한국고전

조경일록(김육)

청담(靑潭) 2018. 7. 14. 14:37



조경일록(朝京日錄)

김육(1580-1658)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회정당(晦靜堂).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4대손이며, 할아버지는 군자감판관 김비(金棐)이고, 아버지는 참봉 김흥우(金興宇)이며, 어머니는 현감 조희맹(趙希孟)의 딸이다.

1605년(선조 38)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1609년(광해군 1)에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 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 등 5인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자,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 청덕동에 은거하였다.

청덕동에 머물며 회정당을 짓고 홀로 학문을 닦으니, 이 때부터 스스로 호를 잠곡이라 하였다. 1623년에 서인의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며, 1624년 2월에는 음성현감이 되어 목민(牧民)의 직분을 다하는 한편,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 해 10월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1633년 9월에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로 나가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중요한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

1636년(57세) 동지성절천추진하사(冬至聖節千秋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온 뒤 예조참의·우부승지·장례원판결사를 거쳐 1638년 6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도정(道政)에 임해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한편, 수차(水車: 무자위·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구황촬요(救荒撮要)』와 『벽온방(辟瘟方)』 등을 편찬, 간행하다가 승정원좌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형조참의 겸 대사성·대제학·대사간·병조참의·한성부우윤·도승지 겸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병조참판·이조참판 겸 비변사유사제조(備邊司有司提調)·형조판서 겸 선혜청제조·우참찬·대사헌·예조판서·도총부도총관·개성부유수 등의 현직(顯職)을 지내면서 중국에 두 차례(1643(64세)년과 1645(66세)년)나 더 다녀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화폐의 주조·유통, 수레의 제조·보급 및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 등에 착안하고 노력하는 한편, 『유원총보(類苑叢寶)』·『황명기략(皇明紀略)』·『종덕신편(種德新編)』·『송도지(松都誌)』 등을 저술, 간행하기도 하였다.

1649년 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9월에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의 확장 시행에 적극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는 김집(金集)과의 불화로 이듬해 1월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물러앉아 다시 진향사(進香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1650년 71세의 늙은 몸을 무릅쓰고 중국에 다녀온 뒤, 잠시 향리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1월에 영의정에 임명되고,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겸하였다.

대동법의 확장 실시에 또다시 힘을 기울여 충청도에 시행하는 데 성공했고, 아울러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일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12월에는 원임(原任) 정태화(鄭太和)가 영의정에 복귀함에 따라 좌의정으로 지내면서도 대동법 시행에 따른 몇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는 한편,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을 저술하고 『인조실록(仁祖實錄)』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1654년 6월에 다시 영의정에 오르자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쳐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죽어, 이 사업은 유언에 따라서 서필원(徐必遠)에 의해 뒷날 성취되었다.

저술로는 시·문을 모은 『잠곡유고(潛谷遺稿)』(11권 10책)·『잠곡별고(潛谷別稿)』·『잠곡유고보유(潛谷遺稿補遺)』·『잠곡속고(潛谷續稿)』가 전한다.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것 이외에 『천성일록(天聖日錄)』·『청풍세고(淸風世稿)』·『조천일기(朝天日記)』·『기묘록(己卯錄)』·『잠곡필담(潛谷筆談)』·『당삼대가시집(唐三大家詩集)』 등이 전하며, 「자네집에 술닉거든」이라는 시조 1수도 전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유원총보(類苑叢寶)』는 우리 나라의 학문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편찬된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주목된다. 그리고 『구황촬요(救荒撮要)』·『벽온방(辟瘟方)』·『종덕신편(種德新編)』 등은 목민자(牧民者)의 각성을 촉구하는 안민(安民)의 한 방책으로서, 위민적(爲民的) 생애의 단면을 보이는 저술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저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직접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업은 자손 대까지 하나의 가업(家業)으로 계승되어 우리 나라 주자(鑄字)와 인쇄 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번 연행은 평양 석다산(평안북도 영변군 소재)에서 출발하는 뱃길 사행이다. 후금(1616)이 건국되어 만주를 차지하였으므로 사신은 해로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병자년 숭정(崇禎) 9년 (1636, 인조 14) 6월

◯15일 맑음. 서장관(書狀官) 이만영(李晚榮)과 함께 의정부로 가서 방물(方物)을 꾸리는 데 참여하였다.

좌의정 홍서봉(洪瑞鳳), 우의정 이홍주(李弘冑), 좌참찬 한여직(韓汝溭), 우참찬 박동선(朴東善), 이조 판서 김상헌(金尙憲),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 예조 판서 강석기(姜碩期), 공조 판서 구굉(具宏), 호조 참판 이명(李溟), 예조 참판 민형남(閔馨男), 형조 참판 윤휘(尹暉), 대사헌 서경우(徐景雨), 좌승지 김상(金尙)도 와서 참여하였다.

◯17일 당상 군관(堂上軍官) 유경우(柳敬友)는 대략 열 번이나 중국에 왕래해서 수로에 익숙하므로, 전월 초승에 배를 수리하는 일로 먼저 석다산(石多山)으로 갔다.

◯25일 중화(中和)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고 미시(未時)에 평양(平壤)에 도착하였다.

■병자년 숭정(崇禎) 9년 (1636, 인조 14) 7월

◯13일 밥 먹은 뒤에 출발하여 증산현(甑山縣)을 지나 곧장 석다산(石多山 평북 영변군 )에 도착하였다.

◯17일 맑음. 아침에 증산 현령과 문화 현령 및 김경(金坰)이 고별 인사를 하고서 떠났다. 아침 일찍 노자(奴子)를 서울에 올려 보냈다.

진시에 돛을 달고 배를 띄워 미시에 울미도(鬱美島)에 도착하여 정박하였다.

여기서 석다산과 거리는 거의 80리라고 하였다. 황혼에 감석문(減石門)으로 옮겨 머물렀다.

◯19일 사시에 배를 띄워 미시에 운종도(雲從島 평북 선천군 남면)의 북당(北堂) 뒤에 도착하여 정박하였다. 여기서 울미도와의 거리는 60리라고 하였다.

◯20일 10여 리를 채 가지 못했을 때 조수가 거슬러 오므로 배를 멈췄다. 3선(三船)도 머물렀다. 2선과 4선은 먼저 떠나서 매우 멀리 갔다. 달이 뜨고 조수가 밀려오고 동풍이 또 일어서 돛을 달고 떠나 2경(二更)에 피도(皮島) 앞바다에 당도하니, 2선과 4선이 멀리 포구를 돌아서 뒤따라 이르렀다.

◯22일 아침 일찍 밥을 먹고 도독부(都督府)에 나아가서 현관례(見官禮)를 행하였다. 도독의 예우가 대단히 두터웠으며 차를 마시면서 오랫동안 담화하다가 파하였다. 이어 물러 나와 배에 올랐더니, 찬합과 술통 등을 보내왔다. 이는 대개 현관할 때에 연회를 베풀려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국휼(國恤)을 핑계로 굳이 사양하였으므로 주찬(酒饌)을 보내온 것이다.

◯24일 진시에 양 참장이 와서 배 위에서 접견하고, 4선에 올랐다. 드디어 출발하여 저녁때 거우도(車牛島)에 도착하니 피도(皮島)와의 거리는 50리였다.

밤이 깊어 새벽이 되면서 북풍이 일어나므로 배를 옮겨 섬의 동쪽 우모연(牛毛淵)에 머물렀는데, 우리나라의 국토는 섬의 서쪽 신도(薪島)에서 끝난다고 하였다.

이곳은 바위의 결이 가로로 중첩되어 마치 서적을 쌓아 놓은 것 같으므로 책도(冊島)라고 일렀는데, 서장관과 반송(伴送)이 내려가서 노닐며 구경하였다.

◯25일 조수가 물러가서 수심이 얕고 풍세가 불순하므로 그대로 머물렀다.

뱃사람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맨손으로 홍어(洪魚) 10여 마리를 잡아 왔다.

◯26일 돛을 달고 배를 띄우니, 풍세가 대단히 순조로워 종일토록 그치지 않았다. 사시에 녹도(鹿島)를 지나고 유시에 석성도(石城島)를 지나서 2경 초에 장산도(長山島)에 도착하였다. 뱃사람들이 이르기를, ‘오늘 지난 거리는 거의 1000여 리니, 항해한 이래로 오늘처럼 순탄히 건넌 적은 없었다.’고 하였다.

◯27일 당선(唐船) 7, 8척이 섬가에 정박하고 있기에 통역관 전유후(全有後)와 김대영(金大嶸) 등을 시켜 가서 물어보게 하였더니, 바로 황 감군(黃監軍)의 배였다. 감군의 이름은 손무(孫茂)인데, 우리나라를 장유(獎諭)하는 일로 1품복(品服)을 더하여 나온 것이다. 역관 최원립(崔元立)과 박인후(朴仁厚)를 시켜 고두(叩頭)하며 배신(陪臣)이 여기에 이른 뜻을 말하게 하였더니, 감군이 날이 저물었다고 하여 만나 주지 않고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 한다.

◯29일 해 뜰 무렵에 황 감군은 돛을 달고 동으로 떠나고, 양 참장이 매화를 그린 금선(金扇) 한 자루를 보내고 시를 구하기에 단율(短律 절구(絶句))을 지어서 보냈다.

사시에 북풍이 불므로 돛을 달고 가는데, 감군의 배는 역풍에 떠밀려 도로 돌아와 앞서의 자리에 정박하였다.

우리 일행은 배를 띄워 광록도(廣鹿島)로 향하였으나 풍세가 불리하여 바다 가운데 닻을 내리니, 2선은 앞에 있고 3선과 4선은 뒤에 있었다. 밤중에 서북풍이 매우 급하므로 3선과 4선을 2선이 정박한 곳으로 옮기고, 상선(上船 상사의 배) 또한 닻을 올리고 돛을 달아 모든 배가 있는 곳으로 와서 함께 바다 가운데 떠 있었다.


■병자년 숭정(崇禎) 9년 (1636, 인조 14) 8월

◯1일 광록도를 지나서 오시에 복자산(福子山)에 당도하니, 바람은 잠잠하고 물결은 고요하여 만 리가 1개의 거울 같은데, 드디어 돛을 내리고 노를 멈추었다. 뱃사람들은 육지에 내려 촌락의 빈 터로 가서 복숭아를 따오기도 하였는데, 담장과 주춧돌, 섬돌이 완연히 옛 모습 그대로였고 또 맷돌[石磨] 등이 있었다. 수전(水田)과 육전(陸田)은 모두 말라 묵은 황무지였고 사람의 자취가 없었다. 대개 연해 수백 리의 지경이 전연 거주하는 백성이 없는 공허한 땅이 되어 있으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8일 배를 띄워 포구를 나오니, 다른 배들은 모두 풍세가 좋지 않다고 출발하지 않다가, 내가 탄 배가 포구를 나온 뒤에 동남풍이 불어 돛을 날리며 가므로 모두 따라 출발하였다.

여순구(旅順口) 철산취(鐵山觜)를 지나서 황혼에 쌍도(雙島)에 이르렀다. 섬 가에 횃불이 보였는데 당선인 듯했으나 어두운 밤이라 분별하기 어려워서 감히 함께 정박하지 못하고, 바다 가운데 머물러 모든 배들이 다 오기를 기다려서 밤새도록 조수를 따라갔다. 평명에 저도(猪島)를 지나서 그대로 갔다. 세 척의 배는 뒤떨어졌다.

◯18일 서장관과 함께 언덕에 내려 바위 아래 앉아서 조금 쉬었다. 작년에 동지사(冬至使) 최혜길(崔惠吉) 일행이 이곳에 이르러 15일간을 머물렀고, 8월 16일, 이름을 돌 위에 썼다. 우리들도 이름을 써서 기록하였다

◯27일 나는 몸이 아파서 관(官)을 볼 수 없으므로 서장관으로 하여금 군문(軍門)에 자문(咨文)을 올리고 예단(禮單)을 보이게 하였다. 포 소리가 오늘도 끊이지 않았다. 군문은 병부 좌시랑(兵部左侍郞) 방일조(方一藻)였다.


■병자년 숭정(崇禎) 9년 (1636, 인조 14) 9월

◯4일 맑음. 주인집 곁에 사공이 있어 관내(關內)로부터 나와 말하기를, “적의 대진(大陣)이 영평부에 있는데 노략질한 물건을 모아 수레 한 대에 노새 12필을 메워 모두 800여 대가 북관으로 빠져 나가려고 하나, 관의 요소마다 파수하고 있어 빠져 나가지 못하고 있다. 고 태감(高太監)과 조 총병(祖總兵)이 천하의 병사 15, 6만 명을 거느리고 적의 진영을 둘러싸고 있는데, 천자가 한 명의 달적(㺚賊)도 탈출하지 못하게 하므로 서로 버티고 있다.” 하였다.

◯14일 또 말하기를, “관내(關內)의 적이 이달 1일부터 4일까지의 사이에 냉구관(冷口關)을 경유, 모두 탈출하여 북으로 갔으며, 병부 상서 장봉익(張鳳翼)은 독약을 마셔 죽고 밀운도 어사(密雲道御史) 또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하니, 아마 달적(㺚賊)을 놓쳤기 때문에 주륙당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리라. 듣건대, 어젯밤에 적이 군량을 실은 배 아홉 척을 육주하(六州河)에서 불태웠다 하는데, 육주하는 중후소(中後所)의 앞바다에 있다.

◯27일 처음으로 얼음이 얼었다


■병자년 숭정(崇禎) 9년 (1636, 인조 14) 10월

◯10일 식후에 서장관과 함께 서문 밖으로 나가 열병(閱兵)하는 것을 보았다. 마병과 보병이 약 1만여 명인데 창과 칼은 햇빛에 번쩍이고 투구와 갑옷은 선명하였다. 큰 들판에 진을 쳐 접전하는 형세를 취하자 철기(鐵騎)는 돌격하고 포성은 땅을 진동하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15일 병비도(兵備道)가 처음으로 수레 다섯 대를 내주었다. 역관 등을 시켜 전례에 의하여 군문에게 공문을 드렸더니 군문이 병비도에게 이첩하여 세 대를 더 주고 노새와 사람을 모두 고용해 오게 하였다. 그런데 유 태감은 노새 15마리와 사람 열 명을 두고 있고, 도사는 노새만 다섯 마리가 있었는데, 모두 고용하여 가기를 청하여 서로 다투기를 마지않으니 괴이한 일이었다.

◯16일 오후에 영원을 출발하였는데 반송관(伴送官)으로 왕(王)ㆍ창(昌) 2인이 함께 갔다.

◯27일 맑음. 출발하여 고려촌(高麗村)을 지나 사류하보(沙流河堡)에서 점심을 먹고 양가점(梁家店)을 지나 저녁에 옥전현(玉田縣)에서 유숙하였다. 대략 70리를 갔다.

도중에 짐을 지고 아이를 데리고 가는 사람이 있어 물어보았더니, 노적들이 사로잡아 간 아이를 찾아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동행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혹은 찾고 혹은 찾지 못하여 눈물을 머금고 돌아오는 자가 계속 이어졌다. 또 길옆 성문과 점포의 벽에는 곳곳마다 방문(榜文)을 걸고 잃어버린 아이들의 성명을 죽 써서 붙였으며, 돈을 걸어 찾겠다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길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되, 관군(官軍)이 거의 20만으로 도적의 뒤에 100리쯤 떨어져 오면서 끝내 싸워 보지도 않고 촌가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부녀자를 욕보임이 달적(㺚賊)보다도 심하였으니 분하고 또 분함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6일 산해관 서쪽의 지나온 주현(州縣)은 적병이 모두 침입하지 않았고 다만 촌락이나 야점(野店)이 혹 불타고 약탈된 곳을 보았지만 또한 많지 않았다. 거주민들이 즉시 다시 모두 수리하여 완연히 예와 같았다.

영평부의 동쪽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는 다만 한 들판이라 마을의 여염이 연달아 있어 밥 짓는 연기와 등불이 서로 이어지고, 산에는 한 치의 나무도 없었지만 원야(原野)에는 수목이 울창하여 숲을 이루었으니 이 나무들은 모두 양류(楊柳), 백양(白楊), 대추, 밤나무의 종류인데, 대추와 밤나무는 밭 가운데 줄지어 심어 먹줄과 같이 곧아 한 자 한 치도 묵은 땅이 없고, 논은 전연 없는데 다만 고려촌(高麗村) 앞에 논 같은 게 한 군데 있었다.

도로에는 상인과 나그네가 연락부절하여 10여 명씩 무리를 지었다. 탄 것이나 짐 실은 것은 나귀가 아니면 노새인데, 큰 수레는 10여 두, 혹은 5, 6두가 메고 작은 수레는 2, 3두의 소나 나귀가 끌었다. 사람이 끄는 수레[輓輅]는 바퀴가 하나이며 한 사람이 미는데, 그 분량은 말 한 마리에 싣는 분량이었다. 혹 실은 것이 무거우면 앞에서 한 사람이 끌고 더 무거우면 나귀나 노새가 메되 앞에서 끄는 사람이 채찍을 들고 몰았다.

◯10일 상서 강봉원이 교자(轎子)를 타고 와서 중대청(中大廳)으로 우리들을 불렀다.

나는 서장관과 함께 의관을 차리고 나아가서 예를 행하였다. 상서는 나를 불러 앞으로 다가오게 하고서 이르기를,

“배신(陪臣)이 멀리 오느라고 노고하였소.”

하니, 답하기를,

“신자(臣子)된 직분의 일이니 어찌 감히 노고라 이르겠습니까?”

하였다. 상서가 이르기를,

“황조(皇朝)의 은전(恩典)이 매우 융숭하지만 법제는 또한 엄격하니 마땅히 공경하여 법도를 준수하고 감히 어기지 마시오.”

하고서 드디어 나갔다.


■병자년 숭정(崇禎) 9년 (1636, 인조 14) 12월

◯16일 이전에는 제독의 예단(禮單)이 인삼 3, 4근에 불과하여도 때로는 혹 받지 않은 적이 있었는데, 5, 6년 이래 5근으로 증가되고, 작년 사행(使行)에는 또 15근으로 증가되었다. 나는 이르기를, 5근도 오히려 과하거늘 하물며 15근이겠는가? 5근은 여러 해 동안 이미 정해진 규정이라 변경하여 감하기가 어려울 것 같으나 작년에 새로이 정한 15근의 규정은 결코 그대로 따라 과람하게 무궁한 폐단을 열어 줄 수 없다고 하여, 서로 견지하여 결정짓지 못하므로 아직도 예물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독이 이로 인해 노심을 먹고 일마다 방해하는데, 오늘도 또 관부(館夫)를 때리니, 역관들이 모두 예단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20일 오늘은 예부에서 환관(宦官) 3000명을 뽑는 날이라 예부의 문이 꽉 찼다고 하였다. 환관들이 말 달리고 칼 쓰는 것을 시험하여 대오(隊伍)를 지은 것이 거의 5만여 명인데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또 더 선발하는 것인데, 반드시 주선(主選)하는 태감에게 뇌물을 바친 다음에야 당선이 되니, 가난한 사람은 비록 재주가 있다 해도 뽑힐 수 없으므로 눈물을 흘리고 물러가는 자까지 있었다. 3년마다 3000명씩 뽑는 것이 식례(式例)이므로 아들을 많이 둔 사람은 반드시 한두 명쯤은 고자를 만든다고 한다.

◯27일 제독이 모인(毛寅)을 보내와 말하기를, 동방은 아무런 소식도 없으니, 아예 놀라거나 걱정하지 말고 안심하고 잘 있으라고 하였다.


■정축년 숭정(崇禎) 10년 (1637, 인조 15) 1월

◯3일 관중(館中)의 독에 물을 받아 놓았는데 물이 얼어 독이 깨져 모양이 은(銀) 독과 같았다. 속을 뚫어서 등을 만들고 촛불 2개를 그 가운데 밝혀 놓으매 빛이 온 뜰에 가득하여 환한 대낮과 같으니 또한 한 가지 기묘한 구경거리였다.

◯29일 내가 모인의 시(詩)를 차운하여 보냈더니 모인이 제독에게 보였다. 제독이 즉시 그 운을 절취하여 절구 한 수를 짓기를,

술이 있으니 여관의 찬 눈을 녹일 수 있고 / 有酒能消旅館雪

꾀꼬리 소리 들으매 상림의 꽃도 볼 수 있지요 / 聞鶯得見上林花

고국의 슬픈 사연 근심을 마소 / 莫愁故國多惆悵

손꼽아 세어 보니 이미 임기가 다가왔구려 / 屈指相將己及瓜

하였다.

■정축년 숭정(崇禎) 10년 (1637, 인조 15) 2월

◯11일 맑고 따뜻함. 모인이 와서 보고 하는 말이, 적이 우리나라 변두리를 침범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15일 나는 아픔을 무릅쓰고 문에 나아가 제독을 보고 속히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제독은 놀라는 표정으로 걸상에서 내려 문밖에 나와 서서 위로하기를 매우 정성스럽게 하고 속히 들어가라고 하였다. 또 유첩(諭帖)을 보내어 힘을 다해 보겠다는 뜻을 말하고, 모인과 육 의원을 들어와 보게 하였다.


■정축년 숭정(崇禎) 10년 (1637, 인조 15) 3월

◯26일 맑고 바람 붊. 노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하였다가 도중(島中)에서 크게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청은 병자년(1636) 12월 1일 거병하여 정축년(1637)1월 30일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는데 사신일행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


■정축년 숭정(崇禎) 10년 (1637, 인조 15) 4월

◯19일 모인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변방을 지키던 장수가 오랑캐에 항복하여 한발(漢撥 명 나라 전초병)을 많이 죽였다고 하였다.

◯20일 맑음. 제독이 후당(後堂)으로 와서 우리들을 불러 상을 나누어 주고 또 병부의 제주(題奏)를 보여 주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병부 상서 양사창(楊嗣昌)은 아룁니다. 신은 본부의 거가사 주사(車駕司主事) 오정(吳鼎)이 사이관(四夷館)에 말미를 얻어 개시(開市)하는 일을 살펴봄을 인하여, 조선의 공사(貢使)가 장차 떠나려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저 나라가 오랑캐에게 항복한 지 이제 이미 한 달이 지나는데 소식이 감감하여 마침내 어떠한 상태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번에 사신이 돌아가는 길은 그 상황을 탐지하여 살피기에 딱 좋은 기회입니다. 신의 어리석음으론, 성상께서 여느 때보다 상 주는 것을 갑절이나 더하시고 칙사(勅使)를 내리시어 그 길을 함께 호송해 주기를 청하고자 합니다. 진실로 두려운 것은, 앞으로 지나야 할 노정인 해도(海島)의 장수, 관리, 군병, 백성들이 천조의 소국(小國)을 사랑하는 뜻을 알지 못하고 오직 속국이라는 마음에만 얽매이거나 혹은 철산(鐵山)에서 이미 우리 군사를 상했으니 우리도 이제 마땅히 이를 죽여야 한다고 하거나 혹은 그 가지고 있는 것을 욕심내어 해할 마음을 품은 채 속여서 문득 사신을 지목하여 도적이라 하고 당보(塘報)하여 공을 날조하는 등, 그야말로 사신으로 하여금 기를 펴지 못하게 하면, 이를 계기로 성심으로 복종하는 마음이 영원히 단절되어 잘못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삼가 어리석은 소견을 진달하오니, 옳은지 그른지 신의 주청한 바를, 삼가 성상의 재가를 기다립니다.”

하니, 성지(聖旨)에 이르기를,

“속국이 대대로 충의(忠義)를 표방해 오다가 힘이 굴하여 오랑캐에 항복하였으니 그 사정이 참으로 애처롭다. 아뢴 대로 상을 더 내리고 함께 호송하여 조정의 소국을 사랑하는 은혜를 밝히자는 것은 깊은 생각을 잘 알 수 있으니 의논대로 즉시 청렴하고 재능 있는 무관 한 사람을 선택하여 선도(先導) 보호하여 뱃길을 떠나게 하고, 한편으로는 연로의 관사(官司)들에게 통첩하여 만일 침범 모욕하거나 기만 모해(謀害)하는 자는 즉각 엄중히 잡아다 끝까지 징치하며 실정을 가지고 중벌에 처하고 상수(賞數)는 예부에서 적어서 그날로 갖추 아뢰라. 해부(該部)는 그리 알라.”

하였다. 14일에 성지를 받들었다.

우리들은 이 제본(題本)을 보고 즉시 중문을 나가 일행을 거느리고 동향하여 통곡하였다. 들어가 제독을 뵙고 오랑캐에게 항복했다는 원통한 소식에 대해 말하였더니, 제독은 또한 말하기를, 이는 전해 말이라 완전히 믿을 만한 것은 못 되니 글을 올려 밝히게 하라고 하였다.

섬라의 사신이 떠났다.

윤사월 1일 범가장(范家莊)에서 잠시 쉬었고, 저녁에는 산해관(山海關)에서 묵었다.

고 태감(高太監)이 영원(寧遠)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주둔하고 있다가 근래에 백성들을 진휼하는 일로 창려(昌黎)로 갔으며, 풍 군문(馮軍門) 역시 천안(遷安)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는 대개 변방 지역에 크게 기근이 들어서 황제께서 내탕고(內帑庫)에 있는 은 8000냥을 풀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으므로, 태감 등이 여러 고을로 나누어 간 것이라고 한다.

오늘 지나온 객점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딸을 팔고 있었는데, 나이가 15, 6세 가량 되었다. 산서(山西)의 객상(客商)에게 은 4냥을 받자마자 곧바로 보내었는데,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정축년 숭정(崇禎) 10년 (1637, 인조 15) 5월

◯1일 훤히 밝을 무렵 북풍이 일므로 드디어 떠나 철산취(鐵山觜)에 이르러 비를 만나 네 척의 배가 일제히 멈추었다. 2경에 서장관의 배가 가만히 닻을 올리고 먼저 달리니 3선과 4선도 따라가므로 상선(上船)도 할 수 없이 뒤따라 일어나서 밤새도록 행선하였다. 당선은 오지 않았다

◯3일 훤히 밝을 무렵에 돛을 달고 떠나 오시(午時)에 장산도(長山島)에 이르렀다. 즉시 배에서 내려 진 도독을 만나려고 청하니, 도독이 유 태감(劉太監), 황 감군(黃監軍)과 같이 앉았는데 태감은 중앙에 있고 도독은 왼쪽 머리에 있고 감군은 오른쪽 머리에 있었다. 함께 몰아서 현관례(見官禮)를 행하였더니 나를 끌어 동쪽 벽 옆에 앉히고 서장관은 서쪽에 앉혔다.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국가의 일을 호소하니, 도독이 이르기를,

“지금은 적병이 모두 물러가고 국왕께서 서울로 귀환하였으니 걱정하지 마오.”

하였다. 내가,

“우리들이 본국에 돌아가기가 매우 어려운데 다행히 천자의 은혜를 입어 호송을 받고 또 노야(老爺)께서 여기 계시니 저희들이 살아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니, 도독이,

“내 마땅히 배를 보내어 보호하여 보내겠으며 또 배 안의 양식도 보조하겠으니 내일은 일단 이곳에서 머무르시오. 조용히 상의할 일이 있소.”

하였다. 내가,

“돌아가서 우리 임금을 뵙는 것이 한시각이 급한데 어찌 감히 늦추어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만약 가르쳐 주실 일이 있으시면 이 자리에서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도독이 굳이 머무르기를 청하므로, 결국 나와 외막(外幕)으로 갔는데, 피도(皮島)의 기고관(旗鼓官) 여벽(呂碧)이 난리를 피하여 여기 와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적병이 작년 12월 11일에 압록강을 건넜고 15일에는 선봉이 서울에 닥치니, 국왕이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가, 적병이 크게 강도(江都)를 공략하매 국왕이 부득이 강화하였고 이로 인하여 철수하여 돌아오는데, 4월 9일에 적병이 조선 군사를 겁략(劫掠)하고 피도를 공격하여 피도가 함락되니, 심 도독은 죽고, 도민의 반은 죽고 반은 도망하므로 나도 또한 배를 타고 달아나 빠져 나왔는데, 장관(將官) 중에 도망쳐 면한 자는 겨우 5, 6인뿐이고 평안 감사는 금화(金化)에서 전사하였으니, 대개 이와 같다.”

하였다.

도독이 나에게 백 부장(白副將)의 집에 가서 잠시 이야기하여 보라고 하기에 드디어 그 집으로 갔다.

◯5일 돛을 비껴 달고 운행하여 석성도(石城島)에 다다랐다. 호송선 여섯 척이 모두 따라오지 못하였다.

◯7일 돛을 걸고 갔으니 풍세가 세차지 못하여 배가 매우 더디 가므로 밤새도록 운행하여 훤히 밝을 무렵에야 비로소 녹도(鹿島)의 남쪽 바다에 도착하였다.

◯9일 대화도(大華島) 남쪽에 정박하였다. 저녁때 소낙비가 왔다.

◯10일 오후에 서풍이 일어나므로 자리를 걸고 가 석다산(石多山) 앞바다에 이르렀는데, 조수가 물러가 물이 얕으므로 바다 가운데 머물러 잤다.

◯11일 상망아(上望牙)를 지나니 조수가 물러가므로 배를 세웠다. 저녁 조수에 출항하여 유시(酉時)에 석다산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증산 현령(甑山縣令) 변대중(邊大中)이 와서 접견하였다.

석다산에 이르러 정박하였다는 일로 먼저 박신생(朴信生), 김대영(金大嶸) 등을 보내어 치계(馳啓)하였다.

◯13일 강서현(江西縣)에 당도하니 다섯째 아이가 와서 뵙고, 집안 노복(奴僕)들이 모두 포로로 잡혀갔다고 말하였다.

■정축년 숭정(崇禎) 10년 (1637, 인조 15) 6월

◯1일 맑음. 고양(高陽)에서 점심을 먹었다. 윤원(尹杬) 형제가 와서 맞아주었다. 홍제원(弘濟院)에서 옷을 갈아입고 대궐에 나아가 복명하니, 내일 아침에 와서 대령하라는 전교(傳敎)를 받들었다.

◯2일 맑음. 아침에 대궐에 나아가니 상이 문정전(文政殿)에서 인견(引見)하였다.


■발문 : 김 승지(金承旨)의 《조경일록(朝京日錄)》 뒤에 씀 [신익성(申翊聖)]

◯승지 김백후(金伯厚)가 《조경일록》을 나에게 보이매, 내가 다 읽고 나서 한숨지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북경(北京)에 조공하는 예물이 병자년에서 끝나고 말 것이며, 조공하는 사신이 김백후에게서 끝나고 말 것인가?

성명하신 천자(天子)께서 우리가 성에서 물러 나온 일(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한 일)을 불쌍히 여겨 도리어 애련(哀憐)을 더하고 두터히 공사(貢使)에게 상을 주어 안전하게 호송하여 보내신 것은 바로 우리 열성조께서 천조(天朝)에 외복(畏服)한 효험이다.

본조(本朝)가 홍무(洪武) 임신년(1392, 태조 1)에 수봉(受封)되었고, 영락(永樂) 이후에는 비로소 의장(儀章)과 서적을 내려 주셨으며, 경사와 상조(喪吊)의 예절이 한집안의 일과 같았으니, 대개 헌묘(獻廟)께서 천조에 조회할 적에 일일이 연저(燕邸 영락제(永樂帝))를 배알하여 성신(聖神)이 회동하여 만나매 서로 교분이 밝고 융화하여, 개옥(改玉)한 뒤로는 은혜를 베푸심이 더욱 융숭해서 수백 년 동안 울연(蔚然)히 동문(同文 예악 문물이 같은 것)의 아름다움이 있게 된 것이다. 선묘(宣廟)께서 왜(倭)의 길을 빌리자[假道]는 요청을 물리침에 미쳐서는 혹심하게 패하는 화를 입어 양경(兩京 서울과 평양)이 함락되고 팔도(八道)가 폐허가 되었어도, 의열(義烈)이 밝게 우주에 선양(宣揚)되었으니 외번(外藩)의 참혹과 중국의 환란을 받음이 옛적에 있지 않던 일이요,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 천하의 병력을 동원하여 전후 7년 동안 요망한 것들을 소탕하였으니, 중국이 외번을 위하여 군사를 쓴 것도 옛적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부터 군신 상하가 마음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의리를 맹세하여, 비록 그 힘이 약하고 적이 강하여도 오히려 대방(大防 대의(大義))을 잡아, 용만(龍灣)의 행차와 남한(南漢 남한산성)의 포위에도 의리를 지켜 굴하지 않았으니, 한 번 일어나고 한 번 패함은 천하의 대세가 다름에 말미암은 것이다.

성명하신 천자께서 애련하게 여겨 공사(貢使)에게 두터이 상 주고, 안전하게 보호하여 보내 주게 하신 것은, 천지같이 덮어 주고 일월같이 비춰 주신 것이다.

백후가 은혜를 받들고 돌아와 복명한 뒤에 바로 이 《조경일록》을 지은 것은 끝내 잊지 못하겠음을 기록한 것이다.

아! 사신의 수레가 유연(幽燕)에 계속 이어져 의관 문물(衣冠文物)이 빈빈(彬彬)한 중화의 제도이거니, 어찌 예물이 병자년에 그치고, 사신이 김백후에게서 끝나고 만다고 기필하리오?

이는 우리 동방의 백육(百六)의 시기이니, 사람으로서 이 《조경일록》을 보는 자 어찌 이마에 땀이 솟고 눈에 눈물이 나지 않으랴!

김백후의 이름은 육(堉)이요, 청풍(淸風)이 본관이다.

숭정(崇禎) 10년 정축년(1637, 인조 15) 남지(南至 동지)에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은 지(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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