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조천기(허봉)

청담(靑潭) 2018. 7. 16. 23:38



조천기(朝天記)

허봉(1551-1588)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미숙(美叔), 호는 하곡(荷谷).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엽(曄)이다. 난설헌(蘭雪軒)의 오빠이자 균(筠)의 형이다.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이다.

1568년(선조 1)에 생원과, 1572년(선조 5)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574년(선조 7)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기행문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썼다.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이듬해 이조좌랑이 됐다. 1577년(선조 10)교리를 거쳐 1583년(선조 16)창원부사를 역임했다.

그는 김효원(金孝元) 등과 동인의 선봉이 되어 서인들과 대립했다. 1584년(선조 17)병조판서 이이(李珥)의 직무상 과실을 들어 탄핵하다가 종성에 유배됐고, 이듬해 풀려났으나 정치에 뜻을 버리고 방랑생활을 했다.

1588년(선조 21) 38세의 젊은 나이로 금강산 밑 김화현 생창역에서 죽었다.

※《선조실록》 권8, 선조 7년 5월 갑술 조에 성절사 박희립, 서장관 허봉, 질정관 조헌(1544-1592)이 출발한 기사가 있으며, 같은 해 11월 계유 조에 왕이 백관을 인솔하고 영칙례(迎勅禮)를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천기 서(朝天記序)

◯미숙은 나이 겨우 약관(弱冠 24세)에 이미 천하의 책을 모두 읽어서 문학(文學)과 사장(詞章)으로 조정에 명성이 있었고, 또한 중국(中國) 땅을 밟고서 천하의 기관(奇觀)을 모두 보고자 하였는데, 조정에서 사신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자, 여러 사람을 대하여 가보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전관(銓官)이 그를 추천하여 보내게 되었으니, 그의 뜻이 이미 얕지가 않았던 것이다.


■조천기 상

■갑술년 만력(萬曆) 2년 (1574, 선조 7) 5월

◯11일 나는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 1523- ?) 공을 따라서 경사(京師)로 가게 되어, 먼동이 틀 때에 건천동(乾川洞) 집으로 가서 양친께 하직하고 이른 아침에 입궐하였다.

◯23일 우리나라의 풍악(風樂)은 가곡(歌曲)이 음란하고 외설되며 소리가 슬퍼서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하며, 그 춤의 진퇴하는 것은 경박하고 촉급하므로 똑바로 볼 수가 없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바야흐로 또한 이를 즐겨 보며 밤낮을 다하여도 싫증을 아니 내니 홀로 무슨 마음에서인가? 그런 소위로써 신과 인간을 조화시키고 위와 아래가 질서 잡히기를 구하는 것은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예전에 우리 장헌왕(莊憲王 장헌은 세종 대왕의 시호)께서 거서(秬黍)와 경석(磬石)을 얻어서 예(禮)를 정하고 악(樂)을 만드셨으나 이를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초창기에는 완성하시지를 못하였다.

강정왕(康靖王 강정은 성종의 시호)에 이르러서는 조정에서 성현(成俔)과 유자광(柳子光) 등에게 명하여 뒤를 이어 완성하게 함으로써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았는데 지금 전하는 바 《악학궤범(樂學軌範)》이 이것이다. 예약(禮樂)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성인(聖人)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 까닭에 송 나라 때에는 호원(胡瑗)과 범진(范鎭) 같은 현인(賢人)도 오히려 그 요령을 아직 터득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하나의 유자광 같은 간사하고 음흉한 자를 가지고 천지의 조화를 더불어 말할 수 있겠는가? 의당 잘못을 이어받고 와전되었던 것을 되밟았으니, 우리 동방의 천백 년의 수치가 된 것이다.


■갑술년 만력(萬曆) 2년 (1574, 선조 7) 6월

◯15일 목사가 대문에서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었는데 의주 주탕(酒湯주탕비(酒湯婢)의 준말. 주탕비란 고을에 있는 관비(官婢)나 기생을 말한다. ) 중에는 기사(騎射)를 잘 하는 자가 5, 6인 있었으므로 우리들은 시험하기를 명하고 이를 보았다. 걷고 뛰고 몸을 젖히고 엎드리는 데에는 더욱 법도가 있어서 남자들과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조천기 중

■갑술년 만력(萬曆) 2년 (1574, 선조 7) 7월

◯1일 아침에 조공마(朝貢馬) 39필이 놀라 달아나서 성안으로 들어갔으므로 홍순언(洪純彦)과 송대춘(宋大春)이 참장(參將)인 왕영우(王永祐)에게 알렸더니, 왕영우는 곧 파총관(把摠官) 학세신(郝世臣) 등 여섯 사람에게 명하여 사방의 문을 닫고 군사를 동원하여 모조리 붙들게 하였는데, 얼마 후에 길거리나 인가에서 모두 붙잡았다.

나는 이마(理馬)에게 말을 조심하여 보호하고 지키지 못했다는 죄목을 들어 매를 치려고 하였는데, 상사(上使)가 굳이 용서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용서하였다.

◯23일 중조(中朝)의 등과록(登科錄)을 파는 자가 있었는데, 모두 3권이었다. 홍무(洪武) 4년(1371)의 과거에 합격한 오백종방(吳伯宗榜) 120명 안에는 우리나라의 김도(金濤)가 병과(丙科) 제4인으로 합격되었는데, 그 이름 아래 주(註)하기를 ‘고려국(高麗國) 연안현(延安縣)’이라고 하였다. 대개 태조 고황제(高皇帝)는 원(元) 나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과거 때마다 거인(擧人) 3명을 뽑아서 성시(省試)를 보도록 허락하였는데, 뒤에 임금을 죽이고 사신을 죽였다는 사유 때문에 폐지시키고서는 행하지 아니하였다. 깊이 한탄할 만한 것이었다.


■갑술년 만력(萬曆) 2년 (1574, 선조 7) 8월

◯8일 아침에는 이정민(李廷敏)을 보내어 홍려시(鴻臚寺)로 가서 보고 단자를 바치게 하였다. 광록시(光祿寺)진수서(珍羞署)에서는 하정(下程)으로 전량(錢糧) 백미 1석 8두와 술 90병과 잎 차[葉茶] 5근 10냥과 소금과 장 각각 9근과 향유(香油) 4근 8냥과 후추[花椒] 5냥과 채삼[菜參] 15근을 보냈는데, 무릇 이 물건들은 5일마다 한 차례씩 보내는 옛 관례를 따른 것이었다.

고운정(高雲程)은 홍려시 주부(主簿) 장국신(張國臣) 및 회동관 부사(會同館副使) 왕정보(王定輔)와 함께 와서 우리들과 일행에게 각각 관복을 갖추게 하고 조회 보는 날의 예의(禮儀)를 가르쳤다.

◯9일 조금 있다가 오문의 세 문이 열리더니 홍려시 서반(序班)은 우리들을 인솔하여 어로(御路)에 올라가서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드디어 오른쪽 곁문을 거쳐 들어갔으며 석교(石橋)를 건넜는데 문무관은 동ㆍ서로 마주 보고서 예모를 갖추었으며, 어사(御史)는 중정(中庭)에 열을 지어서 있었다. 우리들은 그 뒤로 나아가 서 있었는데, 통정사(通政司)의 관원이 앞에 나아가 일을 아뢰고 13도에서 보내 온 사람들의 입견(入見)이 끝나자, 서반은 우리들을 인솔하고 어로 위에서 꿇고 있었는데, 홍려시관(鴻臚寺官)이 게첩(揭帖)을 가지고 아뢰기를,

“조선국에서 온 형조 참판 등 31원(員)이 뵙니다.”

라고 하였다. 이 관원들이 사신들의 이름을 아뢰지 않은 것은 대체로 겁이 난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다시 꿇어앉았더니, 황제(신종 1572-1620)는 친히 옥음(玉音)을 발하며 이르기를,

“저 사람들에게 술과 밥을 주어 먹도록 하라.”

고 하였는데, 소리가 매우 맑고 낭랑하였다. 우리들이 다시 세 번 머리를 조아리자 서반(序班)은 인솔하고 나왔으며, 다시 오른편 곁문을 거쳐 돌아와서 대궐 바른쪽 문 곁에서 쉬었다. 이윽고 조회가 끝나자 여러 관원들이 나왔다.

우리들은 광록시(光祿寺)에 나아가서 술과 밥을 먹었는데 광록시는 왼쪽 문안에 있었으며, 아직 음식이 끝나지 않았는데, 수십 명이 포낭(布囊)을 가지고 와 다투어서 탁자 위의 음식물을 집어넣고 갔다. 만약 우리들이 빨리 일어서지 않았더라면 거의 의복을 더럽히는 것을 면하지 못할 뻔하였다.

◯17일 이날은 성탄일(聖誕日 황제의 생일)이었다. 대궐에 나아가 하례를 행하였다. 우리들이 5경(更) 초에 동장안문(東長安門)에 이르니,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드디어 들어가서 대궐 왼쪽 문에서 쉬었다가 왼쪽 곁문을 거쳐 홍정문(弘政門)을 지나서 황극전(皇極殿) 뜰에 이르렀는데, 홍정문은 곧 황극문의 왼쪽 문이었고 그 오른쪽을 선치전(宣治殿)이라고 하였다. 동쪽과 서쪽에는 2개의 누각이 드높게 서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동쪽은 ‘문소각(文昭閣)’이라 하였고, 서쪽은 무성각(武成閣)이라 하였다.

날이 샐 무렵에는 계인(鷄人)이 시간을 알리면서 창(唱)하기를,

“해가 떠서 사방을 밝히고 만방을 비춥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황제가 어전(御殿)에 납시니 표문을 올리고 나서, 여러 관원들은 하례를 행하고 나왔는데, 그 위엄 있는 의식의 성대함과 엄한 호위 군대 모습의 정돈됨과 임금을 호위하는 수레의 많음과 법악(法樂)의 우렁찬 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으며, 또한 문마다 코끼리로 지키게 하였는데 그 수는 매우 많았으나 여러 관원들의 반열(班列)은 자못 엄숙하지가 못하였다.

이때 서번(西蕃 티베트)ㆍ달자(韃子)ㆍ라마(刺麻)의 나라에서도 역시 서쪽 뜰로 들어왔으므로 우리들은 나와서 왼쪽 곁문 밖에 이르렀다. 여러 관원들은 오래도록 엎드렸다가 바야흐로 해산하였다. 광록시(光祿寺)에 이르러서야 술과 밥을 들었는데 서번 등 세 나라도 있었다.

서번은 곧 서쪽의 오랑캐로서 달자와 같았으며 바지가 벗겨져 생식기가 드러나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던 까닭에 사람들은 이를 개같은 서번이라고 하였다. 라마국은 남쪽 변방에 있으며 머리를 깎고 옷을 입은 것이 마치 중국의 승도와 같았으며, 이들은 다 같이 중역을 거쳐 와서 조회하였으니, 대일통(大一統)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18일 상서(尙書)와 새로 임명된 우시랑 겸 한림원시독학사(右侍郞兼翰林院侍讀學士) 임사장(林士章)이 당(堂)에 앉아 있었다. 우리들은 월대(月臺) 위에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상서는 묻기를,

“무슨 아뢸 일이 있는가?”

라고 하자, 홍순언(洪純彦)은 정문을 가져다가 상사에게 주었으며, 상사가 이를 올리니, 원외랑이 가져다가 상서의 책상 위에 놓았다.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국에서 만수성절(萬壽聖節)을 진하(進賀)하기 위하여 보낸 배신(倍臣) 형조 참판 박희립(朴希立)은 삼가 변무(辨誣 이성계의 조상에 대한 그릇된 《대명회전》 기록을 변명하는 일)에 관하여 정문(呈文)합니다. 먼저 만력(萬曆) 원년(元年) 2월에 본국(本國)에서 종실의 계보[宗系]와 고려 왕을 시역(弑逆)하였다는 것 등의 두 조항이 사실과 다른 정상[情節]을 자세히 갖추어서 상주하였습니다. 배신 이조 판서 이후백(李後白) 등을 보내어 공손히 주문(奏聞)을 올리고 간 뒤에 예부(禮部)의 제(題)를 받았는데 이르기를, ‘조선국에 처음으로 봉(封)한 왕 이(李) 강헌왕(康獻王)의 옛 휘(諱) 는 왕씨(王氏)를 대신해서 나라를 세우고 우리의 동쪽 울타리[東藩]가 되어 신하의 절개를 지켜 온 이래로 왕은 북궐(北闕)에 충성을 바치고 자손이 서로 이어 온 지가 200년이나 되었으며, 종계(宗系)는 각각 본원(本源)이 있어서 이인임(李仁任)과는 같지 않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국조(國祖)는 추대(推戴)로 말미암은 것이며 역시 왕씨(王氏)를 죽였다는 것과는 같지 않다고 하였는데, 우리 황조(皇祖)의 대훈(大訓)은 진실로 일시(一時)의 전문(傳聞)에 의한 것이었고, 그 후손의 변론하는 말은 실로 정성스러이 효도하는 한결같은 생각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그 대대로 예의(禮義)를 지키고 능히 충근(忠勤)을 두텁게 한 것을 생각하여, 그 청한 바에 따르되, 명이 내리기를 기다려서, 한림원(翰林院)에 공문을 보내어 내부(內府)에 청하여 속수(續修)하는 《대명회전》에 새로 조선국(朝鮮國)을 쓴 1책을 내어다가 이(李) 어휘(御諱) 와 아울러 배신 이후백 등이 아뢴 대략을 편찬하여 어람(御覽)에 올리고 본조(本條)의 끝에는 부록하되, 거의 조훈(祖訓)과 《대명회전》의 두 가지를 보존하여 전문(傳聞)의 믿을 만한 것과 의심스러운 것에 각기 근거할 바를 달게 하고, 또 그의 부조(父祖) 이(李) 공희왕(恭僖王)의 휘(諱) 와 이(李) 공헌왕(恭憲王)의 휘(諱) 가 전년에 아뢴 정사(情詞) 및 본부(本部)에서 의론하고 복제(覆題)하여 받든 한 성지(聖旨)를 《세종황제실록(世宗皇帝實錄)》에 자세히 갖추어 실음으로써 길이 세상에 보일 것이다. 이어 일도(一道)의 칙서(勅書)를 내려서 성의(聖意)로써 일러 주되, 한편으로는 먼 나라 신하가 선조[先世]를 맑고 빛나게 하려는 정성에 답하여 주고, 한편으로는 성조(聖朝)가 효도로 천하를 다스리는 뜻을 나타내야 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런 사유를 갖추어 제(題)하여 성지를 받들건대, ‘그리워라. 그 나라의 전후(前後) 주사(奏詞)를 사관(史館)으로 하여금 《황조실록(皇祖實錄)》 안에 갖추어 써서 편찬해 넣고 《대명회전》은 성지를 기다렸다가 이어 수찬할 때에 더해 넣고, 인하여 칙유를 써서 왕에게 효유하라.’고 하였습니다.

◯21일 예부(禮部)의 도리(都吏)가 관으로 와서 통사(通事)에게 말하기를,

“전일의 정문(呈文)은 상서(尙書)가 주객사(主客司)에 내려 《회전(會典)》을 새로 수찬(修纂)할 때의 사고(査考)에 대비케 하였습니다. 평시에 시행할 수 없는 모든 정문은 상서가 해사(該司)에 하달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와 같이 하였으니, 그것은 반드시 후일에 시행될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조천기 하

■갑술년 만력(萬曆) 2년 (1574, 선조 7) 9월

◯새벽녘 꿈에 이숙헌(李叔獻 이이(李珥 1536-1584)의 자(字))을 만나 얘기를 하였는데 매우 흡족하였으며, 이숙헌은 동리(凍梨 언 배를 말함)를 꺼내어 마주앉아 먹었다.

◯3일 이날은 대궐에 나아가서 상을 받았다. 우리들은 일행을 인솔하고 새벽에 입조(入朝)하였는데, 해가 막 돋으니 서반(序班)이 우리들을 이끌고 좌액문(左掖門)으로부터 들어가 금수교(金水橋) 남쪽으로 나아갔다. 명편(鳴鞭)을 마치니, 황제가 황극문(皇極門)에 출어(出御)하였는데 여러 관원들은 한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린 뒤에 오문(午門) 밖에서 사조(辭朝)하였다. 사은사(謝恩使) 등 각관은 모두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려 예를 마치니, 천관(千官)이 한마디 부르는데 그 소리는 마치 뇌성과 같았다. 명찬(鳴贊)이 소리내어 부르기를,

“조선인(朝鮮人)을 인도하라.”

고 하매, 우리들은 서반(序班)을 따라 어로(御路)에 들어섰다. 명찬이 말하기를,

“무릎을 꿇으시오.”

라고 하므로, 우리들은 한결같이 무릎을 꿇었다. 홍려시(鴻臚寺)의 관원 네 사람이 탁자를 받들고 와서 섬돌 아래에 놓았는데, 탁자에는 흠상(欽賞)할 물건을 올려 놓았다. 예부(禮部)의 삼당상관(三堂上官)이 나와서 우리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우시랑(右侍郞)은 게첩(揭帖)을 가지고 상주하기를,

“조선 국왕이 보낸 배신(陪臣) 박희립(朴希立) 등 36명은 오늘 만수성절(萬壽聖節)을 경하(慶賀)하기 위하여 도착하였사오니, 전례대로 상주(上奏)를 받으시고 상(賞)을 내리소서.”

라고 하니, 황제는 친히 옥음(玉音)으로 이르기를,

“그들에게 내려 주라.”

고 하였으며, 상서 등은 물러나와 반열에 들어갔다. 우리들이 세 번 머리를 조아리렸더니, 명찬(鳴贊)은,

“일어나시오.”

라고 하였다. 우리들은 드디어 온 길을 따라서 대궐의 왼쪽문에 이르렀다. 우리는 오늘 황제[天威]를 매우 가깝게 바라보았는데, 용안(龍顔)은 장대(壯大)하고 말소리는 쇳소리와 같으니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갑술년 만력(萬曆) 2년 (1574, 선조 7) 10월

◯9일 아침에 출발하였는데 도중에서 동지 관압사(冬至管押使)가 용산(龍山)에서 점심을 먹는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더니, 동지사(冬至使) 안자유(安自裕 1517-1588) 공, 관압사 조징(趙澄), 그리고 서장관(書狀官) 이언유(李彦愉), 질정관(質正官) 김대명(金大鳴) 등이 7일에 강을 건너 지금 여기에 왔다. 우리들은 이들과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아주 정겨웠다. 나는 관압사에게 별장(別章) 칠언 장률(七言長律) 두 편을 주었고, 또한 통사 홍순언(洪純彦)을 불러서 등계달(滕季達)에게 편지 한 폭을 부치고 안부를 묻게[問訊] 하였다. 동지사가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나는 취하였으므로 점심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학관(學官) 허희(許希)와 손무(孫武)와 동방[同年]인 홍여하(洪汝河)도 함께 만나 보았다. 우리들은 양식이 떨어졌으므로 쌀과 고기를 구해 가지고 떠났다. 저녁에는 세포(細浦)의 모서(毛序)의 집에서 잤는데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찬물(饌物)을 보내왔다. 듣건대 상사(上使)는 7일에 강을 건넜다고 한다.

◯10일 아침에는 흐리다가 낮과 저녁에는 가랑비가 내리면서 큰바람이 불었고 밤에는 눈이 옴.

아침에 적강(狄江)을 건넜고 점심은 서강(西江) 가에서 먹었다. 이날은 비가 오다말다 하고 바람은 매우 세찼다. 군인들이 찬 여울 물을 건너다가 물결에 씻겨서 발[足]이 붉어 있으므로 참연(慘然)하고 애처로웠다. 그리고 서강(西江)을 건너서는 작은 배를 타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의주(義州)에 들어왔다.


■조천기 지[유성룡(柳成龍 1542-1607)]

◯책 가운데에 기록한 바의 호송군(護送軍)에 관한 일은 또한 서방 민폐로 큰 것이다. 만약 국가에서 조만간에 무고한 백성을 진념(軫念)하여 회보(懷保)의 정사를 닦는다면 반드시 이를 변통(變通)함이 있어야 될 것이다. 내가 옛날 북경에 갔을 때에 폐단의 대강을 물어서 알고 은근히 걱정하였었다. 이제 거의 10년이 되었어도 마음속에 오고 가면서 잊을 수가 없었는데, 미숙(美叔)이 기록한 것을 보니 더욱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끔 하였다.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일개 조그만 소임을 가진 관리일지라도 진실로 물건을 아끼는 데 마음을 둔다면 다른 사람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하물며 미숙은 지금 경연(經筵)을 가까이 모시고 날마다 헌체(獻替 선한 것은 권하고 악을 못 하게 함)의 말을 드림에랴. 이 한 가지 일을 만약 마음에 두고서 잊지 않으면 서방의 백성들은 은혜를 받을 날이 있게 될 것이다. 부디 이 비루한 사람이 한갓 그 마음에만 가지고서 그 실천이 없는 것과 같이 됨이 없게 할지어다.

서애병은(西厓病隱)은 또한 쓴다.


■조천기 후서

◯내 일찍이 멀리 가보고자 하는 뜻을 지녔다가 다행히도 왕사로 인하여 그 숙원을 풀었던 것이다. 여행 길에서는 지나는 곳마다 그 산천의 웅장함과 인물의 번창함을 보고 항상 이를 눈에 두고 마음에 간직하며, 옛일을 참고하고 오늘에 비추면서 간독(簡牘)에 갖추어 고리에 넣어 두었다가 오래 된 뒤에 꺼내었더니 이미 쌓여서 책[卷秩]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왕래하는 데 골몰한 나머지에 겨우 그 형상의 방불한 것을 기록했을 뿐, 자세한 곡절은 모두를 잊어버렸던 것이다. 바야흐로 차례대로 추려서 한 권 책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나 재력이 천단하니, 비록 뜻은 있었으나 저술하기에는 미치지 못하였었다. 또한 찢어 버려 거두지 않고자 하였으나 여러 날 애쓴 공이 조금은 아깝기도 하였기 때문에 옛 초고를 따라서 모아 가지고 한 책을 만들어서 《조천기(朝天記)》라 했는데, 거의 검심(檢心)할 즈음에 자신이 누워서 유람하는 자료를 삼고자 할 뿐이요. 감히 사람들에게 내보여 작자의 한만함을 꾸짖게 하고자 함은 아니다.

또 이 때문에 또한 감개한 바가 있었으니 대체로 중화와 외이(外夷)와 안과 밖의 구분은 참으로 딱 끊어진 것이니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만약 사람들이 구습을 말끔히 씻어 버리어 기질을 변화시켜 날로 새롭게 하여 예의의 나라로 자진(自進)하여 간다면, 성스러운 황제와 밝은 왕은 한결같이 일시동인하고 나의 적자(赤子)와 같이 여겨 시기하고 혐오한 마음을 두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황조가 우리나라를 대하는 것이 이와는 달라서, 문을 겹치고 자물쇠를 엄하게 하여 출입을 막아서 마치 도적놈을 보듯 하면서 벌벌 떨면서 일호라도 방자할까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학사 대부(學士大夫)와 진신선생(縉紳先生)들이 읍을 하고 나아가서 자청하는 이가 없고 혹은 경서[典墳]를 토론하고 풍속을 찾고 묻는 사람이 없지 않았으나 조정의 금령이 있었으므로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아, 좁다고 하겠도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신으로 나가면 귀머거리나 소경과 같아서 빈 주머니를 가지고 가서 큰 고리에 가득 싣고서 돌아오는 이를 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황조의 일대 그릇된 전장(典章)이며 우리 동방의 부끄러움이요 한스러운 일이 아니 되겠는가?

그런 까닭에 내가 기록한 바는 다만 그 도리(道里)의 원근(遠近)뿐이며 다른 일에 미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으니, 뒤에 보는 군자(君子)들에는 반드시 나의 뜻을 아는 이가 있을 것이다.

만력 3년 시월[陽月] 하순에 양천 후학 하곡 허봉 미숙보(美叔父)는 호당(湖堂)에서 쓴다.


■과강록 부(過江錄附)

■10월

◯19일 평양에 들어갔다. 감사(監司) 이문향(李文馨) 공이 위로하는 연회를 마련하였으나, 나는 제삿날이기 때문에 참석하지 아니하였다. 풍월루(風月樓)에 묵었다.

■11월

◯3일 새벽에 사현(沙峴)에 이르렀는데, 해가 뜨자 상(上)이 모화관(慕華館) 앞에다 장막을 설치하고서, 칙서를 맞이하여 성안으로 들어가서 근정전(勤政殿)에서 조칙(詔勅)을 선포하였으며, 백관이 축하를 마치자 나는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배명(拜命)되었으므로 4전(四殿 임금, 곤전, 대비, 대왕대비를 말함)에 사은(謝恩)하였다.

■과강록 지(過江錄識)

◯나는 의주(義州)로부터서는 접대에 응하기에 피곤하여 집필하고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단지 행사(行事)의 대개를 서술하여 그 제목을 과강록(過江錄)이라고 하였을 뿐이다. 글은 비록 간단하지만 일은 조금 갖추어졌으니, 그것은 또한 남쪽에 와서 뜻을 펴려는 남은 뜻을 기록하려는 것이다.

미숙보(美叔父)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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