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
황재(자)(黃梓 1689- ?)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자는 자직(子直)이다. 1718년(숙종 4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1년 설서(設書)가 되었다가 소론이 집권하면서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영조 즉위 후 지사(知事) 민진원(閔鎭遠) 등의 주청으로 다시 서용되어 수찬·지평·부교리 등을 거쳐, 1726년 교리·헌납 등을 지냈다.
1727년 겸사서(兼司書)·겸문학(兼文學)·이조좌랑을 역임하면서 언론의 개방과 주강(晝講)에 대신들을 참여시킬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그 뒤 응교·사간을 거쳐, 1734(46세)년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
이듬해 의주부윤이 되었다.
※정사 좌의정 서명균(1680-1745 : 1710 급제, 55세), 부사 예조참판 박문수(1691-1756 : 1723 급제, 44세)
그 뒤 광주부윤(廣州府尹)·겸필선(兼弼善)·집의·보덕(輔德)·강원도관찰사·부제학을 거쳐, 1748년 이조참의·대사헌·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개성유수(開城留守)를 역임하고, 1750(62세)년 동지부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호조참판이 되었다.
저서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기록한 기행문집《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경오연행록(庚午燕行錄)》등이 있다.
※梓는 재 또는 자로 읽는다. 인명사전에서는 자로 찾아야 한다.
갑인연행록 권1
■1734년(영조10, 갑인) 7월
◯2일 진시(辰時 오전 7시~9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숙배 단자(肅拜單子)가 내려오더니 이어 인견(引見)하라는 명이 있었다. 정사와 부사를 따라가 인정전의 뜰에서 배사(拜辭)하고 합문(閤門) 밖으로 나아가 반열을 정하였다. 희정당으로 입시(入侍)하라는 명이 내리자 삼사(三使 사행 책임자인 정사, 부사, 서장관을 아울러 일컫는 말)가 희정당으로 나아가 탑전(榻前)에 부복하고, 정사와 부사가 각각 소회(所懷)를 아뢰었다. 임금께서 하교하시기를, “서장관은 사행(使行)으로 인해 만나보게 되었구나.” 하시므로 천신(賤臣 본인에 대한 겸칭)이 일어나 대답하기를, “소신의 정적(情跡)이 불안하여 여러 해 동안 은명(恩命)을 저버리고 피해왔습니다. 오늘 사행으로 인하여 천안(天顔 임금의 얼굴)을 한번 뵈었사오니, 이후 신이 물러나 궁벽한 시골에서 죽는다 해도 다시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자리로 물러나와 부복하였다. 선온(宣醞 술 혹은 음식을 하사하는 것)이 있은 뒤 삼사가 명을 받들어 나아가 부복하자, 임금께서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것이 지극하였다. 이어 ‘서장관 또한 잘 다녀오라.’는 하교를 내리셨다. 천신이 또 일어나서 답하기를, “소신이 국가에 어려운 일이 있는 때를 만났으니 주군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의리로써 사신의 임무〔使命〕에 응하고자 하였사온데, 성상의 진념(軫念 임금이 마음을 써서 근심함)이 이러하시니 황공하고 감격하여 무어라 아뢰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물러나왔다.
스스로 생각건대 보잘것없는 천신이 허물이 쌓인 몸으로 대궐에 발길을 끊은 지가 어느새 7, 8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지금 외국으로 가는 사행으로 인해 전석(前席)하는 은혜를 입어 옥음(玉音)을 듣자오니 영광과 감격이 마음에 교차되어 꿈결인 듯 황홀하였다. 더구나 주부자(朱夫子 주자(朱子))의 ‘천안(天顔) 또한 예전과 같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라는 말을 나직이 외워보노라니 더욱 감격에 겨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12일 아침에 평양 서윤(平壤庶尹)과 강서, 증산 세 사또들이 와서 만나보았다. 아침을 먹은 뒤 연광정(練光亭)에 가서 정사, 부사와 함께 사대(査對)를 하고 가도사(假都事)인 평양 서윤 홍응몽(洪應夢)이 흑초(黑草)를 참간(參看)하였다. 사대를 마친 후 장계를 써 올렸다. 정사가 함께 술상을 받자고 청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머무르다가 조금 늦게 숙소로 돌아왔다. 편지를 써서 장계를 가지고 가는 편에 부쳤다.
관찰사가 왔는데 내일 연광정에서 열리는 전별 잔치에 참석해 달라고 자꾸 청하기에 허락하였다.
◯13일 노를 저어 오르내리며 물결을 따라 흐르다보니 흰 성가퀴와 붉은 난간은 나무 사이로 어른거리고 광야에 무성한 수풀은 툭 트여 끝이 보이지 않았다. 긴 강과 백사장, 깎은 듯한 낭떠러지와 절벽이 가는 곳마다 더욱 기이하니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내가 지난 해 낙민루(樂民樓)에 올라 즐거워했던 것이 여태껏 잊히지 않았는데 이제야 낙민루의 풍경이 이곳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문(南門)에 이르러 배를 매 두고 두 사또들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왔다. 관찰사가 벌써 연광정에 도착하여 사람을 보내서 정중히 마중하는데다 정사 또한 전갈을 보내왔으므로 어쩔 수 없이 전별연에 참석하였다. 기악(妓樂)은 그저 기악대로 귓가에 떠들썩하기만 할 뿐 전혀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데, 정사는 매우 좋아하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14일 남문으로 나와 기자궁(箕子宮) 옛터에 가니 팔교문(八教門)과 구주단(九疇壇)이 있고 구주단 곁에는 기자의 일을 기록한 비석이 서 있었다. 기자의 우물〔箕子井〕은 주위가 매우 좁았는데 두레박을 드리우고 줄을 당겨 물을 길어 마셔보니 시원하고 상큼했다. 물을 뜨려고 드리운 두레박줄이 5장 길이였는데 우물 바닥까지는 또 몇 장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길 가에 서있는 돌이 정전제(井田制)의 유적지라고 하였지만, 비가 내려 바삐 떠나는 바람에 그 제도를 자세히 살펴보지 못해 아쉬웠다.
◯24일 삭주 부사(朔州府使) 서간세(徐榦世)와 어천 독우가 와서 만났다. 원역(員譯)들의 팔포(八包)는 규정된 액수가 있다. 개인적으로 서로 매매하기도 하지만 이는 조정에서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간간이 포가(包價)라는 명목을 만들어 공공연히 허가해주었던 것이 이미 잘못된 전례로 굳어져 버렸다. 한 사람에게 2, 3백 냥 정도는 실로 얼마 되지 않는 듯하지만, 모두 합쳐서 계산해보면 거의 만여 냥에 이르니 이 어찌 놀랍지 않으랴? 나는 절대 허락하지 않기로 굳게 결정을 하고 바로 원역들에게 분부해두었다. 정사는 허용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으므로 내가 허용해서 안 되는 까닭을 대략 말하였다. 오늘은 의주에 머물렀다.
※팔포(八包) :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이 여비나 무역을 위해 갖고 가는 자금이다. 조선 초기에는 은화를 사용하다가 인삼 10근으로 대신하였는데 인조(仁祖) 때 80근까지 늘어났으므로 팔포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숙종 때에는 인삼을 은화로 환산하여 당상관은 은화 3천 냥, 당하관은 은화 2천 냥 등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팔포는 조선 시대 역관들의 사무역 활동을 가능하게 했던 요건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25일 이른 아침 운향고의 별장과 감관(監官) 및 색리(色吏 아전)를 형추(刑推)하여 징벌하였다. 그리고 노자로 쓸 종이 뭉치는 시중의 본래 가격으로 환산하여 정한 다음 나머지가 많건 적건 상관없이 즉시 은으로 바꿔서 납부하라고 했더니, 곧바로 수납한 은자가 23냥이었다. 이를 운향고 별장에게 준 다음 책문 바깥에서 나누어 줄 때 소란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백지(白紙)와 함께 동시에 내어주라는 뜻으로 차근차근 명령을 내렸다.
■도강록(渡江錄) 8월
◯8월 1일 새벽에 용만관(龍灣館)에 나아갔다. 정사, 부사, 부윤과 함께 망궐례를 행하려는데 비가 쏟아질 듯하여 밖에 있지 못하고 결국 중문 바깥에서 사배례(四拜禮)를 올렸다. 망궐례를 마치자 비가 퍼붓는 듯 쏟아져 돌아오는 길에 흠뻑 젖어버렸는데, 날이 밝아올 무렵에 바로 그쳤다.
늦은 아침 장무관이 와서 정사가 오늘 강을 건너기로 정하여 이미 군령이 내렸다고 알렸다. 나는 “오늘은 비록 어제처럼 비가 내린다 해도 결단코 되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회보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더니, 장무관은 “정사께서 분부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아침 식사를 하고 견여(肩輿)에 올랐다. 지나는 길에 내선각에 들러 정사를 만나고 북문으로 나아가 강가로 향했다. 부윤이 뒤따라와서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과 말에 대한 수검을 마쳤다. 내가 예전에 듣기로는, 수검할 때 사람과 말들이 어지러이 뒤섞여서 번잡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기에 매우 걱정했었다. 그런데 부윤이 군관과 장교들을 많이 파견하여 좌우를 지키고 내작문(內作門) 외작문(外作門)을 세워, 외작문에서 먼저 일행의 사람과 말을 수검하고 그다음 영기를 보내 차례차례 인도해 들어오면 내작문에서 수검을 하였다. 이렇게 하니 다른 사람들이 난입하지 못하여 시종일관 정돈되고 여유가 있었다. 이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부윤이 정사(政事)를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입책록(入柵錄) 8월
◯11일 청석령 아래에 있는 작은 절 앞에 이르러 좌거(坐車)를 탔다. 왼쪽의 소석령(小石嶺) 길 대신에 오른쪽 들판의 평탄한 길을 택하니 낭자산(狼子山)에 이르렀는데도 해가 아직도 남아있다. 찰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염집에 숙박하였다. 주인은 담정필(談廷弼)이었다.
저물녘에 부사가 만나러 왔다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산서(山西) 출신으로 행상(行商)하는 사람이 있어서 불러다가 마두를 시켜 물어보기를, “만주족과 한족은 서로 혼인하는가?” 했더니 그가 발끈 화를 내면서 “네가 어찌 나를 모욕하는가!” 하고, 또 묻기를 “산서(山西)에도 만주인들이 있지 않은가?” 하니, “산동(山東)과 산서를 막론하고 주현(州縣)마다 만주인들 5, 6천인을 거주하게 했는데, 별도의 구역에 두어서 한족과는 서로 섞이지 않는다.”고 하더란다. 내가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을 만났는데, 왜 수역을 시켜 문답을 하지 않으셨소?” 하니, 부사가 “역관과 마주하면 저들이 아예 말을 하려들지 않으니, 마두만 못하오.”라고 말했다.
■과심록(過瀋錄) 8월
◯14일 심양성(瀋陽城)에 이르렀다. 외성(外城)의 바깥에 있는 광자사(廣慈寺)가 아주 크고 웅장했는데, 절 안에 있는 탑 역시 높고 컸다. 길가에 수레를 멈추고 삼사(三使)가 말로 갈아탔고 일산도 접었다. 【성 안에 궁궐이 있기 때문에 사신들이 가마를 타고 일산을 펼 수 없다고 한다.】 외성의 남문으로 들어갔다. 외성은 흙으로 쌓아 낮고 평평했으며 도로의 좌우로는 민가와 상점들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
◯18일 동틀 무렵 자릿조반으로 죽을 먹고 출발하였다. 소백기보(小白旗堡)를 지나서 서북쪽을 바라보니 하늘가에 점점이 있는 산들이 구름과 안개 사이에 감춰져서 산봉우리가 반쯤 희미하게 보이는데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어, 흡사 섬들이 하늘과 바다 사이에 보일 듯 말 듯 떠있는 듯하니 참으로 기이한 장면이었다. 어제 일행 중의 사람들이 말했던 신기루라는 것이 이것을 보고 말한 것인지 아니면 별도의 기이한 모습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일판문(一板門)에 이르러 아침 식사를 하였다. 여관 주인에게 아마(兒馬)가 있는데 말을 몰아 들판 한편에 방목하였다. 그런데 앞뒤 발을 끈으로 묶어 연결해서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여유만 두었고, 목에는 쇠방울을 매달아 짤랑짤랑 소리가 났다. “왜 이렇게 하는가?” 하고 물으니 “이렇게 하는 건 말이 나중에 잘 걷도록 하기 위해서지요. 발을 매어두면 절로 걸음걸이가 일정해지고, 목에 방울을 달아두면 놀라 날뛰거나 급작스레 달리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제멋대로 걷지 않고 방울소리를 듣고 익히니 별달리 조치해서 연습을 하지 않아도 쉽게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저들이 말을 잘 부리는데 그 수법이 또한 이러한 종류였다. 그대로 앞길을 향하여 이도정(二道井)에 이르렀다. 찰원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여염집에 숙박했는데 주인은 상중신(尙重信)이라는 이다.
심양(瀋陽) 이후로부터는 길에 질퍽한 습지가 많아 장마라도 만나게 되면 더더욱 다니기가 어려운데 오늘 지나온 두 역참 길이 그중에서도 더욱 심한 곳이라서 수레가 손잡이까지 빠져서 앞뒤에서 둥둥 떠다닐 정도이다.
갑인연행록 권2
■도관록(度關錄)
◯3일 풍윤에 도착하여 농사 상황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올해는 가뭄과 병충해가 서로 연이었으므로 산해관 바깥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흉년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옥전현의 세금 독촉 방문을 보았더니, ‘지금 8월 초순에 이르러 이렇게 효유하노라. 호적에 올라 세금을 내야하는 사람들은 속히 햅쌀과 묵은쌀, 콩, 풀 다발 등을 가지고 때에 맞춰 납부하라. 더구나 금년에는 크게 풍년이 들어 풍성한 수확을 걷었으니, 너희들은 도리상 공무(公務)를 깊이 생각해서 완전하게 납부하여야 한다. 혹시라도 감히 이전처럼 관망하고 시간을 끌면 본현(本縣)이 정하여 이름을 지목해 잡아넣고 벌을 줄 것이며, 선비들의 경우는 그 가인(家人)들을 잡아다가 엄히 다스려 결코 관대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운운하였다.
이것으로 보자면 보면 풍윤과 옥전에 풍년이 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방문의 내용 중에 사(士)와 평민을 구분하는 의도를 보니, 또 관장(官長)의 정치가 어떠한지도 알 수 있었다
갑인연행록 권3
■유관록(留館錄) 9월 ~ 11월
◯황제가 있는 원명원(圓明苑)은 경성에서 서북쪽으로 20리쯤 된다고 한다. 제독 승도(僧圖)는 몽고사람인데 수역(首譯)에게 묻기를, “이번 사행은 무엇 때문에 온 것인가?” 하므로, 수역은 사단이 일어난 까닭을 하나하나 말해주었다. 제독은 “그렇구려. 황제께선 필시 가상히 여기실 게요.”라고 하였다. 제독은 밤이면 갑군(甲軍)이 직숙하는 대문 안쪽으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에, 중문(中門)은 저녁이 채 되기도 전에 닫아 봉쇄되어 버린다. 현문항(玄文恒)과 이종방(李宗芳)이 와서 인사하였다. 【상방(上房)과 부방(副房)에서 세냈던 수레는 산해관에 들어온 이후 즉시 먼저 출발하여 밤낮없이 달려왔다고 한다.】
●9월
◯9일 정사가 부사의 방에 와서 모였기에 나도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상방(上房)에서 소찬(小饌)을 베풀었다. 회동관에 들어온 이후로 밤마다 딱따기(밤에 순찰을 돌 때 치는 나무막대) 치는 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성 안의 각 동(洞)마다 모두 이문(里門 마을 어귀에 세운 문)이 있고 문 안에는 지키는 병사가 있어 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17일 《제주전록(題奏全錄)》 【우리나라의 조보(朝報)와 같은 것이다.】 을 얻어 보았다. 황제가 10월 1일 태묘(太廟)의 맹동제(孟冬祭)에 가서 직접 예를 올린다고 하였다. 정사와 부사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일 부사가 왕희지(王羲之)와 조맹부(趙孟頫)의 친필(親筆)과 화폭(畵幅) 몇 건을 보내왔기에 살펴보고 즉시 돌려주었다. 원역배가 물품 매매를 시작하는 날을 개문(開門)이라고 한다. 그런데 제독(提督)은 세금을 더 걷으려는 의도가 있고 비단 상인들은 가격을 올리고자 꾀를 내니 안팎에서 서로 버티고 견제하여 이미 10여 일이 지났는데, 갑작스레 오늘 개문을 허락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보따리를 짊어지고 왕래하는 이들이 뜰에 가득 차 끊임없이 북적거렸으니 이 또한 아주 괴로운 상황이었다.
◯20일 김상명(金常明) : 원문에는 김상명(金相鳴)으로 되어있으나 이는 김상명(金常明)의 오기이므로 바로잡았다. 《조선왕조실록》 에는 ‘상명(常明)’과 ‘상명(尙明)’이 번갈아 나오지만 김상명(金常明)이 본명이다. 현재 전하는 기록들마다 일부 내용에 차이가 있다. 김상명은 의주(義州) 출신 김덕운(金德雲)의 손자(서호수, 《연행기》 권3, 8월 24일 참조)이다. 그의 모친이 강희제의 유모였기에 강희제와 함께 자랐으며 이후 황제의 총애를 받아 관리로 출세하고(《경종실록》 3년 9월 10일 참조) 문학에 뛰어나 옹정(雍正)의 스승이 되고 이후 용사(用事)하였다.(성대중, 《청성잡기》 권3 참조) 청과 조선 사이에서 외교문제를 해결하는데 힘을 보태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 역관들과 내통하면서 뇌물을 받아 문제시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연행의 역관인 이추 김시유와 친분이 깊었다.
◯26일 즉시 말을 타고 함께 출발하여 부문 패루를 지났다. 부사가 내게 말하기를, “다른 길로 가면서 보지 못했던 곳을 두루 살펴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하기에 나는 “좋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드디어 옥하관(玉河館) 앞길을 택하여 왔다. 옥하관 안을 보니 국화가 잡초처럼 멋대로 무성하게 자랐는데 달자(㺚子)들이 거주하는 깊숙한 곳은 과연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길가에 겹겹의 큰 문들과 큼직큼직한 저택들이 있어서 물어보니 모두 제왕(諸王)들의 집이었다.
※회동관은 조선의 사신 일행이 머물렀으므로 ‘조선 사신관(朝鮮使臣館)’ 또는 ‘조선관(朝鮮館)’이라고도 한다. 회동관 남관은 옥하교의 곁에 있어서 ‘옥하관(玉河館)’으로 많이 불리었다.
●10월
◯1일 사신의 일로 깊숙한 관사에 매여 있는 사이에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데 내 나라는 아득히 멀리 있으니 흔들리는 내 심정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 사신의 임무는 언제 결말이 날지 기약조차 할 수 없으니, 공사간의 모든 일들이 걱정스럽고 울적하여 그저 병세만 더해갈 뿐이었다. 권순성이 아침에 인사도 하러 오지 않아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니 그 또한 병으로 누웠다고 하였다. 만 리 먼 길을 왔는데 괴롭게도 건강할 때가 없으니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로도 심정을 표현하기에 매우 부족하였다.
◯2일 정사가 만나러 왔다. 내가 이추에게 묻기를 “원역들이 물품을 매매하는 일은 거의 처리가 되었는가?”하니, 이추는 “물품을 매매하는 일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니 출발 날짜만 정해지면 하루 이틀 사이에 짐바리를 쌀 수 있습니다. 다만 물품들이 예전에 비해 매우 적으며, 능단(綾緞 비단) 종류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필시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였더니 이추는 “다름이 아니라, 남경(南京)의 행상들이 올 때 예전에는 불과 두세 곳에서만 세금을 납부하면 됐는데, 지금은 강물이 크건 작건 간에 배가 다니는 곳이면 모두 세금 걷는 관리를 배치해두고 하나하나 세금을 걷고 있답니다. 남경에서 북경까지 거리가 머니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는 것이 몇 번이겠습니까? 행상들이 북경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짐 보따리의 절반은 없어지고 마니 이로 인해 상로(商路)가 막혀 끊어질 지경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 들어와 파는 것 또한 상당수가 오래된 것들이라 하는데 이 역시 형세가 그렇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7일 이른 아침에 부사가 와서 말하기를, “이번 사신의 일은 명백하게 근거할 만한 전례가 있으므로 전례 없던 일이 새로 생겨 도모하기 어려운 경우와는 같지 않으니, 의당 비용을 낭비하는 단서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사안이 남의 손에 달려있으니 또 어찌 인정(人情 뇌물을 의미함)이 전혀 없을 수야 있겠습니까? 저들이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나 역관들이 아낌없이 써버리는 것을 한결같이 굳게 금지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하는 대로 맡겨두기만 할 수도 없습니다. 모름지기 상황을 참작하여 재량껏 허용한다면 차후에 생길지도 모르는 곤란한 경우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잠시 정사를 만나서 이 일에 대해 의논을 해봤습니다. 정사는 관은(官銀)에서 생긴 이익을 덜어내어 전부 역관들에게 주고자 하지만, 제 생각에 이 액수는 너무 많으며 그 절반만 사용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역관들에게 분부하시어 이 일에 잘못됨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오셔서 서로 만나시고 또 이러한 내용으로 말씀을 좀 해주셔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관은(官銀)에서 생긴 이익 : 사신단이 지니고 가는 관은을 역관들에게 빌려주고 그 남은 이익의 일부를 공용은(公用銀)으로 충당하게 하며 빌려간 원금은 기한내에 갚도록 하였다. 역관들은 관은을 빌려 거액의 자금을 무역활동에 사용하고 원금은 2년에 걸쳐 갚을 수 있었다. 여기서 공용은이란 수역 이하 역관들이 수렴하여 사용하는 자금으로, 가는 동안 중국 관리들에 대한 예단 외의 인정비(人情費), 정보 수집 비용, 임무 수행에 관한 교제비 등으로 사용하였다. 사행의 목적과 종류에 따라 금액이 달랐다.
◯14일 정사가 전갈을 보내어 “예부의 초본이 왔으니 오셔서 함께 상의하십시다.”라고 하였다. 내가 즉시 정사의 방으로 가니 부사도 이미 와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초본이 어떻습니까?” 하니 정사는 “일단 보시지요.” 하므로 내가 즉시 초본을 읽어보았다.
담당 신〔該臣〕 등은 논합니다. 조선국 왕이 올린 소에 이른바, “해국(該國)의 민인(民人)이 법을 어기고 강을 건너 인삼을 캐는 사람들의 움막에 가서 짐을 지키고 있던 사람 몇 명을 때려죽이고, 인삼, 구리 솥, 좁쌀〔小米〕 등의 물건을 강탈하였습니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 등이 의논하기를, 당해(當該) 국왕 등으로 하여금 신속히 사건의 범인들을 잡아들여 수사하고, 사건을 명백히 밝혀서 제본을 상주하기를 기다렸다가 담당 부에서 의처(議處)하겠다는 내용으로 옹정 12년 2월 모일에 아뢰어, 의논한대로 하라는 성지가 내려왔습니다.
공경히 받들어 조선국 왕 및 봉천(奉天), 영고탑(寧固塔), 성경(盛京) 형부(刑部)에게 자문(咨文)을 보내었습니다. 그러자 봉천부 부윤이 보낸 문서에 ‘지금 조선국 왕의 소에서 일컬은 바, 법을 어기고 살인을 저지른 범인 모(某) 등 28인을 모두 잡아들이고 공술한 것을 책록(責錄)하여 굳게 가두고 지키면서 황상(皇上)의 예단(睿斷)을 기다리고 있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공경히 생각건대 우리 황상께서는 천지처럼 품어주시고 은혜와 위엄이 두루 미치시니 온 세상의 땅과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황상의 판도가 아닌 곳이 없습니다. 죄(罪)에는 결단코 형벌을 내리는 것이 바로 조정의 법도입니다. 신 등은 황상께서 번왕(藩王)을 불쌍히 여겨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한결같이 대해주시는 더없는 극진한 뜻을 본받아 강희 44년(1705) 조선국 백성 김예진(金禮進) 등이 국경을 넘어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한 안건에 대하여 제준(題准 황제의 비준을 거침)했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당시 범인 김예진 등과 그 지역을 관할한 문무 관원들과 변방의 관리 모두에 대해서, 해국 국왕으로 하여금 죄를 논하여 처벌을 정하고 완결(完結)지어 주문(奏聞)하도록 했던 일이 문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해국의 백성인 모 등이 국경을 넘어 살인을 저지르고 물품을 노략질하였으므로, 응당 강희 44년의 전례에 비추어 범인 모 등은 해국의 왕으로 하여금 치죄(治罪)하도록 하고 문무 관원들 역시 규례에 따라 논의하여 처벌한 뒤, 일체를 완결하여 주문(奏聞)하도록 하였습니다.
해국의 국왕이 범인을 즉시 잡아들이고 감단(勘斷 죄상을 심리(審理)하여 처단함)을 행한 뒤 주청(奏請)한 바, 강희 44년의 전례에 비추어 그 의처(議處)를 면제해달라는 것은, 명(命)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다가 신의 부(部)에서 해국의 왕으로 하여금 준봉(遵奉)하도록 하겠습니다. 삼가 아뢰고 황지를 청합니다.
◯19일 한밤 중 삼경(三更)에 당상 역관(堂上譯官) 고시언(高時彦)이 작고(作故)하였으니 놀랍고도 참담하였다. 처음 보았을 때 실로 쇠약해 보이는 것이 걱정스러웠는데 그가 여항(閭巷) 중에서 문장에 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만 리 먼 길을 함께 오면서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었는데, 의주에서부터 병이 나서 강을 건넌 뒤로는 수레에 실려 행렬을 따라왔다. 간간히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삼하(三河)를 건널 때까지는 여전히 단정하게 관복을 차려입고 나를 만날 수 있었고, 동악묘(東岳廟)에서는 내 뒤를 따라 두루 유람을 했었다. 비록 그의 얼굴이 삭은 나무 같고 기운이 종잇장 같기는 하였으나 이렇게 갑작스럽게 객지의 외로운 혼령이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관사에 도착한 이후 병세가 날로 심해져서 결국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지극히 애달프고 슬퍼서 나도 모르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부사가 사람을 보내어 놀랍고 참담하다는 뜻을 전해왔다.
※고시언(高時彦 : 1671~1734) 1687년에 역관이 되었고 이후 여러 번 청나라를 왕래하였다. 한시(漢詩)에 뛰어나 홍세태(洪世泰), 정래교(鄭來僑) 등과 함께 손꼽히는 여항 시인(閭巷詩人)이었다. 여항 시인들의 시선집 《소대풍요(昭代風謠) 1737년 출간》편찬에 참여하였다.
◯22일 황력 재자관 변익이 귀국하기에 작성한 장계와 함께 집에 보내는 편지도 부쳤다. 듣자하니 새 달력 중에 7월, 8월 두 달의 대소(大小)가 우리나라에서 계산한 것과 서로 맞지 않는다고 한다. 안중태의 수본(手本)과 역서(曆書) 1건(件)은 산해관에 도착하자마자 소통사(小通事)에게 주고 먼저 출발시켜 급히 의주(義州)까지 가게 하여 동지(冬至) 전까지는 운관(雲觀 관상감(觀象監))에 도착하게끔 하였다. 그리고 장계는 소통사가 가는 길에 가벼이 부탁할 수 없는 것이므로 변익이 책문(柵門)에 도착한 다음에 의주로 보낼 것이라고 하였다. 일행들이 보내는 사적인 서신들은 모두 소통사 편에 부쳤다.
◯23일 저녁에 정사가 찾아와 말하기를, “이번 장계는 성글고 누락된 부분이 있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일행이 심양에 도착했을 때 들었던 바, 살해당한 사람이 기하(旗下)인지 일반백성인지에 관한 사항은 본래 조사도 하지 않았고, 또 소위 강조후(姜朝后 범죄와 관련된 청나라 사람)가 여전히 감옥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관서(關西)의 백성들과 관계되는 사안입니다. 당초 탐문(探問)이 범범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닌데 완전히 망각해 버리고 모두 다 진술하지 못하였으니, 이후 선래 군관 편에 장계를 보낼 때는 문장을 다듬어 하나하나 논해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심양에서의 일이 일치하니 이미 다른 문제가 생길 단서는 없기는 합니다만, 복주(覆奏)의 초본에 관해 만전(萬全)을 기한다면 의외의 낭패를 당하지 않을 것이니, 재자관의 회보(回報)에는 당면한 목전의 일만을 아뢰고〔啓聞〕 선래군관 편에 상황을 하나하나 진술하면 훗날 소홀해질 단서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용히 앉아 터놓고 이야기를 하다가 자리를 파하였다.
◯27일 지난밤에 부방(副房)의 쇄마구인(刷馬驅人)인 정주(定州)의 □□가 병으로 죽었으니 불쌍하고 가여웠다. 난 은자 1냥을 내어 시신을 거두는데 보태도록 했고, 상방(上房)에서도 은 1냥을 주었다. 부방은 은 2냥을 주고 또 염습(殮襲)할 수의와 홑이불도 마련해주었다. 원역들도 또한 서로 조금씩 은냥을 모아서 일을 도왔다.
◯29일 권순성(權順性)의 병이 나아 거의 기력을 되찾을 듯하였는데 오늘 다시 병세가 도졌으니, 담(痰)은 아닌 듯하고 분명 회충(蛔蟲) 때문일 것이다. 부사가 사람을 보내어 권순성을 보러 갈 것인지 여부를 묻고는 또 전하기를 지금 백사(白絲)에 관한 일로 정신이 없으니 조금 늦게 가겠다고 하였다.
매일 저녁마다 뜰과 건물 사이를 산보했으나 요즈음은 날이 차가와져 그만둔 지 오래였다. 정사가 나왔다기에 잠시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사는 “초본을 수정하는 것은 뜻대로 될 듯합니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비록 이번 사신의 임무에 크게 관련되는 일은 아니지만 실로 불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제 고칠 수 있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입니다.”라고 하였다.
부사가 정사를 향해 “기백(箕伯 평안도 관찰사)이 편지를 보내어 말한 것을 오늘 서장관께 말씀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정사가 말하기를, “북경으로 올 때는 법에 저촉되는 일을 일체 금지하는 것이 옳습니다만, 돌아갈 때 이익을 남기는 일은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허가해 주어도 무방합니다. 예로부터 이렇게 해왔거늘, 어찌 꼭 불우은(不虞銀)을 쓰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고집하십니까? 이는 국가로 귀속되는 물건이 아니어서 기영(箕營 평안 감영)과 만부(灣府 의주(義州))에서 자신들이 내주었다가 자신들이 거둬가는 것이니, 거기에서 주는 것까지 막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칩니다.”라고 하였다.
부사는 “이 일에 있어서 서장관이 주장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분명히 옳기는 옳습니다만 기백(箕伯)의 편지에 이르기를, ‘진상할 황모(黃毛)를 개시(開市) 때 구하지 못하였으므로 형편상 진상품을 바칠 때 빼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불우은(不虞銀)을 사용하지 않으셨다면 돌아오실 때 황모를 사다 주셔서 공용(公用)으로 쓸 수 있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부모님의 병으로 인해 약값을 보냈는데 서장관께서 막아 만부(湾府)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이번에 본영(本營 평안 감영)으로 반환되는 은은 본영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으니 공사간의 일처리에 있어 문제가 될 소지는 전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도 허락해주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어떠신지요?”라고 하였다. 정사가 말하기를, “어승마(御乘馬 임금이 타는 말) 값과 마부들의 양식을 마련하는 자금은 불우은을 전용하여 사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말하기를, “만윤(灣尹)이 말한 일이 있었는데 제가 막았습니다. 불우(不虞)라는 것은 사행에서 뜻밖의 사고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은이 비록 의주부의 창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창고를 나왔다면 우리 행중의 물품이니 만윤(灣尹)이 사사로이 간여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또 한양에서 환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또한 공적인 물건이 아니겠습니까? 공적인 물건을 가져왔으니 원래 그대로 가지고 가는 것이 도리상 마땅한 일입니다. 어승마(御乘馬)의 값이나 마부들의 양식 자금은 이 중에서도 공용(公用)의 것이니 다른 용도로 옮겨 쓴다 한들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원역에게 내주어 그들이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 결단코 불가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평안 감영에서 진상품을 바칠 때 누락하는 일은 진주사가 상관할 바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정사가 말하기를, “어찌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까? 이 일은 그렇게 고집을 피우실 일이 아닙니다. 다만 황모가 씨가 말라 사는 것도 쉽지 않을 듯하니 걱정입니다.”라고 하였고, 부사 역시 누누이 말을 하였다. 나는 “모두의 뜻이 이러하시니, 기영(箕營)의 공용(公用) 물품을 위한 무역은 허락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밤에 권순성을 보고 왔는데 병세가 위중한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11월
◯1일 사신이 되어 북쪽으로 떠나온 지도 이미 석 달이 넘어 동짓날이 십수 일 앞으로 다가왔으니 새벽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그네의 심정을 어찌할 수 없는데 하물며 지금이 수월(讎月)임을 생각하면 멀리 떠나온 애통하고 절박한 심정이 갑절이나 더하지만, 설령 오늘 수레를 돌려 떠난다 한들 이미 제사 날짜에 맞추어 돌아갈 가망은 전혀 없었다. 사신의 임무가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하니 나라를 위한 근심을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또 돌아갈 날이 점차 미루어짐에 동구 밖에서 자식을 기다리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한번 떠올리자니 가지가지 온갖 상념에 얽매어 억지로 참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마음이 이미 편치 못하고 몸도 오랫동안 성치 못했는데 간밤의 거센 바람에 냉기가 스며들어 감기가 심해졌으니, 세수하고 머리 빗는 것도 모두 그만두고 하루 종일 골골거리며 홀로 누워 누구와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 후 정사(正使)가 만나러 왔기에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정사는 “어제 드린 말씀이 농담처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름지기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제 생각이 본래 이러한데 누차 가르쳐 주심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혼자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어찌 어리석은 소견을 고집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움직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사는 “그렇군요.”라고 말하였다.
◯15일 나는 근래 늘 역관들에게 말해 두기를 “복물(卜物)이 책문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거느리고 가는〔領去〕 이는 응당 중곤(重棍)을 받을 것”이라고 했으니, 저들도 내가 절대 너그러이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서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또 수역들은 혹 먼저 가는 사람이 모자와 면(綿)을 선점해버릴까 두려워하여 군관들을 먼저 보내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또 가교의 말이 부족하다는 것을 들어서 충동질을 하는데 정사의 생각이 확고하게 굳어 바꿀 수가 없었다. 은이 많은 사람은 일단 논하지 않더라도 은이 적은 이들조차 가지 않으려고 하니 이는 역관들이 나를 이긴 것이다. 역관들의 기세가 가히 두려울 만하였다. 아아. 그러나 내 어찌 참으로 저들을 두려워하랴!
밤사이에 정사가 만나러 왔다. 내가 이러한 일들을 열거하며 말을 했지만 정사가 끝내 고집하며 허락하지 않으니 이미 역관들의 말에 깊이 빠졌다는 것을 알 만했다. 내가 또 말하기를, “아침에 부사께서 장계의 초본을 가지고 오셨기에 읽어보았습니다. 후반부에서 현문항의 일 운운 하였던데 이는 필시 대감께서 분부하신 일이겠지요. 현문항이 우리 일행 중 만주어로 된 문서와 만주어에 독보적이니 반드시 장려하고 발탁하고자 하신다면, 귀국하여 어전에서 아룀으로써 자급을 올려주거나 상을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지금 이 장계에서는 ‘일처리를 주선함에 가상하다.’라고 했는데 실제로 이런 일은 없었으니 어찌 불성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릇 사신의 임무 외에 별도로 힘써 노력한 일이 있는 경우는 비록 직접 논상(論賞)을 청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신의 임무에 관계된 것이라면 설령 대단한 공로가 있다고 해도 이는 자신의 직분 안에 포함된 일일 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상하다고 한다면 또한 혐의쩍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원래 맡아 처리한 일이 없는 경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 말은 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정사는 “이는 제 생각이 아닙니다. 부사께서 말씀하신 바입니다. 장계 중에서 먼저 거론한 뒤에 돌아가 아뢸 때 다시 거론하자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16일 아침에 부사가 장계의 초고를 가져와서 보았는데, 현문항의 일이 빠져 있었다. 내가 이미 정사에게 말했던 내용이므로 다시 부사에게 말하고 또 정사가 한 말도 해주었다. 그러자 부사는 “제가 의도했던 바는 아닙니다. 서장관의 말씀이 옳습니다. 돌아가 연석(筵席)에서 아뢴다면 현문항에게도 어찌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운운하였다.
◯17일 저녁 후에 부사가 문병 차 왔다. 내가 묻기를, “김시유가 말한 사신의 일과 관계된다고 운운한 것이 앞으로 있을 사행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라고 하였다. 부사는 “김상명(金常命)이 ‘사행이 오는 것은 피차간에 폐단이 많거늘, 이번에는 올 필요가 없는데도 왔다. 사은사(謝恩使)를 절사(節使)가 겸하는 일은 이미 규정이 있고, 이전에 재자관이 왔을 때에도 사은사는 늦추어 기다렸다가 동지사(冬至使)가 겸하는 게 좋겠다.’라고 말했답니다.”라고 하였다.
갑인연행별록(甲寅燕行別錄)
갑인연행별록 권1
■1734년(영조10, 갑인) 8월
◯18일 길을 가던 중 나귀를 타고 무리지어 가는 이들을 보았다. 물어보니 산서(山西) 사람들이 심양에서 점포를 세내어 장사하다가 잠시 고향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다시 심양으로 가는 중이라고 하였다.
장사꾼들의 수레가 밤낮없이 끊이지 않았다. 수레와 말에 실린 것이 정확히 어떤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잣거리에 쌓여 있는 물품들이 모두 비단〔綾緞〕과 포백(布帛 베와 비단 직물)이었으니 아마 이것들도 모두 같은 종류일 것이다
■1734년(영조10, 갑인) 9월
◯6일 드디어 배를 타고 강을 건너 통주(通州)로 들어갔다. 성곽이 안팎으로 놓여있고 누대(樓臺)들은 좌우로 늘어서 있는데다 점포의 번성함이나 백성들이 많기로는 심양과 비교하면 또 배나 되었다. 구경하는 이들이 마치 담벼락처럼 둘러있고 수레와 말이 길을 가득 메워 길을 가는 도중에 멈추어 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진천상(陳天祥)의 집에 묵었다. 오늘은 70리를 갔다.
◯14일 관에 머물렀다. 임역(任譯)들이 와서 말하기를, ‘내각(內閣)에 심씨(沈氏) 성을 가진 사인(舍人)이 자신들을 불러다 주문(奏文)에 쓰여 있는 각인(各人)들의 관직 등 명목을 물어보았다.’고 하였다. 또 그가 ‘이번에 만주어로 번역하는 일은 문장이 너무 많아 노고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이니, 다음 번 절사(節使)가 올 때 예증(例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라고도 말하였다. 내가 《진신관안(搢紳官案)》을 살펴보니 사인(舍人) 중에 과연 심세풍(沈世楓)이라는 자가 있기는 했다. 그가 했다는 말은 전적으로 뇌물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사안이 크고 작고 긴급하고 아니고를 막론하고 저들은 무엇인가를 얻어야만 겨우 일을 처리해주며, 역관들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어야만 일을 주선하려든다. 그 폐단이 이미 고질이 되어 뇌물을 막기 어렵게 되었으니 통탄할 일이다. 이번에는 통렬하게 막아서 이전처럼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17일 관에 머물렀다. 듣자하니 경외(京外)의 군사들은 모두 팔기(八旗)에 소속되며 군령(軍領)의 명목이 매우 많고 영솔하는 바는 모두 갑군(甲軍)이다. 갑군은 녹봉이 후하고 세금을 감면해 주므로 평민들과는 저절로 구별되고, 그들이 활을 메고 칼을 찬 채 마음대로 도로를 내달리면 평민들이 부러워한다. 이러한 까닭에 만주족이건 한족이건 15세부터 군적에 이름을 올리는데, 모두가 갑군에 소속되기를 원하며 자신이 탈락될까 걱정한다.
◯19일 관에 머물렀다. 예부에서 개문(開門)한다는 방을 붙였다. 듣자하니 근래에는 찾아오는 상인들이 드물고 물건 값은 비싸져서 달마다 다르고 해마다 다르며, 서화(書畫) 종류나 기용(器用) 같은 물건조차 예전과 달리 씨가 마른 것 같다고 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남쪽 지방에 거듭 흉년이 들어 베를 짜는 것이 감소했지만 반면에 세금을 걷는 규정은 지나치게 번잡스럽다고 했다. 북경의 경우 융복사(隆福寺)와 동악묘(東岳廟) 등지에서는 정해진 날짜마다 시장이 열리는데 일일이 세금을 걷어간다. 남경의 경우는 행상(行商)들이 세금을 낼 때 전에는 지정된 장소가 있었지만 지금은 강의 규모가 크건 작건 배를 타고 건너기만 하면 모두 세금을 걷어간다. 이러한 것은 산해관 동쪽의 여러 지역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또 과거 김상명(金常命)이 세관이 되었을 때, 각종 물품의 수를 더하여 세금을 더 거둬들임으로써 옹정의 뜻에 영합하니 백성들은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아! 한 사람의 총애를 받으려고 온 백성에게 해를 끼치다니 통탄할 만한 일이다. 이런 까닭에 심양의 창고에는 은이 돌덩이처럼 쌓여 있다. 북경의 대소 관료들의 녹봉과 공사(公私)간에 날로 쓰는 비용이 모두 은으로 쓰고 또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 지금 저장되어 있는 것도 몇 천만이나 되는지 모를 지경이니 은이 아주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내몰리고 있으니 이것 하나만으로도 북경의 성쇠(盛衰)를 미루어 알 수 있다.
◯27일 듣자하니 강희제는 간혹 길을 가는 도중에 멈춰 쉬면서 장신(將臣)들을 불러 만나보기도 하고, 혹은 마을을 지나갈 때 병사나 백성들을 방문하기도 하면서, 한결같이 성심으로 대하여 차별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옹정은 때로 출입을 하긴 하지만 단지 도성 근처 수십 리에 불과할 뿐이며 어가가 움직일 때에는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모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피한다고 한다. 그 법제의 엄격함이 실로 이러하다면 이 또한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강희(康熙) 때와는 다르다고 한다. 황후(皇后)를 다시 맞아들이지 않고 태자(太子)를 세우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겠다.
■1734년(영조10, 갑인) 10월
◯19일 관에 머물렀다. 한밤중 삼경(三更)에 당상 역관(堂上譯官) 고시언(高時彦)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고시언은 오는 길에 여러 번 서증(暑症)에 걸렸는데 이것이 창병〔脹疾〕이 되어버렸다. 여러 차례 침과 약을 썼지만 끝내 효과를 보지 못하고 결국은 객사하게 되었으니 너무 참담하다.
◯22일 관에 머물렀다. 황력재자관(皇暦賫咨官) 변익(卞熤)이 귀국하므로 장계를 써서 부쳤다.
■1734년(영조10, 갑인) 11월
◯20일 관에 머물렀다. 정사와 부사는 오문(午門)으로 가서 상을 받고, 이어 예부(禮部)에 가서 하마연(下馬宴)을 행한 뒤 관소에 돌아와서는 상마연(上馬宴)을 행하였다. 나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저물녘에 예부에서 자문(咨文)을 보내왔고 병부(兵部)에서는 표문(標文)을 보내왔다.
◯21일 정사 군관 정의산(鄭義山), 부사 군관 박당(朴鏜), 역관 윤우석(尹祐碩)에게 선래장계(先來狀啓)를 가지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먼저 떠나도록 하였다. 식후에 정사와 부사는 말을 타고, 나는 병세가 심해 좌거(坐車)를 타고 출발하였다. 큰 저잣거리를 지났는데 동쪽의 시전(市廛)은 지난밤에 불이 나서 꽤 많이 타버렸다. 조양문(朝陽門)으로 나와서 저녁에 통주(通州)에 도착하였다. 진가발(陳可發)의 집에 묵었다. 오늘 40리를 갔다.
◯29일 닭이 울자 출발하였다. 범가장(范家庄)에서 아침을 먹었다. 이날 동풍이 크게 불어 모래먼지가 하늘을 뒤덮어 지척의 거리도 분별할 수가 없었다. 산해관을 지나는데 성안에 거마(車馬)가 길게 이어지고 사람들이 복작복작 붐비는 것이 지난 가을보다 심하여, 앞으로 한 치 나갔다가 뒤로 한 자만큼이나 물러서게 되니 저녁때가 되어서야 겨우 산해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1734년(영조10, 갑인) 12월
◯9일 연로의 성곽 중에는 통주(通州), 계주(薊州), 영평(永平)이 온전하고 튼튼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심양이 가장 완전하였다. 평지에다 사면(四面)이 반듯반듯하게 벽돌로 지었다. 바깥은 쇠를 깎아놓은 듯 매끈하여 부여잡고 오를 만한 곳이 없다. 성안에 자성(子城)이 많고 문에는 동옥(洞屋)을 만들고 사방으로 길을 내었으니, 보기에 우뚝하여 범접할 수 없는 기세가 있었다. 심양성 외에는 비록 거진(巨鎭), 웅부(雄府)라 하더라도 성가퀴가 모두 무너져 있었다. 벽돌로 쌓은 성의 바깥이 비록 주저앉고 무너졌지만 안쪽에 쌓은 흙덩이는 우뚝하게 철벽처럼 서 있었으니 토질이 본래 특별한 점이 있어서 그러한지 아니면 성을 쌓을 때 독특한 방법을 사용해서 그러한지는 모르겠다. 오늘 90리를 갔다.
◯10일 동틀 무렵 출발하였다. 듣자하니 절사의 행렬이 책문 밖에 다다랐을 때, 갑작스러운 눈보라와 추위 때문에 역졸(驛卒)과 마부들이 동상에 걸려 발을 심하게 다쳤다. 수레에 실려 온 이들이 많아 17명은 돌려보냈으며, 우리 일행은 책문을 나오는 참이었으므로 우리 일행 중 역부 3명을 교체하여 데리고 간다고 하였다.
백탑보(白塔堡)에서 아침밥을 먹었고 십리보(十里堡)에 도착하여 서영(徐英)의 집에 묵었다. 오늘 60리를 갔다.
◯13일 동틀 무렵 출발하였다. 청석령(靑石嶺)을 넘었다. 청석령 남쪽에는 호랑동(虎狼洞)이 있으니 청석령을 피해가려는 사람들이 이 길로 간다고 한다. 청석령 고갯길이 극히 험준하여 수레를 모는 것이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이번 행차에는 쌓인 눈이 판판하게 다져져서 큰 길이 마치 숫돌같아 수레를 모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첨수참(甜水站)에서 아침밥을 먹고 다시 회녕령(會寧嶺)을 넘어 저녁에 연산관(連山關)에 닿았다.
절사(節使)를 따르던 역부(驛夫)들 중 동상에 걸린 3명이 또 이곳에 남겨졌는데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발을 질질 끌며 나와 말 앞에서 크게 울부짖으니 보기에 참으로 참담하였다. 이조(李照)의 집에 묵었다. 오늘 70리를 갔다.
◯16일 동틀 무렵 출발하였다. 책문(柵門) 안에 이르러 이리(夥裡)에서 묵었다. 지난번 갈 때 배를 타고 건넜던 크고 작은 강물들에는 모두 다리가 놓여있어 아무런 장애 없이 수월하게 건넜고 길가는 도중에도 눈이나 비로 인해서 지체되는 일이 없었다. 일행이 큰 탈 없이 책문에 도착했으니 다행스러웠다. 그런데 절사(節使)를 따라 가다가 심양에서 우리와 함께 돌아오던 역부(驛夫)들 중 2인이 또 연달아 죽었다. 오늘 40리를 갔다.
◯17일 내가 돌이켜보건대, 나라가 욕을 당하여 진주사가 되었으니 길을 가는 동안에는 오로지 여정을 재촉할 것만을 생각하였다. 관소에 이르러서는 일을 완수하겠다는 구구한 일념뿐이었으므로, 두루 유람하거나 탐문하며 알아볼 여유가 없었다. 산천(山川)과 도리(道里), 풍기(風氣)와 습속(習俗) 등에 이르러서는 전후에 사명(使命)을 받는 신하들이 이미 자세히 갖추어 진달한 바 있다. 지금은 사행의 임무와 관련하여 보고 들은 것들을 다음과 같이 간략히 항목을 나누어 열거한다.
갑인연행별록 권2
■문견별록〔聞見別錄〕
◯서호(西湖)는 옥천산(玉泉山) 아래에 있고 둘레가 십여 리이다. 연꽃과 마름, 갈매기와 물새들이 푸른 하늘과 흰 구름 사이에 은은히 비치니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이다. 노구하(盧溝河)는 성 서쪽 25리에 있다. 긴 다리는 마치 무지개가 드리워진 듯하며 큰 물결은 내달리는 듯하다. 포자하(泡子河)는 숭문문(崇文門) 동쪽에 있으며 동서 양쪽의 제방 위로는 원림(園林)과 정자(亭子)가 많이 있다.
◯만수산(萬壽山)은 궁궐의 담장 안쪽, 신무문(神武門) 바깥쪽에 있으며 일명 경산(景山)이라고 한다. 이는 인공(人工) 산으로 높이나 크기는 우리 한양의 팔각정(八角頂)보다 조금 더 크다. 북경에 도착하여 조양문(朝陽門)으로 들어올 때 수풀이 울창한 것을 보고 물어보니 그것이 바로 만수산이었다. 숭정(崇禎) 말년의 변고를 생각하니 몹시 슬퍼졌다.
◯이들 사찰과 도관은 모두 명나라 때 건립한 것이다. 애석하구나, 이토록 불교에 심하게 현혹되었다니! 불법은 한나라 명제(明帝) 때 중국에 유입되어 무리가 불어나고 법이 번성했다. 간간히 성스럽고 밝은 제왕(帝王)들이 있었으나 끝내 그 도를 막아 없애지는 못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성 안의 절반은 절이고 도읍지에는 승려가 아닌 이가 없다.
생각해보면 어찌 불교를 숭상하는 것 하나만을 책망하랴. 예부의 대청에 현판 하나가 걸려 있었는데 국기일(國忌日)을 열거하여 써 두고 그 아랫줄에 나란히 성탄(聖誕) 8월 27일, 불탄(佛誕) 4월 8일이라고 썼다. 황제와 부처를 어찌 비교하여 동일시한단 말인가? 하물며 소위 국기일의 아래에 써두었으니 윤리가 없는 중에서도 더욱 심한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해 무엇 하랴! 8월 27일에 사신 일행이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렀을 때 산해관 안에 도살이 금지되었는데 이는 공자의 탄신일 때문이었다.
◯근래 만주 병정(兵丁)이 백성에게 해를 입히는 일이 있다. 어떤 이는 길가는 사람의 옷과 모자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구타하고 빼앗았으며, 어떤 이는 상점의 상품들을 강매(强買)하여 헐값으로 가져가 버렸고, 어떤 이는 바꾸러 왔다면서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울 때를 노려 재물을 탈취하며, 어떤 이는 제 손으로 쳐서 옷을 손상시키고는 핍박하여 배상하게 하였다. 또 어떤 이는 땔감을 벤다는 이유로 묘지의 나무를 베어버리고, 어떤 이는 풀을 뽑는 것을 빙자하여 논의 모를 베어버리는 등 갖가지 악행을 못하는 짓이 없다. 현(縣)의 관리들이 이를 걱정하여 금칙(禁飭)을 써서 방문을 붙여 놓아, 이를 보니 국법이 점차 무너지고 만주 병사들의 기강이 날로 없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성들은 온갖 침탈을 당하면서 누구도 감히 어쩌지 못하고, 그저 어금니를 깨물고 참으며 눈물을 삼키기만 할 뿐이니 또한 애달플 뿐이다.
◯연로한 사람들에 대해 나라가 봉양해주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하였다. 강희(康熙) 27년에 조서를 내려서, 군민(軍民) 중 70세 이상인 자는 장정 한 사람이 모시고 봉양하게 하고 각종 요역을 면제해 주었다. 80세 이상인 자에게는 비단 1필, 면 1근, 쌀 1석, 고기 10근을 나눠주고, 90세 이상인 자에게는 그 두 배를 주게 하니, 군읍에서 모두 명령대로 시행하였다. 물품을 지급해 준 백성들의 숫자와 위로 사농(司農)이 기록하여 책부(冊府)에 보관해둔 것을 합쳐서 온 천하를 따져보니, 70세 이상인 자들은 너무 많아서 이루 다 쓸 수가 없고, 80세 이상인 자는 16만 9830인, 90세 이상인 자는 9996인이며, 100세 이상인 자도 21인이나 되었다.
이들은 모두 황명 때의 유민들이다. 전쟁의 난리 통에도 죽지 않고 기근과 추위, 홍수와 화재 속에서도 살아남아, 세상의 변화를 두루 겪으며 남은 생을 보존하였으니,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강희(康熙)가 천부(天府 조정의 창고)에서 포백(布帛)을 내어 주고 태관(太官)의 쌀과 고기를 내어 준 것은 노인을 봉양하는 특별한 은전을 보여준 것으로 소중히 여겨야 하는 바를 안다고 할 수 있다. 민부(民部 호부(戶部)를 말함)의 관리가 그 숫자를 집록(輯錄)하고는 인서(人瑞)라고 이름 했다고 하니 이 또한 마땅하다 할 것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사민(四民)중의 하나이다. 예로부터 물건 판매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꼭 비루하거나 천한 것들만은 아니었다. 지금 전포(廛鋪)에 앉아 있는 사람만 봐도 용렬한 무리가 아니며 간혹 높은 관직을 지낸 집안의 사람도 있다. 그러니 사람들도 장사치라 하여 박대하지 않는다.
정세태(鄭世泰) 같은 이는 북경 저자〔燕市〕의 거상(巨商)으로서 한 해에 운용하는 것이 수십 만 금(金) 이상이다. 거의 10만 냥에 이르는 우리나라 역원(員譯) 일행의 포은(包銀 팔포(八包)에 채워가는 은)이 모두 정가(鄭哥)에게로 들어간다. 그는 비단〔綾緞〕 종류를 건건이 사들였다가 제 맘대로 파는데 해마다 값을 달리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는 이는 유독 이 사람뿐이니, 이외에도 또 몇 명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어찌 이러한 사람들을 깔볼 수 있겠는가! 정가의 자질 중에는 진사에 이름을 올린 자가 있어, 문액(門額)에 ‘괴원(魁元)’이라는 두 글자를 걸었다.
심양(瀋陽)의 시전(市㕓)이 비록 북경의 저자〔燕市〕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 역시 번성한 곳이다. 듣자하니, 먼 지방 출신으로 고향을 떠나 가게를 빌려 장사를 하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데 2, 3년에 한 번 고향에 가서 처자식을 만난다고 한다. 가는 도중에 산서인(山西人) 한 무리가 나귀를 타고 줄줄이 늘어서서 가는 것을 보고는 물어보았더니 과연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장사 수레 행렬이 요동에서부터 북경까지 끊임없이 계속 이어지니, 삐걱삐걱 수레바퀴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는다. 어떤 것은 준마(駿馬) 4, 5필로 몰고, 어떤 것은 노새와 나귀 5, 6필로 끈다. 사람은 수레 위에 앉아서 긴 채찍으로 수레를 몰아가니 전진하고 물러나고 빨리 가고 천천히 가는데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다.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이 정확히 어떤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잣거리에 쌓여 있는 물품들이 모두 비단과 포백이었으니 아마 이것들도 모두 같은 종류일 것이다. 너른 들판에 모래와 자갈이 섞인 길은 뽀얀 가루를 일으킨다. 바람이 없는 날조차 모래먼지가 해를 가리는 것은 아마도 수레바퀴가 삐걱거리며 바닥을 갈기 때문일 것이다.
◯관인들이 절로 위의(威儀)가 있어야 귀천(貴賤)이 구별되고 상하가 분별된다. 시랑(侍郞) 이상은 승교(乘轎)를 타며 그 형식은 우리나라와 같다. 옥교(屋轎)는 검은 장막을 드리우고 좌판(坐板)은 의자모양으로 만드니 대개 걸터앉기 때문이다. 가마채〔長扛〕 끝에는 가죽 끈을 가로로 동여매며, 가마꾼은 4명이거나 2명이다. 아문(衙門)에 들어갈 때에는 전도(前導)가 창갈(唱喝)하면서 가고, 아문에서 나올 때는 길에서 벽제(辟除)를 하지 않는다. 낭중(郞中) 이하 관원들은 수레나 말을 타며, 수레는 태평거(太平車)를 타고, 말을 탈 때에는 견마 잡이가 없이 그저 한 사람이 모전(毛氈)을 껴안고 뒤따를 뿐이다.
공적인 일로 외지로 나갈 때에도 개인적으로 짐을 싸니 행상(行商)들과 마찬가지로 연로(沿路)의 관청에서 공궤(供饋)하는 규정이 없다. 이는 황제의 행차도 마찬가지이고, 군(郡)이나 현(縣)의 관리들도 동일하다. 이처럼 위의(威儀)가 없으니 무엇으로 귀천(貴賤)을 구별하고 상하(上下)를 구분하겠는가? 크고 작은 의례와 절차들은 모두 명나라의 옛 제도를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결코 황명의 제도가 아니다.
성안의 일반 백성〔白徒〕들도 거개가 말을 타고 다니며 관인과 마주쳐도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 붉은 모자가 서로 뒤섞이고 자줏빛 채찍이 엇갈리며 오로지 모자위에 달린 금붙이와 말의 목에 걸려 있는 자줏빛 장식만으로 구별한다고 한다. 듣자하니 지방의 기발꾼(騎撥軍)만은 역승(驛丞)이 공궤(供饋)하게 했다는데, 급족(急足 급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라 빨리 달려가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기는 하지만 천자의 존엄함과 조정 관리의 귀함이 도리어 일개 기발꾼만도 못하단 말인가?
◯여행을 떠나는 자는 반드시 식량을 가져가야 하니, 식량을 가져가지 않으면 다닐 수가 없는 법이다. 요동에서 북경까지는 길가에 크고 작은 가게들이 10리나 5리마다 연달아 있어서 서로 보일 정도이다. 상점들 모두 탁자를 놓고 화려한 도자기에다 밥, 국, 떡, 면, 생선, 과일 등의 먹을거리를 미리 마련해 담아두며, 심지어는 말과 가축에게 먹일 것까지도 가지가지 구비한다. 이런 까닭에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비록 천리를 간다 해도 짐을 싸지도 않고 따로 사람을 데려가지도 않으며, 주머니에 돈만 넣고 말에 올라 채찍을 휘두른다. 단신(單身)으로 문을 나가고 빈손으로 길을 떠나, 역참이나 점포에 이르러 사람이고 말이고 내키는 대로 양껏 배불리 먹고는 다 먹으면 돈으로 계산하고 떠나니, 사람과 말이 굶주리고 피곤할 우려가 없고 길에서 지체되는 문제도 없다. 날마다 삼사백 리를 가는데 오직 해의 길고 짧음과 말의 속도에만 달려있을 뿐이니, 모든 일의 간편함이 대개 이러하다.
산해관부터는 일정한 거리마다 나라에서 파발과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군졸을 두고 창과 검으로 도적을 예방하여 여행자를 안전하게 보호한다. 이런 까닭에 거마(車馬)들이 끊임없이 밤낮으로 왕래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강남과 강북의 상로(商路)가 막힐 우려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의 운세가 가면 갈수록 나빠진다. 아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랴! 원 나라 때는 벼슬하는 사람들만 삭발을 했고 벼슬이 없는 자들은 모습을 바꾸지 않았으며 산림에는 구속받지 않는 이들이 많아 중화의 제도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의 신분과 지역을 막론하고 모두 민둥머리이니 결국은 모두 오랑캐가 된 것이다. 설령 덕을 감춘 선비가 있다 한들 무엇으로 알 수 있으며, 문물의 번성함을 보고자 생각한들 무엇을 통해서 볼 수 있겠는가? 저 곳의 후생(後生)들은 태어나 배냇머리가 마르기도 전에 홍모(紅毛) 모자를 머리에 얹고 폭이 좁은 검정 옷을 입어, 결국은 지금 시대를 옛날과 똑같이 여겨 기묘함만 추구할 뿐 그 선조들의 시대와 오늘날의 차이가 어떠한지 살펴보지 않게 될 것이다.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번 행차 때 조양문(朝陽門)을 들어올 때 길가에 아이들이 모여 있다가 우리를 손가락질하며 박장대소하니, 이는 필시 우리의 의관 제도를 괴상하게 여겨서 웃은 것이리라. 아! 중화의 문물이 오직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다는 것을 이 무리들이 어찌 알겠는가! 예전에는 길가에 있던 노인들이 우리의 의관을 보고 옛일을 이야기하며 마음 아파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이러한 것조차 볼 수가 없다. 여러 왕가(王家)에는 황명 때의 옥대(玉帶)가 있다고 한다. 일행 중의 누군가가 이를 가져와서 보았더니 그 괴판(塊板)의 네모지고 둥근 것이며 면설(面舌)의 잠김쇠가 우리나라의 양식과 같았다. 종일토록 이것을 어루만지다보니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장사꾼 정세태의 집에도 황명 때의 조복(朝服)와 옥홀(玉笏) 등이 있다고 한다.
◯구주(九州)에 누린내가 진동함에 온갖 일이 괴이하게 변하였지만, 그중에서도 더욱 해괴한 것은 신안(新安)에서 딸을 익사시키는 것과 영현(酃縣)에서 부인을 파는 것이다. 《유청신집(留靑新集)》을 보니 현관(縣官)이 딸을 익사시키는 행위를 금지하고자 써 붙인 방문의 내용이 있는데 다음과 같았다.
“근래 듣자하니 대강(大江) 이남에서 딸을 익사시키는 일이 많으며 그중에서도 신안이 더욱 심하다고 한다. 그러한 원인을 조사해보니 모두가 장래에 딸을 출가시킬 때 드는 비용을 걱정해서일 뿐이다. 방탕한 아들을 낳아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많으며, 효녀를 낳아 잘 키우면 아비를 구하기도 한다. 또 가시나무 비녀와 삼베 치마로도 인연에 따라 출가할 수 있으며, 늘그막에는 사위가 부모를 봉양할 수도 있다. 세상에는 딸을 해쳤다가 아들 또한 기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는 생기(生機)를 스스로 끊었기 때문이다. 또 딸을 죽여서 처도 함께 죽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비용을 아끼려다가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이다. 무릇 민간에서 자식을 낳고 기름에 아들과 딸을 다 같이 낳아 길러야 한다. 만일 혹시라도 이를 어기고 딸을 익사시키는 자가 있다면 흉한(兇狠)과 잔적(殘賊)에 관한 계(戒)로써 엄중히 처벌하겠다.”
부인 파는 것을 금지하는 방문은 다음과 같았다.
“근래 우리 영현(酃縣)을 방문해보니, 곤궁한 백성이 천 번 백 번 생각해서 아내를 맞이했다가 굶주리고 헐벗는 지경이 되면 무심하게 애정을 끊고 남에게 팔아넘기니, 어미는 떠나는데 자식은 남아서 옷깃을 당기며 울기도 하고 혹은 고향을 떠나고 마을과 이별하면서 고개를 돌리고 애처롭게 울부짖는다. 가련하도다! 백세(百歲)의 은정(恩情)이 이날로 영영 남남처럼 되어버리는구나. 알지 못하겠다. 이는 모두 자신이 나태하여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된 탓이다. 자신은 밭 갈고 김매며 아내는 부지런히 길쌈하여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면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다. 부인을 판 값에 의지하여 실낱같은 목숨을 부지한다면, 그 전에 장가들지 않았을 때는 무엇으로 삶을 도모한 것이며, 이후로 돈이 다 떨어지면 무엇으로 입에 풀칠을 하겠는가? 온 읍의 사민(士民)들이 모름지기 힘써야 할 바는 각자 윤리를 돈독히 하고 양심을 지키는 것이다. 만약 부인에게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행적이 없는데도 중매를 통해 파는 자〔央媒別賣〕는 무거운 법률을 적용하여 엄중히 처분할 것이니, 악한 풍습을 바로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운운.
아, 추위와 배고픔, 곤궁함을 이기지 못하여 부자(夫子)와 부부(夫婦)가 서로를 지켜주지 못하는 경우는 예전에도 있었다마는 어찌 훗날에 들어갈 비용과 눈앞의 돈만 보고서 딸을 익사시키고 부인을 팔 수 있는가! 이치를 어그러뜨리고 교화를 해치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는 없다. 이러한 현상이 어찌 중화의 본래 풍습이겠는가? 필시 만주(滿洲)의 더러운 풍습에 물들었기 때문일 뿐이다. 관장(官長)이 엄금(嚴禁)하겠다고 고시(告示)한 것은 마땅하지만 악한 풍습이 즉시 고쳐질지 여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