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표해록(최보)

청담(靑潭) 2018. 7. 19. 18:12



표해록(漂海錄)

최보(1454-1504)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 아버지는 진사 택(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478년(성종 9) 성균관에 들어가 김굉필(金宏弼)·신종호(申從濩) 등과 교유했다. 1482년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저작·군자감주부 등을 역임했다.

최보는 1485년 서거정(徐居正)과 함께 〈동국통감〉의 편찬에 참여하여 논 120편을 집필했다. 이듬해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고, 사가독서했다. 1487년 9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임명되어 제주에 파견되었다. 최보는 다음해 1월 부친상의 소식을 듣고 나주로 돌아오던 중 초란도(草蘭島) 해안에서 풍랑을 만나 14일간 표류한 끝에 명나라의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도착했다. 왜구로 오인되어 살해될 뻔했으나 야음을 틈타 관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여 베이징[北京]으로 호송되었다가 5개월 만에 귀국했다. 귀국 직후 성종의 명을 받아 그동안의 견문을 일기 형식의 〈금남표해록 錦南漂海錄〉 3권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아무리 왕명이라 하더라도 부친상을 당한 몸으로 귀국 즉시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지체한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 하여 사헌부의 탄핵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뒤 지평·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논란이 일어 승문원교리로 밀려났다. 최부는 연산군대에 일찍이 중국에서 배워온 수차의 제작 및 이용법을 보급하여 사용하도록 했다.

최보는 1498년(연산군 4) 7월 무오사화 때 김종직 문하인 이종준(李宗準)·이구(李龜)·김굉필·박한주(朴漢柱) 등과 함께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했다는 죄명으로 함경도 단천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사형당했다. 〈금남표해록〉은 국내에서 한문·한글본으로 간행되었고, 일본에서도 〈당토행정기 唐土行程記〉·〈통속표해록〉 등으로 간행되었다.


표해록 제1권

■표해록서(漂海錄序)

상인(喪人)인 신(臣) 최부(崔溥)는 제주(濟州)로부터 표류, 구동(甌東 절강성(浙江省) 영가현(永嘉縣))에 정박했다가 월남(越南 베트남)을 지나 연북(燕北 하북성(河北省) 이북 북중국 일대)을 거쳐, 이해 6월 14일에 청파역(靑坡驛)에 도착해서 삼가 전지(傳旨)를 받들어 일행의 일록(日錄)을 찬집하여 바칩니다.


※윤 1월 25일자 최부가 이르는 말중에

“대개 우리 조선은, 지역은 비록 해외(海外)나 의관ㆍ문물은 모두 중국과 같으니, 외국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 명(明) 나라가 북방의 호(胡)와 남방의 월(越)까지 통일하여 한집안을 만들었으니, 한 하늘 아래에서는 모두가 우리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라는 표현이 있다. 남월은 중국 진말(秦末)∼한초(漢初)의 혼란을 틈타 조타(趙陀)가 광둥[廣東]·광시[廣西]의 양성(兩省)과 베트남 북부지역에 세운 나라(BC 203∼BC 111)이므로 남월이란 베트남이 아니라 중국의 남부지역을 일컫는 것이며 최부는 남월을 표현한 것인데 무슨 오류가 있었는지 월남이라고 표기되어 <베트남을 거쳐>고 해석하고 있다. 이 표해록을 읽어보면 절강성에서 베이징을 거쳐 귀국하고 있으므로 결코 베트남은 간일이 없다. 저자인 최부는 절강성을 남중국이라고 생각하여 남월이라고 기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것이 편집 또는 번역과정에서 월남으로 둔갑하여 버린 것이다. 명백한 번역자의 오류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정미년(1487, 성종 18) 9월]

○신(臣)이 제주 삼읍 추쇄경차관(濟州三邑推刷敬差官)으로서 대궐을 하직하고 떠나 전라도에 이르러서, 감사(監司)가 사목(事目)에 의거하여 뽑아 보낸 광주목(光州牧)의 아전 정보(程普 정보(程保)), 화순현(和順縣)의 아전 김중(金重)과 승사랑(承仕郞 종8품 문관) 이정(李楨), 나주(羅州)의 수배리(隨陪吏) 손효자(孫孝子), 청암역리(靑巖驛吏) 최거이산(崔巨伊山), 호노(戶奴) 만산(萬山) 등 6인과 사복시(司僕寺)의 안기(安驥)ㆍ최근(崔根) 등을 거느리고 해남현(海南縣)으로 가서 순풍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미년(1487, 성종 18) 11월]

○11월 11일, 아침에 제주의 신임 목사(牧使)인 허희(許煕)와 함께 관두량(館頭梁)에서 같이 배를 타고 12일 저녁에 제주의 조천관(朝天館)에 도착하여 유숙하였습니다.


■[무신년(1488, 성종 19) 1월]

○흐림. 신시[晡時 해질 무렵, 오후 4시 전후]에 신의 종 막금(莫金)이 나주(羅州)로부터 제주에 도착, 상복(喪服)을 가지고 와서 신의 아비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무신년(1488, 성종 19) 윤1월

○1일 비.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새벽과 저녁에 와서 조문(弔問)하였습니다. 이어 수정사(水精寺)의 승려[僧] 지자(智慈)의 배가 튼튼하고 빨리 가므로 관가의 배가 따르지 못한다고 하면서, 병방 진무(兵房鎭撫) 고익견(高益堅)과 오순(吳純) 등에게 명령하여 별도포(別刀浦)로 그 배를 돌려 대게 하여 신이 바다를 건너오는 준비를 시켰습니다. 판관(判官) 정전(鄭詮)이 군관(軍官) 변석산(邊石山)을 보내어 조문했습니다.

○3일 바다에서 표류했음.

이날은 흐리다 비오다 하고 동풍이 조금 불었으며, 바다 물빛은 짙은 청색이었습니다. 대정 현감(大靜縣監) 정사서(鄭嗣瑞)와 훈도(訓導) 노경(盧警)은 신이 친상 당한 것을 듣고 달려와서 조위(弔慰)하고, 최각(崔角), 박중간(朴重幹), 왜학 훈도(倭學訓導) 김계욱(金繼郁), 군관(軍官) 최중중(崔仲衆), 진무(鎭撫) 김중리(金仲理) 등 10여 인과 학장(學長) 김존려(金存麗)ㆍ김득례(金得禮)와 교생(校生) 20여 명과 함께 포구에서 송별했습니다. 김존려와 김득례 등은 신이 떠나는 것을 말리면서 말하기를,

“늙은 저들[老僕]은 섬 지방[海國]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수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한라산(漢拏山)에 구름이 끼거나 비가 내려 날씨가 고르지 못하면 반드시 바람이 일어나는 변고(變故)가 있으니 배를 타서는 안 됩니다. 또 《가례(家禮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처음 친상(親喪)을 듣고 길을 떠난다.’는 조목의 주(註)에도, ‘하루에 100리를 가고 밤길은 가지 않으며, 비록 슬프더라도 해로운 곳은 피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밤길을 가는 것도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이같은 큰 바다를 건너가면서 조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했습니다. 한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이는 권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말리기도 하여, 해가 중천에 높이 솟아오를 때까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진무(鎭撫) 안의(安義)가 와서 알리기를,

“동풍이 아주 좋으니 떠날 만합니다.”

했습니다. 박중간(朴重幹)과 최중중(崔仲衆)도 또한 떠나기를 권하므로, 신은 마침내 작별을 고하고 배를 탔습니다. 노를 저어 5리쯤 가니 군인(軍人) 권산(權山)과 허상리(許尙理) 등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은 바람 기세가 일어났다가 그치기도 하고, 구름과 흙비가 걷혔다가 개이기도 하니 이같이 바람이 순조롭지 못한 날씨를 만나서 이같이 파도가 험악한 바다를 건넌다면 아마 후회가 있을 듯합니다. 청컨대, 별도포로 돌아가서 순풍을 기다렸다가 다시 떠나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안의(安義)는 말하기를,

“하늘의 기후는 사람이 미리 짐작할 수 없는 것이니, 잠깐 동안에 구름이 걷히고 하늘을 볼 수 있을는지 압니까? 그리고 이 바다를 건넌 사람으로서 개인의 배는 뒤집혀 침몰되는 일이 잇달아 일어났지만, 왕명을 받든 조신(朝臣)으로서는 전 정의 현감(旌義縣監) 이섬(李暹) 이외에 배가 표류하여 침몰된 사람이 없었던 것은, 모두 임금의 덕망이 지극히 무거움을 실제로 하늘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여러 사람에게 의논하면 일이 성취되지 않는 것인데, 어찌 길을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감으로써 시일을 지체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큰소리로 호령하여 돛을 달고 가도록 했습니다. 겨우 대화탈도(大火脫島)를 지나자마자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배가 거요량(巨要梁)을 향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올라가고 있으니, 바람을 따라 추자도(楸子島)에 정박하면 매우 빠르게 갈 것입니다.”

하였으나, 권산(權山)은 그 말을 듣지 않고 키[舵]를 잡고서 바람 부는 대로 따라 수덕도(愁德島)를 지나서 서쪽으로 갔는데, 날씨가 어두컴컴해지면서 바람이 약하게 불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추자도의 배 정박할 곳에 가까이 갈 즈음에 썰물의 흐르는 기세가 매우 급하고 하늘은 또한 캄캄하였으므로, 곁꾼(格軍)을 독려하여 노를 젓도록 했더니, 군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같은 날씨에 배를 출발시킨 것은 누구의 허물입니까?”

하고는 모두가 다 거역하는 마음을 품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힘써 노를 저어 뒤로 흘러 내려와서 초란도(草蘭島)에 이르러 서쪽 해안에 의지하여 닻을 내리고 정박했습니다. 밤이 3경(更)이 되자, 허상리(許尙理)가 말하기를,

“이 섬은 비록 동풍은 막혔지마는 3면(面)이 툭 트여서 배를 정박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하고, 또 북풍이 일어날 조짐이 있으므로,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는데 의거할 곳이 없게 될 것이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한 배는 처음 정박한 곳에 있지 않고 점점 도리어 바다 가운데로 들어가고 있으니 내린 닻줄이 혹시 벌써 끊어졌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닻을 올리고 조금 앞으로 나아가서 해안에 매어 두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추자도로 노를 저어 들어가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마침내 닻을 올려 보니 과연 끊어져 버렸으므로, 노를 저었으나 미처 해안에 가까이 가기 전에 북풍에 거슬려서 의지할 데 없는 곳으로 몰려나오게 되었습니다. 비는 오히려 그치지도 않는데 바람과 물결이 모두 사나우니 배는 물결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갈 곳을 알지 못했습니다.

○4일 신이 안의(安義)를 시켜서 취로(取露)하는 일, 배를 수리하는 일로 군인들을 독려케 하니, 군인 중에 고회(高廻)란 사람이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제주는 바닷길이 매우 험악하므로 무릇 왕래하는 자는 다 순풍을 여러 달씩 기다립니다. 전 경차관(敬差官) 같은 분으로 말하면 조천관(朝天館)에 있기도 하고, 수정사(水精寺)에 있기도 하면서 무릇 3개월이나 기다린 뒤에야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지금 이 행차는 바람과 비가 일정하지 않은 때를 당하여 하루 동안의 날씨도 점쳐 보지 않고서 이러한 극단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스스로 취한 것입니다.”

하니, 나머지 군인들은 모두 말하기를,

“형세가 이미 이같이 되었으니 취로를 하고 배를 수리하며, 비록 심력을 다하더라도 끝내는 또한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니, 우리들은 힘을 써가면서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편안히 누워서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고, 모두 귀를 가리고 명령에 따르지 않았으며, 혹은 때려도 또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송진(宋眞)은 참으로 용렬한 자라 구타를 당하고는 성을 내며 말하기를,

“수명이 길구나, 이 배여! 부서질 만도 한데, 어찌 속히 부서지지 않는가?”

하니, 정보가 말하기를,

“제주도 사람들의 마음은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지마는 속으로는 독하며 완만(頑慢)하고 여한(戾悍)하여 죽음을 가벼이 여기니, 그런 까닭으로 그들의 말이 대부분 이와 같습니다.”

하였습니다. 신 또한, 물에 빠져 죽는 것은 이미 결정이 되었지마는, 혹시 하늘의 도움을 입어 다행히 빠져 죽는 데 이르지 않더라도, 정처 없이 표류하다가 죽는 날에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군인들의 게으른 행동에 분개하여 마침내 배를 같이 탄 사람들을 낱낱이 조사해 보니, 종자(從者)인 정보(程保)ㆍ김중(金重)ㆍ이정(李楨)ㆍ손효자(孫孝子)ㆍ최거이산(崔巨伊山)ㆍ막금(莫金)ㆍ만산(萬山)과 제주 목사가 정해 보낸 진무(鎭撫) 안의(安義), 기관(記官) 이효지(李孝枝), 총패(總牌) 허상리(許尙理), 영선(領船) 권산(權山), 사공[梢工] 김고면(金高面), 곁꾼(格軍) 김괴산(金怪山)ㆍ초근보(肖斤寶)ㆍ김구질회(金仇叱廻)ㆍ현산(玄山)ㆍ김석귀(金石貴)ㆍ고이복(高以福)ㆍ김조회(金朝回)ㆍ문회(文回)ㆍ이효태(李孝台)ㆍ강유(姜有)ㆍ부명동(夫命同)ㆍ고내을동(高內乙同)ㆍ고복(高福)ㆍ송진(宋眞)ㆍ김도종(金都終)ㆍ한매산(韓每山)ㆍ정실(鄭實), 호송군(護送軍) 김속(金粟)ㆍ김진(金眞)ㆍ음산(音山)ㆍ고회(高廻)ㆍ김송(金松)ㆍ고보종(高保終)ㆍ양달해(梁達海)ㆍ박종회(朴終回)ㆍ김득시(金得時)ㆍ임산해(任山海), 관노(官奴) 권송(權松)ㆍ강내(姜內)ㆍ이산(李山)ㆍ오산(吳山) 등과 자신까지 합해서 모두 43명이었습니다.

○11일 새벽에 한 섬에 도착하니, 석벽이 우뚝 솟아 매우 험준한데 바다 물결은 출렁거려서 석벽에 부딪혀 거의 1, 2장(丈)이나 솟았습니다. ... 저녁에 한 큰 섬에 도착하니, 섬에는 바위가 깎아 낸 듯이 서 있으므로, 배를 정박하려고 했으나 되지 않았습니다. 고이복이 옷을 벗고는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배를 끌고 헤엄을 쳐서 섬 언덕에 올라가서 배를 매었습니다. 배 안 사람들은 기뻐서 함부로 내려가서 시냇물을 찾아 달콤한 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마시고는 물을 지고 와서 밥을 짓고자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굶주림이 극도에 달하여 오장이 말라붙었으므로 만약 갑자기 밥을 배부르게 먹는다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니, 먼저 장을 마시고는 잇달아 죽을 먹되 적당히 먹고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

하였더니, 배 안 사람들이 모두 죽을 끓여서 먹었습니다. 섬에는 바람을 피할 곳이 없으므로 밤에 또 배를 풀어서 떠났습니다.

○12일 영파부(寧波府)의 경계에서 도적을 만났음. ...조금 후에 도적의 괴수가 신의 몸뚱이를 짓밟고,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공갈 위협하고는 그 무리들을 이끌고 나가면서 신의 배의 닻ㆍ노 등 여러 가지 기구를 끊어서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들의 배로 신의 배를 끌어 큰 바다 가운데 놓은 다음 그들은 배를 타고 도망해 버렸는데, 밤은 이미 깊었습니다.

○13일 신은 말하기를,

“너는 어찌 죽는 것을 분수에 맞는 일이라 하는가?”

하니, 이효지는 말하기를,

“우리 고을 제주도는 큰 바다 가운데 멀리 떨어져 있어, 수로가 900여 리나 되고 다른 바다에 비하여 파도가 더욱 사납습니다. 그래서 공선(貢船)과 상선(商船)의 왕래가 잇달아 끊어지지 않는데, 표류하다가 침몰된 것이 10척에 5, 6척을 차지하게 되니, 고을 사람이 전일에 죽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일에 죽게 됩니다. 그런 까닭으로 경내에는 남자의 무덤이 매우 적고, 여염(閭閻)에는 여자가 많아서 남자보다 3배가 됩니다. 부모된 사람은 딸을 낳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이 애는 나에게 잘 효도할 사람이다.’ 하고, 아들을 낳으면 모두 말하기를 ‘이 애는 내 자식은 아니고 곧 고래와 악어의 밥이다.’고 하니, 우리들의 죽음은 하루살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평상시일지라도 또한 어찌 자기 방안[牖下]에서 죽기를 마음먹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조신(朝臣)들이 왕래할 때면 순풍을 기다리고, 주즙(舟楫)도 빠르고 견고한 까닭으로, 풍파 때문에 죽은 사람은 전고에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경차관에게만이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서 불측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통곡하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16일 우두(牛頭)의 외양(外洋)에 이르러 정박하였음.

○17일 배를 버려두고 육지에 올라갔음.

○18일 천호(千戶) 허청(許淸)을 노상에서 만났음

○19일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공무(公務)로든 사무(私務)로든 제주도에 왕래하다가 혹은 바람을 만나서 간 곳이 없게 된 사람은 낱낱이 들 수도 없고, 마침내 능히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10명, 100명 중에서 겨우 1, 2명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어찌 모두 바다에 침몰된 것이겠습니까? 그중에 표류해서 섬 오랑캐 땅의 섬라(暹羅 태국)ㆍ점성(占城 참파 Champa, 2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인도차이나 남동 기슭에 있던 참(Cham)족의 나라)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랄 수도 없거니와, 비록 혹시 표류해서 중국의 지경에 이르게 된 사람도, 변경 사람이 왜적으로 무고해서 목을 베어 상(賞)을 받는 바 된다면 누가 능히 그 실정을 변명하겠습니까? 신 등과 같은 사람도 만약 먼저 스스로 육지에 내려오지 않았거나, 인신(印信)과 마패(馬牌)의 신표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재화를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국가에서도 만약 중국 조정의 제도에 의거하여 무릇 백관(百官)들에게 호패(號牌)와 석패(錫牌)를 주어 관직과 성명을 전자(篆字)로 써서 평민과 다름을 나타나게 하고, 봉명사신(奉命使臣)에게는 대소를 논할 것 없이 절월(節鉞)을 주어 왕명을 존중하도록 하고, 또 연해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은 비록 사상(私商)으로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라도 모두 호패를 주어서, 아무 나라ㆍ아무 주현(州縣)ㆍ아무 성명ㆍ아무 형상(形狀)ㆍ아무 연갑(年甲 연세(年歲))을 써서 이를 구별하도록 하고, 또 역관 1명을 제주에 두어서 무릇 봉명사신과 3읍(邑) 수령(守令)이 왕래할 적엔 항시 데리고 다녀서 뒷날의 근심을 생각하도록 해야만 거의 환란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일 도저소에 있었음

○21일 신은 말하기를,

“나는 성화(成化) 정유년(1477, 성종 8)에 진사시(進士試) 제3인에 합격하고 임인년(1482, 성종 13)에 문과(文科) 을과(乙科)의 제1인에 합격하여 교서관 저작(校書館著作), 박사(博士), 군자감 주부(軍資監注簿),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ㆍ수찬(修撰)이 되었으며, 병오년(1486, 성종 17)에는 문과 중시(文科重試) 을과(乙科) 제1인에 합격하여,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 용양위 사과(龍驤衛司果), 부사직(副司直)이 되었습니다. 데리고 온 사람 중 배리(陪吏) 4인은 광주 목리(光州牧吏) 정보(程保)ㆍ화순 현리(和順縣吏) 김중(金重)ㆍ나주 목리(羅州牧吏) 손효자(孫孝子)ㆍ제주 목리(濟州牧吏) 이효지(李孝枝)이고 반솔(伴率) 1인 이정(李楨)은 서울[京都] 사람이며, 진무(鎭撫) 1인 안의(安義)는 제주(濟州) 사람이며, 역리(驛吏) 1인 최거이산(崔巨伊山)은 나주(羅州) 청암역(靑巖驛) 사람이며, 노자(奴子) 막금(莫金) 등 2인과 제주 관노(濟州官奴) 권송(權松) 등 4인과 호송군(護送軍) 김속(金粟) 등 9인과 곁꾼 허상리(許尙理) 등 20인은 모두 제주 사람입니다. 타고 온 배는 큰 배 1척뿐인데 돛대와 노는 바람을 만나 잃고 닻은 도적을 만나 잃었으며, 가지고 온 물건은 인신(印信) 1개, 마패(馬牌) 1척(隻), 사모(紗帽), 각대(角帶), 정리한 문서, 중시방록서책(重試榜錄書冊), 활 1장(張), 칼 1자루와 각인(各人)이 입은 의상 이외에는 다른 기계는 없습니다.”...파총관은 묻는 일을 마치고 난 후에 이내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여러 해 동안 조공을 했으니, 의리에는 군신의 화호(和好)가 있고 이미 침역(侵逆)한 정상이 없은즉, 예절로 대우해야 되겠다. 각자 안심하고 다른 생각일랑 하지 마라. 서울을 거쳐서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니 지체하지 말고 행장을 급히 차리라.”

하고는, 곧 다과(茶果)를 접대하므로 신은 즉시 사례하는 시(詩)를 지어 절하니, 파총관은 말하기를,

“절할 필요는 없다.”

하였습니다. 신은 말할 바를 알지 못하여 절을 하니, 파총관도 일어나 서로 마주 보고 도저소에서 길을 떠났음.

◯23일 파총관이 또 신과 종자들을 앞으로 오게 하고, 신으로 하여금 성명을 불러 인원수를 조사하게 하더니, 천호(千戶) 책용(翟勇)과 군리(軍吏) 20여 인을 시켜 신 등을 총병관(總兵官)에게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무신년(1488, 성종 19) 2월[1일-4일]

○1일 자계현(慈溪縣)을 지났음.

○2일 여요현(餘姚縣)을 지났음.

○3일 상우현(上虞縣)을 지났음.

○4일 소흥부(紹興府)에 도착하였음.



표해록 제2권

■무신년(1488, 성종 19) 2월 [5일-30일]

○6일 항주(杭州)에 도착하였음. ...책용(翟勇)은 신 등을 배종(陪從)하면서 비로 인해 하루를 머무른 이외에는 유체한 적이 없고, 혹은 밤에도 가기까지 하면서 1000여 리의 땅을 멀리 거쳐 왔습니다. 그런데도 진수 태감(鎭守太監) 장경(張慶)은 오히려 책용을 더디게 왔다는 죄로 책망하여 곤장을 쳤습니다.

○7일 새벽에 태감(太監)이 관인(官人)을 시켜 묻기를,

“정인지(鄭麟趾)ㆍ신숙주(申叔舟)ㆍ성삼문(成三問)ㆍ김완지(金浣之)ㆍ조혜(趙惠)ㆍ이사철(李思哲)ㆍ이변(李邊)ㆍ이견(李堅), 이상은 모두 조선의 인물인데 이들이 어떤 관직에 있었는가를 일일이 개보(開報)해 와서 알리시오.”

하므로, 신은 대답하기를,

“정인지ㆍ신숙주ㆍ이사철은 모두 관위(官位)가 1품(品)까지 이르고, 성삼문은 3품에 이르렀으며, 이변ㆍ김완지ㆍ조혜ㆍ이견은 내가 후진(後進)의 선비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벼슬 품계를 알지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13일 항주에서 길을 떠났음.

○16일 오강현(吳江縣)을 지나 소주부(蘇州府)에 이르렀음.

○18일 신은 말하기를,

작고(作古)’란 두 글자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중국 사람은 죽은 사람을 일러 작고라 하니, 이미 고인이 되었음을 이른 말입니다.”

하고는, 이내 묻기를,

“당신 나라에서는 무엇이라 이릅니까?”

하므로, 신은 이르기를,

“‘물고(物故)’라고 이릅니다.”

하니, 묻기를,

“‘물고’는 무슨 뜻입니까?”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물(物)은 일[事]이고 고(故)는 없음[無]이니, 죽은 사람은 다시 일을 할 수가 없음을 이른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21일 양자강(揚子江)에 이르렀음

○23일 양주부를 지났음....양주위 백호(揚州衛百戶) 조감(趙鑑)이란 사람이 신에게 이르기를,

“이전 6년 사이에 당신 나라 사람 이섬(李暹)이 또한 표류해 와서 이곳에 도착했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당신은 잘 알고 있습니까?”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무신년(1488, 성종 19) 3월 [1일-25일]

○3일 서주를 지났음

○7일 동북으로 아득히 바라보이는 사이에 산이 있었는데, 그다지 높고 가파르지는 아니했습니다. 부영이 그 산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저 산이 바로 공자께서 태어나신 이구산(尼丘山)입니다.”

하였습니다. 이구산 아래에 공리(孔里)와 수수(洙水)ㆍ사수(泗水)ㆍ기수(沂水)가 있었습니다. 또 동북쪽으로 바라보니, 높은 산이 수백 리를 연해 뻗었는데 구름기운 같은 것이 끼어 있었습니다. 부영은 그 산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저 산은 곧 태산(泰山)이니 바로 옛날의 대종산(垈宗山)이므로, 우(虞) 나라 순제(舜帝)와 주(周) 나라 천자(天子)께서 동쪽으로 순수(巡狩)하던 곳이었습니다. 이번 걸음이 만약 육로를 따라서 연주(兗州) 곡부현(曲阜縣)을 경유하게 된다면 이구산도 지날 수 있고, 수수와 사수도 건널 수 있고, 공리도 구경할 수 있고, 태산도 가까이서 바라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옥황묘(玉皇廟)를 지나 남양갑(南陽閘)에 이르러 정박했습니다.

○15일 요동(遼東) 사람 진이(陣圯)ㆍ왕찬(王鑽)ㆍ장경(張景)ㆍ장승(張昇)ㆍ왕용(王用)ㆍ하옥(何玉)ㆍ유걸(劉傑) 등이 장사하는[商販] 일로 먼저 이곳에 도착하였다가 신 등이 이른 것을 듣고, 청주(淸酒) 3병ㆍ엿[糖餳] 1쟁반ㆍ두부 1쟁반ㆍ떡 1쟁반을 가지고 와서 신과 종자들을 접대하고는, 또 말하기를,

“우리 요동성(遼東城)은 귀국(貴國)과 이웃했으므로 정의(情誼)가 한집안과 같은데, 오늘 다행히 객지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므로 감히 약소한 물품을 가져와서 사례합니다.”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귀지(貴地)는 곧 옛날 고구려의 옛 도읍지였는데, 고구려가 지금은 우리 조선의 땅이 되었으니, 땅의 연혁은 비록 시대에 따라 다른 점이 있지마는, 그 실상은 한 나라와 같습니다. 지금 내가 거의 죽을 뻔하다가 만 리 밖에서 표박(漂泊)하여 사방을 돌아보아도 서로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족하(足下)를 만나게 되고 또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한집안 골육의 친족을 본 것과 같습니다.”

하니, 진이는 말하기를,

“내가 정월에 길을 떠나서 2월 1일에 이곳에 도착했는데 4월 초순쯤에 돌아가게 될 것이니, 아마 다시는 서로 보지 못할 듯합니다. 만약 먼저 천지(賤地 자기의 사는 지방을 낮춘 말)를 지난다면 안정문(安定門) 안에 유학(儒學) 진영(陳瀛)이란 사람이 있는데 나의 아들이니 나의 소식을 잘 전해 주기 바랍니다.”

하고는, 서로 작별하고 떠났습니다.



표해록 제3권

■무신년(1488, 성종 19) 3월[26일-29일]

○28일 북경의 옥하관(玉河館)에 이르렀음.

○29일 병부(兵部)에 나아갔음.

걸어서 서쪽 네거리를 거쳐 상림원감(上林院監)ㆍ남훈방포(南薰坊鋪)ㆍ대의원(大醫院)ㆍ흠천감(欽天監)ㆍ홍려시(鴻臚寺)ㆍ공부(工部)를 지나서 병부에 이르니, 상서(尙書) 여자준(余子俊)은 한 청사에 앉아 있었고, 좌시랑(左侍郞) 성이 하(何)라는 사람과 우시랑(右侍郞) 성이 완(阮)이라는 사람은 한 청사에 마주 앉아 있었으며, 낭중(郞中) 2원(員)과 주사관(主事官) 4원(員)은 한 청사에 연달아 앉아 있었습니다.

신 등이 시랑을 먼저 뵙고 상서를 다음에 뵙고 난 뒤에 낭중과 주사관이 있는 청사에 나아가니, 낭중 등은 신에게 표류해 온 일에 대해서는 다시 묻지 않고서, 뜰 가운데 홰나무 그늘을 가리키며 시제(詩題)를 삼고는 신에게 절구(絶句)를 짓도록 하고, 또 도해(渡海)로써 시제를 삼고는 신에게 당률(唐律 당대(唐代)의 율시)을 짓도록 했습니다. 또 직방청리사(職方淸吏司)의 낭중(郞中) 대호(戴豪)는 신을 인도하여 청사 위에 이르렀는데, 청사 벽에 천하의 지도를 걸어 놓아, 신이 지나온 지역을 한번 보고도 환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낭중 등은 지도를 가리키면서 신에게 이르기를,

“당신은 어느 지방에서 출발하여 어느 지방에 정박했습니까?”

하므로, 신은 손으로 배가 표류된 지방과 지나온 바다와 정박했던 물가[渚]를 가리키니, 해로(海路)가 대유구국(大琉球國)의 북쪽을 경유했었습니다. 대낭중(戴郞中 대호(戴豪))은 말하기를,

“당신은 유구(琉球 류큐. 현재 일본의 최남단에 있는 오키나와의 옛 이름) 지방을 보았습니까?”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내가 표류하여 백해(白海)의 가운데로 들어가다가 서북쪽에서 부는 바람을 만나 남쪽으로 내려가서 바라보니, 산 모양이 보일락말락하는 중에 있었고, 또 인가에서 연기가 나는 기운이 있었으니, 아마 그것이 유구의 지경인 듯했지마는, 확실히 알 수 없었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당신이 데리고 온 사람 중에 사망한 사람이 있습니까?”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우리들 43인은 바다와 같은 황제의 은혜를 힘입어 모두 생명을 보전하여 왔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저녁에, 성명이 하왕(何旺)이란 사람이 우리나라 말을 자못 이해했는데, 와서 신에게 이르기를,

“당신 나라의 하책봉사(賀冊封使)인 재상(宰相) 안처량(安處良) 등 24인이 이곳에 와서 객관(客館)에 40여 일을 머물다가 지난 3월 22일에 돌아갔습니다.”


■무신년(1488, 성종 19) 4월

○3일 (홍려시 주부, 역관) 이상은 말하기를,

당신이 살아서 온 일은 당신 나라의 재상(宰相) 안처량(安處良)이 이미 자세히 알고 돌아갔습니다.”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안 재상(安宰相)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하니, 이상은 말하기를,

“절강 진수(浙江鎭守)가 지휘(指揮) 양노(楊輅)를 차출하여, 당신의 일을 가지고 육로를 따라 밤낮으로 달려 보고케 해서 3월 12일에 도착하였으므로, 안공(安公 안처량(安處良))이 주본(奏本)을 등사해 갔으니, 당신의 집에서는 4월, 5월의 어름께는 반드시 당신이 바다에서 죽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니 근심할 것 없습니다. 다만 당신의 정리(情理)가 매우 절박하니, 진실로 가련하여 구휼(救恤)할 만합니다. 내가 마땅히 병부와 예부에 사정을 알리겠습니다.” 하였습니다.

○10일 옥하관에 있었음.

이날은 맑았습니다. 이서가 신에게 이르기를,

“당신들이 귀국하는 데 쓰일 거마(車馬)를 준비하라는 관문(關文)이 왔으니, 당신은 이곳에 오래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12일 옥하관에 있었음.

이날은 아침에는 비가 내렸고 정오에는 흐렸습니다. 성명이 이해(李海)란 사람 또한 우리나라 말을 알았는데, 그는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신을 따라서 당신 나라에 갔다가 돌아온지 벌써 6번이나 되었습니다. 재상(宰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잘 계시는지요?”

하였습니다.

○15일 옥하관에 있었음.

이날은 맑았습니다. 관리가 예부에서 와서 신의 관직과 성명, 데리고 온 사람들의 성명을 물어서 써 가지고 돌아갔는데,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17일 옥하관에 있었음.

이날은 비가 뿌렸습니다. 유구국 사람 진선(陳善)ㆍ채새(蔡賽)ㆍ왕충(王忠) 등이 와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됨을 알리고는 마침내 왜선(矮扇) 두 자루와 답석(蹋席) 두 닢을 신에게 선사하면서 말하기를,

“물건은 매우 하찮은 것이지마는, 정리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내가 족하(足下)에게 알아 줌을 받은 까닭도 정리에 있지 물건에 있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진선은 말하기를,

우리 국왕께서 20년 전에 나의 아버지를 차출하여 귀국에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의 아버지께서는 귀국 사람들에게 사랑을 매우 받았으므로 항상 은정(恩情)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또 대인(大人 존귀한 사람에 대한 경칭)과 서로 친하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18일 예부에 나아갔음.

이날은 흐렸습니다. 사무를 주관하는 관리[辦事吏] 왕환(王瑍)이 패자(牌子)를 가지고 와서 신을 부르는데, 그 패자에 쓰기를,

“조선 표해 이관(朝鮮漂海夷官) 최부(崔溥)를 부르노니, 급히 관사(官司)에 나오되 어김이 없게 하라. ……”

하였습니다. 신은 왕환을 따라 남훈포(南薰鋪)를 지나서 문덕방(文德坊)에 이르니, 성의 정양문(正陽門) 안에 대명문(大明門)을 세웠는데, 대명문의 왼쪽은 문덕방(文德坊), 오른쪽은 무공방(武功坊)이었고, 정양문은 3층, 대명문은 2층이었습니다. 가서 예부에 이르니, 주객사 낭중(主客司郞中) 이괴(李魁), 주사(主事) 김복(金福)ㆍ왕운봉(王雲鳳) 등이 상서(尙書) 주홍모(周洪謨), 좌시랑(左侍郞) 예(倪), 우시랑(右侍郞) 장(張)의 명령을 받들어 신에게 이르기를,

내일 아침에 인도하여 황제에게 알현(謁見)하면 상을 줄 것이니, 의복은 길복(吉服)으로 바꾸어 입어야 하고 일을 마치면 즉시 돌아갈 것입니다.”

하므로, 신은 대답하기를,

“나는 표류할 때 풍랑을 견디지 못하여 행장을 모두 버리고 이 상복(喪服)만을 겨우 입고 왔으므로, 다른 길복은 없습니다. 또 내가 친상을 당하여 길복을 입는 것이 아마 예절에 합당치 않을 듯합니다. 또 상복 차림으로 황제를 알현함은 의리에 또한 옳지 못하니, 청컨대 대인께서는 예제(禮制)를 참작하여 다시 지시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이 낭중(李郞中 이상(李翔))이 신의 말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과 한참 의논한 후에 관리 정춘(鄭春)을 시켜 신에게 이르기를,

“내일 아침 상 받을 때는 예절을 차릴 절차는 없으니, 당신을 따라온 관리로 하여금 대신 상을 받도록 하고, 모레 황제의 은혜를 사례할 때는 당신이 몸소 황제에게 절을 해야 하니 참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19일 상을 받았음.

이날은 흐렸습니다. 예부의 관리 정춘(鄭春)ㆍ왕민(王敏)ㆍ왕환(王瑍) 등이 와서 신의 수하(手下 부하(部下)) 정보(桯保) 등 40여 인을 불러 가고, 신은 혼자 객관(客館)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정보 등이 대궐 뜰에 들어가서 상을 받아 왔는데, 신이 받은 것은, 소저사의(素紵絲衣) 1벌, 내홍단자 원령(內紅段子圓領) 1건(件), 흑록단자 습자(黑錄段子褶子) 1건, 청단자 답호(靑段子褡?) 1건, 화(靴) 1쌍, 전말(氈襪) 1대(對), 녹면포(綠綿布) 2필이고, 정보 이하 42인이 받은 것은, 반오(胖襖) 각 1건, 면고(綿袴) 각 1건, 옹혜(䩺鞋) 각 1쌍이었습니다. 이상(李翔)이 돈을 요구, 시장 가에서 돈 받고 글을 써 주는 사람에게 주어 서장(書狀)을 써서 홍려시(鴻臚寺)에 보고하기를,

“조선국 사람 최부 등은 상사(賞賜)에 관한 일로 말씀드립니다. 바다에 표류됨으로 말미암아 절강(浙江)에 도착했다가 호송(護送)되어 경사(京師 북경)에 도착하였는데, 지금 황제께서 상 주시는 의복ㆍ반오(胖襖)ㆍ화혜(靴鞋) 등 건(件)을 받았으니, 의당 홍려시(鴻臚寺)에 나가 명단(名單)을 보고하고, 4월 20일 아침에 황제의 은혜를 사례(謝禮)하겠습니다. ……”

하였습니다. 이상(李翔)이 정보(桯保)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상관(上官)에게 알려서 내일 아침에 길복 차림으로 와서 황제의 은혜를 사례하도록 하시오.”

하였습니다. 이름을 잊은 서 서반(徐序班 서반은 관명)이란 사람이 와서 정보 등을 점검하면서 관디[冠帶]를 갖추게 하여 숙배 절차(肅拜節次)의 의절(儀節 예절)을 가르쳤는데, 서 서반은 비록 역관이라고 명칭하지마는 우리나라의 말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 문지기 1명과 같이 가서 이상(李翔)의 집을 찾아 신의 의사를 알리기를,

“친상은 진실로 자기의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인데, 만약 화려한 옷을 입는다면 효도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 또한 남의 자식인데 어찌 상복을 경솔히 벗어 버리고 효도에 어긋난 명분에 처신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이상은 말하기를,

“오늘 내가 예부상서 대인(禮部尙書大人)과 함께 이미 의논했는데, 이때를 당해서는 친상은 가볍고 천은(天恩 황제의 은혜)은 무거우니, 배사(拜謝)하는 예절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밤 4경쯤에 동장안문(東長安門) 밖에서 상을 하사할 것이니, 어김없이 길복을 입고 오십시오.”

하였습니다.

○20일 대궐[大內]에서 황제의 은혜를 사례하였음.

이날은 흐렸습니다. 축시(丑時)에 이상이 자기 집에서 와서 신에게 이르기를,

“당신은 지금 관복을 갖추고 황제께 알현, 은혜를 사례해야 하니 지체할 수 없습니다.”

하므로, 신은 머리 위의 상관(喪冠)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친상을 당하여 비단옷을 입고 사모(紗帽)를 쓰는 것이 마음에 편안하겠습니까?”

하니, 이상은 말하기를,

“당신이 빈소(殯所) 곁에 있다면 당신의 아버지가 중하지만, 지금은 이곳에 있으니 황제가 계심을 생각할 따름입니다. 황제의 은혜가 있는데, 만약 가서 사례하지 않는다면 인신(人臣)의 예절을 아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 중국의 예제에는 재상이 친상을 당할 적에 황제께서 사람을 보내어 부의를 보낸다면 비록 초상 중에 있더라도 반드시 길복을 갖추고 달려가 대궐에 들어가서 배사하고 난 후에 상복을 도로 입게 되니, 대개 황제의 은혜는 사례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사례한다면 반드시 대궐 안에서 해야 하고, 대궐 안에서는 상복[衰麻] 차림으로 할 수는 없으니, 이것은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으로 잡아당기는 권도(權道)입니다. 당신이 지금 길복을 갖춰야 함은 사세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신은 말하기를,

“어제 상을 받을 때 내가 친히 받지 않았으니, 지금 사은(謝恩)할 때도 따라온 관리 이하로 하여금 가서 절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이상은 말하기를,

“상을 받을 때는 배례(拜禮)하는 절차가 없으니 비록 대신 받아도 되었지마는, 지금은 예부와 홍려시(鴻臚寺)가 함께 당신의 사은할 일을 의논하여 이미 들어가 상주하기를, ‘조선이관(朝鮮夷官) 최부 등 ……’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당신들의 반수(班首)로서 어찌 편안히 물러나 앉았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신은 마지못해 정보 등을 거느리고 이상을 따라 걸어서 장안문까지 이르렀으나 그래도 길복을 차마 입지 못했는데, 이상이 몸소 신의 상관(喪冠)을 벗기고 사모(紗帽)를 씌우고는 말하기를,

“만약 국가에 일이 있으면 기복(起復 거상(居喪) 중에 출사(出仕)함)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이 문에서 길복을 입고 들어가서 사은하는 예를 행하고, 예를 마친 즉시 다시 이 문에 나와서 상복을 도로 입게 되면 그 시간은 불과 잠깐 동안이니, 한 편에 집착하여 변통성이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였습니다. 이때 황성(皇城)의 바깥문이 이미 열려, 상참 조관(常參朝官)들이 죽 늘어서서 들어갔습니다. 신은 사세에 몰려서 길복을 입고 대궐에 들어가는데, 1층 문과 2층 두 대문을 지나서 들어가니, 또 2층 대문이 있었는데, 곧 오문(午門)이었습니다. 군대의 위용이 엄정(嚴整)하고 등불이 환하게 밝았습니다. 이상이 신을 중정(中庭)에 앉히더니, 조금 있다가 오문의 왼쪽에서 북을 치고 이를 마치매 오문의 오른쪽에서 쇠북을 치더니, 이를 마치매 홍예문(虹霓門) 셋이 활짝 열렸는데, 문마다 두 마리의 큰 코끼리가 지키고 있었으며 그 형상이 매우 기이했습니다. 먼동이 틀 때 조관들이 차례대로 문 앞에 늘어섰습니다. 이상이 신을 인도하여 조관의 반열에 나란히 서게 하고, 또 정보 등을 인도하여 별도로 1대(隊)를 만들어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의 뒤에 서게 하였습니다. 다섯 번 절하면서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리고 난 뒤에 단문(端門)으로 해서 승천문(承天門)으로 나오니 승천문은 대명문(大明門)의 안에 있었습니다. 또 동쪽으로 가서 장안좌문(長安左門)으로 나와서, 다시 상복을 입고는 장안가(長安街)를 지나서 옥하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효지(李孝枝)ㆍ허상리(許尙理)ㆍ권산(權山) 등은 모두 상으로 하사받은 옷을 입고 와서 신을 보고 말하기를,

“이 앞서 정의(旌義) 사람이 현감(縣監) 이섬(李暹)을 수행했다가 또한 표류하여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황제께서 상을 하사하는 은혜가 없었는데, 지금 우리들은 행차를 따라왔다가 특별히 이런 뜻밖의 상을 받고 황제의 앞에서 절을 하게 되었으니, 요행이 아니겠습니까?”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상이란 것은 공로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인데, 너희들은 대국(大國)에 무슨 공로가 있는가? 표류되어서 죽을 뻔하다가 다시 소생하여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황제의 은혜 또한 이미 지극하거늘, 하물며 또 너희들의 미천한 신분으로서 천자의 대궐에 들어가 이런 상을 받게 되었음에랴? 너희들은 그것을 알고 있는가? 황제께서 우리를 위무(慰撫)하고 우리를 상 주는 것은, 모두가 우리 국왕께서 천명(天命)을 두려워하고 대국을 섬기는 덕택인 것이요, 너희들이 스스로 가져온 것은 아니다. 너희들은 우리 국왕의 덕을 잊지 말고 황제의 상을 가벼이 여기지 말아서, 이를 손상시키지도 말고 잃어버리지도 말고, 팔아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지도 말게 하고, 그대의 자손들로 하여금 대대로 지켜서 영구히 간수할 보물이 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23일 지금 명 나라가 옛날의 더러운 풍속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오랑캐 의복이 유행하던 지구(地區)로 하여금 의관(衣冠 중화의 제도)의 습속이 되도록 했으니, 조정(朝廷) 문물(文物)의 성대함에는 볼 만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염(閭閻 민가(民家))의 사이에서는 도교(道敎)와 불교(佛敎)를 숭상하고 유학(儒學)은 숭상하지 않으며, 상고(商賈)만 직업으로 삼고 농사는 직업으로 삼지 않으며, 의복은 짧고 좁아 남녀 모두 제도가 같았으며, 음식은 누린내 나는 것을 먹고 존비(尊卑)가 그릇을 같이 하여, 오랑캐의 남은 풍습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24일 회동관에서 길을 떠났음.

◯27일 어양역(漁陽驛)에 이르러 사은 사신(謝恩使臣)을 만났음.

이날은 흐리고 밤에는 큰비가 내렸습니다. 백간포(白澗鋪)ㆍ이십리포(二十里鋪)ㆍ십리포(十里鋪)를 지나서 어양역에 이르니, 어양역은 계주성(薊州城) 남쪽 5리 가량에 있었습니다. ... 신 등이 길을 떠나려고 하니 한 사람이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조선국 사신이 왔습니다.’ 하므로, 신은 장술조에게 말하기를,

“우리 본국 사신이 곧 온다지요. 만약 노상에서 서로 만난다면 한번 읍(揖)만 해도 좋으니, 나는 잠시 머물러 기다려서 본국 고향 소식을 알고 싶소.”

하니, 장술조는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였습니다. 신시(申時 오후 4시 전후)경에 사은사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건(成健 1438-1495), 서장관(書狀官) 윤장(尹璋)과 최자준(崔自俊)ㆍ우웅(禹雄)ㆍ성중온(成仲溫)ㆍ김맹경(金孟敬)ㆍ장우기(張佑奇)ㆍ한충상(韓忠常)ㆍ한근(韓謹)ㆍ오근위(吳近位)ㆍ김경희(金敬煕)ㆍ권희지(權煕止)ㆍ성후생(成後生)ㆍ이의산(李義山)ㆍ박선(朴璇)ㆍ정흥조(鄭興祖) 등이 와서 어양역(漁陽驛) 안에 우거하였으므로, 신이 나아가서 사신을 마당 가운데서 뵈니, 사신이 섬돌에서 내려와 또한 고개를 숙이고 신에게 말하기를,

“성상(聖上)의 옥체도 평안하시고 국가도 무사하며, 그대의 고향도 무고하오. 성상께서 그대가 표류되어 간 곳이 없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조(禮曹)에 명령을 내려 각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연해의 각 고을에 통유(通諭 통지(通知))하여 수색하기를 소홀히 하지 말아 급속히 계문(啓聞)하도록 했으며, 또 대마도와 일본 여러 섬에도 사람을 보내되, 서계(書契)를 수답(修答)할 때에 위의 사연을 함께 기록해서 통유하기로, 우승지(右承旨) 경준(慶俊)이 이를 맡아서 계문하여, 성상께서 윤허하셨으니, 상의 은혜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소?”

하므로, 신은 절하고 엎드렸다가 객관으로 물러나와 김중(金重) 등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은 미천한 백성이므로, 마치 쓰르라미와 하루살이가 천지의 사이에 살다가 죽는 것과 같아서, 살아도 천지의 이익이 되지 못하고 죽어도 천지의 손실이 되지 않는데, 어찌 성상의 염려하심이 미천한 백성에게 미치심이 이와 같을 줄을 생각했겠습니까? 성상의 염려하심이 이와 같았으므로 우리들이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하니, 김중 등도 또한 감격해 울었습니다. 조금 후에 서장관이 최자준(崔自俊)과 함께 신이 우거한 곳에 와서, 고국에서 요즘 일어난 일들을 상세히 이야기하고 이내 말하기를,

“처음에 표몰(漂沒)되었다는 보고를 듣고는 사람들이 모두 그대가 죽었다고 해서 탄식하고 있었는데, 성희안(成希顔 1461-1513)만은 혼자 큰소리로 말하기를, ‘내 마음에는 최부가 바다에서 죽지 않고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것이라.’ 하더니, 지금 와서 서로 만나 보게 되니 과연 그의 말이 맞았습니다.”

하였습니다. 저녁에 사신이 신을 맞이하여 같이 앉아 신에게 저녁밥을 대접하고 배리(陪吏)들에게까지도 먹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사례하기를,

“소인은 죄지은 것이 매우 무거운 데도 스스로 죽지 못하고 재앙이 선인(先人)에게 미치게 되었는데, 빈소(殯所) 곁에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슬퍼하기도 전에 도리어 회오리바람에 몰린 바가 되었으니, 오장이 무너지는 듯하여 다시 살아나기를 바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민동(閩東 복건성 동부)에 도착, 6000여 리를 걸어서 지나갔는데, 중간에 돌아보아도 의지할 데가 없었으며, 말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니 비참하고 고생한 일을 호소하려고 한들 누구에게 하겠습니까? 지금 영공(令公 사신을 가리킴)을 만나니 부모를 본 것과 같습니다.”

하니, 사신은 말하기를,

“나도 처음 동팔참(東八站)에서 안 영공(安令公 안처량(安處良))의 행차를 만나 그대가 살아서 절강 등처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매우 기뻐했는데, 오늘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되니 도리어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나의 이번 걸음에 말을 먹이는 사람이 중도에서 죽었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만 리 길을 통행하노라면 다 살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오. 그대가 데리고 간 사람 중에도 죽은 사람이 있었는지요?”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우리 43인은 다행히 죽지 않고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하니, 사신은 말하기를,

“실로 하느님이 살린 것이요, 실로 하느님이 살린 것이오. 그냥 살린 것이 아니라 실상은 임금의 덕 때문이니 이야말로 기쁜 일이오.”

하였습니다. 신은 또 사신의 질문을 받아, 표류ㆍ우거(寓居)한 사유와 지나온 창해의 험한 물결과 산천의 뛰어난 고적과 풍속의 다른 점이 있는 것을 대략 진술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나는 이런 지방을 지나면서 장관(壯觀)이라 생각하는데, 그대가 보기에는 별것 아니겠구려.”

하였습니다.

◯29일 가다가 한가장(韓家莊)을 지나서 2리 가량을 가니, 두 관인(官人)이 교자를 타고 오는 것을 만났습니다. 절월(節鉞)과 납패(鑞牌)를 가지고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이,

“말에서 내리라.”

소리치기에, 신은 즉시 말에서 내렸습니다. 두 관인은 신을 불러 앞에 오게 하고는 말하기를,

“당신은 어떤 사람이오?”

하자, 신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상관인(上官人)이 신으로 하여금 그 손바닥에 쓰도록 했는데, 장중영(張仲英)이 급히 와서 신의 성명을 말하고 바람을 만나 표류되었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을 상세히 진술하니, 상관인은 신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당신 나라 사람이 벌써 당신이 살아서 중국에 도착한 것을 알고 있소 운운. ……”

하였습니다. 신은 읍(揖)하고 물러나와서 그 관인이 누구인가를 물으니, 장중영이 말하기를,

“앞에 간 사람은 곧 한림학사(翰林學士) 동월(蕫越)이고, 뒤에 간 사람은 급사중(給事中) 왕창(王敞)인데, 지난달 황제의 칙서(勅書)를 받들고 당신 나라에 가서 반포하고 지금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였습니다.


※명나라와의 사신교류가 연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일정을 정리해 보니 다음과 같다. 조선에서 파견한 사신일행이 떠난지 한 달 남짓이면 또 다른 사신단이 도착하는데 황제가 파견한 중국사신도 거의 동시에 들어오고 있다. 또 사은사 일행이 떠나면 곧 바로 성절사 일생이 도착하게 된다.

1. 3월 22일 하책봉사인 안처량이 북경에서 귀국길로 나섰음

4월 23일 주인공 최부 일행은 북경을 떠나 귀국길에 나섬.

2. 4월 30일 사은사 성건이 북경에 도착하게 됨

3. 5월 4일이면 황제가 보낸 사신 동월이 북경에 도착하게 됨

4. 6월 8일경이면 성절사 채수일행이 북경에 도착 예정임.


■무신년(1488, 성종 19) 5월

○16일 광녕역(廣寧驛)에 이르러 성절사신(聖節使臣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는 사신)을 만났음.

이날은 맑았습니다. 사탑포(四塔鋪)를 지나고 또 이포(二鋪)와 접관정(接官亭)을 거쳐서 광녕위성(廣寧衛城)에 이르고 성 서쪽 영은문(迎恩門)을 경유해 들어가 진사방(進士坊)을 지나서 광녕역(廣寧驛)에 이르니, 성절사인 참판(參判) 채수(蔡壽 1449-1515), 질정관(質正官) 김학기(金學起 1414-1488), 서장관(書狀官) 정이득(鄭而得)과 민임(閔琳)ㆍ채연(蔡年)ㆍ박명선(朴明善)ㆍ유사달(庾思達)ㆍ구성문(具誠文)ㆍ장량(張良)ㆍ이욱(李郁)ㆍ이숙(李塾)ㆍ이형량(李亨良)ㆍ홍효성(洪孝誠)ㆍ정은(鄭殷)ㆍ신계손(申繼孫)ㆍ신자강(辛自剛)ㆍ윤중련(尹仲連)ㆍ김종손(金從孫)ㆍ김춘(金春) 등이 광녕역에 달려와 이르렀는데, 서장관과 질정관이 먼저 신의 우소(寓所)로 들어와서 고향 소식을 대강 이야기했습니다. 신이 가서 사신에게 절하니, 사신이 신을 상좌로 인도하고 말하기를,

“오늘 이곳에서 서로 만나는 것은 뜻밖의 일이오. 그대를 바다에 표류시키고 또 그대를 살린 것은 실상 하늘이 시킨 일인데, 중국의 경계에 도착 정박했으니 이는 곧 살아날 곳을 얻게 된 것이오.”

하고는, 이내 신에게 지나온 산천의 요해처와 인물의 번성한 것을 묻기에, 신은 대략 진술했습니다. 사신이 또 절강 이남의 강산과 지방을 얘기하기를 마치 그전에 지나본 지방을 이야기하듯 하고는 신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대강(大江 양자강) 이남을 친히 본 이가 근고에 없었는데, 그대만이 두루 관람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소?”

하였습니다. 신은 하직하고 물러나왔는데, 저녁에 사신이 또 사람을 시켜 묻기를,

“그대는 표류돼 타국에 기류(寄留)했으니, 행장에 가진 양찬(糧饌)이 반드시 모자랄 것이오. 모자란 것이 무슨 물건인지 내가 그것을 보충해 주겠소.”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나는 황제의 후한 은혜를 많이 입어 살아서 이곳에 도착하였으니, 이곳을 지난 후에는 수일이 못되어서 달려 본국에 이를 것입니다. 영공(令公 사신을 이름)의 행차는 반드시 7월을 지내야만 돌아오게 될 것이고, 객지에서 가진 물건 또한 한량이 있으므로 가벼이 남에게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사신은 신의 종자를 불러서 쌀 2두와 미역 2속(束)을 선사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상중(喪中)에 손노릇을 하므로 먹을 만한 음식물이 없을게요. 그러므로 이것을 보내오.”

하였습니다. 달밤에 사신이 뜰 가운데 나앉아 신을 맞이해서 술자리를 베풀어 위로했습니다.

○18일 광녕역에 있었음.

이날은 흐렸습니다. 장술조가 작별을 고하고 북경으로 향해 가면서 신에게 이르기를,

“1000여 리 길을 수행하노라니 정의가 매우 깊었습니다. 나는 나이 이미 60이요 다리 힘도 쇠약하니, 어찌 다시 족하(足下)를 재차 만나 볼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족하께서 만약 본국에서 뜻을 이루신다면 후일에 반드시 공물을 바치고 천자께 조회할 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내 집은 순성문(順城門) 안 석 부마(石駙馬)의 집 앞에 문을 마주하고 있으니, 오늘의 정의를 기억해 두셨다가 한번 방문해 주시겠습니까?”

하고는, 이내 속옷을 벗어서 오산(吳山)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대개 장술조가 길에서 오산을 수족(手足 하인(下人))으로 삼았던 때문입니다. 참장(參將) 최승(崔勝)은 김옥(金玉)을 시켜서 신 등을 초청했는데 김옥은 요동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말을 제법 이해했습니다. 신은 정보 등을 시켜 김옥을 따라가게 했더니, 최승은 주식을 많이 차려서 접대했습니다.

○19일 광녕역에 있었음.

이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태감(太監)ㆍ총병관(總兵官)ㆍ도어사(都御史)ㆍ도사(都司)ㆍ참장(參將) 등이 유원(柳源)과 역사자(驛寫字) 왕예(王禮) 등을 시켜 의복ㆍ모자ㆍ가죽신 등을 싣고 광녕역에 와서 신과 종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신이 받은 것은, 생복청단령(生福靑團領) 1건(件)ㆍ백하포파(白夏布擺) 1건ㆍ백삼사포삼(白三梭布衫) 1건ㆍ대전모(大氈帽) 1정(頂)ㆍ소의(小衣) 1건ㆍ백록피화(白鹿皮鞾) 1쌍ㆍ전말(氈韈) 1쌍이고, 정보 이하 42인에게는, 매인당 백삼사포삼 각 1건ㆍ소의 각 1건ㆍ전모(氈帽) 각 1정ㆍ가죽신 각 1쌍ㆍ전말 각 1쌍씩이고, 또 통돼지 1두ㆍ술 2동이를 주었습니다. 유원이 신에게 이르기를,

“삼당 노다(三堂老爹)께서는, 당신이 본국에 돌아가면 오늘 받은 물건을 모두 국왕에게 아뢰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였습니다. 저녁에 정보 등 40여 인이 신의 앞에 죽 꿇어앉아서 말하기를,

“자고로 표류하면 배는 비록 파손되지 않더라도, 물이 떨어지기도 하고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병들어 죽기도 해서 죽은 사람이 절반은 되었는데, 지금 우리들은 여러 번 환란을 겪었으나 사상된 사람이 전연 없었으니, 이것이 한 가지 다행한 일입니다. 타국에 표류 도착한 사람은 변장(邊將)에게 의심을 받아서 결박되기도 하고 구금되기도 하고 매맞기도 하고, 또는 국문(鞫問)ㆍ안험(按驗)을 당하기도 했는데, 지금 우리들은 한 사람도 구금당해 고생한 적이 없고, 이르는 곳마다 모두 존경해 대우하고 밥을 배불리 먹게 하였으니, 이것이 두 가지 다행한 일이고, 이에 앞서 정의현(旌義縣) 사람들은, 이 현감(李縣監)을 따르다가 표류해 죽은 일이 자못 많고, 구련(拘攣 손발이 굽어져 쓰지 못하는 병)도 심했을 뿐더러, 황도(皇都)에 도착하니 상을 내리는 일도 없었으므로 기갈(飢渴)에 시달리다가 겨우 살아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인데, 지금 우리들은 황도에 도착하니 황제께서 상을 내리고 광녕에 도착하니 진수 삼사(鎭守三司)가 의복ㆍ모자ㆍ가죽신을 주고, 군인들은 맨손으로 왔다가 많이 짊어지고 돌아가니, 이것은 세 가지 다행한 일입니다. 무릇 이 세 가지 다행한 일은 어떤 까닭에서 빚어진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우리 성상께서 인애(仁愛)로 민중을 어루만지고, 성심으로 대국을 섬기신 덕택이다.”

고 하였습니다.


■무신년(1488, 성종 19) 6월

○4일 압록강을 건넜음.

이날은 맑았습니다. 맑은 새벽에 탕산참(湯山站)과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두 작은 하수를 지나서 구련성(九連城)에 이르니, 성은 무너져 버리고 흙으로 쌓은 옛 성터만 남았습니다. 또 파사보(婆娑堡)라고도 하였는데, 파사보 앞에 강이 있었으니 곧 풍포(楓浦)였습니다. 또 배로 오야강(吾夜江)을 건넜는데 두 강(풍포ㆍ오야강)이 근원은 같으면서 나누어졌다가 다시 합쳐서 하나가 되었으니, 통칭 ‘적강(狄江)’이라 했습니다. 또 압록강을 건너니, 목사(牧使)가 군관(軍官) 윤천선(尹遷善)을 보내어 강가에서 신을 위로했습니다. 황혼에 또 배로 난자강(難子江)을 건넜는데, 두 강(압록강ㆍ난자강) 또한 근원은 하나로서 나누어 흘렀다가 또 합류했던 것입니다. 밤 3경에 달려서 의주성(義州城)에 들어가니, 의주성은 바로 당인(唐人 중국인(中國人))과 야인(野人 여진족(女眞族)) 등이 왕래하는 요충 지대에 있었습니다. 성의 제도는 협소하고 퇴잔했으며, 성안 동리(洞里)도 영락(零落)했으니, 실로 한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견문잡록(見聞雜錄)

○우두 외양(牛頭外洋)에서 도저소(桃渚所)까지는 160여 리, 도저소에서 영해현(寧海縣)까지는 400여 리인데, 모두 연해 지방의 궁벽한 땅이므로 객관(客館)과 역사(驛舍)는 없었습니다. 월계 순검사(越溪巡檢司)에 도착하니 비로소 포(鋪 우정(郵亭))가 있었고, 영해현에 도착하니 비로소 백교역(白嶠驛)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백교역에서 서점(西店)ㆍ연산(連山)ㆍ사명(四明)ㆍ거구(車廏)ㆍ요강(姚江)ㆍ조아(曹娥)ㆍ동관(東關)ㆍ봉래(蓬萊)ㆍ전청(錢淸)ㆍ서흥(西興)을 거쳐 항주부(杭州府)의 무림역(武林驛)에 이르렀는데, 도저소에서 이곳까지는 1500여 리였습니다. 또 무림역에서 오산(吳山)ㆍ장안(長安)ㆍ조림(皁林)ㆍ서수(西水)ㆍ평망(平望)ㆍ송릉(松陵)ㆍ고소(姑蘇)ㆍ석산(錫山)ㆍ비릉(毗陵)ㆍ운양(雲陽)을 거쳐 진강부(鎭江府)의 경구역(京口驛)에 이르렀는데, 항주에서 이곳까지는 1000여 리였습니다. 양자강을 지나서 양주부(揚州府)의 광릉역(廣陵驛)에 이르렀는데, 여기서부터는 길이 수로와 육로로 나누어졌습니다. 수로는, 소백(邵伯)ㆍ우성(盂城)ㆍ계수(界首)ㆍ안평(安平)ㆍ회음(淮陰)ㆍ청구(淸口)ㆍ도원(桃源)ㆍ고성(古城)ㆍ종오(鍾吾)ㆍ직하(直河)ㆍ하비(下邳)ㆍ신안(新安)ㆍ방촌(房村)ㆍ팽성(彭城)ㆍ협구(夾溝)ㆍ사정(泗停)ㆍ사하(沙河)ㆍ노교(魯橋)ㆍ남성(南城)ㆍ개하(開河)ㆍ안산(安山)ㆍ형문(荊門)ㆍ숭무(崇武)ㆍ청양(淸陽)ㆍ청원(淸源)ㆍ도구(渡口)ㆍ갑마영(甲馬營)ㆍ양가장(梁家莊)ㆍ안덕(安德)ㆍ양점(良店)ㆍ연와(連窩)ㆍ신교(新橋)ㆍ전하(磚河)ㆍ건녕(乾寧)ㆍ유하(流河)ㆍ봉신(奉新)ㆍ양청(楊靑)ㆍ양촌(楊村)ㆍ하서(河西)ㆍ화합(和合)을 거쳐서 통주(通州) 노하 수마역(潞河水馬驛)에 이르렀는데, 양주에서 이곳까지는 합계 3300여 리였습니다. 육로는, 대류(大柳)ㆍ지하(池河)ㆍ홍심(紅心)ㆍ호량(濠梁)ㆍ왕장(王莊)ㆍ고진(固鎭)ㆍ대점(大店)ㆍ수양(睢陽)ㆍ협기(夾㳰)ㆍ도산(桃山)ㆍ황택(黃澤)ㆍ이국(利國)ㆍ등양(滕陽)ㆍ계하(界河)ㆍ수성(邾城)ㆍ창평(昌平)ㆍ신가(新嘉)ㆍ신교(新橋)ㆍ동원구현(東原舊縣)ㆍ동성(銅城)ㆍ임산(荏山)ㆍ어구(魚丘)ㆍ대평(大平)ㆍ안덕(安德)ㆍ동광(東光)ㆍ부성(阜城)ㆍ낙성(樂城)ㆍ영해(瀛海)ㆍ근성(鄞城)ㆍ귀의(歸義)ㆍ분수(汾水)ㆍ탁록(涿鹿)을 거쳐서 고절역(固節驛)에 이르렀는데, 양주에서 이곳까지는 2500여 리였습니다. ...

신의 경로는 우두 외양에서 도저소, 항주로 해서 북경의 회동관(會同館)에 이르렀으니, 대개 합계하면 6000여 리였습니다. 회동관에서 노하(潞河)ㆍ하점(夏店)ㆍ공락(公樂)ㆍ어양(漁陽)ㆍ양번(陽樊)ㆍ영제(永濟)ㆍ의풍(義豐)ㆍ칠가령(七家嶺)ㆍ난하(灤河)ㆍ노봉구(蘆峯口)ㆍ유관(楡關)ㆍ천안(遷安)ㆍ고령(高嶺)ㆍ사하(沙河)ㆍ동관(東關)ㆍ조가장(曹家莊)ㆍ연산도(連山島)ㆍ행아(杏兒)ㆍ소릉하(小凌河)ㆍ십삼산(十三山)ㆍ여양(閭陽)ㆍ광녕(廣寧)ㆍ고평(高平)ㆍ사령(沙嶺)ㆍ우가장(牛家莊)ㆍ해주재성(海州在城)ㆍ안산(鞍山)ㆍ요양(遼陽) 등 역을 거쳐 요동성에 이르렀는데, 요양역은 곧 요동 재성역(在城驛)이었습니다. 역은 거리가 3, 40리 또는 5, 60리였으니, 합계하면 1700여 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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