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오연행록(庚午燕行錄)
황재(자)(黃梓 1689- ?)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자는 자직(子直)이다. 1718년(숙종 4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1년 설서(設書)가 되었다가 소론이 집권하면서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영조 즉위 후 지사(知事) 민진원(閔鎭遠) 등의 주청으로 다시 서용되어 수찬·지평·부교리 등을 거쳐, 1726년 교리·헌납 등을 지냈다.
1727년 겸사서(兼司書)·겸문학(兼文學)·이조좌랑을 역임하면서 언론의 개방과 주강(晝講)에 대신들을 참여시킬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그 뒤 응교·사간을 거쳐, 1734(46세)년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
이듬해 의주부윤이 되었다.
※정사 좌의정 서명균(1680-1745 : 1710 급제, 55세), 부사 예조참판 박문수(1691-1756 : 1723 급제, 44세)
그 뒤 광주부윤(廣州府尹)·겸필선(兼弼善)·집의·보덕(輔德)·강원도관찰사·부제학을 거쳐, 1748년 이조참의·대사헌·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개성유수(開城留守)를 역임하고, 1750(62세)년 동지부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호조참판이 되었다.
저서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기록한 기행문집《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경오연행록(庚午燕行錄)》등이 있다.
※梓는 재 또는 자로 읽는다. 인명사전에서는 자로 찾아야 한다.
경오연행록 권1
■1750년(영조26, 경오)
●7월
◯동지사은 겸 진주사(冬至謝恩兼陳奏使)
정사(正使)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 ? )
부사(副使) 유수(留守) 황재(黃梓 1689 - ?)
서장관(書狀官) 교리(校理) 임집(任집 1696 - ?)
※사신파견의 목적은【김인술(金仁述)을 의율(擬律)하기 위한 일이다.】
김인술(金仁述) : 김인술은 함경북도 유원진(柔遠鎭)의 토병이었다. 그가 금령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 청나라 사람과 베와 쌀을 교역하기로 약속했다가 청나라 사람이 이를 어기자 다툼 끝에 총 5인을 살해하였다. 청나라에서 이를 온성부(穩城府)에 알려왔고 온성부는 즉시 예부(禮部)에 자문을 보냈다. 조정에서는 북도 안핵사로 서지수(徐志修)를 파견하여 감사 정익하(鄭益河)와 병사 구성필(具聖弼)과 함께 이 사건을 안핵하게 하였다. 김인술 등 7인은 이듬해 윤 5월에 국경에서 효시되었고, 양국의 사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음력 7월에 동지사은 겸 진주사 일행이 연경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의율(擬律) : “죄인에게 법률 조문을 적용하다.”라는 의미로, 조율(照律)과 유사하다. 다만 조율이 법사(法司)에서 절차에 따라 죄인에게 적용할 법률 조문을 살펴 적용하는 것이라면, 의율은 그 이외의 관사나 사람이 다른 관원을 탄핵하면서 처벌 수위를 제시한 것도 포함한다.
●11월
◯새벽에 궐하에 나아갔다. 병조 참의(參議) 홍계우(洪季友)의 직소(直所)에 들렀다가 다시 정원(政院)에 나아가 승선(承宣) 황대경(黃大卿)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후 아전이 와서 숙배하기를 재촉하기에 정사인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 서장관인 홍문관 부교리 임집(任)과 일시에 하직하였다. 약방(藥房)이 입진(入診)할 때 함께 입시하라는 명이 있어 즉시 약방을 따라 희정당(熙政堂)에 입시하였다.
약방이 문후(問候)하고 나서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삼사신(三使臣)은 나아오라.”라고 하셨다. 마침내 명을 받들어 나와 엎드렸다. 임금께서 정사를 위로하시고 이어 하교하시기를, “부사를 이런 때나 보는구려.”라고 하셨다. 천신(賤臣)이 비지땀을 흘리며 엎드려 경청하였다. 임금께서 사신 가는 일에 대해 물으시자, 정사가 별 문제 없다고 대답하였다. 천신이 뒤이어 아뢰기를, “이번 사행에서 처리할 진주(陳奏) 건은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저쪽에서 응대하는 방법이 아직은 큰 문제가 없는 편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그렇구나.”라고 하시고, 또 이들이 사람 간의 일로 죄를 범했으니 측은히 여기는 뜻을 후히 보이라고 하교하셨다.
정사가 자리에 앉고 나서 천신이 약간 앞으로 나와 엎드려 말하였다.
“신이 매우 미천하지만 경연의 오랜 신하입니다. 이제 멀리 이별하는 마당에 구구한 소회를 어찌 감히 숨기겠습니까. 신이 전에 《자성편(自省編)》을 보고 마음속 혼잣말로 ‘성상의 학문이 이렇게 고명한데 어찌 중도를 벗어나는 행동을 더 하시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후에도 성상의 과오가 여러 번 있었지만, 신은 개연히 탄식만 할 뿐 속마음을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근래 일을 가지고 말하면 마침 천둥의 이변이 거듭되던 날에 지나친 행동이 또 예사롭지 않았으며 비답은 몹시 평온하지 못했습니다. 신하들을 오래도록 접견하지 않으시니 대소 관원이 허둥지둥 애를 태운 것은 차치하고라도 손상된 성덕을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다만 명을 도로 거둬들이고 감선(減膳)한다는 이번 하교를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 송축(頌祝)하고 있으니 신이 어찌 감히 더 진달할 바가 있겠습니까. 다만 신이 몹시 기원하는 바는, 《자성편》을 지은 뜻을 깊이 유념하고 항상 빈복(頻復)의 경계를 마음에 두어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그치게 하는 한편 자손을 편안하게 하고 후손에게 복을 남겨 줄 것을 도모하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국가와 신민이 어찌 매우 다행으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임금께서 이르셨다.
“말이 간략하면서 곡진하다. 《자성편》을 지은 것은 바로 위 무공(衛武公)이 〈억(抑)〉 시(詩)를 지어 경계한 뜻이다. 비록 나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 썼지만 실은 세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지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번에 사건을 연유로 지나친 행동을 지적받다보니 참으로 후회하고 있다. ‘종용(從容)’ 자는 지난번 여러 신하의 간청으로 빼버렸으나 마음은 얼음장 같았다. 빈복의 경계를 자신하지 못하겠다.”
◯9일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나 서장관에게 들렀다. 정사도 와서 모였다. 방물(方物)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 많았고 서울서 출발하지 못한 품목도 있어서 관문(關文)을 보내 재촉하느라 두 사행이 이 때문에 출발을 다소 늦추려고 하였다.
얘기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데, 두 아이가 말 앞에 꼿꼿이 서 있는 통에 차마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나는 병이 나서 이번 행차를 감당할 수 없었지만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고 생사가 위급한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도외시하였다. 그러나 자식들이 애타하며 이별을 어렵게 여기는 것은 인정상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요사이 담이 활동하지 않아서 밥을 평소보다 몇 숟갈 더 떴던 것은 애당초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어쩌다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5일 감사가 말하기를, “연전에 종형(宗兄)을 논죄(論罪)하여 의리상 내방하기 껄끄러웠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답하기를, “저 역시 그럴 거라 생각하여 처음에는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감사가 말하기를, “어쩌다 우리가 서로 만나지 않고 피하게 되었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또 말하기를, “서로 피했다면 어찌 오늘의 만남이 있었겠습니까? 일을 하다보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라고 하니, 감사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19일 동틀 무렵 길을 떠났다. 얼어붙은 청천강(晴川江)과 대정강(大定江)을 건너 가산(嘉山)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군수는 김광윤(金光胤)이었다. 과섭 차원(過涉差員)인 박천 군수(博川郡守) 최암(崔碞)과 방물 차원(方物差員)인 영원 군수(寧遠郡守) 전광집(田光集)이 찾아와서 작별을 고하였다.
읍인(邑人) 김창세(金昌世)는 내가 전부터 잘 알던 이였다. 내가 용만(龍灣)으로 유배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설사병이 극심했더랬다. 그이가 나를 적 외조모(嫡外祖母) 집으로 인도하고 자기 누이동생을 들여보내 조리하게 하였다. 사흘간 최선을 다해 간호해준 덕에 완치될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여 군(郡)에 도착한 즉시 물어보았더니 이미 그를 아는 자가 없었다. 윤이복(尹以復)도 당시에 만났던 자인데 이때 좌중에 있기에 김창세가 살아있는지 알아보았다. 그가 김씨 남매는 이미 죽었고 집주인도 벌써 바뀌었다고 하였다.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서 더욱 슬픔과 한탄을 금할 수 없었다.
◯27일 비바람 속에서도 길을 재촉하여 용만(龍灣)에 당도하였다. 증세가 더 나빠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임금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임을 알겠다. 나흘간 머물면서 행장을 점검하였다. 압록강을 건너려는 이때 북풍은 쉭쉭 불어대고 오랑캐의 산은 광활하기만 한데 돌아서는 한걸음에 집과 나라가 아득히 멀어졌다. 이쯤 되니 심사(心事)가 어찌 편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나는 질병과 생사를 도외시하였기에 그밖에는 관심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 집을 떠나 있건 집에 있건, 병을 앓건 병이 없건 매한가지였다. 사행의 미래가 어떠할지는 알 수 없으나 큰 변동은 없을 것이다. 애오라지 이번 사행을 기록하여 돌아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뿐이었다.
12월
◯23일 봉성(鳳城) 이후로는 도로가 눈길이었는데 출발을 일찍 하다 보니 수염이 얼어붙어 고드름이 맺혔다. 그래도 가마 문을 종일 열어놓았고 가마 안에서도 피곤하다고 기댄 적이 없었다. 심양 이후로는 따뜻한 날씨를 자주 접하다 보니 머리에 열이 나서 땀이 흘렀다. 이엄(耳掩)과 큰 휘항(揮項)을 모두 벗어버리고 작은 휘황만 쓰고 다녔다. 내 병의 원인은 대부분 화(火)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녀사(姜女祠)에서 찬바람을 쐰 뒤로 몸놀림이 피곤하였고 담핵은 불룩 솟았다. 아픈 곳은 없었지만 감기는 심해졌다. 가마 문을 꼭 여미고 안에서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앉기도 눕기도 어려워 몸을 둘 곳이 없었다. 병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걱정과 번뇌는 실로 깊어졌다. 오늘은 조금 증세가 덜하여 다행이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증세가 아직 많아서 고민이 되었다.
◯24일 서장관이 밤중에 왔다. 감기가 갑자기 심해져서 심지어 침상에 쓰러지기도 했다고 하였다. 매우 걱정이 되었다. 근자에 일행 중에 유행성 감기〔輪感〕가 성행하여 사나흘이나 대엿새 만에 일어나는 자가 속속 뒤따랐다. 사행 일정은 멈출 수 없었고 병증은 줄어들기 쉽지 않아 생각할수록 고민이 되었다. 오늘은 참소(站所)가 멀어서 새벽에 일어났다. 내 병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서장관이 수응(酬應)하느라 조섭하는 데 방해가 될까봐 가서 볼 수가 없었다. 너무 답답하였다.
◯26일 재주도 공로도 없는 나는 임금의 편애를 받아 편안히 앉아서 말을 겸손히 하는 것으로 재상의 반열에 슬쩍 끼었다. 그러다보니 늘 근심과 두려움 속에 지내며 언젠가는 깊은 골짝으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이번 만 리 국경을 넘는 공무에 임하여 그래도 조금이나마 국가에 보답하려고 노쇠한 나이와 고질병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명을 받고 사양하지 않았다. 길에서 죽는다면 후회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직 인사를 드리고 나올 적에 내 병을 아는 친구들, 내 병을 걱정하는 친척들이 위태롭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내가 어찌 사람들이 예의상 하는 말인 줄 모르겠는가? 이리하여 또 불행히도 사신된 책임을 저버리게 될까 걱정하며 맘속으로 말하기를, “의주(義州)에만 당도하면 이런 사정이 대부분 해결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의주에 당도해서는 책문(柵門)과 120리 떨어진 곳에서 이틀 밤을 노숙했다. 그래서 또 스스로에게 말하기를, “무사히 책문을 지나면 다행이겠다.”라고 하였다. 책문에 들어가서는 또 스스로에게 말하기를, “심양(瀋陽)까지 갈 수 있을까?”라고 하였고, 심양을 지나면서는 또 스스로에게 말하기를, “산해관에 들어갈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산해관에 들어가서는 문득 안심이 되면서 말하기를, “북경을 나도 간다! 앞길이 멀지 않다!”라고 하였다.
지금 통주에 도착했으니 북경까지는 40리가 남았다. 모레에 전명(傳命)한다면 나로서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리라. 실로 친구와 친척 모두 생각하지 못했고 나도 맘속으로 기대하지 않았었다. 눈 쌓인 길 위에서 강풍을 만나지 않았고 두 달 동안 비에 행차가 막힌 적이 없었던 것은 천운이었다. 담화증(痰火症)이나 수면과 음식의 조절이 되레 집에 있던 날보다 더 좋았던 것은 또 어떻게 된 일일까? 이를 기록으로 남겨 자식들이 훗날 볼 수 있게 하련다.
◯27일 갑인년 사행과 이번 사행은 시기상 고작 17년의 차이가 났지만, 전후로 달라진 점을 명확히 말할 수 있었다. 고삐 놓은 말들이 떼를 지어 닭이나 개처럼 뜰 앞을 오락가락하였다. 이른 아침에 어린아이가 말 한 마리에게 굴레를 씌워 타고 나가면 말떼가 그 뒤를 따랐다. 저녁에도 이런 식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숙참(宿站)이든 과참(過站)이든 막론하고 떼로 나와 앞을 다퉈 구경하였다. 어디를 가든 그런 것을 보면 인구가 많고 가축이 번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갑인년에 본 모습이었다. 이번 사행 때는 이런 곳을 한 군데도 보지 못하였다. 이것이 전후 사행의 달라진 점이었다.
■1751년(영조27, 신미)
●1월
◯1일 사경(四更)이 되어갈 때쯤 통관(通官)이 길을 재촉하여 마침내 조복(朝服)을 입고 문을 나섰다. 바람은 등잔 모서리를 뒤흔들고 길목은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말 위에 앉았는데도 벌벌 떨렸다. 대청문(大淸門)을 스쳐 지나 오른쪽 변문(邊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들어갔다. 천안문(天安門)을 바라보며 걸어갔다. 그 사이가 매우 멀어서 겨우 문에 들어섰는데 다리 힘이 다 풀려버렸다. 정사는 걸음이 매우 가벼워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서장관과 돌기둥 아래에 걸상에 앉아 쉬었다.
◯3일 아침에도 여전히 혼수상태였다. 문병 온 외지인들이 벌써 문 안에 가득하였다. 해가 저물고서야 비로소 깨어났다. 달리 아픈 데는 없었다. 단지 머리가 맑지 않았고 가슴이 답답하였으며 복담(腹痰)과 다리 통증이 너무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잠옷을 조금 두껍게 입었더니, 물에 빠졌던 것처럼 땀이 흠뻑 배어나와 옷을 바꿔 입고 누웠다. 미음을 몇 차례 마시면서 하루를 마쳤다.
◯4일 밤새 잠을 못 이뤄 아침이 되어서도 여전히 피곤하였다. 가슴이 답답하고 다리가 아픈 것도 줄어들지 않았다. 또 미음을 몇 차례 마시면서 하루를 보냈다. 세폐 방물을 실은 짐차가 들어왔다. 상통사(上通事)가 내일부터 점검하고 다시 쌀 것이라고 하였다.
◯10일 서장관(書狀官)이 일찍이 말하기를, “서책(書冊)은 금서(禁書)든 아니든 막론하고 일체 막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내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송도(松都)에 있을 때 마침 지나가는 사행을 만나게 되어 가서 당시 서장관을 보았습니다. 서장관이 말하기를, ‘이번 회동(會同)에서 서책의 유입을 불허하도록 결정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돌아와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중국 문헌(文獻)을 서적이 아니면 어떻게 신뢰하겠느냐? 이 때문에 선배들은 서적을 사들여오는 것을 꺼리지 않은 것이다. 진실로 사문(斯文)에 유익한 것이라면 금서라도 반드시 주선하여 가져와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유가(儒家)의 도통(道統)을 지키려는 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일에는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이 있고 반드시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일은 남들이 행하려고 하지 않아도 나는 결심하여 실행해야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반드시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은 스스로는 반드시 행해야 한다고 여길지라도 그 사이에는 본래 행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어서 후세에 비웃음을 살 뿐이다. 이 점을 몰라서는 안 된다. 지금 금서를 막는 것으로 충분한데 또 하필 금서가 아닌 책까지 막는단 말인가? 나는 옳은 처사인줄 모르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집안에서 한 말이었지만 내 뜻은 본래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서장관이 묵묵히 말 한 마디 없다가 오늘 와서 내게 말하기를, “저는 겨우 책 한 건(件) 가져가는데 권수(卷數)가 조금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책명(冊名)이 무엇입니까?”라고 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패문운부(佩文韻府)》입니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책입니다.”라고 하였다.
◯11일 나는 여러 번 수역에게 당부하기를, 제독에게 열심히 설명하여 방료(放料 : 이서(吏胥)나 군사(軍士) 등에게 급료를 지급하는 것 )를 요구하라고 하였다. 수역이 말하기를, “사행의 하졸(下卒)이 관부(館夫)에게 빚을 져서 매우 고민입니다. 날마다 제독을 면담하여 말하기를, ‘외국인이 열흘 넘게 급료를 받지 못한 것은 전에 없던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독이 말하기를, ‘네 말이 옳다만 황제가 정월 보름 전에 순수(巡狩)하러 남쪽으로 출행(出行)한 것을 너도 보았잖으냐? 각 아문(衙門)이 분주하여 틈이 없어서 미루다가 이 지경이 되었네. 내가 이미 말했으니 수일 내로 급료를 받을 것이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오늘 과연 급료를 받았다.
●2월
◯1일 관소에 도착하고서 해가 바뀌고 달도 바뀌었다. 혼자 외로이 칩거하노라니 온갖 감회가 모두 생겨났다. 더구나 죽을병에 걸려 산 사람 같지 않은 꼴로 이부자리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밤낮 남쪽을 바라보며 눈물바람이었다. 이렇게 사는 것은 기껏해야 갖은 고생을 다 겪는 것밖에 안 되었다.
◯3일 정세태(鄭世泰)는 북경(北京)의 대상(大商)이다. 우리나라 사행의 십여만 은화(銀貨)가 모두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데 해마다 그 정도씩 거둬들였다. 정세태는 이미 죽었고 그 아들 무진사(武進士)가 작년에 죽어서 오늘 발인(發靷)한다고 하였다. 원역(員譯)들이 누구는 호상(護喪)하러 누구는 구경하러 전부 나가서 관소가 텅 비었다. 권순성(權順性)도 무리를 따라 다녀왔다기에 그에게 묻기를, “발인 행렬이 매우 성대했다고 들었다. 너는 보고 들은 대로 죄다 아뢰거라.”라고 하였다.
경오연행록 권2
■1751년(영조27, 신미)
●2월
◯24일 나는 평소 유람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 병이 또 외출을 방해하였다. 갑인년에 왔을 때는 관소에 체류하는 70여 일 동안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었다. 이번 사행에는 쇠약하여 든 병이 갈수록 심해져 피폐한 몸으로 중병을 앓다보니 산 사람 같지 않았다. 관소 안에서도 왕래하지 못하는데 문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움직일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생각해보면, 한 해가 지나도록 관소만 지키면서 한창 봄날에 문을 닫아걸고 있으려니 본래 지닌 병에다 울적함이 더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기(火氣)가 치솟으면 벽을 박차고 나갈 것 같다가도 조금 후에 한기가 몰려오면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하루 이틀이 가물가물 지나갔고 귀국하는 길에 다른 병이 더해지는 것도 신경 쓰였다. 드넓은 지역에서 바람을 쐬고 훤히 바라보이는 곳에서 마음을 즐겁게 하여 한편으로는 울적한 심사를 풀어놓고 한편으로는 몸을 움직여본다면 심기(心氣)를 헤아려서 기거(起居)를 적절히 조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월
◯3일 진하 부사(1751년 사은사(謝恩使)의 부사였던 윤득화(尹得和, 1688~1759)를 말한다. 당시 정사는 낙풍군(洛豐君) 이무(李楙, ?~?)였다.) 와 서장관이 찾아왔다. 표자문(表咨文)을 바치기 위해 예부에 갔다가 도중에 예부 관서에 사정이 생겨 개좌(開坐 관원들이 모여서 사무를 보는 것)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전방(廛房)에 들어가 개복(改服)하고 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밤에 잠을 설치는 바람에 아침에 기침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꿈을 꾸듯 천 리 밖 옛 친구를 만났으니 어찌 놀랍고 기쁘지 않았겠는가? 이불을 두르고 무릎을 맞대고서 나라와 고향 소식을 자세히 물었다. 봄 동안 갇혀 지냈던 근심이 조금은 달래졌다.
◯4일 진하 정사(陳賀正使) 락풍군(洛豐君)이 들러서 잠깐 얘기를 나누었다. 오늘 일찌감치 예부에 자문을 바치고 부사와 서장관이 곧장 관소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느지막이 정사를 찾아가 보았다. 말하는 중에 서장관이 말하기를, “정사의 연애편지를 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기생이 보냈습니까?”라고 하였더니, 정사가 말하기를, “의주에서 수청 들던 기생이 편지했더군요. 우리 네 사람 이름을 나란히 적어 보냈으니 연애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서장관은 진짜 연애편지를 받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서장관이 말하기를, “저는 본래 정인(情人)이 있었으니 편지를 받은 게 이상할 것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정사에게 말하기를, “연정(戀情)도 없는데 편지를 보냈다면 귀국길에 편지 값이 없을 수 없을 테니, 자연 연정이 생기게 될 겁니다.”라고 하였다. 정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누구는 이미 늙었고 누구는 상피(相避)가 되어 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저는 통인(通引)이 올린 고목(告目)만 받아봤는데, 기생이 보낸 연서와는 전혀 딴판입니다.”라고 하니, 서장관이 말하기를, “귀양살이를 할 때에 알고 지내던 여인이 틀림없이 있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아닙니다. 자신을 수청 드는 통인이라면서 고목을 올린 자는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사와 서장관이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13일 진하사(陳賀使)의 상사와 서장관이 찾아왔다. 신한상(申漢相)이 와서 말하기를, “황제가 채찍을 휘둘러 죽인 어사 운운했던 일을 대략 탐지하였습니다. 작년 8월 황제가 하남(河南)에 행차하여 먼저 준화주(遵化州)에 가서 순치(順治)와 강희(康熙)의 능침을 배알하고 지나는 길에 반산(盤山)의 이궁(離宮 별궁(別宮))에 들르려고 하였습니다. 좌어사(左御史) 마이새(馬爾賽, ?~1734)가 나이든 간관(諫官)을 호가(扈駕)하여 간다는 이유로 어떤 일을 틈타 간언하였는데 매우 솔직하고 간절하였습니다. 황제가 몹시 화가 나서 시위(侍衛)에게 명하여 즉시 전정(殿庭)에서 채찍질을 가하게 하였더니 거의 다 죽게 되었습니다. 유친왕(裕親王)이 땅에 엎드려 그만두시라 청했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현친왕(顯親王)이 뒤이어 땅에 엎드리자 황제가 그를 일으키며 말하기를, ‘숙부(叔父)는 일어나세요.’라고 하였습니다. 현친왕이 말하기를, ‘황상(皇上)의 노여움이 풀리셔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말하기를, ‘화가 벌써 풀렸습니다. 숙부께서는 일어나세요.’라고 하고는 마침내 채찍질을 중지하고 끌어내게 하였습니다. 현친왕이 일어나 마이새를 그 자리에서 내보내어 업혀서 집으로 보내졌는데 며칠 못 가서 결국 죽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아, 어사가 직언하는 것은 실로 자기 직무일 뿐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과감히 직언하여 직무를 다하는 자는 많지 않았다. 마이새는 만주인으로서 직간하다가 채찍을 맞고 죽었으니 어려운 일이었다. 황제가 설령 그를 직언하도록 상황을 만들었다 할지라도 이제 채찍질로 언관을 죽였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죽는 것은 큰일인데 누가 간언하려 하겠는가? 이로부터 황제의 이목이 차단되고 야망은 거세져 못 할 일이 없게 될 것이니 위태롭고 위태롭도다!
◯17일 이어서 편지를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김인술(金仁述), 김두석(金斗石), 장성군(張成群), 장후창(張厚昌), 장한이(張漢伊), 장귀안(張貴安), 김형삼(金亨三)은 모두 즉각 참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의논한 대로 하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황지의 등본(謄本)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태의의 수본(手本)과 수역의 정문을 예부에 함께 보냈습니다.”라고 하였다.
아! 역관은 참으로 말할 수가 없는 자들이었으니, 하는 일마다 속여대고 지껄이는 말마다 우롱이었다. 파발을 띄운 날짜가 20일이 아닐 경우, 자신이 전에 했던 말을 사실로 조장하여 왕복하는 데 각각 13일이 걸린다고 말을 지어내어 파발이 돌아오는 기일에 부합시켜 미봉하였다. 객관에 머무는 기간을 40일로 맞추고자 하면 마침내 황지를 기다리지도 않고 영상이 필시 2일에 거행될 것이라고 떠벌리면서 정문할 계책을 부정하게 성사시켜 사람을 두렵게 만들었다. 세 사신은 이 속에 앉아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문서가 내각에 있는데도 파발이 돌아오기만 헛되이 기다렸고, 태의의 보고가 예부에 전해졌는데도 혹여 반상이 지레 행해질까 염려하였다. 파발을 띄우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지라도 이미 출발했다고 믿었고,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지라도 어쩌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역관들이 마음대로 쥐락펴락하게 놔둔 채 십여 일을 보내노라니 무능한 목각 인형 같았다. 우습고 어처구니없고 가증스럽고 애통하였다.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오늘 황지가 내려졌다고 하자 기뻐하던 사람은 이른바 수치스런 일이 뭔지를 모르는 자였다.
◯22일 갑인년 사행은 오로지 진주(陳奏)만을 목적으로 왔는데 지금은 절행(節行)에 진주(陳奏)까지 겸하고 있었다. 사건이 터져 이를 수습하기 위한 사행이어서 일정이 지연되리라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전에는 관소에 체류한 날짜가 73일이었는데 이번에는 83일이나 되었으니 얼마나 오래 지체한 것인가? 사신의 수레가 해마다 연경(燕京)을 끊임없이 왕래하지만 이렇게 오래 체류한 적이 없었다. 사행을 두 차례 다녀온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마는 총 156일간 관소에 체류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이 어찌 명운(命運)의 소치가 아니겠는가? 나는 국문을 나서던 날에 사생(死生)을 도외시하고 잊어버려 도상의 빙설과 관소의 협소함쯤이야 당연하게 여겨서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아예 없었다. 다만 문제는 본래 지닌 병이 30년을 묵으며 고질이 되다 보니 평상시에도 위태위태하여 산 사람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번이 어떤 행역(行役)이었는데 병이 더치지 않았겠는가? 때로 인사불성이 되어 죽음을 눈앞에 두다 보니 정사가 위문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가 또 말하기를, “오래 체류하다 이지경이 되었으니 어떻게 병이 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원래 있던 병이고 오랜 체류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렸을 때 《천자문(千字文)》과 《18사략(十八史略)》을 읽는데 관상가와 술수가가 그에게 과거에 올라 연경으로 사신가게 된다고 하면 그 말을 듣고도 필시 나쁘게 여기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나는 병을 앓고 나이는 60세에 별다른 노력 없이 아경(亞卿)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되레 체류를 못 견디고 병이 날 지경이 되었다면 어찌 국사에 소홀히 할 수 없는 뜻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정사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로 나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일 뿐이었고 병증은 날마다 하나씩 보태지고 있었다. 지금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는 길이라서 마음이 상당히 느긋하였다. 엄동설한에는 보양(保養)하기가 그래도 쉬웠는데 기온이 올라가면서 몸조리를 잘하기가 매우 어려웠으니, 앞으로의 여정이 과연 어떨지 모르겠다.
◯22일 장계(狀啓)를 정사(淨寫)하고 나서 아침에 정사의 방으로 가 밀봉하여 선래 군관(先來軍官) 편에 부쳤다. 서둘러 밥을 먹고 길을 떠났다. 대시가(大市街)와 십자패루(十字牌樓)를 경유하여 조양문(朝陽門)을 나서니 가슴이 확 뚫렸다. 동악묘(東岳廟)에 도착하니 윤 서장관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윤 부사도 자식을 보내 작별을 대신하였다. 앉아서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윤 서장관이 술을 따라 권하기에 한 순배가 막 오갔는데, 종자가 와서는 하는 말이 구인(驅人)이 술병을 훔쳐가서 남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윤 서장관이 화는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두 사행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대개 똑같아서 웃음만 나왔다.
교외에서 전송하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술병은 바닥나고 길을 떠나려는 마당에 타국에서의 만남과 이별이 사람을 몹시도 고통스럽게 하였다. 정사가 먼저 일어섰고 나도 따라 일어나서 마주 보며 망연자실해서 각자 어쩔 도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윤 대감의 아들이 문을 나가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가마에 오르는 것을 보고나서 도로 들어갔다.
◯23일 자릿조반〔粥早飯 새벽에 일어나는 대로 그 자리에서 먹는 죽이나 미음 따위의 간단한 음식〕을 먹고 길을 떠났다. 백하(白河)에 이르러서 세 행차가 함께 배를 타고 건넜다. 강안(江岸)에 오르고 나서 가마에서 나와 걸상을 놓고 앉았다. 서장관도 함께하였다. 저 멀리 민가를 바라보니 즐비한 가옥은 북경(北京)에 버금갔고 강절(江浙)의 조운선(漕運船)이 정박해 있었다.
●4월
◯25일 정사가 머물러 있고자 하여 그대로 따랐다. 의주(義州)의 찬물 군관(饌物軍官)이 와서 현신하였으니 만윤이 보내 안부를 물은 것이었다. 저녁 무렵에 어의(御醫) 이정덕(李廷德)이 죽었다. 이정덕은 객관에 있을 때부터 병세가 이미 위중했었다. 길을 나선 후로 사람들이 모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오늘까지 버텨온 것이었다. 우리 땅을 지척에 두고 마침내 살아 돌아가지 못하였으니 비참하였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공의 집에 출입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그동안 사행마다 일이 생겨서 참여하지 못했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따라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는데 상당히 만족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만약 길거리 귀신이 될 줄 알았다면 아무리 독촉해도 필시 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사방을 바삐 다니는 자들이 모두 이러한 부류였으니 가련할 뿐이었다.
●5월
◯4일 노새에 실은 짐이 전부 도착하였다지만 수레에 실은 짐이 절반 넘게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연복마(延卜馬)는 1일에 때맞춰 도착했다고 만부(灣府)에 관문을 보내라고 군관에게 분부하였다. 군관이 역관의 말을 듣고 복물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만윤(灣尹)에게 보고하는 바람에 만윤이 마침내 즉시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어제 비로소 배가 출발하였는데 배의 무게로 강물이 짓눌려 사람이 많이 빠져 죽었다고 하였다. 어처구니없고 한탄스러웠다. 아이가 약간의 생선과 새우 알을 보내온 덕분에 잘 먹었다.
◯7일 배를 타고 중강(中江)을 건너 소서강(小西江)에 이르렀다. 주방장이 아뢰기를, “장막을 여기에 설치해도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정사와 서장관과 함께 강변에서 아침을 먹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보니 바람이 몹시 사납고 강 물결이 세차게 일어 날이 저물고 나면 어떠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에게 묻기를, “취사도구는 준비되어 있느냐?”라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조금 멀리 뒤쪽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장막과 취사도구를 여기 두고서 정사와 서장관의 분부를 기다려라. 나는 길을 가겠다.”라고 하였다. 즉시 배에 올라 사공에게 힘을 내서 소서강(小西江)과 압록강(鴨綠江)을 통과하게 하였다. 소서강에서는 배를 끌고 거슬러 오르다가 순류를 따라 내려갔는데 바람이 거세고 풍랑이 심하여 배 안인데도 편안치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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