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관연록(김선민)

청담(靑潭) 2018. 7. 22. 01:26



관연록(觀燕錄)

김선민(金善民 1772-1813 )


1804년 동지사 일행으로 중국을 다녀온 일기이다. 저자 김선민은 본관은 선산이며 소과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으로 벼슬없이 아산에 살고 있는 30대 초반의 젊은 진사인데 이미 경서와 시문에 뛰어난 사람임이 알려져 있었던 듯 하다.  거의 날마다 한 두 편의 수많은 한시를 남기고 있는데, 아마도 정사가 여행을 하는 동안 함께 시를 짓고 싶어 동행을 요청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버지는 생원 김사범이고 동생은 도유록을 남긴 김선신(1775-1850)이다. 동생 김선신은 소과 합격자 명단에도 없다.


▣관연록 권수서

■서전(序前)

나는 병통에 약이 없음을 차마 보지 못했는데, 지금 형님이 쓴 《관연록(觀燕錄)》을 얻어서 읽어 보니 어찌나 빛나고 아름다운지 강한(江漢)의 주옥과 같았다. 비록 그렇지만 형님의 글이 나오지 않으면 천하의 병통이 날로 더해질 것이고, 나는 또 그 병통이 날로 더해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천하 사람들이 두루 읽을 수 있도록 형님에게 이 상하(上下) 두 편의 글을 내놓도록 청하였다. 중인(中人)이 읽으면 스스로 다스릴 바를 알게 되고, 어진 선비가 읽으면 스스로 가릴 바를 알게 될 것이다. 범인(凡人)이 읽어서 지혜가 더 자라지 않고 병통이 더 낫지 않는 경우는 나도 끝내 어찌 할 수가 없다. 아! 슬프다.


■서후(序後)

일전에 나는 내 형님이 쓴 《관연록》을 읽고 ‘지관(智觀)’으로 형님을 인정했는데, 이것이 형님을 사사로이 여겨서 그런 것이겠는가? 그렇지가 않다. 형님은 실로 일찍이 지관으로 연경(燕京)을 본 것은 아니었다. 형님이 연경에 갔을 때 무릇 그 산천(山川)과 도리(道里 길의 이수(里數)), 이항(里衖 마을과 거리)과 가사(街肆 시가와 상점), 도읍(都邑)과 누관(樓觀 누각)의 빼어남과 인물의 풍부함은 모두 형님이 눈으로 보았지만, 이외의 것은 또한 간혹 알지 못하였다. 내가 어찌 문득 형님을 사사로이 생각해서 지관하였다 했겠는가?


▣관연록 권상

■서(序)

나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 이목(耳目)이 진실로 국한되었고, 성시〔城府〕에 왕래하면서도 일찍이 귀한 사람을 번번이 찾아가 뵙지 않았다. 경신년(庚申年, 1800, 정조24)에 동반 급제한 두 사람과 함께 전동(磚洞)의 김 영공(令公 김사목(金思穆, 1740~1829)을 찾아가 뵈었는데, 공은 이때에 또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804, 순조4)에 공이 북한수(北漢帥)로 동지상사(冬至上使)에 차출(差出)되자 억지로 나를 반당(伴倘 사신이 자비(自費)로 데리고 가는 사람)으로 참여시켰다. 나는 평소 걷는 것을 좋아하고 말을 타는 것은 익숙지가 않았다. 하물며 집이 가난하고 부모님께서 연로하시기까지 하여 멀리 여행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간곡하게 사양하기를 두 번 세 번 하고 아우로 대신하기를 청했는데, 김 공께서 고집스럽게 가기를 요청하여 마침내 행장〔行李 길 가는 데 쓰는 여러 가지 물건이나 차림〕을 수습하고 일수(日數)를 계산하여 길에 오름을 면하지 못하였다.

아! 나는 시골에 사는 가난한 선비〔布韋 포의위대(布衣韋帶)의 준말로 가난한 선비의 복식을 말함〕로 중요한 지위에서 일을 맡은 대인(大人)에게 구하는 것이 있지 않았는데, 이전의 반면식(半面識) 친분으로 갑자기 연산(燕山)과 계하(薊河)의 얼음 얼고 눈 쌓인 길에서 동고동락하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에 조물소아(造物小兒)가 미리부터 요명(窈冥)하고 무의(無意)한 때에 정해 놓아서 말려서 못 가는 것과 시켜서 가는 것은 아울러 사양하여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더욱이 한 골짜기의 물은 멋대로 하면서도 동해의 거대함은 알지 못하고, 과거의 사리에 맞는 의론을 즐기면서도 허탄함에 구속되었다. 이제 초목이 무성한 데서 노닐다가 천정(天庭)을 두루 돌아다니고, 말발굽에 고인 물에서 노닐다가 큰 바다에서 내달리게 되었으니, 이 또한 인간의 쾌활함이 아니겠는가? 이에 내가 팔극(八極 온 세상)에서 정신을 노닐어 이목을 키우는 것은 또한 일찍이 저기에 있고 여기에 있지 않음이 없다.


■1804년(순조4, 갑자)

●10월

◯16일 나는 아호(牙湖)에서 출발하여 사흘을 자고 서울에 이르렀다. 이 당시 아버지께서 내 아우와 함께 기한보다 앞서 서울에 머무르며 행장을 점검하였다. 27일 건량청(乾糧廳)으로부터 모물(毛物)을 지급받았는데, 초피(貂皮 담비 가죽) 만순(萬純) 한 장(張), 양피 안감을 쓴 반비(半臂) 1령(領), 양피 안감을 쓴 말발굽 답수(沓手) 한 냥(兩)이었다. 29일 내 아우가 여러 곳에서 보내온 전별 글월을 모아 주었는데, 소산(蘇山) 이만영(李晩永) 어른의 절구 두 수, 동방(東方) 김운(金運) 어른의 절구 네 수, 산수(山水) 홍원(洪薳) 어른의 고사(古詞) 팔 해(解), 후동(後洞)의 나명여(羅明汝) 계남(啓南)의 고시 한 편, 죽동(竹洞)의 이대아(李大雅) 노영(魯榮)의 절구 한 수이다. 【이후 현란(玄蘭) 김정희(金正喜)의 절구 네 수, 태화(太華) 이현상(李顯相)의 고시 일 해, 백월(栢月) 이노원(李魯源) 어른의 절구 한 수, 홍대아(洪大雅) 명후(明厚)와 서대아(徐大雅) 정보(正輔)의 칠언고시 각 한 편은 모두 도중에 받은 것이다.】

◯그믐 정오에 신문(新門)으로부터 길을 잡아 모화관(慕華館)으로 향하는데, 청산(淸山)과 제현 【신계성(申季誠), 이빈국(李賓國), 홍일성(洪一誠), 서여량(徐汝亮), 김경련(金景蓮)】 이 교차(郊次)까지 전송하였다. 잠시 뒤에 세 사신 【상사는 김사목(金思穆 1740-1829) 공, 부사는 송전(宋銓 1741-1814), 서장관은 원재명(元在明 1763-1817)이다.】 이 숭례문(崇禮門)으로부터 표문(表文)을 받들고 나왔다. 사대(査對 중국에 가는 표문과 자문(咨文)을 살펴 확인하는 일)를 마치지도 않았는데 겸인(傔人 잡일을 맡아보거나 시중을 들던 사람)이 나에게 먼저 떠나라고 재촉하였다. 마침내 향대(饗臺 모화관의 연향대(宴饗臺)) 앞으로 나아가 한 잔 술을 사서 마시고 제현들과 이별한 뒤 말을 타고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났다. 청산은 대략 몇 걸음을 옮기더니 마침내 아쉬워하며 전송하였다.

●11월

◯1일

※맨 처음 나오는 시이므로 기록한다.

화석정(花石亭) 앞에는 저녁 안개 자욱하고 / 花石亭前空暯烟

임진강 가에는 다니는 사람 적다 / 臨津江上少行人

목릉(穆陵)을 돌아봄에 마음 더욱 아프니 / 穆陵回首增傷惋

혼란한 그 시절 하늘이 돕잖았네 / 當世夢夢不吊天

◯2일 날이 저문 뒤에 삼방(三房)에 가서 기악(伎樂)을 보았는데 시끄러워서 참지 못하고 이내 돌아왔다. 여기서부터 만부(灣府 의주)까지는 성색(聲色 음악과 여색)이 성대하여 고을마다 없는 곳이 없다고 하였다.

◯20일 세 사신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나를 맞아 함께 시를 지었다.

자시(子時)의 밤 좋은 계절 재촉할 제 / 子夜催佳節

나그네의 마음은 옛 집을 그리노라 / 羈懷念舊居

매화 띄운 상락주(桑落酒) / 梅浮桑落□

복숭아 가지 꽂은 떡갈나무 울타리 성글다 / 桃揷槲籬疏

땅 위에 줄지은 메추라기 바라보다 / 脈脈詹鶉陸

아득히 기러기의 편지를 바라노라 / 迢迢望雁書

퉁소 소리 오히려 감상할 만한데 / 簫歌尙堪賞

차가운 달빛 아래 관아는 비었구나 / 寒月郡齋虛

◯23일 밤이 깊어진 뒤에 늙은 기생 【이름은 잊어버렸다.】 을 불러 〈출사표(出師表)〉,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를 외우게 했는데 소리가 그윽하고 우아하여 뛰어난 유자와 큰 선비가 침잠하여 완색(玩索)하는 뜻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매우 사랑할 만하였다. 그 외 〈후출사표(後出師表)〉, 〈전적벽부(前赤壁賦)〉, 〈후적벽부(後赤壁賦)〉, 〈죽지사(竹枝詞)〉도 막힘없이 외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12월

◯8일 40리를 가서 중안보(中安堡)에 이르고, 30리를 가서 광녕(廣寧)에서 묵었다.

새벽에 출발해 밤중에야 잠을 잤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른데다 또 모래 먼지가 허공에 가득하여 얼굴을 마주하고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입 안에서는 모래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옷 위에는 먼지를 털어내도 곧바로 다시 쌓였다. 가는 길이 괴로워 하나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수레를 탄 이후로는 비록 안마(鞍馬 안장을 올린 말)의 흔들림은 면하였지만, 두 사람이 함께 타서 기대어 앉게 되니 편하지가 않았다. 수레의 주렴〔車簾〕 안에서 보이는 거라고는 수레바퀴에 불과한데다 종일 내달리기만 하니 더더욱 무료하였다. 낮에 중안보(中安堡)에 이르렀다. 삼방(三房 서장관)으로부터 《일하구문(日下舊聞)》을 빌려 시험 삼아 몇 장을 보았는데, 수레바퀴가 심하게 요동쳐 자획이 흔들리는 바람에 어지러워 볼 수가 없었다. 온갖 꾀에도 마음 붙일 데가 하나 없고, 고향 생각은 갈수록 더욱 견디기 어려웠으니 어찌하겠는가? 어찌하겠는가?

◯13일 30리를 가서 쌍하소(雙河所)에 이르고, 48리를 가서 중후소(中後所)에서 묵었다.

동이 틀 무렵 출발하여 청돈대(靑墩臺)에 도착하였다. 【또한 연대(烟臺) 중 하나다.】 동남쪽의 바닷빛이 아득하여 끝이 없었다. 【사행(使行)은 모두 여기에서 일출을 보려 하였지만, 다만 일정을 생각하여 올라가 조망하지 못하였다.】 무령(武寧) 이후로는 간혹 낮은 산등성이와 언덕이 있어서 수렛길이 불편하였고, 동쪽 변의 바닷빛이 보였다 안 보였다 일정치 않았다.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저녁에 중후소에 도착해 관제묘에 들어가 묵었다. 처마 사이를 올려다보니 서까래에 용과 뱀이 날아오르며 춤추는 모습을 새겨 놓았다. 섬돌과 뜰 사이에는 벽돌이 정돈되어 가지런하고, 채색한 소상과 신상을 좌우에 나란히 벌려놓았다. 한 중이 있는데 법호(法號)는 성선(性善), 자가 본초(本初)였다. 가경계첩(嘉慶戒帖) 한 장을 지키고 있었는데, 심양의 중이 수천이 넘지만 이것을 얻은 자가 열두서 명이라며 자랑하였다. 정사가 붓과 청심환을 주었다. 대개 정사는 지난 번 행차 때 성선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일 40리를 가서 사류하(沙流河)에 이르고, 40리를 가서 옥전(玉田)에서 묵었다.

새벽에 출발하여 15리를 가서 고려보(高麗堡)에 이르렀다. 과거 당 태종이 요동을 정벌할 때 고려 백성을 이곳으로 옮겼다. 이곳에 거주하는 자는 모두 그 후예였던 까닭에 전후 사행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번번이 말을 끌어안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고 간혹 술과 음식으로 맞이하여 위로하기도 했었다. 뒤에는 다른 보(堡)로 이주하여 이곳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겨우 한두 씨족뿐이었는데, 이곳을 지나는 동인(東人)들은 간혹 동인의 자손으로 여겨서 갑자기 성내며 욕하고 탄식하며 소리쳤다고 하였다. 보의 백성들이 다투어 술과 음식을 팔고자 했지만, 나는 돈이 한 푼도 없어서 다만 앞으로 헤치며 길을 갔다.

◯22일 일행(一行)이 남관(南館)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곧바로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올리니, 황구(皇舅 황제의 장인)인 공아랍(恭阿拉)이 친히 영수(領受)하였다. 공아랍은 바로 현임(現任) 상서(尙書)라고 하였다.

헤아려 보니 내가 고향을 떠나온 지도 벌써 67일이었고, 고향과 이곳 사이의 거리는 모두 3,300리가 넘는 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지난 노정에서의 고생과 행장의 괴로움, 풍설의 매서움과 인정의 동요도 오히려 아득히 감회를 일으키는데, 하물며 관애(關隘)와 산령(山嶺)이 넘기 어려워 한 걸음도 기댈 곳이 없으며 내년에 돌아갈 기약도 천 년처럼 아득함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저 궁궐의 성대함과 시장의 부유함과 수레바퀴와 말발굽의 요란한 소리를 때마침 한번 보았지만, 구름과 안개가 아득한 하늘을 지나가는 것과 같을 뿐이었으니 어찌 이로써 향수를 씻어내어 사람을 즐겁게 하고 돌아감을 잊게 할 수 있겠는가?

이날 남관에서 묵었다. 새벽녘 베갯머리에서 까마귀가 시끄럽게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정사가 나를 깨우며 말하기를, “자네는 오봉루(五鳳樓)의 까마귀 소리를 못 들었는가? 매일 새벽 이와 같다니, 자네도 들었으면 일어나시게.”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예. 예.”하고 대답하였다.

◯29일 세 사신이 들어가 중화연(重華宴)에 참여하였다. 나는 박 주부(朴主簿)의 사모관대를 빌려 사경(四更) 일점(一點)에 선인문(宣仁門)을 통해 들어가 오봉루(五鳳樓) 바깥에 이르렀다. 월랑(月廊) 안에서 잠시 쉬었는데, 전(殿) 안에서 북 소리가 성대하게 들려왔다. 황제는 황옥거(黃屋車)를 탔는데 양각등(羊角燈)을 밝혔고 일월선(日月扇)과 용봉선(龍鳳扇)을 흔들며 좌우에 의장(儀仗)이 정렬해 있었다. 걸으며 뒤따르는 자가 40~50명이었는데 엄숙하여 떠드는 자가 없었다. 다만 성대하게 말발굽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묘현례(廟見禮)를 행하고 예를 마친 뒤 환궁하는데, 채장(彩仗)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선악(仙樂)이 맑게 울렸다. 어가(御駕) 앞에는 코끼리 네 마리가 선도하였다. 등 위에 상노(象奴)가 앉아 있었는데 높기가 지붕에 올라가 있는 듯하였다. 때마침 하늘이 이미 밝아졌다. 나는 액외(額外 정원 밖의 인원)인 까닭에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관연록 권하

■1805년(순조5, 을축)

◯1일 타국인 청나라에서 촛불을 켜고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았으니, 이러한 회포가 어찌 다만 슬프기만 하리오. 이날 새벽에 하늘이 맑게 개어, 닭이 울기 전에 모두 일어나 사모관대를 갖추고 삼사(三使)를 따라 역관의 반열에 섞여 들어가 원조(元朝)의 조하(朝賀)에 참여하였다. ...

통관이 또 삼사를 이끌고 섬돌 앞에 이르렀다. 나는 여러 역관들과 차례로 따라 가서 반열에 이르러 꿇어앉았다. 조사(朝士)가 일시에 열을 가지런히 하는데 나아갈 때는 뛰지 않았고 앉아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얼굴을 들고 【앙면(仰面)이라고 이른다.】 땅을 짚은 【수수(垂手)라고 이른다.】 모습이 거만한 듯하면서도 대범하였다. 이윽고 홍려관(鴻臚官)이 큰 소리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의례를 주관하였다. 의례가 끝나자 모두 급하게 달려 나가는데 감히 잠시의 지체함도 없었다. 조의(朝儀)가 본래 이와 같다고 하였다.

◯3일 이 날 나는 감기가 심하여 장차 쉬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하였다. 부사가 또 시를 짓자고 하여 병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모임에 갔다. 작은 종이 삼십 장에 운자를 잡다하게 써 놓고 술잔 앞에서 잡히는 대로 차례로 지으면서 날이 저물어 촛불을 켜기까지 하였으니, 또한 절로 아회(雅會)였다. 정사는 족질(足疾) 때문에 잇달아 짓지 못하고 뒤에 몇 구절을 보충하면서 이르기를, “비록 석정(石鼎)의 시 짓기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이를 이으니 거의 장빈(漳濱)의 병을 앓는 마음에 위안이 된다.”라고 하였다.

◯9일 이날 황제(인종 가경제 1795-1820)가 서산(西山)에서 몽고연(蒙古宴)을 베풀었다. 상방과 부방이 새벽에 일어나 삼좌문(三座門)에서 공경히 맞이하였으니, 황제가 말을 타고 거둥한다고 하였다. 밥을 먹은 후 나 또한 따라서 서산으로 향하였다.

서화문(西華門)으로 나가서 수십 리를 가니, 길가에 높은 벼슬아치 집안의 묘각(墓閣)과 패루(牌樓)가 많았다. 백성의 집들은 왕왕 풀로 덮여 있었고, 나무 사이로 절의 탑이 은근히 비치었다. 대체로 우리나라 숭인문(崇仁門) 밖과 같았다.

◯17일 왕 시랑(汪侍郞)이라는 사람이 수레를 타고 옥하관에 도착하였다. 내가 그와 더불어 묻고 답하였다. 붓으로 써서 향리(鄕里)를 물으니, 왕(汪)이 말하기를, “거처는 산동(山東)에 있는데, 곡부(曲阜)에서 4백 리 떨어져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선생은 생각건대 유학을 공부했을 듯합니다. 감히 묻건대 쑥대가 창평(昌平 창평현(昌平縣)으로 명십삼릉이 있는 곳)에 들지 않고 금석(金石)이 궐리(闕里 공자가 살던 동리)에 길이 걸린 것이 지금도 오히려 그러한지요?”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멀어졌으니 어찌 다시 성인(聖人)과 방상(彷像)함이 있겠습니까? 다만 쑥대는 들지 않고 지금까지 이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추로(鄒魯)의 학문이 오래도록 폐하여지지 않았으니 간혹 굉유(宏儒)와 석학(碩學)으로 오히려 옛 성인의 유풍을 이어받은 자가 있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말하기를, “낙낙(落落)하여 가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제가 선생의 명성을 들은 것이 여러 날입니다. 문장과 덕업(德業)은 생각건대 경사(經史)에 발을 딛고 있을 터인데, 경(經)과 사(史)에서 무엇을 숭상하는지요?”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들은 게 적고 배운 게 적으니 선생을 어지럽히기에 부족합니다.”라고 하니

◯18일 청류와 더불어 나란히 옥수(玉水)의 집으로 향하였다. 그 사람됨이 옥과 같아서 지극히 사랑할 만한 사람이었다. 이야기 끝에 옥수가 나에게 물어 말하기를, “귀국에서도 또한 화천(貨泉)을 쓰는지요?”라고 하기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말하기를, “그렇다면 장차 무엇으로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물건을 서로 바꾸거나 판매하는지요?”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부유한 사람은 혹 금과 은을 사용하고, 가난한 사람은 오로지 곡식과 비단, 명주실과 삼실 등으로 저울질하여 곧장 매매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옥수가 말하기를, “저는 불민(不敏)하지만 또한 옛 것을 자못 좋아합니다. 진ㆍ한(秦漢)의 천패(泉貝)와 유협(楡莢)으로부터 원ㆍ명(元明)의 통보(通寶)에 이르기까지 모으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어찌 귀국에서 천부(泉府)를 세우지 않았겠습니까? 선생께서는 저를 속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옛 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구하는 사람이군요.”라고 하니, 조옥수가 말하기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어찌 감당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도 조선통보(朝鮮通寶)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자(箕子) 조선 때 주조하였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위만(衛滿) 조선 때 주조하였다고 하는데, 연도가 오래되다 보니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가운데 지금 겨우 남아 있는 것은 다만 점을 치는 데 사용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읽어온 수많은 연행기 내용 중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다. 우선 조선통보는 조선 세종때 만든 화폐이고 상평통보는 숙종이후 내내 상용되었는데 저자는 유통되는 화폐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다. 아마도 저자가 경서와 시서에는 능하나 우리나라의 실정에는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또는 중국에 비해 잘 유통되지 못하는 상평통보에 대한 불신이 컸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얼마나 상평통보의 유통이 미진했으면 저자가 저러했을까 하는 생각이 미치기도 한다.

◯23일 돌아오는 길에 한 가게에 들어가니 두 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네 모퉁이에 흑백 각 두 점을 두었고 한 사람은 곁에 있었다. 지나가다가 또 한 가게에 들어가서 종이를 찾아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와 행서(行書)를 5, 6도(道) 쓰니, 가게 주인이 붓 열 개를 나에게 사례로 주었다.

◯29일 떠날 날이 한층 더 닥쳐서 행중(行中)이 연일 짐을 꾸렸는데, 동서의 물건 이름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 전대를 살펴보니 담박하여 누될 것이 없어서 마음속이 갑자기 평온함을 느꼈다. 사람들은 모두 나의 어리석고 졸렬함을 비웃었지만, 어리석고 졸렬한 내가 남들보다 한 단계 더 높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 하였다.

이날 조옥수가 전지(箋紙) 서너 폭(幅)을 보내와 나에게 혼묵(渾墨)으로 ‘옥수서방(玉水書坊)’이라는 네 글자로 짧은 서문을 완성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옥같이 온화함은 / 溫兮其若玉

군자의 덕이요 / 君子之德

물처럼 맑음은 / 湛兮其若水

군자의 요새로다 / 君子之塞

대저 이와 같으니 / 夫其如是

펼치면 군자의 책이 되고 / 發而爲君子之書

거두면 군자의 방(坊)이 되네 / 卷而爲君子之坊

●2월

◯1일 행대가 나를 초대하여 술 한 잔을 마시고는 인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여기에 머무는 것이 다만 오늘 하룻밤뿐이니 한 번 취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책문 이후 헤어질 테니 【행대는 대개 책문 안에서 뒤에 처지게 된다.】 먼저 슬픈 생각이 드네. 내가 상방(上房 정사)에게 말하여 희천(希天) 자네를 뒤떨어지게 하여 지극히 터회하고 싶은데,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네.”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 일은 지극히 아름다우니 가르침을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행색(行色)이 남을 따르는데 어찌 중도에 길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행대도 또한 웃으며 응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자네의 말과 같네 그려.”라고 하였다.

◯2일 일행이 행장을 갖추고 출발하려 하는데 수역이 갑자기 와서 말하기를, “장사치의 짐바리가 아직 완전히 꾸려지지 않았으니, 비록 돌아가려 해도 그 형세가 방법이 없습니다. 이튿날 새벽으로 떠날 날짜를 미루어 정하기를 청합니다. 운운.”이라고 하였다. 대저 사행의 지체됨이 모두 역관 무리들의 농간으로 말미암는데, 매년 이와 같음을 면하지 못했다고 한다.

◯3일 일찍 출발하여 41리를 가서 통주(通州)에서 점심을 먹었다. 24리를 가서 연교(煙郊)에서 묵었다.

헤아려 보니 내가 고향을 떠나온 지가 이미 105일이고 관에 머문 것이 40일인데, 그동안의 즐거움과 괴로움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 수레를 돌려 쉬지 않고 가면서 휘휘 휘파람을 부니, 후련하기가 마치 흐르는 물이 골짜기를 내달리는 것과 같았다. 이는 또한 사람이면 누구나 똑같이 느끼는 감정인데, 하물며 나처럼 동동거리며 왕래하느라 보통 사람의 마음보다 갑절이나 된 사람에게는 어떠하겠는가? 이날 닭이 울기 전에 선래상방군관(先來上房軍官) 김영면(金永勉), 부방(副房)의 반당(伴儻) 최□계(崔□洎), 상판사(上判事)의 마두(馬頭), 그리고 사상(私商) 두 사람을 먼저 치송(治送 행장을 차려 떠나보내는 것)할 적에 집에 보내는 편지를 써서 부쳤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였다. 마두들을 보니 어떤 마두는 있고 어떤 마두는 없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모두 술값과 밥값으로 진 빚 때문에 도망가 나타나지 않는데, 많은 자는 간혹 수 삼천 전(錢)에 이른다고 하였다.

아! 대저 정의(情誼)를 좋아하는 우리나라의 풍속이 이에 저들로부터 동이(東夷)라 지목을 받게 되어 【저 나라의 물건 파는 가게에서는 간혹 마두배들 가운데 왕래하는 자가 있으면 번번이 ‘동이가 왔다.’라고 하고 곧바로 물건을 옮겨 숨겼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간혹 그 본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물건 숨기는 것을 동이(東夷)하는 것이라 하였다.】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표방(標榜)에까지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비록 와력(瓦礫)과 금벽(金璧) 같은 행실이 있더라도 한번 동인(東人)의 이름을 들으면 도적(盜賊)처럼 두려워하고 천유(穿窬)처럼 막아서 오직 봉함과 빗장이 견고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 들리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소인들의 무람없는 행동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12일 10리를 가서 산해관에 이르러 조금 지체하였다. 35리를 가서 중전소(中前所)에서 묵었다.

일행이 산해관에 이르렀는데 으레 이곳에서는 수레의 짐바리가 다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했던 까닭에 갑자기 서너 시간 지체되었다. 한인(漢人)과 호인(胡人)이 운집하는 것을 보았는데 시끄럽고 요란하기가 마치 시장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어떤 한 노인이 앞으로 나와 만년에 자식 하나를 두었는데 나이는 이제 열넷으로 문예(文藝)를 일찍 성취했지만 바탕이 약하여 병이 많다고 말하며 진청(眞淸) 서너 환을 주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정사가 곧 불러오게 하니 옥 같은 모습의 한 어린 소년이 《대기(戴記)》 〈곡례(曲禮)〉를 끼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둘러싸고서 앞으로 나와 몇 구절을 읽어보라고 하니 글 읽는 소리가 쟁쟁하여, 무척 사랑할 만하였다. 곧바로 시를 지어 보라고 하자 오언절구 한 편을 썼는데 시구가 자못 공교로웠다. 대개 또한 범민(凡民) 가운데 준수한 사람이었다. 정사가 필묵(筆墨)과 청심환을 상으로 주었다.

잠시 뒤에 원역이 와서 수레의 짐바리가 이미 모두 빠짐없이 도착하였다고 말하였다. 삼사(參使 서장관)가 곧 뒤를 따라서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말 위에서 징해루의 남은 경치를 생각하며 머뭇거리다가 이경(二更)에야 중전소에 도착하였다.

◯21일 밤중이 된 후에 바야흐로 잠을 자려는데, 상통사(上通事)가 심양으로부터 돌아와서 한 장의 예부문자(禮部文字)를 전하였다. “금년 정월 12일에 조선국(朝鮮國)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가 훙서(薨逝)하였다. 운운.”이라고 하였다. 국경까지 돌아가기도 전에 길에서 국부(國訃)를 받았으니 일행의 사람들이 모두 황공하고도 몹시 슬퍼서 몸 둘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 국경에서 보낸 신문(信文)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임시로 망례(望禮)를 중지하였다.

◯30일 책문에 머물렀다. 이날 수레 짐바리가 다 도착하였다. 저녁에 의주 부윤의 편지를 보았는데, 편지는 면면마다 뜻이 지극하였다. 아울러 홍로주(紅露酒)와 침저(沈菹 김치)를 보내주어 비린 위장이 뚫렸다.

●3월

◯1일 50리를 가서 온정(溫井)에서 묵었다.

대체로 사행의 가고 멈춤은 오직 수레 짐바리의 더디고 빠름에 달려 있다. 연경으로부터 올 적에 산해관이 하나의 철한(鐵限)이 되고, 심양이 또 하나의 철한이 되며, 책문 또한 하나의 철한이 된다. 【하나의 철한에 이를 때마다 수레 짐바리에 관인을 찍지 않으면 모두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침 전부터 관인을 찍느라 행중(行中)이 북적거렸다. 그래서 내가 조 역관(趙譯官)의 간청을 지나칠 수가 없어서 정사에게 말하여 관인을 얻어 주었는데, 정사가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다가 나중에야 수긍하였다. 그리고는 저녁에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일은 끝내 물건을 사고파는 일에 가까우니 나는 조 역관을 그냥 둘 수 없네. 나는 마땅히 중죄로 처벌하겠네.”라고 하였다. 나는 대처할 만한 방법이 없어 속으로 스스로 뉘우쳐서 말하기를, “제가 졸(拙)이라는 한 글자로 겨우 큰 허물을 면하였는데, 한 때의 사사로움에 끌려 이러한 분란을 불렀습니다. 《시경》 〈탕(湯)〉에서 ‘시작이 없는 경우는 없으나, 끝까지 제대로 마치는 경우는 드물다.〔靡不有初, 鮮克有終.〕’라고 했는데, 그것은 저를 이른 것인가 봅니다.”라고 하였다.

오시(午時)의 끝 무렵에 일행이 모두 책문을 나왔다. 책문 밖의 공장(供張 공장(供帳)과 같은 뜻)은 완연히 가던 날과 같았다. 정사와 부사가 행대와 작별하였다. 청류가 나에게 술병을 들고 뒷산에 올라가 연이어 마시면서 각자 이별의 회포를 풀어내자고 하였다. 조 역관이 따라와서 처벌을 기다리며 몸 둘 곳이 없는 상황을 말하였는데, 그 사실을 따지자면 내 책임도 있으니 어찌 크게 부끄러워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녁에 온정에 이르러 노숙하였다. 【초3일에 의주 조차(朝次)에서 정사가 조 역관을 불러 엄히 꾸짖었으나 나라의 경사로 처벌은 면하였다.】

◯2일 40리를 가서 구련성(九連城)에 이르고, 30리를 가서 의주에서 묵었다.

오시에 만부(灣府)에 도착하여 객사에서 옷을 갈아입고 망곡례를 행하였다.

◯7일 60리를 가서 순안(順安)에 이르고, 50리를 가서 평양(平壤)에서 묵었다. 기성묘(箕聖廟)를 지나면서 또 들러서 배알하였다.

◯12일 40리를 가서 고양(高陽)에 이르고, 40리를 가서 한양성(漢陽城)에 들어왔다.

※갈 때는 52일 걸렸으나 올 때는 훨씬 빨라 40일만에 도착하였다. 갈 때는 양력으로 치면, 12월과 1월이었으나 올 때는 3월이었으니 날이 좋은 봄철인데다 짐바리가 덜어진 이유도 있다.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니 김경집(金景集), 홍일성(洪一誠), 서여량(徐汝亮)이 나와서 응접했는데, 유독 청산만 보이지 않았다. 대개 죽산(竹山)의 산송(山訟) 때문에 아버지께서 바야흐로 선산에 계셨고, 청산이 돌아간 것도 또한 겨우 4, 5일이었다.

◯13일 서울에 머물렀다.

◯14일 서울에서부터 걸어서 돌아가다가 저녁에 용인(龍仁)의 □에서 묵었다.

◯15일 죽산(竹山 현 안성시)의 월천(月阡) 선산에 이르렀다.

아버지와 청산은 이미 돌아가 있었다.

◯16일 소호(素湖)에 이르렀다.

◯17일 고향에 돌아왔다. ※거주지는 아산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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