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북원록(이의봉)

청담(靑潭) 2018. 7. 25. 10:51


북원록(北轅錄)

이의봉(李義鳳 1733-1801)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상봉(商鳳). 자는 백상(伯祥), 호는 나은(懶隱). 광평대군 여(廣平大君璵)의 후손이며, 휘중(徽中)의 아들이다. 1760년 동지사 서장관인 이휘종을 따라 연경에 다녀왔다.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를 지내고, 1773년(영조 49)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도청(都廳)·부수찬·교리 등을 거쳐 1788년(정조 12) 10월 신천군수가 되었다. 1791년에 검토관 겸 경연관(檢討官兼經筵官)을 지내다가 그 이듬해 10월 좌승지가 되었다.

그리고 1799년 사간원대사간으로 많은 일을 하였으며, 1800년 4월 공조참판이 되었다. 그가 18세 되던 1750년 겨울에 처음으로 『주자어류(朱子語類)』와 『사서소주(四書小註)』를 보던 중 어려운 말들이 많아서 퇴계 문하의 『어록해(語錄解)』 등 여러 책을 참고로 하여 『증주어록해(增註語錄解)』를 편찬하였다.

그 뒤 다시 이 책의 내용을 수정, 증보하여 1789년 40권으로 된 『고금석림(古今釋林)』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무려 1,400여 종류의 참고문헌을 통한 광범위한 고증을 거쳐 동양의 여러 언어와 문자에 관한 사서(辭書)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그의 학자적 위치와 학문적 업적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북원록 제1권

■일행인마입책수(一行人馬入柵數)

정사(正使)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인 홍계희(洪啓禧 1703-1771)

부사(副使)는 호조참의(戶曹參議) 조영진(趙榮進 1703-1775)

서장관 겸 지평(書狀官兼持平) 이휘중(李徽中 1715 - ?)

(서장관의) 군관은 출신 이상봉(李商鳳 1733-1801) : 서장관인 이휘중의 아들이며 뒤에 이의봉(李義鳳)이라 개명하였다. 자는 백상(伯祥), 호는 나은(懶隱)이다. 1773년(영조49)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람은 모두 301명이고, 말은 모두 198필이다.

■방물세폐수목(方物歲幣數目)

성절예물(聖節禮物) 동지예물(冬至禮物) 정조예물(正朝禮物) 세폐예물(歲幣禮物)

■노정배참(路程排站)

■입책보단(入柵報單)

■연로각처예단(沿路各處禮單)

길가에 호행장 이하에 해당하는 사람의 예단은 더러는 주기도 하고 더러는 주지 않기도 하는데 징색(徵索)과 긴만(緊慢 긴급함과 완만함)을 따른다. 강희 갑신년부터는 영원히 방색(防塞 틀어막는 것)하게 하자, 이 밖에 대사(大使)와 통관배(通官輩)가 별도로 요구하는 각색 어물(魚物), 유둔(油芚), 능화(綾花), 환약(藥丸), 붓과 먹 따위 물품이 이보다 몇 곱절이나 되었다. 또 왕래하는 아문의 갑군(甲軍)과 관에 체류할 때, 각처에 날마다 제공하는 갑초(匣草)와 봉초(封草)가 또한 수천 갑에 이르나, 다 기록할 수는 없었다. 또 은으로 계산하여 주는 것이 있으니 이번에 행하는 것으로 말해도 대통관(大通官) 서종맹(徐宗孟)에게 1,000냥과 영송관 박이손(博以遜)에게 500냥을 주고 차통관 이하 사람에게 각각 지급하는 것을 합하면 누천 냥이 넘는다. 이보다 앞서서는 모두 행중(行中)에게서 추렴하여 썼는데 근년 이래로는 묘당(廟堂)이 연화(燕貨 연경의 물화)가 이문이 남지 않고 상역(象譯 통역관)이 피폐해지는 폐단에 진념(軫念)하게 되었다. 송도(松都), 평양, 안주, 선천, 의주 6곳의 관은(官銀)을 합하여 40,000냥을 내어 모자(帽子)를 무역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사상(私商)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본전을 유지하여 이익을 취하게 하였다. 일행은 이자〔息〕 6,000냥을 거둬 임역(任譯)에게 맡기고 왕래하는 부비(浮費 무슨 일을 하는 데 써서 없어지는 비용)에 충당하게끔 하였다.

■중로연향(中路宴享)

■입경(入京)

■입경하정(入京下程)

■표자문 정납(表咨文呈納)

■홍려시의 연의〔鴻臚寺演儀〕

■조참(朝參)

■방물과 세폐의 정납〔方物歲幣呈納〕

■재회수목(齎回數目)

■고시(告示)

■하마연(下馬宴)

■상마연(上馬宴)

■조정에 하직하다〔辭朝〕

■산천풍속총론(山川風俗總論)

■왕래총록(往來總錄)

경진년 11월 초2일에 서울에서 출발하여 19일에 의주에 도착하여 7일을 머물렀다. 27일에 강을 건너 12월 27일에 북경에 들어가 옥하관(玉河館)에서 40일을 지냈다. 신사년 2월 초9일 귀국길에 올라 3월 초7일에 책문에 도착하여 책문 안에서 5일을 머물고 또 책문 밖에서 8일을 머물렀다. 20일에 다시 강을 건너서 의주에서 3일을 머물고 4월 초6일에 서울에 돌아왔다. 왕복 6개월, 날짜로 154일이었다. 서울에서 의주까지는 1,040리이고 의주에서 북경까지는 2,071리인데 합치면 3,111리이니 왕복 6,222리이다. 북경에서 출입하고 도중에서 구경 다닌 것과 우회한 거리가 또 460리이니 모두 합치면 6,782리이다. 서울에서 북경까지의 거리는 냉정이 절반이 되고 의주에서 북경까지의 거리는 십삼산이 절반이 된다.

■1760년(영조36, 경진)

●7월

◯12일 7월 12일이다. 아버지께서 동지서장관(冬至書狀官)을 제수받았다. 아버지께서 지난봄에 참척(慘慽)을 당하신 뒤에 배나 쇠약해지셔서 우리 형제 중에 한 사람이 마땅히 따라가야 하였다. 그러나 상준(商駿)은 병들고 상귀(商龜)는 약하였으며 또 나는 평소에 한번 요계(遼薊) 땅을 밟아 보고 싶은 뜻이 있어서 그 자리에서 가겠다고 고하였다. 아버지께서 집에 주관할 사람이 없어 어렵다고 여기시다가 굳이 청원을 한 뒤에 허락하시고 원역(員譯)이 문안할 때에 군관으로 달하(達下)하는 일로 분부하셨다. 상사 홍계희(洪啓禧), 부사 조영진(趙榮進)이 지난달에 도목정사(都目政事)에 제배(除拜)되어 모두 자제군관을 데려가는 까닭에 육사신(六使臣)이라는 비방이 서울에 자자하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친구들이 더러는 많이 말렸는데, 우선 비방을 피할 계책으로 정양좌(鄭良佐)의 이름을 먼저 달았다가 10월 27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초기(草記)하여 고치게 되었다. 떠나게 되자 《일하구문(日下舊聞)》 한 책을 초하여 행장을 넣는 자루에 넣었으니 장차 이것을 살펴서 연도(燕都)를 두루 구경하려고 한 것이었다.

●11월

◯2일 홍제원(弘濟院)에서 조금 쉬고 40리 길을 가서 고양(高陽)에서 잤다. 아버지께서 동이 틀 무렵 궁궐에 나가셔서 머물러 기다리고 있다가 입시(入侍)하셨다. 연서역(延曙驛)에서 근무하는 나졸이 어제 이미 말을 가지고 와서 대령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점심밥을 먹은 뒤에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하니 어머니께서 차마 헤어지지 못해서 눈물을 흘리기에 이르렀다. ...

상감께서 정사와 부사에게 말씀하셨다.

“군관은 어떤 사람이더냐?”

정사와 부사가 모두 여러 사람을 차례대로 아뢰다가 홍찬해와 조광규에 이르자, 상감께서 말씀하셨다.

“부자가 서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 딱 보기 좋구나.”

또 상감께서 말씀하셨다.

“서장관과 군관은 누구냐?”

아버지가 대답하였다.

“저도 아들을 데려갑니다. 신의 아들이 제 외삼촌 서명선(徐命善)의 말을 듣고 한 차례 중국을 보고 싶어 해서 마지못해서 데리고 갑니다.”

상감께서 말씀하셨다.

“나이는 몇 살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서명선은 누구를 따라서 들어갔던가?”

아버지께서 대답하였다.

“신의 아들 상봉은 나이가 올해 28살이고, 서명선은 그 형인 서명응(徐命膺)이 서장관이 되었을 때에 따라 갔었습니다.”

◯11일 사대와 관은을 바치는 일 때문에 평양에 머물렀다. 아버지께서 낙죽을 잡수셨고 나는 흰죽을 먹었다. 김약수와 홍명목과 함께 고삐를 나란히 잡고 나갔으니 장차 여러 좋은 경치를 보기 위해서였다. 거리에 이르니 마을의 번성함과 저자의 풍부함이 경성과 비슷하였다.

◯22일 의주에 머물렀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백마우(白馬隅)에 나아가서 사냥질을 하였으니 대동승 이성장(李聖章) 【이봉환의 자(字)】, 자겸(子謙) 【조광규의 자】, 유성(幼成) 【홍찬해의 자】 그리고 원역 여러 사람들이 따랐다. 아버지께서는 견여를 타고 남문으로 나오셔서 기사(騎士)를 선발해서 전구(前驅 기마(騎馬)할 때 선도(先導)하는 사람)로 삼아서 다 같이 똑같은 옷을 입혔으니 건탁(鞬槖 활집)한 사람이 30인이었다. 기녀가 전립과 전복(戰服) 차림으로 말을 탔는데 떼를 지은 사람이 14인이었으며 깃발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4인이고, 몽둥이를 메고 있는 자가 4인이었으며 곤뢰가 6인이었다. 집사(執事)로 호령을 할 수 있는 자가 1인이었다. 북, 장군, 피리, 관악기, 해금을 연주하는 사람이 각각 1인이었고, 나팔을 부는 자와 퉁소를 울리는 자가 각각 2인이었으며 가야금을 멘 사람이 또 1인이었으며, 매를 팔에 앉힌 자가 3인이었고 사냥개를 다루는 종자가 6인이었다. 시골 백성으로서 새와 짐승을 모는 자가 30여 인이 되었으며 융복을 입고 수레의 뒤에 있는 사람이 8인이었으니 사람은 모두 128인이었고, 말은 모두 57마리였다. 가로현을 넘었으니 여기에서 백마우까지는 1리쯤 된다. 숲 나무 사이에 이미 세 개의 천막을 설치하고, 각각 말에서 내려서 좌정하였다. 그런 뒤에 깃발을 휘둘러서 기사로 하여금 여도(驢島)에 들어가게 하였으니, 섬의 너비는 한 마장이 될 만하였고, 길이는 5, 6배나 되었다.

성긴 숲에 엷은 수풀은 섬의 면적을 가릴 수가 없었으니, 그곳에는 잡을 만한 토끼와 꿩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기사가 사면에서 들어와서 왔다 갔다 하면서 서로 돌진하였으니 그 빠르기가 나는 것과 같았으며, 달리는 사냥개가 모두 말보다 앞섰다. 나팔을 불어서 명령을 하면 몰이꾼들이 소리를 내서 고함을 쳤으니 또한 기이한 볼거리였다. 가장 뒤에서 오는 한 사람의 기사가 철봉을 메고서 말을 나는 듯 달려서 와서는 무릎을 꿇고 꿩 한 마리를 올렸으니 좌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시장에서 사서 와 가지고는 후한 상을 바라는구나.”라 하자 기사가 꽤나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하였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한번 껄껄 웃게 하였다. 다만 주인(廚人)에게 부탁하고 조금 뒤에 음악이 연주되자 칼춤을 추게 명하니 아기(兒妓 어린 기생)인 차애(次愛)는 나이가 12살이었다. 칼을 놀리기를 넓고 크게 하고 절도에 맞추기를 위엄 있게 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재능이었다. 또 여러 기녀들에게 명령을 해서 대오를 나누어서 정희(呈戱)를 하도록 하니 춤추는 소매는 나풀대고 움직이는 모습이 늠름하여서 조금도 아름답고 요염한 태도는 없었다. 다음으로 기사에게 명령을 하고 그 다음으로 김계탁(金啓鐸)과 박달손(朴達孫)에게 명령을 하였으나 어긋나서 곡조와 박자에 맞지 않았다.

조금 뒤에 먹을 것이 나와서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먹인 것이 하류(下流)에까지 미쳤으며 또 기마를 불러서 떡을 큰 소반에 내려주자 까마귀처럼 모이고 벌떼처럼 모여서 한순간에 다 먹어치웠으니 또 볼만한 일이었다. 또 입정(笠鼎)에다 고기를 삶아 올렸으니 추위를 막을 만하였다.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앉아 말하기를, “변방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일삼은 것이라고는 활을 쏘고 말을 달리는 일이었으니 원컨대 한번 시험해 주소서.”라 하였다. 곧바로 명령을 하니 두 개의 곤봉을 길의 남북쪽에다 세워 놓고 좌우에서 말을 달려서 쏘았다. 적중을 하면 북을 치고 적중을 하지 못하면 꽹과리를 치니 오직 나이가 17, 18세쯤 되는 사람이 두 개의 곤봉을 다 맞췄고 그 나머지 5, 6인은 각각 하나의 화살을 맞췄다. 다 맞힌 자는 광목이 한 필이었고 그 아래는 차등이 있었다. 조금 뒤에 해가 먼 산봉우리로 넘어가자 조심해서 갈 것을 명하여서 음악이 연주되고 나팔을 불자 여러 기녀들이 말 위에서 소리를 내서 정희를 바치면서 가서 남문으로 들어가니 하늘이 처음으로 어두워져서 횃불을 환히 밝혀서 돌아왔다. 부사와 부윤이 찾아와서 아버지를 뵈었다.

◯29일 삼행이 책문 밖에다 막사를 설치하고 이어서 아침밥을 먹으니 청나라 사람들이 차츰 모여 들어서 역관들과 책문을 사이에 두고 말을 하였으며 더러는 그 틈새를 통해 손목을 잡고 흔들면서 말하기를, “좋소, 좋소.”하면서 저들이나 우리들이나 모두 기뻐하는 안색이 있었다. 내가 조광규와 홍찬해 두 친구들과 여러 역관을 따라서 가서 보고 빨리 들어보니 새 우는 소리가 새와 참새가 지저귀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서 자못 구분할 수가 없었다.



▣북원록 제2권

■1760년(영조36, 경진)

◯30일 책문으로부터 35리를 가서 봉황성에서 잤다.

●12월

◯9일 심양에서 30리를 가서 영안교(永安橋)에 이르러서 아침밥을 먹었으며 또 30리를 가서 변성에서 묵었다. 부사가 건량을 실은 짐수레〔卜車〕가 홀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수역과 두 명의 상통사와 건량관을 잡아 들였다. ...

여기서부터는 길옆에 있는 수레바퀴의 자국이 깊은 것과 얕은 것이 모두 깎이어서 평평한 땅이 되었으니 또한 오왕을 위하여 길을 닦은 것이었다.

◯20일 산해관에서 30리를 가서 범가장(范家庄)에 이르러서 아침밥을 먹었고 또 50리를 가서 유관에서 잤다.



▣북원록 제3권

■1760년(영조36, 경진)

◯28일 통주로부터 21리를 가서 대왕장(大王庄)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또 19리를 가서 북경에 들어갔다.

■1761년(영조37, 신사)

■1월

◯1일 북경에 머물렀다. 집집마다 울리는 지포(紙砲) 소리가 새벽이 될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닭이 처음 울자 아버지께서 흰죽을 드시고 정ㆍ부사와 함께 공복을 갖춰 입고 앉아계시니 조참(朝參)에 가시려는 것이다. 조광규, 홍찬해 두 벗이 나에게 와서 물었다.

“오늘 대궐에 가던, 대궐에 가지 않던 우리는 또 함께하지 않을 수 없소. 그대는 장차 어찌하려 하오?”

내가 말하였다.

“그대들은 반드시 고집하는 바가 있을 테니 우선 말해보시오.”

홍찬해가 말하였다.

“우리들은 서생이니 관복을 입어야 하는데, 너무나 비루하고 하니 나는 가지 않는 것을 고수하려 하오.”

조광규가 말하였다.

“권착(權着 권도를 갖추어 입음)의 비루하고 용렬함은 단지 두 번째 일이요. 왕의 명이 없는데, 오랑캐의 조정에 무릎을 굽히는 것은 춘추의 의리를 크게 그르치는 것이오. 나는 가지 않는 것을 고수하겠소.”

내가 웃으며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우리들은 군복을 입어야 하니 이것이야 말로 권착이지요. 무엇 때문에 관복을 택하겠소. 명색이 자제군관이니 군관은 군복을 입고, 관인은 관복을 입는 것이지요.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춘추까지 운운하자면, 이는 우리들의 첫 번째 의리요, 진실로 그대가 말해준 대로입니다. 하지만 부형께서 이미 왕의 명의 받고 폐백을 가지고 서쪽으로 와 굴욕을 참으며 무릎을 굽히니, 우리가 왕명이 없다는 것에 마음이 이끌려 홀로 그 한 몸만 깨끗이 하는 방법만 도모한다면 마음이 편하겠소? 편치 않겠소?”

그러자 드디어 군복을 입고 따랐다.

◯2일 북경에 머물렀다. ... 나는 성장(聖章 이봉환)과 자겸, 유성과 함께 복건과 도포를 입고 고삐를 나란히 해서 나갔는데, 이는 다시 안남관에 가기 위해서였다. 아문은 2명의 갑군을 보내서 패를 지니고 쫓게 하였다. 대개 우리나라 사람들이 출입할 때 반드시 열어야 하는 이유가 있은 연후에야 비로소 문을 막지 않으니, 소란을 막기 위해서이다. 제안문(齊安門) 거리로 내달리니 안남 통관과 2명의 종인이 태평거를 타고 왔다. 아마도 안남 사신〔南使〕이 우리 사신에게 사례하기 위해서인 듯하였다. 그는 말을 멈추고 우리에게 읍하여 말하였다.

“어디로 가십니까?

“안남관으로 갑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우리가 아니면 말을 통할 수 없습니다.”

“해가 될 것 없습니다.” 하고는 읍하고 헤어졌다. 안남관에 이르니 아문이 문을 막고 섰는데, 간청한 후에야 허락하였다.

먼저 셋째 사신의 방으로 가니 그들이 없었고, 방에는 옹기와 솥 등이 벌여져 있었다. 거기에 작은 배〔梨〕를 담아 놓고 안남 사람들이 그 곁에 둘러 앉아 혹 껍질도 벗기고 혹 절구에 찧었으나 무엇에 쓰려 하는 줄은 알 수 없었다. 부사가 있는 방에 이르렀는데 또 없었으며 두 종인이 단정하게 앉아 글을 읽고 있었다. 정사가 있는 곳으로 가니 삼사신이 함께 모여 있기에 서로 읍하고 앉아 그저 말없이 묵묵히 말을 나눌 길이 없었다. 내가 드디어 붓을 꺼내 말을 대신하였다.

“저번에 비루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책을 보여 주마 하는 가르침을 입었기에 감히 두 번 왔습니다.”

부사가 말하였다.

“사사로운 글을 새로 베껴 잘못된 것을 아직 고치지 못하였으니 수삼 일 【날을 ‘천(天)’이라 한다.】 을 기다려 주신다면 마땅히 사람을 시켜 귀관에 보내어 귀 대인의 글을 구하겠습니다.”

성장이 먼저 행리(行李)를 묻고는, 그다음 광동과 광서의 지계를 물었는데, 모두 대답해 주었다. 나 또한 필묵을 남기며 말하였다.

“가난한 선비가 먼 곳에서 와서 예를 삼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삼가 여섯 자루의 붓과 참먹〔眞玄〕 하나를 드리니 어찌 쓸모없는 물건이겠습니까?”

“깊이 성대한 인정을 입었습니다.”

“귀국의 지방은 몇 리 길쯤 되며 명산대천 중에 한 지방의 진(鎭)으로 삼을 만한 곳을 일일이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산원산(傘圓山)과 노하(瀘河)는 예로부터 전하는 바이며, 그 나머지 삼도산(三島山)과 홍령산(洪嶺山), 마하(馬河)와 탄하(灘河)는 또한 한 지방의 진입니다.”

내가 손으로 ‘지방(地方)’ 두 글자를 가리켜 다시 물으니 그들이 즉시 그 아래 써서 이르기를, “동으로는 양광(兩廣 광동과 광서)과 접하고 동북과 정북(正北)은 운남과 접하며 정서(正西)와 정남(正南)은 옛 애뢰(哀牢)와 노과(老撾), 분만(盆蠻), 고면(高綿), 점성(占城 참파) 등 여러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 본국에 복속되고 이로부터 구석진 산골과 바닷가까지 이루다 궁구할 수 없는 곳까지 판도(版圖 한 나라의 영토)에 속해 있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우리들의 성명과 삼사신의 관직, 과갑연기(科甲年紀) 등을 묻자, 성장은 모두 써서 보여 주었다. 부사가 그 종인을 불러 무슨 말을 하니 종인이 나가 물건을 종이에 싸서 가지고 왔다. 그가 받아서 앞에 놓고 나를 향해 말하였다.

“가히 받들어 드릴 것이 없어서 삼가 토산품인 대모(玳瑁) 붓과 은상모(銀象毛)로써 답례합니다.”

하고 드디어 붉은 칠을 한 둥근 쟁반을 내어서 대모 붓 4자루와 은상모 4개를 담아 나왔다. 이른바 대모 붓은 대모로 관(管)을 만들고 흰 털로 붓을 만든 것인데 붓 끝이 매우 뾰족하였으며 먹으로 물을 들여 놓았다. 이른바 은상모라는 것은 양 끝이 바늘처럼 생겼는데 길이는 1촌 남짓하였으며 은실로 장식하였고 붉은 종이로 쌌으니 이를 쑤시는 도구였다. 내가 말하였다.

“어찌 보답을 바라겠습니까? 우선 여기에 두고 저에게 새로운 글을 보여 주시면 백붕(百朋)의 선물을 받은 것뿐은 아닐 것입니다.”

“이 때문은 아닙니다. 이 역시 마땅히 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마땅히 하려 하였던 가르침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제공(諸公)의 젊은 자제들의 높은 재주를 우리들이 깊이 아끼고 중히 여겼습니다. 예를 갖추려고 한 것이 아니라 왕래해 주심에 단지 비루함으로 촌심을 표현하고자 하였을 따름입니다.”

“거듭 받는 것은 예가 아니니 삼가 후일에 새 글을 보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다만 멀리 밖에서부터 온 사람으로서 자주 왕래함을 아문이 꺼리니 이로써 이별을 고해야겠습니다.”

“기왕 이 두 가지의 물건을 기껍게 받지 않으시니 성한 예도 또한 감히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내가 웃으며 말하였다.

“이미 글을 보여 가르침을 입었는데 드리는 것을 받지 않음은 무엇입니까?”

부사가 드디어 한 권 본서를 등사한 책으로 보여 주니 이름하여 《군서고변(群書攷辨)》이었다. 고금 인물의 현부(賢否)와 득실부터 경전, 백가를 일일이 논한 것인데 대개 잡저류로 그가 엮은 것이었다. 내가 몇 장 보지 못하였는데, 그가 나를 보며 말하였다.

“청컨대 대략 보시고 우선 남겨주시면, 잘못된 것을 교정해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

하고 또 대모 붓과 은상모를 가지고 나오니 세 사람과 함께 나누고 부사에게 말하였다.

귀국의 개벽한 군주로 촉나라 잠총(蚕叢)과 어부(魚鳧), 조선의 단군과 기자 같은 이가 누구입니까?”

월(粤)나라 왕 조타(趙佗) 때부터 한 무제에게 항거하였습니다.”

하고 쓰기를 마치지 못하였는데 셋째 사신이 그 쓰는 것을 찢고는 묻고 답하는데 아마도 꾸짖는 말 같았다. 정사가 그 찢어진 조각을 가져다 잘게 찢고 우리를 향해 말하였다.

“혹시 대국 사람이 볼까 염려함이니 제공을 휘함이 아닙니다.”

대개 그 뜻이 조타는 한나라 반적에 불과하였는데 이로써 개벽한 군주로 삼은 것 때문에 혹 우리나라 사람에게 가볍게 보일까 염려하여 우선 휘하고자 한 것이다. 안남은 옛 월나라요, 조타가 월왕이 된 것은 천하가 모두 아는 바인데 이제와 되레 숨기고자 하니 참으로 이른바 방울 도적하는 자가 제 귀를 막는다는 말이 이것이다. 부사가 또 붓을 들어 응수하려 하였는데 서판(書辦 문서를 담당하는 관리)이 밖에서 들어와 그 붓과 벼루를 빼앗고 문답하지 못하게 하였다. 마침내 황망하고 두려워 물러나 앉았다. 우리 또한 작별하고 나왔다.

큰 거리를 지나니 거리 위에 저자를 다 철수하였고 오직 각색 등만 벌여 있었다. 양의 모양, 물고기 모양, 수레 모양 등 형형색색이어서 이루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 그중 물고기 등(燈)은 머리와 꼬리가 활발하게 움직여 핍진하였다. 또 무수한 지포를 길거리에 놓았으니 그 소리가 귀를 시끄럽게 하였다. 남녀 할 것 없이 저자에 앉은 자, 말 타고 다니는 자들이 다 우리를 가리켜 이르되, “고려, 고려.” 하였고 아이들 중엔 혹 따라오며 종인을 심하게 욕하는 자도 있으니 매우 괴로웠다.

서천주당에 이르니 문지기가 막아섰는데 여러 번 달래도 듣지 않았다. 또 그때 눈까지 올 듯하여 관소로 돌아왔다. 들으니 안남 통관이 우리 사신을 뵙고 캉 아래 꿇어 절하고, 편지와 물건들을 드렸는데 삼사신께 각각 등 2개와 부채 4자루, 붓 4자루를 보내고 별도로 단자를 갖추었다고 한다. 또 내게 등 1개 부채 1자루를 보냈으니 이는 세밑에 방문한 것에 대해 사례함이라 하였다. 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이른다.

한번 태좌의 얼굴을 접하니 구름과 나무를 그리워함과 같습니다. 관에 돌아온 후 매양 두 쌍부(雙鳧)를 타고, 학 하나를 날려 문창성과 더불어 서로 비추고자 하였는데 홀연히 빛나는 편지를 주어 지극한 은혜로 적시니 진실로 뜻하여 헤아린 바가 아닙니다. 우리〔職等 ‘우리’, 스스로를 이르는 말〕는 만 리에서 멀리 와 농속에 약물이 하루도 없으면 안 됩니다. 요삼(遼蔘 고려 인삼)을 한번 맛보길 청하니 진실로 당돌하나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 한두 가지 편의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사람이 초목이 아니니 감격함을 써서 깊이 새기겠습니다. 가지고 있는 별것 아닌 토산을 별도로 사람을 시켜 받들어 드립니다. 바라건대 일소에 부치시고 받으시길 바랍니다. 안남국 공사 진휘밀, 여귀돈, 정춘주 함께 절합니다.

겉봉투〔皮封〕에 써서 이르기를, ‘조선 대국 세 분 사신집사께 드립니다.’라 하였다.

아버지께서 저녁 진지 드시는 것이 조금 나아지셨다. 정ㆍ부사와 함께 모이셨다. 나는 세 벗〔三益 여기서는 조광규, 홍찬해, 이봉환을 말함〕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파하였는데 밤 4고(四鼓 오전 2시~4시)가 되었다. 지포 소리가 새벽까지 끊이지 않았다.

◯4일 북경으로부터 서쪽으로 30리를 가서 원명원(圓明園)을 보고 돌아왔다.



▣북원록 제4권

■1761년(영조37, 신사)

◯14일 북경에 머물렀다. 아버지께서 아침을 3분의 1 드셨다. 유구 관생(琉球官生) 채세창이 그 나라 사람 정효덕(鄭孝德)과 함께 나란히 왔다. 지난번 방문에 보답하고자 한 것이다. 안부 인사〔寒喧〕를 마치자 채생이 시 한 수를 주었다. 제하여 이 선생(李先生 이휘중)의 부채 선물에 감사하며 존운(尊韻)에 화답하여 가르침을 구한다고 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솔 부채 만든 것은 신의 솜씨요 / 製成松箑盡神工

훈현곡(薰絃曲) 한 수가 흰 비단 속에 있네 / 一曲薰絃白繭中

더운 날 기다렸다 흰 깃 부채 펼쳐 / 願待炎天舒素羽

온 자리에 어진 바람 일으키고 싶구나 / 試看滿座拂仁風

하고, 말미에 ‘중산(中山) 채세창 쓰다.’라 하였다. 한번 읽어보고는 훌륭한 솜씨라 하고, 이어서 정생(鄭生)의 나이를 물었다. 정생이 말하기를, “27세입니다.”라 하였다.

◯29일 북경에 머물렀다. 아버지께서 저녁 진지 반 그릇을 드셨다. 외조모님의 기일이었기에 나는 소선을 먹었다. 오늘부터 문금(門禁)이 더욱 엄해진다고 하여 서판과 갑군이 제독보다 더 과하게 감시하였다. 김군이 융복사 교시에서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와 《당시별재(唐詩別裁)》를 사가지고 왔다. 가격이 매우 저렴하였는데 여러 서판들이 소개해 준 값과 비교하니 그 절반도 되지 않았다. 내가 말하였다.

“어찌 《팔대가(八大家)》를 사오지 않았는가?”

그가 말하였다.

“단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만 있었습니다요. 이른바 《팔대가》는 없었습니다.”

하니, 듣던 이들이 크게 웃었다.

■2월

◯1일 길을 옛 옥하관으로 잡았는데, 이는 대비달자(러시아인)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였다. 이 호인들은 보통 사람들 몇 배로 코가 크다. 그리고 여러 부락들 중에서 가장 사나우며 매매를 위하여 서울에 머물지만 장사치들이 감히 이들에게 값을 따질 수 없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으로 때려 쓰러뜨린다. 길에서 여인을 만나면 대낮에도 겁탈을 하며, 통관과 갑옷 입은 군사들도 매번 구타를 당하여 한 번씩 길거리로 나오는데 마치 맹호를 피하는 듯하였다. 사람들이 간혹 옛 옥하관에 들어가는데 순하면 정성스레 대하고 기쁘게 맞이하나 그렇지 않으면 사납고 큰 개〔獒〕를 부추겨 물게 하였다.

조하할 때에 혹 배고례에 들어가 참여하기를 권하면 추물(醜物)을 들고 “네가 황제냐?”라고 욕하니, 이러이러해서 청나라 사람들이 교화 밖의 사람인 양 기르고 법례로 구속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침 문 밖으로 나오지 않아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서 관소로 돌아왔다. 해가 막 산 아래로 지려고 하였다. 뜰아래서 절하고 이어서 시식(侍食 웃어른을 모시고 음식을 먹음)하였는데 반 그릇 정도 드셨다.



▣북원록 제5권

■1761년(영조37, 신사)

◯9일 북경에서 출발하여 통주(通州)에서 묵었다. 관례에는 통주에 도달하면 선래(先來) 일행을 떠나보냈는데 일행이 구차하고 군색함을 염려하기에 함께 관소에서 떠날 것을 허락하였다. ...호인(胡人) 한 무리가 들어오더니 상부방(上副房) 캉에 붙인 장지(障紙)와 세웠던 대를 어지럽게 헐지 말라 해도 듣지 않았다. 본방은 이미 먼저 엄칙하였기에 다행히 이 근심을 면하였다. 저녁 식사 후, 삼사신이 말을 타고 나갔는데 내가 복건과 도포를 갖추고 쫓으니 활짝 날개를 펴고 우리를 벗어난 새 같고 생기 있게 굴레를 벗은 매 같아 매우 활발함이 손에 잡힐 듯하였다. 옥하교를 지날 때 성장이 나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어르신들은 혹 이 땅을 다시 밟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한번 나가면 다시 들어오지 못합니다. 만일 동으로 압록강을 건너면 또 장차 서얼(庶孼)이라는 구렁에 매여 있겠지요.”

라 하고 근심스러워하며 기쁘지 않은 기색이 있었다.

◯18일 산해관에서 출발하여 노계둔(老鷄屯)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양수하참(兩水河站)에 이르러서 잤다

●3월

◯1일 심양에서 출발하여 백탑보(白塔堡)에 도착해서 아침밥을 먹었으며 십리포(十里餔)에 이르러서 잤다

◯2일 십리보에서 출발해 삼도파(三道把)에 이르러서 아침밥을 먹었고 신요동(新遼東)에 이르러서 잤다. 날이 밝자 아버지께서 흰죽 조금을 드셨다. 길이 험해서 말을 타시고 15리를 가서 연대(烟臺)에 이르러서는 또 도로 수레를 타셨다. 또 삼도파에 이르러서 아침밥을 먹었는데 반 그릇을 드셨다. 한참 뒤에 출발하였는데 그때 해는 따뜻하고 바람은 잦아졌다. 하늘에는 한 점의 티끌도 없었고 산에는 아지랑이가 있었다. 동쪽으로 구요동(舊遼東)을 바라보니 연수(煙樹 연기 안개에 가려진 나무)가 허공에 자욱한 것이 계문(薊門)보다 못하지 아니하고 백탑이 우뚝 솟은 것이 마치 맑은 바닷속에 꽂혀 있는 것 같아서 말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 속을 씻게 해주었다. 접관청(接官廳)에 이르러서 좌거의 말을 바꾸었다. 오덕겸 등 여러 사람들이 길가에 있는 연대에 올랐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연대 위에는 조그마한 암자가 있으나 특별히 기이한 볼거리가 없었고 오직 늙은 나무가 그 위에 있었으니 절을 세울 때 심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요동에 이르러서는 한군 오등강(吳登剛)의 집에 들어갔으니 오등강은 나이가 81세였으나 여전히 강건(强健)하였다. 또 그 마을에 사는 수십 명의 여자 한 패가 집으로 들어와서 까닭을 물으니 말하였다.

“구경하러 온 것입니다.”

내가 말하였다.

“그대들은 이 땅이 본래는 우리나라의 땅인지 알고 있는가?”

라 하자, 여러 남자들은 모두 대답을 못 하였는데 그 가운데 여자 한 사람이 있어서 자리에서 나와서 대답하여 말하였다.

“8백 년 전에는 과연 동국 지방이었습니다.”

“그러하면 그대들도 우리나라 사람의 후손이던가?”

“우리들은 본래 산동의 객자(喀子)였는데 흘러 다니다 여기에 정착을 해서 이제는 만주 사람이 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곳은 백성의 호수가 대략 얼마나 되는가?”

“이곳에 사는 백성들은 백여 호이고 신성(新城) 안에 삼백여 호가 되며, 구성(舊城) 안팎에는 만여 호가 살고 있으니 이곳은 지부(知府)가 거주하는 곳입니다.”

유성택(정사의 호위역)이 여러 여자들의 압도적인 미색을 보고는 그들과 가까이하여 말을 하려고 하였으나 중국말을 할 수가 없어서 다만 담배를 주어 그들과 함께 수작하기를 바랐지만 모든 여자들이 아이종〔小奚〕을 보내 대신 받게 하니, 유씨가 도모했던 것을 크게 잃게 되고 주고 또 주어서 거의 한 근이나 되는 담배를 잃었다. 내가 자겸과 함께 유성이 있는 곳에 이르니 일승(馹丞 역승을 가리킴)의 집이었다. 태자하가 가까이 있어서 하수가 넘실넘실 흘러가고 있었으니 긴 다리가 그 위에 걸쳐 있었고 빈 배가 그 물가에 가로놓여 있었는데 경치가 또한 아름다웠다. 신성이 하수 밖 동북쪽에 있는데 구불구불 굽어 있었으니 주위가 십여 리나 되었다. 또 거기에서 멀리 동남쪽을 바라보자 촘촘한 산이 푸르고 산봉우리들이 짐승의 뿔과 같이 뾰족하여 헤아리기 어렵고 몇 군데의 사냥불이 맑은 안개 속에 보였다 안 보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천산(千山)이었다. 여기에서의 거리가 80리나 되고 왕복하려고 하면 사오 일간이나 걸려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혼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감히 마음을 먹지는 못하였으나 참으로 서운했다.

◯8일 책문의 안에서 머물렀다

◯15일 책문 밖에서 머물렀다. 사람과 말이 비에 푹 젖었으니 장막이 새서 곧 군대가 다닐 때 즐풍목우(櫛風沐雨)와 같았다. 막사 안에서 꼼짝 않고서 누워 있다가, 혼자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거적을 막사 위에다 올리니 물이 쏟아 붓는 것처럼 새는 것을 면했다. 세관이 이른 아침에 문을 열고 나와 연복 두어 개를 점고하고, 비가 내려서 도로 들어왔다. 밥을 먹은 뒤에 비가 잠시 개자 아버지께서 수역으로 하여금 세관을 재촉하여 나와서 점고를 다 마치도록 하였다. 장사를 하는 오랑캐와 복주들이 물건 값을 결정하지 못하고 먼저 산적피(山赤皮 여우 가죽)를 책문 안으로 들여놓았다. 아버지께서 흰죽을 드시고 아침밥을 조금 드셨으며 저녁밥은 반 그릇을 잡수셨다.

◯19일 책문 밖으로부터 출발을 하여서 온정평(溫井坪)에 이르러서 잠을 잤다.

◯20일 온정평으로부터 출발을 하여서 구련성에 도착해서 아침밥을 먹고 의주에 도착했다. 새벽이 되자 추위가 심하여서 잠을 못자고 엿들어 보니 사방에서 모두 춥다고 소리를 질렀다. 도척으로 하여금 죽을 쑤게 하여서 일행들에게 나누어 먹이게 하였다.

◯21일 동헌으로 나아가시어 부윤과 함께 개좌(開坐)하여 경포(京包) 몇 짝을 추생하여 보고 부윤에게 부탁을 해서 다 검열을 하라 하셨다. 사모(私帽)로써 낙은한 자를 핵출(覈出)하여 죄를 따져 물었는데 복주(卜主)인 정명희가 2천 냥이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한 차례 때렸다. 그 나머지 이용석(李龍錫)과 홍운태(洪運泰)는 많은 자는 4백 냥이었고 적은 자는 2백 냥이었으니 많고 적은 것을 참작해서 10대를 때렸다. 정명희의 공초 안에 역관(譯官) 안세제(安世濟)의 낙은에 관한 일을 만성 양기(萬盛楊記)에서 들었다고 하였으므로 잡아들여다가 대면을 하고 물어 보니, 안세제가 말이 어눌해서 대답을 하지 못하기에 곤장을 다섯 대를 때리고 이정필과 이명백은 자백한 것을 참작해서 세 대를 때렸다. 수역은 검사하여 신칙하지 못한 죄로써 잡아들여다 분부하였으며, 만상 군관 박오상은 실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감춘 죄로써 10대를 때릴 것을 결정하였다.

◯27일 정주로부터 출발해서 납청정(納淸亭)에 이르러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가산(嘉山)에 이르러서 잤다. 밥을 먹은 뒤에 출발하여 납청정에 이르렀다. 정주에서 미음을 내와 먹고 나서 오후에 가산의 가평관(嘉平館)에 이르니 군수 이영보(李永輔)가 와서 만나 보고 공경의 뜻을 보여서 일행 중에 하속에 이르기까지 아침저녁으로 먹이는 것을 모두 직접 점검을 했다. 아버지께서 계고를 드셨다. 기녀인 명애(明愛)는 중구씨(仲舅氏 둘째 외숙)가 아끼던 사람이기에 상을 물려서 그녀에게 주었다.

◯30일 순안으로부터 길을 출발해서 평양(平壤)에 이르러서 잤다. 날이 샐 무렵에 출발해서 평양에 이르러서는 먼저 기자묘(箕子墓)에 나아가 아버지께서 홍전문(紅煎門) 밖에서 가마에서 내려서 견여를 타고 문 안에서 견여에서 내려서 조금 쉬셨다.

●4월

◯5일 송도에서 출발해 장단(長湍)에 이르러 점심밥을 먹고 파주(坡州)에서 말을 먹이고 고양(高陽)에서 잤다. 새벽에 배행하는 원역이 모두 먼저 떠나고 오직 변광보와 이형윤이 뒤를 따랐다. 장단에 이르러 동헌에서 머무르니 부사 심인희(沈仁希)가 와서 뵙고 파주에 이르러 질청(秩廳 고을의 아전들이 직무를 보는 곳)으로 들어가니 목사(牧使)인 삼종숙(三從叔) 명중(明中) 씨가 휴가를 받아 서울에 올라갔다. 고양 혜음현(惠陰峴)에 이르러서는 순노(順奴)가 맞이해서 뵙고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해 주고 말하기를, “그저께 진연(診筵)에서 상감께서 서장관이 들어오는 시기를 물었습니다.”라고 한다. 횃불을 사르고 벽제참(碧蹄站)에 이르자 진량(振良), 흥성(興晟), 순경(順慶), 곤치(串致)가 마중 나와 배알하였다. 질청에 머무르니 군수 이태원(李泰遠)이 휴가를 받아 상경하였으며, 변광호, 이형윤 두 사람의 역관이 밤중인데도 먼저 출발하였다.

◯6일 고양에서 길을 떠나 홍제원(洪濟院)에서 조금 쉬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일찍 일어나자 개성경력(開城經歷) 변치명(邊致明)의 첩보 안에 16세의 종사(從事)가 본부(本府)의 산림동(山林洞)에 이르렀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혼질(昏窒)하여 죽었다. 그런 까닭으로 마부와 보종(步從)을 형틀에 씌워서 엄하게 가두고 죽은 사람 주머니 속의 서간을 올려 보냈다고 하였다. 그 서신을 살펴보자 홍덕윤이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참담하고 애석하게 하였다. 아버지께서 명령으로 감옥에 가두어 두었던 역인을 놓아 주고 또 말을 달려서 사역원에 통지하게 하였다. 양철(陽喆)의 들판에 이르자 아우 이상귀(李商龜)가 맞이하여 배알하였으며 홍제원에 이르자 선달(先達)인 종숙(從叔), 이양직(李養直)과 이상발(李商發), 해득(亥得), 양봉주(梁鳳周)와 문택중(文宅中), 홍장복(洪長福), 임대욱(林大郁), 헌부(憲府)에서 근무하는 이례(吏隷)가 마중 나왔다. 원(院)에 앉아서 잠깐 이야기하다가 아버지께서 입었던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신문(新門) 밖의 개인 집에 머물렀다. 나는 아우 이상준(李商駿)과 함께 말을 나란히 하여 집으로 들어가자 어머니가 중문(中門)에서 나와 웃으며 맞이해 주셨는데 정신과 기력이 작년에 뵐 때보다도 덜해지지 않으셨으니 매우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왕복하는데 달수로 6달이니 모두 154일이었고, 가고 오는 노정이 모두 6,222리였으며, 연경에서 출입한 것과 길을 우회한 것이 또 460리였으니 합치면 6,782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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