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암이원정연행록(歸巖李元禎燕行錄)
이원정(李元禎 1622-1680)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징(士徵), 호는 귀암(歸巖). 아버지는 도장(道長)이며, 어머니는 김시양(金時讓)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며, 큰 학자였던 할아버지 윤우(潤雨)에게도 수학하였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를 거쳐 1652년(효종 3)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검열·교리를 지내고 1660년(현종 1)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다. 1670년 청나라에 사은부사로 다녀왔으며, 1673년 도승지, 1677년(숙종 3) 대사간·형조판서를 지냈다.
1680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에 경신대출척으로 초산에 유배가던 도중에 불려와 장살당하였다. 9년 뒤인 1689년 신원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원된 뒤에도 여러 차례 정국의 변화에 따라 추탈(追奪)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귀암문집』이 있으며, 편저에는 『경산지 京山志』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귀암집 제11권
■1659년(현종 즉위년, 기해)
●11월
◯15일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 1635-1673)를 사은 정사(謝恩正使)로, 행 대사간(行大司諫) 정지화(鄭知和 1613-1688)를 부사(副使)로, 응교(應敎) 이시술(李時術)을 서장관(書狀官 1606-1672)으로 계하(啓下)하다.
◯17일 서장관 이시술과 부사가 상피(相避)되어 대신하여 홍주 목사(洪州牧使) 성후설(成後卨 1615-1673), 장성 부사(長城府使) 이원정(李元禎1622-1680), 전 사간(前司諫) 이후(李垕1611-1668)를 의망(擬望)하여 입계(入啓)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수령(守令)으로 비의(備擬 의망(擬望))한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니, 승지(承旨) 오정위(吳挺緯)가 대답하기를, “외직에 있는 이를 제외하면 아무 일 없는 사람이 매우 적기 때문에 부득이 의망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이번 영송(迎送)은 폐단이 몹시 크다.”라고 하니, 오정위가 대답하기를, “성상(聖上)의 하교가 진실로 마땅합니다. 이번 영송의 폐단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애초에 사신(使臣)을 정밀하게 선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불초한 소신(小臣)이 부의(副擬)로 낙점 받았으니 아마도 임금께서 춘궁(春宮 동궁(東宮))에 계실 때 외람되이 주연(冑筵)에서 모신 지 오래였기 때문인 듯하다.
■1660년(현종 원년, 경자)
●1월
◯20일 사대(查對)가 끝나자 상사(上使 정사(正使))와 부사는 먼저 길을 떠나고, 나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이세화(李世華)와 함께 앉아 자문(咨文)과 주문(奏文)을 감봉(監封 물건을 싸서 봉(封)하는 것을 감시하는 일)하였다. 우의정(右議政)과 오 사재(吳四宰)가 안현(鞍峴) 길 왼편에 막차를 설치하고 사람을 보내어 보자고 하기에 들어가 뵙고 나왔다. ...조금 늦게 출발하여 병조 판서 정치화(鄭致和)의 의막(依幕)을 차례로 방문하니 이시술 사강(士强), 정만화(鄭萬和) 일운(一運)이 함께 있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곧장 나와서 고양군(高陽郡)에 묵었다. 초저녁에 부사(副使)가 이어서 오고, 밤이 깊어 상사(上使)가 비로소 도착했는데 모두 만취하였다고 한다. 군수(郡守) 심억(沈檍)이 나와서 기다렸다. 이문상(李文相)과 신서(申曙)가 와서 만나 보았다. ※정사는 26세. 부사는 48세, 서장관은 39세이다.
◯25일 저녁에 풍천, 안악의 두 사또와 함께 부사의 숙소에서 술을 마시다가 상사의 처소로 옮겼다. 나 또한 상사, 부사의 강권으로 술을 조금 마시고 만취하였으니 우습다. 취한 뒤에 역관들에게 바둑을 두게 하고 구경하다가 닭이 3번 울고서야 흩어져 나갔다. 풍천 사또와 함께 잤는데 홍명하(洪命夏)가 전장(銓長 이조 판서(吏曺判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26일 대동강(大同江)에 이르러 상사, 부사, 방백(方伯 관찰사(觀察使)) 및 평양 판관(平壤判官)과 함께 누선(樓船 다락이 있는 배)을 타고 술을 마시며 노닐다 강을 건넜다. 이곳은 기자(箕子)의 옛 도읍으로 붉은 난간과 그림이 그려진 용마루, 높고 큰 누각이 성(城) 안에 가득하고 구불구불 큰길, 땅에 즐비한 여염집, 나루에 가득한 배와 아득히 뻗은 평평한 수풀, 도도히 흐르는 큰 강은 마땅히 우리나라 제일의 명승이다.
◯28일 숙천(肅川)에서 이른 아침을 마련해주었다. 사시(巳時 오전 9시 ~11시)에 안주(安州)에 들어가서 병사인 외삼촌(김휘(金徽 1607-1677))과 외숙모〔姑氏 양천 허씨〕를 배알하였다. 여러 해 이별한 뒤라 기쁘고 위안됨을 어찌 헤아리겠는가마는 종제(從弟) 김두현(金斗賢)이 요절한 후로 처음 뵙는 것이었다. 외숙모는 자신도 모르게 통곡하며 실성하였고, 외삼촌과 나도 마주 보며 눈물을 흘렸다.
●2월
◯2일 재종조(再從祖)인 생원(生員) 이시행(李時行)은 올해 85세로 외삼촌께 걸식(乞食)하고자 평산(平山)으로부터 5일을 걸어서 그저께 도착하였는데, 노망기가 심하였다. 잠시 관덕정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하처로 돌아왔다. 날이 저물자 통판이 나를 위해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외삼촌과 김질, 이흠선 두 숙부가 동석하여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8일 의주에 그대로 머물렀다. 오후에 상사가 부사의 하처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 초대하여 부윤(府尹 의주 부윤 민희)과 함께 가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왔다. 또 부윤과 함께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닭이 울고 난 뒤에 나란히 누워서 잤다. 개천 사또, 희천 사또가 와서 만나 보았다.
◯아침에 집에 보낼 편지와 서울에 보낼 편지를 봉하고, 밥을 먹은 뒤 동소문(東小門)을 나섰다. 압록강가의 막차에 들어가 부윤과 함께 방물을 점검하고 조금 늦게 강을 건넜다. 상사, 부사, 부윤, 개천 사또와 강 언덕 아래에 누선(樓船)을 대고 술을 몇 잔 마셨다. 배에서 내려 출발하여 중강(中江)에 이르니, 차원인 청성 첨사(靑城僉使)가 배를 정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삼강(三江)에 이르자 물이 얕아 여울을 건너고 여울 가에 장막을 설치하니 저녁밥을 내어왔다. 이곳이 바로 명나라의 구련성(九連城)이다. 희천 사또 김신광, 곽산 사또 최명후가 압록강 막차에서 작별을 고하였다.
압록강ㆍ중강ㆍ삼강은 그 원류가 각각 다르지만 하류에서 합류한다. 멀지 않은 곳에 압록강 나루 입구가 있는데 상류에는 구룡연(九龍淵)이 있고 구룡연 위에 연대(烟臺)가 있으며, 하류에는 천가장(千家莊)이 있다. 구련성은 삼강가에 가까이 있고 성은 모두 벽돌로 쌓았는데 사람들이 거처한 터가 완연하다. 중강 동쪽은 우리나라의 경계이고, 서쪽은 저들(청나라)의 경계이다. 통군정이 눈앞에 아득한데 차가운 산은 서글프고 달빛은 또렷이 밝으며 마른 갈대는 들에 가득하고 평원(平原)은 한없이 펼쳐져 있다. 가끔 호랑이와 표범이 수풀 사이를 오가는데 많고 적은 경치가 닿는 곳마다 슬픔이 일어나서, 부모와 이별하고 고향을 떠난 시름이 이곳에 이르러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상사와 부사가 술을 마시다가 잠시 뒤 각기 나에게 한 잔 권하였다. 간곡히 사양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마시자마자 잔뜩 취해서 부사의 장막에 쓰러져 누워 얼음을 많이 부수어 먹었다. 상사가 쫓아 와서 마구 괴롭히며 손으로 때리기도 하였다. 잠시 뒤 부사를 데리고 그의 막차로 옮겨 가는데 나는 거짓으로 따라가는 것처럼 하다가 몰래 나의 막차로 돌아왔다. 늦은 밤 깊이 잠든 뒤 상사와 부사가 모두 이르러 발로 차 일으켜 피곤이 극에 달하였다. 한참 있다가 흩어져 돌아갔다.
◯10일 해 뜰 무렵 상사가 또 와서 만나고 길을 떠났다. 20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렀는데, 지명이 가음복(家音福) 【걈복】 이었다. 길 왼편에 큰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상사의 궁노(宮奴) 귀일(貴一)은 곧 성주(星州) 기생 득금(得今)의 아들로 궁가(宮家)에 사패(賜牌)된 자이다. 사람됨이 총술(銃術)에 뛰어나 처음에는 호랑이인 줄 모르고 탄환을 쏘았으나 뒷다리를 맞히니 호랑이가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면서 점점 앞산으로 갔다. 일행이 모두 말에서 내려서 앉아 한 군뢰(軍牢)에게 살펴보기를 재촉하니, 만상(灣上 의주)의 호행 포수(護行炮手) 8명이 귀일과 함께 길 앞을 막고 상사의 편비인 전 영변 부사(前寧邊府使) 박형(朴詗) 영감의 명령으로 가서 도모하였는데, 호랑이는 도리어 수풀 속에 엎드려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가까이 가면 물릴까 두렵고 느슨하면 잡기 어려워서 먼저 근처에 불을 놓고 또 천아성(天鵝聲)을 불면서 그 뒤를 쫒자, 호랑이가 어쩔 수 없이 다시 일어나 산등성을 뛰어 올랐다. 웅장하고 용맹한 기상이 일찍이 조금도 꺾임이 없었다. 포수들이 앞에서 기다렸다가 일제히 5발을 쏘니 성을 내고 울부짖으면서 빠르게 달아나 소리가 산악을 진동하였다. 포수들이 다시 길 앞을 막고 일제히 발포하니 호랑이가 탄환에 맞고 더욱 성을 내며 두 발로 나무를 끌어다가 다시 씹어서 부러뜨렸다. 울부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으나 포환을 계속 맞고 드디어 죽었다. 통쾌하게 장관이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빈 말에 싣고 떠났다.
◯12일 아침에 출발하여 20리쯤 지나 냇가에서 아침을 먹었다. 송참(松站) 찰원에서 잤는데 누추함이 봉성(鳳城 봉황성(鳳凰城))보다 조금 나았다. 저녁에 상사와 함께 바둑 5국(局)을 두고, 부사와도 바둑 2국을 두었다. 나는 또 상사와 함께 쌍륙(雙陸) 한 판을 하였다. 이날부터 봉성 아역(衙譯 통역을 담당한 차통관(次通官)) 문금(文金)과 마패(馬牌) 이하 청인 40명이 호행(護行)하여 앞서거나 뒤서거나, 말을 타거나 걸어서 갔다. 이른바 문금(文金)은 곧 우리나라 가산(嘉山) 사람으로 사로잡힌 자이다.
◯23일 장진보(壯鎭堡)를 지나는데 두 여자가 길가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한 여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나라 서소문(西小門) 근처에 사는 박 좌랑(朴佐郞)의 서녀(庶女)로 조부는 박 보덕(朴輔德)인데 어릴 때 사로잡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오늘 고국 사람을 만나게 될 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소리 내어 통곡하며 눈물을 비처럼 흘리고 나머지 한 여자는 옆에서 눈물을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일행들이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길을 가던 중이라 증정할 만한 물건이 없어 간절히 한탄만 할 뿐이었다. 여양역(閭陽驛) 성 밖에서 아침을 먹고, 십삼산(十三山) 성 밖 찰원에서 잤다. 사로잡힌 우리나라 사람들이 곳곳에서 찾아와 만나 보았다. 대개 동쪽 길에 비옥한 토지가 많이 버려져 있었으므로 여러 해 전 북경에서 깊숙한 곳으로 이주시켜 백성들을 연로에 살게 하고 밭을 나누어 귀농하게 하였으니, 박씨 여자가 고국 사람을 처음 본 것과 같은 경우는 이 때문이다.
◯24일 소릉하(小凌河) 냇가에서 말을 먹이고, 송산(松山)을 지나 행산(杏山)에서 잤다. 두 곳 모두 황폐한 보(堡)가 있다. 행산 동쪽에 도공 보장비(塗公堡障碑)가 있고 소릉하 서북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에 금주위(錦州衛)가 있다. 정 영상(鄭領相 영의정(領議政) 정태화(鄭太和))의 여종인 수대(遂代)는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14)에 사로잡혀 왔는데 지난번 동지사(冬至使)의 행차에서 정 영상이 부사로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닭과 술을 가지고 와 알현하여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울면서 눈물을 비처럼 흘렸다.
◯27일 고령(高嶺)에서 아침을 먹고, 산해관에 도착하였다. ...역관 서효남(徐孝男)에게 세족(世族)의 글 배우는 아이를 찾아가게 하여 3인을 초청하였는데 어무조(於懋祖) 17세, 손창윤(孫昌胤) 15세, 이성린(李成麟) 12세로 모두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자제였다. 어무조는 매우 영리했고, 손창윤은 대단히 총명했으며, 이성린은 몹시 단아하여 모두 사랑할 만하였다. 역관들을 두고 통역하게 하고 통역하여 이해되지 않는 것은 각각 문자로 써서 보여 주었다. 밤이 깊어 인사하고 떠날 때 술과 과일을 대접하고 종이, 붓, 먹을 주고 전송하였다. 길에 낙타 3마리에 짐을 싣고 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여러 말들이 모두 놀랐다. 밤에 비가 내렸다.
●3월
◯7일 아침에 길을 떠났다. 경성(京城)과 20여 리 떨어져 있으나 벌써 인가가 즐비하고 여행객이 길에 가득하였다. 붉게 단청한 누각이 수십 리에 이어지는데, 청기와로 덮은 것이 매우 많았다. 수레바퀴가 서로 부딪히고, 사람의 어깨가 서로 닿을 지경이었다. 성 동쪽 문 5리 안에 황제묘(皇弟墓)가 있다. 무덤 위에 큰 집을 지었는데 또한 청기와로 지붕을 덮었으며, 동우(棟宇)와 낭무(廊廡)의 웅장함이 궁궐과 같았다.
동악묘(東嶽廟)에서 아침을 먹었다. 동악묘는 바로 동방의 청제(靑帝)의 신사(神祠)이다. ...밥을 먹은 뒤 관디(冠帶)를 정돈하고, 조양문(朝陽門)을 따라 들어가 10여 리를 걸어서 옥하관(玉河館)에 들어갔다. 성 안 시장과 인물의 번화함, 궁궐과 해우의 웅장하고 화려함, 형형색색의 무궁함, 중중첩첩(重重疊疊)의 경치는 문자로 기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모두 생략한다.
◯10일 대통관 이일선이 멋대로 까불면서 징색(徵索 돈이나 곡식을 강제로 요구하는 일)하기를 끝없이 하니, 머리털을 뽑아 주벌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13일 상ㆍ부사〔二使〕와 함께 종일 바둑을 두었는데, 상사는 겨우 몇 국(局)을 이겼고, 부사는 1승도 거두지 못하였다. 저녁을 먹은 후, 여러 편비와 역관에게 씨름을 하게 하니, 허종민은 연달아 5인을 이겼으나 박창원(朴昌元)이 결판을 내었다. 저녁에 문을 지키는 청인에게 말을 전하여 문을 열게 하고 상ㆍ부사와 함께 걸어 나가 길거리를 소요(逍遙)하다가 의자에 앉아 잠시 뒤에 돌아왔다. 의자를 놓고 뜰에 앉아서 장현, 박유기, 변충일에게 번갈아가며 시를 읊게 하고는 술을 마시며 웃고 즐겼다.
상ㆍ부사가 함께 취했다. 밤이 이미 깊었는데 나는 본래 술을 마시지 않는데다 자꾸만 추워져서 먼저 들어가 누워 잤다. 상사가 양제신(梁濟臣)에게 나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내가 거짓으로 코를 골며 자는 체하고는 궤안(几案)에 기대어 응하지 않았다. 잠시 뒤 깊이 잠들었는데, 상ㆍ부사가 갑자기 들어와 곤한 이를 범하여 나를 깜짝 놀라게 하였으나 나는 이런 근심이 있을 줄 예상하여 처음부터 옷을 벗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전도(顚倒)됨을 면할 수 있었다. 상ㆍ부사가 함께 양손을 잡고 다그치며 나가서 앉게 하고는 마주하여 놀리고 잠시 뒤에 잤다. 닭이 이미 두 번 울었다.
◯14일 상사는 연이어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하였다. 또 원역에게 씨름을 하게 하였는데, 박지겸이 결판을 내어 은 5냥을 상으로 주자 다시 펄쩍 뛰며 기뻐하였다. 여러 하인과 장사치 중 세수를 하지 않고, 관건(冠巾)을 쓰지 않은 자를 샅샅이 찾아 곤장을 쳤더니, 쑥대머리에 귀신같은 얼굴을 한 무리가 일시에 깨끗해졌고 관건을 잃어버린 자들은 구입해서 쓰는 데 이르렀다. 술도 도와줌이 없지 않으니 가소롭다.
◯25일 예부에서 연향을 행하자, 상사, 부사 이하 원역이 모두 나아가 참여하였다. 상서 조흑(鳥黑)이 연향을 주관〔押宴〕하여 먼저 대궐문〔闕門〕을 향해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였다. 상서는 앞줄에 자리하고, 삼사는 상서의 뒤에 자리하며, 중사는 삼사의 뒤에 자리하고, 원역은 중사의 뒤에 자리한다. 예를 마치자 상서가 제배례(除拜禮)를 명하여 다만 서로 읍(揖)한 후에 상서는 주벽에, 사신들은 서벽(西壁)에서 차를 마시고 술과 안주를 내어 두 순배를 돌고 파하였다. 또 대궐을 향해 일배삼고두(一拜三叩頭)를 행하고 다시 상서와 함께 서로 읍하고 나와서 관소로 돌아왔다.
※황제는 세조 순치제(1643-1661)
●4월
◯2일 원역과 장사치들이 처음으로 재화(財貨)를 교역하였다.
◯3일 밥을 먹은 뒤에 예부에서 회자(回咨 명령이나 요청에 대해 회답하는 자문(咨文))를 보내어 비로소 길을 떠나 장안가(長安街), 광인가(廣仁街)를 지나 성 동문(東門)을 나섰다. 통주(通州) 찰원에서 잤다. 길에서 남방(南方)의 수령(守令)으로 부임하는 자를 보았는데 짐을 실은 수레가 매우 많았다.
◯8일 아침에 길가에서 여자가 궁대(弓袋 활집)를 차고 말을 타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청나라의 풍속이 이와 같다고 한다. 사로잡힌 우리나라 개성(開城)의 늙은 여자와 남양(南陽)의 여자가 사하역에 와서 만나 보았다. 소녀가 말하기를, “이곳에 온 후 함께 사로잡힌 김용백(金龍伯)에게 시집가서 자녀를 많이 낳은 뒤에 김용백이 본국으로 도망해 돌아가서 과부로 지내기가 힘듭니다.”라고 하고는 눈물을 비처럼 흘리며 슬픔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다. 상사, 부사가 술잔을 잡을 때 노래 몇 곡조를 불렀는데 국상〔國恤〕 중이라 감히 들을 수 없다며 사양하니, “사로잡힌 천한 여자가 어찌 마음 상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마음이 참으로 서글프다. 행중에서 전두(纏頭)의 비용을 주자, 두 여자가 모두 입이 마르도록 사양하였다.
저녁에 상사의 하인들이 사하역 성 동쪽 사하(沙河)에 그물을 던져서 물고기를 많이 잡아왔는데 회를 뜨고 굽고 탕을 만드니 모두 아주 맛있었다. 만상(灣上) 마종(馬從 말구종) 1인이 갑자기 달아나 향한 곳을 알지 못하여 일행 중 하인들〔下輩〕과 호행 청인들이 샅샅이 수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밤늦게 돌아와 박 영변(朴寧邊 박형(朴詗))에게 스스로 고하기를, “북경에 있을 때 청인에게 빚을 졌는데 그 사람이 따라와서 독촉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선 피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일이 비록 딱하나 죄 또한 가볍지 않다. 날씨가 몹시 더워서 괴로움을 참기 어렵다.
◯23일 이른 아침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고평(高平)에서 잤다. 반산으로부터 동쪽은 샘의 근원이다. 말라버려서 사람과 말이 모두 갈증을 겪었고 상사의 증세는 오히려 심해졌다. 하루에 겨우 일식정(一息程 30리)을 가는 데 불과하니 근심을 말할 수 없다. 부사와 함께 상사의 숙소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27일 이른 아침을 먹은 뒤에 부사의 하처를 방문하니, 그 집주인의 아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나라 관리의 딸로 7살 때 사로잡혀 와서 아버지의 성명과 거주지, 고국의 방언(方言)을 모두 알지 못하는데, 운산(雲山)이나 은산(殷山) 중 한 고을인 듯하나 자세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비로소 고국 사신〔使華〕의 행렬을 보니, 저도 모르게 슬픔이 밀려와 가슴이 멥니다.”라고 하고는 눈물을 비처럼 흘리니 매우 불쌍하고 가여웠다.
◯부사의 양자(養子) 정재희(鄭載禧)가 식년시(式年試) 강경(講經 : 과거(科擧)에서 경서(經書)를 강론하던 것을 말한다. ‘강서(講書)’라고도 한다. 시관(試官) 앞에서 사서오경(四書五經) 중 지정된 부분을 읽고 해석한 뒤 시관의 질문에 대답하는 구술시험이다. )에서 15분(分)을 받았고, 영상(領相 영의정 정태화)의 아들 정재숭(鄭載嵩)이 강경에서 16분을 받아 일행이 함께 축하하였다. 이 소식은 영상의 사서(私書)에서 나온 것으로 편지를 보낸 때는 강경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동생을 위해 혹시라도 요행을 바라는 마음 없지 않으나 끝내 낙방하는 데 이르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조용할 리가 없을 것이니 통탄스러움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5월
◯1일 선래 군관(先來軍官) 박창원(朴昌元)이 서울에서부터 돌아와 맞이하여 탕참(湯站) 앞길에서 만났다. 방목(榜目)을 보고 또 변선남(卞善男)의 고목(告目)을 보고는 동생(이원록(李元祿))이 《역경(易經)》에서 낙방한 것을 알게 되었다. 분명 〈계사전(繫辭傳)〉을 만났을 것이니 통탄할 일이다, 통탄할 일이다. 참의(參議) 윤선도(尹善道)가 대왕대비(大王大妃)의 기복(朞服)이 잘못 되었다고 소(疏)를 올려 양송(兩宋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예(禮)를 논한 잘못을 아뢰었는데 말에 과중(過重)이 많아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안율(按律 죄를 조사하여 다스림)하라는 논의까지 나왔다고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경악하게 만든다.(기해예송) 신후재(申厚載)가 강경에서 16분(分)을 받았으니 기쁨을 알 만하다.
◯2일 이른 아침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마전령(馬轉嶺) 아래에서 아침을 먹고, 구련성(九連城) 가에 이르렀다. 통군정(統軍亭)과 정자 아래의 인가를 바라보니 마음이 날아오를 듯하여 새장을 벗어나 구름길을 나는 것과 같았다. 삼강(三江)에 이르니 의주 군관이 와서 백립(白笠)을 전해 주었고, 중강(中江)에 이르니 청성 첨사(靑城僉使) 독고의(獨孤義)가 배를 대고 강 건너는 것을 호행하였다.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니 부윤(府尹 의주 부윤 민희(閔熙)) 영감이 배 위에서 맞이하여 악수하면서 서로 보니 딴 세상사람 얼굴〔隔世面目〕을 보는 듯하였다. 차사원(差使員)인 용천 부사(龍川府使) 황호(黃浩), 운산 군수(雲山郡守) 심서(沈緖), 어천 찰방(魚川察訪) 원격(元格)이 와서 기다렸고, 태천 현감(泰川縣監) 이우(李藕)도 병참관(並站官)으로 와서 기다렸다.
◯4일 오늘은 곧 효종 대행 대왕(孝宗大行大王)의 초기(初朞) 날이다. 닭이 처음 울자 사신(使臣) 이하 수령(守令), 중사(中使), 원역(員譯) 및 본부(本府)의 유품(儒品)이 중대청(中大廳)에 모여서 뜰 동ㆍ서문(東西門) 안팎으로 나뉘어, 먼저 최복(衰服 상복)을 입고 들어가 곡을 하며 사배(四拜)하고 나와서 연복(練服)으로 갈아입고 다시 들어가 곡을 하며 사배하고 나왔다. 상ㆍ부사와 중사의 연복은 의주에서 마련해 왔고, 내가 입은 연복은 병영(兵營)에서 준비해 보내 주었다.
◯8일 평양성 서쪽에 이르러 기자묘(箕子墓)를 배알하였다. ...서별관에서 잤다. 이날 160리를 가서 피곤함이 몹시 심하였다.
◯11일 이른 아침을 먹은 뒤 길을 떠나 개성부(開城府)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12일 날이 밝기 전에 윤계형과 작별하고 고양 앞길에 이르렀는데 상사의 행차는 이미 출발하였다. 군재(郡齋)에서 아침을 먹었다. 군수 심억(沈檍)이 나와서 기다렸다. 전석현(磚石峴)에 이르러 수사(水使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중신(李重信)이 길 왼쪽에서 부사를 영접하기에 말에서 내려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홍제원(弘濟院)에 들어가자 형부 상서(刑部尙書) 홍중보(洪重普), 도사(都事) 정재후(鄭載厚), 선달 정재숭(鄭載嵩), 수찬(修撰) 김만균(金萬均) 정평(正平)이 와서 맞이하였다. 정평과 함께 두 선달(정재희와 정재숭)을 불러 진퇴(進退)하게 하였다. 상의원(尙衣院)에서 술상을 내어오니 부사가 본원의 제조(提調)이기 때문이다. 경영고(京營庫)에 이르러 관디를 정돈하고 금중(禁中)에 복명(復命)하였다.
※진퇴(進退) : 새로 과거에 합격한 사람을 상급 관원이 부를 때 얼굴에 물감을 칠하고 두 사람이 두 팔을 잡고 ‘신래(新來)’를 부르며 상관의 앞으로 나아갔다 뒤로 물러갔다 하는 것이다
▣귀암집 제12권
■1670년(현종11, 경술)
●7월
◯6일 서장관(書狀官) 조세환(趙世煥 1615-1683)과 도사(都事) 이우정(李宇鼎), 부윤(府尹) 황준구(黃儁耉)가 먼저 압록강(鴨綠江) 가에 나가서 인마(人馬)를 점검하였다.상사(上使 정재륜(鄭載崙 1648-1723))는 밥을 먹은 뒤 길을 떠나고 나는 이어서 소동문(小東門)을 나서 적소(謫所 유배지)에서 재령(載寧 재령 군수) 이온(李溫)의 적소를 방문하고 드디어 강 언덕의 막차(幕次)에 이르러 점심밥을 먹었다. 점검이 끝나자 부윤이 전별(餞別) 주연(酒宴)을 베풀어 주었다. 증산 현령(甑山縣令) 황도광(黃道光)도 상사의 당숙(堂叔)으로 와서 자리에 참석하였다. 술을 몇 잔 마신 뒤 작별하고 배에 오르니 기녀들이 물가에서 전송해 주었다. 옛날에 알던 늙은 기녀가 눈물을 흘리며 전별해 주는 이가 많았는데 이 고을 사람이 남쪽 언덕에서 피리를 불며 전송하는 소리가 매우 비장하여 마음이 또한 슬퍼졌다. ...중강의 동서는 곧 우리나라의 강역과 저들의 경계가 나뉘는 곳으로, 강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갈대가 하늘에 가득하고 좁은 길이 이리저리 나 있으며 진흙탕에 무릎이 빠져 사람과 말이 모두 곤란을 겪는다. 5리 쯤 가면 또 적강(狄江)이 있는데 물이 얕아 강물에 뛰어들어 건넌다. 압록강, 중강, 적강은 근원이 각기 다르지만 하류에서 만나 하나가 된다.
◯9일 봉성에 머물렀다. 상사와 종일 이야기를 나누다가 쌍륙 놀이를 하기도 했는데 서장관이 옆에 앉아 구경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잡기(雜技)가 떡 훔쳐 먹고 오리발 내미는 것〔竊餠之看證〕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서장관 조세환(趙世煥, 1615~1683)의 일기는 현재 《조세환일기(趙世煥日記)》라는 서명(書名)으로 전한다. 필사본 2책. 규장각 소장이다. 《조세환일기》는 조세환이 1647년부터 1680년까지 쓴 일기를 모아 엮은 책으로, 여기에 1670년 연행 당시의 일기가 노정에 따라 ‘경술년부연도강이전일기(庚戌年赴燕渡江以前日記)’, ‘경술연행월강이후일기(庚戌燕行越江以後日記)’, ‘경술시월연행복명후일기(庚戌十月燕行復命後日記)’라는 제목으로 나뉘어 실려 있다.
◯19일 아문 북쪽 여염집의 나이 15, 6세 정도 되는 소녀가 의상(衣裳)을 성대하게 하고 연지와 분〔紅粉〕으로 꾸미고서 담장 머리에 서서 두 사신의 행차를 살펴보는데 곱고 옥같이 깨끗한 자태와 환하고 아름답고 고운 모습이 꼭 봄꽃이 이슬을 머금고 가을 파도가 달을 비치는 듯하였다. 일찌감치 이 여자를 서울〔京國〕에 살게 하였다면 서시(西施)와 태진(太眞 양귀비(楊貴妃))은 분명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니, 하나로 셋을 반추해 보자면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도 인멸되어 일컬어지지 않은 이 여자와 같은 사람이 어찌 한정이 있으리오. 일행 상하가 크게 놀라 뛰어나다〔奇〕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고 비록 여색(女色)에 뜻이 없는 내시〔中使〕일지라도 감탄하는 소리가 또한 입에서 끊이지 않으리니 참으로 경국지색이었다.
◯26일 상국(相國 정승) 정태화(鄭太和)의 여종인 수대(遂代)는 봉래상국(蓬萊相國) 정창연(鄭昌衍) 때부터 부리던 시자(使者 심부름꾼)이다. 일찍이 경자년(庚子年, 1660, 현종 원년) 사행 때 판서(判書) 정지화(鄭知和)가 부사였는데 닭과 술을 가지고 와서 맞이하여 절을 하며 통곡했었다. 지금 또 와서 상사를 알현하여 슬프고 괴로운 말을 많이 하니,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14) 난리 때 사로잡혀 그 집에 와서 사는데 거리가 10리라고 한다. 찰원 한인의 아내가 매 사행 때마다 역졸(驛卒)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억지로 몸값〔債〕을 요구하고 음란한 행동을 많이 하므로 갑군에게 말하여 문밖으로 내쫓으니 그 여자가 크게 한스러워하면서 갔다. 가소롭다.
●8월
◯9일 부사는 예전에 정당(正堂)의 오른쪽 온돌에 들어갔는데, 전후로 부사 중에 살아서 나갔다가 죽어서 돌아온 사람은 김휼(金霱), 민성휘(閔聖徽), 이익한(李翊漢) 3인이다. 이익한이 죽은 이후로 그 온돌을 폐하여 거처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미 4년이 지났다. 나는 서장관과 함께 북랑(北廊)에 거처하였다.
※김휼(金霱, 1594~1648)은 1648년(인조26) 동지 부사로 사행 도중 병으로 사망했고, 민성휘(閔聖徽, 1582~1647)는 1647년 사은 부사로 영평부(永平府)에서 병이 나 북경에 도착해서 사망했으며, 이익한(李翊漢, 1609~1668)은 1667년 동지 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10일 하인들 이백 수십 인이 압록강을 건넌 뒤부터 머리 빗고 세수하고 관과 두건을 쓰는 자가 없어 볼썽사납고 더러워 귀신같아 잡아다 곤장 3대씩을 쳤다. 대개 어제 이미 엄칙(嚴飭)을 내렸건만 오늘 명을 따르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깐 사이에 관중(館中)이 모두 새로워졌다. 한 사람이 요하(遼河)를 건널 때 전립(氈笠)을 잃어버려 거북처럼 움츠리고 피해 숨어서 방을 나오지 않으니 가소로웠다.
◯12일 서장관이 황제의 성(姓)을 알고자 해서 역관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오랑캐가 어찌 성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서장관이 반드시 알려고 해서 그치지 않으니, 곧 말하기를, “예로부터 오랑캐가 중국에 들어와 주인이 되면 중국의 성씨를 많이 썼으니, 시험 삼아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오늘 역관 방이민(方以敏)이 와서 알려주기를, “황제는 조씨(趙氏) 성을 씁니다.”라고 하였다. 서장관이 조씨이기 때문에 갑자기 변색하며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부사께서 나를 곤란케 하려고 그대들을 교유(敎誘)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이로군.”이라고 하니 방이민이 와서 말하기를, “순치제가 처음 성을 고를 때 《백가성보(百家姓譜)》를 취하여 고찰했는데 조(趙) 자가 첫머리에 씌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였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서장관이 고개를 떨구며 웃고는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내가 희롱삼아 말하기를, “외국 신하가 황제와 같은 성을 쓰는 것은 그대에게 있어서 영광인데 어째서 낙심하는가.”라고 하니 서로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25일 역관들이 방물을 가지고 궁궐에 바쳤다. 창고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넘쳐나고, 또 천리마를 기르는 별도의 마구간이 있다고 한다.
●9월
◯5일 사신 이하는 태화문의 서쪽 계단 아래에 앉아 있었고 오래 지나 해가 뜨고 음악이 연주되자 황제가 어탑에 나와 앉았다. 홍려가 의식 진행하는 소리를 전하면 새롭게 관에 제수된 400여 명이 먼저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하고 사신이 다음 차례로 하고, 천관이 또 다음 차례로 하였다. 행례(行禮)를 겨우 마치자 촉급하게 사신들을 계단에 오르게 하였다. 아역이 서쪽 뜰을 따라 인도하였고 꺾어서 북쪽으로 걸어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서 전문(殿門) 밖 서쪽 계단 위에 앉았다. 위로는 황제(성조 강희제 : 1661-1722)의 자리와 가까웠지만 전우(殿宇)에 깊이 그늘지고 금빛에 시선을 빼앗겨 자세히 살필 수 없었고 다만 날래고 건장하며 영특한 모습을 볼 뿐이었다. 하(蝦)에게 명하여 차를 제왕에게 올리게 하고 다음으로 사신에게 올리게 하였다. 차를 다 마시자 황제는 자리를 파하고 들어갔고 제왕과 천관도 파하고 나아갔다. 진말(辰末 오전 9시경)쯤에 옥하관(玉河關)으로 돌아왔다.
◯17일 지난밤에 또 취한을 하여 증세가 조금 진정되었다. 아침에 물에 밥을 말아먹고서야 상사를 찾아뵙고 짐을 꾸려 관문을 나가서 가교(駕轎)를 타고 창문을 닫고 떠났다. 기운이 매우 좋지 않아 구토할 지경이었지만 겨우 진정시켜서 통주(通州) 찰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10월
◯2일 관서(關西)에서 연경에 이르기까지 상사와 함께 쌍륙 놀이를 쉴 새 없이 하였지만 서장관은 쌍륙에 취미가 없어서 수수방관하였다. 내가 병에 걸린 날에 미쳐서 비로소 대국을 즐겼고, 내가 장기에 서툴지만 서장관에게 차(車) 하나를 빼고, 상사에게 차, 포(包), 졸(卒) 5개를 빼고도 내가 오히려 연승하였다. 내 병이 갑자기 심해지자 일행이 모두 걱정하여 잡기(雜技)에 뜻이 없는 지 오래되었다. 내 병이 차도가 있기를 기다리다 다시 쌍륙을 찾으니, 판(板)이 이미 깨져버렸다. 드디어 쌍륙판〔局戱〕을 다시 만들어 매번 행역 중 여유가 있을 때나, 아침과 점심을 먹을 때, 숙소에서 번갈아가며 서로 대국(對局)하니, 문득 먼 길을 떠나는 수고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서장관은 가장 이기기를 좋아하는 벽(癖)이 있었지만, 그다지 재주가 없어서 열에 한 번도 이기지 못하였다. 승부를 다툴 때면 반드시 분통한 말을 쏟아 부었다. 바둑을 잘 두는 역관들이 혹 옆에서 지켜보았지만 감히 품제(品題 평한다는 말) 하지는 못하니 또한 어찌 비웃지 않겠는가.
◯12일 날이 밝기 전에 길에 올라서 마전교(馬轉郊)에서 아침을 먹었다. 구련성(九連城)에 이르러 통군정(統軍亭)을 바라보니, 아득히 시야에 들어왔다. 놀랍고 기쁜 마음에 망연히 신선이 되어서 날아서 건너고 싶었다. 적강(狄江)을 가로질러 중강(中江)에 이르니, 차사원(差使員)인 옥강 만호(玉江萬戶) 한경립(韓敬立)과 방산 만호(方山萬戶) 이승립(李承立)이 배를 정돈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압록강에 이르러 상사, 서장관과 함께 배를 함께 타고 건넜다. 여러 기생들이 또한 물가에서 영접하였고, 차사원인 용천 부사(龍川府使) 한휴(韓休)와 귀성 부사(龜城府使) 황응도(黃應都), 철산 부사(鐵山府使) 이동로(李東老)가 와서 기다리고 있어서 가마를 멈추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령 군수(載寧郡守) 이온(李溫)을 방문하니, 병이 위중하였지만 전혀 치료할 방도가 없었고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는 이별하였다. 부(府)의 밖에 있는 동헌(東軒)에 들어가자 부윤(府尹) 황준구(黃儁耈)와 평안 도사(平安都事) 이옥(李沃), 어천 찰방(魚川察訪) 이시담(李時)이 거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 첨사(僉使) 백승윤(白承湚)이 찾아왔다.
'한국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을사전문록(이중열) (0) | 2018.08.07 |
---|---|
북원록(이의봉) (0) | 2018.07.25 |
관연록(김선민) (0) | 2018.07.22 |
경오연행록(황재) (0) | 2018.07.21 |
갑인연행록 및 갑인연행별록(황재) (0) | 2018.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