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월정만필(윤근수)

청담(靑潭) 2018. 8. 5. 23:04



월정만필(月汀漫筆)

    

윤근수(尹根壽 1536-1616)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장원(掌苑) 윤계정(尹繼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용(司勇) 윤희림(尹希林)이다. 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 윤변(尹忭)이며, 어머니는 부사직(副司直)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동생이다. 김덕수(金德秀)·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용된 뒤, 승정원주서·춘추관기사관·연천군수 등을 거쳐 1562년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 때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을 청했다가 과천현감으로 체직되었다.

이듬 해 8월 행신(倖臣) 이량(李樑)이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하자 형 윤두수, 박소립(朴素立), 기대승(奇大升) 등이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 이량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해 9월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우의정 심통원(沈通源)의 계문(啓文: 왕에게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올리는 글)으로 죄가 없음이 밝혀져 승문원 검교에 서용되었으나, 형 윤두수가 이조전랑이어서 취임하지 않았다.

1565년 홍문관부교리로 다시 기용된 뒤 이조좌랑·정랑(正郎)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해 의정부사인·지제교 겸 교서관교리(知製敎兼校書館校理)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검상·사인·장령·집의·사예·부응교 등을 역임했으며, 1572년(선조 5)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에 승진하였다. 이듬 해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 명나라 『태조실록』과『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도록 요청한 일)를 하였다.

그 뒤 경상도감사·부제학·개경유수·공조참판 등을 거쳐 158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귀국할 때 『대명회전전서(大明會典全書)』를 가져왔다.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591년 우찬성으로 정철(鄭澈)이 건저(建儲: 세자 책봉) 문제로 화를 입자, 윤근수가 정철에게 당부했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형 윤두수와 함께 삭탈관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문안사(問安使)·원접사(遠接使)·주청사 등으로 여러 차례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국난 극복에 노력하였다.

그 뒤 판중추부사를 거쳐 좌찬성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했고,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1606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를 조(祖)로 할 것을 주장해 실현시켰다.

청백간손(淸白簡遜)하고 문장이 고아하며 필법이 주경(遒勁: 그림이나 글씨 등에서 붓의 힘이 굳셈)해 예원(藝苑)의 종장(宗匠)이라 일컬어졌다 한다. 저서로는 『사서토석(四書吐釋)』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윤근수(尹根壽) 저(1597)

○삼대(三代 하ㆍ은ㆍ주) 이전의 시대는 공공(公共)의 임금이 천자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영토는 모두 제후에 봉해 주어 제각기 나라를 이루게 하였다. 때문에 왕기(王畿)의 천 리 밖은 모두 제후의 영토였다. 훌륭한 덕이 있었기 때문에, 삼대, 삼대하고 일컫지만 천자가 소유한 영토는 사실 좁았다. 진(秦) 나라 때 와서 천하를 군현(郡縣)으로 만든 뒤에 중국은 모두 천자의 영토가 되었다.

진 나라 이후로 역년이 가장 오랜 나라는 한ㆍ당ㆍ송이었다. 당 나라는 명황(明皇)의 천보(天寶) 때에 와서 안녹산(安祿山)의 난리로 인하여 하북의 영토를 잃게 되었다. 이때 전국 때의 연(燕)ㆍ제(齊)ㆍ조(趙)ㆍ위(魏) 네 나라의 영토는 모두 재후들의 차지한 바가 되어, 당 나라가 망할 때까지 복구하지 못하였다. 송 나라는 개국하기 전에 벌써 연경ㆍ운중(雲中)의 16개 주(州)를 잃어 버렸고, 휘종(徽宗)ㆍ흠종(欽宗) 때 와서는 두 임금이 금 나라에 사로잡혔으며, 고종(高宗)은 임안(臨安)으로 수도를 옮겼다. 드디어 중원을 잃어 버리고 송 나라가 망할 때까지 회복해내지 못하였다. 당 나라ㆍ송나라는 비록 각각 3백여 년을 누리기는 하였지만, 당 나라는 하북의 영토를 잃었고 송 나라는 중원을 잃었으니, 천하가 분열된 것은 말할 것조차 못 된다. 유독 양한(兩漢 서한과 동한)만이 4백여 년을 누리기는 하였으나 서한은 2백 14년 만에 왕망(王莽)에 의해 반역을 담하였다.

그런데 대명(大明)은 홍무(洪武) 원년 무신(1368)에서 지금의 만력(萬曆) 정유년(1597)까지 2백 30년이다. 그 사이 정통(正統) 연간에 황제가 오랑캐의 적진 속에 빠지긴 하였지만 곧 바로 남쪽으로 돌아왔으므로 영토는 한자 한치도 잃지 않았다. 당ㆍ송은 정말 말할 것조차 못 되고 한은 2백 14년 만에 왕망의 찬역이 있었으며, 대명은 2백 30년이 되었어도 천하가 조용하였으니, 아, 훌륭한지고!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진 뒤 몇 대를 전해 내려오다가 기준(箕準) 때 와서 위만 (衛滿)의 난리를 피해 평양에서 금마군(金馬郡)으로 도망쳤으니 바로 지금의 익산이다. 이것이 마한이 되었으며, 또한 몇 대를 전해 내려오다가 망하였다. 평안도에 지금 선우(鮮于)라는 성(姓)이 있는데, 기자의 후손이라 일컫는다. 《씨족대전(氏族大全)》에서 본 것이 기억난다. 《씨족대전》에,

“기자는 조선에 봉해지고, 소자(少子)는 우(于)에 봉해졌는데 그들의 후손이 선우씨가 되었다.”

고 하였다. 그렇다면 곧 기자와 소자의 후손이요, 기준의 후손은 아니다. 기준은 마한을 세웠는데, 그의 후손이 곧 한씨(韓氏)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청주 등지에 살고 있는 한씨들은 다 기준의 후손이라 한다. 이 말은 《위략(魏略 책명)》에서 나왔다. 후손이라고는 하였지만 꼭 그런지는 모르겠다. 제종조에 기자의 후손을 찾아서 대대로 벼슬을 주어서 제사를 받들게 하여 마치 고려 숭의전(崇義殿)처럼 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진정한 후손을 얻지 못한다 하여 그 논의는 드디어 중단되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 익산성씨조(益山姓氏條)에, 한씨 성을 가진 자가 있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함이다.

중국 사람은 위국의 왕을 일러 왕자(王子)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난리를 만나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딴 곳으로 피난함)하게 되면서부터 중국 사람을 자주 접촉하여 이 말을 귀에 익히 들었다. 인하여 《송감(宋鑑)》의 〈인종기(仁宗紀)〉가 기억난다. 〈인종기〉에,

“북사(北使)가 말하기를, ‘고려가 직공(職貢 신하가 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소홀히 하니 지금 군대를 동원하여 정벌하렵니다.’하니 인종은 말하기를, ‘이것은 다만 왕자(王子)의 죄요, 백성에게 관계되는 일은 아니다. 지금 군대를 동원하여 정벌한다 하더라도 왕자는 반드시 베이지 못할 것이요, 백성만 무찔러 죽일 것이다.’하여, 마침내 군대를 중지시켰다.”

고 하였다. 여기서의 왕자는 곧 고려의 왕을 지칭한 것이니, 송 나라 때 이미 그렇게 하였다.

광녕성(廣寧城) 북쪽 5리쯤에 기자정(箕子井)이 있다. 옆 부근에 옛날 기자묘가 있고, 방건(方巾 두건의 일종으로 옛날 문인(文人)들이 쓰던 관)을 쓴 기자의 소상(塑像 진흙으로 만든 사람의 상(像))이 있었는데, 가정(嘉靖 명 세종의 연호. 1522~1566) 연간에 달자(㺚子)가 태워 버려서 지금은 없어졌다. 광녕은 기자의 봉역(封域) 안에 있었다. 또한 기자가 여기에 머무른 사실이 없는데도 우물과 사당이 있었겠는가?

○평양에 등나무 지팡이 한 쌍이 있었는데 ‘기자 지팡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나는 가운데가 부러져서 누런 주석으로 부러진 곳을 싸 묶었다. 이것을 칠갑(漆匣)에 담아 두었다가, 감사가 관아에 나갈 적에 효기(驍騎) 두 사람이 가지고서 앞길을 인도한다. 감사가 좌정해서 정무를 보거나 손님을 대할 때는 이것을 섬돌 위 좌우편에 갈라 놓아두는데 붉은 칠한 나무틀로써 받는다.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다고 한다.

○광녕성 서쪽 40리 지점에 요궁(遼宮)의 옛터가 있었는데, 지금은 달자(達字 여진)의 영토가 되었다. 성의 서쪽 5리쯤에 야율초재(耶律楚材)의 무덤이 있다.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 물어 보았더니, 홍무(洪武) 황제가 오랑캐인 원 나라를 몰아낼 적에 그들의 종족을 따라서 오랑캐 지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대릉하보(大陵河堡 《월정별집》만록에는 소릉(小凌)으로 되었음)의 서북쪽 20리쯤에 산이 있으니 즉 목엽산(木葉山)이다. 산의 서쪽에 요(遼)의 시조 아보기(阿保機)의 사당이 있는데 성에서 바라다 보이며, 산 북쪽에는 그의 무덤이 있다 한다. 유정수(劉靜修)의 시에,

목엽산 머리 비바람 스친 지 몇해더냐 / 木葉山頭幾風雨

라고 한 것이, 곧 이 산이다.

○안시성주(安市城主)가 당 태종(唐太宗)의 정병(精兵)에 항거하여 마침내 외로운 성을 보전하였으니, 공이 위대하다. 그런데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서적이 드물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 때의 사적(史籍)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임진왜란 뒤에 중국의 장관(將官)으로 우리나라에 원병(援兵) 나온 오종도(吳宗道)란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안시성주의 성명은 양만춘(梁萬春 일반적으로는 양(楊)이라고 함)이다. 당 태종 《동정기(東征記)에 보인다.”

고 하였다. 얼마 전 감사 이시발(李時發)을 만났더니 말하기를,“일찍이 《당서연의(唐書衍義)》를 보니 안시성주는 과연 양만춘이었으며, 그 외에도 안시성을 지킨 장수가 무릇 두 사람이었다.”

고 하였다.

참의 유조인(柳祖訒 1522-1599)은 젊어서 과거 공부에 전념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미 당상관에 오른 뒤에 소(疏)를 올려 화산군(花山君) 권반(權攀)의 전례에 의하여 과거에 응시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유조인이 일찍이 말하기를,

“명사(名士)로는 좌참찬 성공(成公)과 같고, 원훈(元勳)은 상산군(商山君) 박모(朴某)처럼 되어도 모두 소용없고 반드시 과거에 올라서야만 세상에 전해서 행세할 수 있다.”

고 하였다. 나도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은 들었는데, 마침 유조인이 찾아왔기에 이 사실을 물었더니, 정말 그렇다고 하였다. 사람들의 과거 급제에 대한 부러움이 이렇게까지 된단 말인가? ※저자 본인은 23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 당시 예조판서였다.

○황강(黃岡) 참판 김중회(金重晦 이름은 계휘(繼輝))가 같은 때 급제한 이준민 자수(李俊民子修 자수는 자(字))ㆍ이인 숙응(李遴叔膺 숙응은 자) 및 임자년 급제한 박계현 군옥(朴啓賢君沃 군옥은 자)과 승문원에 같이 벼슬하게 되었다. 자수가 참판에게 묻기를,

“네가 일찍이 사람을 볼줄 안다고 자부하더니 군옥의 앞길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참판은 대답하기를,

“군옥은 비록 조신(操身)하지 않아도 부형의 덕택으로 지위 명망은 병조 판서까지 이를 것이다.”

고 하였다. 나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너는 비록 시골 선비이지만 그 재주가 병조 판서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옥보다 10년 뒤에야 될 것이다.”

고 하였다. 숙응을 부르니 대답하기를,

“숙응의 공명(功名)은 선지(瑄之 어희선(魚希瑄)의 자)와 견줄 만하고, 오히려 너희들을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때 어선지(魚瑄之)는 바야흐로 판사가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선지와 숙응의 벼슬을 모두 호조 판서에 이르렀고, 군옥과 자순는 모두 병조 판서에 이르렀으니, 그 말이 마치 시귀(蓍龜 시초점과 거북점)처럼 용하였다.

소로(蘇老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을 지칭함)는 말하기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호)는 존심(存心) 공부가 많았다. 우리 동방에서, 학자로는 회재를, 위대한 사람으로는 음애(陰崖 이자(李耔)의 호)를 보았노라.”

고 하였다.

소재(蘇齋 노수신 1515-1590)는 일찍이 말하기를,

“회재는 존심(存心) 공부가 많고 퇴계(退溪)는 강학(講學) 공부가 많았다.”

고 하였다. 퇴계가 보니, 회재가 망기당(忘機堂)에게 답한 편지가, 무릇 다섯 차례를 오고 갔다. 퇴계는 옷깃을 여미고 공경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뜻하지 않게도 선생의 학문과 견해의 높음이 여기에까지 이르셨는가.”

하였다. 망기당이란 분은 생원 조한보(曺漢輔)인데 선학(禪學)을 공부한 사람이다.

○온 세상의 평론이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의 호)는 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 하며, 전고(典故)에 널리 통하였으나 학문상의 공부에 이르러서는 별로 착실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호)은 벼슬한 초년에 자기의 저술한 사단ㆍ칠정의 논을 소재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의 의견을 물었다. 소재는 답장에,

“음양 가운데 태극이 있고, 칠정 가운데 사단이 있다.”

고 하였다. 고봉은 또 답장을 보내기를,

“내 마음에 아주 만족하여 부질없이 자신을 가졌습니다.”

고 하였다.

소재 노수신의 일기를 보니, 소재는 경석(經席)에서 율곡(栗谷)을 세 번이나 추천하였다. 하루는 경연 중에서 상이, 유능한 인재를 묻자 소재는 대답하기를,

이이(李珥 1536-1584)ㆍ허엽(許曄 1517-1580)입니다.”

라고 하였고, 하루는 경연에서 이 아무는 크게 임용해야 된다고 추천하였으며, 하루는 상이 대제학이 될 만한 사람을 묻자, 이이(1536-1584ㆍ이산해(李山海 1539-1609)ㆍ구봉령(具鳳齡 1526-1586)을 추천하였다.

○무인년(1518, 중종 13)에 김사재 정국(金思齋正國 정국은 이름 1485-1541)은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는데, 마침 종계 주청사(宗系奏請使)의 일행을 만나 전례에 따라 황강(黃江)에서 송별을 하게 되었다. 상사는 남지정 곤(南止亭袞 지정은 호 1471-1528)이었고, 부사는 이음애 자(李陰崖耔 음애는 호 1480-1533)였으며, 서장관은 한공 충(韓公忠)이었다. 사재가 상사의 객관(客館) 대청에서 술잔을 잡아 작별 인사를 나누고, 이어서 지정에게 말하기를,

“공은 선비들을 사랑하지 않는데 모름지기 더욱 유의하여 아끼고 사랑해야겠습니다.”

고 하였다. 지정은 화가 잔뜩 나서 환송의 술잔을 받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사재는 공손히 사과하면서 나오기를 권했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특별히 지정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사재는 벼슬이 깎여서 쫓겨나고, 제현(諸賢)들은 큰 풍파를 만나서 20년 동안 조정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것은 곧 지정의 앙갚음이었다.

○일본 책사(冊使)가 우리나라에 도착하였다. 수행원 가운데 유산인 승종(兪山人承宗)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시에 능하고 또한 글씨에도 아주 뛰어나서 진(晉) 나라 사람의 필법이 있었다. 접반사 판서 이항복(李恒福)이 한 낭중(韓郞中 낭중은 당시 한호(韓濩)의 벼슬)이 쓴 책을 가지고 그에게 보이니, 유공(兪公)은 크게 칭찬을 하여 말하기를,

“자못 진 나라의 필법을 체득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그 책 안에 두 장은 자획이 진 나라 필법이 아니니 아마도 이 사람의 글씨가 아닌 것 같소.”

하였다. 이 판서가 이 책을 가지고 한 낭중에게 물으니, 한 낭중이 대답하기를,

“그 책 안에 두 장은 곧 김생(金生)의 시법을 모방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김생의 필법은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훌륭한 이름을 떨치고 있으나 필체가 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의 것과는 조금 다르고, 더군다나 중국 사람들은 한번도 이 필체를 보지 못한 것이다. 유공의 감상이 정밀함을 알 수 있다.

장인(丈人 조안국(趙安國 1501-1573))은 가정 을묘년(1555, 명종 10) 왜변 때에 여러 장수들과 함께 어겨서 평안도로 귀양을 갔다가 곧바로 공로를 세워 속죄 하겠다는 명목으로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의 녹도(鹿島)로 옮겨졌다. 얼마 후에 녹도에서 배 전체의 왜구를 몽땅 사로잡았으므로 장인은 공에 참여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왜구의 배에서 얻은 생초(生綃)에 미인의 상반신을 그린 그림을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림의 미인은 하얀 꽃을 손에 쥐고 마치 그 향내를 맡고 있는 듯한 것이었다. 그 위에 시를 쓰기를,

졸다 깨니 중문은 오슬오슬 추운데 / 睡起重門淰淰寒

희끗희끗 귀밑머리 마전한 홑적삼이네 / 鬢雲繚繞練杉單

한가로운 이 마음 가는 봄이 애석해 / 閑情只恐春將晩

꽃가지 꺾어 쥐고 혼자서 보고 있구나 / 折得花枝獨自看

하였는데, 당인(唐寅)이 손수 소시(小詩)를 이렇게 쓰고, 아울러 도장까지 눌렀다. 뒤에 중국 소설을 상고해 보았더니, 인은 소주(蘇州) 장주(長洲)의 이름난 선비였다. 그런데 남기(南畿)의 향시(鄕試) 자원으로서 거인(擧人) 서경(徐經)과 과실을 저질렀다. 기미년 회시(會試) 때 장고관(掌考官) 예부 시랑 정민정(程敏政)이 글제 팔아먹은 사건으로 죄를 입고 관리에게 넘겨졌다. 그래서 한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고 문장과 서화로 스스로를 즐겨 예술과 문장에 자못 유명해져서, 그림하면 백호(伯虎)를 꼽았다. 백호는 곧 당인의 자다. 그의 그처럼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스스로 이름을 떨쳐서 제 몸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그 뒤에 임진왜란으로 서울이 함락되어 그 그림을 잃어버렸다. 그 시 또한 훌륭한데, 행여 후대에 영원히 없어질까 염려된다. 우선 이것을 기록 하여서 재주를 품고도 시험해보지 못한 그 사람을 슬퍼한다.

○임금호(林錦湖 임형수(林亨秀 1514-1547)의 호)는 동배(同輩)들을 업신여기는 버릇이 있어, 아무리 선배일지라도 모두 버릇없는 말을 퍼부었다. 그러나 퇴계에게만은 존경하면서 감히 함부로 굴지 못하였다. 일찍이 신영천(申靈川 이름은 잠(潛))의 죽화(竹畫)에 쓰기를,

영천이 그려낸 푸른 대나무는 / 靈川筆下碧琅玕

소상 어귀 높은 표지 눈과 달이 차갑구나 / 湘口高標雪月寒

시인을 추려본들 어느 누가 근사하리 / 揀得詩人誰得似

청수한 그 아취는 퇴계와 함께 보리라 / 淸癯宜竝退溪看

하였으니, 그를 지극히 높인 것이다. 그 뒤에 제주로 귀양가서 퇴계의 편지에 시로써 화답하기를,

그대의 높은 의리 나로서는 어림없나니 / 高義吾君我不如

편지에 넘친 인정 너무도 간절하구나 / 書來情款溢言餘

변씨의 옥이 월형(刖刑) 부름을 원래 알고 있는데 / 本知卞玉能成刖

반드시 양장이라야 수레 넘어지는 것 아니라네 / 未必羊腸可覆車

떠도는 벼슬살이 이제는 괴롭기만 해 / 浮海宦情今已苦

산 사서 돌아갈 계획 응당 소홀하지 않으리라 / 買山歸計未應踈

강매화 피고 짐을 누구와 얘기하리 / 江梅落盡誰相問

만리 밖에서 속절없이 편지만 전할 뿐이네 / 萬里空傳尺素書

하였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호)은 진퇴의 의리를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호)에게 물었다. 목은은 대답하기를,

“지금 시대에는 제각기 제 뜻대로 행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 대신들은 국가와 고락을 같이해야 하므로 떠나버릴 수 없지만, 너는 떠날 수 있다.”

하였다. 야은은 떠날 것을 결정하고 목은에게 돌아가겠다는 작별 인사를 고하였다. 목은은 그때 장단(長湍) 별장(別莊)에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주었다.

나는 외 기러기 까마득히 떠 있구나 / 鴻飛一箇在冥冥

○목은은 고려 말엽에 수상(首相)으로서 연경에 가기를 자청하였는데, 고황제(高皇帝)를 만나보고 할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조(太祖)의 의심을 살까 염려하여 태종(太宗)을 서장관으로 자신이 추천해서 데리고 떠났다. 홍무 황제(洪武皇帝 주원장)가 목은을 원 나라 조정의 한림(翰林)으로 여기면서 대화를 나누려 하였다. 목은은 본국을 부호(扶護)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니, 황제는 거짓 못 알아 듣는 체하면서 말하기를,

“네 한어(漢語 중국 말)는 납합출(納哈出 나하추 ?-1388)과 비슷하구나.”

고 하였다.

○기묘사화 때 구수복(具壽福 1491-1535)은 현직 이조 좌랑으로서 파직을 당하여 돌아갈 곳이 없었다. 장인은 이를 불쌍히 여겨 자기의 보은 별장에 내려가 있게 하였다. 구공은 즉시 보은으로 내려갔다. 얼마 뒤에 장인의 종으로 주간하는 자가, 구공이 여기에 붙어 살면서 자기 종처럼 부려먹는 것이 싫어서, 장인에게 참소하기를,

“좌랑 어른이 농막에 와 계시면서부터 여러 종들을 몹시 부려서 배겨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 하였다. 장인은 사정을 알아보지 않고 발끈 화를 내서 그를 즉시 내쫓게 하였다. 그때는 마침 겨울철이었다. 구공은 쫓겨나서 야윈 말에 종 하나를 앞세우고 길을 오르긴 하였으나, 사방을 둘러봐도 갈 만한 곳이 없어, 행색이 참담하였다. 마침 호걸한 선비 하나가 사냥터에서 많은 구종(驅從)들을 거느리고, 개는 몰고 매는 어깨에 얹고서 지나갔다. 그런데 구공이 길가에서 어정버정 돌아다녔기 때문에 한 시간도 못 되는 사이에 무릇 두 차례나 만나게 되었다. 호걸한 선비는 홀연히 말 위에서 구공에게 읍하고 말하기를,

“그대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처럼 쓸쓸히 타달거리고 있소?”

하였다. 구공은 그렇게 된 까닭을 대강 말하였다. 호걸한 선비는 구공을 즉시 말에서 내리게 하였다. 털 보료를 눈 위에 깔고 또한 꿩을 구워 안주 삼아 술을 권하면서 옛날부터 친하게 지내는 사람처첨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였다. 이어서 그의 집으로 함께 돌아갔다고 한다.

○소재(蘇齋 노수신)는 말하기를,

“반우(返虞)는 비록 옛날부터 전해오는 예절이지만, 우리나라의 여묘(廬墓)에 거하는 예절이 참 좋은 풍속이다. 반우를 하면 좋은 집에서 처자들과 함께 거처하게 되므로 애통한 생각을 잊어버릴 때가 많아진다. 그러므로 상중(喪中)의 기강을 헐어버리니 아주 옳지 못하다.”

고 하였다. 일찍이 경석(經席)에 모시고 있으면서 거상(居喪)할 적에 반우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힘써 진달하였다.

진우량(陳友諒)의 아들 이(理)는 우량의 참람된 국호(國號)를 이어받아서 그대로 무창(武昌)에서 도읍하다가, 명(明) 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혔다. 고황제(高皇帝)가 명옥진(明玉珍)의 아들 승(昇)과 함께 고려에 귀양을 보냈다. 승은 개성에 머물러 있고, 이는 또 청양현(靑陽縣)으로 옮겨졌다. 이는 키가 보통 사람보다 우뚝하게 뛰어났다. 무창에서 첩 40명과 흰빛 준마 40필을 거느리고 왔다. 그런데 그가 죽자, 첩과 말이 한두 해 사이에 연다아 죽어 없어져서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과거에 급제한 뒤의 일이다. 통역관 고언명(高彦明)이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몇 해 전에 한번은 이당 화종(李堂和宗)을 만났더니 말하기를, ‘신사년(1521, 중종 16)에 가정 황제의 등극 조사(登極詔使) 수찬 당고(唐皐)가 나올 때에, 원접사 용재(容齋) 이공(李公)이 중국 사신에게 지금 천하의 문장은 누가 제일이냐고 물으니, 당 수찬이 천하의 문장은 이몽양(李夢陽)이 제일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한다. 그때 공동(崆峒 이몽양의 호임)은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직하고 변량(汴梁)에 살고 있었지만 이름이 천하에 울렸는데 우리나라는 알지 못하였다. 비록 이 말을 들었으면서도 중원(中原)에 가서 그를 방문하지 못했으니 탄식할 일이다. 근세에 와서야 《공동집》을 얻고, 비로소 그는 시와 문장이 다 훌륭하여 왕세정(王世貞)ㆍ이반룡(李攀龍) 등과 같은 문장들이 그를 매우 추존하기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공동자(崆峒子)가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당조사(唐詔使)가 서울에 도착할 적에 무릇 유관(遊觀)하는 재신(宰臣)들의 주고받는 시는 제술관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각각 한재신의 시를 맡아서 지었으므로, 혼잡하지 않았다.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이 예조 판서 홍숙(洪淑)의 시를 전담하여 지었던 것이다. 상사(上使)가 극히 감탄하여 칭찬하기를,

“예조 판서의 시는 아주 훌륭하여 원접공(遠接公 이행(李荇)을 말함)의 시보다 오히려 낫다.”

고 하였다. 이 말을 주부 정작(鄭碏)에게 들었다. 첨정(僉正) 박난(朴蘭)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눌재의 여주 제영(驪州題詠)에,

도은ㆍ목은의 문장은 거북돌에 남아 있고 / 文章陶牧留龜石

신괴한 꾀꼬리는 말바위 기억하네 / 神怪黃驪記馬岩

라는 글귀는 문장의 힘이 매우 있다.”

고 하였다.

내가 북경에 조회간 것이 무릇 네 차례였다. 가정 병인년(1566, 명종 21)에 서장관으로서 관원(灌園) 박공(朴公 이름은 계현(啓賢))을 따라서 갔다. 그 당시 예부 상서는 고공의(高公儀)였다. 섬돌 중층 위에서 범연히 바라보다가 회동관(會同館) 연회 때 한자리에 가까이 앉게 되어 자세히 살펴보니, 그 얼굴 생김새는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으나 온화스러운 군자였다. 그는 절강 인화(仁和) 사람이다. 그 뒤에 정승이 되었다. 만력 원년(1573, 선조 6)에 수상(首相) 고공(高拱)이 환관 풍보(馮保)를 없애려 하다가 실패하여 쫓김을 당하였다. 공은 지위가 셋째였는데, 환관 풍보 때문에 놀라고 걱정되어 얼마 못 가서 죽으니, 나이는 56세였다.

○만력 원년 계유에 주청부사로 청련(靑蓮) 이 판서(李判書 이름은 후백(後白))와 동행하였다. 육수성(陸樹聲)은 회시 장원으로 예부 상서가 되었는데, 헌칠한 키에 점잖게 서 있었다. 중국 사람은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귀밑머리를 깨끗하게 쓸어내리는데, 육공만이 그러지 않았다. 그는 예부 상서에 이르기까지 관계의 경력을 쌓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매양 임하(林下)에 있었는데 조정에서 불러 올려 승급(陞級)시켜 지금의 관직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들으니 각로(閣老) 장거정(張居正)이 좌주(座主 과거 시험관의 경칭)였다고 한다.

○북경에 갔다 돌아온 사람의 말에,

“성조(成祖)가 서울의 대궐을 연도(燕都)에 창건하였다. 그 지점의 동편에 깊은 못이 있었는데, 이것을 즉시 메우고 바로 그 지점 위에 동장안문을 세웠다. 뒤에 그 문이 여러 차례 화재를 당하였다. 서로 전해 오기로는 이 못의 용이 갈 곳을 잃고 성이 나서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문을 다시 만들어 화재를 막으려 하였는데 모든 기둥과 석가래를 모두 돌로 만들었다. 그래서 화재의 걱정은 드디어 없어졌다.”

한다.

내가 북경에 갔을 때 동장안문에 이르러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석가래와 기둥에 단청이 떨어져 나간 곳은 본바탕이 드러났는데, 모두 다음은 돌이었다. 그의 말이 정말 옳았다.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호)은 학조(學祖)와는 같은 시대 사람이고, 학조 또한 당시의 문벌 있는 집안 사람으로서 중이 된 자여서 동봉에게 굽히지 않고 매양 그와 겨루었다. 하루는 산속으로 같이 가는데 동봉이 앞서고 학조는 뒤따랐다. 때마침 비는 개고 길 옆엔 멧돼지가 칡뿌리를 캐먹은 자리가 구덩이가 되어 꽤 깊은데, 거기 물이 그득이 고여 있었다. 동봉이 학조를 돌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이 웅덩에 들어가 뒹굴고 나올 터이니, 나를 따라 할 수 있느냐?”

하니, 학조는 이를 허락하였다. 즉시 두 사람은 같이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뒹굴고 나왔다. 그런데 동봉은 입은 옷과 온 몸에 물 한 방울 젖은 곳이 없는데, 학조는 흙탕물이 온 얼굴에 흘러 내렸고 의복이 몽땅 젖어 있었다. 동봉은 웃으면서 학조에게 이르기를,

“네가 어찌 내 흉내를 낼 수 있겠느냐?”

고 하였다.

동봉 김시습(1434-1493)이 풍악산에 유람하려던 하루 전날이었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호) 등 훌륭한 명사들이 우거지인 용산 수정(水亭)에 찾아왔다. 동봉이 마주 애기하다가 갑자기 창밖 두어 길 밑으로 떨어져서 몹시 다쳐 숨을 쉬지 못하였다. 여러 손님들이 모두 달려가 구원하여 겨우 깨어났다. 그를 정자 안에 메다 놓고 손님들이 묻기를,

“그대가 이렇게 많이 다쳤으니 내일 어떻게 떠나겠는가?”

하니, 동봉은 대답하기를,

“자네들은 누원(樓院)에 가서 나의 송별만 기다리고 있게, 곧 조섭해서 조금이라도 낫게 된다면 병을 참고 일을 나서겠네.”

라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모든 손님들이 누원에 가니, 동봉을 벌써 와 있는데, 떨어져 다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자약하게 웃고 이야기하였다. 추강은 나무라기를,

“자네는 어찌하여 환술을 써서 우리들을 속이는가?”

라고 하였다.

○금헌휘언(今獻彙言)》에,

“동지 뒤에 남은 날이 있으면 남은 날의 수로써 이듬해의 윤달을 결정한다. 가령, 하루가 남으면 이듬해 정월에 윤달이 들고, 이틀이 남으면 2월에 윤달이 들고, 만약 13일 이상이 남으면 다음해엔 윤달이 없다.”

고 하였다.

융경(隆慶) 6년 임신년(1572, 선조 5) 앞해는 곧 신미년이다. 그 해에 동지 후 남은 날이 4일이었는데 일관(日官)은 2월에 윤달이 든다고 하였다. 어 학관(魚學官 숙권(叔權))은 일찍이 《휘언(彙言)》을 보았으므로 윤달이 잘못되었다 고집하여 영감사(領監事)가 다시 계산해 보라는 명령까지 하는데, 일관은 그래도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여 틀리지 않는다고 힘껏 말하였다. 뒤에 대통력을 보니 그 해의 윤달은 과연 2월에 들었었다. 일관은 죄책(罪責)을 면하였다. 일관 남응년(南應年)은 말하기를,

“책력 만드는 방식에 동지의 남는 날짜로써 윤달을 삼는다고 말하였지만, 이 방법은 혹 맞지 않는 곳이 있으며, 그달 안에 중기(中氣)가 없는 달로써 윤달을 삼으면 역수에 꼭 들어맞는다.”

고 하였다. 이것 또한 알아 두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사람은 말하기를,

“송조(宋朝)가 남쪽으로 옮겨 왕이 임안(臨安 항저우)에 머물러 있다가 그대로 수도를 정하였다. 옛 서울의 신하들은 임금의 수레를 호종하여 임안에 와서 살았으므로 성내의 백성들은 모두 개봉 사람이었으며, 언어는 모두 변량(汴梁)의 음에 비롯되었다. 자손들이 전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므로 항주(杭州) 성안은 중국의 말씨이고 성밖은 남방음에 시골 사투리다.”

고 하였다.

○호응원(胡應元)은 말하기를,

“중국 각 현의 진사 출신은 복건성 보전현(莆田縣)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절강성ㆍ여요현(餘姚縣)이며, 이 밖의 고을들은 모두 이 두 현만 못하다.”

고 하였다.

○판윤 전임(田霖)은 육진 부사(六鎭府使)로 있을 적에, 객관(客館)을 다시 수리하고 낙성연을 베풀어서 이웃 진부(鎭府)의 통판(通判)들이 다 모였었다. 공이 객관에 나가 맞아서 연회를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배앓이를 만나 매우 위급하여 즉시 관아로 돌아오고, 여러 손님들도 편안히 있을 수 없어 모두 각자 숙소로 물러났다. 그런데 갑자기 객관 정청(正廳)의 대들보 기둥이 쓰러지면서 부러졌다. 그러나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만약 공이 병이 들지 않고 잔치를 열게 되었다면 여러 손님들과 함께 모두 눌려 죽었을 것이다. 하늘이 도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은 집이 청도(淸道)에 있었으니, 청도는 곧 경상북도였다. 탁영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경상북도의 향시에는 언제나 장원이었다. 같은 시기에 경상남도에서는 권홍(權弘 1467-?)이 여러 번 장원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알지는 못하였다. 회시에 응시하기 위해 두 사람 다 서울에 왔다. 하루는 권홍이 탁영을 찾아왔다. 탁영은 허겁지겁 나가 맞아서 윗자리에 안내하여 앉히고 물었다.

“그대는 향시 때마다 늘 장원만 하니, 무슨 책들을 읽어서 그처럼 문장이 훌륭합니까?”

하니, 홍은 대답하기를,

“딴 책은 별로 공부한 것이 없고 《통송(通宋)》만 숙독했을 뿐입니다.”

고 하였다. 탁영은 즉시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워서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이고 다시는 손님의 대접을 하지 않았다.

탁영이 한번은 별과에 응시하였다. 그의 두 형인 준손(駿孫)ㆍ기손(驥孫)은 탁영의 손을 빌어서 탁영과 함께 모두 초시에 합격하였다. 전시의 날이 되어, 탁영은 두 형님의 책문만 대신 지어주고, 자기의 것은 짓지 않았다. 대개 그의 형님에게 장원을 양보하고 자기는 다음 과거 때 장원하려는 속셈이었다. 두 형님이 모두 과거에 올랐으며, 준손은 1등이 되었다. 다음 과거 때 전시의 시험관이 마음속으로는 탁영의 문장이 훌륭함을 알면서도 그 사람을 꺼려서 2등에 눌러 두었으므로 민첩(閔怗)이 곧 1등이 되었다. 탁영은 듣고 분이 나 말하기를,

“민첩은 어떠한 사람이냐?”

하고 통한해 마지않았다.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집을 뛰쳐나와서 방랑 생활을 하였다. 만약 성안에 오게 되면 어린아이들이 떼를 지어 뒤따라 오면서, ‘다섯살’하고 불러대었다. 대개 동봉이 다섯 살 적에 신동이란 별명이 있어서 나라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나아갔기 때문인 것이다.

성안에 들어와서는 번번이 향교동에서 묵고 있었는데,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찾아가면 동봉은 예우하지 않고 벌렁 드러누워서 두 발을 거꾸로 벽 사이에 기대고 발장난을 하면서 종일 동안 얘기하였다. 동리 이웃 하인들이 모두 이르기를,

“김 아무가 서 상국을 예우하지 않고 이처럼 모욕을 주었으니, 다음에는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 뒤 며칠 만에 서 정승은 다시 와서 찾아보았다.

○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경적(經籍)에 넓게 통하고 아울러 자ㆍ사(子史 제자 백가서와 사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거침없이 외었다. 한번은 강연에서 임문(臨文)하여 진계(進啓)할 적에 《성리대전(性理大全)》중의 말을 인용한 것이 있었다. 그런데 반 장을 외어 나가도록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미암이 세상을 뜬 뒤에 내가 특진관으로 경연에 입시하였으므로 왕의 이같은 말씀을 듣게 되었다.

기묘 제현들의 한 시대의 평론이, 문장은 한 나라의 법을 본받았고, 글씨는 진(晉) 나라의 법을 본받았으며, 시는 당(唐) 나라의 격조를 배웠고, 인물은 송(宋) 나라의 여러 유학자로서 표준을 삼은 것이라 하였으니, 김원충(金元冲 김정(金淨)의 자)ㆍ김대유(金大柔 김구(金絿)의 자(字))ㆍ기자경(奇子敬 기준(奇遵)의 자) 등이다. 충암(冲菴 김정의 호 1486-1521)과 덕양(德陽 기준의 호)의 시는 아주 훌륭하였다. 그의 유집(遺集)은 모두 부인한테 보관되어 있었는데, 보았더니 정말 당(唐) 나라의 음조였었다. 참의의 초서(草書) 두루마리가 있었는데, 흡사 진(晉) 나라 사람의 풍격이었고, 해자(楷字)는 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의 필법을 완전히 숙달한 것이었다.

옥당에 옛날에 《한서(漢書)》가 있었는데 그 제목은 곧 충암의 글씨였다. 몇 해 전에 내가 구황 어사(救荒御史)로 충청도에 내려 가니 회덕(懷德)의 옛 집에 충암 부인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길가에서 통성명하였는데, 그의 손자가 충암의 전시 때의 시권(詩券)을 내보여 주었다. 자획이 《한서(漢書)》의 제목 글씨와 똑같아 자못 진 나라 사람의 필법이 있었다.

유정수(劉靜修)는 백대를 전할 만한 인물이다. 〈과강부(過江賦)〉하나가 흠이었다. 정수는 또 다른 시에서,

누운 자리 지금은 누구에게 맡길꼬 / 臥榻而今又屬誰

하늘 땅 돌아보니 깃발만이 나부낀다 / 乾坤回首見旌旗

길가의 사람들은 항복한 임금 가리켜 / 路人爭指降王道

주 나라 일곱 살 애기와 흡사하다 하는도다 / 好似周家七歲兒

고 하였는데, 자못 조롱과 풍자가 들어 있어 또한 〈과강부〉의 뜻과 같았다.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 1369-1439)는 예조 판서로 있을 때 그의 외손녀를 위해 신랑감을 고르게 되었다. 일찍이 사학(四學)에 앉아서 여러 서생들을 시험하였는데, 남학(南學)에서 광릉군(廣陵君) 이극배(李克培)를 택하여 그를 손서로 삼았다. 문경공의 집은 남부(南部)에 있었는데, 그 집을 광릉군에게 물려 주었다. 그 행랑채는 새[草]로 이은 것이었는데, 광릉의 대에 이르러서도 개조하지 않았으니, 두 분의 청렴 검소함은 공경할 만하다. 그 집이 지금은 상공(相公) 유전(柳㙉)의 집이 되었다고 한다. 외손녀는 즉 최유종(崔有悰)의 딸이다.

○ 장계(長溪) 황경문(黃景文) 정욱(廷彧)의 자)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사대문서(事大文書 중국에 보내는 편지와 문서)는 묵초(墨草)에서 나왔다. 매양, ‘조선국왕 신성휘(朝鮮國王臣姓諱)’라고 하였는데, 대개 휘(諱) 자는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지금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상고해 보니 종사(宗社)의 축문에 모두 황제 성명으로 쓰여졌다. 장계(長溪)의 말이 정말로 이와 꼭 들어맞았다. 이 소문이 장계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더욱 자신만만해 할 것이다.

○일찍이 병인년(1566, 명종 21)에 북경에 가서 강절 선생(康節先生 소옹(邵雍)의 호)의 ‘생강(生薑)이 나무 위에서 난다’는 말을 국자학정 육광조(陸光祖)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이것은 곧 중국의 속담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생강은 곧 나무 위에서 난다.’고 그릇 말하자, 어떤 사람이 그 말을 부인하면서, ‘생강은 정말 땅위에서 난다.’하였더니, 나무 위에서 난다고 말하는 사람은, ‘내 말이 옳다.’고 우겼습니다. 그래서 지는 자는 노새 한 마리를 내기로 서로 약속하고 딴 사람에게 물으니 ‘생강은 원래 땅 위에서 나는 것인데, 어찌 나무 위에서 날 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자, 그 사람은 곧 노새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복종하기는 싫어서, ‘노새는 준다만 생강은 결코 나무 위에서 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답니다. 이 속담은 사람들이 망령된 소견을 고집하는 것을 조롱한 것입니다.”

하였다.

광주(廣州이씨) 둔촌(遁村) 이집(李集 1327-1387)은 고려 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교시사에 이르렀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맏아들 지직(之直)은 호조 참의ㆍ보문각 직제학이었다. 참의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또한 과거에 급제하였고, 막내 아들 인손(仁孫)은 우의정이었는데 시호는 충희(忠僖)다. 충희공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고, 둘째 아들 극감(克堪)은 형조 판서를 지냈고,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문경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과거에 급제하고, 그의 맏아들 세좌(世佐)는 광양군(廣陽君)에 봉해졌다. 광양군의 아들 수정(守貞)은 수찬이다. 수찬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고, 막내 아들은 준경(浚慶 1499-1572)인데 영의정이다. 영의정의 작은 아들 덕열(德悅)은 현재 좌승지다. 8대를 연달아서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또 광양군의 아우 세우(世佑)는 관찰사다. 관찰사의 아들 자(滋)는 홍문관 박사로 있다가, 연산군 때 외직으로 함창 현감이 되었다. 함창 현감의 아들은 약빙(若氷)이니 종부시 정이다. 정의 아들 홍남(洪男)은 공조 참의다. 참의의 아들은 민각(民覺)인데 장원을 하였고, 지금은 제용감 정이 되었다. 연달아 9대를 과거에 급제한 것이다.

○교관(敎官) 정군경(鄭君敬 작(碏)의 자)이 나에게 윤창주(尹滄洲 윤춘년(尹春年)의 호)가 임자년 가을에 쓴 증별시(贈別詩)를 보여 주었다. 시는 이러하다.

문장은 정맥이 있어 / 文章有正脈

뜻과 음이 주가 되거늘 / 意音爲之主

이 도를 오랫동안 전하지 못해 / 此道久不傳

소경 귀머거리 되고 말았네 / 已矣爲聾瞽

성과 정은 원래 맑은 것 / 性情本湛然

뜻만이 고무할 수 있다네 / 惟意能鼓舞

애와 낙은 각각 서로 응하고 / 哀樂各相應

안팎은 원래 한 법칙이다 / 表裏元一矩

원기는 정말 호연한 것이라 / 元氣信浩然

큰 악에 악보 어이 있으리 / 大樂安有譜

음조ㆍ반절은 문자에 붙어 있고 / 調切寄文子

박자는 종고에 맞춰 응하는 도다 / 節奏應鐘鼓

슬프다. 내 옛글 읽음이여 / 嗟余讀古書

십 년 동안 고생스리 노력했네 / 十年勤自苦

다행히도 하루아침에 깨달아져 / 一朝幸有得

눈으로 보듯 훤하다 할 수 있었도다 / 敢謂如目覩

정군은 나이 비록 적지만 / 鄭子雖年少

그 마음은 옛글 생각 간절했네 / 其心甚慕古

상종하여 여러 차례 물었지만 / 相從已屢問

도움 못 준 내 자신 부끄럽구나 / 自愧無所補

양기함을 근본 삼고 / 養氣以爲本

독서해서 돕게 했네 / 讀書以爲輔

혈기 정말 성하지 않으면 / 血氣苟不盛

만 권 서적 끝내 거칠어질 뿐이다 / 萬卷終鹵莽

그대는 귀 기울여 듣기 바라노니 / 願君聽慇懃

내 이 말은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네 / 我言出肺腑

어찌 문장 짓는 것뿐이겠나 / 豈徒作文法

도 배움 또한 이로부터 취해지는도다 / 學道從此取

그대 지금 멀리 떠남은 / 今君有遠行

적막한 저 남방으로 돌아가는구나 / 寂寞歸南土

서로의 왕래 응당 오랫동안 없으리니 / 追隨應久廢

이별 어이 셀 수 있으랴 / 別離那可數

옛사람 흉내내어 증언하려 하나 / 贈言欲效古

내 재주는 이백ㆍ두보처럼 훌륭치 못하다네 / 我才非李杜

서성거리며 작별 차마 못하는데 / 徘徊不忍別

가을 바람 강포를 움직이도다 / 秋風動江浦

그때 정군(鄭君)의 나이 겨우 스무 살이었는데, 창주의 허여해 줌이 벌써 이와 같았다. 이 시는 자못 법도가 있어 볼 만하였다. 창주는 평생에 성률학(聲律學)을 가지고 자부하였다. 과연 독특한 견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왕감주(王弇州 명 세정(世貞)의 호)의 《치언부록(巵言附錄)》을 상고해 보니 왕경부(王敬夫 명 구사(九思)의 자)가 남곡(南曲)을 짓기를

술 또한 다 떨어져서 / 且盡杯中物

못 마시고 있는데 청산은 어두워진다 / 不飮靑山暮

라고 하여, 남방의 음은 반드시 남방, 북방의 음은 반드시 북방의 음으로 더욱 적절하게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동일한 중원의 음이면서 남음(南音)ㆍ북음(北音)도 서로 들어가지 못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말과 소리가 다른 데에도 홀로 중국의 성률에 맞음이 있겠느가? 참으로 꼭 그렇지 못할 것이다. 이어 옛날 응교로서 옥당에 있을 적의 일이 기억난다. 한번은 어떤 모임에서 이 사실을 들어 부제학 소재에게 물었더니, 소재는 말하기를,

“이것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은 성(性)이니 이것은 정말 맑은 것이지만, 정(情)이란 느껴서 모든 일에 통하는 것이다. 어찌 정마저 맑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남소문동(南小門洞)에 종실(宗室)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시를 즐기고 손님을 좋아하여, 한때의 이렇다 하는 시인 및 방외의 선비들이 모여 들어 언제나 손님이 만원이었다. 조우(祖雨)라는 중이 있었는데 일찍이 《장자(莊子)》를 가지고 재상 노사신에게 배우러 갔던 자다. 하루는 조우가 그의 집에 먼저 도착하고, 동봉 김열경(金悅卿)이 나중 이르렀다. 동봉은 조우가 이미 온 줄 알면서도 거짓 모르는 체하고 말하기를,

“조우는 노사신에게 수학하였으니 이 어찌 사람의 수에 넣을 수 있겠는가? 만약 여기에 오기만 하면 내가 반드시 그를 죽여 버리겠다.”

고 하니, 조우는 분을 견디지 못하여 동봉의 앞에 불쑥 나와서 말하기를,

“생원이 감히 대재상을 드러내 놓고 욕을 퍼부어서야 되겠는가? 만약 나를 죽이고 싶으면 그대 마음대로 죽여 보시오.”

하였다. 동봉은 조우를 움켜잡고 때리려 하는데 여러 손님들이 모두 떼어 말려서 겨우 빠져 달아나게 되었다. 노사신이 그때 정승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 동봉이 수락산 속에 머물러 있었는데, 조우가 갑자기 찾아와 뵈었다. 동봉은 흔연히 맞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고맙게 나를 찾아보러 오는가? 네가 글을 배우겠다면 내 마땅히 가르쳐 주겠다.”

하고, 즉시 종에게 밥을 지어서 먹이도록 하였다. 밥상이 준비되자, 동봉은 조우의 옆에 높이 걸터앉았다. 조우가 밥을 떠서 먹으려고 입에 숟가락이 갈 적마다 들어가기 직전에 발로 비벼 땅 위의 먼지를 일으켜서 그 숟갈 위에 날아 들게 하였다. 그래서 조우는 한 그릇 밥을 다 퍼내도록 끝내는 한 숟가락의 밥도 먹지 못하게 되었다. 조우가 말하기를,

“생원은 이미 밥을 지어서 나는 주고서 또 먹지 못하게 하니, 이것을 무슨 생각이오?”

하니, 동봉은 대답하기를,

“네가 노 아무개에게 글을 배웠으니 어찌 사람이냐?”

라고 하였다. 조우가 일찍이 송광사 주지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우송광(雨松廣)이라고 불렀다. 80~90이 되도록 살아 있었으므로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가 그를 만나보게 되었던 것이다. 한번은 이 얘기를 수암에게 전하고 말하기를,

“동봉의 한 일들이 이처럼 괴상하여 나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겠소.”

하니, 수암은 대답하기를,

“동봉은 일찍이 주공ㆍ공자를 대단찮게 여기고, 탕왕과 무왕을 그르게 여긴 적이 있었다. 그런데 노사신이 그때 총애받는 정승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와 같이 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한다.

○고황제(高皇帝)의 장릉(長陵)은 남경의 종산(鍾山)에 있다. 그 산에 고라니와 사슴들이 많이 서식하여도 사람들이 감히 사냥을 할 수 없다. 때문에 언제나 사람을 겁내지 않아서 가까이 가도 피하지 않으며, 산밑 시냇물에는 굵고 작은 고기들이 헤엄치고 놀고 있는데, 그물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가까이 가도 또한 놀라 달아나지 않는다고 한다.

○직장(直長) 송미로(宋眉老)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천(利川)에 진사 한 분이 있었으니 곧 모재(慕齋)의 고제자였다. 그의 성명은 잊어버렸다. 한번은 모재가 풀지 못한 문자를 적어서 창주(滄洲) 윤춘년(尹春年)에게 물었더니, 조목조목 해석하여 다시 의문과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극히 탄복할 만하다.”

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정영위(丁令威)는 항주(杭州) 사람이다. 의무려(醫無閭)에 들어가서 신선을 배웠다. 지금 도화동(桃花洞)에 성수분(聖水盆)이 있으니 이것이 정영위의 유적인데, 학이 되어 화표주(華表柱)에 날아와서 울었다.”

고 하였다. 요성(遼城) 밖 팔리참(八里站)의 서북쪽에 수산령(首山嶺)이 있고, 수산령의 동북쪽에 석봉(石峯)이 높이 솟아 있으니 곧 문황제(文皇帝)의 어가(御駕)가 머물던 산이라고 한다.

○추강(秋江) 남백공(南伯恭 남효온(南孝溫)의 자)이 과거에 응하지 않으니, 동봉은 그를 나무라기를,

“나는 영묘조(英廟朝 세종의 묘호)의 사람으로 노산(魯山) 때의 일을 직접 보았으니, 진실로 본조에 벼슬하기 어렵지만 자네는 그 뒤에 태어났으면서 벼슬하지 않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추강은 드디어 시험에 응시할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소릉(昭陵)의 일이 통탄할 일이다 하여, 만약 복위시킬 수만 있다면 내가 벼슬할 수 있다하고 곧 소릉 위소(復位疏)를 올렸는데, 당시 논의가 떠들썩해져 이를 배척하였다. 그래서 추강은 즉시 벼슬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따금 과장에 들어가서는 빈 피봉(皮封)만 내었으므로 과거 글은 장원에 뽑혔으나, 피봉을 뜯으면 성명이 없어서 방에 붙지 못하였다고 한다.

○만력 기축년(1589, 선조 22)에 종계 주청사(宗系奏請使)로 북경에 갔었다. 그때 마침 중양일(重陽日)이어서 국자감에서 공자를 뵈었다. 여관으로 돌아올 적에 일부러 딴 길을 택했는데, 길 위에서 보지 못한 것을 구경하려는 것이었다. 그 길을 지금 비록 기억해 낼 수 없으나, 동화문(東華門) 남쪽으로 뻗은 거리인 듯한데, 그 거리가 아주 좁았다. 학관(學官) 안정란(安庭蘭)이 중국 말을 잘하였으므로, 말머리에 서서 앞을 인도하였다. 발걸음이 그 동네의 중간쯤에 도착하니, 화분을 길가에 내다 놓은 것이 있었다. 그 꽃나무는 외줄기로 우뚝하게 바로 올라서 해마다 자란 마디가 있고, 마디마다 바야흐로 잎사귀가 붙어 있는데, 옆으로 뻗어 나간 가지가 없으며, 그 잎사귀는 꽤 두툼하면서도 넓적하여 마치 두충(杜冲)의 잎사귀와 같았다. 잎사귀 사이에 하얀 꽃이 때마침 활짝 피어 있는데, 꽃봉오리가 오얏꽃에 비해서 조금 더 크고도 두꺼웠다. 나는 생각하기를, 9월에 피는 흰꽃은 우리나라에서는 없는 것이니 반드시 이름난 꽃이리라 여기고, 곧 말을 멈추고 안생(安生)을 시켜서 길 옆에 사는 사람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 꽃은 관가의 물건이라고 했다. 한 관리가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문밖에 나와서 내게 이르기를,

“당신이 이 꽃을 사겠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사려는 것이 아니오. 나는 외국 사람인데, 이 꽃이 무슨 꽃인지를 몰라서 물어본 것뿐이오.”

하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말리화(茉莉花)입니다.”

하고, 인하여 손수 그 꽃 네댓 송이를 따서 내게 선물하였다. 냄새를 맡아보니 맑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인해서 젊을 적에 본 《사문유취(事文類娶)》가운데 말리화를 두고 읊은 시가 떠올랐다. 시는 이러하다.

여러 사람 놀라게 할 고운 자태는 없지만 / 雖無艶態驚群目

다행히도 맑은 향기는 구추의 으뜸이라 / 幸有淸香壓九秋

이 꽃은 원래부터 맑은 향기가 있기로 유명한 것이다. 예관에 돌아온 즉시 소매 속의 꽃송이를 꺼내 가지고 물었더니, 여관 역부(役夫)들이 모두 말하기를,

“말리화다. 말리화는 남방에서 나는데, 서울에 옮겨 심어 그 꽃이 자못 많이 퍼졌다.”

고 하였다.

모재(김안국 1478-1543)는 벼슬하기 전부터 벌써 시를 볼 줄 안다고 당시에 이름이 났었다. 판서 성경숙(成磬叔 성현(成俔 1439-1504)의 자)이 한 해 동안 나서지 않고 집안에서 요양하였다. 그 사이에 두시(杜詩)를 숙독해서 사운(四韻) 여덟 수를 짓고 스스로 ‘마음에 만족한 작품이니 옛날 사람의 시에 견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때는 아들 하산(夏山) 세창(世昌)이 과거에 오르지 못하였을 때다. 하루는 하산에게 말하기를,

“내 이 시는 옛날 사람의 작품에 부끄러울 것이 없을 만한 것이다. 들으니 네 친구 김 아무개는 시의 잘잘못을 가려낸다고 하니, 네가 보통 종이에다 하인을 시켜서 베끼고 이것을 부엌 위에 수십 일 동안 매달아 연기에 오래 묵은 것처럼 만든 뒤, 그을리게 하여 김 아무개에게 보여 그것이 어느 시대의 시인가를 물어보라.”

하였다. 하산이 자기 집에 모재를 초청하여 손님 자리에 같이 앉고, 판서는 그 안방에 있으면서 벽만 가려 놓고 그 말을 들으려 하였다. 하산이 묻기를,

“집의 어른께서 시를 묵은 책 상자 속에서 찾아내셨는데, 이것이 참으로 옛날 사람의 작품임은 알 수 있다. 그러나 잘 모르겠구려. 송 나라 말엽의 작품인지, 아니면 원 나라 사람의 작품인지를 분명히 알 수 없어, 자네에게 이 시의 감정을 청하네.”

하였다. 모재는 두 편을 읽고 말하기를,

“이 시는 격이 낮다. 송 말엽의 시는 벌써 아니고, 원 나라 시 또한 아니다. 바로 현대의 작품이다.”

고 하였다. 또 묻기를,

“최고운(崔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호)이나 이목은(李牧隱 이색(李穡)의 호)의 작품은 아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최고운ㆍ이목은의 시는 격이 높다. 그러니 그들의 작품은 아닐 것이고, 진실로 현대 사람의 작품이다. 그러나 현대 사람의 작품으로는 매우 훌륭하다. 다른 사람은 아마 이렇게 지을 수 없을 것이다. 들으니, 대감(大監 성현을 지칭)께서 요즘 두시를 읽으셨다고 하는데, 만약 정밀하게 생각하고 다듬으시면 이만한 작품을 쓰실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대감의 작품일게다.”

하였다. 판서가 안에서 이 얘기를 듣고 문을 열고 나와서 모재를 보고 말하기를,

“너의 시 공부가 이 정도까지 이른 것은 뜻밖이구나.”

하고, 드디어 술상을 차리고 마주 앉아서 오랫동안 조용히 얘기한 뒤에 파하였다 한다.

○중국의 풍속 습관은 예와 지금이 동일하지 않은 것이 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기장밥은 젓가락으로 먹지 말라.”

하였는데, 주가(注家)에서는,

“젓가락으로 먹지 말라는 것은 숟가락으로 먹는 것이 편리함을 좋게 여긴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서는 밥을 뜰 때 모두 젓가락질이고, 이른바 숟가락이라는 것은 전혀 없다.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말머리를 동여매고 소 코를 꿰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하였다. 지금 중국엔 코 꿴 소가 없고, 우리나라에서만 그렇게 하고 있다.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소 코를 꿰지 않은 것은 어느 때부터인지 알 수 없다. 중국의 고급 사정을 잘 아는 자에게 물어 봐야겠다.

북경의 삼충묘(三忠廟)는 숭문문(崇文門) 밖 6~7리 지점 길 옆에 있고, 동쪽으로 도자하(桃子河)에 임하였는데, 제갈무후(諸葛武侯)ㆍ악무목(岳武穆)ㆍ문신국(文信國) 등 세 소상(塑像)이 있다.

○김전한(金典翰 전한은 벼슬 이름)은 일찍이 말하기를,

“모재((김안국 1478-1543))가 임인년 7월부터 배앓이를 얻어서 계묘년 정월 초4일에 세상을 뜨셨다. 한번은 임인년 동짓달 밤에 밖에 나가 대변을 보고 돌아와서 전한에게 이르기를, ‘지금 하늘의 기상을 살펴보니 국가의 형편이 위태롭게 되었다. 외척이 장차 화를 전가시키면서 선비들이 살해를 많이 입게 되어 국가가 반드시 망할 것이다. 비록 망하지 않더라도 그 화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병으로 인해 일어나지 못하니 보게 되지 않을 것이지만, 너희들도 또한 말을 함부로 지껄여서 화기(禍機)를 건드리지 말라.’하고 연달아 4~5일을 혀를 차고 탄식하면서 먹지 않으셨다.”

고 하였다.

○모재(김안국 1478-1543)가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쫓겨난 뒤에, 이천(利川)의 줏동(注叱洞)에 처음으로 갔었다. 그런데 마침 평안도 관찰사는 사로 친분이 있는 친구였다. 편지로 개가죽 배자(褙子)를 입고 밤중에 하늘의 기상을 살펴보려 한다고 하였는데, 드디어 개가죽 배자를 얻게 되었다. 또 문앞에다 높다란 누각을 짓고 흐리고 비오는 날이 아니면 밤에는 곧 털가죽 옷을 입고 누각에 올라가서 천문(天文)을 보면서 해를 마쳤다. 그러니 모재는 천문에도 극히 정통하였다.

○모재(김안국 1478-1543)는 일찍이 말하기를,

남곤이 기묘사류들을 죄에 빠뜨릴 적에 그의 본의는 그 기세를 죽이기 위해 파직시켜 내쫓으려 했을 뿐, 애당초 살해할 의사는 없었으나, 행여 왕께서 말을 들어 주지 않을까 염려하여, 일부러 장황하게 죄를 만들어 임금의 귀가 솔깃해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중묘(中廟 중종)께서 그 말을 지나치게 믿고 처분을 극히 무겁게 하였으므로 정암(靜菴)ㆍ충암(冲菴) 등이 마침내 그 생명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남곤이 비록 이것을 후회는 하면서도 자기가 설치한 함정을 자기가 도로 구해낼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죽음을 눈으로 보고 한평생 한스럽게 여겼다.”

고 하였다.

○우참찬 백인걸(白仁傑)은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모재에게 글을 배웠다. 한림에서 파직당하고 자원하여 여주(驪州)의 교수(敎授)로 나갔다. 항상 모재의 문하에 가서 매양 을사년 충순당(忠順堂) 면대(面對)의 일을 말하기를,

“회재는 그때 면대에 참여하지 않고 한번 죽을 따름인데, 어찌 차마 이기(李芑)의 무리들과 한때 같이 면대하였는가? 모재가 만일 세상에 계셨더라면 죽으면 죽었지, 결코 그 면대에 참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만력 기축년(1589)에 북경을 갔었는데, 국자감에 나아가 장차 공자를 뵈려 할 적에, 관부(館夫) 이선(李瑄) 등이 길 위에서 한 골목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골짜기에 융복사(隆福寺)가 있으니 실로 서울의 큰 사찰이요, 경태제(景泰帝)의 잠저입니다. 경태제가 잠저시에 언젠가 중이 되어 이 절에 머물고 있었는데, 정통 황제(正統皇帝)의 북방 사냥 행차를 만나 감국(監國)을 인하여 황제 위에 올랐습니다.”

하였다. 경태제가 일찍이 중 노릇을 하였다는 설은 다른 증거도 없으니, 그런지 아닌지를 모르겠다. 인해 기억 나기로는 사십가소설(四十家小說)의 《병일만기(病逸謾記)》인데, 육익 정의(陸釴鼎儀 정의는 자임)가 찬한 글 중 한 줄거리에,

“경태제의 죽음은 환자(宦子) 장안(蔣安)이 깁[帛]으로 억지로 죽였다.”

고 하였는데, 그럴듯하다. 또 기억나기로는 북경에 갔을 적인데, 남성을 물으니, 중국 사람이 이르기를,

“장안문 동편에 궁궐 담장을 불룩 나오게 쌓은 곳에서 바라보면, 그 가운데 궁전이 대내(大內)보다 조금 낮은 것이 곧 남궁(南宮)인데, 정통황제까지의 임금들이 여기에 살았다.”

고 하였다. 식자들의 평정(評訂)을 기다려야겠다.

○우리나라 종계(宗系)를 변무할 적에 주문(奏文) 가운데, 국조(國祖)의 휘(諱)는 자춘(子春), 자도 자춘(子春)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예부의 관리가 이것을 의심스럽게 여긴 자가 있어서 묻기를,

“자춘은 곧 인임(仁任)이라고 하는 사람의 자(字)가 아니냐?”

하였다. 사신이 돌아오자 참판 김계휘(金繼輝 1526-1582)는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옛사람들은 자가 그 이름과 같은 사람이 많았다. 이를테면, 곽자의(郭子儀)의 자는 자의(子儀), 양연기(楊燕奇)의 자는 연기(燕奇)이다.”

하고, 이어서 이름과 자가 같은 사람을 무릇 7명을 드는데, 책자를 상고하지도 않고 대담하는 자리에서 직접 들었으니 박식하다고 할 만하다.

공헌대왕(恭憲大王 명종) 시호를 청하기 위해 쓴 행장(行狀)은 즉 퇴계가 제술한 것이다. 감정(勘定)할 때에 경복궁의 춘추관에 일제히 모였는데, 직책이 춘추관의 일을 겸한 자는 모두 회의 좌중에 있었으므로 다 기억할 수 없고, 다만 참판 김중회(金重晦)공이 참여한 것은 기억난다. 행장의 끄트머리에,

“왕의 선형(先兄) 영정왕(榮靖王) 모비(母妃)의 일족이 죄를 입고 죽기도 하고 더러는 귀양간 사람도 있었는데, 다 은혜를 베풀어 신원해 주고, 또 석방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는 말이 있었다. 그 당시 논의는, 영정왕 모비의 일족이 죄를 입었다는 것은 중국 조정에서는 모르는 일이니, 지금 이 말을 제기하여 중국 조정이 알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하자, 퇴계는 말하기를,

“여러분의 의사가 이미 이렇다면 이 한 줄거리는 삭제하자.”

하고, 즉시 그 자리에서 지워버렸다. 이어서 말하기를,

“이것은 실로 선왕의 훌륭한 업적이다. 비록 중국 조정에는 숨기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빠뜨려서 없애버릴 수 없는 일이니, 국승(國乘)에 분명히 기재하여 후세에 알도록 해야 한다.”

고 하였다 한다.

문종대왕이 손수 눈 속의 매화 한 가지를 그리고, 아울러 칠언 율시 한마디를 제하여 안평대군에게 주었다. 그 둘째 구에,

도리어 차디찬 눈 속인데도 / 却於氷雪崢嶸裏

봄바람 살짝 얻어 향기 풍기네 / 偸得春風漏洩香

라고 하였고, 다른 구절은 잊어버려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박 참의(朴參議)의 말은 첨지 송응형(宋應泂)의 집에서 친히 보았다고 한다.

노산왕(魯山王 단종)의 비(妃) 송씨(宋氏)는 적몰되어 관비가 되었는데, 신숙주(申叔舟)가 공신의 여자종으로 받아내려고 왕에게 청하기까지 하였으나, 광묘(光廟 세조의 묘호)가 그의 청을 허락하지 않고서 얼마 안 가서 궁중에서 정미수(鄭眉壽)를 양육하게 하였다.

영양위(寧陽尉 정충경의 아들 정종)가 적소에서 사사(1561)된 뒤 공주(문종의 장녀 경혜공주 1436-1474)는 적몰되어 순천(順天) 관비가 되었다. 부사 여자신(呂自新)은 무인이었다. 장차 관비의 일로 부리려 하니, 공주는 곧장 대청에 들어가서 교의(交椅)를 베풀고 앉아서 말하기를,

“나는 왕의 딸이다. 내 비록 죄가 있어 정배되었지만, 어찌 수령이 감히 관비의 일을 시키는가?”

하여, 마침내 일을 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여자신은 뒤에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즉 여유길(呂裕吉)의 방조(傍祖)다.

안정복순암집에도 경혜공주가 장흥의 관노가 되었다는 기술이 있다. 그러나 실록에는 경혜공주가 관노가 되었다는 기록이 없고 대신 정종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는데 무척 가난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조는 이를 불쌍히 여겨 경혜공주에게 집을 지어주고 몰수한 재산과 노비를 하사했다. 또한 지난 2012년 7월 24일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증된 해주 정씨 대종가 소장 고문서 가운데 경혜공주가 자신의 유일한 아들 정미수에게 재산을 상속한 분재기(分財記)가 공개되었는데, 공주 자신이 죽기 사흘 전인 성종5년(1474년) 음력 12월 27일에 제작된 것으로 '경혜공주지인(敬惠公主之印)'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어 경혜공주가 죽을 때까지 공주의 신분을 유지했다는 증거로 채택되기도 했다.

○중종(中宗) 임신년에 소릉(昭陵) 복위를 위한 회의를 특별히 베풀었는데, 유순정(柳順汀)이 수상으로서 홀로 불가하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의논을 널리 모으던 그날, 어떤 한 사람의 꿈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가 유 정승과 씨름으로 서로 겨루다가 유 정승이 지는 것을 보았다. 때는 정 해평부원군이 죽고 장사를 치르기 전날이었다. 날이 밝아 유 정승이 관과 띠를 갖추고 대궐로 나아가려는데 갑자기 중풍이 들어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소릉 복위의 반대 논의가 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복위하게 되었다 한다.

○내가 옛날에 대언(代言 승지의 별칭)이 되어 은대(銀臺 승정원의 별칭)에 있었는데, 마침 양도왕조(襄悼王朝 예종)의 일기를 상고해 보게 되었다. 양도왕이 하루는 이렇게 전교하였다.

“공정왕(恭靖王 정종)은 종사(宗社)에 죄를 얻지 않았는데도 묘시(廟諡)가 없으니 이것은 전례(典禮)를 빠뜨린 것이다. 지금 마땅히 시호를 올려야 한다.”

하여, 드디어 시호를 안종(安宗)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이내 공정왕으로 부르고 안종이란 시호는 마침내 폐지되어 불리지 않았으니, 또한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다. 본국의 전고에 널리 통한 자를 만나서 이를 상의해 봐야겠다.

○금상(今上 현재의 임금을 말함)이 즉위한 처음에 잠저 때의 구휘(舊諱)를 고치고 아래에서 삼망(三望)을 갖추었는데 모두 날일(日) 자 변의 글자로서 비의(備擬)하여 바쳤다. 그 때 경(曔) 자가 수망(首望)이었는데 부망(副望)이었는지는 확실히 기억할 수는 없으나, 그 글자가 비의된 것만은 분명하다. 마침 지금 어휘에 낙점되었다. 참판 김계휘(1526-1582)가 나중에 비의된 소문을 듣고 놀라기를,

“경(曔) 자는 바로 공정왕(恭靖王)의 어휘다.”

하였다. 만약 낙점이 되었더면 어떻게 될 뻔했겠나. 다행히 낙점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에 종묘의 어보(御寶)를 이산(李山)에게 도둑맞아서 도감을 설치하여 잃어버린 어보를 다시 만들게 되었다. 내가 제조가 되어 도제조 이하의 관원들로 더불어 종묘 안 각 실의 책보(冊寶)를 살펴 보았더니 첫째 실인 강헌왕(康獻王 태조)의 실 안에 공정왕의 존호를 올린 옥책이 있었는데, 그 문장에, ‘신(臣) 경(曔)…’으로 되어 있어, 바야흐로 경(曔) 자가 공정왕의 휘가 됨을 알았다. 온 세상이 모르는 것을 김 참판만이 알고 있으니 박식하다고 할 만하다.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 이숙번(李叔蕃 1373-1440)은 광묘(光廟 세조)가 어릴 적에 보고 말하기를,

“어린애의 눈동자가 너무도 그의 할아버지를 닮았구나. 모쪼록 형제끼리 우애하고 너의 할아버지는 본받지 말라.”

하였다 한다. 할아버지는 태종을 가리킨 것이다.

○가정 경신년(1560, 명종 15)에 찬성 홍섬(洪暹 1504-1585)이 대제학의 직을 간절히 사양하여 원한 대로 되었다. 신임 대제학을 선출해야 하므로, 승정원이 전례에 의하여 무릇 가선대부 이상의 문관을 패초(牌招 왕명으로 승지가 신하를 부르는 것)하여, 모두 경복궁의 빈청에 나아갔다. 빈청의 행랑은 길이가 무릇 몇 칸이나 되어 매우 널찍하였으나, 왕명을 받고 그 자리에 나온 재신들로 빈청이 가득하였다. 영상 상진(尙震 1493-1564)ㆍ좌상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은 북쪽 벽에 앉고, 거기서 꺾어져 서쪽 벽에는 홍 찬성이 제일 윗자리에 앉고, 그 아래로 여러 재신들이 차례대로 앉았다. 찬성은 전례대로 자신의 후임을 추천하게 되었는데, 예조 판서 정유길(鄭惟吉)ㆍ지사 윤춘년(尹春年)ㆍ동지 이황(李滉)을 추천하고, 이어서 정승의 자리 앞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이 아무(이황)는 경술과 사장(詞章)이 실로 이 임무에 합당하지만 초야에 깊이 묻혀서 굳이 나오지 않은 데야 어찌 하겠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찬성이 대제학을 사직했을 때, 답사에,

“신임 예조 판서를 겨우 보게 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이처럼 사직하오?”

라는 말씀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왕이 정 예조 판서에게 뜻을 두고 있음을 짐작하였다. 이날 예조 판서는 와서 참석하였고, 윤 지사는 병으로 오지 못하였다. 내가 주서로서 추천 단자를 가지고 아랫자리부터 윗자리까지 앞에 나가서 권점을 청하였다. 그런데 가선들은 거의가 임당(林塘 정유길의 호)에게 권점을 쳤고, 박영준(朴永俊)에게 와서야 퇴계에게 권점을 치기 시작하였다. 좌찬성(홍섬을 지칭함)이 권점 칠 차례가 되자 일어나 정승의 자리 앞에 나 앉으면서 말하기를,

“사람들은 각각 한 사람에게 권점을 치지만 내 생각으로는 세 사람이 모두 합당하니 모두에게 권점을 치겠습니다.”

하였다. 정승들이 허락하니 곧 세 사람 모두에게 권점을 쳤다. 참판 김주(金澍)는 좌찬성의 앞에 있었다. 박 참판(박영준을 지칭)에게 이르기를,

“영감이 만일 추천되었다면 내가 거기에 권점을 칠 텐데, 지금 추천되지 않았구려.”

하였다. 권점이 끝나게 되어 영상의 앞에 가지고 나아가니, 퇴계는 12권점, 임당은 16권점, 창주는 겨우 5권점뿐이었다. 영상은 창주의 이름 밑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여기는 너무 적다. 나는 여기에 권점을 쳐야겠구나.”

하고 즉시 그의 이름 밑에 권점을 쳤다. 창주는 이 때문에 6권점을 얻게 되었다. 나중에 수망(首望)으로서 권점이 많다고 하여 임당을 대제학에 임명하였다. 이것을 평시의 전례로 내가 분명히 아는 일이다.

임진왜란 뒤에 무릇 대제학을 선출할 때는 현직 정승과 육조 판서만 패초해서 권점을 모을 뿐이며, 심지어 박충간(朴忠侃) 같은 이는 음관(蔭官)으로서 마침 판서가 되어 뻔뻔스레 권점을 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전례가 오래지 않아서 증거삼을 만한데, 임진왜란 후에는 마음대로 새로운 예를 만들어 내서 이를 수행하고 있으니 탄식할 뿐이다.

○공헌왕(恭憲王) 때 황홍헌(黃洪憲)이라는 중국 사신은 명성이 미리 알려져 있었다. 하루는 경연에서 임당 정유길에게 묻기를,

“우리 나라 조사(詔使)들이 지은 시 가운데 누구의 것이 제일가오?”

하니, 임당은,

“기순(祁順)이 첫째고, 장영(張寧)이 첫째고, 장영(張寧)은 그 다음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지금 와서 살펴보건대, 장정지(張靖之 자영의 자)의 시는 편마다 절창이라 첫째가 되어야 합당한데, 임당이 그렇게 대단한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나라가 바뀔 적에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은 자는, 이를테면 유유(劉裕)ㆍ소도성(蕭道成) 등인데, 모두가 국운이 짧았다. 순환을 좋아하는 하늘의 이치가 당연하다. 그런데 홀로 사마소(司馬昭)만은 성제(成濟)의 손을 빌려서 고귀향공(高貴鄕公 위주(魏主) 모(髦))을 죽였는데도 사마(司馬)씨의 진(晉) 나라는 백 년 동안 나라를 누렸으므로 일찍이 이 일을 적이 괴이쩍게 여겼더니, 뒤에 깊이 연구하여 비로소 거기에 대한 설명을 얻게 되었다. 사마의(司馬懿)는 비록 찬탈의 터전은 닦았지만 일찍이 임금을 죽이지는 않았고, 사마소(司馬昭)의 자손이 비록 천하를 차지하였으나 회제(懷帝)ㆍ민제(愍帝) 때 와서 오랑캐의 손에 사로잡혀서 죽음을 당하였으니, 하늘이 사마소의 죄악에 대한 보복이 아주 뚜렷하여, 사마소의 후손은 진실로 이미 멸망한 것이다. 원제(元帝)는 곧 사마의의 증손이며 사마소의 후손은 아니다. 사마의는 임금을 죽인 죄가 없는 만큼, 그의 후손의 향국이 조금 연장된 것은 또한 당연한 이치다.

○일찍이 《송사(宋史)》를 상고해 보았더니, 이를테면 장돈(章惇)ㆍ채경(蔡京)ㆍ진회(秦檜) 등이 모두 간신전(姦臣傳)에 있는데, 그들의 죄악이 워낙 많았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모두 간악한 사람으로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사(高麗史)》의 간신전에 실린 조민수(曺敏修 ? - 1390)ㆍ변안렬(邊安烈 1334-1390)로 말한다면, 그들의 일과 행동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간사스러운 증상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 조민수는 다만 선왕(先王)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는 이색(李穡)의 말만 듣고 창왕(昌王)을 옹립하였을 뿐이며, 변안렬은 여흥왕(驪興王 우왕)을 개인적으로 찾아가 뵈었을 뿐이다. 이것을 가지고 죄를 만들어서 간신의 열에 넣어 두었으니 어찌 후세의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으며, 또한 사실을 바른 대로 쓴 믿을 만한 역사가 될 수 있겠는가? 또 먼저 임금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는 것은 곧 이색의 말이다. 근본을 따져서 죄를 삼는다면 이색은 장차 죄의 우두머리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신(史臣)들이 이색은 명유(名儒)라 하여 감히 간신의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민수에게만 가하였을 다름이니, 한번 웃음을 터뜨릴 만하다.

이자의(李資義 ? - 1095) 같은 분은 헌종(獻宗)을 보호하려고 꾀를 쓰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주었다. 현종은 곧 선종(宣宗)의 아들로 이미 선종을 이어서 임금이 되었으며, 자의는 친(親)으로 말하면 그의 장인이다. 그를 보호함이 또한 무슨 죄가 되겠는가? 성공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 운명이다. 비록 죽었지만 부끄러움이 없을 만한 것이다. 《고려사》에서는 그를 역신(逆臣)으로 전(傳)을 내었다. 대개 역신이란, 자신이 난역을 범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자의에게 이런 일이 있었는가?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염흥방(廉興邦 ? - 1388)은 고려 말엽에 임견미(林堅味)와 재물을 탐냈다고 하여 한때 죽음을 당하여 지금까지도 임견미ㆍ염흥방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유희령(柳希齡)이 지은 《대동시림(大東詩林)》에 시인의 성명을 기록하였는데, 염흥방의 이름에 가서는,

“요(遼)를 쳐야 한다고 간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고 하였다. 이것은 옛날 역사에도 없던 말인데, 희령이 갑자기 이런 말을 끄집어 내었으니, 또한 전해 들은 것이 꼭 그러한 단사를 얻어서 말한 것인가? 과연 이와 같다면 염흥방은 참으로 나라의 일에 충성한 사람이다. 그의 죽음이 합당한 죄가 아닌 듯하다. 허균(許筠)은 말하기를,

“우왕(禑王)이 최영(崔瑩)의 딸을 비(妃)로 맞아들일 때 흥방이,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대장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서는 안 된다.’고 간하였다. 이 때문에 최영(崔瑩)의 노여움을 깊이 건드려서 혹독한 재앙을 당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믿을 만한 말인지 모르겠다.

○둔촌(遁村) 이집(李集1327-1387)은 자는 호연(浩然)이며 벼슬은 판전교시사에까지 이르렀는데 고려 말에 죽었고, 본조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가 죽으니 정종지 도전(鄭宗之道傳 종지는 정도전의 자)이 곡하며 말하기를,

“손꼽아 세어본들 날 알아 줄 이 그 누구랴! 슬허 아픈 이 마음 하늘에나 물어 보련다. 약재(若齋)는 예전에 만리길 떠났는데, 둔촌 노인이 또 저 세상 사람이라네. 강개스러운 그 말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맑고 산뜻한 시는 세상에 으뜸이었도다. 지금은 모두 함께 갔으니, 눈물 어리 흘리지 않으리.”

하였다. 약재는 곧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이다. 고려 때 북경에 사신으로 갔었다. 고황제(高皇帝)가 공마(貢馬)의 수가 모자란다 하여 대리(大理)에 귀양을 보냈는데 도중에서 죽었다. 길 가운데서 시를 짓기를,

좋은 말 오천 필은 어느 날 도착하려나 / 良馬五千何日到

도화관 밖에는 풀만이 더부룩하도다 / 桃花門外草芊芊

하였다. 둔촌의 죽음이 아마 척약재와 같은 시기였을 것이다. 참의 유희령이 지은 《대동시림》에는 둔촌의 이름 밑에서 주석을 내기를,

“본조에 들어와서 무슨 벼슬까지 했다.”

하였으니, 이보다 더 심한 거짓말이 어디 있겠는가? 후손되는 사람은 그 억울함음 분명히 밝혀야 될 것이다.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 1425-1475)은 춘추감으로 있을 때에 시정기(時政記 정사를 집행하여 나가는 중에 역사에 남을 만한 것을 사관이 추려서 적은 기록)에서 자기의 죄악이 낭자하게 쓰여진 것을 보고 분해하면서 말하기를,

“왜종이[倭楮]에 박은 《강목(綱目)》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또한 즐겨 보지 않는데, 더군다나 《동국통감(東國通鑑)》이겠는가? 너희들 마음대로 써라. 누가 동국의 역사를 보려하겠느냐?”

하였다.

○정자삼(鄭子三)은 젊을 적에 늘 황여헌(黃汝獻)의 문하에 있었다. 내가 경상도 관찰로 있을 적에 정자삼을 청해 보고 울산 군수 황여헌(1486-?)의 평일의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정자삼은 말하기를,

“매양 울산 군수를 모셨더니, 하루는 울산 군수가 갑자기 한숨을 쉬면서 말하기를, ‘선조 (先朝)에서 서당(書堂)에 뽑힌 사람은 무릇 일곱 사람이다. 이행(李荇)ㆍ김안국(金安國)ㆍ김안로(金安老)ㆍ소세양(蘇世讓)ㆍ유운(柳雲)ㆍ정사룡(鄭士龍) 그리고 나다. 이행과 김안로는 정승이 되고 또 대제학을 하였으며, 김안국ㆍ소세양ㆍ정사룡 또한 대제학을 지냈으므로 대제학을 지낸 사람이 다섯이다. 유운은 죄를 입고 일찍 죽었어도 오히려 종2품까지 되었는데, 나 혼자만이 어정어정 낭관의 자리에서 헤매다가 시골로 쫓겼났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느냐?’라고 하더라.”

하였다.

○신기재(申企齋 이름은 광한(光漢))는 무릇 시를 지은 것이 있으면 곧 직강(直講) 신호(申濩)에게 보여서 그의 시정을 얻은 위에야 세상에 행하였다. 하루는 세초연(洗草宴) 계축시(契軸詩)를 가지고 신 직강에게 보였다. 신 직강이,

인간의 남긴 자취 용이 오르는 것 같구나 / 人間遺迹似龍騰

라는 구절까지 읽다가는 마음에 들지 않아 두세 번 되풀이하면서 읊었다. 기재가 말하기를,

“이것이 만족스럽지 못해 그러는가?”

하니, 신 직강이 말하기를,

“동파(東坡)의 시에서 말한 바,

세간의 남긴 자취 용이 오르는 것 같다 / 世間遺跡猶龍騰

고 한 것은, 난정(蘭亭)의 견지(繭紙)의 진본은 소릉(昭陵 당 태종(唐太宗)의 능) 장사 때 같이 묻었고, 그 모본(摹本)으로 세상에 전하는 것도 오히려 용이 날아오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모본이라 비록 진본은 아니지만, 그 필세는 오히려 용이 날아오르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을 인용하여,

천하의 보배 글은 물을 따라 흘러간다 / 天上寶書隨水化

의 대구로 사용함은 아마도 마땅치 않은 것 같다.”

하니 기재는 말하기를,

“어찌 이렇게 봐서야 되겠는가? 용이 오른다는 것은 다만 마치 용이 변화를 부려서 흔적이 없음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하고, 신 직강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아서 ‘용이 오른다’는 말은 고치지 않고 세상에 전해졌다. 지금 보니 아마 신 직강의 말이 옳은 듯하다.

○모재(김안국)가 여강(驪江)에 있을 때에 음애(陰崖)는 충주, 희강(希剛 이장곤(李長坤))은 우만(牛灣)으로부터 신륵사(神勒寺)에 와서 모재와 서로 모여 유숙하였다.

그때 김이숙(金頤叔 안로(安老)의 자)이 국사를 맡아 보았는데,

“파직된 중신들이 한 곳에 모여서 국가의 일을 의논한다.”

고 하였다.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1499-1547)는 이기(李芑 1476-1552)가 《대학》과 《성리대전》 등의 글을 잘 안다 하여 매양 그의 집에 가서 정정(訂正)하고는 물었다. 모재 김안국(1478-1543)이 들어오게 되어, 규암이 가서 뵈니 모재가, ‘이기는 실지로 학문을 알지 못하고 거칠고 험해서 만나봐서는 안 된다.’고 극언하였다. 기의 집은 관아에 나가는 길 옆에 있었으므로 규암이 전에는 늘 들렀는데, 이로부터 전혀 가지 않았다. 이기는 분해 하며 말하기를,

“송 아무가 김 아무의 말을 듣고 곧 나를 찾아보지 않는가?”

하고, 드디어 깊이 양심을 품었다 한다.

윤원형(尹元衡 1503-1565)이 봉상시 정이 되자, 당시의 논의는 장차 이를 공박하려 하였다. 이 영상(李領相)이 이를 말리기를,

“대상의 형제도 오히려 연줄로 벼슬을 하는데 중전(中殿)의 형제간으로 이 직을 보전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그가 당상관에 올라서 관압사(管押使)로 북경에 가게 되었는데, 죄를 입고 살아 돌아오지 못할까 염려하니, 참판 구수담(具壽聃)이 반드시 무사할 것이라고 보증하였다. 원형은 과연 무사히 갔다 와서 그를 매우 고맙게 여겼다. 을사사화가 일어나게 되어 이 정승은 중열(仲悅)의 작은 아버지라하여 평안 감사로 밀려나고, 구공은 연좌되어 파직되었는데, 진복창(陳復昌)이, 선왕 때의 착한 사람은 어린 임금이 새로 들어서는 초기에 없어서는 안 된다는 소(疏)를 올려, 곧 다시 임용되었으니 모두 원형의 힘이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사재 김정국은 황해 감사로 있으면서 남곤ㆍ심정의 간사하여 남을 모함한 죄상 및 정암(靜菴)과 제현들의 자신의 몸을 잊어버리고 나라에 목숨을 바친 충성을 힘껏 진술하여, 수천 마디 말의 상소문 하나를 지었는데 무려 10장이나 되었다. 마침 막료(幕僚)에 성이 남씨며 남곤의 일족인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헌납(獻納)에 발탁되어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사재가 그 소를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서울에 가거든 이 소를 꼭 올리게.”

하니, 남씨 또한 허락하면서 사양하지 않고 곧 소를 싸가지고 길에 올랐다. 공(사재를 지칭)의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이 소를 올리게 되면 사림들은 모조리 결딴이 날 터이니, 지금 사람을 달려 보내면 도로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이 놀라 깨어 즉시 역졸(驛卒) 3명을 골라 헌납의 행차에 달려보내서 그 소를 도로 찾아오게 하였다. 헌납이 바야흐로 벽제관(碧蹄館)에 도착하였는데, 역졸이 뒤따르게 되어 남(南)은 곧 그 소를 돌려 주었다. 남곤이 남씨에게 소의 뜻을 묻자 남씨는 이런 일이 없었다 하고, 일체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매우 높이 여겼다. 나중에 남씨는 벼슬이 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요즘 죽산 현감(竹山縣監) 남대임(南大任)은 곧 그의 손자이다. 모재가 매양 사재에게 말하기를,

“이 소가 만약 올라가게 되었더라면 사람들은 어찌 내가 몰랐다고 말하겠는가? 우리 형제는 죽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죽은 사람이 또한 얼마나 되었겠느냐?”

하였다. 그때 모재는 파직만 되었고, 사재는 삭직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재의 죄를 얻음이 모재보다 더 중한 것은 소가 비록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그가 소를 올리려 했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남지정(南止亭 남곤)이 주청사로 갔다가 돌아올 적에 공이 황해 감사로서 황주(黃州)에 나가서 만나 보고는, 지정이 사림(士林)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서 그 때문에 그의 노여움을 건드리게 되어 죄를 얻음이 더욱 무거웠다.”

고 하였다.

○소재(노수신 1515-1490)가 말하기를,

“이중열(李仲悅)이 이조 좌랑으로서 윤춘년(尹春年)을 추천하지 않자, 춘년은 소를 올려 말하기를, ‘윤임(尹任)은 전하의 역적이요, 윤원로(尹元老)는 인묘(仁廟)의 역적이라’고 했다.”

고 하였다. 뒤에 와서 윤원형 형제가 비록 둘로 갈라졌으나 애당초는 한 마음이었다. 원로가 이미 인묘의 역적이 되었으면 원형은 홀로 인묘의 역적이 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분명히 공초(供招)에 인정되어 결안(結案 형벌을 결정한 안문(案文))은 동일함이 있을 것이다.

양재역 벽상서(壁上書 1547)를 정언각(鄭彦慤)이 고변한 뒤에 당시 사류들의 죄가 결정되었다. 그때 진복창ㆍ윤춘년이 소재를 힘써 구해 주었으므로 사적(死籍)에서 벗어나고 다만 진도에 귀양가는 데에 그쳤다.

소재 (노수신)는 이조 정랑으로 있을 적에 한때의 중망을 받았다. 마침 진복창과 함께 시원(試院)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시권(試券)을 고사(考査)할 적에 두 사람은 함께 과장을 좌우하였다. 과장이 파한 뒤에, 소재가 복창의 집에 한 번 찾아갔다가 그가 없어서 명함을 남겨두고 돌아왔다. 복창은 소재가 찾아온 것이 매우 고맙게 여겨 매양 그의 명함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내보이면서,

“과회(寡悔 노사신의 자)가 나를 찾아왔다가 내가 없어서 그냥 갔다. 이것이 그가 남겨둔 명함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정미년(1547, 명조 2)에 과회가 죄를 얻었을 적에 진복창이 힘써 구해줘서 그의 죄가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그는 진도에 귀양살이한 지 19년 만에 비로소 놓여 돌아오게 되었는데, 서열을 밟지 않고 뛰어올라 드디어 정승에까지 올랐다. 그 사이에 복창이 대사헌으로서 죄를 얻어 갑산(甲山)으로 멀리 귀양을 가게 되었다. 소재는 복창이 자기를 힘써 구해줘서 살아나게 되었으므로 복창의 아들을 자기집 식구처럼 돌보았다. 복창의 아들이 만일 소재의 집에 오게 되면 다정하기 자식과 같아 이름을 통하지 않고 바로 들어왔다고 한다.

○소재(노수신)는 윤창주와는 진사의 동년(同年)이다. 늦게 귀양지에서 돌아와 부제학이 되었다. 내가 직제학이 되어 옥당에 있었다. 일찍이 한 차례 모임에서 내가 묻기를,

“창주는 일평생 음률을 안다고 자부하였는데, 과연 이런 일이 있습니까?”

하니, 소재는 대답하기를,

“이것은 헛말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대개 전혀 음률을 안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은 즉 남지정의 외손자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지정(남곤)의 시는 용재(성현)를 아주 따르지 못하며, 용재의 문장은 지정에게 못지않다. 그런데 지정의〈백사정기(白沙亭記 《월정별집》에는 정(亭)이 정(汀)으로 되어 있음)〉만은 아마도 용재가 그만큼 짓지 못할 것이다.”

고 하였다. 용재는 시에만 이름이 났고 문장은 지정에게 어림도 없었는데, 여성군이 이렇게 말하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여성군이 지정의 문집을 인쇄하였으므로 판본이 그의 집에 간직되어 있는데, 그의 시는 인쇄하지 않았다. 정호음(鄭湖陰 정사룡(鄭士龍))은 일찍이 말하기를,

“지정의 시는 결코 대가(大家)인데, 어찌 후세에 전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하였다. 서진지(徐鎭之)는 우리 형제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정의 홍경주(洪景舟)에게 한 제문에, ‘어두울 녘에 대궐문을 밀치고 곧장 바로 들어감은 우리 두 사람이 공동으로 하였다.’하였는데, 기묘사화 때 신무문(神武門) 고변한 사건을 가리킨 것이니, 웃음이 터져나올 만하다. 여성군이 이것을 빼버리어 판본 속에는 실리지 않았다.”

고 하였다.

○감서 허태휘(許太輝 엽(曄)의 자)는 언젠가 말하기를,

진복창(?-1563)은 소인이기는 하지만 자못 재주가 있으니, 조정에서 만일 잘 다루어서 이용만 한다면 전혀 못쓸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무강(李無疆 ? - ?)으로 말한다면 오직 권세 잡은 간신의 지시나 부추김을 받아 선량한 사람을 후려치는 것만 일삼을 뿐, 다른 재주라곤 없으니, 전혀 쓰지 못할 소인이다.”

라고 하였다.

이무강은 이기(李芑)에게 붙어 아첨해서 바야흐로 양사(사헌부ㆍ사간원)의 아장(亞長 사헌부 집의와 사간원 사간)이 되었으나 선비들의 평론을 이를 매우 더럽게 여겼다. 옥당에서 본관록(本館錄)에 권점을 찍는 날 관(館)의 전체 관원들이 모두 무강의 자를 부르며 말하기를,

“경휴(景休)가 이번 본관록에 틀림없이 피선될 거야.”

하였다. 그런데 권점이 끝나게 되어 무강의 이름 밑은 살펴보니 1권점도 없었다. 드디어 서로 놀라는 체하면서 말하기를,

“이 아무개가 어째서 오늘의 본관록에 참여되지 못하였을까?”

하였다. 한결같이 그 사람을 더럽게 여겨서 그의 이름 밑에 권점 찍기를 좋아하지 않은 것이 진정이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짓 놀랍다는 말을 하다니, 또한 우습다.

○진복창은 서화담(徐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호)에게 보낸 시에서,

봄철의 좋은 꽃은 피었다간 또 지고 / 春半好花開又落

비온 뒤의 못물은 흐렸다가 맑아진다 / 雨餘潭水濁還淸

푸른 솔 앙상한 바위 모양도 기이한데 / 蒼髥瘦骨多奇態

어찌하여 송암이라 이름하지 않는고? / 盍取松岩以記名

하였다. 진복창 그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감히 화담에게 호를 고치라고 권하였는가? 제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직장 이의중(李宜仲)은 영상 홍언필(洪彦弼)의 손서(孫婿)다. 그가 말하기를,

“젊을 적에 홍영상이 사궤장연(賜几杖宴)을 베풀었는데, 진복창은 대사간으로 와서 참석하였다. 잔치가 파하여 떠날 때 그는 발을 삐었다. 영상의 아들 지충추부사 섬(暹)이 다음날 복창의 집에 사람을 보내서 편지로 어제 발을 삐었는데 많이 다치지나 않았는지 위문하니, 복창은 화전지(花牋紙)에 답장을 쓰기를, ‘평소에 대감님의 가르침에 감격하고, 또 영감의 우정을 생각하여 마음 놓고 실컷 마시고 엎어지락 자빠지락 나오다가 발을 조금 삐긴 하였지만, 무어 다치기야 하였겠습니까? 지금은 벌써 회복되어 또 술자리에 나가고 있으니, 풍부(馮婦)의 범 잡음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하여, 지충추는 그의 편지 사연을 극히 칭찬하였었다.”

고 하였다. 내가 젊을 적에 한번은 임 판서(任判書)의 집에서 판서가 경상 감사로 부임할 적의 증별첩(贈別帖)을 보니, 그 속에 진복창의 별장(別章)이 있었다. 자체는 조송설(趙松雪 조맹부(趙孟頫)의 호)의 〈대우부(大雨賦)〉를 모방하였는데, 글씨가 아주 힘차고 아름다웠다.

○부정(副正) 신사헌(愼思獻)이 한번은 하는 말이,

“조인규(趙仁奎)가 내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집 어른께서 연산조에 장령이 되어 부임할 즈음에 새로 제주 목사로 임명된 사람이 있어 종루(鍾樓) 옆의 어느 집에 와 있으면서 만나기를 요구하였다. 장령께서 즉시 들러서 만나셨는데, 그 사람 하는 말이 「원래 질병이 있어 만약 바다 밖 제주의 땅으로 부임하게 된다면 장독(瘴毒)을 뒤집어쓰기 때문에 살아서 돌아오기 어렵소. 만일 나를 위해 적당하지 않다고 체직을 논해 준다면 매우 고맙겠소.」하였다. 말이 끝나자, 장령께서는 곧 작별하고 나오셔서 본부(本府)에 출근하지 않고 곧장 대궐로 나아가 피혐하시기를, 「오늘 아침 출근할 적에 제주 목사 아무가 길 옆에 와있다가 신을 보고 체직을 논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신이 원래부터 위풍이 없었기 때문에 감히 사적인 일을 가지고 서로 부탁한 것이오니 바라옵건대 신의 직을 갈아 주시옵소서.」하였다. 연산군은 즉시 그 사람을 잡아 국문하여 마침내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우리집 어른께서는 평생 동안 한스럽게 여기셨다.’하였다. 그가 아들을 두지 못하는 것도 또한 이러한 악을 쌓은 소치일 것이다.”

하였다.

○옥당에서 예전에 학 한 마리를 길렀었다. 당시에 이렇다 하는 학사(學士)들은 흔히 이 학을 두고 시를 지었는데, 모두 하늘 천(天) 자의 운을 달아 지었다. 그 가운데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ㆍ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작품이 특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서는 시의 학을 잃어버린 뒤에 지은 것이다. 임석천 시에,

두어 마디 맑은 소리 하늘 높이 울어대고 / 數聲嘹亮沈寥天

전나무 그늘, 대밭 가를 찾아 깃든다네 / 蒼檜陰中苦竹邊

연기 비는 삼도의 달을 가린 것이 그 얼마더뇨 / 煙雨幾䨪三島月

바람 서리는 오호 연꽃을 또 거꾸러뜨렸구나 / 風霜又倒五湖蓮

검은 먼지는 가린 것이 새로운 털을 물들였건만 / 緇塵已染新毛換

붉은 이마는 오히려 옛 모습 지녔도다 / 丹頂猶存舊骨仙

강해의 늙은이는 공연히 마주보고 섰으니 / 江海老人空對立

찬 이슬이 가을 자리에 젖어옴을 모르누나 / 不知涼露濕秋筵

하였다. 김하서의 시는 다음과 같다.

뛰어난 자태 하늘 멀리 보냄을 후회하노니 / 悔放殊姿送遠天

지금은 종적이 어느 물가에 붙여 있나 / 秪今蹤跡寄何邊

시 지어 천년 화표주(華表柱)를 조상하려 하노니 / 題詩肯弔千年柱

날개 쳐서 열 길 연꽃에 깃들 만하구나 / 刷羽堪依十丈蓮

맑게 부는 옥퉁소는 누대가에 비치고 / 淸轉玉簫臺畔影

아득한 적벽강은 꿈속의 신선이라 / 微茫赤壁夢中仙

산 높고 바다 넓어 소식조차 없으니 / 山高海濶無消息

그때의 대모연을 혹시나 기억하리 / 倘記當年玳瑁筵

하였다.

○유신(金庾信)은 계유년 생원시에 장원하고 뒤에 대과에 올랐는데, 자문(咨文)을 보내서 말을 점검하러 곽산(郭山)에 이르렀다가 대낮에 도깨비에게 가위눌려서 까무러쳤다. 그것은 마치 거문고 줄과 같은 끈 하나로 급히 그의 배를 동여매는 것 같았다. 옆에 사람들이 칼로 그 실끈을 베어내면 끊어졌다가는 도로 이어져서 끝내 끊어내지 못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는데 홀연히 밖으로부터 삼베 직령(直領)을 입은 서생이 들어오자, 도깨비는 공중에서 여자의 소리를 내면서 말하기를,

“정 한림(鄭翰林)은 그대의 일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내가 누대의 원수를 갚으려 하는데, 그대가 무엇 때문에 장난질인가?”

하였다. 서생은 군수에게 청하기를,

“대나무통 하나와 주사(朱砂) 약간을 얻어서 사용해 보겠습니다.”

하기에, 군수는 즉시 대나무통과 주사를 주었다. 서생은 즉시 조그마한 종이 두 장을 잘라서 그 위에 부적을 그려, 하나는 대나무통 바닥에 깔고, 하나는 통 위에 얹어서 공중으로 날려 보내니 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은은히 대나무통 속에서 나는데, 처음에는 가까이서 들리다가 차츰차츰 멀리 사라져 가고 유신은 즉시 깨나서 일어나 앉았다. 서생은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살아나게 되었지만 오던 길로 가서는 안 된다.”

하고 가짜 널[棺]을 만들어 ‘김유신의 널’이라 쓰게 하고, 한길을 따라서 돌아가게 하고, 또 유신은 변복을 시켜 수안(遂安) 산골짝 길을 경유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 뒤로 유신은 살긴 살았어도 마치 넋 잃은 사람과 같다가 3년 만에 결국 죽고 말았다. 이른바 서생은 행방을 알 수 없다. 사람들의 말에, 서생은 곧 정희량(鄭希良)이라고 하였다. 정희량이 죽지 않았음을 또한 여기서 징험할 만하다. 유신은 일찍이 정희량에게 수업을 하였으므로 옛날 정을 못 잊어 와서 구해준 것이라 한다.

○옛날 내가 직제학으로 옥당의 일회(一會 여럿이 한 번 모이는 일)에 참여하는데, 유미암(柳眉巖 유희춘(柳希春)의 호)은 그때 통정(通政)으로 부제학이 되어 진시황(秦始皇)의 일에 대해 이야기가 미쳤다. 나는 말하기를,

“일년 만에 아들 정(政)을 낳았으니, 한단(邯鄲)의 여자는 태자 궁중에 들어온 지 실지로 12개월이 지나서 아들을 낳은 것이며, 또 그보다 앞서 2~3개월을 지나서야 바야흐로 애기 밴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15개월이 넘는다. 어째서 그대로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라고 하겠는가? 이것은 반드시 후세 사람들이 진시황을 몹시 미워하여 이와 같이 사실이 아닌 말을 한 것이요, 실재로는 아마 장양왕(莊襄王)의 아들로 봐도 의심이 없을 것이다.”

하니 미암은 말하기를,

옛날 사람은 애기를 배서 달을 넘어 낳는 약이 있었으니, 이것은 정말 불위의 자식인 것이다. 직제학도 불위의 속임수에 넘어감이 지나치구나.”

하였다. 이 설은 또한 꼭 그렇지는 않으나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에서도, 진시황과 진원제(晉元帝)는 모두 다른 성의 아들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진실로 여씨가 진(秦)을, 우씨(牛氏)가 진(晋)을 이었다고 꼭 지적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어떤 사람이 정승 임당(林塘 정유길 1515-1588)을 뵙고 말하기를,

“마침 옥당에 갔다가 당직 학사를 만났는데, 바야흐로 《호음고(湖陰稿)》를 열람하다가 자못 이를 업신여겨 좋지 않다고 하고, 간혹 그의 글귀를 지우기를 마치 글 등급을 매기듯 하더이다.”

하니, 임당은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호음 아저씨께서 다른 일로 평론받는 것은 혹 모를 일이지만, 시에 가서야 지금 세상에 어찌 등급을 매길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다.

○정 문익공(鄭文翼公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의 시호)은 김탁영(金濯纓 김일손 1464-1498)과 함께 양남(兩南 영남ㆍ호남) 어사의 명을 받아 같은 날 임금께 하직하고 용인현(龍仁縣)에 도착하였는데, 서로 사이가 좋아서 용인관(龍仁館)의 한 객실에서 같이 자게 되었다.

탁영이 강개하게 시사(時事)를 논하는데, 말씨가 지나침이 많았다. 문익공이 여러 차례 이것을 중지시키기를,

“말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니, 탁영은 문득 분격해서 말하기를,

“사훈(士勛 정광필의 자)도 또한 이처럼 낮고 더러운 논을 하는가? 어찌 차마 기절 없는 썩어빠진 선비가 되는가?”

하여, 밤새도록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 한다.

○여성위(礪城尉)는 말하기를,

“남지정(南止亭 남곤 1471-1527)이 과거에 올라서(1494년) 방(榜) 부르는 날 새벽에 동년(同年)들과 광화문 밖으로 나아가는데, 홀연히 한 선생이 홍살[紅戟] 섬돌 앞에서 ‘남곤(南袞) 신래위(新來位)’라고 부르기에, 지정이 달려가니 그 선생은 지정에 말하기를, ‘네가 장원이 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느냐? 중국에는 소동파(蘇東坡 소식(蘇軾)의 호)가, 우리나라에는 내가 모두 제 2등으로 합격하였으니, 너도 이것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말라.’한다. 지정이 마음속으로 누구인지 몰라, 자못 괴이쩍게 여겨 하인을 시켜 그 선생의 종에게 물어보았더니, 이는 김일손(金馹孫) 이었다.”

하였다. 대개 탁영은 평소에 장원이 되지 못한 것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는데, 마침 지정이 또 제2등이 되었으므로 이를 계기로 지정을 불러 이같이 말하여 그 평소의 불평스러운 뜻을 터뜨린 것이라 한다.

○신평산 호(申平山濩)는 말하기를,

“용인에 사는 윤(尹) 아무는 탁영의 생질이다. 탁영과 지정이 서로 사이가 좋았으므로 서울 가게 되면 지정을 찾아가 뵈었다. 지정이 정승으로 있을 적에 윤 아무가 그를 찾아 뵈니, 지정은 한숨을 쉬며, ‘세상에 어찌 다시 탁영과 같은 분이 나오겠는가?’하니, 윤은, ‘대감의 문장으로도 곧 우리 외삼촌을 이처럼 칭찬하고 부러워합니까?’하니, 지정은, ‘너희들은 문장가의 수(數)를 바로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물로 비유하면, 탁영(김일손)의 문장은 곧 강물이요, 나(남곤)의 문장은 도랑물이다. 어찌 서로 견줄 수 있겠는가?’하였으니, 그를 추중함이 이와 같았다.”

고 하였다.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이 서당(書堂)에 있을 적에 시를 지었는데, 그 글제는 아마 ‘망월(望月)’등의 말인 듯하나 기억할 수 없다. 눌재(訥齋 박상(朴祥))는 이상(二上)으로 장원이 되고, 유촌은 삼중이었는데,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이름으로 또 한 수를 지어 삼하가 되었으며, 모재는 차상이었다. 유촌이 늘그막에 늘 말하기를,

눌재(박상)의 이 시는 글자마다 출처가 있어 따라갈 수 없고, 모재(김안국)는 원래 시에는 모자랐다.”

하였다 한다.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 1502-1558)는 대사성이 된 지 3년의 오랜 세월을 매양 신관(新館)에 출사하였으므로 다니는 길이 진복창(陳復昌 ?-1563)의 집을 지나가도 전혀 들러 찾아보지 않았다. 복창은 배리(陪吏 부하 아전)를 문 밖에 배치하고서 무릇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 들리지 않는 자는 곧 알리게 하였다. 송강은 이 소문을 듣고 그 뒤부터는 이현로(梨峴路)로 다니지 않고 길을 고쳐 어의동(於義洞)으로 다녓다. 복창은 또 알고 어의동에 사람을 배치해 두고 탐지하게 하였으되, 송강은 끝내 한번도 찾아보지 않았다. 선배들은 명분과 절의를 가다듬어, 소인을 보기를 마치 더럽혀지는 것처럼 여겨 전혀 한번도 만나보지 않았으니, 공경할 만하다.

○명묘조(明廟朝)에 심충선(沈忠宣 신연원(沈連源)의 시호인 듯)은 수상으로 영경연(領經筵)을 겸하고, 조송강(趙松岡)은 지경연으로서 같이 입시하게 되었다. 대신들의 집이 정도에 지나침을 논하는데, 송강은 충선의 첩의 집 행랑채가 너무 크다고 바로 그 자리에서 논박하여, 충선은 몸둘 바를 몰라 등에 땀이 나서 옷이 흠뻑 젖었었다. 그 뒤로 충선은 첩의 집 행랑채를 깊이 잠그고서 손님을 대하지 못하게 하고 작은 사랑채에서만 손님을 맞았다. 그러나 송강을 이조 판서에 추천하여 낙점되게 하였다. 충선은 의리에 감복하고 송강은 곧음을 지켰으니, 모두 공경할 만하다.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호) 조자건(曺子建)은 하종악(河宗岳)의 아내가 실행한 일을 가지고 귀암(龜岩 이정(李楨))과 논의가 달라서 절교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소재(蘇齋 노수신)가 부친상을 당하여 상주(尙州)에서 수제(守制 상을 당하여 상의 예제를 지킴)하고 있었는데, 이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남명은 평생 동안 관직을 사랑하지 않고 속세를 떠나 고고하게 지나더니, 한 부인의 실행에 대해 무슨 관계되는 것이 있기에 친구와 절교하는 것인지, 이는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남명의 문인 유종지(柳宗智)가 곧 소재의 한 말을 남명에게 고하니, 남명은,

“소재는 전해 들리는 말만 들었을 뿐, 나의 본정은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갑오년(1594년) 겨울에 내가 주청사로 북경에 가는데, 부사 최입지(崔立之 입(岦)의 자)ㆍ서장관 신경숙(申敬叔 흠(欽)의 자)과 함께 소주(蘇州)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길을 떠나 길을 떠나 성중을 다 지나서 삼하(三河)로 향하려는 터였다. 서문 안에는 독락사(獨樂寺)란 절이 있고, 매우 높은 불상이 있었다. 최 부사와 신 서장관은 한번도 본 적이 없으므로 두 사람을 데리고 올라가서 구경하였다. 절의 동서편 행랑방엔 점쟁이 조소봉(趙小峯)이란 자가 와서 머물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즉시 들러서 찾아보고 내력을 물어보았더니, 자기는 소흥부(紹興府) 사람이라 하고는, 이어서 그가 이른 아침에 점친 것을 내보여 주었다. 거기에,

“오늘 아침에 눈이 내림, 고려 재상이 찾아옴.”

이라고 적혀 있었다. 때마침 눈이 뿌렸고 우리 일행도 또한 도착하였으니, 그의 술법이 자못 신묘하다. 소봉은 나에게 혼자 고요한 방에 들어가서 묻고 싶은 일을 써서 조그마한 합(盒)에 집어 넣게 한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해 가지고 나와서 소봉에게 주었더니, 소봉은 향로에 불을 피워 부처 앞에 놓고 부처를 놓고 아주 공손하게 읍례를 드렸다. 이어서 그 합을 향로 위에 들고 쏘이고 또 그 합을 부처의 두 귀 둘레를 두어 바퀴 돌린 뒤에 상 위에 내려 놓았다. 그런데 물음을 쓴 말이 한 자도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최 부사와 신 서장관 두 사람의 물음은 글자 수가 더욱 많았는데도 틀리지 않고 신기하게 맞혔다. 만약 사복(射覆)놀이를 한다면, 그의 말은 열어 보지 않고도 반드시 맞히리라고 자신하였다. 이어서 나의 여행에 대해 점쳐 보았더니, 즉시 쓰기를,

“명년 정월에 말해서 떨어질 환이 있을 것이니, 부디 조심하라.”

고 하였다. 그 길로 북경에 갔다가 정월 21일에 하직하고 이튿날 통주(通州 퉁저우)로 돌아왔고, 통주에서 25일에 소주(蘇州)를 거쳐 옥전(玉田)으로 향하는데, 도중에서 타고 있던 말이 낙타를 보고 놀라 뛰는 바람에 그만 땅바닥에 떨어졌다. 어리둥절하여 소봉의 말을 미처 기억하지 못하였는데, 최입지가 곧 말을 해주어 비로소 그의 말이 들어맞았음을 깨달았다. 또한 기이한 일이다.

○임진왜란 때 난여(鑾輿 임금이 타는 수레)가 난리를 피하여 서쪽으로 옮겨 평양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1534-1602) 공이, 부원수 신각(申恪 ?-1592)이 그의 진을 마음대로 떠나서 검찰사(檢察使) 정승(政丞) 이양원(李陽元)을 따라간 것이 글렀다고 하여, 장계를 올려 그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비변사에서는 그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 죽이기를 청하였다. 이튿날 신각에게서 비보가 들어왔는데, 베어낸 적의 귀가 40여 급(級)이라 하였다. 비변사의 제공들은 그의 공이 죄를 덮을 만하다 하여 용서하고 죽이지 않기를 청하고 또 선전관에게 빨리 뒤쫓아가서 그가 죽기 전에 도착하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떠난 선전관이 빨리 가지 못하였으므로 거기에 도착하니, 신 부원수는 벌써 죽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변사의 제공들은, 모두 죽지 않아도 되는데 끝내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고 그를 아프게 여겼다.

이어서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연간의 일이 기억난다. 고황제(高皇帝)가, 학사(學士) 송염(宋濂)은 집에 있으면서 성탄절(聖誕節 천자의 생일)에 서울에 오지 않았다 하여 역말을 보내서 그를 목 베게 하였다. 이미 며칠이 지나서 효자황후(孝慈皇后)의 간함으로 인하여 다시 중지할 것을 명하였는데, 그때는 사람이 빨리 달려가서 처형하기 전에 그를 구해 주었으니, 그 행과 불행이 바로 이렇다. 신 부원수는 무관의 직에 있으면서 자못 직무의 봉사에 충실하였다. 일찍이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을 적에 성첩(城堞)을 수리하느라 우물이 마르게 되자, 도랑을 파서 성의 북쪽 비봉산(飛鳳山) 냇물을 끌어와서 성안으로 대었으므로, 드디어 물이 마르는 걱정이 없어졌다. 이정암(李廷馣)이 포위당하였을 적에 자못 그의 힘을 입어서 성이 함락되지 않았다 한다.

○임금호(林錦湖)는 을사 권간의 비위를 거슬려 제주 목사에서 파직되어 나주의 본가로 돌아왔는데 부모가 모두 살아 있었다. 그런데 홀연히 후명(後命 유배한 죄인에게 사약을 내려 죽임)이 있어 마침내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죽을 무렵에 정신이 어지럽지 않고 마치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는 사람처럼 하였으니, 비록 학문의 힘은 없을지라도 또한 타고난 천품은 원래 높았던 것이다.

○영천(靈川) 신잠(申潛)은 참판 종호(從濩)의 둘째 아들이다. 시에 능하고 묵죽(墨竹)을 잘 치고 초서를 잘 썼다. 정덕(正德) 계유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뽑히고 또 기묘년 현량과에 합격하였다. 나중에 대과(大科)는 삭제되고 진사과의 백패(白牌) 또한 잃어버렸다. 별장(別莊)이 아차산(峩嵯山) 밑에 있었는데, 그는 시를 짓기를,

홍지는 회수되고 백패는 잃어버렸으니 / 紅紙已收白牌失

진사시의 장원한 것도 헛이름일세 / 壯元進士摠虛名

돌아와 아차산 밑에 사니 / 歸去峩嵯山下住

산인이란 두 글자야 어느 누가 다투리 / 山人二字孰能爭

하였다. 간성 군수(杆城郡守)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당상에 오르고 상주 목사로 영전하였는데, 열심히 공직에 봉사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랑하였다. 공은 마침내 상주에서 죽었는데, 주민들이 공을 추모하여 덕정비(德政碑)를 세웠다.

○내가 젊을 적에 황화지(黃華紙)로 책자를 만들어 퇴계 선생(退溪先生)에게 법서(法書)를 청했더니, 선생께서 소 강절(邵康節 소응(邵雍)의 시호)의 시만 써 주었다. 그 중의 한 율시에,

부름에 자주 사양해도 버리지 아니함은 / 相招多謝不相遺

가슴에 품은 경륜 씀직해서 그렇지만 / 將謂胸中有所施

나아간들 어찌 금리의 임무 감당하리 / 若進豈能禁吏責

한가로운 바에야 명예 다시 무엇하리 / 旣閑安用更名爲

다행히 요순 같은 착한 임금 만났으니 / 幸逢堯舜升平日

당우의 태평성대에 달갑게 늙으려네 / 甘老唐虞比屋時

청렴하고 어진 이 조정에 가득한데 / 滿眼淸賢在朝列

나라일에 늙은이야 무슨 소용 있으리 / 老夫無以繫安危

하였다. 그의 시는 부정공(富鄭公)에게 화답한 것이 많았는데, 부공이 강절에게 벼슬하기를 권하자, 강절은 벼슬을 원하지 않는다는 작품인 것이다. 다른 시도 거의 모두가 이런 내용이어서, 온 책이 모두 한가로움을 사랑하고 명리(名利)에 나아가지 않는 내용의 말이었다. 내가 관직을 사랑하여 물러나기를 좋아하지 않을 것을 퇴계께서 미리 아시고 주신 정문일침일 줄이야 어찌 알겠는가?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호)를 뵐 적마다 선생은 나에게 관직을 그만두고 시골에 가서 살라고 권하였다. 나는 돌아가서 살 만한 전지가 없다고 대답하였더니, 우계는 말하기를,

“비록 돌아갈 만한 곳이 없을지라도 만일 용단을 내서 돌아가면 가난하게 살 수는 있네. 속담에, ‘산 사람의 입에 거미줄 칠 리 없다’하였으니, 참으로 격언일세.”

하므로, 나는 부끄러워서 사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내 나이 60이 넘도록 아직까지 관직에 미련을 두고 물러나려 하지 않을 줄이야 어찌 생각하였겠나? 퇴계와 우계는 모두 선견(先見)이 있어서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이 일을 한 번씩 생각할 적마다 얼굴이 붉어진다.

최치원(崔致遠 857-?)의 〈쌍계사비(雙溪寺碑)〉 및 《해동명적(海東名迹)》의 〈추풍유고음(秋風唯高吟)〉의 자체는 가로 긋고 세로 내리 긋는 획이 가늘고도 힘차기 마치 산가지와 비슷하여 곧기만 하고 모양이 적었으며,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의 〈연복사비(演福寺碑)〉 및 〈도평의사사청기(都評議使司廳記)〉의 자체는 성(成) 자 등의 과(戈) 획과 중(中) 자 등의 바로 내리 긋는 획이 매우 길어서, 다른 사람의 글자 모양과는 아주 비슷하지도 않으므로 늘 속에 괴이쩍게 여겼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 갑오년에 북경에 가서 모든 명가들의 법첩을 사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구양순(歐陽詢)이 쓴 〈예천관명(醴泉觀銘)〉과 〈황보부군비(皇甫府君碑)〉는 자획이 가늘고도 힘차기 마치 산가지와 같고, 저수량(褚遂良)의 〈성교서(聖敎序)〉는 과(戈) 획과 중(中) 자 등의 획이 매우 길었다. 그래서 최치원(崔致遠)은 구양순의 체를 배우고, 성석린은 저수량의 체를 모방하였음을 비로소 알았다. 비록 우리 동방에 있을지라도 명필에 이르러서는 감히 스스로 자체(字體)를 만들지 못하고 옛날 사람의 체를 모방하였음을 여기서 또한 짐작할 수 있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조송설(趙松雪 조맹부(趙孟頫)의 호)의 체를 모방한 사람은 매우 많으나, 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의 체를 배운 사람은 혹간 있으며, 우영흥(虞永興)ㆍ저수량ㆍ안진경(顔眞卿)ㆍ유공권(柳公權)ㆍ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의 체는 다시 전하는 자가 없어져서, 한결같이 붓 나가는 대로 휘갈려 써서 옛날 법을 다시 찾아볼 수 없으니, 개탄해 할 따름이다.

중국 조정의 정덕(正德) 연간에 오인(吳人) 축윤명(祝允明)은 명필의 이름을 독차지하여 명 나라 법서의 제일로 추존되었다. 〈국조명신법첩(國朝名臣法帖)〉가운데 축윤명의 글씨 한 권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자체는 축 윤명이 쓴 〈사수시(四愁詩)〉와 아주 똑같았다. 정호음이 일찍이 축윤명의 체를 보고서 이것을 본받은 것이지, 아니면 우현히 합치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난 갑오년에 북경에 가서 옥하관(玉河館)에 머물고 있을 적에 〈순화법첩(淳化法帖)〉을 며칠 동안 모방하여 연습하였다. 부사 최입지ㆍ서장관 신경숙은 이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나이 60에 비로소 법서를 모사하여 장차 얼마나 성취되겠는가? 왜 이처럼 스스로 고생하고 있소.”

하기에, 나는 웃고 말았다. 그 뒤 임진왜란 때 죽국의 대병(大兵)이 와서 구해 주고 철수해 돌아갈 적에 유격(游擊) 왕입주(王立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소주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찾아가 보고, 이어서 글씨 한 폭을 써서 그와 같은 고향인 왕감주(王弇州 왕세정(王世貞)의 호)의 아들 주사(主事) 왕사기(王士騏)에게 부쳤는데, 유격은 내 글씨를 보고 말하기를,

“이 글씨의 자획은 우영흥의 글씨를 모방한 것이다.”

하였다. 나의 글씨가 어찌 만분의 일이라도 우영흥의 필법을 얻었겠는가?

찬성 허자(許磁)좌윤 이찬(李澯)은 대과에 오르기 전에 성균관에 같이 거하였다. 허찬성은 이 좌윤보다 두 살 위로 허 찬성은 병진생, 이 좌윤은 무오생이었는데, 매양 이 좌윤의 윗자리에 앉았었다. 어느 날 허 찬성은 꿈을 꾸고는 이로부터 매양 이 좌윤에게 윗자리를 사양하고 자기는 아랫자리에 앉았다. 계미년(1523, 중종 18)에 같이 과거에 올랐는데, 이 좌윤은 2등, 허 찬성은 3등이 되었다. 허 찬성은 그제서야 그때의 꿈 얘기를 하되, ‘자기와 이 좌윤이 동방 급제를 하였는데, 자기 이름이 바로 이 좌윤의 이름 아래에 있었다. 그 뒤부터 매양 이 좌윤의 아랫자리에 앉은 것은 그 꿈이 실현되기를 바란 것이요, 이것을 숨기고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은 행여 하늘의 기밀을 누설시킬까 염려해서였다.’고 하였다.

○이조 판서 조사수(趙士秀 1502-1558)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병조 판서 이준민(李俊民 1524-1590)은 상주 교수(尙州敎授)로 가도사(假都事)가 되었다. 관찰사의 순행(巡行)이 경주에 도착하니, 좌윤 이찬(李澯 1498-1554)공은 가도사에게 아주 공경히 대하고, 부의 아랫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재상이 될 인물이니, 진짜 도사로 대우해야 된다.”

하니, 관찰사는 듣고 빙긋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가도사는 어떠한 재상이기에 주인 영공(令公)이 이처럼 극히 우대하시오?”

하였다. 매우 경멸한 탓으로 그의 말씨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 뒤 이 좌윤은 체직되어 와서 경연청에 나가고, 이 판서도 이미 한림이 되어 같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좌윤은 이미 늙고 병들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한림이 앞에 가서 스스로 얘기하니, 그제서야 알아보았다. 이 판서는 뒤에 병조 판서가 되어 공명이 조 판서와 거의 비슷하였으니, 이 좌윤은 안식(眼識)이 있다고 할 만하며, 조 판서의 사람을 잃음은 실로 그를 업신여긴 데에 있었던 것이다.

첨지(僉知) 이공좌(李公佐)는 가정 계미(1523, 명종 18) 8월 20일 해시(亥時)에 태어났는데 영상 박순(朴淳 1523-1589)과는 오주(五柱)가 모두 같았다. 둘 다 계축년(1553, 명종 8) 정시(庭試)에 급제하였는데, 박 영상은 문과 장원이 되고, 이 첨지는 무과 장원이 되었다. 박순은 벼슬이 영사에 이르러 사퇴하고 영평(永平)으로 내려간 지 3년 만에 죽으니, 수는 겨우 67세이다. 적실에는 딸 하나만 있고 아들은 없으며, 측실에 아들이 있긴 하나 나이 어려서 성취시키지 못하였다. 이 첨지는 적실에 아들 넷, 딸 하나를 두고, 측실에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적자ㆍ서자 5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 첨지 자신도 일찍이 3품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였고,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올랐다 하여 직급이 더해져 당상에 올랐으며, 올해 나이 81세인데도 건강하다.(1593년) 맏아들 응해(應獬)는 현임 가선(嘉善)인 수사(水使)이며, 그 밑에 네 아들도 모두 6품 이상이다. 벼슬 지위로 말하면, 이 첨지가 박 영상에게 어림도 없지만, 오래 살고 자식 많으며 목전의 영화로 말하면, 이 첨지만이 누린 것이요, 박 영상이 도리어 모자란다. 오주가 같은데도 성쇠의 이치는 그 사이에 다름이 있으니,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운명을 말하는 자가 거기에 대한 해설을 구해 보나 알아내지 못하여 말하기를,

“이 첨지는 해시 초에 나고, 박 영상은 해시 말에 나서 팔자가 같지 않은 까닭이다.”

라고 하니, 이는 더욱 괴이하다.

○나는 소재(蘇齋)와 함께 옥당에 있었다. 소재가 얘기하던 끝에 말하기를,

“《대학(大學)》의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은 본디 차례와 등급이 있는 것이지만, 그 외의 《논어(論語)》와 《맹자(孟子)》에 산발적으로 나오는 것은 주자(朱子)의 말대로 차례와 등급이 꼭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후대의 학자들은 선유(先儒)의 말이라 하여 감히 다른 의견을 가지지 못하나 실제로는 꼭 그렇지가 못하다.”

하였다. 이는 곧 주자의 말이라 하여 다 따를 수 없다는 뜻이다.

○소재(노수신)는 또 말하기를,

“고봉(高峯 기대승 1527-1572)이 칠언율시를 지었으므로 나는 거기에 차운(次韻)을 붙였다. 고봉의 차운은 20여 수나 되었지만, 다는 다섯 수만 차운하고 말았다.”

한다. 그의 뜻을 한 운으로 많이 짓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제학 유회부(柳晦夫 근(根)의 자)는 말하기를,

“지금 본 서당(書堂)에서 조(祖)ㆍ자(子)ㆍ손(孫) 3대가 뽑힌 자는 무릇 세 집이다. 홍 감사(洪監司)의 집은 감사 홍춘경(洪春卿), 그의 아들 도승지 천민(天民)ㆍ찬성 성민(聖民) 형제와 승지의 아들 서봉(瑞鳳)이, 정 정승의 집은 우상 정유길(鄭惟吉), 그의 아들 현임 이조 판서 창연(昌衍), 이조 판서의 아들 지평(持平) 광성(廣成)이, 이 영상의 집은 전 영상 이산해(李山海) 공, 그의 아들 현임 이조 참의 경전(慶全), 이조 참의의 아들 전 정언(正言) 후(厚)ㆍ한림 구(久)의 형제가 모두 뽑히었다.”

하였다.

○안자유 계홍(安自裕季弘 계홍은 자) 어른은 김홍도(金弘度)의 당에 연좌되어 파직당하였다가 몇 해 지나서야 다시 임용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이조에 들어가고 공이 잇달아 들어와서 같이 좌랑이 되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곽부(郭赴) 공은 언관을 감당할 만한 분이라고 말하자, 공은 말하기를,

곽부는 본디 착한 분이지만 그가 언관이 되는 데 있어서는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는 그저 그런 자격이다. 그렇지만 그의 형 월(越)은 진실로 기이한 재주를 가진 선비이고 사람이 알지 못하는 명장의 재주를 가졌다. 만일 병사(兵使)에 임용되면 반드시 훌륭한 업적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월(越)은 매양 외직에만 임용되었고, 혹 풍헌관(風憲官 풍기를 취체하는 관리)이 되어서도 돌아다니기만 하였을 뿐, 남보다 훌륭함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항상 안장(安丈)의 말이 실정보다 지나치다고 여겼다. 월은 나중에 의주 목사만 되었을 뿐, 병사는 되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장수 재질이 과연 어떠한지 알 수 없거니와, 설사 한 방면의 장수가 되었다하더라도 평화로운 시대에는 진실로 실력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아들 재우(再祐)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포의(布衣)로 병대를 끌고 정진(鼎津)을 지켜 적이 감히 건너오지 못하였다. 그 뒤 적병을 여러 번 쳐부수었고, 또한 어루만져 통솔을 잘하였으므로 군사들이 모두 임용되기를 즐겨하였다. 설사 지금 병사나 수사가 된다 하여도 그의 재주를 충분히 펴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적이 만일 다시 나오면 곽재우가 반드시 대장이 될 것이고, 삼군은 바야흐로 두려움이 없이 완전히 승리하고 깨끗이 소탕하는 공을 거둘 수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명장은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그의 장수 재질은 진실로 내림이 있었던 것이니, 단 샘물[醴泉]은 근원이 없는 것이라고 우겨서는 안 된다. 안 노인(安老人)의 안식에 매양 감복한다.

○신기재(申企齋)는 말하기를,

“한지원(韓智源)의 〈제갈채(諸葛菜)〉절구는 지금의 두시(杜詩)라.”

하였다. 시는 이러하다.

팥배나무엔 이미 소공의 덕화 없어졌는데 / 甘棠已無召公化

작은 나물엔 오히려 제갈 이름 전해 오네 / 小菜猶傳諸葛名

당시에 큰 별이 떨어지지 않았던들 / 不有當年大星落

위의 동산 오의 채마밭에는 나물만이 자랐으리 / 魏園吳圃菜渾生

○옛날에 내가 경차관(敬差官)으로 영남(嶺南)에 내려갔을 때다. 중에게 준 시축에,

고향생각 아득해 흰구름 바라보니 / 鄕心迢遞白雲端

남국의 가을 바람 나그네길 어렵구나 / 南國秋風道路難

말 위에서 중 만나 도리어 한 번 웃으니 / 馬上逢僧還一笑

산에 가득한 푸른 숲은 날 좀 보소 하는구나 / 滿山蒼翠要人看

하였더니, 남명(南溟)은 이를 매우 칭찬하였다 한다,

○융경 2년 무진 (1568, 선조 1)에 중국 조정은 한림원 검토 성헌(成憲)ㆍ병과급사중 왕새(王璽)를 보내어 황태자를 세운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무릇 조사를 접대하는 책임은 도승지에게 있었다. 성공(成公)의 뺨에 꽤 큰 혹이 있었는데, 우리 나라 의원에게 치료를 받으려고 하였다. 이후백(李後白 1520-1578 도승지였는데, 아뢰기를,

“만약 우리나라 의원이 치료하다가 낫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상사(上使)에게 말하되, ‘외국엔 좋은 의원이 없다. 만약에 혹은 제거되지 않고 부스럼만 생긴다면 어찌하겠는가?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사정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상은 그 말이 그렇겠다 여기고 상자에게 청하니, 상사도 과연 그렇겠다고 하였다. 당시의 재신들은 모두 이공을 일러서 변통수에 능하다고 하였다. 성공은 기해생이니, 계주위(薊州衛) 사람이며, 을축년에 과거하였다. 그 뒤 기축년에 내가 북경에 갔더니, 성공은 국자감 좨주로 집에 돌아와서 병을 치료하여 뺨에 있던 혹이 말끔히 치료되어 있었다.

모재(慕齋 김안국)는 조정에서 돌아온 뒤 오랫동안 예조 판서로 대제학을 겸하였다. 뒤에 병조 판서로서 찬성에 올랐고 이조 판서는 되지 못하였으니, 곧 양연(梁淵)의 방해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인데, 정승의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도 또한 복상(卜相)에 참여되지 못하였다 한다.

퇴계(이황 1501-1570)는 벼슬하기 전에 서울을 오가는 길에 여강(驪江)의 범사정(泛槎亭)에 들러서 모재(김안국 1478-1543)를 뵌 일이 있었다. 《퇴계집》 속에,

“모재를 뵈온 뒤부터 비로소 정인 군자(正人君子)의 도를 알았다.”

는 말이 있다. 여주의 산승(山僧)이 시축을 가지고 영남으로 퇴계를 찾아가 뵈었는데, 시축 속에 모재ㆍ기재(企齋) 두 노선생(老先生)의 절구가 있었다. 퇴계는 그 절구에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

두 노인 서거한 지 몇 해나 지났던고 / 二老仙遊知幾年

매화 피는 섣달에 중이 와서 나를 찾네 / 僧來見我臘梅天

예전에 찾아갔던 이 사람은 / 自嗟疇昔登門客

남긴 시에 눈물 뿌리며 백발을 슬퍼한다오 / 淚洒遺篇雪滿顚

유이현(柳而見 유성룡(柳成龍)의 자)이 응교로 있을 적에 판서 이윤경(李潤慶)의 시호를 의논하기 위하여 가는 길에 좌의정 소재(蘇齋 노수신)에게 들러 뵈었다. 소재는 유이현에게 이르기를,

“판서는 유명한 재상이며, 또 남정(南征) 때 공로가 있었고, 또 청덕(淸德)이 많으니, 모름지기 좋은 시호로 정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니, 유이현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곧 의숙(懿肅)ㆍ익장(翼莊)ㆍ의도(懿度)로 망단(望單)을 갖추어 의정부에 보고하였다. 그 때 박사암(朴思菴 박순의 호)은 수상이었는데, 합석하여 계(啓)를 감정(勘定)할 때 시호가 그의 실정을 다 그려내지 못하였다 하여 고치라고 도로 내려 보냈다. 소 정승은 말하기를,

“이 논이 극히 합당하다.”

하고, 우상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호)과 함께 같은 말로 고하였다 한다.

○감주(弇州 명(明) 나라 왕 세정(王世貞)의 호)의 〈왕소군도(王昭君圖)〉의 발문에,

“개보(介甫 왕안석(王安石)의 자)만이 그의 정과 일을 얻어서 말하기를,

한의 은혜 얕아지고 호의 은혜 깊어지니 / 漢恩自淺胡自深

인생의 즐거움은 마음 서로 앎에 있도다 / 人生樂在相知心

하였는데, 비록 이 두 마디 말이 죄가 되기는 하였으나, 사람으로 하여금 그 속마음을 알게 하여 풍영왕(馮瀛王)을 허여함을 기다리지 않고도 그가 순수하지 못함을 미워하였으니, 가소로울 뿐이다.”

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의 소군을 두고 읊은 글은 새로운 뜻을 지어내어 앞사람을 앞서려고 힘썼으므로, 묘사의 기교를 주로 삼다보면 그 사람의 본마음과 사정을 잘못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지만, 풍영왕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오계(五季)를 섬겨 명분과 절의는 쓸어낸 듯하였으므로, 후세의 죄줌이 의당 돌아갈 데가 있어 결코 용서할 도리가 없는데, 개보는 곧 말하기를, “몸을 굽혀 세상을 구해서 모든 보살의 덕행이 있다.”하고, 심지어는 다섯 번 걸(桀)에게 나아가고, 다섯 번 탕(湯)에게 나아갔다는 고사를 비유까지 하였으니, 그의 본마음이 참으로 풍영왕을 그르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뒤에 와서 치우친 소견을 고집하여 여러 사람의 논의를 배척하고 신법(新法)을 힘써 주장하고, 흉사(凶邪)한 자를 인용하여 천하를 어지럽힌 것은 실로 여기서 조짐이 시작된 것이다. 이벽 계장(李璧季章 계장은 자)은 도(燾)의 아들로 일찍이 주부자(朱夫子)에게 인정을 받은 자다. 처음에는 실로 조행을 잃지 않고 사류(士流)가 되었으나, 그가 형공(荊公)의 시를 주(註)낼 적에 그의 인생의 즐거움은 마음 서로 알아줌에 있도다[人生樂在相知心]라는 말을 혼자서 용서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이런 글귀를 지었더라면 사람들이 반드시 그르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가 형공을 두둔하고 애석히 여긴 것은 곧 그의 본심이다. 주장하는 의논이 이와 같았다.

내가 기축년(1589)에 북경으로 조회하러 갔을 적에 화숙양(華叔陽)은 제독주사(提督主事)로 우리들의 단속을 매우 까다롭게 하여 관부(館夫)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공은 시독학사(侍讀學士) 찰(察)의 아들이요, 왕봉주(王鳳洲 왕세정(王世貞)의 호)의 맏사위이다. 그때 들으니, 같은 고을에 사는 중서사인(中書舍人) 진씨(秦氏) 성을 가진 자가 충고하여 풍간하기를,

“그대의 춘부장 학사공(學士公)은 일찍이 조선에 사신을 갔다 와서 입에서 그칠 줄 모르게 조선을 칭찬하였는데, 그대가 어찌 사신을 이처럼 까다롭게 단속하오?”

하니, 공은 대답하기를,

“조선이 예의 바른 나라라고 집 어른께서 늘 칭찬하였음을 진실로 알지만, 직책이 제독에 있으니, 특별히 후하게 할 수 있소?”

라고 하였다 한다. 하루는 어떤 일을 가지고 글을 바치니, 공은 글자 네댓 자를 답으로 써서 던져 내렸다.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받아서 나에게 보이는데, 글씨가 훌륭하여 진(晉) 나라 필법이었다. 또 아주 호부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여, 여름철에는 아침마다 객관에 도착하였는데, 언제나 초록 문사단령(紋紗團領)을 입었으며, 날마다 갈아 입었다. 《이력편람(履歷便覽)》을 상고해 보니, 을해년(1999)에 죽었다 한다. 들으니, 화학사(華學士)의 병이 위독하자, 공은 자기 다리를 베어 약에 썼는데, 그로 인하여 부스럼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내가 종계주청사(宗系奏請使)로 기축년(1589, 선조 22)에 북경을 갔을 적에 수상 신시행(申時行)ㆍ부수상 허국(許國)ㆍ왕석작(王錫爵)ㆍ왕가병(王嘉屛)이 각중(閣中)에서 일시에 함께 나왔다. 서공은 큰 키에 머리털이 희끗희끗하고, 허공은 작달만한 키에 수염이 듬성듬성 나고 매양 천청단령(天靑團領)을 입었으며, 왕공 석장은 머리가 새까맣고, 왕공 가병은 수염이 듬성듬성 나고 신체는 건장하기 무인(武人)과 같았는데, 우리나라의 지사(知事) 곽흘(郭屹)과 아주 비슷하였다.

신공은 임술년 과거에 장원하였는데, 을미생이며, 오현(吳縣) 사람이다. 허공은 을축년에 과거하고, 정해생이며 흡현(歙縣) 사람이다. 일찍이 검토(檢討)로써 급사중 위시량(魏時亮)과 함께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와 등극조서를 반포한 적이 있는데, 그의 깨끗한 절조, 깊은 아량을 우리나라 사람은 마치 하늘의 신선처럼 우러러 보았었다. 왕공 석작은 임술년 회시에 제2등으로 합격하였고, 태창주(太倉州) 사람이며 갑오생이다. 또 왕공 가병은 북산음(北山陰) 사람이며, 병신생이다. 우리가 조정에 돌아올 칙서를 받을 때에 시강 육가교(陸可敎)가 칙서를 받들고 문화전문(文華殿門)에서 나에게 주었다. 육공은 작달만한 키에 수염이 적으며, 정축년에 과거하였고, 정미생이며, 난계(蘭溪) 사람인데, 호는 규일(葵日)이다.

부사 도(屠) 아무를 인하여 〈조천록서(朝天錄序)〉를 받았는데, 그의 문장이 매우 훌륭하였다. 《이력편람》을 상고해 보니, 갑오년에 남예부시랑(南禮部侍郞)에 올랐고, 무술년에 죽었다고 한다.

○온순(溫純)은 내가 기축년에 천자께 조회하러 갔을 때 창장호서(倉場戶書)로서 흰옷 차림에 보자기도 없이 예를 드리고 조정을 하직하였다. 관부(館夫)는 그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분은 곧 분상(奔喪 타향에서 어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 것)하는 창량호서(倉粮戶書)입니다.”

하기에, 그를 자세히 살펴보니, 상복 위에 흑단령(黑團領)을 입었는데, 상복은 흑단령보다 조금 더 길었으며, 발에는 황색 신을 신고 있었다. 관부는 이르되,

“대궐문을 나가면 즉시 단령은 벗어버리고 상복으로 길에 오르고, 전송하는 자가 있으면 전송을 받고 떠난다.”

하였다. 《이력편람》을 상고해 보니, 공은 기해생이고, 삼원현(三原縣) 사람이며, 을축년에 과거하였다.

내가 갑오년(1594년)에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유원진(劉元震)은 예부 우시랑으로 시독학사(侍讀學士)를 겸하고 있었다. 하루는 비가 오는데 종이 삿갓만 쓰고 우의는 입지 않았으며, 몸에는 푸른 비단 적삼만 입고 대궐을 나아갔다. 위대한 장부였다. 《이력편람》을 상고해 보았더니, 공은 임구(任邱) 사람으로 계묘생이며, 신미년에 방(榜)이 바뀌어지고, 이부 좌시랑으로 첨사를 맡고 있으며, 현재 각로(閣老)의 물망에 오르고 있다고 한다.

○손계고(孫繼皐)는 예부 우시랑의 자리에 있으면서 나의 인사를 받았다. 그는 얼굴이 그림처럼 훤하고 몸집은 매우 뚱뚱하였다. 《이력편람》을 상고해 보았더니, 공은 갑술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경술생이며, 이부 우시랑에 추천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계유(1573년)에 북경에 갔다. 조회가 파하여 대궐문을 나올 적에 이부 상서 양박(楊博)ㆍ좌도어사(左都御史) 갈수례(葛守禮)가 나란히 나왔다. 단문(端門 정전(正殿) 앞에 있는 문)을 나서기 전에 관부(館夫)가 내게 가리켜 보이며 말하기를,

“이 분들은 이부 상서 양공ㆍ좌도어사 갈공입니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그들은 당시의 명신(名臣)입니다.”

하였다. 양공은 머리가 검고 번지르르하여 아직 늙지는 않았고, 그의 모양은 우리나라의 죽은 군수 심의검(沈義儉)과 거의 비슷하였다. 갈공은 양공에 비해 몸집은 조금 더 컸으나, 머리는 하얗게 세었다. 두 분은 가정 기축년 동년 출신이다. 또 기억나기로는, 그 걸음에 있기 전후에 공부 상서 뇌예지(雷禮之)를 만났는데, 단문을 나와서 막 동장안문(東長安門)으로 향하는 길에서 관부는 또한 가리켜 보이면서 그의 관직과 성명을 말해 주었다. 지금 《가정문견기(嘉靖聞見紀)》를 상고해 보니, 세 분은 모두 융경 임신년(1572, 선조 5)에 이 관직에 있었다. 이듬해인 계유년에도 아마 전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내가 바라보았던 사람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양공은 원래 이부(吏部)였는데, 전직 이서(吏書)로 기용되어 병부 일을 맡아보았다. 양공ㆍ갈공은 모두 깨끗한 절조와 무거운 신망으로 당시의 명신이었고, 뇌공은 가정 임진년(1532, 중종 27)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공이 쓴 정 단간(鄭端簡 단간은 효(曉)의 시호)의 《오학편(吾學編)》서문을 보았더니, 그 ‘박학한 학문은 천하를 감복시키고, 덕스러운 몸과 깨끗한 행실이 이미 썩지 않는 서림(書林)에 벌여 있다.’는 것을 가지고 일컬어 문체를 세웠으니, 그 문장이 매우 아름다웠다. 역시 문장에 능한 명재상이었던 모양이다. 양공은 산서 포주(蒲州) 사람이고, 갈공은 산동 덕평(德平) 사람이며, 뇌공은 강서 풍성(豐城) 사람이다.

계유년(1573)에 나는 종계주청사로 상사 판서 이후백(李後白)ㆍ서장관 칠원군(漆原君) 윤탁연(尹卓然)과 같이 북경을 가게 되었다. 우리 일행이 요양에 도착하여 군사 조련을 만났는데, 병부 시랑의 순시가 요성(遼城)에 온다 하여 성안의 대소 관원들은 다 하루 이틀 길 밖으로 마중을 나갔다. 며칠 뒤에야 시랑의 행차가 요성에 도착하였다는 것과 성안의 대소 관원들이 모시고 왔다는 것을 들었다. 이 뒤에 비로소 도사(都司)에서 관리를 만나보게 되어, 조련에 나갔던 사람은 곧 좌시랑 왕도곤(汪道昆)이었다는 것을 들었다.

그 뒤 시랑 왕남명(汪湳明)이 지은 《부묵(副墨)》 및 《황명십팔가(皇明十八家)》를 모니, 왕남명의 문장이 들어 있고, 감주(弇州)의 《사부고(四部稿)》에 왕백옥(汪佰玉 왕도곤(汪道昆)의 자)을 성대히 칭찬하였으므로, 왕 시랑은 곧 근세 문장의 대가임을 비로소 알았다. 다행히 한 시대에 같이 태어나고, 마침 북경으로 가는 길에 시랑의 요성 순시를 만났다. 당시에 만일 그가 천하의 훌륭한 문장사임을 알았더라면, 곧 길가에 나가서 얼굴을 쳐다보았을 터인데 미처 몰랐던 것이니, 지금까지 늘 한이 된다.

또 후일 시랑은 조련을 마친 뒤에 매일 한 말의 금을 소비하였다는 참소를 당한 후에 다시 기용되지 못하고 일생을 미쳤다고 한다. 봉주(鳳洲)의 편지첩에 공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이르기를,

“일찍이 하인을 보내서 안부를 여쭈려 하였으나, 이때는 절월(節鉞 사신을 말함)이 현도(玄菟) 패수(浿水)가에 계셨습니다. 이 때문에 훌륭한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여 한으로 여깁니다.”

하였으니, 그 당시 왕공이 요성으로 순시 나갔을 때였다.

○일찍이 《작애집(灼艾集)》을 보았더니, 한 가지 논의가 있는데, ‘풍도(馮道)는 정도로 벼슬하였고, 아첨하여 따른 적이 없었다.’고 성대히 칭찬하였다. 시세종(柴世宗)이 장차 유숭(劉崇)을 친히 막으려 하매, 풍도는 힘써 간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나의 많은 군대로써 유숭을 친히 정벌하는 것은 마치 산이 달걀을 누르는 것과 같다.”

하매, 풍도는 말하기를,

“폐하께서 산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다 직절(直截)한 것이요, 임금의 의견에 아첨하여 따른 적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풍도를 일러서 훌륭하다 할 수 있겠는가? 괴짜라고 말할 만하다.

어떤 중국 사람이 말하기를,

“거래(崌崍) 장가윤(張佳胤)이 《이창명집(李滄溟集)》의 서문을 지었는데, 왕봉주(王鳳洲)에게 또 서문을 청하자, 봉주는 핑계를 대고 짓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만일 자기가 서문을 짓게 되면 반드시 장거래(張崌崍)의 글보다 훌륭할 것이므로, 남이 지은 글을 덮어버리고 자기의 재주를 자랑하게 될까 염려한 것이다. 그가 짓지 않은 것은 실로 봉주다운 겸허한 덕행인 것이다.”

하였다.

이시애(李施愛 ?-1467)는 반란을 일으켜 성언(聲言)하기를,

“신숙주(申叔舟)ㆍ한명회(韓命澮)가 권력을 남용하고 있으므로 임금 곁에 있는 이 악당을 제거하련다.”

하자, 광묘(光廟 세조의 묘호)는 신숙주와 한명회를 금부(禁府)에 하옥시키고 내시에게 부정을 살피도록 하였는데, 내시가 말하기를,

“두 사람 다 칼을 쓰기는 하였으나, 칼이 가볍고 또한 목이 닿는 끝에는 구멍이 매우 넓습니다.”

하니, 즉시 금부당상을 추국하고 의금부 도사는 저자에서 찢어 죽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옥을 내원(內苑)으로 옮겨서 승지가 순찰하고 금군이 수직하게 하였다. 10일이 지난 뒤에 특별히 두 사람을 불러 접견하는데, 맨발로 대전을 내려가서 여덟 가지 사항을 들어 자신을 책망한 뒤에 손을 잡고 대전(大殿)으로 오르고 관직은 옛날 그대로 두었다 한다.

○김모재(金慕齋 김안국)는 늘 어의동에 사는 문관(文官) 정씨(鄭氏)가 지은 규원시(閨怨詩)를 말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홍루의 조용한 낮 베개마저 허전한데 / 紅樓晝寂寢屏空

한 움큼 매화 향기 숫제 옥다발일세 / 一掬寒香玉砌叢

눈물로 지워진 거북 무늬 변방은 멀고 / 泣罷龜紋沙塞遠

발에 가린 성긴 버들엔 또 갈바람일세 / 隔簾疏柳又西風

○중국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천하의 이름난 지역은 소주ㆍ항주의 두 부(府)다. 속담에,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당에는 소주ㆍ항주가 있다.’고 하여, 누구나 이 말은 한다.”

고 하였으니, 항주는 즉 남송(南宋)이 수도를 세운 임안부(臨安府)이고, 소주는 즉 송(宋)의 평강부(平江府)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일찍이 말하기를,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지은 시는 격이 매우 높아 그의 시재(詩才)는 비록 열 사람이 뜯어 갈라도 한 부분은 남을 것이며, 대제학도 넉넉히 해낼 수 있다.”

라고 하였으니, 심복(心腹)된 것이다.

○혜장왕(惠莊王 세조) 대엔 당시 신료들치고 누구나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일을 애석히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가 성묘조(成廟朝)의 성명(聖明)한 때에 이르러서야 잊어버리게 되었다 한다.

지난 기축년(1589)에 북경에 가서 옥하관(玉河館)에 머물 적이다. 어느 집에서 기르는 앵무새를 빌려다 보았더니, 크기는 까치에 비해서 조금 더 컸으며, 짙은 녹색에다 입부리와 엄지 발톱은 모두 검었다. 긴 말은 못하고 다만, ‘손님이 온다, 찻상 보라’, ‘고양이 온다.’라는 말을 할 따름이었다. 전해 오는 말에는, 앵무새가 본산지에서 중국으로 온 지 여러 해가 되면 입부리와 엄지발톱이 붉어지고, 그래야만 긴 말을 해낸다는 것이다. 옥하관에서 나들이할 적에 길가의 어느 집 누대 벽을 바라보니, 못질한 쇠횃대에 여러 쌍의 앵무새가 앉아 있는데, 입부리와 엄지발톱이 모두 붉었다. 그러나 빌려다 뵈는 못하였다. 틀림없이 긴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앵무새가 입을 벌려 말할 적에 보니, 혀가 비록 작긴 하였으나, 혀가 뾰족한 여느 새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그 혓바닥이 둥그스름하기는 사람의 혀와 똑같았다. 이것이 사람처럼 총명하고 말을 해내는 까닭일 것이니, 물(物)에 부여한 이치 또한 묘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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