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당전집(阮堂全集)
완당 김정희(1786-1856)
생애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 1766-1837)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아버지는 사약을 받고 추사는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윤상도(1768∼1840)는 순조 30년(1830) 호조판서 박종훈과 유수를 지낸 신위, 그리고 어영대장 유상량 등을 탐관오리로 몰아 탄핵을 한다. 그러나 군신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이유로 왕의 미움을 사서 추자도에 유배되고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은 배후조종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된다. 그러다가 헌종6년(1840) 의금부에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윤상도는 아들과 함께 능지처참된다. 이 사건을 두고 윤상도 옥사라고 하는데 추사는 윤상도 부자가 올렸던 상소문의 초안을 잡았다는 이유로 이 사건에 뒤늦게 연루되어 제주로 유배되었던 것이다.
활동사항
1. 학문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서 일찍이 북학파(北學派)의 일인자인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학문 방향은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 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같은 이름난 유학자와 접할 수가 있었다. 이 시기의 연경 학계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렀었다.
종래 경학(經學)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하였던 금석학(金石學)·사학·문자학·음운학·천산학(天算學)·지리학 등의 학문이 모두 독립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금석학은 문자학과 서도사(書道史)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서는 신위(申緯)·조인영(趙寅永)·권돈인·신관호(申觀浩)·조면호(趙冕鎬)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경학은 옹방강(1733-1818)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근본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의 경학관을 요약하여 천명하였다고 할 수 있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한 완원의 학설과 방법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밖에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청대 학자들의 학설을 박람하고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소화하였다. 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음이 그의 문집에 수록된 왕복 서신과 논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 그의 학문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불교학(佛敎學)이다. 용산의 저택 경내에 화엄사(華嚴寺)라는 가족의 원찰(願刹)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전(佛典)을 섭렵하였다.
그는 당대의 고승들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다. 특히 백파(白坡 1767-1852)와 초의(草衣 1786-1866), 두 대사와의 친분이 깊었다. 그리고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고증학적인 안목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려들과의 왕복 서간 및 영정(影幀)의 제사(題辭)와 발문(跋文) 등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말년에 수년간은 과천 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면서 선지식(善知識: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의 대접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이름난 유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 미칭(美稱)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 문화의 거성적 존재였다.
2. 예술
김정희는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시·서·화 일치 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온 조선 고유의 국서(國書)와 국화풍(國畵風)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연경(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진적(眞蹟: 친필)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1733-1818)과 완원(1764-1849)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趙孟頫)·소동파(蘇東坡)·안진경(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다시 더 소급하여 한(漢)·위(魏)시대의 여러 예서체(隷書體)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創出)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하다)한 추사체(秋史體)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그는 시도(詩道)에 대해서도 당시의 고증학에서 그러했듯이 철저한 정도(正道)의 수련을 강조했다.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소식(蘇軾)·두보(杜甫)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시도의 정통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시상이 다분히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저술인 『시선제가총론(詩選諸家總論)』에서 시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화풍(畵風)은 대체로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시·서·화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림에서도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文人畫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마치 예서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고담(枯淡: 글이나 그림 따위의 표현이 꾸밈이 없고 담담함)하고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심의(心意)를 노출하는 문기(文氣)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그는 난(蘭)을 잘 쳤다.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였다.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화법(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서화관은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 맑고 고결하며 예스럽고 아담하다)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趙熙龍)·허유(許維)·이하응(李昰應)·전기(田琦)·권돈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예원(藝苑: 예술가들의 사회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을 풍미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歲寒圖)」와 「모질도(耄耋圖)」·「부작란도(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시·서·화 이외에 그의 예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전각(篆刻)이다. 전각이 단순한 인신(印信)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다. 청나라의 비파서도(碑派書道)가 낳은 등석여(鄧石如)에 이르러서 크게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김정희는 등석여의 전각에 친밀히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인각(印刻)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고인(古印)의 인보(印譜: 여러 가지 인발을 모아둔 책)를 얻어서 직접 진(秦)·한(漢)의 것까지 본받았다. 그의 전각 수준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다. 그의 별호가 많은 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서 서화의 낙관(落款)에 쓰고 있었다. 추사체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독특한 자각풍(自刻風)인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여, 졸박청수(拙樸淸瘦: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깨끗하며 가늘다)한 특징을 드러내었다.
3. 문학
김정희의 문학에서 시 아닌 산문으로서 한묵(翰墨: 문한과 필묵이라는 뜻으로, 글을 짓거나 쓰는 것을 이르는 말)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편지 형식을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과 평론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그의 문집은 대부분이 이와 같은 편지 글이라고 할 만큼 평생 동안 편지를 많이 썼다. 그리고 편지를 통해서 내면생활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그중에도 한글 편지까지도 많이 썼다는 것은 실학적인 어문 의식(語文意識)의 면에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그의 친필 언간(諺簡: 언문 편지라는 뜻으로, 한글로 된 편지)이 40여 통에 이르는데 제주도 귀양살이 중에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다. 국문학적 가치로 볼 때 한문 서간보다 월등한 것이다. 또 한글 서예 면에서 민족 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무적인 자료이다. 한문과 국문을 막론하고 그의 서간은 한묵적 가치 면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문집은 네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다. 『완당척독(阮堂尺牘)』(2권 2책, 1867년)·『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7권 2책, 1867년)·『완당선생집』(5권 5책, 1868년)이 있다. 그리고 『완당선생전집』(10권 5책, 1934년)은 종현손 김익환(金翊煥)이 최종적으로 보충, 간행한 것이다.
평가와 의의
우리나라 역사상에 예명(藝名)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이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예술의 각 분야별로 국내외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였다. 즉,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 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완당전집 권수
●완당김공 소전(阮堂金公小傳) : 민규호(閔奎鎬)
...이에 앞서 판서공이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갈 적에 공도 따라 들어갔는데 이때 공의 나이는 24세였다. 당시 각로(閣老)인 완원(阮元)과 홍려(鴻臚)인 옹방강(翁方綱)은 모두 당세의 대유(大儒)로서 큰 명성이 천하에 진동하였고 지위도 현달하여 선뜻 남들을 접견하지 않은 터였으나, 그들이 공을 한번 보고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경의(經義)를 변론하면서 그들과 승부를 맞겨루어 조금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완원이 《경해(經解)》를 찬술하였으나 중국의 여러 대가(大家)들은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특별히 공에게 먼저 초본(抄本)을 부쳐주었던 것이다.
헌종(憲宗) 경자년(1840, 헌종 6)에 옥사가 일어나 말이 공에게 관련되어 의금부의 군졸들이 황급하게 움직이자, 공을 위해 걱정하는 이들이 모두 두렵게 여기었다. 그러나 공은 행동거지가 평소와 똑같았고, 법관을 대해서는 요점을 잘 지적하여 변석하니, 그 준엄하고 명백한 기상이 일성(日星)을 능가하고 금석(金石)을 꿰뚫을 만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공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라도 중요한 단서는 잡아내지 못했으나, 끝내 제주(濟州)에 유배되는 것은 면치 못하였다.
제주는 옛 탐라(耽羅)인데 큰 바다가 사이에 끼어 있어 거리가 매우 멀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사람들이 이곳을 건너가려면 보통 10일에서 1개월 정도가 소요되곤 하였다. 그런데 공이 이곳을 건널 적에는 유독 큰 파도 속에서 천둥 벼락까지 만나 죽고 삶이 순간에 달린 지경이라,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넋을 잃고 서로 부둥켜안고서 호곡하였고, 뱃사공도 다리가 떨려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은 타두(柁頭)에 꼼짝 않고 앉아서 소리를 높여 시를 읊으니, 시 읊는 소리와 파도 소리가 서로 오르내렸다. 공은 인하여 손을 들어 어느 곳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사공은 힘껏 키[柁]를 끌어당겨 이곳으로 향하라.” 하였다. 그렇게 하자 항해(航海)가 빨라져서 마침내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제주에 당도하니, 제주 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날아서 건너온 것이다.”고 하였다. 공이 적사(謫舍)에 들어간 뒤에는 원근에서 글을 배우려고 찾아온 자가 대단히 많았다. 그래서 겨우 두어 달 동안에 인문(人文)이 크게 열리어 찬란하게 서울의 기풍이 있게 되었으니, 탐라의 황폐한 문화를 개척한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철종(哲宗) 신해년(1851, 철종 2)에 상국(相國) 권돈인(權敦仁)이 예론(禮論)으로 배척을 받았는데, 배척하는 자가 공이 실제로 그 예론에 참예했다고 하여 공을 북청(北靑)에 유배시켰다. 이때 공의 나이는 66세였고 두 아우 또한 늙어 백발이었다. 두 아우는 공의 손을 잡고 말도 못한 채 통곡만 하였고, 친척이나 옛 부하 관리들도 물끄러미 바라보며 슬피 부르짖어 우니, 통곡 소리가 장옥(墻屋)을 진동하였다. 그러자 공이 정색을 하고 두 아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못난 사람은 논할 것도 없거니와, 자네들같이 글을 읽은 사람들도 이러한단 말인가.” 하고는, 얘기하며 웃고 또 위로하면서 손수 책 상자를 정연하게 정돈하였다. 병오년에 공이 별세하니 수가 71세였다.
공은 매우 청신하고 유연하며 기국이 안한하고 화평하여 사람들과 말을 할 때는 모두를 즐겁게 하였다. 그러나 의리(義理)의 관계에 미쳐서는 의론이 마치 천둥 벼락이나 창ㆍ칼과도 같아 사람들이 모두 춥지 않아도 덜덜 떨었다.
완당전집 제1권
설(說)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 이르기를,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實事求是]”
하였는데, 이 말은 곧 학문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도리이다. 만일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다만 허술한 방도를 편리하게 여기거나, 그 진리를 찾지 않고 다만 선입견(先入見)을 위주로 한다면 성현(聖賢)의 도에 있어 배치(背馳)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한유(漢儒)들은 경전(經傳)의 훈고(訓詁)에 대해서 모두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어 정실(精實)함을 극도로 갖추었고, 성도인의(性道仁義)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때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어서 깊이 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많이 추명(推明))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주석(注釋)이란 것이 있으니 이것은 진정 사실에 의거하여 그 진리를 찾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변(辨)
●역서변(易筮辨) 상(上)
이것이 곧 옛날의 점법(占法)으로서 그에게는 옛 점법의 한 가닥 실마리가 아직 남아 있어 여러 술사(術士)들의 말과 달랐는데, 당시 사람들은 서로 견강부회하여 성경(聖經)을 오도했었다. 그래서 공자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주역》을 많이 열독(閱讀)하여, 《주역》이 한갓 복서(卜筮)만 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허물을 적게 하는 글임을 밝혔던 것이다.
●묵법변(墨法辨)
고결(古訣)에 이르기를,
“먹물은 깊고 색은 진하며, 수많은 붓털이 힘을 가지런히 쓰게 한다.[漿深色濃 萬亳齊力]”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묵법(墨法)과 필법(筆法)을 아울러서 말한 것이다.
완당전집 제2권
서독(書牘)
●사중 명희 에게 주다[與舍仲 命喜]
나의 행차는 그날 행장을 점검하여 배에 오르고 나니 해가 벌써 떠올랐었네. 그리고 배의 행로에 대해서는 북풍(北風)으로 들어갔다가 남풍(南風)으로 나오곤 하다가 동풍(東風) 또한 나고 들고 하는 데에 모두 유리하므로 이에 동풍으로 들어갔는데, 풍세(風勢)가 잇달아 순조로워서 정오(正午) 사이에 바다를 거의 삼분의 일이나 건너버렸었네.
그런데 오후에는 풍세가 꽤나 사납고 날카로워서 파도가 거세게 일어 배가 파도를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므로 금오랑(金吾郞)으로부터 이하로 우리 일행에 이르기까지 그 배에 탄 여러 초행인(初行人)들이 모두가 여기에서 현기증이 일어나 엎드러지고 낯빛이 변하였네. 그러나 나는 다행히 현기증이 나지 않아서 진종일 뱃머리에 있으면서 혼자 밥을 먹고, 타공(舵工)ㆍ수사(水師) 등과 고락(苦樂)을 같이하면서 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쳐가려는 뜻이 있었다네. 그러나 생각하건대, 이 억압된 죄인이 어찌 감히 스스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실상은 오직 선왕(先王)의 영령이 미친 곳에 저 푸른 하늘 또한 나를 불쌍히 여겨 도와 주신 듯하였네.
석양 무렵에 곧바로 제주성(濟州城)의 화북진(禾北鎭) 아래 당도하였는데, 여기가 바로 하선(下船)하는 곳이었네. 그런데 그곳에 구경나온 제주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북쪽의 배가 날아서 건너왔도다. 해뜰 무렵에 출발하여 석양에 당도한 것은 61일 동안에 보기 드문 일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의 풍세가 배를 이토록 빨리 몰아칠 줄은 또 생각지도 못했다.”
고 하였네. 그래서 내 또한 스스로 이상하게 여기었는데, 이것은 나도 모르는 가운데 또 하나의 험난함과 평탄함을 경험한 것이 아니겠는가.
배가 정박한 곳으로부터 주성(州城)까지의 거리는 10리였는데, 그대로 화북진 밑의 민가(民家)에서 유숙하였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성(城)을 들어가 아전[吏]인 고한익(高漢益)의 집에 주인 삼아 있었는데, 이 아전은 바로 전등(前等)의 이방(吏房)이었는 바, 배 안에서부터 고생을 함께 하며 왔었네. 그는 매우 좋은 사람인데다 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뜻이 있으니, 이 또한 곤궁한 처지로서 감동할 만한 일일세.
대정(大靜)은 주성의 서쪽으로 80리쯤의 거리에 있는데, 그 다음날에는 큰 바람이 불어서 전진할 수가 없었고, 또 그 다음날은 바로 그 달 초하루였었네. 그런데 이날은 바람이 불지 않으므로 마침내 금오랑과 함께 길을 나섰는데, 그 길의 절반은 순전히 돌길이어서 인마(人馬)가 발을 붙이기가 어려웠으나, 그 길의 절반을 지난 이후로는 길이 약간 평탄하였네. 그리고 또 밀림(密林)의 그늘 속으로 가게 되어 하늘 빛이 겨우 실낱만큼이나 통하였는데, 모두가 아름다운 수목(樹木)들로서 겨울에도 새파랗게 시들지 않는 것들이었고, 간혹 모란꽃처럼 빨간 단풍숲도 있었는데, 이것은 또 내지(內地)의 단풍잎과는 달리 매우 사랑스러웠으나, 정해진 일정으로 황급한 처지였으니 무슨 운취가 있었겠는가.
대체로 고을마다 성(城)의 크기는 고작 말[斗] 만한 정도였네. 정군(鄭君)이 먼저 가서 군교(軍校)인 송계순(宋啓純)의 집을 얻어 여기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 집은 과연 읍(邑) 밑에서 약간 나은 집인데다 또한 꽤나 정밀하게 닦아놓았었네. 온돌방은 한 칸인데 남쪽으로 향하여 가느다란 툇마루가 있고, 동쪽으로는 작은 정주(鼎廚)가 있으며, 작은 정주의 북쪽에는 또 두 칸의 정주가 있고, 또 고사(庫舍) 한 칸이 있네. 이것은 외사(外舍)이고 또 내사(內舍)가 이와 같은 것이 있는데, 내사는 주인에게 예전대로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네. 다만 이미 외사는 절반으로 갈라서 한계를 나누어놓아 손을 용접(容接)하기에 충분하고, 작은 정주를 장차 온돌방으로 개조한다면 손이나 하인 무리들이 또 거기에 들어가 거처할 수 있을 것인데, 이 일은 변통하기가 어렵지 않다고 하였네.
그리고 가시울타리를 둘러치는 일은 이 가옥(家屋) 터의 모양에 따라서 하였는데, 마당과 뜨락 사이에 또한 걸어다니고 밥 먹고 할 수가 있으니, 거처하는 곳은 내 분수에 지나치다 하겠네. 주인 또한 매우 순박하고 근신하여 참 좋으네. 조금도 괴로워하는 기색이 없는지라 매우 감탄하는 바이로세. 이 밖의 잗단 일들이야 설령 불편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그것을 감내할 방도가 없겠는가.
금오랑이 방금 회정(回程)에 올랐는데, 또 며칠이나 순풍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네. 집안 하인을 금오랑 편에 같이 내보내면서 대략 이렇게 서신을 부치는데 어느 때나 과연 이 서신을 열어보게 될지 모르겠고, 집의 소식은 막연히 들어볼 방도가 없으므로 바라보며 애만 끊어질 뿐이로세. 아직 다 말하지 못하네.
●두 번째[二]
나는 근래에 와서 눈이 어른어른한 것이 더욱 가중된데다, 밥 못 먹는 증상이 더욱 심해져서 밥상을 대할 적마다 구역질만 나므로 목구멍에 넘기는 것이 전혀 없는지라, 이 때문에 신기(神氣) 또한 따라서 몹시 쇠진하여 수습할 수가 없네. 그래서 이 글을 경영한 지 오랜만에 이제야 비로소 붓을 들었으나 또한 계속해서 써나갈 수가 없네. 그러나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되는지를 몰라서 또한 그대로 내버려둘 뿐이로세. 비록 의약(醫藥)으로 다스리고자 하나 또한 약재료가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네 번째[四]
강릉(江陵) 경포(鏡浦)의 배[般] 편에 마침 뱃사람 양봉신(梁鳳信)이란 자가 있어 그가 가끔 내 처소를 출입하여 친숙해졌는데, 그가 이 서신을 가지고 몸소 가고자 하네. 만일 부칠 물건이라도 있으면 그가 또한 잘 보호해서 가져오겠다고 하니, 그의 뜻이 참으로 감동될 만하고 곤경에 빠진 나에게는 진정 있기 드문 일이네. 부디 각별히 환대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리고 만일 부치는 물건이 있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 반드시 착오 없이 잘 전할 것이니, 헤아려 처리하는 것이 좋겠네. 그리고 전주(全州) 김생(金生)한테 부탁한 것 또한 이 사람의 방편을 따를 뿐이네. 나머지는 이 사람 편에 다 말할 것이 아니고, 의당 본가의 하인이 올 때가 있을 듯하니, 모두 그냥 두고 말하지 않네.
●다섯 번째[五]
지난달에 안 주부(安主簿) 편과 제주(濟州)의 경저리(京邸吏)가 돌아가는 편에 연달아 부친 서신이 있었는데, 듣건대 아직껏 포구로 내려가는 곳에 머물러 있어 즉시 출발하지 못했다 하니 아마 이 서신과 함께 나란히 들어갈 듯하네.
●일곱 번째[七]
근래에는 안질이 더욱 심해짐으로 인하여 도저히 붓대를 잡고 글씨를 쓸 수가 없었으나, 왕령(王靈)이 이른 곳에 15~16일간의 공력을 들이어 겨우 편액(扁額) 셋과 권축(眷軸) 셋을 써놓았을 뿐이네. 그리고 나머지 두 권축에 대해서는 이렇듯 흐린 눈으로는 도저히 계속해서 써낼 방도가 없어 부득이 다시 정납(呈納)하게 되었는지라, 그 사실대로 오군(吳君)에게 보낸 편지에 다 진술하였는데, 천만 번 송구스러움은 잘 알지만, 억지로 할 수 없는 것들 역시 억지로 할 수가 없었네.
●우아에게 주다[與佑兒]
난(蘭)을 치는 법은 또한 예서(隷書)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文字)의 향기와 서권(書卷)의 정취가 있은 다음에야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난 치는 법은 그림 그리는 법칙대로 하는 것을 가장 꺼리는 것이니, 만일 그림 그리는 법칙을 쓰려면 일필(一筆)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조희룡(趙熙龍) 같은 무리는 나에게서 난 치는 법을 배웠으나 끝내 그림 그리는 법칙 한 길[一路]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그의 가슴속에 문자의 향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 종이를 많이 보내온 것을 보니, 너도 아직 난(蘭) 경지의 취미를 알지 못해서 이렇게 많은 종이를 보내 그려주기를 요구한 것이니, 자못 실소(失笑)를 금치 못하겠다. 난을 치는 데는 종이 서너 장만 가지면 충분하다. 신기(神氣)가 서로 모이고 경우(境遇)가 서로 융회되는 것은 글씨나 그림이 똑같이 그러하지만, 난을 치는 데는 그것이 더욱 많이 작용하는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많은 양으로 하겠는가. 만일 화공배(畫工輩)들의 수응법(酬應法)과 같이 하기로 들면 한 붓으로 천 장의 종이도 쓸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작품은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이 때문에 난을 그리는 데 있어 내가 많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바로 네가 일찍이 본 바이다.
그리하여 지금 약간의 종이에만 써서 보내고 보내온 종이를 다 쓰지 않았으니, 모름지기 그 묘리를 터득하는 것이 옳다. 난을 치는 데는 반드시 붓을 세 번 굴리는[三轉] 것을 묘로 삼는 것인데, 지금 보건대 네가 한 것은 붓을 한 번에 죽 긋고는 바로 그쳤다. 그러니 모름지기 붓을 세 번 굴리는 곳에 공력을 쓰는 것이 좋다. 대체로 요즘의 난을 치는 사람들이 모두가 이 세 번 굴리는 묘를 알지 못하고 되는 대로 먹칠이나 할 뿐이다.
●석파 흥선대원군(1820-1898) 에게 주다[與石坡 興宣大院君]
내려주신 여러 가지 물품에 대해서는 정중하신 지극한 뜻을 나의 소망(素望)이 미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우러러 알겠습니다. 그러나 물리치는 것은 불공스러운 일이기에 마치 본디부터 소유한 것처럼 염치를 무릅쓰고서 받고 보니, 감격함과 부끄러운 마음이 함께 일어납니다.
눈은 더욱 어른거리고 팔목은 태산같이 무거워서 어렵스럽게 붓을 들어 이 몇 자만다섯 번째[五] 을 기록합니다. 우선 남겨 두고 장례(狀禮)를 갖추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五]
보여주신 난폭(蘭幅)에 대해서는 이 노부(老夫)도 의당 손을 오므려야 하겠습니다. 압록강 동쪽에서는 이 작품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내가 좋아하는 이에게 면전(面前)에서 아첨하는 하나의 꾸민 말이 아닙니다. 옛날 이장형(李長蘅)에게 이 법이 있었는데, 지금 다시 그것을 보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리도 이상하단 말입니까. 합하(閤下 흥선대원군)께서도 스스로 이 법이 여기에서 나온 것임을 몰랐으니, 이것이 바로 저절로 법도에 합치되는 묘입니다. 나머지는 벼루가 얼어서 간략히 이만 줄이고 갖추지 않습니다.
완당전집 제3권
서독(書牘)
●다섯 번째[五]
이곳의 풍토(風土)와 인물(人物)은 혼돈 상태가 아직 벽파(闢破)되지 않았으니, 그 우둔하고 무지함이 저 어만(魚蠻)ㆍ하이(蝦夷)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래도 그 가운데 또한 무리를 초월한 기재(奇才)가 있기는 하나, 그들이 읽은 것은 《통감(通鑑)》ㆍ《맹자(孟子)》 두 종류의 책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비록 이 두 가지 책만 하더라도 어디에나 구애될 것이 없는데, 어떻게 이와 같이 책비(責備)할 수 있겠습니까. 타고난 본성은 남북이 서로 다를 것이 없으나, 다만 그들을 인도하여 개발시켜 줄 스승이 없으므로, 슬피 여기고 불쌍히 여겨 이와 같이 탄식을 하는 것이 정히 이곳을 위해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한라산(漢拏山) 주위 4백 리 사이에 널려있는 아릅답고 진기한 감(柑)ㆍ등(橙)ㆍ귤(橘)ㆍ유(柚) 등은 사람마다 다같이 아는 바이거니와, 이 밖의 푸른 빛이 어우러진 기목명훼(奇木名卉)들은 거개가 겨울에도 푸르른 식물(植物)로서 모두 이름도 알 수 없는 것들인데, 여기에 나무하고 마소 먹는 것을 금하지 않으니, 이것이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가령 나막신 신고 지팡이를 끌고서 이곳저곳을 탐방한다면 반드시 기이한 구경거리와 들을 것들이 있으련마는 이 위리안치된 생활로 어떻게 그런 놀이를 할 수 있겠습니까. 초(楚) 나라 남쪽에 돌은 많고 사람은 적은 것은 예부터 그러하였거니와, 한라산의 영이하고 충만한 기운 또한 초목에 모였을 뿐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어찌 그 기운이 물(物)에만 모이고 사람에게는 모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수선화(水仙花)는 과연 천하에 큰 구경거리입니다. 강절(江浙) 이남 지역에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곳에는 촌리(村里)마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도 이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는데, 화품(花品)이 대단히 커서 한 송이가 많게는 십수화(十數花) 팔구악(八九萼) 오륙악(五六萼)에 이르되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꽃은 정월 그믐, 2월 초에 피어서 3월에 이르러서는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또는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 합니다. 이 죄인이 거주하고 있는 집의 문 동쪽ㆍ서쪽이 모두 그러하건만, 돌아보건대 굴속에 처박힌 초췌한 이 몸이야 어떻게 이것을 언급할 수 있겠습니까. 눈을 감아버리면 그만이거니와, 눈을 뜨면 눈에 가득 들어오니, 어떻게 해야 눈을 차단하여 보이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토착민들은 이것이 귀한 줄을 몰라서 우마(牛馬)에게 먹이고 또 따라서 짓밟아 버리며, 또한 그것이 보리밭에 많이 난 때문에 촌리(村里)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한결같이 호미로 파내어 버리는데, 호미로 파내도 다시 나곤 하기 때문에 또는 이것을 원수 보듯 하고 있으니, 물(物)이 제자리를 얻지 못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또 천엽(千葉) 한 종류가 있는데, 처음 송이가 터져 나올 때에는 마치 국화(菊花)의 청룡수(靑龍鬚)와 같아 서울에서 본 천엽과는 크게 달라서 곧 하나의 기품(奇品)입니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삼가 큰 뿌리를 골라서 보내 드리려고 합니다마는, 그때 인편이 늦어지지나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굴자(屈子)의 이른바,
“내가 고인(古人)에게 미치지 못하니, 내가 누구와 더불어 이 방초(芳草)를 완상하리오.”
라고 한 말에 내가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접촉하는 지경마다 처량한 감회가 일어나서 더욱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힘들게 살아가는 탐라 섬 백성들의 삶을 살펴보고 아픔을 함께 하는 마음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이것이 다산과의 명백한 차이점이다. 완당은 자신의 안위만 돌아보는 천재 학자이자 예술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리라.
●열네 번째[十四]
죄인 정희는 이렇게 병든 몸으로 이곳에 있은 지 7년이 되었는데, 그 완둔하고 어두움이 점차로 더욱 목석(木石)보다 심해져가고 있으니, 이것이 또한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코에는 열화(熱火)가 이글거리고, 혀에는 백태(白苔)가 끼며, 눈은 항상 어른어른하여 나날이 이 증세들이 사람을 들볶는 바람에 도저히 반 시각도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속히 죽어서 아무것도 몰라버리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비록 7년을 더 지낸다 하더라도 무슨 득될 것이 있겠습니까.
한 가지 지극히 원통한 것이 있습니다. 생각건대, 이제는 성명께서는 거울처럼 환히 내려다 보시고 합하께서는 성명을 잘 보상하심으로써 한 백성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는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어두운 구덩이에 빠진 나만은 절로 이 밝은 태평성대와 막힘으로 인하여, 문을 지키는 호표(虎豹)가 그대로 있고 실내(室內)에 들어온 과극(戈戟)이 아직도 그대로 있으니, 설령 빠진 나를 구원할 긴 팔이 있고, 마른 나를 적셔줄 감로수(甘露水)가 있다 하더라도 손을 쓸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원통하여 탄식하며 길이 호곡하여도 구름 덮인 바다만 아득할 뿐이니, 또한 다시 어찌하겠습니까.
●서른두 번째[三十二]
진흥왕비(眞興王碑)가 하나는 낭선(朗善) 시대에 나타났고, 또 하나는 유 문익공(兪文翼公 문익은 유척기(兪拓基)의 시호) 시대에 나타났는데, 끝내 그것을 알려고 물어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함흥 부사(咸興府使) 윤광호(尹光濩)가 대략 몇 본(本)을 탁본하였는데, 그 후에 관(官)에서 탁본한 것을 인하여 백성들이 마침내 그것을 파묻어 버림으로써 형체도 그림자도 없어진 지가 지금 40여 년이 되었습니다. 제(弟)는 이 비(碑)에 대해서 고심(苦心)한 것이 있어 매양 북쪽에 가는 사람을 인하여 널리 찾아 보도록 요구하였으나 끝내 한 사람도 그 말에 응해준 자가 없었으니, 저들이 어떻게 이것을 알겠습니까.
낭선의 시대에는 이 비가 두 조각[二段]이 다 있었는데, 유 문익공 시대에는 이 비가 이 한 조각만 남고 아래 한 조각은 다시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만일 다시 아래 한 조각을 얻는다면 더욱 신기하겠지만 아마 기필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대개 이 비는 한갓 우리나라 금석(金石)의 시조(始祖)가 될 뿐만이 아닙니다. 신라(新羅)의 봉강(封疆)에 대하여 국사(國史)를 가지고 상고해 보면 겨우 비렬홀(比列忽) ―즉 안변(安邊)이다.― 까지에만 미쳤으니, 이 비를 통해서 보지 않으면 어떻게 신라의 봉강이 멀리 황초령(黃草嶺)까지 미쳤던 것을 다시 알 수 있겠습니까. 금석이 국사보다 나은 점이 이와 같으니, 옛 사람들이 금석을 귀중하게 여긴 까닭이 어찌 하나의 고물(古物)이라는 것에만 그칠 뿐이겠습니까.
또 하나의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이 비가 중국으로 말하면 진(陳) 나라 광대(光大 진 문제(陳文帝)의 연호 567~568) 연간에 세워진 것인데, 육조(六朝) 시대의 금석들이 지금 약간 남아 있는바, 그것들이 이 비의 서체(書體)와 서로 흡사하니, 그때에 중국과 외국의 풍기(風氣)가 서로 멀지 않았음을 볼 수 있고, 그때에 신라 사람들이 중국의 서체를 마음으로 본뜨고 손으로 따르고 했던 것을 또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서체는 예서(隷書)와도 비슷하고 해서(楷書)와도 비슷한데, 이것이 바로 육조 시대의 서법은 오히려 옛 법규를 거슬러 따라서 파체(破體)로 쓰지 않는 것을 정묘(精妙)하게 여겼던 까닭이니, 이것이 또 증빙의 자료가 될 만합니다. 또 부지(夫知)ㆍ급간(及干) 등의 관명(官名)ㆍ인명(人名)에 이르러서도 국사 이외의 것을 자세히 상고할 수 있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제(弟)가 이 비에 대해서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한 권을 찬술하였는데, 일자(一字)ㆍ일획(一畫)과 일지(一地)ㆍ일관(一官)을 모두 자세하게 확증한 것이 한 권 분량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삼가 이번에 우러러 바치고는 싶으나, 아직 초고(草稿)로 있고 미처 정리를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정리를 한 다음에야 열람을 할 수 있으므로 지금은 보내 드릴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지금 이미 비를 얻고 나서 또 이것을 우거진 잡초 사이에 버려둔다면, 대감께서 돌아오신 뒤에는 반드시 또 매몰되고 말 것입니다. 진흥왕의 풍공 성렬(豐功盛烈)이 담긴 한 조각 빗돌이 세간에 남아 존재해 온 지가 이미 천 년이 지났고 보면, 반드시 연운(煙雲)의 변멸(變滅)과 함께 따라서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니, 후인들이 그를 높여 꾸미고 포장하는 도리에 있어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러니 지금 영하(營下)로 가져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기는 하나, 그 일을 크게 벌여서 영원히 잘 보존되도록 하는 조처가 있지 않는다면 또 이것이 어디로 굴러가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또 이 비가 원래 있던 곳이 바로 봉강(封疆)을 척정(拓定)한 실적(實蹟)이고 보면,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또한 어떨까 싶기도 하니, 만일 그 비가 원래 있던 곳에 그대로 두고 영원히 보존할 계책을 마련한다면 참으로 더욱 좋겠습니다.
완당전집 제4권
서독(書牘)
●정다산 약용 에게 주다[與丁茶山 若鏞]
하문하신 잡기(雜記)에 나타난 정주(鄭注)의 글월에 대하여는 마침내 소가(疏家)가 정의 본의(本義 이하에서는 정의로 약칭함)를 어지럽힌 것에 의거하여 가르침을 주신 것 같사오나, 아무래도 소가가 이와 같이 했다 해서 정의를 따를 수 없다고 여겨서는 불가할 듯하옵니다.
정주에 있어서도 역시 조복(弔服)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온데, 다만 천자의 조복을 따로 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조문에 또 천자의 조복이라는 어떤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까?
정설(鄭說)에는 변질(弁絰)을 들어 조복으로 삼은 것이 자주 나타나서 낱낱이 다 들 수가 없는데, 지금 소가가 어지럽힌 것을 들어 그대로 정설이라 둘러씌워서는 아무래도 불가할 것이옵니다. 소가가 이를 어지럽히게 된 까닭 또한 근거가 있으니, 곧 상대기(喪大記)에 “임금이 대렴(大斂)하게 되면 아들은 변질한다.[君將大斂子弁絰]”라는 대문을 들어 서로서로 증명함으로써 갈등을 면치 못한 것이나 대개 대렴에 ‘아들이 변질한다.’는 것으로 또 미루어 소렴(小斂)을 증명할 만하여 마침내 잡기의 대문과 서로 끌어 맞춘 것입니다.
“아들이 변질한다.”가 이미 특별히 드러난 큰 절문이 되어 있으니, 지금 만약 고례(古禮)를 증명한다면 “아들이 변질한다.”의 질(絰)이 또한 환질(環絰)의 제(制)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까? 《의례(儀禮)》의 사상례(士喪禮)에 나타난 습질(襲絰)을 살펴보면, 일고(一股)의 환(環)은 아닌 것 같사오나 변(弁)하고 질(絰)을 더하는 것은 모두 일고로 제를 삼았으며, 사상례의 습질은 이미 분명히 말한 것이 있으니, 마땅히 사상례로써 귀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상례에는 질만 있고 변은 없으며, 상대기에는 변이 있고 질이 있는데, 질이란 관이 없이는 머리에 얹지 못할 것이온즉 이 역시 상대기로써 사상례의 빠진 것을 보충하여 위아래를 통해야 마땅할 것이오니, 이는 바로 옛사람의, 찬언(纂言)은 하되 찬례(纂禮)는 하지 않는다는 의의입니다.
대저 정주가 의심나는 곳이 매우 많지만 이는 다 사설(師說)이요 가법(家法)이니, 비록 지금 사람의 견문에 합당하지 않은 점이 있을지라도 만약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의 자(磁)나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의 요(窯)를 가지고 봉우파사(鳳羽波沙)에 의심이 가게 한다면 너무도 불가한 것입니다. 뒷사람이 정(鄭)을 반박하는 까닭은 자기의 한 가지 반토막에 지나지 않는 식해(識解)를 가지고서 어쩌다 새롭고 기특하여 기뻐할 만한 곳을 발견하게 되면 의연히 떨치고 일어나 공격하여 있는 힘을 남기지 않곤 하였으나 돌이켜 생각하면 자기가 공격한 그 자체는 특별히 사설(師說)도 없고 또 가법도 아닌 것입니다.
저 왕숙(王肅) 같은 무리들이 힐난한 것은 뜻을 두고 이 설을 세워 스스로 독특함을 자랑한 것이며, 경(經)의 뜻이 날로 부스러지고 없어지는 데에 이르러서는 전혀 생각조차 아니한 것이니, 이는 또 뒷사람들이 크게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육향(六鄕)이 왕성(王城)에 있다는 것도 어떤 분명한 증거가 있사옵니까? 보내온 가르치심이 너무도 간략하여 감히 근거삼아 대답을 못하겠습니다. 대저 육향이 교(郊)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정(鄭)도 또한 가ㆍ마(賈馬)의 의(義)를 벽파하였으니, 이미 정의 시대로부터 일정한 논이 없었는데, 더구나 뒷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허공에 매달고서 부연하여 추측하기를 마치 몸소 그 땅에 다다르고 눈으로 그 일을 본 듯이 착착 말하는 것입니까? 설사 옛사람과 암암리에 합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자기 의견을 스스로 세우고 자기 말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은, 경(經)을 설명하는 처지로서는 감히 못할 바이며, 다만 갈수록 갈등만 더하여 뒷사람의 안목을 어지럽히는 데에 족할 따름이요 경에는 보익됨이 없을 것입니다.
관자(管子)의 시대에도 육향은 벌써 주(周) 나라 제도가 없어져서 증거를 삼을 수 없으며, 이를테면 “제후(諸侯)는 삼향(三鄕)인데 송(宋)은 유독 사향(四鄕)이다.” 한 것은, 주의 제도에 대하여 참증(參證)할 수는 있을 것이오나, 향(鄕)이 어디에 있었느냐는 것은 이제 와서 억지로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졸곡(卒哭)의 변(辨)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선유(先儒) 역시 혼합하여 일치시킨 것이 있을뿐더러 이미 정ㆍ가(鄭賈)가 나열 변파한 것을 거쳤으니, 이후 여러 말들이 서로서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너무도 그들의 요량 모르는 것을 보여줄 뿐이며, 어리석은 저의 소견으로는 다만 정설을 준수할 따름입니다.
그윽이 생각하오면 육경(六經)의 전ㆍ주(傳注)는 마땅히 육경의 정문(正文)과 함께 천고에 남아야 하며, 위공(僞孔)ㆍ두예(杜預)ㆍ왕필(王弼)ㆍ하안(何晏)에 있어서도 다 폐기하지 못할 것이 있사온데 하물며 정의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정약용(1762-1836 : 75세) 김정희(1786-1856 : 71세)
●황생 상 에게 주다[與黃生 裳 : 황상 1788-1870 : 83세]
온갖 나무가 파릇파릇하여 모두 봄의 뜻을 자랑하고 예전의 제비도 새로워 둥지를 치는데 바로 곧 먼 서한을 받으니 어찌 신이 날고 안색이 기쁘지 않으리오.
더구나 그 가슴속의 발울(勃鬱)한 기운은 누각의 구름과도 같고 거마의 일산과도 같아서 천리의 밖에서도 한 오라기가 서로 접속되어 나같이 삭고 낡아빠진 물건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네. 편지 전한 이후에도 동정이 과연 편지 부칠 때와 한결같은가?
이 몸은 칠십의 나이가 어느덧 닥쳤으니 무엇을 했다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네. 사중(舍中)도 역시 일년 사이에 더욱 늙었고 계군(季君)도 많은 고초를 겪은 탓으로 늘 병을 떠나보내지 못하니 한탄스러울 따름일세.
시권(詩卷)과 독초(牘草)는 그 공중에 가로지른 노련한 기운을 뉘 능히 당해낸단 말인가. 서문을 써 달라는 청은 진실로 이상히 여길 게 없으나 이는 어찌 나를 기다려서 값이 정해진다 하리오. 문장 촌심(文章寸心)은 스스로 천고를 지닌 것이니 실로 내가 들어서 사사로이 할 바도 아니지 않은가.
운포(耘逋)는 지병으로 지난 설 전부터 극심해지더니 마침내 금월 초하룻날 작고하여 이물(異物)이 되었다네. 이와 같은 말세에 이와 같은 인물을 어디에서 다시 본단 말인가.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 1783-1859 : 77세) 다산의 아들) 노인은 그와 정지(情地)가 특별하여 무척이나 슬퍼하고 있다네. 좌우(左右)도 이 소식을 들으면 또한 반드시 마음 놀래어 죽음을 애도함이 남과는 같지 않으리라 생각되네. 불선.
●정유산 학연 에게 주다[與丁酉山 學淵]
누른 암꿩이 숫놈으로 변하고 벙어리 종(鐘)도 다시 울고 몇 생을 닦고 닦아서야 매화의 골격에 이르렀다오.
사당에 배알할 포홀(袍笏)은 바로 계족산(鷄足山) 중에 있는 하나의 금란가사(金襴袈裟)로서 필경에는 미륵(彌勒)이 세상에 나와 사용하길 기다리는 것이니 물이 지나가면 똘이 이루어지고 과일이 익으면 꼭지가 떨어지기 마련이라 각각 그 때가 있거늘 사람이 스스로 발광 조급하여 잠시 동안을 참지 못하고 공연스레 갈등을 부리는 게 아니겠소.
근연(巹筵)의 축하는 매양 칠십으로 하고 매양 감역(監役)으로써 하는데, 모르괘라, 선생이 합초(合醮)할 때에 누가 선생을 위해 꼭 이렇게 되라고 잘 빌었습니까. 이 무슨 기험(奇驗)이란 말입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 놀라고 기뻐 절도할 지경이외다.
북방에 있을 적에 보내주신 두 통의 서한은 돌아와서도 소매 속에 품고 있으며 비록 즉시 사(謝)하지는 못했지만 이 마음이 위로 이마를 뚫고 아래로 발밑까지 통하는 것을 어떻게 다 헤아려 주시겠소.
오늘 이후로는 바로 선생이 세상을 다시 사는 새 일월이니 다시 늙었다거니 병들었다거니 칭하는 것은 마땅치 않고 빠른 노와 경쾌한 배로 나는 듯이 왕림하여 새 면목을 옛 늙은이 앞에 나타내주면 어떻겠소. 어떻게 생각하시오.
늙은 아우 같은 자는 쇠하고 삭아 여지가 없으나 살아서 옥문(玉門)에 들어온 것만도 다행이외다. 장차 형과 더불어 한번 뵐 양이기에 먼저 쌓이고 쌓인 회포를 펴며 일체는 다 물리쳐 버리오. 머지않아 누옥 속에서 촛불을 켜고 추위를 녹이며 예전 일과 묵은 꿈을 깨뜨리길 믿으며 불비.
●오생 경석 에게 주다[與吳生 慶錫 오경석 1831-1879]
그대와 더불어 겨우 두세 번 만났지만 그 손가락은 봄바람을 튕기고 그 입은 꽃다운 향기를 뱉어냄을 보고서 마음속으로 이상히 여겼는데 곧 서찰을 받아보니 문채(文采)와 사화(詞華)가 또 이와 같이 넉넉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네.
주문세가(朱門世家)의 모든 자제들이 비록 청환(淸宦)과 화직(華職)을 거쳤다 해도 건각(巾角) 추미(麈尾)가 다 이와 같지는 못하니 자못 한탄스러운 일이며 또한 무슨 까닭인지 알 수가 없네.
우선(藕船) 같은 사람은 바로 하나의 기린의 뿔이 세상에 나타났다 여겼는데 그 뒤를 이어 섭진추영(躡塵追影)하는 일족(逸足)이 또 몇이나 있는지 듣고 싶네.
그러나 하늘이 총명을 주는 것은 귀천이나 상하나 남북에 한정되어 있지 아니하니 오직 확충(擴充)하여 모질게 정채(精彩)를 쏟아나가면 비록 구천 구백 구십 구분은 도달할 수 있으나 그 나머지 일분의 공부는 원만히 이루기가 극히 어려우니 끝까지 노력해야만 되는 거라네. 연본(聯本)은 써보내며, 나머지는 불선식.
완당전집 제5권
서독(書牘)
●백파(1767-1852)에게 주다[與白坡]
백파 노사(白坡老師) 선안(禪安)하신지요? 이미 더불어 거리낌없이 말을 마구 했는데 어찌 체면을 보아 자제할 이치가 있으리오. 전후 지묵(紙墨)의 사이에 일호라도 노여움을 숨겨 둔 뜻은 없었는데 보내 온 깨우침이 갑자기 이렇게 중언부언한 것을 보면 이는 사(師)가 스스로 갈등을 일으킨 것이라 나도 몰래 웃음이 터져 머금은 밥알이 튀어나와 서안(書案)에 가득하구려.
사의 나이 장차 팔십이요, 더구나 오늘날 선문(禪門)의 종장으로서 평소에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지 못했고 또 명안(明眼)의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기봉(機鋒)을 누가 들어서 발전(撥轉)해 주리오. 정문(頂門)도 따라서 인색(湮塞)하게 되어 침침한 귀굴(鬼窟) 속에 허다한 세월을 그저 넘기고 말다가 갑자기 목놓아 말하는 사람의 큰 사자후(獅子吼)를 부딪치니 의당 그 눈이 휘둥그레질밖에요.
내 비록 천박한 사람이지만 어찌 늙은 두타(頭陀) 한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서 아울러 그 선장(先狀)에까지 언급하였겠소. 사는 하나의 속세 문자에 있어서도 오히려 깊이 궁구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심심(甚深)한 불지(佛旨)를 꿰뚫어 갈 수 있으리오. 이에 나아가 사의 무너지고 빠침이 여지가 없음을 알겠으니 어찌 더욱 터져 나오는 밥알이 서안에 가득하지 않겠소....
●초의(1786-1866)에게 주다[與草衣]
산중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니 마치 제유(諸有)를 벗어나 삼매(三昧)의 경지로 들어선 것 같았소. 다만 꿈속의 잠꼬대가 많이도 사의 무리에게 괴이한 꼴을 보였으니 행여 산이 조롱하고 숲이 꾸지람하는 일이나 없었는지요. 바로 곧 범함(梵椷)을 받아보니 자못 못 마친 인연을 다시 잇는 듯하여 기쁨과 칭송이 어울리는구려.
해사(海師)는 한결같이 맑고도 왕성한지요. 정근(情根)이 얽히고 맺히어 끊어 없애자도 아니 되외다.
속인은 따분한 일들이 여전히 덮치고 덮치니 족히 범청(梵聽)에 누를 끼칠 게 없고말고요.
주관(珠串 염주)은 이 편에 보내는데 원래는 마흔두 알로서 사십이장(四十二章)의 수에 응한 것이었으나 둘은 깨어져 없어졌으니 한스럽지만 어쩌겠소.
완당전집 제6권
서(序)
●귤중옥서(橘中屋序)
매화ㆍ대ㆍ연ㆍ국화는 어디에도 다 있지만 귤에 있어서는 오직 내 고을의 전유물이다. 겉빛은 깨끗하고 속은 희며 문채는 푸르고 누르며 우뚝이 선 지조와 꽃답고 향기로운 덕은 유(類)를 취하여 물(物)에 비교할 것이 아니므로 나는 그로써 내 집의 액호(額號)를 삼는다.
아, 우공(藕孔)과 개자는 각기 세계를 갖추고, 침공(鍼孔)과 선계(線蹊)는 구주(九州)보다 크며, 바둑을 두고 학으로 화하여 막히고 걸릴 것이 없으니 저 높고 커 위로 덮고 넓고 두터워서 아래로 실은 것도 어찌 또 하나의 큰 껍질의 속이 아니라는 것을 뉘알리오. 인하여 시로써 붙이노라.
제발(題跋)
●권 수찬 돈인 이재의 허천기적 시권의 뒤에 제하다‘
허천(虛川)은 옛날의 속빈로(速頻路)인데 삼수(三水)의 하나이다.
금(金) 본기(本紀)에 이르기를 “도문수(徒門水)의 서쪽 혼동(渾疃)ㆍ성현(星顯)ㆍ잔준(僝蠢)ㆍ삼수 이북의 한전(閒田)은 갈뢰로(曷懶路)의 여러 모극(謀剋)에게 주다.”라 했는데, 갈뢰로는 지금의 함흥이다. 혼동ㆍ성현ㆍ잔준이 삼수가 되기 때문에 삼수의 이름은 이로써 생긴 것이다.
이제 와서 상고해 보면 삼수의 치(治)는 곧 압록강이 그 북으로 지나가고 허천은 동쪽에 있으며 장진(長津)은 서쪽에 있는데 명칭이 달라진 것은 예와 이제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에는 단지 갑산(甲山)만이 있어 바로 옛날의 허천부(虛川府)를 그대로 인한 것이며 삼수에는 설치한 부(府)가 없었는데 나누어 둘로 한 것은 우리 조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고구려에 있어서는 졸본(卒本)이 되었고 당 나라 때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예속되었다가 이윽고 발해에 들어가 솔빈부(率賓府)가 되었던 것이다.
요(遼)ㆍ금(金) 이래로는 혹은 속빈, 휼품(恤品), 소빈(蘇濱)이라 부르니, 다 어음(語音)의 변전(變轉)이며 졸본과 더불어 모두 하나이다. 금사(金史)에는 또 오연(烏延), 포할노(蒲豁奴, 속빈로, 성현하(星顯河)라고 칭했는데 사람들이 이 성현에 의거하여 삼수의 하나라고 하고 있으니 삼수가 속빈이 된 것은 더욱 확실하다.
대개 폐려연(廢閭延)으로부터 압록강 북쪽으로 삼ㆍ갑(三甲)에 미쳐서는 다 졸본의 땅인데 동쪽 사람들이 성천(成川)으로써 해당하게 한 것은 너무도 근거가 없는 것이다.
●북수비문 뒤에 제하다[題北狩碑文後]
이는 바로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낡은 비(碑)이다. 비는 함경도 함흥(咸興) 황초령(黃草嶺)에 있었는데 비가 하 오래되어 닳고 벗겨졌는데 이재(彝齋 권돈인) 상서(尙書)가 이 도(道)에 관찰사가 되어 인풍(仁風)을 선양하여 온갖 법도가 함께 흥기하니 잠긴 빛과 숨은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열려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고적(古蹟)을 모으고 찾는 데까지에 미치어 이 비를 흙 속에서 얻었는데 이 비는 곧 우리나라 금석의 으뜸으로서 이천여 년의 묵은 자취가 다시 세상에 크게 밝혀졌으니 저 옛날 황룡(黃龍)ㆍ가화(嘉禾)ㆍ목련(木連)ㆍ감로(甘露)의 상서와 같을 뿐만이 아니라 너무도 성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일찍이 이 탁본(拓本)을 얻어 연월(年月)ㆍ지리ㆍ인명(人名)ㆍ직관(職官) 등을 증정(證定)하여 써서 비의 고(考)를 만들어 《해동금석록(海東金石錄)》과 《문헌비고(文獻備考)》의 그릇됨을 시정한 바 있었는데 지금의 잔석(殘石)과 비교해보면 오히려 쉰다섯 글자나 더 많고 그 부스러져 손(損)된 것이 또 열여섯 글자나 된다.
진흥왕 이십구년이 중국에 있어서는 진(陳) 광대(光大) 이년ㆍ북제(北齊) 천통(天統) 사년ㆍ후주(後周) 천화(天和) 삼년ㆍ후량(後梁) 천보(天保) 칠년이 되며 비의 글자체는 제ㆍ양간의 잔비나 조상기(造像記)와 더불어 흡사하다.
대개 구양순(歐陽詢)의 흑수비(黑水碑)가 동으로 온 이후로 우리나라 비판(碑版)은 다 구의 체를 모방했으니 그 중화(中華)를 사모한 것은 진작 진흥왕 시대부터 이미 그러했던 모양이다.
●석파의 난권에 쓰다[題石坡蘭卷]
난(蘭)을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 산수(山水)ㆍ매죽(梅竹)ㆍ화훼(花卉)ㆍ금어(禽魚)에 대하여는 예로부터 그에 능한 자가 많았으나 유독 난을 그리는 데는 특별히 소문난 이가 없었다. 이를테면 산수로서 송ㆍ원(宋元) 이래 남ㆍ북(南北)의 명적(名蹟)이 하나 둘로 헤아릴 바 아니나 왕숙명(王叔明)ㆍ황공망(黃公望)이 아울러 난마저 잘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며 대의 문호주(文湖州 문징명(文徵明))와 매(梅)의 양보지(楊補之)도 역시 난마저 잘하지는 못했다.
대개 난은 정소남(鄭所南)으로부터 비로소 나타나서 조이재(趙彝齋 조자고(趙子固))가 으뜸이 되었으니 이는 인품이 고고(高古)하고 특절(特絶)하지 않으면 하수(下手)하기가 쉽지 않다.
문형산(文衡山) 이후로 강ㆍ절(江浙) 사이에서 마침내 크게 유행되었지만 그러나 문형산은 서화가 심히 많으며 그가 난을 그린 것은 또 그 작품의 열에 하나 둘도 안 되니 그 드물게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함부로 그려 횡소난말(橫掃亂抹)하기를 요즘처럼 조금도 꺼림이 없이 사람마다 다하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소남이 그린 것을 일찍이 본 바 있는데 지금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겨우 일본(一本)일 따름이다. 그 잎과 그 꽃은 근일에 그린다는 자들과는 너무도 달라서 함부로 의모(擬摹)할 수도 없으며 조이재 이후로는 오히려 그 신모(神貌)와 계경(蹊徑)을 찾을 수는 있으나 방모(仿模)에 이르러서는 또 갑자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정ㆍ조 두 사람은 인품이 고고하고 특절하므로 화풍도 역시 그와 같아서 범인으로는 쫓아가 발을 밟을 수 없는 것이다.
근대에는 진원소(陳元素), 승(僧) 백정(白丁), 석도(石濤)로부터 정판교(鄭板橋) 전택석(錢籜石) 같은 이에 이르러는 본시 난을 전공한 이들로서 인품 또한 다 고고하여 무리에 뛰어났으므로 화품 또한 따라서 오르내리게 되며 단지 화품만을 들어 논정할 수는 없다.
우선 화품으로부터 말한다면 형사(形似)에도 달려 있지 않고 계경(蹊逕)에도 달려 있지 않으며 또 화법만 가지고서 들어가는 것을 절대 꺼리며 또 많이 그린 후라야 가능하고 당장에 부처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구천 구백 구십 구분까지 이르러 갔다 해도 그 나머지 일분이 가장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려우며 구천 구백 구십 구분은 거의 다 가능하겠지만 이 일분은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역시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리는 것은 이 의를 알지 못하니 모두 망작(妄作)인 것이다.
석파는 난에 깊으니 대개 그 천기(天機)가 청묘(淸妙)하여 서로 근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갈 것은 다만 이 일분의 공(工)이다.
나는 몹시 노둔(鹵鈍)한데다 지금은 또 여지없는 전복(顚覆)의 신세라서 난표봉박(鸞飄鳳泊)이 되어 그리지 않은 지 하마 이십여 년이다. 사람들이 혹 와서 요구하면 일체 못한다고 사절하여 마치 마른 나무와 차가운 재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과 같았는데 석파가 그린 것을 보니 하남(河南) 선생이 사냥꾼을 본 생각이 든다.
그래서 비록 스스로 그리지는 못할망정 전일의 아는 것을 들어 경솔히 쓰기를 이와 같이 하여 석파에게 부치는 바이니 모름지기 뜻과 힘을 오로지하여 나감과 동시에 다시는 이 퇴원(退院) 노추(老錐)로 하여금 더하지 못할 것을 더하도록 하여 나의 자작(自作)에 나음이 있게 말 것이며 사람들이 나에게 요구하고 싶어하는 자는 석파에게 요구함이 옳을 것이다.
●석파 난첩 뒤에 제하다[題石坡蘭帖後]
난초를 그리자면 역시 고인의 극적(劇迹)을 많이 보아야 하는데 소남(所南 정사초(鄭思肖))ㆍ구파(漚坡 조맹부(趙孟頫))의 난 같은 것은 대강(大江)의 남북에도 역시 드물어서 용이하게 구경 못한다. 겨우 소남의 한 본을 얻어 보았는데 원ㆍ명(元明) 이래의 여러 작품과는 크게 다르다.
오직 우리 선조(宣祖)의 어화(御畫) 묵란이 소남의 필의가 있을 뿐이며 그 한 잎ㆍ한 화판(花瓣)도 아무나 규방(規仿)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인으로는 진원소(陳元素)ㆍ승 백정(白丁)ㆍ고과(苦瓜 고과화상(苦瓜和尙) 석도(石濤)임) 같은 이들이 모두 천취(天趣)가 유발하니 오히려 문경(門逕)을 찾아 얻을 만하다. 석파의 난법이 쾌히 구과(臼窠)를 벗어났으므로 써서 준다.
완당전집 제7권
잡저(雜著)
●김군 석준에게 써서 보이다[書示金君奭準]
첫째는 생필(生筆)이니, 토호(兎毫)가 둥글고 건장한 것이어야 하며 반드시 쓰고 나면 거두어 넣어 두고 쓸 때를 기다려야 한다.
둘째는 생지(生紙)이니, 새로 협사(篋笥)에서 꺼내야 펴지고 윤기가 나서 먹을 잘 받는다.
셋째는 생연(生硯)이니, 벼룻먹을 다 쓰고 나면 씻어 말리어 젖거나 불게 아니해야 한다.
넷째는 생수(生水)이니, 새로 맑은 샘물을 길러 와야 하며,
다섯째는 생묵(生墨)이니, 쓰게 되면 그때그때 갈아 써야 한다.
여섯째는 생수(生手)이니, 공부를 간단(間斷)해서는 안 되고 항상 근맥(筋脈)을 놀리어 움직여야 하며,
일곱째는 생신(生神)이니, 정회(情懷)가 화평하고 적의하며 신은 편안하고 일은 한가해야 한다.
여덟째는 생목(生目)이니, 자고 쉬고 갓 일어나서 눈은 밝고 체(體)는 고요해야 하며,
아홉째는 생경(生景)이니, 때는 화창하고 기운은 윤택하며 궤(几)는 조촐하고 창은 밝아야 한다.
●백파(1767-1852)비의 전면 글자를 지어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라 썼음 써서 그 문도에게 주다.
우리나라가 근세에는 율사(律師)의 일종(一宗)이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이에 해당할 만하므로 때문에 율사로 썼으며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바로 본시 백파의 팔십 년 동안 자수(藉手)하고 착력(着力)한 곳이다.
혹자는 기(機)ㆍ용(用)ㆍ살(殺)ㆍ활(活)로써 지리하고 천착한 바 있다고 하나 이는 절대 그렇지 않다.
무릇 범부(凡夫)를 상대하여 다스리는 자는 어디고 살ㆍ활ㆍ기ㆍ용이 아닌 것 없으니 비록 팔만의 대장(大藏)으로도 한 가지 법이 살ㆍ활ㆍ기ㆍ용의 밖에 벗어난 것은 없다. 특히 사람들이 그 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살ㆍ활ㆍ기ㆍ용을 들어 백파의 구집(拘執)한 착상(着相)으로 삼는 것은 이야말로 다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드는 격이다. 이 어찌 백파를 안다 할 수 있으랴.
예전에 백파와 더불어 자못 왕복하고 변란(辨難)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곧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 한 곳은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아는 것이니 아무리 만 가지로 입이 닳게 말한다 해도 사람들이 다 해오(解悟)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찌하면 다시 사(師)를 일으켜 와서 서로 마주앉아 한번 웃을 수 있으리오.
지금 백파의 비면(碑面) 글자를 지음에 있어 만약 대기대용의 한 구절을 대서(大書)로 특서(特書)하지 않는다면 족히 백파의 비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써서 설두(雪竇)ㆍ백암(白巖) 여러 문도(門徒)에게 보이는 바이다. 찬(贊)에 이르되,
가난은 송곳 꽂을 땅이 없으나 / 貧無貞錐
기개는 수미산을 누를 만하네 / 氣壓須彌
부모 섬김을 부처 섬기듯 하니 / 事親如事佛
가풍이 가장 진실도 하도다 / 家風最眞實
그 이름 긍선이라 일렀으니 / 厥名兮亘璇
전전한다 말할 수 없도다 / 不可說轉轉
※백파대사비는 전북 고창군 선운사에 있다.
완당전집 제8권
잡지(雜識)
●무릇 서를 공부하는 문(門)은 열 두 종의 은필(隱筆)의 법이 있으니 바로 지필(遲筆)ㆍ질필(疾筆)ㆍ역필(逆筆)ㆍ순필(順筆)ㆍ도필(倒筆)ㆍ삽필(澀筆)ㆍ전필(轉筆)ㆍ와필(渦筆)ㆍ제필(提筆)ㆍ탁필(啄筆)ㆍ엄필(罨筆)ㆍ역필(䟐筆)이다.
무릇 용필(用筆)에 있어 생사(生死)의 법은 유은(幽隱)에 있고 지필의 법은 질((疾)에 있고 질필의 법은 지(遲)에 있다. 역입(逆入) 도출(倒出)하여 세를 취해 가감(加減)하고 때를 살펴 조정(調停)한다. 그 묘리를 믿기까지는 모름지기 공력(功力)이 깊어야 하며 쉽게 얻으려 들면 얻기 어려운 것이다.
붓의 가벼운 것은 양(陽)이 되고 무거운 것은 음(陰)이 된다. 무릇 글자 중에 두 개의 직획(直畫)이 있는 것은 왼편 획은 가늘고 바른편의 획은 굵어야 하며 글자 속의 주(柱)는 굵어야 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늘어야 한다. 이는 음양을 나눈 법이다.
정봉(正鋒) 편봉(偏鋒)의 설이 고본(古本)에는 없었는데 근래 사람들이 오로지 축경조(祝京兆 축윤명(祝允明))를 배우고자 하여 짐짓 이를 빌려 말한 것이다. 정(正)으로써 골(骨)을 세우고 편(偏)으로써 태(態)를 취하는 것은 자연 말자고 해도 말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서가 비록 장봉(藏鋒)을 귀히 여기지만 모호(糢糊)한 것으로써 장봉이라 할 수는 없으며 모름지기 붓을 쓰기를 태아검(太阿劍)이 자르고 베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대개 경리(勁利)로써 세를 취하고 허화(虛和)로써 운(韻)을 취하여 인(印)으로 인주를 찍는 것 같이 하며 송곳으로 모래를 긋는 것 같이 해야만 되는 것이다.
조문민(趙文敏 조맹부(趙孟頫)) 이 용필(用筆)을 잘 하는데 쓰는 붓이 완전(宛轉)하여 뜻과 같이 나가는 것이 있을 때는 그 붓을 선뜻 짜개어 그 정호(精毫)만을 가려서 따로 모은다. 그리하여 붓 세 자루의 정호((精毫)만을 합쳐 필공에게 주어 한 자루로 매게 하면 진서(眞書)ㆍ초서(草書)의 거세(巨細)를 막론하고 던지면 아니되는 것이 없으며 여러 해가 가도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서가(書家)가 이르기를 “진서(眞書)를 쓰면서 능히 전주(篆籒)의 법을 붙여 나가면 고금에 높다.”라 했다.
서법은 시품(詩品)ㆍ화수(畫髓)와 더불어 묘경(妙境)은 동일하다. 이를테면 서경(西京)의 고예(古隷)가 못[釘]을 베고 철(鐵)을 자른 것 같으며 흉하고 험하여 두렵게 뵈는 것은 곧 건(健)을 쌓아 웅(雄)이 되는 의(義)이며, 청춘(靑春)의 앵무(鸚鵡)는 꽃을 꽂은 무녀(舞女)가 거울을 당겨 봄에 웃는 의이며, 유천희해(遊天戲海)는 곧 앞으로 삼신(三辰)을 부르고 뒤로 봉황을 끄는 의로 시와 더불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상(象)의 밖에 초월하여 그 환중(環中)을 얻는다는 한마디 말에 벗어나지 않는다. 능히 이십사품(二十四品)의 묘오(妙悟)가 있다면 서경(書境)이 곧 시경(詩境)인 것이다. 이를테면 뿔을 떼어 놓은 영양(羚羊)과 같아 자취를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는 저절로 신해(神解)가 들어 있으니 신(神)으로써 밝혀 나가는 것은 또 종적으로는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은 은술(隱術)로 십수 가지 법이 있으니 지(遲)ㆍ질(疾)ㆍ순(順)ㆍ역(逆)ㆍ도(倒)ㆍ삽(澀)ㆍ전(轉)ㆍ와(渦)ㆍ엄(罨)ㆍ탁(啄)ㆍ제(提)ㆍ역(䟐) 등의 법을 들고 있으니 발등(撥鐙)의 예행(例行)하는 통법(通法)으로써 제한하는 것은 불가하다. 이는 나이 젊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엽등(躐等)하여 나갈 수는 없는 것이며, 삼십 년의 노련한 공력이 있지 아니하면 절대로 망행(妄行)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한예(漢隷)의 한 글자가 해행(楷行)의 열 글자를 당할 만한데 요즘 사람들이 익히는 것은 다 동경(東京) 말에 만들어진 것이며 서경(西京)에 이르러서는 손을 댈 수가 없으니 능히 진예(晉隷)를 만들 수 있는 것만도 역시 다행이다.
예리하고 가지런하고 건강하고 둥근 것은 필의 네 가지 덕이다.
난곡(蘭谷)의 서법은 너무도 해숭위(海嵩尉)의 필의(筆意)를 지녔으니 어찌 그 연원이었던가? 창울(蒼鬱)하고 돈좌(頓挫)하여 속본(俗本)과는 매우 틀린다. 필은 봉(鋒)이 가지런하고 허리가 강한 것을 요하며 벼루는 윤택함과 껄끄러움이 서로 겸하여 거품이 뜨고 먹이 빛나는 것을 취한다.
백양산인(白陽山人)의 서법은 손건례(孫虔禮)ㆍ양소사(楊少師)의 규도(規度)가 있으니 바로 초법(草法)의 정종(正宗)이다. 초법이 손ㆍ양을 말미암지 않으면 다 진택부(鎭宅符 집 지키는 부적)를 만들 뿐인데 동인(東人)은 더욱 심하여 악찰(惡札)이 아닌 것이 없다.
소재(蘇齋 옹방강의 호)는 원조(元朝)에 참깨 하나에다 천하태평(天下太平)의 네 글자를 썼는데 이때 소제의 나이 칠십팔 세였다. 글자가 승두(蠅頭)와 같은데도 역시 안경도 쓰지 않았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 또 원조로부터 금경(金經)을 쓰기 시작하여 종이 한 장을 일과로 삼아 그믐날에 끝마쳐 법원사(法源寺)에 시주했다. 그리고 또 내가 공양하는 대사(大士)의 소정(小幀)에 제자(題字)한 글씨는 몹시 가는데 다 동시의 일이다.
육조(六朝)의 비로서 무평(武平)의 제석(諸石)과 조준(刁遵)ㆍ진사왕비(陳思王碑) 같은 것은 다 극적(劇迹)이며 정도소(鄭道昭)의 비는 곧장 초산명(焦山銘)과 더불어 갑을을 다툴 만하다. 이를 알지 못하면 어떻게 비궤(棐几 우군(右軍)을 이름)의 풍류(風流)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랴.
옛사람이 글씨를 쓴 것은 바로 우연히 쓰고 싶어서 쓴 것이다. 글씨 쓸 만한 때는 이를테면 왕자유(王子猷)의 산음설도(山陰雪棹)가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오는 그 기분인 것이다. 때문에 행지(行止)가 뜻에 따라 조금도 걸릴 것이 없으며 서취(書趣)도 역시 천마(天馬)가 공중에 행하는 것 같다.
지금 글씨를 청하는 자들은 산음에 눈이 오고 안 오고를 헤아리지 않고 또 왕자유를 강요하여 곧장 대안도(戴安道)의 집으로 향해 가는 식이니 어찌 크게 답답하지 않겠는가. 지금 서극(西極)의 용매(龍媒)로 하여금 어노(圉奴)의 기적(羈靮)을 받아 준판(峻阪)에 올라가게 한다면 어떻게 섭운(籋雲)의 걸음을 펼 수 있겠는가. 필을 놓고 한번 웃는다.
홍보명(洪寶銘)은 역시 아름답다. 비록 시평(始平) 무평(武平)에 미치지는 못하나 오히려 북조(北朝)의 고격(古格)을 증명할 수 있다.
용용용필(用筆)의 법은 다섯 손가락을 사면에 성글게 벌리며 붓대를 식지 가운데 마디의 끝에 세워 잡아당겨 안으로 향하고, 엄지손가락의 나문(螺紋) 있는 곳으로써 눌러 밖으로 향하며 가운데손가락으로 그 양(陽)을 걸고 무평지와 새끼손가락으로 그 음(陰)을 받치면 손가락은 실하고 손바닥은 비어 운전하기가 편하고 빠르며, 운전하는 법에 있어서는 식지의 뼈는 반드시 가로 대어 필세(筆勢)로 하여금 왼편으로 향하게 하고 엄지손가락의 뼈는 반드시 밖으로 튀어나 필세로 하여금 바른편으로 향하게 해야만 만호(萬毫)가 힘을 가지런히 하고 필봉이 마침내 중으로 가게 된다. 만약 단단히 잡기만 하고 돌리지 않으면 힘은 붓대에만 있고 호(毫)에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구양영숙(歐陽永叔)의 이른바 “손가락으로 하여금 운용하여 완(腕)은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며, 동파(東坡)의 이른바 “비고 너그럽게 한다.”는 것이다. 가로 다붙이는 기(機)는 무명지의 손톱과 육(肉)의 사이에 있으며 밖으로 튀어나는 묘는 가운데손가락의 강하고 부드러운 그 사이에 있는 것이며, 또 “무명지의 손톱과 육의 사이로써 붓대를 떠받아 위로 향하게 한다.”는 말도 있다.
측(側)을 점(點)이라 하지 않고 굳이 측이라 한 것은 측으로 비스듬히 쏟아 점을 만드는 형세가 있음으로 해서이다. 면(宀)의 윗점 같은 것에 이르러는 역시 측이라 불러서는 불가하니 파(波)를 날(捺)이라 하고 별(撇)을 불(拂)이라 하는 호칭(互稱)과는 같지 않다.
“호를 편다[伸毫]”는 것은 바로 고금 서가의 들어보지 못하던 말이다. 필봉은 항상 필획의 안에 있어야 하며 한 획의 속에서도 기복이 봉초(鋒抄)에서 변하며 한 점의 속에서도 육좌(衄挫)가 호망(毫芒)으로 달라진다 하였는데 이는 본시 종유ㆍ색정 이래의 진결(眞訣)로서 고금을 통하여 바꾸지 못하는 것이며 인(印)과 인처럼 서로 전하는 것이다. 근일에 동인의 이른바 호를 펴는 한 법은 곧 바람벽을 향하여 허위조작한 것으로 전혀 낙착(落着)이 없다. 만약 별(撇)의 말필(末筆)을 만난다면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는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후학들이 다 이의 그르침을 입어 점점 귀굴(鬼窟)로 들어간 것이다.
법은 사람마다 전수받을 수 있지만 정신과 흥회(興會)는 사람마다 스스로 이룩하는 것이다. 정신이 없는 것은 서법이 아무리 볼 만하다 해도 능히 오래두고 완색하지 못하며 흥회가 없는 것은 자체(字體)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기껏해야 자장(字匠)이란 말 밖에 못 듣는다. 가슴속에 잠재한 기세(氣勢)가 글자 속과 줄 사이에 유로(流露)되어 혹은 웅장하고 혹은 우여(紆餘)하여 막자도 막아낼 수 없는 것인데 만약 겨우 점ㆍ획의 면에서 기세를 논한다면 오히려 한 층이 가로막힌 것이다.
박군 혜백(蕙百)이 글씨를 나에게 물으며 서의 원류(源流)를 터득하는 방법을 청하므로 나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는 젊어서부터 글씨에 뜻을 두었었다. 이십사 세적에 중국 연경(燕京)에 들어가 여러 명석(名碩)들을 만나보고 그 서론(緖論)을 들어본 바 발등법(撥鐙法)이 머리를 세우는 제일의 의가 되며 지법(指法)ㆍ필법(筆法)ㆍ묵법(墨法)으로부터 분항(分行)ㆍ포백(布白)ㆍ과파(戈波)ㆍ점획(點畫)의 법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익히는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한ㆍ위(漢魏) 이하 금석(金石)의 문자가 수천 종이 되어 종ㆍ색(鍾索) 이상을 소급하고자 하면 반드시 북비(北碑)를 많이 보아야만 비로소 그 조계(祖系)의 원류의 소자출(所自出)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악의론(樂毅論)은 당의 시대부터 이미 진본은 없어졌고 황정경은 육조 시대 사람이 쓴 것이며 유교경(遺敎經)은 당 나라 경생(經生)의 글씨이며, 동방삭찬(東方朔贊)ㆍ조아비(曹娥碑) 등의 글씨도 전혀 내력이 없으며, 각첩(閣帖)은 왕저(王著)가 번모(飜摹)한 것으로써 더욱 오류(誤謬)가 되어 이미 당시에 미원장(米元章)ㆍ황백사(黃伯思)ㆍ동광천(董廣川 동기창(董其昌) 같은 이가 일일이 박정(駁正)한 바 있으니 중국의 유식자들은 악의ㆍ황정 등의 서로부터 각첩(閣帖)에 이르러는 다 말하기조차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대개 악의ㆍ황정 등의 서는 만약 근거될 만한 진본이었다면 당의 구ㆍ저ㆍ우(虞 우세남(虞世南))ㆍ설(薛 설직(薛稷),ㆍ안(顔 안진경(顔眞卿))ㆍ유(柳 유공권(柳公權))ㆍ손(孫 손건례(孫虔禮))ㆍ양(楊 양응식(楊凝式))ㆍ서(徐 서계해(徐季海))ㆍ이(李 이옹(李邕)) 여러 사람들의 쓴 글씨가 하나도 황정ㆍ악의와 같은 것이 없으니 그 황정ㆍ악의로부터 입문하지 않은 것을 입증할 만하며 다만 여러 북비와는 인과 인이 서로 합할 뿐만 아니라 방경(方勁)하고 고졸(古拙)하여 모릉(模綾)이 원숙한 것은 없다.
근일에 우리나라에서 일컫는 서가의 이른바 진체(晉體)니 촉체(蜀體)니 하는 것은 다 이런 것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며 곧 중국에서 이미 울 밖에 버려진 것들을 가져다가 신물(神物)과 같이 보고 규얼(圭臬)과 같이 받들며 썩은 쥐를 가지고서 봉새를 쪼으려 든다[腐鼠嚇鳳]는 격이니 어찌 가소롭지 아니한가.
혜백은 말하기를 “이 추사의 하는 말을 들어보면 전일에 정(鄭)ㆍ이(李) 여러 사람에게 익히 들었던 것은 모두 남원(南轅)에 북철(北轍)인 격이 아니겠소?" 하므로 나는 또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것은 정ㆍ이 여러 사람들의 허물이 아니다. 정ㆍ이 여러 사람들은 다 천분(天分)은 지녔지만 궁려(窮廬)에 묻혀 있어 옛사람의 선본(善本)을 보지 못했으며 또 유도(有道)의 대방가(大方家)들에게 취정(取正)하지 못하고 모두 옹유 승추(甕牖繩樞)로서 많이 보고 많이 들은 것은 없으나 그 학을 하는 고심(苦心)에 있어서는 무시하지 못할 점이 있다. 그래서 어렴풋이 그림자만 찾고 황홀하게 소리만 어루만져서 내심으로 생각하기를 “천상(天上) 옥경(玉京)의 경루(瓊樓) 금궐(金闕)도 반드시 응당 이렇고 이러리라.” 하며 능히 눈으로 보고 발로 가지는 못했으니 어떻게 경루ㆍ금궐의 실상을 증명할 수 있으랴.
옛날 동파(東坡)가 나한복호(羅漢伏虎)를 찬한 글귀에,
일념의 차로써 / 一念之差
이 비이에 떨어졌네 / 墮此髬髵
도사가 비민히 여겨 / 導師悲憫
너를 위해 빈탄하도다 / 爲汝嚬歎
너 같은 맹렬로서 / 以爾猛烈
본성 찾기 어렵잖네 / 復性不難
라 하였으니, 제군들도 다 일념의 차로써 타락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맹렬한 것도 역시 본성을 되찾기가 어렵지 않은데 특히 도사의 비민을 만나지 못한 탓이다 하고서 서로 크게 웃었다. 그 실상을 헤아려 보면 실로 정ㆍ이의 허물이 아니니 이는 책비(責備)만 해서는 옳지 않은 것이다.
원교(圓嶠)의 필결에 이르러는 가장 가르침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터럭을 편다는 법이라 하겠는데 이것이 더욱더 틀려나가서 그른 것이 쌓여 옳은 것을 이길 작정으로 구ㆍ저 여러 사람들을 다 무시하고 위로 종ㆍ왕(鍾王)에 접속하려 드니 이는 문 앞길도 거치지 아니하고 곧장 방 아랫목을 밟겠다는 격이라, 그것이 되겠는가.
조자고(趙子固)는 말하기를 “진(晉)을 배우려면서 당 나라 사람을 거치지 않는 것은 너무도 요량없는 것을 내보일 뿐이다. 해서(楷書)에 들어가는 길이 셋이 있으니 화도(化度)ㆍ구성(九成)ㆍ묘당(廟堂)의 세 비(碑)일 따름이다.”라 했으니, 자고(子固)의 때에 어찌 악의ㆍ황정이 없어서 이 세 비를 들어 말했겠는가. 때문에 악의ㆍ황정은 유식자로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황정은 오히려 육조 사람이 쓴 진본이 있어 사람이 다 볼 수 있으니 만약 이를 임서하고 싶으면 바로 우연히 한번 희묵(戲墨)으로 시험하는 데 불과할 따름이며 이 어찌 법을 세우는 정종이라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황정의 진본은 필세가 가볍게 드날려 근일에 행세하는 묵각(墨刻)과는 특별히 다르기만 할 뿐 아니라 빙탄(氷炭)과 훈유(薰蕕)가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를 어찌하여 진체(晉體)라 일러 집집마다 떠받드는지 모를 일이다.
안평원(顔平原)의 글씨는 순전히 신으로써 나가 이는 곧 저법(褚法)으로부터 왔으나 저와는 일호도 서로 근사한 것이 없다. 황산곡(黃山谷)은 바로 진인(晉人)의 신수(神髓)라 했는데 사람들은 혹 우군의 과파(戈波)가 없다 하여 미사(微詞)가 있으니 다 그 변한 곳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논한 것이다.
근일의 유석암(劉石庵) 같은 이는 동파(東坡)의 서로부터 들어가 곧장 산음(山陰)의 문정(門庭)에 이르렀는데 지금 파서(坡書)의 형상을 가지고서 석암을 가책(苛責)한다면 되겠는가. 고예(古隷)도 역시 이와 같아서 한비(漢碑)를 보면 허화(虛和)하고 졸박(拙朴)하고 흉험가외(凶險可畏)의 상이 있는데 근세 사람들의 천량(淺量)과 소견(小見)으로는 오히려 문형산(文衡山)ㆍ동향광(董香光)의 한 획조차 능히 만들지 못하니, 어떻게 해서 동경(東京)의 한 파(波)인들 만들며 또 어떻게 해서 서경(西京)의 한 횡(橫)인들 만들 수 있으리오.
지금 한비로 현재 보존된 것은 겨우 사십 종류이며 또 잔금영전(殘金零塼)으로도 모추(摹追)할 만한 것이 있는데 촉천(蜀川)과 서로 통하는 곡부(曲阜) 제령(濟寧)의 밖에는 형언할 수 없이 괴괴기기(怪怪畸畸)하여 마치 공양(公羊)의 비상하고 가괴(可怪)한 것은 좌씨(左氏)에만 익숙한 자로는 규측(窺測)할 바 못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의심하여 심한 사람은 혹 묶어 저장해 놓고만 있으니 이 비록 하나의 소도(小道)이나 그 어려움이 이와 같아서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이원교(李圓嶠)가 황산곡의 글씨를 여지없이 논척(論斥)한 것을 보았는데 이는 곧 조미숙(晁美叔)의 말을 주워 모은 것에 불과하며 미숙의 이 말이 이미 산곡에게 감파(勘破)되었다는 것은 몰랐던 모양이다.
대개 논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디고 망령되이 스스로 존대(尊大)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원교마냥 곧장 당ㆍ송ㆍ육조를 뛰어넘어 지레 산음의 비궤(棐几)를 침범하려 드는 것은 바로 지붕 밖에 푸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격이다.
원교는 십가(十駕)로도 안평(安平)ㆍ석봉(石峯)에게 미치지 못하고 또 안평ㆍ석봉은 십가로도 동현재(董玄宰)에게 미치지 못하고 현재는 또 십가로도 동파(東坡)와 산곡에게 미치지 못할 터인데 그런 처지로서 어떻게 함부로 산곡을 논한단 말인가. 원교의 글씨는 어찌 일찍이 산곡의 파절(波折)의 법만이라도 지녔던가. 만약 원교가 파절을 모른다 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크게 놀랄 터이지만 실상은 파절의 오정(五停)하는 고법을 모른다.
조자고는 말하기를 “진(晉)을 어찌 쉽게 배울 수 있으랴. 당(唐)을 배우면 오히려 규구(規矩)는 잃지 않는다. 진을 배운다면서 당 나라 사람을 따르지 않는 것은 너무도 요량 모르는 것을 내보일 뿐이다. 해서(楷書)에 들어가는 것이 겨우 세 가지가 있으니 화도(化度)ㆍ구성(九成)ㆍ묘당(廟堂)이다.”라 했다. 지금 조자고의 시대를 들어 말하자면 이미 육칠백 년이 지났으니 지금 통행하는 황정ㆍ악의ㆍ유교 등의 법서 같은 것은 어찌 자고가 이를 보지 못했겠는가. 그렇지만 반드시 이 세 비만을 뽑아든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황정은 산음(山陰)의 글씨가 아니며 악의론은 이미 그때에 선본(善本)이 없어져서 표준으로 삼을 수 없으며 유교는 곧 당의 시대 경생(經生)의 글씨라 부득불 이 세 비에서 구할 수밖에 없으며 비록 석본(石本)이라 할지라도 원석이 상기 보존되어 있으니 진적(眞跡)에 비하여 한 등급이 낮지만 후세 석각(石刻)의 자꾸자꾸 서로 번모(飜摸)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서법은 신라 고려 두 시대에 오로지 구체(歐體)만을 익혀서 지금 남아 있는 구비(舊碑)로써 오히려 그 한두 가지를 거슬러 얻을 수 있는데 본조부터 이래로는 다 송설(松雪)의 한 길로만 쏠리었다. 그러나 신장(申檣)ㆍ성임(成任) 같은 여러 분들이 쓴 문방(門榜)의 액(額)은 웅기(雄奇)하고 고아하여 대단히도 옛법을 지녔으며 석봉에 이르러도 비록 송설의 기미는 있으나 역시 정성껏 옛법을 따랐던 것이다.
뒤에 와서 스스로 힘을 다하여 고법을 만회한다고 여기는 자들이 걸핏하면 다 황정ㆍ악의의 진체(晉體)를 말하고 있는데 모르괘라 황정ㆍ악의는 과연 이것이 무슨 본이었던가.
마침내 원교에 이르러는 또 예로부터 내려온 유규(遺規)를 다 말살하고 한 법을 억조(臆造)하여 붓 잡는 법에 있어서도 현비(懸臂)와 발등(撥鐙)을 익히지 아니하고 결자(結字)에 있어서는 “왼편은 위를 가지런히 하고 바른편은 아래를 가지런히 한다.”는 등의 법으로 예로부터 감히 바꾸지 못한 것을 알지도 못하며 온 세상이 육침(陸沈)이 되어 거의 돌이켜 깨닫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서가의 하나의 큰 변이라 하겠다.
글씨를 배우는 자가 진을 쉽게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당 나라 사람을 경유하여 진에 들어가는 지름길을 삼는다면 거의 그릇됨이 없을 것이다.
고현(古賢)이 글자를 만듦에 있어 공중에 올려 곧장 내림으로써 능히 신품(神品)에 들어가지 않는 자가 없는데 이는 현비(懸臂)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현비를 하면 공제(空際)에서 선전(旋轉)하여 가는 곳에 따라 살찌건 여위건 간에 다 묘취(妙趣)를 이룬다. 그러므로 장득천(張得天) 사구(司寇)는 글씨를 배움에 있어 먼저 현비를 하고서 원권(圓圈)을 그려 삼개월이 지나 그 권자(圈子)가 둥글고 깨끗하며 순숙(純熟)할 때를 기다려서 붓을 쓰면 자연히 주경(遒勁)하고 원전(圓轉)하여 여유가 작작하며 붓을 눌러 글자를 만들면 스스로 편봉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다만 권자만으로는 다 되지 못하며 지운(指運)으로써 참(參)해야 한다.
종정(鍾鼎)의 고문자는 다 예법(隷法)이 이로부터 나오게 된 것이니 예를 배우는 자가 이를 알지 못하면 바로 흐름을 거스르고 근원은 잊어버린 격이다.
우리들이 한예(漢隷)의 글자를 배웠다지만 모두 결국 당예(唐隷)를 쓰게 되고 만다. 그러나 당예도 미쳐가기 어렵다. 당예는 하나의 명황(明皇) 효경(孝經)에만 그치고 말 따름이 아니다. 한비(漢碑)에 없는 글자는 함부로 만들어 내서는 안 되며 만약 당비(唐碑)에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 모양에 의해 만들 수도 있으니 전체(篆體)와 같이 지극히 엄하지는 않다. 전자(篆字)는 결코 당으로 흘러가서는 안 되니 비록 이소온(李少溫)의 전(篆)이라도 단연코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강백석(姜白石 강기(姜虁))이 수장한 정무난정(定武蘭亭)은 바로 조자고(趙子固)의 낙수본(落水本)이다. 소미재(蘇米齋 옹방강(翁方綱)의 재호임)가 손수 모(摹)하여 호리(毫釐)의 차와(差訛)도 없다. 또 강개양(姜開陽)이 산음(山陰)에서 각을 했으니 난정이 강씨에게 있어 크나큰 묵연(墨緣)이라 하겠다.
서가(書家)는 반드시 우군의 부자(父子)를 들어 준칙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왕(二王)의 서는 세상에 전본(傳本)이 없으며 진적으로 상기 보존된 것은 쾌설시청(快雪時晴)과 대령(大令)의 송리첩(送梨帖) 뿐이어서 모두 계산해도 백자(百字)를 넘어가지 않으니 천재(千載)의 아래에 있어 비궤(棐几)의 가풍을 추소(追溯)할 것은 이에 그칠 뿐이다. 이 역시 내부(內府)로 들어가서 외인으로는 얻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모(劉摹)나 장각(章刻) 같은 것은 오히려 한번 번모(飜摹)한 것으로서 모법(摹法)이나 각법(刻法)이 하마 송ㆍ원 시대에 미치지 못하는데 또 어찌 양모(梁摹) 당각(唐刻)을 상대하여 논할 수 있으랴.
육조(六朝)의 비판(碑版)은 자못 전본(傳本)이 있어 구ㆍ저가 모두 이에서 나왔다. 그러나 송ㆍ원(宋元)의 여러 분들이 그다지 칭도(稱道)함이 없는 것은 그 이왕(二王)의 진적이 지금과 같이 다 없어지지는 않은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마땅히 북비(北碑)로부터 하수(下手)해야만 제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초산명(焦山銘)ㆍ예학명(瘞鶴銘)은 곧 육조 사람의 글씨이며 또 정도소(鄭道昭)의 여러 석각 같은 것도 다 볼 만하다. 황산곡 같은 이는 자주 초산(焦山)은 언급했지만 정(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역시 이상한 일이다.
형방비(衡方碑)ㆍ하승비(夏承碑)를 올려 보내는데 하승비의 원석(原石)은 이미 있지 않으며 이는 다 중각(重刻)한 통행본이다.
윤백하(尹白下)의 글씨는 문형산(文衡山)에게서 나왔는데 세상이 다 알지 못하며 우선 백하(白下) 자신도 또한 말하지 않았다. 문(文)의 글씨로서 소해(小楷) 적벽부 묵탑본(墨塌本)이 우리나라로 건너온 것이 있는데 백하가 전심하여 이것을 배웠다. 그 짧은 수획(竪畫)의 위는 풍성하고 아래는 빤 것은 바로 문(文)에게서 얻어온 법인데 문의 서는 청완(淸婉)하고 경리(勁利)한 반면 백하는 살짝 둔하고 조금 살찌며 우선 문의 결구는 다 구ㆍ저(歐褚) 안ㆍ유(顔柳)의 서로 전하는 옛 식에 들어 맞는데 백하는 다 되는 대로 썼으며 한 글자의 안에서 그 횡(橫)ㆍ수(竪)ㆍ점(點)ㆍ날(捺)에 따라 늘어놓기만 했다. 그러나 그 천품이 매우 특이한데다 인공마저 더하여 끝내 하나의 가수(家數)를 이룬 것은 형산을 비근하다 여기지 아니하고 머리를 숙여 배우고 익히곤 하여 먼 데로 치달려 스스로 대단한 척하기를 근래의 종ㆍ왕을 망칭(妄稱)하는 사람같이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해(大楷)의 금석비판(金石碑版) 전면(前面) 글자는 오로지 파공(坡公)의 표충비(表忠碑)를 법받았으며 그 반초(半艸)는 미남궁(米南宮)을 귀숙(歸宿)으로 삼아서 모두가 송인(宋人)의 권자(圈子) 밖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곧 그 식력(識力)이 크게 상량(商量)을 가진 곳이다.
그 문하에서 진수를 얻은 사람으로는 원교를 제일로 삼거니와 원교의 초년에 쓴 해자는 곧 사문(師門)과 더불어 조금도 다름이 없어 한 솜씨와 같았다. 실상 모를 일은 단지 사문의 써낸 것에서만 배우고 일찍이 한번도 사문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는 더듬어 보지 않은 점이니 이는 또 웬일이며 사문 역시 자기의 나온 바를 일러주지 않은 것은 또 웬일인가.
다시 생각하면 사도(師道)가 너무도 엄하여 감히 함부로 묻지 못했던 것이었던가. 사문이 일러주지 않은 것도 또한 박(璞)을 보여주지 않은 의에서였던가.
백하는 양호필(羊毫筆)을 썼던 모양이다. 서단양(徐丹陽)은 일찍이 말하기를 “사문의 쓰는 붓을 보니 중국의 대호로써 희기가 눈 같은데 끝내 무슨 붓이 되는지를 알지 못했고 또한 끝내 청해 묻지도 못했다.”고 했다. 대개 옛사람은 사도(師道)가 엄하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서ㆍ이(徐李)는 모두 그 고족(高足)이며 이(李)는 또 그 필법마저 물려받았으나 모두 양호인지는 알지 못했으며 비록 알았다 해도 백하는 능히 부려 쓸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필성(筆性)으로 보아 맞지 않을 것이다.
강표암(姜豹庵) 글씨는 바로 저하남(褚河南)에서 나왔으나 역시 어디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백하와 같으니 옛사람들은 이와 같은 곳이 많았다.
미남궁(米南宮 미불(米芾))의 글씨는 나양(羅讓)에게서 나왔는데 세상은 다만 미(米)를 알 뿐이요, 나(羅)가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난정(蘭亭)은 하나는 구(歐)의 모본(摹本)이요, 하나는 저(褚)의 임본(臨本)으로서 구는 구의 체가 있고 저는 저의 체가 있는데 세상에서는 다만 산음(山陰)의 것인 줄만 알고 도리어 이것은 구, 이것은 저임을 알지 못하며 만약 구ㆍ저의 서(書)를 들어 말을 하면 비록 구성(九成)ㆍ화도(化度)ㆍ삼감(三龕)ㆍ성교(聖敎 저(褚)의 안탑성교(雁塔聖敎)를 말함)라도 모두가 경홀히 여긴다. 중국 람들은 일찍이 이와 같지 않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말살하려 든다. 이를테면 송ㆍ원의 여러 사람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침폄(鍼砭)하려 들며 서경(西京)ㆍ동경(東京)으로 곧장 뛰어넘어 올라가려 하나 그 실상인즉 화도ㆍ삼감을 보지도 못하고서 공연스레 허세와 공갈로만 오만을 부리는 것이다.
미남궁은 저임(褚臨)을 들어 천하의 제일로 삼았는데 그 당시에는 정무본(定武本)이 적지는 않았으나 반드시 저(褚)를 중히 여겼으니 남궁의 감식(鑑識)은 의당 참증한 바 있어 뒷사람의 천량(淺量)으로는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황 산곡(黃山谷) 같은 이는 또 정무본은 추켜들었으며 강백석(姜白石)ㆍ조이재(趙彝齋)가 다 정무를 진(眞)으로 삼았으니 후세 사람들이 정무를 일컫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상세창(桑世昌)ㆍ유송(兪松) 여러 감상가들은 오로지 정무를 제일로 삼지 아니하고 아울러 저본(褚本)을 들었다.
악의론(樂毅論)의 양모ㆍ당각(梁摹唐刻)은 이미 북송(北宋) 시대부터 대단히 드물었으며 근세에 유행하는 속본(俗本)은 바로 왕저(王著)의 글씨이다. 동쪽 사람들은 더욱이 감별이 없어서 비궤(棐几)의 진영(眞影)으로 인식하고 아이 때부터 머리가 하얗토록 익혀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마치 채구봉(蔡九峯 채 침(蔡沈))이 전(傳)을 한 서경(書經)의 고문(古文)은 다 매색(梅賾)의 위본(僞本)임을 모르는 것과 같다.
서와 화(畫)는 도가 한 가지이다. 화가가 반드시 위로 조불흥(曹不興)장승유(張僧繇)만 찾는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며 만약 왕우승(王右丞 왕유(王維))의 강간설재(江干雪霽) 전본(傳本)이나 오도현(吳道玄)의 보살천왕(菩薩天王) 모필(摹筆)을 얻는다면 받들기를 천구(天球)와 홍벽(弘璧)같이 한다. 송의 연문귀(燕文貴)와 역원길(易元吉)의 것 같은 것도 세상에 드문 보배로 삼으며 원의 사대가(四大家) 조송설(趙松雪) 예운림(倪雲林) 황대치(黃大痴) 왕몽(王蒙) 를 말하더라도 역시 그 진본은 얻기 어렵다. 비록 명의 심석전(沈石田)ㆍ유완암(劉完庵)ㆍ문형산ㆍ동향광 같은 지극히 가까운 시대 사람들의 작품도 보기를 금과 옥조(金科玉條)처럼 하는데 글씨만은 그렇지 아니하여 반드시 종ㆍ왕을 준칙으로 삼으며 이것이 아니면 선뜻 다 경홀히 여긴다.
무릇 구ㆍ저 같은 이는 다 진인(晉人)의 신수(神髓)인데도 이원교는 방판(方板)이라 칭하여 하찮게 여기며 “우군은 이렇게 쓰지 않았다.” 하고 있으나 그 평생을 두고 익힌 것은 바로 왕저가 쓴 악의론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동향광은 바로 서가로서 하나의 큰 결국(結局)인데도 마구 말살하여 넘어뜨리고 있지만 중국 사람들은 동이 임서한 난정시(蘭亭詩)를 난정의 팔주첩(八柱帖) 안에 꽂아넣어 적파(嫡派) 진맥(眞脈)이 서로 전하는 것과 같이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목이 훨씬 중국의 감상가들보다 나아서 그렇단 말인가. 너무도 요량 없음을 보여줄 뿐이다.
만약 원교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고 창정(暢整) 경객(敬客)의 글씨로 향하여 배우고 익혔더라면 그만한 천품으로써 구ㆍ저를 거슬러 가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니 또한 반드시 깊이 가책(苛責)을 가할 것도 아니다.
이왕(二王)의 진적으로 지금도 오히려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은 우군(右軍)의 쾌설시청(快雪時晴) 원생(袁生) 등의 첩(帖)과 대령(大令)의 송리첩(送梨帖) 같은 것인데 이런 것도 그들은 다 심상(尋常)히 거쳐 가고 심상히 모습(摹習)하는 터이며 또 우모난정(虞摹蘭亭)ㆍ저본난정(褚本蘭亭)ㆍ풍(馮)의 난정ㆍ육(陸)의 난정ㆍ
개황난정(開皇蘭亭) 같은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찌 꿈엔들 이에 미쳤으랴. 이러한 도리를 알지 못하고 한결같이 미오(迷誤)되어 돌아오지 못하며 삼전(三錢)의 계모필(鷄毛筆)을 견집하여 걸핏하면 진체(晉體)라 칭하고 있으나 그들의 말하는 진체는 과연 무슨 본인고 하면 왕저의 악의론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아니하랴.
우연히 손과정(孫過庭 손건례 (孫虔禮))의 사자부(獅子賦)ㆍ임조(林藻)의 심위첩(深慰帖)을 펴보고 저도 몰래 신이 나서 한번 써 보았는데 손ㆍ임은 곧 진인(晉人)의 규칙이다. 초법(草法)을 배우고자 하면서 손의 문경(門逕)을 말미암지 않으면 또 촌구석 가게에나 술집 바람벽에 붙이는 하나의 진택부(鎭宅符)의 악찰(惡札)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가슴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 서품(書品)이나 화품(畫品)이 다 한 등급을 뛰어나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다 속장(俗匠) 마계(魔界)일 따름이다.
구(歐)의 서는 기화(奇花)가 갓 맺은 것 같아서 함축하고 드러내지 않는다. 옹사탑명(邕師塔銘)은 그 신(神)이 행하고 환(幻)이 나타난 곳으로서 사람들이 그 그림자나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저의 삼감(三龕)ㆍ맹법사(孟法師)ㆍ성교(聖敎) 등의 서는 해[歲]가 새로워짐을 보는 것 같고 꽃이 벌어지는 것을 만난 것 같아 유행하고 변형(變形)하여 헤아릴 수 없지 않는 것이 없다. 화엄누각(華嚴樓閣)이 한 손가락으로 탄개(彈開)하는 것은 미륵이 아니고서는 이를 판출(辦出)할 수 없고 선재(善財)가 아니면 이에 들어갈 수 없어 바라볼 수는 있어도 나아가지는 못한다.
완당전집 제9권
시(詩)
●모씨가 내 글씨가 시중에 굴러다니는 것을 발견하고 구입하여 수장했다는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입안에 든 밥알이 벌나오듯 튀어나왔다. 그래서 붓을 달려 써서 부끄러움을 기록함과 동시에 서도를 약술하고 또 이로써 권면하다[聞某從市中得拙書流落者 購藏之 不覺噴飯如蜂 走寫以志媿 略畧敍書道 又以勉之]
내 글씨 옹졸하고 또 고루하여 / 吾書拙且陋
이십 년을 갈림길에 헤매었다오 / 卄載迷路岐
원화의 각본조차 이해 못하니 / 未解元和脚
난정의 피상(皮相)인들 어찌 알쏜가 / 寧識蘭亭皮
혹 더러 사람들이 강요해오면 / 或有人强要
부끄럼이 앞서네 붓 들자마자 / 拈毫先忸怩
토란 하나 얻어 내기도 부족한데 / 不足博一芋
어찌하여 장사꾼의 손에 들었노 / 何緣贐市兒
절묘하다 그대 글씨 성을 기울여 / 君書妙傾城
거울 속에 봄의 양자(樣姿) 춤을 추누나 / 鏡裏舞春姿
호올로 이르러가 기재(奇才) 달리니 / 獨詣騁異才
제게서 법을 찾아 만족할 텐데 / 自求有餘師
괴이하다 기가의 벽이 많아서 / 多怪嗜痂癖
애목의 어리석음 되었군그래 / 仍成愛騖癡
적전(赤箭) 청지(靑芝) 아울러 비축할진대 / 芝箭歸並蓄
진실로 저령(猪苓)조차 버리지 않네 / 豨苓諒不遺
스스로 살펴보고 문득 혹하여 / 自檢輒自惑
곧바로 그대에게 힐문하고자 / 直欲詰君爲
그러나 내 글씨는 잘 못쓰지만 / 然吾不善書
서도에 나아가선 들은 바 있네 / 書道頗聞之
근원을 거슬러서 삼창을 알고 / 溯源該三蒼
진본(珍本)의 여러 비를 배워야 하네 / 模眞學衆碑
평직이라 균밀이라 그 사이에는 / 平直均密間
글자 밖의 기상(奇狀)이 빛나느니라 / 煥乎字外奇
회계라 천년적을 고사하고도 / 會稽千年跡
오히려 쾌설시가 있다는 것을 / 尙有快雪時
곁으로는 악의론(樂毅論)의 해 자(海字)를 찾고 / 旁探樂毅海
멀리 이재(彝齋) 낙수본을 입증하게나 / 遙證落水彝
구괴라 저연이라 가릴 것 없이 / 而歐怪褚硏
하나의 모니주(牟尼珠)로 거두어져야 / 攝之一牟尼
산과 바다 높깊음을 두들겨 보고 / 山海叩崇深
난새 봉새 마음껏 채찍질하네 / 鸞鳳恣鞭笞
이것저것 하고한 번각본이야 / 紛紛屢飜本
약반(籥盤)을 문질기라 서글프기만 / 捫籥堪一噫
고비나 금수를 만나거드면 / 古肥與今瘦
거꾸로 또 역으로 끌고 가야 해 / 倒行又逆施
대아의 수레바퀼 잡아일으켜 / 扶起大雅輪
특별히 물자기를 세우고 가면 / 特竪勿字旗
종당에는 우리 군사 늘어나리니 / 行當張吾軍
이걸로써 지제를 삼을지어다 / 以此爲質劑
완당전집 제10권
시(詩)
●소치(허련 : 1809-1892, 추사의 제자)의 묵파초에 제하다[題小癡墨芭蕉]
소치 화백 눈 속에 파초를 그려 내니 / 小癡雪裏作蕉圖
망천을 거슬러라 신운이 없을 수가 / 直溯輞川神韻無
연북에 피어 있는 삼백 송이 수선화는 / 硯北水仙三百朶
파초와 둘 아니다 문수에게 물어 보소 / 與蕉不二叩文殊
●청어(靑魚)
바닷배에 실린 청어 온 성에 가득하니 / 海舶靑魚滿一城
살구꽃 봄비 속에 팔이꾼 외는 소리 / 杏花春雨販夫聲
구워 노니 해마다 먹던 맛 그대론데 / 炙來不過常年味
새 철이라 눈이 끌려 특별히 정이 가네 / 眼逐時新別有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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