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일록(孤臺日錄)
정경운(鄭慶雲 1556 - ?)
서언
이 책은 지금까지 읽은 수 십권의 그 어떤 문헌보다 임진왜란 전후의 우리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는데 최고의 자료라고 여겨졌다. 읽은 후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 몇 가지 적어 본다.
○그 어려운 시기에 써온 주인공 정경운의 18년간(1592-1609)의 기록이 우선 대단하다.
○주인공의 우국충정과 백성사랑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선조를 비롯한 당시 인물들을 아주 객관적으로 평가한 측면이 크다.
○왜란이 결코 1598년에 종결되지 않았고 수 년후까지 명의 장수가 조선에 남아 있는 등 전쟁의 여운이 가시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오직 과거급제만을 지상과제로 알고 살아가는 나약한 양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저자가 착한 사람임에도 스승인 정인홍을 무비판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숭배하는 당파성이 강하여 스승과 관계되는 사항에 대해서는 분별력을 잃는다.
○지방고을의 재산많은 유력양반들의 서원및 향교관리및 지방관과의 협조모습을 볼 수 있다
○난을 통하여 가족들을 처참하게 잃으면서도 굿굿하게 살아가는 의연한 태도를 본다.
○난을 치르는 동안이나 그 이후까지 민중들의 처참한 삶의 모습을 생생히 엿 볼 수 있다.
○전통있는 양반집안의 막대한 토지 소유와 노비소유관계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지방간의 연결로와 통신의 발달이 상당한 수준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을 가진 주인공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불과 10여일이면 왕래하면서 자신의 토지와 노비를 관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경상도 지역의 왜적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조선 중기 학자 겸 의병장. 저술로는 《고대일록(孤臺日錄)》 등 임진왜란 때 의병의 사적을 기록한 여러 저술에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덕옹(德顒), 호는 고대(孤臺)이다. 경남 함양(咸陽)에서 승문원(承文院) 부정(副正)을 지낸 정율(鄭栗)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정인홍(鄭仁弘)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주변에 절승(絶勝)을 이룬 소고대(小孤臺)가 있어서 ‘고대’라 자호하였다. 청년기에 함양의 탁영서실(濯纓書室)에서 학문을 닦고, 26세 때 정인홍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이때 함께 교유한 인물은 박여량(朴汝樑) ·노사상(盧士尙) ·오장(吳長) 등이다. 정인홍의 《내암집(來庵集)》에 정경운의 시가 12수 남아 있을 정도로 정인홍과의 관계는 친밀하였지만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사상 등과 함께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1천여 의병을 모집, 김성일(金誠一) ·김면(金沔)의 휘하에서 활약하면서 군량보급과 군기조달에 주력하여 경상도 지역의 왜적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597년의 정유재란 때는 남계서원(藍溪書院)이 병화로 소실되자 이 서원의 유사(有司)로서 정여창(鄭汝昌) 등의 위패를 모셔두었다가 뒤에 위패를 다시 봉안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1617년에는 남계서원의 원장에 올랐다. 저술로는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고대일록(孤臺日錄)》과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등이 있다. 특히 《고대일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1609년까지 초유사 김성일의 소모유사, 의병장 김면의 소모종사관 등을 지내면서 겪은 일들을 기록한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과 전후 수습대책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료이다.
고대일록 제1권
▣1592
■4월
◯20일 왜적(倭賊)이 상륙(上陸)했다.
◯23일 오직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 ?-1593)이 다양한 방략(方略)으로 힘을 다해 방어했다. ...우수사(右水使) 원균(元均 1540-1597 )은 사망한 절도사(節度使) 준량(俊良)의 아들로 평소 담력과 지략이 있었다. 변란이 발발한 초기부터 전함에 올라 적을 방어하며 하루도 육지에 발을 내린 적이 없었다.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우상(右相) 유성룡(柳成龍)이 천거하였다.] 과 한마음이 되기를 약속하고는 전력을 다해 적을 추격해 격파했다. 적들이 더 이상 전라도를 넘보지 못하게 된 것은 양 수사(兩水使)의 공로이다.
◯25일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 1546-1592)이 충주(忠州) 달천(達川)에서 적과 맞닥뜨렸으나, 대응 조치가 적절하지 않아 전투에서 패배하여 익사(溺死)했다. 정병(精兵) 5백여 명도 모두 물에 빠져 숨졌다.
■여름 5월
◯8일 왕이 평양부에 행차하여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을 영남 초유사(嶺南招諭使)로 임명했다. 김성일은 함양군(咸陽郡)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사인(士人)들을 불렀다. ...또한 의령(宜寧)에 있는 곽재우(郭再祐 1552-1617)에게 급히 글을 보내 권면했다. ...나는 초모유사(招募有司)가 되어 흩어진 병졸들을 불러 모았다.
◯24일 본군(本郡)에서 흩어진 병사를 불러 모으니, 모두 4백여 명이었다. 관군(官軍)에 속하게 했다. [내가 힘을 다해 군사를 끌어모아도 관(官)에 소속시킬 수밖에 없으니, 의병(義兵)이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름 6월
◯13일 군사를 관아에 모으니, 그 대부분은 전쟁에 나가기를 자원한 사람들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만약 김수(金睟 1547-1615)가 성 쌓는 일을 늦추고 인심의 화합을 도모했더라면, 어찌 일시에 붕괴되는 환란이 있었겠는가. 슬프구나!
◯17일 세자(世子)를 책봉한다는 교서(敎書)와 죄인들을 사면토록 하는 사문(赦文)이 군(郡)에 도착했다. 종이에 가득한 왕의 뜻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했다. 만약 위기가 닥치지 않았을 때 나라를 보전하고 난리가 나기 전에 제대로 다스렸더라면 어찌 봉천(奉天)의 액운이 있었겠는가.
◯18일 행군(行軍)하여 향현사(鄕賢祠)에서 숙박했다. 본군(本郡)의 병사들은 진용(陣容)을 갖춘 이후로 남의 말을 빼앗고 재물을 약탈하며 멋대로 행동함이 지나쳐서, 사람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었으나, 통제할 수가 없었다. 옛 명장(名將)들의 사례에 비추어 보면, 군기(軍氣)가 형편없다
■가을 7월
◯2일 적이 전라도(全羅道) 금산(錦山)과 용담(龍潭)을 함락하고, 전주(全州) 지경에 들어와 여염집을 분탕질했다.
◯8일 무주(茂朱)에 사는 전 군수(郡守) 김종려(金宗麗)가 적진에 들어가 투항했다. 적의 청철릭〔靑帖裏〕을 받고 농사를 지은 지 수일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슬프다! 이증(李增)은 왜놈에게서 받은 짐을 지고, 종려(宗麗)는 적의 소굴에서 호미질이나 하면서 호령을 달게 받아들이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국가의 은혜를 저버리고 절의의 규칙을 무너뜨려, 도리어 견마(犬馬)만 못하니 애통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9일 적이 무주(茂朱)ㆍ금산(錦山)ㆍ용담(龍潭) 등의 고을에 주둔하니, 몇몇 군의 백성들이 모두 쏠리듯 투항해 들어가서, 말에게 먹일 풀과 땔나무를 모두 적에게 주었다.
◯20일 전라도의 적들이 용담(龍潭)에 모여 주둔했다.
◯금산(錦山)의 적들이 무주(茂州) 지역을 경유하여 옥천군(沃川郡) 양산창(梁山倉)을 지나갔고, 이동 중인 한 무리는 무풍(茂豊)에 모여 주둔했다.
■가을 8월
◯9일 초유사(招諭使)가 경상 좌도 감사((慶尙左道監司)에 제수되어 장차 강을 건너 좌도로 향해 가려고 할 때, 여러 고을의 사자(士子)들이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19일 본군(本郡)의 모든 유생들이 초유사를 막아 머물게 하는 일로 합천(陜川)으로 갔다.
■가을 9월
◯4일 충청도(忠淸道) 의병장(義兵將) 조헌(趙憲 1544-1592)과 충청도 연기(燕岐)의 의승장(義僧將) 영규(靈圭 ?-1592)가 금산(錦山)에서 적과 교전을 벌이다 대패하여 전사했다. 처음 조헌과 영규는 군사를 일으켜 적을 소탕하여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공로를 많이 세움으로써, 충청도 지역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금산에 있는 적을 토벌하다가 적에게 함락되어, 한 번 만에 패배하고 죽어 남긴 것이 거의 없으니, 애석하다. 그들의 남은 병졸들은 충청도 의병장 이산겸(李山謙)의 진영에 소속되었다고 한다.
■겨울 10월
◯3일 좌수사(左水使) 이절(李梲)이 군(郡)에 도착했다. 병을 핑계 삼아 적을 토멸할 의사가 전혀 없었으니, 걸어 다니는 하나의 시체에 불과했다.
■겨울 11월
◯22일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의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랐지만, 이날 밤 관아에서 사망했다. 김시민은 통판(通判)으로 재직할 때부터 사졸(士卒)을 휴양(休養)하여 하나같이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진주(晉州)의 사람들이 부모(父母)와 같이 사랑했다. 위아래가 혼연일체가 되어 전혀 갈등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전쟁에 동원해도 이기지 않음이 없었고, 성을 지키게 해도 수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간성(干城)의 장수로 간주했다.
하지만 큰 승리를 거둔 뒤에 적의 총탄에 맞은 곳이 날로 더욱 심해져서, 그 정신이 혼미하고 어지러워져 사람들이 모두 대단히 걱정하였다. 21일 머리를 빗고서 옷을 갈아입으니 병이 약간 나은 듯했으나, 다음 날 병이 심해져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진주(晉州)의 사람들이 어른 아이 없이 통곡하여 밤까지 이어졌으니, 마치 자신의 부모님 상(喪)과 같이 하였다. 백성들의 마음을 깊이 얻지 않았다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다만 대의(大義)에 힘쓰지 않고 작은 은혜를 베푸는 데 한결같이 힘썼으니, 사론(士論)은 그를 기국(器局)이 적다고 여겼다.
■겨울 12월
◯4일 순찰사(巡察使) 김성일(金誠一)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했고, 곽재우(郭再祐)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했다는 전갈이 왔다. 순찰사는 변란이 발발한 초기부터 본도(本道)를 담당하는 직무를 맡으면서, 힘을 다해 충성을 바치겠다는 마음을 천지에 서약하고, 한 지방을 방어하여 흉측한 칼날을 막았으니, 공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비변사(備邊司)나 이조(吏曹) 등은 태만하여 왕에게 포상을 건의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왕이 특별히 품계를 올려 주라고 명령하자, 이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유감을 가진 자들이 더욱 심하게 입방아를 찧으며 가로막는 데 꺼림이 없었으니, 나라의 명맥이 위태롭구나!
◯14일 장모(丈母)가 돌아가셨다는 부음(訃音)이 비로소 도착했다. 처음에 처형(妻兄) 김득윤(金得允)과 그의 동생 득지(得智)가 어머니를 모시고 산속으로 피난을 가서는, 아침저녁으로 옮겨 다니면서 겨우 목숨을 온전하게 부지하고 있었다. 가을에는 속리산(俗離山) 아래로 들어가 초막(草幕)을 지어 머물고 있었다. 장모는 본래 중풍을 앓았는데, 깊은 산속의 타관살이때문에 이전의 증세가 재발하였다. 11월 26일에 산막(山幕)에서 숨을 거두었다. 산속에 임시로 빈소를 설치했지만, 소식을 끊다시피 하고 살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야 처형이 처가 자식을 거느리고 왔기 때문에 비로소 그 전말을 상세하게 알게 되었으니, 슬픈 일이다.
◯25일 나는 집에 있으면서 편전(片箭)을 쏘고자 후원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화살이 왼손을 잘못 맞혔는데, 합곡(合曲)으로부터 장지(長指)를 관통하였다. 왼손이 장차 못쓰게 될 형편이니, 걱정이 어떠하겠는가. 심하다! 이것도 왜적으로 인해 입은 피해이다. 진정 이 적들이 아니었다면, 어찌 활쏘기 연습을 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1593
■봄 정월
◯1일 왕은 의주(義州)에 머물고 계신다. 도성을 버리고 서쪽 의주에서 피난 생활을 한 지가 지금 2년째이다.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곧바로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는데, 어가(御駕)를 따르고 있는 여러 신하들은 회복(恢復)하는 일은 여사(餘事)로 여기면서 정적(政敵)에게 유감을 갚는 것을 때를 얻었다고 여기니, 슬프구나! 썩은 나무가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걸어 다니는 시체가 권력을 쥐고 있으니, 나라의 불행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구나. 나의 병은 조금 차도가 있었다.
◯13일 팔도(八道)에 무과(武科)를 대대적으로 시행하되, 경상도(慶尙道)에서 4천 명, 전라도(全羅道)에서 5천 명을 선발하라는 전교가 있었다고 한다.
■봄 2월
◯7일 순찰사(巡察使)가 경내(境內)의 유민(流民)들을 모아 남아 있는 쌀 7섬을 내어 구휼하도록 하니, 반나절 사이에 모인 사람의 수가 거의 천여 명이나 되었다. 만약 정협(鄭俠)으로 하여금 지금의 세상에 살도록 한다면, 어떤 마음을 가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정철(鄭澈 1536-1593)과 같은 무리들이 날마다 술을 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적들이 가득하고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도무지 생각도 하지 않아, 나라의 근본이 이미 뒤엎어져도 마치 진(秦)나라와 월(越)나라의 살찌고 마르는 것을 보듯 하니, 애통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25일 체찰사(體察使) 정철(鄭澈)이 사은사(謝恩使)로 경성으로 부임함에 따라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이 대신 체찰사가 되었다.
황해도 방어사(黃海道防禦使) 김경로(金敬老)를 형벌에 처해 죽였다. 김경로는 본래부터 탐욕스럽고 교활한 인물로 김수(金睟)에게 아부하였고, 군공(軍功)을 거짓으로 기록해서 갑자기 현달한 지위를 얻었다. 명나라 군대가 대첩을 거두었을 때, 김경로는 명나라 군사들이 벤 왜적의 머리 30여 급을 훔쳐 자신의 공로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지만 여러 사람의 눈을 가릴 수 없어, 그의 죄악이 들통 나고 말았다. 명나라 장수가 그를 처형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문서를 보내니, 왕이 그를 죽이도록 명령했다. 김경로는 이미 지금의 세상을 속였고, 또 명나라 장수를 속이고자 했다가 드러나 처형을 당했으니, 역시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봄 3월
◯4일 나의 병은 여전하여 밤 2경이 되면 온몸이 차갑고 손발이 미친 듯이 떨리며, 이가 부딪히는 소리는 천둥소리와 같아서, 마치 극한의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그치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면서 정신이 점차 안정되어, 비로소 살아날 길을 얻었다.
◯13일 절도사(節度使) 송암(松庵) 김면(金沔 1541-1593)이 군중(軍中)에서 돌아가셨다. 송암은 깊은 산속에서 병을 다스리며 노년을 마칠 생각을 했는데, 국가가 멸망할 위기를 만나 분연히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일어나 군사들을 거느리고 적을 토멸했다. 그렇지만 단지 몇 고을만 수복하였을 뿐,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른바 군대를 내어 승첩을 못 거두고 몸이 먼저 죽었다는 것이니, 아! 슬프구나.
◯27일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 유기(鍮器)ㆍ철물(鐵物)ㆍ포백(布帛)ㆍ곡물(穀物)을 모두 훔쳐갔다. 여러 차례 도둑을 맞아 집안의 몰락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하늘의 처분에 맡겨야 할 것인가.
◯28일 아들이 태어났다. 내 나이 40세(38세) 가까이 되어 마침내 어린아이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장성하는 것을 어찌 반드시 기약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의 어머니가 병중에 잉태하여 수척하니, 근육이 견고하지 못하고 신체가 연약하여 염려된다.
■여름 4월
◯2일 병중에 아들을 낳아 아내의 병세가 위태로우니 걱정이다. 2경쯤 열이 올라 기절하므로, 냉약(冷藥)을 많이 썼더니 숨이 끊어진 듯하다가 다시 소생했다. 불행 중에 너무나 다행스럽다. 노복(奴僕)들은 모두 잠들었고, 나와 여자 종 한 명만이 치료하였다. 그 피곤하고 걱정됨을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7일 오시(午時)가 지나서 어린 아들이 요절(夭折)했다. 불쌍한 마음과 애틋한 정을 글로 쓰자니, 참담하여 탄식할 따름이다. 나는 강보에 싸인 아이도 오히려 슬픈데, 하물며 내암(來庵) 선생은 어떠했겠는가
◯13일 번성하면 쇠퇴하기 마련이고, 오래되면 변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천도(天道)의 일반적인 법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이 왜적들이 육지로 건너와 제멋대로 한 지 벌써 한 해가 되었으니, 오늘이 바로 작년 상륙한 날이다. 생각해 보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져 눈물이 흘렀다. 아! 성하면 쇠하고, 오래되면 변하는 도리가 어찌 이렇게 막연하기만 한가. 무슨 기다림이 있는 것일까. 백만이나 되는 명나라 군대가 양경(兩京)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고, 곳곳에서 의병의 군대가 정탐하여 요격하고 있지만, 아직도 수도 서울을 깨끗이 소탕하여 임금의 수레를 한양(漢陽)의 궁성으로 봉환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우리나라 사람이 죽음을 아까워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백발의 우활한 유생이 오두막에 병들어 쭈그리고 있어, 비록 칼을 잡는 책략에는 부족하지만 칠실(漆室)의 걱정을 막기 어렵구나.
아! 큰 돼지와 긴 구렁이같이 악한 무리들이 도처에 가득하여, 우리 강토를 점령하고 우리 풍속을 더럽힌 지 한 해가 지나도 그치지 않으며 그들의 간특한 짓을 일삼는 행태가 더욱 심하다. 온 나라가 텅텅 비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조리 쑥대밭뿐이고, 굶어 죽은 시체는 들판에 가득하여 날마다 수천 명의 죽은 시체가 골짜기를 메운 것을 가는 길마다 근심과 한탄이라 삶을 즐거워하는 의사가 전혀 없으니, 백성들의 궁핍함이 극에 달했다. 행궁(行宮)께서 만 리 밖 상황을 통촉하고 계시는지 알지 못하겠다. 만일 형세가 방휼(蚌鷸)을 이루어 오래도록 지구전을 벌이다가 군대는 늙고 무기는 무디어진 채 날이 가고 달이 간다면 나라꼴이 장차 어찌 되겠는가. 달 밝은 밤 빈 계단에 홀로 앉아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을 이길 수 없다.
◯25일 정사연(鄭士淵)을 만나 개령(開寧)ㆍ김산(金山)에서 난리를 겪고 있는 궁인(宮人) 등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말을 듣고서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오늘의 세상이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 과연 누구의 잘못인지 혼자서 한탄하였다. 슬프구나!
■여름 5월
◯6일 막내딸이 요절했다. 전염병에 걸려 오한과 설사로 고생하다 사망하니, 슬프기만 하다.
◯8일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 1552-1617)가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다.
◯11일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권율(權慄 1537-1599)이 군사를 이끌고 군(郡)에 당도했다. 왜적을 뒤에서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20일 명나라 군대에 군량을 운반했던 사람과 말이 되돌아왔지만, 나의 말은 명나라 사람에게 빼앗겼다.
◯29일 독운어사(督運御使) 윤경립(尹景立)이 군(郡)에 당도하여 왕의 유지(諭旨)를 전했는데, 여기에는 “군량 40섬을 60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보내는 자는 동반(東班) 6품에 제수하고, 20섬은 참상관(參上官) 영직(影職)을, 15섬은 훈도(訓導)에 제수한다. 공사 천민(公私賤民)은 모두 차등을 두어 상격(賞格)에 등급을 둘 것이니, 비워 둔 칙지를 갖고 있다가 사민(士民)이 스스로 응모한 것을 듣고서, 그 많고 적음에 따라 관직을 하사하는 교지를 주겠다.”라고 했다.
◯29일 왜적들이 진주성(晉州城)을 함락했다. 우도 절도사(右道節度使) 최경회(崔慶會)ㆍ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ㆍ충청 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ㆍ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 등이 모두 전사(戰死)했다. 처음 왜적들이 성을 포위하자 공격하며 축대를 쌓느라고 병사들은 조금도 쉬지 않았다. 성안의 사람들이 위기가 조석(朝夕)에 박두하여 날마다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바랐지만, 끝내 그림자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반드시 죽을 줄을 스스로 알고서 모두가 위태롭고 두렵다는 생각을 품었지만, 진주 목사(晉州牧使) 서예원(徐禮元)은 군졸들을 구휼하지 않고서 식량 지급을 줄이고, 활과 화살의 지급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진주(晉州)의 백성들의 마음이 떠나고, 용감한 군사들도 흩어졌다. 성을 지키는 모양이 김시민(金時敏)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니, 사람들이 예측할 수 없는 참화를 걱정했다.
■가을 7월
◯4일 도사(都事)는 왜적이 산음으로 쳐들어오는 데도 막아 낼 수가 없자, 향소(鄕所)에 명령하여 창고의 곡식을 나누어 주도록 했는데, 다만 몇 개의 동네에만 지급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전라 병사(全羅兵使)가 자신이 거느린 군사들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도록 명령하여, 전라도 군사들이 창고에 들어가 곡식을 점유해 버렸다. 이로 인해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되자, 전라도 군사들이 군민(郡民) 3사람의 목을 베며 창고에 출입할 수 없도록 하고는 마음대로 곡식을 훔쳐 내갔다.
황해 병사(黃海兵使)의 군대와 평안도(平安道) 유정(惟正)의 승군(僧軍) 등은 전혀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도둑질을 하였고, 관청(官廳)에 저장하고 있던 참기름 등의 물건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꺼낸 다음, 2경(更)쯤 되었을 때 사창(司倉)과 관청에다 불을 질러 훔친 흔적이 남아 있지 않도록 했다. 3도(道)의 군인들과 사방의 유민(流民)ㆍ아전과 마을의 백성들이 각자 훔친 것을 짊어진 채 온통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으니, 기강이 없어진 양상이 극에 달하고 있다. 아! 고을의 업무를 주관하는 수령은 외지에 나가 있고, 업무를 맡은 무리들은 잘 처리하지 못하여, 관가(官家)의 소유를 하루아침에 남김없이 잃어버렸으니, 그들의 겁먹고 나약해진 모습에 참 서글프다.
◯5일 왜적들이 진주(晉州)의 곡식을 모두 꺼내 배에 싣고 초계(草溪)로 갔다. 관사(官舍)를 불 지르고, 백성들을 노략질하는 짓이 지난날보다 훨씬 심했다. 나는 집에 있는 노비들을 데리고 물건들을 싣고서는 백전(栢田)으로 향했다. 피난하는 사람들로 시장 바닥을 이루고 있었고, 엎드려 울부짖는 소리가 길에서 끊이지를 않았다. 만약 주상(主上)께서 직접 허둥대는 상황을 본다면, 어찌 슬퍼하지 않겠는가.
◯15일 명나라 군대는 3곳에 진을 치고 파 총병(把摠兵)의 중군관(中軍官)인 막(莫)ㆍ마(馬)ㆍ왕(王)ㆍ사(謝) 네 명이 군사들에게 주둔하고 있는 동안 백성들을 침탈하거나 오곡(五穀)을 짓밟거나 베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렇지만 군졸들은 주장(主將)의 뜻을 무시하고 감춰 둔 재물을 찾아내 취하니, 사람들이 그로 인한 고통을 감당해 내지 못했다.
◯16일 내가 집에 있는데, 명나라 군사 두 명이 쇠뇌를 휴대하고 왔다. 화살을 쏘아 보도록 하니, 화살이 내 방문 아래의 판자 두 곳을 맞추어 화살이 꿰뚫은 흔적이 생겼다. 쇠뇌를 만든 형태를 보면, 나무로 활을 만들고서, 한 척 정도 되는 곧은 나무를 활의 몸통 중앙에 가로놓고, 줄을 당겨 가로놓은 나무 가운데에 걸어 대나무 화살을 횡목의 윗면에 놓고서, 왼손은 활을 잡고 오른손은 쇠뇌의 방아쇠를 작동하면, 줄이 저절로 빠지면서 화살이 힘차게 발사되었다
◯22일 개령 현감 최규보(崔圭甫)가 나를 만나러 왔다. 둘이서 함께 묵으며 한 달 정도 만나지 못한 회포를 풀면서 말 위의 고통을 낱낱이 말하였다. 내가 농담으로 말하기를, “공명(功名)이란 원래 이런 거야!”라고 했다. 그러고는 온갖 이야기를 다 했다.
◯26일 나는 백운산(白雲山)으로 가서 참봉(參奉) 방극지(房克智)를 만났다. 방극지는 처음 도탄(陶灘)의 의병장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함안(咸安)으로 달려가, 대장(代將) 강희보(姜姬甫) 등을 정하여 진주(晉州)를 지키게 하고 스스로는 호남에서 군량을 마련하는 일을 맡았는데, 적들이 진양(晉陽)을 함락시키고 악양(岳陽) 등지에서 충돌하자, 가족을 데리고 여러 차례 피해서 지리산 속으로 들어갔다. 아침저녁으로 옮겨 다니다가 결국 반야봉(般若峰) 꼭대기에 이르러서 겨우 적의 흉봉(凶鋒)을 피했다. 묘봉(妙峰)ㆍ운봉(雲峰) 등지를 거쳐 한 달 정도 지난 뒤에서야 백전(栢田)에 도착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걸어서 산길을 넘어왔는데, 하나의 상처도 없으니, 하늘이 도운 행운이었다고 했다. 서로 마주하여 담소하니 죽은 사람을 만나 본 정도가 아니어서 기쁘고 위로되기 짝이 없었다.
◯27일 나는 형수와 함께 산에 숨어 있는 처(妻)를 데리고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방형(房兄)을 찾아가 보고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가을 8월
◯1일 명나라 군사 8명이 운봉(雲峰)에서 군(郡)을 거쳐 산음(安陰)으로 향하던 길에, 개평촌(介坪村)에 있는 노지부(盧志夫)의 집으로 들어갔다. 노지부와 서로 다투다가 구타를 했는데, 지부는 얼굴이 터져 피가 흘렀고, 몸 또한 중상(重傷)을 입었다고 하였다. 매우 걱정된다.
◯3일 명나라 군대 중의 7개 부대가 군(郡)으로 들어왔다가 바로 거창(居昌)으로 향했다. 군으로 오는 부대의 사람들마다 각기 닭과 술, 채소와 과일, 짐 싣는 말 등의 물건들을 요구하였는데, 요구하기를 성화(星火)보다 급하게 하여 사람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했다.
◯29일 통령남병정왜좌참장(統領南兵征倭左參將) 낙상지(駱尙志)ㆍ왕 감독(王監督) 등이 절강(浙江)의 병사 6백 명과 평안도(平安道) 무진사(武進士) 등 백 명을 거느리고 군(郡)에 들어왔다. 낙상지는 나이가 65세이고 신장(身長)은 7척이나 되며, 풍채가 크고 눈빛은 광채를 발했다. 근육의 힘이 무척 강해 능히 천근을 들어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낙 천근(駱千斤)이라 불렸다. 사졸(士卒)들과 고락(苦樂)을 함께했다. 매일 6되 분량의 밥과 몇 근의 고기를 먹고서는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변방에서 창칼을 익히면서 일찍이 조금도 휴식하지 않았으며, 처신이 청렴하고 전쟁에 임해서는 용맹하니 명나라 제일의 장수이다.
■가을 9월
◯27일 명나라 군대 한 부대가 군(郡)에 당도하여 요녕(遼寧) 사람 5명이 조카의 집에서 숙박했다가, 패랭이〔笠冒〕ㆍ의복(衣服)ㆍ필묵(筆墨)ㆍ수건(手巾) 등을 몰래 가지고 가 버렸다. 한탄할 일이다.
■겨울 10월
◯1일 왕은 해주(海州)에 계신다. 적의 무리들이 고성(固城)ㆍ진해(鎭海)ㆍ창원(昌原)ㆍ김해(金海) 등지에 가득 몰려 있다. 산초를 심고 보리를 심는 등 도무지 돌아갈 뜻이 없으니, 그나마 남겨진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까.
◯11일 명나라 장병들이 낙동강을 건널 때, 낡은 배가 물에 뒤집어져 명나라 사람 30명과 우리나라 사람 3명이 물에 빠져 숨졌다. 상국(上國)의 사람들이 와서 우리나라를 구하려다 익사를 하고 말았으니, 슬픈 일이다.
◯15일 주상(主上)께서는 환궁(還宮)하던 날 비단옷을 입고 들어오셨지만, 동궁(東宮 : 광해군)은 베옷을 입고 눈물을 비와 같이 흘리며 행색이 초췌하여 감회를 떠올리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받들고, 기뻐하며 머리를 들고 말하기를, “과연 우리 임금의 아들이시다.”라고 했다.
■겨울 11월
◯6일 왜적들이 경주(慶州) 지역을 침범하여 명나라 군대를 엄습해 280여 명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전율이 온몸에 퍼졌다.
◯17일 나는 남원(南原)으로 가서 노복(奴僕) 언금(彦金)의 집에서 숙박하다가 명나라 군대를 만났는데, 그들은 내가 탄 말을 빼앗아 가 버렸다. 노복의 아들이 말을 끌고 되돌아오자, 명나라 군사들이 다시 와서는 나의 멱살을 잡으면서 적지 않은 수모를 주었다. 다른 노복들도 무수히 구타를 당했다. 한탄할 일이다.
◯19일 나는 길을 떠나 우리 고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처음 나는 도망간 노비를 잡기 위한 목적으로 떠났던 것인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계획한 대로 일을 성취하지 못하여 슬프고 한탄스러운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길은 마현(馬峴)을 경유하였는데, 길이 험하고 많이 걷게 되어서 너무 피곤하였다. 저녁에 비천(臂川)의 촌사(村舍)에 투숙했지만, 촌사의 늙은이가 성질이 포악하여 나를 심하게 박대했다. 밤이 깊어 비가 내렸다.
■윤 11월
◯12일 고을 사람들이 좌상(左相 : 윤두수)에게 각종 폐단에 대해 진달했다. 나도 역시 참석했다. 영남 지방에 외롭게 남아 있는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혜택을 베풀어 주기를 바라면서, 폐단으로 인한 고통을 진달했지만 전혀 거들떠볼 의사가 없으니, 재상의 인물됨이 과연 이와 같은가.
◯16일 유 총병(劉摠兵)은 각 고을에 패문(牌文)을 보내, 명나라 군인으로서 왕래하는 사람이 고을에 출입하면서 남의 재물을 탈취하거나 고을 수령에게 공갈하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전혀 무리를 통솔하는 자신의 본뜻이 아님을 알렸다. 그러고는 위관(委官) 주수손(周虽孫)에게 군(郡)에 남아 있으면서 백성들을 침탈하는 폐단을 금하도록 명령했다. 아! 유 총병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베푸는 은혜가 지극하구나.
■겨울 12월
◯2일 내가 타는 말이 여읜 데다 병마저 심해져서 드러누워 울타리 밖을 일어나 나갈 수 없었다. 1년 사이에 탈 말을 두 마리나 잃게 되었으니, 탄식할 일이다. 나는 군대를 접대하는 일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 향교로 갔다.
◯4일 유 총병(유정 劉挺)이 대답하기를, “나는 처음에 음식과 술을 받지 않으려 했지만, 너희들의 말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받을 수밖에 없으니 물러가도록 하라.”라고 했다. 고을 사람들이 뜰아래로 물러나 재배(再拜)를 하고 감사의 인사를 하니, 유 총병이 청 아래 서서 몸을 굽히고 답례를 했다.
아! 유 총병은 중국의 대장(大將)으로서 우리나라에 와서 구함에 그 위의(威儀)의 성대함과 작위(爵位)의 높음은 매우 지극한 위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싸 주고 덮어 줌은 곡진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사람들과 말을 할 때는 충의(忠義)의 성의가 천성(天性)에서 나와 온화한 얼굴과 온정이 넘치는 말속에는 능멸하고 지배하려는 모습이 없었다. 말을 모는 자태도 자상하고 화락(和樂)하여 다가가면 따뜻하고 바라보면 위엄이 있었다. 사자(士子)들을 대하기를 가인(家人)이나 자제(子弟)를 대하듯 하였고, 사졸(士卒)들을 부림에 추호도 규율을 범하는 일이 없어서 성대하게 옛날 명장(名將)의 풍모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장수가 괴팍하고 사나워 스스로 높고 위대하다고 여기는 것과 비교해 보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26일 포시(晡時)에 전주성(全州城) 안으로 들어갔다. 세자(世子)가 영전(影殿)에 참배한 뒤 유민(流民)들에게 구휼미를 나누어 주었다.
◯27일 정시(庭試)에 들어가 왕세자의 옥안(玉顔)을 우러러보았다. 표제(表題)가 나왔는데, “진(晉)나라 도협(刀協)이 낙양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하자, 이에 교사(郊祀)의 예(禮)를 의논했다.”라 되어 있었다. 출제 후에는 북쪽 정자(亭子)로 나가시어 활쏘기 시험을 관람하셨다.
고대일록 제2권
▣1594
■봄 정월
◯1일 임금께서 한양(漢陽)으로 돌아오셨다. 왕세자는 전주(全州)에 머무르셨다.
◯10일 나는 고을 수령을 뵙고 정철(鄭澈)이 죽었다는 것을 들었다. 이는 반드시 하늘이 죽인 것이나, 전형(典刑)을 분명하게 밝혀 사람의 마음을 통쾌하게 할 수 없음이 한스럽다.
◯11일 병사(兵使 성윤문)의 군관(軍官) 박천봉(朴天鳳)이 군(郡)에 이르러, 군사(軍士)를 선발하면서 아주 엄한 형벌을 가하였다. 성윤문(成允文)의 명령을 받들어 수행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사람의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생각하니, 너무 애통하다.
■봄 3월
◯24일 나는 병이 여전하다. 아내가 낙태를 했는데, 또 아들이었다. 운명의 엇갈림이 이 지경에 이르다니!
■여름 4월
◯9일 식후(食後)에 비가 내렸다. 비는 때맞춰 내렸으나, 백성들이 굶주려서 능히 일을 할 수 없었다. 곡식을 전혀 심지 않았으므로 가을의 수확을 바랄 수 없다. 인사(人事)를 다하지 못했으니, 천도(天道)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21일 종 세근(世斤)이 죽었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힘센 종이었다. 죽을 무렵에 얼굴빛이 푸르스름하더니 졸지에 가벼운 병에 걸렸는데, 갑자기 죽어 버렸다. 사람의 일이 한탄스럽다. 우리 형제의 집에 굶어 죽은 노비가 7, 8명이나 된다. 측은한 마음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29일 왜적(倭賊) 네 명이 강화(講和)를 명분으로 군(郡)에 이르렀다. 장차 유 총병(劉摠兵)에게 가려 하므로, 그들을 만류하면서 총병께서 군으로 오게 하여 강화를 의논하자고 청했더니, 왜인들이 마을을 제멋대로 다니면서 방자하여 꺼림이 없었다.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깎은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늙은이의 분노가 끓어올랐다. 어찌하면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처럼 더러운 무리들을 바다 밖으로 통쾌하게 쓸어버릴 수가 있을까.
■여름 5월
◯1일 명나라 병사의 짐바리 70여 수레를 운봉(雲峰)으로 운반해 갔다. 백성들의 고통이 이 일을 맡고 더욱 심해졌다.
◯30일 무명 한 필이 겉보리 네 말 값에 해당한다. 이것에 견주어 보면, 백성들의 어려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쌀 한 말에 3전(錢) 하던 날에 비하면 너무나 차이가 난다. 많은 비가 한 달 동안 내려서 백곡이 모두 상했다. 목화의 손상이 더욱 심하여 대부분 갈아엎었으니, 올 겨울에는 굶주림과 추위가 모두 극심할 것을 점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여름 6월
◯5일 정중립(鄭中立)이 장수 현감(長水縣監)을 제수받았다고 한다. 앉아서 그것을 얻다니, 복이 많다고 할 만하다.
◯9일 계집종 금춘(今春) 네 부자(父子)가 도망쳤다. 전라도(全羅道)로 향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조카를 데리고 몰래 운봉(雲峰) 땅을 살폈다.
◯10일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도망한 노비를 잡지 못하고, 단지 몸만 피곤할 따름이다. 너무 한탄스러웠다.
◯22일 소낙비가 내렸다. 왜놈 세 명이 군(郡)에 와서 소란을 피웠다. 통탄할 만하다.
◯24일 올벼를 대부분 도둑맞았다. 분통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을 것이다. 포시(哺時)에 벼를 도적질한 자를 잡아서 가두었다.
■가을 7월
◯1일 이자반(李子胖)이 나를 찾아왔기에 함께 잤다. 자반이 강도에게 약탈당하여 집에는 한 되 한 홉의 양식도 없고, 몸에는 한 자 한 치의 가릴 옷도 없으니, 불쌍하고 불쌍하다.
◯6일 중국의 수군이 전라도(全羅道) 바닷가에 와서 정박하면서 일본 도적의 소굴을 곧장 쳐서 한 번에 소탕하였는데, 씨를 말렸다고 한다. 장하도다!
■가을 8월
◯4일 비가 왔다. 나는 과거장(科擧場)으로 들어갔다. 유생들이 겨우 100여 명이었으니, 이제 사람들이 죽어 없어지고 재물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시험관은 이로(李魯)ㆍ고상안(高尙顔)ㆍ노경록(盧景祿)이고, 시제(試題)는 〈조복수종묘부(朝服守宗廟賦)〉와 〈애진길료시(哀秦吉了詩)〉였다.
◯5일 퇴장(退場)의 공문(公文)이 비로소 도착했는데, 초장(初場)에서 제출한 답안이 모두 채점되어 방이 나붙었다. 비록 내가 장원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여유(李汝唯) 어른이 나를 불러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종제(從弟) 덕장(德將)도 역시 과거에 참여하였는데, 그는 낙방하였다. 그래서 잠시 희롱하는 말로 농담을 하였다
◯23일 화적패들이 최 별감(崔別監)의 집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였다고 한다. 매우 통탄할 일이다. 아! 흉년이 들고 사람들이 곤궁한데, 도적마저 동시에 일어나서 혹 산중에 몰려다니기도 하고, 혹은 대낮에도 사람의 앞길을 막아서 백성들을 해쳐, 못하는 짓이 없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가을 9월
◯새로 온 수령 이희급(李希伋)이 취임하였다. 성주는 나와 오랜 교분이 있고, 또한 먼 친척으로 각별한 관계이다.
11일 나는 성주(城主)를 찾아뵈었다. 단성 현감(丹城縣監) 조종도(趙宗道)도 와서 만났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즐겁게 놀았다.
■겨울 10월
◯8일 나는 거창(居昌)으로 갔는데, 별거(別擧)에 응시하기 위해서이다. 도중에 성주(城主)를 찾아뵈었는데, 성주는 시험관으로서 갔다. 종제(從弟) 덕장(德將)도 함께 갔다.
◯9일 새벽에 과거장으로 들어갔다. 성주(城主)와 삼가(三嘉) 수령 고상안(高尙顔)과 진주 판관(晋州判官) 박사제(朴思齊)가 시험관이 되고, 시제(試題)는 〈면출고하론(俛出袴下論)〉과 〈금문대은부(金門大隱賦)〉였다. 세 번이나 고쳐 쓰고 나니, 날이 이미 오시(午時)가 되었다. 구상할 시간이 촉박해서 생각을 전개할 수 없었으니, 한스럽다.
◯12일 성주(城主)가 거창(居昌)에서 돌아왔다. 별거(別擧)의 방목(榜目)을 가지고 도착하였는데, 성주(星州)에 사는 박명윤(朴明胤)이 장원이고, 나와 노지부(盧志夫)는 참방(參榜)이었다.
◯17일 체찰사(體察使) 윤두수(尹斗壽)는 성주(城主)가 군관(軍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수에게 전령하여 전주(全州)로 불러올렸는데, 언사가 몹시 패악하고 오만하였다. 아! 윤두수는 나라의 삼공(三公)으로서 국가가 텅 비어 고갈된 것과 백성이 다 죽어 없어지는 것을 생각지도 않고, 오로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그 기염(氣焰)을 평상시와 다름없게 하니, 너무 한탄스럽구나! 성주(城主)가 이날 길을 떠나 운봉(雲峰)에서 유숙하였다.
■겨울 11월
◯7일 나는 지부(志夫)와 함께 서울길을 출발하여, 운봉(雲峰)에서 덕장(德將)의 집에 유숙하였다. 고을 원님에게 작별 인사를 드렸더니, 원님이 명지(名紙) 3장과 백지(白紙) 2권을 주었다.
◯10일 전주부(全州府) 안에서 유숙하였다. 여산(礪山)의 경계에 들어가서 척금(戚金)과 왕문(王門) 두 장수의 청덕비(淸德碑)를 보았다.
◯14일 광정촌(廣頂村) 앞에서 조반을 들었다. 오후에 가랑비가 내려서 창촌(倉村)에 투숙하였다. 중국인 서너 명을 만났는데, 큰 소란을 피우며 지부(志夫)의 쇠 화살 7개를 빼앗아 갔다. 또 정서(呈瑞)의 활도 빼앗아 갔다. 동행하던 김천의(金千義)도 활을 빼앗겼다.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한탄스럽고 한탄스럽도다.
◯15일 회덕(回德) 지역에서 조반을 들었다. 지부(志夫)의 말이 피곤하여 걷지를 못해서 노비를 보내어 끌고 돌아가게 하였다. 그래서 나 역시 종을 보내 버렸다. 1명의 종만을 데리고 가자니, 그 곤궁함이 어떠하겠는가.
◯18일 수원부(水原府) 안에서 유숙하였다. 부사(府使) 김영남(金穎男)에게 면회를 신청하였다. 부사가 각자에게 양식과 찬거리를 지급하고는, 급히 성안으로 들어가 버렸으므로 만나지는 못하였다
◯19일 도성(都城)에 들어갔다. 궁궐은 탕진되고 인가는 재가 되어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온 세상이 쑥대밭이라, 슬픈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우리나라 2백 년 문물과 제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깨어져 다시 더 남은 자취가 없게 되니, 백수(白首)의 서생도 지금 처음 보고 서리(黍離)의 탄식을 금할 수 없거늘, 나라의 녹을 먹는 공경 재상(公卿宰相)들이 분개하여 느끼는 감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만약 군신들로 하여금 힘을 합쳐 한결같이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각오를 지니고 회복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면, 하늘의 뜻을 되돌리고 민심을 수습하여 원수를 갚는 데 거의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미적미적 세월만 보내면서 난리를 평정하고 쇠망한 것을 일으켜 세울 조짐이 없으니, 참으로 애통할 따름이다.
우연히 병조(兵曹)의 하인 양금이(揚金伊)의 집을 방문하여 세 사람이 함께 기거하였다. 벽에는 흙을 바르지 않았고 생기와로 지붕을 덮었는데, 위에서는 눈이 떨어지고 옆으로는 바람이 들어와서 춥기가 노숙하는 것과 같았다. 대개 도성 안의 집들이 모두가 이 모양들이었다.
◯20일 명지(名紙)를 장흥고(長興庫)에 납부하였다.
◯21일 전정(殿庭)에 들어갔다. 제목이 나왔는데 〈본국이 교사 몇 명을 청하여 머물게 하고 군민(軍民)을 훈련시키도록 하다.〔本國請留敎師數人訓鍊軍民〕〉였다. 시험관은 우상(右相) 김응남(金應南)ㆍ판서(判書) 김명원(金命元)ㆍ이충원(李忠元)이었다. 우리들은 본래 대우(對偶)의 문장을 연습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험장에 들어가 구상(構想)하자니 엉성하기가 이보다 심한 것이 없었다. 이른바 비파를 들고 제왕(齊王)의 문에 서 있는 꼴이었다.
◯22일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은 수사(水使) 원균(元均)이 거제도(巨濟島) 전투에서 함대가 전멸했는데도 숨기고 알리지 않았다. 순찰사(巡察使) 홍인상(洪麟祥)이 그 사유를 아뢰자, 임금은 진노하고 사간원(司諫院)에서 입계(入啓)하여 잡아와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23일 오후에 방(榜)이 나붙었는데, 도사(都事) 송준(宋駿) 등 19인이 등제(登第)하였다. 본도(本道)에는 이광윤(李光胤) 한 사람뿐이고, 호남(湖南)은 없고 호서(湖西)는 이당(李讜)뿐이다. 지부(志夫)와 함께 서로 혀를 차며 짐을 꾸려서 돌아왔다. 한강에 도착하니, 얼음이 반쯤 풀려 굳지 않아서 돌아와 용산창(龍山倉)에 들어와 유숙하였다.
◯24일 새벽에 길을 떠나 얼음을 밟고 강을 건넜다.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마치 호랑이 꼬리를 밟는 듯했다.
■겨울 12월
◯1일 여산군(礪山郡) 안에서 유숙하였다. 유응원(柳應元), 장응천(張應千)과 함께 고삐를 나란히 하고 길을 갔다.
◯4일 새벽에 성을 나섰다. 황산(荒山)에서 말에게 여물을 먹였다. 초저녁 무렵에 집에 도착하였다. 지부(志夫)가 개평(介坪)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날이 저물어 가지 못하고 조카의 집에서 같이 유숙하였다. 집에 도착하였다.
▣1595
■봄 정월
◯28일 진 유격(陳遊擊)이 운봉(雲峯)으로 가고, 도원수(都元帥)는 산음(山陰)으로 향했다. 명나라 장수 낙 수비(駱守備)가 거창(居昌)으로부터 군(郡)에 도착하였다.
■봄 2월
◯6일 나는 성주(城主)를 찾아뵈었다. 성주가 명나라 사람에게 곤욕을 당하여 거의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8일 하질부(河質夫)와 동행하여 고령현(高靈縣) 안에 있는 질부의 노비 집에서 잤다. 고령 사람들은 옛날 집터에 천막을 치고 사는 자들이 3분의 1이었다.
◯10일 아침을 먹은 후, 길에 올라 대구(大邱)ㆍ경산(慶山)ㆍ하양(河陽) 경계를 지나니, 사람의 자취가 끊어졌다. 밭과 들이 모두 황폐하였고, 흰 갈대와 누런 띠풀이 끝없이 펼쳐 있었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참담한 풍경이 이와 같은 경우가 있겠는가.
◯14일 일찍 출발하여 법포촌(法浦村)에 이르렀다. 명나라 사람들이 우리들의 말 두 마리를 강탈해 갔다. 간절하게 설득하여 말을 찾아 돌아왔다. 오시(午時)에 무계진(茂溪津)을 건너니, 나룻머리에 바람은 고요하고 강물은 깊고 맑으며, 언덕엔 연한 녹색이 드리우고 봄기운은 따사로웠다. 경치가 참으로 좋은데, 도처의 촌락들은 텅 비어 토규(兎葵)와 연맥(燕麥)이 봄바람에 흔들릴 뿐이었다. 어찌 슬픈 느낌이 들지 않겠는가. 저녁에는 성주(星州) 우손동(迂遜洞)에서 잤다. 이 동네는 곧 개천〔犬川〕의 하류로 병화(兵火)를 겪지 않아 사람들이 매우 풍족했다.
◯17일 길에 올랐으나 말이 피곤하여 어렵게 집에 이르렀다. 집안 노비들이 다 도망가고 남은 자가 없었다. 액운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봄 3월
◯23일 명나라 사람 송신(宋信)이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렸다. 가증스러웠다.
■여름 4월
◯3일 나는 성주(城主)를 찾아뵙고 노지부(盧志夫)가 참봉(參奉)이 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20일 참장(參將) 심유경(沈惟敬)이 남원(南原)으로부터 군(郡)에 도착했다가 배도(陪道)로 나아갔다. 강화를 논의하러 온 것이다.
◯27일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가 군(郡)에 이르렀는데, 심유경(沈惟敬)이 하는 일을 정탐하러 온 것이다. 윤공(尹公)이 나를 불러 유뇌계(兪㵢溪)의 일을 매우 상세하게 물었다.
■여름 5월
◯8일 명나라 장수 김 지휘(金指揮)가 남원(南原)에서 군(郡)에 왔다. 함부로 위세를 부리며 난동을 일으켜 백성들을 휘갈기고 때리니, 금수(禽獸)와 다를 바 없었다. 접반관(接伴官) 김모(金某)는 무인(武人)이다. 주육(酒肉)을 요구하는 것이 태평스러울 때보다 심하니, 사람됨을 알 만하다.
◯11일 명나라 장수 유 참장(劉參將)이 운봉(雲峯)에서 군(郡)으로 왔다. 성주(城主)의 멱살을 잡고서 향소(鄕所)에서 마구 구타하니, 지금이 어느 때인가. 접반사(接伴使)는 좌랑(佐郞) 박경심(朴慶深)이다.
■여름 6월
◯12일 비가 왔다. 김천 찰방(金泉察訪) 정이홍(鄭而弘)이 가가 차사원(加假差使員)으로서 군(郡)에 도착했다. 관아를 수리하는데, 입결(入結) 여부를 논하지 않고 밥 짓는 연기가 나는 집은 모두 부역에 편입시켜, 농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채찍과 매질이 낭자하니, 백성들의 고초가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다.
■가을 7월
◯23일 중국 사신 양방형(楊方亨)이 군(郡)에 들어왔다. 나는 향인(鄕人)들과 큰 다리 가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 깃발과 칼들이 유 총병(劉摠兵)의 행차보다도 성대했다. 다리 앞에는 회피패(回避牌) 한 쌍, 숙정패(肅靜牌) 한 쌍, 책봉(冊封) 한 쌍을 세웠는데, 책봉(冊封)은 황금으로 썼다. 깃발 가운데 쓴 ‘금고(金鼓)’라는 두 자는 모두 매우 잘 쓴 글씨였다. 또한 빈 가마 한 틀을 메고 있었는데 매우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아마도 중국 사신이 겨울철에 타는 것일 터이다. 푸른 휘장으로 덮어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하였다. 군졸들은 단지 백여 기(騎)에 불과하나, 군졸들을 엄하고 분명하게 다스렸으므로 군사들이 마을을 침탈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축수(祝手)하였다. 접반관(接伴官)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중국 사신을 모시고 군(郡)에 왔다.
■가을 8월
◯19일 이원익(元翼 1547-1634)과 김륵(金玏)이 거창(居昌)으로 향했다. 이 상공(李相公)의 성품은 본디 담박하여 시대의 폐단을 힘껏 고치고자 했다. 행장을 꾸린 것이 보잘것없었으며, 한 필의 쇄마(刷馬)도 거느리지 않고, 단지 군관(軍官) 한 쌍만 대동하였다. 난리 뒤에 성사(星使)로서는 없던 바였다. 경내에 사는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되살아날 수 있게 하되,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기가 밀어내 버린 것 같이 생각하였다. 사람들이 봉황이 나타나 세상을 상서롭게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과 순찰사(巡察使) 서성(徐渻)도 군(郡)에 왔으나, 조심스러워 하여 단지 군관(軍官) 두 명만 거느리고 왔으며, 술을 마시는데 소고기가 있으니, 크게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이 정승(李政承)이 알게 하지 말라.’고 거듭거듭 다짐하였다. 아! ‘탐욕스러운 이가 청렴해지고 게으른 자가 뜻을 세운다.’고 하더니 참으로 빈말이 아니구나!
■가을 9월
◯20일 대관(大館)에서 상주 목사(尙州牧使)를 만났다. 상주 경내의 선비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500여 명 정도이며, 백성은 3000명이며, 귀속하여 온 자도 또한 3000명이라고 하였다.
◯27일 나는 향교(鄕校)에 가서 학관(學官)을 선발했는데, 상사(上舍) 노지부(盧志夫)가 선발되었다
■겨울 10월
◯6일 고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성주(城主)에게 정상을 참작해 줄 것을 호소했다. 성주는 이전에 관청에 비축해 두었던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쌀 판 값 밀린 것도 받아 내기 어렵다 하여, 납부해야 할 쌀과 콩의 수를 8결(結)로 정했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 백성들은 그 명령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글을 올려 힘껏 하소연하자, 조금 삭감해서 결정한다는 의사가 있었다.
◯18일 이날 중국 사신이 거창(居昌)에 머물렀는데, 거창(居昌) 수령이 전혀 예비하지 않아서 모양새를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거창(居昌) 수령과 삼기(三岐) 수령과 진주 판관(晉州判官)에게 장형(杖刑)을 가하였다고 한다. 대저 거창의 풍속은 억세고 사나워, 사람들이 영(令)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죽을 각오를 하고 명령을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중국 사신이 지나가는 데만 모양새를 크게 잃었을 뿐 아니라, 전날 유 총병(劉摠兵)ㆍ낙 참장(駱參將)ㆍ송 유격(宋游擊)의 행차 때도 어긋나고 태만하지 않음이 없어서 거창 수령으로 하여금 친히 스스로 풀을 베도록 하니, 백성들이 모두 괄시하였다. 해괴하기 짝이 없다.
■겨울 11월
◯3일 명나라 파발병(擺撥兵) [연락병] 가운데 교대하여 돌아가는 다섯 명이 우리 집에 갑자기 들이닥쳐 내 몸을 마구 때려서 팔뚝과 손을 많이 다쳤다. 통탄스럽고 통탄스럽다.
◯5일 명나라 병사 다섯 명이 또 우리 집에 들어와 병아리를 모두 죽였다. 또한 곡물을 빼앗고, 술과 고기를 내놓으라고 화를 내는데, 성화(星火)보다 급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으면, 나무와 돌을 다루듯이 마음대로 때렸다. 나는 말세에 태어나서 어찌 이다지도 불행한가.
■겨울 12월
◯18일 나는 성주(城主)를 뵈었다. 성주는 패잔(敗殘)한 읍에 거듭 부임하였기에 즐거워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같이 잤다.
◯19일 나는 관아에 머물면서 조보(朝報)를 보니, 조정견(趙廷堅)이 정시(廷試)에서 장원급제하였다.
▣1596
■봄 정월
◯23일 나는 호남(湖南)으로 갔다. 날이 저물어 남원(南原)의 노비 집에 투숙하였다.
◯24일 아침 일찍 출발하였다. 바람과 눈이 하늘을 덮고, 그것이 함께 얼어붙은 겨울날이었다. 저녁에는 순창군(淳昌郡) 내에서 잠을 잤다. 인심(人心)이 흉악하여 따뜻한 온돌을 주지 않아서 차가운 마루에 앉아 조는데, 냉기가 뼈에 사무쳤다. 닭이 울기만을 고대(苦待)하는데 긴긴밤이 더디기만 했다. 이른바 “한계(寒鷄)가 둥지에서 이지러진 달만 자꾸 쳐다본다.”는 것이다. 오시(午時)에 적성(赤城)을 지나매 산과 시내를 두루 보고 시 한 편을 읊었다.
◯25일 여명(黎明)에 길을 떠났다. 길에서 감사(監司) 이광(李洸)의 노비를 만나, 그와 함께 멸현(蔑峴)을 넘어갔다. 해 질 무렵 순창(淳昌) 땅의 정곡(鼎谷)에 유숙하니, 이는 이광의 농지이다. 들으니, 광(洸)이 소유한 아홉 곳의 전장(田庄)이 모두 백석(百石)에 이른다고 하였다. 아! 이광은 지위가 경상(卿相)에 이르렀는데, 나라의 안락과 근심〔休戚〕을 진(秦)ㆍ월(越)의 관계처럼 여기고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이용하여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도모하며 방자하게 마음대로 위엄을 부려 많은 토지를 소유하였다. 많은 백성들을 거두어들여 종을 부리듯 하였으니, 그의 마음 씀씀이를 이러한 것에서 알 수 있다.
◯26일 바람이 세게 불고 눈이 많이 내렸다. 아침을 먹은 후에 길에 올랐다. 산골의 계곡은 띠풀로 막히고 쌓인 눈이 길을 막아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눈먼 뱀이 갈대밭을 달리는 것 같았으니, 사람의 일이란 가소롭다. 갈현(曷峴)을 넘는데 위태롭고 힘들기가 공중에 매달린 듯하였다. 눈 위에서 나무를 붙잡고 가는데 가는 길이 험하고 위태롭기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정읍현(井邑縣)에서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해 지기 전에 고부군(古阜郡) 내에 투숙하였다. 군인(郡人) 최대해(崔大海)가 나를 아주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29일 산길을 따라 동으로 흥덕현(興德縣)에 이르렀다. 마침 누선(樓船)을 짓는다고 백성들이 모여 있었다. 형장(刑杖)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것을 보니, 백성들의 괴로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사진포(沙津浦)를 건너고 고갯마루를 넘어 남으로 갔다. 눈보라가 크게 일어나 연기사(延氣寺)에 들어가 묵었다. 한밤중에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고, 그것으로 한 수의 시를 읊었다.
◯30일 아침밥을 먹은 후 길에 올랐다. 선원포(禪院浦)를 건너는데 가랑비가 내렸다. 그래서 선원사(禪院寺)에 들어가 법당에서 쉬었다. 무장(茂長) 관아에서 온 손님 대여섯 명이 있었는데, 한결같이 도깨비 같았다. 무장 원의 사람됨을 이에 알 만하였다. 오리동(吾里洞)에 이르러 노비 집을 찾아가니, 폐허에 대숲이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봄 2월
◯1일 어두운 안개가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밥을 먹은 후에 검단포(黔檀浦)에 이르러 거기에서 묵었다. 유쾌하게 창해를 바라보고, 저 멀리 죽도(竹島)와 군산(君山) 등 여러 섬을 바라보았다.
◯2일 도사(都事)가 무장(茂長)에 이르렀다고 하여 곧장 무장으로 향해 갔다. 순찰사(巡察使) 홍세태(洪世泰)가 혼자 와 있었으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무장읍에서 묵었다.
◯3일 고창현(高敞縣)에 닿았다. 송현(松峴)을 넘어 장성현(長城縣)에 이르러 묵었다. 판사(判事) 이운백(李雲伯)의 집에 찾아가려고 하였으나, 길이 멀어 가지 못하였다.
◯4일 담양(潭陽)에 이르렀다. 금성산성(金城山城) 아래의 선달(先達) 김발(金潑)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그는 아주 후하게 나를 대접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산성이 험준하고 냇물의 흐름이 활발하여 참으로 이른바 하늘이 만든 험함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만약 뛰어난 장수가 그 지역을 막는다면, 아마도 백성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으로 현명한 보필이 없고 밖으로 어진 장수가 없으니,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장성산성(長城山城)은 이곳에 비해 더욱 험하다.
◯5일 순창군(淳昌郡)을 지나 남원부(南原府)에 이르러 노비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6일 이른 새벽에 길을 떠나 비전(碑殿)에 도착하여 말에게 먹이를 먹였다. 첨정(僉正) 류응(柳噟)과 수재(秀才) 허탁(許?)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 딸이 문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조카가 반갑게 맞았다. ‘어린 자식이 옷을 잡아당기며 묻기를, 돌아오심이 어찌 이리도 늦으셨습니까?’라고 하는 옛 시(詩)와 같다
◯26일 오후에 잠깐 비가 내렸다. 산군(山君 호랑이)이 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개를 쫓아갔으나 물지는 못했다. 근년에 호환(虎患)이 매우 많아서 사람을 해치고 가축을 잡아먹는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살벌한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고 음기(陰氣)가 성하고, 양기(陽氣)가 미미하여 악물(惡物)이 번성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봄 3월
◯17일 이날 밤에 내 말이 파발(擺撥)에서 나왔는데, 다만 피골만 남았을 뿐이었다.
■봄 4월
◯5일 파총(把摠) 장남(張楠)이 서울로부터 군(郡)에 이르러 왕 지휘(王指揮)의 사악함을 듣고, 그날로 떠나게 하였다.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길에서 소리쳐 촌민들을 곡진히 설득하여,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밭 갈고 씨 뿌리기에 전력하게 하였다. 또한 왕 지휘가 모은 물건을 단속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각자 자기 물건을 찾아가게 하였다. 그래서 왕 지휘가 머리를 구부려 명을 받들면서 감히 어쩌지를 못했으나, 빼앗은 물건을 몰래 팔아 치웠으니, 그 영악함이란 필적할 만한 이가 드물다.
◯25일 묘시(卯時)에 아들 주복(周復)이 태어났다. 모양새가 허약하여 울음소리조차 없다. 나이 40에 아들을 두었는데 오히려 튼튼하지 못하니, 가여운 생각이 어떠하겠는가.
■여름 5월
◯8일 오늘이 죽은 벗 정현경(鄭玄卿)의 대상(大祥) 날이다. 내가 새벽에 말을 타고 가 보니, 친척과 벗들이 한 사람도 온 자가 없었다. 세도(世道)를 한탄할 만하고 인정(人情)이 놀랄 만하다. 속담에 ‘죽은 사람은 벗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맞는 말이다.
◯11일 순찰사(巡察使)의 명령으로 용담(龍潭)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이날 비가 잠시 내렸는데, 이른바 ‘비를 구하여 비를 얻었다.’라는 것이다.
■여름 6월
◯26일 접반사(接伴使) 이항복(李恒福)이 군(郡)에 이르렀으나, 중국 사신이 바다를 건넜으므로 서울로 돌아갔다. 조사(詔使)는 바다를 건넜으나 적(賊)은 우리 영토에 남아 있고,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는 것은 주상께서 굳게 거절하시니, 반드시 장래의 환란이 있을 것이다. 조정(朝廷)에서는 계책(計策)을 내는 사람이 있겠는가. 아! 염려스럽구나.
■가을 7월
◯2일 중국 사신의 군마(軍馬)가 순창(淳昌)으로 향하였다. 오후에 칙서(勅書)를 가지고 온 중국 장수와 접반관(接伴官) 및 운봉 현감(雲峯縣監) 남간(南侃)이 군(郡)에 이르렀는데, 하리배(下吏輩)가 모두 숨고 달아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중국 사람과 통사(通事) 및 운봉(雲峯) 사람 등이 여염집을 수색함이 꿩이나 토끼를 사냥하듯 하여, 만나기만 하면 결박을 지어 형장(刑杖)을 자행하였다. 백성들이 모두 놀라고 겁내어 남녀를 불문하고 미친 듯 달아나, 있는 힘을 다해 산골짜기로 숨어들어 가 노숙을 하며 돌아오지 않았다. 이 무슨 세상의 변고인가. 향소(鄕所)의 공형(公兄)은 죄를 받음이 마땅하다. 무고(無辜)한 이 백성이 무엇을 좇아 살란 말인가. 남간(南侃)의 인물됨은 가증스럽고 가증스럽다.
■가을 8월
◯26일 대평(大坪)의 벼를 타작하는 것을 보았다. 벼가 바람에 해를 많이 입어서 혹 한 섬의 씨를 뿌려도 한 섬을 못 거둔 사람도 있으니, 민생(民生)이 걱정스럽다. 큰 기근 끝에 작년에는 조금 풍년이 들었는데, 무지한 무리들이 곡식을 흙처럼 천하게 여기고, 나물을 먹던 날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하늘이 재앙을 내리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윤 8월
◯12일 익호장(翼虎將) 김덕령(金德齡)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가련하다. 덕령은 의(義)로써 기병(起兵)하였으나, 마침내 큰 횡액에 걸려 옥석(玉石)의 분변을 받지 못했으니, 한탄스럽도다.
◯27일 성균관(成均館)을 중수(重修)하는 데 제각기 재물을 내어 만분의 일이라도 돕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군(郡)의 영역이 도로에 접해 있어 곤란을 겪으므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가을이 되자 두 차례나 독촉해 왔으므로 향중에 문서를 보내어 미두(米斗)를 할당하였는데, 고을 사람들 가운데 이 말을 기꺼이 따를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갔다.
■가을 9월
◯1일 주상(主上)께서 세자(世子)께 전위(傳位)하셨는데, 세자께서 극구 사양하셨다고 한다. 상(上)께서는 국새(國璽)를 봉하여 영상(領相)인 유성룡(柳成龍)에게 맡겨 두고, 오랫동안 정사(政事)를 처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상께서 전위하신 일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만 전위(傳位)하심이 정성스럽지 못하고 말씀이 흡족하지 못함이 있다. 그러므로 국시(國是)가 흉흉하고 임금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가령 주상께서 정전(正殿)에 임하시어, 세자를 불러 정하(庭下)에 서게 하시고 국보를 가지고서 간곡하게 당부하셨다면, 세자께서 무슨 말로 사양하셨겠는가. 재야(在野)의 가난한 선비라고 하여, 어찌 주제넘은 근심이 없으랴.
◯15일 중국 군대 2만이 내려왔다고 한다. 각 역참(驛站)에 영(令)을 내려 꼴 10만 단을 쌓아 두라고 하였다. 초췌한 백성들이 어떻게 마련해 내겠는가. 짐작컨대, 중국 사신이 칙서(勅書)를 반사(頒賜)하니, 적장(賊將) 평행장(平行長) [소서행장] 이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중원으로 사례를 드리러 가는데 길이 조선을 경유한다고 하니, 그래서 꼴을 준비하고 양식을 저장하여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다는 것인가.
■겨울 10월
◯22일 부사(副使) 접반사(接伴使) 이광정(李光庭 1552-1627)이 군(郡)에 도착하였다. 나와 고을 사람들은 접반사에게 폐단을 진술하였다. 적장이 다른 길을 경유하여 가도록 해서, 전라도(全羅道)는 입에 오르지 않도록 해 달라고 청하였다. 접반사가 대답하기를, ‘이는 실로 온 백성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는 것인데, 조정(朝廷)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나 혼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곧바로 가서 순찰사(巡察使)와 함께 논의하겠다.’고 하였다.
■겨울 11월
◯3일 주상께서 “곽재우는 발호(跋扈)한 장수이니 그에게 병권을 맡길 수 없다.”라는 등으로 전교하시고, 게다가 체찰사에게 그의 의향을 정탐하여 보고하도록 명령하셨다고 들었다. 아! 이 어찌 밝은 시대의 일인가. 곽공은 세상이 어지러움에 분개하여 포의(布衣)로서 일어나 여러 차례 훌륭한 전공을 세웠으며, 한 방면을 차단하여 장성(長城)에 비길 만한 공이 있는데도 주상의 뜻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과연 중흥(中興)의 계책인가.
◯15일 조카가 시사(時祀)를 행하며 선형(先兄)에게 직장(直長)을 추증(追贈)하였다. 아! 선형의 문장(文章)은 하늘이 부여한 것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신동(神童)이라고 주위에서 칭찬하였는데, 약관(弱冠)의 나이에 병이 중하여 성취하지 못하고 죽었다. 게다가 집안 살림이 가난하여, 칠품(七品)의 품계를 드렸을 따름이니, 비참하기 그지없다.
◯27일 강군망(姜君望) 형과 사고(士古)가 나를 초청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나아가서 그들을 보았다. 도원수(都元帥)의 관문(關文)이 군(郡)에 도착하였는데 말하기를, 임금으로부터의 전지(傳旨)가, ‘정월(正月) 초열흘 안으로 모든 마을을 비워, 들녘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하여 변란에 대비하며, 각각 유사(有司)를 정하여 도망가서 숨도록 재촉하라.’고 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계책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겨울 12월
◯7일 부체찰사(副體察使) 한효순(韓孝純)이 군(郡)에 도착하였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성주(星州)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체찰사가 다시 오니,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었지만, 그 체찰사는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릴 재주는 없었다. 나라 안에서 한 사람도 군사를 훈련시키고, 무예를 강습하며, 왜적의 흉봉(兇鋒)을 막는 것으로 뜻을 삼는 이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한갓 스스로 놀고 쉴 따름이니, 나랏일은 어찌하며, 백성들은 어찌할 것인가.
◯8일 요즈음 추위의 매섭기가 옛날과 비할 데가 없다. 양산(梁山)에 갔더니, 사람과 가축이 많이 얼어 죽었다고 하였다. 탄식할 일이로다. 탄식할 일이로다.
▣1597
■봄 정월
◯4일 부천사(副天使) 심유경(沈惟敬)이 군(郡)에 왔다. 함께 온 군사가 5백 명보다 적지 않았는데, 모두 여우 가죽, 수달 가죽, 오소리 가죽 옷을 입었고 수레에도 가득 실려 있었다. 조금이라도 염치가 있다면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9일 종 억석(億石)의 집에 도착하였다. 여종 억개(億介)를 샀는데, 을미년(1595, 선조28) 봄에 죽었다고 한다. 이는 곧 죽은 다음에 산 셈이니, 가소로운 일이로다. 종 억석은 지난겨울에 아들을 낳았다.
◯13일 큰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이날 적장 청정(淸正)이 바다를 건너 서생포(西生浦)로 들어왔다. 이에 앞서 수군(水軍)이 요격하기로 기약했었는데,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가 와서 참여하려 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채 적장을 쉽게 건너오게 하였으니,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22일 순찰사(巡察使) 종사관(從事官) 성안의(成安義)가 여러 읍(邑)에 통문(通文)을 돌려 군량(軍糧)을 모으려 하였다. 읍마다 유사(有司)를 정하였는데, 함양(咸陽)에서는 지부(志夫)와 내가 유사(有司)가 되었다. 이미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요구가 있었는데, 또 종사관의 요구를 받았다. 두 번씩이나 군량 모집에 응하다 보니 어찌해 볼 방도가 없다.
■봄 2월
◯1일 박경실(朴景實)이 박명부(朴明榑 1571-1639 1590년 20세에 급제 농월정을 지은 사람)에게 머리채를 잡혔다는 얘기를 들었다. 박명부는 스스로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及第)했다고 하여, 기염(氣焰)을 제멋대로 부리고 아무 거리낌 없이 친구를 끌어다 욕보였다. 통탄할 일이다. 아, 인심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봄 3월
◯6일 심유경(沈惟敬)이 의령(宜寧)에 머물면서 왜장(倭將) 평조신(平調信)과 요시라(要時羅) 등을 맞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15일 성주(城主)가 나를 지대도감(支待都監 : 고관들을 뒷바라지 하는 일)으로 정하였다. 그 수고로움이 어떠하겠는가.
◯21일 심유경(沈惟敬)이 거창(居昌)에서 군(郡)으로 왔다. 아랫사람들을 단속하지 못하고 자기 욕심을 막을 재주도 없으니, 일개 유세객(遊說客)에 불과하다. 그런데 거느린 군정(軍丁)이 2백여 명에 이르고, 말에 실은 짐은 3백 바리가 넘는다. 동원되어야 할 말과 짐꾼의 수가 무려 수백인데, 게다가 분담할 고을은 없고 한 군(郡)이 모두 감당해야 하니, 경내(境內)가 어수선하여 도로에 길게 늘어서 있을 따름이다. 가엽구나, 우리 고을 사람이여!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여름 4월
◯18일 왜적(倭賊) 세 명이 거짓으로 우리나라 사람처럼 꾸미고 와서 공산산성(公山山城)의 지형을 엿보고, 또 부산산성(富山山城)에 갔다가 붙잡혔다. 그런데 끝까지 추궁하여 문책하니, 적장(賊將)이 시켜서 산성(山城)을 염탐하러 왔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게으르고 겁이 많아서 간첩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저 왜적들은 밤낮으로 우리나라를 도모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슴 아프도다! 가슴 아프도다!
◯25일 아들 주복(周復)의 생일이다. 마음은 집에 들어가서 돌상에 있는 물건을 집는 것을 보고 싶은데, 비가 내리는 것이 마치 물 붓듯 해 움츠린 채 감히 가지를 못했다. 고대(孤臺)를 바라보기만 하니, 내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나중에 들으니, 아들이 책을 골라잡고 붓을 집었다고 한다. 기쁜 일이다.
■여름 5월
◯19일 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열읍(列邑)에 전령하기를, 무과 출신과 무예에 재주가 있는〔武才〕 모든 사람 등은 각자 처자식을 데리고 벽견산성(碧堅山城)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인심이 싫어하고 고생스럽게 여겨,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했다.
■여름 6월
◯4일 비가 왔다. 순화군(順和君)의 포악함이 말할 수 없어 노복이 모두 흩어졌고, 생활 도구 일체를 가까운 마을에서 조달하니, 사방의 이웃이 그 고통을 참지 못하여 흩어졌는데, 조정 신하의 상투를 끌어당기기를 하졸(下卒) 대하듯해, 사람들이 싫어하고 힘들어 함이 연산군보다 못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7일 앞서 주상께서 권협(權恊)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원병을 요청하게 했다지만 명나라에서 듣지 않았다. 권협이 장차 예부(禮部)의 문밖에서 목매달아 죽고자 하는 것으로 원병을 요청하는 정성을 보였다. 천자가 3만 병력을 동쪽에 보내어 조선을 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명나라 장수가 서울에 도착했는데도 임금께서 초대하여 만나 보지 않았다. 이에 명나라 장수가 크게 화가 나서 특별히 힘써 싸우려는 의지가 없었다. 이같이 하고서야 어찌 나라를 회복할 수 있겠는가라는 소문이 있다.
◯20일 심유경이 산음(山陰)에 머문다고 들었다. 유경은 세객(說客)을 자처하지만 화의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중국 조정의 논의가 엄중하다. 또 총병(摠兵) 양원(楊元)의 철저한 저지를 받자 놀고 즐기는 데만 열중하여 도를 넘어 못하는 짓이 없으며, 거느린 부하들이 우리 백성을 침학(侵虐)하니 가증스럽고 가증스럽다.
◯30일 총병(摠兵) 양원(楊元)이 심유경을 체포하여 함양(咸陽)을 지나 남원으로 갔다. 유경이 강화를 칭탁하고 왜적에게 출입하면서, 물건을 팔고 사는 데 힘쓰고 우리나라를 착취하니, 공론이 시끄럽게 일어나 천자에게까지 알려졌는데, 명령을 내려 추국(推鞫)하니, 만리(萬里) 밖의 일까지 밝게 본다고 이를 만하다.
■가을 7월
◯6일 성주(城主)가 파면당하였으므로 내가 개평(介坪)에 가서 성주를 위로하였고, 아울러 노 참봉(盧參奉)과 노지부(盧志夫)를 만나 보았다.
◯10일 통제사 원균(元均)이 주사(舟師)를 이끌고 왜적을 맞이하여 치면서 적의 소굴을 바로 공격했는데, 우리 배 6척이 서생포(西生浦)에 표류했고, 한 척은 침몰했으며, 나머지 배는 살아 돌아왔다고 들었다.
◯18일 오후에 정사고(鄭士古)가 서원에 왔다. 해가 기울 무렵에 박공간(朴公幹)이 서원에 왔고, 황혼에 황덕장(黃德璋)이 의령(宜寧)으로부터 서원에 왔다. 황이 말하기를, “통제사 원균이 14일에 배 200여 척을 끌고 나가서, 공산(公山)에서 적을 맞이하여 치고는 영등포(永登浦)에 배를 머물러 두고 있었습니다. 16일 밤에 적이 와서 밤중에 기습하였으나 배를 묶어 두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이 트자 적선이 와서 사면을 포위하고 공격하니, 아군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원균(元均)은 바다에 빠져 사라지고 충청 병사 최호(崔浩)도 죽었습니다. 주사(舟師) 중에서 죽거나 물에 빠진 자의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은 일이 글렀음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서 포위를 뚫고 나와, 곧바로 한산(寒山)에 다다라 남은 배에다 군사를 싣고 급히 도망하면서 군량과 기계를 전부 태워 버렸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오호라! 우리나라가 의지한 것이 수군(주사)이었는데, 원균이 원래 통어할 만한 인재가 아니었음에도, 갑자기 이순신(李舜臣)을 파직하고 원균으로써 대신하게 했고, 원수 권율(權慄)은 원균을 곤장까지 쳤다. 원균이 이때문에 성이 나서 급히 군사를 몰아 나가면서 세력의 많고 적음도 고려하지 않고, 계속 바다에 배를 띄워 다 함께 침몰하는 패배를 당하였다. 이는 실로 조정의 정책이 마땅함을 잃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서, 원수의 방략이 어긋나 날마다 함부로 전투를 벌여 일의 기틀을 크게 잃은 것이다. 원균 같은 자야 죽어도 아까울 것 없지만, 나랏일을 어찌하며 백성들은 또 어찌 할 것인가! 온 나라 사람이 한산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듣고, 너무나 놀라 모두 이제 다 죽게 되었구나 하는〔溘然〕생각을 가졌다. 배설(裵楔)은 몰래 전라도로 도망쳐 전선(戰船)을 팔았다고 한다.
■가을 8월 : 정유재란
◯8일 동이 틀 무렵 가족과 여러 아낙네들을 이끌고 개심사(開心寺)로 피난했다. 인심이 무너지고 흩어져 마을이 텅 비었고, 한 사람도 산성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11일 흉적들이 구례와 남원에 들어갔다가, 나가서 불을 지르고 노략질하기를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가듯 하니, 통분하고 또 통분하도다
◯14일 황혼에 집안식구들을 거느리고 대구 형수를 모시고서 출발하였다. 쇠목〔牛項〕 앞의 쌍정자(雙亭子)에 이르렀더니 비가 퍼붓듯이 쏟아져서 옷이 다 젖었다. 일행은 위아래 사람 할 것 없이 엎어지고 넘어지며 덜덜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8일 크고 작은 피난민 무리들이 산 위에 모였는데,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점심때쯤 흰옷 입고 삿갓 쓴 자가 산허리에 불을 질렀는데, 왜적으로 의심하여 활과 화살을 엄밀하게 준비시켰으나, 문득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의 마음이 느슨해졌을 때 왜적 십여 명이 다른 길로 숨어들어 와서, 큰 소리로 부르짖고 칼을 휘두르며 사방에서 돌입하니, 사람들이 모두 산골짜기에서 엎어지고 넘어지다가 잃은 재보(財寶)는 헤아릴 수 없었다. 저녁 늦게 다시 모여 가속(家屬)들의 행방을 물으니, 큰딸, 막내딸 및 노비 세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소재(所在)를 알 수 없었다. 마음과 넋이 다 빠져 울고 또 울었다. 노 참봉(盧參奉)과 손을 잡고 소리 내어 울다가, 그날 밤에 가운데 고개를 지나 백운산 바깥 기슭에 투숙하였다. 적이 남원을 함락시켰고, 총병(摠兵) 양원(楊元)은 도망갔다.
◯조카가 산에서 정아(貞兒)의 시신(屍身)을 찾았다. 목이 반 이상 잘린 채로 바위 사이에 넘어져 있었는데, 갖고 있던 패도와 손이 모두 평소와 같았다. 오호라! 내 딸이 어찌 이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가. 내가 처음 왜적들이 곳곳에서 출몰한다는 말을 듣고 패도를 주면서, ‘만약 불행하게도 네가 왜적을 만나면 적을 따르지 말라’고 하였다. 이후로 한 번도 머리를 빗지 않고 얼굴도 씻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큰 도적이 지금 왔으니, 제가 반드시 산다고 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그 엄마에게 매번 하였는데, 졸지에 흉적을 만나서는 우뚝 서서 겁 없이 적노(賊奴)를 욕하고 꾸짖으며 목숨을 버려 절개를 온전히 하였다. 곧도다! 내 딸이여,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구나. 오호라! 네가 삶을 버리고 의를 택했으니, 참으로 잘한 일이구나. 하지만 나는 딸 하나도 능히 구하지 못해, 흉한 칼끝에서 너를 죽게 했다. 손을 붙들고 피난하여 시작과 끝을 함께하고자 했으나 그러지를 못했구나. 죽은 후에 황천에서 손잡고 다시 만날 때, 나는 진실로 너만 못하니, 무슨 면목으로 너를 위로할까! 네가 높게 세운 절개는 내 그 뜻을 글로서 분명히 전할 것이다. 의복을 모두 잃어버려 시신을 염하는 도구가 초라하기 짝이 없으니, 통곡하고 또 통곡한다.
◯30일 나는 집에 돌아와서 난리에 불타고 남은 것을 둘러보았는데, 마을 전체가 남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이 다 타 버렸다. 흉적의 혹심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도다.
■가을 9월
◯8일 잠시 전물(奠物)을 준비해 가서 딸의 널 앞에서 곡을 했다. 궁벽한 산에 뼈를 묻은 지 20일이 넘었으니, 외로운 혼백이 떠돌아다니며 어느 곳에 의탁했을까. 시체를 어루만지며 통곡하다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났다. 나무껍질로 관을 만든다는 말이 과연 거짓이 아니었다.
■겨울 10월
◯29일 명(明)나라의 대병(大兵)이 왔는데, 형 군문(邢軍門)이 원수(元帥)가 되고, 양 경리(楊經理)가 절제(節制)가 되었으며 마 도독(麻都督)이 대장(大將)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형의 이름은 개(玠)이고, 양의 이름은 호(鎬)이며, 마의 이름은 귀(貴)다.
■겨울 11월
◯27일 원수(元帥) 권율(權慄)이 단기(單騎)로 서울에 갔다.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불러서 군사기밀을 의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겨울 12월
◯23일 바야흐로 저장해 두었던 곡식을 파고 있는데, 흉적이 바로 대황(大荒) 고개를 넘어오기에 곡식을 버리고 지름길을 통해 수정진(水程津)으로 돌아왔다. 적이 쳐들어올 것을 생각하여 말을 계곡에다 숨기고, 나는 종 억(億)이와 함께 산중턱으로 들어갔다. 잠깐 동안에 적의 무리 열 몇 놈이 오동재〔梧岾〕 길로 급히 오고, 또 적 세 놈이 나를 뒤따라 이르니, 황급히 도망하여 눈 속에 숨어 하루 종일 마음을 졸였다. 난리 이후로 적의 모습을 이제야 처음으로 분명하게 보았다. 저 왜적이 백 명을 넘지 않고, 또 마병(馬兵)도 되지 않으며 또한 말과 무기도 없이 단지 짧은 칼만 차고서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오듯 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멸시하는 것이 흙덩이와 다름없이 하니 통탄스럽다! 다동(茶洞)과 우락촌(雨落村)ㆍ오강(梧岡)ㆍ여건대(餘件大) 등의 마을을 불 지르고 약탈하였다. 해가 저물어 산을 내려오니, 말이 개울가에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왜적의 도적질을 면했으니, 그 기쁨이 어떻겠는가! 이경(二更)쯤에 노천(蘆川)으로 돌아와 짐을 꾸려서 육십현(六十峴)을 넘었다.
◯26일 새벽 벽두에 길에 올라 곧바로 용담현(龍潭縣) 내로 들어가 관가(官家)에 거처를 정했다.
◯30일 용담(龍潭)에 머물렀다
고대일록 제3권
▣1598
■봄 정월
◯13일 조카와 함께 함양(咸陽)으로 가서 해 질 녘에 노천(蘆川)에 도착하여 탄혜(坦惠)의 집에서 묵었다.
◯16일 이웃 사람이 노루를 활로 쏘아 맞혔다. 나도 노루를 쫓았으므로, 고기를 조금 나누어 받았다.
■봄 2월
◯8일 옛터의 전답을 두루 둘러보았다. 점심때 왜적이 와서 산음(山陰)을 침범하였다. 장차 남촌(南村)에 이를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바삐 달려서 산에 올랐다가 해가 저물자 삼술대(三述臺)에서 잤다.
◯10일 흉적들이 함양(咸陽)ㆍ안음(安陰) 등지에 침입하여 깃발을 세웠는데, 말과 무기가 매우 많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가 서산에 기울 때 동향(銅鄕)에 이르렀다. 노비들이 전부 도망가고 남은 자가 없으니, 가증스럽고 또 가증스럽다.
◯11일 나는 사연(士淵)과 함께 성을 보전할 계책을 세우고 있었다. 여러 친구들이 오지 않았으니, 한스럽다.
◯24일 사연(士淵)과 함께 군사 40여 명을 거느리고 사근(沙斤)에서 정탐하다가, 적과 서로 만나 병사를 후퇴시켜 돌아왔다. 조카와 함께 급히 백전(栢田)으로 가서 저녁에 중현(中峴) 길가에서 잤다. 이날 밤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쳐서 추위를 견디기 어려웠다
■봄 3월
◯19일 적의 무리들이 가지 않고 장수현(長水縣) 안에서 출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행을 이룬 사람들이 비를 무릅쓰고 덕옹(德翁)의 집을 떠나 전주(全州)로 향하고, 나머지는 모두 고산(高山)으로 향했다. 점심때 학두재〔鶴頭峴〕를 넘어 시냇가의 들판에 도착했다. 길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아! 저 하늘이여 / 噫咄咄彼蒼者
흉적들로 하여금 우리 백성들 다 죽게 하네 / 使凶賊殲我人
고산을 향해 가는데 종일토록 비 내리고 / 向高山終日雨
만 겹의 봉우리에 구름은 천 겹이구나 / 萬疊峯千重雲
◯24일 내가 전주(全州)로 향했는데, 마위(馬位)의 입안(立案)을 얻기 위해서 갔다. 이날 어머니가 불을 잘못 내어, 우사(寓舍)의 행장(行裝)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태워버렸다. 유기(鍮器) 등의 물건 역시 구하지 못했다. 불이 옮겨 붙은 이웃집 사람으로부터 욕을 당하였으니, 곤궁한 운명이 하나같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도다
◯26일 새벽에 소양(蘇陽)으로 향했다. 철점(鐵店)에서 정덕옹(鄭德翁)을 찾아보았다. 이날 저녁 소양 마을의 집에서 묵었는데, 주인인 조덕천(趙德川)이 나를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고산(高山)의 선비(士人)인 구엽(具燁)ㆍ고경삼(高景參) 등을 잇달아 방문하고, 혼자 무등정(無等亭)에 올라 잠시 유람한 다음, 저녁에 옥포역(玉包驛 현 화산면 운제리)에 돌아왔다.
◯29일 익산(益山)의 저자에 가서 소금을 바꾸었다. 유옥(幼玉)이 내 양식이 떨어진 것을 가엽게 여겨, 나무를 빌려주면서 이것으로 바꿔오게 했다.
■여름 4월
◯4일 조카가 함열(咸悅)로 갔다. 여러 벗들은 적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고향 근처로 가려는 생각을 했다. 빈부(賓夫)와 희망(姬望)이 먼저 말을 타고 출발했다. 그래서 이날 함께 길에 올라 돌아가는 여정에 들어가서 학목들〔鶴項野〕에서 잤다.
◯5일 진안현(鎭安縣)에 도착하여 오익승(吳翼承)을 만났다. 왜적이 산음(山陰)으로 와서 육십현(六十峴)을 넘어 장계현(長溪縣)으로 침입했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도망갔다.
◯6일 날이 밝자 전주(全州)로 가는 길에 들어서서 곰재〔熊峴〕를 넘는데, 사람과 말로 가득차서 길을 가지 못하고 해가 졌으므로 유점(柳店)에 들어가 잤다. 이렇게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나와 지부(志夫)의 마음은 아주 옳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여러 벗들의 뜻이 나와 같지 않았다. 전유옥(全幼玉)은 귀향에 급하여 낭패하는 근심을 초래했으니,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책망하겠는가.
◯7일 익산(益山) 동촌(東村)에 도착했다. 주인 임현(林玹)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웃 사람 구대준(具大俊)도 역시 와서 이야기를 했다. [구(具)는 사인(士人)이다.]
◯8일 군내(郡內)로 들어갔다. 진사(進士) 소영복(蘇永復)을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부(志夫) 역시 군(郡) 안으로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왜적의 소식이 놀랍고 다급했기 때문이다.
◯10일 지부(志夫)를 만났고, 시장에서 양식을 구걸했다. 두꺼운 얼굴이 부끄러워 마치 시장판에서 매를 맞는 것 같으니, 곤궁함에 마음이 상하는구나!
◯11일 이이영(李而愥)과 동행하여 전주(全州) 새골〔新谷〕을 지났다. 시 한 수를 읊었다. 이날 밤에 비가 왔다. 진안(鎭安) 사람을 만났는데, 왜적이 무리지어 무주(茂州)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13일 천촌(川村) 및 삼례(參禮)역에서 양식을 구걸하다가 해가 저물어 거처하는 집〔寓舍〕으로 돌아왔다.
◯14일 유옥(幼玉)ㆍ경소(景紹)ㆍ여임(汝任)과 함께 익산 군수(益山郡守) 이상길(李尙吉)을 만났다. 군수〔主倅〕의 대우가 매우 두터웠다.
◯16일 군수에게 정문(呈文)을 올려 볍씨 각 한 섬(石)과 종자 콩 다섯 말(斗)을 얻었다.
◯23일 새벽에 전유옥(全幼玉)과 함께 길에 올라 양정포(良丁浦)에서 아침을 먹었다. 저녁에 진안(鎭安)의 의창(義倉)에 들어가 잤다.
◯24일 오후에 천잠(天岑)에 도착해서 노숙을 했는데, 장시(場市)를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25일 해가 기울 무렵 옥산창(玉山倉)에 도착해서 그대로 묵었다.
◯26일 아침에 다동(茶洞)으로 갔다. 구덩이를 파고 곡식을 보니 그렇게 심하게 썩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27일 밥을 먹은 후 날이 개었다. 점심때 곡식을 싣고 가서 장수(長水) 침현(砧峴) 마을에 두었다
■여름 5월
◯1일 곰재〔熊峴〕에서 아침을 먹었다. 점심때 정덕옹(鄭德翁)을 만나 말먹이를 주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 4시쯤〔晡時〕 소양(蘇陽)을 넘다가 노빈부(盧賓夫)를 만나 지부(志夫)의 부음(訃音)을 들었다. 아! 지부가 이렇게 되었는가. 작년에 경실(景實)과 사고(士古)를 잃고, 금년에 지부마저 울며 보내게 되니, 내가 어찌 서럽지 않겠는가. 지부는 상을 당하여 난리 중에도 한결같이 예법을 따르고, 몸가짐에 예를 지켜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죽을 먹으며 애통해 하니 몸이 여위어감이 날로 심해져 갔다. 벗들이 효도를 다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힘써 밥 먹기를 권하고, 고산(高山)에 도착해서는 또 머리 빗기를 권했다. 원기가 크게 손상되어 눈이 물건을 볼 수 없게 되어도 법을 지키기를 더욱 견고히 했다. 익산(益山)에 도착한 십여 일 후에 병을 얻어 고통을 당했다. 내가 문병을 갔다. 하루를 걸러 또다시 가서 문병을 했는데, 상한(傷寒)으로 땀이 비 오듯 했지만 두통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하루를 걸러 다시 가서 보니, 말이 잘 되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손을 잡고는 가엾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2일 오후에 익산(益山)의 우사(寓舍)로 돌아갔다.
◯4일 가서 노지부(盧志夫)를 조문(弔問)했다. 집안일을 돕는 한 사람의 여자 종과 한 사람의 남자 종이 문밖에서 곡(哭)을 하고 있었다. 상(喪)을 주관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더욱 애통하다.
◯8일 익산 군수(益山郡守)가 전정(前亭)에 도착하여 우리들을 보고 쌀과 콩을 각각 주고, 아울러 지붕 덮을 재료를 베풀어 주었다. 이것은 떠돌이 생활 중에 하나의 큰 행운이다.
◯11일 나는 장수(長水)로 향하여 소양(蘇陽) 마을에 이르렀다. 하인이 병이 나서 해 질 녘에 돌아왔다.
◯23일 전유옥(全幼玉)ㆍ구천뢰(具天賚)ㆍ이정보(李貞甫)와 함께 함열(咸悅) 장에 갔다. 길에서 소나기를 만나 저녁에 돌아왔다.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하니, 가소롭다.
◯24일 나는 전유옥(全幼玉)ㆍ조카 등과 함께 용안(龍安) 나루터에 가서 약간의 소금을 사려고 했으나, 살 수 없어서 해가 질 무렵에 우사(寓舍)로 돌아왔다.
◯28일 나는 임경명(林景?) 임경현(林景玹)과 함께 함열(咸悅) 장에 가서 콩을 사왔다.
■여름 6월
◯3일 새벽에는 비가 왔으나, 아침을 먹고 나니 날이 활짝 개었다. 조카와 함께 함열(咸悅) 장에 가서 소금을 사려 했으나, 소금이 비싸서 구할 수 없었다.
◯5일 나는 익산 군수(益山郡守)를 뵈러 갔다. 그를 만나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지붕을 덮을 재료를 주었고, 양식과 필묵(筆墨)도 보태주었다. 그의 동생과 아들을 나오게 해서 만났다. 소사(蕭寺)의 만남을 기약하고, 해 질 녘에 우사(寓舍)로 돌아왔다.
◯8일 나는 구천뢰(具天賚)와 함께 함열(咸悅) 장에 가서 한 움큼의 소금을 구해 왔다.
◯13일 양식이 떨어져 군내(郡內)로 갔다. 주부(主簿) 소윤원(蘇潤源)과 진사(進士) 김정익(金廷益)을 찾아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보리를 얻어 왔다. 이날 밤중에 호랑이가 개를 물어가서 온 집안이 놀랐다. 그 개는 피난 올 때 끌고 왔는데, 이렇게 잃어버렸으니, 한탄스럽다.
◯15일 가산(家山)으로 향했다. 혼자 말을 타고 가다가 저녁에는 곰재〔熊峴〕에 있는 주막집에 묵었다. 점심때 소양(蘇陽)을 지나면서 시 한 수를 읊었다.
◯26일 공이재〔孔耳峴〕를 넘는 길을 잡았는데, 길이 매우 험하고 위태하였다. 저녁에 전주(全州) 지곡(池谷)에 도착해서 묵었다.
◯27일 점심때 우사(寓舍)에 도착해서 주복(周復)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죽고 싶었다. 오호라! 내가 사십을 넘겨 겨우 아들 하나를 두었다. 결국 그의 요절함을 보니, 운명의 기박(奇薄)함이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난리(亂離)통에 옷과 음식을 주지 못했다. 아들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데도 그의 배를 굶기고, 그 몸에 옷을 입히지 못하여 병을 얻어 죽게 했으니, 내가 차마 너를 묻지 못하겠다. 나는 너에게 자애롭지 못했고, 너는 나에게 불효를 했다. 불자불효(不慈不孝)가 이 한 몸에 다 모였으니, 내 몸이 천지 사이에 서 있을 때가 그 얼마나 되겠는가. 다른 날 구천에 내려가서 너를 보듬으며 너를 부른다면 너는 그 때도 나를 알아보고서 따라주겠는가. 아 슬프고 슬프구나! 임경진(林景珍) 군이 손수 관을 만들어 와서 주복을 묻자고 하니, 망극(罔極)한 은혜를 어찌 보답하겠는가. 묻은 곳에 가서 곡하는데, 밥을 떠 놓고서 한 번 곡할 따름이었으니, 참혹하구나!
■가을 7월
◯5일 익산(益山) 장을 보러 갔는데, 한 되〔升〕도 사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탄식할 만하다.
◯6일 이정보(李貞甫)와 고산(高山) 장에 갔다.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한스럽다
◯11일 익산 군수(益山郡守)를 찾아뵈었다. 그는 쌀과 콩을 주는 등 후한 대접을 해주었다.
◯13일 이정보(李貞甫)와 소금을 싣고 금산(錦山)으로 향했다.
◯14일 오후에 배현(排峴 배치고개)을 넘었다. 산길이 매우 험했다. 저녁에는 진산군(珍山郡) 안의 촌사(村舍)에서 묵었다.
◯15일 나는 복통을 일으켜 몇 번이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점심때 시장터에 도착했다. 장보는 사람이 적어 불리할 것 같아서 영동으로 가고자 했는데 복통이 점점 더 심해져서 되돌아 용담(龍潭)으로 향했다. 저녁에 초현(草峴) 마을에 묵었다.
◯16일 동향(銅鄕)에 도착하여 옛 주인 홍언필(洪彦弼)을 찾았다. 그가 나를 우사(寓舍)에서 만나보고는 어린 아들을 기억하면서 비참해 하기에 정말 난감하였다.
◯19일 용담현(龍潭縣)에 도착했다. 사람이 거처하는 곳을 차례차례 방문하여 소금을 팔고자 했으니, 그 힘듦이 어떠했겠는가
◯20일 명나라 군사들이 많이 왔다. 그들을 피하여 산골짜기로 도망갔다가, 오후쯤에야 길에 올라 영강(永康) 마을에 이르렀다. 저녁에 주아(走兒)의 촌사에서 묵었다.
◯21일 소금을 다 팔았는데 일곱 말도 되지 않으니, 가소롭다.
◯22일 오후에 우사(寓舍)로 돌아왔다. 다행히 가족들이 굶어 죽는 것은 면했으니, 너무 불쌍하다.
◯28일 함열(咸悅)장에 가서 베 반 필을 팔았다. 식량이 바닥나고 더 이상 대책이 없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생계를 계속 이을 수 있겠는가.
◯29일 전유옥(全幼玉)과 서로 약속하고 전주로 갔다. 가는 도중에 비를 만나 돌아왔다. 익산 군수(益山郡守)가 우리들을 걱정하여 여러 번 벼와 콩의 환자〔還上〕를 공급해주니, 감사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가을 8월
◯4일 적의 무리들이 장수(長水)ㆍ용담(龍潭) 등지에서 진을 쳤다
◯11일 전유옥(全幼玉)과 함께 익산 군수(益山郡守)를 만나 술을 몇 순배 마셨고, 이상급(李尙及)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12일 임금께서 다만 두 끼니를 드실 뿐이고, 우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전주(全州)에 도착했는데, 역시 아침과 저녁만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6일 정 참봉(丁參奉)과 함께 남원(南原)으로 가다가 전주(全州)에서 묵었다. 명나라 군사가 사방에서 진을 치고 밤새워 순찰했다.
◯19일 냇물이 불어나 사람이 건널 수가 없었다. 오후에 상류에서 고생 끝에 겨우 건넜다. 저녁에 남원 향교(鄕校) 앞의 마을에서 묵었다.
◯21일 달이 뜬 뒤에 길에 올라 오수(獒樹)에 도착했더니 하늘은 아직 밝지 않았다. 교외에서 말에 꼴을 먹이고 냇가에서 잠시 잤다.
◯22일 화현(火峴)을 지나고 전주(全州)를 거쳐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에 우사(寓舍)에 도착했다.
◯26일 나는 정 참봉(丁參奉)ㆍ조카와 함께 이성(利城)장에 갔다. 춘포(春浦)마을 앞 길가에서 묵었다. 이정보(李貞甫)가 동행했다.
◯27일 꼭두새벽에 출발했다. 아침에 배를 타고 석탄포(石灘浦)를 건넜다. 장을 본 후에 저녁에는 임피(臨陂) 마을 집에서 묵었다.
◯29일 역촌(驛村)에서 아침을 먹고서 임피현(臨陂縣)을 둘러보았더니, 곡식이 다른 곳에 비해 곱절이나 좋고 무성하였다. 지석(支石)에서 말에게 꼴을 먹이고 황혼에 돌아왔다.
■가을 9월
◯10일 전유옥(全幼玉)ㆍ조카ㆍ이정보(李貞甫)가 장수(長水)로 갔다. 장계(長溪)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11일 정 참봉(丁參奉)과 함께 용성(龍城)으로 향했다. 저녁에 전주(全州)의 길가에서 묵었다.
◯12일 꼭두새벽에 길에 올랐다. 만장(萬場) 동네에서 아침을 먹고, 저녁에는 오수(獒樹) 개울가에서 묵었다.
◯15일 닭이 울자 길을 떠났다. 번암(樊岩) 하류(下流)에서 아침을 먹고, 내곡을 지나 운봉(雲峯)에 도착하였다. 첨지(僉知) 오인(吳戭)ㆍ오무숙(吳務叔) 등 여러 사람들을 만났는데, 매우 후하게 나를 대접해 주었다.
◯18일 인월(引月)에 갔다. 주창(周昌)이 의지하고 있는 곳을 물어 그를 불러 만나보니, 절로 눈물이 흘렀다.
◯19일 길을 떠나 안신원(安信院) 하류에서 말에게 꼴을 먹이고, 남원성(南原城) 동문 밖으로 들어갔다.
◯21일 달이 뜬 후, 길에 올랐다. 오수(獒樹)에서 아침을 먹고, 저녁에는 임실(任實) 원암(元岩) 마을에서 묵었다.
◯22일 닭이 울자 길에 올랐다. 대현(大峴)을 넘고, 전주지역을 지나 삼례(參禮) 마을 하계(下溪)에서 아침을 먹었다. ...익산(益山)지역에 도착해서 시다산(施茶山)을 바라보며 시 한 수를 읊었다.
◯23일 정 참봉(丁參奉)과 함열(咸悅) 장에 갔다. 함열 장의 물가(物價)가 갑자기 떨어져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28일 나는 정공(丁公)ㆍ전유옥(全幼玉)ㆍ조카 등과 함께 용안(龍安) 운포(雲浦)에 가서 고기를 사오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정공은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 세 사람은 저녁에 함열현(咸悅縣) 안으로 들어갔다.
◯30일 함열(咸悅)에 머물렀다. 꼭대기에 올라 백마강 하류를 굽어보았다. 거울 면이 하늘과 나란히 하듯 풍파가 일어나지 않았다. 먼 포구로 돌아가는 돛단배가 위아래에 떠 있는 모양은, 한강에 견주어도 그 풍경이 뒤지지 않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사람이 죽고 흩어졌는데, 경치만은 유독 옛날과 같으니, 유람하는 흥취에 감탄과 탄식이 엇갈린다. 임피(臨陂) 장에 가서 나무를 팔았다.
■겨울 10월
◯1일 함열(咸悅)의 이군(李君) 집에서 머물면서 물고기를 사고자 했다. 제주(濟州)ㆍ나주(羅州)의 장사꾼들이 값을 따지면서 팔지 않으니, 가증스럽다.
◯2일 부질없이 며칠을 머물렀으나 결국 일을 이루지 못하했다. 다만 홍소(洪召)와 약속하여 쌀과 나무를 주고서 돌아왔다. ...이청중ㆍ청숙(淸叔) 등과 함께 숭림사(崇林寺)에서 두부를 만들었다.
◯11일 정공(丁公)과 함께 임피(臨陂)의 홍수지(洪壽之)의 집으로 가서, 곧바로 그 집에서 묵었다.
◯12일 소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은데, 날은 이미 저물었다. 이날 밤 홍수지(洪壽之)의 집에 머물렀다. 걸어서 강어귀에 나와 바라보니, 바다가 끝 간데없이 바라보이고 산천이 둘러 읍하는 지세(地勢)였다. 참으로 빼어난 곳이다.
◯14일 우리나라 군사로 순천(順天)에서 도망쳐 온 자가 도로에 끊이지 않으니, 나랏일이 걱정스럽다.
◯21일 정공(丁公)과 함께 군량을 싣고 순천(順天)으로 향했다. 유옥(幼玉)ㆍ조카ㆍ이정보(李貞甫)는 장수(長水)로 향했다. 이날 밤 삼례역(參禮驛) 앞에서 묵었다.
◯25일 남원(南原) 언개(偃盖) 마을에서 묵었다.
◯28일 순천(順天)의 부유창(富有倉)에 도착했다. 길에서 유 제독(劉提督)을 만났다. 유 제독이 단기(單騎)로 몰래 숨어들어와서 왕 참정(王參政)과 서로 의논하기 위한 것이다. 말을 소나무 숲 속에 감춰두었는데, 순천 사람에게 잡힌바 되었다. 정공(丁公)이 통곡하며 애걸하니,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종일 좋은 말로 타일러보았지만 말을 빼내기가 어려웠다. 해 질 녘에 곡성(谷城)의 빈 마을에서 묵었다.
◯29일 새벽에 길을 떠나 옥과현(玉果縣)을 지났다. 순창군(淳昌郡)을 지나 이경(二更)쯤 산골짜기에서 쉬었다. 한기(寒氣)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겨울 11월
◯1일 일찍 길을 떠났다. 태인(泰仁) 경계를 지나는데, 길가의 시골집에 곡식이 가득했다. 시골집에서 묵었다.
◯2일 일찍 길을 떠났다. 금구현(金溝縣)을 지나고 석탄(石灘)을 지났다. 몇 리에 걸친 진흙길에 간신히 넘어지는 것을 면하고 해 질 녘에 우사(寓舍)에 돌아왔다.
◯3일 익산 군수(益山郡守)가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제수 받고, 이원익(李元翼)이 영의정에 올랐으며, 이정신(李廷臣)이 전주(全州) 부윤을 제수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4일 익산 군수(益山郡守)가 앞길을 지나다가 나를 부르기에 그와 함께 시다(施茶)로 갔다. 두부를 만들면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19일 적장(賊將) 평행장(平行長)이 도망쳤다. 숭정대부(崇政大夫) 전라 좌수사 겸 통제사(全羅左水使兼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죽었다. 먼저 행장(行長)이 제독(提督) 유정(劉綎)에게 두 번이나 강화를 청하면서 병력을 해산하고 돌아가겠다고 청했다. 유정이 거짓으로 화친을 허락하고 통제사에게 이를 몰래 알렸다. 선척(船隻)을 정비하여 반쯤 건넜을 때, 이를 공격하였다. 결국 왜적이 배에 오르되 아직 다 타지 못했을 때, 제독이 방포하고, 순신이 그 소리에 응하여 나아가 왜선 수백 척을 부딪쳐서 파괴하였다. 왜적들이 건널 수 없음을 알고, 진영으로 다시 되돌아가 사천(泗川)의 적장(賊將) 심안도(沈安道)에게 힘을 합쳐 수전(水戰)을 할 것이니, 모름지기 즉시 달려오라고 통지하였다. 안도(安道)가 과연 배를 타고 앞으로 나오니, 통제사가 좌우로 협격하여 큰 전쟁이 바다 가운데서 벌어졌다. 통제사가 사졸들의 앞에 서서 종일 혈전을 하였는데, 철환을 머리에 맞아 전사했다. 그 아들 아무개가 그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감추고 소리를 삼키며 울음이 나오지 않도록 억누르며 말하기를, “내 마땅히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이며, 이 도적들과는 함께 살지 않을 것을 맹서하노라” 하고는 깃발을 올리고 북을 치며, 적을 죄다 죽일 때까지 싸워 물러서지 않았다.
전후(前後)로 부순 적의 배가 거의 400여 척에 이르렀고, 진 도독(陳都督)이 거느린 군사를 풀어서 잇달아 지원하여 적의 무리를 대파하고 죽여 머리를 벤 것이 매우 많았다. 전쟁하는 날, 행장(行長)이 유 제독(劉提督)에게 은을 바치고 지름길로 도망갔다.
■겨울 12월
◯16일 희미하게 날이 밝아 올 무렵에 길을 떠나 거창(居昌)으로 향했다.
◯24일 병사(兵使)를 만나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에 고령현(高靈縣)에 도착했다가, 안림(安林)에 도착하여 역마(驛馬)를 타고 가서 산곡(山谷)역에 도착하여 산골짜기에서 묵었다
◯25일 합천(陜川) 경계를 거쳐 초계군(草溪郡)을 지나다가 길에서 노극승(盧克承)을 만났다. 그와 함께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령(宜寧)의 산골짜기에서 묵었다.
◯26일 정진(鼎津)을 건너 함안(咸安) 땅의 텅 빈 마을에서 아침을 먹었다. 흰 갈대와 누런 띠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점심때 함안군을 지났고, 진해(鎭海)지역에서 묵었다.
◯27일 진해(진안으로 오기) 옛 읍 터에 도착했다. 바다를 구경하고 이어 비장(裨將) 정지일(鄭之一)을 만났다. 지일은 바로 곤양(昆陽) 사람인데, 연파(連派)의 관계가 있었기에 유숙했다.
◯29일 어선 여섯 척이 빈 채로 왔다. 우리가 고대(苦待)했던 계획이 결국 허사로 돌아갔다. 아! 난이 극도에 이르니, 계책도 군색하여, 벽어(碧魚)를 얻고자 했지만 계획이 성사되지 못했다. 어촌의 손님이 되어 전대도 앞으로 다 떨어져 가니, 삶의 괴로움이 어쩌다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1599
■봄 정월
◯1일 강좌(江左)로 가려고 함안(咸安) 길을 지나면서 시 한 수를 읊었다
◯2일 칠원(漆原) 경계를 지나갔다. 한 조각 부서진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한 잎사귀에 몸을 실은 듯 위태로웠다. 조심조심하는 마음이 요 임금과 순 임금의 마음과 비슷하였다. 오후에 비를 만나 창녕(昌寧)에서 묵었다.
◯3일 오후에 비가 개었다. 곧바로 길을 떠나 밀양(密陽)의 촌사(村舍)에서 묵었다.
◯4일 풍각현(豊角縣)을 지나 청도(淸道) 경계의 생현역(生賢驛)을 넘어 경주(慶州) 재인현(才人縣)에 도착하여 묵었다. 주인 영감이 술을 대접했다.
◯5일 영천(永川) 별화(別禾)에 도착해서 억석(億石)의 집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억노(億奴)는 왜적들에게 집이 불타버려, 거처를 하양(河陽)으로 옮겼다. 그래서 피난 간 사람의 집에서 묵었다.
◯9일 여우고개〔狐峴〕를 넘어 경주(慶州) 안강현(安康縣)을 지났다.
◯14일 영천(永川) 길을 거쳐 가다가 길에서 명나라 사람을 만났다. 내 작도(斫刀)와 벽어(碧魚)를 빼앗아 갔고, 적지 않게 모욕을 당했으니, 한탄스럽다.
◯21일 여명에 길을 떠나 대구(大邱)지역을 두루 거쳐서 화원현(花園縣)에 도착해서 묵었다.
◯22일 낙동강(洛東江)을 건너 기현(岐縣)에 이르러 묵었다. 여염집에는 명나라 사람들의 약탈로 사람과 가축이 거의 없었으니, 안타깝다.
◯23일 재를 넘고 큰 내를 건너 형전(荊田) 마을에 도착해서 고기를 팔아 밥을 먹었다.
◯27일 시항수(矢項水)를 건너고 복숭고개〔桃峴〕를 넘었다. 동안(同安)의 묘소에 도착하여 부모 및 조부모의 묘를 찾아뵈었다. 돌아가신 지 2년 만에 비로소 찾아뵙는다.
■봄 2월
◯4일 진안현(鎭安縣)에 도착해서 주인 오익승(吳翼承)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사(進士) 이자거(李子擧)ㆍ강경정(姜景靜)도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혼에 정덕옹(鄭德翁)이 익산(益山)에서 와서 처와 자식의 소식을 들었다. 길을 떠나 내려오는 길에 용담(龍潭)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곧바로 용담(龍潭)으로 가는 계획을 세웠다.
◯5일 용담(龍潭)에 도착해서 시골집에서 묵었다.
◯14일 대황(大荒) 고개를 넘어 간신히 집에 도착해 보니, 이웃 마을의 불량한 젊은 놈들이 과일나무를 전부 찍어 없애버렸다. 너무 가증스럽다.
◯22일 소고개〔牛峴〕를 넘고 무주현(茂朱縣)을 거쳐 옥천(沃川) 필역(畢役) 마을의 촌사(村舍)에서 묵었다.
◯24일 말의 병이 아주 위중하여 오전 8시 무렵까지 여전히 누워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이 말은 난리에 보존하기 어렵겠다. 양식을 멀리까지 실어 날라 한 집안의 운명이 말에 걸려 있었는데, 갑자기 죽게 되었으니, 너무 한탄스럽다. 겨우 목면(木棉) 한 필을 구하여 돌아오는 길에 이런 모양을 보니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봄 3월
◯18일 움막 한 칸을 만들었다. 바람과 비를 겨우 막을 정도이지, 안에서는 설 수도 없다. 크기가 한 말 정도밖에 안 되어 무릎조차 들어가기 어렵다.
◯19일 난리 후에 여러 읍의 수령을 대부분 무반(武班) 출신으로 뽑아서 보냈다. 그래서 그들은 오로지 백성들을 벗겨서 자신을 살찌우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안음 군수(安陰郡守) 곽급(郭伋)ㆍ산음 군수(山陰郡守) 최발ㆍ운봉 군수(雲峯郡守) 김기(金基) 등은 모두가 용렬한 사람으로서, 조정의 뜻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한다.
■여름 4월
◯5일 당나귀를 빌려 타고 운봉(雲峯)으로 가서 통정(通政) 오인(吳戭)을 찾아갔다.
◯14일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운봉(雲峯)에서 와서 군을 지나 거창(居昌)으로 향했다.
■여름 윤4월
◯11일 서원의 노비들이 장차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내가 그 사유를 적어 도사(都事)에게 올렸다. ...우리 지역의 피해는 다른 고을에 비해 백배나 되어, 얼마 남지 않은 노비들은 채소 뿌리만 먹는 형편이므로, 노약자들은 이미 다 죽었고, 장정들 또한 산채로 엎어져 송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원임은 앉아서 죽음을 바라볼 뿐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더라도 빈손으로 어떻게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합하(閤下)께서는 노복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좁쌀을 넉넉히 베풀어주셔서 끊어질 목숨을 잇게 해 주십시오. ...소생은 차마 두고 볼 수 없는 심정이라, 위엄을 거슬림을 무릅쓰고 말씀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도사가 겨우 쌀과 콩 여덟 말만 주고는 대면하여 말하고자 하지 않으니, 그 사람됨을 알 만하다.
◯18일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합천(陜川)에서 군(郡)으로 와서 묵었다. 관에서도 한 되의 쌀조차 없기 때문에 회람문을 내어 좁쌀 한 섬을 돌려 급히 민간에서 바꾸었는데, 여러 사람의 슬퍼하는 소리를 차마 듣기 어렵다.
◯24일 노경승(盧景承)ㆍ승간(承幹)의 계집종이 호랑이에게 잡혀갔다는 얘기를 들으니, 탄식이 나온다. 우리 군(郡) 안에는 옛날부터 호환(虎患)이 없어 피난할 때 밤에 산골짜기를 다녀도 호랑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봄이 시작된 이후로 십여 명이 해침을 당하였다. 맹호(猛虎)와 가정(苛政)이 함께 덮치는 꼴이니, 근심이다.
■여름 5월
◯3일 좌상(左相)에게 폐단을 진정하는 다섯 조목〔陳弊五條〕을 올렸는데, 내가 글을 지었다.
◯16일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서울로 갔다. 오랑캐들이 북쪽 국경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1600
■가을 7월
◯25일 날이 새자 선생을 배알(拜謁)했다. 선생께서는 중국사람 반국창(潘國昌)과 더불어 조상들이 묻힌 선산(先山)에서 혈 자리를 짚고 계셨는데, 앞으로 부인의 묘를 개장(改葬)하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세 사람도 가서 보았다. 오후에 하직 인사를 올리고, 해 질 녘에 응구(應久)의 집에 도착했다.
■겨울 10월
◯15일 타작을 이미 마쳤다. 하지만 늦가을에 저장한 것이라곤 겨우 삼십 섬 남짓이니, 한 해를 마칠 수 있을까.
◯16일 하루 종일 비바람이 쳐서 우리 집의 띠가 날아가 버렸다. 두보(杜甫)의 시가 진실로 헛된 말이 아니구나.
◯30일 병상(兵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편지가 왔고, 소금 몇 말을 부쳐왔다. 마치 큰돈을 받은 것과 같다.
■겨울 11월
◯7일 순찰사(巡察使) 김신원(金信元)이 군(郡)에 들어왔다. 중국의 도망병 십여 명이 남원(南原)에서 군(郡)으로 들어와서는, 방자하게 위세 부리기를 평소와 다름없이 하였다. 순찰사가 명령을 내려 도망군을 체포하려 하자, 칼을 빼어 사람을 찌르려고 하였다. 태수와 여러 무사가 추격하여 서계(西溪)의 상류에서 체포했다. 도망한 무리들이 군문(軍門)의 패문(牌文)을 위조하여 각 읍을 뒤져서 수탈했으나 가짜임이 탄로 났으니, 통탄스럽다.
◯22일 아침에 셋째 딸이 병이 났다. 내가 상산 [商山은 尙州] 에 가고자한 것은 진찰을 청하기 위한 것이었다. 저녁에 무촌역(茂村驛)에서 묵었다. 이날 밤 땅거미가 질 무렵 셋째 딸이 명(命)이 끊어졌다고 한다. 어버이와 자식이 등을 한번 어루만져주지도 못하고 영원히 서로 이별했으니, 평생의 아픔이 어찌 그칠 수 있겠는가!
■겨울 12월
◯19일 흰쌀과 벼ㆍ콩ㆍ사색(四色) 과자를 준비하여 관아에다 바쳤다. 모두 명목에 없는 세금이다. 백성을 벗겨 먹기를 호랑이 같이 하니 민생이 가련하다.
◯27일 조카 신익(申翼)이 우연히 첩을 하나 얻어 와서 조카의 비어 있던 집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해 질 무렵에 실수로 불을 내어 오두막 여러 채를 다 태웠고, 나의 씨암탉과 장닭도 모두 타 죽었으니, 손뼉 치며 탄식할 일이다.
▣1601
■봄 정월
◯28일 동틀 무렵 과장(科場)에 들어갔다. 오후의 시관(試官)은 권진(權縉)ㆍ이춘영(李春英)ㆍ이기(李器) 등이었다. 내가 시(詩)와 부(賦)를 함께 봉했다〔雙書〕 하여 채점조차 받지 못하고 내걸렸으니, 이 역시 운수(運數)이다. 가소롭도다! 나이가 오십에 가까운데, 얼굴 두껍게도 과거시험을 보았으니, 어찌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겠는가. 다만 어머님께서 임종하시면서 하신 명령이 귀에 생생함을 생각한 까닭으로, 재주가 열등함을 잊고 몇 번이나 시험을 쳐서 매번 떨어지니, 한탄스럽다.
■봄 2월
◯9일 왜적(倭賊)이 강화(講和)를 한답시고 관사(館舍)에 와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너무 통분하다.
◯22일 강극수(姜克修)가 나를 찾아왔다. 강극수는 동당(東堂)에 6등으로 참방(參榜)하였다. 익승(翼承)이 2등이고, 송원기(宋遠器)가 일등이다. 시험문제에 있어서 논(論)은 〈한나라 유비〔昭烈〕가 제갈공명에게 스스로 임금이 될 것을 부탁함(昭烈託孔明自取)〉이며, 부(賦)는 〈비루(碑樓)를 끌어 넘어뜨림(曳倒碑樓)〉이며, 표(表)는 〈체찰사 모(某)가 삼남(三南)의 감사(監司)에게 유계(留界)의 예(例)에 의거하여 감영(監營)에 오래 머물도록 청하여 효과를 이루기를 독책함(體察使某請三南監司依留界例留營久住以責成效)〉이다. 책문(策問)의 제목은 〈풍비지설(風悲之說)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길흉(吉凶)이 같고 다름(風悲之說自古及今吉凶之同異)〉이었다.
■봄 3월
◯27일 강극수(姜克修)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뛸 듯이 기뻤다. 극수는 절친하고 정의(情意)의 참됨이 난초(蘭草)와 혜초(蕙草)의 향기가 있는 정도만이 아닌데, 과거에 합격했다고 하니 더욱 기쁘다. 권집(權潗)ㆍ정대방(鄭大邦)ㆍ박효선(朴孝先) 등도 합격했다고 한다.
■여름 4월
◯7일 포로로 잡혀 간 남녀 11명과 일본 사람 한 명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26일 위서(渭瑞)와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노 원장(盧院長)을 방문하였고, 북면(北面)의 벗들이 한곳에 모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장(院長)이 시냇가에 새로 터를 잡아 섬돌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 물을 막아 못을 만들었는데, 노니는 물고기 수십 마리가 그 가운데서 활발하게 오갔다. 한가로운 가운데 그윽한 흥취가 있으니, 사람들에게 흥이 나게 한다. 정자의 이름은 ‘만수정(晩修亭)’이다.
■여름 5월
◯29일 진주 제독(晋州提督) 김시견(金時見)이 함양군(咸陽郡)에 도착하여 서로 조용히 이야기를 하다가 그와 함께 잤다.
■여름 6월
◯1일 서원(書院)에 갔다. 가서 고을 전체의 후생(後生)들에게 강론을 하였으나, 서면(西面)의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으니, 통탄할 일이다. 날이 저물어 서원에서 잤다
■가을 7월
◯2일 향교에서 향인(鄕人)들에게 강론하였다. 날이 저물어 노 원장(盧院長)과 함께 향교에서 잤다.
◯6일 머슴의 병이 위급해졌다. 분명히 그는 죽을 것이니, 가여워서 어찌하나.
◯7일 병이 위중해져서 숨이 끊어졌다. 종들에게 그를 묻어주도록 하였다. 내 신분이 비록 종은 아니지만, 마음이 너무 안됐다.
◯24일 성균관(成均館)에 부조할 베 15필을 성주(星州)에 보냈다.
■가을 9월
◯4일 개평(介坪)에 가다가 도중에 목사(牧使) 강군망(姜君望) 형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하였다. 노 원장(盧院長)을 방문하여 조용히 대화하였다. 그리고 회덕 현감을 지낸 노씨〔盧懷德〕를 찾아가서 종매(從妹)를 보았다. 그녀는 병이 위중하여 아마도 몸을 부지하지 못할 듯하니, 너무나 가련하다. 날이 저물 무렵 집에 돌아왔다.
◯12일 ...또한 평조신(平朝信)이 강화(講和)를 청할 뜻이 있다고 들었으나,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왜적의 정세를 헤아리기 어려우니, 내년 봄의 일이 염려스럽다.
◯순찰사(巡察使) 김신원(金信元)이 사면하고 이시발(李時發)이 대신하였으며, 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이 상경하였다. 마침내 조정에서 강화(講和)의 의논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화(和)’ 한 글자로 송(宋)나라가 흙더미처럼 무너지는 형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안으로 현명한 재상이 없고, 밖으로 뛰어난 장수가 없다. 모두 변변찮고 무뢰(無賴)한 무리들로서 오직 백성을 착취하고 나라를 깎아내는 것으로써 일삼는다. 나라가 멸망한 뒤에 저들끼리만 부귀를 누리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아!
■겨울 10월
◯10일 임해군(臨海君)이 무뢰(無賴)한 무리들을 많이 양성하여 횡행하며 깡패짓을 하면서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 옛날에는 왕자가 어진 이를 양성하였는데, 오늘날에는 왕자가 깡패를 기르니, 그 기상을 잘 알 만하다.
◯13일 유옥(幼玉)ㆍ양형언(梁馨彦)ㆍ치숙(致叔)과 함께 고현(古縣)에 가서 선생(정인홍 1535-1623)을 배알하였다. 오후에 산소에 도착하여 제사를 지낸 후에 선생께 술을 올렸다. 날이 저물어 선생께서 서당에 돌아가 자리에 앉으시자, 여러 벗들이 모두 모여 술과 과일을 올렸다. 삼경(三更) 무렵에 재실(齋室)에서 모시고 잤다. 이날 밤에 비가 많이 내렸다.
◯15일 노 예산(盧禮山)ㆍ경승(景承)ㆍ위서(渭瑞)가 함께 와서 원장(院長)을 방문하고, 저녁 무렵에 귀가하였다. 황혼 무렵에 수령이 소고대(小孤臺)에 이르러 나를 초청하고, 다시 사람을 시켜 나가서 보게 하니, 이른바 이귀(李貴1557-1633 : 1582 소과, 1603 대과)라는 자가 모임에 와서 흉악한 말을 많이 내뱉었는데,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욕설뿐이었다.
※저자인 정경운(1556)과 이귀(1557)은 거의 동년배이다. 이귀는 이이와 성혼의 제자이며 정경운은 정인홍의 제자인데 정경운은 소과에도 급제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이귀는 26세에 소과에 급제하고 참봉으로 있다가 임란때 공을 세워 벼슬을 하게 되어 김제군수까지 지낸 후 이곳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정인홍은 1602년 대사헌이 되었고 광해군 집권후 북인의 영수로 영의정까지 올라 권력을 누리다가 인조반정후 참형당했다. 이귀는 1603년 대과에 급제한 후 형조좌랑을 거쳐 인조반정에 주역으로 참가하여 판서 대사헌 좌찬성을 지냈다. 이때부터 서인인 이귀는 북인인 정인홍을 공격했으며 인조반정후 정인홍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7일 선생께 사람을 보내어서 이귀에게 욕을 본 것을 위로하였다. 이귀는 곧 이이(李珥)의 조카이자 성혼(成渾)의 제자이다. 이 때문에 득의양양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26일 서원(書院) 남쪽의 논에서 타작을 마쳤는데, 소출이 너무 적어서 근심스럽다. 대개 올해는 결실이 지난해의 태반에도 미치지 못하니, 민생이 염려스럽다. 하지만 어리석은 백성들이 진흙처럼 곡식을 천하게 여기니, 천시(天時)가 흉년이 든 것을 어찌 이상하게 여기겠는가.
■겨울 11월
◯17일 왜사(倭使)가 부산(釜山)에 도착하여 머무르면서 강화(講和)를 청하였고, 만약 강화가 성사되지 않으면 내년 봄에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올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왜적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운데, 다가올 재앙을 무엇으로 감당할까.
◯29일 수령이 산양(山陽)으로 가면서 나더러 도회(都會)를 보라고 재촉하였으니, 내 신세가 안됐구나.
■겨울 12월
◯2일 도회(都會)의 부(賦) 제목은 〈공중누각(空中樓閣)〉이고, 시(詩)는 〈홀로 봄바람을 마주하며 웃음을 그치지 않네.〔獨對春風笑未休〕〉이고, 논제(論題)는 〈호강후(胡康侯)가 힘써 진회(秦檜)를 추천하다.〔胡康侯力薦秦檜〕〉라고 들었다.
◯17일 선생의 답장을 받아보고서 평안하심을 알았으니, 아주 위로가 되었다. 서북쪽은 근심이 아직 급박하지 않으니, 기쁘다. 다만 이흉(李兇)이 서울에 가서 상소를 올려, 선생을 심하게 헐뜯고 패악한 말을 함부로 하니, 통탄스럽기 짝이 없다.
◯21일 나는 절기가 갑자기 바뀌어 호흡이 막히는 듯하였다. 이는 옷이 얇기 때문이니, 내 신세가 처량하다.
◯27일 호랑이〔山君〕가 죽곡(竹谷)에서 사람을 해쳤고, 또 개평(介坪)에서도 사람을 물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난리를 겪고 남은 백성들 중에서 맹호에게 물려 죽은 자가 거의 50명에 이른다고 한다.
▣1602
■봄 정월
◯19일 왜적이 와서 목도(木島)에 정박하며 망보는 사람 몇 명을 몰래 죽였고, 또한 절영도(絶影島)에 군량(軍糧)을 모아 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봄 2월
◯13일 역졸(驛卒)을 독촉하여 노비들을 철저히 찾았다
◯14일 우졸(郵卒)이 노비 세 명을 결박하여 뜰로 데려왔으니, 아주 다행스러웠다.
◯17일 노비들을 모두 이끌고서 길에 올라 경산(慶山)에 들렀다가 대구(大丘) 입석촌(立石村)에서 잤다.
◯24일 선생께서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다.
■봄 윤2월
◯9일 새벽 무렵에 길에 올라 부음정(孚飮亭)에 도착하였다. 원근의 문생(門生)들이 모두 모였는데, 거의 수백 명에 이르렀다. 오후에 선생께서 성주(星州)로 향하셨으므로 여러 벗들과 헤어진 뒤, 시천총(施千摠)의 집에서 잤다. 어두운 심정을 감당할 수 없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21일 임금께서 〈비망기(備忘記)〉에서 이르시기를, “군공(軍功)이 있으나 은상(恩賞)을 받지 못한 사람, 학행(學行)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 공사(公事)로 죽은 뒤에도 아직 은전(恩典)을 받지 못한 사람, 일을 처리함에 재능이 있는 사람, 용력(勇力)이 있는 사람을 공론(公論)으로 널리 조사하여 조정에 아뢰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셨다. 나와 노사예(盧士豫)ㆍ박손(朴?)ㆍ노사상(盧士尙)ㆍ노사개(盧士㑘)는 의병을 일으켰으나, 은상(恩賞)을 받지 못한 것으로 천거되었다. 학행 및 재능이 있는 사람〔才良〕으로서 노사개가 천거되었는데, 나 역시 첨부되어 순찰사(巡察使)에게 보고되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재능이 없는데 향인(鄕人)들이 천거하여 선발의 취지가 상당히 퇴색하게 되었으니, 한스럽다.
■봄 3월
◯1일 조카가 《소학(小學)》을 고강(考講) [외우고 풀이하는 시험] 하러 산양(山陽 : 문경)에 갔다. 나는 가서 보려고 하였으나 말이 없어 갈 수 없었으니, 너무 한탄스러웠다.
■여름 4월
◯11일 큰비가 내렸다. 임금께서 선생의 차자(箚子)에 비답하여 이르시기를, “차자를 살펴보니 경은 어째서 갑자기 물러나 돌아갈 뜻을 품는가. 전일 대신의 계사(啓辭)에는 진실로 의심을 갖게 하는 점이 있었지만, 이귀(李貴)의 사람됨은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사람은 일찍이 김덕령(金德齡)의 양편 겨드랑이에 호랑이 두 마리가 출입한다는 설을 지어낸 자이다. 이러한 말도 만들어 내는데 무슨 말인들 만들어 내지 못하겠는가. 이것은 그가 그대를 낭패시켜 물러나 돌아가게 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어쩌면 또 모두가 반드시 이귀의 수단에서 나온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듣건대, 그대가 남쪽에 있으면서 성혼(成渾)이 최영경(崔永慶)을 음살(陰殺)한 사실을 강력히 말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말이 옳은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어쩌면 이런 일로 인해 이러한 상소가 있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대는 마땅히 사직하지 말고 얼른 출사(出仕)하라. 더구나 조사(詔使)가 와 있는데, 사헌부의 장관이 물러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하셨다.
■여름 5월
◯3일 선생(정인홍)께서 사직소(辭職疎)를 여러 차례 올리고, 호연(浩然)히 귀향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른바 봉황이 천 길이나 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6일 향인(鄕人) 50명이 무과(武科)에 급제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예로부터 있지 않았던 성대한 일이다. 그러나 온갖 사람들이 과거에 진출하여 질서가 없으니, 가소롭다.
■여름 6월
◯10일 아침에 날이 개었다가 저녁에 비가 내렸다. 오늘 밤 꿈에 조정의 명령을 받았다. 이 무슨 엉뚱한 조짐이 이와 같은가. 이른바 남가일몽(南柯一夢)과 같은 것이다.
■가을 7월
◯2일 하늘에서 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았다. 뿌리까지 모두 말라버렸다. 기장ㆍ조ㆍ목면 등의 농작물은 끝장이구나! 하늘의 재앙이 백성에게서 비롯되니, 이상할 것이 무엇인가.
◯14일 합천(陜川)의 벗들이 여러 읍에 통문(通文)을 돌렸는데, 선생께서 돌아오셨으므로 오해받을 혐의가 있을 것 같으니 상소를 중지하자는 내용이었다.
◯17일 선생을 배알하였다. 심신이 평안하고 덕우(德宇)가 늠연하시니, 이천(伊川) 선생이 배릉(陪陵)하러 갔던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엎드려 듣건대, 이즈음 사람들은 오직 서로 공격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 다시 임금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23일 경기도 포천(抱川) 여곡리(汝谷里) 박종무(朴宗武)의 휘하에 사는 …〈결락(缺落)〉… 우음이(于音伊)ㆍ유금(劉今)ㆍ유금(劉金) 등은 이미 박종무에게 팔렸다. …〈결락(缺落)〉… 사내종 난적이(難赤伊)와 도난손(道難孫)ㆍ계집종 운비(雲非)와 돌덕(乭德) 등은 아직 팔리지 않았으며 포천에 거주하는데, 그 자손 등이 번성하여 2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가을 8월
◯13일 선생을 다시금 대사헌(大司憲)에 제수한다는 교지(敎旨)가 내려왔으나, 병 때문에 나가지 못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 조정에 계실 때 여러 소인배들이 임금의 뜻을 거역하여 조정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더니,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비록 소명(召命)이 계속 내려오지만, 집권자들이 책임을 면하려고 꾸미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도가 형통하기 어려운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으니, 어찌하겠는가.
■가을 9월
◯7일 오늘 밤 꿈에 임금을 뵈었다. 나는 옥련(玉輦)을 멘 다음에 산록을 오르내렸는데, 앞뒤의 의장(儀仗)이 매우 성대하였다. 나는 일찍이 임금을 가까이서 모신 적이 없었는데 꿈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무슨 조짐인가.
◯13일 박공간(朴公幹 박여량 : 1554-1611)이 본도(本道)의 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기쁜 일이다. 공간이 서울에서 곤란을 겪은 지 오래되었다. 다시 귀향하고 또한 선영을 영예롭게 하는 오랜 소원을 이루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수령이 …〈결(缺)〉… 아직 오기도 전에 네 칸의 집을 지으려고 하니, 급제(及第)가 얼마나 귀한지 엿볼 수 있다.
■겨울 10월
◯16일 오늘 선생께서 상경하신다고 한다. 임금께서 대사헌(大司憲) 직책을 바꾸지 않고서 연달아 교지(敎旨)를 내리시며, 게다가 선전관(宣傳官)과 승전관(承傳官)을 보내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은 예로부터 가장 어려운 일이니, 도를 행하기는 어찌 반드시 기약할 수 있겠는가.
◯18일 오늘 밤 꿈에 왕을 탑전(榻前)에서 모셨고, 선생께서 임금과 함께 주무셨다. 임금께서 나를 부르시어 술을 내리셨다. 명령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나아갔더니 임금께서 조용히 말씀하기를, “이것은 선생이 좋은 일을 누리는 모임이니, 광무제(光武帝)가 엄자릉(嚴子陵)과 함께 누웠던 일에 비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뜻밖의 꿈이 이처럼 분명한데, 이것은 무슨 조짐인가.
◯8일 하동(河東)에 사는 정여희(鄭汝熙)가 나를 찾아왔다. 여희(汝熙)는 포로가 되어 9년 동안 온갖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 이제야 돌아왔다. 얼굴을 대하고 있으니, 마치 저승의 사람과 같았다
■겨울 11월
◯6일 문과 별시에 단지 11명이 선발되었는데, 지방에서는 안동(安東)에 거주하는 배용길(裵龍吉)뿐이고, 서울 사람이 10명이나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3일 수령이 서원을 옮기는 일로 원장과 나를 불렀다. 이것은 곧 군(郡)의 사람 중에서 사악하고 음험한 자가 남을 사주하여 수령에게 참소하였고, 그가 있지 않은 것을 틈타서 말을 하여 믿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 수령은 단정적인 말로써 의리의 본질을 생각하지 않고 헛된 말을 주워들어 순찰사에게 보고하였다. 아! 소인이 의론을 좋아하고 남의 일이 잘 되기를 즐기지 않는 것이 이와 같구나.
■겨울 12월
◯1일 오늘 밤 꿈에 선생을 모시고 이불을 함께 덮고서 자는데,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입을 벌리고 선생께 돌진하였다. 선생께서 나에게 장검을 주시기에, 나는 몸을 곧추세우고 호랑이를 한 번에 찔러서 죽였다. 또 대나무 꼬챙이에 호랑이의 두 눈을 꽂았는데, 평생에 용기가 이보다 더한 적이 없었다. 지금부터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징조를 보여준 것인가.
◯4일 오늘 밤 꿈에 장녀(長女)를 보았다. 장녀가 말하기를 “저는 죽은 지 이미 오래되어 부모를 뵈러 올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깬지도 모르고 눈물을 흘렸다.
고대일록 제4권
▣1603
■봄 정월
◯14일 식사 후에 선생을 뵈었다. 도체(道體)가 두루 평안하셨고, 덕용(德容)을 우러러보니 기쁘고 다행스럽기 짝이 없었다. 임금께서 쌀과 보리 각각 다섯 섬, 꿀과 술 등의 음식을 내려 새해의 문안을 하셨으니, 영광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다.
■봄 2월
◯3일 이산해(李山海)의 손자 이후(李厚 1585-1613)가 16세(사실은 19세이며 이조정랑을 역임하였으나 28세때 천연두에 걸려 죽는다.)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어린 나이에 급제하였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호신(李好信)도 또한 급제하였다
◯10일 제사를 지낸 뒤에 현풍(玄風)에 갔다. 나는 과거를 그만두려고 하였으나, 위로는 집안에서 재촉하고 다음으로는 수령이 권유하기에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다. 억지로 가게 되었으니, 개탄스럽다.
◯13일 닭이 운 뒤에 시험장에 들어갔다. 시관(試官)은 신요(申橈)ㆍ신경진(申景進), 그리고 수령이었다. 부(賦)는 〈말액응모(秣額應募)〉이고, 시(詩)는 〈송서서지위일입필서근면예백수(送徐庶之魏日入畢書僅免曳白首)〉였다. 해가 들어갈 무렵에야 쓰기를 마쳤는데, 겨우 흰 종이를 그대로 제출하는 것을 면했다. 센머리로 과거에 나아가려니, 더욱 한탄스러웠다.
◯20일 경상 좌도(慶尙左道)와 우도(右道)의 과방(科榜) 기별이 왔는데, 정온(鄭縕)이 장원하였고, 함양(咸陽)에서는 정홍서(鄭弘緖)ㆍ노일(盧佾) 두 사람뿐이었고, 나는 뽑히지 않았다. 과거를 그만두려고 결심하였다가 남들의 권유를 받아 시험에서 문장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한탄스럽다.
■겨울 10월
◯29일 향회(鄕會)가 열리는 날에 다시 단자(單子)를 올렸으나 체임(遞任)을 얻지 못하였으니, 향인(鄕人)들이 나를 대우함이 각박하다.
■겨울 11월
◯3일 처자를 옮겨 새 집에 들어갔다. 다만 추위에 대비한 시설이 없고, 벽도 바람을 막을 수 없으니, 이것이 염려된다.
■겨울 12월
◯2일 인사고과에 대한 기별을 들었다. 하(下)는 합천(陜川) 군수이고, 중(中)은 상주 목사(尙州牧使)ㆍ대구 반자(大丘半刺) [判官] 등 몇 개 고을이라고 한다. 일개 법이 엄하지 않으므로 아부하는 대부(大夫)들이 마음대로 횡행하여 거리낌이 없으니,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28일 꿈에 관직에 임명되어 사은숙배(謝恩肅拜)하였으니, 괴이하다.
▣1604
■봄 3월
◯18일 왜노(倭奴) 놈이 부산(釜山)에 시장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들은 백세(百世)가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원수이다. 그런데도 화친을 허락하여 무역을 텄으니, 조정의 신하들은 홀로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여름 4월
◯27일 영의정(領議政) 이덕형(李德馨)이 왕자의 방자한 실책에 대하여 간언(諫言)을 올렸는데, 임금께서 진노하여 엄한 교시를 많이 하고 면직시키라고 하였다고 한다. 아! 성상께서 자식을 사랑하는 정〔苗碩之情〕에 가려 패악한 자식을 엄하게 책망하시지 않은 채 대신을 파직시키기에 이르렀으니, 말세로(末世路)의 재앙이 어떠하겠는가?
■여름 5월
◯28일 비가 많이 내렸다. 사람들이 모두 가뭄으로 고생하다가, 비로소 큰비가 내리자 마을에서 환호성이 곳곳마다 넘쳐흘렀다.
■여름 6월
◯2일 명나라 장수 한 사람이 왜적의 정세를 탐지하려고 부산(釜山)에 왔다가 호남(湖南)을 향해 갔다.
■가을 7월
◯19일 천장(天將) 진 유격(陳遊擊 : 진린)이 함양군(咸陽郡)에 도착하였다. 수륙(水陸)의 군병을 검열하기 위해 온 것이다. 접반관(接伴官)은 김광엽(金光曄)이었다.
■가을 8월
◯13일 호궤(犒饋 :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하는 일로 종이 거제(巨濟)에 갔다.
■겨울 10월
◯29일 아침에 선생을 찾아가서 뵈었다. 도체가 아주 평안하시고 정신과 안색이 오십대의 나이와 같았다. 아마도 밝고 화평한 기운이 얼굴에 나타나고 등에 가득하며〔粹面盎背〕, 뜻과 기운이 강건하고 장중함〔志氣康壯〕은 늙어서도 쇠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손히 약간의 격훈(格訓)을 노래하였다.
■겨울 12월
◯6일 호남(湖南)을 향해 갔다. 부안(扶安)에 갈 계획이었다. 인월(引月)에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저녁에 서식(徐湜)의 집에서 묵었다.
◯7일 남원(南原)에서 출발하여 오수역(獒樹驛)에서 묵었다.
◯8일 임실(任實)을 거쳐 전주(全州)로 들어갔다. 신원(新院)에서 묵었다
◯9일 전주(全州)를 지나서 금구(金溝) 땅을 경유하여, 김제(金堤) 경계에 있는 엄목촌(嚴木村)에서 묵었다
◯10일 김제(金堤)에서 출발하여 부안(扶安)에 도착했는데 오후 네다섯 시쯤이었다. 고을 수령 윤택원(尹澤元)이 동당시관(東堂試官)으로서 시정(試亭)에 들어갔다. 저물녘에 명함을 전하고 오두막집에서 곤하게 잤다. 멀리서 피리 소리가 들려왔는데, 객(客)은 자고 시관(試官) 등이 잔치를 벌였다.
◯11일 날이 희미하게 밝아올 무렵에 고을 수령 윤택원(尹澤元)이 내가 묵고 있는 객사에 찾아왔기에 만났다. 또한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던 회포를 말하였다. 노비에게 패자(牌子)를 내어주었다.
◯12일 종 대절산(大卩山)의 처와 그 아들 귀희(貴喜)가 왔다. 오늘 저녁에 고을 수령이 또다시 찾아왔기에 만났다.
◯13일 해가 뜰 무렵에 관아의 동헌(東軒)에서 고을 수령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계집종 아망개(阿望介)와 그 딸이 와서 보았다. 또한 대절산(大卩山)의 딸 연춘(延春)은 정병(正兵) 박봉룡(朴鳳龍)에게 시집갔고, 간랑(艮郞)은 정병(正兵) 김언석(金彦石)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남면(南面) 호동(狐洞)에서 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15일 노비로 등록된 11명을 박만종(朴萬從)이 적어서 바쳤다. ...계집종 연춘(延春)ㆍ계집종 간랑(艮郞)과 연춘의 아들이 와서 보았다.
◯16일 계집종 감덕(甘德)이 찾아왔기에 보았다. 나이가 거의 70세가 다 되었는데 아직도 쇠하거나 늙지 않았고, 승려가 된 아들을 꺼려서 피하니, 너무 가증스럽다. 종 대절지(大卩之)와 그 아들 종 영화(永和), 종 승개(承介)가 와서 보았다.
◯18일 계집종 막개(莫介)와 그 아들 정남(丁男)이 와서 보았다. 계집종 감덕(甘德)이 거짓으로 꾸며 애걸(哀乞)하니, 너무 가증스럽다.
◯20일 고을 수령 윤택원(尹澤元)과 종일토록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였다. 노비 등을 몽둥이로 때리고 신문(訊問)하여, 박만(朴萬)과 종 대절동(大卩同) 등의 자백을 받았다.
◯22일 날이 희미하게 밝아올 무렵에 길을 떠났다. 동진(東津)을 지나 김제군(金堤郡)에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23일 금구(金溝)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오후에 전주(全州)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잤다.
◯24일 만장동(萬場洞)에서 아침밥을 먹고, 저녁에 임실(任實) 관전촌(官錢村)에서 묵었다. 종 산이(山伊)를 만나 집안이 평안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26일 정오에 집에 도착했다.
◯30일 아내가 술시(戌時)에 별세하였다. 오호라! 내 다시 만나보지 못하겠구나. 어찌 차마 날 버리고 떠난단 말인가? 만력(萬曆) 경진년(庚辰年, 1580)에 나에게 시집와서 3남 4녀를 낳았는데, 딸아이 하나는 아직 시집가지 못했으니, 이는 이 세상에 더할 수 없는 큰 슬픔이다. 사람됨이 진실되고 우둔하여 교식(矯餙)하지 않았으니, 집안에서 거처한 지 15년 동안 일찍이 거만한 기색이 없었다. 중년(中年)에 풍(風)을 얻어 병이 들었고, 집안일을 하지 못한 것이 10여 년이었다. 오랫동안 침석(寢席)에 누워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오늘 결국 이러한 지경에 이를지를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오호라! 아내가 공손하고 검소한 덕이 있었으나 천수를 누리는 복은 없었으니, 이는 나의 불행이다. 앞으로 집안 대대로 참된 덕을 기록하여 그 전말(顚末)을 후일의 상고로 삼으라.
▣1605
■봄 2월
◯23일 천장(天將 : 명의 장수)이 온다는 기별이 부산(釜山)에서 군(郡)으로 왔다. 그런데 거두어들이기를 절제 없이 함부로 하여 온갖 물건을 모조리 요구하였다. 염치(廉耻) 없기가 청소를 한 듯해 오랑캐와 중화의 탐욕이 똑같으니,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여름 4월
◯7일 나는 두 살에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외조부(外祖父)께 의지하여 길러졌다. 아홉 살에 외왕부(外王父)께서 또 돌아가시고, 열세 살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양부모가 모두 돌아가셔서 맏형에게서 수학(受學)하였고 외왕모(外王母)에 의해 길러졌다. 열다섯에 또 외왕모를 여의었으며, 이때부터 형 보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였고, 형수 보기를 어머니와 같이 하였다. 열아홉에 또 형님을 잃었는데, 학업은 어자(魚字)와 노자(魯字)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몸과 그림자가 서로를 위로할 지경〔形影相弔〕이었다. 경오년(庚午年, 1570)부터 기묘년(己卯年, 1579)까지 형수를 우러르며 생명을 이어나가기를, 마치 한유(韓愈)가 정부인(鄭夫人)을 대한 것과 같았다. 경진년(庚辰年, 1580)에 이르러 마침내 아내를 두었다.
외롭고 곤궁한 가운데에도 오히려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알아, 집이 성시(城市)에 가까웠으나 한 번도 시리(市利)를 도모하는 잘못이 없었다. 마음으로 현인을 사모하고 되기를 바라 약간 옛 책에서 자득함이 있었고, 박공간(朴公幹)ㆍ박경실(朴景實)ㆍ노지부(盧志夫)ㆍ정현경(鄭玄卿)ㆍ강극수(姜克修) 등과 벗하였다.
신사년(辛巳年, 1581, 26세)에 마침내 스승을 찾을 줄 알아 내암(來庵)선생께 배움을 청하였다. 선생께서 못난이로 물리치지 않으셨으니, 그 후 잇따라 출입하였다. 매번 “가을달이 차가운 강물에 비치다.〔秋月照寒水〕”라는 시구(詩句)를 생각하며, 부모와 같이 우러르고 신명(神明)과 같이 믿었다.
갑오년(甲午年, 1594)에 노지부(盧志夫)와 함께 원임(院任)을 받았다. 정유재란(丁酉再亂) 이후에 지부(志夫)는 몸을 상하여 죽었고, 나 홀로 고향으로 돌아와 일두서원(一蠹書院)과 향현사(鄕賢祠)를 관리하였는데 만분의 보탬이 있었다. 경자년(庚子年, 1600)에 노장(盧丈)이 원장(院長)이 되어, 서원을 옮기는 논의를 나와 함께 발의하여 옮길 장소를 정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노장(盧丈)이 갑자기 죽자 아무도 이 일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고, 일 년 만에 뭇 사람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노 익산(盧益山) 어른이 원장(院長)이 되어 같은 생각으로 학교를 일으켰는데, 잇달아 죽어 기약했던 바의 일을 마치지 못했고, 강극수(姜克修)에게 전임(傳任)되었다. 나는 궁향(窮鄕)의 만학(晩學)으로서 이미 입설(立雪)의 정성도 없었고, 또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공부도 모자라 끝내 담장을 쳐다보는 듯한 지경을 면하지 못해 도(道)의 영역과 서로 격리되었다. 마치 기러기가 수초 속에 내려 앉아 진흙 속에 머리를 박고 있는 것과 같았다. 노둔함을 채찍질하여 선생께 나아가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때로 혹 편지를 부쳐 안부를 묻고 연달아 이끌어주는 은덕을 입었다.
갑진년(甲辰年, 1604)에 아내가 세상을 버림에 예를 물어 상(喪)을 치러,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실수를 면할 수 있었다. 강위서(姜渭瑞)와 사생지교(死生之交)를 맺고 우산(牛山)의 언덕에 함께 집터를 정하였다. 정(情)이 같았고, 지(志)가 같고, 사우(師友)가 같았고, 학업(學業)이 같았고, 궤안(几案)이 같았고, 비방이 같았다. 아양(峨洋)의 사이에 비견하였고, 간담(肝膽)을 서로 내비쳤는데, 완전히 기러기가 무리지어 날아올라 멀리가려는 것 같았다.
을사년(乙巳年, 1605)에 상(喪)을 만난 후에는 인사(人事)에 뜻을 두지 않다. 다만 삼현(三賢)의 사당이 풀숲에 매몰될까 염려할 뿐이었는데, 강극수(姜克修)가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여 돌아오지 않아, 신위를 봉안(奉安)하는 것을 쉽게 기약할 수 없었다. 쇠하고 슬픈 몸을 애써 일으켜 다반으로 조처해서, 날을 택하여 이안(移安)하려고 하였다. 이때 고을 사람들은 혹 죄로 여기기도 하고 혹 소홀함을 지적하기도 하고, 혹 성례(盛禮)에 참여하지 못한 것으로써, 분을 품고 이를 갈며 비어(飛語)를 날조하며 모래를 뿜고 그림자를 엿보아〔吹沙伺影〕, 반드시 죄인의 처지에 빠뜨리고자 하였다. 위서(渭瑞)ㆍ극수(克修)와 함께 구설(口舌)을 받았는데, 그 정도가 끝이 없었다. 마치 외로운 학〔孤鶴〕은 무리가 적고 솔개와 갈가마귀〔鴟鴉〕는 많은 것 같았다. 이로부터 뜻이 인사(人事)를 사절(謝絶)하고 두문(杜門)하여 허물을 살폈다. 만약 허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비웃었는데, 마치 기러기가 마시지 않고 쪼지 않고 듣지 않고 보지 않으며, 구름 속에서 날개를 접고서 기색을 살피며 드물게 나와 거의 그물에 걸리는 재앙을 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시(詩)를 읊어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26일 진주(晉州)에 군량을 보냈다. 어염(魚鹽)의 가격을 핑계로 삼아서 명분 없는 세금을 억지로 나누니, 순찰사(巡察使)의 사람됨을 알 만하다.
■겨울 12월
◯4일 조보(朝報)를 보니, 이귀(李貴)가 군수(郡守)의 망단(望單)에 올랐다고 한다. 아! 인재를 등용하는 데 있어서 사람을 천거함이 이와 같구나.
◯17일 새 집터〔新基〕에 가서 온돌(溫突)을 만들었다. 강위서(姜渭瑞)와 함께 묵었고, 방항진(房亢震)과 잠시 대화했다.
◯22일 당장(唐將) 유유격(劉游擊)이 군(郡)에 들어왔다. 마음대로 거두어들여 헤아림이 없었다. 해침이 심한 경우에는 다만 이에 그치지 않고 땅에 가죽이 없다.
◯26일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새 집터〔新基〕로 이사했다.
▣1606
■봄 정월
◯17일 재목(材木)을 운반하여 왔다. 새 집터〔新基〕에 아직 태반(太半)도 공급하지 못했다. 분명히 집이 아직 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공력(功力)이 미치지 못하는 근심이 있을 것이니, 너무 근심스럽다.
■봄 2월
◯21일 수령을 뵈었다. 수령이 부임해 온 지 이미 한 해가 지났는데 이제야 비로소 만나보았다.
■봄 3월
◯26일 새로 지은 집에 들어갔다. 지난해 섣달그믐부터 토우(土宇)에 살면서 깨진 옹기로 만든 창문〔甕牖〕으로 출입하였는데, 이제야 마침내 그럭저럭 편안하여 방에 들어갔으니, 이것은 나의 종신 계획이었다. 비록 넓고 큰 집의 장중함〔渠渠之壯〕은 없으나, 또한 나에겐 넓음을 이룸이 있으니, 수년 동안 비바람의 괴로움을 면할 수 있다. 위서와 함께 구원(丘園)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분우(分愚)의 즐거움을 갖출 만하였다.
■여름 6월
◯21일 수령을 찾아가서 위로했다. 수령의 거처에 물이 들어왔는데, 경상도(慶尙道)에 있는 67읍 가운데 함양(咸陽)만이 유독 여기에 포함되었으니, 너무 가련하고 가련하도다. 수령의 다스림이 그렇게 악하지도 않았는데,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면 권세를 잡은 무사(武士)라서 그러한 것이 아닌가?
■가을 8월
◯24일 나는 병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병명(病名)은 바로 초학(草瘧 : 학질)이다. 나의 일생〔生平〕에서 일찍이 없었는데, 이제 마침내 병을 앓게 되었다. 기운이 아주 쇠약해질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가을 9월
◯14일 서원에 머물며 사당에 참배한 후에, 다시 남명(조식 1501-1572) 선생을 참배하였다. 묵은 풀이 자라있었다. 선생의 은둔하며 숨어 사셨던 즐거움을 미루어 생각해 보니, 정말 후학(後學)의 감회를 일으키고 나약한 사람〔懶夫〕의 뜻을 세울 수 있었다.
■겨울 10월
◯19일 일본(日本) 사신(使臣)으로 여우길(呂祐吉)이 차정(差定)되었고, 경섬(慶暹)이 부사(副使)가 되고, 정호관(丁好寬)이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겨울 12월
◯13일 호남(湖南)을 향해 갔다. 운봉(雲峰) 장교촌(長橋村)에서 묵었다. 이날 밤 꿈에서 공간(公幹)을 보았다.
◯15일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임실(任實) 경계를 지나서 태인(泰仁) 판후촌(板後村)에서 묵었다.
◯16일 고부(古阜) 경계를 지나 탑립촌(塔立村) 막개(莫介)의 집에서 묵었다.
◯17일 부안(扶安)의 호동(狐洞)에 있는 연춘(延春)의 집에 도착했다. 연춘은 올해 딸을 낳았다. 연춘의 아들 이름은 ‘자근동(者斤同)’이라고 하였다.
◯20일 앞으로 궁궐(宮闕)을 새로 지으려고 변산(邊山)에서 1만 그루의 나무를 벌목하려고 하니, 백성들의 어려움이 어찌 끝날 수 있겠는가?
◯21일 막개(莫介)의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태인(泰仁)의 고현촌(古縣村)에 있는 양반(兩班) 정희현(鄭希賢)의 집에서 묵었다
◯23일 아침밥을 먹은 후에 비를 맞으며 남원(南原)의 고사촌(古寺村)에 도착했다
◯24일 황혼녘에 집에 도착했다. 온 집안이 별다른 근심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1607
■가을 9월
◯28일 꼭두새벽에 길을 떠났다. 오후에 선생께 인사를 드리고 잔을 올리며 절구 한 수를 지어서 바쳤다.
▣1608
■봄 2월
◯23일 임해군(臨海君)이 반란을 꾀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어 진도(珍島)에 위리(圍籬)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여름 6월
◯1일 22일에 선생께서 길을 출발하셨다. 27일에 충주(忠州)에 도착하여 3일을 머무르셨는데, 또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셨다. 주상의 뜻이 간절하시고 자상하셨다. 6월 초하루에 배를 띄워 서울을 향하셨다. 2일에 아차산(峨嵯山) 강사정(江舍亭)에 이르셨다.
■겨울 11월
◯22일 황해도(黃海道)의 유생 이선장(李善長)이 성혼(成渾)을 위하여 상소를 올렸다. 대체로 성혼과 이이(李珥)를 우리나라 이학(理學)의 연원으로 삼았으니, 이른바 ‘그대는 진실로 제나라 사람이다.〔子誠齊人〕’라는 것이다.
▣1609
■봄 3월
◯10일 선생께서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진되었고, 정창연(鄭昌衍)이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고 한다.
■가을 9월
◯25일 선생의 답장 편지를 받아보았다. 아직도 직지사(直旨寺)에 머물며, 돌아올 임금의 명(命)을 기다리고 있음을 공경히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