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동사강목 2

청담(靑潭) 2018. 11. 29. 22:26



동사강목(東史綱目)

안정복(1712-1791)

▣동사강목 제3하

■신라 진평왕 38년, 고구려 영양왕 27년, 백제 무왕 17년(616)

◯동10월백제가 신라를 침략하였다.

백제가 달솔(達率) 백기(苩奇)를 보내어 군사 8천을 이끌고 신라 모산성(母山城) 지금의 운봉현(雲峯縣)이다 을 공격하였다.

■신라 진평왕 43년, 고구려 영류왕 4년, 백제 무왕 22년(621)

◯【안】《당서》신라전(新羅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신라는 변한(弁韓)의 묘족(苗族 종족(種族))이다. 한(漢) 낙랑(樂浪) 땅에 있으니 횡(橫)이 1천 리요, 종(縱)이 3천 리나 된다. 동남방은 일본이요, 서쪽은 백제이며, 남쪽은 바다에 닿았으며 북쪽은 고구려이다. 왕은 금성(金城 경주(慶州)에 거하니 둘레가 8리로 호위하는 군사가 3천이다. 성(城)을 침모라(侵牟羅)라고 하고 안에 있는 읍(邑)을 훼평(喙評), 밖에 있는 것을 읍륵(邑勒)이라 하는데 훼평이 6개이고 읍륵이 52개다.

조복(朝服)은 흰 것을 숭상하고 산신(山神)에 제사하기를 좋아한다. 8월 보름에는 크게 잔치하고 관리들에게 활을 쏘게 한다. 벼슬은 친속(親屬)을 위에 앉히며 그 족명(族名)은 제일골(第一骨) 제이골(第二骨)로 분별하며 형제녀(兄弟女)와 내외종자매(內外從姊妹)를 다 맞이하여 아내로 삼는다. 왕족은 제1골이며 아내 또한 그 족(族)으로 아들을 낳으면 다 제일골이 되며, 제이골의 딸과 혼인하지 않고 비록 혼인을 하더라도 첩잉(妾媵)이 될 뿐이다.

벼슬은 재상(宰相)ㆍ시중(侍中)ㆍ사농경(司農卿)ㆍ태부령(太府令) 등 모두 17등급으로 나뉘어졌으며, 제2골이 그런 벼슬을 하게 된다. 정사(政事)는 반드시 중의(衆議)에 따라 하니 이를 화백(和白)이라 하고, 한 사람이라도 이의(異議)를 제기하면 부결시킨다. 재상의 집은 녹(祿)이 끊어지지 않으며 노비를 3천이나 거느리며, 갑병(甲兵)과 말ㆍ소ㆍ돼지 등도 이 수에 맞추었다. 가축은 바다 가운데의 산에다 길러, 먹을 일이 있으면 쏘아 잡는다. 사람들에 곡미(糓米)를 주고 이식을 붙이되 정한 양을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았다. 왕의 성씨는 김(金)이요, 귀인(貴人)의 성씨는 박(朴)이요, 백성은 성씨가 없고 이름만이 있다. 식기(食器)는 목기와 놋그릇이나 질그릇을 사용한다. 원일(元日 정월 초하루)에는 서로 경하하며 이날은 일월신(日月神)에게 절을 한다. 남자는 굵은 베로 만든 바지를 입고, 부녀는 긴 저고리를 입는다. 사람을 보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손을 땅에 집고 예를 한다. 화장을 하지 않으며 좋은 머리털을 땋아 머리에 틀어 얹고 주채(珠綵)로써 장식한다. 남자는 머리를 자르고 흑건(黑巾)을 썼다. 저자[市場]에서는 부녀들이 물건을 사고 판다. 겨울철에는 부엌을 방안에 만들고 여름에는 음식을 얼음 위에 둔다. 가축에 양(羊)은 없고 나귀가 적으며 말이 많은데 말은 비록 높고 크나 행보를 잘하지 못한다.”

◯【안】《당서》 백제전(百濟傳)에 이르기를,

“백제는 부여의 별종(別種)으로 곧 경사(京師)에서 6천 리 떨어진 바닷가에 있다. 서쪽은 월주(越州), 남쪽은 왜(倭)요, 북쪽은 고구려이니, 다 바다를 건너 이르게 되며, 그 동쪽은 신라이다. 왕은 동서 두 성(城)에 거하였고 관직에 내신 좌평(內臣佐平)은 왕의 명령 출납을 맡고, 내두 좌평(內頭佐平)은 재물을 맡고, 내법 좌평(內法佐平)은 의례를 맡고, 위사 좌평(衛士佐平)은 위병(衛兵)을 맡고, 조정 좌평(朝廷佐平)은 형옥(刑獄)을 맡고, 병관 좌평(兵官佐平)은 외방(外方)ㆍ병마(兵馬)를 맡으니, 병마는 6만이며 지방은 10군(郡)으로 통할하였다. 대성(大姓)이 8개가 있으니, 사씨(沙氏)ㆍ연씨(燕氏)ㆍ협씨(劦氏)ㆍ해씨(解氏)ㆍ진씨(眞氏)ㆍ국씨(國氏)ㆍ목씨(木氏)ㆍ백씨(苩氏)이다. 그 형법은 반역자는 베고 그 집은 적몰(籍沒)하며, 사람을 죽인 자는 노비 셋을 들이고 속죄(贖罪)하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을 하면 3배를 배상하고 종신토록 금고에 처한 풍속은 고구려와 같고, 세 섬[三島]이 있어 황칠(黃漆)이 나는데 6월에 나무 껍질을 벗겨 진을 취하여 쓰는데 빛깔이 금과 같다. 왕은 큰 소매의 자색포(袍)와 푸른 비단바지를 입고, 흰 가죽띠를 띠고 검은 가죽신을 신으며 검은 비단관을 쓰는데, 모두 금으로 장식하였고, 조신들은 붉은 비단옷을 입고 갓은 은으로 장식하였으며 백성에게는 붉은 비단과 자색 비단 옷을 입지 못하게 한다. 문서에 시월(時月)로 기록하는 것이 중국 사람과 같은 점이 있다.”

■신라 진평왕 44년, 고구려 영류왕 5년, 백제 무왕 23년(622)

◯○ 당(唐)이 수(隋) 말기에 고구려에 잡혀 온 포로를 찾아가고, 또한 중국에 있는 고구려 사람을 돌려 주겠다는 조칙을 내렸다.

고구려 사신이 당에 조회하자 황제는 수 말기에 전사(戰士)들이 다수 고구려에 함몰하였음을 느끼고 조칙을 내리기를,

“육합(六合 천하(天下))이 안녕하고 사해(四海)가 청평(淸平)하며, 빙문하는 예가 이미 소통하고 도로도 막힌 곳이 없어서 바야흐로 화목을 다짐하며, 영구히 빙호(聘好 교빙(交聘))를 돈독히 하여 각기 강토와 국경을 보존하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수나라 말년에 연이어 군사를 발하여 그 백성을 잃어 마침내 골육(骨肉)이 서로 떠나고 실가(室家)가 나누어 헤어져 여러 해가 지나도록 남녀의 원한을 펴지 못하였다. 이제 두 나라가 화의를 통하였으니 의리에 서로 막힐 것이 없다. 이곳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을 이미 조사하여 찾는 즉시 보내라고 영을 내렸으니, 고구려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들을, 왕은 방환하여 힘써 편안히 살 수 있는 방법을 다하고 함께 인서(仁恕)의 도를 넓히도록 할지어다.”

하였다. 이에 돌아가지 못한 수나라 사람 1만여 구를 찾아서 보내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였다.

■신라 진평왕 46년, 고구려 영류왕 7년, 백제 무왕 25년(624)

◯ 이때에 삼국(三國)이 서로 침략하여 강역(疆埸 국경)이 다사(多事)하였고 백성이 방수(防戍)에 피곤하였으며, 노약자 또한 많이 정벌에 따라다녔다. 신라 율리(栗里)의 민가(民家) 설씨(薛氏)에게 예쁜 딸이 있었다. 아비가 방수(防戍)에 나가게 되었으나 나이가 많은 데다 병약(病弱)하였다. 설씨는 자신은 여자여서 대신 갈 수도 없어서 한갓 혼자 근심하고 괴로워하였다. 사량부(沙梁部) 소년 가실(嘉實)이 마침 설씨에게 와서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지기(志氣)가 있는 것으로 자부해 왔소, 자신이 있으니 엄군(嚴君)의 역(役)을 대신하기를 원하오.”

하였다. 설씨가 기뻐하며 아비에게 고하니 아비는 치사(致謝)하면서 딸로 배필을 삼아 달라 청원하였다. 가실이 물러와서 혼일을 청하니 설씨가 말하기를,

“혼인은 인륜대사(人倫大事)이니 구차하게 이루는 것은 옳지 않다. 첩(妾 설씨 자칭)이 이미 마음으로 허락하였다면, 죽어도 변함이 없을 것이니 그대가 방수에서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서 날을 보아 예식을 올려도 늦지 않다.”

하고, 이어 거울을 깨어 나누어 갖고 표신을 삼았다. 가실이 말 한 필을 설씨에게 주며 말하기를,

“이 말은 천하에 좋은 준마(駿馬)입니다. 후에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니 잘 먹여 주기를 바라오.”

하고, 드디어 떠났다. 마침 나라에 연고가 있어서 교대를 하지 못하고 어느새 6년이 지났다. 아비가 딸에게 말하기를,

“3년이 기한인데 기한이 다했으니 다른 집으로 출가하는 것이 좋겠다.”

하매, 설씨가 말하기를,

“그가 대신 변성(邊城)에 나가서 신고(辛苦)의 세월을 보내는데, 신의를 저버리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제가 차마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아비가 강제로 출가시키려고 몰래 마을 사람과 언약하고 혼기(婚期)를 이미 정하였다. 설씨는 몰래 달아나기로 하고, 가실이 맡겨 둔 말을 보고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렸다. 마침 가실이 왔는데 형색이 수척하고 의복이 남루하여 그녀가 그를 보았으나 가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다가 깨어진 거울을 맞춰보고는 드디어 부부가 되었다.

■신라 진평왕 50년, 고구려 영류왕 11년, 백제 무왕 29년(628)

◯겨울신라에 기근이 들었다. 때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서 먹고 살았다. 대사(大舍) 구문(仇文)의 아들 검군(劒君)이 사량궁(沙梁宮) 사인(舍人)이 되었는데 모든 사인이 창곡(倉穀)을 도적질하여 나누어 가졌으나 검군은 홀로 받지 않았다. 모든 사인들이 적어서 받지 않는 줄로 생각하고 더 주려 하니, 검군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이름이 근랑(近郞)의 무리에 편입되어 풍월(風月)의 뜰에서 수행(修行)하였으니, 진실로 그 의로운 것이 아니면 비록 천금(千金)이라도 어찌 마음이 움직이겠는가?”

하였다. 근랑은 바로 이찬(伊飡) 대일(大日)의 아들로서 화랑이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검군이 물러가서 근랑에게로 가니 모든 사인들은 말이 누설이 될까 두려워서 검군을 죽이려고 불렀다. 검군은 그것을 알고서도 가려 하자 근랑이 말하기를,

“어찌 유사(有司)에게 알리지 않는가?”

하매, 검군이 말하기를,

“내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다른 사람을 죄에 걸리게 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다.”

하니,

“어찌 도망하지 않는가?”

하자, 말하기를,

“저들이 잘못했고 나는 바른데 도망하는 것은 장부의 할 일이 못된다.”

하고, 드디어 가니, 모든 사인이 겉으로 사과하는 체하면서 음식에 독약을 넣어, 그것을 먹고 드디어 죽었다.

■신라 진평왕 51년, 고구려 영류왕 12년, 백제 무왕 30년(629)

◯추8월 신라가 장수를 보내어 고구려 낭비성(狼臂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이 이찬(伊飡) 임말리(任末里)ㆍ소판(蘇判) 대인(大因)ㆍ대장군(大將軍) 용춘(龍春)일명 용수(龍樹)라고도 한다 ㆍ백룡(白龍)ㆍ서현(舒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니, 고구려 군사는 성을 나와 진을 쳤는데 군세(軍勢)가 매우 왕성하여 신라군이 그들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때에 서현(舒玄)의 아들 유신(庾信)이 중당(中幢)의 당주(幢主)가 되었었는데 그 아비에게 말하기를,

“유신은 평생에 충효를 스스로 기약하였으니 싸움에 임하여 용감하지 못함은 옳지 못하옵니다. 제가 듣건대 옷깃을 떨치면 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들면 그물이 펴진다고 하니, 내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하고, 곧 말에 올라 적진에 돌진하여 세 번 들어갔다 세 번 나오면서 적장을 베어 머리를 들고 오니 제군이 승승(乘勝) 분격(奮擊)하여 5천여 급을 참살(斬殺)하고 1천여 명을 사로잡으니 성중이 모두 두려워하여 나와 항복하였다. 서현은 신라 명장 무력(武力)의 아들이니, 가락왕(駕洛王) 김수로(金首露)의 11대 손이다. 서현은 일명 도연(道衍)이라고도 한다 처음에 서현이 신라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기뻐하여 중매없이 장가들었다. 뒤에 서현이 만노군(萬弩郡)지금의 진천(鎭川)태수(太守)가 되었는데 만 명이 도망하여 서현의 임지(任地)로 가 있어 임신한 지 20개월에 유신(庾信)을 낳았다. 어렸을 때 모친은 날마다 엄한 가르침을 가하여 망령되이 교유(交遊)하지 못하게 하였다. 어느날 우연히 창녀 천관(天官) 집에서 자고 왔다. 모친이 말하기를,

“나는 날로 네가 성장해서 공명(功名)을 세워 군친(君親)을 영화롭게 하여 주기를 바랐더니, 이제 천한 집 계집아이와 함께 음방 주사(淫房酒肆)에서 희롱하고 논단 말이냐!”

하고,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유신은 곧 어머니 앞에서 스스로 맹서하기를,

“다시는 그 문 앞을 지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하루는 술이 취하여 집에 돌아가는데 말이 옛길을 따라 잘못 창가(倡家)에 이르니 창녀가 일변 기뻐하며 일변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나와 맞았다. 유신이 이미 술이 깨어 타고 온 말을 베고 돌아왔다. 천관사(天官寺)는 지금 경주(慶州) 오릉(五陵)동에 있다 이로부터 더욱더 열심히 공부하여 15세에 화랑(花郞)이 되니, 당시 사람들이 좋아하며 복종하여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렀다. 나이 17세에 고구려ㆍ백제ㆍ말갈(靺鞨)이 신라 강토를 침구하는 것을 보고 비분 강개하여 삭평(削平)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中岳) 석굴(石窟)에 들어가 재계(齋戒)하고 하늘에 맹세하며 고하기를,

“적국이 무도(無道)하여 우리 국토를 침략하여 거의 편안한 해가 없습니다. 일개 미신(微臣)이 재주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화란을 말끔히 청소할 뜻이 있으니 오직 하늘은 이를 굽어살피시어 나에게 힘을 빌려 주소서!”

하였다. 그의 뜻과 절개가 이와 같더니 이에 이르러 종군하여 공을 세워 이로부터 위엄과 명성이 크게 떨쳤다.

■신라 선덕여주(善德女主)원년, 고구려영류왕 15년, 백제무왕 33년(632)

◯춘정월신라 왕 백정(伯淨)이 훙서(薨逝)하고 왕녀 덕만(德曼)이 즉위하였다. 왕이 훙하니 진평(眞平)이라 시(諡)하고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

왕은 아들이 없었는데 장녀 덕만이 관인 명민(寬仁明敏)하여 세워 왕으로 삼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 불렀으니 이가 선덕여주(善德女主)이다. 어머니는 김씨(金氏) 마야 부인(摩耶夫人)이다. 처음 당 황제가 모란꽃의 그림과 꽃씨를 보내왔는데, 진평왕이 덕만에게 보내자 덕만이 말하기를,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웃으면서,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이 그림은 몹시 아름답기는 합니다만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면 이는 반드시 향기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 씨를 심었더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는데, 그 앞일을 미리 아는 것이 이와 같았다. 김씨(金氏)는 이렇게 말하였다.

“예전에 여와(女媧)가 있었으나 천자(天子)는 아니었고, 복희씨(伏羲氏)를 도와서 9주(州)를 다스렸을 뿐이며 여치(呂雉)ㆍ무조(武瞾)에 이르러 조정에 임하여 제(制 조서(詔書))를 칭하였으나 사서(史書)에서는 공식으로 왕이라 칭함을 얻지 못했다. 다만 고황후 여씨(高皇后呂氏)니, 측천 황후 무씨(則天皇后武氏)라 쓰고 있다. 하늘의 이치로 말하면 양(陽)은 강(剛)하고, 음(陰)은 유(柔)하며,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 것인데, 어찌 노구(老嫗)로 규방(閨房)을 나와서 국가의 정사를 결단(決斷)하는 것을 허락했단 말인가? 신라는 여자를 도와 일으켜 왕위에 앉게 하였으니, 진실로 세상을 어지럽힌 일이라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신라 선덕여주 11년, 고구려 영류왕 25년, 백제 의자왕 2년(642)

◯춘정월고구려가 동부 대인(東部大人) 천개소문(泉蓋蘇文)에 명하여 장성(長城)을 감독하여 쌓게 하였다.

개소문(蓋蘇文)은 일명 개금(蓋金)이라 하는데 성은 천(泉)씨이니, 자신이 물속에서 낳았다 하여 많은 사람을 현혹시켰다. 형체(形體)가 괴걸(魁傑)하고 의기(意氣)가 호일(豪逸)하였다. 그 아버지 동부대인 대대로(東部大人大對盧)가 죽으매 소문(蘇文)이 마땅히 뒤를 이을 것이나 나라 사람들이 그 잔인하고 포악한 것을 미워하여 그를 세우지 아니하였다. 소문은 머리를 조아리며 모든 사람에게 사과하고 섭직(攝職)할 것을 청하면서 ‘후일에 만일 옳지 않음이 있으면 비록 폐함을 당해도 후회하지 않겠다.’ 하니, 사람들이 측은히 여겨 허락하여 드디어 위(位)를 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장성의 수축을 감독하라는 명을 받자 남자들은 부역에 종사하고 여자들은 농사를 짓게 하여 백성이 조금도 쉬지 못하였다.

◯8월백제 장수 윤충(允忠)이 신라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합천(陜川) 을 함락시키고 성주(城主) 김품석(金品釋)을 죽였는데, 사지(舍知) 죽죽(竹竹)이 함께 죽었다.

이보다 먼저 이찬(伊飡) 김품석이 대야성 도독(大耶城都督)이 되어 막객(幕客) 금일(黔日)의 아내를 좋아하여 빼앗으니 금일이 원한을 품었다. 이에 이르러 백제 장수 윤충(允忠)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매, 금일이 내응하여 그 창고에 불지르니 성중이 소란하였다. 품석의 보좌인 아찬(阿飡) 서천(西川)이 성에 올라 윤충에게 말하기를,

“만약 죽이지 않는다면 성을 들어 항복하겠다.”

하니, 윤충이 대답하기를,

“만약 항복한다면 공과 함께 친하여 해와 같이 변치 않겠소.”

하였다. 서천이 품석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였다. 사지 죽죽이 그때 품석의 당하(幢下)가 되었었는데 말리면서 말하기를,

“백제는 반복이 무상한 나라이므로 믿을 수가 없다. 윤충이 말을 달콤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를 꾀려는 것이니, 만약 성을 나가면 반드시 살해될 것이다. 쥐같이 엎드려 삶을 구하는 것이 범처럼 싸우다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으나, 품석이 듣지 않고 성문을 열어 먼저 군사를 내어 보내니, 백제군이 복병을 발하여 다 죽였다. 품석은 장졸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처자를 죽이고 스스로 목찔러 죽었다.

죽죽이 잔졸(殘卒)을 거두어 성문을 닫고 혼자서 항거하였다. 사지(舍知) 용석(龍石)이 죽죽에게 말하기를,

“지금 병세(兵勢)가 이와 같으니 필시 온전함을 얻지 못할 것이오, 살아서 투항하였다가 뒷날에 가서 공을 도모함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죽죽이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가 나를 죽죽(竹竹)이라 이름 지은 것은, 나로 하여금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말고 꺾어도 굽히지 말라 한 것이거늘, 어찌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항복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힘껏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어 용석과 더불어 함께 죽으니, 윤충은 1천여 인을 사로잡아 나라 서쪽 주현(州縣)에 나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머물러 성을 지키게 하였다. 백제 왕은 윤충이 공을 세운 데 대해 말 20필, 곡물 1천 석을 상으로 주었다. 신라 왕은 죽죽에게 급찬(級飡)을, 용석에게는 대내마(大奈麻)를 추증(追贈)하고, 그 처자를 왕도(王都)로 옮기어 후한 상을 주었다.

◯동10월고구려에서는 천개소문(泉蓋蘇文)이 그 임금 건무(建武)를 시해(弑害)하고서 왕의 조카 장(藏)을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개소문이 아버지를 이은 이후 흉포하여 많은 불법을 저지르니, 모든 대인(大人)과 왕이 비밀히 의논하여 죽이려 하다가 일이 누설되자 소문이 ‘부병(部兵)을 다 모아 열병한다.’ 하고 성 남쪽에서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려놓고 모든 대인을 불러 참관하게 하고는 그들이 이르매 다 죽이니 모두 백여 인이나 되었고 드디어 궁궐에 들어가 왕을 시해하여 두어 동강으로 잘라 개천 가운데에 버리고 영류왕(榮留王)이라고 하였다. 왕의 아우 대양(大陽)의 아들인 장(藏)을 세워 왕으로 삼으니, 이가 보장왕(寶藏王)이다. 소문이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니 막리지는 관명(官名)으로, 당(唐)의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중서령(中書令)을 겸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에 원근을 호령하고 국사(國事)를 마음대로 처리하니 아무도 감히 무어라 하지 못하였다. 몸에는 다섯 개의 칼을 찼으며 의복과 관(冠)과 신[履]은 다 금채(金綵)로 장식하였고 팔을 휘저으며 걸음을 높이 걸어 제 위에는 사람이 없는 듯이 하니 좌우에서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매양 말을 타고 내릴 때면 반드시 귀인과 무장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밟고 오르내렸고, 나오고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대오(隊伍)를 펴서 앞에서 인도하며 길게 외치니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서 갱곡(坑谷)에 피하여 길에 보행자가 끊어지니 나라 사람들이 괴롭게 여겼다.

○ 신라가 종실(宗室) 김춘추(金春秋 604-661)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하니, 고구려는 그를 구류하였다가 얼마 지나서 석방하였다.

김춘추는 진지왕(眞智王)의 손자요 진평왕(眞平王)의 외손자요, 이찬(伊飡) 용춘(龍春 용수(龍樹)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의젓하여 세상을 구제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 딸이 김품석(金品釋)의 아내가 되었는데 대야성(大耶城) 싸움에서 죽었다. 춘추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둥에 의지하여 종일토록 서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는 말하기를,

“아아! 대장부로서 원수 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하랴!”

하고, 곧 주(主)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신(臣)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원병을 청하여 원수를 갚기를 원하옵니다.”

하니, 주가 허락하였다.

길을 떠나려 할 적에 김유신(金庾信 595-673)에게 이르기를,

“나와 그대는 고굉(股肱)이 되어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을 함께 하였소.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그대는 어떻게 대처하겠소?”

하니, 유신이 말하기를,

“그렇게 된다면 복(僕)의 말발굽이 반드시 두 왕[兩王 고구려ㆍ백제 왕을 가리킨다]의 궁정을 짓밟을 것이오.”

하였다. 춘추가 드디어 유신과 더불어 맹서하기를,

“육순(六旬)이면 의당 돌아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오. 이 기간이 지나면 다시 만날 수가 없을 것이오.”

하였다. 춘추가 길을 떠나 대매현(代買縣)지금 미상 에 이르니, 현 사람 두사지(豆斯智)가 청포(靑布) 3백 필(疋)을 주었다. 고구려 지경(地境)에 들어가니 고구려 왕이 평소 그의 이름을 들은지라 대로(對盧) 개금(蓋金)을 보내 객사에 안내하고 잔치를 거듭 베풀었다. 혹자가 고구려 왕에게 말하기를,

“신라 사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옵니다. 이제 온 것은 우리 나라의 형세를 살피기 위한 것이오니 왕께서는 도모하소서.”

하였다. 왕은 드디어 병위(兵衛)를 엄하게 하고 그를 보니, 춘추가 말하기를,

“지금 백제가 무도(無道)하게 우리 강역(疆域)을 침략하니, 원컨대 대국(大國 고구려)의 위엄을 의지하여 한번 설욕하려고 하신(下臣)으로 하여금 명을 하집사(下執事)에게 전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마현(麻峴)ㆍ죽령(竹嶺)은 본디 우리 땅이다. 땅을 돌려주면 군사를 보내줄 수 있다.”

하매, 춘추가 대답하기를,

“신이 명을 받들어 원병을 빌러 왔는데, 대왕께서는 환란을 구해 줄 뜻은 없으시고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달라 하시니 신은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가두었다. 춘추가 청포(靑布)를 고구려 왕의 총신(寵臣)인 선도해(先道解)에게 뇌물로 주고 방면해 줄 것을 요구하니, 선도해가 춘추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거북과 토끼의 이야기[龜兎之說]’를 들었는가? 예전에 동해 용녀(龍女)가 가슴병을 앓았는데 의원이 ‘토끼의 간을 얻으면 치료될 수 있다.’ 하였다. 그러나 바다 속에 토끼가 없어 용왕(龍王)이 근심하자 거북 한 마리가 ‘내가 구해올 수 있다.’ 하고, 드디어 뭍에 올라가 토끼를 보고 ‘바다 가운데 섬 하나가 있는데 맑은 샘물에 흰 돌이 있고 숲이 우거져서 좋은 실과가 있고 추위와 더위가 없고 사나운 매들이 침입하지 못하니, 네가 만일 가기만 하면 걱정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고, 토끼를 업고 2~3리 들어가다가 토끼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지금 용녀가 병이 났는데 꼭 토끼 간이 약이 된다기에 노고를 꺼리지 않고 너를 업고 가는 것이다.’ 하매, 토끼가 말하기를 ‘아! 나는 신명(神明)의 후손으로 능히 오장(五臟)을 꺼내 씻어서 집어 넣는데, 요즘 조금 마음이 번뇌하여 간을 꺼내서 씻어 잠시 바위 밑에 두었는데 너의 꾀는 말을 듣고 바로 왔으니 간은 아직 거기에 있다. 돌아가서 간을 가지고 오면 너는 구하는 바를 얻을 것이요 나는 비록 간이 없다 해도 살 수 있으니, 어찌 양편이 서로 마땅하지 않으랴!’ 하자, 거북은 그 말을 믿고 곧 되돌아서 겨우 해안에 올라오자 토끼가 탈출하여 풀속으로 들어가서 거북에게 말하기를 ‘이 어리석은 거북아, 어찌 간이 없이 살 수 있겠느냐!’ 하니, 거북은 섭섭해 하며 말 못하고 갔다 하였으니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였다. 춘추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고구려 왕에게 글을 보내 아뢰기를,

“이령(二嶺)은 본래 대국의 땅이오니 신이 돌아가 돌려드릴 것을 청하겠습니다.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서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춘추가 고구려에 들어간 지 이미 60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매, 유신은 왕께 고구려를 칠 것을 아뢰고 죽기를 각오한 병사 1만 인을 모집하여 말하기를,

“나는 듣건대 ‘위기를 보면 목숨을 바치고, 난(亂)에 임하여는 몸을 잊으라’ 하였으니, 대저 한 사람이 죽음으로 백 사람을 감당하고 백 사람이 죽음으로 천 사람을 감당하고 천 사람이 죽음으로 만 사람을 당하면, 가히 천하를 횡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웃 나라가 무도(無道)하여 나라의 재상이 붙잡힘을 당했으니 뜻 있는 인사와 어진 사람들이 부심(腐心)할 때이다. 그런데 죽음을 두려워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행군하여 한강(漢江)을 건넜다. 그때에 고구려 첩자(諜者) 부도(浮屠) 덕창(德昌)이 사람을 시켜 달려가 왕께 고하니 왕은 이미 춘추의 서신을 보았고, 또 첩자의 말도 들었으므로 드디어 춘추를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내니, 춘추가 지경(地境)을 빠져나와서 전송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국가의 강토는 사신이 마음대로 할 바가 아니다. 지난 번에 한 말은 죽음에서 도망하자는 의도에서 한 말이었다.”

하였다.

■신라 선덕여주 12년, 고구려 왕 장(藏) 2년, 백제 의자왕 3년(643)

◯ 고구려가 당에 사신을 보내 도교(道敎)를 청하였다.

개소문이 왕에게 고하기를,

“삼교(三敎 유교(儒敎)ㆍ불교(佛敎)ㆍ도교(道敎))는 솥발[鼎足]과 같아서 하나라도 뺄 수 없는데, 지금 유교(儒敎)와 불교(佛敎)는 아울러 일어났지만 도교(道敎)는 번성하지 못하오니 사신을 당(唐)에 보내서 구해 오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황제가 숙달(叔達) 등 8인을 보내고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주니, 왕이 기뻐하여 절[僧寺]을 비워 그곳에 살게 하고 도사(道士)를 높여 유사(儒士) 이상으로 여겼다. 도사 등을 나누어 보내 국내 산천을 두루 다니면서 진압하게 하고, 또 평양(平壤)에 용언성(龍堰城)을 쌓았다. 고구려 중 보덕(普德)은 불교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보고 남으로 완산주(完山州 전주(全州))로 달아났다.

◯추9월백제가 신라를 침략하니, 신라는 당(唐)에 위급을 고하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군사를 연합하여 신라 당항성(黨項城) 지금 미상. 지금 남양(南陽) 등의 땅인 듯함 을 취하여 당(唐)의 조빙하는 길을 끊을 것을 모의하니, 신라왕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위급함을 알리고, 말하기를,

“백제가 일찍이 40여 성을 취하고 또 고구려와 더불어 화친하여 장차 대거 내침하려 하니 사직(社稷)을 보존하기 어렵습니다. 일부 군사를 보내 구원해 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황제가 사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실로 그대의 나라가 두 나라의 침입을 받는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 그대 나라에서는 무슨 기모(奇謀)를 써서 전월(顚越)을 면하려 하는가?”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우리 왕이 사정은 궁하고 계교가 다하여 오직 대국에 위급함을 알려 보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내가 다소의 변방 군사를 발하여 거란ㆍ말갈 군사를 이끌고 바로 요동(遼東)으로 들어가면 두 나라가 스스로 해산될 것이니 1년은 완화할 수 있겠으나, 이후 두 나라가 우리 군사가 계속되지 않는 것을 알면 도리어 침략을 마음대로 하여 그대 나라는 편안치 못할 것이니 이것이 첫째 계책이 되는 것이요, 내가 그대 나라에 주포(朱袍)와 단치(丹幟) 수천을 주어 두 나라 군사가 이를 때에 진열하여 세우면 저들이 보고 우리 군사가 내원한 것으로 알고 반드시 다 달아날 것이니 이것이 둘째 계책이요, 백제가 바다가 험한 것을 믿고 병계(兵械)를 수리하지 아니하며 남녀가 어지러이 섞여서 서로 모여서 연회(燕會)만 베풀고 있으니, 우리가 갑병(甲兵)을 거느리고 가만히 배를 띄워 바로 그 땅을 엄습하면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 나라가 부인을 주(主)로 삼아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는 터이므로 내가 친척을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으로 삼되 홀로 가서 왕노릇할 수 없으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어 호위(護衛)하게 하고, 너의 나라가 편안한 때를 기다려 그대들이 스스로 지키도록 맡겨 두는 것이 셋째 계책이다. 그대는 앞으로 어떠한 계책을 따를 것인가 잘 생각하여 보라.”

하였다. 사신이 능히 대답을 못하자 황제는 그가 용렬하여, 위급을 고하고 원병을 청할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 탄식하였다. 백제왕은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 당에 가서 원병을 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군사를 파했다.

◯당이 사농승(司農丞) 상리 현장(相里玄獎)을 보내어, 고구려와 백제에게 신라와 더불어 화평하라 칙유하였다.

조칙에 이르기를,

“신라는 우리 나라를 섬기고 조빙도 끊이지 않았으니, 그대 나라는 마땅히 백제와 함께 각기 병기를 거두어야 할 것이다. 만약 다시 이를 침공한다면, 명년에 군사를 발하여 그대 나라를 공격할 것이다.”

하였다.

■신라 선덕여주 13년, 고구려 왕장 3년, 백제 왕 의자 4년(644)

◯11월 황제가 친히 고구려를 정벌한다는 조칙을 내리고, 제군(諸軍) 및 신라ㆍ백제ㆍ해(奚 동호족(東胡族))ㆍ거란(契丹)에 영을 내려 길을 나누어 공격케 하였다.

이에 앞서 황제가 염입덕(閻立德)을 명하여 홍주(洪州 강서성(江西省) 남창(南昌))ㆍ요주(饒州 강서성(江西省) 파양(坡陽))ㆍ강주(江州 호북성(湖北省) 소무창(小武昌)) 3주에 나아가 전선 4백 척을 만들어 군량을 실어오게 하고,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 등을 보내어 유주(幽州 북경(北京))ㆍ영주(營州 하북성(河北省) 역주(易州)) 군사 및 거란(契丹)ㆍ해(奚)ㆍ말갈(靺鞨)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요동(遼東)을 공격하여 그 정세를 보아 하남 제주(河南諸州)의 군량을 운반하여 바다로 가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황제가 스스로 토벌하고자 북쪽 군량을 영주(營州)로 수송하고, 동쪽의 양곡은 고대인성(古大人城)에 저장하였다.

11월, 황제가 낙양(洛陽)에 이르러, 전 의주자사(宜州刺史) 정원숙(鄭元璹)은 일찍이 수 양제(隋煬帝)를 따라 고구려를 정벌한지라, 행재소(行在所)에 불러 나오게 하여 물으니 대답하기를,

“요동(遼東)은 길이 멀어 군량을 운반하기 어려우며, 동이(東夷)들은 성을 잘 수비하므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오늘날은 수(隋)에 비교될 바 아니니 공(公)은 다만 들어주기만 하면 되오.”

하였다. 장검 등이 요수(遼水)가 넘쳐서 오래 건너지 못하자, 황제가 겁을 내는 것이라 여겨 그를 불러들이매 그 산천(山川)의 험하고 평이한 것과 수초(水草)의 좋고 나쁨을 아뢰니, 황제가 기뻐하며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강회(江淮)ㆍ영협(嶺峽)의 군사 4만 명과 장안(長安)ㆍ낙양(洛陽)에서 모집한 병사 3천과 전함(戰艦) 5백 척을 거느리고 내주(萊州 산동반도(山東半島))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나가게 하고, 이세적(李世勣)으로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을 삼아 보기(步騎) 6만 및 난주(蘭州 감숙성(甘肅省) 동부(東部))ㆍ하주(河州) 등 3주(州)의 항복한 호병[降胡兵]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나아가 합세하여 함께 전진하여 유주에 모이게 하고, 행군총관(行軍摠管) 강행본(江行本)과 소부 소감(少府小監) 구행엄(丘行淹)을 보내어 먼저 공인(工人)들을 독촉하여 안라산(安蘿山)에서 운제(雲梯)와 충차(衝車)를 제조하게 하니, 때에 원근에서 응모하는 용사(勇士)와 성을 공격하는 기계(器械)를 바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황제는 또 손수 조서를 지어 천하에 유시하기를,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하니 인정에서 어찌 참을 수가 있는가? 유ㆍ계(幽薊)에 순행하고 요ㆍ갈(遼碣)로 가서 죄를 물으려 하니, 지나는 바 영돈(營頓 진영(陣營))에서는 노력과 비용을 쓰지 말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옛날에 수 양제(隋煬帝)는 그 아랫사람들을 포학하게 부렸는데, 고구려 왕은 그 아랫사람을 어질게 다스렸다. 난을 생각하는 군사로써 평화로운 백성을 쳤기 때문에 이기지 못한 것이다. 이제 꼭 이길 수 있는 방도를 대강 말하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치는 것, 둘째는 순리로써 역리를 치는 것, 셋째는 다스려진 자로써 어지러운 자를 이기는 것, 넷째는 안일로써 피로를 대적하는 것, 다섯째는 희열로써 원망을 당하는 것이니 어찌 이기지 못할 것을 근심하리요. 백성들에게 포고하노니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이때에 무릇 숙사 설비의 기구를 감(減)한 것이 태반이었다. 제군(諸軍) 및 신라ㆍ백제ㆍ해(奚)ㆍ거란(契丹)에 조서를 내려 길을 나누어 이를 치게 하였다.

■신라 선덕여주 14년, 고구려 왕장 4년, 백제 왕 의자 5년(645)

◯하4월 당(唐)의 제군(諸軍)이 현도 신성(玄菟新城)에 모여 군사를 나누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황제가 낙양(洛陽)으로부터 정주(定州)에 이르러 황태자로 하여금 국정(國政)을 감독하게 하고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요동(遼東)은 본래 중국의 땅인데 수씨(隋氏)가 네 차례 출병을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짐이 지금 동정(東征)하는 것은 중국을 위하여는 자제(子弟)들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에 대해서는 군부(君父)의 치욕을 씻어주려 함이다. 또한 사방이 크게 평정하여졌으나 오직 이곳만을 평정하지 못하였으므로 짐이 늙기 전에 사대부(士大夫)들의 남은 힘을 써서 그곳을 취하려 한다.”

하였다. 황제가 정주(定州)를 출발하는데 몸소 궁시(弓矢)를 차고 손수 안장 뒤에 우의(雨衣)를 매어달았다.

이세적(李世勣 594-669)의 군사는 유성(柳城 조양(朝陽))을 떠나 형세를 크게 떨치며 회원진(懷遠鎭)으로 나가는 것처럼 하면서, 군사를 몰래 북쪽으로 용도(甬道 샛길)로 하여 고구려가 뜻하지 않은 데로 나가게 하였다. 하4월 초하루 무술에 이세적이 통정진(通定鎭)으로부터 요수(遼水)를 건너 현도(玄菟)에 이르니, 고구려는 크게 놀라서 성읍(城邑)은 다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임인(壬寅)에 부총관(副摠管)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에 이르렀고, 절충도위(折衝都尉) 조삼량(曹三良)이 10여 기(騎)를 이끌고 바로 성문으로 달려드니, 성중이 놀라 동요되어 감히 나오는 자가 없었다. 장검(張儉)은 호병(胡兵)을 이끌고 전봉(前鋒)이 되어 나아가 요수를 건너 건안성(建安城) 호 삼성(胡三省)이 이르기를 “당(唐) 건안성(建安城)은 요동(遼東) 서남(西南) 3백 리에 있으니 곧 한(漢)의 평곽현(平郭縣)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지금의 개주(蓋州) 동북 경계로 생각된다 으로 달려가서 고구려 군사를 파하고 수천급(級)을 베었다.

○당(唐)의 이세적(李世勣)이 개모성(蓋牟城)을 함락하였다.

임자(壬子)에, 이세적과 도종이 개모성을 공격하여 계해(癸亥)에 그것을 함락하고 인구 2만과 양곡 10여만 석(石)을 노획하였다. 처음에 개소문이 가시성(加尸城) 지금 미상 에 7백 명을 보내어 개모(蓋牟)를 방수케 하였더니 이때에 와서 사로잡히게 되자, 종군하여 힘을 다할 것을 청하매, 후에 황제가 그들을 보고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리를 위하여 싸운다면 고구려는 반드시 너희들의 처자를 살해할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자고 일가(一家)를 멸하는 것은 내가 차마 못하겠다.”

하고, 다 양식을 주어 보내고 개모성(蓋牟城)을 개주(蓋州)라고 하였다.

◯5월당의 장량(張亮)이 비사성(卑沙城 만주(滿洲) 대련(大蓮) 부근)을 함락하였다.

장량이 주사(舟師)를 이끌고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 비사성(卑沙城) 즉 비사성(卑奢城) 을 엄습하였는데, 그 성은 사방이 절벽이고 오직 서문(西門)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 장군 정명진(程名振)이 군사를 이끌고 밤에 이르고, 부총관(副摠管) 왕대도(王大度)가 먼저 올랐다. 5월 기사(己巳)에 성을 함락하여 남녀 8천 구를 획득하였다. 총관(摠管) 구 효충(丘孝忠) 등을 보내어 압록수(鴨綠水)에서 군사를 연습하여 위엄을 뽐내었다.

○ 황제가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성(遼東城)을 함락했다.

이세적이 전진하여 요동성 밑에 이르렀고 경오(庚午)에 황제가 요택(遼澤)에 이르렀는데 진흙 수렁길이 2백여 리라 인마(人馬)가 통할 수 없으므로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펴고 다리를 놓아 군사들이 쉬지 않고 행군하여 임신(壬申)에 요택 동쪽을 건넜다. 을해(乙亥)에 고구려왕이 신성(新城)ㆍ국내성(國內城)의 보병과 기병(騎兵) 4만을 내어서 요동을 구원케 하니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4천 기(騎)를 거느리고 이들을 맞아 싸우매, 군중(軍中)이 다들 ‘군사의 수가 너무나 차이가 있으니 호(壕)를 깊이 하고 성루를 높이고서 거가(車駕)가 이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도종이 말하기를,

“적은 군사가 많음을 믿고 우리를 가벼이 하는 마음이 있으며, 멀리 오느라고 피곤할 것이니 공격하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 마땅히 길을 깨끗이 하고 승여(乘輿)를 기다릴 것이지 다시 적을 군부(君父)에게 남겨 준단 말인가?”

하였다. 과의도위(果毅都尉) 마문거(馬文擧)가 말을 채찍질하여 적진에 달려가니 이르는 곳마다 다 휩쓸리었다. 이미 싸움이 전개되었는데 행군총관(行軍摠管) 장군예(張君乂)가 퇴주하여 당병(唐兵)이 불리하게 되자, 도종이 높은 곳에 올라 고구려 군진(軍陣)이 어지러운 것을 바라보고 날쌘 기병 수십 명(《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수천 명)과 함께 돌격하였는데 이세적이 군사를 이끌고 도우니 고구려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천여 사람이나 되었다.

정축(丁丑)에, 황제가 요수(遼水)를 건너와서 다리를 철거하여 사졸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주둔하고서 제장(諸將)을 위로하고 장군예를 목베어 죽였다. 황제가 친히 수백 기(騎)를 거느리고 요동성 아래에 이르러 사졸들이 흙을 져다가 참호를 메우는 것을 보고, 황제가 그 더욱 무거운 것을 진 자의 짐을 나누어 말 위에서 들어 주니, 시종 관원들도 다 흙을 져다가 성(城) 밑에 놓았다. 이때에 이세적이 성을 공격하는데 밤낮 12일을 쉬지 않았다. 황제가 정병(精兵)을 이끌고 와서 합세하여 성을 수백 겹으로 에워싸니 북 소리와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성 안에는 주몽(朱蒙)의 사당(祠堂)이 있고, 사당에 쇠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이르기를 전연(前燕) 시대에 하늘에서 내린 것이라 하였다. 이때 포위가 다급하게 되자 수장(守將)이 미인(美人)으로 신무(神巫)를 꾸며 놓고 말하게 하기를,

“주몽이 기뻐하니 성이 완전할 것이다.”

하니, 군사들의 마음이 그 말을 믿고 안정이 되었다. 이세적이 포차(砲車)를 벌여 놓고 큰 돌을 쏘아대니 3백 보(步)를 지나 맞는 곳마다 곧 파괴되었다. 고구려 사람이 나무를 쌓아 다락을 만들고 동아줄로 얽어 포석을 막았으나 당해 내지를 못했다. 다시 충차(衝車)로 비옥(陴屋 성 위의 담)을 쳐부수었다. 이때에 백제에서 금휴개(金髹鎧)을 올리고, 또 현금(玄金)으로 문개(文鎧)를 만들어 군사를 입혀 싸우게 하니 갑옷 빛이 햇빛에 눈이 부셨다. 갑신(甲申)에 남풍이 세차게 불므로 황제가 날랜 군사를 보내어 충차 끝에 올라가 서남루(西南樓)에 불을 지르니 불이 성 안에 번지어 붙었다. 휘하병을 이끌고 성을 오르니 고구려 군사가 힘을 다해서 싸워 전사한 자가 만여 인이었다. 당병(唐兵)이 드디어 성안으로 들어가서, 승병(勝兵) 1만여 인과 남녀 4만 구(口)를 얻고 그 성을 요주(遼州)로 만들었다

◯황제가 백암성(白巖城)에 진군하여 공격하니 성주(城主) 손대음(孫代音)이 항복하였다.

을미일(乙未日)에 황제가 백암성에 진군하고 병신일(丙申日)에 오골성주(烏骨城主) 지금 심양(瀋陽)의 영해현(寧海縣)이 바로 그 땅이다 가 군사 1만여 명을 보내어 백암성을 성원하니, 당장(唐將) 계필 하력(契苾何力)이 8백 기(騎)로 쳐서 1천여 급(級)을 베었다. 이세적은 성 서남쪽을 치고 황제는 그 서북에 임하니, 성주(城主) 손대음(孫代音)이 몰래 심복(心腹)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청하고 성 위에서 도월(刀鉞)을 던지는 것으로 신호를 하기로 하고, 또 말하기를,

“노(奴 손대음 자신을 가리킴)가 항복하려 하오나 성중(城中)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하니, 황제가 기를 사자(使者)에게 주며 말하기를,

“반드시 항복하려거든 이 기를 성 위에 세우라.”

하였다. 손대음이 그 기를 세우니 성중의 사람들이 당병(唐兵)이 벌써 성에 오른 것으로 알고 모두 그 뜻을 따랐다. 황제가 요동성(遼東城)을 함락하자, 백암성(白巖城)이 항복을 청하였다가 이윽고 후회하므로, 황제가 그 반복(反覆)하는 것에 노하여 군중에 영을 내리기를,

“성을 빼앗으면 사람과 물건들을 다 전사(戰士)에게 상줄 것이다.”

하였다. 이세적이 황제가 장차 그 항복을 받으려는 것을 보고 아뢰기를,

사졸들이 다투어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그 죽음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노획을 탐내서인데, 지금 성이 함락되려는 때에 어찌 다시 그 항복을 받아서 전사의 마음을 외롭게 하시렵니까?”

하니, 황제가 말에서 내려 사과하기를,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군사를 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이 차마 할 수 없소. 장군 휘하의 공이 있는 자는 짐이 창고의 물건으로 상줄 것이니 장군을 인하여 이 성의 인명을 살리려 하오.”

하니, 이세적이 곧 물러났다. 성 중의 남녀 1만여 구(口)를 얻어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고, 곧 음식을 주고 80세 이상은 포백(布帛)을 주되 차등을 두었으며, 백암성에 있던 다른 성의 병사들도 다 위로하고 양곡과 병기 등을 주어 그들 마음대로 가게 하였다. 이에 요동성 장사(長史)는 부하에게 죽은 바가 되었는데 그 성사(省事) 벼슬 이름인데 이직(吏職)이다. 후위(後魏) 이래로 있었다. 가 장사의 처자를 받들고 백암성으로 달아나 있었으므로 황제가 그 의리가 있음을 측은히 생각하여 포백(布帛) 5필(匹)을 주고 장사를 위하여 영여(靈轝)를 만들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백암성으로 암주(巖州)를 삼고 손대음으로 자사(刺史)를 삼았다.

○황제가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여 성 밑에서 그 구원병을 대파하니, 고구려 장수 고연수(高延壽)ㆍ고혜진(高惠眞)이 항복하였다.

황제가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성을 공격하니, 정사일(丁巳日)에 고구려 북부의 누살(耨薩) 고연수와 남부의 누살 고혜진이 고구려와 말갈(靺鞨)군사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지금 고연수의 계책에 셋이 있다. 바로 군사를 이끌고 전진하여 안시성을 연(連)하여 보루(堡壘)를 만들고 높은 산의 험한 곳에 웅거하여 성 중의 식량을 먹으면서 말갈의 군사를 놓아 우리의 우마(牛馬)를 약탈하면,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여도 빨리 함락하지 못하고 돌아가고자 하면 진흙 수렁에 막히게 되매 가만히 앉아서 우리 군사를 곤궁에 빠뜨리게 되리니 이것이 상책(上策)이요, 성 중의 무리를 빼내어 그들과 함께 밤에 도망하는 것이 중책(中策)이요, 지능을 헤아리지 않고 와서 우리와 싸우는 것이 하책(下策)이다. 경(卿)들은 두고 보라. 반드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사로잡히는 것이 내 눈 안에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 고구려에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란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가 많고 매사에 익숙하였다. 그가 고연수에게 말하기를,

“진왕(秦王)은 안으로 군웅(群雄)을 베어 없애고, 밖으로 이적(夷狄)을 굴복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일세의 뛰어난 인물이다. 지금 해내(海內)의 무리를 몰아 왔으니 대적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 계획 같아서는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지 않고 그대로 오래 날짜를 끌면서 기병(奇兵)을 나누어 파견하여 그들의 군량 운반하는 길을 끊는 것만 같지 못하니, 양식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하여도 갈 길이 없을 것이매, 곧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고연수가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바로 전진하여 안시성 40리 지점까지 갔다. 황제가 그들이 머뭇거리며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좌위 대장군(左衛大將軍) 아사나두이(阿史那杜爾)를 명하여 돌궐병(突厥兵) 1천 기를 거느리고 이들을 유인하도록 하였다. 싸움이 시작되자 거짓 도주하니 고연수가 말하기를,

“상대하기 쉽다.”

하고, 다투어 나아가 성 동남쪽 8리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여 진을 치매 황제가 곧 장손무기(長孫無忌) 등과 함께 수백 기를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니, 산세가 복병하고 출입할 만한 곳이며, 고구려와 말갈이 군사를 합하여 진을 쳤는데 방(方)이 40리나 되었다. 황제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으니,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말하기를,

“고구려가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왕사(王師)를 대항하니, 평양의 수비는 반드시 허약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에게 정졸(精卒) 5천 명을 빌어 주시어 그 본거지를 덮치게 하신다면 수십만 군사를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황제가 응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연수를 속여 말하기를,

“나는 그대 나라의 강신(强臣 연 개소문(淵蓋蘇文)을 가리킨다)이 군주를 시해한 까닭으로 죄를 물으러 왔다가 싸우기에 이르렀으나 이는 나의 본뜻이 아니고, 그대 나라에 들어와 추속(蒭束)을 공급받지 못하였으므로 그대 나라의 몇 성(城)을 취하였으나 그대 나라가 신례(臣禮)를 닦는다면 빼앗은 것을 꼭 돌려주겠다.”

하니, 고연수가 그것을 믿고 다시 방비를 하지 않았다. 황제가 밤에 문무관원(文武官員)을 불러 일을 계획하고, 이세적에게 명하여 보기(步騎) 1만 5천을 거느리고 서령(西嶺)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는 정병(精兵) 1만 1천을 거느리고 기병(奇兵)이 되어 산 북쪽으로부터 협구(峽口)로 나가서 그 뒤를 치도록 하며, 황제는 친히 보기(步騎) 4천을 거느리고 고각(鼓角)을 끼고 기치(旗幟)를 뉘고 북쪽 산 위로 올라가서 제군(諸軍)에 칙유(勅諭)하여 ‘고각(鼓角)을 울리면 일제히 내달아 분격(奮擊)하도록 하라’ 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수항막(受降幕)을 조당(朝堂) 곁에 치도록 하였다. 이날 밤에 유성(流星)이 고연수의 군영(軍營)에 떨어졌다.

무오일(戊午日)에 고연수 등이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군사를 내어 싸우려고 하였다. 황제가 장손무기의 군영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 명하여 고각(鼓角)을 울리고 기치를 들게 하니, 제군(諸軍)이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며 함께 진격하였다. 고연수 등이 군사를 나누어 이를 막으니 대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눌리게 되어 떨치지 못하고 척후병이 또 알리기를,

“영공(英公)의 지휘하는 흑기(黑旗)가 포위되었다.”

하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마침 우레와 번개가 일어나더니, 응모되어 군중(軍中)에 있던 용문(龍門) 사람 설인귀(薛人貴)가 기이한 옷을 입고 크게 소리치며 진(陣) 중에 뛰어들어가니 가는 곳마다 상대가 없어 고구려 군사가 흩어지고 쓰러지매, 대군이 승세를 타 나아가니 고구려 군사가 크게 무너져서 전사한 자가 2만 명이나 되었다. 고연수 등이 잔여 군사를 이끌고 산을 의지해서 스스로 고수하니 황제가 제군(諸軍)에 명하여 그들을 포위하고, 장손무기는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그들의 돌아갈 길을 끊어 버렸다. 기미일(己未日)에 고연수와 고혜진은 그의 무리 3만 6천 8백 인을 거느리고 항복하기를 청하고 군문으로 들어와서 엎드려 명(命)을 청하니, 황제가 그에게 말하기를,

“동이소년(東夷少年)이 해곡(海曲)에서는 날뛰었으나 굳은 갑병을 꺾고 승리를 결정하는 데 이르러서는 아직 마땅히 늙은이[老人 당(唐) 태종(太宗)자신을 가리킨다]에 미치지 못한다. 지금에도 다시 천자와 더불어 싸우겠는가?”

하고, 마침내 누살(耨薩) 이하 관장(官長) 5백 인 신ㆍ구당서(新舊唐書)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3천 5백임. 을 뽑아 융질(戎秩 군사의 품계)을 주어 내지(內地)로 옮기고, 나머지는 다 놓아 주되 말갈의 3천 3백 인을 거두어 다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말 5만 필과 소 5만 두와 명광개(明光鎧) 1만 영(領)을 획득했고, 그 밖의 다른 기계(器械)도 이와 맞먹었다.

고구려는 온 나라가 크게 놀래어, 후황성(後黃城)과 은성(銀城)은 다 스스로 도망가니 수백 리의 인가(人家)에 다시 밥 짓는 연기를 볼 수가 없었다. 황제가 역서(驛書)로 태자에게 알리기를,

“짐이 장수 노릇함이 이러하니 어떠한가?”

하고, 행차한 산을 이름하여 주필산(駐蹕山 요동(遼東) 해성(海城) 동남쪽의 6산(山))이라 하였다.

○ 처음에 신라 사람 설계두(薛罽頭)가 일찍이 친우들과 더불어 뜻을 말하기를,

“국가에서 사람을 등용하되 오직 골품(骨品)만 따지어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홍재(鴻材) 걸공(傑功)이 있어도 스스로 일어날 수 없으니, 나의 소원은 서쪽으로 중국에 들어가 분발하여 불세(不世)의 재략(材略)을 뽐내어 비상한 공을 세우고 높은 벼슬을 하여 천자의 곁을 출입해야만 만족하겠다.”

하고, 해선(海船)을 따라 당(唐)에 들어갔었는데, 이번 역사에 스스로 천거하여 좌무위 과의(左武衛果毅)가 되어 적진에 깊이 들어가 맹렬히 싸우다가 죽으니, 공(功)이 1등이었다. 황제가 물어 신라 사람이란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도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여 망설이며 앞서지 못하였는데 외국 사람이 우리를 위해 죽었으니, 무엇으로 그 공을 갚으리요.”

하고 종자(從者)에게 물어 그의 평생의 원을 듣고 어의(御衣)를 벗어서 그를 덮어주고, 대장군(大將軍)을 추증(追贈)하고 예식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

추7월 당(唐)의 장량(張亮)이 고구려 군사를 건안성(建安城) 아래에서 파하였다.

장량의 군사가 건안성 아래에 이르러 벽루(壁壘)를 완전히 하지 못하였는데 고구려 군사가 갑자기 이르자 군중(軍中)이 놀라 동요하였다. 장량은 본래 겁 많은 사람인데 호상(胡床)에 걸터앉은 채 똑바로 응시하고 말이 없으니 장사(將士)들이 그것을 보고 다시 용맹스럽게 여겨 힘껏 싸워 격파하였다.

8월 개소문이 말갈(靺鞨)로 하여금 설연타(薛延陁 흉노(匈奴)의 별종(別種))에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황제가 동정(東征)할 때에 설연타가 조공하여 왔는데, 황제가 그 사신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가한(可汗)에게 말하라. 지금 내가 동으로 고구려를 정벌하니, 너희가 능히 입구하려거든 빨리 오라고.”

하니, 진주가한(眞珠可汗)이 사신을 보내 치사하고 발병(發兵)하여 군사를 돕겠다고 청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개소문이 말갈을 시켜서 진주(眞珠)를 달래고 후한 뇌물을 주었지만 진주는 당(唐)을 두려워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때에 개소문의 첩자(諜者) 고죽리(高竹離)가 당 후기(候騎 척후병)에 잡힌 바 되어 군문(軍門)에 나가니, 황제가 소견(召見)하고 결박을 풀어 주며 묻기를,

“어찌 그렇게 수척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샛길을 택하여 오느라 수일 동안 먹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명하여 먹을 것을 주고 말하기를,

“그대가 첩자(諜者)가 되었으니 마땅히 속히 반명(反命 복명(復命))을 하여야 할 것이다. 나를 위해서 개소문에 말을 전하되, ‘군중(軍中)의 소식을 알고 싶으면 사람을 곧바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보낼 것이지 어찌하여 샛길로 보내어 신고(辛苦)를 겪게 하느냐’고 하여라.”

하였다. 고죽리가 맨발이매 황제가 신을 주어 보냈다. 황제가 요동성 밖에 군영을 설치하는데, 다만 척후(斥候)를 분명하게 할 뿐 참호와 성루(城壘)를 만들지 아니하여 비록 그 성에 가까워도 고구려 사람들이 끝내 감히 나와 노략하지 못하였다.

황제가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9월에 조칙을 내려 반사(班師 군사를 이끌고 돌아감)하고 성주(城主)에게 합사 비단[縑] 1백 필을 주었다.

황제가 백암성(白巖城 요동성(遼東城) 남 평안(平安) 부근) 싸움에 이기자 이세적에게,

“내가 듣건대 ‘안시성은 험하고 군사들이 강하며 그 성주(城主)는 재주와 용맹이 있어 개소문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굴복하지 않았으므로 개소문이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서 그대로 맡겼다.’ 하며, ‘건안성(建安城)은 군사가 약하고 군량이 적다.’ 하니, 만약 불의에 나아가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니, 공은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라. 건안성이 떨어지면 안시성은 우리 복중(腹中)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 병법에 이른바, ‘성에는 치지 않고도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매, 대답하기를,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다 요동에 있으니, 지금 안시성을 지나서 건안성을 치다가 만일 고구려 사람이 우리의 양도(糧道)를 끊으면 장차 어찌 하오리까? 먼저 안시성을 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안시성이 함락되면 북을 울리며 나아가 건안성을 취할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좇았다.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니 안시성 사람들이 황제의 깃발을 보고 문득 성에 올라 북을 울리며 욕을 하니 황제가 노하매, 이세적이 성을 함락시키는 날에 남자는 다 묻어 버릴 것을 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게 지키므로 치기를 오래 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우리가 이미 몸을 대국에 맡겼으니 감히 그 성의를 다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빨리 큰 공을 이루시게 하여, 우리도 처자와 서로 만나려 합니다. 안시성 사람들이 그들의 가인(家人)을 아끼고 염려하여 스스로 싸우고 있으니 쉽사리 함락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고구려의 10만이 넘는 군사로써 당(唐)의 깃발을 바라보고 무너졌으니 나라 사람들의 간담(肝膽)이 터질 것이요, 오골성(烏骨城 압록강 서쪽 봉황성(鳳凰城) 부근) 누살(耨薩)은 늙어서 굳게 지키지 못하니, 군사를 옮기어 그곳에 가면 아침에 이르러 저녁에 이길 것이며, 그 나머지 길가의 작은 성(城)들은 반드시 바람에 쓰러지듯 무너져 달아날 것입니다. 그런 뒤에 그 자량(資糧)을 거두어 북을 울리며 전진해 나간다면 평양성도 반드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뭇 신하들이 또 말하기를,

“장량(張亮)의 군사가 비사성(卑沙城)에 있으니 그를 부르면 이틀 동안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두려워하는 틈을 타 힘을 합쳐 오골성(烏骨城)을 함락하고 압록수를 건너서 바로 평양성을 취하는 것이 이번 싸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장차 그 말을 따르려 하였는데 유독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말하기를,

“천자께서 친정(親征)하시는 것이 제장(諸將)과는 다르니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지금 건안성(建安城)과 신성(新城)의 오랑캐가 오히려 10만이 되는데, 만약 오골성으로 향한다면 다 우리의 뒤를 밟을 것이매 안시성을 격파하고 건안성을 취한 뒤에 거침없이 몰아나가는 것만 같지 못하니 이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곧 그만두매 제장들이 급히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황제가 성중에서 닭과 돼지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것을 듣고 이세적에게 말하기를,

“성이 포위된 지 오래되어 연화(烟火)가 날로 줄어들 텐데 지금 닭과 돼지가 크게 소리치는 것은 필시 그것을 잡아 병사들을 호궤시키고 밤을 타서 우리를 엄습하려 하는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병비(兵備)를 엄하게 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이날 밤에 고구려 군사 수백 명이 줄을 타고 성을 내려오매 황제가 그 소식을 듣고 스스로 성 밑에 이르러 군사를 불러 급히 치니, 고구려 군의 죽은 자가 수십 인이 되었고 나머지 군사는 퇴주하였다. 도종(道宗)은 군사를 동독하여 성 동남쪽에 토성(土城)을 쌓아 그 성을 침핍(侵逼)하니, 성중에서도 또한 그 성을 높게 증축하여 막았다. 사졸을 교대로 나누어 교전하는데 하루에 6~7차씩 되었고, 충차(衝車)로 돌을 쏘아 그 누첩(樓堞)을 파괴하면 성중에서 즉시 목책(木柵)을 세워 무너진 곳을 보완하였다. 도종이 발을 다쳤으나 밤낮으로 쉬지 않고 60일 동안 토산(土山)을 쌓았는데, 연인원 50만 명이 공을 들였고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도 두어 길이나 높아 성중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도종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토산 위에 진을 치고 적을 수비하게 하였는데, 산이 무너져 성을 누르매 성이 무너졌다.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군부(軍部)를 비웠었으므로 고구려 군사 수백 인이 성 무너진 곳을 따라 나와 싸워 마침내 토산을 빼앗아 웅거하고 참호를 만들어 지켰다. 황제가 노하여 부복애의 머리를 베어 진중에 돌려 보이고 제장에게 명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3일이 되어도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에 나와 죄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그대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다만 짐은 한무(漢武)가 왕회(王恢)를 죽인 것이, 진목(秦穆)이 맹명(孟明)을 살려 쓴 것만 같지 못하고, 또 개모성(蓋牟城)과 요동성(遼東城)을 격파한 공이 있으므로 그대를 특별히 용서한다.”

하였다. 황제가, 요동은 일찍 추워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사와 군마가 오래 머무르기가 어렵고 또 양식이 장차 떨어지려 하므로 군사를 돌리라고 명령하고, 먼저 요동(遼東)ㆍ개모(蓋牟) 2주의 호구(戶口)를 뽑아서 요수(遼水)를 건너게 하고 이에 안시성 아래에서 군사를 시위하고 돌아가니, 성중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성주(城主)가 성위에 올라 배사(拜辭)하니, 황제가 그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백 필을 주면서 임금을 잘 섬기라고 격려하였다. 이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기(步騎) 4만을 거느리고 후군이 되게 하였다. 을유일(乙酉日)에 요동에 이르고 병술일(丙戌日)에 요수를 건너니 요택(遼澤)이 진흙탕이어서 거마(車馬)가 통할 수가 없으므로,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에는 수레로써 다리를 만드는데, 황제가 친히 나무를 말채찍에 매어 역사(役事)를 도왔다. 동10월 초하루 병신일(丙申日)에 황제가 포구(蒲溝)에 이르러 말을 세우고 길 메우는 것을 동독하였고 제군(諸軍)이 발착수(渤錯水)를 건넜는데, 사나운 눈보라에 사졸들의 옷이 젖어서 죽는 자가 많으므로 길에 불을 피우고 기다리도록 명하였다. 무릇 고구려를 정벌하여 현도(玄菟)ㆍ횡산(橫山)ㆍ개모(蓋牟)ㆍ마미(磨米)ㆍ요동(遼東)ㆍ백암(白巖)ㆍ비사(卑沙)ㆍ협곡(夾谷)ㆍ은산(銀山)ㆍ후황(後黃) 등 10성(城)을 함락하고, 요(遼)ㆍ개(蓋)ㆍ암(巖) 등 3주(州)의 호구를 옮겨 중국에 들어간 것이 7만 명이었다. 고연수(高延壽)는 항복한 후로 늘 분하게 여기며 탄식하다가 얼마 후 근심으로 죽었고, 고혜진(高惠眞)은 마침내 장안(長安)에 이르렀다. 신성(新城)ㆍ건안(建安)ㆍ주필(駐蹕)의 삼대전(三大戰)에서 고구려 군사 및 당(唐) 병마(兵馬)의 죽은 것이 매우 많았다. 황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뉘우치며 탄식하기를,

“위징(魏徵)이 살아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걸음이 있게 하지 않았으리라.”

하였다.

○ 이때에 당(唐)의 군사가 사로잡은 고구려 백성이 1만 4천 구(口)였는데, 먼저 유주(幽州)에 모아놓고 장차 장사들에게 상을 주려 하였으나, 황제가 그들의 부자와 부부가 떨어져 흩어지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유사(有司)에 명하여 그 몸값을 평균하게 하여 다 전포(錢布)로 속죄하고 백성이 되게 하니, 즐거워 외치는 소리가 3일 동안 그치지 않았다. 황제가 경사(京師)에 돌아와서 이정(李靖)에게 이르기를,

“내 천하의 무리로써 작은 오랑캐[小夷]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매, 이정이 말하기를,

“이는 도종(道宗)이 해석할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도종(道宗)에게 물었다. 도종이 주필(駐蹕)에 있을 때에 허술한 틈을 타서 평양을 공격하자던 말로 갖추어 진술하니 황제가 서글프게 말하기를,

“당시는 급해서 내가 살피지 못했소.”

하였다.

■신라 선덕여주 15년, 고구려 왕장 5년, 백제 왕 의자 6년(646)

◯하5월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당(唐)에 가서 사죄하였으나, 당은 조칙을 내려 그 조공을 거절하였다.

고구려왕 및 개금(蓋金 개소문(蓋蘇文)의 별명)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아울러 두 여자를 바쳤다. 당초 황제가 장차 돌아가려 할 때 궁복(弓服)을 개금(蓋金)에게 주었는데, 개금이 받고도 사례하지 않고 또한 더욱 교만 방자하여 비록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기는 하나 그 말이 모두 궤탄(詭誕)하였으며, 또 당의 사신을 대접하는 것도 거만할 뿐더러 항상 변경의 틈을 엿보고, 누차 칙령을 내려 신라를 치지 말라고 하였으나 침릉(侵凌)을 그치지 않으므로 이에 이르러 조칙을 내려 그 조공을 받지 말라고 하고, 다시 고구려 토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또 말하기를,

어여쁜 여자는 사람들이 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친척을 떠나 그 마음이 상할 것을 불쌍히 여겨서 짐은 취하지 않겠다.”

하고, 아울러 그 여인들을 돌려보냈다.

■신라 진덕 여주(眞德女主)원년, 고구려 왕 장 6년, 백제 왕 의자 7년(647)

◯3월당(唐)의 우진달(牛進達)ㆍ이세적(李世勣)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황제가 다시 군사를 내려 하니 조정의 의론이,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만들었으므로 얼른 성을 함락할 수 없습니다. 전번에 대가(大駕)가 친정(新征)하실 때 그 나라 사람들이 밭 갈고 씨 뿌리지 못하였고 계속 한재(旱災)가 들었으므로 백성들은 태반이 먹을 것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만약 자주 일부 군사를 보내어 교대로 강역[疆場]을 소란하게 하여, 저들로 하여금 명령에 좇아 싸움에 시달리어 농기를 버리고 보루(堡壘)에 들어 있게 하면 수년 사이에 천리의 땅이 소연하게 될 것이니, 그때에는 인심이 자연히 떠날 것이므로 압록수(鴨綠水)의 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는 그 말을 따라 우진달(牛進達)로써 청구도행군대총관(靑丘道行軍大摠管)을 삼고, 이해안(李海岸)으로 부총관을 삼아, 군사 1만여 인을 발하여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 산동반도(山東半島))로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가게 하고, 또 이세적(李世勣)으로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을 삼고, 손이랑(孫貳郞)으로 부총관을 삼아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영주부(營州府)의 군사와 함께 신성도(新城道)로부터 들어가게 하였는데, 양군(兩軍)에 다 물에 익숙하고 싸움을 잘하는 자를 선발하여 배속시켰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명령에 시달리고 싸움에 지쳐서 마침내 망하기에 이르렀다.

하5월 이세적(李世勣)이 고구려 남소성(南蘇城)을 파하고 돌아갔다.

이세적의 군사가 이미 요수(遼水)를 건너 남소성 등 몇 성을 거치는 동안 고구려에서 많이 성을 등지고 막아 싸웠으나 이세적이 쳐서 파하고 그 성곽(城郭)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신라 진덕 여주 2년, 고구려 왕장 7년, 백제 왕 의자 8년(648)

◯춘정월 당이 설만철(薛萬徹)을 보내어 고구려를 쳤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설만철로 청구도행군대총관(靑丘道行軍大摠管)을 삼고 배행방(裴行方)으로 부총관을 삼아, 군사 3만 명 및 누선(樓船)ㆍ전함(戰艦)을 인솔하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하4월 당의 오호진장(烏胡鎭將) 고신감(古神感)이 고구려를 쳐서 패배시켰다. 신감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서 고구려 보기(步騎) 5천을 만나 역산(易山)에서 싸워 그들을 파했다. 그날 밤 고구려 사람 1만여 가 신감의 배를 엄습하였으나 신감이 복병을 설치하여 또 그들을 파하고 돌아갔다. 황제는 고구려가 곤궁하고 피폐하다 하여 명년에 30만을 발하여 일거에 격멸시킬 것을 의논하였다. 수말(隋末)에 검남(劍南 사천성(四川省))이 유독 요동(遼東)싸움에 참여하지 아니하여 백성이 많고 풍부하므로 검남에 사신을 보내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게 하니, 큰 것은 혹 길이가 1백 척(尺)이나 되었으며, 넓이는 그것의 반이 되었다. 촉인(蜀人)들이 부역에 시달리어 검외(劍外 검남을 말한다)가 소란하였다. 내주자사(萊州剌史) 이도유(李道裕)에게 조칙을 내려 군량 및 병기를 오호도(烏胡島) 오호도(嗚呼島)라고도 한다 로 옮기게 하였다.


▣동사강목 제4상

■신라 진덕 여주 4년, 고구려 왕 장 9년, 백제 왕 의자 10년(650)

◯6월 신라가 당(唐)에 승첩(勝捷)을 고하였다.

김춘추(金春秋)와 법민(法敏)을 당나라에 보내었는데, 이때에 진덕 여주(眞德女主)가 스스로 태평송(太平頌)을 지어, 비단에 무늬로 짜 넣어서 바쳤다.

그 시(詩)는 이러하다.

대당이 대업을 개창하니 / 大唐開洪業

높고 높은 임금의 모책이 창성하여라 / 巍巍皇猷昌

전쟁을 그치게 해서 천하를 안정하고 / 止戈戎衣定

문덕을 닦아서 백왕을 이었도다 / 修文繼百王

하늘을 통어하니 은택이 넓고 / 統天崇兩施

만물을 다스리니 광채가 은은하다 / 理物體含章

인덕을 깊이 하여 일월과 짝하고 / 深仁諧日月

운수를 어루만져 성세를 보전하도다 / 撫運護時康

휘날리는 기치는 어찌 그리 혁혁하며 / 幡旗何赫赫

징소리 북소리 어찌 그리 황황한고 / 鉦鼓何鍠鍠

제명 어긴 외이는 / 外夷違命者

잘리어 천벌받는다 / 剪覆披天殃

교화가 어둡고 밝은 데에 고루 입혀지니 / 淳風凝幽顯

먼 곳 가까운 곳에서 다투어 상서를 바친다 / 遐邇競呈祥

사철은 옥촉처럼 화순하고 / 四時和玉燭

칠요는 만방에 돈다 / 七曜巡萬方

악산은 재보를 내리고 / 維嶽降宰輔

황제는 나라를 충량에게 맡기도다 / 維帝任忠良

삼황 오제 같은 덕을 이루니 / 五三成一德

밝게 빛나는 우리 당나라 임금이로다 / 照我唐家皇

당이 법민에게 태부경(太府卿)을 제수하여 돌려보냈다.

■신라 진덕 여주 5년, 고구려 왕 장 10년, 백제 왕 의자 11년(651)

◯2월 신라가 집사부 중시(執事部中侍)를 두었다.

신라에서는 처음에 품주(禀主)를 두어 기밀(機密)에 관한 일을 맡아 보게 하다가, 이때에 와서 집사부로 고치고 중시(中侍) 1인을 두고, 파진찬(波珍飡) 죽지(竹旨)를 중시로 삼아서 상대등(上大等)과 함께 집정재상(執政宰相)이 되게 하였다.

■신라 태종 무열왕 원년, 고구려왕 장 13년, 백제왕 의자 14년(654)

◯춘3월 신라의 여주(女主) 승만(勝曼 진덕 여왕의 휘)이 훙(薨)하니, 국인이 진지왕(眞智王)의 손자 김춘추(金春秋)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신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시조 혁거세(赫居世)부터 진덕(眞德)까지 28왕(王)을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왕(武烈王)부터 영왕(永王)영왕은 경순왕(敬順王)인 것 같다. 까지는 진골(眞骨)이라 하였다. 주(主)가 훙하매 시호를 ‘진덕’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내었다. 여러 신하들은 이찬(伊飡) 알천(閼川)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기를,

“노부(老夫)는 이렇다 할 덕망이 없고, 지금의 덕망으로는 춘추공(春秋公)만한 이가 없는데, 그는 제세(濟世)의 영걸(英傑)이라 할 만하다.”

하므로, 드디어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춘추가 세 번 사양한 뒤에 즉위하니, 이가 곧 태종 무열왕이다. 아버지는 이찬 용춘(龍春)이고, 어머니 김씨(金氏) 천명 부인(天明夫人)은 진평왕(眞平王)의 딸이요, 비(妃) 김씨 문명 부인(文明夫人)은 각찬(角飡) 서현(舒玄)의 딸이다.

※무력 - 서현(만명부인) - 김유신

용춘(천명부인 : 진평왕의 딸)-김춘추(문명부인(문희) : 서현의 딸)-법민

■신라 태종 2년, 고구려 왕 장 14년, 백제 왕 의자 15년(655)

◯3월 신라가 아들 법민(法敏)을 태자로 세우고, 여러 아들에게도 작(爵)을 주었다.

왕비 김씨는 이름이 문희(文姬)인데,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이다.

처음에 비(妃)의 언니 보희(寶姬)가, 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가 앉아서 오줌을 누니 그것이 전국에 흘러 퍼지는 꿈을 꾸고, 깨어나 이를 비에게 이야기하였다. 비가 장난삼아 말하기를, ‘형님의 꿈을 삽시다.’ 하고서 비단치마를 주어 그 값을 치렀다. 뒤에 춘추가 유신과 함께 축국(蹴踘)을 하다가, 짐짓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서 떨어뜨리고는, 자기집에 들어가 꿰매자고 청하고서, 술을 내오고 보희를 불러 고름을 꿰매게 하니, 보희가,

“어찌 사소한 일로 경솔하게 귀공자를 가까이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사양하므로, 비(妃)가 꿰매었는데, 비가 산뜻한 화장에 경쾌한 차림으로 아리따운 모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춘추가 좋아하며 혼인을 청하였다. 즉위한 뒤에 왕비로 책봉되니, 이가 곧 문명 왕후(文明王后)이다. 아들 여섯을 낳았는데, 장자 법민은 태자가 되고, 인문(仁問)은 당에 들어가 숙위(宿衛)하고, 문왕(文王)은 이찬(伊飡)이 되고, 노차(老且)는 해찬(海飡)이 되고, 지경(智鏡)ㆍ개원(愷元)은 모두 이찬(伊飡)이 되었다. 서자(庶子)인 인태(仁泰)는 각찬(角飡)이 되고, 개지(皆知)ㆍ거득(車得)ㆍ마득(馬得)에게도 모두 관직이 제수되었으며, 딸이 또 5인이었다. 법민은 자표(姿表 외모와 품격)가 영특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

■신라 태종 3년, 고구려 왕 장(藏) 15년, 백제 왕 의자 16년(656)

◯춘3월 백제가 간신(諫臣)인 좌평(佐平) 성충(成忠)을 죽였다.

처음에 백제 왕이 날마다 궁인(宮人)과 함께 탐락(耽樂)하므로 좌평 성충이 극력 간하자, 왕은 노하여 그를 가두었다. 이 때문에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중에서 음식을 끊고 죽음에 임하여 상서(上書)하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드리고 죽고자 합니다. 신이 시세의 변이[時變]를 보건대, 반드시 병란이 있을 것이니, 무릇 용병(用兵)에는 반드시 그 지세를 잘 살펴서 상류(上流)에 처하여 적을 맞은 뒤라야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적병이 만약 오면 육로(陸路)로는 침현(沈峴)일명 탄현(炭峴)인데 지금 부여현 동쪽 14리에 있다. 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로로는 기대포(伎代浦 기벌포의 오류) 일명 백마강(白馬江)인데 지금 부여현 서쪽 5리에 있다. 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험한 곳에 의거하여 막아야 합니다.

하였으나, 왕은 이를 돌보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옥중에서 죽었다.

■신라 태종 5년, 고구려 왕 장 17년, 백제 왕 의자 18년(658)

◯하6월 당의 정명진(程名振)ㆍ설인귀(薛仁貴)가 고구려를 쳐서 깨뜨렸다.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營州都督兼東夷都護) 정명진과 중랑장(中郞將) 설인귀가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적봉진(赤烽鎭)요동 땅에 있었으나 지금은 미상. 을 쳐서 함락시키고 4백여 급(級)을 참수(斬首)하니, 고구려의 대장 두방루(豆方婁)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막으므로, 명진이 거란(契丹)의 군사로써 역습하여 크게 깨뜨리고 2천 5백 급을 참수하였다.

■신라 태종 7년, 고구려 왕 장 19년, 백제 왕 의자 20년(660)

◯3월 당이 소정방(蘇定方)ㆍ김인문(金仁問) 등을 보내어 수군과 육군을 이끌고 백제를 치게 하고 또 신라 왕에게 조칙하여 이를 성원(聲援)하게 하였다. 이때 김인문이 원병을 청하기 위하여 당에 가 있었는데 제(帝)는 도로의 험이(險夷)가 어떠냐고 물었다. 인문이 매우 상세히 대답하매 제는 기뻐하여 출병할 것을 결심, 소정방으로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을 삼고 인문을 부총관으로 하여, 유백영(劉伯英)ㆍ방효공(龐孝恭)ㆍ풍사귀(馮士貴) 등 수륙병(水陸兵) 12만 2천 7백 11인과 배 1천 9백 척을 이끌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그리고 신라 왕은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을 삼아 그 무리를 거느리고 이에 합세하게 하였다.

◯하6월 신라 왕이 남천정(南川停)에 나가 주둔하고, 태자 법민(法敏)과 김유신을 보내어 덕물도(德勿島 덕적도)에서 당나라 군사와 만나게 하였다.

신라 왕이 김유신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남천정에 나가 주둔하고 있다가, 소정방 등이 군사를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오는데 함선이 천리에 뻗쳤으며 덕물도 지금 인천부 서해 가운데 있다 에 진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태자 법민(法敏)과 대장군 김유신ㆍ장군 진주(眞珠)ㆍ천존(天存) 등을 보내어 병함(兵艦) 1백 수(艘)를 거느리고 정방(定方)과 합치게 하였다. 정방은 기뻐하며 7월 10일에 왕과 만나기로 기약하고 곧장 의자(義慈 의자왕)의 도성을 무찔렀다. 법민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정방의 군세(軍勢)가 대단히 성대하다.’ 하니 왕이 기뻐하여 다시 법민을 보내어 유신(庾信) 및 장군 품일(品日)ㆍ흠춘(欽春)과 함께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응전하게 하고 금돌성(金堗城)지금의 상주(尙州) 백화산(白華山). 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 백제 왕이 신하들을 모아 놓고 처음으로 적을 방어할 계책을 논의하였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두려워하여 군신을 모아놓고 전수(戰守)에 관한 방도를 물었다. 좌평 의직(義直)이 아뢰기를,

“당병은 배타기에 익숙하지 못한데다가 멀리 큰 바다를 건너왔으니, 그들이 하륙(下陸)하여 사기(士氣)가 고르지 못한 때를 이용하여 급히 치면 일을 성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 사람은 대국(大國)의 원병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가벼이 보는 마음이 있어 만약 당병이 실패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하여 감히 진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병과 결전(決戰)하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하였고, 달솔(達率) 상영(常永)은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병은 멀리서 왔기 때문에 빨리 싸우려 할 것이니 그 예기를 당해 낼 수가 없을 것이요, 신라 사람은 여러번 우리에게 패한 일이 있는 터라 이제 우리의 병세(兵勢)를 보게 되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당인의 진로를 막아 그 군사를 피로하게 해 놓고, 군사를 나누어 먼저 신라군을 쳐서 그 예기를 꺾어 놓은 다음에 형편을 보아 합세해서 싸우면 군사와 나라를 보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은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때 좌평 흥수(興首)가 일찍이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지금의 장흥(長興) 수령현(遂寧縣) 에 귀양가 있었는데 왕이 사람을 보내어 물으니 대답하기를,

“당병은 그 수가 이미 많고 군율도 엄명(嚴明)한데 더구나 신라와 함께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고 있으니, 만약 들판에서 대진(對陣)한다면 승패를 알 수가 없습니다. 기벌포(伎伐浦)와 침현(沈峴)은 우리의 요새지라, 한 사람이 창을 들고 지켜도 만인이 당하지 못하는 요새이오니, 마땅히 용사(勇士)를 뽑아 수비케 하여 당병(唐兵)은 기벌포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사람은 탄현(炭峴 침현)을 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 대왕께서는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면서, 저들의 군량이 떨어지고 사졸이 피로하게 되기를 기다려 분발하여 공격하시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의논하는 사람들은 모두,

“흥수는 오랫동안 죄수로 갇혀 있던 사람이라,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당병으로 하여금 기벌포로 들어와 강을 따라 내려가게 하면 배를 나란히 하여 갈 수 없고 신라 군사는 탄현으로 올라 길을 따라 가게 하면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갈 수 없을 것이오니, 이때에 군사를 풀어 공격하면 마치 새장에 갇힌 새와 같고 그물에 걸린 고기와 같아 모두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은 매우 옳게 여겼다.

○ 김유신 등이 황산(黃山)지금 연산현(連山縣) 동쪽 4리에 있다 으로 진군하니 백제에서는 장군 계백(階伯)을 보내어 막게 했다.

유신 등이 황산벌[黃山原]로 진군하자, 백제에서는 당ㆍ나군이 이미 침현(沈峴)과 기벌포(伎伐浦)를 지났다는 말을 듣고 장군 계백을 보내어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항거케 하였다. 이때 계백이 말하기를

“한 나라의 편사(偏師)를 가지고 두 나라 군사를 당하게 되니 존망(存亡)을 알 수가 없다. 또 만일 망하게 되면 반드시 처자(妻子)가 욕을 볼 것이니, 살아서 욕을 보느니보다는 차라리 깨끗이 죽는 것이 낫다.”

하고, 드디어 처자를 모두 죽여 버렸다.

○ 백제 장군 계백(階伯)이, 신라 군사와 황산(黃山)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계백이 황산에 이르러, 먼저 진영 셋을 설치하고 싸우기에 앞서 여러 군사에게 맹세하기를,

“옛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吳) 나라 군사 70만을 격파하였다. 오늘 모두 분려(奮勵)하여 국은(國恩)을 갚으라.”

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울고 힘을 다해 싸우니, 한 사람이 천명을 당해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김유신 등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나가 네 번 싸웠으나 불리하였고 사졸(士卒)들도 힘이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신라 장군 김흠춘(金欽春)이 그의 아들 반굴(盤屈)에게 이르기를,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해야 하고 아들이 되어서는 효도해야 하는 것이니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은 충성과 효도를 함께 보전하는 것이다.”

하니, 반굴은 이에 전진(戰陣)으로 들어가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좌장군(左將軍) 품일(品日)의 아들 관창(官昌)은 의표(儀表)가 단아하였고 어려서 화랑(花郞)이 되어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는데 이때 나이 16세였다. 품일이 이르기를,

“네 나이가 어리기는 하나 지기(志氣)가 있으니 이제 삼군(三軍)의 표적(標的)이 될 수 있겠느냐?”

하니, 관창은

“예”

하고 대답하고는, 필마 단창으로 곧바로 백제의 진중으로 달려갔으나 붙잡혔다. 계백은 그가 어리고 또 용기 있음을 아껴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신라에는 기이한 무사(武士)가 많아서 가벼이 볼 수 없다.”

하고, 돌려 보냈다. 관창이 그의 아버지에게,

“적진에 들어갔다가 장수를 베지 못한 것이 깊이 한스럽다.”

고 말하고,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으로 돌격하여 힘써 싸웠다. 마침내 계백은 그를 사로잡아 베고 머리를 말안장에 매달아 품일에게 보냈다. 이에 신라 군사들은 분격하여 모두 죽을 각오를 가지고 북을 울리고 소리를 지르며 진격하여, 백제군을 크게 패배시켰고 계백도 죽였으며, 백제의 좌평(佐平)인 충상(忠常)ㆍ상영(常永) 등 20여 인을 사로잡았다.

신라에서는, 반굴ㆍ관창에게 급찬(級飡)의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부의(賻儀)도 매우 후하게 내려주고 예로 장사지내 주었다. 신라의 법은 싸우다가 죽은 사람에게는 모두 후하게 장사지내 주고 벼슬과 상을 주었으며, 뇌사(?賜)가 일족(一族)에까지 미치니, 나라 사람들은 이를 본받아서 나아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물러나 사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였으니 옛 전국(戰國) 시대의 기풍이 있었다.

○ 당과 신라의 군사가 사자성(泗泚城 사비성의 오류)을 포위하니 백제 왕 의자(義慈)는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났다. 그리하여 왕자 태(泰 의자왕의 둘째 아들)가 스스로 왕이 되었다.

소정방(蘇定方)ㆍ김인문(金仁問) 등이 기벌포(伎伐浦)를 건너서 해안(海岸) 수렁에 버드나무 가지를 엮어 깔고 출사(出師)하니, 백제는 군사를 모아 웅진구(熊津口)로 나와 이를 막았다. 정방이 왼쪽 언덕으로 나와 높은 곳에 진을 치고 백제군과 싸워 크게 격파시켰다.

김유신이 당의 진영에 이르자, 정방이 기일을 어겼다 하여 유신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頴)을 베려 하니 이에 유신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대장군(大將軍 소정방을 가리킨다)은, 황산(黃山)의 싸움은 알지 못하고 기일을 어긴 것만 죄를 삼으려 하니, 나는 죄없이 욕을 받을 수 없다. 기필코 당나라 군사와 먼저 결전(決戰)한 뒤에 백제를 격파하겠다.”

하고, 도끼를 짚고 군문(軍門)에 서니 성난 머리털은 곤두섰으며 허리에 찬 보검(寶劍)은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 나왔다. 정방의 우장(右將) 동보량(董寶亮)이 정방의 발을 밟으면서 말하기를,

“신라군이 변(變)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

말하매, 정방이 이에 문영을 풀어 주니, 갑자기 새가 정방의 진영 위를 돌며 날았다. 사람을 시켜 이를 점치게 하니 ‘반드시 원수에게 해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정방은 두려워하여 군사를 이끌고 물러가 싸움을 그치려 하니, 유신이 말하기를,

“천리와 인심에 순응하여 지극히 불인(不仁)한 것을 치는데 무슨 상서롭지 못한 것이 있으리오.”

하였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覺伽)를 시켜 당장(唐將)에게 글을 보내, 퇴군(退軍)하여 줄 것을 애걸하고 또 많은 음식을 바쳤으나, 정방은 이를 물리쳤다. 신라군의 전함(戰艦)들은 조수를 이용하여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였고,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진격시켜 곧바로 도성(都城)으로 달려가니, 백제는 무리를 모두 동원하여 맞서 싸웠는데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당군이 승세를 타고 도성에 육박하니 백제 왕은 어쩔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성충(成忠)의 말을 쓰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고, 태자 효(孝) 의자왕 4년에 아들 융(隆)을 세워 태자로 삼았는데, 여기에서 태자 효라고 한 것은 알 수 없다.※효-태-융와 함께 좌우를 거느리고 밤에 북쪽으로 도망가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을 보전하였다. 왕궁의 여러 희첩(姬妾)들은 대왕포(大王浦)의 암석 위로 도망가 떨어져 죽으니 뒷사람들이 그 바위를 낙화암(落花岩)지금의 부여현(扶餘縣) 이라고 불렀다. 차자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 당군이 사자성을 함락시키니, 백제 왕 의자가 웅진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자 융(隆)에게 이르기를,

“왕과 태자가 있는데도 숙부(왕자 태를 가리킨다)가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당군이 비록 포위를 푼다 해도 우리들이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융은 드디어 문사 및 좌평인 천복(千福) 등과 함께 성을 넘어 나와 항복하니, 백성들도 모두 이들을 따랐고, 신라 태자 법민(法敏)이 그들의 항복을 받았다. 당의 군사가 승세(勝勢)를 타고 성가퀴[堞]에 올라 당의 깃발을 세우니, 태(泰)는 사세가 궁박하여 성문을 열고 살려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왕과 태자 효 및 웅진 방면을 지키던 군사들이 정방에게 항복하였으니, 사자에 도읍한 지 1백 23년 만에 항복한 것이다.

○ 신라 왕이 소정방과 사자성에서 회담하였고, 사신을 당에 보내어 승첩(勝捷)을 알렸다.

왕이 남천(南川)으로부터 금돌성(今突城) 지금은 미상 에 나와 있다가 백제의 항복을 듣고 금돌성에서 사자성으로 와서 제감(第監) 천복(天福)을 보내 당에 노포(露布 전승을 알리는 포고문)하였다. 술을 차려 놓고 장사(將士)들을 위로할 적에 왕과 소정방은 당상(堂上)에 앉고 의자는 당하에 앉혀 술잔을 돌리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들은 오열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왕이 금일(黔日)ㆍ모척(毛尺)을 잡아 베었는데 두 사람은 일찍이 대야성(大耶城) 싸움에서 함께 성의 함락을 꾀한 자였다. 정방이 유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황제로부터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이제 백제의 땅을 공(公)들에게 나누어 주어 식읍(食邑)을 삼게 하려 하오.”

유신이 대답하기를,

“대장군께서 천병(天兵)을 거느리고 와서 무도한 무리를 쳐서 우리 나라의 원수를 갚아 주었으므로 우리 왕과 온 나라 신민(臣民)은 바야흐로 기뻐할 겨를도 없는데 감히 사사로운 이익을 받겠습니까?”

하였다.

9월 당이 백제의 땅을 나누어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만들고 유인원(劉仁願)에게 명하여 사자성에 머물러 지키게 하고 항복한 왕 의자를 잡아가지고 돌아갔다.

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사자성 입구에 진영을 치고 신라를 치려는 음모를 꾸미자 신라 왕이 이것을 알고 여러 신하를 불러 대책을 물으니, 다미(多美)라는 신하가 아뢰기를,

“우리 백성을 거짓 백제 사람으로 꾸며 해치고자 할 것 같으면, 당이 반드시 공격할 것이니 이때를 틈타 싸운다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유신이 이 말대로 좇기를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당군은 우리를 위하여 적을 멸망시켰는데 도리어 그들과 싸워서야 되겠는가?”

하니, 유신이 말하기를,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 하지만 주인이 제 발을 밟으면 무는 법인데, 어찌 환란을 만나 스스로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당의 사람들이 첩자를 통하여 신라에서 대비하고 있음을 알고 마침내 그만두었다.

백제가 융성할 적에는 도성의 민호(民戶)가 15만 2천 3백이었으며 나라에는 5부(部)ㆍ37군(郡)ㆍ2백 성(城)에 76만 호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누어 웅진(熊津)ㆍ마한(馬韓)ㆍ동명(東明)ㆍ금련(金漣)ㆍ덕안(德安)의 5도독부 《북사(北史)》에 “백제웅진(熊津)ㆍ마한(馬韓)ㆍ동명(東明)ㆍ금련(金漣)ㆍ덕안(德安)의 5도독부에 5성이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은 득안성(得安城)이라 부른다.” 하였는데 본래의 이름은 덕근지(德近支)로 지금의 은진현(恩津縣)이며 마한은 지금의 익산(益山)인 듯하며 동명ㆍ금련은 미상이다. 를 두고 각각 주현(州縣)을 통솔케 하고 그들의 거장(渠長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괴수(魁首)와 같다)을 발탁하여 도독(都督)ㆍ자사(刺史)ㆍ현령(縣令)을 삼아 다스리게 하고 낭장(郞將) 유인원에게 명하여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사자성에 머물러 지키게 하니 신라 왕도 왕자 인태(仁泰) 및 사찬 일원(日原)ㆍ급찬 길나(吉那)을 보내어 군사 7천으로 그들을 돕게 하였다. 정방은 의자와 아들 효(孝)ㆍ태(泰)ㆍ융(隆)ㆍ연(演) 및 종자(從者)ㆍ대신(大臣)ㆍ장사(將士) 88인과 백성 1만 2천 8백 7인을 데리고 사자정에서 출범하여 당으로 돌아갔는데 김인문(金仁問) 및 사찬 유돈(儒敦)과 대내마 중지(中知) 등이 따라갔다. 정방이 돌아가서 의자 등을 제(帝)에게 알현시키니 제는 측천문(則天門)에 나아가서 포로를 받고 그들을 책망하고서는 용서해 주었다. 그리고 정방에게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때를 틈타서 신라를 치지 않았으냐?”

하니, 정방이 대답하기를,

“그 임금은 어질어서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성스러워 임금을 잘 섬기며, 아랫사람은 웃사람 섬기기를 자제가 부형(父兄)을 호위하는 것 같이 하니, 나라는 비록 작으나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 당이 왕문도(王文度)로 웅진도독을 삼았는데 얼마 안 가서 죽었다.

왕이, 문도로 도독을 삼아 백제의 나머지 무리를 진무(鎭撫)케 하였다. 신라 왕이 이 말을 듣고 삼년산성(三年山城 지금의 보은(報恩))에 이르렀는데, 문도가 조서(詔書)를 가지고 와서 전하지 못하고 갑자기 병이 나서 죽으니, 종자(從者)가 대신하여 일을 마쳤다.

동10월 신라 왕이 반사(班師)할 때에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여러 성 중에서 항복하지 아니한 성을 쳐서 격파시켰다.

백제가 망하였으나 남은 무리가 남잠정현(南岑貞峴)즉 진현(眞峴)으로 지금의 진잠(鎭岑)이다 과 임존성(任存城)고성(古城)인데 지금의 대흥현(大興縣) 서쪽 13리에 있다 을 점거하고 대두시(大豆尸)ㆍ원악(原嶽)지금은 모두 미상 에 모여 당인들을 약탈하면서 사자성에까지 이르니, 유인원이 이를 쳐서 쫓아 버렸다. 그리하여 백제군은 사자성 남쪽 산마루로 올라가 4~5개의 성책(城柵)을 세우고 둔취(屯聚)하면서 틈을 엿보고 있었다. 이에 호응하는 백제의 유민(遺民)이 20여 성이었다.

왕이 태자 및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이례성(爾禮城)지금은 미상 을 쳐서 취하고 관(官)을 두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백제의 성들은 두려워하여 모두 항복하였다. 또 사자성의 남쪽 산마루의 성책을 공격하여 1천 5백 급(級)을 베었으며 계탄(鷄灘)을 건너 왕흥사(王興寺)의 잠성(岑城)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시켰고 머리 7백을 베었다.

○ 신라가 김유신으로 대각간(大角干)을 삼았다.

왕이 백제로부터 돌아와서 논공(論功)하여 봉작(封爵)함을 차등 있게 하였고, 항복한 백제 사람들도 모두 재주를 헤아려 임용하였다. 좌평(佐平)인 충상(忠常)ㆍ상영(常永)과 달솔(達率)인 자간(自簡)과 은솔(恩率)인 무수(武守)ㆍ인수(仁守) 등에게도 아울러 좋은 벼슬을 주었다. 유신으로 대각간을 삼았는데 반열(班列)이 17위(位)의 최상이었으니, 대각간의 이름이 이때부터 비롯 되었다.

○ 옛 백제 왕 의자가 당에서 죽었다.

제(帝)가, 금자광록대부 위위경(金紫光祿大夫衛尉卿)을 추증하고 구신(舊臣 의자왕의 신하를 말한다)들의 장례 참석을 허락하고 손호(孫皓)ㆍ진숙보(陳叔寶)의 묘 곁에 장지를 정해 주고 비석도 세워 주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융(隆)에게는 사농경(司農卿)을 제수(除授)하였다.

○ 당이, 계필 하력(契苾何力)과 소정방 등을 보내,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쳤다.

백제가 멸(滅)하자 제는 드디어 고구려를 마저 멸하려 하여 이에 계필 하력을 패강도(浿江道)로, 소정방을 요동도(遼東道)로,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平壤道)로 가게 하여 모두 행군 대총관(行軍大摠管)을 삼고 정명진(程名振)을 누방도 총관(鏤方道摠管)으로 삼아,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또 하남(河南)ㆍ하북(河北)ㆍ회남(淮南)의 67주(州)의 군사 4천 여 명을 모아, 평양ㆍ누방의 행영(行營)으로 가게 하고, 소사업(蕭嗣業)으로 부여도 총관(扶餘道摠管)을 삼아 회흘(回紇) 등 여러 부(部)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신라 문무왕 원년, 고구려 왕 장(藏) 20년, 백제 왕 풍(豊) 원년(661)

◯춘정월 백제의 종실(宗室)인 복신(福信)이, 옛 왕자인 (豊)을 주류성(周留城)에서 왕으로 세우고 나아가 웅진(熊津)을 포위하였다.

풍은 일찍이 왜(倭)에 인질(人質)로 가 있었는데 무왕(武王)의 종자(從子) 복신이, 중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 지금은 미상 을 점거하고 풍을 맞아 세우니, 서북부(西北部)가 모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유인원(劉仁願)을 포위하였고, 또 부성(府城) 근처 네 곳에 성을 만들어 포위하여 지키면서, 유인원의 군사를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 백제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군사를 일으켜 복신에 호응하였다.

상지(常之)는 백제 서부(西部) 사람으로 키가 7척이며 용맹하고 지략(智略)이 있어 벼슬이 달솔(達率)에 이르렀고, 풍달(風達)지금은 미상군장(郡將)을 겸하였다. 정방이 백제를 멸할 때에 상지가 전부(前部)로써 항복하였으나 정방이 왕 의자(義慈)를 가두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하므로 상지는 두려워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를 모으니, 한달 만에 귀부(歸附)한 자가 3만여 인이었다. 정방이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상지는 마침내 2백여 성을 회복하고 별부(別部) 사타상여(沙咤相如)와 함께 각각 요험지(要險地)에 웅거하니, 여러 성이 많이 귀부하였다. 이때에 군사를 이끌고 복신에 호응한 것이다

○ 백제 장수 복신이 신라의 구원병을 요격(邀擊 도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급습하는 것)하여 패배시켰다.

그때 도침(道琛)은 스스로 영군 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컫고 복신은 상잠 장군(霜岑將軍)이라 일컬으면서, 유민(遺民)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늘어났다. 사자를 인궤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들으니 당과 신라가 백제 사람을 모두 섬멸하고 나라를 신라에 넘겨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니 그렇게 죽는 것보다는 어찌 싸우다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더니, 인궤도 사자를 보내어 글을 지어 화복(禍福)을 갖추어 말하였다. 그러나 도침 등은 그 사자를 외관(外館)에 가두어 두고 교만한 말로 이르기를,

“너는 벼슬이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니 함께 논의할 수 없다.”

하고, 답서(答書)도 없이 돌려보냈다.

당이 군사 1천 명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인궤는 무리가 적었기 때문에 인원(仁願)의 군사와 합하고 사졸을 쉬게 하고는, 황제에게 글을 올려 신라 군사와 합하여 공격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왕은 그의 장수 김흠(金欽)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인궤 등을 구원케 하였다. 그리하여 고사(古泗)에 이르러 주류성을 포위하였으나 복신이 군사적은 것을 알고 요격하여 패배시켰다. 김흠이 갈령(葛嶺)지금은 미상 에서 도망하여 오니, 신라의 군사들은 감히 다시 나오지 못하였고 여러 장수들은 모두 복신에게 항복하였다. 복신은 승세(勝勢)를 타고 다시 부성(府城)을 포위하니 웅진의 길이 끊기고 식량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신라에서는 건장한 사람들을 모집하여 몰래 식량을 보내어 그들의 곤핍(困乏)을 구제하였다. 이때에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병합하였으나 풍(豊)은 제어(制御)하지 못하고 주제(主祭)만 할 뿐이었다. 복신은 인원이 외로운 성에 구원병이 없음을 알고는 사자를 보내어 타일러 말하기를,

“대사(大使)는 어느 때에 서쪽으로 돌아가겠소? 돌아갈 때는 사람을 보내 송별(送別)하겠소.”

하였는데, 말이 매우 거만하였다.

◯하4월 당이 임아상(任雅相) 등을 보내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쳤다.

당이 다시 아상(雅相)으로 패강도(浿江道)와 행군총관(行軍摠管)을 삼고 계필 하력(契苾何力)으로 요동도(遼東道)의 행군총관을 삼고, 소정방으로 평양도(平壤道)의 행군총관을 삼아 소사업(蘇嗣業) 및 여러 호병(胡兵)과 함께 모두 35군(軍)을 수륙(水陸)으로 길을 나누어 진격하게 하고, 제(帝)는 스스로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그들 뒤를 이으려 하니 울주 자사(蔚州刺史) 이군구(李君球)가 말하기를,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중국의 온 힘을 기울여 이를 도모하기에 이릅니까? 만일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반드시 군사를 동원하여 지켜야 하는데 적게 동원하면 위엄이 떨쳐지지 못하고 많이 동원하면 국내의 인심이 편치 못할 것이니 이는 천하가 수비하는 것 때문에 피폐될 것입니다. 신은, 정벌(征伐)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고 멸(滅)하는 것이 멸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무후(武后)가 또한 간하므로, 조칙하여 군사를 돌아오게 하였다.

◯6월 신라의 대관사(大官寺) 샘물이 피로 변하였다.

또 금마군(金馬郡)에는 땅에 피가 흘러 5보(步)의 넓이에 번졌다.

○ 신라 왕 춘추(春秋)가 훙(薨)하고 태자 법민(法敏)이 즉위하였다.

신라의 제도에, 왕에게 하루 반미(飯米) 서 말과 수꿩 아홉 마리를 바쳤는데, 왕이 백제를 멸하고는 주선(晝膳 점심)을 없앴다. 이때에 나라가 태평하고 풍년이 들어 베 한 필이 벼 30석, 혹은 50석과 맞먹어서 백성들이 성대(聖代)라 일컬었다. 왕은 군사를 조련(操鍊)하고 무사(武士)를 기르며 어진 이에게 일을 맡기고 재능이 있는 자를 부려서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할 운(運)을 열어 놓았다. 훙(薨)할 적에 나이는 59세였고 묘호(廟號)는 태종(太宗), 시호(諡號)는 무열(武烈)이었으며 영경사(永敬寺) 북쪽 지금의 경주부 서악리(西岳里)에 있다 에 장사지냈다.

태자 법민이 즉위하니, 이가 문 무왕(文武王)이다. 왕비 김씨는 파진찬 선품(善品)의 딸이니, 이가 자의 왕후(慈儀王后)이다.

○ 당(唐)의 계필 하력(契苾何力)이 고구려의 군사를 압록강에서 격파하고 돌아갔다.

개소문(蓋蘇文)이 그의 아들 남생(男生)을 시켜 정병(精兵) 수만으로 압록강을 지키게 하니 당군이 건너지 못하였다. 마침 계필 하력이 얼음이 언 때를 만나서 북을 울리고 소리를 지르며 강을 건너 진격하니 고구려 군사가 무너졌다. 하력이 수십 리를 쫓아가 죽이니 죽은 자가 3만 명이었고, 남은 무리들은 항복하였으며, 남생은 겨우 몸을 빼어 달아나 죽음을 면하였다. 그때 마침 군사를 돌리라는 조칙이 있어 돌아갔다.

동10월 신라 왕이 서울로 돌아왔다.

이에 앞서 왕이 대감(大監) 문천(文泉)을 보내 소정방을 만나보게 하니, 정방이 회답하기를,

“내가 명을 받고 적을 토벌하기 위해 만 리 바다를 건너와서 한 달이 넘도록 배회(俳徊)하였는데도 왕(신라의 왕)의 군사가 이르지 않고, 양곡도 대어 주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였다. 그래서 왕은 여러 신하와 의논하니, 모두 적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어려운 일로 생각하였다. 유신이 말하기를,

“신에게 중책을 주시면 죽어도 어려움을 사양치 않겠습니다. 오늘은 이 노신(老臣)이 충절을 다하는 날이니, 적전 속으로 달려가 소 장군(蘇將軍)의 뜻에 부응하겠습니다.”

하니, 왕은 기뻐서 이르기를,

“국경을 넘은 뒤에는 상벌(賞罰)을 자의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왕이, 당의 조제사(吊祭使)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유신에게 맡기고 돌아오니, 유신 등은 군사를 쉬게 하고 다음 명을 기다렸다.

12월 신라가 군량을 웅진에 운반하여 주었다.

그때 유덕민(劉德敏)이 평양에 군량 수송할 것을 독촉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금 웅진의 양곡이 다하였는데 먼저 웅진으로 운반하면 칙지(勅旨)를 어기는 것이 되고, 만약 평양으로 운반하면 또한 웅진의 양곡이 떨어질까 염려스럽다.”

하고, 이에 노약자(老弱者)를 뽑아 웅진으로 양곡을 운반케 하고, 정병(精兵)들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웅진이 백제의 핍박을 받음에 있어, 신라가 군량 수만 곡(斛)을 남으로 웅진에, 북으로 평양에 전후 공급했고, 또 머물러 진수(鎭守)하는 한병(漢兵)의 의복까지도 모두 신라에서 공급해 주었다. 이 때문에 신라의 백성은 공급에 피폐되어 풀뿌리를 캐어 먹었는데도 오히려 부족하였다.

■신라 문무왕 2년, 고구려 왕 장(藏) 21년, 백제 왕 풍(豊) 2년(662)

◯춘정월 당의 사신이 신라에 와서 조제(吊祭)하고 사왕(嗣王)으로 책봉하였다.

처음에, 제가 왕의 부음을 듣고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하는 예를 거행한 뒤에 사신을 보내 조제하고, 왕으로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공 신라 왕(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公新羅王)을 삼고 잡채(雜綵) 5백 단을 하사하였다.

○ 고구려 개소문이 당의 군사를 사수(蛇水)에서 패배시켰다.

처음에, 당의 옥저도총관(沃沮道摠管) 방효공(龐孝恭)이 영남(嶺南)의 수졸(水卒)을 거느리고 사수 위 지금은 미상 에 주둔하자, 개소문이 맞아 공격하니, 효공이 크게 패하여 자신과 모든 군사가 죽었으며, 그의 아들 13명도 모두 죽었다.

○ 신라가 김유신을 보내 평양 행영(平壤行營)에 양곡을 운반하였다.

왕이 김유신에게 명하여, 인문(仁問)ㆍ양도(良圖)ㆍ진복(眞服) 등 9장군 및 진수하고 있는 유인원과 함께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수레 2천여 량(輛)에 쌀 4천 석과 벼 2만 2천여 석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이들이 풍수촌(楓樹村)에 이르자 얼음이 미끄럽고 길이 험하여서 수레가 갈 수 없어서 모두 마소에 옮겨 실었다. 5일 만에 칠중하(七重河)를 건너는데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앞장서 건너는 자가 없었다. 유신이 먼저 건너가자 여러 군사가 뒤를 이어 건넜고 고구려 경내로 들어가서는 적들이 길을 지키다가 칠까 염려하여 험한 길을 따라갔다. 산양(蒜壤)에 이르러 인마(人馬)가 곤핍하니, 유신이 모든 장수에게 맹세하기를,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우리의 세세(世世) 원수이다. 지금 죽음을 무릅쓰고 어려운 곳에 나아가는 것은 대국(大國)의 힘을 빌어 두 나라를 멸하여 원수와 치욕을 씻으려는 것이다. 마음에 맹세하고 하늘에 고(告)하여 신명이 돕기를 기원하노니, 제공(諸公)이 협력하여 일당백(一當百)의 마음을 가져 적의 사로잡힘을 면하기 바란다.”

하니, 모두,

“옳습니다.”

하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귀당제감(貴幢弟監) 성천(星川)과 군사(軍師) 술천(述川) 등이 이현(梨峴)에서 적을 만나 공격하여 죽였다. 2월 초하루에 유신 등이, 평양에서 3만 6천 보 떨어진 장새(獐塞) 장새현은 지금의 수안군(遂安郡)이다 에 이르렀다.

이날, 바람과 눈이 몹시 차서 인마가 많이 얼어 죽었다. 유신이 웃옷을 벗고 채찍을 잡고서 험난을 무릅쓰고 앞서서 나가니, 모든 무리가 죽을 힘을 다하여 험한 곳을 건넜다. 이때에 고구려 군사가 곳곳에 지키고 있어서 길을 통할 수가 없었는데, 유신은 당의 군사가 주리고 군색함을 염려하여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와 장사 구근(仇近) 등 15인을 모집하여 먼저 당군의 진영으로 보내니, 고구려 사람들은 바라보기만 하고 막지 못하였다. 정방은 글을 받아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유신은 한어(漢語)를 잘하는 인문(仁問)ㆍ양도(良圖) 등을 당의 진영으로 보내어 군량을 주고, 정방에게는 은(銀)ㆍ세포(細布)ㆍ두발(頭髮 머리 장식에 쓰이는 다리)ㆍ우황(牛黃 경간증(驚癎症)에 쓰이는 약 이름) 등의 물건을 보내 주었다.

2월 소정방이 평양의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정방은 양식이 다하고 군사가 피로하였으며, 또 큰눈을 만나서 돌아가려 하였지만 돌아갈 수가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양식을 얻어서 곧 돌아갔다. 전후의 행군에 모두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물러갔다. 정방이 돌아갈 적에 송아지와 난새[鸞]를 그려 신라에 보냈으나 해득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원효(元曉)가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속히 돌아갈 것을 뜻한 것입니다. 송아지와 난새를 그린 것은 이절(二切)로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 후 얼마 뒤에 과연 그러했다.

○ 김유신 등이 돌아올 적에, 고구려의 추격하는 군사를 호로하(瓠瀘河)에서 만나 크게 격파하였다.

정방이 돌아가매, 양도(良圖) 등도 군사 8백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돌아왔고 유신도 돌아오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복병(伏兵)을 하고 있다가 가는 길을 막으니 유신은 북을 소 허리에 매고 북채를 소 꼬리에 매달아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나게 하고, 또 나무를 태워 연기가 끊어지지 않게 하여 둔숙(屯宿)하는 것처럼 보이고는, 밤중에 몰래 행군하여 표하(䕯河) 호로(瓠瀘)라고도 한다 에 이르니 고구려 사람들이 보고 추격하여 왔다. 유신은 김인문과 함께 군사를 돌려 맞서 싸우면서 모든 궁수(弓手)들에게 활을 일제히 쏘게 하고 여러 당(幢)의 장사들에게 나누어 공격하게 하여 그들을 패배시키고, 머리 1만을 베고 소형(小兄) 아달혜(阿達兮) 등 5천여 인을 사로잡았으며, 병기(兵機) 수만을 얻었다. 군사가 돌아오자 왕은 기뻐서 사자를 보내 위로하고 각각 차등 있게 표상(表賞)하였다. 유신이 왕에게 아뢰기를,

“열기(裂起)ㆍ구근(仇近)은 천하의 용사입니다. 신이 편의(便宜)대로 급찬(級飡)을 제수하였으나 그들의 공에 맞지 않으니, 사찬(沙飡)을 더해 주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너무 과하지 않은가?”

하니, 유신이 대답하기를,

“작록(爵祿)은 공에 따라 주는 것이니, 과하지 않습니다.”

하니, 왕은 이를 좇았다.

추7월 신라 왕이 아우 인문(仁問)을 보내어 당에 입조(入朝)하였다.

○ 당의 웅진도독(熊津都督) 유인원(劉仁願)과 대방주 자사(帶方州刺史) 유인궤(劉仁軌)가 백제의 군사를 웅진의 동쪽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처음에, 유인원 등이 웅진에 주둔하고 있을 때 제가 칙서(勅書)를 보내어 이르기를,

“평양의 군사를 귀환시켰으므로 한 성을 혼자 고수(固守)할 수 없을 것이니 마땅히 옮겨 신라로 가 있으라. 김법민(金法敏)이 경의 유진(留鎭)을 의뢰해 오거든 그대로 머물러 있어도 좋겠지만, 만약 저들이 원치 않거든 바로 바다를 건너 돌아오라.”

하였다. 이에 장사들이 모두 중국으로 돌아가려 하니 인궤가 말하기를,

“인신(人臣)은 나라의 이익에 따라 죽을 뿐이요, 두 마음이 없어야 하는데 어찌 먼저 사사의 이익을 생각하리요. 주상(主上)께서 고구려를 멸하고자 먼저 백제를 베고 군사를 머물러 지키어 그들의 심복(心腹)을 제어하게 하신 것이다. 비록 남은 도둑이 많고 수비가 매우 엄밀하나, 군사를 격려하고 말을 잘 먹여 그들이 생각지도 않을 때를 타서 공격하면 이기지 못할 이치가 없다. 이기고 나서 사졸이 편안해진 뒤에 군사를 나누어 요험지(要險地)를 점거하여 형세를 확장하고 글을 올려 다시 군사를 더해 줄 것을 요구하면, 조정에서는 성공한 것을 알고 반드시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보내 줄 것이니 성원(聲援)이 있으면 남은 흉추(兇醜)들은 절로 섬멸될 것이다. 이것은 곧 성공을 버리지 않는 것만이 아니고 실로 길이 해외(海外)를 맑게 하는 것이다. 지금 평양의 군사는 돌아갔고 웅진마저 철수한다면 백제의 남은 무리가 곧 다시 붕기할 것이니 고구려의 도둑들을 어느 때에 멸할 수 있겠는가! 또 지금 이 성은 적의 한가운데에 있어서 혹 움직이기만 하면 곧 사로잡히게 될 것이며, 비록 신라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또한 나그네 신세[覊客]가 되는 것이고 만일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하물며 복신(福信)은 흉패(凶悖)하고 잔학(殘虐)하여 군신(君臣)이 서로 시기하고 도륙(屠戮)을 자행하고 있으니, 마땅히 굳게 지키고 있다가 그들의 변란을 보아 적당한 기회를 타서 그들을 취해야지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하니, 여러 사람이 이 말을 좇았다.

이때에 이르러, 인원 등이 백제의 경비가 소홀한 것을 알고 갑자기 군사를 내어 웅진의 동쪽에서 격파(擊破)하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ㆍ대산(大山)ㆍ사정(沙井) 등의 성책을 함락시켰는데, 죽이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으며 군사를 나누어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이 진현성(眞峴城)이 강을 끼고 험준하여 요새지가 되므로 군사를 더하여 지키게 하였는데, 인궤는 그들이 조금 해이함을 엿보고 신라의 군사를 이끌고 성에 육박하여 성첩(城堞)에 기어 올라가 새벽에 그 성을 점거하였고, 8백 인을 참살하였다. 이리하여 신라와의 향도(饟道 군량을 운반하는 길)가 뚫렸다.

신라는 다시 흠순(欽純) 등 19명의 장수를 보내어 내사지성(內斯只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 유인원이 군사를 더해 줄 것을 주청(奏請)하니, 손인사(孫仁師)에게 조칙(詔勅)을 내려 군사를 동원하여 나가게 하였다.

인원이 백제를 파하고 군사를 더해 줄 것을 주청하니, 손인사에게 조칙하여 웅진도 행군총관(熊津道行軍摠管)으로 삼고, 치주(淄州)ㆍ청주(靑州)ㆍ내주(萊州)ㆍ해주(海州)의 병사 7천 인을 동원하여 덕물도(德勿島)를 거쳐 웅진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 백제 왕이 복신을 죽였다.

복신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게 되자, 왕과 서로 시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복신은 거짓 병들었다 핑계대고 굴실(窟室)에 누워서 왕의 문병(問病)을 기다려 해치려 하니, 왕이 이것을 알고 심복 신하를 거느리고 가서 복신을 죽였다.

○ 백제가 사자를 고구려 및 왜(倭)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백제가 남은 무리를 모아 서로 보취(保聚 보전하여 지키기 위하여 백성이 모여 사는 것)하였으나 당과 신라가 끊일 사이없이 노략질하였고 당이 또 군사를 증원하였다. 반면에 백제는 대신이 안에서 반역(叛逆)하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스스로 진작(振作)할 수가 없었다. 이에 사자를 두 나라에 보내어 군사를 빌어 당의 군사를 막으려 하였다.

■신라 문무왕 3년, 고구려 왕 장 22년, 백제 왕 풍 3년. 이해에 백제는 망하여 두 나라가 되었다(663)

◯추9월 당의 유인궤ㆍ손인사 및 신라 왕이, 백제 및 왜의 구원병을 백강(白江)에서 공격하여 패배시켰고 주류성(周留城)을 빼앗았다. 백제 왕 풍(豊)이 고구려로 도망가니, 백제가 드디어 망하였다.

인사(仁師)가 와서 인원(仁願)과 합세하니, 사기가 크게 떨쳤다. 신라 왕이 김유신 등 28장(將)을 거느리고 와서 전봉(前鋒)이 되었다. 여러 장수가. 가림성은 수륙(水陸)의 요충(要衝)이라 하여 먼저 공격하려 하니, 인궤가 말하였다.

“병법(兵法)에 실(實)을 피하고 허(虛)를 공격한다 하였으니, 가림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면 사졸이 상하게 되고 지키면 날짜만 허비하게 될 것이다.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巢窟)이니 여기서 이긴다면 여러 성은 저절로 떨어질 것이다.”

이에 인사ㆍ인원 및 신라 왕은 육지로 따라 나가고, 인궤와 별장 두상(杜爽) 및 부여융(扶餘隆)은 주사(舟師)와 양선(糧船)을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들어가 서로 모여 함께 주류성으로 나아가다가 왜병(倭兵)을 백강 입구에서 만났으며, 백제의 정기(精騎)도 언덕 위에 열지어 있었다. 신라의 군사가 힘써 싸워 4합(合 싸우는 횟수를 말한다)을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치솟았으며 바닷물이 붉게 되었다. 이긴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언덕 위의 군사를 깨뜨렸다. 이렇게 되자 두릉(豆陵)ㆍ윤성(尹城)ㆍ주류(周留) 등의 성이 모두 두려워 항복하였다. 마침내 풍(豊)은 고구려로 달아나니 그의 보검(寶劍)을 노획했으며, 왕자인 충승(忠勝)ㆍ충지(忠志) 등은 그들의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倭人)과 함께 신라에 항복하였다. 왕이 왜인에게 이르기를,

“우리 나라가 너의 나라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강화(講和)하고 빙문(聘問)하여 한번도 불화(不和)한 일이 없었는데 무엇 때문에 오늘날 이런 짓을 했는가? 내가 차마 너희들을 죽이지 못하겠으니 돌아가 너희 왕에게 말하라.”

하고, 드디어 놓아 보냈고 군사를 나누어 여러 성을 쳐서 항복받았다. 백제는 모두 32왕 6백 81년 만에 망하였다.

동11월 백제 장군 지수신(遲受信)이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고 신라에 항거하였다.

백제가 망하자 모든 성이 항복하였으나, 지수신만이 임존성에 웅거하였는데 지세가 험하고 성이 견고하며 저장해 둔 양식이 또한 많아서 신라 사람이 한 달을 공격하였어도 함락되지 않았다.

○ 백제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당에 항복하였다. 그리고는 임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수장(守將) 지수신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백제가 망하였는데도 상지(常之)가 험지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제가 사자를 보내어 초유(招諭)하니, 상지가 사타 상여(沙咜相如)와 함께 인궤에게 나아가 항복하였다. 인궤가 성심으로 그를 대접하고 그들로 하여금 성을 취하여 스스로 공효를 세우게 하고 양곡과 병기를 대주니, 손인사가 말하기를,

“야심(野心)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병기와 양곡을 대어 주었다가 그들이 배반한다면 도적을 도와 주는 것이 됩니다.”

하니, 인궤가 말하기를,

“두 사람을 보건대 충성스럽고도 지모가 있습니다. 단지 지난날에는 못된 사람에게 의탁하였기 때문이요, 지금은 매우 감격하여 공을 세우려 하니 의심할 것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주었다. 이들이 임존성을 공격하여 빼앗으니, 수신(受信)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나고 남은 무리들은 모두 평정되었다. 상지는 당에 들어가 정벌(征伐)에 종군하여 공을 세워서 벼슬이 연연도 대총관(燕然道大摠管)에 이르렀다. 무후(武后) 때에 마침내 무함(誣陷)을 입어 옥에서 죽었다. 상지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데 인정이 있었다. 어느 때 자기가 타는 말을 사졸이 매질한 적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죄 주라고 청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개인의 말[馬] 때문에 나라의 병사를 때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전후에 상으로 하사받은 것을 남김없이 부하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가 죽자 사람들이 모두 그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슬퍼하였다.

○ 당이, 유인궤를 백제에 머물러 진수하게 하고 유인원을 소환하였다.

이때에 백제는 전쟁을 치른 나머지, 집들이 허물어지고 시체가 들에 깔렸었다. 인궤는 비로소 해골을 거두어 묻게 하고, 호적을 만들어 촌락을 정리하고, 관장(官長)을 임명하여 도로를 통하며, 교량(橋梁)을 세우고 제방을 보수하며, 방죽을 복구시키고 농잠(農蠶)을 장려하며, 가난을 구제하고 고아와 노인을 양육하며, 당의 사직(社稷)을 세우고 정삭(正朔) 및 묘휘(廟諱)를 반포하여 백성들이 모두 생업에 편안히 종사케 한 뒤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양곡을 저장하고 사졸을 훈련시켜 고구려를 도모하려 하였다. 유인궤가 있던 고성(古城)은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에 있으며 정전(井田)하던 터도 있다.

○ 신라가 진수하고 있는 당군에게 의복을 공급하여 주었다.

■신라 문무왕 4년 고구려 왕 장 23년(664)

○ 당이 유인원을 보내에 웅진을 대신 수비하게 하고, 부여 융으로 웅진도위(熊津都尉)를 삼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인궤가 글을 올리기를,

“수병(戍兵)들이 타국에서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으니 특별한 위로가 없으면 군사들이 피로하여 공을 세울 날이 없을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제가 인원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서 먼저 있던 군사를 대신케 하고 인궤는 돌아오라 하교(下敎)하였다. 인궤는 인원에게 말하기를,

“국가에서 후원이 없는 군사를 먼 외국에 두고 고구려를 경략(經略)하려 하니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장졸(將卒)들을 한꺼번에 교대하여 돌아간다면, 새로 복종한 오랑캐의 인심이 불안하여져서 반드시 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구병(舊兵)을 머물러 있게 하여 점차적으로 자량(資糧)을 준비하고 절차를 정하여 돌려보낼 것이요, 군장(軍將)들은 끝까지 머물러 진무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인원이 말하기를,

“군사를 거느리고 바깥에 있으면 의당 참소와 비방이 따르는 것이니, 어찌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하니, 인궤가 말하기를,

“인신(人臣)은 진실로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하지 않을 것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사사인을 돌볼 수 있겠습니까?”

하고, 표(表)를 올려 편의대로 할 것을 아뢰고 스스로 해동(海東)에 머물러 진수(鎭守)할 것을 청하니, 제(帝)가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부여 융을 웅진 도위로 삼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남은 무리를 불러 모아 신라와 더불어 감정을 풀게 하였다.

○ 당의 유인원이 신라의 김인문(金仁問)과 백제의 부여 융과 웅진에서 회맹(會盟)하였다.

3월 백제의 남은 무리가 사자성을 점거하자, 웅진의 군사가 공격하여 깨뜨렸다.

추7월 신라 및 웅진의 군사가 고구려의 돌사성(突沙城)을 공격하여 멸하였다.

■신라 문무왕 5년, 고구려 왕 장 24년 (665)

◯추8월 당의 유인원이 신라 왕 및 부여 융과 함께 웅진의 취리산(就利山)에서 회맹(會盟)하였다.

이보다 앞서 백제가 평정되었을 적에 당이 신라에게 백제와 더불어 동맹할 것을 조칙(詔勅)하였으나, 신라는 백제가 갖가지로 간교하고 반복(反復)이 무상하여 지금 서로 동맹하더라도 뒷날 후회스러운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따르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또 조칙을 내려 맹세(盟誓)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니, 드디어 웅진의 취리산 지금의 공주 북쪽 60리에 있다 에 단(壇)을 쌓고, 백마를 잡아 맹세(盟誓)하였는데, 먼저 천ㆍ지ㆍ산ㆍ천(天地山川)의 신에게 제사지낸 후에 피를 마시고 함께 맹세하였다. 맹세한 말은 이러하였다.

“과거 백제의 선왕(先王)들이 순역(順逆)을 살피지 아니하여 이웃 나라와 우호를 돈독히 하지 아니하고 친척과 화목하지 아니했으며, 고구려ㆍ왜와 함께 신라를 침략하여 거의 평안한 해가 없었다. 천자께서는 한 물건이라도 제곳을 잃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허물 없는 백성을 가엽게 여기시어, 자주 사자(使者)를 보내 화친할 것을 효유하였는데도 지세가 험하고 중국에서 멀다는 것을 자부하여 천경(天經 중화를 가리킨다)을 모멸(侮蔑)하였으므로, 황제께서 노하여 한번 군사를 내자 크게 평정되었다. 진실로 궁궐을 헐어 못을 만들어 후예의 경계를 삼게 하고,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아 후손의 교훈을 삼게 할 것이나, 복종하는 자를 품어 주고 배반하는 자를 치는 것은 전왕(前王)들의 아름다운 법이요, 망한 것을 일으켜 주고 끊어진 것을 이어 주는 것은 지난 현철(賢哲)의 통상 규범(規範)이므로, 전의 태자 융(隆)을 책립하여 웅진 도독으로 삼아 선대의 제사를 지키고 고국을 보전하게 하였으니, 신라와 의지하여 길이 동맹의 나라가 되어 우호를 맺고 원한을 없애며, 각각 조명(詔命)을 받들어 길이 번방(藩邦)으로 복속할 지어다. 우위위장군 노성현공(右威衛將軍魯城縣公) 유 인원이 친히 그 회맹에 임하여 이 성지(成旨)를 선포하고 혼인으로 약속하며, 맹세를 다짐하여 희생(犧牲)을 잡아 피를 마시고서 다 함께 시종(始終)토록 돈독히 재앙을 나누고 환란을 구제하며 은의(恩義)를 형제같이 하여, 공경히 윤음(綸音)을 받들어 감히 실추(失墜)하지 말라. 만일 두 마음을 품고 변경을 침범하면, 신명(神明)이 이를 보시고 백 가지 재앙을 내려, 자손이 끊기고 사직도 무너져 제사는 물론 종자도 남길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로 해서 금서(金書)ㆍ철권(鐵券)을 만들어 종묘에 간직하여 두니 자손 만대토록 어김이 없도록 하라. 신명께서는 이 맹약을 들으시고 흠향(歆饗)하여 복을 주소서.”

인궤가 지은 글이다. 피를 마신 뒤에 희생과 폐백을 제단 북쪽에 묻고 그 글을 신라의 종묘에 간직케 하였다.

○ 유인궤 및 부여융이 당으로 돌아갔다.

이때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맺자, 인궤는 신라ㆍ백제ㆍ탐라ㆍ왜국의 사자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돌아가서 태산에 모여 제사지냈다. 융은 신라의 핍박이 두려워 감히 머물러 지키지 못하고, 당으로 돌아갔다.

■신라 문무왕 6년 고구려 왕 장 25년(666)

◯5월 고구려 천개소문(泉蓋蘇文)이 죽으니, 아들 남생(男生)이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개소문이 정권을 잡은 지가 24년이었는데 바깥으로는 상국(上國 중국을 가리킨다)에 항거하고 옆으로는 이웃 나라(신라를 가리킨다)를 침략하였으며 안으로는 임금을 협제하여 기염(氣焰)이 대단히 거세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장자(長者)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었다. 처음 남생은 아버지로 인하여 선인(先人)에 임명되었다가 중리 소형(中裏小兄)에 옮겨졌으니, 당의 알자(謁者)와 같다. 또 중리 대형(中裏大兄)이 되어 국정(國政)을 맡아 보았기 때문에 모든 사령(辭令)을 주관하였으며, 중리 위두 대형(中裏位頭大兄)으로 승진하여 드디어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었으며, 삼군 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하고 대막리지(大莫離支)를 더하였다.

○ 고구려의 천남건(泉男建)이 그 형 남생을 쫓아내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 남생은 도망가 국내성(國內城)을 점거하였다가 성을 가지고 당에 항복하니, 당에서는 장수를 보내 고구려를 쳤다.

남생이 처음에 국정을 맡고 있다가 여러 부(部)를 순무(巡撫)하러 나가면서 그의 아우 남건(男建)ㆍ남산(男産)들에게 머물러 있으면서 뒷일을 맡게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두 아우에게 말하기를,

“남생이 그대들이 핍박함을 미워하여 그대들을 제거하려고 하니 먼저 계책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니, 두 아우가 처음에는 믿지 아니하였다. 그랬는데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고해 바치기를,

“두 아우는 형이 돌아오면 그들의 권한을 빼앗길까 두려워서 형에게 항거하려 한다.”

하니, 남생이 몰래 평양에 사람을 보내 그들을 엿보게 하였는데, 두 아우는 그를 체포하고 왕명(王命)을 거짓 꾸며 남생을 부르니 남생은 두려워서 돌아가지 못하였다. 마침내 남건은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고는 군사를 내어 남생을 공격하였다. 남생은 달아나 국내성을 지키면서 거란ㆍ말갈과 결탁하고 아들 헌성(獻誠)을 당에 보내 내응해 주기를 구하였다.

제는 헌성에게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을 배수(拜授)하고 승여(乘輿)ㆍ승마(乘馬)ㆍ서금(瑞錦)ㆍ보도(寶刀)를 하사하여 보냈으며, 계필 하력(契苾何力)을 요동도 안무대사(遼東道安撫大使)로 삼아 그를 구하게 하고 헌성을 향도(嚮導)로 삼았으며, 또 방동선(龐同善)을 영주 도독(營州都督)으로 삼고 고간(高侃)을 행군총관(行軍摠管)으로 삼아서 함께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방동선은 진병(進兵)하여 고구려 군사를 크게 깨뜨리고 남생과 합군(合軍)하였다. 제는 남생을 특진요동대도독 겸 평양주 행군대총관 지절안무대사현도군공(特進遼東大都督兼平壤州行軍大摠管持節安撫大使玄菟郡公)으로 제수하니, 남생이 가물(哥勿)ㆍ남소(南蘇)ㆍ창암(倉巖) 등의 성(城)을 가지고 당에 귀의하였다.

동12월 당이 이적(李勣)ㆍ학처준(郝處俊)을 보내어 고구려를 쳤다.

적(勣)으로 요동도 대총관을 삼고 처준(處俊)으로 부총관을 삼아 계필 하력ㆍ방동선과 함께 힘을 합하게 하였으며, 수륙(水陸)의 모든 군사는 적(勣)의 처분을 받게 하고 하북(河北) 여러 주(州)의 조부(租賦)는 모두 요동으로 보내어 군용(軍用)으로 공급케 하였다.

○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가 배반하여 신라에 항복하였다.

정토는 개소문의 아우이다. 남생이 반역하여 국내(國內)의 인심이 흩어지자, 정토는 그의 종관(從官) 24인, 성(城) 12, 호(戶) 7백 60, 인구(人口) 3천 5백 43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니, 왕이 의식(衣食)과 가택(家宅)을 주어 왕도(王都) 및 주부(州府)에 편안히 살게 하고, 사졸을 보내 그들이 가지고 온 성을 지키게 하였다. 뒤에 정토는 당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신라 문무왕 7년 고구려 왕 장 26년(667)

○당이 군사를 신라에서 징발(徵發)하여 고구려를 쳤다.

제가 조칙(詔勅)을 보내어 왕의 아우인 지경(智鏡)ㆍ개원(愷元)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의 전역(戰役)에 나가게 하고, 또 조칙을 일원(日原)에게 보내어 운휘장군(雲麾將軍)을 삼으니 왕이 궁정(宮庭)에서 조칙대로 명하였다. 제가 또 유인원 및 왕의 아우인 인태(仁泰)에게 명하여 비열도(卑列道 문무왕이 설인귀(薛仁貴)의 글에 답하기를, 비열도는 본래 신라의 땅이었는데 고구려에서 빼앗아 36여 년 동안 소유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아마도 비열주인가 싶은데 지금의 안변(安邊)이다)에 종군(從軍)케 하였으며, 또 신라의 군사를 징발하여 다곡(多谷)ㆍ해곡(海谷) 두 도(道) 모두 미상 로 종군(從軍)하여 평양으로 모이게 하였다.

8월 신라가 김유신 등 30장군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는데, 9월에 모든 군사가 한성(漢城)에 이르렀다.

이적(李勣)이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16성(城)을 항복받았다. 겨울 10월에 적(勣)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적(勣)이 처음 요동에 건너와서 여러 장수에게 이르기를,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邊境)의 요해처(要害處)여서 먼저 얻지 못하면 나머지의 성들은 취(取)하기가 쉽지 않다.”

하고, 드디어 이를 공격하였는데, 성인(城人) 사부구(師夫仇) 등이 성주(城主)를 포박하여 문을 열고 항복하니, 계필 하력에게 그곳을 지키게 하고 적(勣)은 군사를 이끌고 16성에 진격하여 모두 항복받았다. 방동선(龐同善)ㆍ고간(高侃)은 아직도 신성에 있었는데, 천남건(泉男建)이 군사를 보내 그 진영을 엄습하니, 좌무위 장군(左武衛將軍) 설인귀(薛仁貴)가 이를 격파하였다. 간(侃)이 진군하여 금산(金山)에 이르러 고구려의 군사와 싸워 패배시키고 승세를 타서 추격하였는데, 설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횡(橫)으로 공격하여 고구려의 군사 5만여 인을 죽이고 남소(南蘇)ㆍ목저(木底)ㆍ창암(蒼巖) 등의 3성을 함락시키고 천남생의 군사와 합하였다. 적리도(積利道) 요동에 있다. 총관(摠管) 곽대봉(郭待封)은 수군(水軍)을 이끌고 다른 길로 평양으로 나갔는데, 적(勣)이 별장(別將) 풍사본(馮師本)을 보내 군량과 병기를 대주게 하였더니 사본(師本)이 파선(破船)을 당하여 기일 안에 대주지 못하자, 대봉의 군중(軍中)은 주리고 군색하였다. 대봉이 글을 지어 적(勣)에게 보내려 하였으나 고구려에게 빼앗겨 그 허실(虛實)이 알려질까 두려워서 이합시(離合詩)를 지어 적(勣)에게 보냈다. 글을 받아 본 적은 성내어 말하기를,

“군사의 일이 급박한 때에 어찌 시를 지어 보내는가? 내 꼭 참수(斬首)하리라.”

하매, 행군관기(行軍管記)인 원만경(元萬頃)이 그 뜻을 풀이해 주자, 적(勣)은 다시 군량과 병기를 보내 주었다. 만경(萬頃)이 격문 짓기를,

“압록의 험지(險地)를 지킬 줄 모르는구나.”

하였더니, 천남건이 회보(回報)하기를,

“삼가 명령을 듣겠다.”

하고, 곧바로 군사를 옮겨 압록진(鴨綠津)을 점거하니 당의 군사가 건너지 못하였다. 제가 이 사실을 듣고 만경을 영남(嶺南)에 귀양보냈다. 학처준(郝處俊)은 안시성(安市城) 아래에 있었는데, 고구려 군사 3만이 엄습하자 군중(軍中)은 크게 놀랐으나 처준은 호상(胡床)에 앉아 마른 밥을 다 먹은 다음에 정병(精兵)을 뽑아서 이를 격파하였다. 겨울 10월에 적(勣)이 돌아갔다.

○ 신라 왕이 한성주(漢城州)에 왔다. 11월에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장새(獐塞)에 이르렀는데, 이적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이에 앞서 이적이 평양성(平壤城) 못 미쳐 2백 리에 이르러서, 이동혜(爾同兮)이동혜현은 일선군(一善郡)에 속했는데 지금은 미상촌주(村主) 대내마(大奈麻) 강심(江深)을 보내 거란 기병 8천여 인을 거느리고 아진함성(阿珍含城) 지금의 안협현(安峽縣)인데 함(含)은 압(押)이라고도 한다 을 거쳐 한성에 이르렀다. 그때에 왕이 한성에 있으면서 세작(細作 첩자를 말한다)을 보내 탐문하여 보니, 당의 군사가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은 도로를 개통하기 위하여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될 즈음에 심(深)이 와서 성을 치지 말고 빨리 평양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므로, 왕은 이 말을 좇아 장새에 이르렀다가 적(勣)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신라 문무왕 8년, 고구려 왕 장 27년 이 해에 고구려가 망하였다(668)

◯춘정월 당이 다시 이적(이세적) 등을 보내 고구려를 치게 하고 김인문(金仁問)을 시켜 신라군을 징발하게 하였다. 2월에 이적이 부여성(扶餘城)을 함락시키고 그들의 구원병을 설하수(薛賀水)에서 격파하였다.

설인귀는 고구려의 군사를 금산(金山)《성경지(盛京志)》에 지금의 영해현(寧海縣) 서남쪽 1백 27리에 있는 황금산(黃金山)이 이것이라 하였다 에서 격파하고, 승세(勝勢)를 이용하여 3천인을 거느리고 부여성을 격파하려 하자 여러 장수들이 군사 적은 것을 가지고 말리니 인귀가,

“군사는 많다고 하여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하고, 드디어 전봉(前鋒)이 되어 나아가서 고구려와 싸워 크게 격파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1만여 인이었다. 마침내 부여성이 함락되니 부여천(扶餘川) 주변의 40여 성이 모두 풍문만 듣고 바람에 쓸리듯 항복을 청하였다. 시어사(侍御史) 가충언(賈忠言)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요동으로부터 돌아갔는데 제가 군중(軍中)의 일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옛날 선제(先帝 당의 태종(太宗)을 말한다)께서 동정(東征)하여 고구려를 이기지 못한 것은 그들 내부에 틈이 있지 않아서입니다. 속언(俗諺)에, ‘군(軍)은 길잡이가 없으면 중도(中道)에서 돌아온다.’ 하였습니다. 지금 남생의 형제가 서로 싸워서 우리를 이끌어들이며, 오랑캐의 실정과 거짓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장수는 충성하고 사졸은 힘을 다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긴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 고구려 비기(秘記)에, ‘9백 년이 못되어 80대장(大將)이 이를 멸할 것이라.’ 하였는데, 고씨(高氏)는 한(漢) 때부터 나라를 세운 지 지금 9백 년이고 적(勣)의 나이 80이며, 오랑캐들은 연이어 굶주려서 사람들은 서로 약탈하고 땅은 모두 분산되고, 이리와 여우가 성으로 들어오고, 두더지는 문에 구멍을 내며 인심은 흉흉하니 이번에 꼭 이기고 다시 거병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남건이 군사 5만으로 부여성을 구원하자, 적(勣)이 설하수 이 강은 요동에 있다는데 지금은 미상이다 에서 그들을 격파하였는데 머리 5천 급을 베었고 인구 3만을 사로잡으며, 나아가 대행성(大行城) 지금은 미상 을 함락시켰다.

6월 신라 왕이 38명의 총관을 거느리고 당의 군사와 평양에서 모였다.

당의 우상(右相)인 요동도 부대총관(遼東道副大摠管) 유인궤가 숙위 김삼광(金三光)과 함께 당항진(黨項津)에 도착하여 조칙을 선포하고 돌아갔다. 왕은,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大幢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金仁問)ㆍ흠순(欽純)ㆍ천존(天存)ㆍ문충(文忠)ㆍ진복(眞福)ㆍ지경(智鏡)ㆍ양도(良圖)ㆍ흠돌(欽突)을 대당 총관으로 삼고, 진순(陳純)ㆍ죽지(竹旨)를 경정(京停)으로 삼고, 품일(品日)ㆍ문훈(文訓)ㆍ천품(天品)을 귀당(貴幢)으로 삼고, 인태(仁泰)를 비열도 군관(卑列道軍官)으로 삼고, 도유(都儒)ㆍ용장(龍長)을 한성주 총관(漢城州摠管)으로 삼고, 숭신(崇信)ㆍ문영(文穎)ㆍ복세(福世)를 비열주 총관(卑列州摠管)으로 삼고, 선광(宣光)ㆍ장순(長順)ㆍ순장(純長)을 하서주 총관(河西州摠管)으로 삼고, 의복(宜福)ㆍ천광(天光)을 서당 총관(誓幢摠管)으로 삼고, 일원(日原)ㆍ흥원(興元)을 계금당 총관(罽衿幢摠管)으로 삼아 군사 20만을 내어 모든 군사를 출발시켰는데, 인문ㆍ천존ㆍ도유 등은 일선주(一善州) 지금의 선산(善山) 등 7군(郡) 및 한성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의 진영으로 나아갔다.

왕은 맨 뒤에 출발하면서, 유신이 풍병(風病)을 앓았기 때문에 경도(京都)에 머물게 하고 흠순ㆍ인문을 장수로 삼으니, 흠순이 왕에게 아뢰기를,

“유신이 함께 가지 않는다면 후회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등(卿等)은 모두 나라의 보배다. 만약 함께 가서 만(萬)에 하나라도 차질이 생긴다면 그때 나라의 일은 어찌 되겠는가? 유신을 머물게 하는 것은 은연(隱然)하게 나라의 장성(長城)을 삼는 것이니 나는 근심될 것이 없다.”

흠순은 유신의 아우요, 인문은 유신의 생질(甥姪)인데 두 사람이 유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인재가 못되는데, 지금 대왕을 따라 예측하지 못할 땅으로 나아가니 원컨대 가르침을 듣고자 합니다.”

하니, 유신이 이르기를,

“무릇 장수된 자는 나라의 간성(干城)이요, 임금의 조아(爪牙 손톱과 어금니의 뜻으로 가장 중요한 사람을 말한다)로서 승부(勝負)를 시석(矢石 화살과 쇠뇌로 쏘는 들의 뜻인데 전쟁을 말한다) 사이에서 결단하는 것이니, 반드시 위로는 천도(天道)를 얻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얻고, 가운데로는 인심을 얻은 뒤라야 성공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충신(忠信)으로 존재하였고, 백제는 오만으로 망하였으며, 고구려는 교만으로 위태롭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곧음으로 저들의 굳음을 치니 어찌 이기지 못함을 근심하리요. 하물며 천자의 위엄을 가지고 지극히 불인(不仁)함을 정벌함에랴!”

하였다. 인문 등이 이적을 만나서 영류산(嬰留山)김부식은, 이 산은 평양 바깥쪽 20리에 있다고 하였다. 아래로 진군(進軍)하였다.

○ 고구려의 대곡군(大谷郡)지금의 평산부(平山府)이다 이 유인원에게 항복하였다.

추7월 신라 왕이 한성주에 행차(行次)하여 문영(文穎) 등을 보내 고구려의 군사를 사천(蛇川)지금은 미상 에서 패배시켰다.

8월 당의 유인원이 두류(逗遛)하고 전진하지 않았다는 죄로 요주(姚州)로 귀양갔다.

9월 당의 군사와 신라 군사가 평양에 모여들어서 성을 함락시키고, 당이 고구려 왕 장을 잡아가지고 돌아감으로써 고구려는 망하였다. 당은 설인귀를 평양에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적(勣)은 태행성(太行城)을 이기니, 여러 갈래의 군사들이 다 모였다. 그리하여 압록의 성책(城柵)으로 진군하니 고구려가 항거하여 왔다. 그러나 적(勣)이 이를 패배시키고 2백여 리를 추격하여 욕이성(辱夷城)지금 평안도인 듯하나 미상 을 함락시키니, 모든 성이 잇달아 항복하였다.

계필 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에 이르니, 적(勣)의 군사가 뒤이어 왔으며 여러 총관의 군사도 모두 모였다. 이때에 신라의 군사가 선봉(先鋒)이 되어 당의 군사와 함께 평양성을 포위한 지 한 달 만에 고구려 왕은 천남산(泉男産)을 보내어 수령(首領) 98인을 거느리고 흰 기를 들고 적(勣) 앞으로 나와 항복하니, 적이 예로써 대접하였다.

그러나 남건(男建)은 오히려 성을 굳게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남건이 군사의 일을 중[浮圖] 신성(信誠)에게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小將)인 오사(烏沙)ㆍ요묘(饒苗) 등과 함께 은밀히 첩자(諜者)를 보내 내응(內應)하기로 약속한 뒤 5일 만에 성문을 열어 놓았다. 적(勣)은 다시 효용(驍勇)한 신라의 기병(騎兵) 5백 인을 먼저 성에 들어가게 하고, 뒤따라 군사를 놓아 북치고 소리 지르면서 성에 불을 지르니, 남건은 다급하여 스스로 자신을 찔렀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김인문 등이 왕을 잡아 적(勣)의 앞에 꿇어앉히고 그의 죄를 문책하니, 왕이 재배하였고 적도 답례하였다.

드디어 장(藏) 및 아들 복남(福男)ㆍ덕남(德男)과 대신 남건(男建) 그리고 부여풍(扶餘豊) 등 20여만의 무리를 잡아 당으로 보냈으며, 설인귀를 평양에 머물러 진수케 하였다. 장안성(長安城)에 도읍한 지 83년 만에 망하였다. 이리하여 고구려가 망하였으니 무릇 28왕에 모두 7백 5년이었다.

○ 신라가 김유신을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으로 삼고 여러 장수에게도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신라 왕이 평양이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만나려고 힐차양(肹次壤) 지금은 미상 까지 갔다가, 당군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다시 한성으로 돌아와서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옛날 백제 왕 명농(明襛 성왕(聖王)의 이름)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자 유신의 조부 무력(武力)이 맞아 싸워서 왕 및 대신 4명을 사로잡았다. 그의 아버지 서현(舒玄)은 양주 총관(良州摠管)이 되어 여러 번 백제를 꺾어서 경계를 침범치 못하게 하였다. 김유신은 조고(祖考)의 공업(功業)을 받들어 사직의 신하가 되어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었으니, 공적이 매우 크다. 이제 특별한 예로 상을 주고자 한다.”

하고, 이에 대각간(大角干) 위가 되는 태대서발한을 두어 이를 제수하고, 식읍(食邑) 5백 호를 주었으며,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여 궁전에 오를 적에도 빨리 걷지 않게 하였다. 김인문에게는 대각간을 제수하고 식읍 5백호를 주었으며, 장사(將士)들도 공을 논하여 산 자에게는 관작을 주고 곡식을 하사하였으며, 죽은 자에게는 관위(官位)를 추증하였다. 사천(蛇川)의 싸움에서 사찬 구율(求律)이 다리 밑으로 들어가 물을 건너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으나, 군령(軍令)이 없이 스스로 위험한 곳으로 들어갔다 하여 공이 제일인데도 공이 기록되지 않으니, 분한(憤恨)하여 목매어 죽으려 하자 옆 사람이 구해 주었다.

동10월 당이 고구려 왕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옛 백제 왕 풍(豊)을 영남에 귀양보냈다.

처음에 이적이 고구려를 격파할 적에 신라의 군사가 매양 성을 먼저 오르자 이적이 이것을 시기하여, ‘신라가 먼젓번에 군사 댈 시기를 어겼으니 토정(討定)하겠다.’고 말하였다. 또 비열성(卑列城)은 본시 신라에 속해 있었는데 고구려에게 빼앗긴 지가 30여 년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신라가 취하여 관원을 두어 지키자, 적(勣)은 취하여 고구려에 돌려 주었다. 당으로 돌아갈 적에 또 ‘신라는 공이 없다.’고 말하니, 신라의 장수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분격하였다. 적(勣)이 고구려의 포로를 바치니, 제가 명하여 먼저 장(藏) 등을 소릉(昭陵 당 태종의 능)에 바치게 하고, 군용(軍容)을 갖추고 개가(凱歌)를 연주하면서 입경(入京)하여 태묘(太廟)에 바치게 하였다. 제가 포로를 함원전(含元殿)에서 받았는데, 장(藏)의 지난 정사(政事)가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하여 사면(赦免)하여 사정태상백 원외동정(司正太常伯員外同正)으로 삼았으며, 뒤에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승진되었다.

천남산(泉男産)을 사재 소경(司宰少卿)으로 삼고, 중 신성(信誠)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삼고, 천남생(泉男生)을 우위대장군 변국공(右衛大將軍卞國公)으로 삼았으며, 남건(男建)은 검주(黔州)로 유배보내고 부여풍(扶餘豊)은 영남으로 유배보냈다. 남생은 성품이 순후(淳厚)하고 예의가 있었으며 주대(奏對 천자에게 상주(上奏)하거나 하문(下問)에 대답하는 것)에 민첩하였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다. 그가 처음 당에 가서 도끼를 가지고 궁궐 앞에 엎디어 대죄(待罪)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칭송하였다. 나이 46세에 졸(卒)하였다. 그의 아들 헌성(獻誠)은 측천 무후(則天武后) 때에 우위대장군이 되었다. 무후가 금폐(金幣)를 내놓고 활 잘쏘는 5인을 골라 가장 많이 맞춘 자에게 이것을 주게 하였다. 헌성이 제일이 되었는데 헌성이 사양하며 아뢰기를,

“신은 중화(中華)의 사람이 아니므로 당의 관원이 활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까 두렵습니다.”

하니, 무후가 이것을 아름답게 받아들였다. 뒤에 내준신(來俊臣)이 모함하여 죽였는데 무후는 그가 원통하게 죽은 것을 알고, 벼슬을 추증하고 장사지내 주었다.

11월 5일 왕은 고구려의 포로 7천을 데리고 입경하였으며, 6일에는 문신(文臣)과 무신(武臣)을 거느리고 선조묘(先祖廟)에 조알(朝謁)하고 고(告)하기를,

“삼가 선조(先祖)의 뜻을 받들어 대당(大唐)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의 죄를 문책하였으며, 원흉(元兇)이 복죄(伏罪)되어 나라가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18일에는 싸우다가 죽은 이에게 포백을 차등 있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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