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강목(東史綱目)
안정복(1712-1791)
동사강목 제4하
■문무왕(文武王) 9년(669)
◯당(唐)이 평양(平壤)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설인귀(薛仁貴)를 도호(都護)로 삼았다.
고구려가 전성(全盛)할 적에는 도성(都城)의 호수(戶數)가 21만 5백 8호이었는데, 난리로 유망(流亡)할 적에 이르러서는 국내 오부(五部)와 1백 76성(城)에 69만여 호뿐이었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이적(李勣)과 천남생(泉男生)이, 신성(新城)ㆍ요성(遼城)ㆍ가물(哥勿)ㆍ위락(衛樂)ㆍ사리(舍利)ㆍ거소(居素)ㆍ월희(越喜)ㆍ거단(去旦)ㆍ건안(建安) 등 9주(州)의 도독부(都督府)와 남소(南蘇)ㆍ개모(蓋牟)ㆍ대라(代羅)ㆍ창암(倉巖)ㆍ마미(磨米)ㆍ적리(積利)ㆍ여산(黎山)ㆍ연진(延津)ㆍ목저(木底)ㆍ안시(安市)ㆍ제북(諸北)ㆍ식리(識利)ㆍ불녈(拂涅)ㆍ배한(拜漢) 등 42주 1백 현(縣)으로 나누고 도호부를 평양에 설치하여 통괄(統括)하였으며, 공이 있는 고구려 사람을 도독(都督 도독부를 다스리는 우두머리)ㆍ자사(刺史 주(州)를 다스리는 우두머리)ㆍ현령(縣令 현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으로 발탁하여 중국 사람과 함께 다스리게 하고, 설인귀(薛仁貴)로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새서(璽書 천자가 내리는 문서)로 위로하고 겸하여 금과 비단을 내렸으며, 또한 김유신(金庾信)에게 글을 내려 포장(褒獎)하고, 김인문(金仁問)에게 작위(爵位)를 더하여 그대로 머물러 숙위(宿衛)케 하였다.
뒤에 고구려 사람들이 많이 이반(離反)하므로 3만 8천 호를 강회(江淮)의 남쪽 및 산남(山南)ㆍ경서(京西) 등 여러 주의 비어 있던 땅에 옮기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은 머물러서 안동(도호부가 있는 평양을 가리킨다)을 지키게 하였다.
○ 옛 고구려의 왕자 안승(安勝)이 무리를 거느리고서 투항하여 왔다.
■경오년 문무왕 10년(670)
◯하6월 옛 고구려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이 군사를 일으켜 그들 임금의 아들인 안승(安勝)을 한성(漢城)에서 옹립(擁立)하고 사신을 보내어 내부(來附)하였다.
여수임성(麗水臨城)미상 사람 대형 검모잠(劍牟岑)이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남은 인민을 수합하였다. 궁모성(窮牟城)미상 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관인(官人) 및 중[僧]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던 길에 서해(西海) 사야도(史冶島)지금의 인천(仁川) 사야도(史也島) 에 이르러 안승을 만나 한성으로 맞이하여 가서 임금을 삼았다. 그리고서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어 슬피 고(告)하였다.
“멸망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대(代)를 이어주는 것은 천하의 공의(公義)입니다. 우리 선왕이 왕도(王道)를 잃어서 멸망을 당하였거니와 이제 신의 무리가 나라의 귀한 족속(族屬)을 찾아서,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으니, 원컨대 번방(藩邦)이 되게 하여 주소서. 삼가 대국(大國)께 바랍니다.”
○ 당이 고간(高侃)ㆍ이근행(李謹行)을 보내어 안승을 치니,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도망하여 왔다.
8월 왕이 안승을 책봉(冊封)하여 고구려 왕으로 삼았다.
왕이, 사찬(沙飡) 김수미산(金須彌山)을 보내어 안승(安勝)을 책봉하며 말하였다.
“공의 태조는 덕을 쌓고 공을 세워서 자손이 서로 대를 이었으며 천 리의 땅을 개척한 지 8백 년이 가까웠는데, 남건(男建)ㆍ남산(男産)에 이르러서 화가 집안에서 일어나고 불화가 지친(至親) 사이에 벌어져서 집과 나라가 멸망하게 되었다. 공은 산과 들에서 난을 피하다가 몸을 이웃 나라에 던졌으니, 자취는 진 문공(晉文公)과 같고, 일은 위후(衛侯)와 같도다. 선왕(先王 보장왕(寶藏王)을 가리킨다)의 정사(正嗣)는 오직 공뿐이니, 그의 제사를 맡을 이는 공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공을 책봉하여 고구려 왕으로 삼노니, 공은 마땅히 유민(遺民)을 안무(按撫)하여 모아서 옛 서업(緖業)을 이어받아 일으켜 길이 이웃 나라가 되게 하라. 공경할지니라.”
12월 왜(倭)가 국호(國號)를 일본(日本)이라 고쳤다.
왜는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당에 입조(入朝)하였다. 조금 중국글을 익혀 그들의 주(主) 천무(天武)에 이르러 왜라는 이름을 싫어하고 일본이라 고쳐 불렀는데, 해뜨는 곳에 가까워서 이 이름을 지었다고 스스로 말한다. 혹은 일본은 작은 나라의 이름이었는데, 왜가 병탄하였기 때문에 그 명호(名號)를 모칭(冒稱)하였다고도 한다.
■문무왕 14년(674)
○ 당이 조서(詔書)로 왕의 작위(爵位)를 삭탈하고, 유인궤(劉仁軌)와 이근행(李謹行)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서 치러 왔다.
이때에, 왕이 고구려의 반역한 무리를 거두어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였으므로 제(帝)가 크게 노하였다. 때마침 우효위 원외대장군(右驍衛員外大將軍)인 왕제(王弟) 인문(仁問)이 경사(京師 당의 서울)에 있었는데, 그를 왕으로 삼아 계림주 대도독(鷄林州大都督)을 책봉하여 귀국케 하니, 인문이 간절한 말로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하였으며, 인궤를 계림도 대총관(鷄林道大摠管)으로 삼고 근행을 부관으로 삼았다.
■문무왕 15년(675)
◯2월 당의 유인궤가 돌아갔으며 이근행은 매초성(買肖城)에 와서 유둔(留屯)하였다.
그때에 유인궤는 칠중성(七重城)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으며, 또 말갈을 시켜 바다로 나가 옛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약취(略取)케 하여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다. 인궤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조서(詔書)를 내려 이근행을 안동진 대사(安東鎭大使)로 삼고,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초성(買肖城)매초는 곧 매성군(買省郡)으로 지금의 양주(楊州)이다 에 유둔하여 경략(經略)케 하였다. 근행이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 왕이 다시 당에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니, 조서(詔書)로 왕의 관작을 회복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연거푸 사죄하고 겸하여 방물(方物)을 바치니, 황제가 사면하여 왕의 관작을 회복하였으며, 돌아오던 김인문(金仁問)이 중로에서 다시 당에 되돌아가니 임해군공(臨海郡公)으로 다시 책봉하였다. 그러나 왕이 백제의 땅을 많이 차지하고 드디어 고구려의 남쪽 경계까지를 주군(州郡)으로 만들었다. 이 말을 듣고, 당병이 말갈과 함께 와서 침범하니, 9군(九軍)을 출동하여 대비하였다.
추9월 당의 설인귀(薛仁貴)가 천성(泉城)을 치다가 패하였고, 이근행의 군사도 패하여 돌아갔다.
인귀는 숙위하는 학생(學生) 김풍훈(金風訓)의 아비 김진주(金眞珠)가 본국에서 주살(誅殺)된 것으로 하여 풍훈을 향도(嚮導)로 삼아 천성을 공격하였다. 장군 문훈(文訓) 등이 맞아 싸워서 1천 4백 급을 베고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할 적에는 전마(戰馬) 1천 필을 얻었다. 이근행을 매초성(買肖城)에서 쳐서 달아나게 하고는 전마 3만 3백 80필과 이에 맞먹는 병기를 얻었다.
○ 당병이 말갈과 함께 쳐들어 왔다.
당병이 말갈과 함께 칠중성(七重城)을 포위하였으며 소수(小守) 유동(儒冬) 등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赤木城) 지금의 회양부(淮陽府)의 남곡현(嵐谷縣) 을 포위하여 이를 격멸하니, 현령(縣令) 탈기(脫起)가 항거하여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죽었다. 당병이 또 석현성(石峴城) 지금 미상 을 포위하여 빼앗았는데, 현령 선백(仙伯)ㆍ실모(悉毛) 등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이윽고, 우리 군사가 당병과 더불어 크고 작은 싸움 열여덟 번에서 모두 이겼고 머리 6천 47급을 베고, 전마(戰馬) 2백 필을 얻었다.
■문무왕 16년(676)
◯춘2월 부석사(浮石寺)를 창건(創建)하였다. 중 의상(義相)이 청한 것이다. 절은 지금 순흥(順興)의 태백산(太白山)에 있다.
○ 당이 안동(安東)ㆍ웅진(熊津) 두 도독부(都督府)를 요(遼)의 땅으로 옮겼다.
당은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배반한다 하여 안동도호부를 요동(遼東)의 고성(故城)으로 옮겼으며, 웅진이 한쪽 모퉁이에 떨어져 있는데다가 백제의 유민(遺民)들이 곳곳에 마을을 이루고, 신라가 또한 나와서 약탈하였으므로 웅진도독부를 건안(建安)의 고성으로 옮긴 것이다. 이에 앞서, 동관(東官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을 관리하는 도독부의 벼슬아치)이 된 화인(華人 당나라 사람)을 모두 파직시켰으며, 지난번 서주(徐州)ㆍ연주(兗州) 등지에 옮겼던 백제의 호구(戶口)는 모두 건안에 두었다.
동11월 사찬(沙餐) 시득(施得)이 설인귀를 기벌포(伎伐浦)에서 크게 깨뜨렸다.
설인귀가 평양으로부터 배를 타고 소부리주(所夫里州)에 왔다. 시득이 병선(兵船)을 거느리고 인귀와 기벌포에서 싸워 패하였다. 또 진격하여 크고 작은 스물 두 번의 싸움에서 이를 이기고 머리 4천여 급을 베었다. 뒤에 제(帝)가 신라의 불공(不恭)함에 분노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려 하자, 시중(侍中) 장문관(張文瓘)이 병을 무릅쓰고 들어가 간하기를,
“신라가 불공하다 하나 일찍이 변경(邊境)을 침범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또 동정(東征)한다면 신은 공사(公私)가 모두 폐단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
■문무왕 17년(677)
◯춘2월 당이 고장(高藏)을 책봉하여 조선왕(朝鮮王)으로 삼고 부여융(扶餘隆)을 책봉하여 대방왕(帶方王)으로 삼아 각각 환국(還國)하게 하였는데, 융(隆)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처음에, 당이 고구려와 백제의 옛 경계를 회복하려고 이근행ㆍ설인귀 등을 시켜 여러 해를 경략(經略)하였으나 지탱하지 못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공부 상서(工部尙書) 고장(高臧)을 요동주 도독(遼東州都督)으로 삼아 조선왕(朝鮮王)에 책봉하여 요동으로 돌려 보내어 남은 무리를 안집(安集)케 하고, 앞서부터 여러 주에 있었던 고구려의 유민을 모두 장(藏)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으며, 또 사농경(司農卿)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대방왕(帶方王)에 책봉하여 돌려보내어 백제의 남은 무리를 안집케 하고 이어 안동도 호부를 신성(新城)에 옮겨 통괄(統括)케 하였다. 그때에 백제가 거칠고 쇠잔하였으므로 융(隆)이 신라를 두려워하여 끝내 옛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자, 융에게 명하여 고구려에 붙어 살게 하였다. 융이 얼마 안 되어 죽으니, 부여씨(扶餘氏)가 드디어 끊어졌다.
■문무왕 21년 신문왕(神文王) 원년(681)
◯문무왕의 영구(靈柩)를 동해에서 태웠다.
왕이 살아 있을 때에 항상 중 지의(知義)에게 이르기를,
“왜구가 늘 침범하니 짐(朕)이 죽으면 동해 가운데 큰 바위에 장사지내라. 호국(護國)의 큰 용이 되기를 원한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유교(遺敎)대로 따른 것이다. 세속에서는, ‘왕은 용이 되었다.’고 전하여진다. 그래서 그 바위를 가리켜 ‘대왕석(大王石)’이라 하였다. 권씨(權氏)는 이렇게 적었다.
“장사(葬事)는 간직하는 것이다. 신자(臣子)가, 군부(君父)가 몰(歿)함에 있어서 반드시 예(禮)로써 장사지내는 것은 그 차마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이 있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화장(火葬)은 불씨(佛氏)에서 나왔다. 그 교설(敎說)에는 금수를 태우는 것도 오히려 죄가 된다 하여 인과 응보(因果應報)의 참혹함을 극언(極言)하였는데, 사람의 죽음에는 반드시 태우려 하여 지친(至親)을 금수만도 못하게 보니, 이치를 거스르고 상도(常道)에 어그러짐이 심하다 하겠다. 신라의 군신(群臣)들이 그 난명(亂命 정신이 혼미하였을 때의 유언)을 따르고서도 잘못인 줄을 알지 못하였고, 후 왕들까지도 그 영구를 태워 뼈를 동해에 흩어버렸으니, 사설(邪說)이 사람을 의혹시킴을 한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신문왕 2년(682)
◯하5월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었다.
해관(海官) 박숙청(朴夙淸)이 아뢰기를,
“동해 가운데의 작은 산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어지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진다.”
하여, 왕이 사람을 시켜 그것을 가져다 피리를 만들어서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하여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군사가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에는 비가 내리고 장마질 적에는 개며, 바람이 불 때에는 고요하여지고, 파도가 심할 적에는 잔잔하여져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부르며 나라의 보배라고 일컬었다.
■신문왕 4년(684)
◯11월 금마저(金馬渚)에서 모반이 있었으므로 군사를 보내어 토평(討平)하였다.
안승(安勝)이 환조(還朝)하여 제택(第宅)을 하사(下賜)받고 경도(京都)에 머물러 있으면서 돌아가지 않았다. 족자(族子)인 장군 대문(大文) 실복(悉伏)이라고도 한다 이 금마저에 웅거하여 반역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복주(伏誅)하였다. 남은 무리가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報德城)에 웅거하여 반역하므로, 왕은 장수에게 명하여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그 고을 사람들은 나라의 남쪽 주군(州郡)에 옮기고 그 땅을 금마군(金馬郡 강등시킨 것이다)으로 삼았다.
■신문왕 12년 (692)
◯설총(薛聰)을 고질(高秩)로 발탁하였다.
총(聰)의 자(字)는 총지(聰智)요, 그의 아버지 원효(元曉)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다. 원효는 사문(沙門)이 되었다가 다시 속인(俗人)으로 돌아와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호(自號)하고 요석궁 과부인(瑤石宮寡夫人)에게 장가들어 총을 낳았다. 총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박학(博學)하여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을 풀어 후생(後生)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니, 학자들이 종주(宗主)로 삼았으며, 또 글을 잘 지었다. 왕이 한가롭게 있을 적에 총을 인견하고 말하기를,
“오늘은 오랜 비도 개고 훈풍(薰風)이 서늘하게 불어 오니, 고담(高談)ㆍ선학(善謔)으로 울적한 마음을 푸는 것이 좋겠다. 그대는 특이한 얘기가 있으면 나에게 들려 달라.”
하매, 총이 대답하기를,
“신이 화왕(花王)이 처음 온 얘기를 들으니, 향기로운 화원에 심고 푸른 장막을 쳐서 보호하였는데, 봄에 꽃을 피우니 온갖 꽃보다 뛰어나게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이에 어여쁜 영기(靈氣)와 아리따운 영자(英姿)들이 모두가 분주하게 화왕을 뵈려 하였습니다. 홀연히 이름을 장미(薔薇)라 하고는 한 가인(佳人)이 붉은 얼굴과 옥 같은 이[齒]에 화려하게 화장하고 곱게 꾸며 입고 사쁜사쁜 걸어와서 화왕 앞에서 얌전히 말하기를, ‘첩은 왕의 아름다운 덕을 익히 들었습니다. 베개를 향기로운 휘장에 드리기를 원하오니, 왕께서는 저를 거두어 들여 주소서.’ 하였습니다. 또 이름을 백두옹(白頭翁)이라 하는 한 장부가 베옷에 가죽띠를 매고 백발에 지팡이를 짚고서 지친 걸음으로 구부리고 와서 말하기를, ‘저는 경성의 바깥 큰 길가에 삽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좌우의 공급은 고량 진미(膏梁珍味)가 비록 풍족하더라도, 보자기에 저장하는 데는 좋은 약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비록 명주실과 삼실이 있더라도 왕골과 기령풀을 버리지 말라 하였는데, 알지 못하겠으나 왕께서는 또한 의향이 계십니까?’ 하매, 왕이 ‘장부의 말이 또한 도리에 맞으나, 아름다운 여자도 얻기 어려우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장부가 말하기를, ‘무릇 임금된 이는 노성(老成)한 신하를 친근히 하면 흥하고, 어여쁜 여자를 가까이하면 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여쁜 여자와는 화합되기가 쉽고 노성한 신하와는 친근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로 하여 하희(夏姬)는 진(陳)나라를 망쳤고, 서시(西施)는 오(吳)나라를 멸망하게 하였으며, 맹가(孟軻 맹자(孟子))는 불우하게 몸을 바쳤고, 풍당랑(馮唐郞)은 낮은 벼슬로 늙었으니, 옛날부터 이와 같았는데 전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화왕이 사과하기를, ‘내 잘못이로다.’ 하였다 합니다.”
하니, 이에 왕이 슬픈 낯빛을 지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풍자와 비유가 깊고 간절하다. 그것을 글로 써서 나의 경계로 삼게 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드디어 총을 높은 품계에 발탁하였는데, 관작이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성덕왕 6년(707)
◯춘정월 기민(饑民)을 구제하였다.
그때에 기근이 들어 굶어 죽은 백성이 많았으므로 곡식을 사람들에게 하루 서되씩 나누어 주다가 7월에 이르러 그치었는데, 곡식이 모두 30여만 석이었다.
■성덕왕 15년(716)
◯3월 왕비 김씨를 폐하였다.
왕후가 궁을 나갈 적에 비단 5백 필, 전지(田地) 2백 결(結), 벼 1만 석, 집 한 채를 하사하여 살게 하였다.
■성덕왕 21년(722)
◯추8월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주었다.
【안】 백성들의 정전(丁田)이 있게 된 것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성덕왕 22년(당 현종 개원 11, 723)
◯3월 사신을 보내어, 당에 여자를 바쳤다.
아름다운 여자 두 사람이었는데, 하나는 이름이 포정(抱貞)으로 내마(奈麻) 천승(天承)의 딸이요, 하나는 이름이 정원(貞菀)으로 대사(大舍) 충훈(忠訓)의 딸이었다. 왕이 예를 갖추어 보냈다. 또 과하마(果下馬)ㆍ우황(牛黃)ㆍ인삼(人蔘)ㆍ미체(美髢)ㆍ조하주(朝霞紬)ㆍ어아주(魚牙紬)ㆍ누응령(鏤鷹鈴)ㆍ해표피(海豹皮)ㆍ금은 등의 물건을 바치면서 표(表)를 올렸다.
“신의 고장은 바다의 후미진 곳에 있고 땅은 먼 구석에 있어서, 원래 천객(泉客)의 보배도 없고, 본디 종인(賨人)의 재화도 모자랍니다. 감히 토산의 물품을 가지고서 천자의 관아를 속되게 하고 노둔한 망아지로 천자의 마굿간을 더럽히게 되었습니다.”
제(帝)는, 여자들은 모두 왕의 고종(姑從) 자매로 친속(親屬)과 떨어지고 본국과 이별하여 왔으므로 차마 머물러 둘 수 없다 하고, 물건을 후히 하사하고 되돌려 보냈다.
■정해년 경덕왕 6년(당 현종 천보 6, 747)
◯춘정월 중시를 시중(侍中)으로 고쳤다.
■갑오년 경덕왕 13년(당 현종 천보 13, 754)
○황룡사(黃龍寺)의 종을 주조(鑄造)하였다.
길이가 1장 3촌(寸), 두께가 9촌, 무게가 49만 7천 5백 81근이었으며, 시주(施主)는 왕비 삼모 부인(三毛夫人)이었다. 이듬해에 또 분황사(芬皇寺)에 약사 동상(藥師銅像)을 주조하였는데, 무게가 3만 6천 7백 근이었다.
■병신년 경덕왕 15년(당 숙종(肅宗) 지덕(至德) 원년, 756)
◯사신을 보내어 촉(蜀)에 달려가 문안하였다.
왕이,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켜서 현종(玄宗)이 촉 땅으로 출분(出奔)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당에 가게 하였다. 사신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 성도(成都)에 이르자, 제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친히 십운시(十韻詩)를 지어 하사하였다. 시는 이러하다
사유는 큰 위도로 나뉘었고 / 四維分景緯
만상은 중추에 간직되었다 / 萬象舍中樞
제후의 조공은 천하에 펼쳤는데 / 玉帛遍天下
사신 배는 상도로 돌아오네 / 梯航歸上都
생각하니 신라는 멀고멀건만 / 緬懷阻靑陸
옛날부터 중국을 섬겨 왔었다 / 歲月勤黃圖
멀고먼 땅 끝이요 / 漫漫窮地際
아득히 이어지는 바다 모퉁이 / 蒼蒼連海隅
명분과 의리의 나라이거니 / 輿言名義國
어찌 산하가 다르다 하리 / 豈謂山河殊
사신이 가면 풍교를 전하고 / 使去傳風敎
사람이 와서는 전모를 익힌다 / 人來習傳謨
벼슬아치는 예를 받들 줄 알고 / 衣冠知奉禮
충신한 사람은 선비 높일 줄 알도다 / 忠信識尊儒
정성스럽다 하늘도 굽어보시거니 / 誠矣天其監
어질도다 덕은 외롭지 않으리 / 賢哉德不孤
어가를 따름은 목민관과 같고 / 擁旄同作牧
후한 예물은 생추에 견주겠구나 / 厚貺比生蒭
선비의 길을 더욱 중히 하여 / 益重靑靑者
바람 서리에도 변치 말지어다 / 風霜恒不渝
■정유년 경덕왕 16년(당 숙종 지덕 2, 757)
◯동12월 9주(州) 군현(郡縣)의 이름을 고쳤다.
왕이, 군현의 이름이 속되고 방언(方言)이 섞여서 분별할 수 없다고 하여, 이때에 모두 아름다운 이름으로 고쳤다. 사벌주(沙伐州)를 상주(尙州)지금도 같다 로 하여 주(州) 1, 군(郡) 10, 현(縣) 30을 거느리게 하고, 삽량주(歃良州)를 양주(良州)양주(梁州)라고도 한다. 지금의 양산군(梁山郡) 로 하여 주 1, 소경(小京) 1, 군 12, 현 34를 거느리게 하고, 청주(菁州)를 당주(唐州)지금의 진주(晉州) 로 하여 주 1, 군 11, 현 27을 거느리게 하고, 한산주(漢山州)를 한주(漢州)지금의 경성(京城) 로 하여 주 1, 소경 1, 군 27, 현 46을 거느리게 하고, 수약주(首若州)를 삭주(朔州)지금의 춘천부(春川府) 로 하여 주 1, 소경 1, 군 11, 현 27을 거느리게 하고, 하서주(河西州)를 명주(溟州)지금의 강릉부(江陵府) 로 하여 주 1, 군 9, 현 25를 거느리게 하고, 웅천주(熊川州)를 웅주(熊州)지금의 공주부(公州府) 로 하여 주 1, 소경 1, 군 13, 현 29를 거느리게 하고, 완산주(完山州)를 전주(全州)지금도 같다 로 하여 주 1, 소경 1, 군 10, 현 31을 거느리게 하고, 무진주(武珍州)는 무주(武州)지금의 광주부(光州府) 로 하여 주 1, 군 14, 현 44를 거느리게 하였다. 모두 주가 9, 소경이 5, 군이 1백 17, 현이 2백 93이었으며, 향부곡(鄕部曲)이라 하는 등의 잡소(雜所)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나라는 삼면(三面)이 바다에 접하여 있었으며, 동북으로는 정천군(井泉郡)지금의 덕원부(德源府) 에 이르렀는데 탄항(炭項)에 관문(關門)을 만들어 경계로 삼았고, 서북으로는 당악현(唐嶽縣) 지금의 중화부(中和府) 에 이르렀다. 신라의 땅 넓이가 이에 이르러 번성하였다.
동사강목 제5상
■무신년 혜공왕 4년(당 대종 대력 3, 768)
◯추7월 일길찬(一吉飡) 대공(大恭) 등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포위하므로, 그를 쳐서 평정하고 그의 구족(九族)을 주멸(誅滅)하였다.
이때 조정이 혼란하고 재앙과 이변이 자주 나타나므로, 대공이 아우 아찬 대렴(大廉) 등과 더불어서 왕궁을 포위하기 33일 동안이었는데, 왕도(王都)와 5도(道) 주군(州郡)에서 96명의 각간(角干)들이 더불어 싸워 대공을 죽이고 그의 가산 보배와 포백 등을 왕궁으로 실어들였다. 반란이 3개월에 걸쳐 끝났는데, 목베어 죽인 자는 셀 수가 없었다.
■경술년 혜공왕 6년(당 대종 대력 5, 770)
◯ 봉덕사(奉德寺)의 종을 주성(鑄成)하였다.
처음에 경덕왕이 그 아버지 성덕왕을 위하여 큰 종을 주성하다가 성취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종이 완성되었다. 구리의 중량이 12만 근이고 소리가 1백여 리까지 들렸다. 조산 대부(朝散大夫) 전 태자사의랑 한림랑(太子司議郞翰林郞) 김필해(金弼奚)에게 종의 명문(銘文)을 지어 성덕왕의 공덕을 찬양하게 하였다.
■경신년 혜공왕 16년 선덕왕(宣德王) 원년(당 덕종(德宗) 원년, 780)
◯하4월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포위하였다. 상대등 김양상이 그를 토벌하여 죽이고, 마침내 왕을 시해(弑害)하고 왕위를 찬탈(簒奪)하였다.
혜공왕은 어려서 왕위를 계승하여 모후(母后)가 임조(臨朝 정무를 보다)하고, 장성하여서는 성색(聲色)에 빠져서 항상 부녀자들의 유희 놀이를 하며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들과 어울려서 희롱하며 순유(巡遊)함이 법도가 없었다. 따라서 기강(紀綱)이 문란해지고 재앙과 이변이 자주 나타나며 반역이 잇달아 일어나니 인심이 이반하였다. 이에 지정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포위하였다. 김양상이 이찬 김경신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이를 죽였는데, 왕과 후비는 난병(亂兵)에게 시해되니, 시호를 혜공이라 하였다. 재위(在位)는 16년간이다. 원비(元妃)는 신보 왕후(新寶王后)인데 이찬 유성(維城)의 딸이고, 차비(次妃)는 이찬 김장(金璋)의 딸이나 왕궁에 들어온 연월은 알 수 없다.
김양상은 내물왕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해찬(海飡 파진찬(波珍飡)을 말한다) 효방(孝芳)이요, 어머니는 사소 부인(四炤夫人) 김씨로 성덕왕의 딸이다. 김양상이 즉위하니, 이가 선덕왕(宣德王)이다.
■무진년 원성왕 4년(당덕종 정원 4, 788)
◯봄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립하였다.
전에 신문왕이 비록 국학을 세웠으나 아직 과시(科試)하는 법은 없었고, 그 뒤에 박사(博士)ㆍ조교(助敎)를 두어 생도를 교수하였을 뿐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독서 삼품(讀書三品)을 정하여 출신(出身)하게 하였으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읽고 《예기(禮記)》ㆍ《문선(文選)》에도 그 뜻을 통달하며 겸하여 《논어(論語)》ㆍ《효경(孝經)》에도 밝은 자를 상품(上品)이라 하고, 곡례(曲禮)ㆍ《논어》ㆍ《효경》을 읽은 자를 중품(中品)이라 하고, 곡례와 《효경》을 읽은 자를 하품(下品)이라 하였다. 만일 오경(五經)ㆍ삼사(三史)ㆍ제자 백가(諸子百家)의 글을 널리 통달한 자는 특별히 뽑아서 등용하였다. 이전에는 다만 무예[引箭]로써 사람을 시험해 뽑았으나, 이로부터는 사람을 등용하는 법이 한결같이 문적 출신(文籍出身)을 귀중하게
■경오년 원성왕 6년(당 덕종 정원 6, 790)
○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였다.
전주 등 7주의 인민을 징발하여 수축하였다.
3월 사신을 북국(北國)에 보내 빙문하였다.
북국은 발해(渤海)이다. 대씨(大氏 대조영(大祚榮))는 요동(遼東)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북쪽 땅을 병합하고 신라와 더불어 경계를 서로 맞대었지마는, 교빙한 일이 역사에는 전하는 것이 없었다. 이때에 와서 일길찬 백어(伯魚)를 보내어 교빙하였다.
■임신년 원성왕 8년(당 덕종 정원 8, 792)
◯추7월 사신을 당에 보내어 여자를 공납하였다.
여인의 이름은 김정란(金井蘭)이니, 국색(國色)으로 몸에서 향내가 났다.
■기묘년 소성왕 원년(당덕종 정원 15, 799)
◯추7월 사신을 당에 보내어 인삼을 헌납하였다.
중국에서는 신라에서 인삼이 생산되므로 방물 공납에 반드시 인삼을 헌납하도록 하였다. 이때 9척짜리 인삼을 얻어 매우 기이하게 여겨서 사신을 당에 보내어 이를 헌납하였더니, 황제는 ‘가짜가 아닌가’ 의심하여 받지 아니하였다.
■임오년 애장왕 3년(당 덕종 정원 18, 802)
◯8월 해인사(海印寺)를 창건하였다.
중 순응(順應) 등이 말하기를,
“가야산(伽倻山)은 경치가 천하에 뛰어나고 지덕(地德)이 해동에 으뜸이니 참으로 장수(藏修)할 만한 곳입니다.”
하고 절을 창건하니, 성목 태후가 찬조하여 마침내 성취되었다.
■경자년 헌덕왕 12년(당 헌종 원화 15, 820)
◯겨울 기근이 들었다.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스스로 살아갔다.
■임인년 헌덕왕 14년(당 목종 장경 2, 822)
◯3월 웅주 도독 김헌창이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였다. 장웅(張雄) 등을 보내 토벌하여 그를 목베었다.
김헌창은 여러 차례 지방 장관을 지내 형세가 매우 커졌다. 그는 항상 그의 아버지(주원(周元))가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여,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세워 경운(慶雲)이라 하였으며, 무주(武州)ㆍ전주(全州)ㆍ강주(康州)ㆍ상주(尙州) 4주의 도독과 국원(國原)ㆍ서원(西原)ㆍ금관(金官)의 사신(仕臣)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 편에 속하게 하였다.
강주 도독 상영(向榮)이 추화군(推火郡)지금의 밀양(密陽) 으로 달아나고, 한산ㆍ우두(牛頭)ㆍ삽량ㆍ패강ㆍ북원 등지에서는 먼저 헌창의 역모를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스스로 수비하였으며, 완산(完山)의 장사(長史) 최웅(崔雄)과 주조(州助)주조는 관명영충(令忠) 등은 도망쳐 경사로 돌아와서 변란을 고하였다.
왕은 최웅을 급찬으로 진급시켜 속함군 태수(速含郡太守) 속함군은 지금의 함양(咸陽) 를 제수하고, 영충에게도 급찬을 주었다. 그리고 장수 8인을 차출하여 왕도의 8면을 지키게 한 뒤에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 장웅(張雄)이 선봉으로 출발하고, 잡찬 위공(衛恭)과 파진찬 제릉(悌凌)이 뒤를 이었으며, 이찬 균정(均貞)과 잡찬 웅원(雄元)과 대아찬 우징(祐徵) 등이 삼군(三軍)을 통솔하고 출정하였으며, 각간 충공과 잡찬 윤응(允膺) 등은 문화관문(蚊火關門) 지금은 미상 을 지켰다.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낭(郞) 신라 시대 화랑의 무리들을 모두 낭이라 하였다 이 종군하기를 자청하여 각기 그의 낭도(郞徒)들을 데리고 갔다.
김헌창이 장수를 파견하여 요긴한 길목에 의거하였으나 장웅이 도동현(道冬峴)지금은 미상 에서 격파하고, 위공과 제릉의 군사가 이르러 장웅과 합하여 삼년성(三年城)을 쳐서 이기고 군사를 속리산(俗離山)지금의 보은군에 있다 으로 돌려 적을 격멸하였으며, 균정 등이 성산(星山)에서 적과 싸워 격멸하였다. 여러 군사가 함께 웅진에 이르러 적과 대전하여 크게 이겨 목베고 노획한 것이 이루 셀 수가 없었다. 헌창이 겨우 몸을 피하여 성에 들어가 굳게 지켰으나 여러 군사가 성을 포위하기 10일이 넘어 성이 함락하게 되니 헌창은 자결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그의 시체를 찾아 목을 베고, 그의 종족과 당파 2백 39인을 죽였다.
이보다 앞서 청주 태수(菁州太守)의 청사 남쪽 연못에 이상한 새가 있었다. 길이가 5척이요 빛은 검고 부리의 길이가 1척 5촌이며, 눈은 사람 같고 멀떠구니[嗉]는 5승들이 그릇만 하였는데, 3일 만에 죽었다. 그때 사람들은, 헌창이 패망할 조짐이라고 하였다.
■무신년 흥덕왕 3년(당 문종 태화 2, 828)
◯하4월 장보고(張保皐)를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로 삼았다.
장보고는 어렸을 때의 이름이 궁복(弓福) 《삼국유사》에는 궁파(弓巴)라 하였다 이다. 당에 건너가 서주(徐州)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이 되었는데, 말 타고 창을 쓰는 데는 대적할 이가 없었다. 이때 중국 사람이 항상 바닷길을 따라 우리 변경의 백성들을 약탈하였다. 장보고가 본국에 돌아와 왕을 배알하고 말하기를,
“온 중국에서 우리 백성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청해(淸海)에 진(鎭)을 설치하여 우리 백성들을 노략해 가지 못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군사 1만을 주어 청해 청해진(淸海鎭)은 지금 강진(康津)의 완도(莞島) 를 진수하게 하였다. 청해는 바닷길의 요충이 되는 곳이므로 장보고가 순경(巡警)을 엄하게 하니, 이로부터 해상에서 침략하는 자가 없어졌다.
동12월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김대렴(金大廉)을 당에 보냈다. 황제가 인덕전(麟德殿)에서 불러 보고 규정대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차 종자(茶種子)를 지리산(地理山)에 심었다.
동방에는 옛날에 차가 없었다가 선덕왕 때부터 먹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당에 건너갔던 사신 김대렴이 차의 종자를 가져왔으므로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이로부터 차가 성하게 되었다.
■경술년 흥덕왕 5년(당 문종 태화 4, 830)
◯이해에 발해왕 인수가 졸하였다.
시호를 선왕(宣王)이라 하였다. 아들 신덕(新德)이 일찍 죽었으므로 손자 이진(彛震)이 왕위에 오르고 연호를 함화(咸和)로 고쳤다. 그 이듬해에 당의 조명으로 작위를 습봉하였다. 인수는 바다 북쪽의 여러 부족을 토벌하여 크게 강토를 확장하였다. 대조영 이래로 자주 여러 학생을 당에 보내어 제도를 배웠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드디어 해동의 강성한 나라가 되어, 숙신(肅愼)ㆍ예맥(濊貊)ㆍ옥저(沃沮)ㆍ고구려ㆍ부여ㆍ읍루(挹婁)ㆍ솔빈(率賓)ㆍ철리(鐵利)ㆍ월희(越喜) 등의 옛땅을 차지하고, 5경 15부 62주가 있었으며, 예악과 제도는 대개 중국을 모방하였다고 한다.
【안】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5경 15부 62주가 있으니, 숙신의 옛땅으로 상경(上京)을 삼아 용천부(龍泉府)라 하고 용주(龍州)ㆍ호주(湖州)ㆍ발주(渤州)의 3주를 관할하였고, 그 남쪽에 중경(中京)이 있는데 현덕부(顯德府)라 하고 노주(盧州)ㆍ현주(顯州)ㆍ철주(鐵州)ㆍ탕주(湯州)ㆍ영주(榮州)ㆍ흥주(興州)의 6주를 관할하였고, 예맥의 옛땅으로 동경(東京)을 삼아 용원부(龍原府) 또는 책성부(柵城府)라 하고 경주(慶州)ㆍ염주(鹽州)ㆍ목주(穆州)ㆍ하주(賀州)의 4주를 관할하였고, 옥저의 옛땅으로 남경(南京)을 삼아 남해부(南海府)라 하고 옥주(沃州)ㆍ정주(睛州)ㆍ초주(椒州)의 3주를 관할하였고, 고구려의 옛땅에 서경(西京)을 두어 압록부(鴨淥府)라 하고 신주(神州)ㆍ환주(桓州)ㆍ풍주(豊州)ㆍ정주(正州)의 4주를 관할하였으며, 장령부(長領府)는 하주(瑕州)ㆍ하주(河州)의 2주를 관할하였고, 부여의 옛땅에는 부여부(扶餘府)를 두어 항상 굳센 군사를 주둔시켜 거란(契丹)을 방비하였는데 부주(扶州)ㆍ선주(仙州)의 2주를 관할하였으며, 막힐부(鄚頡府)는 막주(鄚州)ㆍ고주(高州)의 2주를 관할하였고, 읍루의 옛땅에는 정리부(定理府)를 두어 정주(定州)ㆍ심주(瀋州)의 2주를 관할하였으며, 안변부(安邊府)는 안주(安州)ㆍ경주(瓊州)의 2주를 관할하였고, 솔빈의 옛땅에는 솔빈부(率賓府)를 두어 화주(華州)ㆍ익주(益州)ㆍ건주(建州)의 3주를 관할하였고, 불녈(拂涅)의 옛땅에는 동평부(東平府)를 두어 이주(伊州)ㆍ몽주(蒙州)ㆍ타주(沱州)ㆍ흑주(黑州)ㆍ비주(比州)의 5주를 관할하였고, 철리의 옛땅에는 철리부(鐵利府)를 두어 광주(廣州)ㆍ분주(汾州)ㆍ포주(蒲州)ㆍ해주(海州)ㆍ의주(義州)ㆍ귀주(歸州)의 6주를 관할하였고, 월희의 옛땅에는 회원부(懷遠府)를 두어 달주(達州)ㆍ월주(越州)ㆍ회주(懷州)ㆍ기주(紀州)ㆍ부주(富州)ㆍ미주(美州)ㆍ복주(福州)ㆍ야주(邪州)ㆍ지주(芝州)의 9주를 관할하였으며, 안원부(安遠府)는 영주(寧州)ㆍ미주(郿州)ㆍ모주(慕州)ㆍ상주(常州)의 4주를 관찰하였다. 그리고 영주(郢州)ㆍ동주(銅州)ㆍ속주(涑州)의 3주는 독주주(獨奏州)로 삼았는데, 속주가 속말강(涑沫江)에 가깝기 때문이다. 용원(龍原) 동남쪽은 바다에 연해 있어서 일본과 교통하는 길이요, 남해는 신라와 교통하는 길이고, 압록은 조공하는 길이며, 장령(長嶺)은 영주(營州)와 교통하는 길이고, 부여는 거란과 교통하는 길이다.
그 나라 풍속이 왕을 가독부(可毒夫) 또는 성주(聖主)ㆍ기하(基下)라 하고, 왕의 명을 교(敎)라 하며, 왕의 부친을 노왕(老王)이라 하고 모친을 태비(太妃)라 하며, 처를 귀비(貴妃)라 하고, 맏아들을 부왕(副王)이라 하고, 지차 아들을 왕자라 하였다.
관제는 선조성(宣詔省)에 좌상(左相)ㆍ좌평장사(左平章事)ㆍ시중(侍中)ㆍ좌상시(左常侍)ㆍ간의(諫議)가 있고, 중대성(中臺省)에 우상(右相)ㆍ우평장사(右平章事)ㆍ내사(內史)ㆍ조고사인(詔誥舍人)이 있고, 정당성(政堂省)에는 대내상(大內相) 1인이 있는데 좌우상(左右相)의 위요, 좌우 사정(左右司政) 각 1인은 좌우평장사(左右平章事)의 아래로 복야(僕射)에 해당하고, 좌우윤(左右允)은 이승(二丞)에 해당하는 것이다.
좌육사(左六司)의 충부(忠部)ㆍ인부(仁部)ㆍ의부(義部)에 각기 경(卿) 1인이 있는데 사정(司政)의 아래로서 작부(爵部)ㆍ창부(倉部)ㆍ선부(膳部)를 맡아 보며, 부에는 낭중(郞中)ㆍ원외(員外)가 있다. 우육사(右六司)는 지부(智部)ㆍ예부(禮部)ㆍ신부(信部)가 있는데 융부(戎部)ㆍ계부(計部)ㆍ수부(水部)를 맡아 보며, 경과 낭중은 좌육사와 같은데 중국의 육관(六官)에 해당하는 것이다.
중정대(中正臺)에는 대중정(大中正) 1인이 있는데 어사대부(御史大夫)에 해당하며 사정의 아래에 위치하고, 소정(少正) 1인이 있다. 또 전중시(殿中寺)ㆍ종속시(宗屬寺)에는 대령(大令)이 있고, 문적원(文籍院)에는 감(監)과 영(令)이 있는데 감에는 다 소감(少監)이 있으며, 태상시(太常寺)ㆍ사빈시(司賓寺)ㆍ대농시(大農寺)에는 경(卿)이 있고, 사장시(司藏寺)ㆍ사선시(司膳寺)에는 영과 승(丞)이 있고, 주자감(冑子監)에는 감장(監長)이 있고, 항백국(巷伯局)에는 상시(常侍) 등의 관직이 있다.
무관(武官)으로는 좌우 맹분(猛賁)과 웅위(熊衛)ㆍ비위(羆衛)ㆍ남좌우위(南左右衛)ㆍ북좌우위(北左右衛)가 있는데, 각기 대장군(大將軍) 1인, 장군(將軍) 1인이 있다. 대개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였음이 이와 같다.
품(品)을 가지고 질(秩)을 정하였는데 3질 이상의 복색은 자색이고 홀(笏)은 상아(象牙)이며 어대(魚袋)는 금이고, 5질 이상의 복색은 비색(緋色)이고 홀은 상아이며 어대는 은이고, 6질과 7질의 복색은 엷은 비색이고, 8질의 복색은 녹색(綠色)이며 홀은 모두 나무이다.
그 나라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태백산(太白山)의 토끼와 남해의 곤포(昆布), 책성(柵城)의 콩자반, 부여의 사슴, 막힐(鄚頡)의 돼지, 솔빈의 말, 현주(顯州)의 포(布), 옥주(沃州)의 면(綿), 용주(龍州)의 명주, 위성(位城)의 철(鐵), 노성(盧城)의 벼[稻], 미타(湄沱)의 도미[䱶] 등이다. 과일에는 구도(九都)의 오얏과 낙유(樂游)의 배[梨]가 있다. 그 나머지의 풍속은 대략 고려ㆍ거란과 비슷하다. 유주 절도사부(幽州節度使府)와 서로 사신을 보내 교빙하였다. 영평(營平)으로부터 중국 서울까지는 8천 리의 먼 거리이다.”
■을묘년 흥덕왕 10년(당 문종 태화 9, 835)
◯옛 재상 김유신을 추봉하여 흥무 대왕(興武大王)이라 하였다.
○ 효자 손순(孫順)에게 집과 1년에 쌀 50석씩을 주게 하였다.
손순은 모량(牟梁) 사람으로 지극한 효성이 있었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부부가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손순의 어린 자식이 항상 어머니 먹을 것을 빼앗아 먹었다. 손순이 이를 난처하게 여겨 아내에게 말하기를,
“자식은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할 수 없지 않겠소?”
하고, 어린아이를 업고 산 북쪽의 들로 가서 땅을 파고 묻으려 하였다. 그런데 땅을 파던 중 갑자기 석종(石鐘)이 나왔는데 매우 기이하였다. 아내가 말하기를,
“이렇게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마 아이의 복인 것 같으니 아이를 파묻어서는 안 되겠소.”
하니, 손순이 그 말에 따라 돌아와 석종을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치니 종소리가 왕궁에까지 들렸으며, 멀리까지 맑게 들리는 것이 이상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그 사유를 알아 보고 말하기를,
“옛날에 곽거(郭巨)가 자식을 파묻다가 하늘이 금가마[金釜]를 주었다 하더니, 이제 손순이 자식을 파묻다가 땅에서 석종이 나왔으니, 예와 이제의 사실이 서로 부합한다.”
하고, 집 한 채를 하사하고 1년에 쌀 50석씩을 주게 하였다.
■병진년 흥덕왕 11년 희강왕(僖康王) 원년(당 문종 개성(開成) 원년, 836)
◯동12월 왕이 훙하였다. 종실 균정(均貞)과 제륭(悌隆)이 서로 왕위를 다투었는데, 시중 김명(金明)이 균정을 죽이고 제륭을 왕으로 세웠다.
왕이 훙하니 재위 11년이요, 시호를 흥덕이라 하였다. 아들이 없으므로 사촌 아우 상대등 균정과 사촌 아우 이찬 헌정(憲貞)의 아들 제륭이 서로 왕위를 다투었다. 시중 김명과 아찬 이홍(利弘)과 배훤백(裵萱伯) 등은 제륭을 받들었고, 균정의 아들 우징(祐徵)과 조카 예징(禮徵)혹은 누이의 사위라고도 한다 과 김양(金陽)은 균정을 받들고 동시에 왕궁으로 들어왔다. 균정이 먼저 적판궁(積板宮)에 들어와 친족들의 병력으로 숙위하니, 김명 등이 쳐들어와 포위하였다. 김양이 궁문에 진을 치고 그를 막으면서 말하기를,
“새 임금이 여기 있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흉악하게 거역하느냐?”
하고, 십수 인을 쏘아 죽였으나, 배훤백이 김양을 쏘아 그의 다리를 맞히니 균정이 말하기를,
“저들은 많고 우리 편은 적으니 더 막을 수가 없다. 공은 거짓 패한 체하고 후퇴하였다가 후일 다시 계책을 세우도록 하라.”
하니, 김양이 우징 등과 함께 포위를 뚫고 탈출하고, 균정은 난병에게 피살되었다.
이에 제륭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희강왕(僖康王)이다. 어머니는 포도 부인(包道夫人) 박씨요, 비는 문목 부인(文穆夫人) 김씨로서 갈문왕(葛文王) 충공의 딸이다.
■정사년 희강왕 2년(당 문종 개성 2, 837)
◯하5월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망명하였다.
김우징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처자를 데리고 황산진(黃山津) 어귀로 달아나 배를 타고 청해진으로 가서 장보고에게 의지하여 복수를 도모하니, 예징과 아찬 양순(良順)도 망명하여 우징에게로 갔다.
■무오년 희강왕 3년 민애왕(閔哀王) 원년(당 문종 개성 3, 838)
◯춘정월 김명이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처음에 김명이 비록 희강왕을 세웠으나 실상은 딴 뜻을 품었다. 이때에 와서 김명이 이홍 등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난을 일으켜 왕궁으로 쳐들어가 왕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니, 왕이 면하지 못할 줄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재위 3년이며, 시호를 희강이라 하였다.
김명이 스스로 왕이 되어, 아버지를 추시(追諡)하여 선강 대왕(宣康大王)이라 하고, 어머니 박씨 귀보 부인(貴寶夫人)을 선의 태후(宣懿太后)라 하고, 처 김씨를 윤용 왕후(允容王后)로 삼았는데, 윤용 왕후는 각간 영공(永恭)의 딸이다.
2월 무주 도독 김양이 김우징을 받들고 청해진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보다 앞서 김양이 난을 피하여 마음속으로 원수 갚기를 맹세하고, 산야에 숨어 있으면서 그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가서 군사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바다를 건너가 김우징을 만나보고 거사(擧事)할 것을 도모하였다. 김우징이 장보고에게 말하기를,
“이제 김명이 그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이홍은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이들과는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소. 원컨대 장군의 군사를 빌어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하여 주시오.”
하니, 장보고가 이에 따라 군사 5천 명을 나누어 그의 벗 정연(鄭年)에게 주어 김명 등을 치게 하였다.
처음에 장보고와 정연은 다 싸움을 잘하였다. 정연은 바닷속으로 50여 리를 헤엄쳐 들어가도 조금도 숨가빠하지 아니하였고, 그 용력을 겨루어도 장보고가 조금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연은 장보고를 형이라 불렀다. 장보고는 나이로서, 정연은 무예로서 항상 사이가 좋지 못하여 서로 지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두 사람이 다 당에 건너가 무령군(武寧軍)에 속하여 같이 무용으로 이름이 났었다. 뒤에 장보고는 본국에 돌아와 영달하고, 정연은 직위에서 물러나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 사천(泗川)의 연수현(漣水縣)에 있었다. 어느날 정연이 그곳의 수장(戍將) 풍원규(馮元規)를 보고 말하기를,
“나는 본국으로 돌아가 장보고에게 의지할까 하오.”
하니, 풍원규가 대답하기를,
“만일 장보고와 서로 좋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소. 가서 죽으려 하오?”
하자, 정연이 말하기를,
“굶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것이 쾌하지 않겠소? 하물며 고향에서 죽는 것임에랴.”
하고,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와 장보고를 찾아갔다. 장보고가 그를 맞아 연회를 베풀고 환영하였는데, 연회가 끝나기 전에 김명의 변란을 들었다. 장보고가 군사를 정연에게 맡기며 손을 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이 환란(患亂)을 평정할 수 없을 것이오.”
하였다.
이제 장보고가 한 일은 곽분양의 현명함과 비등한 것이다. 아! 원수의 독한 마음으로 서로 해치지 않고 국가의 근심을 먼저 생각하는 이로서 진(晋)에 기해(祁奚), 당(唐)에 곽분양이 있고, 장보고가 있으니 누가 오랑캐에 인물이 없다고 하겠는가?”
3월 청해진의 군사가 무주를 습격하여 항복받고, 더 진격하여 남원까지 이르며 연달아 싸워 이기고,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갔다.
김양이 강한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무주를 습격하니 무주 사람들이 항복하였다. 더 진격하여 남원에까지 이르며 연달아 싸워 이겼다. 우징은 군사가 오랜 싸움에 지쳤으므로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가 군사를 쉬게 하였다.
12월 김명이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를 보내 청해진의 군사를 철야현(鐵冶縣)에서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하였다.
김명은 김양 등이 군사 일으켰음을 듣고, 대감 김민주를 보내어 치게 하였다. 이때 혜성이 서방에 나타나 꼬리가 동쪽을 가리켰다. 여러 사람들이 김양을 축하하여 말하기를,
“이는 옛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펴서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을 형상이니 이번 전쟁에는 성공하겠소.”
하였다. 이에 김양은 평동장군(平東將軍)이라 칭하고, 12월에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나갔는데, 김양순(金亮詢)이 무주(鵡州)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 김우징은 다시 날래고 용맹한 염장(閻長)ㆍ장변(張弁)ㆍ정연ㆍ낙금(駱金)ㆍ장건영(張建榮)ㆍ이순행(李順行) 등 여섯 장수를 보내어 선봉을 삼으니, 군사의 위용(威容)이 매우 성하였다. 행진하여 무주 철야현(鐵冶縣)지금 남평(南平)의 속현이다 에 이르니 김민주가 군사로써 맞싸웠다. 낙금과 이순행이 마병 3천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거의 다 살상하였다.
■기미년 신무왕(神武王) 원년 문성왕(文聖王) 원년(당 문종 개성 4, 839)
◯춘윤정월 김양이 김명을 토벌하여 주살하였다.
김양 등이 밤낮으로 행군하여 달벌구(達伐丘)지금의 대구(大邱) 에 이르니, 김명이 이찬 김흔(金昕)과 대아찬 윤린(允璘)ㆍ의훈(嶷勛)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으나, 김양 등이 한 번 싸워 크게 이겼다. 그때 김명은 서교(西郊)에 있었는데, 좌우가 모두 흩어져 도망하므로 혼자 남아서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월유택(月遊宅)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 것을 군사들이 추격하여 잡아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예로써 장사지내고 시호를 민애(閔哀)라 하였다.
이에 김양이 영을 내려 말하기를,
“본래 원수를 갚기 위함이었다. 이제 괴수가 주륙(誅戮)을 당하였으니 백성들은 각각 안정하라.”
하였다. 왕성을 수복하매 인민이 안도(安堵)하였다. 김양은 배훤백을 불러서 말하기를,
“개도 자기 주인 아닌 사람을 보면 짖는 것이다. 네가 그때 너의 주인을 위하여 나에게 활을 쏜 것은 의사(義士)이다. 내가 괘념치 않으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니, 여러 사람들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배훤백도 이러하니 우리들은 염려할 것이 없다.”
하고, 감격하여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4월 김우징이 들어와 즉위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및 어머니 박씨를 추시(追諡)하였다. 예징이 먼저 들어와 궁금(宮禁)을 깨끗이하고 예를 갖추어 김우징을 맞아들여 즉위하니 이가 신무왕이다.
■신유년 문성왕 3년(당 무종(武宗) 회창(會昌) 원년, 841)
◯추7월 당에서 왕과 왕비 박씨를 책봉하였다.
전에 본국 사람 김운경(金雲卿)이 당에 건너가 연주 도독부(兗州都督府) 사마(司馬)가 되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황제가 김운경을 사신으로 보내어 왕을 책봉하였는데, 책봉한 작위는 전과 같았다. 처 박씨를 왕비로 봉하고, 또 김양에게 검교 위위(檢校衛尉)를 주었다.
김운경은 장경(長慶 당 목종의 연호) 초년에 처음으로 당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는데, 이름이 두사례(杜師禮)의 방(榜)에 올라 있다. 그가 본국으로 돌아올 적에 당나라 사람 주한(周翰)이 시를 주기를,
예악은 오랑캐 풍속이 변하고 / 禮樂夷風變
의관은 한나라 제도가 새롭네 / 衣冠漢制新
하였다. 그후 김이어(金夷魚)와 김가기(金可紀)가 연이어 당의 과거에 합격하였다. 특히 김가기는 신선의 방술(方術)을 잘하여 더욱 중국에 유명하였다. 그가 일찍이 사신이 되어 본국으로 돌아올 적에 문인 장효표(章孝標)가 시를 지어 이별하기를,
문장 가져가 오랑캐 예악에 맞추고 / 想把文章合夷樂
반도화 아래 누워 인삼에 취하겠지 / 蟠桃花下醉人蔘
하였다. 신라 문물의 융성함이 이때에 와서 더욱 갖추어졌다 하겠다.
■병인년 문성왕 8년(당 무종 회창 6, 846)
◯봄 도적이 진해 장군 장보고를 죽였다.
처음에 신무왕이 청해진에 의지해 있을 적에 장보고와 약속하기를,
“만일 원수를 갚게 된다면 마땅히 경의 딸로써 아들의 배필을 삼겠다.”
하였다. 문성왕이 왕위에 올라서 그의 딸을 맞아들여 차비(次妃)로 삼으려 하니, 여러 신하들이 간(諫)하여 말하기를,
“부부는 사람의 큰 윤리입니다. 하(夏)는 도산(塗山) 때문에 훙하였고 은(殷)은 신씨(㜪氏) 때문에 번창하였으며, 주(周)는 포사(褒姒) 때문에 멸망하였고, 진(晋)은 여희(驪姬) 때문에 어지러워졌습니다. 국가의 존망이 이에 달려 있으니 어찌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장보고는 섬사람이니, 그의 딸을 왕실의 배필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왕이 그 말에 따랐다. 이때에 이르러 왕은 장보고가 그의 딸을 맞아들이지 않음을 원망하여 장차 청해진을 근거로 하여 반역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왕이 그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혹시 이기지 못할까 우려하였다.
무주 사람 염장(閻長)은 본래 장대하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왕에게 와서 고하기를,
“대왕께서 신의 계책을 들어 주시면, 한 군사도 수고시키지 않고 맨주먹으로 장보고를 목베어 바치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염장이 거짓 반역한 체하고 청해진에 가서 의지하려 하니, 장보고가 그의 용력을 사랑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상객(上客)으로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어 술을 마시며 매우 기뻐하였다. 장보고가 취하자 염장이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베고 그 무리를 불러 효유하니, 감히 동하지 못하였다. 왕이 기뻐서 염장에게 아간(阿干) 벼슬을 주었다.
■병술년 경문왕 6년(당 의종 함통 7, 866)
◯처음에 진(晋)나라 사람이 칠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냈었다. 고구려 사람이 그 타는 법을 몰라 나라 사람으로서 탄주(彈妻)할 줄 아는 자를 구하였다. 그때에 제이상(第二相)인 왕산악(王山岳)이 1백여의 음곡(音曲)을 고쳐 지어서 탄주하니, 검은 학이 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현학금(玄鶴琴)이라 이름하고 또는 거문고[玄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 때에 사찬 공영(恭永)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地理山) 지금의 지리산(智異山)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배우고, 스스로 새 곡조 30곡을 지어서 속명득(續命得)에게 전수하고, 속명득은 귀금 선생(貴金先生)에게 전수하였는데, 귀금 선생도 지리산에 들어가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왕은 거문고의 도(道)가 끊어질까 염려하여, 이찬 윤흥으로 남원 공사(南原公事)를 삼았다. 윤흥이 관에 부임하여 총명한 소년 두 사람을 간선하였는데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이다. 귀금 선생에게 가서 그 타는 법을 배우게 하였으나, 귀금 선생은 그 기술을 다 가르쳐 주지 아니하였다. 이에 윤흥이 부인과 함께 귀금 선생에게 가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나를 여기에 파견한 것은 선생의 기술을 전수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3년이 되었는데 선생께서 비밀히 간직하고 다 가르쳐 주지 않으니 내가 임금님께 복명(復命)할 수 없습니다.”
하고 술잔을 들고 무릎걸음을 하며 예의와 정성을 다하였다. 이에 귀금 선생이 표풍(飃風) 등 3곡을 전수하였다. 안장은 그의 아들 극종(克宗)에게 전하고, 극종은 다시 7곡을 지었다. 그 뒤에 거문고를 직업으로 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며, 지어진 음곡에 2종이 있으니, 하나는 평조(平調)요 또 하나는 우조(羽調)로서 모두 1백 87곡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그 음곡으로 유전하여 기록에 있는 것은 얼마 없고, 나머지는 모두 산일(散逸)되어 전하지 않는다.
■신묘년 경문왕 11년(당 의종 함통 12, 871)
◯춘정월 황룡사탑을 개조하였다.
3년에 걸쳐 완성하였는데, 9층으로 높이가 22장(丈)이며, 크고 화려한 것은 전보다 훨씬 더하였다.
■경자년 헌강왕 6년(당 희종 광명(廣明) 원년, 880)
◯추9월 왕이 월상루에서 놀았다.
이때 도읍이 전성하여 서울의 방(坊)이 1천 3백 60이요, 이(里)가 55이며, 호수가 17만 8천 9백 36호였다. 서울 사람들이 부윤(富潤)한 집을 ‘금입택(金入宅)’이라 하였는데, 서울 가운데 금입택이 35택이나 되었다. 또 사철 유람 관상하는 곳을 ‘사절유택(四節遊宅)’이라 하였는데, 봄에는 동야택(東野宅)이요,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이요,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이요,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이었다. 여염집이 즐비하고 노래와 취주(吹奏)하는 소리가 높이 들렸다.
■을사년 헌강왕 11년(당 희종 광계(光啓) 원년, 885)
◯3월 최치원(崔致遠)을 시독한림학사(侍讀翰林學士)로 삼았다.
최치원의 자는 고운(孤雲)혹은 해운(海雲) 으로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풍채가 잘 생기고 어려서부터 정밀하고 민첩하여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에 배를 타고 당에 건너가서 공부하였다. 떠날 적에 그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10년 안에 급제를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하였다. 최치원이 당에 도착하여 스승을 찾아 학문을 힘써서, 건부(乾符 당 희종의 연호) 원년(874)에 예부 시랑 배찬(裴瓚)의 방하(榜下)에 급제하여 선주(宣州)의 율수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으며, 치적에 의하여 승무랑 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진급되었다. 그때에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므로 고병이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토벌하였는데, 고병이 최치원을 불러 종사(從事)로 삼고 서기(書記)의 일을 맡기니, 표(表)ㆍ장(狀)ㆍ서(書)ㆍ계(啓)와 징병(徵兵)ㆍ고격(告檄)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가 황소에게 보낸 격문(檄文)에,
“다만 천하의 사람이 다 너를 죽일 것을 생각할 뿐 아니라, 또한 지중(地中)의 귀신들도 이미 가만히 죽일 것을 의론한다.”
는 말이 있었는데, 황소가 이를 읽고 저도 모르게 걸상에서 떨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명성이 천하에 떨쳤다.
이때에 이르러 그의 나이 28세로 부모를 뵈러 고국에 돌아갈 뜻이 있어서 황제의 조명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왔다. 왕이 그를 머물러 있게 하고 시독 겸한림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兵部侍郞知瑞書監事)로 삼았다. 최치원이 돌아올 때에 동년 급제(同年及第)인 고운(顧雲)이 고운편(孤雲篇)을 지어서 전송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바람을 끌고 바다를 달려 / 引風離海上
달을 짝하여 인간에 이르네 / 伴月倒人間
배회하며 좇아갈 수 없더니 / 徘徊不可從
만만하게 동으로 돌아가게 / 漫漫又東還
하였고 또,
열 두 살에 배타고 바다 건너와 / 十二乘舟渡海來
문장이 중화를 뒤흔들고 / 文章撼動中華國
열 여덟 살에 사원을 누비며 / 十八橫行戰詞苑
한 화살로 금문책을 깨뜨렸네 / 一箭射破金門策
하였다. 최치원도 자서(自叙)하기를,
“무협 중봉(巫峽重峯 무협(巫峽)은 12봉이니 곧 12세를 뜻한다)의 해에 무명옷[絲] 입고 중화에 들어갔다가, 은하 열수(銀河列宿 열수(列宿)는 28수(宿)니 곧 28세를 뜻한다)의 해에 비단옷 입고 우리 나라에 돌아왔다.”
하였다. 이는 12세에 당에 건너가고 28세에 본국에 돌아왔음을 말한 것이다. 최치원은 중국에 유학하여 얻은 것이 많았으므로 본국에 돌아와서 자기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국운이 쇠퇴한 말기가 되어 의심하고 시기하는 이가 많아서 잘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있다가 태산군 태수(太山郡太守) 태산군은 지금의 태인(泰仁) 로 나갔다.
○ 최신지(崔愼之) 등을 당에 유학보냈다.
최신지는 경주 사람으로 각간 유덕(有德)의 원손(遠孫)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며 문장에 능하였다. 이때에 나이 18세였다. 최신지ㆍ김곡(金鵠) 등 8인, 대수령(大首領) 기작(祈綽) 등 8인, 소수령(小首領) 소은(蘇恩) 등 2인이 하정사(賀正使) 수창부 시랑 급찬(守倉部侍郞級飡) 김영(金穎)을 따라 당에 건너가 공부하였다.
김곡의 아버지 김장(金裝)도 일찍이 당에 벼슬하여 해주현 자사(海州縣刺史)가 되었다. 뒤에 최신지는 예부 시랑 설정규(薛廷珪)의 방하(榜下)에 급제하였다. 그때 발해국 재상 오소도(烏昭度)의 아들 광찬(光贊)도 같은 해에 급제하였는데, 오소도가 조공사로 당에 와서 청하여 말하기를,
“신이 옛날에 급제하였을 적에 이름이 신라 이동(李同)의 위에 있었습니다. 이제 신의 아들 광찬도 마땅히 최신지의 위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당에서는 최신지의 재주와 학문이 우수하였기 때문에 오소도의 청을 들어 주지 아니하였다. 최신지는 뒤에 이름을 언위(彦撝)로 고쳤다.
■무신년 진성 여주 2년(당 희종 문덕(文德) 원년, 888)
○ 폐신(嬖臣) 위홍이 죽으니 혜성왕(惠成王)으로 추봉하였다.
위홍은 여주의 유모 부호 부인(鳧好夫人)의 남편으로 벼슬이 상대등에 이르렀으며, 여주가 일찍부터 그와 간통하였으므로 항상 궁내에 들어와서 정권을 마음대로 하였다. 여주의 명으로 중 대구(大矩)와 더불어 향가(鄕歌)를 수집하여 편수하였는데, 이를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 위홍이 죽자 혜성왕으로 추시하였으나 여러 신하 중에 한 사람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 은사(隱士) 왕거인(王巨仁)을 옥에 가두었다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석방하였다.
위홍이 죽은 뒤에는 여주가 몰래 아름다운 소년 2~3명을 궁중에 끌어들여 사통하고 그들에게 요직(要職)을 주어 국정을 맡겼다. 이로 말미암아 폐행(嬖倖)이 뜻을 마음대로 펴서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기강이 해이해지니, 어떤 사람이 시정(時政)을 기방(譏謗)하여 다라니(陀羅尼)의 은어(隱語)를 지어 조정의 길목에 방을 붙였다. 어떤 이가 여주에게 아뢰기를,
“이는 반드시 뜻을 얻지 못한 자가 한 짓으로, 아마 대야주(大耶州)의 은자(隱者) 왕 거인일 것입니다.”
하므로, 여주가 명하여 옥에 가두고 장차 처형하려 하였다. 이에 왕거인이 너무나 억울하여 옥벽(獄壁)에 글을 쓰기를,
우공이 통곡하니 삼 년 가물었고 / 于公慟哭三年旱
추연이 슬픔을 품으니 오월에 서리 내렸네 / 鄒衍含悲五月霜
이제 깊은 근심 예와 비슷한데 / 今我幽愁還似古
황천은 말없이 다만 푸르기만 하네 / 皇天無語但蒼蒼
하였다. 그날 저녁에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고 우박이 쏟아졌다. 이에 여주가 두려워하여 그를 석방하였다.
■기유년 진성 여주 3년(당 소종(昭宗) 용기(龍紀) 원년, 889)
◯최승우(崔承祐)를 당에 보내어 유학시켰다.
최승우는 그 뒤 경복(景福 당 소종의 연호) 2년(893)에 시랑 양섭(楊涉)의 방하(榜下)에 급제하였다. 사륙체 문집 5권이 있는데, 스스로 서문을 쓰고 《호본집(糊本集)》이라 하였다.
신라는 당을 섬긴 이후부터 항상 왕자를 보내 숙위하고, 또 학생을 보내 태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닦게 하며, 10년의 연한이 차면 본국에 돌아오게 하고 다시 다른 학생을 보냈는데, 입학하는 자가 많을 때에는 1백여 인이나 되었다. 서적을 구입하는 은화는 본국에서 지급하고, 학습하는 서적과 양식은 당의 홍로시에서 공급하였다. 그러기에 학생의 가고 오는 자가 서로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장경(長慶 당 목종의 연호) 초에 김운경이 처음으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빈공과는 과거가 있을 때마다 항상 외국인을 위하여 별시(別試)를 보여 방(榜) 끝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김운경으로부터 당 말기까지 과거에 합격한 자가 58인이며, 오대(五代)의 양(梁)과 당(唐) 때에도 32인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두드러지게 이름을 나타낸 자는 최이정(崔利貞)ㆍ김숙정(金叔貞)ㆍ박계업(朴季業)ㆍ김윤부(金允夫)ㆍ김입지(金立之)ㆍ박양지(朴亮之)ㆍ이동(李同)ㆍ최영(崔霙)ㆍ김무선(金茂先)ㆍ양영(楊頴)ㆍ최환(崔渙)ㆍ최광유(崔匡裕)ㆍ최치원(崔致遠)ㆍ최신지(崔愼之)ㆍ김소유(金紹游)ㆍ박인범(朴仁範)ㆍ김악(金渥)ㆍ최승우(崔承祐)ㆍ김문울(金文蔚) 등으로 모두 성재(成材)하여 일가를 이루었는데 박인범은 시(詩)로 울렸고, 김악은 예(禮)로 일컬어졌으며, 최치원ㆍ최신지ㆍ최승우는 더욱 저명한 자이다. 또 원걸(元傑)ㆍ왕거인(王巨仁)ㆍ김수훈(金垂訓) 등은 모두 문장으로 저명하나 사서에 빠져서 전하지 않는다.
■신해년 진성 여주 5년(당 소종 대순 2, 891)
◯동10월 북원의 도적 양길이 궁예(弓裔)로 비장(裨將)을 삼아 주천(酒泉)ㆍ내성(奈城) 등의 군현을 함락하였다.
궁예는 헌안왕의 서자이다. 혹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태어날 때에 집 위에 흰 빛이 무지개와 같이 하늘에 뻗쳤고, 태어나면서부터 이[齒]가 있었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 아이는 중오일(重午日)에 태어났고 또 이상한 빛이 있으니, 혹시 국가에 이롭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대로 두지 마십시오.”
하므로, 왕이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죽이게 하였다. 사자가 강보(襁褓) 속에서 끌어내어 누각 아래로 던졌는데 젖 먹이는 여종이 몰래 받다가 손가락이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 그 여종이 안고 도망가서 양육하였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자, 세달사(世達寺) 고려 흥교사(興敎寺) 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장성하게 되자 승려(僧侶)의 규율에 구애되지 않고, 의기양양하고 담력이 있었다. 일찍이 바리때[鉢]를 들고 재(齋)를 지내러 나아갈 때 까마귀 한 마리가 아첨(牙籤)을 물어다가 바리때 속에 떨어뜨렸는데, 그것을 보니 왕(王)이란 글자가 씌어 있었다. 그 일을 숨기고 말을 하지 않았으나 매우 자부(自負)하였다.
그는 국가가 쇠하여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백성이 흩어지며 여러 도적이 봉기함을 보고, 이러한 혼란을 틈타서 무리를 모으면 뜻을 얻을 수 있겠다 생각하고, 개산(介山)지금의 죽산 의 도적 기훤에게 가 의지하였으나 기훤이 거만하여 예로 대우하지 않으므로, 궁예는 마음 답답하여 스스로 안정하지 못하고 가만히 기훤의 부하 원회(元會)ㆍ신훤(申烜) 등과 결탁하여 벗을 삼고, 북원의 도적 양길에게로 가서 의지하니, 양길이 잘 대우하여 일을 맡기고, 1백여 기병을 나누어 주어 동쪽 지방을 치게 하였다. 이에 궁예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치악산(雉岳山)지금의 원주부 동쪽 25리에 있다석남사(石南寺)에서 자고, 다음날 행군하여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江陵)) 관내의 주천(酒泉) 지금의 원주에 소속되며 원주 동쪽 90리에 있다 ㆍ내성(奈城)지금의 영월군(寧越郡) ㆍ울오(鬱烏) 혹은 욱오(郁烏)라 하며 지금의 평창군(平昌郡) ㆍ어진(御珍)지금은 미상 등 10여 군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임자년 진성 여주 6년(당 소종 경복(景福) 원년, 892)
◯ 남해(南海)의 수졸(戍卒) 진훤(甄萱)진(甄)의 음은 진(眞) 이 반란을 일으켜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光州))를 근거로 하고 스스로 한남군 개국공(漢南郡開國公)이라 칭하였다.
진훤은 상주(尙州) 가선현(嘉善縣)지금의 문경(聞慶) 남쪽 45리에 속했는데 고려에서 가은(加恩)으로 고쳤다 사람으로 본성은 이씨(李氏)였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로 자활(自活)하였고, 뒤에 가세를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네 아들이 있어 모두 이름이 알려졌는데, 진훤은 더욱 걸출하여 지략이 많았다. 처음 진훤이 태어나 강보에 싸였을 때에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는 점심밥을 가져오느라 아이를 숲속에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먹였다 한다. 장성하게 되자 체모가 웅위(雄偉)하고 지기가 남달리 뛰어났다. 나이 15세 때에 스스로 성을 진(甄)이라 하고, 종군(從軍)하여 왕경에 갔다가, 서남 해안을 방비하는 수졸로 나아가서는 창을 베고 자면서 적을 대비하고, 항상 사졸(士卒)의 앞장을 섰다. 그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이때 여주가 혼미하고 음란하여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져서 백성은 굶주리고 도적이 일어나자, 진훤이 가만히 딴뜻을 품고 망명(亡命)하는 이들을 불러 모아서 주현을 공략하니, 달포 사이에 무리가 5천 명에 이르렀다. 드디어 무주를 습격하여 차지하였다. 그러나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 자칭하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 서남도통 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 전무웅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 개국공 식읍이천호(新羅西南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熊等州郡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가 되고 멀리 북원의 적 양길을 제수하여 비장을 삼았다.
■갑인년 진성 여주 8년(당 소종 건녕(乾寧) 원년, 894)
◯춘2월 최치원으로 아찬을 삼았다.
이때 잘못된 정사가 너무나 많고 도적들이 떼지어 일어나므로 최치원이 시무(時務) 10여 조를 올리니, 여주가 기꺼이 받아들이고, 아찬을 제수하였다.
동10월 궁예가 명주(溟州)를 침략하고,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궁예가 북원으로부터 명주에 침입할 때 무리가 3천 5백 인이었다. 본기에는 “무리가 6백에 이른다.” 하였으나 여기서는 본전(本傳)에 따랐다 이것을 14대(隊)로 나누고 김대(金大)ㆍ검모(黔毛)ㆍ흔장(昕長)ㆍ귀평(貴平)ㆍ장일(張一) 등으로 사상(舍上)을 삼았는데, 사상은 부장(部長)을 말한다. 궁예가 사졸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하고 주고 뺏는 것을 사사롭게 하지 않으니, 부하가 마음으로 외복(畏服)하고 애경(愛敬)하였다. 그러므로 드디어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을묘년 진성 여주 9년(당 소종 건녕 2, 895)
◯추8월 궁예가 한주에 침입하여 철원(鐵圓) 등 10여 군을 함락하였다.
궁예가 저족(猪足)지금의 인제(麟蹄) ㆍ성천(狌川)지금의 낭천(狼川) 2군에 침입하여 점령하고, 다시 한주 관내의 부약(夫若)지금은 미상 ㆍ철원(鐵圓)지금의 철원(鐵原) 등 10여 군을 깨뜨리니, 군세가 매우 성하여 패수 서쪽의 도적들이 와서 항복하는 무리가 많았다. 이에 궁예는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칭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비로소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궁예가 왕건(王建)을 철원군 태수로 삼았다.
왕건은 한주 송악군(松岳郡) 지금의 개성부(開城府) 사람이다. 처음에 왕건의 아버지 융(隆)은 기우(器宇)가 커서 삼한을 병탄(並呑)할 뜻이 있었다. 한씨(韓氏)와 결혼하여 집을 송악(松嶽)송악은 지금의 개성부 진산(鎭山) 남쪽에 지었는데, 중 도선(道詵)이 문앞의 나무 아래에 와서 쉬면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땅에 마땅히 성인(聖人)이 출생하겠다.”
하였다. 왕륭이 이를 듣고 신을 거꾸로 신으며 나와 맞이하였다. 두 사람이 함께 송악산에 올라가서 산수(山水)의 맥(脈)을 살핀 다음에 도선이 글 1통을 써서 봉하고 그 외면에 쓰기를 ‘삼가 이 글을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인 대원(大原) 군자 족하에게 드립니다.’라고 쓰고, 왕륭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공이 명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그가 장성하거든 이것을 주시오.”
하였다. 그 편지는 비밀히 하여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 기일에 미쳐 과연 왕건이 탄생하였으니, 곧 헌강왕 3년(정유) 정월 병술(丙戌 14일)이었다. 그가 날 때에 신기한 자색 기운이 종일토록 둘러싸고 뜰에 가득하게 서렸으며, 그 돌아가는 모양이 마치 교룡(蛟龍)과 같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용안(龍顔) 일각(日角)에 턱은 모나고 이마는 넓으며, 기우(器宇)가 크고 깊으며, 말소리가 크며, 성품이 관후(寬厚)하여 세상을 구제할 도량이 있었다. 왕건의 나이 17세에 도선이 다시 와서 보기를 청하고 말하기를,
“족하는 백육(百六)의 모임을 만났으니 말세[三季]의 창생들이 공의 넓은 구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고, 인하여 군사를 출동하고 진(陣)을 설치하는 지리(地理)와 천시(天時)의 법도 및 산천(山川)을 망제(望祭)하여 감통(感通)하고 보우(保佑)하는 이치를 고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건이 궁예에게 가서 의지하니, 궁예가 이 관직을 제수한 것이다. 이때 왕건의 나이 19세였다.
도선은 영암(靈巖)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혹은 태종무열왕의 서손(庶孫)이라고도 한다. 나이 15세에 중이 되었는데, 해를 지나지 않아서 대장경(大藏經)을 다 통달하고, 호를 신총(神聰)이라 하였다. 헌강왕이 일찍이 그를 맞아 금중(禁中)에 머물게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아니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 돌아갔다. 그가 이인(異人)을 남해의 물가 지금의 구례현(求禮縣) 사도촌(沙圖村) 에서 만났는데, 모래를 모아 산천의 순하고 역한 형세를 만들어 보였다. 이로부터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방술을 활연히 통달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도선이 당에 건너가서 일행(一行 당의 고승(高僧))의 지리법(地理法)을 전수받았다.”
한다. 산을 밟고 물을 관찰하여 신기한 징험이 많이 있으므로, 드디어 동방 감여(堪輿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말한다) 술수(術數)의 시조가 되었다. 진성 여주 9년으로부터 3년 뒤인 무오년(898)에 죽었다. 여주가 서석학사(瑞石學士) 박인범(朴仁範)에게 명하여 비문을 지었다.
동사강목 제5하
■정사년 효공왕(孝恭王) 원년(당(唐) 소종(昭宗) 건녕(乾寧) 4, 897)
◯효녀 지은(知恩)의 가문(家門)을 정표(旌表)하였다.
지은은 한기부(漢岐部) 백성 연권(連權)의 딸인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나이 32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집이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였고 더러는 돌아다니며 구걸까지 하였지만 봉양하기에는 모자랐다. 그래서 부잣집에 몸을 팔고 종이 되어, 낮에는 그 대가로 일을 하고 저물어서야 집에 돌아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이렇게 한 지 며칠 만에 어머니가 말하기를,
“지난날에는 거친 음식을 먹어도 오히려 맛이 있더니, 이제는 비록 음식이 좋아도 간장이 찢어지는 듯하니 어찌 된 일이냐?”
하였다. 이에 딸이 사실대로 아뢰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 때문에 너를 남의 종이 되게 하였으니 내가 빨리 죽느니만 못하구나.”
하면서 통곡하니, 딸도 또한 울었다. 낭도(郞徒) 효종(孝宗)이 이를 의롭게 여겨서 곡식 1백 석을 주고, 또 빚을 갚아 주어서 품팔이를 면하게 하였고, 1천 명의 낭도가 각기 곡식 1석씩을 보내 주었다. 여주(女主 진성 여왕(眞聖女王))도 또한 조(租) 5백 석과 집 한 채를 내리고 그 마을을 정표하여 효양방(孝養坊)이라 하였다. 또한 효종을 가상히 여겨 헌강왕(憲康王)의 딸에게 장가들였다.
■경신년 효공왕 4년 진훤(甄萱) 9년(당 소종 광화 5, 900)
◯진훤(甄萱)이 후백제왕(後百濟王)을 참칭(僣稱)하여 전주(全州)에 도읍하고, 사신을 오월(吳越)에 보내었다. ※안정복은 후백제 건국을 892년으로 삼고 있다. 현재 국정교과서에서는 900년으로 정하고 있다.
훤이 서쪽으로 완산주(完山州)에 이르니, 고을 사람들이 맞아 위로하였다. 훤은 인심 얻은 것을 기뻐하여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삼국(三國)의 시초를 살피건대 마한(馬韓)이 맨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居世)가 뒤에 일어났으며,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이 이를 좇아 일어났었다. 이에, 백제(百濟)가 금마산(金馬山)에 개국(開國)하여 전세(傳世)한 지 6백 년이었더니, 당이 신라와 더불어 합공(合攻)하여 이를 멸하였다. 지금 내가 비록 부덕하지만 의자왕(義慈王)의 오랜 울분을 씻고자 한다.”
하고, 드디어 완산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왕을 일컫고, 관제를 마련하여 직책을 나누었으며, 사신을 오월에 보내었다. 오월왕(吳越王) 전류(錢鏐)가 답사(答使)를 보내어 훤에게 검교태부(檢校太傅)를 더하고, 그밖의 벼슬은 그전 예와 같았다.
■신유년 효공왕 5년 진훤 10년 궁예(弓裔) 원년(901)
◯ 궁예(弓裔)가 왕을 참칭하였다.
예가 종국(宗國 신라를 가리킴)을 원망하여 항상 말하기를,
“신라가 고구려를 멸하였으니, 내가 고구려를 위하여 원수를 갚으리라.”
하였다. 일찍이 남쪽에 갔다가 급산군(岌山郡)고려가 흥주(興州)라 고쳤다. 지금의 순흥(順興)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 위에 전왕(前王)의 화상이 있는 것을 보고 검을 뽑아서 이를 쳤다.
■계해년 혜공왕 7년 진훤 12년 궁예 3년(당 소종 천복 3, 903)
◯궁예가 왕건을 보내어 금성(錦城) 어떤 본에는 성(城)이 산(山)으로 되었다 등 10군을 취하게 하여, 수비병을 두고 돌아갔다.
이때 남쪽 지역이 모두 진훤에게 예속되었으며 금성군 사람들만은 홀로 궁예에게 부속되었었다. 예가 건에게 명하여 주사(舟師 수군)를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무주(武州) 지역에 진병하게 하였는데, 성주 지훤(池萱)은 진훤의 사위로써 이를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으므로 건이 금성군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10여 군현을 쳐서 취하였다. 이어 금성을 고쳐서 나주(羅州)를 삼아 군사를 나누어 수비하게 하고 돌아왔다. 양주(良州)의 장수 김인훈(金忍訓)이 급보를 알리니, 예가 또 건을 시켜 가서 구원하게 하였는데, 돌아왔을 때에 예가 변방의 일을 물었다. 이에 태조가 변방을 편안하게 하고 국경을 개척할 계책을 개진하니, 좌우가 모두 눈길을 모았고, 예도 또한 기특하게 여겨서 계급을 올려 알찬(閼粲)으로 삼았다.
■을축년 효공왕 9년 진훤 14년 궁예 5년(당 애제 천우 2, 905)
◯ 궁예가 도읍을 철원(鐵圓)으로 옮겼다.
예가 참위(讖緯 도참설) 때문에 철원 부양(斧壤)지금의 평강(平康) 에 도읍하고자 하여 산수를 두루 살펴보고 드디어 도읍을 정하였는데, 서원(西原) 백성 1천 호(戶)를 이곳에 옮겨 채우고, 궁실을 수즙(修葺)하고 사치를 극하였으며, 성책(聖冊)이라 개원(改元)하였다. 지금 철원부 북쪽 27리에 풍천원(楓川原)이 있으니, 곧 궁예의 궁전 유지(遺址)이다.
■신미년 효공왕 15년 진훤 20년 궁예 11년(911)
◯궁예가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고치고,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일컬었다.
수덕만세(水德萬歲)라 개원하고, 미륵불이 모니불(牟尼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린다고 스스로 일컬었으며, 금책(金幘 금으로 장식한 상투건(巾))을 쓰고 방포(方袍 승려복, 즉 가사(袈裟))를 입었다. 큰아들은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 하고, 막내아들은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다. 밖에 나갈 때는 흰 말을 탔는데 비단으로 그 갈기와 꼬리를 장식하였으며, 동남 동녀를 시켜 번개(幡盖 깃발과 일산 등의 의물(儀物))와 향화(香花)를 받들어 앞을 인도하게 하고, 또 비구(比丘) 2백여 명에게 명하여 범패(梵唄 여래(如來)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를 외며 뒤따르게 하였다. 스스로 경(經)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말이 모두 요망스러워 법도에 맞지 않았으며, 때로는 혹 정좌하여 이를 강설(講說)하기도 하였는데, 중 석총(釋聰)이 이르기를,
“이것은 모두 사특하고 괴이한 말이어서 교훈이 될 수가 없다.”
하니, 예가 철퇴(鐵槌)로 그를 쳐서 죽였다.
■계유년 신덕왕(神德王) 2년 진훤 22년 궁예 13년(913)
◯궁예가 왕건을 시중으로 삼았다.
예는 건이 누차 변방에서의 공이 현저하였으므로 여러 차례 계제를 올려 파진찬 겸시중(波珍飡兼侍中)을 삼아 불러들이고, 수군(水軍)에 관한 업무는 모두 부장 김언(金言) 등에게 위임하되 정토(征討)의 일은 반드시 건에게 품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이에 건은 지위가 백료(百僚)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러나 참람될까 두려워하여 벼슬에 있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매양 공문(公門)을 출입하며 나라를 위한 계책을 처리할 때는 오로지 감정을 억제하고 근신하여 민중의 마음 얻기에 힘썼으며, 남이 참소를 입은 것을 보면 곧 해명하여 구했다. 서원(西原) 사람 아지태(阿志泰)가 아첨하고 간사한 짓으로 굄을 받았는데, 같은 고을 사람 입전(笠全)ㆍ졸방(卒方)ㆍ관서(寬舒) 등을 참소하여 국문을 받은 지 몇 해가 되어도 판결이 나지 않더니, 건이 즉시 분변하여 지태가 복죄하자 뭇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이리하여 인심이 건에게 기울게 되매, 건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다시 곤외(閫外 군대를 이끌고 경외(境外)로 출정하는 장군의 직임을 말한다)로 나가기를 원하였다.
■을해년 신덕왕 4년 진훤 24년 궁예 15년(915)
◯궁예가 그의 아내 강씨(康氏)와 그의 두 아들을 죽였다.
예가 무함하여 반역죄로 얽어 하루에 살해하는 자가 백 명으로 헤아렸으며, 장수와 재상으로 해를 당한 자가 십중 팔구에 이르니, 부양(斧壤)과 철원(鐵圓) 사람들이 그 독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궁예가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미륵의 마음 관찰하는 법을 체득하여 부인의 사통하는 것도 능히 알 수 있다.”
하고는, 드디어 3척 되는 쇠공이를 만들어서, 죽이고자 하는 자가 있을 때마다 그것을 불에 달구어서 그 음부를 찔렀다. 이 때문에 사녀(士女)들이 몹시 두려워하고 원망과 울분(鬱憤)이 날로 심하였다. 부인 강씨가 예의 불법을 많이 행하는 것을 정색하여 간하니, 예가 이를 미워하여 말하기를,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한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였다. 강씨가 말하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궁예는,
“내가 신통법(神通法)으로 보았다.”
하고는, 뜨거운 불에 쇠공이를 달구어서 그 음부를 찌르니, 입과 코로 연기를 내뿜으며 죽었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까지 아울러 죽였다.
○ 궁예가 왕건을 보내어 나주를 순무(巡撫)하게 하였다.
예의 흉학(凶虐)이 날로 심하더니, 하루는 급히 건을 불러 성난 눈으로 노려보며 말하기를,
“경이 어젯밤에 무리를 모아 모반(謀叛)하였으니, 어째서인가?”
하였다. 건이 태연한 얼굴빛으로 말하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니, 예가 말하기를,
“경은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볼 줄 안다. 내가 곧 입정(入定 참선(參禪)하여 삼매경에 이른 것)하여 살펴보리라.”
하고는, 곧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서 한참 동안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이때 장주(掌奏) 최응(崔凝)이 곁에 있다가 짐짓 붓을 떨어뜨리고는 뜰에 내려가 붓을 주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건에게 말하기를,
“승복하지 않으면 위태롭습니다.”
하였다. 건이 곧 깨닫고 말하기를,
“신이 사실 모반하였습니다. 그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예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가히 정직하다고 할 만하다.”
하고는, 금안(金鞍 금으로 장식한 안장)을 그에게 내리며 말하기를,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
하였다. 드디어 보장(步將) 강선힐(康瑄詰)ㆍ흑상(黑湘)ㆍ김재원(金材瑗) 등으로 건을 도와 배 1백여 척을 더 만들게 하니, 큰 배는 각기 사방이 16보(步)로, 위에는 누로(樓櫓 적을 망보는 지붕 없는 전망대)를 일으켜서 말을 달릴 만하였다. 군사 3천을 거느려 양식을 싣고 나주에 가니, 이때 남방에는 기근이 들어 도둑이 벌떼같이 일어났었다. 건이 마음을 다하여 구휼(救恤)하니, 이를 힘입어 온전하게 생활하였다.
■경명왕(景明王) 2년 진훤 27년, 고려 왕건(王建) 원년 (918)
◯하6월 태봉의 장수 왕건이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니, 궁예는 달아났다가 죽었다.
■기묘년 경명왕 3년 진훤 28년 고려 태조 2년(919)
◯춘정월 고려가 송악(松嶽)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려왕이 송악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올려서 개주(開州)라 하였으며, 궁궐을 창건하고, 저자를 세우며, 방리(坊里)를 구별하여 5부(部)로 나누었다. 철원(鐵圓)을 동주(東州)로 고쳤다.
■병술년 경애왕 3년 진훤 35년 고려 태조 9년(926)
◯추7월 거란이 발해를 멸하였다.
■신묘년 왕 김부 5년 진훤 40년 고려 태조 14년(931)
◯춘2월 고려 임금 건이 와서 조회하였다.
왕이 태수(太守) 겸용(謙用)을 고려에 보내어 서로 만나 보기를 청하니, 고려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5천여 기를 거느리고 서울 경내에 이르러 먼저 장군 선필(善弼)을 보내어 기거(起居)를 물으니, 왕이 백관에게 명하여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고, 당제(堂弟)인 상국(相國) 김유렴(金裕廉) 등으로 하여금 성안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왕이 응문(應門 궁궐의 정문) 밖에 나아가 맞이하여 절하니, 고려왕이 답배하고, 왕은 왼쪽을, 고려왕은 오른쪽을 거쳐서 읍하고 사양하며 전에 올랐다. 고려왕이 호종(扈從)한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왕에게 절하게 하였다. 드디어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이 반쯤 취하자 왕이 이르기를,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점점 화란(禍亂)을 빚어내었으니, 애통해한들 어찌하랴?”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니, 좌우의 신하도 오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고려왕도 또한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고, 왕태후ㆍ부인ㆍ국상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예물을 주었다.
■갑오년 왕 김부 8년 진훤 43년 고려 태조 17년(934)
◯추7월 발해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고려로 도망쳐왔다.
광현이 무리 수만을 거느리고 도망쳐오니, 성명을 왕계(王繼)로 내리어 백주(白州)를 지키게 하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요좌(僚佐)들에게는 관작을, 군사들에게는 전택(田宅)을 차등 있게 내렸다. 처음 발해 사람 은계종(隱繼宗)이 천덕전(天德殿)에서 뵐 적에 절을 세 번 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예(禮)에 어긋난 것이라고 하니, 대상 송함홍(宋含弘)이 이르기를,
“나라 잃은 사람이 세 번 절하는 것은 옛날 예(禮)이다.”
하였다.
■을미년 왕 김부 9년 진훤 44년 고려 태조 18년(935)
◯춘3월 진신검(甄神劒)이 그 아버지 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하고, 그 아우 금강(金剛)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立]하였다.
처음에, 훤이 잉첩(媵妾)이 많아 아들 10여 인을 두었는데, 제4자 금강이 몸이 장대하고 지혜가 많으므로 훤이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왕위를 전하고자 하니, 장자 신검과 차자 양검(良劒)ㆍ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 근심하였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이 되고,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이 되어 나아가 주둔하였으며, 신검은 훤의 곁에 있었는데, 이찬(伊粲) 능환(能奐)이 사람을 시켜 용검과 양검에게 가서 음모를 꾸미고 파진찬(波珍粲) 신덕(新德)과 영순(英順) 등과 더불어 신검에게 난리를 일으킬 것을 권하였다. 이때에 훤이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는데, 궁정(宮庭)이 떠들썩한 소리를 듣고 ‘무슨 소리인가?’ 하고 물으니, 좌우가 이르기를, ‘왕이 늙었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장자 신검에게 왕위를 차지하게 하고, 진하(陳賀)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조금 뒤에 훤을 금산불사(金山佛寺) 지금의 금구현(金溝縣)에 있다 에 옮기고, 장사 파달(巴達) 등 30인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이때 동요(童謠)에 이르기를,
가련하다 완산 아이는 / 可憐完山兒
아비를 잃고 눈물 흘리네 / 失父涕漣洏
하였다. 신검이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경내의 죄인을 대사하였다.
동10월 왕이 시랑 김봉휴(金封休)를 보내어 고려에 항복하기를 청하니, 왕자가 도망하여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갔다. ※마의태자
왕은 사방의 토지가 모두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고, 국세가 외롭고 미약하여 능히 스스로 편안할 수 없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고려에 항복할 것을 모의하였으나, 여러 사람의 의논이 한결같지 않았다. 왕자가 아뢰기를,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습니다. 마땅히 충신 의사와 더불어 민심을 수합(收合)하여 죽음으로써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 그만둘 것인데, 어찌 1천 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주어야 합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외롭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서 형세가 능히 보전할 수 없다. 이미 능히 강해질 수도 없고 또 능히 약해질 수도 없어서, 무고한 백성으로 하여금 참혹한 죽음에 이르게 함은 내가 차마 못하겠다.”
하고, 이에 봉휴로 하여금 글을 가지고 고려에 항복할 것을 청하게 하였다. 왕자가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하고 총총히 개골산 지금의 금강산(金剛山)으로, 회양(淮陽)에 있다 에 들어가 바위를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에 초식(草食)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동생도 또한 중이 되어 이름을 범공(梵空)이라 하니, 뒤에 법수(法水)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고 한다.
동사강목 제6상
■병신년 고려 태조 신성왕(太祖 神聖王) 19년 후백제가 멸망(936)
◯추9월 왕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하여 백제의 군사를 숭선군(崇善郡)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진신검(甄神劍)이 항복하자, 특별히 그의 죽음을 면해 주었다. 진훤이 등에 종기가 나서 죽었다. 백제가 평정되었다.
왕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서 군사를 합하여 숭선(崇善)곧 일선군(一善郡)의 옛터이다. 지금의 선산(善山) 여차니진(餘次尼津) 동쪽 1리에 있다 으로 나아가 주둔하니 신검이 군사를 이끌고 맞섰다. 8일(갑오)에는 일리천(一利川) 지금의 여차니진이다. 선산부 동쪽 11리에 있다 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
북을 울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갑자기 칼과 창 같은 모양의 흰 구름이 고려 군사 위에 일어나서, 적진을 향하여 퍼져나갔다. 백제의 좌장군 효봉(孝奉)ㆍ덕술(德述) 등이 군사의 세력이 대단한 것을 보고 갑옷를 벗고 창을 내던지면서 진훤의 말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이에 적의 사기가 꺾이어 감히 움직이지를 못하였다. 왕이 효봉 등을 위로하면서 신검이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말하였다.
“중군에 있는데, 좌우 양쪽으로 끼고 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왕이, 공훤에게 곧바로 중군을 치게 하고, 3군이 일제히 나아가 분전(奮戰)하니, 적의 군사가 크게 무너졌다. 백제의 장군 흔강(昕康)ㆍ견달(見達)ㆍ은술(殷述)ㆍ금식(今式)ㆍ우봉(又奉) 등 3천 2백여 명을 사로잡고, 머리 5천 7백여 급(級)을 베었다. 적이 창을 거꾸로 쥐고 서로 공격하므로 여러 군사가 황산(黃山)지금의 연산(連山) 에까지 추격하여 탄령(炭嶺)을 넘으니, 신검이 그의 두 아우인 양검(良劍)ㆍ용검(龍劍), 그리고 문무(文武)의 여러 벼슬아치를 데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고 그들을 위로하였으며, 포로로 잡은 백제의 장사(將士)들은 모두 본토(本土)로 돌려보내고 오직 흔강ㆍ부달ㆍ우봉ㆍ견달 등 40여 명만을 경사(京師)로 보냈다.
왕이 능환(能奐)을 불러 면대하여 꾸짖었다.
“처음 양검(良劍) 등과 함께 모의하여 군부(君父)를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자는 너다. 인신(人臣)의 의리가 이와 같아야 하겠는가?”
능환이 머리를 수그리고 말을 하지 못하니, 그를 죽이게 하였다. 양검ㆍ용검은 진주(眞州)지금은 미상 에 유배시켰다가 조금 뒤에 죽였다. 신검이 참람되이 왕위에 오른 것은 다른 사람의 협박 탓이어서 죄가 두 아우보다 가볍고 또 귀순(歸順)한 공이 있다 하여, 조서로 특별히 죽음을 면해 주고 벼슬을 내렸다. 이에 진훤은 울분과 번민으로 종기가 난 지 며칠 만에 황산(黃山)지금의 연산 동쪽 5리에 있다 의 절에서 졸(卒)하니, 나이 70이었다. 진훤의 묘는 지금의 은진현(恩津縣) 남쪽 12리 풍계촌(風界村)에 있는데 세상에서 왕묘(王墓)라고 부른다
왕이 백제 도성(都城)에 들어가 영을 내려,
“저들 괴수가 이미 귀순하여 충성을 나타냈으니, 나의 적자(赤子 임금의 은택을 받는 백성)를 범하지 말라.”
하고, 장사들을 위로하여 재주를 헤아려 임용하고 군령을 엄하게 밝혀서 추호도 범하지 아니하므로, 주군(州郡)이 안도(安堵)하여 노인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만세를 부르면서 서로 경하하였다. 진씨(甄氏)는 왕호(王號)를 참칭(僣稱)한 지 45년 만에 망하였다.
■임인년 태조 25년(후진 고조 천복 7, 거란 태종 회동 5, 942)
◯동10월 거란의 사신을 섬으로 귀양보냈다.
거란이 사신을 보내 낙타(駱駞) 50필을 가져다 주었다. 왕은, 거란이 발해와 화호를 맺었다가 갑자기 동맹을 배반하고 멸망시켰으므로 심히 무도(無道)하니, 멀리 동맹을 맺어 이웃을 삼을 것이 못된다 하여 마침내 교빙(交聘)을 끊고, 그들의 사자 30인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를 만부교(萬夫橋) 송경(松京)의 보정문(保定門) 안에 있다. 지금은 야교(夜橋)라고 부른다 아래에 매어 두고서 모두 굶어 죽게 하였다.
■계묘년 태조 26년(후진 출제(出帝) 천복 8, 거란 태종 회동 6, 943)
◯하4월 왕이 친히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지었다.
제서(制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순(大舜)은 역산(歷山)에서 밭갈았으나 마침내 요(堯)의 선위(禪位)를 받았고, 한(漢) 고조(高祖)는 패택(沛澤)에서 일어나 드디어 한(漢)의 제업(帝業)을 일으켰다. 짐(朕)도 하찮은 가문(家門)에서 일어나 잘못 추대되어,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면서 노신 초사(勞身焦思)한 지 19년에 삼한을 통일하였으며, 외람되이 대보(大寶 왕위를 말한다)에 있은 지 25년이 되어 몸이 이미 늙었다. 후사(後嗣)가 방종하여 강기(綱紀)를 어그러뜨릴까 크게 근심하여, 이에 훈요 십조를 지어 후사에게 전하니 아침저녁으로 펴보아 길이 귀감(龜鑑)으로 삼을지어다.”
하고는 내전(內殿)에 임어하여 대광(大匡) 박술희를 불러 친히 이것을 주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리 나라의 큰 왕업(王業)은 반드시 여러 부처가 보호하여 주는 힘을 입었다. 그러므로 선종(禪宗)ㆍ교종(敎宗)의 절을 창건(創建)하여 주지(住持)를 뽑아 보내어 각각 불업(佛業)을 다스리게 하라. 뒷세상의 간신들이 중들의 청탁에 따라 각각 절을 경영하려고 다투어 서로 빼앗는 것을 일체 금하라.
2. 모든 절은 도선(道詵)이 터잡아 정한 것 이외에 함부로 짓는다면 지덕(地德)을 손상시켜서 왕업(王業)이 길지 못할 것이다. 짐이 생각건대, 후세의 왕공(王公)ㆍ후비(后妃)들이 각각 원당(願堂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짓는 절)이라 하여 간혹 더 짓는다면 크게 근심되는 일이다. 신라 말기에 다투어 절을 지어 지덕을 손상시켜서 망하기에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3. 나라를 맏아들에게 전하는 것은 비록 상례(常禮)라 하나 단주(丹朱 요 임금의 아들)가 불초(不肖)하여, 요가 순에게 선위(禪位)한 것은 실로 공심(公心)인 것이다. 만약 원자(元子)가 불초하면 차자(次子)에게 전하여 주고, 차자가 또한 불초하면 그의 형제 중에서 여러 사람이 추대하는 자에게 주어 대통(大統)을 잇게 하라.
4. 우리 동방은 예부터 당나라 풍속을 흠모하여 문물(文物)과 예악(禮樂)을 모두 그들 제도에 따랐으나, 방토(方土)가 다르고 사람의 성품도 달라 굳이 같이할 것은 없다. 거란은 금수의 나라이므로 풍속도 같지 않고 언어도 다르니, 굳이 의관제도(衣冠制度)를 본받지 말라.
5. 서경(西京)은 우리 나라 지맥(地脈)의 근본이요, 큰 왕업이 이룩될 만대(萬代)의 땅이니, 사중월(四仲月 네 철의 중간이 되는 2월ㆍ5월ㆍ8월ㆍ11월을 말한다)에는 순행하여 백날이 지나도록 머물러 안녕을 이루도록 하라.
6. 연등(燃燈)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八關)은 천령(天靈) 및 명산(名山)ㆍ대천(大川)ㆍ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후세의 간신들이 가감(加減)할 것을 건의하여 아뢰면 금단(禁斷)해야 한다.
7. 임금이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들 마음을 얻으려면, 그 요체는 간하는 말을 따르고 참소하는 말을 멀리하고, 적절한 때를 맞추어 백성을 부리고, 부역(賦役)을 가볍게 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간하는 말을 따르면 성군(聖君)이 되고, 간신의 말을 믿지 않으면 참소하는 말이 저절로 그칠 것이고, 농사짓는 일의 어려움을 알면 저절로 민심을 얻어 나라는 풍부하고 백성은 편안해질 것이다. 또 옛사람이 말하기를 ‘미끼가 좋은 낚시 아래에는 반드시 걸리는 고기가 있고, 상을 중하게 주는 아래에는 반드시 양장(良將)이 있으며, 활을 당기는 곁에는 반드시 피하는 새가 있고, 인(仁)이 베풀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양민(良民)이 있다.’ 하였으니, 상과 벌이 중하면 음양(陰陽)이 순조롭게 된다.
8. 차현(車峴)지금의 공주(公州) 서북쪽 57리에 있다 이남과 공주강(公州江)의 바깥은 산지(山地)의 형세가 모두 배역(背逆)으로 뻗어 있어 인심도 또한 그러하다. 그곳 아래의 주군(州郡) 사람들에게는 벼슬을 주어 용사(用事)하지 말게 하며 국척(國戚 임금의 인척)과의 혼인을 금하라. 일찍이 관사(官寺)의 노비와 진(津)과 역(驛)의 잡척(雜尺)에 속했던 무리들은 혹 권세에 의탁하여 권력을 부리고 정사를 어지럽혀 재앙을 불러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양민일지라도 벼슬을 주어 일보게 하지 말라.
9 모든 관료의 녹은 나라의 크고 작음을 견주어 정제(定制)로 삼은 것이니, 증감(增減)해서는 안 된다. 공이 없는 사람 및 친척이나 사사로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헛되이 나라의 녹을 받게 하는 것 또한 일체 이를 경계해야 한다. 또 강하고 악한 나라와 이웃하고 있으니 편안하여도 위태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병졸을 보호하고 구휼하여 부역를 참작하여 면제해 주어야 하며, 매년 가을에는 용맹하고 정예한 군사를 훈련시켜 사열하라.
10. 나라를 가지고 집을 가지면 근심이 없을 때에 경계하여야 한다. 주공(周公)의 무일(無逸) 한 편을 그림을 그려 걸어 두고서 출입한 적에 보고 살펴야 한다.
십훈(十訓)의 끝에는 모두 ‘마음속에 이를 간직하라[中心藏之]’라는 네 글자로 끝맺었다.
■정미년 정종 2년(요(遼) 세종(世宗) 완(阮) 천록(天祿) 원년, 947)
◯가을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였다.
이보다 앞서 최언위(崔彦撝)의 아들 광윤(光胤)이 공사(貢士)로 진(晉)나라에 들어갔다가 거란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재주가 있어서 등용되었다. 거란이 우리 나라를 침범하려는 것을 알고 글로 알려 왔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군사 30만을 뽑게 하여 광군(光軍)이라 부르고 관사(官司)를 설치하여 거느리게 하였다.
■경술년 광종 대성왕(光宗大成王) 원년, 정종의 동모제(950)
◯여동생을 책립하여 왕후로 삼고, 성을 황보씨라 하였다.
외가의 성을 따른 것이다. 이가 대목왕후(大穆王后)이다. 고려의 후비(后妃)는 대체로 종성(宗姓)이 많았는데 혹은 말하기를,
“외척의 폐단을 막으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계축년 광종 4년(953)
◯동10월 황룡사(黃龍寺) 구층탑이 화재를 당하였다.
■병진년 광종 7년(956)
◯후주 사람 쌍기(雙冀)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았다.
쌍기는 후주에 벼슬하여 대리평사(大理評事)가 되었는데 이때 책봉사(冊封使)를 따라왔다가 병이 나서 머물러 있었다. 병이 낫게 되어 왕이 불러보니 뜻이 맞았다. 왕이 그의 재주를 사랑해서 후주에 표를 올려 요속(僚屬)으로 삼기를 청하여, 마침내 발탁하여서 원보(元甫)인 한림학사로 삼았다가 1년이 못 되어 문병(文柄)을 제수(除授)하니, 세상 여론이 불만스럽게 여겼다.
○노비 안험법(奴婢按驗法)을 정하였다.
옛날 기자(箕子)가 금법(禁法)을 베풀 적에 도둑질한 자는 그 집을 모두 노비로 삼았다. 우리 나라의 노비법(奴婢法)은 아마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세족(世族)의 집에서 대대로 전하여 부리는 자를 사노비(私奴婢)라 하고, 관아(官衙)와 주군(州郡)에서 부리는 자를 공노비(公奴婢)라고 하였다. 태조가 창업할 처음에는 장사(將士)가 본래 노비를 가진 자는 없었고 혹 종군(從軍)하여 포로를 얻거나 혹 재물로 샀었다. 태조는 일찍이 포로를 놓아 주어 양민(良民)으로 삼으려 하였지만, 공신들이 동요하는 걱정이 있을까 염려하여 편의대로 따르게 하였는데 세대가 지나면서 점점 번성하였다. 이에 서로 빼앗고 겸병(兼幷)하는 것이 날로 더해가는 것을 염려하여 관사(官司)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는데, 금방(禁防)이 매우 엄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노비를 안험(按驗)하고 그 시비를 가리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원망하면서도 감히 간하는 자가 없었다. 왕비 황보씨가 간절히 간하여도 들어 주지 않았었다. 이에 천예(賤隸)들이 뜻을 얻어서 주인을 배반하고 윗사람을 능멸하는 풍조가 크게 행해져서 본 주인을 모함하는 자들이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무오년 광종 9년(후주 세종 현덕 5, 요 목종 응력 8, 958)
◯하5월 처음으로 과거를 설치, 쌍기를 지공거(知貢擧)로 삼았다.
삼국 시대 이전에는 과거가 있지 아니하였다. 태조가 개국(開國)하여서는 먼저 학교를 세웠지만 과거를 베풀어 취사(取士)하는 법은 없었다. 이때에 쌍기가 건의하여 중국의 법대로 행할 것을 청하였다. 마침내 쌍기를 지공거로 삼아, 시(詩)ㆍ부(賦)ㆍ송(頌) 및 시무책(時務策)을 시험보여 진사를 뽑았다.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나와 방(榜)을 내어 갑과(甲科) 최섬(崔暹) 등에게 급제를 주었다. 이로부터 사람을 취하는 법은 오로지 과거로만 하였다. 쌍기가 여러 번 공거를 맡아서 후학(後學)을 장려하니, 문풍(文風)이 비로소 떨쳤다. 그 방법이 당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여 제술(製述)혹 진사과(進士科)라고도 한다 ㆍ명경(明經)의 두 과 및 의복(醫卜)ㆍ지리(地理)ㆍ율(律)ㆍ서(書)ㆍ산(算)ㆍ삼례(三禮)ㆍ삼전(三傳)ㆍ하론(何論 하안(何晏)이 주석을 낸 《논어집해(論語集解)》를 시험보이는 것) 등의 잡과(雜科)가 있었는데, 각각 그 학업을 시험하여 출신(出身)을 주었다.
진사과는 시ㆍ부ㆍ책을 시험보였고, 명경과는 《역(易)》ㆍ《서(書)》ㆍ《시(詩)》ㆍ《춘추(春秋)》 등을 시험보였는데 모두 첩괄(帖括)과 구두로 묻는 것[口問]을 썼다. 그 시관은 문신 한 사람으로 지공거를 삼았다. 혹은 매년 혹은 격년으로 행하여 일정한 기간이 없었고 취사(取士)도 정원이 없었다.
■경종 헌화왕(景宗獻和王) 원년(976)
◯ 처음으로 각 품(品)의 전시과(田柴科)를 정하였다.
처음 태조가 역분전(役分田)을 정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직관(職官 현재 벼슬자리에 있는 관원)ㆍ산관(散官 일정한 벼슬은 없고 관계(官階)만 있는 사람)의 각 품에 전시과를 정하였다. 관품(官品)의 높고 낮은 것은 따지지 않고 인품(人品)으로 정하였다. 간전(墾田)의 수(數)를 총괄하여 기름지고 메마른 것을 나누어 문무 백관으로부터 부병(府兵)ㆍ한인(閑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정한 전지를 주었으며, 또 전지에 따라 초채지(樵採地 땔나무를 채취하는 땅)를 주었는데 이것을 전시과라 하였다. 자삼(紫衫) 이상은 8품을 만들었으며, 문반(文班)의 경우, 단삼(丹衫) 만들고, 비삼(緋衫)고, 녹삼(綠衫) 었으며, 무반(武班) 이상은 5품을 만들고, 잡업(雜業)의 경우, 단삼 고, 비삼고, 녹삼 었는데, 많은 사람은 전시(田柴)가 각각 1백 10결(結)이었으며 차례로 줄어들어서 아주 적은 자는 전(田) 21결, 시(柴) 10결이었다. 이외에 잡리(雜吏)ㆍ제품(諸品) 중에서 이들 과(科)에 미치지 못하는 자에게는 모두 전 15결을 주었다. 죽으면 모두 나라에 바쳤는데 오직 부병(府兵)0이면 비로소 받았다가 60이 되면 도로 바치게 하였다. 자손이나 친척이 있으면 남자에게 밭을 대신 받게 하였고 없으면 감문위(監門衛) 다. 또 부병들이 70이 넘으면 구분전(口分田)을 주고 나머지 밭을 거두어들였으며, 후사가 없이 죽은 자의 처 및 싸움에서 죽은 자의 처에게도 구분전을 주었다.
■무인년 경종 3년(978)
◯하4월 상보(尙父) 김부(金傅)가 졸하였다.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김부는 몸이 우빈(虞賓 나라의 임금을 일컫는 말)이 되고 왕의 작위를 누렸다. 연이어 국척(國戚)과 혼인하여 사위와 외손이 대대로 군왕(君王)이 되었다. 부후(富厚)와 복록(福祿)이 당세에 견줄 이가 없었다. ※약 900년경에 출생한 것으로 추측되며<재위(927-935)> 나라를 구려에 바치고도 43년을 더 살았다.
■성종 문의왕(成宗文懿王) 원년(982)
◯하6월 경관(京官) 5품 이상에게 봉사(封事)를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게 하였다.
왕이 4조(朝)의 혼란(昏亂)한 뒤를 이어서 고쳐 교화하고자 하여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임금의 덕이 오직 신하에게 달려 있는 것은 고금이 마찬가지이다. 짐이 새로이 모든 기무(機務)를 거느리니 잘못된 정사가 있을까 염려된다. 경관 5품 이상은 각각 봉사를 올려 시정의 득실을 논하라.”
상주국(上柱國) 최승로(崔承老)가 다음과 같이 상서하였다. ...인하여 태조의 창업 규묘와 혜종ㆍ정종ㆍ광종ㆍ경종의 수성에 대한 득실을 다 말하여 잘잘못을 낱낱이 들어 남김없이 왕의 감계(鑑戒)를 권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드디어 조목을 나누어 시무 28조를 올렸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다.
(생략)
■계미년 성종 2년(983)
◯2월 처음으로 12목(牧)을 두었다.
최승로의 외관(外官) 두기를 청한 말을 좇은 것이다. 나라 안에, 양주(楊州)ㆍ광주(廣州)ㆍ충주(忠州)ㆍ청주(淸州)ㆍ공주(公州)ㆍ진주(晉州)ㆍ상주(尙州)ㆍ전주(全州)ㆍ나주(羅州)ㆍ승주(昇州)지금의 순천(順天) ㆍ해주(海州)ㆍ황주(黃州) 등의 12주를 만들고 모두 목(牧)을 두었다.
하6월 처음으로 주(州)ㆍ현(縣)ㆍ관(館)ㆍ역(驛)의 공해전(公廨田)을 정하였다.
주ㆍ현ㆍ관ㆍ역에 1천 정(丁) 이상으로부터 20정 이하에 이르기까지 공수전(公須田)ㆍ지전(紙田)ㆍ장전(長田)을 각각 차등 있게 두었다. 향(鄕)ㆍ부곡(部曲)에도 이와 같게 하였다. 역은 모두 22도(道)에 속역(屬驛)은 2백 5개였는데, 대로(大路)ㆍ중로ㆍ소로로 나누어 다소의 차등을 두었다.
동10월 처음으로 주점(酒店)을 두었다.
주점 여섯 곳을 두었는데, 성례(成禮)ㆍ낙빈(樂賓)ㆍ연령(延齡)ㆍ영액(靈液)ㆍ옥장(玉漿)ㆍ희빈(喜賓)이라 하였다.
■병술년 성종 5년(송 태종 옹희 3, 요 성종 통화 4, 986)
◯추7월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처음에 태조가 흑창(黑倉)을 설치하여 궁민(窮民)에게 빌려 주는 것을 일정한 법식(法式)으로 삼게 하였는데 왕이, 인구가 점점 많아지는데도 비축된 곡식이 많지 않자, 쌀 1만 석을 더해 주고 이름을 의창(義倉)이라 고쳤다. 또 여러 주와 부에도 각각 의창을 설치하고자 하여 유사(有司)에게 인호(人戶)의 많고 적음과 창고 곡식의 숫자를 점검하여 아뢰게 하였다.
동사강목 제6하
■정해년 성종 6년(987)
◯추7월 노비환천법(奴婢還賤法)을 제정하였다.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방량노비(放良奴婢 양인(良人)이 되게 한 노비)는 연대가 멀어지면 필시 그 본주(本主)를 경멸할 것이다. 만일 본주를 모욕하거나 본주의 친족과 맞서려드는 자가 있으면 환천(還賤)하여 부리라.”
■임진년 성종 11년(송 태종 순화 3, 거란 성종 통화 10, 992)
◯춘정월 경외(京外) 인사들이 대궐에 들어와서 자신을 천거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은(殷) 고종(高宗)은 죄수인 부열(傅說)을 징용하고, 주(周) 무왕(武王)은 어부인 강태공(姜太公)을 등용하였다. 그러므로 사직을 보호하고 국가를 잘 다스릴 수 있었다. 나는 안으로는 상서(庠序)를 세우고 밖으로 학교(學校)를 설립하였으나 오히려 훌륭한 인사를 만나지 못했으니 현능(賢能)한 사람을 가로막는 자가 어찌 없다고 보겠는가? 무릇 문재(文才)와 무략(武略)이 있는 자는 대궐에 들어와서 자신을 천거하는 것을 허락한다.”
또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5품 이상인 경관(京官)은 각기 한 사람씩을 천거하되, 그 덕행과 재능을 이름 밑에 갖추어 기록하라.”
○ 서울로 운수하는 조선(漕船)의 뱃삯을 정하였다.
국초에, 남도(南道)의 주군(州郡)에 12창(倉)을 설치하였는데, 즉 충주(忠州) 덕흥창(德興倉)덕흥은 지금 가흥(可興)이라 일컫는데 옛날에는 금천(金遷) 서애(西崖)에 있었으니, 즉 충주 서쪽 10리 지점에 있었는데 지금은 가흥역(嘉興驛) 동쪽 2리 지점으로 옮겼으니, 즉 충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었다 ㆍ원주(原州) 흥원창(興元倉)흥원은 섬강(蟾江) 북안(北岸)에 있었으니, 즉 원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었다 ㆍ아주(牙州)지금의 아산(牙山)이다.하양창(河陽倉)하양은 아주 타이포(打伊浦)에 있었는데, 뒤에 편섭포(便涉浦)라고 일컬었다.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본조(本朝)에서 아산현 서쪽 10리 지점 공세관(貢稅串)에 공세관창(貢稅串倉)을 설치하였다 ㆍ부성(富城)지금 서산(瑞山)이다.영풍창(永豊倉)영풍은 부성에 있었는데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ㆍ보안(保安)지금의 부안(扶安) 폐지(廢址)인데 현재의 부안현(扶安縣) 남쪽 30리 지점에 있었다안흥창(安興倉)안흥은 보안 제안포(濟安浦) 전에는 무포(無浦)라고 일컬었으나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ㆍ임피(臨陂) 진성창(鎭城倉)진성은 임피 조종포(朝宗浦), 전에는 진포(鎭浦)라고도 일컬은 곳에 있었으니 즉 임피현 북쪽 17리 지점에 있었다 ㆍ나주(羅州) 해릉창(海陵倉)해릉은 나주 통진포(通津浦)에 있었는데 전에는 매을포(買乙浦)라고 일컬었으나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본조에서 나주 남쪽 10리 지점에 영산창(榮山倉)을 두었다가 뒤에 영광(靈光) 법성창(法聖倉)으로 옮기고 그것을 없애 버렸다 ㆍ영광(靈光) 부용창(芙蓉倉)부용은 영광군 부용포(芙蓉浦)에 있었고 전에는 아무포(阿無浦)라고 일컬었으나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본조에서 영광군 북쪽 30리 지점 법성포(法聖浦)에 법성창(法聖倉)을 설치하였다 ㆍ영암(靈巖) 장흥창(長興倉)장흥은 영암 조동포(潮東浦)에 있었고 전에는 신포(薪浦)라고 일컬었으나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ㆍ승주(昇州)지금의 순천(順天)이다해룡창(海龍倉)해룡은 승평(昇平) 조양포(潮陽浦)에 있었고 전에는 사비포(沙飛浦)라고 일컬었으나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ㆍ사주(泗州)지금의 사천(泗川)이다통양창(通陽倉)통양은 사주 통조포(通潮浦)에 있었고 전에는 말조포(末潮浦)라고 일컬었다. 지금의 통양포(通洋浦)는 사천현 20리 지점에 있고, 통양창(通洋倉)의 옛터는 사천현 남쪽 17리 지점에 있다 ㆍ합포(合浦)지금의 창원(昌原)이다석두창(石頭倉)석두는 합포현 나포(螺浦)에 있었고 전에는 골포(骨浦)라고 일컬었으나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또 서해도(西海道) 장연현(長淵縣)에 안란창(安瀾倉)안란은 장연(長淵)에 있었는데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을 설치하고 창(倉)에는 판관(判官)을 두어, 주군의 조세를 각각 가까운 거리에 따라 모든 창고로 운반했다가, 이듬해 2월에 배로 운반하되, 가까운 지방은 넉 달 내에, 먼 지방은 다섯 달 내에 경창(京倉)으로 모두 운반하게 하였으며, 이때에 와서 값을 정하였는데, 먼 거리는 다섯 섬 운반값을 한 섬으로, 가까운 거리는 스무 섬 운반값을 한 섬으로 각각 차등을 두었다.
12월 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전장(田庄)을 지급하였다.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배움에 있어서 숙당(塾黨)이 없으면 재주를 잘 단련시킬 수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좋은 땅을 찾아서 학사(學舍)를 많이 영건하고 운영에 맞게 전장을 지급하여 참다운 인재가 배출되게 하라. 제유들은 나의 뜻을 알지어다.”
■계사년 성종 12년(송 태종 순화 4, 거란 성종 통화 11, 993)
◯춘2월 양경(兩京)ㆍ12목(牧)에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였다.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한서》 식화지(食貨志)에, ‘천승(千乘)의 나라는 반드시 천금 값을 비축하여 풍년과 흉년에 조적(糶糴 환곡(還糓))을 시행하되, 백성이 풍족할 때에는 거두어들이고 백성이 부족할 때에는 나누어 주었다.’ 하였다. 천금을 시가(時價)에 준하면 금 1냥 값은 베가 40필이니 천금은,
【안】 16냥 1근이 1금이다.
베가 64만 필이요, 절미(折米)가 12만 8천 석이다. 절반으로 계산하면 쌀이 6만 4천 석이니, 5천 석은 서울 경시서(京市署)에 맡겨 조적할 때는 대부시(大府寺)와 사헌대(司憲臺)가 이를 같이 관장하게 하며, 나머지 5만 9천 석은 서경과 주군의 창고 열 다섯 곳에 나누어 주되, 서경은 분사헌대(分司憲臺)에 맡기고, 주군은 계수관(界首官 서울에서 각도에 가는 연변 고을이나 도계(道界)의 수령)에게 맡겨서 이를 관장, 빈약자를 구제하게 하라.”
동10월 거란의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蕭遜寧)이 대거 침입하자,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 및 시랑(侍郞) 서희(徐熙)ㆍ최량(崔亮)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막게 하였다.
이해 5월에 서북계(西北界) 여진(女眞)이 ‘거란이 군사를 일으켜 침입할 것을 꾀한다.’고 보고해 왔으나, 조정에서는 우리를 속이는 말이라 생각하고 그에 대비하지 않았다가, 8월에 ‘거란 군사가 이른다.’고 다시 보고해 오자, 그때야 비로소 사태가 위급함을 알고 모든 도(道)의 군마제정사(軍馬齊正使)를 나누어 보냈고, 이때에 와서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上軍使)로,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를 중군사(中軍使)로, 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을 하군사(下軍使)로 삼아 북계(北界)에 주둔하여 그를 막게 하였다.
윤10월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안북부(安北府)에 이르니, 거란이 봉산(蓬山)을 격파하고 선봉(先鋒) 윤서안(尹庶顔)을 잡아갔다. 그래서 왕은 물러나 서경에 진을 쳤다.
○ 거란의 진영에 사신을 보내 화친하기를 청하였다.
서희가 군사를 이끌고 봉산을 구원하려 하니, 소손녕이 성언(聲言)하기를,
“대조(大朝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했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강토의 경계를 침탈하므로 이처럼 정토(征討)한다.”
하고, 또 글을 보내어 속히 항복하기를 재촉하였다. 서희가 그 글을 보고 돌아와 화친할 기미가 보인다고 아뢰자, 예빈소경(禮賓少卿) 이몽전(李蒙戩)을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였다.
소손녕이 또 글을 보내기를,
“80만 대군이 이르렀다. 만약 강(江 대동강을 말한다)에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진멸(殄滅)시킬 것이니, 군신(君臣)이 진영 앞에 와서 빨리 항복하라.”
하였다. 이몽전이 침입하게 된 이유를 묻자, 소손녕은,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으므로 우리가 하늘을 대신하여 천벌(天罰)을 시행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몽전이 돌아오자, 왕은 군신(群臣)을 모아 이 일을 의논하였더니, 어떤 이는 말하기를,
“어가(御駕)가 서울로 돌아가서 중신(重臣)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하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서 그들에게 주고 황주(黃州)에서부터 절령(岊嶺)‘岊’은 음이 절이니, 절령은 지금 자비령(慈悲嶺)이라 일컬으며, 서흥부(瑞興府) 서쪽 60리 지점에 있다 까지를 국경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왕은 땅을 떼어 주자는 의논을 따르려 하여, 서경의 창고를 열어 쌀을 백성들 마음대로 가져가게 하고, 남은 것이 아직도 많으므로 적군에게 이용될 것을 염려하여 대동강에 흩어버리게 하였다. 그러자 서희가 아뢰기를,
“먹을 것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전쟁에 이기고 지는 것은 군사의 강하고 약할 데 있는 것이 아니고 틈을 잘 엿보아 움직이는 데 있을 뿐입니다. 어찌 갑자기 쌀을 버리게 하십니까? 더구나 먹을 것은 백성의 생명이오니, 차라리 적군에게 이용되게 할지언정 헛되이 강에 버리는 것은 하늘의 뜻에 맞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이를 중지하였다. 서희는 또 아뢰기를,
“거란의 동경(東京)에서 우리 나라의 안북부까지는 모두 생여진(生女眞)에게 점령되었던 것인데, 광종(光宗)이 이를 빼앗아 가주(嘉州)ㆍ송성(松城) 등 성을 쌓았으니, 지금 거란 군사가 온 것은 그 의도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고구려의 옛땅을 빼앗는다.’고 성언하는 것은 실상은 우리를 공갈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군사의 강성함을 보고 갑자기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그들에게 주는 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더구나 삼각산 이북의 땅도 역시 고구려의 옛땅이온데, 저들의 무한정한 욕심으로 한없이 요구한다면 그대로 다 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땅을 떼어 적군에게 주는 것은 진실로 만세의 수치가 되니 원하옵건대, 어가가 도성으로 돌아가서 신등(臣等)으로 하여금 한 번 싸움을 해보게 하신 뒤에 이를 의논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전(前) 민관어사(民官御事) 이지백(李知白)이 아뢰기를,
“성조(聖祖)께서 나라를 세워 자손에게 물려 주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는데 한 명의 충신도 없어서 갑자기 토지를 가벼이 적국에게 주려고 합니다. 옛사람의 시에,
천리 강산을 유자보다 가볍게 여기니 / 千里山河輕孺子
양조의 관검이 초주를 원망한다 / 兩朝冦劒恨譙周
하였습니다. 어찌 가벼이 토지를 떼어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 거란의 군사가 안융진(安戎鎭)에 이르자,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가 그들을 격파하였다.
당시 조정 의논이 오래도록 결정을 보지 못했었다. 소손녕은 이몽전이 돌아간 후에 오래도록 회보가 없으므로 드디어 안융진 옛터는 지금의 안주(安州) 서쪽 60리 지점에 있으며, 융(戎) 자는 어떤 본에는 인(仁) 자로 되어 있다 을 공격하였는데,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郞將) 유방(庾方)이 힘껏 싸워 격파하니, 소손녕은 감히 다시는 전진하지 못하고 다만 사람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재촉할 뿐이었다.
○ 서희가 거란의 진영에 가자, 거란은 철군하여 북으로 돌아갔다.
왕이 화통사(和通使)로 합문사인(閤門舍人) 장영(張瑩)을 보냈는데 그가 거란의 진영에 가자, 소손녕은 말하기를,
“마땅히 다시 대신을 군문(軍門) 앞에 보내어 면대(面對)하게 하라.”
하였다. 장영이 돌아오니,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묻기를,
“누가 능히 거란의 진영에 가서 말로 적군을 물리치고 만세의 공을 세우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 중에는 응답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서희가 가기를 청하였다. 왕은 강가에 나가 그를 전송하면서 손을 잡고 위로해 보냈다. 서희는 국서(國書)를 받들고 소손녕의 진영에 가서 통역을 시켜 상견례(相見禮)를 물어보게 하였더니, 소손녕이 말하기를,
“나는 대조(大朝)의 귀인(貴人)이니 마땅히 뜰에서 절을 하라.”
하므로, 서희는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에게 대해서는 뜰 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이 예의이지만, 양국 대신이 서로 만나 보는 자리에 어찌 이처럼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견례 문제로 두세 차례 오갔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서희는 화를 내고 돌아와서는 관소에 누워 일어나지 않으니, 소손녕은 마음속으로 보통 아니라 여기고는 곧 당(堂)에 올라와서 상견례를 행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래서 서희는 영문(營門)에 당도하여 말에서 내려 들어가 소손녕과 뜰에 마주서서 읍(揖)하고 당에 올라가서 상견례를 행한 다음 동서에 마주 대하고 앉았다. 소손녕은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 나라가 이를 침식(侵蝕)하고 있으며,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니, 이 때문에 와서 치는 것이다. 지금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朝聘)을 한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하자, 서희는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는 곧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그런 까닭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도읍을 평양에 정하였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경내에 있는데, 어찌 우리더러 침식한다고 하는가? 더구나 압록강 안팎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에 점거하여 교활하고 변덕이 많아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마치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으니, 조빙의 통하지 못함은 실로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의 옛땅을 돌려 주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이 말을 귀국의 황제에게 알린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언사와 안색이 강개(慷慨)하였다. 소손녕이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자기 임금에게 사실대로 아뢰니, 거란주(契丹主)는 말하기를,
“고려가 이미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니, 군사를 철수하라.”
하였다. 소손녕이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려 하자, 서희는 말하기를,
“본국이 비록 도리를 잃은 일은 없었지만, 상국의 군사를 이처럼 멀리 오게 하여 상하가 불안에 떨면서 병기를 쥐고 여러 날을 한데서 지내게 하였는데, 어찌 차마 연락(宴樂)을 즐길 수 있겠는가?”
하니, 소손녕이 말하기를,
“양국 대신이 서로 만나는 자리에 어찌 연락(宴樂)의 예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 굳이 허락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연락을 마냥 즐기고 헤어졌다. 서희가 그의 진영에 머무른 지 7일 만에 돌아오는데, 소손녕은 타마(駝馬)와 비단을 매우 많이 주었다. 왕은 서희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강가에 나가서 맞이하고, 드디어 군사를 철수하였다.
최씨(崔氏)는 이렇게 적었다.
“소손녕이 침입하여 봉산을 격파하고 선봉을 사로잡아 크게 위력을 떨치니, 성종은 급히 도성으로 돌아가 국토를 떼어 주자는 의논을 따르려 하였는데, 서희가 박론(駁論)을 펴서 그들과 한 번 싸우기를 원하였으니, 곧 구준(冦準)이 주장한 친정책(親征策)이요, 사신갔을 때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강한 오랑캐가 두려워 떨었으며 마침내 화친을 하게 되었으니, 또한 어찌 부필(富弼)이 주장한 빙로책(聘虜策)만 못하겠는가? 그 당시 만약 서희가 없었더라면 절령 이북을 능히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
■갑오년 성종 13년(송 태종 순화 5, 거란 성종 통화 12, 994)
◯춘2월 비로소 거란의 연호를 시행하였다.
○ 거란에 사신을 보냈다.
왕이 시중 박양유를 예폐사(禮幣使)로 삼아, 거란에 가서 조근(朝覲)하고 정삭(正朔) 시행함을 알리고 포로 돌려 주기를 청하게 하자, 서희는 아뢰기를,
“신(臣)이 소손녕과, 여진을 몰아내고 옛땅을 수복한 뒤에야 조근(朝覲)의 길이 통할 수 있다고 약속하였는데, 이제 겨우 압록강 안을 수복하였으니 압록강 밖을 수복한 뒤에 조근해도 늦지 않습니다.”
하니, 왕은 말하기를,
“오래도록 조근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염려된다.”
하고, 드디어 보냈다.
6월 송(宋)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청하니, 송은 허락하지 않았다.
왕이 송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청하여 거란에게 보복하려 하였는데, 송은 북쪽 변방이 겨우 안정되었으니 경솔하게 움직일 수 없다고 하여 우대해서 돌려보냈다. 이때부터 송과 국교를 끊었다.
○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빙문하였다.
거란은, 본국이 새로 복속한 나라라고 생각하여 숭록경(崇祿卿) 소술관(蕭述管)과 어사대부(御史大夫) 이완(李琬)에게 조서(詔書)를 주어 보내와 위무(慰撫)하고 유시(諭示)하였다.
왕은 다시 사신을 보내어 기악(妓樂)을 바쳤는데 거란은 이를 물리쳤다. 이때부더 국교가 계속되었다.
■을미년 성종 14년(송 태종 지도(至道) 원년, 거란 성종 통화 13, 995)
◯춘2월 문신(文臣)의 월과법(月課法)을 정하였다.
왕은, 문(文)을 업으로 삼는 선비가 겨우 과명(科名)만 얻으면 공무에 끌려서 그 본업을 폐지한다고 생각하여, 나이 50 이하로서 아직 지제고(知製誥 임금의 제고(制誥) 등을 짓는 직책)를 지내지 않은 자는 한림원(翰林院)에서 출제하여 매월 시(詩) 3편과 부(賦) 1편씩을 지어 바치게 하고, 외임에 있는 문관(文官)은 스스로 시 30편과 부 1편을 지어서 연말에 계리(計吏 지방의 회계를 중앙에 보고하는 관리) 편에 올리면, 한림원은 그 우열을 판정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무술년 목종 선양왕(穆宗宣讓王) 원년 998)
◯동12월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였다.
문ㆍ무(文武) 양반(兩班) 및 군인(軍人)의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되, 그 관직 계급을 가지고 1품에서 9품까지 18과(科)로 나누어 제1과는 전(田) 1백 결(結), 시(柴) 70결을 주고, 과(科)가 낮아질수록 결수를 점점 감하여 18과에 이르러서는 전 20결을 주는 것으로 일정한 규정을 삼았다.
■임인년 목종 5년(송 진종 함평 5, 거란 성종 통화 20, 1002)
◯추7월 백성들이 교역(交易)할 때에 돈 대신 토산물을 마음대로 사용하게 하였다.
당시 전폐(錢幣)만을 사용하고 추포(麁布)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백성들은 매우 불편을 느꼈다. 그러자 시중 한언공(韓彦恭)이 상소하기를,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물건을 이롭게 하려면 꾸준히 옛날 제도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선조(先朝 성종을 가리킴)를 이어 돈을 사용하고 추포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여 시속을 놀라게 하시니, 국가의 이익을 보지 못하고 한갓 백성의 원성만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니, 이에 왕은,
“다점(茶店)ㆍ주점(酒店)ㆍ음식점 등 여러 점사들이 그 전대로 돈을 사용하고, 백성들이 사사로 교역할 때에는 토산물을 마음대로 사용하게 하라.”
하였다.
■계묘년 목종 6년(송 진종 함평 6, 거란 성종 통화 21, 1003)
◯김치양(金致陽)을 우복야(右僕射)로 삼아 삼사(三司)의 일을 겸하게 하였다. 김치양은 몇 해 안 가서 임금의 총애를 받음이 비할 데 없더니, 갑자기 우복야에 이르렀다. 백관의 관직을 주고 빼앗음이 모두 그의 손에 달렸으며, 친당(親黨)이 조정에 포열(布列)하여 세력이 조야를 뒤흔들었다. 집을 지었는데 3백여 칸이나 되고, 누각ㆍ정자ㆍ동산ㆍ연못이 극도로 화려하였다. 주야로 태후와 유희(遊戱)하여 아무런 두려움과 꺼리는 바가 없었다. 동주(洞州)지금의 서흥(瑞興) 에 사(祠)를 세우고 이름을 성수사(星宿寺)라 하고, 또 궁성의 서북 모퉁이에 시왕사(十王寺)를 세웠는데, 그 도상(圖像)은 기괴하여 이루 형용하기 어려웠다. 몰래 딴마음을 품고, 음조(陰助)를 구하기 위하여 모든 기명(器皿)에도 그 의미를 새겼다. 그 종명(鐘銘)에,
동국에 태어날 때에는 / 當生東國之時
태후와 함께 좋은 종자 만들고 / 同修善種
후세 서방에 가는 날에는 / 後徃西方之日
함께 보리를 깨달으리 / 共證菩提
하였다. 왕은 항시 그를 내쫓고자 하였으나 모친의 마음을 상울까 염려하여 감히 내쫓지 못하였다.
■정미년 목종 10년(송 진종 경덕 4, 거란 성종 통화 25, 1007)
○ 탐라의 바다 가운데에서 산이 솟았다.
산이 처음 솟을 때에 구름과 안개가 어두컴컴하고 땅이 움직여 우렛소리가 나는 듯하다가, 7주야 만에 비로소 구름과 안개가 걷혔는데, 산의 높이는 1백여 장이나 되고 주위는 40리나 되며, 풀과 나무는 없고 연기가 산 위에 덮여져 있었으며, 바라보면 마치 석류황(石硫黃)과 같았다. 태학 박사 전공지(田拱之)를 보냈더니, 그가 그 형상을 그려서 바쳤는데, 이것을 서산(瑞山)이라 하였다.
유씨(兪氏)는 이렇게 적었다.
“옛날 당(唐) 무후(武后) 때 평지에서 산이 솟으매, 이것을 경산(慶山)이라 하였으나, 그 당시 글을 올려서, 음(陰)이 왕성한 소치라고 말한 이가 있었으니, 이 말이 참으로 지당한 말이었다. 목종 때 천추 태후가 위에서 음탕하게 놀아서 큰 화란이 일어나려 하던 차에, 산이 솟는 이변이 측천 무후(則天武后) 시대의 그것과 똑같았으니, 하늘의 경고함이 매우 간절하였다. 그런데 상하 모두가 마음이 태평하였으니, 나라가 어지럽지 않으려 한들 어지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유년 목종 12년(1009) 강조의 변의 전말
◯김치양이 난을 일으키려고 꾀하자, 왕은 비밀히 급사중(給事中) 채충순(蔡忠順) 등을 불러서 대량군(大良君) 순(詢)을 신혈사(神穴寺)에서 맞이하였다.
왕이 여러 날 동안 병이 나서 항상 내전(內殿)에 거처하면서 여러 신하 만나는 것을 싫어하니, 유행간 등이 중간에서 권력을 부렸다. 재신(宰臣)들이 두려워하여 침전(寢殿)에 들어가서 문병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날 왕이 채충순을 내전으로 불러들여 측근자들을 물리치고 이르기를,
“과인이 병이 점차 회복되어 가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밖에서 왕위를 엿보는 자가 있다고 하니, 경은 이를 아는가?”
하였다. 채충순은 대답하기를,
“신도 들었사오나 그 실상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왕이 베개 위의 봉서(封書)를 집어 충순에게 주니, 곧 지은대사(知銀臺事) 유충정(劉忠正)이 올린 것이었다. 그 봉서에 이르기를,
“우복야 김치양이 왕위를 엿보아, 사람을 보내 뇌물을 주어 심복들을 깊이 배치하고, 따라서 그들에게 안에서 원조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또 봉서 하나를 가져다 보여주니, 곧 대량군 순이 올린 것이었다. 그 봉서에 이르기를,
“간악한 무리들이 사람을 보내어 포위 협박하고, 겸하여 독주(毒酒)를 보냅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신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옵소서.”
하였다. 충순이 보고나서 아뢰기를,
“사세가 위급하니 일찍 손을 써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짐의 병이 점점 위독하여 조석간에 죽게 되었다. 태조의 손자로는 오직 대량원군(大良院君)이 있을 뿐이다. 경(卿)과 최항(崔沆)은 평소부터 충의(忠義)를 품고 있으니, 마땅히 마음을 다해 구제하여 사직이 다른 성(姓)에게 옮겨가지 않게 하라.”
하였다. 충순이 밖에 나와서 최항에게 말하니, 최항이 말하기를,
“성상의 뜻이 이와 같으니 사직의 복이다.”
하였다. 최항 등은 드디어 몰래 충정과 함께 순(詢)을 맞이하기로 결의하였다. 충순 등이, 선휘판관(宣徽判官) 황보유의(皇甫兪義)가 뜻을 사직 보호하는 데 둔 자라고 천거하여, 드디어 유의로 하여금 순을 맞이하게 하였다. 또 군교(軍校)가 많으면 행차가 반드시 지체하게 될 것이며, 간악한 무리들이 먼저 손을 쓸까 염려하여, 10여 인만 보내어 지름길로 가서 맞아오게 하자고 청하니,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이르기를,
“빨리 보내야지, 늦추어서는 안 된다. 내가 친히 왕위를 물려 주려 한다. 만약 내가 병이 나으면 성종께서 짐을 책봉하였던 고사(故事)와 같이 하리라. 짐이 아들이 없는데도 계사를 정하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사람이 요동하게 되니, 이것은 나의 과실이다. 종묘 사직을 보전하는 큰 계책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경등은 각기 마음을 다하라.”
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충순도 역시 울었다. 왕이 충순에게 명하여 순(詢)에게 줄 서신을 초하게 하고 친히 먹을 갈면서 이르기를,
“마음이 매우 바쁘기 때문에 수고로운 줄을 모르겠다.”
하였다. 그 서신에 이르기를,
“자고로 국가의 대사는 미리 명분을 정하면 인심이 이에 안정되는 것이다. 이제 내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간사한 무리들이 왕위를 엿보게 되니, 이는 명분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卿)은 태조의 적손(嫡孫)이다. 과인이 죽기 전에 면대하여 종사의 일을 부탁하게 되면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이요, 만약 더 살게 되면 경을 동궁(東宮)에 있게 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하겠다.”
하였다. 이때 유행간이 순을 임금으로 세우고자 하지 않으므로, 왕이 일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행간에게 이 일을 알리지 말도록 충순을 경계하고, 서신을 유의에게 주어 신혈사에 가서 맞이하게 하였다.
○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를 불러 서울에 들어와서 호위하게 하였더니, 강조는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침범하였다.
왕은 전중감(殿中監) 이주정(李周禎)이 김치양에게 붙은 것을 알고 임시로 서북면 순검부사(西北面巡檢副使)를 제수하여 그 날로 떠나게 하고, 강조를 불러 서울에 들어와서 호위하게 하였다. 강조가 명을 듣고 즉시 출발하여 동주(洞州)의 용천역(龍泉驛)지금의 서흥현(瑞興縣) 서남쪽 20여 리 지점에 있었다 에 이르렀다. 세인(細人) 위종정(魏從政)ㆍ최창(崔昌)이란 자는 일찍이 무슨 일로 죄를 지고 조정을 원망하여 항상 난을 꾸미려고 하였는데, 이들이 결국 강조를 속여서 말하기를,
“주상(主上)께서 병이 위독하매, 태후가 김치양과 함께 사직을 빼앗으려 모의하고 있는데,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밖에 있는 공을 꺼려서 왕명을 위조하여 부르게 된 것이니, 족하(足下)는 속히 본도(本道)로 돌아가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보호하고 자신도 보전하시오. 시기를 잃어서는 안되오.”
하였다. 강조는, 왕은 이미 훙하였고 조정은 모두 김치양에게 속아서 그릇된 것이라 생각하고 곧 본영(本營)으로 돌아갔다. 태후는 강조가 오는 것을 꺼려하여 내신(內臣)을 보내어 절령(岊嶺)을 지켜 행인의 왕래를 막게 하였다. 강조는 부사(副使)인 이부 시랑 이현운(李鉉雲) 등과 함께 갑졸(甲卒) 5천 명을 거느리고 평주(平州)에 이르러 비로소 왕이 훙하지 않은 것을 알고는 한참 동안 기운을 잃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중지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드디어 현재의 왕을 폐하고 다른 왕을 세우기로 결정하여, 김치양과 유행간을 주참하고 대량군을 맞아 세울 것으로 명분을 내세웠다. 그리하여 왕이 이미 순을 맞이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어 순을 맞이하게 하였다.
2월 대량군 순이 신혈사로부터 이르렀다. 강조가 순을 세워 왕으로 삼고, 목종을 폐하여 양국공(讓國公)으로 삼았다가 얼마 후에 그를 시해하였고, 태후는 황주(黃州)로 도망하였다.
2일(무자)에 강조의 군사가 서울에 들어왔다. 강조는,
“왕은 용흥(龍興)절 이름인데 귀법사(歸法寺) 곁에 있다 의 귀법사(歸法寺)에 나가 계십시오. 간악한 무리들을 소탕한 뒤에 맞아들이겠습니다.”
하고 주청하였다. 3일(기축)에 햇빛이 마치 붉은 장막을 쳐놓은 것과 같았다. 이현운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추문(迎秋門)에 들어가서 크게 떠드니, 왕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유행간을 잡아 강조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이때 성중(省中)의 직숙관(直宿官)인 중랑장(中郞將) 하공신(河拱辰)과 탁사정(卓思政)은 모두 강조에게 달려갔다. 강조가 대초문(大初門)에 이르러 호상(胡床)에 걸터앉으니, 최항이 성(省 중추원을 가리킨다)에서 나오므로 강조가 일어나서 읍(揖)하였다. 최항이 말하기를,
“옛날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던가?”
하니, 강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군사들이 함부로 들어가니, 왕이 화를 면하지 못할 줄 알고 태후와 함께 목놓아 울었다. 그리고 중인과 내시 및 채충순ㆍ유충정 등을 거느리고 나가서 법왕사(法王寺) 송악(松岳) 아래에 있다 에 거처하였다. 강조가 건덕전(乾德殿)의 어탑(御榻) 아래에 앉으니, 군사들이 만세를 불렀다. 강조가 놀라 일어나서 꿇어앉으며 말하기를,
“사군(嗣君)이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이것이 무슨 소리냐?”
하였다. 조금 후에 황보유의 등이 순(詢)을 모시고 이르러 연총전(延寵殿)에서 즉위하니, 이가 바로 현종(顯宗)이다.
강조가 왕을 폐하여 양국공으로 삼고, 통사사인(通事舍人) 부암(傅巖) 등을 시켜 왕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최항 등 몇 사람이 시종(侍從)했을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군사를 보내어 김치양ㆍ유행간 등 7인을 주참하고, 그 무리와 태후의 친속 30여 명을 섬으로 귀양보냈으며, 왕과 태후를 충주(忠州)로 내쳤다. 왕이 최항을 시켜 강조에게 말[馬]을 청하니, 1필을 보내므로 또 민가에서 말 1 필을 가져와 왕과 태후가 이것을 타고 선인문(宣仁門)으로 나와서 귀법사(歸法寺)에 이르러 어의(御衣)를 벗어 음식을 바꾸어서 태후에게 올렸다. 강조가 최항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하니, 왕이 최항에게 이르기를,
“고향에 돌아가서 늙기를 원할 뿐이니, 경이 새 임금에게 이 사실을 아뢰고 또 새 임금을 잘 보좌하라.”
하였다.
왕이 태후를 위하여 손수 음식을 마련하기도 하고 손수 말을 몰기도 하면서 적성현(積城縣)에 이르렀는데, 강조는 상약직장(尙藥直長) 김광보(金光甫)를 보내어 독약을 올렸다. 왕이 독약 마시기를 싫어하니, 김광보가 수종한 중금(中禁) 안패(安覇)에게 말하기를,
“강조가 ‘네가 독약을 능히 올리지 못하거든 중금의 군사를 시켜 대사(大事 임금을 죽이는 일)를 행하고 자살하였다고 보고하라.’고 하였으니, 그렇게 하지 못하면 나와 너희들은 모두 멸족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밤에 안패 등이 왕을 시해하고 왕이 자결하였다고 아뢰고는 문짝을 구해 관(棺)을 만들어 임시로 관(館)에 매장하였으니, 왕은 재위 12년에 수는 30이었다. 강조는 사람을 시켜 그 고을의 창고 쌀로 밥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태후는 황주로 도망하였다.
왕은 천성이 침착하고 엄숙하여 인군의 도량이 있었으며,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고 술을 즐기고 사냥하기를 좋아하고 정사하는 데는 정신을 쓰지 않았으며, 폐행인(嬖倖人)의 말만을 믿다가 결국 화를 당하였다. 한 달 후에 왕을 적성현 남쪽에 화장하고 능은 공릉(恭陵), 시호는 선령(宣靈), 묘호는 민종(愍宗)이라 하였다. 신민(臣民)으로 통분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새 임금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거란이 죄를 문책할 때에야 비로소 알았다.
※김치양과 사통하며 왕권을 무너뜨리는 천추태후를 오직 효성으로 모시고 지키는 목종의 무능함이 자초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강조가 김치양 일당을 제거하고 왕과 태후를 충주로 내치고 있는데 이때에도 김치양과 함게 모반사건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태후를 극진히 모시고 있다. 강조가 김치양 일당과 함께 태후를 처형시킨 뒤 왕의 죄(국정을 문란시킨 태후와 김치양을 보호한 죄)를 물어 귀양보내는 것이 바른 처사라 할 수 있다.
■경술년 현종 원문왕(顯宗元文王) 1010)
○ 거란주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이르러서 강조를 잡아 주참하였다.
16일(신묘)에 보병(步兵)과 기형(騎兵) 40만 명을 거느리고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 칭하며 압록강을 건너와서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니, 도순검사(都巡檢使) 양규(楊規), 진사(鎭使) 정성(鄭成), 부사(副使) 이수화(李守和), 판관(判官) 장호(張顥) 등이 성을 굳게 지켰다.
거란주가 우리 나라 사람을 붙잡아 각기 비단옷을 주고 화살에 매단 봉서(封書)를 준 다음 군사 1백여 명으로 그들을 성 아래에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게 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짐(朕)은 전왕(前王) 송(誦)이 우리 조정을 섬겨온 지 오래인데 이제 역신(逆臣) 강조가 임금을 죽이고 어린 임금을 세운 까닭으로 친히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국경에 다다랐으니, 너희들이 강조를 사로잡아 나의 수레 앞에 보내면 곧 군사를 돌이킬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곧장 개경(開京)으로 들어가서 너희 처자들을 죽일 것이다.”
하였다. 18일(계사)에 또 칙서(勅書)를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였다. 이수화(李守和) 등이 표문을 올려 사의를 표하고 항복하지 않을 의사를 보였다. 19일(갑오)에 거란주가 비단옷과 은그릇 등의 물품을 진장(鎭將)에게 주고, 칙사를 보내어 성심을 다하도록 타일렀다. 20일(을미)에 이수화가 또 보낸 회답의 표문에,
“이제 조서를 받들고 문득 심중에 있는 말을 하오니 읍고(泣辜)의 은혜를 내리시고 해망(解網)의 인자를 베푸소서.”
하였다. 거란주는 그들이 항복하지 않을 줄 알고 다시 칙서를 보내어 위로해 타이르기를,
“너희들은 백성을 위안하고 기다리라.”
하였다. 22일(정유)에 포위를 풀고 20만의 군사를 인주(麟州)지금의 의주부(義州府) 남쪽 35리 지점에 있다 남쪽 무로대(無老代)지금은 미상 에 주둔시키고, 20만의 군사는 진군하여 통주(通州)에 이르게 하고, 거란주는 동산(銅山)지금의 철산(鐵山) 아래로 군사를 옮겼다.
이에 앞서 강조와 최사위(崔士威) 등은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귀주(龜州)지금의 귀성(龜城) 의 북쪽에 나아가 거란과 싸우다 패전하고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通州城) 남쪽으로 나와서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물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에 진을 쳐서 세 곳의 물이 모이는 곳에 웅거했는데 강조는 그 속에 있고, 다른 한 부대는 통주 부근의 산에, 나머지 한 부대는 성에 붙여서 진을 쳤다.
강조는 검거(劒車)로써 진을 배치했다가 거란의 군사가 이르면 합세하여 공격하니 부수어지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드디어 적을 깔보는 마음이 생겨 다른 사람과 바둑을 두었다. 24일(기해)에 거란의 선봉(先鋒) 야율분노(耶律盆奴)와 야율적로(耶律敵魯)가 삼수채(三水砦)를 격파하였다. 진주(鎭主)가 거란의 군사가 이르렀음을 알리니, 강조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입안의 음식과 같이 적으면 씹기가 불편하니, 마땅히 많이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재차 알리기를,
“거란 군사가 벌써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니, 강조가 놀라 일어나면서,
“정말이냐?”
하는데, 정신이 황홀한 가운데 전왕(前王)이 나타나 뒤에 서서 꾸짖기를,
“네 놈은 끝장이 났다. 천벌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하는 듯하였다. 강조가 곧 투구를 벗고 무릎을 꿇으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란 군사가 벌써 이르러 강조를 결박하여 전(氈)으로 싸서 싣고 갔다. 이현운ㆍ노전(盧戩)ㆍ노의(盧顗)ㆍ양경(楊景)ㆍ이성좌(李成佐) 등이 모두 잡히고, 노정(盧頲)ㆍ서숭(徐崧)ㆍ노제(盧濟) 등이 모두 죽으니, 삼군(三軍)은 크게 요란하였다.
거란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서 수십 리를 추격하여 머리를 3만여 개나 베었고, 내버려진 군량과 무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거란주가 강조의 결박을 풀어 주고 묻기를,
“너는 나의 신하가 되겠느나?”
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
하였다. 재차 물었으나 처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살을 발라내면서 물었으나 역시 대답은 처음과 같았다. 거란주가 이현운에게 그와 같이 물으니 대답하기를,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보았는데 / 兩眼已瞻新日月
한 마음이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소 / 一心何憶舊山川
하였다. 강조가 노하여 이현운을 발길로 차면서 말하기를,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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