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동사강목 4

청담(靑潭) 2018. 12. 29. 23:28



동사강목(東史綱目)

안정복(1712-1791)

동사강목 제7상

■무오년 현종 9년(송 진종 천희 2, 거란 성종 개태 7, 1018)

◯5월 중 10만 명을 궁중에서 밥 먹였다.

중 3천 2백 명에게 도첩(度牒)을 주었는데 이로부터 역대에 상례(常例)로 삼았으며, 혹은 해마다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기로 하여 많을 때는 10만 명에 이르고 적을 때라도 1천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사서(史書)에 이와 같은 기록이 연이어 있으나 일일이 적을 수가 없다.

11월 우산국(于山國)에 농기구를 하사하였다.

이때 우산국이 동북여진의 침략을 입어 농사를 폐하였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농기구를 내려 주고 노략질을 당하여 쫓기어 온 민가를 모두 돌려보냈다.

12월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이 대거 남침하자, 강감찬(姜邯賛)을 상원수(上元帥)로 삼아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이를 방어하게 하였는데 흥화진(興化鎭)에서 싸워서 이를 크게 패배시켰다.

이때에 거란이 해마다 침략하더니 이에 이르러서는 손녕(遜寧)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하면서 그들의 군사가 10만이라고 하였다. 왕은 감찬을 상원수로 삼고,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 안주(安州))에 나아가 둔치게 하였다.

흥화진에 이르러서 기병(騎兵) 1만 2천 명을 선발하여 산골짜기에 잠복시키고, 큰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서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고 대기하였다가 적들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트면서 잠복시켜 두었던 군사를 일으켜 크게 패배시켰다.

■기미년 현종 10년(송 진종 천희 3, 거란 성종 개태 8, 1019)

◯2월 강감찬이 거란 군사를 귀주(龜州)에서 크게 패배시키니, 소손녕이 도망쳐 돌아갔다.

23일(신사)에 거란이 군사를 돌려서 연주(連州)ㆍ위주(渭州)연주는 지금의 개천(价川)이며 위주는 지금의 영변부(寧邊府)의 서북쪽 40리에 있다 에 이르자 강감찬에게 습격당하여 사망한 자가 5백여 명이었다.

2월 초하루(기축)에 거란 군사가 귀주(龜州)를 지나자 감찬 등이 동쪽들에서 맞아 싸웠는데 양군이 서로 버티어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다. 마침 김종현이 군사를 인솔하고 달려왔는데 문득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감찬 등이 그 기세를 타고 돌격하니, 용기가 갑절이나 더 하였다. 거란 군사가 패하여 달아나자 감찬 등이 이를 추격하여 석천(石川) 아마도 지금의 팔령천(八嶺川)인 듯한데 귀성부(龜城府) 북쪽 20리에 있다 을 건너 반령(盤嶺)아마도 지금의 팔령산(八嶺山)인 듯한데 귀성부 북쪽 29리에 있다 에 이르렀다. 시체가 들을 뒤덮고, 사로잡힌 인원과 말ㆍ낙타ㆍ갑옷ㆍ투구ㆍ무기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손녕은 도망치고, 살아서 도망간 자는 겨우 수천 명이었으며 거란의 패망이 이때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거란주가 이 소식을 듣고 대로(大怒)하여 사신을 보내어 손녕을 문책하기를,

“네가 상대편을 가볍게 여기고 너무 깊이 들어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볼 것인가? 내 마땅히 너의 낯가죽을 벗긴 뒤에 죽이리라.”

하였다.

■경신년 현종 11년(송 진종 천희 4, 거란 성종 개태 9, 1020)

◯2월 사신을 거란에 보내어 번신(藩臣)을 칭하였다.

이때에 거란이 비록 패하여 돌아갔으나 조정에서는 변경의 침략이 그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사신을 보내어 번신을 칭하여 공납을 옛날처럼 하였고, 또한 구류하였던 야율행평(耶律行平)ㆍ지라리(只刺里) 등을 돌려보내니, 우리나라에 억류된 지 무릇 6년이었다. 거란도 또한 다시는 뜻을 얻지 못하여 화친을 허락하고, 사신을 보내어 답례하니, 이후부터 사신이 끊이지 않았다.

■임술년 현종 13년(송 인종(仁宗) 원년, 거란 성종 태평 2, 1022)

◯2월 탐라(耽羅)가 조공하였다. 이때에 탐라의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갑자년 현종 15년(송 인종 천성 2, 거란 성종 태평 4, 1024)

주현(州縣)의 공거법(貢擧法)을 정하였다.

여러 주현에 영(令)하여 1천 정(丁) 이상은 해마다 3인, 5백 정 이상은 2인, 그 이하는 1인을 천거하게 하여 계수관(界首官)으로 하여금 시험하게 하였는데, 제술과(製述科)는 오언 육운시(五言六韵詩) 1수(首)를, 명경과(明經科)에는 5경(經)의 각각 1궤(机)를 시험하여 예에 따라 서울로 보내면 국자감(國子監)에서 다시 시험하여 합격한 자를 과거(科擧)에 응하게 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되 만일 천거된 사람이 자격이 안 될 때에는 조사하여 죄를 주었다.

■갑술년 덕종 3년(송 인종 경우(景祐) 원년 거란 흥종 중희 3, 1034)

◯2월 누이[妹]를 왕후로 삼고, 성을 김씨로 하였다.

후(后)는 현종(顯宗)의 딸로 김씨 소생인데, 이가 경성 왕후(敬成王后)이다. 또 원혜 태후(元惠太后) 김씨의 딸을 맞아들여 외가의 성(姓)을 일컬으니 역시 현종의 딸인데, 이가 효사 왕후(孝思王后)이다.

유씨(兪氏 형원)는 이렇게 적었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것은 인륜(人倫)이 있기 때문이다. 인륜의 근본은 남녀에서 시작되므로 성인(聖人)이 이를 중히 여겨서 반드시 이성(異姓)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였다. 고려가 신라의 풍습을 이어받아 동성(同姓)끼리 혼인하는 것을 잘못으로 여기지 않았다. 광종(光宗)ㆍ덕종(德宗)ㆍ문종(文宗) 같은 경우는 심지어 자매를 아내로 삼아서 인도가 끊어지고 천리(天理)가 없어졌으니, 이는 진실로 오랑캐들도 심히 수치스럽게 여기는 일이다. 고려 시대의 교화가 밝지 못하고 풍속이 음탕하고 괴벽한 것도 까닭이 있는 것이다.”

■병자년 정종 2년(송 인종 경우 3, 거란 흥종 중희 5, 1036)

◯추7월 왕에게 바치는 인삼을 줄였다.

왕이 인삼 3백 근을 바치게 하니, 중추원(中樞院)에서 아뢰기를,

“근자에 바친 1천근이면 어용(御用)에 족할 것입니다. 국부(國府)의 공물(貢物)은 모두 백성의 고혈(膏血)이니, 함부로 거두어들일 수 없습니다. 다시는 더 바치지 말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왕이 좋아하지 아니하자, 문하성(門下省)에서 논박하여 아뢰기를, “옛날의 제왕들이 기호(嗜好)를 절제하고 사치를 금하며, 내 몸을 삼가고 닦아 겸허한 마음으로 간언(諫言)을 받아들인 것은 백성을 부양(扶養)하여 태평을 이룩하려는 까닭입니다. 이제 재변이 자주 일어나니, 의당 마음을 가다듬어 내 몸을 채찍질하여야만 하거늘 어찌 쓸데없는 낭비로 백성들의 고혈을 모손(耗損)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중추원(中樞院)의 주청(奏請)을 받아들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기묘년 정종 5년(송 인종 보원 2, 거란 흥종 중희 8, 1039)

◯6월 처음으로 미천한 자의 종모법(從母法)을 마련하였다.

유씨(柳氏)형원(馨遠) 는 이렇게 적었다.

“미천한 자의 종모법(從母法)이 이때에 비롯되었는데, 어미만 알고 아비를 알지 못한 것은 금수(禽獸)의 도이다. 인류로서 금수와 같이 처우하는 것이 어찌 법이겠는가? 그러나 그 법의 근본을 따지면, 우리나라 풍속이 천한 사람을 부리는 것이 마소와 다름이 없었다. 이미 이같이 부리고서 그 아비를 따르려고 하면 음란의 송사가 그지없이 번거로울 것이므로 부득이 이와 같이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모법의 잘못이 아니라 노비법(奴婢法)의 잘못이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그 종모법을 따르다가 어미가 만일 양가(良家)의 딸일 때는 또한 반드시 아비를 따르게 하여 천인(賤人)을 삼았으니, 이 법은 법이 아니라 오직 사람을 천인으로 몰아넣기만 하는 것으로 잘못된 법 중에서도 가장 잘못된 법이다.”

■임오년 정종 8년(송 인종 경력 2, 거란 흥종 중희 11, 1042)

◯동11월 거란이 와서 송나라와 강화한 것을 알렸다.

거란이 전연(澶淵)에서 맹약(盟約)함으로부터 송나라와 수호(修好)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송나라를 침구하려고 하니, 송나라가 금(金)과 비단[繒] 따위 세폐(歲幣)를 늘릴 것을 허락하였으므로 거란이 이를 칭하(稱賀)하고, 그들 왕에게 존호(尊號)를 올렸으므로, 사신이 와서 이를 알린 것이다.

■기축년 문종 3년(송 인종 황우(皇祐) 원년, 거란 흥종 중희 18, 1049)

◯하5월 양반(兩班)의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을 정하였다.

1품 평장사(平章事) 이상은 전지(田地) 25결(結)과 시장(柴場) 15결을 주고, 체감(遞減)하여 5품에 이르면 전지 15결과 시장 5결을 주어 자손에게 전하도록 하였고, 아들이 혹 죄가 있으면 제명하되, 그 손자가 죄가 없으면 3분의 1을 주었다.

동11월 대마도(對馬島)가 표류된 우리나라 사람들을 송환하였다.

도관(島官)이 수령(首領) 명임(明任) 등을 보내어 표류된 우리나라 사람 김효(金孝) 등을 금주(金州)에 압송하여 오니, 명임 등에게 물건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으며, 이로부터 이것이 상례가 되었다.

■계사년 문종 7년(송 인종 황우 5, 거란 흥종 중희 22, 1053)

○세모(稅耗 조세의 부족량)를 증수(增收)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아뢰기를,

“옛날 제도는 세미(稅米) 1석에 모미(耗米 말[斗]로 될 때나 창고에서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더 받는 곡식) 1승(升)을 더 거두었는데, 지금 12창(倉)의 쌀을 경창(京倉)으로 운반하려면 여러 차례 수륙(水陸)을 경유하여야 하므로 소모되는 것이 실로 많아서 운반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상하는 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1곡(斛)에 소미 7승을 더 거두게 하소서.”

하니, 이를 제가하였다.

【안정복】 조세를 바치는 자는 백성이요, 미곡을 주관하는 자는 관리이다. 많이 거두자면 백성들을 괴롭히고 조금 거두자면 관리들을 곤란하게 한다. 그러므로 국가가 일을 처리할 때 물정을 충분히 살펴서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다. 수로와 육로로 운반하는 어려움을 겪고, 비에 젖고 벌레와 쥐들의 침해를 입는 까닭에 그것이 줄어들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원수(元數)를 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미(耗米)의 명칭이 생긴 것이다.

중국의 경우는 양곡을 보관하는 데는 작서모(雀鼠耗)가 있고, 이것을 운반하는 데는 두모(斗耗)가 있었는데, 이것은 후당(後唐)의 명종(明宗) 때부터 시작된 제도로서 대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옛날 성시(盛時)라 하여 어찌 운반할 때에 줄어들고 새나 쥐 때문에 소모되는 것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백성에게서 받는 것은 원수(原數)만이고 그 소모되는 것도 또한 마땅히 원수에서 감량(減量)하여 조금이라도 백성에게서 더 거두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백성의 힘이 펴지고 국가의 용도는 절약된 것이었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이를 백성에게서 더 거두어들였으니, 이는 좋은 법이라 할 수가 없다. 고려의 제도는 15두(斗)로 1석(碩)을 삼았는데 1석에 모미 1승을 더 거둬들였으니, 이는 지극히 가벼운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7승을 더 거둬들였다면 또한 이 법의 본의(本意)는 아니지만 또한 가벼운 일이라 할 수는 있는데, 명종(明宗) 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2두를 더 거둬들였으니, 지나치게 과중한 것이 아닌가? 법을 한번 정하면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문종(文宗)이 한번 올려 거두자 후세에는 더욱 이를 본받아서 그 폐단이 여기까지 이를 줄이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의 환곡 제도는 봄에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에 거두어들이는데, 곡식에 정량(定量)이 있기 때문에 모자라게 할 수가 없어서 10두면 1두씩을 더 거두고 이를 일러 모미라고 하였으며, 또한 새나 쥐가 축내는 것을 빙자하여 거두는 것이다. 이왕 모미라고 이름 붙였으니, 마땅히 그 소모량만 충당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모미는 거두어서 관부의 수용(需用)으로 쓰고, 새나 쥐가 축낸 것은 소두(小斗)로 분배(分配)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그 축난 수량을 채워서 바치게 하고 또 모미의 ‘모미’를 거둔다면, 이것은 백성들이 그 소모량을 거듭 내게 되는 셈 이다. 새나 쥐가 축낸 것을 빙자하여 이것을 끌어다가 관용(官用)으로 쓰고 있으니, 그 욕됨이 이만저만 아닌 것이다. 천하 후세에 전할 수 없을 만한 일이요, 옛날 사람들의 이른바 ‘모미’와 이름은 같지만 그 백성들을 괴롭힌 것으로 말하면 더욱 심한 것이다.

■병신년 문종 10년(송 인종 가우(嘉祐) 원년, 거란 도종 청녕 2, 1056)

◯동10월 일본이 사신을 보내와 빙문하였다.

사신 정상위(正上位) 권예(權隷) 등원 조신 뇌충(藤原朝臣賴忠) 등 30인이 금주(金州)에 와서 머물러 있었다. 이로부터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동사강목 제7하

문종 11년(송(宋) 인종(仁宗) 거란(契丹) 1057)

◯추8월 경정상(慶鼎相)을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삼았다.

중서성(中書省)이 아뢰기를,

“정상은 철장(鐵匠)의 후손이므로 청요직(淸要職)에 맞지 않으니, 삭직(削職)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배추를 캘 때에 뿌리만을 보지 않는다[采葑采菲無以下體]고 함은 대개 그 쓸 수 있는 부분만을 귀하게 여긴 것이다. 정상은 재능과 학식이 쓸 만한데 어찌 세계(世系)를 따지겠는가?”

하고 듣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급제(及第) 이신석(李申錫)이 씨족을 기록하지 않았다 하여 최충이,

“조정에 오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하니, 시랑(侍郞) 김원충(金元冲)이 아뢰기를,

“씨족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 부조(父祖)들의 실책이며 신석은 한묵(翰墨 붓과 먹이란 뜻으로 문학(文學)을 말한다)의 공을 쌓아 정시(庭試)에 급제하였고 자신은 허물이 없으니 잠신(簪紳 고관(高官))의 반열에 들 수 있습니다.”

하자, 제(制)하기를,

“현자(賢者)를 쓰는 데는 방소(方所)가 없는 것이니, 그것은 원충의 주청(奏請)에 의거하라.”

하였다.

왕은 모두 이와 같이 문벌을 숭상하지 않고 오직 재능에 따라 사람을 채용하였다.

■무술년 문종 12년(송 인종 가우 3, 거란 도종 청녕 4, 1058)

◯8월 왕이 사신을 보내어 송과 통교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왕이 탐라(耽羅) 및 영암(靈巖)에서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장차 송과 통교하려 하자 문하성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북조(北朝)와 수호를 맺어 변방이 걱정이 없고 백성들은 안락하니 이것으로써 국가를 보전함이 상책입니다. 지난 경술년(庚戌年)에 거란이 문죄하여 말하기를 ‘동으로 여진(女眞)과 결탁하고, 서쪽으로 송나라와 왕래하니 이는 무엇을 도모하려는 것인가?’ 하였는데 만약 일이 누설되면 반드시 틈이 생길 것이고, 또 탐라는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오직 해산물과 배[木道]를 타는 것으로 생계를 도모하고 있는데 재목을 베기 위하여 바다를 왕래하고, 새로 절을 짓느라고 노고가 이미 많았는데, 이제 또 거듭 괴롭게 한다면 다른 변괴가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에는 문물ㆍ예약이 행해진 지 이미 오래여서 상선(商船)의 왕래가 빈번하여 진귀한 보배가 날로 들어오므로 중국과 통교해도 사실상 도움 될 것이 없습니다. 만일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려 하지 않는다면 사신을 송나라에 보낸다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왕이 이에 쫓았다.

■정미년 문종 21년(송 영종 치평 4, 거란 도종 함옹 3, 1067)

◯춘정월 흥왕사(興王寺)가 낙성되니 연등회(燃燈會)를 특설하였다.

2월 사유(赦宥)하였다. 절이 낙성되었는데, 무릇 2천 8백간이며 12년 만에 준공한 것이다. 왕이 재장(齋場)을 설치하고 낙성재(落成齋)를 지내려 하자 중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으므로, 그 중 계행(戒行)이 있는 자 1천 명을 뽑아 재회(齋會)에 참석하게 하였고, 이어 그들을 상주(常住)하도록 하였다. 19일(무진)에는 연등대회(燃燈大會)를 특설하였는데 무릇 5주야(晝夜)에 걸쳤으며, 칙령으로 모든 관아와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ㆍ개성부(開城府)와 광주(廣州)ㆍ수주(水州)ㆍ양주(楊州)ㆍ동주(東州) 지금의 철원(鐵原) ㆍ수주(樹州)지금의 부평(富平) 등 5주(州)와 강화(江華)ㆍ장단(長湍)2현(縣)을 시켜서 대궐 뜰에서부터 절문[寺門]에 이르기까지 채붕(綵棚)을 얽되 빗살처럼 가지런하고 고기비늘처럼 서로 잇닿도록 하였으며, 연로(輦路)의 좌우에는 또 등산(燈山)과 화수(火樹)를 꾸며서 대낮같이 밝게 하였다. 이날 왕은 노부(鹵簿 왕의 행행 장(儀仗))를 갖추고 백관을 거느려 분향하였으며, 시주를 바치고 재물을 보시하였다. 불사(佛寺)의 성대함은 고금에 없던 것으로, 금탑(金塔)을 만드는 데에 은 4백 27근으로 속을 만들고 금 1백 44근으로 겉을 만들었으며, 또 탑을 보호하는 석성(石城)을 쌓았다.

■무신년 문종 22년(송(宋) 신종(神宗), 거란 1068)

◯추7월 송나라 사람 황신(黃愼)이 왔다.

송나라 사람 황신ㆍ홍만(洪萬) 등이 와서 말하기를,

“황제께서 강회양절제치발운사(江淮兩浙制置發運使)인 나증(羅拯)을 불러 이르기를 ‘고려는 예로부터 군자의 나라라 칭하였고, 조종(祖宗) 때에는 수호(修好)를 매우 근실하게 하였는데 지금까지 오랫동안 두절되었다. 듣기에 그 나라의 국왕이 현군(賢君)이라 하니 사람을 보내어 효유(曉諭)함이 옳다.’고 하여, 증(拯)이 신(愼) 등을 보내어 천자의 뜻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고 하니, 왕이 기뻐하여 후히 대접하였다. 이듬해 사신들이 돌아갈 때 왕은 예빈성(禮賓省)으로 하여금 나증에게 이첩(移牒)하여 귀부할 뜻을 말하고, 예를 갖추어 조공하기를 청하였다.

■선종 사효왕(宣宗思孝王) 원년 (송 신종 원풍 7, 요 도종 태강 10, 1084)

◯춘정월 처음으로 승과(僧科)를 두었다.

보제사(普濟寺)의 중 정쌍(貞雙) 등이 아뢰기를,

“구산문(九山門)에 참학(參學)하는 승도(僧徒)를 진사(進士)의 예에 의하여 3년에 한번씩 뽑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이에 쫓았다.

■헌종 공상왕(獻宗恭殤王) 원년(송 철종, 요 도종 1095)

◯동10월 희(熙)가 왕을 폐하고 자립(自立)하였다.

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왕의 숙부(叔父) 5인이 조정에 있었다. 희는 본래 인망(人望)이 있는데다 이자의(李資義)를 주살한 뒤부터는 위세와 권한이 날로 높아져, 중서령이 되었을 때는 백관이 사저(私邸)에 나아가 진하(陳賀)하였다. 이달 6일(기사)에 왕이 제서(制書)를 내려 선위(禪位)할 때, 근신 김덕균(金德鈞)을 보내어 희를 종저(宗邸)에서 맞이하고 왕은 후궁(後宮)으로 물러났다.

왕은 재위 1년이며, 2년 후에 훙 하니 나이 14이었다. 7일(경오)에 희가 두세 번 사양하다가 드디어 중광전(重光殿)에서 즉위하니, 이가 숙종(肅宗)이다. 희는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근면 검소하였고 씩씩하고 굳세어 과단성이 있었으며, 오경(五經)과 자서(諸子書)ㆍ사서(史書)를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문종(文宗)이 총애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왕실을 부흥시킬 자는 너다.”

고 하였다. 선종(宣宗) 9년에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서경(西京)에 갔는데, 그가 머무르는 장막(帳幕) 위에 자기(紫氣)가 오르니, 그 기(氣)를 보는 자가,

“왕자(王者)의 상서(祥瑞)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즉위하였다.


동사강목 제8상

■정해년 예종 2년(송 휘종 대관(大觀) 원년, 요 천조제 건통 7, 1107)

○ 왕이 서경(西京)에 행행하였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임금께서 마땅히 서경에 나아가서 장수를 보내야 합니다.”

하니, 19일(경오)에 왕이 서경으로 행행하였다. 24일(을해)에 왕이 서경에 이르러 위봉루(威鳳樓)에 나아가서 윤관 등에게 부월(鈇鉞)을 친히 주어서 보내었다. 윤관과 오연총이 동계(東界)에 이르러 장춘역(長春驛) 옛날의 장주(長州)에 있었는데 지금의 정평(定平)이다 에 둔병(屯兵)하였는데 군사는 대략 17만 명이었으나 20만 명이라 선전하였다. 병마판관(兵馬判官) 최홍정(崔弘正)과 황군상(黃君裳)을 나누어 보내어 정주(定州)ㆍ장주(長州)의 두 주(州)에 들어가서 여진의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전일에 구류한 번추(蕃酋 여진의 추장)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장차 놓아 돌려보내려고 하니 너희들이 와서 명령을 들어라.”

하고는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추장(酋長) 고라(古羅) 등 4백여 명이 이 말을 믿고 왔는데,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는 복병이 나와서 이를 모조리 죽였다. 그 중에 장건하고 교활한 자 50~60명은 의심을 하면서 관문에 들어오지 않으니, 판관(判官) 김부필(金富弼)과 녹사(錄事) 척준경(拓俊京)을 보내어 길을 나누어 거의 다 사로잡아 죽였다.

12월 윤관 등이 여진을 쳐서 대파(大破)하고 영주(英州)ㆍ웅주(雄州)ㆍ복주(福州)ㆍ길주(吉州)의 4주(州)를 설치하였다.

14일(을미)에 윤관이 길을 나누어 군대를 내보내는데, 자신은 5만 3천 명을 거느리고 정주의 대화문(大和門)으로 나가고,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 김한충(金漢忠)은 3만 6천 7백 명을 거느리고 안륙수(安陸戍)로 나가고,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 문관(文冠)은 3만 3천 9백 명을 거느리고 정주(定州)의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가고,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 김덕진(金德珍)은 4만 3천 8백 명을 거느리고 선덕진(宣德鎭)옛터는 지금의 함흥부(咸興府) 45리에 있다 으로 나가고,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竦) 등은 선병(船兵) 2천 6백 명을 거느리고 도린포(道鱗浦)일명 도련포(道連浦)라고도 하는데 함흥(咸興) 남쪽 35리에 있다 로 나갔다. 윤관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을 지나가니, 여진이 우리 군대의 기세가 매우 강성함을 보고는 모두 도망하여 가축(家畜)이 들판을 덮고 있었다. 문내니촌(文乃泥村)에 이르니 적(賊)이 동음성(冬音城)에 들어가 지키므로 윤관이 병마금할(兵馬鈐轄) 임언(林彦)과 최 홍정(崔弘正)을 보내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15일(병신)에 좌군(左軍)이 석성(石城) 아래에 도착하여 통역을 보내어 여진을 타일러 항복하도록 하니, 여진이 말하기를,

“우리가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하려고 하는데 어찌 항복하라고 하는가?”

하면서 성(城)에 올라 막아 싸우니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지므로 우리 군사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윤관이 척준경에게 이르기를,

“해는 기울고 사태는 급하니 그대가 장군 이관진(李冠珍)과 더불어 공격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제가 일찍이 죄를 범했는데도 공(公)은 나를 장사(壯士)로 인정하여 조정에 청하여 용서하였으니, 오늘은 준경이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기 위하여 힘을 다할 때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석성에 도착하여 갑옷을 입고 방패를 쥐고 적진에 갑자기 뛰어 들어가서 추장 두서너 사람을 쳐서 죽였다. 이에 윤관의 군사는 좌군(左軍)과 합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서 적을 크게 쳐부수니, 적병이 혹은 스스로 바위에 몸을 던져서 죽고, 노유(老幼)와 남녀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홍정(弘正) 등이 나아가 이위동(伊位洞)을 쳐서 이겼는데 4군(軍)이 적의 머리를 4천 8백여 개를 베었고, 포로로 잡은 자 또한 수천 명이나 되었으며 촌락을 부순 것이 1백 30여 소나 되었다. 사자를 보내어 승전을 알리니, 왕은 크게 기뻐하여 조서를 내려 원수(元帥) 이하의 장수에게 유고(諭告)로 권장하고 물품을 차등이 있게 내려 주었다. 윤관은 또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어 땅의 경계를 획정(畫定)하였으니 동쪽으로는 화관령(火串嶺)까지 이르고, 북쪽으로는 궁한이령(弓漢伊嶺)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까지 이르렀다. 또 일관(日官) 최자호(崔資顥)에게 지형을 살피게 하여, 몽라골령의 아래에는 영주성(英州城) 지금의 길주(吉州)에 있다 을 축조하고, 화관령의 아래에는 웅주성(雄州城)지금의 길주(吉州)에 있다 을 축조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는 복주성(福州城) 지금의 단천(端川)에 있다 을 축조하고, 궁한이촌에는 길주성(吉州城) 웅주(雄州)의 북쪽에 있다 을 축조하였다. 여진의 요을내(裊乙乃) 등 3천여 명이 와서 붙 쫓았다.

■기축년 예종 4년(송 휘종 대관 3, 요 천조제 건통 9, 1109

◯6월 동여진이 화친하기를 청하니, 윤관이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定州)로 돌아왔다.

윤관과 오연총이 정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길주로 가다가 나복기촌(那卜其村)에 이르니, 여진의 공형(公兄) 요불(裊弗)과 사현(史顯) 등이 함주(咸州)에 나와서 관문을 두드리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이르렀는데, 태사(太師) 오아속(烏雅束)이 지금 화친하기를 청하려고 하여 나로 하여금 병마사(兵馬使)에게 전해 알리게 하였습니다.”

하니, 윤관 등이 이 말을 듣고 정주성(定州城)으로 들어와서 사자를 보내어 여진의 장수 오사(吳舍)에게 회답하기를,

“화친하는 일은 병마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공형(公兄)을 보내어 들어와 위에 주달(奏達)해야 할 것이오.”

하였다. 여진이 크게 기뻐하여 관인(官人)을 서로 볼모로 바꾸어 입조(入朝)하기를 청하니, 윤관이 기사(記事) 이관중(李管仲)과 이현(異賢) 등을 볼모로 삼았다.

○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서 구성(九城)을 여진에게 돌려주는 일을 의논하였다.

처음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여진은 궁한리(弓漢里) 밖에 연산(連山)이 절벽처럼 서 있어, 다만 한 가닥 작은 길만이 통할 수 있으니, 만약 관성(關城)을 설치하여 작은 길을 막아 버린다면 그 걱정은 영구히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후에 그것을 공격하여 취하려 하니 수로(水路)와 육로(陸路)가 어디로나 통하지 않는 데가 없어서 전일 들은 바와는 아주 달랐다. 여진이 이미 거처할 곳을 잃게 되니 맹세코 보복하려고 하여 이에 먼 곳의 여러 추장(酋長)들을 이끌고 해마다 와서 공격하는데, 속이는 꾀와 병기(兵器)가 이르지 않는 데가 없었다. 성이 험준하고 튼튼하여 능히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우리 군사도 많이 잃었다. 땅을 개척한 것이 너무 많고, 구성(九城)의 상거(相距)가 매우 멀고 산골짜기가 텅 비고 깊어서 적이 복병을 설치하여 왕래하는 사람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국가에서 여러 방면으로 군사를 징발하니, 중앙과 지방에서 소란이 일어나고 기근(飢饉)과 역질(疫疾)까지 겹쳐 마침내 원망이 일어나게 되었다. 여진도 싫증이 나고 괴롭게 여겨 또한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면서 옛 땅을 돌려주기를 원하니,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왕이 망설이면서 결정하지 못하니 간의 대부(諫議大夫) 김연(金緣)이 아뢰기를,

“군주(君主)가 토지를 빼앗는 것은 본디 백성을 무육(撫育)하려고 한 것인데, 지금은 성을 다투어 사람을 죽이니 그 땅을 돌려주고 백성을 휴식시키는 것만 못합니다. 또 국가에서 처음 구성을 쌓을 때 사신을 보내어 거란에게 알리는 표문(表文)에 일컫기를 ‘여진의 궁한리(弓漢里)는 곧 우리의 옛 땅이고, 그 거민(居民)도 우리의 편맹(編氓 호적에 편입된 백성)인데 근래에 여진이 변방을 침구(侵寇)하여 그치지 않는 까닭으로 이 땅을 수복하여 그 성을 쌓았습니다.’ 하였는데, 지금 궁한리의 추장(酋長)이 거란의 관직을 받은 사람이 많으니 만약 이 땅을 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과 흔단이 생겨 책망할 것이므로 동쪽은 여진을 방비하고 북쪽은 거란을 방비해야 할 것이니, 아마 구성은 우리나라의 복이 되지는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왕이 이 말을 옳게 여겨 여러 신하들을 모아서 구성을 돌려주는 가부를 의논하게 하니, 평장사 최홍사(崔弘嗣) 등 28인은 모두 ‘돌려주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예부 낭중(禮部郞中) 박승중(朴昇中) 등은 모두 ‘돌려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 동여진의 요불(裊弗) 등이 와서 조회하면서 구성 돌려주기를 청하였다.

요불(裊弗)과 사현(史顯) 등이 마침내 와서 조회하므로 왕이 선정전(宣政殿)의 남문(南門)에 임어하여 인견하고, 내조한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옛날에 우리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祖宗)은 대방(大邦 우리나라를 높이는 말)에서 출생하였으니 자손에 이르기까지 의리상 마땅히 귀부(歸附)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의 태사(太師) 오아속(烏雅束)도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었는데, 갑신년(1104, 숙종 9) 무렵에 궁한촌(弓漢村) 사람이 스스로 좋지 못한 일을 저지른 것은 본디부터 태사가 지휘한 것은 아닙니다. 국조(國朝 우리나라를 지칭(指稱)함)에서 그 국경을 침범한 죄를 세상에 발표하고서 이를 토벌하였으나 다시 수호(修好)하기를 허락하신 까닭에 우리는 이를 믿고 조공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뜻밖에 지난해에 크게 군사를 일으켜 들어와서 우리의 늙은이와 어린아이를 죽이고 구성을 쌓아,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거주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 닭으로 태사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와서 옛 땅을 청하게 했으니, 지금 만약 옛 성을 돌려주어 생업이 안정되도록 허가한다면 우리들은 하늘에 고하고 맹세하여 자손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조공을 공손히 이행하고, 또한 감히 기와조각이나 조약돌 하나 경계 위에 던지지 않겠습니다.”

하니, 왕이 술을 하사하여 위로하고 타일렀다.

■갑오년 예종 9년(송 휘종 정화 4, 요 천조제 천경 4, 1114)

◯12월 연덕 궁주(延德宮主) 이씨(李氏)를 책봉하여 왕비(王妃)로 삼았다.

○ 왕비의 아버지인 이자겸을 수사도 중서시랑 평장사 겸 서경유수사(守司徒中書侍郞平章事兼西京留守使)로 삼았다.

■예종 10년(금(金) 태조(太祖) 아골타(阿骨打) 수국(收國) 원년, 1115)

◯춘정월 완안부 아골타가 참람하게 황제라 일컫고 나라 이름을 (金)이라 하였다.

■예종 12년(송 휘종, 요 천조제, 금 태조 천보(天輔) 원년, 1117)

◯3월 내원주ㆍ포주의 옛 땅을 요(遼)에서 취하였다.

금나라 군사가 요나라 개주(開州)를 공격하고 내원성 및 대부영(大夫營)ㆍ걸타영(乞打營)ㆍ유백영(柳白營)의 3영(營)을 습격하여 전함(戰艦)을 불사르니, 통군(統軍) 야율영이 내원성 자사(來遠城刺史) 상효손(常孝孫)과 더불어 그 관리와 백성을 거느리고 배 1백 40척에 싣고서 나와 강가에 대고는 영덕진(寧德鎭)에 공첩(公牒)을 보내어 내원주ㆍ포주의 2성(城)으로써 우리에게 귀순했다가 바다를 건너 도망하므로, 우리 군사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병장(兵仗)과 전곡(錢糓)을 거둔 것이 매우 많았다. 김연이 상세하게 적어 급히 아뢰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포주를 고쳐서 의주(義州)로 삼아 방어사(防禦使)를 두고, 압록강을 경계로 삼고 관방(關防)을 설치하니, 백관이 표문을 올려 하례하였다.

○ 금주(金主)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나, 회답하지 않았다.

금주가 아지(阿只) 등을 보내와 왕에게 서신을 보내기를,

형인 대여진 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인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서신을 보냅니다.

우리 조고(祖考)로부터 한 지방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일컬어 대국(大國)으로 인정하고, 고려를 일컬어 부모의 나라로 인정하고서 조심하여 섬겼는데, 거란이 무도(無道)하여 우리 국경을 유린하고 우리 인민을 노예로 삼고, 여러 번 명분 없는 군사로 공격하므로 우리는 마지못해서 이를 막았는데, 하늘의 도움을 입어 무찔러 모조리 죽이게 되었습니다. 다만 왕은 우리에게 화친을 허용하여 형제를 맺어서 대대로 무궁한 호의(好誼)를 이루게 하시오.”

하고, 좋은 말 1필을 보내었다. 대신들이 화친이 옳지 못함을 극론하면서 그 사신의 목을 베자는 사람까지 있었다. 어사중승(御史中丞) 김부철(金富轍)이 상소하기를,

“금나라 사람이 대요(大遼)를 갓 격파하고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어 형제가 되기를 청하였는데, 신이 보건대 한(漢)나라가 흉노(凶奴)에게, 당(唐)나라가 돌궐(突厥)에게 혹은 신(臣)을 일컫기도 하고, 혹은 공주(公主)를 시집보내기도 하면서, 무릇 화친할 만한 것은 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 대송(大宋)은 거란과 더불어 번갈아 백숙형제(伯叔兄弟)가 되면서 대대로 화통(和通)하고 있으니, 천자(天子)의 존엄은 천하에 대적(對敵)이 없는데도 오랑캐의 나라에 몸을 굽혀 섬기게 된 것은 이른바 성인(聖人)이 권도(權道)를 정도(正道)로 삼아 국가를 보전하는 좋은 계책인 것입니다. 옛날 성종(成宗) 때에 변방을 제어하는 일이 계책을 잃어서 요인(遼人)의 입구(入寇)를 초래하였으니 진실로 거울삼을 만한 일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장구한 계획과 원대한 계책을 생각하여 국가를 보전시켜 후일의 뉘우침이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재추(宰樞)들이 이를 비웃고 배척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인종 2년(송 휘종 선화 6, 요 천조제 보대 4, 금 태종 천회 2, 1124)

이자겸을 책봉하여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삼고, 관부(官府)를 세워 관속을 두도록 하고, 백관들에게 그 사제(私第)에 나아가 하례하도록 하였다.

박승중(朴昇中)이 왕에게 아뢰어, 이자겸을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의 예절에 의거하여 관부(官府)를 세워 관속을 두기를 청하니 왕이 그대로 따라서 관부의 이름은 숭덕부(崇德府)라 하고, 궁(宮)은 의친궁(懿親宮)이라 하고, 그 아내 최씨(崔氏)를 책봉하여 진한국 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삼고, 여러 아들 지미(之美)ㆍ공의(公儀)ㆍ지언(之彦)ㆍ지보(之甫)ㆍ지윤(之允)ㆍ지원(之元)에게 모두 대관(大官)을 가자(加資)하였다.

왕이 대궐 문에 나가서 친히 조서를 전하고, 백관들에게 조정에서 하례하도록 하고, 다음은 이자겸의 사제(私第)에 나아가서 하례하도록 하고, 마침내 중앙과 지방으로 하여금 전문(箋文)을 올리고, 방물(方物)을 숭덕부(崇德府)에 바치도록 하였다. 이자겸이 상복(喪服)을 벗고 관직에 나아가 중서성(中書省)에 앉으니, 백관들이 행렬을 지어 뜰에서 하례하였다. 이날에 큰 천둥이 치고 비가 와서 거리에 물의 깊이가 1장(丈)이나 되었으며, 영은관(迎恩館)에 벼락이 쳤다.

또 이자겸의 조고(祖考)를 추봉(追封)했는데, 박승중(朴昇中)이 죽책(竹冊 책봉문(冊封文)을 새긴 간책(簡策))으로 책봉하여 높이고, 분황(焚黃)하는 날에 교방(敎坊)의 음악을 하사하기를 청하고, 또 예사(禮司)로 하여금 이자겸의 생일(生日) 호칭을 정하도록 하니, 예부 시랑(禮部侍郞) 김부식(金富軾)이 의논드리기를,

“종묘(宗廟)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은 평생의 한 일을 상징하는 것인데, 무덤의 빈 터에는 소복(素服)으로 종사(從事)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울기까지 하니, 어찌 음악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생일을 명절(名節)로 일컫는 것은 예로부터 없었던 바이나 당나라 현종(玄宗)에게서 시작되었으며, 신하로서 생일을 절(節)이라 일컬은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니, 박승중은 마침내 사사로이 인수절(仁壽節)이라 칭호 하였다.

8월 이자겸이 그 딸을 바쳐 왕비로 삼게 하였다.(제3녀)

이자겸은 다른 성(姓)이 왕비가 되면 권세와 총애가 나누어질까 두려워 그 셋째 딸을 왕에게 바치기를 무리하게 청하니, 왕은 마지못해 이를 맞아들였다. 이날에 큰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인종 3년(송 휘종 선화 7, 요 천조제 보대 5, 금 태종 천회 3, 1125)

◯춘정월 이자겸이 또 그의 딸을 왕에게 바쳤다.(제4녀)

이자겸이 또 넷째 딸을 바쳐서 차비(次妃)로 삼게 했는데, 이날에 또 큰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동사강목 제8하

■인종 4년(송(宋) 흠종(欽宗) 원년, 금 태종 4, 1126)

◯2월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拓俊京)이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여 궁실을 불사르고, 왕을 위협하여 남궁(南宮)으로 옮겼으며, 안보린(安甫麟)과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 및 좌복야(左僕射) 홍관(洪灌) 등 17인을 죽였다.

자겸이 당여(黨與)를 많이 세워 조정에 두루 배치하고, 여러 아들의 제택(第宅)이 거리에 연하여 뻗쳐 있었다. 기세가 더욱 성하여 관작을 팔아 뇌물이 폭주(輻湊)하니, 썩은 고기가 늘 수만 근(斤)이나 되었고 노복을 내놓아 남의 재물을 약탈하여 길거리가 떠들썩하였다. 또 군국(軍國)의 일을 주관하고자 하여 왕을 그의 집에 행행하게 해서 책명(策命)을 줄 것을 청하며 시일을 강제로 결정하였는데, 일이 성취되지는 못하였으나 왕은 그를 매우 미워하였다. 내시(內侍) 김찬(金粲)ㆍ안보린(安甫麟)이 왕의 뜻을 알아차리고 이에 지녹연(智祿延)과 모의하였다. 왕이 김찬을 보내어 이수(李壽)와 김인존(金仁存)에게 계책을 물었다. 김인존은 김연(金緣)이다. 두 사람이 모두 대답하기를,

“상께서 외가에서 생장하였으니 은혜는 끊을 수가 없으며, 더구나 저들의 당여가 조정에 가득 찼으니 경솔히 행동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지녹연 등은 마침내 상장군(上將軍) 최탁(崔卓)ㆍ오탁(吳卓)과 대장군(大將軍) 권수(權秀)ㆍ고석(高碩) 등과 더불어 약속하고는, 25일(신유) 밤에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갔다.

이때 자겸의 아들 지원(之元)은 척준경(拓俊京)의 사위가 되어, 이로 말미암아 준경과 그의 아우 척준신(拓俊臣)이 자못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있었다. 준신이 병부 상서(兵部尙書)였는데, 최탁(崔卓) 등이 그를 미워하여 척준신과 척준경의 아들인 내시(內侍) 척순(拓純)을 먼저 죽여서 궁성밖에 시체를 던져 버렸다. 낭중(郞中) 왕의(王毅)가 성을 넘어 달려가서 자겸에게 알리니, 자겸은 그 아들 지미(之美), 준경과 더불어 서로 돌아보고는 두려워 떨면서 백관들을 불러서 의논해 물으려고 하였다. 준경은 말하기를,

“일이 위급하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다.”

하고는, 이에 수십 인을 거느리고 주작문(朱雀門)에 이르러 성을 넘어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신봉문(神鳳門)에 이르러 고함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니, 지녹연(智祿延)과 최탁(崔卓) 등은 외부(外部)의 군대가 많이 모였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낙담하여 나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해가 뜰 때 준경 등이 군졸을 불러 모아 군기고(軍器庫)의 무기를 주어 나아가서 승평문(昇平門)을 포위하고, 자겸의 아들인 중 의장(義莊)은 현화사(玄化寺)로부터 중 3백여 명을 거느리고 궁성 밖에 이르렀다. 왕이 신봉문(神鳳門)에 나가서 황색(黃色)의 일산(日傘)을 펴 드니 준경의 군대가 멀리서 바라보고는 죽 늘어서서 절하며 만세를 불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묻기를,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무기를 가지고 왔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도적이 대궐 안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사직을 보위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하므로, 왕은

“그런 일이 없다.”

고 말하고는, 시어사(侍御史) 이중(李仲)으로 하여금 갑옷을 벗고 무기를 던지도록 선유(宣諭)하자, 준경이 노해서 칼을 뽑아 이중을 쫓아버리고 군사들로 하여금 다시 갑옷을 입고 무기를 쥐고서 큰소리로 외치게 하니, 빗나간 화살이 임금의 앞에까지 미치었고, 의장(義莊)의 무리가 신봉문(神鳳門)의 기둥을 도끼로 찍었다. 자겸이 난리를 일으킨 자를 내 주기를 청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아마 대궐 안이 놀라 동요할 듯하다고 하였는데, 말이 매우 공손하지 못하였으나, 왕은 잠자코 있었다.(이하 생략)

3월 이자겸이 왕을 그 사제(私第)로 다시 옮겼다.

중흥택(重興宅)은 자겸의 사제이다. 자겸이 왕을 청하여 그 서원(西院)에 옮겨서 거처하게 하니, 왕이 장위(仗衛 호위하는 의장(儀仗))를 버리고 사잇길을 따라 원문(院門)에 이르렀는데, 낭장(郞將) 지석숭(池錫崇)ㆍ권정균(權正均)ㆍ오함(吳含) 등은 난리가 일어날 때부터 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3인이 왕을 부축하여 들어가려고 하니, 자겸이 그들을 죽이려고 낭장(郞將) 이적선(李積善)을 시켜 끌어내도록 하였다. 석숭이 임금의 웃자락을 손으로 잡고 살려달라고 급히 소리치니, 왕이 적선을 돌아보고 꾸짖었으나 적선이 석숭의 가슴을 발로 차면서 그래도 놓아 주지 않으니, 임금의 옷자락이 이 때문에 찢어졌다. 지미(之美)ㆍ지보(之甫)는 왕을 바라보고서도 섬돌에 내려오지 않았는데, 시랑(侍郞) 최식(崔湜)만이 홀로 나와서 절하고 적선을 꾸짖기를,

“성지(聖旨)가 계신데, 네가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하니, 적선이 마침내 그를 놓아 주었다. 왕이 최식을 불러 말하기를,

“석숭등 3인은 지성으로 임금을 위할 뿐이요 다시 딴마음이 없으니, 나를 위하여 죽이지 말라.”

하니, 준경이 그대로 따라 먼 곳에 유배시켰다. 왕이 당에 오르니, 자겸은 그 아내와 더불어 손뼉을 치고 땅바닥을 두드리며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왕후가 대궐에 들어간 이후로 성자(聖子)를 낳아서 하늘의 영원한 명이 있기를 빌었는데, 오늘날에 도리어 적신(賊臣)을 믿고서 골육(骨肉)을 해치려 할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왕은 부끄러워서 말이 없었다. 왕이 서원(西院)에 거처하면서부터 좌우(左右)가 자겸의 무리이므로, 국사를 스스로 청단(聽斷)하지 못하고 행동과 음식도 모두 자유스럽지 못하였으며, 백관들은 근방의 사원에 기우(寄寓)해 있으면서 인원만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재상 박승중(朴昇中)ㆍ허재(許載)ㆍ최식(崔湜) 이하는 모두 적당(賊黨)에게 아첨해 붙으매, 자겸과 준경의 위세가 더욱 성하여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였다.

5월 이자겸과 그의 처자를 유배시키고, 지당(支黨)을 먼 지방에 나누어 유배시켰다.

자겸과 아내 최씨(崔氏) 및 아들 지윤은 영광(靈光)에 유배시키고, 지미는 합주(陜州)협(陜)은 속음(俗音) 합(合)이니, 지금의 합천(陜川)이다 에, 공의는 진도(珍島)에, 지언은 제(巨濟)에, 지보는 삼척(三陟)에, 의장은 금주(金州)에, 지원은 함종(咸從)에 유배시키고, 합문지후(閤門祗候) 박표(朴彪)ㆍ문중경(文仲經), 직장(直長) 박영(朴永), 중서시랑(中書侍郞) 박승중(朴昇中) 및 그 아들 심조(深造) 등 30여 인과, 관노(官奴)ㆍ사노(私奴) 무릇 90여 명을 먼 지방에 나누어 유배시켰다. 박표는 가장 간사하고 교활하여 자겸에게 아첨해 붙어서 부세를 가혹히 징수하여 자겸의 부(富)를 더욱 과도하게 하였으니, 그런 까닭으로 조정에서 그를 더욱 미워하여 중도에서 죽여 물에 빠뜨렸다. 자겸의 친당(親黨)으로서 직위에 있는 사람은 모두 파직시켜 내쫓았다.

■정미년 인종 5년(송 고종(高宗) 건염(建炎) 원년, 금 태종 천회 5, 1127)

◯9월 금에서 사신을 보내와 송을 멸망시켰음을 알렸다.

이보다 먼저 금나라 군사가 변경(汴京)에 들어갔는데, 변방의 보고가 잘못 전해지기를,

“금나라 군사가 패전하고 송나라 군사가 이긴 기세를 타서 깊이 적지에 들어갔다.”

하니, 정지상과 김안 등이 아뢰기를,

“시기는 놓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군사를 내어 송나라 군사를 응접(應接)하여 큰 공을 이루고, 주상(主上)의 공덕을 중국의 역사에 기재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김안은 곧 김찬(金粲)이었다. 왕은 이때 서경(西京)에 있었는데, 사람을 보내어 달려가 김인존(金仁存)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전문(傳聞)한 일은 항상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 많으니, 마땅히 뜬소문만 듣고 군대를 일으켜 강적을 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김부식(金富軾)이 돌아오자 과연 그 말이 거짓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에 와서 금나라가 변경(汴京)을 함락시키고 두 황제(皇帝 휘종(徽宗)과 흠종(欽宗))를 사로잡았는데, 선경사(宣慶使) 야율거근(耶律居瑾)과 장회(張淮) 등을 보내와, 조주(趙主 송(宋)나라 황제를 말한다) 부자와 연왕(燕王)ㆍ월왕(越王)ㆍ운왕(鄆王) 이하 종족 4백 70여 인까지 잡아서 대궐에 오게 하고, 망한 송나라 태재(太宰)였던 장방창(張邦昌)을 책명(冊命)하여 대초 황제(大楚皇帝)로 삼는다는 등의 일을 조칙(詔勅)으로 효유(曉諭)하였다. 금나라 사신이 돌아가매 표문을 부쳐 사례하였다.

■무신년 인종 6년(송 고종 건염 2, 금 태종 천회 6, 1128)

◯11월 대화궐(大華闕)을 서경(西京)의 임원역(林原驛)에 지었다.

이때 묘청(妙淸)과 백수한(白壽翰)이 음양(陰陽)의 정도(正道)에 어긋난 설로 여러 사람들을 현혹시켰는데, 정지상(鄭知常)도 서경 사람이므로 그 설을 깊이 믿고서 말하기를,

“상경(上京 개경(開京))은 기업(基業)이 이미 쇠진하고 궁궐이 불에 타서 없어졌는데, 서경은 왕기(王氣)가 있으니 마땅히 상께서 옮겨 거처해서 상경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내시(內侍) 김안(金安)ㆍ홍이서(洪彛叙)ㆍ이중부(李仲孚)와 대신 문공인(文公仁)ㆍ임경청(林景淸)이 뒤따라 이에 부화하여, 마침내 아뢰기를,

“묘청은 성인(聖人)이고, 백수한은 그 다음입니다. 그들이 진술해 청하는 것을 모두 용납해 받아들인다면 정사가 잘 다스려져 국가를 보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는, 이에 여러 관원에게 서명하기를 일일이 청하니,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 김부식(金富軾), 참지정사(參知政事) 임원애(任元敳), 승선(承宣) 이지저(李之氐)만이 홀로 서명하지 않았다. 글이 아뢰어지자 왕이 자못 마음이 기울어 이를 믿게 되었는데, 공인(公仁)은 곧 공미(公美)이다. 이에 묘청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지금의 평양부(平壤府) 북쪽 20리(里)에 있다 의 땅은 이것이 술가(術家)에서 말한 대화세(大華勢 아주 좋은 지세(地勢))이니, 만약 궁궐을 세워 거처한다면 천하를 병합할 수가 있으며, 금국(金國)이 폐백을 가지고 저절로 항복할 것이며, 36국(國)이 모두 신첩(臣妾)이 될 것입니다.”

하므로, 왕이 기뻐하면서 이를 사모하여 서경에 행행하여 따라간 재추신(宰樞臣)에게 명하여 묘청과 더불어 땅을 보고 정하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새 궁궐을 창건하면서 김안(金安)에게 말하여 역사(役事)를 독려함이 매우 급하였다. 때가 바야흐로 몹시 추워서, 백성이 매우 원망하고 괴로워하였다. 한림학사(翰林學士) 김부식(金富軾)이 상소하여 불가함을 극언(極言)하였으나 왕은 따르지 않았다.

■경술년 인종 8년(송 고종 건염 4, 금 태종 천회 8, 1130)

◯추7월 어사대(御史臺)가 국학(國學)에서 양성하는 선비의 수를 줄이기를 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어사대(御史臺)에서 아뢰기를,

“국학(國學)에서 양성하는 선비가 너무 많아서 공급을 매우 허비하니, 청컨대 조행(操行)이 성취된 사람 약간만 뽑아 남겨 두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내보내게 하소서.”

하니, 이에 국학의 여러 유생들이 대궐에 나아와서 상서(上書)하기를,

“대저 학문을 숭상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므로, 옛날의 성현들도 반드시 이로써 먼저 할 일로 삼았던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비록 지위를 얻지 못하여 사방에 두루 돌아다녔지마는 그래도 3천명의 학도를 양성하였으며, 조주(潮洲)는 하등(下等)의 주(州)인데도 한문공(韓文公 문공은 당나라 한유(韓愈)의 시호)이 생도를 모아서 자기의 봉록(俸祿)을 내어 주찬(厨饌)을 공급했는데, 하물며 우리 국가는 삼한(三韓)을 전부 점유하여 이미 국력은 부유하고 백성은 많아져서 풍속과 문물(文物)은 삼대(三代 하(夏)ㆍ는(殷)ㆍ주(周)의 세 왕조(王朝))에 비길만 한데, 2백 명에 불과한 국학의 생도를 유사(有司)가 재물을 허비한다고 여겨 이를 줄이려고 하니, 어찌 우리 임금의 도학(道學)을 존중하고 유학(儒學)을 숭상하는 뜻이겠습니까? 또 불교의 사찰(寺刹)은 중앙과 지방에 널리 퍼져 있어서 평민이 부역을 도피하고 배불리 먹고 편안히 사는 사람이 몇 천 명, 몇 만 명이나 되는지도 알 수가 없는데, 유사는 일찍이 이것은 생각지도 않으면서 도리어 국학의 낭비만 말하니, 공평한 말과 지극한 의논은 아닙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를 물리치고 채용하지 마소서.”

하니, 조서로 옳다고 하였다.

■을묘년 인종 13년(송 고종 소흥 5, 금 희종(熙宗) 천회 13, 1135-금 희종이 즉위하였으나 그대로 천회 연호를 사용했다-)

◯춘정월 묘청이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과 더불어 서경에 웅거하여 반(叛)하니, 평장사 김부식을 보내어 제군(諸軍)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묘청이 분사시랑 조광ㆍ병부 상서(兵部尙書) 유참(柳旵)‘旵’의 음은 초(初)와 감(減)의 반절(反切)이니 훈(訓)은 햇빛이다사령소경(司寧少卿) 조창언(趙昌言)ㆍ안중영(安仲榮) 등과 더불어 서경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명이라 칭탁하고는 유수(留守)와 관료를 가두고, 또 사람을 보내어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 이중(李仲)과 여러 요좌(僚佐), 여러 성의 군장(軍將) 및 상경(上京 개경(開京)) 사람으로서 서경에 와 있는 이는 잡아서 귀천이나 승려(僧侶)ㆍ속인(俗人)을 논할 것 없이 모두 구금시켰다. 군사를 보내어 절령(岊嶺)의 길을 끊고 여러 성의 군사들을 위협하여 출병시키고, 또 왕명이라 칭탁하여 양계(兩界 서계(西界)와 북계(北界))에서 징병(徵兵)하고, 가까운 도(道)의 목마(牧馬)를 약탈하여 성에 들어가서,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정하고, 스스로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칭호하고는 위관(僞官)을 임명해 두고 두서너 길로 나누어 상경(上京)으로 바로 달려가려고 하였다. 이때에 백수한(白壽翰)이 상경에 있었는데 그의 당여로서 서경에 있던 사람이 서신을 보내어 백수한을 불러 말하기를,

“서경이 이미 반하였으니 몸을 빼어 나오라.”

하였다. 수한이 그 서신을 가지고 왕에게 아뢰므로, 왕이 문공인(文公仁)을 불러서 보이니, 공인은 아뢰기를,

“이 일은 의심스러우니 진위를 규명하기가 어려우므로 잠시 이를 제쳐 놓기로 합시다.”

하였다. 조금 후에 서경으로부터 도망해 돌아온 어떤 사람이 그들의 배반한 상황을 상세히 말하니, 왕이 이에 김부식을 원수로 삼아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김정순(金正純)ㆍ정정숙(鄭㫌淑)ㆍ노영거(盧令琚)ㆍ윤언이(尹彦頤)ㆍ고당유(高唐愈) 등으로 이를 보좌하게 하고, 이부 상서(吏部尙書) 김부의(金富儀)는 좌군을 거느리게 하여, 김단(金旦)ㆍ이유(李愈)ㆍ윤언민(尹彦旼) 등으로 이를 보좌하게 하고,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이주연(李周衍)으로 우군(右軍)을 거느리게 하여, 진숙(陳淑)ㆍ양우충(梁祐忠)ㆍ진경보(陳景甫) 등으로 이를 보좌하게 하였다. 김부의는 부철(富轍)이다. 먼저 우군을 보내어 동북(東北)의 여러 성들을 타일러 이내 적당(賊黨)을 수색하도록 하고, 부의에게 좌군을 거느리고 먼저 서경을 향하여 가도록 명하였다.

○ 백수한(白壽翰)ㆍ김안(金安)ㆍ정지상(鄭知常)이 복주(伏誅)되었다.

부식이 군사를 거느리고 갈 적에 여러 재상들과 상의하기를,

“서경(西京)의 반역에는 정지상ㆍ김안ㆍ백수한 등이 모의에 참여했으니, 이 사람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서경은 평정시킬 수가 없다.”

하고, 이에 지상 등 3인을 불렀다. 그들이 오니 김정순(金正純)을 몰래 타일러 용사를 시켜 끌어내어 궁문 밖에서 목을 베게 하고는 왕에게 아뢰었다. 사람들은 부식이 평소 지상과 명성이 같아서 문자(文字) 때문에 불평이 쌓여 있었는데 이때 와서 내응(內應)을 핑계하고서 지상을 죽였다고 말하였다. 지상은 뛰어난 재주가 있어 장원급제로 발탁되어 대궐에 드나들면서 건건(謇謇 곧은 말을 하는 모양)한 옛날 간신(諫臣)의 기풍이 있었으며, 시(詩)는 만당(晩唐)의 체를 얻었었다. 그러나 성품이 부탄(浮誕) 허위(虛僞)하여 묘청에게 미혹되어 마침내 반역함으로써 죽음을 당하였다.

■병진년 인종 14년(송 고종 소흥 6, 금 희종 천회 14, 1136)

◯춘2월 김부식(金富軾)이 서경(西京)을 쳐서 이기니, 조광(趙匡)이 스스로 불에 타서 죽고 서경의 적(賊)이 모두 평정되었다.

■갑자년 인종 22년(송 고종 소흥 14, 금 희종 황통 4, 1144)

◯하5월 김돈중(金敦中)을 시중으로 삼았다.

돈중(敦中)은 김부식의 아들이다. 이해에 제2등으로 급제하였는데, 왕이 그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제1등에 승진시키고 이내 내시(內侍)에 속하게 하였다. 돈중은 나이가 젊고 기상이 날카로웠는데, 후에 궁정의 나례(儺禮)에서 촛불로 견룡(牽龍 위사(衛士) 하나)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니, 중부가 손으로 때리며 욕하였다. 이 때문에 부식이 노하여 왕에게 아뢰어 중부를 결박하여 고문하게 하였으나, 왕은 중부의 사람 된 품을 기이하게 여겨 이에 도망하여 피하게 하였으니, 세상에서 이르기를 경계(庚癸)의 화란이 이 일에서 조짐 되었다고 한다. 중부는 해주인(海州人)인데 네모진 동자(瞳子)와 넓은 이마에 살빛이 희고 수염이 고왔으며, 키는 7척이 넘었다. 최홍재(崔弘宰)가 보고 기이하게 여겨 공학금군(控鶴禁軍)에 충용(充用)하였다.

■을축년 인종 23년(송 고종 소흥 15, 금 희종 황통 5, 1145)

○김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찬술하여 바쳤다.

삼국(三國)이 정립(鼎立)하여 각기 국사(國史)의 편찬 기관을 두고서 그 당시에 일어난 일을 맡아서 기록했는데, 여러 번 병화를 겪었기 때문에 전적(典籍)이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고기(古記 옛날의 기록)의 문자는 정돈되지 않았고 황당하고 괴이하여 믿지 못할 것이 많았다. 왕이 부식에게 명하여 삼국사(三國史)를 찬술하게 하니, 부식이 고기(古記) 및 신라(新羅)의 유적(遺籍)을 채록(採錄)하고, 한(漢)ㆍ당(唐)의 여러 역사까지 채록하여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모방하여 무릇 50권을 지어 《삼국사기(三國史記)》라 명칭했는데, 이때에 와서 바치니, 왕이 권장하여 유고(諭告)하면서 화주(花酒)를 내렸다.


동사강목 제9상

■신미년 의종 5년(송 고종 소흥 21, 금주 양 천덕 3, 1151)

◯춘2월 시중(侍中)으로 치사(致仕)한 김부식(金富軾)이 졸하였다.

부식은 풍후한 용모에 큰 몸집으로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나왔고, 문장으로 세상에 명성을 떨쳤다. 송(宋)의 사신 노윤적(路允迪)과 서긍(徐兢)이 왔을 때 부식이 관반(館伴)이 되었다. 긍이 그의 사람됨을 좋아하여,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저술할 때 부식의 가계를 기재하고 또 그의 형모를 그려 가지고 돌아가 황제에게 아뢰었고, 판각하여 세상에 전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천하에 떨쳤다. 그 후 사명을 받들고 송에 갔었는데 가는 곳마다 예를 갖추어 그를 대접하였다. 세 차례 예위(禮闈 과거의 상시관(上試官))를 맡아 보아 선비를 얻은 것으로 일컬어졌다. 졸하니 문열(文烈)이라 시호를 내렸다. 문집 20권이 있다.

■정축년 의종 11년(송 고종 소흥 27, 금주 양 정륭 2, 1157)

◯5월 사람을 보내 우릉도(羽陵島 울릉도(鬱陵島))를 살펴보게 하였다.

왕이, 동해에 우릉도가 있는데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며 옛날에는 주현(州縣)을 두었던 곳으로 백성을 거주시킬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내급사(內給事)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돌아와서 암석이 많아 거주할 수 없다고 아뢰니, 그 의론이 잠잠해졌다.

동10월 환자 정함(내사, 환자)의 저택을 경명궁(慶明宮)으로 삼아 이어(移御)하였다.

왕이 신료(臣僚)의 거주하는 저택들로 경치가 좋다는 것을 들으면 빼앗아 이궁과 별관으로 삼았다. 함의 저택은 대궐 동남쪽에 있는데 집채가 2백여 간이고 누각이 높이 치솟아 금벽 단청 이 황홀하였는데, 왕이 빼앗아 경명궁으로 삼았다. 태사(太史)가, 그 지형이 개가 머리를 들고 주인을 짖는 형세여서 임어(臨御)하기에 마땅치 않다고 하였으나, 왕은 따르지 않고 드디어 이어하였다.

■정해년 의종 21년(송 효종 건도 3, 금 세종 대정 7, 1167)

◯3월 왕이 중미정(衆美亭) 남쪽 못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왕이 미행으로 금신굴(金身窟)에 이르러 나한재(羅漢齋)를 설치하였다. 현화사(玄化寺)로 돌아와 이공승(李公升)ㆍ허홍재(許洪材), 시승(誇僧) 각예(覺倪) 등과 중미정 남쪽 못에 배를 띄우고 담뿍 마시고 마음껏 즐겼다. 이에 앞서 청녕재(淸寧齋) 남쪽 산록에 정자각(丁字閣)을 짓고 중미정이라고 현판을 달았다. 중미정의 남쪽 골짜기에 토석을 쌓아 물을 괴게 하고, 언덕 위에 모정(茅亭)을 짓고 오리와 기러기에 갈대가 곁들여져, 강호(江湖)의 형상이 완연하였다. 그 가운데에 배를 띄우고 어린 아이들을 시켜 뱃노래와 어부노래를 부르며 서로 주고받게 하여 밤이 깊어도 돌아가기를 잊고 놀이와 구경을 마음껏 즐겼다.

시초에 중미정을 지을 때 일군들이 개인으로 양식을 가져왔는데, 한 일군은 몹시 가난해서 자급하지 못하여 일군들이 함께 밥을 나누어 먹었다. 하루는 그의 아내가 음식을 마련해서 가져다주며 말하기를,

“친한 분들을 불러다 같이 드십시오.”

하자, 그 일군은,

“집안이 가난한데 어떻게 이것을 마련하였소? 남에게 사통하고서 얻었는가, 남이 가진 것을 훔쳤단 말인가?”

하였다. 아내가 말하기를,

“용모가 추하니 누가 나와 사통하겠소? 천성이 졸렬하니 어찌 훔칠 수 있겠소? 머리를 잘라 팔아 왔을 뿐이오.”

하고는 자기 머리를 보이니, 일군은 흐느끼고 먹지를 못했으며, 듣는 사람들도 슬퍼하였다.

■경인년 의종 24년(송 효종 건도 6, 금 세종 대정 10, 1170)

◯8월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행행하니, 무신 정중부(鄭仲夫)ㆍ이의방(李義方)ㆍ이고(李高) 등이 난동을 일으켜 문신들을 대량 살해하고 왕을 위협하여 환궁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화평재(和平齋)에 행행하여 근행(近倖)의 문신들과 함께 술 마시고 시를 읊으며 돌아가기를 잊어 호종한 장졸들은 지쳐서 성이 났다. 대장군 정중부가 나가서 배회하자 견룡행수(牽龍行首) 산원(散員) 이의방ㆍ고 등이 따라가 중부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오늘 문신들은 득의하여 취하고 배부른데 무신들은 다 굶주리고 피곤하니 이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하니, 중부는 일찍이 수염을 태운 원한이 있었던 터라 드디어 흉모를 꾸몄다. 이 달 29일(병자)에 왕이 연복정(延福亭)에서 흥왕사(興王寺)로 가려고 하였는데 중부가 의방에게 말하기를,

“지금 거사해야 한다. 만약에 왕이 여기서 보현원으로 옮겨가면 기회를 놓치지 말라.”

하였다. 30일(정축)에 보현원으로 행행하려고 오문(五門) 앞에 이르러 시신(侍臣)을 불러 술을 들었다. 술이 얼근해지자, 왕이 무신들에게 결망(缺望 불만이 있어 원망함)이 있음을 알고 측근을 돌아보고,

“장하다. 이곳은 무술을 익힐 만하다.”

라고 말하고 무신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戲)를 하게 하였는데, 그것을 빌어 후하게 상을 내려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기거주(起居注) 한뇌(韓賴)는 무신들이 총애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수박희에 이기지 못했다 하여 뺨을 쳐서 모욕을 주었는데, 왕은 지어사대사 이복기, 좌부승선 임종식 등과 그것을 보고 기뻐하며 웃었다. 중부는 큰소리로 뇌를 힐난하기를,

“소응은 비록 무인이기는 하지만 벼슬이 3품인데 어찌 그토록 심하게 모욕을 주는가?”

하니, 왕이 중부의 손을 잡고 그를 달랬다. 이고가 칼을 뽑고 중부에게 눈짓을 하였는데, 중부가 그를 말렸다. 저녁에 이르러 어가가 보현원에 가까이 가자, 고와 의방이 먼저 가서 임금의 명령이라 속이고 순검군(巡檢軍)을 모아, 왕이 막 문으로 들어가고 군신(羣臣)이 물러가려 할 때 고 등이 종식과 복기를 문에서 손수 죽였다. 한뇌는 달아나 어상(御床) 아래에 숨었는데, 왕은 크게 놀라 환자 왕광취(王光就)를 시켜 금지시켰다. 중부 등이,

“화근인 한뇌가 아직 왕 곁에 있으니, 내보내어 죽이기를 청합니다.”

하자, 뇌는 손으로 어의(御衣)를 끌어당겼는데 고가 검을 뽑아 위협하여 끌어내어 참했다. 이리하여 호종한 문관들을 대량으로 죽이니, 승선 이세통(李世通), 내시 이당주(李唐柱), 잡단(雜端) 김기신(金起莘) 및 여러 환시(宦寺)들의 시체가 산같이 쌓였다.

처음에 중부 등이,

“우리들은 오른쪽 어깨의 옷을 벗고 복두(幞頭)를 벗되, 그렇게 하지 않은 자들은 다 죽이자.”

라고 약속하였기 때문에 무신으로 복두를 벗지 않은 자들 역시 많이 피살되었다. 시체를 호수 안에 던져 후세 사람들은 그곳을 명명하여 조정침(朝廷沈) 개성에서 동파역(東坡驛)으로 가는 20리 지점에 초현원(招賢院)이 있는데 그곳이 보현원의 옛터로 속칭 조정침이라 부른다. 이라 하였다. 왕은 대단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안하려고 하여 마침내 제장(諸將)에게 검을 내리니 무신들은 더욱 횡포해졌다. 김돈중을 먼저 알고 도망쳐 중부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만약에 돈중이 성 안으로 들어가 태자를 받들고 성을 닫고 굳게 버티며 난동을 일으킨 괴수를 잡기를 주청(奏請)한다면 일이 위태로워진다.”

하고 급히 발이 날랜 자를 보내어 돈중의 집을 탐지하니, 돈중은 돌아오지 않았었다. 중부 등이 매우 기뻐하여 우리 일은 잘되었다고 말하고서 그 도당을 남겨 행궁을 지키게 하고, 고ㆍ의방ㆍ소응 등은 용맹한 군사를 뽑아 곧장 경성(京城)으로 달려가서 대궐 안으로 들어가 추밀부사 양순정(梁純精), 사천감 음중인(陰仲寅), 감찰어사 최동식(崔東軾) 등 내직원료(內直員僚)를 잡아 모두 죽였다. 또 태자궁에 가서 요원(僚員) 김거실(金居實)ㆍ이인보(李仁甫) 등 10여 인을 죽이고, 사람을 시켜 길에서 다음과 같이 외치게 하였다.

“무릇 문관(文冠)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 할지라도 죽여버리고 씨를 남기지 말라.”

군졸들은 이때를 틈타 봉기하여 평장사 최부칭(崔裒稱)ㆍ허홍재(許洪材), 지추밀 서순(徐醇)ㆍ최온(崔溫), 상서우승(尙書右丞) 김돈시(金敦時), -돈시는 돈중의 아우다- 대사성(大司成) 이지심(李知深) 등 50여 인을 찾아내어 죽였다. 왕은 더욱 두려워하여 중부를 불러 난동을 멈추기를 의논하였으나 중부는 ‘네네’ 하면서 응답하지 않다가 드디어는 무기로 왕을 위협하여 환궁하였다.

사신(史臣) 유승단(兪升旦)은 이렇게 적었다.

“옛날의 명철한 임금은 문관과 무관을 왼팔과 오른팔같이 보고 피차간의 경중이 없었기 때문에 임금은 위에서 밝았고 신하는 아래에서 화합하였다. 의종은 불행하게도 아첨하고 경조한 무리가 측근에 늘어서 있어, 재초(齋醮)에 재물을 쏟고 정사하는 시간을 주색에 돌리고 풍월을 읊조리는 것으로 정사를 의논하는 것에 대신하여서 무인의 앙화가 닥쳐와, 마침내는 승여(乘輿)가 파천(播遷)하고 명대로 죽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으니, 비통하다.”

【안】 옛날의 문무는 두 갈래 길이 없었는데 후세에 나뉘어 둘이 되었다. 시절이 화평하면 문을 숭상하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무를 높여 서로 경중이 있어서 이로 말미암아 서로 알력하는 습성이 이루어졌다. 이른바 문사는 대부분 망령되게 경솔하고 무인은 대부분 거칠고 사나와, 임금이 한 군데만 치우치게 소중히 여겨 어거하는 데 마땅함을 잃게 되면, 그것은 난동을 가져오는 길이 된다. 이것은 의종이 멸망한 까닭이었고 후세 임금들의 밝은 거울로 삼을 만한 것이다.

○ 난동이 일어났을 때 문신들은 살륙을 면했다 하여도 대부분 잡혀서 욕을 당했는데, 다만 전 평장사 최유청(崔惟淸)ㆍ서공(徐恭) 등은 본래부터 무신에게 존경을 받아왔기 때문에 무신이 수검군을 시켜 그들의 저택을 둘러싸서 지키고 침입 폭행을 금지하게 하여 두 사람의 종족들은 다 화를 면했다. 전중급사(殿中給事) 문극겸(文克謙)이 성중(省中)에 숙직하고 있다가 변란의 소식을 듣고 도망쳤으나 군사에게 잡혔다. 극겸은 말하기를,

“나는 전 정언(正言) 문극겸이다. 왕께서 만약에 내 말을 따르셨다면 어찌 오늘에 이르렀겠는가? 날카로운 검으로 자결하고 싶다.”

하니, 제장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들이 전부터 이름을 들여오던 자다.”

하고 마침내 죽이지 말도록 시키고 궁중에 가두었다. 김돈중은 감악산(紺嶽山)에 도망가 숨었는데 중부 등이 현상을 걸어 잡아다가 마침내 죽였다. 돈중이 죽음에 임박하여 개탄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한(韓)ㆍ가(李)에 편들지 않았으니 사실은 죄가 없다. 다만 유시(流矢)의 변으로 화가 무죄한 자들에게까지 미쳤으니 오늘이 온 것은 마땅하다.”

병부 시랑 조동희(趙冬曦)는 서해도(西海道)로 사명을 받들고 갔었는데 변란의 소식을 듣고 동계(東界)에 가서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려고 하였는데, 철령(鐵嶺)에 다다르자 맹호(猛虎)가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고 추격하는 군사에게 잡히자 중부가 죽였다. 중부 등이 또 죽인 문신들의 집을 헐어 버리려고 하였는데 진준(陳俊)이 그것을 말리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원망한 것은 한ㆍ가 등 4~5인인데 지금 무죄한 자들을 죽인 것이 또한 너무 심했다. 만약에 그들의 집을 모조리 헐어 버린다면 그 처자들은 장차 어디에 의지하고 살겠는가?”

하였으나 의방 등은 듣지 않고 드디어 군사들을 풀어놓아 헐어 버렸다. 그 후부터 무인들의 상습이 되어서 만약 원수가 생기면 으레 그 집을 헐어버렸다.

사신 김양경(金良鏡)은 이렇게 적었다.

“정습명(鄭襲明)은 참소를 받아 떠나 버렸고 영행(侫倖)은 날로 나와 왕은 더욱 방자하고 절도가 없어졌다. 처음에는 격구로 중부와 친숙해지자 대간이 그것을 말했으나 듣지 않았고, 종당에는 사장(詞章)으로 한뇌(韓賴)와 친밀해져 무부(武夫)가 분노하고 원망하였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마침내는 한뇌가 난동을 불러일으켜서 중부의 손에 죽고, 조정의 신하들이 다 살해되었다. 대체로 왕이 좋아한 것은 처음과 끝이 달랐으나 난동을 가져온 것은 같다. 그러므로 임금이 좋아하는 것은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

9월 정중부 등이 왕을 거제(巨濟)로 추방하고, 익양공(翼陽公) 호(皓)를 왕으로 세웠다.

9월 초하루(무인)에 왕이 강안전(康安殿)에 들어가자 환자 왕광취(王光就) 등이 중부를 토벌할 것을 모의하였다. 일이 누설되어 중부가 또 내시와 환자 수십 인을 죽이고 광취 및 백자단(白子端)ㆍ영의(榮儀) 등의 목을 저자에 효시하였다. 당시의 총행(寵幸)은 목베어 죽여 거의 다 없어졌으나 왕은 수문전(修文殿)에서 태연하게 음악을 연주하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고(李高)ㆍ채원(蔡元) 등이 왕을 시해하려고 하였으나 양숙(梁叔)이 그것을 말렸다. 순검(巡檢)이 벽을 부수고 내탕의 진보(珍寶)를 훔쳤다. 중부가 왕을 핍박하여 군기감(軍器監)으로 옮기고 태자를 연은관(延恩館)으로 옮겼다. 2일(기묘)에 왕을 핍박하여 쫓아내어 왕은 필마로 거제로 물러났고, 태자를 진도로 몰아내고, 왕의 어린 손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왕의 애희(愛姬) 무비(無比)는 청교역(靑郊驛)에 도망쳐 숨었는데 중부 등이 죽이고자 하였으나, 태후(太后)가 굳이 간청해서 죽음을 면하고 왕을 따라갔다. 왕이 말 위에서 탄식하기를,

“만약에 일찍 문극겸의 말에 따랐더라면 어찌 이런 욕을 당하겠는가!”

하였다. 왕은 손위한 지 3년 만에 시해되었고, 수는 47, 시호는 장효(莊孝), 묘호는 의종이다. 중부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왕의 동복아우 익양공 호(晧)를 맞아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시키니, 이가 명종(明宗)이다.

정중부는 스스로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임극충(任克忠)을 평장사로, 문극겸을 우승선으로 삼았다.

왕이 수문전(修文殿)에 임어하는데 정중부ㆍ이의방 등이 시종하여 문극겸의 감금을 풀어 승선으로 삼아 비목(批目 관직 임명을 명단)을 쓰도록 하고 드디어 극충을 재상으로 삼고 중부가 부상(副相)이 되었다. 그 밖의 무신으로 양숙(梁淑)ㆍ이준의(李俊儀)ㆍ이소응(李紹膺)ㆍ고(李高)ㆍ이의방(李義方)ㆍ채원(蔡元) 등에게 모두 참정(參政)ㆍ추밀(樞密)ㆍ승선(承宣)ㆍ상시(常侍)ㆍ집주(執奏)ㆍ대헌(臺憲)을 배수했는데, 자품(資品)과 서열을 뛰어넘어서 화현(華顯)한 자리에 늘어서게 된 자들을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여러 무신들이 중방(重房)에 모여 문신으로 살아남은 자들을 불러 이고가 다 죽이고자 하였는데 중부가 그것을 말렸다. 중방이라는 것은 시초에는 목종(穆宗)이 6위(衛)의 직원을 두려고 마련하였던 것이요, 후에는 응양(鷹揚)ㆍ용호(龍虎) 2군(軍)을 두었는데 6위 위에 있었고, 후에 또 중방을 설치하여 2군과 6위 위에 있게 하여 대장군들이 모두 거기에 예속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무신이 정사를 다루게 되어 중방의 권한이 더욱 대단해졌고 고려의 대가 끝날 때까지 폐지하지 못했다. 극겸이 등용되고나서는 무신 역시 그에게 의지하여 고사(故事)를 많이 자문하였고, 또 딸을 의방의 아우에게 출가시켰기 때문에 계사년의 화에 온 집안이 다 해를 면했다. 문신 이공승(李公升) 등도 또한 그의 덕분으로 목숨을 보전하였다. 곧이어 용호군대장(龍虎軍大將)을 겸임하였으니, 문신이 장수의 소임을 겸한 것은 극겸부터 시작되었다.

동10월 대사(大赦)하였다.

○ 정중부ㆍ이의방ㆍ이고를 공신으로 삼아 전각(殿閣)에다 그 화상을 그렸다.

중부는 곧이어 중서시랑 평장사로 승진하였고, 또 문하평장을 가관(加官)하였다. 시초에 의종이 세 곳에 사제(私第)를 지었는데, 관북택(館北宅)ㆍ천동택(泉洞宅)ㆍ곽정동택(藿井洞宅)이 그것으로 거만의 재물을 거두어 모았다. 이때에 이르러 중부 등이 그것들을 나누어 차지하였다.

■신묘년 명종 광효왕(明宗光孝王)원년(송 효종7, 금 세종 대정, 1171)

◯춘정월 이의방이 대장군 한순(韓順) 등을 죽였다.

순(順)이 장군 한공(韓恭)ㆍ신대여(申大輿)ㆍ사직재(史直哉) 등과 몰래 맡하기를,

“의방 등이 조정의 신하들을 멋대로 죽여 해(害)가 충량(忠良)한 사람들에게 미치니, 의로운 일이 아니다.”

하였는데, 의방 등이 듣고서 그들을 죽였다.

이고가 난동을 모의하다 복주(伏誅)되었다.

고(高)가 부당한 뜻을 품고 악한 소인배들 및 중 수혜(修惠)ㆍ현소(玄素) 등과 몰래 결탁하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말하기를,

“대사가 성공한다면 너희들은 다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

하고, 드디어는 위제(僞制 거짓 제서(制書))를 만들었다. 왕이 여정궁(麗正宮)에서 연회를 베풀게 되자, 고는 당연히 그 연회에 참여하게 되어 몰래 수혜 등을 시켜 각각 칼을 소매 속에 감추고 담벼락 사이에 숨어 있게 하였다. 난동을 일으키려 할 때 장군 채원 등이 그 음모를 알고 그것을 의방에게 고했다. 의방은 본래 고가 자기를 핍박하는 것을 미워하던 터라, 원과 고 등이 궁문 밖에 오기를 기다렸다가 철퇴로 쳐 죽이고 그 도당을 나누어 잡아 주살하였고 고의 어미까지 죽였다. 그의 아비는 일찍이 고가 불초하다 하여 그를 아들로 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면했다. 원은 또 이번 일을 빙자해 조정의 신하들을 다 죽이기를 도모했으나 일이 누설되었고 의방은 또 원을 꺼려해서 마침내 원을 조정에서 참하고 그의 문객과 작은 무리들을 잡아 다 죽였다.

■계사년 명종 3년(송 효종 건도 9, 금 세종 대정 13, 1173)

◯추8월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金甫當)이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 등을 토벌하여 폐왕을 복위시키기를 꾀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피살되었다. 중부 등이 드디어 문관들을 대량 살해하였다.

보당은 본래부터 담기가 있어 중부 등이 그를 기탄하여, 간의 대부에서 동북면 병마사로 내보냈다. 보당은 그래서 녹사(錄事) 이경직(李敬直)ㆍ장순석(張純錫) 등과 모의하여 마침내 동쪽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중부ㆍ의방 등을 토벌하여 전왕을 다시 세우려고 마침내 순석 및 유인준(柳寅俊)으로 하여금 남로 병마사를 삼고 배윤재(裵允材)를 서해도 병마사로 삼아 동시에 군사를 일으키기로 약속하였고, 동북면 지병마사(東北面知兵馬事) 한언국(韓彦國) 역시 군사를 일으켜 그에 호응하였다. 순석ㆍ인준 등은 거제에 이르러 전왕을 모시고 경주에 나와 있었다. 중부ㆍ의방 등이 그 소식을 듣고 장군 이의민(李義旼)과 산원(散員) 박존위(朴存葳)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남로로 가게 하고 또 군사를 서해도로 보내어 평정을 도모하였다. 9월 7일(정유)에 한 언국이 관병에게 잡혀 죽어 보당은 형세가 더욱 고립되었다. 13일(계묘)에 안북부(安北府)에서 보당을 잡아 경사로 보내 의방 등이 국문하고 죽였다.

시초에 보당의 모의는 오직 내시 진의광(陳義光)ㆍ배윤재 등 수인이 알았을 뿐이었는데 보당이 죽기에 임박하여 거짓으로,

“무릇 문신치고 누가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겠는가?”

라고 말하여, 모두가 주륙되고 혹은 강물에 던져죽이기도 해서 순일간(旬日間)에 문사들은 죽임을 당하고 다 없어졌다. 이의방은 윤인첨(尹鱗瞻)이 그 모의에 참여하였나 의심하고 군사를 시켜 포박하게 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유응규(庾應圭)가 가서 제장을 만나 말하기를,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예의를 무시하고 그 국가를 보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소. 또 옛날에는 형벌을 대부에게는 가하지 않았소. 공 등은 나라를 바로잡을 뜻을 가졌으니, 마땅히 옛날을 본받아야지 어찌 천한 군졸을 시켜 대신을 묶어서 욕보이게 합니까? 또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면 반드시 앙화가 있게 마련이오.”

하였다. 제장이 말하기를,

“경인년의 일을 공이 주청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죽었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인첨을 놓아주었다. 문극겸 역시 손을 써서 구제하여 살려낸 사람이 많았다. 이리하여 중외가 흉흉하여 조석의 일을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진준(陳俊)ㆍ이준의(李俊儀) 등 역시 무도함을 스스로 알고서 의방에게 살륙을 중지할 것을 청했다. 낭장(郞將) 김부(金富) 역시 중부와 의방에게 말하기를,

“하늘의 뜻은 알 수 없고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데, 힘을 믿고 의를 버려 의관(衣冠 문관을 말한다)을 없애버린다면 세상에 어찌 김보당 같은 자가 안 나오겠는가? 우리들 중에 자녀가 있는 자들은 문관들과 통혼하여서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것이 오래갈 수 있는 방법이오.”

하니, 중부 등이 그 말에 따랐는데, 그로 말미암아 화가 좀 멎었다. 후에 준의 손자 식(湜)ㆍ화(澕)ㆍ온(溫)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현직(顯職)에 오르고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부의 아들 취려(就礪)와 손자 전(佺)은 2대에 걸쳐 수상(首相)이 되었고, 그 후손들 중에는 현달(顯達)한 자들이 많이 나와 세상에서는 음덕(陰德)이라고 여겼다.


동사강목 제9하

■명종 4년(송(宋) 효종(孝宗)원년 금(金) 세종(世宗)14, 1174)

◯춘정월 여러 절 중들이 이의방(李義方)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중광(重光)ㆍ홍호(弘護)ㆍ귀법(歸法)ㆍ홍화(弘化) 등의 절 중 2천여 명이 성의 동문(東門)에 모이니, 문이 닫히었다. 이에 성밖의 인가를 불태워 숭인문(崇仁門)을 연소시키고 들어가 의방 형제를 죽이려 하였다. 의방이 이것을 알고 부병(府兵)을 모아 이를 쫓고 중 1백여 명을 죽였으나 부병도 많이 죽었다. 의방이 병사를 보내어 여러 절을 불태우고 그 기물을 취하니, 준의(俊儀)가 이를 말렸으나 의방은 화를 내고 욕을 하면서 따르지 않았다. 중들이 중도(中道)에서 요격(邀擊)하여 그 기물을 빼앗으니, 부병이 많이 죽었다. 준의가 의방을 꾸짖기를,

“너에게 세 가지 큰 죄악이 있다. 임금을 내쫓아 죽이고 그 제택(第宅)과 희첩(姬妾)을 취함이 첫째요, 태후(太后)의 여동생을 협박하여 간통함이 둘째이며, 나라의 정치를 전천(專擅)함이 그 셋째이다.”

하였다. 의방이 크게 노하여 칼을 뽑아 죽이려 하는데, 문극겸(文克謙)이 해명하여 그만두었다. 의방은 칼로 스스로 자기의 가슴을 베었다. 정중부(鄭仲夫)가 준의를 잡아 죽이려 하니, 그의 처가 이를 말리면서 말하기를,

“그들 형제의 일이 당신에게 무슨 상관입니까?”

하여 준의는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추9월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ㆍ이의방을 쳤다.

위총은 의종(毅宗) 말년에 병부 상서(兵部尙書)로서 서경 유수로 나갔다. 이때 이르러, 중부 등이 임금을 죽이고 장사하지 않자,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치려고 꾀하였다. 9월 25일(기유)에 동북 양계(東北兩界) 여러 성의 병사를 격문으로 부르기를,

“듣건대, 서울의 중방(重房)이 북계의 여러 성이 매우 거세고 나쁘다 하여 치려고 이미 대병(大兵)이 출발하였다 하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당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각각 병마(兵馬)를 규합하여 속히 서경으로 달려오라.”

하니, 이에 절령(岊嶺 지금의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호응하였다.

12월 정균(鄭筠)이 이의방을 죽였다.

의방이 그의 딸을 동궁(東宮)에 들이고 더욱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여 조정의 정사를 탁란(濁亂)하게 하니, 여러 사람들이 분개하게 여기고 원망하였다. 정중부(鄭仲夫)는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근심하여 직위를 사양하고자 하여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의방의 형제가 술을 가지고 중부의 집에 이르러 정성을 다하여 부자(父子)되기를 약속하는데 말이 매우 지극하고 절실하여 중부는 그제야 안심은 되었으나,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생각은 가셔지지 않았다. 때에 윤인첨(尹鱗瞻)이 서교(西郊)에서 군사를 조련하고 있었는데 승도(僧徒)들도 종군(從軍)하였다. 의방이 마침 선의문(宣義門) 밖에 나가자 균(筠)이 중 종참(宗旵) 등을 비밀히 달래어, 호소할 것이 있다고 칭탁하여 그 뒤를 따르다가 틈을 보아 의방을 베게 하고는 준의(俊儀)와 그 당여들도 잡아서 모두 죽였다. 승도들이 ‘적신(賊臣)의 딸을 동궁(東宮)의 배필로 삼을 수 없다.’고 아뢰어 의방의 딸을 내쫓았다. 그 후, 의방의 문객(門客)이 많이 무장(武將)이 되었는데 복수하려는 자가 많이 있어 중부는 종참 등을 해도로 귀양보냈다.

■을미년 명종 5년(송 효종 순희 2, 금 세종 대정 15, 1175)

◯12월 정중부(鄭仲夫)에게 궤장(几杖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였다.

중부의 나이가 이미 70이 되었으나 벼슬에서 물러나려 하지 않자, 낭중(郞中) 장충의(張忠義)가 아첨하는 뜻으로 달래며 말하기를,

“재상(宰相)에게 궤장을 하사하면 비록 나이가 70이라도 치사(致仕)하지 않습니다.”

하니, 중부가 좋아하며 예관(禮官)을 종용하여 한(漢)나라 공광(孔光)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궤장을 하사하게 하여 나라 일을 모두 관결(關決)하고 때로 중방(重房)에 앉아 사람의 죄를 의논하였는데, 백관들이 문에 나아가 축하하였다.

■병신년 명종 6년(송 효종 순희 3, 금 세종 대정 16, 1176)

◯춘정월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에 도적이 일어났다.

이때에 국가의 내란으로 호령이 행해지지 않아 도적이 무리로 일어났다.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 등이 그 당여(黨與)를 불러 모아 스스로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 일컫고 공주(公州)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사신을 보내어 선유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다시 대장군 정황재(丁黃載) 등을 보내어 장사(壯士) 3천을 모집하게 하고 이를 거느리고 남적을 치게 하였으나 싸움이 불리하자 승군(僧軍)을 모집하여 군사를 더 보태기를 청하였다.

하6월 명학소(鳴鶴所)를 승격시켜 충순현(忠順縣)으로 삼았다.

조정에서는 서적(西賊)이 아직 평정되지 않음을 걱정하고 있는데 남적(南賊)이 다시 일어나니, 초안(招安)하여 이를 위로하려고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삼고, 내시(內侍) 김윤실(金允實)을 위(尉)로 삼아서 이를 무마하도록 하였다.

■기해년 명종 9년(송 효종 순희 6, 금 세종 대정 19, 1179)

장군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ㆍ송유인을 토벌하여 이를 베어 죽였다.

정균(鄭筠)이 은밀히 공주에게 장가들기를 꾀하자 왕이 이를 근심하였다. 장군 경대승이 중부 등의 소위를 분하게 여겨 이를 토벌하려 벼르고 있었으나 송유인을 두려워하여 틈을 얻을 수가 없었다. 유인이 문극겸(文克謙)과 한문준(韓文俊) 등을 배척함에 이르러 크게 인심을 잃었고 조정(朝廷)은 무서워 곁눈질만 하고 있었다. 견룡(牽龍) 허승(許升)은 용력(勇力)이 있어 정균이 아꼈으나, 허승과 대정(隊正) 김광립(金光立) 등도 또한 모두 대승과 좋게 지내는 사이였다. 대승이 승에게 말하기를,

“내가 흉한 무리를 제거하려 하는데 네가 따른다면 일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승이 이를 승낙하였다. 대승이 말하기를,

“장경회(藏經會)가 끝나는 날 밤에 숙위하는 군사들은 반드시 모두 곤하게 잠들 것이다. 내가 죽기를 결심한 군사 30여 인을 화의문(和義門) 밖에 매복시킬 터이니 네가 먼저 정균을 안에서 죽이고 휘파람 소리로 신호를 하면 내가 복병을 일으켜 호응하겠다.”

하였다. 밤 4고(四鼓 새벽 2시 전후)에 승은 균이 숙직하는 곳에 들어가 죽이고 휘파람을 불었다. 대승이 결사대를 이끌고 궁궐 담을 넘어들어가 대장군 이경백(李景伯)과 지유(指諭) 문공려(文公呂)를 죽이고 보이는 대로 죽이니 부르짖는 소리로 궁중이 떠들썩하고 칼날이 맞부딪치므로 왕이 크게 놀랐다. 대승이 왕의 침전(寢殿) 밖에 이르러 큰 소리로 아뢰기를,

“신등이 사직(社稷)을 호위하는 것이니, 청컨대 상께서는 두려워하지 마옵소서.”

하였다. 왕이 궁문(宮門)에 나와 경승 등을 불러 손수 술잔을 내리니, 대승은 금군을 풀어서 중부와 유인 등을 체포하기를 청하였다. 중부 등이 변란을 듣고 도망하여 민가(民家)에 숨었으나 모두 잡아다가 베어 죽이고 목을 저자에 효시(梟示)하였다. 대승은 드디어 중부ㆍ유인 부자와 사가(四家)의 무리를 샅샅이 잡아 모두 죽였다. 조정 벼슬아치들이 대궐에 나아가 축하하니, 대승이 말하기를,

“임금을 시해한 자가 아직도 있는데 어찌 축하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의민(李義旼)이 이를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은밀하게 용사를 모아 이에 대비하고, 이어 마을에 대문(大門)을 세워 밤을 경계하면서 여문(閭門)이라 일컬었으며, 방리(坊里)가 모두 이에 따라 대문을 세웠다.

무신들이 혹 선언(宣言)하기를,

“대승이 제마음대로 정(鄭)과 송(宋)을 죽인 것은 옳지 않다.”

하니, 대승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결사대 1백여 인을 불러들여 문하(門下)에 두고서 이를 도방(都房)이라 일컫고, 긴 목침과 큰 이불을 만들어 돌려가며 직숙(直宿)하게 했는데, 혹 스스로 함께 덮는 정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벼슬을 사퇴하고 집에 있었으나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결정에 관여하였다. 뒤에 허승과 김광립이 공로를 믿고 교만하여 은밀히 불량배를 양성하여 동궁(東宮)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뒷벽에서 잠을 자며 밤새도록 노래를 불러대자 대승이 이를 싫어하여 승을 불러 베고 또한 길에서 광립을 죽이고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승 등이 불궤(不軌)하기에 아뢸 틈이 없이 베었습니다.”

하였다. 왕이 근신(近臣)으로 하여금 위로하고 타일렀으며 재상(宰相) 이하도 그 집에 가서 축하하니, 대승이 차츰 스스로 안심하고 군사의 호위를 파하였다.

○경대승이 정중부ㆍ송유인을 제거한 이래로 마음속으로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까 하여 항상 사람을 시켜 마을과 거리에 숨어 살피게 하고 뜬소문이 있으면 문득 잡아 가두고 국문하여 여러 번 큰 옥사를 일으켰는데 형벌이 심히 준엄하였다. 왕이 이를 가엾게 여겨 사령을 내리니, 중외가 크게 기뻐하였다.

■신축년 명종 11년(송 효종 순희 8, 금 세종 대정 21, 1181)

◯윤3월 이의민(李義旼)이 병을 핑계하고 귀향하였다.

앞서 의민이 북계(北界)에 나아가 진수(鎭守)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나라에서 경대승(慶大升)을 죽였다.”

고 잘못 전하였다. 의민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죽이려고 했으나 실행하지 못했는데, 누가 나보다 선수를 썼느냐?”

하였다. 대승이 이 말을 듣고 앙심을 품으니, 의민이 돌아와서는 크게 두려워하여 스스로 불안을 느껴서 병을 핑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계묘년 명종 13년(송 효종 순희 10, 금 세종 대정 23, 1183)

◯추7월 장군 경대승(慶大升)이 졸하였다.

대승은 청주인(淸州人)으로 일찍이 큰 뜻이 있어서 가산에 힘쓰지 않았다. 아비 진(珍)은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으나 성질이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남의 전답을 많이 빼앗았는데, 죽게 되자 대승이 전답 문서를 모두 선군(選軍)에 바치고 하나도 갖는 것이 없으니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정중부(鄭仲夫)를 죽이게 되자 왕이 비록 겉으로 남다른 은총을 보였으나 속으로는 실로 꺼려서 청하는 일에 굽혀가며 좇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많이 붙좇아서 따랐으나 학식(學識)과 용략(勇略)이 있는 자가 아니면 대승이 번번이 이를 거절하니 무관들이 모두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다. 나이 30에 졸하니 길가는 사람들이 슬퍼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사람이 고발하기를 ‘대승의 도방(都房)이 장차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하므로 왕이 명하여 이들을 체포하게 하니 모두 60여 인이었다. 이들을 엄중히 고문하고 아울러 먼 섬으로 귀양보냈는데, 도중에 많이 죽었다.

■갑진년 명종 14년(송 효종 순희 11, 금 세종 대정 24, 1184)

◯2월 이의민(李義旼)을 소환하였다.

의민이 경대승을 두려워하여 여러 차례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대승이 죽자 왕이 그가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중사(中使)를 보내어 타이르게 하고, 공부 상서(工部尙書)로 기용해서 불러들였다. 편전(便殿)에서 인견하니, 중외(中外)가 모두 왕의 유약함을 안타깝게 여겼다.

■명종 20년(송(宋) 광종(光宗)원년, 금(金) 장종(章宗) 원년 1190)

◯추8월 내외(內外)의 사형수를 감형(減刑)하여 해도(海島)에 나누어 귀양보냈다.

고려의 형정(刑政)은 대체로 관대하였는데 왕(명종) 때에 더욱 심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노(私奴) 평량(平亮)은 평장사(平章事) 김영관(金永寬)의 종이었다. 집이 부유하여 권신에게 뇌물을 주고 면천(免賤)하여 산원동정(散員同正)이 되었는데 그의 처는 곧 소감(少監) 왕원(王元)의 여종이었다. 평량이 천적(賤迹)을 없애려고 원의 집을 멸종시키고 그 아들을 위하여 판관(判官) 박유진(朴柔進)의 딸을 혼취하였다. 어사대(御史臺)에서 잡아 국문하여 귀양보냈다.

■계축년 명종 23년(송 광종 소희 4, 금 장종 명창 4, 1193)

◯추7월 남방(南方)에서 도적이 일어나니, 대장군(大將軍) 전존걸(全存傑) 등을 보내어 이를 토벌하였다.

이때 남방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는데, 그 중에 극렬한 자 김사미(金沙彌)는 운문(雲門) 산 이름으로 지금의 청도군(淸道郡) 동쪽 96리에 있다 에 웅거하고, 효심(孝心)이란 자는 초전(草田) 지금은 미상(울산) 에 웅거하여 망명(亡命)한 자들을 불러 모아 주현(州縣)을 협박하고 약탈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근심하여 대장군 전존걸에게 명하여 장군 이지순(李至純)ㆍ이공정(李公靖)ㆍ김척후(金陟候)ㆍ김경부(金慶夫)ㆍ노식(盧植) 등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지순은 의민(義旼)의 아들이다. 공정ㆍ경부 등은 적을 치다가 패배하였다. 왕은 다시 상장군(上將軍) 최인(崔仁)을 착적병마사(捉賊兵馬使)로, 대장군(大將軍) 고용지(高湧之)를 도지병마사(都知兵馬事)로 삼아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가서 이를 정토하게 하였다.

■갑인년 명종 24년(송 광종 소희 5, 금 장종 명창 5, 1114)

이의민(李義旼)에게 공신(功臣)의 호를 내렸다.

양부(兩府)의 문무관(文武官)이 모두 그의 집에 가서 축하하였다. 의민이 전주(銓注)를 천단하여 정사가 뇌물로써 이루어지고 지당(支黨)이 연결되매 조정 신하들은 누구도 감히 어찌 하지 못하였다. 백성들의 주거를 많이 점령하고, 크게 제택(第宅)을 지으며, 남의 전토(田土)를 빼앗아 탐학(貪虐)을 마음대로 하니 중외(中外)가 떨며 두려워하였다. 일찍이 탁치교(槖馳橋)로부터 저교(猪橋)까지 둑을 쌓아 버드나무를 심으니, 사람들이 ‘신도재상(新道宰相)’이라 일컬었다. 여러 자식도 아비를 의지하여 횡포하고 방자하였는데, 지영(至榮)과 지광(至光)이 더욱 심하여, 세상에서는 이들을 ‘쌍도자(雙刀子)’라 하였다. 지영은 장군이 되어 생살을 제멋대로 하였는데, 길에서 아름다운 부인을 만나면 문득 종자(從者)에게 안고 가도록 하여 욕을 보이고야 말았다.

■병진년 명종 26년(송 영종 경원 2, 금 장종 승안(承安) 원년, 1195)

◯하4월 장군(將軍) 최충헌(崔忠獻)이 그의 아우 충수(忠粹)와 함께 이 의민(李義旼)을 목베고, 그의 삼족(三族)을 죽이고, 드디어 왕궁(王宮)을 포위하여 조정 신하를 대량 살해하였다.

이의민은 흉악하고 방자함이 날로 심하고, 그의 아들 지영은 왕의 폐희(嬖姬)를 핍박하여 간음하여도 왕이 이를 죄주지 못하니, 조야(朝野)가 몹시 통분하였다. 지영이 일찍이 동부녹사(東部錄事) 최충수의 집 비둘기를 빼앗은 일이 있었다. 충수는 시기심이 많고 음험하고 날래고 사나왔다. 그의 형 충헌은 용감한 것으로 별초도령(別抄都領)에 선보(選補)되었는데 여러 차례 벼슬을 옮겨 섭장군(攝將軍)에 이르렀다. 이때 와서 충수가 충헌에게 말하기를,

“의민의 4부자는 실로 국적(國賊)인데, 내가 그들을 베고자 하니 어떻습니까?”

하니, 충헌이 어렵게 여겼다. 충수가 말하기를,

“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중지할 수 없습니다.”

하니, 충헌도 그렇게 여겼다. 그에 마침 왕이 보제사(普濟寺)로 행행하는데 의민이 병을 핑계하고 호종(扈從)하지 않고 남몰래 미타산(彌陁山)의 별장으로 갔다. 충헌과 충수 및 그 생질인 대정(隊正) 박진재(朴晉材), 족인(族人) 노석숭(盧碩崇) 등이 소매 속에 칼을 감추고 별장의 문 밖에서 기다렸다. 의민이 돌아가려고 문 밖에 나오자 충수가 뛰어들어가 찔렀으나 맞지 않아 충헌이 바로 앞으로 나아가 목을 베니, 종자(從者)들이 모두 도망하였다. 충헌이 석숭을 시켜 의민의 머리를 가지고 빨리 서울로 들어가서 저자에 효시하도록 하였는데 보는 자가 놀라서 떠드니, 소리가 서울안에 진동하였다. 호종하는 자들이 변고를 듣고는 몰래 도망하므로 왕이 가마를 재촉하여 궁으로 돌아왔다. 충헌 등이 말을 달려 칼을 뽑아들고 십자가(十字街)에 이르러 장군 백존유(白存儒)를 만나 사실대로 알리니 존유가 즐거이 그들을 따라 장졸을 불러모았다. 충헌 등이 군졸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적신(賊臣)을 벤 것을 아뢰니, 왕이 이들을 위로하고 타일렀다. 이에 대장군 이경유(李景儒)ㆍ최문청(崔文淸) 등과 함께 나머지 무리들을 나누어 체포하기를 청하여 지순ㆍ지광은 복주(伏誅)되었고 지영은 서안부(西安府)로 달아났는데 사람을 보내어 쫓아가 목을 베어 서울로 올려보내고, 또 경주(慶州)에 사람을 보내어 의민의 삼족을 죽이게 하였다.

충헌 등이 의민의 잔당(殘黨)을 나누어 잡을 때에 이경유 등과 인은관(仁恩館)에 모여 앉았는데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평장사(平章事) 권절평(權節平)ㆍ손석(孫碩), 상장군(上將軍) 길인(吉仁) 등이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

하고, 또 고하기를,

“경유 등도 다른 음모가 있다.”

하였다. 충헌이 곧 절평의 아들 장군 준(準)과 손석의 아들 장군 홍윤(洪胤) 등을 잡아다가 죽이고 또한 경유를 앉은 자리에서 목 베었다. 절평과 석 및 장군 권윤(權允)ㆍ유삼상(柳森相), 어사중승(御史中丞) 최혁윤(崔赫尹) 등도 잡아서 모두 죽였다. 길인은 수창궁(壽昌宮)에 있다가 변고를 듣고 장군 유광(兪光)ㆍ박공습(朴公襲) 등과 함께 무고(武庫)로 나아가 무기를 금군(禁軍)과 환관ㆍ노예 1천여 인에게 주면서 타이르기를,

“지금 충헌이 난을 일으켜 죄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니 화가 장차 너희들에게 미칠 것이다. 마땅히 각기 힘을 다하라.”

하였다. 이에 무리를 거느리고 궁궐 문을 나가서 시가(市街)를 향하니, 충헌 등이 군사를 몰아서 맞아 싸웠는데, 결사대 10여 인으로 전봉(前鋒)을 삼아 칼을 휘두르고 크게 부르짖으면서 돌격(突擊)하여 나아가니, 길인의 무리들이 크게 무너졌다. 길인 등이 수창궁으로 달려들어가 항거하여 지켰다. 충헌 등이 포위하여 공격하니, 길인이 두려워하여 담을 넘어 도망쳐버렸다. 왕이 사람을 시켜 대궐 문을 열고 충헌을 부르니, 충헌 등이 길인이 대궐 안에 있을까 의심하여 낭장(郞將) 최윤광(崔允匡)을 시켜 들어가 왕에게 아뢰기를,

“적신(賊臣) 의민이 발호(跋扈)하므로 신등이 군사를 일으켜 목베었습니다. 그 무리들이 신을 꺼리어 도리어 해를 가하고자 하니, 청컨대 궁에 들어가서 수색하여 잡게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드디어 윤광을 시켜 군사를 풀어 함부로 들어가서 닥치는대로 죽이니, 넘어진 시체가 낭자하였다. 유광과 공습은 자기 목을 찔러서 죽었다. 왕의 좌우(左右)가 모두 뿔뿔이 도주하고 다만 소군(小君)과 궁희(宮姬) 몇 사람만 왕의 곁에서 모시고 울고 있을 따름이었다. 길인은 북산(北山)으로 도주하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다. 충헌은 또한 참정(參政) 이인성(李仁成), 승선(承宣) 문적(文廸)ㆍ최광유(崔光裕), 대사성 이 순우(李純祐) 등 36인을 잡아 모두 죽였다. 문적의 처 최씨(崔氏)가 쌓인 시체 속에서 남편의 시체를 찾아 머리에 이고 가니,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충헌이 이를 듣고 열녀라 하여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또 판위위사(判衛尉事) 최광원(崔光遠) 등 4인을 남쪽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충헌이 많은 조정 신하를 죽이매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니, 사신을 모든 도(道)에 보내어 이를 위로하고 편안하게 하였다.

○ 최충헌(崔忠獻)이 왕의 서자승(庶子僧) 6명과 내시(內侍) 이분(李芬) 등 50명을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

국가 제도에 궁인(宮人)이 왕을 모시다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데 소군(小君)이라 하였다. 왕이 일찍이 여러 폐첩의 아들을 모두 머리를 깎아 유명한 절간을 선택하여 주지(住持)하게 하였는데 이들이 궁중에 출입하며 권세를 부리니 요행(僥倖)을 바라는 자가 많이 아부하였다. 에 이르러 충헌은 소군인 홍기(洪機)ㆍ홍추(洪樞)ㆍ홍규(洪規)ㆍ홍균(洪鈞)ㆍ홍각(洪覺)ㆍ홍이(洪貽) 등이 궁궐 안에 있으면서 정치에 간여하므로 왕에게 아뢰어 본사(本寺)로 돌려보내고, 또한 분(芬) 등이 세력을 믿고 승진을 요구하므로 내쫓았다.

6월 최충헌이 스스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이에 앞서 충헌이 봉사(封事) 10조를 헌상(獻上)하였다.

1. 신궁(新宮)으로 옮겨 거처할 것.

2. 관제(官制)를 감하여 덜고, 적격자를 헤아려 제수(除授)할 것.

3. 빼앗은 공사전(公私田)은 모두 본 주인에게 돌려줄 것.

4. 유능한 관리를 가려 외직에 임명하고, 세력 있는 집안이 백성들의 가산(家産)을 파산시키지 못하도록 할 것.

5. 모든 도의 공진(供進)을 금지시키고 오로지 민정을 살피는 것으로 직책을 삼게 할 것.

6. 여러 중들을 물리쳐 궁궐에 발을 딛지 못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곡식으로 이식을 늘리지 못하게 할 것.

7. 양계(兩界)ㆍ오도(五道)에 신칙하여 관리들의 잘하고 잘못한 것을 장계로 아뢰게 할 것.

8. 사치(奢侈)를 금할 것.

9. 비보(裨補) 사찰 이외의 절은 모두 삭거(削去)할 것.

10. 성대(省臺)를 가리되 바른 말하는 자로 하여금 조정에 있게 할 것.

등을 글로 써서 올리니, 왕이 가납(嘉納)하였다.


동사강목 제10상

■명종 27년(송(宋) 영종(寧宗) 3, 금(金) 장종(章宗) 2, 1197)

최충헌이 최충수를 죽였다.

처음에, 태자가 창화백(昌化伯) 우(祐)의 딸에게 장가들어 비(妃)로 삼았는데, 우는 대방공(帶方公) 보(俌)의 증손으로, 명종의 딸에게 장가들어 비를 낳았었다. 충수가 자기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삼으려고 왕에게 굳이 청하니, 왕이 기꺼이 들어 주지 않았었다. 충수가 협박하자 왕이 부득이 태자비를 내쫓으니 비는 목메어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고, 왕도 눈물을 흘리니 궁중(官中)이 애통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자비가 드디어 평복으로 궁궐 밖으로 나가자 충수는 기일을 정하고 공인(工人)을 모아 장구(粧具)를 많이 마련하였다.

충헌이 이 말을 듣고 술을 가져다 충수에게 먹이고 얼근했을 때 비유로 깨우쳐 말하기를,

“지금 우리 형제의 권세가 일국을 좌우하고 있지만 가계(家系)가 본래 미천한데, 만일 너의 딸을 동궁(東宮)의 배필로 삼는다면 비방하는 말이 없겠느냐? 또 태자가 배필을 맞이한 지 여러 해인데 하루아침에 이별하게 한다면 인정으로도 어떠하겠느냐? 지난번에 이 의방이 그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삼았다가 마침내 남의 손에 죽었는데, 지금 그 전철(前轍)을 밟으려고 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느냐?”

하니, 충수도 그 말을 옳다고 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후회하므로, 그의 어머니가 또 충헌이 하던 말로 만류하니 충수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부인들이 알 바가 아니다.”

하며, 손으로 밀어뜨려 땅에 넘어지게 하였다. 충헌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죄는 불효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는 말로 타이를 수가 없으니 내일 아침에 나의 무리를 시켜 광화문(廣化門)에서 기다렸다가, 그의 딸을 들어가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하였다. 이 사실을 어떤 사람이 충수에게 밀고하니, 충수가 말하기를,

“형이 나를 제압하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을 믿기 때문이니, 내일 아침에 내가 그의 무리들을 소탕하겠다.”

하였다. 충헌이 드디어 박진재ㆍ노석숭(盧碩崇)ㆍ김약진(金躍珍) 등과 더불어 군사 1천여 명을 인솔하고 밤을 이용하여 광화문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말하기를,

“충수가 내일 아침에 난리를 꾸미려고 하므로 내가 사직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문지기가 이 사실을 알리니, 왕이 크게 놀래어 곧 명하여 문을 열게 하고 이들을 맞아들여 구정(毬庭)에 둔치게 하고, 또 무고(武庫)의 병기를 내어 금군(禁軍)에게 주어 방비하게 하였다.

새벽에 충수가 그의 무리 1천여 명과 더불어 십자가(十字街)에 둔쳤다가 충헌의 군사와 흥국사(興國寺) 남쪽에서 만나 대전하였는데, 진재와 석숭 등은 서로 호응하여 앞뒤에서 협공하고, 충헌은 어고(御庫)의 대각노(大角弩 활의 한 가지)로 마구 쏘니, 충수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 충수가 말하기를,

“오늘의 패전은 천운이다.”

하고는 보정문(保定門)으로 달려가 빗장을 자르고 탈출하여 장단(長湍)을 건너 파평(坡平)에 이르러 임진강(臨津江) 남쪽에 웅거하여 충헌을 대항하려고 하였는데, 추격하던 자가 이를 참살하여 그 수급을 서울로 전해왔다. 이로부터 안팎의 대권(大權)이 모두 충헌에게로 돌아갔다.

■신종 정효왕(神宗靖孝王) 원년(송 영종 경원 4, 금 장종 승안 3, 1198)

◯하5월 공사(公私)의 노예가 난리를 모의하므로 붙잡아 죽였다.

사가의 종 만적(萬積) 등 6인이 북산(北山)에서 나무를 하면서 공사(公私)의 노예들을 모아 놓고 모의하기를,

“경계(庚癸)의 난리 이래로 높은 벼슬아치[朱紫]가 천한 노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상(將相)이 어찌 씨가 있으며, 우리들이라 해서 어찌 채찍을 맞으면서 뼈아픈 고역을 치러야만 되겠는가?”

하니, 모든 종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겨 황지(黃紙) 수천 장을 오려서 모두 ‘정(丁)’자를 새겨 표지를 삼고 약속하기를,

“흥국사에서 모여 구정(毬庭)으로 몰려가서 먼저 최충헌 등을 죽이고 이어서 각기 자기의 주인을 쳐죽인 후에 종의 문서를 불태워 삼한(三韓)에 천한 사람이 없게 되면 공경ㆍ장상이라도 모두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기일에 모인 사람이 수백 명도 되지 않자 성사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다시 보제사(普濟寺)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는데, 율학 박사(律學博士) 한충유(韓忠愈)의 종 순정(順貞)이 충유에게 고하니, 충유가 충헌에게 고하여, 드디어 만적 등 1백여 명을 체포하여 강물에 던져 죽였다.

■희종 성효왕(熙宗成孝王) 원년 (송 영종 원년, 금 장종, 1205)

◯동12월 최충헌에게 특진시중 진강군개국후(特進侍中晉康郡開國侯)를 더하였다.

충헌에게 내장전(內庄田 궁궐에 속한 논과 밭을 가리킨다) 1백 결(結)을 하사하고, 우모일덕안사제세공신 문하시중 진강군개국후 식읍삼천호 식실봉삼백호(訏謨逸德安社濟世功臣門下侍中晉康郡開國侯食邑三千戶食實封三百戶)를 제수하였다. 충헌이 정권을 천단하여 위엄이 일국에 떨치니 뇌물을 바치는 길을 크게 열고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여 주택ㆍ의복(衣服)ㆍ거마(車馬) 따위를 참람하게 사치하니, 공리(功利)를 탐내는 무리들은 충헌에게 서로 다투어 붙좇았다. 충헌이 모정(茅亭)을 남산(男山)지금의 개성부 동쪽에 있다 에 있는 시골 집 곁에 짓고 소나무 두 그루를 심었는데, 급제(及第) 최이(崔頤)가 ‘쌍송시(雙松詩)’를 짓고 문사들이 모두 화답하였다. 충헌이 기유(耆儒) 백광신(白光臣) 등을 시켜 등급을 정하도록 하였다. 급제 정공분(鄭公賁)이 장원을 하자 충헌이 그 시를 왕에게 아뢰니, 공분을 불러 내시(內侍)에 소속시켰다.

직한림(直翰林) 이규보(李奎報)는 모정기(茅亭記)를 지어 이를 찬미하였다.

규보는 황려인(黃驪人)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9세에 글을 잘 지어 기동(奇童)이라 불리었고 차츰 자라면서 경사(經史)ㆍ백가(百家)ㆍ불로(佛老)의 글을 통달하였는데, 한 번 보면 문득 기억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서는 불평하는 자에게 억제되어 오래도록 등용하지 못하였다가 충헌에게 아첨하여 드디어 지위와 명망이 높아졌다. 규보가 충헌에게 계(啓)하기를,

“하늘과 땅이 나를 낳았지만 이 몸을 윤택하게 못하였고, 부모가 나를 길렀어도 날개를 붙여 주지는 못하였다. 나의 목숨은 공이 생성한 것이다.”

하니, 식자들이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

■정묘년 희종 3년(송 영종 개희 3, 금 장종 태화 7, 몽고 태조 2, 1207)

◯하5월 최충헌이 그의 생질 박진재(朴晉材)를 죽였다.

진재는 처음부터 충헌과 더불어 일을 같이 하다가 얼마 안 되어 불화가 있게 되었다. 진재가 대장군이 되었는데 문객의 수는 충헌과 거의 같은데다 모두 용맹하고 굳세었다. 진재는 그 문객이 관직을 받은 자가 적은 것을 원망하여 마음속으로 불평하다가 취중에 문득 말하기를,

“충헌은 무장(無狀)한 사람이다.”

하고는 또 혼잣말로,

“충헌이 없을 것 같으면 내가 국정을 마음대로 할 것이다.”

하고는 이를 도모하려 하여,

“구씨(舅氏 최충헌을 가리킨다)가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다.”

는 말을 유포하였다. 충헌은 진재가 자기를 해칠 것을 알고, 그를 불러오게 하고는 말하기를,

“너는 무엇 때문에 나를 해치려고 하느냐?”

하고, 드디어 좌우에 명하여 포박하고, 다리 힘줄을 자른 후 백령진(白翎鎭)지금의 장연부 남쪽바다 가운데에 있다 으로 귀양보냈는데, 두어 달 만에 병들어 죽었다. 용맹하고 굳센 진재의 문객들을 먼 섬으로 나누어 귀양보내니, 이에 충헌은 더욱 꺼릴 것이 없었다.

■을해년 고종 2년(송 영종 가정 8, 금 선종 정우 3, 몽고 태조 10, 1215)

◯ 최충헌이 이규보(李奎報)를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로 삼았다.

규보가 시를 지어 충헌에게 올려 참관(參官)을 구하니, 충헌이 말하기를,

“이 사람의 높은 뜻은 여기에 그칠 것이 아니다.”

○ 이해에 금(金)의 선무사(宣撫使) 포선만노(蒲鮮萬奴)가 배반하고 요동에 웅거하였다.

천왕(天王)을 참칭하고 국호를 대진(大眞)이라 하고, 연호를 천태(天泰)로 고치니, 이것이 동진(東眞)이다. 그 지역은 백둔산 안팎을 통할하였는데 여진의 모든 부락이 다 이에 예속되었다.

■기묘년 고종 6년(송 영종 가정 12, 금 선종 흥정 3, 몽고 태조 14, 1219)

◯춘정월 조충ㆍ김취려가 몽고ㆍ동진병을 모아 강동성에서 거란을 공격하여 항복하게 하니, 제군(諸軍)이 계엄을 풀었다.

이때 몽고ㆍ동진병이 비록 거란을 격파하고 우리를 구제한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으나, 몽고는 이적(夷狄) 중에서도 가장 흉한(凶悍)하고, 또 일찍이 본국(本國)과 구호(舊好)가 없었으므로 중외의 인심이 몹시 놀라고 조정의 논의도 결정되지 않아서 오래도록 그들의 군사를 호궤(犒饋)하지도 않았었다. 다만, 조충만은 의심하지 않고 치문(馳聞)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몽고는 호궤가 지체되는 것을 화내어 꾸짖고 독책하기를 매우 심히 하니, 충이 편의에 따라 이를 화해시켰다. 합진이 여러 번 원병(援兵)을 보내라고 독촉하였으나 여러 장수가 다 가기를 꺼려하는데, 김취려가 말하기를,

“국가의 이해(利害)는 바로 오늘에 있으며, 어려운 일을 사양하지 않는 것이 신자(臣子)의 직분이니 청컨대 내가 가겠다.”

하니, 충이 허락하지 않다가 굳이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 취려가 이에 지병마사(知兵馬事) 한광연(韓光衍)과 더불어, 10장군이 거느렸던 군병 및 신기(神騎)ㆍ대각(大角)ㆍ내상(內廂)의 정병(精兵)을 영솔하고 갔다. 합진이 사자를 보내어 취려에게 고하기를,

“참으로 우리와 호의를 맺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몽고 황제에게 요배(遙拜)하고 다음으로 만노 황제에게 예를 해야 합니다.”

하였다. 취려는 말하기를,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 법인데 천하에 어찌 두 황제가 있겠습니까?”

하고는 이에 몽고 황제에게만 배례하였다. 취려는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왔다. 합진이 그의 뛰어난 상모(狀貌)를 보고, 또 그의 말을 듣고는 크게 기이하게 여겨 그를 이끌어 자리를 함께 하고는 형제가 되기를 언약하였는데 취려가 나이가 많아 형으로 섬기겠다고 하면서 취려에게 말하기를,

“내가 6국을 정벌하면서 귀인을 많이 보았으나 형만한 이가 없었습니다. 형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휘하(麾下)의 군사보기를 또한 한집안같이 하겠습니다.”

하고, 작별할 때에는 손을 잡고 문밖에 나와 부축하여 말에 오르게 하였다. 수일 후에 충이 또한 군사를 이끌고 오니, 합진이 끌어당겨 상좌에 앉히고 또한 형으로 섬기었다. 몽고의 풍속에, 예리한 칼로 고기를 잘라서 빈주(賓主)가 서로 주고받으며 먹기를 좋아하되 눈 깜작할 사이도 없을만큼 하였는데, 우리 군사 중에 본래 용맹이 있다고 하는 자들도 서툴러서 난색(難色)을 보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충과 취려는 꿇여앉고 서로 주고 받고 하는 것이, 매우 익숙하였으므로 합진이 극히 즐거워하였다.

합진은 술을 잘하여 충과 우열을 겨루어서 이기지 못하는 자에게 벌을 주기로 언약하였다. 충은 가득 찬 술잔을 비우면서 연방 마셨으나 조금도 취한 빛이 없었는데, 마지막 한 잔은 마시지 않고 말하기를,

“만일 내가 이겨서 언약대로 한다면 공(公)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는데, 주인으로서 손님에게 벌을 주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니, 합진이 그 말을 중히 여겨 크게 기뻐하고 다음날 아침 신사(辛巳)에 강동성(江東城) 아래에서 만나기로 언약하되, 성에서 3백 보 떨어진 곳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합진은 강동성 남문에서 동문까지 너비와 길이가 10척이 되는 못을 파기로 하는데, 서문 북쪽은 완안자연(完顔子淵)에게 맡기고, 동문 북쪽은 취려에게 맡겨 모두 참호(塹壕)를 파서 도망하는 자를 방어하게 하였다. 적은 형세가 군색하게 되자 적괴(賊魁) 감사왕자(?捨王子)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니, 그 장졸(將卒) 남녀 등 5만여 명이 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합진이 충과 더불어 투항한 상황을 돌아보고, 왕자의 처자 및 가짜 승상(丞相)ㆍ평장(平章) 이하 1백여 인을 진(陣) 앞에서 목베고, 그 나머지는 죽이지 않고 모두 살려 주었다. 합진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만리 밖에 와서 귀국과 힘을 합쳐 적을 격파한 것은 천년에 한번 있는 행운이라, 예로 보아서는 당연히 국왕을 가서 뵈어야 하나 우리 군사가 매우 많고 멀리 가기가 어려우니 다만 사신을 보내어 진사(陳謝)한다.”

하고, 곧 충 등과 더불어 동맹하기를,

“양국은 길이 형제가 되어서 만대의 자손까지도 서로 잊어서는 안 된다.”

하면서 포로된 남녀 7백 명과 우리 나라 사람으로 납치된 2백 명을 우리에게 돌려 주고, 그 나머지는 모두 자신이 데리고 갔으며 충과 취려 등에게는 여러 가지 물건을 매우 많이 주었다. 충은 거란의 포로를 각 도의 주현(州縣)으로 나누어 보내서 공한지(空閑地)를 가려 그곳에 모여 살게 하고 전지를 요량해 주어 농사로 생업을 삼게 하니, 시속에서 거란장(契丹場)이라 불렀다.


동사강목 제10하

■경진년 고종 7년(송 영종 가정 13, 금 선종 흥정 4, 몽고 태조 15, 1220)

◯춘정월 최우(崔瑀)가 그의 아우 향(珦)을 해도(海島)로 귀양보냈다.

최우가 계속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자 명성과 칭예를 얻고자 그 아비가 쌓아 둔 금은ㆍ진완(珍玩)을 왕에게 바치고, 박탈하였던 공사의 전민(田民)을 각각 그 옛 주인에게 돌려주고, 또 한사(寒士 가난한 선비)를 많이 발탁하여 인망(人望)에 흡족하게 하였다. 처음에 최충헌이 관작을 줄 때 뇌물의 다소에 따랐는데, 이때에 8품(品)의 벼슬을 구하는 사람은 많고 벼슬자리는 적으므로 이에 오부(五部)의 녹사(錄事)와 사관(史官)ㆍ한림(翰林)을 올려서 8품으로 만들었다. 최우는 선왕(先王)의 구제(舊制)를 구태여 고칠 것이 없다 하고 모두 옛날대로 회복시켜서 권무관(權務官)을 삼았으며, 그의 아우 보성백(寶城伯) 최향(崔珦)과 최충헌의 가신(家臣)ㆍ비첩(婢妾) 등을 여러 섬으로 귀양보냈다.

■고종 9년(송 영종 15, 금 선종 원년, 몽고 태조 17, 1222)

◯동10월 몽고의 사신이 왔다.

저고여(著古與) 등이 와서 납관(納款 성의껏 복종함)의 실정을 살폈다.

■고종 11년(송 영종17, 금 애종(哀宗) 원년, 몽고 태조 19, 1224)

◯춘정월 몽고와 동진이 모두 사신을 보내왔다.

몽고의 사신 찰고야(札古也) 등이 왔다. 동진에서 또 사신을 보내어 첩보(牒報)하기를,

“몽고의 성길사한(成吉思汗)의 군사는 절역(絶域)에 오래 가 있어서 그 존망(存亡)을 알 수가 없으므로 이미 구교(舊交)를 끊었습니다. 청컨대 본국(本國)의 청주(靑州 함경남도 북청(北靑))와 귀국(貴國)의 정주(定州 지금의 정평(定平))에 각각 각장(榷場 거란ㆍ여진 등과 무역하던 곳)을 두어 전례에 의거하여 매매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그때 몽주(蒙主)는 하(夏 서하(西夏))를 치고 돌아오지 않았는데, 만노(萬奴)가 다시 배반하여 국호를 동하(東夏)라 고쳤다.

재상들이 최우(崔瑀)의 집에 모여 몽고와 동진 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예(禮)를 의논하고 몽고의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몽고 사신은 압록강에 이르러 명주와 삼베 등속의 물건은 모두 버리고 수달피만을 가지고 갔다.

■고종 12년(송 이종(理宗)원년, 금 애종 2, 몽고 태조 20, 1225)

◯춘정월 도적이 몽고의 사신 저고여를 죽였다.

몽고는 교의(交誼)를 맺은 뒤로 사신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몽고의 사신 저고여 등이 압록강을 건너서 돌아가다가 중도에서 도적에게 피살되었는데 후에 들으니, 우가하가 그들을 죽였다는 것이었다. 이때 우가하와 동진(東眞)은 우리 나라와 몽고가 교의를 맺은 것을 미워하여 틈이 생기게 하려고 우리 나라를 쳐들어올 때는 몽고옷을 입고, 몽고 사신들의 길을 막을 때는 우리 나라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분별할 수가 없었다. 뒤에 몽고의 사신이 동진을 지날 때 만노(萬奴)가 말하기를,

“고려는 너희를 배반하였다. 조심하여 더 나가지 말라.”

하였으나, 사신은 듣지 않고 그 진위(眞僞)를 증험하려고 드디어 길을 떠났다. 만노는 먼저 사람을 양국의 경계 산골 사이에 보내어 우리 나라의 옷으로 위장하여 잠복하였다가 이를 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몽고는 우리 나라를 의

◯추7월 최우가 정방(政房)을 그의 집에 두었다.심하고 화친을 끊었다.

■고종 16년(송 이종2, 금 애종 6, 몽고 태종(太宗) 원년, 1229)

◯동11월 최우가 구장(毬場)을 만들고, 그 가병(家兵)을 사열하였다.

우는 이웃집 수백여 구(區)를 빼앗아 구장을 만들었는데, 동서가 수백 보나 되고, 평탄하기가 바둑판 같았다. 날마다 도방(都房) 마별초(馬別抄)를 모아 격구(擊毬)를 하게 하였는데, 혹은 창을 던지고, 말타고 활쏘기를 더러는 5~6일까지 계속하기도 하였고, 잘하는 자는 즉석에서 작(爵)과 상을 가하였다. 그래서 도방 별초의 안마(鞍馬)ㆍ의복ㆍ궁시(弓矢)는 모두 몽고 풍속을 본받아 곱고 아름다운 것을 서로 다투어 자랑하였다.

또 군사를 오군(五軍)으로 나누어서 전쟁 연습을 할 때면, 인마가 엎드러지고 쓰러져서 사상자가 많았다. 그것을 마치면 사냥하는 법을 익히는데 산을 에워싸고 들에 늘어서서 순환하는 것이 끝이 없었는데, 우는 그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신묘년 고종 18년(송 이종 소정 4, 금 애종 정대 8, 몽고 태종 3, 1231)

◯8월 몽고가 살례탑(撒禮塔)을 보내어, 함신진(咸新鎭)에 대거 침입하니, 수장(守將) 전한(全僩)과 조숙창(趙叔昌)이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이보다 먼저 몽고는 우리 나라에서 그들의 사신을 죽인 것으로 의심한 뒤로 사실의 왕래가 끊어진 지 이미 7년이 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원수(元帥) 살례탑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하니, 홍대순(洪大純)의 아들 복원(福源)이 군중(軍中)에서 맞아 항복하였다. 몽고군이 함신진(咸新鎭)지금의 의주(義州) 을 포위하고 성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몽고군이다. 너희는 빨리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무찔러 죽이리라.”

하니, 부사(副使) 전 한과 방수장군(防守將軍) 조숙창이 겁내어 마침내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숙창은 조충(趙冲)의 아들인데, 스스로 그 아비 충이 합진(哈眞)과 형제의 의를 맺었다고 말하고, 이어 글로 삭주(朔州) 선덕진(宣德鎭)을 타일러서 맞아 항복하게 하니, 몽고 사람들이 마침내 숙창을 그들의 군대 앞에 내세워 이르는 곳마다 외치면서 나와서 항복하도록 타이르게 하였다.

○12월 몽고가 항복한 장수 조숙창(趙叔昌)을 돌려보냈으므로, 숙창을 보내어 표(表)를 올려 항복을 청하였다.

23일(갑술)에 살례탑이 숙창과 몽고의 사신 9인을 보내어 이른바 황제의 첩문을 가지고 왔다. 첩문에는, 먼저 사자를 숙인 죄를 꾸짖으며 속히 투항하라고 하였고, 또 금은(金銀)과 의복(衣服) 2만 바리[駄], 자라(紫羅) 1만 필, 수달피(水獺皮) 2만 벌[領], 관마(官馬) 2만 필, 왕손(王孫)ㆍ종실(宗室)의 동남 동녀(童男童女) 각 1천 명을 요구하였으며, 이 밖에 요구한 것은 다 기록할 수조차 없었다. 또 백만 군사의 의복을 판비(辦備)하게 하고 삼군(三軍)의 진주(陣主)는 속히 권황제(權皇帝 대리 황제라는 뜻)의 처소에 나와 항복하라 하였다.

24일(을해)에 몽고 사신을 내전(內殿)에서 잔치하고, 29일(경진)에는 몽고 사신이 국신물(國贐物)로 황금 70근, 백금(白金) 1천 3백 근, 유의(襦衣 동옷, 여기서는 군사들이 입는 저고리) 1천 벌[領], 말 1백 70필을 가지고 돌아갔으며, 장군 조시저(曹時著)를 보내어 황금 68근, 백금 1천 8백 80근, 은병(銀甁) 2백 36구(口), 사라(沙羅)ㆍ금수(錦繡)ㆍ주저포(維苧布)ㆍ수달피 등의 물건을 살례탑과 그 휘하 장좌(將佐)에게 보내었다. 숙창에게 대장군(大將軍)을 가하여 함께 가서 표(表)를 올려 신(臣)을 칭하게 하면서 저고여(著古與) 등이 피살된 사실을 변명하였다. 이때 부고(府庫)가 비여 있었으므로 처음으로 백관들에게 품계라 따라 차등을 두어 의복(衣服)을 내게 하여 그것으로 국신을 충당하였다.

■고종 19년(송 이종 소정 5, 금 애종 천흥(天興) 원년, 몽고 태종 4, 1232)

◯2월 최우(崔瑀)가 처음으로 천도(遷都)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보다 먼저 승천 부사(昇天副使) 윤인(尹繗) 등이 전쟁을 피하여 집안권속을 몰래 강화도(江華島)에 옮겨 두고는 최우에게 말하기를,

“강화는 자연의 요해지이니 난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최우가 그 말을 믿고 사람을 보내어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중도에 몽고군에게 구류되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재추(宰樞)와 4품(品) 이상을 모아 놓고 막을 것을 의논하니, 모두 왕성을 지키면서 적막을 계책을 말하였으나, 오직 재추 정묘(鄭畝)와 대집성(大集成) 등이 천도하여 난을 피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 무렵에 우는, 집성의 딸이 새로 과부가 되었는데 자색(姿色)이 있다는 말을 듣고, 취하여 후실(後室)을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집성이 비록 싸움에서는 패하여 돌아왔어도 불문에 붙이고,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따랐었다.

■고종 21년(송 이종 원년(元年), 금 애종 3, 몽고 태종 6, 1234)

◯동10월 최우(崔瑀)를 봉하여 진양후(晋陽侯)로 삼았다.

왕이 우의 천도(遷都)의 공을 논하여 후(侯)로 봉하고 부(府)를 세우게 하였는데, 백관이 다 그의 집에 가서 하례하였다.

우는 또 도방(都房)과 4령(領)의 군사를 사역하여 사제(私第)를 넓게 지어 사람들은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다. 원림(園林)의 넓이가 수십 리였다.

■무술년 고종 25년(송 이종 가희 2, 몽고 태종 10, 1238)

◯하4월 몽고의 군사가 동경(東京)에 이르렀다.

황룡사(黃龍寺)의 탑(塔)을 불태웠다. 이때에 몽고 군사가 지경 안에 가득 차서 멀다고 이르지 않은 곳이 없고,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왕래하는 것이 수년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 백성들은 산성이나 해도(海島)에 들어가서 목숨을 보전하고, 조정은 강도(江都)에서 안락만을 탐하고, 외적을 물리치고 막을 계책을 생각하지 않아서 이로 말미암아 몽고 군사는 더욱 제멋대로 횡행하였다.

■신축년 고종 28년(송 이종 순우(淳祐) 원년, 몽고 태종 13, 1241)

◯추9월 이규보(李奎報)가 졸하였다.

규보는 참정(參政)으로 물러나기를 빌어 치사(致仕)하였는데, 봉록은 전과 같았다. 집에서 기거하기 5년 만에 졸하니 나이 74이었다. 규보는 젊어서부터 총민하여 백가(百家)에 널리 통하였으며, 홀로 독특한 경지를 달리어 문장의 기제가 넓고 커서 대성(大成)하였다. 당대의 고문 대책(高文大冊)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벼슬을 그만둔 뒤에도 외국 교빙의 표장(表狀)은 모두 그가 제술한 것이었다. 세 차례나 예위(禮闈)를 맡아서 훌륭한 선비를 많이 얻었다. 성격이 호방하고 활달하여 시주(詩酒)로써 스스로 즐겼으며, 호를 백운 거사(白雲居士)라 하였다. 그러나 최씨에게 아첨하여 사론(士論)의 죄를 얻었다. 시문집(詩文集) 53권이 세상에 전한다.

■기유년 고종 36년(송 이종 순우 9, 몽고 황후 칭제(皇后稱制) 원년, 1249)

◯동11월 최이가 죽었다. 최항이 스스로 추밀원부사 이병부상서 어사대부(樞密院副使吏兵部尙書御史大夫)가 되고, 지추밀 민희(閔曦), 추밀부사 김경손(金慶孫)을 해도(海島)로 귀양보냈다.

이(怡)는 충헌의 세력에 의지하여 국사를 천단하기 30년, 모든 정사가 자신의 몸에서 나왔고, 생살(生殺)은 그의 희로(喜怒)에 있었으며, 왕은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죽으니, 아들 항은 복상(服喪)한 지 2일 만에 상복을 벗어버리고, 장사를 지내고나서 문을 닫고 들어앉아 밖에 나가지 않고는, 그 아비의 첩을 간통하였다. 항은 더욱 사납고, 잔인하고 포악하여, 경손이 본디 인심을 얻은 것을 꺼려서 백령도(白領島)로 귀양보내고 지추밀 민희를 꺼려서 역시 귀양보냈다.


동사강목 제11상

■고종 38년(송(宋) 이종(理宗) 11, 몽고(蒙古) 헌종 원년, 1251)

◯하5월 좌복야(左僕射) 손변(孫抃)이 졸하였다.

변은 수주인(樹州人)인데, 성품이 강하고 굳세며 사무 처리에 능해서 판결하는 것이 물흐르듯 하여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일찍이 경상도를 안찰할 때에 아우와 누이가 서로 송사한 일이 있었다. 그들의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에 딸은 이미 시집을 갔고, 아들은 바야흐로 이[齒] 갈 나이인 7~8세밖에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임종할 때에 재산을 전부 딸에게 주고, 오직 검은 옷 한 벌과 갓 하나, 미투리 한 켤레와 종이 한 권만 그 아들에게 물려 주었다. 이 때문에 송사가 되어 여러 해를 두고 판결이 나지 않았는데, 변이 타이르기를,

“부모의 마음은 아들이나 딸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찌 장성하여 출가한 딸에게는 후하게 하고, 어머니 없는 어린 아들에게는 박하게 할 리가 있겠는가? 생각건대, 아들이 의지할 곳은 누이뿐인데, 만일 재산을 누이와 똑같이 나누어 준다면, 누이의 사랑이 혹 지극하지 못하거나, 기르는 것이 온전하지 못할까 걱정해서이다. 아들이 장성하면, 이 종이로 소장(訴狀)을 쓰고 검은 의관에 미투리를 신고 관가에 가서 소송하면, 장차 판결하여 줄 사람이 있으리라는 뜻으로 네 가지 물건만을 물려 준 것이다.”

하였다.

아우와 누이가 이 말을 듣고 감동하여 울자, 변이 드디어 가산을 반씩 나누어 주었다.

처음에 변이 아내의 파계(派系)가 왕가의 서족[國庶]이기 때문에 대성(臺省)의 벼슬에 임명되지 못하게 되니, 아내가 청하기를,

“나를 버리고 다시 세족(世族)의 집에 장가드십시오.”

하자, 변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자신의 벼슬을 위하여 30년 동안의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리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소.”

하였다.

■정사년 고종 44년(송 이종 보우 5, 몽고 헌종 7, 1257)

◯윤4월 최항(崔沆)이 죽고 의(竩)를 차장군 교정별감(借將軍敎定別監)으로 삼았다.

항이 정권을 잡은 8년 동안 잔학함이 더욱 심하여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살해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죽은 후의 뒷일을 그의 일당인 선인열(宣仁烈)ㆍ유능(柳能) 등에게 부탁하였는데, 인열 등이 비밀에 붙이고 발상(發喪)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의 문객 대장군 최영(崔瑛)ㆍ채정(蔡禎) 등에게 알리고, 여러 별초(別抄)ㆍ도방(都房) 군사를 모아 옹위한 뒤에야 발상하였다. 왕은 곧 의를 차장군으로 삼으니, 백관(百官)들이 모두 그의 집에 가서 조문하고 치하하였다. 항에게 사랑하는 첩 심경(心鏡)이 있었는데 의가 일찍이 사통(私通)하였다. 항이 죽는 날에 곧 후방(後房 첩이 거처하는 방)에 들여놓았다. 항이 본래 기생의 소생이고, 의의 어미도 또한 천하였으므로, 관리들이 문서를 읽다가 창기(娼妓)니, 노예(奴隸)니 하는 말이 나오면 문득 휘하였다.

혹 남을 모함하는 자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의는 소출이 미천하다고 말했다.’ 하면, 의는 모두 죽여버렸다. 왕이 또 의를 추밀부사 이병부상서어사대사(樞密副使吏兵部尙書御史臺事)로 임명했으나, 의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무오년 고종 45년(송 이종 보우 6, 몽고 헌종 8, 1258)

○3월 유경(柳璥)ㆍ김인준(金仁俊)이 최의(崔竩)를 죽이고 정권을 왕에게 돌리었다.

의는 나이가 어리고 암약(暗弱)하여 재물을 긁어모으는 데 한이 없어서 크게 인심을 잃었다. 도령 낭장(都領郞將) 박희실(朴希實) 등이 비밀히 유경ㆍ김인준, 장군 박송비(朴松庇), 낭장 임연(林衍)ㆍ이공주 등에게 말하기를,

“의가 간사한 소인만 친근하고 참소를 믿고 꺼리는 것이 많으니,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우리들도 또한 면하지 못할까 두렵다.”

하고, 4월 8일 관등(觀燈)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

의의 도당 이주(李柱)ㆍ최양백(崔良伯)이 그 모의를 듣고 가만히 의에게 알렸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다 하여 다음날 아침에 인준 등을 잡으려고 했다. 인준 등이 듣고 급히 여러 동모자(同謀者)를 모아 경에게 가서 의논하니, 경이 말로는 감히 나타내지 못하고, 가인(家人)을 시켜서 은행[杏子] 한 주발을 올리게 하니, 인준 등이 절하면서,

“알겠습니다.”

하였는데, 대저 행(杏)과 행(幸)의 음이 같기 때문이다. 마침내 삼별초(三別抄)를 사청(射廳)에 모으고, 사람을 시켜 길에서 외치기를,

“영공(令公)은 이미 죽었다.”

하였다. 영공은 최의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에 듣는 사람들이 모두 모이었다. 인준이 말하기를,

“이같은 큰일에는 재상(宰相)으로 위엄과 명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모의의 주동을 삼아야 한다.”

하고, 곧 추밀사(樞密使) 최온(崔昷)을 불러서 의논하여 의의 심복 최양백ㆍ이일휴(李日休) 등을 불라서 죽이고, 인준은 의의 문졸(門卒)을 시켜 경주(更籌)를 알리지 못하게 하였는데, 안개가 짙게 끼어 의의 집을 수위(守衛)하는 군사는 하나도 아는 자가 없었다. 날이 샐 무렵에 야별초가 의의 집 벽을 무너뜨리고 들어갔다. 의가 달아나 침방에 숨은 것을 찾아내어 죽이고, 그 도당 유능(柳能) 등을 모두 죽이었다.

경과 인준이 온과 더불어 대궐에 나아가, 백관(百官)을 모아서 편전(便殿)에 들어가 뵙고, 적신(賊臣) 죽인 것을 고하고는 정권을 왕에게 돌리었다. 왕이 경과 인준 등에게 이르기를,

“경등이 과인을 위하여 비상한 공을 세웠다.”

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여러 신하들이 청하기를,

“충헌(忠獻)과 우(瑀)의 벽상도형(壁上圖形)을 깎아버리고, 묘정(廟庭)에 배향한 것을 파(罷)하소서.”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경(璥)은 공권(公權)의 증손이고, 온(昷)은 선(詵)의 손자이다. 최씨(崔氏)가 국권을 전횡한 지 63년 만에 주륙된 것이다.

○유경(柳璥)을 우부승선(右副承宣), 박송비(朴松庇)를 대장군(大將軍), 김인준(金仁俊)을 장군(將軍)으로 삼았다.

박희실(朴希實)ㆍ임연(林衍)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벼슬을 내리고, 아울러 공신(功臣)의 호를 주었다.

연은 벌 눈[蜂目]에 이리 소리[豺聲]를 냈으며, 날래고 힘이 세어 능히 거꾸로 서서 팔로 걸어다니며, 대들보에 매달리기도 하였다. 대장군 송언상(宋彦庠)의 말먹이는 하인이 되었다가 뒤에 대정(隊正)에 보직되었다. 일찍이 남의 아내를 간통하였으므로 유사(有司)가 다스리려 하매, 인준이 의에게 극력 청하기를,

“연은 쓸 만한 장사(壯士)입니다.”

하고, 천거하여 낭장을 삼았기 때문에 연이 인준을 아버지라 부르고 승준을 숙부라 불렀다.

동11월 유경(柳璥)을 파면하였다. 김인준(金仁俊)ㆍ임연(林衍)이 장군 우득규(禹得圭) 등을 죽였다.

경이 의를 죽이고 승선(承宣)이 되어, 편전(便殿) 옆에 정방(政房)을 두고 전주(銓注)를 맡아 국가의 기무(機務)를 모두 결재하였다. 김승준(金承俊)이 스스로 이르기를, 훈공은 높은데 관작이 낮다 하여 마음에 항상 불평하였다. 경이 승준에게 말하기를,

“공(公)의 공은 비록 하루에 아홉 번 벼슬을 승진하더라도 좋으나, 자품(資品)에 따라서 제수(除授)하는 것은 국가의 일정한 법전이다. 그대는 대정(隊正)에서 4등을 뛰어 중랑장(中郞將)으로 승진되었으니, 품계가 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니, 승준이 더욱 앙심을 품었다. 경이 큰 제택(第宅)을 많이 가지고 권세가 날로 성하여 문앞이 저자와 같으니, 승준ㆍ연 등 여러 공신들이 꺼리어 인준에게 참소하였다. 인준이 왕에게 고하여, 왕이 그 권세를 빼앗고자 승선의 벼슬을 파하여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를 제수하니, 이는 정병(政柄)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또한 경과 친하게 지내는 장군 우득규ㆍ양화(梁和)ㆍ원녹(元祿) 등을 가두었다. 경이 그 일을 알고 대궐에 나아가 인준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처음 나와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의거(義擧)해서 정권을 왕실(王室)로 돌려주었으니, 골육지친(骨肉之親)과 같아서 비록 참소를 잘하는 자라도 이간할 수 없는데, 어찌 오늘에 이와 같은 짓을 할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하였다. 인준은 부끄러워서 사과하고 여러 공신들은 말없이 물러갔으나 마침내 득규 등을 죽였다. 이로부터 안팎의 대권(大權)이 한결같이 인준에게로 돌아갔다.

○ 몽고가 쌍성 총관부(雙城總管府)를 화주에 두어, 조휘를 총관으로,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았다.

이로부터 마침내 동북의 여러 성(城)을 잃고, 휘 등이 출물하여 노략질이 날로 심하였다.

■갑자년 원종 5년(송 이종 경정 5, 몽고 세조 지원(至元) 원년, 1264)

◯8월 왕이 몽고에 갔다. 김준(金俊)에게 명하여 태자를 보필하여 감국(監國)하게 하였다.

평장사(平章事) 이장용(李藏用), 추밀부사(樞密副使) 채정(蔡禎) 등 50인이 따라갔다.

9월에 연도(燕都)에 이르러 몽주를 알현하니, 몽주가 두 번 친히 잔치를 베풀고 내려주는 것이 심히 후하였다.


동사강목 제11하

■원종 9년(송(宋) 도종(度宗)4, 몽고(蒙古) 세조(世祖) 5, 1268)

◯12월 왕이 임연(林衍)을 시켜 김준(金俊)을 죽이고 그 일족을 멸하게 하였다.

준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무오년(고종 45 1258) 기근 때에 권문(權門)을 주멸하고 저축을 풀어서 사람을 많이 살렸으니, 거리에 누워 있더라도 누가 감히 나를 해치랴.”

하였다. 그래서 그를 욕하는 말을 들어도 염려하지 않고, 농장(農庄)을 각처에 벌여 놓고서 가신(家臣) 문성주(文成柱)ㆍ지준(池濬) 등을 시켜 전라도ㆍ충청도를 맡아보게 하여 마음대로 마구 거둬들이니, 원망이 매우 많았다. 준이 일찍이 왕을 제 집에 청하려고 이웃집을 헐어서 제 집을 넓히느라고 한겨울 한여름을 밤낮으로 일을 독촉하였다. 집 높이가 수장(數丈)이요, 뜰 너비가 1백 보가 되었는데도 그 아내는 오히려 불만하여,

“장부의 안목이 이리도 작으시오?”

하였다. 추부(樞副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의 약칭) 임연이 일찍이 준의 아들과 전토(田土) 때문에 다투었는데, 준이 말하기를,

“내가 살아 있는데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죽은 뒤에랴. 내 어찌 이 자를 차마 보랴!”

하니, 이 때문에 서로 사이가 벌어졌다. 폐신(嬖臣) 강윤소(康允紹)는 본디 신안공(新安公 성명은 왕전(王佺). 원종의 비로 경창 궁주(慶昌宮主)의 아버지)의 종이었는데, 몽고어를 알며 간사하고 약삭빠름으로 왕에게 굄을 받았으며, 연과는 친한 사이였다. 왕이 준을 꺼리는 것을 알고 또 연과 준이 사이가 벌어진 것을 알았으므로, 왕에게 여러 번 말한기를,

“연이 준을 죽일 뜻을 가졌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참된 충신이다.”

하였다. 연이 입직(入直)하여 환자(宦者) 최은(崔?)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당장에 결단하여야 하오.”

하였는데, 은이 곧 환자 김경(金鏡)과 함께 들어가 아뢰니, 왕이 말하기를,

“과연 준을 죽인다면 얼마나 다행이랴!”

하였다. 연이 드디어 큰 곤봉[梃]을 만들어 궤에 담아서 경에게 비밀히 주어 미리 궁중에 두게 하고 거사할 날을 약속하였으나, 마침 연고가 있어서 실행하지 못하니, 왕이 일의 누설을 두려워하여 밤새 자지 못하였다. 병이 났다고 선언하고 중사(中使)를 나누어 보내어 신사(神祠)에 기도하게 하였으나, 아침이 되도록 준이 들어오지 않으므로, 경 등이 왕명으로 준을 불렀다. 준이 바삐 조당(朝堂)에 나아가니, 은이 말하기를,

“상께서 침소에 계시니, 영공(令公)께서 들어가 문병하셔야 합니다.”

하고, 인도하여 편전(便殿) 앞에 이르러서 사람을 시켜 곤봉으로 치게 하니 준이 크게 부르짖는데, 드디어 준을 베어서 땅에 쓰러뜨렸다. 충도 임금이 앓는다는 것을 듣고서 조당에 나아갔다가 핏자국을 보고 달아나려 하는데, 환자 김자정(金子廷)이 죽였다. 준의 종자(從者)가 변고를 듣고 들어가 구하려 하니, 자정이 문을 막고 외치기를,

“왕명으로 준을 죽였는데, 너희가 안에 들어가서 어찌하려느냐?”

하였다. 그래서 그 무리가 궤산(潰散)하매, 연이 드디어 야별초(夜別抄)를 나누어 보내어 준의 아들들과 그 무리를 잡아서 다 참(斬)하였다. 충은 맑고 고고하여 스스로 지킬 줄 아는 이로, 그 형과 조카들이 하는 짓을 보고 늘 책망하였으므로, 준과 그 아들들이 다 그를 꺼려하였다. 충이 처형될 즈음에 한탄하여 말하기를,

“원통하다. 나는 아는 바 없다.”

하였으며, 남들이 다 그를 아깝게 여겼다. 준의 무리인 장군 최휘(崔暉)ㆍ차송우(車松祐) 등 10여 인이 다 죽었고, 가노(家奴)로서 죽은 자는 이루다 적을 수 없으며, 준의 아내를 섬으로 귀양보냈다. 이종기(李宗器)라는 자는 영주(永州)의 아전으로 있다가 도망하여 서울에 들어와서, 용력(勇力)으로 일컬어져 준과 함께 위사(衛社)하고 여러 번 벼슬을 옮겨서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는데, 죽게 되어서는 한탄하기를,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일찍 연을 죽일 것을!”

하였다.

■경오년 원종 11년(송 도종 함순 6, 몽고 세조 지원 7, 1270)

◯2월 몽고가 서경(西京)을 동녕부(東寧府)로 삼고 자비령(慈悲嶺)으로 경계를 그었다.

○ 임연이 죽으매, 그 아들 유무(惟茂)를 교정별감(敎定別監)으로 삼았다.

○ 하5월 삼별초(三別抄)를 파하였다.

당초에, 최우(崔瑀)가 나라 안에 도둑이 많음을 걱정하여 용맹한 군사를 모아 밤마다 순행하며 포악을 금하게 하니, 이 때문에 야별초(夜別抄)라 불렀는데, 도둑이 여러 도(道)에서 일어나게 되매, 별초를 나누어 보내서 잡게 하니, 그 군사가 매우 많아져서 드디어 좌ㆍ우로 나누고, 또 몽고로부터 도망해 돌아온 우리 나라 사람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서 신의군(神義軍)이라 불렀으니 이것이 삼별초이다.

권신이 정권을 잡으면, 이들을 조아(爪牙)로 삼아 봉록(俸祿)을 후히 주고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기도 하며 또 죄인의 재물을 적몰하여 주었으므로, 권신이 턱짓만 해도 앞을 다투어 힘을 다하였다. 김준(金俊)이 최의(崔竩)를 죽이고, 임연(林衍)이 김준을 죽이고, 송례(松禮)가 유무(惟茂)를 죽인 것이 다 삼별초의 힘에 의지한 것이다.

왕이 구경에 다시 도읍하게 되매, 삼별초가 도리어 딴마음을 품으므로 장군 김지저(金之氐)를 보내어 파하게 하였는데, 지저가 그 명적(名籍)을 가지고 돌아오니, 삼별초가 그 명적을 상국에 알릴까 두려워서 더욱 반심(叛心)을 품었다.

6월 배중손(裵仲孫)ㆍ노영희(盧永禧) 등이 삼별초를 데리고 반(叛)하여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세우고서 강화(江華)를 크게 노략하고 바닷길로 해서 남으로 달아났다. 직학(直學) 정문감(鄭文鑑)이 그때에 죽었다.

■신미년 원종 12년(송 도종 함순 7, 몽고 세조 지원 8, 1271)

◯5월 몽고가 홍다구(洪茶丘)를 보내어, 도와서 진도(珍島)를 치게 하였다.

다구가 올 적에 그 족속과 무뢰한 무리가 많이 따라왔다. 탈타아와 재추(宰樞)가 교외에서 군사를 점고하니 모두 5백여 인이었는데, 탈타아가 종군하는 재추의 자제가 없다 하여, 곧 재추로 하여금 각각 말[馬]을 내서 관군(官軍)에게 주게 하고, 경군(京軍)과 충청ㆍ경상 2도의 군사를 더 징발하여 변 량(邊亮) 등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해서 증군(增軍)하였다.

○ 김방경ㆍ흔도 등이 진도를 쳐서 크게 격파하고 온(溫)을 참하니, 적의 장수 김통정(金通精)이 남은 무리를 데리고 탐라(耽羅)로 달아났다.

방경 등이 1만여 인을 모아 흔도와 함께 중군(中軍)를 거느리고서 벽파정(碧波亭) 지금의 진도군 동쪽 30리에 있는 나루 어귀에 있다 으로부터 들어가고, 왕희(王熙)ㆍ왕옹(王雍)과 홍다구(洪茶丘)가 좌군을 거느리고서 장항(獐項)지금은 미상 으로부터 들어가고, 대장군 김석(金錫), 만호(萬戶) 고을마(高乙麻) 등이 우군을 거느리고 동면(東面)으로부터 들어가니, 모두 1백여 척이었다. 적이 벽파정에 모여 먼저 중군을 막았으나, 다구가 먼저 올라가 불을 놓고 협공하니 적이 놀라 무너지매, 방경 등이 분발해서 크게 격파하였다. 적이 다 처자를 버리고 도망하매, 방경이 추격하여 남녀 1만여 인과 전함(戰艦) 수십 척을 노획하고, 진도에 들어가 쌀 4천 석을 얻었다. 적의 장수 김통정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탐라로 도망해 들어가니, 그들에게 사로잡혔던 강도(江都)의 사녀(士女)와 진기한 보배 및 진도의 주민이 다 몽고 군사에게 노획되었다. 온(溫)은 왕준의 동복형(同腹兄)인데 다구에게 죽었다.

그때에, 적의 장수 유존혁(劉存奕)이 남해현(南海縣)에 웅거하여 있다가 적이 탐라로 도망해 들어갔다는 것을 듣고 배 80여 척을 이끌고 따라갔다. 방경이 재보(財寶)와 기장(器仗)을 죄다 왕경(王京)으로 나르고, 적에게 함몰되었던 양민은 다 생업을 회복하게 하였다. 사로잡혔던 조사(朝士 벼슬아치) 강위(姜渭)ㆍ김지숙(金之淑)ㆍ임굉(任宏)ㆍ송숙(宋肅)ㆍ이신손(李信孫) 등이 다 돌아왔으나, 몽고 군사에게 노획된 사녀들은 다 쇄환(刷還)되지 않았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재삼 아뢰어 죄없이 사로잡힌 자를 찾아서 내보내주기를 청하니, 몽주(蒙主)가 조허(詔許)하여 적의 무리의 가족 외는 다 살펴서 돌려보내게 하였는데, 흔도 등이 끝내 그렇게 하려 하지 않으매 탈타아가 황제의 명에 의거하여 굳이 다투었으므로, 조금은 가려서 내보내게 되었으나 돌아오지 못한 자가 매우 많았다.

대관(臺官)이 아뢰기를,

“경오년(원종 11 1270)의 변란에 조사(朝士)의 가족이 적에게 함몰되었으므로 조사들이 거의 다 재취하였는데, 이제 적이 평정되매 그 옛 아내 중에 살아 돌아온 자가 있으나, 적에게 더럽혀졌을 것으로 의심하거나 새로 혼인한 것을 기뻐하여 드디어 버리고 돌보지 않아 인륜을 어기니, 원망이 참으로 많습니다. 일체 금지하소서.”

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

12월 몽고가 대원(大元)이라고 국호를 세웠다.

■계유년 원종 14년(송 도종 함순 9, 원 세조 지원 10, 1273)

◯하4월 김방경(金方慶)ㆍ흔도(忻都) 등이 탐라를 쳐서 평정하였다.

방경이 연졸(練卒)과 수군(水軍) 1만여 인을 거느리고 흔도ㆍ홍다구와 함께 반남현(潘南縣)지금 나주(羅州)의 속현(屬縣)이다 에 주둔하여 여러 도의 전함을 모아, 서해도(西海島) 전함 20척을 거느리고 가야소도(伽倻召島)에 이르러 큰 바람을 만나 패몰(敗沒)하여, 남경 판관(南京判官) 임순(任恂), 인주 부사(仁州副使) 이석(李奭) 등 1백 15인이 물에 빠져 죽고, 경상도의 전함 27척도 패몰하였으므로, 전라도의 전함 1백 60척만으로 추자도(楸子島)에 머물러 바람을 살피며 기다렸으나, 한밤에 바람이 급히 부니 갈 바를 몰랐다. 어둑새벽에 이미 탐라에 가까이 갔는데 풍랑이 용솟음쳐서 나아가지도 물러가지도 못하게 되매, 방경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사직(社稷)의 안위(安危)가 이 한 거사에 달려 있으니, 오늘의 일이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가?”

하니, 이윽고 풍랑이 그쳤다.

중군(中軍)이 함덕포(咸德浦)지금 제주(濟州) 동쪽 31리에 있다 로부터 들어가니, 적이 바위 사이에 복병(伏兵)하였다가 뛰어나와 크게 외치며 항거하였다. 방경이 소리를 질러 여러 배가 아울러 나아가도록 독려하니, 대정(隊正) 고 세화(高世和)가 앞장 서서 적진에 돌입하매 사졸들이 승세(乘勢)하여 앞을 다투어 나아가고, 장군 나유(羅裕)가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매,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좌군(左軍)의 전함 30척이 비양도(飛揚島)제주 서쪽 80리에 있다 로부터 곧바로 적의 보루를 찌르니 적이 자성(子城)으로 달아나 들어갔다. 관군이 외성(外城)을 넘어들어가 불화살을 사방에서 쏘아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으니, 적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적중으로부터 투항해 온 자가 말하기를,

“적이 형세가 궁급하여 도망하려고 꾀하니 급히 공격하십시오.”

하였는데, 그런 뒤에 적의 괴수 김통정(金通精)이 그 무리 70여 인을 거느리고 산중으로 도망해 들어가서 목을 매어 죽으니, 적의 장수 이순공(李順恭)ㆍ조시적(曹時適) 등이 육단(肉袒 항복의 표시로 윗도리를 벗는 것)하고 항복하였다.

방경이 장수들을 지휘하여 자성에 들어가니 사녀(士女)가 외치며 우는데, 방경이 말하기를,

“괴수만을 죽일 터이니 너희들은 두려워 말라.”

하고, 괴수 김윤서(金允敍) 등 6인을 잡아 거리에서 참하고, 항복한 자 1천 3백여 인을 여러 배에 나누어 실으니, 그 나머지 주민 사녀는 예전처럼 편히 살게 되었다. 적이 죄다 평정되매 흔도가 몽고 군사 5백을 주둔시키고, 방경도 장군 송보연(宋甫演) 등으로 하여금 군사 1천을 거느리고 머물러 진수(鎭戍)하게 하고 돌아왔다.

■갑술년 원종 15년(송 도종 함순 10, 원 세조 지원 11, 1274)

◯춘정월 원(元)이 합포현(合浦縣)을 정동행성(征東行省)으로 삼아 사신을 보내어 전함을 독려해 만들었다. 행성의 옛터가 지금 창원부(昌原府) 서쪽 28리에 있다

원이 장차 일본을 정벌하려고, 총관(摠管) 찰홀(察忽)을 보내어 전함 3백 척을 감독해 만들며 본국에게 응부(應副)를 맡기고, 또 홍다구를 시켜 감독하게 하매, 왕이 김방경(金方慶)을 동남도 도독사(東南道都督使)로, 추밀부사(樞密副使) 허공(許珙)을 전주도 도지휘사(全州道都指揮使)로, 우복야(右僕射) 홍녹주(洪祿遒)를 나주도 지휘사(羅州道指揮使)로 삼고, 또 대장군 나유(羅裕) 등 5인을 보내어 제도(諸道)의 부부사(部夫使)로 삼아서 공장(工匠)ㆍ역도(役徒) 3만 5백 인을 징집하였다. 이때에 역기(驛騎)가 잇달아 다니고, 서무(庶務)가 번극(煩劇)하며 기한이 급박하기가 마치 바람이나 번개 같으니, 백성이 매우 괴로왔다.

군사 5천을 내어 일본 정벌을 도우매, 견(絹) 3만 3천여 필(匹)을 보내어 군량으로 바꾸어 사들이되, 경외(京外)의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값을 정해서 쌀을 거두었는데, 매필에 쌀 12두(斗)였다. 국가가 수년 동안 용병(用兵)한 이래 무릇 정토(征討)ㆍ둔전(屯田)ㆍ조선(造船) 등의 군사의 의식을 위한 지공(支供)에 한 해에 쓰이는 것이 무려 수십만 석이었다. 이 때문에 공사(公私)의 재물이 아주 비어서 사람들이 명(命)을 감내(堪耐)할 수 없었다. 왕이 농사에 방해됨을 걱정하여, 이분희(李汾禧)를 시켜 다구(茶丘)에게 가서 설득하여 반을 나누어 돌아가 농사짓게 하기를 청하니, 다구가 그대로 따랐다.

배 만들 재목을 변산(邊山)지금의 부안(扶安)에 있다 과 천관산(天冠山)지금의 장흥(長興)에 있다 에서 취했는데, 일을 이달 16일에 시작하여 5월 그믐에 끝내어, 크고 작은 배 9백 척을 김주(金州)에 돌려 대니, 사신을 보내어 원에 고하였다.

■갑술년 원종 15년(송 도종 함순 10, 원 세조 지원 11, 1274)

◯5월 세자가 원의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다.

곧 원주의 딸이며, 성은 기악온씨(奇渥溫氏)이고,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이니, 이가 제국 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이다.

○ 원의 정동군(征東軍)이 이르렀다.

무릇 1만 5천 인이었다. 원이 또 사신을 보내어 조(詔)하여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하고 군량을 저축하게 하고, 이어 홍다구에게 명하여 농사를 제점(提點)하게 하였으며, 왕은 송송례(宋松禮)에게 명하여 정동군을 더 내게 하였다.

동10월 원(元)의 정동군(征東軍)이 합포(合浦)를 떠나매, 도독사(都督使) 김방경에게 명하여 제군(諸軍)을 거느리고 따라가게 하였는데, 방경이 삼랑포(三郞浦)에서 일본 군사를 크게 격파하였고, 원군(元軍)은 물러나 돌아왔다.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과 우부원수(右副元帥) 홍다구(洪茶丘), 좌부원수 유복형(劉復亨)이 전함(戰艦)을 사열하였다. 김방경이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박지량(朴之亮)ㆍ김흔(金忻)이 지병마사(知兵馬事)가 되고, 임개(任愷)가 부사(副使)가 되며, 추밀부사(樞密副使) 김신(金侁)이 좌군사(左軍使)가 되고, 위득유(韋得儒)가 지병마사가 되고, 손세정(孫世貞)이 부사가 되며, 상장군(上將軍) 김문비(金文庇)가 우군사가 되고 나유(羅裕)ㆍ박보(朴保)가 지병마사가 되고, 반부(潘阜)가 부사가 되니, 삼익군(三翼軍)이라 불렀다. 흔(忻)은 곧 완(緩)이다.

몽한군(蒙漢軍 몽고와 중국 본토의 군사) 2만 5천과 우리 군사 8천과 초공(梢工 사공 곧 선장)ㆍ인해(引海)ㆍ수수(水手 수부) 6천 7백과 전함 9백여 척으로 합포에 머물러 여진군(女眞軍)을 기다렸으나 여진이 시기에 뒤지므로, 일시에 배를 띄워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니, 쳐서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일기도(壹岐島)에 이르니 왜병이 해안에 진을 쳤는데, 지량과 방경의 사위 조변(趙抃)이 쫓으니 왜가 항복을 청했다가 다시 와서 싸우므로, 다구가 지량ㆍ변과 함께 쳐서 1천여 급(級)을 죽이고, 삼랑포에 배를 두고 길을 나누어 나아가니, 죽인 것이 너무 많았다. 왜병이 불쑥 이르러 중군(中軍)을 공격하니 긴 칼이 좌우에 엇갈리되, 방경이 심은 듯이 서서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한 효시(嚆矢)를 뽑아 소리 질러 크게 호령하니 왜가 겁이 나서 달아나매, 지량ㆍ흔ㆍ변ㆍ이당공(李唐公)ㆍ김천록(金天祿)ㆍ신혁(申奕) 등이 힘껏 싸우니 왜병이 크게 패하여 주검이 삼더미 같았으므로, 홀돈이 말하기를,

“원나라 사람들이 싸움을 익혔다고는 하나 어떻게 이보다 더하랴!”

하였다. 제군(諸軍)이 함께 싸우다가 저물어서야 그쳤다.

방경이 홀돈ㆍ다구에게 말하기를,

“병법에 ‘천리의 현군(懸軍 이어지는 원군 없이 홀로 적지에 깊이 들어간 군사)은 그 예봉을 당할 수 없다, 하였거니와, 우리 군사가 적기는 하나 이미 적의 땅에 들어왔으므로 사람마다 자진해 싸우니, 곧 맹명(孟明)의 분선(焚船)이요, 회음(淮陰)의 배수(背水)입니다. 다시 싸웁시다.”

하였으나, 홀돈은 말하기를,

“병법에 ‘소적(小敵)이 굳게 지키더라도 힘이 빠지면 대적에게 사로잡힌다.’ 하였거니와, 지친 군사를 몰아서 날로 더하는 무리를 대적함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니, 군사를 돌려 돌아가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복형이 유시(流矢)에 맞아 먼저 배에 올랐다. 드디어 군사를 물려 돌아오는데, 마침 밤이요 크게 비바람이 불어 전함이 바위 언덕에 부딪쳐서 많이 부서지고, 신(侁)이 물에 떨어져 죽었다. 합포에 이르러 노획한 기장(器仗)을 황제와 왕에게 바치니, 왕이 추밀부사(樞密副使) 장일(張鎰)을 보내어 위유(慰諭)하였다. 제군(諸軍) 중에 돌아오지 않은 자가 1만 3천 5백여 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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