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강목(東史綱目)
안정복(1712-1791)
동사강목 제12상
■충렬왕 2년(송(宋) 단종(端宗) 원년, 원(元) 세조(世祖) 13, 1276)
◯윤3월 원에서 사람을 보내어 탐라(耽羅)에 가서 진주(眞珠)를 채취하였다.
원에서 임유간(林惟幹) 등과 회회(回回) 사람을 보내어 채취하였으나 수확이 없어, 마침내 백성이 간직한 1백여 개를 거두어가지고 돌아갔다.
○ 원에서 사신을 보내와 여자를 요구하였다.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와서 귀부군(歸附軍) 5백 명에게 아내를 구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왕은 과부처녀 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 5명을 여러 도에 파견하였다.
이때 국가에서 무인들을 많이 등용하여 재상을 삼았고, 모든 제도를 설시할 적에는 수상(首相)과 상색녹사(上色錄事)만이 그 명칭을 정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저속한 명칭이 많았다. 뒤에 ‘귀부군 행빙별감(歸附軍行聘別監)’으로 명칭을 고쳤다. 얼마 후에 그 반수를 데리고 돌아갔다.
○ 원에서 사신을 보내어 금을 채취하였다.
어떤 사람이,
“우리 나라에 금이 산출된다.”
하였기 때문이다. 왕이 인공수(印公秀)와 달로화적(達魯花赤)을 보내어 홍주(洪州)에서 채취하였는데 겨우 2전(錢)을 얻었다. 또 홍종로(洪宗老)라는 자가 금이 나는 곳을 많이 안다 하여 국자직강(國子直講) 최양(崔諹)을 종로와 함께 홍주(洪州)ㆍ직산(稷山)ㆍ정선(旌善) 등지로 보내어 70일간이나 금을 일었는데, 백성 1만 1천여 명을 동원해서 금 7냥 9푼중을 채취하였다. 왕이 채취하는 일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정축년 충렬왕 3년(송 당종 경염 2, 원 세조 지원 14, 1277)
◯2월 처음으로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 법을 실시하였다.
앞서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아뢰기를,
“국가의 경비가 부족하오니 문관과 무관에 대하여 동반(東班)은 벼슬이 없는 자에서 참직(參職)까지, 서반(西班)은 군인에서 낭장(郞將)까지 모두 등급에 따라 은을 바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또,
“벼슬을 돈을 받고 판다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나 국고가 바닥이 나서 재정을 마련할 도리가 없으니 전번의 교령에 추가하여 공로가 없는 자, 또는 순서를 밟지 않고 승진하려는 자에게 은을 국신도감(國贐都監)에 바친 뒤에 관직을 주게 하소서.”
하니, 왕은 이에 따랐다.
○ 원에서 사신을 보내와 인삼을 채취하였다.
중랑장 조윤통(曹允通)이 처음에 바둑을 잘 두는 것으로 원나라에 불려 들어갔었다. 원주가,
“세상에서 너희 나라에서 나는 인삼이 가장 좋다고 하니 네가 좀 구해올 수 있느냐?”
하매 윤통은,
“신에게 채취하여 들이라 하신다면 1년에 수백 근은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원주가 보내게 되었다.
이때부터 윤통은 해마다 지방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동원하여 인삼을 캐들이는데, 인삼이 산출되지 않는 지방에서 제 기한에 납부할 수 없을 때에는 곧 은을 징수하여 사리(私利)를 도모하였다.
왕이 장순룡을 보내어,
“인삼은 동북계(東北界)에서만 산출되는데 윤통이 여러 도에 대하여 강제로 채취해 올리라 하고 있습니다. 신이 생산되는 지방에서 철에 따라 캐어 올릴 터이오니 윤통이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7월 응방(鷹坊)에 딸린 민호(民戶)의 수를 줄였다.
왕의 명령에 의하여 응방에 딸린 민호 2백 5호에서 1백 2호를 줄였다. 이때 백성들이 과세가 과중한 것을 피하기 위하여 다투어 응방에 이름을 걸어놓았는데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왕이 알고 있는 것이 2백 5호이고 나머지는 모두 임금의 폐행(嬖倖)에게 개인적으로 소속되었는데 모두 은과 베를 거두어들였다. 당시 사람들이,
“매를 고기로 기르는 것이 아니라 은과 베로 배를 채운다.”
하였다.
■충렬왕 4년(송 제(帝) 병(昺) 원년, 세조 15, 1278)
◯ 처음으로 국중에, 모두 호복(胡服)을 입도륵 명을 내렸다.
이때 재상으로부터 하급 관리까지 개체(開剃)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다만 궁중과 학관(學館)만이 개체하지 않았었는데, 좌승지 박항(朴恒)이 학생들에게 모두 개체하게 하고, 인하여 나라 안이 모두 원나라 의관을 착용하게 하였다.
뒤에 원주가 강수형(康守衡)에게,
“고려에서는 복색을 어떻게 하느냐?”
하고 물으매,
“몽고의 양식을 다 따르고 있으며, 조서를 맞이할 때와 명절을 축하할 때에만 고려의 복색으로 행사합니다.”
하니, 원주는,
“사람들은 내가 고려의 고유한 의복을 금지한 것으로 말하는데 어찌 그럴 리가 있느냐? 너희 나라의 예법을 갑자기 폐지할 필요가 있느냐?”
하였다.
추7월 17일(무술)에 원주가 왕을 불러서 흔도와 다구의 군대, 종전군(種田軍)과 합포 진수군(合浦鎭守軍)을 모두 폐지할 것을 말하였다.
왕이 물러나오려 하니 원주는 다시 불러서 앞에 가까이 오게 하고는,
“나는 글을 모르는 거친 사람이고 너는 글을 아는 찬찬한 사람이다. 그러나 내 말을 잘 들어라. 성길사 황제(成吉思皇帝)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효성이 있으면 하늘이 반드시 안다.’ 하셨다. 네가 나를 받들려면 술 한 병, 쌀 한 섬만 가지고 오더라도 그것이 효다.”
하였다. 왕도 아뢰기를,
“신이 다구의 군대를 소환해 주시도록 청한 데 대해서 황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 모든 군대를 모두 소환하시니, 삼가 만수를 축원할 뿐입니다.”
하니, 원주는,
“두려워할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고, 하나는 말한 것을 어기는 것이다. 너는 백성을 잘 다스려서 여러 나라와 후세에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하라.”
하였다. 왕은,
“모든 군대가 돌아올 때에 양민을 위협하여 끌고 가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오니 금지하여 주옵소서.”
하니, 원주는,
“내가 말한 이상 너의 백성을 한 사람인들 누가 감히 데리고 온단 말이냐?”
하였다. 왕은,
“상께서 가까이 신임하시는 몽고인 출신 한 사람을 달로화적으로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원주는,
“달로화적은 두어서 무얼하느냐? 네 마음대로 잘하여라.”
하였다. 왕이,
“저희 나라에서도 대국의 법대로 점호(點戶)를 실시하기를 원하며, 또 합포군(合浦軍)은 그대로 두어서 왜적을 방어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원주는,
“남겨둘 필요가 없다. 너희 백성들의 피해가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너희 나라 사람으로 방비하게 하라. 왜적은 두려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점호법만은 네가 스스로 실시하라.”
하였다. 왕은 절하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물러나왔다.
○ 원에서 김방경을 놓아주어, 왕을 따라 귀국하였다.
원주가 왕에게 이르기를,
“방경을 참소한 두 사람이 모두 죽어서 대질 심문할 곳이 없게 되었으나 나는 벌써 방경이 억울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를 사(赦)하노라.”
하고, 왕을 따라 귀국할 것을 명하였다.
왕이 하직하고 돌아오는데 원주가 사람을 시켜서 호송하고, 왕에게 해동청(海東靑) 1련(連)과 부마(駙馬)의 금인(金印) 및 안장 갖춘 말을 주었고, 황후는 공주에게 채단(彩段) 한 수레를 주었으며, 황태자도 사람을 보내어 전송하고, 황자(皇子) 탈환(脫歡)과 황녀(皇女) 망가대(忙哥歹)와 여러 관인들이 몽고의 노래와 춤으로 술을 권하였다. 왕은 노래를 잘하는 홀치(忽赤)를 시켜 감황은곡(感皇恩曲)을 불러 화답하였다.
이번에 가서 국가에 폐해가 되는 모든 것을 건의하여 제거하게 되니, 나라 사람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충렬왕 5년(송 상흥 2 이 해 송이 망하였다-원 세조 지원 16, 1279)
◯ 도병마사(都兵馬使)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고쳤다.
국초부터 도병마사를 설치하고 시중(侍中)ㆍ평장사(平章事)ㆍ참지정사(參知政事)ㆍ정당문학(政堂文學)ㆍ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사(使)로 하고, 6추밀(樞密)과 소속[職事]된 3품관 이상을 부사(副使)로 하고 그 밑에 또 낭관(郞官)을 두었었는데, 이때에 이를 고쳐서 도평의사로 만들고 큰 사건이 있을 때에는 사(使) 이상이 회의를 열었다. 이리하여 합좌(合坐)라는 명칭이 생겼다. 원나라에 복속된 이후로 갑자기 일어나는 문제가 많아져서 첨의(僉議)와 밀직(密直)이 언제나 모여앉아서 회의하였다.
○ 백성이 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것을 허락하였다.
왕은 백성이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서도 이를 풀어주지 못하는 일이 많을 것을 고려하여 이 명을 내렸다.
또 권세를 부리는 집에서 남의 농민을 마음대로 빼앗아가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왕지별감(王旨別監)과 경화궁(敬和宮)에 속해 있는 자들이 각 고을에서 행패를 부려서 백성들의 불평이 가득하였으나 하소연할 곳이 없고, 이런 것은 쓸데없는 형식에 그치고 말았다.
9월 사절을 남도(南道)에 파견하여 전함(戰艦)을 수리하고 제조하였다.
원나라에서는 다시 일본을 정벌하려 하여 원수부(元帥府)에서 명령을 받들어 우리 나라에 전함 9백 척을 다시 제조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허공을 경상도에, 홍자번(洪子藩)을 전라도에, 권단을 충청도에 보내어 도지휘사로 삼았다. 얼마 후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전함 제조하는 것을 독려하니, 왕은 광평공(廣平公) 혜(譓)에게 명하여 함께 가서 감독하게 하였다.
■신사년 충렬왕 7년(원 세조 지원 18, 1281)
◯춘정월 초하루에 원에서 수시력(授時曆)을 반포하였다.
허형(許衡)과 곽수경(郭守敬)이 편찬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진(秦)나라에서 옛 성인의 학술을 없애면서 매번 연말에 윤달을 두기 시작하면서 옛법이 없어졌다. 한대(漢代) 이후로 연ㆍ월ㆍ일의 나머지 숫자를 집계하는 기준을 삼아서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여 내려왔다. 하늘의 움직임은 쉴새없이 돌아가는데 일정한 방법에 의거하여 거기에 얽매이게 되니 오래가서 틀리지 않을 수가 없다. 틀리면 반드시 개정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 태사원(太史院)에 명하여 영대(靈臺)를 짓고 의상(儀象)을 만들어 날마다 측정하고 달마다 시험하여 도수(度數)의 정확을 탐구하고 ‘연ㆍ월ㆍ일의 나머지 숫자를 집계하는 법’을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하늘이 운행하는 실제에 들어맞아 영원히 착오가 없을 것을 바라며 명칭을 수시력(授時曆)이라 하였다.”
반행조사(頒行詔使) 왕통(王通) 등이 도일사(道日寺)에 숙소를 정하고 낮에는 해그림자를 측정하며 밤에는 천문(天文)을 관찰하고, 우리 나라의 지도 보여주기를 요구하였다.
하4월 왕이 합포에 갔다. 4일 만에 합포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초하루(병인)에 왕경을 출발하여 15일(경진)에 합포에 도착하고 18일(계미)에 군대와 전함 1천여 척을 사열하였다. 김방경 등이 거느린 우리 군대가 2만 7천여 명, 흔도가 거느린 몽고군과 한군이 5만 명이요, 지난해 10월에 원나라에서 범문호(范文虎)를 보내어 10만 군을 거느리고 강남(江南)에서 바다를 건너 금년 6월 보름에 일기도(壹岐島)로 모이기로 약속되었다. 여기에 소요되는 군량이 13만 3천 5백 60여 석에 달하였다.
월 일본 정벌군이 합포에서 출발하였다.
6월 원군(元軍)이 일본병과 패가대(覇家臺)에서 싸워, 원군이 패하였다.
5월 4일(무술)에 모든 군대가 배로 출발하여 27일(신유)에 일본 세계촌(世界村) 대명포(大明浦)에 도착하여 통사(通事) 김저(金貯)로 하여금 격문을 보내어 설유하였다.
김주정이 먼저 왜군과 교전하였는데 모든 군대가 모두 내려가서 어울려 싸웠다. 낭장 강언(康彦)과 강사자(康師子) 등이 전사하였다. 모든 군대가 일기도를 향하여 가는데, 원나라 장군 홀로물탑(忽魯勿塔)이 거느린 선군(船軍) 1백 13명이 폭풍을 만나 떠내려갔다.
6월 8일(임신)에 태재부(太宰府)의 패가대(覇家臺) 그 나라의 박다진(博多津)으로 서해도(西海道)의 축전주(筑前州)에 속한다 에 닿았다. 김방경ㆍ김주정ㆍ박구ㆍ박지량, 원 나라 장군 형만호(荊萬戶) 등이 일본병과 싸워서 3백여 명을 죽였는데, 일본병이 돌진하여 관군의 진용이 흩어지고 홍다구는 말을 버리고 달아났다. 원 나라 장군 왕만호(王萬戶)가 다시 측면으로 공격하여 50여 명을 죽이니, 일본병은 마침내 물러났다.
다구는 가까스로 살아났다가 이튿날 싸움에서 다시 패하였고, 군중에는 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죽은 사람이 모두 3천여 명에 달하였다. 흔도와 다구 등은 여러 번 전투에서 불리하였고, 또 범문호가 기한이 지났는데도 오지 아니하므로 돌아갈 것을 논의하였다. 방경은,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3개 월의 식량을 가지고 왔는데, 지금 1개 월의 식량이 아직도 남았으니 남방의 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함께 싸우면 반드시 섬의 오랑캐를 격멸할 것이다.”
하고 강조하니, 여러 장군은 감히 다시 말을 하지 못하였다.
○ 원에서 군대를 보내어 합포에 주둔하였다.
모두 기마병 3백 명이었다.
○ 일본 정벌에 나갔던 여러 장군이 군대를 버리고 도망쳐 돌아왔다.
범문호가 전함(戰艦) 3천 5백 척과 만군(蠻軍)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서 7월에 평호도(平壺島)지금은 평호도(平戶島)라 한다. 일본 서해도(西海道) 비전주(肥前州)에 속하였으며 일기도의 동쪽에 있다 에 도착했는데 8월 1일 태풍(颱風)을 만나서 배가 부서지고, 5일에 여러 장군은 각기 튼튼한 배를 가려서 타고 달아나고, 문호는 우리 나라로 도망쳐 나왔으며, 흔도는 군대 10여만 명을 산 밑에다 버려두어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수가 없어 시체가 밀물을 따라 포구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데, 포구가 그 때문에 막히게 되어 사람이 밟고 다니게 되었다.
여러 군대가 마침내 돌아왔는데, 원나라 군대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10여 만에 달하였고, 우리 군대도 죽은 사람이 8천여 명이었다. 태풍이 닥쳐올 때에 김주정이 계책을 써서 건지고 살려낸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남방 군대들은 섬에서 장백호(張百戶)라는 사람을 추대하여 장수로 세우고 돌아갈 계책을 세우는데, 일본에서 이를 알아내고 습격하여 거의 다 죽여버렸다. 그 뒤에 만군 총관(蠻軍摠管) 심총(沈聰) 등 6명이 도망쳐와서,
“우리는 명주(明州) 사람인데 6월 18일에 같랄대(葛剌歹) 만호(萬戶)를 따라 배를 타고 일본에 이르러 폭풍을 만나 배가 부서져 여러 군대 13만~14만 명이 한 산(山) 원사(元史)에는 오룡산(五龍山)이라 하였다 에 모여 있었는데, 10월 8일에 일본군대가 이르렀는데도 우리 군대는 배가 고파서 싸울 수가 없어 모두 항복하였더니, 일본에서 기술자와 농사지을 수 있는 사람만을 뽑아 남겨놓고 다 죽였다.”
하였다.
동사강목 제12하
■계미년 충렬왕 9년(원 세조 지원 20, 1283)
◯춘2월 유생(儒生)을 군대에 보충하기를 논의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왕이 윤수(尹秀)의 말을 받아들여 유생을 군대에 보충하려 하니, 우승지(右承旨) 정가신(鄭可臣)이,
“선왕이 사람을 쓰는 데 있어서 문인과 무인을 양쪽 손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중국의 법에도 유생의 집안은 군사에는 관계하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거추장스러운 옷에다 넓은 띠를 매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잡게 하여 멀리 정벌에 참가시킨다면 이는 임금의 덕을 손상시키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하니, 왕은 그 말을 따랐다.
5월 전함 수리와 군대를 징발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원나라 중승(中丞) 최욱(崔彧)이,
“강남(江南) 지방에 도적이 일어나고 백성이 제대로 생활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일본을 정벌하는 계획은 당분간 중지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황제는 일본 정벌의 논의를 중지하였다.
뒤에 황제는 일본 풍속이 불교를 숭상하는 것을 생각하고 왕적옹(王積翁)과 승려 여지(如智)를 일본에 사절로 보냈는데, 뱃사람이 가기를 싫어하여 적옹(積翁)을 살해하였다.
동10월 왕이 공주와 남경(南京)에서 사냥을 하였다.
윤수(尹秀)ㆍ이정(李貞)ㆍ박의(朴義) 등이 왕을 인도하여 사냥하러 다니는데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때에 세자 원(謜)이 9살이었는데 이 말을 듣고 울면서,
“백성이 곤경에 빠져 있고 또한 농사철인데 부왕(父王)은 어째서 멀리 다니며 사냥을 하십니까?”
하였다. 왕은 그 말을 듣고,
“어린아이가 괴상한 소리를 다 한다.”
하더니, 얼마 후에 공주가 병이 나서 마침내 가지 못하고 말았다.
세자는 총명이 뛰어났다. 한번은 장작서(將作署)의 기인(其人)이 해진 베옷을 입고 땔나무를 지고서 궁궐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좋은 옷을 입었는데 백성들은 저 모양이니 내가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느냐?”
하였고, 또 궁의 노예가, 마을 아이가 날리는 종이연을 빼앗는 것을 보고는 곧 돌려주게 하였다.
한번은 행리별감(行李別監) 위선(魏璇)에게,
“기괴하고 요망스러운 이야기는 다 나에게 소용이 없으니 다만 옛사람들의 훌륭했던 사실만 나에게 일러 달라.”
하였다. 염승익(廉承益)이 관상하는 사람 천일(天一)에게 세자를 보였더니 천일이,
“인자한 눈을 가지셨으니 매나 사냥개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으시겠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박의가 마침 옆에 있는 것을 보고 세자는,
“매와 사냥개를 가지고 우리 임금께 아첨을 부리는 자가 바로 이 늙은 개다.”
하니, 의는 부끄러워 자리에서 물러갔다.
왕이 병이 났는데 박사(博士) 강후(康煦)가 머리와 팔뚝을 불로 지져서 왕의 병을 구호한 적이 있었다. 후가 죽은 뒤에 세자는 그 말을 듣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충성과 열의로 절조를 극진히 하는 것이 옳다. 머리와 팔뚝을 지지는 것은 불가에서 하는 의식이며 군자로서 할 바가 아닌데, 후는 임금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이렇게 예에 어긋나는 짓을 감행하였으니 죽은들 아까울 것이 무엇이냐?”
라고 논평하여 듣는 사람을 감탄하게 하였다.
■갑신년 충렬왕 10년(원 세조 지원 21, 1284)
◯하4월 왕이 공주ㆍ세자와 원에 갔다.
수행하는 신하가 1천 2백여 명, 가져가는 예물이 은 6백 30여 근, 모시 2천 4백 40필, 저폐(楮幣)가 1천 8백여 명이었다.
■을유년 충렬왕 11년(원 세조 지원 22, 1285)
◯12월 원에서 다시 사절을 보내어 전함 만드는 것을 독촉하였다.
원주는 일본이 섬 안에 있는 군대를 습격하여 죽인 데에 분노하여 다시 일본을 토벌하려고 한 것이다. 원나라 중서성에 통첩을 보내어 군량 10만 석을 조달하라 하였다.
■병술년 충렬왕 12년(원 세조 지원 23, 1286)
◯춘정월 원에서 조서를 내리어 일본을 토벌하려던 일을 중지하였다.
원나라에서는 이 해 3월에 각 지방의 군대를 출동하여 8월에 합포에 집합하려 했는데, 상서(尙書) 유선(劉宣)이 글을 올리기를,
“이 전쟁이 그치지 않으면 이는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여 마침내 조서를 내리어 일본을 토벌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정해년 충렬왕 13년(원 세조 지원 24, 1287)
○하4월 왕이 공주와 서해도(西海道)에 가서 사냥하였다.
사냥하는 기마(騎馬)가 1천 5백이었다. 재상이 간하기를,
“가뭄이 매우 심하였고 백성이 경작할 때이니, 아마도 이번 행행은 민원(民怨)을 초래할 것입니다. 더구나 금수가 새끼를 밸 때이므로 사냥해서는 안됩니다.”
하였으나, 왕은 성을 내고 듣지 않았다.
■무자년 충렬왕 14년(원 세조, 지원 25, 1288)
◯환자 최세연(崔世延)ㆍ도성기(陶成器)가 죄를 짓고 섬에 유배되었다.
세연은 남의 노비를 빼앗아 가지다가 세자의 마음에 거슬렸고 또 미친 개를 많이 길러서 사람을 물어 죽였다.
정화 궁주(貞和宮主)가 소문을 듣고 미친 개를 기르지 말 것을 명령하였더니, 세연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
“궁주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려고 내가 개 기르는 것까지 못하게 합니까?”
하였다. 세자는 크게 노하여 그의 앞에서 죄를 지적하였으나, 세연은 불손한 태토로 항변하였다. 세자는 왕에게,
“세연이 못된 짓을 많이 하여 온 나라에 해독을 끼치고 있으니 멀리 쫓아내어 그 죄를 징계하옵소서.”
하였다. 세연이 인후(印侯)를 아비로 받들고 있었는데 왕은 후의 말을 받아들여 난색을 보였다. 세자가 울면서 요청하니 후는 세자를 원망하였다. 세자는 후를 꾸짖기를,
“재상은 배가 독처럼 큰데 그것이 모두 세연이 바친 술과 고기로 채워놓은 것이다. 너도 세연과 같이 못된 짓을 했으니 한 형틀 위에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공주도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세연에게 장형을 실시하고 성기와 함께 먼 섬에 유배보냈으나 얼마 안되어 불러들였다.
■기축년 충렬왕 15년(원 세조, 지원 26, 1289)
◯춘2월 쌀을 요동(遼東)에 수송하였다.
원나라에서 전쟁이 있었고 또 흉년이 들었다 하여 참정(參政) 장수지(張守智)를 보내와,
“쌀 10만 석을 조달해 가지고 와서 구호해 달라.”
는 조서를 가져왔다.
왕은 모든 관료로부터 공사 노예에까지 등급에 따라 쌀을 바치게 하여 감찰사 승(監察司丞) 여문취(呂文就) 등을 보내어 배 4백 82척에다 쌀 6만 4천 석을 싣고 개주(蓋州)개평현(蓋平縣). 심양(瀋陽) 남쪽 3백 60리에 있는데 남쪽은 요해(遼海)와 붙어 있다 로 수송하고, 나유(羅裕)ㆍ박지량(朴之亮)을 충청ㆍ경상 도순문사(都巡問使)에 임명하여 군량 수집을 독려했는데, 개주에까지 가서 풍파를 만나 배 50여 척이 파괴되고, 쌀 6천 2백여 석이 침몰되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1백여 명에 달하였다.
■경인년 충렬왕 16년(원 세조 지원 27, 1290)
◯3월 원에서 동녕부(東寧府)를 폐지하고 서북 지방의 여러 성을 돌려 주었다. 왕은 한신(韓愼)ㆍ계문비(桂文庇) 등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았다.
앞서 최탄(崔坦) 등이 서경(西京) 이북의 땅을 가지고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왕이 여러 번 돌려 주기를 요청했으나 원에서 듣지 않았고, 탄(坦)과 신(愼) 등은 중로(中路)에 점령하고 있으면서 백방으로 본국을 모해하였다. 이때에 와서 원에서는 비로소 동녕부를 폐지하고 서북 지방의 여러 성을 모두 돌려주었으니 22년 만에 비로소 복구된 것이다. 왕은 그 총관(摠管)이었던 한신과 계문비 등을 대장군으로 삼고 그 밑의 관리들에게도 계급에 따라 관직을 내렸다. 그 뒤에 원주가 세자에게,
“한신 등이 너희 나라를 배반한 것은 사실이나 정부에 대하여 다소의 공로가 있었으니 지나치게 책망하지는 말라.”
하였다.
12월 합단이 화주(和州)와 등주(登州)를 함락하니, 만호 인후(印侯)를 보내어 방어하였다.
합단병 수만 명이 3개의 주를 함락하고 사람을 죽여서 식량을 하며, 부녀자에게는 떼를 지어 윤간[聚麀]한 다음에 죽여서 포(脯)를 떴다.
■임진년 충렬왕 18년(원 세조 지원 29, 1292)
◯하5월 세자가 원에서 돌아왔다.
이에 앞서 상장군(上將軍) 유비(柳庇)를 원나라에 보내어 세자가 본국에 돌아오기를 청했는데, 이때에 장군 김연수(金延壽)가 돌아와서 세자가 돌아올 기일을 알리고 또 세자의 말로 왕에게 아뢰기를,
“들으니 흉년이 들고 백성이 굶주린다 하는데 왕께서 행행하시면 받들기 위한 경비가 적지 않을 것이오니, 왕께서는 서울 밖에 나와서 맞이하지 마시옵소서. 더구나 자식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일부러 나오시는 일은 불가한 일입니다. 또 궁중의 관료로 마중나올 사람들도 서보통(西普通)지금의 개성(開城) 영평문(永平門) 밖에 있다 이상은 나오지 말게 하소서.”
하였다. 왕은 노하여,
“세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하였다.
윤6월 원에서 다시 쌀을 수송하여 와서 구호하였다.
만호(萬戶) 서흥상(徐興祥)이 쌀 10만 석을 싣고 와서 기민(飢民)을 구호하려다가 풍파를 만나 배가 침몰되어 4천여 석 만을 가져왔다.
■계사년 충렬왕 19년(원 세조 지원 30, 1293)
◯추8월 원에서 사신을 보내와 배 만드는 것을 관리하였다.
이때에 원나라에서는 다시 일본을 토벌하려 하여 파두아(波豆兒)를 보내와 배를 만드는 것을 관리하게 하였다. 파두아는 군상(君祥)의 형인 웅삼(熊三)의 아들이다. 사명을 받들고 오다가 왕궁을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눈물을 흘리며,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오지만, 내 직임(職任)이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니 부끄럽다.”
하였다. 재상에게 대우하는 것이 매우 공손스러웠다.
◯동10월 왕이 공주와 함께 원에 갔다.
왕은 일본을 정벌하는 문제를 아뢰기 위하여 마침내 원나라에 가는데 양가의 여자 세 사람을 골라 데려가고 제안공(齊安公) 숙(淑)과 홍자번을 명하여 수도에 남게 하였다. 왕이 금교(金郊)에 도착했는데 서해도 안렴사 유서(庾瑞)가 접대하는 것이 늦었다 하여 장형을 실시하고, 봉주(鳳州)에 도착하여 서가 왕에게 연회를 베풀었더니 왕은 부드러운 말로 위로해주었다. 공주가,
“먼저 금교에서는 꾸지람을 듣고 오늘 봉양(鳳陽)에서는 기쁨을 샀으나 여기에 올라오는 음식이 모두가 백성의 기름을 짜낸 것이니 돌아올 적에는 백성에게서 짜내가지고 기쁨을 살 생각을 하지 말라.”
하였다.
12월 왕이 연경(燕京)에 도착하였다.
왕이 연경에 가서 홍군상(洪君祥)의 집에 사관을 정하였다. 이때 원주는 병이 위독하여 보지 못했으나 오는 도중에서부터 맞이하여 위안하는 예우와 도착한 이후에 사랑하며 물품을 후하게 주는 것이 제왕(諸王)이나 부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갑오년 충렬왕 20년(원 세조 지원 31, 1294)
◯하4월 원에서 일본을 정벌하려는 계획을 철회하였다.
이때에 왕이 들어간 것은, 일본을 정벌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점을 건의하려 한 것이었는데, 마침 세조가 죽었다. 첨원(僉院) 홍군상(洪君祥)을 시켜서 승상 완택에게 말하여 마침내 일본 정벌을 중지하였다.
그때 좌부승지 민지(閔漬)가 따라갔는데 군상과 배 만드는 일을 중지할 것을 논의하니, 인후(印侯)와 장순룡(張舜龍)이,
“이는 조정의 중대한 일인데 어떻게 첨원 한 사람의 말로 중지할 수 있느냐?”
하니, 지는,
“뒤에 만일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책임을 지겠다.”
하고 마침내 왕에게 아뢰어 이를 중지하였다. 사람들은 지가 강경하고 곧은 것을 칭찬하였다.
5월 원에서 탐라를 고려에 돌려주었는데 명칭을 제주(濟州)라 고쳤다.
왕이 원주에게 네 가지를 청하여 모두 허락을 받았다. 첫째는 탐라를 돌려 줄 것, 둘째는 우리의 포로를 돌려보낼 것, 셋째는 공주를 책봉할 것, 넷째는 작명(爵命)을 내려 줄 것 등이었다.
■병신년 충렬왕 22년(원 성종 원정 2, 1296)
◯하5월 홍자번을 우중찬(右中贊)으로, 조인규를 좌중찬으로 삼았다.
자번이 백성을 위하여 필요한 18개 사항을 아뢰었는데 다음과 같다.
1. 지금 여러 도에 세저(細苧)를 거두어들이어 백성이 감당할 수 없사오니 관비(官婢)로서 복무 신역(身役)을 면한 자에게 짜서 올리게 하여 백성의 힘을 덜어주십시오.
2. 공납과 세납은 이미 일정한 액수가 있는데 또 여러 도에서 집집마다 세마포(細麻布)를 거두어들이는 것은 사실 무리한 징발이오니, 이를 금지하소서.
3. 토지는 책임 있는 임자가 없어서 도망치는 일꾼이 많고 백성은 항심(恒心)이 없어서 도망한 세대가 많은데, 공납이나 세납이 나올 적마다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 부담시키고 있으니 이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 피폐해지는 이유입니다. 그들에게 토지를 주어서 그 다소에 따라 공납을 바치게 하십시오.
4. 여러 도의 공납이 이미 정해진 액수가 있는데 이제 또 호피(虎皮)ㆍ표피(豹皮)ㆍ웅피(熊皮)를 공납시키고 있으니 이는 공납이 복잡하고 과중할 뿐 아니라 사나운 짐승이 사람을 해칠 우려마저 있으니 이를 금지하십시오.
5. 나라에서 금과 은을 사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데 나올 데가 없으니, 동서(東西) 각방(各房)에서 집무하는 모든 관료가 새로 임명될 때에 거두어들이는 물품에서 3분의 2를 받아들여서 국가의 용도에 보충하십시오.
6. 소금에 대해서는 이미 일정한 세납을 받는데, 이제 주현에 강제로 세납을 매기고 있으니, 이를 금지하십시오.
7. 국가의 경비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오랫동안 힘을 쌓은 사람, 공적이 있는 사람, 왕을 모시고 중국에 수행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새로 관직을 받은 자에 대하여 계급에 따라 세납을 받아서 국가 경비에 충당하십시오.
8. 나라는 백성이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이 근본인데 국가에서 평소에 양곡을 축적해 두지 않았다가는 흉년이 들 때에 구제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중앙과 지방에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집집마다 미곡을 거두어서 제철에 비축해 두었다가 비상시에 대비하십시오.
9. 근래 놋쇠[鍮]와 동(銅)을 다루는 공인이 지방에 많이 있는데, 모든 주현의 관리 및 왕의 명을 받든 사신이 경쟁하여 놋쇠와 동으로 그릇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민간에 사용하는 그릇이 날로 없어져가고 있으니, 공인들에게 기한을 설정해 주어 서울로 돌아오게 하십시오.
10. 모든 주현의 관리와 사신으로 나가는 관리가 모두 출신(出身)한 관청과 급제한 진사(進士)에게 물품을 부쳐 보내며 이것을 봉송(封送)이라 하는데, 실 한 오라기, 쌀 한 톨이라도 모두가 백성의 피와 기름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것을 금지하십시오.
11. 모든 주현 및 향소(鄕所)와 부곡(部曲)에 아전 한 사람도 없는 곳이 많으니 지방의 아전으로서 세력가에 붙어서 역(役)을 회피하는 자를 모두 시골로 돌아가게 하며, 정리(丁吏)도 인원을 줄여서 돌아가게 하십시오.
12. 권력 있는 집에서 주현에 사람을 보내어 은병(銀甁) 따위의 물건을 가지고 민간에 세포(細布)ㆍ능라(綾羅)ㆍ위석(韋席) 등 물품을 강제로 사들여가고 있어 민간의 폐해가 크니 이를 금지하십시오.
13. 근래 지방에 사고가 많아서 공납을 제때에 못할 적이 많은데 여러 관청의 관리와 이익을 노리는 사람이 먼저 자기의 물품을 세납하고 그 증명서를 받아가지고 시골로 내려가서 그 대가를 많이 얹어서 받아가므로 백성이 견디지 못하오니 이를 금지하십시오. (방납제가 시행되고 있다.)
14. 대부(大府)ㆍ영송(迎送)ㆍ국신(國贐) 등의 창고에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곧 서울 시장에서 사들이는데, 자유롭게 사온다 하지만 사실은 강탈(强奪)이나 마찬가지오니 이를 금지하십시오.
15. 여러 주의 아전이 서울에 머물면서 대기하고 있어 이를 기인(其人)이라 하는데, 근래에는 기인을 인부로 사용하여 지방에도 일이 많아서 기인이 혹 빠지게 될 때에는 일자를 계산하여 그 품삯을 징수합니다. 이리하여 주현이 날이 갈수록 피폐해가며, 참작하여 수를 줄였다 하나 아직도 고르지 못하오니 이제부터 10세대가 있는 고을에는 1명으로 줄이고 5세대인 고을은 전부 면제하십시오.
16.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짐을 운반하여 민간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인데 근래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소와 말을 가지고 국경을 나가기도 하며, 또 주와 군에 대하여 소와 말을 징발하여 국신(國贐)에 사용하게 하고 있으니 금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17. 각 지방의 수령이 교체될 때에 전송과 마중에 대한 경비가 백성에게 폐해가 되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관청에 소속된 사람만으로 전송하며 맞이하게 해야 합니다.
18. 사신으로 나가는 관리가 정리(丁吏)와 상수(上守)를 데리고 가는데 가는 주현에서 모두 물품을 선사하면서 이것을 예물(例物)이라 하오니 이것도 금지하십시오.
9월 왕이 공주와 함께 원에 갔는데, 11월에 연경(燕京)에 이르렀다.
이때 원나라에서 혼인을 허락하고 왕이 들어올 것을 재촉하였다. 9월 21일(정해)에 왕이 공주와 원나라에 가는데 따르는 신하가 2백 43명, 따르는 하인이 5백 90명, 말이 9백 90필이었으며 행자(行資)와 예물로 가져가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11월 17일(임오)에 연경에 이르러 홍군상(洪君祥)의 집에 사관을 정하였다. 황태후가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고, 제왕ㆍ공주ㆍ공경(公卿)ㆍ사부(士婦)들이 다투어 와서 문안하였다.
19일(갑신)에 황제를 뵙고 장조전(長朝殿)에서 연회를 베푸는데, 여러 왕이 좌석에 꽉 차 있었다. 왕은 일곱째 좌석에 앉고 공주의 옆에는 앉는 사람이 없었다.
○세자가 원의 진왕(晉王) 감마랄(甘麻剌)의 딸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에게 장가들어 비(妃)로 삼았다.
세자는 백마(白馬) 81필을 황제에게 바치고 진왕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이날 연회에서 우리 나라의 유밀과(油蜜果)를 사용하였다. 여러 왕ㆍ공주 및 여러 대신이 모두 시연(侍宴)하였다. 술이 취한 뒤에 우리 나라의 악관에게 감황은(感皇恩) 곡조를 연주하게 하였다. 세자는 또 태후와 진왕에게 백마 81필씩을 드렸다. 태후와 진왕이 또 연회를 베풀어 주었고 원주는 왕과 따라간 신하ㆍ여자ㆍ내시들에게까지 계급에 따라 물품을 차등 있게 주었다. 진왕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 하니 원주는 그를 위하여 전별연을 베풀었는데, 술이 취하자 왕은 일어나서 춤추고 공주는 노래를 불렀다. 이때에 왕과 공주는 날마다 시연(侍宴)하였다.
■정유년 충렬왕 23년(원 성종 대덕(大德) 원년, 1297)
◯추7월 세자 원(謜)이 왕의 행희(幸姬) 무비(無比)와 환자(宦者) 최세연(崔世延)ㆍ도성기(陶成器) 등을 죽이고 그의 무리 40여 명을 유배하였다.
무비는 총행(寵幸)이 더욱 두터워지지자, 세연 등과 안팎에서 마음대로 세력을 부렸다. 세자가 이를 몹시 미워했는데 상사를 당하여 달려와서 왕에게,
“전하는 공주가 병이 생긴 이유를 아십니까? 이는 궁중에서 사랑을 받고 질투하는 사람 때문이오니 그를 국문하게 하옵소서.”
하니 왕은,
“우선 복이 끝날 때를 기다리자.”
하였으나 세자는 듣지 않고 측근을 시켜 국문하니 무비ㆍ세연ㆍ성기ㆍ전숙(全淑)ㆍ방종저(方宗氐), 장군 윤길손(尹吉孫)ㆍ이무(李茂), 소윤(少尹) 유거(柳琚), 지유(指諭) 송신단(宋臣旦), 내관 김인경(金仁鏡)ㆍ김근(金瑾) 등과 여자무당ㆍ술승(術僧) 들이 모두 자백하였으며, 저주(咀呪)를 행한 사실까지 대강 알아냈다. 무비ㆍ세연ㆍ성기ㆍ숙ㆍ종저 등을 모조리 죽이고, 그의 무리 40여 명을 유배했는데, 왕은 이를 말리지 못하니 나라 사람들은 떨며 무서워하였다.
■무술년 충렬왕 24년 정월 17일(갑진)부터 8월 18일(임신)까지는 충선왕(忠宣王)의 기사이다. (원 성종 대덕 2, 1298)
◯ 원에서 세자 원(謜)을 왕에 책봉하고, 충렬왕을 봉하여 일수왕(逸壽王)이라 하였다. 원이 왕위에 올라서 충렬왕을 높이어 태상왕(太上王)이라 하였다.
세자가 돌아오니 왕이 교서를 내리어 왕위를 전하였다. 세자는 전(牋)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나라에서 함녕후(咸寧侯) 왕유(王維)를 보내어 조서를 내리어 세자를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 좌승상 부마 상주국 고려왕(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駙馬上柱國高麗王)의 칭호를 주고, 왕에게는 공신호(功臣號)와 태위 부마 상주국 일수왕(太尉駙馬上柱國逸壽王)의 칭호를 더 주어 특별히 높이 대우하는 뜻을 보였다.
19일(병오)에 왕이 강안전(康安殿)에 행행하여 세자 원에게 왕위를 전하니 이가 충선왕(忠宣王)이다. 왕은 장순룡(張舜龍)의 집으로 물러나앉아 명칭을 덕자궁(德慈宮)이라 하였다.
28일(을묘)에 덕자궁에 나아가 전(箋)을 받들고 광문선덕 태상왕(光文宣德太上王)이라고 존호(尊號)를 올렸다. 왕은 자포(紫袍)를 입고 태상왕은 황포(黃袍)를 입고 축하를 받으니 이때 사람들은 ‘삼한(三韓)의 성대한 행사’라고 칭송하였다.
○5월 공주가 조인규와 그의 아내를 옥에 가두었다.
왕은 공주를 맞아온 이후로 부부간의 행사가 거의 없다시피하였고 조비(趙妃)가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공주는 질투와 원한 끝에 외오아(畏吾兒) 글자로 편지를 써서 따라온 사람 활활불화(闊闊不花) 등에게 주어 원나라에 가 황태후에게 고하게 하였다.
외오아는 옛날의 회골(回鶻)이다. 원나라에는 옛적에는 글자가 없었는데 팔사파(八思巴) 중의 이름 가 처음으로 몽고 문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통용하는 편지에는 외오아 글자를 많이 사용하였다. 그 편지에,
“조비가 공주를 저주하여 왕이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하였다. 왕은 두려워서 상왕에게 말하여 상왕이 공주에게 와서 위로하였으나 공주는 그런데도 보냈다. 얼마 후에 어떤 사람이 대궐문에다 익명서(匿名書)를 붙였는데,
“조인규의 아내가 무당을 시켜저 저주술을 행하여, 왕이 공주는 사랑하지 않고 자기 딸만을 사랑하게 해 달라 했다.”
하였다. 공주는 인규와 그 아내를 옥에 가두고 방을 붙인 자를 찾아내니 곧 사재 주부(司宰注簿) 윤언주(尹彦柱)의 짓이었다. 또 인규의 사위인 최충소(崔冲紹)ㆍ박선(朴瑄) 등을 가두고 곧 철리(徹里)를 원나라에 보내어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 등이 공주에게 나아가 철리를 가지 못하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듣지 아니하고, 왕이 사람을 시켜서 요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원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인규를 국문하고, 왕비 조씨를 가두었다. 6월에 또 사절을 파견하여 조비와 인규를 잡아갔다.
철리가 원나라에서 돌아와서 원주의 명령으로 조비를 가두었는데 사신이 올 때 역마를 탄 사람이 모두 1백여 명에 달하였다. 마침내 인규를 국문하고 또 인규의 아내를 국문하였는데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인규의 아내는 거짓 자백하였다. 마침내 인규ㆍ최충소ㆍ박선을 잡아가고 그 집의 재산을 몰수하여 사신의 숙소로 운반하였다. 원나라에서는 인규를 안서(安西)에, 충소 등은 공창(鞏昌)에 유배하였다.
◯8월 원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의 인(印)을 회수하고, 불러들여 숙위(宿衛)하게 하고 상왕(上王)을 복위시켰다. 왕은 공주와 함께 원에 갔다.
이때에 어떤 사람이 원나라에 가서 왕이 참람스럽게 사도(司徒)와 사공(司空) 등의 관직을 설치하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일이 많다고 중상하였다. 중서성(中書省)에서 조서를 내리어 원(謜)을 불러들일 것을 요청하여, 이 달 10일(갑자)에 원나라에서 발로올(孛魯兀)을 보내서 왕과 공주에게 빨리 들어와서 조회할 것을 독촉하여 17일(신미)에 왕과 공주가 원나라로 떠났다. 18일(임신)에 상왕이 금교(金郊)에 나아가서 전송하는데 술이 얼근할 무렵에 발로올은 원주의 명으로 왕의 인을 빼앗아 상왕에게 주었다. 19일(계유)에 상왕이 수령궁(壽寧宮)에서 조서를 받았다. 조서에,
“아들인 왕이 정치를 담당한 이후에 정권을 독재하고 잘못 처결하는 일이 많으므로 여러 사람이 의구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이는 아직 나이가 들지않고 경험이 적기 때문이므로 내가 직접 임명한 뜻에 부합되지 못하고 있으므로 이제 조서를 내리어 경에게 과거대로 나라의 정사를 통할하게 하고 원을 불러들여서 궁궐에 시위하고 있으면서 사무에 대한 것을 밝게 익히게 하였노라.”
하였다. 이때에 원나라의 사신이 들어온 지가 10일이 지났는데도 나라 사람은 이런 조서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왕이 공주와 원나라에 들어가자 원주가 급히 불러들이니 왕은 두려워했는데, 승상이 나와서 임금의 뜻을 전하면서 따라온 신하 안향(安珦)에게,
“너희 왕이 어째서 공주를 가까이하지 않느냐?”
하고 물었다. 향은,
“이는 궁중의 사생활로서 밖에 있는 신하가 알 바가 아닙니다. 이제 이런 것을 물으신다면 어떻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승상이 그대로 원주에게 아뢰니, 원주는,
“이 사람은 대체를 아는 사람이니 먼 나라 사람[遠人]으로 볼 수 있겠느냐?”
하고는 다시 묻지 않았다.
■경자년 충렬왕 26년(원 성종 대덕 4, 1330)
◯6월 왕이 원의 서울에 이르렀다. 원이 한희유(韓希愈) 등을 석방하였다.
왕이 원나라 서울에 이르니 원주는 지손연(只孫宴)을 베풀었다. 지손이란 중국말로 빛깔[顔色]이라는 뜻이다. 연회에 참가하는 사람의 옷과 갓이 모두 같은 빛깔이다. 왕은 연회에서 모시고 앉는 석차가 넷째 번 좌석이었으며 사랑이 특별하였다. 왕도 양 2백 마리와 술 2백 통으로 축하를 올렸다. 원주가 고려의 노래를 부르라 하니, 왕이 송방영(宋邦英) 등에게 쌍연곡(雙燕曲)을 부르게 하고, 왕은 단판(檀板 악기(樂器)의 일종)을 잡고 전왕(前王)도 일어나서 춤을 추니 원주와 황후가 기뻐하였다.
왕은 또 희유와 인후의 잘잘못을 변명하였다. 그리하여 희유 등이 석방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원주는 본국의 풍속 등 여러 가지를 옛날 제도대로 따르게 해 달라는 청을 허락하였다.
동사강목 제13상
■신축년 충렬왕 27년(원(元) 성종(成宗) 대덕(大德) 5, 1301)
○3월 원이 정동성(征東省)을 파(罷)하고 활리길사(闊里吉思)를 소환하였다.
길사는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뇌물을 마구 받아들였으며, 재상 이하는 마음에 조금만 거슬려도 곤장을 치거나 가두어 온 나라 사람이 뇌물을 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원에서는 길사가 인민을 인화로써 안정시키지 못하는 데다 왕이 행성(行省)의 관원을 더 두는 것은 백성이 불안해 하니 폐지하도록 표(表)로 아뢰자 행성평장사(行省平章事)를 파하고 길사를 소환하였다. 길사는 돌아가 원주(元主)에게, 우리 나라가 참람하게 예법을 쓰고 형벌을 아무렇게나 실시하며, 쓸데없는 관원이 많아 백성의 폐해가 된다고 아뢰어 원주는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내리기를,
“왕은 종국(宗國)과 백성을 생각하라. 위복(威福)과 여탈(與奪)의 권한이 모두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사체(事體)에 미편한 점이 있다거나 민정에 미안한 점이 있는지 잘 헤아려 도모할 것이다. 너희 군료(郡僚)들도 마음을 다하여 바르게 봉행하여 각기 자기의 직분을 근수(勤修)할지어다. 감히 이전의 잘못을 되풀이하여 불법한 짓을 함부로 하는 일이 있다면, 왕은 너희들을 보아 줄지라도 짐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중서성(中書省)의 이자(移咨)에 이르기를,
“왕이 근자에 표문으로 아뢴 행성의 관원을 더 두는 것이 백성을 불안하게 한다는 것과 선조의 유풍을 고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등의 일에 대해서 이 들지 못하였다.?
■갑진년 충렬왕 30년(원 성종 대덕 8, 1304)
○ 찬성사 안향(安珦)이 건의하여, 국학(國學)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였다.
국가의 용병(用兵)이 거의 20년이나 되어 선비도 모두 금혁(金革)이나 궁과(弓戈)만을 다룰뿐 책을 끼고 독서하는 자는 열에 한둘도 못되었다. 선배 노유(老儒)는 작고하였거나 거의 쇠진해서 육경(六經)이 겨우 실오라기처럼 이어오고 있었다. 〈역옹패설(櫟翁稗說)〉에서 보충안향은 학교가 날로 쇠퇴하여 가는 것을 우려하여 양부(兩府)와 의논하기를,
“재상의 직책이란 인재를 교육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소.
【안】 이 말은 실로 만세의 격언으로, 재상이 된 자는 부귀에만 빠질 것이 아니라 이로써 뜻을 삼는다면 세도(世道)가 잘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양현고(養賢庫)가 탕진되어 교육에 쓸 자금이 없으니, 청컨대, 6품 이상은 각기 은(銀) 1근(斤)씩을 내고 7품 이하는 베[布]를 차이가 있게 내도록 하여, 본전은 두고 이식(利息)을 받아서 섬학적으로 만듭시다.”
하니, 양부에서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자, 왕은 내고(內庫)의 전곡(錢穀)을 내어 보조하였다. 밀직(密直) 고세(高世)라는 자가 자기는 무인이라 하여 돈을 내려 하지 않자 안향이 재상들에게 이르기를,
“부자(夫子)의 도는 만세토록 내려 준 법이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아우가 형에게 공경하는 것은 누구의 가르침이오? 만일 ‘나는 무인인데 무엇 때문에 애써 돈을 내어 생도를 가르칠 필요가 있겠는가?’한다면, 이는 공자를 업신여기는 것이오.”
하자, 세는 이 말을 듣고 매우 부끄럽게 여겨 즉시 돈을 내었다. 향(珦)은 남는 돈을 중원(中原)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을 그리고, 제기(祭器)ㆍ악기(樂器)ㆍ육경ㆍ제자서(諸子書)ㆍ사기(史記) 등을 사들였다. 또, 이산(李㦃)과 이진(李瑱)을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추천하였다. 이에 금내학관(禁內學館)ㆍ내시삼도감(內侍三都監)ㆍ오고(五庫)에서 수학을 원하는 선비와 칠관(七管) 예종(睿宗)이 세운 칠재(七齋)를 칠관이라 한다. ㆍ십이도(十二徒)의 여러 생도들이 경서를 끼고 와서 수업하는 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어떤 생도가 선배에게 무례하므로 향이 노하여 벌을 주려고 하니, 제생(諸生)이 사죄하자 향이 경계하기를,
“나는 제생을 아들이나 손자같이 여기는데 제생은 왜 이 늙은이의 뜻을 본받지 않는가?”
하고는 이어 집에 데리고 가 술자리를 베풀자, 제생이 서로 말하기를,
“공이 우리에게 이처럼 정성으로 대하시는데 만약 감화되어 복종하지 않는다면 사람이랄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고(故) 낭중(郞中) 유함(兪咸)의 아들이 중이 되어 사주(泗州)에 거주하는데 〈사기(史記)〉와 〈한서(漢書)〉를 읽을 줄 안다는 말을 듣고 역마로 불러 서울로 오게 하고는 윤신걸(尹莘傑)ㆍ김승인(金承印)ㆍ서견(徐諲)ㆍ김원식(金元軾)ㆍ박이(朴理) 등을 보내어 그의 설을 받도록 하였다. 이에 선비들은 대부분 경서를 통하고 옛것에 박람하는 것을 일삼았다.
■정미년 충렬왕 33년(원 성종 대덕 11, 1307)
◯춘정월 왕(충렬)이 원에 있었다.
이때 성종(成宗)이 붕(崩)하였다. 승상 아홀대(阿忽臺) 등이 난을 꾀하자 폐왕이 원주의 조카인 애육여발역팔달(愛育黎拔力八達)이이가 인종(仁宗)이 되었다. 과 같이 아홀대 등을 잡아 죽이고 회령왕(懷寧王) 해산(海山)을 맞아 황제로 옹립하였으니, 이가 무종(武宗)이다. 인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폐왕(충선)과는 생활을 같이하여 밤낮으로 떨어지지 않아서 정(情)이 돈독하였다.
3월 폐왕이 최유엄(崔有渰)을 중찬 전리사(中贊典理司)로, 유비(柳庇)ㆍ이혼(李混)을 찬성사(贊成事)로 삼았다.
전왕은 용사(用事)할 계책을 세우고 드디어 지밀직(知密直) 김문연(金文衍)을 보내어 밤에 순군부(巡軍府)에 들어가 비판(批判)을 선포하게 하였는데, 유엄을 중찬으로, 유비ㆍ이혼을 찬성으로, 김심(金深)을 참리(參理)로, 허평(許評)을 판밀직(判密直)으로, 김연수(金延壽)ㆍ김태현(金台鉉)을 지밀직(知密直)으로, 김문연(金文衍)을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 윤보(尹珤)ㆍ오한경(吳漢卿)을 부밀직(副密直)으로, 조인규(趙仁規)ㆍ인후(印侯)ㆍ김흔(金忻)을 자의도첨의(咨議都僉議)로, 종신(從臣) 권한공(權漢功)ㆍ최성지(崔成之)로 전선(銓選)을 주관하게 하여, 왕이 임명한 자는 모두 파면시키고 친신(親信)한 자 80여 인을 제수(除授)하니, 왕은 팔짱을 끼고 인(印)만 찍을 뿐이었다. 이로부터 국정(國政)이 모두 전왕에게로 돌아갔다.
한공(漢功)은 안동인(安東人)으로 오랫동안 전왕을 시중하여 총애를 받았으므로 수시로 불러 보니, 궁중에서 권세를 제 마음대로 하였다.
하4월 폐왕 원(謜)이 왕을 경수사(慶壽寺)로 옮기고, 서흥후(瑞興侯) 전(琠)과 왕유소ㆍ송방영(宋邦英)ㆍ송린(宋璘)ㆍ송균(宋均)ㆍ한신(韓愼) 등을 죽이고, 그의 당여 송분(宋玢) 등 36인을 귀양보냈다.
폐왕이 태자(太子) 애육여발역팔달의 전지를 받들어 왕유소ㆍ송방영ㆍ송린ㆍ송균ㆍ한신ㆍ김충의(金忠義)ㆍ최연(崔涓) 등을 잡아서 집에 가두었다가 이내 모두 주살하고, 아울러 서흥후 전도 주살하였으며, 왕을 경수사로 옮기고 유소 등의 집을 적몰하고 부자 형제를 모두 종으로 삼았으며, 송분 등 36인은 그의 재산을 적몰하고 귀양보냈다. 그 밖에 장형(杖刑)이나 유형(流刑)에 처한 자가 수십 명이었다. 한희유(韓希愈)는 살았을 적에 규간(規諫)하지 않았다 하여, 그의 아들 인검(仁儉)을 가주(嘉州)지금의 가산(嘉山) 로 귀양보내고 이역(吏役)만을 면제하였다.
○ 원에서 왕(충렬)을 환국시켰다.
■무신년 충렬왕 34년(원(元)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 1308)
◯5월 원에서 폐왕(충선)을 심양왕(瀋陽王)으로 봉하였다.
원에서 폐왕이 정책(定策)한 공훈이 있다 하여 개부의동삼사 태자태부 상주국 부마도위(開府儀同三司太子太傅上柱國駙馬都尉)를 제수하고 승진시켜 심양왕에 봉하였으며, 중서성(中書省)에 들어가 정사에 참의(參議)하게 하고, 금호부(金虎符)ㆍ옥대(玉帶)ㆍ칠보대(七寶帶)ㆍ벽전금대(碧鈿金帶)와 황금 5백 냥, 은 5천 냥을 하사하였다.
◯8월 심양왕이 원에서 와서 분상(奔喪)하고 28일(갑인)에 즉위하였다. 이름을 장(璋)이라 고쳤다.
전왕이 분상하려고 원에서 10여 일을 밤낮으로 와 26일(임자)에 도착(연경에서 10일이면 개경에 도착이 가능함을 알 수 있다.)하였다. 빈전(殯殿)에 들어가 곡하고 전제(奠祭)를 행하니, 모든 관원들은 검은 관(冠)과 소복 차림으로 시립(侍立)하였다. 28일(갑인)에 경령전(景靈殿)에 나아가 왕위의 전승을 고하고 드디어 수령궁(壽靈宮)에서 즉위하고,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는데, 반열의 순서는 오른쪽을 높였다. 예식이 채 끝나기 전에 하늘에서 큰 우레와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갠 뒤에 첨의사(僉議司)에서 왕에게 연회를 베풀고 백관이 백마(白馬)를 바쳤다.
○ 종친(宗親)ㆍ양반(兩班)의 동성혼(同姓婚)을 금하였다.
전교에,
“세조(世祖)의 성지(聖旨)에 ‘같은 성끼리 통혼하지 못하는 것은 천하의 통리(通理)다. 하물며 그대 나라는 문자를 알고 부자(夫子)의 도를 행함에랴. 같은 성끼리 혼인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으므로 이제부터 만약 종친으로 동성끼리 혼인하는 자는 위지(違旨)로써 논할 것이니, 마땅히 누대 재상의 딸에게 장가들 것이며, 재상의 아들은 종실의 딸에게 장가를 가야 한다. 신라(新羅)의 왕손 김혼(金琿)은 사삿집에 있지만 역시 순경 태후(順敬太后)의 오빠의 후손이다. 언양 김씨(彦陽金氏) 1종(宗)ㆍ정안(定安) 임 태후(任太后) 1종ㆍ경원(慶源) 이 태후(李太后)ㆍ안산(安山) 김 태후(金太后)ㆍ철원 최씨(鐵原崔氏)ㆍ해주 최씨(海州崔氏)ㆍ공암 허씨(孔巖許氏)ㆍ평강 채씨(平康蔡氏)ㆍ청주 이씨(淸州李氏)ㆍ당성 홍씨(唐城洪氏)ㆍ황려 민씨(黃驪閔氏)ㆍ횡천 조씨(橫川趙氏)ㆍ파평 윤씨(坡平尹氏)ㆍ평양 조씨(平壤趙氏)는 모두 누대의 공신ㆍ재상의 종친이니, 대대로 혼인할 수 있다. 남자는 종친의 딸에게 장가가면 여자는 종비(宗妃)가 된다. 문무(文武) 양반의 집은 동성끼리 혼인할 수 없다.”
하였다.
■충선선효왕(忠宣宣孝王) 원년, 원 무종 2, 1309)
◯2월 소금 전매법을 세웠다.
왕이 전지(傳旨)하기를,
“옛날 소금을 전매하던 법은 국가의 비용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여러 궁(宮)ㆍ원(院)ㆍ사(寺)ㆍ사(社)와 권세 있는 집들이 사사로 염분(鹽盆)을 설치하여 그 이익을 독점하고 있으니, 국가의 비용은 무엇으로 넉넉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장차 내고(內庫)ㆍ상적창(常積倉)ㆍ도염원(都鹽院)ㆍ안국사(安國社)와 여러 궁(宮)ㆍ원(院)과 중앙이나 지방의 사(寺)ㆍ사(社)가 소유하고 있는 염분은 모두 관(官)에서 접수하고 대가(貸價)는 소금 4석(碩)에 은(銀) 1냥, 소금 2석에 베[布] 1필로 하여 이것을 예(例)로 한다. 소금을 쓰는 자에게는 모두 의염창(義鹽倉)에 가서 사게 하며, 군현(郡縣) 사람들은 모두 본관(本管) 관사(官司)에서 베를 바치고 소금을 받아가도록 하라. 만약 사사로 염분을 사거나 사사로 소금을 매매하는 자가 있으면 엄중히 치죄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경중(京中)에서는 네 곳에 염포(鹽鋪)를 세우고 군현에서 백성을 뽑아 염호(鹽戶)로 삼고, 또 염창(鹽倉)을 설치하도록 하니, 백성들이 심히 괴로워하였다. 양광(楊廣)ㆍ경상(慶尙)ㆍ전라(全羅)ㆍ평양(平壤)ㆍ강릉(江陵)ㆍ서해(西海) 6도의 염분은 6백 16개, 염호는 8백 92호였고, 1년에 소금 값으로 받아들인 베는 4만 필이었다.
■계축년 충선왕 5년(원 인종 황경 2, 1313)
○ 원에서 화평군(化平君) 김심(金深)과 밀직사(密直使) 이사온(李思溫)을 임조(臨洮)에 장류(杖流)하였다.
사온이 심과 상의하기를,
“왕이 오랫동안 원의 경사(京師)에 머물러 있어서 해마다 보내는 우리 나라 베[布]가 10만 필, 쌀이 4백 곡(斛)이고 다른 물건은 이루 다 기록할 수도 없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조운(漕運)하는 폐단이 더욱 심하여지고 있소. 그러므로 여러 종신(從臣)들은 모두 오랜 타관살이로 귀국하기를 바라는데, 권한공(權漢功)ㆍ최성지(崔誠之)는 전선(銓選)을 맡아 뇌물 보내오는 것만 이롭게 여기고, 박경량(朴景亮)은 왕의 심복이 되어 여러 번 상을 받고 재산 놀리기만 도모하니, 왕이 귀국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이 세 사람 때문이오.”
하고는 호군(護軍) 이규(李揆) 등 수백 명에게 통보해서 서명하도록 하여 휘정원사(徽政院使) 실렬문(失列門)에게 정소(呈訴)하니, 실렬문이 태후(太后)의 제(制)라 칭탁하며 한공 등 세 사람을 하옥시켰다. 왕은 노하여 시비(侍婢)를 통하여 태후에게 아뢰기를,
“종신들 중에서 이 세 사람처럼 나를 사랑하는 자는 없습니다. 심 등은 나에게 고하지 않고 문득 휘정원에 호소하였으니, 그 뜻은 이 세 사람에게만 그치지 않습니다.”
하였고, 한공 또한 뇌물을 써서 면방되기를 강구하여 이에 태후는 세 사람을 석방시키고는 바로 심과 사온 등을 임조(臨洮)에 장류하였고, 왕은 규(揆) 등의 집을 적몰(籍沒)하였다. 5년 뒤에야 소환(召還)하였다.
○ 왕이 강릉대군(江陵大君) 도(燾)에게 전위(傳位)하자, 도는 연저(燕邸)에서 즉위하고 왕을 상왕(上王)이라 높였다.
이때 원에서는 왕을 귀국시키려 하자, 왕은 뭐라 꾸며댈 말이 없어 원주에게 도(燾)에게 손위(遜位)할 것을 청하였다. 도는 세자 감(鑑)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왕은 재위 5년, 상왕(上王) 12년, 수(壽)는 51이며, 원에서 충선(忠宣)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어 도를 책봉하여 금자광록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승상 상주국 고려국왕(金紫光祿大夫征東行中書省左丞相上柱國高麗國王)을 제수하였는데 이가 충숙왕(忠肅王)이다.
○ 상왕(上王 충선))은 스스로 심양왕(瀋陽王)이라 호하고, 형의 아들 고(暠)를 세자로 삼았다.
고는 상왕의 형 강양공(江陽公) 자(滋)의 아들로 자는 아들 셋이 있는데 후(珛)ㆍ고(暠)ㆍ훈(塤)이다. 왕은 사랑하고 돌보기를 아들과 같이 하여, 후는 단양부원대군(丹陽府院大君)으로, 고는 연안군(延安君)으로, 훈은 연덕군(延德君)으로 삼았다. 고는 궁중에서 기르며 자기 아들과 같이 사랑하였는데, 몽고 이름은 완택독(完澤禿)이다. 이때에 이르러 왕에게 전위하고는 고를 세자로 삼아 그대로 독로화(禿魯花)로 머물러 있게 하였다.
사신(史臣)은 이렇게 적었다.
충선(忠宣)은 세자 시절에 원에 들어가 요수(姚燧)ㆍ조맹부(趙孟頫) 등 제공(諸公)과 교유하였으며, 간혹 원의 조정에도 참여하여 그의 의논이 볼 만한 것이 있었다. 즉위하여서는 상국(上國)의 제도를 피하여 관명(官名)을 바꾸었으니, 제후(諸侯)의 법도를 근수(謹守)한 것이고, 전부(田賦)를 바루고 염법(鹽法)을 세웠으니 근본을 안 것이다. 인군(人君)이란 만기(萬機)를 총람(總攬)하는 자리이므로 하루도 빌 수 없는 것인데 왕이 이미 명을 받아 복위(復位)하고서도 원에서 부녀(婦女)와 환관을 아첨하여 섬겼다. 연경(燕京)에 머물러 있은 지 5년이나 되어 국인들은 공궤(供饋)에 지치고, 시종하는 신하들은 오랫동안 고생해서 고국에 돌아가기를 생각하여 신하들이 서로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원에서도 싫어하여 두번이나 귀국하도륵 조서(詔書)를 내리니 변명할 말이 없어 곧 아들 도(燾)에게 손위하고 조카 고(暠)를 세자로 삼아 부자와 형제 사이에 마침내 시기와 혐원(嫌怨)을 만들게 되어 화가 여러 대(代)에까지 미쳤다. 후손에게 남긴 계책이 현명하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토번(吐蕃)으로 귀양간 것도 불행이 아니다.
하6월 왕이 상왕(上王)과 공주(公主)를 모시고 원으로부터 돌아왔다.
4월 27일(병술)에 왕이 상왕과 공주를 모시고 연경(燕京)을 출발하였다. 상왕은 왕위(王位)를 물려 주고 그대로 원에 머무르고자 하였으나 원에서 들어주지 않자 마지못해 돌아오게 되었다. 전거(傳車) 1백 40냥(輛)이요, 말[馬]도 이와 비슷했다. 원에서는 승상(丞相) 납라홀(納剌忽) 등을 보내어 호송(護送)하게 하였다. 16일(갑술)에 상왕과 왕이 서보통사(西普通寺)에 행차하니, 백관(百官)이 출영(出迎)하였고, 18일(병자)에 입경(入京)하여, 26일(갑신)에는 경령전(景靈殿)에 알현하고 연경궁(延慶宮)에서 즉위하였다. 5일에 한 번씩 상왕에게 조알(朝謁)하였다.
■충숙의효왕(忠肅懿孝王) 원년, 원 인종 1, 1314)
◯상왕이 원에 갔다.
상왕이 원에 가는데 왕이 금교(金郊)에서 전별하면서, 술잔을 받들어 올리니, 상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국사를 왕과 재추(宰樞)에게 부탁하였다. 원에 이르러 원주를 뵙자 연경에 머물 것을 명하였다. 상왕은 연경의 저택에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이제현(李齊賢)을 불러 부중(府中)에 충원시키고, 또 대유(大儒) 염복(閻復)ㆍ요수(姚燧)ㆍ조맹부(趙孟頫)ㆍ우집(虞集) 등을 초치하여 종유(從遊)하면서 서사(書史)를 고증하고 연구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즐겼다. 그때 선비(鮮卑)의 중[僧]이 원주에게 상언하기를,
“제사(帝師) 팔사파(八思巴)가 몽고 문자를 만들어 국가에 이익되게 하였으니, 비옵건대 천하에 영을 내려서 사당을 세워 공자(孔子)에 비하게 하소서.”
하니, 조(詔)하여 공경(公卿)과 기로(耆老)에게 회의토록 하였다. 국공(國公) 양안보(楊安普)가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자, 상왕이 안보에게,
“제사가 문자를 만들어 국가에 공이 있다면 자연히 옛 법전에 따라 제사지낼 것이지 어찌 꼭 공씨에게 견주어야 되겠소. 공씨는 모든 제왕의 스승이니, 그가 널리 향사(享祀)되는 것은 덕(德)이 있어서이지 공(功)이 있어서가 아니오. 후세에 이론(異論)이 있을 것이오.”
하였다. 그 말이 비록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듣는 사람이 옳다고 하였다. 과거제도(科擧制度)를 설치할 것을 상왕이 요수(姚燧)의 말로써 아뢰었더니, 원주가 윤허하였다. 이맹(李孟)이 평장사(平章事)가 되자 과거를 주청(奏請)하여 시행하였는데, 그 발원은 대개 상왕에게서 나온 것이다. 우승상(右丞相) 독로(秃魯)가 파직되자 황제가 상왕을 승상으로 임명하니, 굳이 사양하면서,
“신은 조그마한 변방의 나라도 오히려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 자식에게 넘겨 주기를 바랐는데 하물며 조정의 상상(上相)이겠습니까? 어찌 감히 영화를 탐내어 함부로 받아서 폐하의 밝음에 누가 되게 하겠습니까? 감히 죽음으로써 사양합니다.”
하니, 황제가 웃으면서,
“짐은 본래부터 경이 권력을 잘 피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였다. 상왕이 일찍이 이제현(李齊賢)에게 묻기를,
“우리 나라는 예부터 문물(文物)이 중화(中華)와 같다고 일컬어 왔는데 오늘날 학자들은 모두 석자(釋子)만을 좇아 장구(章句)를 익히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일찍이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세운 초창기라 할 일이 무척 많았는데도 우선 학교를 진흥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광묘(光廟) 후에는 더욱 문교(文敎)를 닦아 안으로는 국학(國學)을 존숭하고 밖으로 향(鄕)에는 교(校), 이(里)에는 상(庠), 당(黨)에는 서(序)를 두어 현송(絃誦)하는 소리가 서로 이어 들리니, 이른바 문물이 중화와 같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왕(毅王) 말년에 무인(武人)의 변이 일어나 모두 화를 당하게 되니 몸을 화란 속에서 벗어난 자는 궁벽한 산으로 도망해 숨어서 관대(冠帶)를 벗어 던지고 가리(伽梨 가사(袈裟)의 일종이다)를 입고 여생을 마쳤습니다. 신준(神駿)ㆍ오생(悟生)의 유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후 국가가 다소 문치(文治)를 회복하니, 비록 학문에 뜻을 둔 선비가 있었으나 배울 데가 없어 이런 무리를 좇아 강습(講習)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말한 석자(釋子)를 따르는 학자란 그 원류가 이와 같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학교(學校)ㆍ상서(庠序)를 널리 세우며, 육예(六藝)를 높이고 오교(五敎)를 밝혀 선왕(先王)의 도를 여십시오. 그렇게 되면 누가 진유(眞儒)를 등지고 석자를 좇겠습니까?”
하였다.
제현은 진(瑱)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억연(嶷然)하여 어른과 같았다.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였고 병과(丙科)에 합격하였으나, 그는 이것을 소기(小技)라 하고 경적(經籍)에 대해 토론하기를 더욱 근실하게 하여 널리 통하고 깊이 연구하였다. 왕을 따라 원에 와서는 여러 명유(名儒)들과 상종하여 학문이 더욱 진취하니, 요수(姚燧) 등이 감탄하며 칭찬하기를 마지않았다.
동사강목 제13하
■정사년 충숙왕 4년(원 인종 연우 4, 1317)
◯춘정월 상왕(上王)이 원에 있었다. 왕이 친히 동녀(童女)를 뽑았다.
영왕(營王)의 청 때문이었다. 이때에 원의 제왕(諸王)과 재상 및 사신(使臣)들이 각각 동녀를 청했으며, 또 나라에서도 뽑아 사사로이 황제에게 바쳤다. 그래서 사대부들이 딸을 낳으면 비밀에 붙이고 친척이라 하더라도 서로 보이지 않았다.
2월 왕이 서해도(西海道)에서 사냥하였다.
이때부터 왕의 놀이와 사냥이 때없이 행해져서 농민이 원망하였다.
■무오년 충숙왕 5년(원 인종 연우 5, 1318)
◯하4월 주군(州郡)의 사심관(事審官)을 파(罷)하였다.
국초에 사심관을 두었었다. 본래는 백성의 종주(宗主)로 삼아 신분을 구별하고 부역을 균평하게 하며 풍속을 바로잡게 하였다.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에 벼슬하는 명망(名望)이 있는 그 고을의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사심관으로 삼았기 때문에 여러 조정 이래로 선발이 매우 엄중하였었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이름만 있을 뿐 실제는 그렇지 못하여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고 공전(公田)을 넓게 점유하며 민호(民戶)를 숨긴 것이 많았다. 왕이 고을에 해가 있고 나라에 도움이 없다고 여겨, 그들이 감춘 공전과 민호를 모두 혁파하여 쇄환(刷還)하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권문 호족들이 다시 스스로 사심관이 되니, 그 폐해가 전보다 더 심하였다.
■경신년 충숙왕 7년(원 인종 연우 7, 1320)
◯12월 원에서 상왕(충선왕)을 토번(吐蕃)의 살사결(撤思結)로 유배하였다.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는 본국의 상서 주면(朱冕)의 가노(家奴)였는데, 스스로 거세(去勢)하고는 내시가 되어 연줄로 번저(藩邸)에 있는 원 인종(元仁宗)을 섬겨 불법을 많이 저질렀다. 그래서 상왕이 매우 미워하여 황태후에게 아뢰어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고, 그의 무례함을 들어 매를 때렸었다. 독고사가 상왕을 중상하려고 마음먹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인종이 붕하고 태후 또한 별궁으로 물러나자 독고사는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게 되어 백방으로 무함하였다.
이때 상왕은 시사(時事)가 변하리라는 것을 알고, 다시 원주(元主)에게 강남(江南)이 강향(降香)할 것을 청하여 화를 피하려 하였다. 윤주(潤州)의 금산사(金山寺)에 이르렀을 때 원주가 사자를 보내어 급히 소환하면서 기사(騎士)로 하여금 핍박하여 갔다. 시종하던 신하들은 다 도망가 숨고 박경량(朴景亮)ㆍ이연송(李連松)은 독약을 먹고 죽었는데, 이는 독고사가 궁중에서 용사(用事)하고 있어 왕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아서였다.
상왕이 대도(大都)에 이르자 원주가 중서성에 명하여 본국으로 호송해서 안치(安置)하도록 하였는데, 왕이 지체하고 출발하지 않으니 형부(刑部)에 내렸다가 얼마 후에는 머리를 깎게 하고 석불사(石佛寺)에 유치(留置)하였고, 또다시 불경을 배우라는 명목으로 토번의 살사결로 유배하였다. 그곳은 경사(京師)에서 1만 5천 리나 떨어져서 수종하던 재상 최성지(崔誠之) 등은 다 도망하여 나타나지 않았고, 오직 직보문각(直寶文閣) 박인간(朴仁幹), 대호군(大護軍) 장원지(張元祉) 등 18인 만이 유배소까지 수종(隨從)하였다.
독고사의 참소가 그치지 않아 화를 예측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승상(丞相) 배주(拜住 한복(韓復))의 영구(營救)함을 힘입어서 화를 면하였다. 이능간(李凌幹)이 상왕을 따라가 원에 있으면서 반전별감(盤纏別監)이 되었었다. 함께 일하는 자들은 다 부귀를 이루었으나 능간만은 홀로 청백하여 겨울에도 떨어진 저고리와 홑바지를 입었으며, 1전(錢)도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상왕이 귀양을 가게 되자 금(金)을 역리(驛吏)에게 몰래 주어 보내 왕에게 바쳐, 왕과 수종하는 신하가 그것을 힘입어 궁하지 않았다.
상왕이 일찍이 사랑하던 두 희첩을 능간과 백문거(白文擧)에게 주었는데 능간은 별실에 거처시키고 가까이하지 않으니, 왕이 의롭게 여겼다.
■신유년 충숙왕 8년(원(元) 영종(英宗) 지치(至治) 원년, 1321)
◯추7월 상왕이 토번에 이르렀다.
상왕이 서번의 독지리(獨知里)에 이르러, 최유엄(崔有渰)ㆍ권보(權溥)ㆍ허유전(許有全)ㆍ조간(趙簡) 등에게 글을 보냈는데,
“내 운명이 기구하여 이런 우환에 걸려 혈혈단신으로 1만 5천 리 험한 길을 왔으니 우리 사직을 욕되게 함이 많다. 생각건대 국로(國老)들은 노심초사(勞心焦思)할 것이니 더욱 두렵고 부끄럽다. 국왕은 나이가 어려 무지하므로, 군소배들이 반드시 내가 이렇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 그 간교함을 제멋대로 부릴 것이니, 우리 부자를 이간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바라건대 여러 국로는 동심협력하여 황제에게 아뢰어 나를 속히 돌아가게 하라.”
하였다. 그래서 허유전과 민지(閔漬) 등이 원에 가서 왕의 환국을 청하려 하였으나, 고의 당여가 방해하여 아뢰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해 11월에 상왕이 또 유엄ㆍ보ㆍ유전ㆍ간ㆍ배정(裵挺)ㆍ이진(李瑱)ㆍ김거(金䝻)에게 글을 보냈는데,
“나는 10월 6일에 토번 살사결에 도착하였다. 공 등은 유청신ㆍ오잠과 의논하여 황제께 표를 올려 내가 이곳에 오래 있지 않도록 청하라.” 하였다.
■계해년 충숙왕 10년(원 영종 지치 3, 1323)
○추9월 원이 상왕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이때 영종(英宗)이 시해되고 태정제(泰定帝)가 즉위하여 전국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 상왕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상왕이 유배될 때 계림군(鷄林君) 왕후(王煦)가 대신 죄를 받고자 하였는데, 원주가 그 말을 듣고 가엾게 여겼다. 후가 토번에 있는 상왕을 알현하러 가다가 길에서 사자(使者)를 만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자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조서를 받들고 상왕을 맞으러 갑니다. 그러나 나는 제로(諸路)를 순시한 다음에 가야만 하니, 늦어질까 걱정됩니다. 공께서 먼저 가서 알리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후가 겸행(兼行 하루의 일정을 배(陪)로 해서 빨리 가는 것)하여 임조(臨洮)에 가서 상왕을 뵈었다. 얼마 후에 사자 역시 이르러 상왕을 모시고 돌아왔다.
○ 원이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를 죽였다.
숙비(淑妃)는 독고사가 상왕을 해칠 것을 모의하였기 때문에 군신을 시켜 중서성에 호소하게 하여 죽인 것이다.
■을축년 충숙왕 12년(원 진종 태정 2, 1325)
◯하5월 왕과 공주가 원에서 왔다.
왕이 원에 머무른 지 무릇 5년 만에 돌아왔다.
○상왕(충선왕)이 연경의 사저(私邸)에서 훙(薨)하였다.
왕은 성품이 현자를 좋아하고 악인을 미워하였다.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한 번 듣거나 본 일은 평생 잊지 않았다. 매양 유생을 인대(引對)하여 고금의 일을 헤아렸는데, 흥망(興亡)과 사정(邪正)에 이르러서는 더욱 열심히 마음을 쏟았다. 일찍이 요좌(僚佐)를 시켜 《동도사략(東都事略)》을 읽게 하였는데, 듣고 있다가 왕단(王旦)ㆍ이항(李沆)ㆍ부필(富弼)ㆍ한기(韓琦) 범중엄(范仲淹) 등 여러 명신전에 이르면 반드시 손을 이마에 얹고 경모(景慕)하는 뜻을 보이고, 정위(丁謂) 채경(蔡京)ㆍ장돈(章惇) 등 간신전에 이르면 이를 갈며 분해하였다. 그러나 언행이 일치되지 않아 참덕(慚德)이 매우 많았다.
■무진년 충숙왕 15년(원 진종 치화(致和) 원년, 1328)
◯12월 은병(銀甁)의 값을 정하였다.
자섬사(資贍司)에서 아뢰기를,
“은병의 값이 날로 떨어지니, 지금부터 상품(上品)은 종포(綜布) 10필로, 첨병(貼甁)은 8~9필로 정하여 위반하는 자는 죄를 주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이때 은병을 만드는 데 구리를 섞었기 때문에 관에서 비록 값을 정하여도 사람들은 모두 따르지 않았다.
■기사년 충숙왕 16년(원(元) 문종(文宗) 천력(天曆) 2, 1329)
◯3월 도둑이 마한(馬韓)의 시조인 무강왕릉(武康王陵) 금마군(金馬郡)에 있다. 을 파헤쳤다.
체포하여 전법사(典法司)에 구금하였는데 도둑이 달아나버렸다. 그래서 정방길(鄭方吉)이 전법관을 탄핵하려 하니 임중연이 저지하자, 방길이 말하기를,
“나는 무덤을 파낸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하니, 중연은 부끄러워하며 분히 여겨 병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방길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경오년 충숙왕 17년(원(元) 문종(文宗) 지순(至順) 원년, 1330)
◯춘2월 원이 세자 정(禎)을 책봉하여 왕으로 삼으니 세자가 연저(燕邸)에서 즉위하고 멀리서 왕을 높여 태상왕(太上王)으로 삼았다.
○윤7월 상왕(충숙왕)이 황주(黃州)에 이르렀다.
왕(충혜왕)이 원으로부터 오다가 상왕을 뵈는데 길 위에 호례(胡禮)로 꿇어앉아 맞아뵈었다. 상왕이 말하기를,
“너의 부모는 모두 고려 사람인데 어찌 나를 보고 호례를 행하느냐?”
하고 훈계하여 엄하게 나무라니 왕이 눈물을 흘리며 나갔다.
○ 왕과 공주가 원에 와서 8월에 즉위하였다.
■충숙왕 후(後) 원년 정월 이전은 충혜왕 2년 (원 문종 지순 3, 1332)
◯2월 원에서 장백상(蔣伯祥)을 보내어 왕의 인장을 회수하고 입조하라고 불렀다. 상왕이 연저(燕邸)에서 복위하였다.
■병자년 충숙왕 후 5년(원 순제 지원 2, 1336)
◯12월 원에서 폐왕(廢王)을 귀국하게 하였다.
폐왕은 원에서 숙위(宿衛)하였는데, 이때 연첩목아(燕帖木兒)는 이미 죽어 태보(太保) 백안(伯顔)이 폐왕을 더욱 박대하였다. 폐왕은 연첩목아의 자제들 및 회골(回鶻) 소년들과 술을 마시고 농지거리하며 회골 부인을 사랑하여 혹 숙위에 들어오지 않으니, 백안은 더욱 미워하여 폐왕을 가리켜 발피(潑皮) 호협(豪俠)의 뜻이다. 라 하였다. 종신(從臣) 가운데 전 군부 판서(軍簿判書) 이조년이 경계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천자를 섬기는 데는 하루하루를 근신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예절을 버리고 마음대로 행동하여 누(累)를 초래하십니까? 그러나 이는 전하의 잘못은 아닙니다. 전하는 궁녀와 환관의 집에서 성장하여 함께 노닐던 자에 무뢰한 자제들이 많았고, 박중인(朴仲仁)ㆍ이인길(李仁吉) 같은 무리들이 실로 좌우하였으니 전하께서 누구를 따라 바른말을 듣고 누구를 따라 바른 일을 행하였겠습니까? 선비는 비록 소박하고 옹졸하지만 모두 경사(經史)를 익혀 염치를 아는데, 전하께서는 이들을 지목하여 사개리(沙箇里)라 하니 이것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 아첨하는 무리를 멀리하시고 바른 선비를 가까이하시어 행실을 고치고 스스로 삼가시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천위(天威)가 지척에서 엄중할 것입니다.”
하였다. 폐왕은 그 말을 듣다가 견디지 못하여 담을 넘어 달아났으며, 끝내 개전하지 못하였다. 백안은 원주에게 아뢰기를,
“왕정(王禎)은 본디 조행(操行)이 없어서 숙위에 누를 끼칠까 염려되오니, 그의 아비 있는 곳으로 보내어 의방(義方)을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 제가(制可)하였다.
■기묘년 충숙왕 후 8년(원 순제 지원 5, 1339)
○춘3월 왕이 훙(薨)하니 폐왕이 즉위하였다.
왕은 재위(在位)가 전후 25년, 수(壽)는 46이었다. 왕은 폐왕을 대하는데 사랑이 적어 항상 발피(潑皮)라 불렀다. 그러나 유명(遺命)으로 습위(襲位)하게 하고, 홍빈(洪彬)을 권정동성사(權征東省事)로 삼았다. 왕은 엄의(嚴毅)하고 심중하고 총명하였으며 문장에 능하고 예서를 잘 썼다. 성품이 청결함을 좋아하여 한 달에 목욕하는 데 쓰이는 여러 가지 향이 10여 분(盆)이고, 저포(苧布)가 60여 필이나 되었는데 수건(手巾)이라 이름하였으며 환관들이 훔쳤으나 왕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원에서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신(史臣)은 이렇게 적었다.
충렬(忠列)ㆍ충선(忠宣)ㆍ충숙(忠肅)ㆍ충혜(忠惠) 4대를 내려오면서 부자가 서로 헐뜯어 천자의 조정에서 송사까지 하게 되어 천하 후세에 비웃음을 남겼으니 다른 것은 볼 것도 없다. 충숙왕은 만년에 국사를 버려 두고 교외에 나가 머물면서 박청(朴靑) 등 세 환관들을 신임하여 위복(威福)이 하층으로 옮겨졌고, 그 아들과 손자가 무두 흉사를 만나 요절하였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동사강목 제14상
■경진년 충혜왕 후 원년(원(元) 순제(順帝) 지원(至元) 6, 1340)
◯3월 원이 왕을 석방하여 복위시켰다.
그때 백안(伯顔)이 왕을 미워하여 기필코 위태롭게 하고자 하니,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이 강개하여 이제현(李齊賢1287-1367)에게 말하기를,
“내가 승상을 면접하고 하소연하고자 하였으나, 문지기가 창극(槍戟)을 벌여 들고 문을 지키므로 하소할 수가 없었소. 이제 들은즉, 성남(城南)으로 사냥을 나간다 하오. 내 의당 그 길섶에서 글을 올리다가 말발굽 아래 머리가 부서진다 하더라도 죽음으로 우리 임금을 변명할 터이니, 그대는 붓을 잡아 내가 가지고 갈 글을 써주오.”
하고, 밤중에 일어나 목욕하고서 닭이 울자 떠나려 하였다. 백안이 때마침 이날 실각하여 그 글은 마침내 올려지지 않았으나, 듣는 사람마다 모두 두려워하면서,
“이공(李公)은 담이 몸보다 크다.”
하였다. 탈탈(脫脫)이 주청(奏請)하여 왕을 풀어주고 복위시켰다.
■갑신년 충혜왕 후 5년(원 순제 지정 4, 1344)
◯춘정월 왕이 도중에 악양현(岳陽縣)에서 훙하였다.(순제가 귀양보냄)
왕이 역참(驛站)의 수레로 치달리니 간난 고초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게양(揭陽)에 채 이르지 못하고 15일(병자)에 악양현에서 훙하였다. 어떤 이는 독살당하였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귤(橘)을 먹고 죽었다고도 하였다. 국민들이 이를 듣고 슬퍼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소민(小民)들은 기뻐 날뛰면서 ‘다시 살 수 있는 날을 보겠구나.’ 하는 자까지 있었다. 처음에 궁중과 길거리에 노래가 돌기를,
“아야(阿也) 말고지라[麻古之那] 이제 가면 언제 오리?”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이 풀이하기를,
“악양에서 죽을 재난이여 오늘 가면 어느 때에 돌아오겠는가?”
하였다.
왕은 성품이 호협(豪俠)하여 말 타고 활쏘기를 즐겼으며, 재물의 이익을 늘리기를 좋아하고 황음무도하여, 뭇 소인배들이 뜻을 얻고 충직한 신하들은 배척되었으니, 바른말을 하는 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반드시 주륙(誅戮)하였으므로 사람마다 죄받을까 두려워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왕은 재위(在位)한 지가 전후(前後)하여 7년이요, 수(壽)는 36세였다. 후에 충혜(忠惠)라 시호를 사(賜)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하였다.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질을 착하지 못한 데에 사용하였고, 불량배들을 가까이 친해서 음란하고 방자하여, 안으로는 부왕(父王)에게 꾸지람을 당하고 위로는 천자에게 죄를 얻었으니, 죄수의 몸으로 길에서 죽은 것도 마땅하다. 비록 한 사람 늙은 신하 이조년의 간절한 간언이 있었으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어쩌겠는가?
■무자년 충목왕 4년(원 순제 지정 8, 1348)
◯12월 왕이 김영돈의 집에서 훙(薨)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병이 나서 김영돈의 집으로 이어(移御)했었는데, 5일(정묘)에 훙하니 재위가 5년이고 수(壽)가 12였다. 왕의 천성은 총민(聰敏)하였으나 즉위한 처음부터 모후(母后 덕녕공주(德寧公主))가 권세를 부리고, 강윤충(康允忠)ㆍ배전(裵佺)ㆍ신예(辛裔) 등이 서로 이어가면서 정권을 잡았으므로 왕후ㆍ김영돈 등이 오래된 폐단을 정리하려고 하였으나 마침내는 윤충과 예의 모함에 빠지게 되니, 식자(識者)들이 애석해 하였다. 뒤에 원에서 충목(忠穆)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씨(李氏) 이색(李穡) 는 이렇게 적었다.
근세의 태평 시대를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들 명릉(明陵 충목왕을 말한다)을 일컫는데 ‘대개 5년 간 조야(朝野)가 깨끗하고 조용하여 사류(士類)는 즐거워하였고 백성은 의지할 수 있어 이른바 조금 안정이 되었었다.’ 하였으니 역시 지나친 말은 아니다.
■충정왕(忠定王) 충혜왕(忠惠王)의 서자(庶子) (원 순제 지정 9, 1349)
◯하5월 원에서 경창부원군 저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가 충정왕(忠定王)으로 그때 나이 12요, 어머니는 희비(禧妃) 윤씨(尹氏)니 찬성사 윤계종(尹繼宗)의 딸이다.
■신묘년 충정왕 3년(원 순제 지정 11, 1351)
◯춘정월 찬성사 이곡(李糓)이 졸하였다.
곡(糓)은 일찍이 강릉군을 왕으로 세우자고 청하였는데, 왕이 즉위하게 되어서는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였다. 원에서 행성좌우사 낭중(行省左右司郞中)을 제수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졸하니 향년이 54였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호는 가정(稼亭), 문집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성품이 단정 엄숙하고 강직하여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민경효왕(恭愍敬孝王) 원년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 충혜왕의 동모제(同母弟)(원 순제 지정 12, 1352) : 충정왕이 폐위되고 왕위를 이음
◯3월 왕이 강화(江華)에 있는 폐왕(廢王 충정왕)을 시해(弑害)하였다.
폐왕이 강화에 있는데 지공(支供)하는 음식도 충분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왕래도 끊어져 근심에 싸여 울부짖다가, 이때에 와서 짐주(酖酒)에 의해 훙(薨)하여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도성(都城)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뒤에 원에서 충정(忠定)이란 시호를 내렸다.
■갑오년 공민왕 3년(원 순제 지정 14, 1354)
○3월 서장관(書狀官) 이색(李穡)이 원에 가서 제과(制科)에 합격하였다.
지난해에 왕이 선비들을 시험보였는데 색(穡)이 장원(壯元)하였고, 가을에 행성(行省) 향시(鄕試)에서도 장원하였으므로 서장관에 충원되어 원에 갔는데, 독권관(讀券官) 한림승지(翰林承旨) 구양현(歐陽玄)이 색의 대책문(對策文)을 보고 크게 칭상(稱賞)하여 제2갑(甲) 제2명(名)에 발탁하며,
“도통(道統)이 해외(海外)로 갔구나.”
하였다. 칙명(勅命)으로 색을 응봉한림문자승사랑 지제고(應奉翰林文字承仕郞知制誥)로 제수하였다.
하4월 왜구가 전라도의 조선(漕船)을 약탈하였다.
왜구가 해마다 침략하여 노략질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 또 전라도의 조운선 40여 척을 약탈하였다.
동사강목 제14하
■을미년 공민왕 4년(원 순제 지정 15, 1355)
◯춘2월 전라도 안렴사 정지상(鄭之祥)이 원의 강향사(降香使)를 전주(全州)에 구금하였다. ※시인 鄭知常(? -1135)과 同名異人임.
원의 어향사(御香使) 야사불화(埜思不花)는 본국인이었다. 원에 들어가 총애를 받아서 그의 형 서신계(徐臣桂)는 동지밀직(同知密直)이 되었고 아우 응려(應呂)는 상호군(上護軍)이 되어서 위복(威福)을 제멋대로 부리므로 국인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이때에 야사불화가 여러 도(道)에 향(香)을 내리는데, 이르는 곳마다 횡포를 자행하였다. 정지상이 그를 맞아 공손히 접대하였지만 야사불화는 접반사(接伴使) 홍원철(洪元哲)의 참소를 듣고, 정지상을 결박하여 곤욕을 주었다. 정지상이 곧 분개하여 크게 부르짖으니, 읍(邑)의 관리들이 큰소리로 떠들며 들어가서 결박을 풀고 부축하여 나왔다. 정지상은 곧 무리를 거느리고 야사불화와 홍원철 등을 붙잡아 가두고 야사불화의 금패(金牌)를 빼앗았다. 그리고 달려 경도로 돌아올 적에 공주(公州)에 들러 응려를 붙잡아 철퇴로 쳐서 수일 만에 죽게 하였다.
정지상이 돌아와서 왕에게 아뢰니, 왕이 놀라서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명하여 전주목사 최영기(崔英起)와 고을 관리들을 체포하고 금패를 야사불화에게 돌려주었다.
원에서 사신을 보내어 정지상을 국문하고, 전주를 부곡(部曲)으로 강등하였다. 얼마 안 되어 여러 기씨(奇氏)들이 처형되자 정지상의 죄를 사면하였다.
○12월 우리 환조(桓祖: 이자춘)가 쌍성(雙城)으로부터 와서 조회하였다.
쌍성은 조휘(趙暉)가 배반한 때부터 우리 국토가 아닌 지 오래이다. 그때 환조는 쌍성 천호(雙城千戶)였는데 와서 조회하였다. 처음에 목조(穆祖 휘는 안사(安社))가 성품이 호방(豪放)하여 나라를 안정시킬 뜻을 두었으며, 일찍이 의주(宜州)를 다스릴 적에 어진 정치를 하였었다.
인아 친척(姻婭親戚)의 문제로 인하여 삼척현(三陟縣)에 옮겨가 살았었고 거기서 또 어떤 일로 지현(知縣)에게 거슬려 원에 망명하니, 원에서는 남경(南京)원지(元志)에 “개원성(開元城) 서남쪽은 영원현(寧遠縣)이고, 또 그 서남쪽은 남경이고, 또 그 남쪽은 합란부(哈蘭府)이고, 또 그 남쪽은 쌍성이라 한다.” 하였다. 에 살게 하고 오천호소(五千戶所)의 달로화적(達魯花赤)으로 삼았다.
그가 훙(薨)하자 익조(翼祖)휘는 행리(行里) 가 그 직위를 이어받아 남경 천호(南京千戶)가 되었다. 원이 일본을 정벌할 적에 원조정의 명으로 와서 충렬왕을 알현하고 사례하기를,
“신의 선조가 북으로 망명하여 간 것은 실상 호랑(虎狼)의 입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요, 감히 나라를 배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경은 본래 사족(士族)인데 어찌 근본을 잊었겠는가. 경이 하는 것을 보니, 그 마음에 간직한 바를 충분히 알겠다.”
하였다. 충렬왕 신사년에 있던 일이다. 그가 훙하자 도조(度祖)휘는 춘(椿) 가 뜻을 계승하여 와서 조회하니, 충숙왕(忠肅王)이 상으로 하사한 것이 매우 많았다. 그가 훙하자, 환조(桓祖)휘는 자춘(子春) 가 직위를 이어받았는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으므로 사졸들이 즐겨 따랐다. 이때에 이르러 와서 조회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대 할아비와 아비가 몸은 비록 외지(外地)에 있었으나 마음만은 왕실에 있었으니, 이제 경은 할아비와 아비를 욕되게 하지 말라. 내가 장차 그대를 중용(重用)하리라.”
하였다. 처음에 쌍성 지방은 땅이 매우 기름지고 풍요하여 일정한 생업이 없는 동남 지방의 백성들이 많이 귀부하였었다. 본국에서는 원의 중서성에 알리니 차관(差官)이 오고 요양성 차관도 왔다. 왕이 행성낭중(行省郞中) 이수산(李壽山)을 파견하여 서로 모여서 신구적민(新舊籍民)을 사정 분간하였으니, 이를 삼성(三省)에서 조감(照勘)한 호계(戶計)라 하였다. 그 뒤에는 그곳을 무유(撫綏)하는 것이 적당하지 못하였기에 백성들이 차츰 흩어져 나갔다. 이에 왕은 환조에게 명하여 그 일을 주관하게 하니, 백성들이 그 생업에 안정하였다.
■병신년 공민왕 5년(원 순제 지정 16, 1356)
◯하5월 기철ㆍ권겸(權謙)ㆍ노책(盧?)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이때 원에서 기씨(奇氏)의 삼세(三世)를 책봉하여 왕을 삼고, 기철에게 요양평장 대사도(遼陽平章大司徒)를 제수하였다. 기철이 요양으로부터 와서 어머니를 근행할 적에 왕에게 칭신(稱臣)하지 않자 왕이 더욱 불평하였다. 노책과 권겸도 모두 딸을 원의 황제와 태자에게 들였으므로 원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기철ㆍ권겸ㆍ노책 등은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했는데, 천하가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악한 짓을 많이 하여 원한을 사고 있으니, 만일 하루아침에 세력이 가면 보전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하고,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꾀하되 친척과 심복 등을 권력 있는 요직에 배치하여 은밀히 당파를 만들어 장차 대역(大逆)을 도모하려고 여러 도의 병기(兵器)를 점검하고, 가짜 조서를 만들어 그릇된 말을 선동하고 은밀히 기회를 알려 일을 거행하기로 약속하였다. 이 일을 왕이 먼저 알고, 곡연(曲宴)을 구실로 하여 재추(宰樞)들을 불러들여 모두 궁궐에 모이게 하였다. 그리고 노책ㆍ권겸ㆍ노책과 그들의 여러 아들도 명하여 불렀다. 이에 기철과 권겸이 부름을 받고 먼저 나오자, 밀직 경천흥(慶千興)과 황석기(黃石奇) 등이 은밀히 왕에게 아뢰기를,
“기철ㆍ권겸 두 사람은 이미 왔습니다만 그 나머지의 자질(子侄)과 노책 부자(父子)는 아직 이르지 않았으니, 만일 일이 누설되면 뜻하지 않은데서 변이 일어날 것이매 일찍 도모하느니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왕이 그렇게 여겨 곧 밀직 강중경(姜仲卿)과 대호군 목인길(睦仁吉) 등에게 명하여 장사들을 매복하였다가 철퇴로 기철을 쳐서 죽이고 피해 달아나는 권겸을 추격하여 자문(紫門)에서 죽이니, 피가 궁문에 뿌려졌다. 이에 기철과 권겸의 휘하들이 허겁지겁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자 금위(禁衛)의 4번(番) 군사들이 일시에 출동하여 칼과 창이 길에서 부딪쳤다. 강중경은 노책의 집에 이르러 노책을 붙잡아 죽이고 북천동 노상(路上)에 기시(棄尸)하였다. 이에 여러 기씨의 처자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원호(元顥)는 기철의 아들 유걸(有傑)의 장인으로 역시 딴 뜻이 있어 죽임을 당하였고, 권겸과 노책의 자제들은 참형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세 사람의 가산을 적몰(籍沒)하고 그들의 당파인 김보ㆍ이수산ㆍ왕중귀(王重貴)ㆍ임군보(任君輔) 등 17인을 유배하였다. 기철의 아들인 상호군 세걸(世傑)과 평장사 새인첩목아(賽因帖木兒)만은 원에 있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기해년 공민왕 8년(원 순제 지정 19, 1359)
◯12월 홍두적이 의주(義州)ㆍ정주(靜州)ㆍ인주(麟州)를 함락하였다. 이에 이암(李嵓)으로 서북면 도원수를 삼아 방어하게 하였다.
8일(정묘)에 적의 괴수인 위평장사(僞平章事) 모거경(毛居敬)이 무리를 4만이라 일컫고, 얼음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의주를 함락하고 부사(副使) 주영세(朱永世)와 주민(州民) 1천여 인을 죽였다. 9일(무진)에는 또 정주를 함락하고 도지휘사 김원봉을 죽였다. 그리고 인주까지 함락하였다. 이에 안우가 군사를 출동하여 적을 막아 물리쳤다. 조정에서는 이암을 서북면 도원수로 삼고 경천흥을 부원수로 삼아 최영(崔瑩) 등 여러 장수들을 인솔하여 적을 방어하게 하고, 김득배를 도지휘사로, 이춘부(李春富)를 서경윤(西京尹)으로, 이인임(李仁任)을 서경 존무사(西京存撫使)로 삼아 나아가서 적을 방어하게 하였다.
■신축년 공민왕 10년(원 순제 지정 21, 1361)
◯11월 18일(을축)에 안우가 군사를 수습하여 김용 등과 금교역(金郊驛)을 둔친 다음 김용이 좌산기(左散騎) 최영(崔瑩)을 보내어 경군(京軍)을 더 보내 주도록 주청하였다. 왕이 사세가 급박함을 알고 드디어 피난갈 것을 꾀하였다. 이에 시중 홍언박이 선왕의 기업(基業)과 통서(統緖)를 실휴(失隳)시킬 수가 없다고 여겨 왕에게 권하기를,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백성과 함께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지추밀사(知樞密使) 유숙이 아뢰기를,
“나라에서 믿을 것은 성자 참호와 양식인데, 이제 성이 완전하지 못하고 창고에는 저축한 것이 없으니 무엇을 가지고 지킬 것입니까?”
하니, 왕이 남으로 피난갈 것을 결정하여 먼저 부녀들과 약한 자들을 내보내자 인심이 흉흉하였다. 이날 적의 선봉이 흥의역(興義驛)까지 이르렀다.
19일(병인)에 왕과 공주가 태후를 모시고 남으로 행차하려 하였다. 새벽에 김용ㆍ안우ㆍ이방실 등이 달려와서 모두 아뢰기를,
“경성을 지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고, 최영은 더욱 통분하여 큰 소리로 아뢰기를,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조금만 더 머물러 주소서. 장정들을 모집하여 종묘와 사직을 지키겠습니다.”
하였으나, 재상들이 서로 돌아보며 잠자코 있었다. 날이 밝을 무렵에 어가가 민천사(旻天寺)에 행행하여서는, 가까운 신하들을 큰거리로 나누어 보내서 큰 소리로 의병(義兵)을 모집하게 하였으나, 도성 사람들은 다 흩어져 없어 모집에 응한 자는 겨우 두어 사람뿐이었다. 안우 등이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왕에게 아뢰기를,
“신 등은 여기에 머물러 적을 방어하겠으니 왕께서는 피난을 떠나십시오.”
하니, 왕이 드디어 숭인문(崇仁門)으로 나갔고 공주도 말을 타고 뒤따랐다. 차비(次妃) 이씨가 탄 말은 너무나 수척하고 약하였기에, 보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따라가는 신하들은 홍언박ㆍ이암ㆍ김용ㆍ경천흥ㆍ유탁ㆍ정세운 등 28인 뿐이었다. 도성 사람들은 늙은이와 어린이가 넘어지고 자빠지며 자식과 어미가 서로 잃어버려서 짓밟혀 죽는 자가 들에 가득하고 통곡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왕이 임진강(臨津江)에 다달아 어가를 강기슭에 머물게 하고는 산하(山河)를 돌아보면서, 원송수(元松壽)ㆍ이색 등에게 이르기를,
“이와 같은 풍경은 연구(聯句)를 짓기에 좋구나.”
하였다.
○ 적이 경성에 쳐들어왔다.
24일(신미)에 적이 경성을 함락하고서 두어 달이나 머물러 둔쳤다. 소와 말을 잡아 죽이고 그 가죽을 펴서 성(城)을 만들고 거기에 물을 대어 얼음을 얼리니 사람들이 올라갈 수가 없었다. 적은 또 남자와 여자를 함부로 죽여서 지져먹기도 하고, 혹은 임신한 부인들의 유방을 베어 구워먹는 등 잔혹한 짓을 마음대로 하였다.
12월 왕이 복주(福州 안동)에 이르렀다.
거가가 처음 경성을 출발할 적에는 너무나 창졸간이어서 위의(威儀)를 갖추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연서역(延曙驛)지금의 양주부(楊州府) 서쪽 60리에 있다. 에 이르러서는, 충청도 안렴사 안종원(安宗源)과 충주 목사 박희(朴曦) 등이 와서 알현하였다. 얼마 뒤에 청주ㆍ상주(尙州) 등지의 군대와 말이 잇달아 이르러서는 비로소 위의를 갖추게 되었다. 이천(利川)에 어가가 머물렀을 적에는 어의(御衣)가 젖고 얼어, 불을 피워 스스로 따스하게 하였다. 이때 이르는 곳마다 인민들이 무너지고 흩어져 공궤(供饋)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이에 안종원 등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12월 15일(임진)에 비로소 복주에 도착하였다. 종원은 안축(安軸)의 아들이다.
■임인년 공민왕 11년(원 순제 지정 22, 1362
◯춘정월 김용이 왕의 교지라 거짓 꾸며서 안우등에게 총병관 평장사 정세운을 죽이게 하였다.
김용이 본래 정세운과는 사이가 나빴고 또 안우ㆍ김득배ㆍ이방실 등이 큰 공을 세워 왕의 신임이 두터워질까 두려워하여, 안우 등에게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는 이를 죄로 몰아서 그들을 다 죽이려 하였다.
22일(기사)에 김용이 왕의 교지를 거짓으로 꾸며 글을 만들어서 자기 조카인 전 공부 상서(工部尙書) 김림(金琳)을 시켜 은밀히 안우 등을 꾀어 정세운을 처치하도록 하면서,
“정세운이 본래부터 공경들을 시기하였으니 적을 무찌른 뒤에는 반드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찌하여 먼저 도모하지 않는가?”
하였다. 이에 안우와 이방실이 김득배의 장막(帳幕)에 나아가 말하기를,
“이제 정세운이 적을 겁내어 진격하지 않고 김용의 서신이 또 이와 같으니, 그의 말을 좇아 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니, 김득배가 말하기를,
“이제 겨우 적을 평정하였는데 어찌 서로 죽여 없애겠소? 옛날 양저(穰苴)가 독단으로 장가(莊賈)를 목베었으며 위청(衛靑)이 소건(蘇建)을 죽이지 않은 것은 고금의 밝은 거울이니, 삼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만일 부득이한 일이라면 왕의 궁궐 앞에 붙잡아 가서 왕의 처리를 받는 것이 옳지 않겠소?”
하니, 안우와 이방실이 일단 물러갔다가 밤중에 다시 와서 말하기를,
“정세운을 목베라는 것은 왕명이오. 이제 우리들이 전공(戰功)을 이루고도 왕명을 받들지 않았다는 그 후환(後患)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소?”
하였으나, 김득배는 그러한 짓이 결코 옳지 않다고 굳이 고집하였다. 그러나 안우 등은 기어코 행하려 하여, 이에 술을 장만하여 놓고 사람을 시켜 정세운을 오라 해서 그가 이르자, 안우 등이 장사들에게 눈짓하여 그 자리에서 쳐죽였다. 홍언박(洪彦博)이 정세운(鄭世雲)의 죽음을 듣고 말하기를,
“총병이 군사를 출동할 적에 언동이 너무 오만하였으니 그가 이렇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였다.
23일(경오)에 정세운의 노포(露布 포백(布帛)에 써서 널리 알리는 전승보(戰勝報)) 가 행재소에 이르니,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정세운에게 의복과 술을 하사했는데, 이때 다시 정세운이 죽었다는 변고를 듣고 크게 노하여 장차 군사를 풀어 정세운을 죽인 자들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조금 뒤에 여러 장수들이 정세운의 죄상을 진술한 서신을 보고서는 왕이 도리어 기뻐하면서 사자를 보내어 여러 장수들에게 옷과 술을 하사하고 빨리 개선하라고 독촉하였다.
○ 도원수 안우와 원수 이방실ㆍ김득배를 죽였다.
안우 등이 함창(咸昌)에 이르렀을 적에 왕은 대신 가운데서 계획이 있는 자를 뽑아 보내서 그를 맞아 비상(非常)한 일이 있을 것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에 시중 유탁(柳濯)을 보냈다. 유탁이 함창에 이르러 꿇어앉아서 술을 올리면서 원수가 서서 마시기를 청하니, 안우가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유탁이 말하기를,
“이제 공(公)이 삼한(三韓)을 수복하였습니다. 내가 감히 관직의 지위를 마음에 두겠습니까?”
하고 눈물을 흘렸다.
29일(을사)에 안우가 개선하여 행궁에 나아가 알현(謁見)할 적에 김용이 목인길(睦仁吉)에게 인도하게 하고 안우가 중문(中門)에 이르자, 문 지키는 자를 시켜 안우의 머리를 철퇴로 쳤다. 그러나 안우는 얼굴빛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차고 있던 주머니를 세 번이나 가리키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조금만 늦추어다오. 원컨대, 임금 앞에 나아가서 주머니 속의 서신을 바치고 죽임을 받겠다.”
하였으나 철퇴 든 자가 다시 쳐서 죽이고 그 시체를 뜰에 끌어내렸다. 왕은 안우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전지(傳旨)하기를,
“너희들이 제멋대로 정세운을 죽였으니 마땅히 목을 베어 죽일 것이로되 이제 너를 목베지 않는 것은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하였다. 안우가 가리킨 주머니 속의 서신이란 곧, 안우 등을 속여서 정세운을 죽이게 한 김용의 서신이었다.
김용은 또 김림(金琳)이 자기의 음모를 누설시킬까 염려하여 먼저 김림을 목 베었다. 그리고 왕에게 보고하기를,
“안우 등이 멋대로 주장을 죽였으니 이는 전하를 염두에도 두지 않은 것으로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얼마 후에 왕은 안우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안우의 어린 아들이 벌거벗은 채로 길가에 섰는 것을 보고 애처롭게 여겨 그를 불러서 금중(禁中)에 머물게 하였다가 그가 갈 만한 곳을 물어서 돌려보냈다. 이에 안우의 휘하 장사들이 모두 놀래어 달아나려 하자 왕이 그들을 불러 주식(酒食)을 주며 위로하였다.
김용이 다시 교지(敎旨)를 선포하면서 방시(榜示)하기를,
“안우 등이 충성하지 못하여 제마음대로 정세운을 죽였기 때문에 그는 이미 죄를 받았다. 김득배와 이방실을 붙잡아 오는 자가 있으면 중한 상을 준다.”
하고, 대장군 오인택(吳仁澤), 만호 박춘(朴椿)ㆍ김유(金庾)ㆍ정지상(鄭之祥) 등을 나누어 보내서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날 이방실이 행재소에 나아가려고 용궁현(龍宮縣)까지 왔었는데, 박춘이 그곳에 와서 왕의 교지가 있다고 일컬으니, 이방실이 뜰에 내려가서 꿇어앉자 오인택이 칼을 뽑아 그를 쳤다. 이방실이 곧 넘어져서 기절하였다가 한참 만에 다시 깨어나서 담을 넘어 도망가자 박춘이 그를 쫓아가 붙잡고, 정지상이 뒤에서 다시 쳐서 죽였다.
김득배는 기주(基州)지금의 풍기(豐基) 까지 와서 변이 있었음을 알고, 따르는 기병 두어 명을 데리고 도망쳐 산양현(山陽縣)지금은 상주에 속한다. 상주 북쪽 63리에 있다.선영(先塋)의 곁에 숨었다. 이에 김득배의 아내와 자식들을 옥에 가두고 국문을 하니, 그의 사위인 직강(直講) 조운흘(趙云仡)이 장모에게 말하기를,
“사실대로 말을 하여 고초를 당하지 마소서.”
하니, 그 장모가 한참 동안 참고 견디다가 마침내 사실대로 고하였다. 그리하여 3월 1일(정미)에 김유ㆍ박춘ㆍ정지상 등이 김득배를 붙잡아 목베어 상주(尙州)에서 효수(梟首)하니 보는 자들이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안우는 탐진인(耽津人)이고, 김득배는 상주인이고, 이방실은 함안인(咸安人)이다. 김득배는 과거를 보아 진출한 자였다. 그의 문생(門生)인 직한림(直翰林) 정몽주(鄭夢周)가 왕에게 간청하여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는데 그 제문에,
“홍두적이 쳐들어와서 임금이 피난하였을 적에 공(公)이 만번 죽음을 무릅쓰는 계책을 세워서 삼한(三韓)을 회복하는 큰 업을 이루었으니, 비록 죄가 있더라도 공(功)으로 죄를 덮었어야 할 것이요, 만일 죄가 공보다 더 무거우면 반드시 그 죄를 승복(承服)시킨 뒤에 목을 베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말[馬]에 땀이 마르기도 전에, 개가(凱歌)가 끝나기도 전에, 태산 같은 큰 공을 세운 분이 칼날 밑에서 피로 물들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내가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에게 묻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것을 듣는 이들은 그를 의롭게 여겼다.
안우와 이방실의 아들들은 나이 겨우 10여 세였다. 그들이 저자로 돌아다니니, 사람들이 서로 물건을 그들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오늘날 편안하게 침식(寢食)하는 것은 모두 세 원수의 공이다.”
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들까지 있었다.
오씨(吳氏)는 이렇게 적었다,
하늘을 떠받는 큰 공훈이 있는 세 원수가 모두 김용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데도 왕은 이를 반성하여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마 하늘이 왕씨(王氏)를 싫어하여 그의 총명을 빼앗아서 멸망을 재촉하는 조짐을 싹트게 함이 아니었을까. 일찍이 관찰하여 보건대, 위기를 당하여 난리를 평정할 적에는 장수에 주의(注意)하게 된다. 그런데 공(功)이 온 세상을 덮은 자로서 도리어 의심을 받고 시기를 당하고, 소인들이 이러한 틈을 타서 귀신과 물여우 같은 짓을 하여 ‘군사를 데리고 반역을 도모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군사의 마음이 모두 그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여 반드시 손으로 장성(長城) 같은 장수를 죽이게 하니,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마저 삶아 죽이는 격으로 나라가 따라서 멸망한다. 앞 수레가 이미 엎어졌으니 뒷수레가 엎어질 것은 고금(古今)이 동일한 법칙이어서 오직 저 혼미하고 용렬한 공민왕은 구태여 깊이 책망할 것도 못된다. 그러나 당시에 시종하던 신하로서 이암ㆍ유탁ㆍ홍언박 등 여러 사람이 어찌 모두 적(賊) 김용의 도당들이기야 했겠는가마는 한 사람도 말 한 마디 내어 임금을 깨우치는 이가 없었다. 이는 오히려 세 원수의 아들들에게 서로 물건을 주어 은공을 갚으려는 시정인(市井人)들만도 못함이니, 아, 슬프다.
유씨(兪氏)는 이렇게 적었다.
김용의 계교가 본래 간악하고 묘해서, 왕이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왕은 본래 잔인하고 시기심이 많은 임금으로서 평소에 김용을 심복으로 대하였었다. 이제 여러 장수들이 세상에 뛰어난 큰 공을 세우는 것을 보고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김용과 더불어 그들을 억제하는 방법을 비밀히 의논하여, 김용으로 하여금 왕의 마음을 엿보아 헤아리게 한 것이다. 그러기에 김용이 틈을 만들어서 간악한 짓을 할 수 있었으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김용을 죽일 적에 왕이 눈물을 흘려서까지 김용을 생각하였겠는가. 당시의 일을 대략 짐작할 만하다.
동사강목 제15상
■갑진년 공민왕 13년(원(元) 순제(順帝) 지정(至正) 24, 1364)
◯동10월 원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王 공민왕)을 복위시키고 최유(崔濡)를 함거(檻車)에 실어 보냈다.
이전에 최유가 원의 권신 삭사감(槊思監)과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통하여 모략 중상해서 왕을 폐위하고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오기까지 하였다. 패하여 돌아가서는 또 권세에 의탁하여 대군을 일으켜 다시 본국을 치기를 꾀하였다. 그리고 원주(元主)에게 청하기를,
“만일 본국에 돌아가기만 한다면 장정은 모두 징발하여 천자의 위병(衛兵)에 충당하고, 또 양식과 여자를 바쳐 이를 연례(年例)로 삼겠으며, 경상도와 전라도에 왜인 만호부(倭人萬戶府)를 설치해서 왜인을 불러 금부(金符)를 주어 상국(上國)의 후원이 되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원에 머물고 있던 이공수(李公遂)ㆍ이자송(李子松)ㆍ임박(林樸) 등이 이 사실을 알고 편지를 써서 대지팡이 속에 넣어, 남루한 옷을 입혀 거지 행색으로 꾸민 하인에게 주어 샛길로 보내서 알리기를,
“덕흥군(德興君)이 이미 패하였다고 안심하지 말고 조심해 방비를 하소서.”
하였다. 이에 본국에서는 비로소 공수 등이 굴복하지 않고 있는 형편을 알았다. 그때 승상(丞相) 패라첩목아(孛羅帖木兒) 등이 고려 왕은 공은 있고 죄는 없는데 소인에 의해 곤경에 몰려 있으니 어찌 먼저 그 억울함을 변명해 주지 않을 수 있느냐고 해서, 감찰어사(監察御史) 유련(紐憐)이 아뢰어 왕의 공을 따지고 최유의 악(惡)을 말하였다. 원주는 즉시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 덕흥군(德興君))의 인장(印章)을 거둬들여 영평부(永平府)에 안치(安置)하고 왕을 복위하도록 명하고는 한림승지(翰林承旨) 기전룡(奇田龍)을 보내어 조서를 전달하고 최유를 함거에 실어 보냈다. 원의 사신이 이르자 도당(都堂)에서 왕에게 교외에 나가 맞이하도록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백관(百官)들이 맞이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는 이르기를,
“만약 내가 교외에서 마중하지 않는 것을 조사(詔使)가 묻거든 마땅히 대답하기를 ‘과군(寡君)이 일찍이 천조(天朝)에 죄를 얻어 폄작(貶爵)되었는데, 지금 비록 복위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명명(明命)을 받지 못했으니 감히 조사를 맞이하지 못한다.’ 하라.”
하였다. 원의 사신이 행성(行省)에 당도하자 왕은 편복(便服)으로 조서의 내용을 듣고 나서 그제야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명(命)을 배수(拜受)하였다
■갑진년 공민왕 13년(원(元) 순제(順帝) 지정(至正) 24, 1364)
○영도첨의사(領都僉議事) 이공수(李公遂 1308-1366 : 익산인 기황후의 내종사촌오빠)가 원에서 돌아왔다.
공수는 원에 있으면서 절개를 지켜 딴마음을 갖지 않았고, 그곳에서 벼슬하여 태상경(太常卿)이 되었었다. 사직하고 고려로 돌아올 적에 충의(忠義)가 천하에 알려졌다. 연경(燕京)의 제화문(齊化門)을 나서며 종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면서 말하기를,
“천하의 즐거움이 이보다 더한 것이 또 있겠는가.”
하였다. 도중에서 말이 지쳐 종이 화살로써 콩 1단을 사서 먹이니 공수가,
“무슨 까닭으로 궁한 백성들의 먹이를 빼앗느냐?”
하고, 면포(綿布)를 끊어 보상하였다. 여산참(閭山站)에서 아무도 없는 들판에 조 낟가리가 쌓여 있었는데 종자가 또 그것을 취해다가 말을 먹이니 공수가 조 1단의 값이 포(布) 몇 자나 되느냐고 물어 그 대답대로 값을 쳐서 포 양끝에 사연을 써서 조 낟가리 속에 두었다. 종자가,
“다른 사람이 반드시 가져갈 터인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니, 공수가,
“그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내 마음이 편안할 수 있다.”
하였다. 덕흥군(德興君 충선왕의 3자)의 변(變)에 유인우(柳仁雨) 등은 모두 붙었지만 오직 공수ㆍ이자송ㆍ홍순(洪淳)ㆍ김유(金庾)ㆍ허강(許綱)ㆍ황대두(黃大豆)ㆍ장자온(張子溫) 등은 따르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연경에 있으면서 돈과 양식이 다 떨어졌지만 끝내 딴마음을 갖지 않았다. 이들을 모두 탁용(擢用)하여 표창하였다.
■을사년 공민왕 14년(원 순제 지정 25, 1365)
◯5월 중 편조(遍照 신돈)를 사부(師傅)로 삼아 국정을 자문하였다.
편조의 자는 요공(耀空)이요, 영산(靈山)사람으로 옥천사(玉川寺)의 중이었다. 어려서 중이 되었으나 그 어미의 신분이 천하여 (옥천사의 종이었다) 동류에 끼이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왕의 꿈에 어떤 사람이 칼을 빼어 자기를 찌르는데 어떤 중이 구해 주어 모면하게 되었다. 마침 김원명(金元命)이 편조를 왕에게 알현시켰는데 그 용모가 꿈에 본 중의 모습과 매우 닮았으므로 왕이 크게 이상하게 여겨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니 편조가 비록 글은 못해도 총혜하고 능변이었다. 스스로 도를 얻었다 하여 괴이하게 떠벌리는 말이 문득 왕의 뜻에 맞았다. 이로 말미암아 자주 궁중에 불러들여 그와 더불어 공리(空理 불교)를 담론하였다.
편조는 일찍이 서울에 노닐면서 불도에 인연 맺기를 권하며 부녀들을 속여 꾀어 멋대로 간음하였다. 왕을 뵌 뒤로는 거짓 꾸미기에 힘써 그 형용을 초라하게 하여 비록 한여름 한겨울이라도 항상 해진 가사 한 벌만 입고 다니니, 왕이 더욱 중하게 여겨 무릇 의복과 음식을 대접함에 청결히 하며 버선까지도 반드시 이마에 받들어 공경의 뜻을 표했다. 이승경(李承慶)이 이를 보고,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반드시 이 중이리라.”
하였고, 정세운(鄭世雲)도 또한 그를 요승(妖僧)이라 하여 죽이려 하였는데 왕이 몰래 그를 피신하게 하였다. 이 두 사람이 죽자 편조는 두발을 기르고 두타(頭陀)가 되어서는 다시 와 왕을 배알하고 비로소 조정 안에 들어와 권세를 부리기 시작하였는데, 왕은 그에게 청한 거사(淸閑居士)란 칭호를 하사하더니 이때에 이르러는 사부(師傅)라 일컫고 국정을 자문하여 그의 말이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많이 그에게 빌붙었다. 사대부의 아내들은 그를 신승(神僧)이라 생각하여 불법을 듣고 복을 구하러 왔는데 편조는 그들이 오기만 하면 곧 사통하였다. 편조가 왕에게 총애를 얻고 나서는 그 행적이 매우 비밀스러워졌다. 이인복(李仁復)과 한수(韓脩)가 왕에게,
“이 사람은 바른 사람이 아닙니다. 후일 반드시 변고가 있을 것이니 이 사람을 멀리하십시오.”
간하고, 이제현(李齊賢)도 그의 골격이 옛날의 흉인(凶人)과 같아 반드시 후환을 끼칠 것이라 아뢰었으나 왕은 모두 듣지 않았다.
◯동12월 신돈(辛旽)에게 수정리순 논도섭리보세(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의 공신호를 내리고 영도첨의사사 취성부원군(領都僉議司事鷲城府院君)으로 삼았다.
편조를 비로소 성을 신(辛), 이름을 돈(旽)이라고 일컬었다. 당초에 왕이 재위한 지 오래되었으나 많은 재상이 뜻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일찍이 생각하기를, 세신 대족(世臣大族)은 친당(親黨)이 뿌리를 연하여 서로 가려 덮어주고, 초야(草野)의 신진(新進)은 실상을 속이고 행실을 꾸며서 명망을 취하여 귀현(貴顯)하기에 이르면 대족에 혼인하여 그 처음을 깡그리 버리고, 유생(儒生)은 나약하여 굳셈이 적은데다 또 문생(門生)이니 좌주(座主)니 동년(同年)이니 부르며 끼리끼리 무리를 이루어 사정(私情)에 따르므로 이 세 부류는 모두 쓸만하지 못하다 하고, 세상을 떠나 독립(獨立)해 있는 사람을 얻어 인순(因循)의 폐단을 개혁하려 하였다. 그러던 차에 신돈을 보고 나서 그는 도를 얻어 욕심이 적으며, 또 미천한 데에서 나와 친당(親黨)이 없으므로 일을 맡기면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 돌아보거나 거리낄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중 가운데서 뽑아내어 국정을 맡겨 의심치 않았다. 신돈은 겉으로는 마음 내키지 않는 척하여 왕의 마음을 더욱 끌었다. 왕이 강청(强請)하니, 돈은 아뢰기를,
“일찍이 듣건대 상께서 참소하고 이간하는 것을 많이 믿는다 하오니 삼가셔서 이와 같이 하지 말아야 세간(世間)을 복되고 이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이에 손수 맹세의 말을 쓰기를,
“사(師)는 나를 구하고 나는 사를 구하여 사생간에 이것으로 하여 남의 말에 미혹됨이 없을 것을 부처님과 하늘에 증명하리라.”
하였다. 이에 돈이 권세를 부린 지 3순(旬)에 대신들을 참소하여 거의 다 파면 축출하고 총재(冢宰)ㆍ대간(臺諫)이 모두 그의 입에서 나왔다. 영도첨의(領都僉議)는 오랫동안 그 자리가 비어 있었더니 이때에 이르러 수정리순 논도섭리 보세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사 판중방감찰사사 취성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판서운관사(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都僉議使司事判重房監察司事鷲城府院君提調僧錄司事兼判書雲觀事)가 되어 내의의 대권(大權)이 온통 돈에게로 모아졌다. 비로소 궁중에서 나와 기현(奇顯)의 집에 우거하였는데 백관이 그 문에 나아가 국사를 의논하였다. 돈은 ‘진사(辰巳)에 성인이 나온다.’는 참언(讖言)을 인거하여,
“그 성인이 바로 내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돈은 기현의 아내와 사통하여 그녀로 하여금 자기의 식사를 맡게 하였다. 기현과 그의 아내는 조석으로 돈의 곁에서 모시어 마치 늙은 노비 같았다. 돈은 탐음(貪淫)하기 날로 더욱 심해져 뇌물이 몰려들었다. 집에서는 주육성색(酒肉聲色)을 욕망대로 즐기면서 왕을 배알하는 자리에서는 종일토록 청담(淸談)을 늘어놓으며 채소ㆍ과일만 먹고 차만 마셨다. 그래서 왕은 그를 중으로서 몸가짐이 있다 하여 믿고 소중히 여겼다. 돈은 김원명(金元命)이 자기를 천거해 주었다고 하여 그로 하여금 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을 겸하게 하여 8위(衛) 42도(都)의 부병(府兵)을 맡게 하였다.
■병오년 공민왕 15년(원 순제 지정 26, 1366)
◯우정언(右正言) 이존오(李存吾 1341-1371)와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 정추(鄭樞 1333-1382)가 상소하여 신돈(?-1371)을 몰아내기를 청하니, 왕은 그 소문(疏文)을 태워버리고 존오를 좌천시켜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삼고, 추를 좌천시켜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삼았다.
신돈이 국권을 잡고부터 참람하게 굴고 불법을 자행하였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존오가 장차 이를 논란하려고 소문(疏文)의 초고를 옷소매에 넣어 가지고 성(省)에 가서 동료들에게 내보이며,
“요망한 자가 나라를 그르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여러 낭관들이 두려워 움츠러들어 아무도 응대하는 이가 없고 오직 정추가 여기에 따랐다.
드디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신등(臣等)이 삼가 3월 18일 전내(殿內)에서 베푼 문수회(文殊會)에 참석하였는데 영도첨의(領都僉議) 신돈(辛旽)이 재신(宰臣)의 반열에 앉지 않고 감히 전하와 나란히 앉았는데 그 사이가 몇 자 떨어지지 않아 나라 사람들이 놀라 흉흉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대저 예란 상하를 분별하고 백성의 뜻을 안정케 하는 것이니 진실로 예가 없으면 어찌 군신(君臣)이 되며, 어찌 부자(父子)가 되며, 어찌 국가가 되겠습니까? 보옵건대 돈(旽)은 상(上)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 국정을 오로지하여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당초 영도첨의 판감찰(領都僉議判監察) 제수의 명이 내리던 날에 법으로 마땅히 조복(朝服)을 입고 나와서 사례를 드려야 할 터인데도 반달이 되도록 나오지 않다가 궐정(闕庭)에 나아감에 미쳐서는 무릎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항상 말을 타고 홍문(紅門)을 출입하며 전하와 나란히 하여 호상(胡床)에 기대어 앉고 그의 집에서는 재상이 뜰 아래에서 절을 하여도 모두 앉아서 대우합니다. 비록 최항(崔沆)ㆍ김인준(金仁俊)ㆍ임연(林衍)의 소위라 하더라도 일찍이 이와 같이 한 적은 없습니다. 전날에는 사문(沙門)으로 있었는지라 마땅히 법도 밖에 두어 그 무례함을 반드시 책망할 것까지는 없었으나 지금은 재상이 되었으니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졌는데도 감히 예를 잃고 강상(綱常)을 훼손함이 이와 같습니다. 그 연유를 추구하면 필시 사부(師傅)의 이름을 칭탁한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승단(兪升旦)은 고왕(高王 고종(高宗))의 스승이요, 정가신(鄭可臣)은 덕릉(德陵 충선왕(忠宣王))의 스승이었으나 신등은 그 두 사람이 감히 이와 같이 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자겸(李資謙)은 인왕(仁王 인종(仁宗))의 외조부라 인왕이 겸양하여 조손(祖孫)의 예로 서로 보려 하였으나 공론이 두려워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군신의 분의(分義)가 본디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군신의 예는 군신이 있어 온 이래로 만고에 걸쳐 바뀌지 않는 것이니 돈과 전하가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스스로 높이기를 이와 같이 한단 말입니까?
돈이 이미 위복(威福)을 짓고, 또 전하와 예를 대등하게 하니, 이는 나라에 두 임금이 있는 격입니다. 참람함이 지극하고 교만함이 습속을 이루면 위(位)를 가진 자 모두 그 분수에 안돈하지 못하고 소민(小民)은 그 상도(常度)를 넘을 것이니 가히 두렵지 않겠습니까? 송(宋)의 사마광(司馬光)은 말하기를 ‘기강이 서지 않으면 간특한 영웅이 마음을 낸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예는 엄히 하지 않을 수 없고 습속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이 사람을 공경하여 백성에게 재화가 없게 하실 양이면 그 두발을 깎고 그 옷을 승복(僧服)으로 입히고 그 관직을 삭제하여 사원(寺院)에 두어 공경할 것입니다. 반드시 이 사람을 써서 국가가 평안하게 되도록 하시려면 그 권세를 억제하고 상하의 예를 엄하게 하여 부리시어야 백성의 뜻이 안정될 것이요 나라의 환난이 풀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돈을 어질다 하시나 돈이 권세를 부린 이래로 음양이 예를 잃어 겨울인데도 우레가 일고 누른 안개가 사방에 가득 끼기를 열흘에 걸치며, 해에 흑자(黑子)가 있고 밤에 붉은 기운이 있으며 천구(天狗 별의 이름)가 땅에 떨어지고 상고대[木氷]가 너무 심하게 끼었으며, 청명(淸明) 뒤에는 우박이 내리고 찬바람이 불어 하늘의 기상이 여러 차례 변하고 산새와 들짐승들이 한낮에 성안에서 날고 뛰어다닙니다. 그러니 돈의 논도섭리공신(論道燮理功臣)의 호가 과연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뜻에 부합되겠습니까?
신등은 직책이 간원(諫院)에 있어, 전하의 재상 선택이 그 적임자가 아니어서 장차 사방에서 웃음을 사고 만세에 기롱을 당할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서 말하지 않는 죄책을 면할까 합니다.
소가 올라가자, 왕이 크게 노하여 절반도 채 보지도 않고 불살라 버리라고 명하고 정추 등을 불러 면책(面責)을 하였다. 그때에 돈이 왕과 평상을 마주하고 있기에 존오가 돈을 쏘아보며 질책하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렇게 무례한가?”
하니, 돈이 놀라 황망하여 저도 모르게 평상에서 내려왔다. 왕이 더욱 노하여 정추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리고 이춘부(李春富)ㆍ김난(金蘭)ㆍ이색(李穡)ㆍ김달상(金達祥) 등에게 명하여 국문케 하였다. 그리고는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 존오의 성난 눈을 두려워한다.”
하였다. 춘부 등이 정추에게 묻기를,
“너를 꾀어 상소케 한 자가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 부자가 대를 이어 간대부(諫大夫)가 되어 함께 나라의 은혜를 받아왔다. 이제 상(上)께서 정사를 마땅치 않은 사람에게 맡겨 장차 사직을 위태롭게 할 판이어서 사람마다 분한(憤恨)을 머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언직(言職)에 있으면서 잠자코 있을 수 없었을 따름이다. 어찌 남이 꾀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말을 할까보냐! 그리고 돈이 위복을 휘둘러 길에 다니는 사람들이 서로 눈을 흘기는데 누가 시킨 것이겠는가?”
하고, 단지 임박(林樸)과 김주(金湊)가 알았다고만 말하였다. 이에 임박 등이 모두 연루되어 신문을 받았다.
또 존오에게 묻기를,
“네 아직 입에 젖내나는 동자가 어찌 능히 스스로 알았겠느냐. 필시 몰래 사주(使嗾)한 늙은 여우가 있을 터이니 숨기지 말라.”
하니, 대답하기를,
“국가가 동자를 아는 것이 없다 않고 언관(言官)의 자리에 두었으니 감히 말을 하지 않아 국가를 저버리겠는가?”
하였다. 당시 존오의 나이는 25세였다.
돈이 이 일을 계기로 자기에 대립하는 명망 있는 사람들을 깡그리 제거하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정추 등에게 말하기를,
“만약 전(前) 정당(政堂) 원 송수(元松壽)와 전 시중(侍中) 경천흥(慶千興)을 끌어들이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
하니, 대답하기를,
“몸이 간관(諫官)이 되어 단지 국적(國賊)을 논핵했을 따름이다. 어찌 남의 지촉을 받음이 있겠는가. 무릇 죽고 사는 데는 명이 있다. 어찌 남을 무함해서 죽음을 면하기를 구하겠는가?”
하였다. 좌헌납(左獻納) 박보록(朴普祿)이 정추 등을 옥에서 만나 보고 나와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사람 노릇 못하네, 사람 노릇 못해. 돈의 무리가 반드시 죽이려고 들 것이네.”
하였다. 이색(李穡)이 춘부에게 이르기를,
“두 사람의 광망(狂妄)함은 진실로 죄줄 만하네. 그러나 우리 태조(太祖) 이래로 아직 일찍이 한 사람의 간관(諫官)도 죽인 적이 없네. 그런데 지금 영공(令公)돈(旽)이다. 으로 인하여 간관을 죽인다면 악한 소리가 멀리 전파될까 우려되네.”
하니, 춘부가 그렇게 수긍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에 정추를 좌천시켜 동래현령으로 삼고, 존오를 좌천시켜 장사감무(長沙監務) 장사는 지금의 무장(茂長)인데, 옛터가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로 삼았다. 당시 사람들이 존오를 일러 진정한 정언(正言)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돈의 사납게 날뜀은 더욱 심해지고 재상(宰相)도 대간(臺諫)도 모두 돈에게 붙어 언로(言路)가 막히고 말았다.
최씨(崔氏)는 이렇게 적었다.
돈이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었으나 공경 대부(公卿大夫)들 가운데는 감히 한 마디도 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존오는 소를 올려 극론하여 임금의 우레 같은 위엄을 범하고도 조금도 꺾이지 않았고, 늙은 간물[老奸]의 승냥이ㆍ호랑이 같은 노여움을 건드리고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그 충간의담(忠肝義膽)은 곧바로 일월(日月)ㆍ빙상(氷霜)과 빛을 다툴 만하다. 고려 5백 년에 간관(諫官)은 이 한 사람일 뿐이다. 그가 죽는 날에 ‘돈이 죽어야 내가 죽을 것이다.’ 한 말을 남겼으니 또한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해 죽으나 사나 변하지 않는 지절(志節)을 볼 수 있다.
5월 전(前) 영도첨의(領都僉議) 익산부원군(益出府院君) 이공수(李公遂)가 졸하였다.
공수는 정명(精明)하고 근신(謹愼)하여 털끝만큼도 함부로 취하거나 주지 않았으며 일에 임하기를 꿋꿋한 자세로 하여 형세에 몰림을 받지 않았다. 풍류가 있고 한아(閑雅)하여 소연(蕭然)히 산야(山野)의 풍취가 있었다. 덕수현(德水縣)에 별장을 두었으며, 남촌 선생(南村先生)이라고 불렀다. 복건에 청려장(靑藜杖)으로 소요자적(逍遙自適)하였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자부(姊夫) 전공의(全公義)에게서 성장하였는데 현달(顯達)하고 나서도 공의를 아비 섬기듯, 누이를 어미 섬기듯 하였다. 공수가 병이 들자 친속(親屬)들이 그 아내 김씨에게,
“왜 부처님께 기도하지 않느냐?”
하니, 김씨는 대답하기를,
“공(公)이 평생 동안 일찍이 부처를 섬긴 적이 없는데 어찌 감히 그의 도(道)를 저버리고서 속이겠는가?”
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을 설치하고 신돈(辛旽)을 판사(判事)로 삼았다.
왕은 다음과 같은 영(令)을 내렸다.
근래에 기강이 크게 무너져 탐욕이 풍속을 이루어, 종묘(宗廟)ㆍ학교(學校)ㆍ창고(倉庫)ㆍ군수(軍須)의 전지와 국인(國人)의 세업(世業)의 전민(田民 토지와 거기에 예속된 민호)을 호강(豪强)이 빼앗아 점거하고, 주현(州縣)의 역리(驛吏)ㆍ관노(官奴)ㆍ백성(百姓)으로 역(役)을 도피한 자들을 모두 빠뜨려 숨겨 크게 농장(農庄)을 주어, 백성을 병들게 하고 나라를 여위게 하고 있기에 이제 도감을 설치하여 추정(推整)하려 한다.
이영이 나와 권호(權豪)들이 많이들 그 빼앗았던 전민(田民)을 본주인에게 돌려 주니 중외(中外)가 기뻐하였다. 돈은 하루 건너씩 도감에 나왔고 이인임(李仁任)ㆍ이춘부(李春富) 이하는 돈의 지시를 들어 처결하였다. 돈은 외면으로는 공의(公義)를 가탁하였으나 실속으로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팔았다. 그래서 무릇 천예(賤隸)로서 양민(良民)되기를 호소하는 자는 모두 양민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러자,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한 자들이 봉기하여 말하기를,
“성인이 나왔다.”
하였다. 돈이 군소(群小)들의 마음을 거두어 그의 간특한 일을 성취시키려 함이 이와 같았다. 부녀로서 송사해 오는 자가 만약 아리따운 용모와 자태를 가지고 있으면 돈은 겉으로는 불쌍히 여기는 척하면서 그의 집으로 꾀어가서 간음하고는 송사는 반드시 해결해 주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여자의 청알(請謁)이 성행하였고 사부(士夫)는 이를 갈았다.
○ 백관이 신돈의 집에 모였는데, 이날 크게 지진이 있었다.
신돈의 전횡이 날로 심해 가 백관들이 그를 대우하기를 왕처럼 하였다. 그의 출입에 전후를 옹위했으며 그의 집에 번갈아 숙직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양부(兩府 문하부(門下府)와 밀직사(密直司))가 정릉(正陵 노국 대장공주의 능)에 제사를 지내는데 돈은 절도 하지 않고 공주(公主)의 신좌(神座)와 마주앉아 음식을 먹었다. 왕이 여러 능을 배알할 적에 백관들은 모두 왕을 따라 절을 하나 돈은 홀로 서서 절을 하지 않았다. 왕이 일찍이 가루(假樓 임시로 세운 누대)에 거둥하여 격구(擊毬)를 구경하는데 돈이 말을 타고 도당(都堂)의 천막앞에 이르러 여러 상신(相臣)들이 다 일어섰으나 돈은 말을 탄 채로 여러 상신과 이야기하고 가루 밑에 이르러서야 말에서 내려 왕과 함께 다락 위에 앉으니 도무지 군신(君臣)의 예가 없었으며 복식(服飾)도 왕과 같아 보는 이들이 분별할 수가 없었다. 유탁(柳濯)이 음식을 날라들이니 돈이 앉아서 받아 술을 마시고 나머지를 시중(侍中) 윤환(尹桓)에게 주니 환이 그것을 마시고서도 아무런 부끄러운 빛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백관이 돈의 집에 모이니 거마(車馬)가 거리를 메웠으나 궁문(宮門)은 적막하여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이날 크게 지진이 있었다.
8월 태백(太白)이 경천(經天)하였다.
○ 왕이 태후전(太后殿)에서 태후를 모시고 연회하였다.
이때 덕녕 공주(德寧公主)가 문예부(文睿府)에서 태후에게 잔치를 베풀고 있었는데 왕이 시연(侍宴)하였다. 신돈이 왕을 따라들어가 뵈었으나 태후는 돈에게 앉으라고 하지 않았다. 돈이 나가자 왕이 태후에게,
“첨의(僉議 왕이 신돈을 공경하여 부른 칭호)는 나라의 주석(柱石)인데 어찌 앉으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하였다. 태후가 정색을 하고,
“미망인(未亡人)이 어찌 감히 외승(外僧)과 같이 앉겠오?”
하니, 왕은 잠자코 있었다. 돈이 이로 말미암아 깊이 앙심을 품었다. 당시 공경 구신(公卿舊臣)들은 모두 축출되고 돈이 꺼려하는 이는 오직 태후뿐이었으므로 갖가지 계략으로 참소하고 이간시켜 이에 왕의 태후에 대한 효성이 드디어 쇠해갔다.
■정미년 공민왕 16년(원 순제 지정 27, 1367)
◯춘정월 원에서 신돈을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로 삼았다.
돈이 원의 선사(宣賜)를 집에서 받아서는 자리 곁에 밀쳐 놓으며 말하기를,
“어찌 이 따위를 쓰리요. 다만 저들이 준 것이니 버리지는 못할 뿐이다.”
하였다. 그 교만하기가 이와 같았다.
■무신년 공민왕 17년(명(明) 태조(太祖) 홍무(洪武) 원년, 1368)
◯하4월 왕이 구제(九齋)에 행행하여 친히 선비들을 시험하였다.
이에 앞서 신돈이 이제현(李齊賢)을 미워하여 왕에게 이르기를,
“유자(儒者)들이 좌주(座主)다 문생(門生)이다 일컬으며 중외(中外)에 포열(布列)하여 서로 청탁을 들이니, 이를테면 제현의 문생 같은 것은 나라에 가득찬 도둑들입니다. 유자의 해가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당시 예문관(藝文館)이 두 차례나 삼관원(三館員)의 수가 부족된다 하여 과거를 시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돈의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 허락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친시(親試)를 행하여 경의(經義)를 써서 이첨(李詹 1345-1405) 등 7인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추7월 일본이 사신을 보내와 빙문하였다.
○ 대마도(對馬島)의 만호(萬戶) 종경(宗慶)이 사자를 보내와 조공을 바쳤다.
겨울에 이르러서도 또 사자를 보내어 조알(朝謁)해 왔기에 종 경에게 쌀 1천 석을 하사하였다. 동래(東萊)의 부산포(釜山浦)에서 동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섬의 선월포(船越浦)에 이르기까지는 물길 6백 70리이다. 섬 안은 8개 군(郡)으로 나뉘어 있고 인호(人戶)는 모두 섬의 개[海浦]를 연해 있다. 남북이 삼일정(三日程), 동서는 일일정 혹은 반일정(半日程)으로 사면이 모두 돌산으로 되어 있어,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소금굽기ㆍ고기잡이ㆍ장사로 살아간다. 종씨(宗氏)가 대대로 도주(島主)가 되어 왔다. 섬은 해동(海東) 여러 섬의 요충에 위치해 있다. 본국에서 이전부터 금주(金州 김해)에다 호시(互市)를 허가하여 때로 들어와 조공을 바쳤는데 동정(東征) 이후로 수신사(修信使)가 서로 끊어졌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다시 조알해 왔기에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을 보내어 답례하였다.
9월 명(明)의 군대가 연경(燕京)을 함락하자 원의 황제는 상도(上都)로 달아났다.
왕은 원의 황제가 상도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백관을 모아 명과 사신을 통하느냐의 가부를 의논하였다.
동사강목 제15하
■기유년 공민왕 18년(명(明) 태조(太祖) 홍무(洪武) 2, 1369)
◯3월 북원(北元)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을 승진시켜 우승상(右丞相)으로 삼았다.
○ 사신을 북원에 보내어 사은(謝恩)하게 하였으나 길이 막혀 중도에서 되돌아왔다.
하4월 대명 황제(大明皇帝)가 사신을 보내어 천하가 평정되었음을 알려왔다.
대명의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바닷길로 부보랑(符寶郞) 설사(偰斯)를 보내어, 왕에게 새서(璽書 천자의 옥새를 찍은 조서(詔書))를 내리고 천하가 평정되었음을 알렸다. 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숭인문(崇仁門) 밖에 나아가 맞이하였다.
그 조서는 다음과 같다.
대명 황제는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내노라. 송(宋)이 통어(統馭)하기를 상실하고부터 하늘이 그 제사를 끊었다. 원(元)은 우리 족류(族類)도 아닌데 중국에 들어와 주인 노릇한 지 1백여 년에 하늘이 그 혼음(昏淫)함을 미워하여 또한 그 천명을 끊어버려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이 요란하게 된 지 18년이다. 군웅(群雄)이 처음 일어나던 때에 짐(朕)은 회서(淮西) 지방의 한 포의(布衣 평민)였는데 홀연히 포악한 군대가 들이닥쳐 잘못 그 가운데 들어갔다가 그 성공의 가망이 없음을 보고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편안하지 못하였었다. 이에 하늘의 신령(神靈)이 문무(文武)를 부하(負荷)시켜주어 동쪽의 강좌(江左 강남)로 건너가 백성을 기르는 도를 익힌지 14년 만에 서쪽으로는 한왕(漢王) 진우량(陳友諒)을 토평하고, 동쪽으로는 오왕(吳王 장사성(張士誠))을 고소(姑蘇)에서 결박하고, 남쪽으로는 민월(閩越)을 토평하여 팔번(八蕃)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호군(胡君 원 순제(元順帝))을 축출하여 화하(華夏)를 숙청하고 우리 중국의 옛 강토를 회복하였다. 그리하여 금년 정월에 신민(臣民)이 추대하여 황제의 위에 나아가 국호(國號)를 대명(大明)이라 정하고 연호를 홍무(洪武)로 세웠다. 사이(四夷)가 복속해오므로 국서(國書)를 써서 사신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 고려에 들어가 왕에게 통보하여 이를 알게 하노라.
설사는 양 2마리를 왕에게 바쳤다. 설사는 설손(偰遜)의 아우였다.
그가 돌아가게 되자 왕이 안장마와 의복을 선물로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 사신을 보내어 원(元)의 회왕(淮王)에게 빙문하였다.
8월 사신을 보내어 명(明)에 입조(入朝)하였다.
총부상서(摠部尙書) 성준득(成准得)은 성절(聖節)을 하례하고, 대장군(大將軍) 김갑우(金甲雨)는 황태자의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고, 공부상서(工部尙書) 장자온(張子溫)은 신정(新正)을 하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본국에 조하의주(朝賀儀注)를 하사하도록 청하였다.
○ 북원이 사신을 보내어 빙문하였다.
추7월 비로소 홍무(洪武 명 태조의 연호) 연호를 시행하였다.
○ 사신을 보내어 명에 사례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 강사찬(姜師贊)을 명의 서울로 보내었으니 책명(冊命)에 사례하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원(元)에서 내려주었던 금인(金印)도 바쳤다. 이어 탐라(耽羅)의 일을 품(禀)하기를,
“탐라는 바로 고려의 땅이라 그 방목하던 말과 노새는 토착인을 시켜 기르도록 허락하시고, 그 달달(達達 몽고족을 가리킨다)의 목자(牧子)도 본국이 위무하여 양민으로 삼게 하십시오.”
하였다. 또 악공(樂工)을 보내어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청하였더니, 사찬이 돌아오기에 미쳐 황제는 태상시(太常寺)의 악공이 명의 서울에 와서 기술을 익히도록 명하였다. 명의 중서성(中書省)에서 이르기를,
“고려의 사신이 입공(入貢)할 적에 많이들 사물(私物)을 가지고 와서 매매를 하니 마땅히 세(稅)를 거두어야 하며, 또 많이들 중국의 물건을 가지고 국경을 나가니 금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원의 멸망을 알렸다.
이해 4월에 원 순제(元順帝)가 응창(應昌)에서 죽자, 명의 장군 이문충(李文忠) 등이 대군을 거느리고 응창에 들어가 순제의 손자 매적리팔랄(買的里八剌)과 그 후비(后妃)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승첩(勝捷)이 이르자 황제는 천하에 포고하였다. 그래서 선사(宣史) 맹 원철(孟原哲)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와서 반사(頒賜)하였다.
추7월 신돈이 모반하니 수원(水原)으로 유배하고, 그 무리 기현(奇顯)ㆍ최사원(崔思遠) 등을 베었다.
신돈이 처음에는 중으로서 왕에게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김란(金蘭)의 딸을 들이고도 또 축첩이 셀 수 없이 많았으며, 경대부(卿大夫)의 아내로 아름다운 자는 반드시 은밀히 불러 사통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은혜를 바라고 위세를 두려워하여 다투어 노비와 보물을 바쳤다. 그런데도 왕은 오히려 녹을 받지 않고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으며 전원(田園)을 두지 않는다고 해서 신임하고 중히 여겼다. 그래서 신돈은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며 은수(恩讐)를 반드시 갚아 세가 대족(世家大族)이 거의 다 주살당하여 사람들이 그를 호랑이나 이리 보듯이 하였다.
기현과 최사원이 그의 심복이 되고, 이춘부(李春富)와 김난이 그의 우익이 되어 당여(黨與)가 조정에 가득하였다. 왕도 스스로 불안한 마음이 있으되 영상(領相)이라 칭하고 감히 신하로 여기지는 못하였다. 왕의 성품이 본래 시기심이 많아 비록 심복 대신이라 하더라도 그 권력이 성하게 되면 반드시 시기하여 베어죽였다. 그래서 신돈이 스스로 자신의 세력이 너무 심하게 떨침을 알고 왕이 시기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반역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헌릉(憲陵 광종(光宗)의 능)과 경릉(景陵 문종(文宗)의 능)에 배알하는 때를 타서 신돈이 그의 당인(黨人)을 나누어 보내어 길 곁에 잠복해 있다가 대사(大事)를 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당인이 왕 행차의 의장(儀仗)과 호위가 매우 성함을 보고 차마 범하지를 못하였다. 신돈은 성이 나서 그들을 질책하고 다시 거사할 것을 꾀하였다. 신돈의 문객인 의랑(議郞) 이인(李靭)이 그 흉모(凶謀)를 기록하여 익명서(匿名書)를 만들어 한림거사(寒林居士)라 칭해서 밤에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다 던지고 달아났다. 속명이 그 글로써 아뢰니, 기현ㆍ최사원ㆍ정귀한(鄭龜漢)ㆍ진윤검(陳允儉), 그리고 기현의 아들 중수(仲脩) 등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는데, 모두 자복(自服)하는지라 베어 죽이고 신돈을 수원에 유배하였다. 왕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익재(益齋)가 일찍이 돈(旽)은 단인(端人)이 아니라고 하더니 그 선견(先見)에는 미칠 수가 없구나.”
하였다.
○ 신돈이 복주(伏誅)되었다.
신돈이 유배되자 성부(省府)와 대간(臺諫)이 글을 올려 죽이기를 청하였다. 이에 찰방사(察訪使) 임박(林樸)을 보내어 신돈을 수원에서 베게 하였는데, 왕은 신돈과 맹약한 글을 임박에게 주며 신돈에게 보이고 죄목을 따지기를,
“네가 항상 여자를 가까이함은 도인(導引)하여 양기(養氣)하기 위함이요 감히 사통하자는 것은 아니라 하였는데, 지금 들이니 낳은 아이가 있다니 이것도 맹약한 글에 있는 것이냐? 성 안에 갑제(甲第)를 지은 것이 일곱 군데에 이르니 이것도 맹약한 글에 있는 것이냐?”
하게 하고, 이와 같은 몇 가지 일로 죄를 따져 책망한 뒤에는 이 맹약한 글을 불사르라고 하였다. 임박이 수원에 이르러 신돈을 목베어 사지는 갈라 조리돌리고 머리는 서울의 동문(東門)에 효시(梟示)하였다. 아울러 그의 두 살 난 아이도 베었다. 신돈은 성품이 사냥개를 두려워하고 사냥을 싫어하면서도 방자하고 음란하여, 항상 오계(烏鷄)ㆍ백마(白馬)를 잡아먹어 양기(陽氣)를 보충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신돈을 늙은 여우의 정기라고 하였다.
■임자년 공민왕 21년(명 태조 홍무 5, 1372)
◯동10월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였다.
왕은 공주가 죽고(1365) 나서부터 밤낮으로 시름에 잠기고 여색을 즐기지 않아 마침내 심질(心疾)이 되어 비록 왕비는 들이기는 하였으나 별궁(別宮)에 두고 별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대언(代言) 김흥경(金興慶)이 총혜(聰慧)하고 잘 알랑거려 용양(龍陽)의 총애가 있어 항상 금중(禁中)에서 왕을 모시고 있으면서 권세가 날로 성해갔는데, 이때에 이르러 경대부(卿大夫)의 자제로 나이 젊고 용모가 아름다운 자를 뽑아 소속시켜 흥경으로 총괄하게 하고 자제위라 불렀다. 또 두리속고치(頭裡束古赤)를 설치하여 역시 미남자로 채워서는 부담없이 마구 굴어 군신 사이의 예가 없었다. 이에 홍륜(洪倫)ㆍ한안(韓安)ㆍ권진(權瑨)ㆍ홍관(洪寬)ㆍ노선(盧瑄) 등이 모두 총애를 받아 항상 왕을 침실에서 모시게 하여 마음대로 음란하게 놀았으며 상사(賞賜)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계축년 공민왕 22년(명 태조 홍무 6, 1373)
◯2월 북원(北元)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응창(應昌)이 무너진 뒤로는 조정이 북원의 소식을 다시는 알지 못하였다.
【안】 원 순제(元順帝)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혜종(惠宗)이라 시호하고, 태자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이 서니 이가 소종(昭宗)이다.
그런데 3일(을해)에 북원이 파도첩목아(波都帖木兒)ㆍ어산불화(於山不花) 등을 보내왔는데 조서에 이르기를,
“앞서 병란 때문에 북쪽으로 파천(播遷)하였으나 지금 곽확첩목아(廓擴帖木兒)를 재상으로 삼아 중흥을 하려 하는데 왕(王 공민왕)도 세조(世祖)의 손자이니 마땅히 힘을 도와 다시 천하를 진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 원의 사신이 입경(入境)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죽여버리려고 하였으나 군신이 모두 불가함을 고집하였다. 이에 그를 구류(拘留)할 것인가, 방환(放還)시킬 것인가, 체포하여 명의 서울로 보낼 것인가의 세 가지 방책을 놓고 물어 보았더니 군신이 모두 방환시키는 것이 무난하다고 하였다. 사신이 이르자 왕은 눈병이 나서 햇빛을 볼 수 없다고 핑계대고 밤에 그를 만나보고 돌려보냈으니, 대명(大明)을 매우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원의 사신이 돌아간 뒤에 저포(苧布)를 부쳐 바쳤다.
11월 사신을 보내어 명에 입조(入朝)하였다.
밀직부사(密直副使) 주영찬(周英贊)은 하정사(賀正使)로, 판선공(判繕工) 우인열(禹仁烈)은 말 24필과 노새 2필을 바치기 위해 갔는데 거자(擧子) 김잠(金潛)ㆍ송문중(宋文中)ㆍ조신(曹信)이 따라갔으며, 또 손내시(孫內侍)가 죽은 정상에 대해서도 표변(表辨)하려 하였다. 그런데 영광(靈光)의 자은도(慈恩島)지금의 나주(羅州)에 속해 있는데, 주의 서쪽 바다 가운데 있다. 에 이르러 배가 파선하여 영찬ㆍ김잠ㆍ조신은 익사하고 인열과 문중은 되돌아왔다. 그래서 다시 장자온(張子溫)을 영찬 대신에 보내었다. 문중은 회시(會試)에 응시하러 갔으나 시기(試期)에 미치지 못해 되돌려보내며 본국에 탁용(擢用)하도록 명하였다. 영찬의 딸이 일찍이 원에 들어가 있다가 대명(大明)의 군대에 포로가 되었는데, 뽑혀서 궁인(宮人)이 되어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영찬이 자주 사명(使命)에 충당되었다.
■갑인년 공민왕 23년(명 태조 홍무 7, 1374)
○22일(갑신)에 도적이 왕을 침전(寢殿)에서 시해(弑害)하였다.
강녕 대군(江寧大君) 우(禑)가 즉위하였다.
22일 밤에 왕이 몹시 취하여 침전에 있었는데 도적이 칼로 쳐서 시해하여 왕의 뇌수(腦髓)가 벽에 뿌려지자 도적이 소리치기를,
“적이 밖에서 들어왔다.”
하였으나, 위사(衛士)들은 벌벌 떨기만 하고 아무도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으며 재상과 모든 집사(執事)들도 변고를 듣고 한 사람도 오는 자가 없었다. 환자(宦者) 이강달(李剛達)이 먼저 들어가 방에 피가 가득 흘러 있음을 보고나서 속여 말하기를,
“상(上)이 편찮으시다.”
하고는 문을 잠그고 출입을 금하였다. 날이 샐 무렵에 태후(太后)가 변고를 듣고 우(禑)를 데리고 궁(宮) 안으로 들어와서 비밀에 붙이고 발상(發喪)을 하지 않고 백관(百官)의 시위(侍衛)도 평소대로 하였다. 강달이 왕명이라 하여 경복흥(慶復興)ㆍ이인임(李仁任)ㆍ안사기(安師琦)를 불러서 도적을 토멸할 것을 비밀히 의논하였다. 인임은 중 신조(神照)가 항상 금중(禁中)에 있었으므로 그가 심왕(瀋王)의 아들 탈탈첩목아(脫脫帖木兒)와 통모(通謀)해서 난을 일으킨 것이라 의심하고 신조를 옥에 가두었다. 이윽고 최만생(崔萬生)의 옷에 피 흔적이 있음을 보고 그를 잡아 순위부(巡衛府)에 가두고 국문하여 그 진상을 모두 알아냈는데, 만생이 칼로 치고 권진(權瑨)ㆍ홍관(洪寬)ㆍ노선(盧瑄)ㆍ한안(韓安) 등이 어울려 마구 쳐서 시해했던 것이다. 홍륜(洪倫) 등을 체포하여 신문하니 모두 자복(自服)하였다. 홍륜 등은 모두 자제위(子弟衛)로서 항상 금중(禁中)에 입직(入直)하느라 일년 내내 휴가를 얻지 못하여 모두 왕에 대해 원망을 품은 자들이었다. 노선은 끝내 불복하였으나 홍륜 등의 사증(辭證)이 명백하였으므로 그들의 부형(父兄)과 제부(諸父 아버지의 형제), 아들들을 모두 가두었다.
24일(병술)에 보방(寶房)에 왕을 안치하고 비로소 발상하였다.
왕은 재위 23년, 수(壽) 45세, 시호(諡號)는 경효(敬孝)였는데 후에 명(明)에서 공민(恭愍)이라 사시(賜諡)하였다.
이튿날 이인임이 우(禑)를 받들어 즉위시키니 당시 나이 10세였다.
백관(百官)이 거리에 모여 최만생과 홍륜을 차열(車裂)하고 한안ㆍ권진ㆍ홍관ㆍ노선 및 그 아들들을 효수(梟首)하였으며, 가산을 적몰하고 처첩을 관비(官婢)로 삼았다. 홍륜의 아비인 전라순문사(全羅巡問使) 홍사우(洪師禹)와 형인 홍이(洪彛), 한안의 아비인 찬성(贊成) 한방신(韓方信), 노선의 아비인 밀직(密直) 노진(盧稹), 권진의 아비인 밀직부사(密直副使) 권용(權?), 홍관의 아비인 판합문(判閤門) 홍사보(洪師普)도 얼마뒤에 모두 연좌되어 베어졌으며 친속으로 연좌되어 유배된 자도 매우 많았다. 당초에 홍사우가 홍륜이 불초(不肖)함을 일찍이 알고서 왕에게 아뢰기를,
“윤(倫)은 인면 수심(人面獸心)이니 원컨대 궁중에 두지 마십시오.”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홍이도 홍륜의 소위를 미워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함께 베어지니,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생각하여 경상도ㆍ전라도 사람 가운데는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한안의 아우 한열(韓烈)은 형서(刑書 사형 집행 때 죄수 자인서)에 서명하지 않으려 하면서 말하기를,
“내 나이 아홉 살인데 어찌 여기에 가담했겠오?”
하였다가 이윽고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왕명을 어기는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죽음에 나아갔다.
왕은 성품이 본래 엄중하고 동용(動容)이 예(禮)에 맞으며 총명하고 인후하여 민망(民望)이 모두 쏠렸다. 즉위하여서는 온갖 힘을 기울여 선정(善政)에 힘쓰니 중외가 크게 기뻐하며 태평 시대를 기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노국 공주(魯國公主)가 훙서(薨逝)한 뒤로는 지나치게 슬퍼하여 이성(理性)을 잃고 정사를 신돈에게 맡겨 훈신(勳臣)ㆍ현신(賢臣)을 내쫓거나 죽이고, 시기와 횡포를 부리고, 미혹함이 더욱 심해지고, 크게 토목(土木)의 역사를 일으켜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완악한 소년들을 가까이하여 음란하고 더러운 짓을 함부로 하고, 무시로 술주정을 부려 좌우를 구타하고, 상벌을 근거도 없이 하다가 마침내는 화를 입기에 이르렀다. 10월에 현릉(玄陵)에 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