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동사강목 6

청담(靑潭) 2019. 1. 20. 18:41

 

 

동사강목(東史綱目)

안정복(1712-1791)

 

동사강목 제16상

■을묘년 전폐왕 우(前廢王禑) 원년(명(明) 태조(太祖) 홍무(洪武) 8, 1375)

◯춘정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최원(崔源)을 명(明)에 보내어 고애(告哀)하게 하였는데, 최원이 구류되었다.

현릉(玄陵 공민왕(恭愍王)을 말한다)이 시해되고 김의(金義)가 명의 사신을 죽인 뒤부터는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명에 사신을 통하지 못하였다. 대사성(大司成) 정몽주(鄭夢周)가 말하기를,

“먼저 스스로 주저하여 백성들에게 화를 끼쳐서는 안 된다.”

하였고, 전교령(典校令) 박상충(朴尙衷), 사예(司藝) 정도전(鄭道傳)도 그렇게 말하였으나, 시인(時人)들이 모두 명에 가는 것을 꺼렸는데, 최원이 말하기를,

“사직(社稷)이 편해질 수만 있다면 어찌 내 몸 한번 죽는 것을 아끼겠는가?”

하므로, 드디어 최원을 보내어 상사(喪事)를 고하고 시호(諡號)와 왕위의 승습(承襲)을 청하였었다.

■병진년 전폐왕 우 2년(명 태조 홍무 9, 1376)

◯3월 반야(般若)를 임진강에 던졌다.

신돈(辛旽)의 여종인 반야가 몰래 태후궁에 들어가 울부짖으며,

“내가 진실로 주상을 낳았는데 어찌 어머니가 한씨(韓氏)란 말입니까?”

하니, 태후가 내쳐버렸다. 이인임은 반야를 옥에 가두고는 대간과 순위부(巡衛府)에서 서로 다스리게 하였더니, 반야는 새로 창건한 중문(中門)을 가리키며 울부짖기를,

“하늘이 만일 나의 원통함을 안다면 이 문이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후에 문이 저절로 무너지니 사람들은 크게 이상히 생각하였으나 끝내 반야를 임진강에 던지고 말았다. 반야가 국문을 당할 적에 양부(兩府 첨의부(僉議府)와 밀직사(密直司))에서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판결하였는데, 밀직(密直) 권중화(權仲和)는 서연(書筵)에 진강(進講)한다는 핑계로 오지 않자, 김속명이 당리(堂吏)에게 말하기를,

“왕모(王母)가 아직 정해지지 못했으니 빨리 판가름하여 국민들의 의혹을 풀어줘야 하는데 어찌 서연을 한단 말인가?”

하고는 이어 탄식하며 이르기를,

“천하에 아버지를 분변하지 못하는 경우는 혹 있을 수 있지만 자기의 어머니를 분변하지 못한단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때 이인임과 지윤(池奫) 등이 정권을 마음대로 하였는데, 김속명이 강직하여 과감히 말하는 것을 미워해서 사의(司議) 김도(金濤)를 사주하여 김속명이 입으로 할 수 없는 말을 했다고 탄핵한 다음 국문하여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태후가 힘껏 구원하여 마침 내 문의현(文義縣)으로 귀양보냈다.

○ 동10월 사신을 북원(北元)에 보냈다.

북원의 하남왕(河南王) 확확첩목아(擴廓帖木兒)가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글을 전하여 자세히 이해를 말하고 함께 명을 협공할 것을 청했으며, 또 우리의 외교관인 문천식(文天式)을 돌려보냈으므로 조정에서는 마침내 밀직부사(密直副使) 손언(孫彦)을 북원에 보내어 부자가 서로 전위(傳位)하는 의리를 말하고 심왕(瀋王)을 잡아 보낼 것을 청했으며, 또 납합출(納哈出)에게 사신을 보내어 보빙하였더니 납합출이 말하기를,

“우리는 본래 고려와 싸우지 않았는데 백안첩목아왕(伯顔帖木兒王 공민왕을 가리킨다)이 나이 젊은 이장군(李將軍 이성계(李成桂)를 가리킨다)을 보내어 우리를 공격해서 거의 화를 면치 못할 뻔하였다. 이장군은 지금도 무고한가? 용병(用兵)하는 것이 신과 같으니 참으로 천재이다. 장차 너희 나라에서 큰일을 맡을 것이다.”

하였다. 납합출의 누이가 군중에 있다가 태조(太祖)의 신무(神武)한 것을 보고는 마음으로 좋아하여 또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천하에 둘도 없는 사람이다.”

하였다

■정사년 전폐왕 우 3년(명 태조 홍무 10, 1777)

◯춘2월 북원(北元)에서 책명사(冊命使)가 왔다.

비로소 북원의 선광(宣光) 연호를 사용하였다.

동10월 처음으로 화통도감(火桶都監)을 설치하였다.

본국은 화약(火藥)을 연조(煉造)하는 법을 몰랐었다. 공민왕(恭愍王)이 일찍이 명 황제에게 화약과 염초(焰焇)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판사(判事) 최무선(崔茂宣)이 원(元)의 염초공(焰焇工) 이원(李元)과 한마을 사람이었으므로 잘 대우하여 은밀히 그 방법을 물었으며, 가동(家僮)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여 시험하고, 드디어 화통도감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무오년 전폐왕 우 4년(명 태조 홍무 11, 1378)

○3월 사신을 명(明)에 보내어 사례하였다.

제(帝)가 본국인(本國人) 정언(丁彦) 등 3백 58인을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 유번(柳藩)을 보내어 사은(謝恩)하는 예의(禮儀)를 행하게 하고, 판서(判書) 주의(周誼)를 보내어 시호(諡號)와 승습(承襲)을 청하게 하였다.

유번 등이 돌아올 적에 예부(禮部 명 나라 예부이다)가 제의 뜻을 기록하여 보였는데 이러하다.

짐(朕)은 한미한 출신으로 중국의 군주가 되었다. 처음 즉위하여 사방(四方)의 오랑캐에게 비보(飛報)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중국에 임금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통화(通和)하게 하는 데에 불과할 뿐이었는데, 뜻밖에도 고려왕(高麗王) 왕전(王顓)이 신하라 칭하면서 조공(朝貢)을 바쳐왔으니, 이는 힘 때문이 아니요 마음으로 열복(悅服)한 때문이다.

그 왕이 정성을 바친 여러 해 만에, 신하에 의하여 시해(弑害)되었고 시해된 지 또 여러 해 되었다. 그런데 저들이 와서 왕전의 시호를 청하니, 짐의 생각으로는 산과 바다가 멀리 가로막혀 성교(聲敎)로 제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마땅히 저들이 하자는 대로 들어 줄 것이요, 명작(名爵)에 간여할 것이 아니다.

전에 자기들 임금을 시해하고 행인(行人)을 죽였는데, 이제 어찌 법률을 따르고 헌장(憲章)을 지키겠는가? 저들의 일에 간여하지 말라. 조칙(詔勅)대로 시행할지어다.

추7월 정몽주(鄭夢周)가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원 요준이 사신을 보내었으므로 함께 왔다.

원 요준이 주맹인(周孟仁)을 보내었으므로 몽주와 함께 왔다. 몽주가 돌아올 적에 포로되었던 사람 윤명(尹明)ㆍ안세우(安世遇) 등 수백 명을 쇄환(刷還)하고, 또 삼도(三島)의 침략을 금하게 하였다.

왜인이 오래도록 칭송하고 사모하여 마지않았는데, 뒤에 몽주가 졸(卒)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절에 가 재(齋)를 올리면서 명복을 비는 자까지 있었다.

몽주는 돌아와서 여러 재상(宰相)과 재물을 내어 포로된 백성의 몸값으로 주고 데려오기를 모의하고 편지를 써서 윤명에게 주어 보냈는데, 적의 괴수(魁首)가 편지의 내용이 매우 간측(懇惻)함을 보고서는 포로 1백여 인을 돌려보냈다.

이부터 윤명이 갈 때마다 반드시 포로된 백성을 데리고 돌아왔다.

○ 북원(北元)의 사신(使臣)이 왔다.

사신이 와서 자기들의 임금 두질구첩목아(豆叱仇帖木兒)가 즉위하였다고 하니, 우가 병을 핑계하고 맞이하지 않자 사신이 강요하므로, 드디어 행성(行省)으로 나아가 맞았다.

■경신년 전폐왕 우 6년(명 태조 홍무 13, 1380)

◯8월 해도 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와 심덕부(沈德符)가 왜적을 진포(鎭浦)에서 크게 깨뜨렸다.

나세와 심덕부가 최무선(崔茂宣)과 더불어 전함 1백여 척으로 적을 추격하여 나포하였다. 당시 왜적 5백여 척이 진포(鎭浦)지금의 서천군(舒川郡) 남쪽 26리에 있다. 어귀에 들어가 해안에 상륙하여 주군(州郡)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恣行)하니, 시체가 산과 들에 널렸다. 나세 등이 진포에 이르러 최무선이 제작한 화통(火筩)과 화포(火砲)를 사용하여 적선 30여 척을 불태우고 그 괴수 손시랄(孫時剌)을 죽이니 정이오(鄭以吾)의 《화약고기(火藥庫記)》에서 보충 화염(火焰)이 하늘을 찌르고 배를 지키고 있던 도적들은 거의 다 불에 타 죽었다.

도적들은 포로로 잡은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모조리 죽여서 지나는 곳마다 피가 시냇물처럼 흘렀고, 3백 30여 명만이 도망하여 왔다. 〈죽음을 면하고 달아난〉 적들은 옥주(沃州)로 들어가 이산(利山)지금은 옥천(沃川)에 속해 있다. 과 영동현(永同縣)을 불태우니, 김사혁(金斯革)이 잔적(殘賊)을 추격하여 임천(林川)에서 패배시켰다.

9월 우리 태조가 운봉(雲峰)에서 왜적을 크게 깨뜨리고 그들의 우두머리 장수를 베었다.

왜적이 상주로부터 와서 경산(京山)을 거쳐 사근역(沙斤驛)지금의 함양(咸陽) 동쪽 13리에 있다. 에 주둔하자 삼도원수(三道元帥) 배극렴(裵克廉)ㆍ지용기(池湧奇)ㆍ정지(鄭地) 등 아홉 장수가 역 동쪽 3리 지점에서 싸워 패전하였다. 박수경(朴修敬)ㆍ배언(裵彦) 두 원수는 전사하였으며, 죽은 사졸(士卒)도 5백여 인이나 되어 냇물이 모두 붉은 빛으로 되니 피내[血溪]라고들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보충왜적의 형세가 더욱 치성(熾盛)해져 드디어 함양(咸陽)을 도륙(屠戮)하고 남원산성(南原山城) 지금의 교룡산성(蛟龍山城)인 듯하다 을 진공(進攻)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여 운봉을 불지르고 인월역(引月驛)지금의 운봉 동쪽 16리에 있다. 에 주둔하여 북상(北上)한다고 떠들어대니 중외(中外)가 크게 놀랐다.

태조가 변안열 등과 함께 남원에 이르기까지 1천여 리 사이에 시체가 잇대었었다. 배극렴 등이 태조를 와서 뵈매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조가 그 이튿날 싸우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도적이 험한 곳에 의지하고 있으니 그들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서 싸우느니만 못하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려 하면서 도적을 만나지 못할까 걱정이거늘, 이제 적을 만나고서도 치지 않는 것이 가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여러 장수들의 부서(部署)를 정하고는 이튿날 새벽 대중에게 맹세하고, 동쪽으로 운봉(雲峰)을 넘어 적과 30리쯤 떨어진 황산(荒山)운봉 동쪽 16리에 있다. 에 이르러 정산봉(鼎山峰)황산 동북쪽 산기슭이다. 에 올랐다. 길 오른편에 험한 지름길이 있어 태조가 그 험한 길로 들어가자, 적의 기병(奇兵)이 갑자기 튀어나오므로 태조가 대우전(大羽箭) 20발을 쏘고 계속해서 유엽전(柳葉箭) 50발을 쏘아, 쏠 적마다 그 얼굴을 명중시키니, 활시위를 당길 때마다 맞아 죽지 않은 자가 없었다.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다 죽일 때까지 싸워 섬멸하였다. 도적이 산에 웅거하면서 굳게 지키므로, 태조가 군사를 지휘하여 요해처(要害處)에 나누어 지키게 하고, 사람을 시켜 도전하게 하니, 적이 죽을 힘을 다해 돌진해 왔다. 태조가 즉시 8명을 죽이니 적이 감히 앞으로 나오지를 못하였다.

나이가 15~16세 된 적장이 하나 있는데 용모가 단아(端雅) 수려(秀麗)하고 날래고 용맹스러운데 백마(白馬)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내달으니, 감히 대적하는 자가 없어 우리 군사는 아기발도(阿只拔都) 아기는 방언으로 어린아이를 일컫는 말이고, 발도(拔都)는 몽고말로 용감하다는 말이다. 라고 하면서 다투어 피하였다. 태조가 그의 용맹하고 날램을 아껴서 생포(生捕)하도록 명하니, 편장(偏將) 이두란(李豆蘭)이 말하기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이 상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 자는 목과 얼굴에 모두 갑주(甲冑)를 써서 쏠 틈이 없으므로 태조가 그의 투구를 쏘아 깨뜨리고 두란이 쏘아서 죽이니, 이에 적의 예기가 꺾였다. 태조가 몸을 빼어 분발하여 치니, 적의 정예부대는 거의 다 죽었고 적들의 통곡 소리는 1만 마리의 소 울음소리와 같았다. 적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기어오르자, 관군이 승세(勝勢)를 타서 달려 올라가는데 환호성과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몽고 장수 처명(處明)이 태조의 앞에서 힘껏 싸우니 사면의 적이 무너져 드디어 크게 깨뜨렸다. 냇물은 온통 붉게 물들어 7일간이나 그대로였으며, 노획한 말이 1천 6백여 필에 병장기(兵仗器)는 이루 셀 수조차 없었다.

처음에는 적이 아군에 비해 10배나 되던 것이 오직 70여 인만이 지리산(智異山)으로 도망갔다. 태조가 말하기를,

“도적을 완전히 섬멸한 나라는 천하에 없었다.”

하고, 드디어 끝까지 추격하지 않으니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 싸움에 우리 공정왕(恭靖王 정종(定宗)을 말한다)이 수행했는데, 아무리 급할 때에도 태조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적을 꺾어 함몰시킨 공이 많았다. 당시 포로되었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기발도가 이원수(李元帥)의 진(陣) 친 것을 바라보고는 ‘이 군대의 형세 지난날에 비할 바가 아니니 각별히 조심하라.’ 했다.”

하였다.

태조는 가는 곳마다 조금도 약탈하지 않으니 백성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개선하여 돌아오매, 최영(崔瑩)이 백관을 거느리고 천수사(天壽寺)에서 맞이하는데,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삼한(三韓)을 다시 탄생시킨 공이 이 한번 싸움에 있었으니, 공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소.”

하고, 우(禑)가 태조와 변안열(邊安烈) 등에게 각각 금 50냥씩을, 여러 장수들에게는 각각 은 50냥씩을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태조의 위명(威名)이 더욱 드러나, 왜적이 우리 나라 사람을 사로잡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이만호(李萬戶)가 어디에 있는가?”

묻고 감히 가까이 오지를 못하였다.

 

동사강목 제16하

■임술년 전폐왕 우 8년(명 태조 홍무 15, 1382)

◯9월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겼다.

이보다 앞서 서운관(書雲觀)에서 괴변이 자주 나타나고, 야수가 도성 안에 들어오며, 우물물이 끓고, 물고기들이 싸우며, 까마귀떼가 궁중으로 날아든다 해서 도읍을 옮겨 재이(災異)를 피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인임(李仁任)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최영(崔瑩)이 천도(遷都)할 계획을 의정(議定)하자, 대간(臺諫)이 간쟁(諫爭)하였으나 듣지 않고 27일(계유)에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개성(開城)은 이자송(李子松)에게 명하여 유수(留守)하게 하고, 궁녀에게 이장포(理裝布) 5천 필을 내렸다.

■계해년 전폐왕 우 9년(명 태조 홍무 16, 1383

◯2월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하였다.

남경(南京 한양(漢陽)을 말한다)은 모든 일이 초창(草創)이어서 문하부(門下府)가 송경(松京)으로 환도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좇았다.

그때 군민(軍民)들이 포로(暴露 객지에서 야영하며 풍우에 시달림을 말함)에 고달파서, 환도할 때에 그들이 살던 여막(盧幕)을 불태워 다시 오지 않기를 바랐다.

■갑자년 전폐왕 우 10년(명 태조 홍무 17, 1384)

◯윤10월 사신을 명에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때 재용(財用)이 바닥이 나서 다시 진헌반전색(進獻盤纏色)을 두고 칙명(勅命)대로 5년 동안 공물 금(金) 5백 근 중 96근 14냥은 그대로 보내고 나머지는 말 1백 29필로 대신하였으며, 은 5만 냥 중에서 1만 9천 냥은 그대로 보내고 나머지는 말 1백 4필로 대신하였으며, 포(布) 5만 필은 백저포(白苧布)ㆍ흑마포(黑麻布)ㆍ백마포(白麻布)를 숫자대로 보내고, 말 5천 필 중 이미 요동에 보낸 것이 4천 필이므로 이번에 1천 필을 더 보냈다. 이때 사신(使臣)으로 갈 자들이 가기를 꺼려하여 세도가에게 붙어 면하니, 연산군(連山君) 이원굉(李元紘)과 은천군(銀川君) 조림(趙琳)이 산관(散官)으로 있다가 갔다.

■병인년 전폐왕 우 12년(명 태조 홍무 19, 1386)

◯2월 명에 사신을 보내어 청하였다.

정몽주를 보내어 왕의 편복(便服) 및 군신(群臣)의 조복(朝服)과 편복을 청하고, 이어 세공(歲貢)을 견감(蠲減)해 줄 것을 빌었다. 몽주가 자세히 주대(奏對)하여 5년 동안 미납한 공물과 늘려 정한 세공의 상수(常數)를 면제받았다. 제가 칙지(勅旨)를 내리기를,

“나는 초야에서 일어났지만, 왕전(王顓 공민왕을 말한다)이 삼한에 왕 노릇 한 것은 그의 조상이 그의 임금을 시역한 데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4백 67년이 되었다. 이제 나에게 조공을 잘 하므로 나도 성의로 대하였는데, 어찌 공민(恭愍)이 그 조상이 시역한 벌을 받아 시역을 당할 줄 알았으랴? 이는 호환(好還)의 도(道)를 피하기 어려워 시해를 당한 것이다. 시역한 자가 자기의 죄악을 감추려고 우리의 사신을 죽이고, 다시 약속(約束)을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내가 윤허하지 않음은 분수를 지키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래도 청을 그만두지 않으므로 내가 억지로 따랐는데, 1~2년도 못되어 약속을 어기고, 다시 3년이 못되어 약속을 지키고, 또 다시 2년이 되어서는 그것이 어렵다고 호소하는구나.

아, 내가 볼 때 삼한(三韓)은 해내(海內)의 제일 작은 나라가 아니다. 왜 성품이 바르지 못한가? 세공을 둔 것이 어찌 중국이 그것으로 부요하려 한 것이겠느냐? 삼한이 진실한가 거짓된가를 알고자 한 데 불과하다.

이제 세공을 없애고 3년에 한번 조회하되 좋은 말 50필을 바쳐 종산(鍾山) 남쪽의 목마(牧馬)하는 군(郡)에 보태게 하려 하노니, 영원히 서로 보존하여 지키되 이것으로 증험을 삼는다.”

하였다

■무진년 전폐왕 우 14년(명 태조 홍무 21, 1388)

◯춘정월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ㆍ도길부(都吉敷)ㆍ이성림(李成林)ㆍ반복해(潘福海) 등 50여 인과 그 친당(親黨) 1천여 인을 죽이고 이인임(李仁任)을 경산부(京山府)에 안치(安置)하였다.

그때 이인임이 정권을 잡았는데, 영삼사사(領三司事) 임견미, 삼사좌사(三司左使) 염흥방이 나란히 정권을 전횡하였다. 마침 염흥방의 가노(家奴) 이광(李光)이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조반(趙胖)의 백주(白州) 땅을 빼앗았는데, 조반이 애걸하자 염흥방이 그 땅을 돌려 주었다. 이광이 다시 뺏고 능욕하니, 조반이 분을 참지 못하고 수십 명의 기병으로써 그를 베고 그 집을 불지르며, 염흥방에게 고하고자 서울에 달려 들어왔다. 염흥방이 이 소문을 듣고 크게 노하여 조반이 모반한다고 무고하고, 그의 처와 어머니를 잡고, 조반을 순군(巡軍)에서 국문하였다.

염흥방이 그때 상만호(上萬戶)였는데, 만호(萬戶) 도길부ㆍ반복해ㆍ이광보, 위관(委官) 윤진(尹珍)ㆍ강회백(姜淮伯), 대간(臺諫)ㆍ전법(典法)과 더불어 교대로 신문하니, 조반이 말하기를,

“6~7명의 탐욕스러운 재상이 종을 사방에 풀어 놓아 남의 전민(田民)을 빼앗고 백성에게 해를 끼치니 이것이 큰 도적이다. 이제 이광을 벤 것은 국가를 위하고 백성의 해를 제거하기 위함인데, 어찌 모반이라 하느냐?”

하므로, 염흥방이 승복을 받으려고 국문을 참혹하게 하였으나, 조반이 굽히지 않고 욕하고 꾸짖으며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 국적(國賊)을 베고자 한다. 너와 나는 서로 송사(訟事)하는 자인데, 어찌 나를 국문하느냐?”

하였다. 염흥방이 더욱 노하여 사람을 시켜 그 입을 마구 치게 하였다.

수일 후에 우가 최영의 집에 가서 조반의 옥사를 의논하였는데, 이날 조반을 풀어 주도록 명하고 의약(醫藥)을 내리고, 마침내 염흥방을 순군(巡軍)에 내리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명철하시다.”

하였다.

우가 조반의 일곱 살 먹은 아이를 불러 그 아버지의 한 바를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다만 칼을 빼어 시험하면서 말씀하시기를 ‘탐욕스러운 7~8인의 재상을 목 베어 나의 뜻을 시원하게 하고자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자가 반드시 기한(飢寒)에 이르리라.’ 하더이다.”

하였다.

우(禑)가 최영(崔瑩)과 우리 태조(太祖)에게 명하여 군사를 풀어 숙위(宿衛)하게 하고, 임견미와 찬성사 도길부, 우시중 이성림, 찬성사 반복해, 대사헌 염정수(廉庭秀), 지밀직(知密直) 김영진(金永珍), 밀직부사(密直副使) 임치(林㮹) 등을 옥에 내려 죽이고, 아울러 그 부자 형제와 족당(族黨) 등 50여 인을 죽이고, 그의 처와 딸은 관비(官婢)로 삼고, 자손으로서 강보에 있는 자는 모두 임진강(臨津江)에 던졌고, 그 가재(家財)는 적몰하였다.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 등이 백성의 땅을 빼앗은 것을 변핵하여, 안무사(按撫使)를 각 도에 보내서 그의 가신(家臣)과 악한 종을 잡아 죽였는데, 모두 1천여 인이었다.

이존성(李存性)은 이인임의 종손(從孫)인데, 일찍이 서경윤(西京尹)이 되어 많은 치적을 남겼다. 밀직(密直) 임헌(任獻)은 염흥방의 매서(妹婿)인데, 집을 적몰하러 가니 쌀 한 섬의 비축도 없는지라 옥관이 면하여 주려 하였으나 최영이 따르지 않고 아울러 베니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이인임은 오랫동안 나라 권세를 도적질하여 그 지당(支黨)이 뿌리가 얽혔는데, 임견미가 그의 심복이 되어 문신(文臣)을 미워해서 내쫓은 자가 매우 많았다. 염흥방도 내쫓기는 중에 있었는데, 후에 임견미가 염흥방이 세가(世家)의 대족(大族)이라 하여 혼인하기를 청하여서, 임치(林㮹)는 염흥방의 사위가 되었다.

염흥방의 이부형(異父兄) 이성림(李成林)은 시중(侍中)이 되자, 친당(親黨)이 양부(兩府)에 늘어서서 중외의 요직이 사인(私人) 아닌 사람이 없어 권세를 전횡하기를 마음대로 하여, 관작(官爵)을 팔고 남의 밭을 빼앗고 산야(山野)를 점유하였다. 노비가 천백 인으로 무리를 지어 능침(陵寢)ㆍ궁고(宮庫)ㆍ주현(州縣)ㆍ진역(津驛)의 밭을 점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주인을 배반한 노예와 부역(賦役)을 도피한 백성이 모여들어, 염사(廉使)와 수령(守令)도 감히 징발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공사(公私)의 재물이 탕갈되어 중외(中外)가 이를 갈았다.

최영과 우리 태조가 그 소행을 분하게 여겨 동심 협력하여 우(禑)를 인도하여 그들을 없애 버리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여 길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임견미ㆍ염흥방이 주살될 때 이인임이 최영을 찾아 갔는데, 최영이 사절하고 만나 보지 않고 우에게 아뢰기를,

“이인임이 모책(謀策)을 결정하여 대국(大國)을 섬겨 국가를 진정시켰으니, 공(功)이 허물을 덮을 만합니다.”

라고 하여, 그 자제까지 모두 함께 용서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정직한 최공(崔公)이 사정(私情)으로 늙은 도적을 살렸다.”

하였다.

이인임의 아우 이인민(李仁敏)도 역시 악인에게 당부(黨附)하였기 때문에 계림(鷄林)의 봉졸(烽卒)로 귀양갔다.

 

동사강목 제17상

■기사년 후폐왕 창(後廢王昌) 즉위년(6월 즉위)

○폐왕 우(廢王禑)를 높여 상왕(上王)이라 하고, 근비(謹妃) 이씨(李氏)를 높여 왕대비(王大妃)라 하였다.

우(禑)가 가까이하던 제비(諸妃)ㆍ옹주(翁主)를 다 사제(私第)로 돌려보내어 그 공상(供上)을 끊었고, 제비의 아버지 강인유(姜仁裕)ㆍ최천검(崔天儉)ㆍ조영길(趙英吉)ㆍ신아(申雅)ㆍ왕흥(王興) 등을 유배하였다.

○ 이인임(李仁任)이 졸(卒)하였다

8월 전제(田制)를 개정(改定)하였다.

이때 전제가 크게 무너져서 전시과(田柴科)가 퇴폐하여 사전(私田)이 되어, 호강(豪强)이 겸병(兼幷)하고 남의 전토(田土)를 빼앗으매, 태조(太祖)가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과 함께 사전을 없애고 균전제(均田制)를 복구할 것을 의논하였다. 조준이 동렬(同列)과 함께 상소(上疏)하여 극론(極論)하였다

■후폐왕 창(後廢王昌) 원년 11월 이후는 공양왕(恭讓王)(명(明) 태조(太祖) 홍무(洪武) 22, 1389)

◯8월 유구국(琉球國)이 사신(使臣)을 보내어와서 조빙(朝聘)하였다.

유구국은 우리 나라의 동남 바다 가운데에 있고 동으로는 일본(日本)에 가까운데, 예전부터 사신을 교통한 일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 나라의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우리 나라가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그 신하 옥지(玉之)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바쳐 칭신(稱臣)하고, 왜(倭)에게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돌려보내 오고, 방물(方物)인 유황(琉黃)ㆍ소목(蘇木)ㆍ호초(胡椒)ㆍ갑(甲)을 바쳤다. 사신이 순천부(順天府)에 이르니, 도당(都堂)에서는 전대(前代)에 오지 않았었다 하여 그 접대를 유난(留難)하였으나, 창(昌)이 이르기를,

“먼 나라 사람이 조공(朝貢)하러 왔으니, 입경(入京)하게 하여 위로해서 보내는 것이 옳으리라.”

하고, 드디어 판사(判事) 진의귀(陳義貴)를 영접사(迎接使)로 보냈다. 창이 유구에서 바친 소목ㆍ호초를 궁중에서 쓰려 하매, 판사 유백유(柳伯濡)가 간(諫)하기를,

“예전에 충숙왕(忠肅王)께서 젓항아리[醢瓮]를 궁중에 두셨는데, 사신(史臣)이 그것을 써서 전하여,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동사강목 제17하

■기사년 고려 공양왕(恭讓王) 원년(명(明) 태조(太祖) 홍무(洪武) 22, 1389)

◯12월 조민수(曹敏修)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이색 등을 유배하였다.

좌사의(左司議) 오사충(吳思忠), 사인(舍人) 조박(趙璞) 등이 상소하기를,

“이색은 대대로 왕씨를 섬기다가 이인임(李仁任)에게 붙어 신우(辛禑)를 세웠으며, 여러 장수들이 왕씨를 세우자고 건의하였으나 조민수에게 붙어 창(昌)을 세웠고,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왕씨의 왕통을 회복하려 하자 변안열(邊安烈)에게 붙어서 창을 축출하고 우를 맞아들이 다시 왕씨의 제사를 끊으려 하였습니다. 정도(正道)를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에 아첨하고, 거짓을 꾸며 명예를 구하였으니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대통(大統)을 계승하였음에도 그 아들 종학(種學)은 떠들대기를 ‘현릉(玄陵 공민왕(恭愍王)을 말한다)이 이미 우를 강녕군(江寧君)으로 봉하여 부(府)를 세웠고 천자가 봉작(封爵)을 명하였는데 이(李) 태조(太祖)의 구휘(舊諱) 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현릉의 명을 어기고 우리 여흥왕(驪興王 당시 우왕(禑王)이 여흥에 유배되어 있었다)을 폐하였는가.’ 하였습니다. 이제 우(禑) 부자의 죄를 바루지 않고 민심을 안정시키려 하며, 이색 부자의 죄를 바루지 않고 뭇 소인들의 음모를 끊으려 한다면 전하께서 단 하루라도 왕위에 편안히 계실 수 없을 것입니다. 이숭인(李崇仁)ㆍ하륜(河崙)은 전날에는 이인임(李仁任)의 심복이었고 뒤에 와서는 이색의 간계를 좇아 창(昌)의 친조(親朝)를 독려하고 신우를 세우고자 하였으며, 권근(權近)이 성지(聖旨)를 사사로이 뜯어 보고 먼저 이림(李琳)에게 보였으니 모두 소관 사(司)로 하여금 논죄(論罪)하도록 하소서.”

하니, 이에 이색 부자와 이숭인ㆍ하륜ㆍ권근 등을 유배하였고, 조민수는 삼척(三陟)으로 귀양보냈다.

■경오년 공양왕 2년(명 태조 홍무 23, 1390)

◯윤4월 처음으로 무과를 설치하였다.

도당(都堂)에서 아뢰기를,

“문과 무는 어느 한쪽도 폐지할 수 없는 것인데, 본조(本朝)에서는 문과만 뽑고 무과는 뽑지 않았기 때문에 무예(武藝)에 뛰어난 인재가 드뭅니다. 마땅히 인(寅)ㆍ신(申)ㆍ사(巳)ㆍ해(亥)가 되는 해에 무과를 실시하여 시험해 뽑고 합격자에게는 패(牌)를 주어 한결같이 문과의 예에 따르되, 제가(諸家)의 병서(兵書)에 모두 통하고 또 문예에 익숙한 자를 1등으로 3명 뽑고, 무예를 대강 익히고 병서에 통한 자를 2등으로 7명 뽑고, 병서에 통하거나 한 가지 무예에 인숙한 자를 3등으로 23명 뽑는 것을 영원히 변하지 않는 법식(法式)으로 삼으십시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신미년 공양왕 3년(명 태조 홍무 24, 1391)

이색ㆍ우현보 등을 다시 먼 곳으로 유배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이색ㆍ우현보 등을 주살(誅殺)하여, 창(昌)을 세우고 우(禑)를 맞아들이려 한 죄를 정할 것을 청하고, 또 면대해서도 극론하였으며, 대사헌 김사형(金士衡)도 다시 논박하니 왕이 어쩔 수 없어 그대로 좇아 이색을 함창(咸昌)에 유배하고, 이종학(李種學)ㆍ이을진(李乙珍)ㆍ이경도(李庚道) 등을 모두 먼 곳에 유배하였는데, 대간에서 또 번갈아 소장을 올리므로 우현보를 철원(鐵原)에 유배하였다.

정도전을 나주(羅州)에 유배하였다.

성헌과 형조에서 상소하여 정도전을 탄핵하기를,

“정도전은 속으로는 간악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충직한 체하며 국정을 더럽히니 대죄(大罪)로 다스리소서.”

하였는데, 왕이 공신이라고 하여 용서해 주고 그의 고향인 봉화현(奉化縣)으로 방축(放逐)하였다. 다시 논핵하기를,

“정도전은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명백하지 못한데도 외람되이 중한 관직을 받아 조정을 혼란시켰으니, 고신(告身) 및 공신녹권(功臣錄券)을 거두글 그의 죄를 밝히소서.”

하였으므로 드디어 나주로 이배(移配)하였는데, 김주(金湊) 등이 또 그 아들 전농정(典農正) 진(津)과 종부부령(宗簿副令) 담(澹)을 논박하자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었다. 밀직부사(密直副使) 남은(南誾)이 힘을 다했으나 구할 수 없자 병을 핑계하고 면직하였고, 도전은 얼마 있다가 봉화로 양이(量移)되었다.

■임신년 공양왕 4년(명태조 홍무 25, 1392)

◯하4월 조준(趙浚)과 정도전을 먼 곳에 유배하였다.

정몽주는,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하여 중외(中外)의 인심이 쏠리는 것을 보고, 또 조준과 정도전이 추대할 계획을 갖고 있음을 알고는 은밀히 주선하였다. 5죄(罪)를 확정하여 탄핵과 논박을 억제하고, 옛 인물들을 등용시켰으며, 또 김진양(金震陽) 등을 끌어다가 간직(諫職)에 앉혀 놓고 기회를 타서 도모하려 하였다. 이때 마침 세자가 돌아오게 되자 태조가 황주(黃州)에 나가 맞이하여 해주(海州)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게 되었다. 정몽주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기색으로 대간에게 지시하기를,

“마땅이 이때를 타서 먼저 우익(羽翼)을 제거한 뒤에 도모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수시중(守侍中) 익양백(益陽伯) 정몽주가 졸하였다.

정몽주가 사람을 나누어보내 조준ㆍ정도전 등을 죽이려 하였는데 그때에 태조는 돌아오다가 벽란도(碧瀾渡)에 이르렀다. 태종이 말을 달려가 고하기를,

“정몽주가 기어코 우리 집안을 함몰시키려 합니다.”

하고, 굳이 청하여 병을 무릅쓰고 밤새 돌아와 3일(갑인) 미명(未明)에 입경(入京)하여 조준 등의 억울함을 서너 차례나 왕복하면서 변론하였으나 왕은 들어 주지 않았다. 이에 태종이 근심에 싸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뵈며 말하기를,

“백성의 이해를 결정할 때에는 바로 지금입니다. 왕후(王侯)ㆍ장상(將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습니까?”

하니, 태종은 즉시 태조의 집으로 돌아와 휘하 장사들을 모아놓고 의논하였는데, 태조의 형인 원계(元桂)의 사위 변중량(卞仲良)이 이 사실을 정몽주에게 누설하였다. 이때 정몽주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걱정하여 밥을 먹지 않은 지가 사흘이나 되었다. 정몽주는 태조의 집을 방문하여 사태의 변화를 살폈는데, 이에 태종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하고 이두란(李豆蘭)을 시켜 격살(擊殺)하도록 하니 이두란이 말하기를,

“우리 공(公 이성계를 말한다)이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는가?”

하므로 태종은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에게 말하니, 조영규가 하겠다 말하고 해주목사(海州牧使) 조무(趙茂), 중랑장(中郞將) 고려(高呂), 판사(判事) 이부(李敷) 등과 길목에 잠복해 있었다. 정몽주가 돌아오는데 동개[櫜鞬 활과 화살을 넣어 등에 지고 다니는 물건]를 멘 무부(武夫)가 스치며 지나가자 정몽주가 얼굴빛을 변하며 수행하는 녹사(錄事)에게 말하기를,

“너는 뒤에 처지는 것이 좋겠다.”

하고, 재삼 꾸짖으며 못 따라오게 하였으나 듣지 않고 말하기를,

“소인은 대감을 수행하는 몸인데 어찌 돌아가겠습니까?”

하였다. 선죽교(善竹橋)에 이르자 조영규가 쳤으나 맞지 않았다. 정몽주가 꾸짖으며 말을 채찍질해 달아나자 조영규가 따라와 말머리를 쳐서 말이 꺼꾸러지고 정몽주가 땅에 떨어지니 고려가 쳐서 죽이므로 녹사도 끌어안고 같이 죽었다. 이날이 바로 4월 4일(을묘)로 정몽주의 당시 나이는 56세이었다.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고이(考異)

■무강왕(武康王)

◯무강왕(武康王)은 고려 사람들이 혜종(惠宗 이름은 무(武))의 휘(諱)를 피하여 모두 호강왕(虎康王)이라 일컬었는데, 《고려사》 지리지에,

금마군(金馬郡)에 후조선(後朝鮮) 무강왕비릉(武康王妃陵)이 있어 세속에서 영통대왕릉(永通大王陵)이라 부르는데, 일설에는 백제(百濟)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이라 한다.”

하고, 《여지승람》에,

“익산(益山)의 옛이름이 금마(金馬)요, 영통(永通)은 곧 서동(薯童)이 변한 것이다.”

하였다. 《여지승람》에 또,

“무강왕이 선화 부인(善花夫人)과 더불어 미륵사(彌勒寺)를 지으니,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백공(百平)을 보내 도왔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여기에 이른 무강(武康)은 곧 무왕(武王)의 오류이다. 백제(百濟)의 무왕이 진평왕과 동시이고 또 선화 부인이 있었으니, 《여지승람》은 이를 상고하지 않은 것이다. 《삼국유사》에,

“백제 무왕의 이름은 서동이고 비는 선화 부인으로 신라 진평왕의 딸이다.”

한 것이 이것이다. 《고려사》 충숙왕 36년에,

“도적이 마한조(馬韓祖) 호강왕릉(虎康王陵)을 도굴하였다.”

하였고, 또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여지승람》에 말한 무강왕은 곧 기준이다.”

하여, 두 설 역시 근거가 있기 때문에 그를 따른다.

■마한(馬韓)의 멸망

○서씨 거정(徐氏居正)이,

“기준(箕準)이 금마(金馬)에 도읍을 옮겨 사군(四郡)ㆍ이부(二府)를 거쳐 온조(溫祚) 무진년(8)에 망하였으니 또한 1백 40여 년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마한은 역년(歷年) 2백 2년에 망하였다. 서씨가 문장은 풍부하나 이것에 대해 고증하지 않았기에 이를 기록하여 그 잘못을 밝힌다.

■백제 무왕(武王)의 선화 부인(善花夫人)

《삼국유사》에, 무왕(武王)의 비(妃) 선화 부인(善花夫人)은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의 딸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왕의 이름은 서동(薯童)이다.’ 하였는데,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 많고 본사(本史)에도 나오지 않으므로 취하지 않는다. 위의 무강왕(武康王) 조에 보인다.

■안시(安市)의 싸움 고구려 보장왕 4년(645)

◯세상이 전하는 말에, 당(唐) 태종(太宗)이 안시(安市)를 치다가 유시(流矢)에 눈을 맞았다고 하는데, 중국 역사가 이를 숨기고 바로 쓰지 않은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겠으나, 우리 나라 역사에도 보이는 곳이 없다. 이목은(李牧隱)의 정관음(貞觀吟)에,

주머니 속에 든 하나의 물건으로 보았는데 / 謂見囊中一物耳

어찌 화살이 눈에 떨어질 줄 알았으랴 / 那知玄花落白羽

하였다. 목은이 당세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니 그 말이 망령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태종이 요동(遼東)으로부터 돌아와 악성 종기를 앓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유시(流矢)에 상처입은 것을 역사에서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안시성주(安市城主)의 성명 고구려 보장왕 4년(645)

◯성주(城主)의 성명(姓名)이 동사(東史)에는 전하지 않는데, 태종(太宗)의 동정기(東征記)에 양만춘(梁萬春)이라 하였다. 이것이 김하담(金荷譚)의 《파적록(破寂錄)》에서 나왔는데, 《경세서보편(經世書補編)》에도 그러하다. 상고하건대 혹은 추정국(鄒定國)이라 하였다.

 

동사강목 부록 상권 중

 

동사강목 부록 상권 하

■진국삼한설(辰國三韓說)

◯고초(古初)에 한남(漢南)의 땅이 삼한(三韓)이었으니, 한인(韓人)이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한(韓)이라 일컬었다. 또 진국(辰國)이라 일컫는 것은 진(秦)을 피하여 온 사람들이 모두 진이 통일한 뒤에 왔기 때문에 진(辰)으로 통칭하였다. 진(辰)이 진(秦)으로 된 것은 《좌전(左傳)》에 이른 진영(辰嬴)에 증거할 수 있다. 《한서(漢書)》에,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보고자 하였으나 우거(右渠)가 막고 통행시키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는 기씨(箕氏)의 마한(馬韓)을 가리킨다. 범사(范史《후한서(後漢書)》를 가리킨다)에서 처음으로 삼한전(三韓傳)을 만들어,

“삼한은 대개 78개국인데 그 중 마한이 가장 컸다. 그들은 마한종(馬韓種)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아 삼한의 땅에 군림하였는데, 조선왕(朝鮮王) 준(準)이 위만(衛滿)에 패하고 바다에 들어와 마한을 쳐 파한 다음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이 뒤에 멸망하자 한인이 다시 스스로 진왕(辰王)이 되었다.”

한 이외의 진국은 보지 못하였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의하면 마한의 벼슬에 중랑장(中郞將)ㆍ도위(都尉) 등의 명칭이 있으니 이는 모두 진(秦) 나라 벼슬이다. 이것으로 더욱 진국(辰國)이 진(秦)임을 믿을 수 있다. 이른바 진한(辰韓)은 곧 별개의 부족이요, 78개 국은 모두 한인이 와서 분치(分治)한 것이 아니다. 대개 강토를 갈라 나누어서 제각기 영웅인 체하며 어른 노릇을 하다가, 한인이 이르러 그 형세가 커지자 모두 거기에 귀복(歸服)하여 한(韓)이라 명칭하였으니 대개 한의 칭호는 이처럼 아정(雅正)하여 애매한 태고 적의 칭호와는 같지 않다. 대개 삼진(三晉)의 한(韓)이 진(秦)을 피하여 동(東)으로 와서 나라를 세우고

이름한 것이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삼한(三韓) 후설(後說)

◯진한(辰韓)은 신라(新羅)가 되고, 변한(弁韓)은 신라에 항복하였으며, 시조(始祖) 19년마한(馬韓)은 멸망하여 백제(百濟)에 흡수되었다. 삼한(三韓)이 이에 다 멸망하였는데, 신라 탈해왕(脫解王) 5년(61)에 마한의 장수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들어 항복하였으니, 마한이 망한 해와의 상거는 53년이다. 이로 보면 《후한서(後漢書)》에 이른바 왕 준(準)이 뒤에 멸망하고 마한 사람이 다시 스스로 서서 진왕(辰王)이 되었다는 말이 옳은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한 안제(漢安帝) 건광(建光) 원년(121)에 고구려(高句麗)와 마한이 현도(玄菟)를 포위하고 연광(廷光) 원년(122)에 또 고구려ㆍ마한이 요동(遼東)을 침략하였다.”

하였는데,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에 인용해 쓰면서 논하기를,

“마한(馬韓)이 이미 멸망하였는데, 멸망했다가 다시 일어났는가?”

하였다. 우리 나라 사서에 삼한(三韓)의 시종이 없기 때문에 김씨(金氏)는 상고할 데가 없었으므로 이처럼 의심나는 말을 하였다.

■삼국(三國)이 처음 일어나다

삼국이 일어나기 전에 한수(漢水) 이남은 삼한(三韓)의 78개 국이 있었고, 북방 역시 낙랑군(樂浪郡)ㆍ부여(扶餘)ㆍ옥저(沃沮)ㆍ예맥(濊貊)ㆍ비류(沸流)ㆍ황룡(黃龍)ㆍ행인(荇人)ㆍ개마(蓋馬)ㆍ구다(句茶) 등의 나라가 있었다.

신라(新羅)는 한 선제(漢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B.C. 57)에 일어났고, 고구려(高句麗)는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 갑진(B.C. 37)에 일어났고, 백제(百濟)는 성제(成帝)홍가(鴻嘉) 3년 계묘(B.C. 18)에 일어났다. 저 세 임금은 애초 일토일민(一土一民)의 바탕도 없이 혹은 추대(推戴)로 임금이 되거나 난을 피해 도망하였다가 나라를 세우게 되어, 불과 40년 내에 같이 나라를 세워 문득 솥발의 형세를 이루었는데, 앞에 이른바 거의 1백에 가까운 나라는 하나도 근거가 없이 일어났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

《후한서(後漢書)》에는,

“삼한 78개 국에 백제가 그 하나이다.”

하였고, 《북사(北史)에는,

“신라는 진한(辰韓)의 유종(遺種)이니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진한 12개 국에 신라가 그 하나이다.”

하였으며,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의 현도군(玄菟郡) 조에 대해 반씨(班氏)가 스스로 주내기를,

“무제(武帝) 원봉(元封) 4년(B.C. 107)에 설치하였다. 고구려는 왕망(王莽)이 하구려(下句麗)라 하였다.”

하였으니, 그 나라는 대개 한 무제(漢武帝) 전에 있었다. 무제(武帝)가 조선(朝鮮)을 평정하니 그 병위(兵威)로 말미암아 동ㆍ북의 작은 오랑캐들은 모두 분열되어 있는 군현(郡縣)의 틈에 끼어 있었다. 고구려가 있던 곳으로 현도(玄菟)의 군치(郡治)를 만들고 이어 현(縣)을 만듦으로써 그 부락(部落)은 남쪽 땅으로 옮겨갔다가 뒤에 점점 강대해진 것이다. 《후한서》ㆍ《북사(北史)》ㆍ《통전(通典)》의 고구현고(高句縣考)에 모두 한결같이 자세하니, 이 말에 의하면 삼국의 명칭이 모두 한 무제 이전에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증빙할 만한 문헌(文獻)이 없어 후인들의 의혹만 일으킬 뿐이다.

 

사강목 부록 하권

■단군강역고(檀君疆域考)

○단군의 강역은 상고할 수 없지만, 기자(箕子)가 단씨(檀氏)를 대신하여 왕 노릇하였는데 그 제봉(提封 제후(諸侯)의 봉지(封地))의 반이 곧 요지(遼地)였으니, 단군의 시대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고기(古記)》에,

“북부여(北夫餘)는 단군의 후손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부여는 요동 북쪽 1천여 리에 있으니, 아마 단씨 세대가 쇠하자 자손이 북으로 옮기고 옛 강역이 이내 기자의 봉지에 흡수된 것이리라.

《고려사》 지리지(地理志)에,

“마니산(摩尼山)의 참성단(塹城壇)은 세속에서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단이다.’ 하고, 전등산(傳燈山)은 일명 삼랑성(三郞城)인데, 세속에서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은 것이다.’ 고 전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그 남쪽은 또한 한수(漢水)로 한계를 해야 할 것이다.

■태백산고(太伯山考)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태백산(太伯山)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지금의 영변부(寧邊府)에 있다. 이다.”

하였는데, 《고려사》 지리지와 《여지승람(輿地勝覽)》은 모두 그 설을 따랐다. 태백산이 묘향으로 변한 것은 그 어느 시대에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나라 모든 산 이름은 대부분 중들이 지었으니 묘향이란 이름 또한 불가의 문자이리라.

이목은(李牧隱 목은은 이색(李穡)의 호)의 묘향산기(妙香山記)에,

“산은 압록강(鴨綠江) 남쪽에 있는데, 요지(遼地)와 경계가 되고 장백산(長白山)의 분맥(分脉)이다. 그 산에는 향나무가 많다.”

하였다. 그렇다면 묘향산이란 이름은 향나무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리라.

단군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에 하강하였고 단(檀)은 바로 향나무인 까닭에 후인이 그 임금을 단군이라 칭하고, 그 산을 묘향이라 부른 것이 아닐까? 《삼국사기》 최치원전(崔致遠傳)에 있는 태사(太師)에게 올린 장(狀)에,

“고구려의 잔민(殘民)이 북쪽 태백산 아래에 의거하고 국호를 발해(渤海)라 했다.”

하였다. 여기서 말한 태백산은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을 가리킨 것이요, 위에 말한 장백산이 바로 그것인데 단군이 하강하였던 지역이다.

■낙랑고(樂浪考)

◯《급총주서(汲冢周書)》에서 낙랑을 양이(良夷)로 삼았으니, 곧 조선(朝鮮)을 가리킨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위씨(衛氏)를 멸하고 옛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한서》 지리지에,

낙랑군치(樂浪郡治)는 조선현(朝鮮縣)이다.”

하였는데, 그 주에,

우거(右渠)가 도읍한 곳을 군치로 삼았다.”

하였고, 응소(應劭)는,

낙랑은 옛 조선국(朝鮮國)이다.”

하였고, 《통전(通典)》에도,

평양성(平壤城)은 곧 한(漢)의 낙랑군 왕검성(王儉城)이다.

하였다. 지금 평양을 낙랑이라고 칭하니 그 유래가 오래다.

■예고(濊考)

◯《후한서》에서 비로소 예(濊)에 대한 전(傳)을 두었는데, 《후한서》에 의하면, 예(濊)는 북쪽은 고구려ㆍ옥저와 접하고, 남쪽은 진한과 접하고,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낙랑에 이르는데, 본시 조선의 땅이다. 원삭(元朔) 원년에 예의 임금 남려(南閭)가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인구 28만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에 가서 내속(內屬)하니, 무제(武帝)가 그 땅을 창해군(滄海郡)으로 삼았다가 수년 만에 이를 혁파하였다. 원봉(元封) 3년에 조선을 멸하고 사군(四郡)을 나누어 두었다. 소제(昭帝)시원(始元) 5년에 단단대령(單單大嶺) 이동의 옥저(添沮)ㆍ예(濊)ㆍ맥(貊)을 다 낙랑에 소속시키고, 낙랑 7현(縣)을 나누어서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어 다스렸다 하고,

광무(光武) 건무(建武) 6년에 도위(都尉)를 없애고 결국 영동(嶺東)의 땅을 떼어내서 그 땅에는 모두 그 우두머리를 봉해 현후(縣侯)로 삼은 다음 세시(歲時)에 조알(朝謁)하게 했다 한다.

그리고 예는 뒤에 고구려에 붙었더니 조위(曹魏) 정시(正始) 6년에 불내(不耐) 등과 함께 위(魏)에 항복했다 하였고, 이 뒤로는 예가 중국 역사책에 나타나지 않는데, 《삼국사기》 김인문전(金仁問傳)에,

“당 고종(唐高宗)이 ‘지금 고구려가 그 지세(地勢)의 험고(險固)를 믿고 예ㆍ맥과 함께 악한 짓을 같이한다.’ 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그 추장[酋帥]은 오히려 남아 있었던가?

■맥고(貊考)

◯맥(貊)도 동이(東夷)의 옛 나라이다. 《주관(周官)》의 맥예(貊隸)에 대한 주에,

“동북 오랑캐를 정벌해서 노획한 것이다.”

하고, 또,

“직방씨(職方氏)는 구이(九夷)와 구맥(九貊)을 관장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서〉 정지(鄭志)는 조상(趙商)의 물음에 답하기를,

“구맥(九貊)은 곧 구이(九夷)이다.”

하고, 《이아(爾雅)》의 주에는,

“예맥(濊貊)은 오적(五狄)의 하나이다.”

하고, 《맹자(孟子)》에,

“백규(白圭)가 ‘세(稅)를 거둘 때 20분의 1을 거두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고 묻자, 맹자는 ‘그대의 세법은 맥(貊)에서나 하는 세법일세. 맥에는 성곽(城郭)ㆍ궁실(宮室)ㆍ종묘(宗廟)나 제사지내는 예절이 없고, 제후(諸侯)에게 폐백(幣帛)과 음식 대접하는 일이 없으며, 백관(百官)ㆍ유사(有司)가 없다. 그러므로 20분의 1을 거두어도 충분하다.’ 했다.”

하였는데, 그 집주(集註)에,

“맥은 북방 이적(夷狄)의 나라이다.”

하고, 《공양전(公羊傳)》에는,

“10분의 1은 천하에서 중정(中正)한 세법이다. 10분의 1보다 많으면 대걸(大桀)이나 소걸(小桀)이요, 10분의 1보다 적으면 대맥(大貊)이나 소맥(小貊)이다.”

하였다. 맥이 경전(經傳)의 글에 섞여 나온 것이 이와 같으니, 그 유래가 아마 오랜 모양이다. 《한서》 고제(高帝) 4년에,

“북맥(北貊)과 연(燕) 사람이 효기(梟騎 강한 기병(騎兵))를 보내와 한(漢)을 도왔다.”

하고, 《후한서》에,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옥저 땅을 현도군으로 삼았는데, 소제(昭帝)가 이맥(夷貊)이 침략한다고 하여 현도군을 고구려로 옮기고 단단대령(單單大嶺) 이동의 옥저ㆍ예ㆍ맥을 다 낙랑(樂浪)에 소속시켰더니, 뒤에 경토(境土)가 너무 광원(曠遠)하다는 이유로 다시 영동(嶺東) 7현(縣)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였는데, 광무(光武) 건무(建武) 6년에 도위를 없애고 결국 영동 땅을 떼어내서 그 땅에 모두 그들의 괴수를 봉하여 현후(縣侯)로 삼고 세시(歲時)에 조알(朝謁)하게 하였다.”

하고, 또,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 고구려 태조왕 때이다 에 맥이 고구려ㆍ예를 따라 현도를 침범하였다. 건광(建光) 원년에 유주 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이 새(塞)를 나가서 예ㆍ맥의 괴수를 쳐 베었다. 고구려가 마한과 예ㆍ맥을 거느리고 현도를 침범하였다.”

하고, 신라기에,

“유리왕(儒理王) 17년에 화려(華麗)와 불내(不耐)가 북쪽 지경을 침범하매 맥국(貊國)의 괴수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맞아 격파하니,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19년에 맥국의 괴수가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하였는데, 이는 바로 한 광무 건무(建武) 때이다.

맥국은 아마 나라는 작고 군사는 강한데 예에 붙여서 고구려에 소속된 것이리라. 그 강역은 상고할 수가 없으나, 《삼국사기》에는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고구려의 동남쪽과 예의 서쪽이 옛날 맥의 땅이다.’ 한 것을 인용하였으니, 《고려사》 지리지에,

“교주도(交州道)는 본시 맥의 땅이고, 춘주(春州)는 맥국이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삼국유사》에도,

“춘주는 옛날 우수주(牛首州)이니, 옛날의 맥국이다.”

하였고, 《여지지(輿地志)》에는,

“맥국의 옛날 도읍은 지금의 춘천부(春川府) 북쪽 13리 소양강(昭陽江) 북쪽에 있다.”

하였다.

■분야고(分野考)

◯《한서》 지리지에,

“연지(燕地)는 미(尾 별이름)ㆍ기(箕) 분야(分野)이다. 곧 석목(析木 : 별이름)의 성좌(星座)이다. 낙랑과 현도도 마땅히 그에 속한다.”

하고, 《진서(晋書)》 천문지에,

“발해는 기(箕)의 1도(度)에 해당하고, 낙랑은 기의 3도에 해당하고, 현도는 기의 6도에 해당한다.”

하였다. 이러므로 후인들이 우리 나라를 기의 분야에 해당시킨다. 일찍이 스승에게 들었는데, 다음과 같다.

기자(箕子)의 봉지(封地)는 남기(南箕 성좌(星座) 이름. 남방 7수(宿)의 하나)의 땅에 있다.

홍범(洪範)에 설명한 것은 곧 낙서(洛書)를 펴서 만든 것이다.

낙서의 위치는 이(二)와 팔(八)이 그 위치가 바뀌었다.

【안】 음양(陰陽)의 수는 자(子)ㆍ오(午)에서 시작한다. 양수(陽數)는 자(子)에서 시작하여 바로 세어가기 때문에 일(一)이 감(坎)에, 이(二)가 간(艮)에, 삼(三)이 진(震)에, 사(四)가 손(巽)에 위치하고, 음수(陰數)는 오(午)에서 시작하여 역으로 세어가기 때문에 구(九)가 이(離)에, 팔(八)이 곤(坤)에, 칠(七)이 태(兌)에, 육(六)이 건(乾)에 위치한다. 지금 낙서의 수는 이가 곤에, 팔이 간에 위치했기 때문에 위치가 바뀌었다 한 것이다. 이와 팔이 위치가 바뀌었다 한 것은 이오사(二五事)의 숙(肅)ㆍ예(乂)ㆍ철(哲)ㆍ모(謀)ㆍ성(聖)이 팔서징(八庶徵)의 우(雨)ㆍ양(暘)ㆍ욱(燠)ㆍ한(寒)ㆍ풍(風)과 서로 대응하니, 이것은 하늘과 사람이 감응하는 이치이다.

곤(坤)과 간(艮)이 마주 대하여 위로 은하(銀河)에 응한다. 은하는 본래 도는 것인데, 지금 중국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다만 간(艮)에서부터 곤(坤)에 이르기까지일 뿐이다. 간(艮)은 기(箕)ㆍ미(尾)의 성좌에 해당한다.

지금 압록강 이동의 물은 모두 간방(艮方)에서 곤방(坤方)으로 흘러 홍범의 글과 꼭 맞으니, 그 일은 마치 귀신이 도운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는 기(箕)의 분야에 해당하니 천문ㆍ지리가 이처럼 꼭 맞다.

《한서》 지리지에 또,

“조선은 바다 가운데 있으니 월(越)의 상(象)이요, 북방(北方)에 있으니 호(胡)의 상이다.”

하였으니, 월의 상이 있기 때문에 또한 두(斗)의 분야로 해당시킨다. 당(唐)의 일행(一行)은,

“기(箕)와 남두(南斗)가 서로 가까우니 요수(遼水)의 양지쪽이 된다. 조선 삼한의 땅은 모두 오(吳)ㆍ월(越) 동쪽에 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지금의 삼남(三南)이 곧 옛 삼한 땅이니, 오ㆍ월과 서로 마주 대하였다. 그렇다면 한수(漢水) 남쪽에서 바다에 이르기까지는 마땅히 두(斗)의 분야로 정해야 할 것이다.

지금 만국전도경위선(萬國全圖經緯線)으로 우리 나라 전도(全圖)를 그리면, 이적도이북(離赤道以北) 37도(度)의 기처(起處), 이복도이동(離福島以東) 1백 63도 1백 50리(里)가 바로 경도(京都)한성부(漢城府) 본 위치이다.

경도의 서단(西端)인 황해도 풍천부(豐川府)의 이복도 1백 61도 89리는 북으로 여진(女眞)의 백도눌(白都訥) 동쪽 지경에 닿고, 동단(東端)인 경상도 영해부(寧海府) 〈이복도〉 1백 65도 1백 90리는 북으로 여진의 흑룡강(黑龍江) 동쪽 지경에 닿는데, 〈서단에서 동단까지가〉 4도 1도는 2백 50리이다. 1백 2리가 된다.

남단(南端)인 전라도 해남현(海南縣)북신출지(北辰出地) 31도 2백 44리는 서쪽으로 중국 절강성 북쪽 지경에 닿고, 또 해남현에서 바다를 건너면 제주도 남쪽 지경에 닿는데, 바로 그곳의 북신출지 27도 1백 97리는 서쪽으로 중국 복건성(福建省) 남쪽 지경에 닿고, 북단(北端)인 함경도 온성부(穩城府) 북신출지 44도 91리는 서쪽으로 여진의 길림(吉林) 북쪽 지경에 닿는데, (남단에서 북단까지가) 16도 1백 58리가 된다.

경도(京都)는 산동성(山東省)과 위(緯)가 같으면서 조금 북쪽으로 치우치고 길림 땅과 경(經)이 같다. 대저 위광(緯廣)은 여진과 대략 같으나 좁고, 경장(經長)은 중국과 대략 같으나 짧다.

《천관서(天官書)》로 상고하면, 함경ㆍ평안 2도 및 황해ㆍ강원 2도의 북쪽 지경은 중국 순천부(順天府)와 위가 같으니, 마땅히 기(箕)ㆍ미(尾)의 분야에 속해야 하고, 경기도 및 황해ㆍ강원 2도의 남쪽, 충청ㆍ경상 2도의 북쪽 지경은 중국 산동성(山東省)과 위가 같으니 마땅히 허(虛)ㆍ위(危)의 분야에 속해야 하고, 전라도 및 경상ㆍ충청 2도의 남쪽 지경은 중국 강남성(江南省)과 위가 같으니 마땅히 두(斗)의 분야에 속해야 하고, 제주는 중국 복건성(福建省)과 위가 같으니 마땅히 우(牛)ㆍ여(女)의 분야에 속해야 한다. 그림을 상고하면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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