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명의록(정조)

청담(靑潭) 2019. 1. 24. 03:56


명의록[明義錄]


조선 시대 정조가 왕세손(王世孫)으로 있을 때, 그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반대하던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을 사사(賜死)하게 된 전말을 기록한 책. 정조 원년(1777)에 김치인(金致仁) 등에게 명하여 편찬케 하였음.

※정조(1752-1800) 정후겸(1749-1776) 홍국영(1748-1781)


▣명의록 서

◯병신년(1776, 정조 즉위년) 12월 26일에 승지에게 명하여 찬집(纂輯)하는 제신(諸臣)에게 다음과 같이 써서 내리게 하셨다.

“책을 만드는 데에는 자연 바꾸지 못할 범례(凡例)가 있으니 결코 이리저리 뒤섞어서 근엄한 사체(事體)를 잃어서는 안 된다. 일을 서술하는 글로써 윤음(綸音)과 함께 기록하고 역사를 짓는 법으로써 일기(日記)와 함께 편집한다면, 이는 도감(都監)의 의궤(儀軌)나 각사(各司)의 등록(謄錄)과 동일한 규례가 될 뿐일 것이다. 만일 위의 범례를 써서 권수(卷首)와 권1, 권2를 나누면 어제(御製) 부분과 찬집 부분이 대략 구별되는 뜻이 있고, 함께 명의록(明義錄)이라 이름 붙인다면 어제 부분과 찬집 부분이 또 각기 편집되는 혐의가 없을 것이니, 책을 만드는 사체와 책을 만드는 범례가 모두 마땅하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연석(筵席)에서 나온 서로 다른 의논을 모두 취하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 경들의 뜻은 어떤지 모르겠다.”

신들은 한결같이 성상의 전교대로 편차(編次)하되, 그동안 찬집청(纂輯廳)에 내리신 전교(傳敎) 및 도승지 홍국영(洪國榮)의 상소(上疏)도 품지(稟旨)하여 덧붙여 기록하고 이어 이 전교를 목록 아래에 실어서 보는 자들로 하여금 편(編)을 나누고 이름을 지어 붙이신 성의(聖意)를 알게 하려 한다.


▣명의록 권수

■존현각일기 상 (尊賢閣日記 上 ) 을미년(1775, 영조 51)

◯2월 8일 어떤 사람이 봉서(封書) 한 통을 내가 거처하는 존현각(尊賢閣) 마루 위에 던졌는데, 중관이 척리(戚里)의 봉서로 알고 가져와 나에게 고하였다. 내가 괴이하게 여겨 뜯어보니, 곧 익명서(匿名書)였다. 봉서에 말한 내용은 모두가 망측하고 흉패(凶悖)하였다. 이 각(閣)은 내가 강독(講讀)하는 곳으로 바깥사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닌데도 갑자기 이렇게 익명서를 던져 넣는 변고가 일어나니 너무 염려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 즈음 또 수문(守門)하는 중관이 봉서 한 통을 주워 들였는데, 곧 언문(諺文)으로 된 익명서였다. 그 내용은 앞의 익명서보다 더 심하였는데, 그 가운데 또 “반드시 언근을 찾아내고 싶다면 대전(大殿)에 고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날 포도청으로 하여금 익명서를 던져 넣은 사람을 찾아 체포하게 하였다.

2월 11일

○ 포도청이 익명서를 던져 넣은 사람인 김중득(金重得)과 하익룡(河翼龍)을 체포하여 두 죄수를 추문(推問)하였는데, 모두 하나하나 자백하였다. 그 추안(推案)이 포도청에 있다. 김중득이란 자는 본래 장수(匠手)로서 대궐 및 여러 궁가(宮家)에 출입하며 궁인(宮人)과 중관 중에 사귀어 놓지 않은 자가 없었고 성품도 사나워서 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익으로 꾀고 힘을 내세워 이렇게 시켰던 것이다. 하익룡이란 자는 곧 홍인한(洪麟漢 1722-1776)의 집안사람인데, 병조의 서리(書吏)로서 항상 대궐 안에 있었기 때문에 나를 원망하는 무리들과 결탁하여 모아 들여서 이렇게 망측한 일을 벌였다.

미행한다는 말은 이미 일어난 곳이 있기 때문에 끝까지 캐내어 다스리지는 못하였으나, 익명서의 경우는 비록 귀근에게서 나온 것이긴 해도 만고에 없는 변괴(變怪)이니 상에게 아뢰어 극률(極律)로 처단해도 안 될 것이 없었다. 화완으로서도 오히려 감히 막고 방해하지 못하였는데, 홍인한이 이때에 내국(內局)에서 틈을 타 나를 보고 말하기를, “이 무슨 큰일이라고 상에게 번거롭게 아뢸 것까지 있겠습니까.” 하고 반복하여 달래고 협박하여 끝까지 캐내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나도 그 위세가 두려워 거스르지 못해 마침내 끝까지 핵심을 캐내지 못하고 다만 포도청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포도청에서는 강도(强盜)의 형률 이외에 다른 율문(律文)이 없기 때문에 강도의 형률만을 적용하여 형조(刑曹)로 이관하여 종〔奴〕으로 삼도록 하였다.

5월 3일

○ 홍인한은 성품과 행실이 본래 어그러지고 사나워 인륜이 있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가정에서도 실로 금수와 같은 행실이 있었으니, 제 형을 길에 오가는 사람 정도로 여겨 따로 당류(黨類)를 모아 제멋대로 권세를 팔았다. 한유(韓鍮)의 일이 나온 뒤로 일문(一門)이 모두 청의(淸議)에 용납받지 못하였는데, 감히 중한 데 의탁하여 진출할 빌미를 만들려고 하여 북촌(北村)의 흉도(凶徒)들과 깊이 맺어 사람들에게 떠들어 대기를, “우리 집안은 동궁의 외가(外家)이다. 진실로 터럭만큼이라도 우리 집안에 불리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이는 동궁에게 불리하게 하는 자이다.” 하였다. 또 정후겸(鄭厚謙)과 깊이 맺어 한편으로는 당류를 원조해 줄 사람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권세를 부릴 바탕으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기이한 보배와 재화를 계속해서 실어다 바치고 심지어 그 아우로 하여금 혼인을 언약하게 하기에 이르러서는 극에 달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나는 한 몸뿐이라 저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감히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머리를 숙여 매우 애써 가며 명을 들었으니, 그 당류가 한마디 말을 하면 나는 “옳다” 하고 한 가지 일을 행하면 나는 “좋다” 하였다. 잡고 놓으며 주고 빼앗는 것이 전적으로 저들에게 달려 있었으니, 내가 두려워 겁을 내며 의심스럽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홍인한이 또 정후겸과 함께 내간(內間)에서 떠들어 대기를, “동궁이 외롭고 위태로우니 외가를 후히 대우하지 않으면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하였다. 윤양후(尹養厚)와 윤태연(尹泰淵)의 무리가 또 따라서 꾀여 염치도 식견도 없는 무리들에게 소개해서 세력이 이루어지고 위엄이 서며 뿌리가 서리고 줄기가 굳어지니, 나를 저희들 손 안의 물건으로 여긴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내 본마음은 실로 하늘이 부여해 주신 데 힘입어 환히 밝아 혹하지 않음이 있었다. 그래서 깊이 미워하며 크게 통분해하는 것이 혹 말이나 안색에 드러났으니, 저들이 도리어 흉한 모의를 계속하며 역절(逆節)을 행하게 되면서도 뉘우칠 줄 몰랐던 것은 또한 이 때문이다.

6월 10일

○ 이 무리는 상을 사사로이 만날 때마다 조정 신하 가운데 서로 친한 자는 반드시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하면서 친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여지없이 헐뜯어 그 사람이 어진지 불초한지를 막론하고 오직 친한지 소원한지만을 보았기 때문에 내가 항상 매우 통탄스럽게 여겼다. 겸사서(홍국영 : 1748-1781)가 계사년(1773, 영조 49) 여름에 한림(翰林)으로서 집경당(集慶堂)에 입시하였기 때문에 내가 시좌(侍坐)할 때마다 보니,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풍모가 청명하여 이미 그가 길한 사람임을 알았지만 오히려 속마음이 어떤지는 알지 못하였다. 그 뒤 상께서 크게 후대하신 실상이 전부터 부리던 신하보다 못하지 않으셨다.

하루는 홍인한의 집안사람이 사사로운 글을 올려, “홍국영은 본래 이름도 없고 또 우리 집안과는 왕래를 하지 않으니 훗날 춘방(春坊) 관원이 되더라도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또 “그 숙질(叔姪)이 우리 집안과 본래 사이가 좋지 않으니 저하께서 미리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심히 의심하여 속으로 “비록 저들 집안과는 친하지 않다 하더라도 어찌 미리 나로 하여금 친근하게 대하지 말라고까지 하는가. 일이 너무 괴이하다.” 하였다.

그 뒤 겸사서가 과연 설서(說書)로서 계속 춘방에 있게 되어 그 말하는 것을 계속 주시해 보았는데, 일언반구도 실로 저들 집안의 일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었다. 공공연히 몰래 남을 해쳐서 훗날의 진로를 막은 것이 또한 흉하고도 교활하였으니, 근래 저들 무리의 흉모(凶謀)로 보면 그 정상(情狀)을 더욱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날 이런 말을 겸사서에게 하고, 이어 기록한다.

7월 5일

○ 정후겸의 죄는 진실로 이른바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본래 성품이 간교(奸巧)하고 요악(妖惡)하여 천만 가지 죄악이 한 몸에 다 갖춰져 있는데, 무엇보다도 임금을 무시하는 뜻과 상을 업신여기는 마음은 나이 어렸을 적부터 본래 온축한 것이 오래되었다. 그런데 성상의 안목은 위대하시다. 정후겸이 상을 사사로이 만나 뵐 때마다 몸을 구부리지 않았고 출입할 때에는 신발 끄는 소리가 탁탁 나서 전혀 삼가고 두려워하는 뜻이 없었으니, 상이 화완에게 이르시기를, “신발 소리가 어쩌면 그리도 거만한가.” 하셨다. 비록 한때 웃자고 한 말씀이셨지만, 이후로 정후겸이 나를 대할 때마다 말하기를, “옛날에는 신발 끄는 소리를 내는 것이 임금을 섬기는 예였다. 성상께서 예절에 대해 굽어 살피지 못하심이 한스럽다.” 하고, 또 “저하께서는 반드시 《의례(儀禮)》를 읽는 것이 좋습니다.” 하고, 또 자신이 《의례》의 공부에 힘을 쏟고 있다고 자랑하였다. 이것만도 너무나 무엄한 일인데, 이뿐만이 아니다. 그 나머지 스스로 높은 체하고 스스로 자랑하는 이와 같은 일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7월 10일

정후겸(1649-1776)이 나에게 말하기를,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백익(伯益). 아버지는 정석달(鄭錫達)이며, 일성위(日城尉)정치달(鄭致達)에게 입양되었다. 본래 인천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서인 출신(庶人出身)이었으나 영조의 서녀(庶女) 화완옹주(和緩翁主: 정치달의 처)의 양자가 되면서부터 궁중에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었다.

영조의 총애를 받아 16세로 장원봉사(掌苑奉事)가 되고, 1767년(영조 43) 수찬에 올랐다. 이어 부교리·지평을 역임하고 1768년 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개성부유수를 거쳐 호조참의·호조참판·공조참판을 지냈다.

성격이 매우 교활하고 간사하였으며, 영조의 총애를 바탕으로 당시 세도가였던 홍인한(洪麟漢)과 더불어 국정을 좌우하였다. 1775년 세손(世孫: 정조)이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되자 화완옹주·홍인한 등과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며, 동궁에 사인을 비밀리에 보내어 세자의 언동을 살피게 하였다.

또한 한편으로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세손의 비행을 조작하고 심상운(沈翔雲)을 시켜 세손을 보호하는 홍국영(洪國榮)을 탄핵하는 등 세손을 모해하는 데 광분하였다.

이듬해 정조가 즉위하자 군신들이 그를 주살할 것을 요청, 드디어 경원에 유배되어 천극(栫棘: 조선시대 유배된 중죄인을 가둔 가옥 둘레에 가시울타리를 쳐서 외출하지 못하게 하였음.)되었다가 곧 이어 사사되었다.

“근래에 궁관을 대부분 잘 선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홍상간(洪相簡) 같은 사람은 본래 박식한 사람인데 어찌 오래도록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여, 내가 이르기를,

“이것은 전관의 일이니, 내 알 바 아니다.”

하였다. 그 뒤에 홍인한이 또 말하기를,

“홍국영이 오래도록 체차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홍상간 같은 무리가 춘방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홍국영을 한번 체차하도록 저하께서는 어찌 하령(下令)하지 않으십니까? 신 또한 그에게 언급하여 체차되어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체차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말들이 매우 많으니, 모두가 이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저하께서 놓아주지 않으신다면 좋지 않은 일이 필시 많을 것입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체차되고 체차되지 않는 것은 그의 생각에 달려 있는 것이니, 내 어찌 그 거취를 억지로 다그칠 수 있겠는가.”

하니, 홍인한이 또 분해하면서 말하기를,

“끝내 춘방에 오래 둘 사람이 아닙니다. 속히 체차하도록 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 홍인한이 안으로 정후겸과 결탁하여 혈당(血黨)이 되고, 또 이른바 계동(桂洞)의 적도들과 급박한 상황에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형세를 이루어 놓았는데, 홍지해는 누구보다 가장 특별한 사이였다. 홍지해를 평안 감사로 삼는 일에 그가 이미 밖에서 최선을 다해 애를 쓰고 또 안으로 들어와서는 말을 퍼뜨리기를, “홍지해는 순결하고 청렴하니 진실로 재상감이다. 살아서는 대관(大官)이 될 만하고 죽어서는 서원(書院)을 세워 줄 만하다.”고 거듭 되풀이하여 말해 낭자하게 전파하였다. 또 나에게 말한 것도 몇 번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부족하게 여겨 다른 한 경로를 통하여 밤낮으로 체결하여 비밀히 뇌물을 바쳐서 반드시 홍지해를 재상으로 삼고야 말려 하였으나, 성상의 명철하심으로 끝내 가하다 하지 않으시어 마침내 계략을 이룰 수 없었으니, 진실로 이른바 생사를 함께하기로 한 사귐이다. 저들이 이른바 아무개는 주벽(主壁)이 되고 아무개는 배향(配享)하자는 말이 참으로 헛된 것이 아니다.


■존현각일기 하 (尊賢閣日記 下 ) 을미년(1775, 영조 51)

◯11월 27일 이때 흉도들이 심복을 널리 심어 놓아 밤낮으로 엿보고 살펴 나의 동정 하나하나를 살피고 언행 하나하나를 모두 탐지해 위협할 거리로 삼았는데, 화완(옹주)은 안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심하였다. 나는 글로 적은 것은 비록 한때 읊조린 시작(詩作)이라도 혹 소매 속에 넣어 두었으니, 책상 위에 놓아두면 반드시 틈을 봐서 찾아내 본 뒤에 정후겸에게 전하여 이로써 부언의 단서를 삼고 또 공갈할 거리로 삼았다. 그래서 사소하게 글을 짓는 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일기(日記)에 기록하는 것은 더욱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간신히 기억해 내어 일찍이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대개 이렇게 핍박당하는 상황을 후세에 전하여 사람마다 다 알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11월 내가 옷을 벗고 잠자지 못한 지 몇 달째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고 스스로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위로 성명이 계시니 오히려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그러나 흉적이 곁에서 살피는 것이 날로 심해지니, 겉으로 얼핏 보기에는 위태롭게 핍박하는 꾀는 있어도 위태롭게 핍박하는 형상은 없는 듯하나 사실은 크게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대체로 홍인한은 나에게 외척(外戚)이 되고 정후겸은 나에게 의친(懿親)이 되니, 속사정을 모르는 바깥사람들이 어찌 이 일이 이와 같은 줄 알겠는가. 지혜가 있는 자라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무엇인가 하면, 내가 잠덕(潛德)하는 동궁에 있으면서 비록 잠덕하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본래 비호하여 숨겨 주며 혹 어질다는 소문이 드러나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할 텐데 저 흉도들은 비호하여 숨겨 주지 않을 뿐더러 천부당만부당한 기기괴괴한 부언과 거짓말을 날마다 지어내어 세상 사람들을 속여 혹하게 만드니, 이것은 이미 길 가는 사람도 다 알 수 있는 심보이다.

그런데 이 뿐만이 아니다. 들어와서 위협하는 것이 모두가 경악할 만하고 괴이하게 여길 일들인데, 나가서 이리저리 퍼뜨리는 것은 또 지극히 간사하고 흉악한 말들이다. 또 따라서 공갈하여 ‘남촌(南村) 사람이 저궁(儲宮)을 위태롭게 만들려고 한다.’고 하고, 짐독(鴆毒)을 쓸 것이라느니 자객(刺客)을 보낼 것이라느니 하며 낭자하게 말한다. 남촌 사람이 나에게 본래 은덕으로 여기는 것도 원망하는 것도 없으며 저도 조선의 신하인데 어찌 이와 같이 할 염려가 있겠는가.

흉도들의 뜻은 알기 어렵지 않다. 이로써 나를 협박하고 나를 농락하는 것은 내가 저들의 논의를 들어주지 않을까 두려워해서인데, 하나라도 혹 흉도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저들이 품고 있는 뜻이 바로 저들이 이야기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흉적들의 꾀가 참으로 심하도다. 만약 흉도들의 이런 말이 없었다면 내가 저들이 마음을 먹고 꾀를 내는 것이 이처럼 흉악한지를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진실로 이른바 너무 기교를 부리려다 도리어 형편없게 된 꼴이다.

정후겸은 더욱 심하니,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말로 나를 업신여기는 모습은 눈 먼 이에게 보게 하고 귀 먹은 이에게 듣게 해도 결코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을 것이다. 또 나와 가까운 자는 한 궁관뿐인데, 반드시 먼저 제거해 버리려고 못하는 짓 없이 온갖 방도를 쓴다. 아, 자객을 보낼 것이라느니 짐독을 쓸 것이라느니 하는 저들의 말은 바로 저들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말한 바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이미 흉도를 없앨 위엄이 없으니, 장차 가만히 앉아 흉적들에게 곤경을 당하게 생겼다. 이 어찌 편히 밥 먹고 잠잘 수 있는 때이겠는가.

더구나 근심에 우려가 뒤섞여 스스로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내가 하루는 한 궁관에게 이르기를, ‘흉도가 내 몸에 손을 대고자 한다면 그 해가 먼저 궁관에게 미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내가 더욱 잠도 자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한다. 더구나 한 번 장지항(張志恒)이 자객을 사서 들여보냈다는 말이 성행하고 어떤 사람이 궁중에서 괴이한 짓을 한 뒤부터는 저들의 괴이한 말이 날로 심해지고 있으니, 실로 이 때문에 내가 옷을 벗고 잠자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도 반드시 잠자고 밥 먹는 사이에도 조심해야 한다.’ 하였다. 이때의 광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털이 쭈뼛 서고 몸에 소름이 돋게 하니, 옛날에도 이와 같은 때가 있었겠는가. 성상의 감식(鑑識)이 매우 밝아 일마다 비호해 주지 않으신다면 앞으로의 일은 나도 실로 모를 일이다.”

하였다.

○ 12월 흉도들이 틈을 엿보던 끝에 서명선의 상소가 나오게 되었으니, 흉도들은 이를 계기로 의리를 모호하게 만들고 사부(士夫)를 일망타진하려는 꾀를 부리게 되었다. 이날 전교가 또 아침 진료 때에 내렸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수천 수백 마디의 말씀이 글자마다 귀신을 울릴 만하였다. 끝에 또 이르시기를,

우러러 저 하늘에 묻노니, 83세 된 조선의 한 임금이 대신을 믿으리까, 이목(耳目)을 믿으리까. 오늘의 우리나라는 대신의 나라이다. 우리 한림(翰林)으로 하여금 크게 쓰게 하고 특별히 쓰게 하였는데, 불러 주고 쓰는 일이 끝나자 문지방을 두드리며 비분강개할 따름이다.”

하셨다. 이어 즉시 대내로 돌아오셔서 아침 수라를 드실 때에 내 손을 잡고 하교하시기를,

너는 이제 마음을 놓아라. 내 손에 아직 권위와 기강이 쥐어져 있으니, 저 대신 중에 누구 할 것 없이 어찌 어려워할 것이 있겠는가.”

하셨다. 아침 진료 때 전교하신 바가 자못 많고 수응을 조금 오래 하신 탓에 겨우 이 하교를 내리시고는 담후가 막혀 아침 수라를 들지 못하셨다. 성상께서는 오히려 입시한 신하들이 아직 물러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전교를 불러 주며 쓰도록 하시니, 나는 어수(御手)를 잡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때 성상의 환후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흉도들의 흉론(凶論)이 치성하였던 것인데, 성상께서 이처럼 계속 편찮으신 중에도 담후가 조금 가라앉으실 때면 말씀에 오히려 엄정하고 특출하신 뜻이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간악한 무리들의 계략이 급박하였지만 몰래 일으키려는 계략을 오히려 감히 빠르게 이루지 못하였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날 기무가 많이 적체되었으나 내가 또한 감히 “안에서 수고를 대신하라.”는 하교를 받들지 못하였으니, 더욱 너무도 송구스럽고 염려스러웠다.


■병신년(1776, 영조 52)

◯2월 28일 홍인한이 정승이 된 뒤로 제 마음에 있는 흉한 의도를 멋대로 행한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나, 한 가지 일로만 말하면, 한 번 정승이 된 뒤로 하나의 술수와 계책으로 삼은 것은 오직 협박과 공갈로 한 세상을 제어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입시할 때에는 반드시 상의 환후가 조금 심해지신 때를 틈타서 매번 하고자 하는 일을 아뢴다. 심지어 담후(痰候)로 편찮아 신하들이 입시하였는지도 굽어 살필 수 없는 때에 몇 마디 말씀을 드리는 양 하고는 자기 스스로 “상께서 하교하여 윤허하셨다.”고까지 하였다.


■어제 윤음(御製綸音)

◯...아, 저군과 조정 신하 사이에도 임금과 신하의 분수가 있는 법이니, 조정 신하로서 저군에게 무례한 것을 신하로서의 예절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궁관을 몰아내려다가 도리어 저군을 핍박하는 죄로 귀결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이른바 교묘하게 굴려다가 도리어 형편없게 된 꼴이다. 청정을 하기 전에는 애당초 보고 듣는 사람들을 주목하게 할 만한 정령(政令)이나 일이 없었는데도 저들은 감히 부언을 지어내 세상을 의혹스럽게 만들 거리로 삼았고, 청정을 하고 난 뒤에는 분명하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릴 만한 시행과 조치가 있었는데도 저들은 도리어 참언(讖言)을 지어내 남을 해칠 계략으로 삼았다. ...


명의록 제1권

■도승지 홍국영(洪國榮)의 상소

◯...아,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전하께서 외롭고 위태로우신 날에 실로 떳떳한 양심을 지닌 자라면 누군들 피눈물을 흘리고 이를 갈며 역적들과는 함께 살지 않으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신이 요행히 기회를 타서 요속(僚屬)으로 있게 되어 남이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남이 듣지 못한 것을 듣게 되었을 뿐이었으니, 무슨 조그마한 공이라도 있어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을 구하는 데 보탬이 되었겠습니까. 밤이나 낮이나 노심초사하며 목숨을 바쳐 임금을 보위하는 것으로는 신이 정민시(鄭民始)만 못하며, 맨손으로 기강을 수립하여 나라밖에 모르는 충정으로는 신이 서명선(徐命善)만 못합니다. 이는 모두 성명께서도 굽어 살피시는 바이며 신이 우러러 아뢴 바입니다. ...

■3월 13일 갑신(甲申), 홍문관 응교 홍국영(洪國榮)을 발탁하여 승정원 동부승지로 삼았다.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하늘이 총명한 임금을 탄생시켜 이에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을 때는 또한 한두 명의 보필하는 사람이 있어 그 좌우가 되어 서로 도와 함께 이루니, 그 사람은 반드시 공정하고 충성스러우면서도 정직하며, 침착하고 치밀하면서도 기민하여 대사를 맡기고 중임을 부탁할 만한 법이다. 또 반드시 심한 위태로움을 건너고 지극한 어려움에 처해 보도록 하여 그 지혜를 더해 주고 그 공로를 드러나게 해서 그가 이로운 그릇임을 분별하게 해 주니, 대개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잘 맞았을 때는 예로부터 이미 그러하였다.

아, 지난날 우리 전하께서 저궁에 계실 때 그 외롭고 위태롭기 그지없었던 형세가 과연 어떠하였던가. 저 흉적들이 위복(威福)을 훔쳐 농락하고 부언(浮言)을 크게 떠벌려 밖으로 한 세상을 의혹케 하고, 몰래 궁내(宮內)의 후원을 통하고 성세(聲勢)를 빙자하여 안으로 온갖 방법으로 위협하여, 궁관을 제거하려는 꾀와 대리청정을 번복하려는 계략을 오랫동안 빚어내어 차례로 이루려 하였으니, 동궁이 침식을 편하게 하지 못하신 지 몇 달이었는지 모른다. 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할 때에 전후좌우가 모두 역당(逆黨)을 편드는 사람들이었으되, 한마음으로 보호하여 한 몸으로 국본(國本)의 안위(安危)를 떠맡은 자는 오직 홍국영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기미에 응하고 변고에 대처하는 즈음에 빨리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느리게 할 수도 없었으니, 빠르게 하면 그 변고를 격발하기 쉽고 느리게 하면 그 기회를 놓치기 쉬웠다. 이에 두루 총괄하고 보호하여 위로는 말씀과 기색에 드러날 것을 경계하여 자취를 감추어 훗날을 도모하는 도리를 다하도록 하였고 아래로는 형세와 그림자가 은미하게 감추어진 데를 살펴 틈을 엿보는 형세를 막았으며, 만금(萬金)을 걸어 그를 죽이도록 하였는데도 눈도 꿈쩍하지 않았고 앞에 앉혀 놓고 떠나도록 타일렀는데도 절개를 더욱 굳게 하였다.

■3월 25일 병신(丙申), 대신과 삼사(三司)가 구대(求對)하여 속히 정후겸(鄭厚謙) 모자의 죄를 바로잡도록 청하였는데, 정후겸을 경원부(慶源府)로 찬배(竄配)하라고 명하였다.

◯○ 이날 사헌부 신하가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기를,

“정후겸은 하늘이 낳은 아주 몹쓸 종자로서 어렸을 때부터 간사함의 구멍이 이미 뚫려 장성하게 되자 화심(禍心)이 점차 싹텄으니, 성사(城社)를 의지하여 구중궁궐에 출몰하면서 일삼은 것은 상의 뜻을 비밀히 엿보는 것이었고, 총애를 믿고 조정을 협박하면서 경영한 것은 나라의 권병(權柄)을 남모르게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장상(將相)을 농락하여 우익(羽翼)으로 삼고 전선(銓選)을 주장하여 그 기세를 이리저리 부려서, 찡그리고 웃는 사이에 상대의 영화와 몰락이 판가름 나며 미워하고 좋아하는 즈음에 상대의 삶과 죽음이 나뉘었습니다. 그 소행을 보면 한 가지도 분수를 범하지 않는 일이 없었고 하루라도 나라를 팔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화완옹주는 진실로 이른바 그 아들에 그 어미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원수로 여기는 바인데도 오래도록 대궐에 있으면서 궁을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 그 안팎으로 선동한 자취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사정과 처지가 전과 달라짐에 따라 갈수록 더욱 의심하고 시기하니 계략을 몰래 이루려고 장차 어떠한 변괴를 일으킬지 알 수 없습니다. 옛날에 주공(周公)도 동생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에 대해 감히 법을 굽히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전하께서는 위로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 억조창생을 거느리고 계시니 어찌 스스로 경솔히 처신하여 환란을 막는 데 소홀히 해서야 되겠습니까. 또한 오늘 당장 대궐에서 내쳐서 일찌감치 감처(勘處)하소서.”

■4월 7일 무신(戊申), 홍인한(洪麟漢)을 여산부(礪山府)로 찬배하도록 명하였다.

◯삼사가 계속해서 홍인한을 원찬하도록 청하고, 대신이 또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하교하기를,

“아, 대행대왕(大行大王)께서 환후를 오랫동안 앓아 몇 년 동안 정섭(靜攝)하신 결과 작년 겨울에 이르러서는 조정 일과 나랏일에 실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염려가 있었다. 그런데 해와 달 같은 밝음으로 종묘사직의 중함을 염려하여, 어전(御前)에서는 수고를 대신하도록 하는 뜻을 보이시고 조정에서는 신하다운 신하가 없다는 탄식을 하셨다. 진실로 옛날의 대신이 이와 같은 시대를 만났다면 어찌 성상의 하교를 기다릴 것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저 홍인한은, 성품은 본래 어리석고 분수를 모르며 학문은 임금 제(帝) 자와 범 호(虎) 자도 구분하기 어려운 정도인데, 그 형의 동생으로서 허물을 말끔히 닦아내 주신 선왕의 은혜를 받아 차례로 벼슬을 옮겨 삼정승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니, 진실로 있는 힘을 다해 보답하여 티끌만큼이라도 갚으려고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권세를 탐하는 것을 묘계(妙計)로 삼고 총애를 파는 것을 능사로 삼아, 세 가지 일을 굳이 알 것이 없다는 말을 쉽사리 입에서 내고도 오히려 두려워할 줄 몰랐다. 그러다가 서명선(徐命善)의 상소가 나오자 도리어 대적하려는 계략만 꾸미고 두려워하며 후회할 방도는 생각지 않았다. 아, 경인년(1770, 영조 46)의 일로 말하더라도, 그 득실을 근심한 바가 채유(蔡攸)가 맥(脈)을 본 일과 다름이 없었다. 군부(君父)와 형제(兄弟) 사이에 처신하는 것도 이와 같았으니,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명의(名義)를 바로잡는 도리에 있어 엄히 처벌해야 할 것이니, 판부사 홍인한을 우선 삭직(削職)하고 여산부에 찬배하라.”


명의록 제2권

■7월 4일 계유(癸酉), 윤음(綸音)을 내려 팔도에 효유(曉諭)하였다. ○ 홍인한과 정후겸을 사사(賜死)하였다.

정후겸은 본래 바닷가 마을의 한미하고 비천한 것이었는데, 아이 적에 화완옹주(和緩翁主)가 데려다가 아들로 삼았다. 성격이 교활하고 조금 재주가 있어 그 어미와 함께 모두 선대왕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선대왕께서는 끝내 사랑한다고 해서 정후겸에게 청요직(淸要職)을 제수하지는 않으시고 또 정후겸에게 망녕되이 사람을 사귀지 말라고 경계하셨으되, 정후겸이 오히려 어미의 형세를 빙자하여 밖으로 권세를 팔았다.

이에 앞서 홍씨가 오랫동안 조정의 권력을 독점하여 조정의 사대부로서 자신들에게 붙좇는 자는 승진시키고 붙좇지 않는 자는 내쫓아 조정의 사대부들이 그리로 쏠려 귀의하였으니, 홍씨 집안에 출입하지 않고도 벼슬자리를 얻은 자는 없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정후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는 아무리 홍씨라도 두려워하여 마침내 홍씨를 섬기는 자들에게 정후겸도 섬기게 하면서 감히 그 사이에 경중(輕重)을 두지 않도록 하였다.

정후겸은 조정 사대부들이 이와 같은 것을 보면서 오히려 세상의 청의(淸議)를 견지하는 자들이 자신을 허여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따금 상소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함으로써 명예를 곡진히 거두어들였다. 또 마음으로 홍씨를 꺼리면서 홍씨를 쳐야 인심을 기쁘게 할 수 있으리라 하여 드러내 놓고 홍씨를 배척하였으니, 이에 지난날 홍씨에게 붙좇지 않았던 자들이 또한 정후겸을 깊이 배척하지 않으려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실정을 아는 사류(士流)들은 더욱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

정후겸은 사류들이 끝내 자신을 허여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는 마침내 다시 전적으로 홍씨에게 뜻을 기울여 더욱 위복(威福)을 펼치며 한 세상을 농락하였다. 이에 대신(大臣) 이하부터 인물을 진퇴시킬 일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정후겸이 가하다고 생각하는지의 여부를 묻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삼가하여 감히 한마디라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정후겸의 뜻이 더욱 교만해져 마침내 온 세상에 다시는 자신과 다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모르는 것은 오직 동궁(東宮)이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가 하는 것이었다. 또 그 평소의 본말과 몰래 행하는 바를 유독 동궁이 다 알까 두려워하여, 달래어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위협하여 감히 조금도 어기지 못하도록 갖가지로 술책을 부렸으나 그 계략이 끝내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그러자 마침내 그 어미와 홍인한 등의 역적들과 더불어 안팎으로 합세하여 역모(逆謀)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사인(私人)을 널리 심어 동궁의 언동을 엿보아 살피게 하고 유언비어를 지어내서 보고 듣는 사람들을 의혹스럽게 만들더니, 끝내는 우익을 베어 없애려는 계략을 드러내 놓고 시험하고 대책을 번복하려는 음모를 몰래 주장하는 등 온갖 방도를 써서, 말을 하고 인사를 하는 즈음에도 다시는 신하로서 자처하지 않았다. 이는 예전 흉역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바이니, 그 죄범을 따져 보면 처형하여 시신을 저잣거리에 놓아두는 법을 시행한다 해도 그 죄에 마땅치 않다. 그런데 성조(聖朝)께서 관대하고 어질어 형률이 사사하는 데서 그쳤으니, 온 나라 신인(神人)의 울분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아, 을미년(1775, 영조 51) 가을 겨울 사이에 선대왕의 환후가 날로 더하시고 대리청정의 의논이 오래도록 결정되지 못하였는데, 유독 정후겸 모자가 빈번히 상의 와내에 출입하니 나라 사람들이 의심하였다. 이때 우리 선대왕의 일월 같은 밝음과 풍정(風霆) 같은 결단이 아니셨다면 나라가 어찌 되었겠는가. 국운(國運)의 영장(靈長)함이 천지와 함께 유구할 것임을 이에 점칠 수 있으니, 정후겸 같은 자 백 명 천 명이 나온다 해도 천명(天命)에야 어찌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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