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미수기언(허목)

청담(靑潭) 2019. 1. 28. 21:52




미수기언(眉叟記言)

허목(1595-1682 : 88세)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 찬성 허자(許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허강(許橿)이고, 아버지는 현감 허교(許喬)이며, 어머니는 정랑 임제(林悌)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

1615년(광해군 7)정언눌(鄭彦訥)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거창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사사하였다. 또한 그의 소개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 2) 광주(廣州)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해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1626년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具氏)의 복상(服喪)문제와 관련해 유신(儒臣) 박지계(朴知誡)가 원종의 추숭론(追崇論)을 제창하자, 동학의 재임(齋任)으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해 예를 혼란시킨다고 유벌(儒罰)을 가하였다.

이에 인조는 그에게 정거(停擧: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못 보게 하던 벌)를 명하였다. 뒤에 벌이 풀렸는데도 과거를 보지 않고 자봉산에 은거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해 영동(嶺東)으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강릉·원주를 거쳐 상주에 이르렀다.

1638년 의령의 모의촌(慕義村)에서 살다가 1641년 다시 사천으로 옮겼다. 그 뒤 창원·칠원(漆原) 등지로 전전하다가 1646년 마침내 경기도 연천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상중에 『경례유찬(經禮類纂)』을 편찬하기 시작해 3년 뒤에는 상례편(喪禮篇)을 완성하였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종9품 56세)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이듬해 내시교관이 된 뒤 조지서별좌(造紙署別坐)·공조좌랑 등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공조정랑(정5품 63세)에 이어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효종을 만나 소를 올려 군덕(君德)과 정폐(政弊)를 논하고 사임을 청하였다. 그 뒤 사복시주부로 옮겼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59년 장령(정4품 65세)이 되어 군덕을 논하는 소를 올렸으며, 또한 당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이 주도하는 북벌정책에 신중할 것을 효종에게 간하는 옥궤명(玉几銘)을 지어 바쳤다. 이어 둔전의 폐단을 논하였다. 그 해 효종이 죽자 소를 올려 상례를 논했고,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경연(經筵)에 출입했고, 다시 장령이 되었다. 그 때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 인조의 繼妃)의 복상기간이 잘못되었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해 정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이를 기해복제라 한다. 당시 송시열(1607-1689) 등 서인(西人)은 『경국대전』에 의거해 맏아들과 중자(衆子)의 구별 없이 조대비는 기년복(朞年服: 1年喪)을 입어야 한다고 건의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은 의례(儀禮) 주소(註疏: 경서 등에 해석을 덧붙인 것)에 의거해 효종이 체이부정(體而不正), 즉 아들이기는 하지만 맏아들이 아닌 서자에 해당된다고 해석해 기년복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고 또 종묘의 제사를 주재해 사실상 맏아들 노릇을 했으니 어머니의 맏아들에 대한 복으로서 자최삼년(齊衰三年)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복제논쟁의 시비로 정계가 소란해지자 왕은 그를 삼척부사로 임명하였다. 여기서 그는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으며, 『척주지(陟州誌)』를 편찬하는 한편, 『정체전중설(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1674년 효종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복제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조정에서는 대공복(大功服)으로 9개월을 정했으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다시 기해복제가 거론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맏아들·중자의 구별 없이 부모는 아들을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고 규정했으나, 며느리의 경우 맏며느리는 기년, 중자처는 대공으로 구별해 규정하였다.

그런데 인선왕후에게 대공복(大功服)을 적용함은 중자처(衆子妻)로 대우함이고, 따라서 효종을 중자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근거는 『경국대전』이 아니라 고례(古禮)의 체이부정설이었다.

이는 효종의 복제와 모순되는 것으로서 새로 즉위한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일로 송시열 등 서인은 몰리게 되고 그의 견해가 받아들여져 대공복을 기년복으로 고치게 되었다.

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의 집권과 더불어 그는 대사헌(종2품 80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직소를 올렸고, 병이 나자 숙종은 어의를 보내어 간호하기까지 하였다. 1675년(숙종 1) 이조참판·비국당상(備局堂上)·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 등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고, 의정부우참찬 겸 성균관제조로 특진하였다.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보지 않고도 유일(遺逸)로서 삼공(三公)에 올랐다. 그 해 덕원(德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를 놓고 영의정 허적(許積 1610-1689)의 의견에 맞서 가혹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남인은 송시열의 처벌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탁남(濁南)과 청남(淸南)으로 갈라졌고, 그는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그 뒤 지덕사(至德祠)의 창건을 건의하고, 체부(體府)·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지패법(紙牌法)·축성(築城) 등을 반대했으며, 그 해 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차자(箚子)를 올려 치병사(治兵事)·조병거(造兵車) 등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그러나 사임을 아무리 청해도 허락하지 않아 성묘를 핑계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대비의 병환소식을 듣고 다시 예궐하였다. 특명으로 기로소당상(耆老所堂上)이 되었는데 음사(蔭仕)로서 기로소에 든 것은 특례였다.

1677년 비변사를 폐지하고 북벌준비를 위해 체부를 설치할 것과 재정보전책으로 호포법(戶布法) 실시를 주장하는 윤휴(尹鑴)에 맞서 그 폐(弊)를 논하고 반대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해, 나라에서 집을 지어주자 은거당(恩居堂)이라 명명하였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해 영의정 허적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렸다.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

그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는 기에서 행하므로, 이기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독특한 도해법(圖解法)으로 해설한 『심학도(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를 지어 후학들을 교육하였다.

사후 1688년 관작이 회복되고, 숙종은 예장(禮葬)의 명령을 내려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했으며, 자손을 등용하도록 하고 문집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림·글씨·문장에 모두 능했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작품으로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동사(東事)』·『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경설(經說)』·『경례유찬(經禮類纂)』·『미수기언(眉叟記言)』이 있다.

1691년 그의 신위(神位)를 봉안하는 사액서원으로 미강서원(嵋江書院)이 마전군(麻田郡)에 세워졌고, 나주의 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미수기언》은 원집ㆍ속집ㆍ습유(拾遺)ㆍ자서(自序)ㆍ자서속편ㆍ별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종 15년(서기 1674년) 이전에 쓴 〈원집〉과 그 이후에 지은 〈속집〉이 합계 67권이고, 따로 〈기언별집〉 26권이 있어서 총 93권 20책이다. 미수(眉叟)는 허목의 호로서, 눈썹이 길어 눈을 덮었으므로 스스로 호를 지어 '미수'(眉叟)라 하였다. 기언(記言)이란 말의 중요함과 위험함을 두렵게 여겨, 말하면 반드시 써서 지키기에 힘쓰는 한편 날마다 반성한다는 뜻이다.

※남인의 영수로 당쟁(예송논쟁)의 주역이며 성리학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바, 개인적으로 송시열과 함께 구태여 존경스러움을 찾기 어려운 인물로 여기는 터이다.


▣기언 서

◯...목(穆)은 오직 이것을 두려워하여 말하면 반드시 써서 날마다 반성하고 힘써 왔다. 내가 쓴 글을 이름하여 《기언(記言)》이라 하였으며, 고인(古人)의 글을 읽기 좋아하여 마음으로 고인의 실마리를 따라가서 날마다 부지런히 하였다. 《기언》의 글은, 육경(六經)으로 근본을 삼고, 예악(禮樂)을 참정하고, 백가(百家)의 변(辯)을 통하여, 분발하고 힘을 다한 지 50년이 되었으니, 그 글이 간명하면서도 갖추었고 늘어놓았으되 엄격하다. 천지의 화육(化育)과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운행(運行), 풍우한서(風雨寒暑)의 왕래(往來), 산천ㆍ초목ㆍ조수(鳥獸)ㆍ오곡(五穀)의 자라나는 것, 인사(人事)의 마땅함과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 사물의 법칙, 시ㆍ서ㆍ육예(六藝)의 가르침, 희로애락애오(喜怒哀樂愛惡) 등 형기(形氣)의 느낌, 제사 지내는 것, 귀신ㆍ요상(妖祥 요망되고 상서로움)ㆍ괴상한 사물 따위의 이상한 것들, 사방(四方)의 풍속과 기후의 다름, 말과 세간(世間) 풍속의 같지 않음, 기사(記事)ㆍ서사(敍事)ㆍ논사(論事)ㆍ답술(答述), 도(道)의 낮고 높음, 세상의 치란(治亂), 현인(賢人)ㆍ열사(烈士)ㆍ정부(貞婦)ㆍ간인(奸人)ㆍ역수(逆豎 도덕에 어그러진 일을 하는 고약한 자)ㆍ암우(暗愚)한 자에 대한 경계 따위를 하나같이 이 글에 포함시켜 고인과 같아지기를 바란다.

정미년(1667, 현종8) 동지(冬至)에 양천(陽川) 미수(眉叟) 허목(許穆) 씀.


▣기언 제1권 원집 상편

문옹(文翁)에게 답함

◯근세(近世) 학자의 폐단은 실천함은 부족하고 의견부터 내세우며, 게다가 지나치게 과격하기까지 하여 경박함이 날로 심하니, 충신(忠信)스럽고 독후(篤厚)한 풍(風)이 크게 옛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옛사람들은 일분(一分)이라도 실제 보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대로 실행하여 지(知)와 행(行)이 서로 드러나게 차이나지 않았습니다. 배우는 데 있어서 힘쓸 것은 먼저 인륜(人倫)과 일용(日用)의 법칙에 대해서 부지런히 힘써서 생각에 조금이라도 미진함이 없게 함입니다. 그런 다음이라야 잘 배웠다고 말할 수 있으니, 성명(性命)의 근본과 천리(天理)의 바른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기언 제3권 원집 상편

■이기(理氣)를 논함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理)는 기에서 행(行)하여지니, 근본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며 쉬지도 않고 어그러지지도 않아, 갔다가 다시 오는 것이다. 드러난 것은 천지의 조화(造化)와 육성(育成)이요 사시(四時)가 차례로 교대하는 것이며, 만물의 시작과 끝이요 인사(人事)의 성쇠(盛衰)인지라, 심은 것을 북돋고 기울어진 것을 넘어뜨리기까지 흥(興)하고 멸(滅)함이 모두 여기에 매여 있다. 이것은 한 번은 가고 한 번은 오는 소장(消長)의 일정한 원칙이다. 형체(形體)가 없는 것은 기(氣)의 근본이요 형체가 있는 것은 기(氣)의 이루어진 것이다. 형체 있는 것은 때로는 생(生)하고 때로는 사(死)하지만, 형체 없는 것은 죽지 않으니, 신명(神明)의 변화가 끝도 없고 시작도 없으며 남기지도 않고 다하지도 않는다. 이(理) 밖에 기(氣)가 없고 기 밖에 이가 없어, 이를 볼 수는 없지만 이가 드러난 것을 미루어 그 까닭을 추구하면 이를 얻을 수 있나니, 죽고 사는 것, 끝남과 시작, 흥하고 멸함, 성(盛)하고 쇠(衰)함이 원리는 한가지이다.

사람이 죽으면 기(氣)가 위쪽으로 퍼져 올라가서 밝게 드러나고, 향기가 위로 올라가 신령(神靈)의 기(氣)가 사람의 정신을 숙연케 하며, 울금향(鬱金香)의 거창주(秬鬯酒)로 강신(降神)하며, 쑥을 서직(黍稷)에 합(合)하여 전(奠)드리며, 성사염임(腥肆焰腍)으로 귀신에게 드리니, 이 모두가 다 기(氣)가 감동하는 것인데, 그 감동하게 하는 것은 이(理)이다.


▣기언 제6권 원집 상편

■고문(古文)을 학생들에게 보여 주다

◯고문은 이미 세상에서 쓰이는 데가 없다. 그래서 오늘날 먼 옛날 육서의 법을 알아보는 자가 매우 드물다. 널리 사방의 장서(藏書)를 뒤져 창힐(蒼頡)ㆍ사주(史籀)의 고문 여러 체를 구하였는데, 그 글씨들이 변형된 점은 같지 않으나 대개 모두 조적(鳥跡)ㆍ육체(六體)를 따랐다. 그 가운데 의문나는 점을 참고할 데가 없었는데, 뒤에 또 풍숙(豐叔)의 금석 고문을 구하였다. 그 책의 내용은 한간문(汗簡文)ㆍ설문(說文)ㆍ연설문(演說文)ㆍ고경(古經)ㆍ석경(石經)ㆍ하서(夏書)ㆍ고사(古史)ㆍ비간총(比干塚)의 석곽문(石槨文)ㆍ화악비(華嶽碑)ㆍ상정(商鼎)ㆍ주이(周彝)ㆍ주반(周盤)ㆍ주이(周匜)ㆍ보(簠)ㆍ궤(簋)의 글씨로부터 주운(籀韻) 고대본과 기양 석고대전(岐陽石鼓大傳)ㆍ절운집자(切韻集字)ㆍ군서고문(群書古文) 등 모두 130종이나 된다. 그 글씨가 아주 예스럽고 아담하며 의젓하고 신비로워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기언 제9권 원집 상편

■화상 자찬[寫影自贊]

형체는 유형이나 정신은 무형 / 貌有形神無形

유형은 그려도 무형은 못 그려 / 其有形者可模無形者不可模

형체가 잡혀야 정신이 온전해져 / 有形者定無形者完

유형한 것 쇠하면 무형한 것도 물러가니 / 有形者衰無形者謝

형체가 다하면 정신도 떠나리 / 有形者盡無形者去

내가 23세 때, 가운데 아우가 17세였는데, 묘한 재주가 있어서 제 형의 화상을 그렸다. 이제 내가 70세 늙은이로 화상을 대하니 딴사람 같으므로 탄식하며 이 글을 쓴다.

갑진년(1664, 현종5) 가을 내가 공암(孔巖)에 있을 때, 책을 뒤지다 이 그림을 찾았는데, 지금은 벌써 이 그림을 그린 지 50년이 되었다. 모습만 시들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일도 변천하여 옛일이 되었으니, 슬픈 노릇이다.

■화상 자찬[寫影自贊]

◯수십 년 전에 휘(徽)가 또 나의 화상을 그렸는데, 비로소 수염이 희어졌으므로 자찬을 쓴다.

청수한 모습에 훤칠한 몸매 / 臞而頎

우묵한 이마에 긴 눈썹 / 凹頂而鬚眉

손에 문 자를 쥐고 발로 정 자를 밟고 / 握文履井

염담하면서도 광대하다 / 恬而煕

손바닥에 문(文) 자가 있고 발바닥에 정(井) 자가 있으므로 이렇게 쓴 것이다.


▣기언 제10권 원집 중편

■《이문충공유권(李文忠公遺卷)》 서(序)

◯상국(相國)의 명성과 공업이 온 세상에 드러나고 사방에 두루 미쳤는데, 그 마음을 찾아보면 바로 한결같음이다. 한결같기 때문에 밝으며, 밝기 때문에 신념을 갖게 되고 신념을 갖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로써 임금을 섬기니 임금이 신뢰하고 이로써 남을 다스리니 남들이 심복하였으며, 이로써 큰 어려움을 물리치고, 이로써 큰 어려움을 처리했다. 부귀(富貴)ㆍ화복(禍福)ㆍ궁액(窮阨)까지도 이 한마음으로 처한 때문에 상국의 덕은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 비록 붕당(朋黨)으로 어수선하던 때였으나 친한 사람과 소원한 사람,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진 상국이라고 말하였다. 광해군이 무도(無道)하여 상국의 충성을 원수로 여겨 어떻게 하면 더욱 멀리 물리칠 수 있을까 하였지만, 그래도 ‘어진 상국’이라고 하였다.

이이첨(李爾瞻)이 상국을 대우함이 융숭하였다 하겠으나, 모비(母妃)를 유폐(幽閉)하는 일이 일어나고부터는 한마디 말이라도 자기의 비위를 거스른 자에 대해서는 모두 중상하였으며,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반드시 죽여야 할 자는 상국이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되자 탄식하며,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 1547-1634 88세)의 봉호)이 정승에 복위되었다면 우리 일족은 반드시 살아남게 되었을 텐데.”

하였으니, 사람이 궁지에 이르면 반드시 어진 사람 우러르기를 마치 신명처럼 여기게 되는 법이다. 참으로 천하의 정의를 잡고 천하의 정의를 실천하며 대사(大事)에 임해 대의(大議)를 결정하는 지극한 정성이 남을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이렇게 될 수가 없다.

이제 상국이 죽은 지 근 40년이 되어 당시 문하의 선비들은 거의 모두 늙어 죽었다. 목이 조용주(趙龍洲 조경(趙絅))와 늘 상국의 고사를 얘기하였는데, 용주가 이미 시장(諡狀)을 짓고 목이 유고를 편차하였다. 대체로 소(疏)와 차(箚) 4권에는 진퇴(進退)를 가지고 간쟁(諫爭)한 내용도 있고 죽음으로써 간쟁한 내용도 있다. 말을 구차히 맞추려 하지 않고 행동을 구차히 용납받으려 하지 않았으며, 오직 국가의 먼 훗날을 위해서 장구한 계획을 세웠을 뿐, 고식적인 방편으로 충(忠)을 삼지는 않았다. 일기 4권에도 선조 2년(1569)에서 인조 12년(1634)까지 66년 간 많은 국가의 일들과 군자ㆍ소인의 출처(出處)와 소장(消長)이 환히 나타나 있다. 이를 읽으면 어진 자는 권장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두려움을 갖게 되니, 백세의 교훈이 될 만하다. 일기에 수록되지 않은 것으로, 인물과 고사를 널리 논해서 대략 연차별로 엮은 것이 합쳐서 1권인데 ‘일기별록(日記別錄)’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유문(遺文) 1권, 연보 1권, 언행록 1권, 부록 2권이다.

■백사(白沙) 이 상국(李相國) 사적

◯계곡(谿谷 장유(張維))이 지은 백사 이 상국(이항복 1556-1618) 행장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발각되어, 대신들이 매번 죄인을 심의하는데, 공이 추국 문사랑(推鞫問事郞)으로 있으면서 중간에서 잘 주선하여 목숨을 보전하게 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하고, 또,

“마침 사화가 일어났을 때, 정승 정철(鄭澈)이 사화의 우두머리였다.”

라고 하였다.


▣기언 제11권 원집 중편

■김시습(金時習)

◯...아내가 죽자, 다시 장가들지 않고 중의 차림으로 동해를 비롯 사방을 다니며 노닐었다.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세상을 마치니 59세였다. 주검을 불사르지 말라는 유언이 있어서 절 근처에 초빈하였다가 3년 후에 장사 지내려고 파 보았는데, 얼굴이 산 사람 같아 중들이 부처라 하였다. 화장을 한 다음 그곳에 부도(浮圖)를 세웠다. 저서(著書)로 《사방지(四方志)》 1600편과 산천 지리를 배경으로 쓴 작품 2백 편이 남아 있고, 이 밖에도 많은 시가 세상에 전해진다. 음애공(陰崖公 이자(李耔))이 그 글을 읽어 보고,

“불가에 몸을 담고 유교를 행한 이다.”

라고 평하였다.


▣기언 제13권 원집 중편

■죽서루기(竹西樓記)

◯관동 지방에는 이름난 곳이 많다. 그중에도 가장 뛰어난 곳이 여덟이니, 즉 통천(通川)의 총석정(叢石亭), 고성(高城)의 삼일포(三日浦)와 해산정(海山亭), 수성(䢘城)의 영랑호(永郞湖), 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 명주(溟州)의 경포대(鏡浦臺), 척주(陟州)의 죽서루, 평해(平海)의 월송포(越松浦)인데, 관광하는 자들이 유독 죽서루를 제일로 손꼽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해변에 위치한 주군(州郡)들이 대관령(大關嶺) 밖은 동으로 큰 바다를 접했으므로 그 바깥은 끝이 없으며, 해와 달이 번갈아 떠올라 괴이한 기상의 변화가 무궁하다. 해안은 모두 모래톱인데, 어떤 데는 모롱이진 큰 소[大澤], 또 어떤 데는 불거진 기이한 바위, 그리고 또 어떤 데는 우거진 깊은 솔밭으로 되어 있어, 습계(習溪) 이북으로 기성(箕城) 남쪽 접경까지 7백 리는 대체로 다 이러하다. 유독 죽서루의 경치만이 동해와 마주하여 높은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벼랑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두타산(頭陀山)과 태백산(太白山)이 우뚝 솟아 있는데, 짙은 이내 속으로 바위 너설이 아스라이 보인다. 큰 시내가 동으로 흘러 꾸불꾸불 50리의 여울을 이루었고, 그 사이에는 울창한 숲도 있고 사람 사는 마을도 있다. 누각 밑에 와서는 겹겹이 쌓인 바위 벼랑이 천 길이나 되고 흰 여울이 그 밑을 감돌아 맑은 소를 이루었는데, 해가 서쪽으로 기울녘이면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이 바위 벼랑에 부딪쳐 부서진다. 별구(別區)의 아름다운 경치는 큰 바다의 풍경과는 아주 다르다. 관광하는 자들도 이런 경치를 좋아해서 일컫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고을 고사(故事)를 상고해 보아도 누를 어느 시대에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황명(皇明) 영락(永樂) 원년(1403, 태조3)에 부사(府使) 김 효종(金孝宗)이 폐허를 닦아 누를 세웠고, 홍희(洪煕) 원년(1425, 세종7)에 부사 조관(趙貫)이 단청을 올렸다. 그 뒤 46년인 성화(成化) 7년(1471, 성종2)에 부사 양찬(梁瓚)이 중수했고, 가정(嘉靖) 9년(1530, 중종25)에 부사 허확(許確)이 남쪽 처마를 중축했다. 또 그 뒤 61년인 만력(萬曆) 19년(1591, 선조24)에 부사 정유청(鄭惟淸)이 다시 중수하였다. 태종(太宗) 영락 원년 계미(1403)에서부터 청주(淸主) 강희(康煕) 원년 임인(1662, 현종3)까지는 260년이 된다. 옛날에 누 밑에 죽장사(竹藏寺)란 절이 있었는데, 누 이름을 죽서라고 부른 것은 아마 이 때문인 듯하다. 이상을 기록하여 죽서루기로 삼는다.

■반구정기(伴鷗亭記) 반구정은 임진강 아래에 있다.

◯반구정은, 먼 옛날 태평 재상 황 익성공(黃翼成公 황희(黃喜 1363-1452 90세))의 정자이다. 상국이 죽은 지 2백 년이 채 못 되어 정자가 헐렸고, 그 터전이 쟁기 밑에 버려진 땅이 된 지도 1백 년이 된다. 이제 상국의 후손 황생(黃生)이 강 언덕에 집을 짓고 살면서 옛 이름 그대로 반구정이라 하였다. 이는 정자의 이름을 없애지 않으려 함이니 역시 훌륭한 일이다.

상국의 사업이나 공렬은 어리석은 사람도 다 왼다. 상국은 조정에 나아가 벼슬할 적에는 임금을 잘 보좌하여 정치 체제를 확립하고 모든 관료를 바로잡았으며, 훌륭하고 유능한 자를 직에 있게 하여 온 국가가 걱정이 없고 온 백성이 모든 업(業)에 만족하도록 하였다. 물러나 강호(江湖)에서 여생을 보낼 적에는 자연스럽게 구로(鷗鷺)와 같이 세상을 잊고 높은 벼슬을 뜬 구름처럼 여겼으니, 대장부의 일로 그 탁월함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겠다. 야사(野史)에서 전하는 명인(名人)의 고사에, 상국은 평생 말과 웃음이 적어서 사람들은 그의 희로(喜怒)를 알 수 없었고, 일을 담당하여서는 대체에만 힘쓰고 자질구레한 것은 묻지 않았다 한다. 이것이 이른바 훌륭한 상국이고 이름이 백세에 남게 된 것이리라.

정자는 파주 부치에서 서쪽으로 15리 되는 임진(臨津) 가에 있는데, 썰물이 물러가고 갯벌이 드러날 때마다 갈매기들이 모여든다. 강가의 잡초 우거진 벌판에는 모래밭으로 꽉 찼다. 또 9월이 오면 기러기가 찾아든다. 서쪽으로 바다 어귀까지 10리이다. 상(上) 6년 5월 16일에 미수는 쓴다.

■후조당기(後凋堂記)

◯후조당은, 세조 때 명신 권 익평공(權翼平公 권람(權擥 1416-1465))의 옛집이다. 당은 목멱산(木覔山) 북쪽 기슭 비서감(祕書監) 동쪽 바위 둔덕에 있다. 세조가 그 집에 거둥한 후 오늘날까지 그 서쪽 둔덕에 있는 돌샘을 ‘어정(御井)’이라 부른다. 그 위에 소한당(素閒堂)의 유지(遺址)가 남아 있다. 당(堂)은 3칸에 남쪽으로 온돌방이 있는데, 겨울에 따스한 볕이 들고 여름에 시원한 바람이 든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서 푸른 언덕에 석양이 비낄 때면 창가는 쓸쓸하기만 하다. 세운 지는 아주 오래되었는데, 상국이 살던 당시에서 오늘날까지 수백 년을 거쳐 6대째 사도공(司徒公 형조 판서 권반(權盼)을 가리킴)에 이르러 비로소 중건되었다. 마룻대를 고치거나 기둥을 갈거나 하지도 않았고 또 더 꾸미지도 않았으며, 기울고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때묻은 곳이나 닦아서 집은 예나 다름이 없다. 집 남쪽 돌 아래에서 솟는 샘물이 매우 맑고 차갑다. 섬돌 밑은 모두 산돌에 펑퍼짐한 너럭바위이고 뜨락에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더욱 기이하다. 3월에는 산꽃이 만발하고 동산에 꽉 들어선 소나무는 겨울 추위가 닥쳐와도 이파리가 변하지 않는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송백(松柏)이 맨 나중에 시듦을 알 수 있다.”

란 공자의 말을 일컬었는데, 이 말에 연유하여 ‘후조당’이라 하였으니, 자신을 경계하는 뜻이다. 지세가 높아 북록(北麓)을 바라보면 화산(華山)ㆍ백악산(白岳山)ㆍ인왕산(仁王山) 멧부리가 벌여섰고, 금원(禁苑)의 깊은 숲에 층층이 솟은 높은 궁궐들이 관청과 시가(市街)를 이루고 있어 정사를 내는 벼슬아치와 재산을 늘리는 장사치들이 사방에서 몰려드니, 종횡으로 누빈 넓디넓은 길과 집이 다닥다닥한 장안 터전은 구계(久溪)ㆍ학동(鶴洞)과 함께 남산의 명승으로 불린다.

사도공의 손자인 사부(師傅) 적(蹟)이 뒤를 이어 당 앞에 돌을 깨고 연못을 팠는데, 이끼는 짙고 물은 맑아 바위 그림자가 환히 비친다. 사부는 아들 흠(歆)을 두었는데, 그는 곧고 올바름을 좋아하며 학식이 넓고 행실이 훌륭하다. 때문에 나는 권씨 집안에 인재가 있다고 여겼다. 그가 지난 세대의 고사 고적을 열거하여 나에게 ‘후조당 기문’을 청하기에 글을 지으니 3백여 글자로 사실을 기록했다.

우리 대행(大行) 15년(1674, 현종15) 10월 신축일이다.


▣기언 제16권 원집 중편

■삼봉사기(三峯祠記)

◯지(誌 《동국여지승람》을 말함)에 ‘홍주(洪州) 삼봉산(三峯山)에 최영(崔瑩)의 사당이 있다.’라고 씌어 있다. 고려 우왕(禑王) 14년(1388) 우리 태상왕(太上王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이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우왕이 폐위되고 그 길로 최영도 죽었다. 후에 그의 신이 가장 영험이 있어서 화복(禍福)과 경앙(慶殃)을 조정하였는데, 업신여겨 공경하지 않은 자는 그 자리에서 죽기도 한다. 이에 이 고장 사람들이 겁에 질려 엄숙히 제사하고 또 영신사(迎神祠)와 망신사(望神祠)를 세웠다. ...영은 절약 검소하고 직간(直諫)하기를 좋아했으며, 30년 간 군대를 이끌면서 성을 함락하고 진을 무찌를 때는 반드시 자신이 군졸보다 앞섰고, 싸움마다 이겨 져 본 적이 없었다. 형장에 나갔을 때는 탄식하며,

“내 일생에 나쁜 일은 하지 않았는데 죄 없이 죽으니 내가 죽으면 내 무덤에는 풀이 돋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수도 백성들은 시장 문을 닫았고 듣는 자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 주검을 거리에 내다 버렸는데, 길손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갔다. 그의 무덤이 고양(高陽)에 있는데, ‘붉은 무덤[赤塚]’이라 부른다. 그 뒤 4년 만에 고려는 멸망하였다. 후에 시호를 무민(武愍)이라 했다.


▣기언 제17권 원집 중편

■육신 의총비(六臣疑塚碑)

◯세종 명신(名臣)에,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유응부(兪應孚)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이 있어 육신(六臣)이라 부르는데, 그 사적은 육신본전(六臣本傳)에 실려 있다. 이른바 육신총(六臣塚)이 서호(西湖)의 노량진(露梁津) 강 언덕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에 사람을 이곳에서 죽였다.’고 한다. 모두 비석에 새기기를 ‘박씨(朴氏)ㆍ유씨(兪氏)ㆍ이씨(李氏)ㆍ성씨(成氏)의 묘(墓)’라고 하였는데 박씨의 묘가 가장 남쪽에 있고 그 북쪽이 유씨의 묘, 그 북쪽이 이씨의 묘, 그 북쪽이 성씨의 묘이며, 또 성씨의 묘가 그 뒤 10보쯤 떨어진 지점에 있는데 성씨 부자의 묘로, 뒤에 있는 것이 성승(成勝)의 묘라고 한다. ...


▣기언 제18권 원집 중편

■운곡 선생(耘谷先生) 묘명(墓銘)

◯선생은 원주인(原州人)으로, 성은 원씨(元氏), 휘는 천석(天錫), 자는 자정(子正)이다. 고려의 국자 진사(國子進士)로 고려의 정치가 어지러움을 보고 은거하여 지절(志節)을 지키며 호를 운곡 선생이라고 하더니, 고려가 망하자 치악산(雉嶽山)에 들어가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다.

태종이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았는데, 태종은 그의 의리를 고상하게 여겨서 동쪽으로 유람할 때 그의 집에 행차하였더니 선생은 숨어 버리고 뵙지를 않았다. 태종은 시냇가 바위 위로 내려가서 그 집을 지키는 노파에게 후한 상을 하사하고 그 아들인 형(泂)에게 기천 감무(基川監務)를 제수하였으므로 후인들이 이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고 부르는데, 그 대는 치악산의 각림사(覺林寺) 옆에 있다. 지금 원주(原州) 치소(治所)에서 동으로 10리 떨어진 석경(石鏡) 마을에 운곡 선생의 묘소가 있는데, 그 앞에 또 하나의 분묘는 부인인 유인(孺人)의 묘소라고 한다.

처음, 선생에게는 장서(藏書) 6책이 있었으니, 이는 망국(亡國 고려)의 고사를 말한 것이었다. 자손들에게 망녕되이 펼쳐 보지 말라고 경계하였으나 그 책이 여러 대를 전하여 자손 중에 한 사람이 가만히 펼쳐 보고는 크게 두려워하면서,

“우리 집안이 멸족된다.”

하고 들어다가 불살랐으므로 그 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남긴 시집이 있으니 이른바 《시사(詩史)》란 것이다. 나는 들으니 ‘군자는 숨어 살아도 세상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선생은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숨었지만 세상을 잊은 분이 아니며 변함없이 도를 지켜 그 몸을 깨끗이 하였다.


▣기언 제21권 원집 중편

■조일장(趙日章)에게 준 글

◯그대가 병이 많은 몸으로 멀리 해외의 외딴 나라로 사신 가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더욱 근심되오. 특히 백수(白首)에 이별을 섭섭히 여기는 생각뿐이겠소. 군자가 임금을 섬기는 데는 평탄과 험란을 막론하고 일관된 절조여야 하는데, 그대에게는 물론 동심(動心)하는 바가 없을 것이오.

천하의 이치는 하나일 뿐이므로 아무리 풍속이 다르고 기품이 다른 외딴 나라라 할지라도 그 본성은 동일하니, 진실로 성의를 보인다면 무엇을 감복시키지 못하겠소. 해외의 오랑캐로 하여금 우리 조정에 강직하고 올바른 선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면, 감화되어서 감히 우리에게 무례한 짓을 못할 것이오. 옛날에 외딴 나라로 사신 가던 자는 그 방법이 이러하였소. 군자는 어려운 것으로 권면하고 능한 것으로 아첨하지 않는 것이 옛 도인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오? 비록 패괴(敗壞)ㆍ위란(危亂)의 즈음을 당하더라도 한 가지 일과 한마디 말에 힘입어 다시 그 잠재한 힘을 진작시키게 된다면 어찌 현대부(賢大夫)의 공이 아니겠소. 그대는 힘쓰오. 목(穆)은 극남(極南)으로 옮겨 와서 바닷가에서 두 해를 이미 지냈으니, 세상일과 더욱 관계를 끊었소. 풍파 만리의 머나먼 일본 여행길에 부디 몸 보중하오. 이만 줄이오.

■진주 목사(晉州牧使) 조공(趙公)의 유애비(遺愛碑)

◯조공이 진주 목사가 된 시기는 청 나라가 우리나라를 정복한 2, 3년 사이였다. 우리나라가 병화(兵禍)를 입은 후로 남방의 주군(州郡)은 북ㆍ동ㆍ서의 여러 고을에 비하여 온전한 편이었으나, 북쪽으로 수송되는 육해(陸海)의 산물과 군사 출동에 소요되는 제반 군비가 다 남방에서 나왔고, 영북(嶺北)에서 난리로 유리하여 남으로 피난 오는 자들이 또 잇달았으므로, 진주가 영남에서 제일 큰 부요한 고을이라고 이름났지만 재력이 매우 달렸는데, 거기에 매년 홍수와 한발까지 겹쳐서 백성의 생활이 크게 곤란하였다.

목사는 부임하자 부로(父老)들을 모두 불러 조정의 덕의(德意)를 선포하고 누적된 폐단을 혁파하였다. 명목이 없는 세(稅) 약간 조(條)와 세입(歲入)에 상봉(常捧) 이외의 것은 의연금으로 내놓고, 또 각목(各目)의 포흠(逋欠)과 속전(贖錢)으로 들어오는 돈 수천을 얻어서 백성에게 독촉하지 않고도 모든 수용(需用)에 응하였으며, 거친 음식과 소박한 의복으로 자신을 근검히 하여 백성을 풍족케 하니, 1년 사이에 온 고을이 크게 소생되어 근심과 아픔이 가셨다. 또 군려(軍旅)를 다스리고 병기를 수선하며, 사졸(士卒)을 격리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모두 웃사람을 위하여 다투어 죽을 마음을 갖게 하니, 이웃 몇 고을의 원들도 서로 본받아 고을을 잘 다스렸다.

그 이듬해 도당(都堂)에 사인(舍人)이 결원되어 조공을 소환하니, 고을의 부로(父老)와 뭇 이사(吏士)로부터 농공 백예(農工百隷) 및 사방에서 나그네로 이 고을에 온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힘입어 살 바가 없었으므로 마치 자부(慈父)와 자모(慈母)를 잃은 듯하였으며, 모두들 비석을 세워 목사가 남긴 자애(慈愛)를 잊지 않기를 원하였다. 목사는 휘가 모(某), 자가 모, 성이 조씨(趙氏)인데 한양인(漢陽人)이다.


▣기언 제22권 원집 중편

■동래(東萊) 노파

◯동래 노파는 본래 동래의 사창(私娼)이었다. 선조 25년(1592)에 왜구(倭寇)가 보물과 부녀를 크게 약탈해 간 일이 있었는데, 노파는 당시 30여 세의 나이로 왜국에 잡혀가 10여 년을 지냈다. 그후 선조 39년(1606) 봄 왜구가 이미 화친(和親)을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행(使行)이 돌아오는 편에 지난날 잡아간 사람들을 돌려 보내게 되어, 노파도 돌아오게 되었다.

노파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었는데, 난리에 서로 간 곳을 몰랐다. 돌아와서 그 어머니의 소재를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난리에 잡혀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하였다. 원래 모녀가 같이 왜국에 있으면서도 10년 동안을 서로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노파는 사적으로 그 친족들과 작별하면서,

“맹세코 어머니를 보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는다.”

하고, 다시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렀다. 거리에서 걸식하는 등 왜국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며 전국을 누벼서 어머니를 찾았다. 모녀는 다 늙었는데 어머니는 70여 세로서 아직 정정하였다. 왜인이 모두 크게 놀라 감탄하고 어질게 여겨서 눈물까지 흘렸다. 이 이야기가 전하여 국중에 들리자 왜의 추장은 어머니와 함께 송환하도록 허락하였다.

노파는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재산도 직업도 없어서 살아갈 길이 없자 노파는 언니와 함께 어머니를 업고 강우(江右)로 가서 함안(咸安) 방목리(放牧里)에 거주하였다. 어머니가 천수를 누리고 작고하니, 자매가 서로 의지하고 살았다. 날마다 품팔이를 해서 생활을 하였는데, 무릇 옷 한 가지, 음식 한 가지가 생기면 언니에게 먼저 주고 자신은 뒤에 가졌다.

노파는 80여 세에 죽었는데, 동리 사람들이 모두 ‘동래 노파’라고 불러서 그대로 호가 되었다 한다. 아, 여자로서 능히 바다를 건너 만리 타국의 험난한 바닷길에서 모녀가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돌본 것이다. 자고로 남자도 하지 못할 일을 능히 해서 세상에 뛰어난 절행(節行)을 세워 오랑캐를 감화시켰으니 아, 어질도다.


▣기언 제26권 원집 하편

■정곤재(鄭困齋) 사적

◯곤재 선생(困齋先生) 정씨(鄭氏)는 휘가 개청(介淸)으로 선조 때 징사(徵士)이다. 선생은 독실하고 옛것을 좋아하였으며, 은거하여 글을 가르치니 제자들이 날로 모였다. 선생이 제자를 거느리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대안학사(大安學舍)에서 행하였는데, 주목(州牧)인 유몽정(柳夢鼎)이 가서 그 예를 보고 탄식하기를,

“삼대(三代)의 예를 여기서 보겠도다.”

하고, 그 어짊을 나라에 천거하여 주(州)의 훈도(訓導)로 삼았다. 선생은 사제(師弟)의 예를 엄격히 하여 교육을 시키되 한결같이 《소학(小學)》의 남전향약(藍田鄕約)을 따랐으며,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중요시하였다.

향교의 생도 중에 홍천경(洪千璟)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가 조소(嘲笑)하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므로 주가(州家)가 그를 벌주었더니, 그는 도리어 말을 꾸며내므로 비방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유후(柳侯 유몽정)가 떠나가고 선생도 사직하고 돌아왔다. 김공 성일(金公誠一)이 대신 주목으로 와서 다시 예로써 청하였으나, 선생은 끝내 나아가지 않았으며, 선조(宣祖)가 그의 어짊을 듣고 여러 번 관직을 제수하였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당시 경서(經書)의 뜻을 바로잡기 위해 여러 선비들을 크게 불렀으므로 선생도 부름을 받고 경사(京師)에 갔으나 곧 사양하고 돌아왔다. 그후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에 제배되자, 상소하여 ‘도덕 입본(道德立本)의 설’을 말하니, 상이 가상히 여기고 하교하기를,

“오늘에야 지론(至論)을 얻어 보았다.”

하고 불러 쓰려고 하였으나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니, 가까운 고을을 제수하여 편히 봉양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곡성 현감(谷城縣監)이 되었는데, 반년 만에 사양하고 돌아왔다.

이때 일본 왜인이 변란을 일으키려고 우리를 시험하는데 기탄없는 일이 많았다. 상이 이것을 근심하여 군신(群臣)들에게 묻기를,

“누가 장수를 맡을 만한가?”

하니, 영의정 박순(朴淳)이 천거하기를,

“정개청이 이미 유술(儒術)로 이름이 났지만 실상은 장수의 재질이 있으니, 그 사람이 참으로 장수를 맡을 만합니다.”

하였다. 박순의 집에 책이 많으므로 선생이 일찍이 책을 구하여 본 일이 있었는데, 박순이 마음속으로 어질게 여겨 객례(客禮)로 대접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본디 의정(議政) 정철(鄭澈)의 사람됨을 허여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그에게는 취할 만한 청백한 지조가 있소.”

하니, 선생은 답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그 사람은 가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지 바른 사람은 아니다.”

하였다. 정철이 이 말을 듣고 몹시 노여워하였다. 오래지 않아 정여립(鄭汝立)의 상변사(上變事)가 있었는데, 옥사(獄事)가 이미 이루어지자, 정철은 군읍(郡邑)에 영을 내려 죄인의 당여(黨與)로 포박해야 할 자를 염탐하게 하였으나, 사람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나주(羅州) 사람 중에서 5, 6명이 정개청(鄭介淸)과 죄인이 서로 통한 정상을 고발하였는데, 선생과 죄인은 당초 얼굴도 모르는 사이로 경서의 뜻을 교정할 때 서로 만났을 뿐이었다. 정철의 문객 정암수(丁巖壽)ㆍ홍천경(洪千璟) 등이 함께 없는 죄를 얽어서 꾸몄다 한다.

안문(按問)하자 모두 사실이 없었으므로 상의 뜻이 비로소 풀렸는데, 정철이 말하기를,

“정개청이 비록 죄가 없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그는 일찍이 배절의론(排節義論)을 지어서 인심을 혼란케 하였으니, 끼친 해독이 홍수(洪水)나 맹수(猛獸)보다 심합니다. 고문(拷問)을 하십시오.”

하였다. 남쪽 지방의 풍속이 기개와 임협(任俠)을 좋아하여 법도를 따르지 않는 것으로써 고상함을 삼는 때문에 선생이 동한절의설(東漢節義說)과 진송청담설(晉宋淸談說)을 지어서 풍속을 깨우쳤는데, 정철이 절의를 배척한 것으로 상에게 아뢰어 격동시킨 것이다.

상은 막 반역을 다스리는 판이라서 매우 노하여, 학사(學士)로 하여금 교서를 초하되 일일이 그 말을 변석(辨釋)해서 사방에 포고하여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게 하고, 개청(介淸)은 율(律)을 적용하여 유배시켰다. 처음에는 위원(渭源)에 유배시켰다가 정철이 극북(極北)인 경원(慶源)으로 개정하였는데, 6월에 아산보(阿山堡)에 이르러 달포 만에 선생이 작고하였다. 그 뒤 상국(相國) 유성룡(柳成龍)이 상에게 아뢰기를,

“정개청은 평생에 경술(經術)과 행의(行誼)로써 스스로 면려하였는데, 우연히 한 논저(論著)로 인하여 끝내는 죽게 되었습니다.”

라고 했다 한다.

선생의 저서에는 《수수기(隨手記)》 9권과 《우득록(愚得錄)》 3권이 있었는데, 옥사(獄事) 때 죄인의 글을 수색하여 가져오니, 상은 그 글을 보고 이르기를,

“이는 고인의 글을 읽은 자다.”

하고, 그것을 현저(縣邸)에 내려서 그 집에 주었는데, 모두 유실되고 오직 《우득록》만이 세상에 전한다. 뒤에 고장 사람들이 사우(祠宇)를 그 고을에 세워서 제사 지냈는데, 효종(孝宗) 때 정철의 당이 다시 용사하자 상에게 아뢰어서 그 사우를 헐어 버렸다.


▣기언 제28권 원집 하편

■지리산(智異山) 청학동기(靑鶴洞記)

◯남방의 산 중에서 지리산이 가장 깊숙하고 그윽하여 신산(神山)이라 부른다. 그윽한 바위와 뛰어난 경치는 거의 헤아릴 수 없는데 그중에서도 청학동(靑鶴洞)이 기이하다고 일컫는다. 이것은 예부터 기록된 것이다. 쌍계(雙溪) 석문(石門) 위에서 옥소(玉簫) 동쪽 구렁을 지나는 사이는 모두 깊은 물과 큰 돌이라 인적(人跡)이 통하지 못한다. 쌍계 북쪽 언덕을 좇아 산굽이를 따라서 암벽을 부여잡고 올라가 불일전대(佛日前臺) 석벽 위에 이르러서 남쪽으로 향하여 서면, 곧 청학동이 굽어보인다. 돌로 이루어진 골짜기에 가파른 바위요, 암석 위에는 소나무ㆍ대나무ㆍ단풍나무가 많다. 서남쪽 석봉(石峯)에는 옛날 학 둥우리가 있었는데, 산중의 노인들이 전하기를,

“학은 검은 깃, 붉은 머리, 자줏빛 다리로 생겼으나 햇볕 아래에서 보면 깃이 모두 푸르며, 아침에는 빙 돌아 날아올라서 하늘 높이 갔다가 저녁에는 둥우리로 돌아오곤 했는데, 지금 오지 않은 지가 거의 백 년이 된다.”

하였다. 그리하여 봉우리를 청학봉(靑鶴峯), 골짜기를 청학동이라고 하였다.

남쪽으로 향로봉(香爐峯)을 마주하고, 동쪽은 석봉(石峯) 셋이 벌여 솟았으며, 그 동쪽 구렁은 모두가 층석기암(層石奇巖)인데 어젯밤 큰비로 폭포수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그 대(臺) 위의 돌에는 완폭대(玩瀑臺)라고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못이 있다.

숭정 13년(1640, 인조18) 9월 3일에 나는 악양(嶽陽 하동(河東) 악양(岳陽))에서 섬진강(蟾津江)을 거슬러 올라가 삼신동(三神洞)을 지나 아침에 쌍계의 석문을 보고, 또 쌍계사(雙溪寺)에서 최 학사(崔學士 최치원(崔致遠))의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를 관람하였는데, 천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끼 사이로 보이는 문자를 읽을 수 있었다. 이어서 불일전대에 올라가 청학동기(靑鶴洞記)를 지었다.

■빙산기(氷山記)

◯빙산(氷山)은 문소(聞韶 의성(義城)의 고호(古號)) 남쪽 47리 떨어진 지점에 있다. 그 산에 쌓인 돌은 울퉁불퉁하고 구멍이 많아서, 마치 낙숫물 그릇과도 같고 사립문과도 같고 규호(圭戶 홀(笏) 모양으로 된 방문)와도 같고 부엌과도 같고 방과도 같은 것이 자못 헤아릴 수가 없다.

이 산은 입춘(立春) 때 찬 기운이 처음 생겨 입하(立夏)에 얼음이 얼고, 하지(夏至)의 막바지에 이르면 얼음이 더욱 단단하고 찬 기운이 더욱 매섭다. 그래서 아무리 성덕(盛德)이 화(火)에 있어 찌는 듯한 무더위가 성한 대서(大暑)라도 공기가 차고 땅이 얼어서 초목이 나지 못한다. 입추(立秋)에 얼음이 녹기 시작하여 입동(立冬)에 찬 기운이 다하고 동지(冬至)의 막바지에 이르면 구멍이 모두 비게 된다. 얼음이 없을 시기에 얼음을 보기 때문에 기이함을 적어서 산을 빙산(氷山), 시내를 빙계(氷溪)라 한 것이다.

일찍이 듣건대, 천지의 기운이 봄과 여름에는 따뜻한 기운을 내어 발육하기 때문에 응결된 음기(陰氣)가 안에 있고, 가을과 겨울에는 거두어 간직하기 때문에 온후(溫厚)한 것이 안에 있다고 한다. 이는 바위 구멍이 땅바닥까지 뚫려서 땅속에 잠복한 음기가 이를 통하여 스며나오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입춘에 춥기 시작하여 입하에 얼음이 얼고 하지에 얼음이 굳으며, 입추에 얼음이 녹기 시작하여 입동에 얼음이 다 녹고 동지에 구멍이 비는 것이니, 이는 곧 일음(一陰)ㆍ일양(一陽)의 소장(消長)ㆍ왕래(往來)하는 기운을 징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기(地氣)의 충만함이 동남 지역은 부족하기 때문에 그 뜨고 성기어서 새 나오는 것이 이와 같다. 그 서쪽으로 백 수십 리쯤 떨어진 주흘산(主屹山) 아래에 조석천(潮汐泉)이 있는데, 바다와의 거리가 4백여 리나 되는데도 그 찼다 줄었다 하는 것이 바다의 조수와 같다 한다.


▣기언 제29권 원집 하편

■포도첩기(葡萄貼記)

◯대체로 예술의 오묘함은 전공이 아니면 터득할 수가 없다. 함종씨(咸從氏 어몽룡(魚夢龍))의 매화라든가 황씨(黃氏 황집중(黃執中))의 포도라든가 석양 공자(石陽公子 석양군(石陽君) 이정(李霆))의 대 같은 그림은 모두 한 예술에 전공하여 당시에 이름을 얻었던 것이다. 이 몇 분 이후 오늘날까지 그 오묘한 전통이 끊긴 지가 오래되었다.

내가 10년 전 막내아우 공숙(恭叔 허서(許舒))에게서 종남 노인(終南老人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묵포도(墨葡萄) 그림을 얻었는데, 뻗어가는 넝쿨과 피어나는 잎새와 드리워진 열매는 옛사람의 오묘한 경치를 그대로 잘 살려 아주 신비스러운 데가 있다.

오늘날 그 사람은 이미 죽어서 다시 볼 수 없는데, 들으니 그가 죽을 무렵 집안 식구에게 부탁하기를,

“나의 그림이 아주 특이하지만, 세상에서 알아 줄 사람이 없다. 그런데 다행히 자봉공(紫峯公 허목(許穆)의 별호))이 나의 그림을 알아준다. 또 그의 글은 반드시 후세에 전해질 것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고 나의 그림도 가지고 가서 글을 받아 보관하여라. 그러면 내가 죽어도 한이 없겠다.”

하였다 한다.

나도 그의 뛰어난 솜씨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서, 여러 번 그의 작품의 귀중성을 말한 적이 있었다. 이 사람은 자신을 깊이 알았으나 알아주는 이를 만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였겠지만, 그의 심정은 이에 대하여 많은 고심을 하였을 것이니, 그의 인품과 그림을 알 수 있겠다. 나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이 흐르게 하는데 내 어찌 한마디 말을 아껴 이미 죽은 이의 마음을 저버리겠는가.


▣기언 제30권 원집 잡편

■왜인(倭人)과 재화를 통함

◯정통(正統) 8년(1443, 세종25)에 왜인들이 중국에 가서 도둑질하고 또 우리 제주에 와서 노략질하다가 변방 장수의 공격을 받고 패하여 도망갔다.

우리 세종이 대마도에 사신을 보내 문책하였는데, 대마도에서 난을 일으킨 주모자를 잡아 바쳐 와 그 공으로 해마다 50척의 배가 와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정덕(正德) 5년(1510, 중종5)에는 삼포(三浦 제포(薺浦)ㆍ부산포(釜山浦)ㆍ염포(鹽浦))의 왜인이 배반하여 우리의 제포(薺浦)와 웅천(熊川)을 함락시키고 변방 장수를 죽였다. 우리 중종께서 유담년(柳聃年)을 보내 이를 토벌하여 격파시키고 화친을 끊었다가 7년(1512)에 다시 조약을 맺고 25척을 허락하였다.

만력(萬曆) 37년(1609, 광해군1)에 임진란(壬辰亂) 이후 처음으로 무역을 허락하고 20척을 허용하였는데, 세지사(歲至使)가 올 때에 3척 또는 2척을 허용하되, 약속된 20척 이내에서 하고 왜인으로서 증명서가 없거나 부산으로 오지 않는 자들은 모두 도둑으로 간주했다.


▣기언 제32권 원집 외편

■기자세가(箕子世家)

◯은(殷) 나라의 종실(宗室)인데 기(箕) 땅에 자작(子爵)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기자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의 이름은 서여(胥餘)로, 은 나라 태사(太師)였다.”

고 한다. 은 나라 임금 제을(帝乙)에게 적자(嫡子) 수(受)가 있었는데, 말을 잘하고 민첩하며 용력(勇力)을 좋아하였고, 그의 서형(庶兄) 미자(微子) 계(啓)는 정성스럽고 조심스러워 효도를 잘하였다. 기자가 제을에게 권하기를,

“계(啓)는 어진 데다 또 장자이니 그를 세워 후사(後嗣)를 삼아야 합니다.”

하였으나, 제을(帝乙)이 듣지 않고 끝내 수(受)를 세웠다. 수가 즉위하여 임금이 되어, 호를 주(紂)라 하고 위력으로 천하를 복속시킨다면 백전백승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유소씨(有蘇氏)를 쳐 달기(妲己)를 취해 가지고 돌아와서는 달기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

이에 앞서 주(紂)가 상아(象牙) 젓가락을 처음 만드니, 기자가 탄식하기를,

“저 사람이 상아 젓가락을 만들었으니, 반드시 나물국을 먹지 않을 것이며 음식을 담는 데 토궤(土簋)를 쓰지 않을 것이다. 먼 지방에서 진괴(珍恠)한 물건의 뇌물이 이를 것이요, 여마(輿馬)의 낭비와 궁실이 사치할 조짐이 이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하더니, 주(紂)가 백성들에게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여 궁실을 짓고, 대사(臺榭)를 세우며, 피지(陂池)를 파고는 사치스러운 복식으로 밤새워 술을 마시면서 날짜를 잊을까 두려워하여 좌우 신하들에게 날짜를 물었으나 모두 알지 못했다. 그러자 곧 사람을 시켜 기자에게 물었다. 기자는 마음속으로 탄식하기를,

“천하의 임금이 되어 온 나라가 모두 날짜를 잊어버렸으니 천하가 위태롭게 되겠구나. 온 나라가 알지 못하는 것을 나만 안다 하면 내가 위태롭게 되리라.”

하고, 술 취해서 알지 못한다고 핑계하였다. 주가 백성들에게 잔학(殘虐)하되, 포락(炮烙)의 형벌을 만들어서 간신(諫臣)과 보필(輔弼)을 지지고 뜸 뜨니, 천하가 그를 배반하였다.

주(周)의 덕이 날로 왕성해지자, 미자가 기자와 비간(比干)에게 말하기를,

“상(商) 나라가 지금 망해 가는 것이 큰 냇물을 건너는데 나루터가 없는 것과 같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오.”

하였다. 기자가,

“상 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신복(臣僕)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왕자에게 고하노니 상 나라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 마땅하다. 전에 내가 한 말이 왕자를 해치도록 만든 셈이 되었도다. 왕자가 나가지 않으면 화를 면치 못하여 은(殷) 나라 종사(宗祀)는 끊어지고 말 것이다. 스스로 깨끗이하여 사람마다 선왕(先王)께 그 뜻을 바쳐야 할 뿐이니, 나는 도망하기를 생각하지 않겠다.”

하니, 미자(微子)는 제기(祭器)를 싸 가지고 도망하였다. 기자가 주에게 간하되 주가 듣지 않으니, 어떤 사람이,

“간언을 듣지 않는 것을 기화로 떠나는 것이 옳다.”

하니, 기자는,

“옳지 않다. 남의 신하가 되어 간함을 듣지 않는다고 떠나는 것은, 그 인군의 악을 드러내고 자신은 백성의 환심을 사는 것이니,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고, 곧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종이 되었다. 주가 그를 가두니, 그는 금(琴)을 타면서 스스로 상심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곡조를 가리켜 ‘기자조(箕子操)’라 하였다. 비간(比干)은 간쟁(諫爭)을 하고 떠나지 않으니, 주가 그를 죽여 버렸다.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을 평정하고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 주고 그에게 묻기를,

“은(銀) 나라가 망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였으나, 기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왕이,

“오직 하늘이 몰래 백성을 도우시어 살 곳을 잘 돌보아 주셨는데 나는 이륜(彝倫)의 펼 바를 알지 못하겠다.”

하니, 기자가 곧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진술하여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대법(大法)을 전술(傳述)하고 황극(皇極)의 훈(訓)을 설명하였는데, 모두 37장(章)으로 주서(周書)에 실려 있다.

기자가 그곳을 떠나 조선(朝鮮)으로 오니, 은 나라 백성으로 따라온 사람들이 5천여 인이나 되었고, 시서(詩書)ㆍ예악(禮樂)ㆍ무의(巫醫)ㆍ복서(卜筮)의 유(流)와, 백공기예(百工技藝)가 모두 따라왔다. 그래서 무왕(武王)이 그대로 그곳에 봉해 주고 신하로 여기지 않았다. 평양에 도읍하였는데, 그 땅이 옛날 단군조선(檀君朝鮮)이었으므로, 그를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 하였다. 기자가 처음 와서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통역으로 그 뜻을 통하였다. 이어 예의(禮義)와 농상(農桑)과 길쌈을 가르쳤으며, 농토를 구획(區劃)하고 경계를 만들어, 조법(助法)을 행하였다. 그리고 8조목(條目)의 규약을 세워서, 남을 죽인 자는 자기 목숨으로 보상하고, 남을 상해한 자는 곡식으로 보상하며,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는 남녀 모두 노비(奴婢)가 되는데, 속죄를 하려는 자는 1인당 50만(萬)을 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비록 노비를 면하고 평민이 되어도 그들의 풍속에 수치로 여겼기 때문에 시집가고 장가갈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풍속에 도둑이 없어서 밤에도 대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길 가던 나그네가 들판에 노숙(露宿)할 수도 있었고, 부인들은 정결하고 신실하며 음란하지 않았다. 그릇은 조두(俎豆)를 사용하였으며 예양(禮讓)을 높이 믿고 병투(兵鬪)를 숭상하지 않으니, 이웃 나라들이 감화되었다.

기자가 주(周) 나라에 조회 가는 길에 옛 은허(殷墟)를 지나다가, 궁실이 허물어져 그 터에 벼와 기장이 자라는 것을 보고 맥수가(麥秀歌)를 지었는데, 그 노래에,

보리 이삭 쑥쑥 패고 / 麥秀漸漸兮

벼 기장도 무럭무럭 자라누나 / 禾黍油油

교활한 저 아이 / 彼狡童兮

나와 뜻이 안 맞았네 / 不與我好兮

라고 하였다. 은 나라 사람들이 그 노래를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기자의 자손이 서로 전승하여 주 나라의 말세(末世)에까지 이르렀는데, 연백(燕伯)이 참칭하여 왕이라 하고 동쪽으로 조선 땅을 노략질하자 조선후(朝鮮侯)가 군사를 일으켜 연(燕) 나라를 공벌하여 주실(周室)을 높이려 하였는데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여 중지하고, 그로 하여금 서쪽으로 연왕을 달래어 두 나라가 서로 침벌(侵伐)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육국(六國) 때에 연 나라가 진번조선(眞番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변새(邊塞)를 쌓았다. 뒤에 조선후도 역시 자칭 왕이라 하고 점점 교만하고 방자해지니, 연이 서쪽 땅 2천여 리를 쳐서 만번한(滿潘汗)으로 경계를 삼았다. 진(秦)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장군(將軍)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장성(長城)을 쌓아 요동까지 이르러 조선의 외요(外徼 변방의 가까운 지방)로 만드니 조선왕 비(否)는 크게 두려워하여 복종하였다. 비(否)가 졸(卒)하고 준(準)이 즉위하였는데 진(秦) 나라가 연(燕) 나라와 조(趙) 나라를 멸하니, 그 백성들이 많이 도망하여 조선으로 들어왔다.

한(漢) 나라가 일어나 노관(蘆綰)을 연왕(燕王)으로 삼으니, 그는 조선과 패수(浿水)로 경계할 것을 약속하고 다시 요동의 옛 변새를 지켰는데, 노관이 흉노(匈奴)에게로 들어갈 때 연 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상투를 짜고 만이(蠻夷)의 복장으로 천여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와서, 서쪽 경계에 살기를 구하며 번폐(藩蔽)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였다.

왕(王) 준(準)이 그를 제배(除拜)하여 박사(博士)로 삼고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니, 위만이 망명인들을 불러들여 그 무리가 더욱 강성해졌다. 그렇게 되자 위만이 왕 준을 속여,

“한(漢) 나라 군사가 크게 이를 것이니, 제가 국도(國都)에 들어가서 시위(侍衛)하겠습니다.”

하고, 그 길로 왕 준을 습격하였다. 왕 준이 싸움에 패하여 남쪽으로 달아나니, 드디어 위만이 조선을 점령하게 되었다. 기자(箕子)로부터 왕 준까지 나라를 전승한 것이 41대에 무릇 928년이다.

왕 준은 나라를 잃고 바다를 건너 금마(金馬) 땅에 이르러 마한왕(馬韓王)이라 자칭하고, 작은 나라 50국을 통치하였는데, 후세에 와서 백제왕 온조(溫祚) 26년에 온조가 마한 땅을 병합하자, 기씨는 절사(絶祀)되고 말았다. 왕 준이 마한에 웅거한 지 2백 년 만에 멸망하였으니, 전후 역년은 1120년이다. 기자의 자손들은 분산하여 기씨(奇氏)ㆍ한씨(韓氏)ㆍ선우씨(鮮于氏)가 되었고, 지금 평양(平壤) 토산(兎山)에 기자총(箕子塚)이 있으며 나라 사람들이 숭인전(崇仁殿)을 세우고 혈식(血食)을 끊지 않았다.

은(殷) 나라가 망할 무렵에 미자(微子)는 그 나라를 떠나고 기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종 노릇을 하였으며, 비간(比干)은 간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공자는,

“은 나라에 세 어진 이가 있었다.”

고 말하였다. 동국(東國)이 기자의 교화에 힘입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부인들은 정결하고 신실하여 음란하지 않았고, 치교(治敎)가 장구하여 나라의 운명이 천여 년을 끊기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삼대(三代) 때에도 있지 않았던 바이다.

■위만세가(衛滿世家)

◯위만(衛滿)은 연(燕) 나라 사람이다. 연왕 노관(盧綰) 때에 위만이 천여의 무리를 모아, 동쪽으로 달아나 변방을 벗어나서 패수(浿水)를 건너왔는데, 때는 조선왕(朝鮮王) 준(準)이 즉위한 때였다. 그때 마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연(燕)ㆍ제(齊)ㆍ조(趙)의 유망민(流亡民)들이 많이 서쪽 변경으로 귀순해 왔다. 위만이 신하가 되어 막아 지키겠다 하므로, 왕(王) 준(準)이 그를 제배(除拜)하여 박사(博士)로 삼고 백리의 땅을 봉해 주어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자 위만이 옛 진(秦)의 운장(雲障) 땅을 병유(倂有)하고 망명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차츰 강대해졌다. 한 효혜제(漢孝惠帝)와 고후(高后) 때에 와서, 천하가 이미 평정되자, 위만이 왕 준을 속여,

“한 나라 군사가 크게 이를 것이니, 제가 국도(國都)에 들어가 시위(侍衛)하겠습니다.”

하고, 그 길로 왕 준을 습격하였다. 왕 준은 싸움에 패하여 남으로 달아나고 위만이 드디어 조선을 점령하여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니, 이것을 위만조선이라 한다.

위만은 요동 태수(遼東太守)와 더불어 약속하기를, 외신(外臣)이 되어 변방 밖에 여러 만이(蠻夷)를 막아 그들이 노략질을 하지 못하게 하고 공물 바치는 자들을 막지 않게 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군사의 위력과 재물을 가지고 이웃에 있는 작은 나라들을 복속시켜 지방이 수천 리였다. 두 대를 전승하여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자,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외신(外臣)의 직책과 입공(入貢)의 예를 수행하지 않고, 진번(眞番)과 진국(震國)이 글을 올려 중국에 들어가 천자를 뵙겠다고 청하자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효무제(孝武帝)가 사신을 보내어 우거(右渠)를 꾸짖으니, 우거는 조서를 받들려 하지 않고 군사를 발하여 봉사자(奉使者) 하(何)를 죽였다.

원봉(元封) 3년(서기전 108)에 한(漢) 나라가 크게 군사를 내어 우거를 토벌하자, 이계상(尼溪相) 삼(參)이 자객을 보내어 왕 우거를 살해하고 한 나라에 항복하니, 위씨는 절사(絶祀)되고 후사(後嗣)가 없게 되었다. 그 사실이 조선열전(朝鮮列傳)에 실려 있다.

한(漢) 나라는 그 땅을 분할(分割)하여 낙랑(樂浪)ㆍ임둔(臨屯)ㆍ현도(玄菟)․진번(眞番) 등 4군(郡)으로 만들었다. 위만은 인(仁)을 쌓고 덕을 행한 일이 없는 한갓 망명인의 신분으로 천하가 어지러운 것을 이용하여 천여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처음에는 작고 약하므로 조선에 신복되기를 빌다가 강대하여지자 속임수로 왕 준을 쫓아내고 나라를 빼앗아 제 소유로 삼았으니, 의롭지 못함이 너무나 심하다.

그리고 군사의 위력과 재물의 힘으로 이웃 나라들을 침략하여 복속시켜서 지방이 수천 리였으나 2대 만에 멸망하고 말았으니, 갑자기 얻은 자는 갑자기 망하게 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어떻게 전세(傳世)의 장구함이 단군ㆍ기자와 같을 수 있겠는가.

■사군(四郡) 이부(二府)

◯한 효무제(漢孝武帝) 때 우거(右渠)를 평정하고 4군(郡)을 설치하였는데 낙랑(樂浪)의 군 소재지는 조선현(朝鮮縣), 임둔(臨屯)의 군 소재지는 동이현(東暆縣), 현도(玄菟)의 군 소재지는 옥저(沃沮), 진번(眞番)의 군 소재지는 잡현(霅縣)에 있었다.

효소제(孝昭帝) 때에는 진번군을 혁파하고 요동성과 현도성을 쌓았다. 뒤에 다시 이부(二府)를 설치하여 조선의 옛 땅 평나(平那)ㆍ현도(玄菟)를 평주(平州)로 만들고, 임둔(臨屯)ㆍ낙랑(樂浪)을 동부(東府)로 만들어 모두 도독부(都督府)를 두었다.

■삼한(三韓)

◯마한(馬韓)

마한(馬韓)을 신라 사람들은 서한(西韓)이라 하였다. 서한의 풍속은, 사람들이 산간(山間)과 해곡(海曲)에서 살면서 각각 수장(帥長)을 두었는데, 그들을 ‘신지(臣智)’라 하며, 또는 ‘읍차(邑借)’라 불렀다. 그 사람들은 성곽(城郭)이 없었고 토실(土室 움집을 말함)에 거처했는데, 지붕은 풀로 이었고 지붕 위에 지게문을 내었다. 노끈에 구슬을 꾀어 머리를 장식하여 귀에 늘어뜨렸고, 비단 도포[帛袍]를 입었으며 짚신[草蹻]을 신었고, 금(金)ㆍ은(銀)ㆍ비단[錦]ㆍ모직[罽]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의 성질은 용맹스럽고 사나우며 떠들썩하였다. 활ㆍ창ㆍ방패를 썼으며, 귀신을 좋아하여 5월에 밭갈이와 모종내기가 끝나면 여럿이 모여 노래와 춤으로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고,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또 그와 같이 하였다. 국도(國都)와 방읍(方邑)에 각각 한 사람씩 세워 천신(天神)을 맡아 제사 지내게 하고, 그를 ‘천군(天君)’이라 하였다. 그리고 따로 읍(邑)을 두어 큰 나무를 세워 방울을 달아 놓고 쳤는데, 그것을 소도(蘇塗)라 하며, 엄숙하게 섬기기를 서역(西域)에서 부처를 섬기는 것과 같이 하였다.

마한왕(馬韓王) 준(準)이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는데, 원양국(爰襄國)ㆍ대석색국(大石索國)ㆍ소석색국(小石索國) 등 50여 나라로 그 가운데에 큰 나라는 1만 가구(家口), 작은 나라는 수천 가구였다.

진 무제(晉武帝) 때 공물(貢物)을 바쳤고, 태희(太煕) 원년(290)에 와서는 동이교위(東夷校尉) 하감(何龕)에게 나아가 토산물을 바쳤다. 함희(咸煕) 3년(266)에도 입조(入朝)하였으며, 그 다음해에는 내부(內附)할 것을 청하였다.

진한(辰韓)

진한은, 본래 진(秦) 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와서 살았다 하여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그들이 자립(自立)하지 못하여 마한(馬韓)이 임금을 세워 주고 마한에 부속시켰다.

그 땅은 오곡을 키우는 데 알맞으며 잠상(蠶桑)ㆍ직겸(織縑)이 넉넉하였다. 시집가고 장가드는 데에 예가 있었으며, 풍속에는 남녀의 분별이 있고, 길 가는 사람들이 길을 양보하였다.

변한(弁韓)

변한은, 낙랑(樂浪)의 후예인데 진한(秦韓)의 부용국(附庸國)이다. 변진(卞辰)ㆍ구야(狗邪)ㆍ염해(冉奚)ㆍ불사(不斯)ㆍ변락노(弁樂奴) 등 이족(夷族)으로 이한(二韓)에 복속한 나라가 각각 12국이었는데, 큰 나라는 가호(家戶)가 4, 5천이었고 작은 나라는 6, 7백 호였다. 또 속읍(屬邑)에는 각각 우두머리를 두었는데, 이들을 신지(臣智)ㆍ험칙(險側)ㆍ번예(樊濊)ㆍ살해(殺奚)ㆍ읍차(邑借)라 불렀다.

삼한(三韓)에 속국(屬國)이 78국인데,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에는 보이나 동사(東史)에는 전하지 않는다.


▣기언 제33권 원집 외편

■가락(駕洛)

◯가락은 신라의 남쪽 경계 바닷가에 있는 동떨어진 나라였다. 처음에는 군장(君長)이 없다가 시조(始祖)가 화생(化生)한 것은 바로 동한(東漢) 건무(建武) 18년(42)이었다. 9락(落)에 9간(干)이 있었는데, 그들을 신명(神明)으로 여기고 첫 번째 출생된 자를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고 호를 수로(首露), 성(姓)을 김(金)이라 하고, 나라를 세워 호를 가락(駕洛), 또는 가야(伽倻)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가락가야(駕洛伽倻)’라는 것이다.

그 다음 다섯 사람은 각각 5가야(伽倻)의 주(主)가 되었는데, 첫째는 아나가야(阿那伽倻), 지금의 함안군(咸安郡)이다. 둘째는 고령가야(古寧伽倻), 지금의 함창현(咸昌縣)이다. 셋째는 대가야(大伽倻), 지금의 고령현(高靈縣)이다. 넷째는 벽진가야(碧珍伽倻), 지금의 성주목(星州牧)이다. 다섯째는 소가야(小伽倻) 지금의 고성현(固城縣)이다. 이다. 수로(首露)가 선 지 7년 되는 해에 아유타국(阿隃陀國) 임금의 딸을 얻어 그를 세워 왕비로 삼으니, 이 사람이 ‘황옥 부인(皇玉夫人)’이며, ‘보주 태후(普州太后)’라고도 한다. 태후의 성은 허씨(許氏)인데 어떤 사람은 ‘남천축국(南天竺國)’ 임금의 딸이라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서역 허국(西域許國)’ 임금의 딸이라고도 한다. 또, 허황(許黃)의 《국지(國誌)》에, 그 선군(先君)의 명(命)을 기록하기를,

“동방(東方)에 가락원군(駕洛元君)이 있어서 딸을 얻어 아내로 삼고 바다에 떠서 왔다.”

고 되어 있다. 수로(首露)가 다스릴 때에는 백성이 크게 편안하여 사방(四方)에서 와서 그를 본받았다. 음집벌(音汁伐)과 실직곡(悉直谷)이 땅을 다투어 서로 싸웠는데, 두 나라는 신라에 그 문제를 질정해 왔다. 신라는 수로가 신명(神明)의 정치를 한다고 생각하여 그를 불러 그 일을 물어보았는데, 수로가 와서 다투던 땅을 음집벌에 소속시켜 주어 두 나라의 난(難)이 해결되었다. 신라의 임금 파사(婆娑)는 6부의 대인(大人)들에게 명하여 수로(首露)에게 향례를 베풀게 하였다. 여러 부(部)들이 그를 두렵게 생각하여 모두 이찬을 시켜서 객을 대접하게 하였는데, 다만 한지부(漢祗部)만이 객을 접대하는 데에 귀인(貴人)을 시키지 않았다. 그러자 수로가,

“예에 게으르며 공경치 못하다.”

하고, 대인 보제(保齊)를 쳐 죽였다. 가락에서 죄를 얻고 망명한 자가 음집벌(音汁伐)에 의탁하고 있으므로, 수로가 사신을 보내어 수색하게 하였는데, 음집벌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로가 군사를 들어 치니 음집벌이 항복하였다. 그후에 신라 지마(祗摩)가 즉위하여 가락을 치다가 황산하(黃山河)에서 패하였다. 이리하여 나라가 더욱 강해져서, 그 땅이 동으로는 황산하에 이르고, 북으로는 대량주(大良州 합천)에 이르며, 서남방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서북방으로는 거타주(居陁州)까지였는데 그곳은 백제(百濟)와의 경계이다.

후한(後漢) 효령제(孝靈帝) 중평(中平) 6년(189)에 태후(太后) 허씨(許氏)가 졸(卒)하니 나이가 157세였다. 태후는 아들 10형제를 두었는데, 어머니 성을 따른 자가 두 사람이라 한다. 후한(後漢) 효헌제(孝獻帝) 건안(建安) 4년(199)에 수로가 졸하니, 나이가 158세였다. 납릉(納陵)에 장사 지냈다. 아들 거등(居登)이 즉위하여 칠점산인(七點山人) 참시(旵始)를 불러들이고, 초현대(招賢臺)를 지었다. 마품(麻品), 거질미(居叱彌), 이시품(伊尸品)에게까지 전승(傳承)하여 오다가 좌지(坐知) 때에 이르러서 용녀(傭女)를 얻어 총애하니, 여당(女儻)들이 용사(用事)하여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 신하 원도(元道)가 간하고 시초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해괘의 점사에,

“발가락을 풀어야 벗이 와서 믿을 것이다.”

라고 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좌지가 사례하고 여자를 하산(荷山)에다 쫓아내니 나라가 다스려지고 부강해졌다. 그후로 취희(吹希), 질지(銍智)에게 전하였는데, 질지가 국모(國母)인 황옥 부인(皇玉夫人)께 제사를 올렸다. 질지가 졸(卒)하니 감지(鉗知)가 즉위하고, 감지가 졸하니 구형(仇衡)이 즉위하였다. 신라 법흥왕(法興王) 원년(514)에 구형이 신라에 항복하니, 왕이 객의 예로써 대접하고, 그 나라를 금관군(金官郡 지금의 김해(金海))으로 삼아 그의 식읍(食邑)으로 봉해 주었는데, 문무왕(文武王)이 즉위하고 나서는 금관 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다. 가락은 무릇 10세(世) 동안 4백 91년을 일기로 나라가 망하였다.


▣기언 제34권 원집 외편

■예맥(獩貊)

◯예맥은 본래 조선(朝鮮)의 옛 땅이다. 남쪽으로는 진한(辰韓)과 접하였고 북쪽으로는 고구려ㆍ옥저(沃沮)와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낙랑(樂浪)에 이르렀다.

한 효무제(漢孝武帝) 원삭(元朔) 5년(서기전 124)에 예의 임금 남려(南閭)가 조선을 배반하여,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에 나아가 항복하니 그 땅을 창해군(滄海郡)으로 삼았다. 수년 만에 파(罷)하고 건무(建武) 연간에는 거수(渠帥)를 현후(縣侯)로 봉하니, 모두 세시(歲時)에 조공(朝貢)을 하였다.

그들의 언어와 법속(法俗)은 고구려와 같았으며 사람들의 성품도 우직하고 기욕(嗜欲)이 적어 염치를 아는 풍속이 있었다. 동성(同姓)간에는 혼인을 하지 않았으며 주옥(珠玉) 같은 것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 부락에 범법자가 있게 되면 산 채로 우마(牛馬)를 내게 하였고 군(軍)에 내는 세금은 중국과 같았다. 한(韓) 나라 건광(建光) 원년(121) 유주 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 태수(玄菟太守) 요광(姚光), 요동 태수 채풍(蔡諷)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예맥의 거수를 격살하고 그 군사와 재물을 모두 노획해 갔다.

주(周) 나라 때에 이미 맥이 있었는데, 맥인들이 사는 곳은 산이 깊고 험조하여 탐낼 만한 땅이 못 되었다. 맥 사람들은 흥망이나 또는 세상이 바뀌는 것도 몰랐다. 맥이 어느 대(代)에 나라를 세웠으며, 또 어느 대에 절종(絶種)되었는지도 모른다. 《사기(史記)》에도 말이 없다.

당(唐) 나라 때에 와서 말갈(靺鞨)이 경(慶)ㆍ염(鹽)ㆍ목(穆)ㆍ하(賀)의 4주(州)를 예맥 옛 땅에 두었다.

지리지(地理志)에 강릉(江陵)을 옛 예국이라 하였고, 수춘(壽春 지금의 춘천)을 옛 맥국이라 하였다. 강릉에 예성(獩城)이 있다.

■말갈(靺鞨)

◯말갈은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다. 고구려의 별종으로 야발(野勃)이 있었는데, 3세손 걸걸중상(乞乞仲象)이 그 무리와 함께 요하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쪽을 보존하고 있었다. 중상이 죽고 아들 조영(祚榮)이 대를 이었다. 조영은 용감하며 말 타고 활쏘기를 잘했는데, 고구려에서 망명한 무리를 모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震)이라 하였다.

사신을 보내 돌궐(突厥)과 통교하였다. 지방(地方)이 5천 리, 가호(家戶)가 10여 만, 우수한 군사가 수만이었다. 부여ㆍ옥저ㆍ변한ㆍ조선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개원(開元) 원년(713)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하여 비로소 말갈이란 이름을 버리고 발해로 부르게 되었다. 속말말갈에는 또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있었는데, 개원 연간에 흑수주(黑水州)에 장사(長史)를 두었다.

■탁라(乇羅)

◯탁라는 남해(南海) 가운데의 나라이다. 처음에는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고을나(高乙那)ㆍ양을나(良乙那)ㆍ부을나(夫乙那) 3인이 화생(化生)하여 사람이 되니, 오곡을 심어 가꾸며 목축을 하여 무리를 이루었다. 3인은 3도(都)에 나누어 살며 각기 수장(帥長)이 되었다.

고을나의 15세에 고후(高厚)라는 자가 있어서 처음으로 신라와 통교하였다. 그때 객성(客星)이 나타났으므로, 신라국 임금이 고후를 성주(星主)라 이름하고 탐라(耽羅)라는 국호를 하사하였다. 뒤에 백제를 섬겼는데, 백제가 멸망하자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항복해 왔다.

고려 신성왕(神聖王 왕건(王建)) 20년(937) 탐라국의 태자(太子) 말로(末老)라는 자가 입조(入朝)하였고 의종(毅宗) 때 나라를 폐하고 군현(郡縣)을 두었다. 그 백성들은 어리석고 풍속은 검색(儉嗇)하며 귀신을 좋아하였다.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예양(禮讓)을 알았다. 사람이 죽으면 밭 사이에 묻었고 부처를 섬기지 않았다. 양마(良馬)ㆍ진주(眞珠)ㆍ대모(玳瑁)ㆍ나패(螺貝)가 나왔고 귤ㆍ유자(柚子)ㆍ황감(黃柑)이 풍부하였다. 산이 높고 바다가 험한데, 고기를 낚고 사냥하는 데에 어망(魚網)과 덫을 쓰지 않았다.


▣기언 제35권 원집 외편

■지승(地乘)

◯강남(江南)과 해양(海陽) 강남은 지금의 전주이고, 해양은 지금의 광주이다. 은 본래 마한의 땅으로 서남쪽이 바다에 접하였다. 소금ㆍ철ㆍ해산물ㆍ귤ㆍ유자ㆍ치자ㆍ비자(榧子)ㆍ죽전(竹箭) 등의 특산물이 산출된다. 해안 습속이 농사에는 힘쓰지 않고 고기 잡는 것으로 업을 삼았으며, 쌓아 두는 법이 없다. 강남에서는 닥나무ㆍ칠(潻)ㆍ매실ㆍ석류(石榴)ㆍ왕골ㆍ모시ㆍ파초ㆍ생강ㆍ짚ㆍ연[荷]ㆍ울금(鬱金) 등이 산출된다.

금마(金馬 익산(益山))에서는 순후하고 소박한 것을 숭상하니, 고국(古國)의 유풍이며, 김제(金堤)에는 5개의 거독(渠瀆)이 있어 논 9800결(結)이 모두 기름진 땅으로 오곡이 안 되는 것이 없다. 전주(全州)는 강해(江海)의 도회(都會)이고 화물을 실어 나르는 통로로 상인들이 모여드는 곳이므로, 이해에 밝아 백성들이 순박하지 못하다. 대방(帶方 남원)은 사람들이 날래며 말 타고 활쏘기를 숭상하였다.

청거(淸渠) 지금의 용담현(龍潭縣)이다. 의 동쪽 지방은 백성들이 질박하여 꾸밈이 적었으며, 도토리와 상수리를 길렀다. 승라(昇羅) 승평(昇平)과 나주(羅州) 는 풍속이 부려(富麗)한 것을 숭상하였고 남자답게 씩씩한 것과 특출나게 기운 쓰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담주(潭州) 담양부(潭陽府) 에는 준재(俊才)가 많다고 한다.

용안(龍安 지금의 익산군)에서는 옛 풍속으로 해마다 봄과 가을에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는데, 거기서 서약하기를,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 형제간에 우애 없는 자, 친구 간에 신용이 없는 자, 나라의 정사를 헐뜯는 자, 관리에게 불손한 자는 모두 내쫓고, 덕업(德業)에 힘쓰고 잘못을 바로잡으며, 환난(患難)을 구휼하여 예속(禮俗)을 이루어, 두터운 데로 함께 돌아가자.”

하고는, 모두 재배(再拜)하고 나이 순서에 따라 차례로 술을 마신다. 대체로 금마(金馬) 이남에서는 무당, 광대, 요사스러운 기예[淫技]와 여러 가지 놀이를 좋아하였다.

군산(群山 만경현(萬頃縣) 서쪽 바다에 있는 섬)은 바다 가운데 있는, 주위가 60리 되는 섬이며 후미진 곳이 있다. 변산(卞山)에서는 궁실(宮室)과 주거(舟車)를 만드는 데에 소용되는 목재들이 산출되고, 나주(羅州)에는 남해신사(南海神祠)가 있어 소사(小祀)를 지냈으며 대방(帶方) 남원부(南原府) 에는 남악사(南嶽祠)가 있다. 《상서(尙書)》 대전(大傳)에 이르기를,

“천자(天子)가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祭祀) 지낼 때, 오악(五嶽)은 삼공(三公)에, 사독(四瀆)은 제후(諸侯)에, 그 나머지는 백(伯)ㆍ자(子)ㆍ남(男)에 준하는 예로 한다.”

하였다. 이는 그 희생(犧牲)과 폐백(幣帛), 그리고 변두(籩豆 제기)와 작헌(爵獻)의 수를 말함이다. 제후는 자기가 통치하는 지역 안에 있는 명산대천에 제사 지낸다.

《예기(禮記)》에 “삼왕(三王)이 내[川]에 제사할 때 모두 하(河)에 먼저 하고 뒤에 해(海)에 한다.” 하였다. 그래서 진인(晉人)은 하에 제사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호지(惡池)에 먼저 하였으며, 제인(齊人)은 태산(泰山)에 제사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배림(配林)에 먼저 하였다. 종사(從祀 덧붙여 지내는 제사)에 먼저 고하는 것은 대신(大神)을 높이고자 해서이다. 산천(山川)에 제사할 때 해악(海嶽)을 가장 높이는데, 지금 사독(四瀆)에는 중사(中祀)를 하면서 해악에는 소사(小祀)를 함은 예를 잃은 처사라 하겠다.

탁라(乇羅)는 남해(南海) 가운데의 나라로 폭이 4백 리인데, 곡식으로는 보리ㆍ기장ㆍ차조가 잘 된다. 땅이 척박하여 백성들이 가난하며, 사람들은 미련하고 순박하며 습속은 검소하다. 3대 2의 비율로 여자가 많고 대부분 오래 산다. 좋은 말이 나고 감귤(柑橘)ㆍ대모(玳瑁)ㆍ진주[蠙珠]ㆍ치자나무ㆍ박달나무가 산출된다. 신라 때 고후(高厚)라는 자가 내조(來朝)하여 탐라(耽羅)라는 국호를 받았다. 고려 초에 와서 제주(濟州)를 설치하였다.


▣기언 제37권 원집

■배를 만들어서 곡식을 수송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는 장계

◯동해(東海)는 바람과 파도가 사나워 배와 노의 제도가 서해나 남해 같지 않습니다. 몇 아름드리 통나무를 파서 반으로 쪼개 이 두 쪽을 합하여 배를 만들며, 높은 돛이나 큰 노를 사용하지 않고 파도를 타고 들락날락하면서 고기잡이를 합니다. 동해에는 언제나 거센 바람이 많이 불고 때로는 바람이 없는데도 물결이 일곤 하는데, 이런 것을 ‘해악(海惡)’이라 합니다. 해악이 되면 고기잡이를 할 수 없습니다. 동해는 동ㆍ남ㆍ북쪽이 끝이 없으며 언제나 풍랑(風浪)이 언덕에 들이쳐 열 길씩이나 솟아오릅니다. 서풍이 불 때만 바다가 조용해지나 바다가 동요할 때는 서풍이라도 아주 사납습니다. 북풍은 더욱 두려운데 이따금 고기잡이하는 자가 갑자기 그 바람을 만나게 되면 배가 표류하거나 침몰되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만약 서해나 남해의 배를 동해에 갖다 놓는다면 배가 아무리 완벽하고 크더라도 여지없이 파손되어 배가 크면 클수록 더 빨리 뒤집히거나 파손될 것입니다.

큰 바다에 배나 노를 사용하는 것이 동해와 서해가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데, 사실상 동해는 보통의 배나 노는 없습니다. 이른바 동해의 배라는 것은 앞은 높고 뒤는 낮으며 윗부분이 고기 머리같이 뾰족한데, 한 길 남짓한 돗자리를 달고 파도와 함께 떠다닙니다. 그러나 튼튼하고 큰 통나무를 합하여 만든 것은 길이가 대여섯 길이나 되며, 그 다음 것은 서너 길로 아주 무겁고 견고합니다. 어부들은 7, 8월에 장마가 끝나거나 2, 3월에 눈이 녹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모두 농한기(農閑期)를 이용하여 여러 날을 두고 양식 준비를 해 가지고 산중에 들어가 소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여 배를 만들고, 그것을 끌어내릴 때는 소를 이용하는데 큰 것은 30마리나 동원합니다. 소를 몰 때는 소 한 마리에 사람이 좌우에서 부축하며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방어하는 자도 수십 명이 넘습니다.

산이 워낙 높고 험하여 먼 곳은 5, 60리나 되는데 배가 클수록 더욱 깊은 산중에서 만들어져 10개월씩이나 노력이 걸리오며, 계곡으로 끌어내릴 때는 반드시 오뉴월의 장마를 기다려 계곡 물이 불어난 다음이라야 비로소 바다까지 띄워 내리게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가뭄이 들어 계곡 물이 마르게 되면 해가 바뀌어도 끌어내리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고기잡이 배로는 큰 것이라야 적재량이 기껏 50석이고 다음은 40석 혹은 30석이오니, 작은 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곡식을 급히 수송해야 할 때를 당하여 곡식은 1만 섬이나 되는데, 고깃배로 백 번 수송해 봐야 겨우 몇천 석에 불과할 것입니다.

■두 창고의 기장을 변통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장계

◯이곳 부로(父老)들이 전하는 말을 들으니,

“만력(萬曆) 연간에 임진왜란과 흉년을 겪은 뒤로 모든 재정이 판탕하였는데 몇 해 동안 풍년을 만나 민간의 곡식을 거두어들임으로 해서, 임진란 이후 처음으로 창고의 비축을 갖게 되었으나, 산전(山田)에서 생산되는 곡식의 8, 9할 가운데 검은 기장[稷]은 가장 쓸모가 없고, 기장[穄]은 더욱 낟알이 없다.” 합니다.

본부는 산과 바다의 궁벽한 곳으로 지대는 높은 데다 들이 많고 메마르며, 바다 주변이 모두 곡식이 자랄 수 없는 모래땅이어서 기장을 심기에는 알맞지 않고, 대관령(大關嶺) 서쪽 깊은 산중에는 서리가 일찍 내려서 오곡(五穀)이 절반밖에 결실이 안 되는데 검은 기장이 가장 심합니다. 대관령 서쪽에는 검은 기장이 없고 기장은 대관령 동서를 통틀어도 파종하는 것이 아주 적으니, 기장이 없는 지역이라고 하여도 될 것입니다. 논의 벼포기 사이에 돌기장이 섞여서 나면 김맬 때 뽑아 버리지 않고 그냥 두는데, 한 경(頃)쯤 되는 논에 기장이 5분의 1, 혹은 6분의 2는 됩니다. 9월에 벼를 베기 전에도 기장은 껍질이 벌어져서 저절로 떨어지므로 베어 거둘 수가 없고, 또 그 낟알이 아주 작아서 겉곡식 한 말에 알곡은 한 되밖에 안 되니 이것은 피[稗] 종류이지 기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닷가 풍속이 낟알이 채 떨어지기 전에 이삭마다 훑어서 한 섬이 되면 대여(貸與)받았던 것을 갚곤 하니 기장이 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부 창고 중에서 장부에 기록된 수량으로는 검은 기장이 348섬 남짓하고 기장이 548섬 남짓하며, 이 밖에 상평창(常平倉)에는 검은 기장이 133섬 남짓하고 기장이 221섬 남짓합니다. 상평창의 곡식은 기본 모곡(耗穀) 외에 원곡(元穀) 3할에 해당하는 모곡에다 해마다 증가하는 잉여곡을 보태면 원곡 수량보다 배나 많아질 것이니 아무 실속도 없이 백성의 폐단은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풍년이라 하더라도 시급하게 변통을 해야 할 것인데, 흉년을 만나서 2월에 대여곡을 나누어 준 뒤로 지방 백성과 유민(流民)들 가운데 대여곡을 먹는 자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 지금은 583호구나 됩니다.

보리가을까지 아직 시일이 많이 남았는데, 찾아오는 기민(飢民)들은 5, 6백이 넘으니 본부의 저축은 바닥이 날 것이고, 간성(杆城)에서 수송해 올 대여곡이 비록 5백 섬이라고 하지만 북쪽으로 운항한 많은 배들이 영해(寧海)에 있으면서 돌아올 기약이 없습니다. 간성에서 곡식을 수송해 오려면 많은 선박이 필요한데, 영해의 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때는 본부의 곡식은 바닥이 나고 기민은 흩어진 다음입니다. 그렇게 되면 굶어 죽는 자가 들판에 가득하더라도 그냥 보기만 하고 구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상평창의 기장을 가지고, 한편으로는 공문을 올리고 한편으로 대출을 하여 구제해야 되겠습니다. 지금의 급한 명을 조금도 늦출 수 없으므로 원장부에 있는 것도 곁들여 아뢰옵니다.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변통할 것을 각별히 참작하여 주시옵소서.


▣기언 제38권 원집

서애 유성룡(西厓 1542-1607) 유사(遺事)

◯...고(故) 재상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이 임종할 때, 차차(箚子)를 올려 조정의 붕당에 관한 일을 말하고,

“후일에 어찌할 수 없는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응교 이이(李珥)가 노하여 상소하기를,

“그가 질투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때 이이를 중용(重用)하였으므로 여론이 대부분 그를 따라서 이준경의 관작을 삭탈할 것을 논의하였다. 공이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대신이 임종할 때 올린 말이 옳지 않으면 그것을 변론할 따름이니 죄주기를 청한다면 조정에서 대신을 대우하는 체통을 잃게 된다.”

하니, 그 의론이 중지되었다.

...한번은 상이 조용히 여립(汝立)의 일을 말하고, 이어서 조정의 신하 중에 그의 간악함을 미리 안 자가 누구인가를 물었다. 공이,

“신의 망우(亡友) 이경중(李敬中)이 일찍이 그를 등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도리어 배척을 당하여 불우하게 죽었습니다.”

하자, 상이,

“배척한 자가 누구인가?”

하므로,

“신이 잊었습니다마는 사관(史官)의 기록에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물어보니 장령 정인홍(鄭仁弘)과 지평 박광옥(朴光玉)이라 하므로 명하여 두 사람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정인홍이 당시에 중명(重名)이 있었는데 모함하는 것이라 하여 매우 화를 냈다.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왜적을 진도(珍島)에서 대파하고 한산도(閑山島)에 주둔하여 연이어 적을 격파하니, 왜적이 그를 염려하여 정유년(1597, 선조30)에 첩자를 시켜 우리를 유인하여,

“청정(淸正)이 지금 막 바다를 건너오고 있으니, 수군으로 맞아 싸우면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우리의 실정을 염탐하려 한 것이다. 이순신이 거짓임을 알고 듣지 않으니, 절도사 원균(元均)이 이순신의 공이 높아 가는 것을 시기하여,

“순신이 명령을 받고도 출병하지 않는다.”

하였으므로, 부득이 출병하니 청정은 이미 바다에서 떠난 후였다. 이순신은 공이 발탁한 사람이었으므로, 공을 비난하는 자들이 이순신이 일을 그르쳤다는 것으로 비방의 구실을 삼자, 상이 노하여 법으로 조치하고 원균(元均)으로 대신케 하려 하였다. 공이 힘써 다투며,

“균은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과연 대패하여 원균은 도망치다 죽고 호남 지역은 적의 수중에 떨어지자, 김명원(金命元)과 이항복의 건의에 따라 이순신을 다시 등용하였다.

■오리(梧里)이상국(李相國 이원익 1547-1634 88세) 유사(遺事)

◯...정유년(1597, 선조30) 적이 다시 군사를 증강하여 우리를 쳐들어오면서 우리를 속여서, 우리의 수군(水軍)을 부산 앞바다에 도열(堵列)케 하여 허실을 살피려 하였는데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듣지 않자, 용사자(用事者)가 이순신이 일을 그르친다 하여 이순신은 죄를 받고 물러났다. 공이 계를 올리기를,

“이 사람이 죄를 받는다면 큰일이 잘못됩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 일에 관해서 공에게 묻자, 다시 극력 의견을 말하였는데 미처 상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원균(元均)이 와서 대신하니, 상의 본 의도는 아니었다. 원균은 과연 패주하여 적에게 피살되었다. 그후에 상이 다시 이순신을 등용하자 부서진 나머지를 가지고 몸소 부지런히 사졸을 무순(撫循)하니, 군사들의 사기가 다시 진작되었다. 공이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일을 계획할 때,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군사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푸니 군사들이 뛸 듯이 좋아하며 분전(奮戰)할 것을 생각하였다. 이순신이 말하기를,

“장사들로 하여금 죽음을 잊도록 한 것은 상국의 힘이다.”

하고, 이어 탄식하기를,

“내가 장수가 되어 외방에 있으면서 당로자(當路者)들이 참소하고 의심할 때 상국이 전적으로 나의 계책을 써서 이제 수군(水軍)이 약간 완비됐다. 이는 나의 힘이 아니요, 상국의 힘이다.”

하였다. 드디어 남해 앞바다에서 싸워 적을 대파하고, 이순신은 군중에서 전사하였다.

...기해년(1599, 선조32) 2월에 공이 복명하니 상이 위로하기를,

“혈성(血誠)으로 변무(辨誣)하느라 수고가 많았소.”

하였다. 공이 사례하고 상소하기를,

“유성룡은 청렴 개결하고 정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으며 나라를 걱정하고 사가(私家)를 걱정하지 않으니 그 마음이 슬픕니다. 이 사람이 배척되면 그와 친하다 하여 배척되는 자도 있을 것이고, 의론을 달리한다 하여 배척되는 자도 있게 되어 사류(士類)가 순식간에 모두 배척될 것이니 국가의 복이 아닌 듯싶습니다.”

하고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이때 적은 이미 바다를 건넜고, 우리의 모든 대병(大兵)은 다 경성에 집중돼 있는 데다, 또 군사를 남겨 뒤에 대처하자는 의론이 있어 사태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자 상이 매우 급히 독촉하였으므로, 공이 부득이 나아가 일을 보다가 다시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여 열세 번이나 정고(呈告)하고 차자를 네 번이나 올렸지만 상이 허락하지 않다가, 4월에 가서야 허락하고, 판중추로 개임(改任)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상이 반정(反正)하자, 공이 다시 영상이 되어 입경하여 사례하니, 도민(都民)의 부로(父老)들이 공을 바라보면서 서로 경하하기를,

“이 상공이 오셨다.”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광해가 폐위되고 죄인들도 모두 복형(伏刑)하자, 그들을 돕고 추종하던 자들을 공이 모두 가벼운 형벌로 다스리기를 청하여, 신광업(辛光業) 등은 을묘년에 공을 사형으로 논죄하였는데도 모두 사형을 면하는 속에 끼이니, 공을 모르는 자들은 공이 혐의를 피하려 한다 하였으나 동요되지 않았다. 사형된 사람의 재산을 공신 등이 이미 모두 몰입(沒入)하자, 공이 옳지 못하다 하여,

“박승종(朴承宗)ㆍ유희분(柳希奮) 같은 사람의 재산을 속공(屬公)하는 것은 옳지만 적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대비가 광해를 꼭 죽이려 하니 공신 등이 모두들 말하기를,

“죽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광해는 스스로 천명을 끊었으니 그를 폐위시키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나, 그를 죽이는 데에 이른다면, 노신은 이미 임금으로 섬겼으니 마땅히 이제 조정을 떠나야 하겠습니다.”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니 상이,

“마땅히 목숨을 보전케 하리라.”

하였다. 어떤 사람이 정철(鄭澈)의 관작을 복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공에게 묻자 공이 답하기를,

“철을 어떤 이는 군자라 하고 어떤 이는 소인이라 하나, 이제 죄를 지었던 자들이 모두 용서받았으니 철도 풀어 줄 만합니다.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철이 실로 주동한 것으로 억울하게 많은 사람이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슬프게 여깁니다. 신이 일찍이 대사헌으로서 이 사람을 논죄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둘 다 풀어 주라.”

하였다. 이로 해서 기축옥사에 관련되었던 자들이 모두 그 벼슬에 복직되었다.

...신미년(1631, 인조9) 여름에 변방에 급한 보고가 있자 공이 입경하니 상이 인견하고 후사(厚賜)하였다. 두어 달 머물러 있다가 향리에 돌아와 차자를 올리기를,

“현재의 정세가, 적병이 비록 물러갔으나 조만간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니, 바라건대 분발하여 힘써 무익한 일을 중지하고 병사(兵事)에 전념하여 적의 내침에 대비하소서. 강도(江都)로 보장(保障)을 삼고 남한산성으로 보거(輔車)를 삼아 수리하고 저축하여 마땅한 장수를 얻어 맡기고, 삼남(三南)을 수습하고 양서(兩西)를 존휼(存恤)해서, 군민으로 하여금 윗사람과 친하게 하여 기세가 이어져 통틀어 한집안이 되게 한다면, 외적의 침입은 염려할 게 못됩니다. 이러한 것은 신하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전하가 정신을 하나로 집중해서 감응(感應)이 두루 미친 뒤에야 이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될 수 없고 식량이 없으면 백성이 없게 되므로 백성의 노력을 아끼고 백성의 식량을 여유 있게 하는 것이 제왕의 급무이온데, 근래에 오로지 원망을 감당하는 것을 현명하다 하고 백성을 기쁘게 하는 것을 혐의쩍게 여겨서, 국가의 권징(勸懲)이 이와 같으니 전하가 비록 백성을 보호하고자 한들 은택이 아래로 끝까지 미치지 못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위문하게 하고, 복명하자 그 거처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모옥(茅屋)이 낡아서 비바람도 가리지 못할 지경입니다.”

하므로, 상이 말하기를,

“재상 40년에 몇 칸 모옥이 있을 뿐이란 말인가?”

하고, 본도(本道 경기도를 이름)에 정당(政堂)을 짓게 하여 하사하니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 치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다시 상소하기를,

“신이 비록 치사하더라도 나라에 위난(危難)이 있으면 마땅히 죽음으로써 전하께 보답하겠습니다.”

하였다.


▣기언 제48권 속집

■탐라지(耽羅誌)

탁라(乇羅 제주도)는 남해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나라로서 너비가 4백 리쯤 되며 해로(海路)로 970리 거리에 멀리 떨어져 있다.

본래 구이(九夷) 중의 하나로 상고 시대에 고을나(高乙那)ㆍ양을나(良乙那)ㆍ부을나(夫乙那) 세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이 화생(化生)하여 사람이 되므로 비로소 생민들의 시조가 되었다. 이 세 사람이 기반을 닦은 곳을 상도(上都)ㆍ중도(中都)ㆍ하도(下都)라 하였다.

고을나의 15대 손자인 고후(高厚)와 고청(高淸)이 처음으로 신라와 국교를 맺었다. 그때 신라에 객성(客星)이 나타났으므로, 신라의 임금이 고후를 성주(星主), 고청을 왕자(王子)라고 이름하였는데 왕자라는 것은 총애(寵愛)한다는 명칭이다.

처음에 고후와 고청이 배를 타고 탐진(耽津 강진(康津))에 도착하였으므로 탐라(耽羅)라는 국호를 명명(命名) 받았다. 그 후세에 백제에 항복하여 탐탁라(耽乇羅)라고 하였으며 은솔(恩率)이라는 벼슬을 하사받았는데 뒤에 좌평(佐平)이 되었다.

고려 태조 20년에 탐탁라에서 태자 말로(末老)를 파견하여 조회하였다.

숙종(肅宗)이 즉위하여 그들을 격멸시켜 군현으로 삼았다. 원종(元宗) 때 와서 탐탁라가 모반하므로 김방경(金方慶)을 파견하여 그들을 쳐서 평정하였다.

충렬왕(忠烈王) 원년에 원 나라가 탐라총관(耽羅摠管)을 설치하여 소ㆍ말ㆍ낙타ㆍ나귀ㆍ양 등을 방목하다가 20년에 총관을 없애고 고려에 귀속시켰다.

고려가 제주목(濟州牧)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 6년에 원 나라가 다시 군민 만호(軍民萬戶)를 설치하여 말을 방목하다가 곧 폐기하였다. 공민왕(恭愍王) 21년에 원 나라가 다시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였다가, 원 나라가 망하자 다시 고려에 예속되었다.

홍무(洪武) 7년 원 나라의 목자(牧子)가 난을 일으켜 자칭 동서하치(東西哈赤)라 하면서 장관을 죽이므로 고려에서 최영(崔瑩)을 파견하여 그들을 토벌하여 모두 죽였고, 우리 태조 5년에 주(州)ㆍ목(牧)에 판관(判官)을 설치하였다.

태종(太宗) 2년에 성주와 왕자를 고쳐서 좌우도지관(左右都知管)을 삼고 정의(旌義)와 대정(大靜) 두 고을을 설치하였다.

세종 27년에 좌우도지관을 없애고 읍에서 준수한 인물을 뽑아 상진무(上鎭撫)를 두었다.


▣기언 제55권권 속집

■궤장(几杖 안석과 지팡이)을 받은 뒤 진언하는 소(疏)을묘년(1675, 숙종1)

◯생각하오니, 신은 못난 자질로 나이만 제일 높아졌습니다. 이제 해와 달이 바뀌어 신의 나이가 82세입니다. 신은 폐척(廢斥)에서 기용(起用)되어 특별한 지우(知遇)를 융성하게 받을 줄 생각도 못하였는데, 이미 지위가 인신(人臣)으로서는 끝까지 올랐으며 이에 더하여 궤장(几杖)을 내리시니, 우례(優禮)의 성대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신은 늙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정력(精力)이 소망(消亡)되었는데, 삼공(三公)의 자리에 앉아 보답함도 하나 없이 한갓 헛이름으로 세상을 속이고 있으니, 백료(百僚)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신은 용렬하고 다른 장점도 없는데, 무사히 수(壽)를 하였기에 이 수하는 것으로 전하께 고하기를 청하옵는바, 이 미신(微臣)의 헌근(獻芹)하는 정성으로 받아 주십시오.

신은 우졸(迂拙)하여 세상에 쓰여지지 못함이 오래되었습니다. 평생을 두고 스스로 힘써 온 바 세 가지 지킴이 있으나, 아직 하나도 이루지를 못하였습니다. 첫째는 입을 지키는 것이고, 둘째는 몸을 지키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을 지키는 것인데, 입을 지키면 망언(妄言)이 없고, 몸을 지키면 망행(妄行)이 없으며, 마음을 지키면 망동(妄動)이 없습니다. ...

■기로소(耆老所 70세 이상으로 정2품 이상)에 대한 기사(記事) 병진년(1676, 숙종2)

◯원년(元年) 을묘(1675, 숙종1)에 상이 노신(老臣)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는데, 경연(經筵) 신(臣 이항)이 상께 아뢰기를,

“국제(國制)에 벼슬이 정2품이고 나이 70세 이상인 자는 모두 기로소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목(穆)은 상께서 높여 쓰신 신하로서 지위가 삼공(三公)에까지 이르렀으며, 나이 82세이니 기로소에 들어감이 당연합니다. 고사(古事)에 문리(文吏)가 아니면 못 들어간다 하였는데, 목은 삼공의 지위에다 그 겸임(兼任)한 바 영경연사(領經筵事)ㆍ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같은 것은 모두가 문리의 직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만이 기로소에 들어가지 못합니까? 이는 기로를 대우하는 뜻이 아닙니다.”

라고 하여 상의 윤허가 있었던 것이다.

■은거시(恩居詩) 서(序)

◯상 즉위 4년(1678, 숙종4)에 노신(老臣)이 늙어서 판중추부사를 물러나 향리로 돌아갈 것을 청하자, 경연(經筵) 신(臣) 이항(李沆)이 상께 아뢰어 거택(居宅)을 하사한다는 명이 있었다. 이에 신은 극력 사양해 마지않으며,

“옛날 안영(晏嬰)이 진(晉) 나라에 사신 갔을 때 경공(景公)이 그의 집을 다시 지었는데, 돌아오자 집이 벌써 완성되었으므로 안영은 일단 배례를 드리고 바로 그 집을 헐었습니다. 이제 상께서 신을 귀히 여기고 아끼심은, 경공이 안영에게 하였던 것보다 못하지 않은데, 신의 전하에 대한 보답은 안영에 미치지를 못합니다. 신같이 안영보다 못한 자가 안영과 같은 사람도 헐어 버린 그러한 집에 편히 산다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라고 하였으나, 상은 끝내 허락하지 않으셨다.

국초(國初)부터 상의 대까지 2백 년간 거택(居宅)을 하사받은 이가 3인이었으니, 세종(世宗) 때의 정승 황 익성공(黃翼成公 황희(黃喜))과 선조(宣祖) 때의 정승 이 문충공(李文忠公 이원익(李元翼)), 그리고 지금의 노신(老臣)이다. 나이 80에 두터운 은총을 받아 1년에 다섯 번이나 관직을 옮겨 지위가 삼공(三公)에까지 이르렀고 늙어서 물러날 것을 고함에는 궤장(几杖)을 내리시고 향리로 돌아오니 거실(居室)을 지어 주라 명하셨다. 노신이 세 조정에 걸쳐 벼슬을 역임하며 이제 84세가 되었으니,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모두 임금의 은택(恩澤) 가운데에 있었다. 내리신 거실의 이름을 ‘은거(恩居)’라 하고 이어 시를 지어 성덕(聖德)을 노래하노니 도당(陶唐) 때 격양(擊壤)의 유풍(遺風)이로다. 아래와 같이 시를 짓는다.

밤낮으로 공경하는 이 마음 / 夙夜祗懼

우러러 하늘을 대한 듯하며 / 對越在天

양심에 꺼리는 부끄러움 없어 / 不愧屋漏

행여 허물이나 없게 되고져 / 庶無咎諐

아, 크도다 성철하심이여 / 於皇聖哲

늙은이 대우를 먼저 하시니 / 老老是先

사방이 모두들 태평하여 / 四方煕煕

길이길이 천만년 누리오리다 / 於千萬年


▣기언 제67권 자서

■허미수(許眉叟) 자명(自銘)

◯수(叟)의 성명은 허목(許穆)이요, 자는 문보(文父)다. 본디 공암 사람으로 한양(漢陽)의 동쪽 성곽 아래에서 살았다. 수는 눈썹이 길어 눈을 덮었으므로 스스로 미수(眉叟)라 호(號)하였다. 나서부터 손금이 문자(文字)의 형태로 되었으므로, 또한 스스로 문보(文父)라 자(字)하였다.

수는 평생에 고문(古文)을 지극히 좋아하여 항상 자봉산(紫峯山) 속에 들어가 고문의 공씨전(孔氏傳)을 읽었다. 늦게야 문장을 성취하니, 그 문장은 방사(放肆)하였지만 난잡하지 않았으며 희활(稀闊)함을 좋아하여 스스로 즐겼다. 마음으로는 고인들의 남긴 교훈을 따라 항상 스스로를 지켜 몸에 허물을 적게 하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아래와 같이 자명(自銘)한다.

“말은 그 행동을 가리지 못하며, 행동은 그 말을 실천하지 못했도다. 다만 자족(自足)하여 성현의 글을 기꺼이 읽었으나, 하나도 그 허물을 더는데 도움된 것이 없었도다. 이런 사실을 돌에 써서 뒷사람을 경계하노라.


▣기언 별집 제 8권

■의정부(議政府) 동서벽(東西壁)에 제명(題名)한 안(案)에 대한 서

◯우리 태조가 당초에 도평의사(都評議司)를 설치해서 나라 다스리는 일을 관장하게 하고 삼군부(三軍府)를 세워서 병사(兵事)를 다스렸다. 국가를 처음 안정하였으므로 대개 고려의 옛 제도를 따른 것이었다. 그후 우리 공정대왕(恭靖大王 태종) 때에 두 부를 고쳐서 의정부로 만들고 좌의정ㆍ우의정을 두어서 정1품으로 하고, 그 다음 시랑(侍郞)ㆍ찬성(贊成)이 종1품이고, 또 그 다음 참찬이 정2품이었다. 그후 영의정을 더 두어서 삼공(三公)으로 만들면서 시랑을 없애고 좌ㆍ우 찬성과 좌우참찬은 그대로 두었다. 14년에 다시 영부사(領府事) 1인, 판부사(判府事) 2인을 두었는데 모두 정1품이고, 동판부사(同判府事) 2인은 종1품이었는데 얼마 안 되어서 없애고 다시 옛날 관직대로 회복하였다.

찬성은 이첨(李詹)ㆍ유탁(柳濯)으로부터 시작되고 참찬은 이래(李來)ㆍ권근(權近)으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3백 년을 내려오고 있다. 그동안 어질고 재능이 있어, 벼슬에 있으면서 이름이 드러나 문적에 실린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그런데 중엽 이래로 국가에 사변(事變)이 많아서 전적(典籍)이 모두 없어졌고, 오직 의정 삼공만이 여러 전임(前任)의 옛 문안(文案)이 있다. 그러나 찬성ㆍ참찬은 갖추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동부(東府)에는 간직된 문서가 없으니, 대개 없어져서 전해 오지 못한 것이다.

이번에 본조의 유문(遺文)ㆍ고사(古事)ㆍ행장(行狀)ㆍ비지(碑誌)를 널리 상고하여 여러분의 성명을 추후하여 기록하였으나, 역시 백에 하나가 되지 않는다. 찬성 자리는 꼭 충수(充數)하지 않고 반드시 기로 구신(耆老舊臣)으로서 덕 있는 사람을 임용하였는데, 최근 효종ㆍ현종 이래에는 충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궐원(闕員)된 지가 오래었다. 본조에 벼슬하여 현저한 제공(諸公) 중에 혹 오래되어 선후(先後)를 알 수 없는 것은 대략 어느 세대 어느 조정이라고 기록하였다.

금상 즉위(卽位) 원년(元年) 가을 8월 방사백(旁死魄 매월 초이튿날을 말함) 다음날(임신)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허목은 서한다.


▣기언 별집 제 10권

■김생(金生)의 친필 뒤에 씀

◯내가 일찍이 4년 봄에 서울에 와서 동종(同宗)인 시랑(侍郞) 허옥여(許沃汝)를 찾아가 서적을 열람하다가 김생의 진적(眞蹟)을 얻어 보았다. 너무 기뻐서 잊지 못하고 진선(進善) 조희온(趙希溫 희온은 조속(趙涑)의 자. 호는 창강(滄江))에게 자랑하였더니, 희온이,

“그 글씨가 어떻게 되었소?”

물었다. 내가 그 대략을 얘기하고, 또 말하기를,

“그 글씨의 변동이 신(神)과 같아서 거의 필력(筆力)으로 될 수 없는 것인데, 비단이 오래되어 많이 헐어서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니, 그가,

“가만히 있소. 행초(行草)로 갈겨쓴 것이 실같이 곧게 내려 쓴 것으로 길이가 반 자쯤 되는 것 아닙니까?”

하므로, 그렇다고 하자, 그는 또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승평(昇平) 김 상국(金相國 김류(金瑬))의 서고(書庫)에서 이 글씨를 보았는데, 이것은 본래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 이 선생(李先生)에게서 나온 것으로, 주천(舟川 강유선(康惟善)) 강 상사(康上舍)에게 전해졌고, 김 상국은 강씨(康氏)의 자손에게서 얻은 것이오.”

하였다. 아, 천하의 보배는 주인이 없고 얻은 사람이 갖는 것이니 지금 과연 허씨의 소유가 되었구나.

이어서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소설을 보여 주었는데, 송(宋)의 숭녕(崇寧 휘종(徽宗)의 연호) 때 한림 대조(翰林待詔) 이혁(李革)과 양구(楊球) 두 사람은 명필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 고려의 홍 학사 관(洪學士灌)이 송에 들어가 김생의 행초를 보였더니, 그 두 사람이 깜짝 놀라며,

“오늘 왕 우군(王右軍 진(晉)의 왕희지(王羲之)가 우군 장군(右軍將軍)을 지냈으므로 이름)의 진적(眞蹟)을 볼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하매, 관이 그때서야 김생의 글씨라 하니, 두 사람은,

“우군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신묘(神妙)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였다. 또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우리나라의 필법을 논하면, 김생이 제일이고 요 학사(姚學士 신라(新羅) 요극일(姚克一)의 벼슬이 시서 학사(侍書學士)임)와 중 탄연(坦然 고려(高麗)의 중, 호는 법운(法雲))과 영업(靈業 신라 헌덕왕(新羅憲德王) 때 중)이 그 다음이다.’ 하였다. 내가 계림(鷄林)에 가서 들으니,

“김생은 원성왕(元聖王) 때 사람으로 산중에 들어가 나무를 꺾어 땅에다 글씨를 썼는데 우군의 글씨를 배워


▣기언 별집 제 14권

■삭낭자전(索囊子傳)

◯완산(完山 전주(全州))에 한 거지가 있었는데 이름을 물어도 모른다 하고, 성을 물어도 모른다 하는데, 어떤 이가 홍(洪)이라고 불렀다. 많이 먹을 수 있는데 배불리 먹지 않고,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눈바람에 벗고 있어도 춥지 않았다. 사람들이 옷가지를 주어도 받지 않고, 쌀을 동냥하여 먹다가 남는 것이 있으면 굶주리는 사람에게 주었다.

한 번도 남과 함께 산 적도 없고 한 번도 남과 더불어 말을 한 적도 없었다.

관사(館舍) 아래에 묵는데 고을의 노인네들도 모두 이 거지가 언제 처음 왔는지를 몰랐지만 얼굴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망태기[索囊子]’라고 불렀는데, 새끼[索]를 꼬아 망태기[囊]를 만들어서 다닐 때에는 둘러메었으나 아무런 물건도 없었고, 또한 이상한 일도 없었다.

왕왕 서울에 가서 놀아도 아무도 그가 가고 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다 떨어진 옷에 나막신을 신고 저자에서 구걸을 했는데, 지금 정승[相國] 원공(元公 원두표(元斗杓))이 완산 윤(完山尹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었을 때, 마음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불러들여 아주 친절하게 대접했는데, 그 또한 사양하지 않았다. 먹을 것을 주면 먹었으나, 말을 걸면 말을 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그후 남쪽 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고, 아직까지 다시 오지 않은 지가 몇 십 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방외(方外)에 노닐면서 사물(事物)과 상관하지 않고, 즐거이 세상을 잊어버리면서 그 자취를 없앴으며, 떠돌아다니며 얻어 먹으니, 토태(土駘)의 광인(狂人) 접여(接輿)의 무리인가.

계묘년(1663, 현종4) 1월에 미수(眉叟)는 쓴다.


▣기언 별집 제 15권

■무술 주행기(戊戌舟行記)

◯9년(1658, 효종9) 6월 3일, ...이때 바닷가 죄수를 사면하여 돌아오게 하는 일과 임금의 사냥을 강론하여 결정하는 일로 양사(兩司 사헌부 사간원)가 논쟁을 벌였다. 나는 서울에 오자마자 사퇴하여 언관(言官)의 책임을 벗어나고 다른 일이 없으므로 논열(論列)한 바가 없었는데, 옥당(玉堂)의 소리(小吏)가 와서 소대(召對 왕명으로 입대(入對)하여 정사에 관한 의견을 상주함)에 관한 일을 말했으나, 병을 핑계로 사임하고 비를 무릅쓰고 성을 나온 것이 10일이었다.

옹점(瓮店)의 앞 물가에서 배를 탔는데, 굉(翃)과 규(?)가 따랐다. 규는 뒤에서 토정(土亭)을 들렀다 왔는데, ‘토정’이란 토정장(土亭丈 이지함(李之菡)을 말함)이 지은 것이다. 그 어른은 높은 행실과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서 세속을 우습게 보며 스스로 즐기는 분이었다.

노를 저어 서강(西江)으로 내려가 조수가 물러가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자릉(子陵 현루(玄樓) 이경엄(李景儼))이 술을 사 가지고 보러 왔는데, 서로 상대하니 매우 즐거웠다.

그와 작별하고 나서 잠령(蠶嶺) 아래에 이르러 빗속에 선유봉(仙遊峯)을 보고 양화(楊花) 나루를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 아래에 이르니, 위에는 계사년(1593, 선조26)의 승첩비(勝捷碑)가 있었다.

배 안에서 묵었다. 듣기로 이른 조수 때에 배를 출발시키면 조수가 만조(滿潮)를 이룬다 하므로 조금 뒤에 조수를 타고 공암(孔巖)으로 내려가서 파릉(巴陵) 포구에 이르렀다.

바다가 가까워지자 강물이 흐려지고 짠 기운이 있었다. 부도(鳧島)를 지나니, 그 남안(南岸)은 장릉(章陵 원종(元宗)의 능)이었다. 장릉 아래는 김포군(金浦郡)이다.

뱃사람이 서쪽으로 심악(深嶽)을 가리키며, 봉성(鳳城)과 마주 보는 것이 해구(海口)라고 하였다. 그 밖은 조강(祖江)인데, 조강은 두 강이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므로 삼기하(三岐河)라고도 한다.

그 북쪽 언덕이 교하(交河 지금의 파주군의 옛 이름)의 오도성(烏島城)이고, 서남쪽으로 강화(江華)가 바라보인다.

곧바로 서쪽은 덕수(德水)의 해암(蟹巖)인데, 여기까지 이르러 정박하고 한낮 조수를 기다렸다. 조수가 떨어질 때에 보니, 어부가 배를 타고 강을 가로질러 그물을 펴고, 또 바닷가 아이들이 더벅머리로 발가벗고 배를 타고 그물질을 하며 조수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한다. 바다갈매기 수십 마리가 고기를 다투어 어지러이 나는데, 사람과 서로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은 고기를 보느라고 새를 신경쓰지 않으니, 새도 사람을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

조강(祖江) 동북쪽은 탄포(炭浦)이고, 그 위가 낙하(洛河)인데, 연산(燕山) 갑자의 화(禍)를 당하여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이 이곳에서 세상을 피해 흔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범포(帆浦)에 이르러서야 물맛이 짜지 않고, 흐린 기운이 점점 맑아졌다. 임진탄(臨津灘) 아래에 이르러 청강(淸江)이라 하는 곳에서 순풍을 만나 돛을 올렸다.

임진강(臨津江)으로 올라가니 비로소 석벽(石壁)이 있는데, 왕왕 나무가 우거지고 숲이 무성하였다.

화석정(花石亭)은 이 문성(李文成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시호)의 별장이요, 한벽정(寒碧亭), 창랑정(滄浪亭)은 다 성씨(成氏)의 옛 별장이라고 강가 사람들이 말했다.

북안(北岸)은 적운(積雲)인데 사심 장인(師心丈人 사심은 이정호(李挺豪)의 호임)의 구거(舊居)였으며, 그 뒤에 사심의 무덤이 있다.

이 사람은 겸손하고 후덕함을 좋아하여 스스로를 엄하게 지키고, 말을 반드시 삼가고 행동은 반드시 과감(果敢)하게 하여, 옛사람이 이른바, 진실하게 보고 진실하게 실천한다는 것을 나는 이 사람에게서 보게 되었다. 아, 이 사람은 죽어 지금 다시 볼 수가 없구나.

협구(峽口)에 들어가니 강벽(江壁)은 깎아지른 듯하고 물결은 깨끗하며, 날이 저무니 산 기운이 더욱 깊었다. 석기(石岐)에 이르니 강촌(江村)의 아름다운 곳이라, 앞에는 옛 나루터가 있고 그 위에는 곳집이 있고, 북벽(北壁) 아래에는 8월 추수를 하고 있었다. 큰 물이 떨어졌다. 바다 사람들이 배를 집으로 삼고 여기에 모여 들어, 고기와 소금을 팔아 무역하여 이익을 취했다.

위에는 사현(四賢)의 사당이 있었다. 규(?)는 먼저 돌아갔다. 저물녘에 주암(舟巖)에 이르렀는데, 곽 결성(郭結城 결성은 홍성(洪城)의 옛 이름)의 옛 별장이라고 한다.

아침에 배를 띄워 가려고 하는데 주인이 술과 음식을 보냈다. 거상(居喪) 중이라 해서 그의 젊은 사위를 시켜서 뵙게 한 것이 몹시 정성스러웠다. 또 김 능주(金綾州 능주는 고을 이름으로 원을 나타냄)가 뒤쫓아 와서 강가에 배를 머무르고 서로 만났다.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 놓았는데, 만취정(晩翠亭)이라 하고, 포구(浦口)를 물으니 자애(紫涯)라 하고, 그 북안(北岸)은 동포(銅浦)라 했다. 그 위에 어촌이 있어 예부터 전해 내려오기를 고려(高麗) 임춘(林椿 예천 임씨(醴泉林氏)의 시조. 강좌 칠현(江左七賢)으로 글을 잘했다)의 강가 별장이라고 했다.

날이 저물어 돛을 올리고 호로탄(瓠蘆灘)으로 올라가니, 여기가 호로하(瓠蘆河)이고, 그 위는 육계(六溪)이다. 또 옛날 진루(陳壘)가 있는데, 앞의 여울은 아주 험하며 사미천(沙彌川)이 여기로 들어온다. 상류에 옛 성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대해 있는데 석벽으로 되어 있어 견고하다. 강가의 부로(父老)들 사이에 서로 전해 오기를, 옛날 만호(萬戶)의 진루였다고 하나 이것은 알 수가 없다. 고려 때에 여러 번 거란(契丹)의 병화를 입었으니 이곳은 전쟁터로 오늘날까지도 옛 자취가 이와 같은 것인가.

그 위의 칠중성(七重城)은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인데,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두 나라의 국경이라고 하였다.

강가의 감악(紺岳)에 설인귀(薛仁貴)의 사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음사(淫祠)가 되었다.

노자암(鸕鶿巖)을 지나 석포(席浦)에 이르니, 강산의 경치가 하류로 갈수록 더욱 아름다운데, 그 위의 앙암(仰巖)이 가장 기이하고 빼어났다. 석봉(石峯)이 있고, 고벽(高壁)이 있고 깊은 못[重淵]이 있는데, 옛 종[古鐘]이 이 속에 잠겨 있으며, 나라에 난리가 나면 울린다고 하니, 물건이 오래되면 신령스럽다는 것인가.

석포로부터 남안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흰 돌이고, 절벽은 모두 푸른 바위였다. 북쪽에는 고려 왕의 사당이 있는데 숭의전(崇義殿)이라 하고, 강물이 아주 깊어 강가 사람들은 ‘전에 용이 나타나면 가물었다.’ 하였다. 동쪽에는 아미사(阿彌寺)가 있다.

마전(麻田) 앞의 언덕 강벽(江壁) 위에 옛 진루가 있었는데, 지금 그 위는 총사(叢祠 잡신을 모시는 사당)가 되었고, 그 앞의 나루를 당포(堂浦)라 하는데, 큰물이 들면 나루길이 트였다.

물은 깊고 여울은 얕은 데다가 바람이 없어, 돛을 내리고 물살을 거슬러 배를 끌어 오강(烏江)을 지나자 수세(水勢)가 꺾이고, 바람이 저절로 순해졌다. 그래서 다시 돛을 들어 올리고 호구협(壺口峽)을 나서니, 여울의 돌이 몹시 험한데 이를 마차산(摩嵯山)이라 한다. 북쪽 기슭은 산이 깊고 물살이 급하며, 영평(永平)의 물이 여기서 합류하는데, 그것을 상포(上浦)라 하고, 그 동쪽은 도가미(陶哥湄)인데, 흰 자갈과 평평한 모래사장이 많았다.

호구(壺口)를 지나면 율탄(栗灘)이고, 율탄 위는 마탄(馬灘)이고, 여울 위의 암벽 사이에는 못물이 괴어 있는데, 깊고 험하여 놀 수 없었다.

마탄을 지나면 기탄(岐灘)이고, 기탄을 지나면 유연(楡淵)이고, 유연 위는 유탄(楡灘)이고, 유탄을 2, 3리 지나면 휴류탄(鵂鶹灘 부엉이 여울)에 이른다. 그 위가 징파도(澄波渡)이고, 또 그 위 귀탄(鬼灘)에서 웅연(熊淵) 문석(文石)까지 7, 8리인데, 문석이란 것은 웅연의 그늘진 벼랑의 돌 위에 초서(草書) 같은 글이 있는 것인데, 기이하여 분별할 수가 없었다. 전에 어떤 고을 원이 부수려 했으나, 글자가 깊이 새겨져서 고칠 수 없었다 한다.

강가의 옛일[古事]은 기록할 만한 것이 많으나 물어볼 곳이 없었다. 징파도(澄波渡)에서 배에서 내려 돌아왔다.

미수(眉叟)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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