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암집(眉巖集)
유희춘(柳希春 1513-1577)
조선 중기의 문신. 1547년 벽서(壁書)의 옥(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고,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어 직강 겸 지제교에 재등용되었다. 경사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미암일기》외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16세기 호남사림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본관 선산(善山). 자 인중(仁仲). 호 미암(眉巖). 시호 문절(文節). 1513년(중종 8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았던 집 뒤의 바위가 눈썹의 모양이라고 해서 호를 미암(眉巖)이라고 지었다. 그의 고조는 감모만호를 지냈는데 이때 영남에서 순천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해남에서 살게되었다. 여류문인 송덕봉(宋德峯 1521-1578)이 유희춘의 처이다. 20세 때 최산두(崔山斗)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대둔사, 도갑사에 머물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1537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다음 수찬(정5품) ·정언(正言 정6품)) 등을 지냈다. 1547년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가 윤임, 유관, 유인숙의 죄를 물어 숙청하라는 밀지를 내리자 이에 부당함을 논하다가 벽서(壁書)의 옥(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1558년 그의 모친이 사망하였지만 그는 귀양지에 머물러야 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어 성균관 직강(直講 종5품)) 겸 지제교(知製敎정6품)에 재등용되었다. 이어 1568년 의정부 검상(정5품) 의정부 사인(정4품) 성균관 대사성(정3품) · 1570년 홍문관 부제학(종2품)․ 1571년 전라도관찰사(종2품) ·1572년 대사헌(종2품) 1573년 예조참판(종2품) 1574년 다시 대사헌(종2품)등을 역임하고 1575년(선조 8) 이조참판(종2품)을 지내다가 1576년 선조에게 사직을 청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머물다가 사망하였다.
경사(經史)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미암일기(眉巖日記)》 《속위변(續諱辨)》 《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 《시서석의(詩書釋義)》 《헌근록(獻芹錄)》 《역대요록(歷代要錄)》 《강목고이(綱目考異)》 등의 저서를 남겼다. 좌찬성에 추증되어 담양(潭陽)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茂長)의 충현사(忠賢祠), 종성(鍾城)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미암집은 유희춘이 1567년 다시 관직을 받아 여러 직책에 근무하면서 그 때마다 맡은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아주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내가 지금까지 읽은 자서 기록 중 그 어느 기록보다 내용이 풍부하고 뛰어나다. 또 그의 고매한 인품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송덕봉(1521-1578)
본관은 여산(礪山)송씨에서 분적한 홍주(洪州) 송씨이며 호는 덕봉(德峯)이다. 1521년(중종 16) 12월 20일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송준(宋駿)은 31세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참봉이 된 후 음직으로 별좌주부,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고 단성현감이 되었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덕운산에서 살았다. 덕봉의 어머니는 연산군 때 예조판서까지 오른 이인형(李仁亨)의 딸인 함안 이씨로 둘 사이에서는 정노, 정언, 정수라는 세 아들과 두딸이 있었는데 덕봉은 그 중 둘째딸이다. 결혼 전 그녀의 집안은 학문과 시문에 힘쓰는 지방의 명문가로 그녀 역시 어려서부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공부하며 자랐으며 16세인 1536년 해남 출신으로 호남의 다섯 현인으로 꼽히던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과 혼례를 올렸다.
미암은 26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으나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이후 21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미암의 유배기간동안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시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른 후에는 남편의 귀양지 함경도 종성으로 홀로 찾아가 남편과 함께 유배생활을 견디었다. 미암은 1567년 복직되고 부제학까지 벼슬이 올랐으며 그녀는 정경부인에 봉하여졌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으며 미암 사망 1년 후인 1578년 58세로 사망하였다. 미암이 기록한 《미암일기초》에 남아있는 그녀에 대한 기록들은 가부장제가 강화되기 전 16세기를 살았던 조선시대 여인들의 당당함과 호방한 기상을 소상히 전하고 있다. 미암의 기록에 전하는 덕봉의 시문은 정교하면서도 고아한 멋을 지녔으며 그녀의 성품은 명민하였으며 서사(書史)에도 두루 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시집으로 《송씨시고(宋氏詩藁)》 1권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마천령상음(磨天嶺上吟)》 《희신사시(喜新舍詩)》 《증미암(贈眉巖)》 《취리음(醉裏吟)》 《헌화미암운(獻和眉巖韻)》등의 한시가 다수 전해지고 있다.
▣미암집 제1권
■술 한 잔을 마시며〔飮酒一盃〕
◯만 길이나 뻗힌 수성을 깨부수고자 / 欲破愁城萬丈延
짐짓 댓잎 가져다가 창을 만드네 / 故將竹葉作戈鋋
한 잔도 천 종도 모두 양에 가득하니 / 一盞千鍾俱滿量
느릅나무의 뱁새 하늘 솔개 부럽지 않네 / 槍楡不羨戾天鳶
▣미암집 제2권
■나를 경계하며〔自警〕
◯입 막기를 병 막듯이 하고 / 守口如甁塞
정욕 막기를 물 막듯이 하라 / 窒情若水防
몸가짐 산악처럼 무겁게 하여 / 凝身山嶽重
수시 행동에 반드시 자상하라 / 時動必安詳
▣미암집 제3권
■호남 관찰사를 병으로 사양하는 서장 신미년(1571, 선조4)
◯신은 본래 거칠어 엉성하고 사리에 어두운 서생(書生)으로 군대의 일은 아는 것이 없어서 본직과 겸하여 절도(節度)의 임무를 받으면서부터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과 같아 밤낮으로 걱정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신의 도량이 직책에 맞지 않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신은 본래 병에 시달리는 허약한 사람으로 나이가 예순에 가까운데, 위로는 뜨겁고 아래로는 차서 몸을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상경(上京)하여 숙배(肅拜)하느라 왕래할 즈음에도 노열(勞熱)이 발작하여 수없이 물을 마셨고, 배사(拜辭)하고 처음 출발하던 날에도 복통(腹痛)과 설사로 앓기를 하루에 일곱 여덟 번이나 했습니다. 지금 직산(稷山)에 도착해서 또 남쪽 지방의 왜구(倭寇)의 소식을 들으니, 심신이 떨려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만일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달려간다면, 한 몸의 고통이 날로 깊어 부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적을 제압하고 공격을 막는 계책에 서툴러서 반드시 나랏일을 그르칠 것이니 황공하고 민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저의 간절한 소원을 굽어살피시어 빨리 체차(遞差)를 명하시고, 감당할만한 인물에게 다시 본직을 제수하여 전라도 방백의 임무를 완수케 하십시오. 이러한 내용으로 조리있게 잘 아뢰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영상 이준경에게 답한 편지 기사년(1569, 선조2)
◯존엄함을 굽히어 손수 보내주신 서신이 정중하여 감격스럽고 송구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소인은 아버님 묘소의 가토(加土)를 위하여 휴가를 받아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아내가 일찍이 앓고 있던 풍냉증(風冷症)이 더욱 심해져 겨울이 지나면 손상될까 두려웠습니다. 때문에 동행함에 그 자취가 고향으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20년간 쫓겨난 신을 다행히 전하께서 죄에 빠져 만 번 죽어 마땅한 사람을 발탁해 주심을 받으니 그 은혜가 뼛속까지 스며들되, 항상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없음이 부끄러우니 어찌 감히 갑자기 멀리 떠나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다만 원래 약골로 태어났는데, 북쪽 변방에서 추위에 오랫동안 고생하여 허리 아래로는 얼음 같이 차가워 겨울철 냉돌(冷突)에서 병이 생길까 두려우니 겨울을 지내고 돌아가려고 할 뿐입니다. 엎드려 살펴주시기 바라며, 삼가 재배하고 아룁니다.
이 영상의 편지〔李領相書〕
어제 녹사(錄事)가 돌아와 영공(令公)의 뜻을 들었는데, 설을 쇤 뒤에 돌아온다 하니 저의 마음 위로됩니다. 다만 사람들에게서 영공께서 아주 떠날 계획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허전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요사이 조정에 옛 영상들이 계속 떠나가고 저와 같이 늙고 부족한 사람만 이끌려 홀로 남게 되니 장차 무엇을 하겠습니까. 눈으로 높이 나는 기러기를 보내고 이 몸만 시끄러운 세상에 남아 있으니, 이른바 주옥(珠玉 유희춘을 지칭)이 곁에 있어야 저의 부족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당나라 사람들이 하는 말에 “우리들은 스스로 점검(點檢)해야 한다. 공이부(孔吏部)도 조정에 머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바로 오늘을 두고 한 말인 듯합니다. 다만 전하께서 위에 계시며 치도(治道)를 펴기 위하여 인재를 기다리고 있으니 영공께서 어찌 오랫동안 숲 속에서 한가롭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믿고 스스로 마음을 달랠 뿐입니다. 떠나는 길에 체후 만복하시를 바라며 삼가 올립니다.
▣미암집 제5권
■1568년 2월
◯【3일】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므로 5경(更) 2점(點)에 문을 나서서 모화관으로 가서 부(府)의 의막에 들어갔는데,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임금의 수레가 도착하니 먼저 왔던 신하들은 모두 길가에 엎드렸다.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모두 조복(朝服)을 입었고, 답호(褡衤十蒦 벼슬아치가 입던 겉옷의 일종)를 물들여 입은 사람도 있었다.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대감(太監) 장조(張朝)ㆍ행인사(行人司) 행인(行人) 구희직(歐希稷)이 영조문(迎詔門)으로 들어오니, 성상께서 백관들을 거느리고 공경히 맞이하였다. 백관들은 5배(拜) 3고두(叩頭)를 한 뒤에 백관들이 아래로부터 먼저 돌아가는데 머리를 조칙(詔勅 명 사신의 조칙)을 실을 용정(龍亭) 쪽으로 향하고, 태평관(太平館)에 이르러 대문 안으로 들어가 늘어섰다가 임금의 수레가 이르자 허리를 굽혔다. 용정과 중국 사신이 도착하자 다시 허리를 굽혀 공경히 맞이했다. 사신이 곧이어 정당(正堂)으로 들어간 뒤에 성상께서 나아가 만났다. 사신은 동편의 교의자(交倚子)에 앉고, 성상께서는 서쪽 교의자에 앉았다. 다례(茶禮)를 행한 뒤에 백관과 당상관은 먼저 현관 안에 나아가 재배를 하고, 당하관은 따라가 현관 밖에서 재배를 하고 나왔다. 아침에 모화관에서 밥을 먹고, 낮에는 태평관의 대문 밖에서 점심을 들었다. 또 포시(哺時 오후 4시경)에는 관문(館門) 밖 장랑(長廊)으로 물러 나와 동료들과 다 함께 모여 또 점심 먹었다. 성상께서 두 사신에게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어주기 위하여 면류관을 쓰고 두 사신의 앞으로 나아가 서서 술을 부어주었다. 그 다음에는 1품의 재상인 권철(權轍)과 오겸(吳謙) 등 네 명의 신하에게 술병을 들고 나아가 술을 부어 주었다. 성상께서 좌석으로 돌아온 뒤에는 네 명의 신하가 이어 잔을 드리고 재배를 하고 물러나 엎드렸다. 애초에는 잔을 아홉 번 드리기로 정해져 있었으나 사신이 다섯 번에 이르러 그만하기를 요청하므로 그쳤다. 성상께서 어두워진 뒤에 횃불을 밝히고 나오므로 신하들은 몸을 굽히고 공경히 맞이하여 임금의 수레가 지나간 뒤에 차례로 임금의 수레를 따라 광화문 밖에 이르러 물러났다. 밤이 이미 2경(更) 중말(中末)이었다.
【4일】파루(罷漏)의 뒤에 사헌부로 가니 모든 동료가 모여들었다.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임금의 수레가 태평관으로 가니 나는 경연의 입직 당번으로서 뒤를 따라 7칸의 병문(屛門)에 이르니 대가는 이미 들어가고 대관(臺官) 다섯 명이 물러나 의막으로 들어갔다. 종일토록 일이 없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사헌 김귀영(金貴榮)ㆍ지평 이경명(李景明)이 글 속의 의심난 곳을 많이 물었다. 경명(景明) 여회(如晦)가 말하기를,
“어제 이조 정랑 이제민(李齊閔)이 선생께서 윤원례(尹元禮)를 마땅히 발탁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셔서 이 정랑도 그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하였다. 성상께서 익일연(翌日宴)을 베풀었는데, 육관(六官)들이 잔을 권했고 주상께서는 끝잔을 권하였다. 부사(副使) 구공(歐公)이 초6일 제를 지낸 뒤에 즉시 떠나겠다고 하자 성상께서 강력히 만류하니, 사신들이 하루를 더 묵었다가 7일에 출발하기로 했다 한다.
○ 저녁에 성상께서 환궁하였다. 부사(副使) 구군(歐君)이 주상을 보고 탄복을 금하지 못하였다.
【6일】파루(罷漏) 뒤에 태평관으로 갔다. 사시(巳時)에 제상(祭床)과 용정(龍亭)을 앞서 인도하여 광화문 밖에 이르니 제상 280개가 연달아 이르렀다. 백관이 허리를 굽히고 있다가 용정이 이르자 더욱 허리를 굽혔으니, 조칙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조칙을 담은 것이 셋이요, 향을 담은 것이 하나이다. 이날에 오산잡희(鼇山雜戱)를 하는 재인(才人)들을 불렀는데, 그 기이한 재주와 구경거리는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두 조사(詔使)는 조용히 수레를 멈추고 구경하였다. 사신이 들어간 뒤에 나는 최복(衰服)이 없어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사신은 들어간 뒤에 사제(賜祭)의 예를 행하고 시호(諡號)를 내리는 조서와 사부(賜賻)의 칙서를 전하고 나서, 이윽고 두 사신이 사제(私祭)를 지냈다. 동료 3인이 우주(虞主)를 모의전(慕義殿)으로 모시고, 또 4인이 들어가서 제사를 지냈다. 나는 사헌부로 물러와 있었는데, 날이 저물 때 지평 이여회(李如晦)가 와 쉬면서 이야기하다가 갔다.
○ 사신이 사제(私祭)를 지내고 나서, 성균관(成均館)으로 가서 알성(謁聖)을 하고 즉시 태평관(太平館)으로 돌아갔다. 주상께서 만나 보기 위하여 태평관으로 갔다. 나는 경연의 입직 당번으로서 임금의 수레를 따랐는데, 해 저물 무렵에 성상께서 횃불을 밝히고 환궁하므로 희춘도 따라서 광화문 밖까지 나아갔다가 집에 돌아오니 밤이 이미 2경 한 중간이었다. 성상께서는 이날 곡읍(哭泣)을 한 나머지 대신들에게 양사(兩使)의 위로연을 대행하도록 하였다.
【7일】파루 후에 중국 사신 구공(歐公)이 날이 밝기 전에 길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 바삐 모화관으로 갔으나 실상은 부사(副使)가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출발한다고 했다.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임금의 수레가 먼저 도착하니 신하들이 몸을 굽히고 공손히 맞았고, 진시에 사신이 도착하여 함께 모화관 안의 남북쪽 의막으로 들어갔다. 곧 서로 모여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었는데, 대관(臺官)은 백관을 따라 영조문(迎詔門)의 서편에 나열하여 서 있었다. 성상께서는 모화관의 대문에서 사신을 보냈다. 사신들은 영조문(迎詔門)에 이르러 걸어서 자리로 나와 백관들과 재배하고 작별하였다. 다시 임금의 수레를 따라 태평관 근처의 의막에 도착하였다. 성상께서는 태평관 안으로 들어가서 상사(上使) 장조(張朝)에게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입시하는 사람들 외에 다른 신하들은 모두 물러나 있었다. 대사헌 김귀영(金貴榮)이 날마다 의심난 글을 묻기에 내가 막힘없이 대답해 주자 김공이 몹시 기뻐하였다.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다시 임금의 수레를 따라 광화문 밖에까지 가서 대신들을 따라 말에서 내렸다가 다시 말을 타고 돌아왔다.
○ 사신 구희직(歐希稷)이 영상 이준경(李浚慶)에게 말하기를,
“영상은 일국의 표준이요, 국왕은 현명하시니 보좌를 잘 하십시오.”
했다 한다.
■1568년 4월
◯【13일】밥을 먹고 출근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가 첩소(牒訴)한 공사(公事)가 너무 많아 병이 없는 사람이 병이 생길 지경인데, 하물며 한 나라의 공사(公事)가 어떻겠소. 육조(六曹)와 모든 각 시(寺 관아)의 계목(啓目)과 팔도의 감사(監司)와 병사(兵使)ㆍ수사(水使)의 계본(啓本)이며, 양사(兩司)의 차자(箚子)를 올려 아뢴 것과 홍문관(弘文館)의 차자(箚子)와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이 아뢰는 말이며, 중외(中外)의 신민들이 올린 상소와 사헌부(司憲府)의 추고(推考) 등 성상께서 열람하는 것이 하루에도 수십 권 혹은 백 권에 이르고 있으니, 정신과 기력의 소모가 너무나도 심하므로 불가불 그런 일을 줄여서 건강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지금 방법으로는 무엇보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맡아서 그중 주요한 것만 초록한 뒤 말단에 성상께서 한 번만 보아도 요연하게 알 수 있도록 한다면, 정신이 상쾌하여 피로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북경으로 가는 사신이 일 년에 대여섯 번에 이르러 중국으로 가는 길 일대가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하늘을 향해 외치며 목이 메니 차마 들을 수가 없습니다. 대저 한 사신이 가는 데는 짐을 싣고 가는 말이 일백 수 십 필에 이르러 길가의 백성들이 수레를 끌고 나오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리고 북경에 도착하면, 그 조정에서의 대우가 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보다 못합니다. 그것은 유구(琉球)의 사신은 짐이 적고 우리나라 사신은 짐이 너무나 많고 하인들도 모두 무역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국가에서 통사(通事 통역을 맡은 벼슬아치)만 요동(遼東)에서 무역을 하도록 하고 사신은 양식으로 쓸 쌀만 가지고 연경(燕京)으로 가도록 한다면 중국의 폐단도 덜어주고 우리나라도 되레 청렴결백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동료들이 모두 내 말을 따르고, 정승에게 알린 뒤에 임금께 아뢰었다
▣미암집 제6권
■1568 5월
◯【2일】대사성 기대승(1527-1572) 명언(奇大升明彦)이 찾아와 문자 및 인사를 담론하였다. 대체로 《논어(論語)》ㆍ《대학(大學)》ㆍ《강목(綱目)》의 긴요한 곳에서 모두 내 말을 따랐다. 그는 학술이 통달하고 지혜가 밝아 당대에 짝할 사람이 드무니 참으로 즐겁다고 할 만하며, 마음도 또한 질박하고 정직하다. 오늘의 인사에서 내가 사간(司諫)의 수망(首望)에 들었으나 낙점 받지는 못하였다. 주상께서 경연에 머물게 할 뜻이 있어서였다.
【4일】나는 기명언(奇明彦)이 말한 ‘부자기문(不自棄文)’이 실은 문공(文公 주희(朱熹))이 지은 것이 아님을 깨닫고, 마땅히 완산부(完山府)에 서신을 보내 삭제하라 하였다. 서신으로 명언에게 알리자 명언은 의견이 서로 부합함에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또 이르기를,
“호씨(胡氏)의 인자불위(仁者不爲)의 설이 선생의 지시(指示)로 인하여 어둡고 막혔던 것이 활짝 열렸습니다.”
하였다.
【26일】조식(曺植)의 상소를 보니,
“지금의 행정은 서리(胥吏)와 대례(儓隷)들에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각 고을에서 공물로 바치는 물건들은 모두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다른 것으로 대납하고 있으며, 각기 주현(州縣)을 나누어 자기 물건으로 삼고 문권(文券)을 작성하여 그들 자손에게 전할 것을 허락하고, 지방에서 바치는 것은 일절 막아버려 한 물건도 상납하지 않으니 이것은 참으로 큰 좀입니다.”
하였다. 그 말이 지금의 폐단에 절실히 맞다.
【17일】우의정이 전(殿)에 오르고 노수신과 희춘도 함께 전에 올랐다. 북벽(北壁)에 이미 어탑(御榻)이 설치되어 있어서 모든 신하들이 서쪽의 작은 문으로 부복(俯伏)하기를 입시(入侍)의 예와 같이 하였다. 사알(司謁)이 와서 전하가 낙점한 시제를 전하므로 열어보니 경연에서 물었던 시제였다. 윤근수와 기명언이 각자 책(策)의 제목을 크게 썼는데, 기명언이 나의 노고를 대신하여 몸소 해 주었다. 쓰기를 마치자 나와 윤군(尹君)은 각자 한 건씩을 들고 동서의 작은 문으로 나뉘어 나가 인의(引儀)에게 주었다. 동이 틀 무렵 사령(使令)더러 과거 응시자에게 가지고 가서 보이도록 했는데, 응시자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어서였다. 이미 제목을 선포한 뒤에 어좌(御座)를 거두었다. 모든 신하들은 서쪽 처마 밑으로 물러나기도 하고, 혹은 충의청(忠義廳)에서 잠시 쉬기도 하였다.
【18일】파루 후에 전(殿)에 올라가 32도(道 과거시험 답안지 32편)의 시험지를 살폈는데, 우의정이 희춘ㆍ기대승ㆍ노수신의 말을 많이 따랐다. 정희적(鄭煕績)이 삼상(三上)으로 장원이 되고, 이정형(李廷馨)ㆍ정이주(鄭以周)가 삼중(三中)으로 1등이 되었으며, 전현룡(田見龍)ㆍ홍인건(洪仁健)도 삼중으로 을과(乙科)의 1‚ 2등이 되었다. 최경창(崔慶昌)ㆍ최진국(崔鎭國)ㆍ홍여순(洪汝諄)ㆍ이영익(李榮翼)은 삼하(三下)로 다음이 되고, 김성일(金誠一)은 말석을 차지했으니 곽란증(霍亂症)으로 제술(製述)을 못했기 때문이다. 어모장군(禦侮將軍) 이윤희(李允禧)ㆍ민복(閔福)은 삼하의 1‚ 2등이 되었는데, 사실은 말석인 셈이다.
■1568년 7월
◯1일】뭇 유학자들이 저술한 일을 의논하기 위한 우의정의 부름으로 광화문으로 나가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들어갔다. 나와 대사성 기대승ㆍ부제학 노수신이 특별히 우의정의 초청에 뽑혀 우리나라 유학자들을 논의하였다. 우리들은 우탁 등 열 명을 10대 유학자라고 대답했는데, 즉 우탁(1262~ 1342)ㆍ정몽주ㆍ길재(吉再)ㆍ김종직(金宗直)ㆍ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ㆍ이언적(李彦迪)ㆍ김안국(金安國)ㆍ서경덕(徐敬德)이다. 나는 우탁ㆍ길재ㆍ조대헌(趙大憲 조광조)ㆍ김모재(金慕齋 김안국)의 학행을 기록하였고, 기명언(奇明彦)은 이회재(李晦齋 이언적)ㆍ서경덕을 기록하였다. 두 교리는 김한훤당(金寒喧堂 김굉필)을 기록하였고, 노군(盧君)은 정 문충(鄭文忠)을 기록하였다. 김점필(金佔畢 김종직)ㆍ정여창은 《여지승람(輿地勝覽)》과 전대(前代)의 기술을 활용하였다.
【16일】 어제 영의정이 제의하기를,
“유희춘이 아뢴 말을 보니 불법으로 제비뽑기 하는 일은 진실로 그의 말과 같습니다. 수령이 비록 백성을 사랑하는 선량한 관원이지만, 관리로 있으면서 일을 처리한 것과 빈객을 접대하고 공물(供物)을 마련하는 사이에 법 밖의 예산을 마련하는 일이 한 가지가 아니므로 만일 지적을 해서 잡아내더라도 불법을 저지르지 않은 수령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듣고 보고 하는 사이에도 반드시 다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일찍이 나이가 젊고 기가 높은 별성(別星)도 일시적인 희노를 가지고 파직을 아뢴 사람이 있으니, 이런 폐단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을 보내실 때에 ‘자세히 살펴보고 사사로운 뜻을 용납하지 말며, 듣고 보는 일도 반복하여 분명하게 증거가 있는 연후에야 아뢰도록 하라.’ 한다면, 희춘이 아뢴 폐단이 거의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불법의 제비뽑기는 옛날에도 항상 행했던 규칙이지만, 만일 별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부 놓아두고 살피지 않는다면, 또한 장차 수령들이 방자히 불법을 자행하는 폐단을 열어놓는 것이니 제비뽑기와 듣고 보는 일을 주상께서 참작하여 제때에 행하신다면 거의 치우친 폐단을 근심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오직 주상께서는 결정하십시오.”
하였다.
○이황(1501-1571)이 거듭 아뢰어 정숭품(正崇品 정1품의 직책)의 직책 내림을 고쳐줄 것을 청하니, 주상께서 답하기를,
“사양하려는 뜻은 지성에서 나왔겠지만, 이미 명한 숭품의 직책을 다시 바꿀 수 없으니 경은 모름지기 거절하지 마시오.”
하였다.
■1568년 8월
◯【6일】이날 인사 발령에서 이황이 대제학(정2품)이 되고, 박순이 제학, 윤행(尹行)이 정주 목사(定州牧使), 윤복(尹復)이 종 부정(宗簿正), 나는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 정5품)이 되었다. 이담(李湛)이 첫 번째 물망에 오르고, 희춘이 두 번째가 되고,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끝이었는데, 내가 낙점을 받았다. 승지 김계(金啓)가 먼저 서신으로 하례하였고, 황정욱(黃廷彧)ㆍ신담(申湛)ㆍ동지(同知) 심봉원(沈逢源)도 모두 서신과 사람을 보내왔다.
【7일】이황이 6조(條)로 상소를 하자 주상께서 답하기를,
“내가 상소문을 보고 반복하여 깊이 생각해 보니 경의 도덕은 옛사람에 견주어도 비견할 사람이 드물겠소. 이 6조는 진정 천고의 격언(格言)이요, 지금의 급선무로 내가 비록 하찮은 사람이지만 감히 명심하지 않겠소.”
하였다.
○ 부리(府吏)가 나에게 고하기를,
“무릇 사인(舍人 정4품)과 검상(檢詳)은 당하관(堂下官)의 수장인데, 지난번 윤사인(尹舍人 윤근수 1537-1616)이 나리〔進賜〕에게 굳이 양보한 것은 특별히 한때의 선배를 존경하는 사사로운 정에서 그런 것이지 일반적인 예는 아니므로 한결같이 옛 풍습을 따르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18일】강릉(康陵 명종(明宗)의 능) 능위의 돌이 깨져 양궁(兩宮)이 크게 놀라므로 공경(公卿)을 불러 물어보고, 나는 정승에게 이 일을 아뢰기 위하여 빈청(賓廳)으로 나아갔다. 잠시 후 물러나오자 영의정 이공(李公 이준경)과 우의정 홍공(洪公 홍섬)이 사람을 보내 나에게 말하기를,
“속히 검상(檢詳)을 내시오.”
하였다. 나는 즉시 사람을 시켜 검상 천거의 두루마리를 가지고 오도록 하니, 곧 이중호ㆍ이담ㆍ이산해ㆍ이기였다. 벼슬이 낮은 관리부터 봉권(捧圈 마음에 든 사람의 이름 밑에 동그라미를 치는 것)을 하였다. 우참찬 박순(朴淳)이 맨 처음 동그라미를 쳤으며, 좌참찬 원혼(元混)이 그 다음으로 하였다. 좌찬성 오겸(吳謙)이 그 다음으로 하였고, 우의정 홍섬(洪暹)이 또 그 다음으로 하였다. 이산해ㆍ이담은 모두 다섯 개의 동그라미를 받았다. 천거된 차례를 보면, 이담이 첫 번째이고, 이산해가 두 번째이며, 이중호가 네 개의 동그라미를 받아 마지막 물망에 올랐다. 이기는 다만 한 개의 동그라미를 받아 물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잠시 후 연정(蓮亭)으로 물러 나와 본부의 공사(公事)를 처리하였다.
■1568년 9월
◯【29일】아내가 딸을 데리고 담양(潭陽)을 출발하였다. 딸은 몸이 허약하여 말을 탈 수 없으므로 어떤 사람은 딸도 가마를 태우라고 권하였으나 아내는 집안 어른의 명이 없었다며 사양하고 태우지 않았다. 전주에 도착하여 부윤 노진(盧禛)이 가마를 하나 내주면서 딸도 태우라고 하였으나 아내는 애써 사양하며 집안 어른의 뜻이 아니라고 하였다. 부윤이 세 번이나 간청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자 노공이 탄복하였고, 폭쇄별감(曝曬別監 책을 말리는 관리) 정언신(鄭彦信)도 서울에서 여러 번 칭송했다고 한다.
■1568년 10월
◯【25일】옥당에서 의견을 조정하는 회의를 열었다. 나는 《근사록(近思錄)》을 당연히 《대학연의(大學衍義)》보다 먼저 강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민군(閔君)도 그렇다고 하여 영의정 이공(李公 이준경)에게 아뢰었더니 영의정도 참으로 그렇다고 하며, 곧바로 나에게 서신으로 알려왔다. 대개 이 의견을 낸 사람은 이퇴계ㆍ사재(四宰) 박화숙(朴和叔)ㆍ기명언(奇明彦)ㆍ이계진(李季眞) 등인데, 영의정의 처음 생각도 《근사록》을 먼저 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29일】날이 저물 무렵에 판부사 퇴계 선생께서 지나는 길에 왔다. 나는 공손히 맞아들여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술을 조금 차려내어 서로 권하며 마셨다. 아울러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내가 유배 갈 때 하셨던 말씀을 말씀드렸더니 선생께서 크게 칭찬하시며 탄복하였다. 또한 선생은 옥당에서 올린 차자와 주상의 비답을 보고 탄복을 금하지 못하였으며, 《서명(西銘)》을 진강하도록 간청해야 함도 언급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합당하다. 희춘은 선생의 노복에게도 음식을 주었으니, 이것은 두자미(杜子美)가 두 시어(竇侍御)를 대접한 뜻이다.
■1568년 11월
◯【5일】인사에서 박응남(朴應男)ㆍ홍천민(洪天民)ㆍ희춘을 대사성(정3품)의 물망에 올렸다. 이조의 정청(政廳)에서 아뢰기를,
“대사성은 반드시 문학(文學)이 있어서 사람을 가르칠만한 인물이어야 하는데, 전한 유희춘은 전일에도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하여 임용하겠다는 전교가 있었으므로 함께 천거했습니다.”
하였다. 주상께서 결국 나를 낙점하니 승지 등이 사람을 보내 하례하였다. 사시(巳時)였다.
※24년 전인 1544년 정5품에서 유배되었고, 1568년 한 해에 정5품에서 정3품까지 고속 승진 되고 있다
▣미암집 제7권
■1569년 5월
◯【9일】오늘 조강(朝講)에 특진관 김개(金鎧 1504-1569)가 지사(知事)의 신분으로 입시하여 또 옳지 않은 의론을 내놓자, 대간들이 합사(合司)하여 계청(啓請)하기를,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해야 한다.” 하고, 홍문관에서도 차자(箚子)를 올렸다고 한다.
○ 좌승지 기대승(奇大升)과 우승지 심의겸(沈義謙)이 아뢰기를,
“김개(金鎧)가 전일에 아뢴 것은 매우 의심스럽고 해괴합니다. 지금 또 계사(啓辭)를 보니 매우 흉악한 마음을 품고서 군주를 모함하고 나라를 망칠 말을 하였습니다. 전일에 신들의 생각은 ‘노망한 말을 망발하는 것에 불과하니 진정시키는 편이 좋겠다.’라고 여겼습니다. 신들이 전일 아뢴 것은 결국 간사한 자를 구제해주려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매우 황공하여 처벌을 기다립니다.”
하였다. 주상이 답하기를,
“늙은 신하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조용히 진정시켜 조정이 화평해지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으니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 승정원의 전원이 아뢰기를,
“김개가 아뢴 것은 나라의 존망(存亡)에 관계되는 일이어서 글로 써서 아뢸 수는 없으니, 신들은 전원의 면대를 청합니다.”
하였다. 주상께서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고 곧 불러들여 보자, 승지 등이 극진히 아뢰었다.
【10일】어제 조강(朝講)에서 김개가 아뢰기를,
“소신은 천성이 본래 용렬하고 옹졸한 데다 늙고 병듦이 더욱 깊어 망녕된 일도 많았습니다. 지난번에 외람되이 대사헌이 되었으나 그전에 들어보니 잡된 논의 중에 삼공(三公 3정승)을 존중하지 않고 낱낱이 비방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삼공에 대한 논의도 미안스런 일이지만 영의정에 대한 것은 더욱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신은 잡된 논의가 이와 같다면 매우 부당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대사헌이 되어 당시의 말을 듣고 모른 척하는 것도 부당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일을 거론하는 것도 부당하기에, 범연히 아뢰어 잡된 논의를 하는 연소배들로 하여금 스스로 알아서 근신하게 한다면, 시사(時事)가 좋아질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입니다.
소신은 삼공이 잘못이 있으면 대간이 마땅히 규탄하여 바로잡아야하지만 주상께서 반드시 신임해줘야 가능하고, 또 그런 잡된 논의가 있으면 인심이 불안해지니 《논어》에서 ‘몸을 경건한 마음으로 닦아라.’라고 말한 것은 마땅히 자기의 몸을 닦기만 하고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는 뜻이며, 잡된 논의가 있으면 인심이 불안하여 반드시 원망이 생긴다고 보았기 때문에 곧장 이 뜻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또 기묘년(1519, 중종14)의 일에 대하여 소신은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마음 씀은 참으로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람을 지나치게 믿어서 비록 말만 능하게 하는 자라도 선인(善人)이라 생각하고 모두 끌어들였으므로 결국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소신은 나이 16세로서 그 시비를 몰랐습니다. 그 뒤에 전지(傳旨)를 보니 ‘자기에게 붙는 사람은 진출시키고 자기와 다른 사람은 배척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마도 화평치 못하였으므로 전지의 말씀이 이와 같았을 것으로 여겨 이를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안자유(安自裕)가 ‘이것은 소인이 군자를 다스리는 말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도 또한 좋습니다. 이것은 소인이 군자를 다스리는 말이긴 하지만 인심이 화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말도 있게 된 것입니다.
기묘년의 사람 또한 많았지만 어찌 모두 다 선인(善人)이었겠으며, 선인 가운데서도 어찌 혹 잘못 생각하여 실수한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후세에 기묘년의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은 단지 그 대강령이 옳았기 때문입니다. 대강령이 옳았다 함은 임금을 도와서 좋은 정치를 일으키려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나이 젊은 사람들이 선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지나치게 비난하였으니, 어찌 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선하지 않다 하여 자복(自服)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인심의 불화를 초래한 것입니다. 대간이 대신의 실책을 논하는 것은 옳으나, 가정에서 사사로운 의견을 일삼게 되면 인심의 동요가 없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하였다.
【11일】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요사이 하늘의 변고가 있고 조정도 안정이 되지 않았으니 대간이 아뢴 것을 속히 따르십시오.” 하였다.
○ 대간이 세 차례나 김개의 관작을 삭탈하여 내쳐야할 일을 아뢰고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에서도 차자(箚子)를 올렸으나, 주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개(金鎧)가 전후에 걸쳐 올린 계사(啓辭)를 써서 들이라고 명하니, 주상께서 다시 자세히 그 내막을 살펴보고 처리하고자 한 것이다.
【16일】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가 연합하여 아뢰기를,
“김개(金鎧)의 간사하고 비뚤어진 죄상에 대해 나라 사람 모두가 내쫓아야한다고 하는데, 전하는 이를 노망한 사람의 말실수로 돌려 시간을 지연시키고 안타까워하면서 즉시 내쫓지 않으시니, 이것은 실로 국가의 흥망과 안위가 걸린 문제입니다. 전하는 어찌하여 자기의 소견만 편벽되게 믿고 공론을 완강하게 거절하여 간사한 무리로 하여금 남몰래 엿보아 훗날의 환란을 일으키게 하십니까.
지난 기묘년에는 조정이 깨끗하고 선명했는데도 자기에게 아부하거나 자기와 의견이 다른 말이 한번 간사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자 현인들이 화를 당하여 그 참혹함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50년이 지나서도 사림들이 가슴 아파하고 있는데, 김개의 시기하는 마음은 늙을수록 더욱 심하여 사특한 말을 선동하여 기묘사림을 다시 헐뜯고 재앙을 조정에다 옮기려 하였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의심을 간직하고 있다면 기묘년의 재앙이 다시 오늘에 일어날 것이니, 어찌 참담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조정에 있는 현인들이 서로 공경하고 협력하려고 애쓰는데 김개가 또 낱낱이 헐뜯는 말을 하여 반드시 간사한 심술을 부린 뒤에 그만둘 작정을 하니, 그 죄상은 여기에 이르러 극에 달한 것입니다. 전대의 현인을 포상하고 이미 죽은 간신을 죄 주니 전하의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이 이처럼 지극하였건만, 김개가 홀로 재앙을 일으킬 마음을 은밀히 품고 시비를 어지럽혀 이미 처벌한 간신들을 변호하고 나중에 포상한 현인들을 헐뜯어 전하를 현혹시키고 시류(時流)를 모함하였으니, 그 실상을 살펴보면 매우 간사합니다. 이런 자를 치죄하지 않으면 노회하고 간특함이 더욱 꺼리는 바가 없어 그 간사한 꾀와 은밀한 계책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며, 결국엔 국가를 텅 비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래도 전하는 ‘선하지 않은 마음이 있다 한들 그가 어떻게 간사한 꾀를 부려 사림을 해치겠는가.’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이것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중종 임금 같은 지혜로도 남곤(南袞)ㆍ심정(沈貞)에게 속임을 당해 끝내 기묘년의 재앙을 면하지 못했는데, 전하께서는 스스로 밝은 지혜를 믿고 이 노회한 간신을 아껴 간곡히 비호하여 호오(好惡)의 공정함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간사한 꾀를 부리거나 사림이 당하는 피해를 전하께서는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망설이지 마시고 속히 윤허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자, 전하께서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사림들의 횡포를 볼 수 있으며 심지어 임금까지도 협박하고 있다. 기묘사화를 보는 김개의 판단은 옳으며 조광조 일당을 처단한 것은 남곤, 심정일파가 아니라 조광조 일당의 권력비대를 막기 위해 중종 자신이 일으킨 사화였다.
■1569년 7월
◯【18일】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유배를 당했다가 조정으로 돌아와 당상관에 오른 사람이 9명이니, 백인걸(白仁傑)ㆍ노수신(盧守愼)ㆍ황박(黃博)ㆍ김난상(金鸞祥)ㆍ유희춘(柳希春)ㆍ민기문(閔起文)ㆍ이담(李湛)ㆍ이진(李震)ㆍ이원록(李元祿)이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일찍 죽은 사람이 3명이니, 한주(韓澍)ㆍ이염(李爓)ㆍ유감(柳堪)이다. 이때까지 당상관이 되지 못한 사람은 윤강원(尹剛元) 1명뿐이다.
■1569년 9월
◯【12일】조강(朝講)이 있었다. 교리 이이(李珥 1537-1584)가 신래(新來 : 과거에 급제하여 새로 부임한 관리)를 학대하고 모욕하는 것이 풍기를 손상시키는 병폐라고 진술하자, 주상께서 “이는 참으로 말도 안 되는 것이니 통렬히 금지토록 하라.” 하였다.
【13일】주상께서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사람을 사관(四館 성균관ㆍ예문관ㆍ승문원ㆍ교서관)에서 신래(新來)라 지목하여 학대하고 모욕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시궁창의 더러운 진흙을 그 얼굴에 바르고 이를 ‘당향분(唐鄕粉)’이라 하고, 관(冠)과 의복을 찢고 더러운 물속에 밀어 넣어 귀신 형상을 만들어 사람이 차마 볼 수가 없으며, 몸을 상하기도 하고 병을 얻기도 하는 경우가 빈번히 있을 뿐만 아니라, 체모에도 손상이 참으로 많다. 이러한 폐속(弊俗)은 이미 예문(禮文)에도 없고 또 중국에도 없는 일인데 관습이 되어 고칠 줄을 모르니 무식하기 짝이 없다. 앞으로는 신참과 고참 간에 이를 바로잡아 살필 것이며 더럽히고 학대하며 희롱하는 일을 일절 엄히 고치도록 하라. 만약 옛 습관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적발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예조(禮曹)에 이르노라.”
하였다.
○ 신래(新來)를 학대하여 더럽히거나 손상시키는 일은 나도 전일에 여러 번 명공(名公)과 현사(賢士)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1569년 10월
◯【5일】전라 감사가 오늘 진산(珍山)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 나의 행차를 탐문했다. 만날 뜻이 있어서일 것이다.
【7일】오시에 전주(全州)에 도착했다. 부윤(府尹) 노공(盧公 노진)의 초청을 받아 우리 부부가 함께 관아로 나가 잔치에 참석했다. 나는 들어가 대부인에게 술을 따라드렸다. 대부인은 이때에 나이가 여든이니 자식의 영화가 어느 것이 이보다 크겠는가. 나는 노진(盧禛) 군과 함께 일어나 앞에서 춤을 추고 물러나와 술잔을 주고받으며 기쁨을 만끽하고 어두워서야 물러났다.
○ 날이 저물녘에 관찰사 정종영(鄭宗榮)이 여산(礪山)에서 전주부(全州府)로 들어왔다. 조금 지나서 만나 보기를 청하자 나는 동헌(東軒)으로 나아갔다. 감사는 주벽(主壁)에 앉고 나와 부윤 노진(盧禛)이 동벽(東壁)에 앉으니 도사(都事) 강원(姜源)이 남쪽 줄에 앉아 번갈아 술을 따랐다. 감사가 부윤과 도사에게 명하여 먼저 나에게 술을 따르게 하였다. 나는 감사와 더불어 담화를 나누다가 취하여 서헌(西軒)의 방으로 물러났다. 측간을 가다가 전임 금산 군수(錦山郡守) 이의신(李義臣)을 보았다. 이때 이의신의 사촌 아우가 사상(使相 감사(監司)의 별칭)에게 범마(犯馬)했다가 갇혔는데 나의 구제에 힘입어 풀려났다. 나는 감사의 초청을 받아 다시 직령(直領)을 갖춘 평상복 차림으로 동헌방으로 가서 감사와 마주하여 밥을 먹었다. 감사가 강진과 장흥에 제상(祭床)을 차려드리라고 하달하니 이는 해남의 부모 묘소를 위해서이고, 또 광주에도 하달하니 이는 처부모의 묘소를 위해서이며, 또 광양에도 하달하니 이는 조부모의 묘소를 위해서였다.
【21일】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께 제사를 지냈다. 축문의 내용은
“엎드려 아룁니다. 정묘년(1567) 10월부터 성은을 입고 조정으로 돌아와 전하의 보살핌을 극진히 받았습니다. 시종(侍從)ㆍ대간(臺諫)ㆍ사인(舍人)과 같은 청화(淸華)한 직책을 차례로 역임하고, 무진년(1568) 11월에는 또 통정대부에 올라 성균관 대사성과 승정원 승지 등의 등의 관직을 지냈으니, 이는 어리석은 손자가 이룰 수 있는 바가 아니라 실로 할아버지께서 선행을 쌓은 여경(餘慶)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내려와서 감히 그간의 정황을 고합니다. 흠향하소서.” 하였다.
■1570년 4월
◯【30일】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주의 유생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은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을 삼가며 충신(忠信)하고 독실한 사람이었다. 지난 무진년(1568, 선조1)에 최정(崔頲)이 헌납(獻納)으로 있으면서 조정에 등용시키고자 하여 일찍이 어탑(御榻) 앞에서 아뢰었는데, 희춘이 “김천일은 지금 질병에 걸려 벼슬살이를 할 수 없으니 아직은 기운을 북돋게 놔두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더니, 주상께서도 그렇겠다고 하였다. 이제 와서 생각건대, 김천일이 병세가 날로 깊어가 죽을 날이 더욱 닥쳐오니 만약 포상해주는 은전이 없다면 아마도 훗날에 후회가 있을 듯하다. 경연에서 감사에게 글을 보내 구휼하는 약물을 주게 하여 한 고을의 선사(善士)에게 표창해주시기를 청해야겠다.
■1570년 5월
◯【1일】새로 서경(署經)을 거쳐 수찬(修撰)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들어왔는데, 그 학문과 문장이 정밀하고 합당하였으며 사람 됨됨이도 아낄만하여 매우 기뻤다.
■1570년 6월
◯1일】진시 말에 옥당에 이르러 ※유희춘(1513-1577), 이산해(李山海 1539-1609)ㆍ이중호(李仲虎)ㆍ이해수(李海壽)ㆍ송응개(宋應漑)ㆍ이이(李珥 1537-1584)ㆍ윤탁연(尹卓然)ㆍ유성룡(柳成龍1542-1607)과 함께 완의(完議)했다. 주상께서 어제 양사(兩司)에 답하기를, “치죄(治罪)한 일은 곧 선왕이 친정(親政)하기 전에 벌어졌다.” 하였는데, 이는 매우 고명한 견해이므로 이를 찬미하고 받들어서 속히 공론에 따르도록 권하기 위해서였다. 이이(李珥)에게 차자(箚子)를 짓게 하여 올렸는데 주상께서 윤허하지 않아 또 다시 유성룡에게 차자를 짓게 하여 들여보냈다. 두 번째 차자를 올린 뒤 미시(未時)에 집으로 돌아왔다.
【7일】이 날 인사 행정에서 성절사(聖節使)의 후보에 기대승과 희춘이 부망(副望)과 말망(末望)에 들었는데 기대승이 낙점을 받았다.
【8일】내가 춘추관(春秋館)에 가서 작년 11월 6일의 시정기(時政記)를 보니, “희춘에게 부제학을 제수하다.”라고 쓰고, 그 아래에다
“자는 인중(仁仲)이니 영민하고 담백하며 박식하고 글을 좋아한다. 일찍이 을사년에 정언(正言)이 되어 밀지(密旨)의 잘못됨을 논박했다가 정미년 초에 탐라(耽羅 제주도)로 귀양 갔고 또 종성으로 옮겼는데, 유배지에 이르러서는 오직 독서를 일로 삼고 후생들을 가르쳐 성취시킨 바가 많았다. 정묘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청요직(淸要職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관직)을 두루 거치며 유명해지니 사림들이 추중하였다.”
라고 주(註)를 달아놓았다.
【12일】진시(辰時) 말에 옥당의 전체 회의에 참석했다. 첫 번째 차자는 유성룡의 것을 쓰고 두 번째 차자는 윤탁연의 것을 썼는데 윤탁연이 지은 것이 매우 좋았다.
○ 부인(夫人 송덕봉(宋德峰 1521-1578))이 장문의 편지를 지어 광문(光雯 유희춘의 종손자)에게 써서 보내도록 했는데, 그 내용은
“삼가 편지 내용을 보니, 갚기 어려운 은혜를 저에게 베푼 듯이 스스로 자랑했는데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군자는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성현의 밝은 가르침이니, 어찌 나 같은 아녀자를 위해 억지로 힘쓸 일이겠습니까. 만일 속마음이 이미 확고해져서 물욕(物欲)이 가리기 어려우면 저절로 마음의 찌꺼기도 없어질 것인데, 어찌하여 안방 아녀자의 보은을 바라십니까. 서너 달 동안 홀로 잤다고 해서 고결한 척 은덕을 베푼 기색이 있다면, 결코 담담하게 무심한 사람은 아닙니다. 편안하고 결백한 마음을 지녀 밖으로 화사한 미색을 끊고 안으로 사사로운 생각을 없앤다면, 어찌 굳이 편지를 보내 공(功)을 자랑한 뒤에야 알겠습니까. 곁에 친한 벗이 있고 아래로 가족과 종들이 있어 뭇사람이 눈으로 보아 저절로 공론(公論)이 퍼질 것이니, 굳이 애써 편지를 보낼 것도 없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당신은 아마도 겉으로 인의(仁義)를 베푸는 척하는 폐단과 남이 알아주기를 서두르는 병폐가 있는 듯합니다. 제가 애틋한 마음으로 가만히 살펴보니 의심스럽고 걱정스러움이 한량이 없습니다. 저 또한 당신에게 잊지 못할 공이 있으니 가볍게 여기지 마세요. 당신은 몇 달 동안 홀로 잤던 일을 두고 붓을 들어 편지를 쓸 때마다 글자 가득 공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순에 가까운 나이로 이처럼 혼자 잔다면 당신의 기운을 보양하는 데 매우 이로운 것이니, 이는 결코 제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귀한 관직에 올라 도성의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처지이니, 비록 몇 달 동안 홀로 잤다 할지라도 또한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저는 옛날 당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사방에 돌봐주는 사람이 없고 당신은 만 리 밖에 있어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슬퍼하기만 했지요. 그래도 지성으로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러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했는데, 곁에 있던 어떤 사람은 ‘묘를 쓰고 제사를 지냄이 비록 친자식이라도 이보다 더할 순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삼년상을 마치고 또 만 리 길에 올라 험난한 곳을 고생스레 찾아간 일은 누군들 모를까요. 제가 당신에게 이처럼 지성스럽게 대한 일을 두고 잊기 어려운 일이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몇 달 동안 홀로 잤던 공과 제가 했던 몇 가지 일을 서로 비교하면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겁겠습니까. 바라건대 당신은 영원히 잡념을 끊고 기운을 보양하여 수명을 늘리도록 하세요. 이것이 제가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제 뜻을 이해하고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송씨(宋氏)가 아룁니다.”
하였다. 부인의 말과 뜻이 다 좋아 탄복을 금할 수 없다.
▣미암집 제8권
■1570년 8월
◯28일】이른 새벽에 대궐에 나아가 호조 당상(戶曹堂上)의 의막(依幕)으로 들어갔다. 판서 홍태허 담(洪太虛曇)이 이끌어 함께 앉았는데 참판 박계현(朴啓賢)과 참의 성의국(成義國)도 자리를 함께했다. 묘시에 삼공(三公)인 이준경(李浚慶)ㆍ권철(權轍)ㆍ홍섬(洪暹)이 모두 이르러 근정전의 동쪽 뜰에다 장막을 설치하였다. 영의정이 유관과 유인숙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위훈을 삭제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주상께서 비망기로 답하기를,
“임금이 신하에게 위엄으로 겁박해서는 안 되듯이 신하도 임금에게 강요하며 시끄럽게 굴어서는 안 되오. 을사년(1545)과 정미년(1547)의 원통함이 이미 풀리고 사흉(四凶)의 죄도 다 처벌되었건만, 또 어찌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소란을 일으키는 것인가.”
하였다. 좌의정 권철이 또 거듭 계청하고 우의정 홍섬이 또 세 번째 계청했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주상께서 양사(兩司)의 계청에 답하기를,
“사흉이 이미 그 죄를 받았고 을사년과 정미년의 원통함을 모두 풀어주었다. 호오(好惡)가 밝혀지고 시비가 정해지는 데 부족함이 없거늘 어찌 반드시 선왕조의 일을 모조리 고친 뒤에야 통쾌하단 말인가.”
하였다.
■1570년 9월
◯【10일】어제의 조보(朝報)를 보니, 한성부에서 아뢰기를,
“서부의 용산(龍山) 아래 공덕리에 사는 충순위(忠順衛) 김일례(金逸禮)의 집에 지난 8월 15일 오시에 하늘이 흐리고 비가 뿌리는 중에 어떤 물건이 공중에서 떨어졌습니다. 쨍그랑하는 소리가 나므로 취하여 보니 검은 돌 한 조각인데 안팎으로 글씨가 쓰여 있어 매우 괴이해 그 돌을 가지고 와서 서부(西部)를 통해 바칩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한성부에서 입계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돌이 공중에서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이미 괴상하고 허망하건만 글씨도 쓰여 있다고 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15일】이이 숙헌(李珥叔獻)이 답장을 보내 말하기를,
“《육서부록》 2책에 종이쪽지〔籤〕를 붙여서 올립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영공이 이 일을 하는 것은 매우 훌륭합니다. 다만 《사서》와 《소학》의 부록은 너무 소략해서 초라한 듯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마땅히 몇 년의 공부를 더 하여 상세하게 해야지 잠깐 사이에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 말이 매우 좋다
■1570년 11월
◯7일】아침밥을 먹은 뒤에 전하께 하직을 아뢰는 숙배(肅拜)를 하기 위해 대궐로 가서 보루문(報漏門)의 의막(依幕 임시 막사)으로 들어갔다. 의정부에서 설치한 것이었다. 옥당의 응교 이중호(李仲虎), 교리 이해수(李海壽), 수찬 유성룡(柳成龍)이 술을 가지고 와서 전별했다. 조금 있다가 숙배하고 다시 의막으로 들어갔다. 예를 마치고 곧 승정원의 도승지 방으로 들어가서 이계진(李季眞 이후백)ㆍ송하(宋賀)ㆍ오성(吳誠)ㆍ유홍(兪泓)을 만나 함께 전별의 술을 마셨으며, 또 승지 이충작(李忠綽), 승지 안자유(安自裕)를 두루 만나고 나왔다. 남소 위장(南所衛將)들의 초대를 받고 가서 송찬(宋贊)ㆍ오성(吳誠)ㆍ육첨(陸詹)ㆍ윤번(尹璠)ㆍ김오(金鋘)와 전별했으며, 또 참지(參知) 윤두수(尹斗壽)를 홍례문(弘禮門) 곁에서 보았다. 또 도총관(都摠管)의 초대를 받아 도총부로 가자 호조 판서 홍담(洪曇)과 형조 판서 정종영(鄭宗榮)이 전별해주고, 또 성문을 나와 멀리 향교동(鄕校洞)의 동지(同知) 심봉원(沈逢源) 집에 이르렀는데 심공이 특별히 전별주를 차려주어 마시고 나왔다.
남대문(南大門) 밖에 도착하여 첫 번째로 참의 이담(李湛)의 의막에 들어가 전별주를 마시고, 두 번째로 참의 박호원(朴好元)의 전별주를 마시고, 세 번째로 우윤 이건(李楗)과 첨정 김세헌(金世憲)의 전별주를 마시고, 네 번째로 예조 판서 박충원(朴忠元)과 호조 참판 박계현(朴啓賢)의 전별주를 마시고, 다섯 번째로 봉상시 정(奉常寺正) 고경허(高景虛)의 전별주를 마시고, 여섯 번째로 사복시 정(司僕寺正) 신련(辛璉)의 전별주를 마시고, 일곱 번째로 첨지 최옹(崔顒), 옥천 군수 권영(權詠), 김충갑(金忠甲)의 전별주를 마시고, 여덟 번째로 순천 경재소(順天京在所)의 전별주를 마시니 곧 평양군(平陽君) 김순고(金舜皐), 제용감 정(濟用監正) 이여경(李餘慶), 충의위(忠義衛) 김자문(金自汶), 무가선(武嘉善) 김경석(金景錫)이 참여했다. 아홉 번째로 대사성 민기문(閔起文)의 전별주를 마셨는데 원호변(元虎變), 윤강원(尹剛元), 사성 정언지(鄭彦智), 사예 민충원(閔忠元)도 참여했다. 열 번째로 봉상시 봉사(奉常寺奉事) 신대수(申大壽)와 김전개(金田漑)의 전별주를 마시고, 열한 번째로 사재(四宰) 박순(朴淳)의 전별주를 마셨는데 그의 형인 장원(掌苑) 박개 대균(朴漑大均), 사예(司藝) 민덕봉 응소(閔德鳳應韶), 별좌(別坐) 유몽익(柳夢翼)이 모두 도착했다.
이 날 홍태허(洪太虛 홍담(洪曇)), 최경숙(崔景肅 최옹(崔顒)), 민숙도(閔叔道 민기문(閔起文)), 박화숙(朴和叔 박순(朴淳))이 모두 말하기를, “충청 감사가 섣달에 과만(瓜滿)이 되니 영공이 후보에 들어 낙점을 받게 되면 추증(追贈)의 영광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나도 만일 호서백(湖西伯 충청도 관찰사)이 된다면 반년을 수행하다가 전최(殿最)한 뒤에 병으로 사임장을 내고 귀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섣달 20일 전에 제수해주면 정월 20일 뒤에 상경하여 사은숙배해도 늦지 않기 때문이다. 화숙 형제의 후의가 넘치니 일생동안 어찌 잊겠는가. 경상 병사 곽순수(郭舜壽)도 이날 함께 절하고 하직하느라 대궐 안에서부터 전정(餞亭 전별하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서로 들락날락하였다.
해거름에 한강 북쪽 언덕의 인가에 도착했는데 의정부에서 정해준 곳이었다. 정릉 참봉 김윤(金胤)과 선릉 참봉 민계(閔洎)가 말먹이 풀을 가지고 와서 맞이해주고, 허성(許筬)ㆍ윤진(尹軫)ㆍ윤흥종(尹興宗)ㆍ유대진(兪大進)ㆍ김진(金晉)ㆍ한경두(韓景斗)ㆍ이순(李淳)ㆍ최산앙(崔山仰)ㆍ정언눌(鄭彦訥)이 모두 왔다. 빙고별좌 김취려(金就礪)도 술병을 갖고 와서 전별했는데 그는 학문을 제법 알았다. 두 참봉과 허성ㆍ윤진ㆍ박순원(朴舜元)이 모두 술을 가지고 와서 전별하고 저녁에는 정홍(鄭鴻)이 왔다.
【12일】영릉 참봉(英陵參奉)의 후보에 아들 경렴(景濂)이 수망(首望)에 들고 강회경(姜懷慶)ㆍ홍일민(洪逸民)은 부망(副望)과 말망(末望)에 들었으나 경렴이 낙점을 받았다. 가문의 경사가 이보다 큰 것이 없다. 이 아이가 지난해부터 바랐는데 이제야 얻게 되니 주상의 은혜가 매우 크고 판서 정대년(鄭大年)과 참의 허엽(許曄)이 명심하여 도모해준 덕도 적지 않다.
【13일】전의(全義)에 이르자 현감 정인귀(鄭仁貴)가 두터운 예의를 갖춰 지영(祗迎)하므로 나는 “어찌 이렇게까지 하는가?”라고 물었다. 마주하여 차를 마시고 점심을 먹은 뒤에 담화도 많이 나누었다.
【15일】감사 박예숙(朴豫叔 박소립(朴素立))이 저녁에 내 방으로 와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술을 마셨는데 성 도사(成都事 성세평(成世平))도 참여했다.
○ 사시(巳時)에 관찰사 박소립(朴素立)이 동헌으로 들어와 나와 더불어 각각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청에서 상견례를 행하였다. 정월에 맺었던 약속을 다시 이 고을에서 찾게 된 것을 무척 다행으로 여겼다. 다시 편복(便服)으로 갈아입고 동헌으로 가서 차를 마시며 담화를 나누었다. 들어보니, 이 고을의 판관 박진(朴進)은 무과에 급제한 사람으로 지략이 있어 지난날 사나운 대당(大黨 큰 도적) 정검동(鄭黔同)을 잡아 가두었는데, 대개 그들의 당인을 꾀어 우리 편으로 활용하여 그 도당들을 많이 잡아들이고 이미 10여 명을 죽였으며 이제 또 괴수를 포획했다고 한다.
【17일】여산(礪山)으로 들어가니 어사(御史) 오건 자강(吳健子强)이 먼저 서헌으로 들어 동헌을 나에게 사양했다. 나는 대청에서 서로 만났는데 주재(主宰 군수) 김한걸(金漢傑)도 함께 앉았다. 군수의 아들 경심(慶深)이 처음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희롱을 당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제각기 흩어졌다. 김 군수가 다시 찾아와 관노(官奴) 한 명을 담양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 여자 종들의 일행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1570년 11월
◯【8일】심부름꾼이 나주에서 돌아왔는데 이상(貳相) 오겸(吳謙)의 답장은 은근했고 기명언(奇明彦 기대승)의 답장은 더욱 정중했다. 퇴계 선생이 자신의 무극(無極)과 물격(物格)의 설명을 따랐다는 내용도 베껴 보내왔다.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24일】들어보니, 영남의 예안(禮安)에 사는 퇴계(退溪) 선생 이공(李公 이황)이 이달 8일에 작고했는데 향년이 70이었다. 한 시대의 유종(儒宗)이 갑자기 이처럼 떠나니 애통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선생의 저술은 고정(考亭)을 도와서 실로 해ㆍ달과 빛을 다투고 만세에 전해질 것이다.
▣미암집 제9권
■1571년 2월
◯【11일】닭이 울자 일어나 제물을 장만하여 아침에 제사상을 차렸는데 제물이 자못 엄숙하게 갖추어졌다. 제사가 끝나기 전에 본 도(道)의 영리(營吏) 나덕린(羅德麟)과 마두(馬頭) 최광수(崔光秀)가 찾아와서, 내가 전라도의 감사(監司 : 종2품)가 되었다고 보고했다. 제사가 끝난 뒤에 이달 4일의 정목(政目)을 보니, 내가 수망(首望)이 되고 박승임(朴承任)이 부망(副望)이 되고 김계(金啓)가 말망(末望)이 되었는데 희춘이 낙점을 받았다. 주상께서 희춘이 고향을 그리워함을 알고 특별히 중임(重任)을 주어 부모와 조상에게 영화가 미치게 되었으니 감읍할 뿐이다. 다만 임무는 막중하고 재주는 짧으니 이것이 염려된다.
○ 선고(先考)는 마땅히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조고(祖考)는 좌승지 가 되고, 증조고는 좌통례(左通禮)가 될 것이니, 광영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13일】성주(城主 : 군수)가 감사가 상관이라 하여 찾아와 밖에 있기에 나는 맞아들여 접대하고 이 뒤에는 그러지 말라고 단단히 타일렀다.
■1571년 3월
◯【5일】이조의 서리(書吏) 유희상(柳煕祥)이 어제의 인사 행정에서 삼세(三世)를 추증한다고 비답을 내린 관고(官誥 교지)를 가지고 왔다. 희춘이 관디를 갖추고 나가 맞이하여 이를 받고 대궐을 향해 땅에 엎드렸다가 들어와서 펼쳐 읽어 보니, 선고에게는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를 추증하고, 조고에게는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을 추증하고, 증조고에게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추증했다. 선비 최씨(崔氏)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을 추증하고, 조비 설씨(薛氏)에게는 숙부인(淑夫人)을 추증하고, 증조비 양씨(梁氏)에게는 숙인(淑人)을 추증했으니, 백년의 소원이 이제야 풀렸다. 비감(悲感)을 금할 수가 없어 기쁜 눈물이 절로 떨어졌다. 사간 민덕봉(閔德鳳), 정언 윤탁연(尹卓然), 첨지 당언필(唐彦弼), 강익(姜益), 첨정(僉正) 남궁희(南宮憘), 정홍(鄭鴻), 김한(金僩), 설공(薛恭)이 잇달아 왔다 갔다.
○ 광흥창(廣興倉 녹봉을 관장하던 곳)에서 녹봉을 받았는데 쌀이 10섬, 콩이 7섬, 명주베가 1필, 포목 4필이다.
○ 희춘이 처음엔 전교를 도승지에게 받았는데, 그 내용은
“수령 등이 백성의 고혈을 짜 빈객(賓客)의 환심을 사기에 힘쓰고 음식을 장만하여 제공하며, 장막과 각종 물건들이 매우 화려하여 사치의 기풍을 이루고 있으니, 이런 폐단을 엄히 금지할 것이며 무기를 정비하고 훈련하는 따위의 일도 아울러 단속하라. 또 감사는 한 도의 일을 모두 다스리지 않음이 없는데 근래에 풍속이 쇠퇴하거나 투박해지고 학교가 폐지되거나 해이해지고 있으니 풍속을 바로잡고 학교를 일으키며 농사와 잠업에 힘쓰되 더욱 사형수를 중히 여겨 마땅히 자세하게 추고하라. 만일 강상(綱常)의 큰 변고가 생긴다면 이는 더욱 중대한 일이다. 옥사가 확정된 뒤에는 비록 경관(京官)을 보낸다고 해도 또한 분별하기 어려울 것이니 더욱 상세하고 신중히 살펴서 위협하여 국문하거나 억지로 공초를 받지 말라.”
하였다.
또 전교를 우부승지 이제민(李齊閔)에게 받았는데,
“백성을 친애할 관리는 수령보다 더 절실한 자가 없다. 수령의 어질고 어리석음에 백성의 기쁨과 슬픔이 달려 있으니 그 막중한 소임이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내가 지금의 방백(方伯 관찰사) 된 사람을 보면 출척(黜陟)이 너무 밝지 못하니, 이는 관찰(觀察)의 이름만 있고 관찰의 실상이 없는 것이다. 경은 마땅히 영념하여 엄히 밝히도록 하라. 또 ‘조그만 고을에도 반드시 참되고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라고 했으니, 전라도에 어찌 그런 사람이 없겠는가. 경은 탐문하여 장계로 알려서 나의 취사(取捨)를 기다리라. 또 지금 범상치 않은 변괴가 생기고 기근이 겹쳐 혹시라도 섬 오랑캐〔島夷〕가 틈을 보아 독기를 내뿜을 우려가 있으니, 절도사를 겸한 경이 방비할 일도 잘 살펴 조치해야 하리라.”
하였다.
○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관(官)을 두고 직(職)을 나누니 안과 밖이 다르지만 모두가 나의 정치를 기약하지 않는 것이 없다. 덕화를 받들어 교화를 펴고 민정(民情)을 묻고 물어 힘을 다하라. 참으로 그대들의 협력에 의지할 것이다.”
하였고, 다시 호남은 중요한 곳이라는 것과 민속의 폐단에 대해 언급하면서,
“미리 방비하여 후환이 없게 해야 하니 마땅히 난민이 날뛰는 것을 염려해야 한다. 전쟁을 망각하면 반드시 위태로운 법이니 군사 조련하는 일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이에 훌륭한 인재를 얻어 의지하고 큰 덕이 있는 선비를 구해야 한다. 경(卿)은 화평하고 단아한 영재(英才)로 옥과 같은 덕망을 지녔고, 5천 권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문자를 남김없이 가슴속에 채웠으며, 왕성한 논의는 흥망치란(興亡治亂)에 대한 수만 마디 말을 거울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다. 지난날 간사한 무리들이 감정을 품고 선량한 사람들을 죽이려 하였을 때 그 흉계를 꺾고 따르지 않았다가 도리어 음모에 걸렸으니, 어찌 전상(殿上)에 서 있던 강직한 선비가 바닷가로 귀양 가는 기러기가 될 줄 알았겠는가. 선왕께서 말년에 임용하려 하였으니 후사(後嗣)가 어찌 그 유지(遺志)를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난파(鑾坡)에서 나의 물음에 응하여 정성스럽게 인도하였고, 성균관에서는 유풍(儒風)을 진작시켜 부지런히 훌륭한 선비를 기르는데 뜻을 다하였으며, 대사헌(?)이 되어서는 풍채가 백간(白簡 관리를 탄핵하는 상소문)에 준엄하였고, 승정원의 직임을 맡아서는 우룡(虞龍 왕명의 출납을 맡은 신하)처럼 신실하였다. 역대 정훈(政訓)에 대한 글을 바쳐 신하의 정성을 다했고, 《소학(小學)》의 표리(表裏)에 대한 설을 올려 성리(性理)의 근원을 밝혀 보였다. 평소 그대의 충성이 애군(愛君)에 돈독함을 가상히 여겼는데, 이제 어려운 때를 만나 뛰어난 능력을 시험하려 하노라. 고향은 반드시 그리운 것이기에 그대가 돌아가려고 했지만 좌우에서 모두 어진 사람이라고 말하니, 내 어찌 그대를 버려 둘 수 있겠는가. 이에 가식(家食)하는 사람을 발탁하여 남방을 진무(鎭撫)케 하노라.”
■1571년 5월
◯【6일】옥부용(玉芙蓉 기생 이름)을 불러다가 만나 봤다. 그는 임인년(1542, 중종37) 봄에 설서(說書)로 있을 때부터 사귀어 온 친구〔故人〕이다. 금년에는 또 옥경아(玉瓊兒 기생 이름)와 친밀하게 지내니 완산(完山)에 두 사람이 있게 되었다. 우스운 일이다.
【11일】유시(酉時)에 봉안사 박화숙이 매월루(梅月樓)에 오르니 내가 찾아가 회합했다. 부윤 남궁성중(南宮誠仲), 종사관 신희남(愼喜男), 봉교(奉敎) 이산보(李山甫)도 모두 도착했다. 풍악을 울리고 술을 권했는데 화숙 영공이 나를 스승이라 부르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또 나더러 평생 여색을 가까이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옥경아(玉瓊兒)를 유독 어여삐 여긴다면서 특별히 술잔을 잡아 직접 주기도 했다. 내가 비록 봉안사를 위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듣기는 했지만 실은 소식(素食 고기반찬이 없는 음식)을 먹었다.
20일】이때 도내에서 강단 있고 현명하게 듣고 심리하여 능히 옥사나 송사를 판결한 관리로는 오직 여산 군수(礪山郡守) 정엄(鄭淹), 익산 군수(益山郡守) 조완벽(趙完璧), 남평 현감(南平縣監) 이징(李徵), 담양 부사(潭陽府使) 김위(金偉), 구례 군수(求禮郡守) 신승서(申承緖)다. 그 다음으로는 영광 군수(靈光郡守) 안용(安容), 나주 목사(羅州牧使) 권순(權純), 능성 현감(綾城縣監) 정염(丁焰), 순천 부사(順天府使) 이선(李選)이니 이 네 명은 강단과 현명함에서 버금간 사람이다.
■1571년 7월
◯【9일】오시에 익산(益山)에 이르러 청심루(淸心樓)에 올라 심약관(審藥官)을 보내 동지(同知) 소세검(蘇世儉 1483-1573 1555년 퇴임 소세양(1486-1562)의 형)의 안부를 물었다. 소공은 이때 나이가 89세였는데 아들 하(遐)를 보내 사례를 표했다.
※청심루
수양버들 제방 위에 단청 누각 해맑은데 / 고르디고른 맑은 강 비단무늬 깔리었네
平누런 말 헤엄친 물결 그 자취 아득하고 / 검은 학 신선 고을 이름 아직 남았구나
楊柳提頭畵閣淸 澄江一面錦紋平 黃驪寶馬波無跡 玄鶴仙人洞有名
봄 지난 강기슭에 향그런 풀 깔리었고 / 비 보낸 맑은 안개 먼 돛배 또렷하도다
어촌에서 빚은 박주 취한 기운 돌지 않아 / 서북 하늘 뜬구름에 나그네 마음 흔들려
斷港經春芳草遍 晴煙送雨遠帆明 漁村薄酒難成醉 西北浮雲動客情
다산 정약이 청심루에 올라가(登淸心樓) 읊은 시로 또다른 정자의 흔적을 찾는다.
청심루(淸心樓),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당시 익산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었다.
청심루는 1456년(세조 2) 이곳 군수였던 노상군(盧相君)이 객관(客館)의 동쪽에 창건하였으며, 1508년(중종 3)밀양의 손후(孫侯)가 이곳 군수로 부임하여 중수하였다 한다
○ 저녁에 최희정(崔希程)ㆍ소종선(蘇宗善)ㆍ소이(蘇邇)ㆍ오유일(吳惟一)ㆍ오유언(吳惟彦)이 찾아와 인사했고, 소종선의 아들 형진(亨震)도 왔는데 병진생(丙辰生)으로 매우 기특하고 순수했다.
【10일】국기일(國忌日)이다. 아침에 향교로 가서 알성(謁聖)하고 곧 동지 소세검의 집으로 갔는데 맞아들여 무척 반가워했다. 지난 을해년(1515)과 정축년(1517) 사이에 우리 선군(先君 유계린(柳桂隣))을 순천과 해남에서 만나 장기를 두었던 일과 선형(先兄 유성춘(柳成春))과 종유한 동년(同年)의 선비 직제학 이약해(李若海)가 자기의 사위가 된 인연을 들려주었는데 비감을 금할 수 없었다. 국기이므로 술상은 차리지 않았다.
28일】오시 초에 4사(使 병사ㆍ좌수사ㆍ우수사ㆍ관찰사)가 희경루(喜景樓)에 모였다. 내가 먼저 오르고 병사(兵使)가 다음에 올라 함께 북벽(北壁)에 앉았다. 좌수사(左水使)와 우수사(右水使)가 다음에 올라 함께 동벽(東壁)에 앉으니 풍악이 울리고 번갈아 술잔을 들었다. 그전에 두 수사가 첨사(僉使)와 만호(萬戶)의 포폄을 논의했는데, 우수사는 목포(木浦)를 토(土 5등)로 삼고 어란진(於蘭鎭)을 수(水 3등)로 삼았다. 나는 임치진(臨淄鎭)이 군졸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어 또한 토(土)로 삼으려 했는데 좌수사는 여도(呂島)를 토로 삼았다. 두 수사가 물러간 뒤에 병사와 마주하여 수령들의 포폄을 논의했는데, 순창을 내가 토로 삼으려 하자 도사(都事)와 병사(兵使)는 수가 합당하다고 했다.
■1571년 10월
◯【14일】조보(朝報)가 내려왔다. 이달 9일에 대사헌 박응남(朴應男)이 신병으로 세 번이나 사임장을 제출해 주상께서 체차를 명하고, 그날 저녁에 인사 행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조(吏曹)에서 김귀영(金貴榮)ㆍ노수신(盧守愼)ㆍ이후백(李後白)을 대사헌의 물망에 올리려고 했다. 아직 입계(入啓)하기 전에 주상께서 이조의 정청(政廳)에 전교하기를 “전라 감사 유희춘을 대사헌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 하셨다고 한다. 삼가 생각건대 신이 볼품없는 사람으로 외람되이 주상의 은총을 입어 이렇게 발탁되니 황공하기 그지없다. 곧 유지(有旨)가 오기를 기다려 부름에 응하여 대궐로 나아갈 작정을 하고, 해남과 담양으로 편지를 보냈다.
○ 신임 감사(監司)는 이양원(李陽元 1526-1592)이 되었는데 46세로 나이가 젊고 병이 없는 사람이다.
【17일】무장(茂長)이란 고을은 선형(先兄 유성춘(柳成春))이 18세에 〈검각부(釰閣賦)〉를 지어 동당시(東堂試)에서 장원이 되었고, 내가 25세에 〈의심(疑心)〉으로 이하(二下)를 받아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을 한 곳이다. 계묘년(1543, 중종38)에는 현감이 되어 어머니를 모셔와 이 고을에서 봉양하였고, 을사년(1545, 인종1) 여름에는 홍문관 수찬으로 유지(有旨)의 서장(書狀)을 받았다. 이제 또 대사헌으로 승진하여 청관(淸官)에 뽑히는 소명을 받았으니, 인연이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1572년 9월
◯【20일】이날의 인사 행정에서 희춘은 예문관 제학(정3품 藝文館提學)의 말망(末望)에 들어 낙점을 받았다. 이후백(李後白)ㆍ오상(吳祥)이 수망(首望)과 부망(副望)에 들었었다. 나에게 이 직책은 마치 귀머거리와 장님더러 오음(五音)을 듣게 하고 오색(五色)을 변별케 하는 격이어서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겁이 났다. 장차 소장을 올려 강력히 사양하여 기어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야겠다.
■1571년 11월
◯【3일】동지성균(同知成均)의 신분으로 태학(太學)에 갔는데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유생들이 천 수백 명이었다. 이처럼 많아진 이유는 별시(別試)가 앞에 다가왔는데 4관(성균관ㆍ홍문관ㆍ예문관ㆍ춘추관)에서 사신을 정중히 맞이하지 않는 사람은 수록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서쪽 협실로 들어가 가관관(假館官)인 판서 원혼(元混), 판윤 강섬(姜暹), 판서 김귀영(金貴榮), 대사성 홍천민(洪天民)과 함께 모였다. 여기서 오늘 사신의 연회석에서 마땅히 흉배단령(胸背團領)을 입어야 한다고 들었고 또 김공(金公)을 통해 자주색 바탕의 옷은 곧 중국 황후가 입는 옷이기 때문에 사신이 보는 곳에서 입어서는 안 된다고 들었다. 즉시 종을 보내 흉배(胸背)와 초록빛 철릭〔天益〕을 가져오게 했다.
○ 명나라 사신은 유생들이 뜰에 가득히 모여 배례(拜禮)하는 것을 보고 역관을 보내어 관당상(館堂上)에게 말하기를 “영재(英才)들이 많이 모인 것을 보니 교육이 훌륭함을 알 만합니다.” 하고, 또 관원(館員)에게 묻기를 “관에는 양성하는 유생이 몇 명이나 됩니까?” 하니, 유희춘이 대답하기를 “언제나 5백 명을 양성합니다.” 하였는데, 이는 전에 서거정(徐居正)이 왕창(王昌)과 동월(董越)에게 대답한 말을 그대로 한 것이다.
【7일】정철(鄭澈)이 소식을 전하여 기대승(1527-1572 46세)이 서거했음을 알게 되었다. 놀랍고 슬프기 그지없다. 이 사람은 지기(志氣)가 뛰어나고 강개한 마음으로 일을 행하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학식이 넓고 옛것을 좋아하며 문장에도 능하였으니, 호련(瑚璉) 같은 그릇이라고 할 수 있고 세상에 드문 인재라 할 수 있다. 다만 강단 있고 과감하여 자기 생각대로 행하고 말을 쉽게 하여 기로(耆老)들을 책망함으로서 구신(舊臣)과 정승들에게 크게 미움을 샀다. 이것은 날카로운 기질이 닳아지지 못하여 갑자기 통곡하는 병폐가 있었기 때문이다.
18일】2소(所)의 시관으로 낙점을 받았다. 사약방(司鑰房)으로 가서 2소의 시관이 된 사재(四宰) 박충원(朴忠元), 첨지 민기문(閔起文)과 함께 앉았다. 2경(更)에 무과 시관과 합쳐 모두 5소의 시관 45명이 한꺼번에 숙배하고 빈청에서 하사한 술을 받았다. 곧 나와 성균관에 이르니 밤은 이미 2경 4점이 되었다. 참찬 박충원(朴忠元)이 상시관(上試官)이 되어 북쪽에 앉고 희춘이 부시관(副試官)이 되어 동쪽에 앉고 대사간(大司諫) 허엽(許曄)과 첨지 민기문이 서쪽에 앉고 군기시 정(軍器寺正) 이거(李蘧), 장령 신점(申點), 이조 좌랑 정탁(鄭琢), 예조 정랑 유대수(兪大脩), 병조 좌랑 홍혼(洪渾)은 남쪽에 앉았다. 곧 상(床)을 내려 완의하고 책(策) 제목을 냈는데 좌중이 모두 나에게 맡기므로 나는 서쪽 방의 편안한 곳으로 가서 기초했다.
■1572년 12월
◯【1일】내가 또 전시관(殿試官)의 후보에 들었다는 말을 듣고 옥당으로 가니 날이 이미 오시가 되었다. 저녁에 낙점을 받았는데 형조 판서 박충원(朴忠元), 형조 참판 이양원(李陽元)과 희춘이 독권관(讀卷官)이 되고 홍천민(洪天民)ㆍ박승임(朴承任)ㆍ윤근수(尹根壽)ㆍ조정기(趙廷機)가 대독관(對讀官)이 되고 이기(李墍)가 우승지로 참여했다. 날이 어두울 무렵 함께 빈청으로 올라가 대(對)ㆍ책(策)ㆍ표(表)ㆍ론(論)ㆍ부(賦)ㆍ송(頌) 등을 써서 의견을 여쭈었더니 주상께서 표(表)에다 점을 찍었다. 여러 사람이 표의 제목을 논의했으나 속히 정하지 못하고 모두 나에게 맡겼다. 나는 ‘송나라 사마광이 인(仁)을 다하고 무(武)를 밝힐 방도를 청한 내용을 지어보라〔擬宋司馬光請盡仁明武之道〕’로 초안을 썼는데 좌중이 모두 승복했다. 또 부망(副望)에 대비한 제목을 논의했는데 나는 또 ‘송나라 정호가 천하의 선비를 가볍게 보지 말기를 청한 내용을 지어보라〔擬宋程顥請勿輕天下士〕’로 초안을 잡아 참판 이양원에게 쓰라고 하고, 윤자고(尹子固 윤근수)는 ‘송나라 이강이 장준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장래의 공효를 요구하기를 청한 내용을 지어보라〔擬宋李綱請寬假張浚以責來效〕’로 단자를 만들어 들여보냈는데, 주상께서 첫 번째 제목에다 점을 찍었다. 밤이 이미 3경이 되어 모든 시관들이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내금위장의 청방(廳房)으로 들어갔다. 뒤따른 사람은 이덕순(李德純)과 김성윤(金成胤)이다.
▣미암집 제10권
■1573년 1월
◯【1일】교서관 제조(校書館提調)의 후보에 강사상(姜士尙)이 수망이 되고 박근원(朴謹元)이 말망이 되었는데 내가 부망(副望)으로 낙점을 받았다. 이 또한 문자(文字)를 다루는 관사(官司)이다.
【13일】오늘 ‘희춘이 군주의 은총이 두터운 때에 물러가 쉬겠다고 청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나, 사마광(司馬光)이 물러나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수하느라 15년 동안 낙양(洛陽)에 머물렀던 전례에 의거하여 3, 4년간 집으로 돌아가 《강목부록(綱目附錄)》ㆍ《관규(管窺)》 등을 찬술하기를 청하면 반드시 보내주실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가을이 되길 기다려 말해야겠다.
○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서책을 인쇄할 때에 자획이 희미한 것은 본래 감인(監印)과 감교(監校)를 맡은 관리가 책임질 일입니다. 제조(提調)는 몸소 교정을 볼 수 없게 되어있기 때문에 법전 내용에도 ‘만일 착오나 희미한 곳이 있으면 감인과 감교를 맡은 관리 및 하인만 다스린다.’라고 되어있으니 제조는 무관합니다. 이제 추고(推考)의 명이 본사(本司)에 하달되었으니 더욱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이 남을 다스린다는 혐의는 없습니다. 청컨대 대사헌 유희춘에게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주상께서 즉시 패초(牌招)로 출사를 명하였다. 희춘은 곧바로 출사했다.이윽고 좌의정 박순(朴淳), 정2품 송기수(宋麒壽)ㆍ박충원(朴忠元)과 함께 근정전(勤政殿) 뜰로 들어가 사배하고 다시 동쪽으로 옮겨 섰다. 새로 급제한 사람은 문과가 33명, 무과가 29명인데 차례대로 불러들였다. 나는 김제민(金齊閔)과 김한(金僩)의 차례에 후배(後拜)를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않았다. 새로운 급제자들에게 홍패(紅牌)를 하사하고 술을 하사하고 어사화(御賜花)를 내리고 일산(日傘)을 하사하니 사은의 절을 하고 나갔다. 여러 신하들이 반열(班列)을 돌려 하례를 행하고 사배를 드린 뒤에 나왔다. 다시 홍례문 의막에 이르러 집의 이해수(李海壽), 장령 한효우(韓孝友), 지평 조부(趙溥)와 함께 계달할 것을 의논했다. 수사(水使) 조구(趙逑)에 대한 논핵이 야기되었으나 마침 우리 세 명이 저지했다.
【29일】예조 참판 후보에 희춘이 수망(首望)에 들고 박근원(朴謹元)이 부망, 윤의중(尹毅中)이 말망이 되었는데 희춘이 낙점을 받았다. 이것은 참으로 선비의 직책이어서 온 집안이 좋아했다.
■1573년 5월
◯【13일】모화관(慕華館)의 사대(査對)하는 곳으로 갔다. 오늘 성절사(聖節使)의 표문(表文)에 절하고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오시(午時)에 권덕여(權德輿)를 시켜 표문을 모시게 하고 백관이 표문에 절하고 모화관까지 따라서 갔다. 좌의정과 우의정이 모화관의 대청으로 들어가니 승문원의 제조(提調) 제공과 육조의 제공들이 들어가 읍례(揖禮)를 행하고 얼마 안 있어 사대를 시작했다. 이는 8월 17일의 성절을 축하하고 피랍된 중국인을 쇄환해준 데 대해 황제가 은과 비단을 하사했기 때문에 이번의 행차에 사은(謝恩)까지 겸해서 두 행차가 있는 것이다. 문서의 사대가 끝난 뒤에 정승들은 나가고 우리들은 승문원의 제조로서 또 봉과(封裹)를 감사했다. 나는 사인(舍人) 이해수(李海壽)의 초청을 받아 함께 사신 권치원(權致遠 권덕여), 서장관(書狀官) 이승양(李承楊), 질정관(質正官) 이원익(李元翼)을 전별하고 곧 물러나왔다.
■1573년 6월
◯ 삼공과 이조가 같이 의논하여 이조의 낭청(郞廳 낭관)이 아뢰기를,
“암혈(巖穴)에 은둔한 선비는 신들이 아직 들은 바가 없으므로 감히 천거를 논할 수 없으나, 우선 지금 학행이 두드러지게 알려진 전 참봉(參奉) 조목(趙穆 1524-1606), 학생(學生) 이지함(李之菡 토정 1517-1578),
※생원(生員) 정인홍(鄭仁弘 1535-1623 89세 처형),
<조식(曺植)의 수제자로서 최영경(崔永慶)·오건(吳健)·김우옹(金宇顒)·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경상우도의 남명학파(南冥學派)를 대표하였다.
1573년(선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오르고, 1575년 황간현감에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지평을 거쳐 1581년 장령에 승진하였다.
당파가 동서로 양분되자 다른 남명학파와 함께 동인편에 서서 서인 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을 탄핵하려다가 도리어 해직당하고 낙향하였다.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를 계기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립될 때 북인에 가담하여 영수(領首 55세)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성주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고, 10월 영남의병장의 호를 받아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고령·함안 등지를 방어했으며, 의병 활동을 통해 강력한 재지적 기반(在地的基盤)을 구축하였다.
1602년 대사헌에 승진, 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했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여 파직하게 한 다음, 홍여순(洪汝諄)·남이공(南以恭) 등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다. 이어 유성룡과 함께 화의를 주장했던 성혼(成渾) 등 서인을 탄핵하였다.
북인이 선조 말년에 소북·대북으로 분열되자, 이산해(李山海)·이이첨(李爾瞻)과 대북을 영도하였다.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자 적통(嫡統)을 주장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에 대항하여 광해군을 적극 지지하였다.
1607년 선조가 광해군에 양위하고자 할 때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반대하자 탄핵했다가 이듬해 소북 이효원(李效元)의 탄핵으로 영변에 유배되었다.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배도중 풀려나와 대사헌에 기용되어 소북일당을 추방하고 대북정권을 수립하였다.
대북정권의 고문 내지 산림(山林)의 위치에 있던 그는 유성룡계의 남인과 서인세력을 추방하고 스승 조식의 추존 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문묘종사 문제를 둘러싸고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비방하는 소를 올려 두 학자의 문묘종사를 저지시키려 하다가 8도 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에 의하여 청금록(靑襟錄: 儒籍)에서 삭제되는 등 집권을 위한 싸움으로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612년(광해군 4, 78세) 우의정이 되고, 1613년 이이첨과 계축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좌의정에 올라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1618년 인목대비 유폐사건에 가담하여 영의정(84세)에 올랐다.
그는 광해군 때 대북의 영수로서 1품(品)의 관직을 지닌 채 고향 합천에 기거하면서 요집조권(遙執朝權: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함.)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89세)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당했으며, 끝내 신원되지 못하였다. 이이(李珥)는 일찍이 그를 평하여 “강직하나 식견이 밝지 못하니, 용병에 비유한다면 돌격장이 적격이다.”라고 하였다.
강경한 지조, 강려(剛戾)한 성품, 그리고 지나치게 경의(敬義)를 내세우는 행동으로 좌충우돌하는 대인관계를 맺어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저서로 『내암집』이 있다.>
학생 최영경(崔永慶 1529-1590)ㆍ김천일(金千鎰 1537-1593) 5명을 뽑아 아룁니다. 이 사람들에게 관례에 따라 참봉의 말직을 준다면 각별히 거두어 쓰는 뜻에 맞지 않을 듯하니, 참상관(參上官)에 해당하는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신이 삼가 이 조처를 살펴보건대, 참으로 대신들의 선비를 천거하는 도리가 난초와 구슬을 가시덤불이나 진흙 속에 버려지지 않게 함이니, 누가 감탄하지 않겠는가.
【21일】전라 감사(全羅監司) 이중호(李仲虎)가 찾아와서 경재소(京在所)의 전별을 면제해주기를 청했다. 나는 출발하는 날에 문밖에서만 전별하려고 한다. ※당시 유희춘이 전라도 경재소의 대표격인 위치에 있었던 것 같다.
※경재소(京在所) : 조선 전기 중앙집권적 지방 통치 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중앙의 현직 관리를 통해 출신지나 연고를 지닌 군현의 품관ㆍ향리 등 지방 토착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두어진 기구의 하나이다. 임원은 각 군현마다 좌수(座首) 1명, 6품 이상의 참상별감(參上別監) 2명, 7품 이하의 참하별감(參下別監) 2명 등 모두 5명으로 구성되었다. 수령의 직무에는 관여하지 못한다는 원칙하에 각기 연고지 군현의 유향소와 긴밀한 종적(縱的) 유대 관계를 갖고 있었다. 유향소 임원의 임면(任免), 원악향리(元惡鄕吏)의 규찰, 향중 인사(鄕中人士)의 천거와 보증, 공부(貢賦)ㆍ진상(進上)의 독납(督納), 경저리(京邸吏)의 사역, 공물 대납(代納) 및 해당 군현의 요구 사항을 건의하는 등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향중 공무(鄕中公務)를 관장하고, 향촌사회 내부의 풍속 규찰과 교화(敎化)를 담당했다.
■1573년 7월
【6일】허태휘(許太輝 허엽)와 이여수(李汝受 이산해)가 찾아왔다. 내가 품계가 올라 이조 참판의 후보에 들지 못한 것을 위안하려는 뜻이었다.
○ 대사간(大司諫) 이산해(李山海)를 통해, “숙부 지함(之菡)의 호는 토정(土亭)인데 형 지번(之蕃)의 병환 때문에 서울로 들어와 자기에게 6품의 관직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귀를 씻고 곧장 돌아가 버렸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벼슬과 녹봉을 뜬구름처럼 보는 사람이니 참으로 세상에 없는 고결한 선비이다.
◯【19일】동지경연관(同知經筵官)의 교지가 왔다. 주상께서 평소에 신 희춘의 문학을 아시고 매우 지극히 돌보아주셨으므로 부제학ㆍ대사성ㆍ교서관 제조ㆍ예문관 제학ㆍ동지경연관 등 문자에 관한 화려한 인선에 낙점을 하시지 않은 바가 없으니, 신 희춘이 주상을 만남은 이른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큰 행운이다. 감격의 정이 어떠하겠는가. 그 은총을 어찌 갚겠는가. 땅에 엎드려 황송할 따름이다.
■1573년 8월
◯대사간 김계휘(金繼輝) 중회(重晦), 지평 노직(盧稙), 고산 현감 박개(朴漑)가 잇달아 왔다가 갔다. 대균(大均 박개)이 말하기를,
“좌의정(박순)이 완산(完山)의 기생 준향(俊香)을 보살피고 그리워하는데, 기운이 쇠약한 나이(51세)에 이처럼 정력을 소모시키는 일을 하는 데다가 근일에 그를 불러올릴 것이라 하니,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하였다. 나는 대균의 이 말이 사암(思庵 박순)에게 약석(藥石)이 될 만하다고 여겼다.
■1573년 11월
◯【10일】식후에 예조에 좌기(坐起)했다. 탄신일에 올릴 방물(方物)의 물품을 살피기 위해서다. 희춘이 처음 들어가 낭청(郞廳)의 사례(私禮)를 받고 다시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서쪽 벽을 향해 서 있는데, 외방에서 전문(箋文)을 모시고 온 관원들이 차례대로 전문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바쳤다. 희춘이 서서 받아 서리(書吏)에게 주어 북쪽 벽의 높은 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방물을 받아들였는데 낭청이 남쪽에 앉아 물품마다 먼저 하나씩 취하여 나에게 보여주고 다음으로 낭관에게 보여줬다. 팔도의 감사(監司)와 병사(兵使)가 봉하여 올린 것이 매우 많았고, 수사(水使)는 노루 가죽만 올렸을 뿐이다.
방물은 대전(大殿)에는 갑옷ㆍ투구ㆍ활ㆍ화살ㆍ창ㆍ검ㆍ아다개(阿多介 털담요)ㆍ호표(虎豹) 가죽ㆍ노루 가죽ㆍ칠상자ㆍ삼도자(三刀子)ㆍ가위ㆍ인두ㆍ나무 빗ㆍ대나무 빗ㆍ빗치개ㆍ벼루ㆍ솥ㆍ탕관(湯罐)ㆍ황모(黃毛)ㆍ먹집ㆍ유둔(油芚)ㆍ유석(油席)ㆍ말고삐ㆍ마장(馬裝)ㆍ동백기름 따위의 물품을 올리고, 공의전(恭懿殿)ㆍ의성전(懿聖殿)ㆍ중전(中殿)ㆍ덕빈전(德嬪殿)에는 활ㆍ화살ㆍ창ㆍ검을 제외하고 나머지 물품은 대략 같다. 인정(人定)이 된 뒤에야 모두 살피고 물러났다.
▣미암집 제11권
■1574년 1월
◯【12일】우부승지(정3품) 이이(李珥 1536-1584)가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위로는 성학(聖學)으로부터 아래로는 시국의 폐단에 이르기까지였다. 주상께서 비망기로 답하기를,
“〈만언소〉를 살펴보고 요순(堯舜)이 백성을 다스리는 뜻을 볼 수 있었다. 의론이 훌륭하여 옛 사람도 이보다 낫지 못하리라. 이와 같은 신하가 있으니 어찌 다스려지지 못할까 근심하겠는가. 그대의 충성을 깊이 기뻐하노니 감히 띠에 쓰지 않겠는가. 다만 고쳐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갑자기 모두 바꿀 수가 없노라. 이 〈만언소〉를 여러 대신들에게 보이고 그 가운데 선상(選上)과 군정(軍政)의 개혁은 군민(軍民)의 급선무이기 때문에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1574년 6월
◯【6일】오늘은 파직되어 서용되지 못하는 사람과 성문 밖으로 쫓겨난 사람을 의논하였다. 곧 이명(李銘)ㆍ고경명(高景明)ㆍ윤인함(尹仁涵)ㆍ임복(林復)ㆍ정신(鄭愼)ㆍ김여부(金汝孚)ㆍ김진(金鎭)ㆍ황이경(黃以瓊)ㆍ이성헌(李成憲)ㆍ이언충(李彦忠)ㆍ윤인서(尹仁恕)ㆍ심뢰(沈鐳)ㆍ심전(沈銓)ㆍ조덕원(趙德源)ㆍ황삼성(黃三省)ㆍ정척(鄭惕)ㆍ강극성(姜克誠) 등이다.
【29일】우의정 노공(노수신 1515-1590)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부터 그 아우 극신(克愼)의 요청으로 인해 청렴하지 못한다는 이름을 많이 얻었다. 뇌물을 주고 관직을 구하는 자들이 그 아우의 집에 폭주하였다. 정승이 되어서도 현인을 추천하고 신원하는 일에는 조금도 뜻이 없고 도리어 사특하고 간사하여 선비들을 모함하는 자 4, 5명을 급급히 끌어 올리는 우두머리가 되었다. 또 무과의 당상 이의(李義)는 이량(李樑)에게 아첨하여 붙어서 의롭지 못하고 인륜을 어지럽히는 일을 많이 행하였는데 노공이 또한 경연에서 서용할 것을 청하였다. 전날 홍문록(弘文錄)도 본관에서 추천한 사람이 9명이었는데 다만 2명만 쓰고 7명은 쓰지 않았으며 이랑(吏郞)을 녹용(錄用)하는 것도 3명을 다 쓰지 않았다. 집요하게 사사로움만을 따르는 병통이 있고 공평하게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뜻이 없으니 사림이 크게 실망하였다. 이숙헌과 정연지도 모두 탄식하기를 전일에 사림들이 속아서 잘못 믿을 만하다고 여겼다고 하였다.
■1574년 7월
○ 내가 이 집으로 이사 온 뒤로 밥 지을 솥이 없어 사람에게 빌렸다. 저번 날에 우리 집 여종이 빨래를 하러 우물에 가니 마을의 여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밥 지을 솥이 없어 남에게 빌렸다는 재상집의 여종인가.” 하였다 하니 웃을 만한 일이다.
【18일】사전(四殿)에 숙배하고 동문의 빈청(賓廳)으로 돌아왔다. 단령(團領)으로 바꾸어 입고 대간청(臺諫廳)에 이르러 계초(啓草)를 갖추어 사면을 청하기를,
“대사헌의 임무는 위를 바로잡고 아래를 규찰하여 대간을 이끌 뿐만 아니라 실로 기강을 들어 진작하여 한 시대의 정치와 풍속을 정돈하는 것이니 강명하고 굳세어 다스림의 요체에 밝은 선비가 아니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여러 신하 가운데서 가장 우활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전일에 여러 번 이 직책을 지냈으나 모두 수행하지 못하여 체직되었습니다. 이제 또 왕명으로 제수되니 모기가 산을 지는 듯하여 밤낮으로 황송합니다. 거듭 명기(名器 나라의 작위나 벼슬)를 더럽힐 수 없으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이 스스로 아는 것을 헤아리시고 속히 체차를 명하시어 다시 합당한 사람에게 제수하소서.”
라고 하자, 주상께서 답하기를 “경이 합당하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미암집 제12권
■1574년 7월
◯【7일】이날 인사행정이 있어 나는 호조 참판의 말망(末望)에 들었으나 낙점을 받지 못하고 형조 참판의 부망(副望)에 들어 낙점을 받았다. 이양원(李陽元)과 이희검(李希儉)은 수망(首望)과 말망이었다. 허사흠(許思欽)은 지평이 되고 심충겸(沈忠謙)은 정언이 되었다.
■1574년 8월
◯【18일】사시에 시관의 패초(牌招)를 받고 대궐로 갔는데 함께 소환된 이들 중에서 가장 먼저 도착하였다. 근정전에 마련한 의막으로 들어가니 이조 정랑 김효원(金孝元 1542-1590)이 찾아와 절을 하였다. 나는 이정서(李廷瑞)가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 정미년(1547, 명종2) 간에 사화를 당한 이들을 신원하여 구해 주었는데 풀려나 돌아온 후에 같이 귀양을 간 제공(諸公)의 자제는 모두 벼슬을 주었다. 유독 이정서만 그 형의 아들 정(瀞)에게 관직을 주지 못하였고 정도 또한 사람됨이 매우 좋다고 하였다. 김군이 기쁘게 판서에게 잘 말해 돕겠다는 뜻이 있었다. 호조 판서 윤현도 찾아왔다. 날이 저물 때에 여러 추천인 들이 도착하였는데 혹 오지 않는 이도 있었다.
예조 판서가 단자를 들여보내니 나는 한 곳의 시관으로 낙점을 받았고 판윤(정2품) 심수경(1516-1599 84세)은 상시관(上試官)이 되었다. 문무시(文武試)가 5곳인데 각 장소마다 시관이 3명이고 참시관(參試官)이 4명, 감시관(監試官)으로 대간이 각각 1명이니 합해서 5곳에 9명씩 45명이다. 근정전 뜰에서 숙배를 하니 주상께서 술을 하사하시어 차례대로 받아 마셨다. 또 문과의 시관들이 선반(宣飯)을 받아먹고 2경 말에 나왔다. 내가 심 판윤을 따라 성균관 명륜당에 이르니 밤이 이미 3경 2점이었다. 판윤 심희안(沈希安 심수경)이 북쪽에 앉고 나는 동벽에 앉았으며 병조 참의 최옹 경숙은 서벽에 앉았다. 참시관은 우통례 이인(李訒), 군기정 윤고(尹杲), 사예 윤승경(尹承慶), 서윤 임국로(任國老)이고 감시관은 집의 최흥원(崔興源), 헌납 정사위(鄭士偉)였다. 판윤이 책문(策問)의 시제를 나와 최경숙(崔景肅), 윤승경(尹承慶)에게 맡겼다.
【19일】문에 들어온 유생의 수가 1671명이다.
【20일】시관은 7명이고 감시관은 2명으로 합이 9명이다. 함께 시권을 살펴보았다. 초경 5점에 끝냈다. 16축에 260도(道)였다.
【21일】아침에 명륜당으로 올라가서 종일 글 20축을 살폈으니 200도였다. 2경 4점에 끝냈다.
【23일】오늘은 20축을 살폈으니 200도이다.
【24일】일찍 일어나서 이전과 같이 문장을 고과(考課)하였다. 초경 5점에 이르렀으니 25축 250도이다. 26일에 출방(出榜)하기 때문에 서둘러서 보았다. 이 때문에 이와 같이 과차(科次)하였다.
【25일】일찍 일어나 이전처럼 문장을 고과하였다. 미시에 이르러 마치니 19축 189도이다. 신시에 전에 보류하여 높게 매기려다 못하였던 등급을 매겼다. 2상(二上)인 사람이 2명, 2중(二中)인 사람이 2명, 2하(二下)인 사람이 1명이었다. 비록 봉함을 열지는 않았지만 우선 시권의 자호(字號 순번)로 100명을 매긴다면 3하(三下) 이상이 27명이고 그 다음이 73명은 차등(次等)이다. 점의 순서대로 내려가면 5, 6일이 지나 끝난다. 2소(二所)의 방을 보니 양사형(楊士衡)과 최상중(崔尙重)이 모두 들었고 3소(三所)의 방을 보니 문위세(文緯世), 이효(李效), 원충원(元冲元) 등이 모두 들어있으니 기쁜 일이다.
【26일】명륜당에 모여 앉아 등록관(騰錄官)과 삼관(三館)을 오게 하여 비봉(秘封)을 열어 보니 2상으로 수석이 된 이는 생원 이관(李寬)이고 2상으로 차석이 된 이는 김간(金侃)이었다. 삼관에게 초방(草榜)을 쓰게 하고 1등한 유생은 괘방(掛榜)을 쓰게 하였으며 서사관은 입계 단자를 쓰게 하여 숙배하니 주상께서 명하여 술을 하사하였다. 미시 말에 집에 돌아왔다.
■1574년 9월
◯【21일】좌기(坐起)를 하기 위해 성균관으로 갔다. 대사성 윤두수(1533-1601) 자앙(尹斗壽子昻) 이하가 먼저 와서 기다렸다. 내가 명륜당으로 들어가니 여러 관원이 위로부터 아래로 차례대로 예를 행한 후에 동서재(東西齋)의 유생들이 뜰에 나와 읍을 하였다. 이윽고 색장생(色掌生)이 일강(日講)과 벌강(罰講)을 여쭈기에 나는 《논어》 〈학이(學而)〉의 수장부터 증자(曾子) 삼성장(三省章)까지 통독하게 하였다. 제생(諸生)이 좌우에서 어려운 것을 물으니 나는 모두 자세히 분석해 주고 해가 질 무렵에 끝냈다.
■1574년 10월
◯20일】정원에서 아뢰기를,
“어제 조강(朝講)에서 부제학(정3품) 유희춘이 ‘이황(李滉)이 고증한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과 언해 및 그가 교정한 《주자대전(朱子大全)》, 《어류(語類)》 등의 책을 그 집을 방문하여 수집해 올려보내게 하소서.’라고 아뢰었던 일을 경상 감사에게 하유(下諭)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22일】이른 아침에 서소문 밖으로 가서 황해 감사 이이(李珥)를 방문하여 갈두리(加乙頭里) 강가에서 함께 앉았다. 돌아오는 길에 박옥(朴沃) 군을 만나 27일에 장기를 두자고 약속을 하였다.
■1574년 12월
◯【25일】우윤(右尹 한성부 우윤 종2품) 심의겸(沈義謙 1535-1587)이 와서 첨지(僉知) 이담(李湛)이 오늘 아침에 죽었다고 알렸다. 놀랍고 슬프기 그지없다. 즉시 관리를 시켜 탐문하였더니 또 지사(知事) 김순고(金舜皐)도 오늘 아침에 죽었다고 하였다.
■1574년 윤12월
◯【14일】이른 아침에 춘추관으로 갔다. 포폄(褒貶)을 완의(完議)하기 위해서다. 동관(同官)들이 오지 않아 우선 예문관(藝文舘) 상직방(上直房)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에 어떤 사람이 대사헌 이동지가 들어왔다고 잘못 전해서 곧 춘추관으로 갔다. 바람과 날이 몹시 추워 나는 옥당에서 술을 가져다가 마셨다. 사시 초가 되니 이후백과 대제학 김귀영(1520-1590)이 예조와 이조로부터 잇달아 왔다. 함께 겸춘추(兼春秋) 4명의 예수(禮數)를 받고 드디어 시정기(時政記)를 보았다. 마침 이계진(李季眞)이 본 곳에 나의 사실을 기록한 대목이 나오는데 대략 말하기를,
“사람됨이 자상하고 진솔하며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다. 귀양살이 20년간 한가한 중에 노력하여 제자백가를 읽지 않은 것이 없었고 《속몽구(續蒙求)》와 《육서부록(六書附錄)》 등의 책을 만들었다. 그러나 학문은 넓지만 요약하지 못하였고, 경(敬)을 지녀 안팎을 아울러 닦는 공부는 여전히 소략한 바가 있다. 또 성격이 우활(?오활하다?를 잘못 표기한 듯하며 이는 사리에 어둡고 세상물정을 잘 모른다는 뜻이다.) 하고 성글어(관계가 깊지 않고 서먹하다는 말) 번거로움을 결단하는 재주가 모자라니, 관각(舘閣)의 우두머리에 있기는 넉넉하나 조재(調宰 국사를 꾸림)하는 솜씨를 맡기기에는 부족하다.”
하였다.
※유희춘은 총명하여 경서에 밝고 성품이 바르므로 사헌부, 성균관, 예문관, 홍문관 등에서 일하기에는 적합한 인물이었으나 강력한 리더십은 없는 인물이어서 판서 이상의 직책을 맡아 국사를 처리하는 능력은 부족하였기에 참판에 머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미암집 제13권
■1575년 3월
◯ 해운 판관(海運判官) 한백후(韓百厚)가 와서 부임한다고 고하였다. 나는 부안의 품관(品官)이 값을 받고 조운선(漕運船)을 조잡하게 만든 일을 말하고 김종려(金宗麗)와 광룡(光龍)을 부탁하였다.
○ 한군은 내가 고금에 널리 통하고 나랏일에 마음을 다한다고 여겨 오늘 하직하면서 찾아왔으니 두터움이 극진하다.
■1575년 10월
◯【30일】부인이 말하기를, 금년 여름 서울에 있을 때 꿈에 내가 백인걸(白仁傑 1497-1579 83세 : 1537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합격한 인물)과 더불어 들판에서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우리 두 사람이 초야로 물러나와 쉬면서 장수할 징조라고 하였다.
■1575년 11월
◯직제학 정철 계함(鄭澈季涵 1536-1593)이 질병의 요양을 위해 광주(光州) 석저리(石底里)로 왔는데 집에 도착한 다음날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내가 그때에 해남에 가 있다가 어제 비로소 듣고 편지로 사례하였더니 정군이 답장에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 하문해 주시니 간곡히 교시하신 뜻을 잘 살펴 여러 번 읽고 감사하고 송구하여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병세가 위중하여 전하의 부름에 나아가지 못하고 황공하게 대죄(待罪)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 번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하니 우러러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굽어살펴주소서. 삼가 백배하고 답장 올립니다.”
※이이(13536-1584)와 정철(1536-1593)은 당대의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두 사람 모두 단명했다. 16세기는 이황(1501-1570), 기대승(1527-1575), 유성룡(1542-1607), 윤두수(1533-1601), 정인홍(1535-1623), 이원익(1547-1634), 이순신(1545-1598), 권율(1537-1599), 김효원(1542-1590), 심의겸(1535-1587) 같은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들이 엄청나게 많이 배출된 시대이다.
○ 내가 부인과 장기 두 판을 두고 그쳤다. 책을 편수하느라 겨를이 없어 요사이 장기를 두고 싶지 않았다.
【7일】조보(朝報)가 서울로부터 내려왔다. 10월 26일에 정원이 아뢰기를,
“이조 참판 유희춘의 사직장에 계자(啓字)가 찍혀져 내려졌으니 마땅히 체차의 전교를 받아야 합니다. 다만 유희춘이 고향으로 내려간 지 오래되지 않았고 또 아주 물러날 사람도 아닌데 스스로 사직함을 인하여 본직과 겸대(兼帶)한 직책을 일시에 모두 체직시킨다면 그를 돌보시는 뜻이 없는 듯하니 겸대한 사무 중에서 아주 중요하지 않은 것은 우선 놓아두어 체직시키지 말고 병을 조리하여 올라오라고 권유하심이 어떻습니까?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비망기로 답하기를,
“서장(書狀)을 관례에 따라 계하(啓下)가 되었는데 또 상소가 있어서 머물러두고 미처 답을 못했다. 지금은 날씨가 차가우니 병을 조리하고 명년 봄에 올라오게 한다. 계사는 불윤함을 하유(下諭)한다. 또 그 집이 반드시 곤궁할 터이니 이제 고향에 있을 때 감사(監司)에게 식품을 제급(題給)해주라고 이르라.”
하였다.
○ 나는 전하께서 은총으로 식품까지 제급해 주라고 함을 들으니 이는 보통 은총이 아닌 지라 감읍함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1575년 12월
◯【13일】관속(官屬)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편지를 한 통을 가지고 왔는데 바로 이달 초3일에 부친 것이다. 경렴과 딸아이는 모두 무양(無恙)하다고 한다. 초3일에 사인(舍人)이 삼공의 뜻으로 아뢰기를,
“이조 참판 유희춘이 고향 집에서 병을 얻어 때에 맞추어 올라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들으니 희춘이 추운 겨울을 지내고 따뜻한 봄에 병이 나은 후에 돌아온다고 합니다. 주상께서 희춘의 사장(辭狀)을 인하여 본직의 체차를 허락하지 않으시니 유신(儒臣)을 권념(眷念)하여 자리를 비우고 기다리는 뜻을 신 등이 어찌 알고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근래에 이조 판서가 누차 병으로 사임하니 크고 작은 정사를 모두 참의가 홀로 감당하게 되니 사체(事體)를 헤아려 보아도 참으로 온당하지 않습니다. 전주(銓注)할 때에 판서가 있더라도, 반드시 참판과 참의를 참여시켜서 가부를 논의하여 비난을 없게 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전형(銓衡)을 맡은 아장(亞長 참판)이 자리를 비운 지 이미 오래이니, 나라에서 관료를 갖추어 전선(銓選)을 중시하는 뜻이 전혀 없어 체모(體貌) 또한 훼손되는 듯하고 더구나 대도목(大都目) 정사도 멀지 않습니다. 유희춘이 겸대(兼帶)한 경연 제조 등의 직책은 마땅히 체차하지 말아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하지만, 본직은 체차하여 전조(銓曹)의 체모를 보전하는 것이 유신(儒臣)을 우대하는 아름다운 뜻에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니 주상께서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25일】영남의 군위 현감(軍威縣監) 유몽정(柳夢井)이 지나가다 들렀다. 내가 술을 접대하며 담화하였다.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두 붕당이 서로 공격하는 상황을 언급하고 또 사림이 나와 이이(李珥)가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1576년 1월
◯영의정 홍섬(洪暹 1504-1585)과 판부사 박영준(朴永俊1510-1576)이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다. ※홍섬의 사망기록은 잘못 전해진 것이다. 두 분은 모두 공평무사하신 분들이다. 홍섬은 90세 노모가 집에 계시는데, 만일 죽었다면 원통해서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26일】조보(朝報)가 부사(府使)에게서 왔는데, 이달 초9일에 전 판중추 박영준이 죽고, 초9일 저녁에 판중추 이탁(李鐸 1509-1576)도 죽었다 한다. 이공(李公)이 영의정을 일찍 지냈기 때문에 사람들이 홍 영상을 잘못 안 것이 분명하다. 이공은 마음이 정대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현인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함이 지성스러웠다. 평생을 조정에 서서 대의를 세우고 간악한 자들을 탄핵하여 늠름한 직신(直臣)의 절개가 있었고, 얼음같이 깨끗한 지조가 또 당세에 으뜸이었으며 재주와 기량이 뭇사람보다 뛰어났었다. 전상(銓相 이조 판서)이 되었을 때에 사람들이 공의 청고함에 탄복하였고, 삼공이 되어서는 태산(泰山) 교악(喬嶽)과 같은 명망이 높았는데, 갑자기 병으로 체직되어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였다. 여러 해를 병으로 앓아눕자 사림들의 갈망이 더욱 심했는데, 어찌 강물을 건널 큰 배를 밝은 시대에 갑자기 잃게 될 줄 알았겠는가. 희춘이 작년 가을 남쪽으로 올 때에 이공이 손수 편지를 보내 힘써 만류하였고, 나중에 작별 인사를 고하자 은근하고 간곡하여 차마 서로 헤어지지 못하였다. 어찌 겨우 3개월이 지나서 갑자기 부음을 들을 줄이야. 애통함이 한이 없다. 공의 나이는 69세이며, 무진생이다.
■1576년 2월
◯【14일】김제군수 정황(鄭滉)은 정철(鄭澈 1536-1593)의 형이요, 정자(鄭滋)의 동생이다. 멀리서 혼수용 수기러기를 보내와 전에 온 암기러기의 가리 속에 넣었는데, 그것은 광산(光山)에서 보내온 것이다. 내가 암컷을 놔두고 수컷을 구하려 했으므로 멀리서 보내준 것이다.
※당시 익산의 최대명망가 형제로는 소세량(1476-1528), 소세검(1483-1573), 소세양(1486-1562) 형제가 있다.
◯【26일】꿈에 어전에 나아갔는데, 바로 경연 자리였다. 임금께서 글 뜻과 여러 가지 일들을 묻기에 신이 묻는 대로 즉시 대답 하였더니 임금께서 김응남(金應南) 등을 돌아보며,
“유희춘은 모르는 것이 없어 물으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학식이 이에 이르렀는가.”
하였다. 응남이 대답하기를,
“희춘은 깊이 연구하고 모두 외웠기 때문에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1576년 3월
◯【3일】어제 들으니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두 당(黨)이 서로 원수처럼 공격한다고 한다. 당초에 심이 김을 비난하고, 김이 심을 헐뜯어 각기 붕당이 되고 서로를 모함하였다. 김과 심은 비록 모두 외직으로 나갔지만, 심 쪽이 김 쪽을 이겨 당하(堂下)의 문사로서 유명한 사람이 많이 배격당하니 이성중(李誠中)도 김의 친구라 하여 논핵을 당해 철산 군수(鐵山郡守)로 의망(擬望)되기까지 하였고, 정희적(鄭煕績)과 노준(盧畯)도 그러하였다. 붕당이 나뉘어 서로 공격함이 마치 당나라의 우이(牛李)의 당과 같다. 사림이 안정되지 못함이 이 지경까지 이르니 국가를 위한 근심과 탄식이 그치지 않는다.
◯20일】광주 사인(舍人) 정철 계함(鄭澈季涵 1536-1593)이 《근사록(近思錄)》을 안고 찾아왔다. 첫 권의 의심난 곳을 질문하므로 모두 대답하였다. 또 편수한 《대학토석(大學吐釋)》을 상론했는데, 계함의 말에 취할 점이 많았다. 만나 본 것이 매우 기뻤다. 함께 술과 음식을 먹고서 저물자 김언욱(金彦勗)의 집으로 물러가 잤다.
【21일】아침에 정계함이 다시 왔다. 사랑방에서 《대학》을 상론했는데 유익한 점이 많았다. 그의 학식이 정개청(鄭介淸 1529-1590)보다 낫다. 식후에 정군이 또 《근사록》으로 질의하였다. 새참에 가겠다고 하여 나는 보내면서 서운하였다.
■1576년 5월
◯【10일】내가 정계함(鄭季涵)의 《근사록(近思錄)》에 대한 문목(問目) 수십 조목에 대해 일일이 답을 해주었더니 정군의 사례 편지에 이르기를,
“바쳤던 의문에 대하여 낱낱이 가르쳐 주시어 시종 애써 돌봐주시니 평생 새긴 마음을 어찌 사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12일】기대승(奇大升)의 《논어》 설에 근거하여 때때로 그 풀이를 채용하였다. 20편까지 모두 마쳤는데, 다만 〈옹야(雍也)〉, 〈술이(述而)〉 1책은 여러 책 속에 숨었다고 한다.
【14일】집의(執義) 정철(鄭澈)이 단오절에 임금이 하사한 후추와 첩선(貼扇)이 내려왔는데 사직을 한 후라 미안하여 사양을 하려면서 편지로 나에게 물었다. 내가 대답하기를,
“군자는 큰 것은 사양하고 작은 일은 사양하지 않는 것이네. 이미 관직을 그만두었어도 소소한 일에 꼭 일일이 상소(上疏)할 것이 없네. 꼭 철저하게 따지자면 사양하는 것도 이치가 있지만 만약 감사(監司)에게 사장(辭狀)을 내면 아마 받아서 전달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네.”
하였다.
■1576년 6월
◯【19일】조보(朝報)를 보니 이달 초5일에 임금이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대학석소(大學釋疏)》 1권과 《유합(類合)》 2권은 후학에게 도움이 될 만하니 매우 가상하다. 마땅히 인출을 명할 것이니 ‘경(卿)은 그리 알라’라는 말을 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 저녁에 홍문관의 서리(書吏) 이덕순(李德純)과 관인(館人) 오헌(吳獻)이 유지(有旨)의 서장을 가지고 왔다. 이는 이달 12일의 정안(政案)에 희춘이 부제학의 수망(首望)에 들어 점(點)을 받았고, 같은 날 즉시 서장이 내려 이르기를,
“이제 경을 홍문관 부제학(정3품)으로 삼는다. 경연에 입번(入番)하는 일은 긴요하니 경은 역마를 타고 속히 올라오라.”
하였다.
■1576년 7월
◯【25일】노비 몽근(夢勤)과 천리(千里) 등이 여름, 가을로 2등 녹(祿)을 받게 되었다. 여름은 동지 중추(同知中樞)의 녹으로 중미(中米 쌀의 품질이 중간인 것) 3섬(石), 조미(造米 왕겨만 벗긴 쌀) 10섬, 보리 4섬, 명주베 1필, 삼베 3필이요, 가을 등은 부제학의 녹으로 중미 3섬, 조미 8섬, 전미(田米 벼 껍질을 벗기지 않은 쌀) 1섬, 보리 4섬, 명주베 1필, 삼베 3필이다. 지난밤 꿈에 벼가 노랗게 익은 것을 보았는데, 이것의 징조였을까 싶다. 가난한 아이가 갑자기 부자가 된 셈이다.
※녹봉은 연 4회 지급하고 있는데 종2품은 중미(中米 쌀의 품질이 중간인 것) 3섬(石), 조미(造米 왕겨만 벗긴 쌀) 10섬, 보리 4섬, 명주베 1필, 삼베 3필이다.
▣미암집 제14권
■1576년 9월
◯【11일】삼공의 논의가 들어갔다. 영상(領相) 권철(權轍 1503-1578)이 논의하기를,
“유희춘은 나이가 늙고(64세) 병이 깊어 형편상 경연에 오래 모실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제 들으니 객지에 기거하는 형편이 외롭고 차가워 그대로 겨울을 지내면 반드시 몸을 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이 정밀하고 해박하여 의견을 물으시면 반드시 도움이 많을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오래도록 시강(侍講)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머무르도록 권면함이 옳습니다.”
하고, 좌상(左相) 박순(朴淳 1523-1589)이 논의하기를,
“유희춘은 여러 책을 널리 통하고 정학(正學)을 주장하니 마땅히 경연에 있게 하여 고문으로 삼으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의 뜻으로는 녹봉을 넉넉히 주고 한직(閒職)에 두어 오직 경연에만 입시(入侍)하게 하고 겸하여 수서(修書)도 하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가 물러나기를 간청함이 진실한 마음에서 나왔지만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우상 노수신(1515-1590)이 논의하기를,
“인신(人臣)이 늙고 병들어 은퇴를 빌면 성군(聖君)이 한가한 곳에 물러남을 허락하는 것이 옛날의 도의입니다. 유희춘이 나이가 늙고 몸이 병들어 상소의 말이 성심에서 나왔으니 지극히 측은합니다. 다만 임금께서 늙은 신하를 애석히 여겨 저희들에게 묻기까지 하시니 누가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뜻에는 조금 그의 녹봉을 높여 주어 한직에 두고 때때로 고문을 받으심이 온당합니다.” 하였다.
※노수신은 주인공 유희춘과 함께 을사사화(1545)와 양재역사건(1547)에 연루되어 20여년을 유배당하다가 선조등극 후 다시 등용(1567)되었는데 유희춘보다 두 살 아래이고 급제는 5년이나 늦은데도 정치적 역량이 컸는지 이미 1573년에 정승이 되었다.
◯【13일】어제부터 지금까지 경, 대부, 사로서 편지로 나의 떠날 날을 묻는 자가 헤아릴 수 없다. 판서 정종영(鄭宗榮)은 정청(政廳)에 있으면서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영공이 짐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시니 그 흥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 이날의 인사에서 박충원(朴忠元)은 참찬, 박근원(朴謹元)은 경기 감사, 윤의중(尹毅中)은 부제학, 희춘은 첨지 중추(정3품), 이대신(李大伸)은 청주 목사, 김일준(金逸駿)은 담양 부사, 이방주(李邦柱)는 대동 찰방(大同察訪)이 되었다.
【26일】사람들이 희춘을 ‘천자(天子)의 문하생’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대신(大臣)들의 도움 없이 성상(聖上)만이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1576년 10월
◯【6일】영상 권철(權轍)의 집에 찾아가서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았고, 또 동지 최응룡(崔應龍)의 집에 가니 최공이 밥을 주어 포식하였다. 은근한 뜻이 넘쳤다. 또 영중추 홍섬(洪暹)의 집에 가니 홍공도 간곡하게 대접해 주었다. 그리고 나의 외조부 최공(崔公 최부(崔溥))이 갑자년(1504년, 연산군10) 옥중에서 형벌에 임해서도 차분히 동요하지 않은 의연함을 말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경석(經席)에 입시했을 적에 영공이 막힘없이 꿰뚫어 외우는 것을 임금께서 칭찬하신 것을 보았는데, 사람의 신하가 이런 영예와 은총을 얻음은 세상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요, 당대의 유신(儒臣) 중에 몇이겠소. 나는 유신의 떠남이 매우 애석하니 병을 칭탁하지 말고 빨리 조정으로 돌아오시오.”
하였다. 또 우상 노수신(盧守愼)의 집에 갔는데, 노공이 친히 방석을 가지고 나를 오른쪽에 앉히니 지세가 남향이라서 마치 주벽(主壁)인 듯하였다. 잠시 술을 나눈 뒤에 노극신(盧克愼)과 허징(許澄)에게 나와서 보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나중에 찾아가서 작별을 하겠소.”
하였지만, 모두 겉으로만 보이는 것이고 진심은 없었다.
【8일】내가 알고 보니 무술년(1538, 중종33) 8월의 별시에 서울에 올라와 과거에 급제하였고, 8년 뒤 을사년(1545, 명종1) 8월에 도성을 떠났으며, 다시 정묘년(1567, 명종22) 초겨울에 은혜를 입어 조정으로 돌아왔고, 이제 또 초겨울에 고향으로 돌아가니 어찌 운수가 아니겠는가. 정묘년으로부터 금년까지 꼭 10년이다.
【10일】수찬 김응남(金應南)이 와서 말하기를,
“전일 경연에서 임금이 《유합》을 누가 썼냐고 물으시어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썼다고 대답하였고, 지난 달 18일에 도승지 정탁(鄭琢)이 급마(給馬)를 계청(啓請)할 때에도 김응남이 아뢰기를, ‘유희춘이 부제학이 되어 신이 3년간을 같은 관직에 있으면서 그 사람됨에 탄복했습니다. 이 사람은 경연에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만 임금께서도 이 사람을 경연에 두어야 하는 줄 아시면서 형편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우선 그의 돌아감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는 현인을 지극히 사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신이 감히 딴말을 할 수 없사오나 임금께서는 그에게 속히 조정으로 돌아오라고 돈독히 권하소서.’ 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의중과 홍진(洪進)도 모두 애석해하며 만류하려는 뜻이 있었지만, 우상 노수신(盧守愼)은 홀로 말이 없었다고 한다.
○ 들으니, 우상 노수신이 현인을 질투하고 능력이 있는 이를 미워하여 문학(文學)으로 주상께 우대받는 사람을 꼭 시기하여 헐뜯었는데, 유독 나에게 으르렁대고 일찍이 말을 지어내 윤기(尹箕)에게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11일】경연청의 관리가 와서 다음날 조강(朝講)이 있어 희춘이 특진관으로 입시해야 한다고 고하였다. 이날의 인사에 박충원이 병조 판서가 되고, 희춘이 동지 중추(종2품)의 수망(首望)에 들어 낙점을 받았다.
15일】출발을 하여 가마 속에서 시 1수를 읊었다. 가르치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생각하여 다시 시 2수를 지었다.
○ 저녁에 의주 목사(義州牧使) 양응정(梁應鼎 1519-1581)이 남쪽 고을에서 올라오다가 갈원(葛院)에 이르러 내가 이 현(縣 진위(振威))에 들었다는 말을 듣고 어두운 밤을 무릅쓰고 말을 몰아 왔다. 서로 보고 몹시 기뻤다. 공섭(公爕 양응정)은 비록 한안국(韓安國 : 재리에 밝음)의 병통이 있기는 하지만 마음이 공평하고 선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아들 산숙(山璹)을 데리고 왔는데 나이가 16세로 단아하여 사랑스러웠다. 공섭이 일찍이 내가 자기를 구해주었다는 말을 듣고 골수에 사무치듯 깊이 감격해 하였다. 나에게 사례하기를,
“내 처자식도 모두 고마워합니다.”
하였다. 또 나의 학문이 정밀하고 해박함을 탄복하였다. 또 임금께서 특별히 하사하신 어의와 붉은 보가 희춘 곁에 있음을 듣고, 한번 보기를 원해 희춘이 허락했더니, 공섭의 부자가 구경을 하고 탄식하기를,
“공경의 지위는 사람이 얻을 수 있지만 이렇게 세상에 없는 은광(恩光)은 자손에게까지 경사가 전해질 것이니 탄복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28일】남원에 도착하니 고을의 여러 친구들과 안황(安璜)이 함께 어의(御衣)를 구경하고 말하기를,
“이제야 임금 옷이 검소함을 보았으니 이를 보고 들은 자가 생각을 바꾸고 행실을 고쳐 사치를 하지 않고 검소하다면 교화의 공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안황의 이 말은 유학자다운 말이니 사랑스럽고도 사랑스럽다.
■1576년 11월
◯【11일】희춘이 선인의 훈계를 서술하여 시 한 구절 지었다. 부인이 나에게 말하기를,
“시의 법도는 문장을 짓듯이 직설(直說)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산에 오르고 바다를 건너는 등의 말로 시작하여 끝에 가서 벼슬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며 그 말을 따라 시를 지었다.
■1577년 1월
◯【5일】원례(元禮 윤복(尹復 1512-1577))공이 비위(脾胃) 증이 점점 악화되어 설날 오시(午時)에 작고했다고 한다. 애석하도다, 이 사람의 수명이 여기에서 그치다니……. 참으로 슬프고도 슬프다. 원례는 기상이 단정하고 신중하며 벼슬에 급급하지 않았고 친구와 사귐에 신의가 있었다.
○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 이후로 원례는 여러 번 주현(州縣)을 다스렸는데, 윤원형(尹元衡)ㆍ이량(李樑)ㆍ심통원(沈通源)에게 붙지 않았으니 그의 지조가 이러하였다.
※윤복은 유희춘과 함께 1538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같은 종2품까지 이르렀고, 같은 해에 세상은 떴으니 큰 인연이다.
19일】사재(四宰) 송순(宋純 1493-1582 90세)이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하여 이르기를,
“어제 들으니 영감이 근일에 찾아 주겠다고 하여 감사하고 송구하였네. 다만 날씨가 설 이래로 매우 추워 지금까지 풀리지 않으니 한가히 기거하는 원로가 애써 기동(起動)할 때가 아니어서 심히 미안하네. 다음 달에나 봄기운이 따뜻해지거든 서로 기약하여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네.”
하였다. 나도 어제부터 오늘까지 바람이 차가워서 다시 어렵다 생각했는데, 그 말씀이 내 마음과 매우 맞았다.
【27일】나는 양응정(梁應鼎)이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부경(赴京)한다고 하기에, 이산(理山)에서 온 인삼 두 근으로 중국의 서책을 사기 위하여 편지를 써서 보내고 경렴(景濂)에게 인삼을 가지고 가 부탁하도록 하였다. 가장 바라는 것은 《황조명신편록(皇朝名臣編錄)》ㆍ《구양공집(歐陽公集)》ㆍ《공동집(空同集)》 곧 이몽양(李夢陽)의 문집이다. 《치당관견(致堂管見)》, 그 다음은 《대문회원(待問會元)》ㆍ《한묵서(翰墨書)》ㆍ《세사정강(世史正綱)》ㆍ《원류지론(源流至論)》 등 모두 8종이다.
■1577년 3월
◯ 나의 뒷머리는 지금 65세인데도 오히려 새까맣고 흰머리 한 올도 없으며, 두 귀속의 털도 모두 검고 인중의 아래 털도 검으며, 왼쪽 눈썹에도 긴 터럭이 있다. 오줌을 누면 많이 흩어지고 방울이 많으며, 초저녁에 잠이 많아 닭이 울 때에 깨고, 목소리에서 물 말은 밥의 소리가 나며, 잠을 잘 때에 거북의 숨을 쉬고 얼굴에는 주름이 없으며, 눈은 매우 밝다. 장수할 징조가 이미 많으니 다행이다.
○ 뛰어난 기억력은 젊었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이것이 열 가지 장수할 징조이다.
【28일】 이날 주상께서 희춘을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로 특별히 승진시켰다. ※정2품부터 대감이라 호칭한다. 종2품과 정3품은 영감이라 불렀다. 말하자면 판서급 이상이 대감이다.
■1577년 4월
◯【9일】 내가 기사년(1569, 선조2) 겨울에 처음 부제학이 되었고, 이제 2월까지 부제학이 된 지 모두 일곱 차례이다. 지난달 27일의 인사행정에 주상께서 특별히 자헌대부에 가자(加資)하니 이는 실로 큰 승진이요, 총 여덟 차례의 부제학이다.
■1577년 5월
◯【10일】 조강(朝講)이 있었는데, 몸이 피곤하여 입시(入侍)하지 못함이 한스럽다.
○ 들으니 평안도(平安道)에 전염병이 가장 심하여 죽은 사람이 2만여 명인데, 비구, 비구니ㆍ부녀자ㆍ어린아이는 그 수에 들지도 않으며 마을들이 텅 비었다고 한다. 황해도ㆍ함경도가 그 다음, 경기도ㆍ서울이 그 다음, 충청도가 그 다음, 강원도가 그 다음, 보전된 곳은 이남(二南 영ㆍ호남)이라고 한다.
【11일】 피로와 열이 크게 일어나 음식이 줄어들고 소변이 붉고 노랗다. 심히 피곤하여 베개에 눕게 되니 사직 단자(單子)를 올려 말하기를,
“신이 먼 길에 달려왔더니 피로와 열이 크게 일어나 음식을 들지 못하고 베개에 누워 고통에 신음하니 열흘 사이에 병세가 회복될 수 없습니다. 경연의 중요한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으니 지극히 황송하고 민망합니다.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였다.
○ 내가 처음 피로와 열을 앓을 때에는 그저 가벼운 증세로만 알았는데, 9일과 10일 이후로는 약을 자주 먹자 기운은 아직 피곤하지만 열은 크게 물러갔다.
【13일】 전한(典翰) 유성룡(柳成龍)이 전일에 상소하여 가까운 곳의 수령을 허락받자 이조가 입계하기를,
“외지를 중히 여기고 내지를 소홀히 여겨서는 아니 되니 외지로 보임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주상이 따랐다.
【14일】병환이 지극히 위중하여 일기를 적지 못하고 15일에 작고하였다.
▣미암집 제15권(이후 내용은 이전에 빠진 것을 보충한 것인데 모두 경연의 내용이다.)
▣미암집 제16권
■1572년 9월
◯4일】 경연청에 들어갔다. 좌의정(左議政) 홍섬(洪暹), 특진관(特進官) 박영준(朴永俊),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대사헌(大司憲) 홍천민(洪天民), 장령(掌令) 한호(韓灏), 수찬(修撰) 신점(申點), 조정기(趙廷機)도 함께 들어왔다. ‘하늘이 듣고 보는 것은 우리 백성들의 듣고 봄으로부터 시작한다.〔天聰明 自我民聰明〕’ 및 〈고요모(皐陶謨)〉의 졸장(卒章)을 강하였다. 강관(講官)의 설명이 끝난 뒤에 신 희춘이 말씀드리기를,
“하늘의 듣고 보심이 우리 백성들이 듣고 봄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늘의 밝고 두려운 것이 우리 백성들의 밝고 두려운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대체로 인군은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해야 천심과 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敬)을 한 마음의 주재(主宰)와 만사의 근본으로 삼아야 하늘을 섬기고 백성을 기를 수 있습니다.”
하였다.
▣미암집 부록 제21권
■미암선생문집 발문〔眉巖先生文集跋〕
아, 저명한 유현(儒賢)들이 조선조보다 성대할 때가 없었는데, 도덕과 사업이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전해지는 것은 오로지 유고 속의 글에 달려 있으니, 후세에 문집을 간행하는 일은 참으로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선조 문절공(文節公 유희춘)은 총명하고 정직한 자품으로 계왕개래(繼往開來)의 학문을 맡아 글을 짓고 말을 남겨 거의 수백여 책이 되었다. 그런데 평생의 도학(道學)은 오로지 회암(晦庵) 주 부자(朱夫子 주희)를 스승으로 삼아 그 미세하고 오묘한 뜻을 풀이하니 실로 큰 두뇌(頭腦)요 큰 관려(關棙)였다. 따라서 선조(宣祖)의 치제문(致祭文)에서 이르기를,
“오묘한 이치를 머금고 씹어서, 자양(紫陽)을 스승 삼았네. 《주자어류》를 해석하고, 《속몽구(續蒙求)》 편찬하였네.”
하였고, 현종의 사제문(賜祭文)에서 이르기를,
“위로는 공자ㆍ맹자를 전술하고, 아래로는 정자ㆍ주자를 살폈네. 동몽을 위해 훈을 달고, 육서(六書)에 주를 붙였네.”
하였다. 정조 때에는 《춘추(春秋)》ㆍ《향음합편(鄕飮合編)》ㆍ《오경백선(五經百選)》ㆍ《아송(雅誦)》ㆍ《규장전운(奎章全韻)》 등의 책자를 도통(道統)을 이은 서원에 반포했는데, 우리 선조의 서원도 내사(內賜)의 은전을 받았다. 이어서 또 봉사손(奉祀孫)을 찾아주셨는데 선고(先考)가 당시에 상중에 있어서 비록 명을 받들지는 못했지만 아, 역대 조정에서 포상한 은전이 이와 같이 두드러졌으니, 후학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불초 후손들이 머나먼 궁벽한 시골에 살면서 여러 차례 전쟁으로 생긴 화재를 겪느라 공의 유고는 흩어지고 사라져 몇 편이 없으니, 거의 아름다운 옥이 광채를 감추고 아롱다롱한 표범이 무늬를 잃어버린 꼴이다. 공이 저술한 《경중구결(經中口訣)》ㆍ《속몽구(續蒙求)》ㆍ《육서부주(六書附註)》ㆍ《유선록(儒先錄)》ㆍ《헌근록(獻芹錄)》 등 여러 편은 당시에 조정에서 간행을 명하였으나, 그 밖에 《강목고이(綱目考異)》ㆍ《역대요록(歷代要錄)》ㆍ《완심도(玩心圖)》ㆍ《예원한채(藝苑閒採)》ㆍ《천해록(川海錄)》ㆍ《별록(別錄)》 등 여러 편은 이제 모두 없어져 전해지지 않으니, 참으로 유림의 불행이요 후손들의 통한이다. 다만 손수 쓴 《일기(日記)》가 아직도 전해지는 것이 다행스럽다. 정묘년(1567, 선조 즉위년)에 시작하여 정축년(1577, 선조10)에 끝나는데, 비록 낙권(落卷)을 면치 못했지만 10에 7, 8은 보전되었다. 짧은 글과 작은 시들이 간혹 여기에 실려 있었으나 감싸서 상자에 두었더니 좀이 갉아먹어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경술년(1850, 철종1)에 중형(仲兄) 경심(慶深)이 선조의 유적이 없어짐을 개탄하고 집안에 소장된 것을 수습하여 스승 기공 정진(奇公正鎭)의 문하를 찾아가 뵈니, 공이 현인을 좋아하고 선을 즐겨하는 마음으로 교정을 사양하지 않고 합하여 10권으로 만들었다. 아, 수백 년 동안 겨를을 내지 못했던 일이 이제야 끝을 보니, 또한 때를 기다려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리라. 이에 각수장이에게 부쳤으나 미처 인출하여 배포하지 못하고 가문의 운수가 쇠퇴하여 중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애통하고 절박한 마음을 어찌 말하겠는가. 큰조카 정식(廷植)은 곧 선조의 봉사손이다. 하루는 나에게 말하기를
“선조의 문집을 아직도 인출하지 못하고 있으니 중부(仲父)께서 시작한 뜻을 후손들이 이어받은 도리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도모하여 힘을 내서 약간의 권질(卷帙)을 인출하여 끝을 내도록 하시지요.”
하니, 나는 감동하여 삼가 위와 같이 서술한다.
기사년(1869, 고종6) 3월 하순에 불초 9대손 경집(慶集)이 손을 씻고 삼가 적는다.
■미암선생문집 발문〔眉巖先生文集跋〕
나는 일찍이 미암(眉巖) 유 문절공(柳文節公)의 묘소에 비명(碑銘)을 지었는데, 식견이 짧고 문장이 졸렬하여 비슷하게나마 드러낼 수 없어서 한스러웠다. 후손 병찬(炳贊)과 상기(相基)가 또 문집의 끝에다 내 이름을 두게 하려 하니, 연못과 바다의 깊이는 본래 조개껍데기를 기우려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노사(蘆沙) 기공(奇公 기정진(奇正鎭))의 서문에 이미 다 진술이 된 것이겠는가. 그러나 문절공의 학문은 해박하고 섬부(贍富)하여 구경(九經)의 깊은 뜻과 백가(百家)의 여러 학설을 꿰뚫어 이해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발휘하여 글을 지을 때에 인위적으로 빚거나 깎아서 다듬지 않아도 혼연히 자연스레 이루어지니, 마치 페르시아(Persia 波斯)의 창고에 들어가면 백 가지 보화가 쌓여있어 눈이 있는 사람은 모두 그것이 보화임을 아는 것과 같았다.
공의 선(善)을 좋아하는 덕은 천성에 뿌리를 두어 한 평생 존경하고 추앙한 분이 오직 자양(紫陽 주자(朱子))뿐이었다. 그리하여 “주자의 창성한 덕과 위대한 공은 공자와 짝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결코 문인(文人)이나 속사(俗士)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으로 조정에 서서 군주의 마음을 계도하고, 이것으로 사람을 가르쳐 후학들을 일깨웠다.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철저히 탐구하여 유학의 도를 도왔으니, 이는 곧 뚜렷하게 드러난 덕행이었고 문사(文詞)는 공에게 여사(餘事)였을 뿐이다. 이 문집을 읽고서 그 덕업(德業)을 본받지 않고 오직 문장만 숭상하다면, ‘궤만 사고 구슬은 돌려주는’ 꼴일 뿐만 아니라 또한 어찌 공이 글을 짓고 말을 남긴 본뜻이겠는가. 이 점 또한 몰라서는 안 되겠기에 이 글을 문집의 말미에 붙이려 한다.
정유년(1897, 광무1) 11월 하순에 은진(恩津) 송병선(宋秉璿)이 삼가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