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헌집(不憂軒集)
정극인(丁克仁 1401-1481)
생애 및 활동사항
1429년(세종 11) 생원이 된 후 여러 번 과시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1437년(세종 세종 19)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태학생(太學生)을 이끌고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북도(北道)로 귀양을 갔다.
그 뒤 풀려나 태인(泰仁)으로 가 집을 짓고 거처하며 집의 이름을 불우헌이라고 지었다. 불우헌 앞 비수천(泌水川) 주변에 송죽을 심고 밭을 갈아 양성을 힘쓰면서 향리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는 한편으로 향약계축(鄕約契軸)을 만들어 향리의 교화에 힘썼다.
한편, 정극인은 원래 광주(廣州) 두모포리 태생인데, 처가가 태인인 까닭으로 이곳에 우거하게 된 것이다. 송세림(宋世琳)의 「동중향음주서(洞中鄕飮酒序)」 발문에도 애초의 태인 사람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1451년(문종 1) 천거로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이 되어 6품(六品)을 받았다. 이어 인수부승(仁壽府丞)으로 있다가 1453년(단종 1)한성판관성순조(成順祖)의 권유로 전시(殿試)에 응시하여 김수령방(金壽寧榜) 정과(丁科) 13명에 들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전주부교수참진사(全州府敎授參賑事)로 있다가 그 직을 사임하고 태인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 해 12월 조정에서는 인순부승록(仁順府丞錄)으로서 좌익원종공권(佐翼原從功券) 4등을 내렸다. 이로부터 다시 출사하여 약 10년간, 네 번의 성균관주부, 두 번의 종학박사(宗學博士)를 지냈고, 사헌부감찰(정6품) 및 통례문통찬(通禮門通贊) 등을 역임했다.
1469년(예종 원년) 69세 때 태인현 훈도로 있다가 사간원헌납(정5품)으로 다시 옮겨 조산대부 행사간원정언(朝散大夫行司諫院正言)이 되었다. 또 불교를 배척하는 논의를 하다가 하옥되기도 했으나 오래지 않아 석방됐다.
1470년(성종 1)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하고 귀향해 후진을 양성했다. 1472년 벼슬에 뜻을 접고 향리의 자제를 열심히 가르친 공으로 3품산관(三品散官)이 내려지자 이에 감격해 「불우헌가(不憂軒歌)」·「불우헌곡(不憂軒曲)」을 지어 송축했다. 1481(성종 12)년 81세의 나이로 죽었다.
비록 환로의 영달은 없었으나 선비로서의 청렴한 삶을 고수했고, 검소하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 문학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 최초의 가사 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과 단가(短歌) 「불우헌가」, 한림별곡체(翰林別曲體)의 「불우헌곡」 등을 지어 한국시가사에 공헌했다.
문집으로 『불우헌집(不憂軒集)』2권 1책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예조판서 겸 지춘추관성균관사에 추증됐으며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됐다.
▣불우헌집 제1권
■고현(古縣)을 추억하다 병자년(1456, 세조2) 칠석에 전주에 도임하였다.
적막한 횡당에 하루 해가 또 긴데 / 寂寞黌堂日又長
눈이 뚫어지도록 남쪽을 바라보매 나의 마음 상하네 / 眼穿南望我心傷
시산군까지 축지법을 쓰려 하나 / 若爲縮地詩山郡
높디높은 모악산이 두 고을을 가로막았네 / 母岳嵬嵬隔兩鄕
■태인의 여러 선비들에게 부치다
고현에 말머리를 나란히 하기 마땅하니 / 古縣宜乎齊馬首
인간 세상의 갑자를 서로 잘못 알았네 / 人間甲子誤相知
나무 그늘 물에 임하여 청풍이 움직이니 / 樹陰臨水淸風動
술잔을 띄워 적료함을 깨기에 알맞구나 / 不害流觴破寂爲
■불우헌음(不憂軒吟)
청산에 또 백운을 길이 차지하니 / 長占靑山又白雲
불우헌 위에서 마음을 섬기네 / 不憂軒上事天君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는 한중의 재미 / 飢餐渴飮閑中味
명월 청풍이 함께 하리라 / 明月淸風可與云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생각하다 합천(陜川)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놀 때에 지은 것이다.
숲 사이에 갓과 신을 벗어 놓고 아득히 떠났으니 / 林間冠屨去茫茫
누가 알랴 유선이 본디 죽지 않았음을 / 誰識儒仙本不亡
흐르는 물로 산을 에워싸리라 읊은 시는 먼 옛날 일이나 / 流水籠山吟已遠
바람과 구름이 아직껏 독서당을 보살피네 / 風雲猶護讀書堂
▣불우헌집 제2권
■벼슬에서 물러난 후 시정의 폐단을 진달하는 소 성종 2년 신묘년(1471)에 구언(求言)의 하교에 응하여 올린 것이다.
조산대부 전 행 사간원 정언 신 정극인은 산림에 엎드려 지내면서 매양 조신(朝臣)이 왕명을 받아서 이 곳에 오고 군사(軍士)가 번에서 내려와 전하는 말을 통하여 엎드려 듣자옵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유충(幼沖)한 바탕에 소간(宵旰)의 노고를 잊으시고 하루에 세 차례 경연에 임하여 치도(治道)를 강구하신다고 하니, 손뼉을 치며 경하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잠시라도 더 살아서 성군의 교화가 흘러 행함을 볼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지금 경건히 구언(求言)의 하교를 받들고 삼가 좁은 견해로써 다음의 8조목을 나열하여 참으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나이다.
1. 학교는 인재를 만드는 기구로서 인재가 성하고 쇠함과 세도가 오르고 내림이 여기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훈도(訓導)의 임무에는 유학(幼學)의 선비를 쓰지 말기 바랍니다. 간혹 해시(亥豕), 노어(魯魚)를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가 있어 사방에 웃음거리가 되는 이가 있으니, 나이가 마흔이 지난 생원 진사로서 경전(經傳)에 제법 통한 사람을 정선하여 발령함으로써 학교의 정사를 거듭 밝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2. 선유(先儒)의 말에 “불씨(弗氏)의 해가 양묵(楊墨)보다 심하다.”라고 했는데, 근래에 불교가 크게 일어나 세상에 독을 끼치니, 이 신민(臣民)들이 누구인들 애통해 하며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명경거유(名卿鉅儒)가 일찍이 학자에게 말하기를 “금구(金口 불(佛))가 말한 더할 수 없이 높고 매우 깊어 미묘한 법은 공자 맹자의 글보다 낫기가 월등하다.”고 하니, 이것은 바로 세상을 미혹시키고 백성을 속이는 중에서도 더욱 심한 축에 드는 것이기에 족히 책망할 것도 못 됩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간경도감(刊經都監)을 혁파하여, 은벽(隱僻)함을 구하고 괴이함을 행하는 정사를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종조에 자전(慈殿)의 뜻에 따라 합천 해인사에 불가의 팔만대장경을 간행하기 위하여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일을 감독하게 했는데, 임사홍(任士洪)이 그 일에 대하여 기록했다.-
3. 수령은 백성의 부모인 탓에, 한 사람의 현명한 이를 쓰면 한 고을이 그 혜택을 받고 한 사람의 불초한 이를 쓰면 한 고을이 그 피해를 받으니, 임기 내의 업적을 살펴서 내치고 올려쓰는 법을 경솔히 할 수 없습니다. 각 도의 관찰사가 매양 고과(考課)를 매김에 있어서 혹 인정에 몰리고 혹 원망을 꺼려서 상등은 많고 중등은 적게 매기며 하등은 한 도에 겨우 한두 사람뿐이니, 말고삐를 당기고 수레바퀴를 묻었던 기풍과는 자못 다른 점이 있습니다. 고금 천하에 인재의 품등(品等)이 선한 사람은 적고 악한 사람은 많은 법인데, 어찌 유독 각 고을의 수령에 있어서만 현자가 많고 불선자가 적은 것입니까. 신은 원하옵건대, 십분(十分)으로 비율을 삼아 수령이 50명인 도에는 하등을 5명, 수령이 70명인 도에는 하등이 7명으로 불변의 법식을 정하여 지극히 공명하게 하고 무너진 세도를 가다듬는 정사에 힘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4. 원종공신(原從功臣)은 비록 팔공신(八功臣)의 특별한 은총에 미치지 못하나, 충훈부(忠勳府)와 충익부(忠翊府)가 병립하여 둘이고 대려(帶礪)의 바람과 숭화(嵩華)의 축원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은 조금도 차별이 없습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공사 천첩(公私賤妾)의 소생은 부계를 따라 양인으로 삼음으로써 백성이 바라는 아름다운 정사를 닦음이 어떻겠습니까.
5. 논밭을 측량하여 장부에 기록해 올린 전답은 ‘경작하는 것과 묵은 것[起陳]’을 분간하지 않고 아울러 납세하니, 《맹자(孟子)》에서 용자(龍子)가 이른 바 “공법(貢法)보다 좋지 못한 것은 없다.”는 것이 헛된 말이 아닙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경작하는 것과 묵은 것을 분간하여 민생의 질고를 풀어 줌이 어떻겠습니까.
6. ‘병사는 그 수효가 많은 데 달린 것이 아니고 오직 정예(精銳)해야 한다’는 것이 옛말입니다. 《시경》 대아(大雅) 상무편(常武篇)에 말하기를 “우리 천자의 군사를 정돈한다.[整我六師]” 하고, 《서경》 주서(周書) 강왕지고편(康王之誥篇)에 말하기를 “천자의 군사를 펼쳐서 크게 한다.[張皇六師]” 하니, ‘정돈한다’나 ‘펼친다’는 것이 어찌 수효가 많은 것을 말함이겠습니까. 신이 가만히 살펴보니, 정병(正兵)의 수효는 비록 많으나 정병의 실상인즉 보지 못하겠습니다. 빈천한 사람이 번에 들어오는 때에 가산을 다 팔아서 겨우 군장을 갖추는 형편인데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기르는 일에 어찌 겨를이 있겠습니까. 신은 원하옵건대, 거듭 정선(精選)의 법을 밝혀 그 봉족(奉足)의 수를 넉넉하게 함으로써 민생의 질고를 풀어 줌이 어떻겠습니까.
7. 각 도의 도잠실(都蠶室)이 없어졌거나 남아 있는 형상에 대해서는 신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태인현 도잠실의 일로 보자면, 혁파된 지 이미 오래되어 뽕나무는 늙고 썩어서 거의 다하게 되고 뽕밭은 백성의 밭이 되어서 이미 양전안(量田案)에 들고 백성이 이를 바탕으로 산 것이 오래입니다. 지금 신묘년(1471, 성종2)에 처음으로 도잠실을 다시 세우고 앞에서 말한 백성의 밭에 뽕나무를 빽빽하게 심은 결과 오로지 살아가기만 바라는 백성의 근심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잠실에서 2백여 보 떨어진 동서의 산이 오래 묵어 토질이 후하니 가시나무를 베어 내고 뽕나무를 두루 심는다면 10여만 그루에 이를 수 있고 몇 년 후에는 무궁한 이익이 될 것입니다. 이같이 한다면 위로는 공가의 부세를 잃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의 생업을 잃지 않을 것이니, 신은 원하옵건대, 백성들의 희망을 따름으로써 민생의 질고를 풀어 줌이 어떻겠습니까.
8. 조운(漕運)에 쓰는 선박을 관청에서 만든다는 법이 새로 생김에 따라 국가의 이익은 한 가지이고 민간의 폐단은 일곱 가지이니, 다음에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배를 만드는 비용을 주지 않는 것이 그 한 가지 이익입니다. 그러나 배를 만드는 곳마다 천여 명의 군인이 겨울에 부역을 나가 모진 바람을 맞으며 자느라 굶주림과 추위의 고통이 몸에 와 닿는 폐단이 첫째이고, 세 곳에서 배를 싣는 것이 농사짓는 달에 해당하니 부근 각관의 공무를 띤 군인으로 5, 6십명의 대관과 3, 4십명의 소관이 1, 2십일 사이에 왕래하느라 봄철에 농사짓는 시기를 잃는 폐단이 둘째이고, 위에 말한 군인이 혹 색리(色吏)에게 부탁하거나 반당(伴倘)에게 청하여 1명당 목면 2, 3필과 쌀 2, 3말을 뇌물로 받고 부역에 종사하지 않았는데도 부역을 마쳤다는 증서를 주는 폐단이 셋째이고, 서울에서 온 사지(事知)와 선군(船軍)이 배를 거느리고 갈 때 연해의 각 관에게 후하게 물품을 주고 대접한 연후에 무사히 경계를 통과할 수 있는 증서를 주는 폐단이 넷째이고, 조운의 격군(格軍)이 부족이 생긴 미곡을 무조건 징수하는 해독이 있어 다만 가산을 파탕(破蕩)할 뿐 아니라 또한 피해가 일족에게 미침에 따라 사람들이 도망하여 흩어지게 되니 호구(戶口)를 잃는 폐단이 다섯째이고, 배를 만드는 장인(匠人)은 여러 포구(浦口)의 장부에 오른 실군(實軍)인즉 뇌물을 받고서 찾지 않고 연해에 거주하는 백성과 염간(鹽干) 등은 많이 모아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더욱 끝까지 찾아내니 침손(侵損)의 폐단이 여섯째이고, 조운(漕運) 후의 공선(公船)을 지키고 살피는 군인이 많이들 공무를 빙자하여 사리를 꾀하기를 마음대로 하지 않음이 없으니 만호(萬戶)의 권한과 같은 폐단이 일곱째입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다시 사선(私船)으로 조운(漕運)하는 법을 세운다면 한 가지 이익은 비록 국가에 부족하겠으나 일곱 가지 폐단은 백성에게서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학》에 재용(財用), 혈구(絜矩)의 도를 논하면서 맹헌자(孟獻子)의 말을 인용하여 종결했는데, 당당한 우리 조정에서 어찌 반드시 선박의 값 한 가지 이익을 아끼느라 일곱 가지 폐단의 질고를 혁파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사어(史魚)의 곧음은 오히려 자신이 죽은 후 시신으로써 간언했는데, 더구나 노신은 정언의 직책을 띠고 있으면서 여생을 보존하고 있으니 마침 진언할 때를 당하여 감히 마음을 깨끗이 가다듬어 주상의 아름다운 명을 행여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자손에 대한 경계
학문의 공효는 크다. 천자가 배우지 않으면 사해를 보존할 수 없고, 제후가 배우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할 수 없고, 경대부가 배우지 않으면 그 집을 보존할 수 없고, 사서인(士庶人)이 배우지 않으면 그 몸을 보존할 수 없으니, 옛 성현을 살펴보건대 학문을 통하여 나가지 않음이 없었다. 왕형공(王荊公 왕안석(王安石))의 권학시(勸學詩)에 좋은 말이 있으니,
다만 독서 후 영화만을 볼 것이고 / 只見讀書榮
독서의 욕된 결과는 보지 않으리라 / 不見讀書辱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본조의 제도에 수고롭고 욕된 직임(職任)으로서는 향리(鄕吏)만 한 것이 없다. 우리 집안은 본디 영광(靈光)의 향족인데, 우리 시조 휘 진(瑨) 생원공이 향역(鄕役)을 면제받는 공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아마 방립(方笠)을 쓰고서 구부리고 엎드려 지내는 수고로움과 욕됨을 겪어야만 했을 것이다.
내가 다행히 보잘것없는 바탕으로 우연히 사마시에 급제(1429)하여 20여 년 동안 성균관에서 음식을 축내었으나 운명이 어긋남이 많아 과거에 누차 떨어지고 공곡(空谷)에 돌아와 누워지내면서 이렇게 종신토록 지낼 것처럼 한 지가 여러 해였다. 그런데 신미년(1451, 문종1) 겨울 문종조에 그릇되게 재능과 학식이 모두 정밀하다는 이름을 입어서 성균관에서 물망에 올리고 예조에서 천거하여 특별히 종사랑(從仕郞) 수 광흥창 부승(廣興倉副丞)에 임명되었으니, 이 또한 옛것을 살핀 학문의 힘이었고 근고에 일찍이 없었던 성대한 일이었다.
너희들은 나이가 모두 아직 20세가 되지 않았으니, 이때에 미쳐서 학문에 힘써서 총명을 개발한다면 공경(公卿)과 장상(將相)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 미쳐서 안일하고 태만하여 타고난 본심을 거칠게 한다면 이는 스스로 욕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아, 너희들은 이 점을 생각하여 ‘미쳐서[及]’라고 하는 말을 상세히 음미함이 좋을 것이다.
《소학(小學)》에서 여 사인(呂舍人 여본중(呂本中))이 말하기를 “지도하고 이끌어 주는 것은 스승의 공이고, 행함에 이르지 못함이 있으면 조용히 타이르고 경계하는 것은 붕우의 임무이니, 뜻을 결단하여 나가는 것인즉 반드시 자기 힘으로 해야지 타인에게 바라기 어렵다.” 했다. 아, 너희들은 이 점을 생각하여 ‘나간다[往]’는 말을 상세히 음미함이 좋을 것이다.
아, 나의 훈계를 듣는 사람은 누구이며, 어리석게 귀를 막는 사람은 누구인가.
■학령(學令) 훈도 교수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독서와 학문을 하는 까닭은 본디 마음을 열고 눈을 밝혀서 행실에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일 따름이다.
제생(諸生)들은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인가. 왕공대인(王公大人)의 아들과 아우, 공경장상(公卿將相)의 아우와 조카가 무슨 일인들 부족하랴만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교에 들어가 그 덕을 성취하는데, 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귀천 빈부를 논할 것 없이 한결같이 스승과 벗의 규계와 책려를 따름이 옳다.
제생들은 나이가 이미 장성한데도 학문은 성취가 없으니, 향리의 무지한 눈으로 본다면 모두 면목과 수족이 있으니 누구인들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성현의 말씀으로 헤아린다면 참으로 이른바 소나 말에 옷을 입힌 격이니, 비록 사람의 형체는 있으나 그 실상은 금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해가 이미 바뀌었으니 학당의 학령도 또한 다음과 같이 고쳐야 마땅할 것이다.
일과(日課)를 외우지 못하는 사람은 회초리 50대, 앞서 배운 것을 외우지 못하는 사람은 60대, 바둑이나 장기 등 잡기 놀이 하는 사람은 70대, 규계와 책려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80대, 시간을 틈타서 활쏘기를 배우는 사람은 90대, 여색을 탐하여 따르는 사람은 100대를 치는데, 모두 댓가지로 만든 회초리로 벌한다.
제생들은 자신의 재질을 헤아리고 능력을 요량하여 이 학령에 따를 수 있으면 학당에 있도록 하고 따를 수 없으면 학당에서 나감이 옳을 것이다. 우리 학당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종이 끝에 친히 서명하여 후일의 고증을 삼도록 할 것이다. 서명한 뒤에 만약 학령을 범하는 이가 있다면, 비록 기개가 호매하여 스승과 벗을 멸시하는 자일지라도 내가 마땅히 강하게 통제할 것이다. 제생들은 학령을 소홀히 하는 과오를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불우헌기
이 헌(軒)을 불우(不憂)라고 명명한 것은 한가로이 지내는 뜻을 드러내 기록함이다. 사람이 세상에 있어서 한가함이 없으면 근심이 있고 한가함이 있으면 근심이 없음이 예로부터 그런 것이다.
요(堯) 임금은 순(舜)을 얻지 못한 것을 자기 근심으로 삼았고 순 임금은 우(禹)와 고요(皐陶)를 얻지 못한 것을 자기 근심을 삼았으니, 이는 천하를 위하여 인재를 얻는 것으로 근심한 것이다. 공자가 노(魯)나라를 떠나면서 “더디도다, 나의 행차여.”라고 했고, 맹자가 제(齊)나라를 떠날 때는 사흘을 묵고 주읍(晝邑)을 나갔으니, 이는 도를 행하고 시대를 구제하기 위하여 근심한 것이다.
옛 태산군(泰山郡)에 한 거사(居士)가 있는데, 그 학문은 경사를 섭렵하고 그 뜻은 성현을 사우로 하여 두 차례 이단을 물리치는 상소를 하니, 중용(中庸)에 의지한 것이다. 연방(蓮榜)을 거쳐 정과(丁科)에 급제하니, 유자(儒者)의 기상이다. 원종 2등 공신에 들어 자손이 음직을 받고 후세에 죄가 있어도 용서를 받는 은전을 얻으니, 임금의 은총을 받은 것이다. 성균관 주부 네 번과 종학 박사 두 번을 역임했으니, 문신의 직책이다. 총마(驄馬)를 타고 상대(霜臺 사헌부의 별칭)에 앉았으니, 풍헌(風憲 사헌부의 권능)의 여광(餘光)이다. 양전관(量田官) 세 번과 교수직 세 번을 역임했으니, 유림으로서 쓸모 없는 존재이다. 신세를 뜬구름같이 여기고 고관을 헌신짝처럼 버린 채 자신의 내면에 기량을 간직하고 일의 기미를 보아서 일어나 기쁜 마음과 자득한 모습으로 여기에서 조석으로 지내고 여기에서 기거한다. 그리고 남자 종은 밭을 갈고 여자 종은 베를 짜서 그 수고로움을 대신하고, 부모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하여 그 인륜을 돈독하게 하여, 벼슬길의 부침을 듣지 않으니 어찌 세도의 승강을 알 것인가. 높은 하늘 낮은 땅 사이에 한가히 지내는 한 사람이니, 무엇을 근심할 것인가.
고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네 마리 말이 끄는 높은 수레를 타는 사람은 그 근심이 매우 크니, 부귀하면서 사람을 두려워함이 빈천하면서 뜻을 마음대로 하느니만 못하다고. 그것은 아마 불우헌에 지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리라.
■성종조의 유서(諭書)
전 정언 정극인에게 유시한다. 내가 듣건대, 그대는 청렴 결백한 인품으로 남에게 알려지거나 영달하기를 구하지 않으면서 고을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기에 게으르지 않다고 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불러서 쓰고자 하나 그대가 연로하여 정사를 맡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특별히 3품(三品)의 산관(散官)을 더해 주고 -종3품 중직대부(中直大夫)이다.- 또 본도(本道)로 하여금 때로 은혜를 베풀어 보살피게 한다. 그대는 마땅히 알도록 하라.
성화(成化) 8년 임진년(1472, 성종3) 3월 24일에 직첩을 더하는 일로 유서를 내린다.
■불우헌가(不憂軒歌)
뜬구름 같은 벼슬살이에 / 浮雲似宦海上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 事不如心이
많고 많습니다 / 하고만코니이다
보이고 싶어라 / 뵈고시라
불우헌옹은 보이고 싶어라 / 不憂軒翁뵈고시라
때로 은혜롭게 보살피게 한 / 時致惠養신
맛있는 음식 보이고 싶어라 / 口之於味뵈고시라
보이고 보이고 싶어라 / 뵈고뵈고시라
삼품 벼슬의 의장을 보이고 싶어라 / 三品儀章뵈고시라
영광스럽게 성은을 입은 / 光被聖恩신
마수 요간을 보이고 싶어라 / 馬首腰間뵈고시라
숭삼호 화삼호를 / 嵩三呼華三呼
어느 날엔들 잊으리이까 / 何日忘之리잇고
■불우헌곡(不憂軒曲)
산이 사면에 두르고 / 山四回
물이 거듭 감싼 곳 / 水重抱
넓지 않은 선비의 집이 / 一畝儒宮
양지를 향하여 / 向陽明
남창을 열었으니 / 開南牕
불우헌이라 이름하네 / 名不憂軒
왼쪽엔 거문고와 책 / 左琴書
오른쪽엔 바둑과 장기로 / 右博奕
뜻에 따라 소요하네 / 隨意逍遙
아, 즐거워하여 근심을 잊은 광경이 어떠한가 / 偉樂以忘憂景何叱多
평소에 뜻을 세움이 / 平生立志
성현을 사우로 하니 / 師友聖賢
아, 도를 따라 행하는 광경이 어떠한가 / 偉遵道而行景何叱多
늦게 생원이 되고 / 晩生員
늘그막에 급제하니 / 老及第
천도를 즐기고 천명을 앎이요 / 樂天知命
두 번 훈도가 되고 / 再訓導
세 번 교수가 되니 / 三敎授
사람을 가르치기에 게으르지 않네 / 誨人不倦
집의 글방 세 칸에 / 家塾三間
어린 사람들 모아서 / 鳩聚童蒙
구두를 상세히 말하네 / 詳說句讀
아, 정성들여 잘 가르치는 광경이 어떠한가 / 偉諄諄善誘景何叱多
또한 즐겁지 않은가 / 不亦樂乎
책궤를 짊어진 서생들 있네 / 負笈書生
아, 먼 곳으로부터 이르니 광경이 어떠한가 / 偉自遠方來景何叱多
거듭 상소하여 / 再上疏
이단을 물리치니 / 闢異端
중용에 의지함일세 / 依乎中庸
예로써 나아가고 / 進以禮
의로써 물러나니 / 退以義
몸을 지킴이 큰 일일세 / 守身爲大
상대의 자리에 들어가고 / 備員霜臺
미원의 직책을 맡았다가 / 具臣薇垣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났네 / 引年致仕
아, 무거운 짐을 벗은 듯한 광경이 어떠한가 / 偉如釋重負景何叱多
하나의 외로운 신하가 / 一介孤臣
분에 넘치게 임금의 은총을 받았네 / 濫承天寵
아, 거듭 원종공신에 참여한 광경이 어떠한가 / 偉再參原從景何叱多
밭을 갈아서 먹고 / 耕田食
우물을 파서 마시니 / 鑿井飮
제왕의 힘을 알지 못하네 / 不知帝力
좋은 날을 완상하고 / 賞良辰
빈객을 맞는 자리를 여니 / 設賓筵
형제와 붕우로세 / 兄弟朋友
담소하는 사이에 / 談笑之間
다른 것에 미칠 겨를 없고 / 不遑他及
효제 충신뿐일세 / 孝悌忠信
아, 화락하고 또 위의가 있는 광경이 어떠한가 / 偉樂且有儀景何叱多
춤추고 뛰면서 / 舞之蹈之
성군의 덕을 가영하네 / 歌詠聖德
아, 하늘에 명이 길기를 기원하는 광경이 어떠한가 / 偉祈天永命景何叱多
이윤(伊尹)의 자임함과 / 尹之任
유하혜(柳下惠)의 화순함에 / 惠之和
내가 능함이 없으나 / 我無能焉
공자의 시의(時宜)와 / 聖之時
안연(顔淵)의 낙도(樂道)가 / 顔之樂
곧 원하는 바일세 / 乃所願也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 上不怨天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하지 않으니 / 下不尤人
마음이 넓고 몸이 편안하네 / 心廣體胖
아, 두려워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는 광경이 어떠한가 / 偉不懼不憂景何叱多
해치지도 구하지도 않으니 / 不忮不求
어찌 착하지 않으리 / 何用不臧
아, 옛 가르침을 본받는 광경이 어떠한가 / 偉古訓是式景何叱多
임진년 / 壬辰歲
사월 초에 / 四月初
기이한 일 있었네 / 抑有奇事
유서가 내려와 / 降諭書
형문에 이르니 / 到衡門
마을에 광채를 보겠네 / 閭里觀光
염결(廉潔)로써 스스로 지켜 / 廉介自守
알려지거나 영달하길 구하지 않고 / 不求聞達
어린 사람을 가르친다 하셨네 / 敎誨童蒙
아, 과분하게 포장을 받는 광경이 어떠한가 / 偉過蒙褒獎景何叱多
특별히 삼품을 더하시고 / 特加三品
때로 은혜로이 보살피라 하시니 / 時致惠養
아, 성은이 깊고 무거운 광경이 어떠한가 / 偉聖恩深重景何叱多
즐거울진저 / 樂乎伊隱底
불우헌이여 / 不憂軒伊亦
즐거울진저 / 樂乎伊隱底
근심하지 않는 사람이여 / 不憂人伊亦
아, 이 좋은 노래를 지어 세상 시름 잊은 광경이 어떠한가 / 偉作此好歌消遣世慮景何叱多
■상춘곡(賞春曲)
홍진에 묻혀 사는 사람들아 / 紅塵에뭇친분네
이 나의 삶이 어떠한가 / 이내生涯엇더고
옛사람 풍류를 / 녯사風流
따를까 못 따를까 / 미가미가
천지간 남자 몸이 / 天地間男子몸이
나만 한 사람 많지마는 / 날만이하건마
산수에 묻혀 있어 / 山林에뭇쳐이셔
지락을 모른단 말인가 / 至樂을것가
몇 칸 초가를 / 數間茅屋을
푸른 시내 앞에 지어 놓고 / 碧溪水앏픠두고
송죽이 우거진 속에 / 松竹鬱鬱裏예
풍월 주인 되었도다 / 風月主人되여셔라
엊그제 겨울 지나 / 엇그제겨을지나
새 봄이 돌아오니 / 새봄이도라오니
복사꽃 살구꽃은 / 桃花杏花
석양 속에 피어 있고 / 夕陽裏예퓌여잇고
푸른 버들 꽃다운 풀은 / 綠楊芳草
가랑비에 푸르도다 / 細雨中에프르도다
칼로 재단해 내었는가 / 칼로아낸가
붓으로 그려 내었는가 / 붓으로그려낸가
조물주의 신이한 재주가 / 造化神功이
사물마다 야단스럽다 / 物物마다헌다
수풀에 우는 새는 / 수풀에우새
봄기운을 이기지 못해 / 春氣내계워
소리마다 아양을 떤다 / 소마다嬌態로다
물아일체이니 / 物我一體어니
흥이야 다르겠느냐 / 興이다소냐
사립문에 걸어 보고 / 柴扉예거러보고
정자에 앉아 보니 / 亭子애안자보니
소요하며 음영하여 / 逍遙吟詠야
산 속의 하루가 적적한데 / 山日이寂寂
한가한 속에 진미를 / 閒中眞味
아는 이 없이 혼자로다 / 알니업시호재로다
여보게 이웃 사람들아 / 이바니웃드라
산수 구경 가자꾸나 / 山水구경가쟈스라
답청은 오늘 하고 / 踏靑으란오고
욕기는 내일 하세 / 浴沂란來日새
아침에 산나물 캐고 / 아에採山고
저녁에 낚시질하세 / 나조釣水새
막 익은 술을 / 괴여닉은술을
갈건으로 걸러 놓고 / 葛巾으로밧타노코
꽃나무 가지 꺾어 / 곳나모가지것거
잔 수 세며 마시리라 / 수노코먹으리라
봄바람이 얼핏 불어 / 和風이건부러
푸른 물을 건너오니 / 綠水건너오니
맑은 향기는 잔에 지고 / 淸香은잔에지고
붉은 꽃잎은 옷에 진다 / 落紅은옷새진다
술동이 비었거든 / 樽中이뷔엿거
나에게 알리거라 / 날려알외여라
소동 아이에게 / 小童아려
술집에 술을 물어 / 酒家에술을믈어
어른은 막대 집고 / 얼운은막대집고
아이는 술을 메고 / 아술을메고
나직이 읊고 천천히 걸어 / 微吟緩步야
시냇가에 혼자 앉아 / 시냇의호자안자
명사 좋은 물에 / 明沙조믈에
잔을 씻어 부어 들고 / 잔시어부어들고
맑은 내를 굽어보니 / 淸流굽어보니
떠내려오는 것 복사꽃이로다 / 오니桃花ㅣ로다
무릉이 가깝도다 / 武陵이갓갑도다
저 들이 그곳인가 / 져이긘거인고
소나무 사이 작은 길에 / 松間細路에
두견화를 붙들고 / 杜鵑花부치들고
봉우리에 급히 올라 / 峰頭에급피올나
구름 속에 앉아 보니 / 구릅소긔안자보니
수많은 마을들이 / 千村萬落이
곳곳에 벌여 있네 / 곳곳이버러잇
안개에 비친 해는 / 煙霞日輝
비단 수를 펼친 듯이 / 錦繡재폇
엊그제 검은 들이 / 엇그제검은들이
봄빛도 완연하다 / 봄빗도有餘샤
공명도 날 꺼리고 / 功名도날우고
부귀도 날 꺼리니 / 富貴도날우니
청풍과 명월 외에 / 淸風明月外예
어떤 벗이 있을까 / 엇던벗이잇올고
단표누항에 / 簞瓢陋巷에
허튼 생각 아니 하네 / 흣튼혜음아니
아무튼 한평생 즐거움이 이만한들 어떠하리 / 아모타百年行樂어이만엇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