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집(西厓集)
유성룡[柳成龍 1542-1607 ]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 출생. 유자온(柳子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공작(柳公綽)이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유중영(柳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했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 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25세)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 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정언(正言)·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종3품)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정3품)를 거쳐 1580년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41세, 종2품)에 승진해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皇華集序)」를 지어 올렸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備邊五策)」을 지어 올렸다. 그 해 함경도관찰사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43세, 정2품)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했으며, 1585년 왕명으로 「정충록발(精忠錄跋)」을 지었고, 다음 해『포은집(圃隱集)』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이 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
1590년 우의정(49세, 정1품)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崔永慶)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했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159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해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이 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해,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해 형조정랑(정5품) 권율(權慄 1537-1599)과 정읍현감(종6품)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을 각각 의주목사(정3품)와 전라도좌수사(정3품)에 천거하였다. 그리고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3월에 일본 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를 보내도록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 사신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 해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軍事)에 관해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 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하여,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권율과 이빈(李蘋)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 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또 군대 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및 성곽의 수축을 건의해 군비 확충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의 설치를 요청했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시켜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한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고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 보완을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서애집(西厓集)』·『징비록(懲毖錄)』·『신종록(愼終錄)』·『영모록(永慕錄)』·『관화록(觀化錄)』·『운암잡기(雲巖雜記)』·『난후잡록(亂後雜錄)』·『상례고증(喪禮考證)』·『무오당보(戊午黨譜)』·『침경요의(鍼經要義)』 등이 있다.
편서로는 『대학연의초(大學衍義抄)』·『황화집(皇華集)』·『구경연의(九經衍義)』·『문산집(文山集)』·『정충록』·『포은집』·『퇴계집』·『효경대의(孝經大義)』·『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그런데 문인 정경세(鄭經世)가 유성룡의 저서에 대해, 「서애행장(西厓行狀)」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영모록』·『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서애선생문집 제2권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애도함
한산도 고금도 / 閑山島古今島
넓은 바다 속 두어 점 푸르구나 / 大海之中數點碧
이때 백전 노장 이 장군이 / 當時百戰李將軍
한 손으로 친히 하늘 한쪽을 붙들었네 / 隻手親扶天半壁
고래를 다 죽이니 피가 파도에 번지고 / 鯨鯢戮盡血殷波
맹렬한 불길은 풍이의 소굴 다 태웠어라 / 烈火燒竭馮夷窟
공이 높자 시새우는 모함 면하지 못했으니 / 功高不免讒妬構
홍모 같은 목숨 아낄 것 없노라 / 性命鴻毛安足惜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 君不見
현산 동쪽 한 조각 돌에 / 峴山東頭一片石
양공 간 뒤 사람들이 눈물 흘린 것을 / 羊公去後人垂泣
쓸쓸하다 두어 칸 민충사는 / 凄凉數間愍忠祠
비바람에 해마다 원문 3자 빠짐 / 風雨年年□□□
원문 5자 빠짐 수리하지 않으니 / □□□□□不修
때로 섬 사람들이 소리 죽여 우네 / 時有蜑戶呑聲哭
■족질(族姪) 김부(金頫)와 함께 죽 이야기를 하다가 시를 지어 한바탕 웃음거리로 함
흉년으로 먹을 것 모자라니 / 年饑食不足
목숨을 범벅죽에 의지하네 / 性命寄饘粥
김군이 선성에서 왔는데 / 金生宣城來
걱정이 또한 먹을 것이네 / 所患亦在食
서로 죽 품질 논하여 / 相與論粥品
색과 맛으로 가린다고 했지 / 色味詳推擇
김군이 흔연히 웃으며 / 金生欣然笑
팥죽이 진실로 제일이라고 / 豆粥眞第一
내 보리죽을 제법 잘 먹기로 / 我頗慣食麥
보리가 뒷줄 서는 것이 부끄럽네 / 恥麥居後列
한참 서로 변론하여 / 良久各分疏
끝끝내 굽히지 않네 / 固守終不服
내 말하기를 서로 같으니 / 我言相等耳
굳이 우열을 주장할 것 없네 / 不必强優劣
무루정과 호타하에서 / 蕪蔞與滹沱
다 같이 문숙을 구출했으니 / 一般救文叔
결국 나물국보다 나아 / 終然勝菜羹
주린 창자를 요기할 수 있네 / 足解飢膓熱
옆에 있던 부잣집 아이가 / 傍有富家子
손뼉 치며 껄껄대네 / 撫掌一大?
우리 집에는 죽 먹지 않으니 / 吾家不喫粥
쌀밥도 나쁘지 않네 / 玉食眞不惡
▣서애선생문집 제3권
■적(賊)의 정세를 진술하는 주문 갑오년(1594, 선조27) 6월
...지난 임진년에 적이 경상도를 거쳐 충청 좌도를 지나 곧바로 신의 도성을 침범하였습니다. 그들이 거쳐간 길가 1천 수백 리는 쓸쓸하게 텅 비어 수풀만이 우거졌습니다. 전화를 입은 다른 지방도 다 그러한데, 전라도 일대 수십 고을만 겨우 화를 면하였습니다. 나라에서 쓰는 경비와 군량은 모두 여기서 대고 있습니다.
적이 침을 흘리는 곳이 전라도입니다. 이제 적이 움직이지 않을 뿐이지 움직이면 반드시 전라도를 침범하여 충청도 오른쪽으로 나와 곡식을 짓밟을 것입니다. 공사의 비축한 양곡을 약탈하여 식량으로 삼고 서해의 전함을 거두어 수륙(水陸)으로 진격하면, 전라ㆍ충청은 말할 것도 없고 황해ㆍ평안도까지 차례로 무너질 것입니다. 이는 오늘의 위험하고 절박한 형세가 이렇습니다. ...
▣서애선생문집 제6권
■굶주리는 백성의 구원을 진정하는 서장 2월
적의 변란을 치른 지 두어 달 뒤부터 피란 갔던 성중 백성으로 점차 성으로 찾아 온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적은 평양에서 패한 후로 앙심을 먹고 포악해져 지난달 24일 밤 동시에 성안에다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마구 죽이니, 숫자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칼부림 속에서도 다행히 도망하여 목숨만을 부지한 채 중흥(中興)과 소천(小川) 등으로 흩어져 숨어 버린 백성도 9천~1만여 명이나 됩니다. 더구나 굶주리고 발가벗어서 죽은 사람이 서로 깔고 베고 하니, 차마 보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먼저 군관을 보내고 곧이어 순변사 이빈, 창의사 김천일, 추의장(秋義將) 우성전(禹性傳), 전라도 순찰사 권율, 광주 목사 변응선(邊應善) 등 여러 곳에 통문을 돌려 곡식을 가져오게 하여 온갖 힘을 다하여 구제하나, 모자란 곡식으로는 끝내 구원의 손길을 널리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의 군관 부장(部長) 곽호(郭護)가 강화에서 구제해 데리고 온 남녀 노약자가 9백여 명이요, 이빈의 군관 우림위(羽林衛) 성남(成男)이 잇따라 구제한 자가 2백여 명입니다. 그 밖에 여러 진중에서 나온 자가 잇따르지만 기운이 다하여 길에 쓰러져 죽는 백성도 많습니다. 마산역 근처에서는 벌써 죽은 어미 곁에서 울고 있는 한 젖먹이가 있었습니다. 중국 장수 총병(摠兵) 사대수(査大受)가 이를 보고 불쌍히 여겨 군정(軍丁)을 시켜 말에 태워 안고 와서 곁에서 기르고 있으니, 정상이 매우 가련합니다.
대저, 경기도 수백 리 안에는 더 이상 남은 곡식이라고는 없으니, 백성의 목숨은 길바닥에 고인 물속의 붕어와 같이 하루하루 죽음만을 기다립니다. 구제하자니 곡식이 없고, 그대로 두자니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중국 군사의 양식거리로, 강 어귀에 도착한 것이 근일에 제법 모였습니다. 현재 동파에 쌀과 콩이 10,000여 석이요, 그 뒤편 서강(西江)에도 몇천 석은 됩니다. 이 밖에 중국에서 보낸 양식이 제때에 도착된다면, 대군이 또 온다 하더라도 지급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각 고을에서 실어온 거친 벼 2천여 석도 배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말먹이 콩 대신 지급하려고 하나 중국 군사가 받아가려고 하지 않아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신은 눈앞의 참상을 차마 볼 수 없어 삼가 편리한 대로 1천 석을 덜어 내어 파주ㆍ개성부ㆍ장단ㆍ적성ㆍ마전(麻田)ㆍ고양ㆍ삭녕(朔寧)ㆍ풍덕 등의 굶주린 백성과 서울의 떠돌이 백성으로 찾아온 자를 모아 골고루 나누어 구제하였습니다.
그러나 봄철이 벌써 반이나 지나가고 적병은 아직 물러가지 않았는데 민간 어디에도 보리 심은 데가 없으니, 백만의 목숨을 살릴 방도가 없어 가슴이 아픔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전쟁이 한창 급하다고 해서 백성의 구제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습니다. 신은 군관 현즙(玄楫)을 파견하여 배편으로 경기의 해변과 충청도 내포(內浦) 등에 공문을 보내 보리 종자 수천 석을 가져와 농사 밑천을 삼으려 하였으나, 한식이 다가왔고 바닷길 내왕의 지속(遲速)을 기약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백성들이 농기구를 다 잃어버렸고 소도 없어서 속수무책입니다.
백성들에게 강화 목장을 주어 농사 지어 먹도록 허락한 것은 전에 창의사 김천일의 장계에 따라 비변사가 이미 형편을 보아 처리하게 하였으나, 금년 같은 경우에는 여러 가지로 사세를 분별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구제하기 어렵습니다. 설사 마정(馬政)은 중요하지만, 일의 처리는 때를 따라야지 융통성 없이 상규만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다만, 반드시 합당한 사람을 골라 전적으로 그 일을 맡겨야만 공사 간(公私間)에 이익을 거의 바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보다 깊이 생각하고 조속하게 처리하여 시일을 늦추어서 일에 미치지 못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예컨대, 장단의 호관(壺串)에 있는 목장은 토질이 기름지고 말은 적에게 이미 약탈되어 한 필도 없습니다. 이곳도 올해는 백성들에게 농사를 짓도록 하고, 수년 뒤에 백성들의 자리가 잡히고 나서 목장으로 환원하여도 될 것입니다. 이 밖의 섬에 농사를 지을 만한 곳으로 자연(紫燕)과 일미(一彌) 등의 섬 같은 데에도 가부를 헤아려 시행하소서.
▣서애선생문집 제7권
■도원수(都元帥)에게 명하여 여러 장수가 화목하게 하기를 청하는 계 3월
경상좌우도의 장수들로 좌도에는 고언백(高彦伯), 김응서(金應瑞), 이사명(李思命), 권응수(權應銖) 등이 있고, 우도에는 이빈(李薲), 박진(朴晉), 이시언(李時言) 등이 있으니, 장수가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장의 명위와 작질이 대개 서로 같아 각자 마음대로 호령하고자 하여 세력을 합하고 힘을 함께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임기응변함에 다 각자의 뜻대로 하여 나아갈 때도 함께 나아가지 않고 패할 때도 서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만일 나무하는 작은 적을 만나면 경쟁하여 뒤질까 걱정하다가도 한번 큰 형세의 적을 보면 사방으로 흩어져 물러가 피합니다. 이 때문에 적과 서로 2년이나 버티었지만 일찍이 한 번도 적을 무찌르는 공을 세우지 못함은 다만 군졸이 나약해서가 아니라 실로 장수의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와서 군사의 힘이 가지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저 만 사람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된 뒤라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만일 모든 장수들이 서로 양보하지 않고 뜻을 같이 행하지 않는다면 강과 바다 가운데에서 배를 운전하는 것처럼 배를 조종하는 사람이 하나는 남쪽으로 하나는 북쪽으로 가자고 하니, 그 어찌 패함을 면하겠습니까. 비록 당의 이광필(李光弼)과 곽자의(郭子儀)의 재주를 한곳에 모으더라도 통제하는 사람이 없으면 무너지고 흩어짐을 면할 수 없으니, 이것은 병가가 크게 꺼리는 일입니다. 신등이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하고 가만히 모든 장수를 살펴보니 다 동급으로 통제할 재주가 없어서 처치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김응서와 고언백의 장계를 보면, “2월 14일에 김응서 등이 구법곡(仇法谷)에 나온 적을 나가 쳐서 38급을 베고, 13일에는 고언백의 군사가 또한 구법곡에 나아가 여러 날 기회를 엿보다가 10여 급을 베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같은 때에 한 진의 적을 쳤는데도 서로 알지 못한 것 같으니, 퍽 이상하며, 전날에 원수가 장계에서 운운한 것은 근거한 바가 없지 않습니다. 만일 작은 수로 흩어져 나온 적은 오히려 이같이 하여도 공을 거둘 수 있지만, 만일 큰 부대의 적을 만나서 이와 같이 한다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의 약속과 선처는 오로지 도원수에게 있으니, 권율에게 글을 내려 십분 잘 처리하고, 호령을 거듭 밝혀 모든 장수를 화목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마음과 힘을 합쳐 큰 공을 이루게 하심이 어떠합니까.
▣서애선생문집 제8권
■방어와 수비에 대하여 마땅히 조치해야 할 일을 계함 을미년(1595, 선조28)
신은 오래도록 병으로 혼미한 속에 묻혀 바깥 일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병석에서 조용히 생각해 보니, 왜적들의 모략은 측량하기 어렵고 봄소식은 날로 다가오는데, 한심한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이 미치는 몇 가지 조목을 혼미함을 무릅쓰고 아뢰자니 말에 두서가 없습니다. 그러나 삼가 바라건대, 비변사에 명을 내려 시행할 만한 것은 가려 시행케 하소서. 말단에서 사람을 쓰고 일을 하며 민성을 듣는 것 등은 자못 대체에도 관계되니, 성상께서는 유념하시어 채택하소서.
1. 혹자는 “왜적이 물러갈 뜻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왜적이 대병을 움직여 남의 땅에 머무른 지 벌써 4년인데 돌아가지 않음은 그들 마음에 반드시 큰 욕심이 있어서이며, 그 욕심을 이루지 못하면 아마도 쉽사리 물러나지 않을까 합니다. 명 나라 조정은 봉함을 허락하였으나 조공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왜적은 반드시 다시 요구 사항이 있을 것입니다. 이를 얻지 못하면 다시 공격을 자행할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세입니다. 이러한데, 저들이 우선 물러간다면 이는 만에 하나 다행이며 뜻밖의 일일 따름입니다.
대저 옛날에 이른바 기미(羈縻)라 함은 오직 얼마간의 시일을 따라 유지하면서 우리가 계책을 마련코자 함인데, 만약 기미만 믿고 대비하지 않는다면 이는 기미로써 상대를 그르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스스로를 그르칠 것입니다.
신이 요즈음 안팎의 인심과 남쪽 변방의 장수와 사졸들의 뜻을 살펴보건대, 성패는 명 나라의 처치에 붙여 두고 자기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은 전연 방치하여 대수롭잖게 생각하는 것이 더욱 심합니다. 설사 왜적이 다행히 바다를 건너 물러간다 해도 우리가 탕진된 형세는 하나도 수습되는 것이 없는데, 그들의 재침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물며 본시 바다를 건너간 것도 아닌데, 아침이나 저녁에라도 충돌하면 앞으로 이를 어쩌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이 뜻을 특별히 신칙하여, 원수 이하가 날마다 일을 처리함에 마치 머리 위에서 타는 불을 끄듯이 부지런히 하여 조금이라도 방만하여 일의 기틀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고, 각자 일을 맡은 사람이 일체로 격려하여 사공(事功)에 달려가 성과를 이루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1. 수군의 실전 경험이 있는 여러 장수가 요사이 많이 바뀌니, 앞으로 꼴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오늘의 정세는 왜적이 물러가거나 안 가거나를 막론하고 다 수군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왜적이 물러가지 않으면 적을 막아 요절을 내는 세력을 보유하고, 왜적이 물러가도 수년간 육지 방비를 조치할 수 없어서, 반드시 수군으로 항구를 가로 끊어 놓은 다음 육지에서 호응해야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왜적이 물러가거나 물러가지 않거나를 막론하고 수군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원균은 형세가 그 자리에 머물러 둘 수가 없습니다. 순천 부사 권준(權俊)이 수군중위장(中衛將)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진중에 있어서 해전에 대한 일을 많이 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석방되었으니 속히 이순신 진중으로 보내서 먼저대로 장수로 정해 주고, 기타의 편장과 비장은 일이 안정될 때까지 바꾸지 마소서.
또한 요사이 한산도에서 온 선전관이 말하기를, “수군과 노 젓는 군졸이 굶주린 지 벌써 오래라 얼굴색이 말이 아니어서 한두 달을 못 지나 모두 죽을 것이며, 지난해에 사망한 군졸의 해골이 해변에 쌓여 있다.”고 하니, 참혹하고 측은함이 극에 달했습니다. 평시에 수군 초소 근무자는 모두 자신의 군량을 준비했습니다. 지금은 한 번 나가면 교대하는 기한 없이 배 안에 얽어매니, 바닷물을 한 움큼씩 손으로 떠마셔도 군량이 떨어진 것을 알릴 수 없습니다. 국가는 길가에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에게도 오히려 창고를 풀어 구제하는데, 하물며 창을 메고 싸움터에 나가 있는 군졸들이 굶어 죽어 가는 것을 좌시하고 구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전라도 연해의 군현이 모두 탕진됐다 하지만, 광주ㆍ나주 같은 대읍의 창고 곡식은 아직 남은 저축이 있고, 지난가을에 거둬들인 환곡[還上]도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통제사 이순신ㆍ종사관 정경달(丁景達)로 하여금 맡게 해서 순찰사에게 알리고, 배를 동원해서 급히 1, 2천 석을 풀어 그들을 구제한다면 군졸들은 몇 달 동안 연명할 수 있습니다.
그후에는 둔전에서 양곡 생산하는 일에 더한층 진력하여 군량을 이어 나갈 계획을 삼아야 합니다. 유유히 날짜만 보내다가 또다시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난해에 이순신이 올린 장계에 정경달을 시켜 둔전을 하였다 했는데 그 소출이 얼마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금년 둔전도 그대로 정경달에게 시켜 진력하여 조치케 하고, 근처의 감목관 나덕준(羅德峻) 등에게 작년에 소출한 곡물을 함께 받아들여 종자를 삼아 한산도 근처에 경작할 만한 땅이 있으면, 싸움이 없는 여가에 초소 근무 군사를 열씩 또는 다섯씩 짝을 지워 기장ㆍ차조ㆍ콩ㆍ조를 많이 심게 합니다. 그리고 해변의 경작할 만한 기름진 땅에 편리한 시설을 많이 해서 왜적들에게 포로되었다가 도망해 나온 사람이나 또는 영남 지방의 실업자들을 모으면 모두 농군이 되니 경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경달이 이 일을 잘 해낼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사변 초에 정경달은 선산 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경토를 떠나지 않았고 꽤 군공이 있으니, 약해서 책임을 이기지 못할 무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이순신 군중에는 이미 종사관 심원하(沈源河)가 있으니, 정경달 이 비록 둔전 일에 전임해서 그 성과를 책임지게 하는 것이 실로 무방하겠습니다.
이러한 뜻으로 순찰사 홍세공(洪世恭)과 이순신(李舜臣) 등에게 급히 유시를 내리심이 어떻겠습니까? ...
▣서애선생문집 제9권
■총병(摠兵) 유정(劉綎)에게 주는 글
요사이 변방의 보고를 접해 보니 웅천에 있는 적의 괴수 평의지(平義智)가 경상도 순찰사에게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는데 대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왕자를 돌려보낸 것은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공이 아니고 자기가 힘을 썼기 때문에, 가등청정이 이때부터 원수같이 생각하며 서로의 대립이 날마다 심해졌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조선이 가등청정과는 사절을 왕래하면서 한 번도 우리들에게는 사신을 통하지 않으니 무슨 일인가?” 또한 “대명의 화친 허락을 꼭 믿을 수 없지만, 만일 조선이 허락한다면 마땅히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널 것이며 각 군진에 남은 식량을 보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원해 줄 것이다.” 말하니, 적의 심정을 측량하기 어렵습니다. 옛말에 “까닭도 없이 화친을 청한 것은 모략이다.” 하니, 그 말은 믿기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중에 가등청정과 서로 대립이 격심하다는 말은 혹 근사한 데가 있어, 반드시 첩자를 이용할 기회인데, 노야의 고견은 어떠신지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묘책을 지시해서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대저 왜적은 바다 가운데 작고 추악한 무리이므로 그들의 재력은 한정이 있고, 3년 간 전쟁을 겪어 죽고 상한 자가 많아 날카로운 기세가 처음 같지 않으며, 해로를 따라 식량을 운반하려면 이따금 풍파를 만나 침몰되어 형세가 두루 넉넉하기는 어렵습니다. 몇 해 전에 승세를 몰아 깊이 들어온 것은 모두 우리에게 식량을 의존해서 본국에서 운수하는 수고로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가는 곳마다 패하니, 어느 곳에서 식량을 얻겠습니까. 오직 전라도 하나만이 가장 침을 흘리는 곳입니다. ...
물으신 우리나라 군량은 제가 감히 대답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다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대개 전라도의 여러 가지 군정(軍丁)을 호수로 계산하면 83,685명이고, 충청도에 40,530명이고, 경상도에 94,056명인데 이것은 평상시 정원입니다. 지금 병화로 인하여 십중팔구가 없어졌으나 식량만 있다면 군사는 그래도 모을 수 있는데, 수륙의 여러 장수들이 거느린 병력이 수천에 지나지 않는 것은 다만 먹을 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군량이 많고 적음도 미리 쌓아 두었던 것은 이미 다했고 새 곡식은 아직 거의 거둬들이지 못하였으니, 현재 숫자를 통계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생각으로 추적해 보면 금년에 충청도와 전라도 두 도가 새로 받아들이는 양곡도 응당 많아 봐야 5, 6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안으로 경비에 제공하고 밖으로 군량에 쓰려고 하면 그저 모자랄 정도가 아닙니다. 이 점은 우리나라 사람이 밤낮으로 계산하고 헤아려 보지만, 힘은 다하고 계책은 궁해서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어리석어 지식이 없으나 지난해에 처음으로 노야를 합천 진영 안에서 뵙고 이미 당신이 천하의 위인이심에 감복하였습니다. 당장 내 몸이 물불 속에 있으니, 사사로이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도 오직 당신뿐입니다.
물으심을 받자와 감히 한두 가지 계책을 말씀드리니 황공할 뿐입니다.
▣서애선생문집 제10권
■사순(士純) 김성일(金誠一 1538-1593)에게 답하는 글 - 임진년(1592, 선조25) 8월
나랏일이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한들 무엇하겠습니까. 아무리 사람의 실수로 빚어진 일이라 하지만 또한 어찌 액운이 모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가(車駕)가 맨 처음 평양에 머물렀다가 왜적이 성 아래까지 이르자, 3일 만에 다시 의주로 옮겼습니다. 그후 얼마 안 되어 또 평양을 지키지 못하고 빼앗겼는데, 적이 만약 승세를 타고 서쪽으로 쳐들어왔다면 사태가 말할 수 없는 곤경에 빠졌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적이 머뭇거리며 수십 일 동안이나 쳐들어오지 않자, 이 기회를 타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다시 순안을 지키게 되었는데, 적과 서로 맞서서 번갈아 가며 이기고 지기를 벌써 여러 달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원병을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는 일이 처음에는 잠시 불리했었으나, 지금은 대대적으로 수만 명의 군사를 징발시켜 그 선봉이 벌써 가산에 도착하였습니다. 대개 적의 세력은 이미 꺾였는데 외로운 군대가 깊이 들어와서 사방으로 흩어져 떠다니면서 노략질을 하고 있으니, 이때에 공격하면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되는 것은 인심이 그들을 겁내어 바라만 보고도 도망쳐 흩어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달리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오랑캐는 계책으로써 패주시키기는 쉬워도, 군대로써 쳐부수기는 어렵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적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참으로 날쌘 군사들을 선발하여 예측하지 못한 사이로 나와 곳곳에서 그들을 맞아 끊으면 섬멸하기가 극히 쉽습니다.
그리고 남쪽 지방의 의병들이 영공(令公 김성일을 존칭함)의 한 번 제창으로 인하여 서로 인솔하여 함께 일어나니, 매우 장한 일입니다. 곽공 재우(郭公再祐)는 매우 기특한 인재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용기를 돋우어 줍니다. 그런데 그가 절도사(節度使)와 서로 실책을 일으킨 일도 또한 과격한 충정과 의분에서 나왔으니 대단한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건을 일으키기에 이른다면 이는 매우 옳지 못한 짓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곧 조정의 관리이니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조정에서는 그가 일을 그르친 죄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벌써 면직시키고 영공에게 그의 직책을 대신 맡게 하고 한영해(韓寧海)를 좌도 감사(左道監司)로 임명하였습니다. ...
※당시 절도사 김수(金睟)가 왜적을 막지 않고 초계 지방으로 피해 가는 것을 보고 곽재우가 “감사로서 병사와 수사가 도망해도 형벌을 내리지 않더니, 이제 감사마저 도망하니 베어 죽이겠다.” 했다. 그래서 사이가 벌어지자 김수가 의병을 난적으로 몰아 곽재우를 체포하였는데,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에 의해 풀려났다.
▣서애선생문집 제11권
■공려(公勵) 이원익(李元翼 1547-1634)에게 줌
벌써 가을이 한창인데, 대감께서는 안녕하실 줄로 믿습니다. 요사이 대감께서 돌아오시기를 고대하며 군문(軍門)에 여러 번 부탁했으나 그곳에서 인재를 모집하는 일이 더 급하여 허락되지 않았으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과도관(科道官)이 가까이 이르니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됩니다. 병든 저만 혼자 있는 터라 어디를 보아도 망연하여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휘하의 여러 장수들은 있는 힘을 다하고 있으니, 곧 왜적을 깨끗이 제거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될는지요? 왜군이 지키고 있는 다리를 먼저 공격하고 군대를 진주와 사천으로 옮긴다는 것은 앞서도 의논하였습니다. 군문에서는 대감의 편지로 인하여 기꺼이 따른다고 하니 일이 잘될 것 같아서 크게 위로가 됩니다. 듣자니 대감댁의 일꾼이 군마를 가지고 내려갔다 하니 이는 남자의 할 일이며 절름발이 같은 저는 한갓 부러워할 따름입니다. 아무쪼록 힘써서 일을 잘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서애선생문집 제12권
■여러 아이들에게 보냄[寄諸兒]
너희들이 10년 동안이나 제대로 공부를 못하고, 여러 가지 걱정 때문에 이리저리 쫓겨다니다 보니 한없이 세월만 흘렀구나. 그러나 이것도 천명이니 어찌하겠느냐.
나도 젊었을 때에 전적으로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너희들과 같이 그럭저럭 세월만 보냈다.
경신년(1560, 명종15) 겨울에 《맹자(孟子)》 1질을 가지고 관악산에 들어가서 두어 달 동안 20여 차례 읽고 나서야 겨우 첫머리부터 끝까지 욀 수가 있었다. 산에서 내려와 서울로 오는 동안 말 위에서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양혜왕장(梁惠王章)에서 진심장(盡心章)까지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정밀한 뜻을 깊이 알지 못했지만 군데군데 마음에 이해가 되는 곳이 있었다. 그 이듬해 하회에 와 있으면서 《춘추(春秋)》를 30여 번을 읽고선 이때부터 조금씩 문장의 흐름을 이해하게 되어 다행히 급제하였다.
지금에 와서는 그때 좀더 공부를 하여 사서를 백여 번 읽었더라면 하고 언제나 한이 된다. 만일 그렇게 하였더라면 얻은 바가 기필코 오늘같이 보잘것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늘 너희들에게 사서를 읽으라고 말한다.
요즘 서울의 젊은이들은 마치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과 같아서 다만 빨리 성공할 수 있는 방법만을 연구해서, 성현들의 글은 다락에 묶어 두고 날마다 영리하게 남의 비위에 맞게 하는 작은 문자를 찾아 그 말을 따서 글을 지어 시관의 눈에만 들게 하여 성공을 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는 바로 교묘한 방법으로 벼슬을 하는 사람들의 한 수단이지, 너희들같이 우둔하고 명예를 다투는 데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 쉽게 본받을 것이 못된다. 모모(嫫母)가 서시(西施)를 본받는 것도 뭇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더군다나 제가 굳이 서시와 같지 않고 내가 모모도 아니면서 무엇 때문에 욕되이 이런 일을 하겠느냐? 대개 학문의 성취 여부는 나에게 달려 있고 얻고 얻지 못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오직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만 힘쓰고 운명은 하늘에 맡길 뿐이다. 《통감(通鑑)》도 역사가들의 지남(指南)이니, 어찌 읽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통감을 읽는 것도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이가 벌써 중년이 되었고 할 일이 많은데, 사서(四書)와 시서가 모두 너희들의 물건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또 몇 해를 더 보내면 끝내 아무런 실속도 없이 가난한 집에서 슬피 탄식하는 일부(一夫)의 꼴을 면할 수 없으니, 어찌 민망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경서는 내용과 의미가 깊고 정밀하기 때문에 반드시 노력을 기울인 뒤에야 터득할 수 있지만 역사서는 경서에 비할 것이 못 되니, 경서를 읽으면서 돌아가면서 훑어보아도 관통할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두 가지는 모두 실속이 있으니 잘 생각해 보아라.
▣서애선생문집 제13권
■구양자(歐陽子 구양수 1007-1072)의 붕당론(朋黨論)
朋과 黨은 진실로 분간하기 어려운가. 답하기를,
“분간하기 어렵다면 분간하기 어렵고, 분간하기 쉽다면 분간하기 쉽다. 그 어렵고 쉬움은 다만 임금의 마음이 밝은지, 또는 어두운지의 여하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한다. 묻기를,
“그렇다면, 그 분간하는 방법을 들어 볼 수 있는가?”
하니, 다음과 같이 답한다.
“붕과 당 두 글자는 비록 서로 비슷하다고 하나, 군자는 붕이 있고 당이 없으며, 소인은 당이 있고 붕이 없으니, 붕이란 공(公)이요 당이란 사(私)이다. 만약 어느 것이 붕이 되고 어느 것이 당이 되며, 무엇이 공이고 무엇이 사인가를 분별하지 못하고 막연히 붕당이라고 지목한다면, 형적이 아주 비슷한 사이에서는 바야흐로 현란하고 두려워 당혹하기에도 겨를이 없으니, 군자와 소인은 끝내 분별할 수 없을 것이다. 공자가 군자와 소인을 논함에 매양 주비(周比)ㆍ화동(和同)ㆍ교태(驕泰)의 따위를 상대적으로 들고 비교해서 논한 것은, 같은 것 중에서도 그 다름이 있음을 알리고자 함이니, 성인이 후세를 걱정함은 지극하다 할 수 있다.
대체로 붕이란 동류를 말하고, 당이란 서로 도와서 잘못을 감추어 줌을 이름이니, 두 가지의 분간이 비록 서로 비슷하다고는 하나 실은 백천만 리나 멀다. 군자가 중히 여기는 것은 도의이다. 소리가 같으면 서로 응하고, 기(氣)가 같으면 서로 구하니, 숭상하는 바가 한결같이 공(公)과 정(正)에서 나온 것은 붕이라 하면 옳지만 당이라 하면 안 된다. 소인은 그렇지 않다. 재빨리 서로 부화하고, 맹목적으로 서로 어울려 붙좇아가 간곡하고 후하게 하기를 주야로 그치지 않아서, 자기 뜻에 맞는 사람은 뇌동하여 칭찬하고,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함께 배척하여, 저희들끼리 참여하여 안 뒤에 행동하고 모의한 뒤에 말한다. 비록 자기들이 사사롭고 사악한 형적을 스스로 덮으려 하지만, 그들이 성취한 일을 보면 부귀ㆍ권세와 이권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
▣서애선생문집 제14권
■공물(貢物)을 쌀로 하자는 의논
...국가가 조를 받는 제도는 논에서 미곡을, 밭에서는 콩을 조세로 바치게 했으나, 콩을 납부하고 모자라는 것은 목면ㆍ마포ㆍ기름ㆍ꿀 등 기타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받아들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전결공물(田結貢物)이다. 그 외로 논밭의 결수를 합산하여 거기에 잡물(雜物)을 부과시켜 각 관아에 납부하게 했으니, 이것을 원공물(元貢物)이라 한다. 전에는 서리들이 본색을 관아에 방납하고 백성으로부터 사사로이 미포를 받아들이니, 백성들이 내는 것은 본색의 수십 배가 되어 백성은 매우 곤궁하게 되었다.
승상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이 일찍이 건의하여 정공도감(正貢都監)을 설치하고 폐단을 고치려 했으나 마침내 이루지 못했다. 이때 와서 군수(軍需)는 바닥이 나고 태창(太倉 광흥창(廣興倉))에는 수천 석의 저장이 없으니, 계획이 나올 바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청하여,
“공물을 미곡으로 대납하되 1결(結)마다 2말을 상납하게 하여 군수에 보충한다면 한 해에 7만여 석이 확보되고, 백성의 힘도 소생할 것입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전에 이익을 노리고 방납하던 무리들이 백방으로 모의하고 파고들며, 식견이 모자라는 사대부도 그들과 합세 동조하니, 이 법은 다시 폐지되고 말았다.
▣서애선생문집 제15권
■명예(名譽)를 낚는 설(說)
지난 융경(隆慶) 무진년(1568, 선조1)에 상이 새로 즉위하여 유술을 높이고 장려하니, 발탁된 초야의 노유들이 많았다. 이에 한때의 선비들이 다투어 스스로 힘써 너도 나도 학술을 따라 상서(庠序 향교)와 일반 민간에서도 정주(程朱)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으니, 아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이 세상에 성행하였다. 그러다가 기로(耆老)들이 죽은 뒤 당시에 숭상하던 학풍이 점차 변하니, 전날의 이른바 공부에 전념하던 선비들도 점점 날이 갈수록 태만하여 처음 먹었던 마음을 계속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는 간혹 이 이름(성리학)을 빌려 조정에 나아갔다가 말절(末節)에서 낭패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조소거리가 된 이도 있었다. 이에 세상에서 드디어 《심경》과 《근사록》을 명예를 낚는 미끼라고 하였다.
근일에 이르러 이 책을 학습하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세상에 교훈이 될 만한 성현들의 글이 거의 전폐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탄식할 만하다. 그러나 이는 두 책의 가르침이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니요, 이 책을 빌미로 이익을 중매한 자의 죄이다. 비유하건대 포백과 곡식은 사람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으로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되나, 쟁탈하는 화가 이로부터 일어난다. 가령 여기 어떤 사람이 그 쟁탈을 근심하여,
“포백과 곡식이 없다면 큰 도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베틀과 북을 버리고 쟁기와 보습을 파괴하여 온 천하로 하여금 농사도 안 짓고 베도 짜지 않게 하여, 사람들의 의식(衣食)의 근원을 끊고자 하는 것과 같다 한다. 내 생각에는 도적이 미처 그치기도 전에 인류가 먼저 없어질 것 같다. 이제 사람들이 명예 낚는 것을 근심하여 《심경》과 《근사록》을 없애려 한다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대저 교화의 근본은 본래 있는 데가 있고, 사람을 만드는 기구는 오로지 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이를 말하고자 하면, 그 말이 매우 길다. 《대학(大學)》 서문(序文)의 주자의 논에 갖추어 있으니, 너희들은 돌아가 거기에서 구하여 세속 사람들에게 현혹됨이 없도록 해야 한다.
병오년(1606, 선조39) 초여름에 써서 단(? 서애(西厓)의 둘째 아들)에게 보이니, 마침 단이 《심경》 배우기를 요구하였다. 이에 나는 요사이 보지 못한 일이라 마음에 느낀 바가 있어 말을 적는다.
▣서애선생문집 제16권
■남원(南原) 함락의 일을 기록함
군기시(軍器寺) 소속 파진군(破陣軍) 12명이 총병 양원(楊元)을 따라서 남원으로 들어갔다. 성이 함락될 적에 10명은 전사하였고 김효의(金孝義)와 동반(同伴)하던 한 사람이 성 밖으로 뛰어나오다가 한 사람은 적을 만나 죽었다. 김효의는 벼논 가운데 숨었다가 탈출하여 나에게 그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였다.
양 총병이 남원에 도착하자 성을 수리하고, 성 위에다 한 길 정도의 작은 성을 더 쌓았으며, 성 밖에는 양마장(羊馬墻)을 쌓고 포 쏠 구멍을 뚫으며, 성문 위에다 대포 두세 대를 설치하고, 두 길 정도 되는 참호를 깊이 팠다. 이때 한산도에서 패전하여 적보(敵報)가 매우 급하게 되자 성안의 인심이 어수선하여 군대와 백성들이 차츰 도망하여 흩어지고, 총병 양원이 거느린 요동의 기마병 3천여 명만이 성안에 있었다. 총병이 공문을 발송하여 전라 병사 이복남(李福男)을 불러 성안을 공동으로 지키게 하였으나, 이복남이 시일을 자주 연기하며 오지 않아 연거푸 야불수(夜不收 군중의 정탐하는 자)를 보내 독촉하자 마지못하여 겨우 수백여 명만 데리고 왔다. 광양 현감 이춘원(李春元)과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등이 또 이르렀다.
8월 13일, 왜군의 선발대 백여 명이 성 밑에 도착하여 밭고랑 사이에 흩어져 숨어서 셋 다섯씩 떼를 지어 성 위를 향하여 조총을 쏘는데, 잠깐 멈추었다가 갔는가 하면 다시 오곤 했다. 성 위의 사람들이 승자 소포(勝字小砲)로 대항하였으나 왜군의 본진이 멀리 있고, 또 유격병을 내어 교전하다가 올라가 번갈아 나오기 때문에 포를 쏘아도 맞힐 수가 없고, 적탄은 성 위 사람을 맞혀 이따금 죽어 쓰러졌다. 이윽고 왜병이 성 아래에 와서 성 위의 사람을 불러 함께 이야기하더니 총병이 부하 한 사람을 시켜 통사를 데리고 왜군 진영으로 가서 왜군의 글을 가지고 왔는데, 바로 전쟁을 약속한 글이었다.
14일, 왜병이 성을 포위하고 사방으로 진을 치며 총과 포로 번갈아 공격하기를 지난번처럼 하였다. 이에 앞서 성 남문 밖에 민가가 많았는데 총병은 적군이 올 무렵에 이 집들을 불태웠으나, 돌담과 흙벽이 아직 좀 남아 있었다. 적병이 담과 벽을 의지하여 몸을 숨기고 총과 포를 쏘아 성 위의 사람을 많이 맞혔다.
15일, 왜군 진중을 바라보니 풀과 논에 볏짚을 베어서 큰 단을 만들어 담과 벽 사이에 수없이 쌓아 놓았는데, 성안에서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때에 명장 유격 진우충(陳愚衷)이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전주에 있었다. 남원의 군사가 날마다 와서 지원해 줄 것을 청했지만 오래도록 오지 않아 군사들은 더욱 겁을 먹었다. 이날 늦게 성첩을 지키는 군사들이 대부분 머리를 맞대고 귀엣말을 하며 말에다 안장을 준비하였다. 초경(初更)에 왜군 진중에서 소리가 크게 나며 대략 서로 말하고 대답하며 물건을 운반하여 참호를 메우는 모양이고, 한편으로는 많은 포가 성을 향하여 요란스럽게 쏘아 대어 날아오는 탄알이 비처럼 쏟아져서 성 위의 군사들이 목을 움츠리고 감히 밖을 보지 못하였다. 한두 시간 지나자 떠들썩한 소리가 멈추었는데, 풀단이 벌써 호 안에 가득찼고 또 흙담 안팎에도 쌓여 순식간에 성 높이와 같게 되었다. 왜군들이 밟고 성첩으로 기어올라오니, 성안이 크게 혼란하여 벌써 왜군이 성에 들어왔다고 전하였다.
명 나라 군사는 창졸간에 모두 말을 타고 북문으로 나가려고 하나, 문이 닫혀 쉽게 열리지 않아 거리가 꽉 막히어 말발굽을 묶어 놓은 것 같아 돌아설 수도 없었다. 성안 곳곳에서 불이 일어났다. 얼마 있다가 문이 열려 군사와 말이 문을 다투어 성 밖으로 나가니, 왜병이 각각 길거리를 지켜 몇 겹으로 포위하고 긴 칼을 빼들고 어지럽게 후려치니, 명군은 칼날을 맞고 목이 떨어졌다. 마침 달이 밝아서 빠져나간 자가 얼마 되지 않았다. 총병은 부하 몇 사람과 말을 달려 빠져나와 겨우 죽기를 면하였고, 우리나라 여러 장수 이복남ㆍ김경로ㆍ이춘원 및 남원 부사 임현(任鉉), 총병의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등은 모두 전사하였다.
대체로 양원은 북방의 장수로 북쪽 오랑캐만 막을 줄 알고 왜놈 막을 줄은 몰라 패배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남원이 함락되고 나서는 전주 이북이 와해되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뒤에 양원은 끝내 이 사건으로 죄를 받아 죽임을 당했고, 그의 목은 뭇사람에게 보이었다고 한다.
■조총 제조(鳥銃製造)의 일을 적음
병기에는 긴 것과 짧은 것이 있는 것을 오병(五兵)이라 하니, 마치 천지에 오행이 있는 것과 같아서 이 가운데 한 가지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멀리까지 미칠 수 있는 병기로는 궁시(弓矢)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래서 《주역》에 “호시(弧矢)의 이익으로써 천하를 떨친다.”고 하였다.
이미 궁시를 말했으면 다른 병기는 말하지 않더라도 좋다. 이는 오병 가운데 오직 궁시가 이기(利器)이고, 칼ㆍ방패ㆍ세모창[矛]ㆍ비늘창[戟] 등이 능히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근세에는 또 화포라는 병기가 있다. 그 기계는 도리어 궁시보다 우수하여 그 포성의 위엄과 쳐부수는 공(功)과, 멀리까지 미치는 힘이 모두 궁시와 비길 바가 아니다. 대개 세상이 변화하여 아래로 내려갈수록 전쟁은 더욱 많아지니, 인심의 교묘함과 기지를 쓰는 일은 무궁하다.
그러므로 경산(瓊山) 구준(丘濬)이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에 싣기를, “하늘이 국가에게 복을 내려 자고로 없는 병기를 주었다.”고 했다. 또한 척씨(戚氏 척계광 1528-1588)가 《기효신서(紀效新書)》에서 조총을 신기(神器)라고 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본디부터 활 잘 쏘기로 이름이 났는데, 전세(前世)에 왜적이 다만 장창과 단도로 쳐들어왔을 때 우리는 궁시로 수천 보 밖에서 그들을 제압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성을 지키는 데에 우리나라가 더욱 뛰어났던 일도 우리가 궁시의 기술을 가진 반면에 적은 단병을 지녀 우리와 서로 대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임진년 변란에는 안팎이 무너져 한 달 사이에 도성을 잃고 팔방이 와해된 것은 비록 백 년 태평 생활에 태어난 백성들이 병기를 알지 못하여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실은 왜적이 조총이란 좋은 병기를 가지고 수백 보 밖에까지 미치고, 맞히면 관통할 수 있고, 총알 날아오는 것이 마치 바람을 탄 우박과 같으니, 궁시는 감히 서로 더불어 비교해 볼 수조차 없었다. 조조(鼂錯)가 이른바, “무기가 불리하면 그 졸개를 적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오병이 서로 보위하는 뜻을 알지 못하고, 또 화기의 이로움이 궁시보다 나은 것을 모르면서 항상 “우리나라가 본래부터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다른 기술에 기대하겠는가.” 하니, 참으로 근심스럽고 한탄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군기시에는 원래 천ㆍ지ㆍ현ㆍ황자 대포와 또 점차 규모를 줄인 영ㆍ측자(盈昃字) 소포가 있었고, 또 김지(金墀)가 만든 승자 대ㆍ중ㆍ소 세 가지 양식의 총과 또 비격진천뢰 등의 포가 있었는데, 난리 뒤에 산실되어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명병이 평양의 왜적을 공격하여 파괴할 때 대포로 성을 공격했는데, 그 종류는 대장군ㆍ불랑기(佛狼機)ㆍ벽력(霹靂)ㆍ자모(子母) 등의 포, 화전(火箭)ㆍ백자총(百子銃) 등이 모두 우수한 무기였고, 왜적 진영에서 얻은 조총이 많았었다.
이제 장인(匠人)으로 하여금 그 양식에 의거하여 만들고, 그 만드는 법과 쓰는 법을 기록해서 군기시에 보관하도록 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 급할 때라도 각기 그 힘을 입어 사용하는 방법에 어둡지 않을 것이다.
■중강진(中江鎭)에 저자를 열다
압록강 중강진에 시장을 열었다. 그때 흉년이 날로 심하여 굶어 죽은 시체가 들에 가득하였다. 공사 간의 축적한 것은 탕진되어 진휼하려 하나 별다른 방책이 없었다. 내가 청하여 요동에 자문을 보내 중강에 시장을 열어 무역을 하도록 하니, 중국에서도 우리나라의 기근이 심한 것을 알고 황제에게 아뢰어 허락하였다. 이에 요동의 왼쪽 지방은 미곡이 많이 유출되므로 우리나라 평안도 백성들이 먼저 그 이 점을 취하고 경성의 백성들도 또한 뱃길로 서로 통하게 하니, 여기에 의지하여 수년 사이에 완전히 활기를 되찾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대개 그때 우리의 면포 한 필은 곧 피곡으로 한 말이 차지 않았다. 그런데 중강진에서는 쌀로 스무 말이 넘었으니, 그 이득이 은ㆍ구리ㆍ무쇠의 열 배나 보게 되었다. 비로소 옛사람들이 통상이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에 중요한 일이라고 한 말은 참으로 까닭이 있음을 알았다.
■정토사(淨土寺)의 중이 왜적을 죽임
정토사의 승려들이 왜적을 죽인 것은 통쾌한 일이다. 당시에는 왜적이 경성에 들어와 웅거하고는 매일 성 밖에 산발적으로 나와 노략질을 하였다. 정토사는 도성 서쪽 20리에 있었으므로 적의 왕래가 잦아 승려들과 낯이 익어 의심하지 않는 처지가 되었다.
고양 사람 이산휘(李山輝)가 승려들로 하여금 적을 죽일 계책을 이리이리 하라고 설명해 주었다. 하루는 왜적 4명이 절에 당도하자, 절의 승려들이 기쁘게 나아가 맞이하여 방 안으로 인도하고는 자리를 펴 앉게 하고 서둘러 밥을 지으니, 왜적이 접대가 후하다고 여겨 매우 기뻐하였다.
밥이 다 되자 승려 네 사람이 밥상을 받쳐 들고 엄숙하고 공경한 태도로 올리고는 노승 한 사람이 주석에 마주 앉아 음식을 권하니, 왜적은 의심하지 않고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더운 물을 달라고 하였다. 이때 승려가 이미 펄펄 끓여 놓은 물은 뜨겁기가 불과 같았다. 네 명의 중이 큰 바가지에 가득 담아서 주니까, 왜적이 바리때[鉢]를 받쳐 들고 물을 받으려고 위로 쳐다보는 순간 승려들이 일시에 끓는 물을 그들의 얼굴에 끼얹고, 적들이 모두 방바닥에 엎드리자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죽은 그들을 보니 눈알이 모두 익어 있었다. 시체는 끌어 내어 절 밖에다 매장했다. 그때는 적이 촌락으로 들어와서 동료 가운데 사살자가 생기면 남은 적이 돌아가 보고해서 반드시 대거 출병하여 보복을 자행하였는데, 이날은 4명이 와 모두 죽어 화를 피한 자가 없었기 때문에 드디어 승려들은 무사하였다.
■잡기(雜記)
...다음해 임진년에 허징이 또 신점(申點)을 따라 연경에 가서 옥하관에 있을 때에 왜놈들이 이미 본국을 침범하여 임금께서 서쪽으로 순행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에 명 나라 조정에서는 논의가 같지 않아 대개 세 가지로 나누어졌다. 그 하나는 압록강을 굳게 지키면서 그들의 변란을 관망하자는 논의, 그 하나는 이적(夷狄)이 서로 공격하니, 중국이 반드시 구원할 필요가 없고 마땅히 압록강을 지키면서 굳센 군사를 뽑아 강을 건너 무위나 드날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병부 상서 석성(石星)만이,
“조선은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고 역설하고 또한,
“먼저 군기(軍器)ㆍ화약(火藥) 등, 적군 막을 기구를 주어야 한다.”
고 청하였다. 과도관이 올린 주본에는,
“군기ㆍ화약을 외국에 주는 것을 금한 것은 곧 고황제(高皇帝)가 만든 법이므로 어길 수 없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서는 극력 논쟁하였다.
“이른바 외국이란 기미(覊縻)하기가 멀어서 그들의 성패는 중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일은 내복(內服)의 일과 한가지인데 만약 왜놈들로 하여금 조선을 점령하고 요동을 침범하여 산해관에 미치게 되면 경사(京師)가 진동할 것입니다. 이는 곧 복심(腹心)의 근심인데 어찌 보통의 예로 의논하겠는가. 설령 고황제가 오늘날에 계시더라도 반드시 의심 없이 줄 것이다.”
그제서야 의논이 마침내 결정되어 먼저 이지병(二支兵)을 징발하여 국왕을 호위하게 하고 또한 호군은(犒軍銀) 3만 냥을 주었으니, 이것은 모두 석공(石公)의 힘이었다.
허징이 또 말하였다.
“상서(尙書) 석성은 신장이 8, 9척이요, 용모가 뛰어났으며, 바라보면 덕의 기운이 있고 눈빛이 반짝였다. 사신을 대하여 본국의 사정을 말하면 이따금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그의 정성의 간절함이 이와 같았다. 이때에 군사를 주장하는 처지에 이 사람이 없어서 다른 의논이 승세했다면 우리나라의 일은 심히 위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공을 이루었지만 몸을 보존하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이로 인하여 서로 탄식하였다.
■훈련도감(訓鍊都監)
(1593, 선조26) 10월, 거가가 환도하니 불타다 남은 너저분한 것들이 성안에 가득하고, 거기에다가 전염병과 기근으로 죽은 자들이 서로 길에 겹쳐 있으며, 동대문 밖에 쌓인 시체는 성의 높이와 가지런하니,
어떤 본에는, 평안도에 사는 중 몇몇이 스스로 모여 도성 아래를 청소하며 죽은 시체를 성 밖에 끌어내어 동대문 밖 오간(五間) 수구에 버렸는데, 쌓인 시체가 성의 높이와 같은 것이 여러 곳이었다고 되어 있다.
냄새가 지독하고 더러워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서로 먹어서, 죽은 사람이 있으면 삽시간에 가르고 베어 피와 살덩어리가 낭자하였다.
상이 용산창(龍山倉)에 거둥하시어 창고의 곡식을 내어 방민(坊民)에게 흩어 주었는데, 곡식은 적고 백성은 많으므로 겨우 됫 곡식, 홉 곡식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어공미(御供米)를 삭감하여 구휼하기 위해 동ㆍ서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했으나 겨우 만분의 일도 구제하지 못하였다.
지방은 더욱 심해서 곳곳에서 도적들이 일어났다. 양주(楊州)에는 강대한 도적 이능수(李能水)가 있었고, 이천(利川)에는 현몽(玄夢)이 있었으며, 충청도에는 역적의 난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이때에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라 명하시고, 나를 도제조로 삼았다. 나는 청하여,
“당속미(唐粟米) 1천 석을 꺼내어 양식으로 하되 하루에 한 사람에게 두 되씩 준다하여 군인을 모집하면 응모하는 자가 사방에서 모여들 것입니다.”
하니, 당상 조경(趙儆)이 곡식이 적어 능히 지급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한정하려 하여 법칙을 세웠다. 큰 돌 하나를 놓아두고, 응모자들로 하여금 먼저 들게 하여 힘을 시험해 보고, 또 한 길 남짓한 흙 담장을 뛰어넘게 하여 능히 해내는 자는 들어오기를 허락해 주고 못하는 자는 거절하였다. 사람들이 다 굶주리고 피곤해서 기운이 없으므로 합격하는 자는 열중 한둘이었다. 어떤 사람은 도감문 밖에 있다가 시험 보기를 요구했으나 얻지 못하고 쓰러져서 굶어 죽은 자도 있었다.
얼마 안 되어 수천 명을 얻어 조총 쏘는 법과 창ㆍ칼 쓰는 기술을 가르쳐서 초관(哨官)과 파총(把摠)을 세워서 그들을 거느리고 번을 나누어 보초를 서게 하고 궁중에 무릇 행차의 거둥이 있을 때는 이들로써 호위하니, 민심이 차츰 믿게 되었다.
또한 강이 얼기 때문에 양주ㆍ이천 두 곳의 도적들의 형세가 장차 합세할까 걱정이 더욱 컸는데, 때마침 황해도 승군 백여 명이 도감에 이르러 연습을 하겠다고 하였다.
주상에게 아뢰어 변응성(邊應星)으로 경기 방어사를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용진으로 나아가 주둔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동쪽의 길이 처음으로 통했고, 도적들도 차츰 사라져 가게 되었다. 얼마 있다가 비변사에서 공고하기를,
“도적 중 누구거나 서로 잡아 고하는 자에게는 죄를 면해 주고 공을 의논하여 상을 내리겠다.”
하자, 양주 도적 떼들이 그 소문을 듣고 이능수의 목을 베어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현몽은 무서워서 도망하였다.
또 경기 감사 유근(柳根)을 시켜서 백성을 모아 진지를 짓고, 목책을 만들어서 도적을 방비하게 하고, 또한 나그네들로 하여금 머물러 자고 갈 수 있게 하였다.
그해 봄에 강원도와 양호의 곡식 종자를 옮기고, 황해ㆍ평안의 소를 모집하여 나누어 주게 하였는데, 유근이 지성으로 백성들을 위로하여 오게 하였다. 갑오년 가을은 풍년이 들었으므로 굶어 죽는 자가 차츰 드물게 되었다. 을미년(1595, 선조28)에 풍년이 들었다. 떠도는 백성들이 태반은 고향에 돌아와 모여 살게 되었다. 그전에 내가 차자를 올려 청하였다.
“군량을 조치하고 군사를 더 모집하여 1만 명을 채우고, 경성에는 오영(五營)을 설치하여 영(營)마다 2천 명씩을 훈련하도록 하되 해마다 반은 성안에 머물러 연습하게 하고 반은 성 밖에 나아가 비어있는 넓고 비옥한 땅을 가려 둔전을 만들고 돌아가면서 교대하면, 수년 뒤에는 군사와 군량의 근원이 더욱 두터워지고 나라의 근본이 굳어질 것입니다.”
상이 그 의논을 병조에 내렸으나, 바로 거행되지 않아 마침내 효력을 보지 못했다. 아는 자들은 그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서애선생문집 제18권
■《양명집(陽明集)》 뒤에 씀
이 양명의 문집은 내가 17세에 아버지를 따라 의주에 갔었는데, 마침 사은사 심통원(沈通源 1499-1572)이 연경에서 돌아왔으나, 대간이 점검하지 않았음을 탄핵하여 파직당하게 되었다. 압록강 가에 짐바리를 내버리고 갔는데, 짐 보따리에 이 문집이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양명의 글은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내가 그것을 보고 기뻐서 곧 아버님에게 말씀드리고, 글씨 잘 쓰는 아전을 시켜 베껴 내게 하여 상자 속에 간직한 지가 어언 35년이었다.
임진년 7월에 왜구가 안동에 들어와 옛집과 원지정사를 불사르니, 집에 간직해 두었던 서적은 모두 없어져 버렸는데, 오직 이 몇 권만이 수풀 사이에 있어 온전하였다. 내가 그것을 다시 보니 불각 중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슬펐다. 행장과 함께 가지고 제천에 도착하여 사실의 대강을 적어 자제로 하여금 잘 보존하여 다시는 유실되지 않도록 하라고 일렀다.
계사년(1593, 선조26) 9월 9일 하루 전에 쓰다.
■팔도 군안(八道軍案) 뒤에 씀
내가 평일에 관직을 역임하면서 문관으로 오래 있었고 무관을 지낸 일은 극히 짧았다. 후에 판서가 되어서는 겨우 1개월 있다가 전임되었다. 그때에 팔도의 군안을 작성하였는데, 중앙 및 지방을 통틀어 여러 가지 종류의 군사 수가 모두 35만여 명이었다. 난리 뒤에 모든 서적이 산실되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으나, 이 군안이 우연히 남아 있었다. 거기에 이른바 현재 있다는 것은 바로 난리 후의 액수다. 지금 6, 7년 동안 소모하여 이렇게 되었다. 그러나 진실로 그 요령을 얻으면 적은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니나, 그것을 도모하지 않으니 그 또한 어찌할 수 없을 뿐이다.
■《군문등록(軍門謄錄)》 뒤에 씀
만력 을미년(1595, 선조28)에 나는 영의정으로서 경기ㆍ황해ㆍ평안ㆍ함경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임하라는 명을 받았다.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을 부사로 삼고, 한준겸(韓浚謙)ㆍ최관(崔瓘)ㆍ정경세(鄭經世)ㆍ윤경립(尹敬立)ㆍ정협(鄭協)ㆍ남이공(南以恭) 등을 잇달아 종사관으로 삼았는데, 모두 내가 천거한 사람들이다.
무술년(1598, 선조31) 봄에 사임하고 모든 계초(啓草)와 문이(文移)를 청리(廳吏) 방수(方水)로 하여금 베껴 내게 하고 《군문등록(軍門謄錄)》이라 이름하였는데, 흩어져 수집하지 못한 것이 또한 삼분의 이였다.
나는 용렬한 자격으로 국가가 위난을 당하였을 때 내외의 관직을 겸임하였는데도 한 가지 일도 돕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를 물러나 성주(聖主)의 알아주심을 욕되게 하였다. 지금 이 《군문등록》을 볼 때 아연히 스스로 부끄럽기 때문에 책의 끝에 두어 마디를 적어 두니, 보는 이로 하여금 나의 죄를 알게 함이다.
■좌상(左相) 김종서(金宗瑞 1390-1453)의 건치육진소(建置六鎭疏) 뒤에 씀
조선의 이름난 재상으로서 공적이 두드러진 인물은 김종서(金宗瑞)뿐이다. 공의 공적은 육진을 설치한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지금 이 상소를 보니 배치가 굉장하고 논의가 광범위하여, 세상의 범부나 어린아이의 적은 지혜와 얕은꾀로 입만 가지고 때워 국가의 일을 망친 자들이 기가 막혀 주둥이를 감히 벌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또한 일대의 뛰어난 인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은 세종이 사람을 잘 선임하여 이룩하도록 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년이 되어서는 재상의 공적이 위태로움에 도움 없고 헛되이 죽었으니 어찌된 일인가? 옛말에 이르기를, “자[尺]도 짧은 데가 있고 치[寸]도 긴 데가 있다.” 하더니 정말 그런 것이다. 그러나 가령 공의 재주가 오늘날에 있었다면 볼만한 것이 있으리라. 남긴 글을 세 번쯤 되풀이하여 보면 구원(九原)에서 살아나기 어려운 탄식이 있다. 아, 슬프도다.
만력 무술년(1598, 선조31) 5월 18일에 운암거사(雲巖居士)는 한양의 우사(寓舍)에서 쓴다.
■일산(日傘)에 명(銘)함
그 모양은 둥글고 / 圓其形
그 빛은 검었어라 / 玄其色
펼치면 여섯이요 / 散爲六
합치면 하나로다 / 合爲一
햇볕을 만나면 열리고 / 遇陽而開
그늘을 만나면 닫치네 / 遇陰而闔
오직 그의 움직임은 하늘이 되니 / 惟其動以天
이래서 만물을 덮을 수 있다네 / 是以能覆物
▣서애선생문집 제19권
■여강서원(廬江書院)에 퇴계(退溪) 선생을 봉안하는 제문
아 선생이시여 / 嗚呼先生
도는 높고 덕은 온전하도다 / 道崇德全
청순한 자질은 / 淸純之質
특별히 하늘에서 받으셨고 / 獨得於天
정예한 학문은 / 精詣之學
묘하게도 성현들과 부합되네 / 妙契前賢
참으로 힘써 실천할 줄 알고 / 眞知力踐
그릇된 것 징계하여 착한 것만 행하셨네 / 懲窒遷改
만 가지 다른 것을 모아 근본인 하나에 돌리되 / 會萬歸一
모든 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했네 / 如水注海
상제께서 이 나라를 가엾게 여기시니 / 帝悶吾東
어두운 세상에 해와 별이 되셨네 / 日星昏衢
학문을 펴고 교화를 밝히시어 / 敷文闡敎
어리석은 백성들을 크게 깨우치셨네 / 大啓蒙愚
태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꺾였으나 / 山梁旣頹
끼쳐 주신 전형만은 그대로 남아 있네 / 典刑未渝
인간의 기본 덕은 누구나 좋아하여 / 民彛同好
사방 인사들이 구름같이 모였도다 / 四方雲趨
더구나 탄생하신 고향에서야 / 矧伊鄕邦
더욱 높이 받들지 아니할까 / 敢昧所尊
나는 듯이 웅장한 저 서당 / 翼翼書堂
여원에 세워졌네 / 經始廬原
선생이 남기신 덕화를 생각하니 / 追惟過化
초목도 그 향기를 머금었네 / 草木含馨
산은 높다랗게 웅장하고 / 山高而峙
물은 흐를수록 더욱 맑아라 / 水流益淸
유풍은 남아 있는 듯하고 / 遺風如在
성대하신 덕망은 더욱 오래 가리라 / 盛德彌長
삼가 영혼을 편히 모시니 / 揭虔妥靈
이날은 아주 좋았네 / 時日孔良
훌륭한 선배들이 많이 모여 / 靑衿濟濟
쟁쟁하게 울리누나 패옥소리여 / 群佩鏘鏘
신명이여 부디 강림하셔서 / 神其來假
분명코 이 잔을 받으소서 / 皦如玆觴
▣서애선생문집 발문
■《서애집》 발문 [장현광(張顯光)]
마음에 간직하여 몸에 책임지워진 것은 사람의 덕행과 사업이니 비유하면 근본이며 원천이고, 입으로 소리 내어 세상에 전해지는 것은 말과 글이니 비유하면 말단이며 지류이다.
그렇다면 덕행과 사업은 당연히 대소의 규모가 있고 말과 글도 고하의 품격이 없을 수 없으나, 오직 그 대체는 반드시 근본이 있어야 말단이 있고 원천이 있어야 지류가 있다. 그런 뒤라야 마땅히 세교(世敎)와 관련되니, 이 어찌 입으로 조작하고 문자에만 종사하는 이와 비교하겠는가.
지금 이 문집은 서애 유 상공의 저술이다. 공은 본디 뛰어난 자품으로 일찍부터 퇴계 선생에게 학문의 요지를 받아 이미 우리 유학의 참된 맥락을 터득하였다. 그의 견문과 지식은 정밀하고 지키는 지조는 곧으며 마음가짐은 공평하고 몸가짐은 청결하였다. 가정에서는 효우(孝友)하고 국가에는 충성하여, 대체로 그의 역량이 미치는 데는 일찍이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공이 가지고 있는 실상이 아니었던가. 그의 시는 우아하고 간결하며 문장은 창달(暢達)하고 순탄스러우니, 근본과 근원이 없이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불행하게도 시대를 잘못 만나 왜적이 우리나라에 7년 동안이나 머무르며 난리를 꾸밀 때에 공이 이를 담당하여 다스리면서 노력을 꺼리지 아니하여, 일면으로 명 나라 군사를 맞이하고 일면으로 우리나라 대중을 장려시켜 끝내 국가를 회복하는 영광을 이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 상세한 일은 모두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온 나라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시와 문장으로 표현된 것을 어찌 한갓 말로만 보겠는가.
공의 막내아들 진(袗 1582-1635)의 의지와 사업은 참으로 아버지를 계승할 만하다. 합천 군수로서 정치한 실적이 남보다 월등하니 모두들,
“서애공이 훌륭한 아들을 두었다.”
한다. 지금 난리 속에서 산실되고 남아 있는 아버지의 유고를 수습하여 공무를 수행한 여가에 간행하여 보관할 생각으로 편집이 완성될 무렵, 내가 과거에 공의 알아줌을 받았다 하여 책 끝에 한 말을 덧붙여 달라고 요청하기에 감히 끝내 사양을 할 수 없어 외람되게 이상과 같이 망녕된 말을 하는 바이다.
숭정 6년 계유에 옥산 후인(玉山後人)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은 씀.
※1597년 여러 차례 장현광을 조정에 추천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장현광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서애선생 별집 제1권
■파사성(婆娑城 여주 소재 산성)에서 묵으면서 금강루(襟江樓)에 오름
나그네 루에 오르니 심정이 호연하여 / 客子登臨情浩浩
한 소리 높은 노래에 산들이 찢어질 듯 / 高歌一聲山石裂
긴 바람 동산의 달 불어 올리는데 / 長風吹上東峰月
만 리 하늘은 한결같이 푸르러라 / 萬里天容一㨾碧
내 인생 정말 유유하여 / 我生於世眞悠悠
북으로 갔다 남으로 왔다 머리만 희어졌네 / 北去南來成白髮
풍진 천지에 늙은 병을 재촉하니 / 風塵天地老病催
여기에 돌아오자 속절없이 한숨만 짓네 / 宇宙歸來空嘆息
■제독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을 증별함 2수
세상을 건지려면 뛰어난 영웅이어야 하니 / 濟世須憑盖世雄
그 지휘 아래 삼한을 다시 만들었네 / 三韓再造指揮中
추한 것들 몰아서 고래굴로 보내고 / 驅除醜類還鯨窟
황제의 영기 펴 해동을 덮었어라 / 鋪叙皇靈盡海東
서울서 뒤따를 제 먼지가 가이 날고 / 漢府趍塵雲滿後
안흥에서 맞을 때는 눈이 날렸네 / 安興迎節雪飄空
한 해 동안 난리 속에 뒤따라 모셨기에 / 追陪一歲艱危地
이별이 슬퍼 덕을 연모하는 마음 한없네 / 戀德傷離意不窮
우레 같은 천위로 평양을 빼앗아 / 天威震疊下箕城
천 리 요사한 기운 절반 맑혔어라 / 千里妖氛一半淸
어찌 길게 모는데 병마가 없어서랴 / 豈謂長驅無甲馬
완전히 이기려고 둔영을 파해서지 / 要須全勝罷屯營
항복하는 오랑캐 군사 둔 채 강화를 의논하나 / 羌降每軫留兵議
해가 저무니 그들 실정 알기 어렵다네 / 歲暮仍難得虜情
고래 물결 밀어내 영영 없애야 되건만 / 除却鯨波期永息
알 수 없어라 무슨 계책으로 태평 소식 알릴지 / 不知何計報昇平
▣서애선생 별집 제2권
■사직(辭職) 차자 - 갑오년(1594, 선조27) 5월
신은 용렬하고 우매한데 불행히 국사가 이미 잘못된 뒤에 다시 중한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좌ㆍ우상은 다 밖에 있고 신 홀로 정사당에 있으니, 국론에는 단정 짓기 어려운 근심이 있고, 일의 중요한 고비에는 뒤따르기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은 사방을 둘러보아도 쓸쓸하고 아득하기만 하여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만사가 어두워져 날마다 어찌할 수 없는 지경으로 달려가니, 신은 낮이 되면 마음속으로 말하고 밤이 되면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꾀를 찾아보아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소원은 오직 갑자기 죽어 지각이 없게 되는 것뿐입니다.
바야흐로 지금의 사세는 포개 놓은 알[卵]과 같이 위태로운 형세입니다. 예로부터 신 같은 자가 재상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국가와 민족의 중흥을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도리는 절대로 없습니다. 또한 신은 난리가 있은 뒤로 심기가 손상되고 근력이 말라 없어졌으며 정신이 혼란하여 몸을 붙들고 이끌어서 비변사를 왕래하며 보통 사건으로 올린 한두 가지 회계(回啓)를 검열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지, 조금이라도 큰일에 관계되는 것은 백에 한 가지도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국가 존망의 기미, 백성 이합(離合)의 단서, 왜적을 토벌하여 원수 갚는 일, 병력과 군량을 조치하는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귀머거리와 같아서 가부를 분별하지 못하였고, 장님과 같아서 흑백을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오늘이 이와 같고 내일도 이와 같아, 한갓 조정의 형세가 날마다 엎어지고 실패될 시기만 자꾸 임박해 오는 것만 보게 되니, 신 같은 자는 비록 만번 주륙되더라도 어찌 족히 꾸지람을 막아 내며 어찌 족히 국민에게 사과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신이 밤낮으로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여 죽으려 하여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의 자비하신 마음으로 불원간 회복을 빨리 도모하기 위하여 우매한 신을 내쳐 물러나게 하고, 어려운 시국을 건져 낼 만한 인재를 다시 구하여 국사를 다스리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천하의 일을 아직도 구제할 수 있습니다.
■[사직(辭職) 차자] - 무술년(1598, 선조31)
삼가 아룁니다. 요즈음 국사가 매우 바쁘고, 철이 바뀌는 기후도 고르지 못합니다. 소의간식(宵衣肝食)으로 정사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위하여 근심한 나머지 옥체 기후가 잠시나마 편안하지 못하니, 뭇 신하의 마음이 걱정스럽고 답답한 바입니다.
신은 비록 변변치 못하나, 또한 지성을 다하는 한 조각의 마음이 있다 해서 감히 휴가를 얻어 집에 누워 쉬고 있습니다마는, 이것이 어찌 신의 마음에 편안한 바이겠습니까?
어제 사관이 성상의 뜻을 대신하여 전함을 엎드려 받고, 신은 땅에 이마를 조아리며 죽고자 하여도 죽을 곳이 없었습니다. 신은 본디 위태하고 허무한 목숨으로 여러 해 앓아 오던 병이 골수에 깊이 들어 날마다 더욱 고질병이 되었고, 엎어지고 넘어져 피곤하여 조석으로 목숨이 다하기를 기다리니, 실지로 조금의 근력도 없어 몸을 붙들고 이끌어야 출입하는 형편입니다. 더구나 신은 용렬ㆍ우매하고 망녕된 데다가 오래도록 당치도 않는 벼슬자리에 체면을 무릅쓰고 앉아 있어, 능히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나라의 모든 일이 어지러워지고 흔들리는 것은 신의 죄가 아님이 없으니, 진실로 차마 불초한 몸으로 위로는 군부에게 누를 입히고, 조정에까지 수욕(羞辱)을 끼칠 수 없습니다. 신은 이러한 시국에 국사를 어기고 게을리 한 죄는 가볍고 사리를 따지지 않고 덮어놓은 죄는 크오니, 신하로서 감히 직위에 머물 수 없는 것은 결정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해와 달의 밝음은 비출 만한 곳에는 반드시 비추고 천지의 큰 은혜는 만물까지 곡직하게 성취시켜 줍니다. 감히 바라건대, 성상의 자비한 마음으로 신의 병세를 양지하고 신의 형세를 살피며 신의 마음을 애통하게 여겨 빨리 신의 직위를 면직할 것을 윤허하고, 어질고 덕망이 있는 인물을 다시 가려내어 국사를 붙들어 나가면, 신은 죽어도 살아 있는 듯하여 마땅히 구렁텅이에서 눈을 감더라도 결초(結草)하여 성은에 보답할 것을 도모하겠습니다.
거적자리를 깔고 엎드려 처벌을 기다리자니 마음먹은 뜻을 말로 다하지 못하며, 황공스러운 마음을 재단(裁斷)할 바 모르겠습니다.
■사직계(辭職啓) 병신년(1596, 선조29) 10월
어제 등대할 때에 신은 심정이 가엽고 군색하며 병이 깊어 직무를 감당할 수 없는 정황을 대략 말씀드리고 체면해 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공사로 느끼는 감회가 심중에 엇갈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오열하여 실성하며 변변치 못한 충심을 전부 아뢸 수 없어 물러 나왔습니다. 이제 다시 대궐의 뜰에 엎드려 천청(天聽)을 다시 호소하니, 황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신이 비록 내세울 만한 것은 없으나 신자(臣子)된 자의 마음만은 있습니다. 나라가 위란한 이때에 어찌 감히 말을 꾸미고 병을 칭해 편안하기를 꾀하겠습니까. 다만 신의 병세가 날로 위급해서 지탱할 수가 없더니, 올해는 한기가 배나 심해 병세가 더욱 중합니다. 평상시에도 수없이 상기(上氣)되어 시시각각으로 숨이 끊어질 듯하며, 허리 위로는 마치 불속에 있는 것 같고 귀와 눈은 어둡고 흐립니다. 정신이 산란하고 사려와 말하는 것은 모두 정상이 아니며, 하룻동안에도 추웠다 더웠다 전신이 떨리고, 얼굴은 사람 꼴이 아닙니다. 신의 이 병은 하루아침에 우연히 발생한 증세가 아니고 이제 벌써 4년째 되어 고황(膏肓)에 들어 난치병이 되니, 다시 소생하여 남과 같이 될 이치가 만무합니다.
이러한 때에 신의 한 몸은 기러기의 깃처럼 가벼우니, 병의 경중은 생각할 값어치가 없습니다. 다만 신이 중요한 지위에 있어 내외의 직책을 겸하고 있으니, 이 쇠약한 기력을 가지고 어떻게 질책 격려하며 열심히 맡은 일을 이바지하겠습니까. 이는 신이 밤낮으로 근심하고 걱정하여 눈물이 흘러 떨어짐에 이르러도 어떻게 해야 될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송(宋) 나라 때 원호(元昊)의 난은 변경에서 일어난 걱정거리에 불과하였는데, 재상을 병 치료 때문에 정부가 물러나게 한 것은 정사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이유로 체면시킨 것입니다.
참으로 조정의 중신은 모든 책임에 관계가 있고 성패의 기틀은 호흡 간에 결정되니, 그 소임을 잃으면 잠깐 사이라도 무릅쓰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이 병으로 일을 처리하지 못한 지 그 얼마였습니까. 이와 같이 그대로 자리만 욕되게 하고 하루하루 날짜만 보내는 가운데 국사를 버려두니 예로부터 그렇게 해서 일을 능히 이룬 사람은 있지 않습니다.
어제 신잡(申磼)이 경연 중에 서방의 조치할 일을 아뢴 것은 실로 오늘에서 먼 장래를 염려하는 일입니다. 신이 체찰사의 이름을 띠고 있으니, 내려가서 다스리는 것이 또한 신의 책임인데도, 오히려 달려가 힘을 펼 수가 없습니다. 만일 일이 급박한 지경에 이르러 대계를 간혹 그르치게 된다면, 신이 병을 무릅쓰고 자리에 있는 죄를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감히 구차하게 그저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시세를 헤아려 실제로 사직해야 하기 때문이니, 이는 성상께서 조용히 생각하시어 결재 처리하심에 있을 따름입니다.
신은 받은 은혜가 깊고 두터워 대신의 반열에 있습니다. 가령 정승의 자리에 있지 않다 해도 마땅히 임금님 수레의 밑에 죽을 것이니, 병이 조금 덜해지면 또한 마땅히 여러 대신들의 뒤를 따를 것이며 마음에 품은 바를 역시 꼭 진달하겠습니다. 오직 쇠약한 병자가 재상의 자리에 무릅쓰고 있는 일은 걱정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의 자애로우심으로 신을 불쌍히 여겨 지성으로 신의 형세를 살펴 신의 본직 및 체찰의 직명을 함께 체면하도록 허락하소서. 비통하고 간절하게 축원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나이다.
■접대사(接待使)를 통해서 이 제독(李提督)에게 올리는 글
체찰사는 군중의 이해관계를 모두 진술하여 명의 장수에게 급히 간청하여 제때에 토벌하라는 일에 대해서 글을 보냅니다.
요즈음의 적의 정황은 벌써 각처의 장수들이 속히 갖추어서 보고했으므로 번거롭게 다시 아뢸 것이 없습니다.
대저, 승리란 오직 형세에 달려 있으니, 형세를 이미 얻었으면 약하더라도 강함을 제압할 수 있거늘, 강함으로 약함을 제압하는 것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적병은 명의 대군이 개성부에 주둔한다고 생각하여 흉측한 놈들을 모아 서북쪽만 방비하고, 한강 이남으로는 단지 지쳐 버린 병졸들을 모아 둔영을 만들어 3, 40리로 일진(一陣)을 이루기도 하지만, 좌우에는 모두 우리나라의 군병들이 버티어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만약 대군이 동파ㆍ파주에 진주하여 형세를 크게 펴서 적의 후미를 견제하고, 정예병 수천 명을 내어 강화에서부터 해로로 곧바로 남도를 향해 적의 뒤를 돌아가서 갑자기 덮쳐 돌진하여 쳐들어가면, 단번에 무찔러 충주 이북과 한강 이남의 적의 통로가 끊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경성의 적들은 싸울 겨를도 없이 동쪽 길로 도망칠 것입니다.
따라서 경기, 강원, 충청 등의 도에 있는 군사들에게 귀로를 막지 말도록 하고, 좌우에서 군대를 풀어 공격하며 대군이 뒤에서 엄습하면 적병들은 용진(龍津), 여강(驪江) 등에서 다 죽게 될 것입니다. 이는 완전한 계책이요 놓칠 수 없는 기회로 사세가 분명히 바로 눈앞에 와 있습니다. 이것으로 위급에 처한 우리나라를 구원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건져 주시며, 천하에 닥쳐올 화를 제거하고 성천자(聖天子)께서 동쪽을 돌아보시는 걱정을 푸시게 되어, 대단히 훌륭한 공적을 불일간에 이룰 수 있는데,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습니까?
예로부터 이적은 신의가 없어 서약으로 그 수심(獸心)을 거두기 어려웠거늘, 하물며 관백(關白)은 아주 간사하고 꾀가 많으며 끝없는 욕심이 있어 전에부터 숙고하여 분수에 맞지 않는 꾀를 내어 다만 우리나라에 길을 빌려 하였으니, 그 욕심이 아직 다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비록 평양에서 기세가 좀 꺾이어 중도에서 되돌아갈지라도 그 거짓으로 항복하고 화친하자는 것은 그들의 항상 하는 버릇이니, 이것으로써 시일을 늦추어 버마재비가 수레바퀴를 버티는 무모한 계획을 꾸밀 뿐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미연에 알아차리거늘 이미 나타난 뒤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나라 백성들은 거의 다 죽고 양곡은 다 없어져 열흘 내지 달포만 늦추더라도 다시 우리에게 유리한 형세를 지탱할 수 없으니, 오늘 놓치고 도모하지 않다가 적의 근거가 튼튼해진 뒤에 비록 도모하려고 한다 해도 되겠습니까. 비유해 보면 병자와 같아서 좀 원기가 있으면 약효가 날 수 있지만, 원기가 다하면 아무리 만금의 양약이 있다 한들 어디에 쓰겠습니까.
본국 각처에 군량을 쌓아 놓고 군마를 수습해서 날마다 천병을 바라고 있는데, 명군이 끝내 전진하지 않는다면 이미 모아 놓은 군량은 가만히 앉아서 다 먹어 소모하고, 거두어 모은 군사들은 멀리 흩어지며 적의 형세는 더욱 거셀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업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우리나라의 백성들은 바랄 데가 없어 굽혀 적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니, 천병이 백만이 되더라도 아마 힘이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본국의 일은 제쳐 놓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천조는 어찌되며, 모든 대장들이 병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나라를 구원하는 뜻은 어찌될 것입니까. 당직(當職)이 전일에 제독 노야께 글을 올려 “시기는 얻기 어려우나 잃기 쉬우며, 일은 놓치기는 쉬우나 돌이키기 어렵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말한 것입니다.
요즈음 남방의 의병장 이산겸(李山謙)이란 사람이 남쪽에서 와서 일로(一路)의 적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절강(浙江)의 포수 1, 2천 명으로 앞서 말한 대로 한강 남쪽에서 출격하고자 하였는데 개성부에 머물러 있는 제공(諸公)들은 그 계책이 매우 옳다고 여겼으나, 단지 제독 노야께 허락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군진의 문에 달려가 한번 형편을 아뢰고자 하여 접대사에게 부탁하여 인편을 따라 전달하고, 앞에 나아가 토로하여 결단하여 처리해 주심을 기다립니다.
▣서애선생 별집 제3권
■여해(汝諧) 이순신(李舜臣 1545-1598)에게 줌
무더운 바다에서 효리(孝履 상제(喪制)를 이름)께서 평안하신지 우러러 생각합니다. 제독(진린(陳璘)을 이름)도 그곳에 합세하여 진을 치려고 하니 호응하는 계책과 군량을 징발 수송하는 모든 일은 오로지 영감의 선처만을 믿습니다. 바라건대 모름지기 동심협력하여서 큰 공훈을 이루십시오.
도감의 포수 1백 명이 내려가는 편에 안부를 묻습니다. 바라건대 오직 나라를 위하여 몸을 보살피십시오.
▣서애선생 별집 제4권
■《난설헌집(蘭雪軒集 1563-1589)》 뒤에 발함
내 친구 미숙(美叔 허봉(許篈 1551-1588))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뛰어난 재주를 가졌는데, 불행히 일찍 죽었다. 나는 그가 남긴 글을 보고 정말로 무릎을 치면서 탄복하여 칭찬해 마지않았다. 하루는 미숙의 아우 단보(端甫 허균(許筠 1569-1618)) 군이 그의 죽은 누이가 지은 《난설헌고(蘭雪軒藁)》를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다. 나는 놀라서,
“훌륭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 어떻게 하여 허씨의 집안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
라고 말하였다.
나는 시학(詩學)에 관하여는 잘 모른다. 다만 보는 바에 따라 평한다면 말을 세우고 뜻을 창조함이 허공의 꽃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아서 맑고 영롱하여 눈여겨볼 수가 없고, 울리는 소리는 형옥(珩玉)과 황옥(璜玉)이 서로 부딪치는 것 같으며, 남달리 뛰어나기는 숭산(嵩山)과 화산(華山)이 빼어나기를 다투는 듯하다. 가을 부용은 물 위에 넘실대고 봄 구름이 허공에 아롱진다. 높은 것으로는 한(漢) 나라ㆍ위(魏) 나라의 제가(諸家)보다도 뛰어나고 그 나머지는 성당(盛唐)의 것만 하다. 그 사물을 보고 정감을 불러일으키며 시절을 염려하고 풍속을 근심함에는 종종 열사의 기풍이 있다. 조금도 세상에 물든 자국이 없으니, 백주(柏舟)ㆍ동정(東征)이 오로지 옛날에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나는 단보 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돌아가 간추려서 보배롭게 간직하여 한집안의 말로 비치하고 반드시 전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만력 경인년(1590, 선조23) 11월 서애는 한양의 우사(寓舍)에서 쓴다.
■시에 능한 승려[僧가운데 휴정(休靜 1520-1604)이란 이는 자못 선가(禪家)의 학문을 깨우쳐 중들 중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또한 시를 잘 지었는데 스스로 청허자(淸虛子)라 했다. 일찍이 묘향산에 있을 때 지은 시 한 수에,
만국 도성이 개미굴 같고 / 萬國都城如蟻垤
천가 호사는 초파리와 같도다 / 千家豪士若醯鷄
밝은 달 창 아래 맑은 기운 베고 누우니 / 一窓明月淸虛枕
가없는 솔바람 소리 운치가 가지런하지 않네 / 無限松風韻不齊
하였다. 물욕의 밖에서 높이 서서 세속을 굽어보는 뜻이 보이니, 한때의 뜻 깊은 작품이라 하겠다.
■시에 능한 여자[女子能詩]
근세에 여자로 시에 능한 사람이 몇 있다. 그중에 한 사람이 허씨로 호를 난설헌(蘭雪軒 1563-1589)이라 하는데, 감사 엽(曄)의 딸로 자라서 정자(正字) 김성립(金誠立 1562-1593)에게 시집갔다. 재주가 출중하였는데, 여기 두 편의 시를 소개한다.
비단 띠 비단 옷에 눈물 자국뿐이니 / 錦帶羅衣積淚痕
한해살이 꽃다운 풀 왕손을 원망함이여 / 一年芳草怨王孫
요금으로 강남곡을 다 타니 / 瑤琴彈罷江南曲
배꽃을 적시는 비 낮에 문을 걸었노라 / 雨打梨花晝掩門
또,
달 비친 누에 가을 깊고 옥병은 비었는데 / 月樓秋盡玉屛空
서리친 갈대 물가에 저문 기러기 내리다 / 霜打蘆洲下暮鴻
비파 한 곡 다 타도록 사람 구경 못하는데 / 瑤瑟一彈人不見
연꽃은 들 연당 위에 시나브로 지누나 / 藕花零落野塘中
모두가 세속에서 초연히 벗어나 당시(唐詩)와 같으니 사랑할 만하다. 다른 편에도 이와 같은 시가 많다. 나이 스물 남짓에 죽었다.
또 하나는 이씨 여자(이옥봉)인데, 옥천 군수 이봉(李逢)의 얼녀(孽女)로 죽은 승지 조원(趙瑗)의 첩이 되었다. 조원(1544-1595)이 삼척 부사로 있을 때 이씨가 죽서루(竹西樓)에서 지은 시에,
강은 갈매기 꿈을 먹고 환히 트였는데 / 江呑鷗夢闊
하늘에는 기러기들 수심만 길도다 / 天入鴈愁長
하였다. 이 시는 호사자(好事者)들이 널리 애송하여 전해 온다고 한다.
※이옥봉(?-?) : 16세기 후반 이옥봉은 옥천 군수를 지낸 이봉의 서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숙원이고 옥봉은 그의 호이다.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글과 시를 배웠으며 영특하고 명민하여 그녀가 지은 시는 부친을 놀라게 하였을 정도로 매우 뛰어났다. 이렇게 뛰어난 재주를 지닌 옥봉이지만 신분이 서녀였기 때문에 문장이 뛰어난 조원의 소실로 들어갔다고 한다.
하루는 이웃의 아낙이 찾아와 자기 남편이 남의 소를 훔쳐 갔다는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옥봉의 남편에게 형조에 편지를 써서 죄를 면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옥봉은 남편에게 말하지 못하고 자기가 대신 시를 한 수 적어 주었다. 이 시를 읽은 형조의 관리들이 글솜씨에 감탄하여 그 남편을 석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을 안 옥봉의 남편은 관청의 일에 아녀자가 간여하여 죄인을 풀어 주게 했다고 하며 옥봉을 용서하지 않고 친정집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옥봉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죽을 때까지 남편에게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시우산인(時雨山人)
홍혼(洪渾 1541-1593)은 자가 혼원(渾元)으로 당성인(唐城人)이다. 나와 더불어 병인년 과거에 올라 괴원(槐院 승문원)에 들어갔는데, 함께 신귀희(新鬼戲)를 치른 사람으로서는 교분이 제일 두터웠다. 그는 예문관 검열에 이미 선보되었다가 점점 더 현달하여 사간원ㆍ사헌부ㆍ홍문관을 거쳤다.
혼원은 사람됨이 낙천적이어서 남과 담을 쌓고 지내지 못하고 천진한 그대로 바른말을 잘하여 시속에 잘 영합하지 못하였다. 중년엔 벼슬살이를 즐겨하지 않아서 하루아침에 관직을 버리고는 처첩을 싣고 양근현(楊根縣) 용진(龍津) 시우동(時雨洞)에 은거하였다.
내가 시를 지어 그에게 보낸 일이 있었는데 거기엔 ‘조각배에 두 첩을 실었다[扁舟載二妾]’라는 구절이 있다. 혼원은 원래 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술이 좋거나 나쁘거나 가리지 않고 마셨으며, 마시면 곧 취했고 취하면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농부나 시골의 노인들과 어울려 산수 사이에서 세속의 격식을 잊었다. 매양 가을이 깊어 단풍이 골짜기에 가득 물들고 시냇물 소리가 또록또록 집 주위를 에워싸듯 흐르면, 혼원은 혼연히 스스로 득의하여 자랑하였다.
이따금 성안으로 들어와 나를 찾곤 하였는데 곤드레가 되도록 취해 가지고 실려 오지 않는 때가 없었으니, 종들이 달려와 이르기를 ‘취객이 또 옵니다.’ 하였다. 혼원은 곧장 당상(堂上)에 올라 걸터앉아서 왕왕 자리에 오줌을 싸기도 하며, 뜻이 맞으면 노래까지 부르는데 그 음절이 매우 격렬하였다. 내가 들어 보니 한 곡을 가지고 늘 부르는데 그 가사는 이러했다.
옛적이 이와 같았으니 / 昔時苟如此
이 몰골 어찌 스스로 가지리 / 此容寧自持
내 마음 변하여 실가닥이 되어 / 吾心化爲絲
구비마다 맺혀 버렸네 / 曲曲皆成結
풀고 풀어 보려 하나 / 欲解又欲解
실마리를 찾지 못하겠네 / 不知端在處
노래가 끝나면 어떤 때는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아니하고 불쑥 일어나 가 버리니 사람들은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웠으나, 대개 시대를 상심하는 뜻이 많았다.
그 뒤 다시 일어나 양주 목사가 되었는데, 취하면 아래 아전들과 희롱하기 일쑤여서 아전의 관을 벗겨 스스로 머리에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간결하여 원망을 사지 않았다. 임진왜란에 혼원이 어가를 모시고 평양까지 갔었다. 또 어가가 의주에 머무르고 있을 때 혼원에게 이조 참의의 벼슬을 내리고 성천에 있는 동궁을 호종하도록 하였다. 그때 대신 중에는 술이 과하여 실례한 자가 있었는데, 혼원이 등대(登對)하여 그 잘못을 지적하였다. 이 일을 달갑잖게 여긴 그의 탄핵을 받아 혼원은 파직되어 충청도를 방황하다가 공주에서 객사하였다.
혼원이 평생 동안 가업에 뜻이 없어 매우 빈곤하였으나, 붕우와 교제하는 데는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하여 부귀의 변화에 따라 뜻을 바꾸지 않았다.
■송운(松雲)
을사년(1605, 선조38) 5월에 승장(僧將) 송운(松雲 1544-1610 사명대사(四溟大師))이 일본에서 잡혀간 우리 포로 1천여 명을 거두어 4, 50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왜인 귤지정(橘智正)과 함께 돌아왔다.
송운은 일명 유정(惟政)이라 하는데 성은 임(任)씨로 밀양 사람이다. 선대는 사족(士族)이었는데 송운에 이르러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시에 매우 능하였고 진초(眞草)를 잘 써서 총림(叢林)에 이름이 났다.
임진년, 금강산에 머물러 있었다. 하루는 왜병이 절에 난입하자, 중들이 흩어져 숨었으나 송운만은 꼼짝 않고 앉아 있으니 왜병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둘러서서 합장하여 경의를 표한 후에 물러갔다. 그해 가을에 내가 안주에 있으면서 각도에 통문을 보내어 승려와 속인을 막론하고 의병을 일으켜 임금을 위해 충성하라고 하였다. 통문이 이르자 송운이 그 통문을 불탑 위에 펼쳐 놓은 후 중들을 이끌어 모아 놓고 흐느껴 울었다. 드디어 승병 천여 명을 모아 평양으로 가서 임원평(林原坪)에 진을 치고 왜병과 연일 싸웠으며 이로부터 오래도록 군중에 있었다.
또한 일찍이 청정(淸正)의 군영에 두 번 들어가 논설한 일이 있었는데, 의기가 격렬하여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지난해 조정에서 일본으로 가 유람하는 체하며 적중의 소식을 탐지해 오라는 명이 내렸을 때 사람들이 모두 위험스럽다고 여겼으나, 송운은 서슴지 않고 어려워하는 빛도 없이 나섰다가 이에 이르러 일을 수행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조령(鳥嶺)에 성을 쌓다
임진란에 조정에서 변기(邊璣)를 보내어 조령을 지키게 했는데, 신립이 충주에 이르러서 변기를 휘하로 불러들여 조령의 방어를 포기하였다.
적이 고갯길에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수일간을 배회하면서 여러 번 척후로 자세히 살펴 복병이 없음을 알고 난 후에 비로소 조령을 통과했다.
제독(提督) 이여송이 조령을 보고 탄식하면서,
“이 같은 천연의 험지를 버려 적에게 넘기다니, 총병 신립은 참으로 병법을 모르는 자다.”
라고 했다.
내가 계사년(1593, 선조26)에 남쪽의 진중을 왕래하면서 다시 조령의 형세를 보니, 관문을 설치하고 양변을 따라 복병하면 적을 방어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군읍에 씻은 듯이 사람이 없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충주 사람 신충원(辛忠元)이란 자가 전에 의병으로 조령에서 적병의 허리를 꺾어 목 베고 노획한 군공으로 수문장이 되었는데, 조령의 도로를 하나같이 알고 있어 그곳에 가기를 청하였다. 내가 조정에 아뢰어 보내면서 공명첩 수십 장을 주고 그로 하여금 사람을 모집해서 쌓게 하였다. 드디어 응암(鷹巖)에다 성을 쌓고 문루를 세우게 하며, 유랑민을 모아 달천(㺚川)ㆍ장항(麞項)ㆍ수회촌(水回村)ㆍ안보(安寶)에 둔전을 하여 도로를 소통시키라고 했다.
신충원이 모집한 중에 공사천(公私賤)이 많았는데 관리 및 노예를 잃은 주인들의 비방이 자자하였고, 신충원 또한 지나치고 거슬린 일이 없지 않았다. 이 때문에 끝내 죄를 얻어 금부에 잡혀 형을 백여 차례 받고 사면이 있어도 풀려나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정유년(1597, 선조30)에 왜적이 재차 움직였을 때 조령을 경유하지 않았고, 전라ㆍ충청도의 피란민들로 신충원을 찾아가 의지한 사람들이 산중에 꽉 찼었다. 사람들은 ‘성을 설치한 공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옛말에 “관가의 일을 잘하는 것은 재앙의 근본이라.” 했으니, 아, 어찌 신충원만이 그러하겠는가.
■화전(火箭)
사서(史書)에 보면 불화살이 군중에 쓰이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었다. 다만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분주(分註)로 고찰한다면 옛날의 불화살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대개 옛날에 말한 화전은 화살 끝에 기름을 담은 조그만 바가지를 달아서 적진과 누(樓)나 노(櫓)의 인화될 만한 곳에 쏘면 화살이 그 위에 적중될 때 바가지가 부서져 기름이 흘러나오고, 계속 불에 달군 쇠화살을 그곳에 쏘면 불이 일어나니, 그 제조법이 주밀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시에 화전을 쓰는데 신기전(神機箭)이라고 부른다. 단지 변란을 알리는 데 쓸 뿐 불태우는 데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 쓰임이 큰 관건이 되지 못하고 오직 수전(水戰)에서만 이것을 적의 배집[舡篷]에 쏘아서 능히 불을 일으키나 그리 많이 쓰지는 않았다. 임진 난리에 명 나라 군사가 평양성의 왜적을 공격하여 함락할 때 전적으로 대포 화전을 썼다. 그 제조법은 우리나라 신기전과 비슷한데, 그 화살대가 심히 길다. 화살촉에서 2, 3치 되는 곳에 약통을 달아매고 그 좌우에 자그마한 불이 묶여 있다. 그래서 이것이 떨어진 곳에 화염이 함께 폭발하여 연기가 하늘을 가리므로 적이 눈을 뜨지 못하게 된다. 화전은 승리를 거두는 묘한 무기로서 여러 대포에 뒤지지 않는다.
■군량 저축으로 기민구제법(飢民救濟法)을 적음
수(隋) 나라의 의창(義倉)은 백성들로 하여금 매양 가을에 집집마다 속맥(粟麥) 한 섬 이하로 빈부에 따라 차등적으로 내게 하여 당지 사창(社倉)에 저축하고, 사사검교(社司檢校)에게 위임하여 흉년을 대비한 제도이다. 치당(致堂) 호인(胡寅)이 말하기를,
“기근의 구제는 사람을 가깝게 하는 일이 요긴하다.”
하였다. 수 나라의 의창 제도는 백성들에게서 적은 곡식을 거두어 사창에 두었으니, 굶주리는 사람이 먹는 일은 거의 갖추어졌다. 반드시 대비하여 걱정이 없게 하려면 모름지기 수 나라의 의창 제도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을미ㆍ병신 연간을 돌이켜 보면, 나는 그때 체찰사가 되어 경기 등의 도에서 속오군을 조련하고 있었다. 척계광의 《기효신서》의 법을 따라 12명으로 한 대(隊)를 만들어 인근에 사는 사람들로 그들을 단속하게 하였다. 또한 군량을 비축하고자 하여 시험적으로 각 대에게 놀고 있는 넓은 논을 선택해서 열두 사람이 함께 10두락을 농사짓게 하여 먼저 수원에다 실행하여 가을에 벼 800여 섬을 거두어 독성에 비축하였다. 그리고 대마다 벼ㆍ보리를 각각 10말 이하씩 내게 하여 그 마을에 저장하도록 하고 대장(隊長)에게 검찰하도록 맡겨 해마다 더 비축하게 하였다. 만일 가난한 백성들이 먹기를 원하면 허락해서 대략 그 이자를 취해서 받는다. 유사시에는 군량으로 쓰게 하며, 평화시에는 한발과 홍수의 재해를 대비하게 하면 수년 뒤에는 마을마다 축적한 곡식이 있어 때 아닌 경우의 수요에 대응할 수 있으니, 의창의 제도와 더불어 매우 근사하였다. 그러나 이는 결국 실행되지 못하고 나는 자리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