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집[四佳集]
서거정[ 徐居正 1420-1488 ]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으며,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 19세)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25세)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부교리(副校理)에 올랐다. 1453년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 「적벽부(赤壁賦)」 글자를 모아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해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57년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 우사간·지제교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 정시(庭試)에서 우등해 공조참의·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오행총괄(五行摠括)』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서거정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다음 해 발영시(拔英試)에 을과로 급제, 예조참판(종2품)이 되었다.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급제해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도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정2품)로서 예문관대제학·성균관지사를 겸해 문형(文衡)을 관장했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서거정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4년 다시 군(君)에 봉해지고 좌참찬에 복배되었다. 1476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는데, 수창(酬唱: 시로써 서로의 마음을 문답함)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해 우찬성(종1품)에 오르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공편했으며, 1477년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다음 해 대제학을 겸직했고, 곧이어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이 해 『동문선(東文選)』 130권을 신찬하였다.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해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 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오자(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찬진하였다. 1481년『신찬동국여지승람(新撰東國與地勝覽)』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으며, 이 해 『동국통감(東國通鑑)』 57권을 완성해 바쳤다. 1486년『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論語)』를 강했으며, 다음 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23년 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이 전한다.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문선(東文選)』·『경국대전(經國大典)』·『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역대연표(歷代年表)』·『동인시화(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筆苑雜記)』·『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서거정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서거정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東文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했는데, 서거정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또한, 서거정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린 서거정의 서문과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의 서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 처음 나라를 세움)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 봉토를 받음)한 이래로 삼국·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은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의 『방여승람(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나라 독자적 지리지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서거정이 주동해 편찬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왕명에 따라 사림 인사의 참여 하에 개찬되었다. 이렇듯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지만, 성종이나 사림들과 전적으로 투합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사가집서
■사가선생집 서(四佳先生集序)
우리 국조(國朝) 이래로 문인 시사(文人詩士)로서 저술(著述)을 남긴 이가 무려 수백가(數百家)에 이르되, 혹은 시에는 능하나 문에는 능하지 못하고, 문은 혹 칭도(稱道)할 만하나 시는 칭도할 만하지 못했다. 시와 문을 겸해서 잘하는 이를 집대성(集大成)이라 하나니, 집대성이라 할 만한 이는 오직 목은(牧隱) 선생뿐이었는데, 목은 선생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백 년이 지나도록 적막하여 그런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사가(四佳) 서 상국(徐相國)은 기화(氣化)의 융성한 때에 태어나 문명(文明)의 운수를 만나서 무려 20여 년이나 사문(斯文)의 영수(領袖)로 있었기에, 그가 평소에 저술한 것들이 상자에 가득하였다.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교화(敎化)를 진흥하시던 터라, 선생을 경악(經幄)의 원로(元老)라 하여 존경함으로 대우하시고, 한가한 여가에 선생의 저술을 열람해 보고자 하여 그 시문(詩文) 몇 권을 편집해 오도록 명해서 특별히 열람하시고 탄상(歎賞)까지 내리시었다. 그러자 선생은 전하의 돌보아 주심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여기어 머리를 조아리고 그 시문을 소중히 간직해 두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이것을 꺼내어 사홍(士洪)에게 보여 주므로, 사홍이 삼가 한번 죽 열람해 본 결과, 마치 광대한 큰 강물이 끝을 헤아릴 수 없어 천오(天吳), 해약(海若) 같은 해신(海神)마저도 전도 착란(顚倒錯亂)을 일으키는 듯해서, 그 대략도 기억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삼가 옷깃을 여미고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장은 일체(一體)가 아니어서 유능한 이들도 서로 장단점이 있었으니, 중선(仲宣)은 부(賦)에는 능했으나 다른 글은 혹 그만 못했고, 자미(子美)는 시성(詩聖)이었으나 운(韻)이 없으면 읽기가 어려웠으며, 속수(涑水)는 사륙문(四六文)을 익히지 않았었고, 남풍(南豐)은 문이 시보다 나았듯이, 두 가지에 다 능한 이는 옛날에도 있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은 그렇지 않다. 문은 일가(一家)의 것을 주로 삼지 않아서 중체(衆體)를 겸비하였고, 시는 비록 중격(衆格)을 한데 모았으나 스스로 일종(一宗)이 되어, 고금(古今)을 한데 융합시켜 무궁한 변태(變態)를 발현시킴으로써 천재(千載) 이후에 홀로 목은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니, 의당 아조(我朝)의 일대가(一大家)로 쳐야 할 것이다. 기타 사항에 대해서는 나의 천박한 식견으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
선생이 사홍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그대 부자(父子) 사이에 종유한 관계로 그대의 부친이 이미 내 문집에 서문을 썼으니, 그대 또한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므로, 사홍이 삼가 절하면서 ‘예’ 하고 대답하였다.
무신년 중추(仲秋)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전 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홍문관직제학 상서원정(前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弘文館直提學尙瑞院正) 서하(西河) 임사홍(任士洪 1445-1506)은 삼가 쓰다.
▣사가시집 제1권
■압구정부(狎鷗亭賦)
이 관람의 광대함을 좋아한 이가 있음이여 / 客有好玆觀覽之博大兮
끝없이 넓은 나의 소원을 품었도다 / 齎予志之瀁瀁
어찌 답답하게 내 이 한구석에 있으리요 / 夫豈鬱鬱予一隅兮
혼돈 상태와 광활한 공간을 뛰어넘어 / 超澒洞與空廣
사방 끝을 다하여라 어찌 끝이 있으랴 / 窮四際兮焉極
고금을 열력하며 함께 오르내리도다 / 閱古今而俯仰
갑자기 하토의 적소를 내려다봄이여 / 忽臨睨夫下土之積蘇兮
그 누가 나의 호탕함을 알겠는가 / 孰知予之浩蕩
한고에서 나의 수레를 멈추고 / 弭予節兮漢皐
압구정에 올라 이리저리 바라보니 / 登狎鷗兮騁目
건곤의 혼돈 상태를 열었음이여 / 開乾坤之混沌
우주의 광대함이 확 트이었도다 / 廓宇宙之盤辟
인간 세계로부터 운우 위에 치솟아 / 軼雲雨於下界
항해를 취하여 하늘에 다다르도다 / 挹沆瀣而上薄
줄줄이 서 있는 사방 산들을 마주하고 / 面四山之立立兮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굽어보도다 / 俯江流兮湯湯
아스라이 만 리가 요원 광활함이여 / 渺萬里兮泱莽
광활함 속에 삼라만상을 포함했도다 / 涵衆象於淼茫
동으로 바라보면 산악들이 지극히 높아 / 東望則列岳峻極
위로 하늘 높이 치솟았고 / 上磨寥廓
겹겹의 등성이와 봉우리들은 / 重岡複嶺
용이 날고 범이 뛰는 듯하네 / 龍跳虎躍
금대는 지극히 높고 / 金臺兮嶔岑
화개는 우뚝하도다 / 華蓋兮崒嵂
여섯 자라는 힘을 크게 써서 / 六鼇奰屭
봉래 영주를 머리에 이었도다 / 頭戴蓬瀛
하늘의 별들은 빛을 나눠주고 / 天星分曜
지축은 신령함을 나타내도다 / 地軸效靈
낙천정은 드높아 용마루가 화려하고 / 樂天崇兮畫棟
화양정은 우뚝해라 높다란 정자로다 / 華陽屹兮危亭
월악산은 첩첩으로 깊숙하여 / 月岳嶙峋
한강의 발원지가 되었으니 / 有江發源
여강으로 들어서 질펀히 흐르다가 / 納驪水兮汪汪
용진을 삼키어 더욱 광대해지도다 / 呑龍津兮沄沄
광나루를 구불구불 돌아서 / 逶迤廣津
삼전도를 질펀히 흐르다가 / 演漾三渡
세차게 흘러 백 번 꺾여져서 / 奔流百折
더욱 제멋대로 쏟아져 흐르도다 / 益肆以注
저자도는 희미하게 눈에 들오고 / 島楮子兮熹微
새매들의 늪은 빙 둘러 있도다 / 藪鷂兒兮回互
큰 들은 손바닥처럼 편평하고 / 鉅野掌平
살곶이 교외의 주위에는 / 箭郊周遭
말 목장이 빙 둘러 있는데 / 沙苑盤回
물과 풀이 매우 넉넉하여 / 水草肥饒
검고 누런 준마의 떼가 / 驪黃騄駬
아침놀의 무늬를 이루어 / 雲錦成章
바람을 따르고 번개를 쫓는 듯 / 追風逐電
매우 날래서 날아오를 듯하도다 / 天驕騰驤
고기 잡고 나무하고 말 치는 곳이 / 畋漁樵牧
번다하게 여기저기 널려 있고 / 紛紜布濩
짐꾼이며 실어나르는 수레는 / 擔負馱輦
앞뒤로 줄을 이어 달리도다 / 前鶩後續
남으로 바라보면 뭇 산들이 얽혀 있어 / 南望則群山糾紛
푸르른 초목들이 무성하고 / 薈蔚葱蘢
태수가 수시로 왕래할 적엔 / 五馬盤桓
대궐을 향해 공손히 읍을 하네 / 拱挹朝宗
오른쪽으론 관악산 청계산이 험준하고 / 右冠岳淸溪之崚嶒
왼쪽으론 대모산성이 불룩 솟아 있어 / 左大母山城之穹窿
도성의 경내로부터 / 曰自畿甸
사방의 요충으로 나누어졌고 / 區分四衝
관산과 하수가 아득하여라 / 關河綿邈
큰길은 숫돌처럼 평탄하도다 / 周道如砥
지방 고을들은 별처럼 나열하여 / 列郡星羅
경계를 나누어 각각 다스리고 / 界畫疆理
역관은 바둑알처럼 펼쳐 있어 / 驛館碁布
사마의 수레가 나란히 다니고 / 轍駟方軌
여염집은 사방에 가득하여 / 閭閻撲地
비늘처럼 빗살처럼 늘어서 있도다 / 鱗次櫛比
누런 벼논과 푸른 밭둑은 / 黃畦綠塍
시야 가득 구불구불 펼쳐 있고 / 彌望逶迤
심고 매고 거두고 방아 찧어 / 耕耘穫舂
농사일을 서로 다투어 힘쓰고 / 競效農功
누에 치고 실 켜고 명주베 짜서 / 蠶繰紡織
아낙의 일을 다투어 다스리니 / 爭脩女紅
농토와 상전의 천 리 벌판에 / 農桑千里
집집마다 자급자족하도다 / 家給人豐
서쪽으로 바라보면 해문이 탁 트여서 / 西望則海門唅呀
가득한 물이 용솟음쳐 흘러서 / 瀰漫汨潏
작은 물결과 큰 파도가 / 鰌濤鯨浪
밀물 썰물을 삼키고 뱉고 하도다 / 呑吐潮汐
한강은 웅장한 관문이 되어 / 漢江雄關
산천의 요해를 누르고 있는데 / 控扼襟帶
선박들이 줄을 이어 왕래하매 / 舸艦牽聯
돛 그림자가 하늘을 가리도다 / 檣帆掩靄
깎아지른 절벽들은 험준하고 / 絶壁巃嵷
높은 누각들은 우뚝 솟아서 / 傑閣岧嶢
아래로는 물가를 굽어 임하고 / 下臨芳渚
위로는 높은 하늘을 찌르도다 / 上揷層霄
고관 대작 공경 사대부 중에 / 縉紳卿士
장수나 지방관에 임명되어 / 杖鉞分符
혹 전송을 하거나 영접할 때면 / 或餞或迓
높은 수레들이 길에 그득하고 / 冠蓋塞途
수시로 왕래하는 장사꾼들은 / 來商往旅
서로 따라 앞서고 뒤서고 하여 / 攀援後先
분잡하게 서로 줄을 이어서 / 紛紜絲絡
시끄럽게 떠들며 늘어섰도다 / 喧鬧騈闐
초목이 무성한 성단에 접근함이여 / 近星壇之蓊鬱
아득한 데에 노량과도 연접하도다 / 控露梁於澶漫
율도엔 연기가 활짝 걷히고 / 栗島兮煙開
마포엔 물결이 차가운데 / 麻浦兮波寒
용산의 조운선들이 빽빽이 이어지고 / 龍山之漕舶織織
양화도의 바람 돛이 펄펄 나부끼거든 / 楊渡之風帆飛飛
가을 흥취의 호기를 들이마시고 / 吸秋興之灝氣
맑게 내리는 단비를 맞기도 하도다 / 來喜雨之淸霏
북으로 바라보면 도봉산은 험준하고 / 北望則道峯峭截
삼각산은 높고도 뾰족하며 / 三山巑岏
화산은 연꽃이 핀 것 같고 / 華岳蓮開
종남산은 용이 서린 듯하니 / 終南龍蟠
귀신이 아끼고 비장한 곳으로 / 神慳鬼祕
천지가 전환하여 일신되었도다 / 乾轉坤旋
금성 탕지로 험고함 이루니 / 金城設險
대궐 광채가 하늘에 빛나도다 / 玉闕麗天
상서로운 해는 빛을 거듭하고 / 瑞日兮重光
상서로운 구름은 오색이 찬란하도다 / 祥雲兮五色
왕도는 하 넓고 넓음이여 / 王道兮蕩蕩
사문은 지극히 화목하도다 / 四門兮穆穆
장수와 재상 공경들은 / 將相公卿
고요 기 위청 곽거병과 같고 / 皐夔衛霍
문인이며 재사들은 / 文人才士
반고 사마천 유향 순숙과 같아 / 班馬劉荀
뛰어난 영재가 줄을 이어서 / 翹英接武
날개에 붙고 비늘을 부여잡도다 / 附翼攀鱗
천문 만호는 / 千門萬戶
개밋둑 벌집처럼 널려 있어 / 綴蟻點蜂
구준과 춘대를 누리면서 / 衢樽春臺
격양가 부르며 화락하도다 / 擊壤熙雍
공장과 장사꾼 놀이꾼들은 / 工商遊冶
어지러이 서로 달려 왕래하니 / 紛紛駾駾
거수와 마룡은 / 車水馬龍
웅성웅성 많이도 다니어라 / 彭彭藹藹
사방이 모여드는 도회가 되어서 / 爲四方之都會
팔방의 창이 탁 트여 밖이 없으니 / 洞八窓兮無外
이는 바로 시야를 넓혀서 사방을 두루 보아 / 此所以豁雙眸騁四望
높은 데서 조망하여 스스로 유쾌해짐이로다 / 登眺自快者也
봄 경치가 화창함에 이르러서는 / 至如韶光駘蕩
만물을 발육시키는 가운데 / 萬物發毓
바람은 순주처럼 훈훈하고 / 風醇如酒
햇볕은 옥같이 온화한지라 / 日溫如玉
꽃나무는 서로 고운 꽃을 피워 / 花木喧姸
청홍의 채색들이 찬란하고 / 紅碧酣縟
맑은 강물은 새로 벌창하여 / 澄江新漲
포도처럼 푸르게 물들어서 / 葡萄染綠
움킬 만도 하고 마실 만도 하며 / 可掬可啜
거울처럼 맑고 환해지나니 / 宜鑑宜燭
이때엔 난간에 기대 배회하면서 / 當此時憑闌徙倚
술잔을 들어 정서를 즐긴다면 / 擧酒敍暢
난정의 풍류에다 / 有蘭亭風流
무우의 기상을 겸하게 되리로다 / 舞雩氣像者矣
남풍이 재물 풍부케 함에 미쳐서는 / 及其南薰阜財
만물을 기르는 여름날이라 / 恢台長嬴
보릿가을은 언뜻 지나가고 / 麥秋奄逝
초여름 장마가 쾌히 걷히고 / 梅霖快晴
뜨거운 더위가 발산하는지라 / 火傘旣張
무서운 태양이 한창 성하여 / 畏日方赫
산을 태우고 들을 태우며 / 焦山燎原
무쇠와 옥이 녹아 흐르고 / 金流玉鑠
소낙비는 강물을 쏟듯 내려서 / 急雨懸河
급한 여울에 눈발이 튀어오르고 / 驚湍湧雪
어룡들은 까불며 춤을 추고 / 魚龍簸舞
오리들은 물속을 출몰하나니 / 鳧鴨出沒
이때엔 옷깃을 풀고 두건을 벗고 / 當此時披襟露頂
읊조리고 술마시고 한다면 / 俯仰詠觴
무더위를 씻고 청량함을 취할 수 있으리로다 / 可以滌煩暑而賭淸涼者矣
하늘 높고 기후 맑은 때에 미쳐서는 / 迨至天高氣晶
바람은 나무 끝에 불어대고 / 風號樹杪
은하수는 영롱히 반짝거리고 / 明河耿熒
깨끗한 달은 하얗게 빛나며 / 皓月皦皎
난초 꽃의 향기는 농후하고 / 蘭香馥郁
국화의 향기는 그윽한 가운데 / 菊馨窈窕
구름 걸친 산은 푸르디푸르고 / 雲山蒼蒼
가을 기럭은 아득히 날아가며 / 霜鴻渺渺
도랑물은 마르고 못물은 맑아 / 潦盡潭淸
하늘과 물이 한 빛을 이룰 제 / 天水一色
티끌 하나 없는 옥호의 맑은 / 玉壺無塵
그림자는 구슬이 잠긴 듯하나니 / 淨影沈璧
이때엔 기둥 기대어 먼 데를 바라보면서 / 當此時倚柱遐矚
광막한 속에 정신으로 노닌다면 / 神遊沖漠
또 하필 등림 부하여 요락을 슬퍼할 것 있으랴 / 又何必賦登臨而悲搖落者乎
그리고 짙은 구름이 어두컴컴하고 / 若乃凝雲潑墨
매서운 바람에 솜이 부러지며 / 嚴風綿折
눈은 내려 우뚝하게 쌓이고 / 積雪嵯峨
얼음은 겹겹으로 꽁꽁 얼며 / 層氷沍結
참새들은 서로 짹짹거리고 / 冷雀査査
까마귀는 두려워 두리번거리며 / 寒鴉矍矍
얼음은 틈새 없이 꽁꽁 얼어 / 凍合無縫
배가 묶여 건너지 못하는지라 / 舟膠不涉
장사꾼들은 오가지도 못한 채 / 商旅踟躕
검은 살결에 소름이 일어나고 / 肌黧膚粟
어부들은 머뭇거리는 가운데 / 漁子逡巡
손이 트고 머리털이 솟구치거든 / 龜手蝟髮
이때엔 영서로 추위를 물리치고 / 當此時靈犀辟寒
술 마시고 갖옷을 껴입나니 / 醉擁貂貉
또한 어찌 나귀 타고 추위를 참거나 / 亦何數夫騎驢忍凍
드러눕고 맨발 벗은 걸 셀 것 있으랴 / 僵臥跣足者乎
이상은 바로 사시가 순환하는 가운데 / 此所以四時循環
즐거이 시절과 함께 자적하는 것이로다 / 樂與時適者也
곁에서 누가 힐난하길 물은 용 때문에 신령하고 / 傍有詰者曰水靈以龍
산은 신선 때문에 신령해지나니 / 山靈以仙
아무리 뛰어난 경계가 있더라도 / 有地雖勝
사람 없이는 전해지지 않고말고 / 非人不傳
그러기에 무창의 남루는 / 武昌南樓
원규를 인하여 드러났고 / 以元規而著顯
양양의 현수는 / 襄陽峴首
숙자를 인하여 알려졌거늘 / 以叔子而昭宣
지금 그대는 주인의 덕업을 근본하지 않고 / 今子不本主人之德之業
정자 이름의 소이연도 추구하지 않았으니 / 不究之亭之名之所以然
주렴 모퉁이의 한 굽이만을 보고 / 得非覩簾隅之一曲
당실의 완전한 모양은 빼놓은 격이 아닌가 / 而遺堂室大全者乎
아 그 연원을 상고하건대 / 粤惟□源
성악이 신령함을 잉태하여 / 星岳孕靈
명문의 선인 음덕을 입어 / 名門食德
대대로 영재가 태어나서 / 世有俊英
고관 대작이 대대로 이어져 / 蟬貂聯奕
종정에 공훈이 새겨졌도다 / 鼎刻鐘銘
그중에 당당한 상당군은 / 堂堂上黨
창성한 시기에 태어나서 / 生膺昌期
잠저 시절의 광묘로부터 / 光廟龍潛
한번 만나서 알아줌을 받았으니 / 一見受知
풍운의 기이한 만남이요 / 風雲奇遇
어수가 서로 만난 것이로다 / 魚水相得
손으로 붉은 태양 붙들어서 / 手扶紅日
구오의 용이 날아오르니 / 龍飛九五
천지가 조용하고 편안해지매 / 乾淸坤寧
만물이 모두 우러러보도다 / 萬物咸覩
공은 이때에 / 公於是時
유악 안에 조용히 들앉아서 / 從容帷幄
소조의 논의를 하고 / 蕭曹論議
양평의 계책을 내니 / 良平籌策
태산과 황하로 맹세하여 / 泰山黃河
운대와 기린각에 초상 걸렸네 / 雲臺麟閣
나가면 장수요 들오면 재상으로 / 出將入相
문모와 무략을 겸비했으니 / 文謨武略
재차 조정의 우두머리 되어선 / 再長巖廊
임금을 보좌하여 다스렸고 / 燮理黼黻
누차 부월 잡고 지방에 나가선 / 屢杖鐵鉞
온 강역을 진정시켰으니 / 鎭定疆域
공은 그와 같이 클 수 없고 / 功莫與京
덕은 그와 같이 높을 수 없도다 / 德莫與崇
지위가 높을수록 맘은 되레 작아지고 / 位尊而心轉小
은총이 높을수록 몸은 더욱 공손하여 / 寵極而身愈恭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갖고 / 恒存挹損
늘 만족함을 알려고 경계해 / 每戒知足
묘당에 있으면서도 강호를 생각하고 / 處廟堂而思江湖
고량진미가 넘쳐도 담박함을 즐기도다 / 飫膏粱而嗜淡薄
정자를 여기에 얽어 세우니 / 有亭斯構
넓고도 한적하고 적막하여라 / 寬閑寂寞
위로는 녹야당을 뒤따르고 / 上追綠野
아래로는 독락원을 벗삼아서 / 下友獨樂
이에 아침엔 대궐로 달려가고 / 於是朝趨丹鳳
저녁엔 백구와 가까이하니 / 莫狎白鷗
깊은 맹약 맺어서 저버릴 수 없음이여 / 托深盟兮不可寒
기심을 잊고 서로 평화로이 지내도다 / 庶息機而相夷猶也
푸르고 깨끗한 물결 먹을 수는 없지만 / 波綠潔而不可飱兮
백설 같은 깃털을 깨끗이 씻어주도다 / 白雪羽毛之無塵也
때로 왕래하며 서로 가까이하거니 / 時往來而相近兮
누가 아득하여 길들이기 어렵다 했는고 / 孰曰浩蕩而難馴也
아 퇴청하여 먹으며 종용 자득하여라 / 羌退食而逶蛇兮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자유자재하도다 / 聊逍遙以自由也
거북 물고기를 모아서 주인이 됨이여 / 會龜魚而作主兮
나날이 구렁을 찾고 언덕을 지나도다 / 日尋壑而經丘也
내 자취 이미 쓸모없는 재목 같음이여 / 跡已同於散木兮
마음 또한 이 때문에 빈 배가 되었으니 / 心亦以之虛舟也
이것이 어찌 세속 밖에 멀리 초월해서 / 此豈非超乎流俗之表
즐거이 조물주와 함께 노는 이가 아니겠는가 / 而樂與造物而同遊者乎
나아가서는 큰 띠 띠고 홀을 꽂고 / 進則垂紳正笏
왕궁을 보호하고 왕의 직무 보충하고 / 保王躬而補袞職
물러와서는 야인 복장의 차림으로 / 退則黃冠野服
물고기와 짝하고 사슴을 벗삼도다 / 侶魚蝦而友麋鹿
사직하고픈 생각은 비록 간절하나 / 掛冠之念雖切
만백성의 기대가 더욱 중해지고 / 而萬姓之望愈重
물러나 쉬려는 뜻 또한 급급했지만 / 退休之志亦勤
임금의 은총은 더욱 깊어만 갔으니 / 而一人之眷益寵
그래서 은하수 빛이 창벽에 도는 건 / 是以雲漢昭回於櫳壁者
하늘 문채가 초목에 입혀지는 것이요 / 天章之衣被草木也
규벽이 문지방 위에 찬란한 건 / 奎壁燦爛於楣宇者
신조로써 일월의 빛을 그려낸 것이라 / 宸藻之繪畫日月也
산천이 이 때문에 닫히고 열리고 / 山川以之闔闢
귀신이 이 때문에 멀어졌거니와 / 鬼神以之扃鐍
천조의 큰 솜씨로 화려하게 꾸미고 / 賁飾天朝之大手
한 시대의 큰 문장으로 단장했으니 / 粧點一代之鉅筆
이 때문에 명성이 천지간에 가득 차서 / 此所以聲名滿於天地
태산북두처럼 우러르게 된 것이로다 / 而仰若山斗者也
그러나 압구는 해옹의 한가한 일이거늘 / 然狎鷗者海翁之閑事
이로써 정자를 명명함은 무엇을 취한 건가 / 而獨揭此名亭何取耶
아 한 위공은 / 猗韓魏公
바로 송 나라 현상으로서 / 是宋賢相
원훈 공신에 현량한 보필 되어 / 元勳碩輔
높은 덕과 큰 아량이 있었는데 / 宿德偉量
그 실명을 압구정이라 했으니 / 名亭狎鷗
고상한 풍류를 넉넉히 보겠도다 / 足見雅尙
아 먼 조상의 아름다운 모범을 / 繄鼻祖之懿範
먼 후손이 본받아야 하고말고 / 宜耳孫之取則
전세의 한공과 후세의 한공은 / 前韓後韓
행적이 아주 서로 똑같아서 / 同符合轍
문덕 무략으로 천하를 다스려 / 文武經緯
천지의 조화 육성을 참찬하여 / 參贊化育
충성은 일월을 꿰뚫을 만하고 / 忠貫日月
공은 사직을 보존하였거니와 / 功存社稷
국가의 안위를 한 몸에 지고서 / 佩國家之安危
민심을 산악처럼 진정시켰으니 / 鎭民心如山岳
공과 충헌은 / 公與忠獻
둘이면서 하나인 셈이로다 / 二而爲一
급류를 탄 날에 한가함을 구하고 / 求閑於急流之日
한창 강건할 때에 숨어 지내면서 / 佚處於强健之時
산수 속의 한가로운 낙을 다하고 / 盡山水優游之樂
물아간의 시기하는 사심을 없애서 / 無物我忌克之私
시종 한 가지 절조를 굳게 지키어 / 終始堅乎一節
진퇴 거취가 시의에 합당하였으니 / 進退合於時宜
공과 충헌 두 사람 가운데 / 公與忠獻
누가 더 낫고 못하다 할꼬 / 孰仲孰伯
모두 나는 백구를 잊고 백구는 날 잊었으니 / 皆能我忘鷗而鷗忘我
이 때문에 서로 친해질 수 있었던 걸세 / 是以能相熟而相狎也
나는 객과 함께 농서의 보리를 다 거두고 / 吾將與客窮隴西之麥
강남의 나락을 다 수확해서 / 殫江南之稻
감주를 만들고 술도 만들고 / 爲醴爲酒
동해의 물결에 소금을 치고 / 鹽東海之波
오창의 곡식을 곱게 빻아서 / 屑敖倉之粟
면을 만들고 건량도 만들어 / 爲麵爲糗
천지를 흘겨보아 여관으로 삼고 / 睥睨天地而籧廬
일월을 여닫아서 창문으로 삼고 / 開闔日月爲戶牖
남기를 부여잡고 올라가 / 攀南箕
북두로 술을 떠 마시고 / 酌北斗
공을 따라 이 정자에 노닐면서 / 邁從公于斯亭
공의 백세 향수를 축복드리리 / 祝眉壽而黃耈
그리고는 다시 백구와의 맹약을 찾아 / 然後更與白鷗而尋盟
세한 불변의 굳은 우정을 맺고 / 結歲寒之耐友
푸른 절벽 위에 황견을 새겨서 / 鐫黃絹於蒼崖
만고에 전하도록 하겠다 하누나 / 傳萬古而不朽
이 말에 객은 깜짝 놀라 얼굴 고치고 / 客矍然改容
빗자루 휘두르듯 붓을 휘둘러 / 落筆揮帚
무지개를 뱉어내어 부를 써내리니 / 吐虹霓而作賦
어슴푸레 손에서 벼락을 치는 듯하구나 / 恍若霹靂之在手也
■산중지락사(山中之樂辭)
정유년(1477, 성종 8) 여름에 파직(罷職)되어 양주(楊州) 토산(兎山)의 촌서(村墅)에 있으면서 짓다.
산중에 있는 것이 즐거울 만하여라 / 山之中兮可樂
아름다운 한 사람이 한곳에 홀로 있으니 / 有美一人兮獨處廓
높은 산은 푸르고 푸름이여 / 高山之蒼蒼兮
흐르는 물은 깊고도 넓도다 / 流水之泱泱
계수나무는 떨기져서 어지러이 섞여 있고 / 桂樹叢兮轇轕
그윽한 난초는 자라서 향기를 풍기도다 / 幽蘭茁兮芬芳
소나무 잣나무는 하도 많아서 무성함이여 / 松柏紛其薈鬱兮
또 긴 대나무 밭을 겸하였도다 / 又重之以脩篁
내 아침엔 국화의 떨어진 꽃잎을 먹음이여 / 予朝飧秋菊之落英兮
저녁엔 매화의 향기를 맡노라 / 夕坐嗅乎梅之香
거처할 만한 띳집이 있음이여 / 居有茅茨兮
경작할 만한 묵정밭이 있도다 / 耕有菑畬
낚시질할 고기가 있음이여 / 釣有魚兮
캘 만한 나물이 있도다 / 採有蔬
내 상자에 내가 쟁여둠이여 / 我篋我遺兮
내 항아리에 내가 남겨두도다 / 我盎我贏
내 이미 춥고 굶주릴 걱정이 없음이여 / 我旣無溫飽之足虞兮
다시 구구와 승영을 어찌 일삼으리요 / 復何事於狗苟而蠅營也
공명의 길은 멀어서 나와 서로 어긋남이여 / 顧名途之邈與我違兮
하늘 높이 나는 기러기에 뜻을 두도다 / 志鴻飛之冥冥也
내 이미 으르렁대는 호표를 멀리 도망쳐서 / 予旣使虎豹嘷以遠遁兮
교룡과 더불어 깊이 숨어 있게 하고 / 與蛟龍以潛藏也
황학을 불러서 함께 배회함이여 / 招黃鶴以夷猶兮
미록과 서로 벗삼아 노니는도다 / 友麋鹿乎翶翔也
깨끗하게 홀로 서서 짝이 없음이여 / 耿獨立而無伴兮
적막을 달게 여기고 오래 머무르도다 / 甘寂寞而淹留
맑은 가을의 낙엽지는 걸 슬퍼함이여 / 悲淸秋之搖落兮
해는 저물어서 서산으로 넘어가도다 / 白日晼晩其西流
그러나 내 어려서 끝없이 청결했음이여 / 然予幼淸之未沫兮
조용히 허정함으로써 스스로 닦았도다 / 漠虛靜以自脩
하늘은 넓어서 하도 광대함이여 / 天宇寬以蕩蕩兮
나의 조용한 모습을 누가 알리요 / 孰知予之從容
문득 잠깐 사이에 얻은 것이 있음이여 / 忽有得於介然之頃兮
어찌 띠풀이 내 마음을 막았으랴만 / 夫豈茅塞乎其心胸也
그러나 반성하여 스스로 책망함이여 / 顧反觀以自訟兮
아 기왕지사는 어찌할 수가 없도다 / 嗟旣往之不可追也
내 이미 시속의 비굴한 작태를 등졌음이여 / 予旣偭夫時俗之軟美兮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를 뿐이로다 / 直是是而非非也
어찌하여 홀로 이 기복을 사모하여 / 何獨慕此奇服兮
높은 관을 쓰고 긴 칼을 허리에 찼는고 / 冠巍峨而鋏陸離也
세상은 이미 둥글기를 좋아하는데 / 世旣好夫圓兮
나만 홀로 모난 것을 지키도다 / 吾獨守乎方也
세상은 모두 권세를 좋아하는데 / 世皆好夫炎熱兮
나만 홀로 우우하며 양량하도다 / 吾獨踽踽而涼涼也
갑자기 이 까닭 없는 재앙을 만났음이여 / 忽然遭此無妄之災兮
마음에 맺혀 풀리지 않는도다 / 謇不可釋也
그러나 나는 조금의 허물도 없음이여 / 然吾無纖芥之疵兮
또 어찌 가려져서 안 밝혀질 걸 걱정하랴 / 又何患蔽而不白也
아 슬프다 안회는 먼지를 주웠음이여 / 嗚呼嘻噫顔回拾塵兮
불의는 남의 금을 훔쳤도다 / 不疑盜金
광장은 불효를 하였음이여 / 匡章不孝兮
중자는 청렴하지 못했도다 / 仲子不廉
고인을 보니 애매하여 밝히기 어려움이여 / 相古人其曖昧而難明兮
나만 어찌 여기에 사리를 못 깨닫는고 / 吾何獨於此而蓬之心也
내 처음 마음의 헤아린 바를 관찰함이여 / 庶覽余初之所揆兮
청백을 굳게 지켜 뉘우치지 않으련다 / 伏淸白而不悔也
어진 이를 가려 덮고 시기하기 좋아함이여 / 好蔽美而妬賢兮
진실로 뭇사람의 평상적인 태도로다 / 固衆人之常態也
영분이 나에게 좋은 점괘를 고해줌이여 / 靈氛告予以吉占兮
하늘이 나를 크게 성취시키리라 하도다 / 天方玉汝于大成也
나는 또 하늘은 편애가 없음을 감격하여 / 予又感皇天之無私阿兮
이에 말을 늘어놓아서 정회를 펴도다 / 玆陳辭以抒情
산중에 있는 것이 즐거울 만하여라 / 山之中兮可樂
더 즐거울 수 없음은 한적하고 고독함일세 / 樂莫樂兮幽且獨
한적하고 고독함을 다시 어떻게 구하리요 / 幽且獨兮復焉求
내 장차 이런 데서 스스로 아끼련다 / 吾將以此而自惜
▣사가시집 제2권
■입춘(立春)
◯오두막집에 또 한 해의 봄이 찾아를 오니 / 茆齋又是一年春
계절 경물이 명백하게 눈에 산뜻 들어오네 / 節物班班入眼新
대궐에서 하사한 번승엔 채화가 따라오고 / 北闕賜幡隨彩勝
이웃에서 보낸 채반엔 오신이 섞이었구나 / 西鄰送菜錯盤辛
얼른 춘첩자 써놓고는 새해 경사 맞이하고 / 旋題門帖迎新慶
막걸리 동이 열고는 친구와 함께 마셔대네 / 爲發盆醪對故人
병골은 갈수록 쇠해 거울 보기 부끄러워라 / 病骨侵尋羞對鏡
명절을 만날 적마다 은근히 맘이 상하누나 / 每逢佳節暗傷神
▣사가시집 제4권
■촌가(村家) 4수
노란 띠풀 뜯어다가 조그만 지붕을 이고 / 葺葺黃茅覆小齋
문전의 두어 이랑 논밭은 묵거나 말거나 / 門前數頃付汙萊
아동은 시장으로 소금을 구하러 갔는데 / 兒童近市求鹽去
같은 마을 친척은 내게 쌀을 보내왔구려 / 親戚同鄕送米來
영운은 청산에 밀 칠한 나막신 자주 신고 / 靈運靑山頻蠟屐
적선은 명월 아래서 또 술잔을 멈추어라 / 謫仙明月且停盃
천기는 끊임없고 인사도 하 많은 가운데 / 天機袞袞人多事
백발과 춘풍이 서로 시샘을 부리는구나 / 白髮春風已作猜
소진은 장기간 수불 앞에서 재계했지만 / 蘇晉長年繡佛齋
인간은 아스라이 봉래산과 격해 있었네 / 人間渺渺隔蓬萊
강산은 가는 곳마다 모두 내 소유려니와 / 江山到處皆吾有
고관대작은 사람에게 우연히 오는 걸세 / 軒冕於人是儻來
죽은 뒤엔 이름 없어 정에 못 오르겠지만 / 死後無名能上鼎
생전엔 입이 있어 술은 마실 수 있네그려 / 生前有口可銜盃
십 년을 호해의 일엽편주만 꿈꾸다 보니 / 十年湖海扁舟夢
물새들은 여전히 나를 꺼리지 않는구나 / 沙鳥依然不我猜
한가하기가 심재 배우던 안자 같아서 / 閑如顔子學心齋
출처는 유유해라 하나의 초야인이로세 / 出處悠悠一草萊
눈 온 뒤의 매화는 흰빛을 가져가버리고 / 雪後梅花將白去
깊은 봄의 버들은 노란빛을 보내오누나 / 春深柳色送黃來
칼집엔 벽제고로 닦은 칼을 꽂아두고 / 匣中藏得鷿鵜劍
손으로는 항상 앵무배를 가까이하네 / 手裏□親鸚鵡盃
덧없는 인생 억지로 요리할 것 없어라 / 不用浮生强料理
천시와 인사가 은밀히 서로 시샘하나니 / 天時人事暗相猜
고금에 시 좋아한 이는 진간재였고요 / 古今好詩陳簡齋
천하에 명성 높은 이는 구 내공이었네 / 天下高名有寇萊
옛사람은 못 본 채로 세월이 멀어졌는데 / 昔人不見歲已遠
덧없는 생애엔 봄이 또 몇 번이나 올런고 / 浮生幾何春又來
인생의 백년은 참으로 백년이 아니거니 / 人生百歲非百歲
막걸리나 한잔 또 한잔 거듭 마시자꾸나 / 濁酒一盃復一盃
노란 고니는 몇천 리나 높이 날아가는데 / 黃鵠高飛幾千里
제비 참새는 괜히 서로 꺼려 떠들어대네 / 燕雀羣噪空相猜
▣사가시집 제7권
■덧없는 세상
덧없는 세상이 이와 같을 뿐인데 / 浮世只如此
가는 세월을 부여잡을 수가 없네 / 光陰不可扳
멀리 노닐다 두 귀밑은 희어졌고 / 遠遊雙鬢白
나라에 보답할 촌심은 붉디붉어라 / 報國寸心丹
요동 바다는 천길이나 새파랗고 / 遼海千尋碧
의무려산은 만길이나 서리었는데 / 閭山萬丈蟠
돌아갈 길이 두 눈에 삼삼한지라 / 歸途森在眼
밤새도록 고향 얘기를 나누었네 / 終夜說鄕關
▣사가시집 제10권
■임실(任實)의 동헌에서 차운하다. 3수
가을바람이 벼슬할 마음을 불어 끊어라 / 秋風吹斷宦遊情
만리 머나먼 호남에 호수는 맑기만 한데 / 萬里湖南湖水淸
아스라한 역참 나무엔 단풍잎이 산란하고 / 驛樹依俙紅葉亂
머나먼 고향 하늘엔 흰 구름이 비껴 있네 / 鄕關迢遞白雲橫
세월은 나를 등지고 당당하게 흘러가는데 / 流光背我堂堂去
백발은 사람을 깔보아 줄줄이 나오는구나 / 華髮欺人續續生
객헌에 홀로 앉아서 잠깐 한숨 졸다가 / 獨坐客軒成小睡
모점의 낮닭 우는 소리에 문득 깨었네 / 忽回茅店午鷄聲
문 밀치고 들온 청산은 세정과 멀거니와 / 排闥靑山不世情
때로 불어오는 청풍은 맑기도 그지없어라 / 時聞爽籟有餘淸
장안에 머리 돌리니 삼각산은 멀찍하고 / 長安回首三峯遠
고향에 돌아가려니 겹겹 산은 가로놓였네 - 이때 달성(達城)으로 가려던 참이다. - / 故國歸心疊山橫
객사에 유유히 나그네 신세 오래기도 해라 / 逆旅悠悠長作客
허명 아래 분주한 게 어찌 생계를 위함이랴 / 虛名役役豈謀生
태평성대 마을마다의 경치 그림직해라 / 太平堪畫村村景
개 짖고 닭 우는 소리에 벼 타작 소리로다 / 鷄犬聲中打稻聲
호남 일대의 물정을 두루 다 관찰해보니 / 行盡湖南見物情
강산이 무사하여 태평성대를 즐기는구려 / 江山無事樂時淸
주광이 어찌 시광에게 굽히려고 하리오 / 酒狂肯爲詩狂屈
호기는 항상 검기를 따라서 종횡하누나 / 豪氣常隨劍氣橫
장년의 뜻이 어찌 백발이라 어긋날쏜가 / 壯志何曾違白首
아량은 끝내 창생을 저버리지 않고말고 / 雅懷終不負蒼生
사군의 백성 다스림은 물보다도 맑아라 / 使君爲政淸於水
현가 소리 육 년을 들은 게 또한 기쁘구려 / 更喜絃歌六載聲
▣사가시집 제11권
■쌍매당집(雙梅堂集 이첨 李詹 1345-1405)의 후미에 제(題)하다. 언보(彦甫)가 소장한 책인데, 나로 하여금 제목(題目)을 쓰게 하였다.
시 짓기는 조금 쉬우나 품평하긴 어렵나니 / 作詩差易品詩難
안목 갖춘 어느 누가 자세히 본단 말인가 / 具眼何人字細看
쌍매당집의 제목은 이미 써서 마쳤건만 / 寫罷雙梅題目了
세상에 이성이 없으니 누가 산삭을 할꼬 / 世無尼聖孰能刪
※이성(尼聖)은 자가 중니(仲尼)인 공자를 가리킨 것으로, 공자가 일찍이 3000여 편이나 되던 옛 시 중에서 중복된 것 등을 모두 산삭(刪削)하여 300여 편으로 만들었던 데서 온 말이다.
▣사가시집 제20권
■고우탄(苦雨嘆) 베갯머리서 짓다.
고우를 탄식하고 고우를 탄식하여라 / 苦雨嘆苦雨嘆
내 고우를 탄식하노니 언제나 그칠런고 / 我嘆苦雨何時乾
금년에도 큰비가 거년같이 내려서 / 今年大雨去年同
넘실대는 흰 물결이 하늘에 잇닿았네 / 白浪拍拍連長空
강과 바다가 넘쳐흘러 산릉을 삼켜 버리면 / 江翻海溢憂懷襄
산릉이 어룡의 고장으로 변할까 걱정일세 / 丘陵變作魚龍鄕
아득한 평지의 논밭엔 곡식이 그득했는데 / 平田渺渺禾稼多
지금은 뼈만 앙상해 백사장이 되어 버렸네 / 祗今露骨爲白沙
거년엔 농사 망쳐 백성들이 쌀을 못 먹어서 / 去年害稼民未粒
죽은 사람 즐비하고 산 사람은 통곡했는데 / 死者相枕生者泣
금년엔 이 지경이 되도록 농사를 망쳤으니 / 今年害稼一至此
백성의 종자를 모조리 없애고야 말겠구나 / 民靡孑遺而後止
빗줄기가 계속해서 동이로 퍼붓듯 하여라 / 雨勢相續如翻盆
종일하고 밤새도록 빗소리에 넌덜이 나네 / 終日厭聽通宵聞
나는 비 뿌리는 교룡을 베 죽일 계책 없어 / 我無籌策誅蛟龍
칼 뽑아 안석 찍고 공연히 가슴만 쳐대네 / 拔劍斫几空搥胸
공연히 가슴만 쳐댄들 무엇을 얻으리오 / 空搥胸何可得
새벽 닭은 울지 않고 비만 다시 내리누나 / 晨鷄無聲雨復作
▣사가시집 제21권
■북풍(北風)
어젯밤 북풍이 높은 나뭇가지를 흔들더니 / 北風昨夜撼危梢
나뭇잎 다 떨어져 새 둥지가 훤히 드러났네 / 葉盡分明露鳥巢
생각하니 산중에 있는 내 오두막집에도 / 憶我山中有小屋
응당 두어 겹 띠 지붕을 다 말아갔겠구나 / 定應捲盡數重茅
▣사가시집 제29권
■한가한 가운데 閑中
한가함 속의 온갖 흥미가 절로 애틋하여라 / 閑中味味自堪憐
나는야 시선이 아니요 바로 주선이로다 / 不是詩仙卽酒仙
집 가득한 황금은 저 홀로 귀중할 뿐이라 / 滿屋黃金徒自貴
내 북창의 잠자리는 결코 살 수 없고말고 / 不曾賭我北窓眠
▣사가시집 제31권
■춘일(春日)
아득한 먼 하늘에 비가 잠깐 개 보니 / 漠漠長空雨乍晴
도성 가득 꽃 버들이 청명 시절에 다다랐네 / 滿城花柳近淸明
낮잠 깨어 일어나선 아무 일 없이 적적하여 / 午窓睡覺寂無事
술통에 술 거르는 소리를 조용히 듣노라 / 細聽糟牀壓酒聲
▣사가시집 제40권
■봄비
봄 정원에 가랑비 자욱이 부슬부슬 내릴 제 / 春園小雨碧纖纖
자고 일어나 남창의 주렴 반쯤 걷어 올리니 / 睡起南窓半上簾
서글퍼라 살구꽃이 아직 피지는 않았지만 / 惆悵杏花開較晩
향과 빛깔 한층 더해진 게 보기가 즐겁구려 / 喜看香色一分添
▣사가시집 제44권
■꽃을 심다
꽃 옮겨 차례로 정원 가득히 심어 놓고 / 移花次第滿園栽
다시 명년 봄에 찬란히 피우도록 하노니 / 更擬明春爛熳開
벌 나비들 신이 나서 한창 유희하거든 / 戲蝶遊蜂皆得意
하찮은 꽃들은 서로 시기하지 말지어다 / 浮英浪蘂莫相猜
■채소를 심다
채소 죽순이 전부터 내 성에 맞았던 거고 / 蔬筍由來性所宜
육식을 꾀한 게 아닌데 또 무얼 기약하랴 / 謀非肉食復何期
땅 가득 채소 심는 게 노년의 흥취고말고 / 種蔬滿地殘年興
나도 이제부턴 채소 가꾸는 거나 배우련다 / 我亦從今學圃爲
▣사가시집 제46권
■모춘(暮春)
어젯밤엔 작은 못에 비가 흠뻑 내리더니 / 昨夜方塘雨更肥
오늘은 처음 온 제비가 자꾸 날아다니네 / 初來燕子故飛飛
동풍이 살구꽃 불어 눈처럼 다 쏟아져라 / 東風吹盡杏花雪
희미한 석양 아래 봄이 장차 가려는구나 / 淡淡斜陽春欲歸
▣사가시집 제52권
■앉은뱅이가 되다 病躄
앉은뱅이라 앉는 데는 능하기에 / 病躄工能坐
머리 붙들고 편안히 잠도 이루네 / 扶頭穩作眠
청운 길에 활보하기는 어려우니 / 靑雲難闊步
띳집에 깊이 숨는 게 마땅코말고 / 白屋合深跧
발 날쌘 준마 못 된 건 부끄럽지만 / 健足慙非馬
가부좌한 꼴은 스님과 다름없네 / 加趺酷似襌
어찌 위험한 곳을 밟을 수 있으랴 / 履危那可得
끝내 재앙에 빠지는 건 면하겠지 / 終免蹈禍權
▣사가시집보유 제3권《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있는 시
■익산(益山)
남녘 호수는 하도 맑고 익산은 푸르른데 / 南湖白白益山蒼
지난 일들은 아득해라 한바탕 봄꿈일세 / 往事微茫夢一場
백제의 옛터엔 고목만 덩그렇게 서 있는데 / 濟國遺墟空老樹
기준의 옛 궁터엔 석양이 그 몇 번 비꼈을꼬 / 箕君故殿幾斜陽
백년토록 말이 없으니 금마는 가련타만 / 百年無語憐金馬
만고에 다정한 것은 석양이 기억나누나 / 萬古多情記石羊
백발로 멀리 노닐다 보니 하도 강개하여 / 白髮遠遊多慷慨
오르는 곳마다 상심 안 되는 곳이 없구나 / 登臨無處不傷神
■만경(萬頃)
물가 마을의 풍경이 내 고향과 달라서 / 澤國風煙異故鄕
나그네 회포 벼슬살이가 똑같이 아득하네 / 羈懷宦況共茫茫
청산이 끊어진 곳엔 땅도 따라서 다하고 / 靑山斷處地應盡
백조가 날아가는 곳엔 하늘 또한 멀구나 / 白鳥去邊天更長
저녁 비 올 땐 구름이 칠흑처럼 시커멓더니 / 晩雨來時雲似漆
밤바람이 다 불어 내니 달빛은 서릿발 같네 / 夜風吹盡月如霜
작은 누각의 하룻밤은 물처럼 서늘한데 / 小樓一夜涼如水
청수함은 연래에 심랑보다 갑절일세 / 淸瘦年來倍沈郞
■금구(金溝)
해 저물어 누각 기대 선 곳에 / 日暮倚樓處
출처를 초당에 묻고 싶어라 / 行藏問草堂
시가 나온다 꽃은 오솔길 가득고 / 有詩花滿徑
꿈은 없어도 풀은 못 둑에 나누나 / 無夢草生塘
높은 나무엔 석양이 머물러 있고 / 高樹留殘照
빈 처마엔 저녁 서늘한 기운 감도네 / 虛簷逗晩涼
바닷가의 산이 칼끝처럼 뾰족하니 / 海山尖似劍
시름겨운 창자를 베 낼 만하다마다 / 端可割愁腸
■부안(扶安)
하늘엔 가랑비가 또 아침 내내 내리는데 / 天街小雨又崇朝
누가 황금을 배배 꼬아 버들가지 물들였나 / 誰撚黃金染柳條
골짝의 맑은 바람 소리는 멀리 울려 퍼지고 / 洞壑淸風生遠籟
해문에 지는 달빛은 찬 조수에 떨어지네 / 海門殘月落寒潮
한 누각은 고요하여 편히 잠자기 마땅한데 / 一樓岑寂宜高枕
옛 나루는 쓸쓸해라 누운 다리뿐이로다 / 古渡荒涼只臥橋
가는 곳마다 강산은 시 짓기에 알맞건만 / 隨處江山堪作賦
끝내 묘사하지 못하는 졸필이 하 부끄럽네 / 多慙拙筆竟難描
■용안(龍安)
현의 크기는 말보다 클 정도인데 / 縣大大於斗
손님이 많기는 구름처럼 많구나 / 客多多似雲
서늘한 바람 들이려 북창을 열고 / 納涼開北牖
모자 젖혀 쓰고 남풍을 쐬노라니 / 岸幘倚南薰
먼 산들은 검은 머리처럼 자잘하고 / 遠岫鴉鬟細
앞 시내는 제비 꼬리처럼 갈라졌네 / 前溪燕尾分
시는 읊조려도 좋은 말 안 나오니 / 吟詩無好語
술로나 통쾌한 기분 즐겨야겠네 / 酒可策高勳
▣사가문집 제2권
■전주(全州)의 공북정(拱北亭)을 중신한 것에 대한 기문
전주부(全州府)는 곧 옛 백제(百濟)의 완산군(完山郡)이다. 견훤(甄萱)이 외람되이 차지하여 도읍을 삼은 기간이 40년이 넘었다.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여 하나의 나라를 만든 뒤에 혁파하여 전주로 만들었다. 우리 성조(聖朝) 이씨(李氏)가 이곳에서 처음 일어났다. 성목대왕(聖穆大王)께서 비로소 북방으로 이주하였다. 태조 1년(1392)에 전주를 고쳐 완산부(完山府)로 삼았고, 태종 12년(1412)에 전주부로 복구하였다.
전주부는 땅이 넓고 백성이 많으며 일이 많고 번거롭다. 또한 사방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위치하여, 서울에서 충청으로 가고 충청을 거쳐 호남으로 가거나 영남으로 가는 자들이 모두 이곳을 지나가니, 실로 사람들의 왕래가 폭주하는 곳이다.
전주부의 북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 정자가 있는데, 이것이 ‘공북정(拱北亭)’이다. 조정에서 덕음(德音)을 펴거나 사신을 파견할 때에는, 부윤이 관리들을 거느리고 의관을 갖추 차려입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나가서 맞이하였다. 정월 초하루, 동지, 탄신일 및 나라의 큰 경사와 상서로운 일을 만나게 되면, 부(府)와 주(州)들이 각각 전문(牋文)을 갖추어 대궐을 향해 예식을 올리고 전송하는 일을 여기에서 하였다. 다만 지은 지가 오래되어 거의 허물어지고 기울어, 예식을 행하는 자들이, 새로 지을 좋은 계책을 낼 사람이 없음을 탄식하였다.
신사년(1461, 세조7) 겨울에 이후 언(李侯堰)이 부윤이 되었다. 개연히 새로 지을 생각을 하여 바야흐로 계획을 세웠는데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체직되었다. 이후 형손(李侯亨孫)이 후임으로 와 공인을 모으고 목재를 다듬어 거의 완공할 참이었는데, 마침 초상을 당하여 교체되었다. 이어 이번(李蕃)이 부윤이 되고 최지(崔漬)가 통판이 되었다. 공사를 마무리할 방법을 강구하여, 고을 사람 김사효(金思孝)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고 한가한 사람들을 부리고, 농민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몇 달 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전주의 원로들이 수령들의 공적을 빛내고자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생각하건대, 전주 고을은 산천의 맑은 기운이 어리고 서려서 처음으로 왕업(王業)의 기반이 된 곳이니 실로 우리 조선의 근본이 되는 지역이다. 주(周)의 태빈(邰豳)과 같은 곳이다. 목조(穆祖)께서 북방으로 이주한 것은 태왕(太王)이 빈(豳)을 떠날 때와 같은 것이리라. 태조께서 나라를 여니, 대대로 임금들이 서로 이어 부(府)를 설치하고 부윤을 두어 한 도(道)의 으뜸이 되는 고을로 만들었으니, 대개 영광스럽게 한 것이다.
전주의 원로와 젊은이들은 오래오래 선왕(先王)의 교화를 입고 여러 임금들의 은택을 받으며 임금의 고향에서 읊고 노래하였으니, 왕실을 향한 정성이 보통의 경우보다 만배나 더하였다. 전후로 수령으로 온 자들은 모두 조정에서 엄격하게 선발한 인재들이었고, 지금 우리 어진 부윤과 어진 통판도 한 시대에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다. 정사를 함에 왕명(王命)을 공경하고 왕인(王人)을 예우하는 것으로써 우선을 삼았다. 이것이 공북정이 다시 새롭게 지어진 까닭이다.
아! 옛사람이 이르기를, “그 경계에 들어가면 그 교화를 안다.”라고 하였다. 이제부터는 우리 고을을 방문하여 우리 풍속을 물어, 우리 고을이 《춘추》의 ‘왕실을 높이는 의리와 예법’을 깊이 터득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은 반드시 이 정자로 인해서일 것이다. 만약 “누대를 수리한 것은 장차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서 노는 곳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라고 한다면, 우리 두 수령을 제대로 아는 자가 아니다. 뒤에 후임으로 오는 이들도 오늘날 다시 정자를 새롭게 지은 성대한 뜻을 저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전주(全州)의 향교(鄕校)를 중신한 것에 대한 기문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유학을 높이고 도(道)를 중시하여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었으니, 비록 궁벽진 시골일지라도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하물며 전주는 우리 왕조의 시조가 살았던 땅으로서 남쪽 지역의 인재들이 모여드는 곳이니, 그들을 가르치고 기르는 일을 가장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곳이다. 고을의 젊은이들이 또한 대부분 대대로 학문하는 집안의 출신들로서 선행을 즐기고 배우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한 고을이 교화되어 아주 뛰어난 사람이 간혹 출현한다. 이것은 땅의 아름다운 기운이 모인 까닭이기도 하지만, 또한 모두 평소의 교육이 그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주부의 학교는 예전에는 치소(治所) 안에 있었는데, 신유년(1441, 세종23)에 태조의 영정을 경기전(慶基殿)에 봉안하니, 경기전과 너무 가까운 탓에 시서(詩書)를 외는 소리, 회초리를 치는 소리 등이 시끌벅적 끊임이 없어서 성령(聖靈)을 편안히 모실 수가 없었다. 이에 성곽 서쪽 6, 7리 되는 곳에 옮겨 지었다. 성전(聖殿)과 강당과 재사(齋舍)와 부엌이 차례대로 지어졌다. 다만 그 지역이 깊고 주변이 비어 있는 곳으로 전주 마을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도둑과 짐승들의 피해에 대한 걱정이 없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담장을 두르고 자물쇠를 굳게 잠가 오직 단단히 지키는 데에 신경을 쓸 뿐이었다.
기해년(1479, 성종10)에 계림(鷄林) 이유인(李有仁) 선생이 이곳에 부윤으로 부임하였다. 먼저 공자의 사당에 알현하고 다음에 여러 학생들에게 읍하여 나아오게 하고서, 제사에 대한 일을 강론하였다. 개탄하는 심정으로 교화를 일으키고 현인을 면려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교과를 과정별로 체계화하였으며, 양식과 물품을 넉넉하게 공급하였다. 작은 일을 고치고 다듬는 것까지도 여유롭게 잘 조치하였다.
이듬해 경자년(1480, 성종11) 봄에 다섯 칸 누각을 새로 세웠는데, 우뚝 솟고 시원하게 트였으며 제도가 아주 적합하였다. 완공한 뒤에, 선생이 여러 학생들을 거느리고 올라가서 잔치를 벌여 낙성식을 하고, 학생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여러분은 이 누각에서 얻은 것이 있는가?”
하니, 학생이 답하기를,
“이전에 누각이 지어지기 전에는 공부하는 집이 낮고 좁아, 저희들이 공부하는 여가에 답답함을 없애고 정신을 통창하게 하고 싶어도 쉬거나 놀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답답하기가 마치 뜨거운 물건을 잡았던 손을 얼른 물에 식혀야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제 이 누각에 올라 저희들의 번잡한 마음을 씻고 저희들의 막힌 생각을 씻을 것입니다. 산을 보면서 그 어짊을 체득하고 물을 보면서 그 지혜를 기르며, 솔개와 물고기가 날고 뛰는 것을 보면서 도체가 밝게 드러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래위로 한 번 보는 것도 배움이고 행동거지 하나하나도 배움입니다. 무릇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어오는, 그 많고 많은 만물들이 어느 것인들 저희가 본성을 기르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미루어 그 공부를 지극히 하면 또한 화육(化育)에 참여하여 천지와 함께 흐르게 될 것입니다. 선생께서 저희들에게 매우 좋은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노는 즐거움에 빠져 허송세월만 하고 글공부를 하다 말다 한다면 이는 선생께서 저희들에게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들이 공의 은택을 아름답게 꾸며 두고자 하여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나 또한 이 고을에 적(籍)을 붙이고 있는지라 의리로 보아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학교는 교화를 하는 곳이다. 가르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고, 사람이 본디 지니고 있는 것을 인하여 인도하는 것일 따름이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사람이 본디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러 가려져서 어둡게 됨이 없을 수 없는데, 그렇게 되면 일상생활에서의 인륜과 수작하는 사물에 대해 타당하게 처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글을 짓고 말씀을 하여 후세에 가르침을 남겼으니, 모두가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이 도를 밝혀, 발휘하여 문장을 짓고 사업에 적용한다면 그 관계되는 바가 어찌 중요하고도 크지 않겠는가.
그러나 가르치고 권면하는 책무는 반드시 주관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 벼슬자리에 있는 자들은 문서를 처리하는 잗단 일이나 힘쓰면서 학교를 흥기시키는 것을 오활하게 본다. 고을의 학교는 더욱 심하다. 맹자가 이르기를 “한 고을의 훌륭한 선비라야 한 나라의 훌륭한 선비를 벗하고 한 나라의 훌륭한 선비라야 천하의 훌륭한 선비를 벗한다.”라고 하였다. 고을을 말미암아 나라로 가고 천하로 가는 것이다. 일찍이 고을의 학교라 해서 가벼이 여겼더란 말인가.
선생은 선비를 가르치고 기르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학교를 흥기시키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누각을 지은 데다 또 잔치를 열어 낙성식을 하였고 또 여러 학생들과 토론하였다. 그 가슴속이 넓고 그윽하여 상대와 나와의 간격이 없는 경지는,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는 천성에 견줄 만하고, 천지처럼 넓은 도량은,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긴 공자의 기상과 함께 놓고 이야기할 만하다. 선생이 한 누각을 지음이 이처럼 유교의 학문에 관계된 줄을 아는 이가 누구일까?
여러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은, 정미하게 살피고 힘써 실천하여 학업을 거칠어지게 하지 말며 생각 없이 내버려 두어서 학업을 훼손되게 하지 말아서, 선생이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아! 민월(閩越)은 궁벽한 고을이라 그 풍속이 문서와 이사(吏事)를 잘 알지 못했는데, 상곤(常袞)이 관찰사가 되어 선비들을 불러 그들과 더불어 예를 갖추니 선비들이 모두 흔쾌히 따랐으며, 구양첨(歐陽詹)이 비로소 진사에 합격하였고 문치(文治)가 점점 일어나게 되었다. 하물며 우리 임금의 고향은 인재가 많은 지역이고 선생이 이처럼 인도하고 권면하니, 장차 집집마다 유학의 기풍이 일고 사람마다 정주(程朱)의 학문을 하여, 나가서 나라의 쓰임이 될 훌륭한 사람이 반드시 많이 나올 것이다.
이것으로 기문을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