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사설(星湖僿說)
이익(李瀷 1681-1763 )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 팔대조 이계손(李繼孫)이 성종 때 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지내는 등 명문 가문의 후손이다.
증조부 이상의(李尙毅)는 의정부좌찬성, 할아버지 이지안(李志安)은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아버지 이하진(李夏鎭)은 사헌부대사헌에서 사간원대사간으로 환임(還任)되었다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 때 진주목사로 좌천, 다시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다.
1681년 10월 18일에 아버지 이하진과 후부인 권씨(權氏) 사이에 운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682년 6월에 전부인 이씨(李氏) 사이의 3남 2녀와 후부인 권씨 사이의 2남 1녀를 남긴 채 55세를 일기로 유배지 운산에서 사망하였다.
아버지를 여읜 뒤에 선영이 있는 안산의 첨성리(瞻星里)로 돌아와, 어머니 권씨 슬하에서 자라나 조고다질(早孤多疾)의 생애가 시작된 셈이다.
첨성리는 행정적으로 경기도 광주부에 속해 광주 첨성리로 일컬어졌으나, 이른바 비래지(飛來地)로서 광주에서 과천·금천을 거쳐 있는 안산군내에 있어 흔히 안산의 첨성리로 불려졌다.
10세가 되어서도 글을 배울 수 없으리만큼 병약했으나, 더 자라서는 둘째 형 이잠(李潛)에게 글을 배웠다. 25세 되던 1705년 증광시에 응했으나, 녹명(錄名)이 격식에 맞지 않았던 탓으로 회시에 응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다음해 9월에 둘째 형 이잠은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는 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17, 18차의 형신(刑訊) 끝에 47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이익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과거에 응할 뜻을 버리고 평생을 첨성리에 칩거하였다. 바다에 가까운 그 고장에는 성호(星湖)라는 호수가 있어서 이익의 호도 여기에 연유되었고, 그 고장에 있던 이익의 전장(田莊)도 성호장(星湖莊)이라 일컬어졌다.
이익은 여기에서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 사령(使令)과 기승(騎乘)을 이어, 재야의 선비로서 일평생 은둔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셋째 형 이서(李漵)와 사촌형 이진(李溍)과 종유(從遊)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35세 되던 1715년에 어머니 권씨마저 여의어 복상(服喪)을 마치고서는 노비와 집기를 모두 종가(宗家)로 돌려보냈으나, 형제자질에 대한 은애(恩愛)가 지극해 실제로는 일가의 지주가 되었다. 47세 되던 해에 조정에서 이익의 명성을 듣고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가세는 퇴락되었고, 이익 부자의 오랜 질역(疾疫)은 쇠운을 재촉하였다. 64, 65세 때에 이미 뒷잔등의 좌달(痤疸)이 악화되었고, 70세가 넘어서는 일찍이 괴과(魁科 : 문과의 갑과)로 급제해 예조정랑·만경현감을 지낸 외아들 이맹휴(李孟休 1713-1751)마저 오랜 병고 끝에 죽었으며, 70세 후반기에 들어서는 반신불수가 되어 기거마저 불편할 지경이었다.
그 동안에 가산도 탕진되어 만년에는 한 명의 고노(雇奴) 외에는 송곳을 세울 만한 전지도 없으리만큼 영락하였다. 83세 되던 1763년(영조 39) 조정에서는 우로예전(優老例典)에 따라 이익에게 첨지중추부사로서 승자(陞資)의 은전을 베풀었으나, 그 해 12월 17일 오랜 병고 끝에 죽었다.
유해는 선영이 있는 첨성리(현재 경기도 안산시 성포동)에 안장되었다.
타고난 성품은 기신(氣神)이 정랑(精朗)하고 성모(性貌)는 준결(峻潔)하며, 눈에는 정기가 넘쳐흘러서 영채(英彩)가 사람을 쏘는 듯했다 한다. 또한 조그마한 긍지도 가진 듯싶지 않으면서도 중정간중(中正簡重)해 하나의 덕성을 갖추어, 집안에서는 법을 세워 예절을 엄히 하고 사치한 생활을 금했다 한다.
문인 안정복(安鼎福)은 이익의 인품에 대해 “강의독실(剛毅篤實) 이것은 선생의 뜻이요, 정대광명(正大光明) 이것은 선생의 덕이요, 선생의 학은 정심굉박(精深宏博)하고, 그 기상은 화풍경운(化風景雲)이요, 그 금회(襟懷)는 추월빙호(秋月氷壺)이다.”라고 술회하였다.
이익의 학문은 일문에 이어져서 준재가 많이 배출되어, 아들 이맹휴는 『예론설경(禮論說經)』·『춘관지(春官志)』·『접왜고(接倭考)』 등을 남기고, 손자 이구환(李九煥)은 조업(祖業)을 계승하였다.
그 위에 종자(從子) 이병휴(李秉休)는 예학으로, 종손(從孫) 이중환(李重煥)은 인문지리로 이름을 남기고, 이가환(李家煥)은 정조의 은총을 받아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천주교를 신앙해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 때에 옥사하였다.
문인으로 두드러진 자로는 윤동규(尹東奎)·신후담(愼後聃)·안정복·권철신(權哲身) 등이 있어, 당대의 학해(學海)를 이루어 그 흐름을 정약용(丁若鏞)에게까지 미쳤다.
증조부 이상의는 일찍이 이수광(李睟光)과 더불어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다녀온 일이 있고, 이익의 딸이 이수광의 후손과 결혼한 것으로 보아 이익·이수광의 양가는 세교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익이 첨성리에 칩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이하진이 1678년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에 청제(淸帝)의 궤사은(饋賜銀)으로 사 가지고 온 수천 권의 서적 때문이었다.
이익은 선현의 언행을 샅샅이 기억하고 일찍부터 시나 문을 잘 외었다. 『맹자』·『대학』·『소학』·『논어』·『중용』·『근사록』 등을 읽고, 다시 『심경(心經)』·『역경』·『서경』·『시경』을 거쳐 정주(程朱)와 이황(李滉)의 학문을 탐독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익의 학문은 이렇듯 철저한 유교적 기반 위에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여러 경서(經書)에 대한 질서(疾書)를 지어내고, 주자(朱子)의 『근사록』 처럼 이황의 언행록인 『이자수어(李子粹語)』를 찬저(撰著)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허목(許穆)·윤휴(尹鑴) 등의 뒤를 이어 주자에게로만 치우치는 폐풍에서 벗어나 수사학적(洙泗學的)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의 부흥을 기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부흥이 아니라 부흥이 바로 혁신을 의미하였다.
이익은 이이(李珥)와 유형원(柳馨遠)의 학풍을 존숭해, 당시의 사회실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무(世務)에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재구(材具)의 준비가 있어야만 실학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사장(詞章)·예론(禮論)에 치우치거나 주자의 집전(集傳)·장구(章句)에만 구애되는 풍조, 그리고 종래의 주자학적으로 경화된 신분관·직업관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한편,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의 사회변동과 당시의 세계관·역사의식의 확대 및 심화에 따른 자기 나라에 대한 재인식·자각에서 일어난 조선 후기 실학의 기본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이익은 불씨(佛氏)의 이단(異端), 술가(術家)의 소기(小技)와 패관잡설(稗官雜說) 등 세가지 서(書)를 혐오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학(西學)에는 학문적인 관심을 기울여, 천문(天文)·역산(曆算)·지리학과 천주교서 등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널리 열람하고 만국전도(萬國全圖)·시원경(視遠鏡)·서양화(西洋畵) 등 서양문물에 직접 접하면서 세계관·역사의식을 확대, 심화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이익으로 하여금 종래 중국 중심의 화이관(華夷觀)·성인관(聖人觀)에서 탈피해 보다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시야를 지닐 수 있게끔 하였다. 정통적인 유학자이면서도 노불(老佛)의 학이나 새로 전래된 천주교와 같은 이른바 이단에 대해서도 윤리면에서 남다른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설이나 천주교의 천당지옥설·야소부활설(耶蘇復活說)과 같은 것은 황탄한 설로 간주하였다. 종래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도 사물의 존재원리로서의 이(理)는 인정하지만 존재 자체는 기(氣)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해, 현실적으로는 존재 원리보다도 기로서의 인간존재를 보다 더 중시하였다.
문학론(文學論)도 경세실용적(經世實用的)인 면에서 교화와 풍간(諷諫)에 보다 더 많은 의의를 부여하고, 화론(畵論)과 같이 형(形)·신(神)의 일치로써 ‘사진(寫眞)’, 즉 전신사영(傳神寫影)의 원칙을 중시하였다.
시에 있어서도 마치 두보(杜甫)나 이태백(李太白) 같이 색태(色態)를 돋보이게 하여 사실적이면서도 회화적인 묘사를 귀히 여기는 한편, 황새·소리개·지렁이·개미와 같은 동물의 생태를 빌린 우의적·풍자적인 시작과 현실적인 좌절·갈등에서 오는 은일적(隱逸的)인 시작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단잡설과 훈고(訓詁)·사부(詞賦)는 물론, 이기(理氣)의 논의도 당시 사회의 현실문제에 비추어서는 아무런 실익을 주지 못한다고 보고, 그러한 의미에서 예학이나 이기설 같은 것이 당시에는 긴요하고 절실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익의 학문·사상은 내외적으로 당시 조선이 처한 사회현실로 보아 경세실용이라는 면에 중점이 두어졌다.
역사인식도 종래의 주관적이고 의리·시비위주의 인식태도를 벗어나 객관적이며 비판적·실증적인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믿었다. 문헌에 대한 충분한 고증과 비판이 없이 주관적인 억측이나 요량으로 역사를 서술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시조난생설(始祖卵生說)이나 신인하강설(神人下降說)과 같은 설화를 그대로 사실시(史實視)하지 않았다. 또 역사서술에 있어서 권선·징악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서도 안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다같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통찰, 서술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가(史家)가 무엇보다도 먼저 파악할 것은 ‘시세(時勢)’, 즉 역사적 추세이며, 시비를 앞세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익은 이른바 붕당은 쟁투(爭鬪)에서 일어나고 쟁투는 이해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이해가 절실하면 그 당이 뿌리깊고, 이해가 오래 계속되면 그 당이 견고하게 되는 것은 세(勢)가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이(利)가 하나이고 사람이 둘이면 두 당이 생기고 이가 하나인데 사람이 넷이면 네 당이 생기게 마련이나, 이(利)는 고정되어 변함이 없는데 사람만 더욱 늘어나면 십붕팔당(十朋八黨)으로 분열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양반사회와 관료제도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즉, 양반들은 실제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오로지 관작을 얻는 일만을 목표로 삼으니, 그것은 관작을 얻어 관리가 되면 부(富)가 따르기 때문이라 하였다. 따라서, 양반이라면 누구나 먼저 관리되기에만 열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정된 정치기구 밑에서 관리등용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반면에 양반의 신분은 세습되므로 그들의 수는 늘어나서 관리후보자의 수도 늘어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례적인 과거시험에 합격되는 사람의 수만을 따져도 한정된 관리자리에 그들 모두 수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가령 한 사람이 관직을 차지하는 평균연한을 30년으로 본다면, 그 30년 동안에 정기적인 과거합격자의 수만도 2, 330명이나 되며, 그 밖의 여러 가지 명목의 특별시험의 합격자까지 합치면 그 수가 훨씬 많아진다.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관직수는 500을 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관직수는 하나인데 이를 뚫고 들어가려는 사람이 8, 9명에 이르므로 분붕분당(分朋分黨)이 될 수밖에 없는 형세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질화된 붕당의 폐풍을 고치고 나라와 사회를 안정시키려면, 한편으로 인재등용의 방법을 고쳐서 문벌이나 당색 중심의 정치를 타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관료기구를 개편하는 동시에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사치한 소비생활을 하는 양반들의 생리를 고쳐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익은 인간은 타고나면서부터 관작이나 부귀를 몸에 지니고 나오는 것은 아니며, 천자로부터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애초에 빈천하기는 매양 일반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양반들도 무위도식하지 말고 농토로 돌아가 생산에 직접 종사하는 사농합일(士農合一)을 주장하였다. 양반이라도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상업에 종사해도 무방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실제로 생업에 종사하는 선비 중에서 효제(孝悌)의 정신을 갖춘 인재를 뽑아서 관리로 등용하자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문장이나 시가에만 힘쓰지 말고 사회를 바로잡아 나갈 수 있는 실효성 있는 학문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 인재 등용도 종래의 과거제도 외에 훌륭한 인재를 천거해 채용하는 공거제(貢擧制)를 아울러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과거의 정기시험도 5년에 한번씩 시행하고, 해마다 시험과목을 한가지씩 나누어 실시해 응시자가 과목마다 착실한 준비를 갖출 수 있게 하고, 조선의 역사도 과목으로 부과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신분제적인 사회구조를 고쳐서 점진적으로나마 노비의 신분을 해방시켜 사농의 합일과 같이 양천(良賤)의 합일도 아울러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이익의 사상은 근대적인 직업관·신분관에 접근했음을 나타내 준다.
이익은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덕치(德治)로써 인정(仁政)을 베풀어야 한다는 본원적인 유교정치를 지표로 삼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17세기이래 조선의 사회변동에 따른 개혁을 지향하였다.
그리하여 이익 역시 인정에는 형정(刑政)을 병행해야 한다 하였다. 이익의 전통적인 죄형법정주의사상에도 일반예방주의적인 사상이 들어 있어, 기강이 해이해진 당시의 세태에서는 오히려 형정을 준엄하게 하여 법의 위엄이 이(利)보다 무거워야 한다고 보았다.
이익은 엄정한 법의 실시는 강자·다수자 또는 지교(智巧)와 횡포에 대해 약자·소수자·겁자(怯者)·우자(愚者)를 보호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 하였다.
이익은 정치기강을 바로잡는 동시에 통치기구의 개편도 구상하였다. 즉, 중앙에서는 먼저 허구화된 의정부의 기능을 복구시켜 최고통섭자(最高統攝者)로서의 의정기능을 활성화해야 하고, 간직(諫職)을 확대시켜 언로를 넓혀야 한다고 믿었다.
인사행정도 그것을 총관하는 총장사(總章司)를 새로 설치해 문벌존중의 폐습을 버리고, 조상의 신분·경력에 관계없이 개인능력본위로 해야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수급계획에 의한 인사조처와 시보제(試補制)의 채용, 문무병용(文武竝用), 관리고과에서의 비례평가제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지방제에 있어서는 충역(忠逆)에 따른 주현승강제(州縣陞降制)와 이에 따른 도명개변제(道名改變制)를 폐기하고, 군현을 합리적으로 개편하고 감사(監司)의 직권을 강화, 견제하도록 하였다.
병제도 병역의무 대상자의 철저한 파악, 군포남징(軍布濫徵)의 폐단시정, 납포대립(納布代立)·고역제(雇役制)의 폐지, 병농일치·양천합일(良賤合一)의 향병제(鄕兵制)의 확립 등 이를테면, 근대적인 징병제에 한 걸음 접근된 구상을 하였다.
군비상(軍備上)으로도 성지수축(城池修築), 군량확보, 군기(軍器)의 제조 및 공급의 원활, 도로확장, 병거(兵車)의 개발, 군마(軍馬)의 사양(飼養) 등 군정(軍政) 전반에 걸친 쇄신을 강조하였다.
이익은 과거의 역사에 비추어 인적(隣敵)에 대한 경계·무비(武備)의 긴요성과 시의(時宜)에 적절한 외교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군비강화의 목적은 문자 그대로 국가방위에 있으며 외국침공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대교린의 외교책을 적절히 쓰는 것은 목적이 환맹(歡盟)에 있지 심복(心服)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또한 남왜북로(南倭北虜)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며, 당시에 이미 청나라의 쇠망과 일본의 조선침구의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예상하기도 하였다.
이익은 재부(財富)의 원천을 토지에 두었으므로 전지(田地)에서 힘써 일하는 데에서 재부가 창출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정치에 있어서도 전제(田制)에 관한 올바른 시책을 가장 중요한 분야로 생각하였다. 토지는 원천적으로 공전(公田), 즉 국유이며, 토지 사점(私占)의 확대는 사회악의 원천으로 여겼다.
관료에게 작위와 전지·녹봉을 주는 것은 그들 자신의 관작을 귀히 여겨서 생계를 부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실제로 관작에는 부가 겸해 따르므로 관작에 대한 욕구가 더욱 치열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권세가에 의한 대토지점유와 재부의 독점은 인간의 덕성마저 해치게 하여 사회악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이익의 경제사상의 근저에는 무농(務農)·절검(節儉)·모리작간(謀利作奸)의 방지라는 세 가지 조건이 깔려 있었다.
전화(錢貨)는 기본적으로 재화의 유통 및 매개를 위해 필요하지만, 당시 실정에 비추어 화폐의 유통이 농촌경제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사리(射利)와 사치의 풍조를 조장하고 악화(惡貨)의 유통, 고리대 행위의 폐단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전제를 개혁하는 한편, 승려·창우(倡優)·궁비(宮婢)·액속(掖屬) 등 유식자(遊食者)와 용관(冗官)을 없애 재정을 긴축시켜서 남징(濫徵)을 없애며, 관개·수리사업을 일으키고 경지개발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토지제도는 전지측량을 철저히 하여 호세가(豪勢家)에 의한 전지광점(田地廣占)을 막도록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전지점유를 제한하는 이른바 한전법(限田法)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즉 나라에서 일가(一家)의 기본수요전적을 1결(結)로 작정해 이것을 한 가호(家戶)의 영업전(永業田)으로 삼고, 그 이상의 전지를 차지한 자에게는 자유매매를 허용하되, 그 이하의 점유지에 대해서는 매매를 엄금하며, 일체의 전지매매는 관청에 보고해 관에서 전안(田案)을 비치하고 문권을 발급해 법적 보증이 되게끔 관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한다면 현재의 점유전지에 대한 감탈(減奪)이나 가수(加授)를 하지 않더라도 전지점유는 균등화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전지를 많이 차지한 자는 그들의 자손에 의해 분점(分占)되거나 혹은 불초한 자의 파락(破落)으로 말미암아 여러 세대가 지나면서 전지가 줄어 평민과 균등하게 된다.
반면 빈농의 전지매각을 금하면 호세가의 토지겸병이 불가능하고, 빈민은 지력(智力)을 다해 절검(節儉)·증식(增殖)에 노력한다면 조금씩이라도 전지를 사서 제한량까지는 늘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일세법(什一稅法)의 원칙을 엄수해 족징(族徵)·인징(隣徵)·백골징포(白骨徵布)·수포방번(收布放番) 등 종래에 자행되어 온 봉건적인 과징(過徵)·남징의 폐단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또 사치의 풍조를 없애기 위해서는 억말(抑末), 즉 상행위의 억제책을 주장하였다.
특히, 중국으로부터의 사치품수입은 국내 산출의 은화(銀貨)뿐만 아니라 미포(米布)로 바꾸어 유입되는 일본의 은정(銀錠)까지도 중국으로 유출되며, 그것은 또 국경에서 상역배(商譯輩)에 의한 밀무역을 유발한다고도 하였다.
특히, 빈민구제라는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공사간의 고리대행위로 변질된 조적(糶糴)은 전제·세제의 개편과 아울러 원래의 진휼책(賑恤策)으로 환원, 실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익의 학문사상은 먼저 언급한 바와 같이 단적으로 말한다면 탈주자학적인 수사학적 수기치인의 학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수사학에로의 복귀 내지 부흥이 아니라, 당시 조선의 사회현실에 입각한 사회개편을 주장한 개혁사상을 의미한다.
이익의 학문의 체(體)는 어디까지나 경학에 두어졌음에도 사회현실에 비추어 보다 더 긴요하고 절실한 것은 경세치용의 학으로 간주하였다.
이익은 당시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서학의 수용으로 세계관·역사의식을 확대, 심화시켜갔고, 보다 더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방식을 체득할 수가 있었다. 이익의 여러 ‘이단(異端)’에 대한 자세를 볼 때 윤리면에는 너그러웠지만, 신앙 자체는 거부적인 견해를 취하였다.
그 점에서는 새로 전래, 유포되던 천주교에 대해서도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익은 정통적인 유학자에서 벗어남이 없었다.
이익은 이교배척, 폐전론(廢錢論)·억말책(抑末策)의 제의, 남녀관 등에서 정통유학자로서의 한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사민평등의 인간관·신분관·직업관에서 근대적인 사회에로 한 걸음 다가섰음을 엿볼 수 있다.
저서로는 『성호사설』·『곽우록(藿憂錄)』·『성호선생문집』·『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사칠신편(四七新編)』·『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과 『사서삼경』·『근사록』·『심경』 등의 질서, 『이자수어』 등이 있다.
▣성호사설 서
■자서(自序)
《성호사설(星湖僿說)》은 성호옹(星湖翁)의 희필(戱筆)이다. 옹이 이를 지은 것은 무슨 뜻에서였을까? 별다른 뜻은 없다. 뜻이 없었다면 왜 이것이 생겼을까? 옹은 한가로운 사람이다. 독서의 여가를 틈타 전기(傳記)ㆍ자집(子集)ㆍ시가(詩家)ㆍ회해(詼諧)나 혹은 웃고 즐길 만하여 두고 열람할 수 있는 것을 붓가는 대로 적었더니, 많이 쌓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 비망(備忘)을 위해서 권책에 기록하게 되었는데, 뒤에 제목별 그대로 배열하고 보니, 또한 두루 열람할 수 없어 다시 문별로 분류하여 드디어 권질(卷帙)을 만들었다. 이에 이름이 없을 수 없어 그 이름을 「사설」이라 붙인 것인데, 이는 마지 못해서이지 여기에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옹은 20년 동안 경서를 연구하면서 성현들의 남긴 뜻을 보고 이해한 대로 거기에 대해 각각 설(說)을 만들었고, 또 저술을 즐겨 때에 따라 읊고 수답한 것, 그리고 서(序)ㆍ기(記)ㆍ논(論)ㆍ설(說)을 별도로 채집하였으되, 사설 따위는 차마 이 몇 가지 조항에 실리지 못할 것인즉, 쓸데없는 용잡한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속담에 “내가 먹기는 싫어도 버리기는 아깝다.”는 그 말이 이 「사설」이 생긴 이유이다.
무릇 삼대(三代)가 그 숭상함을 달리하여 문(文)에 이르러 그쳤는데, 문의 말조(末造)란 소인의 세쇄한 것들이다. 주(周) 나라 이후로 그 문이 순수한 데로 되돌아가지 못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 하민(下民)의 덕이란 그 폐단이 더욱 심해지게 마련이라, 우리 같은 소인배가 세속과 함께 흘러 움쩍하면 말이 많아지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극히 천한 분양 초개(糞壤草芥)라도, 분양은 밭에 거름하면 아름다운 곡식을 기를 수 있고, 초개는 아궁이에 때면 아름다운 반찬을 만들 수 있다. 이 글을 잘 보고 채택한다면 어찌 백에 하나라도 쓸 만한 것이 없겠는가?
▣성호사설 제1권
■도성(都城)
...내가 생각하기에는, 가령 성이 견고하고 병졸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그 성안에 사는 사람들의 8~9할이 축적된 식량이 없고 아침에 벌어 저녁에 먹고, 오늘 마련해야 내일을 살 수 있는 사정이라면 그 많은 남녀노소를 정부가 모두 식량을 공급하여 먹여 살릴 수 있겠는가? 반드시 며칠을 가지 못해서 굶주림과 아우성이 일어날 것이고, 이렇게 된다면 성문을 열고 적을 맞아들이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마침내 성을 도저히 지켜내지 못하게 된 뒤에 가서야 비로소 서울을 버릴 것을 계획한다면 임금을 적에게 그냥 내어 주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랴?
종전의 예로 보면, 난리를 만나서 임금이 피난길에 오른 때에 더러는 성문을 닫아버리어 남아 있는 백성들을 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또 아무 세력도 없는 대신을 임명하여 유도대장(留都大將)이라고 해 놓으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나라에서 내버리는데 저 병졸도 없는 외톨박이가 무슨 재주로 허물어진 판국을 수습하겠는가?
당 명황(唐明皇)이 피난길을 떠날 때에 백성들을 모두 주작교(朱雀橋)까지 건네주었으니, 지난 일은 그만두고라도 백성을 건네주었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이 백성들의 마음을 수습하게 된 것이다. 당(唐)이 망하지 아니한 것은 당시의 선심을 베푼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려 때 홍두적(紅頭賊)의 난에 공민왕(恭愍王)이 복주(福州 안동(安東)의 옛 명칭)로 피난을 가면서 경성(京城)의 부녀자와 늙고 어린 사람들을 먼저 성밖으로 내어 보냈으니, 후대에 성문을 닫고 자물통을 채운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하겠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태조(太祖)가 처음에 도성(都城)이 지나치게 큰 것을 문제삼지 않은 것은 평화시에 안팎을 방호하기 위한 것이요, 비상시에까지 결사적으로 여기를 지키고 버리지 않겠다는 계책이 아니었을 것이다.”고 하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동방인문(東方人文)
단군 시대는 원시적이어서 문화가 개척되지 못했고 천백여 년을 지나서 기자가 동쪽 지방에 봉함을 받게 되면서 암흑이 걷혀졌으나, 그것도 한강 이남까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9백여 년을 지나 삼한(三韓) 시대에 이르러 이 지역의 경계선이 모두 정해져 삼국의 영토가 정해졌고, 또 천여 년을 지나 우리 왕조가 창건되면서 문화가 바로 열렸다. 중세 이후에는 퇴계(退溪 이황 1501-1570)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南冥 조식 1501-1572)이 두류산(頭流山)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하였고 남도에서는 의(義)를 앞세워 유교의 감화와 기개를 숭상한 것이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게 되었다. 우리의 문화는 여기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나는 두 분의 후대에 출생하였다. 그런대로 도가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았으나 지금 이후로는 여울을 내려가는 배와 같이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다시 몇 겹의 파란과 웅덩이를 거치게 될지 모른다. 후대 사람들은 반드시 나를 보고 일어설 것이다.
■시헌력(時憲曆)
지금 음양가(陰陽家)들이 길흉을 점칠 때 아직도 독일(獨逸) 사람 탕약망(湯若望)의 시헌력(時憲曆)을 쓰지 않고 굳이 대통력(大統曆)을 사용한다. 저 곽 태사(郭太史)의 수시력(授時曆)이 원 세조(元世祖) 때에 나온 것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이나, 역가(曆家)에서는 소ㆍ장(消長)법을 쓰지 않은 것을 결점으로 생각한다. 대통력이란 명 태조(明太祖) 때에 원통(元統)이 만든 것인데 수시력을 만든 때와는 그 사이가 백 년이 못 되었고 순치(順治) 때에 이르러는 탕약망이 또 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또 시헌력은 하늘이 운행하는 도수는 계산하지 않고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가지고 만들었으니 이것은 인간의 역서(曆書)요 하늘의 역서가 아니니 달과 날을 가져 운명을 감정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음양가들은 모두 대통력을 따른다. 그러나 대통력에도 틀린 것이 없을 수 없음은 어찌할 것인가? 예부터 역법이 오래되면 반드시 고쳐 왔는데 시헌력이 나오고 나서는 아무도 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고 다만 대통력이라는 기성 역법에만 의거하여 1년을 24기로 평균하게 나누어 추정하고 있으니, 만일 오래되어 달과 날의 운행에 차이가 생길 적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대체 운명을 추정한다는 것이 본래 믿을 만한 근거가 없는 것이니 그 근본을 추구해 보았자 도대체 어디서부터 숫자를 시작할 것인가? 대신 최석정(崔錫鼎)이 역관(曆官)에게 명하여 시헌력 가운데서 24기의 시간의 장단(長短)과 분수(分數)를 표시하게 했는데, 이것은 절기의 변천이 본래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겨울과 여름의 날수를 생각해 보아도 서로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여국(女國)
...그 여국은 북호(北胡)의 서쪽으로서 아세아(亞細亞)와 구라파(歐羅巴) 중앙에 끼여 있을 것이니, 생각건대 본래 여자가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풍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듯하다. 그러나 남녀의 정욕은 선천적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이며, 이미 생식의 길을 열어 놓았으니 마침내는 막을 수 없었을 것인데, 옛적에는 있었다가 지금은 없어졌다는 말이 믿을 만하다. 우리나라도 그 지역의 유주와 가까워서 본시 여자가 많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고려 충렬왕 때 대부경(大府卿) 박유(朴楡)가 상소하기를, “우리나라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계급이 높고 낮은 구별이 없이 아내를 한 명으로 제한하였고 아들이 없는 사람도 감히 첩을 두지 못하는데, 외국인으로서 입국하여 사는 자들에게는 제한 없이 아내를 얻게 하므로 신(臣)은 인물이 모두 북쪽으로 넘어갈까 염려되니, 관리들에게는 첩을 두도록 하되 그 계급에 따라서 그 수를 조정하여 일반 사람에게도 아내와 첩을 한 명씩 두게 하고 첩들이 낳은 자식도 나라에 벼슬할 수 있기를 적자(嫡子)와 다름없이 한다면 배우자를 잃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요, 사람도 흘러나가지 아니하여 인구가 날로 늘어날 것이다.”고 하자, 여자들이 이 말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당시에 한 대신이 그 아내가 무서워 그 건의를 무시해 버렸다고 한다. 대부가 처첩을 두는 것은 법에서 금하지 않은 것인데 아마도 그때에 왕이 원(元) 나라 공주에게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듯하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서선(徐選)이 법을 세운 후부터 개가(改嫁)한 여자의 자손에 대하여 앞길을 막아 버렸다. 그러므로 양반집에서 과부가 되면 모두 죽을 때까지 수절하였고 천한 사람들도 이 풍속을 따라 개가하지 아니하였는데, 남자는 첩을 많이 두어도 금하지 아니하였으니 거의 사리에 맞는 듯하다. 또 듣건대, 경상도와 전라도 해변 지역에는 남편 없는 여자로서 나그네가 요구하면 쉽사리 얻을 수 있다 하며, 제주도에는 한 사람이 아내를 셋 내지 다섯까지 두는 사람이 있다 하니, 이것도 물[澤]이 가까운 곳에서는 여자가 많다는 증거이다.
■풍기유전(風氣流傳)
풍속과 습관의 전통은 그 지방 유풍만이 아니라 왔다갔다 하며 옮겨 거주하는 데 따라 그 습관이 형성된다. 우리나라의 영남 지방은 진(秦) 나라 백성이 처음으로 창설한 곳이다. 진 나라는 본래 문왕과 무왕이 터전이므로 지금 영남은 진 나라의 풍속과 매우 비슷하다. 소 동파(蘇東坡)의 원경루기(遠景樓記)에서도 증명이 된다.
이 밖에 경주의 원전(轅田)은 분명히 상앙(商鞅)이 농지의 구획선을 개척한 제도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식해서 이것을 모른다. 개성(開城)의 삿갓[坮笠]과 타래머리[蠆髮]는 은(殷) 나라 백성이 낙양(洛陽)에 주거할 때의 풍속인데 기자(箕子)를 따라서 우리나라에 들어 온 듯하다. 최근으로 말하면 북방 사람들이 제주도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제주도 사람들이 거칠고 사나운데다가 그 사투리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개성의 향교(鄕校)지기로서 성균관에 나와 있는 자의 곡(哭)소리까지도 변하지 않았으니, 마치 제주산 망아지와 내륙산 망아지가 서로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발해(渤海)가 망하고 나서 그 백성들이 모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글안이 망했을 때도 그 백성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이것을 글안장(契丹場)이라 하므로 서쪽 사람들은 대체로 건장하고 힘쓰기를 좋아하여 옛날 풍속이 없어지지 않았다. 충렬왕 때에 원 나라에서 만자군(蠻子軍) 1만 4천 명을 보내어 해주(海州)ㆍ염주(鹽州)ㆍ백주(白州)의 3개 주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만자군은 남만 지방의 해귀족(海鬼族)이다. 지금 무과 시험에서 굳센 활을 당기어 먼 데까지 쏘는데 거의 황해도에서 독차지하여 서울 사람으로서는 상대하지 못하니 아마 그들의 후손인 듯하다. 임진왜란에 유정(劉綎)이 우리나라의 군사를 많이 데리고 갔었고 그 뒤에 백사(白沙) 이상(李相 이항복(李恒福))이 그 군사들을 만났는데, 남쪽 북쪽에서 여러 번 전투에 참가하여 어려운 고비를 많이 겪었던 그들은, “달자(㺚子 말하기를,)는 상대하기 쉽고 해귀족은 약간 힘들지만, 왜놈처럼 강한 것은 없다.”고 하였으니, 왜인들은 그처럼 강한데다가 새부리총[鳥嘴銃]이라는 무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지금 해변의 여러 고을에는 왜인들로서 돌아가지 않고 거주하는 자들이 매우 많아 명칭을 향화(向化)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혼인도 하지 않고 따로 부락을 형성하여 그 수가 점점 많아졌다. 조정에서는 이를 예조(禮曹)에 맡겨 아전들로 하여금 그 세금만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비록 그곳에 정착해 있으나 속으로는 풍속을 달리하고 있으므로 내가 알기에는, 만일 외적이 들어올 때에는 그들은 반드시 기회를 보아 배반할 것이 뻔하니, 하루속히 단안을 내려야 할 것이다.
즉 안정된 시기에 그들을 우리 국적에 편입시켜 일상생활에 일반 백성들과 같이 혜택을 누리게 한다면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에 그들은 모두 강한 군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당면한 급무이다.
■두만쟁계(豆滿爭界)
북방의 국경은 두만강으로 경계선을 삼고 있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 윤관(尹瓘)의 비(碑)가 선춘령(先春嶺)에 있고 선춘령은 두만강 북쪽 칠백리 밖에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지난번에 국경선을 정할 때 두만강의 원류(源流)만을 찾았는지 알 수 없다. 두만이란 것은 바다로 들어가는 위치를 말한 것이니, 토문(土門)이라고 하는 곳이 바로 여기인데, 어음이 비슷해서 와전된 것이다.
백두산의 물이 이리로 모여드는데, 만일 토문에서 여러 물의 근원을 따라 올라간다면 지금 강 북쪽에 있는 지역은 모두 우리의 소유이며 선춘령도 그 안에 포함된다. 말하는 사람들은, 경계선을 논쟁할 때에 세밀히 따지지 못한 것을 탓하는데 그 말도 옳다.
그러나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것을 갑자기 회수한다 하여 찾아질 바가 아니며, 방어와 수호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장래에 큰 걱정거리가 되므로 반드시 영토를 넓히는 것만을 능사로 삼을 것은 아니다. 지금 중국과의 관계가 잘되고 있어 국경에 걱정이 없는 터에 다만 욕심만 부리고 문제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옛적에 한 광무(漢光武)는 옥문관(玉門關)을 폐쇄하고 서역(西域)에서 보내는 인질을 사절하였으며, 송 태조는 도끼로 대도하(大渡河)를 그으면서, “이 밖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원대한 생각이 있는 처사라고 하였다. 토지만 넓은 것이 영구히 안정된 방법이 아니므로 서혜비(徐惠妃)의 간한 글이 사실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우리의 땅덩어리는 한 곳도 건드리지 못한다고 하면서 사람의 말을 거절한 양 무제(梁武帝)가 잘못된 것이다.
▣성호사설 제2권
■우(雨)
비에 대한 학설은 아직까지 완전한 연구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요컨대 이는 추위와 더위가 서로 충돌하여 생기는 것임에는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허공에서 어디로부터 이렇게 많은 물이 내려오겠는가? 술을 달여서 이슬이 내리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대체로 양은 덥고 음은 차며, 양은 부드럽고 음은 단단하며, 양은 퍼지고 음은 막힌다. 더워서 습기가 올라가면 구름이 엉기고 그 기운은 반드시 차다.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생긴다.
그러므로 냉기 가운데에 열이 있다. 이는 음과 양이 서로 사명을 이루는 것이다. 두 가지가 서로 대등하여 발산되거나 새어나가지 못하면 곧 비가 된다. 많고 적은 것은 무게의 분량에 의한다. 음은 막히고 양은 솟아오르는데 이것을 결렬시키며 충격시키는 것이 천둥과 번개다. 혹 음만 있고 양이 내부에 간직되지 않았거나 또는 음이 응결되었더라도 단단하지 못하고 안팎으로 새어나가는 것은 비를 이루지 못한다. 또 혹은 용(龍)이 성이 나서 싸우면 비가 물처럼 쏟아지기도 하나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을 듯하다.
사람이 열병을 앓을 때에 냉한 약을 쓰면 땀을 뻘뻘 흘린다. 용은 순수한 야성의 동물이다. 무거운 구름 속에 싸여서 음이 응결되면 반드시 싸울 것이니, 양이 안에서 솟아오르면 그 힘이 서로 부딪칠 것이므로 거기에서 많은 물이 쏟아지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눈도 마찬가지다. 지금 한 간 방안에서도 외부가 차고 내부가 더우면 벽에 성에가 가득히 서린다. 이것을 가지고도 서로 추측할 수 있다.
■조선지방(朝鮮地方)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나올 때에 홍범(洪範)의 원리를 가르쳐 윤리를 바로잡아 놓았으니, 그 공적이 매우 컸다. 그러므로 자작(子爵)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 나라가 쇠하고 연(燕)이 왕이라는 칭호를 쓰고 동쪽으로 토지를 경략하려는 것을 보고, 자기도 왕이라 자칭하고 군대를 일으켜 연을 토벌하고 주 나라를 높이려 했는데, 대부인 예(禮)가 말려서 그만두었다는 말이 있으니, 벌써 이보다 앞서 후국(侯國)이 되었고, 조선이 왕이라 칭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후손이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燕)에서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어 그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반한(滿潘汗)까지를 경계로 삼으니 조선은 마침내 쇠약해졌다.
그런즉 당초에 봉한 지역은 사실상 연 나라와 접근해 있었으니, 지금 만리장성 밖으로 요하(遼河)와 심(瀋)의 지역이 모두 영토 안에 들었던 것이다. 만반한(滿潘汗)은 어디를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연 나라의 동쪽에는 이렇게 큰 땅이 없다. 지금 의주(義州)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가 1천 4백 리에 불과하니, 생각건대 만(滿)은 지금의 만주(滿州)로 청(淸)의 왕업이 시작된 곳이요, 반(潘)은 심(瀋)의 잘못인 듯하다. 곧 우리나라의 강계(江界) 이북과 백두산 큰 줄기의 서쪽이 모두 연(燕)의 통치하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연과 패수(浿水)를 국경으로 삼았다 했으니, 여기서 패(浿)는 취(溴)의 잘못으로 곧 압록강(鴨綠江)인 듯하다.
위만(衛滿)이 취수(溴水)를 건너와서 위와 아래의 방어선을 모두 소유하였으니 이곳은 곧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옛 영토이며 남으로는 삼한(三韓)과 국경이 되었다. 이것은 조선 지방의 연혁이다. 뒤에 고구려가 또 요하[遼]와 심수[瀋]의 지역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그것은 옛 터전을 수복한 것이었는데 그 말기에 와서 발해(渤海)가 이곳을 점령하였다가 그대로 요(遼)에 편입되었고 왕 태조(王太祖)는 뜻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해랑도(海浪島)
근세에 바닷가에서 고기잡이하는 해랑선(海浪船)이 예사로 출몰하여 그 수를 알 수 없다. 지난번에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었는데 쌀을 싣고 온 배가 와서 “황제의 명령이다.” 하며, “대관이 직접 나와서 물건과 바꾸어가라.” 하여 가서 물어보면 가진 것이 없었다.
이것은 반드시 이 가운데의 무뢰배들이 이곳의 사정에 정통하고 해로에 숙달한 자가 이렇게 농락을 부렸을 것이다.
해랑(海浪)은 섬이름인데, 중국의 동북해 가운데에 있다. 명 나라 말기에 정지룡(鄭芝龍)의 무리들이 섬에 있는 도둑과 연결하여 한 세력을 형성하였고, 그의 아들인 성공(成功)과 손자인 경(經)이 바다에 들어가자 우리나라에서까지 이를 걱정하게 되었으며 뜬소문으로 소동이 있을 적마다 반란자의 문초 가운데에서까지 말이 나왔다.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정경(鄭經)이 바닷섬을 점령한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의 해랑선이라는 것은 그들의 후손이 아님을 어떻게 알겠는가?
연산군 6년에 바다에 나갔던 사람이 해랑도에 기착했는데 섬 안에 거주하는 사람은 대개 우리나라에서 도망쳐서 들어간 자들로 자손들이 불어서 차츰 번성해가고 있었다. 이 사실을 중국에 보고하고 이점(李玷)ㆍ전림(田霖)ㆍ조원기(趙元紀) 등을 보내어 요동(遼東) 사람 64명을 색출하여 사람을 시켜 돌려보내고, 우리나라 사람 48명도 데려왔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나라에 보고하기를 선왕 때에 전림(田霖)에게 명하여 해랑도를 토벌하고 돌아올 때에 개성부(開城府)에서 일등의 음악을 내려서 위로연을 베풀어 주도록 명하였다고 한 것은 곧 이 사실을 지적한 것이니 해랑도의 얘기는 오늘에 처음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일본낙지(日本樂地)
일본 역사에 “예로부터 외적의 침해를 받지 않았는데, 다만 원(元)나라 때에 많은 군대가 쳐들어와서 자칫하면 멸망을 당할 뻔했는데 다행히 큰 바람이 불어서 원 나라의 배가 모조리 침몰됨을 힘입었다.” 했다.
고려 충렬왕 때에 김방경(金方慶) 등이 몽고병과 만병(蠻兵)과 합세하여 일기도(日岐島 : 나가사키에 있는 이키섬)에 가서 3백여 명을 죽이고 다시 싸우다가 패전하였고 큰 바람을 만나서 전선(戰船) 3천 5백 척과 만병 10만 명이 모두 물에 빠져죽었다. 《원사(元史)》에도, “평호도(平壺島)에까지 가서 구풍(颶風)이 불어서 배가 파선되고 여러 장수는 모두 달아나고 군대 10여 만 명을 섬에 버려두었는데 나무를 베어가지고 배를 만들어서 돌아오려 했으나 일본이 습격하여 거의 모두가 죽음을 당하고 남만 사람 1만여 명을 남겨서 노예로 삼았다.” 한 것이 곧 이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우리 왕조에 와서 이종무(李從茂) 등이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하여 공적을 세웠다. 하지만 일기나 대마는 모두 왜의 바깥 섬이니 그들의 변경 땅을 한 번이라도 들어간 적이 있었는가?
이로 말한다면 살기 좋은 땅이라 할 수 있으나, 면적이 넓고 그 국내에서도 군대를 끼고 서로 다투고 있으니 마침내는 통일되는 시기에 가서야 비로소 걱정이 없어질 것이다.
■여진(女眞)
말갈(靺鞨)이 여진(女眞)으로 명칭을 고쳐서 동쪽에 가까운 지방은 동여진(東女眞), 서쪽에 가까운 지방은 서여진(西女眞)이라 하였다. 금(金) 나라의 목조(穆祖)인 영가(盈歌)는 서여진이었는데 경(鏡)과 박(泊)의 중간지점에서 일어났다.
윤관(尹瓘)이 구성(九城)을 설치할 때에 여진의 요불(褭弗)과 사현(史顯)이 우리나라에 와서 “옛적에 우리의 태조(太祖)인 영가가 말하기를 ‘우리의 선조는 귀국에서 나왔다.’고 했으니, 그 자손의 대에 와서 귀국으로 귀속하는 것이 당연하며 또 지금의 태사(太師)인 오아속(烏雅束)도 귀국을 ‘부모의 나라’라고 하였다.” 했다. 이것은 평주(平州) 출신의 승려인 금준(今俊)이 여진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선조가 된 것이다.
어떤 이는, “승려 전행(全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여진의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 고을(古乙)을 낳았는데 이것이 영가의 선조다.” 했다.
이때에 여진은 고려에 항복하고 귀속되어 정성으로 앙모하였고 완안(完顔)이라고 성을 붙였다. 《감주집(弇州集)》에 보면 “완안은 곧 왕(王)의 성(姓)이다.” 하였으니, 아마 고려의 성을 따른 듯하다. 《여지승람》에는, 평주(平州)를 평산(平山)이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인 듯하다.
지금 영흥(永興)에 평주성의 유지가 있으며 옛적부터 큰 성이었다. 우리 왕조에 와서 영흥이라고 칭호를 고쳤는데 아마도 이곳인 듯하다.
우리나라에 또 북여진(北女眞)이 있는데 이는 흑수부(黑水部)의 생여진(生女眞)인 듯하며, 그쪽에 철리국(鐵利國)이라는 것이 항상 여진을 통하여 그 나라의 특산물을 바쳐 왔으니, 철리는 또 반드시 북여진 밖에 있었을 것이다. 우리 왕조 때에 동여진의 종족으로 오디개[兀狄介]ㆍ오랑캐[兀良介]ㆍ니마거(尼麻車) 등의 칭호가 있었으나 이들은 서여진족처럼 강대하지 못하였다.
■가도(椵島)
가도(椵島)는 가죽섬[皮島]이다. 가수(椵樹)는 우리 말의, 가죽나무다. 지금은 삼화현(三和縣)에 속하며 50리 밖의 바닷속에 있다. 고려 원종(元宗) 10년에 임연(林衍)이 왕을 쫓아내고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웠을 때에 최탄(崔坦)ㆍ한신(韓愼)ㆍ이연령(李延齡)ㆍ계문비(桂文庇)ㆍ현효철(玄孝哲) 등이 임연을 토벌한다는 명목 아래 무리들을 모집하여 들어가서 섬의 병영을 점령하고 분사어사(分司御史) 심원준(沈元濬)과 감창(監倉) 박수혁(朴守奕)과 경별초(京別抄) 등을 죽이고 몽고에 가서 허위로 보고하기를, “고려에서 북계(北界) 모든 성에 있는 사람을 모조리 죽이려 한다.” 하였다.
몽고의 황제는 그에게 금패(金牌)를 주고 조서를 내리어 그곳을 몽고에 편입시키고 명칭을 동녕부(東寧府)라 하고 자비령(慈悲嶺)을 경계선으로 확정하고 탄(坦)을 총관(總管)에 임명하고 군대 3천 명을 서경(西京)에 보냈다. 뒤에 왕이 복위하여 여러 성을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16년에 이르러 황제는 동녕부를 폐지하고 서북 지방의 여러 성을 모두 반환하고 탄은 처형하였다.
이곳은 또 근세에 모문룡(毛文龍)이 점령했던 땅이다. 고려왕조부터 병영을 설치했다가 반란군들에게 점거된 곳이다. 지금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그 전말을 기술했어야 할 터인데도 빠져 있기 때문에 일부러 수록한다.
■일만이천봉(一萬二千峯)
이가정(李稼亭 가정은 이곡(穀)의 호)이 지은 장안사(長安寺) 비문(碑文)에, “금강산(金剛山)의 뛰어난 경치는 다만 천하에 이름이 났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경(佛經)에도 기록되었으니, 《화엄경(華嚴經)》에 말한, ‘동북쪽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으니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1만 2천의 보살로 더불어 항상 《반야경(般若經)》을 설법(說法)했다.’ 한 그것이 바로 이곳이다.” 하였으니, 1만 2천이라는 숫자는 곧 보살의 숫자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1만 2천 봉우리가 있다고 하여 그대로 인습하기 때문에 변경할 수가 없다. 나도 일찍이 이 산을 구경했는데 봉우리가 비록 많다고는 하지만 어찌 그렇게 많을 수야 있겠는가?
나의 생각으로는, 옛날 사람들은 너무 어리석고 순진하여 1만 2천이라는 글자만을 보고 그저 봉우리의 숫자거니 여기며, 이 비문(碑文)은 자세히 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하는 말이니 가소로운 일이다.
이 산의 본 이름은 풍악(楓嶽)이었는데 중들이 불경의 말을 따다가 고의로 금강이란 이름을 붙였고, 또 불경에 “동해(東海) 가운데까지는 8만 유순(由旬)이 된다.”는 말이 있어서, 하윤(河崙)이 풍악을 지목한 것이 아님을 변명해 놓았다.
내가 상고해 보건대 《만국전도(萬國全圖)》에, “지구(地球)의 둘레가 9만 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으니, 어찌 또 8만 유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불씨(佛氏)의 과장하는 말에 불과한 것이니 반드시 증거가 되어 믿을 것이 못 된다.
■지구(地球)
지구 아래 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말은 서양(西洋) 사람들에 의하여 비로소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근세(近世)에 어떤 사람이 이시언(李時言)을 천거하면서, “훌륭한 장재(將才)가 있다.” 하니, 김하담(金荷潭 하담은 호. 이름은 시양(時讓))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아무개는 서양의 학설을 믿는다.’ 하니, 이 사람은 서양 학설의 잘못된 줄도 모르거든 하물며 적진을 엿보고 적의 행동을 제지할 수 있느냐?” 하였다.
하담은 본래 밝고 슬기로워서 그의 계획대로 들어맞는 일이 많다고 이름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하여 그렇게도 모르니 그의 학식이 깊지 못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참판(參判) 김시진(金始振)도 지구 아래 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말을 몹시 그르게 여겨서 남극관(南克寬)이 글을 지어 변명하기를, “여기에 계란(鷄卵) 한 개가 있는데 개미가 계란 껍데기에 올라가 두루 돌아다녀도 떨어지지 않으니 사람이 지면에서 사는 것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랴?” 하였다.
나는 남극관이 김시진을 나무란 것은 잘못된 말로 잘못을 공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미가 계란 껍질에서 돌아다녀도 떨어지지 않는 것은 개미의 발이 잘 달라붙는 때문이다. 여기에 발이 없는 벌레가 있어서 벽에 기어올라가다가 꿈틀하면 당장 떨어지고 마니 이런 비유를 가지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깨우쳐 줄 것인가?
이 문제는 마땅히 지심론(地心論)은 따라야 할 것이다. 일점(一點)의 지심에는 상하 사방이 모두 안으로 향하여 있어서 큰 지구가 중앙에 달려 있음을 볼 수 있으니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은 추측해 알 수 있는 것이다.
계란은 지구 한쪽에 붙어 있으니 계란도 지구를 뜨기만 하면 당장 떨어지고 만다. 그렇다면 계란 밑에도 개미가 기어다닐 수 있겠는가?
■삼한 금마(三韓金馬)
최치원(崔致遠)은, “마한이 고구려가 되고, 변한이 백제가 되었으며, 진한이 신라가 되었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사실이 그렇지 않다고 의심한다. 그러나 최치원은 당시의 사람인데, 어찌 이같은 어긋난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후한서》에, “변한은 남쪽에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후에 신라가 실로 진한의 지역에 근거했다.” 하니 지금의 경상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진주 등 여덟 고을은 백제의 땅이었으며, 또한 남변(南邊)이 있으니 이것이 아마 변한의 지역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진한과 변한이 처음에 다 마한의 동쪽에 있었다 하니 경계는 경상도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며, 백제가 마한을 병탄하므로 변한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었다고 한다면, 변한은 비록 처음에는 신라에 부속되었으나 나중에는 백제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최치원이 어찌, “변한이 백제가 되었다.”고 하였겠는가 ?
권양촌(權陽村)은 《신당서》를 인용하여, “변한은 낙랑군(樂浪郡)에 있었다.” 했으나, 대개 당(唐) 나라가 백제를 멸하여 신라에 병합시키고 낙랑왕(樂浪王)을 봉하였은즉 낙랑이라는 것은 한(漢)의 낙랑이 아닐 것이다.
마한이라는 것은 기준(箕準)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디 고구려 땅에 살다가 후에 비록 남쪽으로 달아났으나, 고구려를 가리켜 마한의 옛 땅이라고 하였으니 아마 그랬을 것 같다.
백제는 마한의 경내에서 일어났으며, 마한이 통할하던 50여 나라에 원래 백제국(伯濟國)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아마도 맨처음 이 땅에 기반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우며, 후세 사람들이, “십제(十濟)로부터 백제(伯濟)에 이른 것이다.”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마한이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하고 진훤이 또한 백제라 하며 금마산(金馬山)에서 개국한 것은 어째서인가? 나는 생각하건대, 옛날에는 반도[東方]를 반으로 나누어 지금의 서울[圻甸] 이북을 조선이라 하고, 이남을 한(韓)이라고 했다 하니, 한의 땅을 반으로 나누어 동쪽은 진한ㆍ변한이 되고 서쪽은 마한이 되었으며, 마한의 땅을 통틀어 금마(金馬)라 했으니, 기준의 익산(益山)이나 온조의 직산(稷山)이, 어느 것이 금마의 고을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말한다면 문창후(文昌侯)와, 진훤의 말도 잘못된 점이 보이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은 전적들이 이미 없어진 뒤를 따라 희미한 것에 의거하여 추단(推斷)하면서 오히려 당시에 눈으로 본 사람의 말을 의심하니, 어찌 위박(衛朴)이 자기는 눈도 없으면서 천하가 본 것을 잘못 보았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성호사설 제3권
■조선사군(朝鮮四郡)
한(漢) 나라가 조선(朝鮮) 땅을 빼앗아 사군(四郡)을 만들었으니, 사군은 본디 우리나라에 속한 것이다. 위(魏) 나라의 관구검(毌丘儉)이 현도(玄菟)에서 나와 고구려를 침범하자 왕이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위 나라 장수가 숙신(肅愼) 남쪽 경계까지 추격하여 돌에 공적을 새겨 기록했다. 또 환도(丸都)를 무찌르고, 불내성(不耐城)에다 공적을 새기고서 낙랑으로부터 물러갔다. 환도는 국내성(國內城)인데,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할 수 없었으므로 마침내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겼으니, 평양은 왕검성(王儉城)이다. 환도는 압록강 서쪽에 있는데, 현도로부터 나와 낙랑으로부터 물러갔으니, 두 군(郡)이 요동(遼東)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고(通考)》에, “조선은 진번(眞番)을 역속(役屬 복속)시켰다.” 했으며, 또, “우거(右渠)가 들어와 천자(天子)께 뵈오려 하면서도 일찍이 진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했으니 진번이 한(漢) 나라로 들어가는 경계(境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隋) 나라의 동정(東征)에 있어,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오고,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오고,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遼東道)로 나오고,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沃沮道)로 나오고,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玄菟道)로 나오고,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나오고,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碣石道)로 나오고,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遂城道)로 나오고,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增地道)로 나와서 모두 압록수(鴨綠水 압록강) 서쪽에 모였다. 《통고(通考)》에 본다면, 수성 증지는 낙랑군의 속현(屬縣)이고, 양평은 요동군(遼東郡)에 속했으니, 이는 모두 압록 이동(以東)과 상관없다. 다만 임둔(臨屯)은 기록에 보이는 것이 없다.
내 생각으로 미루어 본다면 낙랑군치(樂浪郡治)는 조선현(朝鮮縣)이니 그 읍거(邑居)가 비록 요동에 있었지만, 평양에서 서쪽 지방은 모두 그 속현(屬縣)이었다. 현도군치 옥저성(沃沮城)은 설세웅이 나온 길로서 반드시 그 이름이 있지만, 우리나라 동북(東北)의 옥저는 아니다. 진번군치 삽현(霅縣)은 수(隋) 나라 군대의 동쪽으로 나온 아홉 길 안에 들어 있지 않으니 요하(遼河)의 서쪽으로서 중국 본토에 가장 가까운 곳이다.
한 소제(漢昭帝) 때에 이르러 사군(四郡)을 합쳐서 둘로 만들었는데, 평나(平那)가 있을 뿐 진번이 없으니, 진번이 바로 평나군(平那郡)인 것이다. 오직 임둔군치인 동이현(東暆縣)을 우리나라 사람이 지금의 강릉부(江陵府)로 지칭(指稱)하고 있으나 반드시 확실하다고 볼 수 없다. 이 한 부(府)는 패강(浿江)의 동남쪽 지방과 강원도 내부 예맥(濊貊)의 서쪽 지방이 모두였으니, 혹시 당시에 강릉에 수부(首府)를 두었는지도 모른다.한 소제 때 사군을 고쳐 이부(二府)로 만들어서 임둔을 낙랑에 합쳤으니 이부가 된 후로는 압록강 밖과 임둔 지방을 통틀어서 낙랑이라고 일컬었다. 지금의 평안ㆍ강원 두 도(道)가 모두 낙랑의 지경(地鏡) 안이었다.
삼국 시대(三國時代)에 이르러, 평안도가 고구려에게 점령당해 낙랑주(樂浪主)는 백제(百濟)의 동쪽, 예맥(濊貊)의 서쪽으로 물러가 있게 되니, 그 압록강 서쪽에 있던 땅은 중국의 군현으로 들어갔으므로 태수(太守)라 일컫고, 주(主)라 일컫지 않은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밝힐 수 있는가? 처음에 백제왕이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다.” 했으며, 또 예맥은 동쪽은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쪽은 낙랑에 이르렀으니, 예맥과 백제 두 나라 틈에 끼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고구려에 쫓겨서 강원도에 물러와 있을 때이다.
그 후 고구려 태조왕(太祖王) 때 중국의 요동을 습격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약탈해 가지고 돌아왔다.동천왕(東川王) 때에 위(魏) 나라의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함께 현도(玄菟)로부터 나와 고구려를 침입했는데, 이는 고구려에게 멸망당하여 압록강 밖으로 도망해 가 있을 때의 일이다. 다만 이때에 백제가 낙랑의 공허(空虛)함을 틈타 이를 습격하여 변경(邊境)의 백성을 빼앗아갔기 때문에 유무가 노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의 지경을 넘어서 요동을 습격했을 리는 없었던 것 같다. 내 생각으로는, 이 전역(戰役)은 낙랑이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하여 관구검을 이끌고 와서 공격하니 고구려의 왕이 바닷가로 달아났으므로 이에 낙랑이 그 옛땅을 회복하게 되고 백제가 그 공허함을 틈타서 백성을 약탈해 간 것일 것이다. 여기에서 ‘낙랑’이라고 말한 것은 여왕(麗王)이 멀리 달아나고, 옛 주인이 와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여왕이 유유(紐由)의 계교를 써서 위 나라 군대를 격퇴하고 그 나라를 회복하니, 유무도 또한 요동의 고을로 돌아갔다. 또 생각건대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했을 때는 한(漢) 나라 건무(建武) 13년이다. 건무 20년에 이르러 한 나라에서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서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만들었으니 살수(薩水) 이북이 모두 한 나라에 속했다. 이때에 고구려가 비록 낙랑의 터전을 차지했었지만, 국도는 아직도 압록강 서쪽에 있었으며, 낙랑주(樂浪主)가 비록 요동에 도망가 있어서 옛 땅과 격절되고, 또 고구려가 그 사이에 가로막고 있었지만, 한 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서 영지(領地)를 회복했던 것이다. 이 전역은 낙랑의 옛 땅을 친 것이고, 낙랑주를 친 것은 아니니 실지에 있어 고구려를 친 것이다. 낙랑은 이미 멸망한 지 오래인데, 또 누구를 치겠는가? 일일이 교감하여 귀결을 밝힌다. 후일에 태사씨(太史氏)로서 낙랑세가(樂浪世家)를 짓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여기에서 취할 것이 있을 것이다. 살수는 곧 청천강(淸川江)이다.
※조선사군(朝鮮四郡) : 서기전 108년 한 무제(漢武帝)가 위만 조선(衛滿朝鮮)을 멸하고, 낙랑(樂浪)ㆍ임둔(臨屯)ㆍ현도(玄菟)ㆍ진번(眞番)의 사군(四郡)을 두었음. 성호(星湖)는 조선사군(朝鮮四郡)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지만, 흔히 한사군(漢四郡)이라는 말로 표현됨. 사군 설치 당초의 위치 및 강역(疆域)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음. 여기에서 성호(星湖)는 역사의 기록을 고증(考證)으로 들고, 또 개인적인 견해(見解)도 덧붙여서 사군의 위치와 그 변천을 논했음.
■북도로정(北道路徑)
북도(北道)의 대로(大路)로서 지름길로 저들의 지경에 도달하는 길이 6~7갈래 있다. 하나는 경원(慶源)ㆍ경흥(慶興)의 사이로부터 들어가는 산이니, 높은 산이나 큰 언덕의 막힘이 없다. 하나는 회령(會寧)에서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마운두성(劘雲頭城)으로 해서 부령(富寧)에 도달하는 것이고, 하나는 장백산(長白山) 줄기의 남쪽으로 나무와 돌 사이를 따라 무산(茂山)에 도달하는 것이고, 하나는 명천(明川)의 서곡(西谷)에서 곧장 성(城) 밑에 도달하는 것이고, 하나는 영흥(永興)의 요덕리(了德里)에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는 별해(別害)에서부터 함흥(咸興)에 도달하는 것이다. ‘적이’ 요덕리로 나온다면 정평(定平) 이북의 길이 끊어지고, 별해로 나오면 함흥 이북의 길이 끊어지며, 명천 및 장백산 밑으로 나온다면 육진(六鎭)의 길이 끊어진다. 유몽인(柳夢寅)의 안변책(安邊策)에 보이는 것이 이와 같다.
백두산 남쪽에서 두만ㆍ압록의 두 강(江)을 가지고 두 나라의 경계로 삼으며, 두만강은 동북으로 흐르고, 압록강은 서남으로 흐른다. 대령(大嶺)의 맥(脈)이 두 강의 근원으로부터 서남으로 달려서 압록강과 병행하다가 철령(鐵嶺)에 이르러, 꺾이어 돌아서 남쪽으로 달리어, 이것이 북도의 경계가 되며, 군읍(郡邑)이 안변(安邊) 무산(茂山)에 이르기까지 좌우의 산과 바다가 마치 구슬을 꿴 것 같다. 오직 삼수(三水)ㆍ갑산(甲山)은 함흥의 서북쪽에 있어서 물이 모두 압록강으로 흘러들어가며, 서쪽으로 폐사군(廢四郡)과 서로 접하여 저들의 지경과 극히 가깝다. 요덕(了德)과 별해(別害)가 이곳에 있어 함흥ㆍ영흥과 비록 대령의 맥을 격하고 있지만, 길이 서로 통함이 있다. 저 나라 변방의 백성이 폐사군에서 횡행하고 있으니, 삼수ㆍ갑산을 거쳐서 함흥에 도달할 것이 틀림없다. 나라를 경영하는 자가 마땅히 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백두산 정계비 :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에 세운 비석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을 표시한 경계비이다. 정상이 아닌 해발 2,2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의 압록과 동쪽의 토문을 분수령으로 삼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비석은 인적이 드문 곳에 설치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잊혔다. 그 후에 러시아와 일본 등이 이 일대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청나라와 조선도 비석의 내용을 다시 관찰하게 되었다. 양측은 1883년 비석을 다시 조사했는데, 비석 내용의 ‘토문’이라는 말을 놓고 조선과 청나라는 의견이 엇갈렸다.
우리는 만주 쑹화 강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했고, 청나라는 두만강이라고 주장해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백두산 북쪽 지역에 우리 민족이 많이 이주해 있어 현실적으로는 조선 영토로 인정이 되었다. 1909년 일제는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맺어 남만주의 안동-봉천 간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버렸다. 비석도 1931년 만주 사변 당시 일제가 철거해 버렸다.
■벽골제(碧骨堤)
반계(磻溪) 선생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호남(湖南)에서 만약 황등(黃登)ㆍ벽골(碧骨)ㆍ눌제(訥堤)를 수축한다면 노령(蘆嶺) 밑으로는 흉년이 없을 것이다.” 했다. 셋 중에서도 벽골지가 그 가장 큰 것이다. 신라 흘해왕(訖解王) 21년에 처음으로 축조(築造)했고, 고려 시대에 이를 늘려서 수축했는데, 길이가 6만 8백여 척에 둘레가 7만 7천여 보(步)였으며, 다섯 도랑이 모두 걸치었으니, 전지(田地) 9천 8백 40결(結)에 물을 대었다. 그 후 인종(仁宗)이 병이 들자 무당의 말을 듣고 내시(內侍)를 보내서 터뜨려버렸다. 본조(本朝)에서 비록 중수(重修)했으나, 마침내 회복할 수 없었으며, 오늘날에는 이미 폐기되었다. 인종은 천명(天命)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토지에서 나는 곡식은 백성의 생명이 매어 있는 것인데, 그 하찮은 병으로 인해서 생령(生靈)의 큰 이익을 버렸으니 하늘이 돕겠는가? 아 슬프도다.
※황등제 : 오랜 세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던 황등제는 1780(정조4년)에 제방과 다리를 수축하였다는 기록이 요교비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으므로 일본이 1909년에 임익수리조합을 설립하고 제방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그 뒤 1923년에 황등제를 수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저수지 사진자료도 볼 수 있는데 1935년에 완주군에 경천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불용시설이 되어 도로로서의 역할만 하게 되었다.
■울릉도(鬱陵島)
울릉도는 동해 가운데 있는데, 우산국(于山國)이라고도 한다. 육지에서의 거리가 7백 리 내지 8백 리쯤 되며, 강릉ㆍ삼척 등지의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면 세 봉우리가 가물거린다.
신라 지증왕(智證王) 12년(511)에 그곳의 주민들이 힘을 믿고 복종하지 않자,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軍主) 이사부(異斯夫)가 나무로 만든 사자의 위력으로 이를 정복했으니,하슬라는 지금의 강릉이다.
고려 초기에 방물(方物)을 바친 일이 있었으며, 의종(毅宗) 11년(1157)에 김 유립(金柔立)을 우릉도(羽陵島)에 보내어 탐사하게 하였는데, 산마루에서 바다까지 동쪽으로 1만여 보요, 서쪽으로 1만 3천여 보이며, 남쪽으로 1만 5천 보요, 북쪽으로 8천 보였다.
마을의 빈 터가 일곱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석불(石拂)ㆍ철종(鐵鍾)ㆍ석탑이 있었으며, 땅에는 바위가 많아 사람이 살 수 없었으니, 그렇다면 이때에 벌써 공허지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미쳐 죄인들이 도망해 와서 사는 자가 많으므로 태종(太宗)과 세종(世宗) 때에 낱낱이 수색하여 모두 잡아온 일도 있었다.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울릉도는 임진왜란 후에 왜적의 분탕(焚蕩)과 노략질을 겪어 다시 인적이 없었는데, 근자에 들으니 왜적이 의죽도(礒竹島)를 점거했다 하며, 혹자의 말에 의죽도는 곧 울릉도라고 한다.” 하였다.
왜인들이 어부 안용복(安龍福)이 월경(越境)한 일로써 와서 쟁론할 때 《지봉유설》과 예조(禮曹)의 회답 가운데 ‘귀계(貴界)’니, ‘죽도(竹島)’니 하는 말이 있는 것으로 증거를 삼았다.
조정에서 이에 무신 장한상(張漢相)을 울릉도로 보내어 살피게 했는데, 그의 복명에, “남북은 70리요, 동서는 60리이며, 나무는 동백ㆍ자단(紫檀)ㆍ측백ㆍ황벽(黃蘖)ㆍ괴목(槐木)ㆍ유자ㆍ뽕나무ㆍ느릅나무 등이 있고, 복숭아ㆍ오얏ㆍ소나무ㆍ상수리나무 등은 없었습니다. 새는 까마귀ㆍ까치가 있고 짐승은 고양이와 쥐가 있으며, 물고기는 가지어(嘉支魚)가 있는데, 바위틈에 서식하며 비늘은 없고 꼬리가 있습니다. 몸은 물고기와 같고 다리가 넷이 있는데, 뒷다리는 아주 짧으며, 육지에서는 빨리 달리지 못하나 물에서 나는 듯이 빠르고 소리는 어린 아이와 같으며 그 기름은 등불에 사용합니다.”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누차 서신을 왕복하여 무마시켰던 것이다.
나는 생각건대, 이 일은 담판하기 어려울 것이 없으니, 그 당시에 “울릉도가 신라에 예속된 것은 지증왕 때부터 시작된 일이며, 그 당시 귀국은 계체(繼體) 6년(512, 신라 지중왕 13)이었는데 위덕(威德)이 멀리까지 미친 일이 있는지 나는 들은 적이 없으니, 역사에 상고할 만한 특이한 기록이 있는가?
고려로 논한다면 혹은 방물을 바친 적이 있으며 혹은 그 섬을 비운 일도 사기에 기록이 끊어진 적이 없었는데, 일천여 년을 내려 온 오늘에 와서 무슨 이유로 갑자기 이 분쟁을 일으키는가?
우릉도(羽陵島)라고 하든, 의죽도라고 하든, 어느 칭호를 막론하고 울릉도가 우리나라에 속하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며, 그 부근의 섬도 또한 울릉도의 부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귀국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졌는데, 그 틈을 타서 점령한 것은 이치에 어긋난 일이니, 자랑할 말이 못되는 것이다. 가령 중간에 귀국의 약탈한 바 되었더라도 두 나라가 신의로써 화친을 맺은 후에는 옛 경계에 의하여 서둘러 돌려주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일찍이 귀국의 판도에 들지 않았음에랴?
이미 우리나라의 강토인 이상 우리 백성들이 왕래하며 고기잡이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귀국이 무슨 관여할 권리가 있는가?”라고 왜 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말했다면 저들이 비록 간사할지라도 다시 입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안용복은 동래부(東萊府) 전선(戰船)에 예속된 노군(櫓軍)이니, 왜관에 출입하여 왜어에 능숙하였다.
숙종(肅宗) 19년 계유 여름에 풍랑으로 울릉도에 표류했는데, 왜선 7척이 먼저 와서 섬을 다투는 분쟁이 일고 있었다. 이에 용복이 왜인들과 논란하니, 왜인들이 노하여 잡아가지고 오랑도(五浪島)로 돌아가 구금하였다.
용복이 도주에게 “울릉 우산은 원래 조선에 예속되어 있으며, 조선은 가깝고 일본은 멀거늘 어찌 나를 구금하고 돌려보내지 않는가?” 하니, 도주가 백기주(伯耆州)로 돌려보냈다.
이에 백기도주(伯耆島主)가 빈례(賓禮)로 대우하고 많은 은자(銀子)를 주니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도주가 “그대의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니 용복이 전후 사실을 말하고 이르기를, “침략을 금지하고 이웃 나라끼리 친선을 도모함이 소원이다.”고 하니, 도주가 이를 승낙하고 강호 막부(江戶幕府)에 품하여 계권(契券)을 출급하고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출발하여 장기도에 이르니 도주가 대마도와 부동(符同)하여 그 계권을 빼앗고 대마도로 압송하였다. 대마도주가 또 구금하고 강호 막부로 보고하니, 강호에서 다시 서계를 보내고 울릉 우산 두 섬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또 본국으로 호송하라는 지령이 있었다. 그런데 대마도주는 다시 그 서계를 빼앗고 50일을 구금하였다가 동래부 왜관으로 보냈는데, 왜관에서 또 40일을 유련(留連)시켰다가 동래부로 돌려보냈다.
이에 용복이 이 사실을 모두 호소하니, 부사가 상부에 보고하지도 않고 월경(越境)한 일로 2년의 형벌을 내렸다. 을해(1695, 숙종 21) 여름에 용복이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떠돌이 중 5인과 사공(沙工) 4인과 배를 타고 다시 울릉도에 이르니, 우리나라 상선 3척이 먼저 와서 정박하고 고기를 잡으며 대나무를 벌채하고 있었는데, 왜선이 마침 당도하였다.
용복이 여러 사람을 시켜 왜인들을 포박하려 했으나 여러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좇지 않았으며, 왜인들이 “우리들은 송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우연히 이곳에 왔을 뿐이다.” 하고 곧 물러갔다. 용복이, ‘송도도 원래 우리 우산도’라 하고 다음날 우산도로 달려가니, 왜인들이 돛을 달고 달아나거늘 용복이 뒤쫓아 옥기도(玉岐島)로 갔다가 백기주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도주가 나와 환영하거늘, 용복이 울릉도 수포장(搜捕將)이라 자칭하고 교자를 타고 들어가 도주와 대등한 예로 대하고 전후의 일을 소상히 말하였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쌀 1석에 반드시 15두요, 면포 1필은 35척이며, 종이 1권에 20장으로 충수(充數)해 보냈는데, 대마도에서 빼먹고 쌀 1석은 7두, 면포 1필에 20척, 종이는 3권으로 절단하여 강호로 올려보냈으니, 내가 장차 이 사실을 관백(關白)에게 곧장 전달하여 그 속인 죄상을 다스리게 하겠소.” 하고 동행 가운데 문학에 능통한 자를 시켜 소장을 지어 도주에게 보여 주었다.
대마도주의 부친된 자가 이 말을 듣고 백기주에 달려와 용서해 주기를 애걸하므로 그 일은 이로써 결말을 지었다. 그리고 과거의 일을 사과하고 돌려보내며, “섬을 가지고 다툰 일은 모두 그대의 말대로 준행할 것이요, 만약 이 약속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중벌에 처하겠소.”라고 하였다.
추(秋) 8월에 양양에 다다르니, 방백(方伯)이 이 사실을 장계로써 보고하고 용복 등 일행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여러 사람의 공초가 한결같이 나오니 조정의 의론이 월경하여 이웃 나라와 쟁단을 일으켰다 하여 장차 참형에 처하려 하였다.
오직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완(尹趾完)이 “용복이 비록 죄는 있으나 대마도가 예전부터 속여온 것은 한갓 우리나라가 강호와 직통하지 않은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별달리 통하는 길을 알았으니 대마도에서 반드시 두려워할 것인데, 오늘날 용복을 참형에 처하는 것은 국가의 좋은 계책이 아니옵니다.”라고 하였다.
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남구만(南九萬)은 “대마도에서 속여온 일은 용복이 아니면 탄로되지 않았을 것이니, 그 죄상이 있고 없는 것은 아직 논할 것이 없고, 섬을 다투는 일에 대하여는 이 기회에 밝게 변론하고 중엄하게 물리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즉 대마도에 서계를 보내어 ‘조정에서 장차 강호에 직접 사신을 보내어 그 허실을 탐지하겠다.’ 한다면 대마도에서 반드시 크게 두려워하여 복죄(服罪)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용복의 일은 그 경중을 서서히 논의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요, 그렇지 않다면 동래부를 시켜 대마도에 서계를 보내어 먼저 용복이 임의로 글을 올린 죄상을 말하고, 다음에 울릉도를 죽도(竹島)라고 가칭한 것과 공문을 탈취한 도주의 과실을 밝혀 그 회답을 기다릴 것이요, 용복을 죄줄 뜻은 서계 가운데 미치지 않을 것이니, 이는 중책이요, 만약 대마도의 속여 온 죄상을 묻지도 않고 먼저 용복을 죽여 저들의 마음을 쾌하게 해준다면 저들이 반드시 이로써 구실을 삼고 우리를 업신여기며 우리를 협박할 것이니, 장차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이것이 하책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중책을 채용하니, 도주가 과연 자복(自服)하여 허물을 전도주(前島主)에게 돌리고 다시 울릉도에 왕래하지 않았으며, 조정에서는 용복을 극형에서 감하여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나는 생각건대, 안용복은 곧 영웃 호걸인 것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하여 강적과 겨루어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토지를 회복했으니 부개자(傅介子)와 진탕(陳湯)에 비하여 그 일이 더욱 어려운 것이니 영특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상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에는 형벌을 내리고 뒤에는 귀양을 보내어 꺾어버리기에 주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울릉도가 비록 척박하다고 하나, 대마도도 또한 한 조각의 농토가 없는 곳으로서 왜인의 소굴이 되어 역대로 내려오면서 우환거리가 되고 있는데, 울릉도를 한 번 빼앗긴다면 이는 또 하나의 대마도가 불어나게 되는 것이니 앞으로 오는 앙화를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이로써 논하건대, 용복은 한 세대의 공적을 세운 것뿐이 아니었다. 고금에 장순왕(張循王)의 화원노졸(花園老卒)을 호걸이라고 칭송하나, 그가 이룩한 일은 대상 거부(大商巨富)에 지나지 않았으며, 국가의 큰 계책에는 도움이 없었던 것이다.
용복과 같은 자는 국가의 위급한 때를 당하여 항오에서 발탁하여 장수급으로 등용하고 그 뜻을 행하게 했다면, 그 이룩한 바가 어찌 이에 그쳤겠는가?
▣성호사설 제4권
■비색자기(秘色磁器)
《수중금(袖中錦)》에, “고려의 비색자기(秘色磁器)는 천하에서 제일 간다. 그러나 우리나라 자기는 결백하게 만드는 데는 장점이 있어도 그림을 수놓아서 만드는 일에는 능란하지 못하다.” 하였으니, 이는 곧 결백한 것을 지칭한 말이다.
지금 궁중에 바치는 사옹원(司饔院)의 자기가 지극히 아름다운바, 지난해 청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한량없이 칭찬하였다. 그러나 충렬왕(忠烈王) 15년에 원(元) 나라 중서성(中書省)에서 고려로 통첩을 보내 청사(靑砂)로 만든 독ㆍ동이ㆍ병 등을 구해 갔다 하니, 이는 혹 예전에만 만드는 이가 있었고 지금은 능히 만들 수 없는 것인지, 또는 일본과 무역함에 따라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육귀몽(陸龜蒙)이 월(越) 나라 그릇을 보고 읊은 시에,
구추의 찬바람 찬이슬에 월 나라 옹기 굴을 열어 젖히니 / 九秋風露越窰開
일천 봉우리 푸른빛을 앗아 오는 듯하도다 / 奪得千峯翠色來
마침 높은 하늘을 향하여 항해기를 움켜 담으니 / 好向中霄盛沆瀣
신선이 남긴 술잔을 혜 중산과 함께 다투는 듯 / 共嵇中散鬪遺杯
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고 송 나라 사람이 이른바, 비색자기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해설자는, ‘오월왕(吳越王) 때에 신하와 서민은 비색자기를 사용할 수 없었던 까닭에 이름을 비색(祕色)이라 했다.’ 하였으니, 이는 곧 월주(越州)에서 오월왕에게 공물로 바쳤다는 것인데, 이 설은 서조(徐慥)의 《만소록(漫笑錄)》에 나타나 있다.
지금 세상에는 이런 자기가 또한 많은데, 금조(禽鳥)ㆍ초목ㆍ산악ㆍ충수(虫獸) 등 여러 물형의 그림을 놓아 만든 것이 푸르고 곱기가 모두 절기하다. 이는 곧 회회청(回回靑)이라야 그릴 수 있는 것이고 딴 채색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인데, 왕원미(王元美)는, “혹 석청(石靑)으로도 그릴 수 있다.” 하였다. 우리 집에도 옛날에는 이런 자기가 몇 개쯤 있었는데, 선인(先人) 외가에서 궐내(闕內)로부터 전해 왔기 때문에 우리 할머니께서 몹시 중하게 생각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 14) 난리 때에도 잃어버리지 않고 온전히 보호했던바, 나도 오히려 보았다. 그러나 지금 사대부(士大夫)의 집에 보통 쓰는 그릇에 비교해도 오히려 품격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귀천을 막론하고 집집마다 이런 자기를 쌓아 놓고 쓰는데, 거의 질그릇과 구별없이 흔하게들 쓰고 있으니, 이로써 세상의 사치함과 검소함을 점칠 수 있겠다.
■두부(豆腐)
지금 식품(食品) 중에 두부(豆腐)란 것이 있다. 콩을 매에 갈아서 끓여 익혀서 포대(布帒)에 넣어 거른 다음 염즙(鹽汁)을 넣으면 바로 엉키게 되고, 두장(豆醬)은 조금만 넣어도 삭아서 엉키지 않는다. 염즙이란 것은 소금에서 흘러 나오는 붉은 즙이고, 두장 역시 끓인 콩을 소금에 섞어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염즙을 넣으면 두부가 제대로 엉키고 두장 물을 넣으면 삭아져서 엉키지 않으니, 그 이치를 궁구하기 어렵다. 쌀뜨물(米泔) 역시 삭아지게 하는 까닭에, 두부를 먹고 체증이 생긴 자는 쌀뜨물을 마시면 바로 났는다고 한다.
《군쇄록(群碎錄)》에 이르기를, “두부는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만든 것이다.”고 했는데 소동파의 주에는, ‘증중수(曾仲殊)가 화식(火食)을 않고 꿀만 먹었는데, 두부ㆍ국수ㆍ우유 따위를 꿀에 적셔 먹고, 이름을 밀수(蜜殊)라 했다.’ 하였다. 근래에 어떤 사람이 해수병(咳嗽病)을 앓는데, 뜨거운 순두부 물에 꿀을 타서 먹고 낳았다고 하니, 의술(醫術)하는 자로서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도량(度量)
지금 세속에서 15두를 1석(石)이라 하고 2척(尺) 4촌을 1척이라 하니 무슨 까닭인가? 석은 본래 오권(五權)의 하나이고 양(量)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데, 한(漢) 나라 때부터 양(量)이 되었다. 대개 오권은 황종(黃鍾)에서 기인되었는데, 24수(銖)가 1냥(兩), 6냥이 1근(斤), 30근이 1균(勻), 4균이 1석(石)이니, 이로 따지면 1백 20근이 1석이 되는 것이다.
석이란 곡(斛)으로서, 곡의 중량도 1백 20근인 것이다. 예전에는 쌀을 측정하는 데 경중으로 썼던 것은 이일미(二溢米) 따위에서 볼 수 있으니, 곡을 석이라 해도 해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 사용하는 말[斗]은 옛것과 비교하면 세 갑절이나 되므로 실에 있어서는 서로가 같지 않다. 또 싣고 운반하는 데 오직 15두가 편리한 까닭에 억측으로 정한 것이므로 이름과 실상이 서로 어긋나는 것이 매양 이러하다.
지금 시행하는 포백척(布帛尺)도 옛것에 표준하면 2척 4촌이 되는데, 이도 쓰기에 편리함을 위해서이고, 또 옛것에 근본한 바도 있다. 진 효공(秦孝公)이 정전법(井田法)을 없애고 2백 40보(步)를 1묘(畝)라고 한 데서 기인된 것이다. 이보다 더 예전에는 6척을 1보, 1백 보를 1묘라고 했는데, 이때에 와서 옛날 1척을 2척 4촌으로 변한 까닭에 2백 40보가 1묘가 된 것이다.
주자(朱子)는, “지금 쓰는 자를 예전 자에 표준하면, 2척 2촌이 조금 모자란다.” 하였다. 이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쓰는 포백척에 비하면 2촌이 모자라니 마땅히 상고해 봐야 하겠다.
■은화(銀貸)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하다고 하며, 창고가 텅 빈 것을 빈국(貧國)이라고 한다. 그러나 곡식과 포백만이 중한 것이 아니라 금은보화도 마찬가지이다. 이 보화(寶貨)는 완구나 사치품으로 이용해서가 아니고 군사[軍旅]에 있어서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출사표(出師表)에, “남방이 이미 평정되고 병갑(兵甲)이 넉넉하다.”고 하였으니, 그때에 병갑이 넉넉해진 것은 반드시 남방의 재물을 힘입어 그렇게 된 것이리라.
이뿐만 아니다. 장간지(張柬之)는, “제갈 무후가 5월에 노수(濾水)를 건너 금은(金銀)과 염포(鹽布)를 수합하여 군수품(軍需品)을 더욱 저장하고, 장백기(張伯岐)에게 억세고 날랜 군사를 뽑아서 무비(武備)를 더하도록 한 까닭으로 《촉지(蜀志)》에, ‘제갈량(諸葛亮)이 남정(南征)한 뒤부터 나라가 부요(富饒)해지고 병갑(兵甲)도 충족해졌다.’ 했다.” 하였으니, 대개 그가 먼 오랑캐 지방에서 괴로움을 겪으면서 칠금(七擒)의 노고를 꺼리지 않은 것은 이를 위한 까닭이다.
화보(貨寶)란 것은 금은이 제일이다. 군사의 공로에 상주고 격려함에 있어서 이 금은이 아니면 되지 않으며, 더구나 군사를 일으켜 소요되는 군량(軍粮)을 이어대기 어렵고, 깊은 골짜기와 궁한 마을의 많은 저축이건 적은 저축이건 금은이라야만 당장에 변통할 수 있음에랴?
우리나라 은화(銀貨)는 다 연경(燕京)에 보내서 딴 물품을 사오게 된다. 하늘이 낸 이 보화를 가지고 비단ㆍ식물ㆍ기명(器皿)ㆍ완구 따위를 멀리서 사들여와 하루도 못가서 소비해 버린다. 나라에서 생산하는 은이 부족한 까닭에 일본(日本) 은을 간신히 들여다가 이어대므로 국고의 저축은 모두 바닥이 난다. 가령 병화(兵禍)가 있게 된다면 장차 무엇으로 처리할 것인가?
요즈음은 연경에서 무역(貿易)함을 금한다는 소문이 있으나 무늬가 있는 비단만 금지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 둔다고 하니, 결과에 있어서 무슨 유익한 점이 있겠는가? 어떤 이는, 기(旗)와 장복(章服) 때문에 무역이 불가피하다고 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수(繡)만 있고 금(錦)은 없었으며, 수 역시 가는 갈포(葛布)에 수놓은 것이고 짜서 만든 무늬는 아니었으나, 그 당시에 이로 인해 할 일을 못한 적은 없었다.
하물며 실은 누에에서 나오고 비단 짜는 깁은 실에서 나오는데, 왜 비단 짜는 기술은 배우지 않고 꼭 은화로 사오는 것만 중히 여기는가? 일에 대해 두미를 모르는 것이 가끔 이와 같다.
▣성호사설 제5권
■탐라목장(耽羅牧場)
탐라(耽羅) 목장에서는, 귀가 높고 몸집이 큰 말은 몰아내어 팔아 버리고 남겨 두었다는 것은 모두 걸음도 잘못 걷는 나쁜 말들뿐이다. 대원(大宛)에서 수입해 온 좋은 종자가 지금은 변해서 머리만 내두르고 제자리에서 뛰기만 한다. 기르는 데는 추운 겨울철이 되면 옷을 두껍게 입히고 더운 여름철이 되면 그늘에 세워 두며, 쉴 때는 먹이는 꼴과 콩을 밤낮으로 걷어 치우지 않고, 길 갈 때는 1식(息)도 채 못가서 배가 꽉 차도록 먹이는데, 꼴과 콩만으로는 오히려 부족해서 더운 죽을 끓여서 대어 주기까지 한다.
이러므로 말이 달리는 데 한 3백 보쯤도 못 가서 땀을 흘리고 다리를 꿇게 된다. 그냥 마판(馬板)에 매어 두면 혹 발굽을 물어뜯기도 하고 오줌을 철철 싸기도 하면서 멍에를 벗어 버리고 사람을 상운다. 평상시에 타고 달리는 데도 오히려 감내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바람이 불고 모래가 날리는 저 변방 밖에서 외적을 막을 때에 있어서랴?
대개 호중(胡中)에는 암말에게는 반드시 암을 붙여 주고 수말에게는 반드시 불을 치게 된다. 암을 붙여야만 씨가 많이 퍼지고 불을 쳐야만 성질이 순하게 됨은 필연의 이치인 것이다.
《시경》에, “키 큰 암말이 3천 마리이다.” 하였으니, 키 큰 암말이 이렇게 많았다면 어찌 좋은 말이 많이 번식되지 않았겠는가? 나는 서양(西洋) 이야기를 들으니, “말에게 보리를 먹일지언정 콩은 먹이지 않는다. 콩을 먹이면 살만 찌게 되어 억세고 날랜 성질이 바꿔진다.”고 하니, 이 말이 또한 일리가 있다.
흉년이 든 해에 사람도 콩을 매에다 갈아서 죽을 쑤어 먹으면 반드시 몸이 더 무거워지고 꿈을 자주 꾸게 되니, 이 콩이란 곡식은 쌀ㆍ보리 따위와 같지 않고 생긴 성분이 무겁고 흐리기 때문이다.
■조선묵(朝鮮墨)
우리나라 백추지(白硾紙)와 낭미필(狼尾筆)은 천하에서 보배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먹에 있어서는 오로지 유연(油烟)만으로 만들기 때문에 송매(松煤)로 만든 먹에 비교하면, 짙게 검은 빛은 모자라면서 반지르르한 윤기만 너무 지나친다. 중국 먹은 모두 송매로 만든 것인데, 소동파(蘇東坡)는 이르기를, “유연과 송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만들어야 좋은 먹이 된다.” 하였다.
나는 이런 먹은 일찍이 시험해써보지않았다. 그러나 한자창(韓子蒼)의 시에,
왕경이 나에게 선물로 준 삼한지라는 종이는 / 王卿贈我三韓紙
비계를 끊어 놓은 듯이 반질반질한빛이 책상에까지 비치고 / 色若截肪光照几
전후가 또 나에게 보내온 조선묵이라는 먹은 / 錢侯繼贈朝鮮墨
칠 같은 검은 광채가 벼룻물 위에 빙빙 돈다 / 黑若點漆光浮水
하였으니, 우리나라 먹도 또한 시가(詩家)에서 소중히 여긴것이 이와같았다.
비록 어린애의 눈동자로써 헤아려 보더라도 짙게 검은 것이 뭐 해롭겠는가? 그 윤기를 곱게 하는 방법은 달걀 흰자를 섞어서 만들면 먹의 광채를 도울 수 있다.
■일본도(日本刀)
미수(眉叟 허목 : 1595-1682)는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외손자이다. 백호가 일본 상인[賈客]에게 고검(古劍) 한 개를 얻었는데, 나중에는 이 칼이 허씨에게로 돌아갔다. 내가 일찍이 이 칼을 보았는데, 눈빛처럼 흰 광채가 사람을 쏘았다. 한여름에 칼집에서 뽑아 벽에 걸어 놓으면 칼 끝에 이슬 방울이 맺혀서 떨어진다 한다.
오행(五行)에서 금(金)이 맨 처음이다. 금이란 수(水)를 내기 때문에 해설자는, “금과 철(鐵)을 불에 녹이면 물이 되는 까닭에 칼 끝에 물이 맺힌다.” 한다. 만약 그렇다면 세상에 도도(滔滔)히 흐르는 것은 모두 물인데, 이 모든 물은 어디에서 나는가? 지금 이 칼로써 징험해 보니, 금이 물을 낸다는 것을 과연 믿겠다. 추측컨대, 쇠붙이란 모두 불에 달궈서 만들린 때문에 그 본질을 잃게 되지만, 오직 그 지사(地四)의 정기(精氣)가 완전히 갖춰진 것만은 본질이 오히려 있는 까닭에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흙 속에서 물이 나는 것도 그 실은 토(土)가 비로소 금의 정기를 양성하고 금은 수(水)를 낳게 된다. 이 금이 아니면 토가 어찌 수를 낼 수 있겠는가? 대개 돌도 흙에서 나니, 돌이란 즉 금 따위인 까닭에 빛깔이 희게 된다. 철(鐵)도 반드시 사석(沙石) 사이에서 생산되니, 그 본질이 같은 따위임을 알 수 있고, 물도 보면 대개 땅속 돌 구멍에서 난다. 내가 지금 금(金)이라고 하는 것은 황금(黃金)ㆍ흑철(黑鐵)ㆍ백석(白石)을 모두 포함해 말한 것이다.
■오곡(五穀)
《주례(周禮)》 질의(疾醫)에, “오미(五味)ㆍ오곡(五糓)ㆍ오약(五藥)으로써 병을 다스린다.”고 하였다. 그 주(註)에, ‘오곡은 삼[麻]ㆍ기장[黍]ㆍ피[稷]ㆍ보리[麥]ㆍ콩[豆] 이 다섯 가지이다’ 하였으니, 이는 《예기(禮記)》 월령(月令) 편에 말한 오곡에 의거하여 해설한 것이다.
사의(食醫)에는, “소에게는 벼[稌]가 알맞고 염소에게는 기장[黍]이 알맞으며, 돼지에게는 피[稷]가 알맞고 개에게는 좁쌀[粱]이 알맞으며, 기러기에게는 보리[麥]가 알맞고 물고기에게는 줄[苽]이 알맞다.” 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육곡(六糓)》이라는 것인데, 줄은 바로 조호(彫胡)이다.
태재(太宰)의, “삼농은 구곡(九糓)을 생산시킨다.”라는 그 주에는, ‘구곡은 기장[黍]ㆍ피[稷]ㆍ수수[秫]ㆍ벼[稻]ㆍ삼[麻]ㆍ콩[大豆]ㆍ팥[小豆]ㆍ보리[大麥]ㆍ밀[小麥]이 아홉 가지이다.’라고 했는데, 정현(鄭玄)이 말한 구곡은 수수와 보리는 빼고 좁쌀과 줄을 넣었다. 《맹자(孟子)》의 주(註)에는, “벼ㆍ기장ㆍ피ㆍ보리ㆍ콩을 오곡이라.” 했으니, 이는 월령 등 모든 글에 있는 것과 따지면 삼은 빠지고 벼가 들어 있는 셈이다.
그런즉, 이 오곡이란 어느 것을 의거해야 할지 모르겠다. 《맹자》에, “오랑캐 지방에는 오곡은 나지 않고 오직 기장만 난다.” 하였으니, 이 말에 참고하면, 이 기장이란 곡식은 오곡 중에 한 목 끼지 않는 듯하니, 또한 괴이하다.
또 서직(黍稷)ㆍ도량(稻粱)ㆍ화마(禾麻ㆍ숙맥(菽麥) 이 여덟 가지로 팔곡(八糓)이라고 하나, 이 화(禾)와 도(稻)는 두 가지 곡식이 아닌 듯하다.
《곡례(曲禮)》에, “도(稻)를 가소(嘉蔬)라고 한다.”라는 그 주에, ‘도(稻)는 고소(苽蔬) 따위이다.’ 하였고, 옛 사람도 흑 이 고(苽)라는 것을 도(稻)라고 하였으니, 이 도라는 벼는 지금의 《가화(嘉禾)》라는 것과 다른 것인가?
■은광(銀礦)
우리나라 서북 지방에는 은광(銀礦)이 많다. 고려 때엔 중국서 대부분 은을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 계속 바치기란 어려운 일이었던 까닭에, 정포은(鄭圃隱)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중국에 갔을 때, 은의 수량을 훨씬 줄이고 다른 토산물로 대신해 바치도록 주청(奏請)하였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선 만력(萬曆) 무렵에 단천(端川) 은광만 남아 있었다. 조신(朝臣)들이 건의하기를, “은광을 민간에 맡겨 채취하도록 하고, 세금을 받아 국가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선묘(宣廟)는 하비(下批)하기를, “혼돈(混沌)을 파헤치면 혼돈이 죽고, 은혈(銀穴)을 파헤치면 인심(人心)이 죽는다.”고 말하였으니, 아! 훌륭하신 말씀이여! 그 염려하신 생각이 심원(深遠)하도다. 뭇 신하들은 거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부인복(婦人服)
말세가 되니, 부인의 의복이 소매는 좁고 옷자락은 짧은 것이 요사한 귀신에게 입히는 것처럼 되었다. 나는 이런 것을 비록 좋게 여기지 않으나 대동(大同)으로 되어 가는 풍속에는 또한 어쩔 수 없겠다.
옛날 태종(太宗)께서는 의복에 대해서 모두 중국 제도를 따르려고 했는데 정승 허주(許稠)가 아뢰기를, “신(臣)이 북경에 갈 때 궐리(闕里)를 지나다가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서 여복 차림으로 된 화상(畵像)을 보니, 우리나라 제도와 다름 없고 다만 수식(首飾)이 같지 않았습니다.” 하여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허정승의 말도 꼭 그러했는지 알 수 없겠다. 어찌 중화(中華)의 의복이 이처럼 짧고 좁은 것이 있었겠는가? 추측컨대, 우리나라 초기에 부인의 의복이 비록 중국과 차별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제도처럼 짧고 좁게 만들지 않았던 것인가? 또는 부인의 의복이란 오직 고운 맵씨를 귀하게 여겨서 가는 허리를 남에게 자랑해 보이려고 한다. 이러므로 위의 옷이 밑의 치마에 덮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나라도 중국 풍속과 마찬가지로 그 제도가 그렇게 되었던 것인가?
그러나 중국도 역시 한 시대 풍속이 그렇게 되었을 뿐이고, 옛날 제도에 있어서도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 이는 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성호사설 제6권
■목면(木綿)
목면은 고려 말기부터 수입되어 지금은 온 나라에 거의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심지 않는 지방이 많은데, 지방에 따라 풍토와 기후가 같지 않아서 심지 못한다는 말은 잘못인 것이다.
황해도의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충청도의 문의(文義)와 옥천(沃川) 등지는 목면이 토리에 알맞아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데, 경기 부근에 이르러서는 차츰 늘어나지 않는다.
내가 바닷가에 살면서 징험해 보니, 수원(水原)에 속한 쌍부(雙阜)라는 한 면은 한 집도 심는 이가 없으니, 어찌 40~50리 사이에 토리가 이처럼 다를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우명(牛鳴)이란 곳도 바닷가의 한 구석진 지대로서 역시 목면은 심지 않는다. 그 실은 풍속 습관이 고쳐지지 않은 관계이지 목면의 성질이 지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사방을 두루 살펴보면, 산골이건 바닷가건 목면이 생산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이는 책임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호남 지방에는 소마(蘇麻)가 없고 다만 수유(茱萸)나무<쉬나무라고 한다> 열매로 기름을 짜서 등불을 켜게 된다. 남과(南瓜)라는 호박이 난 지도 또한 거의 백 년이 가까이 되었는데, 아직 호남 지방에는 미치지 못했으니, 목면이 생산되지 않는 것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달걀로 닭을 생산시키는 것이지만, 암탉이 둥우리 속에서 품지 않으면 닭을 만들 수 없고, 누에가 실을 만드는 것이지만, 뽕을 먹이지 않으면 실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이 달걀을 품게 만들지 않고 또 누에도 먹이지 않으면서 닭과 실이 절로 이루어지기를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옳겠는가?
이 목면을 혹 시험삼아 심어 보는 자도 비록 있기는 하나, 결국은 풍속과 습관에 따라 게으름만 피우고 제대로 알맞게 가꾸지 않는다. 나중에 와서 잘 되지 않으면 다만, “토리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어찌 참 그럴 이치가 있겠는가?
나는 이런 사실을 직접 듣고 본 결과, 저 머리에 젖은 습관은 고질처럼 되고 가꾸는 손은 생소해서, 끝내 제대로 가꾸는 방법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북도(北道)에도 목면을 심지 않으나 이 북도란 일대는 모두 바다가 가까워서 따뜻한 기후가 기호(畿湖) 지방 산 가까이 있는 고을보다도 도리어 낫다.
만약 목면을 심는 방법만 깨닫는다면 반드시 생활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인데, 삼베옷과 가죽옷을 입는 데 습관이 되어서 힘껏 생산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을 잘 달래고 지도하여 목면 심기에 풍속이 되도록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황시(黃始)ㆍ문익점(文益漸)과 같은 공이 있게 될 것이다.
■청어(靑魚)
지금 생산되는 청어는 옛날에도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해마다 가을철이 되면 함경도에서 생산되고 있는데, 형체가 아주 크게 생겼다.
추운 겨울이 되면 경상도에서 생산되고 봄이 되면 차츰 전라도와 충청도로 옮겨 간다. 봄과 여름 사이에는 황해도에서 생산되는데, 차츰 서쪽으로 옮겨짐에 따라 점점 잘아져서 천해지기 때문에 사람마다 먹지 않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징비록(懲毖錄)》에, “해주(海州)에서 나던 청어는 요즈음 와서 10년이 넘도록 근절되어 생산되지 않고 요도(遼東) 바다로 옮겨 가서 생산되는바, 요동 사람은 이 청어를 신어(新魚)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그 당시에는 오직 해주에서만 청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물고기 따위는 매양 시대의 풍토와 기후를 따라 다니기 때문에 요즈음 와서는 이 청어가 서해에서 아주 많이 난다고 하니, 또 저 요동에도 이 청어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성호사설 제7권
■당론(黨論)
당론은 하나의 큰 옥송(獄訟)이었다. 극히 악한 사람이 극히 선한 사람을 치며 극히 어진 사람이 극히 흉한 사람을 배격하는 것은, 사람마다 손가락질하고 지목하여 그 시비가 분명히 판명되는 일인데 어찌하여 편당이 생기는가? 그러나 옳은 가운데도 그름이 있고, 그른 가운데도 옳음이 있으며, 또 옳은 듯하면서도 그른 것이 있고, 그른 듯하면서도 옳은 것이 있다. 사람들은 다만 자신의 옳음과 남의 그름만 보기 때문에 편당이 생기게 된다. 한 일은 분별할 수 있거니와 온 세상에 어찌하며, 당대에는 구별할 수 있으나 후대에 어찌하랴. 마치 무슨 물건을, 촛불이 환한 집에 두면 그 물건이 밝은 불빛을 받아 다 붉어지고, 음폐된 굴 속에 두면 그 어두움에 묻혀 다 검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편당 속에서 생장하면 비단 남에게만 밝히기 어려움이 있을 뿐 아니라 자신 역시 깨닫지 못한다. 진실로 밝은 지혜에 결단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뛰쳐나가 높은 경지에 오르기 어렵다. 비유하면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나쁜 일은 술의 잘못으로 돌리고, 좋은 일은 술의 덕으로 돌리는 것과 같은 격이다. 그러므로 조그마한 지혜와 사사로운 생각으로 잘못 남을 평가하는 자는, 적을 보고 아들이라 하고, 은혜를 베푼 이에게 원한을 품는 격이요, 모르겠다 핑계하고 구제하려 아니하는 자는 도둑이 이르러도 막지 않으며 집이 무너져도 떠받치지 않는 격이다. ...
■무과(武科)
과거의 피해가 비단 한 세대만 쓸데없이 겉치레로 쏠리게 만들 뿐 아니다. 한 번 이름이 정해지면 초목을 구별해 놓은 것과 같아서, 진실로 문과(文科)라면 비록 눈으로 훈전(訓典)을 분별하지 못하고 손으로 사령(辭令)을 쓸 줄 몰라도 태연히 자처하여, 좋은 벼슬자리는 자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원망하여 끝내 얻고야 말기 때문에, 출척(黜陟)의 권한이 문과에 있고 무변(武弁)은 그들을 위해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과일 경우에는 때로 지위 높은 무직(武職)에 임명될 수 있으나, 무과일 경우에는 감히 문사(文詞)의 직을 엿볼 수 없다. 그리고 무과를 한 자는 비록 예약(禮約)을 말하고 시서(詩書)에 독실함이 옛날 명장(名將)과 같더라도 자신의 영달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오래되면 또한 스스로 자신을 멸시하여 임기응변(臨機應變)하는 무술까지 망각해 버린다, 난이 닥치게 되면 비단 문과만 적의 진중에서 충돌하지 못할 뿐 아니라, 무과 역시 진중의 전술에 어둡게 된다. 경내에 든 강한 적군은 창ㆍ칼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데 황차 필묵이나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의 시국을 비유하면 마치 넘어가는 해를 보고도 캄캄한 밤이 앞에 닥칠 줄 알지 못하는 격이다. 진실로 이를 면하려면 무신의 권한을 좀 중하게 해야 되고 그 권한을 중하게 하려면 무신들도 문임(文任)에 등용하여 재기(才器)를 기르게 해야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중하게 대우하면 한갓 해연함을 취할 뿐이리라.
국조(國朝)에서 발영시(拔英試 : 1466년(세조 12) 중신과 문무백관에게 임시로 실시한 과거)를 두었으니 또다시 이 제도를 세워서, 시험을 보일 때 사장(詞章)의 기술로 하지 않고 오로지 무경(武經)으로써 팔고체(八股體) 제목을 하여 외고 읽는 번거로움을 없애고 붓으로 써서 대답하게 한 다음 우수한 자를 뽑아서 벼슬길에 막힘이 없게 할 것이다. 그와 같이 한다면 저들도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문사(文士)들과 동등한 재식(才識)을 갖출 것이다.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와 왕명학(王鳴鶴)이 지은 《등단필구(登壇必究)》 같은 것은 육경(六經)을 근본하고 널리 백가(百家)를 통한 것이라, 그 문장의 아름답고 우아함을 보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그처럼 많은 역대에 또한 언제 이런 인물이 있었던가? 이는 모두가 지도함에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巫)
《국어(國語)》에 “정신이 집중된 자에게 신명이 집히니, 남자에게 집힘을 격(覡)이라 하고 여자에게 집힘을 무(巫)라 한다.” 하였는데, 요즈음 세상에 여무(女巫)가 국내에 퍼져 있으되 그에게 집힌 귀신은 모두 요사한 마귀의 종류다. 민속이 그것으로 풍악을 삼고 기도하여 신사(神事)라 하되 법으로 능히 금하지 못한다. 금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권장하는 편이다. 대개 무녀들에게 부세를 물려 관에서 그 물건으로 이득을 보는데, 무녀들의 재물이 어디에서 나겠는가? 이는 모두가 기도하는 데에서 나는 것이다. 그래서 금하기 어려운 것이다.
《주례(周禮)》에 무관(巫官)을 세운 것은, 뜻하건대 옛날에도 귀도(鬼道)를 숭상하여 재앙이 있으면 반드시 빌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지금 국가의 사전(祀典)에 무(巫)를 쓰지 않으니 그 의식이 극히 온당한 것이라, 마땅히 물리쳐 끊기를 겨를하지 못한 것인데 또 어찌 부세를 받기까지 하는가? 이미 부세를 받고 또 그 귀신 섬기는 것을 처벌하여 많은 속전(贖錢)을 받아 관에서 이득을 보니 이는 금하는 것이 아니요, 그 본의는 전포(錢布)를 거두어들이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까운 서울에서부터 먼 고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무(主巫)가 있어 마음대로 출입하므로 민풍이 퇴폐해진다. 무(巫)란 모두 신이 와 집힌다고 하는데, 이는 곧 사람이 부르는 것이지, 귀신이 억지로 붙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는 격(覡)이 있고 무(巫)가 있었는데, 지금은 여무(女巫)만이 있어 안팎에 출입하니, 이는 사람들에게 친근하여 이득을 취함에 있어, 남자가 여자만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무(男巫)가 드디어 없어지게 된 것이다. 내가 사는 마을에 귀신에게 비는 모임이 있었는데, 그 중 어떤 백성의 아내 한 사람이 갑자기 몸에 신이 내렸다 하여 몸을 떨며 황당한 말을 하면서 드디어 늙은 무당을 따라 스승으로 섬긴다 하기에, 내가 그의 남편을 불러 깨우치고 또 스승으로 섬기는 것을 금하게 하였더니 귀신이 떨어져 마침내 평민이 되었다. 이로 보아 법으로 능히 금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들으니 도성 안에는 하루 동안에도 귀신을 먹이는 자가 무수히 많은데 한번 먹이는 비용이 적지 않게 든다고 하며, 시골에도 질병이 있거나 상사가 있으면 귀신을 먹이는 데 소비하지 않는 자가 없어 걸핏하면 두어 달 먹을 양식을 소모시킨다고 한다. 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공사천(公私賤)
우리나라 풍속에 내노(內奴)ㆍ시노(寺奴)ㆍ역노(驛奴)ㆍ교노(校奴)의 유를 공천(公賤)이라 하고, 사서(士庶)의 노(奴)를 사천(私賤)이라 한다. 사천의 부역은 공천보다 중할 뿐만 아니라 사천은 반드시 군액(軍額)에 보충하여 그것을 속오(束伍)라 하고 공천은 논하지 않으니, 국내에서 사천처럼 불쌍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공천에 투신하는 자가 많고 따라서 속오는 그 액수가 줄어든다. 그리고 역노의 일이 가장 경하기 때문에 그 수효가 점점 많아지는데, 바치는 돈은 찰방(察訪)의 사탁(私橐)에 불과하되 금하지 않고 계속 취하니 이 무슨 도리인가? 임금이 온 백성을 한결같이 봄에 있어 어찌 고락을 달리할 수 있으랴? 내 생각에는 공천도 사천과 같이 군액에 보충하면, 백만의 많은 무리를 잠깐 사이에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사천의 일도 특별히 법도를 두어 잔학하게 못하도록 하면 민생이 점차 소생하리라고 본다. 만약 어찌할 수 없다 하여 버려 두는 것은 백성의 부모된 도리가 아니다. 자식이 구렁에 빠져 죽는데 그를 건져 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중강개시(中江開市)
의주(義州)와 삼강(三江) 사이에는 저 나라 사람이나 우리나라 사람이 다같이 농사를 짓지 못했는데, 선조(宣祖) 말년부터 압록강(鴨綠江) 주변에 밥짓는 연기가 서로 닿았다. 아무리 순수한 민간(民間)의 풍속일지라도 너무 친근하면 틈나기가 쉬운 것인데, 하물며 큰 나라와 작은 나라 사이의 강역(疆域)이 핍근한 것이겠는가? 게다가 두만강(豆滿江) 밖에는 두 나라 사람이 섞여 살면서 종리(鍾離)와 비량(卑梁)처럼 싸움이 끊이지 않았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두 나라 경계가 조용해져서 사람들이 편히 살게 되었으니 예부터 없었던 일이다.
중강(中江)에 시장을 개설한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 후(1593)로 기황(飢荒)이 날로 심해지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왕에게 아뢰어 개설한 시장이다. 여기서 면포(綿布)와 철기(鐵器)로써 서로 무역[貿]하니 요동(遼東)의 곡식이 우리나라에 유포되어 수년 동안에 백성이 잘살게 되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에 사신[使] 가는 일은 오로지 역관(譯官)에 의지하고 역관의 이(利)는 또 물화(物貨)에 있었는데, 이 시장이 개설된 이후로 역관들의 장삿길은 편의를 잃게 되었으나 중국에서는 해마다 은(銀)을 2만 냥(兩)까지 거두어들였다. 뒤에 와서 이 시장을 파하게 된 것은 역관들의 작용이었다. 그 다음해(임인)에 태감(太監) 고양(高洋)이 자문(咨文)을 올려 시장을 다시 개설하기를 청하였는데 말이 극히 엄절(嚴切)하므로, 다시 의주(義州)의 관부(官府)에 명하여 그전처럼 무역을 하게 했는데, 광해(光海) 때(기유)에 이르러 다시 자문을 예부(禮部)에 올려 이 시장을 파하고 말았다.
대저 서로 통상하지 않을 수 없는 물화(物貨)는 곡식[粟]과 베[布]와 소금[鹽]과 철(鐵)이다. 우리나라가 중국에 의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병기[弓角]나 말[馬]이요. 이 밖에는 모두 사치하기 위해서 구해들인 것이다. 이미 시장이 개설되면 모든 신기한 노리개나 화려한 비단 따위의 무역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니, 장단검을 비교해 보면 시장을 개설하지 않는 것이 더 유리하다. 지금은 병기나 말 따위는 금하면서 진기한 노리개 따위는 마음대로 매매한다고 하니 이상하다.
■사주(四柱)
서사가(徐四佳 사가는 서거정(徐居正)의 호)는 말하기를 “연(年)ㆍ월(月)ㆍ일(日)ㆍ시(時)로 따져 보면 타고난 사주가 51만 8천 4백을 한계로 그 이상은 없다.” 하였다.
그러나 갑자(甲子)는 60까지 이르니 60을 세 번 곱하여 보면 이 숫자에만 그치지 않을 듯하다. 왜냐 하면 달은 해에 매이고 시는 날에 매이니, 가령 갑년(甲年)이나 기년(己年)의 해에는 달이 반드시 60갑자가 있으며, 시도 또한 이와 같은데, 나머지도 모두 이 예와 같기 때문이다.
51만 8천 4백의 운명을 가지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추수(推數)해 본다면 준례가 되어서 모두 맞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경(易經)》의 방식은 3백 84효(爻)를 가지고 끝없이 변하는 일들을 점치고 있으니, 사람이 잘 살펴봄에 있을 따름이다.
사람에 따라 성정(性情)은 경중(輕重)이 있고 상모(相貌)는 후박(厚薄)이 있으며, 지위는 존비(尊卑)가 있고, 만난 환경은 선악(善惡)이 있으니, 이런 것을 참고하여 운명을 판결한다면 어쩌면 거의 알 수 있을 것이다.
■남녀지별(男女之別)
《동평위일기(東平尉日記)》에 이르기를 “아무 고을에 한 무사(武士)가 있었는데, 글은 모르지만 집에 거처함에 있어 내외의 분별이 매우 엄하였다. 사람들이 사사로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나의 친척에 과부가 된 여자가 있었는데, 하루는 우연히 그에게 갔더니 마침 곁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가 얼굴빛을 변하더니 문득 유혹하는지라, 가까스로 모면하였습니다. 그 뒤에 선비의 집에 가게 되었었는데, 어린아이들에게 《소학(小學)》의 「남녀는 분별이 있다」는 공부를 가르치는 것을 듣고서, 드디어 언문(諺文)으로 기록하여 가지고 돌아와서, 한결같이 그 교훈을 준수합니다.’ 하였다.” 하였다.
대저 사람의 선악은 고금(古今)이 대략 같다. 그러므로 “과부의 아들이 드러난 행실이 없으면 그와 벗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해석하는 자는 ‘덕을 좋아하는 실상이 없으면, 색(色)을 좋아한다는 혐의를 면하기 어렵다.’ 하였다. 그러므로, 친구간의 교제에도 주인이 있지 않거나 일이 있지 않으면, 그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친구뿐이 아니라 친척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곡례(曲禮)에 또 이르기를 “여자가 시집을 가고 나서는 큰일이 있지 않으면 친정에 가지 않는다.” 하였고 “이미 시집갔다가 돌아오면, 형제도 함께 앉지 않는다.” 하였으니, 그 예방함이 이와 같았다. 아무 고을의 무사는 남녀의 본분에 구별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부녀위니(婦女爲尼)
고려(高麗) 말기에 법을 세우기를 “무릇 중으로서 인가(人家)에 묵는 자는 범간(犯奸)으로 논하고, 모든 부녀는 부모의 상(喪)을 당하였더라도 절에 갈 수 없으며 어기는 자는 실절(失節)로 논하고, 비구니가 된 자는 실행(失行)으로 논하며, 감히 부인의 머리를 깎는 자는 중죄(重罪)로 처벌한다.” 하였는데, 이 뜻이 매우 좋다.
오늘날 시골 부녀들이 혹 일찍 과부가 되거나 실행(도의에 어그러진 좋지 못한 행동을 함)을 하게 되면, 몰래 도망쳐 나가 비구니가 되어, 비천한 무리와 마주앉아 식사하면서 음란한 추행을 멋대로 한다. 또 절에 기도드리러 간다고 핑계하고, 중들과 함께 왕래함으로써 더러운 말이 많이 생기니, 이 습속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의 법이 또한 반드시 목적하는 것이 있어서 만든 것인가?
▣성호사설 제8권
■암행어사(暗行御史)
어사(御史)가 몰래 다니면서 민정을 살핀 것은 한 화제(漢和帝) 때부터 비롯되었다. 화제가 즉위하여 시자(侍者)를 나누어 보내되, 모두 미복(微服)으로 혼자서 각각 주현(州縣)에 가서 풍요(風謠)를 살펴 채문(採問)하게 하였다. 미복으로 출몰하여 숨은 것을 살피는 것이 왕정(王政)의 광명에 취할 것이 없는 듯하지만, 말세의 풍속으로 살펴보면 또한 도움이 있는 듯하다.
비록 감사(監司)와 도사(都事)의 순력(巡歷)이 있기는 하나, 대로에서 큰소리로 외치어 번거롭게 열읍(列邑)의 지공(支供)과 역전(驛傳)만 허비할 뿐이요, 그 여리(閭里)의 횡포와 부부(夫婦)의 억울함을 자세히 살필 길이 없으며, 수령이 비록 몹시 부리고 부세(賦稅)를 마구 거두어들인 것이 있다 하더라도 빈천한 백성들이 감히 상서(上書)하여 발로할 자가 있겠는가? 조정에서 거듭 타이르고 경계한 것은 형식으로 돌아갈 뿐, 백성을 해치는 묵은 폐단은 예전대로 제거되지 않는다. 혹 암행어사가 돈다는 소문을 들으면 큰 고을 작은 고을 할 것 없이 모두 두려워서 벌벌 떨고, 시골의 호부(豪富)한 무리들도 모두 숨기에 여가가 없으니, 비록 탐장(貪贓)하고 교활한 관리라 하더라도 마침내는 벗어난다. 그러나 한 시대를 진작시키는 것은 어사만한 것이 없다.
대개, 말세의 정치는 순박한 옛날과 다르니, 깊이 캐내어서 악을 징계함이 없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본받아서 착한 백성들이 해를 받게 될 것이요, 염탐하여 발각해 냄이 없다면 위에 있는 이가 어떻게 얻어 들을 수 있겠는가? 이러므로 옛날 신명(神明)한 수령으로 일컬어지는 이는 모두 이런 방법으로 하였으니, 나라가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것도 이와 무엇이 다르랴?...
■친경(親耕)
금상(今上 영조를 말함)이 동교(東郊)에서 친경(親耕)한 것은 백성에게 근본(根本 농사)에 힘쓸 것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몇 대 만에 한 번 거행하면서 비용을 이루 계산할 수 없었다. 경적례(耕籍禮)는 해마다 거행해야 할 것인데, 만약 다 이와 같이 하면 나라가 폐해를 받게 될 것이다. 또 백성에게 근본에 힘쓰도록 인도하면서 검소함을 백성에게 보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조정에 한 사람도 여기에 대해 언급한 자가 없는 것이 애석하다.
나의 생각으로는 친경(親耕)과 친잠(親蠶)을 해마다 반드시 거행하되 그 비용을 줄이고 오직 검소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임금이 양로(養老)를 하면 아래에는 반드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 것이며, 나라에 대사(大射)가 있으면 아래에는 반드시 향사례(鄕射禮)가 있을 것이니, 나라와 주군은 대소의 다름은 있으나, 표준이 되어 거느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나의 생각으로는, 주군에서도 또한 몸소 거행하여 그 아랫사람을 거느리면, 옛날에는 그런 사례의 고거가 없으나 의의(意義)를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진다.
■붕우형제(朋友兄弟)
나이 많은 이가 형이 되고 나이 적은 이가 아우가 된다. 예(禮)에, 인척(姻戚)끼리 서로 형제(兄弟)라 호칭(呼稱)하고, 친구 사이에도 결의(結義)하여 형제라 하면 서로 친척(親戚)과 같다. 그러나 나이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남을 형이라 하고 자기를 아우라 하여,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칭호로 삼는 것은 사리에 합당치 않다. 아마도 옛날에는 이와 같이 호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자(朱子)가 육상산(陸象山)보다 갑절이나 더 많은 나이로서 오하려 노형(老兄)이라 호칭한 것은, 세속(世俗)을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었으리라. 내가 소설(小說)을 보니, 결의하여 도당(徒黨)이 된 뒤에는 혹 현제(賢弟)라고 호칭하였으니, 이것이 옳다고 하겠다.
■칠사(七事)
오늘날 수령(守令)이 임지(任地)로 떠날 적이면, 으레 농상성(農桑盛)ㆍ호구증(戶口增)ㆍ학교흥(學校興)ㆍ군정수(軍政修)ㆍ부역균(賦役均)ㆍ사송간(詞松簡)ㆍ간활식(奸猾息)을 반드시 먼저 외게 하지만, 수령들이 부임한 뒤에 일찍이 이것을 염두에 두었던가? 감사(監司)의 전최(殿最)에도 이에 대해서는 조금도 거론하여 언급함이 없지만, 조정에서는 심상히 보아 넘기니, 우리나라의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해진 것이 이와 같다. ...
▣성호사설 제9권
■천당지옥(天堂地獄)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말하기를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는 죽었다 다시 살아난 자가 어찌 지옥(地獄)에 들어가 시왕(十王)을 보았다고 한 적이 없었던가?” 하였는데, 이 말이 어리석은 백성들의 의혹을 풀기에는 족하지 못하다. 무릇 그 죽음에 당해서는 혼(魂)과 기(氣)가 드날려 흩어지지만, 정신과 의식은 아주 깜깜한 지경은 아닐 것인즉, 다시 살아나는 경우에는 반드시 갔던 곳을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또 반드시 갔던 곳에는 쾌락과 고초의 구별도 있었을 것이나, 특히 천당(天堂)ㆍ지옥(地獄)의 명칭은 있지 않았다. 조간자(趙簡子)가 죽은 지 이레 만에 다시 살아나서 “천궁(天宮)에 들어가 옥황상제를 보았다.”는 말을 했는데, 만약 불씨(佛氏)가 이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천당에 올라간 것이라.” 말했을 것이다. 사마공의 말은 단지 이치를 들어 밝히는 데 합당할 따름이었다.
■노비환천(奴婢還賤)
우리나라 노비(奴婢)의 법은 기자(箕子)의 “남의 재물을 도둑질한 자는 적몰(籍沒)하여 그 집 노비로 만든다.”는 조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기자는 성인이라 먼 장래를 생각함이 지극하였을 것인즉, 반드시 대대로 물려주기를 지금의 법과 같이 하지 않고 그 자신으로 하여금 노역(奴役)을 하게 하여 그에게 부끄러움을 주자는 데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뒤에 왕건 태조(王建太祖) 때에, 종군한 자가 잡아온 포로에 대하여는 잡아온 자에게 넘겨주도록 하고, 따라서 대대로 물려받는 규정을 만들었으니, 한번 천한 종이 되면 천만 년이 가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학대와 고통은 천하 고금을 통하여 있지 않았던 일이다.
대개 노(奴)란 명칭이 전기(傳記)에 나타나는 것은 은(殷) 나라로부터 시작되는데, 기자 역시 일찍이 거짓 미친 체하여 노가 되었던 것이다. 팔조(八條)의 교(敎)에 가고(可考)할 것은 세 가지뿐이니, 곧 한 고조(漢高祖)의 삼장의 법[三章之法]이다. 한 나라는 단지 “죄를 준다.” 일렀을 뿐인데, 그 “적몰하여 노를 만든다.”는 것은 대개 기자가 은 나라 제도를 사용한 것이다. 은 나라 제도도 또한 반드시 대대로 물려받게 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 법이 한번 제정되자 갈수록 와전됨이 깊어가서 잔학(殘虐)하여 참지 못할 경우에까지 이르렀으니, 법을 만듦에 있어서는 근신(謹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고려 태조는 일찍이 포로를 석방하여 양인(良人)을 만들고자 했으나, 공신들의 뜻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편의에 따를 것을 허락했었다. 정종(定宗) 5년에 비로소 “천한 자는 어미를 따른다.”는 법을 제정했으니, 처음에는 반드시 아비를 따랐기 때문이다. 천인이란 흔히 어미는 알아도 아비는 알지 못한다. 혹은 위엄과 세력을 두려워하고, 혹은 이해에 꾐을 당하여, 변란이 스스로 일어나 윤기(倫紀)를 무너뜨리고 송사(訟事)도 이 때문에 자주 일어나므로, 진실로 어찌할 수 없는 경우에는 도리어 어미를 따르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었다.
성종(成宗) 6년에 노비환천법(奴婢還賤法)을 제정하였는데, 속량(贖良)된 자들도 연대가 차츰 멀어가면 혹 그 본주(本主)를 경멸하는 일이 있으므로 마침내 명령을 내려 법을 정하되 “비록 이미 속량되었더라도 혹 본주에게 욕설을 하거나 본주의 친족과 서로 맞서는 자는 환천(還賤)하여 노역시킨다.” 하였으니, 그 노비의 행패를 미리 막은 것이 지극하다 하겠다. 하지만 그 본주가 이를 미끼로 하여 공연히 일을 일으켜 강(强)으로써 약(弱)을 제압하여 다시 종으로 만든다면 이것은 어떻게 금할 수 있으랴. 그 법도 역시 혹독하다 하겠다. 진실로 이와 같은 일이 있다면 관부에서 살피어 다스림으로써 족할 것이어늘, 어찌 반드시 환천하고야 만단 말인가!
그 뒤에 찬성사(贊成事) 안축(安軸)이 말하기를 “내 평생에 아무것도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나 다만 네 번을 사사(士師)가 되어, 무릇 백성들이 굴욕을 입어 노비로 된 자는 반드시 바로잡아 양인으로 만들었다.” 하였으니, 대개 생각이 있어 말한 것이다. 자못 인인(仁人) 군자의 마음이라 할 만하다. 안축의 아우는 정당문학(政堂文學) 보(輔)인데, 형제가 함께 원(元) 나라 조정의 제과(制科)에 뽑혀서 한 시대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내가 순흥부(順興府)에 이르러 사현정(四賢井)을 찾아가 보니 비(碑)가 서 있는데 “안석(安碩)의 세 아들 축ㆍ보ㆍ집(輯)이 동거하던 옛터라.” 하였다. 축은 아우 보와 함께 안문성공(安文成公) 안향(安珦))의 서원(書院)에 배향되어 천년을 혈식(血食)하고 있으니, 그 보답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국혼간택(國昏揀擇)
우리 조정의 국혼(國婚)이 시초에는 한데 모아 놓고 친히 가리는 규정이 없었다. 세상에서 전하는 바로는 태종(太宗)이 이속(李續)의 아들을 부마(駙馬)로 삼고자 하여 고매(瞽媒 소경 중매인) 지(池)를 시켜 방문하게 했는데, 이속이 마침 손[客]과 바둑을 두면서 단지 하는 말이 “짚신을 삼는 데는 제날을 써야만 한다[業草履 合用草經].”고 하였다. 말하자면 서로 맞아야 좋다는 것이다. 주상은 크게 노하여 이속의 집을 적몰(籍沒)하고 그 아들에게는 장가를 못들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사대부의 자녀(子女)들을 대궐 안으로 모여들게 하여 친히 간택하게 하는 것을 법식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무릇 왕녀(王女)가 하가(下嫁)하면 남편의 집을 섬김이 평인과 다름없으니, 억눌러서 공경를 하게 해도 오히려 교만하고 나태할까 걱정인데, 하물며 뭇사람을 모아놓고 물리고 들이고 함에 있어서랴!
■삼락(三樂)
영계기(榮啓期)의 삼락(三樂)은 스스로 생각을 너그럽게 가진 것이니, 진실로 너그럽게 뜻을 갖는다면 갈(褐)을 입건 새끼로 허리띠를 하건 어디 가도 즐겁지 않는 것이 없으리니, 군자(君子)의 낙이 어찌 다함이 있으랴.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밖에 또 삼락이 있으니,
인생의 큰 근심은 난리가 일어나서 마구 죽이고 죽곤 하여 애잔한 목숨이 현ㆍ우(賢愚)를 막론하고 구학(丘壑)에 메워지는 것보다 더함이 없는데, 다행히 소강(小康)의 시대를 만나서 바깥 도둑이 침범하지 아니하여 전야(田野)에서 한평생을 마치게 된 것이 첫째요,
대륙(大陸)의 남ㆍ북이 춥고 더움이 너무도 달라서 적도(赤道)의 아래는 화기가 맹렬하여 물(物)을 태울 지경이요, 궁발(窮髮)의 밖에는 얼음이 얼어 녹을 사이가 없는데, 나는 적도의 북쪽인 북극(北極)의 남쪽에 나서 따습고 서늘함이 알맞은 것이 둘째이다.
무릇 천하의 백성이 농상(農商)ㆍ잡례(雜隸)를 막론하고 모든 부세(賦稅)가 갈수록 많아져서, 1년 내내 부지런히 움직여도 입에 풀칠하기 부족한데 다행히 명조상[名祖]의 음덕에 힘입어 편하게 지내면서 굶주림을 면하고 있는 것이 셋째이다.
흔히 보면 친구들 간에도 이 세 가지의 낙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원망하고 허물하기를 말지 않으며, 하는 말이 “때를 잘못 타고 나서 녹위(祿位)가 몸에 미치지 않고 구갈(裘葛)도 부족하고 찬손(饌飡)도 풍성하지 못하다.”고 하니 이는 스스로 너그럽게 가질 줄을 모르는 탓이다. “덕업(德業)은 마땅히 전면(前面)의 사람을 살펴보아야 하고, 명위(名位)는 마땅히 후면의 사람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은 세 번 다시 되풀이하여 마땅하다.
■부부(夫婦)
예(禮)에 부부(夫婦)의 명칭이 있고 또한 구부(舅婦)의 호칭이 있으니, 처자(妻子)ㆍ부첩(婦妾) 같은 것이 이를 이름이요, 혼례(婚禮)에는 단지 서부(婿婦)라 일렀는데, 서(婿)란 아내에게 장가드는 것을 말하고, 부(婦)란 지아비에게 출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아비는 부서(夫婿)라 이르고, 딸의 지아비는 여서(女婿)라 이르고, 손녀의 지아비는 손서라 이르고, 자(姊)의 지아비는 자서라 이르고, 누이의 지아비는 매서라 이르고, 생녀(甥女)의 지아비는 생서라 이르는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역시 마땅히 처는 처부, 아들의 처는 자부, 손자의 처는 손부, 형의 처는 형부, 아우의 처는 제부, 생질녀의 처는 생부라고 일러야 하니, 다 한가지 예라 하겠다.
▣성호사설 제10권
■환관궁첩(宦官宮妾)
임금의 덕이 손상됨은 대개 환관과 궁첩에서 연유한다. 덕이 손상되는 것뿐만 아니라 환관은 독양(獨陽)이고 궁첩은 독음(獨陰)이니, 화육(化育)이 선통(宣通)될 이치가 있겠는가? 어느 나라이건 말기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자손이 적어져 나라가 망하는데, 이는 대개 독음 독양의 무리들이 점점 많아져서 화육이 선통되지 않기 때문이다. 송 인종(宋仁宗) 때 손변(孫抃)이 올린 상소(上疏)에 “한(漢) 나라 영평(永平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연호. 58~75) 무렵에는 상시(常侍)가 4명, 소황문(小黃門)이 10명뿐이었고, 당 태종(唐太宗)이 정한 제도에도 1백 명이 넘지 않았습니다. 신(臣)은 감히 먼 한ㆍ당(漢唐) 때의 사실을 들어 오늘날에 시행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폐하(陛下)는 생각해보십시오. 조종(祖宗) 때에 환관이 모두 몇 사람이었으며 지금은 모두 얼마나 됩니까? 많고 적은 차이는 신의 말이 아니라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환관이 많으므로 울기(鬱氣)와 원기(怨氣)가 쌓여 후사(後嗣)가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또 한 순제(漢順帝) 때에 낭개(郞顗)가 편의(便宜)를 논할 때도 “지금 궐내(闕內)에서 모시는 궁인(宮人)의 수는 1천 명이나 되는데, 이들은 어릴 때부터 격리된 생활을 하여 인도(人道 남녀 관계)를 통하지 못하므로 억울한 기운이 쌓여서 위로 하늘을 감동시켜 자손이 자라지 못하는 것이니, 폐하께서 자손을 많이 두실 수 있는 방법은, 궁녀들을 내보내어 제 마음대로 시집가도록 한다면 하늘이 복을 내리고 자손이 많아질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두 사람의 말로 임금이 거울을 삼는 것이 마땅하다. 요사이 들으니, 내시(內侍)와 나인(內人)이 날로 더욱 더 많아지는데, 외조(外朝)에서는 간섭할 바가 아니라 하여 막대한 국비가 쓰여지는데도 감히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한다 한다.
■조선인난순(朝鮮人難馴)
심하(深河)의 패전에서 포로가 된 많은 사람들을, 손금의 거칠고 고운 것으로써 양반ㆍ상놈을 구분하여 각각 가두어 두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자 도망치는 자가 계속 나왔고 어떤 자는 호녀(胡女)를 죽이기도 하고 강간하다가 들통이 나기도 했다. 그러므로 곧 손금이 고운 자 4~5백 명을 죽이고서 저들은 이르기를 “호랑이와 표범은 길들일 수 있으나 조선 사람만은 길들이기 어렵다.” 하였다.
※조선인난순(朝鮮人難馴) : 조선 사람은 길들이기 어려움. 이는 청국(淸國)에서 나온 말이다.
※심하(深河)의 패전 : 명(明) 나라 말기에 건주위(建州衛)를 치려고 우리나라에 원병(援兵)을 요청하므로 김경서(金景瑞)ㆍ김응하(金應河) 등이 몇 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후원했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치사(致仕)
“나이 70이 되면 관직을 그만둔다.”는 것은 성인(聖人)이 정한 교훈이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는 세력이 있는 자는 80~90이 되어도 벼슬에서 물러나지 않고, 소원하고 계급이 낮은 자는 외람스럽게 여겨 감히 청하지도 못하니, 이것이 무슨 의리인가? 공자는 벼슬을 그만두고서도 오히려 달마다 초하루가 되면 조복(朝服)을 입고 조회했으며, 국가에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국정에 참여했으며, 진항(陳恒)을 성토해야 한다고 청하기도 하였으니, 비록 늙어서 정사는 그만두었다 할지라도 무릇 국가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이 있으면 자기의 의견을 소장(疏章)에 나타내어 의논하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혹 본래 지닌 재산이 없어서 기한(饑寒)을 면치 못할 처지라면, 이것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므로, 지금 으레 늙어서 벼슬을 그만둔 사람에게 7품(品)의 녹(祿)을 주고, 또 세시(歲時)에 주육(酒肉)과 쌀도 하사하니, 은혜와 의리가 지극하다. 그러한데도 벼슬을 그만두지 않는 자는 염치가 없는 사람이니, 강제로 벼슬을 그만두게 하여도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은인(隱忍)하는 것이 풍속이 되어 염치란 다시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니, 어찌 세운(世運)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재미담(思齋美談)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의 호) 김 선생(金先生)은 잘 아는 황씨(黃氏)라는 사람이 돈을 모으느라고 남에게 비방을 듣게 되자 선생은 그에게 편지를 부쳐 “나는 20년 동안이나 가난하게 산다. 오두막집 몇 간, 박토 몇 마지기, 베옷 몇 가지뿐이어도 거처하는 데 여지(餘地)가 있고 몸에 걸치는 것에 여의(餘衣)가 있고 밥그릇 바닥에 여반(餘飯)이 있다. 이 삼여(三餘)를 갖고 세상에 구애되지 않고 소신대로 살아가니, 저 천간(千間)의 집과 만종(萬鍾)의 쌀과 여러 벌의 비단옷은 마치 썩은 쥐[腐鼠]처럼 보인다. 다만 없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서책 한 상자, 거문고 한 장, 필연(筆硯) 한 갑, 신 한 켤레, 잠잘 때 베개 하나, 시원한 마루 한 간, 따뜻한 방 한 칸, 지팡이[扶老] 한 개, 나귀 한 필이니, 이것만 하면 족히 늙은 여년을 지낼 수 있다.” 하였으니, 이같은 선현(先賢)의 미담은 써서 벽에 걸어놓고 늘 볼 만도 하고, 또 삼여(三餘)라는 한 구절은 더욱 시료(詩料)에도 알맞다.
■무예(武藝)
우리나라 초기 무과(武科)의 제도는 그 뽑는 수가 적었다. 3년마다 보이는 대비과(大比科)에서 문과(文科)는 33인, 무과는 28인을 선출하는데, 이 28명마저도 바로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벼슬을 시킨다는 것이니, 이는 무반(武班)의 자리가 본래 적기 때문이었다. 근세에 와서는 혹 해마다 한 번씩, 어떤 때는 한 해에 두 번씩 정시(庭試)를 보이는데, 마지막 회시(會試) 때 화살 다섯 개를 쏘아 두 번만 맞히면 급제(及第)가 된다. 이 활쏘는 기술이 점점 교묘해져서, 그 중 낙제(落第)하는 자는 몇 명에 지나지 않고 등과(登科)하는 자는 한 방(榜)에 5~6백 명씩이나 된다. 그러므로 명칭은 출신(出身)이라고 하나, 모두 홍패(紅牌)만 갖고 한 세상을 보낼 뿐이다. 이러므로 원망은 국가로 돌아가고 군액(軍額)은 날로 줄어지니, 크게 잘못된 정사다.
옛날에는 관혁(貫革)을 쏘는 데에 네 개의 화살을 제도로 정하였으니, 이것이 소위 승시(乘矢)라는 것이다. 지금 다섯 개의 화살로 쏘는 법은 어느 시대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신당서(新唐書)》를 상고해 보니 “무거(武擧)는 모두 네 개의 화살로 쏘아 혹 두 번이나 혹 세 번을 맞히면 급제(及第)로 뽑힌다.” 하였는데, 이 제도에 따라 네 개의 화살만을 쏘도록 규칙을 정하면, 맞히는 자가 반드시 줄어질 것이니, 어찌 변통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겠는가? 옛날 적청(狄靑 송 나라의 장군)이 무예(武藝)를 시험할 때 은기(銀器)를 걸어 놓고 그것을 맞히는 자만을 인정하였다. 그 뒤에 기술이 차츰 교묘해져서 맞히는 자가 많아지자, 다시 그 은기를 깎아서 점점 작게 만들었다고 하였으니 그것도 바로 이런 뜻이었다.
▣성호사설 제11권
■사관(四館)
오로지 문벌(門閥)만을 숭상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큰 폐단인데, 국가에서는 이를 알면서도 개혁하지 아니한다. 문신의 경우에 있어서 처음 출신(出身)한 자를 사관(四館)에 분속(分屬)하는데, 이는 사환(仕宦)의 첫길이 되는 것이다. 천하의 일은 처음에 계획을 잘못하면 종말에는 어찌 할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니, 만약 처음에 문벌을 논하지 않고 오직 재기(材器)만을 보아 채용한다면 어찌 벼슬을 세습(世襲)한다는 기롱을 근심하겠는가?
사관 중에서 승문원(承文院)은 연소(年少)하고 영민한 자로 주를 삼고, 성균관(成均館)은 노성(老成)하고 덕망 있는 자로 주를 삼으며, 교서관(校書館)에는 고금(古今)의 사적을 널리 통달한 자로 주를 삼고, 홍문관(弘文館)에 대하여는 내가 소상히 알지 못하나, 아마도 경전(經傳)에 능통하고 사리(事理)에 밝은 자로 주를 삼은 듯하다. 이는 조종조(祖宗朝)에서 법을 세운 아름다운 뜻으로서 어찌 추호라도 문벌(門閥)을 용납할 뜻이 있었던가?
이제 마땅히 신칙하여 방목(榜目)이 발표될 때마다 문지(門地)의 고하를 막론하고 30세 이내는 승문원에, 30세 이후는 성균관에 배치한 후 대신과 중신이 모여 시권(試券)을 상고하되, 경전에 능통하고 사리에 밝은 자는 동그라미[圈]를 치고, 고금(古今)의 사적에 널리 통달한 자는 점을 찍는다. 동그라미와 점의 많고 적음을 따져 동그라미가 많은 자는 홍문관에 배치하고 점이 많은 자는 교서관(校書館)에 배치하여, 지금의 당록(堂錄)처럼 하여 청환(淸宦)의 길을 터 주어 막히는 바가 없게 할 것이다.
동그라미와 점이 없는 자는 윤번으로 경연(經筵)에 들게 하고 임금께서 몸소 그 재주를 시험하여 만약 학식이 탁월한 자가 있으면 특별히 홍문관과 교서관으로 옮길 것이며, 홍문관과 교서관의 관원으로 노둔하고 용렬한 자가 있으면 또한 성균관과 승문원으로 옮길 것이다. 또 혹은 구두(句讀)를 통하지 못하거나 직무를 감당할 수 없는 자는 죄를 주어 내친다. 이와 같이 한다면 사람들은 각자 노력할 것이므로 문벌의 폐습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인정국(人情國)
우리나라를 본래 인정의 나라라고 이르는데, 이는 큰일이나 작은 일이 뇌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무릇 공납(貢納)하는 물건도 뇌물 없이는 바치지 못하는데, 뇌물을 인정이라고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속담에 “진상(進上)은 꿰미에 꿰고, 인정돈은 말 바리에 가득하다.”고 했으니, 이는 공적으로 나라에 바치는 물건보다 사사로 주는 뇌물이 도리어 많다는 것을 이름이다. 이러므로 백성이 곤궁하고 정사가 혼란한 것이 오로지 이것이 폐단이 되었음을,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알지 못하는 자가 없건마는 이를 개혁하려고 유의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슬프고 괴이한 일이 아닌가. 옛날 한 영제(漢靈帝) 때에 궁중에 열사(列肆)를 세우고 사사로 물건 축적하기를 좋아하여, 군국(郡國)에서 공물(貢物)을 바칠 때마다 도행비(導行費)란 명목으로 중서(中署)에 먼저 뇌물을 바쳤으니, 이는 공물 바치는 것을 인도한다는 뜻이다. 이에 환관 여강(呂强)이 간하기를 “공물을 날라 가는 관아마다 도행비가 있어 부과(賦課)가 많으매, 백성은 곤궁하며 소모되는 경비는 많고 실지로 들어오는 공물은 적으니, 간사한 아전은 그 이익을 취하고 불쌍한 백성은 폐를 입게 됩니다.”라고 글을 올렸으나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오래지 않아서 온 천하가 아우성을 치고 황건적(黃巾賊)이 일어나 한 나라가 드디어 망했으니, 지나간 자취를 거울삼아야 한다.
오늘날 공물을 바치는 데 쓰이는 인정돈이 날이 갈수록 심한데 조정의 고관들은 습관이 되어 예사로 알고 있으니, 그 식견이 환관보다도 훨씬 뒤떨어졌다 하겠다.
■사과(詞科) : 사부(詞賦)로 보이는 과거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말에 “사장(詞章)으로써 사람을 뽑아도 명신 석보(名臣碩輔)가 끊어질 염려가 없는데, 어찌 다른 방도를 취할 필요가 있겠는가?”고 한다. 소자첨(蘇子瞻 이름은 식(軾) 호는 동파(東坡))이 이미 이런 말을 하였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바람 앞에 풀이 쓸리듯 임금의 좋아하는 바에 모두 머리를 굽히고 뜻을 가다듬어 그 뜻에 맞추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주와 덕행(德行)이 있는 자가 사장(詞章)을 겸하여 통하는 것이요. 사장이 곧 재주와 덕 있는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령 박혁(博奕)으로써 사람을 뽑는다 해도 역시 그러하다. 재주와 덕행이 있는 자라 해서 반드시 박혁에 정통하지 못한 것은 아니니, 만약 박혁으로써 사람을 등용하고서 이것이 인재를 얻는 길이라고 한다면 옳겠는가? 오늘날 문신(文臣) 중에는 무예에 능한 자도 많은데, 만약 이로 인하여 무신(武臣)을 선발하는 데 글로써 무과(武科)를 보인다면 과연 어떠하겠는가? 그 폐단이 한 가지뿐이 아닐 것이다. 재주ㆍ덕행ㆍ문장은 마침내 한 가지가 아니므로 문장은 유여하나 재주와 덕행이 없다면 인재가 아닌 사람을 얻게 되니, 이것이 한 가지 폐단이요. 또한 재주와 덕행은 있으나 문장이 부족한 자가 있으니, 저 사과를 어떻게 취하겠는가? 이것이 두 가지 폐단이다. 또한 특이하고 비상(非常)한 인재는 과거(科擧)에 참여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므로 꿩과 토끼의 그물에 기린과 봉황이 잡히지 않고, 송사리와 새우의 그물에 교룡(蛟龍)이 걸리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세 가지 폐단이요. 비록 문사(文詞)는 유능하나 유사(有司)가 알아 뽑아 주지 않는 자도 많으니, 이것이 네 가지 폐단인 것이다. 이상의 폐단은 도씨(屠氏 도륭(屠隆))가 소상히 말했으나, 오히려 미진한 점이 있다. 사대부가 아들을 낳아 겨우 철이 들면 먼저 오언시(五言詩)를 익혀 마음과 일마다 이에 구속시켜 벗어나지 못하게 하므로 비록 재주와 지혜가 있더라도 좌절되어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니, 이는 다섯 가지 폐단이 되는 것이다.
하물며 시골 사람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서적이 많지 않고 문견이 넓지 못하니, 습속과 기풍(氣風)이 어떻게 서울 사람을 따를 수 있겠는가? 이러므로 문과의 방목(榜目)이 나오게 되면 서울의 귀한 집 자제들이 8~9할을 점령하나, 만약 재주와 덕행 있는 자가 반드시 서울에만 있다고 이른다면 어찌 옳겠는가?
■대방인물(大邦人物) : 중국에는 인물이 있다.
종반(宗班) 아무개가 나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사신(使臣)을 따라 북경에 들어갔는데, 호씨(胡氏) 성(姓)을 가진 거자(車子 수레를 끄는 사람)와 날이 오래되매 서로 친숙해졌고 그 사람도 또한 정이 들어 간혹 수레 삯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들은즉 그 아우가 바야흐로 형부 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 하기에 호(胡)에게 이르기를 ‘아우가 이같이 존귀한 자리에 있는데, 형은 어찌하여 마부 노릇을 하고 있는가?’ 하니, 그 사람이 분연(奮然)히 노하여 말하기를 ‘나는 그대를 좋은 사람으로 알고 마음을 주었는데 도리어 이런 말을 하는가? 내 아우는 비록 존귀한 자리에 있으나 생사화복(生死禍福)이 남의 손에 달렸으니, 내일날 과연 어찌 될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수레 한 대를 끌어 그 삯을 받아 배불리 먹으며, 가고 멈추는 것을 자유자재로 하여 천명(天命)을 마칠 것이니, 이것으로 저것과 바꾸지 않는다. 어찌하여 사람을 이같이 멸시하는가?’ 하였다. 그 말이 초초(草草)한 사람은 아니었으니, 계주(季主)와 같은 자가 미천한 직업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에서 중국에는 아직도 인물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서원(書院)
우리나라의 서원은 순흥(順興)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맨 먼저 창설되었고, 풍기(豐基)의 역동서원(易東書院)이 다음으로 설립되었다. 근세에 와서는 그 조상이 조금만 이름 있는 벼슬을 하였고 그 자손이 현달(顯達)한 자들이면 서원을 세우지 않는 자가 없으니, 그 폐단이 너무 심하다 하겠다. 심지어는 공자 이하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이들까지도, 따로 항간(巷間)에서 향사(享祀)하면서, 주자가 창주서원(滄州書院)에서 석전(釋奠)을 행한 것으로 핑계를 삼으니, 주자의 일에 대해서는 감히 말을 할 수 없거니와 공자는 성균관과 각 군현(郡縣)에서 향사하는 것으로 충분한데, 한 고을 안에서 이곳저곳에 겹쳐서 향사하는 것은 참람하고 모독되는 일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물며 왕의 작위(爵位)로 높이어 팔일무(八佾舞)로 향사하는데, 어찌 사람마다 행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퇴계의 말에 “창주서원의 석전은 선생이 만년에 도통(道統)을 자임(自任)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예를 베풀어 의심치 않았으나, 만약 다른 사람으로서 함부로 이것을 본받으려 한다면 그것은 크게 어리석은 짓이 아니면 망령된 일이다.”고 하였다. 나의 생각에도 성탕(成湯)과 무왕(武王)은 걸(桀)과 주(紂)를 주벌(誅伐)하였고, 이윤(伊尹)은 그 임금을 내쳤으며, 순(舜)은 부모에게 고하지 않고 장가들었지만 이런 일은 오직 이들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고, 주자의 석전도 그 뜻이 이와 같다고 여겨진다.
■비변사(備邊司)
우리나라는 명종(明宗) 때부터 비변사를 두어 국가의 큰일을 모두 이곳에서 결정하자, 의정부(議政府)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인조(仁祖) 원년 계해(癸亥)에 반정 공신(反正功臣)들이 모두 도당(都堂 의정부의 별칭)의 옛 제도를 회복하려 하였으나,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 원익(李元翼)이 “근고(近古)의 일은 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라의 큰 권세를 신하가 다시 천단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자 드디어 그 의론이 정지되었으니, 이는 이 상공(李相公)의 실언이다. 만약 삼공(三公)이 권력이 없다면 어찌 삼공이라 할 수 있겠는가? 국가의 체통이 날로 떨어지는 것은 오직 여기에서 연유하였다.
행군(行軍)에 비유하면 대장은 임금과 같고 중군(中軍)은 재상과 같아서 모든 군대에 관한 일은 대장이 중군을 시켜 시행하는 것과 같은데, 만약 중군이 사양하기를 “군대에 관한 일을 중군이 천단해서는 안 된다.” 하여 아래에 있는 편장(偏將)과 동등하게 행동한다면 되겠는가? 그렇다면 중군을 둔 의의(意義)가 어디에 있는가? 재상이 존엄한 뒤에 국가도 존엄해지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뜰이 아홉 계단이 되어야 추녀가 땅에서 멀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명 태조(明太祖)가 삼공의 권세 천단함을 염려하여 이를 폐지하고 태학사(太學士)를 시켜 내각(內閣)에 들어와 나랏일을 경영하게 했는데, 수대(數代)가 지나지 않아 삼양(三楊)의 권세가 너무 중하게 되었으니, 또 무슨 이익이 있는가? 진실로 국권을 장악하는 자라면 많은 사람 가운데 있다 하여 정권을 천단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서로 미루는 것이 풍습이 된 것은 비변사(備邊司)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삼국연의(三國演義)
선조(宣祖) 때에 임금의 교서에 “장비(張飛)의 대갈일성(大喝一聲)에 만군(萬軍)이 달아났다.”는 말이 있거늘,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이 나아가 아뢰기를, 《삼국연의》가 나온 지 오래지 않으므로 신이 보지는 못했으나, 뒤에 친구들에게 들으니 허황한 말이 매우 많다고 하옵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이 책이 처음 나오자 임금이 우연히 언급한 것인데도 기고봉은 이렇게 아뢰었으니, 참으로 체통을 얻었다 하겠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 책을 인쇄하여 널리 반포하였으므로 집집마다 외다시피 하며 과장(科場)에서까지 시제(試題)로 삼아 대대로 인습하여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니, 여기에서도 세대의 변천(變遷)을 엿볼 수 있다.
■군읍관례(郡邑官隷)
오늘날 아전의 녹봉은 제 몸의 호구(糊口)에도 부족하거늘 하물며 위로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 처자를 양육함에 있어서랴? 또 여러 고을마다 노비(奴婢)가 있는데 이를 학대하고 혹사하여서 일년 내내 쉴 겨를마저 없게 한다. 내가 수령을 만날 때마다 문득 “관부(官府)의 노비는 실로 살아날 도리가 없는데, 과연 무슨 재주로 죽지 않고 사는가?”고 물으면 역시 선뜻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사람은 재물이 아니면 살 수 없고 재물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니, 아마도 관가의 위엄을 빙자하여 백성의 재물을 토색함이 아니겠는가?
옛날 “서인(庶人)으로서 벼슬에 종사하는 자는 그 녹봉이 하사(下士)와 같아서 모두 농사짓는 대가(代價)가 되지 않는 자는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녹봉으로는 생활할 도리가 없는데도 백성에게서 조금이라도 거두어들이지 못하게 한다면 죽음이 있을 뿐이니, 어찌 애통할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근세(近世)에 수령 된 자가 혹시 아전들을 엄히 단속하여 농간을 부리지 못하게 하면 백성들은 명관(名官)이라 하지만, 아전은 반드시 부지할 도리가 없어 도망칠 것이며, 이와 반대가 되면 아전은 편하게 되지만 백성들은 살아날 수가 없을 것이니, 장차 어떻게 이 두 가지를 절충할 것인가? 요컨대 좋은 계책이 없다. 그러나 저 아전들은 청렴한 자는 쓸모가 없고 간사한 자는 능숙하다고 하는 것이니, 한번만 고삐를 늦추어 주면 백 가지로 간롱(奸弄)을 부려 다시는 제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즉 그 사역(使役)을 늦추어 주고 법을 엄중히 세워야만 아전과 백성이 모두 편안할 것이다.
내가 시골에 있으면서 많이 경험했지만 정사를 하는 데 준엄하게 다루면 원망을 사게 되고 너그럽게 풀어 놓으면 그 폐단이 더욱 심하여, 한 사람이 조금만 늦추면 뭇 아전들이 대신해서 사나워지는 것이다.
포박자(抱朴子)의 말에 “마땅히 노할 때 노하지 않으면 간사한 신하가 포악한 호랑이가 되고, 마땅히 죽일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마침내 큰 도둑이 일어난다.” 했으니, 어찌 작은 고을만 그러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