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사설(星湖僿說)
이익(李瀷 1681-1763 )
▣성호사설 제12권
■생원(生員)
지금 세속에 지위 없는 선비들을, 생전에는 유학(幼學)이라 하고 사후에는 학생(學生)이라 하는데 그것이 잘못이다. 선비는 다 학교에서 학업을 익히는데, 생전에 누군들 학생이 아니겠는가? 또 늙어서 흰 머리가 되어도 벼슬을 하지 않으면 역시 그를 가리켜 유학이라 하니 옳지 못하다. 학생이란 배우는 사람으로서 제생(諸生) 가운데의 일원(一員)이니 만큼 생원(生員)이라 일컫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상복(喪服 《의례(儀禮)》의 편명) 자하전(子夏傳)에, “대부(大夫)와 학사(學士)는 조상을 존경할 줄 안다.” 하였고, 그 소(疏)에는 ‘향(鄕)의 상(庠)ㆍ서(序) 및 대학(大學)ㆍ소학(小學)의 학사들은 비록 관작(官爵)은 없더라도 그들이 사술(四術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과 육예(六藝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를 익혀서 알아 할아버지에 대한 의(義)와 아버지에 대한 인(仁)을 아는지라, 그러므로 아버지에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곧 조상을 존경하는 것이 귀한 대부와 같으니, 이러한 자는 서인(庶人)들에 비하여 차별이 있어야 한다.’ 하였다. 옛날의 도(道)가 바로 그러하였고 또 명칭이 학사인만큼, 국가로서의 대우하는 특이한 예가 있어야 할 것이다.
■육두(六蠹) : 여섯 가지의 좀.
사람 중에 간사하거나 범람한 자가 없다면 천하가 왜 다스려지지 않겠는가? 간사하고 범란한 짓을 하는 것은 재물이 모자라는 데에서 생기고 재물이 모자라는 것은 농사를 힘쓰지 않는 데에서 생긴다. 농사를 힘쓰지 않는 자 중에 그 좀[蠹]이 여섯 종류가 있는데, 장사꾼은 그 중에 들어 있지 않는다. 첫째가 노비(奴婢)요, 둘째가 과업(科業)이요, 셋째가 벌열(閥閱)이요, 넷째가 기교(技巧)요, 다섯째가 승니(僧尼)요, 여섯째가 게으름뱅이[遊惰]들이다.
저 장사꾼은 본래 사민(四民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의 하나로서 그래도 통화(通貨)의 이익을 가져온다. 소금ㆍ철물ㆍ포백 같은 종류는 장사가 아니면 운반할 수 없지만, 여섯 종류의 해로움은 도둑보다도 더하다. 더구나 노비를 대대로 전하는 것은 고금 천하에 없는 일이다. 덕이 없고 재질이 모자라 무슨 계획을 생각하지 못하여 남의 종이 되었는데, 어쩌다 도피하면 사방으로 수색하고 위협하여 마침내는 그들로 하여금 재산을 탕진하고 처소를 잃어버리게 하고야 만다.
세도(世道)에나 심신(心身)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문예(文藝)는 모두 일에 해롭다. 과거에 종사하는 유생(儒生)들이 효제(孝悌)에 관심이 없고 생업(生業)을 포기한 채 날이 가고 해가 바뀌도록 붓끝이나 빨고 종이쪽만 허비하는 것은 결국 심술(心術)을 망치는 하나의 재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다가 다행히 벼슬을 얻기만 하면, 곧 스스로 뽐내어 사치와 교만이 끝이 없고 백성의 것을 박탈하여 그 소원과 욕심을 채우려 하며, 또 그 사이에 요행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가 많기 때문에 이것을 바라고 본받아 모두들 밭고랑을 버리고 분주하게 날뛴다.
벌열이란 것은 자신이 어떤 공로의 자랑거리가 있음을 말하는 것인데, 지금 세속이 양반집 자손에 대해서는 통틀어 벌열을 일컬으면서 서민층에는 구별한다. 그러므로 그 선대의 업이 다 끝나고 자신의 재예(才藝)가 부족한 자도 이치에 어긋난 일을 해가면서 삶을 구할 뿐, 농사의 일을 부끄러워하여 차라리 굶어죽을지언정 천역을 하려 하지 않으며, 심지어 한 번만 농사쟁기를 잡으면 그만 농부로 지목되어 혼인이 통하지 않고 교제에도 늘 남에게 뒤떨어지니, 이 때문에 혹시 자력으로 살아갈 마음이 있는 자도 역시 어쩔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기교란 것은 한갓 구경거리의 기물뿐이 아니라, 무릇 방술(方術)로써 사람을 속이거나 미혹케 하는 종류도 다 그러한 것에 속하는데, 그 중에도 광대ㆍ무당 따위가 더욱 해로운 것이다.
승려는 부처를 숭봉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다만 여러 가지 역사[役]를 도피할 것을 생각하여 밭 없는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날마다 옥토에서 나는 곡식이나 축내는 무리들이다. 농사의 이익은 겨우 두어 배에 지나지 않고 여름철 밭고랑의 괴로움이란 그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자식을 낳아 그 가장 우매한 자를 가리켜 농부라 하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라 풍속이 본래 생활의 여러 갈래가 있어서 농사가 아니더라도 잘살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사(士)와 농(農)을 하나로 합하여 법으로써 지도하고 교화시켜 마치 고기가 물에 헤엄치고 새가 숲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한 다음, 그 중에 재덕(才德)이 있는 자를 초야[阡陌]에서 뽑아 올려 자천하기를 기다리지 않게 한다면, 백성들이 장차 농사에 종사할 것을 자기 본업으로 생각하여, 눈으로 보고 손으로 익혀 각자가 그 업에 안정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려서는 그냥 태만하게 놀고 커서는 이미 굳어져 놀음이나 하다가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모자라면 남을 속이고 빼앗으며, 구멍을 뚫고 담을 넘어 도둑질까지 하면서도 기탄하지 않는다. 이러고서야 비록 농업[本業]에 머리를 숙이려 한들 어쩔 수 없으리니, 이 몇 가지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세상 다스리기를 바란들 어려울 것이다.
■경소(京所)
지금 군수를 보좌하는 사람에 좌수(座首)ㆍ별감(別監)이란 이름이 있어 이것을 향소(鄕所)라 이르는데 곧 옛날의 이른바, 공조 서좌(功曺書佐) 따위가 이것이다. 고을살이하는 자들이 함부로 매질을 하고 모욕을 주기 때문에 선비들은 몸을 굽혀 취임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스림에 도움이 없게 되었지만 그 처음 법을 만든 것은 역시 좋은 뜻에서였다. 향소가 있으면 반드시 경소(京所)가 있기 마련이다. 경소란 그 고을 사람을 골라서 서울에 두는 것인데, 이는 한 고을의 모든 일을 조달하고 주선하기 위해서이니, 그 근원은 고려(高麗) 때 《기인(其人)》이라는 소임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경소의 명칭은 《미암일기(眉庵日記)》를 보면 상고할 수 있고, 《하담록(荷潭錄)》에 세종(世宗)이 충녕대군(忠寧大君)을 함흥경재소(咸興京在所)에 임명한 사실이 있으며, 또 《송와잡록(松窩雜錄)》에, “동래 원이 향소를 처벌하기 위해 관자(關子)를 경소에 보내어 그 소임을 바꿔 주기를 청하자, 그때 경소 당상관(堂上官)인 정 문익공(鄭文翼公)이 ‘향소가 비록 허물이 있더라도 원의 마음대로 감히 바꾸거나 경솔히 처벌할 수 없다.’ 하였다.” 한 말에서도 볼 수 있으니, 만약 옛 제도를 부활시켜 그 재기(材器)를 시험한 뒤 곧 발탁(拔擢)의 길을 열어서 지식 있는 선비로 하여금 그 사이에 몸을 굽혀 나가게 한다면 어찌 도움이 있지 않겠는가?
■노비(奴婢)
우리나라 노비의 법은 천하 고금에 없는 법이다. 한번 노비가 되면 백세토록 고역을 겪으니 그것도 불쌍한데 하물며 법에 있어서는 반드시 어미의 신역을 따름에 있어서랴? 그렇다면 어미의 어미와 그 어미의 어미의 어미로부터 멀리 10세ㆍ백 세를 소급하여 어느 세대의 어떤 사람인 줄도 모르면서 막연한 외손으로 하여금 하늘과 땅이 다하도록 한량없는 고뇌를 받아서 벗어날 수가 없게 하는 것이니, 과연 이러한 환경에 빠진다면, 안회(顏回)와 백기(伯奇)도 그 행실을 가질 수 없을 것이고, 관중(管仲)과 안영(晏嬰)도 그 지혜를 쓸 수 없을 것이며, 맹분(孟賁)과 하육(夏育)도 그 용맹을 쓸 수 없어서 마침내 노둔하고 미천한 최하의 등류가 되고야 말 것이다. 더구나 남의 집에 붙어 우러러 신역하는 자를 학대하고 괴롭혀 살아갈 수 없게 하니 이처럼 궁한 백성은 천하에 없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여염집에 기숙해 있었는데 하루는 벽 뒤에 뭇 노비들이 모여서 서로 원통함을 하소연하기에, 내가 자세히 들어보니 다 까닭이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주인의 말만 듣고 완악한 노비라고 지목하니 이런 것이 다 잘못이다. 송사란 것은 반드시 양편 말을 다 들은 후에 그 시비를 결정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노비의 말이 도리어 옳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도연명(陶淵明)은, “노비도 사람의 자식이니 잘 대우해야 한다.”고 했으니, 이른바, 사람의 도리로써 사람을 부린다면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 옛날에 원모(元某)는 그 자녀들에게 훈계하기를, “자기 일에 부지런하고 남의 일에 게으른 것은 누구나 다 같은 심정인데, 노비는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매일 하는 일이 모두가 남의 일이니 어찌 일마다 마음을 극진히 할 수 있겠느냐? 다만 너그럽게 용서하고 노여워하지 말라.”고 했으니, 이 말이야말로 과연 그러하다.
옛사람이 노비의 상(相)을 논하면서, “탁자는 높은 곳에다 놓고 물그릇은 가득 채우고, 물건은 사람이 다니는 길에 놓는다.”고 했으니, 탁자가 높으면 떨어지고, 물이 가득 차면 넘치고, 물건이 길에 있으면 부숴지기 마련인데, 이것이 다 남의 물건이기 때문이다. 또 마른 밥을 씹는 것은 항상 굶어서 가슴이 체하지 않기 때문이고, 빨리 잠을 자는 것은 피로가 심하기 때문이고, 의상(衣裳)을 뒤바꿔 입는 것은 몸을 수식할 여가가 없기 때문이니, 이런 것을 미루어본다면, 가련하지 않은 것이 없다.
■허균 기성(許筠記性) : 허균의 기억력
뭇 기러기가 공중에 날아갈 때 그 수를 세어 보기 위해 혹은 셋이 하나, 셋이 둘, 혹은 다섯이 하나, 다섯이 둘로 세어, 셋이 몇이고 다섯이 몇임을 세어 보면 전체의 수를 알 수 있는데, 만약 하나하나씩 세어가면, 혹은 앞에 가고 혹은 뒤에 가서 번쩍하면 도로 미혹하게 되니, 이른바 주를 헤아린다[數柱]는 뜻이 역시 이러한 것인지라, 비로소 대체를 총괄하는 자는 그 뜻이 밝고, 세무(細務)를 애쓰는 자는 그 일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알게 된다. 기억력이 슬기로운 이로서 근세에 허균을 최고라 하니, 그는 눈에 한번 거치기만 하면 문득 알아낸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시험하기 위해 붓을 한줌 가득 주고 들어서 그 붓끝을 보인 다음 붓을 감추고 얼마인가를 물었더니, 균(筠)이 눈으로 짐작하고 마음으로 측정하여 곧 벽을 향해 먹으로 표시하기를 붓대 끝과 같이 하고 다시 하나하나를 헤아려서 능히 알아냈다.
■금민 매노(禁民賣奴) : 백성에게 노비 매매를 금함.
누가 말하기를, “노비의 법을 기왕 개혁하지 못할 바에는, 매매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야 하리라.”고 하니, 이 말이 사실 당연하다. 왕망(王莽)도, “노비를 마치 소나 말처럼 매매하여 함부로 그 목숨을 끊는 것은 천리를 어기고 인륜을 저버리는 일이라.”고 했으니, 그 말이 역시 옳다. 무릇 사내종이 되거나 계집종이 된 자는 다 원통하고 억울함을 하소연할 데가 없는 처지이거니와, 그 중에도 주인 집에 매여 사역하는 자는 그 노고가 배나 더하여 자못 사람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 남의 노비를 사는 사람은 죄다 사역을 시키기 위해서니, 금지하여 팔지 못하게 한다면 노비가 많은 집에는 그 사역할 것이 반드시 한계가 있어서 혹시 한가할 때가 있을 것이다. 또 덕도 지위도 없고, 문(文)도 무(武)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만 사역을 시키고 편안히 앉아서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지낸다면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만약 노비를 팔지 못하게 한다면, 혹 노비 없는 이들은 부득이 자력으로 노력할 것이니 그 유익의 하나이고, 또 먼 곳의 서민들은 선계(先系)가 분명하지 못하고 명호(名號)를 서로 바꾸기 때문에, 간사하고 범람한 무리들이 백방으로 이익을 엿보아 매수를 빙자하고 위조하여 농간을 부리므로 거기에 말려드는 자가 역시 많은데, 만약 노비를 팔지 못하게 한다면, 백성들이 걸려들지 않아 안식할 수 있을 것이니 그 유익의 둘째이고, 또 사람은 금수가 아니거니 혹시 세속을 따라 남의 사역을 하지만, 어찌 소나 말처럼 매매해서야 되겠는가? 비록 어쩌다 매매하더라도 그 값의 경중을 보아서 일정한 기간을 지나면, 그것으로서 그치고 그 자손까지 사역시키지 않기를 중국의 풍속처럼 하는 것이 옳으리라. 만약 이 노비 파는 것을 금한다면 온 국내의 미천한 사람들이 고무(鼓舞)하면서 그 은혜를 생각하리니 그 유익의 셋째이다.
■일본지세변 급 격조선론(日本地勢辨及擊朝鮮論)
...내가 이 변론을 살펴보니, 혹 우리나라의 전해온 것과 같지 않음이 있기는 하나 전체를 참고해 볼 때 이쪽 저쪽을 다 드러내어 그 정상이 비로소 밝아졌다. 예를 든다면, 벽제의 싸움에 이여송이 실패한 것을 기피함으로써 그 상세한 사실을 들을 수 없었는데, 이 논에서 가장 기이한 공으로 기록했으니 이것이 빠뜨릴 수 없는 사실이며, 우리나라가 7년 동안 서로 버티면서 사신이 계속 왕래했지만, 융경(隆景)이 모주가 되고 저 청정과 행장은 하나의 편장(偏將)임을 아는 이가 없었으니 왜정(倭情)을 살피기 어려움이 이와 같다. 그리고 그 이른바 조선의 모신은 바로 서애(西厓) 유 재상(柳宰相 유성룡(柳成龍))이니, 만약 그 계획이 시행되었더라면 왜병을 다 섬멸할 수 있었겠거늘, 당시 여송이 듣지 않은 것을 왜인으로서는 역시 다행한 일이라 했으나, 여송 자신이 실패함을 숨기고 공로를 기피하여 모처럼의 기회를 잃었으니 그 죄가 크다. 대개 왜인은 군사를 통솔하는 기율이 없고, 다만 강한 힘과 간사한 꾀와 날카로운 칼과 빠른 탄환을 믿기 때문에, 경솔히 전진하는 자도 금하지 않고 실패하여 후퇴하는 자도 벌이 없는지라, 비록 수가가 대장이 되고 융경(隆景)이 모주가 되어서도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으로 제재하지 못하고, 그 군사를 다루는 것과 기율을 쓰는 것이 도리어 비장ㆍ편장과 같으니, 이것이 왜들의 단점으로 왜를 방어하는 자의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청정이 북으로 임해군을 뒤따른 것은 임해군이 세자인 줄 그릇 알았기 때문이며, 행장이 유정의 꾀에 빠지지 않은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누설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이 일찍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모두들 유정이 왜의 뇌물을 받고서 놓아 주었다 하여 분개했지만, 그 사실이 역시 곡절이 있어서 그렇게 된 듯하다.
■사암능양(思庵能讓)
우순(虞舜)의 세상에는 그 많은 뭇 신하들이 서로 사양하여 조금도 시기하거나 혐의하는 생각이 없고 오직 벼슬을 줄 만한 사람에게 그 벼슬을 주며, 직책을 맡길 만한 사람에게 그 직책을 맡겼으니, 끝까지 삼대(三代)의 이 풍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진(晉) 나라 조최(趙衰)는 세 사람에게 사양했으니, 난지(欒枝)ㆍ선진(先軫)ㆍ선차거(先且居)는 다 사직(社稷)의 호위인지라, 이른바 의(義)의 사양을 잃지 않은 것이며, 또 원계(原季)가 호언(狐偃)에게 사양하고 호언은 호모(狐毛)에게 사양하여 성심껏 어진 이를 추천했으니 그 일이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후세에 와서는, 무릇 벼슬에 임명되는 자들이 모두 겸손한 말로써 사양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 마음을 살펴보면, 다 팔을 걷어올려 단번에 천금을 끌어들일 뜻이고 한 사람도 남을 추천하여 능한 이에게 돌리는 말은 없으니 이러고서야 어찌 순수하고 화합한 풍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우리 선조 조정에 퇴계(1501-1570) 선생이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자,(1568년이며 퇴계는 68세, 박순은 46세이다.) 그때 대제학(종2품) 박순(朴淳 1523-1589)이, “신(臣)이 주문(主文)이 되어 있는데 이(李) 아무가 제학(정3품)이 되니, 나이 높은 큰 선비를 도로 낮은 지위에 두고 초학자가 도리어 무거운 자리를 차지했으니, 사람 쓰는 것이 뒤바꿔졌습니다. 청컨대 그 임무를 교체해 주옵소서.” 했다. 주상께서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명령하자, 모두 박순의 말이 당연하다 하므로, 이에 박순과 서로 바꿀 것을 명령했으니, 아름다워라 박 순의 그 훌륭함이 충분히 세속의 모범이 될 만하다. 지금에는 이욕만이 설쳐 이런 것을 보고 본받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랴? 아! 슬픈 일이기도 하다.
■신동(神童)
사람이 숙달했다 해서 반드시 훌륭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집 자제 중에 어릴 때 이미 빛나는 진취가 있었다가도 급기야 장성해서 다른 사람보다 기필코 뛰어남이 있는 것은 아니더라는 말을 듣고서 세속의 지도와 교양이 그 방법을 잃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오랫동안 증험한 결과 어려서 총명하고 영리했던 수재가 차츰 장성해서는 도로 그 빛나던 재질이 줄어든 것을 보았으니, 이 때문에 원대한 그릇이 드문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선 김시습ㆍ이산해 두어 사람이 있을 뿐, 다른 이는 듣지 못했다. 과연 숙달한 지혜 그대로 나아간다면, 아마 모든 일을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은데, 공명과 사업이 반드시 이런 사람들에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성호사설 제13권
■이여송(李如松)
임진년 변란에 대가(大駕)가 상국(上國)으로 들어가려 하다가 압록강에 임하여 건너지 않은 것은 다만 평양의 적이 둔취(屯聚)하고만 있어 움직이지 않은 때문이고, 적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또 수군(水軍)이 좌절되어 소식이 없기 때문이었으니, 만일 이 충무공의 한산 대첩이 아니었던들 평양의 적은 반드시 전진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이 충무로 원공(元功)을 삼아야 한다. 그러나 만일 이여송의 평양 승첩이 없었다면 생령(生靈)이 어육됨을 날짜로 기필하였을 것인데, 그 공이 도리어 양호(楊鎬)의 아래에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여송이 벽제(碧蹄)에서 패함으로부터 기운이 저상(沮喪)하여 싸울 생각이 없었고, 크게 사기(事機)를 잃었으니, 참으로 죄가 있으나 대세를 잡아 돌이킨 그 은혜는 잊을 수 없다.
여송은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梁)의 아들인데, 혹자는 “성량의 조부가 우리나라 이산(理山) 땅 독로강(秃老江)에 살다가 살인을 하고 도망하여 철령위(鐵嶺衛)로 들어갔는데, 성량의 아비가 변공(邊功)을 세워 유격(遊擊)이 되었고, 성량은 음직(蔭職)으로 지휘(指揮)에 보직되어 오랑캐를 친 공로가 많으므로 기용되어 험산보(險山堡)를 지켰다. 허국(許國)이 사신일 때에 성량이 죄를 얻어 장차 탄핵을 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역관(譯官)에게 애걸하였는데, 곽지원(郭之元)이 중간에서 알선하여 죄를 면하였다. 몇 해 안되어 총병(摠兵)이 되어 천 리의 지역을 개척하고, 아들 사위로 고관(高官)이 된 자가 10여 인이었다. 지원(之元)이 일찍이 북경을 왕래하는데, 성량이 대단히 후하게 대접하여 그것으로 치부하였다.” 하니, 이 말이 참으로 믿을 만하다. 그러나 임진년 난에 여송 형제 두어 사람이 오래 본국에 있었는데, 끝내 여기에 대하여 말 한 마디도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남무 여복(男巫女服)
수십 년 전에 한 남자 무당이 있었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고왔다. 그는 거짓 여복을 입고 사대부 집에 출입하며 안방에서 섞여 자기도 했는데, 서로서로 칭찬하고 천거하여 종적이 서울 안에 두루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의 자색을 좋아하여 강제로 가까이한 자가 있었는데, 비로소 그 거짓이 발각되어 그는 드디어 사형까지 당했고 이로 인해 추한 소문이 많이 전파되었다.
예전에도 이런 것이 있었다. 명(明) 나라 성화(成化 헌종(憲宗)의 연호. 1465~1487) 13년에 진정부(眞定府) 사람 상충(桑冲) 등 10여 인이 눈썹을 빙 둘러 깎고 얼굴에 화장을 하여 몸과 머리를 부인과 같이 단장하고, 늘 모여서 여공(女工)을 배워 익히며 각각 맹세한 다음, 정신이 혼미해지는 약을 만들고 또 혼미해지는 주문을 묵념하여 여자로 하여금 수족을 움직이지 못하고 입으로 말도 못하게 한 후 가만히 간음을 하였는데, 마침내 이것이 발각되어 능지(凌遲)하라는 조서가 내렸다.
그리고 전항(前項)의 부녀들은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여 조사하는 것을 면해 주었다. 악한 사람이 남을 속이는 일은 한이 없으므로 삼가 방지하지 않으면 교묘한 꾀에 빠지기 쉽다. 법을 지키는 집에서는 무릇 무당이나 여승 그리고 색다른 종류들은 절대로 접근하지 말도록 다시 경계를 거듭하여야 할 것이다.
■색욕(色欲)
주행기(周行己)는 몸가짐이 엄하고 각고(刻苦)하였다. 어렸을 때에 모당(母黨)의 여자와 의혼(議婚)을 하였는데 일찍 등과하자 여자는 뒤에 두 눈이 소경이 되었으나 드디어 장가들었다. 이천(伊川)은, “나는 30이 못되었을 때에도 이런 일을 하지 못했다. 그 나아가는 것이 빨랐는데, 물러가는 것도 빠른 것이 대견스럽다.” 하였다.
뒤에 주행기가 술자리에서 뜻이 가는 여자가 있어 비밀히 사람에게 고하기를, “윤언명(尹彦明)에게 알리지 말라.” 하고 또 말하기를, “알더라도 무엇이 해로울 것 있겠는가? 이것이 의리에 해될 것은 없다.” 하였는데, 이천이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금수만도 못하다.” 하였으니, 어째서 그렇게 말하였을까? 사람이 금수와 다른 것은 윤리가 있기 때문이다. 물욕이 이기면 금수와 멀지 않는 것인데, 금수와 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 도리어 금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음욕(淫欲)이다.
무릇 금수 중에도 가축 이외에는 모두 암컷과 수컷이 쌍으로 날고 함께 다니면서도 서로 혼란하지 않고 각각 정한 짝이 있으니, 이것이 분별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흔히 그렇지 않아서 집에 처첩(妻妾)이 있어도 반드시 다른 곳에서 간음하고자 하며, 저자에서 얼굴을 단장하고 음란한 짓을 가르치면서도 부끄러워함이 없으니, 이것이 이미 금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우양(牛羊)의 무리는 반드시 새끼를 배는 시기가 있어 새끼를 배면 곧 중지하는데 사람은 또 거기에도 미치지 못한다. 금수의 짝은 곱고 추한 것을 가리지 않는데 사람은 혹 추한 것을 싫어하고 예쁜 것을 좋아하며, 늙은 것을 버리고 젊은 것을 따르는데,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는 남자를 유혹하여 담을 엿보고 쫓아다니며, 날이 다하고 해가 다하도록 미친 듯이 희롱하고 극도로 부끄러운 짓을 하면서도 그칠 줄을 모르니, 더럽고 악한 것을 말할 수 없다. 이것이 무슨 천리(天理)인가?
내가 보건대, 가축 중에는 오직 닭이 음란한 짓을 많이 하는데 그 죄는 수컷에 있고 암컷에 있지 않다. 오직 사람은 남녀가 서로 따라서 혹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 금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덕을 잃고 복을 망치고, 명예를 무너뜨리고 자신을 죽이고, 아름다운 얼굴을 망치고 몸에 병을 가져오고, 목숨을 재촉하고 마음의 영각(靈覺)을 둔하게 하고, 이목(耳目)의 총명함을 어둡게 하고 평생의 학업을 폐하고, 선조의 산업을 파괴하는 등 거기에서 미친 환해(患害)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정욕은 불과 같고, 여색(女色)은 섶[薪]과 같다. 불이 장차 치성하려 하는데 색(色)을 만나면 반드시 타오른다. 게다가 술이 열을 도와주니 그 힘을 박멸할 수 있겠는가? 그 까닭은 무엇인가? 금수는 편성이어서 지려(智慮)가 주편하지 못하지만 오직 사람은 가장 신령하여 오성(五性)이 고루 통한다. 군자(君子)는 이치로 기운을 제어하여 행동이 도(道)에 합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이치가 폐색되고 기운이 용사하여 신령한 마음이 도리어 사역이 된다. 비유하자면 영리한 사람이 악한 짓을 하는 것이 더욱 혹독한 것과 같다. 이 지경에 이르면 비록 금수만 못하다 하여도 가할 것이다.
▣성호사설 제14권
■사개구청(使价求請)
상신(相臣) 황희(黃喜 1363-1452 : 90세)가 공좌(公座)에 있을 때에 김종서(金宗瑞 1383-1453)가 공조판서(工曹判書)로서 옆에 있다가 해가 한나절이 되매 시장기가 있을까 염려하여 주식을 갖추어 내니, 황희가 노하여,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를 의정부(議政府) 옆에 설치한 것은 삼공(三公)을 위한 일인데, 어찌 사사로 음식을 준비하는가?” 하고 계품(啓禀)하여 죄주려 하니 여러 사람이 만류하며 그만두었다.
중종대왕(中宗大王) 때에 상신 김극성(金克成)이 이 일을 들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대신이 이와 같아야 조정을 진압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문종 대왕(文宗大王) 때에 박이창(朴以昌 1392년경 ~ 1451)이 사행(使行)으로 북경에 갈 때 장마가 지면 길이 막힐 것을 염려하여 양미(糧米) 40두를 가산(加算)하여 실었다가, 이 일이 탄로되자 장차 돌아오기를 기다려 죄를 다스리려 하였다. 이에 박(朴)은 “이미 국법을 범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임금을 뵙겠는가?” 하고 드디어 자결하였다.
이 몇 가지 일만 보더라도 국초(國初)에 정사와 법이 엄중하여 조금도 용서 없었음을 족히 볼 수 있으니, 나라가 어찌 태평하지 않으며 백성이 어찌 유족하지 않겠는가?
후세에는 공사(公私)의 모임만 있으면 음식이 풍성했으니, 그 허다한 경비가 마침내 어디서 나왔겠는가?
사신이 국경을 나갈 때에는 미리 각도와 각군에 서신을 보내어 재정을 부탁하여 얻기에 힘쓰는 것을 구청(求請)이라 이르는데, 이로써 가산을 일으키고 집을 윤택하게 하였으니 옛날에 비해 과연 어떠한가? 사신이 왕래하는 것은 국가의 상전(常典)인즉, 그 노수(路需)는 다만 예조(禮曹)에서 부담할 뿐이니, 어찌 몰래 재정을 구청하고 다른 나라와 물품을 무역하여 재산을 불려 부자가 되기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 어느 이웃 나라에서 알까 두려운 일이다.
■남명 선생(南冥先生)
남명(南冥 조식(曹植)의 호 1501-1572) 조 선생(曺先生)은 상신(相臣) 이동고(李東皐 동고는 이준경(李浚慶)의 호 1499-1572)와 젊어서부터 친분이 있었는데, 동고는 등용되고 남명은 지리산(智異山)에 숨어 있었다.
뒤에 상서원(尙瑞院) 판관(判官 정5품)으로 징소(徵召)되어(1566년) 서울에 왔다가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동고가 찾아오지 않자 남명(당시 영의정)이 동고를 찾아간 즉, 한 동안 지체하다가 내실로부터 큼직한 신을 끌고 나와 인사를 나눈 후에 다른 말은 없고 다만, “상서원 판관도 괜찮은 벼슬인데 왜 마다하는가? 반드시 지평(持平)이나 장령(掌令)을 주어야만 만족하겠는가?” 하였다. 남명이 매우 언짢게 여기고 돌아갔는데, 동고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남명은 도량이 너무 좁다.”고 하였다.
남들의 말에는, “이상국이 장차 그 도량을 시험하여 천거하려 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부귀한 자리에 있는 자는 도(道)를 즐겨하고 권세를 잊어버려 오직 선비가 가까이 오지 않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거늘, 하물며 높다고 자처하여 천하의 선비를 시험할 수 있겠는가?
무릇 거만한 태도로 사람을 시험하여 그 마음을 농락[顚倒]시킨다면, 이는 무식한 백정이나 협객(俠客)따위를 포섭하는 술책이니, 한 고조(漢高祖)가 역이기(酈食其)와 영포(英布)에게 썼던 수단이 바로 이것이다. 상산(尙山)의 채지옹(採芝翁)들도 오히려 거만으로 굴복시키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도(道)를 간직하고 의(義)를 품은 선비이겠는가?
가령 남명의 도량이 넓어 언짢아하는 빛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선비를 천히 여기고 예의를 무시하는 조정에는 반드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옛날 성군 세대에는 산림(山林)의 어진 이를 초빙할 때 포륜(蒲輪)과 폐백을 갖춰 세 번씩이나 번거로이 찾아갔고, 하찮은 관직으로 불렀다는 말과 재상이 문득 존귀함으로써 자처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조정에서 맹헌자(孟獻子 춘추 시대 노(魯)의 어진 대부 중손멸(仲孫蔑))가 자기 친구를 예우하듯 하던 예는 볼 수 없고, 겨우 5두미(五斗米)의 녹봉으로 도를 즐겨 하는 어진 이를 부리려 함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동고의 이 거조(擧措)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남명이 먼저 찾아간 것이 벌써 자중(自重)의 뜻을 잃은 것이다. 대부가 먼저 찾아오지 않았는데 선비가 대부의 문을 찾아갔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나는 조 선생에 대해 유감이 없지 않은 바이다.
■아조 팔폐(我朝八弊)
우리나라의 폐단을 논하는 자의 말에, “비변사(備邊司)에서 일을 마음대로 하므로 의정부(議政府)는 한국(閑局 일이 없는 기관)이 되었으며, 승정원(承政院)에서는 다만 왕명(王命)의 출납을 맡고 있으므로 승지(承旨)가 실무 기관의 구실을 하며, 별사(別司)에서 도감(都監) 노릇을 하므로 본사(本司)는 도리어 잉관(剩官 남아돌아가는 기관)이 되었으며, 관원을 자주 옮기므로 공무를 일부러 생략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며, 우사(郵舍 공문을 중계하여 전하고, 공용 여행자에게 말[馬]을 제공하던 곳)가 서류를 관여하지 않으므로 서리(胥吏 지방 관아에 딸린 하급 관리)들이 법을 농간하며, 벼슬을 많이 겸임시키므로 책임을 전담하는 실상이 없고, 일이 조사(曹司)에 돌아가므로 직책을 떼어 맡기는 의의가 없으며, 책임을 지우는 것이 본명하지 않으므로 헛자리만 지키고 있는 습속이 되었다.”고 했으니, 이 여덟 가지 조항은 모두 시무(時務)를 아는 말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고려는 삼일 공사[高麗三日公事].”란 말이 있으니, 이는 4일을 지탱해 나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법과 좋은 복안이 있더라도 실행하지 않는 데에 어이하겠는가?
나는, 별달리 하나의 법사(法司)를 세워, 관원의 성적을 시험하고 법의 조항을 집행하는 것으로 임무를 맡겨서, 법령이 있어도 시행하지 않는 자를 낱낱이 따져 아뢰어, 범죄한 자는 법에 의거하여 일정한 기한이 지나야만 다시 벼슬을 주는 한편, 대사령(大赦令)에도 해당시키지 않고, 핵주(覈奏)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자는 누구나 그 잘못을 말할 수 있게 하고, 10년간 금고(禁錮)에 처하여 또 대사령에도 해당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이러한 앞뒤 조건을 백료(百僚)들이 모두 1통씩 갖추어 각기 살피게 한다면 족히 정문 일침(頂門一鍼)이 된다 하겠다. 상세한 것은 곽우록(藿憂錄)에 있다.
■구지기(求知己)
정자(程子)가 한지국(韓持國)과 함께 서호(西湖)에 배를 띄웠는데, 한 사람이 찾아와 뵙고 지기(知己)가 되기를 구하거늘, “정자는 일찍이 구하지 않는 자는 상대해 주지 않고 찾아와 구하는 자만 상대해 주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하니, 한 지국이 문득 탄복하였다.
권문 세가(權門勢家)에 분주하게 드나드는 자를 보고 남들이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으며, 권문 세가에서도 그 추태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결국 소득이 있는 자는 그런 사람들이고, 욕심이 없이 멀리 피하는 선비는 참여되지 못하므로, 나는 이 역시 세상의 상정이라 생각한다.
내가 집에서 음식상을 받았을 때 어린아이들이 남들이 웃는 것도 알지 못하고 가까이 와서 먹을 것을 구하면 마음으로는 싫으면서도 반드시 나눠 주지만, 염치를 알고 멀리 피하는 자에게는 가상한 줄은 알면서도 매양 소홀하게 된다.
지금 사람에게 벼슬을 시키는 것도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왕 문정공(王文正公)이 장사덕(張師德)을 가석하게 여긴 것은, 천고(千古)에 한 사람뿐이라 한다.
■임거정(林居正)
옛날부터 서도(西道)에는 큰 도둑이 많았다. 그 중에 홍길동(洪吉童)이란 자가 있었는데, 세대가 멀어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장사꾼들의 맹세하는 구호(口號)에까지 들어 있다. 명종 때 임거정이 가장 큰 괴수였다.
그는 원래 양주(楊州) 백성인데, 경기(京畿)로부터 해서(海西)에 이르기까지 연로(沿路)의 아전들이 모두 그와 밀통(密通)되어 있어, 관가에서 잡으려 하면 그 기밀이 먼저 누설되었다.
조정에서 장연(長淵)ㆍ옹진(甕津)ㆍ풍천(豊川) 등 너덧 고을의 군사를 동원하여 서흥(瑞興)에 집결시켰는데, 적도(賊徒) 60여 명이 높은 데 올라 내려다보면서 화살을 비 퍼붓듯 쏘아대므로, 관군이 드디어 무너지고 이로부터 수백 리 사이에 길이 거의 끊어졌다.
이에 남치근(南致勤)으로 토포사(討捕使)를 삼아 재령(載寧)에 주둔시키자 적도가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가 험악한 기지에 나눠 웅거하여 대항하였다. 남치근이 군마를 집결하여 산 아래를 철통같이 포위하니, 적의 참모 서임(徐霖)이 마침내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나와서 항복하므로 적의 허실과 정상을 모두 알게 되었다.
드디어 군사를 몰아 소탕전을 벌이는 한편, 서임을 시켜 적당 가운데 억센 혈당(血黨 생사를 같이 하는 무리) 대 여섯 명을 유인하여 죽이니, 임거정이 골짜기를 건너 도망쳤다.
치근이 명을 내려, 황주(黃州)에서 해주(海州)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모두 징발하여 사람으로 성(城)을 만들고 문화(文化)에서 재령까지 낱낱이 수색전을 벌이자, 거정이 어느 민가로 들어갔다.
관군이 바로 포위하니, 거정이 한 노파를 위협하여 “도둑이야!” 하고 외치면서 앞장서서 나가게 하고, 활과 화살을 메어 관군 차림을 하고 노파의 뒤를 따라가면서 “도둑은 벌써 달아났다.”고 외치니, 관군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이 틈을 타 말 한 필을 빼앗아 타고 관군의 총중에 섞여 있다가 잠시 후에 다시 병든 관군이라 핑계하고 진중에서 빠져 나가니, 서임이 발견하고, “저 놈이 바로 거정이다.”고 외쳤다. 이에 사로잡히게 되자 큰 소리로 외치기를, “이건 모두 서임의 술책이었구나.”라고 하였다.
3년 동안에 몇 도(道)의 군사를 동원하여 겨우 도둑 하나를 잡았고 양민으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숙종 때에 교활한 도둑 장길산(張吉山)이 해서(海西)를 횡행했는데 길산은 원래 광대 출신으로 곤두박질을 잘하고 용맹이 뛰어났으므로 드디어 괴수가 되었던 것이다.
조정에서 이를 걱정하여 신엽(申燁)을 감사(監司)로 삼아 체포하게 하였으나 잡지 못했다. 그 후에 한 도당을 잡은바, 그가 숨어 있는 곳을 고(告)하였다. 무사 최형기(崔衡基)가 나포할 것을 자원하고 파주(坡州)에 당도하니, 장사꾼 수십 명이 말을 몰고 지나갔다. 한 사람이 고하기를, “저들은 모두 도둑의 무리다.”라고 하므로 모두 잡아 가두었는데, 그 말들은 모두 건장한 암컷이었다. 그 사람이 다시 고하기를, “적의 말은 모두 암컷이므로 유순하여 날뛰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시 여러 고을의 군사를 징발하여 각기 요소를 지키다가 밤을 타 쳐들어갔는데, 적들이 이미 염탐해 알고 나와서 욕설을 퍼붓다가 모두 도망쳐 아무 자취도 없어졌다.
그 후 병자년(丙子年 1696, 숙종 22)에 이르러 한 적도의 초사(招辭)에 그의 이름이 또 나왔으나 끝내 잡지 못했다.
이 좁은 국토 안에서 몸을 숨기고 도둑질하는 것이 마치 새장 속에 든 새와 물동이 안에 든 물고기에 지나지 않는데, 온 나라가 온갖 힘을 기울였으나 끝내 잡지 못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꾀가 없음이 예로부터 이러하다. 어찌 외군의 침략을 막고 이웃 나라에 위력을 과시하기를 논하겠는가? 슬프다.
▣성호사설 제15권
■노예군(奴隸軍)
지금의 속오(束伍)는 고려의 노예군이다. 고려에 또 삼별초(三別抄)가 있었는데, 나라에 도둑이 많으므로 최우(崔瑀)가 야별초(夜別抄)를 조직하여 밤마다 순찰하며 폭력을 금하다가 여러 도(道)에서 도둑이 마구 일어나자, 좌우별초(左右別抄)로 나누어 각처로 파견하여 도둑을 잡게 했으니, 이는 지금의 포도군(捕盜軍)이다.
그 당시 몽고(蒙古)로부터 도망해 돌아온 우리나라 사람들로 한 부대를 만들어 신의군(神義軍)이라 이름했으니, 합하여 별초(三別抄)가 된 것이고, 그 후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키자 김방경(金方慶)이 원(元) 나라 군사를 이끌고 3년 만에 비로소 평정하였다.
또 양반 별초(兩班別抄)가 있었는데, 생각건대 빈한한 선비로서 음관(蔭官 조상의 덕으로 하는 벼슬)이 될 수 없는 자와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뽑아 군대를 만들었으니, 이는 월(越) 나라의 군자군(君子軍)과 비슷한 것이었다.
고종 19년(1232) 몽고(蒙古)군사가 충주(忠州)를 침략해 왔을 때 성을 지키기로 합의하고, 부사(副使) 우종주(于宗柱)는 양반 별초를, 판관 유홍익(庾洪翼)은 노예군과 잡류 별초(雜流別抄)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런데, 적이 쇄도함에 미쳐 종주와 홍익은 양반 별초와 함께 성을 버리고 모두 달아났고 오직 노예군과 잡류 별초가 힘을 합하여 적을 물리쳤다.
일이 안정된 뒤에 노예군을 죽이려 했는데, 노예군이 그 기밀을 알고 변란을 일으키니, 이를 무마하여 겨우 진정시켰다. 생각건대, 미천한 사람은 힘든 일을 잘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가벼운 편이고 양반들은 속이기를 좋아하고 살고자 하는 마음이 항상 앞서므로, 난시를 당하여 힘을 얻을 때는 미천한 자들에게 있고 양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속오군(束伍軍)을 잘 무마하고 양성한다면 후일에 믿을 바는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도리로써 대우하지 않고 사문(私門)에 맡겨져 갖가지로 혹사를 당하고 형벌을 받는데 관에서는 도리어 그 주인의 위세까지 도와 주니, 이렇게 어긋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새가 궁하면 쪼고, 짐승이 궁하면 물며, 사람이 궁하면 속이는 법이다. 이렇게 되면 그들의 힘을 입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고려 때 공가(公家)와 사가(私家)의 노예들이 음모하기를, “왕(王)ㆍ후(侯)ㆍ장(將)ㆍ상(相)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겠는가? 우리들이 왜 몸을 수고로이 하면서 채찍에 두들겨 맞기만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면서 드디어 황지(黃紙)를 오려 암호를 삼아 먼저 최충헌(崔忠獻)등부터 죽이고 뒤를 이어 각기 자기네 상전을 죽일 계획을 하는 한편, “천적(賤籍 하인들의 명단을 기록한 문서)을 불살라 삼한(三韓)에 노예라는 것을 없앤다면 우리도 누구든지 공경(公卿)과 장상(將相)이 될 수 있다.” 했는데 기밀이 누설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또 원종 12년(1271)에는 관노(官奴)들이 나라의 벼슬아치를 모두 죽이기로 음모했다가 또한 주륙을 당했으니, 이것이 모두 거울삼을 만한 일이기에 아울러 기록해 두는 바이다.
■노인십요(老人十拗)
노인의 열 가지 좌절[拗]이란, 대낮에는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으며, 곡할 때에는 눈물이 없고, 웃을 때에는 눈물이 흐르며, 30년 전 일은 모두 기억되어도 눈 앞에 일은 문득 잊어버리며, 고기를 먹으면 뱃속에 들어가는 것은 없이 모두 이 사이[牙縫]에 끼며, 흰 얼굴은 도리어 검어지고 검은 머리는 도리어 희어지는 것이니, 이는 태평 노인(太平老人)의 명담이다.
내가 장난삼아 다음같이 보충해 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보면 오히려 분별할 수 있는데, 눈을 크게 가까이 보면 도리어 희미하며, 지척(咫尺)의 말은 알아듣기 어려운데 고요한 밤에는 항상 비바람 소리만 들리며, 배고픈 생각은 자주 있으나, 밥상을 대하면 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폐세자(廢世子)
연산(燕山)이 동궁에 있을 때, 사람들은 후일에 그가 왕위를 보존하지 못할 것을 짐작했던 것이다.
사재(四宰) 손순효(孫舜孝)가 용상을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이 자리를 동궁에게 주기는 아깝다.” 했다. 여러 신하들이 “무슨 말이냐?”고 묻자 성종은, “나의 호색을 경계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성종의 두둔해 준 일도 훌륭하지만 손순효도 말을 올리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세자도 또한 임금인데 폐할 것을 어찌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양녕대군이 동궁에 있을 때 의정부ㆍ육조ㆍ삼공신(三功臣)과 문무백관이 세자 제(禔 양녕의 이름)의 허물을 들어 폐하기를 청하자, 태종이 이를 윤허하였으니, 이는 임금의 마음도 반드시 그러할 것을 짐작하고 계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부왕(父王)의 조처에 달려 있는 것이고, 신하로서 세자 폐하기를 청한다면, 어찌 마침내는 임금을 폐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겠는가? 이윤(伊尹)과 곽광(霍光)이 임금을 폐립한 일은 후인들의 본받을 바가 아닌 것이다.
■이혼(離昏)
우리나라 법률에는 출처(出妻)에 대한 조문이 없다. 유모(兪某)란 자가 그 아내의 음란한 행실을 들어 관가에 고하고 두 번이나 소송을 제기했으나 송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내 역시 성질이 패만하여 부부의 체통이 없었다. 그러나 중신(重臣)들은 모두 국법에 출처의 조문이 없다 하여,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비록 출처의 조문이 없지만 출처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또 어디에 있는가?
출처하는 것이 진실로 폐단은 있으나, 부모에게 불효하고 음란한 행실이 있어 도저히 그대로 둘 수 없는 여자도 끝내 국법에 의하여 축출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남녘 고을에 사는 박(朴) 아무란 자의 아내는 성질이 악독했는데 하루는 달아나 간 곳이 없었다. 그래서 옥사가 되었는데, 옥관은 그 아내가 남에게 피살되었다고 의심하고 박모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여 겨우 죽음만 모면하였다. 그 후에 명문의 딸을 맞아 아내를 삼았는데, 전처가 그제야 나타났으니 이 같은 사건은 또 어떻게 처리되어야 할 것인가?
혹자는, “여자가 죄 없이 쫓겨나는 것을 고려한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죄가 있어도 쫓아내지 못하면 무한한 폐단이 있다는 것은 어찌 고려하지 않는가?
풍속이 퇴폐하는 원인은 규문에 달려 있으므로, 천만 가지 죄악을 쉽사리 금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만약 혹자의 말과 같다면 성인이 예절을 제정할 때 어찌 부녀자를 위하여 깊은 고려가 없었겠는가만, 칠거(七去)의 조문을 말한 것은 또 무슨 까닭이겠는가?
도둑을 다스리는 데는 마땅히 엄밀하게 다루어야 하므로 간혹 형벌을 남용하여 양민들이 폐를 입는 자가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도둑 잡는 법을 금지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지금 풍속이, 악독한 아내 앞에서 숨을 죽이고 눈을 감기를 마치 하동 사자후(河東獅子吼)와 같이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족하(足下)
족하라는 명칭은 옛날부터 있었다. 그 뜻을 미루어보건대, 천자는 폐하(陛下), 제후는 전하(殿下), 대부는 대하(臺下)혹은 절하(節下)ㆍ합하(閤下)라 하고 선비는 좌하(座下)라고 한다.
뜰 위에 전(殿)이 있고, 전 안에 합(閤)이 있으며, 합 안에 좌(座)가 있는데, 지극히 존중한 상대를 직접 지칭할 수 없으므로 그 앞에 있는 좌우 집사(執事 여기서는 귀인(貴人)을 모시고 그 집안 살림을 맡은 사람을 이름)나 장명자(將命者 중간에 서서 명을 전달하는 사람)의 무리를 세우는바, 상대방의 지위가 높을수록 그 칭호는 더욱 폐(陛)까지 멀어지는 것이다.
발[足]은 신체 중에서 가장 아래에 있고, 좌(座)는 발이 직접 닿는 곳이므로 허물이 없는 친구 사이에는 족하라 부르는 것이다. 무릇 하(下)란 것은 모두 시종자(侍從者)를 가리켜 말한 것이니, 사람이 자리 위에 있으면 그 자리 아래에 있는 시종자는 족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의 말에는, “단궁(檀弓)에, ‘증자(曾子)가 병으로 누웠을 때 증원(曾元)ㆍ증신(曾申 증자의 두 아들)이 발 아래에 앉았다.’고 했으니, 대개 침실[燕寢]에서 시중드는 자제들은 반드시 발 아래편에 앉으므로 족하라 한다.”라고 하였다.
채옹(蔡邕) 《독단(獨斷)》 (책 이름. 2권으로 되었음)에 “폐하(陛下)란, 여러 신하가 지존(至尊)과 말할 때 감히 그 몸을 지칭할 수 없으므로 뜰[陛] 아래에 있는 자를 불러서 고(告)하는 것이니, 아래에서 높은 데로 전달하는 뜻이다. 여러 신하와 선비들이 전하ㆍ합하ㆍ족하ㆍ시자(侍者)ㆍ집사(執事)라고 말하는 것 등도 모두 이 유례다.”라고 했으니, 상고할 만한 말이다.
■열부 조씨(烈婦趙氏)
조인필(趙仁弼)은 숙원(淑媛)조씨(趙氏)의 친족이다.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이 바야흐로 역모(逆謀)를 꾀할 때에 인필이 가담하였는데, 인필의 사위 신모(申某)가 고발하니, 이에 인필이 극형에 처하게 되었다.
신모의 아내가 종신토록 그 남편과 말을 하지 않았으며 문을 닫고 수절하였으나, 또한 신씨의 가문에서 떠나지는 않았고 그 남편이 잠자리를 함께 하려 하면 굳게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또한 열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옛날 우문 사급(宇文士及)의 아내는 수 양제(隋煬帝)의 장공주(長公主)였다. 우문 지급(宇文智及 사급의 형(兄))이 양제를 시해(弑害)함에 사급이 부부의 인연을 지속하려 하였는데, 공주가 거절하고 드디어 이혼하였다.
송(宋) 나라 왕경칙(王敬則)의 딸도 그 남편 사조(謝眺)와의 관련된 일이 또한 이와 비슷하니, 만약 그 우열을 논한다면 인필의 딸 조씨의 행한 일이 가장 중도를 얻었다고 할 것이다.
■화령(和寧)
...성조(聖朝)께서 천명을 받아 화령과 조선으로써 명(明) 나라에 주청하니 이에 황제가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다.
무릇 화령의 뜻은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 혹자의 말에,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연간에 아로태(阿魯台)을 봉하여 화령왕(和寧王)을 삼았는데 그 후에 화령과 올량합(兀良哈)이 모두 와랄(瓦剌)에게 병합되었다. 명 성조가 북방을 정벌한 것은 아로태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한 것이니, 화령은 원(元) 나라의 옛땅이다. 원 나라의 위소(危素)는 “원 태조(元太祖)가 창업한 땅이라 하여 《화령지(和寧誌)》를 지었으니, 족히 그 증거를 삼을 수 있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오랑캐의 지명으로 국호를 주청할 리는 없을 듯하다.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고려 우왕(禑王) 9년에 이 태조(李太祖)가 변방을 안정시킬 계책을 올린 가운데, “동쪽 경계에 있는 화령의 땅은 도내(道內)에서 가장 땅이 넓고 풍요합니다.” 한 말이 있다.
그 다음해에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화령부(和寧府)에 오매, 임언충(任彥忠)을 파견하여 간곡히 효유하여 보냈는데, 길이 막혀 반 년을 머물렀으니, 대개 화령은 쌍성(雙城)에서 요동(遼東)의 개원부(開原府)로 직통하는 요충지이다.
그러니 그 땅은 실로 성조(聖祖)가 창업한 땅으로서 이른바 적전(赤田)이 이곳이니, 국호를 화령으로 주청한 것은 혹 이 연유가 아니겠는가?
또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하건대, 공양왕(恭讓王) 3년에 화령 판관(和寧判官)을 제수했다는 말이 있고, 또 공민왕(恭愍王) 18년에 동쪽 경계에 있는 화주(和州)를 화령부(和寧府)로 승격했는데, 이는 지금 영흥(永興) 땅이니, 선원전(璿源殿)이 이곳에 있다,
■동성혼(同姓昏)
《좌전》에, “성(姓)이 같은 남녀가 혼인하면 자손이 번성하지 않는다.” 했는데, 이는 예법에는 크게 어긋나는 일이지만, 사실을 상고해 보면 그렇지 않다.
예전(禮典)에, “오세(五世) 이후에 서로 혼인하는 것은 은(殷) 나라의 제도가 그러하였고, 백세(百世)에 이르기까지 통혼(通婚)하지 않는 것은 주(周) 나라의 제도가 그러했다.” 하였다.
요(堯)와 순(舜)은 현효(玄囂)의 아들 교현(橋玄)에서 나왔으니, 요(堯)는 고수(瞽瞍) 순(舜)의 아버지)의 증조와 종형제(從兄弟)가 된다. 예법은 비록 세대에 따라 다르지만 천리(天理)는 영원히 있는 것인데 주 나라 이전에는 천리도 다름이 있었던 것인가?
혹자의 말에는, “비록 한 사람의 자손이라도 성이 변경되면 혼인하더라도 이치에 해로움이 없다.” 한다. 그러나 노포규(盧蒱葵)가 경사(慶舍)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니 노포(盧蒱)씨와 경(慶)씨는 성이 다른데도 당시에 동종(同宗)임을 피하지 않았다는 기롱이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노(魯)의 삼가(三家)는 모두 노환공(魯桓公)에서 나왔는데, 이미 맹손(孟孫)씨ㆍ숙손(叔孫)씨ㆍ계손(季孫)씨로 나뉘어졌으니, 서로 혼인을 맺어도 옳단 말인가?
또 유교(劉矯)가 그 고모(姑母)의 집에서 장성하여 성을 진(陳)으로 고쳤는데, 유송(劉頌)이 그와 가까운 친족으로서 자기 딸을 출가시키고 말하기를, “진(陳)씨와 호(胡)씨가 근본이 같으나 예법과 율법에 통혼을 금지하지 않았다.” 하자, 위(魏) 나라 조조(曹操)도 그 재주를 아껴 논죄(論罪)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에 그들이 기롱을 받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황제(黃帝)의 아들로 성(姓)을 받은 자가 14명인데, 14명이 각기 성이 다르다 하여 혼인할 수 있겠는가? 이는 반드시 옳지 않은 것이다. 조상은 같고 성이 다른 자가 서로 혼인할 수 없다면 성이 같고 근본이 다른 자는 통혼을 하여도 혐의 할 바가 없을 듯하다. 이미 한 사람의 자손이 아니면 종족(宗族)이 될 수 없는 것이므로 종족이 아니라면 타성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왕망(王莽)과 왕함(王咸), 또는 유총(劉聰)과 유은(劉殷)의 문제로 세상에서 모두 평론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유총은 흉노(兇奴)의 후손으로 외가의 성을 따라 유(劉)씨가 되었고, 왕장(王嬙 자는 소군(昭君))은 원래 한(漢) 나라의 공주(公主)가 아니었으니, 유강공(劉康公)의 후손 유은(劉殷)이 유총(劉聰)과 무슨 관련이 있기에 통혼하지 못하겠는가? 생각건대, 유은이 유총에게 딸을 바치기 위하여, “동성(同姓)끼리의 혼인은 괜찮다.”는 말을 지어낸 것이 사실은 근본이 같지 않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이 논설에 대하여 두 가지가 있으니, 만약 근본이 다르고 성이 같은 자가 서로 혼인하지 못한다면, 근본이 같고 성이 다른 자는 혼인할 수 있을 것이요, 만약 성이 다르고 근본이 같은 자가 혼인하지 못한다면 성이 같고 근본이 다른 자는 혼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친족을 취하여 윤리를 문란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타성을 취하여 혐의 없는 것이 나을 것이니, 반드시 한 가지를 취하고 한 가지를 버려야 할 것이다.
▣성호사설 제16권
■언문(諺文)
우리나라의 언문 글자는 세종 28년인 즉 병인년에 처음 지었는데, 온갖 소리를 글자로 형용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를, “창힐(倉頡)과 태사(太史) 주(籒)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라.” 하였다.
원 세조(元世祖) 때에 파스파(巴思八)가 불씨(佛氏)의 유교(遺敎)를 얻어 몽고(蒙古)의 글자를 지었는데, 평ㆍ상ㆍ거ㆍ입(平上去入)의 네 가지 음운(音韻)으로써 순(唇)ㆍ설(舌)ㆍ후(喉)ㆍ치(齒)ㆍ아(牙)ㆍ반순(半唇)ㆍ반치(半齒) 등 칠음(七音)의 모자(母字)로 나누어 무릇 소리가 있는 것은 하나도 빠뜨림이 없었다.
무릇 중국의 글자는 형상을 주장하므로 사람들이 손으로 전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데, 몽고의 글자는 소리를 주장하므로 사람들이 입으로 전하고 귀로 듣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형상이 전혀 없으니 어떻게 유전하여 민멸되지 않겠는가? 이제 그 자세한 내용을 얻어 볼 길이 없는 것이다.
만약 규례를 미루어 문자를 만들었더라면 천하 후세에까지 통용되어 우리나라의 언문과 같은 공효가 있었을 것이니, 생각건대 명 나라 초엽에는 반드시 그 법규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언문을 처음 지을 때에는 궁중에 관서를 차리고 정인지ㆍ성삼문ㆍ신숙주 등에게 명하여 찬정(撰定)하게 하였다.
이때에 명 나라의 학사(學士) 황찬(黃鑽)이 죄를 짓고 요동으로 귀양왔었는데, 성삼문 등을 시켜 찾아가 질문하게 했으니 왕복이 무릇 13차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측해 본다면 지금 언문이 중국의 문자와 판이하게 다른데 황찬과 무슨 관련이 있었겠는가?
이때에 원 나라가 멸망한 지 겨우 79년이었으니 몽고의 문자가 반드시 남아 있었을 것이며, 황찬이 우리에게 전한 바는 아마도 이 밖에 다른 것은 없었을 것이다.
〈고려사〉를 상고하건대, “충렬왕 때에 공주(公主 원 세조의 딸)가 총애를 투기하여 외오아(畏吾兒)의 문자로 편지를 써서 원 나라에 보냈으니, 이는 남들이 알까 두려워한 것이다.” 하였고, 〈사기〉에는, “외오아의 문자는 곧 위구르(回鶻)의 글이라.” 하였다.
우신행(于愼行)은, “송 나라 가정(嘉定 영종(寧宗)의 연호) 3년에 외오아국(畏吾兒國)이 몽고에 항복했으니, 곧 당(唐) 나라 때의 고창(高昌) 땅이라.” 하였다.
거감주(居甘州)는 곧 서역(西域)에 있는 나라로서 불교를 신앙하는데, 파스파(巴思八)의 전한 바에 이미, “불교에 의거하여 몽고의 글자를 지어 원 나라 시대에 통용했다.” 했으니, 공주가 사용한 문자는 이 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언문과 모습은 다르지만 뜻은 같았을 것이다.
무릇 중국의 문자는 소리는 있으나 문자로써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반이 넘는다. 입술과 혀와 목과 이를 여닫아 맑고 흐린 음성이 입에 따라 다른데, 무슨 까닭으로 이를 형용하는 문자가 혹은 있고 혹은 없는가?
이제 언문은 반ㆍ절(反切)이 무릇 열 네 모음이며, 모음만 있고 절(切)은 없는 것이 또한 네 가지이니, 세속에서 이른바 입성(入聲)이 이것이다. 그 혀를 윗잇몸에 붙이는 한 가지 소리는 우리나라에도 또한 문자가 없으며, 침(侵)ㆍ담(覃)ㆍ염(鹽)ㆍ함(咸) 4운은 진(眞)ㆍ문(文) 등과 절(切)이 동일하다.
우리나라의 이른바 입성이 중국에는 없는데 다만 아(兒)ㆍ가(二) 두 자가 있으며, 소(蕭)ㆍ효(肴)ㆍ우(尤) 세 운은 모두 한 자에 두 음이 되니, 이는 이해할 도리가 없다.
생각건대, 오호(五胡)의 난리 후에 원위(元魏)를 거쳐 중국의 음이 북방의 음으로 모두 변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의 습속이 서도(西道)에 흐린 음성이 많고 도성 가운데 반촌(泮村)이 또한 그러하며, 북도의 백성이 제주로 옮겼으므로, 그 음성이 북도와 비슷하니, 이로써 증험할 수 있다.
서역(西域)의 문자는 음성이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으나, 옥(屋)ㆍ옥(沃) 이하 입성(入聲) 17운 밖에는 아마 별다른 음성이 없을 것이니, 황찬에게서 얻은 것이 이와 같은 유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파사팔(巴思八)의 끼친 뜻임을 또 알 수 있는데, 후일에 나온 것이 더욱 공교하다고 할 만하다.
다만 그 문자의 모습이 전혀 의의가 없고 오직 1점 2점으로써 분별하는데, 1점은 모두 혀끝에서 나와 정음(正音)이 되고, 2점은 모두 혀의 우편에서 나와 편음(偏音)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처음의 범례는 이제 상고할 길이 없다.
■수군(水軍)
우리나라가 폭원(幅員)은 넓지 않으나 삼면이 바다로 둘려 있어 둘레가 거의 5천 리가 된즉 해방(海防)이 가장 걱정 거리이니, 고려 말엽으로부터 임진왜란까지의 일을 보더라도 알 수 있거늘 이제 일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방비가 허술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래 장원한 생각이 없으니, 가령 시대가 바뀌어 위험한 사태가 벌어진다면 장차 어떻게 대비하겠는가? 임진년의 큰 난리는 오히려 전쟁하던 끝에 있었지만, 이제 태평세월이 오래되매 수군(水軍)을 통솔하는 자들이 군사의 고혈을 짜내어 상부에 바치며 자신의 사복을 채울 뿐이다.
죽은 아들 맹휴(孟休 1713-1751)가 남녘 고을에 부임했을 때, 이 상황을 목격하고 마음에 걱정이 되어 소장을 지어 올리려 하다가 불행히 세상을 떠났는데, 상소문의 첫머리에 이목은(李牧隱)의 소(疏)로써 증거를 삼았으니, 그 말에, “육지에서 사는 백성들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에 배에 오르기도 전에 정신이 흔매해지며 한 번 풍파를 만나면 좌우로 엎어지고 넘어져 배 가운데 서로 나둥그러지기가 일쑤니, 몸을 기동하여 적병과 싸우려 하나 또한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삼면이 바다로 둘려 섬에서 사는 백성이 무려 백만 명이 되는데, 이들은 물에서 헤엄치는 것이 그 장기(長技)입니다. 해변 사람들을 모집하여 상을 후히 준다면 수천 명의 무리라도 하루 아침에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하건대, 정지(鄭地)의 소에, “육지에 깊숙이 사는 백성들은 선박에 익숙하지 못하오니, 다만 섬에서 생장한 자와 수전(水戰)에 자청하는 자를 뽑아 신 등에게 통솔시킨다면 5년 이내에 바닷길을 맑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순문사(巡問使)는 한갓 군량을 소모하고 백성에게 소란만 피울 뿐이니, 파출(罷黜)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그 후 정지가 왜병과 여덟 차례를 싸워 모두 대승을 거두고 수급을 무수히 베었으니, 이는 수전에 익숙한 자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정지가 또 아뢰기를, “왜인은 그 온 나라가 모두 도둑이 아니요, 그 반민(叛民)들이 대마도(對馬島)ㆍ일기도(一岐島)등 여러 섬을 웅거하고 수시로 침략하니, 만약 그 죄상을 밝히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 그 근거지를 섬멸시킨다면 왜적의 환란을 영원히 근절시킬 것입니다. 이제 수군들이 모두 수전에 익숙하여 충렬왕 7년, 즉 신사년 동정(東征)할 때의 배에 익숙하지 못하던 몽ㆍ한병(蒙漢兵)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니 적당한 시기를 틈타 순풍을 기다려 군사를 일으킨다면 성공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하였는데, 신사년의 동정이란 원세조(元世祖)가 군사를 출동하였다가 일기도에서 대패한 것을 지적한 것이니, 몽ㆍ한병이 비록 강성했으나 수전에 익숙하지 못했으므로 불리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여러 섬과 연해에 거주하는 어민들은 물에 익숙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진실로 모집하는 데 좋은 술책만 쓴다면 수군을 즉시 충당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어민들이 잡부(雜賦) 징수에 시달려 일정한 거주를 가진 자가 드문가 하면, 그 뜻에 맞지 않아 바다에 떠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도 하니, 누구인들 편히 살며 생업에 종사하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떠나는 것은 부득이 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 잡부의 징수는 관청의 일용잡비에 지나지 않는데, 곡식의 일정한 부세와 다르므로 매년 증가되기만 하고 원래 탐탁한 전택(田宅)은 없으니, 어찌 사방으로 떠나 도피하려 하지 않겠는가?
국가에서 만약 승도(僧徒)의 도첩(度牒)과 같이 문권을 작성하여 18세 이상 50세 이하의 건장한 자에게 주어 관노(官奴)들이 함부로 침노하지 못하게 한다면 1천 명이나 1만 명 쯤은 즉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수시로 조련하여 변방을 방어한다면 어찌 유리하지 않겠는가?
■둔전(屯田)
둔전의 폐단이 극도에 이르렀으므로 상신(相臣) 허목(許穆)이 일찍이 간곡한 의론을 올려 윤허를 얻었으나, 마침 국상을 만나 권신(權臣)이 이를 저지하였다.
지금의 둔전은 모두 경사(京司)에 예속되었고 사(司)에는 각각 장(長)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권문 세가들이다. 둔전을 혁파하면 수입이 줄어들므로 차라리 국가의 폐단이 될망정 이를 삭감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
그의 소(疏)에, “옛날의 둔전은 모두 변방의 공한지에 있었고, 그 운영하는 방법은 수졸(戍卒)에게 주어 적병이 오면 싸우고 물러가면 밭을 경작하여 새방(塞方)의 요충(要衝)에 곡식을 저축하였으므로 조운(漕運)의 경비가 절약되고 군량이 넉넉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음죽(陰竹)에 둔전을 두었고, 또 연해의 수비하는 곳에 모두 둔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엽에 이르러 책임자가 부실하여 경작은 허술하고 바치는 수량은 곱절로 오르니, 수졸들이 모두 원망했습니다. 우리 태조(太祖)가 창업의 초두에 연해의 둔전을 모두 혁파했는데, 지금의 둔전은 고려 말엽의 폐단과 비슷하옵니다. 서울 사람들의 속담에, ‘둔전에서 수확한 곡식을 4등분으로 나누어 1분은 나라에 바치고 1분은 뇌물로 바치며 2분은 전관(田官)이 먹는다.’고 하니, 이는 국가의 이익이 아니옵니다. 그리고 둔전은 모두 내지의 군사 없는 곳에 두어 전지(田地)의 조세(租稅)가 날로 감축되니, 이는 아문(衙門)의 큰 폐단입니다.” 하였다.
이같이 누적된 폐단을 어느 사람이 알지 못할까마는 오직 말하는 자만 말하고, 이를 방해하는 자는 1백 사람이나 되니, 국가의 재정이 어찌 날로 삭감되지 않겠는가?
나의 죽은 아들 맹휴(孟休)가 마침내 둔전의 폐단을 개혁할 수 없음을 알고 별도로 잘 대처할 만한 미봉책을 생각해 냈으니, “지금 둔전이라는 것이 모두 비옥한 곳에 있는데, 혹은 역적의 재산을 몰수한 것과 혹은 돈을 주고 사들인 것을 모두 둔전이라 하여, 호조에서는 국가에 바칠 조세를 감해 주고 있으니, 단연코 이런 이치가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둔전(屯田)을 그대로 두고 조세를 전례와 같이 바치게 한다면 각 영문(營門)에서는 백성이 토지를 사서 소출의 반을 받고 자신이 조세(租稅)를 관에 바치는 것과 같을 것이요, 백성에 있어서는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여 소출의 반을 얻는 것과 같을 것이니, 모두 해로움이 없을 것이나 다만 이른바 전관이 4분의 2분을 먹는다는 것은 약간 삭감될 뿐인데 나라에서는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가?” 하였다.
이상과 같이 봉사(封事)의 초안을 갖추어 장차 적합한 때를 기다려 올리려 했으나, 불행히 단명하여 세상을 떠났다.
■강간(强姦)
옛말에, “세상에 강간은 없다.” 했으니, 이는 여자가 만약 목숨을 걸고 정조를 지킨다면 도둑이 범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옛날 노영청(魯永淸)이 화간(和姦)과 강간의 구별을 판결하기 위하여 힘센 종을 시켜 여자의 옷을 벗기게 했는데, 다른 옷은 모두 벗겼으나 오직 속옷 한벌 만은 여자가 죽기를 한정하고 반항하여 마침내 벗기지 못했다. 이에 강간이 아니요 화간이라고 판결을 내리니, 사람들이 명판결이라고 일렀다.
나는 생각건대, 이는 정리에 벗어난 논설이니, 여자가 거절하는데 남자가 겁간하려 하는 것은 이미 강간이니, 그 후에 딸려 일어나는 일은 족히 말할 것이 없다.
날짐승에 비유하건대, 암탉이 수탉에 쫓기어 담을 넘고 지붕에 올라 쉴 사이 없이 날으다가 마침내는 면하지 못하는데, 그 후에 본즉 새끼 딸린 암탉은 모면하지 못할 듯하나 수탉이 마침내 범하지 못하니, 이로써 말한다면 암탉도 또한 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탉에게 쫓기어 쉴 사이 없이 달아나다가 모면하지 못한 것을 어찌 화간이라고 하겠는가?
죄는 마침내 겁간한 자에게 있으니, 혹 이같은 송사가 있어 노영청의 판결에 의한다면 폐단이 있을 듯싶으므로 이에 변론하는 바이다.
■내훈(內訓)
우리나라의 태평 성대는 성종조(成宗朝) 때가 가장 으뜸이었다. 이제 덕종비(德宗妃) 소혜 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가 지은 《내훈(內訓)》 7장을 보니, 즉, 언행(言行)ㆍ효친(孝親)ㆍ혼례(昏禮)ㆍ부부(夫婦)ㆍ모의(母儀)ㆍ돈목(敦睦)ㆍ염검(廉儉)이다.
또 자신이 서문을 지었는데, “《소학》ㆍ《열녀전(烈女傳)》ㆍ《여교명감(女敎明鑑)》은 권질이 너무 많아 알기가 어려우므로 이에 사서(四書) 가운데 긴요한 말을 추려 《내훈》 7장을 지었다. 한 몸을 다스리는 요점이 모두 여기에 실려 있으니,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하였다.
이를 보더라도 그 당시 궁중의 훈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니, 성종조 25년의 태평을 이룩한 것이 어찌 마땅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은, “명성조(明成祖)의 황후 서씨(徐氏)가 《내훈》 20편을 지었다.” 하였다.
■십악 대죄(十惡大罪)
십악 대죄는 모반(謀反)ㆍ모대역(謀大逆)ㆍ모반(謀叛)ㆍ악역(惡逆)ㆍ부도(不道)ㆍ대불경(大不敬)ㆍ불효ㆍ불목(不睦)ㆍ불의(不義)ㆍ내란(內亂)이다.
종묘와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반(反)이요, 나라를 배반하고 역적에게 좇는 것은 반(叛)이니, 반(反)은 곧 나라 안에서 흉모를 꾸미는 것이다. 대역은 종묘(宗廟)ㆍ산릉(山陵)ㆍ궁궐(宮闕)을 침해한 것이요, 악역은 조부모ㆍ부모ㆍ백부모ㆍ숙부모ㆍ고모ㆍ형제 자매ㆍ외조부모ㆍ남편의 조부모와 부모에게 거스리는 것이요, 부도는 일가 중의 죽을 죄 아닌 자 3인을 죽인 것과, 사람의 사지를 찢어 죽인 것과, 고독(蠱毒) 및 염매(魘魅)의 방법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요, 대불경은 큰 제사 및 신전(神殿)에 쓰는 기물 또는 임금이 쓰는 난여(鑾輿) 및 의복ㆍ기물 등을 도둑질한 것과, 어보(御寶)를 위조한 것과, 어약(御藥)을 조제할 때에 잘못 본방에 어긋나게 한 것과, 봉제(封題)를 그릇 쓴 것과, 어선(御膳)을 만들 때에 금기하는 물건을 범한 것과, 임금이 사용하는 배 및 항상 기거하는 궁전을 견고하지 않게 만든 것과 임금을 지적하여 그 정의가 박절하다 하는 것과, 주문(呪文)또는 부적 등속을 사용하여 임금의 총애를 구하는 것과, 임금 또는 임금이 보낸 사신에게 신하된 예절을 차리지 않는 것 등인데 그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이는 죄악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서 백성들끼리 서로 죽인 것과 도둑질한 것은 들지 않았으니, 이는 더욱 용서할 수 없는 죄악임을 밝힌 것이다. 그 나머지는 오형(五刑)에 속한 3천 가지에 스스로 해당되는 법률이 있다.
■빈천 생근검(貧賤生勤儉)
빈천은 근검을 낳고 근검은 부귀를 낳으며 부귀는 교만과 사치를 낳고 교만과 사치는 빈천을 낳으니, 이것을 윤회(輪廻)라고 말한다.
요즈음 사람들의 일로 징험하건대, 근검이 반드시 부귀를 낳지 못하고 교만과 사치가 반드시 빈천을 낳지 못하니, 풍속의 변경에 따라 천리도 때로는 막힘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극도에 이르면 때에 따라서는 또한 이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목자(草木子)》에, “조종(祖宗)의 부귀는 시서 가운데에서 왔는데, 자손이 부귀를 누리게 되면 시서를 천대하며, 가업은 근검 가운데에서 이룩되었는데, 자손이 가업을 얻으면 근검을 잊어버린다.”고 했으니, 이 말이 더욱 절실하다.
■국시(國是) : 온 나라 사람들이 표준으로 삼는 큰 국책(國策).
붕당의 의론이 성하매 어질고 어리석은 구별이 없어지고, 국시의 논설이 머리를 들매 착하고 악한 것이 전도되었다.
여기에 한 사람이 있는데 온 나라 사람의 반은 좋아하고 반은 미워한다. 갑을 주장하는 자가 이것이 국시라고 하면 사정에 가린 바 되어 다만 옳다고 하는 자가 많을 것이요, 을을 주장하는 자가 이것을 국시가 아니라고 하면 사정에 가린 바 되어 다만 아니라고 하는 자가 많을 것이니, 한 사람이 억측으로 결정하면 천 만 사람이 부동하여 마치 자벌레가 누른 것을 먹으면 누르고 푸른 것을 먹으면 푸른 것과 같이 된다. 비록 10인이 옳다고 하고 1인이 그르다고 하더라도 국시가 될 수 없거던, 하물며 옳다고 하는 자가 10인이 되지 않음에 있어서랴? 또 붕당에 아유하여 풍습을 선동하매 흑백이 정한 데가 없어, 배를 타고 방향을 돌리면 남북이 자리를 바꾸듯 하니, 장차 어디로 따라 갈 것인가? 그러므로 스스로 국시라고 창론하는 자는 나라를 망치는 논설인 것이다. ..
▣성호사설 제17권
■임진재조(壬辰再造)
임진왜란에 있어, 재조(再造)의 공은 마땅히 석성(石星?~1599)을 첫째로 하고, 이 순신(李舜臣?~1598)을 다음으로 하고, 이여송(李如松 ?~1598)을 그 다음으로 하고, 심유경(沈惟敬 ?~1597)을 또 그 다음으로 해야 하며, 그 나머지 조그만 승패는 족히 계교할 것이 못된다. 석성이 아니면 명(明) 나라 군대가 나오지 못했다. 처음에서 끝까지 우리나라 일을 힘써 주장한 것이 석성이다. 평양의 승첩은 단지 왜(倭)의 수군(水軍)이 이순신에게 꺾인 바 되어, 수륙(水陸)으로 장구(長驅)하는 세를 잃어 머뭇거리고 나아가지 못하다가 대군(大軍)을 만나서 물러난 것이다. 평양에서 용만(龍灣)까지 거리가 지척인데도, 몇 달을 나아가지 않고 있다가 이여송에게 함락된 것이다. 마치 높은 봉우리 위에서 돌을 굴려 내리는 것처럼 세(勢)가 이미 승패의 국면(局面)을 이루었는데도, 도둑은 평양에 머물러 있어, 끝까지 심유경과의 약속을 지켰다.대가(大駕)가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일이 수습되고, 평안ㆍ황해의 두 서쪽 지방이 참혹한 재앙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 모두 심유경의 힘이었다. 도둑이 물러가 서울을 점거하자 군대를 거두어 돌아갈 뜻이 없었으니, 삼남(三南)이 아직도 도둑의 손 안에 들어 있었다. 심유경이 소서 행장(小西行長)을 속여서 “중국에서 또다시 큰 군대를 동원하매 서해(西海)로 좇아 충청도로 나와서 너희의 돌아갈 길을 끊으려 하고 있다. 그 때에는 비록 돌아가려 한들 되겠는가?” 했다. 도둑이 두려워하여 곧 군대를 거두어 남쪽 바닷가로 물러갔다. 삼남이 병화(兵禍)를 면하게 된 것도 모두 그의 힘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석성ㆍ심유경 두 사람의 재앙을 앉아서 보았을 뿐 한 사람의 신구(伸救)하는 사자도 보내려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을 차마 할 수 있었단 말인가? 다른 날 우리나라 사람이 지하(地下)에서 두 사람을 만난다면 무슨 면목으로 이를 대할 것인가? 도둑이 부산에 남아 있었으니, 우리나라에 만일 지혜와 실력이 있었다면 쫓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을 두려워해서 하지 못했단 말인가? 이것을 석성과 심유경이 금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자기의 할 일을 자기가 하지 못하고 도리어 허물을 남에게 돌렸으니, 이것이 무슨 심사(心思)인가? 이것은 마치 뽕나무에 칼을 대고, 곡식 줄기에서 즙(汁)을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치첩(雉堞)
임진년 난리에,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 ?~1592)이 김명원(金命元)의 부장(副將)이 되었다. 한강에서 패전하자, 김명원을 버리고 이양원(李陽元)을 좇아 양주(楊州)로 갔다. 남병사(南兵使) 이혼(李渾)과 군대를 합쳐 싸워서 승리를 거두고 적의 머리 60여 급(級)을 베었다. 왜(倭)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로 최초의 승리인 것이다. 사람이 모두 기뻐서 펄펄 뛰었다. 이때 김명원이 임진(臨津)에 있으면서 신각이 주장(主將)을 버리고 간 일을 아뢰니, 유홍(兪泓)이 목 베기를 청하여 선전관(宣傳官)이 이미 떠났는데 첩보가 이르렀다. 사람을 시켜 뒤쫓게 했으나 미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슬퍼했다고 한다.
한강을 지키지 못한 것은 대장이 무모했기 때문이다. 부원수의 직위에 있으면서 기회를 보아 공을 세우려 했음이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공을 이루었는데 몸이 죽음을 당했다. 이러고서야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임진의 난에 성(城)을 지킴은 이정암(李廷馣)의 연안성(延安城)을 최고(最高)로 친다. 이보다 앞서 신각이 이 고을의 원이 되어 성을 수축하고 참호를 깊이 파고 군기(軍器)를 많이 비축했으니, 이정암이 이로 인하여 공을 이룬 것이라고 한다. ...
■조선병(朝鮮兵)
사람들이 모두, “조선 군사는 무능하고 약하여 쓰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백사(白沙)가 본국 사람으로 유 제독(劉提督)의 수하에 예속된 자의 말을 기록하기를, “제독을 따라서 사방을 정벌(征伐)해서 경력한 바가 많은데, 그의 본 바로는 달자(㺚子)는 상대하기 쉽고 해귀(海鬼)는 약간 강하고 왜자(倭子)가 가장 강하다. 해귀는 만병(蠻兵)이다. 순천(順天) 싸움에서 적의 수급(首級)을 가장 많이 베어 온 군사는, 모두 조선 사람으로서 귀화하여 한군(漢軍)이 된 자들이었다. 제독이 매우 중히 여겨 제방(提防)하기를 매우 엄밀히 하여 도망해 달아나지 못하였으므로 따라서 강을 건너간 자가 3백 명이 되었다.” 하였다. 이로써 말하면, 조선 군사가 천하에서 제일이라고 해도 가할 것이나, 생각건대, 쓰기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또, “본국에 있을 때에 도망하여 돌아오려고 하다가 일이 탄로되었는데, 제독이 행장을 다 뒤져서 은(銀) 2백 냥을 공탁(公槖)에 압류하였다.” 하였으니, 은은 전공(戰功)의 상인데, 한 사람의 상금이 2백 냥의 다액에 이르렀으므로 가장 용맹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장려했으니, 열등이 변하여 용맹하게 된 것이 마땅하다.
■근민(近民)
임금은 지극히 높고 백성은 지극히 낮다. 양쪽이 모두 먹는 것에 의지하여 사는데, 먹는 것은 백성에게서 나오고 공물(貢物)은 임금의 먹는 것이 된다. 남은 것을 위에 헌상하는 것을 ‘공(貢)’이라 하고, 나는 굶주리는데 위에서 도리어 강제로 취해 가는 것은 ‘탈(奪)’이라 한다. ‘탈’은 백성의 소원이 아니다. 만백성이 생산한 물건으로 한 사람[一人 임금을 이름]을 받드는데 과연 무엇이 부족하여 반드시 겁탈(劫奪)을 일삼아 먹는 것인가? 이는 임금의 본심에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 지극히 높고 지극히 낮은 즈음에 있어서, 만일 자세히 살피고 깊이 노력하지 않으면 그 형편이 능히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오직 백성을 가까이함이 중요한 일이다. 가까이하기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수시로 유예(游豫)하는 기회를 내어 방편(方便)으로 백성을 면접하되, 화한 얼굴로 인도해 주고 모종의 행사를 인연하여 심방하기를 붕우(朋友)간의 반가움과 부자간의 친함같이 한 뒤에야, 아래의 사정이 비로소 위에 통하여 그 고통[疾苦]을 가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
■하대해(河大海)
하대해는 문의(文義)의 교생(校生 : 향교의 심부름꾼)이었다. 용모와 거동이 준수하며 특이하고 완력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데다, 글을 읽어 두루 통달하였고 의론이 강개(慷慨)하였다.
정승 허적(許積 1610-1680)이 파직되어 시골로 돌아가 있을 적에 하대해가 찾아가 뵈었는데, 패랭이[蔽陽笠]를 쓴 채 옷은 터지고 찢어졌으며 진흙투성이였으나, 허 정승은 일어나서 정중히 대하고는 문답한 바가 없었다.
얼마 후에 하대해가 하직하고 나오자 허적이 가지고 있던 부채를 주겠다고 했다. 그가 부채를 받아가지고 물러난 뒤에 곁에 있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물었다. 허 적은, “그는 특이한 사람이다. 패랭이로는 내가 임금을 속였다고 책한 것이고, 터지고 찢어진 데다가 진흙투성이가 된 옷차림을 한 것은 내가 쓸모없이 천하게 지내는 것을 깨우친 것일 뿐이다.” 하였다.
감사 이언기(李彦紀)가 문의(文義 현 청주시 상당구)의 원으로 있을 적에, 하대해가 찾아 뵈었는데, 대청 위에서 절을 하고는 공수(拱手)하고 섬돌 위에 서서, “대청 아래서 절을 하는 것이 예인데, 지금 대청 위에서 절을 한 것은 너무 불공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이언기가 마루로 올라오라고 명하자, 그가 마루로 올라와 앉았다가 곧 물러났는데, 이에 그 고을 좌수가 나와서, “사또가 지성으로 백성을 진휼한 것이 오늘부터 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하였다. 이언기가 그 까닭을 묻자, “하모(河某)는 특이한 선비여서 평생 동안 발자취가 관문(官門)에 미친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그가 다른 곳에 나가고 없을 때 그 고을에서 장정(壯丁)들을 모집하였었는데, 그의 맏아들도 거기에 충액(充額)이 되자 그 가족들이 모두 도피하였다. 그가 돌아와서 이 말을 듣고는 곧 그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이언기에게, “소민(小民) 같은 것이 병역을 기피한다면 국가가 어디서 군정(軍丁)을 얻겠는가? 다만 큰자식은 몸에 병이 있어 병역을 감당하지 못하니, 둘째 자식으로 대신할 것을 결정하여 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언기가 드디어 불러들여 오게 하니, 그는 손에 해어진 부채를 쥐고서, “이것은 허 정승이 준 것이다.” 하였다.
■감사 가민녀(監司嫁民女) : 감사가 백성의 딸을 시집보내 줌
감사 이세재(李世載 1648-1806)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사대부집[衣纓家] 딸이 있어 얼굴이 아름다왔는데, 정혼은 하였으나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어느 날 유모(乳母)가 바깥 행랑에 있을 때에 주인집 딸이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지나가던 장사치가 그 딸을 보고는 많은 재물을 유모에게 주면서 속여 말하기를, “나는 저 처녀 때문에 병이 생겨서 죽게 되었다. 속담에, 처녀가 홀로 잘 때를 틈타서 총각의 허리띠를 그 자리 밑에 몰래 감춰 두면 살 수 있다고 하니, 원컨대 내 목숨을 살려 달라.”고 하자 유모가 그 뇌물을 탐내어 그 말대로 하였다.
장사치가 새벽에 그 집을 찾아가서 이르기를, “내 허리띠를 자리 밑에 빠뜨렸으니 그것을 돌려주어야겠다.”고 했다. 그 집에서 깜짝 놀라 호통을 쳐서 쫓아 버렸는데, 장사치가 드디어 관(官)에 호소하여 기어코 그 딸을 차지할 계략을 세웠다. 이세재가 거기에 거짓이 있음을 짐작하고는 유모를 심문하여 그 실정을 밝혀 내고 장사치와 유모를 죽인 다음, 그 처녀가 시집가지 못하게 된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곧 약혼자를 불러 이런 까닭을 말하고는, “네가 아니면 이 처녀가 시집갈 곳이 없게 되었다. 그 혼사의 비용은 내가 변통할 것이니, 너는 내 말을 좇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하여 억지로 따르게 하였다. 드디어 친히 택일까지 하고 혼수(婚需)를 갖추어 혼례를 치르게 하자 당시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윤집독계(尹鏶獨啓)
효종(孝宗)의 돈독한 우애는 하늘이 낸 것이었다. 정축년(1637, 인조 15) 이후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이 세 차례나 연경(燕京)에 들어가고, 아홉 차례나 심양(瀋陽)에 들어가서 그 공로가 있었다. 우연히 그 처남 오정일(吳挺一)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승지(承旨) 유도삼(柳道三 1609-?)이 취중에 잘못하여 소인(小人)이라고 칭할 것을 소신(小臣)이라고 칭하였는데, 서변(徐忭 1605-1656 당시 천안군수)이란 자가 어떤 자의 사주를 받아 역적으로 고변(告變)하였다. 왕이 크게 노여워하여 사주한 자를 국문하려 하는데, 대간(臺諫)에서는 도삼(道三)을 탄핵하였다. 곧 대간을 파직하라고 명하자, 대사간(大司諫) 유철(兪㯙 1606-1671)은 너무 과중함을 간쟁하였다. 왕이 그 사주한 자를 핵실하고자 하던 차이라 곧 끌어내어 고문하라고 명하고는, “내가 임금이 되어 어찌 하나뿐인 아우도 보호하지 못하겠느냐? 너의 파란 낯[藍面]과 귀신 같은 상으로 간악한 짓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우상(右相) 심지원(沈之源 1593-1662)이 유철을 구하려고 하자 왕이, “간사한 무리로써 간장(諫長 대사헌을 이름)을 삼은 것은 대신(大臣)의 죄이니, 경(卿)은 의당 대죄(待罪)해야 한다. 이런 적을 죽이지 않는다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고 하였는데, 사간(司諫) 윤집(尹鏶 1601-1669)이 집에 있다가 이 소문을 듣고 달려가 독계(獨啓)하자, 왕의 노여움이 약간 풀리었고, 드디어 유철의 죽음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안치하였다.
■김덕함(金德諴) : 1562-1636
판사(判事) 김덕함의 자는 경화(景和)이고 호는 성옹(醒翁)인데, (1617년)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여 절의를 세우고 해남으로 귀양갔다가 얼마후에는 북쪽 명천(明川)으로, 또 온성(穩城)으로 옮겨졌다가, 무오년(1618, 광해 10)에는 다시 영남으로 옮겨졌는데, 그 시에 다음과 같이 읊었다.
남으로 갔다 북으로 갔다 또 남으로 옮기니 / 南遷北謫又南遷
4년 동안 세 번이나 한강 나루를 건넜네 / 四歲三呼漢水船
사공은 늘 이전 죄로써인 줄은 모르고 / 津吏不知因舊罪
가는 곳마다 새 죄를 지었다고 하네 / 謂言隨處作新愆
■칠서얼(七庶孽)
나라의 법에 서자[庶孼]를 경계하여 현직(顯職)에 통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곱 사람의 서자가 나라를 원망한 나머지 서로 모여서 도둑이 되었는데, 정승 순(淳)의 아들 박응서(朴應犀)와 심우영(沈友英)ㆍ서양갑(徐羊甲)ㆍ이경준(李耕俊)ㆍ박치의(朴致毅) 등이 있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 이름을 잊었으나, 모두 경상(卿相)들의 아들이었다. 이에 조령(鳥嶺) 아래서 재물을 겁탈하자, 뒤를 쫓아서 응서를 붙잡았는데, 형벌을 기다릴 것 없이 낱낱이 자백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도둑이 아니라 장차 큰 일을 도모코자 하였다.” 하고는 그 격문(檄文)을 외었으니, 곧 이경준의 필적이었고, 경준은 곧 청강(淸江) 제신(濟臣)의 아들이었으며, 그 공사(供辭)에는 대군(大君) 희(㼁)를 추대한다는 말이 있었다. 이때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獄事)가 있어 그 무리들이 모두 체포되었으나, 치의(致毅)만은 도망쳐 붙잡지 못하였다.
■강홍립(姜弘立) 1560-1627
강홍립은 재신(宰臣)으로 심하(深河) 싸움[役]에서 폐조(廢朝 광해를 이름)의 밀지를 받아 힘껏 싸우지 아니하고 북정(北庭 청 나라를 이름)에 구속되었는데, 정묘년(1627, 인조 5)에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가 곧 다시 귀순하였다. 그가 적을 이끌어 입구(入寇)시켰다고 한다면 가하거니와 청 나라에 투항한 것으로 돌리는 것은 그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가 서자 도(璹)에게 준 편지에, “해가 위에서 비치고 귀신이 곁에 있는데 내가 항복하였다는 말이 어찌하여 나왔느냐?”고 하였으니, 항복을 하였다면 반드시 머리를 깎고 무슨 벼슬을 가졌었다는 소문이 있었을 것인데, 아마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가 나올 적에 장 옥성(張玉城)이 편지를 보내어 “대부인(大夫人)은 천수(天壽)를 누리다가 돌아갔고, 인경(仁卿)은 모관(某官)에 있는데 이렇게 외병(外兵)을 데리고 온 것은 무슨 명분인가?” 하였는데, 인경은 도(璹)의 자이다. 그가 귀순하여 대궐 뜰 아래서 절할 때 왕이, “경(卿)은 선조(先朝)의 옛 신하였다.” 하면서 어전(御殿)으로 오르기를 명하자, 곧 그 인부(印符)와 절월(節鉞)을 바쳤다. 이에 왕이, “소무(蘇武)의 절개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 하였으리라.”고 하였으니, 대개 그가 계해년 이전에는 잇달아 도망쳐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납환(蠟丸)을 주어서, 그곳의 형세를 알려 오다가 개옥(改玉) 이후에는 그렇지 못하였고, 구류된 지 9년 만에 돌아왔었다.
▣성호사설 제18권
■지행합일(知行合一) : 지와 행이 일치됨을 말함. 주자(朱子)의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에 대하여 왕양명(王陽明)은 치지(致知)의 지(知)는 양지(良知)라고 하여, 지(知)를 사물의 위에 두지 않고 지(知)와 행(行)은 병진(竝進)하여야 한다는 것으로서, 알고 행하지 않음은 진실로 아는 것이 아니며, 참된 앎은 반드시 실행을 예상하므로 앎과 행위는 항상 서로 표리(表裏)가 된다는 설이다.
양명(陽明)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설은 또한 이유(理由)가 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무릇 행(行)이라 하는 것은 다만 착실히 그 일을 하는 것이니, 만일 착실히 학(學)ㆍ문(問)ㆍ사(思)ㆍ변(辨)의 공부를 한다면, 학ㆍ문ㆍ사ㆍ변이 곧 행이다. 학은 그 일을 배우는 것이요, 문은 그 일을 묻는 것이요, 사는 그 일을 생각하는 것이요, 변은 그 일을 변별(辨別)하는 것이니 행도 또한 학ㆍ문ㆍ사ㆍ변이다. 만약 학ㆍ문ㆍ사ㆍ변을 한 연후에 행한다 한다면 어떻게 공중에 띄워 놓고 먼저 학ㆍ문ㆍ사ㆍ변을 할 수 있을 것이며, 행할 때에 또 어떻게 학ㆍ문ㆍ사ㆍ변 하는 일을 배울 것인가? 행(行)의 밝게 깨닫고 정하게 살피는[明覺精察] 것이 곧 지(知)이며, 지(知)의 참되고 간절하고 돈독하고 성실한[眞切篤實] 것이 곧 행이다. 만약 행하면서 명각정찰(明覺精察)하지 못하면 그것은 곧 명행(冥行)이요, 곧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속임이다[學而不思則罔].는 것이니, 반드시 지(知)를 설(說)해야 하는 것이요, 지(知)하면서 능히 진절독실(眞切篤實)하지 못하면 곧 망상(妄想)이요, 곧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롭다[思而不學則殆].는 것이니, 반드시 행을 설해야 하는 것이나 원래는 다만 합일(合一)의 공부일 뿐이다.” 하였다.
나의 생각으로는 학(學)에는 지(知)ㆍ행(行)을 겸해서 말한 것이 있으니 “배우며 때로 익힌다[學而時習之].”는 등이 그것이다. 사람 중에 효제(孝悌)하는 이가 있어서 내가 효제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과연 행(行)이요, 사람 중에 이치를 궁리하여 글을 읽는[窮理讀書]이가 있음을 보고 내가 궁리독서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학(學)이 아닌가? 학은 몸으로 배우는 것이 있고 마음으로 배우는 것이 있으니, 학(學)은 다 행(行)이라 할 수 있다. 그런즉 효제 같은 것은 몸의 행(行)이요, 독서궁리 같은 것은 마음의 행(行)이다. 이에서 말미암아 밝게 살피는 데에 이르면 바야흐로 지(知)가 되는 것이니, 행(行)이 지(知)보다 먼저가 될 것도 같다. 그러나 몸으로 효제를 행하는 것을 두고 말하면, 먼저 알고 뒤에 행한다는 것에는 원래 의심이 없다. 만약 독서궁리하는 마음을 두고 행이라 한다면, 저 캄캄하게 무식한 사람이 어떻게 얼른 독서궁리를 할 수 있겠는가? 능히 독서궁리하는 것은 지(知)의 이치에 먼저 통한 것이다. 혹 나보다 먼저 알고 먼저 깨달은 자가 있어 지도하여 하도록 하든지, 혹 자신이 능히 합당히 이렇게 해야 할 것을 깨달아서 독서궁리를 할 수 있다면 어찌 지(知)가 행(行)보다 먼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소학(小學)》을 먼저 읽고 《대학(大學)》을 뒤에 읽는 것은 곧 행(行)이 지(知)보다 먼저 되는 것이다.” 한다. 나의 생각으로는 《소학》도 먼저 안 사람에게 배운 연후에라야 되는 것이니 곧 지(知)가 행(行)보다 먼저인 것이 이와 같다. 만약 지(知)와 행(行)이 두 가지가 아니라 한다면, 사(思)와 학(學)의 사이에 어찌 태(殆)와 망(罔)의 잘못됨이 있겠는가?
■고려 동성혼(高麗同姓昏)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하건대, “정종(定宗)이 처음으로 장공주(長公主)를 아우 소(昭)에게 시집보냈으며, 광종(光宗)은 자매에게 장가가 왕후를 삼았다.” 하였으니 추잡하고 더러운 일이 세대마다 없은 적이 없었으나, 다만 송 나라 왕 유욱(劉彧) 이외에는 또한 자매로서 왕후를 삼은 자를 보지 못했다. 사신(史臣)은 “태조께서 습속에 젖어 변경하지 못했다.” 하였은즉 그 유래가 멀다. 대개 신라 때에 당내(堂內)의 친척에게 장가들어도 안연하게 여기어 수치임을 알지 못하였고, 뒤로도 그대로 인습하여 고치지 않고 바로 맹자(孟子)의 예를 끌어대어 성씨를 바꾸었다.선종(宣宗) 때에 이르러 왕제 금관후(金官侯) 비()와 변한후(卞韓侯) 음(愔)과 진한후(辰韓侯) 유(愉)가 간절하게 간하였지만 듣지 아니하고 마침내 누이를 왕제 부여후(扶餘侯) 수(㸂)의 아내로 삼도록 하였다. 숙종(肅宗) 원년(元年)에 이르러 처음으로 동성이 혼가하는 것을 금하여 대체로 소공(小功 8촌을 말함) 이내가 혼인하여 낳은 자식은 벼슬함을 허용하지 않았다. 의종(毅宗) 원년에 이르러 또 이것을 거듭 금하니 이른바 월양일계(月攘一鷄)란 것이다. 왕세정(王世貞)이 《완위편(宛委編)》에서 송지(宋志)를 인용하여 “고려의 왕녀가 하가(下嫁)함에 반드시 형제와 종족에게로 시집보냈다. 그 임금 휘(徽)는 글을 읽고 선비를 좋아하였는데도 풍속 고치는 것을 달게 여기지 아니하여, 그 둘째아들 운(運)이 간하매 노하여 귀양까지 보냈다. 휘(徽)는 바로 문종(文宗)의 이름이요, 운(運)은 곧 선종(宣宗)의 이름이다.” 하였는데, 뒤에 비() 등의 간함은 듣지 않았다고 말하였은즉 그것은 착오로 전해진 것이 분명하다. 문종 35년에 이부(吏部)에서 “진사(進士) 노준(魯隼)은 그 아비가 법을 범하면서 대공친(大功親 9개월 간 복을 입는 친척)에게 장가들어 낳은 사람이오니, 금고(禁錮)로 종신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여염(閭閻) 사이의 선비와 일반 사람의 예는 이와 같지 아니하였다. 그렇지만 교화는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임금의 소행이 벌써 이와 같았으니, 아랫사람으로 윗사람 본받는 것을 어떻게 금할 수 있으랴? 성조(聖朝)에 이르러 그 전의 더러운 것을 일소하니, 백세에 혼인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성(異姓)의 친척간에도 절대로 서로 통혼하는 자가 없게 되었으니, 이것은 천하와 고금에 없었던 아름다운 일이다. 어떤 사람은 “반드시 세속을 따를 것은 아니다.” 하니 어찌 그렇게 오류의 말을 하는가?
■화랑(花郞)
오늘날의 배우[倡優]의 놀음은 옛날에 정재(程材)라 말한 것이고, 일반에서는 화랑이라 한다. 화랑이란 이름은 신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화랑은 원화(源花)에서 근원하였고, 원화는 풍월주(風月主)에서 근원하였다. 법흥왕 때 동남(童男)으로 용모와 거동이 단정한 사람을 선발하여 이름을 풍월주라 하였고, 선사(善士)를 구하여 무리로 삼아서 효제충신(孝弟忠信)을 닦게 하였다. 진흥왕(眞興王) 때에 이르러서는 사람을 알아볼 도리가 없음을 근심하여, 끼리끼리 모아 떼지어 놀리면서 그 행의(行義)를 보아 거용(擧用)하고자 했다. 마침내 미녀 두 사람을 간택하여 받들어 원화로 삼아, 한 사람은 남모(南毛)라 하고, 한 사람은 준정(俊貞)이라 하였다. 무리 3백여 명을 모았는데, 아름다움을 경쟁하고 서로 질투하여 준정이 남모를 죽이니, 준정도 복주(伏誅)되어 마침내 원화는 폐지되고 말았다. 뒤에 다시 미남자를 뽑아 그들을 단장하고 꾸며서 이름을 화랑이라 하니, 그 무리가 날로 많아졌다. 혹은 도의로 서로 연마하기도 하고,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기기도 하고, 산수를 찾아 즐겁게 노닐기도 하여, 먼 곳이라 하더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세월이 오래 되는 동안에 사특함과 정직함이 자연히 나타나게 되자 그 명예와 덕망이 많은 자를 택하여 등용하였으니, 이것이 신라에서 사람을 뽑던 법이다. 대체로 여색(女色)에는 사람들이 쉽게 미혹되므로 성기(聲妓)들의 마당에 섞어 넣으면 진심을 볼 수 있는 까닭에 반드시 이 방법으로 시험한 것이다. 또 반드시 미남자로서 한 것은, 또한 옛사람이 말한 남색(男色)의 유라 하겠다. 당시의 인사들이 음란하고 추악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과 같이 미쳐 날뛰기를 즐겨하였으니, 그들이 강습하고 연마하던 것은 무슨 도였던가? 오늘날 급제 출신자가 반드시 화랑으로 자처하여 가무하며 날뜀[筋斗]으로써 즐거움을 삼으니, 이것은 그 유풍인 것이다.
▣성호사설 제19권
■정 대마도(征對馬島)
내가 어느 친구 집의 묵은 상자 속에서 얻은 《국조정토록(國朝征討錄)》은 지금 선비로서는 얻어본 자가 아마 드물 것이다. 오래되면 더욱 민멸(泯滅)될까 염려하여 그 중 번잡한 것은 깎아 없애고 대강 적어 두기로 한다.
“세종(世宗) 원년 기해(己亥 1419)년 여름 5월 신해일(辛亥日)에 왜(倭)가 비인현(庇仁縣)으로 침입해 왔다. 얼마 후에 윤득홍(尹得洪)과 평도전(平道全) 등이 왜를 백령도(白翎島)에서 만나 사로잡고 목베어 죽이니 남은 자는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도전은 본래 왜인(倭人)이었는데 이보다 앞서 대마도(對馬島)에 밀통하기를 ‘조선(朝鮮)서 너희들을 대우하는 것이 점점 박해진다. 만약 침략한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반드시 옛날 대우처럼 할 것이다.’ 했다. 이때에 이르러 도전은 병마사(兵馬使)를 도와 싸우게 되었는데, 힘껏 싸우지 않았으므로 평양(平壤)으로 유배(流配)되었다.
그러므로 대마도를 정벌하자는 의론이 일어났는데 모두들 ‘적이 돌아간 후에 하자.’ 하였으나, 오직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만이 ‘이 빈틈을 타서 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그리하여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에 명하여 삼군 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를 삼아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禹博)ㆍ박성양(朴成陽)ㆍ황몽(黃蒙)이 보좌하게 했다. 유습(柳濕)은 좌군(左軍)을 거느리는데 박초(朴楚)ㆍ박실(朴實)이 보좌했다. 이지실(李之實)은 우군(右軍)을 거느리는데 이천(李蕆)ㆍ이순몽(李順蒙)이 보좌했다. 〈3군(軍)의 임명이 끝난 다음〉 경상(慶尙)ㆍ전라(全羅)ㆍ충청(忠淸) 3도(三道)의 병선(兵船) 2백여 척과 갑사(甲士)ㆍ별패(別牌)ㆍ시위(侍衛)ㆍ선군(船軍) 등 1만 7천여 명을 출동시켜 11일 뒤인 임술(壬戌)에 이종무(李從茂) 등이 작별을 고하는데 임금이 친히 백사정(白沙亭)에서 전송하였다. 또 ‘포로가 되어 포구(浦口)까지 끌려 온 왜인 5백 90명 중에서 흉악한 자만을 목베라.’고 명하니 죽임을 당한 자와 물로 들어가 자살한 자가 1백 3명이나 되었다. 평망고(平望古) 등은 나눠서 내읍(內邑)에 두었는데, 망고는 도전의 아들이다.
6월 임진일(壬辰日)에 이종무는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50일 동안 먹을 군량을 배에 싣고서 바로 대마도를 향해 달려갔는데, 왜는 멀리 바라보고 저희 군사가 돌아오는 것으로 여겨 금(金)을 가지고 와서 맞이하였다. 우리 대군이 잇달아 오르자 왜는 도망쳐 험한 지대로 들어갔다. 우리는 그들의 군함(軍艦) 1백 40여 척을 빼앗고 1백 50급(級)을 참수(斬首)했으며, 불태운 여사(盧舍)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왜의 포로가 되었던 한인(漢人) 남녀 1백여 명을 사로잡아서 책문(柵門)을 설치하고 오래 머물러 있을 계획을 하니, 왜는 일기도 상송포(一岐島上松浦)에 구원을 청하고 복병(伏兵)을 설치하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좌군(左軍) 박실(朴實)은 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높은 곳을 향해 습격하려 하였는데, 저들의 복병이 갑자기 일어나 싸움이 불리하게 되어 편장(褊將) 박홍신(朴弘信) 등은 그만 죽고 말았다.
왜가 우리 군사를 추격하자, 우리 군사는 언덕에서 떨어져 죽은 자와, 힘껏 싸우다 죽은 자가 1백 십여 명이나 되었다. 이순몽 등이 죽을 힘을 다해 싸우면서 대항하였으므로 왜가 후퇴했는데 중군은 배에서 내려오지도 않았다. 도주(島主) 도도 웅와(都都熊瓦)가 편지를 올려 수호(修好)를 요청하면서, ‘7월에는 태풍(颱風)이 있으므로 대군이 여기에 오래 멈추어 있음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7월 병오(丙午)에 이종무는 주사(舟師)를 인솔하고 돌아왔다. 모든 장수에게는 각각 공로에 따라 작급(爵級)을 하사하고 임오일(壬午日)에 임금께서 친히 동정 장사(東征將士)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하였다.
내가 상고해 보니 대마도라는 섬은 고금이 다 말하기를, “본래 신라(新羅)에 소속되었다.”고들 하나 삼국사(三國史)에는 반드시 그런 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섬에는 곡식 심을 만한 비옥한 토지가 없고 오직 귤과 탱자와 남초(南草)만이 가장 잘 되니 그 지방 사람은 상업을 주로 삼고 먹을 것은 조선(朝鮮)만 쳐다볼 뿐이다. 이로 본다면 칼자루는 우리에게 있는 셈이다.
진실로 은혜로 어루만져 주고 위엄으로 복종하도록 하여 처우하기를 그 도(道)로 했다면 채찍을 꺾어 없애고도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인데 어찌하여 군사를 수고롭히는 데까지 이르렀는가? 우리나라에는 창과 칼이 날카롭지 못하고 편함만 생각하는 것이 습관으로 되었으니, 갑자기 힘껏 싸우기를 도모한다 해도 외국을 상대해서 꼭 뜻대로 될 수 없다.
이 싸움에도 좌군(左軍)은 불리하게 되었고 우군(右軍)만이 힘껏 대항한 셈이다. 이종무(李從茂) 등은 끝내 중군만을 고수하여 수레에 앉아 패망을 관망하였으니 죄는 죽여도 용서할 수 없는데 돌아와서는 벼슬과 상이 먼저 그에게 미쳤으니, 이렇고야 어찌 백성에게 나라를 위해 죽으라고 권장할 수 있겠는가?
■삼포 왜(三浦倭)
(《국조정토록》에),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한 후에 왜인(倭人) 60호가 제포(薺浦)ㆍ부산포(釜山浦)ㆍ염포(鹽浦) 등지에 와서 살려고 하므로 조정에서 허락해 주었다. 그 뒤 수효가 점점 많아지자 변장(邊將)들은 그들을 매우 혹사했다. 중종(中宗) 5년 경오(庚午 1510) 4월 계사(癸巳)에 왜인은 대마도에 있는 왜(倭)를 유인하여 병선(兵船) 수백 척을 거느리고 와서 성과 보루를 함몰시켰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황형(黃衡)ㆍ유담년(柳聃年)을 좌우도(左右道) 방어사(防禦使)로 삼아 경기(京畿)ㆍ충청(忠淸)ㆍ강원(江原) 3도의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도록 했다. 12일 뒤인 갑진에 황형과 담년은 경상우도 병마사(慶尙右道兵馬使) 김석철(金錫哲)과 길을 나누어 육로(陸路)로 공격하고, 우도수사(右道水使) 이종의(李宗義)ㆍ부산첨사(釜山僉使) 이보(李俌)는 수로(水路)를 따라 진격하자 적은 제포로 퇴진(退陣)했다. 황형이 먼저 적진으로 들어가자 모든 장수도 뒤를 따랐는데, 사람마다 녹각목(鹿角木)을 가졌으므로 적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또 투석군(投石軍)을 앞세워서 돌을 던지게 하니 적의 방패가 모조리 깨어졌다. 적은 〈배가 있는 바닷가로〉 패주(敗走)하여 먼저 배에 오르려고 저희들끼리 서로 칼로 찌르고 활로 쏘아 바다에 빠져 죽은 자가 얼마인지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고 적선을 침몰시킨 것이 5척이고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2백 95급이었다.” 고 했다.
나는 상고해 보니, 세종 때 대마도를 정벌한 것은 평도전(平道全) 등이 왜(倭)를 이끌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여러 섬에 있는 왜를 잡아다가 모두 내읍(內邑)에 살게 하였으니 그 뒤 필연적으로 점점 번식하여 인구가 불어났을 것이다. 지금 왜인 대조마노(大趙馬奴) 등이 옛날 도전(道全)이 썼던 술책을 다시 썼는데 비록 평정은 시켰으나 앞으로 한 번 크게 소란할 것이다. 그들은 결국 우리와 동족이 아니므로 무슨 틈만 있으면 난을 꾸밀 것이니곽흠(郭欽)이 몰아냈던 계책을 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그러나 정현룡(鄭見龍)은 역수(易水) 오랑캐를 섬멸할 때 항복한 왜인을 전봉(前鋒)으로 삼았는데 그 왜인은 죽을 힘을 다하였으니 오직 쓰기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지금 듣건대 해안(海岸)에 있는 각 고을에는 귀화한 왜인들이 스스로 부락을 이루어 사는 곳이 많으나 읍민(邑民)들은 그들과 통혼하지 않는다 하니 이는 천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후일 혹 외국의 침략이 있게 되면 반드시 그런 기회를 노려 화를 꾸미지 않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의 벌열ㆍ씨족(閥閱氏族)도 본래는 오랑캐에서 나온 자가 많으니 지금 외인도 전해온 대수가 오래되어 중국으로 가서 중국 사람이 된 자도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유독 우리나라에 있는 왜인에게만 심히 하는가? 지금 왜관(倭館)에 남녀가 서로 간통하는 자가 있으면 목베어 죽인다 하니 이는 진실로 좋은 법이다. 그들 중에 귀화한 지 오랜 자에게는 마땅히 각 고을로 하여금 임사(任使)할 만한 자를 가리고 그중 우수한 자를 뽑아서 현달하게 하여 차츰 우리나라 사람과 더불어 섞여서 살게 해야 바야흐로 터놓고 이야기하고 믿고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성호사설 제20권
■조위총(趙位寵)
고려에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이의민(李義旼) 등이 의종(毅宗)을 내쫓자 김보당(金甫當)이 군사를 일으켜 복위(復位)를 계획하다가 피살되었다. 보당은 의민이 잡아서 죽였는데, 그의 시체는 물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은 군사를 일으켜 중부의 무리를 토벌, 이때 절령(岊嶺) 서쪽 40여 성(城)이 모두 호응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 윤인첨(尹鱗瞻)에게 잡혀서 처참되었다.
지금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역적처럼 씌어져 있으니, 이는 의리로 보아 크게 그릇된 것인 듯하다. 춘추(春秋)의 의리에는 임금을 죽인 역적은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고 하였다. 임금을 죽였는데 그 역적을 토벌하지 않고 그냥 둘 수 있겠는가? 옛날 진항(陳恒)이 그의 임금을 죽인 것은 노(魯) 나라의 역적이 아니었지만 성인(聖人)은 오히려 조복(朝服)을 입고 노 나라 임금에게 토벌을 요청하였다.
여기에 대해 선유(先儒)도, “일이 되고 안 되는 것은 성인의 여사(餘事)이다.” 하였으니, 이 위총의 일도 소위 “일부터 시작해 놓고 나중에 상문(上聞)한다.”는 말이 즉 이것이다. 나중에 힘이 모자라서 불행하게 죽기까지 하였다면 병필자(秉筆者)로서는 마땅히 사책에 쓰기를, “서경유수 병부상서(兵部尙書) 조위총이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토벌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어야 할 것이다. 가령 그의 일이 드디어 이루어지게 되었더라면 그 당시의 국론(國論)이 장차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이때 명종(明宗)은 비록 역신(逆臣)의 후원으로 세워지기는 했으나 한(漢) 나라 헌제(獻帝)나 당(唐) 나라 소선제(昭宣帝)에 지나지 않아 임금의 자리만 차지했을 뿐이고 그들에게 절제를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명종이 하고 싶어 했을 것이겠는가?
이로 본다면 위총의 실패는 운수가 나빠 그렇게 된 것이지 군사를 일으킨 것이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군신의 대의를 천지 사이에 숨길 수 없다 하여 강약을 헤아리지 않고 그의 의성(義聲)을 나타냈으니, 이것이 바로 신하의 절조를 양심껏 했던 것이다. 역사를 짓는 자로서 다만 일의 성패를 갖고 그의 득실을 논하였으니, 이런 말을 써서 후세에 전한다면 천지가 모두 깜깜해지는 데에 가깝지 않겠는가? 괴이하다 하겠다.
■왜환(倭患)
원(元) 세조(世祖)가 일본(日本)을 정벌하려고 했을 때 군함을 만들고 군량을 쌓은 것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공급했던 것이다. 경내(境內)를 모두 쓸다시피하여 싸움에 조력하였으나 끝내 이기지 못하고, 강한 인국(隣國)과 사이만 좋지 않게 되었다. 저 왜(倭)의 지형은 비파(琵琶)처럼 생긴 것이 뾰족한 머리가 서쪽으로 향해졌다. 이러므로 왜는, 저의 나라를 나와서 남과 대항할 수 있지만, 외국 군사는 능히 거기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중국 강절(江浙)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걱정이 매우 심했어도 또한 어쩔 수 없었던 것인데 하물며 우리 소방(小邦)에 있어서랴?
충정왕(忠定王) 2년(1350) 때부터 왜환(倭患)이 처음으로 생기게 되었는데, 바다의 3면(面)으로 침입을 받게 되자 그들을 능히 대항하여 진압하지 못했다.
저들은 각 고을에 날뛰면서 집을 불태우고 백성을 위협할 뿐 아니라 지방에서 배로 실어 들이는 우리 군량과 마초(馬草)를 차단시키고, 또는 저들이 빼앗아 가지 않으면 배를 엎어 버렸다. 그들의 풍속은 배로 집을 삼고 수전(水戰)에 익숙해서, 먼 바다 사이에서도 비오듯이 갑자기 모이기도 하고 구름 흩어지듯 홀지에 가 버리기도 하여 도대체 방어할 계책이 없었다.
이것이 원(元) 나라 임금의 오산이었고, 우리나라도 역시 잘한 계획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국(大國)에서 내리는 명령을 비록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할지라도 얼마 후에 또 원 나라 임금에게 사랑받는 사위로 되어서 무슨 일이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던 터인데, 군사를 해산시킨 후에 그 방어와 수비를 걷어치우고 후한 폐백으로 통신사(通信使)를 보내서 서로 저자를 열고 화친(和親)을 약속하여 전일의 일은 본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도록 했다면 그들도 역시 그 재물을 이롭게 여겨서 전일의 원수를 잊고 좋게 지나게 되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런 계책은 내지 않고 종달새가 까불고[鷃披]여우가 속이듯이[狐假] 큰소리로 헛 위협만 하면서, 저들의 신사(信使)가 왔는데도 답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신우(辛禑)의 초년에 이르러 등경광(藤經光)을 꾀어서 죽이고자 하였다. 그가 기미를 알고 도망쳐 가 버리자 이로부터 또 도륙의 환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와 같이 자량할 줄을 몰랐으니 화를 취한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이 일은 원 세조(元世祖)에게 조짐(兆朕)이 나타났고 고려 충정왕(忠定王)에게서 아얼(芽孼 재앙의 싹)이 돋은 것이었다. 이로부터 대를 지나면서 서로 빚어 온 화근이 2백 34년 만인 임진(1592) 병화(兵火)에 이르러 극도로 되었었다. 이로 인해 군량도 쌓고 군사도 기르면서 보내는 것은 후히 하고 받는 것은 박하게 한 결과, 시국이 겨우 안정한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일이 오랠수록 틈이 생기게 되고 거짓말로써 믿음을 사려고 하는바, 애써 쌓은 둑이 얼마 못 가고 장차 무너지게 되었다. 이런데도 나라 사람들은 오히려 지나간 임진년의 위엄만 믿고 저들을 업신여기면서 스스로 큰소리를 친다. 그 때의 위엄이 자신에게서 나지 않았고 지금 일도 처음보다 다른 것을 왜 모르는가? 한심한 노릇이다.
■호강왕(虎康王)
우리나라 옛 시대 임금은 단군과 기자로부터 삼국(三國)을 거쳐 고려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군림한 지대에 시조의 사당을 세웠는데, 삼한(三韓)에 있어서는 진한과 변한은 그 시조의 이름을 몰라서 따라 추향(追享)하지 못했었다. 오직 마한(馬韓)의 시조만은 바로 태사(太師)의 41대 손으로서 익산(益山)에서 개국하여 명호와 도읍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는데 사전(祀典)이 아직 없었으니 성세(聖世)의 결점이라 할 수 있다.
여사(麗史)에 상고해 보니, 충숙왕(忠肅王) 16년은, “도둑이 금마군(金馬郡) 마한(馬韓)의 시조(始祖) 호강왕(虎康王)의 무덤을 발굴하였다.”고 했으니, 이는 다만 그 이름 뿐만이 아니라 시호까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지승람(輿地勝覽)》에도, “세상에서 전하기를, ‘무강왕(武康王)은 이미 인심을 얻어 마한에 나라를 세우고 선화부인(善花夫人)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거둥하였다.’ 라고 한다.” 하였고, 또, “두 능이 오금사봉(五金寺峯) 서쪽 수백 보 거리에 있는데 후조선(後朝鮮) 무강왕과 왕비의 능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이는, “백제 무왕(百濟武王)의 속호인 영통대왕(永通大王)의 능이다.”라고 하였으나, 이런 말은 근거가 없다.
고려 혜종(惠宗)의 이름은 무(武)였는데 고려 사람들이 그 무의 음을 휘하여 호(虎)라 하였으니, 이는 마치 무제(武帝)를 휘해서 호제(虎帝)라 하는 것처럼 되었다.
그러나 오직 이 호강(虎康)이란 시호만은 사책에 밝게 실렸으니 속일 수 없다. 가야국(駕倻國)의 수로왕(首露王)은 전해 온 대수가 가장 멀고 신령의 위엄도 가장 나타났으니 또한 향사(享祀)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혁거세(赫居世)와 고주몽(高朱蒙)과 온조(溫祚)는 모두 왕자(王者)의 이름이니 이들 이름은 바로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옛날 당 태종(唐太宗)은 비간(比干)에게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더해 주고 제향(祭享)하였으니, 이도 대개 그의 이름을 바로 부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도 만약 향사를 하려고 한다면, 혁거세ㆍ주몽ㆍ온조에게는 각각 아름다운 시호를 호강의 예처럼 더해야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호사설 제21권
■발해(渤海)
허미수(許眉叟)는 《발해열전(渤海列傳)》을 지었는데 그 내용에 있어 소상한 점이 조금 부족하다. 발해는 본디 속말 말갈(粟末靺鞨)로 고구려(高句麗)의 별종이다. 속말이라는 것은 바로 혼동강(混東江)의 한 명칭인데 그 근원은 백두산(白頭山) 꼭대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쳐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
말갈은 두 종류가 있는데 흑수(黑水) 부근에 사는 자를 소위 생여진(生女眞), 속말 부근에 사는 자를 숙여진(熟女眞)이라고 부른다. 대씨(大氏)는 걸걸 중상(乞乞仲象)으로부터 그의 무리와 함께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쪽을 점거하였으니, 대씨라는 종족은 본래 요수 서쪽에 있었다. 이는 요수 서쪽 씨족으로서 처음에는 속말 지역과도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중상의 아들 조영(祚榮)이 비로소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震)이라 하였다. 지방은 5천 리쯤 되었는데 부여(扶餘)ㆍ옥저(沃沮)ㆍ변한(弁韓)ㆍ조선(朝鮮)의 모든 나라를 다 얻었다는 것이다. 이로 본다면 그때 부여는 압록강(鴨綠江) 밖에 있었고, 성천부(成川府)에 있었다는 말은 잘못이며, 옥저도 지금 북도의 육진(六鎭) 등지이다.
조선(朝鮮)은 지금 요수의 동서쪽이 모두 옛날 경계이고, 변한은 지금 경상도 진한(辰韓) 서남쪽에 있었으니 이는 발해가 통솔한 지역이 아니다. 추측컨대 삼한(三韓)은 모두 밖에서 들어온 나라인 듯하다. 마한(馬韓)은 조선에서 들어오고 진한은 진지(秦地)에서 들어왔다면 변한도 본래 압록강밖에 있다가 산융(山戎)에게 쫓겨서 들어온 것이 아닌가를 또한 어찌 알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기록한 자의 잘못으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당 중종(唐中宗) 때에 조영(祚榮)은 발해군왕(渤海郡王)이 되었고, 그의 아들 무예(武藝)에 이르러서는 강토를 더욱 넓히게 되어 동북쪽의 모든 오랑캐가 두렵게 여기고 복종했는데, 이 동북쪽 오랑캐라는 것은 바로 흑수 따위를 가리킨 것이다. 개원(開元 당 현종(玄宗) 때의 연호. 713~741) 무렵에 흑수 말갈이 당 나라에 조회하자, 당 나라는 흑수주 장사(黑水州長史)를 설치하였다. ...
▣성호사설 제22권
■을파소(乙巴素)
한 고조(漢高祖)는 진평(陳平)을 얻어 천하를 도모하면서 먼저 위무지(魏無知)에게 상을 주었는데, 이것이 4백 년의 터전을 이룩한 조짐으로 되었던 것이다. 공자(孔子)가, “자신이 힘껏 하는 것을 어질다 하겠느냐, 어진 사람 추천하는 것을 어질다 하겠느냐? 비록 관중(管仲)이나 자산(子産)같이 어질고 재주 있는 자로서도 만약 그의 후계자를 추천하지 않았다면 끝내 국위를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므로 어진 자를 추천하면 상등의 상을 받는다.” 하였으니, 한 나라 초기에 인재를 얻은 것이 참으로 이 점에서 훌륭했다 하겠다. 고구려 고국천왕(古國川王) 때에 사부(四部)에 명하여 어진 인재로서 아래 있는 사람을 추천하라 하니, 모두 동부(東部)에 사는 안류(晏留)를 추천했는데, 안류는 또 을파소를 추천하므로, 왕은 비사중례(卑辭重禮)로 그를 맞아들인 결과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왕은 안류에게, “만약 자네의 말이 없었다면 내가 을파소와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여러 가지 업적이 이루어진 것은 자네의 공이었다.” 하고, 그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으니, 왕도 또한 다스리는 요령을 알았다 할 수 있겠다. 처음 을 파소를 우태(于台)라는 벼슬에 등용했으나 파소는 그런 벼슬로는 정사를 해낼 수 없다는 의견으로, “신(臣)은 명령을 감당할 수 없으니, 어진 자를 뽑아 높은 벼슬을 주어서 큰 사업을 성취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왕도 그의 뜻이 보통이 아닌 것을 알고 곧 국상(國相)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으니, 이것이 바로, “어진 이에게 맡기되 의심하지 않는다.” 하는 것이다. 후세에 와서도 혹 어진 이를 추천하여 뽑기는 하나 비미(卑微)한 관직에 앉혀 놓고는 재능이 없다고 하니, 이것이 천리마(千里馬)로 하여금 쥐를 잡도록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고국천왕 같은 이는 지혜도 밝다 할 만하고, 과단성도 뛰어났다 할 만하다.
■김치원(金致遠)
광해군(光海君) 초기에 정언(正言) 김치원(金致遠)이 정사의 잘못을 지극히 말했다. 광해가 대답하기를, “궁위(宮闈)가 엄하지 않아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진다는 것은 어느 사람을 지적한 것이냐? 나는 상사(喪事)를 만난 뒤로부터 베옷을 벗지 않고 궁인(宮人)들도 다들 흰옷을 입었다. 지난번에 상방(尙方)에서 무역(貿易)을 청한 것은 예복(禮服)의 재료를 사려는 것이다. 금액(禁掖)에서 사치만을 주창한다는 것은 무슨 일을 가리킨 것이냐? 3년이 지나기 전에는 내가 일찍이 내침(內寢)에 들어간 때가 없었다. 폐행(嬖幸)이 나와 침처를 함께 했다는 자가 누구냐? 기도하는 일은 내간에 혹 있다 할지라도 어찌 내가 다 알 수 있겠느냐? 소위 좌도(左道)라는 것은 무슨 도(道)냐?” 하였다.
회계(回啓)하기를, “바깥 잡류들이 내인(內人)을 사귀어 서로 청촉(請囑)하는 것이 있다면 궁위(官闈)가 엄하지 않은 것이고, 비단[錦]과 주옥[玉]이 비록 예복에 대한 재료라 할지라도 먼 중국의 물품을 사들일 필요가 없는데 무역을 시키고 계시니, 이는 사치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성상(聖上)께서는 비록 별전(別殿)에 계신다 할지라도 근습(近習)들을 앞에 부리고 계시니 이는 내신(內臣)을 사랑하는 것이며, 기도하는 일은 성상께서 비록 알 수 없다 할지라도 이것이 이미 정도(正道)가 아니었다면, 이는 틀림없는 좌도입니다.” 하였다. 광해가 노해서 그의 관직을 그만두게 하였다.
김(金)은 부안(扶安) 사람이었다. 그는 풍채가 늠름하여 볼 만하였는데, 지금 사람은 이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애석하다.
간관(諫官)이 혹 이름을 팔고 곧은 체하며, 임금이 마음껏 간하도록 한다 할지라도 말하기 어려운 때에는 오히려 다 간할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이토록 꺾음에랴?
이 한 가지의 일만 보아도 족히 왕위(王位)를 잃을 만한 한 징조를 점칠 수 있는 까닭에 특히 따서 적는다.
■곽망우(郭忘憂)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구퇴소(求退疏)에, “성지(城池)와 주사(舟師: 수군)는 한쪽도 없앨 수 없는 것인데, 지금은 주사만 두고 성지는 없애려고 하니, 신(臣)은 실로 이것을 걱정으로 여깁니다. 걱정으로 여겨도 아무 유익이 없으니,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야 할 이유의 첫째입니다. 적국을 얽매어 놓는 것은 강화(講和)하는 것보다 나은 게 없고, 분을 풀고 화를 늦추는 데도 강화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적의 침입을 방비하는 것도 강화보다 나은 것이 없고, 군사와 백성을 쉬게 하는 것도 강화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군사끼리 서로 교섭하자면 사신이 그 중간에 있어야만 하는 것인데, 지금은 왜사(倭使)를 잡아 가두어서 적화를 불러들이려고 하니, 신은 이것을 실로 통탄하게 생각합니다. 통탄하게 생각하여도 아무 보람이 없으니,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야 할 이유의 둘째입니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고 하였으니, 재상이 진실로 어질면 화를 변해서 선치(善治)를 만들 수 있는 것인데 이미 이원익(李元翼)으로 영상(領相)을 삼았다가 얼마 안 되어 그만두도록 하여 조정(朝廷)을 불안하게 만드니, 신은 여기에 대해 실로 민망하게 여깁니다. 아무리 민망하게 여겨도 조금도 보탬이 없으니, 벼슬을 그만두고 떠나가야 할 이유의 셋째입니다.” 하고,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가 버렸다.
임금은 그를 잡아 가두고 국문(鞠問)하라고 명하여, 그를 비방죄(誹謗罪)로 논해서 영암군(靈巖郡)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1년 만에 석방시켰다. 그 뒤로 그는 끝내 벼슬을 하지 않고 벽곡(辟穀)과 도인(導引)으로 숨어 살았으니, 이와 같은 사람은 신하의 절의를 다하고 또 자신의 족함도 알아서 초연한 자세로 사물(事物)에 대한 누(累)가 없었다 할 수 있으니 이른바, “영웅도 머리만 돌리면 바로 신선이지[英雄回首卽神仙].”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가 논한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는 한 토막은 더욱 탁이한 포부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보는 안목이 좁아서 여기까지 미치는 자가 있지 않다.
▣성호사설 제23권
■조선황제(朝鮮皇帝)
근세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의 일을 중조(中朝 중국을 이름)에서 따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요심(遼瀋) 지방에서 조선 황제(朝鮮皇帝)라고 일컬은 말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우리 종조(從祖) 두봉공(斗峯公)이 만력(萬曆 명 신종의 연호) 말기에 주청사(奏請使)로 연경(燕京)에 간바, 주청에 대하여 특지(特旨)로 비준(批準)을 받았으며, 후에 집으로 보내 온 편지 가운데 모두 “조선 황제라 칭한다.” 하였으니, 대개 상국(上國)의 은혜는 우리나라에 대해 그와 같이 후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임진(壬辰, 1592)년 동정(東征) 때 중토(中土 중국을 가리킨 말)의 피폐(疲弊)를 불고하고 후원해 주었겠으며, 또 어찌 인력(人力)으로서 그렇게 되었겠는가? 거기에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성호사설 제24권
■북원(北元)
원(元) 나라 순제(順帝)의 제2황후(皇后)는 바로 우리나라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이고 기철(寄轍)의 누이로서 태자(太子)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을 낳았다. 나중에 순제가 응창부(應昌府)에서 죽은 후, 태자가 왕위를 이었으니, 이가 바로 북원(北元)이다. 고려 말기에는 자주 우리나라에 사신(使臣)을 보내왔고, 신우(辛禑) 3년(1377)에는 북원의 선광(宣光)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나중에는 우리나라에서 그들의 동녕부(東寧府)를 쳐부수고 국교(國交)를 끊었다. 이산군(理山郡)으로부터 북으로 압록강(鴨綠江)과 파저강(婆豬江)을 모두 건너서 올랄산성(兀剌山城)까지 쳐들어갔던 것이다. 이 성은 큰 물 가운데 있어서 사면이 모두 절벽이었고 오직 서쪽으로만 올라갈 수 있었는데, 이산에서 상거가 2백 70리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이르기를, “설한령(雪寒嶺)서는 거리가 7백여 리나 되고 거기서 압록강을 따라 내려오는 길 이외로부터 서쪽으로 바다까지 이르기는 텅 빈 한 벌판으로 되었다.” 하였다. 그렇다면 요양(遼陽) 지대도 오히려 북원에 속했던 것이다. 이조(李朝)에서 일찍이 파저강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했는데, 이만주가 바로 그의 존칭이었다. ...
■공민묘(恭愍墓)
고려 공민왕(恭愍王)은 원(元) 나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에게 장가들었다. 나중에 공주가 죽었을 때 빈전(殯殿)을 설치하고 국장(國葬)으로 장사지냈다. 능(陵)을 만들 때도 불재(佛齋)를 베풀었는데 도감(都監)을 네 명이나 내었고 열 세 고을에는 모두 판사(判事)와 별감(別監)을 설치하여 상사(喪事)를 돕도록 하였다.
모든 기관에 영을 내려 전물(奠物)을 베풀도록 하고 풍성하게 장만한 자와 깨끗이 만든 자에게는 상까지 주었다. 뭇 중[衆僧]을 시켜 염불을 하면서 혼여(魂輿)로 따르도록 하고, 빈전에서 절문 앞에 이르기까지 펄펄 나부끼는 깃발이 하늘을 가렸으며, 또는 비단으로 불우(佛宇)를 덮어 씌우기까지 하였는데 장사 때에 이르러서는 극도로 사치한 제도가 말할 수 없이 굉장하였다.
나중에는 또 영전(影殿)을 세우는데 백관으로 하여금 품계에 따라 역부(役夫)를 내어 나무와 돌을 운반하게 하였는데 수백 사람이 나무 하나를 잡아당겨도 능히 움직일 수 없는 정도였고, 취두산(鷲頭山)처럼 꾸미는 데는 황금 6백 냥과 백금 8백 냥이 들었는데, 그 비용이 이렇게 많았는데도 또 자기의 수릉(壽陵)까지 공주의 능 옆에 만들었다.
이러므로 부고(府庫)가 고갈되고 백성이 살아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고려가 망한 것은 대개 여기에서 연유되었다.”라고 한다. 지금까지 고려의 모든 능이 남아 있는데 그 중 공민왕의 한 능만이 제도가 제일 큰데 고금에 이런 능은 일찍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는 모두 공민왕이 공주를 위하고 또 자신을 위해서 친히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 애석한 것은 그때 어진 공경(公卿)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일찍이 위징(魏徵)이 헌릉(獻陵)에 대해 간하던 것처럼 이야기한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옛날 주 목왕(周穆王)이 성희(盛姬)를 장사지내고 송 문제(宋文帝)가 은숙비(殷淑妃)를 장사지낼 때 거록(鉅鹿)에서 끼친 냄새라고 일컬었는데 지금도 그런 나쁜 짓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그 영전을 세울 때에 주춧돌의 크기가 집채와 같아서 치여 죽은 자를 셀 수가 없었다. 그리고 원 나라가 망하자 토목공사는 더욱 일어났다. 왕(王)은 원 나라 대목인 원세(元世)를 제주(濟州)로부터 불러들이자 원세 등이 와서 재상(宰相)에게 이르기를, “원 황제(元皇帝)께서 토목공사를 좋아하다가 민심을 잃게 되므로 사해(四海)를 보전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짐작하고 우리 무리를 탐라(耽羅 제주(濟州)의 구호)로 보내 궁실(宮室)을 만들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는 피난하려고 한 계획이었는데 우리들 일이 끝나기도 전에 원 나라가 멸망되었습니다. 원 나라는 그렇게 큰 천하로서도 백성을 괴롭히다가 멸망되었는데, 고려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위태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제공(諸公)은 이 말씀을 왕께 여쭈옵소서.”라고 하였으나 재상은 감히 상주하지 못했다. 저 조정에 가득히 있는 벼슬아치들은 도리어 비천하게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들에게도 미치지 못하고 종묘와 사직이 무너지는 것을 앉아 기다리기만 하였으니, 탄식할 일이다.
▣성호사설 제25권
■두예 이순신(杜預李舜臣) : 두예와 이순신
공명에 뜻을 둔 자에게는 부귀가 족히 그 마음을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천 번 생각하여 일을 시행할 방침이 완전히 갖추어져야 나아가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소인들에게 저해를 받아서 자기가 지니고 있는 포부를 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두예(杜預) 같은 이는 진중(鎭中)에 있으면서 자주 서울 안에 있는 귀관요직에게 선물을 보내므로,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두예는 대답하기를, “다만 방해를 할까 두려워서이지 이익을 구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임진(壬辰)의 난리를 당하여 수군(水軍)을 통제하면서, 역시 틈만 나면 공인(工人)들을 모아 놓고 부채[扇箑]따위를 만들어 두루 경ㆍ재상에게 선물하여 마침내 중흥의 공을 이루었으니, 이는 천고에까지 지사들의 눈물을 떨어뜨리게 하는 것이다.
병란의 창졸한 사이를 당하여 공과 허물이 당장에 나타나는 데도 오히려 이와 같이 조밀하게 해야 하는데, 하물며 평시에는 비록 관중(管仲)ㆍ안자(晏子)의 재주가 있다 할지라도 그 재능을 어디다 쓰겠는가? 두예나 이순신 같은 이는 반드시 눈으로 보고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그 정을 생각하면 슬프기만 할 뿐이다.
▣성호사설 제26권
■기자지후(箕子之後)
세상에서 하는 말이 우리나라 한씨(韓氏) 성은 바로 기자(箕子)의 후손이다.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쫓겨나서 마한(馬韓)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기준의 뒤가 그대로 성이 되었다 하는데 이는 너무도 그렇지 않다.
기준이 마한왕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면 기준 이전에 이미 한이 있었던 것이다. 《동사(東史)》에 이르기를,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가 망할 적에 조선의 상(相) 인(路人)ㆍ한음(韓陰) 등이 우거를 죽이고 한 나라에 항복하자 한 나라는 한음을 봉하여 적저후(荻苴侯)로 삼았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조선의 옛 땅에 본시 한씨 성이 있었던 것이다.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한종(韓終)이 서복(徐福)과 동행하여 돌아오지 못했다.” 하였으니 혹시 한종의 후예이던가? 또 기(奇)의 성이 기(箕)와 음이 같으며, 선우(鮮于)의 성은 조맹부(趙孟頫)가 중[僧] 선우추(鮮于樞)에게 준시에 의거하면,
기자의 후손은 염옹이 많다 / 箕子之孫多髥翁
한 것이 증거 되니, 이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 기준을 한씨의 조상으로 삼는다면 단연코 그렇지 않다. 《한서(漢書)》에서는 한음이 한도(韓陶)로 되어 있다.
선우추는 어양(漁陽) 사람인데 벼슬은 태상 전부(太常典簿)를 지냈으며, 시문(詩文)에 능하고 더욱 서한(書翰)에 정하였다. 우집(虞集)은 말하기를, “어양(漁陽)ㆍ오흥(吳興)의 한묵(翰墨)이 한 시대를 독차지했다.” 하였는데 선우추와 조맹부를 두고 이른 것이다. 선우추는 저술로서 《곤학재집(困學齋集)》이 있다.
▣성호사설 제27권
■이시애(李施愛)
이시애(?~1467)의 난은 그 기세가 대 쪼개듯[破竹]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었다.
한 조신(朝臣)이 반열(班列)에서 나서며 아뢰기를, “신은 말씀드릴 것이 있다.”라고 하자, 모든 신하들이 눈을 부비며 그의 좋은 계책을 바랐는데, 그 조신은 다만, “이시애를 사로잡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당시에 얼마나 겁을 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요사이 북쪽[北路]에서 온 사람이 말하기를, “북쪽 사람들은 모두 당시에 단종(端宗)을 폐위(廢位)하였기 때문에 이시애가 구실을 삼아 난을 일으킨 것이라고 여긴다.”고 하였다.
대개 이시애는 한낱 필부(匹夫)로서, 혼자 뽐내며 큰소리를 쳤으므로 가는 곳마다 석권(席捲)하였는데, 이는 지혜와 힘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의 속임을 당한 것이다. 그때 만약 이시애가 이천[利城]에서 주색에 빠지지 않았던들 그처럼 쉽사리 소탕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옹(懶翁)
고려(高麗) 신우(辛禑) 원년에 중 나옹(1320-1376)이 문수회(文殊會)를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에서 여니, 중외(中外)의 사녀(士女)들이 몰려들어 금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옹을 경상도 밀성(密城)으로 추방했는데, 도중에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 이르러 죽었으므로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나옹을 밀성으로 추방했다.”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절에 갔다가 그의 사리탑[舍利碑]를 보니, 법명(法名)은 혜근(惠勤), 혹은 보제(普濟)라고도 하고 속성(俗性)은 아씨(牙氏)이며, 이른바 나옹은 그의 호이다. 그런데, 어찌 당당한 사필(史筆)이 중의 호를 써야만 했는지 우리 동방 사람들의 자세하지 못함이 번번이 이러하다.
보제(普濟)가 이미 죽자, 무릇 사리를 1백 55개나 찾아냈는데 두들겨서 5백 58개로 나누었고, 사방 군중들이 잿속에서 찾아내어 숨긴 숫자도 그 수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연전에 신륵사의 동쪽 대탑(臺塔)이 무너졌는데 내가 우연히 그 곳에 갔다가 그 소장된 사리를 보게 되었다. 크기가 기장 알[黍粒]만한 것이 2개였으며, 철(鐵)로 집을 만들고 그 속에는 쟁반에다 칠보(七寶)를 올려 놓았으며, 또한 수정(水精)을 호로(葫蘆)에 저장하였는데 빛깔이 약간 푸르며 모양은 모래알과 다름이 없었다.
■안시성주(安市城主)
고려의 김부식(金富軾)이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을 인용하여, “주필(駐?)한 전역에 고구려와 말갈(靺鞨)의 연합군이 사방 40리에 뻗쳤으므로, 태종이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하였고, 또 “육군(六軍)이 고구려에게 제압당하여 자못 앞으로 떨쳐나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척후병이 ‘영공(英公 이적(李勣)의 봉호)의 군사가 포위되었다.’고 고하자, 제(帝)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스스로 벗어나가기는 하였지만 두려워함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ㆍ《구당서》와 사마광(司馬光)의 《통감(通鑑)》에 이 사실을 말하지 아니한 것은, 어찌 나라를 위하여 말하기를 꺼려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또 “태종이 영명(英明)하고 신무한 불세출의 임금으로서 오랫동안 안시성을 포위하고 온갖 계책을 다하여 쳤지만 이기지 못하였으니, 그 성주도 역시 비상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애석하게도 역사에 그의 성명이 누락되었다.” 하였다.
내가 하맹춘(何孟春)의 《여동서록(餘冬序錄)》을 상고해 보니, “안시성장(安市城將)은 곧 양만춘(梁萬春)이다.” 하였다.
목은(牧隱)의 시에,
누가 백우가 현화를 떨어뜨린지 알까 / 誰知白羽落玄花
하였는데, 세상에서 “당 태종이 유시(流失)에 맞아 실명(失明)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니, 이에 모두 상고할 수 있는 것이다.
■칠십치사(七十致仕)
칠십치사(七十致仕)란 성인이 대소경중을 짐작해서 말한 것이니 부모의 상기(喪期)도 3년이면 탈상한다는 것과 같다. 큰 법이 여기에 있으니 어찌 어길 수가 있겠는가?
자하(子夏)와 민손(閔損)의 슬퍼함과 즐거워함이 같지 않으나 다 군자라고 이른 데에서 볼 수 있다.
강태공(姜太公)을 어떤 이는 75세, 어떤 이는 80세라고 하였으니, 그가 70세가 넘은 점에서는 같으나 당시 군사의 책임을 태공(太公)이 맡았던 것은 혐의가 될 수 없다.
옛날에는 상기(喪期)가 일정한 연한(年限)이 없었으나 후세에 성인이 제도를 정한 뒤에는 감히 어기겠는가?
옛날에 정무공(鄭武公)은 나이 80세가 넘어서 주(周)에 들어가 사도(司徒)가 되었으니 또한 단상(短喪)의 유도 함부로 말할 것은 아니다. 후세의 풍속은 사욕이 횡행하여 모두 간진무입(干進務入 나아가 벼슬하기를 간구함)하는 사람들로 하루 동안만 지체하면 마치 굶은 사람이 배부르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여기며, 한 걸음 물러서면 마치 추위에 옷을 벗는 것처럼 안타깝게 여겨 열 번을 미봉(彌縫)하고 백 가지로 도움을 청하여, 기어코 사욕을 완수한 뒤에야 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반드시 근력이 아직 강하다고 하나 온 세상을 찾아 보면 50~40된 사람으로 벼슬할 만한 자가 그 아니고는 없단 말인가? 성인은 의ㆍ필ㆍ고ㆍ아(意必固我)가 없었으니, 아(我)라는 것은 양(讓)의 반대이다. 천언만어(千言萬語)가 결국 귀착점은 아(我)이고 남을 위해서는 아니다. 이것은 사욕의 굴혈(窟穴)이고 양도(讓道)의 쇠퇴(衰頹)이다.
진(晉)의 유준(庾峻)은 “원공(元功)이나 국로(國老)가 아니면 칠십치사를 시행한다면 관리가 봉록(俸祿)을 연연히 생각하는 폐단이 없을 것이고, 부모의 나이 80세에 종양(終養)을 허락한다면 효도가 어버이를 섬기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는 것이 된다. 여러 자리의 관직에 시험해 보아도 공적이 없는 자는 옛 법에 의하여 종신토록 사진(仕進)하지 않는다면 관(官)에는 비정(秕政)이 없게 될 것이다. 작은 일은 할 수 있으나 큰일은 하지 못하는 자는 강등시켜 작은 일을 하게 한다면 사람을 그 재능에 알맞게 부리는 것이 된다.”라고 했으니, 이 몇 마디의 말은 벼슬이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설 줄은 모르는 사람의 경계가 된다.
송(宋) 나라 문언박(文彦博)은 80세에 다시 상부(相府)로 들어갔다. 상부에 돌아가서 과연 한 일이 무엇이었던가? 가령 이 사람이 없었다면 다시는 노공(潞公)에 비할 만한 사람이 없었더란 말인가? 이 사람은 이욕을 좋아하는 비부(鄙夫)에 지나지 않는 자로서 후세에 구실이 되었기에 특히 거론하여 분명히 밝힌다.
▣성호사설 제28권
■정인홍 시(鄭仁弘詩)
정인홍(1535-1623)은 어릴 때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었다. 그때 마침 그 도의 감사(監司)가 당도하여, 밤에 글 외는 소리를 듣고 찾아갔더니, 바로 과부집 어린아이였다.
그래서 기이히 여기고 데려다가 묻기를, “네 시를 잘 짓느냐?” 하니, 인홍은 잘 짓지 못한다고 사양했다.
감사는 탑(塔)가의 왜송(矮松)으로 글제를 내고 운(韻)자를 불러 주며 짓게 하였더니, 인홍은 즉석에서,
짧고 짧은 외로운 솔이 탑 서쪽에 서 있으니 / 短短孤松在塔西
탑은 높고 솔은 낮아서 서로 가지런하지 않네 / 塔高松下不相齊
오늘날 외로운 솔이 짧다고 말하지 마오 / 莫言今日孤松短
솔이 자란 다른 날에 탑이 도리어 짧으리 / 松長他時塔反低
라고 지었다. 감사는 깨닫고 감탄해 마지않으며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현달[貴顯]하리라. 그러나 뜻이 참람하니, 부디 경계하라.” 하였다.
그 후에 인홍은 남명(南冥)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세상에서 존대하는 바가 되었다. 그가 패륙(敗戮)됨에 미쳐서는 그의 문도(門徒)들이 매우 많았는데, 그들은 오히려 비분강개[悲歌慷慨]하여 한결같이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이 때문에 합천(陝川) 등지 여러 고을에는 관면(冠冕)이 대대로 끊어지고 사풍(士風)이 떨치지 못했으니, 이는 인홍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성호사설 제29권
■천자문(千字文)
유후촌(劉後村)이, “《천자문(千字文)》을 세상에서는 양(梁) 나라 산기상시(散騎常侍)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법첩(法帖) 가운데 한 장제(漢章帝)가 이미 이 글을 쓴 것이 있으니, 아마 양 나라 사람이 지은 것은 아니리라.” 하였으므로, 뒷사람은 끝내 이 말을 믿고 한(漢) 나라 때에 이미 이 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소견으로는, 《천자문》가운데, “두백도(杜伯度)의 고초(藁草), 종요(鍾繇)의 예서(隸書)[杜藁鍾隸].”라는 것과, “여포(呂布)의 사(射), 혜강(嵇康)의 거문고[布射嵇琴].”와 “완적(阮籍)의 휘파람, 채윤(蔡倫)의 종이[阮嘯倫紙].”라는 등의 말이 있으니, 이 사람들은 모두 한 장제의 뒤에 난 사람들이며, 또, “기리계(綺里季)가 한 혜제(漢惠帝)에게 돌아왔다[綺回漢惠].” 하였으니, 장제의 입으로 이같은 말이 선뜻 나왔겠는가?
이로 미루어볼 때, 장제의 글씨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양 무제(梁武帝)가 은철석(殷鐵石)을 명하여 왕우군(王右軍)의 글씨 천 자를 모해 내서 주흥사를 시켜 차운하게 하였으므로, 그 글이 현저히 편차(編次)에 구애 받은 흔적이 있어 아정(雅正)하지 못한 데가 많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지금 법첩의 그릇된 점으로써 심지어 양(梁) 나라 시대의 글이 아니라고까지 의심한다면 이는 지나친 일이다.
▣성호사설 제30권
■남명 선생 문(南冥先生文)
조남명(曹南冥; 조식 1501-1572) 선생의 지은 글이 심히 특이하므로 퇴계(退溪 1501-1570)는 그 계복당(鷄伏堂) 등의 명(銘)을 보고서, “남화서(南華書) 가운데서도 일찍이 이런 것은 보지 못했다.” 하였으니, 이는 대개 기롱한 것이다.
남명(南冥)이 일찍이, “내 글은 비단을 짜서 필(匹)을 이루지 못한 것이요, 퇴계의 글은 포목을 짜서 필을 이룬 것이다.” 하였으니 역시 스스로 알았던 모양이다. 일찍이 그 친구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의 갈명(碣銘)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노부(老夫)가 남을 보증하는 일이 대개 적은데, 유독 공에게만은 천하의 사(士)로써 허여한다. 갑(甲)이 보기에는 엄박한 대아(大雅)로 토론(討論)하고 경륜하는 큰 유자(儒者)일 것이요, 을(乙)이 보기에는 석대한 장신(長身)으로 사어(射御)에 서툴지 아니한 호사(豪士)일 것이다. 홀로 서당(書堂)에 처하여 길게 노래하고 느리게 춤추어, 집안 사람도 그 뜻을 엿볼 수 없으니, 이는 본 성품에 즐거움이 있어 영가(詠歌)ㆍ무도(舞蹈)하는 때요, 산수(山水)에 몸을 맡겨 낚시질하고 사냥하여, 당시 사람들이 오히려 방탕한 자로 인식하니, 이는 세상에 은둔(隱遯)해도 답답함이 없어 침명(沈冥)하고 도회(鞱晦)하는 일이다. 우리 동덕(同德)자들로부터 본다면, 국량이 크고 깊은 것은 힘쓰는 그 인(仁)이요, 언론이 격렬하고 발월(發越)한 것은 굳센 그 의(義)이다. 선(善)을 좋아하여 스스로 선(善)한데 그치고, 홍제(弘濟)하여 자제(自濟)하고 말았으니, 운명이냐? 때를 잘 못만난 탓이냐?”
이 한 편으로도 역시 그 대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한산 팔경(韓山八景)
가정(稼亭 이곡 1298-1351) 이 문효공(李文孝公)과 목은(牧隱 이색 : 1328-1396) 이 문정공(李文靖公) 부자는 한산(韓山) 사람이다. 문효공이 이미 과거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는데, 뒤에 정동성(征東省)의 향시(鄕試)에 제일로 합격하여 드디어 제과(制科)의 제이갑(第二甲)으로 뽑혔었다. 이에 앞서 본국 사람이 제과에 합격은 하였지만, 대부분은 하열(下列)에 있었으며, 그 우등으로 급제하기는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문정공도 역시 이미 괴과(魁科)에 뽑혔었고 또 행성(行省)의 향시(鄕試)를 제일로 합격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충임(充任)되어 원(元) 나라에 가서 응시하였는데, 고관(考官) 구양현(歐陽玄)이 크게 칭찬하여 제이갑(第二甲)의 제이명(第二名)에 두었었다. 이에 “바다 밖으로 의발(衣鉢)을 전수했다.”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
한산은 바다를 낀 작은 고을로서 산천의 기관(奇觀)은 전혀 없는 곳이었으나, 문정공은, “부자가 제과에 올라 온 천하 사람이 조선(朝鮮)에 한산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불가불 표하여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 따라서 팔경(八景)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홍륜(洪倫)이 임금을 죽이고 김의(金義)가 사신(使臣)을 죽임으로 인하여 드디어 원 나라에서 응신하는 규례를 폐기하게 되자, 이로부터 문학의 선비들이 심지(心志)가 안에 국한되고 재주조차 쭈그러들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자면 반드시 물망이 높은 자를 선택하여 회유(懷柔)의 뜻을 보여 왔으며, 우리나라의 접반(接伴) 역시 반드시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서 종사(從事)로 삼아 창수(唱酬)한 문자라면 이뤄지는 대로 주워모아 《황화집(皇華集)》을 편성하여 과장하고 키우니, 한 시대의 문필하는 사람들이 미우(眉宇)를 쳐들고 기염을 토하며 그 집편(執鞭)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이 길이 끊어진 지도 이미 백여 년이 되었다.
지금의 사대부는 밤낮으로 계획하는 것이 과거를 따서 이권을 얻는 데 지나지 않으며, 사한(詞翰)의 기예에 이르러서는 역시 손을 휘둘러 경계하니, 혹시 과거 보는 데에 방해가 될까 해서이다. 이 때문에 유술(儒術)과 경학(經學)은 버려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비록 시률(詩律) 같은 말단 기예도 또한 차츰차츰 하는 사람이 없어지니, 그 애석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백사시(白沙詩)
백사(이항복 1556-1618) 이정승이 광해군(光海君) 때에 항쟁하는 소(疏)를 올리고 북청(北靑)으로 귀양가게 되자 길을 떠나면서 지은 시에,
맑은 날이 그늘져 대낮이 깜깜한데 / 白日陰陰晝晦微
북녘 바람 불고 불어 길손의 옷을 찢네 / 北風吹裂遠征衣
요동의 성곽은 응당 예아 같을 테나 / 遼東城郭應依舊
정영위는 가고 아니 돌아올까 걱정이야 / 只恐令威去不歸
라 하였다.
그런데, 과연 북쪽 변방에서 작고하고 말았다. 이 시를 욀 적마다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한다.
■한석봉(韓石峰)
우리나라의 필예(筆藝)는, 고려 시대에 있어서는 김생(金生)ㆍ문공유(文公裕)ㆍ설경수(偰慶壽)의 유가 가장 저명하였고, 성조(聖朝)에 들어와서는 안평군 용(安平君瑢)ㆍ양사언(楊士彦)ㆍ한호(韓濩)와 우리 종조(從祖) 청선당(聽蟬堂)이 다 절예(絶藝)라는 일컬음을 받았었다.
상고하건대, 《송도지(松都志)》에, “한호(1543-1605)의 자는 경홍(景洪)인데 정묘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고 호는 석봉(石峰)이었다. 임진년에 명(明) 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ㆍ마귀(麻貴)ㆍ북해(北海)ㆍ등계달(滕季達) 및 유구(琉球)의 양찬지(梁粲之)의 무리가 다 석봉의 글씨를 구해 가지고 갔다.” 하였고, 왕세정(王世貞)이, “동국에 한석봉이라는 이가 있는데, 그 글씨는 성낸 사자가 돌을 긁는 것과 같다.” 하였고, 주지번(朱之蕃)이 또한, “마땅히 왕우군(王右軍)ㆍ안평원(顔平原)과 더불어 우열을 다툴 만하다.” 하였다.
선묘(宣廟)는 그로 하여금 한가한 곳에 나아가 서예를 익히게 하고자 해서 특히 가평군수(嘉平郡守)를 제수하고, “게으르게 하지도 말고 촉박하게 하지도 말고 기운이 피곤한 때는 쓰지 말라.”고 교서를 내렸다. 그리고 또, “붓끝이 조화를 빼앗았다[筆奪造化].”라는 글자를 선사(宣賜)하였다.
나이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한석봉체라 칭하여 항간에 유행하는 것이 있으나 사대부들에는 그 체를 학습하는 이가 적다. 아들 민정(敏政)이 그 학(學)을 물려 받아 아비의 기풍이 있어서 사람들이 얼른 구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비록 조그마한 기예지만 성명(盛名)은 민멸될 수 없는 것이며, 세대가 그다지 멀지도 않은데, 까마득하게 어쩐 줄을 모르고 있으니, 역시 이 나라 습속이 재주를 천히 보는 한 가지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채록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