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전집(星湖全集)
이익(李瀷 1681-1763 )
《성호전집》은 성호가 평생 동안 지은 시문을 모아 만든 문집이다. 성호가 세상을 떠난 후 조카인 이병휴(李秉休)가 편집해 둔 필사본을 바탕으로 1922년에 경상도 밀양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72권 36책이나 되는 거질로 총 2300여 편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편지가 29권으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퇴계의 영향으로 편지를 일상생활의 안부나 묻는 단순한 통신매체가 아닌 학문을 토론하고 가르침을 주고받는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유교경전, 예법, 성리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성호의 견해가 담겨 있다. 다음으로 많은 것이 11권 분량의 잡저(雜著)로, 성호의 실학적 경세관을 볼 수 있는 교육, 군사, 경제 등 각종 제도에 대한 개혁안이 제시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2006년부터 2016년까지 총 17권으로 번역하였다.
▣성호전집 제1권
■농가의 반가운 비 8수중 1수
열흘 동안 준비한 비가 하루아침에 내리니 / 經旬養雨一朝行
금세 물이 가득한 도랑과 밭두둑 앉아 보노라 / 坐見溝塍倏已盈
도롱이 삿갓 쓴 사람마다 모두 생각이 같고 / 蓑笠人人同意思
쟁기와 호미 들고 곳곳마다 저마다 일하누나 / 犁鉏處處各功程
하늘이 백성 불쌍히 여겼구나 함께 노래하면서 / 天應閔下謳吟協
농사일 때 놓칠까 촌각을 서둘러 논밭에 나간다 / 事怕違期分刻爭
나만 홀로 사지를 부지런히 움직이지 못하니 / 獨我不能勤四體
집안에 앉아 음식 대하매 먹고 사는 게 부끄럽네 / 帲幪對食愧生成
■매화를 읊다
보는 이 없어도 스스로 피는 게 가장 사랑스러워 / 最愛無人亦自芳
꽃 중의 군자와 더불어 배회하노라 / 花中君子與相羊
가지 잡고 향기 찬찬히 맡으며 잠자리로 돌아갈 줄 모르니 / 扳條細嗅忘歸寢
하룻밤 내내 꽃이 향기를 허비할까 걱정해서라네 / 只怕通宵浪費香
▣성호전집 제2권
■보리타작 4수 중 1수
화기가 왕성함을 금초에서 아노니 / 火旺徵金草
보리타작의 일이 부쩍 바빠지누나 / 來麰務轉興
무르익은 가을을 미리 보내주니 / 探支秋爛熳
풍년이라 추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 卽事歲豊登
떨어진 이삭은 아이 시켜 줍고 / 滯穗敎兒拾
도리깨질에 힘을 부쩍 더 들이네 / 連耞用力增
탁주를 나 또한 마시노니 / 濁醪吾亦喫
아내가 직접 집에서 빚은 술일세 / 家釀細君憑
■지렁이에 대한 탄식
지렁이가 굴에 숨었을 때 얼마나 지혜로웠던가 / 丘引穴蟄何其智
섬돌 아래 흙을 파고서 그 속에 들어가 살았지 / 墢土築階引帶裏
천신만고 끝에 몸을 빼냈으니 힘이 또한 크건만 / 萬艱抽身力亦大
수십 수백 마리 개미떼 와서 마구 끌고 가누나 / 螻蟻十百來橫曳
꿈틀꿈틀 몸 뒤틀수록 개미는 더욱 모여들고 / 蠕蠕轉動蟻愈集
닭들은 쪼아 먹으려 다투어 틈을 엿보도다 / 羣雞刺蹙爭窺急
이에 이르러선 지혜와 힘으로 어쩔 수 없으니 / 智力到此無柰何
슬프다 세상의 일이 또한 이와 꼭 같구나 / 嗚呼世事亦同科
■쉰 살
쉰 살 나이에 섣달그믐이 다가오는데 / 五十行年逼歲除
흐린 눈 흰 머리로 내 집이나 지키노라 / 眼昏頭白守吾廬
여갱을 배불리 먹으매 다른 생각 없어 / 藜羹飽吃無餘念
밤에 시골 아이 모아 글 읽는 것 보노라 / 夜聚邨童看讀書
※여갱(藜羹) : 명아주 잎으로 끓인 국
■부안(扶安)수령으로부임하는 족손(族孫)유춘(囿春)동환(東煥)을 보내며 2수
쉰 살에 원님으로 가매 머리털이 세었구나 / 五十臨民鬢髮明
우리 왕이 외직 중시하니 일이 가볍지 않아라 / 吾王重外事非輕
여상 두 글자에 부끄러움이 없는 줄 아노니 / 如傷二字知無愧
이 글자를 부안 태수 부임하는 길에 보이노라 / 把似扶安太守行
벼슬살이 고을 수령보다 영광스러운 것 없거늘 / 宦仕無如作宰榮
군은 이번 길에 또 남팽을 맛보게 되었네 / 君行又見味南烹
명년에는 서신이 조수와 통할 것이니 / 明年尺素通潮信
틀림없이 인편에 위도의 청어 보내주겠지 / 會有人遺蝟島鯖
■귀가 먹다
눈 침침한 증세 해마다 심하더니 / 眼昏年年劇
갑자기 한쪽 귀가 안 들리누나 / 偏聾輒闖生
총명이 딴 세상처럼 달라졌으니 / 聰明疑異世
목숨 다할 날이 바짝 다가왔구나 / 凘滅逼前程
높은 소리의 말도 알아듣지 못해 / 未諦高聲語
늘 귓전에 세찬 폭포 울리는 듯 / 常聆急瀑鳴
능히 늙는 성품 나 스스로 가련한데 / 自憐能老性
게다가 병까지 내 몸을 침노하누나 / 况復病相嬰
▣성호전집 제3권
■어린 손자 여달의 돌잔치에 지어 보내다〔寄題小孫如達晬
아들은 늦게 봤어도 손자 일찍 보게 되니 / 生兒雖晩早生孫
네 아비는 한창인데 나는 벌써 늙었구나 / 汝父芳年我老殘
이 세상에 우리 삼대 함께함이 즐겁나니 / 然喜同時三世竝
남은 여생 온갖 영화 맛보기를 기대한다 / 深期餘日百榮存
태어난 게 엊그젠데 그새 돌이 되었구나 / 桑弧蓬矢俄周歲
돌상에 올라 있는 붓이랑 먹을 잡거라 / 兔穎龍煤且試盤
옥나무 뿌리 내려 재목으로 자라나서 / 種玉爲根嘉樹長
가지와 잎이 뜰 가득히 무성하게 되기를 / 任敎枝葉滿庭繁
■김 익산에 대한 만시 2수 〔挽金益山 二首〕
군내에 그대 집안 명망 있는데 / 郡望稱名勝
그중에 공은 더욱 빼어났었지 / 夫公又挺奇
밝은 시대 벼슬길 나가게 되어 / 明時將洗拂
화려한 명성 일찍 드러났어라 / 華譽早彰施
병조의 낭관 직임 맡아 행했고 / 星署容司武
선향의 수령으로 종종 나갔지 / 雲鄕動把麾
상산 골짝 처량함 애절하여라 / 象山哀壑切
하관할 제 슬픔은 더해만 지고 / 窀穸助悽其
우리 서로 만난 게 어느 해던가 / 邂逅何年是
생각대로 그대 용모 준수하였지 / 淸揚適願言
헤어진 뒤 늙도록 대면 못하고 / 乖離垂老禿
편지로만 빈번하게 소식 전했네 / 竿尺荷頻繁
고을에 수령으로 선정 베푼 뒤 / 縣邑棠留茇
뿌리 찾아 고향으로 돌아갔었지 / 丘樊葉返根
얼마 후 병중이란 말 들었는데 / 俄聞淹病枕
문득 부음 받으니 넋이 나가네 / 存沒劇消魂
※김 익산(金益山) : 익산 군수(益山郡守)를 지낸 김 아무개인데 누군지는 미상이다.
▣성호전집 제4권
■딸을 시집보내며〔送女〕
정성 다해 기른 딸 규방에 있었는데 / 勤斯育女在閨房
다른 집에 보내어 효부가 되게 하네 / 送與佗家作孝娘
시집가면 마땅히 친정 부모 떠나서 / 有行固應辭父母
마음 다해 시부모 오롯이 섬겨야지 / 專心惟可事尊章
산천이 얼어붙어 가기가 어려운 때 / 山川凍合憂難徹
골육이 헤어지니 가슴이 찢어지네 / 骨肉分張意自傷
눈바람 속 한 줄기 숲으로 난 길로 / 一路平林風雪裏
석양을 밟고서 저기 말이 떠나가네 / 任敎歸馬踏斜陽
※사위는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의 5대손인 이극성(李克誠)
■사위 이극성을 그리며〔懷李甥〕
가을 시든 초목처럼 마음이 스산하여 / 懷緖秋凋不復穌
계속해서 애타게 성 모퉁이 바라본다 / 盈盈瞻眺屬城隅
대대로 담백하여 구슬처럼 맑은 사람 / 家傳素履人如玉
관이재라 이름한 건 혜안이 있었구나 / 齋揭觀頤眼有珠
바닷가에 병 심하니 바람 정말 시끄럽고 / 水國病淹風正聒
늦가을에 애끓으니 달 외로이 뜨누나 / 霜天魂斷月來孤
나귀 타고 오던 길 이끼 덮여 애달픈데 / 絶憐菭沒鞭驢徑
한 해가 가려 하니 괜스레 더 상심되네 / 合遝空傷歲色徂
※관이재(觀頤齋)는 이극성이 기거하는 재실이다. 이극성의 6대조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한양(漢陽)의 남산(南山)에 작은 집을 마련한 이후로 대대로 그곳에서 살았는데, 이극성의 아버지 이계주가 그 집 옆에 별도로 작은 초막을 지어 관이재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아들 이극성이 조용하고 편하게 기거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성호전집 제5권
■투계도〔鬬雞圖〕
닭의 천성이 시샘하길 좋아하거늘 / 雞性本好妒
더구나 화 돋우어 싸우게 했음에랴 / 况又激之鬬
바야흐로 성이 나서 위세를 떨치니 / 方將怒洸洸
살기가 등등하여 온몸에 뻗쳤구나 / 殺氣撑身首
사람들 모두가 손뼉 치며 보는데 / 人皆拍手看
희색이 미간으로 흘러서 넘치누나 / 喜色眉際透
중간에 흩어질까 그것이 걱정될 뿐 / 但恐或解散
싸우다 죽어도 구할 생각 전혀 없네 / 縱死不思捄
무슨 일로 다투는지 묻지도 아니하고 / 不問爾何由
한 놈이 쓰러지는 것 보기 기다리네 / 祈見一顚仆
기르는 짐승이라 본래 어리석으나 / 畜物自愚蠢
사람들 마음 역시 너무나 비루하다 / 人意亦太陋
몰아대고 부추겨서 유희로 삼으니 / 驅嗾供玩戲
몽매한지 아닌지를 따져 보자꾸나 / 較量憨與否
만약 서로 아끼고 의지하게 만든다면 / 苟令相憐依
세상 사람들은 괴이하다 여기겠지 / 俗情視作醜
어진 사람들은 병아리를 바라보며 / 仁者觀雞雛
이천 어르신의 가르침을 받들리라 / 奉訓伊川叟
■금강산에 들어가는 사람을 전송하다〔送人入金剛〕
금강산 오른 지 오십 년 세월이 흘렀어도 / 念昔登臨五十春
아직도 가슴속에는 드높은 봉우리가 있네 / 至今胷海有嶙峋
비로봉 우뚝 솟아 하늘 받든 기둥이 되니 / 毗盧屹作擎天柱
세상 어지러운 날에 이 몸을 장차 의탁하리라 / 世亂吾將託此身
▣성호전집 제6권
■음식과 여색에 대한 경계〔食色戒〕
식색은 본래 천성이나 / 食色本天性
길흉이 경로로 삼네 / 吉凶爲路徑
잘 수양하면 성인을 바랄 수 있고 / 善養將希聖
외물을 따르면 죽고 병이 드네 / 循物入死病
배고프고 추울 때에 깊이 살펴야 하고 / 飢寒要深省
으슥하고 어두운 데서 더욱 경계해야지 / 幽暗尤宜警
담장에 붙은 귀가 좌우에서 듣고 / 墻耳左右聽
귀신의 눈은 매달린 거울과 같다네 / 鬼目如懸鏡
솥에 태워지고 볶이듯이 될 수도 있고 / 煎熬若在鼎
칼에 깎이고 베이듯이 될 수도 있지 / 削割刀劒倂
진퇴를 마음에서 정해야 하니 / 行違內須定
터럭처럼 미묘한 곳에도 천명 있다네 / 絲髮儘有命
혹시라도 주정하기를 잊어버리면 / 一或忘主靜
온갖 물욕이 다투어 침범하리니 / 衆慾求侵競
불이 언덕과 들판을 맹렬히 태우고 / 火燎丘原猛
범이 숲으로 달아나 날뛰듯 되리라 / 虎逸山林橫
몸을 해치는 것을 형체와 그림자에 비유했나니 / 戕身比形影
훈계가 천년토록 밝게 빛나네 / 訓戒千古炯
공부하여 식색을 제어할 수 있다면 / 功夫得操柄
함정에 떨어지는 일을 면하게 되리라 / 庶幾免墮穽
▣성호전집 제7권 : 해동악부(海東樂府)
■도솔가신라 〔兜率歌 新羅〕
유리왕(儒理王) 5년(28) 겨울 11월에 임금이 나라 안을 순행(巡行)하다가, 주리고 얼어 거의 죽게 된 한 노파를 보고 “내가 보잘것없는 몸으로 왕위에 있으면서 백성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여 늙은이와 어린이를 이 지경이 되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 하고, 옷을 벗어 그 노파를 덮어 주고 음식을 주어 먹게 하였다.
이어 곧바로 담당 관원에게 명령을 내려서, 각 지역마다 환과고독(鰥寡孤獨)과 늙고 병들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을 찾아가서 위문하고 물자를 공급해 주게 하였다. 이에 이웃 나라의 백성으로 그 소문을 듣고 신라로 들어온 자들이 많았다. 이해에 백성들이 즐겁고 편안하여, 비로소 〈도솔가〉를 지었다.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초이다.
임금은 백성의 즐거움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 人主以民樂爲樂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 못 찾으면 임금은 근심했네 / 一夫失所君心憂
임금은 근심했네 / 君心憂
유람하지 않고 즐기지 않으면 백성이 어찌 쉴 수 있으랴 / 不遊不豫民何休
먹이 기다리던 새 새끼가 제때에 얻어먹는 것과 같고 / 若鷇待哺無不得
벼 싹이 단비 만나 논물이 넘실대는 것 같았네 / 若苗時雨流洋洋
주린 자는 배 두드리고 언 자는 솜옷 입어 / 飢斯鼓腹凍挾纊
환호성과 북소리가 사방을 진동했네 / 懽聲鼓發動四方
사방을 진동했네 / 動四方
누군들 기억 아니하랴 은혜에 젖었던 일을 / 何人不憶霑恩波
오호라 도솔 노래여 / 嗚呼兜率歌
다시 볼 수 없으니 시대 변천을 어이하리 / 不可復見柰時何
■회소곡〔會蘇曲〕
유리왕 9년(32)에 임금이 육부(六部)를 정한 뒤에, 가운데를 나누어 둘로 만들고, 임금의 딸 두 사람에게 각각 부(部)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어 편을 짜서,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육부의 뜰에 일찍 모여서 길쌈을 하여 을야(乙夜)에 파하게 하고, 8월 보름에 그 공적을 평가하여 진 자가 이긴 자에게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잔치를 열어 인사를 하도록 하였다. 이에 노래와 춤, 온갖 놀이가 모두 행해졌는데, 그것을 ‘가배(嘉俳)’라 하였다. 이때에 진 쪽 집안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한탄하기를 ‘회소(會蘇)! 회소!’라 하였는데, 그 소리가 애절하고 고왔다. 후세 사람들이 그 소리를 인하여 노래를 지어, 이름을 〈회소곡〉이라 하였다.
지금 영남의 풍속을 살펴보건대, 부녀(婦女)들이 베를 밤늦도록 짜며 잠을 적게 자니, 전해 내려온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하겠다.
동쪽 집 삼 기르고 서쪽 집도 삼을 길러 / 東家藝麻西家同
밭일과 길쌈 일을 서로서로 도왔다네 / 田功績事相始終
서늘한 가을 와서 칠월 팔월 좋은 시절 / 涼秋七月八月時
마을 아낙 너도나도 왕궁에 모였다네 / 濟濟村婦王宮中
왕궁의 귀한 왕녀 엄숙하게 함께 앉아 / 王宮貴姐儼同坐
편을 갈라 길쌈하여 솜씨를 겨루었지 / 萬手分曹鬪女紅
그대는 못 보았나 / 君不見
공상 잠실이 성군의 제도여서 / 公桑蠶室聖有制
부인도 부위 차림으로 삼분수의 수고를 했음을 / 副褘且勞三盆手
그대는 못 보았나 / 君不見
공보 현모가 어리석은 아들을 꾸중하였으니 / 公父賢母怒癡子
직무에는 분수 있어 각기 직분을 잘 지켜야 함을 / 職業有分宜各守
이 일이 지금도 있어 옛 뜻에 부합하니 / 此事今有合古意
요컨대 근만으로 승부를 결정짓네 / 要令勤慢判勝負
이긴 자를 권면하고 진 자를 징계하니 / 勝者可勸負者懲
잔치 열고 술 마련해 벌칙 사양 아니하네 / 設筵置酒不辭罰
기쁜 기운은 봉루에 걸린 연기 위로 치솟고 / 喜氣爭高鳳樓煙
환호 소리는 계림의 달빛을 뒤흔드네 / 歡聲亂動雞林月
가배 자리에서 춤추던 자 누구였나 / 嘉俳席上舞者誰
〈회소곡〉 한 곡조가 더욱 맑고 절묘했네 / 會蘇一曲尤淸絶
위로는 왕공에게 고운 삼베 바치고 / 上獻王公供絺絡
아래로는 노약에게 옷과 이불 만들어 주네 / 下與老穉爲衣被
원하노니 왕의 마음이 삼실 잇기와 같으시길 / 我願王心如續麻
잇다가 혹 끊어지면 어지러이 뒤엉키네 / 續麻或斷紛不理
원하노니 왕의 마음이 실 붙이기와 같으시길 / 我願王政如添絲
계속 붙여 마지않으면 마침내 일 이루리라 / 添絲不已終諧事
원하노니 이 뜻으로 〈갈담〉을 뒤이어서 / 願將此意繼葛覃
노래와 가사를 지어 악사와 사관에게 부치시길 / 播作聲詩付瞽史
■화랑가〔花郞歌〕
진흥왕(眞興王) 37년(606)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이전에 임금과 신료들이 사람을 알아볼 방법이 없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서, 끼리끼리 모여 함께 놀게 해서 그들의 행의(行義)를 관찰한 뒤에 발탁해서 쓰고자 하였다. 드디어 미녀(美女) 두 사람을 선발하여 하나는 남모(南毛)라 하고 하나는 준정(俊貞)이라 하고 낭도(郞徒) 300여 명을 모았다. 그런데 두 여인이 미모를 다투며 서로 시샘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끌어들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고는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 살해하였다. 준정은 사형을 당하였고, 낭도들은 화합을 잃고 흩어졌다.
그 뒤에 다시 잘생긴 남자를 선발하여 곱게 꾸며서 화랑(花郞)이라 하고 그를 받들었는데, 낭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서로 도의(道義)를 연마하기도 하고 가악(歌樂)을 즐기기도 하면서 산수를 유람하여 아무리 멀어도 이르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이것을 통해 그 사람의 사정(邪正)을 알았고 그중 선한 사람을 가려서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러므로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記)》에 “충성스러운 보좌와 현능한 신하가 여기에서 솟아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맹한 군졸이 이로부터 생겨났다.” 하였고,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고 한다. 설교(說敎)의 근원이 선사(仙史)에 자세하게 실려 있으니, 실로 삼교(三敎)를 포괄하여 군생(群生)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들어오면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자는 것은 노(魯)나라 사구(司寇)의 종지(宗旨)이고,무위(無爲)로 일을 처리하고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시행하자는 것은 주(周)나라 주사(柱史)의 종지이며,제악(諸惡)을 짓지 말고 제선(諸善)을 봉행하자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의 교화이다.” 하였으며, 당(唐)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新羅國記)》에 “귀인(貴人) 자제(子弟) 중에서 아름다운 이를 가려서 화장시켜 화랑이라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높이 섬겼다.” 하였다.
태사가 동쪽을 교화한 지 천년이 지났건만 / 太師東敎一千歲
남방에는 아직도 화랑의 비루함이 있었네 / 南邦尙有花郞陋
화랑은 원화로부터 나왔는데 / 花郞自源花
예쁜 계집과 예쁜 사내에게 과연 무엇을 취했을까 / 姣女姣男果何取
학업 닦음에 어찌 방술이 없었기에 / 講業寧無術
분 바르고 화장하니 더욱 추해 보였다네 / 傅粉靘粧益見醜
산천 구경 떠돌면서 완동들과 어울리고 / 浮遊山水比頑童
선왕의 예악은 전수하지 아니했네 / 先王禮樂非受授
구원에 도를 지닌 사람이 있었어도 / 丘園抱道縱有人
깨끗이 의리 지켜 때 묻히지 않았으리 / 皭然義不汙滋垢
계림이 오랑캐의 풍습이 있어 / 雞林夷裔風
인문이 참으로 볼품이 없었네 / 人文不與數
삼고 시대는 아득히 멀고 / 寥寥三古際
어리석게도 부패하여 썩어 가고 있었지 / 蠢蠢歸腐朽
문창은 북학을 하여 안목이 뛰어났는데도 / 文昌北學目有珠
오히려 충효가 여기 있다고 일찍이 말하였네 / 尙云忠孝於斯有
지금 세상은 사장을 귀히 여겨 / 至今天下貴詞場
현능하건 어리석건 과거 공부로 몰아넣네 / 賢愚倂驅入科臼
못에 사는 물고기는 나무에서 못 잡으니 / 淵魚本非緣木求
결국에는 옛 화랑과 무엇이 다를 건가 / 畢竟何別花郞舊
향빈의 삼물을 다시 볼 수 없으니 / 鄕賓三物不復見
풍후와 역목에 응당 고개를 돌려야 하리 / 風后力牧應回首
■만파식곡〔萬波息曲〕
신문왕(神文王) 때에 동해(東海)에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感恩寺) 쪽으로 흘러와서 파도를 따라 왔다갔다하였다. 왕이 신기하게 여겨,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그 산에 들어가 보니, 산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왕이 명하여 피리를 만들게 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질병이 나았으며, 가물 때에는 비가 오고 장마 때에는 날이 개었으며, 바람도 잔잔해지고 파도도 잠잠해졌다. 그것을 만파식적이라 일컫고 대대로 전하면서 보배로 삼았다.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호칭을 추가하였다.
피리가 소리 없으면 파도가 일어나고 / 笛無聲萬波興
피리가 소리를 내면 파도가 멈추었지 / 笛有聲萬波息
칠성공이 비스듬히 뚫리고 / 七星孔兮參差
음향이 은은한 노죽으로 만든 피리라네 / 遺響振兮老竹
노죽은 자랐지 만리 떠온 봉우리에 / 老竹生兮萬里浮來峯
자라 머리 한 점 산에 푸른빛이 엉기었지 / 鰲頭一點兮凝暉碧
난새와 학이 울고 이무기와 용이 으르렁대니 / 鸞鶴嘹唳兮蛟龍叫嘯
바람 불고 비 내려 대나무 한 그루 길렀네 / 風嘷雨溜兮養成一竿玉
왕이 돌아보고 감탄하며 / 王睠焉兮一嗟
공인에게 명하여 긴 피리를 만들게 했네 / 命工人使爲長笛
높은 언덕에 올라 피리를 부니 / 登崇阿而橫吹
서늘하고 맑은 소리가 산과 바다 진동했네 / 凄淸寥亮兮振海岳
해 나와라 비 내려라 하면 반드시 호응했고 / 曰暘雨而必應
온갖 잡귀 물리쳐서 깨끗이 쓸어 냈지 / 驅萬鬼兮掃滌
재해가 변화하여 상서로움으로 바뀌니 / 灾害變而瑞慶
곡식이 풍년 들어 백성들이 기뻐했네 / 年穀穰穰兮黎氓喜樂
전쟁이 멎고 사방이 편안하니 / 兵戈建櫜兮四邊謐寧
태묘에 올려서 영원히 전하리라 / 薦諸太廟兮流無極
■처용가(處容歌〕
헌강왕(憲康王) 5년(879)에 왕이 학성(鶴城)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포구에 이르자 문득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길을 잃었는데, 해신(海神)에게 기도하여 안개를 걷히게 하였다. 인하여 그곳을 개운포(開雲浦)라 하였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처용(處容)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형상이 특이하였고 복장도 특별하였다. 왕 앞에 나아와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왕을 따라서 서울로 들어오니, 왕이 급간(級干)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이때에 또 네 신인(神人)이 있어, 복장이 괴이하고 모습이 해괴하였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왕의 수레 앞에서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그 노래에 ‘지이다도 도파도파(智異多逃都破都破)’ 등의 말이 있었다. 대개 지이국자(智異國者)가 많이 도망을 가서 도읍이 장차 파괴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 때문에 노래하여 그것을 경계한 것인데, 당시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로움이라 여겨서 탐락(耽樂)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에 나라가 끝내 망하고 말았다.
우선 처용무를 멈추고 / 且停處容舞
나의 처용가를 들어 보소 / 聽我處容歌
저들은 일개 배우일 뿐이니 / 彼一俳優耳
군자와 같은 등급이 아니라네 / 君子不同科
나올 때에 포륜으로 초빙한 것도 아닌데 / 出非蒲輪聘
큰 벼슬을 내리다니 또 어찌된 일인가 / 鞶錫又如何
당시에 송악에 진인이 내려오니 / 當時松岳眞人降
하늘 운수 귀결됨이 물결과 같았다네 / 大運歸向如奔波
궁중에서는 암탉이 새벽에 울었으니 / 宮中牝雞待晨鳴
시림의 왕업 기운이 은연중에 깎여 갔네 / 始林王氣陰銷磨
유희와 사냥에 빠져 방탕하게 즐기면서 / 淫遊逸佃方耽懽
임금 신하 아양 떨며 세월만 보냈다네 / 君臣媚悅徒媕婀
밝은 자는 기미를 알아거두어 감추는 법 / 明者知微可卷懷
몇 사람이나 춤을 추며 산속에 은둔했나 / 幾人婆娑在山阿
특이한 사내들이 복장이 이상하니 / 異哉夫夫詭冠服
몸 팔아 은택 구함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네 / 鬻身干澤誠非他
세상 속이고 총애 취하니 무슨 일을 하려는가 / 欺世取寵何事業
산중의 사슴들이 응당 꾸중을 하게 되리 / 山中麋鹿應譏訶
백대를 유전해서 세속의 유희가 되어 / 流傳百代成俗戲
천한 것들이 박수치고 정말 웃음거리로다 / 臺輿拍手眞笑囮
그대는 보게나 / 君看
고운이 벼슬을 버리고 방외에 노닐어 / 孤雲棄官遊方外
지금까지 신선 자취가 가야산에 남은 것을 / 至今仙蹟留伽倻
■황조가〔黃鳥歌〕
유리왕(琉璃王) 3년(기원전17) 가을 7월에 골천(鶻川)에 이궁(離宮)을 지었다. 겨울 10월에 왕비 송씨(松氏)가 죽었다. 왕이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들어 계실(繼室)로 삼았으니, 하나는 화희(禾姬)인데 골천 사람의 딸이고, 하나는 치희(雉姬)인데 한(漢)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두 여자가 총애를 다투어 화목하지 못하므로 왕이 양곡(凉谷)에 동궁(東宮)과 서궁(西宮)을 지어 각각 따로 두었다.
뒷날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그 사이에 두 여자가 다투었는데, 화희가 치희를 꾸짖기를 “너는 한가(漢家)의 비첩(婢妾)으로 어찌 매우 무례한가?” 하니, 치희가 부끄럽고 억울하여 도망쳐 돌아갔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 박차를 가하여 따라갔으나 치희는 노여워하며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한번은 나무 아래에서 쉬다가 꾀꼬리가 날아와 모이는 것을 보고 이에 슬픈 생각이 들어 노래를 지어 불렀다.
훨훨 나는 꾀꼬리는 / 翩翩黃鳥
암수 서로 의지하는데 / 雌雄相依
외로운 이내 몸은 / 念我之獨
뉘와 함께 돌아갈까 / 誰其與歸
별궁을 짓고 또 별궁을 지으니 / 築宮復築宮
별궁 두 채가 골천에 우뚝했네 / 鶻川雙嶙峋
한 나라에 왕비가 둘이 있으니 / 一國有二妃
총애가 같고 투기도 또한 같았지 / 寵均妒亦均
나라 풍속이 토산을 중히 여겨 / 邦風重土産
나라 밖 사람을 차갑게 대하였네 / 冷視域外身
화희가 화를 내어 치희가 돌아가니 / 禾姬一怒雉姬走
채찍질하여 한걸음에 청패를 건넜다네 / 一鞭徑渡淸浿濱
아득히 떠나가서 돌아오지 아니하니 / 悠悠去不返
왕이 홀로 돌아와 짝이 없어 쓸쓸했네 / 王獨歸來影無隣
가지 위에서 들리는 꾀꼬리 노랫소리 / 枝頭忽聞睍睆鳴
수컷 암컷 어울려서 다정하게 날고 있네 / 雄飛從雌意自親
꾀꼴꾀꼴 그 소리에 마음이 뭉클하니 / 聲聲入耳感在心
새도 이러한데 사람에게 있어서랴 / 鳥猶如此況於人
꾀꼬리야 꾀꼬리야 / 黃鳥兮黃鳥
네가 지각이 있다면 응당 꾸짖으리 / 有知應相嗔
남편은 적처 둘 둔 혐의를 못 살폈고 / 夫昧幷嫡嫌
아내는 삼종지도 윤리를 잃었구나 / 妻失三從倫
어찌하여 기자가 다스렸던 땅에 / 柰何箕聖墟
남기신 가르침이 모두 무너졌는가 / 遺敎都喪淪
그대는 못 보았나 / 君不見
압록의 방 안에서 중매도 없이 따랐으니 / 鴨綠室中無媒從
문명 교화 미개하여 황무지와 같았음을 / 天荒未開猶荊榛
■정읍사〔井邑詞〕
정읍(井邑)은 전주(全州)의 속현(屬縣)이다. 고을 사람 중에 행상(行商)을 나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은 자가 있었는데, 그 아내가 산의 바위 위에 올라가 기다리면서, 남편이 밤길을 가다가 해로운 일을 당할까 봐 염려하여 흙탕물의 더러움을 비유로 들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세상에는 고개에 올라 망부석이 되었다고 전한다.
가을 샘물 오열하는데 / 秋泉咽
산하 이쪽이나 저쪽이나 밝은 달은 비추리 / 山河兩地同明月
밝은 달은 비추리 / 同明月
찬바람과 궂은비에 몇 해를 헤어져 살았나 / 凄風苦雨幾年離別
무심한 단풍잎이 시절을 알게 하네 / 等閒黃葉知時節
흙탕길만 아득하고 길 가는 이 없는데 / 泥塗漠漠行人絶
길 가는 이 없는데 / 行人絶
혼이 푸른 바다를 날아 패궁주궐을 찾아가네 / 魂飛滄海貝宮珠闕
▣성호전집 제8권 : 해동악부(海東樂府)
■정과정곡〔瓜亭曲〕
의종(毅宗) 5년(1151)에 정서(鄭敍)를 장형(杖刑)에 처하여 동래(東萊)에 유배하였다. 정서가 출발할 때에 왕이 말하기를 “오늘의 이 일은 조정의 여론에 밀려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가 있으면 다시 부를 것이다.” 하였다. 정서가 유배된 뒤, 소환하는 명령이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 이에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가사가 매우 처량하였다. 정서의 자호(自號)가 과정(瓜亭)이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그 곡조를 〈정과정(鄭瓜亭)〉이라 하였다. 바로 오늘날의 계면조(界面調)이다.
정과정이여, 어찌 화성과 옥당에 있던 몸이 / 鄭瓜亭何處畫省與玉堂
지금은 멀리 해 뜨는 푸른 바닷가에 있소 / 遠在赤日初昇之碧海傍
부르는 왕명은 오지 않고 세월만 흘러가니 / 徵書不下歲月忙
하늘 끝 외진 곳에서 임금 생각 한이 없네 / 無限榛苓天一方
손에는 거문고 한 장 / 手中琴一張
누르고 뒤채며 타는 소리에 근심만 길어지니 / 聲聲掩抑幽憂長
상현 소리는 바람에 대숲이 우는 소리와 같고 / 上絃嘈嘈韻苦篁
하현 소리는 무리 잃은 양 울음처럼 애절하네 / 下絃切切離群羊
한 번 타고 두 번 타니 구름이 피어나고 / 一彈再彈雲飛揚
바람 따라 말려서 하늘로 올라가네 / 流風捲入天中央
바다에 물결이 살랑대더니 하늘에 학이 날고 / 溟濤微興鶴回翔
금계가 눈물을 흘리며 부상에서 솟아오르네 / 金雞釀淚騰扶桑
임금은 구중궁궐 깊숙이 근엄하게 계시니 / 閶門九重儼紫皇
엎어진 동이 밑에 다시 햇살 들기 어렵구나 / 覆盆難回日月光
꿈속에서 한 곡조를 임금께 올리니 / 夢中一曲奏君王
시녀들이 고개 숙이고 애간장 끊어지네 / 侍女低鬟摠斷腸
그대는 못 보았는가 / 君不見
강남의 소녀가 〈절양류〉를 노래했으니 / 江南女兒歌折楊
성률 찾아 악보대로 써 가매 비탄함 더하네 / 尋聲按譜增悲傷
원컨대 이 곡조를 천년토록 전하고 싶은데 / 願將此調傳千霜
몇 명이나 계면조에 방황할지 모르겠네 / 幾人界面來彷徨
■목면가〔木綿歌〕
공양왕(恭讓王) 1년(1389)에 좌사의(左司議) 문익점(文益漸)이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씨를 얻어 가지고 돌아와서 그 장인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해 그것을 심었다. 처음에는 기르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거의 다 말라죽고 단지 한 줄기만 남았는데, 3년이 지나자 마침내 크게 번식하였다. 취자거(取子車)와 소사거(繅絲車)는 모두 정천익이 만들었다.
동화,백첩은 중국에 퍼져 있는데 / 橦花白疊流中國
별도로 다른 풀이지만 이름과 모양이 같네 / 別有異草名狀同
광동의 황시 사당 보지 못하였는가 / 不見廣中黃始祠
세시마다 제물 갖춰 촌 늙은이 분주하네 / 伏臘芬苾走村翁
다래 익은 꽃턱잎에 가는 솜이 피어나와 / 結實三瓣坼細綿
목화의 흰 터럭이 누에 치는 공과 맞먹네 / 白毳可敵桑蠶功
천하를 다 입히고 하천들까지 입혀 주니 / 衣被天下及下賤
만고에 은혜 남겨 무궁하게 전해지네 / 萬古餘惠傳無竆
동으로 와 씨를 퍼트린 이 그 누구인가 / 何人東走種下種
지금까지 모두들 강성공이라 말하네 / 至今共說江城公
정씨 집안 물레는 더욱 기이한 꾀를 내어 / 鄭家繅車益出奇
솜 트는 활과 말대를 백성에게 가르쳤네 / 彈弓捲筳敎愚蒙
곳곳마다 물레로 만 올의 실을 뽑아내니 / 處處莩繀萬縷抽
칠종포 구승포 짜느라 베틀이 빌 새 없네 / 七綜九升機不空
이것으로 솜 넣어 따스한 솜옷 짓고 / 用爲袍著挾纊溫
이것으로 치마 꿰매 여인의 솜씨 부리네 / 用爲縫裳女手工
제나라 노나라 비단도 이제는 소용없어 / 齊紈魯縞今可捐
꽃수와 구름무늬는 사치 풍조일 뿐이라 / 花繡雲紋但侈風
우습구나, 화려한 사치를 다투는 이는 / 可笑繁華鬪靡子
일생이 어지러이 비단 무더기에 파묻혔네 / 一生羅綺紛成䕺
▣성호전집 제43권
■조석에 대한 변증〔潮汐辨〕
...조수(潮水)의 운행(運行)은 항상 달의 운행에 따른다. 즉 땅을 비추면서 왼쪽으로 도는데, 이는 또한 일월성신(日月星辰)이 하늘과 함께 왼쪽으로 도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일월성신이 스스로 도는 것이 아니며 바로 기(氣)가 운행하는 것이 그와 같은 것이다. 기와 함께 운행하기 때문에 조수가 동서로 운행하는 것은 다만 기가 이르면 솟구치고 기가 물러가면 가라앉아서 한시도 쉼 없이 솟구치고 가라앉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해와 달의 운행은 항상 적도(赤道)에 가까우니 적도는 바로 천복(天腹)이다. 적도에 있을 때 그 속도가 가장 빠르며 북쪽으로 갈수록 점점 느려져서 극점에 이르게 되면 항상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조수의 운행도 역시 적도의 아래에 있는 바다가 가장 빠르며 북쪽으로 극점(極點)의 아래에 이르면 조수도 또한 반드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또 반대로 적도로부터 남쪽으로 내려가 남극(南極)에 있어서도 그 형세가 똑같을 것이다.
조수가 달에 따르는 것은 동서(東西)가 모두 같은데 남북(南北)도 또한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서국(西國)의 말을 들어보니 달이 묘방(卯方)에 있을 때 조수가 시작되고 오방(午方)에 있을 때 만조(滿潮)가 되며 유방(酉方)에 이르면 물러가는데, 그쳤다가 다시 생긴다고 하였다. 이는 적도에 위치한 바다의 중심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가령 서쪽 땅에서 달이 처음 떠서 조수가 발생하였다면, 동쪽으로 2만 2천여 리가 떨어진 곳은 바로 그때 달이 오방에 있어 만조가 된다. 서쪽 땅의 달이 오방에 있어서 만조가 되면 이미 동쪽 땅은 달이 져서 조수가 물러가니, 달이 땅의 위와 아래를 돌아서 조수가 달과 동조(同調)한다는 것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
▣성호전집 제45권
■과거의 폐단에 대하여 논함〔論科擧之弊〕
요즘에 과장(科場)이 엄정하지 않아서 용렬한 무리가 마구 섞여서 들어오는데, 혹은 밟혀서 죽고 칼날에 상해도 유사(有司)가 금단(禁斷)하지 못하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대개 국가가 오로지 문장(文章)의 기예(技藝)로써 선비를 뽑는 것이 이미 본분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우선 이 문제는 따지지 말고, 그동안 시행되어 온 과거제도에 대하여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다만 문장만 가지고 뽑은 것이 아니라 필법(筆法)도 같이 보았다. 또 다만 해서(楷書)만 본 것이 아니라 초서(草書)도 같이 보았으니 모두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나날이 제도가 무너져가서 원래의 제도와는 완전히 배치되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글씨를 쓰는 사람은 글을 짓지 않고, 글을 짓는 사람은 글씨를 쓰지 않는다. 궁벽한 시골의 선비가 다만 붓을 잡고 써도 매우 쉽게 급제한다. 또 혹 글은 짓지도 쓰지도 않고 오직 재물을 가지고 농락하여 마음대로 대신 짓고 쓰게 하니 한 사람이 요행히 합격하면 백 사람이 벌떼처럼 따라한다. 심지어 고관대작이나 부귀한 집에서는 책을 가지고 시장(試場)에 들어가는데, 한 사람이 과거를 보면 종자가 수십 명이 따라간다. 비록 충군(充軍)시키는 형률(刑律)이 있다고 한들 누가 누군지 구분하지 못하니 그 폐단이 어찌 저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것이 쉽게 다스려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먼저 명령을 내리고 그 내용을 널리 고시(告示)한다. 초시(初試)의 시권(試券)을 임시로 보관했다가 회시(會試)에 합격하면 그 시권을 예부(禮部)와 대각(臺閣)에 보낸다. 그 다음 모여 앉아 초시의 시권과 회시의 시권을 비교하여 감정한다. 그중에서 글씨체가 비슷하지 않은 것을 골라내어 합격자에서 제외시킨다. 이렇게 한다면 요행을 바라는 자들이 시장(試場)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고시(考試)함에 있어서는 오직 문장만을 보며 필체가 졸렬하다고 하여 떨어뜨리지 않는다. 다만 이미 등수가 정해진 후에 등수가 같다면 필법을 보는데, 해서로 가릴 수 없다면 초서로 우열을 정한다. 작은 차이라도 구분하여 등수를 정한다면 장차 사대부들이 반드시 서예(書藝)에 유념하여 국가에서 부지런히 권면하는 뜻에 부응할 것이며, 또 힘을 다하여 배울 것이니 전혀 글자가 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없게 될 것이다.
책을 가지고 시장에 들어오는 행위만은 예로부터 금지하였다. 만약 금지하지 않는다면 시골의 가난한 선비들은 비록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더라도 천하의 모든 책을 모조리 외워서 머릿속에 넣을 수가 없으니, 많은 책을 가지고 시장에 들어오는 고관대작이나 부호의 자제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일찍이 내가 들으니, 선대의 임금들이 계실 때는 책의 휴대를 매우 엄격하게 단속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와 다시 대충 단속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다. 때문에 거자(擧子)들이 각각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책을 가지고 들어오니, 이것이 시장이 분잡(紛雜)하게 된 이유이다.
또 생원시(生員試) 같은 경우는 문제를 낼 때 구서(九書)를 시험하지 않으니, 경의(經義)는 사서(四書)에서 나오지 않고, 의문(疑問)도 오경(五經)에 없다.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온갖 글을 긁어모아서 미리 답안을 만드는데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유독 저 사서 속에 어찌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어 밝혀낼 곳이 없고, 유독 오경 속에는 질문할 만한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다는 것인가. 지금 만약 사서와 오경을 합하여 문제를 낸다면 모든 글들을 모아서 미리 대비를 했던 사람들이 실패하게 될 것이다.
근세에 학문하는 순서가 반드시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으로써 출발점을 삼으니 또 마땅히 이 두 책을 추가하여 충분히 익히게 해야 한다. 시부(詩賦)에 있어서는 당(唐)나라의 성시(省試) 및 율부(律賦)를 모두 따를 만하다. 반드시 여덟 글자로 운(韻)을 삼는데, 이를 각운(脚韻)이라고 부른다. 혹 제3구와 제2구, 혹은 제4구와 제5구를 차례대로 압운(押韻)하니, 교묘하게 속이는 것을 방지한 것이다. 그런 뒤에 문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게시하여 분명하게 알도록 한다면 시장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태반은 줄어들 것이다. 무릇 시장에 용렬한 무리가 넘쳐도 구별하기 어려운 것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만약 태반이 줄어든다면 비록 하나하나 골라서 내보낸다고 한들 또한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시장에 거자들이 다 들어오면 감찰관(監察官)은 사방을 순시하여 그들의 표정과 용모를 살핀다. 용모가 단정하지 않거나 글을 모르는 자 수십, 수백 명을 별도의 장소로 데리고 가서 글의 뜻을 따져 묻고, 시험 삼아 지어 보라고 한다. 대답하지 못하는 자는 충군(充軍)시킨다. 시권을 내고 시장 밖으로 나가 버린 자는 잡아서 물어보기를 위와 같이 한다. 이렇게 하면 단지 과장이 정돈되고 엄숙해질 뿐만 아니라 군액(軍額)도 또한 더욱 늘어날 것이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고 하여 모두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아니니, 이는 유생(儒生)의 무리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급제(及第)를 내리는 대과(大科)는 한번 합격하기만 하면 나아가 임금을 섬기고 백성에게 임하니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더욱더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처음부터 초시를 거치지 않는다면 요행으로 합격한 사람들이 더욱 많을 것이다. 시작부터 반드시 나라와 임금을 속이고 출신(出身)하는 것이었으니, 그 끝이 반드시 능히 충성을 다하리라고 기필(期必)할 수 없다. 만약 절과(節科)와 같은 것들을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합격한 후에 모여서 전시(殿試)를 치를 때 그 필획을 대조 감정한 뒤에 합격자를 발표한다. 시험 당일에 합격자를 발표하는 경우에도 또한 반드시 불러와서 그 글의 대략적인 뜻을 물어보고, 대답을 몇 줄의 문장으로 써내게 한다. 그 대답의 내용을 살피고 필획을 비교하여 문제가 없는 경우에 급제를 발표한다. 이렇게 하면 그동안 쌓여왔던 폐단을 조금이나마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문신(文臣)들도 또한 정시(庭試)나 전강(殿講) 따위를 보는데, 이것을 어찌 특별한 경우라고 하겠는가. 처음 법을 세울 때 반드시 임금께서 때때로 중관(中官)을 파견하여 경각심(警覺心)을 갖게 하고,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조사하여 시관(試官)을 포상하거나 처벌한다면 이것이 어찌 모든 사람을 쇄신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선비에게 있어서 과거란 가장 큰 이해가 달린 곳이다. 진실로 계교를 써서 죄를 피하고 급제할 수만 있다면 장차 무소불위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법을 세우더라도 오래되면 반드시 폐해가 생기는 까닭에, 전대(前代)에는 인재를 구하는 임금은 반드시 모두 때에 따라 변통하여 옛날의 자취에 구애받지 않았던 것을 역사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지금은 대개 삼백 년 동안 변함없이 왔으니 어찌 문제가 없겠는가. 이렇게 된 것은 고관대작의 자제들이 오로지 당시에 유행하는 글을 익혀서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편하였으므로, 바꾸고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용인에 대하여 논함〔論用人〕
지금의 용인(用人)은 옛날의 제도를 두루 상고하여 가장 열등한 것들을 모아서 만든 제도이다. 선거(選擧)는 덕행(德行)을 우선하고 문장(文章)의 기예(技藝)는 뒤로하는 것이 마땅한데, 지금은 표전(表箋)으로 급제한 자를 가장 높이 친다. 인재를 골라내는 것은 출신지의 여론에 맡기는 것이 마땅한데 지금은 모두 이조(吏曹)에 주어서 한결같이 그 사심(私心)에 맡긴다. 이조에서 골라낸 인재를 규찰(糾察)하여 바로잡는 것은 재상(宰相)과 승정원에 있는 것이 마땅하고, 사헌부와 사간원의 서경(署經)을 거친 후에 실행해야 하는데 지금은 한 번 제수하면 감히 논란하지 못한다. 승진(陞進)은 재덕(才德)으로 해야 마땅한데 지금은 한결같이 순자격(循資格)으로 한다. 상벌(賞罰)은 공로로 하는 것이 마땅한데 지금은 공로가 없는데도 발탁되고 올라가기는 해도 내려오는 법은 없다. 재능(才能)과 기국(器局)은 귀천을 가려서 태어나는 것이 아닌데 지금은 오로지 문벌(門閥)만을 숭상하니 문벌과 관계가 없는 자는 백에 하나도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다.
재상(宰相)을 뽑을 때는 치민(治民)을 우선해야 하는데, 지금은 주군(州郡)에서 백성을 다스린 치적으로 재상에 오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청선(淸選)에 끼어서 다른 길로 오른다. 용관(冗官)은 도태시키는 것이 마땅한데 지금은 나라는 작고 관원은 많다. 입사(入仕)는 잘 가려서 뽑는 것이 마땅한데 지금은 자리는 적고 사람은 많다. 성과를 보자면 구임(久任)시켜야 마땅한데 지금은 자주 교체한다. 천주(薦主)는 연좌하는 것이 마땅한데 지금은 편안하게 벼슬자리를 지키며 아무런 간여를 하지 않는다. 죄가 있으면 쫓아내고 물리치는 것이 마땅한데 지금은 잠시 버렸다가 다시 기용한다.
이상의 몇 가지에 대한 이해와 득실은 지난 역사책을 펼쳐 보면 모두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백성입네, 벼슬아치입네 하면서 이렇게 오래도록 버텨온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라는 한쪽에 치우쳐 있고 일은 잗달며 외세의 침입도 드문 까닭에 도적이나 난리가 쉽게 일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재주가 있고 덕망이 높더라도 쓰일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정치가 무너지면 아래에서 백성이 병드는 것은 필연의 이치이다. 비유해 보자면, 시골 동네의 천한 사내가 집안을 엉망으로 다스려서 그 처자와 노비에게 모질고 가혹하게 한다. 그런데도 이웃에서 아무런 간여도 하지 않는다면, 비록 몇 년은 지탱해 나가겠지만 패가망신할 것은 뻔한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는 대부분 조종(祖宗)의 옛 제도가 아니다. 점점 좀먹고 해져서 이 지경이 된 것이니 이것이 어찌 장구한 계책이겠는가. 향거이선(鄕擧里選)의 제도를 비록 회복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 과목(科目) 중에 추천하여 임명하는 제도만은 다시 채용하여야 한다. 삼공(三公)이 삼공을 추천하고, 육경(六卿)이 육경을 추천하며, 대간(臺諫)이 대간을 천거하고, 주군(州郡)이 주군을 천거한다. 무릇 내외(內外)와 존비(尊卑)를 물론하고 식견이 있는 사람은 모두 한 사람씩 추천한다. 모두 모아서 그 수를 헤아려 추천 수가 많은 사람을 등용한다. 또 반드시 연좌법(連坐法)을 거듭 천명한다. 한 사람을 잘못 천거하면 녹봉을 깎는다. 두 사람을 잘못 천거하면 녹봉을 모두 빼앗는다. 세 사람을 잘못 천거하면 자급을 내린다. 네 사람을 잘못 천거하면 삭탈관직한다. 혹 천거한 사람 중에 탐오(貪汚)하거나 간악한 역적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삭탈관직한다.
당시에 비록 잘못 천거하여 처음에는 청렴하였으나 나중에 탐오하여 처음과 끝이 같지 않은 경우에는, 추천한 사람이 우선적으로 규탄하는 것을 허락하여 천거한 잘못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훌륭한 인재를 천거한 사람은 그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녹봉을 더해 주고 작질을 올려 준다. 재상(宰相) 및 근시(近侍)의 엄선(嚴選)에는 지방관으로서의 치적(治績)이 아니면 그 선발의 대상에 감히 들어갈 수 없다. 다만 선발함에 있어서 해당 인물의 인품(人品)에 대해서는 고과의 등급만을 참고한다.
중앙의 모든 관사(官司)가 육조(六曹)에 소속되어 있듯이 지방에는 모든 주군이 감사에게 속해 있다. 육조의 판서와 참판은 각각 소속된 관사의 관원(官員)에 대하여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 9등급으로 나누어 고과(考課)하고 각각 품평(品評)하여 기록하는데, 관품의 높고 낮음은 고려하지 말고 오직 실적의 높고 낮음을 보아서 차례를 매긴다. 예를 들어 고과 대상이 27명이라면 1등부터 3등까지는 상상을 주고, 4등부터 6등까지는 상중(上中)을 준다. 육조의 판서와 참판 및 감사에 대해서는 재상이 고과하여 올리거나 내린다. 이상이 내가 제안하는 평가방식의 대강이다.
근자에 과거를 지나치게 자주 실시하여 문관과 무관이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거기다가 능(陵)과 전(殿)이 점점 늘어나서 음사(蔭仕)도 더욱 넓어졌다. 더욱 많아진 관리들의 녹봉을 백성에게서 걷어야 하니 형세상 날로 궁색해지는 것이다. 옛날에는 으레 음사로 출신한 경우 많이 적체되었는데, 그 이유는 능과 전에는 다만 처음 제수되는 참봉(參奉)만을 두었으며, 육품의 벼슬자리는 몇 자리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맡은 일에 따라서 관직의 명칭을 바꾸자고 건의하여 각 능에 봉사(奉事), 직장(直長)의 이름이 생겨났고, 그러자 누구나 근무 기간만 채우면 승진하게 되었다. 벼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편하게 해 준 것이니, 이는 그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관직을 설치한 본의는 아니다. 사람들이 쉽게 승진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육품 이상의 자리가 더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자못 알지 못한다. 문무과(文武科)의 승품(陞品)도 또한 모두 이와 같다. 이 때문에 수령의 자리는 팔을 휘두르며 머리가 부서지도록 다투며 한번 수령으로 나가기만 하면 열 식구의 살림을 마련하고 한 사람이 벼슬길에 나아가면 구족(九族)이 자신의 신분이 천하다고 부끄럽게 여겼다. 따라서 벼슬자리가 모조리 영화(榮華)와 부귀(富貴)를 바라고 구하는 마당이 되고 말았으니 백성의 생활은 더욱 오그라들었다.
옛날에는 십 년이 되어도 벼슬자리에 쓰이지 못하고 삼대(三代)가 지나도 여전히 같은 벼슬자리를 하는 일도 있었으니 무슨 까닭인가? 진실로 뛰어난 인재가 아니라면 한 자리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마땅히 문무과 및 음사의 육품직은 반드시 임기를 다 채운 뒤에 다른 직으로 옮겨 주는 것을 예외 없이 지켜야 하는 원칙으로 만든다. 그리고 칠품 이하는 반드시 이를 거친 후에야 승진시키며 한 자리에 오래 있는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 오직 뛰어난 재주와 특별한 공적이 있어서 여러 사람의 천거를 받아 임금에게 보고된 사람만을 특별히 왕지(王旨)를 내려서 발탁한다면, 사람을 등용하는 일이 거의 완전하게 될 것이다.
■붕당을 논함〔論朋黨〕
붕당(朋黨)은 투쟁에서 나오고, 투쟁은 이해(利害)에서 나온다. 이해가 절실하면 붕당은 심각해지고 이해가 오래되면 붕당은 강고해지니, 형세상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을 분명히 아는가?
지금 열 명이 똑같이 배가 고프다. 밥은 한 그릇인데 모두 숟가락을 들이대니 밥그릇을 비우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난다. 따져보니 말이 공손치 않은 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싸움이 말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었다. 다음날 또 밥 한 그릇을 열 명이 함께 먹는데, 그릇이 비기도 전에 또 싸움이 일어났다. 따져보니 태도가 불경한 자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싸움이 태도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었다. 다음날 또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따져보니 행동이 난잡한 자가 있었다. 드디어 한 사람이 성을 내자 모든 사람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던 일이었는데 종내는 크게 되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을 부라리면서 싸우니 왜 이렇게 과도하게 되었는가?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팔을 흔들면서 오는 사람도 있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 가운데는 말이 덜 공손하고, 태도가 좀 불경하며, 행동이 난잡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밥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있는 배고픈 열 사람처럼 저렇듯 사납게 싸우지는 않는다. 이를 보면 싸우는 이유가 말이나 태도,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본질을 모르고 현상만을 문제 삼는 사람은, 말로 말미암아 싸움이 났다고 생각하여 공손했으면 이런 싸움이 없었을 것이라고 할 것이고, 태도 때문에 났다고 생각하여 불경하지 않았으면 이런 싸움이 없었을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이해(利害)의 근원이 여전히 그대로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현상에만 대처한다면 수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이루 다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오늘 밥 한 그릇 놓고 싸우던 사람들에게 내일 밥상을 하나씩 차려 주어 배불리 먹여 보자. 그래서 그 싸움의 원인을 제거해 버린다면, 한때 서로 물고 뜯으며 싸웠던 저들은 편안해지면서 싸움은 그치게 되고 더 이상 성을 내지도 않을 것이다. 처첩이 한방에서 싸울 때 반드시 한쪽의 잘못이 있다. 하지만 그 잘못 때문에 저 지경이 되는 것은 아니니, 남편의 사랑이 고르지 않았던 것이다. 형제가 한집에서 싸울 때 반드시 한쪽의 잘못이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잘못 때문에 이 지경이 되는 것은 아니니, 집안의 재물이 넉넉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라의 붕당이라고 하여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 근원을 추적해 보면 불과 어떤 한 사람에 대해서 선악(善惡)을 달리 말하거나, 아니면 어떤 한 가지 일에 대해서 경중(輕重)을 다르게 본 것일 뿐이다. 그저 마음속으로 비방하고 입으로 헐뜯었을 뿐이니, 너무나 하찮은 일이건마는, 안에서는 피가 터지도록 서로 후려갈겨 싸우고 밖에서는 개가 짓듯이 시끄럽게 싸운다. 부월(斧鉞)을 잡고 군대처럼 명령을 내리지도 않는데 사람마다 절대 생각을 바꾸지 않으니, 무엇 때문인가?
지금 조정(朝廷)의 커다란 뜰에다가 백관(百官)을 불러 모아서 좋고 나쁨을 가려보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에 따라서 좋다고도 하고 나쁘다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관직을 양보하고 품계를 사양하여 서로 간에 모함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면, 시비(是非)는 시비대로 가려질 것이고 조정은 조정대로 하나가 되어서 분열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붕(朋)을 나누고 당(黨)을 갈라서 하루도 쉬지 않고 싸우는 지경에까지 가겠는가.
그렇다면 붕당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과거(科擧)를 너무 자주 보아서 뽑은 사람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며, 임금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을 편파적으로 하여 벼슬에 오르고 내리는 것에 원칙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당(唐)나라의 당파(黨派)가 바로 이것이다.
당나라 사람들은 오로지 과거만을 제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과거라는 것은, 나라가 인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가 나라에서 쓰이기를 구하는 것이다. 때문에 들판 가득 열심히 농사짓던 사람들이 모조리 벼슬길로 나아가 출세하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육갑(六甲)이 뭔지도 모르면서 오언(五言)부터 짓는다. 거의 과거에 합격할 정도만 공부를 하는데 그렇다고 합격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요행히 합격하면 공경(公卿)이 되고 대부(大夫)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 밖에도 벼슬에 나아가는 길이 더욱 번잡하게 많아졌다. 그래서 이른바 관원(官員)의 자리는 적고 지원자는 많으니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러자 사람을 자주 바꾸고 번갈아 자리를 주며, 혹은 이 자리를 없애고 저 자리를 만든다. 교체되면 실망하고 내쳐지면 원망한다. 이는 재물을 준다고 해 놓고는 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니 사람들의 욕심만 더욱 돋운다. 따라서 한정된 재물을 가지고 끝없는 사람들의 요구에 대응하니 싸움이 생기는 것은 진실로 당연하다. 또 한 사람이 벼슬자리에 나아가면 그림자처럼 따르고 메아리처럼 답하던 자들이 모두 그 남은 찌꺼기로 배를 채울 만하니 당(黨)이 나뉘는 것도 또한 마땅하다. 이것을 가리켜 과거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역대의 용인(用人)의 득실(得失)을 살펴보면, 어진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사람을 내쫓은 것은 백에 한둘도 없었다. 그러나 간사한 사람을 등용하면 오로지 그 사람도 또한 간사한 사람만 쓰고 군자를 벼슬자리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나라가 어지러웠던 것은 맞지만 당파라고 지목할 만한 것은 없었다. 이는 이익(利益)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싸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나라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의 이당(李黨)과 하나의 우당(牛黨)이 무릇 수없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에 쫓겨나기만 하면 곧바로 다시 정권을 잡으려고 하니, 이른바 머리카락이 타고 이마가 그을린 것을 최고의 공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니 저 시류(時流)를 따르고 이익을 쫓아가는 민정(民情)이 장차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겠는가. 이것을 가리켜 애증이 편벽되다는 것이다.
송(宋)나라의 낙당(洛黨)과 촉당(蜀黨)에 이르러서는 이천(伊川)같은 현인(賢人)도 끝내 당파로 지목을 받고 말았다. 온 세상이 그러는데 이천도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개 송나라는 쓸데없이 너무 많은 사람을 과거로 뽑아서 걸핏하면 당나라의 두 배가 되었다. 따라서 형세상 얼마 안 가서 무너질 상황이었으나 다만 그 조짐만이 없었을 뿐이었다. 소씨(蘇氏)가 이천을 심각하게 미워하게 되자 그제야 붕당의 형적이 드러나게 된 것이나, 사실은 단지 이천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천이 비록 현인이라고 하지만 평일에 그를 믿고 따른 사람은 윤돈(尹焞), 양시(楊時), 사양좌(謝良佐) 등 몇몇에 불과하니, 거의 붕당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옆에서 어지럽게 곁눈질을 하며 눈치를 보던 무리는 모두 진정으로 이천을 좋아하고 소씨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각자가 기염을 토하며 마치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듯이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래서 송나라에 낙당과 촉당이 생긴 것은 천하의 대세(大勢)라고 한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 당시에 두 당파 이외에 또 따로 삭당(朔黨)이 있었다. 저 삭당이라는 것은 정씨(程氏)의 당인가? 아니면 소씨(蘇氏)의 당인가? 누가 옳은 것이며, 누가 틀린 것인가? 비록 이천이 없었더라도 반드시 붕당이 생기고야 말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릇 인사 정책이 마땅함을 잃으면 선비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선비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면 시비가 혼탁해지며, 시비가 혼탁해지면 정쟁(政爭)이 일어나는 것이다. 천하의 선비들로 하여금 들풀처럼 쓸리게 하고 파도처럼 일렁이게 하여 모두가 휩쓸려서 이해(利害)의 구렁텅이로 들어가게 하였으니 너무도 애석한 일이었다. 그러나 송나라는 관직을 자주 교체하거나 권한을 독단하는 근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 폐해가 곧 그치게 되었다. 그래서 당나라처럼 심한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당나라도 또 족히 말할 것이 없다. 어찌 이 세상에 우리나라처럼 백 년 동안 계속하여 당쟁이 더욱 치성해진 경우가 또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중세 이래로 간인(奸人)이 용사(用事)하여 사화(士禍)가 계속되었다. 앞에는 무오년(1498, 연산군4)과 갑자년(1504)의 살육(殺戮)이 있었고, 뒤에는 기묘년(1519, 중종14)과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의 잔학(殘虐)이 있었다. 한때의 충신(忠臣)과 현사(賢士)가 거센 물결 속에서 함께 죽었지만 그래도 붕당이라는 명호(名號)는 없었다. 선조(宣祖) 때부터 하나가 나뉘어 둘이 되고, 둘이 갈라져서 넷이 되었으며, 넷은 또 갈라져서 여덟이 되었다. 당파를 대대로 자손들에게 세습시켜서 당파가 다르면 서로 원수처럼 여기며 죽였다. 그러나 당파가 같으면 함께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고 한 마을에 모여서 같이 살아서 다른 당파와는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따라서 다른 당파의 길흉사에 가기라도 하면 수군거리며 떠들고, 다른 당파와 통혼(通婚)을 하면 무리를 지어 배척하고 공격을 하였다. 심지어는 말씨와 복장까지도 서로 간에 모양을 다르게 하니, 길에서 만나더라도 어떤 당파라는 것을 지목할 수 있었다. 당파가 다르다고 하여 꼭 동네를 달리하고야 말고 풍속을 달리하고야 마니, 아아! 참으로 심하다. 이제 그 까닭을 지난 형적(形迹)을 통해서 연구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인재 등용은 전적으로 과거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뽑는 숫자가 적었다. 선조(宣祖) 대 이후로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극도로 많아졌다. 북조(北朝) 때 최량(崔亮)이 말하기를 “열 명마다 한 자리를 주어도 오히려 줄 자리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오늘날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다. 무릇 저렇기 때문에 대대로 벼슬하던 문벌(門閥)이나 문장으로 날리던 가문(家門)의 자제가 배를 주리며 홍패(紅牌)를 어루만지고 한숨을 쉬며 한탄한다. 이런 자들을 이루 다 셀 수가 없으니, 붕당이 어떻게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릇 이익이 하나인데 사람이 둘이면 곧 두 개의 당이 만들어지고, 이익이 하나인데 사람이 넷이면 곧 네 개의 당이 만들어진다. 이익은 바뀌지 않는데 사람은 더욱 늘어나니, 더욱 갈라지고 나눠져서 십붕(十朋) 팔당(八黨)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설사 모든 붕당을 모조리 내치고 오직 한 당을 유일하게 만들어도, 저들이 또한 쇠를 녹여 칼을 만들지 않는데도 반드시 어디선가 날카로운 칼 하나가 와서 셋으로 나누고 다섯으로 가를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바야흐로 어떤 당이 정권을 장악하면, 과거를 크게 열어 사정(私情)에 따라 난잡하게 뽑는데 이것을 ‘식당(植黨 당을 부식(扶植)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현명한지 아니면 우매한지는 불문하고 다투어 청요직(淸要職)에 집어넣는데 이것을 ‘장세(張勢 세력을 펼친다는 뜻)’라고 한다. 의정(議政)의 자리는 셋인데 대광(大匡)의 품계는 여섯이며, 판서(判書)의 자리는 여섯인데 자헌(資憲)의 품계는 열이다. 심지어 초헌(軺軒)을 타고 비단옷을 입는 자리나 엄격하게 선발하는 대각(臺閣)의 자리는, 모두 자리에 비하여 사람의 숫자가 배가 되지 않는 경우가 없다. 그러니 반대당의 공격이 겨우 진정이 되자 안에서는 내분(內紛)의 싹이 트는 것이다. 또 하물며 이런 붕당이 있고부터는 수없이 엎치락뒤치락하여 아무리 총명한 사람도 그가 본 것을 모조리 기억할 수가 없다. 중정(中正)에 서서 공정하고 바르게 하는 자를 용렬(庸劣)하다고 말하고, 붕당을 따라 죽어도 흔들림이 없는 자를 명절(名節)이라 한다. 자파(自派)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예뻐하며 타파(他派)면 연못 속에 밀어 넣듯 미워하여 영욕(榮辱)이 일순간에 바뀌니 사람이 어떻게 붕당을 지어 싸우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선비들의 과거를 줄여서 난잡하게 나오는 것을 막고, 관리들의 고과(考課)를 엄격히 하여 무능한 자를 도태시킨다. 그런 뒤에 관직(官職)을 아껴서 많이 주지 말고, 승진(陞進)을 신중히 하여 가볍게 올리지 말며, 자리와 인재가 알맞게 되도록 힘써서 자리를 자주 옮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익이 나오는 구멍을 막아서 백성들의 심지(心志)를 안정시킨다. 이와 같을 뿐이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비록 죽인다고 하더라도 막지 못할 것이다.
■간관을 논함〔論諫官〕
간관(諫官)을 설치한 것은 한(漢)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이에 언로(言路)가 넓어지지 않게 되었다. 이미 담당한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남의 직무를 침범한다는 혐의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무릇 백관(百官)은 모두 자신의 일을 가지고 있고, 그 일에 온당치 않은 점이 있으면 누구든지 간쟁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하러 간쟁하는 관리를 따로 둘 필요가 있겠는가.
풍문(風聞)을 가지고 논핵(論劾)하는 것은 무조(武瞾)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에 참소와 폭로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의 죄과는 그 형적(形迹)을 살펴서 다스리면 된다. 규명할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실상을 살펴야 한다. 만약 길거리에 흘러 다니는 말로 간쟁을 한다면 말하는 사람은 용이하지만 상대는 독(毒)을 받게 되니 어떻게 너끈히 사람의 마음을 승복시키겠는가.
대간(臺諫)의 피혐(避嫌)은 우리나라 중종(中宗) 때 시작되었는데, 이에 으레 피혐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었다. 간관(諫官)은 임금의 이목(耳目)과 같다. 모든 일에는 이익과 해악이 있으니 시종일관 옳고 좋은 것으로 임금에게 간쟁하는 것이 마땅한데 작은 연고와 사소한 일을 가지고 한갓 꺼리고 피하면 되겠는가.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이미 간관을 세웠다면 모름지기 그 책임을 다하게 하여야 한다. 마땅히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려 시행한다. 전후로 대각(臺閣)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그 이름을 나란히 기록하고 합하여 책으로 엮는다. 한 해가 끝이 나면 대신(大臣)과 중신(重臣)은 합좌하여 상의한다. 이름의 아래에 각각 봉직한 기간과 논핵한 사실을 주(註)를 달듯 기록한다. 하나하나 따져서 누락되지 않도록 한다. 한 부는 대각에 비치하고 한 부는 의정부(議政府)에 비치하며 한 부는 궁중에 올린다. 해마다 추가하여 기록하고 임금과 재상이 함께 모여 고과(考課)한다.
의논하여 평정(評定)한 내용이, 참으로 임금을 도와 나쁜 무리를 물리치고 선류(善類)를 드러냈으며 꼿꼿하게 간쟁하여 볼만한 것이 있는 자는 포상을 한다. 만약 혹여라도 남의 뒤나 묵묵히 따르고 권력에 아첨하며 사사로이 편당(偏黨)하여 일을 망쳤으면 물리쳐 내쫓는다. 상을 줄 때는 반드시 가장 우수한 한 사람을 뽑아서 품계를 올려서 영예롭게 해 준다. 내쫓을 때는 잘못이 많은 자는 5년을, 가벼운 자는 3년을 폐고(廢錮)시켜서 비록 사면령이 내려도 거기에 포함되지 못하게 한다. 이러면 사람들이 반드시 다투어 스스로 발분할 것이다.
만약 지방의 주현(州縣)이나 민간의 동리(洞里)에서 간교(奸巧)하고 외람(猥濫)되어 법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대간은 국법과 기강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어찌 그대로 두고 규탄하지 않겠는가. 규탄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또 애매하게 두고 변백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논박한 다음에는 그 일의 허실을 반드시 위의 규례와 같이 이름 아래에 기록한다면 대간은 반드시 사실에 근거할 것이며 단지 풍문에 의거하여 논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일이 생기는 것을 싫어하여 숨기고 회피하는 것이 본래 고질적인 습속으로서, 정말로 관직을 사양하고 녹봉을 양보하여 피혐했다는 일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일단 사단(事端)이 나면 죽을 때까지 뒤로 물러나면서 피혐이라고 핑계 대고 아울러 병이 생겼다고 사양하는 글을 올린다. 종이에 가득하게 자신의 병증을 기록하는데 거리낌 없이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을 늘어놓는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다. 대각의 자리는 청선(淸選)이어서 관함(官銜)은 고상(高尙)하지만 원래부터 제 몸을 살찌울 만한 실속은 없으며, 아침에 체직되어도 저녁에는 제수되어 벼슬길에 막힘이 없는 까닭에 감히 이처럼 스스로 편할 계책을 쓰는 것이다. 심한 자는 패초(牌招)가 문밖에 이르렀는데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으며 심드렁하게 여기니 기강이 어찌 무너지지 않겠는가.
피혐의 습속은 진실로 아프게 끊어 버리는 것이 합당하니, 만약 잘못인 줄 알면서도 피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의정부와 승정원에서 그 잘못을 거론하여 경책(警責)을 한다. 경책은 지금의 추고(推考)하는 규례대로 하는데 그 관직은 그대로 둔다. 다만 사직(辭職)을 용납해 줄 수밖에 없을 때 비로소 파직(罷職)한다. 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올리는 것도 불가하니, 패초를 어기고 사진(仕進)하지 않는 자와 함께, 반드시 자급(資級)을 삭탈한다. 다만 실제로 병이 있는 자는 재상(宰相)이 주문(奏聞)하고 그 나머지는 반드시 일 년을 채운 후에 회복시켜 준다면 그 이후로는 장차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언로(言路)가 막히는 것은 오로지 승정원 때문이다. 지금의 제도에서는 초야의 선비도 상소(上疏)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시론(時論)에 위배되면 곧 승정원에서는 막고 끊어 버린다. 하물며 비열하게 벼슬이나 바라며 상소를 하는 무리들은 도무지 쓸 만한 말이 없다. 식견은 있으나 자중하는 사람은 벼슬이나 바라고 상소했다는 혐의를 받을까 봐, 비록 이해가 크게 갈리는 곳이 있더라도 또한 부끄럽게 여기며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는다. 간간히 의견을 내어 상소하는 사람도 있지만, 승정원에서는 그 상소를 다만 해당 관서에 보낼 뿐이며, 상소를 받은 해당 관서는 달이 지나고 해를 넘겨도 회계(回啓)하기를 기꺼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상소는 부질없이 관부(官簿)의 서류 더미 속에 들어가고 마니 누가 다시 그것을 살피겠는가.
당나라 제도에 등과기(登科記)가 있는데, 글을 올려서 관직을 받은 자를 진사(進士)로 급제한 것과 동등하게 하였으니, 진언(進言)을 하도록 인도한 것이 이와 같았다. 진언하는 자가 있으면 임금이 재상과 함께 그 진언의 득실에 대하여 상의한다. 진실로 다른 이가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으면 특별히 관직을 주어 등용하는데, 아낌없이 한다면 궁벽한 시골에 사는 선비들이 또한 기꺼이 나와서 논박을 할 것이다. 비록 남의 손을 빌렸다고 하지만, 그러나 조정에서 한 가지 좋은 말을 얻어서 한 가지 좋은 정사를 베푼다면 그 혜택이 반드시 백성에게 미치며 나라도 또한 그 힘을 입게 된다. 그러니 당나라 상하(常何) 같은 사람에게 도리어 큰 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하물며 관직 하나를 써서 한 나라의 좋은 말을 모두 들을 수 있는데 그만두어서야 되겠는가. 비유하면 사람이 죽을병으로 앓고 있는데 뛰어난 의사가 남을 시켜서 처방을 준 것과 같은 것이니, 그 처방이 병에 맞아서 효험을 보았다면 감사하고 기쁜 마음에 서로 보답해 주는 것이 마땅히 어떠해야 하겠는가? 용렬한 의사의 잘못된 처방을 분주히 찾아다니며 후한 상을 내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어사를 논함〔論御史〕
수령의 선악과 청렴을 살피는 일은 오로지 관찰사에게 맡긴다. 관찰사에게 오히려 혹 잘못이 있으면 다시 어사(御史)를 시켜서 암행하여 살피게 한다. 수령 중에 잔학(殘虐)하여 백성에게 독을 끼친 자가 있으면 어사가 반드시 탄핵(彈劾)한다. 그래도 어사가 혹 미덥지 못하면 다시 관찰사에게 맡겨서 철저히 조사하도록 하는데, 관찰사는 옆 고을의 수령에게 맡긴다. 하지만 옆 고을의 수령이 남의 악행을 들춰내서 원망을 받는 일을 기꺼이 하겠는가. 그리고 옆 고을 수령이 묻는 사람은 향청(鄕廳)의 임원이나 아전들에 불과하다. 향청의 임원이나 아전들이 감히 자기 수령의 악행을 드러내고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또 관찰사도 또 그렇다. 그 역시 어사를 위하여 무겁게 추궁하여 실상을 밝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사도 마찬가지인데, 이미 형적을 잡아서 파직(罷職)시키기를 아뢰었으니 너무 심하게 논핵하여 남의 평생을 폐고(廢錮)시킬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요즘 세상에서는 장오죄(贓汚罪)로 처벌받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어찌 사람들이 모두 청렴결백해졌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는가. 있는데도 또한 능히 탄핵하지 못하는 것이니, 있는데도 탄핵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백성을 어떤 지경에 빠트리겠다는 것인가. 아아! 너무도 슬픈 일이다.
무릇 어사는 임금의 눈과 귀이니, 명을 받고 장오(贓汚)한 관리를 규탄한다. 결국 장오하지 않다면 청렴한 것이니, 단지 사람들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임금도 기망(欺罔)하는 것이다. 그 죄 또한 사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에 장오죄가 없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어사가 한갓 너무 심하게 하지 않겠다는 것만 알 뿐, 자기 자신은 사람들을 속이고 임금을 기망하는 죄에 빠지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조문을 지어 법으로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
어사가 실상도 없이 탄핵한 경우에는 사안의 경중에 따라서 자급과 녹봉을 빼앗아 처벌하는 것을 보인다면, 탄핵할 때에 반드시 향청의 임원들에게 캐어 볼 것이고, 아전들에게도 캐어 보아서 사실에 근거하여 문서를 완성할 것이다. 모든 것이 자세하고 모든 것이 완벽하여 조금도 누락된 것이 없을 것이니, 그런 다음에야 간악(奸惡)하고 사특(邪慝)한 실정(實情)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장오한 수령에 대해서는 얼굴에 자자(刺字)하고 재산을 적몰하여 조금도 용서해 주지 말아서 모든 관료들을 경책(警責)한다. 이렇게 해야지만 비로소 장오한 수령이 조금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침에 탄핵했는데 저녁에 깨끗해지며, 처벌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도로 벼슬을 준다. 편안하게 서로 만나서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으니 아이들의 장난보다도 심한 일이다.
※장오죄(贓汚罪) : 관원이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는 죄를 말하는데, 일단 장오죄를 받아 장오인 녹안(贓汚人錄案)에 기록되면, 본인은 물론 4대(代)에 이르기까지 의정부(議政府)ㆍ육조ㆍ한성부ㆍ사헌부ㆍ개성부ㆍ승정원ㆍ장례원ㆍ사간원ㆍ경연(經筵)ㆍ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ㆍ춘추관 지제교(春秋館知製敎)ㆍ종부시(宗簿寺)ㆍ관찰사ㆍ도사(都事)ㆍ수령에 제수될 수 없을 뿐 아니라, 현손(玄孫) 이하 사위에게까지도 제약이 있어 환로(宦路)에 현달할 수 없다.
■뇌유를 논함〔論賂遺〕
뇌유(賂遺)는 우리나라의 오래된 병증이다. 나라가 피폐(疲弊)해지고 백성이 잔약(孱弱)해지는 것이 오로지 이것 때문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금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가르치고 있다. 우선 한 가지 조목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중국에 조빙하러 가는 사신(使臣)과 종자(從者)들은 열읍(列邑)에 편지를 보내어 여비를 요구하는데 정해진 액수가 없다. 그러면 음직(蔭職)이나 무변(武弁) 출신의 수령들은 서로 질세라 재물을 실어 나른다. 또 나라에 연회와 같은 커다란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열읍에서 거두어들인다. 그러면 읍(邑)에서는 동네와 마을에 분담시켜서 거두어들이는데 매우 가혹하게 독촉한다. 이렇게 하면서 오히려 남들이 뇌물 주는 것을 금한다는 것인가.
열읍에서는 명절(名節)에 반드시 선물을 보낸다. 그런데 자리나 연연하는 무식한 무리들은 반드시 이것을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기회로 삼는다. 전임자가 이미 많이 실어 보냈으니 후임자는 다투듯이 더욱 많이 보낸다. 더욱 많이 보낸 것을 유능하다 하고 그렇지 않으면 중상모략(中傷謀略)을 한다. 이 재물이, 국가에 비축하는 것을 감해 주고 그 대신에 받은 것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구해온 것인가? 받은 사람이야 편안하게 여기겠지만 백성들은 점점 궁핍하게 되는 것이다.
무릇 저렇기 때문에 조정에서 예사롭게 생각하니 상하(上下)가 이로 인하여 주고받는 것이 풍조를 이루었다. 물건 하나 바치는 것이 받는 관가(官家)에서 보자면 작은 것이지만, 돌고 돌아 가격이 폭등하여 도처에서 백성들이 고갈되니 이런 일을 어찌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법이라는 것은 조정에서부터 지켜야 하는 것이다. 연회나 사신의 비용은 반드시 국가의 경비에서 마련해 주고 백성에게는 부세(賦稅) 이외에는 더 걷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열읍에서 바치는 선물은 곧 옛날의 이른바 의장(義贓)이라고 하는 것인데, 비록 말채찍이나 신발과 같은 사소한 물건이라도 모두 막는 것이 마땅하다.
지난번에 물품의 수량을 정하자는 건의가 있었다. 그러나 사사로이 주고 사사로이 받는데 누가 그것을 살필 수가 있겠는가. 또 만약 오래된 폐단을 갑자기 금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게 명하여 관할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무릇 주군(州郡)에서 조정의 신하에게 선물을 보낼 때는 반드시 물건의 품목을 적은 첩자(帖子)를 먼저 사헌부에 아뢰어 도장을 받아서 증거로 삼고 그런 뒤에 받는 것을 허락한다. 법도에 지나치도록 많이 보내는 경우에는 대관(臺官)이 그 사실을 들어서 논핵한다. 이렇게 하면 오직 비루(鄙陋)하고 저열(低劣)한 종자(種子) 말고는 반드시 감히 벌을 무릅쓰고 주고받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백성을 돕는 한 가지 단서(端緖)이다.
※뇌유(賂遺) : 뇌유란 지방관 등 하급관리가 중앙의 상급 관청이나 관리에게 보내는 선물의 통칭으로서, 글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뇌물적 성격이 있는 것이다.
■토지 제도를 논함〔論田制〕
왕도정치(王道政治)가 토지를 나누어 주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면 모두 구차한 것이다. 이것을 누군들 모르겠는가마는 그러나 끝내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부자들이 가진 땅을 갑자기 빼앗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법이 시행되면 기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지만 많은 사람은 빈천(貧賤)하고, 땅을 많이 가진 자는 곧 부귀한 사람들이니 법도 부귀한 사람들에게는 어찌할 수가 없다.
내 생각에, 비록 지금의 제도를 혁파하지 않더라도 만약 한전법(限田法)을 시행한다면 또한 조금씩 부(富)가 균등해질 것이다.
한(限)이란 무엇인가? 땅이 없는 자에게 땅을 사라고 요구하지 않으며, 땅이 많은 자에게 땅을 팔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각각 1경(頃)의 농지를 영구히 경작해서 먹고사는 땅으로 삼는다. 가난한 자는 1경의 땅을 가지고 사는 것만 있고 파는 것은 없다. 그렇게 하면 가난해도 땅을 팔 수가 없어서 부자들이 토지를 겸병(兼倂)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부자들이 땅을 나누고 없애서 조금씩 토지의 소유가 균등해질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내가 별도로 논한 것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더 이상 논하지 않는다.
결부법(結負法)이 경묘법(頃畝法)보다 못한 것은 본래 그런 것이다. 그러나 경묘법을 써도 토지에는 반드시 비옥(肥沃)하고 척박(瘠薄)한 등급이 있으므로, 휴경(休耕)하지 않는 땅은 한 집에 100묘를 주었고, 1년을 휴경하는 땅은 한 집에 200묘를 주었으며, 2년을 휴경하는 땅은 한 집에 300묘를 주었으니, 이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
관부(官府)에서 받는 부세(賦稅)도 역시 등급에 따라서 마땅히 더하거나 덜어야 하니,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균등해진다. 지금의 법도 또한 토지의 크고 작음을 헤아린다. 그런 뒤에 비옥한 땅은 부세를 많이 매기고 척박한 곳에는 부세를 적게 매겨서 결부(結負)를 결정한다. 만약 모든 농지에 대하여 일제히 조사하여 역시 등급에 따라서 으레 줄여 준다면 안 될 것이 없을 것이다.
이미 정전법(井田法)은 시행하지 않았으니 말할 것이 없다. 그렇다고 결부의 제도에 또한 어찌 조세의 탈루(脫漏)를 막을 만한 좋은 법이 없겠는가. 지금 제도를 정하되, 그 땅의 넓고 좁음에 따라서 정전법과 동일하게 경(頃)을 정한다. 토지의 모양이나 형편에 따라서 혹 4경으로 하거나 혹 9경으로 한다. 또 만약 땅의 크기가 부족하다면 혹 1경이나 2경도 되고, 아니면 7경이나 8경도 된다. 땅의 모양이 길거나 아니면 넓거나 할 것 없이 그 크기에는 구애받지 않는다. 다만 1경의 모양이 반드시 정방형이어야 되며, 둥글거나 비스듬한 것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네 모서리에 흙을 쌓거나 돌을 모아서 표시를 한다. 표시를 따라서 먹줄을 놓아 경계를 정한다. 그런 뒤에 보척(步尺)에 의거하여 측량하여 그 대소(大小)를 정한다. 그 가운데 도랑, 큰길, 자갈밭처럼 지어 먹을 수 없는 땅이 있으면, 지금의 전형법(田形法)에 의거하여 제외시킨다. 또 그 경계를 살펴서 경작하지 않는 면적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그 분수(分數)를 제한다.
그런 뒤에 땅이 비옥한지 척박한지를 따지지 말고 사방의 표지(標識)내에 있는 땅 주인들을 모아서 그들 땅의 크고 작음을 헤아려서 보척으로 나누어 주어서, 땅 주인들이 자기 땅에 해당하는 만큼을 반드시 받게 한다. 만약 땅은 작은데 보척은 많다고 원망하는 자가 있으면 관부에 호소하는 것을 허락하며 관부에서는 해당 지역에 가서 억울한 점을 풀어 준다. 한 주인의 땅인데 표지의 경계에 걸쳐 있는 경우에는 각각 계산한다. 이렇게 한 뒤에 비옥하고 척박한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서 그 결부(結負)를 올리고 낮춘다. 오직 매우 심하게 삐뚤어져 남은 쪼가리 땅으로서 표지의 경계 내에 포함시켜서는 안 되는 것만을 또한 마땅히 별도로 계산하는데, 비록 10보, 5보의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네 귀퉁이에 표지를 하여 지어 먹지 못하는 땅으로 계산하여 제외한다. 이렇게 하면 탈루는 걱정할 바가 아니다. 대개 결부가 비록 경무(頃畝)의 편함에는 못 미치지만 정말로 제도를 시행할 만한 적임자가 있다면 또한 어찌 왕도정치를 펼칠 수 없겠는가. 단지 능히 똑같이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 흠일 뿐이다.
■균전에 대하여 논함〔論均田〕
정전제(井田制)의 회복은 불가하니 정치가 끝내 옛날만 같지 못하다. 장자(張子)는 말했다. “이 법이 시행된다면 기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마도 그렇지가 않을 것이다. 기뻐하는 사람이 백 명이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라도, 하나의 힘이 백 명의 입을 충분히 재갈 물릴 수 있으니, 어떻게 시행할 수 있겠는가.
부자는 농토가 두둑이 이어질 정도로 수없이 많아도 가난한 사람은 송곳 세울 만한 땅도 없다. 그래서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진다. 내가 백성들이 파산하는 것을 보니, 혹은 항심(恒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남에게 빚을 내다 쓰고는 그 이자가 불어서 파산하기도 한다. 무릇 관부(官府)의 착취와 토호(土豪)의 횡포는 모두 백성의 재산을 파탄내기에 충분하다. 파산할 만한 실마리가 아홉이면 유지할 만한 형편은 하나이니, 이런 상황에서도 파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것은 요행히 모면한 것이다.
집은 없어져도 농토가 남아 있으면 오히려 혹 다시 일어나기도 하겠지만, 파산하면 결국엔 반드시 농토가 없어지니, 도주(陶朱)의 지혜가 아니라면 어느 겨를에 수족을 놀리겠는가. 농토를 파는 데는 까닭이 있다. 처음에는 혹 비단옷 입고 고기반찬 먹고 싶어서 팔지만, 마침내는 죽으로도 끼니를 잇지 못하여 파는 것이다. 혹은 주인이 노비를 겁박하여 뺏기도 하고, 혹은 토호가 세민(細民)을 윽박질러 요구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농토는 없어지고 백성은 나날이 곤궁해진다. 그래서 나라를 세운 이들은 모두 이 점을 걱정하였다.
우리 동국은 고려의 원종(元宗)과 우리 조선의 태조대왕(太祖大王)께서 규례를 정하여 수전법(受田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농토가 많은 사람은 반드시 세력이 강하니, 어찌 공손히 자기 농토 덜어가는 것을 기다리겠는가. 역시 끝내 백성들은 그 혜택을 입지 못할 것이다.
한(漢)나라 말기에 한민명전법(限民名田法)이 있었는데 정전법(井田法)에 비하여 시행하기에 조금 쉬운 듯하였지만 역시 권세 있는 귀족들에게 막혀서 시행되지 못하였다. 소순(蘇洵)은, 기왕에 가진 농지를 줄이는 것은 요구하지 않는 대신에 더 이상의 농토를 많이 점유하는 것은 금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농토가 이미 많아서 제한을 넘긴 것은 덜어 내지도 못하면서, 단지 재산을 모아서 농토를 많이 사는 것에 대해서만 금지한다면 막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깊이 연구하여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크게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만약에 내 뜻과 같이 시행하여 상당 기간 지속될 수 있다면 혹 조그만 효과는 볼 것이다.
국가에서는 마땅히 한 집의 재산을 조사하는데, 농지(農地)의 소유를 얼마까지 제한하여, 그것으로 한 가구(家口)의 영업전(永業田)으로 삼는다. 당나라의 조제(租制)와 같이하여 영업전보다 많은 경우에 줄이거나 빼앗지 않고, 영업전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에도 더 주지 않는다. 값을 지불하고 사려는 사람은 비록 천 결 백 결이라도 모두 허용하고 농지가 많아서 팔려는 사람은 다만 영업전을 제하고 남은 농지만 파는 것을 허락한다. 많아도 팔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하지 않으며, 모자라는데 살 능력이 없는 사람도 재촉하지 않는다. 오직 영업전의 한도(限度) 내에서 팔거나 사는 자가 있는 곳을 철저히 조사하여 산 사람은 남의 영업전을 빼앗은 죄로 다스리고 판 사람은 몰래 판 죄로 다스린다. 산 사람은 값을 논하지 않고 돌려주며, 또한 농지의 주인은 스스로 관부에 가서 알리고 죄를 면하도록 하며 자신의 농지를 추산하여 되돌려 받는다.
무릇 농지를 사고파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관부에 알린 뒤에 거래가 성사되도록 하며, 관부에서도 역시 토지문서를 상고하여 확인한 뒤에 문서를 작성하여 발급해 준다. 도장이 없는 것은 송사(訟事)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비록 그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두고두고 그 덕을 보게 될 것이다. 어째서인가?
내가 한 마을을 살펴보니, 지난해에 몇 집이 파산을 했고 올해에 또 몇 집이 파산을 했는데, 파산하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농지를 많이 가졌던 사람이 나중에 적어지게 되고, 처음부터 농지가 적었던 사람은 농지를 모두 잃게 된다. 이미 농지가 없으니 어떻게 파산하지 않겠는가. 백성의 재산을 통제하는 수령이 비록 능히 여기서 빼앗아서 저기에 줄 수는 없겠지만, 가난한 백성이 만약 지금 가지고 있는 남은 땅이나마 항상 지켜서 농사지어 먹고사는 것으로 삼는다면 어찌 조그만 도움이 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무릇 농지를 파는 사람은 반드시 가난한 백성이다. 지금 교활한 아전과 부호(富豪)한 장사치가 천만금의 돈을 가졌으니 어느 날 아침 수만의 가난한 백성들의 땅을 사들여서 임금처럼 떠받들려 호강을 누린다면, 파산한 백성이 단지 눈앞에 가득한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니 그 폐해가 끝이 없을 것이다. 가난한 백성으로 하여금 농지를 팔지 못하게 하면 파는 자가 없어져서 농지를 많이 사 모으는 것도 줄어들 것이다. 가난한 백성 중에 혹시 지혜와 능력이 땅을 살 정도가 되면 그들은 한두 뼘이라도 살 것이고, 그렇게 되면 땅이 들어오는 것은 있으나 나가는 것은 없으니 쉽게 가산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부유한 백성이 가진 농지가 비록 많지만 혹 아들이 많아서 나누어 가지기도 하고, 혹은 불초한 아들을 낳아서 파산하기도 할 터이니 몇 세대를 지나지 않아서 평민들과 같아질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점점 더 균전(均田)의 제도가 완성되어 갈 것이다.
가난한 가구가 눈앞에 닥친 파산의 근심을 벗어난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진실로 기뻐할 것이다. 부유한 가구는 비록 가산을 탕진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영업전은 그대로 있으니 부자로서 후손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역시 장차 기뻐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행은 쉽고 효과는 반드시 있을 것이니 이것이 내 주장의 대강이다.
어떤 사람은 의심하여 말한다.
“장례나 혼인과 같은 비용 때문에 농지를 팔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팔 수 있는 땅이 하나도 없다면 또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정전법이 시행되던 삼대(三代)의 백성들도 그 땅을 팔고 살 수 없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가. 이것으로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제도의 상세한 규정에 대해서는 이것을 시행할 자의 몫이다.
※균전에 대하여 논함 : 균전(均田)에 대하여 논한 이 글은 저자의 농지개혁에 대한 몇 가지 글 중에서 중심을 이룬다. 저자의 토지에 대한 의견은 몇 가지 핵심적인 이론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한전(限田)을 통한 균전(均田)의 달성이다. 즉 토지소유상한제(土地所有上限制)라고 할 수 있는 한전은, 현실적으로 부자들의 사적 소유를 강제로 침탈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인데, 저자는 이를 장기간에 걸쳐서 완만하게 이루어지도록 이른바 저강도(低强度) 정책을 사용하자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부호에게 농지를 더 이상 못 사게 함으로써 빈농의 농지 획득 기회를 늘리며, 부농의 상속을 통한 농지의 재분배도 균전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매우 온건한 주장인 셈이다. 둘째는 국가 차원에서 토지 총조사 사업의 실시를 통한 토지계산 단위의 변경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결부법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면적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고 소출을 기준으로 하여 면적을 정한 것이다. 따라서 면적이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은루결(隱漏結)이 발생하는 등 많은 문제가 지적되어 왔다. 저자는 이에 대해 국가적 차원에서 토지에 대한 총조사를 하되, 경묘법을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기준을 면적으로 바꾸자는 것만이 아니며, 일종의 정전제(井田制) 도입을 전제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확한 십일조의 구현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자는 뜻이다. 셋째는 완벽한 십일조의 실시이다. 즉 위의 두 가지 조건을 전제로 한 십일조의 구현은 국가의 세수원을 튼실하게 하며, 세수의 부족으로 인한 각종 준조세, 또 준조세에 따른 각종 부정행위를 방지함으로써 농민의 안정을 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수리에 대하여 논함〔論水利〕
반계(磻溪) 유 선생(柳先生 1622-1673)은,
“백성들이 의지하는 것은 수리(水利)만 한 것이 없다.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 고부(古阜)의 눌제(訥堤), 익산(益山)과 전주(全州)의 사이에 있는 황등제(黃登堤)는 전조(前朝)에서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서 완성한 것들이다. 지금 모두 무너져 버렸지만, 만약 이 세 제언(堤堰)을 수리하면 노령(蘆嶺) 위로는 흉년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내가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였지만 그 이익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러나 무릇 크고 작은 제언들이 무너지고 터져서 수리하지 않은 것이 곳곳에 널려 있다. 지금 사람들이 조그만 노력을 꺼려해서 큰 이익에 어두운 것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탄식이 그치지 않는다.
대개 수리에는 세 가지가 있다. 둑을 쌓아서 물을 담아 두는 것이 첫 번째이다. 도랑을 뚫어서 물을 끌어오는 것이 두 번째이다. 기계를 만들어서 물을 퍼 올리는 것이 세 번째이다. 물을 담아 두는 것에 대해서는 반계가 자세히 말하였다. 도랑을 뚫어서 물을 끌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역시 나라에서 이해를 하지 못한다. 왕왕 사람들이 사재를 내어서 대략 도랑둑과 수문을 만들기도 하지만 재산을 탕진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열에 여덟아홉은 된다. 물을 퍼 올리는 기계 같은 것에는 어리석은 백성의 지혜가 이에 미치지 못하니 가뭄이 들면 재앙으로 여기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대개 논에 물을 대어서 농사를 짓는 것은 옛날의 방법이 아니다. 정전(井田)에 있는 구혁(溝洫)은 물을 모아 두거나 터서 가뭄이나 홍수에 대비하는 것에 불과하며, 당시에 심었던 벼는 또한 밭에다 파종하는 것이었다. 지금 한 구역의 땅을 논으로 할 수도 있고 밭으로 할 수도 있다. 대략 벼 한 말을 파종할 수 있는 땅에는 봄보리〔春麥〕 두 말과 여름 콩〔夏菽〕 한 말을 파종할 수 있고, 그리고 메밀과 차조〔蕎蘇〕 등 잡곡을 사이사이에 파종한다. 거기서 나오는 곡식의 수량이 벼를 파종하는 것에 비하여 반드시 많지만 공력은 반밖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논곡식은 귀하고 밭곡식은 천하다. 귀한 것은 적은 수량으로도 도리어 많은 수량의 천한 것보다 나으므로 사람들이 반드시 밭을 논으로 바꾸며, 값도 또한 배나 받고 판다.
대강을 말하자면, 곡식이란 사람들이 하루에 두 끼를 먹는데 한 번 먹을 때 한 그릇 말고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좋은 쌀도 그런 것이며, 천한 보리도 또한 그런 것이다. 빈궁한 백성에게는 배를 채우는 것이 중요한 일이니 귀하고 좋은 것을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을 놓고 말하자면 귀하고 좋은 곡식을 빈천한 사람보다는 많이 먹겠지만, 한 나라를 놓고 보면 나라 가운데 곡식은 반드시 줄게 되어서 백성 중에는 굶주리는 자도 있게 될 것이다. 거기다 가뭄이라도 들어 버리면 논은 더욱 피해가 많아서 혹 아무 것도 수확하지 못하기도 하니, 이것이 논의 폐해이다.
오직 땅이 질고 습하여 밭으로 할 수 없는 경우가 되어야 비로소 수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못 하고, 넓고 평평한 땅으로서 진실로 물을 끌어와서 댈 만한 곳이라면 모조리 논농사를 짓는다. 그러나 이것을 갑자기 바꾸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수리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마땅히 해당 관사에 신칙하여 중신(重臣)이 담당하도록 한다. 제방을 수축하고 도랑을 뚫는데 백성들에게 노역시키는 것을 꺼리지 말아서 한 개인이 그 이익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 백성을 돕고 재물을 넉넉히 하는 것이 어찌 적겠는가. 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빠른 물길은 제방으로 막기 어렵다고 핑계를 댈 것이다. 그러나 중국처럼 커다란 강과 하천도 사방으로 통해 있고 도랑과 개천들이 종횡으로 뚫려 있는데 이것은 물의 힘이 약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다만 물을 퍼 올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고금에 전하는 것이 여러 가지이지만 서양의 용미거(龍尾車)만 한 것은 없다. 널리 이용할 만하니, 만약 능히 이것을 운용할 수 있다면 그 이익이 제언에 맞먹을 것이니 반드시 그 기계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
▣성호전집 제46권
■부세에 대하여 논함〔論賦稅〕
부세(賦稅)가 10분의 1인 것은 고금(古今)에 통용되는 법이다. 이보다 많으면 걸(桀)이고 적으면 또한 맥(貊)이다. 비록 적다고 하지만 또한 국용(國用)에 충분하였으며, 전조(田租) 이외에도 민역(民役)이 매우 많았다. 따라서 전조는 반드시 10분의 1의 숫자를 지키게 하여 번다한 잡세(雜稅)의 소용(所用)에 충당하게 하면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볼 것이다. 지금은 오직 전세(田稅)에 대해서만 감세(減稅)를 하고 있다. 따라서 농지(農地)가 없는 사람은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매우 많은 전답을 소유하여 이루 말할 수 없이 사치한 집안들의 소득만 더욱 많아지니, 백성들에게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차라리 마땅히 바쳐야 할 전조(田租)는 모두 바치게 하고 백성에게 절박한 요역(徭役)과 공납(貢納)을 면제하여 준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지금의 결부법(結負法)은 대개 10분의 1의 조세(租稅)에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역(役)때문에 백성들이 곤궁하니 매우 커다란 실정(失政)이다. 반계(磻溪)가,
“1경(頃)은 벼 40두(斗)를 파종할 수 있으며 척박(瘠薄)한 토지라도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1두의 땅에서 또한 20두의 소출이 나온다. 구등(九等)으로 전세를 부과함에 있어서 상년(上年)에는 1경에 미(米) 20두, 중년(中年)에 16두, 하년(下年)에 12두를 부과였으니 대략 20분의 1을 거둔 것이다.”
하였다. 이 같이 하면 국가의 경비가 충분하니 더 이상 민력(民力)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옛날에 서인(庶人)으로서 관직에 있는 사람은 그 녹봉이 하사(下士)와 동일했으며, 무릇 국가의 녹봉을 먹는 집은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지 않았다. 이렇게 했으므로 관리들에게 청렴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서리(胥吏)들은 녹봉이 없거나 혹은 있어도 입에 풀칠조차 못 하니 어떻게 위로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 자식을 양육하기를 바라겠는가. 비록 그래도 조금 괜찮다는 내외의 관료(官僚)까지도 대개가 이와 같으니 만약 분수가 아닌 것을 점탈(占奪)하지 않는다면 살아나갈 방도가 없으며, 그 형세가 점점 법을 어기고 사욕(私慾)을 채워서 백성들이 그 해악을 입는 지경으로 들어가니 이는 바꾸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반계가 말하기를 “7품 이하는 6경(頃)을 주고 점점 늘려나가서 정2품에게는 12경을 준다.”라고 하였다. 무릇 6경의 부세(賦稅)가 미(米) 120두인데 만약 흉년이나 재해를 만나면 72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한 달의 식록(食祿)이 6두인데, 외군(外郡)에서 부림을 받는 이례(吏隷)들에게 있어서는 두 사람이 1경에서 나온 부세를 받으니 이렇게 하고도 탐오(貪汚)하게 변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비록 미관말직의 서관(庶官)이라도 녹봉이 20경에 이르지 않는 것은 옳지 않으니 반계가 제시한 제도에 비하여 세 배 남짓한 것이다. 만약 십일조의 법을 단행한다면 10경이라도 또한 충분하니 혹시 부족할까 봐 염려가 되거든 용관(冗官)을 가려서 도태시켜 세금을 내는 사람은 많게 하고 세금을 먹는 사람은 적게 하면 아마도 이런 근심은 없을 것이다.
■호구에 대하여 논함〔論戶口〕
백성의 호구 수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정사(政事)이다. 그러나 호구 수를 제대로 파악하여 보고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엄중히 감찰(監察)하여 처벌하지 않는다면 바로잡아 다스릴 방도가 없다. 매년 법식(法式)이 반포되면, 법을 어기고 호구를 탈루한 자에 대하여는 모든 고을 임장(任掌)이 연말에 반드시 수재(守宰)에게 보고하되, 있으면 있다 하고 없으면 없다 한다. 수재는 반드시 각 고을을 염찰(廉察)하여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먼저 임장을 다스리고 그런 뒤에 관찰사에게 신보(申報)하되, 있으면 있다 하고 없으면 없다 하여 이것으로 상례(常例)를 삼는다. 관찰사는 또 군현(郡縣)을 염찰하여 능히 규핵(糾覈)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먼저 수재에게 책임을 묻고 그런 뒤에 경부(京府)에 신보하되 있으면 있다 하고 없으면 없다 하여 이것으로 상례를 삼는다. 어사(御史)가 암행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누락된 호구를 염찰하되, 지금의 전정(田政)에서 누결(漏結)에 대한 처벌 규정과 동일하게 처리한다. 회계(回啓)함에 있어서 반드시 누락된 호구의 유무(有無)와 다과(多寡)를 보고하는 것으로 조례(條例)를 삼는다면 크게 한번 징치(懲治)되어서 모든 일이 바로잡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결국에는 조금씩 무너지고 느슨해질 것이다.
사족(士族)의 집에 있어서는 젖먹이나 시집가지 않은 딸은 일일이 찾아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대로 버려두면 법이 무너지고 엄하게 조사하면 도리어 소요가 생길 것이다. 이런 종류는 다스리는 것과는 관계가 없으니, 마땅히 일곱 살 이상의 아들 및 이미 시집간 딸을 기준으로 하면 거의 폐단이 없을 것이다.
무릇 백성 중에 여기저기 옮겨 다니길 좋아하며 한 군데 정착하지 않는 자들은 쉽게 영락(零落)할 뿐 아니라 대부분 부랑(浮浪)한 무리들이니 더욱더 살펴보지 않아서는 안 된다. 지금 전야(田野)가 개간되지 않은 것은 곧 도적이 근심이 되어서 전야에 흩어져서 거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적이란 반드시 종적(蹤迹)이 묘연하여 동쪽에서 나왔다가 서쪽으로 사라져서 추적할 수가 없으니 이는 바로 호적(戶籍)을 핵실하지 않은 폐해이다. 예전에 명도(明道)가 진성(晉城)을 다스릴 때 향촌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려 보오(保伍)를 만들어서 간특하고 거짓된 사람들이 숨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삼 년이 지나는 사이에 도적과 싸움하는 사람들이 없어졌다. 그 법에 대해서는 비록 자세히 알지 못하나 반드시 엄중히 감찰(監察)하고 끝까지 징치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주자(朱子)의 〈사창사목(社倉事目)〉에 또한,
“언제나 열 사람을 묶어 한 보(保)를 만들어서, 절도를 하고 도망한 군인 및 잘못을 하고 종적을 감춘 사람을 그 안에 숨겨 두면, 사수(社首)와 대장(隊長)이 엄중히 사찰하여 신보(申報)하고 위사(尉司)는 그를 잡아들여 뿌리를 캐서 그들을 불러들인 집까지 동일하게 단죄한다.”
하였다. 선현이 법을 정함에 진실로 이와 같이 주도면밀하였다.
이주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원래 살던 고을의 임장 등 여러 사람이 반드시 똑같은 말로써 관아에 보고하여 어느 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하며, 이주한 고을에서도 그 임장이 역시 똑같은 말로써 관아에 보고하여 어느 곳으로부터 이주하여 왔다고 하여 둘이 서로 대조하여 본 이후에 이주를 허락한다. 그리고 반드시 관아에서는 장부(帳簿)에 기록한다. 그 가운데 과오나 패악이 분명하게 드러나서 용납할 수 없는 자는 위 규례와 같이 엄중하게 사찰(査察)하되, 이미 발각된 이후에는 반드시 절도를 한 도적과 그들을 끌어들인 집을 추적하여 같은 보 내의 임장 등 여러 사람을 죄주면, 잘못을 하고 도망하여 종적을 감추거나 도적이 되는 폐단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흉년에 유망(流亡)하여 이주하는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이 규례를 적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거주하는 곳을 점검하고 사찰하는 법이 있어야만 비로소 폐해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도적이 일어나는 것을 그치게 할 수 있고, 군액(軍額)을 채울 수 있으며, 풍속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도움이 없겠는가. 그 요체는 엄중한 사찰에 있으니 엄중하게 사찰하지 않은 것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또한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이 임무를 어사에게 부과하여 자급(資級)과 녹봉(祿俸)을 삭탈(削奪)하되 차등을 두며, 또 엄중하게 사찰한 공로에 대하여 상을 주지 않는다면 권장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마땅히 많고 적음에 따라서 자급을 올려 주거나 관직을 높여 주되 차등 있게 한다.
우선 법령을 반포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분명하게 모두 알게 하여 일일이 정리하게 한 뒤에, 비로소 이 법을 세워서 한두 사람을 죄주면 모든 백성들이 정신을 차릴 것이며, 한두 사람을 상 주면 역시 모든 백성들이 다투어 본받을 것이다. 백성들이 간특한 짓을 하고 도망하여 많은 경우 승니(僧尼) 사이에 숨어 있다. 만약 도첩법(度牒法)을 천명하면 또한 도적이 일어나는 것을 그치게 하고 장정(壯丁)을 채우는 데 일조를 할 것이다.
■조적(환곡)에 대하여 논함〔論糶糴〕
창곡(倉穀)에 환자(還上)를 둔 것은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에서 시작되었다.(진대법) 중국에 있어서는 수(隋)나라의 의창(義倉)이 이에 해당한다. 대개 조적은 가난한 백성들을 위하여 설치된 것이다. 내가 본래 안촉(顔蠋)과 같은 빈한한 삶을 살아와서 빈곤(貧困)의 문제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理解)를 가질 수 있었다. 빈곤의 폐해는 채대(債貸)만 한 것이 없다. 금년에 빈곤한 사람이 명년에 갑자기 부자가 될 이치가 없으니, 올해에 부족한 것을 채대하여 보태면 내년에는 여전히 부족할 것이고, 부채를 상환할 수 있는 숫자는 줄어들게 된다. 따라서 부채는 점점 커지고 가난은 더욱 심해진다.
속담에 “나에게 빚을 주지는 않았지만 원수가 되지는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이 뜻은 처음에는 원망하지만 마침내는 이익이 된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의 마음이란 다만 눈앞의 이득을 기뻐하고 나중에 갚는 어려움은 깨닫지 못한다. 얻으면 써 버리고 갚을 땐 원망하는 것이니 이는 형세상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근(饑饉)을 구호(救護)하는 방법에 있어서 만약 넘치고 흡족하게 해 주어서는 안 된다면, 차라리 작은 은혜로써 간신히 죽음이나 면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지고 은혜가 도리어 원수가 되는 것이다.
상평(常平)이라는 것은 위(魏)나라 이회(李悝)에 시원(始原)을 두고 있으며, 한(漢)나라 경수창(耿壽昌)에서 완성되었다. 값을 내려서 방매(放賣)하고 값을 올려서 수매(收買)하여 항상 백성들로 하여금 그 이익을 얻도록 하였다. 지금 경도(京都)에서 발매(發賣)하는 경우를 보면, 관청에서는 더 이상 독촉하는 괴로움이 없고 백성들도 팔거나 살 때에 모두 나라의 은혜를 느끼니 어찌 좋지 아니한가. 흉년이 들어서 유망(流亡)하는 경우에도 또한 모름지기 창고를 열어서 진휼(賑恤)하였으니 어찌 환곡(還穀)이 필요하겠는가.
지금의 환곡은 10두에 모곡(耗穀)으로 1두를 더하니 모곡이라는 것은 창고에서 참새나 쥐가 먹어서 없앤 것을 보충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대(五代) 한(漢)나라 은제(隱帝) 때 왕장(王章)이 매우 각박하게 거두어들였다. 본래 옛날 제도에는 전세(田稅)에서 매 1곡(斛)당 2승(升)을 더 받고는 작서모(雀鼠耗)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왕장이 처음으로 2두(斗)를 더 받아서 생모(省耗)라고 불렀다. 후주(後周) 태조(太祖) 때에 이르러 두여(斗餘)와 칭모(稱耗)를 혁파하였으며, 세종(世宗)은 또 매 곡당 모(耗) 1두를 지급하였다. 이렇게 한 이유는 조운(漕運)에 있어 강리(綱吏)들이 흔히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운송하는 일이 없는 데도 반드시 10분의 1을 더 받아서 관부(官府)의 비용에 충당하니 이는 바로 참새와 쥐를 핑계로 국가에서 백성들의 곡식을 써 버리는 것이다.
백성들이 유망하여 포흠(逋欠)이 생기면 또 반드시 이웃이나 족속(族屬)에게 징수한다. 그 근심하는 백성들에게 악착같이 받아 내는 것이 거의 동네에서 돈놀이를 하는 잔인한 사람과 구분되지 않으니, 상평에 비해 보면 그 득실이 크게 차이가 난다. 말하는 사람들이 비록 군량(軍糧)으로써 핑계를 대지만 그러나 봄에 풀고 가을에 거두어들이는 것은 상평이나 환곡이 동일하며, 따라서 진실로 우열로서 논할 만한 것이 없다. 만약 병란(兵亂)과 구황(救荒)의 수요에 대비하여 준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한 해의 세입(稅入)을 계산하여 반드시 4분의 1을 저축한다. 그렇게 하면 9년 만에 다시 3년 치를 비축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3년의 비축이 없으면 그 나라가 나라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계획을 세우지 않고 오직 봄에 풀고 가을에 거두어들이는 환곡에만 의지하니 이는 이미 정책(政策)에 실패한 것이다.
무릇 10분의 1을 세금으로 하는 것은 선왕(先王)이 알맞게 정한 제도이다. 이보다 적으면 오랑캐의 방법이니 지금 10분의 1을 세금으로 걷는 것이 마땅하다. 이 중 국가의 경비 이외에 약간을 헤아려서 남겨 두면 해마다 더욱 쌓이게 될 것이다. 이것으로 봄에 방출했다가 가을에 거두어들이는데 원하지 않는 백성에게 강제로 하지 않으며, 창고에 저장한 것이 많아져서 오래 묵게 되면 빈한한 백성에게 나누어 준다. 이렇게 하면 병란과 구황에 대비할 수 있으며 백성들도 혜택을 느끼게 될 것인데, 지금의 정책은 모두 구차할 따름이다. 비록 이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창고의 제도가 구비되지 못하여 수년이 되지 않아서 곡식이 모두 썩어 문드러져 먹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살펴보니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의 균교(囷窌) 주(註)에 “땅을 파서 만든 것을 움집이라고 한다.〔穿地曰窌〕”라고 하였으며, 《예기(禮記)》 〈월령(月令)〉에는 “중추(仲秋)에 두교(竇窖)를 판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거두어 저장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다. 땅을 파되 타원(橢圓)으로 파면 두(竇)라고 부르고 사각으로 파면 교(窖)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 대개 땅속에 저장하는 것은 깊이 밀봉하여 오래도록 보관하려고 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바람이 불고 햇볕이 비치는 곳에 두면 쉽게 부패한다. 땅속에 구멍을 파고 깊이 밀봉해 두면 오래도록 견딜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을 광중(壙中)에 장사 지내는 것에서 증험이 되며, 또 능음(凌陰)에 있는 얼음이 염하(炎夏)를 견디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바람 불고 햇빛 드는 곳에 둔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따라서 수(隋)나라의 낙구(洛口)와 회락(回洛)에 모두 삼천 개의 교(窖)를 판 것은 또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양제(煬帝)의 말기에는 천하에 비축된 물량이 오십 년을 공급할 만하였다.
이제 마땅히 이런 제도를 모방하여 깊숙이 땅을 판다. 벽돌을 쌓아서 벽을 만들고 석회로 봉합하며, 천장에도 역시 회를 쌓은 뒤에 두텁게 흙으로 덮어서 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다. 바닥에는 서국(西國)의 빙고법(氷庫法)에 따라서 조약돌을 진흙에 섞어서 견고하게 두세 자를 쌓는다. 그런 다음에 벽돌을 깔아서 습기와 쥐구멍을 막는다. 만약 석회를 사용하면 습기가 왔을 때는 혹 금방 썩기도 한다 하니 대개 감여가(堪輿家)가 이런 주장을 한다. 재부(財賦)를 관장한 자는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사창(社倉)의 규례와 같은 것은 또한 백성을 보호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재물을 비축하거나 방출하고 거두는 일은 관부(官府)가 아니면 너끈히 해내지 못한다. 무릇 백성이란 가난한 사람이 많고 부자는 적으며 완악한 사람은 많고 선량한 사람은 적은 법이다. 혹 공평하게 나누지 않거나 공고(鞏固)하게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분쟁이 일어나니 위무(威武)가 아니면 진압(鎭壓)될 이치가 없다. 그러나 위무를 쓰는 것만으로는 백성들의 원망과 노여움을 막기 어렵다. 비록 창주인(倉主人)이 그 자리에 알맞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실로 임무를 완수해 내기 쉽지 않은 법인데, 하물며 반드시 제대로 된 창주인을 얻는 것도 아니니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한번 흉년이 들면 창고의 곡식들은 깨끗이 자취를 감추니 누군들 그것을 이어 나갈 수 있겠는가. 형세상 부득이 관부에서 관리해야지만 비로소 오래도록 지탱할 수가 있을 것이며, 특히 외창(外倉)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피폐해지고야 말 것이다.
지금 주군(州郡)의 경계를 획정함에 있어서 고르지 않아 혹 아문(衙門)으로부터 거리가 매우 멀리 떨어진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배고픔에 지쳐 쓰러져 넘어지면서 백 리 이백 리의 길을 달려온다. 따라서 얻는 것은 적은데 그것마저 대부분 길거리에서 써버리고 마니 정작 처자(妻子)를 구휼할 방도가 없다. 그러므로 외창의 규례를 또한 모조리 폐지해서는 안 된다. 만약 경계를 획정함에 일정한 제한을 두어서 관부로부터 매우 먼 곳은 잘라서 근읍(近邑)에 붙여 준다면 또한 외창을 관리해야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지금 만약 오로지 사창에만 의존한다면 사창은 반드시 피폐하게 될 것이고 그런데도 외창을 더 이상 설치하지 않는다면 폐단은 더욱더 심하게 될 것이다.
■병제를 논함〔論兵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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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법전에는 비록 오위(五衛)의 제도가 들어 있지만 평상시에는 시행할 수가 없다.춘추(春秋)와 같은 시대에도 관씨(管氏)는 군령(軍令)을 내정(內政)에 붙였으며, 군사(軍士)들은 각각 향(鄕)을 달리하여 대대로 세습하여 바꾸지 않았다. 대개 군사(軍事)는 정비하지 않을 수 없으며 병사(兵士)도 또한 기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만약 벼슬아치의 자제를 모두 군오(軍伍)로 편제한다면 아마도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지금 백성의 인구수가 많으니 진실로 능히 적절한 방법으로 찾아낸다면 어찌 장적(帳籍)이 텅 빌 이치가 있겠는가. 평시에는 전쟁으로 죽는 근심이 없는 데도 사람들이 거의 함정에 빠지는 것처럼 군대를 싫어하니 이는 군포(軍布)를 가혹하게 징수하기 때문이다.
무릇 나라에는 위란(危亂)이 생기니 군대가 아니면 보존하지 못한다. 비록 평소에 잘 육성하고 큰 은혜를 베풀어도 오히려 그 힘에 의지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평화로운 시기에 가렴주구하고서 전쟁터로 몰아 낸다면 그 누가 과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윗사람을 어버이처럼 여기며 상관(上官)을 위해 죽겠는가. 국가의 경비는 본래 그에 충당하는 세원(稅源)이 있는 데도 반드시 병사가 된 사람들에게 더 걷고자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폐단의 근원을 연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대개 병사라는 것은 경사(京師)로 올라와서 시위(侍衛)를 하고 변방으로 나가서 방어(防禦)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왕래하는 수고로움과 식량에 드는 비용(費用), 그리고 순찰하는 노고(勞苦)가 있는 까닭에 그 가운데는 진실로 번상(番上)하는 대신에 군포로 납부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게 되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로 보나 개인으로 보나 모두 편할 듯하였다.
그러나 목전에 닥친 병화가 없다고 하여 번상하는 일을 풀어주고 대신에 군포를 거두니, 그 자체가 구차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로서의 본질적인 의미도 잃어버렸다. 하지만 이미 일률적인 정식(定式)으로 정해지니 비록 빈곤하여 군포를 납부할 능력이 없어서 군역(軍役)을 살고자 해도 일의 형편상 그 사람 혼자만 할 수가 없었다. 상번자(上番者)는 싸가지고 온 옷과 식량을 모조리 아전들에게 바쳤으며, 그 밖에도 수백 가지 침학(侵虐)을 당했다. 추위를 참고 배고픔을 견디며 목숨만 건져도 다행이었다. 이에 사람들이 상번하는 것을 군포를 납부하는 것보다도 더욱 기피하게 되었고, 백성들은 더욱더 도망하여 모면할 생각만 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 중에 하류(下流)인 승려에 치욕을 참고 귀의하고, 영원히 신역(身役)을 치러야 하는 노예에 근심을 잊고 투신하니, 그 정상(情狀)이 애처롭다.
■경비에 대하여 논함〔論經費〕
세공(稅貢)이 이미 정해져 있으니, 세입(歲入)을 헤아려서 세출(歲出)을 정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세공이 아직 정해지기 전에는 또한 세출을 헤아려서 세입을 정해야 한다.
토지가 있으면 백성이 있고, 백성이 있으면 나라가 있다. 모름지기 우선 국가 경비의 규모를 헤아려서 세입(稅入)을 결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더 이상 거두어들이지 말아야만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과외의 잡세(雜稅)가 엄청나게 늘어나서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무릇 관(官)과 민(民)을 드물게 만나게 하는 것이 백성을 보호하는 요체(要諦)이다.
마땅히 바쳐야 하는 물건은 한 번에 모두 바치게 하고 버린 듯이 그대로 두어야만 백성들이 스스로 애오라지 살아나는 것이다. 만약 한꺼번에 바치게 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여 여러 번으로 나누어 바치게 하면서 자주 독촉하면 그 사이에 간교함이 끼어들기 쉬운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라에 바치는 것은 적어지게 되고 백성들이 잃는 것은 배나 더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대동법(大同法)이 비록 아름다운 법이라고 하지만 또한 봄가을로 두 번 바치니 역시 타당하지 않은 점이 있으며, 또 하물며 잡세(雜稅)의 종류가 더욱 늘었으니 말할 것이 있겠는가. 비용(費用)을 헤아려 세입(歲入)을 정하고 일체 공용(供用)의 물건은 서울에서 무역하면 모든 물산(物産)이 서울로 모여들어서 모자라는 일이 없으면서도 도성(都城)은 번성하게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은 참으로 옳다. 혹 시행함에 있어서 폐단이 있는 것은 곧 방법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지 법(法)이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다.
또 지금 궁중에 공급하는 모든 물건은 모두 기인(其人)에게 맡기니, 기인이란 즉 물건을 공급하는 사람의 호칭이다. 모든 종류의 궁중용 물품을 모조리 비천한 하례(下隷)에게 맡겨 두고 인주(人主)가 뜻에 따라 가져다 쓰니 이렇게 한 것은 편하기 때문이다. 당당한 지존으로서 관리를 두고 임무를 나누면 그들이 분주히 다니며 우러러 바칠 것인데, 마침내 기인에게 주고는 조정에서는 살피지 않으니 이 때문에 비용이 더욱 번다해져도 감히 막지 못하는 것이다. 이 또한 커다란 실정(失政)이다.
하물며 각지에서 바치는 공물(貢物)은, 명목(名目)이 더욱 많아져서 한 가지 품목이 올 때마다 폐단은 백 가지나 되니 모두 개혁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중랑장(中郞將) 방사량(房士良)이 시무소(時務疏)를 올려서 기인의 역(役)을 혁파하기를 요청하였는데 이를 보면 이 폐단은 전조(前朝)의 말기에서 시작되었으며, 나라가 바뀌었는 데도 능히 고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의 고칠 수 있는 방책은, 궁중에 공급하는 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구분하여 결정하고 이를 각각 유사(有司)에게 맡긴다. 그러면 유사는 아전(衙前)과 하례(下隷)에게 요구하되 그 값을 넉넉히 쳐서, 그들로 하여금 각각 가격에 맞추어 갖추도록 한다. 비록 불시에 물품을 공급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유사를 거치게 하며, 물품이 혹 넘치거나 조악하면 유사에게 허물을 두어서 점퇴(點退)하지 말아야 한다. 유사에게 허물을 두니 힘써 정확하게 할 것이며, 점퇴하지 않으므로 뇌물이 생기지 않는다. 이처럼 하면 백성도 살고 재물도 있어 넉넉하지 않을 근심이 없을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바치는 공물을 또한 일체 모두 혁파하더라도, 돈이 부르면 물건은 반드시 발이 없어도 저절로 오는 것이니 없는 품목이 있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만약 경비(經費)가 부족한 것이 근심이라면 차라리 백성에게 세금을 더 거둘 것이지 먼 지방에 자주 요구하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진휼에 대하여 논함〔論賑恤〕
진휼(賑恤)은 미리 예비하여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니, 예를 들면, 이른바 9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 반드시 3년 치 양식의 비축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풍년에 매우 가격이 낮을 때 수매(收買)하여 흉년에 방매(放賣)한다는 이회(李悝)의 평조법(平糶法) 같은 따위가 그것이다. 이런 계획이 없이 흉년이 닥치면 그제야 깨달으니 도대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백성을 옮기고 곡식을 옮기는 일은 이미 구차한 방법이다. 그러나 옮길 만한 곡식이 있는 다음에야 그런 방법도 강구해 볼 수 있으며, 죽이나 끓여 먹이는 일은 참으로 하지하책(下之下策)이다. 내가 최근에 이 죽을 얻어먹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열에 여덟아홉은 죽었으니 텅 빈 창자에 멀건 죽이 무슨 힘을 쓰겠는가. ...
■노비에 대하여 논함〔論奴婢〕
우리나라의 노비세습법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팔조(八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히 기자(箕子)가 이 법을 만든 것은 아니며, 분명히 후대의 잘못된 법규일 것이다. 고려 태조(太祖)는 일찍이 포로를 해방시켜 양인(良人)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정종(靖宗) 대에 이르러서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정하였으니 이는 대개 천례(賤隷)들은 어미는 알지만 아비는 모르므로 만약에 아비를 따르게 하면 쟁송(爭訟)이 발생할 여지가 많기 때문이었다. 성종(成宗)은 또 속전(贖錢)을 내고 양인이 된 자가 세월이 오래되어 감에 따라 혹 원래의 주인을 업신여기지 않을까 우려하여 드디어 환천법(還賤法)을 만들었으니 참으로 심한 일이었다. 당시 안축(安軸)의 말에 “내 평생에 아무것도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나 다만 네 번을 사사(士師)가 되어, 무릇 억울하게 노비가 된 백성은 반드시 바로잡아 양인으로 만들었다.” 하였으니, 어진 사람의 마음 씀씀이라 할 만하다.
지금은 더욱 가혹한 점이 있다. 그 아비가 노(奴)이고 그 어미는 양인일 때 또 아비를 따라서 노로 만들었으니 무릇 사람이 부모가 둘이고 조부모가 넷인데 그것이 4대를 올라가면 이미 열여섯이 된다. 그중에 하나라도 천한 이가 있으면 모두 노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며, 만대(萬代)가 지나도 벗어날 수 없다. 결국엔 나라 가운데 천한 자가 열에 아홉이고, 한번 노비가 되면 비록 성현(聖賢) 같은 재주가 있더라도 평인(平人)의 반열에 낄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애처롭지 않겠는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동방(東方)이 예로부터 나라는 가난하고 국방은 약하여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던 것은 모두 이 법의 폐해 때문이었다. 무릇 백성은 몸이 있으므로 용(庸)이 있고, 집이 있으므로 조(調)가 있는데 이는 모두 나라에 종속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법에 모든 노비는 그 주인에게 복역(服役)하고 주인에게 납공(納貢)하니, 사가(私家)의 권한이 너무 큰 것이다. 나라에서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모두 떳떳한 제도가 있어서 비록 탐관오리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주인으로 하여금 각자 그 노비를 관할하게 하니 주인들이 마음대로 탐욕을 부린다. 나라가 백성에 대해서는 다만 남자에게만 역(役)을 부과할 뿐인데, 주인은 노비에 대해서 남자와 여자에게 각각 역을 부과하니 지아비 하나에 지어미 하나 있는 한 집을 두 주인이 번갈아 침학하여 소소한 작은 일은 물론이고 인륜에 어긋나는 망녕된 일까지 시켜서 반드시 힘이 다할 때까지 부려 먹고서야 그만두니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지는 것이다. ...
■화폐에 대하여 논함〔論錢幣〕
무릇 땅에서 나서 백성에게 유익한 것을 재화(財貨)라고 한다. 재화 중에는 의식(衣食)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그 다음으로는 기물(器物)과 약물(藥物) 따위가 있으니, 이 밖에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천하는 매우 넓고 재화의 생산은 지역마다 다르니, 형편상 이리저리 옮겨서 유통시키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화폐가 발생하게 된 이유이다.
화폐는 아무 쓸모가 없는 물건인데 다만 권도(權道)로서 마땅하게 한 것이니, 이렇게 한 것은 재화가 모든 필요에 빠짐없이 공급되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역대의 화폐 제도가 변혁을 겪으면서 그에 대한 변론도 각각 분명하였다. 폐지하면 곡식을 적시고 옷감을 얇게 하는 근심이 있고, 시행하면 장사를 통해 이익만을 중히 여기는 우려가 있다. 두 가지가 모두 미워할 만하지만, 밉다고 두 가지 모두를 폐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폐단이 심한 것은 제거하고 가벼운 것은 존속시키니, 진실로 존속시킬 만하다면 폐단은 족히 미워할 것이 없다. 만약 말단의 폐단을 가지고 법을 적용하는 의미를 나무란다면 이는 족히 그 대체(大體)를 모르는 것이다.
무릇 물과 불은 백성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폐단은 타서 죽거나 빠져 죽는 혹독함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단지 폐단이 있다고 하여 그만둔다면 이는 물과 불도 모두 없앨 수가 있는 것이다. 요컨대 물이나 불처럼 미곡과 포목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폐지할 만하면 폐지할 수 있는 화폐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화폐의 용도는 유통한다는 것 밖에는 없는데, 오히려 곡식과 포목도 유통할 수 있다. 하지만 돈만 있고 곡식과 포목이 없게 된다면 추워도 못 입고 배고파도 못 먹어서 농(農)이 병드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곡식과 포목을 화폐와 함께 쓰게 하여 농(農)이 재앙을 받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쪽을 없애버리고 본업(本業)에 전일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작으며 서울을 나라의 가운데에 두어서 조정(朝廷)에 진상하러 오는 거리가 천 리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서 뱃길이 내륙에서 서로 만나니 이동의 어려움이 중국과는 다르다. 등에 봇짐을 지고서 충분히 땅끝까지 갈 수 있으니 또한 가벼운 화폐에 기댈 필요가 없다.
지금 화폐가 유통된 지 겨우 40년이 되었는데 화폐가 유통되기 이전에 그 손해는 무엇이며 유통시킨 이후에 그 이익은 무엇인가? 백성들의 생산에 대해서 말하자면 날로 고갈되었으며, 사람들의 풍속에 대해서 말하자면 날로 구차해졌으며, 나라의 저축에 대해서 말하자면 날로 결핍되었으니, 그 이익과 폐해가 대개 이미 드러난 것이다. 다만 세금을 걷는 데 편리하였던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이익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이미 손해를 입었는데, 나라가 어떻게 혼자서 이익을 보겠는가. ...
■주전에 대하여 논함〔論鑄錢〕
모두들 말하기를 “돈을 만들지 않으면 쌀값이 낮아져서 농(農)을 해친다.”라고 한다. 이런 주장은 예로부터 있어 왔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른바 해친다는 것은, 백성은 곡식으로 다른 물건을 교환하는데 물건이 귀해지면 곡식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무릇 백성이 필요한 것은 의식(衣食)일 뿐이다. 벼가 없으면 보리를 먹고, 보리가 없으면 콩을 먹어서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 비단이 없으면 솜옷을 입고, 솜옷이 없으면 가죽을 입어서 추위를 면할 수 있다. 예컨대 이제 제주같이 더운 곳에서 개가죽을 입고, 함경도같이 추운 곳에서 삼베옷을 입어도 또한 살아갈 수는 있는 것이다. 그 땅에서 나는 것으로 그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으니, 따라서 밭 갈아서 먹고 옷 짜서 입으면 충분한 것이지 하필 곡식을 가지고 먼 곳에 있는 물건을 바꾸고 난 다음에야 된다는 것인가.
반드시 물건을 팔고 사서 그치지 않는 자는 바로 사치에 힘쓰는 사람이니, 사치에 힘쓰자면 먼 곳에 있는 진귀한 물건이 아니고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찌 나라에서 권장할 일이겠는가. 만약 화폐가 유통되지 않게 한다면 비록 화려하게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한들 또한 어찌할 수 없어서 마침내 부득이 검소한 습속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것이 곧 이익이 되는 까닭이다.
내가 보건대, 동전(銅錢)을 유통시킨 이후에 운송하는 일은 극히 편해졌으나 소박한 풍습은 날로 사라졌다. 도도한 물결처럼 풍조가 되어 주위에서 보고 배운다. 그래서 자신의 재력(財力)은 따져보지도 않고 부득이 사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사치를 금하는 데는 화폐제도를 폐지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고 한 것이다. ...
■경장을 논함〔論更張〕
법에 폐단이 생기면 경장(更張)하는 것은 당연한 형세이다. 그러나 경장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며, 혹은 그것 때문에 환란을 초래하기도 한다. 때문에 사람이 마침내 경장을 거부하여 말하기를 “구법(舊法)을 깨뜨리고 부숴서 망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답습하여 버틴다.”라고 하니 이는 당장의 안일(安逸)을 꾀하는 것으로는 최고의 계책이다. 이를 집에다 비유해 보면, 집이 오래되어 장차 무너지려고 하는데 서투른 목수에게 고치도록 한다면, 혹 미처 수리하지도 못했는데 집이 먼저 무너지는 우려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고치는 것이 실로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니, 한두 계절 사이에 무너져 버릴 것이 분명하다면 한결같이 고식적으로 대처하여 새로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어찌 마땅하겠는가. 만약 비바람이 침범하여 뜻밖에 갑자기 서까래가 부러지고 대들보가 무너지는 사태를 만나면, 아무리 혀를 차며 탄식하고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나라의 폐정(弊政)이 이것과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러나 사람이란 반드시 집 고치는 것에는 급하지만 폐정을 경장하는 것에는 느슨하니, 또한 그 연유가 있다.
저 집이라는 것은, 무너지는 것도 또한 내 근심이며, 고치는 것도 또한 내 일이다. 내가 고치는 것이 비록 어렵지만, 내 근심도 또한 절실한 것이다. 내가 힘을 쓰지 않으면 내 집은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의 일은 질고(疾苦)가 아래의 백성들에게 치우쳐 있어 위망(危亡)이 혹 목전에 닥치지 않으니, 나는 다만 가만히 있으며 한가롭게 즐기고 화를 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저 집이란 것은 다 지어지면 실로 기쁘고 축하할 일이지만 무너진다고 하여 책망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국사(國事)는 평안함도 반드시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며 혹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죄과를 피하지 못한다. 저 집이란 것은 눈에 선하고 귀에 익어서 진실로 좋은 목수를 만나면 나의 뜻대로 짓게 할 수 있어서 마침내 완성을 기약할 수 있다. 그러나 국사는 험난한 시변(時變)에 손발이 맞지 않고, 비록 입으로는 말하지만 몸은 미처 겪어보지 못한 것이며, 게다가 곁에서 그 틈을 엿보아 백 가지로 망치려 든다. 그러나 이는 모두 인지상정으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이며, 사람들이 경장하기를 무겁게 여기는 까닭이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담당할 생각도 없으면서 다소간에 나라를 경시(輕視)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
▣성호전집 제48권
■자식을 훈계하는 여덟 가지 조목〔訓子八條〕
사물에 대처할 때에는 항상 마음이 몸에 있지 않은지를 살피라.
온유함으로써 백성을 가까이하고, 작은 잘못은 용서하되, 실정(實情)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라.
격노(激怒)함을 경계하고, 하리(下吏)에게 죄가 있거든 부드럽게 대하며 치죄(治罪)하라.
부로(父老)를 불러 그들의 고충을 물으라.
관장(官長)을 부형(父兄)처럼 섬기라.
소송(訴訟)을 하는데 거짓이 있으면, 그 이름을 기록해 두라.
서리(胥吏)들의 과실이 확실하지 않은 경우에는 경솔하게 발설하지 말고 우선 조용히 관찰하라.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가사(家事)를 마음에 두지 말라. 나라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효자이다. 전후(前後)의 연설(筵說)을 항상 책상 위에 두고 살펴보라.
▣성호전집 제53권
■백운동서원 방문기〔訪白雲洞記〕
기축년(1709, 숙종35) 10월 그믐에 순흥부(順興府)에 이르러 백운동(白雲洞)을 찾아갔으니, 안 문성공(安文成公 안향 1243-1306)의 서원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문성공의 외가 쪽 후손이라는 친분이 있는 데다 문성공은 사기(士氣)를 진작하고 풍속을 크게 변화시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남긴 은택이 오늘날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음에랴. 지금 유지(遺址)가 이곳에 있고 사당이 이곳에 있으니 어찌 흠모하고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당은 순흥부 치소(治所)에서 5리쯤 떨어져 있다. 죽계(竹溪)를 따라 동북쪽으로 가다가 동중(洞中)에 이르면 물가에 임하여 작은 정자를 만나니, 바로 경렴정(景濂亭)이라는 곳이다. 해서(楷書)와 초서(草書)로 쓴 두 개의 편액이 있는데, 해서는 퇴계(退溪) 노선생(老先生)의 필적이고 초서는 황고산(黃孤山)의 글씨이다. 정자 아래 물 건너에 바위가 있는데 거기다 흙을 쌓아서 단(壇)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노선생이 명명하신 취한대(翠寒臺)이다. 줄지어 죽 심어진, 한 아름 남짓 되는 소나무는 모두 선생이 손수 기른 것이요, 바위 위에 새겨진 백운동(白雲洞)이란 세 글자도 선생의 글씨이다. 그 아래에 다시 새겨진 하나의 ‘경(敬)’ 자는 바로 주신재(周愼齋)의 글씨라고 하였다.
이어서 원중(院中)으로 걸어 들어가 재실(齋室)에 이르러 잠시 쉬고 사당의 뜰에 나아가 참배하려고 하였는데, 서원의 노복이 검정 유건(儒巾)과 치의(緇衣)를 나에게 주어 입게 하였다. 그러고는 인도하여 외문(外門)으로 들어가게 하고 계단 아래에 자리를 배설한 뒤에 앞문을 열고 나를 인도하여 자리 가운데에 서게 하였다. 나는 공손히 읍(揖)하고 평신(平身)하고 이어서 조금 물러나 손을 씻고 정문(正門)으로 들어가 향을 올리고 협문(夾門)을 통해 종종걸음으로 나와서 뜰에서 배알하고 물러 나왔으니, 원규(院規)가 그러하였다.
사당의 주벽(主壁)에 남면(南面)한 정위(正位)는 안 문성공이고, 왼쪽의 두 신위(神位)는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과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고, 오른쪽 하나의 신위는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인데, 두 안공(安公)은 문성공의 질손(姪孫)이라고 하였다.
노복이 또 인도하여 강당에 이르자 협실(夾室)을 열고 화상(畫像) 세 축(軸)을 받들어 내와 벽에 걸고서 나에게 뜰아래에서 사배(四拜)하게 하였다. 참알한 뒤에 당에 올라가 우러러보니, 하나는 공자의 화상인데 많은 현인들이 시립하고 있는 것이었고, 다른 두 장은 또 안 문성공과 주신재의 유상(遺像)이었다. 문성공 본전(本傳)에 “공이 박사에게 자금을 주어 중국으로 보내서 공자와 70제자의 유상을 그려 오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남아 있는 선성(先聖)의 화상은 당연히 그것이 전해진 것이다. 그런데 그 묘정(廟庭)에 종향된 자들 중에 한나라와 진나라의 제유(諸儒)는 모두 들어 있지 않고 다만 당나라의 문공(文公)과 송나라의 철인(哲人)들, 원나라의 허형(許衡)ㆍ오징(吳澄)만이 별도의 반열로 참여하고 있어서 오늘날의 사전(祀典)과 같지 않았다. 생각건대, 문성공은 원나라 때 사람이니 혹 원나라의 국가 제도가 그랬던 것인가? 전손사(顓孫師)를 십철(十哲)에 올린 것은 《명기(明紀)》에 처음 보이는데, 이 그림에서 또한 자장(子張)을 10인 중에 둔 것은 어째서인가? 혹 나의 좁은 소견이 미치지 못하였던 것인가? 이것은 알 수 없다.
다시 재실에 이르러 심원록(尋院錄)에 이름을 기록하고 인하여 원규 1책을 찾으니 바로 고산(孤山)의 글씨였다. 또 노선생의 유묵(遺墨) 1첩이 있었는데, 원중의 일로 인하여 방백(方伯) 심통원(沈通源)에게 준 편지였다. 그 대개에 “백운동서원은 전 군수 주세붕(1495-1554)이 창건(1543)한 것입니다. 죽계의 물이 소백산(小白山) 아래에서 발원하여 옛 순흥부 안으로 흘러 지나가는데, 이곳은 실로 선정 안 문성공이 옛날에 살던 곳입니다. 골짝이 그윽하고 깊으며 구름 낀 산골이 아늑합니다. 땅을 파다가 묻혀 있던 구리를 얻어 경사자집(經史子集) 수백 권을 사 와서 소장해 두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건대, 이 서원은 주후(周侯)가 창시하였고, 과조(科條)를 만들고 규제(規制)를 제정한 것은 노선생의 공이 많았다.
잠시 뒤에 걸어서 광풍대(光風臺)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면서 취한대를 지나 문성공의 옛터에 들렀는데, 사현정(四賢井)에 이르니 옆에 비(碑)가 있었고 그 음각(陰刻)에 “안석(安碩)과 아들 축(軸)ㆍ보(輔)ㆍ집(輯)이 모두 여기에서 태어났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황(1501-1570)이 1555년 소수서원으로 개칭
■청량산 유람기〔遊淸凉山記〕: 봉화군 명호면 소재
내가 순흥부에서 벗인 신택경(申澤卿 1672 ~ ?)과 청량산(淸涼山)을 유람하기로 약속하고 서둘러 여장을 꾸려 출발한 것이 기축년(1709, 숙종35) 11월 1일이었다. 저녁에 안동 경계의 청암정(靑巖亭)에 이르렀는데, 돌아가신 충재(冲齋) 권 충정공(權忠定公) 벌(橃 권벌(權橃, 1478~1548))이 살았던 곳이다. 개천을 끌어오고 둑을 쌓아 넘실대는 물이 구복암(龜伏巖)을 둘러싸고 흐르며 바위 위에 정자(亭子)를 만든 것이 매우 절묘하여 즐길 만하였다. 이어서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들렀는데, 바로 충재를 제향하는 곳이다. 금명구(琴命耈), 권보(權莆), 권모(權謩) 3인과 함께 원중(院中)에서 잤는데, 두 권생(權生)은 충재의 후손이다.
이튿날 아침에 봉화읍(奉化邑)에 이르렀는데 홍세전(洪世全)이 갑자기 와서 동행하였다. 느지막이 불퇴령(佛退嶺)에 올라 청량산을 바라보니, 이는 태백(太白)에서 뻗어 나와 남쪽으로 와서 우뚝이 높이 솟아 하나의 작은 구역의 명산(名山)이 되었다. 마치 창과 깃대가 삼엄하게 늘어선 진영(陣營)의 모양 같기도 하고 또 부처들이 연화탑(蓮花塔) 속에서 무리 지어 옹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하늘 높이 구름과 함께 떠 있는 형세가 자잘한 언덕 같은 산들에서 특출하니, 참으로 그 명성이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하겠다. 날이 어두워지자 마을 사람에게 관솔불로 앞길을 인도하게 하여 낙천(洛川)을 건너고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산에 도착했는데, 하늘빛이 이미 너무 깜깜해져서 고생스레 길을 찾느라 골짝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연대사(蓮臺寺) 안에서 자고, 다음 날 승려들과 함께 걸어서 절 문 주위를 돌아가며 두루 구경하였다. 산이 깊은 못과 거센 여울의 기이한 곳이나 괴이한 암석과 첩첩이 쌓인 봉우리의 승경은 없지만, 사방의 절벽이 깎은 듯이 가파르게 솟아 모두 하늘을 떠받치고 있으니 병풍을 펼치고 휘장을 드리운 모양 같아서, 바라보면 압도되어 막연히 더위잡고 기어오를 방법이 없을 듯하였다. 이런 점은 금강산(金剛山)과 속리산(俗離山)에는 없는 것으로 여러 명산이 한 발 양보해야 할 것이다.
절 뒤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자수봉(紫秀峯)이라고 하는데 자란봉(紫鸞峯)과 함께 우뚝 솟아 있고, 오른쪽에는 필봉(筆峯), 연적봉(硯滴峯)이 있는데 이는 생김새대로 이름 붙인 것이다. 서쪽의 한 갈래가 연화봉(蓮花峯), 향로봉(香爐峯)인데 향로봉 밖으로는 곧 장인봉(丈人峯) 등의 여러 봉우리가 있다. 동쪽의 한 갈래는 제일봉(第一峯)을 거쳐 금탑봉(金塔峯)에 이르며, 금탑봉 밖으로는 별도로 한 줄기가 빙 둘러 앞을 에워싸고 있는데 그 상봉(上峯)이 축융봉(祝融峯)이다. 자수봉은 일명 미륵봉(彌勒峯)이라고도 하는데 몇 길이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대략 계단 같은 층이 있지만 낭떠러지와 깎아 세운 절벽이어서 등나무나 덩굴도 붙어 오를 수 없었다. 돌은 희미한 푸른색인데 성질이 단단하지 않기 때문에 자주 떨어지고 부서져 휑하니 비어서 평평하고 매끄러운 곳이 없었다. 이것이 그 대개이다. 산봉우리가 숨은 것도 있고 드러난 것도 있어 가로막혀서 다 기록하지 못하였지만 중이 가리켜 준 것은 대개 이와 같았다.
밥을 먹고 나서 우리는 가벼운 신에 편안한 차림으로 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대승대(大乘臺)를 경유하여 보현암(普賢菴)에 이르고 환선대(喚仙臺)에서 쉬고, 다시 문수암(文殊菴)을 거쳐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서 가다가 북쪽으로 갔다. 만월암(滿月菴)에 올라 마침내 만월대(滿月臺) 꼭대기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오른쪽으로 선학대(仙鶴臺)에 올라 바위에 부딪치고 소나무에 의지하여 동부(洞府)를 굽어보니 훨훨 날아 공중에 있는 것 같아 떨려서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여기에 이르자 숨었다 드러났다 출몰하던 산들이 모두 참모습을 드러내었고, 아까 우뚝이 높았던 산이 모두 발아래 있지 않은 것이 없으니, 참으로 청량산에서 가장 경치가 훌륭한 곳이다. 자수봉에 오르려 하였더니 중이 본래 길이 없다고 말하므로 그만두었다.
이때 마침 구름 사이에서 흰옷을 입은 중이 땔감을 패는 모습이 나무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고 떵떵 나무 찍는 메아리가 때때로 들려 또 기묘한 느낌을 부추겼는데, 다시 묶은 장작을 굴려서 아래로 떨어뜨리자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혹 나뭇잎이 부서져 어지러이 날리고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흩어져 낭떠러지와 골짜기를 뒤덮으며 달리니, 그 모양이 떼 지어 있던 무수히 많은 참새가 일제히 나는 것 같았다. 모두 말하기를 “이 산의 이런 광경은 사람이 쉽게 볼 수 없는 것인데, 우리들이 마침 보았다.” 하고, 마침내 함께 한 번 웃었다.
선학대의 서쪽에 또 대(臺)가 있는데 모습은 선학대와 같으나 이름이 없으니, 신택경이 고운대(孤雲臺)라고 명명하였다. 제일봉 앞에 바위가 곧게 서서 봉우리를 이룬 것은 내가 옥주봉(玉柱峯)이라고 명명하였으니, 퇴계 선생이 일찍이 소백산(小白山)을 유람할 적에 이렇게 한 예(例)가 있으므로 우리들이 감히 따라 한 것이다. 이어서 만암(滿菴)에서 술을 마셨다. 옥주봉을 따라 내려오면서 김생폭포(金生瀑布)를 구경하였다. 남여(藍輿)를 타고 동쪽으로 올라갔는데 1리도 안 되어 길이 갈수록 위태로워져 남여를 버리고 걸어서 어풍대(御風臺)에 이르렀다. 대는 금탑봉의 중턱에 있는데 한 가닥 좁은 길이 띠를 두른 듯 주위를 둘러 통해 있었다. 위아래로 단층이 지어져 마치 층각(層閣) 같은 모양인데 한 귀퉁이가 살짝 들려서 대가 되었으니, 바람을 탔다〔御風〕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청량산의 진면목을 여기에서 훤히 바라볼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더러 이 대를 이 산의 제일가는 경관이라고 하였다.
조금씩 돌아 동쪽으로 가서 반야대(般若臺)를 지나 총명수(聰明水)에 이르니, 중이 말하기를, “이 물을 따라서 마시는 사람은 눈과 귀가 밝아지는 효험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이곳에 이르면 한번 마셔서 시험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하였다. 우리들도 습속을 따라 장난삼아 맛보았는데 샘이 바위구멍에 있어 물이 꽤 시원하였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 안중암(安中菴)에 이르자 판 하나를 매달아서 벽 위를 덮어 놓았다. 바로 노선생이 이름을 쓴 곳이라고 하는데 글씨가 떨어져 나가 지금은 찾을 수 있는 필적이 없다. 이곳을 유람하는 사람들 또한 기둥과 도리, 서까래에까지 다투어 성명을 기록하여 빈틈이 조금도 없었는데도 사람들이 오히려 감히 그 옆을 붓으로 더럽히지 않았으니, 영남 사람들이 선생을 존모(尊慕)하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무지한 승도(僧徒)까지도 다 노선생이라고 칭하고 성(姓)이나 호(號)를 말하지 않았다. 선생이 후대의 세속에서 경앙(景仰)받는 것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으니, 아, 얼마나 성대한가.
풍혈암(風穴菴) 옛터에 이르자 바위 모서리가 틈이 벌어져 굴이 남북으로 통하고 넓어서 십수 명을 수용할 정도였는데 이곳이 최치원(崔致遠)이 바둑 두던 곳이라고 한다. 다시 영산전(靈山殿) 상청암(上淸菴)을 지나서 고운암(孤雲菴)에 이르니, 암벽이 더욱 높고도 가팔라서 구경할 만하였다. 잠시 쉬었다가 돌아가는데 봉우리 아래에 이르니 다리 힘이 빠져서 다시 남여를 불러서 타고 연대사(蓮臺寺)에 이르러 누대 위에 이름을 적었다. 점심을 들고 나서 다시 길에 올라 하산하여 동구(洞口)에 이르렀다. 길 오른쪽에서 소나무 한 그루를 보았는데, 높이는 겨우 한 길이었으나 옆으로 서린 가지가 십수 칸이나 덮어서 버팀목을 만들어 지탱하였는데 아래는 무성하게 그늘져서 햇빛이 비치지 않으니, 다들 말하기를, “일찍이 이런 것을 본 적이 없다.” 하였다. 또 시내를 따라 오르내리는데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맑은 물이 그를 감싸고 흘러내리니 또한 절승(絶勝)이었다.
내가 우연히 영외(嶺外)에 이른 것도 이미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일인데 세상일에 빠져 버리면 다시 오는 것을 쉽게 기약할 수 없다. 그래서 철이 비록 겨울이지만 마침내 결정을 하고 산에 들어가 주자(朱子)가 형악(衡岳)을 유람한 것을 따라 하고자 하였는데, 날이 마침 따뜻하여 산에 눈 한 점 없고 사람들이 모두 부채를 부칠 정도였다. 비록 꽃과 잎의 아름다움은 없었으나 하늘의 복을 받아서 이름난 산천과 연분이 있게 된 것은 스스로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기에 드디어 한 번 크게 웃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방문하러 갈 예정이므로 오던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갔다. 몇 리쯤 가서 홍군(洪君)이 작별을 고하기에 말에서 내려 풀을 깔고 앉아 술을 따르며 서로 전송하였다.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도산에 도착하였다.
■도산서원을 배알한 기문〔謁陶山書院記〕
내가 청량산(淸凉山)에서 발길을 돌려 도산을 방문할 때 신택경(申澤卿)이 함께하였다. 반나절쯤 길을 가서 온계(溫溪)를 지날 적에 길가에서 멀리 서원을 가리키며 물으니, 답하기를, “노선생의 선대부(先大夫) 찬성공(贊成公 퇴계의 부친 이식(李埴, 1463~1502))과 종부(從父) 승지공(承旨公 이우(李堣, 1469~1517)), 형 관찰공(觀察公 이해(李瀣, 1496~1550) ) 세 분을 제사하는 곳입니다.” 하였다. 영남 사람들은 선생을 지극히 존경하여 선생의 어버이와 스승에 대해서도 모두 추중(推重)하고 향모(向慕)하는 것이 이와 같다. 하물며 선생의 유적(遺迹)이 있고 가르침을 베푼 곳을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공경함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다시 작은 고개를 지나 먼저 애일당(愛日堂)을 들렀으니, 바로 이농암(李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이 살던 곳으로 매우 아늑하고 절묘한 곳이었다. 말 머리를 돌려 왼쪽으로 달려가 비로소 도산에 이르렀다.
도산은 선생이 늘 기거하던 별장(別莊)으로, 계상(溪上)에서 5리쯤 떨어져 있다. 계상은 선생의 본댁이 있는 곳으로, 퇴계(退溪)라고 이르는 곳이다. 동쪽 상류로 곧장 가는 길에 산기슭 하나가 가로막아서 도산과 통하지 않으니 선생이 늘 산 위를 거쳐서 지팡이를 짚고 왕래하였다고 한다. 대개 산과 물이 구불구불 감싸 안고 돌아 시냇물에 임하여 하나의 골짝이 펼쳐지는데, 산은 영지산(靈芝山)의 줄기이고 물은 황지(黃池)에서 발원한 것이다. 또 청량산으로부터 뻗어 온 산이 물 흐름을 따라서 서쪽으로 달리다가 영지산의 한 줄기와 하류에서 합쳐서 좌우에서 절하고 있는 듯하니, 이른바 동서의 두 취병(翠屛)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동(洞)은 작지만 가운데가 툭 트여서 마을이 들어설 만하니, “터가 넓고 지세가 뛰어나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궁벽하지 않다.”라고 한 본기(本記)에서 증험할 수 있다. 선생이 손수 창건한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여전히 여기에 있는데 후인들이 이어서 서당의 뒤에 서원을 건립하여 존봉(尊奉)하였다.
우리들은 말에서 내려 공순히 바깥문으로 들어갔다. 서쪽에 동몽재(童蒙齋)가 서당과 마주 대하고 있는데, 동몽재는 어린 선비가 학문을 익히는 곳이라고 한다. 다시 진덕문(進德門)으로 들어가니 또한 좌우에 재(齋)가 있는데, 동쪽은 박약재(博約齋)이고 서쪽은 홍의재(弘毅齋)이다. 가운데에 남쪽을 향하여 강당(講堂)을 두었는데 편액을 전교당(典敎堂)이라 하고, 당의 서쪽 실(室)이 한존재(閑存齋)이다. 한존재는 원(院) 내에 반드시 장임(長任)을 두어서 그로 하여금 제생(諸生)을 통솔하며 항상 이곳에 거처하게 한 곳이고, 박약재와 홍의재는 곧 제생이 머무는 곳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홍의재에 들어가 거재(居齋)하는 사인(士人) 금명구(琴命耈)를 만나서 원의 규모와 지명, 민풍(民風)의 대개를 대략 들었다. 이어서 원노를 불러 사우(祠宇)의 바깥 정문을 열도록 하고 배알하는 절차를 상세히 물은 뒤에 감히 들어가니, 상덕사(尙德祠)라는 세 글자 편액이 높이 걸려 있었다. 또 남쪽 문을 열어 주어, 우리들이 뜰아래에서 엄숙히 참배하고 추창하여 서쪽 계단을 통해 가 몸을 숙이고 문지방 밖에 차례로 서서 사당 내의 제도를 살펴보고자 하였는데, 왼쪽에 월천(月川) 조공(趙公 조목(趙穆, 1524~1606))을 배향하는 신위만 있을 뿐이었다. 다시 서쪽 담으로 통하는 작은 문을 열자 담 밖에 집 2채가 있는데, 하나는 주고(酒庫)라고 하고 하나는 제기(祭器)를 보관해 놓는 곳이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마침내 추창하여 나가서 홍의재에 이르자 재 뒤에 다시 실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가리켜 유사방(有司房)이라고 하였다.
잠시 있다가 금생(琴生)과 함께 간 곳이 바로 도산서당인데, 이곳은 정말 선생이 친히 지은 곳이어서 나무 한 그루, 돌 한 덩이도 사람들이 감히 옮기거나 바꾸지 못하였다. 때문에 낮은 담장과 그윽한 사립문, 작은 도랑과 네모난 연못이 소박한 유제(遺制) 그대로여서 마치 선생을 뵌 듯 우러러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다. 처음에는 숙연하여 마치 담소하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가 나중에는 그리워서 잡고 어루만지며 공경을 느끼게 된다. 백 년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이 유적과 덕행에 대해 아직도 보고 감동하여 흥기하는데, 하물며 당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집은 3칸인데, 동쪽은 헌(軒)이고 서쪽은 부엌이고 가운데는 실이다. 실은 완락재(翫樂齋)라 하고 헌은 암서헌(巖栖軒)이라 하여, 합하여 도산서당이라고 명명하였다. 헌의 동쪽에 또 작은방 하나를 붙여 헌과 통하도록 해서 청(廳)을 만들고 나무를 쪼개 판(板)을 만들었는데 오늘날의 와상(臥床) 모양 같았다. 금생이 말하기를, “선생 당시에는 이것이 없었는데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이 유의(遺意)를 받들어 나중에 만든 것입니다.” 하였다. 못은 정우당(淨友塘)이라 하는데 작은 샘의 물을 끌어다가 대었다. 문은 유정문(幽貞門)이라 하는데 섶나무를 엮어서 만든 것으로 대개 평시의 제도를 본뜬 것이다. 뜰 왼쪽에서부터 산기슭에 이르기까지 소나무와 전나무가 숲을 이루었는데 밑동이 모두 한 아름 정도 되었다. 물어보니, 선생이 손수 기른 것이라고 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벌써 140년이나 되었는데 나무만은 여전히 무성하게 남아 있으니, 사람들이 아름다운 나무에 흙을 북돋아 주고 감당(甘棠)에 비의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실 안을 구경해 보니 서쪽과 북쪽 두 벽에 모두 장이 있는데, 각각 2층으로 된 장에는 모두 유물(遺物)이 보관되어 있었다.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는 기구(器具) 하나, 책상, 등잔대, 투호(投壺) 각각 하나, 화분대(花盆臺), 타구(唾具) 각각 하나, 벼룻집 하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벼루는 어떤 자에게 도둑맞아서 지금은 없다고 한다. 무릇 벼루는 한 조각 돌덩어리일 뿐이나, 이곳에 있으면 값을 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 있으면 다만 다른 돌덩이와 같은 것일 뿐인데, 저 훔쳐간 자는 도대체 무슨 마음이었던가. 아, 유감스럽다. 또 청려장(靑藜杖) 한 자루는 갑(匣)을 만들어 간직해 놓았는데 조금의 파손도 없고 품질도 보기 드문 것이었다. 1치마다 마디가 두서너 개 있어 학(鶴)의 무릎 같았고, 두드리면 쨍쨍 울리면서 맑은 소리가 나서 보배로 여길 만하였다.
동쪽으로 문을 내서 걷어 올리면 헌과 통할 수 있고, 남쪽으로 작은 창문을 내고 창 안쪽에 시렁을 가로놓아서 시렁 위에 베개와 자리 등의 물건을 두었다. 금생이 말하기를, “이 방은 선생의 수택(手澤)이 남아 있기 때문에 누추하고 낡았지만 감히 개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벽면에 선생의 차기(箚記)와 필적이 정연하게 있었는데, 근래 원장(院長) 아무개가 유택(遺宅)을 수선하는 일로 방백에게 아뢰니, 방백도 감히 필요한 물자를 아끼지 않고 주었다. 종이를 많이 얻어 벽을 모두 새롭게 도배해 버려 이제는 한 글자도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에 사림이 회의하여 서원 문적에서 원장의 이름을 삭제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조롱하고 한탄하고 있다.
아, 선생의 말씀과 행동 하나하나가 후세의 법칙이 되지 않는 것이 없어서 상서로운 구름과 해같이 사모하고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본다. 지금까지 거처와 용구가 아직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누군들 아끼고 진기한 보배로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자질구레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모두 마음에 새기고 삼가 기록한 것이다. 이는 옛것을 사모하는 벽(癖)일 뿐이니, 보는 사람이 이해하기 바란다.
다시 홍의재에 이르러 마침내 금생과 함께 잤다. 노복이 다시 심원록(尋院錄)을 내와서 우리들이 성명과 자(字), 향관(鄕貫), 날짜를 줄지어 썼으니, 또한 전례이다. 이튿날 아침 출발하려 할 즈음 동쪽 기슭을 100보쯤 걸어 올라가서 천연대(天淵臺)에 이르니, 서쪽 기슭의 천운대(天雲臺)와 마주하여 우뚝 서 있었는데 물길이 도도하게 흘러 앞을 지나가고 시계(視界)가 탁 트여 원근을 막힘없이 전부 바라볼 수 있었다. 석(石) 위에 새긴 ‘천연대(天淵臺)’란 세 글자는 또한 월천이 유의에 따라 만든 것이다. 다시 천운대를 따라 내려와 저녁에 영천군(榮川郡)으로 가서 구학정(龜鶴亭)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삼각산 유람기〔遊三角山記〕
《국지(國誌)》를 살펴보면 삼각산(三角山)은 일명 부아산(負兒山)이라고 하는데, 부아산은 한성(漢城)의 종산(宗山)이다. 대개 도봉산(道峯山)으로부터 산맥이 뻗어 나와 남쪽으로 내려와서 백운봉(白雲峯)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뚝 솟았다. 백운봉의 남쪽에 만경봉(萬景峯)이 있고 동쪽에 인수봉(仁壽峯)이 있는데 모두 높이가 백운봉과 비슷하다. 그중 인수봉은 더욱 깎은 듯이 가파르게 우뚝 솟아서 사람들이 기어오를 수 없고 바라보매 가장 빼어난 절경인데, 실로 오른쪽 두 봉우리와 나란히 우뚝하여 삼각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노적봉(露積峯)이고 봉우리의 아래가 중흥동(中興洞)인데 중흥사(中興寺)가 거기에 있다. 동쪽에 있는 것이 취봉(鷲峯)이고 남쪽으로 돌아 비스듬히 뻗어 고개를 이룬 것이 석가령(釋迦嶺)이다. 이 고개에서 동쪽 지역을 조계(漕溪)라 하고 조계사(漕溪寺)가 있는데 이 절에는 폭포가 있다. 고개 서쪽 갈래는 나한봉(羅漢峯) 등의 여러 봉우리가 되어서 노적봉의 오른쪽 산기슭과 중흥동 어귀에서 합쳐지니, 이것이 옛 북한성(北漢城)의 터이다. 고개의 바로 남쪽이 보현봉(普賢峯)의 여러 봉우리가 되고 점점 뻗어 가서 인왕산(仁王山)에 들어가는데, 이곳은 만세토록 국조(國朝)의 공고한 기반이니, 지금 감히 다 기록하지 않는다. 보현봉의 서쪽은 문수암(文殊菴)이고 암자의 물이 탕춘대(蕩春臺)를 경유하여 한강에 들어간다. 이것이 그 대개이다.
내가 정해년(1707, 숙종33) 중춘(仲春)에 유람하려고 할 때 따라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 드디어 그와 함께 17일 경자일에 집에서 출발하여 18일 신축일에 동소문(東小門)을 거쳐서 천천히 걸어서 조계동(漕溪洞)으로 들어갔다. 〈산에 들어가다〔入山〕〉라는 율시 한 수를 지었다. 보허각(步虛閣)에 올라서 십일층폭포를 구경하고 또 〈폭포를 구경하다〔觀瀑〕〉라는 율시 한 수를 지었다. 방향을 돌려 조계사에 들어 기숙(寄宿)하였는데, 〈징 상인(澄上人)의 시축(詩軸)에 차운하다〉라는 율시 한 수를 지었다.
동틀 무렵 석가령을 넘어서 삼각산의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고 중흥사에 들어가 비로소 조반(朝飯)을 들었다. 우연히 종조손(從祖孫) 이종환(李宗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이어서 백운봉에 오르려고 하였는데 얼음과 눈이 아직 녹지 않아 길이 막혀 올라가지 못하였다. 〈백운대를 바라보고〔望白雲臺〕〉라는 절구 한 수를 지었다. 내성(內城)의 남은 터를 따라가 석문(石門)을 구경하고 길을 바꾸어 문수암에 들어갔다. 〈문수암〉이라는 절구 한 수를 지었다. 문수암의 오른쪽 산등성이에 올라 서해(西海)를 바라보고, 이어 문수암에서 점심을 들었다. 또 보현봉에 올라서 왕성(王城)을 내려다보고 〈보현봉〉이라는 율시 한 수를 지었다. 정오에 탕춘대를 따라 내려와 〈산을 나오며〔出山〕〉라는 율시 한 수를 지었다. 마침내 도성 북문(北門)을 경유하여 돌아왔다.
■관악산 유람기〔遊冠岳山記〕
이해(1707년) 2월 아무 날에 삼각산에서 방향을 돌려 관악산(冠岳山)에 들어갔다. 관동(冠童) 두서너 명과 함께 동강(東岡)을 넘어서 불성암(佛成菴)에 이르러 노승(老僧)과 이야기하였는데, 산승(山僧)이 말하기를, “관악산은 영주대(靈珠臺)가 실로 가장 높은 봉우리인데 산의 승경(勝景)이 이보다 뛰어난 곳이 없습니다. 그다음 가는 것은 자하동(紫霞洞)인데, 자하동이라고 이름 붙인 동이 네 군데 있습니다. 불성암에서 남쪽 아래에 있는 것을 남자하(南紫霞)라고 하고, 남쪽에서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들어간 것을 서자하(西紫霞)라고 하는데, 모두 특별히 칭할 만한 점이 없습니다. 영주대 북쪽에 있는 북자하(北紫霞)는 자못 맑고 깨끗하지만 그래도 동자하(東紫霞)의 기이한 경관만은 못하니 거기에는 못도 있고 폭포도 있어서 영주대의 다음이 됩니다. 그 외에도 절이나 봉우리 등 여러 가지 볼거리가 있습니다.” 하였다. 나는 곧 해질녘에 서암(西巖)에 올라 일몰(日沒)을 보고 그대로 암자에서 잤다.
해가 돋기를 기다리며 북쪽으로 올라가는데 봉우리로는 용각봉(龍角峯)과 비호봉(飛虎峯), 바위로는 문암(門巖)과 옹암(甕巖)이 있었으니, 모두 거쳐 온 곳이다. 의상봉(義上峯)에 이르렀는데, 옛날 의상(義上)이 살았던 곳이다. 관악사(冠岳寺)와 원각사(圓覺寺) 두 절을 지나서 영주대 아래에 이르러 영주암(靈珠菴) 터에서 쉬고, 마침내 대에 올랐다. 돌을 뚫어서 층계를 만들었는데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바위틈을 따라서 가장자리를 붙잡고 조금씩 올라가 빙 돌아서 대의 꼭대기에 이르니, 삼면은 막힘없이 전부 바라보이고 서쪽에는 깎아지른 벽이 서 있었다. 벽에는 불상(佛像)이 새겨져 있고 다시 돌로 처마를 만들어 불상을 덮었다. 바위에 의지하여 단(壇)을 쌓았는데 돌을 쌓고 흙을 채워서 50여 명은 앉을 만하였으며, 바위 머리에 또 구멍을 파 등불 밝힐 곳을 만들어서 성중(城中)에 통지할 수 있었으니, 대개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던 때에 한 일이라고 한다. 다시 차일봉(遮日峯)을 거쳐 북자하를 굽어보고 동자하를 지나서 폭포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북한산 유람기〔遊北漢記〕
금상 재위 38년(1712, 숙종38)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조할 것을 건의한 자가 있었으니, 대개 도성(都城)이 사방으로 트여 있어 위급한 경우 수비할 수가 없고 남한산성(南漢山城)은 물에 막혀서 창졸간에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에 역사(役事)를 봄에 시작하여 가을에 이르러 겨우 끝마쳤는데, 이에 내가 가서 유람하였다. 새로 쌓은 성첩(城堞)은 까마득히 높아 붙잡고 기어오를 수 없을 것 같았고, 개통한 길은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 대개 성 주위가 30리(里)는 족히 되었는데, 무릇 사람이 담요로 감싸고서야 들어갈 수 있는 험한 곳까지 모두 성가퀴를 두었다. 북쪽으로 백운봉(白雲峯)부터 동쪽으로 옛 성터까지 비스듬하게 뻗어 있고 다시 나한봉(羅漢峯) 등의 여러 봉우리를 거쳐서 서쪽 중흥동 어귀에서 합쳐지니, 참으로 이른바 천연의 요새인 백이관(百二關)이란 것이 이것이다.
옛날 백제(百濟)의 온조(溫祚)가 나라를 세울 때 열 명의 신하와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터 잡고 살 만한 땅을 바라보았는데 지금의 백운봉이 그곳이다. 드디어 위례(慰禮)를 도읍으로 정하였다가 그 뒤에 남한(南漢)으로 옮겼다. 비류왕(比流王) 때에 이르러 왕의 서제(庶弟) 내신좌평(內臣佐平) 우복(優福)이 북한(北漢)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371)에 다시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개로왕(蓋鹵王) 21년(475)에 이르러 고구려가 몰래 승려 도림(道琳)을 시켜 왕을 모시게 하니, 도림이 왕을 꾀어 궁실을 수리하고 성곽을 축조하도록 하였다. 이에 나라 사람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만들도록 하니, 양식 창고가 바닥나고 백성들은 곤궁해졌다. 도림이 돌아가 고하자 고구려가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왕을 잡아 살해하니, 왕자(王子)인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에서 즉위하였다. 이것이 북한산성에 얽힌 고사(故事)이다.
고구려가 공격하여 함락할 때에 그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옮겨 남성(南城)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지금 성의 남문(南門) 밖에 다시 골짜기가 하나 있는데 도성(都城)과 접해 있고 역시 형세가 잘 갖춰져 있으니 틀림없이 이곳에 내성(內城)과 외곽(外郭)을 만들었을 것이다. 듣건대, 어떤 사람이 이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 대개 이곳을 차지한 자는 굳이 병기나 화력의 이로움이 필요치 않으니, 몽둥이와 투석으로도 높은 성장(城牆)에 올라 날랜 적병을 칠 수 있다. 또 동서로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고 멀리까지 길이 통하니, 운용하는 데 좋은 방법만 있으면 그 형세는 충분히 뛰어난 점이 있다. 다만 수구문(水口門) 쪽이 자못 낮고 평평하여 구름사다리나 빈 수레로 잡고 올라갈 수 있으나, 안으로 구덩이가 깊어 들어가는 경사가 가팔라서 평평하고 넓은 곳이 조금도 없으니, 혹 빗물에 무너지게 되면 사람들이 발을 붙이기 어려울 것이다. 또 높은 봉우리와 산꼭대기 같은 곳들은 가뭄이 들면 물을 운반하기가 필시 어려울 것이고, 날씨가 추우면 꽁꽁 얼어서 방위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그 이해(利害)에 대한 것이다.
성의 역사가 막 완결되었지만 궁실이 아직 건립되지 않았고 저장 창고가 아직 채워지지 않은 상황이다. 민의(民意)는 흩어지기 쉽고 국용(國用)은 넉넉하기 어려우니, 수십 년 오랜 세월의 계획을 가지고 기약하지 않으면 불의의 환란에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민사(民事)를 돌보지 않고 뜻을 다하여 속성(速成)하려고 한다면 이 또한 넓적다리를 베어서 배를 채우는 격일 뿐이니, 이렇게 되면 비록 성을 방위하는 설비가 있다 하더라도 적을 막을 군졸이 없을까 걱정된다. 또 예로부터 성에서 패전하는 자는 대부분 소홀히 여긴 데에서 문제가 생기니, 국조(國朝)의 병자년(1636, 인조14) 강도(江都)의 변란 같은 유(類)가 그것이다. 자연의 험고함은 믿을 만하지만 또한 두려운 것이니, 방위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이 성이 설령 흠결이 있다 할지라도 백여 년 동안 백제의 터전이 되어서 삼국(三國)이 교전할 무렵 고구려와 겨룰 적에 본디 성하(城下)에서 꺾어 그 위세를 떨쳤었는데, 혼미하고 욕심을 부리다가 패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성의 탓이겠는가. 조정의 시책이 어떤 방향으로 나올지 모르겠다. 이것이 그 시무(時務)이다.
개로왕이 망한 것은 꾀는 말을 듣고 패망의 기미를 잊었기 때문이다. 궁궐을 크게 짓고 누대(樓臺)를 장식하였으며 욱리(郁里)의 돌을 취하여 석곽으로 쓰기도 하고 사성(蛇城)의 동쪽까지 제방을 쌓아 나무를 심기도 하였다. 마침내 나라의 정세가 위태롭게 되고 적의 책략이 이루어졌으니, 뒤늦게 후회하여도 어찌할 수가 없어 자신은 포로로서 죽었다. 개로왕이 말하기를, “내가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자의 말을 신용하여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백성들은 피폐하고 군사들은 약하니, 누가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리오.” 하였다. 아, 깨달았지만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백제가 없어지지 않은 것만도 요행이다. 이것은 그 감계(鑑戒)이다.
무릇 옛것에 집착하는 사람은 “덕(德)에 달린 것이지 험고한 지형에 달린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말단적인 방법만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유리한 지형을 먼저 점유해야 한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모두 하나만 잡고 둘을 폐하는 격이다. 양(梁)나라가 궁궐의 해자를 파자 백성들이 먼저 뿔뿔이 흩어졌고,거(莒)나라가 방비(防備)가 없자 초(楚)나라가 운(鄆) 땅을 침입하였다. 이러하니 어찌 다만 잘못이 방비에 있지 덕에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덕에 있지 방비의 허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상(子常)이 영(郢)에 성을 쌓으니 심윤(沈尹) 술(戌)이 그 수위(守衛)가 너무 작다고 기롱하였고,진(晉)나라가 포(蒲)와 굴(屈)에 성을 쌓자 사위(士蔿)가 전쟁이 없는데 성을 쌓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것은 또 나라의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중흥사(中興寺)에 이르러 기숙하고 이튿날 아침에 두세 동반자와 함께 노적봉(露積峰)을 경유하여 북성(北城)에 올라 인수봉(仁壽峯)을 바라보고 백운중대(白雲中臺)에 이르렀다가 길이 위태로워 그만두었다. 돌아와 절에서 쉬고 수구문을 따라 돌아왔다. 그 산천의 모습 같은 것은 전에 유람한 기문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다시 기술하지 않는다.
■천마산 유람기〔遊天磨山記〕 ; 개성 천마산
갑오년(1714, 숙종40) 봄 2월 23일 을미일에, 내가 옛 금천(金川) 선영(先塋) 아래에서 곧장 천마산(天磨山)으로 가서 마유령(馬踰嶺), 영원령(靈遠嶺) 두 고개를 넘었는데 험준하여 말을 탈 수 없었으므로 말을 버리고 걸어서 해가 기울 무렵 북문(北門) 아래에 이르러 벼랑을 따라 내려왔다. 범사정(汎槎亭)에 이르러서 박연폭포(朴淵瀑布) 가를 소요하며 반백 길이나 되는 은빛 폭포를 바라보니 마음과 눈이 덕분에 장쾌해졌다. 도로 성문으로 들어와 바위틈을 따라 선회(旋回)하여 폭포의 근원을 찾아갔더니, 바위가 골짜기를 막고 있는데 옆으로 걸쳐져서 문과 계단 모양을 하고 있었고 가운데 구덩이에는 주전자와 술잔 같은 못이 하나 있었다. 못 가운데 반타석(盤陀石)이 솟아 있는데 형세가 물에 떠 있는 듯하였으며, 주전자에 본래 주둥이가 있어 물이 쏟아져 나와 폭포가 되었다. 관음사(觀音寺)에 이르러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범사정에 이르렀으니, 대개 흥이 아직 가시지 않았고 기이한 경은 다시 보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마음껏 즐기고 돌아왔다.
물을 따라 왼쪽으로 가서 발자취를 살펴 가며 벼랑을 부여잡고 기어올라 운흥사(雲興寺)를 탐방하고 다시 관음사를 거쳐 대흥사(大興寺)에 이르러 멈추어 쉬었다. 다시 용천사(龍泉寺)를 지나 대장대(大將臺)에 올라서 산 동쪽의 여러 경치를 조망하였다. 다시 대흥사를 거쳐서 소서문(小西門)을 지나 만경대(萬景臺)에 오르니, 산의 형승(形勝)이 최고에 이르렀다. 해질 무렵에 돌아와 대흥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아침에 남문(南門)을 통해 나가서 서사정(逝斯亭)을 탐방하고 마침내 화담서원(花潭書院)을 참배하였다.
■등과기〔登科記〕
나의 증왕고인 소릉공(少陵公)이 돈후한 덕행으로 선조조(宣祖朝)의 명신(名臣)이었는데 지금까지 백여 년이 지나도록 증손, 현손이 대단히 번성하였다. 그러나 내가 어릴 때 사람들은 오히려 집안이 과거에 이름을 떨치지 못하여 합격 인원을 헤아려 손가락을 꼽아 보면 거의 적적할 정도라고 애석하게 여겼다. 경인년(1710, 숙종36)부터 신해년(1731, 영조7)까지 22년 동안 문무과(文武科) 대과와 소과의 절차에 이름이 드러난 사람이 문과나 중시(重試)는 도합 11인, 진사(進士)와 생원(生員)은 도합 18인, 무과는 4인, 합계 33인인데 이름이 거듭 나온 7인을 제외하면 26인이 된다. 그런데 그중 보기 드문 경우가 3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한집안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네 아들이 전후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다시 감시(監試)에 응시한 자가 없는 것이고, 둘째는 아들이 먼저 과거로 벼슬에 오르고 아버지는 도리어 뒤에 임명되었는데 똑같이 공(公)의 지위에 오른 것이고, 셋째는 중시에 나란히 합격하였는데 그중 한 번은 같은 해에 급제한 것이다. 이것은 모두 세상에서 감탄하며 신기하게 여기는 것인데 우리 문중(門中)에 모여 있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은가. 지금 연도별로 기록하여 등과기(登科記)를 만드니, 이는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기에 충분하다.
그렇기는 하나 과장(科場)의 득실은 문장을 다듬는 작은 기예로 주사(主司)에게 판별을 받는 것에 불과하니, 모두 우연하게 그렇게 된 것이다. 어찌 법도 있는 명가의 바른 전칙(典則)을 논하는 데에 거론될 수 있겠는가. 이제 드러내어 기릴 만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무신년(1728, 영조4) 변란 이후로 내로라하는 집안의 저명한 인사들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잇달아 주륙을 당하자 연좌된 이들이 온 나라에 가득하였다. 몇 년 사이에 기상이 꺾이고 무너져서 흡사 겁화(劫火)를 겪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뒤와 같았는데, 오직 우리 여주 이씨(驪州李氏)만은 노소귀천 모두 형옥(刑獄)의 죄안에 오른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과거에 합격한 자는 직무에 종사하고 공부하는 자는 학업을 익혀서 의태(意態)가 조용하고 전아하여 조금도 어지러운 기미가 있는 줄 모르는 듯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이에 아울러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