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
요즈음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언론에서는 독립운동사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국민들에게 그리고 자라나는 학생세대들에게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수탈과 우리 민족의 고통의 역사, 그리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들의 우국충정의 정신을 부각시켜 극일정신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하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각 시도 지방자치별로 일제 잔재를 없앤다는 미명으로 여러 도와 교육청들(특히 경기도와 전라북도)그리고 방송사가 나서서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파 명단에 들어있는 인사들이 작사 작곡한 각급학교의 校歌와 道歌를 폐기하고 다시 노래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느니 도로명을 바꾼다느니 동상을 철거한다느니 하는 관제 반일 민족주의 선동으로 야단법석들이다. 그 동안 많이 겪은 낡은 수법들이다.
심지어 경기도의회에서는 도내 초·중·고가 보유 중인 일제 '전범기업' 제품에 '일본 전범 기업이 생산한 제품입니다'라는 스티커〈사진〉 부착을 의무화하는 내용의 조례안을 준비하고 있고, 서울시의회에서는 일본 '전범 기업' 제품을 낙인찍는 데 그치지 않고, 불매를 촉구하는 조례안이 추진되었다. 우리 조국이 해방된 지 74년이고 6.25 전쟁이 끝난 지 66년인데 저 권력과 이념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은 여야 할 것 없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미래로 나아가는 선진대한민국 민주시민들과 자라나는 학생들을 우롱하는 시대착오적인 짓거리들을 한다. 그만 사라져도 시원찮을 제일야당인 한국당과 태극기부대들이 집권당인 민주당을 종북이네 빨갱이들이네 하며 공격하니 이제 집권당인 민주당과 진보인사들마저 친일흔적 청산작업으로 맞서는 형국이다.
후일 언젠가 중국과 크게 다투게 되면 거의가 한자에서 만들어진 우리 말을 모두 말살시킬 것이며, 미국과 원수가 되면 영어로 된 외래어를 모두 폐기하고 역사적으로 중국이나 미국과의 우호를 증진한 학자나 정치인 문화인들을 모두 친중파 친미파로 몰아 이미 죽은 저들을 끝없이 단죄할 것인가? 중국이나 미국이 생산한 물품은 모두 구매하지 말라고 조례를 제정하고 국민과 학생들을 선동할 것인가? 그런데 저 사람들은 민족상잔의 6.25 전쟁을 일으며 수백만 우리 민족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인적 피해와 엄청난 물적피해를 가져오게한 저 김일성과 그 무리들에게는 어찌 그리 관대한 건지 강력히 규탄하거나 비난하는 저들의 글들을 거의 본적이 없다. 민족이건 종교건 이념이건간에 그 무슨 이유로도 전쟁을 일으키는 집단과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철저하게 증오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18세기 유럽의 제국주의 침략도, 20세기 독일의 나치침략도, 일본 제국주의 침략도 김일성의 남침도 모두 함께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인류공동의 적인 전쟁범죄들이었지만 그렇다고하여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두고두고 그것을 끝없이 들추어 내며 적대를 만드는 작업을 계속할 수는 없다.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관제 친일청산작업으로 반일민족주의를 부추기지만 작년 한해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은 8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고 다른 각도로 여러 생각을 하게 하지 않는가?
미래를 향하여 더 웅지를 펴야할 세계경제대국인 선진국 대한민국에 빨갱이가 웬 말이며, 지금 친일파가 어디 있단 말인가? 어디에 북한을 동경하는 빨갱이 무리들이 있으며, 친일작곡가가 작곡한 교가라지만 친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모교의 교가를 부르면서 졸업생들이나 재학생들이 친일파라도 되어간다는 것인가? 시대착오적이고 과거지향적인 사고와 교육을 저 이념에 함몰된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나서고 있다. 박근혜가 집요하게 추구하던 한국사의 국정교과서 편찬과는 과연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어찌 도의회와 도교육감들이 나서 역사를 재단하고 케케목은 친일파를 들먹이며 어린 학생들에게 증오심을 키우고 갈등을 부채질하는 것인가? 공산혁명을 일으켜 자본주의를 말살하던 시기에 공산당들이 무자비하게 행하던 선동과 숙청과 규모는 다르나 성격면에서는 비슷한 일면을 볼 수 있으니 저들이 하는짓들이 실로 가소롭고 부끄럽다. 우리 대한민국의 위상에 맞지 않다. 마침 오늘 신문에 이에 관련한 정부승교수의 칼럼이 있어 내 블로그에 옮겨 기억하고자 한다.
■2019.11.19 밤
오늘 저녁에 방영된 KBS <역사저널 그들 244회>에 출연한 한 분(처음부터 보지 못하여 성함을 모른다)이 친일 음악과 음악가들(홍난파, 이흥렬, 현제명, 박시춘 등)을 소개하면서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 그런 노래들은 나쁜 노래들입니다. ”
그가 지적하여 말하는 노래는 방금전에 거론된 <고향의 봄 1926>과 <섬집아기 1952>를 말한다.
1.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2.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한인현 작사 이흥렬 작곡 섬집아기의 가사입니다.
1.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2.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 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 옵니다.
우리민족이 큰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독립운동은 못할 망정 평범하게는 살았어야하는데, 출세하려거나 또는 먹고살기 위해 친일을 했다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민족반역자가 맞고, 일제와 일제침략을 찬양하거나 고무하는 노래의 작사나 작곡은 우리가 당연히 불러서는 안되는 일이지요. 하지만 논리가 지나치게 비약하여 일제침략과는 전혀 무관한 노래와 문학작품들까지 모조리 친일작품(나쁜 작품)으로 규정하여 공격합니다.
과연 위의 두 노래가 나쁜 노래인까요? (대학교수인듯한) 출연자가 당당하게 발언한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홍난파와 이흥렬은 친일 작곡가이다.
고로 친일작곡가인 저들이 작곡한 노래는 모두 나쁜 노래들이다.
위와 비슷한 논리로 무제한으로 비약하여 몇가지 예를 만들어 봅니다.
홍명희는 월북공산주의자이다.
고로 공사주의자인 그가 지은 소설들은 모두 나쁜 소설들이다.
안익태는 친나치주의 활동을 했다.
고로 <애국가><코리아 환타지>등 그가 지은 노래는 모두 나쁜 노래들이다.
서정주는 친일시인이다.
고로 <국화옆에서> 등 그가 지은 시는 모두 나쁜 시이다.
김활란은 친일교육자이다.
고로 그가 재직하였던(그의 영향을 받은) 이화여자중고등학교및 이화여자대학은 모두 나쁜 학교들이다.
일제시대 총독부 직원, 금융조합직원, 보통학교교사, 보국대직원은 친일파이다.
고로 그들이 낳은 자식들(유전자와 교육적 영향을 받은)은 모두 나쁜 사람들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지어진 관공서및 은행, 금융조합등의 건물들은 우리민족을 착취하기 위해 지어진 나쁜 건물들이다. 고로 근대화유산운운하는 것은 지자체들의 돈벌이를 위한 변병일 뿐이므로 모두 철거해야한다.
갑은 고등학교 시절에 절도를 해서 실형을 살았다.
고로 갑이 하는 모든 행위는 절도행위처럼 나쁜 행위들이다.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유신체제에서 투쟁하지 않고, 여당에 가담했거나 공무원을 한 사람들은 모두 독재정치에 앞장섰거나 옹호했거나 도운 것이나 마찬가지다. 고로 그들은 모두 나쁜 사람들이다.
과연 논리적으로 맞을까? 오래전부터 끈질기게 친일청산을 부르짖던 개혁파 정권의 지도자급 인사들의 부친들이 묘하게도 일제강점기시대에 친일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어찌된 일일까?
방송을 통해 지극히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친일청산을 극단적으로 외치는 저들도 언젠가는 시대가 바뀌어 친일청산작업세력의 나팔수 앞잡이였다고 비난받는 시대가 오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KBS 사장은 그렇다치더라도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의 지나치게 비논리적이고 지나치게 선동적인 언행에 나 자신 오히려 화가나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낀다.
‘친일’과 ‘종북’이라는 편리한 괴물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교수ㆍ정치학
문재인 대통령의 3ㆍ1절 백주년 기념사를 읽고 놀랐다. 문 대통령은 친일 잔재 청산이 “너무나 오래 미뤄둔 숙제”라고 했다. “빨갱이”라는 말이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독립운동가”를 낙인찍는 말이라고 했다. 게다가 반대파를 빨갱이로 낙인찍는 “색깔론”이 “우리가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친일 잔재”라고도 했다.
문 대통령은 자신이 “분열을 일으키거나” “갈등 요인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지향”한다고 말은 했지만, 왠지 불길했다. 종북 대 반공의 전선을 친일 대 반일의 전선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지난 정권이 상대방을 협력 대상이 아니라 “종북”으로 규정하고 타도하려 했듯이 현 정부는 이제 상대방을 “친일”로 규정하고 청산 대상으로 낙인 찍으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야당은 반발했다. 야당 원내대표가 국회 연설에서 반년 전 외신을 인용하여 문 대통령을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종북’이라는 것이다. 여권은 발끈했다. “토착 왜구” “매국” 등의 수사로 격렬하게 야당을 공격했다. 모두 ‘친일’에서 변형된 표현들이다.
일본 군국주의가 패전한 지 어언 74년이다. 한일 국교 회복 54년이다. 6ㆍ25 한국 전쟁 휴전도 벌써 66년. 반공 군부 독재가 무너지고 민주화된 것도 벌써 한 세대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3ㆍ1운동 백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민족이 다음 백년의 비전을 열어 가야 할 시점에 우리는 아직도 ‘너는 친일’ ‘너는 종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친일과 종북 담론은 우리가 직면한 여러 문제에 대해 실질적 해법을 제공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해법의 발견을 가로막는다. 친일과 종북 담론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증오와 공포를 자극한다. 당면한 정치 투쟁에 승리하기 위한 전술로서 민족주의 내지 집단주의에 편승하면 정치적 화해도 정책적 해법도 제시하기 어렵다.
반일의 렌즈만으로 일본을 보면 협력은 불가능하다. 과거를 부정하는 세력과 어떻게 상종할 수 있나? 반공의 프리즘으로만 북한을 보면 북한과의 어떠한 교류, 협력도 어불성설이다. ‘적과의 동침’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친일과 종북의 담론이 위험한 이유는 현실의 일면만 보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가 일본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은 그 모든 문제의 배후에 공산주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허구적이다. 갈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본, 북한과 교류하고 대화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정교과서를 수단으로 하여 역사에 대한 일원적 시각을 강요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제압하려 했다. 문재인 정부는 역사를 정치 투쟁의 씨름판으로 만들어 버린 박근혜 정부의 우를 반복하려고 하는 것인가?
촛불의 의미는 ‘반공’을 ‘반일’로 대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촛불은 민주국가라면 어디에서나 존중받아 마땅한 자유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들이 짓밟힌 데 대한 공분의 분출이었고, 그 보편적 가치를 매개로 한 국민적 통합의 모멘트였다. 촛불을 계승한다는 정부가 왜 보편과 통합을 분열과 갈등의 역사로 대체하려 하는가?
과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순국선열, 민주화 영령들의 뜻을 기려 나가야 한다. 그러나 과거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는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유연성을 발휘하며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주동적으로 선택해 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친일’과 ‘종북’이라는 편리한 괴물에 의존하여 토론을 중단시키고 상대의 입을 막아온 우리 정치의 나쁜 전통의 악순환을 끊고 촛불이 상징하는 보편과 통합의 동력을 키워 나가길 기대한다. 이제 우리에겐 친일과 종북을 넘어 밝은 미래를 보여줄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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