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행

중남미 여행기(2019)

청담(靑潭) 2019. 6. 6. 10:17

 

중남미 3개국 페루+쿠바+멕시코 여행

서언

나는 1년에 큰 여행 하나, 작은 여행 하나를 해외여행의 기본으로 정하고 있다. 해외여행을 너무 자주 하는 것은 힘들고 번거롭다. 그렇다고 그토록 행복한 해외여행을 1년에 단 한번 만 하기에는 너무 아쉽다. 세상을 사는 동안 5대양 6대주, 가고 싶은 곳은 모두 가고픈 생각에 되도록 젊을 때 10일 이상 소요되는 코스는 빨리 해치우자는 생각이어서 금년도 큰 여행은 가장 힘들다는 중남미를 택했다. 올해 작은 여행은 이미 지난 2월에 베트남 하노이를 다녀온 바 있다. 많은 지인들이 남미지역은 대개 15일 이상의 일정을, 심지어 27일간의 일정을 다녀오는 사람들이 있으나 나와 양드리는 체력적 한계와 15일 이상이면 여행이 지겨워지는 심리적인 이유도 있어 다른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세계의 여행 코스 중 가장 힘이 드는 지역이기에 우리는 우선순위를 다음과 같이 두고 상품을 선택하였다.

첫째, 일정이 가장 짧은 상품으로

둘째, 페루의 잉카유적과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 유적은 반드시 탐방하며

셋째, 쿠바 문화를 탐방하는 여행이다.

시기는 5월 말로 정하고 두 달 전에 3개국 7박 11일짜리 상품을 선정하여 가장 먼저 예약을 해두었다. 무려 8번의 비행기를 타야하는 강행군이므로 어려움은 당연히 감수해야만 한다. 양드리는 한 달간의 미국연수를 다녀 온 바 있으나 나는 아메리카는 처음이다. 이번에 여행하는 세 나라는 경도상 우리나라와 정 반대편에 있으며 위도상으로는 모두 열대지방에 속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와는 달리 무더위는 없다고 한다. 멕시코시티는 해발 2천 미터 이상의 고지대이고, 쿠바는 대서양의 섬이며, 페루의 쿠스코는 3천 미터 이상의 고지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후에 맞추어 봄옷으로 준비하면 된다고 한다. 아들과 딸 그리고 사위를 만날 겸 출국 하루 전날 서울에 갔다. 저녁에 모두 모여 태국식당에서 식사를 함께 하고 다음 날 우리 아들 이대표가 공항까지 바래다주었다. 

 

제 1일차 (5월 19일 일요일)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서 멕시코 항공으로 12:25에 출발하여 무려 13시간 만에(현지시간 오전 11시 39분) 멕시코시티 공항에 도착하였다. 비행기는 일본을 지나 북위 50도를 따라 날아 밴쿠버와 시애틀 지역에서 육지에 가까워지고 샌프란시스코로스엔젤레스 사이에서 대륙으로 들어왔다.

오후 4시 50분에 리마행 비행기에 환승하여 공항을 출발하였는데 다시 6시간을 소요하여 저녁 11시 50분에 페루의 리마에 도착하였다. 마포에서 리마까지 30시간이 걸린 셈이다. 가이드는 40대의 여성 허선생인데 매우 세심하고 친절하다. 1시에 SAN AGUSTIN EXCLUSIVE 호텔에 들어 샤워하고 짐정리를 하고나니 잠잘 시간은 거의 없다. 여행 가방은 호텔에 맡겨놓고 앞으로 3일간의 페루여행에 필요한 물건은 각자가 준비한 배낭에 꾸려서 메고 다니게 된다. 나는 1시간을 잤는데 양드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 모두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한다. 새벽 4시 30분에 모닝콜 5시에 식사하고 5시 30분에 호텔을 다시 나서게 되었다.

이번에 꾸려진 팀은 모두 14명인데 남성이 다섯에 여성이 아홉 분이다. 인솔자가 없고 현지 가이드만 있는 탓에 환승도 스스로 해야 해서 부담이 상당히 컸다. 여행을 함께 한 분들은 다음과 같다.

경기지역에 거주하시는 80세 동갑내기 두 남성 친구분, 제천과 양산에 거주하시는 70세 되신 두 선생님 내외분, 우리 부부, 서울에 거주하시는 60세 정도의 여성 두 분, 60대 중반의 초등학교 동창생 세분과 50대 중반의 지인 한 분으로 일정 내내 서로를 배려하며 따뜻한 여행이 이루어졌다.

 

제 2일차 (5월 20일 월요일) 페루

만족할 만한 아침 뷔페를 먹고 새벽에 공항으로 이동하여 쿠스코행 비행기를 탑승한다. 8시에 리마를 출발하여 1시간만인 9시에 쿠스코에 도착하였다.

페루는 면적이 128만㎢로 세계1 8위, 인구 3,300만 명으로 세계 42위, GDP는세계 50위, 1인당 GDP는 7천 달러 세계74위로 기록되어 있다. 놀랍게도 인구의 수도권집중으로 리마인구가 급증하여 1천 200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수도권 인구집중은 어느 나라에서나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지만 그래도 너무나 놀랍다. 일자리를 찾아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이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의 월급은 우리 돈으로 60만 원 정도라고 한다. 리마는 해안가 대평원에 자리하고 있는데 쿠스코로 가는 비행기에서 보이는 안데스 산맥의 수 천 미터의 높은 산지들에는 만년설이 이어지고 끝없는 산맥을 지나는 동안 많은 마을과 구불구불한 길들이 평화롭고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알프스 산맥이 이어지는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에서나 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광경이다.

▣페루의 역사 : 는 원시 수렵농경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BC 2만 년에서 BC 10세기까지 안데스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몽골계 원주민이 거주하였고, 이후 이들이 고대 토착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러다 1세기까지 정착 농경문화를 형성해 이들이 만든 토기·피라미드 등의 신전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이 시기를 차빈문화로 부른다. 이어 BC 3세기~AD 8세기의 제1기 지역문화 시기를 거쳐 8~12세기의 통일국가 형성기를 티아우아나코 문화로 부르며, 이후 15세기까지를 제2기 지역문화시기로 부른다.

15세기에 이르러 망고 카파크가 나타나 잉카(태양의 아들)가 페루 전역을 지배함으로써 케추아족의 잉카 제국이 탄생하였는데, 전성기에는 콜롬비아 남부에서 칠레 중부에 이르기까지 1200만 명에 달하는 백성과 광대한 지역을 다스렸다. 그들은 정비된 정치조직을 바탕으로 관개농업을 발전시켜 서유럽을 능가하는 문명을 이룩하였고, 특히 거석을 이용한 건축술, 도시계획·의술 등에 뛰어났다.

1532년, 에스파냐의 F.피사로에게 정복된 후 300년 동안 에스파냐의 식민지로서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에스파냐는 1535년 리마에 부왕청을 설치, 인디오를 노예로 삼아 금과 은을 채굴함으로써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부를 누렸다. 그러나 에스파냐 귀족들의 영화도 1781년 콘도르캉기(두파크 아마르)가 이끄는 인디오들의 대규모 반란을 계기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1814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인디오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지 못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1821년 7월 '페루의 보호자'로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산 마르틴 장군이 리마로 들어와 페루의 독립을 선포한 뒤, 시몬 볼리바르가 다시 리마에 입성해 1824년 아야쿠초전투에서 에스파냐군을 격파함으로써 독립을 달성하였다.

1845년부터 1862년까지는 세 차례나 대통령을 역임한 카스틸랴의 지도 아래 약간의 진보정책이 실시되고 자유주의 헌법이 제정되는 한편, 구아노 판매에 따른 호황으로 근대국가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1879년 영국과 미국의 이해대립을 배경으로 한 대 칠레전에 휩쓸려 크게 패함으로써 1883년 초석과 구아노 산지(아리카·타크나)를 칠레에 할양하였는데, 이 지역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분쟁 대상이 되어 오다가 1929년 리마조약에 따라 칠레는 아리카를 차지하는 대신 타크나는 페루에 반환되었다.

그 후 레기아 독재정권, 산체스 세로와 오스카르 베나비데스 군사정권(1930~1939)을 거쳐 1939년 마누엘 프라도의 민간정부가 들어서면서 제2차세계대전 동안 미국과 공동보조를 취하였으나, 1948년 장군 오드리아가 군사혁명을 일으켜 1956년까지 다시 독재정치가 계속되었다.

1990년 7월 선거에서 당선된 후지모리는 가르시아 정부의 비동맹외교에서 탈피, 대선진국 외교를 중시하였다. 초 인플레이션 진정과 재정적자 해소에 주력하는 한편, 200억 달러에 달하는 외채 해결에 역점을 두고 긴축 경제 개혁 조치를 발표하였다. 1995년 재선에 성공했으나, 이듬해 일본대사관저 인질사건이 일어나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뒤, 1997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가입을 거쳐, 1998년에는 에콰도르와 평화협정을 조인함으로써 170여 년 간 지속된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1999년에는 70년간 지속되어온 칠레와의 국경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2000년 11월, 쿠리 야당의원 매수사건 파문으로 사임하게 된다. 2006년 7월 28일 대통령에 취임한 중도좌파 성향의 가르시아 대통령은 빈곤 축소 및 소득 불균형 완화를 추진하면서도 이전 정부의 시장지향적 경제 정책과 안정적 재정 정책이라는 기본 정책틀을 유지하며, 현 정부의 주요과제로 빈곤퇴치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에 두었다.

그러나 가르시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뇌물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다 경찰 강제 연행 직전인 지난 4월 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금년 3월 새 정부가 들어서고 대통령은 마르틴 비스카라이다.

쿠스코안데스 산맥의 동쪽 끝자락이며 아마존강 물줄기가 그리 멀지 않다. 가깝다. 해발 3360m 이르며 고산병을 유발한다. 우리는 미리 고산병 예방약을 준비하였는데 이곳 현지에서 가이드가 아주 값싸게 제공한다.(공항구입은 12,000원, 가이드는 3,000원) 쿠스코는 옛 잉카문명의 중심지로 왕궁이 있던 곳이다. 현재의 인구는 대략 50만 명 정도로 쿠스코주의 주도이다.

▣잉카문명 : 잉카 왕국은 1세기 동안 남북으로는 콜롬비아로부터 칠레의 마울레(Maule) 강까지, 그리고 동서로는 태평양 연안으로부터 안데스의 동부 계곡 지대까지 방대한 지역을 정복하여 제국을 건설하였다. 잉카 제국의 주민들은 쿠스코가 지구의 중심지이고 성지라 태양에 의해 빛나는 도시라고 믿었다. 잉카 제국은 각 지역 지배 계층의 자녀들을 쿠스코에서 집단적으로 교육시켰다. 잉카의 교육은 경직되어 있었으나 효율적이었다. 그들의 도덕률 개념은

◯나태한 자가 되지 말것(Ama Kella),

◯도둑질하는 자가 되지 말것(Ama Sua),

◯거짓말하는 자가 되지 말것(Ama Lulla) 등이었다.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게으름은 인류의 적이다. 지금도 남의 것을 탐내는 부정직한 인간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잉카 제국의 정복은 실용적이고 효율적이며 또한 전체주의적이었다. 잉카 제국은 정복지의 모든 주민들에게 케추아 어를 교육시켜 방대한 지역에서 언어의 통일을 이룩하였다. 일찍이 스페인 정복 때 참여한 초기의 연대기 학자들은 페루의 고산 지대에는 특성이 다른 44개의 부족 집단, 그리고 연안 오아시스 지대에는 38개의 다른 부족 집단이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1532년 피사로는 63명의 기병과 200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잉카제국을 정복하러 페루로 갔다. ...1532년에 승리를 거두고 1533년, 피사로는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로 군대를 신속히 이동시켜서 잉카제국을 점령하고 1535년에는 리마를 건설했다. 그 후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아타우알파의 동생 망코 카팍을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웠다.

■9대왕 동상 : 버스로 이동하면서 보았다.

■산토 도밍고 성당 : 옛 잉카시대의 신전자리에 세워진 성당이다. 석축들만 옛 태양의 신전의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그 위에 나머지는 스페인식 성당이 세어진 것이다. 대단히 큰 돌들을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 맞추어 쌓았다. 그들의 건축기술을 충분히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무기고 광장 : 꽤 넓은 광장으로 주변에 무기고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광장 주변 마을을 돌아보는데 수백년된 좁은 골목길들의 양편 건물들의 기초는 잉카시대의 기초석 그대로이다. 빈틈하나 없이 정교하게 거대한 돌들을 짜 맞추어 놓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그 기초석을 이용하여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선 것은 산토 도밍고 성당과 다름 아니다. 그래 맞다! 쿠스코는 바로 대제국인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것이다. 주변에 성당들이 있고 광장을 두른 건물의 이층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 악사들이 엘콘도 파사(철새는 날아가고)를 연주한다. CD는 구입치 않고 1달러를 주었다. 오랜만에 70년대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게 된다. 연주솜씨도 좋고 점심도 굳! 페루에 있는 동안 이 노래는 여기저기서 끝없이 흘러 나왔다.

 

 

 

 

 

▣엘콘도 파사(El Condor Pasa) : 남미 페루의 민요에 폴 사이먼이 가사를 붙여 사이먼과 가펑클이 부른 곡이다. 플루트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잉카 고유의 피리 연주와 이들의 환상적인 보컬 하모니가 어우러져 이국적인 매력을 더해 주는 아름다운 곡이다. "콘도르(condor)"라는 말은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인 잉카인들 사이에서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콘도르 새 역시 잉카인들에 의해 신성시되어온 새로서 그들의 영웅이 죽으면 콘도르로 부활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그래서 잉카인들의 삶과 종교에서 떼 놓을 수 없는 새로 알려져 있다. 스페인 통치하의 페루에서 1780년에 일어났던 대규모 농민반란의 중심인물인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Jose Gabriel Condorcanqui)와 잉카인들이 마추피추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슬픔과 콘도르칸키의 처지를 빗대어 표현한 노래이다. 페루에서는 콘도르를 여러번 볼 수 있었다.

달팽이가 되기보다는 참새가 되어야지.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게 좋겠지.

못이 되기보다는 망치가 되어야지.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게 좋겠지.

멀리 멀리 떠나고 싶어라.

날아가 버린 백조처럼.

인간은 땅에 얽매여 가장 슬픈 소리를 내고 있다네,

가장 슬픈 소리를.

길보다는 숲이 되어야지.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게 좋겠지.

지구를 내 발밑에 두어야지.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게 좋겠지.

■살리네라스 천연 염전 : 해발 3,000M 산골짜기 비탈에 위치한 계단식 논 형태의 천연염전으로 잉카인들은 모든 밭에 물이 스며들 수 있도록 수로를 설치했으며 시기에 따라 소금밭의 색이 조금씩 다르다. 지하에 형성된 나트륨광을 인근의 온천수가 씻으며 내려와 이 물을 계단식 논에 받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드는 유일한 천일염전이라고 한다. 이 깊은 안데스 산속에서도 소금은 있었다. 지금도 소금을 생산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루밤바 지역올란타이탐보 기차역으로 이동한다. 기차 출발시간은 촉박한데 길은 좁고 다른 관광버스들로 앞이 꽉 막혔다. 모두 내려 10여분을 기차역으로 내달렸다. 80세이신 두 분 형님들이 나보다도 더 잘 뛰신다. 양드리도 나보다 앞서 자알 달린다. 다행히 기차를 탄다. 16시 36분에 올란타이탐보를 출발하여 88km를 약 1시간 40분 달려 마추피추마을인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 도착하는데 기차길 옆으로 마을들이 나타나며 땅이 기름지고 작은 시내가 흐른다. 사람들이 능히 살 만 한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추피추마을은 3,000명 정도가 산다고 하는데 완전 관광으로 사는 도시라 한다. 송어요리로 저녁을 먹고 광장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 HATUN INTI CLASSIC MACHU PICCHU 호텔에 투숙한다. 작지만 깔끔하기는 하다. 규모와 시설은 우리의 모텔수준이다. 양드리와 산책을 하며 광장으로 내려가니 길거리는 호화로운 조명으로 빛나고 세계에서 모인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안데스 산맥 깊숙이 자리한 인적드문 마추피추가 아니다. 벤츠버스와 찬란한 유흥가와 세계의 젊은이들로 북적대는 마추피추의 오늘의 모습이다. 그러나 아침에 호텔에서 바라다 보이는 마을의 집들은 마치 지붕이나 구조나 영락없는 우리나라 해방 뒤 판자촌 모습 같다. 어쩌면 겉과 속이 저리도 다를까?

 

제 3일차 (5월 21일 화요일)

아침 8시 40분에 정류장으로 나가 마추피추행 셔틀버스를 탄다. 벤츠차량이다. 30여분을 달려 지그재그로 높은 산을 올라가는데 저 아래 보이는 산들이 그지없이 아름답다. 아! 이 깊고 높은 산속에 잉카인들의 마을이 있었구나! 정류장에서 불과 몇 분을 걸어 올라가니 나타나는 마추피추!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보던 저 페루 잉카문명의 대표적 유적이자 자랑인 마추피추로구나. 2시간 30분에 걸쳐 트래킹으로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낱낱이 구경한다. 신전제단은 석축구조가 쿠스코 신전과 동일하다. 다시 셔틀버스로 내려와서 어제 저녁에 식사한 식당에서 소와 닭요리를 먹다. 식당 앞에서는 여러 악사들이 요란하게 전통음악을 연주하여 감상하다. 식사 후에는 식당 바로 옆에 있는 대규모 관광상품 판매시장을 찾았는데 쇼핑에 관심이 없는 나는 벤치에서 마냥 편하게 쉬고 만다. 2시 30분에 기차가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역을 출발하여 우리가 출발했던 올란타이탐보역에 도착했다. 이제 버스로 19km 거리의 호텔이 있는 우루밤바로 간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캡슐호텔을 구경하다. 가파른 산을 오르는 힘든 등산을 하고서야 잘 수 있는 호텔로 바닥은 유리라니 나 같은 고소공포증을 가진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그런데 그 호텔비가 여간 비싼 것이 아니란다. 또 이동하는 중에 시골마을의 주점에 들어가 옥수수술을 한 잔 마시며 진열품을 구경하고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모텔겸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사장님이 아주 친절하시고 식당과 여행객 숙소를 운영한다고 한다. 우루밤바(황토평원의 뜻)는 2만 4천 명 정도가 사는 상당히 큰 시골도시다. 어둑해져서야 드디어 도착해 우리가 들어가는 호텔은 도시변방의 시골마을에 있는데 호텔로 들어가는 마을길이 너무 좁아 버스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비포장 흙먼지길이다. 모두 내려서 여행가방을 끌며 호텔로 들어서니 이게 웬 일인가? 작은 구식 대문을 들어서니 아름다운 정원이 꾸며진 마치 암함브라 궁전 같은, 마치 베르사이유 궁 같은 놀라운 호텔이 나타난다. 경이롭다. 다들 탄성을 지른다. HOTEL AGUSTOS, URUBAMBA 이라고 한다. 아침에 나오면서보니 아직도 호텔의 담은 세월을 알 수 없는 높다란 흙담인데 무너져 내리다시피 하고 있고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상상하기로는 어느 대 지주의 저택을 구입하여 호텔이 지어졌고 마을길이나 흙담은 국가에서 변형하지 못하도록 조치가 취해진 것으로 보인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지역이므로 전통을 보존하는 것이 더 각광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아~주 널찍한 6인용 객실을 준다. 정원이 너무나 아름다워 식사 후 다시 밖에 나와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마추피추 : 1911년 7월 24일, 예일 대학교의 역사학자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 1875~1956)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그 누구에게도 존재를 알리지 않았던 잃어버린 도시이며 산 아래쪽에서는 보이지 않아 공중에서만 확인이 가능한 공중도시이다. 물론 원주민들은 익히 알고 있던 곳이다. 이런 놀라운 모습의 마추픽추(Machu Picchu)는 잉카 제국이 멸망한 후 스페인 학살자들에게 쫓긴 잉카인들이 산속으로 숨어들어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도록 세운 비밀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도시의 모습이 신비하고 놀라운 만큼 그 도시의 유래에 대해서도 여러 이론이 있다. 여성 신관을 양성하던 종교 중심지란 이론에서부터 아마존과 잉카 제국을 연결하던 물류 중심지, 잉카 제국 왕의 별장이란 의견까지 다양하다.

잉카 원주민어로 ‘나이 든 봉우리’란 뜻의 마추픽추는 맞추피추 도시의 뒷산이다. 총 면적이 5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데도 도시 대부분이 산의 경사면에 건설되어 있어 외지인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다. 유적 주위는 높이 5미터, 너비 1.8미터의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요새라는 이름이 걸맞은 도시다.

 

 

 

 

 

 

 

 

 

 

 

제 4일차 (5월 22일 수요일)

아침밥을 먹고 나서도 예쁜 정원에서 양드리는 계속 사진을 찍어댔다. 덕분에 좋은 기념사진들이 많이 생겼다. 8시에 우루밤바를 출발하여 57km를 달려 쿠스코로 향한다. 가는 길에 모라이에 들린다.

우루밤바는 결코 작은 도시는 아니다. 인구가 2만 4천명이라는데 우리의읍보다 훨씬 지역이 넓다. 그러나 변두리의 집들은 여전히 후진국 농촌주택을 여실히 보여준다. 안쓰러울 정도다. 그런데도 아이들에게는 예쁜 옷을 입히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부모들이 배웅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우리나 저들이나 다름 아니다. 우루밤바 읍내에 살 수 없는 더 없이 어려운 집 없는 사람들은 나무도 없는 주변의 황폐한 산등성이에 집들을 짓고 산다. 국유지에 허가 없이 마구잡이로 지은 집들이며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거주보장은 받는다고 한다. 우리도 그랬다. 새마을 운동이 펼쳐지기 전인 60년대까지는 도저히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는 보여지지 않는 집에서 사는 친구들이 많았다. 방 한 두 칸의 토담초가집, 생솔가지를 때서 나는 시커먼 그을음으로 뒤덮인 벽, 그래서 온 집이 시커먼 집, 벽지도 바르지 못한 방에서 온 식구들이 구차스럽게 살아가는 집들이 많았다. 어린 시절이라 ?가난하니 그러러니? 하고 살았었다.

■모라이(MORAY) 잉카의 농업 시험장 : 모라이로 가는 길은 보리 같은 잡곡밭이 끝없이 펼쳐지는 고지대의 들판인데 농사는 형편없다. 토지는 메마르고 강우량이 적으니 수확이 아주 적을 것이다. 하지만 잉카인들은 이곳 해발 3,400M대에 원형 경기장식의 밭을 만들어 저지대 작물 적응 훈련 및 각종 곡물의 파종, 수확 시기를 알아보는 시험을 했던 곳이라고 한다.

구불구불한 길을 몇 시간 달려 쿠스코에 다시 도착했다. 쿠스코 앞산을 버스로 올라 여러 유적지를 찾았다. 오늘은 쿠스코를 다시 답사하고 리마로 간다.

■삭사이와만 요새 : 엄청나게 큰 돌을 이용하여 요새를 만들었다. 다시 한 번 그들의 석조건축과 그 신비함이 느껴지는 곳이다. 도대체 저런 돌들을 어떻게 움직여 이동시켰을까? 우리의 고인돌은 부근에서 떼어내어 옮긴 정도이지만 저들은 저 웅대한 돌들을 옮겨 쌓아 올렸다.

■겐코(지그재그 미로) : 큰 바위위에 있어 직접 볼 수는 없다. 대신 동굴제단을 들어갔는데 점을 치는 곳이었다.

■푸카푸카라 : 붉은 요새라고 하는데 차에서도 한 눈에 보이므로 그냥 차안에서 바라보는데 삭사이와만 요새와는 비교되지 않는 작은 규모이므로 큰 의미는 찾을 수 없다.

■탐보마차이: 잉카의 목욕탕이라 하는데 샘물이 넘쳐 흐른다.

점심을 먹고 오후 3시 22분 비행기로 리마로 간다. 어찌된 일인지는 잘 모르나 김, 박 두 여선생님들은 먼저 빠른 다른 비행기로 급히 출발했다. 처음 신청한 여행사가 달라서 그런가 보다. 16시 07분에 리마에 도착한다. 석식 후 공항으로 이동한다. 리마를 달리는 차량들은 도요타가 가장 많고 우리 현대와 기아차가 많다. 이곳저곳에 현대와 기아대리점들이 보인다. 자랑스럽다. 우리 대한민국 대단하다. 세계적인 수출기업들과 노동산업전사들 그리고 해외에 근무하며 우리 생산품을 팔고 있는 저 회사원들 덕분에 나는 황홀한 남미 여행을 즐기는 것이려니.

오늘은 기내박이다. 밤 12시 15분에 리마를 출발하여 6시간 만에 멕시코시티에 도착하고 다시 아침 10시 15분에 멕시코시티를 출발하여 오후 2시 5분에 쿠바의 아바나에 도착하여 하루 일정을 시작하게 된다.

 

 

제 5일차 (5월 23일 목요일) 쿠바

일이 터졌다. 인솔자 없이 환승을 두 번이나 하므로 회사에서 안내책자를 통해 멕시코 입국신고서쿠바의 비자를 잘 챙기도록 주의를 주었는데 우리는 방심하여 책자를 잘 살피지 않았다. 9시 55분 멕시코공항 71번 게이트에서 우리 부부는 입국신고서 반쪽을 제시하지 못해 탑승을 저지당했다. 빨리 이미그레이숀(출입국사무소)에 가서 복사해오라는 지시에 우리는 죽어라고 달려가서 요청했더니 양드리 것은 바로 떼어주고 내 것은 벌금을 내야 한단다. 양드리는 아에 입국시에 반쪽을 받지 않았던 것이고 나는 안일하게 별 필요 없을 것이라 여겨 큰 가방에 넣어 화물로 부쳐버린 것이다. 환전소에 가서 다행히 지갑에 있던 35달러로 페소로 환전하여 복사를 해서 다시 죽을힘을 다해 71번 게이트로 갔으나 시각은 10시 15분! 이제 탑승이 안 된다며 비행기가 이륙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우리 두 사람을 약 10여 분간 기다리다가 이륙했다하니 직원들이 무언가 잘 못 처리하지 않았나 싶지만 상황을 모르는 우리가 어쩌랴? 입국신고서는 비자나 체류확인서와 같다는데 항상 인솔자를 따라 다니므로 여지 것 소홀히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당황해서 영어로 제대로 소통하지도 못하면서 정신없이 뛰어다닌 20분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으리라.

‘이거 말로만 듣던 일이 내게 벌어졌는데 국제 미아가 되는 거 아니야?’하는 생각도 들고, 로밍하고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 이대표와 통화가 되어 본사에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말하고 추후조치를 요청하라 했지만 우리나라는 한 밤중이니 전화가 통할 리 없다. 우리 스스로 오후 비행기표를 구하려니 안내데스크 직원이 하는 말로는 표가 매진되었다고 한다. 매우 난감한 상태에서 정신을 차리고 회사에서 제공한 안내책자를 찾아 멕시코 현지회사 사장에게 전화를 걸으니 통화가 되었다. 李사장님께서 이틀 뒤 우리 팀을 인솔할 현지 가이드인 李가이드를 보내주어 문제는 해결되었다. 마침 이가이드는 한 팀을 마치고 아침잠을 자고 있다가 연락을 받고는 1시가 지나니 공항에 나와 주었다. 오후 6시 35분 티켓을 구하고 함께 햄버거로 점심을 때웠다. 이가이드는 어린 시절 익산에서 자랐고 현재 전주에 살고 있으며 이곳에서 교환학생으로 졸업하고 일을 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반갑고 다행스럽게 어려움이 해결되었다. 이미 부친 짐을 어찌되었는지 확인하니 이미 아바나로 갔다고 한다. 그런 줄 믿고 이번에는 69번 게이트에서 쿠바행 비행기를 타고 10시 30분에 하바나에 도착하였다. 비행기에서 막 나오자마자 웬 잘생긴 쿠바인이 모니터에 우리 부부 이름을 적고서 기다린다. 무조건 따라나서니 쉽게 쉽게 우리를 출국시킨다. 그는 우리 현지여행사 직원들과 친한 공항직원이었다. 짐을 찾는 곳으로 안내하는데 맨 처음 우리의 가방이 나오니 놀랄 수밖에 없다. 이미 아침 비행기로 온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곳 가이드가 연락을 받고 공항에서 아무리 우리 가방을 찾아도 없어 우리가 탄 비행기로 함께 오는 것에 기대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나중 들은 바와 추정으로는 우리 두 사람을 기다리다 제시간에 오지 않으니까 비행기에서 우리의 가방을 빼내었으나 보관소로 보내지 않고 있다가 우리가 티켓을 구매하자 6시 35분 비행기에 다시 실었던 것으로 여겨져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밤늦게 잘 생긴 청년 심 가이드가 마중나와 NACIONAL DE CUBA 호텔에 도착하니 11시 30분이다. 정말 으리으리한 호텔이다. 그나마 531호 특실을 주어 응접실까지 있다. 헤밍웨이는 90여 년 전에 511호실에 묵었다니 가까운 방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알프스 산에 있는 호텔에서 특실을 배정받은 일이 있는데 그 보다 훨씬 고급스럽다. 오늘은 공항에서 하루 내내 비행기만 기다리고 타고 오는 일정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오후 답사코스인 아르마스 광장, 구광장 (커피 시음), 산프란시스코 광장, 대성당, 보데기타 델 메디오 (모히토 시음), 암보스 문도스 호텔, 오비스포 거리, 포격식장 관람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거 별거 아니다. 만일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 쿠바에 오지 못했다면 어쩔 뻔 했나? 만일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하면

?칸쿤이라도 다녀오시면 어떠냐??고 하시는 현지 사장님 말씀에

?그냥 공항에서 지내고 말지요.?라고 대답했었다.

 

제 6일차 (5월 24일 금요일)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면서 우리 일행들에게 심려를 끼친데 대한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반갑게 인사하였다. 다들 많이 걱정하였으나 곧 비행기표를 구하여 저녁에 합류한다는 소식이 왔으므로 모두들 안심하였다고 한다.

쿠바는 인구는 1200만 명으로 세계에서 북한과 함께 사회주의 폐쇄적 기획경제체제를 여전히 유지하는 대표적인 국가이다. 국민소득은 5~6천 달러라고 발료하고 있으나 가이드는 실제로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쿠바의 역사 : 콜럼버스가 쿠바섬을 발견한 것은 제1차 항해중인 1492년이었다. 당시에는 시보네족· 타이노족 등 5만여 명의 원주민들이 고도로 발달된 농경생활에 종사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에스파냐인은 1511년 D.벨라스케스를 파견하여, 1514년에는 전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지 체제를 확립하였다. 원주민들은 사금 채취와 농장 노동 등으로 혹사당한 데다 1528년의 대 에스파냐 반란, 1530년의 악성 유행병 등으로 거의 전멸상태에 이르렀다.

16세기 초부터 에스파냐인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담배· 사탕수수 재배에 종사시켜 막대한 이윤을 거두어들였는데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더욱이 쿠바는 에스파냐와 아메리카대륙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에스파냐는 이곳을 총독령으로 만들고 신대륙 경영의 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본국의 중상주의 정책으로 쿠바는 경제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고 정치적으로도 권리를 갖지 못한 상태였다.

17∼18세기에는 흑인들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에스파냐의 가혹한 탄압으로 끝을 맺었다. 19세기 초 아메리카대륙에서 일어난 미국독립혁명의 영향이 이곳에도 파급되어 1812년에는 아폰테의 지도 아래 대규모 흑인반란이 일어났다. 그 후 노예제도 폐지, 농민혹사 금지와 독립을 요구하는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1868∼1878년의 ‘10년 전쟁’에 돌입하였다. 이 독립전쟁 기간 중 공화제 헌법이 공포되고 데 세스페데스의 공화정권이 수립되었으나, 1878년 정치·경제의 개혁과 노예해방을 약속한 ‘산혼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은 일단 종결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1895년 쿠바 혁명당을 결성한 호세 마르티를 중심으로 제2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어 1898년 아바나항에 정박 중인 미국 선박 메인호에서 원인 모를 폭파사건이 일어나 미국은 에스파냐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 전쟁에 개입하였다.

그 결과 전쟁은 4개월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파리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에스파냐는 쿠바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의 군정이 실시되었으며, 1901년 공화제 헌법 제정과 때를 같이하여 미국의 내정간섭과 군사기지 설치를 인정하는 ‘플래트 수정조항’이 추가되어 1903년부터 1999년을 예정으로 관타나모만 등에 미국의 해군기지가 설치되었다. 미국의 군정 종결과 함께 1902년 5월 E.팔마를 수반으로 하는 공화제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양질의 토지, 사탕산업, 교통수단 등 쿠바 경제의 중추적 기능은 미국자본이 장악하였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수뢰· 부패· 실정· 무책임으로 상징되는 고메스(재임 1909~1913) 정권에 이어 가르시아(1913~1921), 사야스(1921~1925), 마차도(1925~1933), 바티스타 이 살디바르(1934~1944, 1952~1959), 마르틴(1944~1948)의 독재·부패 정치가 계속되었고 1912년에는 아프리카계 쿠바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3,000여 명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특히 미국의 지지로 정권을 장악한 마차도와, 1933년 쿠데타로 마차도 정권을 전복시킨 바티스타는 속임수· 군대· 암살을 통하여 권력을 유지한 인물로 악명이 높다. 더욱이 1933년 직접·간접으로 쿠바의 정치를 좌우해온 바티스타는 1952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쿠데타로 취소된 1952년 선거에 대통령으로 출마하였던 피델 카스트로는 1953년 7월 산티아고의 몬카타요새를 공격하여 이른바 7.26운동이라고도 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하고 투옥되었다. 1955년 감옥에서 풀려난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망명하여 정부 전복을 준비하는 한편 이듬해에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에 상륙하였다. 이후 마에스트라산맥을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벌인 끝에 1959년 1월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총리로 취임한 카스트로는 그해 5월 농지개혁법을 발표하고 대지주의 토지와 미국계 기업의 대농원을 몰수하였다. 1959년의 석유법, 1960년의 대기업 국유화법으로 미국계의 사탕·석유회사를 접수하는 등 개혁을 단행하여 미국과 대립하다가 1961년 1월에는 국교를 단절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미국 기업인들의 지원을 받은 망명 쿠바인들이 쿠바로 진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62년 10월에는 소련 중거리 미사일의 쿠바 반입과 미국의 쿠바 해상 봉쇄로 인한 쿠바 위기사태가 발생하였으며, 같은 해 우루과이의 푼타델에스테에서 개최된 미주기구(OAS)의 외상회의에서 축출된 데 이어, 1964년 회의에서는 대 쿠바 경제봉쇄강화조치가 결정되어 멕시코를 제외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의 국교가 단절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 칠레에 아옌데의 좌파정권이 등장하자 칠레와 복교한 후 1973년까지 페루· 가이아나· 자메이카· 트리니다드토바고· 바베이도스· 아르헨티나와 국교를 회복하였고, 미국과는 1973년 2월 항공기 공중납치 방지협정을 체결하였다. 1994년에는 이민 협의를 체결하였으나 1996년 쿠바의 미국 민간기 격추사건으로 관계가 냉각되었다가 1999년과 2000년에 미국이 대 쿠바 경제제재를 일부 완화하였다.

한편 1960년대 중반부터는 소련과 연합하여 아프리카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쿠바는 1962~1970년은 혁명국가 건설에 치중하였고, 이후 1970년대 및 1980년대에 국제혁명화 전략을 취하였다. 볼리비아 좌익게릴라를 지휘하던 체게바라가 피살된 후에도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페루, 아르헨티나 등지의 좌익게릴라 훈련을 지원하고, 자메이카 마이클 맨리 정권이나 그레나다의 모리스 비숍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고문관과 노동자들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며, 아프리카 앙골라내전이나 에티오피아에도 쿠바군을 보내기도 하였다.

미국과는 1980년 4월 지미 카터 대통령 때 처음으로 화해조치가 취해졌고, 1981년 12월 양국간의 긴장해소를 위한 회담이 열렸다. 1982년에는 소련으로부터 10억 달러 상당의 군사장비인 SA3 지대공 미사일 140기를 제공받는 등 이후로도 소련과 경제적· 군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2000년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방문하였고, 2002년 5월에는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방문하였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하였다. 2003년 3월 75명의 반체제인사를 체제전복 혐의로 일괄 구속시켰으며, 10월에 부시 미 대통령은 쿠바 민주화를 위한 이니셔티브를 발표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2004년 11월에는 쿠바 내 미국 달러 통용을 금지시켰다. 2006년 7월 31일 병환 중인 카스트로가 동생 라울에게 한시적 권력이양을 발표하고 12월 2일 라울이 미국과의 대화를 제의하자, 12월 15일 사상 최대 규모인 미국 의회대표단 10명이 쿠바를 방문하였다. 2007년 1월에는 관타나모 기지 폐쇄를 촉구하는 국제인권단체의 쿠바 평화행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2008년 2월 19일에 쿠바를 49년간 통치해온 피델 카스트로가 국가원수직 사임 발표를 하였으며 2008년 2월 24일에 쿠바혁명 이래 줄곧 국방부장관직을 수행해온 라울 카스트로(1931~ )가 국가평의회 의장 겸 각료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현재는 미겔 디아스카넬이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국가수반이지만 실재 권력은 라울 공산당 총서기에게 있다.

■까삐똘리오 광장 : 가장 중심광장이라 하며 각종 정부청사들이 있다. 엘 카피톨리오는 1929년 당시 대통령인 마차도의 사업으로 미국 국회의사당을 본따 만들었다고 한다. 버스로 시내를 돌면서 눈으로만 아르마스광장, 바닷가 요새들을 보았다.

■럼 박물관 : 럼주를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게 하며 판매도 한다.

■헤밍웨이 박물관 투어 : 아바나 남쪽 12㎞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헤밍웨이 박물관(Museo Ernest Hemingway)은 헤밍웨이가 생전에 살았던 집을 박물관으로 만든 곳이다. 수 만평 규모이며 나무가 우거지고 아름다운데 제국주의 시대 대농장주들의 저택과 같은 모습이다. 헤밍웨이가 네 번째 부인과 거주하던 집의 여러 방을 잘 볼 수 있으며 그가 즐기던 수영장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박물관이 있는 조그만 언덕의 북쪽으로는 아바나 시내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후텁지근한 날씨이고 상당히 덥다. 이곳은 여름으로 들어선다고 한다. 손님들을 싣고 예쁜 올드카들이 계속 드나든다.

 

 

 

■코히마르(COJIMAR) : 1956년에 이곳에서 촬영한 <노인과 바다> 배경으로 유명한 아바나 동쪽에 있는 작은 어촌이다. 헤밍웨이가 바다낚시를 하던 곳이라고 하는데 여기처럼 관광객이 별로 보이지 않는 곳에도 악사들이 연주를 하며 돈을 기다린다. 양드리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1달러를 준다. 이곳 길가식당에서 정말 기억에 남는 좋은 식사를 하였다. 나오고 또 나오고....푸짐하다. 얼음냉수에 럼을 참가하여 주고, 닭죽, 선택한 탄산음료수, 삶은 호박물, 빵과 튀김요리, 김 등은 전체요리이고 개별요리로 양고기와 돼지고기, 랍스타 중 선택하여 준다. 흰 쌀밥에 팥죽을 얹어 먹는다.

가이드는 쿠바는 사회주의체제라서 생필품을 배급하므로 스스로 국민소득이 6,000달러라는데 실제로는 5천 달러 정도로 보인다고 말한다. 가스나 전기세는 몇 천 원정도로 엄청 싸고 학비는 모두 무료라고 한다. 그러나 배급에는 한계가 있고 생필품을 사고 살아가야하므로 월급이외에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다. 대개 월 1천 달러는 되어야 살만 한데, 월급은 일이십 만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로는 생활모습이 국민소득 3천 달러인 베트남만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쿠바는 모계사회이고 아이들을 크게 우대한다고 한다. 우리가 오늘날 무궁화 5개짜리 호텔에서 잠자고 산해진미를 맛보면서 여행할 수 있는 건 우리 대한민국이 경제 선진국이고 내가 중산층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국민임이 자랑스럽고 국가든 나 개인이든 언제까지나 경제는 잘 지켜 어려움 없이 노후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 선진국 국민으로서 우리보다 어려운 후진국들을 방문하며 엄청난 특권을 누리면서 여행하고 있다. 과거 70년대에 유행하던 남미 여러나라들에서 전개되던 사회주의운동과 제국주의 비판적 관점에서 보면 지금 우리들은 후진국 착취여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쿠바 곳곳에는 후람보잉이라는 정자나무처럼 큰 나무가 곳곳에 자라는데 그 꽃이 매우 아름답다.

▣헤밍웨이(1899~1961)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 주 시카고 교외에 있는 오크파크라는 마을에서 6남매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17년 4월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게 되자 헤밍웨이는 졸업하기 직전에 군대에 들어가려 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가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캔자스시티 스타》의 기자가 되었다. 1918년(19세) 4월 신문사를 그만두고 5월에 이탈리아 전선의 야전병원 수송차 운전병으로 참전했으나 2개월도 채 안 되어 부대가 폭격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휴전 후 귀국하여(1919년) 소설가 셔우드 앤더슨과 만남을 가지면서 문학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1921년 11월에 캐나다 ‘토론토 스타’ 및 ‘스타 위클리’의 해외 특파원으로 파리에 간 그는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제임스 조이스 등 수많은 작가들과 교류했다. 1923년 『3편의 단편과 10편의 시(Three Stories and Ten Poems)』를 처음으로 파리에서 출판했고, 1924년 스케치풍의 단편 모음집 『우리 시대에(In Our Time)』(1924)를 출간했다. 1925년 10월 단편소설집 『우리 시대에(In Our Time)』(1925)가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1925년(26세) 파리에서 만나 교류해온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출판사 찰스 스크리브너를 소개받아 1926년 5월 첫 장편소설 『봄의 격류(The Torrents of Spring)』를 출간했다. 1926년(27세) 10월에 장편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를 출간하면서 일약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후 파리와 스페인을 배경으로 각국 망명객들의 향락적인 풍속을 다룬 이 작품은 젊은이들의 애독서가 되었고, 헤밍웨이는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대표 작가로 지목되었다. 1928년(29세)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와 플로리다 주 키웨스트에 머물면서 주요 작품을 집필했다. 그 해 3월 파리에서 쓰기 시작한 명작 『무기여 잘 있거라』를 탈고 이후에도 수정을 거듭해 1929년 1월에 완성했다. 『무기여 잘 있거라』는 1929년 9월에 발표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4개월 만에 8만 부가 판매되었다. 1932년(33세)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을 출간했고, 1933년 10월에 단편집 『승자는 허무하다(Winner Take Nothing)』를 발표했다.

1935년 10월에 아프리카의 수렵 여행을 다룬 논픽션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Green Hills of Africa)』을 발표했는데 유명한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은 이 아프리카 케냐 여행에서 얻은 것이다. 1937년(38세) 스페인내란이 발발하자 공화정부군에 가담했다. 1939년 3월 스페인내란이 파시스트인 혁명군의 승리로 끝나자 미국으로 돌아온 헤밍웨이는 1년 이상에 걸쳐 스페인내란을 배경으로 완성한 대작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를 1940년(41세) 10월에 출간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1944년(45세) 6월 특파원 자격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귀국하여 쿠바에 거처를 정하고 집필에 매진했다.

1952년(52세) 9월에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가 발표되었는데, 처음에 ‘라이프’ 9월 1일호에 전문이 실린 다음 9월 8일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이 작품으로 헤밍웨이는 명성을 회복했고 195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1954년 노벨 문학상에 선정되었다. 『노인과 바다』 이후 거의 아무것도 발표하지 못했고,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증, 기타 질병에 시달리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그는 1961년 7월 2일 아침 엽총의 총구를 입에 문 채 방아쇠를 당겨 자살했다.

점심을 먹고 아바나를 출발하여 약 2시간 고속도로를 달려 바라데로에 도착한다. 마탄자스 만을 지나고 나면 이어 긴 작대기 같은 반도를 타고 가는 해안길은 아름답다. 바라데로는 쿠바 최고의 휴양지이다. 수 백개의 호텔과 리조트들이 즐비한데 미국의 플로리다가 지척이고 바라데로의 에메랄드 빛 바다는 쿠바에서 제일 인기가 좋다고 한다. 우리가 하루 동안 묵을 리조트는 반도의 끝자락에 있는데 리조트내의 모든 식음료 및 프로그램이 객실 가격에 포함되어 있어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 리조트의 정식 이름은 MEMORIES VARADERO BEACH RESORT이다.

모두 21개동으로 구성된 리조트는 대형 풀장이 2개, 대형 식당 및 기타 작은 식당들, 각테일 바가 있고 공연장이 두 곳이고 해안비치가 있다. 우리는 팔목에 녹색띠를 찼는데 이는 다이아몬드급이어서 식당도 일반식당과 다르게 위치하고 서비스도 특별하다. 커피나 물, 음료를 시키면 서비스걸들이 친절하게 가져다준다.

다이아몬드바에서 각종 각케일을 마음껏 주문하여 마실 수 있고 객실 냉장고에 있는 맥주와 음료도 공짜다. 여장을 풀고는 해안비치에 나가 놀다가 저녁을 먹고 두 개의 공연을 관람하다. 대중음악의 수준이 높고 모두들 예술을 즐기는 낭만의 나라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리조트는 거의 모두가 외국인이고 쿠바인들은 극히 소수이다. 가격이 비싸 쿠바인들은 들어오기 힘들다. 우리 호텔료가 1인당 20만 원 이상이라는데 시민들의 월평균 월급은 일이십만 원이고, 전체가구수입이 100만 원 정도라니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가이드와 기사도 다른 싼 호텔에서 묵고 아침에야 왔다. 우리도 1인당 80만 원 짜리 리조트에 들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제 7일차 (5월 25일 토요일)

아침을 먹고 다시 해안해수욕장으로 간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모습이 펼쳐진다. 서양인들이 비키니를 입고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여성들은 블레지어도 벗고 엎드려 있다. 이 번 여행에서는 다른 우리 한국인 여행팀들을 전혀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아직은 중남미 여행이 보편화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구동성으로 ?중남미는 해외여행의 끝판?이라하는 말이 실감이 난다. 동남아시아나 유럽에서는 끝도 없이 만나는게 한국인 여행객들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올인클루시브 리조트에 와서 대서양 해안가 비치 벤치에 누워 있자니 내가 제국주의 선민이 되어 식민지 속국에 와서 특권을 누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곰곰 생각해보니, 아!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게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짐을 꾸려 본부에 위치한 다이아몬드바에서 모히또와 비루께스를 여러 잔 마신다. 시원한 얼음을 넣어주니 마치 음료 같아서 술술 잘 들어가기 때문이다. 점심은 별도의 작은 식당에서 간단하게 햄버거로 먹고 우리는 리조트를 떠났다.

 

 

 

아바나에 도착하여 먼저 찾은 곳은 벼룩시장이다.

●벼룩시장 : 상당히 큰 시장인데 이곳에서 아버지께 드릴 파나마모자를 샀다. 에콰도르산인데 창이 약간 크지만 여름 햇빛을 가리는 데는 괜찮을 듯싶다.

 

 

 

●올드카 투어 : TV에서 쿠바 여행을 보여줄 때면 으레 등장하여 호기심을 자극하는 올드카 투어를 한다. 4명씩 타게 되는데 제일 오래된 차는 2014년 형이라 한다. 대개 수십 년 된 미국산 차들로 요즈음은 전혀 생산되지 않는 예쁜 차들인데 나는 관광객들에게만 제공하는 것으로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차들은 거의 모두가 올드카이다. 현재 생산되는 신차는 값이 엄청난데 이는 관세를 크게 물리기 때문이며 우리 SUB차량 한 대를 구입하려면 1억 5천이 든다나? 올드카는 대개 4천만 원 정도인데 한 대만 가지고 운행하면 능히 잘 살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 백년이 넘은 차가 굴러다니고 온통 수십년씩 묵은 차들이 질주하는 걸 보니 15년된 우리 양드리 라세티는 주행거리가 7만밖에 되지 않으니 적어도 10년은 더 타겠다. 올드카를 타고 호세 마르티 동상이 있는 엄청난 규모의 혁명 광장으로 간다.

●혁명광장 : 주변에 대통령 궁을 비롯한 정부 청사가 많고 체 게바라와 어느 젊은 혁명파장군의 형상이 대형건물에 걸려 있다. 올드카는 우리를 랍스타를 먹을 수 있는 식당으로 데려다 준다.

 

 

 

▣호세 마르티(1853-1895) : 아바나 출생. 소년시절부터 쿠바의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에스파냐로 추방당하였으나, 사라고사대학에서 법률과 문학을 공부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귀국과 추방이 반복되었고, 뉴욕으로 가서 《조국 La Patria》지(誌)를 간행, 쿠바의 독립과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우호 증진에 노력했다. 그 후에 정치에도 참여, 정당의 당수가 되었고, 1895년 4월 M.고메스 등과 무장독립군을 이끌고 쿠바에 상륙하였으나 에스파냐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문예평론 · 전기 · 설화집 등을 남겼으며, 특히 소박한 인간 감정이 넘치면서도 근대적 감각을 풍기는 시로 근대주의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이스마에리요 Issmaelillo》(1882) 등의 시집은 독립 후 아바나에서 발간된 《호세 마르티 전집 Obras completas de José Martí》(27권, 1963∼1965)에 수록되어 있다.

▣피델 카스트로(1926-2016) : 쿠바 동쪽 끝 올긴(Holguin) 주의 한 소도시에서 출생. 1945년 말 아바나대학교(University of Havana) 법학과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다. 대학 재학 때부터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47년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Rafael Trujillo)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침공에 합류하였다.

1948년에는 콜롬비아 보고타(Bogota)에서 발생한 도시폭동사건에 참여하였다. 1953년 당시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Batista)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동지 156명과 함께 쿠바의 산티아고데쿠바(Santiago de Cuba)에 있는 몬카다(Moncada) 병영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55년 5월 특사로 풀려나 아바나로 돌아오자마자 멕시코로 망명, 바티스타 정권 타도 계획을 세웠다. 1956년 86명의 동지들과 함께 원정에 나서 오리엔테(Oriente) 주 시에라마에스트라(Sierra Maestra)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1959년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독재정권을 세워 총리가 되었다. 총리에 취임한 후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을 몰수하는 등 사회개혁을 단행하였으며, 그해 제1차 아바나선언을 발표하여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제창하였다.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1961년 4월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쿠바 해안을 침공한 반혁명군을 격퇴하였으며, 5월 쿠바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하고, 7월 쿠바사회주의혁명통일당을 결성, 제1서기에 취임하였다. 1962년 10월 소련의 중거리미사일의 쿠바 반입을 둘러싸고 핵전쟁 위기로까지 발전하였으나 미국이 카스트로 정부 전복을 기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종결되었다. 이듬해 제2차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1965년 쿠바사회주의혁명통일당을 PCC(Communist Party of Cuba:쿠바공산당)로 개칭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초에는 중국이나 소련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고 자주독립이라는 입장을 취하였으나, 1972년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 공산권의 경제협력기구인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에 가입한 후 점차 친소적(親蘇的) 성향을 띠게 되었다. 1976년 신헌법을 제정하는 등 사회주의국가체제 정비에 힘썼다. 1976년 12월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하여 당· 정부·군의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소련 등 동구권의 민주화 바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해나갔다.

2006년 7월 장 출혈 수술을 받기 위해 친동생이자 공식 후계자인 라울 카스트로(Raul Castro) 국방장관에게 임시로 권력을 이양한 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사망설이 돌기도 하였으나, 10월 말 국영 텔레비전에 모습을 보이면서 사망설을 일축하였다. 2008년 2월에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사임하고 권력을 라울 카스트로에게 넘겼다. 2016년 11월 25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체 게바라(1928-1967)

◯출생과 집안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Rosario)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스페인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고 상류층에 속했다.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와 어머니는 셀리아 데 라 세르나는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사업을 했지만 그의 집안은 부유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문학과 사상에 대한 열정이 매우 높았던 사람으로 집안에는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다. 체 게바라는 자연스럽게 많은 책을 접하면서 성장하였고 그의 집에는 예술가, 지식인들의 교류가 많았다. 체 게바라는 진보적 성향의 어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후일 그가 사회주의 혁명전사가 되는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보여진다. 그의 형제 중 체 게바라는 첫째이며 동생은 4명이 있었다.

◯의과대학 진학

1945년 그의 가족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하였고 체 게바라는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학창시절 그는 성실한 학생이었으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스포츠와 여행을 좋아했다. 1951년 친구 알베르토와 함께 모터사이클을 타고 남아메리카 일대 4500km를 여행하면서 라틴아메리카의 고대유적과 문명에 매료되었다. 1953년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의사가 되었다.

◯라틴아메리카 여행

그해 그는 두 번 째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 그는 볼리비아와 페루를 지나 과테말라로 그리고 파나마를 거쳐 코스타리카를 여행했다. 이때 여행에서 체 게바라는 라틴아메리카 역사와 민중들의 삶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체 게바라는 이때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가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하게 된다.

◯정치혁명가로 활동

과테말라에서 여성혁명가인 일다 가데아 아코스타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사회민주주의정당에 소속되어 정치혁명가와 폭 넓은 인맥과 정치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1955년 멕시코에 머무는 동안 쿠바 혁명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혁명에 뛰어든다. 멕시코에서 쿠바혁명군을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로 침투하였다.

◯쿠바혁명의 성공

1957년 반군부대의 대장을 맡았고 쿠바 바티스타 정부군과 싸웠다. 그리고 이 무렵 두 번 째 부인 알레이다 마치를 만나게 된다. 1959년 쿠바혁명에 성공하여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 쿠바 시민이 되어 라카바니아요새 사령관, 국가토지개혁위원회 위원장, 중앙은행 총재, 공업 장관 등을 역임하며 '쿠바의 두뇌'로 불리면서 쿠바정권의 기초를 세워나갔다.

◯게릴라 활동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군에게 점령되자 위기를 느낀 미국은 1961년 쿠바를 침공하였다. 쿠바는 미국의 공격을 물리쳤지만 미국에 의해 경제봉쇄를 당하게 되었다. 체 게바라는 소련을 방문하여 경제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무기원조를 요청했으며 쿠바에 소련제 미사일을 배치하여 미국의 공격에 대비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소련은 미국과 협상으로 쿠바에 배치했던 미사일을 철수하였다. 체 게바라는 소련의 조치에 실망하여 소련은 더 이상 사회주의혁명을 지원하는 종주국이 아님을 천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은 노동계급을 위한 대중혁명을 지원하는 것이며 쿠바에서 성공한 사회주의혁명을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확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게릴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아프리카 콩고에서 게릴라 지원

1965년 4월 소련과 갈등으로 쿠바의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체 게바라는 혁명 게릴라들의 국제주의 전선의 형성을 위해 아프리카 콩고로 떠난다. 그는 콩고에서 게릴라 부대를 훈련시키고 그의 혁명 동지들과 게릴라 활동을 펼치지만 혁명연합이 와해되고 콩고 좌파세력들의 쿠바인 철수 요구로 성과 없이 쿠바로 돌아오게 된다.

◯볼리비아 혁명에 참가하였다가 사망

쿠바에 돌아온 이후 볼리비아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게릴라 요원을 훈련시켰으며 1966년 가을에는 볼리비아에 직접 잠입하였다. 하지만 볼리비아 혁명세력으로 부터 지원을 받지 못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산악지대에서 소규모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여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혁명을 위해 군사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1967년 10월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포위되어 종아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체 게바라는 다음날 곧바로 총살당하였다. 그의 유해는 총살당한 지 30년 후인 1997년 6월 볼리비아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었으며 그해 10월 전사한 당시의 그의 참모들과 함께 쿠바 산타클라라 시의 기념관에 매장되었다.

●랍스타 특식 : 랍스타를 맛있게 먹어보기는 처음이다. 나는 게장이나 게찌개 국물은 좋아하지만 게살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다 랍스타는 가격이 비싸므로 내게는 가성비가 최하이므로 먹어본 기억도 거의 없다. 필리핀에서 가재를 맛있게 먹어본 기억 정도이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공연 : 원래는 다른 호텔로 이동하여 관람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1인당 50달러를 준비했으나 우리가 묵는 NACIONAL DE CUBA에서 공연이 있으므로 30달러만 지불하였다. 칵테일 1잔을 준다.

남성들만으로 구성된 재즈공연이다. 하늘의 별을 보며 호텔 야외공연장에서 거의 두 시간에 걸친 음악을 듣는데 졸다 듣다 하였다. 그러나 분위기가 좋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제 8일차 (5월 26일 일요일)

6시 10분에 비행기는 아바나를 출발하여 8시 25분에 멕시코시티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작성한 입국신고서 반쪽은 단단히(?) 잘 보관하였다. 자칫 잘못하다간 한국으로 못 갈라! 공항에서 이 가이드를 반갑게 다시 만났다.

멕시코는 면적이 세계 13위이며 인구가 1억 3천만이 넘어 10위인 대국이며 GDP는 세계15위로 OECD회원국이다. 1인당 GNI는 약 1만 달러이니 중진국 수준이라 하겠다. 멕시코는 건기가 지나고 우기가 시작되는 시기로 양지는 여름처럼 뜨겁고 그늘은 서늘한 기후라고 한다. 이제 막 산과들의 나무들이 잎을 무성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멕시코의 역사

멕시코에는 1521년 에스파냐인에게 정복되기 훨씬 이전부터 원주민 인디언에 의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미 BC 2000년 경 옥수수 농사를 기반으로 한 촌락이 각지에 발달하였으며, 기원 전후에 이르러서는 멕시코 중앙고원의 테오티우아칸에 태양과 달의 거대한 피라미드가 구축되었고, 이것을 중심으로 도시가 건설되었다. 한편 남쪽에서는 멕시코만 기슭부터 오악사카계곡에 걸친 일대에 몬테알반의 사포텍문명, 유카탄반도에 마야문명이 꽃피고 있었고, 900년 경에는 군국주의적인 국가가 성립되었다.

멕시코 중앙고원의 톨텍, 마야에 뒤이은 치첸이차, 욱스말 등의 후기 고전문명이 융성하였으며, 멕시코분지 일대에서는 아스텍제국이 일어나 1325~1521년까지 약 200년간 테스코코호 주변을 도읍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521년 8월 에스파냐 탐험대의 장군 코르테스에게 정복된 후 300년 동안, 에스파냐의 ‘누에바에스파냐’로서 에스파냐의 부왕이 통치한 식민지 시대가 전개되었다. 16세기는 식민과 포교의 시기, 17세기는 혼혈화가 진전된 시기, 그리고 18세기는 고유의 혼혈문화를 형성하여 독립의 기운을 북돋운 시기이다.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은 1810년 9월 16일 혁명적 애국자인 미구엘 이달고의 유명한 ‘돌로레스의 부르짖음(Grito de Dolores)’을 계기로 기운이 일기 시작하여, 1821년 멕시코의 독립을 인정한 코르도바 협정에 의해서 성립되었다. 독립 이후 식민지시대가 끝나고 전제정치로부터 공화제로 이행하여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나, 중앙집권주의파와 연방주의파의 대립이 심하여 혼란에 빠졌다. 1846년의 실정은 미국과의 전쟁을 초래하여, 2년 후에는 영토의 북부를 상실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연방주의파는 인디언 출신의 베니토 후아레스를 대통령으로 하여 자유주의 헌법을 반포하고, 정교분리를 단행하여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이른바 레포르마(개혁)를 달성하고 근대화를 지향하였다. 1861년 외채 지불문제로 무력간섭이 비롯되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이 괴뢰황제로 부임했으나 총살당함으로써 간섭정치는 종지부를 찍었다. 뒤를 이어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등장했으나, 대토지소유제 강화가 기폭제가 되어 1910년 11월 20일 멕시코 혁명으로 돌입하였다.

1917년 2월 5일 국가의 권리와 농민·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된 혁신적인 신헌법이 시행되었다. 오늘날 멕시코의 근대국가로서의 번영은 이 신헌법을 바탕으로 구축된 것이다. ‘아시엔다’라 불리던 대토지 소유제도는 농지개혁으로 무너졌다. 이후 1934년 취임한 대통령 카르데나스에 의하여 집단농장의 창설, 멕시코노동자총연합(CTM)의 결성, 석유업의 국유화 등이 추진됨으로써 경제가 크게 발전하였다. 1970년대 중반 집권한 대통령 포르티요 때에는 주요 산유국 중 하나가 되면서 빠른 경제 발전을 보였다. 그러나 지나친 외채 부담과 1980년대 중반이후 계속되는 유가 하락으로 인해 포르티요 이후의 대통령들은 심각한 재정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후 집권한 대통령들은 재정적 위기상황의 개선과 광범위한 경제부양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1980~90년대에 걸쳐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포함한 시장 자유화 조치도 그 일환으로 행해졌다. 현 대통령은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인데 1953년생이라 하니 우리 문재인대통령과 나이가 같고 나와도 동갑이다.

●소깔로 광장 : 엄청나게 큰 광장인데 이곳에 메트로폴리탄 성당이 있어 마치 유럽의 대성당 같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곳인 소칼로 광장은 스페인 지배 당시 세워진 건물로 둘러싸여 있어 유럽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대통령궁 : 현재 사용하는 대통령 집무청 이라는데 수많은 관광객들이 드나드니 과연 실제 사용하는 게 맞나 싶다. 하긴 우리 청와대 본관을 관광객들이 줄지어 다니고 있기는하다. 입구에서부터 2층 복도는 온통 벽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1920년대에 제작되었다고 하며 멕시코 왕국의 역사를 담은 대서사시이다. 멕시코에서는 아즈텍의 왕국대신 멕시칸의 왕국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점심은 아리랑 식당에서 한식으로 맛있게 먹는다. 한국인 부부가 정성을 다해 만드는데 한국에서 먹는 거와 전혀 다름이 없다. 점심을 먹고 저녁에 잠을 잘 도시인 은광도시이자 현재는 관광도시인 멕시코시티 남쪽에 위치한 탁스코로 향한다.

●석회암 동굴 : 시골길을 달려 까까우밀빠라는 석회암동굴에 도착하는데 국내외 관광객들로 붐빈다. 세계최대라고 하는데 실감은 전혀 나지 않는다. 동굴의 넓이와 높이는 인정하되 아름다움이 별로이고, 물이 지하로 빠져 나가버려 동굴안에는 아예 물도 없고 따라서 물소리가 없다. 규모가 커서 가는 길을 신작로처럼 잘 다듬어 놓았으며 특별한 기암괴석이 없으므로 조금만 다른 형상의 돌이 있기만 하면 이름을 붙여 현지 가이드가 설명하면서 진행한다. 양드리가 다리가 아프다하고 나 역시 큰 흥미가 없는 곳이어서 5분정도 진입하다가 강교장 사모님과 되돌아 나와 입구 서늘한 곳에서 일행이 나오기까지 한 시간여를 잘 쉬었다.

●탁스코(TAXCO) : 탁스코 못 미쳐 언덕의 간이 휴게소에서 버스가 멈춘다. 이곳부터는 시내로 버스가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만 큼 시내길이 좁기 때문이라고 한다. 호텔에서 나온 작은 차량에 여행 가방들을 몽땅 실었다. 저기보이는 시내가 어쩌면 저리도 신비로운가? 이 산골짝 언덕에 빼곡히 들어선 수많은 집들이며 시가지인데 도대체 어떻게 올라 다니며 먹고 살아가는 것인지? 예전의 은광도시를 이제 아름답게 꾸며 관광도시로 탈바꿈한 것 같이 보인다. 우리를 실어 나르기 위해 온 차량들은 작은 폭스바겐 구형들이다.

타스코 중심지역인 광장 주변의 길들은 예쁜 돌을 박아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고 엄청난 관광객들로 붐빈다. 광장 한 켠에는 호세 마르티의 동상이 정답게 서 있고 산타 프리스카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은세공품점에 들려 구경을 하면서 자유시간을 즐겼다. PUEBLO LINDO TAXCO 호텔은 아주 작은 호텔인데 들어가면서 많이 놀랐다. 이 좁은 골목에 또 좁은 대지에 세워진 모텔같은 호텔인데 2층으로 올라가니 아기자기하게 정원도 잘 꾸미고 작은 풀장까지 만들어 놓은 치밀한 설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저녁식사에는 데킬라 한 잔까지 주어서 잘 먹었다. 가방을 풀고 7시에 언뜻 잠들었는데 잠시 눈 부치고 일어난다는 게 눈떠보니 새벽 2시인데 곧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계속된다. 잠을 실컷 잤기에 바깥 구경하며 짐을 챙겼다.

 

 

 

제 9일차 (5월 27일 월요일)

무려 이른 아침 6시에 아침을 먹고 7시 20분에 올드 폭스바겐에 탄다. 3시간을 이동하여 멕시코시티 북쪽에 있는 테오티우아칸으로 이동한다. 멕시코시티 남서쪽에 위치한 탁스코에서 곧장 테오티우아칸으로 가는 길이 없는지 멕시코시시티 중심부까지 거의 다 와서야 다시 테오티우아칸으로 가고 있다.

●테오티우아칸 : 멕시코시에서 북동쪽으로 52km 떨어져 있다. 기원전 2세기경 건설되기 시작하여, 기원 후 4세기부터 7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맞았다. 전성기 인구는 대략 12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테오티우아칸은 광범위한 교역을 통해 경제력을 축적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해 중미 전역에 세력을 떨쳤던 것으로 보인다.

신들이 창조한 도시라는 뜻의 테오티우아칸은 건설 초기부터 완벽한 구상 하에 정교하고 치밀하게 계획하였으며, 종교적인 상징성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넓은 길이 계획의 중심에 있다. ‘죽은 자의 길’이라고 불리는 이 길은 폭이 40~100m, 길이가 5.5km나 된다.(현재 복원된 것은 2.5km까지다.) 이 길 좌우로 많은 석조 구조물, 피라미드와 사원, 광장, 주택 등이 건설되었고 그 끝에 사람의 심장과 피를 바쳤던 달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다.

이곳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많은 피라미드다. 이곳 피라미드들도 중남미 전역에서 발견되는 커다란 계단식이다. 가장 큰 것은 해의 피라미드로 바닥 한 변의 길이가 230m, 높이 66m에 248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에서 3번째 큰 피라미드라고 한다. 이집트 쿠푸왕의 대 피라미드가 높이 147미터 각 밑변의 길이 230미터이니 버금가는 크기가 아닌가?

죽은 자의 길 끝에 있는 달의 피라미드는 바닥 한 변 길이 146m, 높이 46m로 해의 피라미드보다 작지만, 인신공희가 이루어진 곳으로 추정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이곳 무덤에서 다량의 유해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인신공희는 다른 지역에서는 사라지거나 동물의 피를 바치는 것으로 대체되었으나, 유독 이곳 중남미 지역에서는 오래도록 유지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세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심장과 피를 신에게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16세기 에스파냐가 점령한 뒤에야 이 의식이 사라졌다.

이들은 전성기로 추정되는 7세기 무렵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만 난무할 뿐 해답을 찾지 못한 상태다. 이들이 어떤 언어를 썼는지조차 밝히지 못했다. 그러나 피라미드 축조술을 비롯한 문화적 전통만은 마야인에게 전해져 사라지지 않았다.

‘신들의 도시’를 의미하는 테오티우아칸이라는 도시 이름마저도 600년 뒤 폐허가 된 이곳을 찾아 정착한 아스텍인들이 붙인 것이다. 아스텍인들은 이 웅장한 유적을 보고 인간이 아닌 신이 지은 도시라고 생각하여 숭배했던 것이다. ‘죽은 자의 길’, ‘해의 피라미드’ 등 건물 명칭들도 마찬가지다.

실로 엄청난 유적이다. 단지 두 개의 피라미드가 웅장해서만은 아니다. 해와 달의 피라미드 사이의 광대한 길과 주변에 나란히 이어진 수많은 작은 피라미드들로 이어지는 신전의 광대함이 나를 압도한다. 아아! 이처럼 위대한 멕시코인들의 위대한 유적이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가려 우리나라의 세계사시간에도 잘 알려주지 않으니 일반인들은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곳을 반드시 찾고자 했는데 그건 내가 역사선생이기 때문이 아니던가? 두 개의 피라미드의 모습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더 미학적으로 아름답기도 하고 웅장함도 그에 뒤지지 않는다. 해의 피라미드를 가장 먼저 올랐다. 팔십 되신 두 형님들도 부지런히 오르신다. 정상에서 바라다 보이는 주변을 보니 이곳 신전은 많은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이며 그 지역이 광활하다. 그래서인지 이 신전도시의 규모가 엄청나서 사막에 단지 3개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있는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군보다 훨씬 더 웅장하게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부지런히 내려와 달의 피라미드로 가니 우리 양드리가 오르고 있다. 정상에 오르니 우리 팀들이 여럿 올라왔다. 해의 피라미드까지 올랐다가 오신 분들도 많았다. 찾아와 볼 수 있어서 후련하다. 그리고 이 유적의 위대함에 감격스럽다.

●피라미드 터 : 멕시코시티 시내에는 여러 곳에 파괴된 피라미드터가 있어 잘 보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피라미드를 파괴하여 그 돌을 이용해 성당을 짓기도 했다고 한다. 현지식 점심을 먹고 한국인들이 많이 가고 싶어 하는 과달루페 성당을 간다.

●바실리카 과달루페 성당 (BASILICA DE GUADALUPE)을 찾는다. 16세기에 세워진 과달루페 성당은 세계 3대 성모 발현지이며, 세계 각국의 카톨릭 성지 순례 장소로 손꼽힌다고 한다. 성당의 규모가 크다. 이곳저곳에 여러 예배당이 있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이곳에 발현한 성모마리아님은 검은 마리아였다고 하니 멕시코인들이 더욱 섬기게 되었고 자신들은 과달루페 성당 신자라고 자신 있게 피력한다고 한다. 멕시코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불이라고 하는데 월급수준은 50만원 정도라고 한다. 페루는 토요타가 가장 많았고 현대와 기아가 그 다음이었는데 멕시코는 닛산이 가장 많고 폭스바겐과 시보레가 많이 보인다. 내 차가 닛산이라서인지 왠지 기분이 좋다.

 

 

 

 

 

 

 

 

 

 

제 10일차 (5월 28일 화요일)

멕시코시티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는 원래 저녁 8시 15분이었는데 9시 55분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가이드 말로는 썸머타임 때문에 변경된 거라는 해명이다.

11시 40분경 몬테레이에 도착하였고 급유를 마친 뒤 1시 15분에 이륙한다. 이제 15시간에 걸친 이동이 시작된다. 아니 멕시코시티에서부터 치면 무려 18시간이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18시간의 비행이다. 몬테레이를 출발한 비행기는 갈 때와는 다른 노선으로 비행하고 있다. 미국 서부해안을 따라 북상하더니 캐나다를 거쳐 앵커리지를 지나 알래스카반도를 나른다. 이어 러시아의 캄챠카 반도 위를 지나더니 중국으로 들어가 랴오둥반도를 지나 황해로 들어와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비행 중 날짜변경선을 지나니 15시간 날고 멕시코보다 14시간이나 빠른 우리나라는 다음날인 29일 아침 6시가 된다.

 

제 11일차 (5월 29일 수요일)

수속을 밟고 가방을 찾은 뒤 일행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시외버스터미널로 나오니 제천의 강교장 선생님 내외분과 양산의 이선생님 내외분을 다시 만난다. 짧은 열흘 동안 서로를 배려하며 편안한 여행을 함께 해준 일행들에게 감사드린다. 제1청사와 달리 제2청사는 시외터미널이 아주 잘 지어져서 편하기 그지없다. 1시간 정도 기다려 군산경유 금남여객 익산행 버스를 타고 오니 수월한 귀향길이 되었다.  끝

■우리가 귀국한 다음날인 5월 30일 아침 4시경(현지시간 29일 오후 9시경)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참혹한 우리 여행객 유람선 전복사고가 발생하였다. 33명중 생존자는 7명이고 나머지 모두 사망하였으며 아직까지도 시신을 다 찾지 못하고 있다. 온 국민들이 아픔을 함께 하고 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며 희생당하신 분들에게 삼가 조의를 표하고 슬픔에 찬 가족들에게는 위로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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