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장빈거사호찬(윤기헌)

청담(靑潭) 2019. 6. 28. 23:35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


기헌(尹耆獻 1548- ?) 저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남원(南原). 자 원옹(元翁). 호 장빈자(長貧者). 윤자신의 아들, 이이(李珥)의 문인. 선조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00년(선조 33) 죽산현감(竹山縣監), 뒤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내고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명(文名)이 높았다. 저서에 《장빈호찬(長貧胡撰)》이 있다.


○ 적암(適庵) 조신(曺伸)이 쓴《백년록(百年錄》이라는 책이 있다. 정통(正統) 갑자년으로부터 가정(嘉靖) 정해년까지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이 볼 만한 것이 많기는 하나 대략만을 적었을 뿐이고 전말을 상세히 하지 않았으니 유감스러운 일이며, 또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일이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청해부원군(靑海府院君) 이지란(李之蘭 1331-1402)의 본성은 퉁씨(佟氏)이다. 태조를 도와 개국의 공훈이 있어 부원군에 봉해지고 지금의 성명을 하사받았다.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기를,

“신이 성주(聖主)를 만나 외람되이 장수가 되어 남정북벌(南征北伐)에 함부로 죽인 것이 매우 많으니, 비록 철권(鐵券)의 은총이 지극하오나, 지옥에 가서 받을 화가 두렵습니다. 원하옵건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사후에 받을 보복을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그날로 절에 들어가 중의 옷을 입고서 집안일을 사절하며, 세속 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자기의 수명을 마쳤으니, 실로 장자방(張子房)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놀기를 바랬던 일과 방불한 것이요, 결코 한신(韓信)ㆍ팽월(彭越) 따위가 미칠 바가 아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중형인 정황(鄭滉)이 김제 군수가 되었다. 송강이 태헌(苔軒) 고경명(高敬命)과 같이 죽정(竹亭)에 묵게 되었는데 송강이 태헌에게 말하기를,

“선생이 운수를 점치는 술법은 제가 탄복을 하는 터인데, 어찌 저에게는 한 말씀도 없으십니까?”

하니, 고태헌은 대답하기를,

“여러 말 말고, 사주만을 말하오.”

하고, 새벽녘에 송강에게,

“나는 공과 사귀기를 바라오. 공은 틀림없이 좌상이 될 터이나, 그러나 만년에 만약 송(松)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강(江)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오.”

말하였다. 송강이 자세히 물었으나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자버렸다. 아마 고태헌의 말은 송강으로 은퇴하지 않으면 강계(江界)로 귀양갈 것이라는 말이었다. 정송강이 만년에 강도(江都)에서 죽었으니, 강이라 한 것은 과연 어느 강을 지칭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율곡(1536-1584) 선생이 어려서 꿈에 상제를 뵙고 금으로 된 족자 하나를 받았다. 열어보니, 아래와 같은 시구가 있었다.

용은 새벽골로 돌아갔으나 구름은 오히려 젖었고 / 龍歸曉洞雲猶濕

사향노루는 봄산을 지나갔으나 풀은 절로 향기롭다 / 麝過春山草自香

이것을 들은 여러 사람들이 기이한 조짐이라 하였다. 선생이 작고한 다음에야 식자들은 비로소 그것이 상서롭지 못한 것임을 알았다. 용이 돌아간다, 사향노루가 지나 간다 한 것은 빨리 죽을 조짐이요, 구름이 젖고 풀이 향기롭다 한 것은 그가 남긴 혜택과 이름만이 홀로 남게 될 것을 가리킨 말이다. 대현의 일평생은 하늘이 이미 정한 바가 있으니,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 병인년(1566, 명종 21) 가을에 선군(先君 : 父 윤자신 1529-1601)께서는 금릉(金陵)에서 상중에 계시었다. 이때 동지 한술(韓述), 참의 심우승(沈友勝), 선산 군수(善山郡守) 한회(韓懷), 상사(上舍) 윤우(尹祐) 등이 선비의 신분으로 흡곡 현감(歙谷縣監) 한호(韓濩 1543-1605)에게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역시 글씨를 잘쓰기 때문에 모였던 것이다. 하루는 밤에 앉아서 무신옥사에 관하여 얘기하다가 윤장원(尹長源 결(潔)의 자)과 윤심원(尹深遠)의 일을 자세하게 말했는데, 심원은 곧 장원의 동생 준(浚)의 자(字)로, 그 묘가 창밖에서 멀지 않은 산등에 있었다. 이날 밤 달빛은 아주 밝고 외딴 묘가 홀로 시들은 풀 사이에 있었다. 선군께서 눈물을 닦으시며 이 묘를 가리켜 이르시기를,

“저것이 심원 아저씨의 유택이시다.”

하니, 돌연 혀를 차는 소리가 그 무덤 속에서 들려 왔다. 이 소리를 듣고 좌중이 송연하였으니, 알지 못하겠구나! 땅 밑의 썩은 뼈에도 오히려 죽지 않은 혼령이 있는 것일까?


○ 충주(忠州) 망경루(望京樓)는 경영루(慶迎樓) 서쪽에 있다. 윤장원(1517-1548)이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먼 길손이 돌아 가고픈 생각 간절하여 / 遠客思歸切

누에 올라 북으로 서울을 바라보네 / 登樓北望京

도리어 같구려, 강 위에 기러기가 / 還同江上雁

가을이 지나자 남으로 가는 것과 / 秋盡更南征

이 시는 세상에 전하기를,

“이 장원이 내한(內翰)으로 있을 때, 이곳을 지났는데, 한 나그네의 말이 ‘경(京) 자와 정(征) 자는 운이 어려워 화답하는 시를 잘 짓기 어려울 것이다.’ 하여, 장원이 술에 잔뜩 취하였는데도 붓을 들어 곧 한 수를 지어내니 좌중이 모두 탄복하였다는 것이다. 경영루에 제영시가 많으나 장원의 시만한 것이 없었다.”

고 한다.


○ 음성(陰城)의 동헌(東軒)에 아래와 같은 윤장원의 시가 있다.

창공에 찬 비 거두고 / 碧落收寒雨

청산에 저녁 햇빛이 담담하구나 / 靑山淡返暉

들판 다리 길엔 인적 끊기려 하고 / 野橋人欲斷

관로(官路)에 나무만이 서로 둘러 서 있네 / 官路樹相圍

나그네 길에 해가 저물려 하니 / 爲客時將晩

집에 돌아가는 꿈 자주 꾸어지누나 / 還家夢屢飛

밤은 깊은데 홀로 앉았으니 / 夜深成獨坐

바람 이슬에 가을 옷이 젖는다 / 風露濕秋衣

허미숙(許美叔)은 이 시에 대하여 늘 청련(靑蓮 이백(李白))의 기풍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장원이 또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의 호)에게 아래와 같은 시를 주었다.

고국(故國)에는 강물이 흐르고 / 故國流江水

싸늘한 성터에는 밤 까마귀 울도다 / 寒城有夜烏

이 시구에 대하여, 하곡(荷谷 허봉(許篈)의 호. 초당(草堂)의 아들)은 탄복하여 말하기를,

“장원이 아니고서는 유(有) 자를 놓아 짓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 화석정(花石亭)은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 1392-1459)이 거처하던 곳이다. 임진강 가 몇 리 되는 곳에 있는데, 긴 강물과 먼 산들이 밝고 아름다운데다 기이한 꽃을 많이 심어, 놀며 감상하는 곳으로 삼았다. 세월이 오래 지나 퇴폐하였더니 그의 손자 이의석(李宜碩)이 새로 수리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이 처음에 시를 지었고, 뒤에 이숙함(李叔瑊)이 기문을 써서 이름을 화석정이라 하였고, 이의무(李宜茂)가 시와 서(序)를 썼다. 김점필(金佔畢)이 또한 시를 지었으니,

이 후야말로 참으로 어진 자손이로다 / 李侯眞箇子孫賢

정자를 새롭게 하니 선조를 잃지 않음이로세 / 堂構如今不墜先

저 물 저 언덕은 양소윤을 슬프게 하고 / 某水某丘悲少尹

꽃과 돌은 평천장보다 아름답다 / 一花一石勝平泉

현주의 바람과 비는 서해로부터 오고 / 玄洲風雨來西海

적현의 봉우리는 중천에 떨어졌네 / 赤縣峯巒落半天

강평공이 자손에 끼친 가풍을 알고자 하면 / 欲識康平貽厥遠

마을에 가득한 연기와 달이 그의 세업이로세 / 滿村煙月是靑氈

하였다.

그 후에 율곡 선생이 또한 후손으로서, 그 터에 집을 다시 짓고 은퇴하여 쉬는 자리로 삼았으나 여러 가지 작품들은 아직 현판에 새기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문하생으로서 이 정자에서 선생님을 모신 것이 오래였다. 앞에 큰 강이 흐르고, 옆에 석벽이 있으며, 지세는 우뚝하고 전망은 탁 틔어 한양의 삼각산과 송도의 오관산(五冠山)이 아득한 구름 사이에 어렴풋이 보인다.

아! 선생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정자 또한 왜적의 난리에 타 버려 오늘날에 와서는 황무지가 되었으니, 옛 자취를 더듬으면 절로 슬퍼진다.


○ 상산(裳山 적상산)은 무주 읍내의 남방 15리에 있다. 일명 상성(裳城)이라고도 하는데, 사면에 층암 절벽이 우뚝 서서 깎은 듯이 높은 모양이 마치 사람이 입은 치마와 같으므로 상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옛사람들이 험준한 곳에 의지하여 성을 쌓았는데 겨우 통할 만한 길이 둘이 있다. 그 안은 평탄하고 시냇물이 사방으로 흘러 실로 하늘이 낸 요지라 하겠다. 거란 군사와 왜구의 난리에 근방의 수십개 군의 백성이 모두 이 산성에 의지하여 목숨을 보존하였다.

고려 최영(崔瑩) 장군이 이곳에 산성을 쌓고 창고를 세워,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도록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세종 때에 체찰사 최윤덕(崔潤德)이 이곳에 왔는데, 마침 구름과 안개가 어둡게 덮여 사방을 자세히 살필 수가 없어서 일이 중지되고 말았다.


송강 공이 일찍이 어사가 되어 관북 지방을 순시할 때에 돌아 오는 길에 철령을 넘지 않고 미복(微服)으로 합포(合浦)로부터 시중대(侍中臺)에 오르고, 통천(通川)에 이르러 다시 총석정(叢石亭)에 올라서 자칭 정 진사(鄭進士)라 하고, 그 고을 군수와 실컷 술을 마시었다.

다음날 동침한 기생에게 말하기를,

“십년 후에는 감사가 되어 다시 오리라.”

하니, 기생의 말이,

“감사가 귀하고 높은 자리이긴 하나 그보다는 찰방이 더 얻기도 쉽고 오기도 빠를 것이 아닙니까?”

하였다. 그 11년 뒤에 과연 감사가 되어 이곳을 순시하자, 그 기생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공이 다음과 같은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었다.

십년 전 언약이 / 一十年前約

감사냐, 찰방이냐였는데 / 監司察訪間

내 말이 비록 맞았으나 / 吾言雖或中

모두가 귀밑털이 반백이로세 / 俱是鬢毛班

이 이야기는 지금껏 관동 지방의 미담으로 전해 오고 있다.

동은(峒隱) 이의건(李義健)이 공과 함께 화천현(花川縣)에서 잔 일이 있었는데, 벽상에 걸린 시를 바라보고 마음에 몹시 불만스럽게 생각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왕명을 받들어 온 사람이라 어쩔 수 없지 않소. 그렇지 않으면 해유(解由)를 어떻게 하겠소.”

하니, 좌중이 크게 웃었다.

공이 나와 함께 금강산 구경을 간 일이 있는데,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어 나에게 주었다.

화천관에서 술잔을 사양하던 밤 / 花川館裏逃觴夜

풍악에서 달을 대하던 때라네 / 楓岳山中對月時

이런 좋은 일들을 세상에서 다시 만나기 어려운데 / 勝事世間難再遇

소상강의 일엽주야, 가는 곳이 어디냐 / 瀟湘一葉竟何之

그때 선군(父 윤자신)께서 회양(淮陽)에 계시었는데, 공과 선군이 같이 술을 마시었다. 선군께서 장단시(長短詩)를 지으시니, 공이 화답하기를,

태수의 명성은 장단구에 있고 / 太守聲名長短句

사신의 풍류는 얕고 깊은 술잔에 있도다 / 使華風味淺深杯

하였으니, 그 호탕함을 알 만하다.

공이 순시 길에 망양정(望洋亭)에 이르렀는데, 바다 속에 바위가 솟아 있어 파도가 치면 부딪쳤다가 부서지는 광경이 기이하고 장관이었다. 공이 아래와 같이 시를 지었다.

옥산을 깎아내어 편편히 날리고 / 剗却玉山飛片片

은기둥을 꺾어다가 층층이 떨어트렸네 / 折來銀柱落層層

이 시를 매양 그 묘사가 잘 되었다고 자랑을 하였다. 뒤에 함경도 감사로 갔을 때에 최고죽(崔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의 호)이 경성(鏡城)에서 와병 중이었다.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역마를 빌려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말이 이르기 전에 고죽은 숨을 거두었다. 공이 만시(挽詩)에 쓰기를,

말 한 필 운중에 들어 왔는데 / 一馬入雲中

봄날에 어느 곳에서 울 것인가 / 春風何處嘶

장군이 병영에 누웠으니 / 將軍臥細柳

다시 운제에 오를 길이 없구나 / 不復上雲梯

이 운제는 바로 관외(關外)의 지명이었다.

이에 앞서 퇴도 선생(退陶先生)이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가니 당시의 사대부들이 모두 강가에 나와 전송을 하였다. 이때 공은 직학으로 있었는데, 공이 강가에 도착하였을 때는 선생이 이미 멀리 떠난 뒤였다. 공이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뒤쫓아 광나루에 오니 / 追至廣陵上

신선의 배 이미 아득하네 / 仙舟已杳冥

봄바람 강에 가득한 생각으로 / 春風滿江思

석양에 홀로 정자에 오르네 / 斜日獨登亭

경인 연간에 공이 좌상으로 강계(江界)에 안치되었는데 하루는 금오랑이 부내에 달려 들어오니, 부인(府人)들이 모두 놀래고 겁을 냈으나 공은 태연하게 목욕하고 단정히 앉아 왕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공은 웃음말로 함경도 사람인 유씨(柳氏) 여인에게 말하기를,

“정대감 위리위리[鄭令公危理危理]”

라 하였다. 위리란 말은 위급하다는 뜻의 방언인데, 때마침 공은 위리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공이 일찍이 아래와 같이 시를 지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일을 모르고 / 居世不知世

하늘을 이고 살면서 하늘 보기 어려워라 / 戴天難見天

다정한 것은 오직 백발이로다 / 多情唯白髮

나를 따라 또 한해를 넘기는구나 / 隨我又經年

공(정철)의 인품이 비록 가볍고 맑아서, 혼후하지는 못하나 지조만은 마음속에 뚜렷하여 죽고 사는 일에 동요됨이 없었으며, 그의 시 또한 맑고 산뜻하고 호방하여 티끌 세상을 벗어 산 운치가 있었다.


○ 선조께서 일찍이 경연에 납시어 여러 재신들에게 묻기를,

“황(黃) 판서가 상중에 있는 지 오래인데, 언제쯤이나 상을 벗게 되오?”

하니, 송강이 승지로 역시 입직하고 있다가 대답하기를,

“황은 신의 재종형입니다만 보통의 재상일 따름입니다. 급히 쓰실 일이 있어 물으시는 것이라면 학문과 도덕이 높은 선비로서 시골에 물러가 산림에 숨어 사는 사람 중에 그만한 인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 사문(斯文) 이장영(李長榮 1521-1589) 공이 함양에 군수로 있을 때, 노진(盧稹) 공이 마침 감사로 순시하러 왔고, 이후백(李後白) 공이 판서로서 또한 휴가를 얻어 고을에 모이게 되었다. 한 백성이 감사에게 호소하기를,

“가난한 백성이 못자리 할 논이 없어 이웃에 사는 아무개에게 빌려 주기를 청하였더니 주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을 빌려 주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될 지경이니, 속히 아무개를 관청에서 잡아들여 백성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하여 주옵소서.”

하니, 감사가 이르기를,

“그가 자기 논을 가지고 너에게 주지 않으려고 하니, 그가 이웃과 친목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관(官)으로서 어떻게 빼앗아 줄 수 있느냐?”

하였다. 그러자 이 판서가 이르기를,

“관이 나쁜 사람을 다스리지 아니하면 가난한 백성은 누구를 믿으며, 소장(訴狀)을 방치하고 처리하지 아니하면 장차 누가 호소를 하겠소?”

하여 두 사람의 논쟁이 결말을 보지 못하였다.

노공이 이르기를,

“군수는 노련한 관리이니, 사건을 이 군수에게 맡겨야겠습니다.”

하니, 군수는 논의 소유자를 치죄하고자 하였다.

노공이 이상하게 여기자 군수는 말하기를,

“선성(先聖)의 교훈이 있으니 감히 어길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노공이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군수는 말하기를,

“ ‘그러지 말라. 이웃과 향당에게 주어라[毋以與隣里鄕黨]’ 한 것이 공자의 말씀이 아닙니까? 무(毋)와 묘(苗)는 음이 서로 비슷합니다.”

하니, 온 좌중이 탄복을 하였다.

정해년 가을에 나는 송강의 집에 있었는데, 이장영이 마침 중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송강을 보러 왔었다. 술이 반이나 되어 이 이야기를 하니, 송강 역시 무릎을 치며 탄복하였다.


박인수(朴仁叟 팽년 1417-1456) 공은 평양 사람이다. 세종 때에 급제하였는데 육신(六臣)의 우두머리로 죽었다. 그의 자부(子婦)가 홀로 죽지 않고 살아 남았는데, 마침 임신 중이었다. 세조가 이르기를,

“아들을 낳으면 함께 죽여라.”

하였다. 그의 여종 한 사람이 역시 임신 중이었는데 자부에게 말하기를,

“마님께서 딸을 낳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둘이 다 아들을 낳게 되어도 저의 자식으로 대신 죽음을 받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주인은 아들을 낳고 종은 딸을 낳았다. 자식을 서로 바꾸어 종이 자기 자식이라 하였으니, 즉 지금 동지 박충준(朴忠俊)은 바로 그의 후손이다. 대구부(大丘府)에서 산다.


○ 중 선순(善純)은 성삼문 공의 족손이 된다. 출가하여 중이 되어 천호산(天護山)에 살았다.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당년의 성근보(성삼문의 자)를 내 그리노니 / 我懷當年成謹甫

절의와 문장을 세상에서 흠앙하였네 / 節義文章世所欽

스님은 그 족손으로 범인과 다르니 / 師其族孫異凡氓

문장을 알고 계율을 지키어 더욱 칭찬할 만하도다 / 識字持律堪堪賞

연산현의 천호산에 / 維連之縣天護山

우리 선조 산소가 계시는데 / 先祖於焉留壽藏

그 옆에 청암이란 작은 절이 있어 / 傍邊小刹號淸菴

백명의 중들이 사장으로 스님을 추앙하였네 / 居僧百指推師長

산속의 오리나무 몇 년이나 되었는고 / 山中松檟幾春秋

그대들이 늘 은근하게 보호를 하였어라 / 爾輩慇懃常護養

내가 그 노고를 잊을 수 있으랴 / 我念其勞未容已

창녕씨 가세는 더욱 잊기 어려워라 / 昌寧家世尤難忘

스님께서 시구를 요청하시니 / 師今乞句要自珍

거친 붓을 수습하여 그대의 소망에 답을 하노라 / 收拾荒毫答來望

서로 만나 한번 웃을 그때가 있으리니 / 相逢一笑會有時

다만 앞날에 안녕하기만을 바라노라 / 但願前頭爲無恙


김모재(金慕齋 안국(安國 1478-1543)의 호)와 김사재(金思齋 정국(正國 1485-1541)의 호) 형제는 소인배에게 배척을 받아 시골에 살고 있었다. 늘 서로 왕래하며 유숙하였는데 때로는 한 달이 되기도 하였다. 작별하면서 모재가 사재에게 말하기를,

“내 이미 연로하고 그대 또한 병이 많은데, 어찌 오래 살기를 바라리오. 서로 만나면 기쁘고 떨어지면 슬픈데, 서로 함께 살며 여생을 마칠 수 없겠는가?”

하니, 사재는 말하기를,

“저의 뜻은 좀 다릅니다. 형제가 동거함은 실로 기쁜 일이오나, 양가의 비복들 사이에 딴 말이 없을 수 없고, 부인들은 성질이 편벽하여 오해하기는 쉽고 풀리기는 어려우니, 만약에 반목이 생긴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서로 각각 사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오래 떨어져 있으면 생각나고, 서로 만나면 즐거우니 우애의 정은 날로 더욱 두터워질 것입니다.”

하였다. 듣는 사람이 더러는 사재의 말에 이치가 있다고 하였다.


노산(魯山 단종(端宗))의 묘는 영월(寧越) 북쪽 5리에 있다. 중종 12년(1517), 승지를 보내서 제를 지내고 수호하는 사람도 두었다.

선조 경진년(1580) 가을에 송강 공이 강원 감사로 있을 때에 상소하여 산소의 개수를 청하여 비석을 세우고 표문을 새겼으며 세 가구를 두어 이를 수호하도록 하였다. 역사가 끝나는 날에, 공사를 맡은 사람과 수령이 한 자리에 모였다. 공이 이르기를,

“이번 노산 묘의 개수에 대하여 사람들의 여론은 어떠한가?”

하고 물었다. 모두 대답하기를,

“상공께서 이 일을 건의하셨고, 성상께서 이를 허락하시니, 상하가 다 아름다우심이라, 천년에 한번 만난 일이라 합니다.”

하였다. 그런데 이천 군수(伊川郡守) 유인지(柳訒之)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공이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노산이 명부(冥府)에 있어 곤룡포를 입으시고, 평천관(平天冠)을 쓰시며 사육신과 같은 충의로운 신하들이 혹은 재상으로서, 혹은 총관으로, 혹은 승지와 옥당으로서 좌우에 모시고 서서 보좌(寶座)를 높이 받들 것인데, 어찌 입석하고 각표하기를 구태여 노산묘라 칭할 필요가 있으리오.”

하였다. 온 자리의 사람들이 아무 말 못하고 조용해졌다.


○ 사문(斯文) 안방경(安方慶)이 영흥 부사(永興府使)가 되어 하직을 하니, 명종이 불러 보셨다. 공이 아뢰기를,

“이제 신의 나이 육십을 넘게 되는데, 멀리 영북(嶺北) 지방에 부임해 가니 다시금 천안(天顔)을 뵈옵기 어려울 것이므로 마음속에 품은 소회를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종대왕께서는 권력을 쥔 간사한 무리의 방해로 연안은전(延安恩殿)에 붙여 있은 지 지금 20여 년이 되었으나 지금까지 원묘(原廟)에 같이 들지를 못하였으니 신은 애통함을 참을 수 없습니다.”

하고 곧 목메어 울었다. 그 언사가 지극히 간절하여 모든 사람들이 모두 얼굴 빛을 변하였다.

다음 해에 과연 조정의 의논이 일어나 마침내 종묘에 모시었으니 지금까지 모든 사람이 이를 갸륵하게 여긴다.


○ 서소문 안에 퇴도(퇴계 1501-1570)선생의 옛집이 있었는데, 즉 지금의 관상감이 들어 있는 곳이 바로 그 자리다. 뜰에 오래된 전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임진 난리를 겪은 뒤에도 여전히 울창하여, 지나는 사람들도 모두 우러러 바라보았다.

신해년이 되어 경상 우도 사람(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상소하여 선생을 헐뜯는 사람이 있었는데, 팔도의 선비들이 대궐에 몰려 들어 변론을 하였고, 성균관생들도 또한 두 번이나 성균관을 비우기까지 했다. 하루는 비바람이 크게 불어 전나무가 꺾이었으니 이 역시 시운의 변함인가? 이상한 일이로다.


○ 가정 정미년(1547, 명종 2)에 판서 홍담(洪曇 1509-1576)이 홍문관 응교로 있었다. 진복창(陳復昌 (? -1563)이 동료로 있으면서, 재상 한 사람을 미워하여 불칙한 데 빠뜨리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아직 여론을 기다림이 어떠한가?”

하니, 복창이 화를 내었다. 공이 이르기를,

“한 집의 일이 아닌데 어찌 경솔하게 사람을 해칠 수 있는가?”

하니, 복창이 곧 자리를 차고 달아났다. 공이 정색을 하고 서서히 말하기를,

“마음을 가라 앉히시오.”

하면서 손으로 옷을 끌어 당기며 만류하였다. 복창이 땅에 엎드려 크게 우니, 좌우 사람들이 모두 실색을 하였으나 공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중상(中傷)을 면하였으니 화복은 명(命)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 나의 처조부 되는 성세정(成世貞 1460- ?)은 청송선생(聽松先生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의 숙부가 된다. 일찍이 영남에 감사로 갔는데, 상주 기생에게 정을 들여 집에 거느리고 살았다. 연산군이 이 여자를 빼앗아다가 총애하였다.

하루는 연산이 기생에게 묻기를,

“너 성세정을 보고 싶지 않느냐?”

하니, 기생이 답하기를,

“어찌 보고 싶은 생각이 있겠습니까? 그가 감사로 있을 때 저를 보고 좋아하여 비록 집에 데리고 살기는 하였으나, 사나운 처를 두려워하여 왕래가 없어서 저를 빈 방에서 외롭게 고생을 시켰으니 신이 언제나 마음에 원통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러면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

하니, 기생이 대답하기를,

“바로 죽이면 시원치 않으니 곤장을 때려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서 온갖 고통을 당하게 한 뒤에 죽였으면 합니다.”

하였다. 연산이 웃고 그대로 실행을 하였다.

배소를 세 번 옮겨 거의 죽게 되었는데 반정으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기생이 출궁하여 공을 뵈오니 공이 이르기를,

“목숨을 건진 은혜는 머리칼을 다 뽑는다 해도 갚을 길이 없다. 그러나 임금을 모셨던 네 몸을 어찌 감히 가까이할 수 있겠는가?”

하고, 오직 옛집과 남녀 노비만을 주었다.

공의 아들 참판 성윤(成倫)이 매년 세말(歲末)에 봉급을 보냈는데, 그 기생 역시 종신토록 정조를 지키고 나이 팔십을 넘게 살았다. 늘 연산군의 이야기를 아주 자세히 하였다.

연산군에게 또 다른 사랑하는 기생이 있었는데 저의 동무에게 말하기를,

“옛 남편을 밤에 꿈속에서 보았으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하였더니, 연산이 곧 소지(小紙)를 써서 외인에게 주었다. 조금 후에 궁녀가 은쟁반 하나를 들고 오는데 포장이 겹겹으로 단단히 되어 있었다. 그 기생으로 하여금 열어 보게 하니 바로 그 남편의 목이었다. 그 기생도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하루는 궁중에서 연회가 있었는데 연산군이 총애하는 환관, 주처신(朱處臣)의 팔을 끌고 함께 춤추고자 하였다. 주처신이 아뢰기를,

“어찌 임금과 신하가 같이 춤을 출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일어나지 않으니, 연산군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죽고 싶으냐?”

하였다. 주처신이 대답하기를,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만, 성상께서 허물이 되실까 두려워 감히 출 수가 없습니다.”

하니, 연산이 노하여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며 이르기를,

“네 발을 하나 잘라내어도 못 추겠느냐?”

하였다. 주처신이 말하기를,

“요사이 항간에 이상한 말들이 나도는데, 신의 발은 자를 수 있지만 뒤에 반드시 후회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연산이 더욱 화가 나서 즉시 한 쪽 발을 자르고, 또 한 쪽 팔을 잘랐다. 그리고

“네가 그래도 못 출까?”

하고 호통을 하였다.

“발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일어나 춤을 춥니까?”

하니, 왕은 다른 발 하나를 마저 잘랐다. 주처신이 말하기를,

“이 나라가 얼마나 갈까?”

하니, 연산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를 호랑이 울에 던져 먹히게 했다.

중종이 반정을 일으킨 날은 바로 연산군(1476-1506 : 재위 1494-1506)이 임진석벽(臨津石壁)에 행차하기 전날이었는데, 반정하려는 사람들이 그날 밤에 떠들썩하니, 연산은,

“무슨 소리가 내전까지 들리느냐?”

하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내일 거둥이 계시니 그 때문에 군사가 모이는 소리입니다.”

하니, 연산이 또 묻기를,

“어찌 전과 다르냐?”

“밤을 새우는 곳이라 군사가 전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밤이 되어 불빛이 대궐안 뜰을 밝게 비치고, 성중에 또한 불빛이 올랐다. 그때에야 연산이 놀라 스스로 나와 엿보기를 여러 번 하였다.

나중에 세 장수(성희안(成希顔)ㆍ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가 의자에 앉아 있고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그 앞에 부복하여 있는 것을 보니 변란의 형상이 완연하였다. 연산이 좌우에 명하여 급히 활과 살을 가져 오라 하자 무기고에 가 보았을 때는 이미 다 가져 가고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다. 연산이 당황하여, 안에 뛰어 들어가 왕비에게 의논하기를,

“같이 나가 애걸해 보자.”

하였다. 왕비가 대답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빌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순하게 받아 들일 따름입니다. 그 전에 간하기를 여러 번 하였으나 끝내 회개하지 못하였으니, 이제와서 스스로 업을 지은 사람은 죽어 마땅하지만, 슬프다. 두 자식을 어디에 둔단 말이오.”

하고 가슴을 치고 통곡하니, 연산이 머리를 떨어뜨리고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말하여 무엇하겠소. 후회막심하도다.”

하였다.

백관이 왕대비에게 청하여 정전에 납시어 연산주를 폐해 군(君)에 봉하여 붙들고 나가게 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르니, 아직 하늘이 밝기 전이었다. 왕비도 대궐에서 나오는데 신고 있던 비단신이 자꾸 벗겨져 걷지를 못하니 비단 수건을 찢어서 신을 동여 메고 걸었다.

연산군의 세자와 대군은 그 유모와 함께 청파촌(靑坡村) 무당집에 있었는데, 날이 저물어도 먹을 것을 얻을 수가 없었다. 무당이 마련하여다가 먹이니, 대군이 말하기를,

“어찌 새끼꿩고기가 없느냐?”

하였다. 유모가 울며 말하기를,

“내일은 이나마라도 다시 얻어 먹을 수 있었으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보는 사람 또한 눈물을 흘리었다. 소위 무당 집이라 함은 지금의 윤 병사(尹兵使) 선정(先正)의 외가집 자리이다.


○ 연산군의 구신(舊臣)이었던 김숭조(金崇祖) 공과 남세주(南世周) 공은 반정 후에 집에서 나오지 않고 한 사람은 눈 뜬 장님이 되었다 하였고, 한 사람은 고질이 있다 하였다. 무도한 임금을 섬길 수 없으며 천명을 어길 수 없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자기의 소견을 스스로 지키고 홀로 변함이 없었으니, 비록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라 할 수는 없으나 뒷세상에서 볼 때 또한 용렬한 자는 아니라 하겠다.


○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할 때에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가 소인들에게 모함을 당하여 진도로 귀양을 갔는데, 갖은 고생을 극도로 겪었다. 홍인록(洪仁祿)이 이때 그 고을 군수로 있었는데 그의 박대는 아주 심했다. 선조 초년에 소재는 석방되어 돌아와서 맑고 빛나는 여러 관직을 두루 지냈다. 당시의 의논이 홍인록을 공박하여 여러 해 동안 벼슬을 못하게 하였으나, 소재가 힘을 다하여 주선하여 마침내 풍천 부사(豐川府使)에 임명되었다. 인록이 매양 감탄하였다.


소재(노수신)가 적소에 있을 때 아래와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

천지의 동쪽, 나라의 남쪽 / 天地之東國以南

옥주성 아래 두어칸 암자에 / 沃州城下數間庵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와 고치기 어려운 병이 있어 / 有難赦罪難醫病

충신도 못 되고 효자도 못 되었구나 / 爲不忠臣不孝男

객이 되어 삼천 육백일이 다행이요 / 客日三千六百幸

을해생에 병진년을 맞으니 부끄럽도다 / 生年乙亥丙辰慙

너 노수신아! 죽음을 만일 면하더라도 / 汝盧守愼如無死

공사간에 보답을 어찌 감내하려는고 / 報得公私底事堪

하였다.

그가 조정에 돌아 온 뒤에 미암(眉庵) 유희춘(柳希春 1513-1577) 공이 세상을 떠났다.

공이 아래와 같은 만장시를 지었다.

젊은 날에 좋은 시대를 만나 / 少日丁嘉會

탁한 진흙이 푸른 못을 가까이하였네 / 汚泥近碧潭

문장을 논하니 진실로 유익한 벗이요 / 論文眞益友

뜻을 보면 실로 뛰어난 인물이었네 / 觀志□奇男

기년에는 꿈길에서만 자주 만났고 / 在己饒魂夢

경년이 기울면서 남북간에 아득하였네 / 斜庚杳北南

귀양 가서 남은 목숨을 붙였고 / 節持殘息假

풀려 옴은 은혜가 두터웠도다 / 環賜誤恩覃

옥을 가까이하니 마음은 항상 붉었고 / 側玉心常赤

실력 없이 앞에 나서니 얼굴에 늘 부끄러운 빛이었네 / 前糠面發慙

공께서는 용단 있게 물러나려 하나 / 公身勇屛退

성상의 뜻으로 높은 자리로 끌어 올리시었네 / 聖意引陞參

바야흐로 동조의 기쁨을 누리고자 했더니 / 正起同朝喜

도리어 병마의 희롱당한 바 되었네 / 還爲二竪戡

관가의 부의가 넉넉하니 조맥할 필요는 없고 / 官貤休助麥

수의에다가 탈참하여 보내리 / 交檖賸辭驂

어진 이의 죽음은 시인들이 추모시를 읊고 / 殄瘁詩人詠

편찬하고 저술한 글은 학사들이 이야기하네 / 編箋學士談

하늘은 한 늙은이를 남겨 두지 않고 / 天將不遺一

나이는 공자보다 세 살을 더하였네 / 壽卽較加三

객지에서 돌아오는 상여 깃발은 진 나라 비에 젖고 / 旅旐沾秦雨

고향 산천은 초 나라 아지랑이에 가리었네 / 家山隱楚嵐

응당 저승길이 넓은 것이니 / 只應泉路澖

내 어찌 눈물을 길이 흘리랴 / 何必淚長含


○ 내가 일찍이 신백록(辛白麓)을 찾아 뵈었더니 백록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전에 왕명을 받고 영남에 가 있을 때에, 저녁에 누각에 올라 옛사람의 시운에 맞추어 시를 짓고자 뒷짐지고 오락가락 하다가 벽 위를 쳐다보니 현판이 있는데, 글자가 작고 먼지가 끼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강혼(姜渾)의 작품이었다. 그 중 연구(聯句) 하나는 이러했다.

제비가 높이 나니 바람에 버들이 흔들리고 / 紫燕高飛風拂柳

개구리 요란스레 울어대고 비는 산을 가렸네 / 靑蛙亂叫雨渾山

이때에 새끼 제비가 누각 안에 날아 들어오고, 뭇 개구리가 못속에서 울어대며, 시냇 바람과 산 비가 앞에 읊은 시와 꼭 같았다. 나는 비로소 그 묘한 문장이 경치를 잘도 묘사하였음을 알고 드디어 붓을 던지고 먼저 강혼의 시를 읊고 탄복하기를 마지 않았다.”

하였다. 공은 또 나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집에도 또한 이와 같이 기막힌 시구가 있는데 공이 미처 모르는가?

강변 사당에 늙은 나무에 지는 햇빛 머무르고 / 江祠樹老留殘照

야역에 누각이 텅비어 새들만 모여든다 / 野驛樓空集亂禽

이것이 바로 공의 어르신께서 지은 시인데, 앞에 시와 비교하여 어느 것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소.”

하셨다. 지금 그 전편(全篇)이 유실되어 볼 수 없으니 통탄할 일이다.


○ 나의 처조부 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는 춘대(椿臺)라 자호하였다. 평생에 서화를 좋아하여 한 첩이 있었으니, 이름을 《무하람(無何覽)》이라 하였다. 상고 시대의 유명한 필적이 많아서 최치원(崔致遠)ㆍ김생(金生)의 수적(手迹)도 있었다. 그 중에는 성임(成任)ㆍ김종직(金宗直)ㆍ최흥효(崔興孝)ㆍ신숙주(申叔舟)ㆍ서거정(徐居正) 등의 글씨가 있어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김생(金生)의 글씨는 자문지(咨文紙)에 썼는데 오래되어 퇴색하였으나, 최치원(崔致遠)의 글씨는 비단빛이 지금껏 새로웠다. 더러는 글씨 잘 쓰는 사람이 모사한 것이 아닌가 의심되기도 한다.

나는 그 모두를 보배롭게 간직하고 있었는데, 임오ㆍ계미 연간에 율곡 선생의 문하생으로 있을 때에 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선생께서 한번 구경하시기를 원하였다. 일년 남짓 뒤에 선생의 아우 이계헌(李季獻)이 이것을 보고 매우 좋아하여 빌려 가고서는 지금껏 돌려 주지 않으니, 지금도 그 집에 있다.


○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할 때에 진복창(陳復昌)과 이기(李芑)가 서로 어울려 결탁하여 바야흐로 총애를 받고 있었다. 복창이 남색 비단으로 만든 철릭[帖裏]과 또 임금이 친히 쓴 큰 글씨를 하사 받고 크게 감격하여 자축하는 잔치를 크게 열었다. 그리고 그 네 글자로 족자를 만들어 당 위에 걸어 놓았는데, 일시의 문인과 명사들이 모두 그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때 취부(醉夫 윤결(尹潔 1517-1548)의 호) 윤장원(尹長源 결의 자)이 수찬으로 있었는데, 입직을 이유로 그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복창은 자기의 심복을 시켜 취부의 입직을 대신하도록 하고 억지로 취부를 참석하도록 하였다.

취부가 큰 잔으로 서너 잔을 연거푸 마시고, 짐짓 정신을 못차리는 척하고 복창의 옷에 토해 버렸다. 복창이 손으로 이것을 털고 훔치며 말하기를,

“누가 장원공의 주량이 크다고 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오늘 술병인 모양이로구나.”

하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깊이 원한을 품었다.

한 사람이 취부에게 이르기를,

“공은 어찌하여 진공(陳公)의 옷에다 토하였소? 진 공이 안색을 꿈쩍도 않고 손으로 훔치니, 진 공이 공을 존중함이 지극합니다. 공은 어찌 찾아가서 사례를 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취부는 대답하기를,

“간악한 자의 술을 어찌 내 뱃속에 남겨 놓겠소? 더구나 임금께서 내리신 옷이 간악한 자의 몸에 합당치 아니하므로 토하였소.”

하였다. 복창이 이 말을 듣고 이를 갈며 죽이려고 하였다.

하루는 취부가 능원군(綾原君)의 집에 갔다. 그의 동생 심원(深源 윤준(尹浚)의 자)이 나의 선군과 함께 범굴사(梵窟寺)에 가는 길에 이현동(梨峴洞)의 어구를 지나다가 마침 취부의 종이 안장을 단 말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심원이 까닭을 물으니 종이 대답하기를,

“나리께서 능원궁(綾原宮)에 가시어 연못 위에서 술을 드십니다.”

하였다. 심원(深源)이 선군과 같이 그곳에 가기를 바랐으나 선군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부마의 집은 유생의 왕래할 곳이 아니며, 더구나 나는 가친께 이미 범굴사에 가겠다고 말씀을 드린 바 있으므로 오늘은 지체할 수가 없소.”

하시었다. 심원이 말하기를,

“그럼 먼저 동성(東城) 밖에 나가서 기다리십시오. 나는 형님께 하직하고 바로 뒤쫓아 가겠소.”

하고 거기에 가서 형제간에 밤새도록 마셨다.

그 뒤 수일이 지나 복창이 대간이 되어 능원군을 찾아보고 말하기를,

“모일에 윤장원 형제가 이곳에 와서 실컷 마시고 간 일이 있다는 데 그러하오?”

“그렇소.”

복창이 말하기를,

“그날 윤장원 등이 상감께 저촉되는 말을 많이 하였다는데 사실이오?”

능원이 말하기를,

“죽어도 그런 일이 없소.”

하니, 복창이 노기를 띠고 일어나며 말하기를,

“공이 임금의 지친으로서 친구에게 편당이 되어 죄악을 숨기니 마땅히 불고의 죄에 연좌되어 같이 죽음을 당할 것이오.”

하고, 그 길로 대궐로 들어가 고하기를,

“어느날 수찬 윤결(尹潔)과 그 아우 윤준(尹浚)이 함께 구사안(具思顔)의 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구사안에게 말하기를, ‘나의 친구 안명세(安名世)는 천성이 효도하고 우애하며 일에 임하여 사필(史筆)대로 기록하다가 죄없이 죽었으니, 내 늘 이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는 바이오.’

하니, 윤준(尹浚) 역시 말하기를, ‘윤원형(尹元衡)이 여주(女主)에게 아첨하기 위해서 그의 형인 원로(元老)를 죽이기에 이르렀으니, 기타의 일이야 말해 무엇하리오.’ 하였다 합니다. 신이 오늘 처음으로 그 말을 듣고 감히 아뢰는 바입니다. 그 자리에서 들은 자도 있으니, 청컨대 함께 잡아다가 국문토록 하옵소서.”

하니, 그날 바로 삼성좌(三省坐)를 열었다.

취부가 그때 마침 호당(湖堂)에 나가 동료들과 시를 짓는데 연속하여 운자를 실수하고 시도 전에 지은 것만 못하고, 몇 잔 술에도 크게 취하니, 동료가 놀리기를,

“공이 오늘 또 술병이 났구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오랑이 닥쳐와 대궐로 잡아가고 한 자리에서 말을 들은 사람도 잡혀 갔다. 취부가 돌아 보며 말하기를,

“나의 생사는 그대의 입에 달렸네. 사실을 숨기지도 말고 또 없는 말 하지도 마소.”

하였다. 그 사람들이 국문을 당하자 같이 들었다고 대답하였으니, 복창의 앞잡이로 취부를 미워하는 자이기 때문이었다.

복창이 남몰래 추관을 사주하여 반드시 윤준을 먼저 심문토록 하였다. 그것은 윤준이 평생 술을 좋아하고, 겁이 많기 때문에 그의 무복(誣服)을 얻어 내려는 계책이었다. 복창이 또 옥졸을 시켜 좋은 술을 억지로 권하고, 매 때리는 자로 하여금 세게 대여섯 대를 내려 치게 한 후에 귓속말로,

“수찬이 이미 자복하여 법대로 장배(杖配)를 당하는데, 공이 어찌 홀로 이 죽음을 참고 당한다는 말이오?”

하니, 과연 윤준이 무복을 하였다. 그날 밤 곧 형을 집행했는데 취부는 연속 두 차례나 고문을 당하였고 다음 날 다시 한 번 고문을 당하여 살점 하나 온전한 데가 없었다. 그러나 한번 대답한 외에는 입을 다물고 말을 아니 하였다. 다만 그 옷 자락을 찢어서 상소를 올린 바 특별히 죽음을 면하고 온성(穩城)에 유배되니,

한때의 친구들이 단 한 사람도 머리를 내미는 자가 없었는데, 선조(先祖) 용재(慵齋) 공만이 홀로 술병을 차고 교외로 나아가 송별을 하였다.

취부가 처음 출옥하여 말하기를,

“하늘에 해가 심히 밝은데, 내 어찌 죄 없이 죽겠느냐?”

하니, 복창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노하여 다시금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취부가 음식을 끊고, 여덟 번째 고문에 죽었다.

심원이 차에 실려 나오는데, 그의 처가 길에서 통곡하자, 사형 집행하는 사람 몇 사람이 금전을 요구하였다. 심원이 그 처를 돌아 보며 말하기를,

“돈을 준들 죽음을 면하겠느냐?”

하니, 집행하는 사람이 노하여 죽일 때에 그 처참함이 극도에 달하므로 그의 처가 입은 옷을 벗어 주니 다음에야 얼른 목을 끊었다.

취부가 평생 지은 글이 한 상자가 넘는데, 매양 호당(湖堂)에 나갈 때에 가지고 다녔다. 호당의 서리가 그 가죽 상자를 탐내서 훔쳐가고 내놓지 않으니 이 때문에 그 시가 세상에 전하지를 못하였다. 애석한 일이다.

심원이 또한 시에 능하였으니, 일찍이 〈천주봉완월(天柱峯翫月)〉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끝 구는 아래와 같다.

술병 기울어지고 달 떨어져 산을 내려 오는데 / 壺傾月落下山來

비오고 바람 부는 마을에 많은 문이 모두 닫혔네 / 風雨人間閉萬戶

또 〈명홍시(冥鴻詩)〉를 지었는데 역시 끝 구에

어찌 배를 사서 강동으로 돌아가지 아니 하는고 / 何不買舟歸江東

하여, 한때 모두 훌륭하다고 일컬었다. 그 때 선군께서 칠십 고령이었는데, 역시 다음과 같은 명홍시를 지었다.

계문의 모래밭 풀은 봄에 푸르르고 / 薊門沙草春萋迷

초강의 연월은 가을에 몽롱하구나 / 楚江煙月秋朦朧

남쪽으로 가는 것이 벼와 좁쌀을 위함이 아니요 / 南征不是爲稻梁

북쪽으로 가는데 어찌 꼭 갈대를 물어야 하나 / 北擧何必含蘆叢

시험관인 한사달(韓士達) 공이 칭찬하였다.

선군께서 취부의 시 수백 편을 외우고 계셨는데, 한 책에 써 두시었다.

내가 이것을 얻어 잘 보관하고 있었는데 임진년 봄에 한음(漢陰) 이 상공(李相公 덕형(德馨))이 빌려갔다가 병화에 없어지니, 지극한 보배가 세상에 전하지 못함은 아마 거기에 운명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아깝다.

취부가 곤장을 맞을 때, 여러 심문하는 관원들은 진복창이 두려워 모두가 성난 소리로 심문하는데, 입암(立岩) 민이상(閔貳相 제인(濟仁))이 홀로 이마를 찡그리고 낯을 돌려 말하기를,

“옥이 이미 부서졌구나.”

하니, 복창이 이것을 듣고 탄핵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고 훈록에서도 삭제되어 버렸다.

취부가 일찍이 꿈에 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중 아래와 같은 한 시구가 기억된다.

바다 천리 외로운 배에 날은 저물고 / 海日孤舟千里暮

물과 구름에 긴 젓대소리는 가을을 알리더라 / 水雲長篴數聲秋

그 후, 열흘이 못 되어 화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멀리 귀양갈 조짐이라 하였는데 마침내 곤장을 맞고 죽으니 애통한 일이다.

취부는 산에 은거한 친구가 가죽신을 보내준 데 대하여 아래와 같은 시로 감사를 표했다.

친구가 멀리 신 한 켤레를 보내왔으니 / 故人遙寄一雙來

우리집 뜰에 푸른 이끼가 끼어 있음을 알고 있구나 / 知我庭中有綠苔

지난 해 가을 절에서 해 저물 무렵 / 仍憶去年秋寺暮

먼 산에 홍엽을 밟으며 돌아오던 일이 생각나누나 / 滿山紅葉踏穿回

하였다.

또 종형이 석가산(石假山)을 선사한데 대해서 아래와 같은 시로 감사를 표했다.

산을 좋아하면서도 아직껏 산에서 살지를 못하고 / 愛山猶未住山間

금강산, 지리산을 꿈속에서만 왕래하였네 / 楓岳頭流夢往還

이로부터는 산의 절정을 오를 마음이 없구나 / 從此無心凌絶頂

책상머리에 푸른산을 항시 대하니 말일세 / 案頭長對碧孱顔

또 충주(忠州) 누헌(樓軒)에 아래와 같은 제시(題詩)가 있다.

중원(충주의 고호(古號))은 옛부터 명승지 / 中原古名勝

경치는 눌재의 읊고 간 곳 / 物色訥齋餘

길손이 누각에 오르니 / 有客登樓處

깊은 가을 낙엽이 지기 시작하는 때로다 / 高秋落木初

강물 소리는 빗소리와 함께 겹치고 / 江聲和雨重

산 기운은 발 안에 들어오도다 / 山氣入簾虛

사방을 둘러 보아도 고향땅은 아니니 / 四顧非鄕國

길게 읊조려 보나 뜻을 펼 길이 없어라 / 長吟意未舒

또,

물이 돌고 산이 낀 이름난 옛골을 / 水回山擁古名州

푸른 기와 붉은 난간이 상류에 비치도다 / 碧瓦朱欄照上流

좋은 계절이 만났으나 몸은 오히려 나그네 신세이고 / 佳節忽來還作客

어제 저녁 마신 술이 깨기 전에 다시 누에 오르네 / 宿醒猶在更登樓

들판 비 개인 경치는 인가가 저물고 / 郊原霽色人家晩

강포에 차가운 소리는 기러기떼 나는 가을이로다 / 江浦寒聲雁陣秋

귀밑머리 쉽게 쇠하는데, 돌아 갈 계책은 더디니 / 鬢髮易凋歸計緩

멀리 노는 손은 어느 날에나 시름을 면할 수 있으리오 / 遠遊何日免淸愁

하였다.


박광우(朴光祐 1495-1545) 선생과 정희등(鄭希登 1506-1545) 공이 어전에서 국문을 받고, 형을 당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새벽에 겨우 소생하니 박 선생이 정공에게 묻기를,

“어제 대비께서 당상에 계시므로,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나도 모르게 입 밖에 소리가 나왔는데, 공은 어떤 사람이기에 끝내 한마디 소리도 없었는가?”

하니, 정공이 말하기를,

“무릎을 내려 치는 곤장이 어찌 아프지 않으리오만, 재궁(梓宮)이 가까이에 있는 자리라서 나쁜 소리가 거기에 들릴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오.”

하자, 선생이 감탄하여 이르기를,

“나의 생각은 재궁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내 공에 미치지 못함이 멀도다.”

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옥졸이 눈물을 흘렸는데 모두 곤장을 맞고 죽으니 애통하도다.


○ 나의 백조(伯祖)인 윤아산(尹牙山) 공이 차원(差員)으로 역사(驛舍)에 들렸을 때, 마침 곽순(郭珣) 공이 체포되어 있는데, 그 행동거지가 조용하였고 인사하는 것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공에게 패도(佩刀)를 빌리려고 하자 아전이 무슨 사고가 있을까 하여 제지하였다. 곽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 어찌 스스로 목숨을 끊겠는가. 태연히 죽음에 나아가리라. 내가 칼을 빌리려는 것은 손톱과 발톱을 깎기 위해서다. 내가 죽은 후 누가 또 깎아 주겠는가.”

하고, 다 깎은 뒤에는 종이를 구해 이것을 싸서 늙은 종에게 주며 이르기를,

“좌우 두 글자(손과 발톱의 좌우쪽을 표시한 것)를 잘 살펴 관에 넣도록 하라.”

하였다.

물로 그 칼을 씻고 웃으며 돌려 주고 말하기를,

“이미 흉기(凶器)가 되었으니 쓸 수 없을 것 같소.”

하고 일어나 읍을 하고 ‘잘 계시오’ 하면서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국문하는 법정에서 한 번 공술(供述)을 한 이외에는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자, 옥졸이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 비록 백 가지 말을 한다 해도 살아날 도리가 있겠느냐.”

하였다. 드디어 옥에서 죽었다.


○ 사문(斯文) 강유선(康惟善 1520-1549) 공이 기유옥사에 무고되어, 격문을 지었다는 죄로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공이 이르기를,

“그 격문을 한번 보고 공술하겠다.”

하였다. 공이 한번 보고서 그것을 둘둘 만 다음 이르기를,

“이 글이 내가 지은 것이 아님은 여러분들도 역시 알고 있으리다. 유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군신(君臣) 두 글자는 진실로 이미 배워 알고 있소이다.”

하여, 눈을 감고 입을 다물어 죽기로 말을 하지 않고, 끝내 매를 맞고 죽으니 듣는 자는 모두 코끝이 시큰하였다.


규암(圭庵) 송(인수 1499-1547) 선생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평생 학문에 힘써 손에서 책을 떼는 일이 없었다. 장가드는 날 저녁에도 등불을 밝히고 글을 읽으니 사람들이 글미치광이라고 지목하였다. 친상(親喪) 중에는 눈물로 삼년을 보내서 소매가 모두 썩을 지경이었다. 흰 제비가 여막 위에 집을 짓고 같이 삼년을 지내니, 사람들은 효성에 감응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루는 늙은 종에게 이르기를,

“네 살찐 암탉으로 골라서 삶아라.”

하고 궤연에 들어가 곡하고, 종의 집에 가서 이것을 먹으니, 종이 그 처에게 말하기를,

“병이 없는데 닭을 먹으니, 미친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였는데, 며칠이 안 가서 크게 병이 나서 반년 동안이나 거의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상을 벗은 뒤, 매일 큰형의 집에 가서 선고(先考)의 사당에 배알하기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치지 않았다. 이기(李芑)와 재종간이 되었는데 한 마을에 동거하여, 이기의 집이 선생의 집 위쪽에 있었다.

이기는 오고 가는 길에 늘 선생을 찾았으나, 선생은 한 번도 답을 하지 안했으니, 이는 이기를 추한 사람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기가 이것 때문에 감정을 품어 중상하려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다만 그의 관직만을 파면하자 송 선생은 청주(淸州)의 선묘 곁에 가 살았다.

그때 정언각(鄭彦慤)이 벽서(壁書)건을 가지고 이기에게 고하기를,

“송인수(宋麟壽)가 오랫동안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선비들의 부박(浮薄)한 습성을 길러 오늘의 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뒷날의 폐단을 막을 수가 없을 것이오. 청컨대 아울러 중형에 처하게 하시오.”

하였다. 이에 사사되니, 어명이 이르는 날이 마침 선생의 생일 전날이었다. 선생이 늘 이르기를,

“멀리 귀양가라는 명령이 조석간에 내려올 것이니, 생일날에 친속들을 만나 작별을 하리라.”

하였다. 그때 배꽃이 한창 피어 있고 월색이 어렴풋이 밝았다. 선생이 소 천엽을 볶아 안주를 만들어 큰형수 앞에 술을 드리며 말하기를,

“오늘 저녁에는 조금 드셔요.”

하고, 이내 잠자리에 눕더니 코고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조금 있다 문밖에서 소리가 나는데 은은하기가 뇌성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의 종 문림(文林)이 저의 동무에게 말하기를,

“영감께서 내일 춤을 추신다고 나에게 족건(足巾)을 만들라고 하셨는데 뇌성이 우루루 하고 비가 올 낌새가 있으니 계획이 잘 되지 않겠다.”

하였다. 이것이 바로 군마(軍馬)가 달리며 포위하는 소리였다. 조금 있다가 문을 두드리는 자가 있는데, 심히 큰 소리로 불러대므로, 나가 보니 바로 금오랑이 온 것이었다.

시첩이 넘어지며 허겁지겁 뛰어가 고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형이라는 명령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급할 수가 있겠느냐?”

하고 바로 일어나 옷을 여미면서 나가니, 시첩은 그 뒤에서 허리띠를 부여 잡고 울었다. 선생이 허리띠를 풀어 버리고 나가며 말하기를,

“곧 이 띠를 가지고 오라. 임금의 명령이라 조금도 늦출 수는 없느니라.”

하고 무릎을 꿇고 도사(都事)에게 말하기를,

“원컨대 전지를 듣고 죽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전지를 보이자 선생이 이르기를,

“부박한 습관을 양성하였다는 것은 나 역시 모르는 일이고, 봉성(鳳城)을 친밀히 하였다 함은 죄를 청한 자의 잘못이요, 신이 일찍이 궐문 밖에서 멀리 벽제(辟除)소리를 듣고 공조(工曹)의 문으로 피해 들어가 한번 멀리 바라보았을 뿐이오.”

하였다 또 목욕하기를 청하고, 손톱을 깎고 옷을 갈아 입은 뒤 꿇어 앉아 유서를 써서 그 어린 아들에게 주면서

“부디 독서를 하지 말라.”

하였다가, 곧 다시 고쳐 쓰기를,

“글은 안 읽을 수 없고, 과거만 보지 말라.”

하였다.

약을 받들어 북향 재배하고 말하기를,

“신의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하온데 오히려 자진하게 해주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고, 또 선영(先瑩)을 향하여 재배하고 고하기를,

“임금을 섬기기를 잘못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황천에서 뵈오리까.”

하고, 두 손으로 약을 들며 행동이 태연하였다. 나졸이 집사람을 시켜 명주 수건을 드렸으나 마침내 말고삐 줄로 목을 매어 눈을 감지 못하고 죽었다.

이 날 밤에 구름도 없이 뇌성이 치며 몹시 사나운 바람이 크게 부니 철인(哲人)의 원통함을 하늘도 또한 불쌍히 여김이니, 애통한 일이로다. 선생은 바로 내 장인의 종형인데 장인이 늘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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