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점필재집

청담(靑潭) 2019. 11. 19. 08:10



점필재집

김종직(1431-1492)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昷)·효관(孝盥), 호는 점필재.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숙자(叔滋)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박홍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숙자는 고려말·조선초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길재(吉再)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종직은 길재와 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계승한 셈이다. 1446년(세종 28) 과거에 응시, 〈백룡부 白龍賦〉를 지어 김수온(金守溫)의 주목을 받았으나 낙방했다. 그 뒤 형 종석(宗碩) 등과 함께 황악산(黃嶽山) 능여사(能如寺)에 가서 독서에 힘써 학문을 크게 성취했다. 1451년(문종 1) 울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이며 종직의 문인인 조위(曺偉)의 누나와 결혼했다.


관직생활

1453년(단종 1) 태학에 들어가 〈주역 周易〉을 읽으며 주자학의 원류를 탐구하여 동료들의 경복(敬服)을 받았다. 이해 진사시에 합격(23세)했으며, 1459년(세조 5 : ) 식년문과에 급제(29세)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서 저작·박사·교검·감찰 등을 두루 지내면서, 왕명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 世子嬪韓氏哀冊文〉·〈인수왕후봉숭왕책문 仁壽王后封崇王冊文〉 등을 지었다. 1464년 세조가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 등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로 기용되면서 관인(官人)으로서 본격적인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1467년 수찬(修撰), 이듬해 이조좌랑, 1469년(예종 1) 전교서교리로 벼슬이 올라갔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지제교(藝文館修撰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늙은 어머니를 모신다고 하여 외직으로 나가 함양군수가 되었다. 1471년 봉열대부(奉列大夫)·봉정대부(奉正大夫), 1473년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으며, 1475년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를 거쳐 함양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했다. 이듬해 잠시 지승문원사를 맡았으나 다시 선산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함양과 선산 두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봄·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양노례(養老禮)를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승언(李承彦)·홍유손(洪裕孫)·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제자들을 기른 것도 이때의 일이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弘文館應敎知製敎) 겸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며, 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 등 승정원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이어서 이조참판·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과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유수,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 병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이 무렵부터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면서 사림파(士林派)를 형성,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제자들과 함께 유향소(留鄕所)의 복립운동(復立運動)을 전개하여 1488년 그 복립절목(復立節目)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향촌사회에서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 진출을 노리는 것이기도 했다.

1485년 사복첨정(司僕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딸인 남평문씨(南平文氏)와 재혼했다. 1489년에는 공조참판·형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1492년 사망하여 부남(府南)의 무량원(無量院) 서산(西山)에 묻혔다.


조의제문

6년 뒤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 〈조의제문 弔義帝文〉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정치행태를 비판해왔던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김굉필·이종준(李宗準) 등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중종이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의 건의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점필재집 시집 제2권

■금강산에 올라 해뜨는 것을 구경하다[登金剛看日出]

금강산의 높기는 하늘을 찌를 듯한데 / 金剛之山高揷天

우뚝 솟은 바위들은 가을 뼈를 드러낸 듯도 / 白石亭亭露秋骨

박상의 먼 그림자 은연중에 끌어들이어 / 搏桑遠影暗句引

일관봉 높은 표치와 함께 우뚝하구려 / 日觀孤標共崷崒

내 옛날 기이한 곳 찾아서 절정에 올라 / 我昔討奇凌絶頂

손으로 구름 헤치고 석실문을 두드렸는데 / 手闢雲關敲石室

동해 바다는 눈 밑의 작은 술잔 같았고 / 滄溟眼底小如杯

팔방의 바람 다 불어와 정신이 방일했었지 / 八極風來神橫逸

함께 놀던 늙은 중은 벽 기대고 졸다가 / 同遊老僧倚壁睡

한밤중에 손 깨워 해돋는 것 구경하자네 / 夜半蹴客候初日

북방의 새벽 기운은 맑기가 술과 같고 / 北方沆瀣澄似酒

하늘 밖엔 닭 우는 소리 어렴풋이 들리는데 / 天外鷄鳴聞彷彿

이 때에 해돋이가 밝고 어두움 반반이러니 / 是時暘谷半明暗

누운 소 수레 일산 다투어 띄엄띄엄 보여라 / 臥牛車蓋爭點綴

장경성 언뜻 보였다 빛을 거두려는데 / 長庚睒睒欲收芒

태양 바퀴 갑자기 파도를 감돌아 나와서 / 火輪忽輾波濤出

붉은 광채가 수십 길을 뛰어 오르니 / 紅光騰起數十丈

만리 파도는 어룡의 굴을 진동시키네 / 萬里驚盪魚龍窟

속세에는 코고는 소리 아직 우레 같은데 / 人寰鼻息尙雷鳴

나는 산봉우리 향해 머리털 말리노라 / 輒向峯頭晞我髮

평생에 기위한 구경 이만하면 이미 족해라 / 平生偉觀此已足

태산에 노니는 거야 어찌 이같을 수 있으랴 / 岱宗之遊豈相埒

엄자산들어가는 곳은 구경할 것 없으니 / 不須崦嵫看入處

이제는 과보의 목마름이 우습기만 하구려 / 至今冷笑夸父渴


■첨성대(瞻星臺)

반월성 가에 뿌연 안개 활짝 걷히니 / 半月城邊嵐霧開

우뚝 솟은 석탑이 사람을 맞는 듯하네 / 亭亭石塔迎人來

신라의 옛 물건은 산만이 남아있는데 / 新羅舊物山獨在

뜻밖에 다시 첨성대가 있네그려 / 不意更有瞻星臺

기형으로 칠정 다스리는 건순우의 일이니 / 璣衡齊政舜禹事

황당무계한 그 제작을 어디에 쓰겠는가 / 制作無稽安用哉

임금의 자리를 감히 여인에게 부여했으니 / 敢將神器付晨牝

천고에 진평왕이 화의 조짐이 되었도다 / 千古眞平爲禍胎


■동래현의 온천에 대하여[東萊縣溫井]

겹겹으로 험준한 금정산이여 / 巖巖金井山

그 아래서 유황수가 나오는데 / 下有硫黃水

천 년을 두고 찌는 듯이 들끓어 / 千載沸如蒸

달걀을 익힐 수가 있다오 / 可以熟雞子

그 누가 땔나무를 제공하는지 / 誰供薪爨用

신이 시키는 일 헤아릴 수 없어라 / 莫測神所使

나는 와서 오랫동안 탄식하다가 / 我來久嘆息

애오라지 때나 한번 씻고자 하네 / 塵垢聊一洗

신라왕의 구리 기둥 흔적은 / 羅王銅柱痕

아직까지 석추 속에 박혀 있으니 / 猶在石甃裏

당시에 큰 은총 입은 것이 / 當時被寵遇

여산의 온천터와 뭐가 다르랴 / 何異驪山址

지금 이 바다 한쪽 구석에는 / 今焉海一角

임금 행차가 용이하지 않으니 / 巡幸非容易

태수는 온천을 수리하지 마소 / 太守勿修繕

백성들만 괴롭힐까 염려스럽네 / 只恐勞民耳


점필재집 시집 제3권

■불국사에서 세번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佛國寺與世蕃話]

사찰의 경내를 찾아와 보니 / 爲訪招提境

솔 사이에 산 빛이 무거웁구려 / 松間紫翠重

푸른 산 한쪽에는 비가 내리고 / 靑山半邊雨

석양의 산사엔 쇠북 소리 울리네 / 落日上方鐘

이야기는 중과 함께 부드러웁고 / 語與居僧軟

술잔은 옛 정취에 따라 진하도다 / 杯隨古意濃

한 걸상 위에서 술에 만취해 / 頹然一榻上

서로 마주하니 머리털이 듬성하구려 / 相對鬢鬆


점필재집 시집 제4권

■포석정(鮑石亭)

포어의 등 위엔 물이 굽이쳐 돌아나가는데 / 鮑魚背上水灣環

깃 일산 수레들 송죽 사이로 은은히 비치어라 / 羽葆隱映松篁間

궁중의 형석은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고서 / 宮中衡石久不用

불계를 빙자하여 한가로움만 즐기었네 / 却憑祓禊耽餘閑

임금 신하 기뻐 날뛰며 유상곡수 구경할제 / 君臣拊髀看流觴

견훤군의 북소리 문득 금오산을 진동하니 / 鼙鼓忽動金鰲山

임금 왕비 허둥지둥 모두 달아나는데 / 倉皇輦路盡奔迸

어느 무사 하난들 방어하기를 꾀했던고 / 虎旅何人謀拒關

붉은 피가 절로 견훤의 칼날에 물들으니 / 鮮血自汚甄王劍

만조백관이 띠풀처럼 어지러이 쓰러졌네 / 滿朝狼藉如茅菅

편히 즐기는 앙화는 잠시도 못 지탱하나니 / 宴安之禍不旋踵

모름지기 진한의 어려웠던 국운을 믿어야지 / 須信辰韓天步艱

당시의 종묘 사직은 타고 남은 재일 뿐이고 / 當時廟社已荒燼

오직 천고에 완악한 돌 하나만이 남았어라 / 唯有片石千古頑

내 와서 옛일 슬퍼하며 길이 휘파람 부노니 / 我來弔古獨長嘯

풍운은 처참하고 시냇물은 졸졸 흐르네 / 風愁雲慘溪潺潺


점필재집 시집 제5권

■과거에 낙방하여 함양으로 돌아가는 유 생원을 보내다

깊은 가슴에 옥을 품고 일찍이 펴지 못해라 / 幽懷抱玉未曾攄

어찌 옷자락 끌고 권세가에 드나듦을 배우리오 / 肯向朱門學曳裾

돌아갈 꿈은 매양 천령의 달빛에 희미하고 / 歸夢每迷天嶺月

가난한 집 음식은 한강 고기를 바라지 않네 / 貧餐不要漢江魚

모친은 세밑이라 바느질을 거듭 더하고 / 親闈歲晏重添線

여관엔 밤도 길어 말 먹이기 싫증나도다 / 旅館更長倦秣驢

웅대한 뜻 잘 가지고 후일을 도모하게나 / 好把壯心謀後擧

알건대 그대는 분명 시서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 知君端不負詩書


점필재집 시집 제5권

■압구정에 대하여 상당부원군이 시 짓기를 청하다[狎鷗亭上黨府院君請賦]

상공은 운학 같은 자태로서 / 相公雲鶴姿

먼 하늘에 안온하게 유희하면서 / 遼天穩遊戲

물가 따르는 기러기도 벗삼지 않는데 / 不侶遵渚鴻

더구나 염주의 물총새를 짝하리오 / 況偶炎洲翠

원대한 뜻으로 서권을 생각하여 / 遐情念舒卷

때로는 강 언덕을 찾아오나니 / 江皐有時至

화려한 집이 대단히 소쇄하여라 / 華構絶蕭灑

도성 남쪽의 한 조각 땅이로세 / 一片城南地

처마 밖에는 산들 죽 비껴있고 / 簷外山庚庚

난간 앞에는 강물이 출렁대도다 / 檻前江淠淠

여기에서 학창의를 풀어헤치고 / 於焉披氅衣

여덟 창문을 즐겨 배회하노라면 / 八窓聊徙倚

맑은 이슬은 안석에 배어들고 / 灝露沁几席

청풍은 연과 마름을 흔드는데 / 淸飇動荷芰

짝을 잃은 듯이 멍하니 있노니 / 嗒然如喪耦

어찌 권세와 지위만 잊으리오 / 豈惟忘勢位

바다 갈매기는 공을 잘 알아보고 / 海鷗聖得知

주야로 서로 다퉈 와서 모이어 / 日夕爭來萃

끼륵끼륵 슬픈 소리로 울면서 / 關關吐商音

눈 같이 하얀 날개를 번득이네 / 皎皎翻雪翅

뜨락에 공의 기침 소리 나거든 / 庭除驚欬落

떼지어 날아 서로 애교를 부리면 / 群擧自相媚

상공은 빙그레 웃을 뿐이니 / 相公莞爾笑

어찌 물아를 구별하여 보았으랴 / 何曾物我視

오래전부터 믿음이 익숙해져서 / 中孚久已熟

새들도 또한 피하지를 않누나 / 禽鳥亦不避

비록 은사의 지취는 풍부하지만 / 縱饒滄洲趣

명군과 함께 다스리기를 도모하니 / 明主共圖治

비심이 일찍이 초야로 갔었으나 / 裨諶嘗適野

이는 곧 국사를 꾀히기 위함이요 / 乃是謀國事

안석이 별장에서 노닐었지만 / 安石遊別墅

중임을 맡기기에 뭐가 해로왔으랴 / 何妨任重寄

조정에 있거나 강호에 있거나 / 廊廟與江湖

걱정하는 건 두 가지가 아니니 / 所憂無二致

갈매기와 친하는 마음을 미룬다면 / 苟推狎鷗心

우리 백성이 그 은혜를 받으리라 / 吾民其受賜

공이여 처음과 끝을 삼가소서 / 公乎愼終始

어찌 충헌이 혼자만 아름다우랴 / 忠獻奚專美

굳이 특별한 수양을 하지 않아도 / 不要養沖素

천년 장수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 鶴算猶可冀


점필재집 시집 제7권

■진주의 교방 가요를 오 관찰사 백창에게 바치다

비봉산과 청천강에는 / 鳳岫菁川

사람마다 신선의 유적이 있다고 말하는데 / 人道有神仙遺迹

이제는 또 교경의 면류관과 공복이며 / 今又見喬卿冕服

상선의 깃발을 보았도다 / 象先旌節

들판에 떠돈 명성은 바닷가를 떨치는데 / 原隰風聲馳海上

화려한 누대에서는 기생을 불러 점고하네 / 瓊樓喚點蓬萊籍

문득 즐거운 마음이 이러하니 / 便歡情如許

물은 더 깊고 산은 더 푸르리라 / 水增深山增碧

가을 날씨는 맑고 가을 밤은 적막한데 / 秋日淨秋宵寂

기약은 잃기 쉽고 때는 얻기 어려워라 / 期易失時難得

깊은 침실은 맑고 환한데 / 儘洞房淸敞

향기로운 술에 밝은 달이로다 / 芳樽明月

양대 아래 운우의 꿈을 물리치지 못하여 / 雲雨未排臺下夢

원앙을 이미 수틀 속에 화려하게 수놓았으니 / 鴛鴦已暈機中織

원컨대 사신 행차 여기에 쉬시어 / 願星軒流憩

잠시나마 오늘 저녁을 즐기소서 / 一霎兒娛今夕


점필재집 시집 제8권

■노인들에게 납연을 베풀었는데 이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납일의 거센 바람에 추운 것도 아랑곳 않고 / 臘日獰飇不覺寒

사방 마을 노인들이 반열에 함께 참여하여 / 四村鳩杖共排班

초연엔 질서 있어약간 예의를 차리다가 / 初筵秩秩粗爲禮

취한 뒤엔 시끄러이 서로 다퉈 즐거워하네 / 旣醉喧喧競自歡

삭설은 어지러이 술 뜨는 국자를 적시고 / 朔雪亂霑浮蟻杓

선화는 나직이 검버섯 얼굴에 입혀지누나 / 仙花低襯凍梨顔

정성스레 위하여 임금의 은택 폈노니 / 殷勤爲霈皇恩澤

머물러두어 후일에 그림으로 만들어 보리라 / 留與他年作畫看


점필재집 시집 제9권

■감[柿]

두류산 북쪽의 수운이라는 마을에는 / 頭流山北水雲鄕

절로 집집마다 칠절당이 있는데 / 自有家家七絶堂

천호후에 봉해진 것과 어찌 맞먹을 뿐이랴 / 千戶侯封奚啻等

팔릉의 진미는 유독 훌륭함을 깨닫겠구려 / 八稜珍味覺偏長

가지에 달린 규룡 알은 서리 뒤에 물러지고 / 枝頭虯卵經霜脆

쟁반 안의 소의 심장은 좌중에 빛을 발하네 / 盤裏牛心照座光

곶감은 본래부터 오래 둘 수 있는 것이라 / 乾腊由來能致遠

장사꾼들 수다하고 돈 갖고 와서 사가누나 / 紛紛抱布往來商


점필재집 시집 제16권

■국이의 아내가 장단의 별장으로 돌아가자, 국이가 시로써 그를 송별하고, 그 다음날 나에게 그 시를 보여 주기에 읽어 보고는 천륜이 두터운 작품임을 매우 감탄하였다. 그 맨 끝구절에 이르기를 “살아서 이별하는 것도 이러한데 죽는 이별이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랴” 하였는데, 이것은 마치 나를 위해 한 말인 것 같아서 몹시 슬퍼한 나머지 차운하여 써서 보이다.

머리 짜올리고 부부가 되어서 / 結髮爲夫婦

절개와 의리를 둘이 서로 아는지라 / 節義兩相識

빈천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 貧賤是逆境

화락한 안색으로 잘 지냈었네 / 處之有愉色

중년엔 자못 비둘기처럼 졸렬하여 / 中歲頗鳩拙

둥지 엎어져 새끼들 일찍 죽이고 / 巢傾雛夭折

근심 걱정 빈한한 생활 속에 / 惸惸蓬蓽中

내외간마저 또한 사별을 하였네 / 鴛鴦亦孤宿

인생 백년이 그 얼마나 되리오 / 百年詎幾何

인간 세상엔 만족함도 없어라 / 人世無得得

구렁의 배는 절로 견고하지 못하기에 / 壑舟不自固

이웃 사람도 끝내 슬피 울었다오 / 隣里竟雨泣

나가서 성밖의 여인들을 보니 / 出見闉闍女

화장한 미인들 어찌 그리 들레는고 / 柰此粉黛聒

비록 작은 봉록 위하여 분주했으나 / 雖爲寸廩驅

집안엔 네 벽만 둘러 있을 뿐이네 / 家徒四壁立

백통의 사랑채에서 압제를 받아라 / 掩抑伯通廡

그 깊은 사정을 누구에게 말하랴 / 深情向誰說

천륜 두터운 시를 재삼 읽으니 / 三復厚倫詩

조석으로 삼가는 마음이 더하누나 / 增予晨夕惕


점필재집 시집 제21권

부안의 고성루에서[扶安古城樓]

천 길의 봉우리에 기이한 누관이 있어 / 千仞峯頭樓觀奇

억지로 쇠약한 몸 이끌고 높은 곳에 의지했네 / 强扶衰憊更憑危

금을 녹인 듯한 햇살은 군산도에 떨어지고 / 鎔金日落群山島

흰 베를 걸친 듯한 연기는 벽골피에 비꼈도다 / 搭素煙橫碧骨陂

몸은 반공중에 있으니 눈 가는 곳이 멀고 / 身在半空遊目遠

시는 만상을 찾노라니 술잔 놓기 더디구나 / 詩搜萬像放杯遲

능가산은 예로부터 천부로 일컬어졌는데 / 楞伽自昔稱天府

지금 험준한 산 대할 줄을 어찌 기약했으랴 / 今對孱顔豈所期


부안의 성루에서 변산을 바라보다[扶安城樓望邊山]

우강이 애써 옮겨 온 뜻을 상상해 보니 / 想像禺强用意移

아득한 만고에 대지를 진압하기 위함일세 / 蒼蒼萬古鎭坤維

초루는 정히 높은 나뭇가지와 마주하였고 / 譙樓正與高標對

바다에는 짙은 안개 걷히어 환하도다 / 溟海仍收宿霧披

울창한 좋은 재목은 일천 봉우리에 모였고 / 鬱鬱珍材千嶂合

그윽한 보찰들은 뭇 마귀들도 안다오 / 耽耽寶刹衆魔知

이 산속의 몇몇 황망한 사적들이 / 山中幾箇荒茫事

춘경의 백수의 시를 끌어내었네그려 / 惹得春卿百首詩


남원의 만복사에서[南原萬福寺]

일천 가호 바람 연기 자욱한 옛 고룡에 / 千室風煙古古龍

구름 위에 솟은 상찰이 단청도 찬란하여라 / 劖雲上刹爛靑紅

만억을 들여 재목 구하고 극도로 꾸몄으니 / 搜材萬億殫工巧

끝내 이 고을 보호한 공은 찾기가 어렵구나 / 畢竟難尋護邑功


만경의 연못에서[萬頃蓮澤]

만경의 성 가에서 백경의 연못을 당하여 / 萬頃城邊百頃蓮

가던 손이 고삐 잡고 푸른 연기 속에 서 있네 / 征夫按轡立蒼煙

꼿꼿이 서서 비 받으니 참으로 일산을 이루고 / 亭亭擎雨眞成蓋

깨끗하게 물 위에 나오니 정히 신선 같아라 / 濯濯凌波正欲仙

사향처럼 짙은 방심은 대단히 사랑하지만 / 酷愛芳心濃似麝

큰 배 만한 연꽃이 없는 게 한스럽구나 / 恨無碧藕大於船

경렴당아래 경치를 멀리 생각하노니 / 景濂堂下遙相憶

돌아가서 어느 때에 성현을 마주할거나 / 環佩何時對聖賢


■칠월 이십오일에 흥덕현의 문을 나와서 큰비를 만났는데, 윤현을 지나자 골짜기의 물이 모두 말의 배에까지 차오르므로 마침내 물에 막혀서 안덕사를 찾아가 묵다.

남풍에 세찬 비가 동이를 기울인 듯하니 / 南風猛雨若傾壺

계곡의 파도가 모두 무서운 길이로세 / 澗谷波濤盡畏途

어찌 뜻하였으랴 허둥지둥 절 방을 찾아 / 豈意倉皇尋丈室

적막함 사양치 않고 포단에서 졸 줄을 / 不辭落莫睡團蒲

죽 늘어선 옥 줄기는 섬돌 가의 대나무요 / 森森幹玉緣階篠

모여드는 자라 머리는 벽에 가득한 그림일세 / 戢戢頭黿滿壁圖

팔십 세 된 이웃 중은 두 손 맞잡고 말하기를 / 八十隣僧叉手道

사신이 머문 적은 예로부터 없었다 하네 / 皇華駐節古來無


익산 미륵사의 석탑을 보며[益山彌勒寺石浮屠]

귀공인지 민력인지 끝내 아득하기만 해라 / 鬼功民力竟茫茫

위로 용화산 만 길 등성이를 능가하였네 / 上軼龍華萬仞岡

천년을 두고 그 석재가 죄안을 이루었으니 / 千載石材成罪案

금마국의 무강왕이 참으로 가련하구나 / 可憐金馬武康王

익산 미륵사의 석탑 : 옛 마한국(馬韓國)이다. 무강왕(武康王)이 일찍이 마한국을 세우고, 하루는 사자사(獅子寺)로 행차하던 도중 못에서 세 미륵불(彌勒佛)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바로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명하여 용화산(龍華山) 아래 미륵사를 창건함과 동시에 또 세 미륵상(彌勒像)을 세웠다고 하는데, 특히 이 곳의 석탑(石塔)은 대단히 커서 높이가 여러 길이나 되어 동방(東方)의 석탑들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한다.


익산에서 두 수를 읊다[益山二首]

연로가 흉포하게 대동강 서쪽 삼켜 버리니 / 燕虜凶呑浿水西

남쪽 망명은 회계산에 머묾보다 심하였네 / 南奔不啻會稽棲

용화산 위의 보덕성은 묵어 없어졌는데 / 龍華山上城蕪絶

아직도 군왕의 준마 발자국은 띠어 있구나 / 尙帶君王駿馬蹄

오얏꽃 성하게 필 때 화려한 혼례 이뤘으니 / 穠李花開縟禮成

우공이 한 때의 영화는 충분이 얻었었네 / 寓公贏得一時榮

그러나 몸이 소종의 귀신이 된 이후로는 / 自從身作蕭琮鬼

천재에 그 보덕성을 찾기가 어렵구나 / 千載難尋報德城

□남쪽 망명은……심하였네 : 연로는 여기서 당(唐) 나라를 가리키고, 회계산(會稽山)에 머묾이란 곧 춘추 시대 월왕 구천(越王句踐)이 오왕 부차(吳王夫差)에게 대패하여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회계산에 올라가 머물렀던 일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일찍이 고구려(高句麗)가 당 나라에 멸망당한 뒤,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이 고구려의 종실(宗室) 안승(安勝)을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新羅)에 귀부(歸附)하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안승을 금마(金馬)에 살게 하여 보덕왕(報德王)으로 삼고, 이어 형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아 주었던 고사를 이른 말이다.

□ 우공 : 나라를 잃고 남의 나라에 우거하는 임금을 가리킨 말로, 여기서는 곧 고구려의 종실인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을 가리킨다. 위의 주석 참조.

□ 소종의 귀신 : 보덕왕 안승의 죽음을 비유한 말. 소종은 후량 명제(後梁明帝)의 아들로서 명제가 죽은 뒤에 그 자리를 이었다가, 뒤에 수 문제(隋文帝)의 부름을 받고 입조(入朝)하여 거국공(莒國公)에 봉해짐으로써 후량은 끝내 망하고 말았다.


장수의 수분정에서[長水水分亭]

만학의 운연 속에 수분정 우뚝 섰으니 / 雲煙萬壑水分亭

이 곳이 가장 호남의 궁벽한 노정이라네 / 最是湖南僻遠程

한 조각 채색 깃발은 새의 길에 서려 있는데 / 一片綵旗盤鳥道

말 머리 남북으로 맑은 바람 소리 들리누나 / 馬頭南北聽泠泠


용담현에 밤비가 내리다[龍潭縣夜雨]

청거의 관사에서 하룻밤을 묵으니 / 一宿淸渠館

도원의 흥취가 벌써 희미하구나 / 桃源興已迷

빗소리는 어이 그리 스산한고 / 雨聲何窣窣

등불 그림자는 또한 쓸쓸하여라 / 燈影轉凄凄

관공문서 수습하는 건 귀찮거니와 / 簿領慵收拾

산과 계곡은 헤어지기 아쉽구려 / 溪山惜解携

적상산성이 바로 어느 곳이뇨 / 裳城何處是

자고새 울음 소리 견주어 듣노라 / 擬聽鷓鴣啼

□ 청거 : 용담현(龍潭縣)의 고호이다.


고산의 탄현에서 성충을 생각하다[高山炭峴有懷成忠]

대둔산 아래 세 겹의 고개가 있는데 / 大芚山下三重嶺

탄현이 중간에 서려 있어 적의 요충 이뤘으나 / 炭峴中蟠作敵衝

신라의 오만 군대가 용이하게 통과하니 / 五萬東兵容易過

부여의 왕업이 이내 헛일이 되어 버렸네 / 扶餘王業旋成空

※이령(梨嶺)은 탄현의 동쪽에 있고 가재(加岾)는 탄현의 서쪽에 있다.

용계는 오열하고 초목은 무성한데 / 龍溪嗚咽樹扶疎

옛 진루가 탄현 서쪽에 아직도 남아 있네 / 故壘猶存炭峴西

여기에서 황산까지 삼십 리 거리인데 / 此去黃山三十里

옥중에서 글 올린 성자가 가련하구나 / 可憐成子獄中書


진안에서 마이산을 바라보다[鎭安望馬耳山]

기이한 봉우리 하늘 밖에 떨어졌는데 / 天外落奇峯

쭈뼛한 두 봉이 말의 귀와 같구나 / 雙尖如馬耳

높이는 몇 천 길이나 되는지 / 不知幾千仞

연기와 안개 속에 우뚝하도다 / 亭亭煙霧裏

우연히 임금의 돌아보심을 힘입어 / 偶蒙重瞳顧

좋은 이름이 만년을 전하게 되었네 / 佳名傳萬祀

용출봉이다 부봉 모봉이라고 한 / 湧出與父母

예전 명칭은 참으로 저속하였네 / 前稱眞鄙俚

중원에도 또한 이 이름이 있는데 / 中原亦有之

이름과 실제가 서로 비슷하다오 / 名實儻相擬

조물주의 기교함은 끝이 없으니 / 眞宰巧莫窮

길이 혼돈상태의 처음을 생각하네 / 永懷鴻濛始

가을비 내린 뒤에 내 여기 오니 / 我來秋雨餘

푸르고 붉은 빛이 비단 무늬 같은데 / 靑紅錯如綺

아름다운 봄 죽순 같은 자태를 / 濯濯春筍姿

서로 사랑할 뿐 기댈 수는 없구나 / 相偎不相倚

멀리 바라보며 고개 돌리지 않으니 / 遙瞻首不掉

문은 밤새도록 열어 두었도다 / 門戶終夜䦱

건강한 다리를 지니지 못하여 / 愧無濟勝具

지척도 두루 보지 못함이 부끄러워라 / 咫尺難歷視

어떻게 하면 대 지팡이를 짚고 / 安得綠玉杖

높이 올라 더러운 속세를 벗어나서 / 高步脫泥滓

쇄암사에서 이틀 밤을 지내고 / 信宿碎石庵

꼭대기에 올라 샘물을 떠 가지고 / 上挹峯頂水

선동과 함께 상의하여 / 靑童共商略

방촌비의 약을 한번 먹어 볼꼬 / 一服方寸匕


■구월 삼십일에 임실현에서 예조의 관문을 받고 황제가 팔월 이십이일에 붕어했음을 알고는 허둥지둥 백단령과 오각대를 현의 관아에서 빌려 입은 다음 역마들을 돌려보내고 그대로 삼 일을 머무르다.

운수에서 서울 사신을 만나서 / 雲水逢京使

황제가 붕어했다는 소식을 듣고 / 因聞帝陟遐

역마는 오수관으로 돌려보내고 / 馬歸獒樹館

옷은 사군의 집에서 빌려 입었네 / 衣倩使君家

조만간 천조가 내리길 기다리며 / 早晩看天詔

여기에 머물러 국화를 마주하도다 / 淹留對菊花

동교에서는 장차 사냥을 파하고 / 東郊將罷獵

병사들의 떠드는 것을 삼가리라 / 兵士愼喧譁

※이 때 철원(鐵原)에서 강무(講武)를 하기 위하여 팔도의 병사들이 모두 살곶이[箭串]에 모이었다.

□ 운수 : 임실(任實)의 고호임.


■광한루에서 계운ㆍ태허에게 화답하다[廣寒樓和季雲太虛]

인궤성가에 백척의 누각이 있는데 / 仁軌城邊百尺樓

백발의 쇠한 낯으로 난간 머리에 섰노니 / 蒼顔白髮曲欄頭

우수수 낙엽진 단풍숲은 구름이 가려 주고 / 霜林摵摵雲猶擁

아득한 수무늬 같은 논에는 벼를 이미 거두었네 / 繡畛茫茫稻已收

호남 영남의 사이에 경치 좋은 땅 제공하니 / 湖嶺中分供勝地

생가 소리 울려 퍼져라 좋은 놀이 즐겁구려 / 笙歌交咽款淸遊

병든 나의 시율은 한우처럼 막히었건만 / 病夫詩律寒竽澁

시인들이 화답을 요구하는 데에 어찌하랴 / 若被騷人折簡求

□ 인궤성 : 남원부(南原府)의 치소(治所)를 이름. 일찍이 당 고종(唐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파견하여 백제(百濟)를 멸하고, 유인궤(劉仁軌)에게 조서를 내려 대방주 자사(帶方州刺史)를 겸임하게 함으로써 유인궤가 쌓은 성인데, 지금도 옛터가 있다고 한다.


■팔량현(八良峴)

황산과 인월역은 가장 깊고 그윽한데 / 荒山引月最深奧

십이 년 만에 이제야 재차 왔노라 / 十二餘年今再到

허주의 고각 소리는 멀리 서로 맞이하는데 / 許州鼓角遠相迎

고개 넘은 바람은 보고를 하는 것 같구나 / 踰嶺縈風如告報

서계의 흐르는 물소리는 패옥과 함께 울리고 / 西谿流水和佩鳴

방장산의 푸른 구름은 말을 끼고 가도다 / 方丈蒼雲擁馬行

구관은 덕이 없는 게 스스로 부끄러운데 / 舊官無德自可愧

이 고장 온갖 물건은 도리어 정이 많구려 / 境上百物還多情


김제군에서 비 때문에 다시 하루를 더 머물면서 벽상의 운에 차하다.

깃발은 펄럭이다 다시 그치어라 / 干旌揚復止

애오라지 막빈과 얘기를 나누노니 / 聊與幕賓談

빗소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들리고 / 聽雨朝連暮

산 구경은 남북쪽이 다 어긋났네 / 看山北誤南

눈썹 낮추어 획일의 법을 따르고 / 低眉遵畫一

입 지키어 세 겹으로 입 봉하노니 / 守口用緘三

있는 곳마다 시위소찬만 하면서 / 着處惟尸素

오래 지체하자니 낯이 부끄럽구나 / 淹留面發慚

반년 동안 부질없이 묵묵히 있었으니 / 半年空嘿嘿

그 누가 담론을 잘한다 이르리오 / 誰道吃能談

문장은 주북을 사모하건만 / 詞藻懷周北

지방 순찰은 소남에 부끄러워라 / 蕃宣愧召南

바람은 손이로 몰아붙인 듯하고 / 風堪驅巽二

사람은 다투어 조삼을 성내도다 / 人競怒朝三

개혁은 끝내 이루기가 어려운지라 / 革易終難辨

때에 당해서 부질없이 스스로 부끄럽네 / 臨機謾自慚


순창의 도중에서 눈을 만났는데 눈이 갠 뒤에 매우 추웠다.

가는 길에서 눈발을 만났노니 / 征途値滕六

어찌 타관살이 연연할 수 있으랴 / 烏得戀覉棲

한점 한점은 사람 낯을 적시고 / 點點霑人面

날고 날아서 말굽을 쫓기도 하네 / 飛飛逐馬蹄

수녀의 태양은 구름을 쪼개고 / 劙雲嬃女日

적성의 닭은 정오를 아뢰누나 / 報午赤城雞

오늘 밤 화로 재를 긋고 있는 이 곳은 / 今夜書灰處

두류산 서쪽에서 또 서쪽이라오 / 頭流西復西


점필재집 시집 제22권

부안에서 상사 이계맹의 시 삼 수에 화답하다[扶安和李上舍繼孟三首〕

이 때 명(明) 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동월(董越)과 급사중(給事中) 왕창(王敞)이 새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우리 나라에 왔는데, 조정의 의논이 사신(使臣)이 반드시 문묘(文廟)를 배알하고 유생들에게 저술(著述)을 시험보여야 한다고 하여, 마침내 중외(中外)의 생원(生員)ㆍ진사(進士)들을 대대적으로 불러 성균관(成均館)에 모이도록 하였다.

학덕 높은 한림의 조서 전하는 의복이요 / 嶷嶷翰林傳詔服

수많은 성균관 유생의 진현관이로다 / 兟兟胄監進賢冠

마의 입고 북으로 가서 의당 나라를 빛내야지 / 麻衣北去須華國

지금은 주머니도 정히 썰렁하지 않으리라 / 囊槖如今正不寒

※상사(上舍)가 막 장가들었다.

운몽택 삼키는 걸어찌 셀 것이나 있으랴 / 胸呑雲夢何須數

일찍이 변산의 제일봉을 올랐었다오 / 曾上邊山第一峯

뱃속엔 오경이 있고 시는 상자에 가득하니 / 腹有五經詩滿篋

화려한 귀족 자제들이 모두 조용해지리 / 綺羅叢裏儘從容

천애의 영주 북쪽엔 관현악 소리 울리고 / 天涯絲管瀛洲北

운연 속의 나그네는 한식을 지낸 뒤로다 / 客裏雲煙熟食餘

스스로 지체 말고 화급히 길을 떠나려무나 / 火急着鞭毋自泥

그대 재주는 끝내 천거를 의지하지 않으리 / 君才終不仗吹噓


완산에서 춘흥에 대하여 세 수를 읊다[完山春興三首]

번화함이 옛날 견훤이 도읍한 때보다 나아라 / 繁華却勝甄都舊

복사꽃 오얏꽃이 온통 금수의 집을 이루었네 / 桃李渾成錦繡家

꽃구경 하기엔 두 눈 껄끄러움이 괴로운데 / 惱殺看花雙眼澁

시를 쓰노라니 또 글자는 까맣게 되는구나 / 探詩猶有字如鴉

제남정 북쪽으로 석귀의 골목에 / 濟南亭北石龜巷

수양버들 늘어진 소소의 집을 가리키어라 / 指點垂楊蘇小家

삼삼오오 탕아들은 오화마를 타고서 / 三三遊冶五花馬

성루의 저녁 까마귀를 서글피 바라보네 / 悵望城樓日暮鴉

붉고 흰 꽃들이 수놓은 비단 이루었는데 / 朱朱白白花成罽

가랑비는 수만 가호에 자욱이 내리누나 / 煙雨空濛數萬家

머무른 시일의 많고 적음을 묻지 마소 / 莫問淹留日多少

성 남쪽 나뭇잎이 벌써 까마귀를 감추었네 / 城南樹葉已藏鴉

□ 소소 : 남제(南齊)때 전당(錢塘)의 명기(名妓)의 이름인데, 전하여 기생을 가리킨 말이다.


전주 향교의 만화루에서 차운하다[全州鄕校萬化樓次韻]

학교는 공자의 궐리 학당과 방불하고 / 庠序依俙闕里堂

유생들은 모두 초 나라 인재 진량이로다 / 藏修盡是楚材良

연어는 활발하게 하늘과 땅을 나누었고 / 鳶魚活活分天地

현가 소리는 양양하게 담 밖으로 퍼지누나 / 絃誦洋洋殷堵墻

물이 방지에 출렁이니 가슴속은 맑아지고 / 水灔芳池襟抱淨

바람이 문행을 흔드니 담소는 시원하여라 / 風搖文杏笑談涼

일 년 동안 내 유생을 고무시킬 꾀 없었으니 / 一年鼓舞吾無術

누 앞의 유하의 배항들에게 부끄럽구나 / 慚負樓前游夏行


전주에서 삼월 삼일에 향음례와 향사례를 거행하다.

향음례의 남긴 법이 하루에 새로워지니 / 鄕飮遺謨一日新

성대한 조정의 풍화가 무리에 뛰어나네 / 盛朝風化冠群倫

황화대 아래서 한창 수작을 하노라니 / 黃花臺下方酬酢

오만 눈들이 함께 주인과 빈객을 보누나 / 萬目同看主與賓

오작의 예를 끝낸 다음 다시 서로 경계하고 / 禮成五酌更相規

사사가 머뭇거리며 말이 있어야 하는데 / 司射逡巡合有辭

일거에 아울러 행한 게 참람한 듯하긴 하나 / 一擧竝行雖似僭

향인들이 어렴풋이나마 옛 의식을 아는구려 / 鄕人髣髴識遺儀

애써 부르지 않아도 사수들이 모이었는데 / 不勞徵召射夫同

읍양의 절차가 아직도 삼대풍이 남았구나 / 揖讓猶存三代風

채번곡 연주 끝내고 깍지 팔찌를 거두니 / 疊盡采蘩收決拾

충만한 기분이 행단 안에 있는 것 같도다 / 充然如在杏壇中

정히 따스한 봄 삼월이라 삼짇날에 / 正是靑春三月三

산꼭대기 화살받이에 북소리 은은하구나 / 岡頭射垜鼓韽韽

유상곡수 놀이는 전혀 쓸데없는 일이라 / 流觴曲水渾閑事

양치한 나머지에 즐거움이 그지없구려 / 揚觶之餘樂且湛


완산의 만경대에 올라 세 수를 읊다[登完山萬景臺三首]

층대가 산꼭대기까지 모두가 암석이라 / 層臺通頂盡巖嶅

말에서 내려 걸음걸음 높은 데로 올라가니 / 卸馬登臨步步高

진포는 아득히 학의 물가에 연하였고 / 鎭浦微茫連鶴渚

변산은 희미하게 큰 바다에 꽂히었네 / 邊山隱約揷鯨濤

기이함 찾는 건 방일한 시 생각에 의지커니와 / 搜奇政倚詩魂橫

먼 데를 바라보매 어찌 눈 피로함을 사양하랴 / 望遠何辭眼力勞

오래 앉았으매 청풍이 두 겨드랑이에 나오니 / 坐久淸風生兩腋

서왕모에게서 빙도를 얻어먹은 듯하구나 / 擬從金母嚼氷桃

만 길 봉우리의 성문을 두루 보면서 / 流眺城闉萬仞岡

남고사 안에 승상을 빌려 앉았노라니 / 南高寺裏借繩床

강산의 웅장 수려함은 한토인 줄 알겠고 / 江山雄麗知韓土

들쭉날쭉한 누관들은 패향이라 일컫누나 / 樓觀參差稱沛鄕

천 두둑 밀 보리는 초여름을 바라보고 / 千隴來牟將孟夏

몇 집의 가취 소리엔 석양이 되어 가네 / 幾家歌吹欲斜陽

굳이 흥망 성쇠의 일을 논할 것이 없어라 / 不須料理興衰事

오늘의 번화함은 사방에 으뜸이라오 / 今日繁華冠四方

이 년의 직무 속에 귀밑이 희어졌는데 / 二年簿領鬢成絲

돌산 봉우리에서 술잔을 손에 쥐니 / 犖确峯頭把酒巵

푸른 눈의 선승은 채소 다발을 제공하고 / 碧眼禪僧供菜把

빨간 치마 기녀는 꽃가지를 꼬는구나 / 蒨裙歌妓撚花枝

버들꽃은 봄날의 개인 뒤에 성해지고 / 柳綿撲撲春晴後

소나무 이슬은 해 저문 때에 내리도다 / 松露霏霏日仄時

한가롭게 노니는 것을 괴이타 여기지 마소 / 莫怪優游仍嘯傲

부절 깃대 다 떨어지고 임기가 찼다오 / 節旄落盡及苽期


고부군에서 처음으로 꾀꼬리 울음소리를 듣다[古阜郡初聞栗留]

영주로 드는 길에서 취한 꿈이 깨어라 / 路入瀛洲醉夢醒

나무 끝 꾀꼬리 소리가 너무도 정녕스럽네 / 樹頭鶯語太丁寧

소녀가 어찌 이 사신의 뜻을 알리오 / 小娃豈識皇華意

열흘 동안 이미 실컷 들었다 웃으며 말하네 / 笑道旬時已厭聽

□ 영주 : 고부(古阜)의 고호임.


흥덕의 서관에서 차운하다[興德西館次韻]

백 길의 높은 성에 천 길의 봉우리라 / 百雉危城千仞峯

올라 보니 몸이 서늘한 바람을 탄 듯한데 / 登臨身似馭冷風

노는 사람 웃음소리는 초루 밖에서 들려 오고 / 遊人笑語華譙外

먼 포구 돛단배는 저녁 노을 속에 떠 있네 / 極浦帆檣返照中

한 길은 동서로 어찌 그리 아득히 먼고 / 一道東西何窵遠

하늘과 땅의 높낮음은 태초의 그대로구나 / 二儀高下自鴻濛

오사모 반쯤 벗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 烏紗半岸沈吟久

묻노니 황혼의 북소리가 몇 번이나 울렸는고 / 且問黃昏鼓幾通


■민락정에 오르다[登民樂亭]

민락정 안에 백성의 일이 적은지라 / 民樂亭中民事少

우연히 여흥을 타서 가득한 술잔 마시노니 / 偶乘餘興引深巵

두강은 아직도 바다 어귀에 있는데 / 頭綱猶在海亹處

나그네는 장차 서울로 돌아갈 때로다 / 客子將歸京邑時

언덕은 겹겹이라 참으로 그림보다 아름답고 / 墩塢重重眞勝畫

구름 덮인 산은 우뚝하니 시가 없을 수 있으랴 / 雲山矗矗可無詩

난간에 기대 황학 타고 신선이 되어 가고 싶은데 / 靠欄擬欲騎黃鶴

누가 회선의 철적을 가져 불어 줄런고 / 誰捻回仙鐵笛吹


고부의 민락정에서 조선을 바라보다[古阜民樂亭望漕船]

3월 29일에 법성포(法聖浦)의 조선(漕船) 60여 척이 부안(扶安)의 변산(邊山) 아래 당도하여 바람을 만났는데, 작당(鵲堂)에 정박한 34척은 모두 온전하고, 모항양(茅項洋) 밖에 정박한 배들은 모두 패선되어 익사자(溺死者)가 3백여 명이나 되었다.

천 척의 배가 흰쌀을 운반하는데 / 千艘運白粲

바닷길은 어찌 그리도 아득한고 / 海道何悠悠

도서가 천백 겹으로 둘러 있어 / 島嶼千百重

해마다 파도의 우환이 있었네 / 歲有風濤憂

지난해엔 제법 평년작을 이루어 / 前年頗中熟

국고가 다행히 조금 넉넉하였네 / 國廩幸少優

수많은 배들이 강장을 출발하여 / 舳艫發江藏

저녁에 변산 모퉁이에 닿았는데 / 夕止邊山陬

뱃사람들의 마음이 각각 달라 / 舟人各有心

흩어서 정박하여 수합할 수 없었네 / 散泊不能收

그래서 큰 파도가 밤에 마구 쳐 대어 / 驚波夜盪激

반은 침몰하고 반은 표류되었으니 / 半溺半漂浮

어떻게 풍백을 죽일 수 있으랴 / 焉能戮風伯

양후를 죽일 계책 또한 없어라 / 無計戕陽侯

백성의 고혈은 우선 그만두고라도 / 民膏且勿論

죽은 자는 누가 은인이고 원수인고 / 死者誰恩讎

통곡 소리가 물가에 진동하건만 / 哭聲殷水濱

아득한 바다 어디에서 찾을꼬 / 茫茫何處求

멀리 작당의 후미진 곳 바라보니 / 遙望鵲堂澳

큰 배 만 척도 감춰 둘 만했는데 / 可藏萬海鰌

시기를 당하여 호령을 잘못했으니 / 臨機失號令

이렇게 된 게 진정 까닭이 있도다 / 致此良有由


■쌀을 건져내는 데 대하여 탄식하다[漉米嘆]

조선이 파패되자, 즉시 흥덕 현감(興德縣監)ㆍ부안 현감(扶安縣監)ㆍ금모포 권관(黔毛浦權管)을 명하여 팔 읍(八邑)의 군사들을 독책해서 바다에 침몰된 쌀을 건져내게 한 결과 3천 7백여 석을 건져냈는데, 5일이 지난 뒤에 건진 쌀은 부패하여 악취가 나서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큰 바다 가운데서 쌀을 건지려니 / 漉米滄海中

어둔 바다에 바람도 쉬지를 않네 / 海暗風不息

사람들은 철룡조를 가지고서 / 人持鐵龍爪

언덕에 메뚜기떼처럼 모이었네 / 崖岸螽蝗集

동서로 부서진 판자를 바라보니 / 東西望壞版

그 밑에 잔뜩 쌓인 것이 있는데 / 其下有堆積

조수가 산더미처럼 말아 오면은 / 潮頭卷連山

황급히 도망쳐 물러나 서 있다가 / 折趾仍却立

조수가 물러갈 때에 함께 끌어내니 / 乘退共拽出

한 가마에 열 사람이 움직이도다 / 一斛動十力

언덕 근처는 혹 기대할 만도 하나 / 近岸或可冀

바다 한가운데야 누가 추적을 할꼬 / 大洋誰蹤跡

그 숫자는 모두 일만 팔천 석인데 / 厥數萬八千

겨우 오분의 일만을 건져내었고 / 五分纔一獲

십 일 간이나 물에서 못 꺼낸 것은 / 淹旬不出水

냄새와 맛이 모두 대단히 나빠져서 / 臭味俱穢惡

백 보 거리도 접근할 수가 없으니 / 百步不可近

큰 돼지도 장차 먹지 않으리라 / 大豕亦將殼

강제로 저 농민에게 분배하는 건 / 抑配彼農民

아 국가의 법칙이 아니니 / 嗚呼非令式

짐짓 그곳에 그대로 남겨 두어서 / 不如姑置之

원타의 먹이로 주는 것만 못하겠네 / 留與黿鼉食


완산에서 부림군 식 에게 받들어 주다[完山奉贈富林君 湜]

계양군(桂陽君)의 아들로 시를 썩 잘하는데, 자기 아들의 혼인에 관한 일로 역마를 타고 고부(古阜)로 간다.

왕손이 남국에서 역마를 타고 나가니 / 王孫南國儼驂騑

푸른 죽순 누런 매실이 비단옷에 비치누나 / 綠筍黃梅映錦衣

패부의 강산은 장한 기상을 제공하고 / 沛府江山供氣岸

영주의 초목은 빛난 광채를 입었도다 / 瀛洲草木被光輝

곡중의 이별의 슬픔은 금비녀를 적시고 / 曲中離思霑金鈿

취한 속의 시 생각은 거문고에 옮겨지네 / 醉裏詩情轉玉徽

부끄러워라 일찍이 잔술의 풍류도 못 나눴다가 / 自愧曾無杯酒雅

오늘 용문에 오르니 그리운 마음 그지없구려 / 龍門今日重依依


■취하여 부림군에게 화답하다[醉和富林君]

비장한 관현악 소리 온 자리에 떠들썩하니 / 豪竹哀絲聒四筵

못난 이 사람이 오늘은 젊어지려 하는구나 / 鄙夫今欲變華顚

자건의 가는 깃발을 멈추게 하기 어려워 / 難敎子建停行旆

오만 산천을 바라보며 섭섭해 할 뿐이로다 / 惆悵千山與百川


완산 도회의 제생에게 답하다[答完山都會諸生]

인재와 지망이 서로 동떨어지지 않는다고 / 人材地望不相懸

함장이 조용하게 뜻을 이미 전하였네 / 函丈從容意已傳

만화루 안에서는 성인의 도를 연구하고 / 萬化樓中硏聖道

황화대 아래는 손의 자리가 널찍하도다 / 皇華臺下敞賓筵

붕정은 통해야 하니 춤을 추게 해야 하지만 / 朋情要暢宜敎舞

강설은 술을 마셔야지 어찌 침을 허비하랴 / 講舌須澆肯費涎

예로부터 호남은 벽사로 일컬어졌으니 / 自古湖南稱甓社

구슬을 찾으려 지금 깊은 못을 말리려 하네 / 搜珠今擬渴深淵


순창의 관정루에서 절도사 이계동과 함께 판상의 운에 차하다.

관찰사 직무 일 년여에 헛된 이름만 훔치고 / 甘棠朞月竊虛名

관정루 안에서 술을 불러 마시노라니 / 觀政樓中喚麴生

정히 옷깃 헤치고 열뇌를 몰아내야지 / 正要披襟驅熱惱

얼굴 씻으러 맑은 물 떠올 것 없어라 / 不須灑面挹深淸

한 지방 나그네들은 교심에서 떠들어대고 / 一方行旅橋心鬧

천실의 밥짓는 연기는 숲 끝에 펀펀하구나 / 千室炊煙樹頂平

예로부터 순창은 순박하다 호칭했으니 / 從古淳州號淳朴

부서를 걷어 치우고 꾀꼬리 소리나 듣자꾸나 / 簿書揮罷聽鶯聲


■단오일에 부윤과 함께 그네뛰는 것을 보고 네 수를 짓다.

매월헌 안에서 단오일을 맞이하여 / 梅月軒中重午日

대윤이 시킨 그네뛰기를 웃으며 구경하노니 / 笑看大尹課秋千

경단과 주악이나 세속 따라 먹을 일이요 / 粉團角黍聊隨俗

술잔 돌리며 관현악에 취할 것 없겠네 / 不要傳觴醉管絃

석 줄의 미인이 일제히 부름에 응하여 / 粉黛三行齊應召

포도 시렁 아래로 함께 공손히 나가서 / 蒲萄架下共鏘翔

활등처럼 구부려 교대로 그넷줄을 차니 / 弓彎迭蹴秋千索

꾀꼬리 쫓아 짧은 담장을 넘는 것 같네 / 似逐流鶯過短墻

아름다운 나무는 토가산에 울창한데 / 佳樹蔥蘢土假山

채색 융단을 녹음 새에 두 줄로 비스듬히 묶고서 / 綵絨斜擘綠陰間

언뜻언뜻 날아가고 날아오고 하는 곳에 / 瞥然飛去飛來處

동실동실한 살구가 쪽머리를 때리는구나 / 杏子團團掠髻鬟

별원 안에서 그네뛰기 놀이를 파하고 나니 / 戲罷蹁躚別院中

유선군의 주름은 빨간 석류꽃 같아라 / 留仙裙皺石榴紅

남은 향기 간드러지게 주렴에 감도는데 / 餘香裊裊縈珠箔

운우가 다시 박초풍을 따라서 오는구나 / 雲雨還隨舶超風

※이날 저물녘에 약간의 비가 내렸다.


■전주 김 부윤 견수 에 대한 만사[全州金府尹 堅壽 挽詞]

김공(金公)은 기묘년의 무과(武科) 제삼인(第三人)으로 나와는 동년(同年)이다. 지난해 11월에 부윤(府尹)으로 전주(全州)에 부임했는데, 전주가 바로 감사(監司)의 본영(本營)이기 때문에 나와는 더욱 자주 만나서 담화를 했었다. 나는 임기가 차서 바야흐로 이 고을에 머물러 교체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는 지난 단오일(端午日)에 함께 매월정(梅月亭)에 올라가서 그네 뛰는 놀이를 구경했는데, 그 이튿날 부윤이 갑자기 병가(病暇)를 청하더니, 그로부터 7일이 지난 11일 새벽 닭이 울 무렵에 별세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이달 24일에 발인(發引)하여 장단(長湍)으로 갔다. 아, 어쩌면 이렇게도 갑작스럽단 말인가. 슬프도다.

대정에서 창방할 땐 기백이 무지개 같았는데 / 大庭臚句氣與虹

두 방의 뛰어난 재주가 누가 공만 했으랴 / 兩牓豪才孰似公

서울에서의 종유는 늘 적어서 한이었는데 / 九陌過從常恨少

올 봄에는 담소를 매양 같이하였네 / 一春笑語每回同

대방의 관현악 소리엔 기쁨이 흡족했는데 / 帶方絲竹歡曾洽

패관의 그네뛰기엔 꿈이 문득 비어 버렸네 / 沛館鞦韆夢忽空

결별의 술잔을 들고서 마시지도 못하고 / 爲擧別觴觴不釂

끝없이 흐르는 눈물을 남풍에 뿌리노라 / 無端涕淚灑


■이 참판 전수 에게 받들어 화답하다[奉和李參判 全粹]

늙어서 사직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 投老懸車歲月深

향려에서 몇 사람의 마음이나 도야했는고 / 鄕閭陶冶幾人心

영주(고부)는 본래부터 신선이 사는 지경이니 / 瀛洲本是神仙境

영춘이 십묘에 그늘지움을 다시 보겠네 / 更看靈椿十畝陰

젊었을 때 조정에서 의리를 깊이 사모했는데 / 少日鵷行慕義深

호남에 와서 꿋꿋한 지조를 저버렸네 / 湖南辜負歲寒心

장구를 못 모시고 부질없이 바라만 보니 / 未陪杖屨空瞻望

푸르른 도순산은 쉬 저물어 가는구려 / 都順蒼蒼易夕陰


부안현에서 자준 영공이 노자로 준 시운에 화답하다.

산서의 호협한 기운은 유병을 압도하나니 / 山西豪氣壓幽幷

그 누가 명공처럼 유독 잘 울리리오 / 誰似明公獨善鳴

예를 말하고 시를 힘씀은 참으로 자득한 건데 / 說禮敦詩眞自得

가벼운 옷 느슨한 띠는 아무 경영함이 없구려 / 輕裘緩帶却無營

후산에겐 일찍이 위엄과 덕으로 교화했으니 / 猴姍早已移威德

기린각엔 끝내 의당 성명이 올라가리라 / 麟閣終當揖姓名

부절 갖고 남쪽에 올 땐 조서를 함께 받았는데 / 南服分符同尺一

먼저 돌아가는 오늘에 내 심정이 어떻겠는가 / 先歸今日若爲情

인간 세상엔 헤어지면 만나기 어렵기에 / 人世睽離少合幷

부령에서 애오라지 불평의 울음을 짓노라 / 扶寧聊作不平鳴

끊임없는 담소에 밤은 점점 깊어졌고 / 笑談袞袞長侵夜

더디더디 가는 깃발은 멀리 감영을 가리키네 / 旌旆遲遲遠指營

취하고픈 건 하삭의 술과 같은 것이 아니요 / 欲醉非同河朔酒

서로 친함은 다만 두남의 명성때문일세 / 相親只爲斗南名

개풍문 밖의 서로 헤어지는 길에는 / 凱風門外分岐路

찬 비와 검은 구름이 무한한 정이로다 / 凍雨陰雲無限情


신창진의 도중에서 짓다[新倉津途中作]

신창진은 세 읍이 모이는 곳으로 / 新倉三邑會 ※옥야 임피 옥구 만경 이성 등

웅령에서 처음 수원이 발하였는데 / 熊嶺初發源

조수가 들어오고 또 나가곤 하여 / 潮生復潮落

밤낮으로 끊임없이 흐르도다 / 日夕流渾渾

원근의 숲들은 마치 부추와 같아서 / 遠近樹如薺

갈대 부들만 번성할 뿐이 아니요 / 不獨萑蒲蕃

기러기 오리는 개 닭과 섞이었는데 / 雁鶩雜鷄狗

고기잡이 집들이 마을을 이루었네 / 漁戶自成村

기름진 토지는 몇 만 이랑이나 되는지 / 腴田幾萬頃

아득히 바다 어귀에 닿았으니 / 蒼茫接海門

호남은 본디 벼곡식이 풍부하지만 / 湖南富秔稻

취야를 의당 으뜸으로 논해야겠네 / 鷲野宜首論

내가 와서 성한 더위를 만났는데 / 我來觸隆赩

높은 누각이 무너진 담장 눌러 있어 / 高樓壓頹垣

높은 데 올라 찬 오얏을 먹으니 / 憑危嚼氷李

순식간에 답답증이 제거되누나 / 倐爾蠲煩寃

길이 자안의 글귀를 읊노니 / 長吟子安句

이 천원이 내 눈을 놀라게 하는데 / 駭矚玆川原

편편이 날아 서쪽으로 가는 학은 / 翩翩西歸鶴

내려다보며 길이 말을 하는 듯하네 / 下顧似長言

구름 연기가 해도에 덮이었는데 / 雲煙冪海島

바람이 불어 구름 연기 환히 걷히니 / 砉然風披掀

봉래산은 전체가 맑고 깨끗한데 / 蓬萊盡澄澈

십주는 멀리 한 점일 뿐이로다 / 十洲夐一痕

손을 들어 나는 신선이 되려 하는데 / 擧手我欲仙

마부가 가는 수레를 묶어 놓았네 / 僕夫縻征軒


옥야현에서 김 월성의 운에 차하다[沃野縣次金月城韻]

넓은 들판에는 모래가 구르고 / 廣野龍堆轉

먼 하늘엔 새의 길이 더딘데 / 遙天鶂路遲

바람은 기울어진 베개에 맑고 / 風從欹枕穆

산은 두건 벗은 낯에 기이하도다 / 山向岸巾奇

촌락마다 닭 돼지의 골목이요 / 塢塢雞豚巷

마을마다 기러기 오리의 못이로세 / 村村雁鶩池

북으로 가면 응당 꿈을 꿀 것이라 / 北歸應入夢

꿇어앉아서 다시 시를 찾는다오 / 危坐更尋詩

도사 윤파를 작별하다[別尹都事坡]

호남에서 수월 동안 함께 일을 상의해 보니 / 湖南數月共咨詢

의당 영평엔 대대로 사람이 있음을 믿겠네 / 須信鈴平世有人

막부에 들어 담소할 땐 참으로 온화하고 / 入幕笑談眞醞籍

연회를 당해선 회포가 다시 청순하였지 / 當筵懷抱更淸醇

문서 끝엔 서아가 젖은 걸매양 보았더니 / 每看牘尾棲鴉濕

반심엔 수해가 새로울 걸미리 생각하네 / 預想班心繡獬新

오늘 여량에서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노니 / 今日礪良垂淚別

명년에는 서울의 봄을 저버리지 마세나 / 明年莫負九街春


점필재집 문집 제2권 / 기행록(紀行錄)

두류산(지리산)을 유람한 기행록[遊頭流錄]

나는 영남(嶺南)에서 생장하였으니, 두류산은 바로 내 고향의 산이다. 그러나 남북으로 떠돌며 벼슬하면서 세속 일에 골몰하여 나이 이미 40이 되도록 아직껏 한번도 유람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묘년(1471, 성종2, 41세때) 봄에 함양 군수(咸陽郡守)가 되어 내려와 보니, 두류산이 바로 그 봉내(封內)에 있어 푸르게 우뚝 솟은 것을 눈만 쳐들면 바라볼 수가 있었으나, 흉년의 민사(民事)와 부서(簿書) 처리에 바빠서 거의 2년이 되도록 또 한 번도 유람하지 못했다. 그리고 매양 유극기(兪克己), 임정숙(林貞叔)과 함께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마음 속에 항상 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 여름에 조태허(曺太虛)가 관동(關東)으로부터 나 있는 데로 와서 《예기(禮記)》를 읽고, 가을에는 장차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이 산에 유람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나 또한 생각건대, 파리해짐이 날로 더함에 따라 다리의 힘도 더욱 쇠해가는 터이니, 금년에 유람하지 못하면 명년을 기약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구나 때는 중추(仲秋)라서 토우(土雨)가 이미 말끔하게 개었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완상하고, 닭이 울면 해돋는 모습을 구경하며, 다음날 아침에는 사방을 두루 관람한다면 일거에 여러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가 있으므로, 마침내 유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극기를 초청하여 태허와 함께 《수친서(壽親書)》에 이른바 유산구(遊山具)를 상고하여, 그 휴대할 것을 거기에서 약간 증감(增減)하였다.

그리고 14일에 덕봉사(德峯寺)의 중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향도(鄕導)를 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는데, 중 법종(法宗)이 뒤따라오므로, 그 열력한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자못 자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말[馬]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부터 1리쯤 가서 환희대(歡喜臺)란 바위가 있는데, 태허와 백원이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는데, 금대사(金臺寺), 홍련사(紅蓮寺), 백련사(白蓮寺) 등 여러 사찰을 내려다보았다.

선열암(先涅菴)을 찾아가 보니, 암자가 높은 절벽을 등진 채 지어져 있는데, 두 샘이 절벽 밑에 있어 물이 매우 차가웠다. 담장 밖에는 물이 반암(半巖)의 부서진 돌 틈에서 방울져 떨어지는데, 반석(盤石)이 이를 받아서 약간 움푹 패인 곳에 맑게 고여 있었다. 그 틈에는 적양(赤楊)과 용수초(龍須草)가 났는데, 모두 두어 치[寸]쯤이나 되었다.

그 곁에 돌이 많은 비탈길이 있어, 등넝쿨[藤蔓] 한 가닥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것을 부여잡고 오르내려서 묘정암(妙貞菴)과 지장사(地藏寺)를 왕래하였다. 중 법종이 말하기를,

“한 비구승(比丘僧)이 있어 결하(結夏)와 우란(盂蘭)을 파하고 나서는 구름처럼 자유로이 돌아다녀서 간 곳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돌 위에는 소과(小瓜) 및 무우[蘿葍]를 심어놓았고, 조그마한 다듬잇방망이와 등겨가루[糠籺] 두어 되쯤이 있을 뿐이었다.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니 중은 없었고, 그 암자 역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가 있어 다섯 가닥이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척(尺)이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는데, 그 바위를 오르려는 자는 나무를 건너질러 타고 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잡고 바위 틈을 돌면서 등과 배가 위아래로 마찰한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란히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는데, 지금에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毛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해져서 내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서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땅거미가 졌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다. 극기(克己) 등은 뒤떨어졌고,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중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인하여 이렇게 호칭한 것입니다.”

하였다. 잠시 뒤에 요주승(寮主僧)이 납의(衲衣)를 입고 와서 합장(合掌)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

하니, 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짓을 하자, 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지금 요주승은 한 야옹(野翁)을 보았을 뿐이니,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

하니, 해공 등이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山行)을 시험하여 20리 가까이 걸은 결과, 극도로 피로하여 잠을 푹 자고 한밤중에 깨어서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여러 산봉우리에서는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으므로, 나는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기묘일 새벽에는 날이 더욱 흐려졌는데, 요주가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오랫동안 이 산에 거주하면서 구름의 형태로써 점을 쳐본 결과, 오늘은 반드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기뻐하며 담부(擔夫)를 감하여 돌려보내고 절에서 나와 곧바로 푸른 등라(藤蘿)가 깊이 우거진 숲속을 가노라니, 저절로 말라 죽은 큰 나무가 좁은 길에 넘어져서 그대로 외나무다리가 되었는데, 그 반쯤 썩은 것은 가지가 아직도 땅을 버티고 있어 마치 행마(行馬)처럼 생겼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그 밑으로 지나갔다. 그리하여 한 언덕을 지나니, 해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구롱(九隴) 가운데 첫째입니다.”

하였다. 연하여 셋째, 넷째 언덕을 지나서 한 동부(洞府)를 만났는데, 지경이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樹木)들이 태양을 가리고 덩굴풀[薜蘿]들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에 소리가 들리었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地勢)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계견(鷄犬)과 우독(牛犢)을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 도원(武陵桃源)에도 그리 손색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약속하고 이 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그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름을 쓰게 하였다.

구롱을 다 지나서는 문득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데, 가는 구름이 나직하게 삿갓을 스치고, 초목들은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축축이 젖어 있으므로, 그제야 비로소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로부터 수리(數里)를 다 못 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의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극도로 가팔라서,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 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나무 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해가 이미 한낮이 지나서야 비로소 영랑재를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쳐다보게 되었다. 영랑은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는데,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수(山水) 속에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시켰다.

이 때 구름과 안개가 다 사라지고 햇살이 내리비추자, 동서의 계곡들이 모두 환히 트이었으므로, 여기저기를 바라보니, 잡수(雜樹)는 없고 모두가 삼나무[杉], 노송나무[檜], 소나무[松], 녹나무[枏]였는데, 말라 죽어서 뼈만 앙상하게 서 있는 것이 3분의 1이나 되었고, 간간이 단풍나무가 섞이어 마치 그림과 같았다. 그리고 등성이에 있는 나무들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리어 가지와 줄기가 모두 왼쪽으로 쏠려 주먹처럼 굽은데다 잎이 거세게 나부끼었다. 중이 말하기를,

“여기에는 잣나무[海松]가 더욱 많으므로, 이 고장 사람들이 가을철마다 잣을 채취하여 공액(貢額)에 충당하는데, 금년에는 잣이 달린 나무가 하나도 없으니, 만일 정한 액수대로 다 징수하려 한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찌 하겠습니까. 수령(守令)께서 마침 보았으니, 이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서대초(書帶草)와 같은 풀이 있어 부드럽고 질기면서 매끄러워, 이것을 깔고 앉고 눕고 할 만하였는데, 곳곳이 다 그러하였다. 청이당 이하로는 오미자(五味子)나무 숲이 많았는데, 여기에 와서는 오미자나무가 없고, 다만 독활(獨活), 당귀(當歸)만이 있을 뿐이었다.

해유령(蟹踰嶺)을 지나면서 보니 곁에 선암(船巖)이 있었는데, 법종(法宗)이 말하기를,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산릉(山陵)을 넘쳐 흐를 때 이 바위에 배[船]를 매어두었는데, 방해(螃蟹)가 여기를 지나갔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생물(生物)들은 모두 하늘을 부여잡고 살았단 말인가.”

하였다.

또 등성이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중봉(中峯)을 올라가 보니, 산중에 모든 융기하여 봉우리가 된 것들은 전부가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이 위에 흙을 이고서 단중(端重)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걸음을 자유로이 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馬巖)에서 쉬는데, 샘물이 맑고 차서 마실 만하였다. 가문 때를 만났을 경우,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하면 반드시 뇌우(雷雨)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서 시험해 본 결과, 자못 효험이 있었다.

신시(申時)에야 천왕봉을 올라가 보니, 구름과 안개가 성하게 일어나 산천이 모두 어두워져서 중봉(中峯) 또한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서 소불(小佛)을 손에 들고 개게[晴] 해달라고 외치며 희롱하였다. 나는 처음에 이를 장난으로 여겼는데, 물어보니 말하기를,

“세속에서 이렇게 하면 날이 갠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손발을 씻고 관대(冠帶)를 정제한 다음 석등(石磴)을 잡고 올라가 사당에 들어가서 주과(酒果)를 올리고 성모(聖母)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저는 일찍이 선니(宣尼)가 태산(泰山)에 올라 구경했던 일과 한자(韓子)가 형산(衡山)에 유람했던 뜻을 사모해 왔으나, 직사(職事)에 얽매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중추(仲秋)에 남쪽 지경에 농사를 살피다가, 높은 봉우리를 쳐다보니 그 정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사(進士) 한인효(韓仁孝),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등과 함께 운제(雲梯)를 타고 올라가 사당의 밑에 당도했는데, 비, 구름의 귀신이 빌미가 되어 운물(雲物)이 뭉게뭉게 일어나므로, 황급하고 답답한 나머지 좋은 때를 헛되이 저버리게 될까 염려하여, 삼가 성모께 비나니, 이 술잔을 흠향하시고 신통한 공효로써 보답하여 주소서.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하늘이 말끔해져서 달빛이 낮과 같이 밝고, 명일 아침에는 만리 경내가 환히 트이어 산해(山海)가 절로 구분되게 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장관(壯觀)을 이루게 되리니, 감히 그 큰 은혜를 잊겠습니까.”

제사를 마치고는 함께 신위(神位) 앞에 앉아서 술을 두어 잔씩 나누고 파하였다. 그 사옥(祠屋)은 다만 3칸으로 되었는데, 엄천리(嚴川里) 사람이 고쳐 지은 것으로, 이 또한 판자 지붕에다 못을 박아놓아서 매우 튼튼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릴 수밖에 없었다. 두 중이 그 벽(壁)에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성모(聖母)의 옛 석상(石像)이란 것이었다. 그런데 미목(眉目)과 쪽머리[髻鬟]에는 모두 분대(粉黛)를 발라놓았고 목에는 결획(缺畫)이 있으므로 그 사실을 물어보니 말하기를,

“태조(太祖)가 인월역(引月驛)에서 왜구(倭寇)와 싸워 승첩을 거두었던 해에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그 곳을 찍고 갔으므로, 후인이 풀을 발라서 다시 붙여놓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 동편으로 움푹 들어간 석루(石壘)에는 해공 등이 희롱하던 소불(小佛)이 있는데, 이를 국사(國師)라 호칭하며, 세속에서는 성모의 음부(淫夫)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묻기를,

“성모는 세속에서 무슨 신(神)이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석가(釋迦)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입니다.”

하였다. 아, 이런 일이 있다니. 서축(西竺)과 우리 동방은 천백(千百)의 세계(世界)로 막혀 있는데, 가유국(迦維國)의 부인이 어떻게 이 땅의 귀신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를 명했다[聖母命詵師]’는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天王)이니, 바로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비(妣)인 위숙왕후(威肅王后)를 가리킨다.”

하였다. 이는 곧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에 관한 말을 익히 듣고서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승휴는 그 말을 믿고 《제왕운기》에 기록해 놓았으니, 이 또한 고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구나 승려들의 세상을 현혹시키는 황당무계한 말임에랴. 또 이미 마야부인이라 하고서 국사(國師)로써 더럽혔으니, 그 설만(褻慢)하고 불경(不敬)스럽기가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이것을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날이 또 어두워지자 음랭한 바람이 매우 거세게 동서쪽에서 마구 불어와, 그 기세가 마치 집을 뽑고 산악을 진동시킬 듯하였고, 안개가 모여들어서 의관(衣冠)이 모두 축축해졌다. 네 사람이 사내(祠內)에서 서로 베개삼아 누웠노라니, 한기(寒氣)가 뼈에 사무치므로 다시 중면(重綿)을 껴입었다. 종자(從者)들은 모두 덜덜 떨며 어쩔 줄을 몰랐으므로, 큰 나무 서너 개를 태워서 불을 쬐게 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므로, 기뻐서 일어나 보니 이내 검은 구름에 가려져 버렸다. 누(壘)에 기대서 사방을 내려다보니, 천지(天地)와 사방(四方)이 서로 한데 연하여, 마치 큰 바다 가운데서 하나의 작은 배를 타고 올라갔다 기울었다 하면서 곧 파도 속으로 빠져들어갈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에게 웃으며 이르기를,

“비록 한퇴지(韓退之)의 정성과 기미(幾微)를 미리 살펴 아는 도술(道術)은 없을지라도 다행히 군(君)들과 함께 기모(氣母 우주의 원기를 이름)를 타고 혼돈(混沌)의 근원에 떠서 노닐게 되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경진일에도 비바람이 아직 거세므로, 먼저 향적사(香積寺)에 종자들을 보내어 밥을 준비해 놓고 지름길을 헤치고 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오(正午)가 지나서는 비가 약간 그쳤는데 돌다리가 몹시 미끄러우므로, 사람을 시켜 붙들게 하여 내려왔다. 수리(數里)쯤 가서는 철쇄로(鐵鎖路)가 있었는데 매우 위험하므로, 문득 석혈(石穴)을 꿰어 나와서 힘껏 걸어 향적사(香積寺)에 들어갔다. 향적사에는 중이 없은 지가 벌써 2년이나 되었는데, 계곡 물은 아직도 쪼개진 나무에 의지하여 졸졸 흘러서 물통으로 떨어졌다. 창유(窓牖)의 관쇄(關鎖) 및 향반(香槃)의 불유(佛油)가 완연히 모두 있었으므로, 명하여 깨끗이 소제하고 분향(焚香)하게 한 다음 들어가 거처하였다.

저물녘에는 운애(雲靄)가 천왕봉으로부터 거꾸로 불려 내려오는데, 그 빠르기가 일순간도 채 안 되었다. 그리하여 먼 하늘에는 간혹 석양이 반사된 데도 있으므로, 나는 손을 들어 매우 기뻐하면서, 문 앞의 반석(盤石)으로 나가서 바라보니, 육천(?川)이 길게 연해져 있고, 여러 산(山)과 해도(海島)는 혹은 완전히 드러나고 혹은 반쯤만 드러나기도 하며 혹은 꼭대기만 드러나기도 하여, 마치 장막(帳幕) 안에 있는 사람의 상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절정(絶頂)을 쳐다보니, 겹겹의 봉우리가 둘러싸여서 어제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당 곁에 서 있는 흰 깃발은 남쪽을 가리키며 펄럭이고 있었는데, 대체로 회화승(繪畫僧)이 나에게 그 곳을 알 수 있도록 알려준 것이다. 여기에서 남북의 두 바위를 마음껏 구경하고, 또 달이 뜨기를 기다렸는데, 이 때는 동방(東方)이 완전히 맑지 못하였다. 다시 추위를 견딜 수가 없어 등걸불을 태워서 집을 훈훈하게 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어갔다. 한밤중에는 별빛과 달빛이 모두 환하였다.

신사일 새벽에는 태양이 양곡(暘谷)에서 올라오는데, 노을빛 같은 채색이 반짝반짝 빛났다. 좌우에서는 모두 내가 몹시 피곤하여 반드시 재차 천왕봉을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나는 생각건대, 수일 동안 짙게 흐리던 날이 갑자기 개었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대단히 도와준 것인데, 지금 지척에 있으면서 힘써 다시 올라보지 못하고 만다면 평생 동안 가슴 속에 쌓아온 것을 끝내 씻어내지 못하고 말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마침내 새벽밥을 재촉하여 먹고는 아랫도리를 걷어올리고 지레 석문(石門)을 통하여 올라가는데, 신에 밟힌 초목들은 모두 고드름이 붙어 있었다. 성모묘에 들어가서 다시 술잔을 올리고 사례하기를,

“오늘은 천지가 맑게 개고 산천이 환하게 트였으니, 이는 실로 신의 도움을 힘입은 것이라, 참으로 깊이 기뻐하며 감사드립니다.”

하고, 이에 극기, 해공과 함께 북루(北壘)를 올라가니, 태허는 벌써 판옥(板屋)에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높이 날으는 홍곡(鴻鵠)일지라도 우리보다 더 높이는 날 수 없었다.

이 때 날이 막 개서 사방에는 구름 한 점도 없고, 다만 대단히 아득하여 끝을 볼 수가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대체로 먼 데를 구경하면서 그 요령을 얻지 못하면 나무꾼의 소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니 어찌 먼저 북쪽을 바라본 다음, 동쪽, 남쪽, 서쪽을 차례로 바라보고 또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하여 먼 데에 이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니, 해공이 그 방도를 썩 잘 지시해 주었다.

이 산은 북으로부터 달려서 남원(南原)에 이르러 으뜸으로 일어난 것이 반야봉(般若峯)이 되었는데, 동쪽에서는 거의 이백 리를 뻗어와서 이 봉우리에 이르러 다시 우뚝하게 솟아서 북쪽으로 서리어 다하였다. 그 사면(四面)의 빼어남을 다투고 흐름을 겨루는 자잘한 봉우리와 계곡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계산(計算)에 능한 사람일지라도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보건대, 그 성첩(城堞)을 마치 죽 끌어서 둘러놓은 것처럼 생긴 것은 함양(咸陽)의 성(城)일 것이고, 청황색이 혼란하게 섞인 가운데 마치 흰 무지개가 가로로 관통한 것처럼 생긴 것은 진주(晉州)의 강물일 것이고, 푸른 산봉우리들이 한점 한점 얽히어 사방으로 가로질러서 곧게 선 것들은 남해(南海)와 거제(巨濟)의 군도(群島)일 것이다. 그리고 산음(山陰), 단계(丹谿), 운봉(雲峯), 구례(求禮), 하동(河東) 등의 현(縣)들은 모두 겹겹의 산골짜기에 숨어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바로 황석(黃石) 안음(安陰)에 있다. 과 취암(鷲巖) 함양(咸陽)에 있다. 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덕유(德裕) 함음(咸陰)에 있다., 계룡(鷄龍) 공주(公州)에 있다., 주우(走牛) 금산(錦山)에 있다., 수도(修道) 지례(知禮)에 있다., 가야(伽耶) 성주(星州)에 있다. 이다. 또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황산(皇山) 산음(山陰)에 있다. 과 감악(紺嶽) 삼가(三嘉)에 있다. 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팔공(八公) 대구(大丘)에 있다., 청량(淸涼) 안동(安東)에 있다. 이다. 동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도굴(闍崛) 의령(宜寧)에 있다. 과 집현(集賢) 진주(晉州)에 있다. 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비슬(毗瑟) 현풍(玄風)에 있다., 운문(雲門) 청도(淸道)에 있다., 원적(圓寂) 양산(梁山)에 있다. 이다.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은 와룡(臥龍) 사천(泗川)에 있다. 이고, 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병요(甁要) 하동(河東)에 있다. 와 백운(白雲) 광양(光陽)에 있다. 이고,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멀리 있는 것은 팔전(八顚) 흥양(興陽)에 있다. 이다. 서쪽에 있는 산으로 멀리 있는 것은 황산(荒山) 운봉(雲峯)에 있다. 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무등(無等) 광주(光州)에 있다., 변산(邊山) 부안(扶安)에 있다., 금성(錦城) 나주(羅州)에 있다., 위봉(威鳳) 고산(高山)에 있다., 모악(母岳) 전주(全州)에 있다., 월출(月出) 영암(靈巖)에 있다. 이고, 서북쪽에 멀리 있는 산은 성수(聖壽) 장수(長水)에 있다. 이다.

이상의 산들이 혹은 조그마한 언덕 같기도 하고, 혹은 용호(龍虎) 같기도 하며, 혹은 음식 접시들을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칼끝 같기도 한데, 그 중에 유독 동쪽의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만이 여러 산들보다 약간 높게 보인다. 그리고 계립령(鷄立嶺) 이북으로는 푸른 산 기운이 창공에 널리 퍼져 있고, 대마도(對馬島) 이남으로는 신기루(蜃氣樓)가 하늘에 닿아 있어, 안계(眼界)가 이미 다하여 더 이상은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극기로 하여금 알 만한 것을 기록하게 한 것이 이상과 같다.

마침내 서로 돌아보고 자축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이 봉우리를 오른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어찌 오늘날 우리들만큼 유쾌한 구경이야 했겠는가.”

하고는, 누(壘)를 내려와 돌에 걸터앉아서 술 두어 잔을 마시고 나니, 해가 이미 정오(亭午)였다. 여기에서 영신사(靈神寺), 좌고대(坐高臺)를 바라보니, 아직도 멀리 보였다.

속히 석문(石門)을 꿰어 내려와 중산(中山)을 올라가 보니 이 또한 토봉(土峯)이었다. 군인(郡人)들이 엄천(嚴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북쪽에 있는 제이봉(第二峯)을 중산이라 하는데, 마천(馬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증봉(甑峯)을 제일봉으로 삼고 이 봉우리를 제이봉으로 삼기 때문에 그들 또한 이것을 중산이라 일컫는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산등성이를 따라서 가는데, 그 중간에 기이한 봉우리가 10여 개나 있어 모두 올라서 사방 경치를 바라볼 만하기는 상봉(上峯)과 서로 비슷했으나 아무런 명칭이 없었다. 그러자 극기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고증할 수 없는 일은 믿어주지 않음에야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이 곳 숲에는 마가목(馬價木)이 많은데, 지팡이를 만들 만하므로, 종자(從者)를 시켜 매끄럽고 곧은 것을 골라서 취하게 하였더니, 잠깐 사이에 한 다발을 취하였다.

증봉(甑峯)을 거쳐 진펄의 평원에 다다르니, 좁은 길에 서 있는 단풍나무가 마치 문설주와 문지방의 형상으로 굽어 있었으므로, 그 곳으로 나가는 사람은 모두 등을 구부리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이 평원은 산의 등성이에 있는데, 5, 6리쯤 넓게 탁 트인 데에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하였다.

시냇가에는 두어 칸 되는 초막[草廠]이 있는데, 빙 둘러 섶으로 울짱을 쳤고 온돌[土炕]도 놓아져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내상군(內廂軍)이 매[鷹]를 포획하는 막사였다. 내가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이 곳에 이르는 동안, 강만(岡巒)의 곳곳에 매 포획하는 도구 설치해 놓은 것을 본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아직은 가을 기운이 그리 높지 않아서 현재 매를 포획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의 무리는 운한(雲漢) 사이를 날아가는 동물이니, 그것이 어떻게 이 준절(峻絶)한 곳에 큼직한 덫을 설치해 놓고 엿보는 자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그래서 미끼를 보고 그것을 탐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걸려 잡혀서 노끈에 매이게 되는 것이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을 경계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라에 진헌(進獻)하는 것은 고작 1, 2련(連)에 불과한데, 희완(戲玩)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보라를 견뎌가면서 천 길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심(仁心)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ㆍ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해공이 여러 구렁[壑]이 모인 곳을 가리키면서 신흥사동(新興寺洞)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湖南)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영기는 구서(狗鼠)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李公) 같은 지용(智勇)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 부사(長興府使)에게로 공(功)이 돌아갔으니, 탄식할 일이다.

해공이 또 악양현(岳陽縣)의 북쪽을 가리키면서 청학사동(靑鶴寺洞)이라고 하였다. 아, 이것이 옛날에 이른바 신선(神仙)이 산다는 곳인가 보다. 인간의 세계와 그리 서로 멀지도 않은데, 이미수(李眉叟)는 어찌하여 이 곳을 찾다가 못 찾았던가? 그렇다면 호사자(好事者)가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짓고서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인가.

해공이 또 그 동쪽을 가리키면서 쌍계사동(雙溪寺洞)이라고 하였다. 최고운(崔孤雲)이 일찍이 이 곳에서 노닐었으므로 각석(刻石)이 남아 있다. 고운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기개(氣槪)를 지닌데다 난세(亂世)를 만났으므로, 중국(中國)에서 불우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토(東土)에서도 용납되지 않아서, 마침내 정의롭게 속세 밖에 은둔함으로써 깊고 그윽한 계산(溪山)의 지경은 모두 그가 유력(遊歷)한 곳이었으니, 세상에서 그를 신선이라 칭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다.

영신사(靈神寺)에서 자는데 여기는 중이 한 사람뿐이었고, 절의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일구(一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 그 석가섭의 목[項]에도 이지러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인은 참으로 구적(寇賊)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단참(斷斬)의 화를 입었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인형(人形)을 닮은 때문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괴(荒怪)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전포(錢布)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정도였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從者)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서 거의 숙맥(菽麥)도 구분하지 못하는데도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법당(法堂)에는 몽산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贊)에,

두타 제일이 / 頭陀第一

이것이 바로 두수인데 / 是爲抖擻

밖으론 이미 속세를 멀리하였고 / 外已遠塵

안으론 이미 마음의 때를 벗었네 / 內已離垢

앞서 도를 깨치었고 / 得道居先

뒤에는 적멸에 들었으니 / 入滅於後

설의와 계산이 / 雪衣鷄山

천추에 썩지 않고 전하리라 / 千秋不朽

하였고, 그 곁의 인장(印章)은 청지(淸之)라는 소전(小篆)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이었다.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泠), 혜산(惠山)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못할 듯하였다. 샘의 서쪽에는 무너진 절이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옛 영신사이다. 그 서북쪽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塔)이 있는데, 그 돌의 결이 아주 섬세하고 매끄러웠다. 이 또한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것을 뒤에 다시 쌓고 그 중심에 철(鐵)을 꿰어놓았는데, 두어 층[數層]은 유실되었다.

임오일에는 일찍 일어나서 문을 열고 보니, 섬진강(蟾津江)에 조수(潮水)가 창일하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로 남기(嵐氣)가 편평하게 펼쳐 있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절의 서북쪽을 따라 내려와 고개 위에서 쉬면서 반야봉을 바라보니, 대략 60여 리쯤 되었다. 이제는 두 발이 다 부르트고 근력이 이미 다하여, 아무리 가서 구경하고 싶어도 강행(强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름길로 직지봉(直旨峯)을 경유하여 내려오는데, 길이 갈수록 가팔라지므로, 나무 뿌리를 부여잡고 돌 모서리를 디디며 가는데 수십 리의 길이 모두 이와 같았다. 여기서 동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우러러보니,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는 대나무 끝에 간혹 열매가 있었는데 모두 사람들이 채취하여 갔다. 소나무가 큰 것은 백 아름[百圍]도 될 만한데, 깊은 골짜기에 즐비하게 서 있었으니, 이것은 모두 평소에 보지 못한 것들이다.

이미 높은 기슭을 내려와서 보니, 두 구렁의 물이 합한 곳에 그 물소리가 대단히 뿜어 나와서 임록(林麓)을 진동시키고, 백 척(百尺)이나 깊은 맑은 못에는 고기들이 자유로이 헤엄쳐 놀았다. 우리 네 사람은 여기서 손에 물을 움켜 양치질을 하고 나서 비탈길을 따라 지팡이를 끌고 가니, 매우 즐거웠다.

골짜기 어귀에는 야묘(野廟)가 있었는데, 복부(僕夫)가 말[馬]을 데리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옷을 갈아입고 말에 올라 실택리(實宅里)에 당도하니, 부로(父老) 두어 사람 길 아래서 맞이하여 절하면서 말하기를,

“사군(使君)께서 산을 유람하시는 동안 아무 탈도 없었으니, 감히 하례 드립니다.”

하므로, 나는 비로소 백성들이 내가 유람하느라 일을 폐했다 하여 나를 허물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뻤다.

해공은 군자사(君子寺)로 가고, 법종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태허, 극기, 백원은 용유담(龍游潭)으로 놀러 가고, 나는 등귀재(登龜岾)를 넘어서 곧장 군재(郡齋)로 돌아왔는데, 나가 노닌 지 겨우 5일 만에 가슴 속과 용모가 확 트이고 조용해짐을 갑자기 깨닫게 되어, 비록 처자(妻子)나 이서(吏胥)들이 나를 볼 적에도 역시 전일과 다르게 보일 것 같았다.

아, 두류산처럼 높고 웅장하고 뛰어난 산이 중원(中原)의 땅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숭산(嵩山), 태산(泰山)보다 앞서 천자(天子)가 올라가 금니(金泥)를 입힌 옥첩 옥검(玉牒玉檢)을 봉(封)하여 상제(上帝)에게 승중(升中)하였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의당 무이산(武夷山), 형악(衡嶽)에 비유되어서, 저 박아(博雅)하기로는 한창려(韓昌黎), 주회암(朱晦庵), 채서산(蔡西山) 같은 이나, 수련(修煉)을 한 이로는 손흥공(孫興公), 여동빈(呂洞賓), 백옥섬(白玉蟾)같은 이들이 서로 연달아 이 산 속에서 배회하며 서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유독 군적(軍籍)을 도피하여 부처[佛]를 배운다는 용렬한 사내나 도망간 천인들의 소굴이 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무리가 비록 한 차례나마 등람(登覽)하여 겨우 평소의 소원에 보답하기는 했으나, 세속의 직무에 급급하여 감히 청학동을 찾고 오대(五臺)를 유람하여 그윽하고 기괴함을 두루 탐토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의 불우함이겠는가. 자미(子美)의 방장삼한(方丈三韓)의 시구를 길이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날아오른다. 임진년 중추(仲秋) 5일 후에 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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