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양촌집

청담(靑潭) 2019. 4. 1. 23:18



양촌집(陽村集)

권근( 權近 1352-1409)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진(權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소오자(小烏子). 권보(權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권고(權皐), 아버지는 검교정승 권희(權僖)이다.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17세)해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와 화친함)을 주장했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1388년(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명나라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몰래 뜯어본 죄로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

그 뒤 영해(寧海)·흥해(興海) 등을 전전하여 유배되던 중,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한때 청주 옥에 구금되기도 했다. 뒤에 다시 익주(益州 익산)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충주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1393년(태조 2)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 태조의 아버지 환조(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바쳤다. 그런데 이 글들은 모두 후세 사람들로부터 유문(諛文)·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했다.

그 뒤 새 왕조에 출사(出仕)하여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表箋問題: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 속에 표현된 내용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함)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 아니라, 유삼오(劉三吾)·허관(許觀) 등 명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했다. 그리고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詩) 24편을 지어 중국에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고, 정종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私兵制度)의 혁파를 건의, 단행하게 했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402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 등을 뽑았고, 1407년에는 최초의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한편, 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 저술하여 정리함)하고, 하륜(河崙) 등과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하였다. 또한, 유학제조(儒學提調)를 겸임해 유생 교육에 힘쓰고, 권학사목(勸學事目)을 올려 당시의 여러 가지 문교시책을 개정, 보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해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했다.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해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학문적 업적은 주로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으로 대표된다. 『입학도설』은 뒷 날 이황(李滉) 등 여러 학자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 『오경천견록』 가운데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은 태종이 관비로 편찬을 도와, 주자(鑄字)로 간행하게 하고 경연(經筵)에서 이를 진강(進講)하게까지 했다.

이밖에 정도전의 척불문자(斥佛文字)인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에 주석을 더하기도 했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양촌집(陽村集)』 40권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명 태조 고황제 어제시

■사행(使行)이 요동(遼東)을 지나다.

경계(境界) 들어서니 농사 노래 한창이라 / 入境聞耕滿野謳

전쟁 멎고 농사짓기 몇 해나 지났느냐 / 罷兵耨種幾經秋

성루(城樓)에 달린 방울 구리에 녹이 슬고 / 樓懸遺鐸生銅綠

척후(斥堠)에 짙은 숲이 토구로 변했고야 / 堠集烟薪化土丘

역리는 맞아들여 멀리 왔다 위로하고 / 驛吏喜迎安遠至

마부는 전송하며 먼 길 잘 다녀오라 하네 / 馹夫忻送穩長遊

하늘 가 땅 끝까지 맞닿은 중국 경계 / 際天極地中華界

벼 기장 들에 가득 해마다 풍년일레 / 禾黍盈疇歲歲收


▣양촌선생문집 제1권

■응제시(應製詩)

조선국 배신(陪臣) 권근(權近) 제진(製進). 홍무 29년 9월 15일에 8수를 명제(命題)하다.

■이씨(李氏) 이거(異居)

동쪽 나라 어려움 한창 많을 적 / 東國方多難

우리 임금 큰 공을 이루셨다오 / 吾王功乃成

백성 살펴 따뜻한 정사를 펴고 / 撫民修惠政

대국 섬겨 충성을 다했답니다 / 事大盡忠誠

국호(國號)를 내려주신 황제의 은총 / 錫號承天寵

터전 옮겨 읍성을 일으켰도다 / 遷居作邑城

원컨대 직공에 부지런하여 / 願言修職貢

만세라 명 나라를 받들고지고 / 萬世奉皇明

■금강산(金剛山)

하얗게 우뚝 선 천만 봉우리 / 雪立亭亭千萬峯

바닷구름 걷히자 옥부용 솟았네 / 海雲開出玉芙蓉

신광은 으리으리 한 바다 간직하고 / 神光蕩漾滄溟近

맑은 기운 서려서려 조화가 뭉치었네 / 淑氣蜿蜒造化鍾

험준한 멧부리는 조도에 다다르고 / 突兀岡巒臨鳥道

그윽한 골짜기엔 신선이 숨어 있네 / 淸幽洞壑祕仙蹤

동쪽을 유람하다 정상에 오르고자 / 東遊便欲凌高頂

홍몽세계 굽어보며 가슴 한번 열어 보자 / 俯視鴻濛一盪胸

■마한(馬韓)

아득아득 마한 땅을 더듬어 보니 / 渺渺馬韓地

구구하다 저 한 바다 물가로세 / 區區鯨海濱

세 나라가 분할하여 점령하더니 / 三方初割據

통일로써 마침내 화친되었네 / 一統竟和親

봉적이라 천년이 지나간 뒤에 / 鋒鏑千年後

사방 들엔 상마가 우거졌네 / 桑麻四野春

더더구나 성명의 시대 만나니 / 況今逢聖代

먼곳도 동인을 입었답니다 / 遠俗被同仁


▣양촌선생문집 제2권

■양촌(陽村)에 당도하다.

벼슬살이 십 년에 한 번 겨우 돌아오니 / 十載趨朝得一廻

이웃 노인 잔 들고 와 나를 위로하네 / 隣翁挈榼慰余來

사륜을 윤색하던 그 손으로 / 直將潤色絲綸手

산촌의 맥주잔을 잘도 기울여 / 能倒山村麥酒杯

■사명을 받들고 일본에 가는 정 대사성(鄭大司成)을 전송하다.

송악이라 하늘 나직한 북쪽에서 / 松嶽天低北

부상이라 해 돋는 저 동쪽으로 / 扶桑日出東

파도는 창공을 연대었는데 / 鯨濤連浩渺

사절은 교린(交隣)을 닦기 위해서 / 使節講交通

강개한 남아의 뜻이라며는 / 慷慨男兒志

위의(威儀) 있는 유자의 기풍이로세 / 周旋儒者風

서시(徐市)의 발자취를 멀리 찾으니 / 遠尋徐氏迹

응당 육생의 공을 세우리 / 應有陸生功

점해의 성교(聲敎)는 처음이지만 / 漸海聲初曁

파란 없어 통역은 거듭이었네 / 無波譯已重

문덕(文德)을 크게 펴라 묘(苗) 이르고 / 格苗文迺誕

덕을 더욱 넓혀라 갈을 섬기네 / 事葛德彌弘

은하수엔 별빛이 찬란도 한데 / 銀漢星芒煥

함지엔 새벽 놀이 떠 붉으리라 / 咸池曉色紅

산 타고 배 타라 옥백 붐비고 / 梯航紛玉帛

칼 차고 패물 찬 영웅 모이네 / 劍佩會英雄

대궐에선 청리를 받들었었고 / 帝闕承聽履

빈연에선 활 선사도 받을 거로세 / 賓筵拜貺弓

이름이 장차 금석에 새겨져서 / 名將勒金石

빛나빛나 영원토록 전하오리다 / 赫赫耀無窮


▣양촌선생문집 제3권

■해바라기를 사랑하여 읊다.

거칠고 주변없는 양촌 늙은이 / 鹵莽陽村翁

그 어찌 꽃나문들 길러 봤겠나 / 何曾養花木

다만 저 담 밑의 해바라기가 / 只愛墻下葵

한 포기 절로 나서 잘 자랐었지 / 一種自生育

비 이슬에 함초롬 젖고 또 젖어 / 雨露所霑濡

줄기가 똑바로 꼿꼿이 솟아 / 莖幹遂挻直

붉은 꽃은 스스로 해에 비치고 / 紅葩自向日

푸른 잎은 능히 발을 호위하누나 / 綠葉能衛足

피고 지는 것마저 차서가 있어 / 開落亦有序

아래서 시작하여 위로 오르네 / 上下相繼續

하찮은 물건도 이치를 아니 / 物微理固然

군자는 속으로 짐작 있겠지 / 君子當黙識

■박연(朴淵)

한 줄기 맑은 못이 위아래로 나눠지고 / 一種淸潭上下分

비온 뒤 봄산은 기운이 평화롭네 / 春山雨後氣氤氳

비탈이 무너지듯 눈무더기 쏟아지고 / 崖崩瀉下千堆雪

해 비추니 뭉게뭉게 오색구름 피어나네 / 日照蒸生五彩雲

돌 밑엔 상기도 신룡(神龍)이 숨었겠지 / 石底尙知龍自蟄

산마루엔 학이 무리를 떠나와서 있으리 / 岡頭應有鶴離羣

이 걸음에 홍진을 깨끗이 씻었으니 / 玆遊滌盡紅塵迹

평소의 소문이 이제야 믿어지네 / 始信奇觀愜素聞


▣양촌선생문집 제4권

■유감(有感)

명예가 나를 끌어 날마다 치달리니 / 名韁挽我日奔馳

흰 실에 물들여 일 만나면 슬프기만 / 遇事堪悲染素絲

맙소사 육경은 모두 땅에 떨어지고 / 已矣六經俱掃地

다만 용열로 남에게 매달리네 / 只將容悅要人知

처지라 중간에 이 몸이 생겼으니 / 俯仰堪輿有此身

물칙을 어찌 저 근진에 맡길쏜가 / 那將物則委根塵

수사는 적막하다 미언이 끊어지고 / 寥寥洙泗微言輟

사설만 가로 흘러 백성을 현혹하네 / 邪說旁流久惑民

■진포(鎭浦)에서 왜선을 깨뜨린 최 원수(崔元帥) 무선(茂宣) 를 축하하다.

공이 처음으로 화포(火砲)를 만들었다.

때 맞추어 태어난 우리님의 지략이라 / 明公才略應時生

삼십 년 왜적 난리 하루에 평정했네 / 三十年倭一日平

바람 실은 전함(戰艦)은 나는 새가 못따르고 / 水艦信風過鳥翼

진(陣) 무찌른 화차는 뇌성이 무색하네 / 火車催陣震雷聲

가소롭다 주유(周瑜)는 갈대에 불지를 뿐 / 周郞可笑徒焚葦

자랑 마소 한신이 목앵부 타고 건넌 것을 / 韓信寧誇暫渡甖

이제부터 큰 공이 만세를 전하고 말고 / 豐烈自今傳萬世

능연각에 초상 걸려 여러 공경(公卿) 으뜸이리 / 凌煙圖畫冠諸卿

화포 만들 공의 지혜 하느님이 열어 주어 / 天誘公衷作火砲

병선(兵船)의 한번 싸움에 흉한 무리 쓸어냈네 / 樓船一戰掃兇徒

허공에 뻗친 적의 기세 연기 따라 흩어지고 / 漫空賊氣隨烟散

세상 덮은 공명은 해와 함께 빛나누나 / 蓋世功名與日鋪

긴 맹세 어찌 다만 대려를 기약하리 / 永誓豈惟期帶礪

응당 정벌(征伐) 맡아 궁부를 받으리라 / 專征應亦賜弓鈇

종묘 사직 힘입고 나라도 안정되어 / 宗祧慶賴邦家定

억조 창생 목숨이 다시금 소생하리 / 億萬蒼生命再蘇


▣양촌선생문집 제5권

■압록강(鴨綠江)에 배를 띄우고서

나라는 봉강의 천험(天險)이 있고 / 國有封疆險

하늘은 지리를 용케 나눴네 / 天分地理確

세 강이 하 깊어 측량 못하니 / 三江深不測

외길론 가도가도 닿기 어려워 / 一道往難通

흐름은 넘실넘실 바다 연대고 / 水濶波連海

바람이니 파도는 허공을 치네 / 風生浪拍空

작은 배 빨라라 화살 같으니 / 小舠如箭疾

사공아 감사하오 편히 건너서 / 利涉謝篙工

■봄날 성남(城南) 즉사(卽事) : 春日城南卽事

정삼봉(鄭三峯)의 비(批)에 말이 조화를 빼앗았다 하였다.

봄바람 어느덧 청명절이 다가오니 / 春風忽已近淸明

가랑비 부슬부슬 늦도록 개질 않네 / 細雨霏霏晩未晴

집 모퉁이 살구꽃 두루 활짝 피려느냐 / 屋角杏花開欲遍

이슬 먹은 두어 가지 내게로 기울이네 / 數枝含露向人傾


▣양촌선생문집 제6권

■황하(黃河)

황하는 천상에서 온다고 예전에 들었는데 / 舊聞黃河天上來

지금 보니 흐린 물결 공중에 연댔구나 / 今見濁浪運空開

동쪽으로 흘러흘러 물 쏟듯 빠르니 / 東流奔放疾於瀉

바람 날고 번개 치고 소리는 우레 같네 / 飈馳電邁聲驅雷

용타(龍鼉)가 울어대며 갈기를 떨치는데 / 龍爭鼉吼振鬐鬣

성난 파도 솟아올라 산처럼 우뚝하이 / 怒濤極目高崔嵬

철기(鐵騎)가 육지에서 어울려 싸우는 듯 / 或如甲騎戰平陸

칼과 창이 부딪쳐라 어이 그리 웅장한고 / 刀搶奮擊何雄哉

동풍이 돛을 불어 물 거슬러 올라가니 / 東風吹帆溯流上

채찍 맞은 준마인냥 몹시도 빠르구나 / 快若逸驥施鞭催

내 연(燕)을 구경하고 제로를 거쳤지만 / 小生遊燕歷齊魯

원유부를 짓자니 재주 없어 부끄럽네 / 欲賦遠遊慚非才

가슴속엔 저마다 호기를 지녔기에 / 自將胸中有豪氣

하수를 굽어보니 술잔 보기 마찬가지 / 俯視河水同看杯

우 임금 공덕이 만세를 덮었으니 / 惟思禹功被萬世

배에 기대 휘파람 불자 소리 정히 애처로와 / 倚舷發嘯聲正哀

■양자강(揚子江)을 건너면서

바다 해 솟아 올라 안개 걷히고 / 海日開陰霧

강바람 가득 불어 배 안에 차네 / 江風滿畫船

높은 나무 저 밖이 무성이라 / 蕪城高樹外

조각돛 바로 앞은 과포 아닌가 / 瓜浦片帆前

아른아른 산은 들에 비끼어 있고 / 隱隱山橫野

아득아득 물은 하늘과 맞닿았네 / 茫茫水接天

중류로 떠나가자 가슴 열리니 / 中流胸次豁

사면을 돌아봐도 유연만 하네 / 四顧正悠然

■압록강을 지나면서

북녘 변새 남녘 하늘 두루두루 구경하고 / 遠遊塞北與天南

오늘은 모래톱에 또 말을 매었다오 / 今日沙頭又係驂

학야라 저문 산은 푸르러 눈썹 같고 / 鶴野晩山靑似黛

압록강 가을 물은 쪽보다 더 진하이 / 鴨江秋水碧於藍

나그네 꿈에는 고향이 자주 들고 / 故鄕屢入客中夢

이역의 풍경은 돌아가면 얘기거리 / 異城終歸醉後談

부모님 안후 소식 반갑게 들었으니 / 喜聽庭闈消息好

술 마시길 사양하리 하마 실컷 취했다네 / 不辭杯酌已沈酣


▣양촌선생문집 제7권

익주(益州)에 이르러

홍무(洪武) 경오년(1390, 공양왕2) 여름 5월에 청주(淸州)에 갇혔는데, 홍수의 재변이 있었으므로 사유(赦宥)를 입어 종편(從便)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또 대간(臺諫)의 논박을 받고 익주로 귀양 왔다. 그날 밤에 크게 우레와 번개가 치고 비가 왔으므로 다음날 벽 위에 기록하니, 때는 백로절(白露節) 뒤 9일이다.

서원 당일에 물이 하늘에 닿았으니 / 西原當日水漫天

과오를 용서하는 큰 은혜가 이미 패연하였네 / 肆眚洪恩已霈然

이 밤 익주에 우레와 비가 급하니 / 此夜益州雷雨急

누가 쫓겨난 몸 홀로 잠 못 드는 것을 불쌍히 여기랴 / 誰憐逐客獨無眠

전주 쉬(全州倅)가 기생을 보내매 받아들이지 않았더니, 뒤에 또 안주와 술을 보냈으므로 시를 올려 사례한다.

흰 머리로 선탑에 앉아 공의 이치를 배우니 / 鬢絲禪榻學觀空

만 가지 경지를 모두 버리매 색이 곧 공이구나 / 萬境俱捐色卽同

다만 입맛은 버리지 못했거니 / 但自未能除口業

홀연히 좋은 음식 받으매 깊은 감사 느끼네 / 忽承香味感深衷


▣양촌선생문집 제8권

■학사 이첨(1345-1405)이 부채에 적은 시의 운을 차한다.

권근(1352-1409)

한창 더울 땐 서로 친밀하더니 / 相親炎熱時

서늘할 때에는 문득 버리네 / 却棄寒凉月

세상 사람 그 마음에 변함 있어도 / 人情有變移

내 뜻이야 어찌 서로 끊으랴 / 我意豈相絶

■학사 이첨이 해도 도절제사(海道都節制使) 김공 영렬(金公英烈)이 전함(戰艦)을 영조(營造)한 것을 축하한 시의 운을 차한다.

서강이 바다에 흘러드는데 / 渺渺西江入海流

배안 깃발이 높은 다락 옹위하였다 / 舟中旌旆擁飛樓

그대 재주 많아서 큰일 하겠소 / 知公濟巨多才畧

일만 섬 큰 배가 물위에 떴네 / 萬斛龍驤駕浪浮

■학사 이첨이 국청사(國淸寺)에 묵어서 지은 시의 운을 차한다.

한가로이 절에 와서 무생을 묻다가 / 閑來僧院問無生

한밤중 종소리를 누워 듣는다 / 臥聽鍾聲半夜鳴

어찌해 맑은 넋이 잠도 없는가 / 怪底魂淸無夢寐

가을 달이 온 발에 가득히 밝네 / 一簾秋月滿床明

쌍매당(雙梅堂 이첨)의 묘유시(猫乳詩)의 운을 차한다.

가난을 싫어하는 쥐 염려가 된다 / 鼠自嫌貧尙可虞

주리다가 책장 쏠까 시름하노라 / 每愁飢齕及書廚

그대 덕화에 고양이 서로 젖 먹인다지 / 聞君德化猫相乳

주먹만한 작은 새끼 한 마리 보내소 / 爲寄如拳一小雛

집도 나라같이 하면 염려없으리 / 爲家如國戒無虞

쥐가 부엌에 듦을 용납할 건가 / 鼠竊寧容入遠廚

고양이를 기름도 장수 기름과 같아 / 自是養猫同養將

그 조아로 오랑캐 없앨 줄 안다 / 定知牙爪滅胡雛


▣양촌선생문집 제9권

김제 현령(金堤縣令) 이백찬(李伯撰)을 전송한다.

착하신 우리 임금 백성 걱정 지극하시어 / 睿想憂民切

신중하고 정밀하게 선비를 뽑으셨네 / 疇咨擇士精

그대가 지금에 고을 맡게 된 것은 / 惟君方得郡

늙은 노친 봉양 위한 전성이었다 / 乃父亦專城

대독을 하느냐고 새 명령 내리고 / 帶犢明新令

승총으로 그 옛날 성망이 있었다 / 乘騘有舊聲

나라를 위하는 마음 안팎이 없지만 / 均勞無內外

정사를 잘하면 또 내직으로 들어오리 / 政最更飄纓

완산 부윤(完山府尹) 윤공 곤(尹公坤)을 전송한다.

거진이 남북을 갈랐으니 / 巨鎭分南北

완산부가 제일로 기이한 데라 / 完山最是奇

천년 동안 왕기가 뭉쳐 있더니 / 千年鍾王氣

일대의 큰 기업을 열게 되었다 / 一代啓鴻基

순박한 옛 풍속이 돌아온 오늘날에 / 舊俗還淳日

훈신이 원님으로 부임한다 / 勳臣出宰時

옹졸한 이 말이 부끄러우나 / 贈言慚鄙拙

애오라지 나의 생각 위로하려네 / 聊以慰吾思

완산(完山)에 부임하는 평양군(平陽君) 조공(趙公)을 전송한다.

수령은 그전부터 귀한 것 / 出宰從來貴

더구나 그대는 젊은 때로세 / 多君少壯時

뛰어난 공으로 임금의 사랑 받았으니 / 殊勳蒙睿睠

너그러운 정사로 백성을 위로하게나 / 寬政慰民思

바람 불고 눈 내려서 이 해도 저무는데 / 風雪歲將暮

산 넘고 물 건너기가 정히 더디리 / 關河行正遲

이별에 임하여 못난 자식 생각하니 / 臨分憶豚犬

말하기가 괴로워 시도 아니 나온다 / 苦語不成詩

※이때 양촌의 아들 천이 반자가 되었다. 반자(半刺)는 군수(郡守)의 보좌관, 즉 통판(通判)ㆍ장사(長史) 따위이다.

쌍매당(雙梅堂)이 옛사람의 운을 써서 차한 어부사(漁父辭)

긴 강에 물고기 낚는 사람은 / 長江釣魚者

자취와 마음이 모두 다 깨끗하지 / 迹與心雙淸

영화도 욕됨도 본래부터 모르는데 / 不自識榮辱

어찌 이익과 명예를 생각하겠나 / 何嘗思利名

작은 배로 혼자서 가고 오다가 / 孤舟獨往還

밤이 되면 백사장 위에서 잔다 / 夜泊沙頭宿

강 바람에 푸른 연기 떠오르는 건 / 江楓吹碧煙

새벽 밥 짓느라고 대나무를 태우는 것 / 曉㸑燃綠竹

낚싯대 하나로도 생애 넉넉하여서 / 一竿生涯亦有餘

갈매기와 해오라기 따라 다닌다 / 汎汎長隨鷗鷺居

탁영가 노래하면 낙이 그 중에 있어 / 高歌濯纓樂在中

통발 잊고 물고기도 잊어버린다 / 忘筌且復兼忘魚


▣양촌선생문집 제10권

쌍매당(雙梅堂)이 보낸 시의 운을 차한다.

이때에 공이 파직되어 임진 별서(臨津別墅)에 있었다.

일찍이 큰 띠 늘이고 조정에 섰으니 / 曾從廊廟儼垂紳

밝은 시대에 알맞는 보필일세 / 端合明時輔弼臣

정통한 학문은 베풂에 순서가 있고 / 學徹精微施有序

조화를 얻은 문장 오묘하기 귀신일세 / 文探造化妙如神

임천에 한가히 시 지으며 지내고 / 閑居綠野詩添藁

푸른 강에 낚시 드리우니 속세를 벗어났네 / 獨釣蒼江迹出塵

고관으로 보좌한 공 없음이 부끄러우니 / 自愧高官無補效

어느 날 물러나서 이웃하여 살까 / 卜隣何日乞吾身

■이가 빠졌다.

젊어선 귀밑털의 푸름만 믿고 / 曾恃年芳兩鬢靑

도가의 황정에 마음을 쓰지 않았더니 / 無心修煉學黃庭

가엾구나 어금니 가을잎처럼 / 可憐牙齒如秋葉

머리가 희어지자 저절로 떨어지네 / 頭上霜來便自零

김장[蓄菜]

시월이라 거센 바람 새벽 서리 내리니 / 十月風高肅曉霜

울에 가꾼 소채 거두어들였네 / 園中蔬菜盡收藏

맛있게 김장 담가 겨울에 대비하니 / 須將旨蓄禦冬乏

진수 성찬 없어도 입맛 절로 나네 / 未有珍羞供日甞

쓸쓸한 겨우살이 스스로 가엾나니 / 寒事自憐牢落甚

만년이라 감회가 깊음을 깨닫겠네 / 殘年偏覺感懷長

앞으로 먹고 마심 얼마나 오래랴 / 從今飮啄焉能久

백년 광음이 유수처럼 바쁜 것을 / 百歲光陰逝水忙

■선녀(選女)

구중 궁궐에서 요조 숙녀 생각하여 / 九重思窈窕

만리 먼 나라의 예쁜 처녀 뽑아가네 / 萬里選娉婷

적불 타고 가는 길 멀기도 하니 / 翟茀行迢遞

고국이 점점 아득하구나 / 鯷岑漸杳冥

어버이에게 차마 하직 못하니 / 辭親語難訣

참는 눈물 닦으면 또 떨어지네 / 忍淚拭還零

서로 이별한 곳 그리운데 / 惆悵相離處

고향 산은 꿈속에 푸르네 / 群山入夢靑


▣양촌선생문집 제11권

용안성 조전기(龍安城漕轉記)

조전(漕轉 배로 운반하는 것)은 큰일로서 국가의 경비와 공사(公私)의 풍흉(豐凶)이 달린 것이다. 남방의 조운으로 들어오는 데에는 오직 전라도가 가장 멀어 반드시 바다로 수송한 뒤라야 서울에 올 수 있는데, 왜(倭)가 일어나면서부터는, 조세(租稅) 받는 곳을 해구(海口)에 두지 않고 산에 있는 모든 성(城)에 두었으므로 조세 바치는 백성들이 소와 말에 싣고 험한 산천을 발섭하며, 빙판과 눈길을 오르내려 삼동(三冬)을 지나서야 겨우 끝난다. 봄이 되어 조운할 때가 되면 또 바다로 수송하게 되는데, 길이 멀고 험하여 며칠이 걸려야 닿게 되므로 그들의 농사일은 하지도 못하고 여름이 되어야 끝나게 되니, 겨울에는 얼고 굶주리며 봄에는 주리고 지쳐, 사람과 가축 죽은 것이 길에 즐비하게 되고, 또 그 두량(斗量)의 소모가 두량할 때마다 줄어들어 반드시 조세를 더 받아 보충하는데, 심지어 빚을 내서라도 정액을 내게까지 하니, 백성의 병폐가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도관찰사(都觀察使) 노공 숭(盧公嵩)이 이곳을 맡아 내려온 이래로 민생의 이득과 병폐를 빠짐없이 따져서 계획을 세우되, 더욱 조전에 치의(致意)하였다. 장구한 계책을 세워 백성을 이롭게 하려 하매 바다를 따라 그 지형을 관찰하여, 전주(全州)에서는 진포(鎭浦)의 용안(龍安)을 발견하고, 나주(羅州)에서는 목포(木浦)의 영산(榮山)을 발견했는데, 모두 바닷가에 언덕이 활처럼 구부정하게 둘러 있고 앞에는 바다가 활짝 트였다. 노공은 이에 민중들과 상의하기를,

”여기에 성을 쌓고 조세를 받는다면 수송하는 백성들이 단번에 끝낼 수 있고, 바다로 조전할 때에도 배를 성 밑에다 대고 져다가 실을 수 있으며, 왜적(倭賊)이 오면 굳게 지켜 병한(屛翰 담)이 될 수 있으니, 깊이 들어와서 노략질하지 못할 것이다. 백성에게 편리하고 국가에도 이로운 것이니, 어찌 여기다 성을 쌓지 않겠는가.”

하니, 민중들이 즐겁게 명령을 들으므로 즉시 역문(驛聞)하였는데, 조정의 의논도 좋다고 여겨 이첩(移牒)하여 알리었다.

가을 8월이 되어 농사일이 한가하여지자,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 정혼(鄭渾)ㆍ전 광주 목사(光州牧使) 황거중(黃居中)ㆍ전 판사(判事) 노원명(盧元明)ㆍ전 고부군사 정사운(鄭士雲)을 명하여 용안의 성 역사를 감독하게 하고, 나주 판관(羅州判官) 윤의(尹義)ㆍ전 개성 윤(開城尹) 김중광(金仲光)과 정윤부(鄭允孚)ㆍ전 판사 나진(羅璡)을 명하여 영산의 성 쌓는 일을 감독하도록 하니, 각각 관할하는 모든 고을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를 시작하자, 백성들은 모두 좋아하며 나서게 되어, 권장하는 북소리가 멈출 겨를이 없었다. 가래질하며 달구질하며 흙을 뭉치며 주워다 쌓으니, 이미 두텁고도 높으며 튼튼하고도 깎은 듯한데 여장(女墻)을 두르고 성문을 굳게 하니, 바라보매 엄숙하고 다가가매 우뚝하게 높다.

영원히 전할 업적을 한 달 만에 끝내니, 마을 사람과 농부들이 병폐가 없어지게 된 것을 기뻐하여 서로들 집에서 경축하고 길에서 노래하였다. 막빈(幕賓 비장(裨將))들과 좌우 사람들이 그 사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기를 청하니, 노공이 곧 편지로 나에게 명하였었다. 이때 내가 익산(益山)에 귀양와 있다가 이미 백성들의 말을 듣고서 아름답게 여겼었는데, 문득 이 명을 받으니, 의리로 보아 글이 졸하다고 사양할 수가 없었다.

“천하의 일이란 사세가 같으면서도 의리가 다른 것이 있으니,《춘추좌전(春秋左傳)》에 성 쌓은 것을 썼는데, 그 전(傳 해설)을 쓴 사람은 모두 나무란 것이라고 했다. 어찌하여 나무라느냐 하면, 그 시기를 따지면 혹은 봄이었거나 혹은 여름이었고, 그 사항을 따지면 법제도 아니요 의리도 아닌 것이기 때문에, 성인이 붓으로 폄하하여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 중대한 일임을 나타내어, 그들이 백성들을 아끼고 키우는 뜻이 없음을 나무란 것이다.

이번에 노공(盧公)의 이 일은, 의리로 말하면 백성을 위한 것이요, 그 시기로 말하면 이미 가을이 되었으며, 성이 이루어진 다음부터는 수송하는데 옛날에 비해 매우 힘이 덜하고, 조운하는 일이 전보다 매우 쉬우며, 바다에 떠서 서울에 닿는 기일이 또한 전에 비하여 매우 빠르게 되었으니, 지금부터 시작하여 영구히 힘입을 것이고 보면, 국가에 이로울 장구한 계책과 백성을 아끼는 지성스러운 마음이 지극하다 하겠다. 맹자가 말하기를 ‘편해질 도리로써 백성을 부리면 비록 수고로워도 원망하지 않는다.’ 한 것을 내가 이 역사에서 보았다. 역사 쓰는 사람들이 반드시 장차 대서 특필하여 표양하게 될 것인데, 어찌 나의 말이 필요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이 도(道)의 백성들이 병폐가 제거되고 이익을 보게 된 사람은 지금에 있어 노공의 덕을 즐거워하며 모두 노래부를 것이지만, 몇 대 뒤에 혹시라도 지난날의 병폐가 매우 곤란했던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면, 또한 반드시 지금 노공의 혜택이 매우 원대하게 되었던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를 마땅히 성루(城樓)에 써서 걸어, 이 성을 지키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시로 찬양하여 뒷사람들에게 말하여 주어, 대대로 잊어버리지 않도록 한다면, 노공의 혜택이 마땅히 진포(鎭浦)ㆍ목포(木浦) 두 포구와 더불어 한없이 같이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문(記文)을 쓴다.”

홍무 23년(1390년) 경오 가을 9월


▣양촌선생문집 제12권

■평양성 대동문루기(平壤城大同門樓記)

평양은 국가의 거진(巨鎭)으로서, 사신이 다니는 길이요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인데, 그 무너진 성을 오래도록 수축하지 않았으며, 그 동문인 대동문(大同門)과 남문인 함구문(含毬門)도 모두 신축년 난리에 불타 강토의 방비가 든든하지 못했으니, 진실로 염려되는 일이었다.

홍무 임신년(1392, 태조1) 가을 전하(殿下)께서 즉위하신 첫머리에 곧 중추원(中樞院) 조온(趙溫)을 평양 부윤(平壤府尹)으로 임명했는데, 그 이듬해에 정사가 닦여지고 송사가 공평하여 백성의 생업이 안정되므로, 그해 가을에 왕명을 받아 비로소 옛 성을 수축하고, 그 이듬해 봄에 새로 두 성문을 시작하여 가을에 공사를 끝내고,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기(記)를 청하기를,

“특히 평양은 군사와 백성들의 일이 많고 풍속이 사납고 험악하여, 전부터 다스리기 어렵다는 곳인데, 내가 재주 없는 사람으로 다행히 개국(開國)한 초기를 만나 그릇 중한 소임을 맡고 여기에 오게 되었기에, 낮이나 밤이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경내(境內)의 수비(守備)를 튼튼히 하려고 하여, 성은 농사 틈에 쌓고 성문은 중들을 시키니, 모두들 나와서 조력하여 세 철 만에 끝이 났다. 초루(譙樓 문루)가 장엄하게 되고 성이 완전하게 되어, 비로소 나라의 울타리가 되는 곳이라 할 만하나, 내가 잘한 것이 아니고 오직 왕의 덕이니, 그대는 이 사실을 써서 성문 위에 걸어서 뒷사람들로 하여금 없어졌다 일으킨 유래를 알게 하라.”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평양은 곧 고조선(古朝鮮) 때에 기자(箕子)가 도읍하였던 곳이므로, 구주(九疇)는 천인(天人)의 학이고 팔조(八條)는 아름다운 풍속이니, 진실로 우리 동방(東方)이 수천 년 동안 예의를 지켜 온 교화의 터전이다. 아. 아름다운 일인데, 위만(衛滿) 때부터 고구려에 이르는 동안에 오로지 무강(武强)만 숭상하여 그때 풍속이 크게 변하였고, 고려 때에 이르러서는 요(遼)ㆍ금(金) 및 원(元)과 국경이 서로 이웃이 되어 오랑캐 풍속에 물들어서 더욱 교만하고 사나워졌으니, 이는 마치 기(岐)ㆍ풍(豐)의 땅을 주(周) 나라는 사용하여 인후(仁厚)한 덕화를 일으켰으나, 진(秦) 나라는 사용하여 용맹스럽고 사나운 기질을 이룬 것과 같은 일이다. 대개 그 민중들의 성질이 후중(厚重)하고 솔직하여, 선(善)으로 인도하면 교화에 따르기 쉽고, 맹렬로 구사(驅使)하면 또한 족히 부강한 업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명 나라 황제가 천하를 차지하여 지극한 정치를 천명하매, 우리 전하(殿下)께서 명 나라 섬기기를 성심으로 하고 아랫사람에게 임하기를 너그럽게 하시며, 황제의 명을 받들어 ‘조선’이란 이름을 회복하셨는데, 공(公)은 인명(仁明)하고 개제(愷悌)한 자질로 첫머리에 막중한 선발을 입어 이 도읍지에 부윤(府尹)으로 왔으니, 그가 반드시 덕화를 선양하여 백성들을 선으로 인도하여, 옛날의 교만하고 사나운 풍습을 크게 변화시켜 예의의 교화를 일으켜 그 풍속이 다시 순박하여져, 훌륭한 세상의 유신(維新) 정사에 찬조하게 됨이 실지 이로부터 비롯할 것이니, 어찌 다만 성곽(城郭)이 튼튼하고 문루(門樓)가 장엄하여 옛적보다 나은 것뿐이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이 문루가 긴 강을 내려다보고 멀리 큰 들판에 임하여 아침 햇살과 저녁 달빛의 천태 만상인 경치가 모두 난간 아래 가까운 곳에 모이므로, 멀리 수레나 말을 타고 가 부벽루(浮碧樓)에 올라 온 지역의 경치를 보려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후일에 내가 혹시라도 올라가 구경하게 된다면, 마땅히 먼저 백성들을 위하여 황극(皇極)의 훈계를 강론(講論)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기자의 혜택이 동방(東方)에 젖어든 것이 매우 깊어서 비록 만세가 되더라도 없어지지 아니할 것과, 이번에 천자께서 국호(國號)를 내린 은혜와 전하께서 옛적대로 복구한 덕이 실로 무왕(武王)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기자가 조선을 다스린 것과 동일한 법도임을 알게 할 것이다. 또 백성들로 하여금 타고난 천성(天性)은 당초부터 화이(華夷 중국과 오랑캐)와 고금(古今)의 다름이 없는 것이니, 진실로 능히 노력하여 황극(皇極)의 교훈을 준행하면, 신명과 사람이 조화되고 자손들이 길조(吉兆)를 만나 대동의 뜻에 맞게 될 것임을 알도록 할 것이다. 그런 뒤에 몇몇 친구와 술잔을 들고 바람에 임하여, 강산(江山)의 아름다운 풍경을 둘러보며 정서(情緖)의 흥취를 펼 때에, 또한 공(公)을 위해 시 한 편을 지어 칭송(稱頌)하며 읊겠다.”

하였다.

홍무 27년(1394년) 갑술 9월 어느 날


▣양촌선생문집 제13권

■월파정기(月波亭記)

선산(善山) 동쪽 5리 가량에 여차(餘次)라는 나루가 있는데, 상주 낙동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곳이라 상주에서 남쪽 고을로 가는 손님들이 여기에 와서 참(站)하게 되니, 실로 요충(要衝)이다. 나루 동쪽에 자그마한 산이 강을 임하여 솟았는데, 옛날에 전주(全州) 사람 이군 문정(李君文挺)이 이 고을 원으로 와서 처음으로 정자를 짓고 월파정이라 이름했더니, 세월이 오래되자 이미 없어졌었다.

건문(建文) 원년 봄에 지금 국구(國舅) 여흥백(驪興伯) 민공(閔公)이 사명을 받들고 여기를 지나다가, 정자가 없어진 지 오래되 새로 지을 사람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돌아가자, 대령(大寧) 최군 개(崔君開)가 마침 이 고을 원이 되므로, 공이 새로 세우기를 명하니 최군이 기쁘게 따랐었다. 부임한 지 두어 달이 지나 정사가 다스려지고 인심이 화합하게 되자, 다시 옛 자리 북쪽 돌벼랑 위에 터를 잡았는데, 시원하게 높직하고 기이하게 솟아나 경치가 더욱 좋았다.

백성을 번거롭히지 않으려고 승도(僧徒)를 모집하여 8월에 일을 시작하여 10월에 끝냈는데, 도편수[榟人]는 곧 서울의 새 궁궐을 영건(營建)한 도편수이었기 때문에, 그 제도가 자못 정교하고 화려하게 되었으며, 또한 온돌(溫突)을 만들어 길손들이 자고 가게 했다.

3년이 지난 가을에 최군이 사수감(司水監 전함사(典艦司)) 벼슬로 조정에 소환되고, 여흥공(驪興公)은 또한 어태(御胎)를 모시고 성산(星山)으로 안치(安置)하러 가게 되어 곧 재차 여기를 지나게 되므로, 나에게 기(記)를 받아 가지고 가서 걸고 싶어했다. 내가 그 사적을 최군에게 물으니, 최군이 말하기를,

“정자 위아래에 다복솔이 울창하고 돌벼랑이 깎아지른 듯하며, 긴 강이 그 앞을 가로지르고 큰 들이 그 밖에 이리 꾸불 저리 꾸불한데, 민가가 땅에 깔려 연화(煙火)가 서로 바라보이는 것은 선산의 고을이요, 농군ㆍ목동ㆍ어부ㆍ초동(樵童)의 노래가 서로 화답되고 구붓구붓 들판을 오고 가고 하는 것은 선산의 백성들이며, 서남쪽으로 하늘이 터져 내와 육지가 아득한데, 운연(雲煙)의 변화는 모습이 천만 가지 형상이고, 강물이 맑고 달이 밝아 싸늘한 달 그림자가 서로 어울리면, 고요할 때는 구슬이 잠긴 듯 움직일 때는 금덩이가 뛰어 노는 듯 비낀 모양은 흰 비단을 펼친 듯 출렁일 때는 탑이 누워 있는 듯하며, 융화된 밝은 빛으로 하늘과 물이 한 색이 되니, 이것이 월파(月波)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으로서, 더욱이 이 정자의 한 가지 기관(奇觀)입니다.

북쪽으로 바라보면 울창한 산이 있는데, 이는 옛날에 왕씨 태조(王氏太祖)가 신라를 치러 갈 때 주필(駐蹕 임금의 행차가 멈춘 곳)한 곳으로서, 그 웅걸한 풍도(風度)와 장한 기세가 지금도 늠름(凜凜)하여 바로 높은 산 흐르는 물과 함께 한이 없으니,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들이 또한 멀리 회상하여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흥공(驪興公)이 국구(國舅)와 재상(宰相)의 귀한 신분으로 재차 여기 이 누에 올라가 구경하고 읊조리며 고상한 흥취를 붙일 것이니, 이 정자의 다행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듣고서 적어 기(記)로 한다.

신사년 겨울 10월 어느 날 적는다.


▣양촌선생문집 제17권

■일본에 사신 가는 밀양(密陽) 박 선생 돈지(朴先生敦之)를 전송하는 서

일본은 바다 가운데 있어 우리나라와 서로 바라보이므로 예로부터 사절 왕래가 있었다. 고려 말엽에 문신은 안일에 빠지고 무신은 놀아나 변방의 방비가 없으므로, 섬나라 백성이 감히 노략을 자행하여 우리 강토에 침범해 온 지가 이제 50년이 되었다. 하늘이 앙화를 뉘우쳐 성인(聖人)을 돌보아, 묵은 것을 고치고 새 것을 마련하여 우리 조선(朝鮮)의 문명한 국운을 창조하매, 모신(謀臣)과 맹장(猛將)이 모두 지력(智力)을 다하여 내정(內政)을 닦고 외적을 물리치되, 하나도 잘못되는 계책이 없어 수륙(水陸) 군사가 어디서나 승첩(勝捷)을 고하였다. 이에 해적이 두려워 굴복하고, 심지어는 자진해서 항복하며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자까지 있었다. 주상(主上)께서 그들이 의리 사모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 지은 죄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집과 의식(衣食)을 주어 다시 살길을 가지게 하시니, 그들을 회유하여 안정시키기를 지극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나머지들은 그래도 다 섬멸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 장사(將士)들이 누차 군사를 일으켜 정벌을 분명하게 거행하여 바닷길을 영구히 밝히기를 청하였으나, 우리 성상께서는 문덕(文德)을 넓히려 하여 선뜻 군사를 쓰지 아니했었다.

그 뒤 올가을에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내빙(來聘)하고 또 적(賊)을 효유하여 침범을 금단하니, 주상께서 가상히 여겨 우악(優渥)한 예절로 대접하고, 장차 돌아가게 되자 조사(朝士) 중에 문학(文學)과 재변(才辯)이 전대(專對)할 만한 사람을 가리어 빙문에 보답하게 하였는데, 비서감(祕書監) 밀양(密陽) 박 선생이 실로 이 명을 받아 떠나게 되었었다.

선생은 세족(世族)의 후예로, 일찍이 진사(進士)에 장원하여 전선(銓選 관리전형)을 맡아 보았고, 사간원(司諫院)으로 승진하여서는 영화로운 소문이 크게 전파되었다.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요해(遼海)를 건너 제ㆍ노(齊魯)의 들판을 거치고 강회(江淮)를 지나 천자의 조정에 조회하러 갔었는데, 이번에 또 헤아릴 수 없는 파도를 건너 먼 나라의 장기(瘴氣) 어린 안개가 침해하고, 고래 떼가 날뛰는 곳으로 사신 가게 되었으니, 지극히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선생은 추호도 두려워하거나 수고를 꺼리는 기색이 없이, 개연(慨然)히 이웃과 사귀어 호의를 지속하고 폭도(暴徒)를 금단하여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삼으니, 어찌 참으로 경중(輕重)을 아는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대장부로 태어나서 장수가 되거나 사신이 되어, 잘 싸우거나 말을 잘하면 족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내가 선생에게 바라는 바이다.

대저 일본은 천지의 맨 동쪽에 있으니, 곧 천지가 만물을 내는 방위이다. 그 사람들도 생겨날 적에 천지의 마음을 받아 그 본성(本性)에 인(仁)을 지니게 된 것은 역시 천하 사방 사람들과 같을 것이니, 어린아이가 기어서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본다면 또한 반드시 측은한 마음이 생겨 구출하려고 할 것이다. 더구나 죄 없는 백성이 칼날에 죽어가서 구렁텅이에 뒹구는 것을 차마 그대로 보겠는가.

아, 인인(仁人)은 천지 만물을 일체(一體)로 보고 사해(四海) 사람을 형제로 여기기 때문에, 비록 바다와 산으로 막히고 강토가 달라 말이 틀리고 풍속이 같지 아니하여도, 그가 같은 인류(人類)인지라 반드시 서로 사랑했었다. 그러므로 옛 성인들이 방교(邦交)하는 빙문(聘問)의 예절을 마련하여, 상역(象譯 통역)으로써 뜻을 통하고 폐백(幣帛)으로써 정을 도탑게 하였으며, 찬란하게 글로써 서로 접촉하고 반갑게 은혜로써 서로 친애한 것이니, 이는 사람이 사람된 바로서 천지에 부끄러움이 없는 점이다.

지금 그 나라의 사신이 와서 빙문의 예절을 닦음으로써 구호(舊好)를 강구(講求)하니, 그 뜻이 진실로 착하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고 같은 동류를 해친다면 반드시 천지에 죄를 얻고 귀신에게 노여움을 사서, 불인(不仁)한 앙화가 마침내는 또한 자신에게 미쳐 반드시 칼날에 죽게 되고야 말것이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이번 길에 진실로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여 준다면, 반드시 감동되어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경신(更新)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읍양(揖讓)하며 담소하는 사이와 조용하게 음식 나누는 동안에, 갑옷과 투구가 의관(衣冠)으로 바뀌고, 활과 칼이 옥백(玉帛 예물)으로 변하며, 완악한 흉도(兇徒)가 선량해지고, 사로잡힌 사람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여, 영구히 화친을 맺어 이웃 정의를 굳게 함으로써 두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편히 오래 살도록 하는 일이, 마땅히 이번 길에 달렸을 것이니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홍무 30년 겨울 12월 하순


▣양촌선생문집 제18권

■사신 왔다 가는 축 소경(祝少卿)을 전송하는 시의 서

삼가 생각한다. 황상(皇上)께서 대보(大寶 제왕의 자리)를 이어 인(仁)과 덕(德)이 흡족하므로, 온 천하가 신복(臣服)하였으며 우리 조선(朝鮮)도 조공 바치기를 더욱 삼갔다. 이때 북번(北藩)이 복종하지 않고 항거하는 것을 황제가 차마 토벌하지 못하고 글로써 효유하였으나,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와서 조회하지 않으므로 황제가 이르기를,

“하늘과 조상이 짐에게 어려움을 맡겨 온 천하를 편히 다스리게 하였으니, 감히 일할 때 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종묘에 고유한 뒤에 무신을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치게 하면서 또 경계하기를,

“저 어리석은 북번 가운데 사납고 거센 자는 나의 친족들이고, 그들의 협박에 못이겨 끌려 나온 자는 나의 선량한 백성이다. 너무 빨리 치지도 말고 함부로 많이 죽이지도 말고, 그곳에 가서 위엄을 보여 귀순하게 한 뒤에 모두 살려 안정시키라.”

하였다. 그리하여 지모 있는 장수와 용맹 있는 군사들이 명을 받고 달려 나가 그 지경에 주둔하고 천명(天命)을 기다린 지 1년이 되었다.

우리 임금은 처음 이 소문을 듣고 즉시 좋은 말 3천 필을 바쳐 그 일을 도왔더니, 황제가 이를 가상히 여겨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공(祝公)을 정사(正使)로, 예부 주사(禮部主事) 육공(陸公)을 부사(副使)로 보내 와서, 임금 및 종척(宗戚)ㆍ배신(陪臣) 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내리고, 새서(璽書)에서 ‘주(周) 나라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난에 월상씨(越常氏)가 중역(重譯)하여 조공을 바쳐 왔던 일’에 견주어서 영예롭게 하는 뜻을 보이고, 또 명하기를,

“우리가 상을 내린다 하더라도 온 나라 사람을 다 줄 수는 없다. 우리 중국에 말이 없어 그러는 것이 아니라, 기왕 한집안이 되었으니 서로 무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누구든지 말을 팔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면 값을 후히 주겠다.”

하였다. 이리하여, 우리나라 임금은 나라 백성으로 더불어 공손히 조명(詔命)을 받들고 모두 감격하여 서로 앞을 다퉈 기르던 말을 내놓으니, 두어 달이 못 되어 5천여 필이 되었다. 옛적에 한 무제(漢武帝)는 천만 군사를 일으켜, 3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의 많은 물자를 소비해가며 대완(大宛)을 쳐서 겨우 좋은 말 수십 필 밖에 얻지 못하였는데, 지금 천자가 회유하는 덕과 우리 작은 나라의 충순(忠順)하는 성의는, 전사(前史)에 찾아보아도 역시 이처럼 아름다운 일은 드물 것이다.

축공(祝公)은 충신(忠信)의 자질과 굉박(宏博)한 학문으로 사명(使命)을 받들고 와 선유(宣諭)하되 매양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여, 날로 말을 간검(揀檢)함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아, 검은 말이든 누른 말이든 한번 보면 좋고 나쁜 것은 다 분간하니, 그 부지런하고 민첩함이 또한 이와 같으며, 행동이 단정하고 말씨가 정직하여 그 얼굴을 보고 말을 듣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 점잖은 덕행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다. 간혹 느끼는 것이 있으면 읊조리는 대로 문장이 되어 금석(金石) 소리가 쟁쟁 나는 듯하고, 글씨까지도 절묘한 경지에 이르러서 보는 자 또한 그 재능이 많음을 탄복하였다.

일을 마치자마자 회정(回程)하게 되매,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류하다 못하여 각각 소회(所懷) 대로 글을 지어 책을 만들어 주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해외에 사는 문견 없는 우리로서는 문장이 졸렬한지라, 아무리 오장육부를 뒤집어 진심을 토해내도 축공의 덕을 만분의 일도 형용할 수 없거든, 하물며 지금 성조(聖朝)에서는 많은 어진이가 벼슬에 있고 재주 있는 이가 모여, 아송(雅頌)의 소리가 쟁쟁하게 귀에 차고 치세(治世)의 정음(正音)이 일대의 성황을 울림이 극도에 이르렀음에랴. 이에 쓸모없는 글로 감히 금옥(金玉)을 본받으려 하면, 이것은 뇌문(雷門)에 포고(布鼓)를 들이는 웃음거리가 아니겠습니까.”

하기에 나는,

“너무 걱정할 것 없다. 봄바람이 훈훈하게 불어오면 뭇 새가 다 우는 법이라 반드시 조양(朝陽)의 봉황만이 우는 것은 아니며, 가을 기운이 선선하면 모든 벌레들이 다 우는 법이라 반드시 풍산(豐山)의 쇠북만 우는 것은 아니다. 황제의 덕이 하늘과 같아서 온 천하를 모두 덮어 주니, 모든 물건이 그 은택을 입고 천지 사이에 사는 것은 모두 다 그 편안함을 얻어 서로 그 평화를 노래하므로, 나는 새는 공중에 지나고 우는 학은 그늘 아래 있으며 깃이 있는 것은 날고 다리가 있는 것은 움직여서, 큰 것은 그 소리가 웅장하고 길며 작은 것은 그 소리가 가늘고 짧으며 농부는 들에서 격양가를 부르며 나무꾼은 산에서 소리를 하는 것이, 모두 제멋대로 할 뿐이라 뭐 걱정이 있으랴. 또 하물며 난리가 평정된 뒤 축공이 벼슬에서 물러나는 그 날, 공경을 이루고 물러가 적막한 들과 물가에 살면서 지팡이를 끌고 다니며 읊조리다가 피곤하면 앉아 쉴 때, 혹시 한번이라도 이를 읽어 본다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반갑다’는 것보다는 낫지 않으랴.”

하니, 그렇다고 대답(對答)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써서 여러 사람의 글 위에 붙인다


▣양촌선생문집 제19권

■사신 왔다 가는 천사(天使) 단목공 지(端木公智)를 전송하는 시의 서

하늘이 명(明) 나라를 도와 크게 만방을 다스리니 사해(四海) 안팎이 위엄에 떨고 덕에 감복하였는데, 우리 조선이 가장 은택을 많이 입었고 다시 좋은 국호(國號)를 주어 영구히 동번(東藩)으로 만들었다. 지금의 천자가 제위(帝位)에 오르면서 우리를 돌보는 것이 더욱 융숭하여 은명(恩命)을 거듭 내렸으며, 그 명을 받들고 오는 사람은 반드시 조정 선비 중에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을 뽑아 보냈다. 그래서 건문(建文, 명 혜제(明惠帝)의 연호) 3년(1401, 태종1)여름 명을 내려 우리 임금(태종(太宗))을 책봉할 적에 통정시 승(通政寺丞) 장공 유상(章公有常)과 문연각 대조(文淵閣待詔) 단목공 효문(端木公孝文)이 오니, 그 뛰어나고 민첩한 재주와 청수하고 준엄한 기절은 더욱 보기 드문 바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모하였으며, 그 이듬해 봄에 대조(待詔)의 아우 효사공(孝思公)이 한림 수사관(翰林修史官)으로서 병부 주사(兵部主事)에 승진되어 그 형의 뒤를 이어 오니, 그 학문의 정박(精博)한 것과 그 조행의 청근(淸謹)함이 대조와 더불어 우열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고, 그 진초(眞草)ㆍ전예(篆隷)에 이르러서는 절묘하여 신경(神境)에 들어간지라, 천하에서 찾아봐도 당세의 독보자였다. 우리 임금과 국인은 천자의 덕에 감격하고 대조의 청백을 생각하여 병부(兵部)가 온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또 그 글씨의 신묘함을 좋아하여 흰 비단을 가지고 와서 글씨를 써 달라는 사람이 날마다 모여들었다. 공은 사신의 일을 보는 여가에도 붓을 들기만 하면 쓰는 대로 신괴하였고 요구하는 대로 써 주되 싫어하는 기색이 없는지라, 요구하는 사람이 잔뜩 몰려들어 각각 그 소망을 채웠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사람이 경모(敬慕)하며 마음으로 좋아하는 이가 더욱 많았다. 5월에 사신 온 일을 마치고 돌아가게 되니, 우리나라 문사들이 글의 변변치 못한 것을 사양하지 않고 각각 소견대로 글을 만들어 가는 이에게 선물로 대신하였으며, 나에게 서문을 지으라 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단목씨(端木氏)는 공자 문하의 높은 제자 여양공(黎陽公)의 후손이다. 여양공은 영민하고 총명한 자질로 직접 성인의 가르침을 받아 언어(言語)의 과(科)에 참예하고, 마침내 성리(性理)와 천도(天道)를 듣고 우수하게 성역(聖域)에 들어가 안연(顔淵)과 민자건(閔子蹇) 다음에 있었으니, 만약 천자가 알아주어서 보필하게 하였다면, 그 공적의 아름다움은 응당 왕도(王道)가 다시 크게 일어남을 보았을 터인데, 아깝게도 하늘이 주(周) 나라에 복을 주지 않아 하국(下國)에서 그럭저럭 지내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성인의 은택은 만세를 지나도 없어지지 않고 천하의 이치는 오래 잠기면 반드시 펴지는 법이라, 지금 공의 백중(伯仲)은 영특한 자질과 말솜씨의 좋음과 성리ㆍ천도의 학이 능히 여양공의 수천 년 동안 전하지 못하던 실마리를 이어 우리 성천자의 알아줌을 만났으니, 이는 하늘이 여양의 덕택을 두텁게 하려고 현철(賢哲)한 사람을 탄생시켜, 황명(皇明)을 돕게 하고 오래도록 전세에 억울하였던 도를 마침내 오늘에 와서 크게 펴고자 함이로다. 장차 보필하는 공적이 삼대(三代)에 비해 보다 능히 널리 베풀고, 중생을 구제하는 어짊이 흘러넘쳐 온 천하가 힘입음을 볼 것이요, 우리 동방이 실제로 그 은택을 많이 받아서 지극히 잘 다스리는 영역 안에 같이 살게 되리니, 사절(使節)의 청백한 것과 재학(才學)의 섬부(贍富)한 것쯤이야 어찌 공을 위한 칭송이 되랴.

■삼국사략(三國史略)의 서

우리 해동(海東)에 나라가 생긴 것이 맨 처음에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그때는 까마득한 옛날이라 민속이 순박하였으며, 기자(箕子)가 봉(奉)함을 받아 팔조지교(八條之敎)를 행하였으니, 문물과 예의의 아름다움이 실제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위만(衛滿)이 탈취해 점거하고 한 무제(漢武帝)가 군사를 일으켜 무력을 남용한 이후부터는, 혹 사군(四郡)도 되었다가 혹 이부(二府)도 되어 여러 번 병선(兵燹)을 겪어서 문적(文籍)이 전해지지 못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신라(新羅) 때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함께 정립(鼎立)하는데 이르러 각각 국사(國史)를 두어 그때의 일을 맡아 기록하게 했으나, 전문(傳聞)이 실제와 틀려 황당하고 괴이한 것이 많으며, 그때 일을 기록한 것이 자세하지도 못한 데다가 방언(方言)을 섞어 써서 말이 단아하지 못한 데가 많다. 전조(前朝 고려)의 문신 김부식(金富軾)이 이것을 모아 정리하여 《삼국사(三國史)》를 만들었는데,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모방하여 나라를 따로따로 나누어 썼다. 본기(本紀)ㆍ열전(列傳)ㆍ지(志)ㆍ표(表)가 있고, 합하여 모두 50권이다. 같은 해의 기년(紀年)을 따로 쓰기도 하고 같은 일을 두 번 쓰기도 하였으며, 방언과 저속한 말을 다 없애지 못했는가 하면 넣고 뺀 것과 범례(凡例)가 적당하게 되지 못하여 책 질이 번다하고 중복된 말이 많은지라, 보는 사람들이, 기록한 것도 있고 빠뜨린 것도 있어서 참고하기 어려움을 병되게 여겼다.

삼가 생각한다.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는 하늘이 낸 총명한 분으로, 경사(經史)에 정신을 두고 좌정승 하륜(河崙)과 예문관 대제학 이첨(李詹)과 신등을 명하여, 《삼국사》를 가지고 잘못된 곳을 고치되 편년법(編年法)을 모방하여 모두 한 책으로 만들게 하였다. 그래서 신라가 먼저 일어나 나중에 망하였기 때문에 그 연기(年紀)를 써서 맨 위에 표시하고, 중국 기원(中國紀元)을 기록하여 그 통서(統緖)를 밝혔다. 또 고구려ㆍ백제의 원년을 그 아래에 각각 기록하였으며, 다음에 시월(時月)을 표시하여 그때 일을 기록하였는데, 신라를 먼저 쓰고 나라별로 하지 않은 것은 신라가 주장이 되기 때문이요, 다음에 고구려와 백제를 쓴 것은 나라를 일으킨 해의 선후를 따진 것이다. 본기를 근본하고 열전을 참고하여 강(綱)으로 그 요점을 들고 목(目)으로 그 자세함을 갖추고 저속한 말은 고치고 번잡한 것은 없애며, 참란(僭亂)함을 치고 절의를 높였으며, 또 나의 좁은 소견으로 그 득실(得失)을 논하여 그 끝에 붙이고 한 책으로 정돈해 만들어서 이름을 《동국사략(東國史略)》이라 하였으니, 비록 문장이 변변치 못하여 보잘것없긴 하지만 그러나 정치의 잘잘못과 국운의 장단은, 본받고 경계할 만한 것이 있고 선악이 모두 갖추어졌으므로, 만기(萬機)를 돌보는 여가에 보신다면 정치하는 방법에 조금은 도움이 될까 한다.

※삼국사략을 동국사략이라고도 하며 다른 사람의 동국사략도 있음.


▣양촌선생문집 제20권

길재 선생(吉再先生 1353-1419)의 시권(詩卷)의 후서

※이성계(1335-1409) 권근(1352-1409)

우리 국가가 개국(開國)하기 전에 전하(殿下 태종(太宗))께서 바야흐로 학궁에 들어가 글을 읽었는데, 태학생(太學生) 길재(吉再)라는 분은 같은 마을에서 자란 사람으로 서로 추종하며 학문을 닦아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 뒤에 과거에 올라서는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는데, 왕조가 바뀐 뒤에는 봉계(鳳溪)에 은퇴하여 효를 다해 어머니를 섬기면서 다시 벼슬할 뜻을 두지 않았다. 전하께서 즉위하여 봉상 박사(奉常博士)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으니, 주현(州縣)에서 상경하기를 독촉하므로 마지못해 서울에 올라와서는 전문(箋文)을 올려 아뢰기를,

“신은 본래 시골 백성으로 전조(前朝)에 몸을 바쳐 그 친시(親試)를 입고 작명(爵命)까지 받았으니, 그 은혜와 의리가 범연히 신하 된 다른 이에 비할 바 아니므로 신이 다시 성조(聖朝)에 벼슬하여 명교(名敎)를 더럽힐 수 없습니다.”

하니, 전하께서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예로 우대하여 보내고 주현에 명하여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었는데, 나는 그때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간청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뒤에 그 어머니의 상사를 당해서는 삼년 동안 시묘살이하면서 모든 상제(喪祭)의 예절을 한결같이 성인의 제도를 따르고 불가의 법을 쓰지 않았다.

귀암(龜岩) 남공 재(南公在)가 그 도에 관찰사로 있으면서 몇 수의 시를 지어 시축(詩軸) 두 개를 만들고 각각 그 끝에 짤막한 서문을 지어 붙였으니, 하나는 그의 절의를 찬미한 것이요 하나는 그의 효행을 찬미한 것이다. 여기에 이어 화답한 시 몇 수를 그 아우 중[僧] 종수(宗樹)가 도하(都下)에서 가지고 와 나에게 보이기에, 나 역시 흉내를 내 그 뒤에 붙이고 책을 어루만지면서 이렇게 감탄하였다.

아, 절의는 사람 마음에 본디 있는 것이라 만세에 민멸될 수 없는 것이며, 도학은 천지의 떳떳한 법이라 만세에 없어질 수 없는 것이니, 무릇 선비 된 자가 누구인들 강명(講明)하여 그 이론을 모르랴. 그러나 공리(功利)에 이끌리지 않고 사설(邪說)에 유혹되지 않으며 대절(大節)에 임하여 변하지 않는 자는 여러 세대가 지나도 듣기가 드문 것이다. 무릇 공리의 사욕과 사설의 유혹이 사람의 마음을 해침이 매우 참혹한지라, 특출한 견해와 확고한 결심이 없다면 어찌 능히 그 배운 바를 온전히 하여 변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지금 선생은 세대가 바뀐 뒤를 당하여 누구를 위해 충성을 바칠 데가 없지만, 능히 옛 임금을 위해 의리를 지켜 그 신하의 절의를 잃지 않았으며, 어머니의 상사를 당하여서는 부처의 슬픔을 잊는 법을 바꾸어 능히 돌아간 어머니를 위해 예를 다하고 이단에 빠지지 않았으니, 신하가 되어 충성하고 자식이 되어 효를 한, 평생의 큰 절의가 이처럼 탁월하다. 학문을 닦음에 정당함과 도를 믿음에 독실함과 견해의 탁월함과 수심(守心)의 확고함이 어쩌면 그렇게도 지극한가. 아, 고려가 5백 년 동안 교화를 베풀어 선비의 풍도를 권장한 효과가 선생의 한 몸에 모아 다하였고, 조선이 억만년토록 강상(綱常)을 붙들어 신하의 절의를 밝히는 근본이 선생의 일신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그 명교(名敎)에 공을 끼침이 매우 크다. 우리 전하의 너그럽고 인자한 큰 도량으로 절의를 표창하는 미덕은 곧 주 무왕(周武王)이 백이(伯夷)ㆍ숙제(叔齊)를 석방하고 한 광무(漢光武)가 엄자릉(嚴子陵)을 보낸 것과 세대는 다르나 일은 같은 것으로, 이는 모두 그 절의를 높이고 그 뜻을 펴게 하여 백대의 고풍(高風)을 격동하고 만세의 대방(大方)을 보존하는 것이다. 우리 조선의 덕이 역시 선생 때문에 더욱 빛났으니, 아, 선생의 어짊은 참으로 절대(絶代)에 듣기 드문 것이라 하겠다.

영락(永樂) 3년(1405) 가을 7월 하한(下澣)


▣양촌선생문집 제21권

■이배지(李培之)의 사화(四畫)에 붙여 주는 설

조계종(曹溪宗)의 중 축분(竺芬)이 새로 서화(書畫)를 잘 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동년(同年) 이군 배지(李君培之)가 그가 그린 난초ㆍ대[竹]ㆍ매화ㆍ혜초[蕙]를 얻어 아울러 한 축(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내가 이것을 사랑하는 것은 그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난초ㆍ대ㆍ매화ㆍ혜초를 사랑함이니, 난초의 사랑스러움은 향기로운 덕이 있기 때문이요, 대의 사랑스러움은 굳센 절개가 있기 때문이요, 매화는 맑기 때문이요, 혜초는 빼어나기 때문이다. 벽에 걸어 놓고 종일 대하매, 애완할 수는 있어도 더럽힐 수 없어서, 마치 구완(九畹)ㆍ백묘(百畝) 가운데 있어 대나무와 매화가 곁에 있는 것 같다. 옛사람이 그 뜻에 만족을 취하고 안색(顔色)을 구하지 않은 자가 있으니,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기에,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 심하도다. 그대의 사랑함이 옛 성인과 합치됨이여. 《역경(易經)》에는 난초를 일컬었고, 《서경(書經)》에는 매화를 기록하였고, 《시경(詩經)》과 《예기(禮記)》에는 대를 말하였고, 《이소경(離騷經)》에는 난초와 혜초를 읊었으며, 각종 전기(傳記)와 백가서(百家書)에도 섞여 나오니, 대저 초목 중에 사랑할 만한 것이 많으나 특별히 드러난 이 네 가지만한 것이 없다. 나는 일찍이 ‘이 네 가지는 천하의 특이한 식물이라 사람이 그것을 애호하는 것이 의당한 일이나, 사람이 식물을 애호하는 것도 또한 각기 유에 따라 다르니 저 장문중(藏文仲)이 부들[蒲]로 자리를 짜게 한 것과, 왕융(王戎)이 오얏씨에 구멍을 뚫은 것은, 그 불인(不仁)한 짓임이 적실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배지의 공순한 말씨와 온화한 기상과 정직한 자질과 굳센 모습은, 접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니 참으로 군자임을 알겠다. 그러므로 능히 저것을 취하지 않고 일찍 이것만을 사랑하니,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이것과 같음이 있는지라 사랑할 만한 것을 알고서 사랑하는 것이요, 이것을 얻음으로 해서 우연히 애호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의 덕이 족히 신명과 사귀어 사람이 감복하고 찬미하는 것이 난초의 높은 향기와 같을 것이요, 나의 지조가 굳세어 뽑을 수 없어 부귀와 빈천이 모두 그 중심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대의 굳셈과 같을 것이요, 매화의 맑음, 혜초의 빼어남 같은 것도 이 밖에 있지 않으리니, 이는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자연히 동하여 말자 해도 말 수 없음이 있기 때문이다. 배지가 능히 그 같은 바를 인해서 그 같게 되는 소이를 연구하여 성현의 글에 구하고 마음속에 새겨, 인(仁)을 좇고 의(義)를 따르면 그 덕이 더욱 밝을 것이요, 마음을 곧게 하고 절개를 굳게 지키면 그 지킴이 더욱 견고하게 될 것이다. 《역경》을 보고서 그 향취와 같이 한다면 붕우의 교도(交道)를 얻을 것이요, 《서경》을 상고하여 국맛을 조화(調和)함과 같이 한다면 군신의 의리가 합해질 것이요, 《시경》의 의의(猗猗)에 흥기한다면 학문의 도가 진전될 것이요, 《예기》의 균(筠)이 있다 함을 체득하면 덕과 예를 갖춘 그릇을 이룰 것이다. 소인(騷人)이 향취를 마심으로써 사체(四體)를 향기롭게 하고, 글을 화려하게 하는 것은 나의 여사(餘事)일 뿐이니, 어찌 난초ㆍ대ㆍ매화ㆍ혜초를 애호한다 할 수 있으랴. 사랑할 것은 네 가지에 있지 않고 모두 내 몸에 갖추어져 있으니 배지는 힘쓸지어다.”

배지의 이름은 윤번(允藩)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양촌선생문집 제22권

■역대 제왕 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의 지

천하는 지극히 넓다. 안으로 중국에서 밖으로 사해에 닿아 몇 천만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 것을, 요약하여 두어 자 되는 폭(幅)에다 그리니 자세하게 기록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지도를 만든 것이 대개 소략(疏略)한데, 오직 오문(吳門)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는 매우 상세하게 갖춰졌으며, 역대 제왕의 국도 연혁(國都沿革)은 천태승 청준(天台僧淸濬)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에 갖추 실렸다. 건문(建文 명 혜제(明惠帝)의 연호) 4년(1402, 태종2) 여름에 좌정승 상락(上洛 본관) 김공 사형(金公士衡)ㆍ우정승 단양(丹陽 본관) 이공 무(李公茂)가 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이 지도를 참고 연구하여 검상(檢詳) 이회(李薈)를 시켜 다시 더 상세히 교정하게 한 다음에 합하여 한 지도를 만들었다. 요수(遼水) 동쪽과 우리나라 지역은 이택민의 광피도에도 또한 많이 궐략되었으므로, 이제 특별히 우리 나라 지도를 더 넓히고 일본(日本) 지도까지 붙여 새 지도를 만드니, 조리가 있고 볼 만하여 참으로 문 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다. 대저 지도를 보고서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아는 것도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한 도움이 되는 것이니, 두 공이 이 지도에 정성을 다한 데에서도 그 규모와 국량의 방대함을 알 수 있다. 근(近)은 변변치 못한 재주로 참찬(參贊)이 되어 두 공의 뒤를 따라 이 지도가 완성됨을 보고 기뻐하였으며 매우 다행하게 여기는 바다. 평일에 책에서 강구하여 보고자 하던 나의 뜻을 이미 이루었고, 또 내가 다른 날 물러가 시골에 있으면서 누워서 유람하는 뜻을 이루게 됨을 기뻐하며 이 말을 지도 아래 쓴다.

이해 가을 8월 일

■조계 염송(曹溪拈頌)의 발

불씨(佛氏)의 글이 많아 수천 권에 이르고 있으나, 그 말에 “일찍이 한 글자를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대개 염화일소(拈華一笑) 이래로 28대를 전하여 달마(達磨)에 이르러는 불립문자 직지인심(不立文字直指人心)을 말했으며, 또 6대를 전하여 혜능(慧能)에 이르러 한마디에 돈오(頓悟)한다 하여 공술(空術)이 더욱 드러났는데, 조계(曹溪)에 살면서 그 법을 전하였으므로, 지금 선(禪)을 배우는 자가 모두 그를 높이며 현묘(玄妙)한 이치를 말하는 것이 마치 바람과 그림자를 잡는 것 같아서 손을 댈 수 없다. 고려 진각 국사(眞覺國師)가 또한 학자들이 허망한 데 빠질까 염려하여, 역대 제조(諸祖)가 문답한 말 1천 20여 조항을 수집하여 합쳐 30권의 책으로 만들어 이를《선문염송(禪門拈頌)》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우리나라 사람으로 조계를 배우는 자가 이 글에 마음을 쏟지 않는 자가 없었다. 대개 불서가 이렇게 많은데도 ‘한 글자를 말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그 현묘한 곳을 언어와 문자로 깨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禪)을 배우는 자가 곧바로 현묘한 관문을 뚫고 들어감에는 불경(佛經)도 쓰지 않거늘, 하물며 이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임에랴. 그러나 자신을 닦음에는 마음으로 하고 남을 깨우침에는 말로 하고 후세에 전함에는 반드시 글로 해야 하니, 언어와 문자 또한 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언어와 문자는 모두 마음을 나타내는 것인데도 두 가지가 있는 것인가? 지금 조계 무영형공(無影形公)이 염송 몇 부를 간행하여 널리 산포하고 멀리 전하려 하면서, 나에게 발(跋)을 청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벽돌은 갈아도 거울이 될 수 없고 종이는 모아도 산이 될 수 없으니, 이 글로 도(道)를 구하는 것이 마치 이와 같다. 더구나 남에게 기대하는 것은 더욱 요원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공은 이를 모르는 분이 아닌데 반드시 이를 하는 것은, 반드시 거기에는 뜻이 있을 것이다. 이를 버리고서 얻을 수 없고 이에 집착해서도 안 되니, 버리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서 얻음이 있어야 참으로 얻는 것이다. 다만 그 기른 바와 얻은 바가 우리 유가(儒家)의 ‘잊지도 않고 돕지도 않으면서 그대로 활발하게 둔다’는 것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모르겠다. 이것이 다 학자의 일이기 때문에 아울러 쓰니, 공은 의당 나를 위하여 한 마디 전어(轉語)를 해 주어야 할 것 같다.”

불립문자 직지인심(不立文字直指人心) : 문자에 의하지 않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 도를 깨닫는다는 뜻인데, 《벽암록(碧巖錄)》 제1칙(第一則) 평창(評唱)에 “문자를 세우지 않고 인심(人心)에 직결시켜서 심성을 철저히 본 뒤에 성불(成佛)한다.”고 하였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발

제생원(濟生院)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은 백성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처음에 평양백(平壤伯) 좌정승(左政丞) 조공 준(趙公浚)과 상락백(上洛伯) 우정승(右政丞) 김공 사형(金公士衡)이 국사를 다스리던 여가에, 곤궁한 백성들이 병이 들어도 치료하지 못함을 불쌍하게 여겨 널리 구제하고자, 동지중추(同知中樞) 김공 희선(金公希善)과 협력하여 제생원을 설치하고 약제를 모아놓고 치료를 하였으며, 또 예천백(醴泉伯) 권상 중화(權相仲和)와 더불어 그가 전에 저술한《향약방(鄕藥方)》을 토대로 다시 더 수집하여 전서(全書)를 만들어서 중외에 반포하고 영원히 전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모두 지역에 따라 약을 구할 수 있고 병에 따라 치료할 수 있음을 알게 하였다. 또 우마(牛馬)의 병에 약을 잘못 써서 죽게 함을 염려하여 그 처방(處方)을 집성하였으니, 백성을 사랑하고 짐승을 아끼는 마음이 깊고 또 간절함이 이와 같았다. 건문(建文) 원년(1399, 정종1)에 그 책이 완성되자, 김 중추(金中樞)가 강원도 관찰사로서 각공(刻工)을 시켜 목판에 새겨 그 전함을 영원하게 하였다. 아! 평양백과 상락백의 인후한 덕으로 그 일을 총괄하였으며, 예천백의 정박(精博)한 학문으로 그 책을 편찬하였으며, 김공이 또 능히 힘을 써서 그 일을 시종 성취하였으니, 네 분이 우리나라 백성에게 혜택을 베푼 바가 마땅히 이 책과 함께 만세에 전하여 무궁함을 기할 것이다. 이 제생원의 일을 주간(主幹)하는 이는, 서원군(西原君) 한공상경(韓公尙敬)ㆍ순흥군(順興君) 안공 경량(安公敬良)ㆍ김군 원경(金君元囧)ㆍ허군 형(許君衡)ㆍ이군 종(李君悰)ㆍ방군 사량(房君士良)으로서 모두 여기에 공로가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아울러 책머리에 밝힌다.

기묘년(1399, 정종1) 여름 5월 상순(上旬)


▣양촌선생문집 제23권

■공(公)공정하면 사가 없고 마음이 맑으면 욕심이 없다. 일이 지당한 데서 나오면 이것이 정직이다.

근(勤)부지런하면 게을러지지 않는 것이니 부지런히 노력하여 어기지 마라. 직사를 폐하거나 해이하지 않는 것이 충현(忠賢)이다.

관(寬)너그러우면 가혹하지 않게 되니, 일을 모두 인후하게 하라. 군자의 덕은 그 경사가 후세에 전해지느니라.

신(信)미더우면 경망하지 않나니 유지하기를 성심으로 하여, 굳게 그 뜻을 지키고 스스로 변경하지 마라.네 자의 명을 지어 아들 길천군 규(吉川君跬)에게 준다.

■삼봉 선생(三峯先生) 진영(眞影)에 대한 찬

온후한 기색과 엄중한 얼굴이로다. 바라보면 높은 산을 우러러보는 듯하며, 대하면 봄바람 속에 앉은 듯하도다. 얼굴이 윤택하며 등이 펴진 것을 보면, 화순한 덕이 마음속에 쌓였음을 알 수 있으리라.

이것은 용모를 말한 것이다.

환한 불길 만 길이나 솟아오르며, 기운은 긴 무지개를 뱉아 놓은 듯하도다. 궁한 때를 당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고, 출세함에 이르러서는 그 덕이 더욱 높았도다. 이는 그 마음이 넓어 스스로 얻은 것이니, 반드시 의가 축적되어 속에 가득차 있기 때문이리라.

이것은 기상을 말한 것이다.

선을 좋아함이 독실하였고, 일을 처리함이 밝았도다. 관대함은 바다의 넓음과 같았고 믿음과 과단성은 시귀(蓍龜 점칠 때에 사용하는 시초와 거북)의 공정함과 같았으니, 그 국량과 규모의 방대함은 또한 오활하고 고루한 자가 따르지 못하리.

이것은 재기를 말한 것이다.

성리(性理)에 대한 학문과 정치에 대한 공은 이단을 배척하여 우리 도의 정대함을 밝혔고, 정의에 입각하여 일어나는 나라의 운을 도와서, 문장이 영원히 썩지 않고 감화가 끝없이 흡족하였으니, 정말 국가의 중신이면서 후학의 스승이로다.

이것은 학문ㆍ사업ㆍ문장을 말한 것이다.

■목은 선생(牧隱先生)의 화상에 대한 찬(讚)

천품의 순수하고 아름다움이 빼어났으며, 성인의 학문은 정미함을 궁구하였으니, 속이 틔어 투명함이 빛나도다. 실천은 매우 독실하였고, 문장은 그 표현이 기묘하도다. 증점(曾點)의 광(狂)이 아니면서도 읊으며 돌아오는 흥취를 가졌고, 유하혜(柳下惠)의 화(和)와 같으면서도 공손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았으니, 학자들은 태산ㆍ북두처럼 우러러보았고, 나라에서는 시귀(蓍龜)처럼 믿었도다. 대신으로 임명되었으되 그 지조를 고치지 않았고, 큰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붉은 마음이 더욱 미더웠고 근본 지조를 변치 않았도다. 이것은 공이 스스로 자기를 평한 말이거니와, 강(江)ㆍ한(漢)처럼 도도(滔滔)하고 운연(雲煙)처럼 비비(霏霏)한 문장은 구양수(歐陽脩)ㆍ한유(韓愈)와 어깨를 겨누고 나란히 달릴 만하니, 후세의 보는 사람은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리라.


▣양촌선생문집 제24권

■사대표전류

신(臣 황제에 대한 왕의 자칭)은 아룁니다.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21년(1388, 우왕14) 2월 15일에 배신(陪臣) 문하평리(門下評理) 설장수(偰長壽)가 경사(京師)에서 돌아오는 편에 호부(戶部)의 자문(咨文)을 받으니 “성지(聖旨)를 받드니 ‘철령(鐵嶺)의 이동ㆍ이북ㆍ이서는 원래 개원(開原)에 속했었으니, 관하의 군민(軍民)을 그대로 요동(遼東)에 붙이라.’하셨으므로, 이를 받들어……” 하였습니다. 신은 온 나라 신민과 함께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며 제 뜻을 아룁니다.

하늘은 넓고 커서 빠짐없이 덮어 기르고, 제왕이 일어나면 경계가 반드시 바루어집니다. 그래서 제 정성을 다하여 번거롭게 아룁니다. 오직 우리 소국은 동떨어진 한 구석땅에 있어, 협소하기는 실로 묵지(墨池)와 같으며, 메마르기는 돌밭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동쪽 모퉁이로부터 북쪽 변방까지는 바다를 끼고 산이 막혀 형세가 매우 편협합니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전해내려와 구역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철령(鐵嶺) 이북은, 문천(文川)ㆍ고원(高原)ㆍ화주(和州 영흥(永興)의 옛 이름)ㆍ정주(定州 정평(定平)의 옛 이름)ㆍ함주(咸州 함흥(咸興)의 옛 이름) 등 여러 고을을 지나 공험진(公嶮鎭)에 이르기까지는 예로부터 본국의 땅으로 되었었는데, 요(遼) 건통(乾通 요 천조제(遼天祚帝)의 연호) 7년(1107, 예종2)에 동여진(東女眞) 사람들이 난리를 일으켜 함주 이북의 땅을 빼앗았으므로 예왕(睿王)이 요에 고하여 토벌하기를 청하니, 요에서 군사를 보내어 잃은 땅을 회복한 다음, 함주ㆍ공험진 등의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 후 원(元) 나라 지원(至元) 무렵 무오년(1258, 고종45)에 이르러, 몽고의 산길대왕(散吉大王)ㆍ보지관인(普只官人)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수복할 때에, 본국 정주의 반민(叛民) 탁청(卓靑)과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가 화주 이북의 땅을 가지고 가서 항복하면서, 원(元)의 요동(遼東) 함주로(咸州路) 부근인 심주(瀋州)에 쌍성현(雙城縣)이 있음을 들어 알고, 본국 함주 근처인 화주에, 옛날에 쌓았던 조그마한 성 둘이 있음을 인하여 모호하게 주청(奏請)하므로, 드디어 화주를 쌍성으로 그릇 일컬어 조휘를 쌍성총관(雙城摠官)으로, 탁청을 쌍성천호(雙城千戶)로 삼아 인민을 관할하였는데, 지정 16년에 이르러 원(元) 나라에 주달하여 총관과 천호 등의 직을 혁파하고 화주 이북의 땅을 다시 본국에 소속시켜, 지금까지 주현의 관원을 제수하고 인민을 관할하게 되었으니, 반적으로 말미암아 빼앗겼던 땅을 대국에 호소하여 다시 찾아낸 것입니다. 이제 받들건대 “철령의 이북ㆍ이동ㆍ이서는 원래 개원로(開原路)에 속한 것이니, 관하 인민을 그대로 요동에 붙이라.” 하셨는데, 철령의 산은 왕경(王京)과 겨우 3백 리의 거리이며 공험의 진은 변방의 경계로 한정된 것이 한두 해가 아닙니다. 선신(先臣)께서 다행히 밝은 세대를 만나 공직(貢職)은 제후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고 땅은 이미 판도에 들었는데, 미미한 신의 몸에 미쳐서도 성상의 은택을 많이 입었으며 특별히 열 줄의 조서를 내리시어 중국과 같이 보아 주는 인(仁)을 베푸셨습니다. 바라건대, 포용하는 도량을 넓히시고 회유하는 덕을 두텁게 하시어 두어 고을 땅으로 하여금 그대로 하국(下國)의 강토가 되게 하여 주시면, 신은 삼가 마땅히 더욱 재조(再造)의 은혜를 느끼어, 항상 만년의 수(壽)를 빌겠습니다. 신은 하늘을 우러러보고 성상을 사모하여 감격하고 황송함을 누르지 못하며, 삼가 배신 봉익대부 밀직제학(奉翊大夫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보내 표를 받들어 진정합니다.


▣양촌선생문집 제25권

■화산군(花山君)으로 기복(起復)함을 사면하는 전

초토(草土)의 신 권근(權近)은 머리 조아려 전(箋)을 올립니다. 신은 집안의 화를 만나 자모(慈母)가 세상을 떠났기로 상복을 입은 지 겨우 석 달이 넘었읍니다. 지나치게 성은(聖恩)을 입어 신에게 자헌대부 화산군 수문전학사(資憲大夫花山君修文殿學士)를 제수하시고 또 성은을 입어 신을 기복시키시니, 신이 그 명을 들으매 감격함과 부끄러움이 겹치어 황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임금을 섬기는 충성과 어버이를 섬기는 효도는 신하나 자식 된 자의 큰 절개이므로, 어느 한편에 치우쳐 선후 장단의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그러므로 《효경(孝經)》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기 때문에 임금에게 충성할 수 있다.”하였고, 전(傳)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섬기는 기간은 짧고 임금을 섬기는 기간은 길다.”하였으니, 이는 옛날 성인이 천리의 정당함에 근원하고 인륜의 편리를 짐작하여 만세의 떳떳한 훈계를 세운 것입니다.

신은 어미가 살아 있던 날에도 조석의 보양을 빠뜨린 적이 많았고, 지금 상을 당하여서도 또한 슬픔을 극진히 하지 못하며 상복을 입고 있으나 편안히 쌀밥을 먹고 있으니, 자식 된 자의 효도는 이미 영영 무너진 것이라 예법에 마땅히 버림을 받아야 하거늘, 도리어 발탁을 입어 영화로이 작위를 받고 따라서 직(職)에 나아가게 하시니, 거룩하신 은총이 실로 분에 넘칩니다. 신이 어찌 상복을 벗고 길복(吉服)으로 바꾸어 몸을 영화로이 하고자 아니하겠습니까. 또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원래 변변치 못한 사람인데 한갓 글자나 숭상하는 천박한 학식으로 빈 이름을 도둑질하여 외람되이 문신(文臣)의 반열에 끼였고, 주제넘게 학자들의 스승이 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만약 영화를 무릅쓰고 상기(喪期)를 단축하여 성인의 법을 무너뜨리고 풍속에 오점을 남긴다면, 신의 평소에 입신(立身)한 근본이 씻은 듯이 없어질 터이니, 장차 무슨 술책으로 국가를 보익하며 또한 장차 무슨 낯으로 후학(後學)을 훈계하겠습니까? 인정을 무시하고 기복시키는 것이 비록 좋은 법은 아니나, 적을 막을 만한 자격이거나 국사를 다스릴 만한 지혜가 있는 자라면 부득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신에게 작위를 주어 기복하게 하시는 것은 적을 막는 데 사용하자는 것이 아니요, 국사를 다스리는 데 사용하자는 것도 아니며, 오직 문묵(文墨 문장)을 대강 안다는 것 때문인데, 문묵의 일은 반드시 공부(公府)에 출사해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상중에 있을지라도 진실로 조정의 명령이 있으면, 감히 정력을 다하여 그 직책에 이바지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나아가면 한갓 예법을 무너뜨릴 뿐 성치(聖治)에 도움은 없을 것이며, 신이 나아가지 아니하면 위로 직에 이바지할 수 있고 아래로 예법을 지킬 수 있으니, 신하와 자식의 도리가 거의 둘 다 온전할 것입니다. 또 하물며《예기(禮記)》에 “아비가 살아 있으면 죽은 어미를 위하여 1년 동안 재최(齊衰)를 입는다”고 하였음에리까. 신이 상복을 입는 날은 그 기한이 매우 짧고 전하에게 충성을 바칠 날은 매우 많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큰 도량을 넓히시어 어리석은 신의 심정을 굽어 살피시고 기복의 명령을 거두어 주셔서, 상복의 법제를 마치게 하여 효도로 다스리심을 빛내시고 풍속을 격려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 근은 절박하고 황공함을 누를 길 없어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아룁니다.


▣양촌선생문집 제26권

■찬성사(贊成事)의 사면을 청하는 계본(啓本)

신 근(近)은 삼가 생각합니다. 지난날에 안에서 내어온 송조 제신 주의(宋朝諸臣奏議) 제35권에 어사중승(御史中丞) 부요유(傅堯兪)가 철종(哲宗) 조후(趙煦)에게 상서(上書)한 것이 있었습니다. 대략,

“엎드려 보건대, 한충언(韓忠彦)이 상서좌승(尙書左丞)인데 또 그의 아우 가언(嘉彦)으로 부마를 삼으시므로 물의가 자자하여 가당치 못하다 합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이덕유(李德裕)는 실로 당(唐) 나라의 명상(名相)인데, 그는 구제(舊制)를 내세워 부마도위(駙馬都尉)가 요관(要官)과 왕래함을 금지시켰습니다. 당시의 방금(防禁)이 이러하였는데 지금은 한 집안에 모였으니 평론하는 사람들의 말을 진실로 취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범조우(范祖禹)는 상서(上書)하기를,

“한가언이 부마도위가 되었는데 그 형 충언이 집정(執政)하는 것은 조종(祖宗)이래로 없었던 일입니다. 어찌 후세의 인척(姻戚)들로 하여금 정치에 간여하게 하는 것을 지금으로부터 시작하게 하리까. 바라건대 충언의 집정을 파하여 후세에 법이 되도록 하소서.”

하였습니다. 대개 아우가 부마가 되고, 형이 재상이 되어 집권하는 것도 옛사람들은 오히려 불가하다고 여겼는데, 하물며 신의 부자가 과람하게 성은을 입어 아들 규(跬)는 공주와 결혼하였고, 신은 정부에 있어 영예와 은총이 무한함에리까. 실로 편안하지 못합니다. 또 신은 근래에 질병이 끊이지 않고 눈과 귀가 어두워서, 일을 보면서도 정신이 아득하여 듣고 살피는 일을 잘하지 못하여, 부지런히 종사한다 해도 오히려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되거늘, 이달 16일부터 병이 재발하여 음식을 먹으려면 구역질이 나고 쇠약함이 더욱 심하여, 병을 고하고 베개에 엎드려 한없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쇠약한 병을 가련히 여기사 신의 작명을 갈으소서. 송(宋) 나라 신하들의 주의(奏議)를 보시고 후세를 위한 법을 세우시며, 또 노신(老臣)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병을 다스려 여생을 보전하게 하여 주신다면 크게 다행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양촌선생문집 제27권

■사신(使臣)으로 간 유구(柳玽)ㆍ정총(鄭摠)ㆍ정신의(鄭臣義) 등을 재액이 사라져서 속히 본국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소

왕명을 받들어 찬했다.

부처님은 모든 근기(根機)에 응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 이익을 입게 하시고, 신하가 임금의 일에 수고하니 임금도 같이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간절하게 귀의(歸依)하오니 도와주시기를 비옵니다. 일찍이 생각건대, 백성을 편히 보전하는 방도는 큰 나라 섬기는 예절을 잘해야 하기에, 신중히 전대(專對)할 만한 인재를 뽑아 조빙(朝聘)하게 한바, 갑자기 황제의 꾸지람을 입어 드디어 억류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본래 희롱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이 없었는데, 저들은 어찌하여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두었습니까? 우러러 생각건대 부처님의 원융(圓融)한 거울은 반드시 굽고 곧은 사정을 아실 것입니다. 사신들이 액을 면하고 빨리 돌아오게 하고자 하는데, 어찌 또한 정성을 다하여 불공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절에 나가서 법석을 펴오니, 장만한 것이 미미하오나 자세히 살펴 감응하소서.

엎드려 바라건대, 부처님의 방편(方便)을 힘입어 속히 고난에서 벗어나고, 황제의 돌봄을 받아 돌아와서 국가에 경사가 있게 하며, 친족들과 서로 만나서 길이 그의 집을 보전하게 하소서.


▣양촌선생문집 제28권

■남편이 아내의 소상(小祥)에 재(齋)를 올리면서 드리는 소

큰 깨달음은 가을달의 밝음과 같아서 진세를 두루 비추고, 1주년이 마치 달리는 말과 같이 빨라서 벌써 소상이 되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 귀의하려는 정성을 다하여 극락세계로 이끌어 주는 자비를 빕니다. 생각건대 가신 혼령은 나의 좋은 배필이었습니다. 살림을 주관함에 법도가 있어 가정의 즐거움을 얻었는데, 해로할 기약이 헛되어 영원히 무덤으로 돌아간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애통해 하기만 한들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좋은 곳으로 가도록 천도하는 것이 나의 정성입니다. 이에 소상을 맞아 특별히 불사(佛事)를 마련하였으니, 이처럼 구구한 차림이나 자세히 살펴 흠향하소서.

엎드려 바라건대, 바로 도솔천궁(兜率天宮)에 올라가서 모든 쾌락을 받게하고, 안양세계(安養世界)에 왕생하여 최상의 보리(菩提)를 이룩하게 하소서.

■아버지를 천도하는 소

부윤(府尹) 조서(曺庶)를 대신하여 짓다.

선지식(善知識 불도를 선도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승(僧))의 자비로운 참회법은 널리 해탈의 문을 열어 주었고, 고애자(孤哀子)의 지극한 마음은 좋은 곳으로 가는 길을 천도하고자 합니다. 이에 정성껏 불공드리면서 감히 이끌어 주시기를 비옵니다. 생각하건대 돌아가신 혼령은 나의 아버지입니다. 만리 밖에 유랑하여 오랫동안 염려를 끼쳐드리다가 10년 만에 다시 기쁜 얼굴로 모실 기회를 얻어, 숙수(菽水)의 봉양을 다할까 하였더니 갑자기 풍수(風樹)의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춘추 94세를 누렸으니 이승에서 상수(上壽)하셨다 하겠으나, 백만억 세계를 지나 저승에 가셔서 좋은 인연을 맺어야 하기로, 이에 절에 나와서 삼가 법회를 베풉니다. 이처럼 약소한 차림이나 밝게 흠향하소서.

엎드려 바라건대, 바로 도솔천(兜率天) 오르시어 자유로이 노닐게 하며, 극락세계에 왕생하시어 부처가 되게 하소서.


▣양촌선생문집 제30권

■동모제(同母弟) 정안공(靖安公 : 방원)에게 내리는 교서

왕은 말하노라.

왕이 나라를 세움은 곧 공고한 터전을 여는 것이요, 일가 친척을 성(城)으로 삼음은 곧 숭고한 세력을 높이는 것이다. 모토(茅土)로 널리 번병(藩屛)을 세우고,갈류(葛藟)로 본근(本根)을 덮으려 하는데, 하물며 좌명(佐命)의 공로가 있어 친의를 두터이 하는 예를 독실하게 하여야 됨에랴. 문왕ㆍ무왕의 세대를 상고하건대 곧 노(魯)ㆍ위(衛)에 친족을 세웠으니, 종맹(宗盟)에 있어 반드시 동성(同姓)을 먼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은(私恩)의 두터움을 보이는 것이 아니요, 역시 훈업(勳業)의 많음을 표창하여야 되기 때문이다.

모제(母弟) 정안공(靖安公) 태종(太宗)의 휘(諱) (태종의 이름인 방원(芳遠)을 피한 것이다) 은 강직하고 밝은 덕행과 바르고 진실한 마음씨를 지녔다. 널리 알고 옛것을 좋아하여 그 학문은 이미 육적(六籍)의 글을 통달하였고, 영민하고 비범함이 무리에서 뛰어나 그 용맹은 삼군(三軍)의 원수를 빼앗을 만하다. 임금을 섬겨서는 극진한 충절을 다하였고, 사명을 받들어서는 전대(專對)의 인재임을 나타냈다. 인의(仁義)가 아니면 더불어 말하지 않아 맹자(孟子)의 어려움을 책하는 도를 얻었고, 오직 효우(孝友)를 정사에 베풀어 군진(君陳)의 아름다운 덕의 풍도가 있었다. 상왕(上王 태조 이성계(李成桂))이 역시(歷試)할 때 고려는 망해가는 운수라, 부역과 부세가 너무 가혹하여 백성은 원망에 쌓였었고, 취하고 버림이 전도되어 어진이는 물러나 자취를 감추었다. 이처럼 상왕은 훌륭한 덕언(德言)을 가지고 참설(讒說)이 뒤엉키는 때를 당하여, 덕을 기르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 지성이 날마다 진취되기를 힘썼는데, 네가 곧 백성의 고달픔을 뼈저리게 생각하고 군부(君父)의 치욕을 씻고자 하여, 앞장서 창의를 솔선하매 뭇사람 또한 꾀를 같이하였다. 천명을 따르고 민심에 호응하여 왕위에 오르는 임금의 덕을 도왔고, 나라를 세워서 억만년 누릴 큰 터전을 넓혔다. 이때 능히 충효(忠孝)의 공로를 온전히 하였으니, 극진한 훈친(勳親)의 총애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작위로 나누어 봉하여 비록 반석의 종친을 만들었으나, 책명(策命)으로 공로를 표창함에는 곧 산하(山河)를 두고 맹세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 이처럼 당일에 친혐(親嫌)으로 피하게 된 것은 대개 후일의 공론을 기대함에서였다. 그런데 요즈음 간신들의 은밀한 모사가 마침 상왕(上王)께서 편치 못하신 때를 틈타, 어린 서얼(庶孼)을 끼고 난을 일으켜 종사(宗社)가 거의 전복될 지경에 이르렀는데, 선견지명으로 즉시 쳐서 안정시켰다. 주공(周公)이 골육의 변을 선처하였으니 오직 의리를 따른 것이요, 관중(管仲)이 형제의 사이에서 옮겼으니 보좌하는 것이 올바르기 때문이다. 천륜이 이 때문에 바로잡혔고 나라가 이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 하늘과 조종이 내린 음덕(陰德)을 입으므로 백성과 사직은 큰 복을 연장하게 되었다. 돌아보건대 미미한 이 몸으로 욕되이 천명을 이어받았으나, 부덕(否德)의 사양을 받아 주지 않아 외람되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오직 밤낮으로 못에 임하고 얼음을 밟듯 삼가고 조심하여, 위로는 상왕이 물려주신 뜻에 부응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안정을 이루려 하는데, 책임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어 걱정이 더욱 많아진다. 바라건대 광보(匡輔)의 힘을 입어 태황(怠荒)의 허물을 면할까 하노라. 더구나 너는 지친으로 나와 명분이 같은 처지이다. 진실로 고락을 같이할 처지인데 어찌 더욱 성실하게 보좌하지 않으랴. 내가 참으로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는데 네가 집에 있으면서 모른다 하는 것이 옳겠는가. 내가 임금 노릇을 함에 욕됨이 없으면 너 역시 영원한 세대에 떳떳이 말할 수 있으리라. 이제 기왕의 공로를 기록하여 더욱 장래의 공을 기대한다. 너를 책명하여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을 삼고 곧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상전(賞典)을 거행하되 형상을 그리고 공로를 새기며, 전토와 인구를 하사함을 한결같이 전례에 의하여 주노라. 이하는 글이 빠졌다.

■태자(太子)를 세우는 교서

왕은 말하노라.

예부터 왕이 태자를 세우는 것은 종사를 높이고 나라의 근본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예문(禮文)을 상고하건대 적자가 아니면 동모제(同母弟)를 세운다는 설이 있는데, 부자간에 계승하거나 형제간에 계승하거나 오직 타당하게 할 뿐이다. 내가 과덕하고 우매한 몸으로 왕실의 계통을 이어받아 엄숙히 삼가면서 다스림을 생각해 온 지 지금 3년이 되었다. 적사(嫡嗣)는 없고 서얼(庶孼)이 있는데, 서얼은 암매하여 어질지 못하다. 항상 계승의 중대한 일을 생각하며 사람을 얻기 어려움을 걱정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며 감히 마음을 놓은 적이 없고, 오직 동기(同氣)의 우애와 독실한 의리를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회안공(懷安公) 방간(芳幹)이 불측한 간신배의 말을 믿고 망녕되이 의심을 품고 시기하여 군사를 들어 난을 일으키므로 그 화단이 이루 헤아릴 수 없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곧 정안공 태종의 휘(諱) 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 치게 하였는데, 다행하게도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즉시 평정하여 불일내에 말끔히 진정시켰다. 그러나 상(象)을 걱정하듯 하는 정이 애처로웠고,관숙(管叔)을 목베듯 하는 일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방간을 잡아다가 사장(私莊)에 안치하고 그 무리들도 모두 각각 그 죄과에 따라 처형하였으니, 이는 대개 나라의 근본이 정해지지 못하여 인심이 흔들리기 쉬움을 말미암아 이처럼 극심한 화란이 일어난 것이다. 말이 여기에 이르니 몹시 슬프다. 그러므로 어진 아우를 세워 나라 근본의 굳건함을 발단하였노라.

정안공 모(某)는 뛰어나게 영명한 기품에 지용을 겸전한 자질로서 문무의 지략은 타고난 소질이요, 효제의 정성은 본심에서 우러났다. 시서(詩書)의 훈계를 받들고 정교(政敎)의 방법을 달통하였다. 상왕을 섬김에는 충성을 바치고 힘을 다하여 개국의 공로를 세웠고, 과덕(寡德)한 형을 호위하여서는 난을 평정하고 반정하여 정사(定社)의 공업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종사(宗社)가 길이 힘입은 바는 신민(臣民)이 다 아는 처지이다. 이처럼 훈덕(勳德)이 높으니 그 덕을 칭송하는 백성들이 다 귀복(歸服)한다. 이에 책명을 내려 왕세자(王世子)를 삼아서 여망(輿望)을 위로한다. 태자의 책임은 반드시 감무(監撫)의 권한을 겸하는 것이다. 곧 명하여 군국(軍國) 중대사(重大事)를 다스리게 한다. 너희 종친(宗親)ㆍ기로(耆老)ㆍ재보(宰輔)ㆍ신료(臣僚)와 중외 인민은 다 내 뜻을 받들어 각각 맡은 바 책임을 완수할 것이며, 원량(元良)의 뜻을 본받아 나의 다스림을 보좌하라. 이 책례(冊禮)를 행함에 있어 마땅히 특사를 베풀겠다. 건문(建文 명 혜제(明惠帝)의 연호) 2년(1400, 정종2) 2월 초4일 새벽 이전을 기하여 반역을 꾀한 역적, 조부모와 부모를 죽인 자, 처첩으로서 남편을 죽인 자, 노비로서 상전을 죽인 자 , 독약을 먹여 죽인 자, 귀신에게 저주한 자, 강도질한 자, 고의로 살인을 꾀한 자와 방간의 무리로서 그 정상을 아는 죄인 외에는 이미 발각된 자나 아직 발각되지 않은 자, 이미 판결이 난 자나 아직 판결이 끝나지 않은 자 등,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다 사면하라. 감히 유지(宥旨)를 내리기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목으로 처벌하리라.

아, 부자간에는 더욱 자애롭고 효도로운 마음을 독실히 하고, 백성들은 서로 화목하여 영원히 태평의 다스림을 열라. 그러므로 이처럼 교시하니 그리 알라.


▣양촌선생문집 제31권

사병 (私兵) 없애기를 청하는 서장(書狀)

사헌부(司憲府) 신(臣) 권근(權近)과 문하부 낭사(門下府郞舍) 신 김약채(金若采) 등은 아룁니다.

병권(兵權)은 국가의 큰 권력이므로 통속(統屬)이 있어야지 분산하여 주관해서는 안 됩니다. 분산 주관하여 통속이 없으면 이는 칼을 거꾸로 잡고 남에게 자루를 쥐어 주는 것과 같아서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맡은 자가 많으면 제각기 도당(徒黨)을 만들어 그 생각이 반드시 달라지고 그 형세가 반드시 분산되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화란(禍亂)을 빚어내게 됩니다. 골육(骨肉)이 서로 해치고 공신(功臣)들이 보전되지 못하는 것도 항상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이는 고금의 공통된 걱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옛날에는 집에 무기를 간직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사병(私兵)이 없었다는 것을 말함이고, 《예기(禮記)》에 “사가(私家)에 무기를 간직하는 것은 예(禮)가 아니고 이는 임금을 위협하는 것이다.” 한 것은 신하가 사병을 소유하면 반드시 강포(强暴)하고 참람해져서 그 임금을 위협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법을 세우고 교훈을 전하여 후세의 혼란을 예방한 것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옛날 송 태조(宋太祖)가 즉위한 초기에 조용히 담소(談笑)하면서 공신(功臣)들의 병권을 해체시켜 보전하게 한 것은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하고, 노(魯) 나라의 삼가(三家),진(晉) 나라의 육경(六卿)과 한말(漢末)에 일제히 일어난 군웅(群雄)이나 당(唐) 나라 때에 멋대로 날뛰던 절도사(節度使)들이 모두 사병을 길러 난리를 일으킨 것도 후세의 경계가 될 만합니다.

생각하옵건대, 우리 태상왕(太上王)께서 개국하신 초기에 특별히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설치하시어 병권을 오로지 관장하도록 하신 그 규모(規模)가 원대했거늘, 당시 의논하는 이들은 “혁명(革命) 초기여서 인심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므로 의외의 변을 대비해야 하니, 훈신(勳臣)과 종친(宗親)에게 각각 사병을 거느리게 하여 창졸의 변에 대응해야 됩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병을 모두 없애지 않아, 사병을 거느린 자들은 도리어 선동과 난리를 꾀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는데, 다행히 하늘의 도움으로 전하께서 난리를 평정하고 사직(社稷)을 안정시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사병에 대한 의논은 아직도 옛날과 같아, 고식적(姑息的)으로 옛 제도만을 따라 없애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대간(臺諫)이 사병 없애기를 청할 적에 전하께서는 “종친과 훈신은 다른 뜻이 없음을 보장할 수 있다.” 하시고 그들에게 다시 사병을 거느리게 하시더니, 오래지 않아 내란이 지친(至親)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사병을 두는 것은 한갓 난리만을 빚어낼 뿐, 그 이로움은 볼 수 없는 것으로서 대간의 말이 이미 증험되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병을 없애지 못하였으니 장래의 환란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외방(外方) 각도의 군마(軍馬)가 여러 절제사(節制使)에게 분속(分屬)되어 있으므로, 혹은 시위(侍衛), 혹은 별비(別陴)ㆍ사반당(私伴倘)이라 하여 번거로운 상번(上番)과 요란한 징발(徵發)에 그 폐단이 매우 많으며, 많은 배종(陪從)들은 잦은 사냥으로 그 노고(勞苦) 또한 심하여 사람은 주리고 말은 지쳤으며, 눈비를 맞으며 사가(私家)를 지키므로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원망하는 것이 매우 딱합니다.

오늘날의 큰 폐단은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서울에 머무는 각도의 절제사를 모두 파(罷)하시고, 서울과 지방의 군마를 모두 삼군부(三軍府)에 소속시켜 국가의 군사로 만들어 체통(體統)을 세우고 국권(國權)을 중히 하여 인심을 안정시키고, 양전(兩殿)의 숙위(宿衛)를 제외하고는 사가의 숙직(宿直)은 모두 금단(禁斷)하소서.

또 조정에 나아갈 때 사반당이 무기를 가지고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시어 ‘옛날에 사가에는 무기를 간직하지 않았다’는 뜻에 합치되도록 하시고, 후일 서로 시기하여 변란을 일으킬 단서를 막으신다면 국가의 큰 다행이겠습니다.


▣양촌선생문집 제32권

■대간(臺諫)의 직임을 논하는 계본(啓本)

신 근은 삼가 대간(臺諫)의 직임(職任)에 관한 일을 아룁니다.

이달 초이렛날 예조 참의(禮曹參議) 신 변계량(卞季良)과 정랑(正郞) 신 장빈(張贇) 등이 왕지(王旨)를 공경히 받들고, 지금 신 근과 더불어 송(宋) 나라 제도 가운데 대간 직임에 관한 사목(事目)을 함께 상고하여 조목별로 나열하여 아뢰게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옵건대, 대간은 임금의 이목(耳目)이니 등용(登用)과 파출(罷黜)을 모두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찍이 국초(國初)에 신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이 《경제문감(經濟文鑑)》을 편수(編修)할 적에 대간 직임의 역대 연혁(沿革)과 선유(先儒)들의 격언(格言)을 두루 기재(記載)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신도 함께 교정(校正)을 하였지만, 대간 직임에 중요한 것으로는 빠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상명(上命)을 받들어 다시 《경제문감》에 기재되지 않은 송(宋) 나라 제도의 연혁과, 송 나라 현신(賢臣)들의 언행(言行)ㆍ사적(事迹) 몇 조목(條目)을 상고하여 참고(參考)ㆍ선사(繕寫)한 것과 《경제문감》한 질을 올려드리오니, 여가에 보시게 되면 거의 간언을 따르는 미덕(美德)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할 말을 다하고 숨기지 않는 것은 신하의 곧은 절개이고, 너그럽게 용납하고 거절하지 않는 것은 임금의 성한 덕입니다. 그러므로 간직(諫職)에 있는 자는 그 말이 비록 지나칠지라도 반드시 너그럽게 용납해야 하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진실로 지나친 말을 하였다 해서 오늘 죄를 주면, 내일부터는 직언(直言)을 하려는 자도 반드시 두려워하고 꺼려서 감히 할 말을 다하지 않게 될 것이니, 이는 언로(言路)를 막는 것이요, 둘째 그 말이 비록 지나쳤다 하더라도, 그 마음은 곧 국가를 위하여 충성을 바치는 것이어서 그 아부하고 아첨하여 국가를 저버리고 제 몸만을 도모하는 자와는 같지 않으니, 진실로 너그럽게 용납하여 앞으로 직언이 들어오기를 권장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공자는 순(舜) 임금의 덕을 찬미하여 말하기를 “나의 악은 숨겨주고 선은 드러내 주었다.” 하였으니, 순 임금이라고 해서 어찌 악을 죄주고 싶지 않았으리요마는 그러나 반드시 숨겨주고 드러내지 않은 것은, 대개 간언(諫言)을 듣는 방법에 있어 만약 악을 숨겨주지 않고 죄를 주면, 선한 자도 두려워하여 말을 하지 않을 것이므로, 반드시 악을 숨겨준 뒤라야 선한 말을 오게 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니, 이는 성인의 선을 좋아하고 바른 말을 구하는 중요한 도로서 만세(萬世) 임금들이 본받아야 할 큰 법입니다.

지금 주상 전하께서는 간하는 말을 따르고 선을 좋아하시는 미덕이 순 임금과 같으시나 더욱 순 임금의 악을 숨겨준 것으로써 법을 삼으시어, 오늘부터는 말을 올리는 자에게 비록 잘못되고 마땅치 못한 일이 있더라도 작으면 너그럽게 용납하시고 크면 다만 파출(罷黜)만 하여, 감히 구속(拘束)하고 매질하는 모욕을 가하지 못하게 하며, 다른 죄에 비하여 항상 말감(末減 가장 가벼운 죄에 처하는 것)을 따르는 것으로 일정한 법식을 삼아, 사기(士氣)를 격려하고 언로(言路)를 넓히며 성덕(聖德)을 더하시어 영원토록 후세의 법이 되도록 하시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계문(啓聞)합니다.


▣양촌선생문집 제33권

■농부의 위문

양촌자(陽村子)가 바른말을 하다가 우봉(牛峯)으로 쫓겨간 이튿날 농부가 찾아와서 위로의 말을 하기를,

“그대는 선영의 음덕을 입어 문예(文藝)를 장식하고 조정 반열에 나가 좋은 벼슬을 거치면서 수레를 타고 장안거리를 휩쓸었으며 많은 녹을 받아서 집안을 살찌게 한 지 오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그대를 버린 적이 없었으니 대각(臺閣)에서 누가 그대를 알지 못하겠는가. 서로 옷깃을 연하고 수레를 접하여 드나들며 높은 벼슬길에서 활개를 치고 임금을 받들어 영광을 보셨습니다. 밖으로는 마을을 빛내고 안으로는 집안을 즐겁게 하였으니, 그대가 조정에 있었던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러하니 마땅히 공(公)을 생각하고 사(私)를 잊어야 하며 진실을 추구하고 명예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발끈 성내어 남을 거역하지도 말고 굳이 이익을 구하여 분주히 왕래하지도 말면, 공명을 보전할 수 있으리니 누가 감히 그대와 맞설 것이며, 부귀를 간직할 수 있으리니 누가 감히 그대를 거스르겠습니까. 그대는 이와 같은 것을 꾀하지 아니하고 벼슬아치에게 곧은 말로 대들면서, 외롭게 죄망에 걸린 이를 도와 주다가 친구를 잃었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벗겨 주고자 하다가 그것이 자기 자신의 누(累)가 됨을 알지 못하였고, 타인들의 불효를 밝혀 주고자 하다가 어버이의 마음 상함을 걱정하지 아니하였으니 그대의 죄야말로 크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성군(聖君)의 어짊과 현상(賢相)의 덮어줌을 힘입어 형을 받지 않았으며, 먼 곳까지 귀양가지 아니하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으니 지극한 다행이거늘 어찌 마음이 석연하게 즐거워하지 않습니까.”

하기에, 양촌자는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노인의 말이 옳습니다. 감히 가르침을 받지 않겠습니까마는 나도 생각한 바가 있으니 감히 고하여 드리겠습니다. 바야흐로 나라의 성군과 현상들이 서로 만나 능력 있는 자에게 직무를 맡기고 덕 있는 자에게 벼슬을 주므로 많은 선비들이 등용되어 문(文)으로 교화를 넓히고 무(武)로는 위풍을 펼치며, 밝은 자는 그 명찰함을 다하고 활달한 자는 그 융통성을 다하며, 재주 있는 자는 힘을 다하고 지혜로운 자는 충성을 바치며, 뛰어난 선비와 충성을 다하는 대신과 우뚝한 호걸과 위대한 영웅과 산림의 처사(處士)와 초야에 묻힌 인재들도 모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일에 민첩하고 공을 세우며, 임기 응변하고 멸사봉공(滅私奉公)하며, 간사한 자를 내쫓고 완만한 자를 물리치며, 아첨하는 자가 나오지 못하고 질투하는 자가 용납되지 않아서 법령이 수행되고 도리가 융성해졌습니다.

나는 쓰일 만한 재주가 없고 지식도 통하지 못하였으며, 말은 더듬어 뜻을 표현하지 못하고 학문이 천박하여 글은 문장을 이루지 못합니다. 외람되게도 특별한 발탁을 받아서 오래도록 조반(朝班)을 더럽혔으나, 능히 임금님께 도움을 드리지 못하매 인물을 천거할 것을 생각하여 화평한 빛으로 오직 덕 있는 사람을 좋아하였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선함에 복종하고, 사람들의 능력을 믿어 한 가지 선한 것을 보면 그 악함을 생각하지 않고 한 가지 능한 것을 보면 그 잘못을 미리 헤아리지 아니하며, 지성을 베풀어 서로 사랑하는 데에 온 마음을 바쳤습니다. 하물며 저 사람은 몸소 실천함이 단정하고 품성이 자상하며, 뜻은 권신(權臣)들에게 아첨하지 아니하고 학문은 이미 높은 경지에 올랐습니다. 문장은 국중에 빼어나고 덕은 민망(民望)에 드러났으되, 일찍이 능력을 스스로 자랑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이익만을 스스로 구하려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루아침에 비방을 당하여 남황(南荒)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솔개는 썩은 쥐 한 마리를 물고 빼앗길까 두려워하지만 봉황새는 하늘 높이 날아갑니다. 선비들이 세속에 굴복을 당하자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깊숙이 은둔하니, 어찌 나라를 위하여 애통해 하지 않으며 세도(世道)를 위하여 상심하지 않겠습니까. 가령 어진 사람이 암혈(巖穴)에 그 빛을 감추고 초야에 자취를 감추어 세상에서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마땅히 불러서 위로해야 하며, 혹은 죄인으로 묶여 있고 혹은 하인의 처지에 놓여 있어 사람들이 천시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것을 열어 주어야 하는데, 하물며 관직이 높고 선비의 원로로 그 뛰어난 소문이 중국에 떨치고, 문장이 태양처럼 빛나서 한 나라가 이미 그 공을 입고 한 시대가 모두 그 재질에 감복하는 자임에리오. 나는 편당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어진이를 추대하였고 나는 사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공도(公道)만을 넓혔을 뿐입니다. 혹 다시 생각하시고 더욱 살피십시오. 어찌 뭇사람들이 노여워하고 뭇사람들이 시기함을 알겠습니까. 이것이 내가 감히 임금님께 호소하면서 나의 재앙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까닭입니다.

아, 한 사나이가 뜻을 얻지 못한 것도 아형(阿衡 이윤(伊尹)을 가리킨다)은 이를 애석히 여겼습니다. 어진이를 의논하고 능력 있는 자를 의논하는 것은 주(周) 나라의 법에 있으니,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곧은 사람을 버리면 백성들도 복종치 않는다.’고 하였으며, 맹자도 ‘어진이의 등용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으니, 참으로 훌륭하신 교훈으로 후왕(後王)의 법이 될 만합니다. 비록 백 마리의 거루새[鷙]가 있더라도 한 마리의 독수리[鶚]만 같지 못합니다. 저 같은 미미한 사람이 어찌 나라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치의(緇衣)를 노래하고백구(白駒)를 잡아매어 차라리 한 세상에 미움을 받을지언정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소인(小人)들이 서로 글을 올려 형벌을 내리기를 청하니 언제 화를 당할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어지신 우리 임금님과 유덕하신 재상께서 더욱 넓으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이렇듯 서울의 교외로 쫓으시니 이를 흔쾌히 여겨 달려왔습니다. 오직 산골짜기에 산들은 웅장하고 물은 굽이쳐 흘러 산고수장(山高水長)하니 흐뭇한 덕에 감격함이 그지없습니다. 그침과 행함 그리고 영광과 욕됨은 하늘이 시키는 것이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거늘 내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습니까.”

농부는 이에 술잔을 잡고 술통을 끌어안은 채 서로 주고받다가 취한 후에 헤어졌다.

■중시(重試)의 책문(策問)

왕은 말하노라.

옛날 제왕들이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함에는 반드시 시의(時宜)에 따라 하였기 때문에 지극한 정치를 이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우(唐虞)와 삼대(三代)의 정치를 이룩할 수 있었던 방법을 들어볼 수 있겠는가.

“정(精)하고 일(一)하여 중(中)을 잡으라.”는 말은 요(堯)ㆍ순(舜)ㆍ우(禹)가 서로 전하여 준 심법(心法)이며, “중을 세우고[建中] 극을 세운다.[建極]”란 말은 상(商) 나라의 탕(湯)과 주(周) 나라의 무왕(武王)이 서로 전하여 준 심법이다. 정이라 하고 일이라 하는 것은 그 공부가 어떻게 다르며, 잡으라는 것과 세우라는 것은 그 의의가 어떻게 같은 것인가. 중이라고 이르면 극에 이르지 못한 것이고, 극이라고 이르면 중을 지나치는 것 같으니 어떻게 하면 이 양자를 절충할 수 있을 것인가.

읍양(揖讓 요ㆍ순ㆍ우가 서로 선위한 것을 말한다.)과 정벌(征伐 탕ㆍ무가 걸(桀)ㆍ주(紂)를 쫓아낸 일을 말한다.) 그리고 문질(文質)의 덜고 보탬[損益]은 일이 때에 따라 다른데도 모두 훌륭한 정치가 된 것은 어째서인가. 한(漢)ㆍ당(唐) 이래로부터 송(宋)ㆍ원(元) 대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時代)마다 각기 다른 정치가 있었으니, 그 중에도 중도(中道)에 합하여 기술함직한 것이 있었는가. 부덕한 내가 한 나라의 백성들 위에 군림하여 비록 덕교(德敎)가 두루 백성에게 미쳐가지는 못할지라도 아침저녁으로 소강(少康)을 이룰 것을 생각하고, 옛 제왕들의 심법과 도학(道學)에 언제나 뜻을 두어 배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정무 보는 여가에 경적(經籍)을 탐독하고 그 뜻을 연구하였어도 무엇부터 힘을 써야 할지 방도를 찾지 못하였으니, 행동하고 말하는 데나 정교(政敎)와 법령(法令)의 사이에 어찌 과(過)하거나 불급(不及)하는 착오가 없겠는가. 그 과한 것에서 덜어내야 할 것은 어떤 일이며, 불급한 것에서 보태야 할 바는 어떤 일이겠는가.

지금 우리나라는 창업한 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법제가 미비되었으며, 천도한 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부역이 아직도 풀리지 아니한 탓으로 정사의 잘잘못과 농촌의 슬픔이나 기쁨 등 말함직한 것들이 많을 것이나 우선 그 큰 것만을 들어 말하고자 한다.

관리의 선발을 정밀하게 하고자 하지만 요행히 끼어드는 폐단이 아직도 제거되지 못하였으니, 성적 평가의 방법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합당하겠는가. 전제(田制)를 바로잡고자 하지만 다과(多寡)와 고하(高下)가 균등하지 못하니 답사(踏査)하는 일에 과연 능히 이의(異議)를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부역(賦役)은 균등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니, 인보 제도(隣保制度)와 호패(號牌)의 설치는 어떤 것이 실행함직하겠는가. 수송은 빠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해운(海運)의 방법과 육운(陸運)의 방법에서 어떤 것이 채용함직하겠는가. 의관(衣冠)의 제도는 모두 중국식을 따르면서 유독 여자의 복식만은 오히려 옛 풍속을 따르고 있으니 이것은 과연 고치지 못할 것인가. 관혼상제 또한 모두 중국 제도를 따라야 하겠는가.

무릇 이러한 것들을 시행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합당한 방법이 있을 것이므로 그것들을 옛것에도 거스르지 않게 하고 오늘에도 해괴하지 않게 하자면 그러한 방법은 어디에 있겠는가.

어질고 뛰어난 여러 선비들과 함께 서정을 도모코자 하여 궐정(闕庭)에서 자대부(子大夫)들에게 친히 책문(策問)하는 바이니, 선정(善政)하는 설을 들려주기 바란다.

자대부들은 경술(經術)에 능통하고 치도에 밝으며, 세상에 뜻을 둔 지 오래일 것이다. 옛 제왕들의 마음을 간직하고 정치를 하는 방도와 오늘의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하는 데에 있어, 고훈(古訓)을 상고하고 시중(時中)을 참작하여 고상(高尙)해도 굳이 어려움을 힘쓰지 말고 뜻은 비야(鄙野)한 데로 흐르지 않아야 할 것이니, 각기 마음에 쌓인 바를 남김없이 저술할지어다. 내 장차 이를 친히 보고 채용하리라.


▣양촌선생문집 제34권

■동국사략론(東國史略論)

【안】 사람에게 생사가 있는 것은 기(氣)에 취산(聚散)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모이고 흩어짐에 느리고 빠른 것이 일정하지 않으므로 사람이 죽고 사는 것에도 일률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사람이 죽었을 당시 그 기 중에서 몸뚱이에 있는 것은 비록 흩어져도 심장과 배에 있는 것은 아직 완전히 흩어지지 않으면 이것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성인이 예법을 만들기를 사람이 처음 죽었을 때에는 지붕 위에 올라가 복(復)을 부르고, 염습이나 빈(殯)할 때에도 조급하게 덮거나 막지 않고, 장사할 때 천자는 7개월, 제후는 5개월 대부는 3개월, 선비나 백성은 1개월 동안을 거쳐 감히 조급하게 묻어버리지 않는 것은, 기가 완전히 흩어지지 않은 자가 소생하여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기 때문인데, 근세의 나쁜 습속은 금기에 구애되어 기가 완전히 끊어지기도 전에 급히 당(堂)에 옮겨 홑옷으로 몸뚱이를 덮고, 혹 추위에 얼게도 하고 겨우 3일 만에 땅에 묻어버리고, 심한 자는 화장(火葬)을 하니, 이 경우 비록 미진한 기가 있다 한들 어찌 살아날 수 있겠는가.

국가에서 법으로 3일장과 참혹한 화장을 금하고, 초상과 장례를 한결같이 예법에 의하게 하지만 아직도 가끔 이를 준수하지 않고 홑옷으로 염습하고 3일 만에 들판에다 빈소를 두니 아, 습속을 고치기 어려움이 심한 것이다. 이제 남신현의 죽은 사람이 달포가 지나서 살아났다는 것을 보니, 홑옷으로 염습하고 3일 만에 장사하여 살아날 수 없었던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통탄할 일이다.

조분왕(助賁王) 6년 병진(236) 백제왕이 서해(西海)의 큰 섬에 사냥가서 손수 사슴 40마리를 쏘아 잡았다.

【안】 사냥의 예(禮)는 옛 임금이 그것으로써 백성을 위하여 재해를 방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살리기를 좋아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에 차마 하지 못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법을 만들어 지나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임금은 삼면에서 짐승을 몰아 앞 짐승을 놓아준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천자는 사면(四面)을 둘러싸지 않으며, 제후는 짐승의 떼를 덮치지 않으며, 대부는 짐승의 새끼를 잡지 않으며, 경(卿)과 선비는 새집을 엎어버리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은 한꺼번에 많이 취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또 수레를 몰 때 왼편에서 활로 짐승을 쏘게 하는 것은 속임수로 많이 잡지 않으려는 것이며, 활을 쏠 때, 천자가 쏘아죽이면 큰 깃발을 내리고, 제후가 죽이면 작은 깃발을 내리는데, 역시 오래 사냥하여 많이 잡으려고 하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성탕(成湯)이 사냥 그물을 칠 적에 삼면을 터 놓았으니 그 인(仁)이 지극한 것이다.

백제왕이 일국의 임금이 된 존귀한 몸으로 정치는 하지 않고, 바람에 출렁대는 험난한 파도를 건너고 위험한 말달리기를 무릅쓰면서 하늘이 낸 짐승을 함부로 거리낌없이 많이 죽여서, 활 쏘고 말 달리는 능력을 과시하며 방자한 태도로 그 잘못을 몰랐으니, 인자한 마음이 없어진 것이라 하겠다.

아, 사람이란 인자한 마음이 없을 수 없어 대부(大夫)와 선비도 역시 많이 잡지 않고 놓아 길러야 하거늘 하물며 임금이겠는가. 옛글에,

“사냥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

하였으니, 어찌 조심하지 않겠는가.

유례왕(儒禮王) 2년 병오(286) 고구려왕 약로(藥盧)가 그의 동생 일우(逸友)와 소발(素勃)을 죽였다.

【안】왕의 혼인은 중대한 예(禮)다. 두 성씨의 좋은 사람이 합쳐져서 국가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예에 있어 같은 성씨와 혼인하지 않으며 비록 백 세대가 되어도 혼인을 통하지 않는 것은 먼 지방 다른 성씨와 혼인하여 남녀의 만남을 신중히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자비왕이 자기 작은 아버지인 미사흔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으니 인간의 도리가 없음이 심하다. 그 왕과 왕비가 할아버지가 같으니 종묘의 제사를 받들면 신은 흠향할 것인가. 신이 흠향하지 않는다면 국운(國運)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옛 책에도 말하기를,

“남녀가 같은 성씨면 그 자손이 번성하지 못한다.”

하였다. 자비가 소지(炤智 제21대 소지왕)를 낳고, 소지는 후사가 끊어졌으니, 경계하지 않겠는가.

진평왕(眞平王) 원년 경자(580) 이찬(伊飡) 김후직(金后稷)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삼았다.

【안】계백(階伯)이 명을 받고 장군이 되어 군대를 지휘하게 되자 출발할 즈음에 먼저 그의 처자를 죽였으니 도리에 벗어남이 심하다. 비록 국난에 반드시 죽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힘껏 싸워 이길 계책은 없었던 것이니 이는 먼저 사기를 잃고 패배를 부르는 일이었다. 훌륭한 사람만 얻으면 적은 수로 많은 수를 공격하고, 약한 군대로 강한 군대를 제압하는 일은 병가(兵家)의 상사이다. 오(吳)의 장수 주유(周瑜)는 5만으로 위왕(魏王) 조조(曹操)의 60만 군대를 칠 수 있었고, 진(晉) 나라 장수 사현(謝玄) 역시 5만으로 전진(前秦) 부견(苻堅)의 80만 군대를 격파하였다. 백제의 군대가 어찌 3만이 못되었을 것이며, 당과 신라의 군대 수가 어찌 60만을 넘었겠는가. 그러나 주유를 진실한 마음으로 임명한 것은 손권(孫權)이요, 사현을 등용하여 신임한 것은 사안(謝安)이다. 이는 오와 진의 임금과 재상이 유능한 이들이고, 적임자를 장수로 얻은 것이다.

이제 백제로 말한다면, 위로는 임금이 어리석고 아래로는 신하가 아첨하여 훌륭한 이는 내쫓기고, 변변치 못한 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훌륭한 장수를 어찌 얻을 수 있었겠는가. 계백의 난폭하고 잔인함이 이와 같으니, 이는 싸우지 않고 스스로 굴복한 것이다. 다만 관창(官昌)을 사로잡고도 죽이지 않고 돌려보내고, 군사가 패배하여도 항복하지 않고 죽었으니 옛 명장의 유풍이 있었다.


▣양촌선생문집 제35권 : 동현사략(東賢事略)

■영첨(領僉) 이공수(李公遂 1308-1366)

공의 자는 ……원문 빠짐…… 호는 남촌(南村)인데 본관은 익주(益州)이다. 할아버지는 국자와 전주(典酒)를 지낸 행검(行儉)인데, 일찍이 형부(刑部)의 관리가 되었을 때에 백성을 구종(驅從)으로 만들려는 세가(勢家)가 있었는데 전주가 허락하지 않다가, 마침 병이 나서 휴가중임을 기화로 동료가 즉결하였었다. 어떤 사람이 하늘에서 예리한 칼이 내려와서 형부의 관리를 마구 베는 것을 꿈꾸었는데, 얼마 안 되어 그 즉결에 관계된 형부의 관리들이 갑자기 병들어 죽었으나 전주만은 아무 탈이 없었다. 아버지는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지낸 애(崖)이다.

지원(至元) 경진년에 공은 33세로 정승 김영돈(金永暾)이 주관한 시험에 장원급제하였다. 공민왕 을미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으며, 신축년 겨울에는 홍건적(紅巾賊)이 서울을 함락시키매 임금이 파천(播遷)하였으며, 다음해 정월에 서울을 수복하였는데, 공을 찬성사(贊成事)에 임명하여 가서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당시에 서울이 병란에 짓밟혔으므로 모든 일을 새로 만들게 되었는데, 방략(方略)을 지시하고 백성들을 위로하여 편안하게 하고 종묘와 선성(先聖)에 제사하였으며, 계묘년(1363)에 임금을 맞아 서울로 돌아왔다. 간신(奸臣) 최유(崔濡)가 원(元)에 있으면서, 권신(權臣)들과 인연하여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워 왕으로 삼으려고 모의하여 황제의 명을 받아 시행할 즈음에, 공민왕은 공이 기 황후(奇皇后)의 친척이라 하여 표(表)를 받들고 경사(京師)로 가게 하였다. 공이 출발할 때 태조묘(太祖廟)에 나아가 맹세하기를,

“우리 임금을 복위시키지 못하면 신은 죽어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경사에 이르니 황후가 성대한 음식을 차려 대접하면서 말하기를,

“공이 마음을 다하여 나의 어머니를 효도로 받드니 나의 오빠(기황후의 외사촌)입니다. 감히 친오빠로 대우하지 않을 수 있겠소.”

하니, 공이 강원(姜嫄)ㆍ태임(太任)ㆍ태사(太姒)와 포사(褒姒)ㆍ달기(妲己)ㆍ여후(呂后)ㆍ무후(武后)의 좋고 나쁜 사적을 모두 진달(陳達)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는 주(周)의 태임과 태사 같은 분으로 삼한(三韓)의 큰 다행입니다. 금왕(今王)이 적개심으로 홍건적을 소탕하고 나라를 위하여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을 내려 장수의 사기를 돋우어야 할 것인데, 어째서 개인적인 감정을 내세우고 공의(公義)를 폐하십니까. 병신년의 화(禍)는 우리 가문이 위세를 믿고 경계하지 않은 데서 온 것이요, 왕의 죄가 아닙니다.”

하였으나, 황후의 노여움은 그래도 풀리지 않았다. 공으로 하여금 덕흥군을 받들고 귀국(歸國)하게 하였으나, 공은 병을 핑계하여 머물기를 청하였다. 얼마 안 되어 태상예의원사(太常禮儀院使)를 제수하매, 공이 사양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종묘의 큰 제사 때에 두 번이나 태상경(太常卿)이 되어 예법대로 진행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공경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공을 불러 같이 광한전(廣寒殿)에 올라, 태자가 전액(殿額)에 씌어 있는 인지(仁智)의 뜻을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백성 사랑하는 것이 인이고 일을 분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제왕이 이 두 자로 사해(四海)를 다스리면 만세토록 태평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자가 전(殿)으로 들어오면서 금옥(金玉)으로 만든 기둥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노인은 일찍이 이런 기둥을 본 적이 있소?”

하매, 대답하기를,

“제왕이 어진 정사를 행한다면 거처하는 집이 아무리 썩은 기둥이라도 오히려 튼튼한 것이 되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금옥으로 만든 기둥일지라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태자가 또 거문고를 타다가 곡을 이루지 못하고 말하기를,

“오랫동안 익히지 않아서 잊어버렸소이다.”

하니, 공이 곧 꿇어앉아 대답하기를,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셨다면, 거문고 한두 곡조쯤이야 잊은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였다. 태자가 산에서 내려와 공의 말을 빠짐없이 아뢰니, 제(帝)가 이르기를,

“짐(朕)은 본디 그가 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의 외가에는 오직 그 사람 하나뿐이다.”

하였다. 갑신년 가을에 조서를 내려 왕을 복위시키고 최유(崔濡)를 잡아보냈다. 공이 이에 귀국할 것을 빌어 제화문(齊化門)을 나와서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천하의 즐거움이 이보다 더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여산참(閭山站)에 이르렀는데, 사람은 없고 노적가리가 들판에 쌓여 있으므로 따르는 사람들이 가져다 말을 먹이니, 공이 묻기를,

“곡식 한 단의 값이 면포(綿布) 몇 자인가?”

하고, 말한 대로 면포의 양 끝에 써서 노적가리 속에 넣었다.

공이 경사에 있을 때 좌정승(左政丞)에 임명되었고, 또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승진되었다. 귀국하여서는 취성(鷲城 신돈의 봉호(封號)) 신돈(辛旽)이 국정을 맡고 있으면서 공을 꺼려하였으므로 공도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단 하루도 조정에 앉아서 총재(冢宰)의 일을 행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한탄하였다. 을사년 6월에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해지고, 병오년(1366, 공민왕15) 5월에 졸(卒)하니 59세였으며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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