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제월당집(霽月堂集)

청담(靑潭) 2020. 4. 20. 19:47

제월당집(霽月堂集)

 

송규렴 :(宋奎濂 1630-1709)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도원(道源), 호는 제월당(霽月堂). 군수 송남수(宋枏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송희원(宋希遠)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송국전(宋國詮)이며, 어머니는 안경인(安敬仁)의 딸이다.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으로 19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4년(효종 5)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 지평· 정언· 사예(司藝)· 응교· 서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 때 수찬· 부교리· 정언· 헌납· 이조좌랑· 사간 등을 거쳐 1667년(현종 8)에 사헌부집의에 이르러 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홍문관교리를 거쳐 사간이 되었다.

1674년에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복상문제에 대해 남인의 주장인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고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했던 송시열(宋時烈)· 송준길 등이 귀양가게 되자 이들의 신원(伸寃)을 주장했다가 파면당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다시 기용되었다. 이후 사간· 수찬·대사간· 승지· 이조참의· 부제학· 대사성 등을 거쳐 대사간이 되어 시폐(時弊) 4조를 올렸다. 그 뒤 안변부사· 강양도관찰사(江襄道觀察使)· 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사직하고 고향에서 학문을 닦았다. 1694년 갑술옥사로 정국이 다시 바뀌게 되자 다시 부제학· 대사간· 대사헌· 우참찬· 동지중추부사· 예조참판을 지내고 169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지중추부사· 우참찬· 예조판서·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80세 때에는 지돈녕부사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학문이 뛰어나 송시열·송준길 등과 동종(同宗)·동향(同鄕)으로 함께 삼송(三宋)으로 일컬어졌고, 전서(篆書)· 주서(籒書)에 능하였다. 회덕의 미호서원(美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저서로는 『제월당집(霽月堂集)』이 있다.

 

 

제월당집 제1권

■아내가 술을 줄이라고 경계하기에 재미삼아 답하다.

경술년(1670,현종11) : 41세

그대 잠시 말 멈추고 / 君言且暫停

내 말 좀 들어보게 / 我言須一聽

옛날에 취한 유령도 있었고 / 古有劉伶醉

또한 술 깬 굴원도 있었지 / 亦有屈子醒

깬 사람이 취한 사람보다 낫지 못하고 / 醒不賢於醉

취한 사람이 깬 사람보다 못나지 않으니 / 醉不歉於醒

아무것도 아닌 깨고 취한 사이에서 / 區區醒醉間

우열을 나눌 수는 없다네 / 未可分劣優

내가 깨었어도 그대 좋아 말고 / 我醒君莫喜

내가 취했어도 그대 걱정 말게 / 我醉君莫憂

내가 취했어도 그대에게 진정 해로움 없고 / 我醉於君固無害

내가 깨었다고 그대가 또한 무엇이 기쁘랴 / 我醒於君亦何快

마셔도 많지 않으면 마신들 해로울 것 없고 / 飮而不多飮無妨

취해도 멀쩡하면 취한들 무엇이 문제이랴 / 醉而不亂醉何傷

내가 언제 소처럼 마신 적 있었으며 / 我飮何曾似牛飮

내가 언제 질탕하게 취한 적 있었나 / 我醉何曾似泥醉

취해봐야 며칠 밤에 불과했고 / 一醉不過連數夜

마셔봐야 몇 사발뿐이었지 / 一飮不過傾數器

게다가 때에 따라 마시고 취했으니 / 況復飮與醉有時

애초 쓸데없이 술잔 들지 않았지 / 把杯初非徒爾爲

한가한 시름 생기면 진정 마실 만하고 / 閒愁生處固可飮

좋은 손님 찾아오면 또한 마실 만하지 / 好客來時亦可酌

시름겨울 때 마시지 않으면 어찌 풀며 / 愁來不飮何以寬

손님 올 때 마시지 않으면 어찌 즐길까 / 客至不酌何以樂

손님 환대와 시름 풀 때 가장 관계되니 / 歡賓遣懷最關事

내가 술 끊기 어찌 쉬우랴 / 令我捨此豈容易

그대 이제 맛난 술이나 준비하고 / 君今但可供美酒

내게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오 / 不須向我更云云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아니면 안 마시니 / 欲飮則飮否則否

조절은 내게 달렸지 그대에게 있지 않네 / 操縱在我非在君

 

■문중의 서얼 송국주 만사〔門孼宋 國柱 挽〕

가련하고 가련하다 / 可憐復可憐

박복한 그대 운명 가련하다 / 憐君賦命薄

거친 몇 이랑 밭과 / 荒蕪數頃田

낡은 세 칸 집 / 破落三椽屋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 有身不得衣

배불리 먹지도 못하니 / 有口不得食

아내는 살을 에는 추위에 통곡하고 / 妻寒泣裂肌

자식은 배를 곯아 울었지 / 子飢啼枵腹

시름겹게 가난에 시달리며 / 慼慼困貧窶

허둥지둥 남북으로 떠돌았으니 / 棲棲走南北

칠십 평생에 / 人間七十年

즐거운 날 하루도 없었네 / 一日無歡樂

2

가련하고 가련하다 / 可憐復可憐

순박한 그대 성품 가련하다 / 憐君性純愨

처신은 거짓이 없었고 / 行身絶詭詐

남들과 다투지도 않았지 / 與物無迕逆

학문은 짧았어도 / 雖云少學文

지식이 많았으니 / 自能多知識

문중의 어른들이 / 所以諸門老

일마다 부탁했지 / 有事輒付托

그래도 성심성의를 다할 뿐 / 唯思盡吾心

싫은 내색 없었는데 / 不曾存厭色

보답도 받지 못했으니 / 有此不食報

하늘 이치 알 수 없구나 / 神理終難測

3

가련하고 가련하다 / 可憐復可憐

그대 갑자기 죽다니 가련하다 / 憐君遽寂寞

서글피 평소 모습 떠올리고 / 惻惻念平生

아련히 묵은 자취 더듬어 보니 / 茫茫撫陳跡

동풍 부는 봄날 버들 아래와 / 東風百柳春

달 밝은 밤 쌍청당에서 / 明月雙淸夕

문 나서면 서로 만나 어울렸고 / 出門卽提携

한자리에 앉아 농담 주고받았는데 / 幷席相讙謔

만사가 이미 부질없게 되었으니 / 萬事已成空

구원으로 간 사람 어찌 일으키랴 / 九原安可作

시 지어 괴로운 마음 토로하니 / 題詩寫苦懷

눈물만 부질없이 가슴 적시네 / 有淚空沾臆

 

 

제월당집 제2권

■서천 관사에서 앓아누워 감회를 쓰다 갑인년(1674, 현종15) : 45세

온종일 빈 관아에 추적추적 비 내리고 / 空齋盡日雨蕭蕭

열흘이나 쓸쓸히 앓아누웠네 / 一病經旬臥寂寥

푸른 산 마주한 문으로 아침에 안개 보고 / 門對碧峯朝見霧

바닷가 고을이라 밤에 조수 소리 들리네 / 地隣滄海夜聞潮

하늘 끝에 머문 자취 이 몸은 나그네 / 天涯蹤跡身如寄

객지에서 세월 보내니 귀밑털 세려 하네 / 客裏光陰鬢欲凋

불현듯 생각하니 고향에 봄 이미 저물어 / 却憶故園春已晩

지는 꽃 향기로운 풀 앞 다리에 가득하겠지 / 落花芳草滿前橋

 

■아들과 사위와 조카에게 경계하다〔戒子壻姪〕

남아의 사업 태산 같으니 / 男兒事業泰山如

아홉 길의 공부 소홀히 하랴 / 九仞工夫可忽諸

의마 달아나기 쉬우니 엄히 단속해야 하고 / 意馬易奔宜猛制

심전 일구기 힘드니 어찌 정성껏 김매지 않으랴 / 心田難闢盍精鋤

덕성 온전히 하려면 술을 멀리해야 하고 / 要全德性須疏酒

입신양명하려면 책을 읽어야 하지 / 欲立身名在讀書

세월은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으니 / 歲月一過追不得

헛되이 늙어 오두막에서 탄식하지 말라 / 莫敎虛老歎窮廬

 

■동지상사 상공 남구만을 전송하다〔送冬至上使南相公 九萬〕: 1684 55세

한겨울에 사신 행렬 연경으로 향하니 / 玄冬四牡向燕京

영숙께서 어느 해에 이 길 가셨던가 / 令叔何年亦此行

계절은 바로 작별하던 날 만났고 / 時序正當曾別日

산천은 예전 엄한 여정과 다름없네 / 山川不改舊嚴程

동문에서 존망의 눈물 얼마나 흘렸던가 / 靑門幾灑存亡淚

백발인 지금 이별하며 아파하는 마음이네 / 白首今傷去住情

아마도 사신 수레 지나는 곳마다 / 遙想使軺經歷處

또한 다투어 중용의 이름 알려 하겠지 / 也應爭識仲容名

남구만(南九萬) : 1629~1711.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이다. 1684년(숙종10) 10월 27일에 부사 이세화(李世華), 서장관 이굉(李宏) 등과 함께 동지사(冬至使)로 연경을 향해 출발하였다. 송규렴과는 같은 충청도출신으로 함께 송준길 문하에서 수학하고 1656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나이는 송규렴보다 한 살 더 먹었으나 과거는 2년이 늦었다. 소론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냈고 당시 정치의 중심인물로 송규렴과 거의 같은 생을 살았으니 송규렴은 80세, 남구만은 83세까지 살았다. 예송논쟁 속에서도 둘 다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들이다.

 

■동백정에서 이상징의 운에 맞춰 짓다〔冬柏亭 次李尙徵韻〕

십 리 뻗은 백사장 눈서리처럼 빛나고 / 十里明沙耀雪霜

흰 갈매기 무수히 어량에 모이네 / 白鷗無數集漁梁

눈에 들어오는 어떤 물건이 시의 소재 더하나 / 眼邊何物添詩料

부슬부슬 가랑비가 해당화 적시네 / 細雨霏霏濕海棠

 

 

제월당집 제3권

■대동강 노래〔浿江詞〕 정지상(鄭知常)의 운을 사용하여 짓다.

이월 강남에 봄물이 많아 / 二月江南春水多

강 건너 어디선가 채릉가 들리네 / 隔江何處採菱歌

마름을 따고 마름을 따서 일찍 돌아갈지어다 / 採菱採菱歸宜早

해 저무는 긴 모래섬에 저녁 물결이나니 / 日暮長洲生夕波

※송규렴이 여기서 사용한 운자는 정지상의 〈송인(送人)〉의 운자와 동일하다.

※채릉가(採菱歌) : 악부(樂府) 청상곡(淸商曲)의 이름이다. 양 무제(梁武帝)의 〈채릉곡(採菱曲)〉에 “강남의 소녀가 팔목에는 진주를 감고, 황금 비취로 머리 꾸미고 고운 얼굴로 일어나, 조용히 계수나무 노 저으며 채릉을 노래하네. 채릉을 노래해도 마음 기쁘지 않아, 비단 소매로 얼굴 가리고 그리운 님을 바라누나.[江南稚女珠腕繩, 金翠搖首紅顔興, 桂棹容與歌採菱. 歌採菱, 心未怡, 翳羅袖, 望所思.]”라고 하였다.

※菱(릉): 마름을 말한다. 민간에서는 열매를 해독제와 위암에 사용한다. 마름을 지나치게 먹으면 복부 창만 증세를 일으키는데, 생강즙을 술에 타서 마시면 이를 방지할 수 있다. 마름의 잎은 어린아이의 머리가 헐었을 때, 과피는 이질 ·설사 ·탈항 ·치질 등에, 줄기는 위궤양을 치료할 때 쓰인다. 마름의 녹말은 구황식품으로도 이용된다.

※정지상의 〈송인(送人)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비개인 긴 둑에 풀빛이 짙은데

님 보내는 남포에 슬픈 노래 흐르는구나.

대동강물이야 어느 때나 마르리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 하는것을.

 

■봄날에 즉흥적으로 읊다 무인년(1698, 숙종24)〔春日卽事 戊寅〕69세로 벼슬을 버리고 기로소에 들어간 시절이다. 권근의 춘일즉사가 유명하다.

북쪽 기슭 산속 늙은이 생활 곤궁한데 / 北麓山翁生事微

사립문에 온종일 오는 손님도 드무네 / 柴門盡日客來稀

매화는 가랑비 맞아 이제 막 피었는데 / 梅經小雨今纔放

제비는 남은 추위 겁내 아직 오지 않네 / 燕怯餘寒尙不歸

거친 밥이나마 저녁을 지을 수 없고 / 疏糲未能謀夕爨

막걸리를 조복 잡혀서라도 사고 싶네 / 薄醪還欲典朝衣

옥계에 맑은 시냇물 있어 / 玉溪賴有淸流在

봄옷으로 기수에 목욕한 증점 따를 수 있네 / 春服堪追點浴沂

※옥계(玉溪)에 …… 있네 : 봄나들이를 갈 수 있다는 말이다. 공자(孔子)께서 제자들에게 저마다 자신의 뜻을 말해보라고 하시자 증점(曾點)이 “늦봄에 봄옷이 이미 만들어지면 관을 쓴 어른 대여섯 명과 아이 예닐곱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단비가 내려 감상을 적다〔好雨志感〕

아침에 따스한 바람과 함께 단비 내려 / 朝來好雨挾薰風

만물이 한바탕 내린 비에 소생하네 / 萬品昭蘇一霈中

하늘의 덕 원래 내게만 베푸는 건 아니지만 / 帝德元非於我獨

내 마음 절로 하늘과 더불어 같아라 / 吾心自可與天同

평생 남을 해치려는 마음 먹지 않았고 / 平生不作傷人意

평소의 뜻 오직 세상 구할 공 기약했건만 / 雅志唯期濟物功

터럭만큼도 공효 없이 몸만 이미 늙었으니 / 未效分毫身已老

한밤에 조용히 생각하매 한없이 부끄럽네 / 靜思中夜愧無窮

 

■병중에 회포를 쓰다〔病中述懷〕

우습다 쓸모없이 늙고 병든 몸 / 笑此支離老病身

헛되이 칠십오 년 세월 보냈네 / 虛經七十五年春

가련해라 백발 늙은이 저승길 가깝지만 / 自憐白髮隣黃壤

임금 향한 일편단심 누가 알랴 / 誰識丹心拱紫宸

감히 바닷가로 돌아간 백란에 견주고 / 敢擬伯鸞歸海曲

장수 가에 누운 유간과 같도다 / 却同劉幹臥漳濱

임금의 은혜에 비록 조금도 보답하지 못했으나 / 洪恩縱蔑涓埃報

한 생각이 언제나 나라와 백성에게 걸려 있네 / 一念長懸國與民

 

■백발〔白髮〕

백발은 거울에서 슬퍼하고 / 白髮悲明鏡

단심은 임금을 그리네 / 丹忱戀紫宸

몸은 유정처럼 병들었고 / 身同劉幹病

집은 두보처럼 가난하네 / 家似杜陵貧

세상에는 다 새로운 사람들이고 / 世路皆新輩

저승으로 친구들 다 돌아갔네 / 泉塗盡故人

빈산에 한 해가 또 저무니 / 空山歲又暮

시름만 갈수록 많아지네 / 愁緖轉紛繽

 

■늙은이〔老翁〕

늙은이 신세 실로 안타까우니 / 老翁身事實堪傷

눈은 침침하고 살쩍(귀밑 털)은 세었네 / 眼着昏花鬢(빈)着霜

다만 작은 정성만은 끝내 변하지 않아 / 獨有寸忱終不改

임금 그리고 나라 걱정하는 마음 잊기 어렵네 / 戀君憂國自難忘

 

 

제월당집 제7권

■명부 이준을 전송하는 서문 갑진년(1664, 현종5)〔送李明府 稕 序 甲辰〕

아,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이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좋아하여 아로새긴 새장과 아름다운 우리에서 극진히 보호하여 기르는 것은 기이한 털과 고운 깃이 화려하여 눈을 즐겁게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야윈 말과 파리한 소가 사람을 위해 수고하여 그 이로움이 매우 넓지만,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겨 채찍질하고 고삐를 매어 모욕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모양과 바탕이 소박하여 특별히 볼 만한 점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람에게 있어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면은 대수롭지 않으나 말로 꾸미고 민첩함으로 뽐내면 재주 있고 능력 있는 자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 반면에 내면에 간직한 것이 지극히 귀하더라도 조용히 말이 없어 어눌한 것 같고 담백하고 투명하여 화려함이 없으면, 평범하고 비루한 자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취하거나 버리고 이것을 가지고 내치거나 등용한다. 무릇 이와 같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영합하는 추악한 무리들은 이리저리 내달리며 뜻을 이루지만, 도를 지키고 겸손한 선비들은 영락하여 설 자리를 잃게 되니, 이것은 진실로 쇠퇴한 세상의 일이며 식자(識者)들이 깊이 탄식하는 바이다.

우리 현감 이준(李稕)씨가 이곳에 부임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정사는 공평하고 인심은 화합하여 사방이 편안하였는데, 갑자기 관장(官長)에게 쫓겨나게 되었다. 백성들이 모두 깜짝 놀라 괴이하게 여기며 서로 떠들썩하게 말하기를 “우리 현감의 어짊은 여러 군의 모든 관리들 중에서 이보다 더 나은 이가 없는데도, 저들은 모두 편안하여 평소와 다름이 없고 우리 현감만 홀로 내쫓기는 굴욕을 당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내가 이에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우리 현감이 불행히도 지금 세상에 태어났으니, 어찌 이런 굴욕을 면할 수 있겠는가. 현감이 비록 지극히 아름다운 것을 내면에 간직하고 있지만, 빛을 감추고 아름다움을 숨겨 밖으로 꾸미지 않으니, 저 세상사람 중에 누가 기꺼이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사랑하듯이 하여 채찍질하고 고삐를 매지 않겠는가.

내가 우리 현감이 고을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니, 근원을 맑게 하고 근본을 바르게 하며 자신을 바로잡아 남을 이끌며, 화락한 마음을 미루어 지친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고 법금(法琴)을 엄격히 적용하여 횡포하고 교활한 자들을 제재하였으므로, 백성들은 병들지 않고 일은 거행되지 않음이 없었다. 현감으로 재직한 1년 동안 녹봉 이외에는 관청의 재물에 털끝만큼도 손을 대는 일이 없었으며, 온전한 솜옷 하나 없고 고기를 두 가지 이상 먹는 일이 없었으니, 그의 청백한 지조와 굳은 절개는 곧바로 빙벽(氷蘗)과 더불어 그 깨끗함이 같다. 부서기회(簿書期會)에 쩨쩨하게 마음을 기울이거나 응접(應接)할 물품을 마련하는 일에 자질구레하게 정신을 쓰지 않아, 진심에 맡기고 분수를 미루어 마땅히 할 일을 할 뿐, 실정을 꾸며 남을 기쁘게 하거나 도를 어기면서 명예를 구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현감을 세상에서 과시하여 스스로 큰 체하며 뽐내는 것을 유능한 것으로 여기고, 손님을 맞이하고 나그네를 접대하는 일에 연연하여 그들의 환심이나 얻으려고 힘쓰며, 남을 속이고 아첨을 취하여 스스로 자신에게 이롭게 하고자 하는 사람과 비교한다면, 그 청탁(淸濁)과 우열(優劣)의 차이가 진실로 크다. 그런데 세상은 바야흐로 외면에 힘쓰고 내면을 버리며 화려함을 숭상하여 실제를 물리친다. 현감이 편안히 여기는 것은 세상에서 박하게 여기는 것이고, 세상에서 숭상하는 것은 현감이 비루하게 여기는 것이니, 어찌 세상과 어긋나 내침을 당하여 곤경에 처하고 시련을 겪지 않겠는가.

가령 우리 현감이 조금이라도 스스로 타고난 성정을 거슬러서 세속에서 좋아하는 것을 좇고 사람들의 안목에 부합하였다면, 어찌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현감은 꼿꼿한 자질로 대현(大賢)의 가문에서 태어나 의리(義理)와 내외(內外)의 구분에 대하여 평소에 익혔기 때문에, 선택함이 정밀하고 잡음이 견고하였다. 어찌 그가 지키던 것을 바꾸어 속리(俗吏)의 태도를 본받겠는가. 차라리 이렇게 하다가 스스로 굴욕을 당할지라도, 저렇게 하여 구차히 영화를 추구하지는 않겠다는 것이 우리 현감의 뜻이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옳다. 그렇다면 우리 현감은 장차 끝내 불우한 채 억울하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니다. 내실이 있으면 마침내 반드시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니, 천리마가 마구간에 엎드려 있어도 백락(伯樂)이 돌아보고, 아름다운 옥이 돌 속에 있어도 변화(卞和)는 그것을 알아보았으니, 비록 지금 세상인들 또한 어찌 현감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겠는가. 현감이 뜻을 펼칠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어찌 여기서 끝날 뿐이겠는가.”

마침 현감이 장차 황해도의 옛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내게 글을 요구하기에 마침내 사사로이 서로 주고받은 말을 차례대로 써서 주니, 이별하는 마음과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의 한스러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지수설〔地水說〕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옛사람의 “땅은 사유(四游)가 있다.”라는 주장과 “하늘과 땅은 물 위에 떠 있다.”라는 주장을 들어 그것이 옳지 않음을 지적하고, 스스로 “물은 땅 위에 있다.”라는 주장을 내세워 이를 변증(辨證)하는 데 매우 힘을 들였다. 그 가운데 말하기를 “땅이 물을 싣고 있는 것이 이치에 맞지, 물이 땅을 싣고 있다는 것이 어찌 이치에 맞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하늘과 땅과 사람은 그 이치가 하나이니, 땅에 물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피가 있는 것과 같다. 사람의 몸은 어디를 가든 피가 아닌 것이 없고, 땅은 어디를 가든 물이 아닌 것이 없다. 바늘로 살갗을 찌르면 피가 나지 않음이 없고, 땅을 파면 물이 나오지 않음이 없으니, 육체와 피는 본래 서로 융합되어 있고, 흙과 물은 본래 서로 뒤섞여 있어서 애당초 피차(彼此)와 상하(上下)의 구분이 없다.

대개 피는 몸의 진액(津液)이다. 몸의 진액이 운행하여 피가 만들어지니, 온몸에 퍼졌다가 오장(五臟)으로 돌아와 거두어지는데, 그 이름은 간(肝)이다. 그 기운이 묽은 것은 구멍을 통해 나와 눈물과 콧물이 되고 침이 된다. 물은 흙의 진액이다. 흙의 진액이 조화롭게 합해져 물이 되니, 땅 속에 스며들어 있다가 큰 골짜기로 흘러나와 모이게 되는데, 그 이름은 바다이다. 그 기운이 맑은 것은 틈새로 쏟아져 나와 우물과 샘이 되고 연못이 된다. 무릇 몸의 진액과 흙의 진액은 천일(天一)이 낳는 바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람이 하늘과 땅에 대하여 배합의 오묘함이 이와 같으니, 사람을 제외하고 하늘과 땅을 논의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렇다면 피가 몸에 대하여 과연 피차의 간격이 있겠으며, 물이 땅에 대하여 과연 상하의 차이가 있겠는가. 이미 상하의 차이가 없다면 물이 땅을 싣고 있다거나 땅이 물을 싣고 있다고 하는 것은 마땅히 변론할 것이 아니다.

'한국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석관유집(竹石館遺集)  (0) 2020.08.26
제호집(霽湖集)  (0) 2020.07.25
점필재집  (0) 2019.11.19
양촌집  (0) 2019.04.01
성호전집  (0) 2019.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