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우(梁慶遇:1568~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자점(子漸), 호는 제호(霽湖)· 점역재(點易齋)· 요정(寥汀)· 태암(泰巖). 아버지는 충장공 양대박(梁大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 양대박이 창의하자, 아우 양형우(梁亨遇)와 함께 아버지를 보필하였다. 양경우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고경명(高敬命)에게 갔는데, 고경명은 양경우에게 기무를 맡겼다.
때마침 왜적이 금산(錦山)을 치려 하자 고경명은 양경우에게 진산(珍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금산에서 싸우다가 패하였다. 이에 고경명을 구하려고 가는 중에 아버지가 진산에서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되돌아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전주(全州)로 옮겨 청계동으로 돌아가 장사를 치렀다.
1595년(선조 28)에는 격문을 돌려 군량 7천 석을 모으는 공을 세우니 조정에서 참봉에 제수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공을 세웠다. 그 해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죽산현감·연산현감을 거쳐 판관이 되었다.
1616(광해군 8)에는 중시(重試: 조선시대에 당하관 이하의 문무관에게 10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는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로 승진하였고 이어 봉상시첨정에 이르렀다. 그 뒤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霽湖集은 그의 시문집으로 10권 4책 목활자본이다. 손자 도(燾)가 1647년(인조 25)에 간행했다. 서문은 김상헌(金尙憲)과 김유(金瑬)가 썼다. 권1~4는 시 450수이다. 저자는 특히 오언시와 칠언시에 능했다고 한다. 권5는 의병활동 당시의 기록이다. 〈천병유량격문 天兵留糧檄文〉은 1595년 명나라군의 식량공급을 위해 도민에게 양곡헌납을 호소한 글로 10여 일 만에 7,000석을 모았다고 한다.
〈창의종군일기 倡義從軍日記〉는 1592년 4~7월의 부친과 저자의 의병활동 일기로 의병 모집과정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권6은 〈시화 詩話〉로 시의 체제와 형식에 대한 비평과 저자와 동료시인들의 일화와 시평을 모은 글이다. 시어· 압운(押韻)· 성률(聲律)을 논하고, 중국의 소동파(蘇東坡)와 두보(杜甫)의 시를 평한 부분도 있다. 시작 과정에 대해서도 고사를 인용하는 방법, 시적인 분위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어휘를 구사할 것 등을 말했다. 일화부분은 권필(權韠)· 박민헌· 김현성(金玄成)· 홍천경 등의 일화인데, 흥미 있는 내용이 많다.
저자는 작가의 성품과 행동을 작품성향과 연계시켜 평가하고 있다. 홍만종(洪萬宗)의 〈시화총림 詩話叢林〉·〈어우야담 於于野談〉에 일화가 발췌되어 〈제호시화〉란 제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권7은 지리산 기행록이며, 권8 이하는 잠(箴)·비문·기(記)·제문(祭文)·논, 그리고 추가한 시와 친우들이 보낸 시들이다.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제1권
○괴로운 비〔苦雨〕
그때 여사에서 장맛비가 내렸는데 마침 친구가 방문하였다. 운서(韻書)를 펼쳐서 립(笠) 자 운을 얻었고, 나에게 몰(沒) 자 운을 맡겼다. 그 가운데 몇 자는 글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만 두었다.
한발의 기운이 불타는 듯 / 旱魃氣如焚
사나움이 날이 심해져 / 肆虐日不給
초목이 다 타서 메마르나 / 草木盡燋卷
건도는 진퇴가 있는 법 / 乾道有張翕
문득 구름이 유연히 일더니 / 同雲忽油然
비가 세차게 쏟아지누나 / 雨注何霫霫
번개가 불 깃발 흔드는 듯 / 列缺掉火幟
한참을 빛이 번쩍이더니 / 良久光熠熠
쾅하고 지축을 진동하여 / 砰訇動坤軸
산악을 무너뜨리는 듯 / 欲頹山岳岌
음양의 기운이 어그러져서 / 二氣遂驕蹇
음기가 쌓인 지 이미 십일 / 積陰日已十
성안의 백만 가옥은 / 城中百萬家
담벼락이 도랑물에 잠겼네 / 墻壁浸溝潗
또 시골 야인의 말 들으니 / 又聞村野語
홍수가 들과 습지를 덮쳐 / 惡潦遍原隰
제방 무너지고 곡식 잠기니 / 堰缺沒禾谷
농부들이 서로 애태운다네 / 農夫相悒悒
음양의 개합이 시의를 잃으니 / 開闔失時宜
이 조화를 누가 주재하나 / 此柄孰操執
나그네로 떠도는 사람이 / 最是羈旅人
그윽한 시름 그칠 수 없어라 / 幽愁莫可挹
부서진 집에 누워 하늘을 보니 / 破屋臥看天
물 샌 틈을 보수하기 어렵네 / 漏罅難補葺
방 가운데엔 그릇들 널려서 / 房中列匜鉢
물방울 받아 넘쳐흐르고 / 承滴盈潝潝
게다가 흙더미가 떨어져서 / 或隨土塊落
의복과 짐들 더럽히고 젖었네 / 衣裝盡汚濕
거문고 보호할 계책 없으니 / 無策護琴匣
몸으로 서책만을 가렸도다 / 以身蔽書笈
깊은 마을 인적도 안통하고 / 深巷不通人
몸을 움츠리니 옥에 갇힌 듯 / 縮頸如遭縶
자리를 펴 잠깐 자고자 하나 / 裹席欲假睡
습기가 피부에 젖어들고 / 潤氣侵膚襲
열기가 찌는 듯 답답하여 / 熇赫又如蒸
미친 듯 외치니 땀만 쏟아지네 / 狂叫瀉汗汁
흙 가마에 버섯이 생기어 / 菌釘生土銼
잠깐 사이 몇 치가 자랐고 / 俄頃數寸立
개구리 떼는 서로 울어대니 / 群蛙吠相應
귀는 항상 시끄럽기만 하네 / 喧聒耳常習
늙은 두꺼비는 엉금엉금 기며 / 老蟾行蹣跚
머리를 들고 삼키려는 듯 / 昂首似呑吸
달팽이는 껍질을 짊어지고 / 蝸牛負其殼
기둥 따라 더디게 나아가네 / 緣柱欲進澁
거미는 처마에 붙어 있다가 / 蜘蛛付簷端
그물을 떠나 깊이 들어가고 / 捨網唯深入
지렁이는 진흙을 지나가는데 / 蚯蚓橫泥中
구멍이 새서 칩거하지 못하네 / 穴漏不得蟄
파리는 엉켜 방에 가득하니 / 靑蠅凝滿室
빗자루로 쫓아도 다시 모이고 / 奮箑驅更集
주린 망아지는 푸른 꼴 찾아 / 飢馬索靑芻
울며 줄에서 벗어나려 하네 / 號鳴脫羈馽
늙은 여종은 몸을 다 적시며 / 老婢徧濡體
나를 위해 밥을 지어주는데 / 爲我事炊汲
생나무라 불이 지피지 않으니 / 靑薪吹不燃
눈에 연기만 차 눈물 흐르네 / 兩目着煙泣
오늘은 한술 밥 먹었으나 / 今日得一飯
내일의 생계 참으로 급하니 / 明日計誠急
이불을 누가 사려 할까마는 / 衿裯誰肯買
백번 빌어서 쌀과 바꾸었네 / 百乞換斗粒
나는 속세의 사람 아닌데 / 我非塵世人
어찌 서울에 머물러 있나 / 胡爲在京邑
날아가고자 해도 날개 없으니 / 欲飛無兩翼
뉘우쳐 본들 어찌하겠는가 / 雖悔曷能及
호촌에 고기잡이 동무 있으니 / 湖村有漁伴
사립으로 낚싯배에 기탁하리라 / 釣舡寄蓑笠
제3권
○만복사〔萬福寺〕
넓은 들에 슬픈 바람 불고 / 曠野饒悲風
쓸쓸히 한 해가 저물어가네 / 蕭條歲將暮
스님은 없고 옛 절만 남아 / 僧亡古寺存
해질녘 종고 소리도 없네 / 日落無鍾鼓
○금강〔錦江〕
천산 만산에 해가 지는데 / 千山萬山落日
한두 점 까마귀 돌아가네 / 一點兩點歸鴉
객로에는 긴 물가 가는 풀 / 客路長汀細草
강촌엔 비단 돌 밝은 모래 / 江村錦石明沙
또〔又〕
강은 사람 등지고 동으로 흐르는데 / 江水背人東去
변방 기러기는 나 먼저 북으로 가네 / 塞鴻先我北歸
두 언덕 눈에 가득한 바람과 안개에 / 兩岸風煙滿目
몇 줄기 나그네의 눈물 옷을 적시네 / 數行客淚沾衣
○칠언절구(七言絶句)
완산의 술자리에서 체찰 상공께서 내가 가장 늦게 도착했다고 하여, 큰 술잔으로 벌주를 내렸다. 내가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사양을 하자, 상공께서 말하기를 급히 시 한 수를 지으면 용서하겠다고 하며 간책을 주고 발우를 두드렸다. 드디어 절구 시 하나를 읊어서 술을 마시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完山酒席 體察相公以余最後至 罰大觥 余辭以不飮 相公曰 急成一詩 可以贖之 授簡擊鉢 遂賦一絶 得免飮〕
화려한 잔치자리에 잠영이 빛나니 / 簪纓交映綺羅筵
필부가 어찌 가까이 할 수 있겠는가 / 短褐如何得近前
병이 많아 큰 술잔 이겨내지 못하니 / 多病未堪浮太白
문을 닫고 나의 현묘한 도 지키리라 / 閉門端合守吾玄
제5권
○아우가 사는 산집을 방문하다〔訪舍弟山居〕
네가 찾아올 계획 없음이 아쉬워 / 恨汝來無計
파리한 말에 늙은 몸을 실었노라 / 羸驂載老兄
봄 이전부터 와병한 지 오래인데 / 春前一病久
이별 뒤 몇 편의 시를 지었는고 / 別後幾詩成
낚시 가는 길은 산 그림자 뚫고 / 釣逕穿山影
글 읽는 창문엔 빗소리도 닫혔네 / 書窓閉雨聲
곧 몇 이랑 논밭 나눠 경작하면서 / 直須分數畝
서로 마주보며 여생을 보내자꾸나 / 相對送餘生
○삼례로 가는 길에〔參禮途中〕
멀고 아득한 비탈진 언덕 / 隴坂茫茫遠
말을 달려 쉼 없이 넘었네 / 征驂靡靡逾
들꽃은 가는 곳마다 피었고 / 野花隨處發
숲새는 사람 쫓아 우노라 / 林鳥逐人呼
웃으며 장사꾼이라 말하나 / 笑語憑商旅
행장은 참으로 하인 모습 / 行裝信僕夫
이정표 물을 필요 있으랴 / 何須問亭堠
이미 앞길을 알고 있나니 / 已自識前途
○떠도는 벼슬길〔旅宦〕 잠양(岑陽 : 해미)에서
벼슬길은 끝내 어인 일인고 / 旅宦終何事
명절이면 마음이 끊어지네 / 逢辰只斷魂
병은 몸을 따라 짝이 되고 / 病隨身作伴
귀밑머리에는 시름의 흔적 / 愁入鬢成痕
달은 섬돌의 나무에 숨고 / 月隱當階樹
물 건너 마을엔 까마귀 울음 / 烏啼隔水村
가엾다 천리 밖 꿈길에서 / 可憐千里夢
밤마다 고향으로 달려가네 / 無夜不鄕園
○삼례로 가는 길에〔參禮途中〕
들 주막은 산기슭을 의지하였고 / 野店依山麓
봄 농사로 낮에도 사립문 닫혔네 / 春農畫掩扉
황폐한 다리에 갈래 길 가늘고 / 荒橋分逕細
병든 나무엔 피는 꽃 드물구나 / 病樹着花稀
누운 송아지 졸면서 풀을 씹고 / 臥犢眠猶齕
굶주린 까마귀 울면서 날아가네 / 飢烏噪更飛
먼지와 모래뿐인 먼 길에 지쳐 / 塵沙倦長路
말을 멈추고 옷을 바꿔 입는다 / 歇馬變征衣
○초포교〔草浦橋〕
하얀 탑은 운문에 아득하고 / 白塔雲門迥
푸른 산은 옛 역참 멀리 있네 / 靑山古驛遙
몸 기운 채 먼 길을 시름하고 / 側身愁遠道
험한 다리에선 말에서 내렸네 / 捨馬怯危橋
들판은 불에 타서 검은 빛이요 / 野黑經新燒
시내는 저녁 조수에 흐리구나 / 溪渾帶晩潮
떠돌다가 반백년을 보냈으니 / 飄零年半百
나그네의 귀밑만 성글어졌네 / 旅鬢自蕭蕭
제8권
○황화정을 지나며〔過皇華亭〕
양호(兩湖 전라도와 충정도)의 경계이다.
황화정 북쪽은 바로 은진인데 / 皇華亭北是恩津
호서에 들면 세상 더욱 멀다네 / 地入湖西更遠人
방초는 절로 길을 따라 피었고 / 芳草自能隨道路
야당도 원래 풍진과 가깝구나 / 野棠元不離風塵
반평생 허명으로 무얼 이루었나 / 浮名半世成何事
오랜 여행길 이 몸이 우스워라 / 行李長年笑此身
앞마을 가려다가 우두커니 서니 / 欲往前村因佇立
저물 녘 말울음을 어이 견디랴 / 何堪斜日馬嘶頻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 여산군 누정조 : 황화정(皇華亭) 군의 북쪽 11리에 있는데, 신구(新舊) 관찰사들이 교대하는 장소이다.
※익산투데이(2018.1.31)인용
“노성 입술막 지내어 풋개 사다리 지낸 후, 은진읍 얼른 지나 ‘황화정’을 당도허니 전라도 초입이라 양재 역마 갈아타고 여산읍을 들어가니, 셔리 역졸 문안커늘 뇌성 풋가 사다리 은진 간치당이 ‘황화정’ 장인 고개 여산읍으 숙소 참하고 잇튼날 셔리 중방 분부하되”
판소리 춘향가에서 암행어사를 제수 받고 남원 행에 오른 이몽룡이 삼남대로(은진-여산-삼례-태인-나주-강진-제주) 전라도 초입인 지금의 여산에 들어서는 대목이다.
황화정(皇華亭)은 지금은 충남 논산에 속하지만 조선시대와 1962년까지만 해도 전라도 땅 여산에 속했다. 본디 조선시대 여산군 피제면, 북삼면, 합선면이 합쳐져 1914년에 황화면이 되었는데 1962년에 충남으로 행정구역이 넘어가 1963년부터 연무읍에 속하게 되고 황화정리라는 里단위지역명칭만이 남아있다. 황화면의 명칭은 바로 이 황화정에서 유래한 것이 틀림없다.
이곳 황화정은 전라도 첫 고을인 여산 초입에 세워져 전라도 신구 관찰사가 전주에 부임하기 전 부신(符信)을 주고받으며 인수인계를 하던 상징적 장소였다. 다시 말해 ‘호남 제일문(湖南 第一門)’이 황화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만 상태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전라감사를 지낸 풍석(楓石) 서유구(1764∼1845)의 공문서 일기인 '완영일록(完營日錄)'을 보면 새로운 전라감사(도지사)가 부임하면 이 황화정에서 신구감사 임무교대식을 하는 곳이다. 그 행사는 화려하고 성대했다.
수백 명의 취타대가 도열했고 지방의 수령(군수, 현감)들이 황화정에 나와서 신임 감사를 맞이했다. 이 황화정의 정확한 위치는 지금의 봉곡서원(1번국도인 황화로 290) 앞이다.
현재 尤庵 宋時烈(1607-1689)이 썼다는 황화정비는 봉곡서원에 있던 것을 2017년 황화정리 3구 경로당 앞으로 옮겨 세워져 있다. 비석의 후면에 군수인 정채화(1611-1677)가 경술년(1670년) 8월에 황화정을 다시 건립하고 세웠다고 쓰여 있다.
(문경새재에 있는 교귀정(1999년 건립)은 전라도 여산과 같이 경상도 초입으로 조선시대 경상감사가 한양을 출발해 부임할 때 신구 경상감사끼리 업무 인수인계를 하던 곳이다. 신임 경상감사가 이곳에 도착하면 기다리고 있던 구 경상감사가 관인과 인계인수 물목을 적은 서책을 건네며 교인식(交印式)을 거행했다. 경상감사 도임 행차는 취타대를 선두로 해서 총 300명가량의 큰 행렬이었다고 한다.)
○8월 15일은 남원성이 함락된 날이다. 밤에 앉아 슬프게 읊다
〔八月十五日 卽南原城陷之日 夜坐哀吟〕
까마귀와 까치 교목에서 울고 / 驚烏獨鵲鳴喬枝
객은 한없는 생각에 잠 못 드네 / 客子不眠無限思
열사 충신이 목숨 버린 곳이니 / 烈士忠臣捐命處
작년 오늘밤 성이 함락됐다네 / 去年今夕陷城時
가을 하늘 달도 어두운 오경에 / 秋天落月五更晦
전장의 유혼만 긴 밤이 슬퍼라 / 戰地遺魂長夜悲
살아서 언제나 태평시대를 볼까 / 未死昇平何日覩
도랑과 성벽에 또 깃발 세웠네 / 廢溝摧堞又旌旗
당시 명나라 군대가 남원에 주둔하여 지켰다.
○군대를 거느리고 금마군에 이르렀다가 돌아올 때 횡탄 촌사에 투숙하다
〔領軍到金馬郡 還時投宿橫灘村舍〕
산들은 출몰하며 평무에 이어지고 / 群山出沒連平蕪
시월의 하늘에 거위와 기러기 소리 / 十月天寒鵝雁呼
교량을 이루지 못해 여행객 괴롭고 / 川梁未就徒旅病
객점과 마을은 비어 연기조차 없네 / 店落皆空煙火無
군현에서는 급히 군사들을 뽑으니 / 郡縣方急甲兵選
풍진이 정히 서북 변방에 일도다 / 風塵正在西北隅
임금이 치욕 받으니 삶을 꾀하랴 / 生逢主辱何由死
궁도에 늙어 한낱 썩은 선비일 뿐 / 老作窮途一腐儒
※횡탄(橫灘) : 전라북도 전주시 송천동과 팔복동의 사이를 흐르는 하천이다. 《대동여지도》에서 전주는 횡탄(橫灘)으로 표기되어 있다. 전주천의 하류를 말한다.
제9권
○고제봉(高霽峰)이 이달(李達 1539-1612)을 대접함
제봉 어른이 말하기를,
“내가 이달을 맞이하여 서산(瑞山)으로 왔을 때 그를 동각의 윗방〔東上房〕에 머무르게 하고, 휘장을 치고 음식을 제공하는 것과 시종 및 모든 도구들을 한결같이 별성(別星)의 예에 따랐네. 한 달이 못 되어 서울에 있는 명류(名流)와 지구(知舊)들은 내가 이달을 과분하게 대접한다고 책망하였네. 서찰이 훌쩍 날아왔는데, 이르기를, ‘조정에서 비방하는 의론이 성행하니 반드시 그대에게 액운이 있을 것이다.’ 하였네. 나는 그래도 동요하지 않았고 서로 변론하지도 않았다네. 이달이 돌아갈 때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비방이 그쳤네. 그 후 관직이 체직되어 서울에 들어가자 전일에 편지를 보내어 책망하던 사람들이 모두 내가 우거(寓居)하던 집에 모여서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는가?’ 라고 묻기에, 나는 ‘그대들이 듣던 대로다.’ 하고 대답하였네. 이에 더욱 놀라고 분노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할 말이 있으니 들어 보시오. 허억봉(許億鳳)은 그 천함을 논한다면 관노(官奴)요. 그런데도 젓대를 잘 불어 연유(宴遊) 때면 매번 그를 초청해서 비단자리에 앉힙니다. 이달은 비록 외가가 없지만 그 부친은 사대부이니, 관노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또한 멀지 않겠소. 젓대를 잘 분다는 것 때문에 비단자리에 맞아들여 천한 관노임을 잊은 것이라면, 세상에 드문 재주를 사랑하여 비어 있는 객관에 두고, 바닷가에서 실컷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이고 한가히 노는 관비 한 명을 짝해주어 그 객지 생활을 즐기게 해주는 것이 어찌 불가하오?’ 하였다. 그러자 나를 책망했던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소.’ 라고 했었네.”
○이달(李達)의 시
내가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제술관으로 서경(西坰) 유근(柳根) 어른을 따라 용만(龍灣 평안북도 의주(義州)의 옛 이름)으로 향하는 길에 평양(平壤)에 도착하였다. 손곡 이달은 70세가 넘어 성안에서 객지 생활을 하고 있었다. 평양의 늙은 관기와 관노들은 그의 젊었을 때 행락(行樂)하는 것을 자세히 말해주기를,
“지난날 학사 서익(徐益)이 대동 찰방(大同察訪)이 되었을 때, 학사 최경창(崔慶昌)이 본부(本府)의 서윤(庶尹)이 되어 이달을 부벽루(浮碧樓)에 머무르게 하고 기녀 중 가장 이름 있는 사람 및 노래 잘하는 사람과 거문고 잘 퉁기는 사람 모두 10여 명을 가려 그들로 하여금 이달을 모시게 하여 떠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서윤 최경창은 매일 석양에 공무(公務)를 마치고 찰방 서익과 함께 가마〔肩輿〕를 타고 부벽루에 이르러 술잔을 돌리고 시를 지으며 극진히 즐긴 후 술자리를 파했는데, 최경창이 임기가 다하여 조정에 돌아가고 나서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가 귀천을 따지지 않고 뛰어난 재주를 사랑함이 이와 같았다.
부벽루 판상(板上)에는 정지상(鄭知常)의 절구
비 그친 긴 둑에 풀빛이 푸른데 / 雨歇長堤草色多
임 보내는 남포엔 슬픈 노랫소리 /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은 언제나 다 마르겠나 / 大同江水何時盡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네 / 別淚年年添綠波
가 있는데 옛날부터 절창(絶唱)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루는 학사 최경창이 술자리에서 말하기를,
“우리 세 사람이 늘 이 누대에서 시를 지어서, 산천과 어조(魚鳥)에 대해 거의 다 읊조렸소. 그러니 글의 제목을 정하여 한 절구씩 짓도록 합시다.”
하였다. 서익은〈채련곡(採蓮曲)〉으로 제명(題名)함이 좋겠다고 말하자 서윤 최경창은 판상의 시(정지상의 시)로 운을 삼자고 하였다. 세 사람은 각각 붓을 잡고 더 낫게 짓기를 힘써 각고한 끝에, 최경창과 서익이 먼저 짓고 이달이 이어서 완성했는데, 마침내 이달의 작품을 절창으로 추대하였다. 그 시는 즉,
들쭉날쭉 연잎에 연밥 많으니 / 蓮葉參差蓮子多
연꽃 사이에 아가씨들 노래하네 / 蓮花相間女娘歌
돌아갈 땐 횡당 입구에서 만나자 약속했기에 / 歸時約伴橫塘口
애써 배를 저어 물결 거슬러 오르네 / 辛苦移舟逆上波
라고 하였다. 서윤 최경창과 찰방 서익의 작품이 꼭 이에 뒤진 것은 아니지만, 특히 이달의 작품을 제일로 삼고 붓을 놓은〔閣筆〕 일이 있었으니, 그 포의(布衣)를 높이고 장려하는 뜻을 알 수 있다. 이는 손곡이 나에게 자세히 말해준 것이다. 나의 우견(愚見)을 말하자면 제 2구의 ‘상간(相間)’ 두 글자는 온당치 않은 듯하다.
※유근(柳根) : 1549~1627.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회부(晦夫), 호는 서경ㆍ고산(孤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572년(선조5)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591년 좌승지가 되었다가 정철(鄭澈)이 화를 당할 때, 그 일파로 몰려 탄핵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義州)까지 선조를 호종하였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사직하고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고,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하던 도중 통진(通津)에서 병사하였다. 문집에는 《서경집》이 있다.
※서익(徐益) : 1542~1587.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萬竹)ㆍ만죽헌(萬竹軒)이다. 1569년(선조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1585년 의주 목사(義州牧使) 때 탄핵받은 이이(李珥)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었다. 은진(恩津) 갈산사(葛山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만죽헌집(萬竹軒集)》이 있고, 시조 2수가 전해진다.
※최경창(崔慶昌) : 1539~1583.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다. 박순(朴淳)의 문인으로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이이(李珥)ㆍ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으로 불리었고 당시(唐詩)에도 능하여 백광훈(白光勳)ㆍ이달과 함께 삼당파로 일컬어졌다. 1568년(선조1) 증광시문과(增廣試文科)에 급제하였고, 1583년 방어사(防禦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으나 상경(上京) 도중 죽었다. 숙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문집에 《고죽유고(孤竹遺稿)》가 있다.
※정지상(鄭知常) : ?~1135. 본관은 서경(西京), 호는 남호(南湖), 초명은 지원(之元)이다. 서경 출생으로 1114년(예종9) 문과에 급제하였다. 음양비술(陰陽祕術)을 믿어 묘청(妙淸)ㆍ백수한(白壽翰) 등과 삼성(三聖)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수도를 서경으로 옮길 것과 금(金)나라를 정벌하고 고려의 왕도 황제로 칭할 것을 주장하였다. 1135년(인종13) 묘청의 난 때 관련된 혐의로 김안(金安)ㆍ백수한과 함께 김부식(金富軾)에게 참살되었다. 저서로는 《정사간집(鄭司諫集)》이 있다.
제10권
○경기전을 중수한 비문〔重脩慶基殿碑〕 방백(方伯)을 대신하여 짓다.
우리 전하(殿下 광해군)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6년인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신(臣)이 왕명을 받들어 호남에 순찰사로 갔습니다. 그해에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완산(完山 전주(全州))은 성조(聖祖)께서 살았던 풍패(豊沛) 고장이다. 옛날에 진전(眞殿)이 전주성 안에 있었으므로 왕적(王迹)을 크게 공경하여 백성들이 바라보면서 흠모하였더니, 불행하게도 세상의 근심을 피하여 영변부(寧邊府)로 영정(影幀)을 옮겨 모셨다. 진전은 폐허가 되었고 능히 복구하지 못한 지 이제 17년이다. 난리가 평정된 지 그리 멀지 않고 백성들의 힘도 완전하지 못하여 그를 복구하려면 실로 몇 해를 기다려야 했으니, 밤낮없이 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내가 장차 비전(閟殿)을 새로 세워 봉환(奉還)하려 하는데 오직 경(卿)은 실로 이 지역을 맡았으니 어찌 감히 경건하게 일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왕명을 받들어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옛터를 살펴보고 옛 제도를 물어서 공역(工役)에 힘을 헤아리고 비용을 적게 사용하였습니다. 이윽고 판자로 쓸 줄기를 베고 서까래 기둥을 다듬으며 기와와 벽돌을 굽고 돌층계를 쌓고 담장을 두르는 것 등에 기일(期日)을 정해 이루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정전(正殿)은 이미 우뚝 섰고, 또 조촐하고 향기로운 음식과 가른 희생을 각각 보관할 곳과 사관(祠官)이 거처할 집과 번위(蕃衛)가 머물 곳을 차례로 세워 모두 단청까지 하는데 9개월 걸려서 완공하였습니다. 이어 기일(期日)을 선택하여 영정을 모셔오는데 여러 백성들이 날마다 이마에 손을 올리고 바라보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석(竹石) 소리가 들리며 영여(靈輿)가 점차 가까워지자 남녀노소가 춤을 추는가 하면 서글퍼하기도 하였습니다. 드디어 영정을 전각 깊은 곳에 올려 안치하고 제사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신은 뜰의 자리로 나아가 우러러 보고 엎드려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태조(太祖) 임금의 공덕(功德)은 만세(萬世)를 덮었으니, 이에 자손을 안락하게 함이 훈모(訓謨 국가 대계가 되는 가르침)와 같았습니다. 운수는 비태(否泰)가 교차하지만 능히 추결(墜缺)에 이르지 않아 오늘날 다시 손질하는 성례(盛禮)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전하의 성효(聖孝)는 하늘이 내었으니, 옛날 난리를 겪던 날에도 일찍이 이 고을에 이르러 친히 어진(御眞)을 바라보며 서글피 면모(緬慕)를 더했기에 마땅히 이를 독실하게 생각하여 선조를 받드는 일에 인정과 예문을 깊이 연구한 것입니다. 이는 성조(聖祖)와 신손(神孫)이 서로 도와 국가의 운명이 무궁하기를 기원한 것입니다. 신은 이 경기전의 흥폐(興廢)는 당연히 천지와 더불어 시작과 끝을 같이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삼가 이어서 다음과 같이 송축합니다.
성조는 천제에게 갔으나 / 聖祖賓帝
성조의 초상은 세상에 남아 / 聖像在世
어언 이백 년 세월 동안 / 於二百歲
모신 그 진전 높고 깊어 / 厥殿崇深
백성들 우러러 바라보고 / 厥民仰瞻
제사는 더욱 엄숙했다네 / 祀典聿嚴
그러나 병란을 만나 / 遭會厄恙
먼 곳에 옮겨 모셨으나 / 徙安遐壤
백성들의 소망 성대하여 / 民鬱其望
하늘과 귀신이 도우시고 / 天神保佑
산신이 앞뒤로 호위하니 / 嶽祇先後
누가 우리를 감히 깔보랴 / 疇我敢侮
진전이 흉탕을 만나 / 殿遘凶蕩
무너져 가시덤불 되니 / 毀爲榛莽
영령이 내려오지 않아 / 靈祉不降
우리 임금 서글피 신음하며 / 我王悲呻
옛것을 생각하고 새것을 구상하여 / 念舊圖新
이에 수령에게 명하셨네 / 乃命守臣
공인들이 힘을 다하여 / 工隷獻力
재촉하지 않아도 일하여 / 不趣而役
보배로운 집 환히 빛나 / 寶構煥赫
진전에 영탑을 설치하여 / 殿設靈榻
엄숙하게 옥첩을 거니 / 儼掛玉帖
백성들 서로 눈물지었네 / 民胥以泣
이는 누구의 공이냐 하기에 / 曰誰是功
전하께 공을 돌렸으니 / 歸于聖躬
인이 깊고 효심이 높아 / 仁深孝隆
단단한 옥에 말씀을 새겨 / 刊辭堅瓊
이생을 갖추나니 / 以資麗牲
억만년 영원히 이으소서 / 永胤億齡
※ 경기전(慶基殿) : 전라북도 전주시 풍남동(豊南洞)에 있는 조선 태조의 영정을 모신 집이다. 1442년(세종24)에 건립하여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영정은 묘향산 보현사에 옮기어 보존될 수 있었다. 현재의 건물은 1614년(광해군6)에 고쳐 지은 것이다.
※ 방백(方伯) : 이경전(李慶全, 1567~1644)을 가리킨다. 이경전은 1613년 2월부터 1615년 8월까지 전라 감사를 지냈으며, 1614년 12월 경기전을 중수한 공으로 가자(加資)를 받았다.
※ 풍패(豊沛) 고장 : 풍패는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고향으로, 제왕(帝王)이 일어난 곳을 가리키는데, 이성계(李成桂)의 선조가 전주(全州)에 살았으므로 이렇게 칭하였다.
제11권
■ 연해(沿海)의 군현을 모두 돌아보고 두류산(頭流山 지리산(智異山)의 별칭)에 들어가 쌍계사(雙溪寺)와 신흥사(神興寺)를 구경한 기행록(51세)
◯무오년(1618, 광해군10) 늦봄 초에 나는 오산현(鰲山縣 장성(長城)의 별호)에 있었다.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이 토포사(討捕使)로 호남과 영남의 제도(諸道)를 안찰하고 순행(巡行)이 우리 현에 이르렀다. 이어서 고을 사람 상사(上舍) 김우급(金友伋)의 계정(溪亭)으로 가서 꽃을 감상하며 시를 짓고 남중(南中) 산수의 뛰어남을 서로 토론하였다. 현주가 말했다.
“용성(龍城 남원)은 사실 내가 반평생 왕래한 곳이며, 그대에게는 고향이오. 쌍계사 청학동은 용성과의 거리가 겨우 이틀 노정일 따름인데 한 번도 가보지 않고 늙었으니, 우리 두 사람 모두 탄식할 일이오. 이제 내가 마침 사명을 받들고 남쪽으로 내려왔고 가형(家兄)인 정랑공(正郞公)도 집안 식구를 거느리고 바야흐로 성촌(省村)에 있으며, 그대의 아우인 자발(子發)도 집에 있어 무고하니, 그대가 비록 문서더미에 골몰해 있지만 어찌 한 번 모일 기회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산꽃이 아직 지지 않았으니 함께 선구(仙區)를 찾아 창화(唱和)하여 승적(勝蹟)을 기록하세. 이는 얻기 어려운 기막힌 기회네.”
이에 서로 마주보고 웃는데 마음에 거슬림이 없었다. 드디어 날짜를 잡고 헤어졌다. 그 뒤에 방백(方伯)에게 휴가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참으로 실망이 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랑(正郞) 조소옹(趙素翁 조위한(趙緯韓)) 제공이 산중에서 수창한 시 한 편을 보내 자랑하고, 또 내가 오두미(五斗米 현령의 녹)에 연연하여 유람할 겨를이 없음을 기롱하였다. 나는 더욱 스스로 즐겁지 않았다. 며칠 있다가 방백이 연해(沿海) 군현의 속안(續案)의 임무를 나에게 맡겼는데 광양(光陽)이 실로 속안 속에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광양으로부터 지리산에 들어가면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도착할 수 있으리니, 아마도 하늘이 편의를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편지를 소옹에게 보내 이렇게 말했다.
“나도 이곳으로부터 갈 것이니 그대보다 뒤쳐진 것이 겨우 한 달 정도이다. 산중의 경치는 아직 그대로일 것이니, 나는 곧 제공의 시운을 가지고 길을 따라가면서 화답할 것이다. 시권(詩卷) 속에 추가로 넣으면 동시에 유상(遊賞)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드디어 행장을 꾸려 길에 오르니, 바로 윤 4월 15일 계유였다. 저녁에 남평현(南平縣)에 당도하여 유숙하였다.
○ 16일 갑술. 맑음.
현에 사는 예부터 알던 몇 사람이 나에게 남계(南溪)에 배를 띄우고 놀자고 했다. 시내의 서쪽에는 푸른 절벽과 뭇 봉우리가 있는데 행인이 그 사이로 숨었다 보였다 하니, 바로 능성(綾城 능주(綾州))으로 가는 길이다. 시내의 동쪽에 어촌 대여섯 가구가 있는데 초가집이 숲 머리에 드러나니, 자못 맑고 시원한 운치가 있다. 강의 가운데서 오르락내리락하다 저물녘에 흥이 다하여 돌아왔다.
○ 17일 을해. 맑음.
마침 조금 아파서 그대로 유숙했다.
○ 18일 병자. 맑음.
일찍 출발하여 영암군에서 투숙하였다.
○ 19일 정축. 맑음.
내가 월출산(月出山)을 찾아가려 하는데 고을 수령도 나와 함께 도갑사(道甲寺)에 가고 싶어 하였으나, 말에 안장을 올리고 출발하려 할 때 관에 일이 있어 그만두었다. 두 소동(小童)을 대동하였는데, 나이가 열대여섯 정도 되었다. 한 동자는 피리를 불고 한 동자는 비파를 타는데 모두 그의 노비였다. 드디어 명하여 나를 따라가게 하여 나의 구경을 호사스럽게 하였다.
함께 가서 골짜기 입구에 당도하니 절문까지 거리는 7,8리였다. 맑은 시내와 푸른 골짜기가 좌우에 비치니 이에 두 소동을 시켜 말 위에서 우성(羽聲)을 골라 연주하게 하였다. 고삐를 늦추고 천천히 걸어가니 절문에 당도하기 몇백 보 앞에 두 기둥의 붉은 문이 나무 꼭대기 위로 솟아 있다. 앞에 다가가서 보니 판액에 ‘내원당(內願堂)’이란 세 글자가 쓰여 있다. 아 고을의 학정을 승려들이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이 형세에 의탁하는 행동을 하였으니 사문(沙門 승려)에 누를 끼친 것이 심하구나. 마침내 선당(禪堂)에 들어가 유숙하였다.
○ 20일 무인. 맑음.
다리에 종기가 생겨 산에 오를 수 없었다. 처량하게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늙은 중이 나를 찾아와 말했다.
“절 뒤에 맑은 여울과 무성한 숲이 있어 더위를 식힐 만합니다.”
그러고는 앞에서 인도하여 북쪽 담장 밖으로 나가서 나를 작은 대(臺) 위에 앉게 했다. 녹음은 자리에 가득한데 한 줄기 흐르는 샘물이 졸졸졸 대를 돌아 아래로 달려가다가 단애(斷崖)를 만나 폭포를 이루며 하얗게 물방울을 튀기며 내려가는 것이 2층을 이룬다. 그 높이를 통틀어 헤아려 보니 4, 5길 정도 된다. 그 아래는 물이 고여 깊은 연못이 되었는데 연못에 두 개의 이름이 있으니, ‘폭포연(瀑布淵)’이라고도 하고 ‘북지당(北池塘)’이라고도 한다. 곁에 있던 종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곳의 중들은 물놀이를 잘하는데 볼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늙은 중에게 명하여 물놀이를 시키라고 재촉하였다. 이에 잘생긴 어린 중 7,8명이 발가벗고 연못 위에 서서 두 손으로 음부를 가리고 다리를 모아 몸을 솟구쳐 연못 가운데로 뛰어드는데 물이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잘하는 것으로 삼는다. 처음에는 그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다가 한참 뒤에 머리를 솟구치며 떠오른다. 나온 뒤에는 또 이와 같이 하여 앞선 자 뒤따르는 자가 서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가운데 들락거림이 매우 빠른 중이 바야흐로 연못 위에 서 있는데 큰 벌이 숲에서 나와 그 이마를 쏘았다. 중은 바로 땅에 쓰러져 소리쳤고, 잠깐 사이에 눈과 눈썹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즐겁지 않게 되어 파하였다.
○ 21일 기묘. 맑음.
다리의 종기가 벌겋게 도져 아파서 그대로 머물렀다.
○ 22일 경진. 맑음.
다리의 종기가 조금 진정되자 이에 칡뿌리와 대나무를 가져다가 둥글게 얽어서 소여(小輿) 모양을 만들어 말에 싣고서는 그대로 타고 길을 나섰다. 골짜기 입구에 도달하자 두 종이 말 앞에서 작별을 고하고 떠나갔다. 저녁에 진사 백선명(白善鳴)의 집을 방문하여 유숙하였다.
○ 23일 신사. 맑음.
백선명이 나를 이끌고 그의 선군 옥봉(王峯 백광훈(白光勳))의 옛 별장에 갔다. 함께 계곡을 샅샅이 구경하다가 돌을 쓸고 앉았다. 이야기가 두 집안이 선대에 사이좋게 지낸 것과 시와 술을 즐긴 것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선명이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선군께서 어용전(御容殿) 참봉으로 완산(完山 전주(全州))에 계실 때 그대의 아버지께서는 장차 낙하(洛下)로 향하던 길에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별을 하게 되었지. 이에 각자 시 한 수를 지었는데 모두 유고 안에 있네. 우리들이 오늘 저녁에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니 어찌 그 운을 따라 시를 짓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드디어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고 하여 잠시 뒤에 시를 지었다.
선명이 또 그 선군의 절구 두 수를 외우자 함께 그 운자에 따라 시를 짓고는 각자 1통씩 써서 나눴다. 선명은 초서를 잘 썼는데 은구(銀鉤)와 옥삭(玉索)이 감상할 만하였다. 곧바로 계곡의 밑으로부터 등나무 넝쿨을 잡고 몇 층의 절벽을 올랐다. 절벽 위에는 정사(精舍)가 있는데 선명이 새로 지은 것이다. 작은 계집종을 시켜 불을 지펴 요기(療飢)를 하고서 서운하게 작별을 고하고 곧장 당악(棠岳) - 해남의 별칭 - 으로 향했다. 동성(東城) 밖의 진사 윤희백(尹熙伯) - 이름은 적(績)이니, 나의 내제(內弟)이다. - 의 집에 도착하여 이모를 배알하고 유숙하였다.
○ 24일 임오. 맑음.
정랑(正郞) 윤귤옥(尹橘屋) - 이름은 광계(光啓)이니, 희백과 같은 마을에 산다. - 공이 아침 일찍 찾아왔다. 인사를 마치고 곧장 소매에서 사고(私稿)를 꺼내면서 말했다.
“내가 약관의 나이 때부터 문장 짓는 것을 배우고 한묵(翰墨)을 전공하여 지금 나이가 예순을 넘어 쇠약해졌네. 지난번에 시험 삼아 상자 속에서 난고〔亂章〕를 꺼내서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버리고 시와 문장 약간 편을 얻어 모아 써서 3권을 만들었다네. 안목이 있는 사람에게 질의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그대가 왔으니 천운이네. 원컨대 그대는 나를 위하여 숨김이 없이 품평해 주게.”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고는 시권을 펼쳐 읽어 보았다. 저녁때가 되도록 다 읽지 못하자 귤옥은 집으로 돌아갔다.
○ 25일 계미. 맑음.
새벽에 일어나 귤옥의 사고를 읽기 시작하여 조금 느즈막히 3권의 시문을 다 읽었다. 대개 산문은 한퇴지(韓退之)를 본받았고 시는 두보(杜甫)를 본받았는데, 나의 소견으로는 산문이 시보다 나으니 지금 세상에 찾아도 대개 흔히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몇 마디 평어(評語)로 회답하였다. 이날 술과 안주를 조금 마련하여 이모에게 술을 올리고 밤늦게 파하였다.
○ 26일 갑신. 맑음.
진도군을 향해 출발하여 행차가 나루터에 이르렀다. 이른바 벽파정(碧波亭)이 물 건너에 창망한데 시야에 가득 바라볼 만하다. 날씨는 맑고 바람이 없어 배를 타고 건너기 좋았다. 이미 건너 정자에 올라 기대어 바라보니 수면이 편평하게 펼쳐져 사방이 거울과 같다. 두 개의 작은 섬이 물결 속에 꽂혀 있는데 기이한 경치가 비할 데 없다. 다만 태평한 시대에 만든 빼어난 전각은 병란에 타버리고 난리 뒤에 새로 지었다. 그러나 집이 비좁고 남루한데다 고치고 청소하는 사람도 없어 새똥이 마루에 가득하다. 마침내 말을 재촉하여 10여 리를 가서 고을에 도착하였다. 고을은 숲과 갈대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매우 쓸쓸하다.
○ 27일 을유. 맑음.
고을 수령〔主倅〕이 나에게 말하기를,
“고을 뒤에 망덕봉(望德峯)이 있는데 매우 높습니다. 그곳에 올라가면 남해를 굽어볼 수 있으니 가보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나와 고을 수령이 북과 피리를 가지고 올랐다. 서남의 큰 바다가 모두 자리 아래에 있고 고래등 같은 파도는 넓고 아득하여 하늘에 닿아 끝이 없으니, 장엄하다! 곁에 있는 늙은 아전이 바다의 섬 이름을 모두 알고 있어서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알려 준다. 이어 한라산을 가리키는데 하늘 끝에 보일락 말락 아득하고 망망하여 그 크기는 모소(母梳) 만하다.
고개를 돌려 낙조를 바라보니 점점 서쪽 바다에 가까워져 붉은 파도와 채색한 구름이 만 리에 펼쳐진다. 잠시 뒤에 거센 바람이 갑자기 일어 바다가 일렁이고 나쁜 기운이 넘쳐 모든 산이 움직이려 하며 온갖 구멍이 일제히 소리를 내니 오싹하여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마침내 파하고 돌아왔다.
○ 28일 병술. 맑음.
나는 돌아오는 길에 벽파정의 야경을 감상하고 싶어서 저녁밥을 먹은 뒤에 말을 타고 나가 홀로 정자 위에 올랐다. 이경(二更 밤9시~11시) 정도 되자 낚싯배들이 파하고 돌아갔다. 새는 날지 않고 많은 별들이 물에 비쳐 위아래가 찬란하다. 조용하게 홀로 앉아 있으니 맑은 회포를 움킬 만하다. 조용한 가운데 문득 파도치는 소리가 이상하게 들리는데 꽤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니, 아마도 고래나 붕새가 장난하는 것인가. 어두운 밤이라 분간하여 밝힐 수는 없지만 깃과 갈기가 거꾸러지고 기운 듯한 형상이다. 벽 위에는 한유천(韓柳川), 유서경(柳西坰) 등 여러 어른들의 십운 배율시가 있기에 관청의 하인에게 촛불로 비추게 하여 베끼고, 그 운자를 따서 시를 지었다. 시 짓기를 마치니 동쪽이 밝아온다.
○ 29일 정해. 맑음.
날이 밝기 전에 배를 불러서 바다를 건넜다. 한 번 안개 낀 수면을 건너니 신계와 속세가 현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서글프게 한다. 다시 당악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서 저녁에 윤희백의 집에서 묵었다.
[오월(五月)]
5월 1일 무자. 맑음. 강진현에서 묵었다.
○ 2일 기축. 맑음.
장흥부를 향해 출발하여 행차가 6,7리에 이르니, 고을에 사는 이의신(李懿信)이 길옆 숲 정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서로 회포를 푸느라 한참이 지나도 떠날 줄 몰랐다. 윤희백이 당악에서부터 나와 함께 왔는데 여기에 이르러 작별을 고하고 돌아갔다. 저녁에 장흥부에서 묵었다.
○ 3일 경인. 맑음. 보성군에서 묵었다.
○ 4일 신묘. 맑음.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섰다. 고을 수령인 정홍량(鄭弘亮) 군이 나를 전송하기 위해 해창(海倉)까지 와서 말하기를,
“여기서 흥양(興陽 고성군)까지는 육로로 거의 70여 리가 되는데, 만약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면 수로로는 겨우 40리입니다. 돌아가는 길과 지름길이 매우 차이가 나는데 다만 배를 타는 것은 위험하고 육로로 나아가는 것이 안전하니 공께서 선택하십시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바닷길의 장엄한 여행길은 내가 원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세 척의 배에 돛대를 갖추니, 두 척의 배에는 말과 괴나리봇짐 등을 싣고 한 척의 배에는 나와 종자(從者) 5,6명과 뱃사공 한 사람이 함께 탔다. 떠나려고 할 때 정군이 나에게 경계하며 말하기를,
“풍파가 쉽게 일어나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웃으면서 헤어졌다. 수십 리쯤 가니 돛이 순풍을 받아 배의 속도가 매우 빨랐다. 문득 뱃사공이 선미(船尾)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고하기를,
“거센 바람이 오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이에 일어나 바라보니 바다가 동남쪽의 파도를 세운 것이 설산(雪山) 같은데, 그 기세가 이미 가까웠다. 내가 뱃사공에게 묻기를,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하자, 뱃사공이 말하기를,
“앞으로 갈 길은 멀어 아직 20리가 남았으니 이번 행차는 정말로 힘들겠습니다. 그러나 돛을 내리고 배에 탄 사람에게 명하여 각각 노를 가지고 힘껏 젓게 한다면 비록 위험한 것을 모면할 수는 없으나 별탈은 없을 것이니, 원컨대 심려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배 안에 마침 술이 있어 사람들에게 한 사발씩 나눠주어 놀람을 진정시키고 일을 독려하였다. 잠깐 사이에 바람과 파도가 이르러 높은 물결이 솟구치는데 외로운 배는 힘이 부쳐 엎어질 듯 하다가 엎어지지 않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하늘을 우러러보고 천 길의 바다를 굽어보면서 배 안은 온통 새파랗게 질려있다. 나는 이때에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가 압록협(鴨綠峽)에서 지은 율시 한 수의 운자를 사용하여 억지로 시를 지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못 정력(定力 굳게 정하고 동요되지 않는 힘)이 있다고 여겼는데, 뱃사공이 자주 자주 고하여 말하기를,
“놀라지 마십시오. 놀라지 마십시오.”
라고 한다. 문득 나의 안색이 반드시 태연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 깨달으니 우습다. 해안에 배를 대니 해는 겨우 삼간(三竿) 쯤이다. 저녁에 흥양현(고흥)에서 묵었다.
○ 5일 임진. 맑음.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길을 나서려고 하였다. 고을 수령인 박유건(朴惟健) 군이 비록 무관이나 제법 문자를 알아 나와 오래 전부터 친하였는데 나와서 나를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오늘은 5월 5일로 명절인데, 우리 고을이 비록 변변치 못하나 어찌 공에게 하루 음식 대접하는 것을 근심할 정도이겠습니까.”
라고 하여 내가 이에 걸음을 멈추었다. 문 밖에서 여러 사람들이 떠들고 웃는 소리가 들리고 태수가 문을 열라 명하니, 고을의 백성 100여 명이 뜰아래에 몰려 들어왔다. 태수가 말하기를,
“이 고을은 많이 강퍅하여 단양절에 각저희(角觗戲 씨름)를 하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손님에게 웃음을 제공하고자 하여 불러 모은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말이 마치기 전에 씨름판을 설치하고 승부를 겨뤄 차례로 진행하였다. 가운데 한 장사가 있는데 키가 크고 피부가 거무잡잡하며 다리는 세운 기둥과 같아서 연이어 7,8명을 물리치니 씨름판이 드디어 비었다. 계단 아래에 엎드려 말하기를,
“놀이가 다 끝났습니다.”
라고 하니, 태수가 큰 사발에 술을 부으라고 명하여 그에게 상으로 주었다. 마르고 키가 작으며 얼굴이 유생처럼 하얀 나이 어린 사람이 앞으로 나와 청하여 말하기를,
“원컨대 저 사람과 겨루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다. 태수가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손사래를 치며 물리쳤으나 그는 억지로 청하였다. 이윽고 그와 더불어 어깨를 잡았는데, 바라보니 마치 왕개미가 나무를 흔드는 것 같아서 뜰에 있는 100여 명이 서로 마주보고 눈웃음을 쳤다. 작은 사람이 갑자기 기합을 지르자 큰 사람이 이에 대응하며 한참 동안 서로 돌다가 두 사람이 함께 넘어졌다. 모래와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는데 자세히 보니 작은 사람이 위에 있다. 내가 태수와 함께 소리를 내어 크게 웃으면서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나이를 물어보니 스물한 살이라고 한다. 태수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서울 저자의 소년으로 장사하려고 이 고을에 왔는데 저도 일찍이 이처럼 힘이 센 줄은 몰랐습니다.”
라고 하였다. 곧 쌀과 베를 상으로 주니 놀이를 파하고 나갔다.
몽접(夢蝶)이라는 관기(官妓)가 들어와 인사를 드리는데, 이 기생은 젊었을 때 노래를 잘 불렀다. 난리를 만나 떠돌아다니다가 용성에 이르러 내가 거처하는 촌사(村舍)에 3년 동안 붙어 살았었다. 그 이후로 20년간 생사를 모르다가 지금 갑자기 만나니 또한 인간 세상의 우연한 일이다. 서로 옛날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니 아직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간드러진다. 태수가 나를 위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여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 6일 계사. 맑음.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일찍 길을 나섰다. 낙안군(樂安郡)에 당도하니 밤 이경〔二鼓〕이 되었다.
○ 7일 갑오. 맑음.
늦게 출발하여 순천부에 도착하였다. 부사인 지봉(芝峯 이수광 1563-1628) 공이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객관으로 나와 나를 맞이하며 말하기를,
“오랜 동안 외진 고을에 있어 일 년 내내 즐겁지 못했는데, 지금 그대를 보니 어찌 외딴 곳에 찾아오는 손님을 맞는 기쁨에 그치겠는가.”
라고 하였다. 함께 시문을 논하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촛불을 켤 때쯤에 파하였다.
○ 8일 을미. 맑음.
내가 일찍 관아에 가서 부사에게 인사를 올렸다. 때는 5월이라 일만 그루 석류꽃이 바야흐로 활짝 피어 사방이 환히 빛나니 몸이 비단 장막〔錦步帳〕 안에 있는 것 같다. 지봉이 돌아보고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가 서울에 있을 때 간혹 남의 집에서 이 꽃이 화분에 있는 것을 보고, 그 예쁜 자태가 쓸쓸하다고만 여겼지 이렇게 번화(繁華)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네.”
라고 하였다. 이에 함께 동성(東城) 밖으로 나가 환선정(喚仙亭) 위에 앉았다. 맑은 시내 한 줄기가 난간 밖으로 비껴 흘러가고 넓은 들과 이어진 산봉우리가 아득히 시야에 들어오니, ‘소강남(小江南)의 맑고 깨끗한 경치’라고 이를 만하다. 부사가 나에게 요구하기를, 며칠을 더 머무르면서 벽 위의 여러 시에 두루 화운(和韻)하자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초목이 무성하니, 두류산 여행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습니다. 원컨대 이만 떠났다가 돌아올 때 며칠 즐기는 것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부사가 허락하자 이에 출발하였다.
저녁이 되기 전에 광양현에 당도하였는데 바닷가는 척박하여 사람 사는 자취가 드물었다. 작은 성은 말〔斗〕과 비슷한데 성가퀴는 반이 무너졌다. 성문 안에 오직 늙은 홰나무가 우뚝 서서 줄을 이루고 있는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고요하여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객관의 밖에 이르러서야 한 늙은 아전이 문에서 맞이하며 고을 수령이 승차(承差 왕명을 받들어 지방으로 차견함)하여 멀리 떠났다고 고한다. 이른바 동상방(東上房)이란 것은 다만 두 칸의 작은 방이라 옷과 띠를 풀지 않고 베개에 기대어 밤을 보냈다.
○ 9일 병신. 맑음.
동 틀 무렵 두치(頭峙)로 향하는 길을 나섰다. 깊은 산 겹겹 고개에 한 줄기 길이 구불구불하여 행로가 매우 어렵다. 오시에 강을 건너 악양(岳陽)을 지나서 화개(花開) 골짜기에 당도하기 7,8리 전에 길옆 민가에서 묵었다. 이 지역의 빼어난 경치는 호남과 영남에서 으뜸간다. 큰 강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가는데 물결이 골짜기에 가득하여 강의 양쪽 물가에서 겨우 소와 말을 분별할 정도이다. 겹겹의 봉우리가 강을 끼고 마주서 있는데 동쪽은 지리산이고 서쪽은 백운산(白雲山)이다. 고기잡이 어부들의 집이 곳곳마다 마을을 이뤄 초가집 울타리가 대나무 사이로 보일락 말락 하니, 이른바 ‘악양의 점사(店舍 조그만 가겟집)가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 10일 정유. 맑음.
일찍 출발하여 쌍계(雙溪)로 향했다. 강을 따라 북쪽으로 나아가니 걸음마다 화폭에 담을 만하다. 화개 골짜기에 이르니 골짜기 문은 서쪽을 향했는데 동부(洞府)가 옹장하고 깊다. 큰 시내가 산중으로부터 흘러나와 돌에 부딪혀 우레처럼 울리며 큰 강으로 흘러 들어가니 바로 화개의 하류이다. 이곳으로부터 강을 따라가는 길을 버리고 시내와 나란히 10여 리를 가서 쌍계동(雙溪洞) 입구에 당도하였다. 물 한 줄기는 석문에서 나오고 다른 한 줄기는 신흥(神興)에서 나와서 합하여 거세게 흘러가니, 바로 화개의 상류의 무릉계(武陵溪)이다.
시내를 건너 오른쪽으로 돌아 수백 보쯤에 두 개의 바위가 길을 막고 문처럼 마주보고 서 있으니 쌍계사를 출입하는 사람은 이곳을 지난다. 그 높이가 모두 5,6길은 되는데 ‘쌍계석문(雙溪石門)’이란 커다란 네 글자가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바위 하나에 각각 두 글자씩 썼는데 필획이 가지런하고 서체(書體)가 엄격하여 칼과 창이 엇갈려 비껴선 듯하니 참으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의 수적(手迹 손수 쓴 글씨)이다. 삼연(森然)히 감동을 받아 말에서 내려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대개 당나라에서 명필을 손꼽을 때 모두 저태부(褚太傅)와 안태사(顏太師)를 말하고 최학사(崔學士)만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외국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저공은 논할 것도 없고 일찍이 안공의 마애비(磨崖碑) 각본(刻本)을 보았는데 결코 이것에 미치지 못했다.
작은 고개를 지나 쌍계사로 들어가니 거처하는 중이 나와서 맞이한다. 나를 인도하여 학사대(學士臺)에 이르러 중이 말하기를,
“옛날에 대 위에 웅장한 건물이 있었는데 신라 시대에 창건하였습니다. 난리를 겪어 폐해졌는데 아직 중건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한다. 다만 옛 비석이 우뚝 홀로 남아있으니, 실로 진감 태사(眞鑑太師)의 비명(碑銘)인데 고운이 짓고 쓴 것이다. 글자의 전형(典刑)은 이따금 예나 다름이 없는데 절반이 마멸되어 거의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선당에 들어가 묵었다.
○ 11일 무술. 아침에 맑고 저녁엔 흐림.
새벽에 일어나 신발을 신고 노소(老少) 승려 8,9명과 함께 절 뒤의 절벽을 따라 개미처럼 붙어서 오르는데 여러 중들이 나무 남여(藍輿 의자처럼 걸터앉아서 타는 가마)를 가지고 뒤따랐다. 내가 말하기를,
“나는 젊어서부터 명승지를 구경할 도구(건장한 다리)가 없지 않았다. 지금 비록 늙었으나 어찌 너희들에게 수고를 끼칠 정도이겠는가. 그냥 놔두어라.”
라고 하였다. 몇 리쯤 지나자 자못 피곤하여 젊은이로 하여금 등 뒤에서 밀게 하였으나 갈수록 더욱 힘이 들어 돌에 기대앉아 잠시 쉬었다. 한 늙은 중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잊었지만 문자를 알아 함께 이야기를 나눌 만하였다. 그가 뒤에 있기에 내가 불러 이야기하며 말하기를,
“심하다! 내가 많이 쇠약해졌구나. 사람으로 하여금 밀게 하여 다닐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야. 이것은 비록 가마는 모면하였으나 아직도 외물에 의지하는 것이니, 어찌 이걸 가지고 스스로 만족하겠는가.”
라고 하고,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여기서부터는 여러 중들이 가마로 나를 메고 오르고 올라 차츰 멀리 가는데 길이 험난할수록 중들은 더욱 힘들어 했다. 굽어보니 가마를 멘 중들이 마치 소처럼 헐떡거리며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늙은 중이 뒤에 따르면서 피곤함을 책려(策勵)하며 말하기를,
“앞길이 멀지 않았으니 게으름 피우지 말라, 게으름 피우지 말라. 전년에 하동 군수가 산처럼 살이 쪄서 무거웠어도 너희들이 능히 감당하였는데 이번 행차를 어찌 고생스럽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하자, 가마를 멘 사람이 대꾸하여 말하기를,
“하필이면 하동 군수를 말하십니까. 근래에 토포(討捕) 영감은 정말 복이 없었습니다.”
라고 하기에, 나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살며시 웃었다. 잠시 뒤에 중들이 길이 끊어졌다고 고하고 나를 가마에서 내려 걷게 하였는데 걸어가다가 잔교(棧橋)를 만났다. 이른바 잔교라는 것은 세 줄기의 긴 나무를 엮어 암벽의 틈에 나무의 양 끝을 얽어매고 허공에 걸쳐 간략한 묶음을 만든 것이다. 사람이 건너면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데 아래로는 땅이 아득하다. 이런 곳이 세 곳인데 대략 수십 걸음이면 지날 수 있으나, 백혼무인(伯昏無人) 같은 신왕(神王)이 아니면 모두 비틀거리며 기어서 건너니 낯빛을 잃지 않은 사람이 없다. 잔교가 끝나자 불일암(佛日庵)이 나타나니 아스라이 구름 끝에 풍경을 매단 것 같다. 암자에서 십여 보 거리에 석대(石臺)가 있어 2,30명이 앉을 수 있으니 그 높이는 몇 천 길〔仞〕인지 알 수가 없다. 향로봉(香爐峯)이 왼쪽에 있고 청학봉(靑鶴峯)이 오른쪽에 있는데, 모두 우뚝 솟아 위로 푸른 하늘에 닿아 있어 웅대하기 짝이 없다.
그 아래에 어두컴컴하여 구름과 나무가 서로 어우러진 곳이 바로 청학동이다. 중이 말하기를,
“옛날에 한 쌍의 청학(靑鶴)이 푸른 절벽 사이에 둥지를 틀고 봄과 여름에 새끼를 기르기 위해 돌아오곤 하였기에 이 골짜기가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천백 년 동안 왕래가 그치지 않다가 형체와 그림자가 끊어져 없어진 지가 지금 10여 년이 됩니다.”
라고 하였다. 나와 노승은 오랜 동안 탄식을 하였다.
폭포가 향로봉의 오른쪽 어깨에서 쏟아져 내려 대의 아래에 이르러 웅덩이를 이룬다. 긴 무지개가 구부려 물을 마시고 흰 띠가 허공에 매달린 것 같은데, 벼랑에 부딪히고 골짜기를 돌아 쿵쿵거리는 것이 천둥이 치고 전쟁터의 돌격하는 소리 같아 참으로 절경이다. 대(臺)에서 조금 왼쪽으로 5,6보쯤에 또 대가 있는데, 대 위의 돌에 ‘완폭대(翫瀑臺)’ 3글자가 새겨져 있다. 거처하는 승려는 이것과 석문의 큰 글씨가 모두 최치원 공의 필적이라고 알고 있으나, 신선과 범인(凡人)의 필획은 현격하게 다른 법인데 세상에 진위(眞僞)를 구별할 수 있는 일척안(一隻眼)이 없으니 애석하다.
배회하는 사이에 어두운 구름이 다리 밑에서 일더니 가랑비가 흩뿌린다. 이슬비가 옷을 적시기에 불일암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 천봉만학에 괴이한 나무와 기이한 바위가 구름과 노을이 감고 펼치는 사이에 숨었다가는 드러난다. 정신이 서늘하고 뼈가 오싹하며 쓸쓸하고 그윽하여 신옹(神翁)과 우객(羽客)을 만난 것 같으니 참으로 신선 세계이다. 다만 암자에는 거처하는 승려가 없어 향불이 끊어진 지 오래되었으며, 집은 오래되고 비가 새 단청(丹靑)이 희미하다. 산중의 가장 유명한 사찰이 거의 무너지게 되었는데도 손을 대어 중수(重修)하는 사람이 없으니, 선가(禪家)의 쇠박(衰薄)함을 또한 알 수가 있다.
잠시 뒤에 비가 그치자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해거름에 쌍계사로 돌아와 묵었다.
○12일 기해. 흐렸다가 갬.
일찍 출발하여 신흥동(神興洞)으로 향하려 하는데 노승(老僧)이 석문까지 따라와 이별을 고하였다. 이윽고 석문을 나와 다시 무릉계(武陵溪)를 건너 신흥동으로 들어가니 동천(洞天)이 넓고 탁 트였다. 흰 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맑은 여울이 세차게 흐르며, 기이한 봉우리와 푸른 절벽이 우뚝 서서 둘러싸고 있다. 칼날이 허공에 빼곡하고 옥순(玉筍)이 이삭을 모은 듯하여 눈앞이 환하고 정신은 아찔하여 미칠 듯 흥이 일어난다. 시내의 북쪽에는 우거진 숲이 솟아 있는데, 그 나무는 소나무, 단풍나무, 종가시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많으며 나머지는 모두 그 이름을 알지 못하겠다. 번성한 가지와 오래된 넝쿨이 층층의 절벽과 무너진 바위에 섞여 있는데 얼기설기 덮이고 얽힌 길이 그 속으로 나 있어 위로 하늘을 볼 수 없다. 해가 정오쯤인데 가느다란 햇살도 땅에 비치지 않으니 이 또한 장관이다.
10여 리를 가서 골짜기 입구에 이르니 ‘삼신동(三神洞)’이라 새겨진 돌이 서 있는데 시승(詩僧) 각성(覺性)이 나와서 나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다. 검은 두건과 도납(稻衲)을 입고 물가에 서 있다가 내가 오는 것을 보고는 합장을 하고 한 번 웃으며 옛 친구처럼 노고를 위로한다.
골짜기의 물은 삼신동에서 흘러 나와 신흥동의 물과 합해진다. 시내 위에 외나무다리가 가로놓여 있는데, 그것을 가리키며 ‘홍류교(紅流橋)’라고 한다. 내가 각성 대사에게 묻기를,
“내가 홍류교를 들은 지가 오래되었다. 지금 다리가 없는데 다리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라고 하자, 각성 대사가 크게 자랑하기를,
“옛날에 시내를 건너질러 5칸의 부루(浮樓)를 지었는데 금빛과 푸른빛이 서로 빛나며 좌우의 난간이 물결 속에 그림자를 비추었습니다. 유람하는 사람과 승려가 서로 왕래하였으니 참으로 경치가 빼어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쟁에 불탄 뒤로 아직까지 중건하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지금의 이른바 홍류교란 것은 그 모칭(冒稱)한 것이 철로보(鐵鑪步)와 비슷한 경우로구나.”
라고 하며 함께 한 번 웃었다. 마침내 서로 이끌고 1리 정도를 가서 절에 이르렀는데 절 또한 난리 뒤에 새로 지은 것이다. 중이 말하기를,
“건물의 규모는 이전보다 더 화려하지만 다만 능파당(凌波堂)은 아직 짓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금사 도량(金沙道場)은 화려한 건물이 영롱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종종걸음을 하여 제멋대로 할 수 없게 한다.
절 앞에 있는 누각에 대사와 함께 올랐다. 산중의 백 갈래의 시내가 합하여 한 줄기 물이 되어 누대 아래에 이르러 연못이 되었는데 깊은 곳은 검은 색을 띠고 얕은 곳은 맑다. 물 건너편 봉우리들은 모두 이 누대를 향하여 인사하는 듯하다.
이날도 새벽에 비가 잠깐 오다가 저물녘에 활짝 갰다. 내가 홍류교에 도착하자 가랑비가 또 내리더니 누대에 오를 때는 반은 흐리고 반은 맑아 구름과 노을의 농담이 변화무쌍하다. 문득 큰 물고기가 물을 차고 뛰어오르는 것을 보았는데, 멀어서 그 이름을 분별할 수는 없지만 길이가 한 자 정도 된다. 산 나무의 진기한 새는 온갖 소리로 지저귀고 물속의 물고기도 뛰어오르니, 저들이 비록 정(情)이 없으나 나를 위하여 앞을 다투는 듯하다.
나이 어린 중들은 옥 골격과 얼음 같은 피부에 눈썹과 눈이 그린 것 같은데, 각성 대사를 에워싼 자들이 수십 명이고 그 나머지 행랑 아래의 뜰에 있는 자는 십백(十百)으로 무리를 이루니 모두 그의 문도(門徒)이다. 서로 밀치고 다투며 내 자리 앞으로 다가와서는 각각 경전을 들고 제목을 써달라고 청한다. 내가 다 써줄 수는 없다고 사양하고 몇 권에만 써서 주었다. 각성 대사가 말하기를,
“빈도(貧道 중이 자기를 낮추어 일컫는 말)가 조대(措大)의 명성을 들은 지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만났으니 원컨대 시 한 수를 지어주시면 훗날의 면목(面目)으로 삼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소옹(素翁) 제공(諸公)이 지어준 시를 꺼내어 나에게 화운을 요청했다. 내가 사양하지 못하고 붓 가는 대로 글을 지어 주었다.
내가 각성 대사와 하룻밤 동숙(同宿)하면서 법을 묻고 도를 논하고 싶었으나, 관청을 떠난 지가 오래되어 맡은 일이 지체되었으며 게다가 노복〔僕從〕의 식량이 바닥났기 때문에 차를 마시고 점심을 먹은 뒤에 절문을 나왔다. 이른바 세 걸음마다 고개를 돌리고 다섯 걸음마다 멈춘다고 한 것은 옛사람이 나의 마음을 미리 안 것이다. 홍류교에 이르러 대사와 이별하고 저녁에 하천(下川 화개동 밖의 마을 이름)의 촌사(村舍)에서 묵었다.
○ 13일 경자. 맑음.
날이 저물자 다시 두치(頭峙) 강나루를 건넜다. 오산(鰲山 장성)의 관인이 본현(本縣)의 급한 보고〔馳狀〕를 가지고 말 앞에서 바쳤다. 그것을 받아서 보니 노적(老賊 후금(後金))이 요양(遼陽)을 침범하여 2~3개의 진보(鎭堡)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므로 중국 조정에서 바야흐로 병사를 일으켜 토벌하려 하는데, 우리나라는 중국의 명령을 받들어 군현에서 병사를 모아 출정에 맞춰 달려가려 한다는 것이다. 총병(摠兵) 전령이 매일 이르므로 아전이 와서 다급함을 보고한 것이었다. 저녁에 광양현에서 묵었다.
○ 14일 신축. 맑음.
일찍 일어나 편지를 써서 지봉 공에게 보냈다. 군무(軍務)가 바빠서 감히 길을 돌아가다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따르지 못하는 사유를 알리는 한편, 환선정의 판상 운을 사용하여 율시 두 수를 지어 사과하였다. 곧장 승평부(昇平府 지금의 순천(順天)) 북촌(北村)의 부유(富有) 길을 따라 산골짜기 백천 굽이를 모두 지나 날이 어두워질 때에 비로소 동부(洞府)의 조금 평평한 곳에 도착하였으니 바로 동복현(同福縣 현 화순군 동복면)이다.
현에 협선루(挾仙樓)가 있으나 황폐한 숲 너머로 보일락 말락 한다. 채찍을 가하여 현에 도착하여 누대에 올라 자세히 감상해보니, 동우(棟宇)는 정미하고 화평할 때 지었는데 난리를 겪고도 온전하다. 아래에 있는 두 연못의 청하(靑荷) 일만 줄기가 꼿꼿하게 솟은 것이며, 큰 대나무 천 줄기가 남쪽 담장 밑에 우뚝 솟은 것이며, 서석산(瑞石山 무등산(無等山)) 한쪽 봉우리가 모두 앉은 자리 곁에 있으니, 깊은 산중에 이런 아름다운 경치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동생 정자(正字) 군이 몇 년 전에 이 누대를 보고 돌아와서 나에게 매우 자랑을 하며 말하기를,
“절대 가인이 빈 골짜기에 있는 것과 비슷하였습니다.”
라고 했으니, 이 말이 참으로 좋은 비유이다.
○ 15일 임인. 흐림.
화순현을 향해 출발했는데 도중에 소나기를 만나 일행이 모두 젖었다.
○ 16일 계묘. 흐림.
빗줄기가 밤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지만 치소(治所)로 돌아가는 것이 급하여 도롱이를 쓰고 출발했다. 능양현(綾陽縣 현 화순군 능주면)의 앞에 이르러 곧장 연주정(聯珠亭)으로 갔다. 올라가 경치를 바라보니, 그때에 시냇물이 불어 수위가 한창 높아 모래톱이 모두 잠겼으며, 먹구름이 뒤섞여 강 위의 열두 봉우리는 나환(螺鬟)이 반쯤 가려졌으니 경취(景趣)가 매우 아름답다. 어둠을 타고 현에 들어가니 고을 수령은 벼슬이 갈려서 가고 새로 임명을 받은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다. 객관은 매우 쓸쓸한데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관기 몇 사람이 찾아와 배알하기에 술을 몇 순배하고 파하였다.
○ 17일 갑진. 맑음.
남평현(南平縣)에서 잤다.
○ 18일 을사. 맑음.
해양(海陽) 서촌(西村)의 길을 따라 횃불을 들고 현에 들어가서 다음날 출발하였다. 해낭(奚囊)에 담긴 시편을 점검해 보니 5언, 7언 율시가 모두 21수이며, 절구는 5수, 배율은 1수로 모두 27수이다. 백선명의 집에서 지은 절구와 환선정의 율시 및 윤희백에게 준 율시, 벽파정의 배율 이외에 나머지는 모두 소옹 제공(諸公)들이 입산 때 따라 지은 운자를 사용하였으니, 대개 내가 전일에 했던 말을 실천한 것이다. 옥소암(玉簫庵)의 단율(短律) 3수는 내가 불일암에서 비를 맞고 쌍계사로 돌아오느라 가서 탐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빠뜨렸다.
예전 신묘년(1591, 선조24) 내 나이가 아직 젊었을 때(14세) 가군(家君)을 모시고 두류산의 북쪽 방면을 찾아갔다. 백장사(百丈寺)에서 묵고 금대암(金臺庵)에 들어갔으며, 용유담(龍游潭)을 구경하고 군자사(君子寺)로부터 천왕봉에 올랐다. 인하여 실상사(實相寺)의 무너진 터를 질러가서 변 산인(邊山人)이 숨어사는 곳을 방문하였다. - 산인의 이름은 사정(士貞)이니 산중에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참봉에 임명하였는데 나오지 않다가 또 부르자 곧 부임하였으나,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버리고 산으로 돌아갔다. 나이 70세에 죽었다. - 처음부터 끝까지 10여 일 동안 마음대로 구경을 하였다.
그 다음해에 남쪽 방면을 탐방하려고 하였는데 난리를 만나 그만두었고, 중년에는 낮은 관직에 연명하느라 바빠서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백수(白首)의 나이에 비로소 숙원을 풀어 선산(仙山)에 자취를 붙였으니 또한 운수가 있었다. 안타까웠던 것은, 바야흐로 내가 두치 나루를 건너 악양과 화개를 지나 쌍계사로 들어갈 때 골짜기에 사는 백성들이 이따금 산기슭을 가리키며 옛날에 아무개와 아무개 사람이 은거한 곳이라고 알려주어 사람으로 하여금 아득히 탄식을 일으키게 한 것이었다. 그 바위 골짜기에 집을 짓고 살던 당시에 그 마음이 이 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초년과 만년을 고찰해 보면 마음의 자취가 같지 않았을 것이니, 금년에는 산림에서 살다가 내년에는 성시에 살지 않은 자가 드문 것이다. 세상에 나가고 머무는 것과 드러내고 감추는 것이 비록 한 시절에 경중(輕重)이 있지만 모두 숲과 계곡에 부끄러움을 끼친 것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우리들은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산길에 걸음을 빌려 산에 들고 나는 것이 3일을 채우지도 못한 사람들이니 또한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돌아가면 마땅히 벼슬을 버리고 늙은 시절을 흰 구름이 이는 곳에서 보내면서 종혜(棕鞋)와 대나무 지팡이로 이 산의 봉우리와 골짜기를 두루 찾아다니면서 나의 뜻을 마치리라.
이윽고 이 말로써 소옹 제공(諸公)에게 말하고 나서 붓을 들어 기록한다. 모년 모월 모일 제호주인은 쓴다.
제호속집 제1권
◯무진(1628)ㆍ기사년(1629) 사이에 변방의 우환을 염려하여 조야가 모두 두려워하였다. 무진년이 가고 기사년이 되어 서북 지방에 전란이 없자 백성들이 기뻐하였으니, 주상께서 오랑캐를 방비한 대책이 주효한 결과이다. 비록 나처럼 늙은이가 일명의 관직도 얻지 못했으나 산야 사이에 한가롭게 지내는 것은 실로 성주의 은혜이다. 붓 가는 대로 율시 한 수를 쓰니, 때는 기사년(1629) 신정 초 5일이다.
무진ㆍ기사년 교차하여 해가 바뀌니 / 龍蛇交際變年華
거리에 격양가가 기쁘게 들리네 / 閭巷欣聞擊壤歌
성주는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 聖主愛民如愛子
종신은 나라를 집안처럼 걱정하네 / 宗臣憂國若憂家
변방에 풍진 잠잠해진 걸 보았으니 / 喜看邊塞風塵靜
궁하게 살아온 세월 많다고 한하랴 / 豈恨窮居歲月多
강 집에 거문고 베고 편히 잠자니 / 江屋枕琴眠正穩
주렴 너머 해 지는 건 아랑곳 않네 / 任他西日隔簾斜
제호집발〔霽湖集跋〕
◯일찍이 듣건대, 정호음(鄭湖陰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이 60세부터 시 읊기를 중단한 것은 기운이 쇠약해진 때문이라 하니, 하물며 다른 사람은 어떻겠는가? 나는 금년에 역시 60세가 되었다. 묵은 상자에 보관하던 예전 시고를 찾아내 모두 산거(刪去)하고 열 가운데 두셋만 취하여 시 2권, 문 1권으로 엮었다. 아이들에게 그것을 쓰게 하여 후손에게 남겨주니 정호음의 뜻을 따르고 싶어서이다. 이제부터는 절필(絶筆)하여 늙은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련다. 그러나 혹시라도 남이 애써 지어달라고 하여 어쩔 수 없이 지은 약간의 시가 있으면 당연히 속권(績卷)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반평생에 쓸데없는 곳에 공 들이고 늙어서 생각해보니 한바탕 웃음만 나온다. 선비가 이 세상을 살아감에 저절로 심학상(心學上)의 즐거운 일이 있을 것인데 하필이면 구구하게 시율을 하겠는가. 정묘년(1627, 인조5) 겨울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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