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이론 기초
■書卷氣와 文字香
서예에는 작가의 생활과 인품이 배여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제된 생활과 수양된 인품을 얻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독서이다. 참된 독서는 사람을 궁극적으로 성인의경지에 이르게 한다. 성인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을 읽은 책이 가슴에 쌓여 청정한 기운과 우아한 향기를 뿜을 때 그 기운과 향기를 서권기, 문자향이라고 한다. 즉, 서권기란 책의 기운이요, 문자향이란 문자의 향기라는 말이다. 중국이나 한국의 고전 書論에는 대부분 서예의 가치와 예술성을 설명할 때 기술적인 기능의 연마보다는 서권기와 문자향의 함양을 훨씬 더 많이 강조하고 있다. 서예의 아름다움과 높은 격조는 바로 이 서권기와 문자향으로 인하여 창출되기 때문이다.
■字體와 書體
○자체는 篆書, 隸書, 楷書, 行書, 草書를 말한다.
○서체는 왕희지체, 구양순체, 안진경체, 송설체(조맹부체), 추사체 등을 일컫는다.
○서풍은 꼴이 없으나 존재하는 어떤 분위기를 말한다. 고려말 서풍, 추사풍, 석봉풍, 왕희지풍 등이다.
■서예작품 구성의 3요소
○필획(筆劃) 는 하나의 글자를 이루는 최소단위의 그음을 말함. 필획이 살아 있어야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
○결자(結字)는 필획들이 모여서 이루는 한 글자의 구조이다.
○장법(章法 )은 작품의 전체적인 어울림을 말한다.
※참고자료 :
서예관련 주요 서체 :서울 예술의 전당〈서예, 그 새로운 탄생전〉전시자료
1. 갑골문(甲骨文)
중국 은나라(상나라)의 복점용 구갑이나 짐승뼈에 새겨진 문자로, 계문 또는 복사라고도 한다. 1899년 왕의영, 유악 등에 의해 발견되었다.
허난성 안양의 은허에서 출토된 은대 후기경의 갑골에 많이 새겨졌고, 한자의 원초적 형식이 보인다. 도상문자적 요소로부터 많이 진보되어 <6서, 즉 한자>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다. 4000종 남짓한 문자중 4할 정도가 해독되고 있다.
2. 산씨반
중국서주시대 후기의 명이 있는 청동기. 기형은 반. 열인반이라고도 한다. 출토지는 분명치 않으며 腹部의 가문이나 夔文이나 權族의 도철문이 모두 특이한 형식을 나타낸다. 명문 장문으로 산씨외 열씨 사이의 토지경계 확정사실을 기록했다. 내용, 자체 모두 독특하여 모조제품이 만들어져서 현대 타이베이의 고궁박물관에 1기를 소장하고 있다.
3. 모공정(毛公鼎)
중국 서주시대 銘이 있는 청동기, 대표적인 청․도광연간(1821-50)말년, 산시성 기산현에서 출토했다. 복부 상부의 표면에 와문이 있다. 명문은 32행 497자로 현존하는 명문 중 가장 길다. 주나라 왕이 이 그릇을 제작시킨 모공에게 강기의 숙정, 정치의 부흥을 명한 것이 절혀 있으며 서주의 선왕(기원전 827~782)무렵으로 추정된다.
4. 상학경(相鶴經)
중극 청대 중기 문인이자 서화가인 금농의 작품이다. 30대부터 여러 지방을 편력하다가 만년에 60세경부터 양주로 이주, 그곳에서 사망했다.
5. 석고문(石鼓文)
당나라 산시성 파오치현에서 당나라 때 발견된 석각문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각문으로 큰 북과 같아서 석고문이라고 한다. 원래는 700자 이상이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272자만 남아 있다.
6. 목간
목독 또는 묵첩이라고 하였다. 나무를 폭 3cm, 길이 약 20-30cm로 긴 판자모양으로 잘라 거기에 묵서하였다. 원래는 대를 잘라서 사용하다가 목편을 사용하였는데 종이가 발명뙬 때까지 사용되다.
7. 장천비(張遷碑)
예서법첩의 하나로 비의 높이는 높이 2.85m, 너비는 0.96m. 15행으로 42자씩 음각되어 있다. 명나로 초에 출토되었으며 전서체와 예서체로 매우 교묘한 글씨라는 평을 받았다.
8. 사신비(史晨碑)
사신비는 17행에 36자, 후비는 14행에 매행 36자고 각되어있으며 노국의 상인 사신이 공묘의 제사를 성대히 행하였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각한 것이다. 한의 예서가 가장 성숙한 시대의 작품으로 그동안에 축적되어온 예서의 필법과 결체 그리고 장법이 사신비로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된다.
9. 난정서(蘭亭序)
중국 동진 왕희지의 행서첩이다. 동진 묵제의 영화9년(353) 3월 3일 회계산음(저장성 소흥) 난정에서 당시의 명사 41명이 모여 계추를 하고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유흥을 하고 시흥에 젖었다. 그때 지은 시집의 서를 왕희지가 썼고 옛날에는 『임하서(臨河序)』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난정서』라고 하며 또 『계첩(稧帖)』이라고도 한다.
당태종은 왕희지를 숭배하여 그의 글씨를 많이 수집하였는데, 특히 『난정서』에 관심이 깊어 지영(智永)의 제자 변재(弁才)에게 사자 숙익(肅翼)을 보내어 이것을 교묘히 빼돌렸다고 전한다. 태종은 그것을 평생 옆에 두고, 임종에 임하여 소릉(昭陵)에 순장하라고 하였다 한다. 현재 전하는 것은 정관년간(貞觀年問, 627~649)에 내부에서 꺼내어 베낀 것과 그것을 다시 베낀 것들이다. 왕희지의 대표적 행서이며 전28행으로 이루어졌고 수소(隨所)에 도말(塗抹)한 문자가 있고, 고서(稿書)의 체를 이룬다. 또 묵탁에는 구양순의 임사라고 하는 정무본(定武本)이 대표적이다.
10. 시평공조상기(始平公造像記)
북위의 태화 2년(498)에 비구인 혜성이 남편인 낙주자사 시공평의명복을 빌며 불상을 조성하고 남긴 조상기이다. 고양동의 북쪽벽에 위치하여 10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행 13자 해서로 새겨져 있다. 맹달이 문장을 짓고 朱義章이 글씨를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1. 장맹룡비(張猛龍碑)
북위에서 522년에 세워진 장맹룡의 비에 해서로 쓰여진 26행이며 1행에 46자가 씌여 있다. 장맹룡이 조상의 업을 계승하여 학교를 세워 교육을 일으킨 송덕비이다. 용문서풍을의 정통을 이어받은 명필로 부위석각 중 가장 걸출한 것 중의 하나이다.
12. 차운진태허견희이롱시첩(次韻秦太虛見戱耳籠詩帖)
송나라 진관이 일찍이 시를 지어 소식의 귀먹은 것을 조롱하므로 소식이 그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시이다. 소동파이며 적벽부를 지은 문인이다. 행서체 글씨이다.
13. 이백억구유시초서권(李白憶舊遊詩草書券)
狂草의 형식으로 썼으며 이백이 장안에서 조정에 출사하려 했으나 현실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친구인 원연을 만나 헤어지며 북쪽의 찬대에서 적막하게 숨어살던 심정을 자신의 처지와 빗대어 적은 글이다.
14. 미불 자서첩(米芾 自敍帖)
미불은 북송의 서화가이다. 자서첩은 행서체이다. 모친이 영종의 황후를 모셨던 관계로 과거에 의지 않고도 처음엔 비서성교서랑, 만년에 서화학 박사에 발탁되었지만 관직이 맞지 않았다. 송대 4대가의 하나로 불리운다. 행서체 글씨이다.
15. 쟁좌위고(爭座位稿)
764년 안진경이 행서체로 정양군왕 곽영부에게 보낸 편지인데 그 내용이 좌위를 논한 것이라고 논좌위라고도 하며 여곽복야서라고도 한다. 당시 상서우복야 정양군왕이던 곽영부가 조정의 신임을 기화로 교만 사치하여 조정신하의 서열좌위까지 무시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그의 비행을 점잖게 나무라고 반성을 촉구한 것이다.
16. 자서고신첩(自書告身帖)
고신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 받는 사령장인데 이첩은 안진경 만년의 가장 원숙기의 작품으로 대표된다.
17. 九曲의 노래
왕탁은 명말청초의 서화가이다. 명 멸망 때 남경 복왕을 찾아갔으나 1645년 청에게 항복했다. 청에서는 예부상서에 올랐고 행서는 왕희지를 숭앙하고 해서는 안진경의 풍을 배워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18. 원진묘지명(元珍墓誌銘)
이 비는 북위 연창 4년(514년) 묻힌 원진의 공덕을 기린 비인데 낙양에서 출토되었으나 지금은 소재가 불분명하다. 원진은 477-514까지 관직을 지낸 사람이다. 비문을 지은이와 글쓴이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북위 해서의 모범적인 전형이므로 해서 입문과정에서 반드시 임서해볼 가치가 매우 높은 법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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