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무서록 외

청담(靑潭) 2020. 3. 19. 12:32

無序錄 외

 

이태준(1904-1960년대 초)전집 5

 

이태준(李泰俊)은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상허(尙虛), 상허당주인이다. 철원의 간이농업학교를 거쳐 휘문고보를 다니다가 동맹휴교를 주도하여 퇴학당했다. 이후 늦은 나이에 도쿄의 조치대학 예과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 부장으로 일하는 한편 구인회에서 활동하였다.

1925년 단편 「오몽녀」를 통해 등단한 이후 「달밤」(1933), 「까마귀」(1936), 「복덕방」(1937) 등 단편소설의 미학을 보여 주는 다수 작품을 발표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순문예 잡지 《문장》을 주재하며 역량 있는 신인들을 발굴하기도 했으나 창작물로서는 통속 소설에 가까운 『화관』, 『사상의 월야』, 『청춘무성』 등을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적인 미의식을 드러낸 수필이나 문장론 등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보이며 『무서록』, 『문장강화』 등의 책을 발간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서 활동하며 일제 말기의 행적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결의를 담은 「해방전후」를 발표했다.

1946년 월북 이후 방소문화사절단으로서 소련을 방문하고 『소련기행』을 썼다. 1956년 소련파의 숙청에 연루되어 함남의 노동신문사 교정원, 함흥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노동자로 일했다. 사망 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무서록』은 이태준이 1930년대 여러 잡지와 매체들에 발표한 수필, 문학론, 여행기 등의 산문을 모은 산문집으로서 모두 57편의 산문이 실려 있다. 이 글들은 크게 수필, 문학론, 기행문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개는 수필이지만, 「단편과 장편」, 「조선의 소설들」, 「소설의 맛」 등과 같이 자신의 문학론을 펼친 글이나 「해촌일지」, 「만주기행」과 같은 기행문도 실려 있다.

순서 혹은 질서가 없는 글이라는 뜻의 ‘무서록(無序錄)’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글의 배열은 자유롭고 또한 부나 장과 같은 분류도 하지 않았다. 질서 없음이란 수필의 본질적인 성격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태준의 수필은 이름다운 문장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아름다운 문장은 “冊만은 ‘책’보다는 ‘冊’으로 쓰고 싶었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冊’답다.”(「冊」)라는 말에서 보듯이 옛것을 숭상하는 상고 취향으로 치닫는다. 이는 조선적 · 동양적 미의식이라 평가되기도 하지만, 당대 일본의 동양주의와 친연성을 갖는 식민지적 무의식이라 평가되기도 한다. 이 책 마지막에 실린 「만주기행」도 후자를 증명하는 글로 자주 인용된다.

『무서록』은 1941년 9월 5일 박문서관에서 초판 발행되었고 재판과 삼판은 같은 출판사에서 각각 1942, 1944년에 발간되었다.

 

서언

우리 佳苑이 다달이 구입하는 책이 상당하나 나는 평소 별로 읽지를 않는다. 대부분 자기 취향의 책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소설집이 아닌 수필집이어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한 사람의 마음과 삶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은 역시 수필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언론계에 종사하던 유명 문학가(소설가)가 쓴 수필이니만큼 무척 재미있고 얻을 것이 클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친일작가이면서 동시에 월북작가이나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그의 사상성은 결코 민족주의자도 강한 사회주의자도 아니다. 그저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수재로써 언론에 몸담고 소설가가 되어 변화하는 문화를 향유하며 살아간 인텔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의 강남좌파라고나 할까?

일백 수 십 편에 달하는 수필과 감상문과 일기, 편지, 좌담회 등의 내용이므로 읽으면서 주의 깊게 바라본 내용만 간추려 적어본다.

 

1. 조숙

오래 살고 싶다. 좋은 글을 써보려면 공부도 공부려니와 오래 살아야 될 것 같다. ...인생의 가을, 70, 80의 노경에 들어 보지 못하고는 정말 ?즐거움?, ?슬픔?은 모를 것 같지 않은가?

 

2. 만주기행(1938) : 동선당

同善堂이란 고아, 걸인, 빈민, 그리고 藝酌婦(술집작부), 창기, 사생아, 이런 불우한 인생 칠백여명을 수용하고 있는 대규모의 자선기관이다. 30여년 전(1910여년 경), 左寶貴(중국인인 듯)라는 개인의 사업이 자란 것으로 特書할 봉천(심양, 오늘 날의 센양) 명물의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은 다른 곳 고아원이나 양로원에서는 보지 못할 도덕과 시설이 있는 때문이다. ...독자생업이 불능한 노인들은 물론이거니와 樓主의 학대를 못 견디어 도망 온 예작부, 창기, 강제매음을 당하게 된 부녀들까지 받다 보호 선도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부부싸움을 하고 온 여자까지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 아내는 대개는 석달이 못되어 흔히는 남편 쪽에서 화해를 신청하고 데려간다는 것이며 데려갈 사람이 없는 여자는 창기든 처녀든 人妻든 동당이 주선하여 상당한 자국에 혼인을 시키는데 그 색시들의 살림솜씨가 좋기 때문에 뭇 총각, 홀아비로부터 求妻申込이 가끔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진기한 풍경은 구산소의 求生門인데 사생아의 피살을 막기 위해 빈민 아니라도 조산을 청하는 여자면 얼마든지 환영할 뿐만 아니라 산모의 주소, 성명, 임신관계 등엔 일체 불문에 부치는 것이요, 아이를 낳아 놓으면 아니만 남을 뿐 산모는 언제든지 쑥 빠져 자유로 자취를 감추게 한다는 것이다. 

구생문이란 뒷골목 길에 나산 솟을 대문 같은 데다 어린애 하나 들여놓은 만한 구멍에다 함지 같은 것을 놓은 것이다. 그리고 어린애를 놓으면 함지가 눌리어 초인종이 울리도록 장치되었다. 누구나 무슨 소속은커녕 얼굴한번 내어놓을 필요도 없이 기르기 딱한 아니면 이 함지에다 갖다놓고만 가면 그만이 되어 있다. 죄는 덮고 불행만을 구하는, 성스런 자선기관이다.

 

3. 만주기행(1938) : 만보산 사건에 대한 취재 기록

?농작물은 대개 어떤 겁니까? ?

?베, 조, 수수, 메밀, 콩, 옥수수, 감자 대개 그런 것들과 채소지요.?

?여기 와 지내는 분들은 생활정도는 평균합니까??

?꼭 같다곤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장자워후 만보산 사건(1935) 일어난 후로 벌써 여러 해 아닙니까? 아마 이민부락으론 기중 자리 잡힌 편인가 봅니다. 그리고 시찰단이 오면 흔히 이 동네로 다리고 오드군요.?

? 이 동넨 다 자작농입니까??

?자작농은 별로 없습니다. 모다 滿人의 땅을 차입해 가지고 하니까 결국 소작 셈이죠. 애초에 이 만보산에 들어온 사람들이 돈을 모아 가지구 荒地차입운동을 한 겁니다.?

?네 자세 좀 말씀해 주십시오.?

?胡가란 여기 사람을 구문을 주고 내세서 장춘 있는 만주인 부호의 땅을 오백상(五百晌, 一 晌 二千坪)을 차입한 겁니다. 그때 계약 관계는 지금 잊었습니다만.?

?네.?

?그런데 이 근방에 만주인 토민들이 들구 일어납니다그려.?

?왜요??

?조선 사람이 와 논을 풀어 놓면 저의 밭들이 결단 난다구 들구 일어났습니다.?

?왜 그 사람 네 밭이 결단 납니까??

? 오시면서 보셨지만 여긴 벌판이 모다 장판방 같지 않어요? 그러니까 논에서 나오는 물이 빠질 데가 없습니다. 저 가고픈 대로 사방으로 흩어지니까 그 옆에 있는 밭들이야 사실 결단이죠.?

?그럼 그 사람네두 밭을 논으로 풀면 좀 좋아요??

?그 사람넨 수종할 줄 모릅니다. 그러구 무슨 사람들이 이밥을 먹으면 반찬이 따로 들 뿐 아니라 배가 아프답니다그려. 그리구 베농살 지어놓는대야 베를 어디 갖다 팔아야 할지도 모르구요......그저 저이 먹을 것을 저이 밭에서 소출시키는 걸 기중 안전하게 생각ㅎ라니까요.?

?반대운동이 어떻게 됐나요??

?그 사람네들도 사실 우리가 넓이 이십여 척이나 되는 큰 수로를 내니까 단단히 서두르더군요. 여러 백 명이 관청으로 달려갔습니다. 조선사람 때문에 저이가 못살게 된다니까 관청에선 개간권을 허가해 주고도 무책임하게 모른다고 내댑니다그려. 백성들은 조선사람들에게 양식두 안 팔죠, 우물도 못쓰게 허죠, 그 때 생각을 하면......결국 우리도 사생결단으로 대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갖구 온 양식, 갖구 온 미천은 다 그 땅 차입하는 운동과 봇도랑에 집어넣어 봇도랑이 거이 거이 완성 돼가는 데 가라니 어딀 갑니까? 갈 노자도 없고 가서 농사 준비할 미천이 있어야죠? 그걸 물어준다고 하더라도 이십리나 되는 봇도랑을 내게 우리가 피땀을 어떻게 흘렸는데.....항차 그저 어디로구 가라구 내댑니다그려. 토민들은 우리가 파논 봇도랑을 군데군데서 작구 메웁니다그려. 그러면 우린 또 달려가 그들을 죽일듯이 으르대구 또 파냅니다그려. 말이 웃읍지만 사생결단하는 투쟁이더랬습니다. 우린 밤에도 팠습니다. 나중엔 토민들이 다시 관청으로 가 야단을 쳐 결국은 중국 군대가 나와 총을 막 쏘게 됐습니다. 머리 우로 총알이 씽씽 지나가지만 우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긴 마찬가지라 그냥 도랑 속에서 흙만 파드랬습니다. ?

하고 주인은 그때 광경이 눈 속에 새로운 듯 땀 없는 이마를 몇 번 문지른다.

그러나 그때 그들의 총알에 명중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한다. 멀리서 위협하느라고 탄환이 공중으로만 지나가게 쏘아 그런지 한 사람도 상한 사람은 없었고 몇 청년들이 잡혀가 여러 날 갇히었다가 나왔을 뿐인데 오히려 조선에서 피차에 살상이 생겼다는 것은 여간 유감이 아니라고 한다.

아무튼 군대 출동은 별문제로 하고 만일 그 토민들이 살생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면 그 토민들의 몽둥이에라도 희생자가 없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나는 내일이나 모레면 山高水麗하다해서 고려란 나라이름까지 생긴 내 고향 금수강산에 들어서려나 생각하니 황막한 벌판에 남는 저들을 한 번 더 돌아볼 염치가 없어졌다.

 

4. 금화원의 언덕길(1931)

우리는 벌서 결혼한 지 1년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까지도 혼인전과 같이 그리웁게 그리웁게 지낸다. 만나려니 하던 날 만나지 못하면 S와 남이 된 것처럼 못 견디게 서글프다.

 

5. 만년필(1934)

나는 다른 방면에 박하더라도 만년필에게만은 제법 흥청거렸다. 그리고 고급은 아니지만 ?콩클린?이나 ?무아?나 아무튼 서양제가 아니면 사기를 싫어하였다.

왜 서양 것을 비싸게 주고 즐겨 샀느냐 하면 첫째, 펜의 감촉이 좋고 그 촉감이 여간 4, 5년 쯤으론 변하지 않는 점과 둘째, 잉크가 고르게 나오는 것과 셋째, 대나 크립이나 모양이 단연 우수한 점에서도 넷째는 바다를 건너 먼 나라에서 왔다는 정에 울리는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끌을 쓰는 펜은 내 사랑하는 만년필은 아니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역시 내 사랑하는 만년필의 실종에서거니와 최근 5, 6년간 길들여온 보스톤 무아 회사제의 만년필을 며칠 전에 경무대 마당에서 베이스 볼 하러 갔다가 잃어버린 것이다. ...

 

6. 고통과 불편(1935)

가정생활도 인간의 생활이다. 예술가로 살려는 역시 내 자신의 일면 생활이다. 물질 때문에 가끔 불편은 느낄 뿐, 그것 때문에 나의생활이 고통하는 적은 없다. 불편에 그칠 뿐 내 생명의 얼굴을 찡그리게까지 하는 고통은 아니다. ....

 

7. P군 생각(1935)

●갈듭회 : 1921년 창단된 고학생들의 친목단체

●갈듭만주(두) : 만두에 갈듭회 낙인(서로 손을 잡은)을 찍은 만두

 

8. 집이야기(1935)

지난봄에 창의문 밖에 있는 전 대원군의 별장(석파정)을 구경한 일이 있다. 워낙은 김모라는 당시 재상이 지은 것인데 뒤에 대원군이 가진 것이라는데 첫째 이상한 것은 그렇게 좋은 재목으로 그렇게 아끼는 것이 없이 짓는 집을 왜 요즘 집장수들의 집처럼 간사를 좁게 지었나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까닭은 그때 사람들이라고 키가 더 작았던 것도 아니요, 재목을 아꼈음도 아니요, 다만 주인의 이만하면 족하다는 겸양에서 나온 것이었다. 별장을 지을망정 고대광실에 거드럭거리지는 않겠다는 그 주인의 겸손이었다.

 

9. 악 아닌 악(1934)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을 싫어한다. 이것은 벌이 있어야 할 감정이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한다면 전에도 이 산양선에서나 동경 등지에서 조선 사람을 만날 때 대체로는 반갑기만 하지 않았다. 이것은 나뿐이 아니요 조선 밖에 나와 보는 모든 동포들이 대개는 경험해 보는 감정이다.

...조선 민족은 노동복도 없거니와 여행복도 없는 민족이다. 가만히 도사리고 앉았어야만 할 의복이다. 그런 옷으로 차를 탄다 배를 탄다하고 이틀 사흘씩 볶이고 난 조선 사람들의 옷은 워낙 자전차에부터 을리지 않는 옷이거니와 기차에서도 을리지 않으며 또 벌써부터 너무 더럽고 꾸기었다. 그런 옷에 싸인 사람 그 주인공 역시 눈치에나 행동에나 기선생활 기차생활에 훈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남은 한 번 주춤하고 말 것이면 이들은 기어이 쓰러지고 말아 귀엽지 않은 인기를 모으는 것이다.

차를 사 마실 돈은 있되 미처 생각이 돌지를 않아서 세면소나 세면소에 물이 없으면 변소에까지 가서 물을 따라 오되 그 나무때기 벤또 그릇에 암아 가지고 그 비칠비칠하는 주제에 다 새기 전에 먹일 사람에게까지 오느라고 달음질을 치는 것이다. 양 옆에 있는 사람들의 발등이 깨끗한 채 있을 리 없다. 심한 사람은 도야지를 보듯 눈을 흘긴다. 옆에서 이런 광경을 보는 조선인 者의 마음이 편할 수 없는 것이다.

 

10. 러스킨 문고(1936)

조선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도 동경의 골동품점들은 우리의 걸음을 급하게 하는 것이다. 서울 상인들은 부호나 친면이 있는 객 이외에는 진품은 보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진품이라 할 만 한 급엣 것은 서울서 구경할 새가 없이 기민한 상인들의 연락으로 동경 와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고려자기나 이조자기나 간에 또 목공물에 있어서도 명품을 구하려면 대가는 몇배라 하더라도 동경에 와 구하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다.

 

11. 동아, 조선 양 신문에 소설 연재하던 회상(1940)

신문사 끼리 얼마쯤 대립, 경쟁은 나도 짐작하지만 동아와 조선이 그처럼 혈안이었음은 나는 그제야 처음 놀랐다. 작당 편파에 망했다고 밤낮 붓으로는 떠들던 그 지도자들이 다시 黨으로 派로 몰려서 소곤소곤, 오글오글하던 것은, 차라리 지금와선, 우리 자신을 깊이 반성하는 반동으로 시원스럽기도 한 것이다.

 

12. 의무진기(意無盡記 1943)

우리 때 중학은 오늘의 중학과는 여러 가지가 달랐다. 일학년에 나룻이 시커먼 삼십객이 수두록하였고, 국어는 나부터도 ?히라까나?를 몰랐고, 그 대신 한문으로는 七書를 읽은 사람이 수두룩했다.

...나는 문학을 할까 미술을 할까 한동안 망설이었다. 미술을 공부하면서도 문학은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동경역을 내렸을 때 주머니에는 일원 육십전밖에 없었던 나라, 결국 고학하기에 편한 문학으로 쏠리고 말았다.

 

13. 목포 조선 현지기행(1943)

...나라일이라도 한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 인간사회, 전 지구위에 큰 개혁을 위해 출정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일개 초목으로서 이에 더한 영달이 없을 것이었다. ...나는 이번 문인보국회의 일원로서 총력동맹의지시를 받아 이런 나무들이 환생하는 목포조선철공회사의 조선현지를 구경하게 된 것이다.

 

14. 인민대표회의와 나의 소감(1945.11)

8월 15일도 이미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우리의 해방이 우리 자력 만에 의한 것이 아니었던 만치 우리에게는 자유의 열락을 만족할 겨를도 없이 너머나 비극적인 정치적 시련이 급박히 강요된 것이다. ...자본주의사회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특권층의 요구와 이미 총독정치시대부터 부절히 싸워오던 노동층의 혁명적 요구는 안으로 불상용의 대립이며 밖으로는 성격과 이해가 상반되는 미소의 대립이 우연이라기보다 이도 또한 자연한 정세로 우리 국토의 38도 선상에서 그 선봉을 맞대이게 된 것이다. ...

민족문화건설을 위해 총독정치를 적극으로 대항할 힘도 없고 민족문화를 도외시하던 그때의 좌익운동엔 가담할 필요가 없던 나는 서제 속에서 명맥을 지키는 길밖에 없었다.

 

15. 먼저 진상을 알자(1946.1)

8월 15일 우리는 곧 독립이 될 줄 알았다. 대통령에 누구, 육군대신에 누구, 민중은 우리 독립국의 각료 성명까지 외이며 있었으나 현실로 나타난 것은 36도선이요, 북에는 인민위원회 남에는 미군 하-지중장의 천하였다.

...최근 36년간 우리 민족의 교육 교화는 일제의 음모와 강제에서였다. 우리의 애국자를 부정선인이라 해서 우리 동포로서 제 손으로 잡아가고 고문하고 죽이고 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미국의 자유주의나 소련의 공산주이ㅡ에 대해서도 일제가 우리에게 넣어준 관념이란 얼마나 그릇된 것이겠는가?

...영어 ?류-틸리즈?나 노어 ?오보까?는 ?교조와 협력?의 뜻이지 ?신탁통치?란 뜻 더구나 ?통치?란 뜻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자력으로 일본을 조선 전토에서는커녕 제주도 하나에서도 축출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물론 우리 지도자들의 해내 해외의 지상지하의 혈투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독립의 독립전쟁으로서가 아니요 세계의 민주주의대 파쇼의 전쟁으로 결정된 것이며 조선독자의 독립이기보다 세계민주주의 건설로서의 조선독립인 것이다.

 

16. 장편작가 방문기(1939)

-역사소설이라구 꼭 역사에 따라 쓸 건 아니라고 봅니다. 역사 그대로 쓴다면 그건 전기지 소설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정말은 연애처럼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난 생각합니다. ...사랑하면 결혼하는 것입니다.

 

17. 현대여성의 고민을 말한다.(1940)

박순천 : 대개 여자들은 결혼한 후에 남편에 대한 불평을 말하고 환멸을 느끼는 이가 많은 것을 봅니다.

박순천 : 젊은 처녀들에게는 주위에 있는 남성들에게 반말을 듣고 멸시를 받고 하는 것이 고통입니다. 직업여성이라고 지식계급에 있는 남성들도 직업여성이라면 그 사람의 인격여하를 불구하고 업수이여기고 낮춰봅니다. 여기 고통이 큽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왜 여자로서 직장에 나가느냐고 그것을 한 방종의 꿈으로 알고 시비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일반 여성들은 가정에서 직장으로 나가기를 죽기보다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심한 말 같지만 남편이라 사람까지 이것을 이해해 주지 못합니다. 직업여성의 비애가 이런 것들에 있습니다.

이태준 : 죽은 사람을 잊을 수 없어서 자신의 정열로 현실을 무시한다면 모르나 가문과 도덕에 얽매여 수절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문제입니다.

 

18. 신년 새 유행! 희망하는 유행․예상하는 유행(1929)

어서 남녀 간에 악수례를 대유행을 지어 일반화하고 평범시 되었으면 한다.

 

19.도세문답(渡世問答)(1937)

1. 무엇으로 처세훈을 삼으십니까?

선량하게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5. 아주 조선을 떠나고 싶지는 아니합니까?

건강한 느티나무처럼 굳이 여기서만 뿌리를 박고 살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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