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金浩然齋(1681-1722) 시 깊이 읽기

청담(靑潭) 2020. 7. 7. 23:25

저자 박은선(한남대 탈메이지교양교육대학 강사)

Ⅰ. 김호연재와 恩津 宋氏家의 후손들

...김호연재 시가 알려진 데에는 먼저 그녀의 증손부인 청송심씨(1747-1814)가 있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68세 때 청송군수로 재직하던 아들 송규희(1769-1819)를 따라 청송에 와 있다가 1814년 6월 5일 자신의 시증조모가 되는 김호연재의 한시 192題 237首를 『증조고시고』라는 제목으로 필사하였다.

※김호연재의 남편은 송요화(1682-1764), 청송심씨의 남편은 송계래(1748-1799)이다.

...이렇게 송씨가의 며느리에 의해 필사되어 가문에 전해오던 김호연재의 시는 1977년 송요화와 김호연재의 후손 송용억(1914-2005)이 김호연재의 시 72題 91首를 묶어 『호연재시집』을 간행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김호연재의 시는 시인이 남긴 많은 작품수 만큼이나 그 시적 모색에서 매우 개성적인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자신이 속해있는 가부장적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의식, 아름다운 어느 한 순간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자연의 묘사, 환상을 통한 이상세계의 동경이 그것이다.

 

Ⅱ. 김호연재 시의 주체의식 연구

●...지금의 추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에서 태어난 시인은 그곳에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열여덟 살 때 대전 송촌의 은진 송씨 가문으로 출가하였다. ..시인의 시는 모두 그녀가 시집갔던 해인 1699년 이후에 쓴 시로 밝혀졌다.

●김호연재는 어렸을 때부터 자유롭게 시를 창작할 수 있는 배경에서 자랐다. 그녀의 친가는 어른아이, 남녀, 적실부실, 적자서자 등 서열과 관계없이 모두 시를 짓는 자리에 함께 하여 시를 짓고 수창(酬唱)하였다. 그러나 김호연재의 시가는 유교의 윤리와 여범적 규범이 청저하게 실행되고 있었던, 여성은 가부장적 체제에 자발적으로 순응하도록 강요하는 곳이었다.

 

※친가

고조부 김상용(1561-1637) : 우의정      종고조부 김상헌(1570-1652) : 좌의정-김수항(1629-1689) : 영의정

증조부 김광현(1584-1647) : 이조참판

조부 김수민(1626-1672) : 덕산 현감

부 김성달(1642-1696) : 고성군수

김호연재는 정실(이옥재 : 1643-1690)소생의 5남 4녀 중 8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시가

시증조부 송준길(1606-1672) : 좌참찬

시조부 송광식(1625-1664) : 공조정랑

시부 송병하(1646-1697) : 의주부윤

남편 송용화(1682-1764) : 지중추부사(실직이 아니고 추증된 것으로 보임)

아들 송익흠(宋益欽 1708~1757) : 보은 현감

 

○春懷

좋고 탕탕한 성질을 가졌으면서

어찌 낮의 방 가운데 무리에 끼었는가?

하늘도 트인 재주를 벗지 못하여

도리어 속됨을 용납지 못하네.

머리를 숙여 세상 비방을 달게 받으니

입을 다물고 곁의 책망을 견디네.

고락의 말 미치지 못하니

차라리 강의 경치를 읊는 것을 따르리라.

 

○聞仲氏以貢差往可興 부분

이 아우는 규중이 몸으로

문을 궁곡(깊은 골짜기)사이에 닫았고

몸에 두 날개 없으니

어찌 신선의 산에 이르고 닿을까.

조각난 마음 하나 멀고 아득하여

돌아갈 꿈 홀로 머뭇거리며 서성이네.

먼(곳에 대한) 생각을 능히 누르지 못하니

글을 보내서 깊은 마음을 토로하네.

문묵(글과 글씨)이 나의 일이 아닌데도

심중에 두고 있으니 견디기 어렵네.

 

○공연히 읊다

가슴에 품었던 오랫동안의 넓고 큰 뜻을 씻고

거나하게 취하여 누워 꾀꼬리 소리를 듣노라.

서늘한 바람 집에 드니 가을은 가깝고

하얀 달은 뜰에 가득해 밤기운이 맑도다.

푸른 물은 매우 차갑게 울밖에 있고

푸른 산은 은은히 난간 앞에서 새롭네.

공명은 다만 이곳에서 덧없는 꿈일 뿐

어찌 구차스럽게 세상과 더불어 다투리오.

시내와 산은 고요하고 밤은 깊은데

국화는 이슬 머금어 작은 뜰이 향기롭구나.

북두칠성의 첫 별이 고개를 넘어가니 구름은 찬란히 흩어지고

떨어지는 달이 들창에 차니 서늘하네.

약간의 술로 반쯤 깨니 뜻이 넓어지고

새로운 시를 읊고자 하니 세상의 일을 잊게 되네.

스스로 기뻐하고 탄식하니 이 몸은 무엇과 같은가?

즐거움도 없고 슬픔도 없는 한 취한 미치광이인 것을.

 

○夜吟

달에 잠긴 천개의 봉우리 고요하고

냇물에 비친 여러 별 맑아라.

대나무 잎 바람과 연기에 흔들리고

매화는 비와 이슬이 맺혀있네.

생애는 석 자 칼이러니

마음속 생각이 매달려 있는 등불 같네.

나이 들어감이 슬퍼라

하얗게 세는 머리카락 해마다 늘어가네.

 

Ⅲ. 김호연재 시 깊이 읽기

●시인이 나고 자랐던 고향과 친정 부모, 형제 자매 그리고 친정 조카에 대한 그리움이 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청룡도

벽 위의 청룡이 부질없이 스스로 우네

어느 때 갑틀에서 나와 무리의 영웅을 만날까.

바람을 타고 쾌히 긴 강을 건너가

무리의 오랑캐들을 다 죽이고 맑은 세상 회복할까.

 

○自傷 스스로 근심하다

가히 아깝다 이 내 마음이여

크고 넓은 군자의 마음이로구나.

겉과 속을 하나도 숨기는 게 없어

밝은 달이 마음속을 비추고 있구나.

마음속은 맑고 맑아 흐르는 물 같고

깨끗하고 깨끗하여 구름 같아라.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뜻은 구름과 물의 자취를 따를 뿐

세속의 무리들과 한 패가 되지 않으니

도리어 세상 사람들은 그르다 하네.

스스로 규방여인의 몸임을 가엷게 여기니

푸른 하늘은 아지 못할 거네.

어이할까 여자로 할 수 있는 경우가 없어

다만 능히 각각의 뜻만 지킬 뿐이라네.

 

●시인의 고조부인 김상용(1561-1637 우의정)와 동생인 김상헌(1570-1652 좌의정)형제는 서울 인왕산 아래 청풍계, 옥류동 일대에 터를 잡고 살았다. 이들 형제와 자녀들은 이웃하고 살며 아침저녁으로 함께 어울려 일상속에서 시가를 짓거나 지은 것을 수창(시를 서로 주고 받으며 부름)하며 즐겁게 놀았다. 홍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증조부 김광현(1584-1647 이조참판)때부터였다. 1667년 덕산현감으로 나가있던 김수민(1623-1772 시인의 조부)이 어머니를 위하여 친척들이 많이 사는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후 정착하게 되었다. ...지금의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이다.

 

○自歎二首

힌 구름으로 성품을 삼고 물로 뜻을 으니

화장대 헛되이 벽 위에서 밝은 것이 부끄럽구나.

혼은 소상강의 안개와 비에 떠있고

마음은 개골산 맑은 물에서 노는구나.

바람은 만 리 밖에서 몰려오지만 마음은 씩씩해지고

달이 깊은 밤에도 비치니 꿈이 스스로 놀라네.

내 처지나 형편은 충족하여 더는 말할 것이 없지만

귀 밑엔 흰 머리 두서너 가닥이나 있네.

 

○戱 놀다

나는 그대를 기다리는 자리를 펼치고

그대는 나를 찾는 정을 받들었네.

구름 그림자는 앞 산골자기에 저물고

바람은 작은 동리에 와 맑네.

 

○贈 글을 적어 보내다

앉아서 달이 뜨기를 기다리니

동족 창에 달뜨는 것이 더디구나.

맑은 말 그대가 싫어 않으니

그윽함에 다다르는 나를 늘 아노라.

 

○期二 기약2

한 자리에서 말을 다하기 어렵고

등불이 차니 밤이 깊은 줄을 깨닫는다.

그대의 옷소매 얇은 줄을 아느니

서리와 이슬 함께 스밀까 염려하노라.

 

○詠桃 복숭아를 읊다

동충이 문득 푸른 복숭아 가지에 드니

화려하고 눈부신 봄빛이 사랑스럽구나.

아름다운 꽃 홀로 마주하고 도리어 먼 곳을 생각하니

주인은 무슨 일로 오기를 더디 하는가.

 

●홍성(홍성군 갈산면 오두리) 오두 바닷가마을에서 대전 회덕 송촌의 법천 산골로 시집은 온 김호연재는 자신의 존재를 오두의 바닷가를 달리고 싶어 하는 〈그리움〉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오래 만나지 못하는 형제를 만나려하고, 때론 이루고 싶은 꿈을 향해 나아가려는 〈내일〉임을 보여준다.

 

○次屬五兄 차하여 다섯째 형에게 부치노라

근심과 후회로 마음이 어둡고 괴로우니

형상이 적국에 있는 듯하도다.

이로 인하여 허물없는 친구가 없구나.

언니와 나는 갈 길이 있어 각각 시집을 갔으나

길은 멀러 부치기 어렵고

봄이 깊어 기러기도 날지 않네.

서로 헤어진 지 십년이 가까워

얼굴이 꿈 가운데서도 드물다네.

 

○簡仲氏乞米 중씨에게 편지로 쌀을 빌리다

해 사창에 나오면 문득 다시 걱정되어

빈손으로 배부르기를 구하니 계책에 사유가 없네.

두 형은 뱃머리의 쌀을 아끼지 말고

보내어 이 아우의 끼니 걱정을 풀어주소서.

 

●노비가 많은 시댁의 실질적인 가장 김호연재는 남편을 대신하여 친정 둘째 오빠 김시윤(1666-1720)에게 편지를 쓴다. ...다른 편지에는 김호연재의 시아주버니인 송요경(1668-1728(에게 콩 서너 말을 꿔 달라는 편지(1705년 25세 때)도 있는데 이 편지에도 많은 가솔들을 거느리고 있는 가장의 고민과 걱정이 나타나 있다.

 

○乞米 三山郡守 삼산군수에게 쌀을 빌리다

호연당 위의 호연한 기운은

구름과 물 사립문의 호연을 즐기고

호연이 비록 즐거우나 곡식으로부터 사는 것이니

쌀을 감산군수에게 빌리다.

 

○永世悠悠恨長 오랜 세월 아득하게 남은 한 길도다

한이 쓸쓸히 깊어

내세와 현세가 멀어지네.

평화롭고 화락하게 즐김을 이제 누구에게 물을까

할미새는 쓸쓸한 우는구나.

평생 따뜻한 사랑을 한 꿈에 기대니

짧은 혼 보잘것없어 꿈 못 이루었네.

 

간명하고도 밀도 있는 언어로 구축되고 있는 이 시는 시적 화자의 일상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처절한 고독의 징후를 보여준다. ...이 꿈은 너무도 일상적인 곳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사랑하는 이와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보통의 삶을 상징한다. 평생 아내를 떠나 어머니를 모시거나 공부를 하고 오겠다는 명분으로 집을 떠나 있던 남편 송요화(1682-1764)를 기다리는 절망 속에서는 누릴 수 없는, 그 시대의 여성이 절박하게 갈구하던 일상의 헤게모니이다.

 

○謾吟 만음 : 부질없이 읊다

인간의 사십년을 짚어보니

가난과 굶주림 병과 고통이 서로 연하여 있구나.

깊이 궁리를 하는 것과 영예와 치욕은 다 내 운명이니

다만 몸과 마음을 살펴 성현을 배우리라.

 

※소대헌· 호연재고택

(대전 광역시 대덕구 송촌동, 옛 회덕군, 현 동춘당 공원)

동춘당(송준길의 호) 종택 바로 인근에 ‘소대헌·호연재 고택’이 있다. 이 고택은 송준길의 둘째 손자 송병하(宋炳夏, 1646~1697)가 분가해서 살던 집이다. 이어서 송병하의 차남 송요화(宋堯和, 1682~1764)와 며느리 안동김씨(1681~1722)가 살았다. 과거에는 이 집을 당시 살던 후손의 이름을 붙여 ‘송용억가옥’이라 불렀다. 2016년 동춘당 종택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 문화재 제 290호)가 되면서 명칭이 바뀌었다. 고택 명칭은 송요화의 소대헌, 안동김씨의 호연재에서 따온 것이다. 송준길에게는 증손, 증손부가 된다. 김호연재는 허난설헌에 버금가는 회덕의 여류시인이었다. 매년 김호연재 축제를 열고, 많은 사람에 의해 그의 시가 회자되고 있다. 올해도 회덕선비문화진흥원이 김호연재를 주제로 “제18회 호서명현학술대회”를 열고 ‘시대를 앞서 간 여성군자 김호연재’ 연극도 공연한바있다. 송익흠(宋益欽 1708~1757)은 이들의 아들로 보은현감을 지냈다.

소대헌 옆은 안채로 통하는 대문이 있는데, 대문을 사이에 두고 또 다른 사랑채 오숙재(寤宿齋)가 있다. 오숙재(송익흠의 호)는 송요화의 아들 송익흠(宋益欽, 1708~1757)의 별채이다. 현판은 조선후기 문신이자 서화가인 능호관 이인상(凌壺觀 李麟祥, 1710~1760)이 썼다. 추사(秋史) 못지않은 필력(筆力)이다. 오숙재 뒤로 넓은 뜰을 낀 안채는 대전평생교육원의 송촌캠퍼스가 되었다. 다양한 시민교육 장소로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시민들을 위한 달빛야행 등 인문학 강좌가 펼쳐진다.

 

送春感懷 : 봄을 보내며 느끼는 생각

一雨靑山濕 : 한 번 비에 푸른 산이 젖고

林間落花多 : 숲 사이 꽃은 많이도 떨어졌구나.

紫門懶不開 : 게을러 사립문 열지 않으니

三春客中過 : 긴 봄 나그네와 함께 지나가누나.

 

○夢歸行 : 꿈에 돌아가노라

꿈속에서 혼이 고향으로 돌아가니

안개와 노을은 강에 가득하고 부질없이 물결이 차네.

어촌은 쓸쓸하고 봄빛은 저물었는데

아득하게 높은 집이 내 집이네.

방초 있는 연못에는 푸른 이끼 자라고

꽃 분분히 떨어져 땅 가득히 붉었네.

주렴을 반만 걷고 웃으며 나와 서로 맞으니

아우와 형이 옛집 안에서 모두 모였네.

은근히 묻고 답하는 것은 평시와 같지만

말을 하다가도 서로의 생각에 이르면 눈물이 저절로 흐르네.

서로 생각하면서 몇 번이나 남몰래 창자가 끊어지려했나

아우 얼굴 이미 쇠하고 형의 머리 하얗게 세었네.

홀연히 물위의 새벽조수 들리니

꿈의 혼이 돛대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깨었네.

돌아오니 슬프고 원망스러워 처소도 찾을 수 없고

오직 서쪽 창에 지는 달이 밝게 비치는 것을 보네.

 

Ⅳ. 聯珠錄 읽기

●『安東世稿』는 김호연재의 친정아버지 김성달(1642-1696)의 시 163수, 친정어머니 연안이씨(이옥재 1643-1690)의 시 76수, 외할아버지 이홍상(1619-1654)의 시 1수, 시인을 확정 할 수 없는 시9수 등 총 249수가 실려 있는 부부수창시집이다.

『연주록』은 김호연재의 친정 형제․자매 5남 4녀중 일직 요절한 사람을 제외한 4남 3녀의 시와 울산 이씨의 시 등 총 172수가 있다.

『우진』이라는 시집에는 김호연재 친정아버지 김성달의 중시 형태의 시 24수, 김호연재의 서모 울산이씨의 18수, 서녀의 시 11수 등 53수가 수록되어 있다.

 

■읽고 나서

고조부가 우의정을 지낸 김상용(1561-1637), 종고조부는 척화파로 유명한 김상헌(1570-1652)이다. 시증조부가 사림의 거물 송준길(1606-1672)이니 17세기 조선의 최고의 집안에서 태어나 최고의 집안으로 시집을 갔으나 남편 송용화(1682-1764)는 벼슬을 하지도 못하였고 가정을 잘 이끌어 나가지 못한 위인으로 보인다. 마치 신사임당의 남편인 이원수와 비견될 만 하다 하겠다. 지중추부사라는 직책은 아마도 추증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온 가족이 시를 짓는 유복한 가정의 딸로 태어났으나 불과 아홉 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열여섯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맛보았다. 혼인을 한 이후로는 전혀 행복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외롭고 쓸쓸하게 가정 대소사를 이끌어나가며 친정집과 형제자매들, 그리고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열 다섯 살인 아들 송익흠과 이제 아홉 살인 딸을 남기고 42세에 요절하였다. 그러나 남편 송요화는 이후 42년간이나 더 살았다. 슬픈 일이다. 20세기 일제 강점기를 지나고 한 참까지도 우리의 대부분의 여성들은 가정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며 한 많은 삶을 살다가 죽어가야만 했다. 대단한 양반 가문의 며느리인 김호연재도 다름 아니었으니 그리 멀지도 않은, 그토록 그리운 친정 땅을 찾아 가지도, 친정 식구들을 자주 만나지도 못하면서 그저 그리움만 가슴에 삭이면서 슬픈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아아! 슬픈 여성들의 삶이여! 가련한 김호연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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