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보(徐榮輔:1759~ 1816)
본관은 달성. 자는 경재, 호는 죽석. 할아버지는 영의정 지수이며, 아버지는 대제학 유신이다. 1776년(영조 52) 18살의 나이에 초시에 합격하였지만 부친 서유신이 홍국영과 갈등을 겪게 되자 복시를 포기하고 출사를 뒤로 미루었다. 부평(富平)의 오곡(梧谷)에 기거하며 학문에 힘쓰다 1788년(정조 12) 전강(殿講)에 참여, 장원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하게 되었다. 1789년(정조 13) 식년 문과에 장원한 뒤 이듬해 성절 겸 사은사(聖節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함경도암행어사로 나갔다.
이어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에 제수되었다가 1792년 승지를 거쳐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1794년 호남위유사(湖南慰諭使)로 나갔으며, 그 뒤 승지를 거쳐 황해도관찰사·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나갔다.
1804년 (순조 4)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 되고 그 이듬해 예조판서에 승진하였다. 1805년 대사헌이 되고 이어 대호군(大護軍)· 홍문관제학·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808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비국유사당상(備局有司堂上)을 겸직, 심상규(沈象奎)와 더불어 『만기요람(萬機要覽)』을 편찬하였다.
그 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평안도관찰사· 규장각제학· 이조판서, 대제학, 통제사, 수원부유수(水原府留守) 등을 역임하였다. 아들 서기순(徐箕淳)도 뒤에 대제학에 올라 아버지로부터 부자손 3대가 대제학을 지내는 가통을 세웠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수원의 지지대비(遲遲臺碑) 비문을 짓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는 『죽석문집(竹石文集)』·『풍악기(楓嶽記)』·『교초고(交抄考)』·『어사고풍첩(御射古風帖)』 등이 있다.
※가계
-남원부사 서정리(7대조):
-병조참의 서문상(1630-1677 6대조):1655진사시, 1668별시문과
-영의정 서종태(1652-1719 고조부): 1675생원시 장원, 1680별시
-좌의정 서명균(1680-1745 증조부): 1710증광문과
-영의정 서지수(1714-1768조부):1733 진사, 1740증광문과
-대제학 서유신(1735-1800부):1772정시 장원
-대제학 서영보(1759-1816본인)
-대제학 서기순(1791-1854자):1827증광문과
제1책
□시월 보름에 약속한 두 손이 오지 않기에〔十月之望 期二客不至〕
달 둥근 밤에 묵기로 약속했는데 / 期宿月圓夜
달이 둥근데도 님들은 오지 않네 / 月圓君不來
말을 타고 미끌어졌을 걱정은 안 하지만 / 未愁騎馬滑
내까지 와서 돌아갔을까 그것이 걱정일세 / 直恐到溪廻
간밤에 비도 많이 적시지 않았고 / 昨雨無多濕
아침에 음산했던 날씨도 개었어라 / 朝陰纔已開
빈 서재에 오늘도 해가 저무니 / 空齋亦日夕
오늘 밤도 나 홀로 서성일밖에 / 此夜獨徘徊
□낮잠〔晝眠〕
배불리 먹고 관은 한가해 할 일 없는 때 / 食飽官閒無一事
화당의 더운 대낮에 바람이 주렴에 솔솔 / 畫堂晝暑進簾風
침낭에 기대 턱을 괴고 탕건도 벗었지만 / 隱囊支頰鬃巾脫
그래도 농사 책만은 손안에 꼭 쥐었다오 / 猶有農書在手中
□병풍에 금강산을 그리다〔屛風畫衆香城〕
종소문처럼 평생토록 좋아한 산수요 / 山水平生宗少文
고 장군처럼 멋지게 그린 단청이로다 / 丹靑能寫顧將軍
거문고와 책과 함께 봉우리 사이에 거하면서 / 琴書携向群峯住
날마다 썰렁한 창 비치는 백운 속에 살고지고 / 日照寒窓欲白雲
제2책
□세검정〔洗劍亭〕
정자는 한여름 더위도 아랑곳없이 / 亭子無朱夏
냉랭하기가 그야말로 음침한 골짝 / 泠泠卽洞陰
옷을 벗어 젖히니 오랜 벗이 기쁘고 / 解衣欣宿契
바위에 걸터앉으니 시름이 사라지네 / 跂石散冲襟
영롱하게 뒤엉긴 연하의 기운이요 / 翛爾煙霞氣
조작이 전혀 없는 산수의 음이로세 / 自然山水音
이런 놀이도 이미 이와 같은데 / 玆遊已如此
상금(尙禽)의 유람은 또 어떠했을까 / 彌憶尙期禽
□매화가 피는 것이 더디다고 불평하는 자가 있기에〔人有悶梅遲開者〕
심는 목적은 단지 꽃필 때 보려는 것인데 / 種時秪爲見開時
약속 기일 맞출 듯 향기와 윤택이 더디기만 / 芳潤都輸似赴期
피려는 은미한 그 뜻 보아도 보지 못하니 / 微展情知看不見
그대 날마다 늦게 핀다 불평하게 놔둘밖에 / 從君日日苦嫌遲
□매화가 봉오리만 벌리고 아직 피지는 않다〔梅萼破苞未舒〕
살결이 빙설 같은 고야의 전신이여 / 姑射全身氷雪肌
정만 두고 꽃다운 자태 다시 거뒀네 / 有情還復斂芳姿
대부가 고택(皐澤)에 워낙 늦게 찾아갔으니 / 大夫自是如皐晩
꽃피기 바란 종전의 어리석음을 비로소 알겠네 / 始識從前索咲癡
□거꾸로 늘어져서 꽃이 벌어지기 시작하다〔倒垂花始破〕
경구를 살짝 다문 것은 혹 새어 나갈까 봐 / 磬口微弇嫌漏洩
꽃술은 토해 내었어도 향내음은 아끼는구먼 / 檀心已吐惜芬芳
여린 가지 거꾸로 매달린 푸른 망울이여 / 柔梢倒綴看靑萼
흰 수염 배배 꼬아 옅은 노란색 물들였네 / 撚却粉鬚著淡黃
□춘첩〔春帖〕
명협(蓂莢) 잎 하나하나 전부 뽑히고 / 丹蓂葉葉已全抽
버들눈 틔우는 동풍이 어구를 건너가네 / 舒柳條風度御溝
만민의 의복도 소매를 느슨히 늘어뜨렸나니 / 萬姓衣裘垂袖緩
태평시대의 서기가 그림 다리 위에 어렸어라 / 太平佳氣畫橋頭
백성은 열심히 밭 갈고 효도하고 우애하며 / 力田孝悌民皆是
관리는 모두 법 지키고 청렴하고 공평하여 / 守法淸平吏盡然
천억의 창름 속에 쾌활한 생활 잇따르며 / 快活因之千億廩
구 년 계속 풍년든 쌀이 썩어 넘쳐 나도록 / 陳陳紅粟九登年
제3책
□풍악기〔楓嶽記〕
우리나라의 명산 가운데 으뜸이 풍악산(楓嶽山)인데, 단풍나무가 많아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 또 금강산(金剛山)이라고도 하고 기달산(怾怛山)이라고도 하는데, 산의 자취를 승려들이 발견하였기 때문에 불교어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 산이 동해 가에 있는데, 남북으로 길게 뻗은 것은 만물초(萬物肖) 골짜기이고, 온정령(溫井嶺) 너머에 있는 것은 비로봉(毘盧峯)이다. 변화무궁하게 산줄기가 펼쳐져 있고 웅대한 산세가 구불구불 뻗어 나가다 무더기로 불쑥 솟아서 고성(高城)을 가로지르고 회양(淮陽)까지 뻗어 있다.
산의 동쪽을 ‘외산(外山)’, 서쪽을 ‘내산(內山)’이라 한다. 우뚝하게 높은 봉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중에서도 비로봉이 가장 높으며 남면(南面)하여 굳게 버티고 서 있다. 비로봉 앞은 중향성(衆香城)이고, 중향성이 뻗어 가다가 다시 우뚝 솟으면 망고대(望高臺)이다. 왼쪽은 구기연(具其淵), 오른쪽은 구룡폭포(九龍瀑布)이며, 그 뒤쪽은 내수점(內水岾)인데, 이를 경계로 내산과 외산이 나뉜다.
동천(洞天) 가운데 이름난 곳은 다음과 같다. 장안사(長安寺) 골짜기는 내산의 첫째 구비이다. 영원동(靈源洞), 백탑동(百塔洞), 백천동(百川洞)은 온 산의 계곡물이 모이는 곳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표훈사(表訓寺) 골짜기인데, 큰 절이 여기에 있다. 그 위쪽은 정양사(正陽寺) 골짜기이다. 또 몇 리를 가서 왼쪽으로 청학대(靑鶴臺), 오른쪽으로 소향로봉(小香爐峯)을 끼고 있는 곳이 만폭동(萬暴洞)이다. 수미수(須彌水)를 지나 또 북쪽으로 올라가면 팔담동(八潭洞)과 가섭동(迦葉洞)이다. 중향성 아래에 있는 것이 백운동(白雲洞)이고, 비로봉 아래에 있는 것이 원적동(圓寂洞)이다. 내수점을 넘으면 효운동(曉雲洞)이고, 여기서 조금 가면 선담동(船潭洞)이다. 또 몇 리쯤 가면 유점사(楡岾寺) 골짜기인데, 골짜기 안이 크고 널찍하며 사찰은 빼어나고 수려하다. 중내원(中內院) 골짜기와 백탑동은 서로 안팎으로 위치해 있는데, 망고대의 맑은 기운이 서리어 만들어진 것이다. 백천교(百川橋) 골짜기와 발연(鉢淵) 골짜기, 신계사(神溪寺) 골짜기 등 여러 골짜기에는 모두 물이 흘러나온다.
봉우리는 모두 아로새긴 듯한 흰 바위가 겹겹이 쌓여 있고, 계곡물은 다 옥구슬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고 있다. 골짜기는 굽이굽이 휘감아 도는 곳도 있고 깊고 으슥한 곳도 있으며, 환하고 넓어서 놀 만한 곳도 있고 몹시 험하여 아예 오를 수 없는 곳도 있으며, 너무 가팔라서 오래 머물 수 없는 곳도 있으니, 실로 은자가 숨어 살거나 신선이 거처할 만한 곳이다.
병인년(1806, 순조6)에 내가 평강(平康)에서부터 금성(金城)을 지나서 단발령(斷髮嶺)을 넘고, 내산을 거쳐 외산에 이르러 온정령(溫井嶺)을 넘었는데, 모두 이레가 걸렸다.
처음 내가 단발령에 이르렀을 때 음산한 가을 날씨에 비가 조금 내리고 있었다. 후리(候吏)가 말하기를 “고개 위에서 멀리 풍악산을 바라보니, 운무가 자욱하여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나는 옛날 한자(韓子)가 묵묵히 기도를 올려 형산(衡山)의 운무가 걷히자 스스로 이르기를 ‘정직한 자의 정성이 신명을 감동시킨 것’이라 한 고사를 떠올리며 내심 걱정하였다.
30리를 가서 철이령(鐵彜嶺)에 이르자, 멀리 여러 봉우리들이 줄지어 모습을 드러내는데, 마침 그때 구름이 걷히고 해가 비추어, 빽빽한 봉우리가 선명하게 눈에 확 들어왔다. 철이령을 내려와서 큰 계곡물을 만났고, 언덕을 따라 올라가다가 갑자기 또 계곡물을 건넜는데, 곧 하나의 계곡을 거듭 건넌 것이다. 10여 리를 가서 장안사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금강산의 입구이다.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남여(藍輿)를 탔다. 벼랑을 오르고 시냇물을 건너서 삐죽삐죽한 돌길을 에돌아가고 빽빽한 수풀을 헤쳐 올랐다. 깊은 골짝을 넘을 때는 허공을 밟는 듯하고 높은 절벽을 딛을 적엔 눈앞이 아찔하였다. 잠깐 사이에 마치 두레박틀처럼 오르내리고 보니, 기이한 봉우리들이 휘돌아 합쳐져서 끝없이 번갈아 나오는데, 가파르게 솟은 것은 무시무시하게 사람을 덮칠 듯하고 불쑥 높이 솟은 것은 눈을 부릅뜬 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산이 이제 끝났나 싶더니 홀연 휘둘러 감았고, 맑은 물과 기이한 바위가 마치 사람을 기다린 듯이 나타났다. 산은 순전히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갈라진 틈이 많고, 그 틈새에는 온통 흙이 붙어 있어서 좋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산허리 아래로는 거대한 나무와 늙은 등덩굴이 어지럽게 뒤엉켜서 울창하고 깊숙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때는 9월 초순이었는데, 울긋불긋한 나뭇잎이 마치 비단을 깔아 놓은 것처럼 몹시도 화려하여 보는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내산의 여러 절과 골짜기들은 내 발길, 눈길이 닿은 곳마다 다 그러하였다.
중향성의 서쪽에 있는 정양사는 산의 3분의 2쯤 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아래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골짜기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헐성루(歇惺樓)와 천일대(天一臺)가 중향성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수미봉(須彌峯)과 가섭봉(迦葉峯)에서부터 망고대(望高臺)와 현불점(現佛岾)에 이르기까지 비로봉과 일월봉(日月峯)이 거듭 포개어 등을 맞대고 찬란하게 늘어서서 진면목을 내 앞에 훤히 드러내며 조금도 숨김이 없었다. 봉우리들이 북동쪽으로부터 동쪽을 거쳐 동남쪽에 이르기까지 20리를 뻗어 있는데, 원근과 고저에 따라 그 형상이 끝없이 변하고, 아침저녁으로 구름이 끼거나 해가 비치면 그 형색이 갖가지로 바뀌었다.
예전부터 일만이천이라고 일컬은 숫자를 지금 다 꼽을 수는 없지만 대략 말해 보면 이러하다. 모난 것과 둥근 것, 날카로운 것과 곧은 것, 평평한 것과 비스듬한 것, 굽어보는 것과 우러러보는 것, 듬성듬성 서로 떨어져 있는 것과 붙어서 서로 이어진 것, 내달리며 서로 뒤쫓는 것과 마주하고 읍하면서 서로 양보하는 것, 툭 불거져 튀어나온 것과 불쑥 솟아나 다투는 것, 달려가며 돌아보지 않는 것과 나아가다 다시 돌아오는 것, 천천히 가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것과 기한에 맞추려는 듯이 바삐 움직이는 것, 삐친 듯 뾰로통한 것과 뽐내는 듯 단아한 것, 화장을 한 듯 예쁜 것과 성내어 소리치는 듯 위엄스러운 것 등 종류마다 같은 것이 없고 모양도 제각기 다르니, 신묘한 변화를 이미 다하였고 교력(巧曆)도 능히 헤아려 볼 수가 없으며, 구경을 하려고 해도 이루 다 감상할 겨를이 없을 것 같았다.
또 몇 리를 가서 만폭동에 이르렀다. 팔담동과 수미동(須彌洞)의 계곡물이 한데 모여 물을 내뿜고 큰 너럭바위가 그 물을 받고 있는데, 세차게 부딪쳐 떨어지는 폭포수 소리에 사람의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서쪽 골짜기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니, 계곡물은 청호연(靑壺淵), 용곡담(龍曲潭), 만절동(萬折洞), 태상동(太上洞), 청랭뢰(淸冷瀨), 자운담(慈雲潭), 우화동(羽化洞), 적룡담(赤龍潭), 강선대(降仙臺)를 지나고, 산봉우리는 청양봉(靑羊峯), 침향근석(沈香根石), 삼난석(三難石)으로 이어지는데, 구비마다 모양이 사뭇 달랐다. 골짜기에 들어가 몇 리를 더 가니, 바닥에 깔린 너럭바위와 옆에 서 있는 절벽은 모두 층층으로 겹겹이 쌓여 있는 형상이었다.
20리를 가자 수미탑(須彌塔)이 갑자기 불쑥 솟아서, 산에 10분의 1쯤 붙어 있는데, 나머지 부분은 둘레를 빙 돌 만하였다. 모양은 둥글고 조각한 것처럼 주름이 져 있었다. 물굽이에 닿아 있는 층계는 마치 융액이 흘러내리는 듯하고 상륜(相輪)은 하늘에 닿을 듯하며 큰 바위가 받침대가 되었는데, 물이 그것을 감돌아 흐르고 있었다. 근방의 바위는 대부분 층층이 쌓여 있는데, 모난 것도 있고 둥근 것도 있었다. 모난 것에는 정사각형부터 비스듬히 모난 것, 직사각형도 있으며, 둥근 것은 완전히 동그란 것부터 비스듬히 둥근 것, 타원형도 있었는데, 모난 것과 둥근 것의 변화가 도무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이곳을 지나 나아가자 산봉우리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고, 봉우리마다 교묘함을 다투는 듯이 우뚝 솟아서 주옥처럼 찬란하게 번갈아 빛을 발하는데, 쌓여서 탑처럼 된 것은 더욱더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숲은 빽빽하고 길도 없어서 남여에서 내려 옷자락을 걷어쥐고서 잡목을 헤치고 계곡물을 건넌 뒤 물줄기가 다한 곳에 이르자 폭포가 나왔고 폭포 옆으로 돌길을 만났다. 왼쪽은 영랑점(永郞岾)이고, 오른쪽은 수미봉인데, 정양사에서는 아득히 보이던 것이 이곳에 이르자 바짝 다가왔다. 비탈길이 산의 10분의 6쯤 되는 높이에 있었으므로 좌우의 봉우리들이 곁에서 굽어보는 것 같았다. 험준하고 울퉁불퉁한 봉우리의 아로새기고 다듬은 듯한 흔적이 온갖 형상을 드러내는데, 그 모습이 가지런하면서도 들쭉날쭉하였다.
만폭동에서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청룡담(靑龍潭)과 세두분(洗頭盆), 백룡담(白龍潭)에 이르렀다. 이곳의 물은 매우 맑고 투명하였고 바위는 몹시 희고 깨끗하였다.
또 북쪽으로 올라가자 팔담(八潭)에 이르렀는데, 팔담의 이름은 흑룡담(黑龍潭), 비파담(琵琶潭), 벽하담(碧霞潭), 분설담(噴雪潭), 진주담(眞珠潭), 구담(龜潭), 선담(船潭), 화룡담(火龍潭)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10여 리쯤 되고 각기 하나의 바위가 바닥을 이루었는데, 높직하기도 하고 나직하기도 하며, 가파르기도 하고 평평하기도 하며, 움푹 패어 절구처럼 된 것도 있고, 쪼개져서 구유처럼 된 것도 있으며, 깎여서 홀〔圭〕처럼 된 것도 있고, 동그랗게 웅덩이가 된 것도 있으며, 잇몸처럼 울퉁불퉁한 것, 섬돌처럼 가지런하게 꺾인 것 등 실로 천태만상이었다.
흐르는 물은 굽이굽이 감돌면서 바위에 따라 형체를 드러내는데, 부딪혀 솟구치고 꺾이어 굽이치며, 퍼져서 흩어지고 빙빙 돌다 급히 흐르며, 모여서 웅덩이가 되고 떨어져서 여울이 되며, 물병이 쏟아지듯이 마구 치달리고 못물이 넘치듯이 질펀히 흐르며, 흰 무지개가 드리워진 듯, 비단 한 필을 펼쳐 놓은 듯, 밝은 구슬을 뿌려 놓은 듯하였다. 그 색깔은 맑고도 검푸른데, 금고(金膏)를 모아 둔 것 같고 항해(沆瀣)가 고인 것 같았다. 그 소리는 패옥(佩玉)이 울리고 허공에 음악을 연주하는 듯한데, 홍종(洪鐘 큰 종)을 두드리고 뇌고(雷鼓)를 울리는 것 같았다. 대체로 정양사에서 산을 구경하였으니 산에서 볼만한 것은 다 본 것이고, 팔담을 유람하였으니 수석의 구경거리는 다 구경한 셈이다.
팔담을 다 보고 몇 리를 채 안 가서 마하연(摩訶衍)에 이르렀는데, 이 절은 금강산에 있는 여러 절 가운데 작은 것이다. 땅이 더욱 가파르고 골짜기는 더욱 깊은데, 혈망봉(穴望峯)의 신령스러운 동굴을 영롱하게 조망할 수 있었다. 절 뒤쪽은 가섭봉인데, 정양사 동북쪽 봉우리 중에서 세 번째 높은 것이다.
봉우리 아래 동문(洞門)은 깊숙하면서도 좁은데 계곡물이 양쪽 벼랑에 닿아 벼랑이 다 깎여 있다. 골짜기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옷을 걷고 나아가는데, 한 발 한 발 돌을 골라 밟으면서 이쪽저쪽으로 펄쩍펄쩍 뛰어서 건너갔다. 절벽을 만나면 나무를 엮어 사다리를 만들어서 직각삼각형 모양으로 세워서 잡고 올라갔다. 기울어진 돌길에서는 올라갈 때 배를 깔고 기어 올라가고 내려갈 때는 등을 대고 조심조심 내려왔는데, 똑바로 앞만 바라볼 뿐 감히 뒤돌아보지 못하였다. 골짜기 안의 여러 봉우리들은 우뚝 빼어나고 곱게 주름진 모습이 수미탑과 비슷하였다.
무릇 산에는 중심과 주변의 구별이 있으니, 비유하자면 옥과 박옥의 구별이 있는 것과 같다. 정양사 북쪽으로 마하연까지는 바로 옥에 해당하고, 영원동과 백천동은 박옥에서 아직 벗어나지 않은 격이며, 마하연을 지나면 옥이 다하여 다시 박옥에 가까워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섭봉 동쪽으로 언덕 하나를 넘으면 만회암(萬灰菴)이 있다. 만회암 동쪽은 백운대(白雲臺)이고, 백운대 아래는 백운동(白雲洞)이다. 이곳에서는 앞에 빽빽하게 늘어선 중향성의 진면목을 조망할 수 있는데, 비탈길이 좁고 위태로워서 쇠줄을 잡고서야 올라갈 수 있었다. 불지암(佛地菴) 골짜기에 감로천(甘露泉)이 있다.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 나와 작은 대나무 홈통으로 물을 받아 마셨는데, 물맛이 우유처럼 달고 부드러웠다. 아마도 육우(陸羽)가 이른 혜산(惠山)의 유천(乳泉)이 이와 같았으리라.
20리를 가서 내수점(內水岾)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비로봉을 돌아보니, 온통 웅장하게 땅 위로 솟아 중첩된 봉우리들이 빽빽하고 높게 솟아서 아득하고 희끗희끗하게 보였다. 이곳은 내산의 등이고, 중향성에서 보이는 것이 내산의 얼굴이다.
나아가 유점사(楡岾寺)에 도착하였다. 고성 군수(高城郡守)의 편지가 와 있었는데, 편지에서 “어찌 삼일호(三日湖)를 먼저 구경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나는 그 말에 따라 견구(犬邱)에 올랐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였는데, 맑고 푸른 물이 하늘에 닿았다. 바다 가운데 산들이 있어서 구름과 파도 속에 출몰하고 있었는데, 중이 “이곳이 해금강(海金剛)입니다.” 하였다.
백천교(百川橋)에 이르러 다시 남여에서 내려 말을 탔다. 다리는 훼손되었고 단지 오래된 비석만이 남아 있었다. 다리 동쪽에는 외원통사(外圓通寺)의 옛터가 있었다. 그다음 골짜기는 발연동(鉢淵洞) 하류의 두 골짜기이다. 정유년(1777, 정조1) 홍수가 진 뒤로 절(발연사(鉢淵寺))이 문을 닫아 다시는 갈 수 없다고 하였다.
20리를 가서 고성의 들녘에 이르렀다. 서쪽으로 외산(外山)을 바라보니, 우뚝 빼어난 여러 봉우리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고장강(顧長康)이 회계(會稽) 산천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일천 바위는 빼어남을 겨루고, 일만 골짜기는 물이 다투어 흐른다.〔千巖競秀 萬壑爭流〕” 하였는데, 내가 여기서 그 말이 사물을 기막히게 묘사한 것임을 깨달았다.
삼일호는 영동의 여러 승경 중에서 미목(眉目)에 해당한다. 호수 가운데에 섬이 있고 섬에는 사선정(四仙亭)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곳을 신라 때의 사선(四仙)이 놀던 곳이라고 한다. 호수의 승경은 내가 지은 〈몽천암기(夢泉菴記)〉에 나온다.
신계사(神溪寺)는 구룡연(九龍淵) 아래의 골짜기에 있다. 비스듬히 에워싸고 있는 검푸른 산봉우리가 마치 가을 하늘에 창을 벌여 세워 놓은 것 같았다. 대체로 외산에는 흙이 많은데, 이 골짜기의 봉우리 중에는 빼어난 바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많았다.
골짜기를 따라 물길을 거슬러 20리를 가서 비봉폭포(飛鳳瀑布)와 옥류동(玉流洞)에 이르렀다. 돌길은 더욱 험하고 바위는 더욱 미끄러워 남여를 멘 사람들이 소처럼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거렸으므로 남여에서 내려 걸어갔는데, 발이 시큰거려 더욱 애를 먹었다.
10리를 더 가서 구룡폭포(九龍瀑布)에 이르렀다. 온 골짜기는 큰 바위가 패여 만들어진 것으로, 그 거대한 반석은 만 명이 앉을 만큼 널찍하였다. 절벽의 높이는 머리를 치켜들고 보아야 꼭대기를 볼 수 있는데, 사방에서 바닥에 이르기까지 이어 붙인 곳은 볼 수 없었다. 폭포의 높이는 30길쯤 되는데, 두레박줄을 걸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무지개를 머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우레가 울리는 것 같기도 하였다. 세차게 부딪치며 쏟아지는 물소리가 마치 귀신과 전투를 벌이는 것과도 같았다. 폭포 아래에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큰 웅덩이가 있었다. 환하게 빛나며 출렁이는 물결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데, 황홀하여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서늘한 기운이 사람의 머리털을 쭈뼛 곤두서게 하니, 이곳이야말로 신물(神物)이 깃들어 사는 곳이다.
폭포 옆으로 절벽이 쌍으로 솟아 있는데, 마치 돌문의 기둥 같았다. 좌우로 촘촘히 감싸고 폭포를 보호하고 있으니, 비록 이 골짜기에 들어온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앞으로 곧바로 다가가지 않으면 폭포를 볼 수가 없었다. 폭포에 구기폭포와 구룡폭포가 있는 것은 탑에 수미탑과 백탑이 있는 것과 같은데, 그 두 가지 모두 나는 하나는 보고 다른 하나는 보지 못하였으니, 지금 감히 우열을 가리지는 않겠다.
만물초(萬物肖) 골짜기는 온정령 북쪽에 있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기문에서 “그 괴이한 형상들이 온갖 모양을 다 갖추고 있다.”라고 대단스럽게 말하였는데, 뒷사람들은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없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온정령 길을 따라가다 올려다 볼 수 있는 봉우리 하나뿐이다. 그 크기는 비로봉과 같고, 작은 봉우리들이 여러 층으로 겹겹이 쌓여 있으며, 색상이나 모습은 대체로 중향성과 비슷하면서도 정세함은 그것을 능가하였는데, 봉우리의 겉모습만 놓고 보아도 아름다움과 교묘함은 현격히 차이가 났다. 봉우리 안의 여러 골짜기들도 기이하고 빼어난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나 가마꾼을 믿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내가 늙어 감에 따라 마음먹은 대로 다 찾아다닐 수 없을 것이므로 산에서 나오는 날 마음속에 아쉬움이 있었다.
여러 경치를 기록하면서 중심은 상세하게 하고 주변은 간략하게 하였으니, 이는 큰 것을 거론하면 작은 것은 자연히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보덕굴(普德窟)의 구리 기둥과 묘길상(妙吉祥)의 석불, 삼일호의 붉은 글씨가 새겨진 옛 각석(刻石), 여러 사찰의 시주로 받은 보기(寶器) 등도 대단한 구경거리들이지만 이것들은 모두 사람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므로 다 생략하였다.
제6책
□강계부의 삼정과 적정의 폐단을 구제하는 일에 대하여 비변사에 보내는 공문〔江界府蔘糴捄弊 報備邊司公移〕
강계부의 감당하기 어려운 폐단이 지금 대단히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지금 바로잡지 않는다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반드시 고을이 없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해당 부(府)의 폐단의 원인은 고슴도치 털처럼 많고 실처럼 엉켜 있을 뿐만이 아니지만, 그중에서 큰 원인을 들자면 삼정(蔘政)ㆍ환정(還政)ㆍ군정(軍政)ㆍ전정(田政)입니다. 해당 고을의 부사가 말한 폐단의 원인 역시 이 네 가지이지만 네 가지 중에서도 삼정과 환정이 더욱 위급합니다. 사정이 이와 같으므로 부사가 논한 바의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가 삼정과 환정 두 조목에서 더욱 상세하여 그 말이 길게 이어져 수천여 언(言)을 넘어섭니다. 그렇지만 그 중요한 뜻을 요약하면 ‘환정의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는 그 수량을 줄이는 데 있을 뿐이고 삼정의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는 그 값을 올리는 데 있을 뿐이니, 환정에서 그 수량을 줄이지 않고 삼정에서 그 값을 올리지 않는다면 이 폐단이 바로잡힐 날이 없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대체로 환곡을 줄여야 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곡식을 옮기거나 사 오는 데에 모두 장애가 있으므로 문제가 쌓이고 고착되어 점차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역시 일의 형편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인삼의 값을 올려 주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삼정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할 때 값을 올려 주는 것 외에 다른 방책이 없었기 때문인데 기묘년(1759, 영조35)부터 신해년(1791, 정조15)까지 33년 동안 차례차례 올려 준 것이 모두 일곱 번이라고 하니 지금 해당 고을 부사가 아뢴 바의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저기에서 빼앗아 여기에 주고 어떤 것은 동쪽을 도우면서 서쪽을 해쳐서, 좌우로 걸리는 것이 여러 가지입니다. 이에 대해 생각해 보건대, 저기에서 줄이고 여기에서 보태는 것이 이미 큰 계획이 되었다면, 이는 저기에서 줄인 것을 가지고 여기에 보태는 것으로, 편리하고 마땅한 대책을 달리 찾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저것과 비교하였을 때 늘고 줄어든 수량을 대략이라도 서로 걸맞게 할 수가 없고, 여러 번 생각해 보아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기에, 오직 변변치 못한 한 조목을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의주(義州)의 사례를 살펴보면 군향곡(軍餉穀)ㆍ상평곡(常平穀)ㆍ별군향곡(別軍餉穀) 등에 대해 모두 2분(分)의 모곡을 취용(取用)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강계 상황의 긴중(緊重)함이 의주에 못지않으니 의주의 사례를 강계에 그대로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군향곡은 원래 여유가 없고 상평곡의 수량도 얼마 되지 않으며 오직 별군향곡만이 그런대로 변통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본부(本府)에 있는 감영에서 구관(句管)하는 곡식 1만 1920섬과 병영에서 구관하는 곡식 3080섬, 합하여 1만 5000섬을 청남(淸南)과 청북(淸北)의 별군향으로 환록(換錄)하고 그중에 반은 대출하고 반은 남겨 둔다면 매년 취하는 모곡이 750섬이 됩니다. 그리고 의주의 군향에서 2분의 모곡을 취용하는 사례에 따라 매년 500섬을 해당 부에 떼어 주어 인삼값을 보충하게 하면 진분(盡分)이 반분(半分 반만 대출하는 것)으로 바뀌어 매년 줄어드는 대출이 7500섬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2분의 모곡이 취용으로 들어가서 모곡 위에 모곡이 생기는 근심이 없게 될 것이니, 환곡을 줄이고 인삼값을 보충하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종전 각각의 해에 인삼값을 올려 준 액수는 그 크기가 다르기는 하지만 매번 3000냥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으니, 지금 값을 올려 주고자 한다면 역시 이 액수에서 깎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2분의 모곡을 돈으로 바꾸면 겨우 1500냥이 되므로 또다시 1500냥이 있어야 그 액수를 맞출 수 있습니다. 해당 부에 작년 겨울에 조사하여 밝혀 낸 은루곡(隱漏穀) 3400섬이 있으니, 이것을 환곡에 보태면 매년 모곡 340섬을 얻을 수 있으나, 본부에는 이미 환곡이 많아서 걱정이므로 그 폐단을 더 키울 수가 없습니다. 금년에는 우선 그 곡식을 해당 부에서 환곡으로 운용하여 가을에 받아들일 때 원곡과 함께 돈으로 바꾸어 내게 하여 청남과 청북의 곡식이 적은 고을로 이송하게 하되, 명년부터는 모조(耗條)만으로 집전(執錢)하여 써야 할 것입니다. 위 조항에서 말한 두 가지를 합계하면 2520냥이 되고 여기에다 전례대로 인삼을 사들이고 남은 데서 480냥을 취용하여 3000냥의 액수를 채우면 됩니다. 근래 강계의 인삼값을 일률적으로 논하기가 참으로 어려우나, 지금 3000냥을 가지고 15근(斤)에 분배한다면 원래의 가격과 아울러 셈하여 인삼 매 냥(兩)당 54냥이 되니, 이와 같다면 삼정의 폐단이 어느 정도는 바로잡힐 것입니다.
환정(還政)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분조(分條 환곡으로 대출하는 몫)가 줄어드는 것이 7500섬이나 되어 적은 양이 아니지만, 응분조(應分條 정식으로 대출하는 몫)가 본래 3만 5900섬 남짓이니 비록 7500섬을 줄이더라도 여전히 대출할 3만 섬이 있습니다. 이런 호총(戶摠)에 이런 곡수(穀數)라면 이는 매우 걸맞지 않으므로 마땅히 곡식이 적은 고을로 이송하여야 하지만, 본부가 한구석에 치우쳐 있고 높은 재로 격리되어 도정(道程)이 험하고 멀기 때문에 곡식으로 이송하는 것은 형세상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또 돈으로 바꾸어 이무(移貿)하여야 하는데, 본부에서의 곡명(穀名)은 비록 소미(小米 좁쌀)이지만 실제로는 모두 콩을 준절(準折)하여 소미 한 섬 대신 두 섬의 콩으로 저장해 두니, 한 섬에 3냥의 돈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가망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예전부터 영읍(營邑)들이 환곡이 많은 것을 근심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바로잡을 방책이 없어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을 앉아서 보면서 아무 조치를 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형편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지금 강계부의 상황과 백성들의 사정으로 본다면, 만일 수만 냥의 돈을 내어 그 황급한 상황을 구제할 수 있다면 이를 당연히 행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조정이 백성들에 대해서, 혹시라도 흉년을 당하면 조세를 견감해 주고 혹시라도 재난을 당하면 구휼해 주어서, 수천 포의 곡식을 정퇴(停退 납부 기한을 물려줌)하거나 탕감(蕩減)하기에 인색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강계 백성들의 고통이 재난이나 흉년에 비할 수 없을 지경이니, 사소한 이해관계는 따질 것이 없을 듯합니다. 지금 만약 1만 섬의 콩을 시장 가격 그대로 돈으로 바꾼다면 절미(折米) 1섬당 2냥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니, 남북의 여러 고을에 분배하여 상정가(詳定價)로 사들이게 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고 좋을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줄어드는 수량이 1660여 섬이 되는데, ‘차라리 법대로 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겠다는 의리〔寧失之義〕’에도 비록 일리가 없지 않지만, 감총(減摠)을 해 달라는 청원은 역시 감히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 돈을 호조로 올려보내고 당년의 모조(耗條)를 발매(發賣)하는 가운데서 매년 1000섬씩 5년을 기한으로 발매를 정지한다면, 원곡(元穀)은 줄어들지 않겠지만 호조로서는 5년 동안 매년 1000냥의 손해를 보게 됩니다. 관련된 경비(經費)가 혹시라도 이 때문에 어렵다고 한다면, 본도에서 이 돈을 가지고 편리한 대로 조치하여 수량을 채워서 올려보내는 것도 어쩌면 하나의 방법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전정(田政)의 일은 전지를 개량(改量)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토착민들이 전하기로는 만력 정미년(1607, 선조40)의 양안(量案 전지를 측량한 기록) 이후로 다시 개량하지 않았다고 하니, 전정의 문란함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행할 방도로는, 개량을 하여 경계(經界)를 바르게 하는 것이 원래 가장 좋은 계책이지만, 양전(量田)을 하게 되면 일이 너무 커지므로 신중하게 해야 할뿐더러, 본도의 전정은 삼남(三南)과 달라서 등급이 가장 낮고 조세도 단갑(單甲)이므로, 개량을 하기 전에 먼저 해당 부에서 조치를 잘 취한다면 그 폐단이 결코 전과 같이 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군정(軍政)의 일로 말하면, 현재 허액(虛額)과 도호(逃戶)의 폐단이 없는 고을이 없는데, 이 문제는 이 고을의 수령이 누락된 것을 조사하여 부족을 메우는 일, 흩어진 백성을 불러들여 민호를 늘리는 일, 사람을 다 모아서 보호하는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무릇 토지가 묵혀지고 황폐해지며 군정(軍丁)이 도피하고 결원이 생기는 것은 모두 백성이 흩어지기 때문이고 백성이 흩어지는 이유는 또 삼정과 환정 두 가지 폐단 때문이니, 삼정ㆍ환정ㆍ군정ㆍ전정 네 가지의 폐단이 본래 서로 이어져 있어 마치 고리처럼 끊어진 데가 없습니다. 지금 만약 먼저 삼정과 환정의 폐단을 바로잡는다면, 아마도 떠났던 민호가 점점 모여들고 전야(田野)가 점점 개간되며, 군오(軍伍)가 점점 채워질 것입니다.
둔전(屯田)의 일로 말하면, 이것은 그 본분에 따라 스스로 입방(入防)한 군대로서, 그 본고장에 살면서 스스로 만든 마을에서, 그 본업을 이용하여 스스로 머물러 지키는 제도에 불과하니, 거주하는 곳에서 경작하고 거둔 곡식에서 양식을 취하여 그 형편이 매우 순조롭고 그 일이 막히는 바가 없습니다. 본 고을 수령이 논열(論列)한 것이 모두 일리가 있으니, 보고한 바에 따라 시행하도록 허락하더라도 의심할 만한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일이 변경의 정사와 관계되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사(司 비변사)에서 참작하고 헤아린 뒤에 위의 여러 조항과 아울러서 가부간 한쪽으로 지시하여 처분을 내리십시오. 지금 봄이 이미 늦었으니, 환곡을 분급하는 일과 농사를 시작하는 일이 모두 시급합니다. 속히 처분을 내려서 때에 맞추어 조처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7책
□거울을 보면서 읊다〔臨鏡贊〕
자신의 얼굴을 사랑하여 보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사랑은 어찌하여 생기는가? 나와 가깝고 나를 알고 나와 오래 함께하기 때문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나이고 나를 아는 사람이 나이며 나와 오래 함께한 사람이 나이니, 내가 매우 사랑하여 그 얼굴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 오직 나인 것도 당연하다. 나와 가까운 사람으로는 부모와 형제와 처자가 있고 나와 오래 함께한 사람으로는 인척과 세구(世舊)와 동네 사람이 있어서 나와 가까운 사람과 나와 오래 함께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지만, 나를 아는 사람으로는 세상에 달리 그런 사람이 없으니, 내가 나를 나의 지기(知己)로 삼아 내가 나와 더불어 어울리려 하는 것이다.
부모와 형제와 처자는 내가 항상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고 인척과 세구와 동네 사람도 얼굴을 보려 하면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유독 나를 아는 나만은 그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반드시 저 사방 몇 치 되는 유리의 빛을 빌려 이 접시만 한 얼굴을 비추니,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다. 내가 이 거울을 가져서 지기 한 사람을 얻었으니, 어찌 백 개의 거울로 백 명의 지기를 얻고 천 개의 거울로 천 명의 지기를 얻지 않으리오. 그러나 나를 아는 사람이 드문 것이야말로 노씨(老氏 노자)가 귀하게 여긴 것이었으니, 내 무엇 때문에 백 개, 천 개의 거울로 끝없이 지기를 구하겠는가.
□교민 5칙〔敎民五則〕
부모를 섬기는 일〔事親〕
일찍 일어나서 밤에 잘 주무셨는지를 여쭈고, 아침저녁의 음식은 반드시 부모에게 먼저 드린 뒤에야 자기가 먹는다. 밤에는 반드시 부모가 주무시는 곳이 따뜻한지 서늘한지를 살핀다.
부모를 뵐 때 안색은 반드시 온화하게 하고 기운은 반드시 낮추며, 부모와 말을 할 때 음성은 반드시 부드럽게 하고 감히 소리를 높이지 말아야 한다.
부모가 노하여 꾸짖으면 반드시 안색을 온화하게 하여 공경히 받아들여야 하며, 반드시 곧바로 고쳐야 한다.
부모와 말을 할 때 감히 옳고 그름을 따져서는 안 된다.
출입할 때는 반드시 부모에게 고하여야 한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은 불효를 행하는 것이다.
자기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자는 감히 남을 함부로 대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만약 자기가 남을 함부로 대하고 미워한다면 남도 반드시 자기의 부모를 함부로 대하고 미워할 것이니, 이것이 자기가 그렇게 행한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어른을 공경하는 일〔敬長〕
맹자가 말하기를 “나의 노인을 노인으로 섬겨서 남의 노인에게까지 미친다.” 하였으며, 《예기》에 이르기를 “나이가 배가 많은 사람은 아버지처럼 섬기고, 10년이 더 많은 사람은 형처럼 섬기며, 5년이 더 많은 사람과는 어깨를 나란히 하되 조금 뒤에서 따라가야 한다.” 하였으니, 어른을 공경하는 예에서부터 공경이 생겨난 것이다.
어른을 보면 반드시 절하고, 길에서 어른을 만났을 때 나어린 자가 말을 타고 있으면 반드시 말에서 내린다.
어른이 있는 장소에서, 나어린 자는 걸터앉지 말고 드러눕지 말며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한다.
감히 어른에게 성내는 기색을 드러내거나 업신여기는 말을 하여서는 안 된다.
업을 닦는 일〔修業〕
선비의 업은 책을 읽고 몸가짐을 단속하는 것으로, 그 절목이 《소학》, 《논어》, 《맹자》 등의 책에 실려 있거니와, 주 부자(朱夫子)가 위응중(魏應仲)에게 답한 편지 역시 초학자의 지침이 되므로 아래에 열거한다.
기거하거나 앉고 설 때는 단정하고 장엄하기에 힘써야 하며, 비스듬히 기대어서는 안 되니, 이는 나태해질 것을 걱정해서이다. 나가고 들어오거나 걷고 달릴 때는 엄숙하고 신중하기에 힘써야 하며, 가벼이 움직임으로써 덕성을 해쳐서는 안 된다. 겸손함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온화함과 공경으로 남을 대한다. 모든 일에 반드시 공손하고 삼가야 하며, 까닭 없이 출입을 하여서는 안 된다. 한담(閑談)을 적게 하여야 하니, 시간을 허비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잡서(雜書)를 보지 말아야 하니, 정력이 분산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활쏘기 역시 선비의 일이며 성인(聖人)이 덕을 관찰하였던 방법이다. 더구나 무사는 활쏘기로 업을 삼으니, 더욱 태만하여서는 안 된다.
농사짓는 사람의 업은 부지런하게 일하는 데에 있다.
밭을 갈면서는 절대로 남과 밭 경계를 다투지 말아야 한다.
향무(鄕武), 이서(吏胥), 노비(奴婢), 군례(軍隷)는 모두 관의 일을 맡은 자이니, 관차(官次)를 공경하고 요속(僚屬 소속 관원)과 화목하며, 반드시 속이지 않고 거스르지 않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
혹시 너무 가난하여 사민(四民)의 업에 종사하지 못하고 남에게 품을 파는 자는, 이 역시 그의 업이니 반드시 정성스럽고 부지런해야 하며 게으름을 피우거나 속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존경할 것이다.
여자의 행실은 유순함이 우선이니, 비록 훌륭한 일과 아름다운 덕이 있더라도, 만약에 유순하지 못하다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자는 길을 갈 때 남자를 만나면 피하여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하고, 곁에 다른 사람이 없이는 남자와 마주 앉지 말아야 한다. 남자와 조용한 곳에서 서로 이야기하지 말고 남자와 함께 음식을 먹지 말며, 밤에는 문밖을 나가지 말아야 한다. 여자는 말을 하면서 소리를 높여서는 안 된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일〔持身〕
술의 해로움은 사람의 성정을 바꾸어서 사납고 어그러지게 만들며 재물을 축내고 가산을 탕진하게 하며 뭇사람에게 비난을 받고 형벌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니, 경계할지어다. 경계할지어다.
잡기(雜技)의 해로움이 술과 어찌 다르겠는가. 절대로 손에 가까이하여서는 안 된다.
패려하고 거만한 사람은 남과 성내어 싸우기를 좋아하고 사납고 시기하는 사람은 남의 잘못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각종의 후회와 허물이 모두 여기에서 생기니 이것은 매우 경박한 풍속이다. 서경(西京)의 사대부는 남의 잘못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고, 조 상국(曹相國)은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리면서 오로지 남의 잘못을 숨기는 데 힘썼으니, 이것은 본받을 만한 일이다.
남의 잘못을 말하면 나의 덕이 손상되고 남과 원한을 맺게 된다.
남의 지난 잘못을 들추는 것은 마음가짐에 가장 큰 해가 된다.
혹시 망녕된 사람이 나와 싸우려 할 때는, 내가 그 사람을 피하여야 하며 이기지 못하는 것을 수치로 여겨서는 안 된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우리 형제는 평생 욕설로 남을 꾸짖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 가르침을 특히 명심하여야 한다. 어찌 다른 사람에 대해서만 그러하겠는가. 비록 처자(妻子)나 노복(奴僕)에 대해서도 욕을 하며 꾸짖어서는 안 된다.
집안을 다스리는 일〔治家〕
매일 아침 방과 마루 및 뜰 안과 문밖을 깨끗이 청소한다. 기명(器皿)의 배치는 절대로 뒤바꾸지 말아야 하고 똥거름을 모은 무더기 역시 반드시 반듯하게 하여야 한다. 후한(後漢)의 곽임종(郭林宗 곽태(郭太))은 자신이 묵은 여관을 반드시 청소한 다음에야 떠났는데, 하물며 자기가 거처하는 집이야 어찌 더럽게 하여 남에게 보이겠는가.
비록 몇 묘(畝)의 작은 집이라도, 만약에 빈 땅이 있으면 뽕ㆍ삼ㆍ채소를 심으며, 닭ㆍ개ㆍ돼지를 기르는 데에 역시 때를 어기지 말아야 한다.
한가할 때 새끼를 꼬거나 노끈을 꼬거나 멍석을 짜거나 미투리를 삼는 것은 모두 할 만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한담이 줄고 출입이 없어지고 일용에 여유가 생기니, 이익 되는 점이 참으로 많다.
□화제 제품〔畫題 諸品〕
매화 그림은 드러난 자태를 중시하니, 동쪽 집의 절세미인이 분을 바르고 연지를 찍어 각종의 자태를 다 꾸미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붉고 흰색으로 화려하게 그렸다고 해서 매우 좋은 그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시험 삼아 〈주중인(舟中人)〉 그림을 위해 지은 시에,
돛 내린 옛 벽에는 연파가 자욱한데 / 落帆古壁烟波宿
장막 걷은 봉창으로 갈대숲 바람이 들어오네 / 卷幔篷窓葦荻風
하였는데, 괜찮은지 모르겠다.
고방산(高房山)이 미가(米家)의 점법(點法)을 많이 썼으므로, 두 사람의 그림은 거의 구별이 안 된다. 다만 미불(米芾)은 초가집을 그리고 고방산은 기와집을 많이 그렸으므로 이것으로 구별한다. 지금 단지 점법을 보기만 하면 모두 미가의 점법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매화 가지 봄빛이 작은 화기를 희롱하여 / 梅梢春色弄微和
작심하고 남쪽 가지에 망울 많이 터뜨렸는데 / 作意南枝剪刻多
달빛 어둔 숲 속에서 흰 옷소매 만나자 / 月黑林間逢縞袂
패릉의 술 취한 교위 누구냐고 잘못 묻네 / 灞陵醉尉誤誰何
맑고 얕은 물 위에 성긴 그림자 가로 비끼고 / 疎影橫斜水淸淺
황혼 녘 달빛 속에 은은한 향기 떠도누나 / 暗香浮動月黃昏
제 모습 절묘하게 창 그림자에 비껴 있고 / 寫眞妙絶橫窓影
뼈 시린 맑고 차가운 물에 매화 가지 잠겨 있네 / 徹骨淸寒蘸水枝
남의 말에 휩쓸리지 않고 홀로 웃음 지으니 / 不共人言惟獨笑
문득 그대는 임을 그리워하는 것인가 / 忽疑君到正相思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매화의 아름다움을 영탄한 구절들이다. 그런데 파옹(坡翁 소동파(蘇東坡))이 읊은 시의,
한매가 마치 봄을 피하는 듯하니 / 寒梅似與春相避
사심 없는 조물주의 생각을 알지 못하겠네 / 未解無私造物情
라는 구절은 뜻이 높고 말이 참신하기가 남보다 몇 단계 뛰어나니, 참으로 보통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다.
게를 그릴 때는 두 개의 엄지발과 여섯 개의 다리를 정확하게 그리는데 구애되지 말고 용필을 활달하게 하여 꾸물꾸물 움직이는 것처럼 하는 것이 중요하니, 이것은 아는 사람과 이야기할 일이다.
※참고사항
서용보(1757~1824)와 정약용(1762-1836)의 악연과 다산의 불운
서용보( 1774 생원시 및 증광문과)는 서영보(1759-1816)의 집안으로 다산 정약용(1762-1836:1783진사, 1789알성시)을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다산의 암행어사 시절(1794) 경기감찰사였던 서용보의 비행을 고발한 것이 18년의 긴 유배 생활의 불운을 만들었다.
다산의 암행어사 시절에 자신의 비행을 지적받았던 서용보는 뒤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서 다산을 끝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일에 앞장서는 역할을 한다. 다산의 생애가 저토록 불행했던 것은 바로 이 서용보와의 악연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1801년 다산이 신유옥사(辛酉獄事)로 구속되고 국문을 맡아 비참한 불행을 겪던 때에, 재판 결과 큰 잘못이 없다고 판명되어 재판관계자 모두가 그를 석방하자고 의견을 모았으나 당시 우의정이라는 고관으로 위관(재판관)의 한 사람이었던 서용보의 반대로 석방될 기회를 놓치고 먼먼 귀양길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귀양살이를 시작한 때로부터 오래지 않은 1803년 왕실의 최고 어른 정순대비가 다산을 유배지에서 풀어 주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정승이던 서용보가 다시 가로막아 풀려나지 못했다. 때문에 다산은 18년의 긴긴 유배생활을 겪어야 했으며, 57세이던 1818년 가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귀양살이를 마치고 귀향할 수 있었다. 돌아온 이듬해인 1819년 겨울에 조정의 의논으로 다산을 다시 등용하여 백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자는 결론이 났으나 영의정인 서용보가 또 저지해 출사할 기회를 영원히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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