芝汀燕記
원재명(元在明 : 1763-1816)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孺良, 호는 芝汀이다. 목사 원명구(元命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원경하(元景夏)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원인손(元仁孫)이며, 어머니는 남유상(南有常)의 딸이다. 1790년(정조 14) 사마시에 합격한 뒤 관직에 나아가 활동하다가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역임하였다. 1801년(순조 1) 도기(到記)의 제술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전시에 직부되고, 이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정랑에 제배된 뒤 정언(正言)이 되었다. 그 뒤 삼사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충청도관찰사,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공(公)은 계미년(1763, 영조39)에 태어났다. 갑자년(1804, 순조4)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갈 때는 나이 42세였다. 수(壽)는 54세에 그쳤다.
※이번 동지사 연행에 동행한 선비 김선민(1772-1813)이 저술한 관연록은 이미 정리한 바 있어 같은 내용이 많이 겹치고 있다.
▣지정연기 권1 : 1804년(순조 4년, 갑자)
○10월 30일
성정각(誠正閣)에서 사폐(辭陛)하고 명정전(明政殿)에서 배표(拜表)하였다. 모화관(慕華館)에서 사대(査對)하였다. 40리를 가서 고양군(高陽郡)에 머물러 묵었다.
새벽에 가묘(家廟)에 인사를 올리고 궁궐로 나아가 정사(正使 김사목(金思穆1740-1829)ㆍ부사(副使 송전(宋銓 1741-1814)와 함께 성정각(誠正閣)에 입시(入侍)하였다. 상(上)께서 친히 하유(下諭)하기를, “삼사(三使 정사ㆍ부사ㆍ서장관 세 사람을 통칭하는 말)는 무사히 잘 다녀 오라.” 하니 삼사가 동시에 일어났다가 부복(俯伏)하였다. 다시 하교(下敎)하기를, “저 나라에 머무는 동안 새로운 소식을 듣는 대로 탐지해 오라.” 하니, 정사가 답하여 아뢰기를, “근래에 통역하는 무리들〔象譯輩〕의 실정 탐지가 엉성합니다만, 그들로 하여금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하교하기를, “어느 때 강을 건너는가?” 하니, 정사는 “아마도 다음 달 20일 무렵일 듯합니다.”라고 답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어느 때 복명(復命 귀국 후 보고하는 것)할 수 있겠는가?”하니, 정사는 “내년 3월 보름에서 20일 사이일 듯합니다.”
하였다.
이어 삼사에게 각각 환약〔丸劑〕 5가지〔種〕ㆍ부채 2자루ㆍ단목(檀木) □근(斤)ㆍ이엄(耳掩) 1벌〔事〕을 내려주라고 하명(下命)하시니, 삼사가 일어났다가 부복하여 공손히 받았다. 차례대로 받기를 마친 뒤 물러가라는 명이 있어 물러나왔다.
삼사가 함께 명정전(明政殿) 뜰로 나아가 배표의(拜表儀)를 행하였다. 삼사는 따로 반차(班次 품계의 차례)를 마련하여 공립(拱立)하고, 백관(百官)들은 의례대로 예를 행하여 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뒤 산호(山呼)를 외쳤다. 드디어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황옥 용정(黃屋龍亭)에 받들고 돈화문(敦化門)으로 나왔다.
모화관(慕華館)에 도착하니 종인(從人)들이 모두 왔고, 전송하는 이들도 벌써 모여 있었다. 부사의 막차(幕次)에 들어가 잠시 쉬고 있는데, 가인(家人)이 아침밥〔朝飯〕을 보내왔다. 대청(大廳)에서 사대(査對)에 참여했다가 물러나와 앉아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사람들과 전별주를 다 마시지도 못했는데, 정사와 부사가 차례로 출발하여 나도 교자에 올라 출발하였다. 산 위의 해는 어느덧 서쪽으로 기울어 가고, 바람도 스산하였다. 조카 규(圭)와 생질 이인태(李寅泰)가 여기에서 작별을 고하고, 범(範)ㆍ주(周) 두 조카와 사위 민치승(閔致昇)은 먼저 고양으로 갔다. 모화현(慕華峴)을 넘고 홍제원(弘濟院)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전송하는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여기에서 작별을 고했다. 창릉점(昌陵店)에 이르렀을 때 이미 횃불을 밝혔고, 초경(初更 5경으로 나눈 첫 번째 시각, 저녁 8시 무렵)에 고양군에 도착했다.
군수 자범(子範) 유한식(兪漢寔)은 병으로 인해 오지 못했으나, 제공된 저녁 식사가 매우 정결하였다. 겸인(傔人) 이명철(李明喆)이 마침 도착하여 관아에 머물다가 와서 인사하기에, 군수에게 술을 좀 보내 달라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였더니, 답으로 밤에 큰 술단지 두 개를 보내 와서 제군들과 함께 몇 잔 흠뻑 마셨는데 술맛이 산뜻하고 시원하였다. 교리(校理) 송지렴(宋知濂)이 그의 부친인 부사(副使 송전)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일행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초야(初夜 초저녁, 초경)였으므로, 잠시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출발하며 지은 시〔發程詩〕 1편이 따로 있다.
○11월 초3일
정사가 한 기녀를 통해 차 주전자를 보내면서 “이 차가 명품(名品)이라 나누어 보냅니다. 맛과 향기가 매우 기이하니 먼저 절반은 홀짝홀짝 마시고, 그런 다음 나머지 반을 마셔 보시지요.”라고 하였다. 계명(季鳴)이 기녀에게 답하기를, “과연 명품일세. 맛이 지극히 담백하구만.”이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계명이 정사의 방으로 갔는데, 정사가 웃으면서 “자네도 보내준 차를 마셨는가? 내가 장난을 친 것일세. 이건 옥류천의 물이었다네.”라고 말했다.
○초4일
고려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때 장군 이자성(李子晟) 등을 파견하여 동선역(洞仙驛)에서 몽고군을 방어하게 하였다. 마침 해가 저물어 삼군(三軍)이 머물러서 쉬고 있었는데, 몽고 장수 살리타〔撒禮塔〕가 80여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자, 이자성 등이 결사적으로 막아내었으니 이곳이 바로 그 땅이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건로(建虜 건주 여진, 후일의 청나라)가 침입함에 김자점(金自點)은 도원수(都元帥)로 정방산성(正方山城)에 있었고, 정방산성은 동선령의 서쪽에 있었는데, 적이 성 아래를 지나가는데도 화살 한 대도 쏘지 않았으니, 이자성의 일과 견주어 본다면 더더욱 애통한 일이다.
○초6일
대동강(大同江)을 따라 길을 가다 보니 일산처럼 드리워진 긴 숲 사이로 깨끗한 모래와 푸른 물결이 은은히 드러나며, 연광정(練光亭)과 읍호루(挹灝樓)가 아스라이 시야에 들어오니, 참으로 눈을 크게 뜨고 볼만한 곳이었다.
세 사신이 함께 큰 배에 올라 중류(中流)에서 배회하는데, 음악 소리가 요란하고 단장한 미녀들이 북적거리는 모습을 보니, 서쪽으로 떠나 온 이래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일〔試役〕로 이곳에 와 십여 일 동안 머물면서 누대(樓臺)와 강산(江山)에 남겨 둔 정을 잊을 수가 없었거늘, 2년이 되기도 전에 다시금 이 패강(浿江 대동강)을 건너게 되니, 이 또한 인연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배에서 내려 세 사신이 함께 연광정(練光亭)에 올랐다. 때는 바야흐로 석양이 온 강에 가득 비치고, 성 아래 강가의 돛을 단 배들은 대나무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으니, 그 번성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읍청루(挹淸樓) 인근의 여러 명승지보다 못하지 않았다. 정자의 편액에 쓰여 있는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는 네 글자는 바로 명나라 사신 주지번의 필적이다.
○초8일
밤에 부사가 나이 어린 기녀 하나를 보내어 전하기를, “이 아이는 제가 이곳에 유배와 있을 때 글을 가르쳐 주었던 기녀인데, 시재(詩才)가 있어 사랑스러우니 시험해 보시지요.”라고 하였다. 듣기에 매우 기특하므로, 운자(韻字)를 불러주고 시를 짓게 하니, 즉시 글로 써서 바치는데 시어가 나긋나긋 부드럽고, 필법도 둥글고 부드러우니, 재주와 재치가 있었다. 나이는 열다섯이고, 이름은 계심(桂心)이라 하였다. 부사에게 회답하기를, “이 아이의 시와 인품이 절묘하니, 앞에 있는 역참에 데려다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초9일
안주목에 이르러서 남문(南門)으로 들어갔다. 긴 숲 사이로 길이 나 있는데, 이중의 성벽 위로 첩첩이 누대가 연이었고 여염집과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으니, 역시 평양성에 버금갈 만하였다.
○14일
점심을 먹을 때에 정사가 어떤 기녀를 보내고 쪽지〔片札〕에 “이 사람은 제가 매우 아꼈던 기녀인데, 어떤지 한번 살펴보시지요.”라고 써 보냈다. 보아하니 과연 범상치 않았는데, 이름은 금옥(金玉)이고 철산(鐵山)의 절세미녀였다. 철산 부사 정택휴(鄭宅休)가 찾아와 만났다.
○15일
퇴기(退妓) 옥섬(玉蟾)과 금아(金蛾)를 불러서 만났다. 옥섬은 궁촌(宮村) 이 참판(李參判) 어른이 정을 나눈 이이고, 금아는 제형(娣兄) 이 진사(李進士)와 정을 나눈 이인데, 나에게 옛일을 이야기하며 마음 약한 소리를 하였다.
○17일
진변헌에서 잔치를 여니 기악(妓樂)이 아주 볼만하였다. 그중 어린 기생 두 쌍〔二雙〕은 모두 11살로 검무(劍舞)를 잘 추었다. 가장 잘하는 아이는 국화(菊花)이고, 그 다음은 녹엽(綠葉)이다.
○18일
삼방(三房 서장관과 서장관을 수행하는 인원을 말함)의 말은 으레 북도(北道 함경도)의 역마 중에서 고르는데, 좌마(座馬)와 거마(車馬) 한 쌍(雙), 의롱마(衣籠馬) 1필이다. 군관은 영남(嶺南)의 역마를 타고, 건량관(乾糧官)은 호남(湖南)의 역마를 타며, 반당(伴儻)과 고지기〔庫直〕들은 의주부의 쇄마(刷馬)를 탄다.
○22일
새벽에 용만관(龍灣館)에서 하례(賀禮)를 행하니, 오늘이 동지(冬至)이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은 후에 삼사와 부윤이 백일원(百一院)에 갔다. 치마기(馳馬妓 말을 타고 달리는 기녀) 4쌍을 선발하니, 이들이 말을 타고 앞길을 인도하였다. 기녀들은 모두 전립(氊笠)을 쓰고 전복(戰服) 차림이었으며, 남문(南門)으로 나와서 군악(軍樂)을 연주하며 갔다. 삼사와 부윤도 융복(戎服)을 갖추어 입고 임하였다. 백일원은 압록강 동쪽 기슭에 있는데, 지세가 평탄하여 활을 쏘고 말을 달릴 수 있었다. 장교(將校)들과 기녀들이 각기 말고삐를 쥐고 도열해 있으니, 당안(唐鞍 중국식 안장)과 호마(胡馬 만주나 중국에서 나는 말)들도 하나하나 선발한 듯하였다. 북이 세 번 울리자 말에 올라타서, 장교들이 앞서고, 기녀들이 뒤따르면서 일궁지(一弓地 6척 정도로 가까운 거리)를 달리다가, 깃발을 보고 되돌아오는데, 순식간에 왔다 갔다 하는 그 모습이 마치 물 찬 제비 같고, 버드나무 가지에서 노니는 꾀꼬리 같았다. 또 그중에는 쌍검을 휘두르는 이도 있어 참으로 장관이니, 옛날의 낭자군(娘子軍) 또한 이와 같았을 것이다. 이에 시 한 수를 지어 이 일을 기록하였다.
○24일
새벽에 의주 부윤과 함께 서문(西門)으로 나섰다. 멀리 강가를 바라보니 연기와 먼지가 모래사장에 자욱하고, 사람과 말들이 뒤섞여 시끌벅적한데, 장사치도 있고 백성들도 있어 수검(授檢 금지 물품 등을 수색하는 것)을 받거나 이별의 술잔을 나누기도 하였다. 먼저 막차(幕次)에 도착하였는데, 잠시 후에 정사와 부사가 나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사와 부사는 남향(南向)하여 앉고, 부윤은 동향(東向)하여 앉고, 서장관은 서향(西向)하여 앉아서, 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수검을 마치지 못했으나 이미 포시(晡時)가 되었으므로, 정사와 부사가 먼저 출발하여 썰매〔雪馬〕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데, 앞길을 인도하는 이들이 모두 뒤떨어지니, 겨우 군뢰(軍牢) 1쌍(雙)과 인로(引路) 1쌍, 일산(日傘) 1자루〔柄〕뿐이었다.
일행들의 짐바리를 검사하고 사람과 말들을 점검한 다음, 도강 장계(渡江狀啓)를 고쳐 썼다. 이번 행차에 인원수는 총 308명이고, 말은 모두 212필이다. 나도 썰매를 타고 강을 건너갔다. 부윤이 나루터까지 와서 전송하면서 군악(軍樂)을 연주하도록 명하였다. 종인(從人)들도 모두 말에 올라서, 군관(軍官)이 앞장서고, 건량관(乾糧官)이 다음이고, 별배행(別陪行), 반당(伴儻)의 순서로 갔으며, 마지막에 고지기〔庫直〕가 갔다. 기녀들이 길 오른편에 늘어서서 절을 하며 일제히 잘 갔다 오라고 말했다. 개중에 마음 아파하는 이도 있고, 눈물을 떨어뜨리는 이도 있었는데, 누구 때문에 그러는지는 참으로 알 수 없었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서글픈 심정이 들게 하였다.
○26일
봉황산에서 1리쯤 떨어진 곳에 큰 목책이 10여 리에 걸쳐 죽 늘어서 있어서, 내를 가로지르고 산을 이어 빽빽하게 세워져 있고, 높이는 한 길(丈) 남짓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책문(柵門)인데 책문 자체는 그저 하나의 초옥(草屋)이었다. 삼사가 책문 밖의 막차에서 점심을 먹었고, 황력재자관(皇曆齎咨官) 홍처순(洪處純)이 책문 안쪽에서 나와서 인사를 하고, 저들에 관한 소식을 대략 전해 주었다. 그가 인솔해 온 전라도 나주(羅州) 출신의 표류민 문순덕(文順德) 등 2인도 함께 왔기에 어찌 된 일인지 사유를 물었다. 두 사람은 나이가 모두 20여 세로, 신유년(1801, 순조 원년) 정월에 바람에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까지 갔다가 금릉(金陵 남경(南京))을 거쳐서 뭍으로 나왔는데, 여송(呂宋 필리핀)과 광동(廣東), 산동(山東)을 두루 거친 뒤 북경(北京)에 이르렀고, 몇 달 동안 체류한 끝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들은 우리들을 보자 눈물 콧물을 쏟으며 그간의 고생을 말하였으며, 자신의 본명은 순득(順得)이었으나 금릉 사람이 순덕(順德)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순덕이 거칠게나마 문자를 알았으므로, 노정기(路程記) 1본(本)을 써서 주머니 속에 지니고 있었는데, 거기에 기록된 장관(壯觀)들은 참으로 망양지탄(望洋之嘆)을 느끼게 하였다.
○27일
이어 집 안채로 들어가자 여인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걸상에 앉아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캉 위에 앉아 천을 다듬어 실로 꿰매어 신발 바닥을 만들고 있었다. 걸상 위에 앉아 있던 여인이 우리를 보고 “고려(高麗), 고려(高麗)”라 하고는 걸상에서 일어나 앉으라 하고, 차를 내려 권하였는데, 조금도 부끄러운 빛이 없었다. 청심환(淸心丸)을 달라고 하기에 주었더니,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했다.
○28일
아이 하나가 캉 아래에 서 있었는데, 청류(靑流 이의성의 호)가 “네 성(姓)이 무엇이냐?” 하자 “나의 성은 이(李)입니다.” 하였다. 청류가 “너와 내가 같은 성씨로구나.” 하자, 아이가 웃으면서 뭐라고 답하였다. 마두에게 무슨 말인지 물어보니, “저와 어르신의 성씨가 같으니 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고 한다. 마두가 “넌 만주어를 할 줄 아니?” 하고 물으니, 아이는 “만주어는 부끄러워서 하지 않아요.”라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이 참 기특하기에 청심환을 주자, 아이는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합니다〔謝謝〕.”라고 하였다.
○29일
얼마 후 서너 명의 행인(行人)들이 캉으로 들어와 술을 마셨다. 탁자 하나를 놓고 주위에 둘러앉아 각자 젓가락 한 벌과 잔 하나씩을 앞에 놓았다. 술잔은 겨우 8, 9사〔龠〕쯤 들어갈 정도이고, 탁자 가운데에 안주 접시 하나가 있었다. 종자(從者)가 납병(鑞甁)을 들고 있으면서 술을 마시면 마시는 대로 잔에 따른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또 단번에 마시지 않고, 홀짝홀짝 마시면서 안주를 먹고, 담소를 나누는데, 술 한 잔을 네댓 번에 나누어 다 마신다. 술을 두 병이나 서너 병을 마시는 이들도 있지만, 병의 크기라야 다섯 잔쯤 들어갈 만큼이고, 값은 17대전(大錢)이다.
○12월 2일
해자를 따라 북쪽으로 가서 백탑(白塔)에 이르렀다. 탑은 8면(面) 13층(層)이고, 하대(下臺)도 3층이나 되니, 높이가 가히 천 길〔仞〕은 됨직했다. 각 층마다 처마가 있고 처마에는 풍경(風磬)을 매달았다. 꼭대기에는 상륜(相輪 탑의 꼭대기 머리 장식)을 설치하여 구리줄을 매어 두었고, 각 면마다 모두 한 길(丈) 남짓한 불상을 새겼다. 온통 벽돌과 석회를 이용해서 지어서 백탑(白塔)이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로는 당나라 태종(太宗)이 동쪽으로 고구려를 정벌할 때 울지경덕(尉遲敬德) 등에게 명하여 건립했다고 한다. 탑의 뒤편으로 오래된 절이 있으니, 옛 이름은 광우사(廣祐寺)이고, ‘백탑사(白塔寺)’라고 일컫기도 한다. 남쪽으로 천산(千山)을 바라보니 5, 60리쯤 되었다.
○3일
요양에서부터 길 양편으로 버드나무를 심어서 북경까지 계속되는데, 대부분의 대로(大路)들은 모두 이렇다. 버드나무 사이는 수레 10대 가량으로, 매년 여름철 불어난 물이 들판에 범람해도 이 나무들에 의지하여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으니, 강희(康熙) 때부터 심은 것이라고 한다. 산해관 동쪽에 있는 부상(富商)과 대고(大賈)들이 심양과 요양을 왕래하기에, 여기서부터 수레바퀴와 말발굽 자국이 더더욱 많았다. 큰 수레 열서너 대가 우르릉우르릉 지나가는 것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수레 한 대에 멍에를 맨 노새나 말이 많게는 열서너 마리나 되었고, 적은 경우도 일고여덟 마리는 되었다. 끌채 아래에 매는 놈은 반드시 체구가 크고 힘이 있는 것으로 고른다. 가슴걸이와 뱃대끈은 쇠가죽을 사용하며, 멍에를 메는〔駕轅〕 방식은 횡액(衡軛)을 사용하지 않으니, 우리나라에서 쌍교(雙轎)에 말을 메는 것과 같다. 작은 나무 안장〔木鞍〕을 만들어 너비가 수촌(數寸)쯤 되는 가죽띠 한 쌍을 양쪽으로 드리우는데, 양쪽 끝에 걸쇠〔套〕가 있고, 그 위에 얽어매는 끈이 있다. 말의 가슴 앞에 끈을 묶어 고정시키고, 말뚝처럼 된 끌채의 끝을 걸쇠에 걸면 빠지지 않는다. 옛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변통하여 이용하여서 말이 온 힘을 쓸 수 있고, 또한 목을 조르는 듯한 괴로움도 받지 않으니, 이 어찌 ‘뒤에 나온 것이 교묘하다〔後出者巧〕’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겁고 큰 짐을 싣는 수레는 바퀴 바깥까지 시렁이 튀어나오고 높이는 몇 장(丈)이나 되니, 무게를 따져 보면 2, 3천 근은 더 될 것이다. 수레를 모는 사람이 앉는 자리를 보면, 위에 길고 짧은 채찍이 꽂혀 있어 번갈아 가며 사용하는데 긴 것은 서너 길쯤 되어서 멀리 있는 말을 채찍질할 때 쓰고, 짧은 것은 한 길 가량으로 가까운 말을 채찍질할 때 쓴다. 명령을 듣지 않는 말에게는 채찍을 휘둘러 때리는데, 한 번도 잘못 치는 법이 없고 벼락이 치듯이 휘둘러 때리면, 여러 말들이 일제히 힘을 써 내달려서 감히 조금도 게으름을 피지 못한다. 멀리서 이 모습을 바라보면 마치 낚시꾼이 낚싯대를 휘두르는 것 같다. 수레 앞에는 쌀 한 말은 들어감직한 큰 방울이 쌍으로 매달려 있는데, 방울이 흔들려서 울리는 소리가 마치 종을 치는 듯하다. 큰 수레든 작은 수레든 바퀴 자국의 폭은 조금의 차이도 없이 동일하니, 이것이 이른바 ‘온 세상의 수레바퀴 폭이 동일하다〔天下同軌〕’라는 것이다.
○초4일
심양은 옛날의 읍루국(挹婁國)으로,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때에는 고구려(高句麗)에 속했다.
○5일
어떤 승려가 한가로이 동쪽 계단 위에 서서 징을 치고 있길래 마두를 시켜 정전(正殿)의 문을 열어 달라고 했는데, 문을 지키던 승려가 제지하여 못 열게 하면서 말하기를, “저들이 정은(正銀) 20냥, 부채 200자루, 백지(白紙) 100권, 청심원(淸心元) 100알〔丸〕을 내지 않으면 결코 문을 열 수 없다.”고 하였다. 점점 공갈(恐喝)이 심해지며 태반이 욕지거리를 지껄이더니,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곧바로 서쪽 옆문으로 나왔다.
○7일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말 수십 마리를 몰고 가는 것을 보았다. 말은 모두 우람하고 씩씩한 준마들이었다. 굴레와 고삐를 묶어 매지도 않았는데 채찍질 한 번에 일제히 머리를 나란히 하고 가니, 말을 부리는 그 방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저녁에 소흑산(小黑山)에서 묵었다. 여관집〔店舍〕은 낮고 좁았다. 주인은 만주인〔胡人〕인데, 그 처(妻)가 우리들을 잘 접대하였고 빈번하게 드나들며 마두(馬頭)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그녀가 또 대인(大人)의 방 앞으로 오길래 내가 무엇 때문에 왔는가 하고 물으니, 노모(老母) 때문에 청심환을 얻고자 한다고 하여 청심환을 주었다. 나이를 물으니 스물 둘이라 하였고, 성(姓)을 물으니 대(戴)라고 하였다.
○8일
광녕참에 머물렀다. 날이 아직 일렀는데, 계명(季鳴)이 희천(希天)과 함께 어느 술집에 들어가서 술을 달라고 하자, 주인이 고개를 저으며 남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상하게 여겨 주인에게 따져 묻자, 주인은 고려(高麗) 사람들이 술을 좋아해서 주정을 부리기 때문에, 지현(知縣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관리)이 고려인들에게 술 파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말했다. 마두가 말하기를, “이 어르신들에게 어찌 그런 일이 있겠소? 빨리빨리 꺼내 오슈.”라고 하자, 잠시 후 술 두 병을 가지고 왔고 이에 희천과 함께 주거니 받거니 몇 순배 마시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예전에 마두나 역졸들이 술주정을 부리며 만주인들과 서로 싸우고, 혹은 술을 마시고서 술값을 치르지 않았다가 저들에게 모욕을 당하기도 하였으니, 술을 팔지 않으려 하는 것도 참으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11일
수레를 모는 사람〔看車的〕이 낙타 네댓 필을 몰아 뒤뜰에서 물을 먹이고 있었다. 낙타 한 필이 사람을 따라 앞서 가자 나머지는 모두 머리를 내린 채 그 뒤를 따라가니, 채찍이나 고삐를 쓰지 않았다. 우물에 가서 물을 마실 때도 필요 이상 많이 먹지 않고, 물을 다 마시면 사람이 지휘하지 않아도 앞섰던 낙타가 먼저 가고, 나머지 낙타들은 그 뒤를 따라서 일제히 수레 앞으로 돌아갔다. 수레를 모는 사람이 무어라 외치자, 먼저 앞다리를 꿇은 다음 뒷다리도 무릎을 꿇어 땅에 엎드렸으며, 또 다시 소리를 지르니 다시 일어났다. 무릎을 꿇거나 일어날 때 모두 울음소리를 내는데, 소의 울음소리와 비슷하였다. 낙타의 다리는 세 마디였다.
○13일
팔도하(八渡河)의 다리 위에서 한 여인을 보았다. 머리는 칠보(七寶)로 꾸미고, 귀에는 옥으로 만든 귀고리 한 쌍을 찼으며 곱게 단장한 아리따운 자태로 나귀를 타고 지나가는데 나이는 16세쯤이었다. 보는 사람마다 모두 아름답다고 하였다. 내가 청류(靑流)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자네도 명색(鳴色)을 보았던가?” 하니, 청류가 “이미 보았지.” 하였다. 명색은 의주부(義州府)의 기녀로, 말을 잘 타고 재담(才談)을 잘하여 매양 청류와 함께 농지거리를 했었는데, 강을 건너 온 이후로 만주 여인이든 한족 여인이든 보기만 하면 명색이라 일컬으니, 우리 일행들 사이에 유행하는 농담이 되었던 것이다. 일전에는 한 미녀가 담장 안에 서서 담장 바깥의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택(二澤)이 갑자기 청류에게 달려가서 말하기를, “명색이 담장 위에 나타났습니다.”라고 말하는 바람에 모두 포복절도하여 웃음을 그치지 못했었다.
▣지정연기 권2 : 1805년(순조 5년, 을축)
○12월 15일
위원대를 내려와 산해관으로 들어섰다. 관장(關將)이 문을 열고 일행을 점검하여 통과시켰다. 산해관은 임유현(臨楡縣)에 속하며, 제독(提督)과 장군(將軍)이 있어 도맡아 다스리고 또 지현(知縣)을 두어 관리한다. 성문은 모두 5중(五重)인데, 첫째 문에는 ‘산해관(山海關)’이라 편액하고, 둘째 문에는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편액을 하였다.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명나라 서달(徐達)의 글씨라고 하지만 확실치 않다. 옹성(瓮城) 안쪽의 바위에는 ‘위진웅변(威鎭雄邊)’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성의 높이는 네 길(丈) 남짓이고, 성루(城樓)는 양첨(兩簷)이거나 삼첨(三簷)으로, 그 제도는 대개 요양성이나 심양성과 같았다. 성은 높고 해자는 깊으며, 산에 걸터앉아 바다로 막혔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든 금성 탕지(金城湯池)요, 중원(中原)의 빗장이다. 또 이곳은 재물이 모여드는 큰 도회로 백성들의 부유함과 저잣거리의 번화함이 심양보다 훨씬 더했다.
정사와 부사는 곧장 참(站)을 향해 갔고, 나는 뒤에 홀로 남아 남문(南門)을 통해 나가서 징해루(澄海樓)에 갔다. 징해루는 허공에 높이 솟아 있었고, 누각 서쪽에 있는 사찰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소장되어 있다. 징해루의 북쪽으로 가서 성문으로 들어가자, 안쪽에 민가 10여 호가 있었다. 좁은 골목을 뚫고 지나 성을 따라 수십 급(級)의 돌계단을 오르자 그 위에 징해루가 있으니, 만리장성이 땅에서 끝나는 끄트머리이다. 큰 파도가 들이치고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한 점 섬조차 없는 곳, 이곳이 바로 발해(渤海)이다. 누각에 올라 통쾌하게 술 한 잔을 마시자, 나도 모르게 탄성이 절로 나왔다.
○17일
이때 흑룡강(黑龍江)의 병사들 수천 명이 점사(店舍)로 들어왔는데, 기세가 매우 거칠고 사납기에, 역관〔譯舌〕을 시켜 물어보게 하였다. 교비(敎匪 백련교의 난) 토벌에 동원되어 촉(蜀) 땅에서 4년 동안 싸운 이들로 동원된 이들 중에 죽은 이가 태반이나 되며, 그들은 올해 대승을 거두어 상을 받아 귀향하는데, 지금은 교비들이 거의 소탕되었다고 했다.
○22일
세 사신이 드디어 옷을 갈아입고 말에 오르고, 종관(從官)들은 동반(東班)과 서반(西班) 차례로 조양문(朝陽門)으로 들어가니, 이것이 바로 북경의 동문(東門)이다. 그런데 수레와 말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 문을 통과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아마도 원근의 나라에서 공물을 바치거나 상인들이 세시(歲時)에 맞추어 더 많이 모여들기 때문인 듯했다.
문안으로 들어서니 큰길의 너비가 7, 80보는 됨직하여 우리나라의 종로 거리와 비교하자면 삼분지 일쯤 더 넓었지만, 좌우에 있는 상점들은 오히려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았다. 문을 들어서서 3리쯤 가자 십자로〔十字街〕가 있었고, 동서남북 모두에 패루가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휘황찬란하여 눈길 닿는 곳마다 기이하였다. 여기서부터 점점 더 화려해졌다. 몇 리를 더 가자 멀리 성문이 보이니, 그것이 숭문문(崇文門)으로 북경의 동남쪽 성문이다. 성문에서 몇 백 보 못 미친 곳에서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가자 돌다리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옥하교(玉河橋)이다. 옥하교를 지나 수백 보를 가서 관사(館舍)에 도착했다.
관사는 성 남쪽에 있는 길의 북쪽 가에 있었다. 통관(通官)들이 문에 나와 영접하자 사행(使行)들은 손을 들어 예를 표하였다. 관사에 들어가
○24일
계명과 희천이 유리창(琉璃廠)에 갔다. 유리창이란 유리 기와와 벽돌을 만드는 공장이다. 푸른 색 누른 색 알록달록한 가지각색 기와며 벽돌들이 유리처럼 반짝이므로, 궁중에서 쓰는 갖가지 기와와 벽돌들을 모두 ‘유리(琉璃)’라고 일컫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일하는 장소를 ‘창(廠)’이라고 한다. 유리창의 양편 길가는 상점들로서, 길의 동쪽과 서쪽에는 여문(閭門)이 세워져 있는데 이어진 거리가 거의 5리나 된다.
상점에는 대부분 서적(書籍)과 비판(碑版 비석에 새긴 글 혹은 탁본), 정이(鼎彝 오래된 솥이나 제기 따위), 골동품 등 갖가지 기완(器玩 완상(玩賞)용 기물)과 잡물(雜物)들이 있고, 장사하는 사람 중에는 강남(江南)의 수재(秀才)로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을 구하러 온 사람들이 많아서 저잣거리에서 때때로 명사(名士)들을 볼 수 있었다. 누각 등 건물의 호사스러움은 비록 다른 곳의 시장만 못하였으나, 진귀하고 기묘한 물건들이 넘치도록 쌓여 있으며, 위치 또한 고아하였다.
각 점포마다 시렁을 10여 층이나 매달아 놓았고, 아첨(牙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으며, 책갑마다 표지(標紙)가 붙어 있었다. 벽에는 거울이 많이 걸려 있고, 탁자 위에는 모두 주판(籌版)이 놓여 있으며, 문미(門楣 문 위에 가로로 댄 나무)에는 편액(扁額)들이 걸려 있으니, ‘취영당(聚瀛堂)’이니, ‘오류거(五柳居)’니 하는 것들이다.
이곳의 상점들이 몇천 개인지, 몇백 개인지 모를 정도이고, 거기에 있는 재화(財貨)는 몇만이나 될지 모를 정도였는데, 백성들이 살아가면서 살아 있는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이를 장사 지내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은 단 하나도 없고, 그저 기기묘묘(奇奇妙妙)한 것으로 사치스럽고 화려하여 사람의 뜻을 해치는 것들뿐이었으니 이 또한 개탄할 만했다.
○28일
홍려시 소경이 앞으로 나아가 계단 위에 서자, 통관이 일행을 인도하여 뜰의 서쪽에 서서 북향(北向)하도록 하였다. 이어 찬례(贊禮)가 높은 목소리로 진(進 jìn, 앞으로 나아가라) 자를 외쳐서 반차(班次)를 정돈시키고, 또 궤(跪 guì, 무릎을 꿇어라) 자를 외쳤으며, 다시 고두(叩頭 kòu̇tóu, 머리를 조아려라) 자를 세 번 외쳤다. 그리고 다시 기(起 qǐ, 일어나라) 자, 궤(跪 guì) 자, 고두(叩頭 kòu̇tóu) 자를 세 차례 외쳤다. 이렇게 세 번 반복하고, 마지막으로 퇴(退 tuì, 물러가라) 자를 외치니, 이것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라는 것이다.
찬례가 외친 것은 만주어〔淸語〕인데, 우리나라 소리와 매우 흡사하였다. 외국의 공사(貢使)들이 의식의 예법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미리 연습하도록 하여 조정의 반열에서 실수하지 않게끔 하는 것이니, 이 또한 명나라 때부터 내려오는 옛 제도이다.
섬라의 사신은 겨우 세 사람뿐이었으며, 각자 종인 하나씩만 데리고 있을 뿐이었다. 맨발에다 이빨이 검었으며, 소위 ‘조복(朝服)’이란 것도 금실로 수를 놓은 붉은 옷으로, 그 제도는 호복(胡服)과 마찬가지였다. 삭발을 한 채 관(冠)을 썼는데, 관의 제도는 원뿔처럼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뾰족해져서 끝은 마치 양의 뿔 같았고, 길이는 두 자(尺)쯤이며, 순색(純色)에 도금(塗金)을 했다. 바닷길과 육로로 몇 만 리나 떨어졌으므로, 1년 이상이나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왔으니, 꾀죄죄한 얼굴과 누추한 몰골은 겨우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1805년 1월 1일
섬라의 사신이 또 들어와서 우리 곁에 서 있었다. 역관이 그들과 말을 해 보려고 했지만 그들의 말이 몽고어나 만주어와 또 달라서,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여러 오랑캐들이 빙 둘러서서 주절주절 떠드는데,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고, 어쩌다가 무슨 관(官) 세 글자나 혹은 고려(高麗) 두 글자만 들렸다. 그중 어떤 이는 우리의 옷과 허리띠를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우리의 면모를 유심히 살펴보니 이 또한 괴로운 일이었다.
동이 틀 무렵에 전(殿) 위에서 명편(鳴鞭) 소리와 함께 음악 연주가 시작되고, 오문(午門) 위에서 북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그리고 이내 황제가 나와 앉자, 태화문이 활짝 열리더니 바깥의 다섯 문부터 정양문에 이르기까지 화살처럼 곧게 통하였다. 의장들이 늘어서고, 모든 관리들이 일제히 들어왔다. 통관(通官)이 사신들을 인도하여 8품석(八品石) 앞으로 나아갔다. 섬라의 사신들은 우리들의 뒤에 있었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고서 물러나왔다.
○8일
방물(方物)과 세폐(歲幣)를 위해 빌린 수레가 도착했다.
연공 예물(年貢禮物)
흰색 저포(苧布) 2백 필(疋)ㆍ홍색 명주〔紅綿紬〕 1백 필ㆍ녹색 명주〔綠綿紬〕 1백 필ㆍ흰색 명주〔白綿紬〕 2백 필ㆍ흰 무명〔白木〕 1천 필ㆍ생무명〔生木綿〕 2천 8백 필ㆍ오조용석(五爪龍席) 2장(張)ㆍ각양 화석(各樣花席) 20장ㆍ사슴 가죽〔鹿皮〕 1백 장ㆍ수달피〔獺皮〕 4백 장ㆍ청서피(靑鼠皮) 3백 장ㆍ호요도(好腰刀) 1천 자루〔杷〕ㆍ호대지(好大紙) 2천 권(卷)ㆍ소호지(小好紙) 3천 권ㆍ쌀 1백 섬〔石〕 중 70섬은 찹쌀〔粘米〕.
동지 예물(冬至禮物)
황색 세모시〔黃細苧布〕 10필ㆍ백색 세모시〔白細苧布〕 20필ㆍ황색 세명주〔黃細綿紬〕 20필ㆍ백색 세명주〔白細綿紬〕 20필ㆍ용무늬 염석〔龍文簾席〕 2장ㆍ황화석(黃花席) 20장ㆍ만화석(滿花席) 20장ㆍ만화방석(滿花方席) 20장ㆍ채화석(彩花席) 20장ㆍ백면지(白綿紙) 2천 권
정조 예물(正朝禮物)
황색 세모시 10필ㆍ백색 세모시 20 필ㆍ황색 세명주 20필ㆍ백색 세명주 20필ㆍ용무늬 염석 2장ㆍ황화석 15장ㆍ만화석 15장ㆍ만화방석 15장ㆍ잡채석(雜彩席) 15장ㆍ백면지 2천 권.
성절 예물(聖節禮物)
황색 세모시 10필ㆍ백색 세모시 20필ㆍ황색 세명주 30필ㆍ용무늬 염석 2장ㆍ황화석 20장ㆍ만화방석 20장ㆍ채화방석(彩花方席) 20장ㆍ백면지 2천 권ㆍ자주색 세명주〔紫細綿紬〕 20필ㆍ수달 가죽〔獺皮〕 20장ㆍ6장을 이어붙인 유둔〔六張付油芚〕 10벌〔番〕
봉성(鳳城)ㆍ심양(瀋陽)ㆍ산해관(山海關)ㆍ북경(北京)에서 소용되는 예단(禮單)과 인정(人情)의 총수〔都合數〕
장지(壯紙) 6백 90속(束)ㆍ청서피(靑鼠皮) 2백 97장ㆍ소갑초(小匣草 갑초는 갑에 넣은 담배) 2천 4백 24봉(封)ㆍ향봉초(鄕封草) 9백 50봉ㆍ전죽(鈿竹) 20개(介)ㆍ장연죽(長煙竹) 96개ㆍ은항연죽(銀項煙竹) 2백 63개ㆍ석장도(錫粧刀) 1백 8자루ㆍ초도(鞘刀) 3백 70자루ㆍ부채〔扇子〕 8백 자루ㆍ대구어(大口魚) 1백 70마리〔尾〕ㆍ다리〔月乃 여자들이 머리숱이 많아 보이라고 덧넣었던 딴머리〕 68부(部)ㆍ환도(環刀) 14자루ㆍ은장도(銀粧刀)와 대모장도(玳瑁粧刀) 7자루ㆍ청서피장도(靑鼠皮粧刀) 12자루ㆍ은연죽(銀煙竹) 19개ㆍ연죽(煙竹) 1백 79개ㆍ전복(全鰒) 13첩(貼)ㆍ문어(文魚) 7마리ㆍ부시〔火金〕 3백 18개ㆍ해삼(海參) 20말(斗)ㆍ정은(正銀) 8냥(兩)ㆍ연초 큰 갑〔大匣草〕 1백 10봉ㆍ유둔(油芚) 3벌〔番〕ㆍ화봉 부시〔花峯火金〕 15개ㆍ붓과 먹 각각 52개.
이상의 각종 물품은 상방(上房)과 부방(副房)에서 반씩 나누어 낸다.
이 밖에 별도로 요구하는 갖가지 어물(魚物)ㆍ유둔(油芚)ㆍ능화(綾花)ㆍ환약(丸藥)ㆍ젓갈〔醢物〕ㆍ붓ㆍ먹 등의 물품이 이보다 몇 곱이나 되며, 또 왕래하는 아문(衙門)의 갑군(甲軍) 및 관사(館舍)에 체류할 때 날마다 각처에 제공하는 갑초(匣草)와 봉초(封草) 또한 수백 갑 수백 봉이나 되니 모두 다 기록할 수도 없다. 이 외에도 은(銀)으로 계산해서 지급하는 것이 무려 수천 냥이나 되므로 이는 일행들이 추렴해서 내는데 주방(廚房)에는 내라고 하지 않는다.
○10일
정사와 부사는 원명원에 머물렀다. 예부에서 몽고포연(蒙古包宴)에 참석하라고 하여서, 정사와 부사는 산고수장(山高水長) 【누각의 이름이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날이 밝자 황제가 보련(步輦)을 타고 나오므로, 정사와 부사는 길의 오른편에서 지영(秪迎)하였다. 공아랍(恭阿拉)이 압반(押班)하였다.
황제가 몽고전막(蒙古氊幕 몽골식 천막인 게르〔Ger〕를 말함)에 자리하자 정사와 부사도 들어가서 반차(班次)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음악이 연주되고, 연희가 베풀어졌으며, 이어 잔칫상이 내려지고, 또 어상(御床)에 있는 떡〔餠〕 한 그릇씩을 하사하였다. 잠시 후에 공아랍이 정사와 부사를 인도하여 어탑(御榻)으로 올라가 황제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자, 황제가 보화전(保和殿)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친히 술을 따라 주었다. 정사와 부사가 차례로 받아서 술을 마시고 반차로 물러나왔다. 연회가 끝나자 황제는 대내로 돌아갔다. 내시가 정사와 부사를 인도하여 황색 장막(帳幕) 왼쪽의 상탁(賞卓) 앞으로 가서 다음과 같이 상품을 내려주었다.
정사의 상품: 비단〔錦〕 3필(疋), 장융(漳絨) 3필, 팔사단(八絲緞) 4필, 오사단(五絲緞) 4필, 대하포(大荷包) 1대(對), 소하포(小荷包) 4대.
부사의 상품: 비단〔錦〕 2필, 장융 2필, 팔사단 3필, 오사단 3필, 대하포 1대, 소하포 4대.
서장관은 비록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부사와 동일하게 상을 받았다. 정사와 부사가 무릎을 꿇고 상품을 받은 뒤에 고두례(叩頭禮)를 행하고 물러났다. 어선방(御饍房)에서 극식(剋食)을 가지고 와 나누어 주었다. 정사와 부사가 이내 관사로 돌아왔다.
○13일
계명은 자금성(紫禁城)을 관람하려고 세폐 방물을 따라갔다. 동화문(東華門)을 통해 들어간 뒤 여러 임역(任譯)들과 함께 어느 주루(酒樓)에 들어갔다. 방물을 정납하는 동안 으레 수역(首譯)이 음식을 사서 이바지하므로, 일행들이 탁자에 둘러앉아 술을 마셨다. 한 낭관이 밖에서 들어와 술을 사서 마셨는데, 우연히 탁자를 나란히 하여 앉게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술 마시는 법을 보더니,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술고래〔海量〕’라고 했다. 좌익문(左翼門)으로 들어가 체인각(體仁閣) 밖에 이르니, 창고를 담당한 관리들과 통관들이 방물의 수량을 대조해 본 뒤에 창고를 열고 받아들였다. 창고에 들어가 안을 살펴보니, 사방에서 진헌(進獻)한 물품들이 가득 차 넘쳤고 모두 비단 종류들이었다. 태화전(太和殿) 건물을 두루 살펴본 뒤 원명원으로 뒤따라갔지만, 날이 저물어서 등불놀이는 보지 못하였다.
○16일
국왕에게 보내는 물품:
망단(蠎緞) 2필(疋), 복자방(福字方) 100폭(幅), 조칠기(雕漆器) 4건(件), 대소견전(大小絹箋) 4권(卷), 붓 4갑(匣), 먹〔墨〕 4갑, 벼루 2방(方), 유리 그릇〔玻璃器〕 4건.
삼사가 공경히 받아서 상통사에게 전해 주었으니, 장차 복명(復命 귀국 후 국왕에게 보고하는 것)하는 날에 정납(呈納)하려는 생각이었다. 삼사에게도 각각 대단(大緞) 1필, 붓 2갑, 먹 2갑, 전지(箋紙) 2권씩을 내려주어 영수(領受)하고 곧 관사로 돌아왔다. 수레를 세내어 길을 나섰는데, 40리나 되는 돌길〔石路〕이 반듯하고 평탄하며 말은 건장하고 수레는 빨라서 바퀴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서직문(西直門) 안으로 들어서자, 막 야시장(夜市場)이 열려 좌우에 늘어선 상점들의 등불이 대낮처럼 환하였다.
▣지정연기 권3 : 1805년(순조 5년, 을축)
○21일
관 시랑(關侍郞 관괴(關槐))이 공무로 예부(禮部)에 갔다가 지나면서 관사를 방문하였는데, 바깥에서 통관(通官) 무리들이 막는 바람에 명함만 남기고 헛걸음하고 돌아갔다. 그래서 이택(二澤)을 보내어서 명함을 전하고 찾아준 것에 대해 인사한 뒤 방문한 뜻을 살폈다. 이택(二澤)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관 시랑이 승지 권상신(權常愼)과 사이가 좋은데, 권 승지가 관 시랑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이번에 방문한 것’이라고 하였다. 왕 원외랑(汪員外郞 왕선(汪䥧))에게 편지를 보냈다. 계명은 또 양 진사(楊進士 양승헌(楊承憲))의 집에 갔다.
※권상신(權常愼1759~1824)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선(權襈)이며, 자는 경호(絅好), 호는 일홍당(日紅堂)ㆍ서어(西漁)이다. 1803년에 동지사의 부사로 연행을 다녀왔다. 당시 정사는 민태혁(閔台爀)이었고 서장관은 서장보(徐長輔)였다. 1824년 다시 동지사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서 사망하였다.
○22일
삼사(三使)가 함께 노구교(盧溝橋)에 갔다. 말을 타고 선무문(宣武門)으로 나서서 1리를 채 못 갔는데, 길가에 천주당(天主堂)이 있었다. 이전부터 들어가서 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근래에는 방금(防禁)하는 것이 지엄(至嚴)하기 때문에 들어가서 그 기교(奇巧)함과 섬세하고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었으니 참으로 한스러웠다. 곧장 성 밖으로 나왔는데, 낙타 수백 필이 호교(濠橋 해자의 다리) 위에 가득했다. 계명(季鳴)이 탄 말이 낙타를 보고 놀라서 갑작스레 날뛰었으므로, 모골(毛骨)이 송연하여 안장을 단단히 조였고, 어떤 이는 말에서 내려 지나가기도 하였으니, 낙타가 사람들을 괴롭게 한 것이다.
○2월 1일
오늘 삼사가 정관(正官)들을 거느리고 오문(午門) 앞으로 나아가니, 예부 상서 공아랍(恭阿拉)이 상(賞)을 나누어 주었다. 문 밖에 커다란 탁자를 설치하고서 그 위에 상물(賞物)을 놓아두고 통관을 시켜서 차례로 받게 하였다.
국왕(國王) 전(前)
동지(冬至)에는 채단(采緞) 5표리(表裏), 은자(銀子) 250냥(兩).
정조(正朝)에는 채단 5표리, 은자 250냥, 준마(駿馬) 1필【영롱(玲瓏) 안장까지 모두 갖춤.】.
성절(聖節)에는 채단 5표리, 은자 250냥, 준마 1필 【영롱 안장까지 모두 갖춤.】 .
연공(年貢)에는 채단 5표리, 은자 250냥.
사은(謝恩)에는 채단 5표리, 은자 250냥, 준마 1필 【영롱 안장까지 모두 갖춤.】
정사와 부사
동지에는 대단주(大緞紬) 2표리, 은자 50냥, 황견(黃絹) 2필.
정조에는 대단주 3표리, 은자 50냥, 안구마(鞍具馬 안장까지 갖춘 말) 1필, 황견 2필.
성절(聖節)에는 대단주 3표리, 은자 50냥, 안구마 1필, 황견 2필.
연공에는 대단주 2표리, 은자 50냥, 황견 2필.
서장관
동지에는 대단주 1표리, 은자 40냥, 황견 1필.
정조에는 대단주 2표리, 은자 50냥, 황견 1필.
성절에는 대단주 2표리, 은자 50냥, 황견 1필.
연공에는 대단주 1표리, 은자 40냥, 황견 1필.
사은에는 대단주 2표리, 은자 50냥, 황견 1필.
대통관(大通官) 3원(員) 각각
동지에는 대단주 1표리, 은자 20냥, 황견 1필.
정조에는 대단주 1표리, 은자 30냥, 황견 1필.
연공에는 대단주 1필, 은자 20냥, 황견 1필.
사은에는 대단주 1표리, 은자 30냥, 황견 1필.
압물관(押物官) 20원 각각
동지에는 소단(小緞) 1표리, 은자 15냥.
정조에는 소단 1표리, 은자 20냥, 청포(靑布) 4필.
성절에는 소단주 1표리, 은자 20냥, 청포 4필.
연공에는 소단주 1표리, 은자 15냥.
사은에는 소단주 1표리, 은자 2냥, 청포 2필.
종인(從人) 30명(名) 각각
동지에는 은자 4냥.
정조에는 은자 5냥.
성절에는 은자 5냥.
연공에는 은자 4냥.
사은에는 은자 5냥.
관 시랑(關侍郞)이 심부름꾼을 보내어 편지를 보내고, 전별 선물로 책자, 서화, 전서와 예서 첩을 보냈다. 나 또한 편지에 답을 하였다.
○12일
상복(商卜 상인들의 짐 보따리)이 다 도착하지 않아서 반나절을 머물러 지체하였다. 집 주인은 세진사(歲進士) 사양기(謝良璣)이다. 그의 집은 살림이 넉넉하며 가옥이 무척 넓었으므로, 안채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주인집의 소년에게 청했더니, 소년이 답하기를, “우리 집의 부녀자들은 외부 사람을 보지 않았는데 만약 대인과 같은 훤칠한 풍채라면 마음속으로 놀랄까 봐 걱정되니, 기꺼이 들어오시라고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그 말이 사람을 포복절도하게 하므로 억지로 청하여 들어가니, 소년은 앞장서서 하나하나 짚어가며 보여주었다.
뜰〔堦庭〕이 넓게 트이고, 창(窓)과 정자는 아로새겨 꾸민 듯한데, 내실〔內炕〕에서는 부녀자들이 웅성거리며 엿보며 살피고 있었다. 뜰 아래의 캉〔炕〕하나에 들어가 보았더니 그곳 역시 내실로, 경갑(鏡匣)과 화장 도구들이 자못 정교하고 아름다웠으며, 또 서안(書案) 위에는 패관소설(稗官小說)이 쌓여 있었다. 모든 물건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으니, 자못 먼 변두리에 있는 선비의 집이 아닌 듯하였다.
○13일
45리를 가서 양수하(亮水河)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43리를 가서 중후소(中後所)에서 묵었다.
해가 뜨자 출발하였다. 바람의 형세가 더욱 악화되어 흙먼지가 얼굴에 가득했다. 일행이 모두 갓을 벗어서 등에 지고, 단지 호항(護項)만을 쓰고 끈으로 둘러 묶고 말에 올라탔지만, 말의 머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졸(下卒) 중에 간혹 전립(氊笠)을 떨어뜨려 잃어버리기도 하였다. 흙먼지가 계속해서 눈, 코, 귀, 입으로 들어가고, 관(冠)이고 띠〔帶〕고, 옷이고 신발이고 간에 모두가 한 가지 누런 황토색이니, 죄다 진흙으로 만든 인형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오시(午時)에 양수하(亮水河)에 도착하여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저물녘에 중후소에 이르니, 바람이 조금 누그러지고 달이 아주 밝았다. 정사의 숙소로 갔더니, 주승(主僧)이 권경호(權絅好 권상신(權常愼))가 초서로 글씨를 쓴 부채를 내보였다. 이곳은 모자(帽子)의 산지로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년 들어갈 때에 미리 부탁했다가 나올 때에 찾아오는 것이 관례다.
○24일
0리를 가서 냉정(冷井)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40리를 가서 낭자산(娘子山)에 머물러서 묵었다.
동이 틀 무렵에 길을 떠나서, 비를 무릅쓰고 냉정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었다. 만부(灣府)의 소식이 여전히 더디니, 일행들이 모두 초조하고 답답해 하였다. 재촉하여 밥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저녁에 낭자산에 도착하였다. 만부의 아전〔灣吏〕이 드디어 이르러서 나라의 소식을 전하였으니 과연 사실이었다. 일행들이 야외(野外)의 황폐한 곳에 모두 모여서 동쪽을 향해 망곡(望哭)을 하였는데, 먼 이역에 있으니 비통한 심정이 더더욱 간절하고 망극하였다.
일행 중에 집에서 보낸 편지를 받은 이들은 감히 선뜻 뜯어보지 못하였고, 마음이 흔들려서 얼굴빛이 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떤 이는 우환(憂患)이 있고, 어떤 이는 상척(喪慽)을 당하기도 하였다. 편안하다는 편지를 받은 이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고,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기뻐하였다. 서로서로 안부를 물어보면서 축하를 하고 위로하기도 하니, 한바탕 소란이었다.
○29일
책문에 머물렀다.
장사치들의 짐바리〔商卜〕가 아직 다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발할 날짜가 조금 지체되니, 근심스럽고 답답했다.
집에 편지를 부치고, 또 의주(義州)에도 편지를 부쳤다. 가노(家奴) 비변(飛邊)이 갈아입을 옷과 갖가지 물품을 가지고 의주로 내려왔다가 여기까지 왔다. 집안 소식을 상세히 듣게 되니 기쁘고 기뻤다.
○3월 2일
총수(蔥秀)에 이르자 날이 이미 어둑하였는데 숲의 나무는 하늘까지 솟아 있고, 진흙탕에 말이 빠졌다. 거군(炬軍 횃불을 든 군사)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호행(護行)하는 하졸(下卒)들이 갈대를 꺾어 모아서 횃불을 만들었다. 횃불은 밝았다 꺼졌다 깜빡여서 밤길을 가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는데, 별안간 짐승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나무 사이로 지나갔다. 일행들은 모두 호랑이라 여겨서 두려워하여 벌벌 떨었고, 고성(高聲)을 질러서 호랑이를 쫓아 앞에서 외치면 뒤에서 호응하니,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잠시 후 이는 바로 사상(私商)이 데리고 온 사냥개〔獵盧〕라는 것을 들어서 알게 되었다. 사냥개는 바로 백기보(白旗堡)가 산지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들 사 온다.
○초3일
압록강에 이르자 강가의 모래사장에 장막이 세워져 있고, 사행을 전송할 때와 같이 부중(府中)의 사녀(士女)들이 맞이하러 나왔으나, 사람들이 모두 소복(素服)을 입고 있어서 물색(物色)이 옛날 같지 않았으니, 다시금 비통해졌다. 강을 건너서 막차에 들어가자, 부윤(府尹)이 소찬(少饌)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 부(府)의 남문을 거쳐서 곧장 용만관(龍灣館)에 도착했고, 의례대로 상복(喪服)으로 갈아입었다. 숙소로 와 보니 지난겨울에 머물렀던 진무당(鎭武堂)이다. 이경로(李敬老)가 강가의 나루터까지 나와서 맞이하였고, 수청기(隨廳妓)도 모두 와서 인사하였다.
○초5일
얼마 후 고부 사행(告訃使行)과 서로 만나서, 정자 위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사는 호조 참의(戶曹參議) 오정원(吳鼎源)이고, 서장관은 장령(掌令) 강준흠(姜俊欽)이었다.
해 질 무렵에 차련관(車輦館)에 들어갔다. 부사(府使) 정택휴(鄭宅休)가 체임되어 돌아가서 관아가 비어 있으므로, 거행(擧行)하는 것이 대부분 전만 못했다. 추풍(秋風)이 뒤처졌다.
○초9일
50리를 가서 평양부(平壤府)에서 묵었다.
해가 뜨자 출발하였다. 평양성 밖에 이르러서 기자묘(箕子墓)에 들러 배알하고, 칠성문(七星門)을 통해 들어가 곧장 영문(營門)으로 들어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종인(從人)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밤에 감사(監司) 이서구(李書九 1754-1825)와 중군(中軍) 이상일(李相一), 서윤(庶尹) 이영원(李永瑗)이 와서 보았다. 나이가 어린 기생들도 많이 와서 보았다.
○15일
30리를 가서 홍제원(弘濟院)에서 조금 쉬고, 다시 20리를 가서 궁궐에 나아가 복명(復命)하였다.
해가 뜨자 출발하였다. 종인(從人) 이치순(李穉順)이 길까지 마중을 나왔고, 가인(家人)이 홍제원(弘濟院)으로 술과 음식을 보냈다. 잠시 쉰 뒤에 모화현(慕華峴)을 넘었다. 전배(前陪 앞을 인도하는 사람)는 모두 뒤처지고 납패(鑞牌)가 앞에 있었다. 돌다리 모퉁이로 들어서니 교리(校理) 김상휴(金相休)가 나와 마중하였다.
부사의 사행 중 주방(廚房) 고지기〔庫直〕였던 김경석(金景錫)이 술과 음식을 갖추어 노차(路次 길 가는 중 잠시 쉬기 위해 길가에 마련하는 임시 거처, 막차)까지 보내 왔으므로, 종인들과 함께 말에서 내려 배불리 먹고, 편지를 보내어 치사(致謝)하였다.
돈의문(敦義門)으로 들어가 선인문(宣仁門)을 거쳐서 대궐에 나아가 복명하였다. 효안전(孝安殿)의 곡반(哭班 국상(國喪)때 곡(哭)하는 벼슬아치의 반열)에 나아갔다가 집으로 돌아와 사당에 인사를 올렸다.
이번 사행은 왕복 총 1백 35일 노정(路程)으로, 길은 총 3천 6백 9리이다. 지은 시(詩)는 모두 59편이다.
■일행 총록(一行摠錄)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
●정사(正使)판부사(判府事)김사목(金思穆)
군관(軍官)전 첨사(前僉使)한명철(韓命喆)
전 중군(前中軍)김영면(金永勉)
사과(司果)구수집(具壽集)
자헌(資憲)이원(李垣)
반당(伴儻)진사(進士)김선민(金善民)
노자(奴子) 건량고직(乾糧庫直)녹상(祿尙)
노(奴)일금(一金)
노(奴)이돌(二乭)
건량관(乾糧官)세폐미(歲幣米) 영거교회(領去敎誨) 전 정(前正)이시승(李時升)
별배행(別陪行)우어봉사(偶語奉事)박명화(朴明和)
서자(書者)의주 노(義州奴)쌍동(雙同)
마두(馬頭)서흥 노(瑞興奴)종표(宗表)
좌견(左牽)박천 노(博川奴)올쇠(㐏金)
농마두(籠馬頭)선천 노(宣川奴)복득(福得)
건량마두(乾糧馬頭)선천 노(宣川奴)석관(碩寬)
일산봉지(日傘奉持)서흥 노(瑞興奴)득복(得卜)
인로(引路) 2명.의주 노(義州奴)이동이(二同伊)
노(奴)성운(成云)
교부축(轎扶軸) 4명.가산 노(嘉山奴)성기(聖己)
순안 노(順安奴)귀삼(龜三)
의주 노(義州奴)서동(徐同)
노(奴)용남(龍南)
●부사(副使)참판(參判)송전(宋銓)
군관(軍官)통덕랑(通德郞)김영(金瑛)
남척로(南陟老)
전 별제(前別提)이최선(李最善)
반당(伴儻)최정현(崔正鉉)
노(奴) 건량고직(乾糧庫直)경석(景錫)
노(奴)복남(福男)
노(奴)치성(致成)
건량관(乾糧官)몽학 주부(蒙學主簿)한광수(韓光壽)
별배행(別陪行)연소총민 주부(年少聰敏主簿)김상순(金相淳)
서자(書者)서흥 노(瑞興奴)윤득(允得)
마두(馬頭)정주 노(定州奴)승동(承同)
좌견(左牽)안주 노(安州奴)봉린(鳳麟)
농마두(籠馬頭)용천 노(龍川奴)창신(昌信)
건량마두(乾糧馬頭)선천 노(宣川奴)종득(宗得)
일산봉지(日傘奉持)곽산 노(郭山奴)최동(崔同)
인로(引路)가산 노(嘉山奴)전동(田同)
교부축(轎扶軸) 4명.철산 노(鐵山奴)손동(孫同)
가산 노(嘉山奴)대성(大成)
의주 노(義州奴)경로(敬老)
용천 노(龍川奴)형득(亨得)
●서장관(書狀官)집의(執義)원재명(元在明)
군관(軍官)상호군(上護軍)백홍규(白弘奎)
반당(伴儻)원철손(元喆孫)
이의성(李義聲)
노(奴) 건량고직(乾糧庫直)기특(奇特)
건량관(乾糧官)압물(押物) 전 정(前正)오명의(吳命毅)
별배행(別陪行)왜학 교회(倭學敎誨) 판관(判官)변문규(卞文奎)
서자(書者)검수 노(劍水奴)완복(完福)
마두(馬頭)철산 노(鐵山奴)이택(二澤)
좌견(左牽)서흥 노(瑞興奴)삼금(三金)
농마두(籠馬頭)철산 노(鐵山奴)철동(喆同)
일산봉지(日傘奉持)평양 노(平壤奴)형로(亨老)
일당상(一堂上)자헌(資憲)이진복(李鎭復)
이당상(二堂上)가선(嘉善)조익수(趙益洙)
삼당상(三堂上)절충(折衝)홍의복(洪義福)
일상통사(一上通事)한학 전 정(漢學前正)이포(李宲)
이상통사(二上通事)청학 판관(淸學判官)현기(玄淇)
일종사(一從事)질문 교회(質問敎誨)홍관철(洪觀喆)
차상(次上)첨정(僉正)고경리(高景履)
압물 통사(押物通事)봉사(奉事)김흥필(金興弼)
장무관(掌務官)봉사(奉事)최중륜(崔重倫)
공간(公幹)세폐 영거 교회(歲幣領去敎誨) 전 정(前正)유운길(劉運吉)
몽학 훈도(蒙學訓導)이정양(李正養)
청학 판관(淸學判官)유학선(劉學善)
신체아(新遞兒) 가선(嘉善)최도관(崔道寬)
우어(偶語)사용(司勇)박중호(朴重瑚)
청학 판관(淸學判官)오태유(吳泰游)
의원(醫員)주부(主簿)이효식(李孝植)
사자관(寫字官)절충(折衝)팽경대(彭敬大)
화원(畵員)절충박인수(朴仁秀)
일관(日官)첨정(僉正)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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