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20년 10월기

청담(靑潭) 2020. 11. 6. 10:41

2020년 10월기

 

1일 추석

이번 추석연휴는 5일(30일~4일)이나 됩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하여 추석경기도 없었고, 정작 고향에서는 자녀들의 고향방문을 사절한다는 플래카드가 내걸어지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이대표는 회사일이 바빠서도 내려올 수가 없었습니다. 추석날, 새벽에 내려왔다가 시댁에서 차례만 지내고 금방 올라가는 셋째내외만 부모님 집에 들러서 함께 점심을 같이 할 수 있었습니다. 막내는 부산시댁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들러 갔습니다. 코로나가 아니라도 가족이 명절날에 함께 만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동생들도 제각기 가정의 어른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1일 결혼기념일

서른하고도 아홉 번째 결혼기념일입니다. 그런데 깜박했습니다. 그저 하는 일이라고는 글씨 쓰고 시골집 다녀오는 일인데 무려 9일이나 지난 20일 저녁에 문득 생각이 나서 둘이서 함께 웃어넘기고 맥주 한잔으로 기념했습니다. 애정이 식어서는 절대 아닙니다. 추석 쇠고 불과 며칠 되지 않은 탓인 듯싶습니다. 내년 40주년은 자식들과 함께 제대로 기념하겠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밤 모임에서 물어보니 강교장은 11월, 김교감은 12월이 40주년이고, 이교장은 내년 11월이 40주년이라 합니다. 우리 넷은 같은 해에 함께 발령받아 무엇이 바쁜지 20대에 모두 2년 안에 결혼 한 것입니다. 요즈음과 비교하면 隔世之感이 큽니다.

 

12일 문화원 개원

거의 두 달 만에 다시 개원했습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가 2단계에서 1단계로 내려옴에 따라 이루어진 반가운 조치입니다. 그동안 서예실은 꾸준히 나가서 많은 회원들을 만나며 지냈지만, 기타 동아리 설레임 회원들은 실로 두 달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16일 도전 발표

《제23회 전북서예전람회》입상작 발표가 있었는데 행초서 계정우음(溪亭偶吟)이 특선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쓰면서 준비한 작품이긴 하지만 여전히 졸작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17일 마한전 전시회

《제14회 대한민국 마한서예문인화대전》입상작 전시회가 익산예술의 전당에서 열렸습니다. 제 졸작 율곡 李珥 선생의 시 『花石亭』이 특선했기에 전시회장을 찾았습니다. 제 작품을 보면 볼수록 부끄럽습니다. 새로운 자세로 더 열심히 습작해야만 합니다.

 

18일 대둔산 산행

대둔산 산행을 결정하고는 45년 전, 우리 가원과 함께 다녀온 기억을 더듬어 그대로 추억을 재현해 보기로 합니다. 그러나 그때와는 출발방식부터 아주 다릅니다. 그때는 전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나 버스로 출발하였으나 오늘은 익산 우리 집에서 자가용차로 함께 출발합니다. 그때처럼 케이블 카로 오르고 출렁다리를 건넙니다. 우리는 출렁다리에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크게 느끼게 되었음을 행복한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동아리 단체 산행 출발장소인 시외터미널에 늦게 도착하여 만난 우리 둘은 일단 대둔산에 가서 일행을 찾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다음 버스로 출발했는데 이런 해프닝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준 최고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일요일이라 그 날도 관광객이 무척 많았습니다. 우리는 동아리 일행을 만나지 못했는데 아마도 마음 한 편으로 제발 만나지 않기를 바란 듯싶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즐거운 하루여행을 즐길 수 있었고, 그런 우연히 이루어진 둘 만의 여행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가을, 우리는 결혼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당시에 핸드폰이 있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부부의 인연을 맺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마침 일요일이라 비록 코로나19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관광객이 꽤나 많습니다. 45년 전 그때처럼 내려올 때는 힘들지만 걸어서 내려왔습니다. 그때 헤어진 곳은 익산 버스터미널인데 오늘은 함께 우리의 보금자리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때는 우리는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는데 지금은 법적으로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만은 영원히 젊고 싶습니다. 오늘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추억여행이 되었습니다. 가원님 오늘도 사랑합니다.

19일 핸드폰 교체

2014년 가을에 무려 1백만 원짜리 갤럭시 노트 옛지를 구입하여 무려 6년을 사용했습니다. 고장이 난김에 새 핸드폰을 구입하였는데 자부담이 10여만 원 밖에 안 되는 거의 공짜입니다. 갤럭시 A31인데 성능은 훨씬 좋다고 합니다. 최근 신형은 무려 250만원이라는데 나는 이 공짜핸드폰에 대만족입니다.

23일 고교동창회 농막 가든 파티

퇴임 후 시골집을 헐고 아주 작은 조립식 집을 짓고는 이름은 화려하게 <지산 쁠라스>라고 지었습니다. 사실은 농막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내가 태어난 집이라 돈을 들이지는 않아도 되도록 예쁘게 가꾸려 노력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시골집을 가지면 친구들과 가든파티를 자주 한다는데 나는 도통 고기 굽는 일에 서투르고 가원의 힘을 빌어야하는 것도 쉽지 않아 꺼려왔습니다. 야외용 바베규 그릴을 구입하여 3년 전에 어머니 생일파티를 한 일밖에 없습니다.

이참에 큰 마음먹고 고등학교 친구들을 초대하기로 합니다. 열다섯 명의 친구와 친구부인들 세 분이 오셔서 모두 열아홉이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총무는 해마다 한 번씩 하자며 좋아합니다. 치르고 나니 아주 후련합니다. 다른 모임들을 초대하여 일 년에 한 번 씩은 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추진할 능력과 힘이 없어지고 아예 의욕마저 사라질 날도 그리 멀지는 않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세월이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26일 문화원 설레임 공연과 연우회 전시회

문화원 동아리 공연 및 발표회에 <설레임>은 비대면 공연을 하고,<연우회>는 복도에 전시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설레임은 열다섯 곡을 선정하여 연습하였으나 제2관 공사관계로 개최시간이 많이 늦어져 아홉 곡만 불렀습니다.

 

28일 진도(珍島)여행

코로나19로 인하여 해외여행은 완전 중단상태이므로 국내여행이라도 자주 다니려는 마음이 컸지만 사실 전혀 실천은 하지 못했습니다. 금년 가을에 진도와 완도를 1박2일로 다녀오고 제주도를 3박4일 다녀오자는 계획이었으나 여러 행사와 아버지 병원 모시고 다니는 일 등으로 여의치 않아 여행계획을 수정하였습니다.

먼저 여러 번 가본 완도는 제치고(실은 완도와 다리로 연결되는 신지도, 고금도, 조약도를 찾기 위함) 우선 찾아본 적이 없는 진도를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합니다. 제주도는 내년 봄으로 미루고 11월초에 서울에 올라가 가족들과 강화도를 가기로 합니다. 이미 여러 번 가본 바 있는 강화도가 주목적이 아니라 교동도와 석모도를 가기 위함입니다.

아침 7시에 출발합니다. 목포항을 지나 유달산을 바라보며 목포대교를 지나 고하도로 들어갑니다.

■고하도

(청일전쟁 후 러시아는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 반도를 청에게 돌려주게 한 뒤, 청과 비밀 협상을 맺어 시베리아 철도가 만주를 통화할 수 있는 권리를 차지하고, 뤼순과 다렌을 조차하였다. 이어 블라디보스토크항과 뤼순항을 연결하는 해군 기지를 얻기 위하여 마산의 맘구미와 목포의 고하도를 조차하려다가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1999).)

역사가 있는 섬인데 정작 찾아보니 섬인지 육지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변해 있습니다.

작은 다리를 지나면 영암군 삼호읍입니다. 처음 들어보는 읍 이름입니다. 영암방조제를 건너면 해남군입니다. 정말 육지인지 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금호도를 지나 우수영에 도착합니다. 진도로 들어가기 전 가장 먼저 옛 우수영 마을에 있는 명량대첩비를 찾습니다.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688년(숙종 14) 3월 이곳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했다. 이순신이 해남 전라우수영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 해협을 흐르는 급류를 이용하여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함선을 격침 혹은 격파하여 해전을 승리로 이끈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숙종 임금은 명량대첩의 의의를 기리고 그 뜻을 후손에게 영원히 전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비문은 1686년에 쓰인 것이나 비가 건립된 것은 2년 뒤인 1688년이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박신주가 건립했다. 비석은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얹고, 구름무용무늬를 새긴 머릿돌을 얹었다.

비문은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판돈령부사 이정영이 해서체로 글씨를 썼으며,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횡서로 된 제자 ‘통제사 충무 이공 명량대첩비(統制使忠武李公鳴梁大捷碑)’ 12자를 써서 1688년 3월에 건립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패전, 만행, 약탈 관련된 기록이나 자료, 유적지는 모두 소각하거나 철거한다는 정책을 시행했다. 다수의 일본인이 문화재를 도굴하거나 왜란 관련 유적지를 훼손, 철거하는 데 앞장섰다.

1942년 전라남도 경찰은 명량대첩비 등을 철거하라는 조선총독부의 지령을 받았다. 경찰은 인부, 목수, 학생들을 동원하여 높이 2.67미터, 폭 1.14미터나 되는 비석을 500미터 떨어진 우수영 선창으로 옮겼으며 비각은 흔적도 없이 제거했다.

조선총독부는 한때 대첩비를 아예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서울로 옮겨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묻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우수영 지역 유지들은 명량대첩비를 되찾아 복구하기 위해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조직하고 전라남도 경찰부와 조선총독부에 수소문한 끝에 대첩비의 소재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교통운반 수단이 여의치 않았던 당시로서는 대첩비를 우수영으로 옮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결국 미군정청(美軍政廳)에 협조를 요청하여 비석을 미군 트럭에 실어 서울역으로 옮긴 후 목포까지는 열차로, 목포에서는 다시 선박을 이용하여 우수영 선창으로 가져왔다. 1947년 이곳 해남 남쪽 끝 해안지역 학동리에 비석을 다시 세웠다.

이어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을 짓기 위한 모금 운동이 시작되었다. 크게 부족한 자금 마련을 위해 풍물패를 조직하여 나주 · 무안 등 8개 지역을 순회하기도 했고 대첩비 탁본을 수백 장 만들어 여러 관공서와 학교를 돌아다니며 판매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50년에야 비각이 완공되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그동안 해남 충무사 경내에 있던 비석과 비각은 2011년 3월 본래의 설립지인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왔다. 해남 명량대첩비는 1969년 6월 16일 보물 제503호로 지정되었다.)

■용장성

예전부터 진도에 반드시 가보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용장성입니다. 전시관이 있고 여러 시설을 하고 있는 모습인데 찾는 이는 거의 없는 듯싶습니다. 사진으로만 보던 용장성터를 한 바퀴 돌아봅니다. 역사의 현장을 찾는 일은 의미도 크지만 역사를 보다 더 확실하게 이해하게 해주는 기쁨이 큽니다.

(고려 원종 때에 몽고 항쟁 중에 왕실이 몽고에 굴복하자 삼별초는 끝까지 저항했다. 배중손 장군은 몽고군에게 쫓기어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겨와 새 나라를 세웠다. 그는 한동안 본토 일부와 제주도까지 세력권에 넣는 등의 위세를 떨쳤으나 결국 여몽연합군에게 토벌되고 말았다. 그때 삼별초가 항쟁의 터전으로 삼았던 것이 용장산성과 남도석성이다. 용장산을 두르고 있는 성이 용장산성인데 주로 석성이지만 부분적으로는 토성이 섞인 곳도 있다. 이 안에 있는 용장성은 몽고에 무릎을 꿇은 고려 조정에 반발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며 난을 일으킨 삼별초가 여연합군에게 패해 제주도로 퇴각하기까지 원종11년(1270) 8월부터 9개월 동안 항몽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배중손을 지도자로 한 삼별초는 왕족인 승하후 온을 새왕으로 받들고 관부를 구성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몽고에게 항복한 고려 조정에 대립, 정권을 세운 뒤 1,000여 척의 배에 재물과 인원 등을 싣고 진도 벽파진에 도착, 용장성에 터를 잡을 후 산성을 개축하고 성안의 용장사를 궁궐로 삼고 각종 건물을 지어 왕을 황제로 칭하였다.

오랑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왜에 국서를 보내 자신들이 유일한 정통 고려 정부임을 표명하기도 했다. 이들이 진도로 온 것은 해전에 약한 몽고군과 맞서 싸우는데 적합하고 섬이 크고 기름져서 오래 버티더라도 자급자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또 명량해협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거두어진 조세를 개경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가야 할 이동로였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조운을 차단 당해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은 정부는 몽고와 손잡고 진도를 몇 차례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고려 원종 12년 5월 15일 여몽연합군은 다시 진도를 공격, 10여일 동안 벌어진 격렬한 싸움에서 삼별초의 임금 온과 배중손은 죽음을 당하고 김통정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로 건너간다. 제주도로 건너간 김통정 휘하의 삼별초는 3년간의 항쟁 끝에 원종13년(1273) 2월에 여몽연합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지금 성의 대부분은 허물어졌으나 현재 궁궐터가 거의 복원되었고 석축으로 이루어진 건물 자리 12개가 남아 있으며, 그 주변에 420m에 이르는 토성이 남아 있다. 진도읍에서 의신면 돈지 가는 길로 운림산방 못 미쳐 여몽연합군에게 쫓겨 죽음을 당한 삼별초의 왕온의 무덤이 왕무덤재에 있다.)

■신비의 바닷길

예정에 없던 곳인데 가는 길이므로 한 번 들리기로 합니다. 1년에 한 번 그것도 1시간 열린다니 구경은 언감생심이고 그저 가계 해수욕장 구경이나 하는 셈이 되었습니다.

(해마다 음력 2월 그믐경의 영등사리와 6월 중순경에 진도군 고군면 회동마을과 그 앞바다의 의신면 모도 사이에 바다가 갈라지는 일명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 물이 빠지면 폭 30~40m, 길이 2.8km 가량 되는 바닷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 기간내 회동리 일대에서는 신비의 바닷길축제가 열린다. 바닷길은 약 1시간 동안 완전히 드러난 후 도로 닫혀 버린다.)

■배중손장군사당

남도진성을 가는 길에 가까이 있으므로 찾았습니다. 사당이 있고 뜰에는 배장군의 동상이 서 있는데 문이 닫혀있어 밖에서 바라보고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도진성

예전 신문에 보도된 남도진성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용장성과 남도진성을 언젠가 꼭 가려니 했는데 너무 늦게 찾았습니다. 아름다운 성입니다. 고창의 모양성, 해미읍성, 낙안읍성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일개 진의 城임에도 이처럼 잘 보존되고 있어 마음이 흐믓합니다.

( 남도진성은 현재 남동마을을 감싸고 있는 평탄한 대지 위에 돌로 축조된 성이다.

조선 초기에 왜구가 해안을 자주 침범하여 해안과 섬 지방에 성을 쌓고 수군을 파견하였다. 당시 이 곳의 지명이 '남도포'였으며 만호가 책임자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남도포수군만호진성'이라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남도포에 만호가 처음 생긴 것은 조선 세종 20년(1438년) 정월의 일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현재 남아있는 성은 세종 20년 이후에 쌓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의 둘레는 610m, 높이 2.8m ~ 4.1m 에 이르며, 성문과 옹성 등도 형태가 뚜렸하다. 남도석성은 수군만호진성으로는 그 유적이 잘 남아있어 보존 가치가 매우 크다.)

■진도항(팽목항)

내 여행의 주안점인 역사문화유적과 전혀 관계는 없으나 반드시 가보고자 한 이 곳 팽목항은 우리 교육자들로서는 가슴이 에이는 슬픔이 깃든 곳이다. 세월호는 인양되어 이곳으로 끌어왔다. 이곳에서 희생된 이들에 대한 위령제가 열리면서 가족들의 한이 서린 곳이 되었다. 나 역시 그날 우리학교 학생들과 충남 내포지역 수학여행 중이었는데 비보를 듣고 아이들과 함께 희생자들에 대해 묵념으로 조의를 표했다. 온 국민들이 슬픔을 함께 하였다.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2014년 4월15일 오후9시 세월호가 인천에서 제주도를 향해 출발했다. 원래 출발시각은 오후6시30분이었지만 악천후로 출발이 늦춰졌다. 탑승자는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나는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을 포함해 교사14명, 인솔자 1명, 일반탑승객 74명, 화물기사 33명, 승무원 29명 등 모두 476명이었다.

4월16일 오전8시49분 전남 진도군 앞바다인 조류가 거센 맹골수도에서 세월호는 급격하게 변침을 했고, 배는 곧 중심을 잃고 기울어져 표류하기 시작했다. 8시51분 단원고 학생이 119에 구조요청 신고를 했다. 배는 침몰하고 있었지만 선내에서는 “이동하지 말라”는 방송이 연방 흘러나왔다. 9시35분 해경 함정 123정이 도착했다. 기관부 선원 7명이 승객을 버리고 탈출해 구조됐고 조타실 선원들도 뒤따라 탈출했다. 침몰 전까지 172명이 구조됐지만, 10시30분께 침몰한 이후 단 1명도 구조되지 못했다. 현재까지(2015년 4월) 희생자는 295명, 실종자는 9명이다. 진도항(珍島港)은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팽목리에 있는 1998년 2월 24일 국가지정어항이 된 소규모 어항이다. 조도면으로 가는 배가 다닌다. 2013년 팽목항(彭木港)에서 진도항으로 개명하였다.)

■진도읍

조금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읍내로 들어갑니다. 우리와 모임을 함께하는 김예원 교장은 이곳 진도출신입니다. 아이들 어린 시절인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우리 할머니는 우리 승수와 승원이를 돌보셨고, 김교장 친정어머니는 보은이와 상은이를 돌보셨기에 같은 아파트에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또 두 분이 아주 친하게 지내셨습니다. 그 어머님은 지금 90대 초반으로 진도에 살아계셔서 임교수와 김교장 내외는 한 달에 한 번씩 진도를 찾습니다. 효성이 지극한 분들이십니다.

■진도개 테마파크

점심후 읍내에 있는 이곳을 찾습니다. 육지에서 보는 진돗개들과 달리 이곳의 진돗개들은 몸이 상당히 크면서도 순하게 생겼고 매우 예쁩니다.

■우수영국민관광단지(울돌목)

언젠가 어느 단체인지는 잊었지만 관광을 하는 중에 이곳에 들린 일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佳苑에게 울돌목을 보여주기 위해 찾았습니다.

이순신장군은 나라를 구한 전쟁의 英雄이자 진정한 聖人이십니다. 오늘 미국의 트럼프가 온갖 술수를 부리며 개표방해공작을 꾸미고 있습니다. 저런 미치광이 장사꾼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또 다시 절반의 국민들이 지지하는 미국은 정치적으로 철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형을 선고 받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짐바브웨의 집권당 대변인은 ?미국은 과거에 우리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며 민주주의를 자랑했지만 오늘날 엔 우리아프리카에서 민주주의를 배워야 할 것이다.?라고 조롱하는 성명을 냈습니다. 트럼프는 미치광이이고 미국은 정말 웃기는 나라입니다. 오후에 바이든의 승리가 확정되고 미국이 조속히 평안해지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바이든의 미국이 트럼프의 부끄러운 4년을 씻어내고 다시 세계의 평화와 안녕과 복지를 이끄는 훌륭한 미국으로 태어나기를 빕니다.

 

30일 남성교직자 산행

우리 고교동창들 중 익산과 군산에 사는 교직자들이 모인 10명의 모임입니다. 우리문화원 주변의 산에서 개최되고 있는 국화축제를 구경하고 우리 백산면 소재지의 내 단골집 <내고향 피순대>에서 점심을 냈습니다. 금년에 익산문화원 주변 야산을 시에서 매입하고 국화축제장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은사이신 모 선생님의 밭과 친구인 모 선생의 가족 선산도 들어가서 많은 보상을 받았다니 부럽습니다. 조상님들 잘 두신 덕이라 하겠습니다.

 

31일 서가협회 익산지부전 개최

제 13회 서가협회 익산지부전(31일~11월 4일)을 준비하느라 지부장이신 덕산 정명성 선생과 사무국장이신 정암 박찬동 선생께서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다. 나는 명색이 총무이사이므로 전시장 꾸미고 거두는 일, 연우회원들과 하루 관리 하는 일등 심부름 정도 역할을 해드렸습니다. 전체 59명의 회원 중 참여회원 44명, 100여점의 회원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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