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20년 8월

청담(靑潭) 2020. 9. 4. 00:04

1일~2일 사돈네와 1박 2일

2일은 우리 이쁜 딸의 생일입니다. 코로나와 장마로 인하여 우리가 서울에 올라가 생일 축하하기에는 매우 부담이 되는 상황인데, 사돈내외분과 사위가 전주에서 하루를 함께 하며 이쁜 딸의 생일을 축하하는 일정을 잡았습니다. 고맙기 짝이 없고 노송동의 단독주택 한 채(인봉댁)를 빌렸습니다. 지도를 찾아보니 내가 근무했던 전주제일고 앞입니다.

서울가족은 오전에 내려와서 점심을 하고 우리는 오후 세시에 출발하였는데 정말 비가 억수로 쏟아졌습니다. 중앙동 영화의 거리 참치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와 딸래미 생일을 축하하며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정박사의 학위논문을 증정 받았습니다.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2년 동안 논문을 준비해서 심사를 통과하여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한 사위 정준호 박사가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본디 런던대 학부와 대학원에서는 기생충학을 전공하였으나 서울대 박사과정에서는 인문의학을 전공하였습니다. 논문주제는 <한국 기생충 관리 사업의 초국적 네트워크, 1950~2000년대>입니다. 이미 기생충 관련하여 저서와 번역서등 여러권의 책을 출판한 바 있으나 앞으로 더욱 활발한 연구와 활동을 기대합니다. 사랑하는 사위 정준호 박사의 미래가 밝기를 사돈내외와 함께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사돈 정사장님 내외분께 그간의 노고를 치하 드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15,6년 전 근무했던 전주제일고를 시찰(?)하였습니다. 교내에는 이곳 저곳 내 손길이 닿은 곳이 아주 많습니다. 교무부장으로 열심히 근무한 시절입니다. 학교 앞에 있는 신석정 선생(1907-1974) 가옥도 찾아봅니다. 선생은 전주고와 전주상고(현 전주제일고)에 오래 근무하셨기에 이곳에 집이 있었는데 내가 근무하던 당시에는 잘 몰랐더니만 이후 전주의 문화관광답사지로 선정하여 안내하며 꾸민듯 합니다. 풍남동 왱이 콩나물국밥집에서는 금년 봄에 문재인 대통령께서 앉으셨던 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작년에 군산에서도 어느 횟집에서 문대통령께서 앉으셨던 자리에서 점심을 먹었으니 문대통령과 내가 동갑의 인연이 조금은 닿기는 하나 봅니다. 웃자는 얘깁니다만 대통령이 나보다 20여일 먼저 출생하셨고 그래서 빠른 7살로 초등학교를 입학한 것도 같습니다.

사돈내외께서 정박사 대학원 졸업 기념으로 중고 아우디를 사주셔서 타고 왔습니다. 이쁜 딸과 정박사가 함께 타게 될 차입니다.

송광사를 찾아 답사하고 위봉사 폭포를 구경했습니다. 마침 비가 많이 내려서 볼 만합니다. 대아수목원에서 한 시간여 산보를 마치고 금마 물머리집에서 점심을 한 뒤 상경했습니다. 맛있는 접심이 되지 못해서 부끄럽습니다. 익산의 맛집이라 소개하며 찾았는데 음식은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본의아니게 사돈내외분께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다시는 물머리집은 가고 싶지 않습니다.

 

15일 채계산 출렁다리와 미술관

진즉부터 순창 채계산 출렁다리를 다녀올 계획이 있다하니 가원이 이왕 가는 길에 남원 김병종미술관까지 다녀오자 합니다. 그곳에서 <예술편력: 김영태 "누군가 다녀갔듯이">를 전시한다고 합니다. 나는 도통 모르는 분인데 가원은 이미 70년대부터 좋아하는 문인이자 화가라고 하며 그가 펴낸 책을 네 권이나 가지고 있다며 보여줍니다.

출렁다리는 금년 봄에 완성하였으나 코로나로 인하여 내내 입장을 불허하다가 최근에야 다시 관람이 허가되었다고 합니다. 다리 길이가 250M나 되는 길고도 멋진 다리입니다. 우리 부부의 인연을 맺어준 한 모티브가 되었던 45년 전의 대둔산 출렁다리를 생각하며 서로의 깊은 사랑을 확인합니다.

전시관에서 느끼는 김영태 시인은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그림의 독창성도 작품성도 뛰어난데 그가 남긴 책이 수십 권입니다. 한 개인이 저토록 많은 책을 남긴 작가는 처음입니다. 그의 약력을 적어봅니다. 엄청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게 살다간 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존경스럽습니다.

※김영태

김영태는 1936년 11월 22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1957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1959년 홍대 재학 중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사상계』에 시 「시련의 사과나무」, 「설경」, 「꽃씨를 받아둔다」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68년 『월간중앙』 기자로 입사하였다가 몇 달 안 돼 한국외환은행 조사부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1992년 외환은행을 퇴사할 때까지 조사부에서 근무하며 은행 잡지와, 단행본, 각종 통계 자료를 만들었다.

1965년 첫 시집 『유태인이 사는 마을의 겨울』(중앙문화사)을 발간한 후, 1968년 황동규, 마종기와의 3인 시집 『평균율1』, 1970년『바람이 센 날의 인상』(현대문학사), 1972년『평균율2』, 1975년『초개수첩』(현대문학사), 1978년『객초』(문예비평사), 1979년『간주곡』(문예비평사), 1981년『여울목 비오리』(문학과지성사), 1986년『결혼식과 장례식』(문학과지성사), 1989년『느리고 무겁게 그리고 우울하게』(민음사), 『매혹』(청하), 1993년『고래는 명상가』(민음사), 1994년『현대시 94』(문학세계사), 『침묵으로도 다하지 못하는 그리움』(양문각), 1995년『남몰래 흐르는 눈물』(문학과지성사), 1997년『하늘 바람꽃이 핀다』(양문각) 등을 간행했다.

그 외에도 시선집으로 『북호텔』(민음사, 1979), 『어름사니의 보행』(지식산업사, 1984) 등이 있으며, 시평집으로 『변주와 상상력』(고려원, 1984)이 있다.

이러한 시인으로서의 활동 외에도 김영태는 무용평론가, 서양화가로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1984년『객석』 무용자문위원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무용평론을 썼고, 동아무용콩크루 심사위원, 서울무용제 운영위원, 국립극장 발레단 무용자문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강사, 무용평론가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대학의 전공을 살려 7차례의 그림 전시를 갖기도 했다.

그가 문인으로서 펴낸 시집은 모두 17권에 이르며, 『갈색 몸매들』, 『막간』 등의 무용평론집이 13권, 『징검다리』 등의 산문집이 12권, 『인간의 집』 등 소묘집이 10권이 달한다. 2007년 7월 12일 타계했다.

18일 육일회 모임

코로나가 걱정이 되기는 하나 지난 2월 모임을 가지지 못한데다, 우리 전북지방에는 확진자가 없는 상태이므로 그냥 모임을 추진했습니다. 지난 2월에 퇴임한 권주영, 김선호, 장우익 교장이 모두 참석하셨고 다행이도 열 아홉분이나 참석하여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2년간 전국교육감협의회 사무국장으로 2년간이나 세종시에 파견 나갔던 이재송 교장은 전북교육정보연구원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모두 크게 축하했습니다. 연 2회의 모임이므로 내년 2월에도 웬만하면 모임을 추진하는 것으로 이야기 되었습니다.

 

21일 남성21회 월례회

코로나가 약간 걱정되기는 하나 이미 한 달 전에 8월 모임은 시외에서 염소탕으로 보신하기로 공포하였기에 그대로 추진하였습니다. 내 자신 작년부터 보신탕은 먹지 않기로 하고 실천하고 있었던 차, 우연히 낭산면의 <내가 잘 가는 집>에서 염소탕을 먹었는데 보신탕보다도 더 맛이 있어 적극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사장님께서 전 날 잡아서 준비한 염소수육과 염소탕이 맛이 끝내주므로 친구들에게 아주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모두 16명이 참석하였습니다. 9월은 모두들 사회적 거리두기를 더욱 걱정하며 지키려하므로 모임을 갖지 않기로 총무와 결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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