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잡기[靑城雜記]
성대중(成大中 1732-1812)
서얼가문 출신의 문인으로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남공철(南公轍) 등과 교유가 있던 인물이다. 1753년(영조 29)에 생원이 되고, 1756년에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순조로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할 처지였으나, 영조의 탕평책에 편승한 서얼들의 신분상승운동인 서얼통청운동(庶孼通淸運動)에 힘입어 1765년 청직(淸職)에 임명되어 서얼통청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1763년에 통신사 조엄(趙曮)을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왔고, 1784년(정조 8)에 흥해군수(興海郡守)가 되어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정조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신분적인 한계에 묶여 부사(府使)의 벼슬에 그쳤다.
학맥은 노론 성리학파 중 낙론계(洛論系)에 속하여 성리학자로서의 체질을 탈피하지는 못했으나, 당대의 시대사상으로 부각된 북학사상(北學思想)에 경도하여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과 교유하면서 이들에게 가학(家學) 및 스승 김준(金焌)에게서 전수받은 상수학적(象數學的)인 학풍을 발전적으로 계승, 전달하여 북학사상 형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취언(취言)·질언(質言)·성언(醒言)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췌언이란 ‘헤아려 쓴 말’이라는 뜻으로 10편의 중국 고사를 쓴 뒤 ‘청장평왈(靑莊評曰)’로 시작되는 평론이 붙어 있다. 질언이란 ‘딱 잘라 한 말’이라는 뜻으로 댓구로 이루어진 120여 항의 격언을 모아놓은 것이다. 성언이란 ‘깨우치는 말’이라는 뜻으로 100여 편의 국내 야담을 모아놓았다.
▣청성잡기 제1권 췌언(揣言)
◯초한(楚漢)의 성패
국가는 인재 등용을 급선무로 여기고 선비는 간언을 유능함으로 삼는다. 만약 장량과 진평의 말이 한나라에 쓰이지 않았다면 한나라가 비록 천하를 차지할 형세가 있었다 하더라도 천하를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고, 만약 한신과 진평의 말이 초나라에 쓰였다면 초나라가 비록 천하를 잃을 만한 말을 하였다 하더라도 천하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유방과 항우의 성패는 오직 인재의 등용 유무에 달려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초나라가 여러 책사들을 반드시 다 등용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한나라가 여러 책사들을 반드시 다 등용한 것도 아니었다. 1000균(鈞)의 무게를 드는 용사를 융우(戎右)로 발탁하면 100균을 드는 용사는 기꺼이 그의 보좌가 되고, 준마(駿馬)와 노마(駑馬)를 함께 끌채에 매면 채찍을 잡은 자가 화를 내는 것이다.
▣청성잡기 제2권 질언(質言)
2. 천지의 조화보다 지극한 솜씨는 없고 성인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
4. 성현은 경외하는 것이 많고 영웅은 시기하는 것이 많다.
5. 화복은 자기에게 달려 있고 성패는 하늘에 달려 있다.
6. 남을 믿는 것은 자기 마음을 믿는 것만 못하고, 자기 마음을 믿는 것은 학문을 믿는 것만 못하다.
7. 학문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고 벼슬살이는 남을 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 결국 남을 위하는 길이고, 남을 위하는 것이 결국 자신을 위하는 길이다.
8. 번성하면 반드시 쇠퇴하고 굽은 것은 펴지나니, 천하만사는 모두 이런 이치를 기준으로 삼는다.
9. 융성은 쇠퇴의 조짐이고 복은 화의 근원이다. 쇠퇴가 없기를 바란다면 극도의 융성에 처하지 말고, 화가 없기를 바란다면 큰 복을 구하지 말라.
11. 한 집안에 있어 당장의 성쇠는 그 집에 오는 손님을 보고 알 수 있고, 먼 훗날의 성쇠는 자손을 보고 알 수 있다.
12. 사람의 얼굴을 관상(觀相)하는 것은 사람의 말을 들어 보는 것만 못하고, 사람의 말을 들어 보는 것은 사람의 일을 살펴보는 것만 못하고, 사람의 일을 살펴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만 못하다.
13. 자그마한 은혜와 임시방편적인 정치는 군자가 잘할 수 없고, 자신을 뽐내는 행동과 너무 지나친 논의는 군자가 하지 않는다.
16. 분수대로 운명에 맡기면 만사가 제대로 되고, 권세를 탐하여 영달을 좇으면 온갖 죄가 생겨난다.
17. 처신(處身)하는 것은 청탁의 중간에 있어야 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빈부의 중간으로 해야 하며, 벼슬살이하는 것은 진퇴의 중간에 있어야 하고, 남과 사귀는 것은 깊고 얕음의 중간으로 해야 한다.
19. 곤경에 처해서는 형통한 듯 여기고, 추한 사람 보기를 고운사람 보듯 하라.
20. 바둑은 두지 않는 것이 고단수이고, 술은 마시지 않는 것이 예이며, 거문고는 타지 않는 것이 아취가 있고, 벼슬은 현달하지 않는 것이 고상하다.
21. 관직에 귀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직분을 다하는 것이 귀한 것이고, 선비에게 장수와 요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남기는 것이 장수하는 것이다.27. 어려서 사람들이 다 칭찬하고 늙어서 사람들이 다 헐뜯는 사람은 모두 말할 가치도 없다. - 오직 만년의 절개를 고귀하게 여긴다.
22. 눈앞에 미운 사람이 없고 마음에 불평한 일이 없는 것이 평생의 지극한 즐거움이다.
23. 천하를 위해 경비를 아끼고, 백성을 위해 힘을 아끼고, 경서를 위해 시간을 아끼고, 자기를 위해 말을 아끼고, 국가를 위해 정신을 아껴라.
24. 군자는 남의 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소인은 남의 악을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현달한 사람은 항상 남도 현달하기를 바라고 곤궁한 사람은 항상 남도 곤궁하기를 바란다. 훌륭한 사람은 남의 장점을 듣기를 좋아하고 용렬한 사람은 남의 단점을 듣기를 좋아한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항상 남을 칭찬하고 부족한 사람은 항상 남을 헐뜯는다. -
25. 인재를 아끼는 사람은 창성하고 인재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패망한다.
26. 공적인 일은 남보다 앞서 하고 사적인 일은 남보다 뒤에 한다. -
30. 어떤 이가 묻기를, “그대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있다. 부귀하면서 교만하고 빈천하면서 나태한 사람을 미워한다.” 하였다.
32. 권세를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명예를 구하고, 명예를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익을 탐한다.
33. 임금이 전쟁을 좋아하면 그 나라를 망치고, 대부가 권력을 좋아하면 그 집안을 망치며, 필부가 재물을 좋아하면 그 몸을 망친다.
37. 나쁜 풍속의 폐단은 이단보다 심하고, 놀고먹는 해악은 도적보다 심하며, 붕당의 화는 전쟁보다 심하다.
39. 염치 불고하고 먹기만을 추구하는 자는 짐승과 다를 것이 없고, 눈을 번득이며 달려가 이익만을 좇는 자는 도적과 다를 것이 없다. 잗달고 소심하여 제 일만을 챙기는 사람은 거간꾼과 다를 것이 없고, 패거리를 지어 비방하면서 사악한 사람만을 가까이하는 자는 도깨비와 다를 것이 없다. 기세를 믿고 기운만을 앞세우는 자는 오랑캐와 다를 것이 없고, 수다를 떨며 권세가만을 붙좇는 자는 종이나 첩과 다를 것이 없다.
40. 음식ㆍ의복ㆍ수레ㆍ거처는 하등인과 같이 하고, 덕행ㆍ언어ㆍ문학ㆍ정사는 상등인과 같이 하라.
43. 몸은 항상 수고롭게 하려 하고, 마음은 항상 한가롭게 하려 하며, 음식은 항상 간소하게 하려 하고, 잠은 항상 편안하게 하려 하라. 건강을 유지하는 요점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47. 고요하면 마음이 비워지고, 마음이 비워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신명해지니, 마음이 평안해져 신명이 와서 머무는 것이다.
48. 몸을 공허한 곳에 두고 마음을 넓게 가지면 몸은 편안해지고 마음은 태평해지며, 차분하게 사물을 다스리고 대범하게 일을 처리하면 사물은 다스려지고 일은 정리된다.
49. 군자의 처세는 나에게 오는 것은 응대하고 나에게서 떠나가는 것은 잊으며, 나의 힘으로 사물에 항거하지 않고 마음으로 일을 엿보지 않으며, 갈 때는 돌아오듯이 하고 움직일 때는 쉬듯이 한다.
50. 도(道)는 크고 작음이 없으니 사람이 쓰기에 달렸을 뿐이다. 발전시켜 넓히면 큰 육합(六合)이라도 용납하기에 부족하고, 거두어 갈무리하면 작은 한 칸의 방이라도 용납하기에 넉넉하다.
53. 덕이 훌륭한 사람은 그 즐거움이 숭고하고, 자질이 순후한 사람은 그 기운이 창성하고, 도가 큰 사람은 그 말이 존엄하고, 식견이 깊은 사람은 그 문장이 심오하다.
56. 벼슬살이는 명운에 달려 있고 정사는 학문에 근본을 둔다.
57. 학문이 실용에 맞지 않으면 그런 학문은 하지 않는 것이 낫고, 문장이 세교(世敎)에 보탬이 없으면 그런 문장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58. 몸을 편안히 가지고 심성을 수양해 천명을 지키는 데는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가장 좋다.
59. 문장으로 세상을 빛내려다가 혹 과장(誇張)에 빠져 잘못되기도 하고, 언론으로 세상을 붙잡으려다가 혹 과격(過激)에 빠져 잘못되기도 한다.
61. 재주는 많기를 바라고, 학문은 넓기를 바라고, 힘은 굳세기를 바라고, 기운은 온후하기를 바라고, 뜻은 전일하기를 바라고, 일은 숙달되기를 바란다.
62. 밖에서 구하지 말고 반드시 내면의 수양을 넉넉히 하라.
66. 잘 다스려진 세상에는 사람마다 일이 있으니, 지위가 높은 사람은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자신의 힘을 다한다.
67. 중요한 곳을 맡은 지방관은 깨끗한 즐거움을 취해야 하고, 높은 지위에 처한 사람은 아랫사람을 간절히 염려해야 한다.
68. 평지를 걸어가면서도 자빠질까 걱정해야 한다.
69. 용모와 마음이 다 훌륭하고 도량과 식견이 두루 완벽한 사람이 세상에 나아가 쓰이면 모든 일에 막힘이 없이 여유가 있을 것이다.
72. 청렴하되 각박하지 말고, 화합하되 휩쓸리지 말며, 엄격하되 잔혹하지 말고, 너그럽되 해이해지지 말라.
73. 벼슬길에 나아갈 때는 남의 도움을 받지 말고, 벼슬길에서 물러날 때는 남을 탓하지 말라.
74. 남의 비밀을 살피지 말고, 남의 재주를 가리지 말며, 남이 나에게 극진히 잘하기를 바라지 말고, 남이 나에게 충성을 다하기를 바라지 말라.
76. 명예가 있는 자리에는 오래 있어서는 안 되고, 재주는 항상 써서는 안 된다.
81. 하늘에 지은 죄는 그래도 벗어날 수 있지만, 백성에게 지은 죄는 구제 받을 수 없다.
85. 사람이 모이면 이익이 생겨나고, 물건이 모이면 해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익을 독차지하면 화도 집중된다.
86. 과거의 흠은 스스로 지기(志氣)를 손상하는 것이고, 문벌의 폐단은 스스로 재능을 제한하는 것이고, 붕당의 폐해는 스스로 원수를 만드는 것이다.
89. 교만과 인색은 다 나쁜 점이다. 그러나 하늘은 인색보다 교만을 더 미워한다.
91. 천하에 믿을 만한 것이 없고 오직 부지런함과 삼감을 믿을 만하다. 그러나 자신이 삼간다고 믿으면 벌써 삼가는 것이 아니고, 부지런하다고 믿으면 도리어 재앙이 된다.
92. 천하에 법에는 걸리지 않지만 죄가 되는 것이 다섯 가지 있으니, 높은 지위, 깨끗한 이름, 많은 재산, 많은 자식, 강성한 가문, 이 다섯 가지이다.
93. 남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남을 존경하고, 남에게 모욕을 당하는 사람은 반드시 남을 모욕한다.
94. 호랑이를 두려워하듯 법을 두려워하고, 화살을 피하듯 권세를 피하라.
98. 의리를 바르게 행하고 도를 밝히는 사람은 공리(功利)가 절로 찾아오지만, 공을 계산하고 이익을 꾀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기질이 거칠고 마음이 가벼운 사람이다.
99. 경전을 힘써 연구하면 마음이 장중해지고 몸이 펴지지만, 외서(外書)에 탐닉하면 마음이 방자해지고 몸이 조급해진다.
102. 이익을 남겨서 벗에게 주고, 복을 남겨서 자손에게 주어라.
103. 물러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나아가는 사람은 그 행로가 순탄치 않다.
106. 독서할 때에는 오직 성현만을 알고, 벼슬할 때에는 오직 백성과 나라만을 알라.
108. 어린아이가 몽둥이를 쥐면 함부로 사람을 때리고, 소인이 권력을 잡으면 함부로 사람을 해친다.
110. 유학의 장점은 선을 권장하는 것이고, 노불(老佛)의 장점은 사악을 금지하는 것이다.
111. 성현은 가장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113. 의론이 일어날 때는 강경론자가 반드시 이긴다. 그러나 끝내 화를 부르는 것도 강경론에서 비롯한다.
115. 여색은 몸을 해칠 뿐이고 싸움은 몸을 죽이기도 하지만, 탐욕을 경계하지 않으면 화가 심한 경우 집안을 망치기도 하며 적은 경우라도 몸을 망친다. 그러므로 군자의 삼계(三戒) 중에서 노욕(老慾)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 으뜸이다.
119. 내면의 수양이 부족한 사람은 그 말이 번잡하고, 마음에 주관이 없는 사람은 그 말이 거칠다.
120. 운명에 맡기기보다는 뜻을 가다듬는 게 낫고, 지난날을 한탄하기보다는 앞일을 힘쓰는 것이 낫다.
122. 좋아함은 부러움을 낳고, 부러움은 시기심을 낳고, 시기심은 원수를 만든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마음이 원수로 변하는 것이 손바닥을 뒤집는 잠깐 사이에 이루어질 뿐이다.
124. 성하면 쇠하는 것이니 지극히 성하면 패망하는 것은 천리(天理)여서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성한 데 처하기를 위태로운 데 처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만이 패망을 면할 수 있다.
127. 인력이 지배하는 사회는 강자가 약자를 이기고, 천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약자가 강자를 이긴다.
129. 윗자리에 있을 적에는 아랫사람이 명분을 내세워 자신을 공격하게 하지 말고, 아랫자리에 있을 적에는 윗사람이 위엄으로 자신을 억누르게 하지 않는다면 처세를 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30. 관직이 높으면 위태로운 일이 많고 낮으면 욕된 일이 많다. 그러나 위태롭기보다는 차라리 욕됨이 낫다.
133. 뜻과 기개는 바라보는 것과 같으니 높고 원대하게 해야 하고, 학문은 걸어가는 것과 같으니 낮고 가까운 데서부터 먼저 해야 한다.
134. 상대편을 물리치고 자기편을 끌어들이는 정치는 항상 호오(好惡)에 치우친다. 그러므로 당화(黨禍)가 뒤따른다.
135. 도덕을 지닌 사람은 항상 남과 소원하고, 사리에 통달한 사람은 항상 세상과 소원하다.
138. 술과 여자, 재물, 벼슬에 대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대장부라고 말할 수 있다.
142. 화는 입에서 생기고, 근심은 눈에서 생기고, 병은 마음에서 생기고, 허물은 체면에서 생긴다.
▣청성잡기 제3권 성언(醒言)
※성언이란 <깨우치는 말>인데 제3장부터 제5장까지 무려 400여개의 많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사람이 살면서 세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모두 나의 교훈이 될 수 있다. 심지어는 어젯밤에 꾼 꿈까지도 말이다. 18세기 영․정조시기에 있었던 수많은 민간이야기들과 중국 및 우리나라의 옛 이야기들이 아주 재미있을 뿐 만 아니라 큰 교훈이 될 만하다. 그중 몇 가지만 옮겨본다.
◯왜병을 물리친 바늘춤
명(明)나라 장수 마귀(麻貴)가 소사(素沙)에서 왜적과 싸울 때의 일이다. 양군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한 왜병이 검을 휘두르며 기세등등하게 도전해 오자, 긴 창을 쥔 절강(浙江) 출신의 병사가 나가 대적하였으나 얼마 못 가 검에 찔려 쓰러졌다. 이를 지켜본 그의 아들 네 명이 연이어 나가 싸웠으나 모두 죽고 말았다. 검을 잡은 왜병이 더욱 앞으로 다가오자 조명(朝明) 연합군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마귀가 군중에 후한 상금을 내걸고 왜병에 대적할 자를 모집하였으나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이때 무명옷을 입은 조선 병사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와서 마귀에게 읍(揖)하고는 맨손으로 그 왜병을 잡겠다고 자원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미친 짓이라고 비웃었으나, 마귀는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우선 나가서 대적하게 하였다. 그 무명옷 병사가 나가서는 양손에 아무런 병기도 없이 검에 맞서 맨손으로 춤을 추기만 하니, 왜병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 웃곤 하였다. 얼마 후에 검을 휘두르던 왜병이 갑자기 쓰러지자, 무명옷 병사는 그의 검을 주워 들어 목을 베어 바쳤다. 이 광경을 본 왜군들은 크게 기가 꺾여 마침내 연합군이 승리하였다.
마귀는 무명옷을 입은 조선 병사의 공로를 인정하고 물었다.
“그대는 검술을 아느냐?”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왜병의 목을 벨 수 있었느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저는 어려서 앉은뱅이가 되어 혼자 방에만 있다 보니,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 바늘 한 쌍을 창문에 던지는 연습을 하면서 날마다 동이 틀 무렵에 시작하여 날이 어두워져서야 그만두었습니다. 처음에는 던지는 족족 바늘이 빗나가 떨어지더니, 오랫동안 연습하자 바늘이 그대로 구멍에 들어가 8, 9척 안의 거리는 던지는 대로 명중하였습니다. 3년이 지나자 먼 데 있는 것이 가깝게 보이고 가는 구멍이 크게 보여, 바늘을 던졌다 하면 손가락이 마음과 일치되어 백발백중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기술이 완성되었으나 써먹을 데가 없었는데, 전쟁이 일어나면서 마침 저의 앉은뱅이 다리도 펴져 오늘에야 적에게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맨손으로 미친 듯이 춤을 추니, 왜병은 저를 비웃고 무시하여 검으로 베지 않았습니다. 저의 바늘이 자신의 눈알을 노릴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마귀가 이 말을 듣고 왜병의 머리를 살펴보니, 과연 그의 눈알에는 각각 바늘이 한 치쯤 박혀 있었다.
◯축원과 저주의 이치
부자에게 아들이 많기를 축원하고, 귀한 사람에게 권세가 막강하기를 축원하고, 명망 있는 사람에게 벼슬이 높기를 축원하고, 복 많은 사람에게 장수하기를 축원하는 것은 모두 저주하는 것이요, 축원하는 것이 아니다.
부유하면서 아들이 많으면 자식을 다 혼인시키기 전에 재산이 이미 줄어들고, 형제가 많으면 밖에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어서 술 마시고 노름에 싸움질이나 하여 집안도 뒤따라 망하고 만다. 귀하면서 권세가 막강하면 10년이 못 되어 하늘의 재앙과 사람들의 해침이 함께 닥치고, 명망이 있으면서 벼슬이 높으면 처음에는 의심이 이르고 중간에는 비방이 모이고 끝내는 온갖 모욕이 모여서 명망이 마침내 다 없어지고 만다. 복이 많으면서 장수하면 처자식이 먼저 죽고 심지어는 손자까지 장사 지내게 되어 복이 변해 재앙이 되고 마니, 이는 모두 불변(不變)의 이치이다.
◯불효자가 된 효자와 음녀(淫女)가 된 열녀
효자가 불효자가 되고 열녀가 음녀가 된 경우가 있다.
영광(靈光)의 강씨(姜氏) 성을 가진 자는 고을의 명문(名門)으로 같은 고을의 이씨 집안에서 후처를 맞았는데, 이씨 역시 양반 가문이었다. 강씨가 마침 어느 이웃 백성의 행위를 괘씸하게 생각하여 자주 그를 곤장으로 괴롭혔다. 그 백성은 원한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강씨를 관가에 밀고하였고, 관가에서는 권세를 믿고 전횡한다는 죄목으로 강씨를 체포하였다. 강씨는 기세 좋게 스스로를 변호하다가 사또의 노여움을 사서 곤장을 맞고 며칠 동안 갇혀 있다가 감옥을 나와서는 죽고 말았다. 마침 암행어사가 이 고을에 오자, 강씨 일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암행어사는 고발당한 백성을 잡아다가 심문하였으나 증거가 없어서 그만두었으며, 사또 역시 다른 일로 파직되고 임상원(林象元)이 대신 이 고을에 부임해 왔다.
강씨 집안에는 자식이라곤 전처(前妻) 소생으로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은 아들 하나뿐이었다. 강씨의 후처 이씨는 매일 밤 울면서 이 아들에게 이야기했다.
“원수를 갚지 않으면 너와 나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예리한 칼을 사 두고 틈만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 한여름이라 그들의 원수가 문을 열어 놓고 잠을 자고 있었다. 모자(母子)는 함께 가서 직접 그를 찔러 죽이고 칼을 들고 나와서 자수하였다.
임상원은 본래 옛것을 좋아하고 기절(氣節)을 숭상하는 사람인지라 자수한 모자를 보고 옛날 조아(趙娥)와 장황(張瑝)이 다시 이 세상에 나왔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이 사실을 감사(監司)에게 상세하게 보고하는 한편, 우선 그 모자를 가두고 음식을 제공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 문안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옥문(獄門)을 가득 메우고 한 번이라도 효자와 열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였으며, 소문을 듣고 몰려오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감사도 이 사건을 쉽게 처리하지 못하고 장계를 올려 조정에 청하니, 영조(英祖)께서는 이들을 함께 좋은 곳으로 유배하여 모자가 서로 의지할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그 마을에 효자와 열녀의 정문(旌門)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곱게 단청한 효자문과 열녀문이 한 마을에 나란히 세워지자, 온 도민(道民)들이 이 모자를 존경하며 우러러보았다. 이들 모자가 유배지인 하동으로 이동하자, 사람들이 이들의 의리를 사모하여 노자로 준 것이 수백 금이었고 지나는 곳마다 모여들어 공경을 표하였다.
모자는 유배지에 이르러 고을의 포교(捕校) 박부장(朴夫長)의 집에 묵었는데, 박부장은 음탕하고 간악한 자로 이씨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겉으로는 공손히 모셨지만 속으로는 흑심을 품었다. 아들은 박부장을 한집안 식구처럼 믿고는 자주 휴가를 얻어 고향집에 돌아가서 집안일을 보았고, 어미만 홀로 유배지에 남아 있었다. 이씨는 여름에는 밖에서 잠을 자고, 날씨가 추워지면 방으로 들어갔다. 박부장의 집은 방이 하나뿐이어서 아랫목 윗목으로 나누어 거처하다 보니, 점점 서로 가까워졌다. 박부장은 일부러 마누라와 음란한 짓을 자행하여 이씨의 음심(淫心)을 도발하여 마침내 그와 사통하여 임신시켰다. 박부장의 마누라가 질투를 하자 따로 마을 뒤편에 거처를 정해 두고 은밀히 왕래하니, 추잡한 소문이 외부에 자자하였다.
아들이 고향에서 돌아와 그 소문을 어렴풋이 듣고 물었다.
“어머니 배가 갑자기 부른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러자 어머니는 발끈하며 말했다.
“우리 집에 너와 나만 있는데, 이런 말을 하느냐?”
아들은 통곡하며 관가로 달려가 고발하였고, 이씨 또한 이 사실이 드러나 아예 박부장의 아내가 되고 싶었으므로 즉시 사실대로 자백하였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두 사람을 가두고, 박부장을 곤장 쳐서 죽이려고 하였지만 끝내 죽지는 않았다.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어 이씨는 흑산도(黑山島)에 종으로 유배 가게 되었는데 가는 길에서까지 창기(娼妓)보다도 심하게 음란한 짓을 자행하였다. 박부장 역시 멀리 유배 갔으며, 아들도 어미를 고발한 죄로 멀리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 그리하여 효자문과 열녀문이 모두 철거되었다.
대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착한 것이 최상이요, 허물을 고쳐 착하게 되는 것이 그 다음이요, 먼저는 착하다가 뒤에 나쁘게 되는 것이 최하이다. 음란한 짓을 한 열녀와 수절한 창녀는 그 선악이 판가름 난다.
◯거지들의 연회
도성 안에 모여 사는 거지들이 해마다 항상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들의 생활 규칙은 거지들 중에서 한 명을 뽑아 왕초로 삼고, 기거동작과 모이고 흩어지는 모든 것을 그의 명령에 따라 하여 감히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하는 것이었다. 아침저녁으로 거지들은 구걸한 음식을 모아 왕초에게 공경히 바치고, 왕초는 태연히 앉아 있었다. - 서울에 왕초 한 명이 있고, 서문시(西門市)와 이현시(梨峴市)에 각각 인을당(人乙堂)이 한 채씩 있어 두 왕초가 나누어 거처하면서 뭇 거지들을 맡아 관리하고 지휘하였는데, 사람들이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
영조(英祖) 경진년(1760, 영조 36)에 큰 풍년이 들자, 임금께서 서울과 지방에서 잔치를 베풀어 즐기라고 명하셨다. 용호영(龍虎營)의 악대(樂隊)는 오군영(五軍營) 중에 으뜸이었는데, 그중에 이씨(李氏) 성을 가진 자가 우두머리로 그를 패두(牌頭)라고 불렀다. 이 패두는 평소 호걸이라고 소문이 나서 도성의 창기(娼妓)들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당시에는 금주령(禁酒令)이 매우 엄격하여 상하(上下)의 연회에 오로지 기녀와 음악만을 숭상하였으므로 용호영의 악대를 데려다가 음악을 연주하면 훌륭한 잔치이고, 그렇지 못하면 수치로 여겼다.
이씨는 연회에 자주 초청되어 피곤하였으므로 때로는 병을 핑계 대고 집에 있기도 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어떤 거지가 찾아와서 부탁하였다.
“거지 왕초 아무개가 삼가 패두님께 아룁니다. 다행히 국가의 명령으로 온 백성들이 함께 즐기게 되었으니, 저희가 비록 거지이지만 또한 국가의 한 백성입니다. 아무 날에 여러 거지들이 모여 연융대(鍊戎臺)에서 잔치를 하려 하니, 수고로우시겠지만 패두님께서 음악을 도와주신다면 저희들은 감히 그 은덕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씨가 매우 화를 내며 꾸짖기를,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 )과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 )의 부름에도 내 가지 않았는데, 어찌 너희 거지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한단 말이냐.”
하고는 종을 불러 쫓아내니, 거지가 웃으면서 물러갔다. 이씨는 더욱더 분노하며 비통해했다.
“나는 악대 노릇이 이처럼 천한 직업인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거지까지 나를 부리려 하다니.”
잠시 후 어떤 사람이 와서 매우 거칠게 문을 두드리기에 이씨가 나가 보니,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으나 몸은 매우 건장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거지 왕초였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이씨를 노려보며 말했다.
“패두님의 머리통은 구리로 되었고 집은 물로 지었습니까? 우리 무리 수백 명이 성안에서 흩어져 돌아다니면 순라군(巡邏軍)도 묻지 않습니다. 저희들이 몽둥이 하나에 횃불 하나씩 들고 오면 패두님의 무사함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여 우리를 이토록 깔보십니까?”
이씨는 예전부터 악대를 따라 사람들과 가까이 어울려서 거지들의 생활상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는 참으로 사내대장부일세. 내가 잘 몰라서 오해했네. 지금 바로 자네 말대로 하겠네.”
그러자 거지 왕초가 이렇게 말하였다.
“내일 아침 식사 후에 공(公)은 아무 기생 아무 악공과 함께 총융청(摠戎廳) 앞에 있는 집으로 오셔서 음악을 크게 연주하시되, 부디 시간을 엄수해 주십시오.”
이씨가 웃으며
“알았네.”
하고 대답하자, 왕초는 한참을 응시하다가 눈도장까지 찍고 갔다. 이씨는 곧 자신의 무리를 모두 부르되 거문고와 피리, 비파와 북 등을 모두 새것으로 준비해 가지고 오게 하였으며, 명기(名妓) 몇몇도 모두 불렀다. 이들이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물었으나 이씨는 웃으며,
“일단 나를 따라와 봐라.”
하였다. 이씨가 약속한 곳에 이르러,
“음악을 연주하라.”
하자 악공들은 모두 음악을 연주하고, 기녀들은 모두 춤을 추었다. 이때 짚옷을 걸치고 새끼로 허리띠를 맨 거지들이 떼 지어 춤을 추며 몰려들었는데, 마치 개미떼가 개미집에 모이는 것 같았다. 이들은 춤이 멈추면 노래하고, 노래가 멈추면 다시 춤을 추며,
“좋을시고, 좋을시고! 우리에게도 이처럼 좋은 날이 있구나.”
하며 즐거워하였다. 거지 왕초가 높은 자리에 앉아 내려다보며 매우 만족해하니, 기녀들이 모두 낄낄대며 계속 웃어 댔다. 이씨가 눈짓으로 못하게 하며 말했다.
“웃지 마라. 저 왕초는 나도 죽일 수 있는데 하물며 너희들이겠느냐.”
해질 무렵에 뭇 거지들이 차례에 따라 앉아서는 각기 동냥자루를 뒤져 고기 한 덩이를 꺼내기도 하고 떡 한 덩이를 꺼내기도 하니, 모두 잔칫집에서 구걸해 온 것들이었다. 이 음식들을 깨진 기왓장에 담고 풀이나 짚으로 엮어 만든 그릇에 받쳐서 잡다하게 올리며,
“저희들이 잔치를 열었기에 감히 공께 먼저 올립니다.”
하자, 이씨가 웃으며 사양하였다.
“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음악은 연주하겠지만 그대들이 주는 음식은 받을 수 없네.”
거지들은 웃으면서 절하며,
“공들은 귀인이니 어찌 거지의 음식을 맛보려 하시겠습니까. 그대를 위하여 다 먹겠습니다.”
하였다. 이씨는 더욱더 기생들에게 춤추게 하고 악공들에게 연주하게 하여 흥을 돕게 하였는데, 잔치가 끝나자 여러 거지들이 다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잠시 후에 또 깨진 과일과 문드러진 육포를 꺼내어 기생들에게 주면서,
“이 수고에 보답할 길이 없으니, 이것을 가져다가 여러분의 어린아이와 어린 손자에게 주십시오.”
하였다. 기생들이 모두 사양하니, 거지들이 또 깨끗이 먹어 치우고 나서 절하며 감사의 말을 하였다.
“여러분 덕택에 배불리 먹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거지 왕초가 앞으로 나와 절하며 말했다.
“저희들은 이제 저녁밥을 구걸해야 하니, 감히 여러분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그 후 길에서 이들을 만나자, 모두 흩어져 가 버렸다. 기생들은 모두 배도 고프고 피곤하여 이씨에게 불평을 해댔는데, 이씨는 감탄하며 말했다.
“내 오늘에서야 호쾌한 남자를 보았도다.”
그 후 이씨는 거지를 마주칠 때마다 마음속으로 그때 일을 떠올렸는데, 끝내 그 거지 왕초는 만나지 못하였다.
◯목숨도 구한 말 한마디
숙종(肅宗) 때에 부산 첨사(釜山僉使)로 부임한 자가 있었는데, 왜관(倭館)에 머물던 왜인(倭人)에게 무시를 당하고 심지어 칼을 뽑아 찌르려고 하자 도망쳐서 죽음을 면하였다. 체포되어 서울에 이른 그는 답변하기를,
“다섯 걸음 안에서는 무력을 사용할 곳이 없고, 한 자 되는 칼 아래에서는 몸을 해칠 의리가 없습니다.”
하였다.
※정3품 부산첨사로 왜관을 관리하는 지방관이 왜관에서 수모를 당하고 해당일본인에 대한 처벌을 하기는커녕 본인이 처벌을 받고 있으니 놀랄만 한 일이다. 그만큼 왜관의 위력이 크고 왜관에 대한 지방관의 감시와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의리를 지킨 기생
취섬(翠蟾)은 함양(咸陽) 출신 기생이다. 일찍이 서울로 뽑혀 왔는데, 미모와 재주가 당시에 으뜸이었다. 지체 높은 재상이 많은 돈을 주고 불러서 음식, 의복, 가마 등의 대접을 그녀의 주인집보다 더 융숭히 해 주었지만 취섬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돈과 의복을 사절하여 보내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서울에서 지낸 지 몇 년 만에 협객과 한량들 간에는 취섬이 사는 골목을 모르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길 정도였다.
취섬이 서울 생활을 마치고 함양에 돌아오자 그때 심약(沈鑰)이라는 사람이 이웃 고을 수령으로 있었는데 그녀를 총애하여 소실로 삼았다. 얼마 뒤 심약이 그의 형 심악(沈䥃)의 역모에 연루되어 먼 북쪽 변방으로 귀양을 가니, 취섬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따라가서 정성을 다해 봉양하였다. 심약이 또 남해(南海)로 이배(移配)되자 취섬은 따라가서 허름한 옷에 맨발로 진흙을 밟으면서 물을 길러 다녔다.
어느 날 서울에서 온 상인이 지나다가 취섬을 알아보고는 손을 잡고 울면서 말했다.
“너는 취섬이가 아니냐? 어째서 이렇게 힘들게 사느냐? 나를 따라가기만 하면 좋은 옷과 음식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취섬은 흐느끼면서 말하였다.
“당신의 지극한 뜻은 감사하지만, 제가 정말 떠나려고 마음먹었다면 지금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다만 곤경에 처한 님을 따르다가 내가 힘들다고 중간에 배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인은 한참 동안을 탄식하다가 비단 몇 필을 주고는 떠나갔다. 상인도 의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와 같은 시기에 유동원(柳東垣)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북쪽 지역 출신의 첩이 있었다. 그 첩은 유동원이 북쪽에서 고을 수령 생활을 할 적에 그를 모시던 기생이었다. 얼마 뒤에 유동원이 집안 사람의 잘못에 연루되어 영변(寧邊)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기생은 그 소식을 듣고는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었지만 버려두고 서울로 가서 의금부(義禁府)의 관리 집에서 품팔이를 하며 옥사(獄事)의 조사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았다. 그랬더니 유동원은 죄 없이 연루되었을 뿐이었다. 이에 영변으로 따라가서 동원을 죽을 때까지 섬겼다.
그런데 그 기생은 온갖 재주가 있었던지라 유동원에게 말하기를,
“제가 밖에 나가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묻지 마십시오.”
하고는, 활쏘기ㆍ노름 등 내기하는 곳마다 찾아가서 돈을 많이 따 왔는데 유동원이 이 덕분에 살 수 있었다. 영변의 호방한 젊은이들의 모임에 이 기생이 없으면 즐겁지 않았지만 감히 딴마음을 품는 자는 없었다.
유동원이 죽자 기생은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 지낼 방법을 생각하여 관청으로 찾아가 사정하였는데, 애처롭게 사정하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관청에서는 즉시 넉넉히 재물을 부조해 주고, 온 고을 사람들이 상여 운반을 도와주어 천 리 먼 길 고향으로 옮겨올 수 있었다. 장례를 마치고 떠나려 하니, 유씨 집안 사람들이 울면서 만류하였다. 기생이 말하기를,
“저는 영공(令公)께서 저를 돌보아 주신 은혜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 이제까지 모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하였습니다. 그러니 저를 더 이상 붙잡지 마십시오.”
하고는 신을 신고 문을 나섰다. 늙은 종이 뒤를 따라가자 기생은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동문(東門) 밖에 나의 종과 말들이 많이 있으니 염려 말고 돌아가라.”
그리고는 손을 내저으며 물리치고 돌아갔다. 북쪽에 가서는 1년에 한 번 유동원의 제사 때가 되면 꼭 편지를 보내어 문안하였다. 이 기생의 이름은 복덕(福德)이고, 경성(鏡城) 출신이었다.
◯서원의 폐단
세상 사람들은 퇴도(退陶 이황(李滉) )의 학문이 가장 후일의 폐단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원을 창설한 것만은 크게 후세의 폐단을 열어 놓은 것이다. 초창기에도 이미 서원에 모여 학업을 닦는 자 중에 술에 취하여 고함지르고 함부로 농담하다가 퇴도에게 꾸지람을 받은 자가 있었다.
삼연(三淵 : 김창흡))의 시에,
퇴도 선생 백운서원 세우심은 / 退陶肇創白雲祠
나라와 백성을 살리려 함이었네 / 活國醫民謂在斯
먹고 마시는 놀이에 글 읽는 소리 끊기니 / 酒肉淋漓絃誦絶
분분한 온갖 폐단을 뒷사람이 알리라 / 紛紛百弊後人知
하였는데, 지금은 삼연이 살던 시대보다 풍속이 더욱 좋지 않다.
◯가문의 덕업은 오래간다
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이 일찍이 말하였다.
“군대에 소속된 자손이라도 있는 경우는 필시 선을 쌓은 가문일 것이다.”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으니 용주는 대답하였다.
“재상의 자손이 잘못되어서 시종관(侍從官)이 되고, 시종관의 자손은 요행히 음관(蔭官)이 되고, 음관의 자손은 겨우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나 하고, 생원과 진사의 자손은 마침내 벼슬하지 못해 점점 쇠퇴하여 4, 5대에 이르다 보면 4대조 가운데 현달한 관직이 없어 군대에 소속된다. 이것은 사람이 장성하고 쇠하고 늙어서 죽는 이치나 같다. 이를 아침에는 권세가 대단하다가 저녁에 멸망한 자에 견주어 보면 그래도 선을 쌓은 집안이 아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이 말을 명언으로 여겼는데, 내가 병신년(1800, 정조 24) 이후로 망한 집안을 살펴보건대 자손들이 종이 되거나 죽임을 당하여 군대에 소속이 되려 하여도 될 수가 없었으니, 용주의 말이 더욱 맞다. 아마도 직접 대북(大北)의 몰락을 보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잠으로 재난을 피하다
배와(坯窩) 김상숙(金相肅 1717-1792)이 나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일본에 갈 적에 배에 바람이 크게 불어 닥쳐 돛대가 꺾이자 배안의 사람들이 모두 사색이 되었는데 그대만 선실 문을 닫고서 아무 일 없는 듯이 잠을 잤다고 들었소. 그대는 무슨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가?”
나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공은 제가 심성을 수양하여 마음을 안정하는 힘이 있다고 여기십니까? 저번 행차는 생사가 배 한 척에 달려 있었을 뿐이니, 만일 배에 도움이 된다면 제가 정말 남보다 먼저 걱정했을 것이지만 도움이 될 것이 없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구경거리가 있었다면 다른 사람을 따라 나왔을 테지만 하늘과 물이 맞닿고 바람과 물결이 치니 배 위에 무슨 구경거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문을 닫고 자느니만 못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잘 알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잠을 잔 것은 저번만이 아닙니다. 사행에서 돌아오다가 오사카〔大阪〕에 이르렀을 때 최천종(崔天宗)이라는 사람이 왜놈에게 상해를 입자 일행이 겁을 내며 동요하여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구설수에 낄까 두려워 병풍으로 사방을 에워싸고 그 속에 들어가 잠을 자다가 밥 먹을 때가 되면 나와서 밥을 먹고 밥을 다 먹고는 다시 들어가 자기를 30일이나 계속하다가 옥사가 끝난 뒤에야 나왔습니다. 일행들은 그저 제가 잠만 잔다고 비웃었습니다. 그제야 희이(希夷)가 1000일 동안 잠을 잔 것이 바로 세상을 피하여 숨는 방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배와도 웃었다.
※시기적으로 보아 본인의 일이 아닌가 싶고 유약한 그의 인성을 짐작케 한다.
◯명가의 후손에게 평가받은 청성의 시와 글씨
진사(進士) 이명규(李命奎)가 동지사(冬至使)를 수행하여 북경으로 갈 적에 내가 시를 써 주며 송별하였는데, 그 시가 북경에까지 알려졌다. 방우주(方禹疇)라는 사람은 정학(正學)의 후손이었는데, 그가 시를 보고 이렇게 평하였다.
“비 갠 숲에 햇살이 비추니 집집마다 음악소리 누굴 위해 울리나.”
이어 나의 글씨도 함께 평하였는데, 또 나의 글씨를 각첩(閣帖)의 필법이라고 하였다.
◯조선 군대 제도의 변천 이면사
조선의 오위(五衛)는 고려의 육위(六衛) 제도를 따른 것이지만 그 근본은 당나라의 부병제(府兵制)를 모방하여, 병사들을 농민 속에 붙여 두고 서울과 지방이 서로 연결되어 나라에는 놀고먹는 백성이 없고 군대에는 이름뿐인 병사가 없었으니, 참으로 훌륭한 제도가 어찌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오래되자 폐단이 생겨나 태학(太學 성균관 )의 유생들과 삼의(三醫 내의원ㆍ전의감ㆍ혜민서 )와 사역관(司譯官)들이 군대의 봉급을 타먹으려고 군적(軍籍)에 이름을 끼워 넣고, 번을 설 차례가 되면 장정을 고용하여 대신하게 하니 이름뿐인 병사이거나 쓸모없는 병사였다.
임진왜란에 신립(申砬)이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서울의 병사들을 이끌고 갈 적에 정승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비변사(備邊司)에서 병사를 징발하게 되었다. 이때 생원과 진사, 의관(醫官)과 역관이 시험에 합격한 증표로 받았던 홍패(紅牌)와 백패(白牌)를 가지고 와서는 앞 다투어 호소하니, 오위(五衛)에 병사다운 병사가 한 명도 없어 서애는 군사를 징발할 수가 없었다. 일이 다급하게 되자 마침내 임금께 청하니, 임금께서는 생원과 진사는 놓아두고 의관과 역관 중에서 병사를 징발하게 하였다.
군대가 출동할 적에 기마병들이 쓰는 모자에 비단으로 만든 겉옷을 입고, 폭이 넓은 바지에 굽 높은 가죽신을 신고서 활통을 지고 가니, 마치 오늘날 시위(侍衛)들의 복장 같았다. 그 모습은 모두 보인(保人)과 같아 보였으며 대부분 말이 없어 중도에 쓰러지는 자들이 연달았으니, 달천(㺚川)에서의 전투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패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그 제도를 변경하지 않을 수 없어 훈련도감(訓鍊都監)을 만들었으니, 당나라가 부병제를 바꾸어 확기제(彍騎制)로 바꾼 것과 같다. 그렇지만 오늘날 병사를 양성하는 것이 또다시 고치기 어려운 폐단을 이루었으니, 국정을 담당한 이들이 어떻게 바로잡으려는지 모르겠다.
◯사람을 살리는 청성(靑城)의 운명
봉산(鳳山)의 소경 유운태(劉雲泰)가 나의 운명을 점치고는 말하였다.
“운수가 좋습니다. 봄바람처럼 온화한 얼굴이요, 비단같이 고운 마음씨이니 관직 생활 할 적에 사람을 많이 살릴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늘 사람 살리기를 내 일로 삼았는지라 살인 옥사(獄事)가 내 덕에 다시 조사되어 억울한 누명이 밝혀진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희천(熙川)에서 죄수 두 명을 죽였고 경주(慶州)에서도 그러하였으니, 모두 삼성추국(三省推鞫)을 당할 강상죄(綱常罪)를 범한 자들이었다. 법으로는 용서 없이 사형시킬 죄이지만 막상 처벌할 때에는 소경 유운태가 한 말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저자가 희천과 경주에서 벼슬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울릉도를 지킨 안용복(安龍福)
효효재(嘐嘐齋) 김용겸(金用謙)이 일찍이 《춘관지(春官志)》가 나에게 좋을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예조에서 구하여 보았는데, 이맹휴(李孟休1713-1750)가 편찬한 것이었다. 상권에는 제사의 전례가 기재되어 있고 하권에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절차가 기재되어 있으며, 끝에 안용복전이 기록되어 있었다. 안용복은 동래(東萊) 백성으로 일본에 가서 울릉도에 관하여 다투었기 때문에 전을 쓴 것이다.
울릉도는 본디 우리 땅인데 왜국 어민들이 함부로 점거하여, 고기를 잡으러 들어간 우리나라 어부가 도리어 그들에게 붙잡혀 곤욕을 당하였다. 안용복은 격분하여 젊은 어부들을 모아 울릉도로 가서 왜국 어민들을 내쫓고는 왜국으로 가서 백기주(伯耆州) 태수에게 항의하여 강하게 따졌으니 왜인들이 당해 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섬을 돌려받고 돌아왔으니 그 일은 참으로 장하였다. 그러나 교린에는 도움이 없었으니, 이맹휴가 끝에다 편집한 것은 필시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전을 베껴다가 보관하였다.
내가 울진(蔚珍)의 수령이었을 적에 마침 함부로 섬에 들어가 산삼을 캐는 부정한 백성들이 많았는데, 일이 발각되자 관찰사와 수령들이 모두 죄를 받게 되었다. 조정에서 울릉도 사건의 시말을 강원도 감영에 물었으나 강원도 감영에도 사건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이에 영동(嶺東) 지역의 여러 군현(郡縣)에 탐문하였는데, 안용복전이 있기는 하였지만 내가 그 전을 내놓으면 나만의 공이 되어 이맹휴의 깊은 뜻이 없어질 터였다. 그래서 그 전을 숨기고 감영에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그 일은 안용복에게서 연유한 것으로 이맹휴가 편찬한 《춘관지》의 끝에 기재되어 있으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일이 이에 드러나서 이맹휴의 깊은 생각을 사람마다 훌륭하게 여겼고, 나도 남의 훌륭함을 훔치는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었다. 안용복의 일은 《문헌비고(文獻備考)》에도 편입되었다.
▣청성잡기 제4권 성언(醒言)
◯가까이해선 안 될 사람들
영천(永川)에 사는 백성이 그 자식에게 훈계하기를,
“양반과 사귀지 마라. 꼭 곤장 맞을 일이 생긴다. 관리와 사귀지 마라. 반드시 고된 노역에 끌려가게 된다. 중들과 사귀지 마라. 틀림없이 젊은 아내를 잃게 된다.”
하였으니, 영남 사람들이 명언이라 하였다. 이와 똑같은 식으로 자식들을 훈계할 수 있다.
“부자와 사귀지 마라. 꼭 네 재산을 잃게 된다. 권력 있는 자와 사귀지 마라. 반드시 네 몸을 망치게 된다. 술사(術士)와 사귀지 마라. 틀림없이 네 집안을 망치게 된다.”
◯협객 양익표(梁益標)
양익표는 보성(寶城) 사람인데 호협으로 알려졌었다. 무과에 급제하고선 제멋대로 한양을 휘젓고 다니며 기생을 끼고 술을 퍼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몽와(夢窩) 김상(金相 김창집(金昌集) )이 한번은 우홍규(禹弘奎)에게 말하였다.
“내 들으니 양익표라는 자의 재주와 기개가 쓸 만하다는데 무절제한 행실로 등용되지 못하고 있다 하네. 그대가 잘 타일러 보게. 스스로 조심할 수 있게 되면 내가 써 볼 작정이네.”
우홍규도 무인으로 후에 신임옥사(辛壬獄事)에서 죽은 자이다. 얼마 후에 기방(妓房)에서 양익표를 만났는데 차츰 패악을 부리기 시작하자 우홍규가 이를 저지하였다. 양익표가 노기충천하여 칼을 뽑으려 하며 말하였다.
“나의 낙은 이런 것에 불과하다. 너희는 귀하고 높은 몸이면서 또 나를 얽어매려 하느냐.”
우홍규가 몽와 김상의 말을 전하며 그를 타이르자, 양익표는 즉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을 조심하였다. 우홍규는 몽와에게 이 일을 보고하였다.
마침 소재(疎齋 이이명(李頤命) ) 이상(李相)이 중국으로 사신을 가게 되었는데, 몽와가 양익표를 데리고 갈 것을 부탁하며
“도중에 잘 삼가서 처신하거든 미리 나에게 알려주게나.”
하였다. 양익표는 사신 행렬을 따라가면서 과연 몸가짐을 조심하였는데, 소재가 서한으로 몽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몽와는 당시 태복시(太僕寺)의 제조(提調)로 있었는데 양익표를 내승(內乘)으로 추천하였다. 그가 돌아올 때 태복시의 말에 법안(法鞍)을 갖추고 홍제원(弘濟院)에서 그를 맞이하니, 그 영화로움이 일행을 압도하였다. 양익표는 이에 죽음으로써 김상에게 보답할 것을 속으로 다짐하였다.
신임옥사가 일어나자 양익표는 전혀 가담한 사실이 없는데도 김씨의 문객이라 하여 무수한 고문을 당해 온몸에 성한 데가 없었으나 끝내 말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데도 결국 사형에 처해졌으니, 용맹스러운 그가 김씨를 위해 죽음을 무릅쓸까 두려워해서였다. 양익표가 수레에 실려 성문 밖으로 나가는데 그의 아들이 따라오며 곡을 하자, 그는 돌아보고 웃으며
“나는 남도의 천한 놈으로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여 한양에서 놀았으나 그저 한 명의 건달에 불과했다. 지금 사화(士禍)로 죽으니 가문의 영광이요, 너는 사대부가 될 것인데 무엇 때문에 곡을 하느냐.”
하고는 술을 가져다가 마셨다. 뒤에 병조 참판에 추증되어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으니, 양익표는 참으로 호쾌한 장부이다.
옛날 대신들이 인재를 쓰는 데 이처럼 관심을 두었으니 어찌 죽음으로써 보답받지 않았겠는가. 과연 인재는 스스로 되는 것인가. 오로지 남이 써 주느냐 써 주지 않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양익표가 건달로 끝나지 않은 것은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김씨에게 발탁되어 사화로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흉악한 무리에게 이용당하다가 헛되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점(店 여관 )과 온돌의 폐해
옛날에 여행자는 원(院)에서 묵었다. 원에는 각각 주관하는 자가 있었지만 그저 땔감과 물이나 갖추고 있을 뿐이어서 양식이나 그릇, 솥 등을 모두 짊어지고 갔으므로 여행자들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이 처음으로 떠도는 거지들을 모아 점(店)을 설치하니, 여행자들이 편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점의 이익이 너무 많아 물가가 하루가 다르게 뛰고 상인들의 이문이 모두 점으로 들어가니, 점이 백성의 큰 폐해가 되고 있다.
온돌이 유행하게 된 것도 김자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옛날에는 방이 모두 마루여서 큰 병풍과 두꺼운 깔개로 한기와 습기를 막고 방 한두 칸만 온돌을 설치해서 노인이나 병자를 거처하게 하였다. 인조(仁祖) 때 도성의 사산(四山)에 솔잎이 너무 쌓여 여러 차례 산불이 나자, 상(上)이 이를 근심하였다. 김자점이 이에 오부(五部)의 집들에 명해 온돌을 설치하게 하자고 청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솔잎을 처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따뜻한 걸 좋아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이 명령을 따라 얼마 안 가서 온 나라가 이를 설치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 온돌의 폐해가 심하니, 젊은 사람들이 따뜻한 데 거처하면 근육도 뼈대도 약해지며, 습지나 산이 모두 민머리가 되어 버려 장작과 숯이 날이 갈수록 부족해지는데도 해결책이 없다. 그러나 내가 일본에 가 보니 일본에는 온돌이 없어 노약자들도 모두 마루에서 거처하였다. 나도 겨울을 나고 돌아왔지만 일행 중에 아무도 병이 난 자가 없었으니 억지로 습관 들이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이를 전국에 시행하면 처음에는 비록 약간 문제가 있겠지만 결국은 큰 이익을 가져올 것이니, 백성들이 틀림없이 기꺼이 따를 것이다. 다만 점의 경우에는 대체할 방법이 없다. 대체로 역신(逆臣)이 만든 법들이 현재 많이 시행되고 있으니, 점과 온돌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점과 온돌이 김자점이 시작하였을 리 만무하나 당시에 다시 설치하고 널리 확대한 것을 말하는 듯하다.
◯멸공봉사(滅公奉私)
무관이 고을 수령이 된 것은 김안로(金安老 1481-1537) 때부터 시작되었고, 대간이 집에서 신임 수령의 인사를 받는 것은 이이첨(李爾瞻 1560-1623)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모두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시행한 것이다
◯재주 있던 일본인 원여(源璵)
일본 사람 원여는 호가 백석(白石)으로 어려서 신동이라 칭해졌으며 원가선(源家宣)과 함께 목정간(木貞幹)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우리 증백조부(曾伯祖父) 취허공(翠虛公 성완(成琬) )께서 일본에 가셨을 때 원여가 시를 들고 찾아오자, 취허공께서 그 책에 서문을 써 주시며 이태백(李太白)과 같은 재주라고 인정하셨다. 이에 원여의 이름이 나라 안에 떠들썩하게 알려지니, 마침내 관백(關白)이 이태백의 금란전(金鑾殿) 고사를 따라 그를 초빙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관직은 모두 세습이었고 원여는 원씨(源氏)의 서자였으므로 관직에는 오를 수가 없었다. 뒤에 원가선이 관백이 되자 원여를 특진시켜 막부에 두었다. 원여가 비록 재주는 뛰어났으나 갑자기 높은 자리에 올라 권력을 독차지하자 무리들이 모두 그를 시기하였다. 임도춘(林道春)이 처음 일본의 문직(文職)을 맡은 이후로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문병(文柄)을 쥐고 있어 온 나라의 문사들이 모두 그 문하에서 배출되었는데, 그 역시 원여에게 문병을 빼앗기고도 대항할 수 없었다.
조태억(趙泰億)이 사신으로 일본에 갔을 때에 원여가 그를 접대하였다. 그와 필담을 나누었는데, 조태억 역시 그의 재빠른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필담을 나누는 사이 어쩌다 그의 기휘(忌諱)를 건드리자 그가 노하여 나가 버리는 바람에 결국 사신 간 일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우리 측 국서(國書)가 우연히 원씨의 휘자를 범하자 원여가 고의로 우리의 휘자를 범해서 맞받아쳤다. 조태억이 이를 따지자 우리 측의 국서를 내보이며 버티고선 가라고 압박하였다. 조태억은 귀국한 다음 결국 나라를 욕보였다 하여 처벌을 받았다.
원가선이 죽자 원여도 관직에서 쫓겨나 죽을 때까지 배척을 당하였고, 임씨가 다시 문병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여의 제자들은 모두 재주 있는 문사들로서 지금까지도 원여를 종주로 추존하여 그의 글을 송독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의 문집이 우리나라에 전해졌는데,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도 그의 시가 당시(唐詩)의 격조가 있음을 좋아하여 본뜨곤 하였다.
※1682년 윤지완(尹趾完)을 정사로 하는 조선통신사 일행 475명이 일본에 갔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가면 머무는 곳마다 일본의 식자들이 몰려들었다. 조선통신사 일행으로부터 뭔가를 듣고 배우기 위해서이다. 이런 모습에 통신사 일행들은 자신들의 지적 우월성에 흠뻑 도취되곤 하였다. 윤지완 일행이 에도에 머물 때, 자신의 시문을 엮은 도정집(陶情集)을 들고 찾아와 평해주기를 청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정사나 부사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 제술관(製術官) 성완(成琬)이 젊은이를 가상히 여겨 만나주었다. 도정집을 살펴본 성완이 훌륭한 시문이라고 칭찬하면서 서문을 적어주었다. 이 청년은 감격하여 선생님의 글월을 평생 면학의 거울로 삼겠다고 다짐하면서 물러갔다.
이 청년이 바로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1657~1725). 한때 에도 막부의 정치를 주물렀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1682년 통신사행때 무명의 문사(文士)로써 제술관(製述官) 성완(成琬)등과 시를 창화(唱和)하여 이름이 조선에 알려졌었다. 아라이 하쿠세키가 지은 시(詩) 백수를 적은 도정시집(陶情詩集)의 서문을 성완이 써줬고, 그로 인하여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의 문하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옛 유학과 지금의 유학
학문의 도는 음식 중에 제일 좋은 고기와 같으니, 무당이나 의술, 갖가지 기예들이 무엇인들 학문이 아니겠는가마는 다만 유학이 그 으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 배웠던 것은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로 모두 실용적인 것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예는 통례원(通禮院)의 관리에게, 악은 장악원(掌樂院)의 악공에게, 활쏘기는 훈련원(訓鍊院)의 한량에게, 말몰이는 사복시(司僕寺)의 이마(理馬)에게, 글씨는 사자관(寫字官)에게, 산수는 호조의 계사(計士)에게 맡겨 학자들은 관계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공자께서 드물게 말씀하신 성(性), 명(命), 천도(天道)를 표방하며 이를 도학(道學)이라 부르면서 세상에 제창한다. 그리하여 어린아이들도 모두 이를 잘 말하나 실용적인 것은 마치 쓸모없는 물건처럼 보니, 삼대의 풍속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재주만 있으면 뭐 하나
...우리나라의 남곤(南袞 1471-1527)은 처음에는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명망이 동등하였으며 문장도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과 견줄 정도였으나 결국 간사함에 빠졌으니, 이는 한 번 생각을 잘못 먹은 데서 기인하였다. 김안로(金安老 1481-1537)는 하루 종일 어깨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고 죽은 것도 세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만약 권력을 전단한 죄가 없었다면 누가 그를 소인이라 지목하겠는가.
그러나 소인은 군자에 비해 재주뿐만 아니라 언변도 좋고 힘도 좋고 일도 잘한다. 그에게 일을 맡기면 반드시 해내니, 군주라면 누군들 그에게 일을 맡기고 싶지 않겠는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마음이다. 그러나 그 흔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미리 억측할 수 있겠는가. 그의 죄악이 모두 노출된 다음에는 국사가 이미 잘못되어 어찌 해 볼 수가 없으니, 비록 그를 처벌하고 죽이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군주는 처음에 등용하는 것을 신중히 하는 것이다.
◯양반에게 소작을 주지 않는 이유
영남에서 소작을 주는 지주들은 ‘세 가지 주지 말 것〔三不給〕’으로 서로를 경계하니, 노비에게 주지 말 것, 친구에게 주지 말 것, 흑립(黑笠)에게 주지 말 것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풍속에 양반은 모두 흑립을 쓰고 일반 백성은 대체로 전립(氈笠)을 쓰므로 흑립은 양반을 지칭한다. 양반이라는 호칭은 고려 때부터 쓰이기 시작했는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의 서신에 나오는 ‘진짜 양반〔眞兩班〕’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양반이라고 하는 것은 동반(東班 문반(文班) )과 서반(西班 무반(武班) )의 정직(正職)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지금의 양반은 관직이 있건 없건 통틀어 양반이라고 하니, 양반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괜찮으나 양반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참람한 일이다.
지금은 양반이 온 나라에 깔려 있으니, 음직도 조상의 공업(功業)도 다 끝나고 토지도 노예도 없으며 문(文)도 무(武)도 익히지 않아 모습과 언동이 평민만도 못한 주제에 그래도 조상의 훌륭한 유업을 들먹이며 남에게 사역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한갓 남의 땅을 움켜쥐고서 이름만 소작일 뿐이지 자기는 쟁기질도 호미질도 제대로 않고 평민들을 부리려 드니, 평민들이 그 말을 듣겠는가. 이 때문에 농사일에 번번이 때를 놓쳐 땅 주인만 피해를 입게 되며, 땅 주인이 조금이라도 책망하면 마구 욕을 해대고 그나마 소출도 다 주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하니 땅 주인이 땅을 빼앗지 않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으면 팔아야 하는데 팔려고 하면 틀림없이 빼앗기게 된다. 이래서 서로 땅을 주지 말라고 경계하는 것이니, 흑립을 쓴 양반들이 어찌 더욱 빈궁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방의 양반자손들의 횡포를 지방관들이 엄히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지방관의 무능 때문이다.
◯운명인가 재주인가
미천하여 귀해질 수 없는 것은 시운이고 가난하여 부유해질 수 없는 것은 운명이며, 허약하여 강건하지 못한 것은 체질이고 어리석어 지혜로울 수 없는 것은 자질이다. 요컨대 하늘과 인간이 서로 잘 맞지 않는 것이다.
영달한 사람은 곤궁한 사람을 비난하기를, “저 사람의 운명이 어찌하여 그리도 궁하겠는가. 다 재주가 없어서이다.”라고 하고, 또 곤궁한 자는 되받아 비난하기를, “저 사람은 유달리 운명이 그렇게 트인 것이다. 어찌 자기 재주 때문이겠는가.”라고 한다. 이 두 얘기는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 둘을 합하여야 한다. 대체로 곤궁한 자는 운명도 박하고 재주도 없는 경우가 많으며, 영달한 자는 운명도 트이고 재주도 있는 경우가 많다.
◯돈을 대하는 사대부의 자세
선친께서 포천(抱川)에서 처가살이하실 적에 가난하여 관아에서 빌린 환곡(還穀)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삼우재(三友齋) 임공 황(林公煌)은 선친과 절친한 친구였는데 그의 부친 참판공(參判公) 주국(柱國)이 마침 영해(寧海 경북 영덕(盈德)의 옛 이름 )의 부사가 되었다. 그 봉급이 집에 도착하자 삼우공은 그것을 자루에 가득 채워 말안장에 매달고 왔다. 말을 울타리 밑에다 묶어 놓고 하루 종일 선친과 담소를 나누고는, 돌아갈 참에 우리 외조부에게 돈을 맡기면서 말하였다.
“아무개가 지금 관아에 갚아야 할 빚이 급하니 공께서 대신 갚아 주십시오.”
그래서 선친은 이 일을 까맣게 알지 못하셨다.
당시에 사대부들은 재물을 함께하고 내 것 네 것을 따지지 않아 직접 돈을 주고받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임공은 선친과의 사이가 형제보다도 더 친하였는데도 돈에 있어서는 이와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친구들끼리 선물할 때에 돈이 없으면 야박하다고 여긴다. 또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감히 돈을 손에 대지 못했으니, 어른들이 금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귀천을 막론하고 아이들에게 돈을 채워 주기를 마치 주옥이나 장난감같이 하니, 풍속이 천박하게 변함이 마침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
◯서얼의 험난한 벼슬길
나라에서 서얼의 벼슬길을 막은 것은 태종(太宗) 을미년(1415, 태종 15)부터 시작되었는데, 실은 미천한 서얼 출신인 정도전(鄭道傳) 때문이었지만 정도전의 손자인 문형(文炯)은 그래도 판중추사(判中樞事)를 지냈다. 관습이 점차 고질이 되어 인조(仁祖) 즉위 초에 처음으로 병조와 형조, 공조에 한하여 허통(許通)을 허락하였으나 역시 이를 적용받은 서얼은 얼마 없었고, 영조(英祖) 임진년에 처음으로 서얼도 청직(淸職)에 진출할 수 있게 하였으나, 조정의 논의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아 시행한 지 5년 만에 다시 막히게 되었다. 또 금상(今上)께서는 이를 절목(節目)으로 정하여 반포하셨으나 인사를 담당하는 전조(銓曹)에서 여전히 묻어 두고 시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에 대해 허통을 주창한 것이 세 번이니, 인조의 성지(聖旨)이자 선왕인 영조의 방침이며 금상의 왕명이다. 이에 반해 이를 막는 것은 그저 세속의 의논일 뿐인데도 이를 저지하니, 장자(莊子)가 한 “풍속이 임금보다 무섭다.”는 말이 맞지 않은가.
◯무엇이 중하고 무엇이 하찮은지
눈독 들이는 미인에게는 천금을 주는 것도 어려워하지 않지만 가난한 친구에게는 백금을 주는 일도 드물다. 준마(駿馬)를 사는 데는 반드시 수백 금을 들이지만 마부를 사는 데는 수십 금을 넘지 않는다. 친구가 미색보다 못하고 사람이 가축보다 못하단 말인가.
◯사대부와 여염집
예전에는 사대부들이 괜찮은 여염집을 보고서 요양을 한다거나 혹은 집을 빌려 혼사를 치른다는 등의 명목으로 곧바로 가솔(家率)들을 이끌고 안채로 들이닥치면 여인네들이 마치 난리라도 만난 것처럼 도망치고, 새로 들어온 사람은 마치 원래 자기 집처럼 태연히 거처하였다. 그 집에 비축해 둔 곡식과 가마솥 등을 그대로 쓰면서 혹은 해가 바뀌도록 나가지 않는데, 집주인은 밖에서 노숙하면서도 괴롭다는 말 한마디 못 하였다. 이렇게 집을 뺏긴 여염집들은 살아갈 길이 막막하니, 조석으로 끼니를 때울 뿐 아무것도 비축할 것이 없었다.
영조께서 세자로 계실 때에 이러한 폐단을 잘 알고는 즉위한 뒤에 법을 만들어 이를 엄금하였다. 그리하여 남의 집을 빼앗아 들어간 사람은 3년 동안 유배 보냈다. 이에 평민들이 비로소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잘못을 지나치게 바로잡는 바람에 그 폐단으로 지금은 재상이 여염집에 임시 처소를 정하고자 하여도 저지당하고, 몇 칸짜리 초가집도 여염집이라고 하면 양반이 매입할 수 없게 되었다. 가난한 양반이 그런 집을 샀다가 발각되면 곧바로 유배를 당하여 양반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금상께서 신해년(1791, 정조 15)에 대신들의 주청(奏請)을 계기로 기와집인 경우에는 11칸 이하, 초가집인 경우에는 칸 수에 상관없이 매매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물론 무단으로 빼앗는 경우는 법률대로 금하였다.
※놀라운 기록이다. 영조이전 사대부들의 만행은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거늘 어찌 조선을 법치국가라 말 할 수 있겠는가?
◯고려 시대의 가법(家法)
고려 시대에는 90여 명의 왕자 중에 출가해서 승려가 된 자가 20여 명이고, 72명의 공주중에 타성(他姓)에게 시집간 자는 겨우 6명이다. 고려 500년 동안의 가법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오랑캐나 금수가 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신라의 제도를 인습한 것이니, 누가 신라를 ‘예의 있는 나라’라고 말하는가. 우리 왕조에 들어와 한번 풍속이 변하지 않았다면 성인(聖人)인 기자(箕子)의 후예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공자와 노자의 항심(恒心)
공자는 말하였다.
“없으면서 있는 척하고, 비었으면서 가득한 척하고, 조금 있으면서 많은 척하면 항심(恒心)을 갖기 어렵다.”
그러나 노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없어도 있는 듯이 여기고, 비었어도 가득한 듯이 여기고, 적어도 많은 듯이 여기면 항심을 가질 수 있다.”
◯승과(僧科)와 보우(普雨)
명종조에 선종(禪宗), 교종(敎宗) 두 종의 승과를 개설하고 보우가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청허당(淸虛堂)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 )이 선과에 장원을 하고 송운당(松雲堂) 유정(惟政 사명대사(四溟大師) )이 교과에 장원을 하였다. 보우가 뽑은 인물이 이와 같으니, 그도 범속한 중은 아니다. 보우는 허응당(虛應堂)이라 자칭하였는데 나중에 제주도로 유배 가서 죽었고 두 종의 승과도 폐지되었다.
◯논할 수 없다
주색을 즐기는 자와는 명리(名利 : 명예와 이익)를 논할 수 없고, 명리를 위해 몸을 바치는 자와는 공업(功業)을 논할 수 없고, 공업을 세우려는 자와는 문장을 논할 수 없고, 문장으로 유명해지려는 자와는 도덕을 논할 수 없다.
◯사육신(死六臣)에 대한 몇 가지 사실
노량진(露梁津)의 육신묘(六臣墓)는 세간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에 사람을 처형하던 곳이고 사육신을 묻어 준 자는 승려인데 아마 김동봉(金東峯 김시습(金時習) )일 거라고 한다. 그러나 실록(實錄)을 조사해 보면 병자년(1456, 세조 2)에 절개를 지키다 죽은 자들은 모두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죽었지 노량진에서 죽은 것이 아니며 박 충정(朴忠正 박팽년(朴彭年) )은 옥중에서 죽었다. 그런데 그들을 노량진 언덕에 함께 묻고 무덤마다 푯대를 세웠으니, 이 일은 지혜와 의기를 겸비한 자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필시 동봉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 충렬(河忠烈 하위지(河緯地) )은 부인과 함께 선산(善山)에 매장되었는데, 시신을 조리돌려 그의 고향에 이르렀다가 그 김에 매장한 것인 듯하다. 연산(連山)에도 성 충문(成忠文 성삼문(成三問) )의 팔다리 중 하나가 묻힌 무덤이 있다. 그러나 노량진의 육신묘 중 하나는 바로 성 총관(成摠管 성승(成勝) )의 것이니, 충문공의 무덤 남쪽에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의 육신전(六臣傳)에는 도리어 총관을 제외하고 유 충경(柳忠景 유성원(柳誠源) )을 포함시켰다. 그래서 서원에서도 성총관 대신 유충경을 사육신으로 모셔 제사 지낸다.
유 충목(兪忠穆 유응부(兪應孚) )이 북병사(北兵使)를 지냈다고 《명신록(名臣錄)》에 실려 있는데, 김백련(金百鍊)이 그 오류를 지적하기를 “김절재(金節齋 김종서(金宗瑞) )가 체직되자마자 이징옥(李澄玉)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는데, 충목공이 어떻게 그 사이에 낄 수 있었겠는가.” 하였으니, 아마 그가 북쪽 변방의 장수를 지냈기 때문에 북병사를 지냈다고 잘못 전해진 듯하다.
◯실용서(實用書)를 만든 사람들
우리나라의 실용서는 대부분 신분이 미천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 《상례비요(喪禮備要)》는 그 편찬을 신의경(申義慶)이 시작하였고, 《무예제보(武藝諸譜)》는 한교(韓嶠)가 완성했으며, 《동의보감(東醫寶鑑)》은 허준(許浚)이 완성하였다. 어숙권(魚叔權)이 《고사촬요(攷事撮要)》를 편찬하자 전례(典例)를 담당한 자들이 그것을 참고했고, 임기(林芑)가 《전등신화(剪燈新話)》에 주석을 달자 아전들이 모두 그것을 학습하였다. 위의 다섯 사람은 모두 서얼 출신이다. 《화동정음통석운고(華東正音通釋韻考)》는 박성원(朴性源)이 완성했고, 《삼운성휘(三韻聲彙)》는 정충언(鄭忠彦)이 완성했는데 홍계희(洪啓禧)가 빼앗아 자기 저술로 삼았다. 박성원과 정충언은 모두 중인 출신이다.
◯이원익(李元翼)의 좌우명
오리(梧里 이원익 ) 이공(李公)의 좌우명에 “뜻과 행동은 나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고 분수와 복은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라.”는 말이 있는데, 장괴애(張乖崖)의 “공적은 높여 잡고 관직은 낮춰 잡아라.”라는 말보다 의미심장하다.
◯기생들을 곤장 친 홍인한(洪麟漢 1722-1776)
홍인한이 감사(監司)로 있을 때 언제나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끝날 즈음이 되면 기생의 잘못을 트집 잡아 곤장을 쳐서 피를 본 뒤에야 통쾌해하였다. 그래서 음악을 연주할 때면 뜰 한쪽에 반드시 형구를 마련해 놓고 기다렸으니, 이는 석수(石邃)가 미녀들을 치장하여 잔치를 즐기고는 결국 삶아 먹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대체로 여자에게 미색이 있는 것은 남자에게 재주가 있는 것과 같으니, 하늘이 부질없이 그들을 낸 것이 아닌데 포악하게 대한다면 어찌 천도를 어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재능 있는 사람을 업신여기면서 잘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유독 기생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더구나 일부러 곤장을 쳐서 통쾌해하는 것은 시랑보다 더 포악한 짓이니, 그가 역적으로 패망한 것은 당연하다.
◯이익이 크면 해도 크다
이익이 많은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그로 인한 해로움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양반만큼 이점을 누리는 것이 없다. 그래서 양반이 될 수만 있다면 패가망신도 각오하였으므로 과거로 인해 패가망신한 자가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패가망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과거에 매진하였으니 큰 이익이 있기 때문이었다.
진한(秦漢) 시대의 전공(戰功)도 이와 마찬가지다. 재물과 벼슬, 노비가 모두 전쟁에서 얻어지니 어찌 목숨을 걸고 출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지금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출전하는 병사들로 하여금 과거 보러 가는 자처럼 용감하게 나서게만 한다면 사방 오랑캐는 신경 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전쟁 잔혹사
전쟁의 혹독함은 진(秦)나라 때에 시작되었다. 옛날의 전쟁은 죄 있는 자를 토벌할 뿐이었으니, 그 임금을 주살하고 그 백성을 위로하며 진격해 오는 자만 귀를 베어 경고하고 죽인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초나라가 정나라를 칠 때에, 초나라와 연합한 진(陳)나라 군대가 지나간 길에는 우물을 메우고 나무를 베니 정나라가 원한을 품어 전쟁으로 보복했다. 만일 후대에 전쟁한 자를 나무를 베고 우물을 막은 것과 비교해 보면 어진 군대이니 꼭 보복을 했겠는가.
대체로 백성을 위로하고 죄 있는 자를 토벌하는 자는 공격하여 차지하는 데 뜻을 두지 않고, 공격하여 차지하는 자는 노획하는 데 뜻을 두지 않고, 노획하는 자는 살육에 뜻을 두지 않는다. 살육은 최악의 전쟁이다. 진(秦)나라의 전쟁은 살육과 노획만을 일삼아서 성을 공격하여 땅을 빼앗고 남녀를 포로로 잡고 성곽을 무너뜨렸으니, 침략하여 겁탈하고 사로잡은 것이 도적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적을 죽인 공로에 따라 관직을 주고 포로를 나누어 주어 노예로 삼게 하여 큰 이익으로 유인하고 엄한 법으로 감독하였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용감하게 전쟁에 나아가 물러설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앞에는 탐나는 이익이, 뒤에는 두려운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나라가 초나라 이릉(夷陵)을 불사르고 조(趙)나라 장평(長平)에서 항복한 군사를 생매장한 일은 천하 사람들에게 원망을 품게 한 것이니, 전쟁이 있은 이후로 없었던 일이다. 그러므로 진나라도 보복을 받아 이릉과 장평에서 했던 것처럼 신안(新安)에서 군대가 생매장당하고 여릉(廬陵)이 불탔다. 그리고 보복한 자 역시 초나라와 조나라의 후손들이었다. 결국 진 시황의 손자 자영(子嬰)이 죽고 영씨(嬴氏)가 패망하였으니, 조나라와 초나라가 보복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하늘이 보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나라의 무자비한 살육은 그래도 인명을 가지고 장난치지는 않았다.
오호(五胡)의 난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사람 목숨을 풀 베듯이 하였다. 그러나 한(漢)나라 가언(賈偃)이 진(晉)나라 군사 2만여 명을 하수(河水)에 빠뜨리자 전조(前趙)의 유연(劉淵)이 노하여 그를 축출하며 말하기를,
“내가 제거하려 한 것은 사마씨(司馬氏)이다. 백성이 무슨 죄이겠는가.”
하였다. 백성을 죽이고 백성의 힘을 함부로 쓴 자는 석씨(石氏)만 한 자가 없었으니 석씨는 끝내 후손이 없었다. 예로부터 망한 나라에도 후손이 없었던 적이 없었으나 영씨와 석씨의 후손만은 모조리 끊어졌으니, 그들이 가장 악질이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전쟁하는 법은 진나라에 의해 다소 악화되고 이적에 의해 더욱 악화되고 도적떼에 의해 가장 악화되어 백성의 화가 극도에 다다랐다. 그들은 백성에게 화를 가져다 준 사다리였으니 최고의 형벌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맹렬했던 조선 군대의 기질
유정(劉綎)이 순천(順天)에서 왜구를 막았는데, 그를 따라온 묘병(苗兵)을 귀병(鬼兵)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전투할 때에 반드시 먼저 성에 올라가긴 했지만 왜구를 보면 지레 기가 꺾였다. 중국의 군대는 더 그랬다. 그러나 조선인은 기세가 꺾이지 않았으므로 잘만 쓴다면 천하의 막강한 군대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유정이 중국으로 돌아갈 때에 데리고 가서 집안 일꾼으로 삼은 자가 매우 많았다. 유해(劉海)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본래 신씨(愼氏)인데 유씨를 가칭하였으며, 실제는 진주(晉州) 사람이었다. 청나라에서 군사를 모집할 때 조선 사람에게는 값을 더 올려 주었으니 그 맹렬한 기세를 높이 산 것이었다.
대체로 문을 나서면 집안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유독 조선인이 그러한데 지금은 수많은 나라 가운데 가장 나약하니 이는 기가 변한 것이다. 형벌로 죽이는 것은 아무리 공적인 일이라도 마치 더러운 것처럼 여겨 회피하고, 붓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무리 많아도 조금도 어렵게 여기지 않으니 이 또한 잘못 바뀐 것이 아니겠는가.
◯가장 천해서 가장 무서운 백정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한 자는 백정이다. 그렇지만 가장 두려워할 만한 자도 백정이니, 그들이 가장 천하기 때문이다. 문경(聞慶)의 공고(工庫)에 소속된 종이 백정을 구타하였는데, 백정이 죽자 재판을 하여 그를 사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관아에서 종의 편을 들까 염려한 나머지 온 군내의 백정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칼날을 세우고 몰려와서는 마치 자신들의 원수를 갚듯이 하여, 기어이 직접 그의 사지를 갈가리 찢어 버리겠다고 관문에서 시끄럽게 굴었다. 이에 관아에서 간곡히 타이르니 그제야 돌아갔다.
윤구종(尹九宗)이 대역죄에 걸려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은 으레 사형수를 쓰는데, 마침 그가 죽어 백정으로 대신 쓰려고 여섯 명을 가두어 대기시켰다. 그런데 윤구종이 지레 죽는 바람에 그 백정들을 풀어 주니, 그들이 곧바로 남산(南山)으로 올라가 봉화를 올려 고의로 사죄를 범하면서까지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상이 군문(軍門)에 명하여 군대 훈련 날을 기다려 백정들을 심하게 매질하게 하고는 외딴 섬의 노비로 보냈다. 그러자 많은 백정들이 백사장에 모여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와서 전송하니 그 수가 거의 500명이나 되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운선(漕運船)을 파손한 곁꾼들
조운선이 전복되어 파손된 것은 금상 임자년(1792, 정조 16) 여름보다 심한 적이 없었으니, 그해 여름에 어찌 그리 심한 풍랑이 있었던가. 이는 사실 곁꾼들이 고의로 파손한 것이기도 하지만 물건 싣는 것을 감독하는 관원의 잘못이기도 하다.
이득준(李得駿)이 강진(康津) 수령(守令)이 되었는데, 배에 물건을 실을 때에 곁꾼들이 관례대로 쌀 60석을 관아에 바쳤다. 이에 이득준이 이를 물리치고, 이어 아전들에게 으레 바치던 뇌물까지 모두 금하였다. 배에 물건을 다 싣고는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뜰에서 뱃사람들을 먹이니, 그들이 모두 거나하게 술이 오르고 적당하게 배가 부르자 기뻐 손뼉을 치며 사례하면서 말하였다.
“물건 싣는 것을 감독하는 관원이 모두 공과 같다면 어찌 바다에서 배가 전복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배에서 먹을 양식은 고을에 뇌물로 다 없애고 세금으로 바칠 쌀은 배에서 양식으로 축내니, 경창(京倉)에 도착하면 죄를 피할 수 없어서 차라리 고의로 파손하여 그 흔적을 없애는 것입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배의 가룡목(架龍木)을 뽑아 바다에 던지고는 풍랑 때문이라 해명하였으니, 소인들이 어찌 좋아서 하는 일이겠습니까. 지금 배를 운항하면 분명 무사히 돌아오리라는 것은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관리가 청렴하지 못하면 아랫사람이 더욱 제멋대로 하니, 애초에 고의적으로 파손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어찌 배에 온전히 실으려 하였겠는가. 바다 한복판까지 갈 것도 없이 배는 이미 텅 비게 될 것이니 어찌 짐을 싣는 것을 감독하는 관원만의 잘못이겠는가. 하지만 벼슬아치가 청렴결백하고 자신을 잘 단속한다면 곁꾼들도 필시 마음을 다하여 감히 함부로 굴지 않을 것이다.
◯홍수보(洪秀輔)의 가훈
판서(判書) 홍수보의 집 가훈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아내가 있으면 첩을 들이지 말고 자식이 있으면 새장가를 들지 마라.”
▣청성잡기 제5권
◯성현(聖賢)의 기상을 풍기는 한국의 명산
장백산은 신령스럽고 광대한 것이 복희씨(伏羲氏)와 같고, 묘향산은 웅장하고 빼어난 것이 노자(老子)와 같고, 금강산은 기이하고 변화무쌍한 것이 석가(釋迦)와 같고, 설악산은 특출하고 청초한 것이 백이(伯夷)와 같고, 태백산은 험준하면서도 탁 트인 것이 주공(周公)과 같고, 지리산은 넓고 크며 활달한 것이 공자(孔子)와 같고, 구월산은 가지런하고 우뚝 솟은 것이 이천(伊川 정이(程頤) )과 같고, 덕유산은 풍부하고 사방으로 통한 것이 회암(晦菴 주희(朱熹) )과 같고, 한라산은 높고 험하며 홀로 솟은 것이 노중련(魯仲連)과 같다.
◯조선에 망명한 한인(漢人)들
제독(李提督 이여송(李如松) )의 손자 이응인(李應仁)이 난리를 피해 우리나라로 망명할 때에 반등운(潘騰雲)과 묵만은(墨萬銀)이란 자가 자신의 일족 한 사람과 함께 왔는데, 묵씨 한 사람은 도중에 요동(遼東)에서 죽고 세 사람만 한양(漢陽)에 이르렀다. 그러나 본국으로 소환될 것을 두려워하여 모두 동쪽으로 깊은 산골로 들어가 몸을 피했는데, 반씨와 묵씨는 김화(金化)에 머물러 살고 이응인은 더욱 깊이 회양(淮陽)으로 들어갔다. 반씨는 향교(鄕校)에 소속되어 제기(祭器)를 담당하여 복호(復戶)되고 묵씨는 군기시(軍器寺)에 소속되어 복호(復戶)되어 모두 관가에서 노역하였다. 이응인의 후손은 지금 신분이 귀해져 내력이 잘 알려져 있으나 여전히 반씨와 묵씨의 이름을 알지 못하였는데 지금에야 《김화읍지(金化邑誌)》를 통해 알았으니, 문헌을 소중히 여길 만하지 않은가. 반씨와 묵씨에게 후손이 있다면 응당 한려(漢旅)에 소속되어 있지 않겠는가.
과거 숭정(崇禎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 갑신년(1644, 인조 22),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던 효종(孝宗 당시 봉림대군(鳳林大君) )이 돌아올 적에 한인(漢人) 8명이 따라왔는데, 그들 모두에게 의동(義洞) 본궁 옆에 거처를 하사하였다. 그 무리 중에 고기잡이를 잘하는 자가 있어서 항상 그물로 고기를 잡아 임금에게 올려 정성을 바치곤 했다. 나중에 한인아병(漢人牙兵)이란 이름으로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고기잡이로 노역당했는데 그 고초를 감내할 수 없었고, 진법을 훈련할 때면 배척하여 왜군 초병 역할을 맡게 하니 천대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너무 심하였다. 금상(今上 정조(正祖) )이 명을 내려 별도로 한려군관을 설치하고 훈련도감에 소속시키지 않자 비로소 고기잡이의 노역에서 벗어났다.
◯충무공(忠武公)은 어떻게 왜적을 물리쳤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처음 호남 좌수사(湖南左水使)에 제수되었을 때 왜적이 침입한다는 경보가 다급했다. 왜적을 막는 것은 바다에 달려 있었으나 공은 바다를 방비하는 요해처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공은 날마다 포구의 남녀 백성들을 좌수영 뜰에 모아놓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짚신도 삼고 길쌈도 하는 등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면서 밤만 되면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였다. 공은 평복 차림으로 그들과 격의 없이 즐기면서 대화를 유도하였다. 포구의 백성들이 처음에는 매우 두려워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친숙해져 함께 웃으면서 농담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대화 내용은 모두 고기 잡고 조개 캐면서 지나다닌 곳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느 항구는 물이 소용돌이쳐서 들어가면 반드시 배가 뒤집힌다.’ ‘어느 여울은 암초가 숨어 있어 그쪽으로 가면 반드시 배가 부서진다.’라고 하면, 공이 일일이 기억했다가 다음 날 아침 몸소 나가 살폈으며 거리가 먼 곳은 휘하 장수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급기야 왜군과 전투를 하게 되어서는 번번이 배를 끌고 후퇴하여 적들을 험지로 유인해 들였는데, 그때마다 왜선이 여지없이 부서져 힘들여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였다.
송 좌상(宋左相 송시열 )이 예전에 그의 손님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면서
“장수만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재상 역시 그처럼 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충무공이 물길에 익숙했던 것은 포구의 백성에게 들어서만은 아니다. 여러 차례 해진(海鎭)의 장수를 지낸 어영담(魚泳潭)이 물길의 요해처를 잘 알았기 때문에 공을 도운 것이 많았으니, 견내량(見乃梁) 해전과 명량(鳴梁) 해전은 오로지 지리를 이용해 승리를 거둔 경우이다.
◯서애(西厓)와 충무공의 첫 만남
서애 유성룡(柳成龍)이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 )의 관리로 있을 때 귀성(歸省)하기 위해 한강을 건너는데, 강물은 불어나고 건너는 사람은 많아 서로 앞 다투어 배에 오르느라 자못 소란스러웠다. 이때 무인으로 보이는 길손이 평복 차림으로 홀로 말을 끌고 배에 올랐는데, 어느 술 취한 자가 뒤따라 올라서는 그가 자기보다 먼저 배에 오른 것에 화를 내며 거침없이 욕을 해 댔다. 그러자 배에 타고 있던 자들이 모두 분개하여 심지어 그를 대신해 싸우려고까지 하는데도 정작 길손은 머리를 숙이고 채찍을 늘어뜨린 채 강을 다 건너도록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하였다. 서애도 속으로 그를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배가 나루터에 닿자 길손이 말을 몰고 먼저 내려 말의 뱃대끈을 바짝 조이고 있었는데, 술 취한 자가 계속 욕지거리를 하면서 뒤따라 내렸다. 알고 보니 대갓집 하인이었다. 길손이 왼손으론 말고삐를 잡고 오른손으로 술 취한 하인을 움켜잡는데 맹호가 토끼를 후려치듯 민첩하였다. 칼을 뽑아 목을 베어 강물에 던져 넣고는 낯빛도 변하지 않고 말에 올라 곧장 떠나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나루터에서 그 모습을 본 자들이 모두 크게 놀라 넋이 빠져 있는데, 서애만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 “이 사람은 대장감이다.”라고 감탄하였다. 항상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뒤에 군문(軍門)에서 살펴보니 바로 훗날의 충무공이었다. 서애가 공을 알아본 것은 사실 이 일에서 비롯된 것이지 율곡(栗谷 이이(李珥) )이 천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참수된 장사 장후량(張後良)
《삼연집(三淵集)》에 ‘장사를 애도함〔哀壯士〕’이란 시가 있는데 장후량을 위해서 지은 것이다. 장후량은 숙종(肅宗) 때에 무예와 용력으로 이름이 났는데, 조정에서 그를 변방에 쓰고자 하여 부령 부사(富寧府使)를 제수하였으나 장후량이 부임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군문(軍門)에 명하여 진법을 연습하게 하고는 그 자리에서 그를 참수하여 군중에 군명(君命)의 지엄함을 보였다. 이 일은 당 태종(唐太宗)이 노조상(盧祖尙)을 참수한 일과 같으니, 옛날에는 국가 기강의 지엄함이 이와 같았다.
◯강 태공(姜太公)을 닮은 관상
영조대왕(英祖大王)이 황송하게도 나의 얼굴을 가지고 한번은 임헌(臨軒)하여 연신(筵臣)들에게 말하였다.
“성(成) 아무개의 얼굴은 하관(下觀)이 풍만한 것이 강자아(姜子牙 강 태공 )의 모습과 닮았다.”
당시 내 나이 아직 서른이 못 되었기에 혼자 남몰래 웃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서른이 되기도 전에 성주(聖主)를 만났는데 어찌 여든이 되어서야 문왕(文王)을 만난 자와 비교한단 말인가. 성왕(聖王)의 말도 때로는 틀릴 때가 있나 보다.’
지금 내 나이 예순이 넘어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뒤에야 비로소 금상(今上 정조 )에게 세상에 흔치 않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옛날 문장에 재주 있는 신하로 한나라의 두 사마씨(司馬氏 사마천ㆍ사마상여 ) 이래 임금에게 인정을 받은 자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두 나에게 미치지는 못한다. 이제야 비로소 영조대왕이 나를 강자아에 비유한 것이 아마도 오늘을 예견한 것이었음을 알고 나니 감개무량하고 황송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삼가 기록하여 자손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얼굴 모습이 풍만하고 수척한 것은 오로지 양생에 달려 있으니 단지 골격만이 부귀로 인해 크게 자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때 지나치게 수척해서 사람들이 모두 요절할 것이라고 여겨 장가도 들지 못할 뻔했는데, 가정에서 교도하여 보양을 적절하게 한 덕분에 스물이 넘어서는 혈기가 충만하고 얼굴이 풍만해서 도리어 관상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일본에 갔을 때 우리 일행을 살펴본 자들이 대부분 나를 두고 풍채가 으뜸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허연 수염에 홍안이라서 사람들이 나에게 뭔가 특별한 수양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섭생(攝生)조차도 이러고저러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데 무슨 특별한 수양 방법이 있겠는가. 다만 어렸을 때부터 생각을 적게 하고 기욕(嗜慾)을 줄였을 뿐이다. 옛사람이 말하는 “세 가지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거의 실천한 듯하니, 이것이 내가 내 자신을 양생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섭생은 오히려 정력을 소모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점을 아울러 기록하여 자손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금상이 또 나의 얼굴을 가지고 경연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여 못난 나의 관상이 재차 성왕(聖王)의 인정을 받았으니, 어찌 평생에 잊지 못할 은총이 아니겠는가. 이것 또한 자손들이 대대로 전해야 할 것이다.
[주-D001] 세 가지 : 술, 여색, 재물을 가리킨다.
◯고려의 문벌에서 조선의 향리로
퇴도(退陶 이황(李滉) ) 선생의 고조는 진보(眞寶)의 향리(鄕吏)였는데 후손 중의 일파는 지금도 여전히 진보의 향리이다. 이씨(李氏)의 가법(家法)에 따르면 후손이 진보의 이청(吏廳)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린다고 한다. 퇴도의 종손인 이귀응(李龜應)이 영덕(盈德)의 수령이 되어 부임하러 가는 길에 진보에 들렀는데 진보의 수령이 그를 이청에 묵게 하였다. 이귀응이 웃으며 사양하기를,
“우리 집안이 다행히 진보 이청을 떠났는데 공이 다시 이곳에 머물게 하는가?”
하였다. 이 이야기가 영남좌도(嶺南左道)에 미담으로 전해진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은 조상이 향리였던 경우가 많은데, 동래 정씨(東萊鄭氏), 광주 이씨(廣州李氏), 반남 박씨(潘南朴氏),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시조가 모두 고려 시대의 향리로서 사실 그중에 유명한 자들이다. 지금의 사대부로 경향(京鄕)을 막론하고 어느 누가 고려 시대 향리의 후손이 아닌가. 반면 영남 지방 향리의 조상은 모두 고려 시대의 이름난 문벌로, 우리 조선조에 신복(臣服)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생각해 보면 그들은 원래 망국의 백성으로서 지조를 지킨 것이고 또한 귀한 신분에 따른 교만함으로 인해 태조(太祖 이성계 )에게 복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 그들의 신분을 낮추어 향리로 만들어 문관의 자손은 지방 관아에 소속시키고 무관의 자손은 역참(驛站)에 소속시키고는 억지로 예절을 만들어 매우 심한 억압을 가했는데, 심지어는 옹기삿갓을 씌워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선조조(宣祖朝) 임진왜란 이후 향리를 억압하는 법이 비로소 조금 완화되었지만, 바로 옛날 향리의 자손이 그들의 관장(官長)이 되어 자신의 조상이 지난 날 받았던 곤욕을 돌려주기라도 하듯 가혹하게 부려 댔으니 아마 일종의 보복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사대부들은 또 역모에 연루되어 자녀들이 노비로 적몰되어 아전에게 부림을 당하는 경우가 많으니, 보복의 교묘함이 이와 같다. 불경(佛經)에서 말하는 “사람과 양이 서로 잡아먹는다.”는 것이 이와 유사하지 않은가
◯《간양록(看羊錄)》의 행운과 《강로전(姜虜傳)》의 불운
수은(睡隱) 강항(姜沆)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갔다가 승려 순 수좌(舜首座)를 만나 학문을 가르쳤다. 일본 유학의 뿌리가 이로부터 시작되었고, 끝내 그의 도움을 받아 환국하여 《간양록》을 지어 왜국의 사정을 매우 정밀하고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아마 승려 순(舜)에게 들은 것인 듯하다. 승려 순은 결국 환속하여 ‘염부(斂夫)’라고 개명하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일본에서는 그를 위해 사당을 지어 제향하고 수은까지 배향하였다고 한다.
국포(菊圃) 권칙(權侙)은 문관으로 강홍립(姜弘立)을 수행하여 심하(深河)의 전투에 참여했는데, 강홍립은 오랑캐에게 항복하였으나 권칙은 적진을 탈출해 돌아와서 압록강에 이르렀다. 여러 날을 먹지 못해 앞이 보이지 않았는데 사람 똥을 먹고서야 앞이 보여 마침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강로전》을 지어 후금(後金)의 사정을 매우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역시 《간양록》에 비견된다. 그러나 강항이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간양록》은 유명해졌고 《강로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지조가 같고 사적(事迹)이 같고 저술이 같지만 역시 행운과 불운의 차이가 있는 것인가.
◯백두산의 위도(緯度)
한양의 북극고도(北極高度)는 37도 15분이고 위원(渭原)은 40도 51분이다. 예전에 이벽(李檗)에게 들었는데 백두산은 42도 남짓으로, 봉조하(奉朝賀) 서명응(徐命膺)이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계절풍을 타고 오는 중국 교역선
매년 4월이면 반드시 7일 동안 서풍이 불고 7월이면 반드시 10일 동안 동풍이 분다.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에서 인삼을 교역하러 오는 선박은 반드시 4월에 서풍을 타고 우리의 서해에 와서 정박하는데, 우리가 온갖 방법으로 쫓아내도 저들은 끝내 빙빙 돌면서 떠나지 않다가 7월에 동풍이 불기를 기다려 돛을 올리고 서쪽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금첩(勿禁帖)은 바로 상식감(尙食監)이 발행한 문서인데, 문서 말미에 “천하 어디든 교역을 막지 말라.〔四海勿禁〕”고 쓰여 있다.
◯사람이 개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나
개는 사람이 뒷간에 올라가는 것을 보면 곧바로 몰려들어 사람이 대변보기를 기다렸다가 재빠른 놈은 먼저 달려들고 약한 놈은 움츠린다. 화가 나면 서로 물어뜯고 즐거우면 서로 핥아 대기도 하는데 다투는 것은 오직 먹이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군들 추하게 여겨 비웃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밥그릇을 다투는 것도 개와 다를 바가 거의 없으니, 엄자릉(嚴子陵 엄광(嚴光) )이나 소 강절(邵康節)이 살아 있다면 밥그릇을 놓고 다투는 사람들을 사람이 개 쳐다보듯 혐오했을 것이다. 아침에 뒷간에서 돌아오다가 그 때문에 한 번 웃고는 기록한다.
그러나 사람이 개보다 못한 점이 사실 많다. 교미는 반드시 발정할 때만 하는데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도둑 경계하기를 귀신처럼 하는데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먹여 주면 은혜를 알고 보답은 의리로 하는데 사람이 누구나 다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또 그 때문에 한 번 탄식한다.
◯사람보다 의리 있는 짐승
양은 천성이 어질다. 희생(犧牲)이 되어 사당에 들어갔을 때 재부(宰夫)가 끓는 물을 퍼 담고 칼을 닦고는 그중에 살진 놈을 도마에 올리면 보조 희생은 제 짝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는 희생을 담당한 자가 끌고 나와도 도마에 기어 올라가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슬피 울면서 차마 버리고 떠나지 못한다. 양이 자기 동류의 죽음을 측은해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사람이 부끄럽지 않겠는가.
내가 흥해 군수(興海郡守)로 있을 때 성의 문루가 거의 무너졌기에 허물어 버리고 수리하는데, 그곳에 살던 뱀 한 마리가 서까래를 빙빙 감고서 옮겨가지 않고 도끼가 번갈아 내리치는데도 겁내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일꾼들에게 뱀을 다치게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서 탄식하며 말하였다.
“죽음으로 관직을 지키기를 저 뱀처럼 해야 한다. 난리에 임해서 이 뱀에게 부끄러울 자가 많을 것이다.”
또 들에 구렁이 한 마리가 죽어 있었는데 다른 구렁이 한 마리가 그 옆에서 뒤따라 죽었다. 아마도 먼저 죽은 뱀의 짝인 듯하니, 누가 구렁이를 음탕한 추물이라고 하겠는가. 강가에서 주살 놓는 자가 저구새를 잡아서 삶고 있었는데 그 새의 짝이 공중을 빙빙 돌다가 끝내 펄펄 끓는 솥으로 떨어져 함께 죽었다. 새나 짐승이 의리를 앎이 도리어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니 참으로 가슴 아프다.
◯노비부처와 공노비 해방
혜화문(惠化門) 밖의 냇가 동쪽에 석벽이 있었다. 거기에 돌로 만든 처마가 덮여 있고 두 개의 기둥이 지탱하고 있는데 기둥 역시 모두 돌로 만든 것이다. 벽면에 불상 하나가 조각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노비부처〔奴佛〕’라 부르고 그 시내를 ‘불천(佛川)’이라 이름 지었다. 도성 동쪽의 나무하는 노비들이 날마다 그 밑에 모여들어 올려다보며 욕하기를,
“우리를 남의 종으로 만든 놈이 이 불상이다. 불상이 무슨 면목으로 우리를 쳐다본단 말인가.”
하면서 낫을 추켜들어 눈을 파내니 불상의 두 눈이 모두 움푹 파였다. 혹사당한 원한이 마침내 불상에게까지 옮겨 갔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그들의 속담에 “이 불상이 없어지면 노비 역시 없어진다.” 하였는데, 노비를 없애는 것은 그래도 가능하지만 석불은 누가 없애겠는가. 내가 젊었을 때는 그래도 불상이 높이 솟아 있고 그 발밑에 냇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매년 장마가 져서 산이 깎이고 하천이 메워져 수십 년 사이에 모래가 그 처마까지 쌓이는 통에 불상의 몸체가 전부 파묻혀 제거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속담대로 과연 이 불상이 없어진 것이다.
영조 신해년(1731, 영조 7)에 노비 가운데 양인 어미 소생은 어미의 신분을 따르도록 명하니 노비가 비로소 줄어들어 지금은 집안에 노비가 없는 자가 대부분이다. 금상 신유년(1801, 순조 1)에 내시노비(內侍奴婢) 대장을 소각하도록 명하여 공노비가 모두 사라졌으니 사노비가 자신들의 천역에 종사하려 하겠는가. 결국에는 반드시 모든 노비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대체로 노비의 자식이 대대로 노비가 되는 것은 중국 성왕(聖王) 시대의 법이 아니라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다. 기자(箕子)의 팔조법금(八條法禁)에 도둑질한 자를 노비로 삼도록 한 것은 그 당대만을 징계한 법이니, 어찌 대를 이어가며 노비로 삼게 하였겠는가. 그러나 끝내는 대대로 남의 종살이를 하는 원한이 불상의 눈을 파내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니, 불상이 만약 지각이 있다면 응당 그들을 가엾게 여겨 눈물을 흘리고 성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공노비 대장이 모두 잿더미가 되어 온 백성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으니, 하늘에 왕업이 장구하기를 비는 것으로 이보다 큰 것이 없다. 올해의 대풍을 해마다 기약할 수 있어 복록이 국가에 돌아가고 은택이 노비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노비가 없는 집안도 걱정할 것이 없다. 한편 자기 몸을 팔아 노비가 되는 자가 어찌 없겠는가. 이러한 경우는 옛 법에도 있는 것으로 단지 당대에 국한된 노비일 뿐이다.
◯불우한 여류 시인 파녀(坡女)
완산(完山)의 이관성(李觀誠)이 《파녀전(坡女傳)》을 지었다. 파녀는 호가 설암(雪菴)인데 파주(坡州) 선비 백상구(白尙九)의 첩이라서 파녀라고 한 것이다. 백상구의 아들 백시경(白時敬) 역시 시로 이름이 났다. 파녀는 부녀자의 일에 있어서라면 능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자수에도 뛰어났다. 그의 시는 당시(唐詩)의 풍격이 있어서 여류 시인의 작품 같지 않았다. 글씨와 그림, 바둑과 활쏘기, 춤과 노래가 모두 남보다 뛰어났는데, 특히 검무를 잘 추어서 때로 홀로 춤을 출 때면 검기(劍氣)가 사방으로 뻗쳐 무인지경인 듯 거칠 것이 없었다. 일찍이 어떤 사람과 이별하고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 나설 제 말없이 작별을 하고 / 出門無語別
여울가 다다르니 말 홀로 우네 / 臨湍獨馬啼
저물 무렵 강물은 풍랑이 높아 / 暮江風浪急
놀란 물새 깃들 곳 정하지 못해 / 驚鷗未定棲
파녀는 백상구를 따른 지 오래되었으나 끝내 자신의 성(姓)을 밝히지 않았고 백상구 역시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였는데, 아마 집안의 환란을 피하여 도망한 사람인 듯했다. 결국 울분 끝에 자식도 없이 죽었는데, 그의 시고(詩藁)가 아직 백씨의 집에 남아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이관성의 《파녀전》 역시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파녀가 기러기를 노래한 시에,
밤하늘 밝은 달 아래 끼룩끼룩 울면서 / 長空皓月聲聲外
옛 물가 푸른 산 너머 훨훨 날아가네 / 古渚靑山去去邊
란 구절이 있는데 역시 경구(警句)이다. 앞에서 “여울가 다다르니〔臨湍〕”라고 읊었던 시는 바로 그가 백상구와 뜻이 맞지 않아 잠시 장단(長湍)에 가 있을 때 지은 것이다.
◯영조대왕(英祖大王)의 개혁 정치
영조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52년 동안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 정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그중에는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도 고치지 못한 고질적인 폐단을 모두 혁파한 일도 포함된다. 그중의 대표적인 것들을 기록해 본다.
전가사변율(全家徙邊律)은 세종이 변방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변방의 인구가 이미 충분한데도 이주는 여전히 중단되지 않았고 변방을 어지럽혔던 오랑캐는 평정되었지만 그 폐단은 심한 고질이 되어 도망하는 자가 끊임없이 나와 도리어 변방 고을에 폐해를 끼쳤는데, 영조 갑자년(1744)에 폐지하였다.
압슬형(壓膝刑)과 낙형(烙刑)은 세조가 사육신의 옥사를 다스릴 때 시작되어 박정재(朴定齋)가 형벌을 받을 때에 이르러 그 참혹함이 극에 달했는데, 영조 갑진년(1724)에 압슬형을 폐지하고 계축년(1733)에 낙형을 폐지하였다.
양산종부율(良産從父律)은 어느 임금 대에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온 나라의 양민들이 거의 모두 사노비가 될 지경이었다. 현종 기유년(1669)에 처음 양인 어미 소생은 양인 신분을 따르도록 명했다가 숙종 을묘년(1675)에 환천(還賤)시켰고, 신유년(1681)에 또 양인 신분을 따르도록 했다가 기사년(1689)에 환천시켰는데, 영조 경술년(1730)에 신해년(1731) 이후 태어난 자들은 모두 양인 신분을 따르도록 명하니, 양인 어미 소생이 노비가 되는 폐단이 비로소 혁파되었다.
도둑을 다스리는 형률은 초범(初犯)은 팔뚝에 자자형(刺字刑)을 가하고 재범(再犯)은 얼굴에 자자형을 가하고 삼범(三犯)인 경우에는 처형했는데, 영조가 모두 폐지하였다. 난장률(亂杖律)은 김자점(金自點)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영조 경인년(1770)에 폐지하였고, 전도주뢰형(剪刀周牢刑) 역시 폐지하였다. 죄인에게 차꼬나 수갑을 채울 때는 두 손을 모두 채웠는데, 영조가 죄인의 왼손을 풀어 주도록 명하여 먹고 마실 수 있게 하였다.
포보(砲保)가 바치는 가포(價布)는 선조 임진왜란 이후에 시작되어 규정에 따라 베 두 필을 바쳤는데, 양인 중에 아들이 많은 자는 가포를 원수 보듯 하여 제 아들을 양반집에 맡겨 노비로 만들거나 머리를 깎아 중으로 만들기도 하여 역(役)을 피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내시노비(內寺奴婢), 관노비(官奴婢), 역노비(驛奴婢), 세도가의 사노비(私奴婢)와 승려는 날로 많아지고 양인은 날로 줄어드니 양역(良役)을 개편하자는 논의가 조정에 무성하여 심지어는 책문(策問)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끝내 곧바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영조 경오년(1750)에 균역청(均役廳)을 설치하고 군포를 한 필로 줄이자 양인의 역이 비로소 가벼워졌다.
어부와 어장(漁場)에 종사하는 백성은 도성의 각 사(司)와 여러 궁가(宮家) 및 외영읍(外營邑)의 침탈로 인해 살아갈 방법이 없었는데, 영조가 그들의 관할권을 균역청에 소속시키자 그 폐단이 일거에 혁파되었다. 사대부가 일반 백성의 집을 빼앗아 거주하는 폐단으로 인해 백성들은 거의 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일단 빼앗아 거주하면 살림이 모두 거덜 나고 집주인은 도리어 집 밖에서 노숙하는데, 비록 조정의 금령이 있어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영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그 폐단을 잘 알고 있어서 등극하자마자 이러한 횡포를 엄히 금하니, 백성들이 그 덕분에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공사 노비의 신공(身貢)은 영조 을해년(1755)에 노공(奴貢)은 베 한 필로, 비공(婢貢)은 반 필로 줄이도록 명하였다가 갑오년(1774)에 비공을 완전히 면제하였다. 경기병(京騎兵) 1000명은 국초에 창설되어 도성 백성들의 폐해가 되었는데, 영조 기미년(1739)에 폐지하였다.
그 밖에도 각종 폐단을 개혁한 정사가 매우 많았다. 영조의 깊은 사랑과 은택이 백성들의 골수에까지 스며들어 사직의 장구함이 실로 그에 힘입었으니 아, 거룩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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