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추강집 秋江集

청담(靑潭) 2022. 8. 21. 12:14

추강집 秋江集

 

□남효온 (1454-1492)

남효온은 세조의 왕위 찬탈로 인한 단종복위운동 실패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절개를 지킨 생육신 6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김종직(1431-1492)과 김시습(1435-1493)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김굉필, 정여창 등과 사귀었다. 1478년(성종 9) 관리등용제도의 개선, 내수사의 혁파, 불교의 배척 등 국정 및 궁중의 여러 문제를 지적하고,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을 복위할 것을 요구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소릉 복위 주장은 세조 즉위와 정난공신의 명분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어서 훈구파의 심한 반발을 샀다. 그 이후 그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유랑생활로 나머지 삶을 마쳤다. 또한 사육신의 절의를 추모하여 <육신전>을 저술했다. 스스로 죽림거사를 자처하고 노장의 이론을 높이 여겼으며, 사회적인 체제에서 벗어나 비판적 발언과 분방한 행동을 했던 이른바 방외인문학의 입장에 섰다.

 

제1권

□주잠(酒箴)

신축년(1481, 성종12) 2월 5일 남산 기슭에서 과음으로 실수하고 짓다.

술자리 처음에는 예의가 엄숙하여 / 初筵禮秩秩

손님과 주인이 거친 행동 경계하니 / 賓主戒荒嬉

오르고 내림에 진실로 예법이 있고 / 升降固有數

나아가고 물러날 때도 절도가 있네 / 進退抑有儀

석 잔 술이면 말이 비로소 많아져서 / 三桮言始暢

법도를 잃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 失度自不知

열 잔 술이면 소리 점점 높아져서 / 十桮聲漸高

주고받는 얘기가 더욱더 어지럽네 / 論議愈參差

뒤이어 언제나 노래하고 춤추니 / 繼以恒歌舞

온몸이 피로한 줄 깨닫지 못하네 / 不覺勞筋肌

술자리 마칠 때면 동서로 치달려서 / 筵罷馳東西

저고리 바지가 온통 진흙투성이라 / 衣裳盡黃泥

올라탄 말 머리가 향하는 곳마다 / 馬首之所向

아이들이 손뼉 치면서 비웃어대고 / 兒童拍手嗤

끝내 비틀대다 넘어지고 자빠져서 / 終然顚與躓

부모가 주신 몸을 손상시키고 마네 / 而傷父母遺

술의 재앙을 모르는 바 아니건만 / 非不知酒禍

스스로 좋아하기를 단 엿처럼 하네 / 顧自甘如飴

무풍은 《서경》에서 경계하였고 / 巫風戒於書

〈빈지초연〉은 《시경》에 실려 있네 / 賓筵播於詩

양웅은 일찍이 주잠(酒箴)을 지었고 / 揚雄曾著箴

백유는 술 때문에 죽었거늘 / 伯有死於斯

어찌하여 이러한 광약을 마시는가 / 胡爲此狂藥

덕을 잃음이 항상 여기에 있다네 / 失德常在玆

술에 대한 경계가 서책에 있으니 / 酒誥在方策

의당 생각하여 법규로 삼아야 하리 / 宜念以爲規

 

제2권

기준성(箕準城)에서

천년 전 은왕의 후손이 세운 나라 / 千載殷王冑

이제는 기준성만 쓸쓸히 남았구나 / 蕭條箕準城

당시의 일이야 바삐 내달렸겠지만 / 奔忙當日事

지금의 정경은 밥 짓는 연기뿐이라 / 煙火此時情

옛일 슬퍼하매 머리카락 먼저 세고 / 弔古頭先白

회포 펼치면서 술잔 한 번 기울이네 / 開懷酒一傾

혼백을 부르자 혼백이 내려오려는지 / 招魂魂欲下

산속의 비가 숲을 지나가며 울리네 / 山雨過林鳴

 

□관가에 환곡을 청했으나 얻지 못하다

미친 늙은이 추강을 그 누가 동정할까 / 秋江狂老有誰憐

미륵 같은 모습이라 하찮게 여기는구나 / 彌勒形模不直錢

가도의 형편이 작년부터 더욱 곤궁하니 / 賈島益窮從去歲

광문 선생이 무슨 수로 올해를 넘길까 / 廣文何計卒今年

처량히 우는 쥐조차 굶어죽을 지경이라 / 凄凉鳴鼠欲飢死

영락한 이내 심정 갑절이나 암담하구나 / 零落殘魂倍黯然

듣건대 단을 익히면 곡식 먹지 않는다니 / 聞道煉丹能辟穀

차라리 이 몸으로 신선술이나 배워볼까 / 寧將身世學神仙

 

□밀양 영남루(嶺南樓)에서 점필재(佔畢齋)를 뵙고

시루봉 도사께서 푸른 소에서 내리시니 / 甑峰道士下靑牛

자부의 신선들이 의관 갖추고 운집했네 / 紫府仙曹冠佩稠

천년에 한 사람은 점필재 김 선생이요 / 千載一人金佔畢

백 년의 명승지로는 밀양의 영남루라오 / 百年勝地嶺南樓

물결 부딪는 성 뿌리엔 찬 못이 수려하고 / 城根浪打寒潭秀

서리 깊은 모래언덕엔 밤 잎이 가을이라 / 沙岸霜深栗葉秋

풍악 소리 울려서 먹은 귀가 밝아오지만 / 聾耳漸明歌管發

타향서 듣는 음악이라 근심만 가득하네 / 他鄕聽樂摠堪愁

 

제4권

□유천왕봉기(遊天王峰記)

정미년(1487, 성종18)

지리산은 남해 가에 있고, 뭇 산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 그중 가장 높은 봉우리가 천왕봉이다. 봉우리의 형세가 북쪽으로 달리다가 멈추어 서서 하나의 큰 산이 된 것이 곧 중봉(中峰)이고, 남쪽으로 비스듬히 이어지다가 한 봉우리가 된 것이 빙발봉(氷鉢峰)이다. 또 서남쪽으로 달리다가 하나의 큰 내를 이룬 것이 반야봉(般若峰)이고, 또 남쪽으로 하나의 큰 산이 된 것이 화엄봉(華嚴峰)이고, 서쪽으로 하나의 큰 산이 된 것이 보문봉(普門峰)이다.

성화(成化) 23년 정미년 9월 그믐날 내가 천왕봉에 올랐다. 푸른 바다가 하늘과 맞닿았고 늘어선 산악은 헤아릴 만하였다. 산의 동북쪽은 경상도이다. 상주(尙州)에 있는 산이 갑장(甲長)이고, 김산(金山)에 있는 산이 직지(直旨)이고, 성주(星州)에 있는 산이 가야(伽倻)이고, 현풍(玄風)에 있는 산이 비슬(毗瑟)이고, 대구(大丘)에 있는 산이 공산(公山)이고, 선산(善山)에 있는 산이 금오(金烏)이고, 초계(艸溪)에 있는 산이 미륵(彌勒)이고, 의령(宜寧)에 있는 산이 자굴(闍崛)이고, 영산(靈山)에 있는 산이 영취(靈鷲)이고, 창원(昌原)에 있는 산이 황산(黃山)이고, 양산(梁山)에 있는 산이 원적(元寂)이고, 김해(金海)에 있는 산이 신어(神魚)이고, 사천(泗川)에 있는 산이 와룡(臥龍)이고, 하동(河東)에 있는 산이 금오(金鰲)이고, 남해에 있는 산이 금산(錦山)이고, 금산과 와룡산 사이에 멀리 바다 밖에 있는 산이 거제(巨濟)이다.

산의 서남쪽은 전라도이다. 흥양(興陽)에 있는 산이 팔전(八巓)이고, 그 서쪽에 있는 산이 진도(珍島)이고, 강진(康津)에 있는 산이 대둔(大屯)이고, 해남(海南)에 있는 산이 달마(達磨)이고, 영암(靈巖)에 있는 산이 월출(月出)이고, 광양(光陽)에 있는 산이 백운(白雲)이고, 순천(順天)에 있는 산이 조계(曹溪)이고, 광주(光州)에 있는 산이 무등(無等)이고, 부안(扶安)에 있는 산이 변산(邊山)이고, 정읍(井邑)에 있는 산이 내장(內藏)이고, 전주(全州)에 있는 산이 모악(母岳)이고, 고산(高山)에 있는 산이 화암(花巖)이고, 장수(長水)에 있는 산이 덕유(德裕)이다.

산의 서북쪽은 충청도이다. 공주(公州)에 있는 산이 계룡(鷄龍)이고, 보은(報恩)에 있는 산이 속리(俗離)이다.

여러 산들이 지리산 아래에 나열해 있고, 무려 천만 봉우리의 이름 없는 작은 산이 맑은 산기운 속에 출몰한다.

산기슭을 둘러싸고 있는 군현(郡縣)이 아홉이니, 함양(咸陽), 산음(山陰), 안음(安陰), 단성(丹城), 진주(晉州), 하동(河東), 구례(求禮), 남원(南原), 운봉(雲峰)이다.

산에 나는 감ㆍ밤ㆍ잣은 과일로 쓰이고, 인삼ㆍ당귀는 약재로 쓰이고, 곰ㆍ돼지ㆍ사슴ㆍ노루ㆍ산나물ㆍ석이버섯은 반찬으로 쓰이고, 범ㆍ표범ㆍ여우ㆍ너구리ㆍ산양ㆍ날다람쥐는 가죽으로 쓰이고, 매는 사냥에 쓰이고, 대나무는 공예품에 쓰이고, 나무는 집에 쓰이고, 소나무는 관곽(棺槨)에 쓰이고, 냇물은 관개에 쓰이고, 상수리나무는 구황에 쓰인다. 이는 높고 큰 산악이 비록 그 운동하는 것을 볼 수 없지만 공리(功利)가 물건에 미침이 이와 같은 것이니, 비유컨대 성인이 옷을 드리우고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있어 비록 임금의 힘이 나에게 미치는 것을 보지 못하지만 재성(裁成)하고 보상(輔相)하는 방도를 만들어 사람을 돕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산은 참으로 성인과 많이 닮았다 하겠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이 자미(子美)의 방장삼한(方丈三韓)의 구절에 의거하여 이 산을 방장산(方丈山)이라 하였다. 중국 사람은 모두 이 산에 불사초가 있다고 여겼으나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산 아래 사람들이 산속에 나는 물건에 의지하여 태어나고 길러지기 때문에 “이 산에 힘입어 살아난다.”고 말한 것이 중국에 와전(訛傳)되어 바다 밖 방장산에 참으로 불사초가 있다고 실제로 생각하였고, 진 시황(秦始皇)과 한 무제(漢武帝)처럼 생명을 탐하고 욕심을 극도로 부렸던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바다를 건너와서 불사초를 구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천왕당(天王堂)의 돌부리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며 한참 동안 있자니, 속념(俗念)이 없어지고 신기(神氣)가 기뻐졌다. 다만 생각건대 세속의 선비는 몸이 명리의 굴레에 매여 있어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처자를 기를 즈음에 산을 오르고 물에 임하는 날이 적으니, 함께 올라온 일경(一冏)ㆍ의문(義文) 승려에게 물어보면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본 바일 것이다. 뒷날 집으로 돌아가서 처자는 굶주림에 울고 노비는 추위에 울부짖어 온갖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습기(習氣)가 회포에 가득할 때에 이 글을 본다면 아마 오늘의 감흥을 갖게 될 것이다.

 

제5권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백두산이 여진(女眞)의 경계로부터 일어나서 남으로 조선국 해변 수천 리에 뻗어 있다. 그 산 가운데 큰 것으로는 영안도(永安道)에 있는 것이 오도산(五道山)이고, 강원도에 있는 것이 금강산이고, 경상도에 있는 것이 지리산인데, 천석(泉石)이 가장 빼어나고도 기이하기는 금강산이 으뜸이다.

... 그러나 금강산이라는 명칭은 지나온 세대가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변경하기 어려우므로 나 또한 금강산이라 지칭한다.

대개 그 산은 하늘의 남북에 걸쳐 우뚝 솟아 아득한 대지를 누르고 있다. 큰 봉우리가 36개이고, 작은 봉우리가 1만 3천 개이다. 한 줄기가 남쪽으로 200여 리를 뻗어 가다가 산 모양이 우뚝 솟고 험준함이 대략 금강산과 같은 것이 설악산(雪岳山)이다. 그 남쪽에 소솔령(所率嶺)이 있다. 설악산 동쪽 한 줄기가 또 하나의 작은 악(岳)을 이룬 것이 천보산(天寶山)이니, 하늘이 눈을 내리려고 하면 산이 저절로 울기 때문에 혹 명산(鳴山)이라고도 한다. 명산이 또 양양부(襄陽府) 뒤를 감돌아서 바닷가로 달려가다가 다섯 봉우리가 우뚝 솟은 것이 낙산(洛山)이다.

금강산 한 줄기가 또 북쪽으로 100여 리 뻗어 간 곳에 한 고개가 있으니, 이름이 추지령(楸池嶺)이다. 추지령의 산이 또 통천(通川) 치소(治所) 뒤에서 야산을 두루 에워싸며 실낱같이 끊어지지 않다가 북으로 돌아서 바다 가운데로 들어간 것이 총석정(叢石亭)이다. 산의 동쪽은 통천군(通川郡)ㆍ고성군(高城郡)ㆍ간성군(杆城郡)이고, 서쪽은 금성현(金城縣)ㆍ회양부(淮陽府)이다. 산 아래에 늘어서 위치한 것이 모두 1부(府)와 3군(郡)과 1현(縣)이다.

●을사년(1485, 성종16) 4월 보름

나는 서울을 출발하여 보제원(普濟院)에서 묵었다.

●정묘일(16일)

90리를 가서 입암(笠巖)에서 묵었다.

●무진일(17일)

소요산(逍遙山)을 지나고 큰 여울을 건너며 60리를 가서 연천(漣川) 거인(居仁)의 집에서 묵었다.

●기사일(18일)

보개산(寶蓋山)을 지나고 또 철원(鐵原)의 옛 동주야(東州野) 남쪽 머리를 지나며 100여 리를 가서 김화(金化) 갑사(甲士) 정시성(鄭時成)의 집에서 묵었다.

●경오일(19일)

김화현을 지나며 60리를 가서 금성(金城) 향교에서 묵었다.

●신미일(20일)

창도역(昌道驛)을 지나고 보리진(菩提津)을 건너며 78리를 가서 신안역(新安驛)에서 묵었다.

●임신일(21일)

비에 막혀 신안(新安) 후동(後洞)의 백성 심달중(沈達中)의 집에서 묵었다.

●계유일(22일)

우독현(牛犢峴)을 건너 화천현(花川縣)을 지나고 보리진 상류를 건너 추지동(湫池洞)으로 나아갔다. 시내를 따라 오를 때에 날씨가 매우 추웠다. 산의 나무는 바람을 피하여 나직이 드리운 채로 부드러운 잎이 겨우 돋아났고, 산앵두나무 꽃이 만발하고 진달래가 아직 시들지 않았으니, 날씨가 서울보다 두세 배 더 춥게 느껴졌다.

추지(湫池)는 보리진이 발원하는 곳이다. 보리진이 금강산 외도솔(外兜率)에 이르러 금성진(金城津)과 합하고, 또 산기슭을 차례로 다 지나서 만폭천(萬瀑川)과 합하고, 또 춘천(春川)에 이르러 병항진(甁項津) 하류와 합하여 소양강(昭陽江)이 된다. 옛날에 어떤 나무꾼이 우연히 그곳에 이르렀다가 다시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산 아래 사람들이 선경(仙境)이라고 서로 전한다.

고개 위에 추지원(湫池院)이 있고, 추지원을 지나면 동쪽 하늘빛이 매우 푸르다. 운산(雲山)이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아니라 바로 바닷물이오.” 하거늘 내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본 뒤에야 하늘과 바닷물을 구별할 수 있었다. 그 물이 해안과 점점 멀어질수록 점점 높아져서 멀리 하늘과 서로 맞닿았으니, 평소에 보았던 물은 모두 아이들 장난이었다.

고개로부터 동쪽으로 내려가니, 날씨가 점점 따뜻해져 철쭉꽃이 한창 피었고 나뭇잎이 그늘을 이루어 비로소 여름 기운을 느꼈다. 종종 나무를 베어 길을 보조하였으니, 이른바 잔도(棧道)라는 것이다. 때때로 말 위에서 산 살구를 따 먹었다. 고개로부터 20리를 가니, 중대원(中臺院)이 있었다. 또 5리를 가서 냇가에서 도시락을 먹고 비로소 평지를 밟았다. 또 15리를 가서 통천군(通川郡)에 이르렀다. 이날 산길을 걸은 것이 모두 90리이고, 평지를 걸은 것이 15리였다. 군수 자달(子達)을 뵈니 자달이 나를 관아의 별실에 묵게 하였고, 자달의 춘부장도 매우 정답게 대해 주었다.

●갑술일(23일)

자달과 작별하고 15리를 가서 총석정(叢石亭)에 이르렀다. 그 아래 이르러 보니, 과연 바위산이 바다 굽이로 들어가며 뱀 모양으로 구불구불하였다. 바위산이 바다에 들어간 끝머리에 사선정(四仙亭)이 있다. 정자에 다다르기 3, 4십 보 앞에서 북쪽으로 한 줄기 길을 넘으니, 바다 속에서 일어나 돌기둥을 묶어 놓은 듯이 깎아지른 네 개의 바위가 있었다. 총석이란 이름을 얻음은 이 때문이다.

바다 서쪽 해안은 모두 총석의 형태를 이루어 1리쯤 뻗었다. 총석의 곁에 평평한 바위 하나가 또한 수중에 있고, 작은 바위가 뒤섞여 쌓여 육지로 연결되었다. 내가 운산(雲山)과 더불어 발을 벗고 해안으로 내려가서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 노복으로 하여금 석결명(石決明)ㆍ소라ㆍ홍합ㆍ미역 등의 해물을 따 오게 하였다. 운산과 더불어 물을 움켜서 서로 장난치다가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하늘 끝과 땅 끝이 탁 트이고 끝이 없어 마치 유리(瑠璃)와 명경(明鏡)이 서로 비추고 위언(韋偃)과 곽희(郭熙)가 재주를 바치는 듯하여 황홀히 꿈속의 풍경인가 의심스럽다가 오랜 뒤에야 분명해졌다. 내가 아쉬워하며 나가려고 하지 않자 운산이 말하기를 “해가 이미 저물었소.” 하였다.

비로소 해안을 나와서 사선정에 오르니, 정자에는 손순효(孫舜孝) 공의 현판시(懸板詩)가 있고, 또 승려와 불자(佛子)의 이름과 호가 많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 앉아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니, 네 개의 총석이 더욱 기이하였다. 보이는 것은 평평한 바위에 내려서 보던 것과 대략 같았으나 안계(眼界)는 더욱 넓었다.

정자 남쪽에 비석이 있지만, 기울어지고 글자가 마멸되어 어느 때 세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자 동쪽으로 약 4, 5십 리쯤에는 바다 속에 섬 하나가 있어 완연히 서로 마주 대한 듯하였다. 정자의 암벽 아래에는 두 척의 배가 오고가며 고기를 낚고, 암벽 남쪽에는 어점(漁店)이 있어 어부들이 그 사이에서 그물을 말렸다. 수중의 온갖 새가 좌우에서 날며 우니, 혹은 몸이 희고 혹은 몸이 검으며, 혹은 부리가 길고 혹은 부리가 짧으며, 혹은 부리가 붉고 혹은 부리가 푸르며, 혹은 꼬리가 길고 혹은 꼬리가 짧으며, 혹은 날개가 검고 혹은 날개가 푸르러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내가 사언시(四言詩) 4장(章)을 정자 기둥에 적었다.

조금 뒤에 풍랑이 일어났다. 내가 내려와서 해변의 백사장을 따라가니, 모래가 허하여 말발굽이 쉽게 빠졌고, 오직 물가의 물결 흔적이 있는 곳만이 단단하여 말발굽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의 파도가 간혹 해안에 부딪쳐서 말안장에까지 이르면 말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해안을 뛰쳐나오므로, 노복으로 하여금 말고삐를 다잡고 가게 하니, 풍경이 더욱 기이하였다.

종종 사취(砂嘴)가 산을 이루었으니, 바다가 사나울 때에 파도에 의해 쌓인 것이다. 또 바닷물이 모래 가에 혹 고였다가 빠져나가지 못한 것이 있고, 혹 고였다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있었다. 또 희고 작은 바위가 섞여서 해안을 이룬 것도 있고, 또 여러 바위가 바닷가에 높고 험하게 서 있으니, 송곳 같은 것, 채찍 같은 것, 사람 같은 것, 짐승 같은 것, 새 같은 것, 끝은 크나 뿌리가 날카로운 것, 뿌리는 크나 끝이 날카로운 것이 있었다. 모래와 바위 가에는 해당화가 서로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았다. 혹은 꽃이 피고 혹은 망울이 맺혔으며, 혹은 붉고 혹은 희며, 혹은 외겹으로 핀 꽃도 있고, 혹은 천 겹으로 핀 꽃도 있었다.

중도에 도시락을 먹고 60리를 가서 동자원(童子院)을 지나 등도역(登道驛)에서 묵었다. 밤에 큰바람이 불어 지붕이 날아가고 나무가 뽑혔다.

●을해일(24일)

등도역을 출발하여 만안역(萬安驛)을 지나갔다. 지나는 곳에 저수지가 매우 많았고, 바닷가의 풍경은 전날과 같았다. 옹천(瓮遷)에 이르렀다. 쌓인 바위가 해안을 이룬 것이 대략 총석정의 백분의 일 정도였다. 옹천을 다 지났을 지점에 푸른 옥을 갈아 놓은 듯한 작은 바위 벼랑이 있고, 서쪽으로부터 바다로 들어가다가 바위 아래를 감도는 명경(明鏡)처럼 맑은 냇물이 있었다. 노복으로 하여금 미역을 따다 국을 끓이게 하고 석결명(石決明)을 캐어 소금에 굽게 하여 점심 반찬으로 삼았다. 장정(長井)의 해변을 지나 고성(高城)의 온정(溫井)에 이르렀으니, 온정은 바로 금강산의 북동(北洞)이다. 이날 60리를 갔다. 이곳에 이르러서 비로소 두견새 소리를 들었다.

●병자일(25일)

바람이 불어 온정에 머물렀다.

●정축일(26일)

금강산에 들어갔다. 5, 6리를 가서 한 고개를 넘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신계사(新戒寺) 터에 들어갔다. 고개의 동쪽은 관음봉(觀音峰)이고 북쪽은 미륵봉(彌勒峰)이다. 미륵봉 서쪽에 한 봉우리가 있다. 미륵봉에 비하면 더욱 빼어났지만 그 이름은 알지 못한다. 또 그 서쪽에 한 봉우리가 멀리 구름 밖에 있으니, 비로봉(毗盧峰)의 북쪽 줄기이다.

신계사는 곧 신라의 구왕(九王)이 창건한 것으로, 승려 지료(智了)가 고쳐 지으려고 재목을 모으고 있었다. 절 앞에 지공백천동(指空百川洞)이 있고 그 남쪽에 큰 봉우리가 있으니, 보문봉(普門峰)이다. 보문봉 앞에 세존백천동(世尊百川洞)이 있고 동쪽에 향로봉(香罏峰)이 있다. 향로봉 동쪽에는 일곱 개의 큰 봉우리가 있어 서로 이어져 하나의 큰 산을 이루니, 관음봉과 미륵봉에 비하면 몇백 배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첫 번째는 비로봉의 한 줄기이고, 두 번째는 원적봉(元寂峰)의 한 줄기이고, 세 번째로 위가 평평한 것은 안문봉(雁門峰)의 한 줄기이고, 네 번째는 계조봉(繼祖峰)의 한 줄기이고, 다섯 번째는 상불사의(上不思議)이고, 여섯 번째는 중불사의(中不思議)이고, 일곱 번째는 하불사의(下不思議)이다. 불사의(不思議)라는 것은 암자 이름으로, 신라의 승려 율사(律師)가 창건한 것이다. 일곱 봉우리 아래에는 세존천(世尊川) 곁으로 대명(大明)ㆍ대평(大平)ㆍ길상(吉祥)ㆍ도솔(兜率) 등의 암자가 있다.

내가 지공천(指空川)을 건너고 보문암(普門庵)을 넘어 산길로 5, 6리 가니, 솜대〔綿竹〕가 오솔길을 이루었다. 암자 아래에 도착해 보니 절의 주지 조은(祖恩)은 바로 운산(雲山)의 친구라서 나를 대우함에 자못 은의(恩意)가 있었다. 암자 위에 앉자, 동북쪽은 바다가 바라보이고 동남쪽은 고성포(高城浦)가 보였다. 암자 앞에는 나옹(懶翁) 혜근 선사(惠勤禪師) 자조탑(自照塔)이 있다. 좌정하자 조은이 싱싱한 배와 잣을 대접하였고 다 먹은 뒤에 밥을 올렸다. 향심(香蕈)과 석심(石蕈)을 삶아서 반찬을 만들었고 산나물도 지극히 갖추었다. 이때에 두견새가 낮에 우니, 산이 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밥을 먹은 뒤에 조은과 작별하고 산길로 약 5, 6리를 가서 세존백천수(世尊百川水)를 건너고, 또 1, 2리를 가서 왼쪽으로 도솔암(兜率庵)을 보며 동쪽으로 갔다. 또 5, 6리를 가서 큰 시냇물을 하나 건너 시냇물 동쪽을 따라 올라갔다. 5, 6리를 가서 발연(鉢淵)을 지났고, 또 반 리를 가서 발연암(鉢淵庵)에 이르렀다. 승려가 전하기를 “신라 시대의 율사(律師) 스님이 이 산에 들어오니, 발연의 용왕이 살 만한 땅을 바쳤습니다. 이에 절을 지어 발연암이라 이름하였습니다.” 하였다.

암자 뒤에 봉우리 하나가 있다. 보문암에서 바라보이던 일곱 봉우리 중의 끝 봉우리이다. 암자 위로 조금 떨어진 곳에 수십 길〔丈〕을 가로로 드리운 폭포가 있다. 좌우는 모두 흰 바위로, 옥을 갈아놓은 것처럼 매끈하여 앉기에도 좋고 눕기에도 좋았다. 내가 행장을 풀고 물을 움켜서 입을 헹구고 꿀물을 마셨다.

발연의 고사(故事)에 불자(佛子)의 유희(遊戱)라는 것이 있다. 이는 곧 폭포 위에서 나무를 갈라 그 위에 앉고 물 위로 띄워서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다. 재주 있는 자는 순조롭게 내려가고 재주 없는 자는 거꾸러져 내려간다. 거꾸러져 내려가면 머리와 눈이 물에 빠졌다가 한참 뒤에 도로 나오게 되니, 곁의 사람들이 모두 깔깔대고 웃는다. 그러나 바위가 매끄럽고 윤택하여 비록 거꾸러져 내려가더라도 몸이 손상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장난하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내가 운산으로 하여금 먼저 시험하게 하고 이어서 뒤따라갔더니, 운산은 여덟 번 출발하여 여덟 번 물에 맞았고, 나는 여덟 번 출발하여 여섯 번 물에 맞았다. 바위 위로 나와서는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이에 책을 베고 바위에 누웠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

주지(住持) 축명(竺明)이 와서 나를 이끌고 절로 들어가 절 뒤의 비석을 보게 하였다. 이는 바로 율사(律師)의 유골을 간직한 비석으로, 고려 승려 형잠(瑩岑)이 지은 것이고, 건립 시기는 승안(承安) 5년 기미년 5월이다. 비석 곁에 마른 소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율사의 비석이 건립된 때부터 500여 년 사이에 세 번 마르고 세 번 번성하다가 지금 다시 말랐다고 한다. 다 구경하고 다시 암자로 내려오니, 축명이 밥을 대접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또 폭포에 이르렀다가 밤이 깊고 날씨가 차가워져서야 들어왔다.

●무인일(27일)

발연을 출발하여 폭포의 하류를 건너고 소인령(小人嶺)에 올랐다. 고갯길이 험악하고 높아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쳐다보고 올라가야 하니, 소인령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 참으로 헛되지 않다. 내가 열 걸음에 아홉 번 쉬어 바야흐로 첫 번째 고개에 올랐다. 유점산(楡岾山)이 왼쪽에 있고 불사의봉(不思議峰)이 오른쪽에 있고 동해가 뒤에 있고 환희재(歡喜岾)가 앞에 있었다. 소인령은 모두 여덟 고개이다. 점점 나아갈수록 점점 높아져서 일곱 번째 고개에 이르니, 상불사의봉과 나란하고 여러 산들이 모두 눈 아래 있었다. 통천(通川)ㆍ고성(高城)ㆍ간성(杆城) 세 고을이 산 밑에 늘어서 있고, 바다를 바라보면 하늘과 더불어 끝이 닿아 있었다. 여덟 번째 고개에 오르니, 불사의봉이 까마득히 발아래에 있었다.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돌아서 산의 북쪽을 따라 가니 길이 매우 험준하였다. 측백(側柏)이 길에 비껴 있고 사철나무가 섞여 자라며, 쌓인 눈이 골짜기에 가득하고 송라(松蘿)가 나무에 붙어 있었다. 나는 호표(虎豹) 모양의 바위에 걸터앉고 규룡(虯龍) 모양의 나무에 오르며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나아갔다. 피로가 심하여 눈〔雪〕을 녹여 꿀을 타서 마시자 갈증이 문득 가셨으니, 자미(子美)가 이른 “영롱한 것은 태초로부터 쌓인 눈이네.”라는 것이다. 조금 뒤에 다시 갈증이 생겼다. 엉금엉금 기어서 환희재(歡喜岾)에 오르니, 소인령의 여덟 번째 봉우리보다 또 한두 등급이 더 높았다.

재(岾)의 동쪽은 토봉(土峰)이 하나이고, 재의 서쪽은 석봉(石峰)이 셋이다. 환희재를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니, 철쭉이 숲을 이루었으나 날씨가 차가워서 망울만 맺고 꽃은 피지 않았다. 작은 시내에 이르러 손과 얼굴을 씻었고, 또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 도솔암(兜率庵)에 이르렀다. 암자의 다른 이름은 백전암(柏田庵)이다. 발연으로부터 여기까지는 30여 리이다. 암자에 들어가서 앉아 오래도록 있다가 다시 나왔다. 길에 올라 1리쯤 가서 적멸암(寂滅庵)에 들어가니, 한 승려가 가사(袈裟)를 입고 입정(入定)하고 있었다.

암자 뒤의 토산(土山)은 적멸봉(寂滅峰)이고, 암자 앞 길 동쪽 석산(石山)은 성불봉(成佛峰)이다. 암자를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 서북쪽으로 가다가 곧바로 한 골짜기로 내려가니, 두 냇물이 어울려 흐르고 물과 바위가 밝고 시원하였다. 바로 십이폭포의 원류이다. 냇물을 건너 올라가니 개심암(開心庵)이 있었다. 암자에 들어가 보니 납의(衲衣)를 입은 한 승려만 있을 뿐이었다. 또 개심암의 전대(前臺)에 올라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니, 앞에는 적멸봉 하나가 있고 뒤에는 개심암 뒤로 봉우리 둘이 있다. 왼쪽에는 백석봉(白石峰)이 있으니 그 봉우리가 스물다섯이고 그 아래에는 운서굴(雲栖窟)이 있다. 오른쪽은 골짜기이다.

다시 암자로 돌아와서 도시락을 먹었다. 서울에서 온 거사(居士) 송 생(宋生)이란 자를 만났는데, 그 말이 매우 거짓되었다. 운산이 말하기를 “지금 해가 아직 남았으니, 이 암자에서 유숙할 것이 아니라 더 가는 것이 좋겠소.” 하기에 그 의견을 따랐다. 개심암 뒤 재를 넘으니, 이 재는 환희재보다 또 한두 등급이 더 높았다. 이곳에서부터는 돌과 나무가 모두 흰색이었다.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높은 봉우리를 왼쪽으로 지나고, 송곳 끝처럼 뾰족한 석봉 하나를 오른쪽으로 지났다. 그 아래에 계조굴(繼祖窟)이 있다. 남쪽 가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울창한 두 봉우리가 있다. 두 봉우리가 만나는 곳에 오르니, 개심암 뒤의 재보다 또 한두 등급이 더 높았다.

재로부터 남쪽으로 내려가자, 측백나무가 길을 메우고 두견화가 간간이 피어 좋은 향기가 코를 감쌌다. 골짜기는 바로 대장동(大藏洞)이다. 시내와 바위가 밝고 시원하여 지나온 곳 중에 이것과 견줄 것이 없다. 골짜기는 또 그윽하고 깊어 냇물의 근원을 따라가면 3, 4일 후에야 바야흐로 비로봉에 당도한다고 한다. 우선 눈으로 본 것을 기록하면, 냇물의 북쪽에 석봉이 다섯이고 남쪽에 석봉이 둘이니, 그 하나는 흰 바위가 포개져서 서책을 쌓아 놓은 듯하다. 호승(胡僧) 지공(指空)이 이곳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 바위 안에 대장경(大藏經)이 있다.” 하였다. 이로 인해 대장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행장을 풀고 앉아 오래도록 구경하다가 암석에서 노숙하려고 계획하니, 운산이 말하기를 “이곳은 비록 나쁜 짐승은 없지만 안개 기운이 사람을 엄습할까 두렵소. 지금 날이 비록 저물었지만 그래도 원적암(元寂庵)에 이를 수 있을 것이오.” 하기에 그 말을 따랐다. 대장봉(大藏峰)을 따라 서쪽으로 가자, 다섯 개의 석봉이 오른쪽에 있고, 아홉 개의 토봉이 왼쪽에 있고, 골짜기 물이 남쪽으로 흘러갔다.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서 오른쪽 산허리를 끼고 큰 재에 올라갔다. 이름이 안문재(雁門岾)로, 안문봉(雁門峰)의 남쪽 줄기이다. 재는 대장봉 뒤 재보다 또 한두 등급 더 높았다. 재를 내려와서 남쪽으로 가다가 시냇물을 따라 갔다. 왼쪽에 있는 산은 모두 소나무와 잣나무여서 그 봉우리를 분별할 수 없고, 오른쪽에 있는 다섯 개의 큰 봉우리는 모두 내산(內山)의 남쪽 줄기이다. 냇물 남쪽과 토산(土山)의 서쪽에 있는 세 개의 가파른 봉우리가 그 머리를 드러내었으니, 그중 하나가 관음봉이다. 관음봉 아래에 부처 형상과 같은 돌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 아래의 원적천(元寂川)은 안문천(雁門川)과 서로 합쳐지는데, 맑고 넓은 것이 대략 대장동 물과 같다. 앉아서 잠깐 구경하다가 물줄기를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니, 밟히는 것이 모두 시냇가의 흰 바위이고, 좌우 산의 수십여 봉우리가 흰 구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이윽고 원적암에 이르렀다. 암자 뒤에 있는 큰 봉우리는 여러 봉우리보다 몇백 배 더 높은지 알 수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원적봉(元寂峰)이다. 원적봉 남쪽에 있는 봉우리는 원적봉에 비해 매우 낮지만, 여러 봉우리에 비하면 또한 큰 차이가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원적향로봉(元寂香爐峰)이다. 암자의 동남쪽으로 바라보이는 토봉 하나는 높이가 원적봉과 같고 그 위는 오목하니, 이것이 이른바 안문봉이다. 승려가 이르기를 “사자가 그 위에서 새끼를 기릅니다.” 하였다. 백전(柏田)에서 여기까지는 또 30리이다. 암자에 있는 계능(戒能) 승려는 문자를 조금 알았다.

●기묘일(28일)

원적암을 출발하여 왔던 길을 따라 내려갔고 안문천이 교류하는 시냇가에 이르러 손을 씻고 입을 헹구었다.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서 문수암(文殊庵)을 지나 묘길상암(妙吉祥庵)에 이르니, 암자가 시냇가에 있고 물과 바위가 매우 선명하였다. 여기서부터 철쭉이 비로소 피었다. 냇물 남쪽에 봉우리 넷이 있고 냇물 북쪽에 깎아지른 듯한 석벽 하나가 있다. 시냇가 바위 위에 앉아 양치하고 암자에 들어가서 제명(題名)하였다. 암자에는 도봉(道逢)이라는 노승이 있었다. 용문사(龍門寺)의 사승(邪僧) 처안(處安)과 회암사(檜巖寺)의 사승 책변(策卞)이 모두 예우하여 스승으로 섬기니, 이 때문에 여러 산에 이름이 높아 재물을 모은 것이 가장 많았다. 나를 볼 때 예법이 매우 거만하여 나는 말하지 않고 나왔다.

시내를 따라 서쪽으로 가니 절터가 있고, 절터 위에는 석벽 사이에 새겨진 돌부처가 있었다. 절터 아래에는 위가 평평한 큰 바위가 냇가에 임해 있어 그 위에 앉아 잠깐 쉬었다. 절터 북쪽에는 여덟 개의 봉우리가 있고, 남쪽에는 관음봉 이하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다. 북쪽 여덟 개 봉우리 뒤에 머리를 드러낸 두 개의 큰 봉우리가 있는데, 하나는 원적봉의 서쪽 면이고 하나는 월출봉(月出峰)의 남쪽 면이다. 그 아래에 불지암(佛知庵)과 계빈굴(罽賓窟)이 있다. 이 두 암자를 지나 마하연암(摩訶衍庵) 전대(前臺)에 이르니 담무갈(曇無竭)의 석상이 있었다. 대(臺)는 바로 이 산의 한가운데이고, 담무갈은 바로 이 산의 주불(主佛)이다. 승속(僧俗) 간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손을 모아 절하고 지나거늘 운산이 지팡이로 그 이마를 두드렸다.

절 가운데로 들어가니, 절에 있던 노승 나융(懶融)이 나와서 나와 함께 얘기하며 마하연암의 사적(事跡)을 보여주었다. 이때에 뜰 아래로 유순하게 다니는 산비둘기가 있었으니, 산인(山人)에게 기심(機心)이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뜰 가운데에 있는 풀은 형상이 부추와 같고 꽃이 조금 붉었다. 나융이 말하기를 “옛날 지공(指空)이 이 산에 들어와서 말하기를 ‘이 산의 흙과 돌은 모두 부처이고, 유독 여기만 빈 땅이다.’ 하며, 여기에 서서 산정(山頂)의 석관음(石觀音)에게 예배하였소. 그가 섰던 땅에 이 풀이 나서 지금까지 100여 년 동안 시들지 않으니, 산인(山人)들이 지공초(指空草)라고 부른다오. 지공은 남천축국(南天竺國)의 술사(術士)로,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그 도술로써 불법을 널리 펼쳤소.” 하였다. 내가 만경대(萬景臺)의 길 안내를 나융에게 청하니, 나융은 자못 꺼리며 비로봉의 정상은 밟을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나융과 작별하고 만회암(萬灰庵)에 이르러 노복으로 하여금 밥을 지어 싸게 하고 만경대에 오르기로 하였다. 만회암의 승려 또한 꺼리며 만류하기를 “길이 없어 갈 수 없소.” 하였고, 운산 또한 원하지 않았으나 내가 강행하였다. 산꼭대기 하나를 넘어 골짜기 하나를 내려갔고, 또 한 꼭대기에 올라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내려갔다. 쌓인 낙엽에 무릎이 빠지고 썩은 나무가 이리저리 가로놓여 동쪽 서쪽이 모두 헷갈리고 새도 한 마리 울지 않았다. 다만 폭포 두어 길만이 숲 밖에서 날아 울릴 뿐이었다. 운산이 바위를 타고 올라가 보니 폭포 위에 또 앞의 것과 같은 폭포가 있는지라 몸이 떨려서 간신히 내려오며 말하기를 “산길을 이미 잃었으니 멋대로 추측해서는 안 되오. 나무 아래에서 사람 흔적이 없는 곳을 찾는 것은 돌아가는 것만 못하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따라 왔던 길을 도로 돌아왔다. 만회암에 이르러 도시락을 먹은 뒤에 다시 마하연암을 지나고 또 묘봉암(妙峰庵)과 사자암(獅子庵)을 지나 사자항(獅子項)에 이르렀다. 그 바위에는 아래로 드리워진 쇠줄이 있어 사람이 더위잡고 올라가는 도구로 삼게 하였다. 민지(閔漬)의 〈유점기(楡岾記)〉에 이르기를 “호종단(胡宗旦)이 이 산에 들어와서 기세를 누르려 하였으나 사자가 길목에서 막아 호종단이 들어갈 수 없었다.” 하였다. 운산이 산꼭대기의 바위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사자 형상이오.” 하였다. 내가 자세히 보건대, 전혀 사자 같지 않고 그냥 투박한 하나의 둥근 바위였다.

냇물이 여기에 이르면 더욱 신기하고 아름답다. 10여 리에 걸쳐서 하나의 흰 바위가 끊어지지 않고 곳곳이 폭포이다. 그 아래는 깊은 못이고, 못 아래에 또한 폭포가 있기 때문에 골짜기 이름을 만폭동(萬瀑洞)이라 하였으니, 폭포가 하나뿐이 아님을 표시한 것이다.

나는 서쪽을 따라 내려갔다. 사자항에서 내려올 때에 서쪽에 네 개의 봉우리가 있으니, 첫째는 윤필봉(潤筆峰)이고, 둘째는 비로봉의 향로봉(香爐峰)이고, 셋째는 이름이 없고, 넷째는 금강대(金剛臺)이다. 동쪽에 있는 세 개의 봉우리는 모두 이름이 없다. 이 세 봉우리를 다 지나면 보덕굴(普德窟)이 있고, 굴 앞의 냇가에 희고 큰 바위가 있으니 평평하여 수백 명이 앉을 만하다. 위아래가 모두 폭포이고 폭포 아래는 모두 깊은 못이다.

바위 위에 앉아 암자를 올려다보니 매우 기이하였다. 중국 사신 정동(鄭同)이 와서 이 산을 구경할 때, 어떤 두목이 하늘에 맹세하기를 “이는 참으로 부처의 경계(境界)이다. 원컨대 여기서 죽어 조선인이 되어 이 부처의 세계를 영원히 보려 한다.” 하고는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하니, 지금 저 위의 못이 바로 그곳이다.

금방 바위 측면에 이름을 적고 굴로 올라가니, 바위를 쌓아 구름사다리를 만든 것이 높이가 수백여 길은 됨 직하였다. 사다리를 다 올라가니 절벽 사이에 암자가 걸려 있었다. 대략 몇 길 되는 두 개의 구리 기둥으로 암자를 지탱시키고 기둥 위에 집 하나를 지었다. 쇠줄 하나를 만들어 한끝은 기둥에 고정시키고 한끝은 바위에 고정시켰다. 또 쇠줄 하나를 만들어 그 집을 둘러 묶어 두 끝을 바위에 고정시키고 관음소상(觀音塑像)을 안치하였다. 그 위에 또 한 개의 사(社)를 지어 승려가 거처하는 곳으로 삼고, 또 그 곁에 방 하나를 만들어 주방으로 삼았다. 승사(僧舍)의 서쪽과 관음굴의 위에 대 하나를 쌓아 보덕대(普德臺)라 했으니, 보덕이라는 것은 관음이 화신한 이름이다. 먼저 승사(僧社)에 들어갔더니 친구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가 지은 벽기(壁記)와 허주(虛舟) 신지정(申持正)이 채색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조금 있다가 승사(僧社)에서 굴로 내려오니 쇠줄 두 개가 있었다. 더위잡고 내려올 때에 판자 소리가 삐걱삐걱하여 두려워할 만하였다. 이른바 관음 앞에는 원장(願狀)이 자못 많았다.

나와서 대(臺) 위를 둘러보고 도로 승사(僧舍)로 들어가서 밥을 먹은 뒤에 보덕굴을 내려왔다. 다시 시냇물을 따라 내려가니, 흰 바위가 매끄럽고 윤택하여 발을 벗고 걸어도 물집이 생기지 않았다. 이윽고 앞으로 나아가서 수건암(手巾巖)에 이르렀다. 동봉의 기(記)에 이르기를 “관음보살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화신하여 이 바위에서 수건을 빨다가 승려 회정(懷靜)에게 쫓겨서 바위 아래로 들어갔다.” 하였다. 바윗돌이 비스듬히 비켜 있어 혹 깊은 못을 이루기도 하고 혹 폭포를 이루기도 하였다. 바위 가로는 만 명의 사람이 앉을 만하여 바라보면 심신(心神)이 시원해졌다. 내가 앉았다 누웠다 하며 물로 장난치면서 기이하고 좋은 경치를 구경하느라 떠나지 못하니, 운산이 가자고 재촉하여 표훈사(表訓寺)로 내려왔다. 서쪽으로는 금강대 이하로 지나온 봉우리가 열한 개이고, 동쪽으로는 보덕굴 이하로 지나온 봉우리가 일곱 개이다. 이날 산행한 거리는 모두 30리이다.

주지 지희(智熙)는 운산의 친구로, 나를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등불을 밝혀 차를 대접하고 차가 나간 뒤에 밥을 대접하였다. 절에는 지원(至元) 4년 무인년(1338) 2월에 세운 비석이 있다. 바로 원나라 황제가 세운 것으로, 봉명신(奉命臣) 양재(梁載)가 글을 짓고, 고려 우정승(右政丞) 권한공(權漢功)이 글씨를 썼다. 이는 황제가 표훈사의 승려에게 음식을 제공하여 만인(萬人)의 결연(結緣)을 지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비석 뒷면에는 태황태후(太皇太后)가 출연(出捐)한 은(銀)과 포(布)의 분량과 영종황제(英宗皇帝), 황후(皇后), 관자불화태자(觀者不花太子) 및 두 낭자(娘子)가 출연한 분량과 완택독(完澤禿) 심왕(瀋王) 등 대소 신료가 출연한 분량을 기재하였으니, 이는 곧 시주를 기록한 것이다. 이날 밤에 나를 작은 침실에서 묵게 하였으니, 친근하게 여긴 것이다.

●경진일(29일)

지희가 아침밥을 대접하였다. 산중의 음식을 극진하게 장만하였고 나의 노복들에게도 후하게 대접하였다. 작별할 때에 부채 하나와 신발 하나를 나에게 선사하고 운산에게도 똑같이 선사하였다.

냇가를 따라 5리쯤 가다가 동남쪽으로 한 골짜기에 들어갔다. 나무 밑으로 갈 때에 올려다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않아서 지나친 산봉우리를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또 5, 6리쯤 갔을 때에 옛날 성(城)이 있었다. 아마 왜적의 난리를 피했을 때에 쌓은 것인 듯하다. 성터를 지나 높은 산꼭대기에 오르니 동쪽에 두 암자가 있었다. 대송라암(大松蘿庵)과 소송라암(小松蘿庵)이다. 여기서부터 내 발에 물집이 생겨서 걷기가 매우 어려웠다.

대송라암에 이르러 누워서 쉬다가 잠이 들었다. 잠이 깬 뒤에 그 절의 승려 성호(性浩)에게 산행의 길잡이가 되어 주기를 청하였다. 암자 뒤로부터 측백나무 가지를 더위잡고 나뭇가지를 헤치며 한 산꼭대기에 올라갔다. 또 곧바로 산허리의 절반을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서 북쪽으로 올라가며 깎아지른 듯이 서 있는 흰 바위를 올려다보았다. 높이가 몇천 길이나 되고 드리운 듯도 하며 떨어질 듯도 하였다. 군데군데 쇠줄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어 손으로 당기고 올라가서 승상봉(僧床峰)과 응암봉(鷹巖峰)의 사이를 나갔다. 승상이라고 이름한 것은 봉우리 아래에 승려의 상(床)과 같은 바위가 있기 때문이고, 응암이라고 이름한 것은 봉우리 위에 매의 형상과 같은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응암 북쪽에서 절벽을 오를 때에 혹은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혹은 돌부리를 더위잡았다. 암석을 걸어온 거리를 모두 합하여 약 10여 리쯤 되는 지점에서 망고대(望高臺)에 오르니, 사통오달(四通五達)하여 승상봉과 응암봉이 도리어 산 밑에 있었다. 전날 만폭동에서 지나온 여러 봉우리는 낮은 언덕과 같아 구별할 수 없고, 단지 진견성봉(眞見性峰)만 북쪽에 보였다. 그 봉우리 뒤에 비로봉이 하늘을 지탱하는 듯한 형세여서 여러 봉우리에 비해 몇백 배나 되게 높으니, 이에 평지에서 올려다본 것은 바로 그 지엽이었고 상봉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봉우리 서남쪽에는 만경대(萬景臺)와 백운대(白雲臺)와 중향성(衆香城)이 있고, 그 다음에 마하연암(摩訶衍庵) 뒤의 봉우리가 있어 비로봉과 서로 이어져 하나의 산악을 이룬 듯하다. 동북쪽에는 안문봉(雁門峰)이 비로봉 다음에 있고, 안문봉 뒤에 있는 대장봉(大藏峰)과 상개심봉(上開心峰) 등 여러 봉우리는 단지 붓끝처럼 뾰족한 머리만 보일 뿐이다. 여러 뾰족한 봉우리 남쪽에 있는 두 봉우리는 여러 뾰족한 봉우리보다 2, 3등급이 낮다. 이름이 시왕봉(十王峰)이다. 봉우리 뒤에 시왕백천동(十王百川洞)이 있고, 냇가에 영원암(寧原庵)이 있다. 운산이 일찍이 이곳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또 시왕수(十王水)가 아래에서 만폭동과 합류하여 장안사(長安寺) 앞의 시내가 된다. 시왕봉 뒤쪽 백천동 동쪽에 위가 평평하며 시왕봉보다 약간 높은 토봉 하나가 있으니, 천등봉(天燈峰)이다. 그 남쪽에 천등봉보다 한두 등급 높은 가파른 봉우리가 있으니, 미륵봉이다. 천등봉과 미륵봉 사이에 머리를 드러낸 두 봉우리가 있으니, 관음봉(觀音峰)과 지장봉(地藏峰)이다. 미륵봉 남쪽에 미륵봉보다 한두 등급 낮은 토봉이 있으니, 달마봉(達磨峰)이다. 달마봉 서쪽에 또한 몹시 낮은 토산 하나가 있으나 그 이름은 알지 못한다. 그 봉우리의 남쪽이 바로 금장면(金藏面)과 은장면(銀藏面)이다.

장안사 서북쪽에 신림사(新林寺)가 있고, 신림사 서북쪽에 정양사(正陽寺)가 있고, 정양사 서북쪽에 개심대(開心臺)가 있고, 개심대 서쪽에 개심암(開心庵)이 있다. 그 산은 기슭에서 꼭대기까지 모두 흙이어서 무성한 수목이 한 방면을 휘감고 있다. 그러나 봉우리는 매우 낮아 여러 봉우리에 견줄 것은 아니다. 개심대 북쪽에는 매우 높은 토산이 미륵봉과 동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이름이 서수정봉(西水精峰)이다. 봉우리 남쪽에 웅호암(熊虎庵)이 있고, 봉우리 뒤쪽에 수정암(水精庵)이 있다. 이는 곧 비로봉 북면의 물이 흘러드는 골짜기이다. 개심대 뒤쪽 서수정봉 남쪽에 개심대 뒷산보다 조금 높은 토산이 하나 있으니, 이름이 발령(髮嶺)이다. 승려가 이르기를 “고려 태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을 지나다가 이 고개에 올라 비로봉을 바라보며 수없이 예배드리고, 머리카락을 끊어 나뭇가지에 걸어 사문(沙門)에 들어가려는 뜻을 보였기 때문에 이 고개를 발령이라고 이름합니다.” 하였다.

대석(臺石) 위에 앉아 봉우리 이름을 다 물은 뒤에 사방을 둘러보니, 신기(神氣)가 기뻐져서 호호(浩浩)히 내 몸이 높은 곳에 있음을 느꼈다. 한참을 보내고 내려가려 할 때에 안변(安邊)의 승려 네 사람이 뒤이어 올라왔기에 네 명의 승려와 함께 내려왔다. 네 명의 승려는 상운재(上雲岾)로 돌아가고, 나는 승상석(僧床石)에 올랐더니 심신이 오싹해지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도로 내려와서 송라암에 이르러서는 벽 위에 있는 친구 대유(大猷)의 명자(名字) 및 절구(絶句) 한 수를 보았다. 이날 산행한 거리는 모두 25, 6리쯤이다.

●윤4월 신사일(1일)

송라암을 출발하여 옛 성터를 지나 남쪽으로 한 골짜기를 내려갔다. 왼쪽으로 두 봉우리를 지나고 오른쪽으로 네 봉우리를 지나 안양암(安養庵)에 이르렀다. 암자 뒤에 있는 나한전(羅漢殿)은 트이고 밝아 앉을 만하기에 그 위에 앉아 일과(日課)를 적었다.

암자 앞에 깊은 못이 있다. 이름이 울연(鬱淵)으로, 김동(金同)이 빠진 곳이다. 김동은 고려 시대의 부자이다. 평소에 부처를 신봉하여 울연 가에 암자를 짓고는 여러 바위 면에 모두 불상을 조각했고, 부처를 공양하고 승려에게 보시하는 쌀 바리가 개경(開京)에서 이어졌다. 지공이 이 산에 들어와서 김동을 외도(外道)라고 하니, 김동이 승복하지 않았다. 지공이 맹세하기를 “네가 옳고 내가 그르다면 오늘 내가 하늘의 재앙을 받을 것이고,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면 오늘 네가 하늘의 재앙을 받을 것이다.” 하니, 김동이 “좋다.” 하였다. 지공이 마하연(摩訶衍)에 들어가서 묵으니, 밤에 과연 뇌성이 일고 비가 퍼부어 김동의 절이 물과 바위에 어지러이 부딪히게 되었다. 그러자 김동이 절의 불상과 종(鍾)과 승려들과 함께 동시에 울연으로 빠져 들어갔다고 한다.

울연 가 1리쯤에 김동의 절터가 있다. 안양암을 지나 동쪽으로 산허리를 돌아가니, 철쭉과 솜대가 붉고 푸르게 오솔길에 가득하였다. 미륵암(彌勒庵)에 이르렀다. 암자 뒤에 일곱 봉우리가 늘어서 있고, 암자 앞에 물이 있으니, 바로 울연의 하류이다. 주승(主僧) 해봉(解逢)에게 청하여 차 한 잔을 마시고, 식사 후에 왼쪽으로 명수(明水)ㆍ지장(地藏)ㆍ관음(觀音) 세 암자를 지나고, 오른쪽으로 양심(養心)ㆍ영쇄(靈碎) 두 암자를 지났다. 시왕백천동의 물이 여기에서 만폭동과 합류한다. 이곳을 지나면 냇가 바위가 더 이상 흰색이 아니다.

미타암(彌陀庵)으로부터 10여 리를 가서 장안사(長安寺)에 이르렀다. 이 절은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창건한 것이고, 원나라 순제(順帝)가 기 황후(奇皇后)와 함께 중창(重創)한 것이다. 문 밖에 천왕(天王) 두 개가 있고, 법당에 대불(大佛) 세 개와 중불(中佛) 두 개가 있었다. 부처 앞에는 ‘황제만만세(皇帝萬萬世)’라고 금으로 쓴 편액이 있다. 법당의 사면에 작은 부처 1만 5천 개가 있으니, 모두 원나라 황제가 만든 것이다. 그 동쪽 측면에 무진등(無盡燈)이 있다. 등(燈) 안의 사면은 모두 구리거울이다. 가운데에 촛불 하나를 두고 그 곁에 여러 승려의 형상을 세워두니, 촛불을 사를 때면 여러 승려가 모두 촛불을 잡는 듯하다. 이 또한 원나라 황제가 만든 것이다.

다섯 왕불(王佛) 위에 또 다섯 중불(中佛)이 있으니, 복성정(福城正)이 만든 것이다. 법당의 서쪽 당에 달마(達磨)의 진영(眞影)이 있고, 동북쪽 모퉁이에 나한전(羅漢殿)이 있고, 당좌(堂坐)에 금불(金佛) 다섯 개가 있고, 좌우로 토나한(土羅漢) 열여섯 개가 있다. 나한의 곁에는 각각 시봉승(侍奉僧) 두 개가 있으니, 기술이 지극히 정교하다. 나한전의 남쪽에 하나의 방이 있다. 방 안에 대장경함(大藏經函)이 있으니, 나무를 새겨 3층을 이루었다. 집 가운데에 철구(鐵臼)가 있다. 철주(鐵柱)를 그 위에 두어 위로 집 대들보와 연속시키고, 함(函)을 그 가운데에 두어 집 한 모퉁이를 잡고 흔들면 3층이 저절로 돌게 하여 구경할 만하다. 이 또한 원나라 황제가 만든 것이다.

구경이 끝나자 주지 조징(祖澄)이 차와 밥을 대접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가랑비를 무릅쓰고 앞서 지나온 냇가를 따라 올라갔다. 울연과 보현암(普賢庵)을 지나 신림사(新林寺)에 이르러 잠깐 쉬었다. 장안사로부터 지나온 여러 봉우리와 아침나절에 지나온 일곱 봉우리와 시왕동(十王洞) 어귀에서 바라본 여러 봉우리를 아울러 헤아려보면, 시내 동쪽에 29개 봉우리가 있고, 시내 서쪽에 18개 봉우리가 있다. 북쪽의 봉우리는 앞의 기록에 실려 있다.

신림사로부터 천친암(天親庵)에 올랐다. 천친암으로부터 정양사(正陽寺)에 오르니 배재(拜岾)가 오른쪽에 있었다. 승려가 이르기를 “고려 태조가 이 산에 들어왔을 때에 5만의 담무갈이 이 재에서 현신(現身)하여 태조가 무수히 예배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배재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하였다. 정양사로부터 또 비를 무릅쓰고 수목 밑으로 약 10리쯤 서쪽으로 올라가서 보현령(普賢嶺)에 올랐다. 또 서쪽으로 3, 4리쯤 올라가서 개심암에 이르니, 옷이 다 젖었고 또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날 산행한 거리는 모두 40리쯤이다.

●임오일(2일)

비가 갰다. 개심대에 올라 여러 봉을 바라보니, 망고대와 대동소이하였다. 비로봉과 중향성이 동쪽에 있고, 선암(禪庵) 뒤의 봉우리가 서북쪽에 걸터앉았으니, 곧 비로봉이 서쪽 줄기이다. 마하연암 뒤의 봉우리가 바로 선암봉 앞에 있고, 영랑현(永郞峴)이 선암봉 뒤에 있다. 서수정봉(西水精峰)이 영랑현 서쪽에 있고, 월출봉이 비로봉 동남쪽에 있다. 일출봉이 월출봉 남쪽에 있고, 원적봉이 일출봉 남쪽에 있으니, 망고대에서는 볼 수 없는 봉우리들이다. 원적향로봉이 원적봉 남쪽에 있고, 안문봉이 또 그 남쪽에 있다. 안문봉 북쪽에 멀리 보이는 한두 봉우리가 있으니, 보문봉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던 것이다. 진견성봉(眞見性峰)이 또 안문봉의 남쪽에 있다. 망고대가 또 그 남쪽에 있고, 시왕봉이 망고대 위에 머리를 드러내고, 천등ㆍ관음ㆍ지장ㆍ미륵ㆍ달마 등 여러 봉우리가 그 동남쪽에 늘어섰으니, 이것이 그 대략의 모습이다.

대의 남쪽에 안심대(安心臺)가 있고, 대의 측면에 개심태자(開心太子)의 석상이 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는 신라국의 태자입니다. 태자가 안심태자(安心太子), 양심태자(養心太子), 돈대부인(頓臺夫人)과 함께 여기에 이르러 수도하였으니, 모두 법흥왕의 자녀입니다.” 하였다. 지금 있는 네 개의 암자가 옛 이름을 그대로 쓴다고 하니,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다. 식사 후에 개심암으로부터 서쪽으로 묘덕암(妙德庵)에 내려가서 극선암(克禪庵)에 들어가 보았다. 뒤쪽에 느린목〔緩項〕이라고 이름한 곳이 있으니, 지공(指空)이 산에 들어올 때의 길이다.

천덕암(天德庵)을 들렀다. 암자에는 수원부(水原府) 사족(士族)의 과부가 도산재(都山齋)를 베풀고 있었다. 승려 500여 명이 산허리에 늘어앉아 떠드는 소리가 골짜기 안에 진동하였고, 과부가 뭇 승려 가운데서 얼굴을 드러낸 채 결연(結緣)을 맺고 있었다. 또 원통암(元通庵)을 찾았다. 암자의 좌우에 있는 두 시내가 암자 앞에서 합류하니, 또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을 지나 원통암 뒤 고개 영랑현(永郞峴)에 올랐다. 앞서 지나온 여러 봉우리는 일곱이다. 또 윤필암(潤筆庵) 고개를 넘어 윤필암을 들렀다. 또 사자령(獅子嶺)을 넘어 동으로 가니, 곧 지난번에 보았던 사자암(獅子庵)이다.

여기서부터 보는 산봉우리는 또한 앞의 기록에 실려 있다. 산과 냇물이 차이가 없고, 흰 바위도 이전과 같다. 다만 냇물 양쪽의 철쭉꽃이 지난밤 비에 활짝 피어 끊임없이 서로 이어지다가 혹 하나의 밭을 이루기도 하니, 구경할 만하다. 나는 이전 길을 따라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안문재에 이르기 전에 동남쪽으로 한 골짜기에 들어가서 도시락을 먹었다. 수재(水岾)를 넘어 동쪽으로 내려와서 왼쪽으로 흐르는 냇물을 보고 오른쪽으로 남산을 끼고서 나무 그늘 속을 걸어갔다. 왼쪽으로 봉우리 일곱 개를 지나고 오른쪽으로 봉우리 네 개를 지나 북쪽으로 냇물을 건너고 높은 산 하나에 올랐다. 내려와서 성불암(成佛庵)에 이르러 암자 위에 앉아 동해를 바라보니, 비가 내린 뒤에 더욱 분명하여 전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객승(客僧) 죽희(竹熙)라는 자가 나를 위하여 밥을 지었다. 밥을 먹은 뒤에 죽희ㆍ성통(性通) 등과 함께 돌아가서 불정암(佛頂庵)을 구경하니, 암자는 지난해에 화재를 당하였다. 불정대(佛頂臺)에 올랐다. 대 가운데 있는 구멍은 산 아래의 깊은 못과 연결되어 바람이 그 가운데서 나온다. 승려가 이르기를 “옛날 용녀(龍女)가 이 구멍에서 나와 불정조사(佛頂祖師)에게 차(茶)를 바쳤습니다.” 하니, 그 말이 매우 황당하였다. 불정대 아래에 청학(靑鶴)이 있어 해마다 그 가운데서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내가 대 위에 앉아 동남쪽 바닷물을 바라보았다. 서쪽에 안문(雁門)이 있고 북쪽에 개심사(開心寺)ㆍ적멸사(寂滅寺)ㆍ백전사(柏田寺) 등이 있다. 그 아래에 흰 바위가 벼랑 하나를 이루었고 폭포가 12층을 드리워서 내려간다. 반은 나무숲 끝으로 들어가 있어 내가 바라본 것은 6층일 뿐이다. 황혼에 돌아와서 성불암(成佛庵)에 투숙하였다. 이날 산행한 거리는 60리이다.

●계미일(3일)

성불암에서 바다 가운데를 바라보았다. 여명 때부터 하늘 동쪽이 붉은 빛을 띠더니 잠깐 사이에 둥근 해가 솟아올라 바다 빛이 모두 붉어졌고, 해가 3간(竿) 정도 올라오자 바다 빛이 맑고 희어졌다. 나는 단편(短篇)을 지어 기록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작은 고개 하나를 넘고 10리를 가서 유점사(楡岾寺)에 이르렀다. 구연동(九淵洞)의 수원(水源)이 미륵봉에서 나와 절 앞에 이르러 수재천(水岾川)과 합류한다. 절에는 시내의 남북을 걸터앉은 수각(水閣)이 있다. 노니는 물고기가 앞에서 날아서 뛰고, 큰물이 지면 연어(連魚)ㆍ송어(松魚)ㆍ방어(魴魚)가 모두 수각 아래에 이른다. 절의 바깥문이 해탈문(解脫門)이니 천왕(天王) 두 개가 있고, 다음은 반야문(般若門)이니 천왕 네 개가 있다. 다음은 범종루(泛鍾樓)이다. 누 곁의 한 방에 노춘(盧偆)의 상(像)이 있다. 가장 안쪽에 능인보전(能仁寶殿)이 있다. 전 안에 나무를 새겨서 산 모양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 늘어선 오십삼불(五十三佛)이 있다. 전 뒤에 우물 하나가 있다. 이름이 오탁(烏啄)이니, 까마귀가 부리로 쪼아 우물물을 처음 얻었기 때문이다.

절에 있는 명(明) 사주(社主)가 묵헌(默軒) 민지(閔漬)의 〈유점기(楡岾記)〉를 내보였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오십삼불은 본래 서역 사위국(舍衛國)에서 세존(世尊)을 보지 못한 삼만가(三萬家)가 문수사니(文殊師尼)의 말을 받들어 석가의 상을 주조한 뒤에 쇠북 속에 담아 바다에 띄워서 가는 대로 내맡겨 두었던 것이다. 불상이 월지국(月氏國)에 이르니, 그 나라 왕이 집을 지어 불상을 안치하였다. 그 집에 큰불이 나자 부처가 왕에게 현몽(現夢)하여 다른 나라로 떠가고자 하니, 왕이 불상을 쇠북 속에 넣어 또 바다에 띄웠다. 불상이 신라국 고성강(高城江)에 다다랐다. 태수 노춘이 불상에게 머무를 곳을 청하자 불상이 금강산으로 들어가므로 노춘이 뒤를 따라 찾아갔다. 바위 위에 앉아 길을 인도하는 비구니가 있었으니 그 땅 이름이 이대(尼臺)이고, 고개 위에서 길을 인도하는 개가 있었으니 그 땅 이름이 구재(狗岾)이고, 산골짜기 입구에서 길을 인도한 노루가 있었으니 그 땅 이름이 장항(獐項)이고, 불상이 머물 곳에 이르러 쇠북 소리를 듣고 기뻐한 것이 있으니 그 땅 이름이 환희재(歡喜岾)이다. 노춘이 남해왕(南解王)에게 아뢰어 큰 절을 지어 불상을 안치하였으니 이름이 유점사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민지의 기문은 일곱 개의 큰 망설(妄說)만 있고, 하나도 취할 만한 것이 없다.

쇠가 물에 뜨는 이치가 없으니, ‘사위국에서 주조한 쇠북과 불상이 바다 가운데에 떠서 월지국을 지나 신라에 이르렀다.’는 것이 첫 번째 큰 망설이다.

쇠가 스스로 걸어갈 이치가 없으니, ‘고성강에 다다라 금불이 스스로 금강산 유점으로 들어갔고, 또 끓는 물을 피하여 구연동(九淵洞)의 바위 위로 날아서 들어갔다.’는 것이 두 번째 큰 망설이다.

불교는 본래 서융의 종교로, 후한 명제(明帝) 시대에 비로소 중국에 들어왔다. 또 수백여 년 뒤 남북조 시대인 신라 중엽이 되어서야 우리나라로 유입되어 소신(小臣) 이차돈(異次頓)이 그 법을 이룬 사실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으니, ‘전한(前漢) 평제(平帝)의 시대와 신라 제2대 남해왕의 조정 때에 이러한 일이 있어 비로소 유점사를 창건했다.’는 것이 세 번째 큰 망설이다.

가령 민지의 설처럼 부처가 비록 한나라 명제 시대에 비로소 중국으로 들어왔지만, 우리나라에 부처가 있었던 것은 남해왕 때부터 비롯되어 실로 중국보다 앞섰다면 어찌 사적(史籍)에 실리지 않았겠는가. 우리나라 사람은 무지하여 군부처럼 부처를 받든다. 태조 왕건(王建)처럼 고명한 사람도 속습을 벗어나지 못하여 오히려 말하기를 “내가 나라를 차지한 것은 실로 불력(佛力)에 힘입은 것이다.” 하였으니, 당시에 가령 이런 사실이 있었다면 반드시 그 사실을 자랑하고 말을 부풀려 역사에 실었을 것이다. 역사에도 오히려 실리지 않았거늘 민지가 근거 없는 야인(野人)의 말을 믿고 기록하였으니, 이것이 네 번째 큰 망설이다.

가령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면, 우리나라에 비구승도 있고 비구니도 있게 된 것이 반드시 이로부터 시작되었을 터이므로 이전에 이러한 법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노춘이 부처를 찾아갈 때에 비구니가 길을 인도했다.” 했으니, 불법이 있기 전에 어찌 비구승과 비구니가 있었겠는가. 이것이 다섯 번째 큰 망설이다.

불상이 날아서 골짜기에 들어갔다는 것은 전혀 일리가 없는 말이다. 승려가 불상을 안치하자 불상이 노여움이 걷혀서 다시 날아가지 않았다고 하니, 이 어찌 앞은 신령스럽고 뒤는 어리석은 것인가. 어린아이의 노여움도 오히려 위엄으로 멈추게 할 수 없거늘 부처의 신령스러움을 찬미하는 것이 도리어 어린아이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것이 여섯 번째 큰 망설이다.

게다가 많이 듣고 널리 본 중국의 인물들로서도 오히려 서역의 범서(梵書)에 통하지 못하여 호승(胡僧)과 더불어 번역한 뒤에야 그 글이 세상에 밝혀졌거늘 사위국과 월지국에서 기록한 쇠북의 글자를 노춘이 또 어찌 해석할 수 있었단 말인가. 더구나 그 당시에는 문적(文籍)이 드물어 사람들이 문자를 알지 못했거늘 서역의 사적을 말한 것이 명백하니, 이것이 일곱 번째 큰 망설이다.

심하도다! 민지의 황당무계함이여. 일곱 개의 큰 망설만 있고 명교(名敎)에 보탬이 될 한마디 말도 없으니, 이 기록은 없애 버려도 괜찮은 줄을 알겠다. 더구나 삼국(三國)의 초기에는 사람에게 일정한 성이 없었고 이름자도 사람에게 걸맞지 않았으니, 노춘이라는 이름은 의심컨대 또한 후세 사람이 지은 것인 듯하다. 어찌 신라 말엽에 학술 있는 승려 원효(元曉)ㆍ의상(義相)ㆍ율사(律師)의 무리들이 애당초 이 산의 사적을 자랑하려고 추후에 기술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릇됨이 이와 같단 말인가.

기문을 다 보았을 때에 명(明)이 나를 앉히고 차를 대접하였고, 나와서 수각(水閣)에 앉았을 때에 또 떡을 대접하였다. 다 먹은 뒤에 명이 냇가에서 전송하였다.

개복대(改服臺)를 지났다. 이 대는 곧 병술년 유점사의 불사 때에 거가(車駕)가 옷을 바꿔 입었던 곳이다. 또 단풍교(丹楓橋)를 지나 다리 근처에서 잠깐 쉬었고, 또 장항(獐項)을 지나다가 온정(溫井)에서 말을 가지고 나를 맞으러 온 자를 만났다. 말을 타고 구재(狗岾)를 넘었다. 고갯길이 험악하여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이대석(尼臺石)을 지나 고개로부터 평지에 이르렀다. 건천(乾川) 가에서 도시락을 먹고 준방(蹲房)을 지나 고성군(高城郡)에 닿았다. 유점사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60리이다.

태수 조공(趙公)은 나의 선조와 친한 사이여서 나를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이때 마침 양양 군수(襄陽郡守) 유자한(柳自漢)이 먼저 와서 자리에 있었고, 반찬이 매우 잘 차려져 있었다.

●갑신일(4일)

태수가 유 양양(柳襄陽)을 위해 삼일포(三日浦) 유람을 마련하여 나도 따라갔다. 삼일포는 신라 때의 화랑(花郞) 안상(安祥)과 영랑(永郞)의 무리가 3일 동안 놀고 파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포구의 암벽 사이에 여섯 자의 붉은 글씨가 있으니, 화랑의 무리가 쓴 것이다. 수면으로 4, 5리 거리의 중간에 바위섬 하나가 있다. 장송(長松) 몇 그루가 있기 때문에 송도(松島)라 이름한다. 동남쪽 모퉁이는 바라보면 바위가 거북 같기 때문에 구암(龜巖)이라 이름한다. 구암의 뒤쪽에 바닷가에 우뚝 솟은 흰 바위가 있으니, 설암(雪巖)이라 이름한다. 물 북쪽에 몽천사(夢泉寺)의 옛터가 있으니, 참으로 절경이다.

훈도(訓導) 김대륜(金大倫) 및 유 양양을 따라 배를 타고 송도에 다다랐다. 또 배를 저어 붉은 글씨가 적힌 암벽 아래 이르렀더니, 과연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라는 여섯 글자가 있고, 그 글자는 돌에 의해 마구 공격당한 흔적이 있었다. 대륜(大倫)이 말하기를 “이전에 손님을 싫어하는 태수가 있었습니다. 군(郡)에 손님으로 오는 사람은 반드시 붉은 글씨를 보려 하기 때문에 태수가 그 비용을 싫어하여 돌로 쳐서 부수려 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글자의 획이 민멸(泯滅)되지 않아 해독할 수 있었다. 내가 이어서 그 글 뜻을 물으니, 대륜이 말하기를 “영랑은 신라 사선(四仙) 중의 하나이고, 남석(南石)은 이 바위를 가리키고, 행(行)은 바위로 가는 것이니, 세상의 문인들이 모두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이 바위는 고성(高城)에서 보면 북쪽에 있고, 금강산에서 보면 동북쪽에 있고, 동해에서 보면 서쪽에 있거늘 남석이라고 일컫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 또 여섯 글자로 문장을 이룬 것이 문리가 너무 엉성하여 아이들 솜씨와 같으니, 옛사람의 문법이 응당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일을 좋아하는 어린애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이는 곧 영랑의 무리 중에 성명이 남석행(南石行)인 자가 이름을 적은 것이 아니겠는가. 배를 묶어 놓고 바위 위에 올랐다. 그 꼭대기에 미륵불을 위하여 향나무를 묻은 사적을 기록한 매향비(埋香碑)가 있으니, 고려 때에 세운 것이다.

배를 타고 송도로 돌아와서 종일 주연을 벌였는데, 안주와 음식이 매우 성대하였다. 혹은 어부로 하여금 고기를 그물질하여 회를 치게 하고, 혹은 연구(聯句)를 지어 창화(唱和)하기도 했다. 오후에 큰바람이 일어나니 태수가 두려워서 배로 돌아가고, 나는 온정(溫井)으로 돌아왔다.

●을유일(5일)

온정에 들어가서 목욕하였다.

●병술일(6일)

목욕하였다.

●정해일(7일)

목욕하였다.

●무자일(8일)

목욕하고 나가서 쉬었다.

●기축일(9일), ●경인일(10일)

쉬었다. 가서(家書)를 받으니, 자당께서 안온하다고 하였다.

●신묘일(11일)

노정을 돌려서 온정을 출발하였고, 가면서 또 고사리를 캐었다. 고성군을 지나고 또 만호도(萬戶渡)를 지났다. 배를 타고 고성포(高城浦)를 건너 강가에서 밥을 지었다. 영동의 민간 풍속은 매년 3ㆍ4ㆍ5월 중에 날을 받아 무당을 맞이하고 산해진미를 극진히 마련하여 산신에게 제사 지낸다. 부유한 사람은 바리에 실어 오고 가난한 사람은 지거나 이고 와서 귀신의 자리에다 차려 놓고 생황을 불고 비파를 타며 즐겁게 사흘을 연이어 취하고 배불리 먹은 연후에야 집으로 내려와서 비로소 남들과 물건을 매매하니, 제사 지내지 않으면 한 자의 베도 남에게 줄 수 없다. 고성의 민속제(民俗祭)가 바로 이날이어서 길거리 곳곳마다 단장한 남녀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종종 성시(城市)처럼 빽빽하기도 하였다.

설암을 지났다. 설암 이남에는 기묘한 바위가 매우 많다. 안창역(安昌驛)을 지나 안석도(安石島)에 올랐다. 자그마한 돌이 육지와 연결되었고, 화살대가 숲을 이루었다. 화살대 아래에 해당화가 있고, 해당화 아래에 있는 흰 바위는 평평하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고 쌓여 있기도 하고 부서져 있기도 하였다. 섬 아래를 두루 돌아본 뒤에 앉거나 누워서 즐겁게 구경하다가 도로 나와서 구장천(仇莊遷)을 지났다. 이 또한 빼어난 경치이지만 옹천(瓮遷)보다는 조금 못하였다.

사천(蛇川)을 건너고 명파역(明波驛)을 지나 냇가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술산(戌山)을 넘어 다시 바닷가를 따라 무송정(茂松亭)에 이르렀다. 정자는 바로 바다굽이에 있고, 또한 육로와 연결되었다. 장송(長松)이 그 꼭대기에서 자랐고 흰 바위가 기슭을 이루었는데, 안석도에 비해 몇 배나 높은지 알 수 없다. 열산(烈山)을 지나고 간성(杆城) 땅에 들어가서 포남(浦南)의 민가에서 묵었다. 이날 바다를 따라 간 거리가 모두 120리이다.

●임진일(12일)

비를 무릅쓰고 포남을 출발하여 반암(盤巖)을 지나 19리를 가다가 비가 심하여 간성의 객사에 멈추어 묵었다. 태수 원보곤(元輔昆)이 술과 밥을 대접하였는데, 운산이 술에 취하여 넘어졌다.

●계사일(13일)

비가 갰다. 출발하여 문암(門巖)을 지나고 바다를 따라 45리를 가서 청간역(淸澗驛)에 이르니, 물가에 임한 누각이 있었다. 누각 뒤에는 절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누각 앞에는 많은 바위가 높고 험하였다. 내가 누각 뒤쪽 절벽 위에 오르니, 바라보이는 것이 더욱 넓었다. 서쪽으로 보이는 설악(雪岳)에는 빗줄기가 쏟아지는 듯하고, 하늘 남쪽에는 정오의 해가 하늘 가운데에 있었다. 바다는 앞에서 어둑하고 꽃은 뒤에서 환하여 기묘한 구경거리를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절벽 위에서 밥을 물에 말아먹고 또 바닷가를 가서 모래 언덕과 바다굽이를 지났다. 이때에 동남풍이 급하게 불어 파도가 해안을 때리는 것이 마치 천병만마(千兵萬馬)가 몰아치는 듯했다. 바닷물이 부딪치는 곳에 붉은 무지개가 즉시 생겨났다가 생기는 대로 곧바로 없어지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죽도(竹島)를 바라보니 흰 대나무가 연기와 같다. 대나무 아래 바위 위에는 해달(海獺)이 줄을 이루어 무리들이 함께 우니, 그 울음소리가 물소리와 어우러져서 바다굽이를 진동시킨다. 또 부석(腐石)에 이르니, 청간(淸澗)에서 여기까지는 20리이다.

또 오른쪽으로 천보산(天寶山)을 지나 송정(松亭)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낙산(洛山)을 바라보며 20리를 가서 낙산동(洛山洞)에 들어갔고, 또 10리를 가서 낙산사(洛山寺)에 닿았다. 지나온 저수지는 크기가 10여 리 혹은 20여 리인 것이 여섯이다. 두 개의 큰 개〔浦〕와 두 개의 큰 냇물을 건너고 세 개의 죽도를 지났는데, 기암(奇巖)과 괴석(怪石)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낙산사는 신라 승려 의상(義相)이 창건한 것이다. 절의 승려가 그 사적(事跡)을 전하기를 “의상이 관음보살의 친신(親身)을 해변 굴속에서 보았을 때에 관음보살이 친히 보주(寶珠)를 주었고, 용왕이 또 여의주(如意珠)를 바쳐서 의상이 두 개의 구슬을 받았습니다. 이에 절을 창건하고, 전단토(旃檀土)를 가져다 손수 관음상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해변의 작은 굴이 바로 관음보살이 머문 곳이고, 뜰 가운데의 석탑이 바로 두 구슬을 갈무리한 탑이고, 관음소상(觀音塑像)이 바로 의상이 손수 만든 것입니다.” 하였다.

무자년(1468)에 요승(妖僧) 학열(學悅)이 건의하여 절터에 큰 가람을 짓고 그 안에 살면서 주변 백성의 전답을 다 빼앗아 자기 소유로 삼았다. 지금 학열이 죽은 지 1년이 되었으나 그의 무리 지생(智生)이 일찍이 학열에게 잘 보였기 때문에 학열이 죽자 노비와 전답과 재물을 다 얻어 그 이익을 관리하고 있다.

절 앞에는 바다에 임한 정자 하나가 있다. 감나무 숲이 둘러쳐 있고, 대나무와 나무가 산에 가득하다. 정자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다가 정자를 내려와서 언덕 아래를 지나 큰 대숲에 이르렀다. 도로 주사(廚舍)를 지나 곡구(谷口)로 내려가서 왼편으로 암석을 거쳐 작은 대나무를 헤치며 반 리쯤 가서 이른바 관음굴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작은 동불(銅佛)이 굴 아래 작은 방에 있었으나 바람과 햇볕을 가리지 못하였고, 방 아래의 바다 물결이 바위를 부딪쳐서 산 모양이 흔들리는 듯하고 지붕 판자가 길게 울렸다. 내가 내려가서 동구에 이르니 운산과 승려 계천(繼千)이 와서 나를 맞이하였다. 절에 이르자 지생(智生)이 나와서 맞이하여 묵을 곳을 마련해 주고 대접하였다.

●갑오일(14일)

동틀 무렵에 정자 위에 앉아 뜨는 해를 바라보았다. 지생이 아침밥을 대접한 뒤에 나를 인도하여 관음전을 보게 하였다. 이른바 관음상이라는 것은 기술이 지극히 정교하여 혼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관음전 앞에 정취전(正趣殿)이 있고, 정취전 안에 금불 세 개가 있다.

남로(南路)로 길을 나와서 서쪽으로 돌아서 갔다. 20리쯤 가서 양양부(襄陽府) 앞의 냇가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였다. 또 10리를 가서 설악에 들어가 소어령(所於嶺) 아래 재에 오르니, 냇물은 왼쪽에 있고 산봉우리는 오른쪽에 있다. 산기슭을 다 지나 냇물을 건너 왼쪽으로 가니, 산은 맑고 물은 빼어나며 흰 바위가 서로 포개진 것이 대략 금강산 대장동(大藏洞)과 같다.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서 오색역(五色驛)에 이르니 산의 달이 이미 흰빛이었다. 이날 육지로 간 것이 30리이고, 산길로 간 것이 40리이다.

●을미일(15일)

오색역을 출발하여 소솔령(所率嶺)을 건너니, 설악의 어지러운 봉우리가 무려 수십여 개였다. 산봉우리는 모두 머리가 희고 시냇가의 바위와 나무 또한 흰색이니, 세상에서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 부르는 것이 빈말이 아니다. 운산이 말하기를 “매년 8월이면 여러 산에는 아직 서리가 내리지 않아도 이 산에는 먼저 눈이 내리기 때문에 설악이라 하오.” 하였다. 고개 위의 바위 사이에 팔분체(八分體)로 쓴 절구 한 수가 있었다.

단군이 나라 세운 무진년보다 먼저 나서 / 生先檀帝戊辰歲

기왕이 마한이라 일컬음을 직접 보았네 / 眼及箕王號馬韓

영랑과 함께 머물며 바다에 노닐다가 / 留與永郞遊水府

또 춘주에 이끌려서 인간에 체류하네 / 又牽春酒滯人間

묵적이 아직도 새로우니, 글씨를 적은 것이 필시 오래지 않다. 세상에 신선이란 것은 없으니, 어찌 일 좋아하는 자가 우연히 적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정자(程子)께서 국가의 운명을 하늘에 빌어 길게 만들거나 보통 사람을 성인의 경지에 도달시키는 것을 정기를 단련하여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에 비유하였으니, 깊은 산과 큰 못 가운데에 또한 이러한 사람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시를 읽어 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속세를 벗어날 생각을 가지게 한다.

고개 위에서 동해 바다를 하직하고, 고개를 내려와서 서남쪽으로 나무 밑을 걸어가니, 길이 매우 험하며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었다. 정향(丁香) 꽃을 꺾어 말안장에 꽂아 향기를 맡았고, 면암(眠巖)을 지나 30리를 가서 말을 쉬게 하였다. 신원(新院)을 지나 또 15리를 가니 설악의 서면(西面)으로부터 오는 냇물이 있었다. 소솔천(所率川)과 합류하여 원통역(元通驛) 아래에 이르러 큰 강이 된다. 앞으로 나아가서 원통에 이르니, 산천이 넓고 크며 매우 아름다웠다. 원통부터는 평지를 밟았다. 또 25리를 가서 원통천(元通川)을 건넜다. 기린현(麒麟縣)의 물이 여기에서 합류한다. 강을 따라 5리를 가서 인제현(麟蹄縣)에서 묵었다. 이날 산길로 간 것이 60리이고, 육지로 간 것이 30리이다.

●병신일(16일)

배를 타고 병항진(甁項津)을 건넌 뒤에 서남쪽으로 가서 선천(船遷)을 지났고, 또 서남쪽으로 가서 만의역(萬義驛)을 지났다. 또 산길로 가서 홍천(洪川) 경계에 들어갔고 천감역(泉甘驛)에서 묵었다. 모두 간 거리가 80리이다.

●정유일(17일)

또 서남쪽으로 가서 마령(馬嶺)을 넘었고, 또 서남쪽으로 가서 큰 강을 따라 내려갔다. 구질천(仇叱遷)과 영봉역(迎逢驛)을 지나 60리를 가서 홍천현(洪川縣)에 이르렀다. 현감 백기(伯起)를 만나 보고 함께 묵었다.

●무술일(18일)

배를 타고 앞강을 건넜고, 괘전령(掛牋嶺)을 넘어 백동역(百同驛) 뒷산을 거쳐 지평현(砥平縣)을 지났다. 또 천곡원(天谷院)을 지나 서남쪽으로 돌길에 들어갔다. 이날 간 거리는 모두 90리이다. 교리(校理) 권경우(權景祐)의 집에서 묵었다.

●기해일(19일)

가랑비를 무릅쓰고 서쪽으로 가서 천곡천(天谷川) 하류를 건넜고, 오빈역(娛賓驛)과 양근군(楊根郡)을 지나갔다. 또 월계천(月溪遷)ㆍ우원(隅院)ㆍ요원(腰院)ㆍ말원(末院)을 지나고 용진(龍津)을 건너서 봉안역(奉安驛)에서 묵었다. 이날 간 거리는 모두 80여 리이다.

●경자일(20일)

두미천(豆尾遷)과 평구역(平丘驛)을 지나고 중녕포(中寧浦)를 건너 70리를 가서 서울에 들어왔다. 모두 계산해 보면, 산길로 간 것이 485리이고, 바닷길로 간 것이 274리이고, 육지로 간 것이 937리이다.

을사년(1485, 성종16) 윤4월 21일 신축에 기록한다.

 

제6권

□송경록(松京錄)

을사년(1485, 성종16) 9월 7일 을묘일

자용(子容)과 정중(正中)이 필마(匹馬)를 타고 아이종을 데리고서 개성부(開城府) 판문(板門) 노사(奴舍)로 나를 방문하였다.

병진일(8일)

아침에 자용, 정중과 함께 판문을 출발하여 5, 6리를 가서 큰길로 나갔고, 천수원(天水院)을 찾아 천수정(天水亭)에 올랐다. 중추공(中樞公) 이예(李芮)의 기문 및 달성(達城) 서거정(徐居正) 공, 판서(判書) 이승소(李承召) 공, 시중(侍中) 홍언박(洪彦博) 공 등의 시를 쳐다보면서 읽었는데, 이는 모두 사인(舍人) 최사립(崔斯立)의 시에 화운(和韻)한 것이었다.

다 읽은 뒤에 도로 정자를 내려와서 탁타교(橐駝橋)를 건넜다. 이 다리는 바로 고려 왕 태조(王太祖)가 거란이 바친 낙타를 물리친 곳이다. 또 청교역(靑郊驛)과 개국사(開國寺)를 찾았다. 절은 단지 터만 남았고 터에는 화표주(華表柱) 두 개와 장명등(長明燈) 하나만 있었다. 수구문(水口門)에 들어갔다가 야교(夜橋) 길로 올라서 남대문 밖에까지 이르렀다. 길가에 국화 10여 떨기가 홍자색(紅紫色)과 황백색(黃白色)으로 흐드러지게 일제히 핀 것을 보고 한참 동안 앉아서 감상하였다.

돌아와서 백원(百源)이 우거하는 집을 방문하였다. 길 가는 사람에게 속아 다른 동네로 잘못 들어갔다가 간신히 그 집에 도달하였다. 백원과 숙형(叔亨)이 우두커니 우리들을 기다리다가 우리가 이르자 크게 기뻐하였고, 이어 개성의 노인 한수(韓壽)라는 사람을 초청하였다. 한수는 전조(前朝)의 고적(故迹)을 잘 알기 때문에 백원이 길잡이가 되어 주기를 청한 것이다.

화원(花園)을 방문하였다. 이른바 팔각전(八角殿)이라는 것은 옛터만 남아 있었다. 내가 10년 전에 이곳에 이르렀을 때는 팔각이 꺾이고 썩은 채로 철거되진 않았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었다. 팔각전 주춧돌 곁에 사람의 키만큼 자란 배나무가 있었다. 팔각전 북쪽 곁에는 쌓여 있는 옛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 단풍나무가 있었다. 신우(辛禑) 때에 심은 것으로, 기운 찬 늙은 뿌리가 바위 사이에 서려 있어 자못 예스러운 자태가 있었다. 한수가 우리들을 인도하여 팔각전 터 위에 앉게 하고 전조의 옛일을 얘기하니 흥미진진하여 싫증이 나지 않았다.

한참을 보내다가 화원을 떠나 동쪽으로 옛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들어가서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비문을 읽었다. 이는 바로 신우 때에 창건한 것이다. 또 동쪽으로 나와서 토령(土嶺)을 넘었고, 반 리(里)쯤 가서 왼쪽으로 태묘동(太廟洞)에 들어갔다. 한수가 동구의 누각 주춧돌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여기는 시중(侍中) 정몽주(鄭夢周)가 고려(高勵) 무리들에게 격살당한 곳입니다.” 하고, 우리를 인도하여 동네로 조금 들어가다 작은 집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시중의 옛집입니다.” 하였다. 우리들이 대문 앞에 앉아 강개(慷慨)한 마음으로 옛일을 애도하였다.

조금 있다가 용암사(龍巖寺)로 올라갔다. 절은 일명(一名)이 암방(巖房)이다. 수목이 하늘에 닿고 큰 것은 둘레가 몇 아름이나 되었다. 아래에 비스듬히 가로지른 큰 바위가 있고 낙엽이 바위를 덮었다. 한수가 우리들을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게 하였다. 평지를 굽어보니 안계(眼界)가 매우 넓어 앉아서 한참 동안 감상하였다. 한수가 말하기를 “여기는 우리 태조(太祖)께서 회군(回軍)할 때에 군사를 멈춘 곳입니다.” 하였다. 바위 뒤에 조각달 모양처럼 굽은 토성(土城)이 있으니, 이른바 내성(內城)이라는 것이다. 한수가 말하기를 “태조께서 나라를 세운 이듬해 계유년(1393, 태조2)에 이 성을 쌓아 고려 왕씨(王氏)의 옛 고장을 격리시켰습니다.” 하였다.

한수가 또 정중, 백원 등을 인도하여 절 안으로 들어가서 이른바 십이행년불(十二行年佛)이라는 것을 보여 주니, 자용이 부처에게 네 번 절하였다. 조금 있다가 도로 나와서 나와 함께 북쪽 언덕으로 올라가 풀을 깔고 앉았다. 백원의 비서(婢婿) 섭귀동(葉貴同)이 술을 갖고 와서 마셨고, 백원 등이 몇 잔을 돌리고서 파하였다. 한수가 또 우리들을 인도하여 백초정(百草亭) 사당(社堂)으로 내려갔다. 그 사(社)에 들어가니, 늙은 여인 10여 명이 북을 치며 큰소리로 염불하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젊은 여자는 나이 서른 남짓으로, 불법을 가장 잘 안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자용이 여자 앞에서 북쪽을 향해 서서 부처에게 네 번 절하였다.

한수가 또 나를 인도하여 백화정(百花亭)을 보게 하였다. 뒤섞여 자란 총죽(叢竹)이 있기에 내가 대나무 아래에 앉아 현담(玄談)을 큰소리로 읊었다. 다 읊은 뒤에 또 북쪽 언덕으로 올라가서 묘각암(妙覺庵)으로 내려갔다. 암자에는 여승 한 명이 있었다. 자용이 여승을 마주 대하여 부처에게 두 번 절하고 염주를 돌리며 큰 소리로 염불을 외니, 여승이 눈짓으로 알아차리고 웃었다. 암자 앞에 매우 높은 탑이 있으니, 고려 현종(顯宗)이 금자경(金字經)을 안치한 탑이다. 탑에 새겨 있는 범어(梵語) 글자는 해독할 수 없었고, 탑 곁에 있는 돌 승상(僧像) 여덟 개는 기교가 매우 정교하였다. 모두 본 뒤에 내려와서 토령(土嶺) 길을 통하여 유숙하는 집에 이르렀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또 황혼을 이용하여 남대문 밖에 이르렀다. 지나오는 길에 국화 앞에서 자세하게 완상하였고, 또 남대문에 올라가서 맘껏 담소하고 달빛 아래를 걸으면서 왔다.

정사일(9일)

한수가 향사례(鄕射禮)에 참여하느라 오지 않았다. 백원 등이 내가 일찍이 이곳을 유람했다는 이유로 나를 선도로 삼으니, 내가 부득이 앞장서 갔다. 길 가던 도중에 악사(樂士) 송회령(宋會寧)에게 피리를 불게 하였다. 토령을 지날 때에 순가(巡家)가 냇가에 있었다. 1, 2리쯤 가서 왼쪽으로 흙다리 하나를 넘어 순효사(純孝寺)에 들어갔다. 또 목청전(穆淸殿)에 들어가서 태조의 진영(眞影)을 배알하고자 했으나 우리들이 모두 복장이 미비하여 군신(君臣)의 예를 갖출 수 없기 때문에 감히 행하지 못하고, 단지 뜰과 집만 둘러보았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절은 태조가 즉위하기 전에 살던 옛집으로, 태조가 집을 희사하여 절을 짓고 또 영전(影殿)을 세워서 태조의 진영을 모신 것이 이른바 목청전이라고 한다.

한참 시간을 보내고 나와서 초동(樵童)에게 물어 샛길을 알아내어 북쪽으로 성균관에 이르렀다. 성균관 앞에 두 냇물이 교차하여 흐르고 있으니 이것을 반수(泮水)라고 한다. 반수 밖에 석교(石橋)가 있고, 석교 밖에 마암(馬巖)이 있다. 석교를 건너 대문에 들어가면 대문 안에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있다. 그것은 본래 제생(諸生)을 묵게 하려고 설치한 것이지만 제생은 하나도 없었다. 동서재 위에 교관청(敎官廳)이 있으나 교관은 없었다. 또 그 위에 명륜당(明倫堂)이 있고, 명륜당 뒤에 동서무(東西廡)가 있다. 동서무 안에 공자의 70제자 및 한당(漢唐) 제유(諸儒)의 신판(神板)이 있었다. 동서무 위에 대성전(大聖殿)이 있다. 대성전 중앙에 문선왕(文宣王)의 토상(土像)이 있고, 그 곁에 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의 토상이 있다. 동서의 종사청(從祀廳)에는 십철(十哲)의 토상이 있는데, 그 위차(位次)는 서울과 같으나 토상은 달랐다.

차례로 둘러본 뒤에 나와 도로 마암을 지나갔다. 또 대경(大卿) 왕미(王美)의 유허(遺墟)를 찾았고, 또 내동소문(內東小門)을 지나 내동대문(內東大門)에 이르렀다. 문이 가시덤불에 묻혀서 길이 문 곁으로 나 있었다. 그 문에 들어가서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 중화당(中華堂)으로 향하였다. 동네 어귀에 돌로 만든 수조(水槽)가 있었다. 어떤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 집이 중화당 옛터에 있는데, 수조를 동네 어귀로 내다놓은 것이 지금 이미 30여 년이 되었소.” 하였다. 내가 노인에게 앞서 인도하여 옛터를 가르쳐 주기를 청하니, 노인이 따라 주었다.

또 한 동네에 들어가서 왼쪽으로 왕륜사(王倫寺)를 보다가 어떤 집터가 있었으니, 바로 고려 시중(侍中) 채공 중암(蔡公中庵)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선생은 휘(諱)가 홍철(洪哲)로, 기개가 높아 한 시대 풍류의 으뜸이 되었다. 집 한 채를 짓고 그곳에 거처하면서 날마다 기영(耆英)을 맞이하여 모임을 열었다. 스스로 〈자하곡(紫霞曲)〉을 지어 여아(女兒)로 하여금 익히게 하고는 어두운 밤에 자하동(紫霞洞)에 들어가서 그 곡을 부르게 하였다. 관현악기가 모두 연주되자 은연히 천상의 소리 같으니, 중암이 손님들을 속이기를 “이 뒤쪽 자하동은 예전에 신선이 있었기 때문에 밤이면 또 이러한 소리가 나는 것이다.” 하자, 여러 손님들이 그렇게 믿었다. 하루는 〈자하곡〉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중화당 뒤에 이르렀고, 조금 있다가 중화당 앞 뜰 가운데로 곧바로 이르니, 중암이 내려가서 꿇어앉자 여러 손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려 부복(俯伏)하고 들었다. 이로 인해 자하동에 신선이 있다고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우리들이 중화당 위의 작은 봉우리에 앉아 아랫자리에 말을 매어놓고 중화당의 고사를 얘기하였다. 노인이 말하기를 “이곳은 채 정승(蔡政丞) 때에 선인(仙人)이 머물던 봉우리라오.” 하였다. 악사 회령(會寧)이 〈자하동곡(紫霞洞曲)〉을 연주하니, 여러 손님이 모두 기뻐하였다. 봉우리 뒤에 작은 동네가 있으니, 묵사동(墨寺洞)이다. 조금 있다가 내려와서는 왕륜사에 들어가서 장륙(丈六) 세 개를 보았다. 또 내려오다가 수락석(水落石)을 만나 정중, 자용과 함께 냇물에서 목욕하였다.

또 1리쯤 올라가니 신박암(信朴庵)이 있었다. 암자 앞의 동쪽 길은 곧 자하동이고, 서쪽 길은 곧 안화동(安和洞)이다. 서쪽 길을 따라 올라가니, 길가엔 들국화가 무더기로 나 있었다. 선인교(仙人橋)를 지나 절 앞에 이르니, 솜대가 오솔길을 이루었고 단풍잎이 떨어지려 하였다. 또 황국(黃菊)이 만발하고 파초가 잎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들이 국화 사이에 앉아 꽃술을 따먹으니 주린 배가 불렀다. 또 절의 승려에게 청하여 어린 노복으로 하여금 똘배를 따오게 하여 마른 목을 적셨다. 송나라 휘종(徽宗)이 썼다는 액자를 물으니, 사주(社主)가 말하기를 “어리석고 망녕된 화주승(化主僧)이 그 글씨가 썩어 못 쓰게 되었다고 불태웠습니다.” 하였다. 오랫동안 있다가 내려왔다.

도로 신박암과 수락석을 지나서 서쪽으로 동산색(東山色)에 들어가 작은 고개를 넘었다. 동지(東池)와 좌장(左藏)의 옛터를 지나 고궁(古宮)의 옛터에 올랐다. 세속에서 망월대(望月臺)라고 부른다. 망월대 아래에 구정(毬庭)이 있고, 구정 가운데에 청천(淸川)이 있으니, 원래 광명사(廣明寺)로부터 흘러오는 것이다. 망월대 위에 소나무가 있으니, 혹 몇 아름 되는 것은 하늘에 닿기까지 하였다. 소나무 아래에 앉았다. 백원의 노복들이 먼저 술, 고기, 떡, 과일을 차려 놓아 백원 등이 술자리를 열었다. 술이 반쯤 되었을 때에 회령이 공민왕(恭愍王) 때의 〈북전곡(北殿曲)〉을 연주하였으니 망국을 상심한 것이고, 흥취가 한창일 때에 의종(毅宗) 때의 〈한림곡(翰林曲)〉을 연주하였으니 전성시대를 생각한 것이다. 또 서로 더불어 강개한 마음이 다하지 않아 내가 옛일을 슬퍼하는 시 3편을 지었다.

이날이 바로 중양절(重陽節)이었다. 동서남쪽의 여러 산을 바라보니, 남녀가 행렬을 이루어 곳곳에서 높은 곳에 올라 노래 부르기도 하고 춤추기도 하여 자못 태평한 기상이 있으니, 한미한 선비가 흉년에 의식을 염려하는 탄식이 문득 잊혀졌다. 얼마 있지 않아 술이 다하고 해가 졌다. 백원의 일행이 북령(北嶺)에 올라가 여러 궁궐 터를 둘러보고 곧이어 첨성대(瞻星臺)를 방문하였다.

건덕전(乾德殿) 터에서 야제(野祭)를 지내는 남녀를 만났다. 남녀가 앞 다투어 나와 맞이하고 들어가서는 백원을 윗줄에 앉게 하니, 우리들은 뒤따르는 사람의 줄에 늘어앉았다. 자용이 첫 번째 앉고, 정중이 그 다음에 앉고, 회령이 그 다음에 앉고, 석을산(石乙山)이 그 다음에 앉고, 숙형(叔亨)이 그 다음에 앉고, 내가 끝에 앉았다. 의복이 매우 지저분했다. 주인 남녀가 과일을 내어오고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 백원이 돌아보면서 부르자 정중이 비파를 타다가 혹 거문고를 타고, 회령이 피리를 불고, 석을산이 노래를 부르고, 자용이 일어나 춤추니, 비파와 노래와 피리가 매우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자용이 가장 젊은 주인 여자와 마주보고 춤추었고, 춤이 끝나고서 원숭이 춤을 추니, 몸동작이 굽이굽이 노래와 피리 소리에 들어맞아 주인 남녀가 기뻐서 모두 눈물을 흘렸다.

주인이 차례대로 술잔을 올렸다. 첫 번째 사람은 나이가 젊고 행색이 양반 같았는데, 스스로 전적(典籍) 안소(安紹)의 아우라고 일컬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사람은 연로하고 저잣거리 사람 같았는데, 스스로 충찬위(忠贊衛)라고 일컬었다. 다섯 번째 사람은 나이가 어리고 행색이 유생(儒生) 같았는데, 나이 많은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의 아들이었다. 주인이 곡진한 뜻을 극진히 펼쳐서 즐거움이 극도에 다다른 뒤에 파하였다. 주인은 백원과 작별하고 우리들은 주인과 작별하였다. 정중이 주인에게 사례하기를 “노숙하는 경우에는 아름다운 만남이 진실로 어려운 법이기에 고맙고 고맙소이다. 만일 우리들을 다시 보려고 한다면 한양의 시중(市中)에서 물어보십시오.” 하니, 주인이 답하여 사례하기를 “궁벽한 곳에 살다 보니 여태 관현악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선악(仙樂)을 듣고서 먹었던 귀가 잠시나마 밝아졌으니, 어찌 큰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헤어지고 나와서는 당금암(當今巖)을 지나 은소령(銀梳嶺)을 넘고 흥국사(興國寺) 옛터를 경유하여 내남대문(內南大門)을 나갔다. 길 가는 중에 회령은 말 위에서 피리를 불고 자용은 말 위에서 일어나 춤추니, 집집마다 남녀가 문을 나와서 바라보고 모두 감탄하며 이인(異人)이라 하므로, 자용이 스스로 만족스러워서 때때로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이날 밤 유숙하던 집에서 묵었다. 백원의 노복이 자용의 재예(才藝)에 심복하여 또 별도로 작은 술자리를 베푸니, 자용이 다시 일어나 원숭이 춤을 추었다. 노복의 우두머리가 손을 모아 두 번 절하였고, 석을산이 기녀를 소개해 주었다.

무오일(10일)

한수가 왔다. 백원이 한수에게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함을 알리고 그와 함께 가고자 했으나 한수가 유수(留守)를 뵙는다면서 사양하고 따르지 않았다. 우리들 다섯 사람이 단지 네 명의 노복만 데리고 양식을 지워서 나섰다. 회령과 석을산은 따라오지 않았으니, 행차가 재미없는 것을 싫어해서인 듯하였다.

시두위교(時豆爲橋)를 건너 태평관(太平館)을 지나고 남쪽으로 승지문(承旨門)을 나가서 경천사(敬天寺)에 들어갔다. 시간이 정오를 지났으므로 무 뿌리를 얻어 씹어 주린 배를 채웠다. 절 가운데에 12층 석탑이 있었다. 층마다 부처를 조각하였고 꼭대기에 금표(金表)를 세웠는데, 기술이 매우 정묘(精妙)하였다. 승려가 이르기를 “중국에서 만든 것입니다.” 하였다. 잠시 뒤에 승려들과 작별하고 장원정을 찾아갔다.

20리를 가서 장원정의 옛터에 이르렀다. 곧바로 철리곶(鐵里串)으로 가서 당두산(堂頭山)에 올랐다. 산꼭대기에 신당(神堂)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의 형세가 가파르게 솟았고 바다 굽이로 달려 들어가서 삼면이 모두 물이다. 한수(漢水)와 낙수(洛水)가 교류하여 바다에 들어간다. 바다 남쪽에 있는 섬이 강화군(江華郡)이고, 강화군의 서쪽에 있는 섬이 교동군(喬桐郡)이니, 두 군의 산이 마치 소라껍데기가 물에 떠 있는 듯하였다. 바다 서쪽에 북쪽에서 바다로 들어오는 강물이 있으니 벽란도(碧瀾渡)이고, 벽란도 서쪽에 육지가 있으니 배천군(白川郡)이다. 앉아서 산과 바다를 볼 때에 정중과 백원은 한층 더 기쁜 기색이 역력했는데, 두 사람이 산과 바다를 구경한 것으로는 이것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곡식을 내어 앞마을 수군(水軍) 집에 가서 밥을 지어 왔다. 무 뿌리를 잘라 소금 간장을 무쳐서 하나의 유기(柳器)에 밥을 담아 우리 다섯 사람이 나란히 앉아 함께 먹었다. 자용은 간혹 손으로 한 움큼씩 집어 먹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바위 사이에 앉아 혹 시사(時事)를 논하다가 혹 옛일을 논하였고 혹 음양 조화의 담론과 조석(潮汐) 진퇴의 이치까지 언급하니, 밤이 깊도록 흥취가 지극하여 속진의 회포가 흩어져 사라졌다. 서늘한 달이 하늘 가운데 이르고 조수가 불어나서 갈매기가 울었다. 내가 시 두 수를 지었다. 첫 번째 시에,

긴 바람 불어서 흰 갈매기 잠 깨우는데 / 長風吹起白鷗眠

밤 달 허공에 걸리고 물결 하늘에 닿았네 / 夜月懸空浪接天

한 시대의 호화로웠던 일 이제는 적막하니 / 一代豪華今寂寞

장원의 옛날 일이야 생각하매 아득하구나 / 長源古事思茫然

하고, 두 번째 시에,

늙은 말은 주려 울고 해는 저물려는데 / 老馬飢嘶日欲曛

흰 소금과 조밥에다 무 뿌리 썰어 먹네 / 白鹽粟飯劈菁根

밀물 썰물 오고감은 삶과 죽음 같으니 / 潮來潮去猶生死

세상의 영고성쇠야 모두 뜬구름 같아라 / 在世榮枯摠似雲

하였다.

이윽고 세 명의 나그네가 세 명의 종을 데리고 우리들을 찾아와서 인사하였다. 정중이 도적일 것이라 생각하여 놀라 성급히 나서서 답례하기를 “손님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하니, 나그네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바닷가에 사는 사인(士人)으로, 아직 군자를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이르러 귀한 분이 왕림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악착스러운 소자(小子)가 아니고 필시 양반의 사족(士族)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찾아와서 뵙는 것입니다. 오늘은 밤이 깊고 이슬이 많이 내리거늘 어찌 내려가서 주무시지 않습니까.” 하였다. 정중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래 바다를 구경하러 왔습니다. 그윽한 흥취가 다하지 않았기에 서리와 이슬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였다. 함께 조수를 보다가 세 사람은 떠나갔고, 우리들은 밤중이 되어 유숙하는 집으로 돌아와서 방앗간 채에서 묵었다.

기미일(11일)

당두산을 출발하여 작은 길을 따라 곧바로 감로사(甘露寺)로 갔는데, 길을 잃었다가 다시 찾기도 하며 간신히 도달하였다. 산길이 매우 험난하여 감로사의 남쪽 고개를 오를 때는 등 넝쿨이 나무를 휘감아 오르고 낙엽에 발이 쑥쑥 빠졌다. 동쪽으로 오봉산(五峰山)을 등지고 서쪽으로 벽란도에 임하여 상류에 우뚝한 절이 있으니, 영락없는 병풍 속 풍경이었다. 절의 기둥에 배가 매어져 있었다. 절의 북쪽에 다경루(多慶樓)가 있고, 다경루 북쪽에 강물에 임한 단정(檀亭)이 있었다. 정중이 앉았다가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주지승으로 유사덕(劉思德)의 조카라고 일컫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유 선생과 구은(舊恩)이 있다는 이유로 정성껏 맞이하여 우리를 당상에 앉게 하고 물에 만 밥을 대접하였다. 또 이어 밥을 짓고는 조금 뒤에 다시 밥을 대접하며 구운 두부를 무수히 올리니, 내가 여러 벗들 중에서 가장 많이 먹었다.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기문을 쳐다보며 읽었다. 기문에 이르기를 “전조의 이자연(李子淵)이 중국에 갔다가 윤주(潤洲)의 감로사를 보고 본떠서 이 절을 창건했다.” 하였다. 감로사 북쪽에 휴휴암(休休庵)이 있으니, 또한 윤주의 휴휴암을 본뜬 것이다. 벽에 영천군(永川君) 이안지(李安之)의 시가 있으니, 곧 강(江)과 창(窓)의 쌍운시(雙韻詩)였다. 부림군(富林君) 낭옹(浪翁)과 허주거사(虛舟居士) 지정(持正) 등의 차운시가 또 벽에 적혀 있었다. 나도 백원과 함께 차운하였다. 창에 기대어 조수를 보고 있자니, 수족(水族)이 출몰하여 기괴한 형상을 다 기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후에 주지승과 작별하고 도로 나와서 평탄한 길을 따라 개성에 들어갔다. 길이 정릉(正陵)을 지나갔으나 날이 저물어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또 영빈관(迎賓館)을 지나서 오정문(午正門)으로 들어갔다. 백원의 노복들이 압각수(鴨脚樹) 아래에 술자리를 베풀고 기다리고 있었다. 회령이 피리를 불고 정중이 거문고를 타서 기쁨을 다한 뒤에 그만두었고, 달빛을 타고 피리를 불며 유숙하는 집에 이르러 묵었다.

경신일(12일)

한수가 와서 그의 인도 하에 우리들이 남대문에 들어가서 수창궁(壽昌宮)을 보았다. 수창궁은 공민왕이 남쪽으로 달아난 뒤에 창건한 것이다. 지금은 창고가 되었다고 한다. 홍례문(弘禮門)을 나와서 용두교(龍頭橋)를 건넜고, 내서소문(內西小門)을 나와서 개성부(開城府)를 지나다가 불은사(佛隱寺)를 바라보니, 불은사의 서쪽에 작은 동네 하나가 있었다. 한수가 이르기를 “별이 들어온 동네입니다. 고려 시중(侍中) 강감찬(姜邯贊)이 송나라 사신에게서 ‘이 사람은 문곡성(文曲星)의 정기이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 동네로 피하였습니다.” 하였다. 동네 안에 강 시중의 옛집이 있었다. 동네 어귀 동쪽에 조준(趙浚) 정승의 옛집이 있고, 서쪽에 전조의 시인 허금(許錦)의 옛집이 있으니, 모두 빈 터만 남아 있었다. 말을 세우고 한참 동안 있다가 돌아왔다.

태평관을 지나 동쪽으로 작은 동네에 들어가서 나의 선조인 정승 구정(龜亭) 선생의 옛집을 보았다. 집터는 지금 농부가 경작하는 밭이 되었고, 밭 곁에 바위가 있었으니, 이는 구정이 말에 오르던 대(臺)이다. 내가 말에서 내려 시 두 수를 지었다. 첫 번째 시에,

오백년이 끝나고 성군을 만나니 / 五百年終遇聖君

구정공 당시에 풍운이 제회하였네 / 龜亭當日際風雲

송악산 아래 처량한 고향집으로 / 凄凉故宅松山下

오세손이 베옷 입고 찾아왔다오 / 短布來過五葉孫

하고, 두 번째 시에,

옛 동산은 지금 농부의 밭이 되었으니 / 故園今作野人田

구정공 당시까진 일백 년 세월이라 / 此去龜亭一百年

교목 늘어선 한양의 종묘를 볼지니 / 喬木南朝看世廟

강후는 원래 네 조정의 현신이었네 / 絳侯元是四朝賢

하였다.

구정댁 아래에 호정(浩亭) 선생 하륜(河崙) 정승의 남은 집터가 있고, 남쪽의 고개 하나 뒤에 상락백(上洛伯) 김사형(金士衡) 정승의 남은 집터가 있으니, 또한 모두 밭이 되었다. 구경을 모두 마치고 동네 어귀를 나와서 동쪽으로 연복사(演福寺)에 들어가 능인전(能仁殿)을 보았다. 큰 불상 세 개가 있고, 사면에 아라한(阿羅漢) 500개가 있었다. 또 능인전의 5층 꼭대기에 올라서 회령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창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신과 기운이 활짝 펴졌다. 우리들이 내려와서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지은 비문을 읽었다. 이는 바로 우리 태조께서 연복사를 중창한 사적이다.

남문(南門)을 나와서 경덕궁(敬德宮)에 이르렀다. 말 위에서 웃옷을 걸머지고 오자 길 가는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궁궐 문에 이르렀을 때에 흰 까치가 날면서 우니,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대문에서 궁전을 다 보고 나와서 말에 걸터앉아 혜민국(惠民局) 앞에 이르렀다. 백원, 자화(子華), 숙형은 서쪽으로 연안(延安)으로 돌아갔고, 나는 정중, 자용과 더불어 동쪽으로 용암산(湧巖山) 낙산사(洛山寺)를 찾았다. 작은 시냇가에 이르러 한수와 작별하였고, 우리 세 사람이 동복 하나만 데리고 갔기 때문에 자용이 말 위에서 거문고를 잡았다. 성균관을 지나 탄현(炭峴)을 넘어 귀법사(歸法寺) 옛터를 찾으니, 화표주 2개가 있었다. 전조의 의종(毅宗)이 역신(逆臣) 정중부(鄭仲夫)에게 핍박을 받아 이 절에 갇혔었다.

마추령(馬墜嶺)을 지나 낙산사에 들어가 조포소(造泡所) 앞에 노복과 말을 남겨두고 낙산사에 오르니, 섬돌은 층계를 이루고 박달나무는 그늘을 드리웠다. 절의 승려 성휴(性休)는 내가 신축년(1481, 성종12)에 산을 유람했을 때에 시를 지어 준 사람이다. 나를 인도하여 들어가 앉게 하였다. 우리들이 곡식을 주고 밥을 짓게 하니, 성휴가 흰쌀로 바꾸므로 자용이 사양했으나 되지 않았다. 밥을 먹은 뒤에 절의 앞뒤를 둘러보니 참으로 절경이었다. 절 뒤에 성현(成俔) 공의 찬불비(贊佛碑)가 바위 사이에 빠져 있었다.

절 앞이 향로봉(香爐峰)이다. 학조(學祖)의 제자라고 일컫는 승려의 인도로 우리 세 사람이 향로봉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시원스레 트였고, 앞산의 불성암(佛成庵), 성불암(成佛庵) 등이 바라보였다. 이때 해가 지고 달이 나왔고, 바람이 일어 나무가 울렸다. 정중이 거문고를 타니, 산승(山僧)이 모두 귀를 세우고 들었다. 나와 자용은 이〔蝨〕를 잡다가 혹 담론하기도 하고 혹 춤추기도 하였다. 밤이 되어서야 들어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신유일(13일)

낙산을 출발하여 여울을 건너고 재를 넘어 적암(跡巖)을 지나갔다. 산승에게 길을 물어 영취산(靈鷲山) 현화사(玄化寺)에 들어갔다. 절 앞에 비석이 있었으니, 고려 주저(周佇)가 지은 것이다. 글 뜻이 비루하고 편벽되어 읽을 수가 없었다. 또 화표주 두 개와 장명등 하나와 석탑 하나가 있었다. 탑에는 친구 대유(大猷)와 덕우(德優)의 이름이 있었다. 절 앞에 옛 궁궐 터가 있었으니, 바로 목종(穆宗)과 현종(顯宗)이 거처하던 이궁(離宮)이고, 절은 성종(成宗)이 창건한 것이다. 절의 승려 일의(一義)가 또 내가 준 곡식을 바꾸어 흰밥을 대접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일의 등의 승려와 작별하였다.

길을 물어 오도령(悟道嶺)을 넘었다. 승려가 이르기를 “옛날의 다섯 성인이 도를 깨달은 곳입니다.” 하였다. 문수암(文殊庵)을 지나 원통사(元通寺)에 들어갔다. 절은 사냥꾼이 창건한 것이다. 승려가 이르기를 “옛날에 어떤 사냥꾼이 수달 한 마리를 쏘아 잡아서 그 가죽을 이미 벗겼는데, 수달이 영취산을 넘고 성거산(聖居山)에 들어가서 다섯 마리 새끼를 안고 죽었습니다. 사냥꾼이 핏자국을 따라 찾아내고는 곧 자비의 마음이 생겨서 활과 화살을 꺾고 그 수달을 묻어 달항(獺項)이라 하고, 절을 지어 원통사라 하고, 또 수달 무덤 곁에 석탑을 지었으니, 이는 수달의 명복을 빈 것입니다.” 하였다.

절 앞 박달나무 아래에서 정중이 거문고를 타고, 또 절 앞 누각 위에서 거문고를 타니, 절의 승려가 늘어서서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한 승려가 몹시 기뻐하며 축원하기를 “옛날 최치원(崔致遠) 무리들이 거리낌 없이 산을 유람하더니, 그대들도 이러한 무리가 아니겠소.” 하였다. 사주(社主) 해경(海敬)은 우리들을 대우함에 자못 곡진한 뜻이 있었다. 우리들이 곡식을 주자 해경이 또 흰쌀로 바꾸어 밥을 지었다. 밥을 먹은 뒤에 문밖 섬돌 위에 나가서 앉아 거문고를 타니, 승려들이 또한 나와서 들었다.

도로 방에 들어와서 현묘한 이치를 담론하며 유가와 석가의 설을 뒤섞어가다가, 얘기가 동산(董山)이 어머니를 배반한 것에 미치자 정중이 깊이 이를 배척하였다. 해은(海恩)이라는 승려는 김제(金堤) 사람이었는데, 자못 도리를 알아 형해(形骸)를 벗어났고 이미 무(無) 자에 대해 그 의미를 간파하였다. 함께 도를 담론하다가 합치됨을 기뻐하여 스스로 이르기를 “각각 자신의 살림을 꺼내어 견주어 본 것이오.” 하기에 내가 대동소이함을 인정하였다. 해은이 말하기를 “손님께서는 도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실행은 조금 못하구려.” 하여 함께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해은이 시주하기를 청하거늘 내가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나는 부처에게 아첨하지 않소.” 하니, 해은이 또한 웃으며 말하기를 “저는 지리(地理)를 조금 볼 줄 알아 사람의 수명을 늘릴 수 있고, 사람의 벼슬을 얻을 수 있고, 사람의 복을 더할 수 있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공은 문기(文記)를 갖고서 상을 보오, 산형(山形)을 갖고서 상을 보오?” 하니, 말하기를 “나는 문기가 없소.”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성품이 비루하고 촌스러워 수명을 더하기를 구하지 않고, 벼슬을 얻기를 구하지 않고, 복을 더하기를 구하지 않고, 죽어서 아미타불을 보기를 구하지 않소.” 하니, 해은이 사례하기를 “그렇다면 손님께서는 도를 맛본 것이오.” 하였다.

임술일(14일)

아침이 밝을 무렵에 창을 열고 당상에 앉아 동구를 보니, 산바람이 비를 끌고서 수십 리를 가고, 동쪽에는 아침 해가 막 솟아오르고 있었다. 내가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벽에 적었다.

아침 식사 뒤에 비가 개었다. 원통사를 출발하여 서쪽으로 가서 중암(中庵)에 이르니, 승려 한 사람만 있었다. 길잡이가 되어 주기를 청하여 수정굴(水精窟)에 이르렀다. 쉬면서 누웠다가 잠깐 잠들었고 잠이 깬 뒤에 사주(社主) 사식(思湜)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기를 청하여 남쌍련암(南雙蓮庵)에 올라갔다. 절은 매우 정결했으나 안에는 승려가 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들이 마루 위에 앉아 바라보다가 벽에 이름을 적었다. 절을 나와서 뒤쪽 바위에 오를 때에는 기기도 하면서 서성거암(西聖居庵)에 올랐다. 암자는 또 기이하고 예스러움이 쌍련암보다 한층 더하였다. 이름이 지심(智深)인 승려가 입정(入定)하고 있다가 나와서 나에게 시를 요구하거늘 내가 절구 한 수를 남겨 주고 도로 나왔다.

또 바위 위로 걸어가서 차일암(遮日巖)에 앉았다. 바위에는 해를 가린 흔적이 있었다. 사식이 말하기를 “여기는 다섯 성인이 모였던 곳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다섯 성인은 어떤 사람이오?” 하니, 사식이 말하기를 “옛날 다섯 성인이 이 산꼭대기에 올라 초가집을 짓고 정진하여 여기에서 도를 깨달았습니다. 세월이 오래되어 그 이름은 알지 못하고, 단지 다섯 성인으로써 그 암자를 호칭했으니, 지금의 남쌍련암, 서성거암, 북쌍련암, 남성거암, 북성거암 등이 이것입니다. 이 산의 이름이 성거산(聖居山)이 된 것도 아마 이 때문인 듯합니다.” 하였다.

이때 서쪽에서 남북의 두 성거암을 굽어보다가 또 성거산 상봉에 올라갔다. 남풍이 매우 거세고 암석이 매우 험하여 발을 땅에 붙일 수 없으니, 정중이 크게 두려워하여 굳이 우리들을 끌고 내려가려 하기에 나와 자용이 따랐다. 북쌍련암에 이르러서는 바람이 더욱 거세지고 찬비가 얼어 눈이 되어 누른 낙엽과 뒤섞여 공중에 날렸다. 창을 열고 바다를 바라보니, 마치 신령이 기운을 일으키는 듯하여 정중과 자용이 크게 기뻐하였다. 정중이 〈청산별곡(靑山別曲)〉의 첫 번째 곡을 타니, 주지승인 성호(性浩)도 크게 기뻐하여 포도즙을 걸러 내와 우리들의 마른 목을 적셔 주었다. 나 또한 기뻤으니, 근래 먹었던 산중의 음식 중에 이것과 견줄 것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눈이 걷히자 나와서 사식과 함께 몇 리쯤을 걸어 윤필암(潤筆庵)에 들어갔다. 행승(行僧) 몇 사람이 이미 먼저 거접(居接)하고 있다가 내가 오는 것을 보고 기쁘게 맞이하여 들어가 앉게 하였다. 자용이 말하기를 “내가 이전에 지리산 승당(僧堂)에 들어가서 3년을 지냈고, 뒤에 금강산에 들어가서 묵언(默言)한 것이 2년이었소. 지금 또 광망(狂妄)한 객(客)을 따라 여기에 이르렀다가 행각승(行脚僧)들을 보게 되었으니, 어찌 숙세(宿世)의 인연이 아니겠소.” 하니, 승려들이 크게 놀라며 남달리 여겼고, 앞 다투어 검은 바리때와 검은 수저를 가져다 우리들 앞에 늘어놓고 밥을 대접하였다. 내가 첫 번째 앉고 자용이 다음에 앉고 정중이 끝에 앉았다. 어떤 승려가 자용에게 합장하고 말하기를 “가운데 앉은 객인(客人)은 장대한 모습이 나옹(懶翁)보다 배나 뛰어나고 학문이 또 높으니, 자리는 비록 가운데에 있으나 필시 먼저 깨달은 사람일 것이오.” 하였다. 식사가 끝나고 정중이 또 거문고를 내어서 타니, 모든 승려가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겼다.

사식이 작별하고 떠나자, 또 행승 경의(敬如)에게 길잡이를 청하여 암자를 출발하여 작은 굴 하나를 지나 내리는 눈을 무릅쓰고 의상암(義相庵)에 들어갔다. 암자에는 의상의 진영(眞影)이 벽에 걸려 있었다. 내가 의상대(義相臺)에 올라가 앉았을 때에 눈이 조금 그치고 의상대 앞에 무지개가 나타났다. 나와서 황련암(黃蓮庵) 앞길을 지나 관음굴(觀音窟)로 가서 묵었다.

계해일(15일)

아침에 박연폭포(朴淵瀑布)를 보러 가니, 높이가 수십 길이었다. 정중과 자용이 몹시 경이롭게 여겼으나 내가 전날 본 것과 견주면 우뚝 솟은 것이 그다지 기이하지는 않았다. 이는 내가 금강산 십이폭포(十二瀑布)를 보았기 때문이니, 맹자가 말한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고연(姑淵) 곁의 바위 위로 내려갔다. 정중이 거문고를 타니 거문고 소리가 매우 맑았다.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바위에 적었다. 다 구경하고 도로 관음굴로 올라가서 아침밥을 먹고 굴속의 석관음(石觀音)을 보았으니, 이는 왕 태조(王太祖)의 원불(願佛)이다.

폭포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대흥사(大興寺) 옛터에 앉았고, 성해암(性海庵)을 찾다가 길을 잃어 정광암(定光庵)으로 잘못 들어갔다. 또 암자의 남쪽 길을 따라 서산(西山)의 허리를 돌아서 가다가 헷갈려 길을 잃고 높은 산 수목 밑을 걸어가니, 낙엽에 무릎이 빠져서 간신히 길로 접어들었다. 배가 고파 석수어(石首魚 조기 )를 먹고, 적멸암(寂滅庵)에 올라가서 무 뿌리를 먹었다. 또 산꼭대기 길을 나와서 남쪽으로 가다가 또 서해의 석양이 물에 빛나는 것을 보게 되니, 정중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근일의 산행에 오늘 같은 걸음은 없었다.” 하였다.

천마산(天磨山) 청량봉(淸凉峰) 동쪽 길을 지나 영통사(靈通寺) 뒤쪽 봉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골짜기 가운뎃길을 따라 대숲을 헤치며 10여 리를 가서 비로소 영통사 길에 도달하였다. 절에 들어가서 누각 위에 오르니, 두 번 온 걸음이라서 경관은 다르지 않으나 낙엽이 떨어진 것은 달랐다. 사주(社主)가 동쪽 곁채에서 우리들에게 밥을 차려 주고 서쪽 곁채에 묵게 하였다. 한밤중에 옥린(玉麟)이란 승려가 와서 얘기를 나누었다. 자못 총명하고 선법(禪法)을 이해하므로 서로 더불어 크게 웃으며 밤을 지새웠다.

갑자일(16일)

영통사 뒤에 있는 흥성사(興聖寺)에 육행법파(陸行法派)를 얻었다고 스스로 일컫는 노승(老僧)이 있었다. 일찍이 들판에서 탁발하다가 나와 함께 잠시 얘기를 나눈 사람으로, 쌀 다섯 말을 얻어 제자 한 사람과 더불어 겨울이 끝나도록 정진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을 보고는 인도하여 밥을 지어 대접하려 하니, 내가 애처롭게 여겨 사양했으나 노승의 정성스럽고 간절한 마음을 보고 부득이 허락하였다. 또 학지(學知)라는 승려를 보았는데, 또한 유생을 많이 사귀어 유가의 풍모를 제법 알았다. 세 승려와 작별하고 와서 판문(板門)에서 묵었다.

을축일(17일)

장단(長湍)을 지나는 길에 이자하(李子賀)를 만났고, 또 백연(伯淵)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임진(臨津)을 건너서 마산역(馬山驛)에서 묵었다.

병인일(18일)

비를 맞으며 서울에 들어왔다.

 

□지리산 일과(日課)

정미년(1487, 성종18) 9월 27일 계해일

진주(晉州) 여사등촌(餘沙等村)을 출발하여 단속사(斷俗寺)로 향하였다. 동구(洞口)에 ‘광제암문(廣濟巖門)’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바위 표면에 새겨져 있으나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른다. 암문(巖門)에 들어가서 1리쯤 지점에 단속사가 있었다. 예인(隷人)의 집이 감나무 숲과 대나무에 어우러져 한 촌락을 이루었고, 그 가운데 큰 가람(伽藍)이 있었다.

그 문에 ‘지리산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문 앞에 탄연선사비명(坦然禪師碑銘)이 있으니,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가 짓고, 금나라 대정(大定) 12년 임진년(1172, 고려 명종2) 1월에 세운 것이다. 절 서쪽에 신행선사비명(神行禪師碑銘)이 있으니, 당나라 위위경(衛尉卿) 김헌정(金獻貞)이 짓고, 원화(元和) 8년(813, 신라 헌덕왕5) 9월에 세운 것이다. 절 북쪽에 감현 선사(鑑玄禪師) 통조(通照)의 비석이 사람들에 의해 뽑힌 채로 있었다. 승려가 이르기를 “세속의 무리들이 한 짓입니다.” 하였다. 한림학사(翰林學士) 김은주(金殷周)가 짓고, 개보(開寶) 8년 갑술년(974, 고려 광종25) 7월에 세운 것이다.

절 안의 동북쪽 모퉁이에 방 한 칸이 있으니,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독서하던 방이다. 절 뜰에 매화 두 그루가 있으니, 전조(前朝)의 정당문학(政堂文學) 강통정(姜通亭)이 손수 심은 것인데 매화나무가 지난 4, 5년 전에 말라죽어 그 증손 용휴(用休) 선생이 다시 심었다.

나는 탄연선사비명을 읽은 뒤에 들어가서 주지 성공(聖空)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공은 일암(一庵)의 문인으로, 나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다시 나와서 서쪽과 북쪽에 있는 두 비석을 보고, 들어가서 강용휴가 심은 매화나무를 보았다. 누각 위에 앉아서 고개를 들어 강용휴가 지은 〈종매기(種梅記)〉를 읽었다. 성공이 나에게 밥을 대접하고 또 시종에게도 밥을 내주었다. 식사가 끝난 뒤에 주인과 작별하고 아래로 내려왔다. 조연(糟淵)에 이르러 알몸으로 들어가서 목욕하니, 물과 바위가 맑고 산뜻하였다. 조연 북쪽에 샘이 있는데, 바위 표면에서 솟구쳐 나와서 유달리 맑고 시원하였다. 나는 손으로 움켜서 마셨다.

광제암문을 도로 나와서 불령(佛嶺)을 넘어 백운동(白雲洞)을 지나갔다. 백운동의 물이 덕천(德川)의 물과 합쳐져서 태연(苔淵)이 된다. 태연의 하류는 곧 진주의 남강(南江)이다. 태연을 지나 덕천의 벼랑 위를 따라 10여 리를 갔다. 긴 냇물을 내려다보니 확 트이고 시원하여 마음이 상쾌하였다. 동구를 다 지나서 양당(壤堂)이라는 한 마을에 들어갔다. 집집마다 큰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감나무와 밤나무가 뒤덮고 있었다. 사립문이나 닭과 개들이 영락없이 무릉도원이나 주진촌(朱陳村)인 듯하였다.

그 오른쪽에 시천동(矢川洞)이 있다. 시천은 진주의 속현(屬縣)이다. 그 현의 아전들은 지리산 석교(釋敎)가 되기를 바라서 벼슬이 호장(戶長)이나 기관(記官)에 이르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가 체임(遞任)되면 다시 속인으로 돌아오니, 드디어 오랜 풍습이 되어 관장(官長)도 그 풍속을 고칠 수 없었다.

날이 저물어 덕산사(德山寺)에 이르렀다. 이 절은 두 냇물이 합류하는 언덕에 있고, 대나무가 두루 펼쳐져 있다. 그 왼쪽에 있는 냇물은 고였다가 다시 흐르는데 용연(龍淵)이라 하고, 오른쪽에 있는 폭포는 떨어졌다가 소용돌이를 이루는데 부연(婦淵)이라 한다. 그 깊이는 한량이 없다.

주지 도숭(道崇)은 일찍이 비해당(匪懈堂)을 만난 뒤에 선림(禪林)에 이름이 있었는데, 비해당이 패망하자 임천(林泉)에 자취를 감추었다. 나를 만나 담론하며 매우 기뻐하였고, 나와 시종들에게 밥을 대접함이 매우 융숭하였다. 이야기가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그의 무리 형유(泂裕), 의문(義文), 의화주(誼化主) 등이 모두 반가운 눈빛으로 나를 대하였다. 이날 40리를 갔다.

갑자일(28일)

도숭, 형유 등과 함께 용연과 부연을 둘러보았는데, 연못 곁의 대나무가 감상할 만하였다. 의화주가 나에게 밥을 대접하였다. 식사 뒤에 도숭이 의문으로 하여금 나를 데리고 길을 안내하게 하였다. 부연에서 위로 올라가 붉게 물든 나무숲 속을 걸어갔다. 왼쪽으로 금장암(金藏庵), 해회암(解會庵)을 지나고 오른쪽으로 석상암(石上庵), 백왕암(百王庵), 도솔암(兜率庵), 내원암(內院庵)을 지난 뒤에 동쪽으로 고개 하나를 돌아 대숲 속으로 들어가서 어렵게 뚫고 지나왔다. 회방령(檜房嶺)에 올랐다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갈대밭으로 들어갔고, 갈대밭을 다 지나서 싸리나무 숲으로 들어가니 길이 몹시 험난했다.

산길로 40리를 가서 보암(普庵)에 들어가니 감나무와 대나무가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주지승 도순(道淳)이 감을 따서 대접하였다. 도순은 무(無) 자 화두에 대해 뜻을 간파함이 정밀하지 못하여 스스로 ‘나밖에 아무도 없다.’라고 생각하고는 불경을 외거나 염불하는 것을 그만두고 앉거나 누울 때에 언제나 음경(陰莖)을 드러내 놓았고, 다방면으로 계책을 내어 승도(僧徒)를 모아 선림(禪林)의 종주(宗主)가 되려는 자였다. 나와 처음 담론할 때는 조금 합치했지만, 재차 얘기할수록 망녕된 주장이 들쭉날쭉하고 윤회의 법칙을 고집하였다. 한밤중에 나에게 기침(起寢)이나 잘 하라고 하였는데, 말씨가 부드럽고 공손하였다.

을축일(29일)

보암을 출발하였다. 동상원사(東上院寺)를 바라보면서 문수암(文殊庵)의 삼밭을 지나 나무 밑의 냇가를 걸어갔다. 어지러운 돌밭에는 길이 없고, 가끔 돌을 모아 탑을 만들어 산길을 표시한 것이 있었다. 나는 돌탑을 찾아가다가 갑자기 법계암(法界庵) 길을 잃었다. 또 산비를 만나 석굴 아래서 묵으려고 하였으나 비가 개어 다시 길을 가서 향적암(香積庵)에 이르렀다.

암자에 한 명의 승려가 있었다. 이름이 일경(一冏)으로, 자못 총명하여 선지(禪指)를 깨달았고, 일찍이 무(無) 자 화두에 대해 대의를 대략 간파하였다. 일경이 나에게 《육조단경(六祖檀經)》을 보여 주었는데, 자못 청정(淸靜)하여 애호할 만하였다. 이날 40리를 갔다.

병인일(30일)

의문, 일경 선사와 함께 향적암에서 상봉(上峰)으로 올라갔다. 구름에 묻히고 바람에 깎이어 나무는 온전한 가지가 없고 풀은 푸른 잎이 없었다. 서리가 매섭고 땅이 얼어 추위가 산 아래보다 갑절이나 더하였다. 구름사다리와 석굴은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였는데 우리들이 뚫고서 올라갔다. 상봉에 올랐을 때에 이른바 천왕(天王)이라는 것을 보았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는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摩倻夫人)이 이 산의 신령이 된 것으로, 당세의 화복(禍福)을 주관하다가 장래에 미륵불을 대신하여 태어날 자입니다.” 하였다. 그 말이 어찌 이리 황당하며 근거가 없단 말인가. 나는 사당 모퉁이의 바위 부리에 앉았다. 엷은 구름이 사방으로 걷히어 산과 바다를 헤아릴 수 있었고, 전라도와 경상도가 내 발 밑에 있었다. 사당 안에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정의문(鄭義門)의 현판 기문이 있고, 내 벗 김대유(金大猷) 등의 이름이 현판 위에 적혀 있었다. 저녁이 되어 향적암으로 도로 내려오니, 왕복 20리 길이었다.

10월 초하루 정묘일

쌀 한 말을 남겨 두고 일경과 작별하였다. 향적암을 출발하여 소년대(少年臺)에 올랐다. 솜대를 뚫고 계족봉(雞足峰)을 지나 산길로 30리를 가서 빈발암(貧鉢庵)에 닿았다. 암자 아래에 영신암(靈神庵)이 있고 암자 뒤에 가섭전(伽葉殿)이 있으니, 세속에서 이른바 영험이 있다는 곳이다. 내가 상세히 살펴보았지만 무딘 석상만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내가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위를 쳐다보며 산 하나를 올라갔는데, 이름이 좌고대(坐高臺)이다. 상ㆍ중ㆍ하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으니, 심신(心神)이 놀라 두근거려 더는 올라갈 수 없었다. 좌고대 뒤에는 좌고대보다 더 높은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위를 내려다보니 또한 기이한 구경거리였다. 의문(義文)이 좌고대 아래에 앉아서는 두려움 때문에 올라오지 못하였다. 이날 서쪽 방면이 전날보다 갑절이나 청명하여 서해와 계룡(鷄龍) 등의 여러 산을 뚜렷이 구분할 수 있었다. 잠깐 있다가 빈발암으로 도로 내려와서 저녁밥을 먹었다. 그 무렵에 지는 해가 암자에 걸렸는데 아래의 인간 세상은 밤처럼 어둡게 보였다.

무진일(2일)

빈발암을 출발하여 영신암을 통과하고 서쪽 산 정상의 수목 속으로 30리를 가서 의신암(義神庵)에 이르렀다. 암자 서쪽은 모두 긴 대나무이고, 감나무가 대나무 사이에 뒤섞여 나 있었다. 붉은 감이 햇빛에 투명하였다. 방앗간과 뒷간도 대나무 사이에 있었다. 근일에 구경한 아름다운 경치로는 이에 비할 것이 없었다.

전(殿) 안에는 금불(金佛) 하나가 있었다. 서쪽 방에 승상(僧像) 하나가 있어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분은 의신조사(義神祖師)입니다. 이곳에 이르러 도를 닦다가 도가 반쯤 이루어졌을 때에 이 산의 천왕(天王)이 조사에게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를 권하고 스스로 굴뚝새〔鷦鷯〕가 되어 길을 인도하므로 조사가 그 새를 따라갔습니다. 큰 고개에 이르러 굴뚝새가 수리〔鵰〕로 변하였으니, 지금도 그 고개 이름을 초료조재(鷦鷯鵰岾)라고 합니다. 수리가 또 길을 인도하여 하무주(下無住) 터에 이르렀습니다. 조사가 묻기를 ‘이곳은 며칠이면 도를 이루겠습니까?’ 하니, 수리가 말하기를 ‘삼칠일(三七日)입니다.’ 하였습니다. 조사가 더디다고 여기자, 수리가 또 중무주(中無住) 터에 이르렀습니다. 조사가 묻기를 ‘이곳은 며칠이면 도를 이루겠습니까?’ 하니, 수리가 말하기를 ‘칠일입니다.’ 하였습니다. 조사가 또 더디다고 여기자, 수리는 또 상무주(上無住) 터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말하기를 ‘이곳은 하루면 도를 이룰 수 있지만, 여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조사가 스스로 들어가서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정진하며 이름을 바꾸어 무주조사(無住祖師)라 하였습니다.” 하니, 그 말이 매우 황당하였다.

암자 앞에서 도시락을 먹은 뒤에 대숲 속을 통과하여 세 개의 큰 내를 건너 내당재(內堂岾)에 올랐다. 북쪽으로 초료조재를 보며 남쪽으로 풀숲 속으로 내려가 30리를 가서 칠불사(七佛寺)에 이르렀다. 절의 본래 이름은 운상원(雲上院)이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에 사찬(沙飧) 김공영(金恭永)의 아들로 이름이 옥보고(玉寶高)라는 사람이 있었다. 거문고를 메고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서 50여 년 동안 거문고로 마음을 닦으며 30곡을 작곡하여 매일 연주하였다. 경덕왕(景德王)이 거리의 정자에서 달을 구경하고 꽃을 감상하다가 홀연히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왕이 일명(一名)이 문복(聞福)인 악사(樂師) 안장(安長)과 일명이 견복(見福)인 악사 청장(請長)에게 묻기를 “이것은 무슨 소리인가?” 하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인간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니, 바로 옥보선인(玉寶仙人)이 거문고를 타는 소리입니다.” 하였다. 왕이 7일 동안 재계하자, 옥보가 왕 앞에 이르러 30곡을 연주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고 안장과 청장으로 하여금 익혀서 악부(樂府)에 전하게 하였다. 또 그가 거처하던 절에 큰 가람을 세우니, 37국(國)이 모두 이 절을 으뜸으로 여겨 원당(願堂)을 삼았다. 형 수좌(泂首坐)는 선법(禪法)을 조금 알아 산중 승려들의 스승이 된 사람인데, 이상은 그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기사일(3일)

이 절의 온 법주(溫法主)가 나에게 옥보고의 사적을 보여 주었는데, 형 수좌가 말한 것과 같았다. 작별할 때에 형 수좌가 나에게 시를 청하기에 내가 절구(絶句) 한 수를 남겼다.

서쪽으로 금륜암(金輪庵)에 올랐다. 전 선사(田禪師)가 우리를 맞아들여 과일을 대접하였다. 다시 청굴(靑窟)을 지나 시내 하나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헷갈려 길을 잃은 것이 두 번이었다. 처음에는 멀리까지 헤매다가 돌아왔고 끝에는 조금 갔다가 돌아왔다. 큰 고개 하나를 넘어 벌초막(伐草幕)에 이르렀다. 벌초막의 위쪽에 새로 지은 초막 한 칸이 있었다. 설근(雪根)이라는 승려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나에게 김치, 간장을 가져다주었다. 이날 내 발에 못이 박혀 간신히 걸으며 30리를 갔다.

경오일(4일)

설근, 의문과 함께 반야봉(般若峰)에 올랐다. 내려다보니 봉우리 북쪽에 혼흑동(昏黑洞)과 월락동(月落洞)이 있고 초막 한 칸이 있었으니, 설근이 사는 곳이다. 또 그 북쪽의 중봉산(中鳳山)은 곧 빈발봉(貧鉢峰)의 북쪽 줄기이다. 산등성이 끊어진 곳에 적조암(寂照庵), 무주암(無住庵) 등의 암자가 있다. 또 그 북쪽의 금봉산(金鳳山)에는 금대암(金臺庵)이 있다. 반야봉 서쪽에 방장산이 있고, 방장산 꼭대기에 만복대(萬福臺)가 있다. 만복대 동쪽에 묘봉암(妙峰庵)이 있고, 만복대 북쪽에 보문암(普門庵)이 있으니, 일명이 황령암(黃嶺庵)이다. 반야봉 남쪽에 고모당(姑母堂)이 있고, 고모당 남쪽에 우번대(牛翻臺)가 있으니, 우번 선사(牛翻禪師)의 도량(道場)이었다. 반야봉 동쪽에 선인대(仙人臺)가 있고, 선인대 동쪽이 곧 쌍계동(雙溪洞)이다. 빈발봉은 반야봉의 동쪽에 있고, 천왕봉(天王峰)은 또 그 동북쪽에 있다.

나는 서쪽으로 반야봉 중봉(中峰)을 내려갔다. 주위를 둘러본 뒤에 우동수(牛銅水)를 내려다보았다. 물이 마르고 흰 벌레만 우물에 가득하여 좋은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이날 누른 구름이 사방에 자욱하여 산 아래 보이는 곳은 남원(南原)뿐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의문이 초막으로 돌아가기를 재촉하였다. 왕복 20리 길이었다.

신미일(5일)

쌀 다섯 되를 남겨 두고 설근과 작별하였다. 식사 뒤에 벌초막을 출발하여 연령(淵嶺)을 지나 고모당에 올랐다. 오른쪽으로 우번대를 끼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보월암(寶月庵), 당굴암(堂窟庵), 극륜암(極倫庵) 등의 암자를 지났다. 승려가 이르기를 “송나라 인종황제(仁宗皇帝)가 총애하던 비(妃)가 죽어 꿈속에 인종황제에게 고하기를 ‘첩은 고려국(高麗國) 지리산 남쪽 화엄사(花嚴寺) 골짜기의 지옥에 들어갔으니, 원하건대 첩을 위하여 명복을 비는 절을 지어 주소서.’ 하니, 황제가 슬퍼하며 극륜사(極倫寺)를 지었습니다.” 하였다. 그 말은 문헌상의 근거가 없어 믿을 것이 못 된다.

이날 30리를 가서 봉천사(奉天寺)에 닿았다. 절은 대숲 속에 있고, 누각 앞의 긴 시내가 대나무 밑을 지나가며 우니,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이날 황제가 붕어했다는 기별을 들었다. 늙은 주지 육공(六空)은 신축년(1481, 성종12)에 산을 유람할 때 개성(開城)의 감로사(甘露寺)에서 보았던 사람이다. 나를 누각 위로 영접하고 선당(禪堂)에 묵게 하였다.

임신일(6일)

비에 막혀 봉천사에서 머물렀다. 누각 위에 앉아 근체시(近體詩) 한 수를 지어 누각 창에 붙였다.

계유일(7일)

수좌(首坐) 도민(道敏)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선산 김씨(善山金氏)라고 일컬으며 내가 양식이 떨어진 것을 보고 쌀 다섯 되를 선사했다. 최충성 필경(崔忠成弼卿)과 김건 자허(金鍵子虛) 등이 지급암(知及庵)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안부를 물었다.

밥을 먹은 뒤에 내려와서 황둔사(黃芚寺)를 구경하였다. 절의 옛 이름은 화엄사(花嚴寺)로, 명승(名僧) 연기(緣起)가 창건한 것이다. 절의 양쪽은 모두 대나무 숲이었다. 절 뒤에 금당(金堂)이 있고, 금당 뒤에 탑전(塔殿)이 있는데, 전각이 몹시 밝고 산뜻하였다. 차 꽃과 큰 대나무와 석류나무와 감나무가 그 곁을 에워싸고 있었다.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니 긴 시내가 가로로 걸쳐 있는데, 그 아래가 웅연(熊淵)이다.

뜰 가운데에 석탑이 있었다. 탑의 네 모퉁이에 탑을 떠받치는 네 기둥이 있고, 또 부인(婦人)이 중간에 서서 정수리로 떠받치는 형상이 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것은 비구니가 된 연기의 어머니입니다.” 하였다. 그 앞에 또 작은 탑이 있었다. 탑의 네 모퉁이에 또한 탑을 떠받치는 네 기둥이 있고, 또한 남자가 중간에 서서 정수리로 떠받치며 탑을 떠받치고 있는 부인을 우러러 향하고 있는 형상이 있으니, 이것이 연기이다. 연기는 옛날 신라 사람으로, 그 어머니를 따라 이 산에 들어와서 절을 세웠다. 제자 천 명을 거느리고서 화두(話頭)를 정밀히 탐구하니, 선림(禪林)에서 조사(祖師)라고 불렀다.

저녁에 필경과 자허가 나를 찾아왔다. 법주(法主) 설응(雪凝)이 인도하여 그의 방에 묵게 하고 배와 감을 대접하였다. 한밤중에 등불을 밝히고 필경 등이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였다. 설응은 비록 불자(佛者)이지만 일찍이 제학(提學) 유진(兪鎭)에게 《중용장구(中庸章句)》를 배운 사람이라서 우리들의 말을 듣고도 거북해하지 않았다. 밤을 새우며 얘기하였다.

갑술일(8일)

황둔사 비물 선사(非勿禪師)가 나에게 밥을 대접하였다. 필경과 자허가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나에게 봉천사에서 유숙하기를 청하였다. 육공 대사가 다시 우리들을 청하므로, 내가 필경 등과 함께 도로 봉천사에 들어갔다. 밤에 《근사록》을 보았다. 그때 지급암의 오 수좌(悟首坐)가 우리들의 성정(性情)에 관한 논의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마음을 잡거나 성찰하는 공부는 유가와 불가가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다.

을해일(9일)

설응이 그 제자를 시켜 종이를 가지고 봉천사로 와서 시를 청하거늘 내가 오언(五言) 장편(長篇)을 남기고 작별하였다. 또 필경, 자허 두 사람과 작별하니, 필경이 흰쌀 4말을 주며 작별하였다.

나는 황둔사 앞의 큰길을 따라 구례(求禮) 정정촌(鼎頂村)을 지나갔고, 강변을 따라가다가 웅연 벼랑길을 지나갔다. 온 산은 비단으로 수 놓였고, 물은 콸콸거리며 산을 뚫고 울었다. 걸어서 30여 리를 가니 정신이 상쾌하였다. 진주(晉州) 화개동(花開洞)에 이르렀다. 웅연 벼랑길을 벗어나 쌍계천(雙溪川) 서쪽 가를 거슬러 올라갔다. 좌우의 인가(人家)가 그림 병풍처럼 환했다. 진주와 구례 경계의 소후(小堠)에서 또 20여 리를 걸어갔다. 서쪽에서 동쪽을 건너자 문처럼 생긴 양쪽의 바위가 있었다.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손수 적은 것이다. 석문 안 1, 2리쯤에 쌍계사(雙溪寺)가 있었다.

내가 승려에게 묻기를 “어디가 청학동이오?” 하니, 의문이 말하기를 “석문을 3, 4리쯤 못 미쳐 동쪽으로 큰 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 안에 청학암(靑鶴庵)이 있으니, 아마 옛날의 청학동인 듯합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지팡이 짚고서 청학동 찾으려 하니 / 杖策欲尋靑鶴洞

숲 너머로 들리는 건 원숭이 울음뿐 / 隔林惟聽白猿啼

누대는 아득하고 삼신산은 저 멀리이니 / 樓臺縹緲三山遠

이끼 속에 어렴풋이 네 글자 적혀 있네 / 苔蘚依稀四字題

하였으니, 석문 안 쌍계사 앞이 여기가 아니겠는가. 쌍계사 위 불일암(佛日庵) 아래에 청학연(靑鶴淵)이 있으니, 여기가 청학동임은 의심할 것이 없다.

절 앞에 광계(光啓) 3년(887, 신라 진성여왕1) 7월 모일에 세운 진감선사비명(眞鑑禪師碑銘)이 있으니, 바로 문창후가 교서(敎書)를 받들어 짓고 글씨와 전액(篆額)도 아울러 쓴 것이다. 선사의 이름은 혜소(慧昭)이다.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였고, 고국에 돌아와서 이 절을 창건하고 임금을 위해 염불하며 일생을 마쳤다. 문창후가 그의 도를 칭찬한 것이 너무 심하니, 선사는 문자선(文字禪)을 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문창후가 어찌 추앙함이 이와 같단 말인가.

내가 비석을 다 읽고서 나무뿌리로 된 다리를 건넜다. 산승(山僧)이 전하기를 “문창후가 손으로 나무뿌리를 틀어잡고 시냇물을 건너자, 그 뿌리가 점점 커져 다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600년 뒤에 들불에 타게 되었으나 아직도 검은 줄기가 남아 있습니다.” 하였다.

절 앞에 흰 국화 몇 떨기와 사계화(四季花) 한 그루가 있었다. 내가 꽃 사이에 앉아 쉬면서 차마 떠나가지 못하였다. 절의 부엌은 대통을 이어서 시냇물을 끌어들이니, 대통 끝에 물소리가 울렸다. 절 뒤에 금당(金堂)이 있으니, 친구 여경(餘慶)과 징원(澄源)이 이 방에서 글을 읽었다. 방 앞에 팔영루(八詠樓) 옛터가 있으니, 곧 문창후가 거처하던 방이다. 지금은 큰 대나무 수십 줄기만 있을 뿐이다. 밤에 선당(禪堂)에서 묵었다. 객승 학유(學乳)가 있었다. 일찍이 여경을 따라 반야봉을 유람한 사람으로, 내가 그와 함께 선(禪)을 얘기하였다. 나에게 시를 애써 요구하기에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었다.

병자일(10일)

시냇물을 10여 리쯤 거슬러 올라서 왼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 불일암에 이르렀다. 이 암자는 바로 혜소가 도를 닦던 곳이다. 암자 앞에 청학연이 있으니, 고운(孤雲)이 일찍이 그 위에서 노닐었다. 내가 암자의 승려 조성(祖成)에게 찾아가 보기를 청하였으나 길이 궁벽하여 찾을 수 없었다. 또 보주암(普珠庵)에 올랐다. 바로 보주 선사(普珠禪師)의 옛 거처이니, 암자의 이름이 이로 인하여 붙여진 것이다. 어떤 노승(老僧)이 나에게 배와 감을 대접하였다.

불일암으로 돌아와서 묵었다. 조성이 시 한 수를 지어 나에게 주었는데, 시운(詩韻)이 원숙(圓熟)하며 청광(淸曠)하고 주밀(周密)한 것으로 보아 일찍이 시 짓는 데에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다. 나에게 차운하기를 요구하여 내가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고운은 돌아가서 머물지 않고 / 孤雲歸不駐

청학은 돌아옴이 어찌 더딘가 / 靑鶴返何遲

인물은 고금에 다름이 없으니 / 人物無今古

맑고 빈한한 가도의 시일세 / 淸寒賈島詩

내가 보기에 조성은 재능이 비상하고 유가(儒家)의 기상이 있기 때문에 운운한 것이다. 이날 눈이 내렸다.

정축일(11일)

조성이 나의 봉천사(奉天寺) 율시(律詩)에 화운(和韻)하여 나를 송별하였다. 조성과 작별하고 보주암을 지나 불지령(佛智嶺)에 올랐다가 묵계동(默溪洞)으로 내려가니, 물과 바위가 매우 맑고 기이하였다. 오서연(鼯鼠淵), 광암연(廣巖淵), 용회연(龍廻淵)을 지나고 비문령(碑文嶺)을 넘어 사자암(獅子庵)에 이르렀다.

이 암자에 있는 승려 해한(海閒)과 계징(戒澄)이 나를 맞이하였다. 해한은 바로 나의 젊은 날 불가(佛家)의 벗이다. 10여 년을 보지 못했더니, 나를 보고 반가워하였다. 이때 밝은 달이 하늘 가운데 떴고 큰 대나무가 암자를 에워싸고 있는데 가지 끝의 높이가 사람 키의 3, 4십 배 정도였다. 말을 주고받으며 오랜 회포를 풀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무인일(12일)

해한이 나에게 굳이 머물기를 청하므로 그대로 머물렀다. 식사 뒤에 해한, 계징 등과 함께 내려가서 오대사(五臺寺)를 구경하였다. 절 앞에 고려 국자 사업(國子司業) 권적(權適)의 〈수정사기(水精社記)〉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송나라 소흥(紹興) 8년(1138, 고려 인종16)에 세워진 것이다. 수정(水精)은 일명이 여의주(如意珠)이다. 무자년에 맹승(盲僧) 학열(學悅)이 나라에 건의한 뒤에 탈취하여 그것을 낙산사(洛山寺) 탑 속에 자신의 이름과 함께 안치하였다. 비문을 다 읽고 들어가 누대 위에 앉았다. 어떤 승려가 나에게 감을 대접하였다. 한참 있다가 사자암으로 도로 올라갔다.

기묘일(13일)

해한, 계징과 작별하였다. 정축일(11일)부터 오늘 아침까지 나와 노복 다섯 사람에게 해한이 모두 식량을 마련해 주었다.

오대사를 지나 또 부윤(府尹) 하숙부(河叔孚)의 집을 들렀다. 집이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하였으며 채소밭이 앞에 일구어져 있고 대나무 숲이 두루 펼쳐졌으니, 중장통(仲長統)이 〈낙지론(樂志論)〉에서 말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40여 리를 걸어가서 다시 여사등촌에 이르렀다.

 

제7권

□냉화(冷話)

○《호산노반(湖山老伴)》1부(部) 114편은 바로 고인이 된 나의 벗 자정(子挺)이 편찬한 것이다. 자정은 세상에 드문 큰 재주를 가졌으나 태어난 지 26년 만에 백의(白衣)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문장과 행실은 내가 지문(誌文)에서 상세히 말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산야에 처하기를 즐기고 세상의 번잡하고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옛사람의 고율가사(古律歌詞) 중에서 한적하여 감상하기에 매우 좋은 것을 뽑아 《호산노반》이라 이름하고 강산에서 노년을 마치려는 계획과 천고의 옛사람과 벗하려는 뜻으로 삼았다.

오호라! 자정은 평소에 성정이 준엄했기 때문에 비록 세속을 백안시하지는 않았으나 사람에 대해 허여함이 적었다. 그러나 유독 나와 더불어 교분이 몹시 깊었다. 일찍이 내가 풍(風)을 앓고 기력이 약해져 오래 살지 못할 것을 걱정하더니, 하루는 내게 와서 시를 얘기하고 밤중에 돌아갔다가 아침이 밝았을 때에 또 와서 내게 이르기를 “어제 얘기를 나눌 때에 내 마음이 매우 평온했소. 길 가는 도중에 갑자기 그대의 묵은 병이 생각나 혼자 말하기를 ‘모(某)가 만약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누구와 더불어 회포를 말할까.’ 하고,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돌아갔소.” 하였다. 자정의 이 말이 낭랑히 오늘 귀에 들리는 듯하거늘 어찌 병든 사람은 살아 있고 강건했던 사람이 죽음으로써 자정의 슬픔이 나에게 옮겨 와 자정의 죽음을 슬퍼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자정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 되는 겨울 10월에 상자 속에서 이 책을 찾아 펼쳐 보고 슬퍼해 마지않는다.

○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이 여막에 거처하는 3년 동안에 상식(上食)하고 곡읍(哭泣)할 때면 길 가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경(餘慶)이 말하기를 “정성이 사람을 감동시킨다더니, 참으로 빈말이 아니로다.” 하였다.

○ 경자년(1480)에 사족(士族)의 여인 어우동(於宇同)이라는 자가 사인(士人)들과 간음한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공사(供辭)에 생원 이승언(李承彦)이 연루되어 이승언이 형장(刑杖)을 맞다 못해 자백하게 되었다. 꿇어앉아 하늘에 고하기를 “옛날에 한 사나이의 원한이 6월에 서리를 날리게 했으니, 지금 하늘이나 옛날 하늘이나 동일한 하늘입니다. 나의 옥사에 원통함이 있거늘 하늘은 어찌 변괴를 내리지 않습니까.” 하니, 이윽고 검은 구름이 화악(華嶽)에서 일어나 폭우가 갑자기 쏟아지고, 날리는 우박이 뜰에 가득하고, 우레와 번개가 진동하였다. 옥관(獄官)이 괴이하게 여겼으나 공사에 이미 자백했기 때문에 다시 밝힐 수 없었다.

○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한강의 남쪽에 정자를 짓고 압구정(狎鷗亭)이라 이름하였다. 이는 임금을 세운 공로를 한 충헌(韓忠獻)에게 비기며 염퇴(恬退)했다는 명성을 얻으려고 나이가 많아 사직하며 강호를 좋아한다는 것으로 말을 삼은 것이지만 벼슬과 봉록에 연연하여 떠나지 못하였다. 주상이 시를 지어 송별하니, 조정의 문사들이 서로 다투어 화운한 것이 수백 편이었다. 그중에 판사(判事) 최경지(崔敬止)의 시가 제일이었다. 그 시에,

밤낮 은근히 접견하여 총애가 극진하니 / 三接慇懃寵渥優

정자가 있어도 와서 노닐 계책 없었네 / 有亭無計得來遊

가슴속에 참으로 기심이 고요해진다면 / 胸中政使機心靜

벼슬살이 동안에도 갈매기와 친하리라 / 宦海前頭可狎鷗

하였다. 한명회가 이를 싫어하여 현판에 넣어 주지 않았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김굉필(金宏弼)은 자가 대유(大猷)이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에게 수업하였고, 경자년(1480, 성종11)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였다. 나와 나이가 같으나 생일이 나보다 늦다. 현풍(玄風)에 살았다. 고상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었고, 본부인 외에는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손에서 《소학》을 놓지 않았으며, 인정(人定)이 된 뒤라야 잠자리에 들고 닭이 울면 일어났다. 사람들이 국가의 일을 물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소학》을 읽는 아이가 어찌 큰 의리를 알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짓기를,

학문에 종사해도 천기를 알지 못했지만 / 業文猶未識天機

《소학》의 글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닫노라 / 小學書中悟昨非

하였다.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것은 곧 성인이 되는 근본 터전이니, 노재(魯齋) 이후에 어찌 그러한 사람이 없다고 하겠는가.” 하였으니, 그를 추중함이 이와 같았다.

○ 정여창(鄭汝昌)은 자가 자욱(自勖)이다. 지리산에 들어가서 3년 동안 나오지 않고 오경(五經)을 공부하여 그 깊은 뜻을 궁구하여 체(體)와 용(用)은 근원은 같으나 나뉨이 다름을 알았고, 선과 악은 성(性)은 같으나 기(氣)가 다름을 알았고, 유(儒)와 불(佛)은 도(道)는 같으나 행적이 다름을 알았다. 그의 성리학을 성광(醒狂)이 존경하였다.

경자년(1480, 성종11)에 주상이 성균관에 하교하여 경전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유생을 찾도록 하니, 성균관에서 자욱을 천거하여 첫 번째로 두었다.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서거정(徐居正)이 장차 자욱을 내보내어 경전을 강론하게 하려 했으나 자욱이 스스로 물러났다.

계묘년(1483)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다. 그의 아버지 육을(六乙)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나라를 위하여 죽었다. 이때 자욱은 나이가 어렸으나 상을 치르는 데에 빠뜨림이 없었고, 모친상을 치를 때에도 전례(典禮)의 도수(度數)와 죽을 먹는 일을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다.

경술년(1490)에 참의(參議) 윤긍(尹兢)이 그의 효행과 학문이 사림 중에 비할 자가 없다고 천거하니, 특별히 불러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으로 삼았다. 자욱이 글을 올려 면직을 청하자, 주상이 하교하여 그를 포상하니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자욱의 사람됨은 성품이 단아하고 중후하였다. 술을 마시지 않았고,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았고, 쇠고기와 말고기를 먹지 않았다. 겉으로는 일상적인 얘기를 했으나 안으로는 마음이 또렷이 깨어 있었다. 젊은 날 성균관에 거처할 때에 남들과 함께 잠자면서 코는 골지만 잠들지는 않거늘 남들이 알지 못하였다. 어느 날 밤에 최진국(崔鎭國)에게 들킨 뒤로 성균관 안에 떠들썩하게 소문이 퍼지기를 “정 아무개가 참선하느라 자지 않는다.” 하였다.

 

제8권

□허후전(許詡傳) ?-1453

허후는 본관이 공암(孔巖)으로, 영의정 허주(許稠)의 아들이다. 집안이 대대로 충효(忠孝)를 이어 왔다. 아버지를 여의고서 어머니를 온화한 얼굴빛으로 섬겼다. 세종조(世宗朝)에 벼슬한 지 20여 년 동안 몸을 삼가고 말을 조심하였다. 문종(文宗)이 승하할 때에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고명(顧命)을 받아 어린 임금을 보필하여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

그때에 세조(世祖)가 수양(首陽)의 잠저(潛邸)에 있다가 장차 명나라 서울로 나아가려 하자, 허후가 세조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지금 재궁(梓宮)이 빈전(殯殿)에 머물러 있고 임금이 어리며 나라가 의심스럽기 때문에 대신들이 따르지 않고 백성들이 친근하지 않습니다. 공자(公子)께서는 국가의 주석(柱石)이거늘 떠나서 장차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하니, 세조가 마음속으로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계유년(1453, 단종1)에 세조가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등과 은밀히 모의하여 김종서를 죽이고 그의 무리를 가려내어 일망타진하니, 영의정 황보인, 이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우찬성 이양(李穰) 등이 모두 죽었다. 이에 정난공(靖難功)을 녹훈(錄勳)하고 세조가 영의정이 되니, 군신(群臣)이 모두 들어가서 축하연을 벌였다.

허후도 이전에 했던 말 때문에 죽음을 면하고 불려 들어가서 연회에 참여하였다. 술을 돌리고 풍악이 울리자 재상(宰相) 정인지(鄭麟趾), 한확(韓確) 등이 손뼉을 치고 기뻐하며 웃었으나, 허후는 홀로 어두운 표정으로 고기를 먹지 않았다. 세조가 그 까닭을 묻자 재일(齋日)이라고 핑계하였으나 세조는 그 뜻을 알고 다시 힐문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김종서, 황보인 등의 머리를 저잣거리에 효시(梟示)하고 그 자손을 죽이기를 명하니, 허후가 아뢰기를 “이 사람들이 무슨 큰 죄인이라고 목을 내걸어 보이며 처자식을 죽이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김종서는 저와 교유가 소원하여 그 마음을 잘 알지 못하지만, 황보인이라면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알고 있으니, 모반할 리가 만무합니다.”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그대가 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은 그 뜻이 진실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로다.”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조정의 원로가 같은 날 모두 죽었습니다. 저는 살아 있는 것으로도 족하거늘 또 차마 고기를 먹겠습니까.” 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세조가 매우 노했으나 그래도 그의 재주와 덕을 아껴서 죽이려 하지는 않았다. 이계전(李季甸)이 힘껏 권하여 허후를 외지로 귀양 보냈다가 마침내 목을 졸라 죽였다. 이로부터 조정이 모두 변하게 되었다.

□육신전(六臣傳)

●박팽년(朴彭年) 1417-1456

자가 인수(仁叟)이고, 세종조에 급제하였다. -선덕(宣德) 임자년(1432, 세종14)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갑인년(1434)에 친시(親試)에 급제하고, 정통(正統) 정묘년(1447, 세종29)에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성삼문(成三問) 등과 더불어 일찍이 집현전(集賢殿)에서 벼슬살이하며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다.

을해년(1455, 세조1)에 세조가 선위(禪位)를 받았다. 박팽년은 왕실의 일이 끝내 구제될 수 없음을 알고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임하여 스스로 떨어져 죽으려 하였다. 성삼문이 굳이 말리며 말하기를 “지금 왕위는 비록 옮겨 갔지만 아직 상왕(上王)이 계시니, 우리들이 죽지 않아야 장차 뒷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한다면 그때 죽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니, 오늘의 죽음은 국가에 무익한 것이오.” 하니, 박팽년이 그 말을 따랐다.

얼마 뒤에 외지로 나가서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조정에 일을 아뢸 때에 신(臣)이라 일컫지 않고 단지 ‘아무 관직의 아무개’라고만 적었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다음 해에 조정에 들어와서 형조 참판이 되었다. 성삼문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 및 유응부(兪應孚),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김질(金礩), 권자신(權自愼) 등과 더불어 상왕의 복위를 도모하였다. 그때에 명나라 사신이 왔기에 세조가 상왕과 함께 사신을 청하여 창덕궁(昌德宮)에서 연회를 베풀려고 하였다. 박팽년 등이 모의하기를 “성승 및 유응부를 별운검(別雲劍)으로 삼아 연회를 베푸는 날에 거사하고, 성문을 닫아 측근을 제거하고 상왕을 다시 세우자.” 하였다.

모의가 이미 결정되었으나 마침 그날 임금이 운검(雲劍)을 그만두도록 명하였고, 세자 또한 병 때문에 따라 나오지 못하였다. 유응부가 그래도 거사하려고 하니, 박팽년과 성삼문이 굳이 말리며 말하기를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고, 공의 운검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만약 여기서 거사하였다가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 경복궁에서 군사를 일으킨다면 성패를 알 수 없게 될 것이니, 다른 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유응부가 말하기를 “일이란 신속함을 귀하게 여기니, 만약 지체한다면 누설될까 두렵소. 지금 세자가 비록 오지 않았지만 측근들이 모두 여기에 있소. 오늘 만약 이들을 모두 죽이고 상왕을 호위하여 호령한다면 이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이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 하였다. 박팽년과 성삼문이 굳이 불가하다고 하며 말하기를 “만전의 계책이 아닙니다.” 하여 드디어 그만두었다.

김질이 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줄 알고 급히 달려가서 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모의하기를, “오늘 세자가 수가(隨駕)하지 아니하고, 특히 운검을 그만두도록 한 것은 하늘의 뜻이니, 먼저 고발하여 요행히 살아나는 편이 낫겠습니다.” 하였다. 정창손이 즉시 김질과 함께 급히 예궐(詣闕)하여 변고를 고하기를 “신은 실로 알지 못하였고, 김질이 홀로 참여한 것입니다. 김질의 죄는 응당 만번 죽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김질과 정창손을 용서하고 박팽년 등을 잡아들였다.

공사(供辭)에서 자복(自服)하자 임금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은밀히 유시(諭示)하기를 “그대가 나에게 돌아와서 처음의 모의를 숨긴다면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박팽년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고, 임금을 일컬을 때에 반드시 ‘나리’라 하였다. 임금이 그 입을 닥치도록 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이미 나에게 신하라고 일컬었으니, 지금 비록 일컫지 않더라도 소용이 없다.” 하니, 대답하기를 “저는 상왕의 신하이니, 어찌 나리의 신하가 되겠습니까. 일찍이 충청 감사로 있던 1년 동안에 무릇 장계와 문서에 일찍이 신하라고 일컬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사람을 시켜 그 계목(啓目)을 살펴보게 했더니, 과연 신하라는 글자가 하나도 없었다.

아우 박대년(朴大年)과 아들 박헌(朴憲)이 모두 죽었고, 아내는 관비(官婢)가 되어 수절하며 평생을 마쳤다. 박헌은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또한 정직하였다.

처형당할 때에 주위 사람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나를 난신(亂臣)이라 하지 말라.” 하였다. 김명중(金命重)이 당시 금부랑(禁府郞)이었다. 사사로이 박팽년에게 이르기를 “공은 어찌하여 이러한 화가 있게 하였습니까?” 하니, 탄식하며 말하기를 “마음이 평안하지 않아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박팽년은 성품이 침착하고 과묵하였다. 《소학》으로 몸을 단속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의관을 흩뜨리지 않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문장은 충담(沖澹)하였고, 필법은 종왕(鍾王)을 사모하였다.

세조가 영의정이 되어 부중(府中)에서 연회를 베풀 때에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 구슬픈 풍악 울리니 / 廟堂深處動哀絲

세상만사 이제는 도무지 모르겠네 / 萬事如今摠不知

푸른 버들가지에 봄바람 솔솔 불고 / 柳綠東風吹細細

밝게 핀 꽃 속에 봄날 정히 길구나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대업은 금궤에서 뽑아내고 / 先王大業抽金櫃

성상의 홍은은 옥 술잔에 넘쳐나네 / 聖主鴻恩倒玉巵

즐기지 않는다고 어찌 늘 즐겁지 않으랴 / 不樂何爲長不樂

태평성대엔 노래하며 취하고 배부르리라 / 賡歌醉飽太平時

하였다. 세조가 이 시를 애송하여 현판에 수를 놓아 부중의 벽 위에 걸도록 하였다.

●성삼문(成三問) 1418-1456

자가 근보(謹甫)이고, 세종조에 급제하였다. -선덕(宣德) 을묘년(1435, 세종17)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무오년(1438)에 식년시에 급제하고, 정묘년(1447)에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하였다.- 항상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모시며 계옥(啓沃)한 것이 넓고 많았다.

세종이 만년에 묵은 병이 있어 여러 차례 온천에 거둥하였다. 항상 성삼문 및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이개(李塏) 등으로 하여금 편복(便服) 차림으로 어가 앞에 있으면서 고문에 응하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영예롭게 여겼다.

계유년(1453, 단종1)에 세조가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집현전(集賢殿)의 여러 신하에게 모두 정난 공신(靖難功臣)의 칭호를 내려 주니, 성삼문이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여러 공신들이 번갈아 가며 연회를 베풀었으나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다.

을해년(1455)에 세조가 선위(禪位)를 받을 때에 성삼문이 예방 승지(禮房承旨)로서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하니, 세조가 막 부복(俯伏)하여 사양하다가 머리를 들어 이를 눈여겨보았다.

이듬해 병자년(1456, 세조2)에 그의 아버지 성승 및 박팽년 등과 함께 상왕의 복위를 도모하고 명나라 사신을 청하여 연회하는 날에 거사하기로 기약하였다. 집현전에 모여 의논할 때에 성삼문이 묻기를 “신숙주는 나와 사이가 좋지만 죄가 중하여 죽이지 않을 수 없다.” 하니, 모두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무사로 하여금 각각 죽일 사람을 맡게 하였는데, 형조 정랑(刑曹正郞) 윤영손(尹鈴孫)이 신숙주를 맡았다. 마침 그날 운검을 그만두게 하여 모의가 중지되었으나 윤영손이 이를 알지 못했다. 신숙주가 편방(便房)에 나아가서 머리를 감을 때에 윤영손이 칼을 어루만지며 앞으로 나아가니, 성삼문이 눈짓하여 중지시켰다.

일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세조가 친히 국문하면서 꾸짖기를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였는가?” 하니, 성삼문이 소리치며 말하기를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했을 뿐입니다. 천하에 그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제 마음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이거늘 어찌 배반이라 하십니까. 나리는 평소에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끌어댔는데 주공에게 또한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삼문이 이렇게 한 것은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세조가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선위를 받던 당초에는 어찌 저지하지 않고 곧 나에게 의지하다가 지금에야 나를 배반하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형세상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진실로 나아가서 금지할 수 없음을 알고는 물러나서 한번 죽으려고 했지만, 공연한 죽음은 무익한 것입니다. 참고서 오늘에 이르렀던 것은 뒷일을 도모하려 했던 것뿐입니다.”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그대는 나의 녹(祿)을 먹지 않았던가. 녹을 먹으면서 배반하는 것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다. 명분으로는 상왕을 복위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신을 위하려는 것이다.”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상왕이 계시거늘 나리가 어찌 저를 신하라고 하겠습니까. 또 나리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만약 믿지 못하겠거든 저의 가산(家産)을 몰수하여 헤아려 보십시오.” 하였다. 세조가 매우 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쇠를 달구어 그의 다리를 뚫고 팔을 자르도록 했으나, 안색의 변화 없이 천천히 말하기를 “나리의 형벌이 혹독하기도 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신숙주가 임금 앞에 있었다. 성삼문이 꾸짖기를 “나와 자네가 집현전에 있을 때에 세종께서 날마다 왕손(王孫)을 안고서 거닐고 산보하다가 여러 유신(儒臣)에게 이르시기를 ‘과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 경들은 부디 이 아이를 보호하라.’ 하셨네. 그 말씀이 아직 귀에 남아 있거늘 자네는 이를 잊었단 말인가. 자네의 악행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 하였다.

제학(提學) 강희안(姜希顔)이 공사(供辭)에 연루되었는데 고문을 당해도 자복하지 않았다. 임금이 묻기를 “강희안도 함께 모의했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강희안은 실로 알지 못합니다. 나리가 명사(名士)를 모두 죽이시니, 의당 이 사람을 남겨 두었다가 쓰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강희안이 이로 인하여 모면할 수 있었다.

성삼문이 수레에 실려 문을 나올 때에 안색이 태연자약하였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서 태평성대를 이루어라. 삼문은 돌아가 지하에서 옛 임금을 뵙겠다.” 하였고, 감형관(監刑官) 김명중(金命重)에게 웃으며 말하기를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였다.

죽은 뒤에 그의 가산을 적몰(籍沒)해 보니, 을해년(1455, 세조1) 이후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 두고서 ‘어느 달의 녹’이라 적어 놓았다. 집안에 남은 것이 없었고, 잠자는 방에는 오직 거적자리만 있을 뿐이었다.

아들 다섯이 있었다. 장남은 성원(成元)이다. 아내는 관비가 되어 절개를 온전히 하였다.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에 성승이 도총관(都摠管)으로서 입직하다가 선위한다는 사실을 듣고 승정원으로 종을 보내어 여러 번 물었으나 성삼문이 대답하지 않고 오랫동안 있었다. 성삼문이 일어나서 측간에 가다가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일이 끝났구나.” 하였다. 종이 이를 성승에게 아뢰니, 성승 또한 크게 탄식하고 말을 재촉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종이 가만히 그를 쳐다보니, 샘물처럼 눈물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즉시 병들었다고 아뢰고 방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니, 집안사람 또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오직 성삼문이 오면 좌우 사람들을 물리치고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성삼문은 사람됨이 해학적이고 자유분방하며 농담하기를 좋아했다. 일상생활에 절도가 없어 겉으로는 지키는 바가 없는 듯하였지만 안으로는 지조가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뜻을 갖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임금의 음식 먹고 임금의 옷 입으니 / 食君之食衣君衣

평소의 뜻을 평생에 어김없기 바라노라 / 素志平生莫願違

한 번 죽어 진실로 충의가 있음을 아니 / 一死固知忠義在

현릉의 송백이 꿈속에서 어른거리네 / 顯陵松柏夢依依

●이개(李塏) 1417-1456

자가 청보(淸甫)이다. -또 다른 자는 백고(伯高)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증손이고, 이종선(李種善)의 손자이다. 문장에 능한 재주를 타고났고, 조부의 풍모가 있었다. -정통(正統) 병진년(1436, 세종18)에 친시(親試)에 급제하고, 정묘년(1447)에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병자년(1456, 세조2)의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국문을 받았다. 박팽년과 성삼문이 대궐 뜰에 묶여서 작형(灼刑)을 당할 때에 이개가 천천히 말하기를 “이것은 무슨 형벌인가?” 하였다. 그는 야위고 약했으나 엄한 형벌 아래서도 낯빛이 변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성삼문과 같은 날 죽었다. 수레에 실려 나갈 때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우 임금의 솥이 무거울 때엔 삶 또한 컸거니와 / 禹鼎重時生亦大

홍모처럼 가벼운 곳엔 죽음이 오히려 영광일세 / 鴻毛輕處死猶榮

날이 새도록 잠 못 이루다가 성문을 나가니 / 明發不寐出門去

현릉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꿈속에서 푸르네 / 顯陵松柏夢中靑

●하위지(河緯地) 1412-1456

자가 천장(天章)이고, -또 다른 자는 중장(仲章)이다.- 세종조에 급제하였다. -선덕(宣德) 을묘년(1435, 세종17)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정통 무오년(1438)에 식년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과묵하며 도리에 어긋난 말이 없었다. 공손하고 예의가 있어 대궐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록 빗물이 고였더라도 길을 피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집현전에 있으면서 경연(經筵)에서 시강(侍講)하여 돕고 바로잡은 바가 많았다.

노산(魯山)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받았을 때에 여덟 공자(公子)가 강성하니, 민심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였다. 박팽년(朴彭年)이 일찍이 하위지에게 도롱이를 빌리려 하니, 시로써 답하여 보내었다.

남아의 득실이야 고금이 마찬가지이니 / 男兒得失古猶今

머리 위에 분명 밝은 해가 임해 있네 / 頭上分明白日臨

도롱이 보내드림은 응당 뜻이 있으니 / 持贈蓑衣應有意

오호의 안개비 속에 좋게 서로 찾으리 / 五湖煙雨好相尋

이는 시사(時事)를 슬퍼한 것이다.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세조가 영의정이 되자, 조복(朝服)을 모두 팔고 전(前) 사간(司諫)으로서 선산(善山)에 물러가 살았다. 세조가 임금에게 아뢰어 좌사간(左司諫)으로 불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을해년(1455, 세조1)에 세조가 선위를 받은 뒤에 교서를 내려 매우 간곡하게 초치하니 하위지가 부름에 응하였다.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을해년 이후부터의 녹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병자년(1456)의 변란 때에 성삼문 등에게 작형(灼刑)을 가하고 그 차례가 하위지에게 미치자 말하기를 “이미 저에게 반역의 이름을 더하였으니 그 죄는 응당 죽이는 것이거늘 다시 무엇을 묻겠습니까.” 하니, 임금의 노여움이 조금 풀려 작형을 시행하지 않았다. 성삼문 등과 같은 날에 죽었다.

세종이 인재를 배양한 것이 문종 때에 이르러 바야흐로 성대하였다. 당시의 인물을 논한다면 하위지를 으뜸으로 꼽는다.

●유성원(柳誠源) ?-1456

자가 태초(太初)이고, 세종조에 급제하였다. -정통 갑자년(1444, 세종26)에 식년시에 급제하고, 정묘년(1447)에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계유년(1453, 단종1)에 백관들이 세조의 공을 주공(周公)에 견주며 포상하기를 청하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조서의 초고를 짓도록 하였다. 여러 학사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유독 유성원만 남아 있다가 협박을 당하여 초고를 지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통곡했으나 집안사람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노산(魯山)이 상왕이 되었을 때에 성균 사예(成均司藝)에 제수되었다.

병자년(1456, 세조2)의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성삼문(成三問)을 잡아갈 때에 유성원이 마침 성균관에 있었다. 제생(諸生)들이 성삼문의 일을 알리자, 즉시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더불어 술을 따라 이별주로 마시고, 사당에 올라가서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았다. 가서 보니 관디(冠帶)도 벗지 않은 채 패도(佩刀)를 뽑아 스스로 목을 찔렀거늘 목숨을 구하려 했으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그 까닭을 알지 못했더니, 조금 뒤에 관리가 와서는 시체를 가져가서 책형(磔刑)을 가하였다.

●유응부(兪應孚) ?-1456

무인(武人)이다. 씩씩하고 용감하며 활을 잘 쏘았다. 세종과 문종이 모두 사랑하고 중하게 여겨서 지위가 2품에 이르렀다.

병자년(1456, 세조2)에 일이 발각되어 대궐 뜰로 잡혀 왔다. 임금이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하려 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신을 청하여 연회하던 날에 일척(一尺)의 검(劍)으로 족하를 폐하고 옛 임금을 복위하려 했으나, 불행히도 간사한 사람에게 고발당했으니 응부(應孚)가 다시 무엇을 하겠습니까. 족하는 속히 나를 죽이시오.” 하였다. 세조가 노하여 꾸짖기를 “그대는 상왕을 명분으로 삼고서 사직을 도모코자 한 것이다.” 하고, 무사로 하여금 살갗을 벗기도록 하며 그 정상(情狀)을 물었으나 죄상을 인정하지 않고, 성삼문(成三問) 등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이르기를 ‘서생(書生)과는 함께 모의할 것이 못 된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사신을 청하여 연회하던 날에 내가 칼을 시험하려 했으나, 그대들이 굳이 저지하며 말하기를 ‘만전의 계책이 아니다.’ 하여 오늘의 화를 불러들였다. 그대들은 사람이면서 계책이 없으니 어찌 축생과 다르겠는가.” 하고, 임금에게 말하기를 “만약 정상 밖의 일을 듣고자 한다면, 저 더벅머리 유자(儒者)들에게 물어보시오.” 하고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임금이 더욱 노하여 불에 달군 쇠를 배 아래에 놓아두기를 명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지글거렸으나 낯빛이 변하지 않았다. 천천히 쇠가 식기를 기다렸다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 끝내 죄상을 인정하지 않고 죽었다.

유응부는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무릇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아우 유응신(兪應信)과 함께 모두 활을 쏘아 사냥하는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짐승을 만나 활을 쏘면 맞추지 못함이 없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한 항아리의 곡식도 쌓인 것이 없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일에는 일찍이 넉넉하지 않음이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이 포천(抱川)의 전장(田莊)으로 갔을 때에 형제가 모시고 가다가 말 위에서 몸을 날려 하늘을 향해 활을 쏘니, 기러기가 활시위 소리가 나자마자 떨어지므로 어머니가 크게 기뻐하였다.

신장이 남보다 컸고 용모가 장엄(壯嚴)하며, 청렴하기가 오릉(於陵) 중자(仲子)와 같았다. 재상이 되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렸고, 음식에 고기가 없고 때로 양식이 끊어지기도 하니, 처자식이 원망하고 나무랐다. 그가 죽던 날에 울면서 길 가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살아서는 보호받은 바가 없고 죽어서는 큰 화를 얻게 되었다.” 하였다.

처음 모의할 때에 여러 사람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기를 “권람(權擥)과 한명회(韓明澮)를 죽이는 데에는 이 주먹이면 족하니, 어찌 큰 검을 쓰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함길도 절제사(咸吉道節制使)가 되어 시를 짓기를,

장군이 부절 잡고서 변경 오랑캐 진압하니 / 將軍持節鎭夷邊

변방엔 전쟁 먼지 없고 사졸은 편히 잠자네 / 紫塞無塵士卒眠

빼어난 말 오천 필이 버드나무 아래서 울고 / 駿馬五千嘶柳下

좋은 새매 삼백 마리가 누각 앞에 앉아 있네 / 良鷹三百坐樓前

하였으니, 여기에서 또한 그 기상을 볼 수 있다.

아들은 없고 두 딸이 있다.

태사씨(太史氏)는 말하노라.

누군들 신하가 되지 않겠는가마는 육신(六臣)의 신하 됨은 지극하기도 하다. 누군들 죽음이 있지 않겠는가마는 육신의 죽음은 참으로 장대하다. 살아서는 임금을 사랑하여 신하 된 도리를 다하였고, 죽어서는 임금에게 충성하여 신하 된 절개를 세웠으니, 충분(忠憤)은 백일(白日)을 꿰뚫고 의기(義氣)는 추상(秋霜)보다 늠름하여 백세(百世)의 신하 된 자로 하여금 한 마음으로 임금 섬기는 의리를 알아 절의(節義)를 천금처럼 여기고 목숨을 터럭처럼 여김으로써 인(仁)을 이루고 의(義)를 취하게 하였다. 군자가 말하기를 “은(殷)나라의 삼인(三仁)과 동방의 육신은 행적에 다름이 있으나 도리는 마찬가지이다.” 하였다.

성대하도다, 혜장대왕(惠莊大王)이여. 영의정으로 황각(黃閣)에 있을 때에는 그 공훈이 주공(周公)에 비견되고 왕위에 올라서는 그 덕이 순 임금과 같으셨기에 높고 크며 넓고 원대한 덕을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었으니, 육신이 복종하지 않은 것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백이(伯夷)가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어 먹었으나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덕이 실추되지 않았고, 엄광(嚴光)이 동강(桐江)에서 낚시질했으나 한나라 광무제(光武帝)의 공이 손상되지 않은 것과 같다.

오호라! 육신으로 하여금 단심(丹心)을 금석(金石)에다 기록하고 백수(白首)를 강호에서 보존하게 했더라면, 상왕의 수명이 연장될 수 있고 세조의 정치가 더욱 융성했을 것이거늘 불행히도 마음이 격동되어 드디어 온 들판을 태우고 말았으니, 슬프도다. 경건히 조사(弔辭)를 짓노라.

세찬 기운 비로소 그치자 / 厲氣初濟

모든 구멍이 막히게 되니 / 衆竅爲塞

서리와 눈 희게 내렸을 때 / 霜雪皎皎

소나무 홀로 푸르디푸르렀네 / 松獨也碧

뜻있는 신하의 머리카락 / 有臣之首

임금을 사랑하여 희어지니 / 愛君而白

머리는 끊을 수 있으나 / 有頭可截

절개는 굽힐 수 없었네 / 節不可屈

다른 사람이 주는 곡식 / 他人之粟

죽더라도 먹지 않았으니 / 寧死不食

고죽의 맑은 바람이고 / 孤竹淸風

시상의 밝은 달이라네 / 柴桑明月

땅속에 충혼이 계시니 / 土中有鬼

원통한 피 한 움큼 맺혔으리 / 寃血一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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