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이덕무(李德懋 1741-1793)
규장각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서적을 정리·교감했고,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본관은 전주.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형암(炯庵)·영처(嬰處)·동방일사(東方一士).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성호(聖浩)이다. 서자로 태어났다.
어려서 병약하고 집안이 가난하여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총명하여 가학으로 문리(文理)를 터득했다. 약관의 나이에 박제가·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 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내어 문명을 중국에까지 떨쳤다. 이후 박지원(朴趾源)·박제가·홍대용(洪大容)·서이수(徐理修)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고염무(顧炎武)·주이존(朱彛尊)·서건학(徐乾學) 등 중국 고증학파의 학문에 심취하여, 당대의 고증학자였던 이만운(李萬運)에게 지도를 받았다.
1778년(정조 2)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으로 청의 연경(燕京)에 갔다. 이때 기균(紀均)·당악우(唐樂宇)·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엄성(嚴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이헌교(李憲喬)·채증원(蔡曾源)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했다. 돌아올 때 그곳의 산천·도리·궁실·누대(樓臺)·초목·충어(蟲魚)·조수(鳥獸)에 이르는 기록과 함께 많은 고증학 관계 서적을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그의 북학론 발전에 큰 보탬이 되었다.
1779년 박제가·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外閣檢書官)이 되었다. 근면하고 시문에 능했던 그는 규장각 경시대회에서 여러 차례 장원하여 1781년 내각검서관(內閣檢書官)이 되었으며, 사도시주부·사근도찰방·광흥창주부·적성현감 등을 거쳐 1791년 사옹원주부가 되었다. 그는 규장각의 도서편찬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전통편 大典通編〉·〈규장전운 奎章全韻〉·〈기전고 箕田攷〉·〈도서집성〉·〈국조보감〉·〈규장각지〉·〈홍문관지〉·〈검서청기 檢書廳記〉·〈시관소전 詩觀小傳〉·〈송사전 宋史筌〉 등을 정리·교감했다.
1793년 병사했는데, 정조는 그의 공적을 기념하여 장례비와 유고집인 〈아정유고 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렸다. 서화(書畵)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영처시고 嬰處詩稿〉·〈이목구심서 耳目口心書〉·〈기년아람 紀年兒覽〉·〈사소절 士小節〉·〈영처문고 嬰處文稿〉·〈청비록 淸脾錄〉·〈뇌뢰낙락서 磊磊落落書〉·〈영처잡고 嬰處雜稿〉·〈관독일기 觀讀日記〉·〈앙엽기 盎葉記〉·〈입연기 入燕記〉·〈열상방언 洌上方言〉·〈예기고 禮記考〉·〈편찬잡고 編纂雜稿〉·〈협주기 峽舟記〉·〈천애지기서 天涯知己書〉·〈한죽당수필 寒竹堂隨筆〉 등이 있다.
▣청장관전서 제1권
◯대[竹]
꺼풀을 갓 벗은 낭간 댓가지가 / 錦綳初脫琅玕枝
댓돌에 해 오르자 그림자 옮겨지네 / 堦上日高影轉移
만고 풍설 겪은 지 몇 번이었나 / 萬古幾經風與雪
그대의 맑은 절개 내야 잘 알지 / 此君淸節我能知
※낭간(琅玕) : 청낭간(靑琅玕)을 말한 것으로 대나무를 칭한다. 낭간은 원래 아름다운 돌로 빛이 푸른 옥[靑玉]과 같은데, 대나무는 이와 비슷하므로 청낭간 또는 낭간이라 한 것이다. 《山海經》에 “곤륜산(崑崙山)에 낭간 나무가 있다.”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대나무를 가리킨 것이다.
▣청장관전서 제5권
◯세정석담(歲精惜譚)
...소설(小說)은 가장 사람의 심술(心術)을 무너뜨리는 것이므로 자제들에게 보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한 번 거기에 집착하면 헤어나지 못하는 자가 많게 된다. 명 나라 청원(淸源) 홍 문과(洪文科)의 말에 “우리나라 소인(騷人)과 묵객(墨客)들이 완사계(浣沙溪 사패(詞牌)의 이름)ㆍ홍불기(紅拂記 극곡(劇曲)의 이름. 장봉익(張鳳翼)이 지었다)ㆍ절부기(竊符記 장봉익이 지은 극곡(劇曲) 이름)ㆍ투필집(投筆集 전겸익(錢謙益)이 지은 것으로 전후 백 편이다) 등을 지었는데, 무릇 혈기가 있는 자들이 분발할 줄 알게 하였다. 이는 진실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되었으니 훌륭하다 이르겠다.”고 하였는데, 슬프다! 이 어찌 될 법이나 한 말인가? 내가 듣건대, 명 나라 말기에 유적(流賊)들이 많이,《수호전(水滸傳)》에 나오는 강도들의 이름을 도용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된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내가 일찍이《수호전》을 보았지만, 인정(人情)과 물태(物態)를 묘사한 데는 그 문사(文思)가 교묘하여 소설 중의 우두머리이며 녹림(綠林) 중의 동호(董狐)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사대부들도 끝내 거기에 현혹되었고, 또 일본(一本)에는 종백경(鍾伯敬 백경은 명(明)의 학자 종성(鍾惺)의 자)이 비평(批評)했다는 말까지 있는데, 백경의 제 정신을 상실했음이 어찌 그 지경에까지야 이르렀겠는가? 이는 부화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백경의 이름을 빌어 간행(刊行)하여 그 글을 중시하도록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김성탄(金聖嘆)이란 자가 나타나 제멋대로 찬평(讚評)하기를 “천하의 문장이 《수호전》보다 앞설 것이 없으므로,《수호전》만 잘 읽고 나면 사람이 여유작작하게 될 것이다.”고 떠들어대었고 또 방자하게 “맹자는 전국 시대 유사(遊士)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훼방하였다.
내가 비록 성탄이 어떠한 위인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망령되고 비루하고 어긋난 자임은 이것으로써 짐작할 수 있으며, 그 말함이 억양이 교묘하여 사람의 마음을 잘 현혹시켰으니, 재주꾼은 재주꾼이다. 과연 시내암(施耐菴《수호전》을 지은 사람)의 좌구명(左丘明)이요 법문(法門)의 송강(宋江)이라 이를 만하다. 생각하건대, 시내암이 금수(錦繡)같은 재주로 한 덩이의 분한(憤恨)이 가슴속에 축적되어 있는 관계로 그와 같이 사실이 없는 말을 조작하여, 한평생 세상을 저주하던 마음을 발로시킨 것 같다. 그러나 그 마음은 비장하고 괴로웠다 하겠지만 그 죄는 머리털을 뽑아 세어도 속죄할 길이 없을 것이다.
소설에는 세 가지 의혹된 바가 있다. 헛 것을 내세우고 빈 것을 천착하며 귀신을 논하고 꿈을 말하였으니 지은 사람이 한 가지의 의혹이요, 허황된 것을 감싸고 비루한 것을 고취시켰으니 논평한 사람이 두 가지 의혹이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경전(經典)을 등한시했으니 탐독하는 사람이 세 가지 의혹이다. 소설을 지은 것도 옳지 못한 일인데 무슨 심정으로 평론까지 붙여 놓았단 말인가? 평론한 것도 옳지 못한 일인데 국지(國誌 《삼국지(三國誌)》를 말한다), 또는《수호전》을 속집(續集)까지 만든 자가 있었으니, 그 비루함을 더욱 논할 나위가 없다. 슬프다! 내암과 성탄 같은 무리들의 재주와 총명으로써 이런 노력을 본분(本分)에 옮겨 힘썼다면 어찌 존경할 일이 아니겠는가? 더욱 심한 자는 음란하고 더러운 일을 늘어 놓고 괴벽한 설을 부연하여 보는 사람의 눈을 기쁘게 하기에 힘쓰면서 부끄러워할 줄을 알지 못한다. 내가 일찍이 보건대, 소설들 서목(書目) 중에 연의(演義)를 개척한 것도 있었는데, 비록 펼쳐 보지는 않았지만 그 명목만 보아도 너무 괴상하다.
내가 어렸을 때 십여 종의 소설을 보았는데, 모두 남녀간의 풍정(風情)과 여항(閭巷)의 속담을 엮은 것으로서 눈이 솔깃해진 적도 있었지만, 진정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확실히 안 뒤에는 증오하는 마음이 점차 더하여 재미가 아주 없어져서 이에 그 글과 나의 눈이 서로 접하지 않게 되었다. ...
▣청장관전서 제9권
◯나를 조롱함
모양은 예스럽고 마음 맑은 이형암 / 貌古心淸李炯菴
평할 적엔 포부가 엄청나지만 / 評渠自抱太憨憨
바야흐로 담담하게 일 없이 앉았을 땐 / 方其澹泊無爲坐
신 매실과 단 수수도 가려낼 줄 모르네 / 不辨梅酸與蔗甘
▣청장관전서 제11권
◯봄날에 몇 사람이 모여
해 길고 봄은 깊어 시비는 고요한데 / 日白春靑靜板扉
높은 누에 앉으니 인기척 별로 없네 / 高樓讌坐客跫稀
바람은 산들산들 꽃눈을 스쳐가고 / 輕颸剪剪經花眼
가랑비 부슬부슬 나비날개 적셔 주네 / 微雨絲絲褪蝶衣
아리따운 연기는 풀을 푹 덮었는데 / 娿娜煙能幽草覆
우거진 나무는 예쁜 새 오기 알맞네 / 丰茸樹可艶禽歸
성긴 발에 시원한 기운 꽉 찼으니 / 疏簾滿貯蕭閑氣
봄빛을 보답하며 술일랑 사양하지 마세 / 報答韶光酒莫違
▣雅亭遺稿(아정유고)
◯아정유고 서(雅亭遺稿序) : [윤행임(尹行恁)1762-1801]
계묘년(1783, 정조 7)에 내가 내각(內閣)에 들어가 검서관(檢書官) 이무관(李懋官)과 정답게 지냈는데 무관도 나를 좋아하였다. 언제나 원(院)에서 돌아와 고요히 지내는 시간이면 소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깔아놓고 대나무숲의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무관과 함께 술을 마시고는 문장을 논평하였는데, 무관은 겨우 몸이나 지탱할 정도의 가냘픈 체격으로 꼿꼿한 어깨에 얼굴을 똑바로 세우고 유창하게 말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소년 시절에, 서쪽으로 중국의 계주(薊州)에 들어가 만리장성(萬里長城)에 서서 창해(滄海)가 동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았으며, 요동(遼東) 들에 수레를 멈추어 오랑캐와의 싸움터를 물었다. 남쪽으로 가야산(伽倻山)에 유람하여 구름과 맞닿는 높은 산의 정상에서 멋대로 시를 읊었고, 최치원(崔致遠)의 고적을 찾아 훨훨 우주의 공간을 두드리고 현명(玄冥 깊은 진리(眞理)를 말한다)을 궁구하였다.”
하였으니, 그의 의기(意氣)가 늠름하여 볼 만하였다.
총명이 남달리 뛰어나 눈으로 한 번 보기만 하면 곧 외었다. 산경(山經)ㆍ수지(水志)ㆍ주고(周鼓 석고문(石鼓文)을 말한다)ㆍ한비(漢碑 한(漢)의 석경(石經)을 말한다)ㆍ《이아(爾雅)》ㆍ《설문(說文)》과 초목(草木)ㆍ충어(蟲魚) 등 상하 3천여 년에 걸쳐 허황하고 괴벽하여 비록 듣기 어렵고 보기 드문 것이라 하더라도 무관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묻기만 하면 여러모로 생각하고 정정하여, 변론이 길어질수록 더욱 변화가 있었다. 이것으로 시문(詩文)을 지으매, 신(神)이 도와주는 듯하여 창연(蒼然)하고 암연(闇然)해서 연(燕)ㆍ조(趙)의 거리에서 축(筑 거문고와 비슷한 악기 이름)으로 노래하며 서로 화답(和答)하는 듯하였다. 이것이 마음에 격동하면 소리가 힘차게 나와서 또렷하고 새롭게 일깨우며 청아하고 그윽하여, 독창적으로 문장을 만들매 묘계(妙界)에 독보하여 억지로 깎아 만든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 지금 그의 유고가 비록 몇 편밖에 안 되지만 이것으로도 충분히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무관과 같은 사람은 대부분 운명이 기구하고 곤궁하지만 일찍이 세상에 합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도 용납해 주지 않으니, 왕왕 술을 먹고는 방랑하기를 좋아하여 나그네나 쫓겨난 떠돌이들과 함께 깊숙한 임천(林泉)과 시골에서 세상을 원망하며 방종하여 죽을 때까지도 돌이키지 않았다. 나는 일찍이 이들을 슬퍼하였다. 그러나 오직 무관만은 행실이 독특하고 문장이 훌륭하여 방외(方外)의 학문으로 자처하지 아니하여 고상하고 얌전하기가 처녀와 같았다. 내각의 서적을 검교(檢校)한 지 15년에 임금의 특별한 총애를 입고 비상한 은혜를 받아 명성과 영광이 이미 혁혁하게 소문났으며 유고의 간행도 임금의 명령에서 나왔으니, 하나의 하찮은 선비로서 훌륭한 임금의 인정을 받은 것은 다시 천고에도 비할 사람이 없다. 그러하니 무관의 사람됨을 알고자 한다면 굳이 시나 문을 보아야 하겠는가.
내가 내각에 있어 이따금 마루를 배회하면서 보면 소나무와 대수풀은 예전과 같이 울창한데 무관은 다시 볼 수가 없어 오랫동안 슬퍼하던 차에 마침 그의 아들 광규(光葵)가 나에게 유고가 완성되었다고 하므로 드디어 책머리에 이 글을 써서 나를 깊이 알아주었던 옛정을 표하려 한다.
성상(聖上) 병진년(1796, 정조 20) 봄에 남원(南原) 윤행임 성보(尹行恁聖甫)는 쓴다.
◯계사년 봄 유람기(遊覽記)
계사년(1773, 영조 49) 윤삼월(閏三月)에, 나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호)ㆍ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1748-1807)의 호)와 함께 평양(平壤)을 유람하기 위해 25일 파주(坡州)에서 잤다.
홍제원(弘濟院)으로부터 녹반현(綠礬峴)에 이르니 길이 훤히 트여 넓고 평평하며 곧아서 말이 잘 걷는다. 파주로 가는 길 북쪽으로 숲이 우거진 언덕 위에 돌로 만든 사람 두 개가 우뚝 서 있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으며 낯빛이 회청색(灰靑色)이어서 무섭게 생겼다. 이것은 대개 동쪽 산의 우묵한 곳에 삼각산(三角山)이 뾰족이 엿보고 있으므로 여기에 수망(守望)을 설치하여 삼각산 기운을 누르는 것이다.
26일 아침 화석정(花石亭)에 오르니, 이곳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호) 선생의 별장이다. 벽에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호)ㆍ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호) 등 여러 명현들의 시(詩)가 있으며, 또 명(明) 나라 사신 황홍헌(黃洪憲) 등 여러 사람들의 시가 있다. 잡목이 우거져 푸르며 새들이 지저귀고 앞에는 구회강(九檜江)이 반달처럼 흐르고 있다. 이리저리 거닐며 상상해 보니 감회를 견딜 수 없어 경서를 끼고 선생을 뵈는 열(列)에 있는 듯하다. 한낮이 되어 개경(開京)의 선비 양정맹(梁廷孟)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진사(進士) 임창택(林昌澤)의 호는 숭악(崧岳)인데, 성품이 대단히 효성스럽고 시문(詩文)에 능하였으며 일찍이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호)을 따라 놀았다. 저서로는 《숭악집(崧岳集)》 몇 권이 있으며 《황고집전(黃固執傳)》과 《임장군전(林將軍傳)》이 있다.
고려(高麗) 말엽의 개성윤(開城尹) 조인(曹仁)의 아들이 의생(義生)과 임선미(林先味) 등 70여 명이 문을 닫고 절의(節義)를 지켜, 칼날이 눈앞에 이르는데도 앞을 다투어 죽으려 하니, 그들의 자손을 모두 폐하여 등용하지 않았다. 이양중(李養中)은 고려가 멸망하자 은둔하여 살았으며 원통하게 죽은 차원부(車原頫)의 죽음을 분하게 여겨, 타어회(打魚會)에서 막걸리를 담아 놓은 술병을 깨부수었으니 사람들이 파료옹(破醪翁 막걸리 병을 깬 노인이란 뜻)이라 불렀다. 길재(吉再)가 등잔을 던진 것과 조 운흘(趙云仡)이 책상을 친 사실들이 《숭악집》에 나와 있다.
두문동(杜門洞)은 지금의 동현(銅峴)이며, 또한 부조령(不朝嶺)과 괘관리(掛冠里)가 있다. 진사 한명상(韓命相)은 지식이 많고 고사를 알아 개성지(開城誌)를 저술하였는데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나는 일찍이 이분의 이름을 조경암(趙敬菴)에게 들었는데, 이번 길에 방문하려 하였으나 길이 총총하여 찾아보지 못하였다.
영재와 함께 남문(南門)에 올랐다. 이것은 국초(國初)에 만든 것으로 동쪽 가에는 성(城)이 없고 서쪽 가에만 성이 있으며, 치문(雉門 왕성(王城)의 남문)과 쇠문이 없다. 동쪽 가에는 연하여 종각(鐘閣)을 건립하였는데,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에 원(元) 나라에서 대장고부사(大藏庫副使)인 신예(辛裔)를 보내어 금강산(金剛山)에서 종을 만들도록 하였다. 일을 끝내고 돌아갈 무렵 왕이 예에게,
“대종(大鐘)이 못쓰게 된 지 오래니, 종을 만드는 훌륭한 기술자가 우리나라에 온 것을 기회로 하나 더 만들어 주기를 원한다.”
하니, 예는 승낙하고 만들었다. 이것을 연복사(演福寺)에다 매달아 두었었는데 국초에 이곳으로 옮겨 달았다. 이가정(李稼亭 가정은 이곡(李穀)의 호)이 기문(記文)을 지었으며, 글씨는 꿈틀거리는 용의 비늘과 같고 두께는 주척(周尺)으로 거의 2척쯤 되었다.
저녁에 청석동(靑石洞)에서 잠을 잤다. 깊숙한 골짜기는 고요한데 암석에 부딪치는 물소리만이 구슬피 울릴 뿐이다. 황혼이 되자 다리에 반점(斑點)이 있는 모기떼가 앵앵거린다. 연암과 영재 두 분과 함께 길거리로 놀러나오니, 어떤 노인이 가야금을 타고 또 해금(奚琴)을 뜯으면서 노래를 잘 부른다. 다시 입을 오므려 잎피리를 불자 소리가 웅장하고 구슬퍼 바위와 숲을 메아리친다.
27일, 아침 청석동을 출발하여 마당점(麻唐店)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店)은 곧 평산(平山)의 땅인데 화석(火石)이 나온다. 평산은 흙빛이 빨갛고 길옆에 간간이 조약돌이 보이는데, 대추 같기도 하고 콩 같기도 한 것이 흙과 섞여 엉기어서 단단한 덩어리가 되어 울퉁불퉁하다. 이것은 먼 옛날에는 물이 괸 곳이었는데, 어느 해엔가 물이 빠지고 육지가 된 것이다. 총수점(蔥秀店)에서 자려고 사양(斜陽)에 말을 몰아 가니, 물빛이 반짝거리고 고목이 띄엄띄엄 있어 사람에게 전원(田園)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점(店)의 지붕을 푸른 돌로 덮기도 하였으며, 산 하나가 점의 남쪽에 깎아지른 절벽으로 솟아 있는데 기괴(奇怪)하고 수려(秀麗)하며 잡목들의 잎이 우거져 있다. 기다란 내가 빙 둘러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물속에 거꾸로 잠겨 있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데 무늬 있는 고기들이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는 수면에서 뛰며, 얼룩오리는 옷 그림자를 보고는 놀라 모래 위로 걸어간다.
이에 연암ㆍ영재 두 분과 함께 미친 듯 기뻐 춤을 추려고 하였다. 석탑(石榻)에 걸터앉으니 석탑의 동쪽 벽은 깊숙이 배꼽처럼 생겼는데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그 언저리는 모두 꽃무늬가 되어 도장을 새길 만하다. 주난우(朱蘭嵎 난우는 주지번(朱之蕃)의 호)가 옥류천(玉溜川)이라고 가로 써 놓았는데 글자 크기가 손바닥만큼씩 하고 옆에는 도장을 찍었으며, 또 옥유영천(玉乳靈泉)이라는 4글자가 있고 옆에 장백 유홍훈(長白劉鴻訓)이라고 새겨 놓았다. 연암은 본래 돌에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이것을 보고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그어 그림 그리는 모습을 하면서 이르기를,
“준법(皴法)이 귀신의 가죽도 아니고 말의 어금니도 아니다.”
하고는 기뻐하여 무엇을 알아낸 듯하였다. 영재는 칼을 꺼내어 갈고 다듬어서 금성(金星)ㆍ구안(鸜眼)을 만들려고 하였는데 색깔이 쑥처럼 푸르고 메밀처럼 희었다. 석탑의 서쪽에 또 청천선탑(聽泉仙榻)이라고 쓴 4글자가 있고, 위에는 가느다란 돌층계가 있는데 물방울이 비처럼 쏟아진다. 이 산 이름인 총수(蔥秀)의 총(蔥)은 푸름을 말한 것이니 푸르고 또 빼어난 것은 우리나라 산중에서 이 산보다 더한 데는 없을 것이다. 요동(遼東)에 총수산이 있는데 이 산과 똑같았으므로 이 산을 총수산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절벽의 중간에 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상을 조각해 놓았는데 어깨와 발이 매우 단정하고 예쁘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주난우의 상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28일, 서흥(瑞興)에서 점심을 먹고 영파루(映波樓)에 올랐는데, 이 누는 용천관(龍泉館)의 문루(門樓)이다. 앞에는 긴 내가 흐르는데 깨끗하고 맑았다.
이장(李樟)의 집에서 술을 마셨다. 논 머리에 물을 푸는 기구가 있는데 두레라고 한다. 나무 3개를 세우고 끝을 동여매고는 장두(長斗)를 아래에 매달아 놓았다. 장두에는 자루가 있는데 이 자루를 잡고 올렸다내렸다 하면 물이 콸콸 논으로 들어간다. 모습은 마치 호하두(戶下斗 나무를 길게 파서 만든 오줌통)와 흡사한데 용골(龍骨)이라 부르기도 하며 세속에서는 용두(龍斗)라고도 한다. 우물의 난간은 나무로 만들기도 하고 푸른 돌로 만들기도 하는데, 양쪽 머리를 에워 깎아 서로 맞추어 놓은 것이 정(井)자 모양과 흡사하니, 대개 정자의 자형(字形)은 복판에 우묵하게 들어간 것을 형상한 것이 아니라 우물에 있는 난간의 모습을 취한 것이다. 이것으로 민생(民生)의 일상 생활에 쓰는 물건을 자세히 상형해 보면 자의(字義) 아닌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가면서 보니 길옆 암석이 간혹 절구통처럼 패었으며, 밭둑이 사방은 높고 한 가운데는 낮으며 땅밑으로 굴이 뚫리기도 하였다. 서쪽 사람들 말에 ‘해서(海西) 지방에는 봉사가 많으니 그것은 지형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한다. 그러나 일찍이 들으니 ‘해서 지방에는 공중에 실[絲]이 날아다니다가 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봉사가 많을 뿐만 아니라 눈먼 말[馬]도 많다.’ 한다. 저녁에 검수점(劍水店)에 머물렀는데, 돌은 험상 궂게 서 있고 시냇물은 성난 소리를 내며 흘렀다.
◯가야산기(伽倻山記)
임인년(1782, 정조 6) 2월 18일, 아침밥을 일찍 먹고 출발하여 거창(居昌)으로 가는데, 40리 떨어진 무촌(茂村)에 가서 점심을 먹고, 40리를 가서 가조촌(加祚村)에서 말을 먹였으며, 여기서 30리 되는 합천 해인사(海印寺)에서 유숙하였다. 무촌은 바로 김천에 딸린 역이다. 10리쯤 떨어진 거창 읍내를 지나 저녁때에 가조창(加祚倉)에 도착하니 여기는 옛 가조현(加祚縣)으로 차츰 기와집이 있기 시작하였다. 5리쯤 갔는데 이곳의 이름은 용산(龍山)으로 가야산에 들어가는 길 어귀이다. 동쪽 언덕에는 구일서재(九日書齋)가 있으며 돌은 우뚝 서 있고 냇물은 흐르니 꽤 아늑한 기운이 있었다.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니 돌은 모두 마아석(馬牙石 돌의 일종으로 지금의 편마석(片麻石)이다)이다. 나무꾼이 연달아 내려오는데 놀란 사슴이나 도망치는 노루같이 빠르다. 나무 끝에 저녁놀이 불그레한데 수십 집이 절벽에 매달려 있어서 말정촌(末丁村)이라 부른다.
20리쯤 가니 사람은 공중에서 말하고 말 울음소리는 구름밖에서 들렸다. 비로소 고개 하나를 넘으니 지형이 낮아졌다. 해가 지자 썰렁하게 춥다. 2~3리를 가니 해인사 중 서너 명이 동네 아이 6~7명을 데리고 가마를 메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마를 타고 2~3리를 가니 다시 마을 하나가 있는데 여기도 말정촌이라 하였다. 4~5명이 횃불을 들어 길을 인도한다. 가마를 멘 사람들은 시내를 건너뛰고 돌길을 가는데 원숭이보다도 민첩하다. 별빛은 나무 사이에 비치고 물소리는 산골짜기를 울린다. 10리쯤 가니 절에서 중 15~16명이 횃불을 들고 마중나오는데 멀어서 반딧불 같았다. 절에 도착하여 궁현당(窮玄堂)에서 쉬는데 중이 꿀물과 산자(饊子)와 대추ㆍ감 따위를 내왔으며 다시 저녁밥을 주었다. 밥상에는 석이버섯ㆍ도라지ㆍ아욱ㆍ녹각채(鹿角菜)가 있는데 모두 맛이 있었다. 촛불을 켜들고 대적광전(大寂光殿)을 구경하였으며, 중이 학식이 있고 지혜로워 이야기할 만하였다. 사지(寺志 해인사에 대한 사적을 적은 책)를 구하여 보고 잤다.
19일, 밤에 비가 내렸다. 아침밥을 일찍 먹고 성주(星州)로 가는데, 40리 되는 양정촌(楊亭村)에서 점심을 먹고, 30리를 가서 성주 읍내에서 유숙하였다. 이 절은 불당(佛堂)이 모두 9개이고 승료(僧寮 중들이 거처하는 숙사)가 모두 12채였는데 옛날부터 불이 자주 났으며, 경자년(1780, 정조 4) 정월에 다시 화재로 불당 3채와 승료 9채를 태웠는데, 근래에야 비로소 승료는 건축하였으나 불당은 짓지 못하였다. 대적광전은 바로 옛날의 비로전(毗盧殿)인데,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때에 지금의 이름인 대적광전으로 사명(賜名)한 것이다. 중은 ‘이 절이 신라(新羅) 때에 건립한 것이다.’ 하는데, 사지(寺志)를 상고하여보니 바로 세조(世祖)가 감사(監司)에게 유시하여 개축(改築)하였으나 얼마 못 되어 쓰러진 것을 인수대비(仁粹大妃 성종(成宗)의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가 명하여 다시 건립한 것이니 임사홍(任士洪)의 기록이 이와 같다.
계단은 모두 20층이며 법당은 46칸으로 매우 크고 웅장하다. 앉아 있는 비로불(毗盧佛)은 2장(丈)쯤 되며 좌우에 있는 불상은 이보다 조금 작다. 향로(香爐) 2개가 놓여 있는데 오동(烏銅)에 은으로 꽃무늬를 놓고 범(梵)자를 상감(象嵌)하여 번질번질 윤이 나고 기교(奇巧)하니 어느 시대에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
면(面)이 하나만 있는 북이 있는데 북통에는 일본에서 나온 주사(硃砂)를 칠하였다. 중은 ‘이것이 애장왕(哀莊王) 때에 악어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쇠가죽이 분명하다. 천장(天將)의 삿갓을 찾으니, 중은 궁현당 화재 때에 불탔다 한다.
법당의 북쪽에는 보안당(普眼堂)이 있는데 바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보관한 곳으로 남북의 두 각(閣)은 다 같이 15칸씩이고 너비가 각각 3칸으로 모두 90칸이다. 한가운데에 3층으로 칸막이를 하고 대장경 경판(經版)을 즐비하게 꽂아 놓았는데, 참으로 장관이었다. 판(版)의 길이는 주척(周尺)으로 1척 반쯤 되고 너비는 2척쯤 된다. 다만 가에 굵은 칸만이 있을 뿐 검은 행간(行間)의 선(線)이 없으며 한 판에 12줄이고 한 행에 14자이다. 글자가 바둑알처럼 되어 비록 해정(楷正)하긴 하지만 본받을 만하지는 못하다. 판은 모두 까맣게 칠하였는데 그리 빛나거나 윤택하지는 않으며 네 귀퉁이에는 얇은 구리로 못을 박아 놓았다. 고적지(古蹟志)에,
“애장왕 시절에 합천의 마을 아전이었던 이거인(李居仁)이 명부(冥府)에 들어가서 눈이 셋 달린 왕을 만나 소원을 말하고 돌아와서 애장왕에게 고하니 왕이 명하여 거제도(巨濟島)에서 판을 새겨 해인사로 옮겨 보관하였다.”
하였는데 황당(荒唐)하여 믿을 수 없다. 비로불 왼편에 세조 때에 찍어낸 경권(經卷)ㆍ시첩(試帖) 2권이 놓여 있는데, 책 끝장에 하나는 계묘년에 대장도감(大藏都監 대장경을 조각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했던 관청)이 칙명(勅命)을 받들어 조각해 만든 것이라 새겼고 하나는 갑진년이라 새겼으나, 고지(古志)를 상고해보면 ‘애장왕 정묘년에 조각한 것이다.’ 하였으니 서로 모순된다. 또 애장왕은 당 덕종(唐德宗) 16년 경진(800)에 왕이 되어 10년째인 당 헌종(唐憲宗) 원화(元和) 4년 기축(809)에 헌덕왕(憲德王)에게 시해(弑害)되었으니, 원래 정묘년이 없다. 고려(高麗)에는 계묘년과 갑진년이 8번 있었으니, 여조(麗朝)에서 조각한 듯한데 어느 시대인지 모르겠다. 만일 내가 경판을 모두 검토해 본다면 반드시 그 시대와 연유를 알 수 있을 것인데 하지 못하였다. 판의 끝 모서리 칸에 모두 글자를 새겼는데 순서를 천자문(千字文)의 글자 번호대로 아무 경(經) 몇째 권 몇째 장(張)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장(張)자를 장(丈)자로 쓰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아조(我朝)에서 보충하여 새긴 것일 것이다. 대개 중국의 모씨(毛氏) 급고각(汲古閣) 서적의 판본과 대등하다고 할 만하다.
세상에서는 ‘이 판각(版閣)에는 벌레와 새가 감히 깃들지 못하고 먼지가 끼지 않는다.’ 하였으나, 북쪽 불당 앞 동쪽 첫째 기둥은 누른 느릅나무로 크기가 세 아름이나 되는데 여기에 구멍이 뚫려 벌이 집을 지었으며, 내가 시험삼아 판 한두 개를 잡아 보니 먼지와 그을음이 손에 묻는다. 사람들이 이처럼 황당한 말 하기를 좋아한다. 북쪽의 불당 1칸에도 부처 하나를 모셨으며 불당의 서쪽에 진상전(眞常殿)이 있으니,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연간에 건축한 것이다. 뒷벽에는 천불(千佛)을 직조(織組)한 비단 휘장을 드리웠는데, 부처가 새끼손가락만큼씩 하며 모두 해져서 나비 날개와 같다. 중은 ‘이것은 월지국(月支國)에서 만든 물건이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그러냐고 하였다.
불당 안의 좌우에 우뚝 솟은 탑을 돌로 조각하고 금으로 칠하였는데 오른편의 것은 33층이고 왼편의 것은 20층이었다. 오른편 북쪽 벽 아래에는 나무로 조각해 만든 신라말의 희랑 선사(希朗禪師)의 상(像)을 모셔 놓았는데, 얼굴과 손을 모두 까맣게 칠하였고 힘줄과 뼈가 울퉁불퉁 나왔으며 옷섶을 헤쳐 가슴을 드러냈는데 양쪽 유방 사이에 앵두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으니 아마도 그가 생존시에 중완(中脘)에다 쑥뜸한 흉터를 형상한 것이거나 어쩌면 조각한 지가 오래되어 썩고 좀먹어 구멍이 생긴 것일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를 천흉국(穿胸國)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일찍이 《삼재도회(三才圖會)》를 보니 천흉국의 귀인(貴人)들은 반드시 긴 장대로 구멍을 꿰어가지고 두 사람이 가마를 멘 것과 같았는데 지금 여기에 있는 희랑 선사의 구멍은 겨우 붓대롱 하나가 들어갈 만하니, 가령 천흉국의 큰 귀인이라 하더라도 꿰어서 메게 되면 붓대롱만한 막대기로는 꺾어져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을 것이다. 참으로 전설과 같다면 거무패(巨無霸)는 용백국(龍伯國) 사람일 것이다. 소열제(昭烈帝)는 장비국(長臂國) 사람일 것이며, 상동왕(湘東王)은 일목국(一目國) 사람일 것이요, 왕덕용(王德用)은 곤륜국(昆崙國) 사람일 것이다.
희랑 선사의 옆에 최고운(崔孤雲 고운은 최치원(崔致遠)의 자)의 화상이 있는데, 건(巾)과 도포는 비록 당(唐) 나라의 장식이지만 얼굴과 머리칼은 이처럼 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서쪽 높은 언덕을 학사대(學士臺)라 하는데 이곳에 오르면 해인사의 경내(境內)를 다 볼 수가 있다. 산이 좌우로 감쌌으며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다. 시냇물은 앞으로 쏜살같이 흐르는데, 종이 만드는 갑문(閘門)과 곡식을 찧는 물방아가 물가를 따라 여기저기에 있다. 시내의 서쪽 높은 절벽에 또 깨끗한 절이 있는데 이름은 원당(願堂)이라 한다. 중이 ‘이곳은 애장왕이 머무른 곳이다.’ 한다. 가마를 타고 홍하문(紅霞門)으로 나오니 뾰족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시냇물 양쪽에 서 있다. 홍류동(紅流洞)과 낙화담(落花潭)의 폭포는 하얗게 떨어지고 물에는 녹음이 잠겼으며 나무와 돌이 모두 성낸 듯하고 연하(煙霞)도 사람을 싫어하는 듯하다. 푸른 절벽에는 이름을 여기저기 새겨 놓아 사람의 흥취(興趣)를 깬다. 원중랑(袁中郞 명(明) 나라 원굉도(袁宏道)를 가리킨다)이 ‘푸른 산의 흰 돌이 죄없이 묵형(墨刑)을 받았네.’ 한 말이 참으로 빈말이 아니다.
동으로 고개 몇을 넘어 10리쯤 가서야 비로소 말을 타고 성주로 향하니 검은 돌과 흰 돌이 수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간혹 백토(白土)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것으로 자기(磁器)를 구워 만들 수 있다.
오시(午時)쯤 성주의 양정촌(楊亭村)에 이르니 회연서원(檜淵書院)이 있다. 이 서원은 바로 정한강(鄭寒岡 한강은 정구(鄭逑)의 호)을 제사하는 곳으로 내일이 춘향일(春享日 봄철에 제사 지내는 날)이라고 한다. 원장(院長) 배흠조(裵欽祖)가 재임(齋任 서원에서 숙직하는 서생 중 재(齋)를 맡은 임원)을 시켜 안주와 술을 점사(店舍)로 가지고 와서 ‘재계하는 중이라서 손님을 만나 볼 수 없다.’고 전하여 말하기에 나 역시 ‘주인이 재계하고 계시므로 손이 감히 찾아가 뵐 수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10리쯤 가니 서천서원(西川書院)이 있다. 이곳은 바로 한강의 형인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곤수(崑壽)의 서원이다. 형제가 한 고을에서 함께 혈식(血食)을 받고 있으니 참으로 드문 일이다. 성주읍의 서쪽에 관후묘(關侯廟 한(漢) 나라 수정후(壽亭侯)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가 있다. 나는 들어가 참배하고서 점사(店舍)에 가서 유숙하였다.
20일, 비가 내렸다. 아침을 일찍 먹고 출발하여 점사로부터 40리 지점인 하빈(河濱)에서 점심을 먹고, 30리 지점인 대구(大丘 지금의 대구(大邱))에서 유숙하였다. 가랑비 속에 낙동강(洛東江)을 건너니 강물은 넘실넘실 흐르고 남쪽의 언덕은 우뚝 솟았는데 상수리나무와 떡갈나무가 섞여 있다.
성주는 옛날의 벽진(碧珍) 고을이다. 가야의 산천이 평평하고 멀며 맑게 흐르고 마을집과 숲의 나무가 모두 그림 그릴 만한 풍경이었다. 금호강(琴湖江)을 따라 구불구불 올라가 남쪽으로 펀펀한 들로 가니 허허벌판이 있는데 한번 바라보니 숫돌처럼 판판하다. 이곳은 대구이니 ‘대구는 의식(衣食)이 풍족한 지방’이란 말이 참으로 이 때문이었다. 대구의 부성(府城)은 견고하고 치밀한 것이 전주(全州)보다 나은데 성가퀴가 모두 무너졌다. 성의 서북쪽에 흙언덕이 있는데 무너진 토성과 같으며 푸른 소나무가 빽빽이 있으니 여기가 바로 달성(達城)이다. 판관(判官) 홍원섭(洪元燮)이 나를 맞이하여 오랫동안 문예(文藝)를 말하다가 파하였다.
21일, 흐리다가 늦게야 갰다. 50리 지점인 성주의 무계(茂溪)에서 점심을 먹고, 20리 지점인 고령(高靈)의 양전(良田)에서 유숙하였다.
대개 나의 이번 길은, 순상(巡相 순찰사(巡察使)를 말한다)이 19일에 출발하여 우순(右巡)하여 성주에 도착할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서였다. 그리하여 해인사로 가는 길에 성주에서 연명(延命 봉명사신(奉命使臣)을 맞이하는 것)하려 했었는데, 성주에 도착해 보니 막연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대로 대구로 향하였던 것인데 어제는 해가 저물어 예를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날 아침에 흑단령(黑團領)을 갖추고 객사(客舍)에 도착하니, 전패(殿牌) 밑에 향안(香案)을 베풀어 놓았으며 뜰의 좌우에는 의장대(儀仗隊)를 죽 세워놓고 병방(兵房)ㆍ군관(軍官)이 군복차림으로 교서(敎書)와 절월(節鉞 왕이 순찰사에게 내리는 신표(信標)를 말함)을 받들어 왔다. 내가 중문(中門) 안 서쪽 뜰에서 몸을 굽혀 공경히 맞이하니 향교(鄕校)의 생도들이 교서를 받들어 책상 위에 갖다 놓고, 풍악소리가 울려퍼지는데 사배(四拜)하니 향로의 연기가 피어 올라간다. 다시 사배하여 예를 마친 다음 시복(時服 평상복)으로 영아(營衙)에 들어가 순상을 뵙고 그대로 객사에 돌아온 다음에야 비로소 순상이 24일에 출발하여 우순하여 25일에 장차 의령(宜寧)의 신반창(新反倉)에서 모이기로 약속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출발하여 10리쯤 가니 큰 연못이 있는데 이름은 상당(上塘)이라 한다. 연못에 사람이 뗏목을 타고서 대나무 상앗대를 가지고 마름을 채취하니 묘연(渺然)히 강호(江湖)의 그리움을 자아내게 한다. 성주의 무계진(茂溪津)을 건너니, 여기는 바로 낙동강 하류이다. 나루터에 있는 점사는 모두 움집이다. 계속 길을 가 양전(良田)에 이르니 큰 못 옆에 점사가 있는데, 저녁 공기가 썰렁하여 물새들이 너울너울 날아다닌다.
22일, 아침을 일찍 먹고 합천으로 가는데 60리 지점인 남정점(南亭店)에서 점심을 먹었으며, 삼가(三嘉)의 유린역(有麟驛)에서 유숙하였다. 지리령(支離嶺)을 넘으니 고갯길이 구불구불 우회하였으며 산이 첩첩하였다.
멀리 흰 모래 일대(一帶)가 바라보이는데 바로 합천 읍내이다. 합천 읍의 남쪽에 강이 있는데 강 언덕에 있는 고목과 연기 나는 마을이 강물에 비친다. 지난해 8월 초5일 술시(戌時)에 큰 바람 천둥 비에 산골짜기의 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려 관사(官舍)가 침수되었었다. 군수 심흥영(沈興永)은 직인을 가지고 나무에 올라가서 겨우 목숨을 건졌으며 백성의 집들이 휩쓸려 남녀 80여 명이 일시에 떼죽음을 당하였는데 시체를 찾은 것은 겨우 50여 명뿐이었다. 겸하여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참혹한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심후(沈侯)가 봉급을 털어 백성을 구호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도 줄였다.
서쪽으로 몇 리쯤 가니 석벽(石壁)이 층층으로 쌓여 있는데 정자 하나가 나는 듯 남강(南江)을 굽어보고 있으니 이름은 함벽루(涵碧樓)이다. 고려의 안진(安震)이 기문을 지었는데,
“진주(晉州)의 장원정(壯元亭)과 평양(平壤)의 부벽루(浮碧樓)가 이 함벽루와 같이 아름답다.”
하였다. 안진은 충숙왕(忠肅王) 때 사람이다. 대개 신유년(1321, 충숙왕 8)에 낙성하였으며 이 누를 지은 사람은 여러 대 훈신(勳臣)이었던 상락군(上洛君)의 맏아들 김후(金侯)였다 한다. 아조에 와서 군수 유윤(柳綸)이 중수하고 강희맹(姜希孟)이 기문을 지었으며 숙종(肅宗) 신유년(1681)에 군수 조지항(趙持恒)이 중수하고 우암(尤庵) 송 문정공(宋文正公 문정은 송시열(宋時烈)의 시호)이 기문을 지었다. 북쪽 바위에는 우암이 쓴 ‘함벽루(涵碧樓)’를 새겨 놓았으며, 누의 오른편 조금 북쪽에 주지승(住持僧)이 살고 있다. 이 다음부터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청장관전서 제27권~29권
◯사물(事物)
농사짓고 나무하고 고기 잡고 짐승 치는 일은 인생의 본업인 것이다. 목수의 일, 미장이의 일, 대장장이의 일, 옹기장이의 일에서부터 새끼 꼬는 일, 신 삼는 일, 그물 뜨는 일, 발 엮는 일, 먹 만들고 붓 만드는 일, 재단하는 일, 책 매는 일, 술 빚는 일, 밥 짓는 일에 이르기까지와 인생이 일상 생활에 필요로 하는 일 및 효제(孝悌)ㆍ윤상(倫常)으로서 아울러 행하여 폐지할 수 없는 것은 재주와 능력에 따라서 글을 읽고 행실을 닦는 여가에 때때로 배워 익혀야 하지, 조그만 기예라 해서 멸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약 전념함으로써 거기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또한 큰 잘못이다.
글 읽는 일에만 도취되고 사리에 어두운 자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고봉(高鳳)이 글 읽는 일에만 정신 쓰다가 보리 멍석을 비에 떠내려가게 만든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군자가 글 읽는 여가에 울타리를 매고 담을 쌓거나 뜰을 쓸고 변소 치고 말 먹이고 물꼬 보고 방아 찧는 일을 때때로 한다면 근골(筋骨)이 단단해지고 지려(志慮)가 안정된다.
치산(治産)을 잘 하여 집을 보전하는 것이 녹봉을 구하는 것보다 낫고, 섭생을 잘 하여 몸을 보전하는 것이 부처에게 아첨하는 것보다 낫다.
어버이가 굶주리고 계시면 어찌하겠는가? 간사하고 참람되는 일이 아니라면 지혜와 힘을 헤아려서 할 뿐이다. 장사하는 것도 좋고 품팔이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능히 습속을 초월해서 이런 일을 할 자가 그 누구이겠는가!
군자는 생활을 오활하게 해서는 안 된다. 부모는 굶주린 지 오랠 것이니 논할 것도 없거니와, 처자를 능히 보전하지 못한다면 또한 어찌 인자한 사람의 일이겠는가?
▣청장관전서 제32 권
◯당 태종(唐太宗)의 애꾸눈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호)이 연경(燕京)으로 가는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의 호)를 전송한 시에,
천추에 대담한 양만춘이 / 天秋大膽楊萬春
활 쏘아 당 태종의 눈동자 맞혔네 / 箭射虯髥落眸子
하였는데, 상고하건대 안시성(安市城) 성주(城主)가 양만춘이라는 것은 《당서연의(唐書演義)》에서 나온 말로, 호사자(好事者)가 그런 성명(姓名)을 만든 것이니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이에 대해서는 《월정잡록(月汀雜錄)》과 서거정(徐居正)의 《사가정집(四佳亭集)》에 자세히 보인다 한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의 정관음(貞觀吟)에,
고구려쯤이야 했었는데 / 謂是囊中一物耳
눈알이 멀 줄 어이 알았으랴 / 那知玄花落白羽
하였는데, 현화(玄花)는 눈을 말하고 백우(白羽 화살에 단 흰 새의 깃)는 화살을 말한다. 세상에서 전해 오기로는 당 태종이 고구려(高句麗)를 치기 위하여 안시성까지 왔다가 눈에 화살을 맞고 돌아갔다 하는데, 《당서(唐書)》ㆍ《통감(通鑑)》을 상고하여 보아도 모두 실려 있지 않았다. 이는 당시의 사관(史官)이 반드시 중국을 위하여 숨긴 것이리니 기록하지 않은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이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실려 있지 않은데, 목은은 어디서 이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광해군(光海君)의 시
광해군이 강도(江都)에서 제주도(濟州島)로 이배(移配)될 적에 배를 타고 가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한더위에 소나기 성 위로 지나가니 / 炎風吹雨過城頭
후덥지근한 장기가 백척이나 높구나 / 瘴氣薰蒸百尺樓
푸른 바다 성난 파도에 어둠이 깃드는데 / 滄海怒濤來薄暮
푸른 산 근심어린 모습으로 가을을 전송하네 / 碧山愁色送淸秋
돌아가고픈 마음 늘 왕손초에 맺혀 있고 / 歸心每結王孫草
나그네 꿈 자주 제자주에 놀라네 / 客夢頻驚帝子洲
고국의 흥망에 대한 소식 끊겼는데 / 故國興亡消息斷
연기 낀 파도 위 외로운 배에 누웠구나 / 煙波江上臥孤舟
▣청장관전서 제 34권
◯연암(燕巖)
연암(燕巖)은 고문사(古文詞)에 있어서 재사(才思)가 넘치고 고금에도 통달하였다. 평원(平遠)한 산수(山水)에 깊은 감회를 소산(疏散)시키는 듯한 그의 시는 대미(大米 송 나라 미불(米芾)을 가리킨다)의 수준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고, 마음이 내킬 때 쓴 그의 행서(行書)와 해서(楷書)는 뛰어난 자태가 넘치며, 너무도 기묘하여 어떤 물건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일찍이 읊은 시에,
푸른 물 맑은 모래 외로운 섬에 / 水碧沙明島嶼孤
교청처럼 맑은 신세 티끌 한점 없다네 / 鵁鶄身世一塵無
하였다. 이것으로써도 그의 시의 품격이 오묘한 지경에 도달한 것임을 알 수 있으나 다만 긍신(矜愼)하여 잘 내놓지 않으므로, 마치 하청(河淸)에 비유된 포용도(包龍圖)의 웃음과 같아서 많이 얻어 볼 수 없으니 동인(同人)들이 못내 아쉬워한다. 일찍이 나에게 오언(五言)으로 된 고시론(古詩論)을 기증하였는데, 폭넓은 문장력이 볼 만하였다.
◯유희경(劉希慶1545-1636)
유희경은 제복장(祭服匠)으로 호는 촌은(村隱)이다. 일찍이 이이첨(李爾瞻)과 사귀었었는데, 뒤에 이첨이 모후(母后)를 폐하자는 의론을 주장하자 이내 절교하였다. 그의 양양도중(襄陽途中)이라는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산은 비 기운 머금고 물은 연기 머금었는데 / 山含雨氣水含煙
청초호 가엔 흰 해오리 졸고 있네 / 靑草湖邊白鷺眼
해당화 밑으로 가노라니 / 路入海棠花下去
꽃잎이 채찍에 걸려 떨어지네 / 滿池香雪落揮鞭
최대립(崔大立)은 역관(譯官)인데, 호는 창록(蒼麓)이다. 그의 ‘상우야음(喪耦夜吟)’ 이란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오리는 졸고 향불 꺼져 밤 이미 깊었는데 / 睡鴨香消夜已闌
빈 집에 혼자 누우니 베갯머리 차갑구나 / 夢回虛閣枕屛寒
매화나무에 걸린 아름다운 조각달 / 梅梢殘月娟娟在
당년에 깨어진 거울 보는 것 같네 / 猶作當年破鏡看
김효일(金孝一)은 금루관(禁漏官)으로 호는 국담(菊潭)이다. 그의 ‘자고(鷓鴣)’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청초호 물결 시내에 연했는데 / 靑草湖波接連溪
엄나무 우거진 곳에 쌍쌍이 깃드네 / 刺桐深處可雙棲
상강의 두 여인 원혼이 남았으니 / 湘江二女怨魂在
황릉묘를 향하여 울지 말아라 / 莫向黃陵廟裏啼
이들은 모두 인조(仁祖) 때 여항(閭巷)에서 시에 능하였다.
▣청장관전서 제 54권
◯훈민정음(訓民正音)
훈민정음에 초성(初聲)ㆍ종성(終聲)이 통용되는 8자는 다 고전(古篆)의 형상이다.
ㄱ 고문(古文)의 급(及)자에서 나온 것인데, 물건들이 서로 어울림을 형상한 것이다. ㆍㄴ 익(匿)자에서 나온 것인데, 은(隱)과 같이 읽는다. ㆍㄷ 물건을 담는 그릇 모양인데, 방(方)자와 같이 읽는다. ㆍㄹ 전서(篆書)의 기(己)자이다. ㆍㅁ 옛날의 위(圍)자이다. ㆍㅂ 전서의 구(口)자이다. ㆍㅅ 전서의 인(人)자이다. ㆍㅇ 옛날의 원(圜)자이다. ㆍㅣ 위아래로 통하는 것이니, 고(古)와 본(本)의 번절이다. 번절(翻切)ㆍ 세속에서는 언문(諺文)으로 반절(反切)이라 하여 반(反)자를 배반한다는 반(反)자로 읽고 반절(反切)의 반(反)자 음(音)이 번(翻)인 줄은 알지 못한다. 1행(行)에 각각 11자이다.
모두 14행(行)인데 글자를 좇아 횡(橫)으로 읽으면 가(可)ㆍ나(拿)ㆍ다(多)ㆍ라(羅)의 유(類)와 같다. 자연히 범주(梵呪)와 같은데 대체로 글자의 획은 전주(篆籒)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성인(聖人)이 아니면 어떻게 여기에 참여할 수 있었겠는가?
세속에 전하기를 “장헌대왕(莊憲大王 장헌은 세종대왕의 시호)이 일찍이 변소에서 막대기를 가지고 배열해 보다가 문득 깨닫고 성삼문(成三問) 등에게 명하여 창제(創製)하였다.”한다.
◯우리나라 역사서
《유기(留記)》고구려가 처음 글을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 1백 권을 적고 책 이름을《유기》라 하였는데, 전해지지 않는다.
《신집(新集)》영양왕(嬰陽王)이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고사(古史)를 요약해서《신집》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전해지지 않는다.
《계림잡전(鷄林雜傳)》신라 때 김대문(金大問)이 지었는데, 전해지지 않는다.
《화랑세기(花郞世記)》김대문이 지었는데, 고승전(高僧傳)과 한산기(漢山記)는 전해지지 않는다.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최치원(崔致遠)이 지었다.
《고금록(古今錄)》고려 때 박인량(朴寅亮)이 지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 인종이 김부식(金富軾)에게 명하여 지어 바치게 하였다. 서사가(徐四佳)의《필원잡기(筆苑雜記》에 ‘《삼국사기》는《통감(通鑑》ㆍ《삼국지(三國志)》ㆍ《남사(南史)》ㆍ《북사(北史)》ㆍ《수서(隋書)》ㆍ《당서(唐書)》의 내용을 거두어 모아서 전(傳)ㆍ기(紀)ㆍ표(表)ㆍ지(志)를 만든 책이니, 믿음직한 것이 못된다. 사실을 적은 대문에 있어서는 매번 다른 책을 인용하였으니, 더욱 사기를 쓰는 체모가 아니다. 또 침벌(侵伐)ㆍ회맹(會盟) 등의 일과 같은 것은 한 사건을 신라기ㆍ고구려기ㆍ백제기에 중첩으로 적되 문체를 조금도 변경하지 않았으니 취할 것이 못된다.’ 하였다.
《삼국사략(三國史略)》하윤(河崙)ㆍ이첨(李詹)ㆍ권근(權近) 등이《삼국사기》에 수정을 가하여 속된 것과 번잡스러운 것을 삭제했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서거정(徐居正)이 편집해 올린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모두 5권인데 기이(記異)가 2권, 흥법(興法)ㆍ의해(義解)ㆍ신주(神呪)ㆍ감통(感通)을 병합하여 3권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제5권 머리에 ‘국존(國尊) 조계종(曺溪宗) 가지산(迦智山) 인각사(麟角寺) 주지(住持) 원경충조대선사(圓鏡冲照大禪師) 일연(一然)이 찬(撰)한다.’고 되어 있다. 그 말이 황당하고 허탄하다.
《고려본사(高麗本史)》김종서(金宗瑞)ㆍ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것이다. 처음 간행된 책은 중국(中國)에 성행(盛行)되고 있다.
《고려국사(高麗國史)》우리 태조가 정도전(鄭道傳)ㆍ정총(鄭摠) 등에게 명하여 지어 올리게 하였다. 정총의 서문에 ‘원왕(元王 원종) 이상부터 일이 참람되게 윗사람에 견준 것이 많으므로 그들이 종(宗)이라 칭한 것은 왕(王)이라 쓰고 절일(節日)이라 칭한 것은 생일(生日)이라 쓰며, 조(詔)라 한 것은 교(敎)라 쓰고 짐(朕)이라 한 것은 여(予)라 썼으니, 이것은 명분을 바루려는 것이다.’ 하였다. ○각조(各朝)의 실록(實錄)과 민지(閔漬)의《강목(綱目)》, 이제현(李齊賢)의《사략(史略)》, 이색(李穡)의《금경록(金鏡錄)》에서 주워모아 좌씨(左氏)의 편년체(編年體)를 모방하였다. 3년 걸려 완성하였는데 모두 37권이다.
《교수고려사(校讐高麗史)》 우리 세종대왕이 정도전(鄭道傳) 등이 지은《고려사(高麗史)》중 원종(元宗) 이상 대의 고친 곳에 사실과 틀린 것이 있는 듯하다 하고 유관(柳觀)과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다시 원종 이상의 실록을 가지고 신사(新史)와 비교하게 하였는데, 종(宗)을 고쳐 왕(王)이라 하고 절일(節日)을 고쳐 생일(生日)이라 하고, 태후(太后)를 태비(太妣)라 하고 태자(太子)를 세자(世子)라 한 유(類)와 같은 것들을 다시 당시의 구사(舊史)대로 따르게 하였다.
《고려사략(高麗史略)》이제현(李齊賢)이 지었다. 《필원잡기(筆苑雜記)》에 ‘《고려본사(高麗本史)》장편(長編)은 본조(本朝)의 김종서(金宗瑞)ㆍ정인지(鄭麟趾)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일찍이 정총(鄭摠)의 서(序)를 보니 거기에「공민왕 때에 이제현(李齊賢)》이 지은《사략(史略)》은 숙종(肅宗)에서 끝났고, 이인복(李仁復)ㆍ이색(李穡)이 지은《금경록(金鏡錄)》은 정종(靖宗)에서 끝났다.」하였다.《사략》은 비록 전서(全書)를 다 볼 수는 없으나 이 제현의 의논이 세상에 행하고 있으며 《금경록》은 보이지 않으니 그 책이 이루어지지 못했는가 의심스럽다. 본조(本朝)에서 정도전과 정총에게 명하여《고려사(高麗史)》를 짓게 했고 정총이 서(序)를 했다 하나 그 책이 보이지 않으니, 그 책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미진(未盡)한 곳이 있어서 전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이극감(李克堪) 등이《고려전사(高麗前史)》를 지어 올리고 또 세교(世敎)에 관계 있는 사적(事蹟)들을 모아 편집하되 연별로 표시하여 사실을 서술해서 참고하여 보기에 편하도록 하였다.
《동국통감(東國通鑑)》모두 2부(部)인데 1부는 지은 사람의 이름이 빠져 있다. 삼조선(三朝鮮)ㆍ사군(四郡)ㆍ이부(二部)ㆍ삼한(三韓)ㆍ삼국(三國)ㆍ신라(新羅)의 기(紀)를 합하여 4권, 고려기(高麗紀) 12권 모두 16권으로 되어 있다. ○또 1부(部)는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처음에 세조(世祖)가 문국(文局)에 명하여 《동국통감》을 짓게 했는데 끝내지 못했고 나머지는 성종 때 서거정이 계진(啓陳)하고 계속해서 찬술하여 책이 이루어졌다. 모두 57편으로, 삼국기(三國紀) 8권, 신라기(新羅紀) 4권, 고려기(高麗紀) 44권이고, 삼국(三國) 이전은 두루 여러 책에서 채집하여 외기(外紀)라 일컬어 1편(編)을 만들었다. 그리고 함께 지은 여러 유신(儒臣)은 정효항(鄭孝恒)ㆍ손비장(孫比長)ㆍ이숙감(李淑瑊)ㆍ김쉬(金淬)ㆍ이승녕(李承寧)ㆍ표연말(表沿沫)ㆍ최보(崔溥)ㆍ유인홍(柳仁洪)ㆍ이극돈(李克墩)이다. 극돈이 서문(序文)을 지었다.
《동국사략(東國史略)》 모두 5부(部)이다. ○1부는 권근(權近)이 지었다. ○1부는 박상(朴祥)이 지었다. 삼조선(三朝鮮)ㆍ사군(四郡)ㆍ이부(二部)ㆍ삼한(三韓)ㆍ삼국(三國)의 기(紀) 1권, 신라기(新羅紀) 1권, 고려기(高麗紀) 4권이다. ○1부는 이우(李㙖)가 지었다. ○1부는 유희령(柳希齡)이 지었다. 모두 12권으로 먼저 강(綱)을 제시하고 뒤에 그 사실을 서술하였으며 중국의 동국전수총도(東國傳授摠圖)와 역대(歷代)의 국도분리세계(國都分理世系) 등 도표(圖表)와 세년가(世年歌)를 그 앞머리에 배치하였다. ○1부는 민제인(閔齊仁)이 지었는데 3권이다.
《동사찬요(東史纂要)》오운(吳澐)이 지었다. 삼조선(三朝鮮)ㆍ사군(四郡)ㆍ이부(二部)ㆍ삼한(三韓)ㆍ삼국(三國)ㆍ고려(高麗)의 사실을 기록한 것인데, 삼국 시대에 소국(小國)이 나라라고 참칭한 것은 대략 그 국도(國都)와 연대(年代)를 기록하여 1권을 만들고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 5권, 반역 권흉전(叛逆權凶傳) 1권으로 되어 있다. ○자서(自敍)에 ‘《삼국사절요》와《동국통감》등의 책을 가지고 그 요점만을 모아 그 나라의 국도ㆍ연대와 명신(名臣)들의 행적(行迹)을 대략 기록하고, 두루 여러 책에서 뽑아내어 그 빠진 것을 보충했으며, 반역(叛逆)과 권흉(權凶)들은 따로 아래에 기록하여 8권으로 나누어 만들어서 인쇄해 반포하였다. 그러나 기록이 소략하여 완전한 책을 만들 수 없으므로 다시 원사(原史)에서 신라 시조 갑자년(서기전 57)부터 고려 공양왕(恭讓王) 임신년(1392)까지 1천 4백 49년 동안의 사적 가운데 쓸데없는 것을 깎아내고 요약하여 군왕기(君王紀)를 편찬 집성하되 전에 인각(印刻)한 것을 깎아버리고, 제1권 이후는 기(紀)를 짓되《훈의강목(訓義綱目)》의 예에 의하여 상ㆍ중ㆍ하로 분작하고 4권을 추각(追刻)하여 편 머리에 두었다.’ 하였다.
《편년통록(編年通錄)》고려(高麗) 김관의(金寬毅)가 지었다. 관의는 의종(毅宗) 때 사람으로 벼슬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이었으며《고려사(高麗史)》에 인용(引用)되었다.
《편년강목(編年綱目)》충선왕(忠宣王)이 민지(閔漬)에게 명(命)하여 수찬(修撰)하게 하였다.
《왕대종록(王代宗錄)》김관의(金寬毅)가 지었다. 서거정(徐居正)이 ‘김관의ㆍ민 지가 고려세계(高麗世系)를《용손(龍孫)이다. 당(唐)의 귀성(貴姓)이다.》 한 것은 다 허탄하고 망령된 말이며 진실성이 없다. 현종조(顯宗朝)의 황주량(黃周亮)이 지은 태조(太祖) 이하 7대(代) 실록(實錄)에는 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한 것이 없다. 만약 이 말과 같다면 고려는 증조(曾祖)를 버려 조상으로 여기지 않고 반대로 증조모(曾祖母)의 아버지를 조상으로 여기는 셈이다. 그러나 그 뒤에《고려사》를 지은 자가 그것을 취(取)하여 외기(外紀)에 붙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세대편년(世代編年)》충목왕(忠穆王)이 민지가 지은《편년강목》에 빠진 것이 많이 있다는 이유로 이제현(李齊賢) 등에게 명하여 다시《세대편년》을 지어 올리라 하였다.
《편년통재(編年通載)》예종(叡宗)이 홍관(洪灌)에게 명하여 삼한(三韓)이래의 사적(事蹟)을 찬집(撰集)해 올리게 하였다.
《고금금경록(古今金鏡錄)》이색(李穡)ㆍ이인복(李仁復)이 지었다.
《금경록(金鏡錄)》정가신(鄭可臣)이 지었다.
《제왕운기(帝王韻紀)》이승휴(李承休)가 지었다. 상권(上卷)은 중국 제왕(帝王)들의 전수(傳受)와 흥망을 논하였으며, 하권(下卷)은 우리나라 군왕(君王)들의 개국(開國)한 연대(年代)의 사실을 논하였는데 중국에 대하여는 칠언시(七言詩)로, 우리나라에 대하여는 오언시(五言詩)로 운(韻)을 붙여 기록하였다.
《치평요람(治平要覽)》 영조(英祖)가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지은 것이다. 중국은 주(周) 나라에서 원(元) 나라까지,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에서부터 고려대(高麗代)에 이르러서 끝났다. 이 책에 국가의 흥망, 군신의 사성(邪正), 풍속(風俗)의 성쇠, 정교(正敎)의 선악에 대해 모든 이륜(彝倫)에 관련된 것은 싣지 않은 것이 없다.
《역대세기(歷代世紀)》지은 사람의 이름이 빠져 있다.
《역대연표(歷代年表)》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위로 제곡(帝嚳) 갑자년부터 아래로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무술년(성종 9, 1478)까지 이르고, 우리나라는 단군(檀君) 무진년(서기전 2333)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무릇 3천 8백 11년 간에 이르는데, 위에는 갑자(甲子)로 나열하고 아래에는 연대(年代)를 대었다.
《역대연기(歷代年紀)》김시습(金時習)이 지었다.
《역대제왕기(歷代帝王紀)》 지은 사람의 이름이 빠져 있다. 어숙권(魚叔權)의 《고사촬요(攷事撮要)》서(序)에 ‘기록된 것이 너무 소략하고 자못 국사(國史)보다 소루하다.’ 하였다.
《역대가(歷代歌)》오세문(吳世文)이 지었다. 금(金) 나라 정우(貞祐 금 선종(金宣宗)의 연호) 7년(고종 6, 1219) 기묘부터 역수(逆數)하여 4만 9천 6백여 세(歲)에 이르면 반고(盤古)가 개벽(開闢)한 무인년이 된다고 하였다.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영조(英祖) 18년(1742)에 증선지(曾先之)의《역대세년가》를 표창(表彰)하고 대제학(大提學) 윤준(尹準)에게 명하여 참작하여 주석을 내게 했는데, 유독 원조(元朝)만이 빠져 있으므로 장미화(長美和)의 시로써 보충하였고, 우리나라의 연대를 몰라서는 안 된다 하고 판서(判書) 권도(權蹈)에게 명하여 차서대로 짓되 주해(注解)를 내라 하고 친히 재결을 더하였으므로 아주 분명하게 갖추어졌다.
《역대요록(歷代要錄)》 내편과 외편 2편으로, 유희춘(柳希春)이 편(編)하였다. 자제(自題)하기를 ‘옛날에 사마공(司馬公 사마 광(司馬光)을 말한다)은 《계고록(稽古錄)》을 지었다. 이것이 내가《역대요록》을 편집하게 된 뜻이다. 삼가 선유(先儒)들의 긴요한 의논을 취하여 대강 자세하고 적절함을 더하였고 상고(上古)에서 시작하여 원(元) 나라에 이르러 끝났다.’ 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세조조(世祖朝)에 신숙주(申叔舟) 등에게 명하여 태조(太祖)ㆍ태종(太宗)ㆍ세종(世宗)ㆍ문종(文宗)의 보감(寶鑑)을 짓게 하고 명목을 《국조보감》이라 하였다. 숙종조(肅宗朝)에서는 이 단하(李端夏)에게 명하여 《선묘보감(宣廟寶鑑》을 지었고 영종조(英宗朝)에는 이덕수(李德壽) 등에게 명하여 《숙묘보감(肅廟寶鑑)》을 지었다. 그리고 금상(今上 정조(正祖)를 말한다) 5년(1781)에 육조(六朝 태조ㆍ태종ㆍ세종ㆍ문종ㆍ선조ㆍ숙종을 말한다.) 이외 13조(朝)는 보감이 갖추어 있지 않으므로 조준(趙㻐)에 명하여 정종(定宗)ㆍ단종(端宗)ㆍ예종(睿宗)ㆍ인종(仁宗)ㆍ경종(景宗) 조(朝)의 사실을 짓게 하고, 정창성(鄭昌聖)에게 명하여 세조조(世祖朝)의 사실을 짓게 하고, 김 노진(金魯鎭)에게 명하여 성종조(成宗朝)의 사실을 짓게 하고 홍양호(洪良浩)에게 명하여 중종조(中宗朝)의 사실을 짓게 했으며, 서유린(徐有隣)에게는 명종조(明宗朝)의 사실을 짓게 하고, 민종현(閔種顯)에게는 인조조(仁祖朝)의 사실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김익(金熤)에게는 효종조(孝宗朝)의 사실을, 이명식(李命植)에게는 현종조(顯宗朝)의 사실을 짓게 하였고, 조준(趙㻐)ㆍ이명식(李明植)ㆍ김익(金熤)에게는 영종조(英祖朝)의 사실을 짓게 하고, 전의 세 보감(寶鑑)과 합하여 인쇄해서 19조(朝)의 보감을 만들고《국조보감》이라 일컬으니, 모두 68권이다. 그리고 또 별편(別篇)을 두어 인조(仁祖)ㆍ효종(孝宗)ㆍ현종(顯宗)ㆍ숙종(肅宗)ㆍ영종(英宗)의 5조(朝)의 사실을 기록한 것은 황은(皇恩)에 보답하는 대의(大義)이다.
《동해야언(東海野言)》허봉(許篈)이 제가(諸家)들의 소설(小說)을 모아 기록하여 이 책을 편집하였다.
《석담일기(石潭日記)》이이(李珥)가 지었다. 일명《경연일기(經筵日記)》라고도 한다.
《야사초본(野史初本)》6권이며 이식(李植)이 지었다. 《석담일기》와 같은데 자못 자세히 갖추어졌다고 일컫는다.
《여사제강(麗史提綱)》유계(兪棨)가 지었다.
《동사회강(東史會綱)》임상덕(林象德)이 지었다. 상덕이 약관(弱冠) 때에 찬집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채 나이 겨우 30에 졸(卒)하였다. 부인 박씨(朴氏)는 판서(判書) 박사수(朴師洙)의 매씨(妹氏)였는데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었으므로 계속 찬집하여 완성시켜 세상에 간행되어 나오게 되었다.
《동사강목(東史綱目)》안정복(安鼎福)이 지었다.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홍만종(洪萬宗)이 지었다.
《역대제왕전세도(歷代帝王傳世圖)》박율(朴繘)이 지었다.
《경세지장(經世指掌)》홍계희(洪啓禧)가 지었다.
《황극일원도(皇極一元圖)》서명응(徐命膺)이 지었다.《경세지장》은 당요 (唐堯)부터 시작되었지만 이 책은 복희(伏羲) 때부터 시작하였다.
《동사촬요(東史撮要)》지은 사람의 이름은 빠져 있다. 자못 상세하고 긴요하다.
《춘파일월록(春坡日月錄)》이성령(李星齡)이 지었다.
《청야만집(靑野漫輯)》이진수(李震秀)가 지었다.
《진승기요(震乘記要)》지은 사람의 이름이 빠져 있다. 자못 한만(汗漫)하다.
《동포휘언(東圃彙言)》김시위(金時煒)가 지었다. 국조(國朝)의 전장(典章)에 대해 극히 정밀하고 긴요하여 사가(史家)들에게 도움이 있다.
《기년아람(紀年兒覽)》이만운(李萬運)이 지었다. 중국(中國)은 태고 때부터 청(淸) 나라까지 이르렀고, 우리나라는 단군 때부터 본조(本朝)까지 이르도록 연기(年紀)를 자세히 계산해 놓았는데 대략 서법(書法)을 따랐다. 중국과 우리나라 밑에 또 각각 역대(歷代)의 지계(地界)ㆍ군읍(郡邑)의 총수(總數)를 붙여서 제가들의 기년(紀年)과 비교하면 가장 정밀하면서도 간결하다. 내가 정보(訂補)한 것도 모두 7편(編)이다.
《동현사적(東賢事蹟)》권근(權近)이 우리나라 명현(名賢)의 행적을 편집한 것이다.
《동국명신행적(東國名臣行蹟)》지은 사람의 이름이 빠져 있다.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2부(部)가 있다. 1부는 주 세붕(周世鵬)이 지었고, 1부는 유성룡(柳成龍)이 지었다. 혹은 지은이를 자세히 알 수 없다고도 한다.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김육(金堉)이 지었다.
《동명신록(東名臣錄)》여광헌(呂光憲)이 편집한 것으로 삼국 시대부터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가장 빼어난 사람만 모아서 편집한 것이다.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송성명(宋成明)이 편집하였다. 등재 인물은 4백 1인으로 효묘조(孝廟朝)까지 이르렀고 신후(申)가 참교(參校)하였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박세채(朴世采)가 편집하였다.
《속동유사우록(續東儒師友錄)》이세환(李世煥)이 편집하였다.
이 밖에도 야사(野史)의 유로는《조야첨재(朝野僉載)》ㆍ《조야기문(朝野記聞)》ㆍ《해동야승(海東野乘)》과 같은 등속이 있지만 다 기록할 수 없다. 이상에 기록한 바는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에 지나지 않는데, 어떤 것은 전해지고 어떤 것은 전해지지 않으며 어떤 것은 간행(刊行)되지 않은 것도 있다. 사가(史家)의 종류가 이것에 그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청장관전서 제 55권
◯장수(長壽)
사람이 장수를 누리는 것은 비록 그 원기(元氣)에 달려 있지만, 혹은 수양(修養)으로, 혹은 욕심이 적음으로, 혹은 기분이 쾌적(快適) 함으로 인해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수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모든 방탕ㆍ편벽과 사악ㆍ사치로 자기의 몸 해치는 일을 거리낌없이 하여도 장수를 누리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람은 강한 원기가 보통 사람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사람이 욕심이 적은 데다가 수양하고 기분을 쾌적하게 하는 방법을 약간만 곁들일 수 있다면 70~80세를 누릴 자가 어찌 90~100세인들 누리지 않겠는가. 지금 몸을 해치지 않고 장수를 누린 옛사람들을 적어 두기로 한다.
《석림연어(石林燕語)》 섭몽득(葉夢得)이 지었다. 에 이렇게 되어 있다.
“문노공(文潞公 노공은 송 나라 문언박(文彦博)의 봉호)은 치사(致仕)할 때에 나이가 거의 80이었다. 신종(神宗)이 ‘경(卿)은 섭생(攝生)하는 데 무슨 방법을 가지고 있소.’ 하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기분을 쾌적하게 하여 외물(外物)로써 화기(和氣)를 손상시키지 않고 감히 지나친 일을 하지 않아서 중도(中道)에 이르면 그만 멈출 뿐입니다.’ 했다.”
《손공담포(孫公談圃)》 - 원주 빠짐 - 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임영(林英)은 나이 70에 기운과 용모가 쇠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무슨 술법으로 그렇게 되었느냐.’ 묻자 ‘다만 평생에 번뇌할 줄을 몰라서 내일 먹을 밥이 없어도 근심하지 않으며 일이 닥쳐오면 속시원히 처리해 버리고 가슴속에 남겨 두지 않을 뿐이다.’ 했다.”
《난매유필(暖妹由筆)》 서충(徐充)이 지었다. 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죽학노인(竹鶴老人) 하태수(何太守 명 나라 하징(何澄)을 말함)는 나이가 99세였다. 중서(中書) 서남(徐南)이 ‘무슨 수양 방법이 있어서 이토록 장수하였느냐?’ 하자 ‘다만 맛있는 것은 많이 먹지 않고 맛없는 것은 전혀 먹지 않았을 뿐이다.’ 했다.”
▣청장관전서 제 56권
◯조선진(朝鮮津)의 졸병 : 공후인
《고금주(古今注)》 최표(崔豹)가 지었다. 에 이렇게 되어 있다.
“공후인(箜篌引)은 조선진의 졸병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것이다. 자고(子高)가 새벽에 일어나 배의 노를 젓는데 머리 흰 한 광부(狂夫)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병을 가지고서 난류(亂流)에 뛰어들어 건너려 하였다. 광부의 아내가 따라가면서 소리쳐 중지하라 하였지만 거리가 미치지 못하여 그만 하수(河水)에 떨어져 죽었다. 그러자 광부의 아내는 공후(箜篌)를 끌어안고 치면서 ‘공(公)은 하수를 건너지 말라.’는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데, 그 곡조가 매우 슬펐다. 곡(曲)이 끝나자 스스로 하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
곽리 자고가 집에 돌아와서 그 곡조를 아내인 여옥에게 이야기하니 여옥이 애처롭게 여기고는 곧 공후를 이끌어 그 가락을 묘사해 놓으니, 듣는 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여옥이 그 곡조를 이웃집 여자인 여용(麗容)에게 전해 주고 이름을 ‘공후인(箜篌引)’이라 하였다.”
차오산(車五山 오산은 차천로(車天輅)의 호)은,
“조선진(朝鮮津)은 바로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이다. 상고하건대, 공후(箜篌)는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만든 것이다.” 《송서(宋書)》에 “공후의 첫이름은 감후(坎篌)였다. 한 나라 무제가 남월(南粤)을 멸망시키고 태일(太一)과 후토(后土)에 제사를 올릴 적에 풍악을 썼는데 그때에 악인(樂人) 후휘(篌暉)로 하여금 거문고의 제도를 본따서 감후를 만들게 하였으니, 이른바 ‘절주(節奏)에 감응(坎應)한다.’는 것이다. 후(篌)는 공인(工人)의 성(姓)을 따서 붙인 것인데 후세에 공(空)이라고 말하게 된 것은 음이 와전되었기 때문이다.”하였다.
하고, 또,
“조선진의 졸병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위만 조선(衛滿朝鮮) 시대이거나 또는 한 나라가 사군(四郡)을 설치하던 때일 것이다. 그리고 곽리 자고와 여옥ㆍ여용(麗容)의 이름이 매우 아름답고 우아해서, 비속하고 촌스러워 뜻을 상고할 수 없는 오랑캐 풍속의 이름자와는 매우 다르다. 위만(衛滿)은 본래 연(燕) 나라 사람이니, 생각하건대 자고(子高)도 중국에서 와 살던 사람이었던가.”
하였다.
▣청장관전서 제 57권
◯팔도감사(八道監司)
우리 조정에서 팔도(八道)의 감사(監司)를 모두 지낸 사람은 단지 두 사람뿐으로 함부림(咸傅霖)과 반석평(潘碩枰)인데, 반석평은 또 오도병사(五道兵使)도 지냈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이상(二相) 정응두(丁應斗)도 팔도 감사를 지냈다 하지만 이 말은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는 칠도(七道)의 감사(監司)만을 지냈을 뿐이다. 그리고 반석평은 종의 신분이었으니, 옛날에 어진 사람을 기용하는 데 있어서는 그 신분을 따지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청장관전서 제 59권
◯우리나라의 도교(道敎)
우리나라 풍속에는 도사(道士)나 도관(道館)이라는 것이 없다. 옛날에는 혹 있기도 했지만 오래 전하지 못하였다.
상고하건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고구려(高句麗) 때 개소문(蓋蘇文)이 왕에게 말하기를 ‘세 가지 교(敎)는 정족(鼎足)처럼 마주 서야 하는데, 지금 유교(儒敎)와 불교(佛敎)는 함께 융성하고 있지만 도교(道敎)는 아직 흥성하지 못하니 사신을 당(唐)에 보내어 도교를 구해 와야 합니다.’ 했더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황제가 도사 여덟 사람을 보내고 아울러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하사했다.”
하였다.
《서하집(西河集)》 임춘(林椿)이 지었다. 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이중약(李仲若)이 입산하여 선학(禪學)을 즐기다가 뒤에 바다를 건너 송(宋)에 들어가서 황대충(黃大忠)을 따라 도교의 요체(要諦)를 전수받고 본국에 돌아오자 소(疏)를 올려 ‘현관(玄館)을 설치하여 국가에서 재초(齋醮)하는 곳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였는데, 지금의 복원궁(福源宮)이다.
◯일본 면화(綿花)의 시초
《일본일사(日本逸史)》 왜인(倭人)이 지었다. 에 이렇게 되어 있다.
“연력(延曆) 환무(桓武)라는 위조 천황(天皇)의 연호. 18년 7월, 어떤 사람이 조그만 배를 타고 삼하국(參河國)에 표착했는데 베등거리와 쇠코잠방이만 입고 바지는 없으며 왼쪽 어깨에 감색 베를 걸쳤는데 모양이 가사(袈裟)와 비슷했다. 나이는 스무 살쯤 되고 키는 5척 5푼, 귀는 세 치가 넘었다.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는데 중국 사람들이 보고 모두 말하기를 ‘곤륜국(崑崙國) 사람이다.’ 했다. 뒤에 중국 말에 제법 익숙해지자 스스로 말하기를 ‘천축(天竺) 사람이다.’ 했다. 항상 줄이 하나뿐인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하는데 그 소리가 슬프고 처량했다. 그 봇짐을 뒤져보니 - 원문 빠짐 - 열매 같은 것이 있는데 목화씨라 했다.
그의 희망대로 천원사(川原寺)에 머물게 했는데, 곧 자기가 지닌 물건을 팔아 서쪽 성 밖에 집을 짓고서 가난한 사람들을 살게 했다. 뒤에 근강국(近江國) 국분사(國分寺)에 옮겨 살았다.
19년 4월에 곤륜 사람이 가져온 목화씨를 기이(紀伊)ㆍ담로(淡路)ㆍ아파(阿波)ㆍ찬기(讚岐)ㆍ이예(伊豫)ㆍ토좌(土佐) 및 태재부(太宰府) 등 여러 나라에 나누어 주어 심게 했다. 그 방법은 우선 양지쪽 비옥한 땅을 가려서 한 치 길이의 구멍을 파되 구멍과 구멍 사이를 넉 자쯤으로 한다. 그리고 씨를 물에 씻어 하룻밤쯤 담가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한 구멍에 네 개씩 심고 흙을 덮은 뒤에 손으로 다둑거려 준다. 아침마다 물을 주어 늘 축축하게 해 두었다가 싹이 트면 김을 매 가꾼다.”
상고하건대, 우리나라 문익점(文益漸)이 처음 목화씨를 얻어온 것이 일본보다 6백여 년이나 뒤진다. 우리나라의 생활을 부유케 하고 기용을 편리하게 하는 정치가 다른 나라에 뒤떨어졌으니, 아마 나라를 위한 계책에 마음쓰지 않았음이 예부터 그러했던 것이다. 유리를 녹여서 물건을 만들고 도자기에 채색화 그려 넣는 것 등은 지극히 사소한 일이지만 끝내 배우려고 하지 않으면서, 담배를 심어 연기를 빠는 일은 재물을 허비하고 건강을 해침이 아주 심한데도 담배가 중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지금까지 습속화했으니,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고구마는 담배에 비해서 이득이 매우 많은데도 그 종자를 전해온 지가 이미 3백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국에 고루 심어지지 않았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도서(島嶼)를 섬(苫)이라 함
일본(日本) 사람이 해중의 모래톱[洲]을 일컬어 서(嶼)라 하고, 또 모양은 서와 같으면서 작고 초목(草木)이 있는 것을 섬(苫)이라 하며, 그리고 섬과 같으면서 순전히 돌로 된 것을 초(嶕)라 한다. 대개 섬이란 곡식을 담는 짚거적인데, 도와 서가 물 위로 솟은 것이 마치 곡식 섬이 땅 위에 우뚝한 것과 같기 때문에 우리나라 방언(方言)에도 도와 서를 섬이라 일컫는 것이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조선의 전주(全州) 바다 가운데 섬이 많은데 대월서(大月嶼)ㆍ소월서(小月嶼)ㆍ보살섬(菩薩苫)ㆍ자운섬(紫雲苫)ㆍ빈랑초(檳榔嶕)가 있다.”
하였다.
▣청장관전서 제 61권
◯갓의 폐단
갓의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나룻배가 바람을 만나면 배가 기우뚱거리는데, 이때 조그마한 배 안에서 급히 일어나면 갓양태의 끝이 남의 이마를 찌르고, 좁은 상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에는 양태 끝이 남의 눈을 다치며,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난장이가 갓쓴 것처럼 민망하다. 이는 사소한 일이지만 들에 가다가 풍우를 만나면 갓모자는 좁고 갓양태는 넓고 지투(紙套)는 경직하여, 바람이 그 사이로 들어오면 펄럭이는 소리가 벽력 같은데, 위로 갓이 말려 멋대로 펄럭인다. 양쪽 갓끈을 단단히 동여매면, 갓끈이 끊어질 듯 팽팽해져 턱과 귀가 모두 당겨 올라가고 상투와 수염이 빠지려 한다. 유의(油衣)는 치마같이 하여 머리에 써서 손으로 잡는 것인데, 바야흐로 비바람이 불어칠 때는 갓이 펄럭여 일정하지 않으므로 불가불 끈을 풀어 손으로 갓의 좌우를 부축해야 하는데, 빗물이 넓은 소매로 들어오므로 무거워서 들 수가 없다. 또 말이 자빠지려 할 경우 어떻게 손으로 고삐를 잡겠는가. 이렇게 되면 위의를 잃은 것을 부끄러워할 겨를은커녕 죽고 사는 것이 시각에 달리게 된다. 이는 다 갓모자가 좁아 머리를 덮지 못하고 갓양태가 넓어 바람을 많이 타기 때문이다.
일찍이 여진(女眞) 사람이 말 타는 것을 보았는데, 급한 비를 만나면 얼른 소매와 옷깃이 있는 유의(油衣)를 입고 또 폭건(幅巾)같이 부드러운 모자를 쓰고 채찍질하여 달렸다. 그러니 어찌 괘활하지 않겠는가?
또 지금의 갓은 제작이 허술하여 갓모자와 갓양태의 사이에 아교가 풀어지면 서로 빠져버린다. 역관(譯官)들이 연경(燕京)에 들어갈 때 요동(遼東) 들판을 지나다가 비를 만나 갓양태는 파손되어 달아나고 다만 모자만 쓰고 가니, 중국 사람이야 우리나라 풍속에 이런 관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보통으로 보나, 같이 간 사람은 다 조소하는데 그렇다고 어디서 갓을 사겠는가. 매양 야중(野中) 행인들을 보니, 비를 만나도 갓 위에 씌울 것이 없는 사람들은 갓양태가 빠져나가고 부서질까 염려하여 풀을 뜯어 갓양태 아래에 테를 만들어 가리며, 또는 갓을 벗어 겨드랑에 끼고 한손으로는 상투를 잡고 허겁지겁 달린다. 대개 갓 하나의 값이 3~4백 냥이 되므로 갓을 생명처럼 보호하여, 그 군색하고 구차함이 한결같이 극에 달했다.
그리고 초립(草笠)의 생긴 모양도 지극히 괴이하다. 소년의 머리나 아전들의 기복(起復)에 일체 착용하고, 길흉에 구별이 없으니 이 무슨 예절인가. 또 빽빽하여 통풍이 안 되므로 바람이 불면 초립끈이 턱을 파고들어 할 수 없이 시원히 초립끈을 풀면 바람에 날려가 마치 종이연 모양으로 멀리 날아 올라간 곳을 모르게 된다. 나이가 좀 든 사람이 초립을 어깨 뒤로 드리우고 다니는 것은 더욱 가증스럽다. 또 공정(工程)도 어렵고 값도 비싸니 엄금하는 것이 좋다.
대저 나태한 풍습과 오만한 태도가 모두 갓에서 생기니, 어찌 옛 습속이라 하여 인순(因循)하고 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청장관전서 제 69권
◯유구(琉球)의 사신
유구의 사신이 역대로 우리나라에 와서 조공(朝貢)하는 길이 경상도를 거쳤으니, 응당 일본(日本)의 살마주(薩摩州)로 가서 일본에서 오는 사자를 따라 우리나라에 온 듯싶다. 점필재(佔畢齋)의 인동객사기(仁同客舍記)에 이르기를,
“인동(仁同)은 낙동강 동편에 있는 영남(嶺南) 중로(中路)의 요충지로서 일본ㆍ유구ㆍ구주(九州) 세 섬나라의 오랑캐들이 보물을 받들고 중역(重譯)을 거쳐 조공 오는 자를 조석으로 맞이하고 전송하여 사철 끊이지가 않는다.”
하였다.
점필재가 또 앵무새를 두고 지은 시가 있다. 이는 유구국의 왕이 사신을 보내어 앵무새 한 마리를 바쳤는데 이를 동도(東都)에서 보고 지은 것이다. 그 시는 이러하다.
진기한 새 한 마리 동방에 왔으니 / 珍禽隻影到東陲
여러 날을 밤낮으로 배 타고 왔으리 / 幾伴檣鳥日夜馳
슬프게 우는 건 아마 고향이 그리워서고 / 鳴咽祇應思故土
웅얼웅얼할 때는 말 배우는 어린애 같네 / 媕婀還欲學癡姬
능화(菱花)에 비친 푸른 빛 스스로 아끼지만 / 翠衿自惜菱花照
감색 빛 다리엔 옥쇠 사슬 면치 못했네 / 紺趾難辭玉鎖縻
찬란한 색깔은 봉황과도 같으니 / 爭似九苞丹穴鳳
상서를 말하지 않아도 태평시대인 줄 알겠네 / 不言猶瑞太平時
또, 유구국의 사신이 연적(硯滴)을 상락군(上洛君 김질(金礩)을 말한다)에게 선물하였는데 그 만듦새가 매우 정교하였다. 상락군이 나에게 대신 시를 지어 사례하게 하였다. 이때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산허리 비껴 뚫은 해안(海眼)이 분명하니 / 山腹橫穿海眼明
그 누가 도자기로 고운 달을 만들었나 / 花瓷誰幻玉蟾精
이제 다시 문방우(文房友)를 얻었으니 / 從今添得文房友
붓 찍어 장차 내경경(內景經)이나 써야겠네 / 濡筆將書內景經
◯담배ㆍ고기ㆍ술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각기 좋아하는 것을 말하게 되었다. 한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담배ㆍ술ㆍ고기 세 가지요.”
하기에, 내가,
“이 세 가지를 다 갖추지 못한다면 어느 것을 빼겠소?”
하니, 그 사람이,
“먼저 술을 빼고 그 다음엔 고기를 빼겠소.”
하므로, 내가 다시 그 다음을 물으니, 그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똑바로 쳐다보면서,
“담배가 없다면 살아 있은들 무슨 재미가 있겠소.”
하였다.
◯교룡성(蛟龍城) 북쪽 산은 창[戟] 모양과 같다
나는 남중(南中)을 오갈 때마다 말 위에서 졸다 깨서는 시 한두 연(聯)씩 읊었다. 그러나 미쳐 이의 짝을 채우기 전에 대부분 잊어버리곤 한다. 이제 마침 세 연이 생각나는데, 이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남원(南原)을 지나면서 광한루(廣寒樓)에 올랐을 때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교룡성 북쪽 산은 창 모양 같고 / 蛟龍城北山如戟
오작교 남쪽 강은 비단 같구나 / 烏鵲橋南水似羅
또 함양(咸陽)의 학사루(學士樓)에서 지은 두 연은 다음과 같다.
쌍계에 비가 개니 은어가 뛰어오르고 / 雙溪雨歇銀魚上
팔령에 구름 걷히니 검은 학 나네 / 八嶺雲晴墨鶴飛
일두의 사당 황폐하고 꽃만 피었는데 / 一蠹祠荒花的歷
외기러기 나는 마을 빗기운 가득하네 / 孤鴻村逈雨冥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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