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청담(靑潭) 2021. 9. 14. 16:08

 

李玉峯(16세기)

 

終南壁面懸靑雨 종남벽면현청우

紫閣霏微白閣晴 자각비미백각청

雲葉散邊殘照 운엽산변잔조루

漫天銀竹過江橫 만천은죽과강횡

 

종남산 벼랑에 푸른비 걸리더니

자각봉은 흩뿌리고 백각봉은 개었구나.

구름터진 사이로 저녁노을 비치고

하늘 가득 은빛 대숲 강건너 걸쳐있다.

 

2021전북서예전람회 삼체행서

■이옥봉 : 양녕대군의 고손자인 자운(子雲) 이봉(李逢, 1526~?)의 서녀로 운강(雲江) 조원(趙瑗, 1544~1595)의 소실이다. 이봉은 종실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했으며 이후 사헌부 감찰, 옥천 군수를 지냈다. 그는 옥봉의 글재주를 기특히 여겨 해마다 책을 사주었으며, 옥봉의 문재(文才)는 날로 좋아져 특히 시를 잘 지었다고 한다. 옥봉은 비록 서녀였지만 자신이 왕실의 후예라는 점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집 갈 나이가 되어서도 그는 자신의 재능을 자부하여 재주와 문망이 일세에 뛰어난 사람을 구해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운강 조원이 풍의(風儀)와 문장이 뛰어남을 알고 그 문채(文采)를 사모하여 스스로 첩이 되기를 원했다. 옥봉의 아버지가 그 뜻을 알고 운강에게 사실을 말하였으나 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봉은 운강의 장인인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을 찾아가 그 사정을 말하니 신암이 웃으며 허락하고, 운강에게 옥봉을 받아들일 것을 권하여 마침내 조원의 소실이 되었다.

조원은 남명(南冥) 조식(趙植)의 문인으로 1564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여 1575년 정언이 되었으며 이조좌랑, 삼척부사를 거쳐 1593년 승지에 이르렀다. 옥봉은 운강이 괴산군수, 삼척부사 등 외직에 나갈 때 동행했으며, 운강은 옥봉의 글재주를 인정하여 그의 친구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도 글을 짓게 하였다.

운강에게는 희정(希正), 희철(希哲), 희일(希逸), 희진(希進)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 시가 누구에게 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들 모두 글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먼저 아들이 쓴 글씨의 위력을 칭찬한 뒤, 그 뜻을 이어 자신의 글 솜씨 역시 뛰어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읍귀(泣鬼)’는 하지장이 이백을 평할 때 ‘귀신도 울게 할[泣鬼神]’ 시인이라고 한 데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본다면 결국 옥봉은 자신의 뛰어난 시재를 이백에 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이웃 여자가 옥봉에게 소도둑으로 잡혀간 남편을 위해 운강에게 글 써 줄 것을 부탁하자 옥봉이 감히 남편에게 써 달라고는 못하고 그 사정을 불쌍히 여겨 자신이 직접 시를 써 주었다. 형조의 당상관들이 이 시를 보고 크게 놀라며 이 글을 누가 써 준 것이냐고 묻자 그 여인이 사실 그대로 말하였다. 이에 당상관들은 그 남편을 풀어주고 그 시를 소매에 넣고 운강을 방문하여 공의 기이한 재주를 늦게 안 것이 한스럽다고 하며 돌아갔다. 손님이 돌아가자 운강은 옥봉을 불러 그녀의 행실을 크게 꾸짖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옥봉이 울며 사죄했으나 운강은 끝내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로 옥봉은 운강과 헤어졌으며 다시는 운강을 만나지 못하고 산수와 시로 자오(自娛)하며 여도사(女道士)로 자칭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옥봉의 시에는 임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마음을 담은 시가 많다. 소실이라는 신분 자체가 임을 기다리고 그리워해야 하는 처지인데다 더욱이 친정으로 쫓겨난 처지여서 임을 기다리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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