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창한화(竹窓閑話)
□이덕형(李德泂 1566-1645)
※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 과는 다른 인물임.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1597년에서 1608년까지 봉교(奉敎)·정언·지평·수찬·부교리·헌납·전적·문학·집의·교리·부응교·사간·사예·사섬시부정·응교·시강원보덕·사도시정 등을 거쳤다.
광해군 때에도 응교·동부승지·승지·대사간·좌부승지·부제학·이조참의·우승지·병조참판·도승지 등의 경관직(京官職)과 나주목사·전라감사·황해감사 등의 외관직을 지냈다.
특히,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킬 때에 직접 반대의 입장에 서지 않고, 왕의 뜻에 따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있을 때 세태가 어지럽자,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인조반정 때 광해군을 죽이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이를 본 능양군(綾陽君: 仁祖)이 충신이라고 판단해, 반정 후 인목대비를 맞이하는 의식에서 이덕형을 앞세워 반정을 보고했고, 능양군에게 어보(御寶)를 내리게 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인조 때는 한성부판윤이 되어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품계가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오르고, 주문사(奏聞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에 호종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
환도 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품계가 올라 예조판서·판의금부사·지돈녕부사·우찬성 등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죽창한화(竹窓閑話)』·『송도기이(松都記異)』 등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이 책의 기록들은 단번에 이루어졌다기보다는 붓 가는 대로 다년간에 걸쳐 씌어진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기사 중 “김신국(金藎國) 등이 무신년(선조 41, 1608)에 서용(敍用)되었는데 이 해에 여순(汝諄)은 귀양가서 섬 속에서 죽었다. 그런 지가 지금 40년인데……” 운운하는 대목으로 미루어 이 책의 하한연대가 거의 저자의 몰년인 1645년까지 이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대체적인 내용은 저자 자신이 견문한 풍속·제도·풍수·점복·몽사(夢事)·당쟁·인재·과거 등에 관한 것들을 포괄하고 있으며, 개중에는 특히 저자의 동족인 한산이씨(韓山李氏)들에 관한 항목들이 많이 눈에 띈다.
찬성(贊成) 이덕형(李德泂) 저
퇴계 선생(1501-1570 退溪先生)의 옛집은 서울 서소문동(西小門洞)에 있었다. 뜰에 늙은 노송나무가 있는데 길이가 수십 길이나 되었다. 난리를 치른 뒤에 서울 안에 있던 큰 나무들이 남은 것 없이 다 없어졌건만, 유독 이 나무만은 그대로 있어 푸른빛이 하늘에 닿으므로 원근에서 모두 쳐다볼 수 있었다. 이 나무가 신해년(1611, 광해군 3) 봄에 갑자기 꺾여지자 사람들이 모두 괴상히 여겼다. 그해 여름에 정인홍(1536-1623 鄭仁弘)이 박여량(朴汝樑)ㆍ박건갑(朴乾甲) 등을 시켜서 소를 올려 퇴계를 헐뜯어 못하는 짓이 없었다. 그러자 사림들이 모두 분하게 여기고, 8도의 유생들이 모두 대전 아래에 모여들어 소를 올려 그 원한을 풀려 했으니, 이 어찌 사문(斯文)의 큰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노송나무가 꺾인 변고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징험된 것이다.
옛 예(例)에 성균관에서는 해마다 인일(人日)이나 다른 절일(節日)에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이는데, 이때 정부(政府)ㆍ관각(館閣)의 당상들이 모두 모여 의자에 걸터앉으면 모든 유생들은 뜰에서 절을 하였다. 소재(蘇齋) 노수신(1515-1590 盧守愼)이 지관사(知館事)가 되고서, 비로소 참고관(參考官)인 대신들과 의논하기를,
“뜰 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뵙는 예법인데, 본보기가 되는 곳에서 유생을 이렇게 만홀하게 대접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유생은 읍(揖)을 하고 모든 재상들은 의자 앞에 서서 받아서, 선비를 우대하는 뜻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했다. 이 말에 모든 사람들도 옳다고 하여, 이것이 지금까지 정한 법이 되었다.
한산(韓山)은 문헌서원(文獻書院)이 이루어지자, 모든 유생들은 가정(稼亭)ㆍ목은(牧隱) 부자의 좌차(坐次)가 서로 나란히 있는 것을 의심해서 서울에 사는 자손들에게 물어왔다. 나는 여러 늙은 선비들에게 물었으나 모두 이를 결정짓지 못하므로, 상공 이항복(1556-1618 李恒福)에게 물으니, 상공은 말하기를,
“오기량(吳紀亮)과 아들 즐(騭)이 부자가 모두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는데, 조회 때마다 임금이 운모병(雲母屛)을 주어서 떨어져 앉도록 했으니, 지금도 장자(障子)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앉도록 하는 것이 옳은 것이오.”
하므로, 드디어 상공의 말과 같이 장자를 놓고 앉도록 하였다. 상공은 풍채가 준위(俊偉)하고, 청백(淸白)하여 절개를 숭상했으며 또 문장에 능했다. 폐조(廢朝) 때에 바른 말을 하다가 멀리 귀양가서 변방에서 졸하니, 백성들이 모두 마음 아파하였다.
명묘(明廟) 때, 참찬 조언수(1497-1574 趙彦秀)가 특진관으로 경연에 들어가 모셨다. 상이 묻기를,
“공부(功夫)라는 두 자의 뜻이 무엇이오?”
하니, 좌우 사람들이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때 조공(趙公)이 앞으로 나가 말하기를,
“공(功)은 여공(女功)이요, 부(夫)는 전부(田夫)입니다. 이 말은 선비가 부지런히 배우는 것은 마치 여자가 길쌈을 부지런히 하고 농부가 농사를 힘써 하는 것과 같이 하라는 뜻이옵니다.”
하니, 상은 이 말을 아름답게 여겼다.
선묘(宣廟) 초년에는 하루에 세 번 경연을 열었다. 이때 미암(眉巖) 유희춘(1513-1577 柳希春)이 부제학으로서 항상 경연에 나가 강(講)을 올렸다. 상은 본래부터 미암의 배운 것이 많은 것을 소중히 여겼던 터이므로, 그를 돌아보고 묻기를 열심히 하여 해가 기울어도 게을리 하는 일이 없었다. 어느날 《시경(詩經)》 석서편(碩鼠篇)을 강하는데, 상이 묻기를,
“쥐는 천하고 보기 싫은 물건인데 어찌해서 육갑(六甲)의 첫 머리에 두는 것인가?”
했다. 미암이 대답하기를,
“쥐는 앞발에 발톱이 네 개이고, 뒷발에 발톱이 다섯 개입니다. 그래서 음양이 상반(相半)되기가 이 물건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밤중에 음이 다하고 양이 생기는 뜻을 취해서 이 자(子)로 12시의 첫머리를 삼는 것입니다.”
했다. 상은 이 말을 듣고 몹시 신기하게 여겼다.
선묘조(宣廟朝)에 우리 장인인 신공 담(1519-1595 申湛)이 부제학으로서 경연에 입시했는데, 강이 끝나자, 상은 역대의 명필(名筆)들은 논하다가 이르기를,
“요새 보니 설암(雪菴) 병위삼(兵衛森)의 필법이 가장 힘찬데 설암은 어떤 사람인가?”
했다. 좌우 신하들은 혹 중이라고 대답했으나 장인은 말하기를,
“설암은 이부광(李溥光)의 별호(別號)로 조맹부(趙孟頫)와 한 시대 사람으로 원(元) 나라 사람입니다.”
했다. 상은 또,
“궁체(宮體)란 무슨 뜻인가?”
하니, 장인이 또 대답하기를,
“진(陳) 나라 후주(后主) 때 강총(江總)이란 사람이 글씨를 화려하고 아름답게 써서, 이것을 궁중에서 본받아 썼기 때문에 궁체라고 하옵니다. 그리고 양(梁) 나라 서이(徐樆)도 역시 궁체를 썼습니다.”
하였다. 장인은 집에 돌아가서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문관들이 모두 글을 읽지 않아서 심지어 궁체도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하였다.
진욱(陳郁) 선생은 글을 잘해서, 여러 번 과장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그 문(文)과 부(賦)는 선비들의 글 짓는 정식(程式)이 되어 베껴다가 외는 자가 꽤 많았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김모재(金慕齋 김안국 1478-1543) 선생에게 글을 배워서 학문과 조행(操行)이 당시 동류들의 추앙을 받았으므로, 전관(銓官)은 그가 과거에 떨어졌다 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하였다. 그는 여러 유생들을 가르치는데 반드시 효도와 우애를 먼저 하니, 배우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나도 역시 가서 《한서(漢書)》를 배웠었다. 선생은 항상 모재(慕齋)를 일컬어, ‘천품이 영특하고 밝으며, 총명과 지혜가 남보다 뛰어나고, 또 이학(理學)이 고명하며 문장이 전아하다’고 했다. 또 모재는 감식(鑑識)이 신과 같아서, 남이 지은 글을 보면 마음속으로 그 사람의 궁달(窮達)과 수요(壽夭)까지도 아는데, 이것은 열에서 한 번도 실수가 없었다. 후학을 이끌어 가르치되 성의를 다했으므로 회재(이언적 1491-1553 晦齋)ㆍ퇴계(退溪) 두 선생도 모두 선생을 뵙고 비로소 학문하는 방도를 알았다고 하니, 그 도를 보호하고 학문을 밝힌 공로가 또한 크다 하겠다. 다만 행동을 너무 천진스럽게 하고, 꾸미는 것에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쳐다보면 처음에는 어둡고 소홀한 것 같지만 가르침을 받아보면 따뜻하기가 옥과 같고, 언론이 화평하여 마치 봄바람 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았다. 선생이 돌아간 뒤에 선비들의 의논이 ‘문묘에 종사하도록 소를 올리자.’고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선생이 평소에 재산을 불린 것이 흠이 된다.’고 하여 그 의논이 중지되었다. 진선생의 벼슬은 현감에서 그쳤다.
○ 신정(申瀞 1450 ? -1482)은 문충공(文忠公) 숙주(叔舟 1417-1475)의 아들인데, 나이 30도 되기 전에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일찍이 이조 참판(李朝參判)으로서 좌리정훈(佐理正勳)에 기록되어 공신이 받아야 할 노비는 정수대로 이미 다 받았다. 고령현(高靈縣)에 사노(寺奴) 부자(父子)가 살고 있는데 한 도(道)에서 제일 부자라는 것을 듣고 그들을 차지하려고 계획을 하다가 어찌할 방법이 없자, 드디어 어보(御寶)를 위조해서 공문(公文)을 내어 독촉하다가 일이 탄로되어 옥에 갇혔다. 성묘(成廟)는 매양 신숙주의 공로를 생각해서 그의 죽음을 면하게 해주려고 했다. 어느 날 밖에 거둥하다가, 금부(禁府)의 앞길에서 연(輦)을 멈추고 신정을 명하여 앞에 불러오게 하여 순순하게 하교하기를,
“네가 대훈신의 아들로서 지금 사형을 받게 되었으니 내가 몹시 측은하게 여긴다. 네가 만일 진실을 말하고 잘못을 뉘우친다면 지금이라도 너를 석방하여 네 아버지의 훈로에 보답하려 한다.”
했다. 그러나 신정은 어려서부터 귀하게만 자라서 성질이 교만했다. 얼굴에 오히려 분한 기색을 띠고 한결 같이 숨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묘(成廟)는 이르기를,
“미련하게 고집이 있는 사람이로군!”
하고, 도로 하옥시키도록 명하고 금부(禁府)로 하여금 그의 죄상을 의논하게 했다. 이때 판부사 강희맹(姜希孟1424-1483) 등이 아뢰기를,
“신정은 몸이 재상에 있으면서 어보를 위조했으니, 법에 비추어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
하니, 성묘는 즉시 이를 윤허하였다.
신정의 집이 우리 마을 안에 있었다. 그래서 그 자손들에게 ‘어보를 위조한 것은 그의 집사람이 한 일이요, 신정은 실상 모르는 일이다.’라는 내용을 들었다. 그 뒤에 나는 동지춘추(同知春秋)로서 실록의 사신론(史臣論)을 보았는데, 거기에,
“신숙주는 공로가 사직(社稷)에 있었는데, 그 시체가 식기도 전에 그 아들 신성이 제명대로 죽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하였다. 이로 보아 그 자손들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닐 듯하였다.
송평(宋枰)은 역시 우리 마을 사람이다. 일찍이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로 있을 때 의녀(醫女) 하나를 첩으로 두었다. 그는 자문지(咨文紙)한 장으로 전모(剪帽)만들어서 그 여인에게 주었다. 대관(臺官) 중에 그 여인을 데리고 살던 자가 있었는데, 그 혐의로 송평을 탄핵하여 장죄(贓罪)로써 하옥시켰다. 송평은 본래 성질이 굳셌다. 발끈 성을 내어 말하기를,
“내 비록 죽을지언정 어찌 이 형장(刑杖)을 받는단 말이냐?”
하고, 이에 죄를 받고 말았으므로, 드디어 장안(贓案)에 기록되어 그 자손이 금고(禁錮)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증손 송복견(宋福堅)이 문과에 올랐으나 청현(淸顯)한 벼슬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시원치 않은 반열로만 돌다가 통례(通禮)로서 당상관에 올랐으며, 현손 송거(宋鐻)가 비로소 주서(注書)와 양사(兩司)가 되었으나, 겨우 시정(寺正)으로 그치고 말았다.
송평이 녹안(錄案)된 지 3년 후 성묘(成廟)가 경연에 납시어 좌우에게 묻기를,
“송평은 필경 그 계집을 버렸겠지?”
하니, 좌우가 대답하기를,
“지금도 오히려 집에 데리고 있다고 합니다.”
했다. 이 말을 듣고 성묘는 아무 말도 없었다. 대개 송평은 종이 한 장 때문에 몸이 큰 죄에 빠지고 그 오명을 자손에게까지 전해지게 하였다. 성묘가 일찍이 그 죄를 용서해 주고자 하여 이렇게 물었건만, 송평은 오히려 뉘우치지 않았으니, 계집에게 혹해서 그 본마음까지 잃은 자라 할 수 있다. 조종조(祖宗朝)에서 장법(贓法)을 제일 엄하게 다스렸으니, 이것은 신정과 송평의 일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묘의 신하를 가엾게 여기는 그 어진 마음은 지금까지 사람을 감동하게 하니, 이야말로 동방에서 성덕을 갖춘 임금이라 할 만하다.
내가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있을 때, 당상 문관 하나가 권세가 혁혁하였는데, 재물을 탐함이 한량이 없었다. 그리하여 황주(黃州)에서 사재(司宰)ㆍ제용감(濟用監)에 드리는 공물을 방납(防納)하자면, 원래 정가는 면포 50동(同)이었는데, 병사(兵使) 정항(鄭沆)이 잘 보이기 위해서 여기에 5동을 더 받아서 그 당상 문관의 집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갖춰 납입할 생각을 하지 않으므로 두 감(監)에서는 글을 보내어 감영(監營)에 계속 재촉했다. 그래서 감사(監司)가 색리(色吏)를 잡아다가 형신(刑訊)을 가하고, 본주(本州)에서는 사람을 그 집에 보내서 바치기를 재촉하면, 관청의 위엄으로써 가두기 때문에 감히 입을 열지 못한 채 3년이 지났다. 정항(鄭沆)이 벼슬이 바뀌어 돌아가자, 병사(兵使) 권여경(權餘慶)이 후임으로 왔는데, 그 역시 당상 문관의 풍지(風旨)를 받아서 감히 가부를 말하지 못했다. 판관(判官) 신수을(愼守乙)이 토산물을 많이 갖추어서 한 바리를 가득 실어 보내면서 편지로 애걸했다. 그러나 그 물건만 모두 받아들이고서 역시 회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수을은 사람을 만나는 대로 그 이야기를 하니, 당상 문관은 이 말을 듣고 미워하여 대간(臺諫)을 시켜 공박하여 제거하게 했다. 권여경이 다시 면포 50동을 민간에서 거두어들이니, 그때는 마침 메마른 여름철이어서 원망과 비방이 떼 지어 일어났다.
나는 항상 그 사람됨을 분하게 여겨 왔었다. 계해년(1623, 인조 1) 반정(反正) 초기에 나는 또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되었다. 그 사람은 백성의 밭을 빼앗아 점령하여 홍주(洪州)ㆍ천안(天安)ㆍ아산(牙山)ㆍ온양(溫陽) 등지에 넓게 둔전(屯田)을 여섯 곳이나 만들어 쌓은 곡식이 수 천 석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여러 고을에 공문을 돌려 개인 소유의 둔전을 없애게 하니, 그곳에 들어살던 무리들은 일시에 도망해 흩어지고 곡식과 소는 관청에서 몰수해 들였다. 성스러운 교화가 더욱 새로워지고 공정한 의논이 바야흐로 널리 펴져, 그 사람 부자는 각각 먼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또 역적의 구초(口招)에서 그들의 말이 나와서 부자가 모두 잡혀 옥에 갇히고 가산은 모두 없어져서 좋은 집 세 채가 헐값으로 권세 있는 집에 다 팔렸다. 오래된 뒤에 겨우 풀려났으나 도로 배소(配所)에 가게 되어 그 아비는 적소(謫所)에서 죽었다. 지금은 비록 방환(放還)되었으나 호서(湖西) 지방으로 떠돌아다니면서 궁하고 파리한 모습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천도(天道)와 신명(神明)이 재물 탐하는 자를 족히 경계한다고 하겠다.
이근(李謹)이란 자도 역시 나와 한 고향 사람으로 대대로 문벌이 좋은 집안이다. 처음 날 때 몸뚱이 하나가 겨우 면목(面目)을 갖추었을 뿐으로 털이 온 몸을 덮어 마치 돼지 새끼와도 같았다. 부모들이 놀라고 괴상히 여겨 처음에는 키우지 않으려고 포대기에 싸서 동산 가운데 나무 밑에 두었더니, 어린애의 우는 소리를 듣고 까마귀떼가 모여 들었다. 부모는 이를 불쌍히 여겨 다시 거두어 길렀는데, 성인이 되었는데도 키가 석자를 넘지 못하고 머리털이 땅까지 내려오고 수염이 한 자나 되었다. 걸음걸이는 휘청휘청하고 손발에도 모두 털투성이어서 참으로 난장이 중에도 난장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근 자신도 자기가 병자인 줄을 알고 사람만 보면 문득 숨고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집에서 글을 배우는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서 책을 덮고서도 줄줄 외어, 경전(經傳)이나 사기(史記)에 정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글을 잘 짓고 글씨도 잘 썼는데 그 중에서도 시에 가장 능했다. 그리고 노래를 잘 부르고 휘파람을 잘 불었으니 대개 그의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문족(門族)인 장계(長溪) 황정욱(黃廷彧1532-1607)이 기이하다는 소문을 듣고 와서 보았다. 처음에는 몹시 해괴하게 여겨 입으로 불러 시를 짓는 것을 시험해 보았다. 그는 운자를 내기가 무섭게 바로 시를 짓는데 그 대구(對句)가 몹시 아름다웠다. 장계는 크게 칭찬하기를,
“이런 기이한 재주가 있는데 타고난 형상이 남과 다르니, 어찌 아까운 일이 아니랴?”
하고, 드디어 그의 부모에게 권하여 장가들이게 했다.
임진왜란 때 이근은 광주(廣州)에 있는 선산 근처로 피난했다. 거기에서 졸지에 여러 왜적을 만났다. 왜적들은 그를 보고 크게 놀라 괴상한 짐승이라 생각하고 우뚝 서서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보고 난 뒤에 잡아 가지고 서로 웃고 놀리더니 기화(奇貨)라고 여겨 마주 들고 그들의 추장에게 갔다. 왜추(倭酋)도 역시 놀라고 괴상히 여겨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별하지 못하여 혹은 먹을 것을 던지기도 하고 혹은 회초리로 때리기도 하여 우는가, 먹는가를 시험했다. 그러나 이근은 본래 뜻이 굳고 용기가 있어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으므로 왜추는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어떤 늙은 왜인 하나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저 물건을 왜 빨리 죽이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조선에서 편전(片箭)을 쏘는 것들이다.”
하니, 모든 왜인들이 모두 분이 나서 칼을 빼어 베이려 하자, 왜추는 힘써 말리고 밤이면 죽롱(竹籠)에 넣어서 도망가는 것을 막았다. 또 점치는 중을 불러다가 그를 두고 점을 치라고 했다. 이때 왜승(倭僧)이 옥 산통(算筒)을 던져서 괘를 지어 말하기를,
“사로잡은 것은 곰도 아니요 범도 아니며, 이것은 바로 문왕(文王)이 여상(呂尙)을 얻을 징조이니, 어찌 기이한 물건을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왜추는 크게 기뻐하여 조심하여 더욱 정성껏 대접하였다.
왜추가 진을 친 곳은 바로 한강 제천정(濟川亭)이었다. 이때는 마침 7월 보름이어서 달빛이 대낮과 같았고 강의 물결은 마치 마전한 베처럼 잔잔했다. 밤기운은 쓸쓸하고 벌레 소리는 찍찍거리는데 가을 소리는 사방에서 일어났다. 이근은 홀로 앉아 잠이 들지 않아 백 가지 생각이 가슴 속에서 일어나므로 죽롱 속에서 길게 휘파람을 부니 그 소리가 처량하여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모든 왜병들은 놀라 일어나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왜추도 이 소리를 듣고 고향을 그리워하고 나라 떠나온 생각을 이기지 못해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셨다. 그러자 비로소 죽롱을 열고 이근을 내놓으면서도 말하기를,
“무슨 괴물이 이렇게 기이한 재주가 있느냐! 저번에 신승(神僧)이 점친 것이 헛말이 아니로구나.”
하였다. 이근은 스스로의 생각에, ‘내가 나면서는 이 세상의 이상한 물건이 되었고 죽어서는 적에게 잡혀가는 혼이 되겠으니, 사람이 이 지경이 되어 만 가지 일에 무엇을 관계하겠는가. 지금의 방법으로는 내가 요행히 이곳을 벗어나서 혼자 계신 어머님을 뵙는 것뿐이다.’고 여겼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말하며 웃어대니, 왜추가 술을 주면서 마시라고 권했다. 이근은 주량도 또한 커서 병을 기울여 마음껏 마시고 술이 취하자 길게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초사(楚辭)는데, 온 진중의 모든 왜병들이 모두 감동해서 울었다. 노래가 끝나자 이근은 일어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로 돌면서 머리를 흔들고 눈망울을 굴리고 손벽을 치고 발을 구르는 등 백 가지 모양을 다하니, 모든 왜인들도 또 손벽을 치며 크게 웃었다. 춤이 끝나자 이근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목 놓아 슬피 우니, 이것을 본 자들도 모두 울었다. 왜추는 묻기를,
“너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슬피 우느냐?”
했다. 이근은 붓과 종이를 달라고 해서 써서 보이기를,
“80세가 되신 늙은 어머니와 헤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으므로 그래서 우는 것이오.”
하니, 왜추도 이 말을 듣고 가엾게 여기며 감탄했다. 그리고 그의 필적을 보더니 혀를 차면서 칭찬하기를 마지않으면서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물건이 몹시 괴이하고 이상하더니 이제 그가 하는 짓을 보니 또한 심상치가 않다. 이 물건을 만일 진중에 둔다면 반드시 요망스러운 일이 생겨서 도리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다. 잡아 두어봐야 유익할 것이 없고 죽이자니 차마 그럴 수도 없으니 차라리 놓아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 말을 듣고 모든 왜병들도 그 말이 옳다고 했다. 그래서 왜추는 이근에게 말하기를,
“네가 지금 집에 돌아가기를 생각하고 있으니 네 소원대로 해주겠다.”
했다. 그러나 이근은 왜추의 마음을 시험해 보려고 말하기를,
“지금 길이 막혔으니 내가 가고 싶지만 어디로 가겠소? 이 진중에 있게 해주시오.”
하니, 왜추는,
“하여튼 말해 보라.”
하므로 이근은,
“강화(江華)로 가고 싶소.”
하니, 왜추는 진중에 잡혀와 있는 우리나라 사람 4ㆍ5명을 불러내어 조그만 배 한 척에 양식을 많이 준비해 주면서 강화로 보내주었다. 강화에 와서 들으니, 그의 외사촌 박경신(朴慶新 1560-1626)이 해주 목사(海州牧使)가 되었다고 하므로 이근은 바로 해주로 찾아갔다. 이근의 어머니는 목사의 삼촌 숙모이기 때문에 해주 관사에 와 있었다. 그래서 모자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아! 난장이는 천지간의 한 불구자인데 그 천한 재주를 가지고 적의 소굴을 벗어나서 늙은 어머니를 만나볼 수가 있었고, 또 나이가 70에 가깝도록 살다가 죽었으며 자손도 또한 많았으니, 어찌 하늘이 시킨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혹 남이 병이 있고 유약하고 어리석고 용렬한 것을 보면 반드시 비웃고 업신여기는데, 사람의 화복의 순환이란 사람의 일을 가지고 미리 짐작할 수가 없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이근의 일이 아! 또한 기이하지 않은가? 감사 박경신이 항상 이 말을 들려주었다.
헌평공(憲平公) 이봉(李封1441-1493)은 목은(牧隱)의 증손인데 글을 잘하여 이름이 있었고 그 성질이 엄격하고 굳세어서 사람들이 감히 사정(私情)을 가지고 청탁하지 못하였다. 그가 형조 판서가 되어 옥사를 다스릴 적에 법을 몹시 엄하게 써서 억울하게 죽은 자가 또한 많았다. 동종(同宗)인 토정(土亭) 이공 지함(李公之菡 1517-1578)이 항상 말하기를,
“헌평공이 돌아간 지 지금 백여 년이 되는데도 그 자손이 미약해서 겨우 비렁뱅이만을 면하고 있음은 어찌 형옥(刑獄)을 엄하게 다스린 응보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형관(刑官)이 된 자는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나는 두 번 형조 판서가 되었지만, 매양 토정의 말을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깊이 생각하곤 했다. 이것이 어찌 한 가지 도움이 아니겠는가?
우리 일가에 이공 지번(李公之蕃 1508-1575)ㆍ지무(之茂)ㆍ지함(之菡 1517-1578)은 모두 동복 형제간이었다. 맏이와 막내는 재주와 행실이 일찍이 뛰어났고 명성이 더욱 자자했다. 맏이는 퇴계와 가까이 사귀어서 자못 봉마(蓬麻)의 유익함이 있었고, 막내는 이학(理學)에 통달하여 학자들이 모두 그를 토정 선생(土亭先生)이라고 불렀다. 이들 형제는 모두 지리(地理)를 알았는데, 그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맏형이 그 막내아우에게 말하기를,
“한산(韓山)에 계신 선묘(先墓)는 산세가 낮고 미약해서 항상 비습(卑濕)한 것이 걱정되니 이번에 딴 곳을 골라서 옮겨 모시도록 하자.”
했다. 이리하여 형제는 호서(湖西)의 여러 산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여러 달이 지나도록 결정짓지 못하였다. 어느 날 홍주(洪州) 오서산(烏鼠山)에 올라, 사방으로 근처 고을의 산 모양과 물 형세를 바라다보고 탄식하기를,
“이런 명산이 우리 고을 가까이에 있는 줄을 몰랐구나.”
했다. 이는 공의 형제가 항상 보령(保寧)을 왕래했기 때문에 이곳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은 주산(主山)에서 10여 리를 뻗어 내리는 동안 혹은 우뚝 솟기도 하고 혹은 낮기도 하여 마치 말이 빨리 달리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형세가 꼭 바닷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듯하다가 바다에 다다라서는 멈추어 천 길이나 되게 우뚝 솟았다. 또다시 산세는 구불구불 흘러 내려가다가 들 복판에서 맺혀져서 조그만 언덕을 이루어 모양이 마치 누워 있는 소와 같았다. 앞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서 넓게 끝이 없고 또 온 섬의 봉우리가 뾰죽뾰죽 바로 그 앞에 서 있었다. 이곳은 고만(高巒)이라고 부르는데, 혹은 고려 때 만호보(萬戶堡)라 불리기도 했다. 맏이가 여기에 올라가 보고 기뻐하여 비로소 묘 자리를 정하고 저물어서 산 밑에 있는 어촌에서 잤다. 그 이튿날 주인 할멈이 맏이에게 묻기를,
“손님은 어디서 오셨소? 어젯밤 꿈에 머리털이 하얀 늙은이가 모양도 기이하게 생겼는데 울면서 말하기를, ‘너희 집에 온 손이 장차 내 집을 뺏으려고 한다.’ 합디다.”
고 말했다. 맏이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여 필경 산신령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례를 모시려 할 때, 그 아우 토정에게 이르기를,
“장례를 모시고 난 뒤 기해년에는 우리 3형제가 모두 귀한 자식을 얻을 것인데 다만 너의 아들이 불행하겠으니 이것이 한스럽다.”
고 했다. 그 뒤 기해년에 맏이는 과연 아들을 낳았으니, 이 분이 바로 아계(鵝溪) 이 상공 산해(李相公山海 1539-1609)이고 그 가운데 분도 또 판서(判書) 산보(山甫1539-1594)를 낳았다. 그리고 토정의 아들도 낳았는데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그 중에서도 뛰어났는데, 나이 겨우 20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편(詩篇)이 호서지방에서 전해지면서 외워지고 있다.
이 상공 덕형(李相公德馨1561~1613)은 곧 아계(鵝溪 이산해)의 사위인데 그도 또 풍수설을 믿었다. 어느 날 내가 마침 가서 뵈었더니, 상공(相公)은 바야흐로 지리를 잘 보는 승려 성지(聖智)와 함께 앉아서 산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묻기를,
“지리(地理)란 묘연한 것이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공은 말하기를,
“이미 천문(天文)이 있는데 어찌 지리가 없겠소? 다만 세상에 안목을 갖춘 지가 없어서 알지 못할 뿐이지요. 내가 일찍이 처가 쪽 선대의 고만산론(高巒山論)을 보았는데 수십 년 뒤에 귀신같이 맞으니, 전혀 맞지 않는다고만 할 수는 없소.”
하였으니, 세상에서 풍수(風水)를 숭상하고 믿게 된 것은 실상 이씨(李氏)의 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맏이는 시정(寺正)의 벼슬을 하다 돌아갔고, 가운데 분은 일찍 돌아갔으며, 막내분 토정은 아산 현감(牙山縣監)으로 관에서 돌아갔다.
아계 이산해가 처음 났을 적에 토정이 그 우는 소리를 듣고 그의 맏형 이시정(李寺正)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기이하니 잘 기르도록 하십시오. 우리 집이 이제부터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했다. 다섯 살이 되자 처음 병풍 글씨를 쓰는데 붓 움직이는 것이 신과 같고 글자 획이 완연히 용과 뱀이 달려가는 것 같았으므로 신동이라고 명성이 자자하여 당시의 공경(公卿)들이 와서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이 먹물을 발바닥에 칠하고 종이 끝에 찍어 어린 아이의 발자국임을 표시했는데, 인가에서 지금도 전해오면서 보고 있다.
나이 13세에 충청우도(忠淸右道)의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뽑혔으니, 그때 지은 글이 〈만초손부(滿招損賦)〉였다. 글 뜻이 노숙해서 글을 아는 자는 이미 그 문장의 수단을 알 수 있었다. 나이 겨우 약관에 과거에 올라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고 여러 번 이조 판서가 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공훈으로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맑은 명성이 있었다.
나의 고조 의정공(議政公)이 일찍이 꿈을 꾸니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이 와서 말하기를,
“내 집이 헐린 지 이미 오래되어서 바람과 비를 가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 세상에 공만이 내 집을 지어줄 만하니 공은 잊지 말도록 하라.”
하므로, 고조는 놀라 깨어서 괴이하게 여겼다. 양경공의 종손은 한성군(韓城君) 이질(李秩)이었으므로 그를 불러다가 꿈 이야기를 했더니, 한성군이 말하기를,
“연산조(燕山朝) 때 찬성(贊成) 이파(李坡)가 폐비 사건으로 극형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양경공은 찬성의 조부이기 때문에 그 무덤을 헐어버렸으나 자손이 미약하고, 또 묘가 한산(韓山)에 있게 때문에 아직 고치지 못했으니 필경 이 때문일 것입니다.”
했다. 고조는 이 말을 듣고 더욱 이상히 여겨 드디어 친 자제들을 보내어 봉분을 고쳐 쌓았다. 양경공은 의정공에게 고조 항렬이 되니, 그가 돌아간 지가 그때 이미 90여 년이 되었다. 이런 일로 보면 사람의 정백(精魄)이 오래 되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과 또 무덤은 죽은 사람의 집이 되는 것이 분명하니, 자손 된 자는 먼 조상이라고 해서 소홀히 하지 못할 것이요, 무덤이 무너진 것도 고쳐 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양경공은 목은(牧隱)의 아들이다. 내 고조의 휘는 유청(惟淸)이다.
우리 나라 음양(陰陽)은 모두 오행(五行)을 주장하여 온 지가 오래되었다. 자평(子平)은 사간(司諫) 김형(金泂)에게서 시작되었고 성요(星曜)는 서얼(庶孼)인 송사련(宋祀連 1496-1575)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김형은 친구를 사귀는데 반드시 그 명도(命途)가 통달하게 될 것을 물색하였다. 그는 한 번은 무슨 일로 해서 옥에 갇히었는데, 이기(李芑 1476-1552)를 끌고 들어갔다. 그러자 기는 분하게 여겨 김형을 꾸짖기를,
“네가 어찌해서 나를 끌어댔느냐?”
하니, 김형이 말하기를,
“내가 잘못한 일도 없이 잡혀왔는데, 이러한 몹시 궁한 때를 당하여 백 가지로 생각하나 계교가 없어, 우리 친구들 중의 명수(命數)를 점쳐보니, 네가 가장 좋아서 반드시 정승이 되어 오랫동안 부귀를 누리겠기에, 너의 큰 복을 힘입으려고 끌어넣은 것이다.”
하였다. 이기는 도리어 크게 기뻐하더니 과연 모두 석방되었다.
송사련은 정승 안당(安瑭 1460-1521) 서매(庶妹)의 소생이므로 안씨의 집에 출입하고 가장 친하게 지냈다. 송사련은 안씨의 집이 반드시 망하고 자기 운수는 바야흐로 형통할 것을 알고, 드디어 안정승의 부인 초상 대 조객록(弔客錄)을 가져다가 역당(逆黨)이라고 지목하여 대궐에 들어가 고변(告變)했다. 이리하여 안씨의 집 4부자는 일시에 죽음을 당하고 송사련은 고변한 공으로 당상관(堂上官)에 올라 나라의 녹(祿)을 40여 년간 먹다가 늙어서 자기 집에서 죽었다. 그 뒤에 비록 안씨 자손들이 그의 무덤을 파고 시체에 매질을 했지만, 당시에 일족(一族)이 모두 죽은 화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상의 점 잘 치는 자도 또한 경계할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력(萬曆) 신묘년(1591, 선조 24)에 장악원(掌樂院)에서 기로연(耆老宴)을 열었다. 이때 정원(政院)에서는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가 있다 하여 예에 의하여 상께 아뢰어서 특별히 1등 기악(妓樂)을 내리도록 했다. 이에 중사승지(中使承旨)를 시켜 술을 내렸다. 이때 정승 김귀영(金貴榮1520-1593)ㆍ정승 심수경(沈守慶1516-1599)ㆍ지사(知事) 강섬(姜暹1516-1594)ㆍ동지 송찬(宋贊1510-1601)ㆍ우윤 목첨(睦詹1515-1593)ㆍ대사성 이기(李墍1522-1600)와 우리 장인 참판 신담(申湛1519-1995)이 미리 모여서 시축(詩軸)을 만들어 경사를 도왔고 심정승이 시를 썼다. 장인이 항상 말하기를,
“기로연(耆老宴)이란 우리 동방의 성대한 행사로서 그 기구나 음식이 여기에 비교할 것이 없다.”
고 하는 것을 내가 일찍이 들은 바 있었다.
그 뒤 25년 만인 을묘년(1615, 광해군 7)에 또 장악원에서 기로연을 열었는데, 역시 기악(妓樂)과 술을 내리기를 한결같이 고사에 의하여 했다. 나는 이때 도승지로서 중사(中使)와 함께 명령을 받고 가서 참여했었다. 이때에는 영의정 기자헌(奇自獻1562-1624)이 당시 정승으로서 잔치를 주재했으나 그는 기로(耆老)가 아니었다. 판추 한효순(韓孝純1543-1621)ㆍ판추 노직(盧稷1545-1618)ㆍ참찬 윤승길(尹承吉1540-1616)ㆍ판서 이준(李準1545-1624)ㆍ지사 이시언(李時彦 ? -1624)이 자리에 있었다. 휘장과 장막ㆍ병풍ㆍ족자 같은 기구나, 등촉(燈燭)과 채화(綵花) 따위의 화려한 것이나, 기악(妓樂)이 차려진 것이나, 음식의 풍부한 것이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여 자못 이 인간 세상의 일 같지가 않았다. 모든 노인들은 모두 여러 조정의 기로들로서, 쇠한 얼굴에 센 머리털을 날리고 서대(犀帶)와 금대(金帶)가 휘황하게 빛나고 머리에 꽂은 꽃은 모자를 눌렀는데, 술이 얼큰하자 서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니 음악 소리가 하늘에 울렸다. 잔치가 파하자 자제들이 부축해서 돌아가는데 연거(蓮炬)로서 앞을 인도하고, 노래와 관악이 뒤를 옹위하고 갔다. 이것을 보는 자는 칭찬해 마지않으면서 모두 신선이라고 일컬었다.
그 뒤 20년인 을해년(1635, 인조 13)에 나는 벼슬이 1품에 오르고 나이도 도한 70에 이르러서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은 평생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던 것이라서 놀라움을 이기지 못했다. 이때에 정승 정창연(鄭昌衍1552-1536)은 나이 85세이고 정승 오윤겸(吳允謙1559-1636)은 77세, 정승 이정귀(李廷龜1564-1535)는 72세, 정승 윤방(尹昉1563-1640)은 73세, 정승 김상용(金尙容1561-1637)은 75세, 판중추부사 정광적(鄭光績1551-?)은 86세, 판서 이홍주(李弘冑1562-1638)ㆍ판서 박정현(朴鼎賢1562-?)ㆍ참찬 박동선(朴東善1562-1640)은 모두 74세였고, 동지 이상길(李尙吉1556-1637)은 나이 80에 가자(加資)되고 나는 나이 70이었다. 이해에 오윤겸ㆍ이정거 두 정승은 돌아갔으나 이듬해 병자년에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은 나이 70, 동지 송일(宋馹)은 나이 81로서 가자되어 역시 여기에 참여하여 도합 11명이었으니, 옛날에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평시에는 종2품의 문관 재상이 모두 참석해도 항상 7ㆍ8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난리 후로는 정2품 문관 재상만 참석하게 했는데도 항상 10여 명이 되었으니, 평시에는 재상의 직급이 드물었단 말인가. 아니면 난리 후에 오래 사는 이가 많아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또한 어찌 일대의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참판 박이서(朴彝敍1561-1621)의 자는 석오(錫吾)로, 충후하고 선량하고 친구와 독실히 지냈는데 나와 가장 친하였다. 기미년(1619, 광해군 11) 겨울에 내가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있다가 벼슬이 바뀌어 돌아오니, 그 이튿날 석오가 찾아왔다. 그와 한참 동안 앉아서 이야기하는데 마침 맹인 지억천(池億千)이 또 왔다. 석오는 말하기를,
“이 맹인이 점을 잘 친다기에 내가 보고자 한 지가 오래일세.”
하고는, 조그만 종이에 다섯 가지 조목을 써서 주면서 나더러 물어 보라는 것이다. 나는 대강 인사를 끝내고 나서 곧 석오가 써 준 다섯 가지 조목을 물어보니, 지맹인(池盲人)은 말하기를,
“오는 신유년(※1621)이 불길합니다.”
했다. 나는 또 묻기를,
“소위 불길하다는 것은 심상한 액환(厄患)인가?”
했더니, 지맹인은,
“점괘로 보면 큰 화액일 듯합니다.”
했다. 나는 듣고 몹시 무료했다. 석오는 나의 얼굴빛을 살펴보더니 비로소 자기가 친히 묻기를,
“이것은 바로 나의 운수요. 그런데 신유년에는 마땅히 죽을 운수란 말이요?”
하니, 지맹인은 본래 노신(老神)한 사람이라, 얼른 대답하기를,
“다시 생각해 보니 신유년에는 길성(吉星)이 구해주어서 슬하에 슬픈 일이 있겠고 75ㆍ76세에 명이 다하겠습니다……”
했다. 석오는 다시 더 묻지 않고 일어나 가버렸다. 그가 간 뒤에 내가 또 물었더니, 그는 말하기를,
“신유년에 반드시 횡사할 액운이 있는데, 아마 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석오는 과연 경신년 가을에 중국 서울에 가는데, 오랑캐가 요동(遼東) 길을 막는 바람에 수로로 가다가, 신유년 5월(1621)에 바다에 빠져서 죽었으니, 지맹인의 말이 과연 맞았다. 그 뒤 갑자년, 내가 주청사(奏請使)로서 수로로 중국 서울을 가다가 바닷가에서 석오를 제사지냈다. 을축년에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 등주(登州)에 이르러 배를 탔는데, 그날 밤 꿈에 석오가 술병을 가지고 와서 나를 전송하면서, 은근히 정회를 말하는 것이 완전히 평시와 같았다. 꿈에서 깨고 나니 서글픔을 이기지 못했다. 배를 타고 6일 동안이나 오는데, 조금도 풍파가 없이 편하게 우리나라 땅에 닿았으니, 어찌 이것이 석오의 영혼이 도와주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평생에 서로 좋게 지내던 의리가 이승과 저승의 간격이 없었으니, 아! 슬픈 일이다. 석오는 나이 15세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고 바야흐로 중한 인망(人望)이 있어 남들이 모두 공보(公輔)의 자격으로 기약했는데, 물에 빠져 죽는 데 이르렀으니, 이보다 불행한 일이 있겠는가. 석오의 어진 인품으로도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아! 슬픈 일이다. 그 아들 박로(朴𥶇)가 지금 참판이 되었으니 진실로 위로가 된다.
하경청(河景淸)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성질이 굳고 기개를 숭상하여 일을 당하면 과감하고 남의 말을 피하지 않았다. 고 좌랑 송구(宋耈)와 한 동네에서 어린시절부터 친구였는데, 송공(宋公)의 조부가 안주 목사(安州牧使)가 되었을 때 하경청은 송구를 따라서 영변(寧邊)에 있는 절로 글을 읽으러 갔다. 이 절은 원래 관서(關西)의 거찰(巨刹)이어서 중이 가장 많이 있었다. 영변에 향리(鄕吏) 하나가 있는데 재산은 수만금이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크게 무차회(無遮會)를 열고 아들 낳기를 빌었다. 이때 도내의 중들이나 이웃 고을의 남녀들은 이 소식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어서 많은 사람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 법회가 있던 전날 밤 모든 제구를 성하게 갖추어 놓았는데, 하경청은 이때 총각으로 불탑(佛榻) 밑에 숨어 있었다. 밤이 깊고 인적은 끊어지자, 하경청은 칼을 가지고 숨어 들어가서 부처의 얼굴을 긁고 눈동자를 빼낸 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와 누웠다. 송구로서도 역시 이것은 알 리가 없었다. 밤중이 되자, 시주하는 사람과 모든 중들은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서 일을 보느라고 분주했다. 종소리와 범패(梵唄) 소리는 산골짜기를 진동하고 등촉(燈燭)은 휘황하여 대낮과 같았다. 그러나 불상을 우러러 보니 얼굴이 망가져 형용이 없고 이목구비는 다 한 구멍이 되어 우두커니 서 있는데, 한 덩어리 흙이었다. 모든 중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크게 놀라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시주한 사람의 내외는 목을 놓아 통곡하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늙은 중은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절의 큰 변이다. 이것은 부처가 필경 변화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했다. 비록 그러나 시주한 사람은 허다한 재물을 헛되이 소비한 것이 아까워서 드디어 옛 부처를 철거한 다음, 딴 부처와 바꾸어 놓고 무차회를 열었다. 하경청은 송구와 10여 개월을 안주(安州)에 함께 있었지만, 한 번도 입을 열지 않다가 서울에 이르러 비로소 말을 했으니, 그 참고 견디는 것이 이와 같았다.
하경청은 훈도(訓導) 박주(朴洲)에게 공부를 했다. 홀(笏)의 표면에 큰 글씨로 고시천지명명(顧諟天之明命)이라고 쓴 다음, 가죽 띠와 가죽 주머니에 팔짱을 펴서 홀을 받들고 조심조심 걸어서 저자 거리로 지나가니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구경했고, 여러 아이들은 손으로 가리키면서 웃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얼굴빛을 변치 않고 종일토록 문을 닫고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을유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하경청은 기질이 굳세고 또 참을성이 있었으며 뜻을 독실하게 갖고 힘써 배웠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원대한 희망이 있다고 기대했다. 난리 때에 관서훈도(關西訓導)가 되었으나 술을 많이 마시고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드디어 방탕하고 말았다. 그래서 전에 배우던 것을 모두 버리고 무관(武官)의 일을 익혀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벽단 첨사(碧團僉使)에 이르렀다. 그러나 파직당하고 안주(安州) 땅으로 가서 붙어살더니 그 집의 풀가리에 불이 나서 타죽었다.
나는 하경청과 함께 이웃하여 살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서로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그는 불행히 재주를 가지고도 쓰이지 못하고 비명에 죽었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그가 제명에 죽지 못한 것은 부처를 헌 응보이다.”
고 하지만, 어찌 그러한 이유 때문이겠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국조(國朝)에는 보필을 잘한 어진 신하와 도덕이 있는 선비들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문치(文治)는 고려조보다 나았던 것 같으나, 무략(武略)은 삼국시대만 훨씬 못한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장수는 원래 이름난 사람이 없는데, 그 중에 김종서(金宗瑞1390-1453)가 육진을 개척하고, 윤필상(尹弼商1427-1504)이 건주위(建州衛)를 몰아낸 일이 족히 국위를 드날렸다고 하겠으나 이것도 옛날의 명장에 비교한다면 어린 아이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은 모두 영결들이니 처지를 바꾸어 태어났다면 그 공업을 측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권율(權慄1537-1599)이 행주(幸州)에서 크게 이긴 것이나, 이순신(李舜臣1545-1598)이 한산도(閑山島)에서 힘껏 싸운 것은 당시에 그 공이 으뜸으로서 실로 중흥의 근본이 되었으니, 이름이 청사(靑史)에 드리워도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곽재우(郭再祐1552-1617)는 의리에 분발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영남(嶺南)을 지켰고, 홍계남(洪季男1563-1597)은 혼자서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호서(湖西)를 보전했으니, 그 공이 적지 않다. 이 밖에도 비록 반군을 치고 역적을 토벌해서 국가에 공이 있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모두 지역 안의 일들이므로 장수의 반열에 놓고 함께 의논할 수가 없다. 내가 일찍이 옥성(玉城) 장만(張晩1566-1629)과 함께 우리나라 명장을 이야기 했는데, 장공이 말하기를,
“2백 년 이래로 일찍이 큰 적을 막아낸 자가 없다. 이것은 대개 국가에서 장수 재목을 기르는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태하고 어지러운 때를 당해서 무관(武官)의 자급을 전쟁으로 인한 공로로 따져서 올려 주지 않고, 군민(軍民)을 못살게 굴면서까지 군량을 모아 저축한 자를 등급을 뛰어넘어 가자시키니, 마침내 벼슬과 자급이 높아져서 뜻과 욕심이 이미 만족하고 보면, 자기 몸과 목숨을 돌아다보고 아끼는 이외에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는가. 지금 나라의 형세가 날로 약해지건만 장수의 적격자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했다. 장공은 원훈(元勳)의 늙은 장수이니 반드시 높은 식견이 있을 것이니, 그 말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전배들의 문장은 실로 문장을 하는 선비가 아니고서는 본래 이것을 감히 의논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새로 과거에 급제하여 간이(簡易) 최립(崔岦1539-1612)에게 인사를 갔더니, 간이는 말하기를,
“목은의 자손은 문관이 연이어 나와서 그 유풍 여운(遺風餘韻)이 오히려 남아 있다. 그리하여 비록 그 자손의 말엽(末葉)까지도 혈맥이 흘러내리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요새 《목은문집(牧隱文集)》 중의 비명(碑銘)과 묘지(墓誌)를 보면 고금에 뛰어나니, 우리나라 문장은 마땅히 목은으로 첫째를 삼아야 할 것이다. 그 자손된 자들은 하필 중국의 한유(韓愈)의 문장이나 유종원(柳宗元)의 글을 읽느라고 공력을 허비해야 하겠는가. 《목은집(牧隱集)》을 읽는 것이 좋다.”
했다. 그가 목은을 추앙하는 뜻이 보통과는 아주 다르니, 그 아들 동망(東望)이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이상국(李相國 : ※이규보1168-1242)의 문장은 목은과 더불어 어느 쪽이 낫습니까?”
하자, 간이는 말하기를,
“호음(湖陰)이 항상 말하기를, ‘이규보의 〈조강부(祖江賦)〉가 가장 좋다.’고 했지만 어찌 목은을 당하겠느냐?”
하였다.
용재(慵齋) 성공 현(成公俔 1439-1504)도 또한 목은이 첫째라고 했다. 내가 옥당에 들어가자, 선조대왕(宣祖大王)은 학문이 고명하여, 경연에서 묻는 것에 많이 대답하지 못하여 항상 황공스럽게 여겼다. 《주역(周易)》과 《대학연의(大學衍義)》 등의 글을 그때 진강(進講)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알 수 없는 곳에는 표를 붙였다가 해평(海平) 윤근수(尹根壽1537-1616)에게 가서 물었다. 그러자, 해평이 말하기를,
“자네 집에 《목은전집(牧隱全集)》이 있다니 나에게 빌려주어 잠시 읽어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나는 즉시 책을 찾아 보내고 또 가서 《주역》을 물었다. 이때 또 해평이 말하기를,
“중국 사신 허국(許國)이 우리나라 문집을 보자고 하므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이상국집(李相國集)》ㆍ《목은집(牧隱集)》ㆍ《점필재집(佔畢齋集)》ㆍ《사가집(四佳集)》 등을 주었더니, 허국은 두루 여러 문장을 훑어보고 곧 모두 돌려보냈는데, 유독 《목은집》만을 가지고서 읊조리고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원접사(遠接使)에게 청해서 그가 갈 때에 가지고 갔는데, 그가 중국에 돌아가자 통사(通使) 홍순언(洪純彦)을 통해서 또다시 《목은집》 여러 질을 청했으니, 이것만으로도 목은의 문장이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지 않은가?”
했다. 지난해에 왜사(倭使) 현방(玄方)이 왔을 때에도 역시 《목은집》을 청해 가지고 갔었다. 그러면 왜국에서도 역시 문장의 고묘한 것을 알아서 그랬단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일찍이 중국 문인들의 말을 듣고 와서 찾은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중국 사신 황홍헌(黃洪憲)이 왔을 때에도, 경연에서 선조(宣祖)가 묻기를,
“우리나라 문장은 누구를 첫째로 삼으오?”
하자, 소재(蘇齋 노수신 1515-1590)와 율곡(栗谷1536-1584)이 모두 목은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내 선조 가정(稼亭 이곡 1298-1352)의 어머님은, 원(元)에서 요양현군(遼陽縣君)에 봉해졌는데, 묘가 한산(韓山)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승 무학(無學)이 본자리로서 지리(地理)가 꽤 좋다.’고 했다. 후손 중에 무식한 자 하나가, 일찍이 한산 이씨(韓山李氏)가 대대로 명공거경(名公鉅卿)이 많은 것은 실로 이 무덤이 복을 내기 때문이라는 것을 듣고서, 그 아비가 죽자 그 묘 곁을 파고 장사를 지내서 완연히 쌍분(雙墳)처럼 되니, 보는 자들이 해괴하게 여겼다. 파토(破土)하던 날에 향로(香爐)가 갑자기 뛰어 하늘로 높이 두어 길이나 뜨다가 무덤 10보 밖에 떨어지니 일하던 사람들도 모두 송구하게 여겼는데, 그 사람은 태연하게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제주(題主)할 때에 또 솔개가 붓을 빼앗아 물고 날아가니 장례에 참례한 사람들이 모두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제야 그 사람도 비로소 크게 두려워했는데, 3년 안에 형제가 계속하여 죽고 지금에도 그 자손들은 거의 죽어 없어졌다. 서울에 살던 부인의 자손들이 뒤에서야 이 사실을 들어 알고서 관청에 글을 올려 묘를 파려고 하자, 그 사람이 최복(衰服)을 입고 멀리 와서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말하고, 곧 옮겨 장사지내려 하는데, 관(棺)이나 석회를 준비하기에 힘이 겨워 아직 못하고 있으니 기일을 늦추어 달라고 울며 애걸했다. 서울 일가들은 그 사람의 말을 믿고, 또한 그가 궁박한 것을 불쌍히 여겨 날짜를 연기해주고 일을 끝내지 못했다. 지금 익재(益齋 이제현 1287-1367)가 지은 묘지(墓誌)를 보면, 부인이 졸(卒)하신 지가 지금 3백여 년이 되었는데도 그 정령(精靈)이 없어지지 않아 경동시키고 화복을 내리는 것이 이처럼 현저하니, 그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 주는 일들은 이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지리설(地理說)은 허망하여 믿을 수 없다고만은 할 수가 없다. 또 지가(地家)의 말에,
“가까운 조상의 곁에 장사지내면 재앙이 자손에게 미친다.”
했는데, 그 말이 이 일을 보면 더욱 맞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되어서 담양(潭陽)에 순찰차 갔었다. 이때 부사(府使)였던 지금의 판중추부사 정공 광적(鄭公光績 1551- 1642이후)이 나에게 이르기를,
“본부(本府) 10리 밖에, 고인이 된 판서 송공(宋公 송순1493-1582)의 정자가 있는데 정자 이름은 면앙(俛仰)이라고 합니다. 경치가 자못 뛰어나니 행차를 잠시 멈추신다면 맑은 놀이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했다. 이튿날 정공(鄭公)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나도 뒤이어 그곳에 도착했다. 정자는 절벽에 임해 있는데, 푸른 소나무와 대숲 사이로 은은히 보이며, 안계(眼界)가 넓고 멀어서 산천의 풍경이 과연 도내에서 명승지로 꼽힐만 하였다. 나는 부사(府使)와 함께 여기에 올라 술자리를 베풀고 놀다가 달빛을 받으며 돌아왔다. 송공의 휘는 순(純)으로서 풍류가 호매(毫邁)하여 한 시대의 명경(名卿)이었다. 그가 지은 〈무등제곡(無等諸曲)〉은 지금까지 전해지며 불리고 있는데, 가사가 몹시 청완(淸婉)하다. 약관에 과거에 올라 여러 청현(淸顯)의 벼슬을 거치다가, 나이가 많아지자 이를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한가히 지냈다. 맑은 복을 누린 지가 20년이 되었고 나이 89세에 졸했다. 과거에 급제한 지 주갑(周甲?※급제가 1519년이며 이때는 1544년경)이 되던 날, 감사 송공 인수(宋公麟壽1499-1547 사사됨)가 그를 위하여 어사화(御賜花)를 만들어 크게 경하하는 자리를 베풀고 기악(妓樂)과 창우(倡優) 등 온갖 놀이를 모두 올렸다. 술이 취하자 좌중의 손들이 고에게 어사화를 한 번 꽂아 남은 경사를 장식하라고 권했다. 그래서 공은 흰 머리 쇠한 얼굴로 머리에 어사화를 이고서 탄식하기를,
“오늘날 다시 소년 시절의 일을 해볼 줄 누가 알았으랴?”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니, 자리에 가득하던 손들이 모두 감격해서 울고, 보는 이들은 모두 크게 칭찬하였다. 지금까지도 이 일을 한 도(道)의 성사(盛事)로 친다.
또 공은 살아 있을 때 그 자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해마다 추석에는 반드시 이 정자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하여, 자손들이 이를 받들어 행했는데, 임진년 난리에 불에 타서 없어지고 말았다. 그 후 윤공 효전(尹公孝全 1563-1619)이 부사(府使)가 되어, 그 옛터에 올라가 기왓장이 무너져 쌓여 있음을 보고, 슬픈 빛으로 송씨 집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하늘이 준 승지(勝地)를 오랫동안 황폐한 채로 둘 수가 없다. 여러분들은 힘을 합하여 급히 이 정자를 세우도록 하라.”
했다. 농사철이 지나자, 윤공은 재목과 기와를 마련해 주고 인부까지 내어주어 날아갈 듯한 정자가 며칠이 되지 않아 다시 세워졌다. 정자가 이미 준공되니, 마침 추석이어서 다시 정자 위에 제사를 지냈다.
그 이웃에 사는 사람이 꿈을 꾸니, ‘송공이 남여(藍輿)를 타고 정자로 향해 가는 것이 완연히 평시와 같았다.’고 하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판서 홍가신(洪可臣1541-1615)이 부여 현감(扶餘縣監)이 되었을 때, 비로소 서원(書院)을 세워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ㆍ계백(階伯)ㆍ흥수(興首)와 고려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 등을 여기에 봉안했다. 제사 지내는 날 밤에 홍공(洪公)이 꿈을 꾸니, 이들 네 사람이 와서 감사한 뜻을 표하면서 자못 감격하고 기뻐하는 빛이 있어 보이므로, 꿈에서 깨자 이상히 여겼다. 그리고 김(金)씨 성을 가진 서생(書生)이 집사(執事)로서 재사(齋舍)에서 자는데, 이날 밤에 또 꿈에 네 사람이 서로 계속해 문으로 들어오더니 읍양(揖讓)을 하고 마루로 올라갔다 한다. 이 일은 서애(西厓) 유상공(柳相公 유성룡1542-1607)의 〈서원기(書院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서원(書院)의 이름은 의열(義烈)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온 시골 선비들의 공부하는 곳이 되고 있다. 성충(成忠) 등의 일은 삼국 시절의 일이니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이나 되었으며, 이공 존오(李公存吾)도 역시 2백 년이나 지났는데, 그 정령(精靈)이 감응을 하니, 이른바 ‘물이 땅에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이 헛된 말이 아니다.
내가 난리를 피해서 진안(鎭安)에 가서 임시로 있었다.(1593년 진사시절) 이곳은 험준한 산과 기다란 골짜기 속이라서 촌락이 드물었다. 이웃에 늙은이 하나가 있는데 그는 홍치(弘治) 정사년(1497, 연산군 3)에 났으니 이해가 계사년(1593, 선조 26)이고 보면 나이가 97세였으며, 아들 하나가 있어 늘그막에 교생(校生)을 제수받았는데, 그 나이는 73세였다. 이들 부자가 한집에서 사는데, 손자 넷, 남자 종 하나, 계집 종 하나와 함께 힘써 농사지어서 겨우 조석을 이어 가고 있었다. 머리가 하얀 두 늙은이가 항상 나무 그늘 밑에서 바둑과 장기를 두니 보는 사람들은 그들을 그림 속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온 고을 사람들이 그들 부자가 나이가 많고 집안의 행실이 순수하게 갖추어졌다 하여 현관(縣官)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여 부역을 면하게 했다. 그 아비는 더욱 건강하고 총명이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는데, 다만 음식이 잘 소화되지 않아서 하루 세 끼 죽 한 사발씩을 다 먹는다. 나는 이 소문을 듣고 기이하게 여겨 어느 날 가서 보았더니, 기거동작이 강건하고 눈썹이 몹시 길고 눈빛이 빛났으며, 용모는 맑고 파리했지만 영특한 풍채가 오히려 남아 있었으니, 실로 속세의 사람의 아니요, 참으로 이른바 지상선(地上仙)이었다. 나는 놀랍고도 감탄해 마지않으며 그 늙은이에게 묻기를,
“젊은 시절의 일을 기억할 수 있소?”
하니, 늙은이는 입을 열어 묻는 대로 대답하는데, 목소리가 쟁쟁하고 조금도 떠듬거리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7세에 군보(軍保)에 소속되어 13세 때 비로소 서울에서 번(番)을 들었는데, 그때는 연산군(燕山君)이 방탕해서 날마다 노는 것만 일삼았습니다. 연산의 얼굴을 쳐다보니 빛은 희고 수염은 적으며, 키는 크고 눈에는 붉은 기운에 있었습니다. 연산이 전교(箭橋)에 거둥할 때 나는 역군(役軍)으로 따라갔는데, 화양정(華陽亭) 앞에 목책을 세우고 각읍에 예치했던 암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에 가둔 다음, 연산이 정자에 자리를 잡으니 수많은 기생만이 앞에 가득했고 시신(侍臣)들을 물리쳤습니다. 이에 마관(馬官)이 숫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으로 몰아넣어서 그들의 교접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여러 말이 발로 차고 이로 물면서 서로 쫓아다니는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했습니다. 그해 가을에 반정(反正)이 일어났습니다.”
하였다. 노인은 당시 재상들의 이름을 일일이 지적하여 누가 어질고 누가 그른 것을 모두 아는 것이었다. 기묘년과 을사년의 일에 대해서는 개연히 탄식하면서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의 많이 듣고 잘 기억하는 것은 비록 이치를 알고 학문에 통달한 선비라도 따라갈 수 없었다. 나는 몹시 괴이하고 의아하게 여겨,
“노인은 글자를 아시오?”
물었더니, 그는 말하기를,
“어렸을 대에는 몹시 총명해서 하루에 천자문을 모두 배웠지요. 그래서 남들은 모두 기동(奇童)이라고 하였는데, 불행히도 남의 시기를 받아 관청에 고소를 당하여 일찍이 군역(軍役)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뒤에는 겨우《소학(小學)》ㆍ《사략(史略)》등의 책만 읽었을 뿐입니다.”
했다. 나는 다시 묻기를,
“노인은 무슨 수련을 해서 이렇게 수(壽)를 누리셨소?”
했더니, 노인은 말하기를,
“산골에서 나서 자랐기 때문에 먹는 것이란 오직 조밥과 나물 뿌리뿐이요. 아무리 병이 있어도 약을 먹을 줄 몰랐는데 저절로 늙어도 죽지 않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 아들이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우리 아버님만 연세가 높을 뿐만이 아니라, 이 고을과 이웃 읍에는 나이 90세가 된 자가 흔하게 있습니다. 그리고 한 교생(校生)의 어머니 한 분은 지금 나이 1백 2세입니다.”
했다. 그 이듬해에 그 아버지 되는 노인이 죽었다. 이로써 나는 깊은 산속에서 담백한 것을 먹는 사람이 높은 수를 누리는 자가 많다는 것을 알았으니, 촉(蜀) 땅의 청성(靑城)이 바로 이러한 곳이다. 나는 노인의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놀라워했다. 그가 번(番)을 들 때에는 말을 기르거나 땔나무를 하던 한 졸병이었을 뿐인데, 어찌 경위(涇渭)를 가슴속으로 분명히 구별하여 어떤 재상은 어질다 하고 어떤 관리는 간사하다고 하는가? 천리가 있는 곳에는 공변된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니, 이야말로 이른바, ‘백성들이 모두 너를 쳐다본다.’ ‘백성들은 지극히 어리석은 듯싶어도 신(神)과 같다.’는 것이다.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명묘조(明廟朝)에 대사헌 조사수(趙士秀1502-1558)와 정승 심연원(沈連源1491-1558)이 함께 경연에 입시하였는데, 조공(趙公)이 아뢰기를,
“영상(領相) 심연원이 첩의 집을 몹시 크고 사치스럽게 짓고 심지어 단청(丹靑)까지 칠했으니 몹시 온당치 못하옵니다.”
하니, 심정승이 절하고 사과하기를,
“조사수의 말이 참으로 신의 실수를 바로 맞추었습니다.”
했다. 그래서 명묘(明廟)는 그를 위로해 타일렀다. 그들이 경연에서 물러 나오자 심정승이 조공에게 이르기를,
“공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 과오가 더 클 뻔했소.”
하고 집에 돌아가 그 단청했던 것을 모두 지워버리니, 그 당시 의논이 모두 위대하게 여겼다.
선조(宣祖)가 경연에 납시었는데 영상 노수신(盧守愼1515-1590)과 수찬 김성일(金誠一1538-1593)이 함께 입시하였다. 김공이 아뢰기를,
“영상 노수신이 남에게 초피(貂皮) 장의(長衣)를 받았사오니, 어찌 노수신에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하니, 노상(盧相)이 자리를 피하여 죄를 기다리면서 말하기를,
“김성일의 말이 옳습니다. 신의 어미가 늙고 병이 많아서 매양 겨울이면 추위를 참지 못하옵기에, 과연 초피 장의를 변방에서 장수 노릇하는 일가 사람에게서 구해다가 늙은 어미에게 주었습니다.”
했다. 선조는 두 사람을 모두 칭찬하면서,
“대신과 대간이 모두 체면을 얻었으니 나는 몹시 가상히 여기오.”
하였다. 노정승은 본래부터 김공과 서로 친했는데 이런 일이 있은 후로 더 공경하고 소중히 여겼다. 이것은 바로 조종조(祖宗朝)의 아름다운 일이었다. 지금의 대신과 대간도 심연원ㆍ노수신 두 정승이 사과한 것과 조사수ㆍ김성일 두 공이 직절(直截)한 것과 같이 한다면 어찌 국가의 복이 아니겠는가.
윤생(尹生)이란 자는 부마(駙馬)의 손자요 재상의 사위로서 권세와 부가 당시에 제일이었다. 귀한 집에서 자라고도 글 한 줄도 읽지 않았으며 성질이 교만하고 어리석어서 인간에게 곤궁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날마다 도박과 주색으로 스스로 즐기고, 함께 사귀는 자는 모두 무뢰하고 사납고 패역스러운 무리들이었다. 또 몹시 화초를 좋아해서 만일 남의 집에 기이한 꽃이나 이상한 새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가격의 많고 적은 것을 가릴 것 없이 반드시 사 왔다.
이웃집의 서생 하나가 일찍이 윤씨 집에 궁에서 내려준 《자치강목(資治綱目)》이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얻고 싶었으나 꾀가 나지 않았다. 마침 그의 장인이 호서(湖西)의 고을 원이 되어 왜철쭉 화분 하나를 얻어가지고 왔다. 그래서 서생은 이것을 기화(奇貨)로 삼아 윤씨 집의 《자치강목》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 아무리 이름 있는 집이라도 이 꽃은 몹시 드물었고, 늦은 봄이 되자 수많은 꽃이 가지에 가득하여 붉은 빛이 만발하였다. 이에 윤생을 불러다가 보이니, 윤생은 몹시 놀라고 이상히 여겨 말하기를,
“이 꽃은 내가 얻으려 한 지가 오래인데, 그대는 이것을 어디에서 구해왔소? 청컨대 어느 물건이고 줄 테니 서로 바꾸도록 합시다.”
했다. 그러나 서생은 거짓으로,
“나도 역시 전 재산을 기울여 새로 얻어서 사랑하고 아끼지를 마지않는데 어떻게 남에게 준단 말이오?”
하니, 윤생은 또 말하기를,
“내게 시정(市井)의 부자 종이 있는데 그 중에서 나이 적은 자 한 사람을 골라서 서로 바꾸지 않으려오?”
하였다. 서생은 이미 윤생이 크게 욕심내는 것을 알고 이에 말하기를,
“그대와 나 사이에 어찌 물건 값을 가지고 따지겠소? 다만 들으니 그대 집에 《자치강목》이 있다는데, 이 책이 비록 귀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자식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니, 이 물건과 바꾸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윤생이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책 전질을 가지고 와서 꽃을 가지고 갔다. 그리고 그 꽃을 뜰가에 놓아두고 자못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었다.
또 한 사람이 잘 길들인 새끼 사슴 한 마리를 조롱에 담아 가지고 왔다. 윤생은 면포 (綿布) 세 단을 주고 바꾸자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말하기를,
“어떤 재상의 집에서 청동화로를 주고 사자는 것도 나는 그것이 적다고 해서 팔지 않았는데, 하물며 이런 면포를 받고 팔겠는가?”
하면서 도로 가지고 가려는 척을 하니, 이에 윤생은 큰 화로를 내주고 바꿨다. 그 사람은 곧장 짊어지고 달아나 버렸으니 그의 어리석고 망령된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이리하여 노비와 전답으로는 모두 광대놀이하는 복식(服飾)을 사고, 그릇이나 책은 꽃과 짐승과 바꾸느라고 모두 없애버렸다. 집 재산은 다 없어지고 방안은 텅 비자 이에 비로소 노량(鷺粱)에 있는 이름난 정자를 팔아서 겨우 1년을 지내고 또 성 남쪽에 있는 좋은 집을 팔았으며, 마침내는 집을 빌어서 살게까지 되었다. 그래도 오히려 훈신(勳臣)의 종손이라 해서 번(番)을 들고 녹(祿)을 받아 근근히 살아 나가면서 해진 옷에 초립(草笠)을 쓰고 원근길을 걸어다녔다. 당시에 패가(敗家)한 집 자식들을 두루 헤아려 보더라도 반드시 윤생이 우두머리가 될 것이다. 내 처가가 윤생의 집과 이웃이라서 그 일을 자세히 들었기 때문에 그 대강을 여기에 적어서 세가(世家) 자제들이 부만 믿고 배우지 않는 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는 바이다.
어느 문관 하나가 황해 감사(黃海監司)가 되었다. 이때 청단역(靑丹驛)에 명마가 있는데, 걸음이 보통 말보다 뛰어났고 성질은 몹시 온순하여 비록 어린 아이라도 역시 이를 끌고 제어할 수 있었으며, 항상 감영(監營)에 두었다. 이때 이조 낭관이 있었는데 권세 있는 집안의 아들로서 세력의 불꽃이 한창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감사(監司)가 내려올 때 말을 서로 바꾸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얼마 있다가 종을 시켜서 자기가 타는 과하마(果下馬)를 끌어 보내어 좋은 말로 바꾸려 하니, 사람들은 모두 분하게 여기고 개탄하였다. 그 말을 끌어 내다가 온 종에게 주려 하니, 말은 갑자기 펄쩍 뛰면서 그 종을 마구 물고 이리저리 차고 밝아 그 종은 땅에 자빠져 며칠 만에 죽고 말았다. 그래서 감사(監司)는 크게 노하여 말 주인을 시켜서 이조 낭관의 집으로 끌어다 주었다. 그러나 이날 밤에 말은 또 뛰어 도망하여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역졸(驛卒)이 길에서 뛰는 말을 만났는데 보니 바로 청단의 명마였다. 따라가도 잡을 수가 없어서 감사에게 와서 보고했다. 그래서 감사는 곧 온 고을 군사를 풀어 쫓아가 잡아오도록 했다. 그러나 말은 도망하여 수양산(首陽山)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람이 혹시 가까이 가면 언덕으로 뛰어오르고 절벽을 뛰어 넘으므로 군졸들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 속수무책이어서 그대로 돌아왔다. 그래서 마침내 바꾸지 못하고 가 버렸다. 그 뒤 10여일이 지난 뒤에 말은 청단역(靑丹驛)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모두 이상히 여겨 신마(神馬)라고 불렀다.
감사는 또 6월 보름에 가까운 이웃의 수령과 옆 고을의 기생들을 불러서 크게 유두회(流頭會)를 열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온백원(溫白元)을 소주에 타서 기생 중에 살찌고 튼튼한 자 10여 명을 골라 모두 여러 그릇을 먹이는데 먹지 않는 자는 억지로 먹였다. 그리고 한 방 속에 몰아 넣고 그 문을 굳게 잠갔다. 이때는 한창 몹시 무더운 때로서 더운 기운이 찌는 듯 답답하고 땀이 비오듯 흘렀다. 조금 있더니 모든 기생들의 뱃속에서는 천둥 소리가 나면서 오장이 뒤집히는 듯하더니 일시에 설사가 났다. 기생들은 어찌 할 바를 몰라 급히 옷을 벗어서 혹은 개켜서 등에 지기도 하고 혹은 말아서 머리에 이기도 했다. 그리고 모두 벽을 의지하여 쪼그리고 앉아서 설사가 나오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피차에 급히 쏟느라고 좌우에서 설사 줄기가 서로 쏘아 더러운 물이 이리저리 흘러서 허리 밑까지 빠지게 되었다. 또 종일토록 빈 창자에서 쉬지 않고 설사를 하고 보니 기운이 점점 다해져서 서로 베고 똥 속에 누워서 원망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 나오고, 고약한 냄새는 방에 가득하여 사람이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이때 감사는 수령과 함께 이것을 엿보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날이 저물어 비로소 내놓으니, 모두 똥이 몸에 묻고 발에 묻어서 모양이 귀신과 같았으므로 부끄러워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다만 스스로 울 뿐이었다. 이것은 다만 그 감사의 희학(戱謔)에 있어 여사일 뿐이니, 그 밖의 것이야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겠는가? 계해년(1623, 인조 1)에 반정(反正)이 일어나자 그 감사는 죄를 받았다고 한다.
석경일(石擎日)은 영남 문관이다. 성질이 어리석고 곧아서 어려서부터 힘써 공부하는데 날마다 백 글자를 한정하고 반드시 천 번을 읽은 뒤에 그만두었다. 이렇게 10여 년을 하고 보니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어서 마음과 눈 속에 또렷또렷하였는데, 과연 그는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하다가 전적(典籍)이 되었다. 일찍이 중학 교수(中學敎授 : 4부학당 중 중부학당)를 겸하기도 했는데, 어느 날 새벽 그가 타는 말이 놓여서 달아났다. 석경일은 황급히 놀라 일어나느라고, 잘못 첩의 자주빛 장의(長衣)를 입고 머리에는 침모(寢帽)를 쓴 채 몸소 쫓아갔다. 말은 달려서 중학(中學) 속으로 들어갔다. 경일이 중학에 이르자 날이 이미 새고 말았다.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어 문밖에서 방황하고 있었는데, 학리(學吏)가 우연히 보니 바로 석교수(石敎授)였다. 크게 놀라서 말하기를,
“나으리께서는 어찌해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밝은 날 길가에서 남보기에 해괴하오니 잠시 소인의 집에서 관복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본댁으로 돌아가시도록 하시지요.”
했다. 석경일은 장의와 치모 바람에 바지도 벗고 맨발이었으므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머리를 수그리고 얼굴을 떨어뜨린 채 오직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금새 구경꾼이 늘어서서 그를 가리켜 광부(狂夫)라고 했다. 아전이 관복을 가져다가 데리고 갔다. 학유(學儒)가 이것을 듣고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일시에 전파되어 웃음거리를 삼았다. 이 일 때문에 그는 결국 불우하게 세상을 마쳤다.
이생 대순(李生大醇)은 서얼(庶孽)이다.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예문(禮文)을 많이 알아 한 시대에 이름이 알려져, 동몽훈도(童蒙訓導)가 되었다. 그는 여러 학생을 가르쳐서 성취시켜 조정에 선 사람도 많았는데, 난리 뒤에 금천(衿川) 땅에 임시로 사는데 곤궁하여 자기 힘으로는 살 수가 없었다. 어느 대신이 본래 이생(李生)이 경술(經術)이 있는 것을 알고 그 곤궁함을 불쌍히 여겨 도로 훈도를 시켜서 녹을 받고 생활하게 해 주었다. 이생이 서울로 와서 숭례문(崇禮門) 안에 임시로 사는데 원근에서 관동(冠童)들이 공부하러 오는 자가 꽤 많았다. 이생은 평시의 훈몽(訓蒙)하는 법에 의하여 읽은 책을 외게 하고 외지 못하는 자는 벌을 주었다. 그리고 도착한 순서를 따져 먼저 온 자는 먼저 가르치는 등 그 과정을 엄하게 하고 모두 연치를 따지게 하였다. 그러자 학도들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아무개는 서얼인데 내가 어찌 그의 밑에 앉는단 말인가? 또 내가 비록 뒤에 왔지만 제가 어찌 나보다 먼저 배운단 말인가?”
하여 세력을 믿고 기를 부려 매양 서로 구타하므로 한 싸움터가 되어버렸다. 이생은 그 괴로움을 이길 수가 없어 조금 경계하고 책하면 반드시 대면하고 욕을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이생은 나에게 와서 작별을 고했다. 나는 몹시 괴이하고 의아해서 그 까닭을 물으니, 이생은 말하기를,
“내가 6ㆍ7세 때부터 선생장자(先生長者)에게 수업하기 시작하여 이제 이미 60여세가 되었습니다만, 요즘과 같은 풍교(風敎)는 본 일이 없습니다. 입에서 아직 젖비린내가 나는 자들이 벌써 붕당(朋黨)을 가르고 글자 하나도 모르면서 먼저 시정(時政)부터 비평하여, 길거리에서 벽제(辟除)의 소리가 나면 반드시 앞을 다투어 나가 보고서 말하기를, ‘저것은 재상 아무개인데, 저 사람은 아무개의 당(黨)으로 사람이 크게 간사하다.’고 하고, 또 어떤 때는 나가 보고서 말하기를, ‘모 벼슬에 있는 사람인데 아무의 당(黨)으로 그 사람은 어진 사람이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와 같은 당류(黨類)가 아니면 아무리 고관 대작이라도 모두 이름을 불러 욕을 합니다. 또 그들은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비단옷을 입으니, 시대의 풍교와 세도(世道)가 몹시 한심스럽습니다. 만일 이러한 세태가 변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어찌 장구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조그만 녹을 위해서 서울에 오래 머물다가는 반드시 큰 화를 당할 것이므로, 뜻을 결단하여 내려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가 임술년(1622, 광해군 14) 겨울이었다. 이듬해에 국운이 거듭 새로워지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 그 뒤 2년 후에 이생은 세상을 떠났다. 요새도 선비들의 습관이 아름답지 못한 것을 보면 매양 이생이 탄식하던 일이 생각난다. 식자의 보는 것이 가이 원대하다 하겠다.
만력(萬曆) 무자(1588, 선조 21) 연간에 내 장인이 오랫동안 이조 참의로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일찍이 관리들의 석차를 적은 문서를 보았는데, 대신과 원임을 제하고서는 종1품부터 정2품까지 겨우 15ㆍ16인이었으며, 문관으로는 가선(嘉善 종2품)도 20명을 넘지 못했다. 조종조(祖宗朝)에는 명기(名器)를 신중히 여겼기 때문에 재상들이 이같이 드물었던 것이다. 선묘(宣廟)가 대신들에게 묻기를,
“요사이 이조에서 육경(六卿)의 의망(擬望)에 항상 인재가 없어서 걱정을 하는데 누가 육경이 될 만하오?”
하니, 대신들은 이조 참판 정대년(鄭大年 1503-1578)을 천거해서 승진시켜 판윤(判尹)으로 삼게 했다. 정공(鄭公)은 그때 나이 이미 70세였다. 또 평시에 정승 지위에 있던 것이 모두 10여 년씩이었으며, 혹은 15ㆍ16년을 넘기도 했다. 윤공 사익(尹公思翼1478-1863)은 공조 판서 10년을 있었고, 임공 열(壬公說1510-1591)은 판윤으로 전후 20년이나 있었으며, 송공 찬(宋公贊1510-1601)은 공조 참판으로 7년 동안 있었다. 그밖에 오랫동안 직위에 있던 자를 이루 다 들어 말할 수가 없다. 지사(知事)ㆍ동지(同知)도 겨우 한 두 명 있을 뿐, 그 나머지는 모두 차임되지 못하였으니, 그렇게 된 까닭은 태평하고 일이 없어서 특명(特命)으로 계급을 올리는 일이 아니면 상으로 가자를 더하고 함부로 특진하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특명이 있다면 비록 당시에 인망(人望)이 무거운 자라고 할지라도 양사(兩司)가 반드시 논집(論執)하여 달을 넘기고야 마는 터였다. 난리 뒤에는 이 법도 역시 없어지고, 오직 이조나 병조 판서만이 두 도목(都目) 정사만을 치른 뒤에는 반드시 체직하도록 허락했으니, 어찌 권력을 오랫동안 잡을 수 없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계미년(1583, 선조 16) 동서(東西)가 분당된 후에 비로소 세 번 이외에 말미를 더 주는 명령이 생겨서 전해 내려오던 성헌(成憲)이 이로부터 크게 무너졌으니, 실로 세 번 이외에 더 말미를 주는 것은 쇠세(衰世)의 일이다. 그리고 무반(武班)으로 자헌(資憲) 계자는 아주 없다시피 하여서 선묘조(宣廟朝) 때 변협(邊協1528-1590)이 공조 판서가 되고, 곽흘(郭屹)은 지사(知事)가 되었을 뿐, 이 두 사람 밖에는 듣지를 못했다. 곽흘은 초헌(軺軒)을 탔다 해서 논죄를 당했으니 공의(公議)의 엄한 것이 역시 이와 같았다.
초당(草堂) 허엽(許曄1517-1580)은 사문(斯文)의 숙덕(宿德)이요, 참의 이해수(李海壽1536-1599)는 일찍부터 맑은 인망이 나타났는데도, 모두 통정(通政)의 반열에 있은 지 거의 30년이 되어, 허공(許公)은 나이 70세에 가까워서야(1579년) 경상감사(慶尙監司)로서 자급이 올라 임소에서 죽었으며, 이공(李公)은 끝내 가선(嘉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으니, 이것은 비록 명도(命途)의 궁하고 통한 데에 달렸다 하겠지만, 역시 승진(昇進)하고 옮겨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지금에는 집집에 금관자와 옥관자가 있으니, 이는 실로 난세의 관방(官方)이 문란하기 때문이다. 대장군(大將軍)의 고신(告身)도 겨우 술 한 번 취하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과 불행히도 비슷하다.
내 외가의 선조 민지사(閔知事)의 휘는 대생(大生)인데, 문음(門蔭)으로 군수를 했다. 그는 날이 어두워질때면 북두성에게 축원하기를,
“원컨대 어진 자손을 낳게 해 주십시오.”
했다. 과연 한 딸을 낳았는데 한공 명회(韓公明澮)에게 시집갔고, 한공(韓公)이 두 딸을 낳았는데, 하나는 예종(睿宗)의 왕비가 되었으며, 하나는 성종(成宗)의 왕비가 되었다. 두 왕비는 춥고 따뜻한 때에 따라서 손수 공(公)의 옷을 지어 보냈으며, 아름다운 명절이나 좋은 절기에는 각각 잔치할 음식을 보냈다. 또 중관(中官)을 시켜서 술을 내렸으며 평상시에 어공(御供)하는 음식도 계속하여 나누어 보냈다. 한공은 한 대(代)의 원훈(元勳)으로서 바야흐로 수상(首相)이 되었고, 공의 두 아들도 역시 문음(門蔭)으로 모두 큰 고을의 시재(時宰)가 되었다. 공은 너무 지나치게 높아진 것을 두려워하여 남양(南陽)으로 물러갔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옷을 내리고 잔치를 내려 서울에 있을 때와 똑같았으므로 왕래하는 중관(中官)들이 앞뒤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공은 나이 80부터 생일이 될 때마다 성묘(成廟)가 문득 한 자급씩 올려주어 드디어는 숭정(崇政)으로 지중추(知中樞)에 이르렀다. 나이 90세가 넘어 죽으니 이 사실이 모두 신도비(神道碑)에 실려 있다. 공은 충후하고 근신하여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으며, 제사 받들기를 몹시 삼가하였다. 그 지성이 있는 바에 하늘도 또 감동해서 그 생전에 끝이 없는 복을 누렸고, 지금까지 자손이 번성하니 어찌 착한 일을 쌓은 보답이 아니겠는가?
한성군(韓城君) 이질(李秩)은 문음으로 벼슬이 부사(府使)에 올랐다. 성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매양 조상의 기제(忌祭)에나 가묘(家廟)에 제사지낼 때에는 초헌(初獻)에 축원하기를,
“자손이 빈한하면 제사를 계속할 수가 없을 듯하오니, 원컨대 말없이 도와주시어 자손으로 하여금 영화롭고 귀히 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공의 손자 이기(李墍)ㆍ이증(李增)과 종손 이산해(李山海)ㆍ이산보(李山甫) 등이 일시에 출세를 하여 문호가 빛났다. 공은 훈신의 종손으로서 나이 80이 넘어 노직(老職)으로 군(君)에 봉해져 편안히 살다가 죽었다. 이 역시 문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이기에 아울러 여기에 기록하는 바이다.
만력(萬曆) 기해년(1599, 선조 32)에 대사헌 홍여순(洪汝諄1547-1609)이 궁중과 인연이 있어 기세를 몹시 부리고 맘대로 탄핵과 공박을 하여 자못 사림을 기울어뜨리고 위태롭게 할 조짐이 보이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근심하다가 삼사(三司)가 공론을 인하여 그를 탄핵했다. 탄핵을 논의한 지 여러 달 만에 비로소 윤허를 얻어 그를 삭직하여 내쫓았다. 홍여순은 은밀히 옳지 못한 무리들을 사주하여 초야(草野)의 공론이라고 가탁해서 날마다 소를 올렸다. 상의 마음이 이미 붕당(朋黨)을 나누어 서로 알력하고 참소와 이간이 따르는 것을 의심하던 터이라서, 홍여순이 용서를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그는 당(黨)의 응원이 더욱 세력을 얻게 되자 도리어 전일에 탄핵한 사람을 공박하여 모두 배척하고 쫓아 버렸다. 이리하여 집의 김신국(金藎國)ㆍ사간 송일(宋馹)ㆍ장령 최동립(崔東立)ㆍ지평 박경업(朴慶業)ㆍ교리 박이서(朴彝敍)ㆍ이조 정랑 이필형(李必亨)ㆍ이조 좌랑 남이공(南以恭) 등이 모두 사직되어 내쫓겼는데, 그 중 유독 교리 유희분(柳希奮)만이 척리(戚里)이므로 면할 수 있었다. 경섬(慶暹)은 장령(掌令)으로, 나는 교리로, 이필영(李必榮)은 수찬으로 모두 벼슬을 제수받은 지 오래지 않아서 파직되었다가 도로 서용되어 모두 외직으로 나갔다. 이때 경섬은 영광(靈光)으로, 나는 여산(礪山)으로, 이필영은 풍기(豐基)로 나갔다. 그 뒤 몇 해를 지나 시론(時論)이 차차 정해지자, 우리 세 사람은 무두 통청(通淸)의 길을 얻고, 김신국 등은 9년 후 무신년에 비로소 서용되었는데, 이해에 홍여순은 귀양가서 섬 안에서 죽었다. 그런 지가 지금 40년 인데 마치 저 세상 일과 같아서 살아 남은 자가 겨우 5인 밖에 없으니, 젊은 시절의 일을 생각하면 실로 두렵기만 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견책받은 사람들의 운명을 점장이 함충헌(咸忠獻)에게 물었더니, 함씨 점장이는 말하기를,
“모두 재상이 될 운수이며, 전도는 매우 멉니다. 다만 그 중 한 사람은 수(壽)가 부족하나 11명 중에 9명은 모두 재상의 반열에 오를 것이요, 한 사람은 통정(通政)으로 수감사(守監司)가 될 것이니, 이 역시 재상입니다.”
했다. 그런데 유독 정랑 이필형(李必亨)만이 서용되고 갑자기 죽으니 그때 나이 38세였다. 함씨 맹인의 말이 과연 맞았으니, 신묘한 점괘라 이를 만하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 2)에 나는 주청사(奏請使)로서 바다를 건너 중국 서울에 갔다. 이때 부사(副使)는 오공숙(吳公䎘)이요, 서장관(書狀官)은 홍공 익한(洪公翼漢1586-1537)이었다. 오공(吳公)은 재주가 많아서 꽤 복설(卜說)을 터득했다. 그래서 중국 서울에 있는 이름난 점장이나 상(相)을 잘 보는 사람은 불러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오공은 어느 백발 노인과 함께 내 처소에 왔다. 이 사람은 상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 상을 한참 보더니 말하기를,
“뜻을 잃은 사람입니다.”
했다. 나는 괴이히 여겨,
“어떻게 아시오?”
하고 물었더니, 그는 말하기를,
“눈썹 사이에 막힌 기운이 있어서, 이것으로 아옵니다.”
했다. 이때는 바로 반정(反正)한 초기였다. 나는 그때 즉시 충청감사(忠淸監司)가 되었다가 들어와서 한성 판윤(漢城判尹)이 되었으니, 사실은 뜻을 잃을 까닭이 없는데, 상보는 자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본국에 돌아가면 반드시 남에게 해를 이어서 낙직(落職)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복직할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또 그에게 묻기를,
“나만 혼자 그렇겠소? 또 바다를 건너는데는 아무 일도 없겠소?”
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세 분이 다 그렇겠소. 하지만 바닷길에는 아무런 일도 없겠습니다.”
하였다. 또 오공이 데리고 간 군관 중에 얼굴이 잘 생기고 키도 크고 수염이 잘난 자가 있었다. 오공은 그 사람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 가지고 그에게 뵈었다. 상보는 자는 문득 말하기를,
“이 사람은 장사꾼이오.”
했다. 오공은 거짓말하기를,
“이는 무과에 급제한 진사로 벼슬이 3품에 이르고 여러 번 수군(水軍)의 장령(將領)을 지낸 사람으로서 순풍을 기다리고 배를 운행하는 일을 하는 일에 익숙하기에 데리고 온 사람이요.”
했다. 그러나 상보는 자는 말하기를,
“거짓말입니다. 얼굴과 등에 모두 애써 이익을 얻으려는 상이 있으니, 이는 멀리 다니면서 이익을 얻으려고 꾀하는 자입니다.”
했다. 오공은 이 말을 듣고 놀라고 감탄하였다. 그 사람은 시정(市井)에 살아서 일생동안 방납(防納)에 종사했으니, 그가 멀리 다니면서 이익을 얻었다는 말이 헛된 말이 아니었다. 대체로 상보는 법에 얼굴과 등을 함께 보는 법이 있으니, 옛날 괴철(蒯徹)의 말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들이 조정에 돌아오자, 과연 원역(員役)을 뒤에 떨어뜨렸다는 것으로 대관(臺官) 중에 평소에 오공과 사이 좋지 않은 자가 때를 타서 그를 탄핵하여 하루 동안 구금되고 여기에 연좌되어 삭직당했으니, 한결같이 상보는 자의 말대로 되었다. 뒤에 또 들으니 상보는 자가 오공에게 이르기를,
“벼슬은 겨우 시랑(侍郞)에 그칠 것이요, 수(壽)도 또한 길지 못하겠다.”
했다는 것이다. 그 후 오공은 벼슬이 통정(通政)에 이르렀고 나이 44세에 죽었으니, 아! 애석한 일이다. 상보는 자는 가위 신묘하다 가겠다.
폐조(廢朝) 때 대궐 세우는 일을 을묘년(1615, 광해군 7)부터 시작했다. 내가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있을 때 지금의 춘성군(春城君) 남공 이웅(南公以雄)이 벌목 경차관(伐木敬差官)으로 내려왔다. 변산(邊山)ㆍ완도(莞島) 등지에 있는 재목을 모두 ‘배로 서울에 운반하므로 백성의 힘은 그다지 대단치 않다.’고 하였는데, 기미년간에 이르러 그 역사가 몹시 커졌다. 내가 또 황해 감사(黃海監司)가 되어 겨우 도경계에 이르니, 도감(都監)의 재촉하는 문서가 산같이 쌓여 어찌할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이때는 당상관을 독운사(督運使)라고 일컬었는데, 지금의 지사(知事) 이상길(李尙吉)이 독운사가 되어 도내에 와서 머문 지가 이미 1년이 지났었다. 그는 오로지 선척을 관리하고 재목 등 물건을 독려하여 출하하고 있었다. 대개 황해도는 땅은 비좁지만 물산은 몹시 많아서, 재목은 장산관(長山串)에서 나고, 백토(白土)는 해주(海州)에서 나고, 청토(靑土)는 은율(殷栗)에서 나고, 번주홍(燔朱紅)은 평산(平山)에서 나고, 돌석(堗石)은 수양산(首陽山)에서 나고, 장연(長淵)의 숯과 재령(載寧)의 쇠 등,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아서 집짓는 백가지 자료를 한결같이 모두 판비해 낼 수 있었다. 또 이곳은 선로(船路)가 가까와서 민생에 막대한 폐가 되었다. 그리하여 수로와 육로로 운반하는 고역이 다른 도보다 백배나 되었다. 재목과 단청과 철과 숯은 각각 주관하는 사람이 있어 혹은 별장(別將)이라 하고 혹은 낭청(郞廳)이라고 일컫는데, 그들의 음식 제공만도 셀 수 없이 많아, 비록 각 읍에서 운반해 와도 역시 지탱할 수가 없어, 각각 인부와 말을 내느라고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가 낭자하였다. 또 김순(金純)이란 자가 있었는데, 천얼(賤孼) 출신이었다. 그는 조도(調度)의 칭호를 띠고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 민간에게 재물을 거두어들이기를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남기지 않았으며, 형벌을 참혹하게 베풀었다. 또 도감(都監)의 관원 중 부끄러움이 없는 무리들은 때를 타서 이익을 노려 마음대로 방납(防納)을 했는데, 그 값이 10배나 되었다. 이렇게 안팎이 서로 침탈하니 온 도의 민생이 마치 물 끓는 솥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이 나라가 언제 망하는냐는 탄식이 한창 극에 달했다. 하늘이 듣는 것은 백성이 듣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종묘와 사직이 말없이 도와주니, 세도(世道)가 어찌 변하지 않을 수 있으랴?
전라도의 병영은 전부터 강진(康津)에 설치했는데, 난리 후에 조정에서 형세가 불편하다고 해서 장흥(長興)으로 옮겼다. 그리고 병사(兵使) 오정방(吳廷邦 1552-1625)으로 부사(府使)를 겸하게 하고, 김여순(金汝純)으로 판관을 삼았다. 김여순은 본래 어리석고 망령되어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문관이 무인의 밑에 있기가 부끄럽다고 하여, 항상 분한 마음을 품었었다. 이런 때에 마침 병영을 옮겨 설치하는 일이 있었는데, 장흥의 인민들이 자못 몹시 원망하고 괴로워했다. 그래서 김여순은 이런 때를 타서 요행히 자기의 분을 풀려고 생각했다. 이에 한 두 품관에게 의논하기를,
“본읍에 새로 병영을 만든다니, 끝없는 폐단을 만드는 것이다. 어찌 이 이회에 이것을 도로 옮기는 방도를 도모하지 않는가?”
했다. 그래서 모두들,
“성주(城主)의 처분대로 하소서.”
하니, 김여순은 말하기를,
“내가 요로를 담당한 재상들에게 통하려고 하는데 인정(人情)이 없을 수가 없어서 이를 근심하는 것이오.”
했다. 그러자 품관들이 또 말하기를,
“우리 고을이 비록 메마르지만 마땅히 재물을 모아서 성주의 장하신 뜻에 맞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이들은 한 고을에 통문을 돌려 목면(木棉) 10여 동(同)을 수합해 주었다. 김여순은 중방(中房)을 시켜 이것을 서울로 실어 보내서 은자(銀子)를 많이 바꾸어 오도록 했다. 중방은 곧 천예(賤隸)이므로 돌아다 봐도 몸을 용납할 곳이 없었다. 그 이웃에 사는 장태백(張太伯)이란 자는 약을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이때는 막 난리를 겪은 뒤여서 약재가 몹시 귀했다. 그리하여 사대부 집에 무슨 병이든지 있으면 반드시 이 장태백의 집에 와서 구해다가 썼다. 또 그는 사람됨이 익살스럽고 말을 잘하여 명공거경(名公鉅卿)과 모두 친근하게 지냈다. 중방은 그 계교를 장태백에게 말하니, 태백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 말대로 하면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다만 빈손으로는 할 수 없다.”
했다. 그래서 중방은 은자를 장태백에게 많이 주면서 맘대로 하라고 했다. 장태백은 이를 비국(備局)의 여러 재상들에게 말했으나 그들은 모두 말하기를,
“큰 진영(鎭營)을 겨우 옮겼는데 경솔히 고칠 수가 없다. 반드시 본도의 감ㆍ병사(監兵使)의 장계가 있은 뒤에야 처리할 수 있다.”
고 하였다. 장태백은 어찌 할 수가 없어 다시 헌부(憲府)의 여러 관원에게 말하니, 혹은 옳다 하고 혹은 그르다고 했다. 이때 나는 사간(司諫)으로 있었는데, 장태백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전라도의 병영을 새로 장흥에 설치하므로 그 고을 사람들이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서 유생 10여 명이 올라와서 장차 비국(備局)ㆍ양사(兩司)에 글을 올리려 하는데, 지금 다행히도 본원(本院)의 대사간(大司諫)이 아직 임명이 되지 않았으니, 이것을 잘 처리하는 책임은 오직 나리에게 달려있습니다. 부디 한 고을의 민생을 생각하시어 혜택을 베푸시옵소서.”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대신들이 익히 생각해서 이미 정해진 일이니, 본원에서는 논하여 아뢰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다면 상언(上言)할 수 밖에 없다.”
고 말해 돌려 보냈다. 이튿날 간원(諫院)의 자리에 과연 유생이 10여 명이 본원 문밖에 모였는데, 완석(完席)이 이미 끝나자 등장(等狀)유생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내가 그 등장에 제사(題辭)하기를,
“변방의 병영을 옮기는 일은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일이므로, 한 고을의 싫고 괴로운 것 때문에 조정의 계획을 경솔히 고칠 수는 없는데, 너희들의 외람됨이 심하구나.”
해서 딴 유생들과 함께 내보냈다. 이로부터 태백이 다시는 내 집에 오지 않았다.
나는 병으로 사직하고 문여(文礪)가 나를 대신해서 사간이 되었다. 내가 또 집의가 되어 제좌(齊坐)하던 날 장령 채형(蔡衡)이 진안 현감(鎭安縣監) 양억(梁嶷)을 월서(越署)하므로, 좌우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채형은 말하기를,
“지난날에 장흥의 유생들이 양억의 집에 와서 여러 가지로 꾀인 일이 있어 들리는 말이 불미스럽기 때문이오.”
했다. 이것을 동료들이 힘써 구해서 무사했으나 채형은 오히려 겸연쩍어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리고 지평(持平) 강주(姜籒)가 공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자, 그 아내가 종이에 싼 물건을 내 보이면서 말하기를,
“장태백이란 자가 와서 바친 물건이오.”
했다. 강주는 크게 놀라 즉시 장태백을 불러다가 성을 내며 꾸짖고 그 물건을 도로 내주면서 말하기를,
“이 뒤로는 영원히 내 집에 오지 말라.”
했다. 이튿날 강주는 동료들에게 이 말을 하고 피혐하려 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중지하라고 권해서 그만두었다. 이해 겨울에 한 대관(大官)이 혐의로 인하여 평소에 강주를 미워했는데, 대간을 시켜서 전일에 장흥 사람이 양사(兩司)에 뇌물을 준 일로 해서 장령 채형과 남탁(南晫)ㆍ전 장령 원호지(元虎智)ㆍ지평 강주ㆍ사간 문여(文礪)ㆍ판관 김여순(金汝純)ㆍ중방 장태백 등을 탄핵해서 모두 옥에 가뒀다. 그 중에 남탁ㆍ원호지ㆍ김여순은 오랜 뒤에 석방되었고, 채형ㆍ강주는 갇힌 지 3년 동안에 여러 번 형벌과 심문을 받았으며, 문여와 장태백은 모두 옥중에서 죽었다. 장태백은 형벌을 받을 때마다 채형과 강주는 애매하다고 극언하여 죽을 때까지도 그 말이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선묘(宣廟)가 엄하게 장옥(贓獄)을 다스렸으나, 이윽고 그들의 원통함을 알고서 특명을 내려 모두 석방했다. 채형과 강주 두 사람의 하늘에 사무치고 땅에 닿는 원통함은 하늘이 통촉해줄 법도 하건만, 이 일로 해서 종신토록 버림을 받았으며 사람들이 비웃으며 손가락질하기도 하였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며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채형과 강주의 옥사가 일어난 뒤의 일이다. 마을 친구 유시행(柳時行)은 내가 사간으로 있을 때에 정언(正言)으로 있었다. 함께 이 자리에 참여했었는데, 와서 나에게 사례하기를,
“장태백은 나도 아는 사이인데 매양 병영 옮기는 일로 와서 말했으며, 나도 역시 그가 그른 것은 알았지만 감히 배척하고 끊지 못했습니다. 만일 당일에 공이 쾌히 거절하지 않았다면 한 원 (院)의 동료들이 거의 다 면치 못했을 것이니, 다행하고 다행한 일이오.”
했다. 또 유공(柳公)은 그 일의 시종을 그의 숙부인 부원군(府院君) 유근(柳根)에게 고한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집의로서 정부의 방물(方物)을 봉과(封裹)하는 자리에 참여했을 적에 유공도 예조 판서로 역시 참여하였는데, 그는 옆 방에 여러 재상들이 모인 곳에서 나를 보고 말하기를,
“저번에 조카의 말을 들으니, 집의가 장흥의 정장(呈狀)을 처리한 것이 아주 명쾌했으므로 나는 항상 깊이 탄복했소.”
하고, 여러 재상들에게 한결같이 유시행의 말대로 말하자, 좌중 사람들은 모두 칭찬하였다.
당초에 내가 장태백을 쫓아버린 것은 실상 우연히 한 일이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송연(竦然)해지니, 이것도 또한 천명인가보다.
만력(萬曆) 무술년(1598, 선조 37)에 내가 정언이 되었는데, 이때 동료들이 임천 군수(林川郡守) 정천경(鄭天卿)을, 이런 난리 중에 크게 관사 건물을 짓느라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백성들이 그 괴로움을 견뎌내지 못한다고 해서, 이것으로 죄를 의논하여 파직시켰다. 이해 가을, 나는 수찬(修撰)으로서 본도의 어사(御使)가 되어 임천(林川)에 당도했다. 그 곳은 새로 병화를 겪어 읍에는 집이 거의 없었다. 나는 산골짜기에 있는 조그만 집에 관사를 정했다. 이곳은 옛 군과는 5리쯤 떨어져 있었고, 그 곁은 바로 군수의 관사였다. 내가 전에 한산(韓山)에 가서 임시로 살았을 때 임천과는 바로 접경이므로 그곳에 피난와 있는 선비들과는 상종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대간 정홍익(鄭弘翼)과 한정겸(韓正謙)은 당시 포의로서 서로 연달아 와서 보았다. 한생(韓生)은 본래 장난을 좋아해서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그대가 일찍이 대간(臺諫)이 되었을 때 제법 바른 말 하는 풍도가 있었다기에 내가 지금 치하하는 것이오.”
하므로 나는,
“무슨 일을 가지고 그러오.”
했더니, 한생은 말하기를,
“전 군수 정천경(鄭天卿)은 벼슬살이를 지극히 간소하게 했으며, 또 부자 사람의 집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집의 곡식을 운반해다가 관사 짓는 재료로 쓰고, 민간 물건은 조금도 범하지 않아서 한 고을 사람들이 은혜를 입었소. 그런데 초옥 두어 칸을 지었다는 일 때문에 탄핵을 받고 떠나갔다니, 그대들의 바른 말 하는 풍도를 알 수가 있겠소.”
하였다. 나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간이 그저 풍문만 듣고 탄핵을 한 것이니, 이것은 바로 떠돌며 사는 선비와 호강(豪强)한 사민(士民)들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탄핵을 당한 것이지, 대간이 무슨 상관이 있겠소.”
하니, 한생 역시 크게 웃었다. 나는 계속하여 그렇게 된 까닭을 물으니, 한생은 말하기를,
“병화 속에 온 고을이 잿더미가 되었는데 오직 이 마을만이 기와집이 남아 있었소. 그렇기 때문에 겨우 객사와 관사를 마련했는데, 다만 군수가 거처할 곳이 없으므로 가까운 곳에 있는 토민(土民)의 묘지에서 재목을 베어다가 초옥을 지었던 것이 바로 아동헌(衙東軒)이었소. 그 무덤의 주인은 음관(蔭官)으로서 그때 벼슬해서 서울에 있었는데, 헐뜯는 말을 만들어서 한 대관에게 부탁하여 탄핵해서 파직시켰던 것이오. 그래서 온 고을 사람들이 통분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소.”
하였다. 이튿날 아침 나는 다른 읍을 거쳐서 마침 읍의 관사 앞 길을 지나다가 시험삼아 동헌(東軒)의 새로 지은 초옥(草屋)을 보니 앞 퇴까지 합해서 모두 3칸이었다. 나는 해괴히 여기고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대개 말세(末世)의 인심이 좋지 못하여 조그만 일에 분한 마음을 일으켜 반드시 음해할 계획을 내어, 약간의 재목을 베었다는 까닭으로 변변치 않은 한 음관(蔭官)이 잘 다스리는 지주(地主 고을 원)를 얽어 파직시켰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풍문이란 것을 족히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이와 같다. 나는 그 뒤로 여러 번 대간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매양 임천의 초옥 사건을 생각하여 남을 탄핵할 때에는 반드시 스스로 신중히 했으니, 어찌 한 가지 도움이 아니었겠는가?
정승 심수경(沈守慶1516-1599)은 제례(祭禮)와 상제(喪制)를 모두 간략히 하도록 하여 자손들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했다. 그러나 제례는 간략히 하는 것이 좋다고 하겠으나, 심지어 장사 지내는데 석회도 쓰지 않으며 3년 동안 궤연(几筵)에 조석 상식(上食)조차 올리지 않고 오직 삭망(朔望) 제사만을 올리며, 묘제(墓祭)도 다만 한식과 추석만을 행하고 정조(正朝)와 단오(端午) 때의 제사를 올리지 않는 등의 일은 정례(情禮)에 어쩔지 알지 못하겠다. 장사 지내는데 석회를 쓰는 것은 예문(禮文)에도 있는 터이니, 힘이 미치는데 따라서 많이 쓰고 적게 쓰는 것이 옳을 것이나, 전연 쓰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의 자식으로 송종(送終)하는 큰 예법에 어긋난다 하겠으며, 상식을 올리지 않으면 3년상 동안 전혀 한 가지 일도 없는 것이니, 역시 죽은 이를 살았을 때와 같이 섬긴다는 의리에 어긋난다 하겠으며, 사시(四時)에 지내는 묘제는 비록 옛날의 예법은 아니지만, 예법은 후한 것을 좇는 것이거늘, 삼국(三國) 이후에 이미 풍속이 되어 이날 귀천을 물론하고 누구나 무덤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자가 없는데, 자기만이 고산(故山)과 선묘(先墓)에 향화(香火)를 올리지 않는다면 유명(幽明)간에 서운한 마음이 없을 수 없다. 정조와 단오에도 율곡(栗谷)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제의(祭儀)와 같이 다만 술과 과실만 가지고 제사를 올려도 오히려 전혀 폐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심정승은 일대의 원로로서 반드시 의견이 있을 것이나, 자손으로서 영구히 지킬 좋은 법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내 고조 의정공(議政公)이 황해 감사(黃海監司)가 되었을 때, 윤상인경(尹相仁鏡 1476-1548)이 도사(都事)로 있었다. 고조가 임지(任地)의 경계에 이르자, 윤공(尹公)은 영명례(迎命禮)를 행했다. 고조는 그의 풍도(風度)가 의젓하고 보는 것이 비범한 것을 보고서 그의 그릇이 큰 것을 깊이 알고 특별한 예로 대우했다. 또 윤공의 어머니가 늙고 곤궁하게 산다고 해서 봉상(封上)하고 남은 지귀한 음식을 계속해 보내니, 윤공은 마음 속으로 항상 감격해 했다. 이때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있는 문관이 재주와 인망이 있었는데, 윤공을 탐탁치 않게 보아 면대해 모욕하기를,
“감사(監司)는 무슨 본 바가 있길래 도사(都事)를 지성으로 대접하는 것이오?”
하였는데, 윤공은,
“나도 모르겠습니다.”
하니, 당시에 이 말을 장자(長者)다운 말이라고 했다. 고조께서 임기가 차서 조정에 돌아오자 얼마 안 되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그래서 힘써 윤공을 천거하여 비로소 현직(顯職)에 나가기 시작했으므로, 윤공은 고조를 섬기는데 평생 동안 자제(子弟)로서의 예를 행했다. 그는 중망이 날로 무거워져서 대각(臺閣)에서 10여 년 동안 지내다가 갑자기 재신의 반열에 올랐다. 윤공이 일찍이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었을 때 그때 해주 목사로 있던 사람은 또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어 옛 계급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는 마음으로 부끄러워하여 남에게 말하기를,
“이 정승은 참으로 성인(聖人)이더군. 어떻게 윤공이 출세할 것을 알았을까?”
했다. 대개 고조께서는 당시 정승이 되었던 것이다. 고조께서 돌아가시자 윤공은 이미 육경(六卿)에 올랐는데 힘을 다하여 호상(護喪)을 했다. 그리고 매번 고조의 제삿날에는 제물을 보내어 제사지내는 것을 도와 종신토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조의 자손을 한집안처럼 여겨 그다지 행하기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면 곡직하게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말세에 배은망덕하는 자와 비교해 볼 때 어찌 한가지로 말할 수가 있겠는가?
윤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또 일가간에 화목하여 자못 당시의 인망이 있었다. 일찍이 영상(領相)으로 내국(內局)의 도제조(都提調)를 겸하였는데, 이때 중묘(中廟)의 병환이 위독하였다. 그는 약 올리는 것을 반드시 재숙(齋宿)아면서 손수 감독하여 올리니, 사람들은 이르기를,
“성효(誠孝)에서 우러난 것이다.”
했다. 그가 졸하자 시호를 효성(孝成)이라 했는데, 을사년 충순당(忠順堂)에 입대(入對)한 일이 공론(公論)에 죄가 되어 훈작(勳爵)이 모두 삭탈당했다고 한다.
일찍이 〈난정소기(蘭亭小記)〉를 보니,
“당태종(唐太宗)이 왕희지(王羲之)의 진필(眞筆)을 얻고자 하는데, 남주(南州)의 중이 왕희지의 친필을 깊이 간직해 두고 내놓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어사(御使)를 보내어 비상한 계책을 써서 얻어왔다.”
했다. 천자의 위엄으로서 중에게서 조그만 종이쪽 하나를 구한다는 것은 한 현관(縣官)의 일일 것인데도 차라리 계교로 얻을지언정 위협해서 빼앗지는 않았다는 것은, 반드시 이 필적은 한묵(翰墨)의 도구이고, 중은 또한 방외(方外)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그리고 만기(萬機)의 여가에 글을 짓고 글씨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성덕(成德)의 일이라고 하겠다. 만일 후세 같으면 중이 어떻게 감히 이것을 비밀리에 간직할 수가 있었겠는가? 반드시 보물을 감추었다는 재앙을 입었을 것이다.
송도(松都) 사람 한호(韓濩153-1605)의 아들과 아우로서 한호의 필적을 간직한 자가 있으면, 모두 한두 부관(府官)에게 빼앗겨서 글자 하나 종이 한쪽을 보존한 자가 없다. 그래서 그 아들이 사람을 대할 때마다 슬퍼하고 분하게 여기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랴?
명나라 영락(永樂) 연간에 어사(御史) 진월(陳鉞)이 유구국(琉球國)에 사신을 가는데, 바다 가운데서 회오리 바람을 만나 거의 온전치 못하게 되었다. 전월은 배안에서 해신(海神)에게 빌기를,
“다행히 신의 도움을 입어서 황제의 명령을 온전하게 전할 수 있게 되면 마땅히 돌아가서 천자께 보고하여 신을 위하여 사당을 세우고 대대로 제사를 올리겠습니다.”
했다. 빌기를 마치자 풍랑이 점점 가라앉아서 일을 끝내고 돌아왔다. 그는 이 사실을 천자께 아뢰어 특명으로 남해(南海)에 사당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올렸다. 진월은 곧 적은 관리인데도 천지가 그 말을 받아들여 사당을 세우고 현판까지 걸었으니, 지금의 천비낭낭묘(天妃娘娘廟)가 이것이다. 성천자(聖天子)의 넓고 큰 도량과 아랫사람에게 내린 어진 마음은 천고에 훌륭하고도 뛰어나다 이를만하다.
가정(嘉靖) 연간에 한 촌 백성이 딸을 낳았는데 몹시 곱고 아름다웠다. 그 아비가 천자께 아뢰기를,
“신의 딸이 몹시 아름다우니, 원컨대 궁중에 데려다가 후열(後列)에 서게 해 주시옵소서.”
했다. 그래서 천자는 즉시 궁중으로 데려 가고, 심지어 하늘이 낸 고운여자라는 조칙까지 있었다. 황조(皇朝)의 간신들은 오로지 절의(節義)를 숭상하므로 이 일에 말 한 마디 올린 자가 없었으니, 비록 이것은 흠된 일이지만 그 규모가 넓고 컸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 33)에 선조(宣祖)가 조강(朝講)에 납시었다. 이때 특진관(特進官) 호조 참판 신식(申湜)이 아뢰기를,
“우리나라 여러 도에서 은(銀)이 나는 곳이 많으니, 이렇게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었을 때에 백성들을 시켜 캐내게 해서 관가에서 세금을 받게 한다면 공사(公私)간에 양쪽이 다 편할 것이오며, 국가의 예산도 역시 넉넉할 것입니다.”
했다. 이에 상이 말하기를,
“은이 나는 곳이 많으냐?”
하니, 신식이 말하기를,
“딴 곳은 모르지만 경기도 안에도 양주(楊州) 땅에 또한 은이 나는 곳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 한창 은을 채취하고 있습니다.”
했다. 이때 나는 사간(司諫)으로 입시해서 아뢰기를,
“일찍이 듣자오니, 우리나라의 명산에는 은이 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오나, 삼국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채취한 것은 다만 단천(端川)의 은 뿐이고 보면, 다른 곳에도 은 구덩이가 많다는 말은 역시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또 고려 말년에 중국에서 은을 공물로 바치라고 했는데 정몽주(鄭夢周)가 사신으로 들어가 아뢰어서, 겨우 이것을 감하고 토산물로 대신하게 했다고 하오니, 이것은 반드시 진헌(進獻)할 물건을 댈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하오나 은은 지극한 보물입니다. 이것을 하늘이 낼 때에는 반드시 쓸 곳이 있어서 냈을 것이온데, 간직해 두기만 하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오니, 만일 은이 나는 곳이 있으면 백성들이 캐내서 쓰도록 하락하는 것이 편리할까 하옵니다.”
했다. 이튿날 정원(政院)에서 상의 결정이 없다고 해서 다시 아뢰었다. 그러자 비망기(備忘記)에,
“혼돈(混沌)을 파헤치자 혼돈이 죽었다. 은 구덩이를 파헤치면 사람의 마음이 죽는다.”
했다.
만력 계묘년(1603, 선조 36) 가을에 내가 겸보덕(謙輔德)으로서 시강원(侍講院)에 입직하였다. 그날 밤 꿈에 만월대(滿月臺)에 오르니, 장막 주변에 군마(軍馬)들이 달리는 것 같았다. 깨고 나서도 분명하였는데 그게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만월대라고 하는 곳은 내 평생에 발자취가 아예 이르지 않은 곳이지만, 언제나 옛 도읍터의 풍물(風物)을 상상하며 한 번 늘 소원을 풀고자 한 지가 오래였다. 그러던 차에 또 이런 꿈을 꾸고 보니 바야흐로 몹시 기쁘고 다행하게 여겼다. 그런 지 며칠 후에 이조(吏曹)에서 마침 비국(備局)의 공사(公事)로 인해서 각 도의 순안어사(巡按御史)를 파견시켜야 했다. 그래서 나는 늙은 어버이가 바야흐로 경기도 안에 계실 뿐 아니라, 또 이기한 꿈도 있기에 이조에 말해서 경기 어사(京畿御史)로 나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선묘(宣廟)는 올린 단자(單子)를 도로 내려 보내면서 말하기를,
“이모(李某)는 곧 시강원의 장관(長官)이니 내보낼 수가 없으니, 다른 사람으로 고쳐 보내도록 하라.”
하므로, 이에 나는 마음 속으로 서운하게 여겨 생각하기를, 전날의 꿈은 한바탕 장난이었구나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갑진년 봄에 내가 특명을 받고 개성부(開城府)의 시재어사(試才御史)가 되었으니, 전날의 꿈이 비로소 맞은 셈이었다. 나는 부응교(副應敎)로서 바야흐로 보덕(輔德)을 겸하게 되었으며, 먼저는 개차(改差)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뒤에는 특별히 보내라는 하교가 있어 몇 달 사이에 상의 마음이 현저하게 달라짐이 이와 같았으니,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쉬는 것에 모두 운수가 달려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생각해 보니, 전일에 개차된 것은 반드시 천기(天機)를 누설해서 인사에 참여하려 했기 때문에 조물주의 꺼림을 받았던 것이요, 뒤에 특명을 내린 것은 스스로 계교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전날의 꿈이 맞았던 것이다.
그러니 사대부의 공명(功名)가 거취(去就)는 한결같이 하늘에 맡겨졌을 뿐이요, 사사로이 경영되고 진취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내 족인(族人) 김현감(金縣監)은 집이 인왕산(仁王山) 밑에 있는데 경치가 몹시 좋고 뜰 앞에는 장미화(薔薇花) 나무가 있어 온 뜰이 환하게 비쳤다. 김공은 이것을 완상하다가 안석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갑자기 황의(黃衣)를 입은 장부 한 사람이 앞에 나와 읍하며 말하기를,
“내가 귀댁에 몸을 의탁한 지가 이미 여러 대가 되어 문호(門戶)를 보호하여 근심과 즐거움을 같이 해 왔는데, 이제 주인의 아들이 무례하기가 자못 심하여 매양 더러운 물을 내 얼굴에 끼얹고 온갖 더럽고 욕된 짓을 다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아들에게 화를 입힐까도 생각했지만 주인을 위해서 차마 하지 못하고 있사오니, 엄하게 가르쳐서 이렇게 못하도록 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더니, 말을 마치자 장미나무 밑으로 들어갔다.
김공은 꿈에서 깨자 놀랍고도 이상히 여겨 마음속으로 혼자 생각해도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로 안석에 기대어 누웠는데, 조금 있다가 보니 김공의 첩의 아들 중에 나이 많은 자가 갑자기 꽃나무 앞에 오더니 오줌을 누는 것이었다. 나이가 젊고 기운이 좋은 터여서 오줌 줄기가 꽃나무 가지 위까지 올라가더니 남은 방울이 꽃에 떨어져 꽃이 모두 시들어 버렸다. 김공은 그 꿈이 맞는 것을 깨닫고 첩의 아들을 불러 몹시 꾸짖은 다음, 계집종을 불러 물을 길어다가 친히 꽃에 뿌려 그 더러운 물을 씻어 주고 꽃나무 밑을 깨끗이 씻었다. 김공은 본래 시에 능했기 때문에 절구 한 수를 지어 사과했다 한다. 나는 이것을 항상 기이하게 여겼다.
또 들으니, 신씨(申氏) 성을 가진 사람이 영남 어느 고을의 원이 되었다. 그 동헌(東軒) 앞에 조그만 못이 있고 못속에 조그만 섬이 있는데, 섬 위에 늙은 매화나무 하나가 오래된 등걸이 용의 모양과 같이 천연으로 기이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고을 원에게 나이는 어리고 일을 좋아하는 손자가 있었는데, 그 매화나무가 궁벽하게 가 있는 것을 싫어하여 동헌(東軒) 뜰에 옮겨 심으려 했다. 그 나무를 캐려니 뿌리가 온 섬 속에 서리었는데, 깊고도 멀어서 10명의 인부의 힘을 들여서 섬을 거의 다 파헤치고 간신히 뽑아냈다.
그날 밤에 신생(申生)이 꿈을 꾸니 머리가 하얀 늙은이가 와서 말하기를,
“내가 편안히 고토(故土)에서 산 지가 거의 백년이나 되었는데, 네가 하루아침에 까닭없이 내 집을 허물고 내 몸뚱이를 상하게 하여 나로 하여금 있을 곳을 잃어 장차 말라 죽게 했으니, 너도 역시 이 세상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고, 노여운 기운이 얼굴에 가득한 채 가버렸다. 신생은 비로소 후회했으나 이미 어찌할 수 없었다. 그 후 그 매화는 과연 말라 죽고 머지 않아 신생도 잇따라 죽고 말았으니, 아! 이 또한 이상한 일이다. 장미는 떨기로 피는 꽃이요, 매화도 또한 약한 나무인데, 오히려 정령(精靈)이 있으니 이것으로 보면 물건이란 오래 되면 반드시 신(神)이 있는 법이다. 꽃을 보고 나무를 심는 자들은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공도(公道)는 오직 과거(科擧) 뿐이었는데, 임진년 병란이 있은 후에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고 법강(法綱)이 해이해져서 한두 시관(試官)이 과거보는 시험장에서 사정(私情)을 행한 것이 시초가 되어, 그 폐단이 점점 만연되어 폐조(廢朝) 때에 이르러 가장 심했으니, 큰 둑이 한 번 무너지자 염치가 모두 없어져서 돈에 환장한 사람보다도 심하였다. 이것은 실로 권간(權奸)이 나라 정치를 맡아 오랫동안 문형(文衡)의 자리를 차지하여 여러 번 시원(試院)을 주장하여 사당(私黨)을 넓게 심어서 자기들의 세력을 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크든 작든 사람을 뽑는 과장에는 반드시 미리 글 제목을 내가지고 문객(文客)과 일가붙이 중의 젖비린내 나는 자제들을 시켜 먼저 남에게 가서 차작(借作)을 받게 하였으니, 이는 차천로(車天輅1556-1615)로부터 그릇된 예가 생겼고 이재영(李再榮)으로부터 기원되었다. 또 관서(關西)에 이진(李進)이란 자가 있어 제법 과문(科文)을 잘 지었다. 이 사람은 재상의 집에 출입하면서 많은 보수를 받고 글을 지어 주어서 과거에 급제한 자가 또한 많았다. 또 식년(式年)의 강경과(講經科)에 있어서도 역시 미리 일곱 대문(大文)의 문제를 내가지고 이것을 익히 외우게 했기 때문에 우수하게 급제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우리나라 과거는 고려 광종조(光宗朝) 때 처음 만든 것으로 지금까지 5ㆍ6백 년이 된다. 그러나 공도(公道)가 없어지기는 지난번보다 더한 때가 없었으므로 보고 듣는 바에 놀라고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어, 나라 안에 말이 시끄럽고 인심이 흙처럼 무너졌다. 그래서 시골에서 경서(經書)를 연구하는 선비나 일생동안 시문을 짓던 문사들이 모두 책을 덮고 과거를 폐하고서 세태에 통분하며 은거하고 만다. 그러므로 그 대각(臺閣)에서 날뛰고 청현(淸顯)한 벼슬자리에 벌여 있는 자들이 모두 학문이 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은 권간(權奸)의 손에서 양육되어 그 풍지(風旨)를 따라서 여러 번 신인(神人)이 공노할 큰 옥사를 일으키고 마침내는 윤리(倫理)가 거의 없어지고 의리가 막혀 버려 종묘와 자식의 위태로움이 간신히 잡아맨 기(旗)의 술과 같았으니, 만일 반정(反正)의 일이 없었다면 거의 금수의 땅이 될 뻔했다. 큰 이익이 있는 곳에는 그 폐단을 막기가 어려운 법이라, 지금까지도 남은 습관이 아직도 있으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재영(李再榮)은 부윤(府尹) 선(選)의 첩의 아들로 글을 잘했다. 더욱이 사륙문(四六文)에 능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통정(通政)으로 군수까지 하는데 이르렀다.
반정 후 죄인 이진(李進)도 역시 잡혀 갇혀서 형벌을 받다가 한참만에 석방되었다. 이진은 뒤에 문과에 급제함. 옛 규례에 새로 급제하여 괴원(槐阮)에 뽑히면, 밤에는 본원(本院)의 박사 이하의 관리에게 명함을 내어 인사를 청하고, 낮에는 장방(長房)에 갇혀서 출입을 못하게 되는데, 이것을 신귀(神鬼)라고 하여 침해와 곤욕을 여러 가지로 하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놓아 주었다. 또 회자(回刺)를 돌게 하여 이렇게 열흘 동안을 하는데, 만일 공손히 하지 않으면 그 가동(家僮)을 종아리 때리고 몇일 동안을 더하게 한다. 이런 때 선생이나 이름 있는 관리가 가서 청하면 혹은 회자를 없애거나, 혹 일수를 감해주었으니, 이것은 역시 옛 풍속이었다. 서공 익(徐公益)과 이상국 원익(李相國元翼1547-1634)은 같은 방(榜)에 급제하여 바야흐로 함께 장방(長房) 안에 있었다. 이아계(李鵝溪)와 서익(徐益1542-1587)은 한 집안 사람이나 옛 규례에 의하여 가서 보았는데, 서공(徐公)은 본래 호방한 사람이라 아계(鵝溪)에게 말하기를,
“이 속에 보기 드문 탈을 쓴 물건이 있으니 한 번 보십시오.”
하면서 이공을 불러 내어,
“이 물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였다. 이공은 본래 청수하고 파리한데다가 찢어진 모자에 귀복(鬼服)을 입고 있어 몹시도 초췌해 보였다. 그러나 아계(鵝溪)는 감식(鑑識)이 몹시 높은 터라서, 이공을 한 번 보자 그가 국가의 큰 그릇이 될 것을 알고 마음을 기울여 허여하고 자못 깊이 사귀었다. 그러나 서익은 아계까지 모욕하고 조롱했던 것이다. 그 뒤에 서공은 외군(外郡)으로 맴돌고 이 공은 맑은 인망이 몹시 자자해서 이미 이조 판서가 되어 금새 정승이 되게 되었다. 그래서 서공은 매양 탄식하기를,
“티끌 속에서는 사람을 알아보기 어렵다.”
했다. 이공은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부원군에 훈봉(勳封)되어 국가의 의중(倚重)하는 바가 된 지 30년 만에 졸하니, 나이 88세였다. 한편 서공은 벼슬이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이르고 나이도 겨우 50세에 죽었으니, 일찍이 높은 재주를 안고서 세상을 경홀히 여기고 남을 거만하게 보는 것이 이와 같았다.
한산(韓山) 숭문동(崇文洞)에 이상사(李上舍)가 살았는데, 목은(牧隱)의 증손이었다. 그는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으나, 성질이 순후하고 근신하며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므로 향당에서 그를 장자(長者)라고 일컬었다. 일찍이 빌어 먹는 중이 문앞에 왔는데 다 떨어진 장삼을 천갈래로 기웠으나 용모가 기이하고 고상했다. 상사는 즉시 몇말 곡식을 주니, 중은 기뻐하여 사례하고 길이 절을 하고서는 집앞에 서성거리면서 돌아다보아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 있는 듯싶었다. 상사는 괴상히 여겨 묻기를,
“너는 그 곡식이 적어서 그러느냐? 그렇지 않으면 할말이 있어서 그러느냐?”
했다. 중은 말하기를,
“이 추수 때를 당해서 비렁뱅이 중이 진사댁 문앞을 지나는 자가 수없이 많을 것인데, 상사께서 번번이 이렇게 많은 양식을 주시면 이것은 받지 못할 곳에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니,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소승이 지리(地理)를 조금 알기에 댁의 지형을 두루 보아서 후하게 주신 은혜에 보답할까 하옵니다.”
하고, 중은 계속해 말하기를,
“상사에게 귀한 아들이 있어 오는 경자년에 사마(司馬)가 되고 임자년에는 과거에 급제하여 수와 복을 많이 누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댁은 마침내는 이성(異姓)의 사람이 살게 될 것인데, 뒷 사람도 역시 경자년과 임자년에 발복(發福)하여 공명과 부귀과 서로 대략 같을 것입니다. 또 진사의 자손들은 높은 벼슬에 오르는 이가 연속하고 좋게 끝을 맺을 것입니다.”
하고, 말을 마치자, 그 중은 표연히 가버려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상사의 아들은 윤번(允蕃)이니 경자년에 사마에 뽑히고 임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화려하고 청현(淸顯)한 벼슬을 거쳐 여러 번 주목(州牧)이 되었고, 벼슬이 가선(嘉善)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러 나이 80여 세에 졸했다. 그 집은 뒤에 상사의 둘째 아들 참봉 윤수(允秀)에게로 갔는데, 참봉이 아들이 없어서 외손인 신빙군(申聘君 빙군은 장인이란 말. 신담(申湛)은 이 책의 저자 이덕형의 장인임)으로 대를 잇게 했다. 장인이 이 집에서 났는데, 역시 경자년에 사마에 뽑히고 임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나이 77세에 졸하여 이름과 지위가 이 대사간(李大司諫)과 대략 같았다. 이리하여 그 중의 말이 하나하나 모두 맞았으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랴?
대사간의 손자 모(某)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정(寺正)에 오르고 시정의 손자 판서 이현영(李顯英)과 판서의 아들 참의 기조(基祚)는 모두 중한 명성이 있어 한때의 명경(名卿)이 되었다. 어진 대부(大夫)의 착한 일을 쌓은 데 대한 보답이 부절(符節)과 같이 들어맞았다고 이를만하니, 이는 반드시 하늘이 기이한 중을 보내서 적덕하는 자로 하여금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더욱 힘쓰도록 한 것이리라. 시정(寺正)의 이름은 희백(希伯)이다.
김남창(金南窓)의 휘는 현성(玄成)이니, 목사(牧使) 언겸(彦謙)의 아들이다. 대대로 고양(高陽)에서 살았는데, 유학을 일삼고 곤궁을 견디며 살았다. 그리고 목사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그 고을에서 모두 칭찬을 하였다. 일찍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아직 벼슬을 하기 전인데 그의 어머니가 서울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이때 목사(牧使)는 관을 받들어 고산(故山)에 장사지내려고 신원(新院)에 이르자 상여 바퀴가 부러졌다. 목사는 어찌 할 줄을 몰라서 관을 길가에 놓고 울부짖고 있으니, 지나가는 행인들이 슬퍼하였다. 근처 마을에 사는 백성들이 이 기별을 듣고 다투어 와서 일을 도와 임시로 시체를 길 위 높은 곳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그러나 목사는 몹시 곤궁하여 선산(先山)에 옮겨 장사지낼 수가 없어서 스스로 흙을 져다가 영역(塋域)을 만들었다. 이때 본군(本郡)에 나라의 능(陵)을 수리하는 역사가 있었다. 지관(地官)이 명을 받들어 지세를 살피려고 지나다가 말 위에서 뒷 사람을 돌아보면서,
“여기 쓴 새 무덤은 누가 와서 봤는지 참으로 길지(吉地)로군!”
했다. 목사는 이 말을 듣고 곧 말 앞으로 쫓아가 절을 하고서 자기의 사정 이야기를 갖추 말하면서 말과 함께 눈물이 흘렀다. 지관은 측연히 감동하여 이내 두루 산세를 살펴보고서 말하기를,
“용호(龍虎)가 너무 가깝고 명당(明堂)이 비좁아서 비록 대지(大地)는 아니지만, 산세가 멀리 와서 스스로 격국(格局)을 이루고 또 정맥(精脈)이 어리어 여기에 모였으니, 마땅히 금방(金榜)에 붙일 귀한 사람이 2대에 계속하여 날 것입니다.”
하고 지관은 또 상주의 성명과 족계를 물었다. 목사는 일일이 말하고 숨기지 않자, 지관은 탄식하기를,
“그러면 상주는 반드시 성효(誠孝)가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장성하여 지관이 된 뒤로 이 길을 지나다닌 것이 몇 번인지 모르는데 일찍이 10보 이내에 이런 명당 자리가 있을 줄 몰랐소이다. 이것은 실로 하늘의 뜻이요, 인력으로 될 일이 아니니 아예 옮겨 모시지 마시오.”
했다. 이리하여 목사는 그 말대로 드디어 영폄(永窆)하게 되었다. 3년 뒤에 목사는 곧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큰 고을에 수령을 지냈는데 모두 명성과 공적이 있었고, 수(壽)도 80세나 살았다. 그 아들 남창(南窓)도 역시 대과에 올랐으니, 2대가 영화롭고 귀하게 되겠다는 말이 과연 맞았다.
또 남창은 효도와 우애가 천성에서 나왔고, 필적은 송설체(宋雪體)에 뛰어나서 공사(公私)간의 비석이나 묘갈ㆍ병풍ㆍ족자의 글씨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또 시에 능해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며 서로 주고 받은 글이 많다. 여러 번 주부(州府)의 목사로 나갔는데 손을 씻은 듯이 직책을 받들어서 청렴하다는 소리가 세상에 나타났다. 성품이 소탈하고 청아해서 관청의 일에만 매달리지 않고, 매 때리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영재(鈴齋)에서 종일토록 글을 읊는 것이었다. 일을 좋아하는 자가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남창(南窓)이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과 같이 하지만 온 고을 사람들은 모두 원망하고, 추호도 범하지 않지만 관가 창고는 텅 비었다.”
고 하여, 일시 사람들이 모두 전해가면서 웃었다. 그는 경학에 고명해서 후진들을 가르쳐 명인들을 많이 내었다. 지조를 몹시 바르게 지켜서 폐후(廢后)의 정청(廷請)에 한 번도 나가 참석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해 동안 버림을 받았는데 그는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고서 서사(書史)를 가지고 스스로 즐겨했다. 벼슬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고 역시 나이 80이 넘어서 졸했다. 나는 일찍이 그에게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가 돌아가자 초상을 치렀는데, 두어 칸 초옥에 책 한 상자와 조복(朝服) 몇 벌이 있을 뿐이었다. 그 맑게 닦은 것과 곧은 절개는 옛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는데도, 지위가 그 덕에 충족하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내가 충청감사(忠淸監司)가 되어 한산(韓山)에 순시를 나갔다. 여기에는 선조 가정(稼亭)ㆍ목은(牧隱)ㆍ인재(麟齋)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 있다. 그리고 충주(忠州)에 음애서원(陰崖書院), 진천(鎭川)에 문학서원(文學書院)이 있어, 한 도 안에 동종(同宗)의 서원이 세 곳 있으니, 어찌 우리 문중의 크게 다행한 일이 아니랴? 인재(麟齋)의 휘는 종학(種學)이니 목은의 아들이다. 벼슬이 밀직 보문각 제학(密直寶文閣提學)에 이르렀고 고려조가 망할 때, 앞장서서 절의에 죽었으므로, 《노소재집(盧蘇齋集)》에,
“절의를 전조(前朝)에 다했고, 목숨을 개사(改社)하는데 마쳤다.”
한 것이 이것이다.
음애(陰崖)의 휘는 자(耔)로서 인재의 손자이다. 벼슬이 참찬(參贊)에 이르고 시호는 문의(文懿)인데 사적은 〈기묘록(己卯錄)〉에 있다. 이문학(李文學)의 휘는 여(畬)이니 인재의 후손으로서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이학(理學)에 고명하였다. 인묘(仁廟)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 가장 오래 강관(講官)이 되어 보익한 것이 많았으므로, 벼슬을 옮기려 하면 인묘(仁廟)는 반드시 상께 청하여 머물러 있게 하고 스승의 예로 대접했다. 나이 겨우 40세에 죽었는데 사적은 모두 유미암(柳眉巖)의 행록(行錄)에 있다.
또 우리나라 큰 집안으로 높은 벼슬이 계속되고 훈업(勳業)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자는 세상이 실로 많이 있지만 대를 연달아 서원을 세워 받들어 모시고 조두(俎豆)로서 제사지내서 사자(士子)들이 본받게 한 집은 우리 한산 이성(韓山李姓) 외에는 들은 데가 없다. 이러므로 오성(鰲城) 이상국(李相國)이 〈목은서원기(牧隱書院記)〉에 말하기를,
“세상에서 하산에 군자가 많다고 하더니 이 말이 정말이로다.”
한 것이 참으로 실록(實錄)인 것이다. 조남명(曺南冥)이 일찍이 말하기를,
참 국화꽃이 거짓 도연명(陶淵明)을 대했구나 / 眞黃花對爲淵明
라는 글귀와,
현릉의 송백이 꿈 속에 푸르러라 / 顯陵松栢夢中靑
라는 글귀는, 조손(祖孫)의 절의(節義)가 전후에 똑같은 법칙이다.”
고 했다. 이 말은 비록 서원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지만, 역시 우리 문중의 의열(義烈)이 족히 천고(千古)의 감개(感慨)를 격동시킬만 하기에 함께 기록하는 바이다. 진황화(眞黃花)는 목은의 시이고, 송백몽중청(松栢夢中靑)은 이개(李塏)의 시이다.
신상국 흠(申相國欽1566-1628)의 호는 상촌(象村)인데, 타고난 자질이 영민하며 세상에 어쩌다가 나는 높은 재주이어서 나이 겨우 10여 세에 글 잘한다는 이름이 이미 진동했다. 이때 송군 미로(宋君眉老)가 꽤 동파(東坡)의 글을 이해하고 또 시에 능하여 세상에서 동파를 배운다는 자는 모두 그에게로 갔다. 그는 항상 학도들을 모아 놓고 시부(詩賦)를 시험하므로 나이 젊고 재주 있는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었다. 그래서 마치 관학(官學)에서 재주를 겨뤄 보는 곳과도 같았다. 이때 공은 나이 겨우 14세로 역시 그 중에 참여했는데, 용모가 옥과 눈같고 행동이 단아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해서 어린 총각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글을 짓게 되어 분명하게 글의 종류를 구별하여 시를 읊고 부(賦)를 짓느라고 벌집처럼 자리가 어수선했다. 그러나 공은 조용히 한 구석에 앉아 한 권 책도 갖지 않고 남이 짓는 것도 보지 않았다. 날이 이미 한낮이 되자 혼자서 종이를 펴더니 부(賦)를 먼저 다 쓰고 나서 계속하여 시편(詩篇)을 썼다. 도도(滔滔)한 걸작을 잠시도 붓을 정체하지 않고 두 편을 모두 완성했는데, 문장의 기운이 노성하고도 기운차서 만좌한 많은 선비들이 모두 와 보고 혀를 차면서 칭찬하고 탄식하기를,
“이는 반드시 참 신선이 세상에 내려온 것이지, 어찌 인간에게 이런 기이한 재주가 있겠느냐?”
하고, 모두 붓을 던지고 손을 거두면서 맥이 없는 기색으로 아무도 감히 그와 겨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송군은 이 글을 읽어 내려 가다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치면서,
“문장의 수단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내가 감히 손을 댈 수가 없다. 이는 반드시 천재이다.”
하고는, 마침내 공의 글을 장원을 시켰다. 그리고 공을 불러 보려고 했으나 공은 이미 집으로 돌아가고 없으니, 대개 남의 칭찬 받기가 싫었던 것이다. 공은 나와 동갑이다. 처음에 송공의 집에서 얼굴을 알게 되었다. 뒤에 함께 옥당에 숙직하면서 당시 글지어 시험하던 일을 말하고 서로 옛날 회포를 풀었다. 공은 20세에 사마시(司馬試) 1등에 합격하고 21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아한 이름과 인망은 조야가 모두 의중(倚重)하였다. 나이 겨우 40세에 이미 육경(六卿)에 올랐고 일찍이 문형을 맡았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향년은 63세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일생 동안 청백(淸白)하고, 마음을 충량(忠亮)하게 가져 세상에서 어진 재상이라고 일컬었다. 문집이 세상에 전한다.
연평(延平) 이귀(李貴1557-1633)의 자는 옥여(玉汝)로서 기위(奇偉)함이 남보다 뛰어나고 기절(氣節)이 활달하여 용감히 말하고 거리낌이 없었으며, 조그만 절조에 얽매이지 않았다. 일찍이 한음(漢陰) 이상국 덕형(李相國德馨)ㆍ박공 경신(朴公慶新)ㆍ윤군섬(尹君暹)과 한 마을에서 글동무로 공부했다. 어느 날 한 곳에 모여 점장이 이인명(李麟命)에게 운명을 물었다. 인명은 말하기를,
“이공(李公)이 제일이요 한음(漢陰)이 그 다음이며, 그 나머지도 역시 과거에 급제는 하지만 모두 보통 운명들입니다.”
했다. 이공은 애써 과거 공부에 노력하지 않았으므로 재명(才名)이 가장 쳐졌다. 박공 경신이 나이도 가장 젊고 기세도 가장 날카로와서 이 말을 듣더니, 갑자기 놀라 일어나 손뻑을 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옥여(玉汝)를 제일이라고 하다니! 무슨 놈의 인명(麟命)이란 말이냐? 너는 점치는 것을 그만 두어라.”
했다. 뒤에 한음(漢陰)은 벼슬이 영상에 올랐으나 나이 겨우 53세에 졸했고, 박공은 가선(嘉善)으로 감사(監司)가 되어 나이 60세가 지났고, 윤공(尹公)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서 나이 겨우 40세에 전진(戰陣)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공은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승진하여 가선(嘉善)에 이르렀고 나라의 큰 운수를 도와서 정사(靖社)의 원훈(元勳)이 되었다. 그리고 양전(兩銓)의 판서를 거쳐 지위가 부원군에 이르는 등 풍운(風雲)을 잘 만나 공명(功名)이 혁연하였고 나이 77세로서 졸했다. 두 아들도 군(君)에 봉했는데 한 아들은 통정(通政)이 되었고, 자손들이 번성하여 높은 벼슬아치가 문중에 가득하였다. 참으로 세상에 드문 큰 운명이었으니, 연평(延平)이 매양 박공의 일을 말하면서 웃었다.
또 박공건(朴公楗)은 기질이 순후하고 풍의(風儀)가 질박하며 마음 쓰는 것이 참되었는데, 지금 한평군(韓平君) 이공 경전(李公慶全)은 젊어서부터 호준(豪俊)하고 문명(文名)이 몹시 자자하여 당시의 재주 있고 이름 있는 선비 유극신(柳克新)ㆍ김시헌(金時獻)ㆍ백진민(白振民) 등 여러 사람과 함께 협기(俠氣)를 부리며 세상을 조롱하고 박공을 조소하여 그로 하여금 못견디게 하였다. 박공은 항상 우울하고 괴로워하였으나 역시 그들과 서로 따지려 하지 않았다. 마침 성균관(成均館)에서 글을 시험하는데 박공이 합격한 일이 있었다. 이때 아계 상국(鵝溪相國)이 태학사(太學士)로 있었는데, 비로소 박공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 그 아들 한평군(韓平君)에게 이르기를,
“박건은 반드시 재상이 되고 수와 복도 역시 원대할 것이다.”
했다. 그러나 모든 나이 젊은 동료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심하게 그를 모욕하고 업신여겼다.
뒤에 유극신ㆍ백진민 두 사람은 모두 일찍 죽고, 김공(金公)은 참판이 되어 나이 50세에 죽었는데, 박공은 벼슬이 판서에 이르고 책훈(策勳)되어 군(君)을 봉받았으며, 상의 은혜와 사랑이 날로 두텁고 기세가 몹시 퍼졌으며, 수도 또한 70세까지 누렸다. 대겨 연평(延平)의 많은 공과 높은 의열(義烈)과 충직(忠直)한 기개는 박공이 따라갈 수가 없는 터이지만, 티끌 속에 섞여 있을 적에 남이 알아 보지 못하기는 매한가지다. 식자(識者)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운명을 타고난 것은 처음에 재주나 모양으로 구별할 수가 없다. 재주 있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잘 되기를 기약할 수는 없고 모양이 못난 자로서도 역시 수와 지위를 누리는 것이니, 하늘의 도는 아득하고 멀어서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서는 미리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였으니, 재주를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이다.
참판 정협(鄭協)의 자는 화백(和伯)이니 의정(義政) 언신(彦信)의 아들이다. 천성이 어질고 두터우며 국량이 크고 원대해서 평생에 덤벙대는 말이나 당황한 기색이 없었고,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하는데 있어서 일단의 한덩어리 화한 기운뿐이었다. 어렸을 때에 길거리에 비렁뱅이가 춥고 얼어서 거의 얼어 죽게 된 것을 보고 그는 곧 입었던 도포를 벗어서 주었으며, 그의 친구 정자(正字) 최인범(崔仁範)이 죽었는데 곤궁해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자, 그는 아버지의 초헌(軺軒)에 깔았던 호피를 부의(賻儀)로 주어서 관(棺)을 사게 했으니, 이것은 역시 맥주(麥舟)의 의 였다. 임진왜란에 식구들을 데리고 난리를 피하여 한 나루에 이르렀다. 뱃사람은 높은 뱃삯을 달라고 하는데, 배를 댄 저편 언덕에는 떠도는 사족(士族)이 늙은 부모를 모시고 강변에 앉아 종일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공은 이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뱃사람을 불러 즉시 행장 속에 있는 옷을 꺼내서 모두 주고, 그 사족의 뱃삯을 대신 지불하여 먼저 그 사족을 건너보낸 뒤에 비로소 자기 식구들을 건너게 했다. 뱃사람이 이것을 의리 있게 생각하여 그 값을 도로 주려 했으나, 공은 이것을 받지 않았다. 그 사족은 전혀 서로 알지 못하는 처지이고 또 뱃삯을 대신 준 것도 모르다가 뱃사람이 말해서 비로소 놀라고 탄식하여 감읍했다고 한다.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의리와 남을 구제하는 어진 마음이 타고난 그대로이고, 조금도 지어서 함이 없는 것을 더욱 따를 수 없는 일이었다.
또 글에 능하고 더욱이 사부(詞賦)를 잘해서 을유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뽑혔고 또 정시(庭試)에 장원하여 직부(直赴)로써 과거에 급제하여 곧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제수받았고, 화려한 벼슬을 거쳐 여러 번 삼사(三司)의 장관에 배수되었다. 나와의 교분은 평소부터 두터워, 병오년(1606, 선조 39) 내가 아버님 상사를 김포(金浦)에서 당했을 때 공은 극력 초상을 처리하여 장례를 마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우리 온 집안이 병에 걸리자, 약을 주선하여 진심껏 구호하여 강을 사이에 둔 40리 길을 두 번이나 와 보는 등, 약관 때부터 맺은 교분이 끝까지 시들지 않았다. 그의 숙덕(宿德)과 중망(重望)이 한 시대에 몹시 자자해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공보(公輔)로 기약했는데,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자 갑자기 풍병에 걸려 이를 고치려고 과천(果川)에 있는 농사(農舍)로 물러가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고치지 못하고 나이 겨우 51세에 졸하니, 조야(朝野)가 모두 놀라고 슬퍼했으며, 길가는 사람들까지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어진데도 수를 누리지 못하고 지위가 그 덕에 만족하지 못했으니, 아! 애석한 일이다. 공에게 한 아들이 있으니 이름은 세미(世美)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역시 화려한 벼슬을 거쳤는데, 술을 즐겨서 병에 걸렸다. 갑자년(1624, 인조 2)에 내가 주청사(奏請使)로서 바다를 건너 중국 서울에 갈 때, 정군 세미(鄭君世美)는 당시 장연 부사(長淵副使)로서 봉산(鳳山)에 와서 나를 전송해 주었는데, 술병이 이미 고질이 되어 겉모습이 달라졌으므로, 나는 몹시 근심하여 은근하게 술을 삼가라고 경계했다. 떠날 때, 그는 10리 밖까지 따라 나와서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내가 돌아올 때 정주(定州)에 이르러 비로소 그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몇 달 동안을 슬퍼하고 마음 아파했다. 이제 들으니 그의 아들이 과거에 올랐다고 한다. 이것으로서 착한 사람은 반드시 뒤가 있다는 것을 알겠으며, 천도(天道)는 어둡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세미(世美)의 아들은 유(攸)이다.
세종 대왕(世宗大王)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여러 대군(大君)ㆍ왕자(王子)들과 함께 제천정(濟川亭)에서 잔치를 열었다. 이때 마침 과거가 있어서 먼 지방의 선비들이 연이어 강을 건너느라고 강어구가 가득 찼다. 세종은 그중 한 유생을 여러 사람 속에서 바라보고 사람을 시켜 지시하기를,
“저 색깔 있는 옷에 어떤 모양을 한 사람을 네가 가서 불러오너라.”
했다. 그 사람은 과연 부름을 받고 와서 뵈었다. 세종은 그를 빈례(賓禮)로 대접하고 그 성명과 주소를 물었다. 그는 현석규(玄錫圭)라고 하고 집은 영남(嶺南) 아무 고을에 있다고 했다. 세종은 간곡한 말을 해 주고 음식을 잘 차려서 대접했다. 이때 그 사람은 먼길을 발섭(跋涉)해 오느라고 의관이 남루하고 형용이 수척하매, 자리에 가득한 사람들은 모두 괴이히 여기고 의아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세종은 좌우를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이 좌중에 혹 처자(處子)가 있는가?”
했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성명(聖明)을 믿으므로, 대답하기를,
“손아(孫兒) 서원군(瑞原君)에게 처자가 있어 바야흐로 혼인을 구하는 중입니다.”
했다. 세종은
“만일 아름다운 사위를 얻으려면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하니, 효령(孝寧)은,
“문호(門戶)가 서로 대등하지 못합니다.”
했다. 그러나 세종은,
“옛날부터 영웅이나 호걸의 선비들이 초야에서 많이 나왔으니, 이 선비집 아들과 뜻을 결정하여 정혼하도록 하라.”
했다. 뒤에 서원군(瑞原君)이 살펴 물어보니 그 사람은 바로 영남의 거유(巨儒)로서 재명(才名)이 한창 떨치고 있던 터였다. 드디어 맞아다가 사위를 삼았다.
현공(玄公)은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현(淸顯)의 요직을 거쳐 당시의 명경(名卿)이 되고 벼슬이 참찬(參贊)에 이르렀다. 세종이 백 보 밖에서 우연히 한 번 바라보고서 통달한 사람과 귀한 손님을 알아 봤으니, 대성인(大聖人)의 식견이란 남보다 훨씬 뛰어난 법이다. 효령(孝寧)은 바로 나의 외선조(外先祖)이고, 찬성(贊成) 이직언(李直彦)은 효령의 직손이기 때문에 매양 이 일을 말하면서 감탄하고 이상해 했었다.
정상국 창연(鄭相國昌衍)은 본래 강직하고 발랐다. 그가 장령(掌令)이 되었을 적에 홍문관 교리 허명(許銘)이 갓 국혼(國婚)을 하고 기세가 한창 등등하였다. 그 아들 철(㬚)은 성질과 행동이 제멋대로여서 날마다 무뢰배와 함께 술을 마시고 기생을 끼고 놀면서 남을 때려 상처를 입히는 등 민간 사람을 해치므로 나라 사람들이 괴롭게 여겼다. 그래서 정상(鄭相)이 아전을 내어 잡아다가 중하게 형벌과 심문을 가하니, 어지럽던 무리들이 흩어져 서울 안에 잠잠해졌으니, 지금까지도 정공(鄭公)의 풍도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 탄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근래에 세력이 있는 집 자식들이 대낮에 횡행하여 남의 목숨을 해치고 조정의 진신(搢紳)들을 욕보여 광종(狂縱)한 행동이 허철(許㬚)보다도 배나 더한데 대관(臺官)이 된 자가 모두 위축되어 한 사람도 말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법과 기강이 땅에 떨어지고 풍속이 날로 망가지니, 세도(世道)가 어찌 여기에 이르지 않으랴?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예로부터 어질고 간사한 이가 번갈아 나오고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짐이 서로 엇바뀌니, 이것은 국가에 예사로 있는 일이다. 우리 나라의 백년 이전의 일은 비록 감히 알 수가 없지만, 중고(中古) 이래로 권간(權奸)이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희롱하여 사류(士類)를 죽인 것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세력이 꺾이게 되거나 혹은 그 몸이 죽은 지 오래된 뒤에야 비로소 그 일을 추후해서 의논한다. 이것은 기묘년의 남곤(南袞)ㆍ심정(沈貞)과 을사년의 이기(李芑)ㆍ윤원형(尹元衡)이 바로 그렇다. 찬성(贊成) 양연(梁淵)이 대사헌이 되고 판윤(判尹) 기대항(奇大恒)이 부제학이 되었을 때, 김안로(金安老)와 이양(李樑)이 바야흐로 그러한 위치에 있어 기염을 몹시 폈는데, 감히 베이고 귀양보내기를 항론하여 풍절(風節)이 늠렬(凜烈)했으니, 지금까지도 쾌하다고 한다.
또 대사헌 박응남(朴應男)이 홀로 풍채를 유지하며 무너지는 기강을 진작시켜 옛날 곧은 신하의 풍도가 있었다. 한 번 조정이 분당(分黨)한 뒤로는 대각(臺閣)이 쓸쓸하여 그 논핵(論劾)하는 바가 다만 자기와 다른 한쪽 사람 뿐이었으므로, 인심이 복종하지 않고 공의(公議)가 거의 없어졌는데, 다행한 것은 추숭(追崇)ㆍ입묘(入廟)에 대하여 선비들의 의논이 준엄하였고, 삼사(三司)에서 일을 의논하는 관원이 서로 계속 쫓겨나면서도 오히려 후회하지 않고 남은 의논이 아직도 쉬지 않았으니, 족히 조종조(祖宗朝)에서 사기(士氣)를 배양한 것을 보겠으며 국맥(國脈)이 유지되는 것도 역시 이 까닭인 것이니, 아! 가상한 일이다.
역대로 어진 신하와 장한 보필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닌데, 한ㆍ당(漢唐) 때는 다만 소하(蕭何)ㆍ조참(曺參)ㆍ병길(丙吉)ㆍ위상(魏相)ㆍ방현령(房玄齡)ㆍ두여회(杜如晦)ㆍ요숭(姚崇)ㆍ송경(宋璟)만을 일컫고 송(宋) 나라 때는 다만 한기(韓琦)ㆍ범중엄(范仲淹)ㆍ부필(富弼)ㆍ마기(馬墍)만을 말했다. 이 나라들이 모두 3ㆍ4백 년씩이나 누리었건만 한 대에 각각 네 사람씩만을 말하고 말았으니, 보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알 만하다.
우리 나라 전기에는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1363-1452)ㆍ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1369-1440)가 있었고, 후기에는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1462-1538)ㆍ충정공(忠正公) 이준경(李浚慶1499-1572)이 있다. 익성공은 덕량(德量)이 넓고 깊었으며, 문경공은 천품이 바르고 곧았는데 그들은 몸이 성주를 만나 태평한 세상을 이루었다. 그리고 문익공은 북문(北門)의 변을 당하여 옷소매를 잡고 울면서 간해서 사류(士類)들을 구호했고, 충정공은 위태롭고 의심나는 날을 당해서 정책(定策)하여 성군을 맞아들여 국가를 편안케 했으니, 그들의 공명과 사업은 전후가 같은 법도이므로, 모두 어진 정승이라고 일컫는 것이 또한 마땅치 않겠는가?
선조 대왕(宣祖大王)에 이르러서는 왕위에 계신 지 가장 오래되었지만 임진년의 왜란은 천고에 없는 난리였으니, 다시 옛 왕업(王業)을 회복하여 다시 나라를 세우게 된 것은 실로 사대(事大)하는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다 함께 어렵고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힘을 다하여 이를 극복하고 중흥(中興)의 업적을 도와 이룬 자로서, 유공 성룡(柳公成龍)의 유아(儒雅)함과 이공 원익(李公元翼)의 충량(忠亮)함과 이공 덕형(李公德馨)의 중망(重望)과 이공 항복(李公恒福)의 석덕(碩德)이야말로 마땅히 황희ㆍ허조 등과 똑같이 아름다워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 밖에도 문장과 덕업(德業)으로 물정을 어루만지고 풍속을 다듬어서 정승의 명망에 꼭 합당한 자가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으나, 그 사이의 잘잘못에 대해서는 반드시 후세의 공론이 있을 것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양신(良臣)이 되기를 원하고 충신(忠臣)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한 것이 바로 이 까닭이다.
동지(同知) 박경업(朴慶業)은 읍취헌(揖翠軒) 박은(朴誾)의 손자이다. 성품이 강개하고 고집이 세었다. 처음 정언(正言)이 되었을 때, 이조 판서 이공 기(李公墍)의 아들이 통진 현감(通津縣監)이 되어 고을을 형편없이 다스렸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말을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박공(朴公)이 즉시 탄핵해서 파직시켰다. 또 최공 관(崔公瓘)이 바야흐로 삼사(三司)에 출입하여 다시 이름이 몹시 성하므로, 그 아버지가 용강 현령(龍岡縣令)이 되었는데, 온 고을이 원망하고 괴로워해도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이에 박공이 또 이를 탄핵했으니, 이것은 모두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그래서 조야가 눈을 씻고 보았고 곧다는 소문이 크게 떨쳤다. 그 뒤에 여러 번 대간(臺諫)이 되었는데 조금이라도 공의(公議)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권귀(權貴)를 가리지 않고 분연히 탄핵했다. 그리하여 한달 동안에 파직시키고 내쫓은 것이 거의 12ㆍ13인이나 되었다. 이처럼 대각(臺閣)에서 바람이 나니 사람들은 모두 눈을 흘겼다. 이 때문에 원망을 쌓은 지가 이미 오래되니, 그를 헐뜯는 말이 일기 시작하여 드디어 벼슬길이 막혔다. 여러 번 주군(州郡)을 다스려서 제법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적을 이미 넓게 심어 놓았으므로 걸핏하면 비방을 얻게 되어 연거푸 대간의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을 논박하기를 좋아한 보복이라고 했다. 대개 박공이 외로운 종적으로 시세를 헤아리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 행했던 것이니, 그가 세상에 불우해서 쓰이지 못하고 드날리지 못했던 것은 그 형세가 그렇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조 판서의 아들을 탄핵하고 최공(崔公)의 아버지를 논박한 것은 비록 옛날의 강직하다고 이름난 사람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니, 말세에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머리를 움츠리고 꼬리를 사리는 자와는 함께 말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박공의 장점인 것이다.
○ 정유년(1597, 선조 30) 난리에 나는 호서(湖西)로부터 김포(金浦) 집으로 옮기었다. 거기서 5리쯤 되는 곳에 조군 헌(趙君憲1544-1592)의 선산이 있었는데, 한 번은 고로(故老)들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신묘년(1591, 선조 24) 가을에 조군이 와서 산소를 살펴보고 연일 통곡했다. 그리고 이웃 친구들이 와서 보면 조군은 반드시 길게 탄식하면서 영결(永訣)이라고 말하므로, 사람들은 모두 괴이하게 여기고 의아해서 그 까닭을 물으니, 조군은 말하기를,
“명년에 반드시 병란(兵亂)이 있는데 남북을 가릴 것 없이 사람이 모두 죽을 것이니, 이 뒤로는 서로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이때는 태평한 지가 2백 년이나 되므로 사람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였는데, 조군의 말을 듣고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그를 괴망(怪妄)하다고 해서 혹은 피해가는 자까지 있었다. 그는 또 고을 원을 가서 만나보고 말하기를,
“국가가 마땅히 병화(兵禍)를 입을 것이오.”
하니, 현령 이조(李調)는 그 요망하고 허탄함을 미워하여 차갑게 대접하므로, 조군은 자못 불평스러워했다.
늙은 선비 조안현(趙安賢)이란 자가 있었는데, 조군의 족숙(族叔)이었다. 나이가 많고 행실이 있어 조군은 항상 공경하여 섬겨 왔다. 그가 조용히 조군에게 이르기를,
“듣자니, 그대가 거적을 깔고 도끼를 가지고서 대궐 아래에 나가 소를 올린 데 대해서 비웃고 손가락질하는 자가 많았다고 하는데, 이제 어찌 또 망령된 말을 해서 시골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동요시키는가? 모름지기 다시 생각하도록 하라.”
했다. 조군은 분연히 말하기를,
“내가 천상(天象)을 살펴보니 명년에 병란이 동쪽에서부터 일어나는데 개벽한 이후 아직까지 없는 큰 변이옵니다. 원컨대, 숙부께서는 내 말을 허망하다 하지 마시고 미리 피난할 방도를 차리십시오.”
하니, 이에 조생(趙生)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했다. 이듬해 여름에 과연 바다 오랑캐가 길게 몰려와 팔로(八路)가 솥에 물이 끓듯 하고 만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이 빈터가 되고 승여(乘輿)가 파천하는 등 한결같이 조군의 말과 같았으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랴?
조군이 처음 급제하고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가 되어 향실(香室)에 입직하였는데, 이때 자전(慈殿)이 불공 드릴 일이 있어서 조군을 시켜 향을 봉하여 올리라고 했다. 그러나 조군은 말하기를,
“이 방에 있는 향은 다만 종사(宗社)와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 데만 사용하는 것이오니, 불사에 쓰는 향은 신이 비록 만번 죽어도 감히 봉하여 드리지 못하겠나이다.”
했다. 그래서 중관(中官)이 두세 번 왕래했어도 끝내 거절하고 듣지 않으므로, 자전(慈殿)은 마침내 그 향을 쓰지 못했다. 그의 성명(聲名)이 이로부터 비로소 떨치기 시작하여 듣는 자들이 부러워하고 감탄하였다.
조군은 강개하고 여러 가지 글을 널리 보았으며, 또 천문(天文)을 정밀하게 알았다. 눈으로 세상 일이 날마다 어긋나고 붕당(朋黨)이 더욱 시끄러운 것을 보고 피어린 소를 올렸는데, 모두 수 천 마디나 되었다. 말이 몹시 급소를 찌르는 것이어서 요직을 담당한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렸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괴귀(怪鬼)라 지목하고 배척하여 쓰지 않았다. 그래서 향학(鄕學)의 제독(提督)의 소임에서 맴돌았다. 뒤에 조군은 물러가서 보은(報恩)에 살면서 모든 유생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문도가 몹시 많았다.
임진년 난리에 의기를 드날려 군사를 일으키니, 원근에서 조군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앞을 다투어 와서 응모하여 한 달이 못되어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래서 호남에서 적의 길을 막고 싸워서 죽인 것이 많았다. 다시 금산(錦山)으로 옮겨가 싸우다가 적에게 패하여 죽으니, 온 군사들이 조군이 죽었단 말을 듣고 다투어 서로 죽음에 나아갔다. 당시에 이들을 전횡(田橫)의 객이라고 일컬었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참판을 증직했고, 호서와 호남의 문생들은 재물을 모아서 돌을 캐다가 문정공(文貞公) 윤근수(尹根壽)에게 글을 청하여 싸우다 죽은 곳에 큰 비석을 세웠다.
을묘년에 내가 전라 감사가 되었을 때 제문을 지어 가지고 가서 제사를 지냈다. 조군은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도 쓰이지 못하고 비록 세상에서 잊혀졌으나, 마침 크게 어려운 때를 당하여 능히 탁월한 절개를 세웠으니 또한 장하지 않은가?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옛 사람이, ‘부자가 희롱을 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고 했는데, 참으로 격언(格言)이다.
판서 박충원(朴忠元1507-1581)의 아들 박계현(朴啓賢1524-1580)이 또한 판서가 되었다. 모두 일시의 명경(名卿)으로서 부자가 서로 희롱을 하여 지극한 즐거움이 넘쳐 흘렀다. 박공(朴公)은 나이 70세인데 아들 판서가 먼저 죽으니, 박공은 애통하고 상심하다가 병이 되어 몇 해 뒤에 뒤를 이어 죽었다.
감사 정효성(鄭孝成1560-1637)의 아들 정백창(鄭百昌1688-1635)이 역시 경기 감사가 되었다. 매양 서로 희롱하여 웃고 즐겼다. 아들 감사가 먼저 죽으니 정공(鄭公)은 이때 나이 76세였는데, 슬퍼하다가 실성해서 지금은 폐인이 되었다. 비록 명의 길고 짧음에 달린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천도(天道)가 성만(盛滿)함을 미워하고 조물주(造物主)가 시기가 많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정승 홍언필(洪彦弼1476-1549)의 아들 정승 섬(暹)이 판서로 있을 때의 일이다. 홍공의 가법이 몹시 엄정해서 판서가 웃옷을 입지 않고는 들어가 뵙지 못했다. 손님이 왔을 때 정승이 만일 편치 않으면 판서를 시켜서 접대하게 했는데, 검소한 베옷이나 겸손한 말과 모양에 처음 보는 사람은 그가 판서임을 알지 못하다가 뒤에서야 듣고서 놀라고 감탄함을 금치 못했다. 판서가 일찍이 초헌(軺軒)을 탔더니, 그 어머니는 몹시 기뻐서 정승에게 말했다. 그러나 정승은 깜짝 놀라 곧 판서를 불러 엄하게 책망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정승의 지위에 있고 또 네가 이제 판서가 되었으니, 항상 성만(盛滿)함을 두려워하는데, 너는 어찌 감히 태연하게 초헌을 탄단 말이냐? 이것은 한 집안의 복이 아니다.”
하고, 인하여 판서로 하여금 초헌을 타고 뜰 가운데를 돌게 하자, 판서는 황공해서 다시는 감히 초헌을 타지 않았다 하니, 그 근신함이 이와 같았다.
정승은 수가 74세이며, 시호는 문희(文僖)인데, 인종(仁宗)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판서는 항상 대제학을 겸하고, 세 번 영상이 되었으며, 나이 82세에 졸했다. 문헌(文獻)이 집에 전하여 세상에서 현상(賢相)이라고 일컫는다. 이것으로서 보건대, 부자간에는 효도와 공경을 우선 삼아야 하고, 벼슬한 집에서는 겸손하고 삼가는 것으로 주장을 삼아야 한다는 것을 알겠으니, 자식된 자는 삼가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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