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22년 찬란한 5월

청담(靑潭) 2022. 6. 4. 14:32

2022년 찬란한 5월

 

□찬란한 오월

봄 가뭄이 심합니다. 비가 온지 한 달하고도 일주일 만에 엊그제 온 비는 5mm정도나 되는지 겨우 밭의 표면을 적신 정도입니다. 덕분에 텃밭과 별서의 장미를 비롯한 나무들에게 연일 물주기 계속하고 있습니다. 잔디는 자라기는 커녕 말라죽어가는 모습이어서 물을 주어 회생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 장미가 나의 별서 지산 쁠라쓰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양귀비를 비롯한 여러 꽃들도 예쁘게 피어났고 마당 서켠의 자목련이 꽃이 진후 잎이 무성해지면서 내가 의자에 앉아 능히 잠시 쉴 만큼의 그늘도 만들어 냈습니다. 나는 텃밭의 각종채소를 가꾸고 佳苑은 별서의 잡풀을 제거하며 가꾸느라 한 달이 휘익 지나버렸습니다 .

 

□2일 코로나 백신 4차 접종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려 면역력이 생겼다거나 다른 이유들로 4차 백신주사 맞기를 거부하였지만, 코로나를 용케 피한 아버지와 우리 부부는 기꺼이 접종하였습니다.

 

□5일 함양-지리산

어린이 날입니다. 손자들이 없는 우린 이 날이 별 관계없는 날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모시고 나들이를 했습니다. 함양에 가신적은 있으나 상림은 가보신 일이 없다 하시기에 먼저 상림을 찾았습니다. 점심을 먹고는 남원 실상사를 찾았습니다. 뱀사골을 지나 정령치에서 쉽니다. 남원을 거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75세까지는 차를 가지셔서 여행을 자주하셨지만, 그 이후는 여행에 그리 자유롭지는 못하셨는데, 오륙년 전쯤 다른 후배 동료의 차로 뱀사골에 오신일이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길눈이 어찌나 밝으신지 마치 살아있는 네비게이션입니다. 할머니도 그러한 면이 강했는데 아마도 유전적 측면이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7일 신춘휘호전

소리문화의 전당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서거정의 시 『익산도중』의 한 聯을 행서체와 예서체로 썼는데, 혼자서 창작하는 일이 너무 어렵습니다. 실패작인데도 입상하게 되니 내심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도 6년간 출품하여 점수가 차서 초대작가 등록 신청을 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작품을 만들 때 더욱 깊이 연구하고 진중하게 연습하는 서예학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초대작가전에 출품할 때는 정말 정성을 다하여 좋은 작품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9일 宗土 구입

代代로 신평이씨 宗中 中派(정확히는 5대조이신 일명 관상리 할아버지, 항렬공파) 所有 沓 471坪의 耕作權을 갖고 있습니다. 종토는 종중사람에게만 매매할 수 있고 매매가격은 시가의 50%입니다. 대대로 경작권을 상속해온 종중답이기에 年 耕作稅는 불과 평당 110원입니다. 아버지께서 십 수 년 간 회장을 맡으셔서 토지개발로 인해 들어오는 매각수입을 다시 농지(田)에 투자하여 만여 평을 매입하고 종중원이 아닌 경작자들에게 임대하여 매년 들어오는 연수입이 현재 천 수백만 원입니다. 시제를 모시고도 해마다 천만 원 이상이 저축되고 있습니다. 종중이 갑자기 부자가 된 것 같습니다. 이 때 임대하는 농토의 임대료는 평당 1,500원 정도인데 종토료는 수년째 평당 110원입니다. 대대로 내려온 경작권을 가진 농토이기에 임대료를 대폭 인상하는 것은 그 누구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종중토 경작권 소유자는 임대료가 극 저렴하니 대단히 좋은 듯하지만,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은 소수의 노인들뿐이고 정작 소유자 본인들은 타지로 떠난 상태에서 농사를 짓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임대하고 있습니다. 종토를 매입할 종중농민도 없고, 대를 이을 아들이 있다 해도 소유권이 없는 땅이라 관심도 크지 않고, 훗날 종중에서 경작권을 몰수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재판까지 한다면 몰라도) 언젠가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다른 성씨의 종중에서는 임대료를 시가대로 대폭 인상하거나 몰수하는 방향으로 해결하는 곳도 있다고 들립니다. 나는 종중 일을 맡지는 않았지만 종중에서 시가의 50%가격으로 매입하는 방법으로 종토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입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임대하는 방법이지요.

아버지의 뒤를 이어 3년 전부터 회장을 맡으신 석구형님이 종토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해결방법은 내 생각과는 반대입니다. 종토를 경작권자에게 시가의 50%에 매도하는 방식입니다. 탁월한 선택을 혁신적으로 처리하십니다. 회장님 계획은 이렇습니다.

종중논 1천 평에서 나오는 종토료(임대료)는 현재 11만 원입니다. 개혁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이렇게 가게 됩니다. 이를 경작권자에게 시가의 50%에 매도하면 5천만 원(평당 시가 10만원)이 들어옵니다. 이렇게 들어오는 돈은 모아 다시 좋은 밭을 구입하게 되면 500평을 살 수 있습니다. 500평을 특수작물 경작자에게 임대하면 75만원의 수입이 생깁니다. 경작권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고 수입은 6-7배가 늘어납니다. 가히 혁명적인 종토개혁인 것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좋은 일이 바로 이런 겁니다. 종중도 이익이고 경작권 소유자도 이익입니다. 농지 관리하는 일이 귀찮아서 불과 4년 전 내 소유 논 550평을 매도해버린 일이 있는데 당시 시가의 두 배 가격(실제로는 50%이니 같은 가격)으로 471평을 매입하게 되니 입안이 씁쓸합니다만(이 땅은 8년간 직접 경작해야만 양도소득세 없이 매도가 가능하다.) 어쨌든 종토 혁신을 꾀하신 이석구 회장님 대단하십니다. 혁신은 정말 어려운 일인데 시대의 초고속 변화에 부응하여 아주 쉽고 단순하게 처리해 버렸습니다. 적극 지지합니다.

 

□11일 서울문상

고교동창인 양희정 친구가 암으로 투병하다 일흔 한 살에 세상을 떴습니다. 안타깝습니다. 투병하는 동안 내내 카톡방에 좋은 시들을 올려왔는데, 부인 말에 의하면 시를 선별하고 올리는 데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대기업 임원으로 퇴직하고 오토바이 판매점을 운영해왔는데 너무나 인성이 바른 친구라서 정말 수많은 친구들이 애도의 글을 올렸습니다. 나는 이 친구와 각별한 개인적 친분은 쌓은 적은 없지만 동기회장의 자격으로 김용묵 익산재무와 함께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통계상으로 만 70세인 현재는 86%가 생존하고 있지만 만 75살이 되면 생존확률은 54%로 낮아지고, 10년 뒤인 만 80세에는 30%만 남게 됩니다. 향후 5년 동안에 친구들 30% 세상을 뜬다는 겁니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 모두 건강관리 잘하면서 오래토록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급격하게 수명이 연장되고 있어 조금 달라질 수 있르리라고 보여지기는 합니다.

※그저께 (6월 2일) 오랫동안 신신쇠약으로 고생해오던 서정구 친구도 세상을 떴습니다.

 

□13일 익산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개설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하면서 익산문화원으로 통합되었고 초대 이인호 원장, 김복현 원장, 김태현 원장까지 채수환 박사가 중심이 되어 향토사 관련 자료를 발간하여 왔습니다. 나도 1999년 신축원사 준공이후 김승대 박사와 함께 채교수를 도와 전문위원으로 발간사업에 여러 차례 참여한 바 있습니다. 2017년 말 채교수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문화원을 떠난 이후 실질적인 향토사 관련 전문위원 없이 자연 발간사업도 중단되었습니다. 이재호 원장이 동아리 활동 및 전통문화활동은 활발하게 확대시켰는데 문화원의 정작 핵심사업인 향토사의 연구, 발굴 조사 및 발간사업은 4년간 중단 된 것입니다. 금년 봄 이원장이 20여 억 원을 투입하여 강의관인 서동관을 신축하여 개관하므로써 강의실에 여유가 생기므로 본관 강의실 하나를 향토자료실로 만들고 중단되었던 향토사 연구및 발간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2019년부터 이사로 활동하게 된 내가 이사회의 위임을 받아 『익산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를 개설하게 되었습니다. 다섯 분의 석․박사급 전문위원들을 위촉하고 본격적인 향토문화연구소를 운영하게 된 바 기쁨이 큽니다. 연구소장은 40여년을 익산향토사 연구에 매진해온 임홍락 전 익산고등학교 교장이 위촉되었습니다. 나는 연구소 개설 산파역을 마치고 앞으로는 발전을 위해 도우미 역할만 하기로 합니다.

 

□14일-15일 예산 1박 2일 가족모임

어머니의 장거리 여행이 불편하시게 된 이후 3년 동안 1박 2일 가족모임이 중단되었습니다. 금년에는 다시 추진되었습니다. 덕산면 아리아오투팬션에서 고기를 굽고 즐거운 1박을 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산에 온 김에 부근 남연군묘를 가보시고자 합니다. 나도 가본 적이 없어 오전에 남연군묘와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거쳐 수덕사를 관람하고 산채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헤어졌습니다.

남연군묘는 1868년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도굴사건을 일으킨 곳인데 남연군(1788-1836)은 흥선대원군의 부친입니다. 남연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아들인데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7대손으로 은신군의 양자가 된 사람입니다. 본디 묘가 경기도 연천에 있었으나 흥선대원군 형제가 이곳으로 이전하였다고하며 가야산 자락이 둘러싸고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하여 가히 명당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덕산면 출신의 윤봉길 의사(1908-1932)가 출생한 마을에 기념관과 유적지가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찾은 일이 있습니다. 상하이 여행시에 1932년 윤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홍구공원의 폭탄 투척 장소를 찾아 본 일도 있습니다. 이 고장이 나은 존경하는 위대한 인물입니다.

 

□19일 시티투어

문화원에서 시청과 연계하여 추진하는 시티투어에 서예동아리 연우회가 참가한 것입니다. 함라에서 조해영 가옥, 김육신도비, 한옥체험관, 향교를 보고 나바위 성당으로 이동합니다. 김대건 신부가 도착한 곳에 당시의 배를 실물크기로 재현하여 놓았는데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망성면에서 갈치 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미륵사지 익산국립박물관을 관람하고 돌아왔습니다. 안내를 맡은 여성 문화해설사님은 부모의 자식차별로 그리 어려운 환경이 아니었음에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는데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운 뒤, 40대 후반에 중등과정을 마치고 대학과 대학원까지 마치고 모교에서 교사로 봉직하였고, 퇴직 후에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운명에 좌절하지 않고 극복해낸 모습이 장하고 아름답습니다. 자신의 타고난 능력에 따라 운명은 능히 극복될 수 있고 그래서 인간은 타고난 능력만큼 살아가게 되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타고난 능력이란 타고난 지적능력(지능)과 의지력 실천력 등 여러 정신적 능력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21일 기린회 등산

작년 9월에 만나고 8달 만입니다. 몇 분이 개인사정으로 못나오셨지만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형님과 주선생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다음 모임 때는 꼭 함께 하기를 빕니다.

 

□25일-26일 흑산도 여행

홍도에 다녀 온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 합니다. 직원여행을 홍도로 갔고 유람선으로 홍도를 한 바퀴 돌았는데 기암절벽에 소나무가 가히 장관이었습니다. 당시 흑산도에는 쾌속선이 잠시 들르기만 했을 뿐이므로 이번 여행은 흑산도가 주 목적지입니다.

육로를 통하여 사신단의 왕래가 이루어지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서안이 수도이던 당나라 시기이래 북송과 남송시기에 이르기까지 자연 육로가 힘들거나 불가능하므로 왕래는 해로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9세기 이후는 산동반도의 덩저우보다는 주로 항저우지역에서 출발하였는데 첫 기착지가 바로 흑산도가 되었고 고려시대에는 고군산 군도를 거쳐 벽란도로 들어갔습니다.

최치원은 885년 귀국길에 올라 양저우를 거처 남단항로를 통해 건너왔으며, 선화봉사 고려도경을 쓴 북송의 서긍 역시 1123년 카이펑에서 배로 이동하여 항저우 부근 명주(현 닝보)까지 와서 고려로 출항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크거나 역사적 의미가 있는 섬은 모두 찾아보고 싶은 계획인데 흑산도방문은 바로 그 일환입니다. 1박 2일을 바쁘지 않게 다녀오기 위해 우리 두 사람이 모두 다년 온 바 있는 홍도는 가지 않고 흑산도만 찾기로 했습니다. 홍도는 흑산군도의 부속섬이기도 합니다.

익산에서 열차로 출발하여 목포에서 오후 1시 쾌속선(동양훼리 뉴골드스타호)을 탔습니다. 여전히 거리상 관계로 홍도와 흑산도는 쾌속선만 운행하는데 하루 3차례 출항합니다. 3시에 도착하여 예약한 아시아 모텔에 신고(?)하고 섬 일주관광 버스를 탑니다. 호텔이 하나 있는데 부두에서 거리가 먼데다 예리항 부두까지의 셔틀버스 이용이 아주 불편한 것으로 여겨져 여객터미널 바로 위에 있는 모텔을 선택했는데 만족합니다. 섬 일주는 두 시간 정도 걸리는데 기사님이 자세하게 해설을 해주십니다. 정약전 선생의 유배지를 그냥 지나치는 것이 매우 아쉽습니다. 봉화대가 있는 곳에서 보이는 흑산군도(대장도, 소장도, 멀리 홍도)의 전경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모텔 주인이 경영하는 아시아 식당에서 일명 목포홍탁을 먹어봅니다. 썩히지 않는 싱싱한 홍어 중짜리 한 접시가 4만원, 막걸리 한 대접이 1만원인데 만족입니다. 그런데 식사는 별도입니다. 본디 안주에 술을 먹어도 반드시 밥을 먹는 스타일인지라 울며 겨자 먹기로 식사를 시키는데 우아! 2인분을 시켜야하고 홍어탕 값은 3만원이요, 밥값이 4천은 별도입니다.

엄청 부른 배도 꺼지도록 해안가 산책을 하며 커피숍을 들러 등대를 다녀오는데 코로나로 인한 여파인지 모텔들이 휴업상태입니다. 아침은 전복죽으로 하고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찾아 면소재지인 진리까지 다녀옵니다. 11시 20분에 동양훼리 동양골드호로 목포로 나오는데 저 멀리 흑산군도최남단섬인 가거도가 보입니다. 지도로 거리를 재어 보니 상하이에서 가거도까지의 거리가 부산에서 원산거리입니다. 이번 흑산도 여행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흑산도 대둔도 출신의 훌륭한 인물 김이수 선생에 대해 처음 알게 되어 흐뭇합니다.

목포에 도착하여 먹은 게정식 점심은 만족스럽습니다. 목포문학관을 찾았습니다. 정말 유명한 문화예술의 도시라서인지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즐비합니다. 김우진(1897-1926), 박화성(1903-1988), 차범석(1924-2006), 김현(1942-1990)의 전시관이 각각 별도로 있고 이외 김진섭(1903-납북), 천승세(1939-2020), 김지하(1941-2022)같은 인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김난영(1916-1965) 남진(1945- )같은 역사에 길이 남을 대중음악 가수들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남농전시관을 찾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입장료가 있어서인지 이전 방문자 기록이 3일전입니다. 안내하시는 분이 서예를 하신분이시고 20여년을 근무하신 분인데 남농 허건(1907-1987)의 그림과 조부인 소치 허련(1808-1897 小痴 許鍊)및 가계에 대해 지식이 풍부하십니다. 전시된 모든 그림에 대해 일일이 자세한 설명을 해주십니다.

서른 젊은 나이에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1897-1926)과 함께 못 이룰 사랑을 안고 현해탄에 몸을 던진 김우진에 대해 자세히 알면서 그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됩니다.

○《고려도경》에 보이는 흑산도

흑산은 백산 동남쪽에 있어 바라보일 정도로 가깝다. 처음 바라보면 극히 높고 험준하고, 바싹 다가서면 산세가 중복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앞의 한 작은 봉우리는 가운데가 굴같이 비어 있고 양쪽 사이가 만입(灣入)했는데, 배를 감출만하다. 옛날에는 바닷길에서 이곳이 역시 사신의 배가 묵는 곳이었다. 관사가 아직 남아 있다. 그런데 이번 길을 잡음에는 여기서 더 이상 정박하지 않았다. 위에는 주민의 부락이 있다. 나라(고려를 말함) 안의 대죄인으로 죽음을 면한 자들이 흔히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언제나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르렀을 때 밤이 되면 산마루에서 봉화불을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서 왕성(王城 개경을 말함)에까지 가는데, 그 일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신시 후에 배가 이곳을 지나갔다.

○김이수(金理守)선생에 관한 내용 : 중부일보 한신대 김준혁 교수의 글

1791년 1월 18일 오후, 국왕 정조는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고 창덕궁으로 돌아가고자 한강을 건너 숭례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의 행차를 보고자 하는 백성들을 막지 않는 정조의 생각 때문에 그의 행차 시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나와 구경하는 것이 하나의 풍속이 됐다. 이때 갑자기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한 사람이 구경 대열에서 튀어나와 정조의 행차를 가로 막았다. ‘격쟁(擊錚)’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백성들이 꽹과리나 징을 쳐서 국왕의 행차를 막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격쟁을 하면 정조는 3일 안에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격쟁을 건 사람은 흑산도 사는 백성 김이수(金理守)였다. 그는 “흑산도에 부과된 잘못된 세금을 철회해 달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조선이 건국 된 후 조정은 각 지역마다 특산물을 세금으로 바치게 했다. 이를 ‘공납’이라고 하는데, 가령 경상도 상주는 곶감이 유명하고 충청도 한산에는 모시가, 연평도는 꽃게가 유명하니 이러한 특산물을 세금으로 바치게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흑산도에 존재하지도 않는 닥나무가 특산물로 지정돼 이곳 주민들을 해마다 닥나무를 다른 곳에서 구입해 조정에 바쳐야 했다. 닥나무는 종이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재료로 아무 곳에서나 자라지 않는 귀한 나무였다. 사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흑산도에 닥나무가 자랐다. 하지만 흑산도 성인 남자는 40근의 닥나무를 바쳐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사람들이 생업을 포기하면서까지 서로 닥나무를 베다 보니 시간이 흘러 닥나무는 흑산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그래서 흑산도 백성들은 정작 섬에는 한그루도 없는 닥나무를 바치기 위해 돈을 모아 외지에서 닥나무를 사다가 바쳐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잘못 돼도 너무나 잘못된 행정이었다.

흑산도 주민들은 1772년(영조 48)과 1783년(정조 7), 나주 관아에 이러한 모순점을 해결을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당시 흑산도가 나주목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주관아의 담당 관리는 흑산도 백성들의 억울한 내용을 접수조차 하지 않았고, 조정에서는 흑산도의 문제를 전혀 알지 못하게 됐다. 그러자 김이수는 전라감영을 찾아가 문제점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오래된 세금 규정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관리들의 답변도 한결 같았다. 이에 흑산도 백성들은 분노했고, 전라감영이 해결 못한다면 임금에게 호소해야 한다는 생각에 김이수를 정조의 수원 행차에 맞춰 한양으로 올려 보냈던 것이다. 정조가 백성들의 억울한 소리를 직접 듣고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소문이 흑산도에까지 퍼졌기 때문이다.

외딴섬에서 천신만고 끝에 한양에 올라온 김이수는 이날 정조에게 자신들의 기가 막힌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은 후 정조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는 단순히 흑산도 지역의 특산물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국가의 세금부과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조정의 공식 논의로 올려 토론하고 해법을 제안하게 했다. 조정은 결국 3개월간에 걸친 현장조사와 오랜 토론 끝에 흑산도에 부과한 닥나무 공납은 잘못된 세금이라고 결정하고 이를 철폐했다. 비록 나라의 세수가 줄어든다 하더라도 백성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그것이 진정 올바른 것이라는 정조의 ‘손상익하(損上益下)’ 정신이 반영된 것이다. 흑산도 백성들의 용기 있는 행동과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정조의 현명한 판단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김우진(1897-1926) : 다음 백과

1926년 8월 3일, 우리 현대 문학사의 뒷길에서 가장 화려하고 비극적인 형태로 사랑을 마감하는 사건이 터져 뭇 사람에게 충격을 준다. 문학과 연극계의 유망주로 꼽히던 김우진(金祐鎭, 1897~1926)이 성악가인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진 것이다. 두 사람의 비극은 우리 문화계에 커다란 손실로 남는다. 아직 극다운 극, 희곡다운 희곡이 거의 나오지 않던 시기에 김우진은 근대 연극과 희곡, 연극 비평의 새로운 지평을 가늠하고 이에 다가서려는 몸짓만을 보여준 채 훌쩍 세상을 뜬 것이다.

‘불타는 별’이라는 뜻의 초성(焦星)이라는 호를 즐겨 쓰고 수산(水山)이라는 예명도 가졌던 김우진은 1897년 전남 장성군에서 태어난다. 부호이자 한때 군수를 지낸 적도 있는 아버지 덕분에 그는 아흔아홉 칸짜리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란다. 그러나 여섯 살 때 겪은 어머니의 죽음, 여러 차례 바뀐 계모와 10명에 이르는 이복 형제, 근엄한 집안 분위기는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쳐 성장기에는 물론 어른이 된 뒤에도 그에게서는 우수가 떠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세운 ‘호남광우의숙’에서 처음 신학문을 접하게 된 그는 학과 시간 외에는 주로 혼자 시간을 보내며 책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얼마 뒤 목포공립심상소학교에 들어가서 빅토르 위고와 셰익스피어 등의 작품을 탐독하며 시와 산문을 습작하는데, 열여섯 살 무렵에는 만일 “창작하자마자 발표했더라면 소설사에서 획기적인 위치를 차지했을”1) 지도 모를 단편 소설 「공상(空想) 문학」을 쓰기도 한다. 열여덟 살 때에는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일본의 사립 농업 학교에 들어가지만 학과 공부보다는 문학과 철학 서적에 심취하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한다.

스무 살 때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유학자 집안의 딸과 결혼한 그는 곁에 남아 사업을 거들라는 다른 요구는 거절한다. 그는 1919년 일본의 와세다대학 예과에 들어간 뒤 이듬해 본과에서 영문학을 전공한다. 이 무렵에 그는 보들레르 · 다눈치오 · 브라우닝 · 하이네 등의 문학 작품은 물론이고 칸트 · 괴테 · 헤겔 · 니체 · 마르크스 등의 철학과 연극에 관한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는다. 1921년 그는 조명희 · 홍해성 · 고한승 · 조춘광 · 유춘섭 · 김영팔 · 최승일 · 진장섭 등 20명의 도쿄 유학생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하고, 『학지광』에 「소위 근대극에 대하야」라는 연극 비평을 발표해 극작가로서의 미래를 다짐한다.

‘극예술협회’는 재일 도쿄 고학생과 노동자들로 구성된 ‘동우회’와 손잡고 여름 방학 동안 회관 건립 기금을 모으기 위한 하기 고국 순회 연극단을 조직한다. 부산 · 김해 · 마산 · 경주 · 대구 · 목포 · 진남포 · 원산 · 서울을 돌며 공연을 하는 동안 줄곧 일경의 제재를 받으면서도 연극단은 조명희의 「김영일의 사(死)」, 홍난파의 소설을 각색한 「최후의 악수」, 그리고 아일랜드 작가 던세이니 경의 희곡을 김우진이 번역한 「찬란한 문(問)」 등을 무대에 올려 가는 곳마다 열띤 호응을 받는다. 성공리에 공연을 마친 순회 연극단은 YMCA 회관에서 해산식을 가진다. 김우진은 이 순회 공연 때 연출을 맡는 한편 일체의 경비를 조달한다. 아울러 홍난파와 함께 이 공연의 음악 프로그램에 초대된 성악가 윤심덕을 처음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비극으로 끝나는 사랑의 서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김우진은 집안이 부유해 빈곤에 허덕이는 다른 예술인들에 비해 혜택도 누리지만 이에 못지않은 고통 또한 안고 산다. 서자로 태어나 자수 성가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그의 아버지는 여러 자식 중에서 김우진을 유독 아끼고, 그도 연민과 사랑 때문에 되도록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한다.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뒤 군말 없이 아버지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서 아버지가 경영하던 회사의 사장직을 맡은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도 아버지의 완고한 태도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아 그는 압박감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게다가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은 그를 더욱 심한 번민과 강박 관념에 시달리게 만든다. 자신이 원하는 세계와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그는 순회 공연 때 알게 된 윤심덕을 얼마 뒤 다시 만난다. 어릴 적부터 세파에 시달리고 애정 결핍에 허덕이던 윤심덕에게 그는 문득 동병 상련을 느낀다. 두 사람은 곧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든다. 이 무렵부터 그의 창작 욕구가 왕성하게 끓어오른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불꽃 튀는 사랑은 당대의 인습이나 도덕률에 비춰보자면 사련(邪戀)이다. 주위의 따가운 눈총 속에서도 자유 분방한 성격의 윤심덕은 비교적 태연한 자세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미 자녀까지 둔 기혼자로서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고 냉철한 성격을 지니고 있던 김우진은 사랑과 도덕률 사이에서 고뇌하며 자신의 생명을 서서히 소진시킨 것이다. 괴로움에 휩싸인 사련의 두 주인공 사이에는 차츰 마찰이 잦아지고, 둘은 서로 떨어진 채 냉각기도 가져본다. 그러나 이내 두 사람은 헤어지기보다는 같이 죽음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불멸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런 죽음은 어쩌면 봉건 유습과 근대의 도덕률이 충돌하던 시대에 그들이 찾을 수 있었던 마지막 비상구였는지도 모른다.

 

□27일 거북회 모임

거북회 역시 오랜만에 모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선생을 보면서 나이 들수록 정신이 건전하고 건강해야 함을 생각합니다. 또 소위 강한 멘탈(건전한)을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또 다른 이선생의 건강도 매우 우려됩니다. 오히려 80이 넘으신 회장님은 건강이 회복되시어 좋은 모습입니다.

 

□28일 별서 가든파티

가까운 분들과 넷이서 막걸리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우리 시골집에서 부부가 함께 하는 가든파티를 열자고 제안했습니다. 모두 찬성하여 익산 해우회원 네 부부가 목삼겹살 파티를 하게 된 것입니다.

 

□31일 종남회 모임

일 년 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강무길 선배님이 무척 좋아하십니다. 기원아재 소유의 5층 상가 건물에 있는 식당에서 모였습니다. 돼지 불고기 점심 특선(9천원) 아주 가성비가 뛰어납니다. 기권아재 얼굴빛이 좋지 않은데 본인은 괜찮다고 하시지만 매우 걱정이 됩니다. 선배들이 80대 초반에서 7십대 후반이라니... 언제까지나 모두 건강하지만은 할 수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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