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송인

청담(靑潭) 2022. 9. 4. 23:05

송인(送人)

정지상(鄭知常 1090경? - 1135)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비 개인 긴 언덕에는 풀빛이 푸른데,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마르리,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 작품 해설

  우리나라 한시 중 이별가의 백미(白眉)로 평가되는 7언 절구의 한시로, 서경(敍景)과 서정(敍情)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항구의 긴 둑에 비에 씻긴 풀들의 푸른빛이 더욱 짙어지고,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은 시적 화자의 슬픈 이별과 대조되어 이별의 애달픔을 더욱 고조시킨다. 자연사와 인간사의 대조를 통하여 이별의 정한(情恨)을 심화 ·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임이 그리워 흘리는 눈물 때문에 대동강 물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과장된 표현은 이별의 정한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이 시에는 대동강 물결이 이별의 눈물과 동일시되어 슬픔의 깊이를 확대하는 시상 전개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때의 눈물은 중의적 표현으로 이별하는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이기도 하고 내가 임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흘린 눈물이기도 하다. 이를 통하여 시적 화자는 일방적인 자기 슬픔의 토로에서 벗어나 인간 보편의 이별 노래로 이 시를 승화시키고 있다.

 

□정지상(1090 경? - 1135

서경인으로 초명은 지원.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다. 서경에 두었던 분사국자감시에서 진사가 된 후, 서울인 개경으로 올라와 최종 고시인 예부시를 준비한 듯하다.

1112년(예종 7)에 과거에 급제하여 1113년에 지방직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1114년 중앙관리로 개경에 올라와 벼슬을 했는데, 이 무렵에 사신의 일행으로 송나라에 가서 해를 넘기고 체류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1127년(인종 5) 3월 척준경이 서경에서 갔을 때 좌정언 정지상은 척준경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것을 인종이 받아들여 척준경을 유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부터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고 인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척준경을 유배시킨 그 날로 왕명에 의해 기린각에서 〈서경〉을 강론하고 주식을 하사받았다.

1130년 선왕의 벗이자 총신이었던 곽여가 죽자 왕명에 의해 제문과 〈동산재기 東山齋記〉를 짓기도 했다. 시에서 뿐만 아니라 문에서도 명성을 떨쳐 당대에 김부식과 쌍벽을 이루었다.

칭제건원을 하자는 논의와 서경천도를 하자는 주장이 강하게 일어났을 때 묘청과 함께 서경천도를 주장했는데, 중앙문벌귀족의 중심세력인 김부식은 이를 강력히 반대해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서로 대립했다. 1135년 묘청은 인종의 서경천도의 뜻이 미약해지자 성급하게 난을 일으켰다.

관군 총사령관으로 반란진압에 나선 김부식은 먼저 국론을 통해 정지상· 김안· 백수한 등이 반역에 가담했으니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해 개경에 있었던 그는 즉시 체포되었다. 체포되어온 그는 김부식의 사명에 의해 궁문 밖에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런 처사를 두고 후에 이규보는 〈백운소설〉에서 "시중 김부식과 학사 정지상은 문장으로 한때 이름을 나란히 했다. 두 사람은 알력이 생겨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라고 적고, 김부식이 자기에 의해 피살되어 음귀가 된 정지상에 의해 죽었다는 일화를 실었다.

그는 불교와 도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지니면서 풍수도참설에도 관심이 많았다. 결국 묘청의 난에 연좌되어 죽임을 당했으나 계속 격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문집으로 〈정사간집 鄭司諫集〉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고 20수 가량의 시와 7편의 문장이 〈동문선〉·〈파한집〉·〈백운소설〉·〈고려사〉 등에 실려 전한다. 시는 절구에 능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율시가 더 많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섬세하고 감각적인 표현에 뛰어났다. 문자의 수식과 조탁에 비중을 두는 만당시풍을 이루면서도 세속의 번거로움과 갈등을 초월한 맑고 깨끗한 세계를 그렸다. 고사의 인용이 적으며, 감각을 통해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전달되는 그의 시세계를 두고 후에 홍만종은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했다. 그러나 시어가 너무 다듬어져 만당시풍의 시가 가지는 단점도 지니는데, 이를 두고 최자는 "웅휘하고 깊은 대작은 없다"라고 평했다. 최치원 이후 고려 전기 한시문학을 주도했던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제25회 전북서예전람회 입선(2022.11)

'서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碧 松(벽송)  (0) 2022.09.27
범해  (0) 2022.09.04
용두산  (0) 2022.09.04
익산을 지나는 중에  (0) 2022.05.25
유조불문(有條不紊)  (0) 2022.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