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팝의 고고학
1960 탄생과 혁명
신현준 최지선 지음
■서언
이 책이 처음 나온 것은 2005년이라고 한다. 17년 만에 나온 개정판이라는데 우리 딸 이승원 선생이 아빠의 관심사인 분야라며 두 권(1960년대, 1970년대)을 구입하여 보내왔다. 한국의 대중음악을 시대별로 정리한 책이라서 반갑고 미처 알지 못했던 대중가요를 발전시켜온 작곡가, 연주가, 가수들에 대한 많은 정보들이 들어 있어 흥미롭다.
초판서문에 이런 글이 있다.
《1960~197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는 이전 시기에 비해, 그리고 이후 시기에 비해 음악이 특히나 중요했던 세대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걸 음악세대라고 부르든, 팝송세대라고 부르든 그 의미는 비슷하다.》크게 공감한다. 나 자신이 딱 그 세대로써 1960년대 전반 초등학교 시절에는 박재란, 현미, 한명숙, 현인, 오기택, 남일해, 위키리, 최희준, 이씨스터즈 등의 노래를 들었고, 60년대 후반 중․고시절에는 남진, 나훈아, 최헌, 펄씨스터즈, 김추자 등의 노래를 불러댔다. 1970년대 대학시절에는 오로지 K-포크에 푹 빠져버렸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조영남, 이장희, 트윈 폴리오, 뚜아에 무아, 박인희, 이연실, 양희은, 은희 등의 노래가 아니면 아예 듣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대학가요제와 해변가요제 입상곡들도 즐기면서 트로트와는 아예 담을 쌓았고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1960년 아버지가 사온 어느 잡지에서 박재란과 현미와 한명숙이 함께 직은 사진을 보며 세련된 옷을 입은 예쁜 가수들의 모습에 감탄하였고 그 모습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중고교 시절에는 남진 노래들을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많이도 불러댔다. 70년대 포크시대가 도래하여 기타를 사서 되는 대로 코드만 잡으면서 송창식과 이장희를 불러댔다. 나는 지금도 k-포크의 심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연과 사랑을 아름답게 그린 노랫말과 기타와 그들의 노래를 듣고 부른다.
1980년대에도 K-포크가 계속되었으나 70년대 포크와는 나 자신부터 가정을 가진 아빠가 되어서인지 정서가 달라져 자주 부르거나 그리 크게 좋아하지도 않았다. 90년대 초 언젠가 직원여행을 가서 밤에 모두 어울려 노래를 부르다 20대는 80년대 포크를, 30대는 70년대 포크만을 연이어 부르는 시합을 해서 우리 30대가 이겼는데 아마도 70년대 포크가 히트송이 많아서였지 않나 생각했다.
은퇴 후 2017년부터 익산문화원 포크 기타동아리 <설레임>에 가입하여 4년간 포크 송을 노래하며 공연에도 참여하는 활동을 하다가 현재는 본의 아니게 중단하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이 책의 내용이 워낙 많은 것을 담고 있어 요약 정리할 수는 없고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기억할 만한 내용만 간추려 기록해 본다.
1. 현인(1919-2002)은 <베사메 무쵸>와 <You are my sunshine>을 개사해서 부른 곡으로 큰 히트 를 쳤다. 말하자면 서양 곡의 번안의 출발이었다.
2. 1950년대 중반 미국 클럽의 수는 264개에 이르렀고, 쇼단에 지불하는 금액은 연간 120만 달러에 육박했다.
3. 미8군 무대가 전성기를 이룬 시기는 통상 1963년~1964년경이라고 한다.
4. 1960년대 전반기는 미8군 무대 출신의 가수들이 대거 일반무대에 등장한 시기였다. 한명숙, 최희준, 김상희, 차도균, 현미, 패티 김, 이금희, 윤복희, 유주용, 위키 리, 박형준 같은 사람들이다.
5. 민간 라디오 방송국은 1961년 문화방송(MBC), 1963년 동아방송(DBS), 1964년 동양방송(TBC)이 차례로 개국한다.
6. TV방송은 1961년 KBS-TV, 1964년 동양-TV, 1969년 MBC-TV가 개국된다.
7. 1957년 공보실에서 국민개창운동을 전개하면서 <밝고 건전한 국민가요>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8. 농촌에서 인기를 누리고 음반판매가 호조를 보인 음악은 왜색이라는 딱지가 붙은 소위 뽕짝이었다. 1964년 <동백아가씨>이후 한국의 대중음악은 장르의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9. 1962년부터 1965년 사이에 전성기를 이룬 대형 음악감상실은 명동을 중심으로 종로, 광화문 등 이른 바 다운타운에 집중되어 있었다. ...음악감상실에서 음악을 듣는 일은 중요한 문화적 경험이 되었다.
10. 신중현(1938~ )을 빼고 한국의 록 음악, 나아가 대중음악 일반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11. 보컬 그룹은 극장가와 살롱가를 주름잡았어도, 음반가와 방송가에서는 아직 찬밥신세였다.
12. 극장쇼는 서울의 시민회관에서 한 달 평균 2-3회의 쇼프로가 있었다. 쇼단이 한 번 조직되면 서울의 변두리와 지방의 극장을 순회하며 공연을 한다.
※일전에 TV에서 현미씨는 < 쇼단을 따라 광주, 전주, 이리 등을 순회공연 운운>하였다. 당시 이리는 극장쇼가 거의 반드시 오는 곳이었는데, 인구가 겨우 6-7만인 이리시였지만 워낙이 교통의 요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당시 이리시와 익산군, 김제군과 군산시, 옥구군의 인구를 합치면 70-8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13. 1967년 4년 전에 미국으로 순회공연을 떠났던 윤복희가 귀국하면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온 것이다.
※그 해 수학여행을 가는데 이리역에서 기차를 탈 때 어느 아가씨가 초미니 스커트를 입고 열차에 타는 것을 매우 힘들어 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수많은 중학생들이 보는데서 다리를 벌리고 열차에 올라타는 것이 버거웠던 것이다.
14. 1960년대 음악 방송의 중심은 TV보다는 라디오였다. 팝송을 틀어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구가하고 DJ가 인기인이 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1964년 최동욱이 동아방송(DBS)의 탑튠쇼의 DJ를 맡아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래 라디오마다 팝송프로그램이 신설되었고, 이종환(MBC), 피세영(라디오 서울:TBC 전신)등이 그 뒤를 이었다.
※19070년 경 광주방송에서 활동한 유명한 DJ 이름이 영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는 최동욱이나 김기덕 못지않은 매우 매혹적인 음성이었다.
15. 1967년 <울려고 내가 왔나>를 히트시킨 남진과 1969년 <님 그리워>를 히트시킨 나훈아라는 신예까지 등장하여 숙명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도회적 트로트를 구사한 불세출의 가수 배호까지 등장하면서 트로트의 갈래는 더 풍성해지는 조짐까지 보였다.
16. 1965년 1월 방송윤리 위원회가 <동백 아가씨>를 비롯한 열아홉 곡에 대해 방송금지 조치를 취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화의 칼날은 뽕짝과 왜색에 대해 매우 날카로웠다.
17. 신인가수가 음반을 취입하려면 음반사와 계약하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에게 레슨비와 녹음비를 제공하면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18. 1969년 12월 2일, MBC 10대 가수 청백전이 열려...신인인 펄 시스터스가 가수왕이 되었다.
※아침에 이리역에서 학교로 가는 길에 음반가게에서 <커피한잔>이 흘러나오면, 너무나 감동적이고 경이로워서 행복감을 느끼며 잠시 발길을 멈추곤 했다. 신중현과 펄 시스터스가 새로운 대중음악의 신세계를 열어준 것이다. 당시에는 라디오 밖에 없어 그저 라디오에서 틀어주는 음악과 길거리 음반가게에서 틀어주는 노래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듣고 싶은 노래를 찾아 듣는 자유는 전혀 없었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마냥 행복한 시절이기도 했다.
19. 1969년 10월, 클리프 리처드 내한공연이 있었다. ...이화여대 강당에서의 공연에서는 무대위로 속옷을 투척한 여성이 있었다는 미확인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또 펄 시스터스의 혜성 같은 등장이 있었다. <님아>와 <커피한잔>은 시내의 음악감상실과 다방에서 1년 내내 울려 퍼졌다.
20. 소올 가요 태풍의 핵은 단연 신중현이었다. ...그 전까지 연주인으로만 평가받던 그는 히트 제조기로 불리며 가요작곡가로 명성을 확립했다.
21. 이제는 음반을 통해 이름을 알린 뒤 방송에 출연하고 그 뒤에 극장쇼 등의 무대 수입으로 인기를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예는 다름 아닌 펄 시스터스와 김추자였다.
22. 1969년 9월에 김상희의 <어떻게 해>에 대해 방송금지 처분을 내렸다. 이유는 창법저속이라는 것이었다.
23. 펄 시스터스, 김추자, 김상희의 음반은 모두 히트했지만, 덩키스의 데뷔작이자 이정화의 데뷔작인 <봄비/마음>은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마음>은 무려 10분을 넘는 길이 때문에 음반 산업 관계자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고, 박인수의 <봄비>도 원래는 10분에 육박하는 길이로 녹음한 것이었으나 킹박이 무단으로 3분 정도로 편집한 다음에 히트를 기록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나는 지금도 이정화의 <봄비>를 여전히 아주 좋아하며 봄이 되면 으레 찾아 듣는다.
24. 1969년 5월 17일부터 4일간 서울 시민회관에서 <5.16 기념 제 1회 보컬그룹경연대회>란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17팀의 출연진과 총 4만 여명의 청중이 어우러져 사상 최대의 록 페스티벌이 되었다. ...최고상은 키 보이스가 차지했다. ...2차 투표까지 가는 팽팽한 신경전이 발생했다. ...아깝게 탈락한 존재는 다름 아니라 우수상을 차지하는데 만족해야 했던 히 파이브와 김홍탁이었다.
25. 1965년부터 베트남 전쟁에 미군이 대규모로 참여하면서 국내의 미8군 무대는 점차 사양화의 길을 걸었다.
26. TBC-TV는 서울과 부산에서만 나왔고, 그나마 부산에서는 1주일 늦게 나왔어요. ...<쇼쇼쇼 : 1973-1980>는 통기타 가수나 그룹사운드보다는 팝 스타일의 가요가 기본 콘셉트였죠. 패티 김, 조영남, 최영희, 정미조, 윤복희, 김추자, 어니언스 등처럼 노래도 잘하고 이미지도 괜찮은 가수들이 인기도 좋았고, 제 구상과도 잘 맞았어요. 트윈 폴리오, 이장희, 투 코리언스 등은 쎄시봉 시절부터 형, 동생하던 사이니까 자주 나왔습니다. (조용호 : 1939~ )
27. 한국의 그룹사운드들은 음악이 정말 좋아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연주하려는 존재들이었다.
28. 그룹사운드 뮤지션과 포크 가수들과의 관계는 생각처럼 나쁘지 않았고, 서로 같은 무대에서 노래하고 연주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영화 <푸른 사과 1969>의 사운드 트랙을 맡은 인물은 다름 아닌 덩키스와 신중현이다. 이 음반에서 당대 하이틴들의 우상이었던 조영남, 최영희. 트윈 폴리오가 영화에 수록된 신중현의 곡을 차례로 부른다.
29. 기지촌 클럽이 있는 왜관이 어떤 곳이냐 하면, 미군이 500명이면 그 동네 양색시가 1,000명이예요.
30. 1969년이 지나가면서 포크 송이라고 불리는 음악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어쿠스틱 기타(통기타)반주 위에 詩情을 담은 가사를 노래하는 포크 싱어들이 차례차례 명동의 다운타운가로 진출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방송을 통해 인기 스타로 부상했다. 조영남의 <딜라일라 1968>, 트윈 폴리오의 <하얀 손수건 1970>, 뚜아에 무아의 <약속 1970>, 라나에 로스포의 <사랑해 1970> 등이 수록된 음반들은 높은 판매고를 올리며 음반업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딜라일라>는 전혀 새로운 클래식 창법이어서 놀라움을 안겼고, <약속>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노래와도 색다른 화음의 차별성을 가져 내게 너무 깊은 충격과 감동을 주었고, <사랑해>는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수많은 포크기타 동아리에서 끝없이 불러대는 명곡이었다.
31. 조영남, 트윈 폴리오, 한 대수가 쎄시봉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67~68년경 일주일에 한번씩 열리는 아마추어 대학생들의 장기자랑 형식의 행사를 통해서였다.
32. 1969년 무교동, 소공동 일대 도심 재개발의 여파로 쎄시봉이 임시 문을 닫고, 트윈 폴리오가 인기 절정의 순간에 해체를 선언한 두 사건은 1960년대의 종언과 1970년대의 시작의 또 하나의 단면이었다.
33. 1970년에 창작 포크송으로서는 최초로 히트곡이라고 할 만한 곡이 탄생하는데 그 곡은 뚜아에 무아가 부른 <약속>이었다. ...1969년 <제1회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가수왕상을 차지한 이필원이 박인희와 결성한 혼성 듀엣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한국 가요사상 가장 아름다운 듀엣으로 <트윈 폴리오>와 <뚜아에 무아>를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많이 행복하다.
34. 쎄시봉에 모였던 사람들 일부는 1970년부터 YWCA에서 마련한 청개구리의 집에 자리를 틀었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은희 등 이미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사람들 뿐 만 아니라, 서유석, 김민기, 양희은, 방의경, 이연실 등이 이곳에 모여 싱얼롱 형식의 모임을 가졌다.
35. 이장희의 음악은 넓은 의미의 포크 음악에 속하는 것은 그의 인맥 때문이지만, 강근식이 이끈 동방의 빛과 함께 빚어낸 음악은 좁은 의미의 록 음악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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