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포크 여행

한국 팝의 고고학(1970)

청담(靑潭) 2023. 1. 8. 20:22

한국 팝의 고고학

1970 절정과 분화

신현준 최지선 지음

 

□1970년대는 나의 20대 시기입니다. 1971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니고 군대문제를 해결하고 1980년 3월에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무려 9년간의 70년대는 나의 20대 청춘의 시기로 거의 대학과 관련하여 살았으니 어쩌면 남들보다 엄청난 혜택을 누리며(못난 아들에게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이 주신)산 세월입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동아리활동을 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한 서툰 솜씨로 기타를 치면서 포크에 빠져 그저 송창식(1947 - )과 윤형주(1947 - )양희은(1952 - )과 이장희(1947 - )와 김세환(1948 - )의 노래를 하릴없이 불러댔습니다. 20대의 이 소중한 시기에 나의 인생의 로드 맵이 결정되고 나의 정서와 가치관이 형성되어 오늘의 『나』가 되었습니다. 실로 포크는 나에게 엄청난 정신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언제까지나 그리운 그 시절입니다. 나는 오늘도 한국 포크 송(K - POP)을 고집하며 듣고 부르며 살아갑니다. 방금도 아름다운 시적 가사와 부드럽고 아름다운 선율로 만들어진 조동진(1947 - 2017)의 <흰 눈이 하얗게>를 들었습니다.

 

1. 회고해보면 통기타 포크의 전개과정에서 1970년부터 1971년 상반기까지는 듀엣이나 트리오 형태의 보컬그룹 혹은 중창단의 전성시대였다. 트윈 폴리오, 뚜아 에 무아, 라나 에 로스포, 투 에이스, 쉐그린, 4월과 5월, 투 코리언스...1971년부터는 솔로 포크 싱어의 대두가 눈에 띄고, 서유석(1945 - ), 김민기(1951 - ), 양희은(1952 - ) 등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뚜아 에 무아의 <약속>이나 라나 에 로스포의 <꽃반지 끼고>같은 순수와 격조의 시대가 지나가고 풍자와 비판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2. 포크는 통기타로 반주하는 생음악도 중요하지만 음반으로 녹음된 사운드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은악이 되었다, 포크는 대학생 공동체의 음악이었지만 음반이라는 대중매체가 그 공동체의 필수적 요소가 되었다.

3. 김민기의 야심찬 음반은 발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별다른 이유 없이 판매가 금지된다. 몇 달 뒤 김민기는 1972년 3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노래지도를 했다는 이유로 어디론가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4. 양희은의 노래는 가수 개인의 노래를 넘어서 1970년대 초중반의 포크송 공동체의 경험과 성과를 표상하는 것이었다. ...1972년을 계기로 포크는 이제 순수의 시대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 음반 산업과 방송산업이 포크 싱어들에게 적극적 관심을 보였고, 다른 한편으로 국가 권력이 이들의 활동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5. 퇴폐풍조 단속의 여파로 살롱에서는 점차 통기타 가수의 자리가 커졌고, 언뜻 보기에 그룹사운드는 살롱가에서 철수하는 양상을 보인다. ...1970년 8월부터 남자의 경우 장발, 여자의 경우 미니스커트에 대한 일상적인 단속이 벌어졌고...음악인들 가운데 퇴폐로 지목되어 정화의 대상이 된 것은 단연 그룹사운드였다.

6. 1973년 대중음악계의 3대 히트는 패티 김(1938 - )의 <이별>, 장현(1945 - )의 <마른 잎>, 이장희의 <그건 너>였다.

7. 1973-74년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포크>라고 불리는 음악이 급부상한 해였다. ..포크 가수들은 청년의 우상을 넘어 대중스타가 되었다. 이장희의 <그건 너>, 송창식의 <피리부는 사나이>, 어니언스의 <편지>, 김정호(1952-1985)의 <이름 모를 소녀>, 김세환의 <사랑하는 마음>...10년 이상 가요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이미자(1941 - )를 비롯해 남진(1946 - ), 나훈아(1947 - ), 김세레나(1947 - ), 문주란(1949 - ), 조미미(1947 - 2012), 하춘화(1955 - ) 등이 장악한 트로트의 철옹성은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1974년에 8대 2정도로 팝이 트로트에 역전한다. 여기서 팝이라고 뭉뚱그린 음악에서 상당한 비중을 포크계열이 차지한다.

8. 예륜이 건전가요로 권장한 곡의 리스트에는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포한되어 있었다. 이 곡은 이미 방륜이 금지한 곡이라서 음반 산업계관계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결국 예륜이 부랴부랴 건전가요리스트에서 <아침이슬>을 삭제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9. 1975년 7월 20일 1차와 2차에 걸쳐 금지곡을 지정한 결과에 따르면 신중현(1938 - )의 곡은 무려 열아홉 곡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당시 현역으로 활동하던 작곡가로는 최다를 기록했다. ...신중현이 이렇게 집중적으로 금지를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대통령 찬가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거절한 괘씸죄일 것이다. 물론 추측일 뿐이라지만...

10. 1976년 최대의 인가가수와 히트곡은 송대관(1946 - )의 <해뜰 날>이다. ...송창식의 <왜 불러>, 김인순(사망)의<여고졸업반>, 정미조(1949 - )의<불꽃>, 박상규(1942 - )의 <조약돌> 등은 신곡 없이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11. 1977년에 접어들면 한 해를 강타한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최헌(1948 - 1912)의 <오동잎>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현대감각을 가미한 뽕짝조이며 그룹사운드 멤버로 있다가 솔로가수로 데뷔한 점, 모두 안치행(1942 - )의 곡이라는 점이다.

12. 1970년대 후반은 고도경제성장과 더불어 음반과 관련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급격하게 변하하는 시기였다. 인켈과 롯데파이오니어 등에서 국산 보급된 컴포넌트 오디오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고 FM을 통한 스테레오 방송도 일반화되었다. ...휴대용이라는 강점을 가진 카세트 녹음기도 널리 보급되었다.

13. 1977년 9월, 정동에 있는 문화체육관에서는 <제1회 MBC대학가요제>가 개최되었다. ...대상은 서울농대 그룹사운드 샌드 페블스의 <나 어떡해>였다. 작곡자는 김창훈(1956 - )으로 6기(76학번)의 1년 선배였다. ...산울림은 예심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김창완(1954 - )이 대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본선에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14. 이수만은 1972년에 샌드 페블스의 2기 멤버(71학번)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71학번 중에는 나이보다 먼저 학교에 들어간 김창완(54년 2월생)도 있었다. ...그는 학교를 다닐 때는 연예인은 고사하고 음악인과도 거리가 멀어 보였다. ...산울림은 밤무대에서 매일 연주하는 일 없이, 그리고 TV에 자주 모습을 비추는 일 없이 음반과 라디오와 음악다방을 통해 그룹사운드가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산울림은 한 시대를 풍미한 대중적 아이콘이라기에는 전위적이고 컬트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15. 1977년 9월 MBC대학가요제, 1978년 8월 TBC FM가 연포해변에서 해변가요제, 1979년 MBC FM 는 강변가요제, TBC TV는 대학가요경연대회를 개최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각 대학에서 우리학교를 대표하는 그룹사운드가 속속 탄생한다. ...무엇보다도 신입생 환영회나 정기 축제 같은 학내 행사에서 캠퍼스 그룹의 활용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16. 1980년 대마초 파동으로 정상적 음악활동을 봉쇄당한 포크 가수들은 음악 외에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 했다. 대표적인 직업은 광고음악, 드라마 음악, 영화음악 등 실용음악을 만드는 일이었다. 김도향(1945 - ), 윤형주, 강근식(1946 - ) 등 한 때 청년문화의 기수로 군림하던 쟁쟁한 인물들은 이렇게 다른 경로를 모색하기도 했다. ...이제 포크는 가요의 한 장르가 되었다. 포크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가요가 된 포크로부터 멀어져 갔고 주로 영미의 팝 음악을 들었다.

17. 송창식과 이필원(1945? - )을 비롯한 포크 1세대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후배 양성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이정선(1950 - )은 많은 후배들을 길러냈다. 그것도 인맥상의 후배를 거느린 것을 넘어서 음악 실력을 전수했다.

18. 1970년대가 막을 내리는 1979년 남자신인상을 받은 인물에 주목하자. 그가 바로 정태춘(1954 - )이다. ...1979년 봄 예사롭지 않은 한 음반이 발표된다. 그는 그룹사운드 1.5세대에 속하는 조동진이다. ...그는 사분오열되어 있던 포크의 잔존세력을 모아서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라고 부르는 음악의 나침이 되었다.

19. 언더그라운드라라고 지칭하는 음악과 음악인들이 대체로 포크계열의 후예들이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 포크라는 단어가 점차 사라지고 언더그라운드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은 TV방송이나 유흥업소에서 오락이나 유흥을 제공하지 않고 음반을 잘 만들어서 정식 콘서트를 하는 정석적인 활동만으로 지속가능하다는 꿈을 꾸었다.

20.1980년 3월 조용필(1950 - )의 공식1집이 발표된다. 이 음반은 1980년대 내내 그가 절대강자로 군림하게 되는 위대한 탄생의 서막이었다. ...사실 이 시점의 대중음악계는 그에게 라이벌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코리아 포크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팝의 고고학(1960)  (1) 2022.12.18
내게 감동을 주는 발라드 모음  (0) 2022.09.18
팬텀싱어 싱어게인  (0) 2021.05.08
유 튜브의 고마움에 대하여  (0) 2018.01.11
박인희 콘서트 with 송창식  (0) 2016.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