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이념논쟁 : 홍범도 장군 폄훼 의도 관련 자료 모음

청담(靑潭) 2023. 9. 8. 00:46

친일파 청산놀음, 공산전체주의 타령

■웬 시대에 맞지도 않는 공산주의 이념 타령인가? 공산주의 사상은 무조건 나쁘고 공산주의자는 모두가 민주사회의 적이요 우리나라의 적인가? 중국과 베트남이 공산주의 체제국가인데 공산주의 국가들과는 결별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에 공산주의자가 어디 있으며 북한공산체제를 옹호하고 공산화하려는 세력을 그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긴 오늘날 친일파가 그 어디에 실체가 있다고 진보세력이 그동안 친일청산을 철저히 정치에 이용하며 보수세력을 친일파라고 공격하여 왔으니 그 반작용이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인 것인가?

 

한 인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객관적이고 다원적이고 공정한 입장에서 그의 일평생을 살펴보고 신중하게 역사적 평가를 내려야 한다. 소위민주세력이라고 하는 정치인들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끈질기게 친일파들을 자의적 잣대로 선별하여 만든 친일인명사전을 무기로 수많은 지도자들이 명단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로 몰아왔다.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였다고 친일파로 규정하고는 조롱하고 장기독재정치와 함께 부정적인 면만 강조면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절대적 가난과 기아에서 벗어나게 한 경제도약의 엄청난 업적은 일방적으로 폄훼해온 조폭깡패보다 더한 인간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정작 자신의 부모들이 친일파인 것이 드러나서 한때 국민들의 조롱거리가 된 허무맹랑한 일도 있었다. 아무리 정치하는 인간들이라지만 그 거짓과 허위와 내로남불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해방된 지 75년이 지나고 새로운 세대들은 정치나 과거사와는 별개로 서로를 이해하고 문화를 즐기는 추세인데 어느 교육감은 일제잔재를 청산한답시고 초중고 교가를 조사하여 친일과는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교가내용과 작곡임에도 그 작사가와 작곡가가 친일파로 규정되었다하여 공립 사립을 막론하고 교가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여서 수많은 일선학교를 곤혹스럽게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다행이 임기가 끝나 그 해프닝은 일단락된 바 있다.

 

이젠 대통령과 일단의 안보 및 군의 수뇌부들이 친일파 청산작업과는 정 반대의 공산전체주의 타령을 시작하였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아무리 내년 총선용이라지만 어떻게 애국독립지사들을, 그 중 홍범도 장군을 공산주의자라고 낙인찍어 욕되게 하고 구 소련 공산치하에서 살아온 수십만 동포들을 슬프게 하는 것인가?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 안하고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결코 모두 친일파가 아니듯이 구소련의 공산치하에서 살아온 사람들도 결코 모두 부끄러운 사람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민족전쟁을 일으킨 김일성 침략공산집단, 전쟁을 승인하고 지원한 스탈린 집단, 대규모 지원군으로 침략자들을 도운 마오쩌뚱의 수뇌부들과는 결이 다른 것이다.

 

근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들의 의견과 지적을 무시하고 육군수뇌부들의 자의적 해석으로 무조건 흉상이전을 강행한다고 하니 저들의 무지함에 놀라고 흉폭함에 놀라며 애국지사들에게 죄스럽기 그지없다.  과거 정부가 무리하게 친일파를 들먹이며 백선엽장군을 폄훼했을지라도 우리 국민들은 북한의 침략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백장군의 업적은 능히 잘 안다. 왜 친일파 청산작업으로 수십년을 우려먹어온 재야진보력보다도 더 유치한 놀음을 시작하는 것인가? 무식한 놈들이 하는 짓이니 그냥 넘어가도 되는 것인가? 이런 무식한 인간들에게 대한민국을 앞으로도 4년간이나 더 맡겨도 되는 것일까?  민주당도, 국민의 힘도 지지하지 않는 무당파이기에 감히 이런 글을 쓰다. 오늘 한국일보에 이에 대한 명쾌하고 논리적인 훌륭한 글이 있어 굳이 나의 블로그에 올려본다.

 

 

 

역사전쟁, 처칠을 소환한다

한국일보 송용창 뉴스1부문장(2023.9.7)

 

'반공' 처칠도 스탈린과 손 잡아

지금 이념 잣대로 홍범도 평가 우매

미국 좌파의 역사 지우기 닮은 꼴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던 1941년 6월 22일 영국의 전시 내각을 이끌던 윈스턴 처칠 총리의 방송 연설은 이랬다. “우리는 히틀러와 나치 체제의 모든 것을 그 흔적까지 없애기로 결심했습니다. 나치 제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그 어느 개인도 국가도 우리는 지원할 것입니다. 히틀러와 함께하는 그 어느 개인도 국가도 우리의 적이 될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당연하게도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을 도울 것입니다.”

 

1919년 러시아 혁명 당시 영국 육군장관이었던 처칠은 러시아 적군에 대항하는 백군을 지원하는 등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하지만 독일 나치의 공세 앞에서 “러시아의 위험은 우리의 위험”이라며 공산주의자들과 힘을 합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소련이 무너지면 영국도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의 존망이었다. 더구나 그에게 나치는 공산주의보다 더 위험한 전쟁 기계였다. “모든 형태의 인간의 사악함을 모아 놓은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그 사악한 나치 체제의 동맹이 이탈리아와 일본이었다. 일본이 그해 12월 진주만을 공습해 미국이 참전하면서 추축국 대 영국ㆍ미국ㆍ소련의 연합국 간 세계대전으로 확대됐다.

 

윤석열 대통령과 여권이 ‘자유민주주의 대 공산전체주의’라는 구도로 역사ㆍ이념전의 드라이브를 걸고 있지만 냉전 이전 20세기 초의 정치ㆍ사상 구도는 전혀 달랐다. 자유민주주의나 공산전체주의라는 용어나 개념이 없거나 희미한 때였다.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군주제를 벗어나지 못한 나라도 많았고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 경쟁이 한창이던 상황에서 제국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여러 이념과 사상이 경합했다. 이 중에서 자유세계, 아니 인류에게 가장 위험한 것으로 드러난 게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전체주의가 결합된 나치즘과 파시즘이었다. 일본의 군국주의도 그 대열 편이었다.

 

처칠마저 스탈린과 손을 잡던 마당인데, 하물며 나라를 잃은 약소민족들은 어땠을까. ‘가짜 혁명’이라는 게 사후에 드러났지만 소비에트는 그때만 해도 제3세계의 독립과 해방을 표방했기에 제국주의에 시달리던 민족들에겐 우군으로 여겨졌다. 나치즘이나 파시즘에 격렬하게 맞섰던 측도 주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적대 관계였던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전체주의의 쌍생아라는 인식이 대두된 것은 1940년대 후반이었다. 스탈린이 동유럽에 위성국가를 건설하며 소련식 제국의 본색을 드러낸 데 이어 그의 사후 소련의 실상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뒤였다. 마르크스주의가 전체주의 이론임을 파헤친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 출간된 해가 1945년이고, 스탈린 정권이 나치 체제처럼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등에 기반한 전체주의 정권임을 갈파한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이 나온 것도 1951년이다. 2차 대전 후 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급격한 정치사상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진 셈이다.

 

홍범도가 타계한 1943년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다. 당시 처칠의 기준에서 보면 홍범도는 인류 파멸을 구원하는 진영에 속했고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 군인이었던 백선엽은 인류 최악의 체제에 복무한 이였다.

굳이 처칠의 기준을 소환한 것은 당대의 맥락을 살피지 않고 독립전쟁의 영웅들에 대해 지금 잣대로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이 노예 소유주였다는 이유로 동상을 철거하려는 미국 일부 좌파들의 철부지 짓을 한국 우파들이 정권 차원에서 벌이고 있으니 황당할 따름이다.

 

 

 

 

■'자유시 참변'은 일본의 사주로 일어났다?

연합뉴스 이웅 기자 2023. 9. 9.

 

상해임시정부, 소비에트러시아 지원 속 항일무장부대 통합 추진

한인 사회주의 양대 세력 갈등…통합부대 주도권 다툼 유혈 사태로

"홍범도 장군은 중립 지켰으나 높은 명성 때문에 파쟁에 이용"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이 때아닌 이념 논쟁을 불러왔다. 논란은 지난달 말 육사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사관생도를 양성하는 곳에 소련공산당 가입 전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두는 게 적절치 않다는 문제 제기에 따라 독립기념관으로 흉상 이전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작됐다.

 

야당과 보훈단체들은 6·25전쟁과 냉전체제 이전에 살았던 항일 독립 영웅까지 공산주의 프레임을 씌우려 한다며 백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여권 일각에서도 이념 논쟁으로 번지는 상황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국방부는 입장문을 통해 홍범도 장군의 독립운동 업적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행적에 대해선 다른 평가가 있다며 흉상 이전 방침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홍범도 장군이 러시아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언론에선 자유시 참변을 일본과 결탁한 러시아공산당이 한인 무장단체를 제거해 달라는 일본 측 요구로 일으킨 독립군 학살 사건인데 홍범도 장군이 여기에 연루됐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이 같은 보도 내용은 근거가 있을까? 이를 판단하려면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배경과 사건의 전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던 1921년은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막 건립돼 독립운동 열기가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시기이자, 러시아 볼셰비키혁명(1917년)과 제1차 세계대전(1914~18년)의 종식으로 국제 정세가 급변하던 세계사적 격변기였다.

 

'한국독립운동사'(박찬승) 등을 보면, 당시 국내외에선 1918년 1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전후 처리 원칙으로 천명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돼 외교적 교섭과 세계 여론 조성으로 독립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듬해 파리강화회의에선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에 대해선 민족자결권이 적용되지 않았고, 뒤이은 국제연맹회의와 워싱턴 태평양회의에서도 열강들은 한국문제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일본의 기득권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1919년 후반부터는 서구 열강에 기댄 '외교론' 대신 '실력양성론'과 '독립전쟁론'이 부상했다.

 

상해임시정부에서도 초대 대통령 이승만 중심의 독립 청원 외교가 힘을 잃고, 1919년 11월 사회주의 계열의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독립전쟁론이 본격적으로 대두했다. 임시정부 국무원은 무장독립전쟁 노선을 시정방침으로 정한 뒤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삼고,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흩어져 싸우던 100개 가까운 항일무장부대들의 통합을 추진했다. 이때 임시정부는 식민지 종속국들의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지를 약속한 신생 소비에트러시아와의 외교에도 힘을 쏟았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17년 발간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에 따르면,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1920년 4월 레닌의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에 특사(한형권)를 파견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자금 지원 등 4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한 뒤 양 정부 간 '대일한로공수동맹(對日韓露攻守同盟)'을 체결하기로 합의하고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당시 일본 언론 보도와 일본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6개 조항으로 된 공수동맹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군단을 설치해 시베리아 지방에 주둔시키고 러시아 총사령관의 지휘받도록 하며,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과 싸울 때 러시아를 원조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볼셰비키 혁명 후 열강들의 지원을 받은 반혁명 세력(백군)과 내전 중이던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적군)는 항일 투쟁을 벌이던 상해임시정부와 한국 사회주의자들을 적극 지원하며 협력했다. 영토 야심이 컸던 일본이 열강 중 가장 많은 7만여명의 병력을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으로 출병하며 백군을 지원하자, 한인 부대들은 적군 편에서 맞서 싸웠다. 소비에트러시아는 열강의 간섭을 약화하기 위해 1920년 4월 아무르주, 자바이칼주, 사할린주, 연해주 등 극동지역에 완충국으로 불리는 '극동공화국'을 수립하고 일본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한 협상도 진행했다.

 

3·1운동을 전후해 한국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 사이에선 러시아, 중국, 일본을 거쳐 들어온 사회주의 사상이 크게 확산했다.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임경석)에 따르면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주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모태가 됐다. 학계에선 이동휘를 비롯한 신민회 좌파들이 일제 탄압으로 망명한 뒤 1918년 4월 러시아 극동지역 한인 사회에서 조직한 '한인사회당'을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로 본다.

 

이와 별개로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1920년 7월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를 결성해 한인사회당 그룹과 경쟁했다. 한인사회당은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근거지로 중국 상하이로 옮겨와 '상해파 공산당'으로 불리게 됐으며, 전로한인공산당은 러시아령 한인 임시정부 격인 '대한국민의회'와 연합하면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으로 불렸다.

두 그룹은 혁명론과 정치노선에서 차이를 보였는데, 상해파는 당면 과제를 민족해방혁명으로 보고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한 반면 이르쿠츠크파는 즉각적인 사회주의혁명을 내세우며 대립했다.

 

1921년 6월 극동공화국 영내인 아무르주 스보보드니(자유시)에서 일어난 유혈 사태인 자유시 참변은 이 같은 배경 위에서 일어났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군 부대들은 부대 통합을 위해 1920년 10월부터 자유시로 집결했다.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등을 보면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소비에트러시아가 합의한 공수동맹이 부대 통합의 토대가 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집결한 부대는 2천~3천명 규모로 추산되는데 크게 세 부류였다. 하나는 자유시에 주둔해 있던 한인자유보병대대(자유대대)였고, 나머지는 백군, 일본군과 싸웠던 연해주 부대들과 북간도 지역에서 온 독립군 부대들이었다.

 

홍범도 장군 부대를 비롯한 간도 독립군들은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간도로 출병한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에 밀려 퇴각해온 상황이었다. 이들은 부대 통합의 대의에 공감했으나 성격은 이질적이었다. 자유대대는 대한국민의회(이르쿠츠크파)의 정치적 지도를 받은 반면 연해주와 간도 부대들은 한인사회당(상해파)과 연계돼 있었다. 처음에는 연해주 부대를 중심으로 부대가 통합돼 극동공화국 국방부 산하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로 편제됐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간도 부대들도 여기에 포함됐다. 그러나 자유대대가 반기를 들면서 갈등을 빚었다. 그러다 1921년 1월 이르쿠츠크에 코민테른(국제공산당) 극동비서부가 설립되면서 주도권은 자유대대로 넘어갔다. 극동비서부는 이르쿠츠크파의 의견대로 통합 부대를 자유대대 중심의 '고려혁명군'으로 재편했다.

 

하지만 이번엔 대한의용군 측의 반발에 부딪혔다. 대한의용군 측은 부대 통합의 조건으로 백군 가담 전력이 있는 고려혁명군 간부들을 축출할 것을 요구하며 대치했으나 설득과 중재 끝에 타협이 이뤄졌다. 그러나 통합 부대의 편제 문제를 놓고 다시 불거진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고려혁명군이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결정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2009년 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윤상원) 등에는 자유시 참변의 전말이 당시 기록과 증언을 토대로 상세히 기술돼 있다. 참사 당일(6월28일) 무장해제를 위한 고려혁명군의 공격이 있었지만 가급적 교전을 피하려는 양측의 노력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고려혁명군의 전면적인 공격은 30분 정도에 그쳤고 대한의용군은 내내 거의 응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려혁명군은 전체 사망자 36명, 포로 864명으로 밝힌 반면 대한의용군은 행방불명을 포함한 사망자가 400~600명이라고 주장했다.

 

■대한의용군이 밝힌 400-600명은 대부분 행방불명자, 즉 포로를 의미한다고 보면 양쪽의 주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에 수 백여명이 사망했다고 단정하면서 적군과 고려혁명군의 소행으로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것으로 치부한 측면이 있다.

 

홍범도 장군은 무력 충돌이 있기 한 달 전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통합부대 재편 결정이 내려지자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다른 간도 부대들과 함께 대한의용군 주둔지에서 고려혁명군 쪽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논문에서 "무장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권위에 대한 인정,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자서전 격인 '홍범도 일지'를 소개한 책 '홍범도 장군'(반병률)에는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 장군이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증언이 있다.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 뒤 대한의용군 포로들에 대한 재판에 3명의 재판위원 중 1명으로 참여했다.

 

이와 관련해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책에서 "홍범도는 사건(자유시 참변) 당시 중립을 지켰으나 참변 이후 군사지휘권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측은 항일의병장으로서 명성이 높은 홍범도를 파쟁에 활용했다"고 지적했다. 윤상원 교수도 홍범도 장군의 재판 참여가 명망과 권위 때문이었다고 봤다.

 

자유시 참변은 해외 한인 사회주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며 이후 항일무장투쟁에 큰 짐을 지웠다. 자유시 참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독립군 부대 간의 주도권 다툼이었지만, 이면에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의 뿌리 깊은 반목과 갈등이 있었다.

 

러시아공산당의 일관성 없는 정책과 내부 알력도 자유시 참변의 한 원인으로 봐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상해파는 러시아공산당 극동국의 지지를 받은 반면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공산당 시베리아국과 연결돼 있었다.

 

2020년 논문 '소비에트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과 초기 한인사회주의 세력의 갈등'(오세호)에선 "해당 연구들은 통합한인부대의 지휘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정치적 갈등을 자유시 사변의 주요 원인으로 보았다"며 "그러나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갈등만으로는 그 발생 원인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여겨진다. … 이를 둘러싼 소비에트러시아의 정책, 그리고 한인부대 통합 과정에서의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자유시사변이 발생한 것으로 보는 선행 연구들의 시각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비춰보면 일부 언론 보도처럼 자유시 참변을 일본과 결탁한 러시아공산당이 한인 독립군 부대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볼 수는 없다.

 

자유시 참변은 모스크바의 공산당 수뇌부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다뤘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1921년 11월 이르쿠츠크파의 반발에도 '한국위원회'를 구성해 자유시 참변의 진상을 조사한 뒤 피해자들의 원상회복과 양 세력의 통합 추진 결정으로 상해파의 손을 들어줬다.

 

러시아공산당과 극동공화국은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백군 격퇴에 집중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으며, 이를 위해 극동공화국 영내 일본군에 적대적인 군대의 주둔을 금지하라는 일본 측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한인 독립군도 극동공화국 내에 공공연히 주둔할 수 없었지만 협력은 지속됐다. 간도 독립군이 자유시로 이동할 때 일시적인 무장해제를 요구한 것과 자유시에 주둔한 한인 부대들을 러시아혁명군 산하 부대로 편성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자유시에서 결성된 고려혁명군은 당초 바로 만주로 출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21년 8월 시베리아 주둔 일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극동공화국과 일본의 협상인 '대련회담'이 열리면서 이르쿠츠크로 회군하게 됐다. 이는 정세 변화에 따른 대응으로 러시아공산당과 일본의 결탁이라고 하긴 어렵다.

 

대련회담이 결렬되기 전인 1921년 10월 일본군과 백군이 총공세로 극동 하바롭스크를 재점령하면서 러시아 내전의 최후 단계인 연해주해방전쟁이 시작됐으며, 한인 부대들은 적군 편에서 격전을 벌였다. 전투와 대치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러시아공산당이 일본의 요구로 한인 독립군들을 자유시에서 몰살했다고 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일본군이 1922년 10월에서야 철병 조약을 맺고 연해주에서 물러나면서 5년에 걸친 러시아 내전은 끝이 났다.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을 보면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치른 시기는 3·1운동 이후 사회주의가 한국에서 새로운 사조로 크게 유행하던 때였다. 사회주의를 말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진 청년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 당국은 이런 사회주의를 식민 지배를 위협하는 불온사상으로 간주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손잡은 좌우합작 정부로 출범해 다양한 사상과 세력들이 경쟁하면서도 독립이란 대의를 두고 협력했다.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이 사회주의자 이동휘와 함께 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의병 활동을 하다 1908년 연해주로 넘어와 주요 활동무대로 삼은 홍범도 장군에게 사회주의는 어쩌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환경이자 항일무장투쟁의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 맞선 러시아령 한인들에게 러시아 내전 기간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군 대신 적군 편에 선 건 당연한 일이었다.

 

홍범도 장군은 은퇴 후 연해주 이만 지역에서 농사를 짓던 1927년 59세에 소련공산당에 가입했고, 이후 이렇다 할 활동 없이 평범한 여생을 보내다 강제 이주된 카자흐스탄에서 1943년 75세 일기로 생을 마쳤다.

 

정부는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의 공을 기리기 위해 박정희 정권 때인 1962년 건국훈장을 수여했으며, 1994년 김영삼 정부부터 추진해온 카자흐스탄에서의 유해 봉환이 문재인 정부 때인 2021년 결실을 거둬 대전현충원에 유해를 안장했다.

홍범도 장군의 소련공산당 가입 전력이 논란이 되고 있으나 당시 시대 상황을 무시한 채 지금의 정치적 잣대로 평가하는 게 타당한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홍범도가 공산주의자입니까?”

[인터뷰] 경향신문 김찬호 기자입력 2023. 9. 9‘

홍범도 연구 권위자’ 반병률 명예교수 인터뷰

 

[주간경향] 역사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다. 100년 전 민족의 영웅이 100년 후 주적과 사상적으로 동조한 인물로 평가가 바뀐다. 이대로면 앞으로 한국의 위인들은 100년 후 정치 변화까지 정확히 예측해 행동한 인물이어야 한다. 후손들은 2023년 역사에서 배운 그대로 자신들의 시대적·정치적 잣대로 100년 전 인물을 난도질할 수 있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고 국정을 운영하고 있을 윤석열 대통령, 이종섭 국방부 장관,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등도 예외가 아니다. 동일한 잣대라면 우파 자유주의라는 정치적 입장은 100년 뒤 시대 상황에 따라 ‘민족 반역’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

 

의병이자 독립군 대장이며 민족적 자부심인 청산리·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항일 활동은 인정하지만”이라는 단서와 함께다. 하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돌아가실 때까지 공산당(원)으로서의 활동을 했다”는 주장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육군사관학교에 세워진 홍 장군 흉상 이전,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 명칭 변경 검토 등이 이를 방증한다.

 

차라리 ‘반공’, ‘반북’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홍 장군 지우기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이해라도 쉽다. 국방부는 홍 장군 논란을 설명하며 자꾸만 ‘역사적 흔적’, ‘학계의 논란’ 등의 허술한 사회과학적 잣대를 동원한다. 실제로 지난 9월 4일에는 홍 장군의 공산주의 이력과 관련한 입장문 작성에 참고했다며 문서 목록까지 공개했다. 해당 목록에 두 번이나 이름을 올린 사람 중에는 국내 홍범도 연구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도 있다. 반 교수는 국제공산당 국제대회인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이른바 ‘극동민족대회’) 개막식에 참석한 홍 장군이 촬영된 영상물을 발굴해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평생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권위자의 책, 논문을 참고했다고 하니 “국방부 주장이 맞나 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9월 5일 경기도 광주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만난 반 교수는 “내 책, 논문도 봤다고 합니까. 아니 대체, 어떻게 읽고 해석하길래 결론이 그렇게 나나”라며 한숨을 쉬었다.

 

홍 장군 논란이 불거진 이후 반 교수는 여러 차례 언론 인터뷰에 나섰다. 하지만 한 줄, 두 줄 정도 인용되는 그의 말만으로 입장문 발표, 언론 설명까지 하고 있는 국방부 논리에 대한 완벽한 반박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에 주간경향은 국방부가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들고 반 교수에게 하나하나 처음부터 물었다. 그 결과 기본적인 용어, 시대 상황, 국제정치적 움직임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홍범도는 공산주의자’ 주장의 허술함이 서서히 드러났다. 특히 “홍 장군을 둘러싼 논란 전후로 국방부나 정부에서 홍 장군에 관해 문의해온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 번도 없었다”는 그의 대답에서 해당 논란이 여론, 학계, 언론 등의 동의를 목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독립군 대장 홍범도의 삶은 어떻게 봐야 하나.

“홍 장군을 이해할 수 있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신분이다. 의병장이나 독립군 대장은 주로 유생, 양반, 고급관료 출신 등이 많았고, 경제적으로 보면 대체로 지주 출신이었다. 그런데 홍 장군은 이른바 ‘머슴’ 출신이다. 부모님이 어린 나이에 돌아가시면서 양반집, 부잣집 머슴으로 전전하며 살았다. 홍 장군의 행보를 보면, 계급적 억압·착취 등에 대한 반감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기 신분적·경제적 차별이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열다섯 살에 나이를 속이고 군대에 가서 나팔수(곡호수) 생활을 했는데 차별을 견디다 못해 장교를 살해하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후 금강산의 유명 사찰 신계사에 몸을 의탁하며 1년 정도 승려의 길을 간 행적도 있다. 종합하면 홍 장군은 계급적·신분적 차별을 이유로 약자를 억압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체화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차별에 대한 반감을 국가 간 관계로 확대하면,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으로도 볼 수 있지 않나.

“실제로 두 번째 특징이 ‘항일 투쟁의 역사’가 어떤 독립군과 비교해도 빠르고 길다는 데 있다. 홍 장군 관련 자료 중 세간에 많이 알려진 것이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쓴 ‘입국신고서’다. 직업은 ‘의병’, 입국 목적과 희망은 ‘고려독립’이라고 적어서 화제가 됐는데 잘 주목하지 않는 부분 중 하나가 홍 장군이 의병이라는 직업과 함께 쓴 ‘28년’이라는 기간이다. 이를 토대로 역산해 보면, 홍 장군은 적어도 1894~1895년부터 의병활동을 한 것이다. 즉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을미의병 때부터 홍 장군이 항일운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의병부터 독립군 활동까지 끊기지 않고 이어온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나.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한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홍범도다. 특히 이렇게 여러 차례 의병, 독립군으로 나선 사례는 없다. 이런 홍 장군을 두고 국방부가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에 사실상 항일 무장 독립투쟁의 경력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홍 장군이 1868년생이다. 비교 대상으로 언급하는 지(이)청천 장군은 1888년생이고, 김좌진 장군은 1889년생, 이범석 장군은 1900년생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지 장군과 비교해도 스무 살 차이가 난다. 자유시 참변 이후라고 하면 홍 장군 나이가 최소 쉰셋이다. 국방부 말대로라면 연로한 장군이 대체 몇 살까지 만주, 연해주 등에서 무장 독립투쟁의 선봉에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항일 투쟁 기간을 최소로 잡아도 28년이다. 다른 어떤 독립운동가와 비교해도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다. 직업을 ‘의병’이라고 할 정도로 자기인식이 분명한 장군을 두고 독립투쟁의 역사가 어떻고, 업적이 어떻고 따지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마지막 특징은 무엇인가.

“홍 장군 가족이다. 나는 학자로서 홍 장군 일가를 ‘독립운동 명가’라고 부른다. 온 가족이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홍 장군의 부인 단양 이씨는 안타깝게도 실명이 알려지지 않지만, 의병 활동에 조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큰아들 홍양순은 아버지를 따라 독립군으로 활동하며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둘째 아들 홍용환 역시 독립군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홍 장군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초를 겪었다. 당시 일본은 홍 장군을 체포할 수 없으니 가족을 인질로 잡고 회유하려 했다. 이를 주도한 것이 조선인 김원홍, 임재덕 등으로 구성된 일진회 간부들이다. 이들은 단양 이씨를 고문하며 홍 장군을 회유하는 편지를 쓰게 했다. 단양 이씨가 ‘홍 장군은 회유될 사람이 아니다’며 거부하니 편지를 조작하기까지 한다. 홍 장군을 회유하기 위해 여러 차례 사람들도 보냈는데 그때마다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자 큰아들 홍양순을 보낸 적도 있다. 아들은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홍 장군이 아들을 꾸짖고 총을 쏜 일화가 있다. 홍 장군 일가는 독립운동이라는 제단에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지만,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홍 장군 가족에 관해서는 일본군이 입수한 첩보로 추정해야 할 정도다. 항일 투쟁을 주도한 인물들이 주로 양반, 고위 관료 등의 명문가 출신이라는 점과 비교하면 이러한 특색은 더욱 두드러진다. 머슴 출신으로 사실상 나라의 도움을 받은 바가 없음에도 집안 전체가 항일 투쟁에 나섰다. 이런 사례는 정말 찾기가 힘들다. 홍 장군 집안이야말로 진짜 명문가다.”

 

-그럼에도 국방부는 홍 장군 행적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모든 논란의 시작과 끝에 1921년 발생한 ‘자유시 참변’이 있다. 국방부는 ‘홍 장군님이 1921년 소련 자유시로 이동한 이후 보인 행적이 독립운동 업적과 다른 평가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학계에서 이런 논란이 있나.

“국방부가 역사적 인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려면, 가장 최신의 연구 성과까지 살펴보고 관련 연구자 등과도 충분히 논의한 뒤 문제 제기를 했어야 한다. 이 과정이 결여되다 보니 논리에 구멍이 뚫려 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지난 2021년이 자유시 참변 100주년이었다. 이때 학술회가 개최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자유시 참변 관련해서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홍 장군이 참변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나, 책임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어느 정도인가, 홍 장군을 대표로 하는 간도에서 올라간 독립군들은 참변의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등에 관한 것이다. 이 부분이 논란이 된 것은 최근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이 공개하기도 한 ‘우리 고려 노동 군중에게’ 같은 문건 때문이다. 홍 장군 등 간도 독립군 지도자 5명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공동명의로 1921년 9월 15일자로 발표한 이 문건에는 ‘우리의 수적(원수인 적)은 자못 일본침략주의자뿐 아니라 동족 사이에도 있나니라. 자세히 말하면 관료 및 유산자이며 홍(紅)O와 같은 외홍내백(外紅內白: 겉으로는 붉지만 속은 하얀)한 가면 공산당원들이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문건만 보면, 홍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가해자로 가담한 것처럼 보인다.”

 

-먼저 자유시 참변부터 정확히 좀 설명해 달라.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 부대들의 이합집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당시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들을 통합해 하나의 체계로 일본군과 무장투쟁에 나서려고 했다. 초창기에는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 원동부와 연결된 이른바 ‘상해파’가 대한의용군을 창설해 통합을 주도했다. 홍 장군 등의 간도에서 출발한 독립군 부대도 이 대한의용군에 가담한다. 그런데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의 후원을 받은 이른바 ‘이르쿠츠크파’가 고려혁명군정의회를 만들면서 주도권을 가져오게 된다. 통합의 주도권이 이동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홍 장군 등 간도 독립군도 대한의용군에서 고려혁명군정회의 쪽으로 옮겨 가게 됐다. 지휘부 구성과 통합군대의 편제 등을 둘러싸고 양측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1921년 6월 28일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이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해제에 나선다. 이를 자유시 참변이라고 한다. 자유시 참변 이후 홍 장군 행보에 문제 제기를 하는 논거는 참변을 정당화하는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과 무장해제를 거부한 독립군을 재판하는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 등이다. 자유시 참변 관련해서 과거 학계에서 논란이 있었던 부분도 이와 같다. 그런데 홍 장군 행보를 액면 그대로만 보기에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정확히 어떤 부분인가.

“우선, 무장해제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독립군들이 누구냐 하는 점이다. 당시 현장에서 피해를 입은 것은 최진동, 허근 등이 이끌던 부대가 합쳐져 만들어진 ‘총군부’라는 부대다. 무장해제 과정에서 현장에서 36~37명이 사살됐다. 그런데 피살된 독립군을 이끌었던 최진동, 허근은 안무, 지청천 그리고 홍범도와 함께 간도에서 올라간 독립군들이었다. 즉 대한의용군 쪽에서 고려혁명군정의회 쪽으로 간도 독립군들이 빠져나갔는데 미처 나가지 못한 총군부 소속, 정확히는 허근의 의군부 소속 독립군들이 일부 남아 있었고, 이들이 총살당한 것이다. 그런데 1921년 11월 초까지 이르쿠츠크파는 ‘(상해파) 대한의용군 진압’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잇달아 발표하는데 이들 문건에 의병대 영수로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허근), 안무, 지(이)청천의 이름이 나온다. 정리하면 홍 장군을 비롯한 간도 독립군 장군들이 자신과 함께한 부대가 피해를 입은 것이 정당하다고 옹호하고, 해당 부대를 공격하는 문건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굉장히 어색한 일이지 않은가. 이에 후속 연구가 진행됐고, 그 결과가 하나씩 나오고 있다. 우선 1921년 10월, 허근 등이 코민테른에 제출한 <자유시 참변에 대한 보고서>에는 ‘귀 의회정부가 총사령관을 보내 풍파를 야기하려 자유시에서 한국군대를 포위·공격했다’며 참변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문책을 강력하게 요구한 문서가 발견된다. 또 같은해 12월 14일자로 홍범도, 최진동, 허근, 지청천 등 간도 독립군 장교 28명이 상하이파의 핵심 인물인 김동한에게 참변 관련 협상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다. 상하이파는 자유시 참변의 피해자다. 간도 독립군 지도자들이 피해 측 인사에게 협상 전권을 위임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자명하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1922년 2월,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석했던 홍범도, 최진동이 김동한과 공동명의로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여기에 ‘이렇게 부끄러운 성명서에 서명할 수 없었으며, 그들(이르쿠츠크파)이 최후통첩을 했지만 서명을 거부했다’며 ‘동의 없이 임의로 (우리) 이름을 넣었다’고 폭로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즉 그동안 이해가 안 됐던 문건이나 홍 장군의 재판 참여 등의 행적이 실상은 명의도용이었고, 이르쿠츠크파의 속임수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국방부가 최신 연구는 보지 않고 섣부른 논란을 만든 것 아닌가. 국방부가 홍 장군 행보에 문제 제기한 논거를 보면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다’, ‘소련공산당 자유시 참변 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했다’, ‘자유시 참변 발생 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면서 소련 적군 5군단 소속 조선여단 1대대장으로 임명됐다’는 것 등이다. 각각에 대해 어떻게 보나.

“먼저 용어부터 제대로 써야 한다. 소련공산당 군정의회 그런 게 어디 있나. 1921년 당시 소련이 성립되지 않은 사실조차 알지 못한 것이다.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라고 표현한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용어를 섞어서 설명하면 안 된다. 당시 독립군 활동에 유리한 쪽이 어디였는지가 홍 장군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재판위원으로 참여했다고 하는 것은 맞다. 다만 독립군을 처벌하기 위해 들어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재판 관련해서 홍 장군은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 등과 재판 과정이 국제공산당 집행위나 소비에트 정부 혁명군정의회 등 중앙의 승인하에 진행된 것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국제공산당 동양혁명책임자인 슈미야츠키와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이 간도독립군 지도자들을 기만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홍범도의 재판 참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소련 적군 소속이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스스로 당시 국제정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국방부는 당시 러시아지역이 전부 소비에트러시아였던 것처럼 말하는데 극동지역의 공식 정부는 ‘원동공화국’이었다. 명목상 국가에 가까웠는데 시베리아에 진출(침입)한 일본군을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운영하면서 소비에트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이른바 완충국가(Buffer State) 역할을 했다. 원동공화국은 ‘인민혁명군’이라는 자체 군대도 갖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국제적 배경에서 당시 러시아지역에서 활동한 독립군들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봐야 한다. 당시 일본은 소비에트러시아든 원동공화국이든 독립군을 후원하는 것에 강력히 항의했다. 독립군이 별도의 군대로 활동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이에 독립군이 아닌 원동공화국 소속 ‘인민혁명군’, 소비에트러시아 소속 ‘적군’으로 명목상 편재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었다. 실제로 홍 장군은 원동공화국인 자유시에 있을 때는 ‘인민혁명군 제2군 29연대 소속’이었고, 소비에트러시아인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후에는 ‘적군 5군단 소속’이 됐다.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실질은 독립군 그대로였다는 것인가.

“그렇다. 명목상 편재라는 증거는 또 있다. 당시 독립군이 인민혁명군이든 적군이든 그 지위는 간도 시절의 지위에 부합하는 직책을 부여받았다. 예를 들어 홍 장군은 간도에서 지휘했던 부대 규모가 대대급이어서 제1대대장으로 되고, 지(이)청천은 사관학교 교장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임명되는 식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라. 홍 장군이 진짜 소비에트러시아 적군의 대대장이면 기록도 남고, 시베리아 내전이 끝난 후에는 장교로서 승승장구해야지 그대로 물러나는 것이 말이 되나. 소비에트러시아, 원동공화국, 일본과의 관계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소련’, ‘반공’ 등만 앞세워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대체 역사자료를 어떻게 보고, 연구해서 이런 결론을 낸 것인지 모르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홍 장군이 공산주의자인가.

“논리적으로 따져보자. 첫째로 홍 장군은 소련공산당에 가입해 어떠한 직책도 맡은 적이 없다. 기껏해야 소련공산당에 뒤늦게 입당한 평당원이다. 둘째로 당시 홍 장군이 가입한 소련공산당을 어떻게 볼 것이냐 문제다. 홍 장군이 공산주의자라는 이들은 공산당의 개념부터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러시아공산당(혁명 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소비에트 정부 수립 후 러시아공산당으로 개칭)은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전위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하고 갖은 회유에도 끝까지 철의 규율로 무장한 자신의 이념을 지키는 이들이 가입한 그런 정당이다. 그런데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당은 사회를 변혁시키고 이념으로 무장하고 그런 정당이 아니다.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된 사회에서 대중정당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즉 일정한 자격이 있고, 문제가 없으면 가입할 수 있는 정당이 된 것이다. 홍 장군은 1927년 소련공산당에 가입했다. 셋째로 만약 홍 장군이 정말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한 공산주의자라면 그 이전 시기 공산당에 가입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1918년 한인사회당, 1921년 고려공산당, 1925년 국내에서 창립한 조선공산당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조차 홍 장군을 영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1920년대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볼 때 홍범도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홍 장군은 왜 뒤늦게 소련공산당에 가입했나.

“생계 문제다. 1929년이면 홍 장군이 연금생활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는데 공산당원과 비공산당원이 받을 수 있는 지원 격차가 컸다. 당시 홍 장군은 재혼도 하고, 가족이 늘어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생활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또 자신을 평생 믿고 따라준 독립군 부하 중 만주나 국내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을 위해 집단 농장을 꾸려가야 했다. 정부에 땅을 신청하고 불하받고 각종 시설 제공 등 혜택을 받으려면 공산당원 자격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홍 장군에게 좋은 땅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황무지에 가까운 땅을 불하받고 개척하는 상황에서 무슨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이념 투쟁을 하고, 혁명을 한다는 말인가. 심지어 홍 장군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까지 당한다. 정말 홍 장군이 소련공산당의 핵심 당원이고 유력 인사라면 아랄해에 가까운 카잘린스크라고 하는 시골로 70세에 가까운 노인을 보내버리겠나.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럼에도 왜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는지까지 따지는데.

“홍 장군은 1908년에 러시아로 간다. 1943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으니 30여 년간 산 셈이다. 일생의 약 절반은 러시아에 머물렀던 셈이다. 홍 장군을 비판하는 이들이 왜 김좌진, 이범석 장군처럼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느냐 묻는 것을 봤다. 두 장군과 홍 장군의 활동 근거지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지적이다. 김좌진, 지(이)청천, 이범석 장군처럼 만주가 활동 근거지인 사람들과 러시아가 활동 근거지인 사람을 비교하면 어떡하나. 게다가 홍 장군은 국내에서도 하층민에 속하는 머슴 출신이다. 이 분이 국내에서 성장한 환경과 비교할 때 노동자·농민의 생활권을 강화하고 러시아 혁명 이후 토지까지 재분배하는 상황은 충분히 기회라고 느낄 수 있다. 1900년대 초반 활동한 인물을 재평가하면서, 2023년의 잣대를 들이대면 어떡하나. 적어도 그 시대 상황, 맥락은 살펴보고 인물을 평가하는 것이 정당한 것 아닌가.”

■이 질문은 이해하기 어렵다. 죽은 홍장군이 어떻게 돌아오나? 또 해방되어 살아서 돌아왔다고 치자. 77살 머슴출신 홍장군이 한국정치계에 어디 발 붙일 수나 있었겠는가?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은 양반가문출신이거나 일본유학파이거나 근대 신지식인 출신들이다. 또 좌익이니 우익이니 나뉘어 서로 죽고 죽이는 극한의 투쟁속에서 배움없는 홍장군이 발을 디딜 틈이 남쪽의 그 어디에 있었을까? 우문 우답이라 몇 자 쓴다.

 

 

-평생 독립운동을 연구한 역사학자로서 이번 논란을 어떻게 보나.

“일부 국민이나 국방부는 공산당 하면 김일성의 조선노동당만 떠올리는 것 같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시기의 공산당 개념은 이와는 다르다. 이론상으로는 양립이 불가능함에도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자였던 분들도 계셨다. 이승만 전 대통령조차 임정대통령으로서 소비에트러시아에 임시정부 외무차장 이희경과 안공근을 파견했고, 1933년에는 모스크바를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공산주의가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독립운동가마다 만들고자 한 나라의 형태는 다를지언정 모두의 1차 목표는 일제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이를 이제 와서 ‘반공’이라는 잣대로 재평가한다면 군주제를 신봉한 의병이나 복벽주의자들,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를 표방한 독립운동가들은 또 어떻게 되나. 이들도 재평가해야 하는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분들이 남북이 분단될지, 이념으로 갈라질지 어떻게 알았겠나.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끊임없이 민족통합을 모색했고 임시정부 아래에서조차 좌우합작 등의 통합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이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