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발트 7국 14일
북유럽 여행은 작년 11월에 미리 결정하여 <참좋은 여행사>에 일찍 예약하였다. 나는 이미2012년에 핀란드 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기는 하나 가원과 함께하는 북유럽 여행은 또 하나의 버킷 리스트였다. 서유럽 동유럽 남유럽을 모두 다녀왔으므로 이번 북유럽은 유럽여행의 결정판이다. 작년에 다녀온 미국여행과는 달리 선택 관광이 적어서 좋다. 그리고 쇼핑이 거의 없는 것도 마음에 드는 일이다. 지산하우스 일은 아버지께 부탁드리고 걱정 없이 떠난다. 아버지께서는 할 일이 생겼으니 내심 좋아하시는 눈치다.
여행일정은 다음과 같다.
인천/바르샤바/코펜하겐(1)-DFDS(1)-오슬로-릴레함메르-돔바스(1)-게이랑에르-피얼란드-송네피오르드-라르달(1)-플롬-오슬로-칼스타드(1)-스톡홀름-바이킹라인(1)-투르크-헬싱키-탈린(1)-파르뉴-리가(1)-룬달레-슈레이-빌뉴스(1)-트라카이-빌뉴스(1)/바르샤바/인천
출국 2024.06.20 (목) 11:20 인천 출발 2024.06.20 (목) 22:10 코펜하겐 도착
입국 2024.07.10 (화) 06:20 빌니우스 출발 2024.07.03 (수) 06:42 인천 도착
■1일차 2024년 06월 20일 (목) 출국
미팅시간이 8시이므로 3시부터 일어나 준비하고, 터미널에서 인천공항 가는 4시 30분 버스로 출발한다. 일행은 29명이고 인솔자 포함 30명이다. 이번 여행은 폴란드 항공으로 바르샤바를 경유하는데 11시 20분 발 비행기가 무슨 연유인지 오후 2시 30분에야 이륙하다. 13시간을 비행하여 바르샤바에 도착하다.
창가좌석을 부탁하였는데 하필이면 날개 바로 위 좌석이라서 밖을 거의 볼 수 없는데다가 일기마저 불순하여 지상을 관람하는 눈 호강은 완전 실패하다. 화면을 통해 관찰하니 행로는 다음과 같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피하여 비행한다.
<대청도-옌타이-베이징-몽고와 중국 국경경계선(중국영토)-고비사막-우루무치 -카자흐스탄 중앙부-이랄해 북쪽-카스피해 중심부=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세반호-투르크- 흑해-루마니아-헝가리-슬로바키아-바르샤바>
바르샤바에 오후 5시 25분 도착예정이었으나 간신히 8시 30분에 도착하여 8시 40분 코펜하겐 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시차는 7시간이다. 내가 동유럽을 여행할 때 폴란드가 빠져 있어 내내 찝찝하더니 오늘에야 폴란드 땅을 밟아보니 의미가 크다. 폴란드 여행은 할 수 없으나 비행기에서 창밖으로나마 바르샤바를 바라보고 땅이라도 밟았으니 말이다. 예전에 이런 경우는 모스크바와 도하가 있었다. 이 비행기도 우리들의 짐을 실기 위함인지 20여분 늦게 9시가 되어서야 이륙하니 참으로 다행이었는데 시작부터 어려움이 나타난다.
10시 10분에 코펜하겐에 도착했는데 참으로 놀라운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 팀 캐리어 14개가 오지 않은 것이다. 바르샤바에서 코펜하겐 행 비행기에 옮겨 싣는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한 것이다. 인천공항에서부터의 잘못인지 바르샤바에서의 잘못인지는 잘 모르나 가방들은 바르샤바에 있다고 한다. 이런 사건은 나는 처음이다. 이후 이틀 만에 6개는 호텔로 왔으나 나머지 8개는 24일(월) 저녁식사를 하는 중국식당에서야 가방들을 찾았다. 대부분 고교동창생 팀의 가방들인데 며칠 동안 고생들이 많았음에도 드러내놓고 불평하지 않는 모습들이 감동이다. 동창생팀의 회장님의 리더십이 대단하시다. 14개의 캐리어 외에 또 두 개의 캐리어는 상당히 깨어진 모습으로 받았다. 폴란드 항공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게 되고 이는 참 좋은 여행사에도 적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미칠 듯하다.
이번 북유럽 여행의 일행은 다음과 같다. 고교동창생 부부 14명 및 함께 오신 부부 4명 도합 18명, 서울 사는 부부 2명, 경기도 여성친구들 4명, 보은 모자 2명, 인천 여성분 1명, 우리까지 총 29명이고 인솔자는 40대의 조창희씨로 일처리가 정확하고 성품이 넉넉한 사람으로 총 30명이다. 여성이 17명이고 남자는 12명이다. 11살 예곤이와 70대로는 우리 부부와 남성 한분이 있고 25명이 60대 초반으로 대부분 환갑을 기념하는 부부여행이라고 한다.
■2일차 2024년 06월 21일 (금) 덴마크 코펜하겐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적한 교외 로스킬레 지역의 호텔이다. 아침에 일찍 나와 거리를 산책하다. 내가 좋아하는 호텔 부페식에 찐한 커피, 매우 행복하다. 현지가이드는 60세 정도의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목소리가 컬컬한 여성인데 20여년 살았다고 하며 전문가답게 능란하게 안내한다. 유람선을 타고는 1시간 내내 안데르센 동화의 동상인 인어공주상, 북유럽 전설에 등장하는 게피온 분수, 현대적인 건축 양식의 왕립 오페라 하우스, 현재 덴마크 왕실의 주거지인 아말리엔보르 성, 왕실, 국회 등이 자리한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을 돌아본다. 우리 일행뿐 아니라 여러 나라 여행객들과 근 100여명이 함께 탔는데 의심되는 절도범에 주의하자는 가이드 말에 내내 신경들이 쓰였다. 알록달록 건물들이 가득한 니하운 항구에서 안데르센이 살았다는 집도 본다. 배에서 내려 붉은 벽돌의 중세 건물로 이루어진 시청사로 들어가니 근위병 교대식을 한다. 크루즈를 타러가는 길에 저 유명한 인어공주상을 다시 가까이 찾았다. 크기는 생각보다 작다. 시간에 쫓겨 가까이서 만져보지 못해 서운하구나.
DFD크루즈를 타고 노르웨이의 오슬로로 간다. 3시에 승선하고 출발하다. 저녁뷔페는 산해진미가 가득한데 웬 음식들이 이리도 짠고? 밤 11시 40분에 스웨덴의 예테보리에서 잠시 정박하고 다시 떠난다. 잠이 들었다가 4시가 되기에 후다닥 간판에 나오니 4시 7분부터 일출이 시작되어 13분에 완전히 떠오른다. 우리나라는 일출이 5시 11분이니 1시간 차이가 난다. 아침식사는 아주 좋다. 10시에 하선하다.
■3일차 2024년 06월 22일 (토) 노르웨이 오슬로
비가 약간 내리니 우산을 준비하다. 가이드는 30대 초반의 회사원인데 귀엽고 목소리가 매우 예쁘고 정확한 귀여운 여성이다. 교환학생으로 왔던 연유로 현재는 이곳 회사에 근무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중세 르네상스 양식의 아케르스후스 요새, 노벨평화상 시상식 장소인 오슬로 시청사, 국왕 하랄 5세가 거주하고 있는 노르웨이 왕궁, 최대 번화가이자 차가 없는 칼 요한스 거리를 보다.
아케르스후스 요새, 노벨평화상 시상식 장소인 오슬로 시청사, 노르웨이 왕궁, 칼 요한스 거리를 거쳐 비겔란 조각공원으로 갔는데 보슬비가 내려 우산을 들고는 대단히 넓고 아름다운 공원을 돌아보는데 규모로나 작품수준으로나 대단하다. 오슬로 여행의 백미다. 비겔란은 뭉크, 입센로랑과 함께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예술가라 한다.
한식당 <남강>에서 점심을 먹는데 소주가격이 무려 6만원(수퍼에서는 1만 8천원)이라고 한다. 놀랍다. 겨울에는 오랫동안 밤이 길어 정신적으로 우울하게 되는 이 나라에서는 음주를 바람직하게 보지 않아 세금문제로 인해 술값이 비싸다고 하며 오후 늦게는 아예 술을 팔지 않는다고. 어찌되었든 라오스에서는 1만여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과연 세계 최고 부자나라 답다. 식후 출발하니 끝없는 큰 호수가 이어지는데 작은 호수들도 그 수를 셀 수 없다. 길이가 100km라는 피에사호를 지나니 릴레함메르가 나온다. 1994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이유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버스는 솔베이지와 페리퀸트의 생가라는 오따마을을 지난다. 1874년 작곡가 그리그는 노르웨이의 문호 헨리크 입센으로부터 시극 《페르귄트》의 부수음악을 작곡해달라는 제안을 받고 작곡에 착수해 1875년 가을 전곡을 완성했다. 초연은 1876년 2월 24일 오슬로의 크리스티나 극장에서 이루어졌는데,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전곡 중 〈솔베이지의 노래〉는 발표 당시부터 가장 주목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는데, 이 곡은 오늘날에도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명곡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노르웨이의 어느 작은 산골마을에 가난한 농부 페르귄트와 소녀 솔베이지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여 결혼을 약속하고 페르귄트는 돈을 벌기위해 먼 외국으로 떠난다.
오랜 세월동안 갖은 고생 끝에 돈을 번 그는 귀국을 하다가 산적에게 돈을 빼앗기고 목숨만 부지한 채 겨우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어머니는 돌아가신지 이미 오래고 연인인 솔베이지가 어머니를 대신해서 고향집을 지키다가 백발의 페르귄트를 맞는데 병들고 지친 페르귄트는 간신히 연인의 무릎을 베고 눈을 감는다. 꿈에도 그리던 연인을 안고 솔베이지의 노래를 부르다 그녀도 연인을 뒤따라간다는 내용이다.》
그 겨울이 지나 봄은 또 가고, 또 봄은 오고
그 여름날이 가면 더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아 그러나 그대는 내 임일세. 내 임일세
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하노라. 고대하노라.
놀랍게도 이 오지에 협궤 철도가 계속 도로를 따라 이어지고 있다. 돔바스로 이동하여 몰데부근 비올리 지역 산장호텔에 투숙하다. 밤은 완전 백야로 일출은 3시 30분이고 일몰은 11시 38분이다. 밖은 밤새 내내 밝았다.
■4일차 2024년 06월 23일 (일) 노르웨이 돔바스, 라르달
아침에 호텔부근을 산책하다보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주변산 정상에는 눈이 덮여 있고 스키장이 보인다. 대도시가 아닌 산속에 있는 조용한 산장에서 자고 아침 산책에 한결 마음 가볍고 상쾌하다.
조식 후 게이랑게르로 이동한다. 독수리 전망대에서 조망하고는 게이랑게르에서 헬레쉴트 구간 유람선을 타고 1시간여를 달리는데 일곱 갈래로 갈라져 쏟아지는 7자매 폭포, 구혼자 폭포 등 수많은 여러 폭포들이 있으나 뉴질랜드에서처럼 대형폭포는 아니다. 그러나 최근 비가 내려서인지 폭포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이 지방에는 정말 수 없는 피오르드들이 있어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다시 버스를 타고 피얼란드로 이동한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빙원 뵈이야 빙하를 구경하다. 빙하를 직접 가까이 보기는 처음이다. 부근에 빙하의 생성과정을 보여주는 빙하박물관이 있어 찾았다.
이어 빙하가 산을 깎아내면서 형성된 송네 피오르드로 이동한다. 만헬러-포드네스 페리호로 20여분을 이동하는데 바다에서 수직으로 우뚝 솟아올라 병풍처럼 늘어져있는 웅장한 송네 피오르드를 조망한다. 피오르드 중에서 가장 큰 피오르드라고 한다. 보스지역의 라르달로 이동 하여 라르달 호텔에 투숙하다.
■5일차 2024년06월24일(월)노르웨이플롬,스웨덴칼스타드
○라르달 호텔 조식 후 플롬으로 이동하는데 라르달 터널이 나온다. 24.6km로 세계최장의 터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양양터널은 11km란다. 선택관광으로 플롬에서 뮈르달을 왕복하는
산악열차를 탄다. 장엄한 폭포와 산봉우리로 좁은 계곡을 통과하는 세계 최고의 플롬산악열차는 중간에 폭포를 구경하기 위해 내리기도 하는데 어느 여인이 신비스러운 춤을 추는 장면도 연출한다. 테마세계기행에서 이미 본 기억이 있다. 플롬역 식당에서 햄버거로 식사하고 11시 15분에 출발하는데 지금부터는 대단한 장거리 버스 여행이 시작된다. 오슬로에 도착하여 중국식당에서 김치찌개로 저녁을 먹고는 곧장 출발하여 스웨덴으로 넘어간다. 북부와는 달리 산이 거의 없는 끝없는 초원과 야산지대이다. 스웨덴으로 넘어가서도 역시 넓은 목초지대의 연속이다. 오슬로까지 4시간 30분이 걸렸고 칼스타드까지 3시간을 달려 밤 9시에 도착하였다. 칼스타드에는 유럽최대의 베네른호수가 있는데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어 너무나 서운하다.
■6일차 2024년 06월 25일 (화) 스웨덴 스톡홀름
칼스타드 호텔 조식 후 스톡홀름으로 이동한다. 스웨덴은 아바와 이케아와 볼보와 노벨의 나라이다. 무려 4시간을 달려가는데 역시 대평원과 숲이 펼쳐진다. 똑똑새 여성 가이드를 만난다. 오슬로가 내륙으로 들어가 있는 항구인줄 알았지만, 스톡홀름은 1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변의 섬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북유럽의 베니스라 부른다는데 공감이 간다.
노벨상 시상식 연회가 열리는 스톡홀롬 시청사가 대단하다. 구조가 마치 어느 왕궁 같다. 점심 후 어느 섬에 있는 왕자의 성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과 브르델의 헤라클레스 상을 보고 감탄하다. 이어 세계에서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는 17세기 전함 바사호의 역사를 조명하는 바사박물관을 가서 웅장한 전함을 보며 저들이 발트해양을 누빌 자격이 충분했음을 이해한다. 13~19세기 건축물의 정취를 가진 구시가지 감라스탄을 구경하는데 광장에 한국여행팀이 무려 8팀이 모였다 한다. 광장에 가득한 한국 사람들 대단하다.
핀란드의 투르크항으로 가는 바이킹라인 호에 탑승하니 방이 깨끗하다. 저녁식사는 10시까지 술(와인, 맥주, 음료수 등)과 음식을 무제한으로 제공하니 실컷 먹었고 배안의 시설이 최고이다. 선미에 큰 휴게실이 있는데 대형 스크린에서 유로 축구를 보여주고 있어 내내 관람하였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지만 역시 아주 좋았다.
■7일차 2024년 06월 26일 (수) 핀란드 헬싱키
투르크항에 도착하여 2시간을 달려 헬싱키에 도착하다. 가이드는 50세 정도의 노랑머리를 한 분인데 음색은 임예진 같고 마치 아나운서처럼 명확하다. 핀란드는 내가 꼭 12년 전에 교장연수로 다녀간 나라인데 그때는 학교방문위주라서 관광은 많이 하지 못했다. 시벨리우스 공원과 호숫가 숲에서의 핀란드 사우나가 크게 기억에 남았다.
국민작곡가를 기리기 위한 시벨리우스 공원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고 북유럽 최대 규모의 정교회 우스펜스키 대성당을 보다. 북구 유럽국가들은 자신의 종교를 국가에 신고하고 신자세 2%를 내며 신부들에게는 대신 국가에서 월급을 지급한다고 한다. 이어서 천연 암석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바위 속의 '템플리아우키오 암석교회를 보고, 헬싱키 랜드마크인 헬싱키 대성당, 대성당과 정부청사들로 둘러싸인 원로원 광장, 현지 생활문화를 체험 할 수 있는 마켓광장, 헬싱키 시내 중심가 만네르헤임 거리를 돌아보고는 항구로 가서 탈린으로 가는 쾌속선을 탄다. 호화여객선인데 가이드가 빨리 함께 내리기 위해 모두 입구에 자리를 잡았는데 위아래 층을 이리저리 모두 돌아보니 너무 좋은 객실들이 많아 서운했다. 헬싱키 항구를 빠져 나가는데 주변 경관이 너무나 아름다워 가원과 함께 내내 구경하고는 2시간만인 6시 30분에 탈린에 도착한다.
여성가이드가 나왔는데 선교사로 와서 20여년 이곳에 사신 분으로 탈린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도 가르친다고 한다. 전북 임실 분이라서 정이 갔으나, 가이드로서는 완전 초보라고 표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안내와 설명에 미숙한 분이라서 따라다니며 듣기가 민망하고 힘들 정도였다. 야간투어를 시작하면서 광장으로 나서니 이곳 아이들이 K-댄스를 추고 있어 한참을 구경한다. 언젠가 어느 해외여행프로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아무튼 이 나라 아이들이 우리 문화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며 즐겁다. 언덕으로 올라가 리굴리스테 교회를 구경하고 요새를 찾았다. 이어 구시가지에 있는 규모가 큰 전통 맥주집에서 한잔씩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8일차 2024년 06월 27일 (목) 에스토니아 탈린
호텔은 한적한 교외에 있어 아침식사 전 밖으로 나서니 길 건너편에 전쟁기념공원이 있다. 이미 다른 분들도 여럿 나오셨다. 호텔 조식 후 표트르 대제가 두 번째 부인인 예카테리나 1세를 위해 지었다는 이 궁전은 여름궁전으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박물관이다. 뒤편은 현 대통령 궁이 있고 궁전 앞과 좌우 모두 아름다운 숲과 호수가 있는 대단히 큰 정원으로 이어져 있다. 상당히 덥지만 모두들 열심히 가이드를 따른다.
《예카테리나 1세(1684-1727)의 본명은 마르타 사무일 로브나이다. 예카테리나 1세의 유년기에 대한 정확한 사료는 남아 있지 않다. 지금까지 그녀가 태어난 곳이나 국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발트 3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지역의 농민 출신으로 추정하고 있다. 추정이 무슨 필요가 있으랴? 이 지역이 자신의 고향이기에 여름별장을 지은 것이 아니겠나?
러시아가 스웨덴과 벌인 북방 전쟁 기간인 1702년 8월 25일 러시아의 육군 원수 셰레메티예프의 군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스웨덴의 마리엔부르크(현재 라트비아의 알룩스네)를 점령했다. 마리엔부르크에서 셰레메티예프는 400명의 주민을 포로로 붙잡았다. 포로들 중 미모가 뛰어난 마르타 크루제를 눈여겨본 셰레메티예프는 그녀를 여종으로 곁에 두었다.
마르타는 러시아군의 침공 전날 스웨덴 병사 이오간 크루제와 결혼식을 올린 유부녀였으나 참전한 남편이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얼마 후인 1703년 8월경에 마르타는 표트르 1세의 최측근인 멘시코프의 여종으로 보내졌다. 그해 가을 마르타는 멘시코프를 방문한 표트르 1세(1672-1725)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 표트르는 마르타의 미모와 상냥함에 이끌려 같이 밤을 보낸 후 자신의 정부로 삼았다. 예카테리나는 1704년 첫 아들 표트르를, 이듬해에는 둘째 파벨을 낳았으나 모두 사망했다.
1705년 표트르 1세는 마르타를 황실영지 프레오브라젠스코예로 보냈다. 그녀는 표트르의 누이 나탈리야와 함께 기거하며 러시아어를 익혔다. 마르타는 1707년(혹은 1708년) 러시아정교 세례를 받고 예카테리나 미하일로브나로 개명했다. 예카테리나는 이 시기에 딸 안나(1708년)와 옐리자베타(1709년)를 낳았다.
1711년 봄 예카테리나는 공식적인 왕후로 공포되었으며, 표트르 1세와의 결혼식은 1712년 2월 19일 페테르부르크의 이삭키 달마츠키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1713년 표트르 1세는 새 왕후를 기념하여 성 예카테리나 훈장을 제정했고, 1714년 11월 24일 예카테리나에게도 이를 수여했다. 1723년에는 우랄 지역의 신설 도시를 왕후의 이름을 따 예카테린부르크로 명명했으며, 예카테리나의 황후 대관식 계획을 공포하여 이듬해 5월 7일 우스펜스키 사원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처럼 예카테리나에 대한 표트르 1세의 각별한 애정은 공개적으로 표현되었다. 예카테리나는 무학에 가까웠으나 특유의 상냥함으로 내조에 힘썼고, 특히 표트르 1세의 지병에 슬기롭게 대처했다. 표트르 1세는 분노나 불안을 느낄 때 극심한 얼굴 경련과 두통으로 힘들어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런 증세를 어린 시절 겪었던 친위대 폭동의 충격 탓으로 보았다. 표트르가 발작을 일으킬 때 오직 예카테리나만이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724년 가을, 예카테리나와 시종 몬손과의 스캔들로 인해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1세의 총애를 잃고 말았다. 자신의 정조를 의심받은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1세와 대화도 나눌 수 없었고 접근조차 금지되었다.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1세의 임종을 앞두고서야 화해할 수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1725년 1월 내내 죽어가는 표트르 1세의 곁을 지켰고, 황제는 그녀의 품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표트르 1세는 생전에 왕위계승에 대한 칙령을 통해 기존의 장자상속제를 폐지하고, 통치 군주의 지명에 따라 왕위를 상속할 수 있도록 했다. 1722년 2월 5일 공포된 이 칙령으로 인해 표트르 1세 사후의 통치권 계승 문제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표트르 1세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한 채 서거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지배 계층인 기존의 귀족들은 관습에 따라 서열 1위인 표트르 대제의 손자 표트르 알렉세예비치(죽은 황태자 알렉세이의 아들)를 지지했다. 그러나 표트르 1세에 의해 발탁된 신진 세력으로서 멘시코프를 비롯한 황제의 최측근들은 예카테리나를 즉위시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들은 근위대를 동원하여 원로원을 겁박함으로써 예카테리나를 후계자로 결정하게 만들었다. 1725년 1월 28일 예카테리나는 최고통치자의 자리에 올랐다. 국민들은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여성 군주가 등장한 데 대해 놀랐지만 큰 동요는 없었다. 이로써 러시아 제국의 여제 시대가 시작되어 18세기 말까지 5년여를 제외하고는 여성들이 국가를 통치했다.
예카테리나 1세 즉위 후 표트르 1세의 최측근이었던 멘시코프의 영향력이 커졌고, 1726년 2월 설립된 추밀원이 최고권력기관으로 부상했다. 멘시코프를 포함한 6명의 측근으로 구성된 추밀원이 모든 주요 국사를 결정했다. 추밀원의 수장으로서 예카테리나 1세의 역할은 이들의 결정을 문서상으로 승인하는 데 그쳤다. 이로써 표트르 1세 시기 행정 개혁을 통해 정립된 통치 체계는 와해되었다.
한편, 이 시기 러시아의 국가재정 상태는 표트르 1세가 수행한 전쟁의 결과로 악화되었다. 더욱이 잇단 흉년으로 곡물 가격이 급등했고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고조되었다. 민심을 다스리기 위해 예카테리나 1세는 추밀원의 결정에 따라 인두세를 인하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정책들은 시행되지 않았고 후계를 둘러싼 추밀원 내의 권력투쟁만이 횡행할 뿐이었다.
예카테리나 1세 재위 기간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1세 시기 대외 정책의 성과에 힘입어 국제관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1726년 예카테리나 1세는 오스트리아 카를 6세와 양국 간의 군사정치 동맹을 체결하였고, 이것은 18세기 러시아 대외 정책의 토대가 되었다.》
어제 올랐던 구시가지 언덕배기를 다시 찾아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톰페아성을 돌아본다. 주변에 현 국회의사당이 있으며 러시아 정교회인 탈린에서 가장 큰 규모의 넵스키 대성당도 본다. 적을 막기 위해 세워진 뚱뚱한 마가렛 성탑, 뱃사람의 수호신을 기리는 니굴리스테 교회를 거쳐 전망대에서 탈린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조망한다. 점심시간이 되어 자유식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중국집을 찾아 아주 간단한 식사를 주문했는데 가격은 두 사람 합하여 이만 오천 원이다. 14세기 건립된 구시가지 관문 비루게이트 앞에서 모인다.
파르뉴로 이동하여 여름 휴양도시인 파르뉴 구 시가지를 잠시 걷는데 무척 덥다. 곧 발트해변 해수욕장으로 나가니 서양인들 남녀노소 저 무더위 뜨거운 햇볕아래 수영복만 입고 모래사장에 엎드리거나 누워 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일조차 힘들다. 잠간 구경하고는 모두들 그늘아래 모여 쉬는데 떠날 시간이 되었는데도 출발을 안 한다. 또 버스가 고장이란다. 어제 공항에서 출발할 때 <꽝!>소리가 나고 차가 턱에 부딪혀 엔진이 멈추는 사고가 나서 걱정했으나 잠시 후 다시 시동이 걸려 간신히 호텔에 왔던 일이 있고, 그래서 아침에 차를 바꾸어 출발했는데 또 사단이 났다. 조창희 인솔자 말로는 기사의 운전미숙이라 한다. 다시 차와 기사까지 바꾸어 출발하다.
2시간 30여분을 달려 라트비아의 수도인 항구도시 리가에 도착하여 호텔에 든다. 리가의 호텔은 방안의 세면도구 등 준비물이 완벽하고 커피포트도 있으며 커피와 차도 준비되어 있다. 전기와 에어컨 시설, 엘지TV도 좋고 물병도 2개나 있다. 처음으로 4성급 호텔에 드니 흡족하다.
■9일차 2024년 06월 28일 (금) 라트비아 리가
호텔조식도 만족하다. 온갖 빵과 햄류, 과일, 커피등 상쾌한 아침식사를 하기에 충분하다. 리가의 가이드는 남자 유학생인데 아마추어 아르바이트생인데도 제법 조리 있고 간단명료하게 설명을 잘하기에 칭찬해 준다. 대통령관저 및 역사박물관인 리가 성, 발트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돔 성당(리가 대성당), 세기별 건축양식을 비교할 수 있는 삼형제 건물, 화약 보관하는 장소이자 역사박물관인 화약 탑, 대단히 크고 아름답게 숲이 정비된 리가 중앙공원, 리가 구 시가지를 감상할 수 있는 성 피터 성당(성 베드로교회), 광장에 있는 검은 머리 길드가 사용했던 건물인 검은머리 전당(현 리가시청)을 보고 자유시간을 갖다. 구시가지가 거리와 오래된 건물들이 모두 너무도 깔끔하고 아름답게 정비되어 있어 놀랍다. 마치 200여 년 전 시대로 돌아가서 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발트3국 수도의 구시가지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깔끔한 시가지이다.
약 1시간을 달려 룬달레로 이동하여 18세기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하여 지었다는 룬달레 궁을 찾았다. 대단하다. 이 시골에 이런 엄청난 궁전이 있다니! 왕의 궁전이 아닌데 어떻게 이런 대 궁궐이 세워질 수 있나?
《룬달레 궁전은 1730년대에 이탈리아 태생의 천재 건축가 바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에른스트 요한 폰 뷔렌 공작의 여름궁전으로 지은 것이다. 바톨로메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을 건축한 것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룬달레 궁은 쿠클란드 세미갈리아 공작 뷔론의 궁전이다. 뷔론이 룬달레 궁을 짓기 시작한 1736년 그는 본디 쿠클란드의 통치자가 아니었다. 러시아 황위를 물려받은 쿠클란드의 안나 공작부인을 따라간 러시아에서 안나 황제의 조력자로 살벌한 통치를 하던 시기였다. 1737년에 쿠클란드의 통치자였던 케틀러가의 승계가 단절되었다. 쿠클란드에 대한 권한을 행사할 권리가 있는 안나황제는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연인인 뷔론을 쿠클란드 세미갈리아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러시아 황권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하던 독일인 뷔론은 승승장구였다. 그는 쿠를란드의 수도 엘가바에서 통치자가 되었으며 룬달레궁은 자연스럽게 공작의 여름궁전이 되었다.
뷔론은 1740년 안나황제의 죽음으로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당연히 룬달레 궁의 건축도 중단되었다.
※<안나황제(1693-1740 재위 1730-40) : 표트르 1세의 이복 형의 딸. 즉 이반 5세의 딸. 1727년부터 에른스트 뷔론이 안나의 총신이 되었다. 표트르 2세 서거 후 즉위했다.>
22년 후 뷔론은 독일인으로 황제가 된 예카테리나 2세(1729-1796)에 의해 복권되었다. 쿠클란드 세미갈리아 공작으로 복귀한 그는 1764년 룬달레 궁의 공사를 재개하여 1768년에 완성하였다. 1769년 뷔론은 아들인 페터 폰 뷔론에게 군주를 물려주면서 2층 황금의 방에서 대관식을 거행한다. 1795년 쿠클란드 공국이 러시아에 편입되면서 공국은 사라진다.
룬달레 궁전은 에카테리나 여제의 소유가 되었고 자신의 연인인 주보프 백작에게 이 궁전을 준다. 제1차 세계대전 이래 재대로 관리되지 못하다가 1972년 라트비아 정부가 소비에트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 다시 룬달레 궁 박물관이 들어섰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2세는 독일 출신으로 표트르 3세의 황후이다. 1762년 궁정 혁명을 통해 남편 표트르 3세를 퇴위시키고 제위에 등극하여 1796년까지 34년간 러시아를 통치했다. 그녀는 표트르 1세가 이룩한 성과를 이어받아 제국을 확대했고 통치 제제를 근대화했으며,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연유로 독일 출신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사에서 대제로 기록되고 있다.>
베르사이유궁전을 모방했기에 정원이 대단히 아름답다는데 너무 덥기도 하고 시간도 촉박하여 정작 뒤편의 드넓은 정원을 미처 보지 못하고 왔다. 궁궐 앞뜰이 공사 중이어서 맨땅으로 놓여 있어 보기에 흉한데 옆과 뒤의 대규모 정원구경을 하지 못하니 크게 아쉬운 일이다. 사진을 찾아보니 실로 건물과 내부의 웅장함과 화려함뿐이 아니고 외관의 정원 규모와 구도는 대단하다.
다음 찾은 곳은 국경을 넘어 리투아니아의 시아울리아이(슈레이)에 있는 십자가의 언덕이다. 리투아니아가 소련의 지배를 받고 있던 1944년부터 1990년까지 리투아니아인들은 이 언덕에 십자가를 봉헌하면서 리투아니아인들의 종교, 문화유산에 대한 충성심, 비폭력적인 저항을 나타냈다. 소련 당국은 3차례에 걸쳐 불도저를 이용해서 십자가를 철거하려고 했다. 1993년 9월 7일에 십자가 언덕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곳이 희망, 평화, 사랑, 희생자를 위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 언덕은 리투아니아 로마 가톨릭교회의 특정 교구의 관할 구역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롭게 출입하고 십자가를 세울 수 있다. 이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세우고 놓아서 수 만개의 십자가의 산을 이루고 있다. 성당을 다니는 분들은 물론 나도 무심코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1KM나 떨어진 언덕으로 바삐 가려는데 가원은 내게 안가겠다고 하여 웬일인가 하다가 피곤하여 그런가보다 하였더니만, 다들 화장실에 가는 줄 알고 그런 것이었다고 한다. 본인 혼자만 남게 되자, 사실을 알고는 십자가를 사서 뒤늦게 따라 왔다. 그런 연유로 신도들은 미처 챙겨 하지 못한 십자가 헌정을 아마도 유일하게 혼자만 하고 오게 되었다.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에 도착하다..
■10일차 2024년 06월 29일 (토) 리투아니아 빌뉴스
호텔 조식 후 30여분 만에 트라카이로 이동하여 호수 위의 섬에 자리한 그림 같은 트라카이 성을 찾았다. 가이드는 50대의 남성인데 20여 년 전 일식 요리사로 왔다가 이곳 여성과 결혼하여 빌뉴스에서 70킬로 떨어진 곳에서 살며 가이드를 한다고 한다. 남자다운 매력적인 목소리로 자신 있게 설명하며 능란하게 안내하니 좋다. 난생 처음으로 요트를 타고 호수를 유람하며 즐기다. 빌뉴스 시내로 돌아와 답사를 시작한다.
구시가에 들어서자 여행의 시작점이자 유일한 성문인 새벽의 문을 지난다. 가이드는 보이는 건물마다 잘 설명해 준다. 성문 위는 교황이 방문하여 예배를 본 곳으로 지금도 예배당으로 이용한다. 성문 안쪽에 바로 테레사 성당이 있고 그리스 정교회가 보인다. 바실리우스수도원이 있고 빌뉴스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성 카시미르교회도 있다. 구 시청사는 현재 영빈관으로 사용된다. 성 니콜라우스 전교회가 있다. 교육부와 성 미타엘 성당도 나온다. 나폴레옹이 탐냈다는 성 안나 성당(일명 나폴레옹 성당)이 있고 뒤쪽은 버나딘 성당이라고 한다. 관심이 컸던 우주피스공화국이 보이는데 가이드는 이제는 예술인들이 거의 떠나서 유명무실화되었으니 장소가 어딘지만 살피고 가자한다. 서운하지만 별 볼일 없다니 어쩌랴? 현재 대통령이 머무르는 대통령 궁이 있고 대통령궁 바로 옆에는 발트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빌뉴스 국립대학교의 철학과가 있다. 최고급 호텔이 보이고 리투아니아 신앙의 중심지 빌뉴스 대성당이 있다. 광장에서는 전국 민속음악축제 연습이 있어 한창이다. 지은 지 오래지 않다는 빌뉴스 궁과 뒤편에 구시가지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게디미나스성이 있다. 자유시간을 주었지만 가원이 너무 더워서 성까지 걸어가기가 싫다한다. 푸니쿨라로 올라간다지만 멀리서 구경만 해야지 별 수 없다. 지나온 구시가지로 가서 아이스크림을 주문하여 먹다. 맛은 있지만 한 개 값이 1만 2천원이다. 우리나라 관광지에서는 딱 2천 원짜리다. 엄청난 관광지의 가게 자릿값이지. 식사는 광장 옆 공원코너에 있는 야외식당에서 먹는데 맥주 한잔 포함 3만 2천원이다.
■11일차 2024년 06월 30일 (일)
○빌뉴스는 9시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으므로 6시 로비에서 빵을 배급받고 공항으로 갔는데 9시가 되어도 계속 출발이 늦는다는 안내만 해주니 모두들 기다리느라 지친다. 연착은 곧 취소로 바꾸어 발표되니 이게 웬 일인가? 출국부터 비행기 출발이 세 시간이나 늦어 모두들 힘들에 이동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캐리어 미도착 사태까지 났는데 마지막 귀국하는 비행기가 또 취소사태라니. 점심때가 되었으나 내내 의자에 앉아 하는 일 없이 놀았으므로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 남은 빵을 먹고 기다리다 항공사가 후속초지로 호텔을 정해주고 버스를 제공하여 서너 시가 되어서야 루프호텔로 갔는데 호텔은 4성급으로 대단히 만족스럽다. 이곳에서 이틀을 자고 모레 아침 6시 20분 비행기로 바르샤바로 가게 된다. 여행일정은 이틀이 연장되었다. 저녁은 호텔식당에서 치킨을 사먹는데 비싸기만 할 뿐 너무 짜서 맛이 별로이고, 아침은 뷔페식인데 괜찮다.
■12일차 2024년 07월 01일(월) 리투아니아 빌뉴스 어게인
하루를 호텔에서 공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들이 마음대로 다른 지역을 관광할 수도 없는데다가 시내에 나간들 이미 구경한 것들을 다시 돌아보는 수밖에 없고, 또 위험도 따를 수 있어 망설였다. 여행사에서 오늘 하루 일정에 대한 대책을 세워주어야 마땅하지만 인솔자가 안쓰러워 말을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데, 다행이 오후는 항공사에서 버스를 제공하기로 해서 다시 구 시가지로 나가다. 그제 미처 가지 못했던 우주피스 공화국을 찾았다. 우주피스는 리투아니아어로 <강 건너편>을 뜻한다. 인구는 약 7,000명인데 약 1,000명에 달하는 예술가가 이 곳에 거주했다고 한다. 1997년 4월 1일에 우주피스에 거주하던 몇몇 예술가들이 우주피스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으며 만우절인 매년 4월 1일에 24시간 동안만 나라가 된다. 초소형국민체를 표방하기 때문에 자체적인 국기, 국가, 군대, 헌법, 화폐, 정부 조직, 내각을 두고 있다. 헌법41조가 한국어로도 게시해놓았는데 아주재미있다.
1. 모든 사람은 빌레네 강변에서 살 건리를 가지며 빌레네강은 모든 사람 곁에서 흐를 권리를 가진다.
9. 모든 사람은 게으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가진다.
28.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나눌수 있다.
39. 이기려고 하지 마라.
우주피스 공화국은 국가는 아닌데 가난하거나 불행한 사람들이 모여 있던 이 마을에 단 하루 만우절만이라도 자신들만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예술가들이 이걸 이벤트 행사로서 만들어내면서 그것이 유명해진 것이라고 한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예술인들의 흔적이 상당히 보이고 아직도 인증서도 판매하고 있다. 상당히 덥다 이번 여행은 대개 섭씨 20도에서 최고 30도까지로 대체로 봄 날씨여서 아주 좋았는데 발트3국에서는 햇볕이 따가워 약간 더웠다. 이제 자유시간이어서 여럿이서 대성당을 들어가 본 다음, 푸니쿨라를 이용하여 게디미나스 성에 오르다. 빌뉴스가 한눈에 다 보이는 멋있는 전망대이다. 내려와서는 빌뉴스 대성당 광장(공연장) 앞 24시 수퍼에서 야채 샌드위치와 음료수로 시원하게 점심을 먹고 역사가 오랜 민속제전 연습을 구경하며 민속제전에 참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원에서 편히 쉬다가 호텔로 돌아오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기사가 길을 잘 몰라 몇 번을 헤매다가 호텔에 도착하니 이번 여행은 비행기와 버스가 유난히 특별난 일들을 잘도 벌인다.
■13일차 2024년 07월 2일 (월) 귀국길
새벽 3시 30분에 로비 집합이다. 6시 20분발 비행기에 탑승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르샤바로 가는 비행기는 창가에 앉아 밖을 구경한다. 폴란드 역시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오늘은 대체로 예정대로 진행되어 바르샤바에서는 12시 10분 발 비행기가 1시 10분에 이륙하다. 통로좌석이기에 편안하다. 가던 항로를 따라 11시간 만인 아침 6시 42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하다.
■14일차 2024년 07월 3일 (월) 인천공항 도착
아침 6시 42분에 도착하여 가방을 찾고 이틀간 귀국이 지연된데 대한 보상을 청구하기 위해 담당 회사의 직원들이 나왔다. 관계서류를 제출하였는데 한 달 후쯤이면 보상비가 약간 지급된다고 한다. 가방으로 인한 피해는 피해자들 개인별로 별도로 항공사에 직접 청구한다고 한다. 8시 5분발 공항버스로 출발하여 11시에 익산에 도착하였다.
※참고자료
1. 폴란드
인구 3,800만 명, GDP 세계 22위, 1인당 GDP 2만 3천 달러(50위), 수도 바르샤바(186만 명), 폴란드어, 로마 카톨릭, 통화 즈워티, 유럽연합국, 안제이 두다(1972- ) 대통령
폴란드에는 수 천 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고대 후기에 이르자 수많은 문화권들이 공존하는 지역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슬라브계열의 폴인이 점차 우세를 점하였고, 이들이 지역의 주류로 떠오르면서 지역의 이름도 ‘폴란드’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현 폴란드의 역사는 996년 경, 당시 폴란드 지방이 마침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을 때부터 시작한다. 1025년에는 폴란드 왕국이 세워졌으며, 1569년에는 루블린 연합으로 리투아니아와 합병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세우며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의 강대국들 중 하나로 군림하였다. 또한 1791년에는 유럽에서 최초로 근대적인 5월 3일 헌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도 시간이 흐르자 과거의 영화가 퇴색하기 시작하였으며, 18세기 말에 이르자 인근의 주변국들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1918년에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립을 되찾았으며, 몇몇 영토 분쟁을 거친 뒤에는 유럽 정치의 핵심적인 축을 담당하게 된다. 1939년 9월에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이 시기에 3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600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인들이 사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세계대전이 끝난 후, 폴란드는 소련 주도의 동구 공산권에 편입되었으며 새롭게 세워진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주도국으로 참여하며 냉전을 더욱 심화하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공산주의가 균열의 조짐을 보이고, 냉전이 종결되자 결국 공산주의 정권도 무너지며 폴란드는 대통령제 민주 공화국으로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 냉전이 종식된 후에는 미국과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폴란드는 꽤나 발전한 경제를 가지고 있으며, 중앙유럽에서는 지역강국으로 분류된다. 명목 GDP로는 유럽 연합 내에서 6번째로 거대한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PPP(1인당 GDP 35,000달러)로 따질 때에는 5번째로 거대하다. 또한 삶의 질, 치안, 경제적 자유도가 굉장히 높은 축에 속하며, 대학 교육과 공중 의료보험 체제도 EU 기준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편이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 마리 퀴리(1867-1934),쇼팽(1810-1849), 루빈스타인(1887-1982)
레반도프스키(바르셀로나1988- )
2. 덴마크
인구 590만 명, 1인당 GDP 6만 9천 달러(세계 9위), 루터파 덴마크 국민교회(79%), 통화 덴마크 크로네, 덴마크어, 유럽 연합국, 수도 코펜하겐(66만 명), 글뤽스부르크 왕조 제6대 국왕 프레데리크 10세(1968- )
고대와 중세
고대부터 윌란반도(유틀란트 반도)에는 데인족이 살고 있었다. 카를 대제의 북진 정책의 결과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811년 프랑크 왕국과 아이더 강을 국경으로 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바이킹의 해상 원정은 8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구드프레드 왕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다.
국가 형성기(바이킹 시대)
6세기-10세기 사이에 바이킹이 윌란반도를 중심으로 원시 왕정 국가를 형성하면서 스웨덴 남부, 영국 동부, 심지어 지중해 연안까지 진출하는 위세를 떨쳤으며, 특히 9세기 경에는 영국 북부 지역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826년에 최초로 기독교가 전래되어, 이외링 지역에서 일어난 왕가는 970년에 하랄드 블라톤(Harald Blåtand) 왕 치하에서 덴마크를 완전히 기독교화하였고, 1014년경 그 아들인 스벤 왕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잉글랜드 왕을 겸하였다. 하랄 왕의 차남 크누드 1세(카누트 대왕)가 1016년에 잉글란드 왕위에 올랐고 1018년에는 덴마크 왕을 겸하였으며, 1028년에는 노르웨이 왕으로 추대되어 '북해 제국(앵글로 스칸디나비아 대제국)'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크누드가 세상을 떠나자 북해 제국은 와해되고, 덴마크는 다시 스칸디나비아의 한 세력으로 전락하였으나, 크누드의 조카 스벤 2세에 의해 로마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신 덴마크 왕국이 건설되었다. 스벤 2세가 죽은 뒤, 1074년부터 1134년까지 스벤 2세의 다섯 아들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고, 그 동안에 한때 앵글로색슨의 세력하에 있던 덴마크 교회는 다시 함부르크의 세력하에 들어갔다가 1104년경 룬드를 대주교구로 한 독자의 국교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134년 이후, 다시 교회와 국가의 분열 및 국내 분쟁이 지속되다가, 1157년 발데마르 1세(재위 1157∼1182)가 일어나서 국내를 통일하고 발데마르 왕조를 일으켰다. 발데마르 1세는 군사력을 재편성하여 독일에 대항하고 발트 해의 슬라브 세력과 싸웠는데, 그 때 슬라브인의 침입에 대비하여 셸란 섬에 구축한 성채가 오늘날의 코펜하겐의 기원이 되었다.
발데마르 2세 때 정치적·경제적 발전이 촉진되었으나, 그가 죽자 다시 왕·교회·귀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서 왕권이 약화되고, 또 같은 시대에 발트해의 지배 및 슐레스비히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스웨덴·노르웨이·한자동맹 세력과의 항쟁이 지속되어 왕국의 약체화를 가져왔다.
발데마르 4세가 죽은 뒤, 발데마르의 딸 마르그레테 1세와 그녀의 남편, 즉 노르웨이의 왕이자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인 노르웨이의 호콘 6세의 아들인 올라프 2세(재위 1375∼87)가 왕위에 오르자 마르그레테가 섭정이 되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해오다가 호콘 6세, 올라프 2세의 사후인 1387년 덴마크 및 노르웨이의 군주로 승인받았다.
마르그레테는 다시 1389년 스웨덴 왕을 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동군 연합을 통한 세 왕국의 통합은 1397년의 이른바 칼마르 동맹에 의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1448년 덴마크의 왕조는 올덴부르크가로 바뀌었으나 칼마르 동맹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근대
1520년 크리스티안 2세가 독립을 요구하던 스웨덴과 전쟁을 벌여 스웨덴의 스텐 스투레 덴 윙레(Sten Sture den yngre, 연소자 스텐 스투레) 일파를 격파하고 스톡홀름에 입성하여 분리주의자들을 제거한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을 일으켰다. 그러나 스웨덴은 다시 봉기하여 스웨덴 해방 전쟁을 통해 독립을 이룩하여, 결국 1523년 칼마르 동맹은 해체되었다. 덴마크의 종교 개혁은 크리스티안 3세에 의해 추진되어 루터교가 받아들여졌으며, 한편 그 무렵에 노르웨이는 자치 운동이 완전히 봉쇄당한 채 사실상 덴마크의 속국이 되어버렸다.
크리스티안 3세 때는 원로원 등 귀족 세력의 강화를 바탕으로 해서 경제의 발전 및 학자의 배출 등 국가 번영의 기운을 보였으나, 그 후 프레데리크 2세 때 발트 해의 주도권을 놓고 덴마크·스웨덴·폴란드·뤼베크 사이에 ‘북방 7년 전쟁’이 일어났고, 크리스티안 4세 때는 2차에 걸친 스웨덴과의 싸움으로 국토의 손실과 국력의 쇠퇴를 가져왔다. 1660년 프레데리크 3세는 귀족 세력과 대립하는 도시 부르주아 및 루터교 성직자와 결합하여 왕위의 세습제를 승인받고, 1665년에는 국왕의 절대주권을 승인받아 절대군주제를 확립하였다.
1788년 신분제가 폐지되고, 1797년 자유 무역의 원칙에 입각한 관세법이 성립되어 덴마크의 경제가 활력을 얻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고 나폴레옹 편에 서게 된 덴마크는 영국·러시아·스웨덴 등 동맹국과 싸운 끝에, 1814년의 킬 조약에 의해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고 4세기에 걸친 노르웨이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하여 덴마크의 영토는 현재의 덴마크와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그린란드로 국한되었다.
국내적으로는 프레데리크 7세의 절대 왕정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1842년에는 입헌적 대의 정치를 주장하는 국민자유당이 결성되었다. 그리하여 1849년 프레데리크 7세는 자유주의자들의 요구에 따라 전제 정치를 포기하고, 자유 헌법을 성립시켜서 입헌군주제를 수립하였다. 1864년 프로이센과의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패배하여 홀스텐(홀슈타인)과 슬레스비(슐레스비히)를 상실했으나,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면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1920년 북슐레스비히를 수복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독일 바로 근처였기 때문에 민간인 상선들이 독일 잠수함에 격침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독일에게 점령되어 1944년까지 고초를 겪었다. 덴마크에 사는 사람들 중 유대인들이 독일군에게 끌려갔고, 전쟁 중에는 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독일군들이 빼앗았다. 1945년 5월에 덴마크 전체가 연합군에 의하여 해방되었다. 1944년에는 덴마크의 영토였던 아이슬란드가 독립하였다.
3.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70만 명), 언어 노르웨이어, 인구 546만 명, 종교 루터복음교, 통화 노르웨이 크로네, 1인당 GDP 9만 5천 달러(4위), 세습적 입헌군주국, 노르웨이 글뤽스부르크 왕조 제3대 국왕 하랄 5세(1937- )
역사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으로 알려진 가장 초기의 것은 해안을 따라 발견되는 석기 도구들로 BC 7000~6000년의 것들이다. BC 3000~2500년 사이에 새로운 이주자들이 동부에 정착했다. 기원후 첫 4세기 동안 노르웨이인들은 로마에 정복당한 골족들과 접촉했다. 서구에서 로마 제국이 몰락하던 시기(400~600)에 노르웨이에서는 웅장한 무기와 금으로 만든 물건을 함께 매장한 족장들의 무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800~1050년은 바이킹 시대로, 당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약탈원정을 떠났다. 노르웨이인의 후손이 그린란드에 정착했고, 빈랜드(뉴펀들랜드 해안) 원정에 나섰다.
900~1035년의 노르웨이 땅에는 여러 국가들이 형성되어, 각 국가는 일단의 무사들을 이끄는 족장이 지배했다. 1015~30년에 울라프 2세 하알손이 전체 노르웨이 최초의 왕이 되었다. 울라프는 잉글랜드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빠져 노르웨이로 돌아온 후 많은 노르웨이인들을 개종시켰다. 1130~1240년에는 노르웨이 왕위를 둘러싸고 여러 세력간에 내란이 벌어졌다. 내란 후기 동안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호콘 4세(1217~73)가 이 기간에 통치했다. 13세기 후반과 14세기 대부분을 통해 왕의 부와 권력은 증대했다.
1389년 포머른의 에리크가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고 후에(1397)는 스웨덴과 덴마크의 왕이 되었다. 1442년 에리크 왕의 폐위 후 노르웨이는 어느 정도 독립을 유지하며 새로운 헌법을 갖기는 했으나, 스웨덴과 합병된 1814년까지 덴마크 왕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스웨덴 왕에 의한 지배는 190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해에 스웨덴의 오스카르 2세는 노르웨이 왕권을 양도했으며, 노르웨이인들은 투표로 공화국을 세우기보다는 독립된 군주국을 재수립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덴마크의 카를 공이 호콘 7세로 선출되었다.
1905~14년 노르웨이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의료보험을 비롯해 1일 10시간 근무와 주당 48시간 근무 같은 많은 사회개혁을 법규화했고, 1913년에는 여성들에게까지 투표권을 확대했다. 이 나라 해운업이 제1차 세계대전의 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정책적으로는 전쟁 동안 중립을 지켰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정부의 경제정책은 자유주의 진로를 추구했다. 1927년에 이르러 노르웨이의 실업률은 20%에 달했고, 대공황기에는 33%까지 증가했다. 이같은 경제적 불황 아래서도 양대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경제발전과 공업성장을 이루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중립을 선언했으나 1940년 독일군이 침공하여 노르웨이군을 패배시켰다. 노르웨이 왕과 정부는 영국으로 피신했으며, 독일의 점령은 대전의 종결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5~65년까지는 노르웨이 노동당이 거의 계속 집권했다. 1930년대에 시작된 많은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이 지금도 계속 운영되고 있다.
1965년 우익 연합세력이 노동당 정부를 축출한 뒤 1971년까지 집권했다. 그후 노동당은 1981년까지 일시적으로 권력을 잡았으며, 그 기간 중 얼마 동안 노르웨이 최초의 여수상인 그로 하를렘 브룬틀란이 노동당을 이끌었다. 50년 만에 처음으로 보수당 행정부가 1981~86년 집권했지만, 1986년 브룬틀란이 이끄는 노동당이 다시 집권했다.
4.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100만 명), 인구 1059만 명, 유럽연합국, 통화 스웨덴 크로나, 1인당 GDP 5만 9천 달러(14위),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조 제7대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1946- )
BC 12000년경에 초기 수렵인들이 유럽으로부터 스웨덴으로 이주해왔다.
BC 3500~500년경 수렵채집인들이 스웨덴 남부에 흩어져 살았고, BC 2500년경에는 농경목축인들이 이 지역에 살았다. BC 1500년경 스웨덴과 유럽대륙간 교역이 시작되었으나 BC 500년경 켈트이베리아인들의 영토확장으로 중단되었다. 철기시대는 약 800년간(BC 400~AD 400) 지속되었으며 이 동안 남쪽으로 로마와의 교역이 늘어났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최초로 기술한 바에 의하면 스비오네스(스웨덴인)로 알려진 게르만족이 스웨덴 동중부에 살면서 점차적으로 스웨덴 남부(예탈란트)의 고트족을 정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바이킹 시대의 스웨덴인들은 발트지역과 동부 러시아에 터전을 잡고 남쪽으로 드네프르 강과 볼가 강을 따라 비잔티움과 중동에 이르는 교역로를 장악했다.
스웨덴은 10세기경 역사에 뚜렷하게 등장했다. 이때까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데 크게 반발했으나, 11세기 올로프 시괴트코눙이 스웨덴 왕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았고 1164년에는 스웨덴인 출신의 대주교를 배출하게 되었다.
이때 스웨덴은 아직 느슨한 연방체였고 군주제도는 경쟁관계에 있는 왕조들간의 싸움과 심하게는 군주와 봉건영주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주기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다.
1397년에 포메른의 에리크는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의 왕이 되어 1439년까지 스웨덴에서 통치했다. 15세기말과 16세기초에 스웨덴과 덴마크의 왕들은 3왕국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서로 겨루었다.
1523년 구스타프 1세 바사는 독립국가 스웨덴의 통치자로서 왕위에 올라 1720년까지 지속되었던 바사왕조의 계보를 확립했다(바사왕가). 이 때 종교개혁의 물결이 스웨덴에도 밀려들어 루터교를 국교로 삼게 되었다. 17세기에 스웨덴은 발트 지역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바사 계보의 군주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인물인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독일 프로테스탄트교도들과 연대해 오스트리아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전쟁을 벌였다.
강대국 스웨덴이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카를 12세 재위시인 1709년 러시아 침공에서 무참히 패배하면서부터였다. 대(大)북방전쟁(1700~21)에서 카를 12세의 죽음(1718)은 유럽 열강으로서의 스웨덴의 위상에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반세기는 바사 절대왕정에서 의회정치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그러나 구스타프 3세 통치기간(1771~92)중에 절대왕정으로 복귀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영국의 동맹국으로서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했으나, 구스타프 4세의 지도력 부족으로 1808년 러시아에게 핀란드를 내어주고 말았다. 1809년 구스타프 4세는 퇴위되었고 왕위 승계를 둘러싼 위기 상황 속에서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 육군원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이 왕국의 황태자로 임명되어(1810), 카를 요한이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1818년에 카를 요한은 카를 14세로 왕위에 올라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카를 14세는 재위(1818~44)시에 보수주의 성향을 띠었으나, 그의 아들 오스카르 1세(1844~59 재위)와 손자 카를 15세(1859~72 재위)는 자유기업 및 교역, 의무교육, 리크스다그의 대표제 개혁 등 진보적인 개혁을 도입했다.
1905년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권 동맹은 오스카르 2세의 통치기간중 해체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 스웨덴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무역이 큰 타격을 입어 극심한 식량부족을 겪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는 사회민주당이 크게 성장하여 1930년대의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포괄적인 정책을 제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웨덴은 자국의 중립을 공포했으며, 전쟁중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전쟁 후 스웨덴은 UN에 가입했으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경제공동체(EEC)의 회원국이 되는 것은 거부하므로써 중립정책을 고수했다.
또한 사회개혁을 실시해 포괄적이고도 광범위한 건강, 교육, 사회복지 원조를 선도하는 복지국가로 변신했다. 사회민주당은 1975~82, 1991~94년의 두 기간 동안만 집권하지 못했을 뿐 전후 내내 정치를 지배해왔다. 1991년 7월 1일 유럽공동체(EC) 회원국 가입을 공식 신청했다. 이 결정은 200년에 걸친 유럽 대륙과의 분리 정책을 파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1992년 반 세기만에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아 비사회주의연합 정부의 인기가 하락했고, 이와 함께 정부의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은 1994년 사회민주당이 권좌에 복귀하는 요인이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유럽연합(EU)에 가입했다.
5. 핀란드
수도 헬싱키(130만 명), 인구554만 명, 핀란드어, 종교 루터 복음교, 유럽연합국,1인당 GDP 5만 5천 달러(16위), 공화국 대통령 알렉산데르 스투브(1968- ) 통화 유로.
선사 시대
기원전 수천년 무렵에 중앙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우랄어족 언어를 쓰는 핀족이 서진을 계속하여 기원후 1세기에 지금의 핀란드 남부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중엽, 스웨덴 왕 에리크 9세의 십자군이 핀란드에 쳐들어옴으로써 스웨덴의 핀란드 지배 윤곽이 잡혔다. 이후 스웨덴의 역대 왕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핀란드에서 스웨덴 영토를 넓혀왔으며, 1397년 포메라니아의 에리크가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의 연합왕으로 즉위할 때 핀란드도 이에 편입되었다.
1523년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스웨덴을 안정된 독립 왕국으로 만들면서 이에 포함시켰다. 이후 스웨덴과 함께 핀란드에서도 루터교로 개종하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여기에는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마르틴 루터에게 수학한 미카엘 아그리콜라의 공이 컸다.
17세기 초에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핀란드를 동방 전초 기지로 활용하였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핀란드에서 문예를 크게 진흥시켜 투르쿠 대학이 이 무렵에 세워졌다.
스웨덴 왕 칼 12세의 무리한 군사정책으로 시작된 대북방 전쟁(1700~1721년)에서 핀란드의 국토는 러시아의 대대적 침공으로 일대 타격을 입었다. 구스타브 3세가 러시아와 전쟁(1788~1790년)을 하는 틈을 타 핀란드 장교들이 무장봉기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 중에 핀란드 영토를 둘러싼 열강의 외교전이 펼쳐진 끝에 1809년 러시아가 핀란드를 점령하였고,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통치하였다. 이에 맞서 핀란드인의 국권 회복 운동이 점차 불붙었고 엘리아스 뢴로트는 1835년부터 1849년 사이에 서사시 칼레발라를 썼다. 그러다가 독립운동 끝에 핀란드는 독립한다.
20세기 초반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17년에 핀란드는 독일 제국의 공국인 헤센-카셀(Hessen-Kassel)가를 핀란드의 왕가로 받아들여 독일제국에서 책봉을 받는 형식상의 제후국이 되었다. 1918년 1월 27일 소련의 지원을 받은 적핀란드(공산군)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은 핀란드 백군(정부군)이 5월 15일 이를 진압하였다. 한편 그 해 11월 11일 독일 제국이 항복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핀란드는 러시아으로부터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부터 소련의 위협이 다시 커져 국가의 생존을 걸고 과거 핀란드를 지배했던 소련과 2차례에 걸쳐 전쟁(겨울 전쟁·계속 전쟁)을 벌였다. 명장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장군의 지휘 아래 전 국력을 총동원하여 소련에 맞서 싸웠고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으나, 소련과의 국력의 열세 때문에 끝내 패배로 끝났다. 이전부터 핀란드는 소련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는데, 이 전쟁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냉전 시대
전쟁이 끝난 뒤에 국토는 다시 재건되었고 핀란드 정부는 소련과 서유럽 사이에서 중립을 표방하면서 노키아 등 경제발전에 힘을 쏟았다. 소련의 의향에 따라 마셜 플랜을 받지 못했고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와 유럽공동체(EC)에 가입하지 않았다. 자유 민주 정권을 유지하면서, 자본주의 경제권에 속하는 경제정책을 쓰고, 외교, 국방 측면에서 공산권과 가까웠지만,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맹하지는 않았다.
현대
소련 붕괴 후 미국, 영국, 유럽 연합 등 서방 진영에 접근하여, 1995년에 유럽 연합 회원국이 되었다. 2002년에는 자국 통화인 핀란드 마르카를 폐지하고 유로를 도입했다. 2023년에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이 되었다.
6.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45만 명) 유럽연합국, 유로, 1인당 GDP 3만 2천 달러(36위), 에스토니아어, 인구 132만 명, 루터 복음교, 공화국 대통령 알라르 카리스(1958- )
에스토니아는 상고적부터 핀우그리아어파의 언어를 사용하는 우랄계 민족인 에스토니아인들의 땅이었으며, 리보니아의 발트족과도 관계를 주고받았다. 중세에 독일의 프라테스 밀리치아이 크리스티(Fratres militiae Christi) 기사단의 리보니아 원정에 의해 1227년 정복되며 기독교화되었다. 이후 덴마크의 지배를 받다가 17세기 스웨덴-러시아 전쟁의 결과로 스웨덴령으로 넘어갔다. 18세기부터는 러시아 제국에 의한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19세기 초부터 이른바 국민계몽(Ärkamisaeg)으로 불리는 민족주의 부흥 시대가 시작되며 민족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0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난 뒤 1918년 2월 24일 에스토니아는 독립국가가 되었다. 1934년에 초대 국무총리였던 콘스탄틴 패츠(Konstantin Päts)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나치 독일과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밀약을 맺어 중앙유럽을 독일과 소련이 각각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 의정서를 만들었을 때 같은 의정서에서 에스토니아는 소련의 영향권에 두기로 인정받았다. 소련은 1940년 6월 중순에 에스토니아를 점령하여 소련의 내무인민위원회 요원은 에스토니아의 국경 초소를 급습하였고, 에스토니아군을 몰아낸 뒤 소비에트 간부단으로 대신하였다. 의회와 여타 정부 부처의 공직자를 뽑는 선거에서는 명부에 후보자가 한 명씩밖에 없었는데, 독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명분으로 선거가 치러져 선거의 공식 결과에서 친(親)소련 후보가 92.8%의 표를 얻었다. 그렇게 구성된 의회는 곧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소련의 승인을 얻어 1940년 8월 6일,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병합되었다. 국제 사회는 이와 같이 진행된 소련의 발트 3국 병합을 불법으로 보고 비판하였다. 에스토니아는 1941년 6월 하순부터 1944년까지 나치 독일군에게 점령되었다. 1991년 8월 20일 노래혁명과 소련의 붕괴로 독립을 되찾았으며, 8월 20일은 에스토니아의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다.
소련 군대가 에스토니아를 떠난 1994년 8월 31일 이후 에스토니아는 서유럽과의 관계 정상화에 노력을 기울여 2004년 3월 29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2004년 5월 1일 유럽 연합(EU)에 가입했고, 2011년 1월 1일부터 유로를 공식화폐로 도입했다. 에스토니아는 세계에서 최초로 휴대폰으로 투표를 치르게 되는 방식을 2012년에 도입하여 주목을 받았다.
7. 라트비아
수도 리가(63만 명), 유럽연합국, 유로, 1인당 GDP 2만 4천 달러(44위), 언어 라트비아어, 인구 184만 명, 루터 복음교, 공화제 대통령 에르가르스 린케비치(1973- )
기원전 2000년 경부터 핀우그르계의 리브인들과 레트족이라고 불리는 발트인들이 이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말부터 독일인들이 리가만 연안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1201년 이들에 의하여 리가시가 건설되었다.
1558년 러시아의 이반 4세가 리보니아 전쟁을 일으키자, 이 지역을 지배하던 독일 기사단은 라트비아를 리투아니아의 보호령으로 양도하였고, 1561년 리투아니아의 보호를 받는 리보니아 공국과 쿠를란트(Courland) 공국이 성립하였다.
그 후 1600년부터 1629년까지 이 지역을 둘러싸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이 전쟁을 벌였다. 스웨덴은 1621년 리가를 점령하였고, 1629년 리보니아 공국은 스웨덴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쿠를란트-젬갈레 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향 하에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예카프스 케틀레르스(Jekabs Ketlers) 공작이 지배하던 시대(1642~1682)에는 동방의 네덜란드를 만들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발전을 꾀하였다. 이 시기에는 쿠를란트 공국의 선단이 대서양을 누비고 다녔으며, 서인도 제도의 토바고와 아프리카의 감비아에 해외식민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1700년부터 1721년까지 계속된 스웨덴과 러시아 제국간 북방전쟁의 결과 리보니아 지역이 러시아의 지배에 들어갔고, 이어 쿠를란트 역시 1795년 폴란드 분할의 결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가 독일에 패하자,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라트비아는 농지개혁을 실시하고 경제, 문화, 교육 전반에 있어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1934년에 일어난 쿠데타로 초대 대통령이었던 카를리스 울마니스(Kārlis Ulmanis)가 4대 대통령으로 다시 취임하였다.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나치 독일[4] 과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밀약을 맺어 중앙유럽을 독일과 소련이 각각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 의정서를 만들었다. 이 의정서에서 라트비아는 소련의 영향권에 두기로 인정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뒤, 소련은 1940년 6월 중순, 발트 3국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소련의 내무인민위원회 요원은 라트비아의 국경 초소를 급습하였고, 라트비아군을 몰아낸 뒤 소비에트 간부단으로 대신하였다. 의회와 여타 정부 부처의 공직자를 뽑는 선거에서는 명부에 후보자가 한 명씩밖에 없었는데, 독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명분 아래에 치러진 선거의 공식 결과에서 친(親)소련 후보가 97.6 %의 표를 얻었다. 그렇게 구성된 의회는 곧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소련의 승인을 얻어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병합되었다.국제 사회는 소련의 발트 3국 병합을 불법으로 보고 비난하였다.
1941년 6월 하순에 나치 독일군은 소련군을 몰아내고 1944년까지 라트비아를 점령했다.
소련으로의 편입 과정에서 약 13만 명의 라트비아인들이 외국으로 망명하였고, 1953년까지 약 12만 명의 라트비아인들이 죽거나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한편 약 75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러시아보다 산업환경이 좋은 라트비아로 이주하여, 라트비아인의 비율은 총인구의 52 % 선으로 감소하기에 이르렀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하였다. 1999년에는 제6대 대통령으로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Vaira Vīķe-Freiberga)가 선출되어 라트비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으며, 친미, 친서방 정책을 펴고 있다. 2012년 2월에 러시아어를 제2의 공용어로 지정하는 것을 정해놓은 투표가 실시되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인구가 러시아어를 제2의 공용어로 지정하는 것에 반대표를 던졌다. 2012년 8월 28일에 라트비아의 국방장관이 소련군 기념비를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계 정치인들이 반발했다.
8.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58만 명), 유럽연합국, 유로, 1인당 GDP 2만 8천 달러(41위), 언어 리투아니아어, 인구 272만 명, 기독교, 공화제, 대통령 기타나스 라우세데(1964- )
리투아니아라는 이름은 1009년의 라틴 연대기 Annales Quedinburgenses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1253년 7월 6일 민다우가스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처음으로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1386년 요가일라(Jogaila)가 폴란드의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면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는 동군연합(同君聯合)을 형성하게 된다.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은 1410년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튜턴 기사단을 무찌름으로써 독일인들의 동방 팽창을 저지하였고, 리투아니아는 이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동일한 운명을 걷게 되어(→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폴란드 분할 결과 1795년 리투아니아 지역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고 말았다. 리투아니아인들은 1795년, 1830년, 1863년 등 세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리투아니아는 1918년 2월 독립을 선언하였다. 애초에는 뷔르템베르크 공국 출신의 군주를 영입해 군주제로 독립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러시아 혁명과 독일 제국의 패망으로 독립되어, 공화국으로 출발한 것이다. 리투아니아는 1918년 독립을 선언한 이후에, 공산당 세력, 보수 세력, 농민 세력 등 복잡한 이념 세력들의 정권 쟁탈 투쟁으로 국내사정은 극히 혼란하여 정권 교체가 잦은 불안이 계속되어왔었다.
그 틈새를 타서 민족주의자가 점점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1930년대 즈음 들어오면서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 국가들은 민족주의자가 반란으로 집권하여 반소, 반공 독재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나치 독일과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밀약을 맺어 중앙유럽을 독일과 소련이 각각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 의정서를 만들었다. 리투아니아는 1939년 9월 두 번째 밀약에서 소련의 몫으로 추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이후,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처음으로 점령한 것은 1940년 6월 15일이었는데, 소련의 내무인민위원회 요원은 리투아니아의 국경 초소를 급습하였고, 리투아니아군을 몰아낸 뒤 소비에트 간부단으로 대신하였다. 의회와 여타 정부 부처의 공직자를 뽑는 선거에서는 명부에 후보자가 한 명씩밖에 없었는데, 선거의 공식 결과에서 친(親)소련 후보가 99.2%의 표를 얻었다. 그렇게 구성된 의회는 곧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소련의 승인을 얻어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병합되었다. 국제 사회는 소련의 리투아니아 병합을 불법으로 보고 비판하였다. 1941년 독-소 개전 이후 독일군에 점령되기도 하였다. 1944년 나치 독일이 패퇴하면서 다시 리투아니아를 점령한 소련군은 독일에 협조하였다는 이유로 리투아니아인들을 박해하여 29923가구가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되었고, 12만 명이 국외 추방되거나 북유럽, 미국 등지로 망명하였다.
1990년 3월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1991년 1월 소련군이 리투아니아를 침공하여 13명이 사망하고 700여명이 부상하였으나, 리투아니아는 1991년 9월에 독립했고 1991년 9월 17일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함께 유엔에 가입하였다.
현재 리투아니아는 반러시아적인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 2008년 11월 27일에 리투아니아는 신임 총리로 안드류스 쿠빌류스가 새총리로 당선되었다.2009년 5월 17일에 대선에서 첫 여성 대통령인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가 당선되었다. 그녀는 재선을 거쳐 2019년까지 임기를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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